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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1 23:43:06 조회 : 408         
위반자 180601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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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25) 18-06-05 11:47 
20180601a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위반자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는 레위기 19장에 화목제 중심으로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면서 신기한 것은 인간이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회사 사장이라면 직원들이 일을 할 때 일했다고 사장이 만족한 걸 봤습니까? 사람이 누구한테 지시할 때는 지시하는 사람의 마음을 지시받는 사람이 다 알지 못해요. 문방구라든지 소규모 사업장이나 대기업도 마찬가지로 어떤 지시를 했을 때 그 지시에 담긴 마음가짐을 직원들이 제대로 그걸 알아챕니까? 절대로 모르게 돼있어요.

이것은 인간은 아무리 부모와 함께 산다할지라도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합치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비축된 기억이 달라서 그래요. ‘비축된 기억’이란 말은 사는 환경이 달라서 그래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똑같은 말을 할지라도 말하는 사람의 본심과 그것을 듣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드려라 할 때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화목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같은 인간도 지시를 냈을 때 지시한 사람의 심정을 온전하게 다 알 수 없는 입장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지시를 뭔 뜻인지 알아채서 거기에 하나님이 만족하도록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시고 뭘 받을 때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들이 모르는 제삼자가 개입돼있어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할 때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가 완벽하게 튼튼하게 어떤 경우에라도 완벽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노아가 방주 안에서 구원이 되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설픈 노아의 솜씨를 봐줘서 구원해주는 겁니다. 노아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산입니다. 엄청난 오산이에요. 거기는 우리가 모르는 허술하고 모자라고 엉터리 같은 우리를 용납해주는 중간 절차가 있어요. 그걸 용납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 중간에 개입하셔서 용납해주신 분의 헌신, 희생, 그런 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분이 신약에서 와서는 자기 정체를 드러나시죠. 고난의 길 가시는 예수님, 십자가 진 예수님으로 정체를 드러냈는데 지금 레위기는 신약이 아니고 구약입니다. 구약에선 하나님이 자기 정체를 다 드러내지 않았어요. 드러내진 않지만 그 징후를 계속해서 던져주시는데 그 던져주시는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는 레위기 19장이고 그 안에 화목제가 들어있습니다. 5절에.

특히 거룩을 언급하면서 화목제를 거론한다는 말은, 화목제가 마무리 짓는 제사거든요. 화목제 받으면 앞은 것을 다 받은 게 돼요. 처음부터 화목제 드리는 게 아니고 속죄제, 번제 하고 마지막에 드리는 제사기 때문에 화목제 받는 것은 다 받은 거예요. 로마서 3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화목제물로 간주했습니다. 요한일서에도 마찬가지로 화목제물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화목제물로, 이렇게 돼있어요.

화목제를 받았다는 것은 앞의 모든 제사에 대한 최종상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에 도달했다는 겁니다. 화목제 이야기가 바로 5절에 나와 있고 거기에 대해서 제가 지난 시간에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레위기 19장은 누구한테 이야기하고 누굴 대상으로 한 것이냐? 이방민족한테 한 게 아닙니다. 이방민족으로 빠져나온 일단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에서 빠져나온 사람에게 레위기 19장을 언급한 겁니다. 이것은 레위기 19장을 보면서 그냥 보지 말고 출애굽 정신으로 보라는 겁니다. 출애굽할 때 사람만 나온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제사법도 같이 나왔다고 보셔야 됩니다. 그게 바로 어린양의 피를 바름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원받았거든요. 피에 둘러싸였다. 보쌈 당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러분, 연 밥 잡숴보신 적 있습니까? 밥이 연잎에 둘러싸이죠. 출애굽 정신이란 나 홀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뭔가 둘러싸여 있는 게 있어요. 그걸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개입된 거란 말이죠. 다시 말씀드릴까요? 인간 대 인간도 그 사람의 심정을 평생을 다해도 헤아리지 못해요. 심지어 같이 사는 부부라 할지라도.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비축된, 쌓여있는 기억이 달라서 그래요. 기억이란 과거로부터 살아온 모든 체험의 집합이죠. 그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단어 하나 던져도 무심코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게 비축된 기억된 단어의 쓰임새, 이런 단어는 어디에 쓰였는지 맥락을 연결해서 이런 뜻이지요,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인생의 맥락과 다른 사람의 인생이 다른데 서로 의견이 맞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일방적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하면서도 각자 자기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특히 돌 무렵의 아기들 보세요.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해요. 그런데 그 얘 나름대로의 인생이 있거든요. 24개월이란 아주 긴긴 인생을 살았어요. 인생을 살면서 몸에 스며든 체험이 있어요. 그게 자기가 내뱉을 때 몸짓, 손짓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본인만의 언어에요. 이럴 때 부모에게 먹혀들고, 이럴 때 할아버지에게 먹혀들고 하는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있단 말이죠.

그래서 아이들 클 때 가정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이 거기서 나오잖아요. 가정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은, 돈 주고 밥 먹여주고 우유 먹인다고 그 얘가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사료로 되는 것은 개나 되지. 개도 안 그렇다, 참. 사료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둘러싸인 환경이 그 사람의 집안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집안이 다른데 출신환경이 다른데 생각이 같을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죄 많은 지옥 같은 세상에 사는데 하나님이 명령한다고 해서 인간이 알아들어요? 턱도 없는 소리, 못 알아듣지요. 지 마음대로 지킨다는 거예요. 자기 마음대로 지키고 자기를 의인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 출애굽 할 때 그냥 하지 않고 보쌈, 보자기에 싸이는 겁니다. 제사에 둘러싸여요. 그 제사는 피라고 돼있지요. 어린양의 피를 묻힌 채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애굽은 뭐냐? 애굽은 이방민족이죠. 애굽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은 없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이방민족이에요. 애굽에서 나온 것은 히브리인들이 예상 못한 사건에 의해서 강제로 빠져나온 거예요. 사건이란 인간이 예상한 게 아닙니다. 새로움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때는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아는 방식은 교양이고 도덕이고 윤리죠.

성경 해석할 때 출애굽 정신으로 하라는 말은 19장 보셨지요. 레위기 19장 해석할 때 윤리도덕은 다 들러내야 되고 빼야 돼요. 인간의 교양 같은 것, 품행은 다 빼야 됩니다. 그것 빼고 해석해야 돼요. 착함으로 승부하면 안 돼요. 착함으로 승부하면 하나님 뜻도 모르고 자기는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 말씀을 지켰으니까 천국 내놓으라는 식으로 나온다고. 그건 스스로 주제파악도 안 되고 자기를 자꾸 의인으로 변모시키는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레위기 19장을 해석할 때 여러 가지 명령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단락 지어서 굉장히 많아요. 소설처럼 흐름이 아니고 명령, 계명들이 단락져있어요. 끊어져있거든요. 하지만 그걸 묶을 수 있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단어를 지루하더라도 같이 보면 지루하지 않습니다.

4절에 보면, “너희가 헛것을 위하지”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와요? “말며” 그 다음에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고 나오지요. 9절에 보면,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10절에 보면, “너희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11절에는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이렇게 돼있지요. 13절에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그 다음에 14절에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그 다음에 16절에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그 다음에 17절에 보면,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그 다음에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그 다음에 19절에 보면,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그 다음에 23절 끝에 보면,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그 다음에 26절에 보면, “너희는 무엇이든지 피체 먹지 말며 복술을 하지 말며 술수를 행치 말며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29절에 보면,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말라” 그 다음에 31절에 보면, “너희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그 다음에 33절에,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그렇게 돼있지요.

여러 가지 지시와 명령을 하는데 공통점이 뭐냐 하면, “◯◯하지 말며”가 연속적으로 나오지요. 이것이 오늘 해석의 열쇠가 되는 말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너는 이미 위반자라는 겁니다. 왜 위반자냐? 하나님 뜻과 인간의 뜻은 속해 있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죄 아래 갇혀있는 인간이 거룩하고 죄 없는 하나님의 뜻을 죄의 막을 뚫고 알아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본인은 인정하지 않으면 이미 죄인이에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스라엘을 만들기 전에 모든 사람은 이방민족이라고. 이방민족이냐, 이스라엘이냐의 차이점은 얼마나 착하냐, 윤리적이냐, 도덕적이냐, 얼마나 성품이 고우냐에 있는 게 아닙니다. 보자기 둘러싸여져야 돼요. 어린양의 피로.

어떤 사람이 나와 악수를 하는데 그 사람 손에 피가 묻혀있단 말이죠. 이게 뭐야, 하고 빼겠지요. 드라큐라야, 뭐야? 당신 손에 피 묻어있네요. 하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당신 죄 때문에 흘린 피고,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흘린 피입니다.”라고 나올 때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인생의 모든 경험이 나로 하여금 나름대로 바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그 사람이 일방적으로 내 죄 때문에 피를 흘린 손을 내밀었다는 말은, 내가 나를 보는 내 모습과 내 앞에 피 묻은 손을 내미는 그분의 안목이 서로 다르다는 뜻이에요. 같지 않다는 겁니다.

레위기 19장을 천 독을 하고 만 독을 해도 자기 자신이 애초부터 위반자인 걸 모르고 해봤자 자기 자랑밖에 안 나와요. 레위기 19장 읽으면서 화목제는 십자가로 대체하면 되고, “신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절에 안 가니까 우상숭배 안 하고. 9절에,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좀 남겨둬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라. 이건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꾸준히 했고. “도적질하지 말며” 내가 도적질한 기억이 있나? 없고. “속이지 말며” 별로 없고.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생각 없이 할 때는 있었지만 자주 하진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욕한 적은 없고.

이건 뭐냐 하면, 될 수 있는 대로 위반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에요. 그러니 모태신앙이라고 교회 50년, 60년 다니는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여전히 이방민족인데. “하나님, 이야기만 하세요. 지켜드릴 테니까. 전에는 못 지켰지만 성령 받았으니까 율법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지키겠습니다.” 레위기 19장이고 20장이고 오라 이 말이죠. 다 지킨다고. 많이 지키면 복 줄 거고 조금 지키면 보너스 약간 적을 거고. 그런 식으로.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요.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본인이 …….” 전두환처럼 맨날 본인 커버하고 있어. 본인 사수하고 있습니다. 새삼 멀리 갈 것도 없어요. 교회 내에서 그래요. 자기 자신의 흠이나 티가 남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긴장 바짝 하고 교회 옵니다. 나중에 그것도 힘들면 아예 교회 나오지도 않아요. 남한테 들키지 않을 능력 있다 싶으면 교회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레위기 19장을 보면서 근본적으로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 네가 뭔데 우리한테 명령하느냐? 이걸 알아야 돼요. 왜 명령합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명령했다고 이야기해도 현대인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일단은 한 번 들어보자. 들어보고 지킬만한 하면 하나님과 계속 사귀고 너무 무리한 요구하면 안 들은 걸로 치고. 배짱도 똥배짱도 아니고 대단한 배짱이라. 나중에 퇴직해서 할 일 없을 때 교회 다니지, 뭐.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께서 명령을, 율법을 줄 때는 이미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어떤 것도 하나라도 우리는 위반하는 성질과 본능과 속성을 잔뜩 지니고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 주님께서 활을 쏘듯이 자꾸 명령하니까, 명령이 19장만 명령이겠어요. 20장, 계속 명령 아닙니까. 나오니까 우리는 도망갈 준비를 하는 겁니다.

특히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두 가지의 정신병적 현상을 보인다고 지적한 사람이 있어요. 스키조와 파라노. 스키조는 정신분열증(精神分裂症, schizophrenia)이에요. 파라노는 편집증(偏執症, paranoia). 현대자본주의사회에서는 인간이 이 두 가지밖에 없다는 거예요. 들뢰즈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 사람이 현대를 분석하면서 스키노적인 현상, 정신분열증적 현상과 파라노적 현상, 편집증적 현상이 모든 인간이 보인다는 겁니다.

파라노, 편집증적 현상은 뭐냐 하면, 인생을 살 때 어떤 집단에 속해서 앞서 간 사람을 따라잡으란 식으로 계속해서 주위 사람들이 그 인간을 잡지요. “너는 저 인간을 따라잡아야 돼. 20등하면 안 돼. 1등해야 돼.” 계속 기존에 구축돼있는 체제에 순복하고 그 체제에서는 최고의 자리에까지 시늉이라고 해야 된다고 거기에 편집이니까 집중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에 비해서 스키조는 정신분열증인데 기존에 구축돼있는 모든 것을 보였다하면 무조건 거기서 도망치는 거예요. 분열, 갈라지니까 쫙쫙 찢어지니까 갈아 타기하는 거예요. 조금하다가 재미없다고 갈아타고, 또 갈아타고.

그래서 인간은 편집증 아니면 정신분열증이에요. 요즘 20대 젊은 사람들 보세요. 안정된 장소, 안정된 직장, 공시생이 44만 명입니다. 2017년 말 기준으로. 국가공무원 시험 쳐서 확정된 직업을 얻고자하고 또 가족들도 그렇게 요구하는 그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44만 명입니다. 이것은 수능 준비하는 학생들 수와 거의 비슷해요. 이건 편집증에 속합니다. 진짜 머리 처박고 우선 들어가고 보자는 거예요. 이미 안정된 직장에.

거기에 비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기타 치는 학과, 연기하는 학과, 래퍼 된다고 머리 노랗게 물들이고 학교도 안 가고 돌아다니는 아이들. 걔들은 뭐하라 해도 무조건 안 해. 튕겨나가요. 이건 서핑족, 새로운 파도가 오게 되면 갈아타는 거예요. 하지 말라하면 더 하고, 보지 말라하면 더 보고, 피우지 말라하면 더 피우고, 마시지 말라하면 더 마시고. 어른들도 마찬가지에요. 안정된 직장에서 때려치우고 사표내고 딴 짓한다고. 집 다 팔고 아이 둘과 부부가 해외여행 돌아다니는 사람, 한둘이 아닙니다. 돌아다니잖아요. 정신분열증 아닙니까.

돈은 마누라가 벌고 남편은, 아내는 편집증, 남편은 정신분열증. 남편은 친구 만나고 취미생활로 청춘을 다 보내는 거예요. 도박, 낚시, 사냥, 등산. 아내는 죽으라고 돈 벌고. 그런 남편이 아내에게 같이 낚시하고 여행하면서 놀자하면, 아내는 싫어요. 왜? 평생을 편집증으로 살았기 때문에 가계 안 지키면 굶어죽을 줄 알고 있어. 둘 다 정신병자거든요. 모든 인간은 환자에요.

성경은 모든 인간을 환자로 보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 해요. 거룩에 비해서 죄인인 겁니다. 그런데 이 죄가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있는 처소, 장소 자체가 죄를 유발하는 곳에 태어났기에 그렇습니다. 이걸 수요일에 이야기했습니다. 아담의 초상이에요. 아담이 아무리 많은 새끼를 까도 그 모두를 모으면 딱 하나의 얼굴이 나옵니다. 아담의 얼굴, 아담의 초상, 형상이 나옵니다. 우리는 아담의 죄 지은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dna를 그대로 받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아담 내외를 쫓아냈잖아요. 어디서 어디로 쫓아냈는지 봐야 돼요.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인간을 내쫓아버린 거예요. 생명나무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인간이 어디서 어떻게 행복하든, 얼마나 큰 성공을 이루든 간에 생명이 없는 거예요. 생명이 없으면 복이 없는 겁니다. 생명나무에 대조되는 나무가 선악과나무거든요. 죽음이 있어요.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성공했는지 그 자체가 죽음이에요. 몸이 건강해도 죽음이고 아픈 것도 죽음이에요.

요즘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 아픈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혹시 안 아픈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안 아픈 사람이 없어요. 지금 나 혼자 안 아파요. 아픈 게 정상인지 안 아픈 게 정상인지 구분이 안 돼요. 그러나 아프나, 안 아프나 상관없이 하나님께선 아프니까 죄 졌고 안 아프니까 의가 아니라 하나님은 병으로 따지는 게 아니고 아프든 안 아프든 전부 다 죄를 앞장세우고 우리한테 쳐들어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것은 안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 죄 사함을 주시는 거죠. 아파 죽어서 천당이나 가라 이 말이에요. 고통 속에 허덕이다 천국에 가라 이 말입니다. 안 아프게 되는 게 아니고. 타고난 게 정신병잔데. 그 아픔에 정신병도 포함되겠지요.

들뢰즈란 철학자가 이렇게 분석해놓고 해결책이 없네. 세상은 이렇다. 해결점은? 없어요. 왜 없느냐? 들뢰즈 이 사람은 세상을 복층으로 본 게 아니고 단층으로 봤기 때문에. 세상을 2층 구조로 본 게 아니고 단층구조로 봤어요. 기존의 세력, 기존의 권위, 힘 있는 곳에서 도망치게 되면 정신분열증, 복이 여기 있다 해서, 뭐 공시죠. 기존에 돈 되는 큰 회사, 삼성이나 현대, 거기에 들어가면 나는 살았다는 건 편집증이거든요. 그러나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수평적으로 이동할 뿐이지 절대로 수직적으로 이동하진 않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삼성에 입사한다고 하늘나라 가는 건 아니란 말이죠. 공무원시험 떨어지든 합격하든 지옥 가지만 떨어진 그 자체가 지옥은 아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신약성경에서 이 세상을 단층으로 보는 게 아니고 복층으로 봐요. 아파트 제일 꼭대기에 펜트하우스. 복층, 다락방이잖아요.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너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느니라.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졸지에 아래나라와 위나라로 갈린 거예요. 아래쪽과 위쪽이 새롭게 형성된 겁니다. 예수님은 위에 계신 분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그런데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의 비축된 기억 속에는 그들이 상상한 천사를 날개 달고 와야 되거든요. 예수님을 아무리 360도 카메라로 찍어봐야 어깻죽지에 날개 없어요. 목수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말은 맞지요.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거예요. 말이야 맞지요. 맞는데 틀렸다니까요. 맞는다는 말은 단층에서 통용되고 소통되는 단어와 개념으로는 맞아요. 이중적인 맥락을 그들은 모르기 때문에 흔히 빠진 목수의 아들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 그게 어린양 피의 능력이다.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체험을 했기 때문에 알아요. 그런데 그게 다른 이방민족에게 먹혀들겠어요? 안 먹혀들지요. 왜냐하면,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생각은 이미 자기가 경험한 것에서 예상하게 돼있어요.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지방에 바르면 천사로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히브리인들도 예상 못한 거고, 애굽의 왕부터 어떤 인간도 이걸 예상 못한 거예요.

예상 못한 것을 저는 사건으로 봐요. 돌발 사건이거든요. 사건은 인간이 평면으로 알았던 시간의 개념을 중간에 난데없이 뛰어든 거예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을 두 개의 이질적인 층으로 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어야 돼요.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방민족은 그걸 아느냐 이 말입니다. 알 턱이 없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구원받은 것은 사건입니까, 성경공부해서 구원받은 거예요? 사건이죠. 성경공부는 하나에 교양입니다. 독서모임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서관마다 마을회관에도 독서모임이 있어요. 그 사람들 공부하는 것은 교양을 쌓기 위함입니다. 교양이 구원합니까? 성경공부가 교양 같으면 할 필요 없어요. 심심풀이로 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는 문제가 되잖아요.

제가 레위기 19장하면서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주님이 왜 우리한테 명령하느냐 하는 겁니다. 막말로 지가 뭔데 우리한테 명령하느냐? 왜 하느냐 하면, 네가 있는 장소가 네가 예상한 장소가 아니고 네가 가는 모든 장소도 사건의 범주에 포함된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 어디 사십니까? 울산에 사시지요. 울산에 산다는 것을 복음을 모르는 십자가 모르는 성령을 안 받은 다른 사람들도 이해해요, 이해 못해요? 그 사람들도 이해하죠. 우리는 고개를 저어야 돼요. 나 울산에 산다. 나도 울산에 산다. 그런 뜻이 아니야, 이 바보야. 울산에(처소) 산다. 산다, 상태을 보여주는 동사. 울산, 지명.

울산+에+산다, 이게 뭐냐? 무슨 뜻이냐? 정답은 예상 못한 십자가 사건, 복음 사건이다. 주님이 일으키신 사건인데 그 사건 이름이 울산이다. 울산이란 이름으로 주와 함께 있는 곳, 이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그러한 전제를 깔고 레위기 19장을 보셔야 된다 이 말입니다. 울산에 산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안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평소에 자기가 의인 척하는 거예요. 주님에게 우리는 이미 위반자에요. 위반자로 간주하고 화목제, 제사를 동반합니다. 보쌈이라 했지요. 연잎에 밥이 싸이듯이 둘러싸여서 우리가 그 안에 위반자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모르고 레위기 19장을 보면, 레위기 19장을 보면서 이것 지키면 의인 맞지요?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이미 위반자인데.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뭐가 잘못됐느냐 하면, 자기는 위반자가 아닌데 19장에 나오는 말씀을 위반할 경우에만 위반자가 되고 지키면 위반자가 안 되는 그런 중립지역에 본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18절 봅시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렇게 원리가 있으니까 응용문제에 들어가 봅시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할 때 어떻게 지킵니까? 정답 드렸어요. 우리는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위반자다. 왜? 그래야 우리를 둘러싼 어린양의 피가 빛이 나고 그게 거룩이 되기 때문에. 이제 레위기 19장 읽는 방법을 알려드렸지요.

20절에 보면, “정혼한 씨종과 사람이 행음하면 두 사람이 형벌은 받으려니와”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킵니까? 바람 안 피우면 되지. 이러면 지킨 거예요? 이미 우리는 이 말씀에 위반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뭘 모르느냐 하면, 내가 뭘 위반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이걸 모르기 때문에 그냥 사람들이 생각하는 울산에 살고 있어요. 울산에 살면서 천국을 사는 울산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냥 울산에 살고 있어요. 평생 울산에 살아라. 천국에 와 있는 울산에 살아야 되는데 울산이란 이름의 천국에 살아야 되는데 그냥 울산에만 살고 있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위반자란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왜 위반자가 아닌가? 자기 혼자 있어요. 뭔가 보쌈이 없어요. 자기를 둘러싼 보쌈이 없어요. 자기를 용서하고 사랑한 그게 없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분은 말하기를, “목사님, 말이 안 통하는 건 좋긴 좋지만 그러면 외롭습니다.”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그런데 여러분, 다이아몬드가 외롭습니까? 옆에 있는 돌처럼 투박스러우면 좋겠다. 이게 다이아몬드의 소원이에요? 다이아몬드는 그 자체로 충분히 존재의 가치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이아몬드로 만들려는 거예요. 어디에도 없는 하나님의 거룩이 빛이 나는 거룩이 거기서 발산되는 어둠 속에 태양이 있는 것처럼 피부 속을 뚫고 거룩의 빛이 발산되는 그러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길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뭐 외로워요? 남들이 안 알아줘서 그래요. 내 잘남을.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하는 이것을 잘못 지키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아까 지루하게 이야기했잖아요. ~하지 말며, ~하지 말며. 주께서 명령할 때 ~하지 말며 연속으로 하는 이유가, 하지 말라는 것으로 인하여 우리를 자극시키는 거예요. 마치 한의학에서 침놓듯이. 손가락 따면 소화가 잘 되고 하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가 있는 곳에 자극하기 위해서는 ~하지 말며, 라는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하고 싶다고 나오게 돼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아담의 초상이기 때문에. 아담의 본성이 뭐냐? 따먹지 말라는 그것을 따먹었잖아요. 그 성깔, 그 성질을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우리는 아담의 초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 제목이, 아담의 초상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돼요. 들어서 내가 얼마나 못난 자인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봐주기로 살아가는 것이지 내가 열심히 돈 벌어서 살아가는 게 아니란 것을 알고 있어야 돼요. 월급 타서 살아가게 되면 그 사람은 울산에 사는 사람이에요. 울산 살다가 지옥이나 가라.

정신병자에요.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잘만하면 복 받겠다는 거예요. <인간극장>인가 아침에 kbs에서 하는 프로에 나오거든요. 91살 먹은 칠갑산 근처에 사는 할머니인데 다래손이란 풀 뜯어서 장에 내다 파는데 제사 지낸다고 두 당 오만 원씩 절에다 내요. 돈 주고 등 달고. 단골인 모양이라. 절에 단골손님이다 보니까 다섯 개에 등 한 개는 공짜로 해주데요. 이게 단층이거든요. 사고방식이 단층이에요. 내가 신에게 잘 보이면 부처한테 잘 보이면 자자손손 대대로 복이 온다는 거예요.

저는 그걸 보면서 절이 저래야 되느냐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고 교회가 꼭 저래야 되는지 생각했어요. 교회가 저럴 것 같으면 있을 필요가 없다 거예요. 그런데 그 91살 먹은 할머니의 모습이 아담의 초상이거든요. 모든 인간 내면, 뿌리에 완전히 자리 잡고 있단 말이죠. 교회 다니나 절에 가자 성당 가나 관계없이. 그들이 왜 절에서 비는 겁니까? 왜 교회 나오는 겁니까? 자자손손 복 받고 잘 되라고 나오잖아요. 이득 보려고 나오잖아요. 이득 보려고 안 나왔어요? 그러나 우리가 이득 볼만한 정당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위반자입니까? 뭘 달라고 할 권리가 애초부터 없어요.

그 불교, 절에 다니는 할머니의 잘못은 뭐냐? 뭔가 예상을 한다는 거예요. 이렇게 등을 달고 제사를 드리고 하면 우리에게 복이 온다는 예상을 하는 반면에 구원은 예상이 아니고 사건이에요. 이건 우리가 교회 가나마나 할 것도 없어요. 주께서 그냥 이끄시는 거예요. 어떻게 이끄는가? 계속해서 명령하고 하는데 하지 말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그걸 들은 우리는 이런 걸 하고 싶었지, 라는 생각이 절로 나게 만드는 거예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전부 절이지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25) 18-06-05 11:48 
20180601b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위반자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지키느냐? 그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자극을 받아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 딜레마에 빠지는 사례가 누가복음 10장에 나옵니다.

어떤 율법사가 와서 하는 말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했는데 그러면 이웃이 누구냐고 예수님께 물었어요. 이웃을 너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든지 또는 몇 미터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면 되는데 예상 밖의 사건이 들어가 있는 예를 들어요. 그 사건에서 등장인물이 레위인 지나가고, 제사장 지나가고, 사마리아인 지나가고, 강도 만난 사람 나오거든요. 이 네 부류의 사람 어느 누구도 강도 만난 사건을 예상 못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그것이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사건 안에 있는 사건을 사건 되도록 하나님께서 진행시키는 하나님 자신의 프로그램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을 지켜요. 인간이 지켜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가치와 자존심을. 하나님이 던진 말씀을 누가 지키는가? 하나님 본인이 지켜요. 본인이 지키면서 누굴 배제해야 되느냐 하면, 감히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 저주받은 땅에 와 있는 인간이 감히 출제자의 의향도 모르면서 문제 풀었다고 우기는 그 인간들이 그 문제를 풀겠다고 덤벼들 때 그게 바로 죄의 조장입니다.

어떻게 오나? 자기 의, 나는 의인이다.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산 의인이고 싶을 때 바로 죄가 조장되는 겁니다. 죄가 확대되고 확산되고 들춰지는 겁니다. 인간이 말씀에 위반할 때 자기를 죄인으로 보지 않아요. 인간의 정신은 죄로 보지 않고, 이것을 못 지켰지만 딴 것은 지켰잖아, 라고 기어이 새롭게 자기가 의인됨을 증명하는 새로운 구성에 나서는 겁니다.

교도소에 가 보세요. 다 사기꾼이지만 자기 엄마한테는 효도했다는 겁니다. 내가 남 등쳐먹었지만 명절에 꼭 엄마를 찾아볼 정도로 효심이 극심한 사람이 자기라는 거예요. 내가 사람은 죽였지만 길거리에 거지한테 동냥했다는 거예요. 내가 마약 팔아 번 것 중에서 오만 원을 노숙자한테 준 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상황도 인간은 그 상황을 통해서 자신이 막 가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주력해요. 그쪽으로 쏠리게 돼있습니다.

그게 바로 아담의 초상에 들어있는 악마의 본모습이에요. 악마가 그런 짓하게 만들어요. 홀로 살겠다는 겁니다. 자기 잘한 걸 모아서 홀로 살겠다는 거예요. 내게 옳은 것이 정의고, 내가 한 것이 사랑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무조건 나는 의롭고 나는 사랑 많고 인정 많은 사람으로 전환되는 쪽으로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을 그렇게 해석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그게 바로 하나님의 화를 돋우는 거예요. 하나님이 둘러친 보쌈, 어린양의 피를 아주 노골적으로 발로 차고 짓밟는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누가복음 10장에 어떤 율법사가 말하기를 29절에,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이것이 이 사람에게만 해당됩니까?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겁니다. 어떤 짓을 해도 변명과 핑계는 끝없이 나옵니다. 자기가 나쁜 짓해놓고 이것은 사회가 자기로 그렇게 하게 했다고 사회 탓으로 돌리잖아요. 어떤 짓을 해도. ktx 여직원들 데모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대법원 판결이 잘못 됐다는 거죠.

모든 것은 나는 의로운 데 세상이 합당한 보상을 안 해줬다는 겁니다. 따라서 내 보상은 내가 알아서 챙기겠다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 남이야 죽든 말든 등쳐먹는 이유입니다. 내가 저 사람 집 담 넘어 훔치는 것은 내가 누구한테 사기를 당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밀릴 필요가 없다는 자세로 내가 남한테 빼앗겼지만 가만있을 내가 아니지. 내가 또 남의 것을 뺐음으로서 내 몫은 내가 챙기겠다는 거예요.

꼭 군대내무반 식기 잃어버리는 것과 똑같아요. 군에서 정기적으로 장비가 제대로 있는지 조사를 해요. 저쪽 내무반 조사할 때 다 맞아요. 이쪽 내무반 조사하는 사이에 몰래 저쪽 내무반 것을 이동해서 다 맞아요. 조사 끝나면 저쪽에 찬합이고 군화고 열 몇 개 모자라요. “아랫돌을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괸다.”는 식으로 세상이 다 그렇지, 뭐. 세상 그런 것 아닙니까. 세상 다 그런 거예요. 내가 억울한 일 당할 때 가만있으면 지가 병신이거든요. 내가 당한만큼 또 내가 그것을 남한테 그저 무작위적으로 랜덤, 아무 안면도 없는 사람에게 자기 손해 본 걸 보상받음으로 말미암아 너는 알아서 하라고 하죠. 꼭 사기 당한 사람이 사기 친다고.

이 사람은 자기가 옳게 보이기 위해서 이웃이 누굽니까, 라고 나섰어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이 사람은 이미 정답에서 멀어졌어요. 왜냐하면 이웃을 사랑함의 정답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위반자라 했잖아요. 내가 그 말씀에 비춰서 애초부터 위반자였습니다.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그 말씀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내가 이웃을 사랑한다고 여겼는데 주께서 사랑하라는 그 말씀이 오는 순간, 이건 왜 나한테 명령하는가? 너는 죽었다 깨나도 사랑 못할 인간이란 걸 지적하기 위해서 이 말씀 주셨다고 받는 것은 어린양의 피의 가치를 중요시여기는 사람이에요.

내가 내세울 것은 행함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가 내민 피 묻은 손에 의해서 천국 가게 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피를 피답게 돋으라지게 드러내기 위해서 “주여, 저로 하여금 천하의 죄인 되게 하옵소서.”라는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막 산다고 죄가 조장되는 게 아니에요. 막 살지 않음으로서 죄가 조장되는 겁니다. 막 살지 않아 보세요. 주의 깊게 절제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게 본격적으로 죄가 드러나는 거예요.

내 이웃이 누구냐고 율법사가 물은 이유는, 조심조심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테니까 이웃이 누군지 정답만 알려주신다면 나머진 제가 알아서 말씀 지키겠습니다. 그런 인간은 예수님의 피가 필요치 않은 인간이에요. 가룟 유다 같은 인간입니다. 마귀 들린 거예요. 오늘날 교회는 지옥 못 보내서 환장한 것 같아. 오는 족족 지옥으로 다 보냅니다. 율법, 말씀 지켜서 복 받으라고.

말씀 안 지키면 손해가 오고 말씀 지키면 이익이 온다고 하니까 평소에 인간들이 본인이 누군지 몰라요. 위반자인지 모르고 무조건 나는 이익 되는 쪽으로 사는 것이 자기한테 합당한 줄로 착각하고 있어요. 나는 손해 보면 안 되는 인간이고, 남의 자식 물에 빠져도 내 자식은 물에 안 빠져야 되는 자식이고. 무슨 그런 억지가 있어요. 아침에 눈떠서 살아있으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 죄로 벌써 죽어야 되는데 눈뜨고 있으니. 멀리 있거든 전화해보세요. 별일 없지. 은혜인줄 알아라, 인간아. 너 잘나서 사는 게 아니야.

예수님께서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 강도 만난 사건을 아무도 예측 못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잖아요. 강도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제사장, 레위인 그냥 지나가고 어떤 사마리아인이 와서 강도 만난 사람을 치료해주고 자기 돈 더 내겠다고 하면서 여관에 안전까지 취했던 사람. 예수님에 의해서 이 예상 못한 사건에 대해서 ~하지 말라가 아니라 ~했다고 나와요.

뭘 하지 말라는 것은 미리 율법에 예측이 돼서 율법이 있는 걸 알고 내가 이 말씀을 지켜야지, 이럴 경우에는 성립되는데, 강도 만난 사건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 레위인과 제사장, 이 사람들한테는 얼토당토않은 돌발사건이 터진 거예요. 실제 문제에 있어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해요. 실제 사건 속에서 이웃 사랑을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가? 사건이 우선이고 거기에 종속된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안 사람은 사건이 사건 되기 위해서 사건에 휘말려버리죠.

다시 말해서 성도란 예수의 피를 믿는 게 성도가 아니고 십자가 사건에 함몰된 사람, 그 파도에 휩쓸려 들어간 사람이에요. 우린 뭘 해도 위반자고 죄인데 이걸 알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는 유일한 분인 것을 증거 할 수 있는 거예요. 이웃을 사랑한 사람은 이웃을 사랑한 분이 예수님인 것을 증거 한 사람이에요. 너는 왜 못하나? 나는 위반자거든요. 위반자와 피의 만남, 위반자와 십자가의 만남, 그 장소가 바로 말씀이 사건화 된 처소입니다.

이제부터 좀 어렵게 이야기할게요. 출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나올 때 주님께서 그 인간들에게 뭘 당부한 게 아니에요. 네가 어느 자리에 놓여있는지 보란 겁니다. 이 말은 출애굽이 출애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출애굽의 발판이 이동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이동한 자리가 광야일 수도 있고, 약속의 땅일 수도 있고 하겠지요.

인류의 모든 역사가 죄가 더 깊어지는 죄가 변모해가는 역사에요. 계속해서 죄가 더 늘어나는데 늘어난다는 것은 역사가 가만있지 않고 어디로 이동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울산도, 한국 땅도 그렇고 세상의 모든 것이 결국 어디로 이동하겠습니까? 결국은 멸망의 길로 이동해요. 멸망의 길인데 그건 뭐냐? 주님 발 앞이라고 보면 돼요. 예수님이 심판주니까 심판주 앞에 가야 돼요.

고린도후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사람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 나온다 했거든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10절) 심판대 앞에 끌려가고 있는 중이에요. 지금 멀리 보이는 심판대 앞에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심판대에 끌려간다는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주님께서 먼저 그냥 그물을 던지고 그물 안에 있는 자와 그물 밖에 있는 자를 구분 짓는 작업이 계속 된다는 뜻이거든요.

그물이라는 것은 개인이 아니에요. 공간이에요. 어느 자리란 말이죠. 내가 밟고 있는 공간에서 운용되는 공간을 공간답게 그리스도의 피, 어린양의 피를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해서 투입되고 있는 그것이 뭐냐 하면, 레위기 19장의 말씀들이에요. 쉽게 말해서 네가 어느 자리에 와 있느냐? 피 묻은 자리에 와 있음을 알라는 거예요. 얼마나 잘났는지 묻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실수 안 하고 완벽한지를 묻는 게 아니고 네가 무엇을 딛고 있느냐는 겁니다. 말씀의 장이, 토대가.

레위기 19장 9절 봅시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희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게 뭐냐 하면, 히브리인이 애굽에 있을 때 타국인이고 가난한 자였어요. 노여였어요. 그러니까 판을 옮긴다니까. 출애굽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사건이 이제 장을 이루는 거예요. 어떤 공간을 이루는데 실리콘 모형 판 위에 그들을 배치해서 옮겨가는 겁니다. 여러분, 라디오나 티비 뒤에 보면 칩 판이 있지요. 칩이 꽂히는 판, 칩 하나하나가 이스라엘로 보면 돼요. 이스라엘이 피 묻은 판위에 꽂혀있을 때에 율법을 통해서 꽂혀있는 거예요. 율법과 피가 연결돼있으니까. 주님 주신 모든 율법과 제사법이 연결돼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나는 잘났다가 아니라 이 전체가 주님의 용서와 긍휼이 주님 자신의,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거룩이 된 그러한 공간이 이 공간이라는 겁니다. 여기 나오지요. 19절에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이게 바로 너희들은 선택됐기 때문에 이방민족과 섞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잘났다, 못났다가 아니라 네가 있는 자리가 저쪽 이방민족을 용납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맞는다면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싸움 벌이는 나라입니다. 아까 다이아몬드 이야기했지요. 다이아몬드 안에 유리제품이 들어오려고 하는 거예요. 저리가라고 떠밀 때 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새순교회와 다른 교회가 싸웁니까? 아니지요. 새순교회 교인 여러분 마음속이 싸우는 거예요. 여러분 마음속에 두 종자가 들어있는 거예요. 두 종자가 들어있는 걸 다행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두 종자 있는 것도 몰라요. 그냥 아담의 dna만 있는 줄 알지.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야 두 종자지요.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는다는 게 참 신기하고 기적이라니까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것을 안 받아요. 하지만 어설픈 우리의 기도와 모든 것, 이게 죄거든요. 죄를 의로 바꾸는 분이 계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아버지께서 어설픈 우리를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진짜 기독교에요. 그렇게 되면 나는 계속해서 죄인 중에 괴수가 돼야 되는 겁니다. 그게 자유라 했지요.

사람이 자기 절제, 자기 관리에 들어가면 자유롭지 못해요. 항상 벌벌 떨며 살아야 돼요. 내가 행동 잘못하게 되면 멀리 간 아이가 나중에 벼락을 맞는다는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요. 내 행동 잘못하게 되면 내 자식이나 내 가족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수가 있어. 이거는 조마조마 불안 불안해서 참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반대로 살아야 돼요. 제가 얼마나 나쁜 인간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려야 됩니까? 이런 쪽으로 그리스도 피와 만나며 살아야 돼요.

어린양의 피는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만 해당이 되게 돼있어요. 애굽 사람은 해당이 안 됩니다. 따라서 19장에 그리고 뒤에 나오는 모든 것은 애굽에서 이방민족은 어떻게 사는지 결국 그것을 너희가 알고 그 식대로 살고 싶어 할 거예요. 여기 레위기 19장 27절에, “머리 가를 둥글게 깎지 말며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게 오늘날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율법 준 그 당시는 듣는 사람은 다 알아요. 이방민족들이 어떻게 몸에 문신을 하고 장례식에서 애도를 표시하기 위해서 살을 베었고 머리 모양은 어떻게 했는지 다 알아요. 그걸 견주어서 그들처럼 하지 말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들처럼 하지 않았는데 문신을 한 그쪽이 경제적으로 너무너무 잘 되고 부흥하고 이스라엘은 맨날 가난하다면, 젊은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본 적도 없고 무시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자기 모델을 찾겠습니까? 자기보다 좀 더 잘 살고 좀 더 멋있게 살고, 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 그것이 기대고 희망사항이잖아요.

젊은 애들이 예수를 믿습니까, 방탄소년단을 믿습니까? 팬클럽, 방탄소년단을 믿잖아요. 조회 수가 수억이 된다니까요. <강남스타일> 조회가 수십억이 넘어요. 가사가 뭡니까? 주님 스타일? 아니에요. 강남스타일이라니까. 그 자식이 누구 몸에서 났습니까? 내 자식이니까 내 몸에서 태어났지요. 내 몸에서 태어났는데 강남스타일이야. 참. 그러면 원판도 강남스타일. 교육하는 방식도 강남스타일. 복층이 아니고 단층이에요. 전부 다. 잘 되면 말씀 지켜서 복 받았다고 우기고. 못 되면 왜 힘들게 하느냐고 따지고. 자기 분수를 몰라요.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출애굽은 사건이에요. 인간 누구도 예상을 못한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림으로 내가 구원받는 것, 이건 내가 도저히 예상 못한 거예요. 들은 적이 있지요. 성경에 본 적은 있지만 내 인생의 사건으로 다가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해도 몰라요. 십자가 사건이 직접 오기 전까지는 십자가 피 믿어줬다고 자랑질 할 지옥 갈 인간밖에 안 돼요. 나 십자가 피 믿는다, 복음 안다. 복음 안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몰라요. 교회마다 다 복음 안데요. 사는 것은 강남스타일.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그런 인간이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없어요. 그런 인간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이에요. 본인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예수님 본인의 사건으로만 실현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웃 사랑? 우리는 어림도 없어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이웃 사랑하려면 남들을 이해해야 되는데 우리는 비축된, 내가 살아온 기억이 다르기 때문에 내 딴에 해줘봐야, “어머니, 그런 뜻이 아닌데요?” 이렇게 나온다니까.

며느리 인생과 자기 인생이 달라요. 얘를 맡겼는데 얘가 울 때마다 아이스크림 주고 초콜릿 주고 한 거예요. 집에 가서 보니까 아토피 벌겋게 올라왔어. 난 잘해준다고 했는데. “내가 당부했잖아요, 어머니. 아이스크림 먹이지 말라고. 알레르기 있다고.” 앞으로 안 맡겠다고 하면 돼요. 두 번 다시 안 맡깁니다. 레위기 19장의 이야기는 우리가 노터치, 손을 떼야 돼요. 들어야 돼요.

레위기 19장 11절 봅시다. “너희는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 이것 결국 죽으란 이야기에요.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은, 사람이 거짓말인지 거짓말 아닌지 하는 기준이 하나님과 동일할 때만 거짓말 안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하늘의 기준을 몰라요. 그러면 우리는 말을 할 때 어떻게 말하느냐? 나한테 이익이냐, 아니면 나한테 손해냐가 우리의 기준입니다. 거짓말 안 해서 이익이 온다면 우리는 거짓말 안 해요. 그게 거짓이에요. 목적이 이미 자기중심이에요. 그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취지와 완전히 배치되는 겁니다.

기도를 할 때 어떤 보상이나 이익을 바라고 기도한다면 이미 그 기도는 거짓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니에요. 오죽 했으면 로마서 8장에서 기도하는 우릴 보고 성령이 탄식하겠습니까. 아이고, 인간아. 그것도 기다라고. 직접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시면서, 탄식이에요. 답답해하시면서 애통해하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주심으로 말미암아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만드는 겁니다.

결국 성도는 뭘 아느냐 하면, 잘못 된 원인자로 사건을 시작해서 내가 들어가는 그것이 원인이 아니고 결과는 다른 분의 올바른 원인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는 것을 내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과 대조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죄 용서함을 받고 감사하는 그러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은, 고맙고 감사하지 않거든 살지 말라. 죽어라 이 말이에요. 모든 일에 고맙고 감사하지 않으면 그것은 주의 일이 아니에요. 벌벌 떨면서 착한 일 해야지 하는 것은 착한 일 한 보상을 내가 원인으로 집어넣고 내가 바르게 했다는 그 원인으로 나온 결과를 열매를 따먹으려 하는 거예요. 손에 쥐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이건 시작부터가 거짓말로 치고 들어간 거예요. 자기 위주니까. 나는 이런 결과를 받아 마땅하다는 말은 지는 잘났다는 말이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위반자가 아니란 뜻이거든요.

위반자 아니면 애굽에 살지 주님과 같이 삽니까? 니 혼자 살지 십자가 붙들고 왜 사느냐 말이죠. 십자가 붙들고 사는 자는 그런 모습이 나와선 안 되지요. 성령께서 나중에 회개케 하실 겁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회개시키는 것이 그거에요. 잘하라고 하는 게 아니고 왜 고마운 줄 모르고 왜 감사가 없느냐, 이 말입니다. 매사에.

참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목사님도 답답하네, 하고 따질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치통, 아토피, 그리고 간지러움, 대상포진, 이런 사람들이 너는 감사가 되고 고마움이 되냐? 너는 대상포진 아니고 이빨 아직까지 안 아프니까 감사와 고마움을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러나 지금 치통, 지금 대상포진, 지금 아프고 진물 나는 사람에게 감사와 고맙지 않다고 죽으라는 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하거든요.

제가 아까 결과적으로. 사람이 아프면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고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주님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주님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복음 받아들이고 십자가 다 했는데 나한테 왜 이런 손실이 옵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 사람은 아무리 해도 자기 원인성을 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고맙고 감사하라는 것은 뭐냐 하면, 결과적으로 그 결과가 나로 하여금, 어느 인간치고 원인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없어요. 그 원인을 지우개로 지워나가는 결과가 주어지는 거예요.

자,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봤습니다. 그 사람이 집에 가서 재수 없이 괜히 강도 만난 사람 만나서 다 털렸어. 안 도와줘도 되는데 왜 도와줬지? 이렇게 생각할까요, 자기가 사건에 휘말려 들어갔다고 생각할까요? 휘말려 들어갔지요. 그러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사건에 휘말려 들어갔으면 내가 그 현장에 타이밍 맞추어서 가게 된 것은 누구 뜻입니까? 주님 뜻이죠. 그러면 아토피, 대상포진 걸렸다는 이 말은 결국은 주님이 날 사랑한다는 주님이 생각한 그 사건의 현실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휘말려 들어간 거죠. 그럼 아픈 역할만 하면 돼요. 참 속 편한 이야기한다.

그냥 아프면 안 돼요. 아프면서 원망하는 역할하면 돼요. 실컷 원망해놓고 돌아서서 죄송합니다. 주님께서 병 고쳐주는 게 아니고 죄 사함해주는 것도 모르고 병만 낫게 하면 좋은 하나님인 줄 생각했습니다, 라고 뒤돌아서서 십자가 생각할 때에 이것마저 내 몸으로 주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배역을 맡은 게 됩니다. 물론 배역 치고는 상당히 안 좋은 배역을 맡았지요.

그래서 어떤 분이 대상포진 때문에 서울에 유명한 병원에 가니까 딱 한 마디 했어요. 그 사람이 상당히 개혁주의 신학적이에요. 당신이 아픈 것은 dna 때문입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약도 없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못 고칩니다. 얼음찜질이나 하세요.

우리는 처음부터 ‘~말며’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이래서는 안 되는데 우리 조상이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지 말라는 것은 다 하고 하라는 것은 절대로 안 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이 싸우기 이전에 먼저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의 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은 욕구와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이 욕구와 욕망이 인간의 몸에서 나와요. 정신병이든 대상포진이든 아토피든 이 몸이 문제라니까. 몸이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느냐 하면, 주의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주의 처소 아닙니까. 주와 함께 있으면 주의 처소 아닙니까. 주님 앞에서 몸은 어떤 몸이냐 하면, 쇠하고 퇴락되어야 될 몸이에요. 다른 사람들도 늙고 병들고 죽고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몸으로 이유를 알아야 돼요. 다른 민족은 죽어도 모르고 죽지만 이스라엘은 이유를 알고 죽어야 돼요.

그 이유가 레위기 19장입니다. 계속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을 지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지켜서 이익 보겠다는 나의 일방적인 주장이 같이 결합되어 나오거든요. 내가 이만큼 지켰으니까 남들보다 더 큰 보상을 주셔야 주님과 동업자지, 그래야 주님 말씀 지킬 마음이 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선 네 몸은 이방인의 몸과 다르다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16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어찌 하느냐 할 때 우리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돈이 생기거든요. 왜 같이 하느냐? 돈이 나오기 때문에 합니다. 돈이란 바로 내가 스스로 내 몸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돈 버는 방법밖에 없어요. 내가 날 안 살리면 아무도 살려줄 사람 없어요. 내 몸일 경우엔 그래요. 만약에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의 몸이라면 누가 책임지고 살려주십니까? 주님이 책임지고 살려주시는데 그 방법이 내 몸을 주님이 알아서 죽여주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려줘요. 그게 싫은 거예요. 주님의 방식이 내 방식과 비교해볼 때 그게 싫은 거예요.

그러면 안 믿는 사람과 함께하기 이전에 누구와 함께하기를 싫어합니까? 주와 함께하기를 싫어하는 이방인임이 들통이 난 겁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주와 함께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자꾸 우리를 주님 편에 두지 마시고 벨리알의 편에 둬야 돼요. 빛의 편에 두지 마시고 어두움 편에 속해요. 그래서 이 말씀이 비로소 이해됩니다.

우리는 주님이라면 천 리, 만 리 내빼고. 교회 나와도 세상친구 얼마나 많습니까. 모임이 왜 그렇게 많은지. 초등학교 동창생 만나서 미국 놀러가고, 세상사는 모든 정보들, 어디 아파트 사놓으면 오른다는 그 정보들. 무슨 친구가 그렇게 많은지 교회 다니는 친구는 서넛이고 나머지 수백 명 전부 다 안 믿는 친구에요. 왜? 강남스타일이니까. 사는 재미를 그쪽에서 다 배웠거든요.

교회 주일학교가 안 되는 이유가, 세상 재미가 더 좋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가라 해도 재미없어서 안 간다는 한 마디에 부모들이 얘들 교회 안 보냅니다. 재미없다는 데 어떻게 해요. 걔들도 인권이 있는데. 그래서 복음 아는 사람들은 아예 놔둡니다. 내 책임이냐? 주님 책임이지. 몰라. 말해도 듣지도 않는데 강제로 끌고 갈 수도 없고.

부모는 복음 아는데 자식들은 복음을 모르느냐? 그게 왜냐하면 내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복음에서 도망치는 그 본성이 내 몸에 나타났거든요. 내가 그런 사람이에요. 그래서 성령께서 날마다 관리해주지 아니하면 자식들이 내빼는 그 세상 속으로 순식간에 합류할 가능성이 항상 있어요. 우리는 매일 절망해야 되고 매일 새사람 돼야 돼요. 매일같이 내 구원받기에 실패로 끝나야 됩니다. 그렇지 주님의 도우심이 느껴지지 않아요. 지 잘나서 하는 것은 어느새 빛이 아니고 어두움이 돼있고 이방인이 돼있어요.

따라서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위반자라는 사실을 날마다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아까 어떻게 빛이 어두움과 함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하느냐는 그 말씀은 우리가 할 몫이 아니고, 우리가 원인제공해서 말씀 성취라는 결과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원인을 비껴나가서 주님이 원인이 되어서 우리는 날마다 이런 인간으로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지금도, 매일같이.

그래서 우리가 사는 공간이 어떤 공간이냐? 고맙게도 감사하게도 말씀이 역사하고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그러한 말씀의 세계에 우리가 죄인으로서 들어가게 돼있습니다. 고린도후서 보면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떻게 함께 있느냐 할 때 주여, 저는 평생 이 말씀 못 지킵니다. 교회친구와 헤어지라면 헤어지지 동네 계모임은 못 헤어집니다. 곗돈 부은 게 15년인데, 안 됩니다. 괌이니 좋은데 다 가는데 교회 사람들과는 기껏 이스라엘 같은 땡볕에나 가고. 도대체 내 몸에 어느 게 이득이냐 말이죠. 어느 게 나한테 행복하냐.

우리의 타고난 평생가도 없어지지 않는 욕망은 세상 쪽이지 주님 쪽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여러분, 말을 잘 들어야 돼요.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뭔가 저쪽이 모르는 게 있어요. 못난 자를 십자가 피로 구원했다는 사실을 평생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으로 사는 세상이거든요. 돈으로 모든 것이 환산되는 세상이기 때문에 교회는 돈을 내잖아요. 그래서 돈 버는 쪽에 먼저 손이 가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갑니다. 그런 울산바닥에 대구바닥에 왜 우리를 살게 하셨습니까? 바로 이곳이 천국에 가기 전부터 이곳이 천국이라는 사실을 다이아몬드처럼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에요. 이게 거룩이에요.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용서가 억만금을 줘도 살 수 없는 것을 얻은 거예요. 내가 돈 주고 산 것도 아니에요. 그냥 들어왔어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성령을 받았다면 우리가 얼마나 잃어버리고 망했어도 우리는 남는 장사를 했잖아요. 하나님의 십자가 언약과 성령 받았으면 다 잃어도 대상포진이나 다 날아가도 우리는 남는 장사입니다. 인생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라고. 결국 말씀을 던지면서 어디로 가는가? 이 모형 판은 움직입니다.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도달됩니다. 모든 인간, 절에 가든, 성당 가든, 안 믿든 간에 한국에는 무교자가 50%가 넘는다는데 100%가 된다할지라도 그때는 무덤에서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거예요. 우리는 미리 들은 거고. 그들은 나중에 듣게 돼요.

여러분, 세상을 부러워하면 지는 겁니다. 부러워할 건더기가 있어야 부러워하지. 뭐가 부러워요? 화분 던졌다고, 가위 던졌다고 부러워요? 나도 이 컵 던져볼까요? 던지면서 지옥 가는, 그들의 판이 고정된 게 아닙니다. 지옥으로 움직이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 움직임을 몰라요. 이 세상 판은 모형이거든요. 가짜고 말씀은 진짜고.

오늘 본문에서 하는 것은 우리의 어떤 권리를 포기하고, 14절에 나오잖아요. 장애자라고 놀리지 말고 품삯을 아침까지 두지 말고. 이 모든 말씀은 너도 똑같은 신세 아니냐는 그런 뜻이에요. 너도 같은 위반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처럼 그들의 풍습을 따르지 말고 문신 새기기 말고.

그리고 특별히 23절 보게 되면,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 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 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니까 삼 년 지나고 제 오 년째 먹어라. 할례를 거쳐서 먹어라. 이 할례가 유월절에 했던 할례거든요. 출애굽할 때 할례하지 않으면 먹지를 못했어요. 할례 행하고 어린양의 고기를 먹고 피 바르고 했단 말이죠. 그 출애굽이 옛날 사건이 아니고 사건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양상, 예상 못할 새로운 사건으로 출애굽 내용이 포함된 채 마지막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32절에 보면, 나이 든 사람에게 순종하고.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의 사건을 알고 있기 때문에. 33절에,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도 애굽 땅에서 34절에 객이었느니라. 간단하지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우리가 원인이 아니고 우리를 위반자로 보고 십자가 피로 보쌈해서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데려간다. 그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한다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어떤 수모를 당해도 마땅하다는 고백이 병행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에 참 우리 힘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살아있음을 죄 용서의 결과임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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