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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7 23:55:07 조회 : 717         
제사 안에서 170707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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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10) 17-07-11 10:15 
20170707a 울산강의-레위기 10장 : 제사 안에서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0장 12절부터 하겠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모세가 아론과 그 남은 아들 엘르아살에게와 이다말에게 이르되 여호와께 드린 화제 중 소제의 남은 것은 지극히 거룩하니 너희는 그것을 취하여 누룩을 넣지 말고 단 곁에서 먹되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네 응식과 네 아들의 응식인즉 너희는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 내가 명령을 받았느니라 흔든 가슴과 든 뒷다리는 너와 네 자녀가 너와 함께 정결한 곳에서 먹을찌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화목제 희생 중에서 네 응식과 네 자손의 응식으로 주신 것임이니라 그 든 뒷다리와 흔든 가슴을 화제의 기름과 함께 가져다가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찌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너와 네 자손의 영원한 응식이니라”

이것 안 하면 지옥 갑니까? 방금 읽은 본문을 보면서 우리의 느낌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너무 잔소리가 심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규칙이 너무 많아요. 모세가 이걸 제사장에게 지시합니다. 제사장 나라지만 모세가 제일 지도자고 그 밑에 아론이 있고 아론의 자식들이 있어요. 모세가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계명을 언급할 때 계명을 받은 제사장과 아론과 오늘날 이 본문을 보는 우리의 느낌은 계속해서 숙제 같은 과제가 인간 쪽으로 넘어온단 말이죠.

그럴 때 주신 과제를 지켰다면 그 다음에 없느냐? 다른 과제가 또 주어질 거잖아요. 또 주어진 과제 지키면 지난 과제는 더 이상 묻지 않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지난 번 과제에 엎친 데 덮치는 식으로 계속 과제가 누적이 되고 누적이 되겠지요. 그러면 이걸 다 지킨다는 것은 우리 사적인 개인생활은 언제 합니까? 티비는 언제 보고 영화구경 갈 시간도 없는데? 이것 한다고. 연애할 시간도 없겠다.

한 번으로 끝날 것이면 눈 감고 해드리자고 해치우면 되는 데 계속해서 주어질 건데 나중에 그 무거운 짐을 지다 자빠지고 엎어지지요. 어떤 여자가 시집갔는데 1월에 제사 지냈단 말이죠. 제사 지내보니까 너무 힘들어요. 1년에 제사 한두 번이면 지낼만하겠지. 1년에 한두 번이 아니고 한 달에 두 번, 2월엔 보름까지 해서 세 번, 3월엔 네 번이라면 숨 못 쉽니다. 이혼 감이에요. 이래서는 더는 못 산다고 나오겠죠.

사람들이 레위기 대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안 지켜도 되는 어떤 묘책을 내놓든지, 이 이야기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든지, 이것 안 지켜도 다른 것 지키면 구원해주시든지, 레위기 10장 내용을 몰라도 구원에 지장 없도록 해주시든지, 그럴 경우에만 나와 상관없으니까 그냥 보자, 그렇게 되겠는데 만약에 레위기 10장 봤어? 그런데 넌 왜 안 지켰어, 라고 닦달내면 우린 못 견딥니다. 그래서 이걸 보면서 우린 굉장히 힘들어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게 있어요. 오늘 레위기 10장 12절부터 하는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우리는 십자가 또는 예수님이 중보자로 오셔서 예수님의 공로로 하늘나라 간다. 이건 확정된 거죠. 확정된 복음으로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레위기 10장이란 말이죠. 모세가 잔소리를 되게 합니다. 무슨 말인지도 몰라요. 음식은 아는데 ‘응식’은 또 뭡니까? 무슨 이런 단어가 있는지. 도대체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면 되는데 레위기 10장 당시에 모세가 딴소리하지 말고 그 당시에 미리 당겨서 모세가 예수님 소개하면 되잖아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 이야기 하나도 없단 말이죠.

이방인인 우리는 조상 제사도 안 드리는데 이런 제사 있겠어요? 이것까지 주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고? 지금이라도 양 한 마리 잡을까요? 양 잡아도 안 돼요. 옷도 맞춰야 되고, 한두 가지가 아니란 말이죠. 레위기 10장에 이르는데. 따라서 결국 우리와 상관없는 거라면 아예 안 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어요. 내 구원과 관련이 없다면 그냥 넘어갑시다, 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넘어갈 수 있다면 레위기 10장이 여기 적혀있겠습니까? 이게 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돼있습니다. 레위기 10장과 연관된 예수님과 레위기 10장을 모르는 예수님이 다릅니다. 예수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게 아니고 레위기 10장 내용과 관련지어진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라는 껍데기 안에 레위기 10장을 채웁시다. 만두 속 넣듯이 찐빵 앙꼬 넣듯이 우리가 흔히 아는 상식의 예수님에다 레위기 10장을 채우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채우는가? 그건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6절부터 20절에 나오는데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모세와 모세의 지시를 받은 아론이 의견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이건 반란이죠. 이건 도발한 거예요. 감히 그 당시 하나님의 중계자라 할 수 있는 모세에 대해서 아론이 달려들고 놀라운 반발을 하는 겁니다.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가로되 이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뇨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그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였으니 그 제육은 너희가 나의 명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할 것이니라”(16~18)

모세가 조카들을 나무라요.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만 오늘날 우리는, 울산중공업 다니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속죄제 제물에 두 종류가 있어요. 제사장을 위한 속죄제물은 먹지 말고 제단에서 다 태워야 됩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의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일부를 반드시 먹도록 돼있어요. 그런데 모세가 보니까 고기를 안 먹은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화를 내면서, “내가 규례를 아는데 너희들이 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왜 안 먹었어!” 상급자가 밑에 제사장들을 나무랐단 말이죠.

그러면 잘못됐습니다, 라고 하면 독자들이 납득이 되거든요. 역시 아론도 인간인지라 실수했구나, 하겠는데 18절에 보면, “그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였으니 그 제육은 너희가 나의 명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할 것이니라”라고 고기를 먹어야 했었다, 라고 하니까 19절에 하는 말이,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이게 무슨 말이냔 말이죠. 상당히 어렵지요. 이게 대드니까 어려운 거예요. 어딜 감히. 시내 산에서 직접 하나님 만나서 명령 받은 사람에게 아무 소리 말고 잘못됐다고 하면 되는데 시키는 대로 안 해서 죄송합니다, 하면 되는데 막 대드는 거예요. 지가 어떤 의견이 있는 것처럼.

이것이 오늘날 레위기 10장이 담긴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시 다가와야 돼요.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두 개의 단어를 적어보겠습니다. 법칙과 규칙, 이 두 단어를 차이를 두겠어요. 법칙은 이미 확정된 겁니다. 모든 내용이 확정됐으니까 폐쇄적입니다. 융통성이 없어요. 반드시 지켜야 돼요. 규칙은 그때그때 주어진 새로운 상황에 따라서 유도리라 하지요. 융통성을 가질 필요가 있을 때는 폐쇄적이 아니고 미확정적이고 개방적이에요.

법칙이란 모세의 의견이에요. “일반인들이 드린 속죄 제물에 대해서 제사장이 먹으라 했는데 왜 안 먹었어?”라고 했고, 아론의 주장은 규칙에 해당되는 겁니다. 법칙대로 했어도 우리 아들 둘 죽었잖아요, 하는 겁니다. 누가봐도 아론의 아들 아답과 아비후가 향로 불 잘못해서 죽었잖아요. 아론은 그렇게 해석하지 말자는 겁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향로 불을 바치는 것이 법칙으로 작용해서 죽은 게 아니고 그 향로 불과 관련 없이 아답과 아비후는 하나님 보시기에 죽을만해서 죽었다고 이해해야 된다는 겁니다. 겉으론 하나님 보시기에 향로 불은 핑계고 그 두 아들은 언젠가는 또 다른 이유로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존재로 우리 앞에 시범 조로 제시됐다는 겁니다.

무엇이 잘못되어 죽었다면 잘못된 게 원인이고 죽음이 결과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걸 뒤집어보자는 겁니다. 죽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향로 불을 빌미로 삼았다고 보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답과 아비후는 죽음으로써 인간들이 이해하는 제사법이 더 이상 수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법칙이 율법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되게 어렵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그게 맞는다고 생각하나? 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믿습니다. 맞습니다. 만약에 그 내용이 아니라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면 어떻게 할래? 저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법칙으로 했는데요?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만약에 52살 때라 합시다. 그리고 53살까지 산다고 칩시다. 52살 때 예수님 십자가 피로 용서받는다는 걸 알았다면 그 법칙이 53세 때도 똑같은 이야기한다고 해서 52세 때 이야기한 사고방식이 그대로 인수받았을까요, 달라졌을까요? 같을 내용일까요, 다른 내용일까요? 달라져요. 왜? 내가 다르기 때문에. 내가 달라졌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를 처음에는 눈물 흘리면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3년 6개월 7일 만에 그 노래를 불렀을 때 눈물 납니까? 4절까지 지겨워죽겠다. 3절이면 좋았을걸. 찬송가는 왜 이렇게 길어. 유행가는 2절로 끝인데 찬송가는 4절까지. 왜 같은 찬송가인데 시간이 좀 지났다고 별 감흥이 없는 이유가 뭡니까? 찬송가는 안 바뀌었어요. 시시각각으로 내가 바뀐다고요. 52살에 십자가 알았다고 53살에 써먹을 생각하지 마세요.

율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법칙이 아닙니다. 율법은 인간의 입장에서 늘 바뀔 수밖에 없는 규칙의 입장에 있어요. 그런데 규칙은 주님 쪽에서 바뀐 게 아니고 우리가 바뀌니까 바뀌는 나를 끝까지 따라붙기 위해서는 변신과 변신을 계속해서 반복되는 겁니다. 갱신과 갱신을 계속하는 거예요.

이래서는 무슨 뜻인지 모를 테니까 제가 어떤 문장을 이야기할 테니까 사실은 방금 이야기한 것보다 더 어려운 이야기지만 들어나 놓으세요. “세상사는 인간 힘으로 좌우되는 게 아닙니다.” 맞아요, 틀렸어요? 맞지요. 지금 우리나라에 비가 안 와서 가물지요. 여기선 비 오는지 모르지만 대구는 십일 동안 3미리 왔어요. 일주일 동안 비 한 방울 구경도 못했어요. 그러면 농사짓는 사람들은 걱정되지요.

그런데 왜 걱정합니까? 지구 담당자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지구가 하나님 것으로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 관리하는데 제 삼자가 왜 주제넘게 끼어듭니까? 제대로 알아서 관리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 안 왔습니다. 비 안 오고 굶어죽지요. 죽으라고 비 안 온 거예요. 죽어야 될 인간이 살아나면 하나님이 관리 잘못하신 거예요. 죽을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려요. 왜냐하면 이 세상 담당자가 주님이기 때문에. 그걸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세상사는 인간 힘으로 좌우되는 게 아니다. 이게 맞다고 동의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맞습니까? “세상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좌우된다.” 이 말이 맞아요, 틀려요? 세상사는 인간의 힘으로 좌우되는 게 아닙니다. 반대로 세상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좌우된다. 이것도 틀린 말이에요. 그러면 바른 말은 뭐냐 하면, “세상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으로 좌우된다.” 이게 맞는 말이에요. 앞의 말과 다른 점이 뭐냐 하면, 앞에는 문장이 하나밖에 없는데 뒤에 이야기하는 것은 두 문장을 합친 게 차이 나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세상만사는 하나님 뜻으로 된다는 말을 하나님이 정답으로 쳐주질 않아요. 왜냐하면 무책임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다 시켜서 하는 것이기에 난 책임 없다. 이게 얼마나 얍삽한 짓이고 무책임한 짓입니까? 남을 때려놓고, 도둑질해놓고 이건 하나님이 허락해서 한 일이니까 내 책임 아니다. 이게 얼마나 싸가지 없는 짓이에요. 지구에 비 안 오는 것은 하나님 뜻이지 내 뜻 아니다. 그래서 죽을래? 논에 물 안 대고 넌 놀래?

사람들은 법칙을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하나님과 연관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법칙과 규칙 둘 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연관시키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어떤 율법을 줬다고 할 때 율법의 뉘앙스가 법칙에 해당돼요. 그래서 인간은 어떤 실수를 하느냐 하면 나는 법대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책임 없고 죄인 아닙니다, 라는 실수를 하는 거예요. 나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습니다. 영생 얻기 위해서 뭐가 필요한지 알려주시면 또 지키겠습니다. 이게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치명적인 실수였어요. 십계명을 법칙으로 본 거예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준 법이기 때문에 성경 말씀이기 때문에 이거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그게 듣기 싫은 거예요. 왜냐하면 성경말씀이 오류 없고 완벽하다는 그 고백이 인간 입에서 내뱉기 때문에. 인간 입에서 내뱉는 그 주둥이가 미워.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누가 복음을 전하는데 그 복음의 내용에 하자가 무엇입니까, 복음의 내용에 문제가 있습니까? 복음은 아무리 전해도 하자가 발생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전해서 누구 한 명도 구원 못 받아요. 성령이 오셔야 구원돼요. 말발 좋고 설득 잘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구원은 성령의 몫이지 인간 전도자의 몫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한 명도 구원 못했어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고. 천국 가 보세요. 주님이 알아서 구원한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이 구원할 수 있습니까? 구원할 수 없습니다.

불교 좀 안다는 사람과 복음 아는 사람이 대화한다고 하면, 불교 알고 인문학, 철학 좀 공부한 사람은 소위 기독교인들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미리 반박할 준비를 해요. 날 설득해서 신자 만들어봐. 사도행전에도 나오잖아요. “아그립바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27~29)

만약에 이렇게 이야기해봅시다. 성경 말씀에 예수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이 없고 저주가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저쪽에선 기다렸다는 듯이 그 성경 누가 썼는데? 내가 알기에는 성경을 누가 쓴 게 아니고 나중에 편집했는데 편집한 내용이 온전치 못해서 도마복음을 집어넣느냐, 마느냐 지금도 의견이 분분한 그러한 미확정적이고 불완전한 성경책으로 인간이 만든 저서를 하나님의 책이라고 우기면서 나한테 들이미느냐, 라고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성경에 보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6,17) 이건 성령으로 썼습니다, 라고 궁색한 변명을 하게 되면 안 믿는 사람, 공부 좀 한 사람이 그 내용도 성경 안에 있잖아. 성경 바깥에서 이야기해. 성경 바깥의 하나님의 어떤 뜻으로 이야기해야지. 성경으로 공격하려고 했는데 성경 덮자고 하면 졌다고 할까요?

안 믿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있음에서 나와요. 그 있음 가운데 풀도 새도 있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있는 내가 죽어서 천국 가든 지옥 가든 결정은 내가 한다는 거예요. 내 앞에 있는 네가 하는 말이 납득되면 믿어줄게. 있음에서 있음으로 출발해요. 성경책으로 들이대면 성경도 거기 있잖아요. 모든 것이 있음이 돼버려요.

그러면 복음 아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돼요. 있는 것 말고 없는 걸 이야기해야 돼요.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면 저쪽에선 성경이야기하다 자기 공격에 차질이 일어났지요. 어? 성령께서? 성령은 눈에 안 보이니까 빼고 이야기하자고 하겠지요. 바로 네가 판단하고 있다고 하기 때문에 네가 생각하는 그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놓치고 있다고 이야길 해야 돼요. 나는 내가 아는 게 전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야기하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그것은 바로 성령이 하는 일을 못 보니까 놓치고 있는 거예요.

모세가 율법 안에서 이야기하자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께 이런 지시를 받았다는 거예요. 일반인들이 드린 속죄제는 고기를 먹는 것이 법칙에 맞는다는 겁니다. 아론이 말하기를 모세가 말대로 그렇게 하든, 안 먹든 간에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지요. 그 죽음 앞에서 그런 규칙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죠.

이게 19절에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자기 두 아들이 죽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까짓 것 먹고, 안 먹고 그게 무슨 의미가 되느냐 그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오느냐 말이죠. 아니거든요. 당신 말대로 법칙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자부한들 하나님이, “너희들의 완벽함을 당할 수가 없네. 너희 소원대로 너희들에게 일임하마.” 이렇게 나오시겠느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도 사회생활하면서 그런 경험 많잖아요. 아들 수능 앞두고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해요. 갑자기 성경을 보다든지 새벽기도에 나간다든지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까 뭔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갑자기 열심 내고 교회 충성도 하고 그동안 몇 번 빼먹은 십일조도 한꺼번에 완납하고 해서 아들 수능 점수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잘 보인다고 하거든요. 보통 열한 시 10분에 오던 사람이 갑자가 열한 시 10분 전에 와서 준비 찬송도 같이 하고. 이렇게 한 이유가 발등에 불 난 게 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조신하게 하고 나쁜 생각, 나쁜 행동 멀리하고 했는데 점수가 예상대로 안 나왔어. 여러분 어떡하면 좋아요. 자기 딴에 온갖 아양을 다 떨었는데. 거기다가 아들이 엄마 약을 올리네. 엄마, 기도발 영 시원찮네. 엄마 신앙까지 의심합니다. 엄마가 신앙적으로 권위를 갖춰야 엄마 말발 하나하나가 아들에게 진리로 전달되는데 아들은 그걸 지켜보면서 믿을 마음 준비를 했는데 점수는 깎였을 때 재수는 따 논 당상이라.

그럴 때 여러분은 마음정리는 어떻게 합니까? “세상일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는구나.” 이렇게 하죠. 그게 아니란 말이죠. 역시 이근호 목사 말이 맞아. 세상은 주의 뜻대로 하는 거야. 자꾸 내 핑계 대지 마세요. 그게 하나님 주권이 아니에요. 하나님 주권은 없어요. 하나님을 법칙화시킨 이것을 실패로 끝나도록 한 게 하나님 일입니다. 내가 이런 짓거리해서 하나님을 좌지우지 하고 조정하려 한 은근히 숨어 있는 그 자체를 무산되게 만들 때 그 사람은 복 받은 겁니다.

하나님은 저기 전능하신 분으로 계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고 내 행동에 따라서 달리 반응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내가 모든 걸 포기했을 때 예상 밖의 기쁜 일이 생기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모든 걸 포기했을 때 예상 밖의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전번에 예상 안 했더니만 복을 주셨잖아요. 따라서 이번에도 예상 안 하면 복 주시겠지 기다리다가 그걸 무산시키는 분이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이란 나 하기 나름이에요. 내가 어떻게 하든 나는 되어지는 모든 일에 대해서 영향력을 줄 수 없음을 이론이 아니고 내가 그 실습에 참여케 해서 깨닫게 합니다.

요새 티비에 요리하는 것 많아 나오죠. 그걸 보게 되면 누구나 그렇게 할 것 같아요. 막상 레시피대로 직접 요리하게 되면 예상 밖에 끊어야 될 것들이 너무 많아요. 전화가 와도 받지 말아야 되고 그렇게 집중할 때 내가 예상한 대로 안 돼요. 그럴 경우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요리한다고 될 리가 없어. 초반에 포기할 마음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되게 맛있는 음식이 돼요. 짜도 맛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내 자신이 애초에 내 성과를 눈으로 목격하겠다는 기대를 처음부터 포기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를 거기에 대해서 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게 자기 부인이라는 겁니다.

아론이 하는 이야기는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는 율법을 지키는지 여부에 따라 벌이 오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 벌조차도 새로운 율법으로 추가된 내용으로 우리에게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 아론의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여기 있고 우리가 여기 있고 중간에 제사법, 율법이 있다. 이건 맞는데 맞는 게 맞는 게 아니라니까요. 율법으로 우리를 덮쳐버려요. 마치 지붕이 무너지는 것처럼. 하늘 있고 지붕 있고 방안에 내가 누워있다. 맞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위에서 누르면 지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은 고려 안 합니까? 그들은 고려 안 해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 있고 지붕 있고 방 있다는 것을 내가 알았기에 설마 이걸 아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지붕을 누를 리가 없을 것이라고 자기의 안전과 자기 행복을 하나님을 이용해서 먼저 챙기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율법은 우리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율법은 앞에 다가올 재앙을 미리 대처하라고 준 게 아니란 말이죠. 오히려 반대입니다. 주님이여, 어떤 재앙이 오더라도 저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 인간으로 변하라고 율법을 준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자신을 사랑해서 자신은 손톱만큼도 다치지 않도록 그저 하나님께 안부하는 쪽으로 빌고 순종하는 것, 그건 전혀 율법의 정신과 동떨어진 거예요. 그건 신앙이 아니고 이용입니다. 그건 잘못된 거예요.

당하면 당할 때도 감사히 당해야지요. 가만있는데 지붕이 무너졌다? “아이고, 안 됐네.”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 틀린 말이에요.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나는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나는 가만있는데 하나님이 눌러서 무너졌으니까 내 책임 아닙니다. 이게 정답이 아니고, 우리 집이 폭삭 망하고 난 뒤에 내가 그동안 평안한 것도 나의 오만이었고 내가 마땅히 평안해야 돼, 라고 한 것도 자만이었습니다. 나의 객기였고 나의 시건방짐이었습니다. 자인하는 기회를 주께서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제사법이나 모든 것 하나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에 내용을 집어넣어봅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 오신 분이 아니죠. 우리를 박살내려 오신 분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박살나도 마땅한 자고.

예수님이 이런 말했다고요.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 간단 이야기를 했잖아요. 왜 세리와 창기를 주께서 거론했느냐 하면, 그 당시에 세리와 창기가 가장 지탄받는 사람들이었어요. 지탄받을 만하지요. 더럽게 돈을 벌었잖아요. 돈을 벌어도 정말 지저분하게 돈을 벌었잖아요. 남의 가정 파탄 나든 말든 지 입에 밥 들어가면 최고다. 그게 창녀가 그게 세리란 말이죠. 남이야 죽든 말든. 돈이란 흐름이 제한돼있거든요. 내가 과도히 가져오면 나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거든요. 세리와 창기는 난 몰라. 나만 배부르면 그만이야. 이런 짓거리한 게 세리와 창기에요.

그런데 주님께선 세리와 창기가 천국에 먼저 간다고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다 세리와 창기가 될까요? 그런 뜻이 아니고 주님 앞에서는 누구든지 세리와 창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 주님께 구원받을 때 나는 세리라서 감사해요. 이럴 게 아니고 너는 세리, 창기 이전에 죄인이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 몫이거든요.

오늘날 구원은 이미 죽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자기 죽음의 세계 속으로 끌고 가는 그 힘이 구원의 힘이에요. 죽음의 힘이 나를 끌고 갈 때 구원된다 이 말입니다. 살아있는 내가 발광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죽음 저편에 성공적으로 건너가신 분의 힘, 그게 성령의 힘이거든요. 그 부활의 힘으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질질 끌고서 죽음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하게 만드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이를 때까지 주님의 모습은 뭐냐? 죄도 없으시면서 죄인의 모습으로 아버지 앞에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건방지게 맨날 죄 지으면서도 마치 얼추 의인인 척하는 우리를 주님께서 가만두지 않지요. 말씀으로 우리를 죄인 만들어버려요. 그 만드는 방법은 나름대로 율법 지켰다고 하고 아들 수능 치는데 겸손했다고 했는데 전혀 우리 예상대로 안 되게 될 때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란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듭니다.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것 중에 아들 수능 점수가 떨어지고 얘가 아픈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던져놓은 땅인데 갑자기 건물 짓는다고 건설회사에서 산 값에 백배를 쳐준다고 제발 팔아달라고 나올 때 우리 입에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안 되고, “주여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갑자기 쓸모없는 땅 도로 난다고 해서 보상금 받은 경험들 없어요? 보상금 받고 갈등 생기지 않던가요? 도대체 이 보상금의 몇 프로를 헌금해야 할지 갑자기 그 걱정이 들지 않던가요?

인간 속에 얼마나 악마의 유혹과 욕망이 겹겹이 쌓였기에 주께서 떼도, 떼도 계속해서 나와요. 계속해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뽑아내는데 52살에 얼추 다 나왔다고 했는데 53살, 54살에도 나올 게 또 있고. 70살에 나올 게 또 있고. 그렇게 나올 때 우리는 얼마나 변명을 합니까? 십자가 복음을 압니다. 성경말씀 압니다. 알면 뭐합니까? 그게 아는 거예요? 네 행동하는 것 봐서 진짜 그게 아는 것인지 착각한 것인지 정말 안다면 죄인 중에 괴수란 말이 나올 것이고,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재앙을 주십니까? 네가 뭔데? 네가 뭐 특별하다고 하필 저에게, 라고 하는 거야. 평소에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벽에 고정된 십자가가 아니에요. 집에 있더라도 떼란 소린 안 하겠는데 십자가가 우릴 갖고 놉니다. 울산 바닥에서. 매일같이 십자가로 우릴 활용해요.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우리는 십자가를 법칙화시키지만 주님께선 십자가를 규칙화시켜요. 오늘까지 알고 죽으면 되는데 내일 또 살면 내일치의 십자가에 담긴 내용이 새롭게 규칙이 갱신 됩니다. 그렇게 갱신되면 우린 지식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 놀아난다는 이것이 중요해요. 십자가에 놀아날 때 우리는 십자가의 증인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위반할 때 죄의식을 느끼던가요, 아니면 불행할 때 죄의식을 느낍니까? 어느 쪽입니까? 여러분이 기분이 안 좋을 때 죄의식을 더 느끼지 않습니까? 요새 우울해. 내가 무슨 죄 지었나? 요즘 내가 왜 불행하지? 그만큼 사람들은 말씀 모르고 자기의 행복이냐, 불행이냐 기분 따라서 그때그때 말씀을 이해한다,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10분간 쉽시다.
 한윤범(IP:14.♡.134.10) 17-07-11 10:16 
20170707b 울산강의-레위기 10장 : 제사 안에서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강의 끝부분 다시 할게요. 인간이 죄의식을 느끼는 경우가 법을 어겼을 때가 아니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낄 때.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반드시 행복하게 돼있는데 내가 왜 불행할까? 갱년기라서 그렇거든요. 갱년기와 십자가 아무 상관없는데 기분이 우울해서 내가 죄가 많아서 우울하다고 관련시키는 겁니다.

두 번째 강의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외부를 관찰해요. 바깥의 것을 활용해서 나의 행복이 목적이 돼요. 그런데 나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도 다니고 예수도 믿고 모든 걸 하는 거예요. 자기가 장래에 죽고 난 뒤에 천국 가면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문제는 행복이 쾌락이거든요. 즐거움. 행복이 어느 선까지 오면 행복이냐? 이쯤이면 행복이라는 게 없어요. 행복하다는 그 순간부터 허탈이 주어집니다. 그것으로 성이 안 차요.

계속해서 행복이 쫓기듯이 또는 뭔가 귀신이 날 부르는 것 같아. 이쯤 와야 행복하잖아아아아~ 귀신이 자꾸 불러. 그 정도로는 안 되잖아아아아~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것처럼 불러댄단 말이죠. 그러니까 허겁지겁 거리면서 더 나은 행복, 쾌락, 만족을 위해서 여기다 뭘 동원시키느냐 하면, 성경보기, 헌금하기, 전도하기, 교회봉사하기 불쏘시개처럼 막 집어넣어요. 시키는 대로 집어넣어서 목적은 나의 행복, 그리고 끝도 한도 없는 행복.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는 행복. 이러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관찰해서 나와서. 뭔가 주시한다는 것, 저게 탐이 난다는 것, 십자가 내 바깥에 있고 하나님이 저 하늘에 있다는 것, 이게 관찰이잖아요. 나는 주님의 십자가 과거를 생각한다. 현재의 주님이 아니고 과거의 주님을 생각하고 과거에 성경 보면서 성지순례하면서 고고학적 과거를 밟으면서 그때 주님 고생한 것을 회상하려고 하는 거예요. 회상한다는 말은 지금은 아니고 그때 그 모습을 기껏 어줍지 않은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백날 상상해봐야 목적은 고정돼있어요. 그렇게 상상해서 내가 주의 복을 받은 것이라고 사적인 감언, 즐거움, 쾌락, 희락에 스스로 도취돼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레위기를 보세요. 굉장히 냉정합니다. 자기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다는 사실, 이것은 바로 이유 있어 죽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죽였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았으니까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도 그 죽음을 새롭게 율법의 내용을 전달시킨 기회로 보자는 겁니다. 기회를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10장 1절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 제사장이 죽었지요. 제사장이 죽은 게 아니고 신이 죽은 거예요. 하나님이 죽은 걸로 이해해야 됩니다. 신이 죽었다고 하니까 니체가 생각나지요. 신은 이미 죽었다고 한 이야기의 근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인간이 주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나의 주인이다. 내가 모든 것의 주체가 된다는 말이거든요. 이것은 여러분이 이미 마음속으로 다 알고 있잖아요. 교회 다녀도 여러분이 주인공이 아닙니까?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죠.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한 이유가 뭐냐 하면, 니체의 말입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한 의지가 나오는데 그 의지가, “네가 너의 주인이야.” 그 의지가 우리한테 계속해서 강권하여 부추기고 있는데 그 의지는 자신이 말릴 수 없다는 거예요. 그 의지를 니체는 그걸 힘, 권력으로 봤습니다. 힘 의지, 권력 의지라고 해요. 우리는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내가 되고자 하는 힘에 놀아나고 있으니 그 힘을 드러내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본인이 제대로 솔직하게 사는 모습이다. 이걸 초인.

우리가 곧 신인데 신을 찾지 말자. 그런데 왜 신을 찾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자기의 주체됨을 포기하고 노혜 근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는 어떤 노예근성도 탈피하고 세상은 우리가 만든다는 의식으로 살아가자. 이 니체의 정신이 히틀러까지 이어졌고 세상의 사람들은 이것으로 나갑니다. 요새 초등학생도 립스틱 칠하고 다닌다는 거예요. 이게 초인이에요. 내 인생은 내가 꾸밀 줄 아는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 시대가 미쳐 돌아가는 시대에요. 며칠 전에 대구에서 퀴어 축제를 벌였어요. 동성애 축제를 벌인 거예요. 서울광장에서 3년째 2만 명 모여서 축제를 벌일 계획이 돼있습니다. 동성애란 정신병자거든요. 일반적인 상식은 이래야 돼요. “우리 병들었어요. 불쌍히 여겨주세요.” 이것까지는 봐줄 수 있는데 “우린 병들어도 정상이야. 그러니까 너희들도 나처럼 살아. 우린 그럴 권리가 있어.” 그걸 허용하면 안 되잖아요. 어떻게 고쳐달라고 하면 수용하겠는데 우리는 당당합니다. 이건 아니란 말이죠. 정신병자가 칼로 사람 죽여 놓고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어떤 의지가 안 거야. 그러니까 난 책임이 없어요.

동성애 축제 벌이면 그 다음에는 전국 사기꾼 축제를 벌입니다. 사기꾼으로 사는 것도 하나에 재주다. 그 다음에 가스관 타고 올라가는 전국 도둑놈협회 나올 거고. 나중에는 골프 치는 사람한테 접근해서 등쳐먹는 이걸 꽃뱀이라 하지 않고 골프장에서 한다고 해서 들뱀이라고 해요. 이렇게 사는 것도 권리를 보장하라고 나온다니까. 그리고 인권을 앞세움으로 그걸 민주주의이라 해요. 조금만 아니라고 하면 전체주의, 파시즘이라 하고. 한 마디로 세상이 미쳤어요. 그런데 요즘 와서 미친 게 아니고 처음부터 미쳤어요. 관찰이에요.

나는 무엇이 행복하냐? 니체 말이 맞아요. 그동안 엄마 말 듣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엄마가 맞벌이하느라 정신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내가 하는 의지를 유튜브에서 배워요. 동영상으로 배워요. 동성애란 것도 이성애적으로는 재미없거든요. 덜 쾌락적이고 덜 자극적이니까 그 선을 넘어가면 뭐가 있을까? 일단 넘어가놓고는 넘어간 자기를 정당화해요. 우리의 권리를 보장해 달라. 왜? 민주주의니까.

전 세계 23개국에서 동성애 결혼을 인정했다는 거예요. 네덜란드에서 제일 먼저 했고, 얼마 전에 런던에서 동성애 부부를 인정했어요. 네덜란드는 세계 최초의 개신교 국가였어요. 성경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음이 중요하지 성경 있음은 뒷전이에요. 내가 있는 게 중요해요, 성경 있는 게 중요해요? 내가 있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가 이 내가 오늘날 교회에 다 퍼져있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신앙인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돈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로 결정됩니다. 가정교육도 다 그렇게 하고. 인품? 잘 사는 집안 아이들 다 좋아요. 그 집안에 돈 있을 시간까지만 좋아요. 돈 없는 집안은 인품도 나빠요. 항상 돈 없다고 싸우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품보다 돈이 우선하는 세계에요. 이 세상이. 다 아는 이야기를 쉬쉬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전부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관찰에서 나왔어요. 과학이 왜 뜨느냐? 관찰이에요. 별이 있고
망원경이란 도구를 사용하지요.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그 눈은 내 눈이잖아요. 결국은 망원경을 몇 배로 확대하든 간에 관찰하는 거예요. 보는 것만 믿겠다는 겁니다. 내가 보고 자신한테 도움 되는 것만 추려서 믿겠다는 겁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잖아요. 향로 불을 잘못 다뤄서 죽었다. 이것은 눈 있는 사람은 그렇게 관찰되는 겁니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것을 확대시키면 이렇게 돼요. 제사 안에서 보는 제사와 제사 밖에서 보는 제사가 달라요. 제사 밖에서 제사를 보게 되면 제사 잘못 드리면 큰일 난다. 우리가 죽는 수가 있다. 앞으로 향로 불에 제대로 담아서 드려라. 그러면 율법 완성 되는 겁니까? 향로 불 제대로 드리면 천국 갑니까? 제가 알고 있는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가요. 언약의 피로 용서받아 간다고요. 향로 불 잘 드려서 나답과 아비후 같이 안 되면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둘이 짝이 되는데 그들이 헌금 반을 빼돌려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헌금 안 빼돌리고 처음 마음먹은 대로 드렸으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그게 아니라고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 반 속여서 드려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헌금할 때 제대로 헌금하자. 이게 관찰이에요. 제사 밖에서 제사 보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고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자기에 손해되고 행복에 방해되는 것을 사전에 예방 차원에서 행동을 조신하려는 하나에 수완, 요령부리기에 지나지 않아요.

교인들은 교회 올 때 요령부리며 오고 목사는 고객에 맞추어서 요령부리는 기술 가르쳐주고. 어떤 장로 돈 아끼지 않고 헌금 했더니만 사업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것도 요령이라니까요. 처세술이에요. 자기 생존에 테크닉에 불과한 겁니다. 그게 이단이 아니면 뭐가 이단이에요. 힐링? 힐링 같은 소리하고 있네. 힐링의 뜻이 뭡니까? 마음 고치는 거잖아요. 고쳐서 뭐 할 건데.

지금 레위기 10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신이 죽었다는 거예요. 신이 죽었으니까 너희도 따라 죽으란 겁니다. 죽은 것 보고 난 안 죽을래, 하지 말란 말이에요. 자칫하면 죽을 뻔했네. 우린 살자, 이렇게 단결하지 말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 뜻은 이겁니다. 죽어봐야 무엇이 생명인지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사 밖에 있지 말고 제사 안에 들어와서 제사 안에 들어오게 되면 내가 제사법을 지킨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착오인 것을 아셔야 해요. 여러분, 십자가 안에서는 말씀을 못 지킵니다. 물론 십자가 밖에서도 못 지키지만. 못 지키는 이유가 십자가 안에서 말씀 지킬 주체가 없어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주께서 사신 것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전까지는, 하나님 사진 찍으세요. 순종, 순종. 아들에게 칼을 들이댔지요. 자기가 받은 정보는 그것뿐이었어요. 아들을 바치면 믿음인 줄 알겠노라. 자기가 아는 정보는 그것뿐이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정보는 몰랐습니다. 칼을 거두어라. 이 정보는 사전에 받은 적이 없어요. 주님이 개입했습니다. “됐어, 그만. 거기까지 네 역할.” 수풀에 양 있다. 수풀에 양이 가둬있다는 이야기는, 그것은 듣도 보도 못한 정보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브라함이 자식 이삭을 바치는 것이 아브라함 본인의 믿음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테스트인 줄 알았지요. 그게 테스트가 아니고 그것마저 하나님의 일로 흡수 통합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에 소재가 돼요. 하나님이 그림 그리는데 물감의 한 종류가 돼버렸어요. 날름 그 전체가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 일이 장차 예수님 오실 때 아버지를 위해서 아들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는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그래서 모든 율법과 말씀이 완성이 되는 최후의 테스트를 앞당겨서 아브라함은 거기에 참여한 거예요.

북한의 김일성 생일 때 퍼레이드를 하고 운동장에 모여서 카드섹션을 하죠. 김정은 동지 만세, 글자가 뜨잖아요. 거기에 평양동중학교 2학년 4반이 카드섹션에 참여했다고 칩시다. 자기가 들고 있는 패널 한 조각은 김정은 동지 최고, 라고 안 나와 있어요. 김정은의 ‘ㄴ’ 일부잖아요. 전체 이미지는 누가 관찰합니까? 본부석에 앉아있는 김정은이 관찰하잖아요. 전체 그림은 하나님 아버지가 보시는 겁니다. 거기는 아브라함은 ‘ㄴ’ 끄트머리에 참여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한 일을 우리가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은사는 다양한 거예요.

아브라함은 지 아들 바치는 식으로 참여했고. 우리는 골프 치는 것으로 참여하고. “나이스 샷!” 하면서 주께 영광 돌리고. 다 달라요. 골프 쳐서 천당 가나, 자기 아들 바쳐 천당 가나 결국 예수님의 이미지에 합류해서 구원받기는 마찬가지거든요. 관찰자는 한 사람만 있으면 돼요. 주가 되신 주님만 보면 되지 우리는 거기에 파편들이고 조각들이란 말이죠. 참여한 거예요.

그래서 막 사에요. 만약에 우리가 막 살지 않고 정신 차려서 주님께 영광 돌린다면 내가 구원받을 요건을 여기서 장만하고 있어요. 그래놓고 내 믿음 좋으니까 날 건드리지 말라는 식으로 나오고.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한다. 그게 자기 몸에 예수 피를 믿어서 구원받는다는 관찰을 자기가 해요. 자기를 믿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잘 믿는다고 상상한 내가 주체가 되어 믿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종교잖아요.

제사 안에서 보면 메시아가 죽어요. 메시아가 제사장으로 왔거든요. 그런데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죽잖아요. 다시 말해서 제사의 중심은 제사를 잘 드림에 있는 게 아니고 제사 과정에서 누가 죽었다는 이 점에 제사에 핵심을 이루는 겁니다. 그 이유가, 누구든지 자기 죽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싫어하는 것을 주님이 대신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아무것도 안 하고 구원받는 법은 없어요. 뭐든지 하게 마련인데 그 한다는 그것이 죽음과 이어져있게 되면 언젠가 죽는다고 생각하면서 하게 되면 그게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에 참여함이 되게 돼있어요. 나는 삼성그룹 이사 되어 죽을래.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받는 겁니다. 나는 이번에 외무부장관 되어 죽을래. 그러면 그 외무부장관이 구원받습니다.

이번에 당신을 인도에 대사로 파견합니다. 주께서 또 죽이시는구나. 자자, 인도에 가서 죽어야지. 그러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관련돼있는 겁니다. 땅 툭 던져놨는데 보상금 백배 받았다. 돈에 치어죽어라. 주여 돈에 치어죽겠습니다. 돈에 뒤집어서 살겠습니다, 하면 안 돼요. 돈에 뒤집어 죽겠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실은 그런 생각이 잘 안 떠올라요. 왜냐하면 우리는 니체에 의해서 내가 신이 되는 권력 의지가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독자적으로 살고 싶어 하지 이런 식으로 죽고 싶어 하지 않아요.

제가 강의할 때 요 근래 여러 번 하는 게 중요해서 그런데요. 남녀가 부부 되는 것은 같이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혼자 죽는 것보다 같이 죽는 게 덜 외롭잖아요. 그런데 부부로 살려고 한다면 그건 철없는 짓입니다. 같이 죽으라고 결혼하는 거예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자기가 먼저 죽고 난 뒤에 남편이 다른 여자와 결혼할까봐 걱정 되어 요구사항이 있어요. 내가 죽으면 내 옆에 순장해라. 그럴 수 있나, 이렇게 물어요.

얼마나 솔직한지. 이게 권력의지라는 겁니다. 모든 권력의지는 자기 행복이 진리에요. 그 다음에 관찰하는 것이 행복에 도움 되는 사람이냐, 아니냐로 가려가면서 사귀고 자기 권력의지에 맞추어서 태도, 눈빛, 그리고 모든 행동 방식이 내 행복에 보탬이 되는지에 근거해서 그때마다 표정들이 달라요.

그런데 그 앞에서 내가 죽었다. 제사의 핵심이 하나님이 죽은 거예요. 예수님이 죽는 거예요. 사람들은 제사 잘 드려서 될 수 있는 데로 안 죽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교회 다녀서 더 살기를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쉽게 말해서 나랑 같이 죽자. 같이 죽으면 살 것이요, 나랑 같이 죽지 아니하면 죽을 것이다. 부자야, 모든 걸 다 팔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영생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어렵습니까? 어렵진 않잖아요. 어처구니없어서 그렇지.

그래서 성경은 똑똑한 것과 지혜로운 것을 구분합니다. 똑똑한 것은 내 몸 내가 간수하는데 뛰어난 것이고, 지혜롭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 그 마음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 그 마음을 갖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고민이 없어요. 어린아이가 고민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부모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냥 이용할 뿐이에요. 어린아이가 고민하지 않는다는 말은, 부모가 자기를 대신하니까. 부모의 세계 일부가 본인이기 때문에 든든한 부모 세계 안에 있는데 왜 내가 걱정합니까?

따라서 이 말을 다시 정리하면 제사 안에서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은 제사 안에 들어가는 것을 전혀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고 든든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은 지금 죽으러 가거든요. 죽어야 아버지 품에 안기니까. 너희는 내게 배워라. 네 자신을 포기하라. 물론 죽어도 포기 안 돼요. 주님께서 포기 안 되는 나에게 포기되는 나를 생성해서 따로 분리시키는 작업을 성령에게 일임했습니다. 나에게 나의 것이 따로 뽑아나요. 옛사람에서 새 사람이 따로 귀신처럼 빠져나오는 작업을, 성령의 주특기가 그겁니다. 죄인에서 인간을 뽑아내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령세례 받고 난 뒤에 마찬가지에요. 예수님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할 때 히브리서에 보면 성령에 의해서 기도했다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 뜻을 꺾고 아버지 뜻에 순종하게 된 겁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서 아버지가 원하는 그것은 따로 분리하면서 주께서 우리를 데려가는 겁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해요.

사랑으로 뽑아낸다, 안 된다는 것을 어떻게 판정할 수 있느냐 하면, 이렇게 판정되거든요. 여러분,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맞는지 보세요. ①계속 사랑하기, ②미워하기, 어느 게 사랑함일까요? 성경에선 말합니다. 자기를 미워하라. 자기를 왜 미워하느냐 하면 2번은 할 줄 몰라요. 나는 미워하는 것은 할 줄 몰라요. 나는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는 것밖에 못해요. 그래서 내가 남편을 사랑한다, 아내를 사랑한다. 절대로 남편/아내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내 사랑에 부합되는 걸 발견할 때까지 그 사람의 내부를 헤집고 다니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게 나오는지 보자. 안 나와? 우리 갈라서. 우리 헤어져.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이 계속 나오는 조건하에 사랑해주는 겁니다. 결국 사랑함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나한테 회수하는 내가 나 사랑하기에 상대에 말려들기를 간곡하게 노리고 꼬시고 협박하고 공갈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절대로 남을 사랑할 수 없고, 왜냐하면 남은 남이고 나는 나거든요. 내가 남에게 내 의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요. 인간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돼요? 뭐가 사랑이냐 하면, 자기를 미워할 줄 알면 그게 사랑이에요. 왜 우리는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미워하느냐 하면, 그 사람보다 내가 낫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한테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이 더운 날 짜증이 나서 미워하는 거예요. 티비를 켰는데 꼴 보기 싫은 탤런트 나왔다면 채널 돌려버립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드는 게 나왔다. 송혜교와 송중기가 결혼할 줄 알았어. 그 소식을 아는데도 계속 트는 거예요. 계속 보고 싶어서.

우리는 나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진리 같으면 누가 뭐래도 사랑하는 거예요. 기독교신자를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나를 사랑하게 되면 기독교신자든, 통일교든, 여호와증인이든 관계없이 신천지 구천지 다 가리지 않고 잘해줍니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데 나를 안 좋아하는 복음 아는 자? 죽으라고 악 씁니다. 꼴 보기 싫어해요.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정말 사랑이란 나를 미워하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다 회개거리가 되면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영감,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나를 미워하잖아요.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영감이, “평소가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겁난다.” “난 당신을 너무 철저하게 빼먹을 것 다 빼먹었어.”

전에 했잖아요. 나이 70넘은 할아버지가 돈 안 벌어온다고 집 나가라고 한. 나이 70에 어디 가서 돈을 법니까? 아침 차려달라니까 “돈도 못 버는 주제에, 돈 벌어 와라. 아침 차려줄게.” 논리상 맞는 이야기인데 약간 억울한 느낌 안 듭니까? 좀 이상해. 누구든지 만나거든 미워하세요. 그게 사랑입니다.

이 책에 보면 나와 있어요. 내가 보기에도 괜찮다는 내용이 있어요. 자식에게 폭력을 가하면 자식이 살고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자살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육신으로 왔을 때 주님이 자기를 비웠다, 낮췄다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가 얼마나 개판인지 생각해보세요.

온 나라 전체가 동성애밖에 없다면 거기서 정상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산다면 얼마나 욕 얻어먹겠습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전부 미쳤다는 뜻이에요. 악마에 의해서 다 정신병자 돼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보다 정상적이라고 우기며 억지를 부리는 자기 자신을 계속 사랑하는 겁니다. 목사는 지 교회를 사랑하고. 지 교회를 사랑하니까 주님을 복음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교회가 깨어져도 난 예수님만 사랑할래.” 이런 목사 어디 있어요. 그런 목사 봤습니까? 내가 얼마나 공 드린 교회인데 이걸 왜 놓쳐. 그런 목사도 목사라고 설교 들으면서 앉아있는 이유는 서로 통하기 때문에. 교인들도 교회 왔다 후다닥 가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집구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와도 돌아갈 집구석이 있다니까. 돌아갈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하늘나라 가려고 온 게 아니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온 거예요. 복 챙겨서 빨리 돌아가야 되는 거예요.

자기를 안 미워해서 그래요. 그 이유가 말씀에 의해서 죽는 사건이 안 일어나서 그래요. 그래서 성령은 십자가, 죽음을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오는 겁니다. 이 땅에서 주님 죽었는데 너는 뭐하느냐는 거예요. “미안합니다. 안 죽어서 미안합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살린 거야.” 죽어야 마땅한데 계속 살리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갱신하기 위해서. 계속 살아있어야 우리의 포개진 죄가 드러날 것이고 한 꺼풀, 두 꺼풀 드러날 때마다 그 틈새에서 십자가 은혜, 죽음의 은혜, 예수의 피의 은혜, 용서가 능력으로 나오잖아요. 그 순간 그 사람은 그 시점에서 주님께 감사와 영광의 찬미를 드릴 수 있고 주의 은혜에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돌아서면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그 순간만큼은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19절 봅시다.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 속죄제, 번제를 모세 당시에는 잘못 드렸다고 닦달 내는 데 죽는 것을 봐서 그것이 더 선하다고 확정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할 때 20절에,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 네 말이 맞아. 그걸 몰랐구나.

이 일 이후에 어떤 일이 전개되는지 오늘 본문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원래 없는 나라에요. 히브리인들은 있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없어요. 히브리인들은 애굽이란 실제로 있는 나라의 일부에요. 애굽에 떼어낼 때 조건이 있었어요.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종족들의 맏아들은 죽었고 이스라엘의 맏아들들은 살았을 때 바로가 기겁해서 나가라고 해서 나갔습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은 완료된 이스라엘일까요, 미완료된 이스라엘일까요? 미완료된 이스라엘이에요. 왜냐하면 그들이 실제로 어린양의 피를 내서 문설주와 문지방에 발랐기 때문에. 그들이 바를 때 그들의 손으로 발랐어요. 자기 손으로 행한 게 있단 말이죠. 행한 게 남아 있는 한 무조건 이스라엘은 미완성이에요. 문설주에 바른 게 당사자가 본인이란 말이죠.

어떤 사람이 복음을 안다 합시다. 그리고 복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밥 먹여줄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엘리야처럼 까마귀가 떡과 물을 제공합니까? 제가 알기로는 돈을 벌지 않는 한 돈은 들어오지 않게 돼있습니다. 복음을 알든 기도를 철야를 하던 간에 돈 버는 작업을 해야 돈이 들어오는 걸로 저는 그렇게 알고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돈 버는 작업을 해야 돼요. 아르바이트를 하던 배달을 하던지 간에 그렇게 해서 일당 받아서 마트에 라면 사서 먹고 그렇게 인생사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믿는다고 해서 돈 안 번다는 것은 말 돼요, 안 돼요? 예수 믿는다고 돈 안 버는 것은 자살행위죠. 말을 바꾸겠습니다. 예수 믿고 아르바이트해서 돈 버는 것은 나쁜 짓입니까? 내가 주를 버리를 세상에 아르바이트를 하다니? 이런 말을 해도 돼요, 안 돼요? 왜 예수 믿어도 아르바이트가 가능한 이유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뭘 모르냐 하면 제사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건 완료된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완료된 이스라엘은 제사 드린 것과 이스라엘 됨과 상관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주의 일이지 내가 예수 믿으려고 애쓰는 것과 아무 상관없고, 내가 돈 벌려고 직장 생활하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상관없다고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는 겁니다.

여러분이 돈 벌 때 내 양심껏 벌 수 없어요. 이윤 안 남기고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이윤 남기는 것이 나쁜 짓입니까? 목사님,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은 나쁜 짓잖아요?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이 나쁜 짓입니까?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은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이지 나쁜 짓은 아니에요. 지금 교육부에서 아이들 가르치고 한 달에 오만 원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십 만원 받았습니다. 나쁜 짓입니까? 오십 만원 받은 짓이지 나쁜 짓은 아니란 말이죠. 그걸 왜 나쁜 짓이라 합니까? 뭐가 나쁜 짓이냐 하면 다른 데는 오만 원 받는데 오십 만원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슬퍼할 것이라고 연관시키는 그게 나쁜 짓이에요.

말을 다시 해봅시다. 한 달에 오만 원 받아야 되는데 너무 가난해서 오만 원 안 받고 공짜로 가르쳤습니다. 그게 착한 짓입니까? 그것은 학원비 안 받은 짓이지 착한 짓이 아니에요. 그런데 안 받고 도와줬다고 착한 짓이라고 여기는 그게 나쁜 짓이에요. 이제 오늘 강의 이해되시겠습니까?

제사의 완성은 하나님이 죽는 것이지 내가 제사 드린 짓은 아니에요. 따라서 제사를 드려서 영광 돌렸다고 할 때는 아직까지 미완료된 엉터리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매주 예배를 드리세, 라고 하는 것이 이단 짓이에요. 왜 예배를 10시 55분은 안 되고 11시 드려야 됩니까? 일요일에 새벽기도하고 오전예배, 오후예배 세 번만 드립니까? 자정 예배는 왜 안 드립니까? 누구 마음대로 안 드려요? 그게 옳은 짓이라면.

제가 지난 낮 설교에 헌금에 관해서 이런 설교했어요. 헌금 하는 게 무의미해요. 무의미하기 때문에 넘치도록 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헌금을 하든 무의미한 것을 아는 순간 그게 달랑 오백 원이든 오십 원이든 주님 보시기에 넘치는 헌금이에요. 왜? 안 해도 되는 데 하니까. 안 해도 돼요. 그런데 헌금을 안 하게 되면 나쁜 짓이라는 게 나쁜 생각이에요.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헌금 안 하면 교회 운영이 안 되잖아. 맞아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내가 일 안 하면 돈 안 생기죠. 맞는 이야기잖아요. 교회 헌금 안 하면 문 닫지요. 전기 끊어지고 차압되고 하잖아요. 그게 맞지요. 교회가 문 닫는다고 해서 그게 나쁜 짓입니까? 목사님, 잘한 짓은 아니잖아요. 잘한 짓은 아닌데 그게 나쁜 짓입니까? 상관이 없다니까. 구원은 십자가 피로 구원받지 교회 세워서 예배드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따라서 우리는 얼마든지 교회 다닐 수 있고 일주일에 열두 번도 더 할 수 있는 거예요. 왜? 상관이 없기 때문에.

지금 제사를 드리라 했잖아요. 죽었잖아요. 속죄제, 번제 상관없어요. 그걸 아론이 알게 된 거예요. 장차오실 메시아가 죽어서 예배가 완성되지 제사 드린다는 것은 관찰이에요. 관찰은 제사 드린 예배드린 헌금 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단 되는 겁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예수님 안에 집어넣읍시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기가 뭡니까? 주여,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이게 고백이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죄 짓는 것 외에 뭘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십자가 지심으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이 날마다 갱신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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