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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6 23:59:12 조회 : 645         
절연 171006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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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25) 17-10-10 13:00 
20171006a 울산강의-레위기 12장 : 절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12장입니다. 내용이 생뚱맞은 게 있어요. 꼭 이럴 것까지 있느냐는 그런 내용들이 의아하게 등장할 건데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 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그러니까 남자를 낳았을 때는 7일+33일, 합쳐서 40일 동안 부정하다는 겁니다. 더럽다는 겁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의아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더러운 인간을 왜 만들었느냐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깨끗하게 만들어야지. 자녀를 낳았는데 더러워서 추가 조치가 있어야 되겠다. 그러려면 추가 조치가 없도록 깨끗하게 낳으면 되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그냥 만드시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매개체가 있어요. 아담을 통해서 인간을 낳게 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인류의 조상 아담이 더럽다는 것은 우리 생각엔 아담이 그때 개인적으로 더럽다고 할 거예요. 우리 상식으론 그래요. “아담이 죄를 지었다. 아담은 나쁜 사람이구나. 왜 죄 지었노? 하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는 이러고 싶단 말이죠.

그런데 이건 우리의 상식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더러웠는데 그 뒤에 몇 백 년, 몇 천 년 흘러도 아담에게 나온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더럽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로마서 9장에 의하면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의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아담을 하나님이 상대하시고 아담에게 어떤 인간이 나오든 간에 하나님이 그 인간과 상대 안 하고 아담과만 계속 상대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담은 매개체니까, 쉬운 말로 중보자니까. 하나님께선 중보자로 상대하고 이야기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돼요. 그 점에 대해서 우리도 잘할 수 있는데 직접 나와 상대하시지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섭섭해 할 문제가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해야 될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더러운 존재가 되는 것도 우리 행함과 무관하게 아담의 자식이란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냥 결정적으로 더러운 겁니다. 그 점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은 섭섭하게 생각해서 나한테 글도 보낸 사람 있어요. 하나님은 사이코라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우리의 행함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는 예수 그리스도란 중보자 때문에 어떤 행함과 상관없이 깨끗함을 얻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그 점은 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걸 생각해보세요.

더러운 것은 아담 때문에 더럽고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겁니까? 그건 기존교회에서 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가 운영이 되니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예수님 덕분에 우리의 어떤 행함과 관계없이, 교회 나오든 말든 관계없이, 헌금하든 말든 관계없이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는다. 이것이 상당히 기분 나쁘게 들리고 분노를 유발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본인이 무슨 짓을 하든 더럽다는 전제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인간은 자꾸 개선하려고 해요. 하루를 살면 하루 더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나아지기를 원하고 개선되기를 원하는 것은, 나란 인간은 개선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해서 그런 겁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개선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출생부터 그랬어요.

꼭 시편 51편 다윗의 고백을 우리가 들어야 하겠습니까? 내가 죄 가운데서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죄 지은 게 아닙니다. 내가 태어나서 죄 지으면 죄 지은 경우도 있고 없을 경우도 있잖아요. 그게 아니고 나는 처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산다는 것은 내가 태어난 그 자리를 평생 동안 보여주는 기능을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죄 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도 죄를 줄줄 흘리고 티를 내며 평생을 살도록 돼있습니다.

사람들이 오늘 참석 안 하잖아요. 사실은 나쁜 마음으로 참석 안 한 게 아니고 주께서 추석 휴가를 보낸 거지요. 참석하지 말라고 참석 못하게 하신 거죠. 지금 참석하고 싶어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있겠어요. 차라리 참석 못하면 죽는 게 낫지. 이렇게 살아야 되나. 이런 식으로 통곡할 건데 주께서 그 심정 헤아릴 줄 믿쓉니다.

성경말씀에서 아기로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기를 태어나게 한 여인, 엄마죠. 엄마 자체가 얼마나 더러운가 하면, 네가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하나님 보기에 더럽다. 네가 자식을 낳기 전에는 맨날 화장하고 잘 때 피부 관리해서 깨끗한 줄 알지 자식 낳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들 낳으면 40일, 딸 낳으면 80일 동안 더럽다고 규정했다는 말은, 그 엄마 자체가 이미 더러운 데 죄 가운데 있었고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다는 시편 51편의 말씀처럼 죄 가운데 자식이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엄마가 깨끗하다고 우긴다면, 자식이 엄마를 죽이는 셈이 됩니다. 거기서 나온 이름이 있어요. 엄마를 죽인 자식이 있습니다. 패륜아는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었지요. 베냐민은 자기는 태어났고 엄마를 죽였습니다. 그렇게 죽일 때 자기 기능을 한 거예요. 오른손의 아들이에요. 오른손은 어떤 기능이냐 하면, 전쟁을 거는, 싸움을 거는 주체 측을 이야기합니다. 전쟁을 시도하는 자리, 결국 전쟁에는 상대가 있는데 그 상대가 적, 다른 말로 원수가 되는 겁니다.

베냐민의 엄마가 언니 레아가 아니고 동생 라헬인데요, 야곱이 정말 사랑했던 아내가 라헬입니다. 사랑했던 아내가 죽고 난 뒤에 사랑의 아들이 나왔지요. 엄마 죽고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엄마의 본질이 아들 베냐민 안에 합류돼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베냐민이 하는 기능은 전쟁을 시도하고 추진하는 주체 측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베냐민은 적을 생산하는 겁니다. 계속 이 땅에서 적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누구 적이냐 하면, 하나님의 적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오른손의 아들의 오른쪽은 전쟁을 벌이는 분이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되겠지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에요. 독생자를 지상에서 누구냐고 물으면 안 돼요. 어떤 기능을 펼치느냐고 물어야 됩니다. 이런 게 어려운데,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누구냐고 존재를 물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존재를 묻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직 아담에게만 해당되고 다른 사람은 해당 안 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만 나라고 할 수 있어요. 나는 포도나무요, 나는 생명의 떡이요, 나는 진리요.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두 기둥 사이에 빨랫줄이 걸었는데 많은 빨래가 있으면 마지막 기둥이 예수 그리스도고 처음 기둥이 아담이에요. 이 사이에 모든 인간은 빨래처럼 바람에 휘날리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란 철학자는 인간을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이 있다고 해서 존재자라 하는데, 어쨌든 간에 사실은 그 존재자들은 영원하지 않아요. 그냥 잠시 왔다고 소모되는 용도로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저기 사진 예쁘게 찍어놨지만 몇 년 안 가서 소모될 거예요. 빈자리, 백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순서가 될지 모르겠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아들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하고 33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고, 5절에 여자를 낳으면 7일 동안 부정한 것이 아니고 무려 14일 동안 부정하고 66일이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진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는데 도대체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묻기 전에 왜 인간이 하나님한테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되는지 기분 나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레위기 12장을 보고 있는데 우리가 기분 틀어지면 성경 덮어버리면 그만이지요.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안 본 걸로 하겠습니다. 직장에서 업무에 관한 책들 볼 것도 많은데 성경 레위기 12장까지 신경 써야 되겠습니까? 안 보면 그만이잖아요. 우리가 책을 볼 때는 자기한테 도움 될 것을 기대하고 보는데 레위기 12장은 도움 되기는커녕 우리를 지적질하는 이야기인데 넌 태어날 때부터 더러운 인간이다. 이런 이야기거든요.

아무 것도 한 것도 없는데 너 때문에 엄마가 더러워졌다. 뭐 어쩌란 말입니까? 책임지란 말입니까? 그런데 우린 엄마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엄마가 보고플 땐~~~ 가수들 어머니 노래, 아버지 노래하면 평소에 효도도 안 하던 것들이 눈물 막 흘리고 노래 부르고 점수 막 따고, 군에 가서 아버지, 엄마 노래 부르면 다 울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나를 낳은 분을 계기로 해서 엄마가 더럽다면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설까요, 엄마 편에 서서 엄마를 두둔할까요? 우리 엄마가 시장통 바람 부는 복판에 바지장사하면서 나를 교육시켰는데 그 엄마가 뭘 그렇게 잘못 됐다고 더럽다고 하느냐 말이죠. 이렇게 대들고 싶은 생각이 든단 말이죠. 이 성경 보고 너무 감격스럽다고 하는 사람, 별로 없어요. 왜 우리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고 이런 욕을 먹어야 하느냐 말이죠. 에이, 하고 덮어버릴 수 있는데 이걸 생각해보세요.

성경이란 그다지 필요치 않는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성경 몰라도 되는 겁니까, 아니면 성경 앞에서 내가 없어져도 되는 겁니까? 우리는 풀 같이 사라져도 말씀은 영원하잖아요. 세상 모든 것이 말씀대로 운영돼요. 이 말은 내 뜻대로 운영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안 보는 이유는, 자기 뜻이 하루에도 수백 번씩 말씀에 대해서 가로막습니다.

가로막는 취지가 뭐냐 하면, 성경말씀이 현실이냐, 내가 하고자 하는 게 현실이냐? 그 투쟁을 우리가 벌이고 있는 겁니다. 내가 상상하고, 내가 기획하고, 내가 계획하고, 내가 마음먹는 게 현실이냐, 아니면 성경말씀이 현실이냐 말이죠. 추석에 내가 고모 집에 간다. 이게 현실이냐? 아니면 추석 때 성경공부에 나온다. 어느 게 현실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많으냐 말이죠.

세상은 성경말씀이 펼쳐진다는 정도가 아니고요, 성경말씀대로 펼쳐지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계획은 무산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점을 안 믿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평소에 자기 원대로 마음대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하니까 하나님의 뜻 같은 것이 허황되고 하나님 계신 것 맞긴 맞아? 하나님 계시면 내 뜻대로 할 테니까 한 번 막아보시오. 못 막잖아. 못 막으니까 신은 있다고 믿기는 믿지만 그다지 신빙성이 있진 않고 역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확실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깔아두고 살아요. 믿는다고요? 개코나 믿어요. 얼마나 안 믿었으면 믿는다고 새삼스럽게 다짐을 해야 될 정도로 안 믿어집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경대로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확실하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망한다고 여러 군데에서 신명기도 그렇게 레위기 그렇고 망한다고 했습니다. 신명기 28장에 보면 반드시 망한다고 돼있거든요. 끝에도 그렇고.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망했고, 말씀대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오독해서 알았던 사람들은 천국에서 쫓겨나서 이를 갈며 후회막심하게 살았습니다.

야고보 2장 5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가난한 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난하더라도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빨리 벗어나서 부자 되고 싶은 충동과 희망으로 살아가죠. 가난이 가난으로 계속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요? 가난이 상대적이거든요. 상대적으로 전부 다 하루 세끼만 먹는 나라가 있다고 합시다. 부자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 빼놓고 다 부자라면 하루 세끼 먹는 사람은 자기 혼자밖에 없어요. 그래도 가난이 되겠습니까? 남들처럼 못 될 때 패배의식을 느끼겠지요. 자괴감을 느낄 것이고. 내가 이러려고 이 땅에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요.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부자가 축복이라 하지 않고 내가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항상 더 많은 돈을 원할 건데 돈을 원하지 않고 믿음에 부요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현찰 750억에 부동산 2600억 갖고 있어도 되게 가난한 자에요. 이까짓 것 돈 750억 한방에 날아가도 괜찮아. 나는 그걸 보고 세상 살지 않아. 믿음에 부요한 것, 이렇게 해준 것, 그게 사는 재미지, 한 달 수입이 26억 들어오고. 이젠 돈 지긋지긋하다. 정말 그런 사람 있다면 가난한 사람입니다. 상대적이니까. 자기가 갖고 있는 믿음에 비해서 돈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야말로 나는 부자 맞는데 믿음에 부자다. 믿음에 부자란 것은 돈 자랑하지 말고 믿음을 자랑하라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에게 믿음이 있으면 그걸 어디에 쓸 건데? 할 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겠느냐” 약속의 나라거든요.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성돼있습니다. 약속이란 하나님이 선물로 준 것이거든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결정적으로 준 것은 율법이었습니다. 모세 당시에, 레위기 당시에. 본문에도 나오잖아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쉽게 말해서 추석인데 남들은 택배도 오고 선물도 오는데 나한테는 무슨 선물 없습니까? 하는데 택배가 왔어요. la갈비인가 하고 보니까 레위기 12장이에요. 레위기 12장에 뭐 좋은 게 있는가 보니까, 아들 태어났으면 7일 동안 부정하고, 그 다음에 33일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고. 어쩌라고? 이걸로 찜해 먹을 수도 없고 어디에 써먹을 거예요?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이 왜 있는 겁니까? 절연, 관계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관계가 끊어졌다는 걸 언급하는 겁니다. 축복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끊어졌다는 걸 눈치 채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소풍 가는데, 저 어릴 때는 고구마 두 개, 삶은 달걀, 김밥, 말표 사이다 갖고 갑니다. 사는 집 아이는 소지지 넣고 하는데, 옛날에는 할머니가 따라 가잖아요. 엄마는 맞벌이한다고 못 오고. “너, 여기 맛있는 것 있으니까 먹고, 엄마는 집에 간다.” 그럼 얘가 기분 좋아합니까? 울지요. 왜 웁니까? 절연, 관계가 끊어졌지요.

오늘날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 안 합니다. 스스로 독자적으로 살면 그게 축복인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은 잔소리해서 귀찮아. 자기 혼자 얼마나 잘 살아냈는지 그걸 자랑스러워합니다. 혼자서도 잘 해요. 그걸 보람으로 삼아요. 관계 맺는 것 본인이 결정합니다. 저 사람 좋으면 친구하자. 저 사람 좋으면 내 애인하자. 본인이 결정해요. 하나님이 맺어준 관계없습니다. 부부라도 싫으면 갈라서 버리죠. 지가 결정했기에 지가 갈라서는 거죠.

하나님의 뜻 같은 것은 조금도 고려의 대상도 안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는, 그게 보통 이방민족이거든요.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아담의 자손은 다 그래요. 제가 요즘 설교에 늘 그런 이야기하는데 모든 인간은 배후에 악마가 있어서 악마의 직원으로써, 악마의 앞잡이로 살아간다고 할 때 교인들이 전혀 안 믿는 눈치를 보내요. 물론 성경에 나와 있는 건 맞지만 실제로 실감이 안 난단 말이죠. 배후에 누가 있는데? 마귀 없어. 내 뒤에 목 돌아간 이상한 귀신 인형 없거든요.

성경에 있으니까 인정은 하겠지만 본인이 그걸 실감을 못해요. 악마가 목에 줄을 맨 세파트처럼 가지고 논다는 그러한 악마의 모습에 대해서 가슴에 와 닿질 않고 마음에 와 닿질 않아요. 여기 만약에 대학교수가 앉아 있는데 여러분 배후에 악마 있다고 하면, 누가 동의하겠습니까?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이런 사람 없어요. 전부 다 수학교수, 물리학교수, 철학박사인데 지 잘난 체하는데 뒤에 악마, 귀신 하나 달렸다 하면 누가 믿겠어요. 신학교수가 앉아있는데  뒤에 악마 있다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 점을 먼저 말씀드릴게요. 왜 인간이 실감을 못하느냐 하면, 인간은 인과관계 속에 놓여 있어요. 원인과 결과 관계를 수정해서 그 구조 속에 자기 자신을 놓이게 해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이런 결과가 나온다. 그건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양육을 받아왔거든요. 착하면(원인) 복 받아 천국 가고, 악하면 벌 받아서 지옥 가요.

그럼 착하다, 악하다는 시작을 누가합니까? 캐치를 내가 하죠.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한 일에 내가 책임지겠다는 겁니다. 자식이 삐딱하게 나가면, 내가 잘못 키웠다고 하죠. 자식은 좋아하지요. 여차하면 엄마 책임, 아빠 책임으로 돌리면 되니까. 본인들이 자백을 했으니 엄마, 아빠가 책임지고 돈 달라하면 되니까.

원인, 결과의 극단적인 것이 물리학, 수학, 과학이에요. 도덕, 윤리, 신학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로마서 9장에 보면, 아직 선이나 악이나 행하기 전이라 했거든요. 원인과 결과가 우리 쪽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가 아니고, 제가 책을 볼 건데, 올해 노벨문학상 받은 책이 인간의 마음속에 어두운 심연이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행동이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게 아니고 뭔가 어두운 심연에서 행동이 나온단 말이죠. 어두운 심연, 깊은 구덩이는 인간이 제공한 게 아니에요.

다시 말해서 뭘 감 잡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행동해서 하고 싶으면 하고, 말면 마는 게 아니고 하도록 부추김을 당하는 다른 어떤 힘, 인간을 힘들게 하는 다른 힘이 인간보다 먼저 전제돼있다는 것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감추고 있었던 거예요. 그 감추고 있던 것을 드러낸 책이라는데, 사실 프로이트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원인과 결과가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미 죄 속에서 태어났잖아요. 인간이 책임질 수 없고 다룰 수도 없는 인간이 어찌 해볼 수 없는 그러한 본질과 성격의 일부를 우리가 할당받은 겁니다. 개성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초법적인 힘이 등장하면 그 개성들 죽어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히틀러 같은 경우에 그 독일의 똑똑한 사람들도 히틀러가 몇 마디 하니까 다 따라 갔잖아요. 다 따라가서 전부 다 미친 사람 돼서 유대인들 학살하고 그래도 양심의 가책 없었어요. 그게 진리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다 따라가는 거예요.

이건 구약성경에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지자가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아무리 외쳐도 듣지도 않아요. 권력의 힘, 정치적인 힘 앞에 전부 다 아무 소리 못하고 우르르 다 따라가는 겁니다. 다수가 진리가 되는 시대를 민주주의라 해요. 민주주의는 결정을 투표로 하는데 다수결로 정합니다. 가정에 식구가 다섯이라 하면, 가정에 문제 있으면 얘들이 뭐라고 합니까? “엄마, 우리 민주주의로 하자.” 표 대결하자는 것 아닙니까. 세 표, 두 표 나오면 세 표로 결정하지만 이미 가정은 두 패로 나눠졌어요. 반대표가 두 표 나왔으니까.

여름방학인데 산으로 가자, 바다로 가자. 이것 때문에 세 표, 두 표로 나눠진다고요. 외식하는데 중국집에 가자, 회 먹으러 가자. 이것 때문에 갈라진다고요. 아이 학원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부부 사이가 또 갈라지요. 근원적인 문제에요. 왜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되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전부 의견이 같아요. 우리 애를 공부를 잘해야 돼. 그 점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공부를 잘해야 됩니까? 그게 레위기 13장에 나옵니까, 어디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의 자식들이잖아요. 죄의 종들이란 말이죠. 공부 잘한다는 게 그 앞에 의미가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근원적인 것은 아담의 죄 안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시작을 자기부터 시작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남보다 우리 아이가 공부를 더 잘하게 되면 독자적으로 우리는 남보다 더 우수한 사람이 된다.

모든 것이 죄라는 결과는 완전히 무시되고 우리 얘는 공부 잘해요, 그 원인으로부터 새로운 결과가 주어질 때 이 가정은 악마를 염두에 두겠습니까? 염두에 안 두지요. 내가 공부 시켰으니까. 내가 직장 다녀서 학원 보내고 이만큼 성공시켰으니까. 그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잘해서 잘된 것만 기억이 돼요.

거기에다 여러분 배후에 악마 있다고 하니까 저게 틀린 말은 아닌데 현실로 와 닿질 않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공부한 아이가 학원가다 차사고로 죽어버렸다. 학원 다녀서 전교 1등 계속하고 있는데 수능 얼마 안 남았는데. 그럼 그 원인을 따져봅시다. 학원가다 죽었잖아요. 학원 누가 보냈습니까? 엄마가 보냈지요. 그럼 엄마가 책임져야 됩니까? 내가 바보 같이 학원을 보내서 어미가 널 죽였다고 하잖아요. 그게 자기 죄를 회개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따지는 겁니까? 따지는 거잖아요. 회개하려면 이렇게 해야 돼요. “학원 보낸 자체가 레위기 12장을 염두에 두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울면서 기도하는 엄마 봤습니까? 레위기 12장이 어디 박혔는지도 몰라요.

레위기 12장이 우리에게 낯설게 등장하는 이유가, 레위기 12장은 여호와께서 모세로 해서 이미 원인과 시작을 여호와로 출발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는 자세가 항상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습관화돼있어요. 그래야 내가 노리는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그냥 하나님은 내가 시작한 일에 후원해주고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위기 12장에서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도저히 마음 편하게 이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겁니다.

예를 이런 게 있어요. 네가 원하는 것 다 들어줄게. 그런 성경이 있다면 들을만해요. 시작을 나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내 소원을 들어주신데.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 기다려보세요. 뜻대로 되면 나 혼자 다 먹는 게 아니고 10프로는 드리겠습니다. 우린 동업자 아닙니까.” 그게 아니고 시작하는 것부터 개 무시하고 들어가면 이 성경이 감사히 들어오겠습니까? 안 들어오지요.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주께서 아이를 데려갈 정도로 나한테 문제 있음을 깨우치게 하셨구나. 아이를 내 자식으로 키웠는데 그게 내 자식이 아니고 다 같은 아담의 자손에 불과하구나. 내가 주님부터 생각하지 않고 내 영광부터 생각한 것을 성령이 임하면 깨닫게 되겠지요. 그리고 깨닫고 난 뒤에 우연히 바람 불어서 레위기 12장을 본다면 우리는 날 때부터 절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 영생과 무관한 관계, 천국과 무관한 관계, 지옥과 친한 관계, 저주받아도 할 말 없는 관계,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럽다고 해도 너무나 합당한 평가라는 사실을 순하게 받아들이겠지요.

너는 더럽다, 할 때 옳소이다. 제가 더럽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끊어지지 않은 사람이에요. 가장 경건하고 가장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 누구냐?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더러운 짓임을 아는 사람, 주께서 그런 죄인을 부르러 왔어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왜 사람들은 자기가 더럽다고 여기지 않느냐 하면, 시작을 자기부터 개시하게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주님부터 시작했다면, 그냥 주님부터 시작했다고 모호하게 하지 말고 말씀으로 시작했다고 보시면 돼요. 아담과 예수님 사이 빨랫줄에 걸린 모든 것은 아담에서 예수님까지 이어진 모든 말씀의 증거들이에요. 그래서 말씀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되게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아들 낳고, 딸 낳게 한 겁니다. 이제 본문이 이해되십니까?

지금 본문이 주객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말씀이 말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아들 낳고, 어떤 때는 딸 낳는 거예요. 딸 낳고, 너는 14일 더럽고 66일 지나야 산혈이 깨끗해지는구나. 그 다음에 아들 낳고, 7일 더럽고. 정말 복음으로 사는 산부인과 같으면 복숭아, 고추 그리지 말고 레위기 12장을 걸어놔야 돼요.

여러분이 더러운 걸 몰랐지요. 자식을 낳고 보니까 그 자식이 바로 당신, 엄마 뱃속에서 나왔잖아요. 자식이 더럽다는 말은, 엄마가 더러운 거예요. 인간은 더러운 거예요. 더럽다는 것을 다른 민족에겐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연관된 민족이기 때문에 알려주는 거예요. 더럽다는 것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예수님 오실 때 멀쩡하게 오지 않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로마서 8장 3절에.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메시아를 보면서 왜 저렇게 초라하냐고 하지만 메시아가 초라한 이유가, 우리 자신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저 사람은 십자가에 피 흐려 왜 돌아갔지? ㅉㅉㅉ

그럴 필요 없어요. 그분이 십자가에 왜 돌아갔습니까? 아버지한테 버림받았잖아요. 인간들치고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자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배후에 악마가 있어서. 자꾸 독자적으로 인생을 개척하라고 계속해서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보기에는 정상적인, 항상 원인과 결과 식으로,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는 낳는다는 식으로 악마가 선악적인 요소로 우리에게 헛된 망상, 바람을 집어넣은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도 마찬가지고. 교인들에게 바람을 집어넣은 거예요. 부~웅 떠서. 어떤 바람이 드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 뭔가 열심히 해서 월급 받고 사니 그다지 레위기 12장이 아쉽지 않아요. 봐도 그만이고 보면 잠 오고 안 봐도 그만이고. 나는 내가 번 돈으로 살지 말씀으로 안 살거든요.

이걸 적으로 삼아 주님께서 싸우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란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돼요. 더럽구나. 더러우면 어떻게 할까? 나중에 66일 지나서 속죄제물 드리고 번제 드리면 되지. 그래서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아들 낳고 딸 낳고 하나님 앞에 번제 드리고 할 도리 다했다고 해서 죽은 겁니다. 그래서 멸망당한 거예요. 왜? 제사를 지내고 번제를 바친다는 것은 그 행위 개시를 자기로부터 시작하잖아요. 누구를 위한 제사에요, 누구를 위한 속죄제고 번제입니까?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시작한 거예요.

말씀이 말씀 되게 드린 게 아니고 내가 이런 속죄제나 번제 드리면 하나님 앞에 거룩하단 소릴 들으면 내가 시작한 일이 나를 구원하는 일로 결과를 맺는다는 그러한 희망 때문에 말씀을 이용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말씀을 줘도 정작 주인공이 누굽니까? 본인이 주인공 된 거예요. 자기가 존재기 때문에.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거예요. 존재한 자가 존재를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아까 빨랫줄 이야기했지요. 자기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담에서 흘러온 죄라는 걸 알아야 돼요.

레위기 12장을 간단한 도식으로 표시하면 이렇습니다. 시간+제사=거룩. 66일, 33일, 80일,40일 그거에요. 시간 지나서 제사 드리면 거룩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어려운 것이 시간과 제사가 인간의 힘으로 만날 수 없다는 것, 결합이 안 된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말씀을 준 것은 인간은 이미 끊어져 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끊어졌는데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께서 잇게 했지요. 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이라고.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시고 율법을 주셔서 이어줬단 말이죠.

그러면 이어진 내용이 시간+제사잖아요. 인간이 시간+제사를 지키는 게 아니고 언약 안에 시간과 제사를 완성시킬 분이 하늘에서 따로 투입, 파견, 오시는 거예요. 끊어진 상태에서 시간 지키고 제사 한다고 거룩해지는 게 아니란 말이죠. 확고하게 끊어졌다 것을 분명하게 만드는 말씀을 실현시키고 완성시킬 분이 하나님께서 ‘시간+제사=거룩’이란 공식에 따라서 장차 이 땅을 방문하시는 겁니다. 그분이 다 이루었다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이걸 어떻게 주님이 투입하는가는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IP:14.♡.134.25) 17-10-10 13:01 
20171006b 울산강의-레위기 12장 : 절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 닮아있는가? 같은 인간이니까 원숭이와는 다르겠지요. 코끼리와도 다르고. 남자와 여자를 왜 하나님께서는 단일성으로 똑같은 성, 젠더로 창조하지 않고 왜 남성, 여성으로 구분시켜놨는지 생각해봐야 돼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남성과 여성이 필히 구분돼야 됩니다.

예수님은 한분이죠. 그 하나라는 것이 하나에서 줄곧 하나로 가는 게 아니고 하나에서 둘이 되었다가 다시 합쳐지는 가운데서 그리스도에 내재돼있는 본질이 바깥으로 방출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냥 승천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서 죽었다가 승천하셨다. 이 죽음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방출이 되고 계시로 드러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실 때 그냥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시거든요. 그 약속은 감사하게도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란 거죠. 이 말은 후손과 후손끼리의 싸움이에요. 여자와 뱀의 싸움이 아니고 후손까지 계속 지연되는 겁니다. 계속 밀리는 거예요. 후손에 와서 싸우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라고요.

원래 아담이 먼저 있고 순서상 아담이 먼저고 여자가 나오잖아요. 그러면 여자가 나오면서 졸지에 아담은 날아가고 아담은 여자가 있음으로 남자가 되는 겁니다. 아담이란 1이잖아요. 그런데 새로운 아담이 되려면 1이 2가 되었다가 다시 1로 가는 가운데 아담이 품고 있던 하나님의 약속이 역사화 되어 역사란 이름으로 바깥으로 펼쳐지는 겁니다. 그걸 저는 포개져 있다, 또는 중첩돼있다고 하는 겁니다.

아담이 나왔을 때 사람이네, 했는데 뒤에서 여자가 튀어나온다면 앞에 있는 게 사람이 아니고 남자구나. 그럼 사람은 뭐냐? 남자만 사람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될 때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남자의 기능과 여자의 기능이 제대로 다 수행될 때 비로소 창조된 본래 인간으로서 뜻이 구현된다는 겁니다. 물론 남자 뒤에 있는 게 아니고 남자 속에 있었지요. 갈빗대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흙으로 만들었어요. 죽는 거죠. 그리고 여자의 이름을 생명이라 했습니다. 남자에서 여자가 나왔는데 순서를 반대로 하면 여자를 통해서 남자를 드러내는데 이 남자는 이미 정해진 남자에요. 이 남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시절은 끝났어요. 아담은 살아있을 때만 아담이에요. 그 뒤에 아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가면 천사와 같아요. 그리도 흙의 형상을 입지 않습니다. 누구의 형상을 입느냐? 하늘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부활의 형상을 입습니다.

제가 일부러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약속된 기업, 하나님의 말씀대로 약속된 기업이에요. 하나님이 약속대로 안 하고 부도나면 어떻게 하느냐?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잖아요. 봐, 약속대로 망했잖아. 하나님이 율법 줬고 율법대로 이스라엘이 망했잖아요.

이스라엘이 망한 것도 증거가 되지만 더 확실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난 것, 사도 바울은 그게 복음이에요. 죽음도 복음이고, 살아남도 복음이고. 앞에 대표적으로 십자가로 나타나고 뒤에 부활은 숨어있고.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부활은 없어요. 뒤에 숨어있는 부활을 알기 위해선 반드시 십자가로 가야 돼요.

십자가란 우리 자신의 구원을 거기서 포기하는 겁니다.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포기하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 포기하는 거예요. 내가 잘 되기 위한 하나님을 포기하는 겁니다. 포기하는 방식은 뭐냐? 나는 주 앞에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성전 앞에 있던 세리처럼.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가 이렇게 하면 의인될 것이라는 꼼수를 사전에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냥 일방적이에요. 본인이 예상 못했습니다.

예상 못했다는 말은, 나라는 것이 존재하고 존재한 내가 기대하고 예상한 노선이 있을 것 아닙니까? 어떤 노선의 끝에도 지금 내 구원은 없는 거예요. 자기 노선에 구원은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용서한 것은 자기가 예상한 노선 말고 다른 노선이 접합해서 그런 거예요. 접촉해서 그런 거예요. 이렇게 하면 내 끝은 잘 될 것이다. 그런 건 없어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아줌마가 이렇게 하면 구원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간음했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자길 고소하는 사람들에게 돌로 치라고 호통할 때 그 아줌마가 신난다고 했습니까? “나는 죽었구나.”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했는데 죄 없다는 인간들도 죄 들통 날 판에 현장에서 잡힌 자기는 죄 없다 할 수 없잖아요. 그럼 죄 있는 여자 맞지요. 죄의 결과가 뭡니까? 지옥이잖아요. 거기서 자기의 모든 기대는 멈춰야 되는 거예요. 내 삶의 마지막은 지옥. 여기서 멈춰야 돼요. 거기서 다른 계산을 하면 안 됩니다. 그걸로 끝나야 돼요.

그 다음에 그 여자가 죄 용서받는 것은 주의 일방적 조치에요. 왜냐하면 그 여자를 구원함이 아니고 그 여자 속에 새로운 아담,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기능을 삽입시킨 겁니다. 붕어빵 만들 때 밀가루 반죽 넣고 앙꼬 넣잖아요. 그리고 돌리고 뒤집고 하듯이 주님께서는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기 의를 집어넣고 안 넣고는 예수님의 일방적 권한이에요. 이런 이야기는 세상과의 절연입니다. 완전히 끊어졌어요. 말을 해도 못 알아들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들의 왜 말을 못 알아듣느냐 하면, 자기의 미래는 자기가 개시하기에 달렸어요. 자기가 원인 제공함에 따라서 결과가 온다는 과학적 합리적 인식이 오늘날 사람들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악마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광채를 기어이 가려버립니다. 네가 인간이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자꾸 격려하고 독려하고 우리를 부추긴 거예요. 하면 된다! I can do it. 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긍정적 사고방식을 집어넣고. 엎어지거든 일어서라. 일어설 수 있어. 하면 돼! 누가 위로해주지? 여러분. 많은 분들이 박수칠 거야. 할 수 있어. 간음한 여인에게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할 수 있어. 용서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겠어요?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본인은 그런 것 기대조차 안 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안다는 것은 더 남아있는 감사거리가 없어요. 복음에 대해서 알았으면, 뭔가 더 기대해서 그것 되면 하는 감사거리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복음에 대한 감사입니다. 십자가 복음, 일방적으로 구원하신 그것만 해도 집구석 박살나도 박수칠 마음에 준비가 돼있어요.

미장원에서 머리 홀랑 깎여도, 대머리 됐는데 박수치면서 나오는 겁니다. 인생은 그냥 박수만 치면 돼요. 그걸 범사에 감사하라는 건데 우리가 평소에 주 앞에 감사하지 못하고 박수치지 못하는 것은 주님 주신 것이 좋은 게 아니고 자기가 은근히 기대했던 자기 노선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원인이 되어 기도한대로 응답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기도는 호흡이 아니라 자살이라고. 그 내용을 위해서 목숨 걸어야 돼요. 이것 들어주면 제 목숨 가져가도 상관없어요. 그게 바로 기도에요. 기도 내용에 대해서 자기 목숨마저 내버릴 정도가 돼야 돼요. 자살입니다. 호흡이 아니고 살고자 하는 게 아니고 죽으려고 환장해야 그게 기도에요. 날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날마다 자살한다는 거예요. 그만 살래. 이 땅에 그만 살래. 울산에 매연도 많은데 그만 살래.

도대체 이런 것도 모르고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그동안 누구한테 뭘 들었는지 모르겠어. 뭘 듣고 믿음도 없으면서 살려고 용기를 내는지, 누가 그렇게 헛바람 줬는지. 헛바람 소용없습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싸움을 겁니다. 여자의 후손은 반드시 적이 있습니다. 뱀의 후손이에요. 원수가 없는 이상 구원은 없습니다. 전쟁 없는 구원은 없어요. 그 전쟁에 대해서 우리가 나설 전쟁은 아니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전쟁은 아닙니다. 주께서 홀로 하실 전쟁이에요. 그 전쟁의 결과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주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정말 머리가 비상한 사람은, 이 본문을 놓고 벌인 전쟁에서 누가 이겼는지 질문해야 돼요. 그런데 레위기 12장에 아무리 봐도 전쟁 이야기 안 나오잖아요. 뭘 하라는 것만 나오지요. 하라 했으니까 하면 되지, 뭐.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겁니다. 말씀은 인간이 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이미 끊어진 상태기 때문에 끊어진 상태에 언약이란 깔때기가 꽂히면 깔때기 속에 레위기 12장 말씀을 친히 이루기 위해서 죄 있는 이 세상까지 아버지로부터 끊어진 이 세상,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게 절연된 상태에 자진해서 쑥 들어오신 분이 계셔요. 레위기 12장이 그분의 이야기에요.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성경을 연결시켜야 해석이 돼요.

예수님이 여자도 아닌데 언제 해산한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 되겠지요. 어떻게 연결됐는지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 2장 22~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팔 일만에 할례 행하는 그 대목입니다.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라”

누구냐 하면 마리아와 요셉이 이렇게 하고자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레위기 12장 8절에 보면,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 이것은 그 여인이 가난한 거예요. 예수님 가정은 되게 가난한 겁니다. 여기 집비둘기, 산비둘기밖에 못 드린 것은 가난한 거죠.

예수님이 태어날 때부터 레위기 12장의 말이 여기에 딱 들어붙어요. 연결됩니다. 누가복음 2장 23절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 이게 핵심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남자는 태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율법에 준해서 실행했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돼요. 이건 출애굽기 13장 1절에 보면 나옵니다. 참 복잡해지지요.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되는데 그렇게 쉽게 연결되지 않아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어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이것은 내 것이라고 했어요. 사람은 다 주의 것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주님이 내 것이라 하는 것은 이방인은 안 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것도 여자는 안 되고 남자, 남자 중에서도 난 지 팔일 만에 율법대로 시행될 때. 계속 율법의 조건들이 들어붙지요.

남자, 여자부터 다시 시작해야 적절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 사실은 아담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여자가 태어나자마다 아담은 남자가 되죠. 둘이 분리가 됩니다. 선악과 때문에 분리되지만. 주님께서는 전쟁하는 하나님이죠. 전쟁을 할 때 사탄이 남자를 유혹했습니까, 여자를 유혹했습니까? 여자를 유혹한 거예요. 사탄에 가장 근접한 자리에 있는 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되는 겁니다.

뱀이 먼저 여자를 유혹했던 그 상황을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반복시켜버려요. 여자가 가깝다는 말은 여자 쪽이 남자보다 죄의 접근성이 강렬하죠. 왜? 사탄이 남자보다 여자를 먼저 유혹했으니까. 남자는 사탄을 만난 적도 없어요. 여자가 유혹 당하고 여자가 남자를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선악과나무에서 일어났던 그 사건을 마지막 천국 올 때까지 선악과 사건을 역사 속에 굴려버려요.

선악과는 없어졌지만 선악과 통해서 발생된 사건은 마지막 생명나무, 천국 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굴러가는 거예요. 눈 덩이처럼. 점점 더 선악과로 유발된 죄의 양은 늘어나고 짙어지는 겁니다. 산비탈에 눈을 굴려보세요. 처음엔 작지만 어떻게 됩니까? 눈이 추가되듯이 죄가 추가된단 말이죠. 마지막 극단적인 죄가 십자가에서 죽일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을 너희 아비는 사탄이라.

사탄에 가장 근접한 모양새와 본질을 보여주는 자는 인류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인 거예요. 가장 사탄을 보고 싶다. 그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을 보면 돼요. 나머지 사람들은 먼발치에 있는 사탄의 졸개에 불과하고. 가장 사탄적인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여러분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보면서 그런 의문은 없던가요? 예수님께서 가는 곳마다 귀신을 쫓아내잖아요. 그렇게 귀신을 쫓아내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속의 마귀는 왜 안 쫓아냅니까? 잔챙이는 쉬운데 오야봉이라 버거워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점점 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쪽에 다가서야 사탄이 마지막 노리는 게 무엇인지 거사가 시행돼야 되는 겁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메시아를 죽이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쓸모없다고 없애버리는 겁니다. 사탄이라 하니까 무당, 절의 중들 생각하는데 자꾸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것도 사탄의 종들이지만 멀찍이 있는 거고 진짜 사탄의 종은 교회에 있어요.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전부터 심판이 시작된다고 베드로전서에 나와 있거든요.

이 모든 말씀을 지켜라. 그러면 복 받을 것이다. 그게 사탄의 이야기 아닙니까. 선하면 어디 가고? 천국 가고. 악하면 지옥 가고. 그게 사탄이잖아요. 주님은 선과 악을 안다는 자체가 이미 사탄이에요. 사탄에게 매여 있기 때문에 악하면 찝찝하고 선하면 기분 좋고. 그게 사탄이 집어넣은 본성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기도 좀 했더니만 갑자기가 돈이 몇 천만 원 들어왔다. 착한 일 한 모양이다. 교회에 봉사 외에는 착한 일 한 게 없는데. 봉사한 걸 주께서 봐주셨구나. 그러면 사람이 기분 좋습니까, 뭐 찝찝한 게 있어요? 내가 착해서 천만 원 들어왔는데 앞으로 만약에 내가 봉사 소홀히 한다든지 교회에 소홀하면 훅 가는 수가 있어요. 그런 불안감, 그런 두려움 들지 않던가요? 감사 한 구석에 감사를 갉아먹는 어두운 그림자. 감사를 해봐야 알지. 다들 본인 알아서 살았습니까? 본인 덕분에 본인이 살았지요. 감사할 것도 없고 열심히 일해서 내 돈으로 살았지. 그렇게 독자적으로 살았어요? 그러면 사탄까지 멀었고 사탄에 저 멀찍이 있는 졸개고.

진짜 사탄의 졸개는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 더 경건하고 더욱 더 완벽하게. Perfect! 완전하게. 완전에 더욱 더 완전을 기하고, 철저에 더욱 더 철저를 기하고. 예수님이 하는 말이,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이 말은 인류가 아무리 까불어도 인류의 대표자는 바리새인이고 그 대표자가 사탄의 가장 본질을 보여주면서 잡아 죽이잖아요. 거기에 한 몫 한 것이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 가룟 유다가 양심에 바쳐서 자살까지 하지요. 스승을 팔아먹었다고.

나라 잃었다고 자결한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되기 전에 얼마나 많이 있었어요. 나라를 지켜야 될 공무원이 나라 못 지키고, 죽자. 민영환이 같은 사람 있지요. 헤이그 밀사로 죽은 사람 있잖아요. 왜 그 사람들은 왜 의인이 아니고 사탄입니까? 갑자기 어려운 문제가 됐는데 정답을 즉각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민족과 국가와 이웃을 사랑 못해서 양심이 가책이 되어 스승을 팔아먹었다는 이유로 목매 자살했는데 왜 그 사람이 의인이 아니냐 하면, 바로 본인의 양심 문제가 되면 온 인류의 원수가 나타나질 않아요. 남자든 여자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줘야 됩니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와요.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처음에 개시가 되면 내 인생은 누구 책임이다? 내 책임이다. 내가 가정을 잘 못 돌보고 내가 돈 못 버니까 우사스럽다, 체면이 손상된다,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이러니 죽는 게 낫지. 이게 죽을 때만 그런 짓 한 게 아니고 평소에 하루하루 일과의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고 내 관리 하에 산다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할 때 이 세상에 몇몇 사람한테 하는 이야기가 아니죠. 오늘날 99.99% 모든 사람한테 하는 이야기에요. 교회 들락날락하고 목사를 섬기든 말든 그런 겉모습은 다 버리고 평소에 너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주님이 주신 복음의 기쁨 때문에 살아갑니까, 아니면 자기의 계획된 것을 실현할 그날을 보고 싶어서 살아갑니까? 내가 꿈꾸는 게 아까워서라도 지금 안 죽고 버티는 것 아니겠어요? 마저 내 소원이 이뤄지기를 기대하면서.

자살하는 사람은 이래 보아도 저리 보아도 아무리 해도 자기 꿈이 실현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자살한 거고, 아직까지 자살 안 한 사람들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면서 그냥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자살해서 먼저 죽었을 뿐이고 좀 늦게 죽을 뿐이지 인간은 다 똑같아요. 이미 절연상태,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요.

그런데 인간은 누굴 모델로 삼는가? 옆 사람을 모델로 삼아요. 노벨문학상? 좋겠다. 상금이 수 십 억인데. 우리나라는 뭐 하노? 맨날 고은은 떨어지고. 노벨물리학상을 일본 사람은 그리 타는데 우리나라는 뭐 하나? 날마다 옆 사람과 비교하면서 좀 좋았다가 낙담했다가 절망했다고 촐싹거리고 까불다가 그냥 자기 노선 관리하면서 살아가잖아요. 그런 눈으로 보면 레위기 12장이 전혀 풀리지 않아요. 시키는 대로 하면 되지 뭐. 시켜서 했는데 멸망했다.

주님께서 레위기 12장을 주신 것은, 때가 되매 내 자식 가져가겠다는 거예요. 아들 낳다? 가져가겠다는 거예요. 주의 것으로, 출애굽기 13장 1절의 말씀처럼. 처음 난 것, 초태생은 누구 것이라고요? 주께서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주께 바치는 거예요. 주께 바칠 때 그냥 바치면 되는가? 아니요. 뭐가 실려야 되는가?

여러분 가정에 아들을 낳았다 합시다. 강보에 쌓여 있어요. 레위기 12장을 벌거벗은 몸에 미싱으로 박아버려야 돼요. 아기는 그냥 바쳐지는 게 아니고 율법의 가현체로 바쳐지는 겁니다. 레위기 12장으로. 아들 낳았다. 칠일 동안 더럽고 산혈이 깨끗해지려면 33일 있어야 된다. 이런 율법의 내용이 그대로 바쳐져야 돼요. 바쳐지는데 미지의 인물로 바쳐져요. 여자의 후손이에요.

왜 여자라 했습니까? 가장 죄에 근접하고 뱀이 여자를 유혹했잖아요. 이제는 반대로 여자와 뱀이 원수지간이 되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원수지간이 됨으로써 어떤 정신이 이어지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었느냐, 라는 것이 계속 이어지는 거죠.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통째로 위반한 것이 이 세상이라고 주님께서 계속 추궁할 수 있는 거예요. 추궁한다는 것은 지구를 완전히 불로써 살라도 피조세계는 거기에 대해서 반박하거나 한 말이 없어요.

레위기 12장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원대한 우주적 계획이 놀랍게도 우리의 사적인 가정까지 침투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돼요. 원대한 계획, 하지만 원대한 계획이 어디까지 이어졌느냐? 아들, 딸 낳는 것까지 하나하나 율법으로 침투돼있는 거예요. 집에서 움찔거리면 전부 다 율법과 관련돼있어요. 설거지하는 것도 율법과 관련돼있고.

성경에 설거지할 때는 따뜻한 물로 하라는 그런 구절은 없지만 누가 설거지하게 했으며 설거지하는 이유, 목적. 무엇 때문에 설거지하느냐? 설거지하는 목적을 전에 이야기한 적 없던가요? 설거지하게 하시는 것은 죄를 알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뭐든지 인간이 하는 것은 왜 죄일 수밖에 없는지 드러내기 위해서 설거지 시키는 거예요. 왜냐하면 주께선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이것을 드려버리면 드린 것이 어디와 연관되느냐 하면 아기에 율법이 실렸지요. 빨랫줄 이야기했지요. 첫 번째 기둥은 아담이죠. 마지막 기둥은 예수님. 그 사이에 율법, 말씀이 흐르지요. 그러면 빨랫줄에 있는 모든 빨래들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줄쳐져 있는 거예요. 빨랫줄 하나에 걸려있는 모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다 이루신 분이 마지막에 세상을 인류역사를 끝장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기를 바친다 할 때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을 위해서 미리 우리에게 율법과 결합이 되도록 이 땅의 인간들을 만든 거예요. 성도만 아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에요. 율법이 더한 곳에 죄가 더하죠.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자기가 더럽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절연상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 상태란 말이죠.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인 됐다는 말은, 천국은 죄인이 못 가는 곳이잖아요. 의인이 가는 곳이죠.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것은 이 조치가 어떤 조치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유일한 하나님의 의가 됨을, 이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예수님의 의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적 조치로 마감처리를 하는 거예요. 심지어 아기 낳는 것까지 산부인과까지 찾아와서 아들 낳았나, 딸 낳았나, 이것까지 해서 고맙게도 아들, 딸 세세하게 율법적 처리를 하는 겁니다.

이것까지는 쉬워요. 이제 어려운 것 나옵니다. 오늘 레위기 12장을 한 마디로 말해서 시간+제사=거룩. 시간 요소로 들어가는 것이 남자는 40일, 여자는 80일. 그런데 시간과 제사가 결합이 된다? 이건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저 같은 경우에 젊을 때 유교 집안이라 제사를 드렸다고요. 보통 밤 12시에 했어요. 그게 점점 빨라져서 10시에도 하고 9시에 하고 때려치우고. 이스라엘과 똑같아요.

제사가 끝나면 제사가 아니지요. 그러면 제사 드릴 시간만 거룩하다면 끝나면 거룩이 안 되잖아요. 인간으로선 이게 성립이 안 돼요. 이게 되려면 제사 시간이 한 텀으로 마감되면 안 되고 이 제사가 영원히 지속돼야 돼요. 묵시에요. 시간 정도가 아니고 영원히 계속 돼야 돼요. 따라서 7+33=40, 14+66=80, 사실은 아들이 원형이니까 딸은 곱빼기로 한 거예요. 이게 여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여자가 깨끗하게 되는데 있어서 시간 소요가 두 배나 될 정도로 하와는 아담보다 더 죄에 근접해 있다는 것을 선악과 따먹은 사건을 반복하다보니까 이리 된 겁니다.

7+33이 우리 보기에는 그냥 40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를 마중하려 온 주님 안에서는 40일이 영원이 표시하는 시간이 되는 거예요. 그럼 영원을 표시하는 시간이 어떤 때는 40이고 어떤 때 천이고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다 영원이지만 어떤 일에 개입한 율법이냐에 따라서 시간이 다 달라요. 창조라면 영원을 천으로 하지 않고 7로 하죠.

그리고 창세기 5장에 아담의 수명이 영원하지 못함을 알려줄 때는 항상 천을 바(bar)로 정해놓고 그 밑으로 무두셀라(969)는 거의 근접했지만 천을 못 넘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년이 묵시세계에요. 그리고 베드로후서에 가면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고 나오지요. 하지만 창세기 5장에선 천을 못 넘어요. 구백 몇 세, 구백 몇 세, 그렇게 돼요. 그때는 천년이 완전을 의미하는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40이란 지상의 숫자로 완전을 표시할 때는 시련과 고난에서 완전할 때는 40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요. 모세가 광야에서 일부러 40을 맞추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요, 예수님께서 금식을 마치는 날이 40일이었습니다. 지상의 고난을 표현할 때 40으로 표현한 겁니다. 42일, 이틀 더 했다고 고생 더한 것 아니에요.

40일 했을 때 영원이란 걸 어떻게 판단하느냐 하면, 누가 40일을 하셨지? 주님이 하셨잖아요. 주님은 하늘에 계신 분인데 이 땅에서 활동하신 분으로 이해해줘야 한단 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남자기 때문에 남자를 기준으로 40일이고, 여자는 80일이라 했지만 사실은 40일과 똑같은 취지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7과 33으로 나눈 것은 7이 지나고 난 뒤에 할례를 행하는 겁니다. 할례는 [은밀한 나라]란 책에 한 챕터로 설명했어요. 할례는 새 자리 마련이란 뜻이에요. 골로새서 2장에서 할례를 행한다는 말은 우리 몸(아담의 몸)은 죽이고 주님의 몸으로 바꿔치기입니다. 할례의 완성이 세례입니다. 할례라는 게 몸과 몸을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고추 끝을 떼어내는 게 할례 아니에요.

누가복음 2장 22절에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주께 드리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난지 팔일 만에 할례 했다는 것이 21절에 나옵니다. “할례 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지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천사가 관여합니다. 뭔 뜻이냐 하면, 우리는 성경을 시시하게 보잖아요. 천사는 시시하게 보지 않아요. 울산시민들은 오다보니 울산배 축제한다고 조항조 오고한다는데 울산시민들한테 성경 레위기 12장 관심 있어요? 아무도 없지요. 그러나 천사는 상당히 중요시 여깁니다. 천사는 축제 같은 것 안 가요. 시끄러워서 안 가요. 자칫하면 총 맞는 수가 있어요.

하여튼 우리는 천사 없는 곳만 찾아다녀요. 성령이 없는 곳만 찾아다녀요. 재미있잖아요. 그러나 천국을 재미로 갑니까? 지옥 가면 굉장히 재미있어요. 동기들 다 거기 있어요. 자기 인생 자기가 관리한 사람들 다 가있습니다. 절연된 사람, 끊어진 사람들 다 가있어요. 남들 지옥 가는데 따라가는 셈이 돼요. 많은 사람이 지옥 간다고 해서 저게 진리인지 싶어서 다 따라가고. 결국 찾는 이가 많은 길이 무슨 길일까요? 멸망의 길입니다. 말해도 무슨 소용 있겠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친 자는 율법이 몸에 문신처럼 박혀 있기 때문에 그 인생은 율법이 장악한 인생이 돼요. 그렇다면 바쳐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 나와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분이라는 요소, 요소가 피부 세포 내에서 빠져나와서 보여주게 된다고요. 이것은 전쟁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한 성도는 전쟁터에 주님의 군사로 나올 수밖에 없어요. 왜? 율법의 완성이 복음이잖아요. 복음이 마구 쏟아지는 거예요. 복음이 쏟아진다는 것은 상대할 대상이 있다는 거고 상대할 대상이 누굽니까? 악마의 앞잡이죠.

시간과 제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함으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면 완성된 것이 신약의 성도에게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와버립니다. 그러면 성도는 다 이루었어요. 이걸 두 자로 완료가 돼요. 구원에 필요한 더 보탤 행동이나 행함이 없어요. 경건하게 살고 이런 것 없어요. 경건하게 살아라가 내 속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만 있을 뿐이죠. 이게 경건이라고 튀어나오는 것만 있죠.

네가 무시로 기도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는 그 말씀이 이제는 이 안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거예요. 자아가 그걸 지키는 게 아니고 이미 말씀의 완성도가 살아가면서 튀어나오게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튀어나오게 되면 튀어나온 현장에서 우리는 졸지에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겁니다. 왜? 우리 육이 남아있으니까. 주께서 우리 육대로 하지 않으시고 주님의 용서와 복음대로 하시는구나. 죄인을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시는 그러한 모습을 남기면서. 주님만 영광만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약한 자만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가난한 자를 부한 자를 부끄럽게 하지요. 왜? 전쟁이니까. 그런데 가난한 자가 하는 전쟁입니까? 가난한 자가 가난한 체 가난하다고 합니까? 가난한 자는 상대를 보지 않아요. 주님을 상대합니다. 주여, 제가 참 이렇게 가난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달 수입이 12억밖에 안 되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는 돈 12억이 중요한 게 아니고 주께서 주신 믿음에 부요하게 하셔서 그까짓 것 12억이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12억 손에 쥐어봐야 알지.

그럼 액수 좀 낮춥시다. 주여, 한 달에 백이십 만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까짓 것 백이십 만원 아무것도 아니고 믿음에 부요한 것을 감사합니다. 이야기 괜히 했다. 벌써 겁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쉽다. 120으론 안 되는 데요. 350은 돼야 된다고 나오면 곤란한데. 어쨌든 간에 그 말씀을 우리로 지키라는 게 아니고 때를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야고보서 말씀이 난데없이 우리에게 튀어나오게 하실 때 그것이 바로 영원한 주님의 완성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활용하고 있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죄인 되고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못 지키는 존재란 것을 날마다 감사하면서 주님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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