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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5 23:45:26 조회 : 803         
죽음 기능의 반복 170505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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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112) 17-05-09 13:39 
20170505a 울산강의-레위기 9장 : 죽음 기능의 반복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9장을 하겠습니다. 강의 전에 제가 레위기 9장을 읽어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레위기 9장을 읽어보게 되면 무슨 말인지 꼭 늪에 빠진 느낌이 들지요. 제사에 대해서 쭉 이야기는 하는데 제사에 관한 내용을 보면서 상당히 복잡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제사를 여러 종류로 하지 말고 간편하게 하나로 정해서 드리고 그래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는데

여기 제사에 속죄제, 번제, 화목제 나오는데 이렇게 제사가 여러 종류가 된다는 이것도 복잡하지만 근본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우리 자신만 생각한단 말이죠.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제사에 관심 두게 한다는, 제사에 대해서 소개한다는 자체가 우리 자신에게 몰두를 하는 우리를 향하여 뭔가 하나님께서 모욕하는 느낌, 그리고 몰아세우시는 그런 느낌을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뻔히 아신다면 우리는 제사에 관심 두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자기 살 궁리하면서 거기에 전부를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관계를 맺으려면 우리가 신경 쓰는, 이렇게 하면 네가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를 해주셔야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시켜 볼까하는 생각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레위기 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원하는 것, 제사 이야기할 때 어느 누가 여기에 관심을 두겠습니다. 관심 안 두면 돌려버리죠. 별로 하나님이 정이 안 든단 말이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동기를 안 준단 말이죠. 우리 자신에게만 관심 있는 사람에게 제사는 이렇고, 화목제는 이렇고, 번제는 이렇고, 지난 8장에서는 위임식을 이렇게 했다. 위임식 하든 말든 누가 하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제사장 위임식 하는데 내가 굳이 거기에 대해서 관심 둬야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의견에 대해서 차이, 충돌을 드러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와 우리 평소의 관심사가 하나로 이어지질 않아요. 이런 결과를 간단하게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교회 만들기가 원천적으로 봉쇄돼있다.] 오늘날 세상은 교회를 잘도 만들어내요. 간판에 대한예수교장로회라 해서 건물 하나 마련해서 하나님 이름으로 모이자, 목사 세우고, 의자 갖다 놓고 해서 교회 만드는 것, 부동산+동산+인물, 잘도 만들어요.

성경 레위기 9장에 관심도 없으면서 교회를 만든다?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우리의 관심사는 우리 자신밖에 없어요. 내가 어떻게 사느냐는 것밖에 없는데 그러면 우리가 교회를 여럿이 힘을 합쳐서 만들어봤자 지요. 교회를 말하는 것은 레위기 9장의 취지가 아니고 하나님께 잘 보이면 잘 먹고 잘 산단다. 그것 외에 뭐가 있겠어요. 그런데 그 안에는 레위기 9장, 8장의 내용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교회 만들기가 원천적으로 봉쇄돼있는 겁니다. 이걸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죽음’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뭐냐 하면,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어떻게 했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지된 것으로 보고, 오직 인간만 정지돼있는 그 상황에서 하나님 쪽에서만 설치는 상태가 죽음이에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은, 내가 일 안 하면 하나님도 일하지 않는 줄 알고 있어요. 오히려 반대에요. 인간이 자기 일에 몰두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쪽이 죽은 자가 돼버려요.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죠. 왜? 본인이 너무 설치니까.

레위기 8장, 9장 내용은 이겁니다. 전부 누구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제안한 거예요. 하나님이 굉장히 신경 쓰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소원한 걸 들어주고, 네 부탁이니까 들어줄게, 이런 게 아니고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으로 속죄제 바치고, 일방적으로 번제, 화목제 드려라. 거의 이건 뭐 횡포지요. 일방적인 요구를 한다고요.

그럼 우리가 간절히 신경 쓰고 있는 건 왜 안 받느냐? 우리는 죽어 있는 상태에요. 우리의 의견, 의사, 요구사항, 희망, 기대, 이 모든 것을 봉쇄작전으로 전부 다 차단시키고 이 세상은 너희들이 설쳐서 되는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는 하나님이 설쳐서 이뤄지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설침 앞에서 인간의 모든 의사와 의견이 개무시 당한다는 말은, 인간은 곧 죽어있다는 겁니다.

인간 세계의 모든 흐름은, 지가 아무리 바쁘게 설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어있는 거예요. 오직 하나님이 설칠 때 이것이 생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생명이에요. 그리고 인간의 생명은 곧 하나님의 죽음을 의미하고. 같이 의견 맞춰서 같이 일하는 법은 하나님 나라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하는 일에 제가 좀 도와드릴게요. 이렇게 하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 만들기는 원천적으로 봉쇄돼있습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레위기 8장, 9장 내용이 담겨있질 않아요. 그럼 레위기 8장은 뭐냐? 제사장 위임식 이야기에요. 9장 내용은, 위임 받은 제사장이 전에는 모세가 정치적으로 주도적으로 하던 모세의 일은 이제 어디로 넘어가느냐 하면, 모세는 지도자로 남고 이제는 모세가 가져온 모든 율법의 내용이 구체화되는 거예요. 대제사장 중심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구체화되는 겁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시내 산에서 받았던 취지가 레위기 9장을 통해서 대제사장 아론 중심으로 본격화되는 거예요.

그게 1절에 보면, 제 팔 일인데, 본격화되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대제사장들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와 번제, 화목제를 드리라는 겁니다. 제사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순서는 속죄제부터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화목제로 그렇게 드리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못 드리겠다고 나올 수 있거든요. 드리라고 했다고 고분고분하게 꼭 그래야 됩니까, 우리가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것이지 시킨다고 다 합니까, 라고 못 드리겠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이게 바로 성경을 해석하는 첫걸음이에요. 예를 들어서 좁은 길로 가라. 넓은 길은 멸망한다. 넓은 길로 가면 어떻게 할 건데요? 이게 성경해석 첫 대목이에요. 이게 우리 본성에 맞아요. 기도할 때 네가 필요한 것을 이방인들처럼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고 한다면, 성경해석 해보라고 한다면, 진짜 전도사나 강도사한테 시험 치고 싶어요. 이것 달라, 저것 달라 기도 좀하면 어떻습니까? 내가 하겠다는데 하나님이 나서서 말릴 겁니까? 내가 필요한 것 달라는데 하나님이 하라, 하지 말라고 태클 걸고 나오십니까?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해석을 어떻게 합니까? 이건 하나님 뜻이니까 기도할 때 이것저것 달라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지. 이렇게 해석해버리면 이것은 자기 몸에 안 맞는 지식일 뿐이에요. 만약에 그렇게 받아들이면 나중에 행세하게 돼있어요. 기도 안 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에 감사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기도 안 한 꼬라지 좋다. 하나님이 필요한 걸 주신다고 한 걸 무시하고 철야하면서 주시옵소서, 기도한 사람은 일이 잘 풀리고 나는 시킨 대로 했더니만 다 가져가고 남는 것 아무것도 없고. 난 이럴 줄 알았어. 차라리 그 말 안 들은 걸로 칩시다. 나는 아쉬울 때 기도하고 그렇게 살 거예요.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게 처음부터 네가 그렇게 해석을 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틱틱 거려야 된다 말이에요. 청개구리처럼 오른쪽으로 가라 하면 왼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라 하면 오른쪽으로 가고. 하나님께서 오른쪽으로 가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왼쪽 가고 싶은데, 라고 자기성향이 공개돼요.

신약에는 없는데 구약에는 십일조가 있다. 레위기에 나오잖아요. 못 하겠다면? 이게 십일조 해석의 기본이에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못 하겠다면?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이에요.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내가 술잔 드는데 갑자기 주의 손이 날아와서 내 소주잔을 꺾을 거예요? 꺾어봐. 살아계신다면 꺾어봐.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본인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거부하게 돼있습니다. 배척하게 돼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아느냐 하면, 내가 죽어 마땅한 걸 아는 그 순간 주님은 살아있어요. 내가 살아서 이만큼 산 게 아니고 죽어야 되는 데 못 죽어서 질질 끌려와서 내팽개치듯이 살아왔다는 것을 안 순간 나는 언제고 죽을 수 있고 그런 주님은 늘 살아계셔야 합당하다는 것을 비로소 그때 아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레위기 8장, 9장을 보게 되면 말씀의 숲에 빠져서 길을 잃어버려요. 재미 하나도 없어요. 건너뛰고 싶어요. 확 당기는 사건도 없고. 그런 사건은 레위기 10장에 나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 쓰다가 제단에서 불이 나와서 홀라당 타버릴 때 “그것 참 신기하네.” 하고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런데 8장, 9장은 백날 봐도 기억에 남질 않아요. 이게 왜 있는지 몰라요.

이게 왜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날, 교회는 하나님이 살아있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살아있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협조를 받지 않는 이유가 우리는 하나님 일에 끼어들 입장이 못 돼요. 왜? 죽은 자니까. 그런데 죽은 자가 지가 죽었다고 하면 참 고맙겠는데 죽은 인간들이 안 죽었다고 길길이 날뛰니까 문제에요. 그게 바로 레위기 10장이에요.

시키는 대로 제단불로 향을 피우면 안 죽었어요. 그런데 아까 제가 말한 성경해석 원리대로 제단불로 향을 피워라. 못 하겠다면? 그 해석이 뭐냐? 그래서 죽었어요. 죽었을 때 나답과 아비후는 참 재수 없다.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게 오늘날 우리 이야기를 대변해주고 있어요.

이제 8장, 9장 내용에 본격적으로 들어갈 입장이 됐습니다. 레위기 1장부터 그랬습니다만 읽어보면 짜증 나. 레위기 때문에 성경 안 본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출애굽기까진 재미있었잖아요. 레위기에 와서 진을 다 빼놨어요. 막 토하려고 해요. 그 정도로 힘든 거예요.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까 봉쇄라 했는데 다른 말로 단절입니다.

단절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제사장 또는 대제사장을 둠으로써 지금 너희들의 바라는 모든 것들을 자칭해서 그들은 자기를 이스라엘로 보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언약으로 인한 아들이란 뜻이에요. 축복의 아들, 언약 백성. 원래 뜻은 하나님이 사람과 싸운다는 뜻인데 그것은 야곱의 이름이잖아요. 야곱이 언약의 복 받은 백성 아닙니까. 그게 집단화된 거예요. 그 자식들이니까.

이렇게 자칭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소통이 잘 되고 원활하게 왔다 갔다 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를 인간의 대표로 봐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뀔 때 죽음이 있어야 됐거든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죽음을 빼버린 겁니다. 이스라엘로 태어났기에 이스라엘로 우기는 겁니다. 마치 대한민국의 부모를 만나서 대한민국의 자식으로 태어났기에 대통령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태어났기에 그 나라 그 백성 아니냐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니라는 거예요. 죽음을 왜 자꾸 빼느냐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이 죽음 말고 주님의 생명에 의해서 위층에서 만들어질 나라가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란 것이 하나님의 살아있음이거든요. 인간 세상에서 죽음을 반복해요. 죽음을 반복하는 걸 제사라 합니다. 계속해서 제사, 제사, 제사. 위임식 할 때 번제, 화목제를 드렸거든요. 하루에 세 번 드리고 칠일 동안 21번 드립니다. 그리고 제 팔 일에 모세가 아론에게 또 제사 드리라는 겁니다. 또 속죄제, 번제, 화목제.

속죄제가 뭐냐? 죽음. 번제가 뭐냐? 죽음. 화목제가 뭐냐? 죽음. 죽음을 계속 중첩시키는 거예요. 죽음을 중첩시키는 이유가 바로 조금이라도 인간들이, 우리는 살아있고 살아있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 만드는데 기여하고 보탬이 된다는 생각이 튀어나오지 않고 차단시키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 증거가 레위기 10장에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안 하고 다른 불로 향을 피웠더니만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잖아요.

여기 있는 인간은 자기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람은 반복된 제사를 통해서 죽음을 경유해야 진짜 이스라엘에 참여하게 됩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생산되는 와중에 인간의 의견은 일체 반영하지 않는다는 단절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도로 죽음으로 와버려요. 나답과 아비후처럼.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이 어떤 세계인지 감 잡으셨습니까?

질문해볼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잔인한 분을 믿어요. 하나님을 아버지라 하거든요. 그 아버지와 그 자식,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아들입니까? 성도에요. 성도는 인정사정도 없어요. 내가 남한테 인정을 베푼다든지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형편이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주제넘게 우리가 누굴 사랑하게 되면 이것은 제사 원칙을 위반한 것이고, 단절의 원칙을 위반한 거예요.

신약성경에 보면 무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비를 베풀라. 네가 동정하는 자가 되라. 불쌍히 여겨라.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너도 이와 같이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네가 사랑을 받은즉 너도 형제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할지니라. 사랑하는 이 계명 외에 다른 계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얼마나 많이 이야기가 긍휼, 사랑, 동정하는 자가 되라, 불쌍히 여기라. 많이 있는 것 인정하지요. 그럼 그걸 해석해보세요. 아까 제가 말씀한 대로 해석해보세요.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랑하면 뭘 줄 건데요? 사랑 못하겠다면?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사랑하고 내게 수천만 원 사기 친 인간은 사랑 못하겠다면?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했지요. 나는 못합니다. 때려죽여도 못합니다. 원수는 사랑 못합니다. 바람피워 이혼한 남편을 사랑하라. 이건 말도 안 되잖아요. 니가 들어와서 내 인생 조졌는데. 남자 잘못 만나서 평생 그때부터 고생했는데. 지만 조지면 괜찮지요. 그 때문에 자식들까지 인생 버린 원인 제공한 그 남편, 남편도 아니지요. 그 남자, 그 남자를 사랑해요? 미쳤어요. 걸리기만 해봐라. 내 인생 물러내. 내 청춘 돌려줘. 니가 뭔데 내 인생 조져놓느냐 말이죠. 니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니 인생을 완전히 짓밟아놓은 그 인간에게 오늘도 따스한 아침 햇살은 비췄고, 그의 심장을 뛰게 했고, 그 인간 어젯밤에 잠 잘 잤다. 그 남자 촌에 가서 농사지었는데 이번에 대풍년 들게 했다. 누가 그렇게 한 건데? 그 사람 대머리도 아니네. 머리카락도 자라게 하시고 발걸음도 세시고 그 원수를 누가 키우십니까, 누가 자라게 하시고, 누가 생명을 보존하게 하십니까? 우리 주님이잖아요. 우리 하나님이잖아요.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요? 차라리 김추자 노래판을 틀어요.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내가 그런 인간을 사랑하라면 나는 하나님 안 믿는다. 그런 불합리한 하나님 못 믿는다.

그렇게 당해놓고 해석을 자기 멋대로 하지 마시고 진즉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그럴 줄 알고 말씀 줬다. 그럴 줄 알고 레위기 8장,9장 줬다는 겁니다. 내가 네 충성을 원했는가, 내가 니 기도를 원한 줄 아느냐, 네 봉사를 원했어? 나는 일체 너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약속의 땅을 만들었다. 약속의 땅을 만들고 천국을 만드는 그 모든 것은 어떤 인간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하나님과 아들, 두 분이 다 만들었어요. 예수님은 하지 못한 것을 홀로 다 이루셔서 약속의 땅을 만든 겁니다.

예수님 오기 전에 그러한 징후가 뭐냐 대제사장이에요. 대제사장은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회막에 들어가서 피를 뿌려요. 여기도 나올 거예요. 회막에 피 뿌리는 것은 제사장도 못합니다. 대제사장, 여기선 아론이죠. 아론이 들어가서 손가락에 피를 찍어서 9장 9절에 나옵니다. “아론의 아들들이 그 피를 아론에게 받들어 주니 아론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단 밑에 쏟고” 제단 뿔도 바르고 단 주위에 피를 뿌립니다. 제사장이 해요.

이해했는지 확인해봅시다. 죽음의 세계와 주님이 말씀대로 만드시는 약속의 세계와 중간에 서있는 자가 누구라 했습니까? 대제사장. 그것 하나 기억하세요. 대제사장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차단, 봉쇄되는 겁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또는 제사장은 누구 말만 들어야 돼요?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면 안 돼요.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해야 돼요. 일방적으로.

그렇게 안 했더니만 레위기 10장에서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인데도 불구하고 죽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화되려면 하나님이 인간 세상을 일단 불도저로 밀어서 시체로 만들어버려요. 어디서 네가 한 행세했다고 까불어. 그 입 다물라. 어디서 천국에 대해서 개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느냐. 가만있어. 천국은 내가 만들어. 이게 레위기 8장, 9장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말 들어요, 안 들어요? 하여튼 진짜 말 안 들어요. 어린아이 같아. 저의 경건, 거룩으로 보태면 안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온다고. 제가 정성들여 다림질한 오만 원짜리 헌금을 받아주셔야지요, 이렇게 나오더라고요. 죽여 버릴까? 인간의 교회 만들기는 봉쇄돼있습니다. 그것 교회 아닙니다. 자기 자랑하는 동네에요. 정성과 열심과 충성과 건전함과 자기 능력과 자질, 남과 비교하고 경쟁해서 자랑질하는 곳이에요. 교회가.

신약의 대제사장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레위기 8장, 9장을 그대로 따와서 대제사장으로 오신 거예요. 히브리서에 나와요. 그 대제사장을 우리가 믿는다고요? 말도 안 돼요. 죽은 놈이 뭘 믿어요. 죽은 놈은, 죽은 게 아니에요. 자기 잘난 맛에 오늘도 찧고 까부는 게 죽은 놈이에요.

이 땅에서 죽은 자의 특징은, 자기에게 몰두하는 거예요. 내일 결혼 주례 있는데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낀 점이 있어요. 결혼해봤자 결혼생활 20년, 30년 하게 되면 이제는 아내도 귀찮고 남편도 귀찮고 좀 혼자 살고 싶어. 뭐 파뿌리가 어떻고 그때는 뭣도 모르고 누가 말리는 사람도 없는데 ‘예’ 대답했는데 안 살아봐서 그래요. 나중에 좀 살면 옆에 누가 있는 것도 귀찮아요. 그럴 때 우리는 왜 너와 계속 살아야 되는지 누가 좀 이유를 말해주면 좋겠어. 한 오년 살면 다른 여자 만나 살고, 또 헤어지고 이랬으면 좋겠어. 차도 오년 주기로 바뀌잖아요.

날이 갈수록 사랑한다? 몰라. 사랑 안 해서 억지로 소리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한 20년, 30년 살다 헤어진다는 것이 양심에 가책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되지. 얼마나 불쌍한데 나 보고 자기 평생을 맡겼는데 내가 남자니까 남자답게 끝까지 저 여자를 보호해야지, 라고 하는데 그게 의무라니까요. 이게 사랑이 아니고 의무가 되니까 문제가 돼요. 그래야 남자답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이 오는 거예요.

이렇게 주례사하면 큰일 나지요. 성경에서 부부란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날이면 날이 갈수록 저 여자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억지로 의무로 지켜주겠다는 게 아니고 전보다 더욱 더 사랑하느뇨? 이래 된다니까요. 바랄 걸 바라야지 어떻게 그걸 바랍니까? 처음엔 덜 사랑했는데 날이 가면 갈수록 당신이 사랑스러워져. 아내가, 어느 정돈데? 나는 없어져도 좋을 정도로 사랑해. 네가 진심이야? 의무감 아니고 진심이야. 가면 갈수록 나는 엷어지고 당신은 두꺼워져.

그러니까 결국 성경말씀은 로마서 3장 말씀대로 처음부터 결혼하나 하기 전이나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하고 합당합니다. 죽어 마땅하니까 아쉽다 생각하지 마시고, 처음에 강의했잖아요.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살아계심, 하나님에 대한 모든 성경대로 일하심이 좋아지느냐 하면, 내가 죽을 자란 걸 알 때.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죽음이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성경에서는 죄의 구조 안에 집어넣어서 그 안에서 죽은 자로 간주하는데 그걸 중간에 대제사장이 제사라는 약속 또는 약속이란 구조를 통해서 죄를 생산해요. 여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의 제사를 통해서 나왔던 죄의 생산과 자신의 현 모습을 비교하고 연결시켜 보란 말입니다. 이래도 네가 죽은 자가 아닌지 보라 이 말입니다. 그게 바로 속죄제에요.

속죄제, 번제, 화목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의 모두 죄를 갖고 있다는 거예요. 죄의 종류를 나눠요. 모르게 한 죄는 속죄제로 봐줄게. 하지만 알고도 지은 죄는 속죄제로도 안 돼. 진짜 죽어야 돼. 연약해서 지은 죄는 속죄제로 말미암아 죽은 자를 안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께서 용서해줘요.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돼버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아들이 돼요.

제사장의 복장을 지난번에 했잖아요. 폼 나지요. 폼 나는 게 제사장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에 죄 지은 우리도 거기에 합세하는 권한을 주고 자격을 허락하노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신랑이잖아요. 그럼 신부가 있을 게 아닙니까. 예수님은 신부를 자기처럼 영광스럽게 만들어낼 책임이 있어요. 조건이 있어요. 본인이 죄를 알 때.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죽어가면서도 죽는 이유를 몰라요. 성도는 특징이 뭐냐? 같이 죽어가면서 죽는 이유를 알아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거예요. 성도는 죄를 생산하는 제사의 구조 안에서 자기 죄를 아는 반면에 성도가 아닌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 다른 말로 율법, 제사의 구조에 포착이 안 됐기 때문에(이방인이죠) 양심상 뭔가 이 세상에서 반듯하게 살려고 애는 쓰지만 결국 비겁한 변명과 핑계로 이어져요.

내가 집에 일찍 들어오려고 했는데 친구가 와서 그랬다. 오늘 내 생일인 줄 아나, 모르나? 아는데 친구가 와서 한 잔했다고 나오거든요. 어린이날이라 얘와 놀아줘야 되는 것 아는데 회사에 바쁜 일 있다고 가봐야 된다고 나온단 말이죠. 엄마 입장에서 어린이날이니까 얘와 놀아줘야 아빠라고 나오잖아요. 어린이날 부모는 아이와 놀아줘야 된다고 율법 어디에 나옵니까? 율법에 안 나오지요.

그 엄마는 어린이날 아이와 놀아주는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죽는지 이유를 몰라요. 얘한테 바른 엄마가 됐으니까 자기 죄를 모르는 거예요. 성의를 다하여 최선을 다하여 살았을 뿐이에요. 어째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안 되는데 더는 못해줘.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뭘 더 하란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말씀의 구조, 제사의 구조 앞에서 우리가 뭘 해도 일체 우리의 선행 같은 것을 주께서 받지 않는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왜? 우리가 어떻게 설치고 부모한테 효도하고 어버이날 봉투에 십만 원 넣어 드려도 그게 죄고 죽은 짓이라니까.

왜요? 저한테 물으면, 제사장이 차단의 선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제사장의 기능을 우리의 선행으로 모욕하면 안 돼요. 거기다 보태거나 모독하거나 무시하면 안 됩니다. 제사장이 우리에게 착한 일 많이 하고 나도 널 용서하고 합쳐서 천당 보내줄게. 이런 일은 없어요. 그런 것은 오늘날 천주교나 교회에서 하는 소리에요. 그런 것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복음이란 간단하지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것 아닙니까. 나는 죽고 내 안에 대제사장이 살아요. 그럼 우리는 어디 속하느냐 하면,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있잖아요. 이스라엘 진이 있으면 중간에서 활동하고 있잖아요. 나중에 성전 지으면 성전에서 일하고 기거했어요. 제사장이 함께 있다는 말은, 나는 죽고 내 안에 제사장이 살아있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있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가 뭘까요? 나는 외롭다, 혼자 있고 싶다. 이게 관심사입니까, 아니면 나밖에 모르는 이런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선 무슨 일을 하셨지? 어느 쪽에 관심 있어야 돼요? 주님한테 관심 있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이 왜 혼자 있고 싶어 하는가? 그것부터 알아야 돼요. 그건 바로 육체가 한 덩어리기 때문에 그래요.

무슨 말이냐 하면, 창세기 2장 끝에 보면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지요. 그런데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실패했어요. 그러면 두 사람이 한 몸이 아니라 두 사람이 두 몸이 됐지요. 한 몸이 못 됐다는 말은, 내가 누구한테 다가가든, 내가 자식한테, 내가 아내한테 다가가든 간에 내 몸 자체가 그 사람에게 하나의 폭탄이 되고 거추장스런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아무리 잘해봤자 그는 날 이해 못하고 나는 그를 이해 못해요. 이건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지 못한 징벌입니다. 벌을 그런 식으로 받아요. 외로운 게 벌이에요. 인간이 사는 게 벌이듯이 인간은 외로운 게 벌이에요. 우리 어머닌 맨날 외롭데.

외로운 데 해결책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럼 같이 놀아주면 안 외롭습니까? 같이 놀아줘도 내가 원하는 대로 놀아줘야 덜 외로워요. 그런데 그쪽도 인간이잖아요. 언제까지 내 횡포에 참을 것 같습니까? 나중에는 못 참습니다. 요양사가 놀아준다? 요양사는 돈 보고 놀아주지 예뻐서 놀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를 키웁니다. 개와 한 몸 되렵니까? 나중에 천당 갈 때 개 끌고 갈 거예요? 안 되잖아요. 고양이 끌고 갑니까? 이미 인간은 실패작이에요. 따라서 실패작인 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 누굴 만나도 군중 속의 외로움, 그런 뜻이에요. 식구 여러 명 되도 명절에 웃으면서 윷놀이하고 고스톱 치면서도 외로워요. 어릴 때는 재롱부리고 돈 받고 좋지요. 열두 살만 되도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고 온다고 해요. 하여튼 크면 따로 논다니까.

바로 그럴 때 너만 외로운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오신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 때문에 외로웠습니다. 아무도 예수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 없어요. 열두 제자도 못 알아듣습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112) 17-05-09 13:40 
20170505b 울산강의-레위기 8장 : 죽음 기능의 반복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9장 1절에 “제 팔 일에”라고 돼있지요. 성경에 제 칠, 그리고 팔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이 7일 만에 창조했잖아요. 그 원리원칙을 제사에도 계속 살아있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있음을 우리가 눈으로 볼 순 없어요. 하지만 일관되게 하나님 쪽에서 어떤 법이 나오고 규칙이 나와요. 규칙에 나오는 내용이 인간이 상식으로 형성된 것과 전혀 상관이 없어요. 그게 희한한해요.

착해서 천국 가렵니까, 십자가 죽으신 피를 믿고 천국 가렵니까? 이건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생 얻는다는 이 아이디어가 전 세계 사람들 다 끌어 모아 보세요. 그런 아이디어가 나오는지. 안 나온다 말이죠. 그건 안 보이지만 살아계신다는 뜻입니다. 안 보이지만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진짜 계속해서 안 보였던가요? 아니에요. 안 보이던 분이 마지막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아기 예수로 등장하시면서 특별한 의미 있는 제사장 제도, 제사 제도, 선지자 이런 것들이 예수님과 연계되어 확 살아나는 겁니다. 옛날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셨구나. 옛날에는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마지막 때는 아들로 이야기한다. 히브리서 1장 1절, 2절 말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살아있으면 보여줘. 이런 소리하면 안 돼요. 그냥 말씀이라 하면 안 되고 예수님과 관련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이것은 구조를 드러내요. 어떤 구조냐 하면, 죄와 긍휼로 연결되어 있는 구조를 말씀 안에 담아주십니다. 긍휼은 출애굽기 33장 19절에 나오지요.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게 여호와 하나님이거든요.

죄와 긍휼의 구조에서는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고집피우는 나는 외롭다, 나는 배고프다, 나는 먹고 싶다, 나는 자고 싶다. 이 나는 죄와 긍휼의 구조에서 없지요. 사라져야 되지요. 사라질 때는 죽음을 통해서 사라져야 돼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산 낙지 있지요. 산 낙지 외에는 죽여서 조리하잖아요. 복어는 죽여서 독을 빼고 요리하잖아요. 죽여서 그 다음에 소비자들이 맛있게 먹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죽여서 죄와 긍휼의 구조를 만족한다 이 말입니다. 그게 레위기란 말이죠.

그런데 안 죽이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제사 드렸다. 나는 제사장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삽니다. 앞에 나가 붙어요. 그렇게 나를 붙여서 제사 드렸던 그들의 멸망한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나답과 아비후고. 나가 살아있으니까 뭘 지시하면 꼭 그래야 돼? 레위기 18장에 보면, 오징어 먹지 마라, 돼지고기 먹지 말라하는데 몸에 좋은데 왜 안 먹어? 그게 나가 붙어서 그래요.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이유가, 주께서 죄와 긍휼의 구조로 하는데 우리는 내가 산 채로 여기에 끼어들려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은 율법을 통해서 죽여 놓고 죄와 긍휼의 구조로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죄와 긍휼의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활용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날마다 죽고 주님은 나로 살아계신 분으로 증거가 되는 겁니다. 증인이 살아있다는 말은, 증인이 증거해야 될 분도 함께 늘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증인된 본인은 살아있다고 우기지만 막상 본인이 증거해야 될 주님은 자기가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큰 장애물이 되어 주님 살아있는 줄 모르고 살아가요. 그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죽이는데 목숨 끊어지는 죽음이 아니고 죄로 인하여 죽은 자로 만들어요. 다시 말해서 죄인으로 만들어버려요.

이렇게 되면 그 다음에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죽음을 둘로 나눠봅시다. ①목숨 붙어있음, ②목숨 끊어짐, 어느 것이 죽는 겁니까? 목숨 끊어짐을 죽는다 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 아니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아는 한 내 목숨 끊어지면 죽는 거고, 내가 아는 한 내 목숨 붙어있으면 살아있다. 이것을 주님께서 죄로 바꿔버려요. 죄가 계속 살아있기 위해서 성도는 목숨이 끊어져도 죄를 보여줬던 사람으로 주님의 구조 안에서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그 실례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 같은 경우입니다. 나사로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게 아니고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죽었다고 봤고. 나사로는 분명히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 나사로 목숨을 끊어지게 했을까? 그것을 나사로한테 찾으면 안 돼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사례가 나사로에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영원히 죽지 않아요. 나사로란 죄인이 예수님의 긍휼로 인하여 영생을 얻는 겁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일하신 게 아니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기 위해서 증거물이 필요했는데 그 증거물이 나사로였던 겁니다. 우리가 현재 그 입장에 있어요. 로마서 14장에 보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 낙지에요. 살아있는 낙지가 되는 겁니다.

그걸 우리가 지식이든 이론이든 알았다 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울산바닥에서 어떻게 인도하시겠습니까? 아슬아슬하게 인도하시겠지요. 왜냐하면 나는 주님 때문에 살아있음을 증거 하면 내 믿음 증거하기 때문에 인정 안 해줘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신자 아닌 사람과 신자인 우리를 달리 취급하고 다뤄나가겠지요.

그러면 우리에게 늘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 거예요. 오게 되면 만약에 우리가 신자가 아니라면, 예수 믿는 게 이렇게 위험한 줄 몰랐다. 더는 위험해서 못 믿겠다. 이런 자기 본색이 튀어나올 것이고 만약에 성도라면, 본인의 성도됨을 증거하는 건 아니죠.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겠죠.

성도에겐 위험한 일들이 오는 게 아니고, 악마의 유혹, 악마의 협박, 공갈이 쳐들어오게 돼있어요. 너, 십일조 안 하면 저주받는다. 이런 것. 너, 이번 주 교회 빠졌지. 이제 벌 받는다. 이런 것. 행함에 관해서 우리에게 유혹이 계속해서 들어오게 돼있어요. 끊임없이. 악마가 행함으로 유혹하는 이유가 뭐냐? 모든 인간은 악마가 지시하는 행함에 대해서 포로 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 정죄하는 자, 욥기에서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대목이 나오죠. 물론 하나님의 허락 하에 시험하지만.

네가 잘 먹고 잘 사니까 하나님 믿는 거지, 그러한 발언이 악마한테 나왔다는 말은 욥 빼놓고 모든 인간에게 그게 통했다는 이야기에요. 잘 먹고 잘 사니까 하나님 사랑합니다, 믿습니다, 한단 말이죠. 실제로 성도라 할지라도 만약에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 사랑할까, 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 수 있어요.그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악마입니다. 구원은, 성도는 반드시 악마가 찾아오게 돼있어요.

그러한 불안감, 초조가 올 때 뭘 잠시 놓치느냐 하면, 구원이란 것은 예수님 쪽에서 시작 되어 우리를 거두었거든요. 이게 이스라엘이란 말이죠. 이스라엘 되기 전에 야곱언약이 먼저 있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가 만들어졌어요. 열두 지파가 만들어졌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한 일을 악마의 유혹이 들어오면 내 구원을 나부터 시작한 것처럼 그렇게 순간 느낌이 확 오게 돼있어요. 요새 내 신앙에 농땡이 부리더라 싶더라.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갑자기 얘가 성적이 내려갔지. 운전할 때 늘 기도했는데 바빠서 안 하니까 3만 원짜리 걸릴 줄 알았어. 그래도 뒤늦게 기도했으니 3만 원짜리지 십만 원짜리 걸릴 뻔 했다. 지 마음대로 법을 요청해요.

성도가 한 평생 살아가는 게 울퉁불퉁해요. 자갈길을 차다고 가면 한시도 편한 길이 없어요.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이게 화목제에서 제사장의 거제가 있어요. 들었다 놨다 했어요. 하나님 것인데 공짜로 얻었습니다. 거제 제물과 요제는 전부 제사장 것입니다. 뒷다리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 몫이고. 들었다 놨다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삽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때문에 제사 율법이 유지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제사 구조가 유지됩니다.

요제는 밀었다 당겼다, 밀당이에요. 요제는 흔든다는 뜻이거든요. 주께서 주시니까 우리가 받습니다. 둘 다 마찬가지에요. 그렇게 한 제사 제물은 전부 제사장에게 가는 거예요. 제사장은 농사지을 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레위지파 전체에게. 왜? 너는 하나님으로 인하여만 밥 먹고 살아라. 이러면 어떤 분은 물을 거예요. “목사님, 오늘날 레위인들은 누굽니까?” 그게 성도입니다. 목사라고 할 줄 알았지요. 성도가 어느 직장을 다니던 야근을 하던 간에 성도만이 하나님께서 밥 먹고 살라고 취직시켜 준 거라고 그들만 압니다.

제사장이 하는 이런 일들을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의 율법적 구조 안에서 살기 위함인데, 구조 안이거든요. 나중에 그리스도 안, 성령 안, 복음 안, 하나님의 의 안 이렇게 돼요. 구조의 특징이 있어요. 시간 요소가 없어요. 왜냐하면 8일째기 때문에. 1234567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실제로 창조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옛날에 했겠지, 창조된 건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모든 민족은 그렇게 생각해서 이스라엘 민족 내부에서는 7의 반복이 일어납니다.

레위기 8장 끝에 봅시다. 33절 읽어보세요. “위임식은 칠 일 동안 행하나니 위임식이 마치는 날까지 칠 일 동안은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이것은 제사장한테만 이야기한 게 아니고 온 회중 대표자들이 회막 앞에 모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 안 돼요. 저 성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봐야 돼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레위기 9장 24절 읽어보세요.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소리 질렀지요. 그 다음에 엎드릴 때 본인이 죽은 자잖아요. 죽음 구조 안에서 우리가 살아요. 만약에 우리가 살아있으면 우리는 죽음에서 내놓은 자식이 돼버려요. 율법에서 구조에서 내놓은 자식이 되면 그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성경은 덮고 산에 가보세요. 이런 말이 절로 나올 겁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천상천하유아독존. 산에 올라서 천하를 내려다보면 세상은 인생 참 나 혼자 열심히 살아왔구나. 마이웨이. 이 날 이때까지 참 열심히 살아왔다.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취직하고 열심히 살았구나. 아이 아플 때 안고 병원에 갈 때 생각나네. 부모님 백내장 때문에 안경 낀 생각나고.

성경 덮어버리면 자기 인생 스토리, 역사가 펼쳐져요. 인생 뭐 있어. 이렇게 살다 가는 게 인생이야. 교회를 40년 다니면 무슨 소용 있고, 성경을 백독하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평생 자기만 달랑 남았는데. 이만큼 살았으니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말라고. 오죽했으면 이런 노래가 나왔겠습니까?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한다고. 명언이에요.

이게 바로 시간 요소입니다. 인간이 시간을 의식한다는 것은 아직 덜 죽었어요. 제대로 안 밟혀서 그래요. 엎드리지 못해서 그렇고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 앞에서 자기가 잿더미에 불과하고 먼지라는 흙이라는 사실을, 무기물질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프로이트란 정신분석학자의 전반기 사상에서는 인간은 생식 본능이다. 동물들 새끼 낳듯이. 결국 남는 것은 내 새끼 낳는 것이다. 그걸 이어서 도킨스라는 사람은 [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 인간의 모든 행동의 근원으로 봤어요. 지금 과학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인간의 근원적인 것은 생식인데 쾌락이 절정에 이를 때 생식이 이뤄지고 그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고 또 낳고. 아이를 키워서 잘 되기를 바라는 것도 생식에 대한 본능의 세력 앞에서 못 벗어나서 그렇다.

프로이트의 후반기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은 죽음(타나토스)의 본능에 있어요. 인간은 쾌락을 쫓다가 결국 금속으로 변하기 위해서, 성경대로 하면 흙, 먼지로 변하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살다보니 죽겠지가 아니라 역시 최고의 쾌락은 자살입니다. 내 인생은 누구의 도움 없이 죽을 때 내가 알아서 죽을 때 그걸 자아실현의 욕구라 합니다. 이게 인간의 잠재력인데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나의 자유의 마지막 카드를 잠재적으로 품고 있다는 거예요. 죽음의 본능이.

죽음의 본능이 사람들 평소 행동에 과도하게 나타나요. 과도한 취미생활, 과도한 쾌락추구, 과도한 폭력, 과도한 분노, 과도한 열심, 죽을 둥 살 둥 사업에 매진하는 것, 경찰이 오는 줄도 모르고 죽자 살자 화투치는 것, 과도하게 이기려하는 승부욕, 유럽 사람들 축구할 때 교회는 안 가고 축구장 가요. 유럽 축구 중계 방송하는 것 봤습니까? 주로 새벽에 하는데. 세상에 유럽 남자들 거기에 다 가 있어요. 손흥민 한 골 넣으면 난리나요. 할렐루야를 그렇게 했으면, 여호와의 불 앞에서 그렇게 엎드렸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메시가 어떠니, 호날두가 어떠니, 스포츠라는 과도한 쾌락, 스마트폰에 과도한 몰입, 과도하게 게임에 매진하는 거예요. 얘고 어른이고 전부 다. 왜 열심히 돈 법니까? 과도한 쾌락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서 과도하게 돈 버는 거예요. 월급쟁이해선 안 되겠다. 사업해야 되겠다. 왜? 골프 치기 위해서. 골프가 뭔데 무리하게 사업을 벌입니까? 주제파악도 못하면서. 지만 하면 되지 남 피해 다 주면서. 자기 하나 살려고 백 명 다 죽여 놓고. 그래놓고 왜 그랬어요? 하면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말은 맞아요. 우리 속의 잠재성이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나만 잘 되면 돼요.

돈 좀 있다, 서울 강남 산다. 문재인 됐다, 캐나다 이민 가면 돼요. 돈이 없어 못 가요. 호주에서도 돈 없으면 안 받아주고 미국에서도 그렇고. 큰일 났어. 대한민국에서 어렵다면 튀면 되니까. 이러한 잠재성이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과도한 금식, 과도한 철야, 교회 폐인이에요. 새순교회는 말똥말똥 뺀질이 돼서. 그걸 어떻게 아느냐? 성경책 그대로 다 있어. 집에 가서 성경 보는 게 아니고 그 자리에 다 있어.

나밖에 모르는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개선할 여지는 없습니다. 이것 알면 정말 복음 아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이러한 잠재력, 이러한 본능, 욕구는 내가 손대서 고칠 문제가 아닙니다. 수술해서 될 문제도 아니에요. 그냥 가는 거예요. 뭐로? 죄인으로 그냥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막 사는 거예요. 막 사는 게 불안하신다면 그 사람은 성령 안 받은 사람입니다. 막 사는 게 내가 미처 몰랐던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발견했다면 그 사람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에요.

제8일은 시간을 빼버려요. 시간을 빼고 한다는 것은 똑같은 것의 영원한 반복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1234567까지는 목표가 있어요. 멈추지 않습니다. 1234567 다 이루었다 하면 그 다음부턴 같이 가버려요. 동일하게 같이 가면 시간이란 게 의미가 없어요. 시간은 변화를 주기 위해서 있거든요. 여기선 변화가 없어요. 드디어 성경에 보면, 50년, 이게 희년이에요. 7*7+1=50 되잖아요. 예수님이 오셔서 희년을 완성해버려요. 누가복음 4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보라 이때가 희년의 때, 내가 온 때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시간이란 요소가 없어요. 그걸 묵시라고 이야기합니다. 묵시를 지난 골로새서에서 다중현실이라 했고, 그 묵시세계가 역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 안에 묵시가 있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어디로 갔느냐? 하늘나라 간 게 아니에요. 아버지께로 갔단 말이죠. 이 땅에 아들로 오셔서 아버지께로 가셨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그리스도 안에 있어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다중현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쓰는 ‘안’이란 말과 동일하게 쓸 수 없어요. 예수님 안에 있다면, 예수님 눕혀놓고 수술해서 하나님 어디 있는지 찾아낼 수 없어요.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계신 그곳이 천국,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서 하늘나라는 성령 안이라고 했어요. 계속해서 모를 이야기만 해요. 사도 바울이. 성령 안, 예수 안, 하나님 안, 다 안 보이는 것들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방해되는 거예요. 레위기 8장 9장 이야기가 방해되는 거예요.

레위기 9장 22~24절.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함으로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필하고 내려오니라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백성에게 축복하매 여호와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며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 지르며 엎드렸더라”

이걸 쉽게 갑니다. 하나님께서 무대장치를 만들었습니다. 그 무대장치에서 설치는 사람은 누굽니까? 모세와 아론이죠. 그리고 아론의 아들들이죠. 여기서 아무 소리 못하고 무대만 쳐다봐야 될 사람들은 회중들이죠. 그래서 8장에서 위임식 할 때 회중을 모으게 하는 거예요. 구경하러 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벌이시는 일 앞에서 내가 누구냐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단에 불로 나타났는데 불만 찾아야 됩니까, 아니면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들어야 돼요? 어느 쪽이에요?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들어야 되죠. 왜? 지금 불이 내려온 근거가 뭡니까? 모세와 아론이 시키는 대로 필하매, 번제와 화목제를 필했지요. 그러면 그 묵시세계, 1234567, 다음에 8에서는 시간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원리원칙이 반복이 되지요. 반복하는데 종사한 사람이 바로 모세와 아론이잖아요. 그런데 10장에 들어가면 아론의 아들이 죽잖아요. 아론이 해야 될 것을 다음에 아론의 아들들의 해야 되는데 죽어 버려요.

그러면 죄와 긍휼의 구체화가 아론 선에서 멈출 것인가, 아니면 뭔가 장래에 제대로 된 제사장까지 이끌겠습니까? 이끄는 거죠. 이끌 때 새롭게 시간의 요소가 또 등장하죠.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하면서 그 시간 요소가 어디서 나옵니까? 모세와 아론의 무대에서 지켜보는 이스라엘 쪽에 불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엎드렸지요. 놀랬지요.

제사장 자체가 반복하니까 또 육적인 본색 나와서 소주 먹고 들어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세상에 죽은 요소가 무대에 인간적인 요소가 난입했다고 보면 돼요. 이들의 말씀 앞에 죽은 자가 된 게 아니고 어째서, 왜 내게 뭐라고 하는데, 이렇게 내가 살아날 수 있지요. 그러면 묵시에는 역사가 필요한데 그냥 역사가 아니고 묵시에 대드는 죄의 역사가 필요한 거예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계속해서 병행해서 주님 오실 때까지 나가야 되는 겁니다. 아니 주님 오신 이후에도 우리의 일이 여전히 반복해서 이뤄지는 거예요.

상당히 함축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표정들 보니 쉽게 알아들으시네요. 8일째 일부 권한이 넘어갔습니다. 아론이 제사 드리거든 하나님이 함께 있는 줄 알아, 라고 해서 화목제, 번제를 드린 거예요. 앞에서 불이 나왔잖아요. 감사해라. 죽을 죄인을 주의 구조 안에 있다는 이유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구나. 이렇게 되면 되는데 벌써 10장 넘어가면 인간적인 요소가 침투해버려요.

마치 성령을 받고 십자가 앞에 죄인인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는데 어떤 사람이 시비를 걸었다. 이게 어디서 주의 성도한테 시비를 걸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물 튕기게 했는데 감히 네가 나를 함부로 대하느냐고 나오더란 말이죠. 주님의 증인 돼야 된다고 자부했던 우리가 5분도 안 지나서 갑자기 자기 잘남의 증인이 됐단 말이죠.

그래서 제가 초반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 만든 교회는 봉쇄돼야 된다고. 왜냐하면 그 교회라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은혜로 받았다고 세워놓고 교회가 역사가 흐르면 흐를수록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동네가 되고 말았어요. 잘난 자들끼리 잘난 증거들을 모아서 세력을 키우는 단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서 목사가 우린 십자가만 있으면 되고 교회 불나도 괜찮다고 설교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의 희생의 역사와 헌신의 역사가 오늘날 이 큰 교회 만들어서 울산 땅에 복음을 전하게 됐으니까 서로에게 박수~~~ 얼마나 장하냐고. 거기에 있던 장로들과 돈 낸 사람들이 얼마나 자부심에 뿌듯하겠습니까. 우리가 교회를 키워서 울산을 기독교화 시키고 하나님 나라 만들고 자식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물려줍시다. 결국 돈 내란 소리나 하고.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뭘 하느냐? 속죄제, 번제, 화목제가 왜 원칙이 됐는지 설명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제사장 폼 나는 복장을 입었는데 그 하나하나가 인간의 아이디어서 일체 나오지 않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디자인한 옷을 입었단 말이죠. 그러면 디자인은 옷을 입으라고 한 게 아니고 제사장 존재가 묵시적 요소가 있지요. 묵시적 요소는 같은 원칙을 반복하는 거죠. 원칙의 반복을 저는 기능의 반복으로 바꾸고 싶어요. 그렇다면 제사장 복장 어깨나 앞에 열두 보석이 있지요.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제사장은 피와 관련된 희생의 죽음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거예요. 그게 기능이에요.

이 기능, 오늘 강의 제목이 죽음의 기능인데 죽음의 기능을 반복하는 겁니다. 죽음의 기능을 묵시적으로 반복하는 겁니다. 반복하는 이유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제공해요. 이스라엘 땅에. 다른 만족은 안 줘요. 안식일에 나무하지 마라. 추가적 율법을 줍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지키려고 애쓰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육이잖아요. 육은 본성이 있단 말이죠. 아담의 마귀 속성이 있어서 나밖에 모르고 쾌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일하지 슬픔을 위해서 일하진 않는다 말이죠. 이러다 보니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더는 못하겠다고 나올 수밖에 없어요.

안식일에 나무하면 돌로 쳐죽어야죠. 이렇게 큰 소리치고 돌 들고 가보니까 그 인간이 자기 아들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슬그머니 돌 내려놓고 그 현장을 빠져나오겠지요. 안다고 해서 봐주고 하는 것이 율법에 통합니까? 안 통하잖아요. 오죽하면 신명기 21장에 보면, 아들이 말을 안 듣거든 부모가 죽이지 말고 마을 장로한테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이라고 돼있어요.

주님의 일방적인 대제사장 저쪽 무대에서 말씀을 던지는 거예요. 앞에 있는 사람들이 이걸 지킬까요, 안 지킬까요? 자기 자식을 때려도 내가 때려야지 남에게 때리도록 만듭니까. 그런데 언제 만약에 자식을 때릴 순간이 온다면 제단에서 불나올 때 그리고 무서워서 엎드릴 그때는 순간적으로 지키고 싶을 거예요. 하나님이 너무 무서우니까. 이게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개무시한다는 뜻이에요. 왜 무시하느냐 하면 가장 소중한 것이 나기 때문에.

아까 했잖아요. 두 사람이 한 몸이 돼야 되는데 실패했다고요. 내 몸 따로, 니 몸 따로 인데 니 몸을 내 몸을 위해서 있다고 우기는 거예요. 사람이 둘이 만나면 주도권 쥐려고 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 행복을 위해서 그 사람을 만나곤 한다 말이죠.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두 사람이 만나게 되면 서로의 과거가 다 튀어나와요. 열차가 둘이 만날 때 살짝 뽀뽀 하듯이 만나는 게 아닙니다. 둘 다 속력을 높여 만나면 양쪽 다 짜 부려지죠.

내일 주례사 이것 하면 소동 난다. 두 사람이 만나면 과거 다 나와요. 좋아 보이지요. 너희 집에서 그래 가르쳐 주드나? 두 개의 열차니까, 두 개의 시간적 요소니까. 묵시적 요소에서는 그래서 시간을 죽이란 말이죠. 새로운 기능을 줄게. 죄인 걸 죄 아닌 걸로 할 수 없어. 하지만 죄는 긍휼을 드러내기 위해서 너는 죄인으로 부름을 받은 거예요. 있는 그대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하잖아요. 그걸 몰라요? 왜 우린 바르게 살아서 이번 주도 복 받으려고 합니까? 심보가 이상한 심보 아닙니까? 잘못된 거예요.

기적이란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은 게 기적이에요. 마귀 유혹을 받는 대상자가 됐다는 기적이에요. 누굴 마귀가 유혹하겠어요? 성도니까 유혹하죠. 행함으로 유혹하고 시비 걸고.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보며 나쁜 짓하면 후회되고 반성하고 회개한다고 하지만 그건 자신을 그렇게 봐야 이미 괜찮은 나라는 결과물을 예상하기 때문에 아무 도움이 안 돼요. 그건 시간적으로 또 시간을 허락하는 거예요. 우리의 구원을 시간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은혜 안에서 긍휼 안에서 묵시적으로 이미 완료된 구조 안에서 이미 캡슐 안에 들어가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간단해요. 어떤 것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릴 수밖에 없는 요소를 내가 발산하고 있느냐? 그럴 때 우리는 주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났지만 다른 사람은 예수의 증인의 모습을 우리에게서 발견합니다.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합니다. 이번에 투표해서 홍준표 떨어지고 문재인 됐다고 대구 사람들 슬퍼하거나 너무 노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그렇게 했다고 했을 때 너는 화도 안 나나. 주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왜? 우리는 죄인이니까. 그게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또 예수의 증인되라고 대통령선거까지 준비하신 주님의 세밀하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불로 나타난 주님 앞에 무서워서 떨었지만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만 감사하지만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 하지만 그러한 모습까지 주께서 허락하셔서 이미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는 계기가 되도록 주께서 지켜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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