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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6 23:46:04 조회 : 579         
유혹 속의 존재 180706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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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54) 18-07-10 13:45 
20180706a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유혹 속의 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20장 1절부터 하겠습니다. 레위기 19장 29절부터 36절까지 내용을 점프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 사실은 레위기 20장에서 1장부터 거꾸로 레위기 19장 29절을 볼 겁니다. 왜 레위기 1절에서 3절까지 초반을 봐야 되느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반드시 죽이되”라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드시 죽이는 거예요. 결정적인 거죠. 모든 법에 벌금형도 있고, 돌로 맞는 것도 있고, 보상해주는 것도 있지만 반드시 죽이는 것,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여 버리는 것, 그 죄에 대해서 20장 1절에 나와 있습니다. 반드시 죽이는 경우는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여기서 ‘몰렉’이라고 지목했지요. 2절에. 몰렉이란 이스라엘 동쪽에 암몬 민족들이 믿었던 신입니다. 이스라엘이 있다면, 모압, 암몬, 블레셋이 있고 에돔 있는데 이스라엘 바깥에 암몬 족속에 몰렉이란 신이 있어요. 그 신은 머리는 황소 모양이고 몸은 사람으로 돼있습니다.

인간들이 신을 표시할 때는 반드시 아이디어를 자연에서 끄집어내지요. 로마서 1장에 나오잖아요. 자연에 있는 것으로 모방해서 신을 끄집어낸다. 그런데 자연에 있는 것들이 그냥 신 되는 게 아니에요. 자연+인간 요소를 조합시킵니다. 자연이 있는데 인간을 결합시킨다는 말은, 인간적 요소 때문에 신을 인간 쪽에서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대상의 신, 그게 바로 우상이에요. 인간이 만든 신인데 그냥 인간이 만들어놓고 섬기는 게 아니고, 인간이 만들 때는 다 의도가 있어요. 그 신을 내 마음대로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 내 뜻대로 원대로 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을 만들지 자연을 만드느냐? 인간은 대자연에 기죽어 살거든요. 특히 농사짓는 사람들한테는 태풍이 오면 안 되잖아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큰 힘과 큰 변화를 지닌 자연, 그러면서도 그 자연을 내 뜻대로 필요한 것을 얻고 싶은 인간, 자연 요소+인간 요소, 그게 바로 우상이란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어때요?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건성으로 우린 겉으로는 그래야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싶지요. 그런데 우리 인생이 자기 뜻대로 잘 진행이 안 되게 되면 은근히 화가 나지요. 화가 난다는 말은, 나는 누구의 종이 되기 싫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존중해줄 테니까 그만큼 대가를 내놓으라는 겁니다. 꼭 제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해야 되겠어요? 원래 이런 마음이거든요.

이방민족이 우상을 섬긴다. 방금 우상 이야기했지요. 자연+인간 요소. 그 우상의 자식들이 우리들이에요. 이방민족이니까. 조상을 나무랄 필요 없어요. 그 조상이 생산한 성질과 본질을 우리가 그대로 물려받은 겁니다. 그 조상은 정화수 떠놓고 한복 입고 새벽에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비는 것, 그 비는 분들의 자식이 오늘날 교회 다니는 거예요. 그 속성이 어딜 가지 않았어요. 옆으로 새질 않았어요. 정성을 다하여 순결을 유지하면서 빕니다.

목적이 있어요. 빌고 있는 나와 관련된 것이 잘 되게, 빌고 있는 당사자 내가 잘 되게, 내 뜻대로 잘 되게. 저는 그런 것으로 성경을 써봤으면 좋겠어요. 성경 있어도 보지 않는 성경 말고 내가 쓰는 성경. 내가 쓰는 성경이 옛날부터 나왔지요. 네 자로 ‘토정비결’이라 하는 것. 액운은 피하면 되고 행운 찾아내면 되고. 간편해요. 그게 우리가 쓰는 성경이에요. 우리가 만들어낸 집필한 신의 게시입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자식이에요. 우리는 이방민족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지적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네가 아무리 마음을 잡아도 본질상 못 지키는 것이라고 해서 지적해주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20장 2절에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라 했거든요. 안 죽입니다. 다 그걸 믿는데 왜 죽입니까. 한두 명 같으면 본을 보이기 위해서 죽일 수 있지만 이웃집부터 해서 201동, 202동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신을 믿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7장 43절에, “몰렉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여기서 초반부터 어려운 게 나와요. 뭐가 어렵냐 하면, 인간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돼요. “인간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없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게 뭔지 몰라요. 그럼 뭐냐? 인간은 하고 싶도록, 뭐가 하고 싶게 유혹받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내가 뭘 할까에 대해서 남들 시선과 눈치를 먼저 보게 돼있는 게 인간이에요. 그래놓고 자기가 하고 싶어서 했다고 우깁니다.

여기 유혹이란 말을 했지요.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린 창세기 1장, 2장의 사람이 아니고 창세기 3장의 사람이에요. 이미 유혹에 넘어간 사람은, 아담을 우리 조상을 유혹에 넘긴 그 유혹이라는 영역, 그 세력에서 우린 절대로 그 유혹을 이기고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오라 유혹이여, 우린 늘 유혹을 찾고 있습니다. 썩은 고기만 좋아하는 하이에나처럼. 배부른 때는 표범이 되고 싶지만 먹을 게 없다면 썩은 고기라고 좋아하는 하이에나처럼 킬리만자로 산을 헤매고 있어요.

배 좀 부르니까 고상을 떨지요. 교회도 나오고. 배고프면 이게 절 음식인지 여호와증인이 준 건지 그건 상관없어요. 인간은 원래 유혹을 그리워하고 있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노인네들 사는 게 서글퍼요. 아무도 자길 유혹 안 해줘서 서글픈 거예요. 있을 때 잘하란 말이 거기서 나왔어요. 당겨줄 때 당겨야지 나중엔 아무도 안 당겨줍니다. 여자나이 40 넘으면 시집 못 가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재취 자리 아니면 잘 나옵니다.

사람이 행동하는 모든 것이 유혹받을 준비하고 있는 거예요. 유혹받을 준비태세. 이 말은 유혹 없이 사는 사람이 없어요. 끊임없이 자극적인 유혹을 하이에나처럼 찾아 헤매게 돼있어요. 애들이 밥을 원한다고 밥 주면 밥으로 만족하지 않아요. 밥으로 만족하는 것은 세 숟가락이면 끝납니다. 밥 줬는데 좀 있으면 반찬은? 반찬 주면, “반찬이 이게 뭐야? 벌써 일주일 째 미역국만 주네.” 이렇게 되지요.

인간은 끊임없이 유혹이 작렬하는 세계 속에 넘어왔기 때문에 유혹을 그리워하고 유혹 없이는 못 살아요. 유혹이 있기 때문에 만사에 고통과 아픔을 잊고 그 인간은 살아갑니다. 그래놓고 그 인간이, 내가 세상에 살면서 그다지 나쁜 짓은 안 했다고. 경찰서 왔다 갔다 하는 그런 짓을 안 했다고 주장하는데, 인간은 새로운 유혹거리에 멈출 수 없어요. 자제가 안 돼요. 그 유혹거리를 넘어서 그걸 차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전략으로 준비하면서 인생을 또 도전하는데, 그 다음에 인간이 감추는 게 있어요.

뭘 감추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걸 가지는 과정에서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돼있어요. 하지 말아야 될 약점을 숱하게 감춰왔거든요. 인간은 목표를 쟁취해놓고는 그 주변에 자기만 아는 뭔가 약점을 감추는 그런 동작이나 행위도 병행해서 지금까지 해온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20대, 30대에 깡패 질했다. 그런데 40대 후반에 사업 망하고 난 뒤에 자살할까 하다 교회 종소리 듣고 그 다음에 목사 됐다. 그러면 남들 앞에선 목사임을 내세우지요. 방금 제 이론에 의하면, 목사가 그 사람의 유혹거리에요.

제가 왜 유혹거리란 말을 쓰느냐 하면, 창세기 3장에 이미 들어선 인간존재는 아무리 해도 창세기 2장의 본래 나를 모른다는 취지로 유혹거리라 하는 거예요. 자기는 목사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본래 원하는 뜻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목사라는 것이 창세기 3장의 존재가 원했던 거예요. 그러면 목사 되고자하는 것도 일종에 유혹거리에 말려든 겁니다. 유혹 아닌 게 없어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 뜻은 배격하고 자기 유혹거리만 찾는 입장에서 죄 아닌 게 어디 있어요.

그래놓고 건전해 보이고 고상해 보이는 어떤 것을 쟁취해놓고는 하나님 은혜로 이렇게 됐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과거를 추적해보자.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는지 그 악행을 안 들키도록 다 치워놓은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남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줬는지 본인도 알아요. 알지만 그건 입 다물고 있어요. 한 평생 살면서 우리 때문에 내 생존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 입었는지 생각하십니까? 생각 못하지요.

제가 어릴 때 집안 식구가 열세 식구였어요. 삼촌, 고모들도 많았고 결혼해선 갈라서서 애들 데리고 오고 해서 식구가 바글바글했어요. 화장실이 하나에요. 얼마나 남한테 피해 줬을까요? 그 열세 식구가 생존하면서 어린 나이에 오직 기대하는 것은 제 때 내 밥을 먹을 수 있어야 돼요. 된장찌개에 넣은 소고기나 두부를 먹으려면 투쟁을 벌여야 되지요. 큰 숟가락 갖고 있는 위에서 휘젓고 나가고. 열세 식구가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제일 큰 삼촌부터 차지하니까 매일 밥 먹는 순간이 그 순간이에요. 양보, 배려? 없습니다. 인자함? 어림 반 푼도 없지요. 먹고 살려면 우선 나부터 챙겨야 되는 것이 습관화돼요. 동생 주라고 남기는 것 없어요. 다 먹어버려요.

그렇게 악행을 저질렀으면 다른 식구들은 어떻게 하느냐? 악행을 저질렀으니까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가 정당하다는 새로운 증거물을 내놓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란 내가 지금 이만큼 살았다는 것이 잘났다는 뜻으로 내놓는 증거물이에요. 우리는 그 사람에게 나타난 그럴싸해 보이는 결과물로 보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서 얼마나 본인만 아는 이상한 짓들을 많이 했는지 그런 것들은 안 들키는 쪽으로 나서는 거예요.

드라마에 보면, 재벌 집에 총각들이 있을 때 아가씨가 재벌이라고 좋다고 했는데 나중에 출생에 비밀이 있고, 재벌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화분 던지고. 아침 드라마가 주로 그런 내용이잖아요. 자기 살기 위해서 남 짓밟았다는 이야기. 그게 그 사람의 이야기로만 그칠까요? 그렇지 않아요.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유혹으로 사는 인간이라면, 재벌에겐 돈 많은 유혹이라면, 우리는 우리 나름의 유혹이 있어요. 만약에 그림 그리는데 소질 있다면 화가 되는 게 유혹이에요. 노래 잘한다면 가수 되는 게 유혹이에요. 우린 유혹 없이는 한시도 행동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같은 창세기 3장에 넘어와서 똑같은 유혹을 받고 유혹대로 살아가는 인간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하고 싶은 게 없어요. 하고 싶어지게 유혹을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율법을 근거로 해서 지적질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없어요. 더 나아가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레위기 19장 29절,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말라 음풍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자기 딸을 기생이나 창녀나 몸 파는 자로 넘기지 말라는 말이죠.

이 말을 보면서 자기 딸이 그렇게 안 된 사람의 엄마의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우쭐, 어떤 구원받았다는 자신감? 그렇지요. 지금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가, 이 유혹은 안 받았거든요. 아직 딸을 술집에 보낼 만큼 그렇게 가난하진 않았으니까. 그 정도로 막가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 부분을 보면 갑자기 신자 된 느낌이 들고 나도 율법 지키는 것 같지만 그것이 잘못인 거예요. 왜냐하면 레위기 20장 10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 본문을 보면서 바람을 피우지 않는 남자나 여자 같은 경우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우쭐댈 수밖에 없어요. “이 정도까지 내가 막가진 않았다. 나도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여력이 있네. 나는 천국 백성인가보다.” 이런 생각이 들지요. 자, 그러면 여러분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남과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함입니까, 본인의 가정을 지키기 위함입니까? 가정을 지키려는 이유가 본인 때문이잖아요. 그 본인이 누구냐? 창세기 3장에 들어간 본인이란 말이에요. 아직 유혹을 덜 받은 거예요.

제가 강의 처음에 레위기 20장 2절부터 시작했지요. 이런 자는 반드시 죽이라 했지요. 그중에 나온 게 몰렉인데 몰렉은 황소 머리에다 사람 몸이라 했어요. 그 몸이 손을 내밀고 있어요. 이건 뭐냐 하면, 몰렉 신이 요구하는 것은 네 자식 바치라는 걸 요구하는 거예요. 사사 중에 입다 있지요. 깡패. 입다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 몰렉을 섬기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니까 레위기에서 몰렉에 자식을 바치는 자를 죽이라 하지만 이스라엘 자체가 완전히 몰렉의 광팬이 돼있어요.

여호와는 안 보이니까. 몰렉 신은 보이잖아요. 만만하잖아요. 갖고 놀 수 있잖아요. 그런데 몰렉 신을 자식을 바치라는 거예요. 결국 이 영향을 받아서 입다가 자기 딸을 여호와께 바쳐요. 그것도 시집도 안 간 딸을. 그 딸이 너무 서러워서 친구들과 엉엉 울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마음 정해서, “아버지, 이것도 운명이니까 하나님께 속한 대로 날 바치세요.” 몰렉을 섬기던 지역에 몰렉 섬기는 방식으로 여호와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그 이방신을 좋아하는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픔이 되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그 사사에게 아픔을 유발시키는 겁니다.

사람이 아파야 자기 모습에 접근해요. 여러분도 그렇지만 집안에서 알뜰살뜰하게 살지요. 그렇게 살 때 내 몸은 하나님이 주신 거고 내가 할 일은 알뜰살뜰하게 살면 된다고 했는데 손가락이 부러졌다. 그리고 손가락 고친다고 십만 원 나갔어요. 그러면 손가락 하나에 십만 원짜리입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이십 만원, 삼십 만원……. 인간이 알뜰살뜰하게 산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 자신을 돈으로 가득 차 있는 몸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상태에서 알뜰살뜰하게 사는 거예요.

이 몸으로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까가 아니고 내 몸 지키기 위해서 한 푼이라도 아껴야 된다고 생각할 때 뒤늦게 하나님께서 손가락 하나 부러트린 거예요. 그러면 돈 십만 원 나갈 때 얼마나 아깝고 아깝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포도주 반병밖에 없다고 하지 않고 반병이나 남았다고 하는 긍정적 사고방식처럼 십만 원짜리 날아갔지만 나머지 백만 원짜리는 남아 있잖아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지요. 그만큼 인간은 이상하게 돈은 아끼면서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이렇게 모순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제가 지적하는 거예요.

공짜로 주신 거니까 오만 원 날아가도 내 돈 아니고 주님 돈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알아요. 내 몸은 공짜라 해놓고 오만 원 날아가니까 아깝다고 하는 거예요. 제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거예요. 성경이 왜 있습니까? 성경이 이야기 안 하면 아무도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우리는 아까 예를 든 것처럼 자기가 바람 안 피우면 우쭐대고 자기가 진짜 괜찮게 인생사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나를 위함이에요. 나를 위해서 만든 게 뭐냐? 몰렉이라는 우상이란 말이죠.

제 말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서 분명히 질문합니다. 여러분, 몰렉 신을 안 믿는 게 쉬울까요, 자기를 포기하는 게 쉬울까요? 몰렉 우상, 요새는 부처지요. 부처를 안 섬기기는 쉬워요. 종교 바꾸면 되니까. 교회 나오면 되니까. 하지만 자기를 포지 않는 것이 곧 부처 섬기는 것과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아요. 왜 자기를 포기해야 하느냐 하면, 포기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우리는 새로운 유혹을 찾아 나서기 때문에.

새로운 유혹을 찾아 나설 때 그게 몰렉을 안 섬겨도 몰렉 섬기는 게 되고, 몰렉 섬기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냥 죽이는 게 아니고 반드시 죽여야 돼요. 그래서 율법은 우리가 반드시 죽을 존재로 그 지역에 태어났다는 거죠. 그게 존재에요. 우리가 반드시 죽어야 마땅한 곳에 태어난 거예요.

제가 아까 몰렉 이야기하면서 스데반 집사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께서 몰렉을 섬기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몰렉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새로운 자극, 새로운 유혹이 된 겁니다. 어떤 원칙이냐 하면,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하는 말은, 아예 선악과 심지도 말고 아예 그 말도 안 했으면 그런 사단이 나지 않았는데 선악과 심어놓고 따먹지 말라는 순간 아담과 하와는 내내 유혹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처럼.

선악과 따먹기 전까지는 자긴 얼마나 잘나고. 자기 본질을 모르고 나는 잘났어, 훌륭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훌륭하고 잘난 것 선악과 따먹는 순간 어떻게 됐습니까? 따먹었다는 그 죄 하나 진 게 아니에요. 아예 그 자리를 놔야, 자리 자체를 모든 걸 털고 이쪽 저주의 땅으로 넘어오게 된 겁니다. 쫓겨난 거예요. 그게 우리 신세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신세, 어떤 위치에 있는가는 계속해서 율법을 통해서 유혹받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 19장 32절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아멘. 이것 우리 흔히 하잖아요. 율법 지켰네. 율법 지켰으니까 천국 가겠네. 우쭐하네, 갑자기. 신앙인 같아. 그런데 그 뒤에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돼 있잖아요. 율법 자체가 일종에 우리에게 유혹이 돼버린 겁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법이다, 지키자. 이렇게 된 거예요.

사람 대 사람이 누구를 비평할 수 없다고요. 둘 다. 만약에 누굴 비판하려면 나는 지켰는데 저쪽이 못 지켰을 때는 비평이 돼요. 요한복음 8장에서 어떤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을 때 바리새인들이 질질 끌고 예수님 앞에 왔지요. 그들은 뭐냐? 나는 간음을 안 했는데 저 여자는 했다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땅에다 누구든지 마음속으로 간음하지 않은 자는 돌로 쳐라. 그 글을 썼다면, 니가 그 여자를 돌로 친다면 나는 새로운 법, 한 번이라도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는 네가 던진 짱돌 그대로 들고 내가 너를 칠 때 너는 군소리하지 마라. 그래도 치려면 쳐봐라.

어떻습니까? 돌로 치려는 사람들 다 어디 갔습니까? 제가 묻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묻는 겁니다. “여인아, 널 치려고 한 사람들 다 어디 갔어?” 여자의 답변이 속이 다 시원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는데 여자는 남았지요. 그럼 여자는 뭐냐? 간 사람을 대표해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대표로 보여주는 사람으로서 예수님 계신 현장에 그 여자가 앉아있는 거예요. 내가 너를 용서한다.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오면 용서받고 나오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을 결합시켜보면, 죄인이 두 가지로 구분돼요. 첫째는 율법 어긴 자가 죄인이 되고, 두 번째는 뭐냐? 예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 어느 게 죄인입니까? 율법 어긴 자가 죄인입니까, 예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가 죄인입니까? 둘 다 죄인이죠. 만약에 1번 같은 경우에 율법 어긴 자가 죄인이란 것만 있다면, 율법 안 어기면 되지, 라는 게 돼버려요. 그때 실수했네. 그때 술 한 잔 먹고 율법 어겼네. 음주운전과 비슷한 줄 알고, 율법이 음주운전 아니거든요. 술을 안 먹으면 음주운전 있을 수 없잖아요. 앞으론 술 먹으면 대리운전 불러야지. 운전 안 해야지. 이러면 본인은 율법을 안 지킨 경우는 있지만 지킨 것도 있다. 그게 나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두 번째, 예수님의 은총이 돼버리면, 어떤 인간도 한 번이라도 율법을 지킨 적이 없는 자로서 주님의 은총을 받은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2번 같은 경우엔 자신의 완벽함을 자랑하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자랑하겠습니까? 하여튼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랑하진 않겠지요. 내가 예수 믿는 것도 자랑 안 하겠지요. 내가 예수 믿으면 내가 잘난 게 되니까. 그냥 주님께서 나에게 속죄의 용서를 주신 거예요.

그럼 둘 중에 누가 구원받겠어요? 예수님한테 은혜를 받은 자가 구원을 받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은총을 받는다고 살 때에 예수님의 은총을 미리 예상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상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예상한 값으로 구원받으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그 지식으로 내가 구원받는 셈이 돼버려요. 그러면 예수 믿으면 구원받을 걸, 그것조차 뭐로 전환돼야 돼요? 이게 죄가 돼야 돼요. 이건 뭐 믿거나 말거나지.

그래서 아까 우리 자신을 포기해야 된다는. 그래서 제가 창세기 3장 이후라 했잖아요. 창세기 3장 이후에 온 인간은 이미 유혹으로만 살기 때문에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도 그 사람한테는 유혹이다, 유혹 아니다? 그것도 유혹이라니까요. 나를 위한 예수가 돼버려요. 나를 위한 예수 믿거든 그 예수 갖다 버리세요. 창세기 3장에서는 절대로 창세기 2장으로 도로 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내가 비법을 알려드릴게.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여러분이 호응이 안 되면 곤란해요. 몰렉을 섬기는 자는 반드시 죽이죠. 그런데 이게 율법이잖아요. 몰렉을 안 섬기는 우상숭배 안 한다는 그것도 율법 자체가 유혹이기 때문에 이것도 유혹된다고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아까 했잖아요. 20장 10절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남의 아내와 간음 안 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주님을 경외함이 아니고 내 가정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내 가정에 내가 있기 때문에. 아까 강의 흐름이 그래요.

내 가정은 괜찮은 가정이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 가정은 건전한 가정이라고 남한테 제시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인간이 뭔가 남한테 근사한 것 내세울 때는 그만큼 부정한 것, 더러운 것들을 억지로 감춰놓은 형편에 있단 말이죠. 남에게 들키기 싫은 것은 다 뒤로 빼돌리고 자랑거리만 추려서 편집해서 나 이렇게 잘 살았다고 내놓는 거예요. 청문회 해봐야 돼요?

머리 센 여자 있잖아요. 외교부장관. 그 사람 똑똑하고 유엔에서 활동하고 대단하지요. 그런데 자기 딸이 이중국적이란 게 청문회 하니까 드러났잖아요. 그래서 이번에 한국국적을 취득한다고 했어요. 보세요. 그 사람이 외교부장관 후보 아니면 계속 묻히는 거예요. 그 사람만 그래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어요. 없는데 인간은 나는 살만 해서 살았다고 전부 다 얼굴 들이대고 있으니까 주님 보시기에 같잖은 거예요. 웃기지도 않은 거예요.

아까 요한복음 8장 했잖아요. 돌로 치려하니까 그 글이 무슨 글인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겠지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자도 간음한 자다. 그걸 썼다면 그걸 보고 난 뒤에 그게 법이라면, 그 여자 치고 난 뒤에 예수가 칠 테니까 각오해라. 그러면 누가 치겠어요? 진짜 죄인 같으면 여자 치고 주님한테 얻어맞아야 돼요. 그래야 공평해요. 그런데 그 여자를 왜 치지 않느냐? 그동안 바리새인들이 자기 허점 드러나는 걸 싫어해서 살았다는 게 티가 난 거예요. 그럼 내 허점을 감추는 방편으로 율법을 지켰다면 그게 율법을 온전히 지킨 거예요? 안 지킨 거죠. 누구나 인간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데. 그게 주님 앞에 통합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전부 다 몰렉 신자다. 우상 모으는 게 취미가 아니에요. 우리는 여호와는 시시해. 예수도 시시해. 새로운 자극적인 것. 물론 우리가 골프 모르던 사람이 교회 다니면서 골프 쳐보세요. 전에는 주일마다 교회 다닌 사람이 세 번 가고 한 번씩 빠진다니까요. 2년 뒤에는 두 번 가고 두 번 빠져요. 3년 뒤에는 한 번 가고 세 번 빠진다니까. 골프 모임 때문에.

집에 자식 없을 때는 부부가 손잡고 주님께 감사하지요. 아이 하나 생기면 처음에는 억지로 교회 다녀요. 그 다음부터는 아이 핑계로 교회 많이 빠집니다. 둘, 셋, 점점 빠지다 나중에는 교회 안 나와요. 누굴 위한 예수고 하나님입니까? 그 사람에게 몰렉은 자식이에요. 왜 그 사람들이 몰렉에게 예배를 드립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식을 바치면 네 가문이 많은 자식을 낳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하나 죽이면 열 명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든요. 그런 사례가 많다면.

제가 지난 화요일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인간이 힘든 것, 돈이 없어서 몸이 아파서 힘든 건 보통 건성으로 이해하잖아요. 인간이 제일 힘든 것은 확실한 게 없어요. 인간들이 제일 힘든 건 정신적인 거예요. 확실한 미래 보장되지 않고 내 인생 어떻게 될지 확실하게 모른다는 것. 예수도 믿어봤다가, 기도도 해봤다가, 십일조도 해봤다가. 왜 그런 짓 하느냐 하면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래요. 확실하지 않아요. 아주 정성 드려 열심히 하는데 불안해요. 뭘 해도 불안해요. 이렇게 바쳤는데 내 뜻대로 안 해주면 어떻게 하나.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식 낳고 자식이 대학 다니다 말다하고 백수로 있을 때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취직이 되면 안심이 되고. “주여, 내 몰렉이 드디어 취직했군요. 7월부터 kbs에 출근한다니 아이고 감사합니다.”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맞닥트리는 모든 사건이 나에게 유혹인 동시에 불확실성이 같이 주어집니다. 그런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꾸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지요.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시키는 대로 다 하지요. 그런다고 그게 확실해집니까? 확실한 건 모르겠고 할 도리는 해봐야지, 이런 식이라. 그게 무슨 안정성입니까? 불확실성이죠.

몰렉이란 신은 계속해서 인간에게 불확실성을 악마기 때문에 공격하는 거예요. 인간은 유혹을 받고 그 유혹과 현실과의 괴리에서 이렇게 해봐라.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라고 하는 것을 계속 우상은 제공하거든요. 그런데 여호와는 그게 아니에요. 여호와는 뭐냐 하면, 내가 너와 함께 동행 한다는 겁니다. 니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주인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주인도 아닌 게 걱정은 왜 하고, 불확실성으로 고민은 왜 하고, 주인도 아닌 게 유혹은 왜 받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상을, 인간은 살았다고 여기거든요. 살았다는 것을 반드시 죽여 버려요. 살은 게 아니고 죽은 것임을 확인사살하기 위해서 율법을 줘요. 안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계속 추가적으로 유입됩니다. 마치 홍수 났을 때 장마 들었을 때 물 퍼내면 이쪽 새고, 이쪽 퍼내면 저쪽 새듯이 계속해서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결코 우리가 산 자가 아니고 죽은 자임을 확인시켜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구약이니까 어린양의 제사에 함께 죽어 버려라. 죽게 되면 이런 불확실성이 없는 안전성 있는 어린양과 함께 새로운 생명을 우리한테 제공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죄인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하나는 율법을 위반한 죄인이 있고, 또 하나는 주님의 은총을 거부한 자가 죄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딱 보고, 나는 1번 안 하고 2번 할래. 그게 또 유혹이라니까.

2번은 1번을 거쳐서 이미 나 이것 할래요. 저것 할래요. 천당 갈래요, 라는 그 주둥이, 이게 죽은 자에게 결과를 남기면서 은총이 제공되게 돼있습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주님 건데 걱정을 내가 왜. 이미 구원받았는데 은혜 받았는데. 이게 은총을 아는 사람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게 되면, 예수님을 자랑하는 게 아니고 나라는 인간이 예수 믿었다는 사실을 자랑해요. 이건 또 새로운 유혹이에요.

자, 주님께서 인간은 창세기 3장에서 절대로 2장으로 못 넘어가지요. 유일하게 넘어간 사람이 누구냐? 바로 선악과로 끊어진 것을 생명나무로 가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갈 때 우리를 그리스도 함께 죽이고 그 다음에 죽은 자를 모가지 잡고 저쪽 세계에 와버리면 우리는 살아날 땐 옛날 나로 살아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난다. 이걸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을 위하라고 살아난 자, 그게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54) 18-07-10 13:46 
20180706b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유혹 속의 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레위기 20장을 하면서 반드시 죽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앞뒤 볼 것도 없이 그냥 죽이라. 사람을 돌로 칠 것이다. 그 이유가 나와 있어요. 20장 3절에 보면, 내 성소를 건드렸다는 거예요. 더럽혔다는 겁니다.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성소란 주님이 계신 곳이거든요.

주님의 관심사가 뭐냐? “나, 건드리지 마.” 그거에요. 인간의 얼마나 행복하냐는 전혀 고려대상도 안 됩니다. 건강? 그건 니가 건강하고 싶지요. 니 소원이고. 건강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 아니에요. 돈을 잃으면 조금 잃고, 건강 잃으면 다 잃는다는 소리하는데 그런 인간은 반드시 죽여 버려야 돼.

나에게 관심을 가져버리면 하나님과 라이벌이 돼요. 경쟁관계에 돌입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네 자신을 위해서 구원이 된 게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변에 다 같이 노예를 만들고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같이 제공합니다. 그것이 레위기 19장 33절에 보면, “타국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애굽 땅에서 객이 되었다는 이 말을 아주 쉽게 말해서 개인주의 구원은 없다. 집단구원이에요. 그 집단 속에 하나의 개인이 있을 거잖아요. 그러면 개인은 무엇과 싸워야 되느냐 하면, 집단 위주냐 아니면 나 위주냐, 싸워야 됩니다. 나를 보고 구원한 것이 아니고 어디 소속되어 구원한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인품이나 품격, 고매한 품위 이런 것 따지지 않아요. 어린양 피 보고 넘어왔다고.

넘어올 때마다 붙들고 출구조사해보세요. 누구 찍었습니까? 전부 다 어린양 피 찍어서 나온 사람들이에요. 인품이 좋아서, 성격 좋아서, 가정환경 괜찮아서, 배울 만큼 배워서 아는 게 많아서, 돈이 많아서? 전혀 없어요. 이것은 모든 인간의 요소를 꽃다발로 만드는 겁니다. 묶어버린 거예요. 히브리인들을 어린양의 피로 묶어요. 그런데 어린양의 피는 사람에게 묻히는 게 아니고 그 인간들로 하여금 공히 할례언약을 행하게 했어요.

할례언약이란 대대로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육적인 혈통이 잘렸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우리가 우린 된 것은 기존의 다른 민족처럼 혈통으로 된 게 아니고 이스마엘과 이삭이 다른 것처럼 약속된 민족이기 때문에 어린양을 우릴 위해서 보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우릴 덮친 거예요. 어린양이 오지 않으면 아버지, 자식, 손자, 혈통의 연관인데 그걸 끊어버리고, 그게 할례언약이에요. 모세를 하나님이 죽이려고 할 때 십보라가 무슨 행동을 취했습니까? 자기 아들 할례를 행했잖아요. 자기 아들 할례 안 한 것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단 말이죠.

하나님은 본인에게 관심 있어요. 관심 있는 본인이 제시한 게 뭐냐 하면, 언약입니다. 그 언약 중에 하나가 할례언약이에요. 내 백성 뽑을 테니까 위로부터 내려오는 혈통을 끊어라. 그겁니다. 할례언약을 행하게 되면 인간의 피가 나오지요. 할례언약은 피언약이니까. 그 피언약과 어린양의 피가 바꿔치기한 거예요. 끊어진 혈통에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어지면 그때부터 살아난 장자는 그 가정의 장자가 아니고 아버지께 드린바 됐습니다.

그게 출애굽기 13장에 나오죠. 초태생, 사람이든 가축이든 내게 돌리라는 말이 그 말이에요. 얼마나 분명합니까. 하나님 뜻은 모호하지 않고 분명해요. 그 분명한 걸 간단하게 말씀드릴게요. 죽으라. 참 분명하지요. 니는 이미 죽은 존재야. 사람들 보기에는 살아있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야 돼요. 그런데 그냥 죽으면 안 돼요. 할례언약처럼 언약에 의해서 죽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우리를 성령을 보내서 살아있는 자를 죽이되 자살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 죽게 만들어서 십자가에 죽은 자만 영생을 얻는 방법을 채택한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언약방법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죽은 자 입장에 소속돼있어요. 죽은 자가 쳐다볼 것은 죽은 우리를 한 묶음으로 천국백성 만들었지, 그걸 쳐다봐야 돼요.

그것은 바로 어디 나오느냐 하면, 20장 3절, “내 성소를 더럽히고” 이걸 저는 중앙부, 중심부. 이스라엘 내부에는 성소라는 중심부가 있어요. 그 중심부를 더럽히면 반드시 죽인단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중심부에서 발생된 반드시 죽은 것에 어떤 게 있는지 20장 6절에,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죽지요. 그 다음에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죽이라.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반드시’란 말이 나오죠. 11절에. 그 다음에 12절,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

20장 2절에 나오는 반드시 죽여라에서 발생된 죽이라는 거예요. 누구든지 여자와 교합하고 남자와 교합하거든 반드시 죽이라. 동성애 하거든 반드시 죽여라. 14절에, “누구든지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취하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지니” 그 다음에 15절에,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하여 교합하거든 반드시 죽여 버려라. 그러니까 이것 죽이고 저것 죽이고 다 죽여 버려요.

그러면 이런 것 하거든 죽이란 말은, 이것이 유혹받는 인간 본성상 그것에 유혹받을 있다, 없다? 유혹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에 네 모습이다. 그래서 내가 너 있는 곳에 성소를 보내서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을 시킨 겁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반드시 죽을 자에 포함돼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법에 의해서 20장에 있는 이것은 비껴가더라도 그 다음 율법에서는 비껴날 수 없어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도록. 나는 살아남았다는 것조차 마지막까지 찾아내서 다른 것 다 지키더라도 마지막 하나 끄집어내서 죽일 만한 요소를 만들어내서 죽여 버립니다. 의인은 없나니, 진짜 모든 것을 싹쓸이 해버려요.

운동회에서 하는 게임 중에 장애물경주 있지요. 장애물이 있을 땐 피해가면 됩니다. 그런데 피하면 다른 장애물이 또 나오지요. 주님은 율법이란 장애물을 계속 주는 거예요. 나는 6단계는 넘었어. 이러면 7단계에서 지게 돼있고, 8단계 넘었다면 9단계에서 지게 돼있어요. 결국 늙어죽던, 물에 빠져 죽던 인간은 죄 값으로 죽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율법 앞에 의롭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기 아니하면 반드시 저주받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다 죽여 버리면 천당에 아무도 없겠네,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죽어라’에 흔쾌히 죽는 자, 그 사람이 약속의 백성이에요. 그래야 내가 죽은 이유는, 하나님에 의해서 법에 의해서 죽어 마땅함을 본인이 버리지 않고 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을 만해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병원에서 건강한 사람은 의사 약 올리려는 사람이에요. “아저씨, 어디가 아픕니까?” “아픈데 없어요.” “그럼 쓸데없이 왜 왔습니까?” “그냥 재미삼아 내 자랑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러면 그거는 업무방해에 걸리죠.

아프기 때문에 의사가 필요하잖아요.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아플 때 자기 자신을 안다고. 지금 주님께서는 율법으로 우릴 계속 아프게 해요. 우리는 단박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만만한 사람 아니에요. 계속해서 장애물경기를 합니다. 계속 변명으로 핑계로 일관합니다. 남의 차 안 박으려고 했는데 비가 와서. 비 내리신 분 탓이지 나는 브레이크 밟다 획 돌아서 박았지. 급발진이고.

급발진 맞아요. 비가 와서 그런 것 맞습니다. 그렇다면 본인에게 아무 일 없을 때도 본인이 잘나서 평안하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도 인정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요. 왜? 평소에 지 잘난 맛에 살았기 때문에. 아무 일 없으면 내 탓이고 안 되면 남 탓인데 뭐. 그렇지요. 그러니까 사람은 아무 일 없고 안 아플 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친구끼리 서로 연락 안 할 때는 이유가 있어요. 내세울 게 없어. 사단 났어. 일이 생겼어. 보톡스 잘못 맞았는지, 뭔가 일이 있어. 그러다 연락 왔다. 뭔가 자랑거리 있어. 결국 뭐냐 하면, 나는 내 뜻대로, 아까 배운 대로 하면, 내 유혹에 말려든 그 모습 그대로 되어줘야 좋은 하나님이고 내게 합당한 조치라고 우리는 이렇게 우기고 있습니다.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참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 세상에 안 걸리는 인간이 없어요. 모든 인간이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어겨서 죄인이 돼버리면, 내가 아는 율법, 내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쪽으로 해석한 율법에 대해서 나는 그걸 지켰다, 나는 위반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율법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 너무 촘촘해서 어느 것 하나 빠져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것은 지옥 갈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다. 어떻게 그 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눈만 뜨면 그 생각하는데.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 내놔라. 네가 용서받은 것처럼 남을 용서하라. 이게 가능합니까?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네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라. 이게 됩니까? 인간은 개인적으로 절대로 용서도 구원도 안 돼요.

그래서 인간 개인, 개인이 모여서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적으로 용서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언약을 보내서 할례언약과 피를 결합시켜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거예요. 애굽에서. 그렇다면 19장 33절,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와 함께 있는 타국인을” 예멘 사람들 압니까? 제주도에 와있는 난민들, 이슬람 국가인데, 돈 모아서 지구상에서 제주도만 가면 시민권 준다는 소문 듣고 오는 거예요. 이 사람들 난민들인데요. 받아줄까요, 안 받아줄까요? 여기 레위기 19장 34절 이론에 의하면, 너희가 타국인을 자식 같이 여겨라.

제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예멘인이 제주도 오기 전에 제주도에 장로님이 믿음이 너무 좋은 거예요. 십계명을 어릴 때부터 다 지켰고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신앙생활 잘했다고 복 주셨다고 했는데 자기 옆집에 예멘인이 와있습니다. 자기 외손자, 어린 아이들이 있어요. 그 난민들 남성들이 무슨 짓거리를 할지 몰라요. 왜냐하면 수개월, 몇 년 동안 쫓기다보니까 동물적인 본능이 그대로 살아있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을 내 외손자처럼 받아줘야 됩니까? 예멘 사람들이 오기 전까지는 착한 사람이었죠. 딱 등장하는 순간 999가지 율법을 지켜도 그 사람은 못 지켰어요. 이유가 뭐냐? 999가지 지킨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영광을 위해 지켰다는 뭐냐? 그게 나 자신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도망치려고 빠져보려고 율법을 이용한 거예요. 그게 들통 난 거예요. 그 사기가. 그 위장술이 들통 난 거예요. 예멘 사람 보낸 것이 하나님 뜻이었어요.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자기를 훌륭한 천국 가는 사람인 줄 알았지요. 예멘 사람 오기 전에 몇 개는 지키고 못 지키는 게 아니고 나 같은 인간이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데 지키기는 뭘 지키겠습니까? 나 같은 인간은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아직도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옆집에 예멘 사람 오게 되면 또 내가 죄인인 것을 드러냈군요. 하는 거죠.

그럼 그건 그거고 이 예멘 사람들 어떻게 할까요? 저들 나라로 보내야지요. 보내면 죽는데요? 죽더라도 보내야지요. 젊은 놈이 싸워야지 전쟁하기 싫어서 남의 나라로 내빼면 안 되잖아요. 비겁하잖아요. 한국에 전쟁이 났다. 전쟁하기 싫어서 나는 여호와증인이라 해서 일본에 난민 신청하면 일본이 받아주면 좋겠어요? 자기 나라에서 보상받았으면 지켜야지 왜 남의 나라로 도망치느냐 말이죠. 그것도 개인적인 영광과 영달 때문에, 나만 살자는 식으로, 자기 아버지는 조국을 위해서 목숨 바쳤는데 자기는 피신하면 되겠어요?

그리고 저들이 믿는 이슬람교 신념에도 위반되잖아요. 난민으로 온 게 아니고 취직하러 온 거예요. 그럼 국가에서 최저임금도 적용시키지 말고 한 시간 오백 원이나 천 원씩 줘서 국가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국가에서 이용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한국은 죄인 되고, 예멘도 죄인 되고 이로서 주의 뜻대로 모든 게 죄인 되는 거예요. 인간은 전부 다 죽을 자에요. 죽을 자는 자기의 어떤 욕구, 기대와 목적을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살게 해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이렇게 살게 해주세요, 저렇게 살게 해주세요, 요구할 입장이 못 됩니다.

집단구원에서 중요한 것은 뭐냐? 중심부를 어떻게 묶어내느냐는 겁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할례언약과 피를 묶어서 이스라엘 중심을 묶어냈지요. 그 묶어낸 원칙에서 발생되는 게 있어요. 이제 오늘 강의 중에서 핵심부분에 도달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경계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할례언약을 통해서 혈통을 끊어버리고 약속의 자손으로 묶어낸 이게 경계선이거든요.

이 경계선이 새로운 민족을 만나서 A라는 경계선이 좀 시간이 지나면 B로 퍼져버립니다. 경계선이 이동해요. B 지점 지나면 그 다음에 C가 돼버려요. 점점 경계선이 이동합니다. 이동할 때마다 A 안에 있었던 경계선이 다 죽은 자들이 되지만 경계선이 A에서 B로 이동하게 되면 A를 포함해서 그동안 안 죽었던 B라는 보다 넓어진 경계선 영역에 있는 자가 다 죽은 자가 돼요. 이게 C로 이동하게 되면 다 죽은 자가 됩니다. 이동하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도달하면 십자가 앞에서 모든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너는 창세기 3장 이후의 존재라는 걸 분명히 하는 거예요. 죽어야 되기에 악마를 통해서 내가 죽이는 거야. 따라서 나는 죽어야 되는 것에 대해서 토 달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이렇게 죽던 저렇게 죽던 죽는 것은 인간을 향한 주님의 고유한 권한의 발휘에요. 주님의 자율권을 이 땅에 발휘하는 겁니다. 언약대로. 따라서 자기가 죽는 걸 고생하는 걸 억울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저기는 율법 어기고 나는 지켰으니까 복 달라. 그런 소리하는 것은 경계선 A라는 거예요. 경계선이 율법이 추가되며 점점 더 확대돼요. 확대되면 구약 때 양 바치고 소 바쳤는데 지옥 가요. 형식적인 제사 드렸다. 할례 행했는데 지옥 가요. 왜? 마음의 할례를 안 했다고. 그렇게 되면 우린 못 지키고 죽잖아요, 라고 한다면, 원래 죽으라고 율법 준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나오잖아요.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에요. 원래 저주받으라고 준 겁니다.

“잘하셨습니다, 하나님.” 이러면 돼요. 까라면 까겠습니다, 오라면 오고. 그게 백부장 믿음 아닙니까. 믿음이란 잘 조치하셨다는 뜻이에요. 왜? 내가 주인이 아니니까. 주님이 주인이고 주님께서 원대로 어떤 사람은 의사 되고, 판사 되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고 이건 주님의 뜻대로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잘 산다고 부러워하지 마세요. 잘 살든, 의사로 살든 결국 머리 세서 죽어버려요. 죽는 방식이 다르지 결과는 똑같아요. 누구나 죽습니다. 목욕탕에 옷 벗고 들어가 보세요. 문신한 사람 빼놓고 전부 다 똑같아요. 물론 거기서 돈 주고 때 벗기는 사람 따로 있겠습니다만.

레위기 19장 36절,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을 뭐라고 표시하느냐 하면, 애굽 땅에서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지요? 나온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2장으로 옮겼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인간은 절대로 죄라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나올 때 기존의 인간을 죽이고 어린양으로 교체해서 어린양의 피가 발린 인간으로 나오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나오게 하셨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 가운데서 어린양의 취지가 보다 점점 더 A, B, C, D로 경계선이 넓혀져야 되는 겁니다.

그럼 인간이 왜 이렇게 안 되는가? 사람이란, 여기서 단어 하나 쓰겠어요. 여러분 싫어하는 단어지만 할 수 없다. 존재. 존재라는 단어를 쓸 때는 뉘앙스가 뭐냐 하면, 딱딱함, 고정화된 형체가 갖추어져 요지부동인, 돌부처, 꿈쩍도 안 함, 그런 용어로 쓰면 돼요.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살만큼 살고 돈 좀 여유 있으면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부자 됐다. 그 말 틀린 말 아니에요.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내 행함으로 복 받았는데 이 경계선이 언제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까지 이동하거든요. 그럼 따라가야 되는데 자기가 잘난 경계선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기존교회 장로님들이, 젊은 아이들에게 내가 처음 교회 다닐 때 아버지 집 준 것 팔고 전세로 옮기고 지금 너희들이 앉아있는 의자와 예배당 토지와 건물을 세웠다. 틀린 말 아니지요. 맞지요. 그런데 그걸 50년째 우려먹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경계선이 이동했거든요. 주의 뜻 맞아요. 그때 은혜 받아서 한 것 맞아요.

하지만 하나님 은혜 받은 것이 사건이 돼야 될 텐데, 사건이란 쉽게 존재의 반응을 바람이라. 성령에 의한 바람. 바람은 임의로 불잖아요. 바람을 잡을 수가 없어요. 바람을 비닐봉지에 담으면 바람 답답하다고 까불고 그럽니까? 조용하지요. 비닐봉지에 담긴 공기는 존재가 돼버려요. 사건이 안 됩니다. 성령을 비닐봉지에 담을까요? 기도 많이 해서 성령 받아서 내 안의 성령에, “성령님 꼼짝하지 마세요. 앞으로 내가 필요할 때 써먹을 테니까.” 이게 바로 몰렉 우상이거든요. 내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의 신이란 거죠.

그런데 성령은 임의로 불어요. 내 뜻대로 안 돼요. 태풍 노선도 지 마음대로 빠져버렸어요. 내륙으로 온다 해놓고 일본으로 쑥 가버렸어요. 울산은 피해를 좀 봤겠지만 대구는 별로 피해 안 봤어요. 바람은 임의로 불거든요. 개인이 그 앞에서 아무런 가치나 의미를 뽑아낼 수 없어요.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했잖아요. 왔다가 가버리는 바담^^ 그냥 왔다가 가버려요. 사랑의 슬픔은 바로 그 사랑이 바람인데 그걸 내 것으로 쥐려고 할 때 그 사랑은 눈물, 그야말로 아픔이 돼버립니다.

어떤 남녀가 만나서 사귀다가 남자가 이야기합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이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하는데 여자가 웃어요. “알았어. 갈게.” 하는데 손을 안 놔줍니다. 꽉 잡고 있어요. 왜 그런가 보니까 울음을 참느라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요. 남자가 보니까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어버려요. 남자도 그 아가씨 껴안는데 아가씨의 눈물이 남자에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할 때 좋았는데 이별할 땐 이렇게 아프구나. 그래도 할 수 없이 헤어졌지요. 그래놓고 가라 했는데 그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고한우 씨가 불렀던 <암연>이란 노래 가사입니다.

이걸 들으면서 제가 뭘 느꼈느냐 하면, 이걸 사랑이라 했잖아요. 사랑이 아니고 혈육의 정이에요. 인간은 아무리 교회 나오고 목사, 장로, 어떻다 해도 혈육의 정은 남달라요. 할례언약으로 절대로 안 끊어져요. 그저 내 자식, 내 손자 밖에 몰라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자식 취직되면 최고에요. 혈육의 정을 못 끊습니다. 이걸 악마가 알고 주님이 알아요. 안 끊어지는데 끊는 방법이 있어요. 죽여 버리는 방법 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끊을 수 있느냐? 다른 말로 네가 믿음이 있느냐? 네 손으로 네 자식을 죽여라. 하나님은 내 자식을 죽였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분임을 언약을 통해서 다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죽였는데 못 돼먹은 인간들은 남은 죽여도 내 자식은, 남을 죽여서라도 내 자식을 살리려하죠. 그게 장한 어머니, 훌륭한 부모잖아요. 그러다 둘 다 지옥 가는 사람이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절대로 살려두지 말라는.

내 중심, 개인중심, 내 가족중심, 혈육중심은 어떤 식으로도 율법을 못 지킵니다. 지켰다고 하지만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경계선에 어느새 그 자리에. 아까 <암연> 가사처럼. 갔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그녀는 그 자리에 있어요. 이미 우리는 딱딱한 괴물덩어리, 물체덩어리 어느 날 우리는 존재가 돼있습니다. 존재가 딱딱하기 때문에 존재 빼놓고 나머진 다 바람이 돼요. 왔다가 가도 아무렇지도 않은 니가 죽든 말든 몰라. 이게 바로 우리가 영원한 고정적인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 앞에서 우상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우상의 특징은 고정적이라는 것, 모셔놓고 찾아가는 거예요. 구약에서 물체니까. 그러나 신약성경에 오면 예수님을 우리가 찾아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을 기도원에 교회에 모셔놓고 찾아가는 게 아니고 주께서 늘 우리에게 바람 같이 찾아오지요. 찾아올 때 우리의 존재를 시비 걸어요. 우리의 존재를 문제시하는 겁니다.

그걸 제가 오후에 문책성 일생이라 했는데 우리 자신을 문책성 인생이 아니고 문책성 일생, 우리 평생이 문책 당하는 일생이에요. 주님께서 늘 지적하는 거예요. 또 니 중심이었지. 내 중심이 돼버리면 우리는 모든 선과 악, 감사와 고마움과 불평을 무슨 기준이냐 하면, 내 존재로 더욱 더 강화되는데 유리했는지, 불리했는지 따져서 평가 내리게 돼있어요. 우리의 모든 판단을.

이게 바로 중국과 미국이 무역 전쟁할 때 또 우리나라 월드컵에서 마지막 게임은 독일한테 이겼잖아요. 그게 왜 그렇게 부각되는가? 내가 그 나라에 속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기 때문에. 일어난 모든 일에 나한테 유리한 거예요. 스웨덴은 16강 올라갔는데? 난 스웨덴 사람 아니거든요. 스웨덴으로 이민 가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독일에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한국과 축구할 때 독일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 축구중계를 봤답니다. 2:0으로 이기고 난 뒤에 창문을 활짝 열고 우리가 이겼다고 고함질렀다는 거예요.

얼마나 자기중심이에요. 자기 소속중심이에요. 이게 존재입니다. 은혜를 받아도 도로 존재가 돼버려요. 주님께서는 이 존재를 우상이기 때문에 용납하지 않고 이걸 바람으로 바꿔버립니다. 바꿀 때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이걸 죄로 녹여버려요. 뜨거운 렌지에 아이스크림 넣으면 녹잖아요. 죄 앞에서 우리가 녹아버립니다. 죄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지요. 그럴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로소 아는 거예요. 물론 그 가운데서 아파요. 그러나 아파야 뭘 안다? 아파야 날 알아요. 내가 아파야 평소에 건강한 것이 내 공로가 아닌 것을 알게 돼요.

우리로 하여금 내가 중심부에 있을 자격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중심부를 차지하게 돼버리면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돼요. 주님도 중심부고 나도 중심부고. 대결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중심부 앞에서 태양 같은 주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이 율법이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려요. 우리를 그렇게 주눅 들게 만들고 벌벌 떨게 만든 그 율법 전체가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려요.

율법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괜히 줬네? 아니에요.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다고 했거든요. 로마서 7장에서. 그럼 왜 줬느냐? <암연>에 이런 가사가 있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사랑이 아픈 이유가 외부에서 사랑이 온 게 아니고 이미 내 안에 그녀를 사랑하는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고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지금 내 안에 있는 사랑을 잊지 말라는 거예요.

피로 주신 피의 생명이 내 안에 있는데 그동안 우리가 구원사건이 되지 못하고 존재가 되다보니까 우린 누굴 무시하고 짓밟느냐 하면, 내가 받은 영생을 누가 모독하고 무시하느냐 하면, 유혹받은 내 욕심이 주님의 고귀하고 소중함을 모르고 주님을 욕되게 만든 거예요. 내가. 주님은 이런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봐주는 것 없습니다. 양보 없습니다. 여러분, 멍게나 대게 먹을 때 그냥 안 먹지요. 껍데기 다 떼고 속살만 먹잖아요. 주님 주신 그 사랑을 빨아 당기기 위해서 아깝지만 우리의 존재를 해체시키고 분해시켜 버립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식이 셋 있으면 하나 쯤 말썽피우고, 말썽 하나 해결되면 다른 게 말썽 되고. 이빨 아픈 게 나으면 허리가 아프고. 내 일이 아무 일 없으면 16강 못 들어가고. 하여튼 계속 쑤셔요. 어디 하나 아픈 구석이 있고 깔끔하게 마무리 지어지는 게 아니게 해요. 우리 인생을. 경계선 따라 이동하라고. 경계선 따라 계속 이동해야 돼요.

율법이 레위기 19장, 20장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뒤에 또 있어요. 계속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너라는 존재가 얼마나 잘 되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못난 네 존재와 그리고 너를 위해서 희생하신 성소에서 일어나는 제사라는 것과 늘 연결시키도록 하시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은 뭐지요? 사랑입니다. 그냥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랑한 거예요. 그냥 사랑한 거예요. 회개하면 사랑하고? 그런 것 없어요. 회개란 조건도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옆에 강도 둘이 있었잖아요. 왜 다 같은 강도인데 하나를 버렸습니까? 버린 강도는 강도이기 때문에 버렸어요. 그런데 다른 쪽은 왜 안 버립니까? 버려야 되지만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안 버린 거예요. 죄 값은 치러야 되는데 그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서 같이 십자가 지신 거예요. 꼭 우리가 내 십자가 달고 올라가야 됩니까? 아프게. 그렇게 실습할 필요 없지요. 그 상황, 주님이 중심이고 나는 변두리라는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가 위해서 나는 강도라는 입장으로 옆에 붙어있는 거예요. 종으로써.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했지요. 성령이 아니고서는 주라 할 수 없다는 이 말은, 이미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종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 돼요. 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된다. 그런데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보세요. 모든 인간은 자기 혼자 사는 맛에 삽니다. 흔히 말하기를 부부가 있다 하지만 부부요? 각자 홀로 둘이 살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유혹받은 존재기 때문에 남의 사정을 이해할 수 없어요. 자기 유혹을 채우는 욕망이 작동하기 때문에 자기 존재기 때문에 그 사람 생각하듯이 내가 그 사람을 생각해줄 수 없어요. 개인주의를 신처럼 여기기 때문에 인간의 한계입니다. 너무 많이 기대하지 마세요. 그냥 돈 벌어주고 설거지 해주고 같이 놀아주고 티비 채널 양보해주고 심심할 때 같이 여행 가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남편이 돈 벌어주고 건강하고 일찍 들어오고 자식 챙겨줄 때는 고마운 줄 아셔야지 너무 많은 걸 요구해선 안 됩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요?

인간은 아무리 퍼주고 퍼줘도 자식은 그 사랑 모르고 부모는 그 퍼준 것을 자랑하기 마련입니다. 개인은 죽지 않고서는 개인주의를 떠나지 못합니다. 감사한 것은 죽지 않는 개인을 향하여 주님께서 경계선을 십자가까지 확대시킨다는 거죠. 너 때문 나 죽었다는 사실을 매일같이 우리에게 통보해주죠. 낮에 집에 노는 사람들은 알지요. 12시 쯤 우체부 다녀가잖아요. 자동차세도 나오고 전기요금고지서도 있잖아요. 기관에서 통보해주잖아요. 주님께서 수시로 통보해줘요.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널 살리기 위해서. 그 통보해주신 것을 우리가 짓밟거나 무시하거나 해선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이란 것이 이미 몰렉 세상이거든요.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신을 믿고 예수 믿고 하는 그런 세상이란 말이죠. 전부 다 종교를 가진다는 게. 지 잘난 맛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세상에서 하는 사고방식이 우리에게 유혹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유혹을 이길 수 없어요.

20장 4절 봅시다.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는 것을 그 지방 사람이 못 본 체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그 사람과 그 권속에게 진노하여 그와 무릇 그를 본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 몰렉이, 인신공양이라 하지요. 어린아이를 받아요. 순수하다고. 그걸 바친 사람도 나쁠뿐더러 그걸 보고 자식 바친 부모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 사람도 주께서 그냥 두지 않겠다고 하신 거예요.

이건 뭘 의미하는 겁니까? 몰렉에게 자식 바치는 걸 뻔히 보면서도 인간은 거기에 관여한다, 관여 안 한다? 관여 안 하지요. 자기는 몰렉을 안 섬겼으니까. 이게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이라니까. 이스라엘이 벌을 받을 때 아무리 지가 훌륭하더라도 집단적으로 범죄 하게 되면 똑같은 운명으로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가게 돼있습니다. 아까 스데반 집사 설교에 나오지요. 몰렉에게 우상숭배해서 집단적으로 고생하는 거예요.

바벨론 포로 생활한다는 것은 구원받기 전에 애굽 생활로 되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구원이 무효된 거죠. 사실은 구약의 구원이란 것도 율법이니까. 무효 돼야 마땅하죠.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한 구원이 되는 것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죽이고 우리와 함께 있는 그런 목숨과 목숨의 관계면 구원이 종결되고 완성되는데 그냥 뭘 행함으로 돼버리면 행했으면 경계선도 A, B, C로 옮겨지기 때문에 나는 제사 드렸다. 복 받았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의 절대화로 응축이 돼버린단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온전한 구원이 될 수 없지요.

방금 강의한 것을 통해서 여러분이 성경 전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셔야 돼요.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우리 안에 나보다 더 소중한 게 있어요. 그게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나는 내쳐도 내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은 내치지 않아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십자가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떼어낼 수 없어요. 악마라도 그걸 못 빼어내요. 한 번 집어넣은 칩은 악마가 와도 그게 안 빼앗겨요.

천 번을 타락해도 언젠가는, 여러분 범죄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강의 끝나면서 걱정 되서 강의를 못 끝내겠네. 간음하고 살인이 범죄가 아니고 내가 더 소중하다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에요. 우상숭배하면 필히 죽이라 하는 것은, 나보다 더 소중한 게 주님인데 우리는 자꾸 주님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날 위해서 주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것 당연한 것 아니에요? 다들 그렇게 살아가지 그렇게 안 사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 없어요. 다 그렇게 살아요. 그런데 그렇게 산 것이 주님의 사랑 앞에서 천하의 죄인인 것을 죽어 마땅함을 인지하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큼은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오늘 레위기 19장, 20장 준 것은 나 이것 안 했다, 이러지 마시고 죄인 됨을 알게 하기 위해서 나보다 더 귀한 말씀을 주셨다. 그렇게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 보면서 상대적으로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나는 예수 잘 믿는데 저 사람은 못 믿는다고 비교, 경쟁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그것이 하나에 유혹이란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인을 구원해주신 십자가라는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 안에서 이미 영생 얻은 사람인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히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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