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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울산강의
2017-02-03 23:39:15 조회 : 924         
속건제 170203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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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223) 17-02-08 12:01 
20170203a 울산강의-레위기 5장 : 속건제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속건제 하겠습니다. 성경 구약에 제사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면 속건제하면 속죄제 잊어버리고 속죄제 하면 번제 잊어버리고, 다 잊어버려요. 다섯 가지나 되거든요. 사람의 정신은 하나를 지향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가 나와 있으면 차이가 다섯 가지 난단 말이죠. 차이를 다섯 가지나 알아야 하기 때문에 정리하기가 힘들죠. 하나만 생각하다보니까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손가락이 다섯 개듯이 제사가 다섯 가지란 말이죠. 그럼 이건 다양하잖아요. 그런데 손바닥은 하나잖아요. 손바닥을 알고 다섯 개를 아는 게 훨씬 편리하겠지요. 하나로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이 행동할 때 두 주인을 못 섬깁니다. 행동을 할 때는 하나의 정신으로 행동하게 돼요.

그래서 삼위일체가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을 모신다는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인간이 행동할 때 하나에 집중하게 돼있지 셋을 동시에 생각 못하게 돼있어요. 인간의 인식은. 둘도 인식 못하게 돼있어요. 하나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를 미워하게 돼있어요. 사람 만들어진 게 그래요.

애들한테 하는 질문 가운데 제일 곤란한 질문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그거잖아요. 애들 생각에 뭐냐? 아빠와 엄마가 차이 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함부로 하나로 합칠 생각을 마시고 둘이 구분된다는 걸 전제로 하고 질문하는 겁니다. 그 질문의 의도가 뭐냐 하면, 하나로 모으겠다는 겁니다. 만약에 아빠가 좋을 것 같으면 엄마는 부수적이 되는 겁니다. 서열이 뒤떨어지게 돼있어요. 아빠가 우선이면 엄마는 뒤떨어지게 돼있고, 엄마를 좋아하게 되면 아빠는 엄마에 붙어있는 부수적이 되는 겁니다.

이 아이들의 질문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똑같아요. 제사 다섯 가지가 나오면 뭘 어쩌란 말입니까? 인간은 행동할 때 항상 하나로 종합하게 마련인데 다섯 가지 제사를 늘어놓으면 우리 보고 뭘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오늘 속건제, 레위기 5장 14절부터 하는데 다음 시간에는 화목제 할 거예요. 계속 반복할 겁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가 뭔지 계속 반복해드리겠습니다. 뭐냐를 생각할 때는 항상 유의할 것은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차이 나는 것만 알면 제대로 아는 게 되는 겁니다. 차이 나는 걸 모르고 그냥 정답 써버리면 그 사람이 정답을 아는지 모르는지 분간이 안 돼요. 어떤 차이나 나느냐?

차를 그랜저 사는 것과 외제차 사는 것과 여자 분들은 그거나 저거나 똑같이 보이지만 남자들은 이런 차이가 난다고 꼭 차이를 이야기하죠. 부처도 착하고 예수님도 착하고 공자도 착한데 왜 하필 예수입니까? 동양 사람은 부처 믿고 서양 사람은 예수 믿으면 되잖아요. 왜 그래요?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으면 차이가 안 나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이 아니죠. 왜? 차이를 말할 건더기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에. 아들의 나라에요. 예수님의 나라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그런데 보통 교회에 오는 일반인들은 차이고 뭐고 다 골치 아픈 거예요. 그저 내가 알던 두리뭉실 전능자, 조물주 앞에 정성 드려 순수하게 들이대면 안 통할 게 어디 있겠냐고 생각하거든요. 순수하게 깔끔하게 정성을 바쳐서 갖다 앉기면, 지가 받았으면 뭔가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둘이 아니고 하나에요.

그런데 십계명에서 첫째 계명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하나님 믿으라고 돼있지 않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해서 이 땅에 신이라고 해서 다 신이 아니란 말이죠. 하나님이라고 다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죠.

이방 사람들이, 그러니까 이스라엘 빼놓고 다른 민족들도 하나님 믿거든요. 전능자, 조물주, 창조주 다 믿어요.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고려시대에도 조물주 다 섬겼고 심지어 구석기, 신석기 동굴에도 신에 대한 경배하는 그림들이 나와 있어요. 미래, 내세에 대한 그리움, 소망 같은 게 있단 말이죠. 그게 신이란 말이죠.

신석기 시대에는 국가가 농경시대가 되고 그때부터 전문적으로 종교를 전담하는 제사장 직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정착해서 농사짓게 되면 농산물이 많아 남아돌게 돼요. 그걸 잉여생산물이라 하는데 그전에는 사냥하려고 돌아다녔지만 농사를 짓게 되면 안정이 되고 남은 생산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등장한 사람이 왕입니다.

그것이 AD6000년경부터 성경 시작할 때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게 왕이에요. 왕이 등장하면 국가가 등장하고 초반에는 왕이 제사장이에요. 나중에는 분담지어 왕과 제사장이 따로 있게 되지만. 인도에 카스트제도가 있는데 브라만 계열이 바로 제사장입니다. 사제들이에요. 쉽게 말해서 샤만, 무당이었어요. 모든 최초의 왕은 무당이었어요. 단군이 무당이에요. 우리는 무당의 자손이에요. 우랄알타이 계통이 모두 샤먼 계통의 국가가 성립되는 겁니다. 몽골로부터 알라스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전체에 퍼져있는 국가 이전의 국가들은 샤먼인데 그걸 수장이라 하거든요.

수장에서 왕이 되면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신의 아들로 본 겁니다. 그게 바로 이방민족이에요. 이스라엘이 나왔던 애굽은 신이 태양신이에요. 왜 태양신이냐? 진짜 신은 따로 있는데 그 신과 연결고리로써 신의 자태, 신의 모습은 대단하고 변하지 않아야 되고 항상 일정해야 되거든요. 그러면 이 자연세계에서 항상 혜택을 주고 일정하게 움직이고 영원불멸한 그러한 전체가 뭐겠습니까? 태양이잖아요. 이집트뿐만 아니고 고대 왕국의 거의 백 퍼센트가 태양을 섬깁니다. 그리고 태양만은 못하지만 태양의 신부처럼 꾸준하게 제자리를 지켜서 신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티를 내는 전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달입니다. 뿐만 아니고 나타나는 게 별이에요. 별은 좀 호들갑스럽지만. 달과 해는 너무나 친숙하게 신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신을 알아요. 달과 해의 변화에 따라서 농사가 되고 안 되고 결정되니까 만약에 밉보였다는 간 농사 안 되면 온 집안이 거덜 날 판입니다. 잘 보여야지요. 어떻게 잘 보일까요? 제사장을 통해서 뇌물을 드리는 거예요. 정성을 드려서 뇌물을 바칩니다. 뇌물을 바칠 때 더러운 드리면 안 돼요. 깨끗한 것, 인간 가운데 가장 깨끗한 게 처녀입니다. 아즈텍 문화에서는 처녀를 많이 바쳤어요. 이것은 사사기에서 입다도 자기 딸을 바치잖아요. 몰렉 신에 의해서 벌써 사람 바치는 이방종족들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그게 바로 마귀라고 보시면 돼요. 내가 믿는 하나님.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의 심성이 우리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악마는 유황불, 지옥 불에 들어가게 돼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독자적인 자기 자리를 고집했던 존재에요. 악마는 하나님을 믿어요. 믿지만 자기 자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 반발을 일으킨 세력이 바로 악마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악마는 하나님의 적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적이에요. 욥기에 보면 악마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해요. 욥기에서 악마가 시비 거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욥이에요. “저 욥이란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고 자식 잘 되고 떵떵거리고 몸 건강하니 믿음 좋지. 자식 어렵고 환란과 곤고 핍박 오게 되면 믿겠습니까? 안 믿겠지요.”라고 악마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어요.

그 자신만만함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악마가 예수님과 광야에서 만났을 때 평소에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을 지배했던 수법을 그대로 예수님한테 적용했던 겁니다. 이 세 가지 유혹에 안 넘어가는 위인이 없었다는 겁니다. 너도 마찬가지 아니겠느냐고 해서 세 가지 시험을 한 거예요.

이걸 한 마디로 말해서 이겁니다. 악마의 마음은 뭐냐? 선악과 따먹으라고 해놓고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아담 속에 들어왔고 그게 우리 속에 반복해서 들어오는 악마의 심성은 뭐냐? ‘삭고 보자’ 딱 이겁니다. 교회 나오는 목적도 이거에요. 사랑이 없는 사랑 얻고자 오고, 외로운 사람은 외로움 덜려고 오는 거고, 돈 없는 사람은 기도해서 돈 얻으려고 오는 거고 자식이 시집장가 가려고 오는 거고. 어디 아프면 병 나으려고 오는 거고.

병 나아서 살아보자. 돈 벌어서 살아보자. 칭찬받아서 살아보자. 사랑받으면서 살아보자. 모든 게 살아보자는 거예요. 그런데 에덴동산은 죽음과 삶, 이게 나란히 있는 것이 에덴동산의 핵심이고 센터에요. 죽음 없는 에덴동산은 없어요. 항상 거기에 에덴동산에 10년, 20년, 30년 버티고 있어도 항상 주시하고 있는 것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지뢰가 있다, 전기철조망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이방신은 그게 아니에요. 태양이 영원히 타듯이, 달이 영원히 빛나듯이 우리도 영원히 빛나리라. 심지어 바알 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부활의 새 생명 강조하지요. 바알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부활로 한 적이 없어요.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부활의 새 생명 아닙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은 이야기 아니에요. 사람 듣기에 어리석고 인간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만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 이야기한 겁니다.

십자는 다른 이야기 아니에요. 같이 죽자는 겁니다. 죽음이 생명이란 이야기에요. 너희들 보기에 살고 있는 줄 아나? 거울을 다시 봐라. 네가 살아가는 방향인지 늙어 죽어가는 방향인지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이 60 넘으면 거울 잘 안 봅니다. 사진 잘 안 찍어요. 사진 찍으면 괴물 나오는데 왜 찍어요. 사진 찍어도 찾지도 않아요.

사람이 서른 살 때까지는 진짜 청춘이 꽃 피는 것 같아. 그러다 서른 넘어가게 되면 시지포스 신화처럼 서서히 내려갑니다. 김광석의 노래 있잖아요. <서른 즈음에> 최정점에서 점점 더 멀어져가는 거예요. 그 짧은 순간, 그 빛나는 청춘의 순간 시집가서 아이 낳게 되면 한 방에 훅 가잖아요. 그래서 아가씨들이 20대에 안 가잖아요. 놀 것 다 놀고 배낭여행 다 가고 괜히 20대 초반 시집가서 친구들 놀 때 지는 못 놀고 아이 키운다고 하면 한 번밖에 없는 그 좋던 시절, 어딜 가려면 아이 달고 가야 되는데 몸매 관리되겠어요? 안 되잖아요. 아껴놨다가 별 볼 일 없을 때 시집가죠. 통박을 그렇게 굴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죽음에서 시작해요.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해와 달과 별을 보면서 저것처럼 우리도 영원했으면, 생명을 연장하고 더 이어지길 소망하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방종교에서 부활이란, 극락은 이 몸 그대로 가는 게 극락이에요. 그러나 복음에서 천국은, 이제 흙에 속한 그 시절은 잊어버리란 거예요. 흙에 속한 아담은 눈에 보이는 이 세계로서 바이바이하세요. 자기에 대해서 자아에 대해서 항상 안녕하란 거예요.

시집장가요? 천국 가면 시집장가 없습니다. 이 땅에 있을 때 해보려면 해보세요. 어차피 이 땅 지나면 시집도, 장가도 못 갈 것 혼자 사는 것보다도 많이 해보고. 물론 그것도 누가 당겨줘 하는 거지만. 어차피 이 땅에서 좋은 것, 그건 전도서에 의하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전도서 마지막에 보면 모든 것이 내려앉게 돼있어요. 척추도 내려앉고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고, 전도서 12장에. 심지어 원욕도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성욕이 없다면 사람 아닙니다. 그게 사람이겠어요. 남자로 보이나, 여자로 보이나 그것도 호르몬 분비 때 지나면 폐경기 지나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여잔데 남자 같고 남자가 여자 같고 혼잡스러워지고.

그래서 의학이 죄입니다. 그냥 별 할 일 없을 때 가는 게 제일 좋아요. 괜히 의학이 만들어놓은 온갖 병명 다 지어내서 링거 꼽고 나중에는 그 쓰레기를 처치 못해서 요양원이라는 현대판 고려장을 만들어서 자식들 불효자 다 만들어놓고. 이게 인간들이 자기 꼼수에 자기가 말려든 거예요. 인간은 기능 떨어지면 가는 게 옳습니다. 별 할 일 없거든. 장기, 바둑, 게이트볼 이런 것 하지 말고 그냥 가는 게 제일 좋아요. 게이트볼하다 공에 얻어맞아 죽는 게 제일 좋아요.

죽음이란 진공청소기 같아서 빨아 당기는 겁니다. 죽으면 살리라, 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안 믿는다고? 내가 시범 보여줄게.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이 죽어서 살았어요. 죽음 없는 예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죽음 없이는. 도마가 본 것은 못자국과 창자국이었어요. 예수님 얼굴 똑같은 예수 아니었어요. 얼굴 봐서는 몰라요. 그 못자국과 창자국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스럽고 저주스러운 세상인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산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시간을 의식하게 돼있어요. 여기서 스트레스가 나와요. 왜? 기대하거든요. 뭔가 기대하고 기다리고 소망하는 거예요. 어디에 투자해놓고 이자 나오겠나, 하고 기다리잖아요. 지가 지 인생을 망치는 겁니다. 돈 빌려줬는데 주님께서 두 시간 뒤에 재림하신다. 안 돼요. 돈 투자한 게 있는데. 20% 이자 받고 재림하야지요. 인간이 기대한 것 때문에 인간은 복음이고 예수고 다 거짓말이고 내가 기대한 그 지점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근사하게 드러나는가? 그것만 쳐다보고 사니까 시간의식, 말도 못하는 초조감, 시험 앞두고 초조감, 운전면허시험도 살이 빠질 정도로. 합격하고 난 뒤에 짜장면 하나 먹어야 돼.

옛날에 운전면허시험이 얼마나 어렵다고요. 제가 여섯 번 떨어졌어요. 뭔가 초조하다는 것, 얼마나 스트레스 받아요. 기다림 때문에 내가 기대한 소망 때문에 지금 내가 지옥 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바보도 아니고.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야 되는데 기다림 때문에 그 즐거움을 미래에 지연시키다보니 지금 힘들어 못 살아요. 곗돈 부어놓고 계 언제 타는지 그것만 생각하고.

그래서 하나님, 다른 신이죠. 이스라엘 신은 시간의식을 없애버립니다. 고정시켜요. 그게 바로 제단입니다. 제단은 무서운 곳이에요. 이방종교에서는 중심점이 자기 자신이에요. 내가 잘 돼야 돼요. 내가 잘 돼야 하니까 시간의식이 있어서 지금은 아니지만 내일을 잘 될 거야. 소망을 갖자. 희망 없이는 못 사는 거야. 이렇게 자꾸 자기중심을 미루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지점, 그것이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역시 그 지점뿐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제단입니다. 모세언약이죠. 제단에서는 홀라당 다 태웁니다. 그걸 번제라 해요.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화목제 할 때 차이를 통해서 다섯 가지 제사를 이해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번제는 홀라당 다 태워요. 심지어 제사장한테 돌아갈 몫도 남기지 않고 다 태웁니다. 피는 뿌려서 제단에 합류하고 나머지 내장과 기름은 제단 위에서 다 태우죠. 태울 때 냄새가 나죠. 하나님께서 그 냄새를 향기 나는 냄새라 했어요. 하나님은 상당히 엽기적이에요. 하나님이 좋아하는 향수는 샤넬 넘버5가 아닙니다. 흠 없는 제물이 죽을 때 그게 그렇게 좋다는 거예요. 죽는 게 그렇게 좋은 거예요.

5대 제사가 원래 처음부터 주어진 게 아니고 노아 때 제사, 그리고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드린 제사는 번제였습니다. 홀라당 다 태우는 겁니다. 번제라는 큰 범주 안에 작은 게 들어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전체 제사는 일단 번제에요.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드린 제사가 번제였습니다.

그런데 번제란 제사가 출애굽기에서 홍해를 건너고 난 뒤에 둘로 구분돼요. 번제와 화목제로 구분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 사이에 하나님께서 틈을 벌려놨어요. 거기서 제사가 함유하고 있는 내용이 더 깊이 있게 다뤄지는 겁니다. 제사는 다 태운다. 그리고 제사장에게 돌아갈 몫도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 인간은 관여하지 말라는 거예요.

네가 네 구원에 대해서 관여하려면 이방나라로 가라. 이방나라에 그런 종교들 많아요. 정성을 다하여 순박하게 아주 공손하게 순종에 순종을 하면서 신이시여, 내 몸 받으소서. 우리 처자 받아주시고 결혼도 안한 색시니까 받으시고. 아즈텍 제사에서는 여자의 심장을 도려내고 바쳐요. 딸자식을 바칠 때 부모는 안타깝겠지요. 하지만 그 당시는 공동체기 때문에 그걸 영광이라고 생각하라, 이렇게 돼요.

왜 처녀를 바치느냐?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것을 아마 하나님도 좋아할 거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가 먼저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살아 있는 식으로 하나님도 살아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죽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살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죽는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란 사실을 누가 알겠어요? 심지어 오늘날 교회도 모르는데.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교회가. 절 정도가 아니고 교회가.

살아 있는 나를 살려달라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은 아니에요. 이리와 나랑 죽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하면 교회 오겠어요? 미쳤나, 이러지 않겠어요? 미쳐야 와요. 미쳐야 온다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성령세례 받지 아니하면 천국, 아들이 나라에 가질 못해요. 자기가 상상한 나라는 갈지 모르지만 아들의 나라, 진짜 천국은 가지 못하는 겁니다.

그걸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해를 못하지요. 주님께서는 일시키기 위해서 홍해에 집어넣었어요. 시껍했어요. 뒤에선 따라오지 앞에는 넘실거리는 물 있지요. 진퇴양난이죠. 끝났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다를 가리키면 진즉에 열어주지요. 그게 아니에요. 뒤에 애굽의 군사소리 다 듣게 만들어요. 아직까지 바닷물 안 열렸어요. 바닷물이 열린다는 게 말이 안 되지요. 인간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 안에 없는 거예요.

복음, 십자가란 게 원래 그런 거예요. 개나 소나 십자가라고 하니까 원래 있는 줄 알지요. 진짜 믿는 십자가는 홍해 같은 겁니다. 미쳤나, 그걸 믿게. 이 정도 믿어야 그게 믿어지는 거예요. 교회 오는 이유가 뭔데? 이익 보려고 오는 거지.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아무 별 볼 일 없는 거고. 십자가 믿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겠습니까, 현찰 주렵니까, 이렇게 나온다니까. 십자가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다른 걸 얻는 수단으로 믿는 척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끝까지 애굽 군사의 발걸음 다 듣게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인간은 구원에 관여하지 못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의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이러려고 애굽에서 나왔나? 비로소 자기 속의 솔직한 악마의 고백이 나오게 만들어요. 나 좋으라고 믿었지, 모세, 니 좋으라고 믿은 줄 아나? 기껏 돌아오는 게 이것밖에 안 되나.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서 목숨 바치려고 대통령 된 거지요. 지금 목숨 바치고 있잖아요. 다시 하겠습니다. 흙에 속한 우리 자아 있잖아요. 이래 끝나나, 저래 끝나나 어차피 끝날 것 기대하지 마세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하지 맙시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걸 믿음이라 해요. 열씨미, 쌍 시옷을 열두 개 갖다 붙이는 게 믿음이 아니고 그냥 툴툴 털어버리세요. 내가 날 믿으면 난 개다, 이게 믿음이에요. 진짜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거잖아요. 저, 개입니다. 이렇게 나왔더니 최고 믿음 아닙니까. 난 똘마니입니다. 이건 백부장 믿음이고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오면 오고 까라하면 까겠나이다. 이게 백부장 믿음이란 말이죠.

그걸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하늘나라 못 간다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한 것, 방금 이야기한 세 가지의 공통점을 끄집어내봅시다. 간단하거든요. 자기에 대해서 포기한 거예요. 자기 자신의의 행위와 열성과 순수함과 순종에 대해서, 자기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해서 늘 포기해줘야 돼요. 그것 끄집어내봐야 흙에 속한 건데 흙 되려고 그 짓합니까? 그래봐야 기껏 진흙밖에 더 되겠습니까?

번제의 의미는 다 태우는 거예요. 그렇지. 네가 없어져야지. 진즉에 그런 마음먹어야지. 다 태워버립니다. 태워버리면 시간의식도 없어지겠지요. 그래서 제단은 영원한 제단이 되는 겁니다. 고정된 기준, 이게 번제입니다. 왜? 하나님만 기뻐하면 그만이에요. 우리 인생 어떻게 꼬라박든 관계없어요. 주님이 기뻐하는 향기로운 냄새만 된다면 이쪽 길로 가나 저쪽 길로 가나 어차피 죽는 길인데 이렇게 죽는 것 하나님이 죽이시는 기준이 제단에서 다 태우는 것, 그것을 먼저 흠 없는 수송아지, 수양, 수염소가 번제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수소, 수양은 시범조교가 되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게 뭔지 모르지? 날 봐. 안수하고 그냥 다 태워 죽이는 거예요. 무서운 지옥 불, 저주의 불이죠. 흙에 속했다는 말은 그 안에 악마의 심성이 들어있다는 것, 악마는 아들에 나라에 못 가니까 주께서 철저하게 차단시키는 자신의 의지를 번제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출애굽기에 보면, 레위기에서는 다섯 가지 제사지만 레위기 오기 전에 출애굽기에서는 번제와 화목제 둘로 나눠져요. 화목제와 다른 모든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화목제는 제사장이나 드린 사람이 다 같이 기뻐하면서 그 기쁨의 참여를 용납하신다는 겁니다. 일종에 파티를 벌이는 거예요. 왜 파티를 벌이겠어요? 모든 것이 마감이 되었으니까 파티를 벌이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흡족하다는 말입니다. 흡족한 상태가 방금 달성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혼인잔치를 벌여놓고 들어와, 내가 기뻐하는 음식을 먹어. 이 음식은 내가 너에게 내 기쁨에 참여하라고 제공하는 식사야. 하고 식사를 제공하게 되면 그 식사를 맛있게 일반 백성과 제사장이 같이 먹는 것, 그게 화목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화목제물로 봐요. 그리고 요한일서에서도 화목제물로 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써 더 이상 제사할 것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우리 것을 안 받는다는 뜻이에요. 돈이든 시간이든 일체 안 받는다는 거예요. 줘봐야 쓰레기통에 버려지는데 어차피 버려질 것, 우린 지금 서서히 버려지고 있잖아요. 공동묘지로. 흙에 속한 것은 더러워서 안 받아요. 하늘에서 오신 어린양만 받지 우린 안 받습니다.

그러나 이방종교는 뭐냐? 우리 것을 받는다는 게 이방종교에요.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하세요. 하나님의 아들 나라, 천국의 기준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것으로 인하여 가는 곳이 천국이에요. 그러나 인간들이 생각하는 가짜 천국은 인간이 드린 당사자가 드렸다는 이유 때문에 거기에 천국에 간다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극락이에요. 오늘날 한국은 극락을 교회가 천국으로 바꿔서 장사하고 있는 겁니다. 시간 바치고, 십일조 바치고, 뭐 바치고, 선교헌금 바치고, 땅 헌금, 주정헌금 바치고, 심방헌금 바치고. 명목을 도대체 몇 개나 다는 거예요?

목사님, 헌금도 안 하면 교회 운영 됩니까? 교회가 있음이 진짜 교회를 막고 있어요. 교회 없애보세요. 교회가 보이지. 그리스도 몸이 교회지. 집구석에 앉아있으면 그게 교회잖아요. 왜 쓸데없이 걱정하고 있어요. 교회 머리 되신 주님이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세워요. 그 교회에 참석하는 것도 성령의 엮음으로 교회되는 거예요. 벽돌 엮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집구석, 화장실 앉아있어도 교횐데 무슨 교회를 해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반드시 십자가 복음으로만 대화하고 만나야 돼요. 그렇지 않고 수천 명 모여도 하나님 믿으면 재수가 있을 거다, 그런 식으로 만나면 행운의 편지 나눠준 거예요. 그 교회는. 쓰레기입니다. 다 이익 보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단골 확보하려고, 돈이나 빌릴까 싶어 온 거예요. 친목단체에요. 동호회고.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사람 가는 곳마다 교회라. 복음은 개뿔, 복음은 하나도 없어요. 외로워서 모여요. 김밥 먹으려고 모여요. 무슨 느낌이 드느냐 하면, 꼭 감방 느낌 들어요. 감방에 죄수들 몇 명 모여 있으면 사식 들어올 때 있잖아요. 들어온 사식을 나눠먹으면 그렇게 맛있답니다. 외국에 있을 때 소포가 오게 되면 오징어 같은 것 내놓으면 같이 뜯어먹고 같이 고향 생각하고.

가만히 보면 외국뿐만 아니고 전라도나 경상도에서 취직하려고 서울에 간 사람도 회사에서 먹는 밥이 허름하잖아요. 교회 가니까 형제여, 하고 맛있는 것 해주니까 고향 생각나고 해서 교회 가는 거예요. 거기에 무슨 제단이 있습니까? 무서운 제단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각자 점심 내놓고 한주에 한 번씩 소풍 온 기분이라니까. 그래놓고 이웃사랑이라고 하나님 사랑하고. 이번에는 촛불집회 참석하고. 그래서 정의 실현했어요?

번제는 다 태우는 겁니다. 화목제 생각하지 마세요. 화목제 생각하더라도 무조건 번제가 입구입니다. 번제 들어가지도 않고 화목제 넘보는 것은 도둑놈 심보에요. 번제가 뭐다? 다 태우는 거예요. 땅에 속하는 것, 흙에 속하는 것은 일체 안 받는다. 천국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100% 다 채웁니다. 인간의 것은 받질 않아요. 더러워서 안 받아요. 악마의 마음을 누가 받습니까? 사람이 헌금을 한다든지 오른손이 할 때 그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십일조 낼 때 벌벌 떨어요. 낼까말까. 세뱃돈 오만 원에서 오천 원 할 땐 안 떨어요. 오천만 원에서 오백만 원 낼 때 벌벌 떤다니까. 그리고 벌벌 떤다는 말은, 이것 내면 30배 줄 거지요? 나는 욕심이 없기 때문에 백배까지는 안 바라고 30배는 줘야지요. 얼마나 마음이 겸손한지. 계산해보세요. 오백만 원에 30배면 얼맙니까?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믿습니다, 해서. 주께서 더러워서 안 받아요. 줘도 안 받아요.

하나님이 만드시는 제물은 성령이 와서 만들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화목제물로 변해요. 너희는 악한 세대에 산제사를 드려라.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를 일방적으로 다루십니다. 다루실 때 일체 우리에 대한 미래에 대한 기대는 다 잘라버려요. 고정된 기준만 제시합니다.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그런 것만 나오도록 쓰시는 겁니다. 그것도 다양하게. 자기 형편에 맞도록. 그것을 로마서 12장에서는 믿음의 분량대로, 라고 해요. 섬기는 자는 섬기는 자로.

그런데 믿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믿음과 믿음이 비교가 안 되는 이유가, 믿음이 본인의 능력이라면 비교가 되는데 믿음이 출처가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기 때문에 그 질을 따지려면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하게 돼있어요. 십자가에 다가가는 순간 우리는 천하의 죄인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면 죄인이 뭘 기대합니까? 죄인이 기대한다는 것은 음흉한 존재지 진짜 죄인이 아니에요. 죄인에게서 나올 것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진즉에 죽을 인간이 이렇게 사니 큰 은혜입니다. 점점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감사만 나오지, 이것 드릴 테니 30배 주세요, 이런 소리가 안 나와요. 어디 교회가 화투판입니까? 다 바쳤다. 돈 놓고 돈 먹는 데에요?

그래서 레위기는 순서가 번제 그 다음에 화목제입니다. 중간에 소제가 들어가지만 소제는 번제 같은 요소에요. 다 갈아서 드립니다. 가루를 만들어버려요. 꿀도 치지 말고 소금 쳐야 돼요. 식사용? 식사는 우리 살기 위함이잖아요. 우리 살기 위한 제물은 안 들어가요. 죽음에서 생명이 나오기 때문에 죽음으로 참여하는 태도를 보여야 돼요. 저는 갈아버리세요. 주님이 조폭 같아. 묻어버릴까? 묻어 주세요. 흙에 속한 게 주님의 약속과 함께 묻게 되면 주와 함께 묻은 자에 한해서 다시 살아나게 돼있습니다. 로마서 6장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 살리라.

화목제는 다음 시간에 하고. 지난 시간에 한 건 속죄제와 속건제인데 속죄제와 속건제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항상 피가 중요해요. 피를 회막문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에 바르고 제단에 와서 피 뿌리고. 피가 선두주자에요. 왜냐하면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에. 피를 뿌린다는 말은 보라는 거예요. 악마에 속한 인간들아, 악마에 속한 죄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 죄를 대신해서 피라는 생명의 모습으로 너희들 살리기 위해서 피를 뿌리는 거예요.

번제로 끝나는 게 아니고 화목제로 나가야 될 이유가, 죄 때문에 그런데 쉽게 말해서 죄는 오염된 것, 더럽다. 더 노골적으로 추잡해서 안 받습니다. 그걸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속죄제, 속건제가 있는데 오늘 할 것, 속건제는 보상을 해줘야 돼요. 배상 또는 보상.

남의 티비를 깼으면 티비를 사주는 게 아닙니다. 사주는 것은 기본이고 플러스 20%를 추가해서 줘야 해요. 이 20%가 무슨 뜻이냐 하면, 죄를 그냥 용서해주면 이게 무죄가 돼요. 무죄는 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무죄가 되면 안 돼요. 의인이 돼야 된다고. 무죄가 되면 에덴동산으로 가버려요. 원상회복이지 천국의 모습은 아니란 말이죠. 인간을 원상회복하려고 주께서 오신 것이 아니고 천국을 이루려고 오셨거든요. 천국은 인간이 못하면서도 잉여, 인간이 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 덮쳐야 천국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속건제는 어떻게 이 취지가 진행되는지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IP:119.♡.174.223) 17-02-08 12:01 
20170203b 울산강의-레위기 5장 : 속건제
(강의:이근호 목사)


번제, 소제 빼놓고는 제사장이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화목제도 제사장이 먹을 수 있고 속건제, 속죄제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일반 제사 드리는 사람은 속건제만 먹을 수 있고 다른 건 못 먹게 돼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제물이 자기가  잘못 됐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라고 양을 끌고 왔을 때 그게 제사장 앞에 스톱하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 죄 문제는 니가 해결할 것은 없어요. 제사장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립되게 되면 죄 용서되는 거고, 만약에 그 관계가 원활치 않으면 용서 안 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회개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제사장을 통해서 죄 용서된 것을 믿습니다,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실제로 제사장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활해야 용서가 되는 거지 “제사장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의 실력을 믿습니다. 믿고말고요.” 이렇게 붙든다고 해서 갸륵한 정성, 순박함이 절대로 그 사람 구원 못해요.

제사장에게 스톱이 된다는 말은, “제사장님, 우리 애 죄 대신 가져왔으니까 부탁합니다.” “예. 아주머니 알았습니다. 집에 가 계세요.” “부탁한다니까요.” “가라니까요.” “제가 제사장을 위해서 제대로 제사 잘 드리라고 빌겠습니다.” “허어. 그렇든 말든 신경 끄시고 나한테 맡겨놓고 가시라니까.” “지켜보겠습니다.” “지켜보지 말고 집에 가시라니까.” 왜 그러냐 하면, 용서해주는 게 인간의 권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필히 용서해줄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계약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리고 구원할 자, 안 할 자 결정은 인간들이 그 결정에 인간이 관여하면 안 돼요. 관여할 수도 없고. 어떤 사람을 구원할지는 아버지와 아들이 이미 결정해놓고 통보만 날릴 뿐이에요. 그리고 통보된 사람은 본인이 싫든지 좋든지 관계없이 무조건 구원받아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을 위한 나라,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주가 되게 하는 나라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 어떤 권한을 줬느냐 하면, 아들이 싫어하는 사람을 지옥 보낼 권한을 줬어요. 그래서 그 권한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옥이란 것을 만들어야 했고, 그 지옥에 넣어야 할 사람들을 절대로 주께서 천국 못 가도록 예수님께서 알아서 아주 공을 들여서 지옥 보내십니다.

“오지 마라. 부탁이다. 난 너 같은 인간 상대 안 한다.” “15년 교회 다녔습니다.” “오지 말라 했잖아. 교회 나와도 안 봐줘.” “30년째 십일조 했습니다.” “백날 해도 소용없어. 돈만 날렸어. 오지 마. 마귀 보내서 지옥으로 곱게 인도하라고 마귀 보냈으니까 너는 그를 따라가고. 너는 오지 마.” 아주 강력한 저지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걸 성령 받은 성도는 알아요. 왜? 나도 같은 저지를 당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않고 오라고 자꾸 인도하시니까 이런 횡재가 없어요. 로또도 이런 로또가 없습니다. 최곱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횡재가 주어졌느냐고 한다면, 레위기 5장, 6장, 7장을 보라고 되는 겁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 안에는 제사장에서 스톱이 되는 거예요.

죄를 짓는 것은 이미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있더라도 몰라요. 잔소리를 해대야 죄인 줄 알아요. 부모가 아이들 키울 때 그렇잖아요. 아이가 크면 클수록 잔소리가 점점 더 늘어납니다. 어지간한 것은 봐주다가 봐줘선 안 될 항목이 점점 많아져요.

이럴 경우에 속죄제 드려라, 이럴 경우에 속건제 드리라는 항목들이 나옵니다. 항목들이 둘로 돼있어요. 하나는 성물을 건드리면 속건제 드리는데 순서가 먼저 제사부터 드리고 그 다음에 보상을 해야 돼요. 그런데 일반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한 것, 인간 대 인간이 범죄 한 것, 범죄 한 걸 어떻게 아느냐? 이것은 율법이 주어져요. 인간이 범죄 한 게 있으면 보상부터 먼저 하고 제사 드리게 돼있어요. 순서가 반대로 돼있어요. 그런데 보상은 그냥 원상회복이 아니고 20%의 보상을 하고 난 뒤에 제사를 드리게 돼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끼리 움직이는 율법으로 보게 되겠지요. 움직이는 폭탄. 저것 잘못 건드리면 20% 다 날아가는 수가 있다. 그러니까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그냥 막 대하지 말고 율법을 경유해서 대하라. 그러면 율법은 어디서 오는가? 율법은 제사와 같이 주어지거든요. 십계명이 주어진 시내 산에서 모세가 제사법도 같이 받아요. 그냥 율법 주고 지키라는 게 아니고 율법 주고 그 다음에 죄 지었을 때는 이런 것으로 처리하라는 처리법이 같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 주고 제사 드리면, 제사 드리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장소가 나옵니다. 어떤 장소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가 나와요. 이걸 만남의 장소라 해요. 만남의 장소는 ‘율법+제사’로써 만나는 거예요. 율법을 준 것은 인간을 죄인 되게 하죠. 그러면 만남의 장소에서는 인간은 멀쩡한 인간도 죄인으로 나타나고 그 장소에서 활동하는 전담인으로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이걸 신약적으로 정리하면 간단하죠. ‘죄인+제사장’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무슨 일을 합니까? 살리는 일을 해요, 죽이는 일을 해요? 제물이니까 항상 죽이는 일을 해요. 죽음이 늘 피어나는 곳. 오늘날 울산, 대구 이런 데서 늘 죽음과 관련되어 연기 피어나는 곳이 화장터죠. 주님을 화장터에서 만납니다. 파이프 오르간 있는 멀쩡한 교회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화장터에서 만나요.

화장터에서 만나기 때문에 화장터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죽음이 가까이 오겠지요. 차타고 화장터에 가면 멀쩡한 사람들도, 유족들도 내가 죽으면 여기 오겠구나, 하고 갑자기 긴장되겠지요.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기에 가까이 가면서 결국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 때 자기의 계획과 기대치와 자기 장래 희망 같은 것이 무용지물이 되겠지요. 그게 없을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도 같이 날아가는 겁니다.

인간이 힘들게 사는 것은 쓸데없는 계획을 많이 해서 그래요. 너무 많은 계획이 자기를 망칩니다. 일 하나 끝내고 난 뒤엔 또 계획 세우고, 그것 끝나고 난 뒤에 또 계획 세우고. 계획 세운다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는 거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인생이 인위적이고 가식적인 그런 어설픈 것들이 내 인생을 억누른 거예요. 억새풀 같은 날카로움을 온 몸에 짊어지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삼켜져서 진정 나다움이 없어져요. 걱정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아. 걱정하다 볼 일 다 보는.

그 이야기하다보니까 갑자기 그런 노래가 생각나네. 서울 시스터즈가 노래한 세상사 인간사 모두 다 부질없는 것. 술 한 잔 하면서 쉬었다 가세요. 뒤가 이상해. 별로 은혜롭지 못하지만 앞의 가사가 멋져요. 세상사 인간사 다 부질없는 거예요.


<서울 탱고>(방실이, 1990)

내 나이 묻지 마세요 내 이름도 묻지마세요
이리저리 나부끼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고향도 묻지 마세요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서울이란 낮선 곳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가 모두가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그냥 쉬었다가 가세요 술이나 한잔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 다 잊으시구려


백날 살아봐야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여기에 하나님이 찾아왔기 때문에 그나마 살 길이 있다는 걸 알지요. 찾아왔는데 멀쩡한 나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율법으로 죽여 놓고 찾아오는 겁니다. 너 말고 네 대신 제사장. 그런데 화목제는 끝나고 난 뒤에 식사를 같이 한다고 했지요. 하나님과 제사장과 백성들이 식사를 같이 하는 것, 그게 바로 화목제인 거예요.

다섯 개 제사 안에서 어떤 흐름 같은 게 있어요. 다 태우고. 왜 다 태우지? 아코디언처럼 늘여보니까 죄 때문에 다 태워져도 마땅함이 보이고. 그런데 그게 나중에 다 태워 죽었는데 화목제로 끝나더라. 중간에 무슨 일을 하셨지? 하나님이 나서서 자기 백성이란 이유로 죄 없이 해주려고 씻어주는데 그냥 속죄제는 죄를 없앨 뿐이지만 속건제는 20% 보너스까지 쳐서 해주니까 그 20%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이건 죄를 안 졌다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너는 잘났고, 잘났어. 이 훌륭한 놈아. 어깨를 치는데 어깨에 멍이 들 지경이에요. 잘한 게 없는데 한평생 살면서 부질없는 짓만 했는데 잘했다고 하니까 잘했다는 격려도 우리에게서 시작한 게 아니에요. 중간에 누가 들어갔어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우리 대신 끼어들었어요. 그러니까 레위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한테 한 게 뭐냐고 할 때 우리가 속건제를 보면서 예수님이 주의 깊게 보는 죄들이 있어요. 그게 속건제로 나타나거든요. 성물, 하나님의 거룩한 물건을 훼손했거나 할 때 그냥 속건제 드리는 게 아니고 20%를 보상해야 돼요. 예를 들어서 레위기 27장 30, 31절을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이게 레위기 끝에 가면 땅 자체가 천국의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거예요. 약속의 땅을. 그러니까 그 땅의 주인이 있어요. 주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그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도 주님의 언약대로 될 경우에만 그 땅에 살 수 있는 곡식이 나오게 돼있어요. 따라서 십일조를 드린다는 말은 사실은 다 받는 거예요. 열심히 쟁기질한다고 소산이 나오는 게 아니에요. 땅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생산물을 얻은 겁니다.

얻었는데 이것을 주님 덕분이라는 티를 내는 모습이 십분의 일을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사적인 독자적인 영역을 고수해서 나만 살아야겠다면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천국 안에 자기 세계, 별장을 만든 셈이 돼요. 그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아들의 나라 안에 내 나라, 이런 나라는 없어요. 내 나라 있으면 옆집 나라와 싸우고 그러면 안 됩니다.

십분의 일을 하려면, 31절에,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것을 훼손할 때는 20%을 더해서 원상회복 시켜야 된다.

그 다음에 어떤 게 있느냐 하면, 레위기 6장에 보면, 그것 하기 전에 속건제 제사는 속죄제와 차이점은 회막문에 피를 일곱 번 뿌린다든지 향단에 피를 바른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단에 피를 뿌리게 돼있어요. 번제도 제단에 피 뿌리고, 속죄제도 제단에 피 뿌리고, 속건제도 제단에 피 뿌리고, 화목제도 제단에 피 뿌리게 돼있어요. 오직 속죄제만 회막에 피 뿌리게 돼있고, 나머지는 제단에 피를 뿌립니다.

그럼 제단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되잖아요. 제단은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것이고 회막은 텐트 쳐놓은데 있어요. 50*25미터 뜰 안에 제단 있고, 텐트 쳐놨는데 앞에 있는 걸 성소, 지성소로 돼있고. 떡을 진열한 상과 등대가 있어요. 나중에 솔로몬 시대에는 야긴과 보아스라 해서 하나님의 힘으로 지켜낸다는 그런 뜻을 갖고 있는 두 기둥이 있고, 이게 굉장히 커요. 50미터 정도 돼요. 이 안에는 향단도 다섯 개나 있어요. 앞에 향을 피우는 향로에 피를 바른다. 회막에 피를 일곱 번 뿌리고, 제단 사면에 나머지 피를 다 쏟아 붓는 거예요. 피는 태우는 게 아니고 피는 뿌리는 거예요.

피를 왜 뿌리느냐 하면, 피를 뿌려야 하나님의 제사라는 기구가 깨끗해진다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피 자체로는 벌거니 더럽잖아요. 그런데 피를 뿌려야 깨끗해진다니까 우리가 보는 안목과 하나님의 안목이 너무 차이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취미가 별나요. 우리가 깨끗한 것과 달라요. 피 없이는 사함이 없어요. 하나님한테는. 우리는 백의민족이라고 뭔가 하얗게 돼야 된다는데 주님은 하얗게 되는 것도 피 없이는 하얗게 될 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대신 값을 치루지 않고는 절대로 봐주는 법이 없어요.

레위기 6장.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에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2,3절)

이걸 제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범죄 했을 때 죄가 성립되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 죄에 대해서 기억하거나 이해하면 잘못됐다고 제물 가져와서 속건제 드리면 속죄가 된다고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범죄 할 때만 죄인입니까? 평소에도 죄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계속해서 시비 거는 거예요. 이만하면 깨끗하다고 하면 또 뭔가 사태가 일어나요. 그 사태에 의해서 자기 본성을 우발적으로 드러내게 되면 그 다음에 준비된 율법이 와서, “그것 봐, 너, 죄인 맞잖아.”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함정수사라 합니다.

죄 아닌 게 없는데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은 자기 백성을 선악과를 초월하도록 작전을 꾸민 겁니다. 나쁜 짓을 한 것을 내가 기억할 때만 나쁜 짓이라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큰 용서의 보자기를 준비한 거예요. 우리는 죄 지으면 그 죄만큼 죄 지었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큼직한 용서를 가져와서, “말로 하세요. 다신 안 그럴게요.” 하는데 주님께서 준비한 보자기가 얼마나 큰지 아예 십자가로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바쳐버려요.

“너희들은 말로 해서 구원받을 위인이 아니야. 한두 가지라야 말을 하지.” 하는 족족 오른손을 하는 것은 왼손이 알아버리는 그걸 못 참겠다는 거예요. 더러워서.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을 천국에 안 받겠다는 거예요. 걸핏하면 기도하면서 맹세합니다. “하나님, 이것만 해주신다면 우리 아들 신학교에 바치겠습니다. 목사 만들겠습니다.” 온갖 근사해 보이는 멘트를 하니 주께서 하는 말이, 제발 맹세 좀 하지 마라. 내가 널 알거든. 네가 얼마나 마음이 헷가닥하는지 뻔히 아는데 안 되는 걸 말로 자꾸 해요.

그리고 사람이 돈을 사랑하게 되면 돈을 기억하게 돼있습니다. 그게 땅이에요.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는 것은 인간이 뭘 해도 자기 마음은 이 땅에서 자기 살 궁리 챙기는 것이 인간의 모든 일의 뒤에 숨겨진 속성이에요. 행동하면서 자기 죽을 요령으로 하는 행동 없습니다. 이 행동에 자기 사는데 유리하도록 행동하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그게 예수님과 달라도 너무 다른 거예요.

죄는 뭐냐?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 따라 다닌 베드로와 열두 제자들 얼마나 훌륭합니까? 주님께서 고난 받는다고 하니까 그 한 마디에 베드로가 그럴 수 없다고 하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리고 목숨 바치겠다고 장담한 베드로, 그 베드로의 모습이 우리한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열두 제자들 가운데 수제자잖아요. 수제자 꼴이 그 꼴이에요. 목숨 바쳤는데 주께서는 목숨 도로 가져가. 소용없어. 네가 목숨 바쳐서 갈 천국 갔으면 진즉 이야기했지. 내가 죽지도 않았다. 니 목숨으로 될 것 같으면 네가 자살해서 천당 가면 돼. 목숨을 내놨다는 것은 다 내놓은 거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는 데 손톱만큼도 보탬이 안 돼요.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우리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또 하나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들려오길 바랍니다.

간음하다 여인이 잡혔어요. 그 여인이 용서받고 천당 가는 방법, 그 여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해도 소용없어요. 두 번 다시 간음하면 손을 자르겠습니다. 눈을 빼겠습니다. 백날해도 용서 안 돼요. 과거를 잊겠다고 해도 안 돼요. 이제는 산장의 여인 되고, 머리 깎고 중 되고, 수녀 되도 안 돼요. 그런 짓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인생에 실패하고 선교단체에 들어가고 남자한테 차였다고 전도사 하고. 그런 일 없기를 바라지만.

왜 그렇게 오버합니까, 객기를 부려요? 남자한테 차였으면 또 차일 준비하면 돼요. 사기 당했으면 또 사기 당하거나 본인이 사기 칠 가능성이 많아요. 베드로의 본질은 변함이 없듯이 인간의 본색도 변함이 없어요.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인간 된 줄 알아요? 아니에요. 주께서 원치 않는 길로 인도했어요. 오죽 못났으면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겠어요. 그걸 자율주행차라 합니다. 지가 운전하는 게 아닙니다. 알아서 성령이 인도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에요. 로마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에요. 로마 가는 것은 자기 계획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로마 가게 했으면 곱게 보내지 지중해에 빠져죽게 만드는 건 뭐예요. 이 모든 계획이 마치 홍해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이제 끝났네. 그 소리가 나올 때마다 자동문처럼 열리는 거예요. 안 돼, 하면 쫙쫙 열려요. 뭐 해보려 하면 닫히고. 에이 더러워서 안 해, 하면 열리고. 그게 훈련돼야 천국에서 면류관을 반납하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게 반복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해놓고 네가 어떤 죄에서 용서받았는지 비교시키는 겁니다. 정답 주고. 정답은 수학참고서 뒤에 있어요. 정답을 가위로 잘라서 오른손에 정답, 왼손에 문제. 정답부터 보고 문제를 보란 말이죠. 바보가 아니면 다 풀어요. 과정은 모르지만. 3번, 4번, 시험 치란 말이죠. 나는 간음했다. 정답 십자가. 나는 사기 쳤다. 정답, 십자가. 다 끝났네. 끝났잖아요.

막달라 마리아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막달라 마리아가 일반 여자들처럼 울 여자가 아니에요. 악착 같이 몸 팔아서 돈 벌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 여자는 울지 않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모은 돈으로 향수를 샀거든요. 향수는 그 당시에 혼수품이니까, 자기를 단장하는. 그걸 예수님한테 다 부었잖아요. 울면서. 이딴 것 때문에 내가 평생을 주님 만나지 못하고 주님 모르는 채 살았나. 부질없는 것, 인간사 무엇 때문에 왜 살았는지 모르고. 주님 앞에 던졌습니다. 주께서 한 마디 했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사랑하려고 생각하지 마. 용서받았으면 용서가 사랑이란 결실물을 낳는다.

주께서 함정수사를 하는 거예요. 나한테 해당 사항 없는데요? 이런 소리 마세요. 제가 지난주일 오후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어떤 성경구절 나오면 자기한테 해당사항이 없데요. 해당사항 되게 해줘요, 주께서? 되게 했을 때 다시 보세요. 나한테 해당사항이 되는 줄 알거에요.

오늘 강의제목을 이것으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갈취’입니다. 갈취는 무슨 뜻이냐 하면, 의도적으로 노리는 것도 있지만 순간적으로 그 상황에서 자기 이익을 먼저 고려하게 되면 그게 뭐든지 갈취가 돼요. 장사꾼이 남는 게 없다고 하면서 이문을 많이 남기려고 바가지 씌우는 것도 갈취에요. 그 당시는 사회가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경우의 수가 작아요. 그 당시에 컴퓨터, sns 없거든요. 인간이 듬성듬성 있는 가운데 관계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계명도 듬성듬성해요. 그러나 십자가 피로써 인간은 어떤 짓을 해도 스스로 자기 죄를 씻지 못하는 것이 최종적으로 십자가로 나왔다면 이 시대가 십자가로 적용되는 시대라면 모든 것이 갈취에 해당되는 겁니다.

갈취를 쉽게 해서 이웃사랑에 대한 위반이에요. 이웃을 괄호 치면 사랑에 대한 위반. 그래서 신약은 계명이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너희에게 명하노니 계명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내가 너희에게 명하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 안에 뭐가 들어 있겠습니까? 갈취하지 마라. 레위기에 나오는, 십계명에 나오는 것이 다 포함돼있어요.

갈취하는 이유가 십계명 마지막에 나옵니다. 탐심이죠. 심지어 정박아, 아이큐가 낮은 어린아이들도 자기 위주에요. 햄버거가 진열돼있는데 아이큐가 떨어지는 아이가 엄마 손 뿌리치고 그냥 집어 먹습니다. 그러면 돈을 보호자가 내겠지요.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먹고 싶거든요. 충동이죠. 먹고 싶다는 짐승, 동물적인 본성,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프로이트가 이야기했는데 동물적인 욕구, 욕심이 나온 거예요. 그게 십계명에서 탐내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 불교에서 제일 큰 문제는 탐심을 어떻게 없애느냐? 그것 한다고 머리 깎고 자기를 비우고 온갖 아이디어를 다 끄집어내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중이 머리 깎는 그게 탐심이잖아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것과 똑같은 겁니다. 뭔가 구별되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거예요. 신부가 로만칼라라고 해서 유니폼처럼 입잖아요. 왜 그런 짓합니까? 수녀가 머리에 수건 쓰잖아요. 이슬람 여인들 머리에 쓰는 것 욕하면서 수녀가 쓰는 것은 왜 욕 안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대통령 되면 수녀고 이슬람이고 뭐고 간에 머리에 쓰는 것 다 없애버릴 거야. 지 종교를 왜 길거리에서 티를 냅니까. 구세군, 원불교도 마찬가지고.

천주교 성당에서 미사 드릴 때 보세요. 만화에 나오는 만화캐릭터 같아. 어린아이들 유치원 학예회도 아니고 뾰족한 모자 쓰고 지팡이 집고. 목가적인가, 반지의 제왕인가? 왜 그런 짓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자유분방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술도 하고 담배피우고. 담배는 왜 피워요? 발암물질이나 내고. 자유분방하면 뭐합니까? 미사 드릴 때 만화캐릭터처럼 놀고 있는데요.

그게 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그게 탐심이에요. 천주교 잘해 보겠다는 탐심, 우리 교회 부흥하겠다는 탐심 아닙니까. 선교사 많이 보내겠다는 탐심. 선교단체들, 교단. 인간이 뭘 조직하든지 회사를 차리든지 탐심을 없앨 수가 없어요. 성도가 뭐냐 하면, 탐심이 있다가 성도입니다. 어떤 짓을 해도 탐심이라는 것, 탐심을 내지 말라고 철야하는 그것이 탐심인 것을 성도이기 때문에 알아요. 그걸 고백한다고요.

나이 육십 넘어서 머리 희어져 보세요. 갑자기 없는 탐심이 생긴다니까요. 갑자기 머리를 염색하고 싶은 생각 들어요. 제가 며칠 전에 염색했거든요. 목사님, 왜 탐심을 부립니까? 탐심이 있음을 티내기 위해서 염색했습니다, 왜? 염색을 해야 나는 이런 탐심을 갖고 있는 게 티가 나지 않습니까? 말을 잘 들어야 돼요. 머리 나쁜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족발을 먹고 싶다. 먹으란 말이죠. 그걸 왜 참아요. 무슨 의인 된다고. 지연 되는 것이 참는 게 아닙니다. 괜히 족발 먹고 싶은 걸 참고 집에 가서 부인한테 화내는 것, 이게 뭐예요? 욕망의 변형이에요. 당신 오늘 안 좋은 일 있어? 지가 자기 자신에 불만이 있어서 그 불만을 남한테 터뜨리면서도 주여, 참았나이다. 잘했다, 그래. 속건제 안 드리고. 참는 걸로 속건제 대신할까요? 참지 말고 속건제 드리세요. 요즘 말로 참지 말고 십자가 바라보세요. 죄인인 것을 알려주시는 사랑에 대한 감사, 그 외에 다른 율법의 완성은 없습니다. 오직 감사하는 것은 내가 죄인인 것 그뿐이에요.

그렇게 해서 갈취를 할 때 탐심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속건제 항목이 몇 가지 더 있어요. 제가 간략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탐심을 갖는다는 말은 중간에 어떤 경로가 날아가 버렸어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어린양의 죽음으로 이스라엘 되게 했다면 이웃 형제를 볼 때 반드시 어린양의 죽음으로 다가가야 되는데 경로가 바로 가버리면 저 사람은 나를 위해서 존재한 게 돼버려요. 내가 살기 위해서 저 사람이 죽을 수 있다면 제발 죽어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맘 편하기 위해서.

이 사람이 우병우, 김기춘 이런 사람들 아닙니까. 저 인간은 재판도 없이 죽어줬으면 좋겠다. 하도 나라가 시끄럽고 경제도 어려운데. 항상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앞에 죽어줬으면 좋겠다는 사람을 심심찮게 등장시킵니다. 주님은, 너는 잘나서 오래 사느냐? 네가 못났다고 죽어줬으면 좋겠다는 인간을 보고 있느냐고 이야기해요. 특히 집안끼리, 형제간끼리, 우리 형은 죽었으면 좋겠다. 어디 귀신 없나. 저 인간 안 잡아가나. 술 처먹는 아버지. 살만큼 살았으면 알아서 죽지. 도박 빚을 자식한테 갚으라 하나. 자는 잠에 죽었으면 좋겠다는 이런 생각, 그게 전부 속건제에 해당되는 겁니다. 계명에 위배되는 것은 속건제를 드리게 돼있습니다.

속건제를 드린다는 말은 뭡니까?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니가 좀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을 바꾸는 거예요. 그래, 내가 죽을게. 주여, 저 인간에게 죽어달라고 한 저를 죽여주옵소서. 이게 속건제에요.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마음으로 지켰겠습니까? 안 지켰어요. 속건제 드리고 난 뒤에 헤헤거렸어요. “주여, 어제 그런 죄 있지만 주께서 준비된 방법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속건제로 염소 한 마리 드렸습니다. 이제 어제 지은 죄 약속대로 없는 겁니다.” 오늘은 착한 사람, 이렇게 살았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그리고 더욱 더 율법이 추가적으로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법이 주어지면 법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을 때는 이 법과 이 법 사이에 마치 법이 없는 지역 같은 곳을 찾아가요. 전형적인 사기꾼이 그렇지 않습니까. 법을 아는 판사, 변호사, 검사들이 법은 위배되지 않으면서 이익은 챙기는 노하우를 갖는 이유가 법을 알기 때문에 그래요.

태국에 가면 대나무 춤이 있답니다. 발을 디딜 때는 사다리 같은 대나무에 안 다치도록 하잖아요. 검사, 판사, 변호사들이에요. 법을 아무리 섞어도 절대로 저촉되지 않는 방법, 노하우를 아는 거예요. 그리고 행정기관에 있는 고급공무원들은 어디가 개발된다는 법을 알거든요. 조례, 규례, 법을 먼저 알게 되면 돈 많은 투기꾼들에게 누설해서 이번에 땅값 오르면 갈라 먹기로. 그런 식으로 부정부패할 경우가 많아요.

그런 공무원들을 얼마나 욕합니까? 그런데 욕할 수 없어요. 본인이 아직 그런 자리에 못 앉았다는 어떤 서러움 같은 겁니다. 남이 하면 욕하지만 자기 친척이나 자기 지인이 하게 되면 자기도 넣어달라고 꼭 끼어들게 돼있어요. 정당한 것처럼 보이는 그 요소가 율법을 맞이하고 있는 인간이 그런 식으로 자기 정체를 내보이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속건제는 점점 더 속건제 범위가 넓어집니다.

민수기 6장 12절,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릴 날을 새로 정하고 일 년 된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로 드릴지니라” 민수기 6장에 특이한 게 있어요. 보통 제물은 양이나 소나 염소가 들어가잖아요. 이건 사람이 들어갑니다. 사람이 제물 되려면 세 가지 표징이 있어야 되는데 포도주에 손대지 말고, 죽은 사람 근처에 가지 말고, 세 번째가 머리카락을 잘라서는 안 돼요. 머리카락은 바친 날의 시간표에요.

그만큼 나라가 개판인 거예요. 엉망인 거예요. 민수기는 장차 이스라엘을 예언하니까. 지금 말씀 들을 때는 예예 하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이방나라가 살던 땅이기 때문에 개판입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축복 주려는 대비책이 나실인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 행세를 보면 다 밟아야 되지만 너희들 중에 나실인이 있어서 그중에 하나라도 말씀대로 살면 나실인 보고 내가 너희에게 저주 안 한다는 조건을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것이 민수기 6장의 나실인이에요. 그 나실인으로 온 사람이 있었으니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이었습니다. 삼손 죽을 때 눈 뺐기고 했어요. 삼손은 포도주 안 먹었지요. 머리카락 자랐잖아요.

삼손의 힘은 머리카락에서 나왔어요. 태어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예정되어 임신하지 못한 여인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데 삼손의 마지막 모습은 장렬한 죽음이었어요. 기둥 사이에 묶여서 눈은 봉사된 채 잡아당기니까 삼손이 살아 있을 때 죽인 자보다 죽을 때 죽인 자가 더 많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자 노릇하고 잠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해방시킨 거예요. 그러나 본인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지요. 그 모습이 장차올 예수님의 비참한 모습을 앞당겨 보여준 겁니다. 그 시대에. 그게 속건제에요.

속건제는 그 시대의 죄는 그 시대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고 그 용서가 후대까지 잉여로 전달되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속건제에 제일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것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사야 53장. 이사야 53장하면 벌써 저는 마음을 두근두근 거립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 대목 아닙니까.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이 일을 제사로 하면 무슨 제사냐고 묻는 거예요. 그게 바로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죄를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레위기에서 죄는 속죄제든 속건제든 일단 자기 죄를 알아야 돼요. 알고 난 뒤에 회개하고 잘못됐다고 갖고 오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회개했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저 회개했습니다. 가 있으라니까. 회개했다고 반성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죄는 그 죄뿐 아니고 다른 죄가 있기 때문에 미처 모를 뿐이지 내일 되면 알아야 될 또 다른 죄가 발굴돼요. 꼭 고고학 같아. 파내면 또 나와요. 속건 제물로 누가 대신 들어와 버립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가요.

이걸 제가 뉴저지 아카데미 제일 마지막 강의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을 설교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친절한지 보세요. 예수님을 채찍에 맞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 같아서 이쪽을 안 봐요. 자기 관심사, 취미생활, 골프 치고, 게이트볼 하고, 놀러 가고 전부 딴 짓하고 있어요. 주께서 얼마나 친절한지 채찍에 맞아 해결된 그것을 찾아오셨어요. 세상에 이런 친절이 어디 있습니까? 찾아와서 우리한테 안겨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중심에 끌려가게 돼있어요. 이사야 53장 속건 제물 안으로, 십자가 안으로 끌러가는 방식이 장차오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실 일의 전부입니다.

십자가 지고 끝이 아니에요. 그건 침례교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께서 십자가 졌기 때문에 이제 믿는 것은 당신의 의지로 믿으라는 거예요. 당신의 의지로 믿는 것이 탐욕이 개재돼있는데 그게 순수한 의지겠습니까? 우리는 양 같아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몰라요. 성령이 십자가 앞장세워서 오니까 보혜사가 오니까 이미 우리는 용서된 자란 사실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돌아서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이미 용서받은 상태기 때문에 그 다음에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그 용서가 더욱 더 용서됨의 풍성함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로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새로운 죄를 더욱 더 알게 되는 거예요. 전에는 선교회비 내면 죄 아닌 줄 알고, 전에는 복음 설교하면 죄 아닌 줄 알았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복음 전하는 것도 죄고, 기도하는 것도 죄고, 예배 참석하는 것도 죄고, 헌금하는 것도 죄고, 뭘 해도 남을 위해서 목숨 바치는 것도 죄란 사실을 알 때 우리 인생에 스트레스가 있을 이유가 없지요. 이미 용서받은 가벼운 존재로 살아갈 때 우리가 할 일은 죄 짓는 일만 남아있지 않으니 세상에 이런 편한 인생이 어디 있어요.

1월 지났으니까 달력 뜯어내잖아요. 이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왜? 다 이것 해서 먹고 살아야지. 이렇게 하면 자식들이 나한테 얼마나 감동 받겠나. 전부 내 것과 내 속의 욕심에서 나온 기대성, 이걸 죽을 때까지 어떻게 지워집니까? 절대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관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남이 모르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엉뚱한 신을 믿고 있지 않았습니까? 정성 드리면 복 주는 그런 신이 아니라 이미 구원시켜놓고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어야 되는지 왜 하나님이 내 대신 죽어야 되는 사실을 깨달아서 죄인을 용서해주신 십자가 희생만 높이고 감사하는 그런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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