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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1 23:58:11 조회 : 788         
고유한 양식 170901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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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55) 17-09-05 10:24 
20170901a 울산강의-레위기 11장 : 고유한 양식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1장 하겠습니다. 레위기 11장 이전에는 제사에 관해서 줄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율법으로. 제사법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제사법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그냥 죽음이 아니고 대신해서 대표한 죽음이거든요. 대표했던 제물이 죽는다는 말은 그 제물에 참여하는 인간은 산 자가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매일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매일같이 확인이 돼요.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뭐냐 하면, 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음에 넘겨야 되는 이유가 뭐냐 이 말이죠. 그냥 죽이면 되지 왜 또 오늘은 살게 하시느냐는 말이죠. 죽음에 넘겨놓고 그 다음에 살게 하시고. 순서가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 문제가 아니고 사고를 바꿔야 돼요. 죽어 마땅한 데 왜 자꾸 살려내시지? 이런 발상으로 바꿔져야 됩니다.

내가 중심이고 제사가 있는 게 아니고 제사 드리는 장소가 유일하게 하나님과 만나는 출발점이어야 하는 겁니다. 사는 울산바닥이, 내가 있는 이곳이 출발해서 갔다가 오는 게 아니고 주님이 계신 곳이 출발점이 되어 주님은 자기 출발점으로 모든 것의 의미를 되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살려놓고 있는 겁니다.

어린 소녀가 서커스에서 공굴리기 하는 것 있지요. 공은 올려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아슬아슬하게 다시 올라가지요. 쟁반 돌리기도 마찬가지고. 왜 쟁반은 돌아가고 공은 왜 계속 움직이고 살아있어야 되는가? 서커스 하는 솜씨 보려고 하는 거잖아요. 왜 우리는 울산바닥에 올라갔다 하면서 계속 돌아가는 겁니까? 주님의 솜씨, 특히 주님의 제사의 효과, 제사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솜씨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굴리는 겁니다. 공 굴리듯이 계속 살려두는 거예요. 이러한 이야기는 제가 결론적으로 단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이 원칙이 가동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중심을 낭부터 출발하면 이것은 기독교란 종교가 돼버립니다. 내가 요령 부려서 천당까지 살려는 것은 살고자하는 욕구란 말이죠. 이것이 문제가 뭐냐 하면, 나는 무조건 천국 가야 돼, 라는 말도 안 되는 계시를 본인이 스스로 창작해서 만들어낸 겁니다. 천국은 무조건 내 세상이다. 여기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거예요. 좀 허전하면 천국은 나와 내 가족이 사는 세상, 그것도 허전하면 나와 내 가족과 동창생까지는 가는 나라, 이렇게 계속해서 확장하는 거죠.

이스라엘이 그것 때문에 멸망한 거죠. 이스라엘은 무조건 구원받는다는 것. 아브라함 자손이니까 구원받는다고요? 아니에요. 마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 본 자손들은 천국에서 쫓겨나서 이를 갊이 있고 거기에 예수 믿는 백부장 같은 이방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잖아요. 잘났다는 바리새인들은 다 탈락이고 못난 강도는 오늘밤에 낙원에 가고. 바꿔치기한 것은 출발점 바꿔치기에요.

도대체 나는 살아야 되겠다고 하지 말고, 네가 누구냐 말이죠. 몰라. 네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왜 살아야 되는데. 나라는 것은 홀로 나가 되면 나가 아니에요. 마귀가 그렇게 몰아넣고 나란 주님과 관련된 나가 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데 주님과 관련될 때는 나부터 출발하면 안 되고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돼요. 하나님부터 출발하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부터 출발해야 돼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셔야 아는 겁니다. 예수님 아버지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오기 전에는 아무도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 없었어요. 아무도 몰랐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절대로 하나님을 몰라요. 그리고 성령이 오게 되면 특징이 뭐냐? 예수님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요. 요한복음 15장 마지막에 나옵니다. 앞으로 보혜사가 올 텐데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몰랐던 예수님에 대한 정보 하나 획득하는 게 아니에요. 그동안 나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가 되는구나. 이제는 이 자리 버리고 주님 자리에서 하는 거예요.

레위기 1장부터 10장까지는 제사,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11장부터는 어린양이 제물로 죽어야 되는 그 이유에 대해서 왜 우리 대신한다는 제물이 당당하게 주님 앞에 양을 제물로 바치면서 예쁜 짓하면서 귀여운 목소리로 예쁜 양이라고 드리면 되는데 왜 우리를 대신하는 양이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되느냐 말이죠. 그것은 죄가 전가 되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그 양이 죽을만한 죄는 어디서 만들어지고 어디서 계속 생산되는지 우리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말을 하려면 그 죄가 뭔지 알아야 된단 말이죠. 그 죄를 우리가 발굴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건 아니에요. 이미 우리 죄를 해결해놓고 해결한 그 능력으로 그 죄를 찾아내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본인이 알아서 이건 죄고, 이건 죄 아니고 결정하는 게 아니에요.

저녁에 노을 질 때 그림자가 길어지지요. 우리가 그림자에게 오라고 한다고 옵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말릴 새도 없이 해가 뉘엿뉘엿 지면 그림자는 어느새 길게 뻗잖아요. 이미 주님의 죽음이 확정되고, 죄 용서가 화정된 되고 난 뒤에 그 용서가 된 사람에게 죽어야 될 죄가 그림자처럼 이스라엘 전체를 덮치는 겁니다. 덮치는 방식이 레위기 11장 식으로 덮치는 거예요.

아까 강의 전에 레위기 11장 좀 보시라 했지요. 보니 여러분이 이해가 쉽지요. 왜냐하면 먹으란 것은 먹고, 먹지 말란 것은 안 먹으면 율법 지킨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참 쉽지요. 문제는 유대인들도 쉽게 그렇게 지켰어요. 제가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할 필요는 없겠지만 요약하면, 이미 죽음으로 출발점을 삼았다면 나머지는 어떤 것이 죄인지 알려주는 거예요. 죄를 알려주기 위해서 레위기 11장에 와서 먹을 것은 먹고, 먹지 말 것은 안 먹으면 그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시키는 대로 함으로써 비로소 그동안 몰랐던 죄가 나오는 겁니다. 먹지 말라 해서 안 먹었고, 먹으라 해서 먹었는데 왜 죕니까, 라고 따지잖아요. 드디어 걸려나온다. 따진다. 그래, 바로 그걸 기다린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먹으란 것은 먹고 먹지 말란 것은 안 먹었을 때 이미 그런 사고방식은 출발점이 벌써 자기 쪽으로 이동했잖아요. “난 최선 다했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말씀에 순종했어요. 나, 어때요?” 출발점이 갑자기 자기 쪽으로 와버렸어요.

주님으로 출발하라고 분명히 언급했는데 주님으로 한 출발점이 되려면 말씀을 못 지키는 자로써 말씀을 봐야 돼요. 그런데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말씀을 보는 순간 이미 그 사람은 출발점 자체가 터무니없는 다른 곳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걸 의도했어요. 그런 것을 일부러 노리고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물어봅시다. 당신은 왜 먹을 것은 먹고, 먹지 말라는 것은 안 먹었느냐? 그걸 해야 우리가 살지요. 말씀대로 해야 살고 만약에 말씀을 위반하면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는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살고 죽는 의미가 서로 달라져 버렸어요. 주님께서 제사 위치에서는 제사로 용서받은 자는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숨을 쉬어도 죽은 자다, 라고 의미가 따로 있는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 쪽은 이것 먹으면 복 받으니까 복 받은 나는 살고 안 그러면 죽는다. 자기중심에 죽고 살고의 개념을 따로 설정해놓은 겁니다. 의미가 서로 대치되고 따로 노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죽했으면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살고 자기 목숨을 잃어버린 자는 얻으리라 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내 목숨을 잃으면 내 목숨을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돈 놓고 돈 먹기란 말이죠. 푼 돈 넣고 몫 돈 챙겼다는 거잖아요. 내 돈 내놓고 부셔진 내 돈 얻겠다는 거죠.

주님은 그런 뜻이 아니고 네 목숨 내놓으면 네 안에 주님의 생명이 살리라.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나는 한 번 죽으면 영 죽은 거예요. 내가 다시 살 생각은 마세요. 꼼수 쓰지 마세요. 내 목숨 버리면 살 것이다. 그것은 누구 사고방식이냐? 그건 기껏 베드로가 했던 게임이에요. 주님 제 목숨 내놓으니까 내 목숨 살리겠지요? 그런 것 없어요. 네 목숨 내놓는 순간 내 목숨이란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다시 미련 가지면 안 돼요. 죄 덩어리인데 뭘 아쉬워합니까?

우리 인생이 빈 접시라면, 빈 접시를 내놓으면 주님께서 맛있는 뷔페 음식 담아줄 줄 알고 있어요. 주님은 아예 깨버립니다. 그릇 자체가 상실되고 없어요. 주님과 장난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과 노닥거릴 생각하고 있어요. 주님과 밀당합니까?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주님은 십자가 졌어요. 그리고 우리 보고 자기 십자가 지고 따라 오너라 말이죠.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레위기 11장 말씀을 하나님께서 들이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주님 생각보다도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라는 속마음이 이 말씀으로 인하여 완전히 노출되고 들통 나고 발각돼버려요. 말씀 때문에 발각된다면 말씀 주기 전에도 모든 정신, 사고방식이 나만 살면 된다는 사고방식으로 똘똘 뭉쳐있다는 것이 소급해서 파악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주님 덕분에 사느냐고 하지 말라 했지요. 왜 주님은 계속 살려주십니까, 그 이야기하라 했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요령껏 사는 것이 출발점이 되면 안 되고 주님이 십자가 지고 주님께서 희생제물 되신 그 내력, 그 이유를 알리기 위해서 계속 살려주는 거예요. 제가 어떤 예를 들었던가요? 15분밖에 안 지났는데.

서커스 소녀가 공굴리기, 쟁반 돌리는 예를 들었잖아요. 쟁반 예뻐서 돌린 줄 알아요? 공 떨어지면 공 사오면 되지. 솜씨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 같은 인간 진작 죽어야 되지만 주님이 십자가 죽었던 것, 주님의 희생에 담긴 의미가 뭔지 계속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소녀의 발 위에서 놀고 있는 공처럼 다뤄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기 1장부터 10장까지는 제사이야기고 11장부터는 그 죄가 어디에 붙어 있어서 계속해서 죄가 나오는지 정찰, 수색, 탐색하는 거예요. 죄가 어디서 생산되지? 주님의 희생으로 출발하지 않고 어디서 자기 살고자 부터 출발하는지 정찰에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각해야 돼요. 왜 주님께서는 제사부터 드리고 용서한다고 선언하시고 구체적으로 생활 법을 주시느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율법도 따라 나왔어요. 이스라엘만 달랑 나온 게 아닙니다. 율법도 따라 나왔는데 율법의 핵심이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너희가 살리라. 그게 공식이거든요. 예수님도 그랬잖아요.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자꾸 네 잘한 것 말고, 네 헌신한 것 말고, 네가 착실하게 산 것 말고 보란 말이죠. 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란 말이죠. 출발점은 자신의 행함으로 삼지 말고.

그 다음부터 문제는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왜 어린양이 피를 흘려야 되느냐 말이죠. 우린 생각엔 이런 아이디어도 나올 수 있단 말이죠. 집에서 양을 예쁘게 순수하게 잘 키웠어요. 그런데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어요. 그러면 죽음의 사자 앞에서 양을 잡아서 맛있는 양 수프를 드리면서 정성을 받으소서, 하는 식도 괜찮은 방식 아니겠습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납득이 되지요. 평소에 하나님께서 정성을 드린 사람은 천국 가고, 하나님을 개무시 한 사람은 지옥 가는 그런 판정이라면 훨씬 더 우리가 이해가 쉬운데 무조건 양을 잡아라. 무조건이에요.

대학교수니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장로, 집사 따지지 말고 애든 어른이든 양을 잡아라. 피를 내라. 나는 평생 여자 하나 밝히지 않고, 돈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사랑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왜 자꾸 내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하냐 말이죠. 나는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사임당 같은 자애로운 어머니, 착실하게 모범적인 순수한 어머니, 희생한 어머니, 아빠로서 가족에 헌신한 아빠, 행여나 죄에 굴레에 빠질까 노심초사하면서 기도하면서 주님이여, 우리 가정과 저를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형상 본받기 위해서 열심히 저는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양이나 잡아. 말이 통해야지. 객소리 필요 없어. 양 잡아 피 내면 끝이에요.

남들 해외여행, 크루스 여행하는데 나는 주일 지키려고, “주여, 마귀의 시험 이기게 하옵소서. 돈 팔백만원 포기하고 주일에 교회 참석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럴 줄 알았지요. 그러나마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맨날 아침마다 들여다보는 네 낯짝을 들여다보느냐 말이죠. 주님의 피 흘린 얼굴은 안 보고. 주님의 피가 우리 얼굴에 묻혀야 돼요. 우리는 피 묻은 얼굴로 나타나야 된다니까요.

여러분 아시겠지요. 신앙생활이 뭔지 아시겠습니까? 마귀의 시험은 딴 게 아니에요. 자기 괜찮은 순수한 얼굴 바라보게 만드는 게 마귀의 시험입니다. 마귀는 이미 결정 난 걸 알기 때문에.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옆에 강도도 그날 밤에 천국 가는 걸 알기 때문에. 기어이 그 입을 막으려고 해요. 마귀는 모든 수단을 통해서라도 선교, 헌금, 봉사, 절차 행위를 끄집어내서라도 십자가 피로 마감됐다는 사실을 애써 감추려고 합니다.

제가 대전에 화요일에 가는데 모퉁이에 이순신 국밥이란 식당이 있어요. 간판에 이 국밥의 맛을 저에게 알리지 말라고 돼있어요. 상당히 재미있게 돼있는데 장사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먹어봐야 알겠지만. 마귀가 우리를 출발점으로 삼아요. 우리 행위를. 개인구원이죠. 개인구원에 몰입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한테 미치게 만들어요. 부인하는 자기를 잊지 않기 위해서 계속 잘 가고 있는 자기 점검에 나서요. 완전히 늪에 빠져도 수심 156미터 늪에 빠졌어요. 못 기어 나옵니다. 어떠한 교훈과 어떠한 성경구절 들이대도 못 빠져나옵니다. 이미 습관화되고 그것이 자기에게 숙명처럼 되어 이것 안 하고 저것 안 하면 지옥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귀신에 옴팍 씌웠어요. 볼 것도 없으면서 맨날 자기 점검하고 있어요.

이스라엘이 나올 때 이미 어린양의 피로 나왔습니다. 문제는 왜 피냐 말이죠. 이 간격, 거리가 있겠지요. 이걸 누가 매우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제시하면서 그 간격이 메워지는 겁니다. 퍼즐의 마지막은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메워져요. 마태복음 5장에 이런 말씀 있거든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뤄져야 한다. 그러면서 율법에 나오지 않는 율법을 예수님 본인 입으로 계속해서 추가시켜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얼추 지켰다고 보거든요. 구약 때 모세가 준 것은 자기 보기에도 이 정도면 지켰다고 본 겁니다. 자기는 볶음밥 하려고 김치, 햄 볶고 해서 아침준비 끝 했는데 주님이 오셔서 모든 율법을 이루기까지 율법은 일점일획이라고 다 이뤄야 한다면서 카레를 볶음밥에 부어버린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먹기만 하면 영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후에 갑자기 볶음밥이 카레가 된 거예요. 카레 밥은 예상도 못한 겁니다.

예상도 못한 율법을 주면서 하는 말이, 네가 간음을 안 했어? 네가 마음속으로 음란하면 간음죄야. 살인 안 했다고? 형제한테 욕하면 살인죄야. 네가 호리라도 다 지키지 않으면 지옥에서 못 나온다. 맹세하지 마라. 네 오른손이 범죄하면 잘라버려요.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줘라. 그 더러운 속옷을 누가 입겠습니까. 심지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만큼 지켰다고 한숨 쉬고 천당 가기만 기다리는데 주님이란 분이 오셔서 덮어버리니까 비판하지 말라니까 어떻게 비판 안 할 수 있어요? 못 지키는 거예요. 그래놓고 네가 지켰느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훌륭한 신사임당한테 물어보세요. 남을 비판한 적이 없는지, 형제 욕한 적 없는지,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한 적 없는지.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건데. 신사임당은 눈만 뜨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한 사람이에요. 지옥 가요. 그래서 지옥 갔어요. 잘 갔어요. 지옥 가보면 신사임당 만나면 악수하세요. 오만 원짜리 반갑습니다.

이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이스라엘을 유지하는 원칙과 애굽을 유지하는 원칙이 달라요. 애굽은 본인들이 살면 행복한 거예요. 본인들 생존이 목적입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인기 얻고 세상 부귀영화 얻으면 더 바람은 죄가 됨이라. 그걸로 족한 사람들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누가 물들었느냐 하면, 무려 사백 년 동안 살았던 히브리인들도 물들었어요. 사람 산다는 것은 고생 없이 편하게 자기 신체 건강하고 먹을 것 챙기고 적당하게 놀러 다니고 인생 뭐 있어? 그게 인생이지 뭐 있어요. 죽을 때 되면 죽고. 그게 다인 줄 알았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애굽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게 인생인 줄 알았어요. 남들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울산바닥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게 인생인 줄 알았지요.

모세와 아론이 와서 하는 말이, 여호와 하나님이 보냈다는 거예요. 그리고 말하기를 여기서 나가자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뭘 뜻하느냐? 분리됨이에요. 분리됨을 거룩이라 합니다. 애굽과 이스라엘을 분리시키는 근원적인 원리를 고수하겠다는 내용이 레위기 11장 음식에 대한 조항에 기본적으로 깔려있어요. 애굽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데 왜 먹습니까?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비타민, 무기물을 왜 먹습니까? 죽으려고 먹습니까? 살려고 먹지요. 그게 애굽이라니까요. 살 이유도 모르면서 무조건 살고 보자는 식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살려고 양식을 먹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걸 확인하는 식으로 양식을 먹어야 돼요. 자기 목숨을 잃는 절차 중에 하나가 양식 먹는 것이 포함돼있어요. 하루 세 끼 먹는 것은 이래서 나는 서서히 죽어가는구나. 확인하는 차원에서 양식을 먹어야 된단 말이죠. 이걸 아시고 식사기도 제대로 해야 돼요.

이 귀한 양식 주셔서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주여, 귀한 양식 주셔서 내가 죽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또 먹이시니까 주께서 무슨 이유 때문에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 출발되는 식으로 해야 돼요. 그런데 식사기도가 너무 길어지니까 복잡하게 하지 말고 고맙습니다, 하고 그냥 먹으면 됩니다. 이유야 먹어보면 알아요. 먹고 배탈 나면 내가 배탈 나는 게 마땅하구나, 라고 아시게 됩니다.

애굽과 이스라엘을 철저히 달라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원래 없는 나라에요. 이게 특이한 나라입니다. 인간들이 예상 못한, 기대하지 못한 나라에요. 뭔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담아내기 위해서 특수하게 만든 나라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 자기 속성만 가득하게 담긴 겁니다. 그 속성이 이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겁니다. 멸망이 없으면 주님이 그 안에서 주님으로 잉태하지 않아요. 주님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술사가 검은 천을 부스럭거려야 그 안에서 비둘기 나오잖아요. 처음에는 비둘기가 안에 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부스럭거리면서 콧기름 묻히면 여기 있습니다, 하고 비둘기 내놓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인간들만의 세상인 줄 알았는데 주께서 부스럭거리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라는, 죽고 난 뒤에 부활의 능력이 이 세상의 죄 속에서 그게 나온 거예요. 쓰레기에서 장미꽃 피듯이 생명이 나온 거예요. 육신으로 오셔야 될 이유가 거기 있어요.

그럼 그 원리가 뭐냐? 창세기 1장 30절에 보면,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여기에 모든 사람과 짐승에게 양식이 뭐냐? 모든 풀을 음식물로 주니 그대로 되니라. 음식물이 식물이에요. 식물인데 창세기 9장 2절에 보면 뭐라고 돼있냐 하면,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더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전에는 채소만 줬는데 지금은 동물성 양식을 제공한다고 돼있어요. 그럼 이건 주님께서 인간을 살리고자 주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이 땅을 방문하는가? 그 당시 노아를 살려내면서 그 정보를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심어놓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담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와 남은 자를 이 땅에 새롭게 번성시킨 겁니다.

이 말은 노아 홍수 이후에 새롭게 된 세상에서는 바로 이 세상을 와르르 멸망시킬 요소. 멸망의 요건, 번창하고 복 받을 요소를 저해하고 방해하는 장애요소가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서 이 땅에 잠복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세상은 시한폭탄입니다. 성도 자체가 시한폭탄이에요. 그 시한폭탄을 두 자로 ‘언약’이라 합니다. 주님이 안고 있던 시한폭탄이 터지니까 그게 십자가 사건이 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시한폭탄이 없어요. 그냥 모세의 말씀을 순종하고 시키려고 애쓴 거예요. 시한폭탄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지키면 살겠지, 라고 산 거예요.

지금 주님께선 살리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파괴를 하되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 된 것만은 예수의 나라, 천국에 간다는 것을 파괴하는 작업과 동반해서 이 땅에 실시하는 거예요. 그 작업 중에 하나가 동물성 음식물이 제공되는 겁니다.

이러면 구라치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구라가 아닙니다. 레위기 11장에 주신 지시를 창세기 1장과 9장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이야기했잖아요. 하지만 왜 사람들이 음식, 스테이크를 먹게 됐는지 이방인들은 몰라요. 아브라함 자손, 이스라엘은 알아요. 왜 이스라엘이냐? 이스라엘은 없는 데서 생긴 특수한 나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굴리기, 또는 쟁반 돌리기에요. 특수하게 만들었어요.

이 특수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존재와 연관돼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이거든요. 이스라엘은 집단적인 하나님 아들이에요.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스라엘을 살리고자 함이 아니고 이 세상은 저주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거기서 영생 얻을 자가 생겨나느냐? 그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레위기 1장에서 10장까지는 제사를 드린 겁니다.

어떻게 양이 죽었는데 그게 용서가 되느냐 말이죠. 정말 제가 중요한 이야기했어요. 양을 대신 잡았는데 어떻게 우리 죄가 대신 없어집니까? 여러분 그 이유를 따져본 적 없지요. 왜냐하면 믿습니다. 앞뒤도 안 가리고 저건 좋은 거야. 우리 식구 다 믿습니다. 내력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고 무조건 믿으면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 믿음은 또 하나의 의로운 행위를 추가한 것밖에 안 돼요. 자기가 믿는 행위를 믿는 거니까 가짜고요.

좋은 것은 나를 살린다. 자꾸 내가 어떻게 하면 사는지 애굽적인 사고방식이 기본으로 돼있는 이상은 성경은 천 독, 만 독해도 소용없어요. 사고방식이 애굽적인 사고방식에서 분리되어 나온 이스라엘 사고방식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왜 모든 인간에게 하지 않고 하필이면 이스라엘에게 했는지 거기에 대한 답변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어야 돼요.

1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라고 돼있어요.

여기 짐승으로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짐승이지만 사실은 땅에 사는 짐승을 이야기해요. 이 짐승이 어떤 짐승이냐 하면, 창세기 1장에 보면 초식동물, 풀을 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짐승을 의미하는 겁니다. 고기 안 먹고 풀만 먹는데 어떻게 살 수 있느냐? 그러니까 식물성 양식과 생명이 서로 연관이 된다는 것은 이미 창세기 1장의 그때 이야기잖아요. 레위기 11장에서 주님께서 그걸 베이스로 깔아버린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네가 이만큼 애를 썼지만 이건 좀 모자라네. 모자란 부분만 용서해줄게. 이렇게 우리를 용서한 게 아니에요. 나름대로 지킨 게 있고 못 지킨 것만 죄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용서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잘했다고 우기는 그것까지 근원적으로 뒤집어버려요. 우리가 잘했다고 자부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건 죄가 아니라고 여기죠. 사람이 죄가 아니라고 여길 때는 그게 근본까지 안 내려와서 때문에 그래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난 뒤에 나단 선지자가 왔을 때 뭘 알았습니까? 나는 죄 졌다고 했습니까? 나는 죄인이라고 했습니까? 어느 쪽이에요? 나는 잘할 수 있는데 죄 지었다고 하지 않고 자기 근원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어요. 자신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죄를 짓는다는 말은, 죄 안 지은 순간도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 이건 죄 아닌데, 이건 죄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죄 지었다는 말은 평소에는 오줌 누는 것은 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죄인이 바지 내려놓고. 그러나 죄인이 돼버리면 죄 아닌 게 없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어요. 왜?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내 쪽에서 시작하는 죄는 없는 게 돼요. 참 정말 복음이에요. 내 쪽에서 죄 지은 게 없다는 말은, 내 쪽에서 그 죄에 대해서 책임질 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이번에 죄를 지었으니까 헌금을 듬뿍해서 선과 악 균형을 맞춰야지. 이럴 필요 없다니까요. 이번에 나쁜 짓했으니까 맨날 11시 5분에 왔는데 열시 반에 가서 청소해야지. 그럴 필요 없어요. 평소대로 11시 5분에 오세요. 뭐 잘났다고.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것은 죄책입니다.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는 것도 죄책감이에요. 나 같은 인간은 살 필요도 없어, 라고 하면서 웃으면서 사세요. 왜? 덤이니까. 살 필요도 없는 사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사업한다고 일 벌였는데 한 벙 터뜨려서 준 재벌 되려고 했다가 왕창 망했다. 빚이 60억 된다. 지리산으로 도망갔다. 아내완 벌써 이혼하고 자식은 다 따라가고 지 혼자 남아 노숙하다 도망갔다. 당당하게 도망가세요. 꿀리지 말고.

왜냐하면 내가 사는 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기 때문에. 당당하게 도망가다가 검문에 걸려서 무기징역에 살거든 당당하게 무기징역 사세요. 주여, 왜 잡히게 하십니까, 이러지 칭얼대지 말고. 잡히는 것도 주의 뜻이니까. 당당하게 잡히시고 우사당하시고 봉변당하시고 당당하게 거기서 사형 당하면 사형 당하고. 죽고 난 뒤에 재는 고향 땅에 뿌려 달라.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사형대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게 죄인 된 도리에요.

마귀가 얼마나 그동안 힘들게 했습니까?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마귀한테 주눅 들었습니까? 너 그렇게 살다간 우사당한데이. 인간 취급 못 받는다. 그걸 인질, 노예 정도가 아닙니다. 인질로 삼아요. 속아도 된 통으로 걸려 속았어요. 누구나 다. 우리 선에서 죄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레위기 1장부터 11장까지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근원적으로 뒤집었다는 거예요. 근원적으로 네가 손댈 수 없는 네 죄책감까지 이미 내가 해결했다는 겁니다. 어떻게?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IP:119.♡.174.155) 17-09-05 10:24 
20170901b 울산강의-레위기 11장 : 고유한 양식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기본이 뭐냐 하면, 고기를 먹는 게 정상이 아니란 이야기에요. 원래 창조에서는 고기를 못 먹게 돼있단 말이죠. 그래서 제사에 들어가는 양이나 염소나 이건 고기를 먹는 게 아니에요. 풀 먹었는데 소가 살고 양이 사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식물성과 관련될 때 그들은 살았단 말이죠. 그런데 창세기 9장에서는 동물성이 들어왔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이미 붕괴될 요소가 삽입돼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식물성이냐, 동물성이냐는 대립구조를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때마다 그 대립성을 통해서 무엇이 본유적이고 무엇이 근본적인가? 창세 때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무엇이 근본인가를 다른 민족에겐 이야기 안 해줘요. 이스라엘에겐 그걸 베이스로 깔아버렸다니까요.

그 뒤에 소가 풀을 그냥 먹으면 돼요. 범죄 한 이후엔 풀을 그냥 먹으면 안 되고 소 자체에서 장차 이 세상을 멸망하고 그 가운데서 영생이 만들어진다는 모든 정보를 소의 외형과 내면의 작업을 통해서, 살기 위해서 먹는 작업 속에 정보가 삽입돼있어야 돼요. 외형적인 것은 굽이 갈라진 거예요. 분리되는 겁니다. 나눠진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의 운명이고 숙명입니다. 되새김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고유한 것을 다시 확인시키는 겁니다. 먹겠다고 꿀꺽 삼키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다시 가는 거예요. 다시 고유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원래 소, 양, 염소, 사슴, 노루는 굽이 다 갈라지고 되새김 되는데 되새김은 되는데 굽이 안 갈라진 게 약대(낙타), 사반(오소리, 토끼 종류)은 못 먹어요. 이것은 굽은 갈라졌지만 못 먹는 게 돼지입니다. 한방에서는 돼지가 버릴 게 없다는데 지금 이걸 먹고 살자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 못 되고 분리되고 떠나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먹는 음식물 속에 그 정보가 포함돼있어요. 이걸 먹고 살자가 아니라 주의 뜻을 알자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왜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달라야 되고 이 세상을 훌쩍 떠나야 되는지, 뭔가 이질적인 민족으로 애굽에서 분리되었느냐 말이죠.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애굽에서 같이 있으면서 히브리인들은 특별대우해서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해서 잘 살게 만들 수 있어요. 기어이 떼어낸다고요. 그 떼어내는 원리가 어린양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문제가 있으니까 죽음의 없이는 삶이 없는 게 돼버려요. 이 세상이 정상이라면 사는 데로 살고 계속 살면 돼요. 그런데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고, 그 사람이 죽었네.” 했는데 죽었다는 그쪽이 오히려 영생이고 살고자 한 쪽은 지옥 가고. 뭔가 굉장히 수상해. 울산바닥이나 대구바닥이 믿을 게 못 돼요. 오히려 울산 자체가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는 이미 지옥 구덩이가 돼있어요.

거기서 우리는 뭘 파악해야 되는가? 본류적인 것,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의 고유성. 처음에 이런 식으로 울산을 만들진 않았을 거 아니냐. 그 순수한 고유성을 되새김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되새김을 강조하고 처음부터 굽이 갈라졌지만 굽이 갈라짐을 강조해서 그걸 모델로 삼아서 그 뒤에 나오는 모든 하늘에 있는 것 중에 못 먹는 것, 물, 강에 있는 것 중에 못 먹는 것, 땅에 기는 것 중에 못 먹는 것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못 먹는 것에 강세, 강조점이 있어요. 살겠다고 이것저것 먹지 말란 말이죠. 못 먹는 것을 지정했다는 말은 너희들만큼은 이 세상에 못 먹을 고기가 그렇게 많은지 이스라엘은 관심 있게 봐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주신 이유가 이미 율법을 통해서 따로 제시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양식을 먹는 게 아니고 결국은 제시한 말씀을 털어먹어야 돼요. 식후 30분후에. 약을 먹듯이 율법을. 식사시간이 아니고 율법 먹는 시간이에요. 율법을 따져서 먹는 시간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면 양식은 나를 살리는 게 아니라 율법대로 먹는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하여 율법적 기능을 해야 돼요. 어떤 기능? 소처럼. 염소처럼. 굽이 갈라지고 되새김하는 것, 다시 말해서 고유한 것, 타락하기 이전의 고유한 그것을 제시하는 유일한 민족으로 살아야 되지요. 그게 분리돼야 되기 때문에 거룩한 민족이라 하는 겁니다. 분리란 거룩이거든요.

거룩이란 혼자 잘났다는 게 아니고 어떤 기능이 발산돼야 돼요. 주께서 이 세상을 다루는 원리가 발산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음식 먹는 것이 식사시간이라고 달려들어서 먹자는 게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을 지금 이스라엘을 통해서 발산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문장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요. 주님은 자연을 통해서 자신을 증거한다. 맞지요. 소, 염소, 돼지, 수중의 지느러미, 비늘 없는 것은 가증하니라. 이것 먹으면 가증하니라, 이스라엘 중에 끊어지리라. 먹지 마라에 강조점이 있다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지 말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식사시간을 가진다는 말이 무슨 의미냐 하면,

자기 민족의 독특함은 다른 이방민족은 살기 위해서 양식을 먹지만 이스라엘이 이미 구원받았음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음은 굉장히 특이하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거예요. 어떤 점에서 특이하냐 하면, 단순히 사는 걸 목적으로 살지 않는 점에서 특이해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멸망시킬 정보를 미리 입수한 나라가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멸망시킬 그 정당성, 당위성을.

그런데 이스라엘 내에 주님이 자연을 통해서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내부에 어떻게 전달되느냐 하면, 자연이 주님을 통해서 스스로 증거한다. 이런 식으로 도출돼버려요. 주님은 자연을 통해서 주님 자신을 증거한다는 게 정답인데 막상 이 말씀을 주게 되면 자연이 주님을 이용해서 주님을 빙자해서 스스로 존재할만하다고 증거하는 식으로 변질돼버려요.

그럼 이 자연 안에 인간이 들어있지요. 제가 왜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소는 먹어도 되고 민물고기, 비늘과 지느러미 있는 건 먹어도 됩니다. 금붕어라든지 또는 갈치도 있잖아요. 갈치가 스스로 나는 살만해서 산다는 생각을 갖겠지요. 왜?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이 먹어도 되는 고상한 것으로 비추게 되게 되면 만약에 갈치에 두뇌가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의 과오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말씀을 주니까 자기만큼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만한 민족이 된다는 식으로 스스로 자기 합리화에 들어간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사전에 차단하고 방비해야 되는데 이스라엘은 그러질 못했지요.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복 받겠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성도가 되면 우리가 살만해서 사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니까 살았지. 우리 쪽에서 살려달라고 요구할 권리나 자격이 없었다는 것이 신약성경에 보면 나와요. 백부장 같은 경우에. 가라하면 가겠나이다. 지옥 보내면 지옥 가고 천국 보내면 천국 가겠다는 말을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백부장에서 백부장이 튀어나오는 게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백부장을 구원했다는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백 프로 나오는 거예요. 세리나 창기가 구원받는 것이 세리란 창기란 직업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는 감히 고개도 못 들었거든요. 이 세상에 나 같은 인간이 천당 가면 천지개벽입니다, 라고 생각했단 말이죠. 그 천지개벽을 주께서 일으킵니다.

단절돼있었는데 단절을 연결로 바꾸신 것은 주님이에요. 뭔가 노림수라든지 기대하지 않았는데 구원이 된 거예요. 입사 불합격이라고 해서 다른 데 알아보고 있는데 합격통지서, 내일까지 출근하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떨어진 줄로 알았는데 돌아왔으니까 그 사람은 회사에 충성하겠지요. 탕자가 자기를 아들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먼저 아들로 인정하니까 그 아들이 그 집에 들어가서 자기 잘난 척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겠지요. 아버지란 그냥 주시는 분이구나. 내가 아들 값을 해서 아들로 취급하는 게 아니란 것을 안단 말이지요.

양이 백 마리 있었는데 99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섰어요. 그런데 99마리 양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당연하게 목자인 줄 알고 있다니까. 잃어버린 적이 없기 때문에. 목자는 전혀 99마리로 기뻐하지 않아요. 기뻐하는 경우는 한 마리밖에 없어요. 잃어버렸는데 목자가 자진해서 되찾아왔다는 목자 고유의 그 기능이 계속 담겨있는 그 양이 99마리 양과 바꾸지도 않아. 그보다 더 소중하단 말이죠.

동전이 굴러서 잃어버렸어요. 아가씨가 밤새도록 찾다 결국 찾았어요. 10원짜리 동전 하나 찾고선 얼마나 기뻤는지 친구들 모아 잔치를 벌였는데 잔치비용이 264500원 나왔어요. 10원 찾고선 264500원 날렸다니까요. 그래도 아깝지 않아요. 왜? 잃었다가 얻었기 때문에. 잃었다가 얻은 게 없으면 성도 아니에요. 성도 아닌 거예요.

따라서 성경에서 주장하는 것은 먹으란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먹지 말라는 것에 주목해야 돼요. 먹지 말라는 짐승들이나 새나 물고기가 자기가 오징어 되고 싶어서 오징어 됩니까? 오징어는 대머리 같아서 비늘이 없어요. 지느러미도 없고. 그래서 이스라엘은 오징어, 문어 종류 먹으면 안 돼요. 물에 사는 것 중에서 비늘과 지느러미 없는 게 뭐냐? 뱀장어, 꼼장어, 장어, 미꾸라지, 갑각류(게, 새우), 따개비, 가재류, 연체동물, 조개 등은 먹으면 안 돼요. 이 소리 들으면 연체동물이 얼마나 속상하고 기분 나쁘겠습니까? 본인이 지옥 가려고 연체동물 된 게 아니잖아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만들어놓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지 말라하니까 자기는 먹히고 싶은데 못 먹게 하는 거예요.

물에 비늘과 지느러미가 왜 있어야 됩니까? 물이란 환경의 고유성을 외형적으로 표시한 거예요. 땅에 사는 자는 풀을 먹어야 된다. 풀을 먹기 때문에 갈아야 되거든요. 되새김하고 굽이 갈라져야 된다. 이 요소를 소화기관의 내면적인 것을 끄집어내어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은 기존과 분리돼야 되고 세상 어느 민족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고유성을 유일하게 담아낸 정보가 있는 민족인 것을 알리는 거예요.

문제는 이스라엘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지 말라 했는데 그들은 자기가 함으로써 구원받아야 마땅하다는 자기 출발점으로 되돌아감이 문제란 말이죠.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돼지고기를 안 먹으면 구원되고 먹으면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유대인이 돼지고기 먹으면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지옥, 천국 가는 것은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저주고 함께 있으면 영생이죠. 그러면 기준은 돼지고기가 기준이 아니고 되새김도 기준이 아니고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님에 대해서 사랑하느냐 그것이죠. 맞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그동안 레위기 11장은 왜 거론했습니까? 자연물은 주님이 자기를 증거하기 위해서 레위기 11장을 주셨잖아요. 이 말은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이용한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나라의 본 자손들은 쫓겨나서 지옥 간다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복 받는 민족이 된다는 죄를 짓게 해서 그들을 멸망시킴으로 주의 주되심을 드러나게 하신 거예요.

주님께서 교회에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면 지옥 가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말씀을 지킴으로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지옥 갑니다. 그런데 그게 주님이에요. 그런데 주신 말씀을 보고, “주여, 이 문제는 우리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는 태생이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말씀 하나라도 지킬 수 없습니다. 고개도 못 들고 죄인입니다. 하는 세리는 주님으로부터 합격통지서, 현장에서 수시모집에 합격한 거예요.

여러분, 살아있을 때 구원 못 받으면 죽어서도 구원 못 받아요. 살아있을 때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인정 못하면 죽어서 지옥 갑니다. 말씀을 왜 봐야 되고 왜 들어야 됩니까? 말씀은 보면 볼수록 내가 지키고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씀은 내가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본인의 저항을 뚫고 나와요. 속에 있는 비복음적인 나의 본성이 뚫고 나와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기어이 우리는 우리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주님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 그래도 일말의 양심 있는 의인이겠지, 라고 실제적인 모든 행동은 거기서 나와요. 그래도 내가 착하니까 이 정도 행동하지. 그 무슨 되도 않은 자신감인지. 자꾸 착하다는 거예요. 착하니까 교회 갔잖아. 주께서 가게 하신 게 아니고 착하니까 간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남과 비교하니까 그래요. 애굽과 애굽을 비교하면 구원됩니까? 똑같은 사람인데. 전부 다 갇혀 있는 상황인데 누굴 컨닝해요. 똑같이 빵점인데. 전부 다 빵점짜리만 모였는데 컨닝해봐야 빵점이죠. 주님을 볼 생각 안 하고 같은 인간을 본다고요. 같은 빵점이면서도 빵점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들. 여러분 이렇게 사는 게 옳습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에서 관심사가 개인구원에 있습니까?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직도 자기한테 가능성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가능성 없어요. 가능성 없는 인간이 예수의 피의 능력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가능성이 아예 없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았다 칩시다. 돌에 맞을 때 한두 대는 견딥니다. 그러나 계속 날아오면 못 견뎌요. 그럼 원망을 누구한테 하겠어요? 주여, 제가 무슨 잘못했는데 이런 형벌을 주십니까? 주께서 뭐라고 하겠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 말씀이 로마서 3장 10절에 있다는 걸 아는데요. 그 말씀 믿는 내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그 말씀은 네가 믿어도 죄인인 것을 알도록 위해서 준 거예요. 믿음으로써 죄인 됐다는 티내라고 그 말씀 준 거란 말이죠. 여러분 말씀 지키세요. 그래서 죄인 됩시다. 말씀을 지킴으로 죄인 되는 거예요. 아직 몰랐습니까? 그렇게 언질을 줬건만. 그렇게 힌트를 줬건만.

여기에 물에 사는 짐승들 중에서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다는 조건을 건 것은 물이란 환경이 본유적이고 고유한 거예요. 고유함을 주께서는 계속 유지하려고 한 겁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들의 하나님의 고유한 민족이라면 이러한 고유성을 지키지 않는 것은 먹지 말라는 겁니다. 땅에 있는 소나 양은 풀을 먹는 거예요. 풀만 먹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고유성을 이 짐승들이 보여주는 겁니다. 풀 먹으니까 되새김하거든요. 풀을 먹는 것이 고유함이에요.

그런데 하늘 나는 짐승은 대부분 안 돼요. 맹금류는 먹을 수 없다. 매, 솔개, 독수리 먹지 말라. 올빼미, 당아새(펠리컨), 까마귀 이들은 어둡고 한적한 곳에 살아요. 불결하고 더러운 것을 먹고 사는 새, 뱀, 벌레 먹고 사는 새는 다 안 되거든요. 이름도 생소한 것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어응이란 것은 바다독수리의 일종이고요, 부리 밑에 털이 많은 게 어응이에요. 다호마스는 나이트호크라 해서 시체, 돌까지 삼키고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노자, 가마우지라 하는데 새부리가 길며 발가락 사이가 물갈퀴가 있고 물고기를 잡아먹고 헤엄도 치며 다이빙도 잘하는 새. 당아는 펠리컨인데 황폐한 곳이나 광야에 사는 새. 올응은 독수리의 일종이고, 대승은 오딧새라 하고 댕기물떼새인데 벌레나 곤충을 찾아 늪지에 돌아다니면서 몸에 냄새가 심하게 나고 사람의 똥이나 더러운 곳에 둥지를 트는 게 대승이란 짐승이에요.

이게 기본적으로 새가 동물성을 먹고 살아요. 동물성이니까 잔인하게 되지요. 시체, 더러운 곳, 음침하고 음산한 분위기. 강조점이 무엇을 먹으라에 있지 않고 무엇을 먹지 말라는 데 있다 했지요. 이런 것들이 고유한 천지창조 처음에 깨끗한 고유성에서 멀어졌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8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아담이 범죄 하기 전까지는 엉겅퀴와 가시덩굴이 없었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엉겅퀴와 가시덩굴이란 자연을 왜 줬습니까? 주님이 자연을 통해서 주님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죠. 그러면 엉겅퀴와 가시덩굴은 어떤 역할을 해야 돼요? 주님께서 화냈다, 저주한다, 원래 고유한 뜻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줘서 인간들로 하여금 수월하게 이 땅에서 이건 내 세상이라고 여기에 죽치고 있자고 못하게 만든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계신데 왜 이 세상에 사기꾼들이 많고 도둑놈, 강도가 많으냐고 하는데 네가 그래. 사람은 자기가 생존하게 되면 자기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해본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어요. 집에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데 아들 하나고 딸이 일곱이고 아빠는 택시운전하고 엄마는 집에서 막내 딸 키우고 있다면 아침에 얼마나 바쁘겠어요. 서로 불편을 느끼죠.

그런데 왜 불편을 느끼면 안 됩니까? 자기 혼자 편해야 되거든요. 왜 나 혼자는 편해야 되고 남들은 불편해도 괜찮은 겁니까? 그게 바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될 인간이에요. 이 땅에서 죽어도 마땅할 인간인 거예요. 죽어도 마땅한 인간이 왜 태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죽어 마땅한 인간이 태어난 거예요. 우리도 죽어 마땅한 인간이에요.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지옥 가도 우리는 곱게 가야 돼요. 그런데 그렇게 고백했던 세리가 어디 갔습니까? 주님과 함께 천국 갔지요.

그런 생각을 이미 범죄 한 인간이 고유적으로 할 수 없는 거예요.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처음에 만든 고유성에서 벌써 멀어졌다는 자아의식이 없어요. 성령을 받아야 알아요. 성령은 십자가를 앞장세우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마저 버림받는다면 우리는 말할 것도 없이 버림받아 저주받아 합당하다는 것이 십자가 볼 때마다 늘 그것이 생각나게 돼있어요.

교회 목사가 전해야 될 소식이 뭡니까? 딱 십자가밖에 없어요.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딴소리하면 안 돼요. 어떤 설교라도 마지막 십자가만 나와야 될 이유가 뭐냐? 그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만 나올 수 있는 기적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적을 생각할 때 기도할 때 은근히 뭘 기다립니까? 행운을 기대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 행운이 기적적 행운을 기대하는데 주님께서 이미 통보했습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기적은 하나밖에 없다. 요나의 기적, 요나의 행운밖에 없어요.

요나는 자기가 갇혀있다는 걸 알았어요. 이 인식만 주께서 주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성령을 주시는데 주게 되면 우리는 여기에 갇혀있다. 갇혀있지만 갇혀있는 곳에 더러운 곳까지 독수리 맹금류 속에, 그리고 따개비 연합체에, 게, 새우, 미꾸라지, 뱀장어, 올빼미. 당아새, 까마귀, 다호마스, 어웅, 노자, 대승, 박쥐.

기본적으로 우리는 남들처럼 땅이 전부인 줄 알고 여기서 행복하면 단 줄 알았잖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땅에 기는 것은 전부 부정하다. 그러면 땅에 있는 것이 다 부정하다면 앞에 있는 것을 해석하는 것은 쉬워져요. 땅에서 들썩거리는 것은 먹어도 돼요. 들썩거리는 것이 뭐냐? 곤충 가운데서 날개+발4개 외에 두 개의 뛰는 다리를 따로 갖고 있는 것은 먹을 수 있다. 메뚜기, 베짱이, 귀뚜라미, 팟종이 종류는 먹을 수 있어요.

기본 베이스가 땅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다 못 먹는다. 족제비, 쥐. 도마뱀, 합개(도마뱀류), 육지 악어, 수궁(왕 도마뱀), 사막 도마뱀, 칠면석척(카멜레온), 땅에 기는 것은 일체 못 먹어요. 이게 해석의 기본입니다. 땅에 기는 것은 자기 힘으로 못 벗어납니다. 대자연? 땅 중심이죠. 그러나 이스라엘한테는 땅 중심에서 땅을 보는 게 아니고 하늘에서 땅을 볼 때 어떻게 보는지 유일하게 아는 민족이어야 한다, 너희 이스라엘아. 음식 먹으면서 전체적인 하나님의 안목을 그들의 음식 속에 섞여 놓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음식을 먹고 사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먹고 사는 거예요. 신명기 8장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만나를 준 것은. 그 만나가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온 거예요. 하늘에서 온 게 그들을 살린다는 거예요. 이 말을 요한복음 6장에 비추어보면 하늘에서 오신 분이 땅에 있는 사람을 살립니다. 이 말은 땅에 있는 자는 결코 땅에 있는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뭘 살려요?

사도 바울이 십자가 졌다. 그럼 사도 바울이 살릴 수 있습니까? 백날 져도 살릴 수 없어요. 십자가 진 사람이 예수님뿐입니까? 옆에 강도도 졌고. <스팔타커스>란 영화에 보면 노예들이 반란 일으켜서 수천 명이 로마에서 십자가에 달려거든요. 그 사람들이 구세주입니까? 아니지요. 십자가에 죽었다고 구세주 아니에요. 하늘에 속한 사람, 똑같은 아담에 속한 사람 말고 두 번째 아담 그분이 십자가에 죽어야 돼요. 그 말은 땅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 예수 찾고 있거든요. 결국 그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출발점을 은근히 노리는 게 있어요. 사적 구원, 개인구원으로 살아보자는 식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결국은 복음을 전해도 그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거부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7장 27절에 보면,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유대인들이 예예수를 안다는 거예요. 그의 아버지가 목수고 이름이 요셉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36절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자, 방금 읽었던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한꺼번에 해석 다 됩니다. 정답이 뭐냐? 하늘에서 오신 분이 자기 백성 데려가기. 이겁니다. 이 땅에서 자기 나름대로 노력하는 것은 말짱 무용지물이란 말입니다. 인간이 예수 믿는 것도 소용없는 짓이에요. 제 말 잘 들어야 돼요. 하늘에서 오신 분이 일방적으로 집어서 데려가는 식이라니까요. 주님을 내가 알아 모셔서 가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집어서 데려간다니까요.

수직적으로 오신 분이 수평적으로 같이 있으니까 인간들이 예수님을 무시한 거예요. 저 예수를 알아. 고향이 베들레헴이고 그 아버지가 목수란다. 우리가 알기론 그리스도는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아니까 분명히 저 사람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요한복음 7장 38절에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들 못 와, 라고 바리새인들에게 이야기한 겁니다. 결국 진짜 정말 예수를 믿으신다면 우리가 갈 수 없는 곳에 가요. 그 말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다는 말은 내 힘으로 못 간다는 뜻이에요. 내 힘으로 못 간다는 말은, 주께서 우리를 멱살 쥐고 끌고 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끌고 가는 게 아니고 죄인 되게 하셔서 끌고 가시는 거예요. 그냥 죄인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을 주셔서 나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까불게 만들고 자신이 죄인인 것을 놓치고 순간적으로 또 자기가 잘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그 죄를 유발하면서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 말은 막 살라는 거예요. 막 사는 논리 나오는 게 이렇게 길어요.

이상구 박사(안식교 교인)는 레위기 11장으로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하나님께서 인간 좋으라고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안 하면 건강에 해롭다고 해서 돼지고기 파동이 일어났어요. 정육점 망했습니다. 수십 년 전 이야기인데.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모르면서 성경을 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좋은 분이니까 이 땅에서 건강하라고 이 말씀 주셨다고 돼지고기는 해롭다고 먹지 말라 했다고 생각한 거예요. 족제비고 합개고 왕 도마뱀이고 사막 도마뱀이고 칠면석천, 카멜레온이에요. 그냥 땅에서 행복하면 소원성취 한 것으로 여기면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에요.

레위기 11장 봅시다. 주께서 이런 말씀을 주시면서, 아까 오징어 이야기마저 합시다. 오징어는 되게 억울해. 자기는 오징어 돼버려서 부정한 게 됐단 말이죠. 하지만 오징어가 섭섭해 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오징어 됨으로써 주님이 드러나면 되잖아요. 오징어 하지 말고 붕어 될래, 이러지 말고. 남의 인생을 모델로 삼지 마세요. 저 사람처럼 돼야 천당 간다는 게 없어요.

주어진 포지션, 그 위상은 주께서 가장 적합해서 심어놓은 거예요. 누구한테 적합하다? 우리한테 적합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 증거하기에 적합한 거예요. 가난한 자는 가난해야 되고 부자는 부자 해야 돼요. 부자를 너무 부러워하지 말고. 그렇다고 가난한 자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자기 팔자대로 가는 겁니다. 긍휼의 그릇은 긍휼의 그릇, 자비의 그릇은 자비의 그릇.

그런데 여기에 23절 봅시다.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 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중, 하늘이라는 것에 고유성에 부합되도록 만들었는데 날개가 있어서 날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하늘이라는 고유성을 못 보여주지요. 그러니까 못 먹는 거예요. 이런 건 먹지 말아야 돼요. 못 날지만 팔짝 뛰는 것 있지요. 메뚜기 같은 것. 그것은 땅에서부터 도약을 의미하는데 그게 바로 지상에서 천국으로 자기 백성을 데려가는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걸 보면서 자연이란 것은 누구 좋으라고 있는 거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함이 아니에요. 이걸 제가 지금까지 수천 번 이야기해도 결국 사람들이 복음, 복음 하다가 이것 때문에 돌아가요. 사람들이 복음이 듣다가 돌아간 이유가 딱 두 가지에요. 막 살라는 말 이해 못하고, 개인구원 없다는 여기에 이해 못해서 돌아갑니다. 마지막 부딪힐 돌에 부딪혔어요.

여기에 부딪힌다는 말은, 결국 그 사람은 출발점을 자기 좋으라고 예수 믿은 거예요. 그건 가짜입니다. 다른 예수에요.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에요.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 않느냐? 맞아요. 모든 사람이 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이 있다니까요. 성령 받은 사람을 왜 빼먹습니까? 스데반 집사가 돌을 맞았을 때 원망했습니까? 아니지요. 이미 자기는 죽은 자거든요. 성령에 충만해서 설교했어요. 성령에 충만하다는 말은, 이 설교해서 천당 가야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단 말이죠. 왜? 이미 나는 잃어버렸고 나를 주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주님이 할 바지 내가 거기서 콩 내라, 팥 내라 할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럼 기도할 필요 없네요.” 기도를 하기 위해서 기도한 사람은 엉터리죠.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기도할 때 성령에 의해서 기도했는데 기도하지 않으면 못 견디도록 만들었어요. 주께서. 기도 자체가 새로운 계시로 개시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도는 그렇게 사용하고 나는 왜 그렇게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건 사용하시는 오야 마음대로지 본인이 왜 걱정합니까. 자기가 주인도 아니면서.

주님께서 어떤 일을 시킬 때 기도하라고 할 수 있어요. 기다려 봐요. 성질 급하게 하지 말고 기다려 봐. 기도 안 하면 못 견딜 순간이 올 거예요. 하여튼 기존교회는 기도했다고 얼마나 자랑질을 해대는지. 기도 대결을 벌여. 준결승전, 결승전, 패자부활전. 얼마나 왕왕 대는지 제가 수련회 그랬잖아요. 통성 기도할 때 얘가 운다고. 얘가 놀래서 울어버려요. 주여, 삼창하고 기도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먼저 치고 나가면 초반부터 기분 나빠. 이건 뭐 장난도 아니고.

교회 자체가 노는 게 장난이에요. 자기 동조, 기분에 도취되는 즐거움이 있잖아요. 내가 기도를 다 할 줄 알다니. 예측이 되고 기대를 하고 예상을 하는 그것을 달성했다고 하니까 마귀가 있는 곳이라고밖에 달리 설명이 안 돼요. 마귀가 있어서 그렇게 인도한다는 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이에요.

아까 마귀는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못 듣도록 자신의 잘남에 집중하게 만들어요. 하면 된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정성을 드려서 하면 다 이뤄져. 간증이 수천 만 개나 돼. 너도 부러우면 그렇게 해봐. 되게 돼있어. 이게 바로 출발점을 계속 자기한테 두려고 하는 마귀의 전략이거든요.

제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24절에, “이런 유는 너희를 부정케 하나니 누구든지 이것들의 주검을 만지면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이 모든 음식을 가려먹는 것과 죽은 시체와 관련돼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이 원치 않던 동물이 원치 않던 계속해서 시체를 유발시키죠. 태어나는 것도 주의 뜻이지만 죽이는 것도 주님이 죽게 하시는 거예요. 그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너희도 죽지만 이왕 죽어가면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근거, 본래적인 것, 고유한 것, 그리고 주님이 함께 있음으로 고유하게 있는 자체가 땅에서부터 뛰는 거예요. 벌어지는 거예요. 분리되는 거예요. 갈라지는 거예요. 헤어지는 것이고 나눠지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우연한 일이지만 하나님께선 우연한 일로 보지 않고 필연적인 것으로 바꿉니다. 우연은 우발적이지만 필연적인 것이 덮치면 필연적 앞에서 동시성, 모든 것은 연관돼있고 관련돼있다는 것이 드러나죠.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바로 천지창조하신 주님이 앞으로 하실 멸망과 구원과 연관된 채 오늘도 저 푸른 초원에서는 소들이 양떼가 뛰놀고 있습니다. 풀을 먹으면서. 인간도 그렇게 풀을 먹을 때가 있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님 앞에 장애물인지 독소적인 요소인 것을 저희들이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주의 일을 훼방한 당사자 속에 우리가 포함된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렇게 하는 것이 주의 뜻이라면 주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이 우리 자신을 통해서 십자가만 드러나는 그러한 계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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