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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7 23:50:44 조회 : 969         
보편적단독자 17040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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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112) 17-04-11 15:48 
20170407a 울산강의-레위기 8장 : 보편적 단독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8장을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과 그 의복과 관유와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수양 둘과 무교병 한 광주리를 이끌고 온 회중을 회막 문에 모으라”

출애굽기, 레위기 나오는데 출애굽기는 지시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레위기는 지시한 사항을 실제로 구체화 적용시키는 대목입니다. 이론과 실천이라고 볼 수 있지요. 명령이 실제로 모세를 통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행될 때 이들이 뭘 하고 있느냐는 거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간에 하나님 지시에 의해서 인간과 하나님이 통할 수 있는 장치가 있다. 한 마디로 시스템이죠. 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게 신약에 보면 여러분이 다 아시는 중보자가 되죠. 항상 중보자 이야기하면서 제가 늘 강조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이 장치를 인간들이 요청했느냐는 겁니다. 요청하지 않았지요. 예를 들어서 홈쇼핑에 물건을 주문하지 않았는데 집에 택배가 왔을 때 기분 좋은 겁니까, 어떤 위기를 느끼는 거예요? 이건 뭐지? 내가 주문하지 안 했는데 물건이 우리 집에 도달했느냐? 내가 모르는 더 넓은 범위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지금 레위기 8장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대제사장 위임식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회중을 다 모아야 돼요. 3절에 모든 백성을 회막 문, 성막 앞에 다 모으는데 이러한 절차를 이스라엘이 요청한 적이 있느냐는 겁니다.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의 차이점은 신에 대해서 자신들의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수 있는 백성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방식을 만들어낸다면 하나님은 다정한 하나님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을 요모조모로 조작할 수도 있고 요리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요청한 적 없는데 하나님이 지시로써 이런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말은 이건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위기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 바깥에서 인간과 의논도 없이,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인간의 요청도 듣지도 않고, 인간과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진행시키니까 이건 일종에 심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죠.

흔히 옛날 말에 있잖아요.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자식 나무라라는 말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요. 부모가 애가 미울 때 자기 미운 감정을 자제한다고 네가 좋아하는 케이크 사 왔다. 그럼 애는 그 취지도 모르고, “참 엄마는 사랑도 많아. 내가 애를 먹이는 데도 내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오나니. 먹을게요.” 그럼 엄마가, “더 먹어.” “배부른 데요.” “더 먹으란 말이야.”

그건 자식이 요청한 적 없어요. 요청한 적이 없는데 케이크를 사줬다는 말은 이건 징벌입니다. 지금 벌을 내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죄 지었는데 벌이 있을 거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선 벌을 먼저 준비해서 거기에 넣게 되면 애는 질질 울면서 케이크에 범벅이 돼가면서 “내가 뭘 잘못했는데?” 그때부터 우리 잘못 안 들켰습니다. 일찍 시작한 것 전혀 들키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벌이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에 내가 요청하지 않은 새로운 환경이 부여될 때 죄를 알아야 돼요. 도대체 죄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 벌에 합당한 어떤 죄를 내가 품고 있는지 연결시킬 책무가 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중보자라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예수님은 그 죽음의 의미를 확대시켰어요. 이 죽음은 네 죄 때문에 죽는다고 그 의미를 확대시켰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에, 아버지께 받은 징벌적 사건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때부터 우리는 내 대신 누가 죽어야 될 정도의 죄가 이미 내 안에서 작용하기에 나는 십자가에 죽는 벌과 그리고 나의 모든 행동을 연결시키는 책임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걸 어렵게 해볼까요? 없었던 것이 새롭게 나타남은 없었던 것의 나타남에 의해서 물려버린 그 대상은 없었던 것이 사라짐과 동반해서 같이 사라져야 된다는 원칙입니다. 흉측한 예를 들면, 집에서 티비를 보고 있는데 멕시코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길이 20미터 되는 뱀이 나타났다. 집에서 그 뱀을 기다렸습니까? 그런 적 없거든요. 그냥 집에서 드라마 보고 있는데 뱀이 갑자기 나타났다. 내가 요청하지 않은 거죠.

요청하지 않은 뱀이 나를 물었다면, 그럼 나는 그 뱀에 삼켜서 뱀이 그 집에 살 건 아니고 떠날 거잖아요. 잠시 없던 뱀이 나타났다. 그 뱀은 그 집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나중에 보니 드라마 보던 주인 양반도 뱀 안에 들어가서 뱀과 같이 사라진다. 이걸 두 자로 ‘복음’이라 하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이 시스템을 우리가 요청한 적 없다니까요.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느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적이 없어요. 그런데 뱀과 같이 사라졌는데 뱀 옆구리가 세 글자가 새겨있다고 봅시다. 어떤 글자냐 하면, ‘새 언약’이라고 나타내면서 그 뱀은 슬금슬금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면 그 뱀이 도달한 곳을 새 언약의 나라라고 합니다. 이걸 두 자로 줄이면,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천국은 언약이 완성돼야 종료되고 완료되어야 구성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리고 옛 언약 중에 하나가 오늘 하는 레위기 8, 9장입니다.

레위기 8장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데 그 율법을 모세언약이라고 해요. 모세언약은 구성요소가 여러 가지에요. 시내 산에서 모세가 받은 걸 모세언약이라 합니다. 점점 이야기가 어렵게 돼가는 데, 오늘 본문에 8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과 그 의복과 관유와 속죄제의 수송아지와 수양 둘과” 이렇게 하라 했단 말이죠. 이렇게 하라는 이유가 5절에 보면 나와요.

“모세가 회중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행하라고 명하신 것이 이러하니라 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을 데려다가 물로 그들을 씻기고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더하고 에봇의 기묘하게 짠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메고 흉패를 붙이고 흉패에 우림과 둠밈을 넣고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관 위 전면에 금패를 붙이니 곧 거룩한 관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

일곱 가지 요소가 여기에 장착됩니다. 어벤저스인가? 무기로 완전히 장착하는 거예요. 인간은 있는데 목욕해서 발가벗었는데 인간은 육체밖에 없어요. 그런데 인간이 요청하지 않은, 제가 여러 번 강조합니다. 아론과 아들들을 발가벗겨 놓고 인간이 요청하지 않은, 인간 시장에서 팔지 않는 물건, 인간 사이에 교환체제에서 나타나지 않는 상품, 인간 공장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그 무엇이 아론과 그 아들들을 발가벗고 놓고 일곱 가지를 덕지덕지 붙이는 겁니다.

그러면 알맹이는 인간의 육체지만 바깥에 있는 모든 모양새, 의복은 인간 나라에 있던 복장이 아니에요. 인간 나라에 없는 복장이에요. 그럼 우리는 묻지요. “누구야, 너? 정체가 뭐냐?” 그 정체가 배역이에요. 배역은 연극할 때 맡은 역할을 말합니다. 아론과 아들들은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 약간 더 붙이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만들기, 더 붙이면,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 백성,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에 나선 쪽은 인간 쪽이 아니고 하나님 쪽이에요. 그래서 복음의 시작은 인간이 요청이 아니고 요구할 사항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님의 자의적인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주어진 겁니다. 여러분이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신다면 다음 질문에 답변을 해주셔야 해요. 복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정답은 두 개입니다. 있거나, 없거나 둘 다 정답이 돼요.

복음이 없다고 한다면 이건 인간 중심의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아론과 아들들을 발가벗겨놓고 일곱 가지 동원된 의복들, 치장들 그 모든 것이 주어지면 그렇게 생겨난 인간 존재는 인간 세계 어디에도 없던 인간이 나왔단 말이죠. 그렇다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이라든지 제사장 제도는 인간 나라에 없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인간 쪽에서 볼 때 복음이 없다는 게 정답입니다.

지금도 울산이고 대구고 복음 없잖아요. 교회도 복음 없잖아요. 교회란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다 모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과 정성을 끌어 모으자, 이게 교회지 인간세계에서 할 수 없는 것을 모시자, 이런 교회라면 교인들이 그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목사님,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고 시키세요. 시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데로 역량대로 하겠습니다. 이게 수월하지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하면 미친 것도 아니고, 없는 걸 어떻게 믿어.

오늘 아침에 메일을 열어보니까 어떤 분이 비밀 글로 질문을 했어요. 비밀 글을 공개하면 됩니까? 하지만 비밀 글로 하다가 잘 안 들어가니까 공개 글로 나타나서 제가 지웠는데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 믿는데 마리아 믿어도 됩니까?” 질문이 되게 비밀스럽지요. 그래서 답변했지요. 마리아 믿어도 되지요. 예수 믿고 마리아 믿고, 제가 답변하기를 이라크도 믿고 북한도 믿으세요. 트럼프도 믿고, 믿어도 돼요. 왜냐하면 믿음을 내가 결심했다는 것, 사람이 결심할 때는 내가 믿을만해서 믿고자 결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믿는다는 것은 없는 게 아니고 내가 예상한 것, 상상한 것, 기대한 것, 이미 있는 거란 말이죠. 있는 거니까 예수도 믿고 마리아도 믿고 뭘 믿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믿음이란 것은 없는 건데 믿어지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거예요. 에베소서 2장 8절. 내가 원인이 되어서 결심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생기는 것이 진짜 믿음이기 때문에 그 선물이 오게 되면 그전에 내가 괜찮다고 여기고 믿는 것, 심지어 그렇게 해서 내가 예수 믿는 것조차 죄가 돼버려요.

그래서 올려놓으니까 댓글이 한 개 달렸지요. 그 댓글이 내가 답변한 거니까. 오후 한 3시에 보니까 답변이 두 개 됐어요. 그 말은 그분이 제 답변을 읽고 다시 보내왔다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ㅋㅋ”

정답이 뭐냐 하면, 복음은 없는 겁니다.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게 아니에요. 일방적인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따라서 그건 우리에 대한 위기고 심판이에요. 네가 아는 범위 내에서 너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으로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일체 하나님의 구원과는 무관 것이고 그냥 네가 몸부림치는 것밖에 안 된다, 라는 내용이 대제사장 시스템 안에 그 의미가 포함돼 있단 말이죠.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은 복음은 없는 겁니다.

그럼 왜 복음이 있다는 것이 왜 정답이 되느냐? 인간 쪽에선 복음이 없다고 봤는데 하나님 쪽에선 복음이 있어요. 하나님 쪽에서 원해서 줬으니까. 하나님 쪽에서 복음이 있으면 우리가 없어요. 우리가 있어도 없는 존재가 돼요. 복음을 집어넣으면 복음만 살려내요. 지남철이 없을 때는 쇳조각이 흩어져있어요. 이걸 균일성이라 합니다. 천문학에서 굉장히 어려운 용어에요. 균일성은 무작위로 흩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상식과는 다르죠. 천문학자들은 그렇게 봐요. 무작위로 흩어져있는데 균일하게 흩어져있다. 동일한 시간과 공간 요소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지점에서.

울산 시내 보세요. 각자 자기 인생 살잖아요. 위에서 보면 흩어져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지남철, 위에서 복음을 줬는데 복음에 달라붙었다. 그러면 균일성이 깨져버려요. 어떻게 달라지느냐? 지남철에 달라붙은 쇳조각과 그렇지 못한 쇳조각으로 구분됩니다. 그 쇳조각을 구약에선 화목제물이죠. 신약에 와도 마찬가지에요. 예수 그리스도와 화목하라. 그렇게 않으면 하나님과 원수가 돼요. 이건 협박, 공갈 이상입니다.

이렇게 날카롭게 대립이 되는 이런 상황을 인간이 기대하거나 요청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공부하면서 생각해보니 이렇게 사단 난 것이, 문제된 게 예수님이 다녀갔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안 다녀갔으면 세상 아무 문제없어요. 각자 균일하게 자기 인생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에요.

방금 이야기가 사도행전 17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경우에 하나님께서 이방민족에 대해서 어떤 조치나 어떠한 책망이나 비난도 하지 않는다. 그냥 방치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분으로 이 땅에 내려 보냄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원한 형벌에 들어간다고 돼있어요.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전도하면서 이런 대범한 공갈, 진짜 터무니없는 공갈협박을 외쳤습니다. 제3자 입장에서 누가 이 사회를 소요케, 혼란케 하는 겁니까? 점잖은 보통 사람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죠. 방금 제가 일반 사람을 점잖은 사람이라 했지요. 점잖은 사람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이렇습니다. 관성으로 사는 자에요.

뇌에 세 종류가 있는데 오랜 된 뇌가 있고 중간 뇌와 새로운 뇌가 있어요. 오래 된 뇌는 행동을 관장하고, 중간 뇌는 정서를 관장하고 새로운 뇌는 창의성과 이성을 관장해요. 현대 뇌 과학에서 이렇게 하는 이유는, 치매 걸린 환자가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은 어디서 나오는가? 뭔가 따져서 나오는 게 아니고 젊을 때부터 해왔던 행동이 그냥 짐승의 충동처럼 나와요. 이게 제일 오래 된 뇌에요.

이것이 계속 눌리고 쌓이고 강렬하고, 새로운 것은 치매 걸리면 다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행동할 때 어떻게 행동합니까? 본능적으로 나오겠죠. 그걸 저는 관행, 관습이라 하는 거예요. 인간은 제가 아까 평범한 사람이라 했지요. 평범한 사람은 살던 대로 사는 거예요. 하던 대로 했고. 관행, 관습은 상식이 돼요. 그럼 상식선에서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는 성도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 이야기하지 맙시다. 성도가 뭘 알아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해야지 지옥 갈 사람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고 하는데 이게 남 이야기하는 걸로 여러분 느껴지십니까? 어떤 시에 이런 게 있어요. 노인들은 혁명을 싫어한다. 그걸 과학적으로 따지면 이거에요. 변화를 싫어해요. 변화를 무서워해요. 그걸 보수적이라 합니다. 그 보수들이 모인 걸 태극기집회라 해요. 그냥 하던 대로 살자. 별 것 없다. 혁명을 싫어한다니까요. 세대 차가 나잖아요.

교회에서 권사들, 장로들 찬송 불러도 치매 걸리면 나훈아, 남진 노래 나와요. 위에 있는 찬송가는 이건 정서적인 문제인데 치매가 이것까지 다 날려버렸어요.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야지, 양심껏 살아야지. 그것 다 날아갔어요. 역시 남는 것은 동물적 본성만 남는데 그 동물적 본성이 나훈아와 가까이 연결되는 겁니다. 가락이. <내 주를 가까이>보다 <안동역에서>가 더 가깝다니까요.

사도 바울의 말이 이건 믿으란 이야기가 아니에요. 믿지 못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마지막에 이게 붙어있어요. “너희가 듣기는 들었는데 너희들 못 믿을 이야기지? 그런 줄 알고 전했어. 보기는 보아도, 너희들 날 봤지? 아무리 봐도 사도처럼 안 보이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어.”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손수 이루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기가 내려준 언약을 손수 이루신 하나님을 여호와라 해요. 이게 모세 때 나타납니다. 모세 이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던져주고 모세 때 던져준 언약을 친히 이루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모세언약이란 자체는 없는 거예요. 여전히 꾸준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만 계속 가는 겁니다.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선 이렇게 돼있어요. 모세언약, 다른 말로 율법이거든요. 율법은 핵심요소가 아니다. 율법으로 구원받는 핵심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나기 위해서 잠시 들어왔다가 빠지는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언약 주고 430년 후에 율법 준 것은 왔다가 빠짐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주목하지 말고 율법조차도 다가가는 너희들이 진짜 쥐어야 될 그걸 보란 말이죠. 그게 뭐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걸 갈라디아서 3장에서 복음 설명하면서 해요.

갈라디아서 3장에서 그 이야기하기 전에 1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해놓고 10절에 보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지요. 다시 말하면 나는 목회하려고 온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목회해서 구원받는 그런 방법 없어요. 그리고 2장 끝에 보면 율법으로 의로울 사람은 없다. 율법으로 만약에 의롭게 된다면 십자가를 주께서 지시지 않았다. 십자가를 예수님이 지신 것을 헛되게 하려면 율법이 구원된다고 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그러면 사람들은 율법을 행하지 않고 십자가를 믿으려면 믿을 당사자가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나오겠지요. 율법을 행하는 당사자나 십자가를 믿을 당사자나 어차피 내가 있어야 되는 것은 기본 원칙이 아니냐고 하겠지요. 거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언약을 주신 분이 언약을 성공적으로 회수한다는 법칙이 있지요. 그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집어넣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할 걸 찾지 말고 십자가를 헤쳐서 죽은 나를 끄집어내란 말이죠.

내가 둘이 된 거예요. 주님이 십자가 지실 때 그 안에 담겨있는 내가 있고,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그러한 노림수를 가진 가짜 나, 잘못된 나,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고 기대하는 그 나, 그 두 개의 나 중에서 내가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율법으로 구원받겠다는 것과 동일한 노선이라는 거예요.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나, 예수 믿어야 구원된다는 그 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나 여전히 초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나는 살았고 더 살아야 되겠다는 데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구원받는 나는, 나한테 작업을 거는 게 아니고 십자가 안에 실려서 택배로 선물로 그 안에 포장돼있다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헤치느냐? 포장지는 성령이 와서 하나둘 벗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그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럴 때 나는 뭡니까? 배역, 무대에서 역할을 하는 겁니다. 어떤 역할? 죄인의 역할. 어렵지만 여러분이 이 논리를 견뎌야 돼요.

제가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뒤에 오신 분도 계시고 이쯤해서 다시 해야 돼. 지나간 건 다 잊어버리니까. 인간과 하나님이 그냥 만나지 않고 여기에 장치를 만들었어요. 이 장치는 우리가 요청한 게 아니고 하나님께 만들었습니다. 이 장치가 신약에 오면 중보자라 했지요. 그런데 중보자가 왜 필요하냐 이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데.

레위기 8장에서 사람을 발가벗겨놓고 일곱 가지 옷을 입히는 거예요. 그럴 때 그 인간이 우리가 예상한 인간이냐, 아니면 낯선 인간이냐? 당연히 낯선 인간이죠. 전에 알던 아론이 아니죠. 본인이 발가벗었는데 옷 입었다고 하지 않고 나는 이러한 옷으로 나의 배역을 표현하는 겁니다. 걸쳐 입은 옷이 내 존재보다 우선하는 거예요. 내가 법학박사인지, 법대 나와서 판사, 검사냐, 의사냐 그건 인간들이 고시공부해서 따낼 수 있는 거예요. 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 두 시간했다. 십일조 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계산만 하면 돼요. 십분의 일 계산하면 되니까.

그게 아니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덧입혀질 때 이건 하나님이 주신 배역이 돼요. 그걸 흔히 말해 은사라 해요. 선물이 된다고. 은사는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내가 이런 배역을 지금껏 원한 적이 없다는 것을 토해 놓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작전은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없었는데 나타났다가 아까 뱀 이야기처럼 우리를 가지고 사라지지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있다, 없다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해요. 어차피 없어질 것 나타나기는 왜 나타났느냐고 하면 안 되고, 없다가 나타났는데 나타난 것이 계속 있든지, 그런데 있는 것도 아니고 사라져요.

예수님이 오셨잖아요. 계속 살면 되는데 십자가 지시고 사라졌잖아요. 그래서 제자들은 오셨다, 사라졌네. 어디 갔지? 그걸 옆에 있던 천사가 나무래요. 보기는 뭘 쳐다 봐? 주께서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어디 있느냐가 아니고 예수님이 남기고 간 그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 과정이 한 자로 이게 죄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자신의 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를 덧입혀서 십자가로 데려가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셨어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제사장들이 입는 복장은 결국 인간의 죄를 전제로 해서 일곱 가지로 입는 거예요. 이것도 모르고 제사장 보면서 저 스타일 괜찮다. 보석이 주렁주렁하네. 나도 만들어볼까? 얼마면 저렇게 입을 수 있겠어? 이렇게 되면 안 돼요. 이 복장은 인간의 죄를 들추기 위한 하나님의 배역을 맡은 자가 입을 옷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라지기 때문에. 주께선 사라지거든요.

레위기 8장 22절 봅시다. “또 다른 수양 곧 위임식의 수양을 드릴새” 지금 위임식하고 있는데 네 종류의 제사가 들어갑니다. 속건제 빼놓다 다 들어가요. 처음에 속죄제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소제 드리고 마지막으로 화목제 드리고 위임식 끝납니다. 23절에 보면, “모세가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바르고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 오른 귓부리와 오른손 엄지가락과 오른발 엄지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또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

피라는 것은 생명인데 생명을 뿌린다는 말은, 인간을 즙을 짜는 거예요. 좀 과격한 비유라도 이게 이해하기 쉬워요. 즙을 짜면 이빨이 몇 개 있는지 임플란트 했는지 키가 얼만지 이런 것은 다 형체가 뭉개져요. 속에 있는 핏줄이 터져서 피가 나오겠지요. 피가 나올 때까지 제물을 잡는 거예요. 주께서는 형체가 어떤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피만 건지는 거예요.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자로 규정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도 사실은 안에 피를 출렁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액체란 원래 형태가 중요하지 않고 액체의 종류가 중요한 것처럼 피를 담는 용기 또는 그릇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인간은. 그런데 그 피가 뿌려지는 거예요. 제단에서. 제단에 뿌려진다는 것은, 그 제단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만들어놓은 공장 시스템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가 들어와서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면 그 죄는 사함이 되고 거룩이 되고 의로움이 되는 거예요. 일단 원료로 피가 들어가야 돼요. 죄가 들어가야 된다고요. 공식으로 하면, ‘피=죄’가 되는 겁니다.

죄인을 짜서 죄를 끄집어내고 그 죄를 피라는 양식으로 전환시켜서 이 피를 하나님의 제단, 다시 말해서 저주의 심판대에 발라 버립니다. 너희는 나한테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자다. 따라서 저주받거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것으로 역할은 끝났어요. 하나님이 누군지 알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는 그 선을 넘어가선 안 돼요. 죄 아는 걸 대가로 구원을 요구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꼼수를 쓰면 안 돼요. 회개할 테니까 구원해달라는 소리하면 안 돼요. 그건 아직도 꼼수 쓰고 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우리는 이미 죽고 그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나는 뭐냐 하면, 새로운 피가 들어오는 그릇이 될 뿐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우리 대신 피 들어가고 그 피에 안수를 했기 때문에 양의 피거든요. 양의 피가 우리 대신 저주를 받고 저주받은 양의 피를 몽땅 태우는 향기를 하나님께서 흡족하게 받으시면 양은 자기의 역할을 다한 겁니다. 그 결과가 뭐냐? 죄 지었는데 제사 지낸 이후에 각자 자기 집에 돌아가서 멀쩡하게 잘 살고 있어요. 왜 잘 삽니까? 하나님이 함께 있음에도 멀쩡하게 산다는 말은, 너와 나 사이에 죄가 제사로 말미암아 처리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막 사시라 이 말입니다. 그래야 막 살아야 되는 것에 대해서 거부를 느끼는 사람, 불신자로 드러날 것이고 막 살란 소리 안 하면 불신자가 안 드러나요. 불신자 이면서도 신자인 척해선 안 되겠어요. 그래서 분개를 유발해요. 성경에 수천 군데에서 바르게 살아라, 형상을 본받으라, 네가 빛의 자녀처럼 살아라, 서로 용서하며 살아라, 이렇게 있는데 네가 뭔데 건방지게 막 살라고 하느냐고 분개를 일으키죠.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제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하나님 말씀을 보는 순간 우리는 막 살고 있구나. 전혀 말씀에 부합되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을 제가 옆에서 거드는 것뿐이에요. 꼴좋다, 막 살라고 거들 뿐인데 거기에 동의하고 감사하겠지요. 그런데 신자 아닌 사람은 분개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성경을 더 퍼붓고 .....

제사장이라 보지 말고 이해하기 쉽게 그냥 기계라고 해요. 낯선 기계에요. 로봇이에요. 하나님이 만든 기계입니다. 기계는 인격 같은 걸 보면 안 돼요. 기계는 배역의 기능만 챙기면 되는 겁니다. 대제사장이란 기계가 보여줄 기능이 뭐냐? 대제사장이니까 제사지요. 우리가 여기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제사라는 걸 알 수 있지요.

제사에서 죄인이 하는 역할은 뭐냐? 죄 짓는 거죠. 자기가 죄인으로 죄 짓고 있는 그대로. 이 말은 자기가 알아서 개과천선하려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알아서 자기 행동을 조심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가져와야 돼요. 이게 주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어차피 즙을 짜거든요. 우리 동네에 그런 가게 많아요. 즙 짜드립니다. 우리교회 밑에도 있는데. 어차피 짜봐야 죄밖에 안 나오잖아요.

유월절 어린양을 왜 죽였습니까? 죽여서 피를 바른 이유가 뭡니까?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안방에 앉아있는 인간들이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양을 죽여서 발랐다는 말은 우리가 죽어야 될 것을 양을 대신 바쳤다는 뜻이잖아요. 이 말은, 우리는 양 같아서 우리는 죽어 마땅한 존재에요. 그러면 울산 바닥에 살면서 평소에 하루하루 늘 죽어 마땅하는 것을 느끼면서 살면 되는 겁니다. 참 쉽지요.

아침에 식사하고 설거지 하면서 죽어 마땅합니다, 하는 거예요. 죽어 마땅한 자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죽어 마땅한 우리에게 오뎅 김치볶음을 주시고, 내일은 번데기로 죽어 마땅함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항상 죽어 마땅함으로 살아가는 것, 이게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죠.

복음을 듣는데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요. 복음을 듣고 어떤 사람은 점점 더 분노해요. 복음을 이야기하면 처음에는 기뻐하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분노해요. 이상하죠. 분노할 게 없는데.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감사해요. 분노하는 게 아니고. 그래서 제가 조사해보니까 분노하는 것은, 내가 당신이 말하는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이야. 그런데 복음 받아들이고 난 뒤에 뭘 해야 되느냐? 그 이야기를 해 달라 하는데 안 해주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겁니다.

복음 받아들이는 행함을 했는데 이 행함이 전부가 아니고 뭔가 있을 것 아니냐? 그걸 추가적으로 계속 이야기해줘야 하는 데 그게 안 나오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복음만 알면 자기는 쪼다 되는 거예요. 쪼다 되기 싫은 거예요. 왜? 오래 된 뇌거든요. 관행과 관습은 내가 남한테 멋진 존재라는, 존재증명이라 하는데, 내가 남한테 기죽지 않는 존재로 증명하는 그것이 사는 보람이 된단 말이죠. 그게 관행이에요.

치매 걸린 그런 분이 옆에 안 계시니까 여러분이 실감이 안 나시는 것 같은데 치매 걸린 분에게 뭔가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런 건 안 들어오고 그러면 죽으란 말이냐, 하고 대번에 화를 내요. “그럼 나가 죽을게.” 오래 된 뇌, 관행이고 관습입니다. 사람이 오십 넘어가면 슬슬 나옵니다. 육십 넘어가면 그런 경향이 많이 있고요. 육교 밑에 건너다가 걸리면 젊은 네가 왜 나한테, 이렇게 나옵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밑바닥에 오래 된 관행과 관습밖에 몰라요. 부모가 그렇게 가르쳤고 사회가 그러니까 자기한테 새로운 걸 강요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촌에 목회하는 방법은, “참 훌륭하십니다. 이 교회 세운다고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고 기도 했습니까?” 이걸 매주 집어넣으면 아무 소리 안 하고 월급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 장로님들 본받으셔야 됩니다. 이 예배당 세운다고 집을 전세로 돌리고 나머지 돈을 바쳐서 주의 은혜로 세웠습니다.” 이걸 매주 반복하게 되면 촌에서 자식들 피아노레슨 받을 수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112) 17-04-11 15:48 
20170407b 울산강의-레위기 8장 : 보편적 단독자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이 맡은 배역은 자기 운명과는 상관없어요. 배역의 의미가, 기능이 중요하기 때문에. 잠언에 그런 내용 있잖아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지만 양쪽 다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자기는 가난이란 배역을 안 맡고 싶지만 누군가는 그 배역을 맡아야 된다고요. 그래서 남과 비교하지 말고 중간에 하나님의 장치와 비교해야 돼요. 대제사장이란 장치를 경유해서 다른 사람을 봐야 됩니다.

교회에서 성도란 다른 게 아니고 성도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로 맡은 배역적 안목으로 상대를 대할 때 그것을 형제간의 사랑이라 합니다. 십자가 사랑이라. 당신은 그런 배역을 맡았구나. 나는 이런 역할을 맡았구나. 눈이 코더러 쓸데없는 소리 못하고 손이 발더러 쓸데없는 소리 못한다고 했지요. 고린도전서 12장에. 그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맡은 기능을 해야 되는데 자신의 직업, 환경, 건강상태, 재산과 관계없이 동일한 기능이 나와야 돼요. 그 기능이 대제사장의 복장으로 설명이 됩니다. 모자가 있고 모자에 금칠을 해놨어요. 여기에 여호와의 성결이라고 적혀있어요. 끈으로 묶었는데 색깔이 청색이에요. 그 다음에 여기에 견대가 있는데 여섯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방탄 옷 입듯이 금실 끈을 금 고리에 연결시켰어요. 가슴팍에 보석을 세 줄로 네 개씩 서로 다른 열두 개 보석에 이름을 새깁니다. 출애굽기 28장에 보면 나오는데 나이순대로 보석이 연결돼있어요. 이걸 흉패라 합니다. 에봇 위에 걸치는 거죠. 앞치마 같은. 흉패 안에 우림과 둠밈이라 해서 판결하는 게 들어가요.

에봇은 금색, 청색, 자색, 홍색이라는 네 가지 모시 가는 실로 만들어요. 에봇이 중요한 것은 금방울, 석류방울이라 해서 제사장이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 방울이 부딪쳐 소리가 나면 기능이 진행 중이구나. 만약에 소리가 나지 않으면 까불다가 죽었구나. 얼마나 무서운 데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복장의 다에요. 안에는 속옷 입고, 목욕하고 이걸 입히는 겁니다. 아까 에벤저스라 안 합니까. 하나님의 기능을 보여주는 기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제사장인데 앞에 뭐가 붙어요. 거룩한 대제사장. 대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하면, 어깨에 열두 지파 들어가고 가슴팍에 열두 지파 들어가죠. 이 말은 이 사람 자체가 분명히 한 사람 개인이잖아요. 한 사람인데 그 안에 열두 지파가 포함돼있어요. 이건 개인이라고 말할 수 없고 대표적 개인, 그걸 어려운 말로 보편적 단독자. 보편적인 사람을 자기 안에 품고 가야 될 단독자에요. 단독자란 의미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이게 언약이거든요. 모세언약이라 했잖아요. 예수님은 바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왔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죠. 왜냐하면 언약으로만 구원받기 때문에. 부처가 착하니 소크라테스도 못지않게 희생적이라니 그런 소리하면 안 돼요. 얼마나 착하냐? 사랑이 많으냐? 그 문제가 아닙니다. 언약이 문제, 약속의 문제에요.

이 말은 교인이 얼마나 착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언약의 완성을 이해하면 구원받고, 언약 완성을 모르게 되면 지옥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거룩은 우리 윤리, 도덕적 개념이 아니고 거룩이란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이렇게 주신 제사장 자체가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사장 중심으로 하는 걸 거룩한 언약의 나라에요. 출애굽기 19장 6절을 누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무슨 나라? 제사장 나라죠. 제사장 있으면 거룩이고, 없으면 거룩이 아니에요. 이걸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님의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켜야 되는데 사람들은 신약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니까 전부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착하게 살기, 바르게살기, 봉사하기, 희생하기, 많이 정주기, 남 도와주기, 배려하기, 친절하기, 인간이 할 수 있는 온유하기 등 이런 걸 총동원해서 그것으로 천국 가려고, 그것으로 거룩하다는 걸 때우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중보자, 시스템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지금도 지키겠다는 말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를 믿으면 됩니까, 라고 하는데 십자가를 믿으면 된다는 말 자체가 십자가 믿는다는 율법에 추가적인 율법 하나 얹은 게 되니까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왜? 죄 지은 자와 제사장의 만남을 주선할 때 거기서 언약이 피어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거룩이 증거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거룩한 게 거룩이 아니고 거룩한 분이 이 분이라는 그게 거룩이에요. 그게 언약적 연관성, 언약적 관계라고 하는 겁니다.

성경에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이죠. 이삭언약, 야곱언약이잖아요. 아브라함언약의 경우에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지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잖아요. 이삭은 처음부터 없는 자기 때문에 옛날 이름이 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이삭으로 태어나야 되기 때문에 이삭은 이름이 바뀔 여지가 없어요. 처음부터 존재도 없었는데 약속대로 이름을 이삭으로 지었기 때 이름이 바뀔 필요가 없단 말이죠.

어쨌든 이름은 다 처음부터 아브라함을 준 게 아니고 아브람을 주고 아브라함을 줬다는 말은 아브라함은 언약에 속한 것이고 아브람은 아담의 죄, 육신에 속한 거예요. 따라서 아브람이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아브람이 이 땅에 와서 사라지면서 중간에 기능, 과정에서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중요해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주께서 찾아와서 진짜 우리가 모르는 구원을 우리로 마음껏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배역, 그 기능이 중요하다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거하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그 사람이 전에 하는 말이,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했거든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 언제 죄를 많이 졌어요. 새삼스럽게 죄를 많이 진 게 아니고 독자적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밀다가 중보자 되신 분이 다메섹 가는 길에 예수님이 찾아왔잖아요. 찾아오니까 자기가 배역을 맡은 거예요. 그것을 그리스도가 보낸 사도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은 거예요. 주님을 만난 겁니다. 주님을 만나니까 전에는 내가 잘났다, 내가 얼마나 완벽할 수 있느냐, 얼마나 거룩할 수 있느냐, 하다가 주님은 나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주님은 나를 어떤 식으로 이끌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것인가, 모든 것이 그쪽 차원으로 정리가 돼가는 겁니다. 자기 맡은 배역에 대해서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총각 때 소원이 있었어요. 대구 계명대학 근처에 모퉁이인데 대지는 한 40평쯤 되는 것 같은 이층 벽돌집인데 작아요. 이층부터 아래로 장미꽃으로 뒤범벅 해놨어요. 그 집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집으로 소원을 마감시켰습니다. 내 인생의 소원은 끝났다. 저런 집에 살고 싶다. 20 초반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건 단독적인 나의 소망이에요. 개인적 소망이에요.

그러나 제사장은 뭡니까? 보편적 단독자에요. 그러니까 내가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나를 위한 내가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처럼 된다 했으니까 내가 소망하지 않고 주님이 소망한 소망이 나한테 덮치면 나는 매일같이 주님한테 까이는 겁니다. 그건 네 소원이고 내 소원은 그게 아니야. 그럼 주의 소원은 뭡니까? 안 가르쳐줘. 그냥 살아봐라. 살아보면 내 소원이 뭔지 네가 알리라. 그 소원이 어떤 실적을 올리는 게 아닙니다. 전도 천 명 하는 게 아니에요. 그 소원은 내가 달성할 필요 없이 주께서 완료시킨 것을 덮치고 있음을 그때마다 느끼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도 주께서는 만족스럽게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 소원이 만약에 있다면 다 이루었다는 것을 내가 훼방 놓겠지요. 나만을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게 목적이 이끄는 삶인데, 내가 목적이 따로 있으면 그것이 십자가를 가립니다.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목적을 갖지 마세요, 라고 한 거예요. 인생이 자기 목적을 가지면 그때부터 긴장이 되면서 위기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생각을 언제 합니까? 생각이란 것이 뜻대로 안 될 때만 생각해요. 보통은 관행으로 관습으로 해요. 집에 문을 열 때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간다. 늘 이렇게 하면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도 안 열릴 때 이게 뭐지, 생각하잖아요. 생각한다는 것은 부딪침이에요. 당혹감? 내 관행대로 뭔가 내 뜻대로 안 될 때만 생각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목적, 소원, 그 노선을 날마다 고맙게도 그 뜻대로 안 되게 돼있어요. 우리는 어떤 목적이 있으면 태만하게 있지 않고 악을 써서 그걸 쟁취하려고 애를 씁니다. 얼마나 그걸 갖고 싶었으면 기도까지 하겠습니까. 주-시-옵-소-서! 그런데 고맙게도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생각하게 만들어요. 내가 가는 노선이 다 이루었다는 것과는 안 맞는 노선을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기도를 해야 돼요, 말아야 돼요? 해야지요. 기도를 해야 숨겨진 자기의 욕망과 야망이 기도의 내용 안에 담겨서 다시 확인이 될 수 있잖아요.

성경 마태복음 10장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찾으라 얻을 것이잖아요. 찾으라, 구하라, 두드리라 이게 하나님 말씀이죠. 말씀 자체가 거룩이니까 말씀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는데 교인들은 말씀을 목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가져가요. 꼬불쳐놔요. 다른 미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주신 것, 수단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기대를 하게 됩니다. 이게 주님의 전략에 걸려든 겁니다. 왜냐하면 구하고 찾는 순간 구하게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한 게 아니고 구할 테니까 내 것 주시겠습니까, 라고 해서 줄 때까지 그 간격이 주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채우게 되죠. 별로 감사할 마음이 없어요.

목적이 안 이뤄졌으니까 초조가 일어나는 거예요. 제가 신자고 하나님 살아계시니까 이 정도는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 거죠. 그게 불만과 불평이죠. 불만과 불평은 다 이루심에 대한 감사를 가리는 거예요. 사실은 가림 이전에 다 이뤘음을 보지 않고 자기 목적을 따로 보는 거예요. 목적을 따라 상상했다는 말은, 그 목적은 목적을 덧입은 자아를 재구성하게 돼요. 말은 어렵지만 예를 들면 쉽지요.

아들이 공무원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만약에 합격이 된다면 나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아들의 아빠가 되니까 누가 만나서 “아들 시험 쳤다는 데 어떻게 됐습니까?” “한 번 만에 되네요.” 그게 얼마나 즐거운 일이 되겠어요. 지금은 합격이 안 됐으니까 자기 꼴이 보기 싫은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아들을 둔 나, 그게 나한테 기쁨이 되지, 지금의 나는 거기에 대해서 늘 미진한 겁니다.

그러니까 목적이 있는 한 주님한테 감사란 것은 없는 거예요. 감사가 없으니까 오기만 있는 거예요. 그 오기가 금요 철야로 나타난 거예요. 누가 오기가 센지 누가 악발이인지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불붙이고 커미션 받아 챙기는 게 교회들이에요. 그런데 그런 교회가 왜 그렇게 마음에 드는지.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니까 목적이 있는 것이 일곱 번 엎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리라는 동력이 되기 때문에 살아보리라는 어떤 희망을 주잖아요. 목적이 없으면 살 희망도 없어요. 지금 제가 전도하는 건지 독려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데 .....

그렇게 될 경우에 개인적인 단독자가 된다 말이죠. 마귀가 심어주는 말은 너만 신이가 나도 신이다. 나도 신처럼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신처럼 될 수 있다면, 신처럼 될 수 있는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가 되는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목적으로 이끄는 삶을 유발시킵니다. 왜? 언약이 언약답게 다 이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약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죄를 짓도록 주께서 의도적으로 몰아세웁니다. 실컷 죄 지어봐라. 그 죄가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는 그 본색을 늘 수시로 일어나게 만듭니다. 예수 찾고, 삼위일체 찾고 신 찾으면서 결국은 그건 주님이 좋은 게 아니고 나의 미래가 될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혼자서 흐믓해 하는 거예요.

아들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그걸로 끝나는 겁니까? 앞산에 올라가기 전에는 뒷산의 모습이 안 보여요. 앞산에 올라가게 되면 비로소 그때만 보이는 산이 있어요. 어떤 달성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저렇게 좋은 게 있는 줄도 모르고 순진하게도 9급 공무원 합격하기만 바랐다니 내 꿈도 참 쫀쫀하다, 정말. 세상에 이왕이면 5급까지 보지 9급이 뭐냐. 9급 되니까 승진 경쟁이 생기거든요. 그러니까 엄마가 할 일이 또 생겼어요. 새벽기도 갈 이유가 또 생겼어. 군대도 치맛바람, 회사 승진도 치맛바람, 대학교 교수 학점 주는 것도 엄마가 관여해. 결혼은 물론이고. 군에서 작전 벌이면서 엄마한테 물어보는 게 어디 있어요? 세상에 무슨 군대가, 사친회가 군대까지 관여합니까? 보직까지 관여하고. 그걸 헬리콥터 맘이라 하는데 어딜 가든지 맨날 엄마가 빙빙 도는.

하나님의 거룩이란 대제사장으로 장착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열두 지파의 죄를 짊어지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 근처에는 열두 지파가 필연적으로 연결돼있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는 대신 지는 거예요. 조건이 있어요.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된 모든 사람, 열두 지파 모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39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린다는 거죠.

그럼 목회자가 몇 명입니까, 목자가 누구에요? 그런 말을 말만 아니고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죠. 그럼 다른 목회자는 뭐예요? 다른 목회자가 목회하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목회자가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하게 하신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구원시킨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었음을 증거 하라고 그걸 고백하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목사의 종은 아무도 없고 목사의 교인도 아무도 없음을 증거 하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감독자 역할은 중심에 서지 않고 중심을 보여주는 역할이죠. 중심 주변에 포진해서 나는 중심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감독자를 삼는 거예요. 감독자가 해야 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말고 다른 걸 첨가하는 것은 신자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 감독자는 늘 십자가 피를 곁눈질해야 돼요.

아까 갈라디아서 1장에서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그래놓고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십자가를 기준으로 내세웁니다. 십자가를 기준으로 내세우면서 율법은 잠시 들어갔다가 빠져나온다고 했지요. 기본은 뭡니까? 아브라함언약이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거예요. 누가? 아브람이? 아니 아브라함이.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려면 여기에 이삭이 제물로 들어가야 돼요. 중보자가 있어야 돼요. 주께서는 중보자 없는 인간을 성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보자 시스템은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 본인의 아이디어기 때문에 본인의 아이디어와 결부된 사람만 천국 백성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제사장 복장 자체는 이미 다 이루었음을 내다보고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는 일은 제사장 복장을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지금부터 좀 난해할 거예요. 다시 언급합니다. 예수님 할 일은 제사장 기능을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쉬운 말로 역사화 시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앞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반죽을 홍두깨로 밀면 납작하게 되지요. 그게 반죽의 지평이에요.

언약을 밀어버리면, 언약이 이스라엘한테 있잖아요. 제사도 있고 율법도 있고. 율법으로 주변에 있는 이방민족을 만나는 겁니다. 만나면 율법의 기능과 효과가 이방민족으로 전달되겠지요. 이방민족이 멸망할 수도 있고 이방민족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멸망될 수도 있지요. 어쨌든 기능이 중요하고 그 과정이 중요한 겁니다.

여호사밧 왕 때 엄청난 이방나라가 쳐들어왔을 때 찬송해서 승리했지요(역대하 20장). 여리고 성에선 언약궤 앞장 세웠지요. 이스라엘이 이겼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가운데 누구한테 공로를 돌려야 된다? 언약이 어떤 건데? 모르지요. 부딪쳐봐야 아는 겁니다. 목사님, 전도는 어떻게 합니까? 전도는 어떻게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전도를 시키는 데 불신자와 부딪치게 하는 거예요.

불신자를 어디서 구합니까? 교회가 불신자 아닙니까. 예배당 짓는데 돈 냈잖아요. 낸 그 돈을 잊을 수 있다, 없다? 귀한 돈을 냈는데 잊을 수가 있겠어요? 못 잊지요. 그러면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오는 헌금 조항에 의하면 헌금 자체를 통해서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닫는 거예요. 내가 피아노를 기증했다면,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본인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만약에 목사가 집사님 다른 교회 가세요, 하면 그 집사는 피아노는 갖고 가야지. 피아노를 본인한테 바쳤어요. 이 교회가 하나님 교회가 아니고 자기 교회거든요. 그 교회의 지분을 산 거예요. 장로들이 주식 산 이사들이에요. 그러니까 회사를 잊을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누구 것이냐 하면 자기 회사였어요. 회사로 간주해서 다른 민족에게 언약궤만 들이밀면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민족한테 이스라엘이 포로 잡히고 고난당했지요. 사사기에 반복적으로 나오잖아요. 그럴 때마다 그들이 안 것은 이 이스라엘이 우리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되게 하신 분 건데 지금의 이스라엘이 아니고 앞으로 주님의 이스라엘 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그들은 부딪치면서 알게 된 겁니다.

생각은 언제 한다고 했습니까? 뜻대로 안 될 때. 이 이스라엘의 역사화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반복되는데 이게 언약 때문에 그렇거든요. 오늘날은 새 언약이죠. 새 언약 속에 언약의 반복이 그대로 적용되어서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여기에 달라붙은 열두 지파로 구원된 사람에게 언약이 뭔지 알리기 위해서 전도하기 위해서 옛 언약 가는 길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그럼 이 세상에서 우린 천하에 죄인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럼 전도는 어떻게 하느냐? 죄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과 이미 십자가로 죄인임을 아는 사람과 부딪침을 통해서 십자가만, 새 언약 완성만 다 이뤘음을 증거 될 때 그게 전도가 되는 거예요.

그럼 저쪽에서 십자가 안 믿는 이유가 뭡니까? 본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행한 것이 있고 바친 게 있고 열심히 한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기도했지요, 헌금했지요, 예배당 다 세웠지요, 주일학교 봉사, 성가대 섰지요. 화요일마다 길에 세워서 휴지 주고 커피 주고. 부산 올 때마다 여러 번 피해간다고 애 먹어. 부산 해운대에 무슨 교횐지.

그렇게 어떤 권사나 집사가 봉사하는데 어느 날 교회가, 집사님은 다른 교회 가세요, 할 때 가겠습니까? 십일조를 20년 내보세요. 이걸 복리로 계산해보세요. 십일조를 그렇게 넣었는데 권사 투표 떨어졌다고 다른 교회 가겠어요? 못 가지요. 벽돌 하나하나가 자기의 피 같은 돈 내서 했는데 안 떠나지요. 교회는 기본으로 먹어주는 숫자가 있어요. 왜 집사에서 권사 될 때 목돈 내라고 하느냐? 그래야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목회는 이것 한 방이에요. 목돈 내서 발목 잡기하는 거예요. 돈이 아까워서 못 떠나게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돈 바치고 아들 집사 되게 하는 게 목표에요. 네가 접수해야 된다. 아버지가 지분 20% 갖고 있거든. 최 씨 집안은 15%밖에 안 돼. 부흥사가 돈 내라 할 때 아버지가 제일 많이 냈다. 목사 떠나고 난 뒤에 네가 이 교회 접수해야 돼. 이건 야쿠자도 아니고 투표할 때 어느 당, 어느 노선인지 분명히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기가 밀어주는 목사 설교단에 세워주고요. 재정 힘, 돈 싸움입니다. 제가 이렇게 분명히 이야기해도 그게 분명히 죄의 역사화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은, 인간은 자기가 얼마나 잘난 것을, 멋있다, 나는 구원받아 마땅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마저 동원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제사장이 아까 서 있었잖아요. 제사장을 자빠뜨립니다. 엎어지면 이게 역사의 지평이 돼요. 제사장 엎어지는 이걸 모세율법이라 합니다. 제사장이 걸치고 있는 복장을 역사로 뽑아내는 거예요. 여기에 담긴 의미와 취지는 한 마디로 말을 못해요. 왜? 역사가 증명해주니까. 그 다음에 자기 역사가 오지 않고, 구원받은 열두 지파가 있다는 것은, 열두 제자가 있는 것은 책임지고 제사장이 구원하는 겁니다, 라고 하면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그 당시 백성들에게 저 구원받았네요, 그렇게 돼버리지요.

우리 시대에 제사장 복장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뭘 해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해버리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죄도 모르면서 우리가 이 복장 만들 때 금은 바치고 제사 지내는데 참여했고 위임식 할 때 양과 소를 제공한 행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민족에 없는 제사장을 포용하고 있으니까 어떤 민족이라도 우릴 이길 수 없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라는 오해를 하겠죠. 그게 유대교의 오해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했던 오해에요.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와 함께 있고 제사장이 함께 있는데 우리가 백성이 아니면 어느 민족이 백성이랴.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주고 제사 지내게 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반복해서 깨닫게 함이라. 로마서 3장에서 율법을 준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입을 틀어막고 모든 것을 저주하려 함이라. 로마서 3장 초반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율법은 준 것은 대표해서 죄를 알라고 준 것이지 구원되라고 준 게 아니에요. 율법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죽은 자에게 구원이라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 의가 필요 없어요.

구원은 누구 소관이냐 하면, 제사장이 온전히 다 이뤘을 때 그 제사장만이 알아요. 제사장 복장에 열두 보석이 붙어있지요. 이들을 결코 놓지 않습니다. 따라서 열두 지파로 구원될 사람이 접니까, 하면 손 내리세요. 그럼 열두 지파 구원을 누가 정합니까? 그건 제사장이 정합니다. 왜 예수님이 정하고 다른 사람은 왜 안 됩니까? 다른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의논할 상대가 아니에요. 언약 상대자가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의견이라도 거절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우리’란 게 예수님 안에 우리에요. 성경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가 나오지요. 같은 말로 너희란 말도 나오지요. 너희는 단수형 복수에요. 이 말은 어디서 나왔는가? 단수형 단일에서 나왔지요. 이 개인이 예수님이고, 예수 안에서, 안이란 말은 안이라고 둘러치는 울타리는 누가 만듭니까? 우리가 알아서 만듭니까? 알아서 만들고 주님 초대하면 됩니까? 예배당 크게 지어놓고 빈자리를 채우면 되는 겁니까? 아니지요. 예수님 안은 예수님만이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우리란 거예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우리란 말은 우리를 쳐다보는 우리가 아니고, 그렇게 되면 옛날 이스라엘의 오류를 반복하는 거예요. 우리끼리? 우리끼리가 아닙니다. 예수님만 단독자란 것은 예수님만이 구원자란 것을 인정하게 된 집합이 우리에요. 이걸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몸, 다른 말로 교회라 하는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그런데 여기 우리란 사람이 서로를 바라볼 때 예수님을 경유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도 개인이고 너도 개인이 되죠. 개인과 개인의 만남에서는 상대방을 나의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내 안으로 잡아당기는 속성이 발휘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내거 저보다 더 신적이어야 돼요. 묻지도 따지 말고 너는 나한테 복종해야 되고 내 이익을 위해서 희생해야 될 대상자로 타인을 보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관계가 이쪽은 자식이고 이쪽은 부모고. 이번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자식의 특징은 부모 등쳐먹는 거라고. “아버지, 내가 네 살 때 뭘 해줬습니까? 나 대학 갈 때 엄만 뭐 해줬습니까?” 잠언에 나오는 대로 맨날 다고, 다고. 맨날 달래. “내가 널 키운다고 얼마나 애썼는데?” “그건 다른 부모도 다 그런데 뭐.” 부모가 나한테 뭘 해줬느냐고 묻는 자체가 누가 절대적 단독자입니까? 본인이죠. 나를 위해서 있는 부모란 말이죠. 그런데 못돼먹은 자식을 부모가 낳았다니까요.

변할 수 있는 요소와 변하지 않는 요소가 있어요. 변하지 않는 요소는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아요. 변하지 않는 그것이 아담으로부터 계속 흘러들어온 겁니다. 자식, 손자까지. 꽂이처럼. 선악과 따먹은 효과가 신처럼 되는 거예요. 상대방에서 굴복해도 상대방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이용해먹기 위해서 한 거예요. 결혼도 마찬가지고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한 게 아니고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가정을 뭐로 봅니까? 네 가정이 교회냐고 묻는 거예요. 가정이 교회입니까? 그러면 배역이 있어요. 예수님 역할은 남편이 해야 되고, 교회 역할은 아내가 해야 되고. 그러면 순서상 먼저 예수님이 피를 흘려야 되겠지요. 예수님의 피 없는 교회는 교회 아니지요. 예수님이 피를 흘린 것을 근거로 해서 교회는 충성을 하게 돼있어요.

그러면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남편에게만(조건입니다) 충성할 의무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면 돼요, 안 돼요? 복종하면 안 되죠. 그럴 때 복종하는 게 주의 뜻에 어긋나요. 그러면 결혼할 때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남편을 찾아야 돼요, 말아야 돼요? 그런 남편 없어요, 이 세상에. 따라서 결혼하는 것은 개판인 것을 알라고 결혼하는 거예요. 둘 다 개판이에요.

성경말씀이 없었으면 둘 다 점잖은 사람인데 성경말씀이 있으니까 자기 본색이 다 드러난 거예요. 가정은 없는 거예요.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게 만들었어요. 가정이 서서히 해체 수순에 들어갑니다. 졸혼. 가정이 해체 수순에 들어가면서 신비가 등장해요. 바로 그렇게 해체하도록 하신 분이 우리의 남편입니다. 남편은 놀지 않았습니다. 오늘 핵심은 놀지 않는 남편. 주님은 놀지 않았어요.

주님은 의도적으로 가정에 충실하지 않도록 그게 우상이 안 되도록 가정이란 것은 우리의 죄를 까발리는 공장이에요. 인생은 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걸 미리 알기 때문에 결혼 안 하는 게 나을 건데. 결혼 한 사람한테는 화가 있을 건데. 그래도 정욕을 못 참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참 안 됐다. 어떻게 결혼을 다 하냐. 저 행복이 눈물의 씨앗으로 바뀔 날이 올 건데. 그래서 갈라서게 되면 그냥 갈라서고 혼자 사는 게 낫다는 거예요. 혼자 못 살거든 또 해라.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 또 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인생이란 역사화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악마적이고 나밖에 모르고 예수마저 내가 신 되기 위한 이용물로 삼는 그런 결과를 이미 구원받은 상태로 만들어놓고 그걸 이 땅에서 펼치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 받은 사람은 항상 갈수록 분노가 일어나는 게 아니고 우리 가정 왜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감사가 이어지지요.

물론 분노를 통해서 감사가 이어져요. 나는 왜 자꾸 우리 가정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는지 몰라. 분하다. 이런 식으로.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 같은데. 나는 요즘 들어 우리 남편이 너무 잘 해줘. 너무 행복해. 그런데 너무 분해. 주님을 가리잖아요. 당신 주님 가리기 있기, 없기? 너 공부 잘하기 있기, 없기? 당신 돈 잘 벌기 있기, 없기? 이런 식으로.

엄살인지 자랑질인지 분간이 안 되지만 그러나 주께서는 항상 우리 뜻대로 안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십자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 방식에선 주님은 한결 같습니다. 오직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는 언약 안에 있기 때문에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성도를 주께서 우리가 하지 않더라도 우리로 하게 하시는 중에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사장 엎어지게 해주시고 십자가 향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그 위에 달려가게 하신 하나님, 제사 드렸다고 구원받았다고 착각한 그 이스라엘 망하게 해주시고 진정한 제사는 예수님 제사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니 십자가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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