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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7 23:40:45 조회 : 368         
하체2 180907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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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32) 18-09-11 10:29 
20180907a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하체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0장 17절부터 21절까지 제가 쭉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 그 민족 앞에서 그들이 끊어지리니 그가 그 자매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그 죄를 당하리라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너의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 이는 골육지친의 하체인즉 그들이 그 죄를 당하리라 누구든지 백숙모와 동침하면 그 백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그 죄를 당하여 무자히 죽으리라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무자하리라” 아멘.

하나님께서 듣기만 해도 상당히 민망하고 난감한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 입장에서 우리 자신이 민망합니다, 듣기 곤란합니다, 라고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어요. 기본적으로 우리의 육신, 우리의 몸이 우리 것이 아닙니다. 딸을 시집보내던, 아들을 장가보내던 내 몸도 내 것이 아니에요. 내 몸도 아닌데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생각하는 본연의 인간으로부터 벌써 우리는 이탈돼있는 겁니다.

내 것이라는 걸 잊게 되면 그냥 잊는 게 아니에요. 내 것이니까 이걸 지키려고 할 거고 그 지키는 방식은 그냥 지키는 게 아닙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해서 지키려고 합니다. 적어볼까요. ‘라는 것은 ’내 것‘이 되고 내 것을 지키려 한다. 나에서 내 것으로. 내 것에서 소중한 내 것, 앞에 ’소중한‘이 붙어요. 그렇게 되면 소중하게 지키려고 하지요. 나를 내 것이 되면 계속 내 것으로 유지한다 이 말이죠. 그 앞에 ’소중한‘을 붙이면 소중하게 지키려 하고, 그렇게 해서 이게 의로운 나, 결국 나는 의롭다고 여기고 싶어 하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아주 무가치하다면, 내가 의롭지 않다면 내가 보기에도 내가 소중하지 않겠지요. 방향이. 만약에 내가 의롭지 않다면 소중하지 않은 내 것이 되겠고, 소중하지 않으면 내 것을 포기하려 하고, 내 것이 포기되면 나는 없어지는 거죠. 그러면 결국 이건 자살이죠. 죽음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나는 있고 나는 발전해서 내 것이 되고 그냥 내 것이 아니라 소중한 내 것이고, 소중한 내 것에서 의로운 내 것, 가치 있는 내 것이 된다.

이것은 무슨 요소를 뺀 거냐 하면, 내게서 죽음이란 요소를 쫙쫙 빼는 거예요. 바비큐 할 때 닭을 뱅뱅 돌리면 기름기가 쫙쫙 빠지지요. 죽음이란 요소를 살아가면서 계속 배제하고 밀어내는 겁니다. 나는 안 죽고 싶은 거예요. 이유가 뭐냐? 이유는 없어요. 왠지 안 죽고 싶어, 왠지 더 살고 싶어요. 그냥 살고 싶은 게 아니고 소중한 내 것이 살고 싶은데 왜 살고 싶으냐? 이 의로움, 잘난 내가 잃기 싫은 겁니다.

벌써 이러한 태도,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보게 되면,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느냐 하면, 상당히 불만이 많아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불만스러워요. 왜냐하면 내가 사는 세계에서 나는 소중한 내 것, 의로운 내 것을 원하고 이런 쪽으로 살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이런 내 의도를 충족시키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은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불만스런 존재로 우리한테 기억이 되는 겁니다. 왜 내 뜻대로 안 해 주느냐는 겁니다. 나는 살고 싶은데. 그리고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소중한 내 것으로 살고 싶은데.

그래서 성경은 별로 인기가 없어요. 성경은 보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은 멀리 하고 싶고 기껏 한 주에 한 번 정도 나와서 여기 왔다고 눈도장 찍고 예배 끝나면 다시 소중한 내 자리로 돌아가는 거죠.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 하면,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라는 말씀을 해버립니다. “그 죄를 당하리라”고 돼있어요.

이것은 누가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우리는 누가 다가온다는 순간에 바짝 긴장해야 되고 누가 말씀이라든지 신체적 접촉으로 건드리게 되면 잠자고 있는 우리의 근본적인 마성이 잠에서 깨어나요.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을 건드리는 겁니다. 18절에 보면, “누구든지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여인은 자기의 피 근원을 드러내었음인즉 둘 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너의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지니 이는 골육지친의 하체인즉 그들이 그 죄를 당하리라” 이렇게 돼있어요.

이런 말을 우리에게 가까이 하나님이 속삭인다든지 이야기한다는 그것이 평소에 우리가 갖고 있던 마성, 악마성이죠. 마성을 자극한 게 돼요. 이게 ‘금지의 족쇄’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또 한 번 확인해주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창세기 2장에서 금한 과실을 따먹었잖아요. 하나님이 금했단 말이죠. 금했는데 그 족쇄를 풀기 위해서 악마가 시켜서 금지한 과실을 먹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악마 입장에선 뭐냐? 금지의 족쇄를 풀었기 때문에 더 이상 너에게 금지할 어떤 요소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처음에 금지할 사항으로 연결돼있었는데 그걸 가위로 잘라버렸다고 보면 됩니다. 잘라버리면 하나님은 따로 하나님이고, 나도 따로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금지를 통해서 계속 간섭을 해야 되는데 그 금지를 끊었으니까 우리 따로 놀자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네가 그걸 먹는 날에는, 즉 금지를 끊어버리면 너도 또 하나의 신이 되는 거예요. 부모로부터 자식이 독립하듯이. 요샌 결혼해도 독립도 안 해. 아이 봐 달라하는데 무슨 독립이 돼요.

완전히 남남으로 독자적으로 금지가 깨져버린 겁니다. 그리고 지금 레위기 20장 말씀은 이제 내 할 도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 인간의 자세거든요. 내 것이 있다는 자체가, 자충이라 하는데, 스스로 충족하는 나는 나 있음으로 스스로 충족하고 싶은 욕구가 와요. 이게 마성입니다. 인간의 악마의 본성이에요. 그래서 내 것이 된 나를 스스로 소중하게 여기고 그 자체로 우리는 의롭게 봐서 어떤 누구로부터 질책당하는 걸 싫어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런데 레위기 20장이 있다는 말은, 이렇게 하지 말라, 저렇게 하지 말라고 왔다는 말은 분명히 따로 논다고 생각한 금지조항이 새롭게 추가된 셈이 됐어요. 인간 입장에서 대단히 기분이 좋지 않지요. 딱 기분 나쁜 거예요.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이랬다저랬다 왜 간섭을 하느냐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독립했다는 말은 일체 간섭받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내가 부모한테 해주면 해주지 부모가 허락 없이 먼저 잔소리하지 마세요. 자식들 그렇잖아요. 그게 범죄 한 인간의 노골적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심으로써 금지를 네 마음대로 끊었지만 금지는 네가 끊었다고 끊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금지를 전에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했지만 하나님께선 인간 몸에다 금지의 실제성을 새겨버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여자의 하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할 때에, 지금 금지의 족쇄를 인간들이 싫어한다, 알지요. 하나님은 금지 없는 창조는 창조로 보지 않고 있어요. 처음에 인간을 만들고 따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선악과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과실이 있는데 이 과실을 따먹지 말라고 했어요.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했어요. 따먹지 말라. 따먹는 날에는 죽음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음 속에서 만들어놨어요. 예수님의 주되심도 죽음에서 나왔듯이 인간의 창조도 죽음에서 나온 거예요. 흙이란 게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명사로 보지 않고 동사로 보겠다는 겁니다. 죽음이란 것을 동사로 움직임으로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살아있는 행동으로도 얼마든지 죽음을 표현할 수 있겠노라, 하고 주께서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죽어서 숨 안 쉬고 가만있는 물체를 죽음으로 보지 않아요. 죽음 자체가 활발한 활동성을 보이는 죽음, 움직이는 죽음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죽으리라. 했을 때 인간이 물어봤습니까? 못 물어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금지 너머는 질문 대상이 안 돼요. 왜 그렇게 했느냐는 금지 너머의 질문은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어요. “따먹지 말라면 따먹지 말지 무슨 이유를 달아. 토 달지 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피조세계에요. 그걸 넘어서면 안 되는데 악마가 그걸 넘어서서 이야기하죠. 네가 따먹는 날에는 죽는 게 아니고 네가 신이 된다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이 넘어서지 말아야 될 경계선을 장벽처럼 만들어놓은 거예요.

왜 제가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자의 하체가 선악과처럼 금지돼있고, 그리고 왜 여자의 하체에 대해서 금지해야 됩니까, 왜 그걸 봐선 안 됩니까, 하는 너머의 문제에 대해서는 인간의 거기에 질문 자체를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여자의 하체에 대해서 거론하셨는가? 물론 남자의 하체도 나오긴 나와요. 17절에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돼있는데, 그 뒤에 20절에 보면, “누구든지 백숙모와 동침하면 그 백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이렇게 돼있어요. 또 18절에 보면, “경도하는 여인과 동침하여 그의 하체를 범하면 남자는 그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었고” 이런 말씀 하나하나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과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금지했다고 보시면 여러분 이해하기가 쉬워요.

그러면 문제를 왜 이렇게 하셨는지 풀어보겠습니다. 비가 오는 것과 남녀가 짝을 이루는 것이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 보기에는 전혀 관계가 없지요. 남녀란 인간이 짝을 이룬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되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과 짝을 이룬다. 그건 내 마음이다. 비가 오는 것은 누구 마음이냐 하면, 하나님의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남녀가 짝을 이뤄서 혼인을 하는데 만약에 가뭄이 계속된다. 이럴 경우에 사람이 어디까지 되느냐 하면, 우리가 짝을 이룸으로써 가뭄이 해소되도록 하늘에서 비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있어요. 그럴 때 인간을 둘로 나눕니다. 여자를 땅으로 보고 남자를 하늘로 보는 거예요. 하늘과 땅이 교접하게 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이게 바알종교고 동양철학입니다. 동양철학은 하늘은 별로 중요치 않아요. 땅이 중요해요. 땅에서 임금님이 제대로 된 결혼하게 되면 하늘도 축하하는 의미에서 단비가 내린다. 그런 신화가 굉장히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그렇게 반대하던 바알종교의 특징이에요.

인간이 행동해서 인간이 얻고자하는 것은 받아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했잖아요. 인간은 스스로 뭐로 보느냐 하면, 자충족적 존재라 하는데 자기 스스로 만족해야 될 사람으로 봐요.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이라 했지요. 세상사는 게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던, 인정 안 하던. 인정하더라도 하나님이 썩 좋진 않아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하더라도 좋은 감정을 안 갖고 있어요. 내 인생 어렵게 사는데 좋을 게 뭐 있겠어,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하나님을 대할 때도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막상 하나님과 상대할 때는 하나님이여 나의 모자람을 채워주소서, 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겁니다. 모자람을 채워달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럼 모자람을 채워주게 되면 인간은 자충족적 존재가 되겠지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했어요. 분명히 인간 자체가 금지에 둘러싸여있지요. 금지 바깥의 이유 때문에 인간은 만들어졌거든요. 그리고 이 경계선은 절대로 넘어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금지를 잘라버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금지를 잘라버렸으면 인간은 분명히 만족해야 되는데 인생사는 게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창세기 3장에 의하면 땅에서 저주받아서 그렇지만. 어쨌든 인간은 여러 가지로 사는 게 빡빡하고 힘들고 불편합니다. 그러면 이런 인간이 신에게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하면서 늘 마음속에 불만을 가지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게 돼있어요. 나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걸 빨리 채워주세요. 모자람을 보충해주세요, 라고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 금지안에 있어야 된다는 금지의 울타리가 인간에게는 계속 무시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채워줄 것을 채워주는 신을 좋아하지요. 그게 무슨 신이라 했습니까? 바알신, 우상숭배를 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필요한 걸 보충해주는 하나님을 기도를 하던 예배를 하던 뇌물을 바치던 헌물을 하던 아이를 제물로 바치던 어쨌든 간에 내 것 채워주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선호하겠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인간을 채워주겠어요, 아니면 인간이 잘라버렸다는 금지를 오히려 가져오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본래 인간으로 돌아가려면 금지라는 것을 깊숙이 집어넣어야 되겠지요. 집어넣은 것이 뭐라 했습니까? 여자의 하체를 그렇게 한 겁니다. 특히 18절에 보면, 월경하는 여자와 동침하라 해서, 오늘 본문은 주로 여자이야기에요. 여자를 하나의 경계면으로 삼는 겁니다. 월경하는 여자가 금지조항으로 남자한테 등장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남녀가 짝을 이룬다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아요. 왜냐하면 남녀가 짝을 이룬다 하지 말고 하나님에 의해서 금지된 조항을 지니고 있는 그 여자를 짝을 이룬다. 이렇게 돼야 돼요. 말은 길지만 여자를 볼 때에 그냥 개인 대 개인으로 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남자의 욕정의 모자람을 채워주기 위해서 여자가 있는 게 아니에요.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지만 특히 여자 쪽에서 이야기하니까 남자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남자들은 여자를 뭘 보느냐 하면, 자기의 모자람을 마저 채우는 용도로서 다가서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남자나 여자나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칭 스스로 신이 되었지요. 모든 인간은 신이 되었잖아요. 신이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나, 그 다음에 내 것이다. 남자나 여자 입장도 마찬가지에요. 나라는 여자는 여자로서 내 것을 갖고 있고, 그냥 여자가 아니고 어떤 여자라 했습니까? 소중한 여자고, 소중한 여자로 단정한 이것이 의롭다고 본 거예요. 남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로서 내 것을 갖고 있고, 소중한 남자를 위하여 그걸 마저 채우기 위해서 여자가 나한테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자가 남자를 생각하는 것과 남자가 여자를 생각하는 것이 서로 대화를 하게 되면 쌍방 간에 대화가 안 돼요. 서로 노리는 점이 어긋나게 돼있어요. 원래 여자는 약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게 돼있고. 창세기 3장에 그렇게 징벌을 받았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소유물로 삼고 여자는 모든 면에서 약하기 때문에 남자 없이 못 먹고 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자의 소유물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구성해놨어요. 선악과를 먼저 따먹은 자가 여자기 때문에 남자보다 징벌을 더 심하게 매긴 겁니다. 징벌을 제일 심하게 매긴 것은 여자를 꼬신 뱀한테 했고요. 뱀은 땅과 밀착해서 살아가게 돼있어요. 그 다음에 징벌이 여자에서 남자로 가잖아요.

어쨌든 그동안 여자들은 남자가 원하는 데로 순응하고 남자가 요구하는 데로 소유물처럼 문화가, 인간역사가 그렇게 돼있는 거예요. 그 증거가 창세기 4장에 곧장 나옵니다. 4장 23절에,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이리로다”라고 라멕이란 왕이 그런 소리하거든요.

여자가 그 소리를 왜 들어야 됩니까? 남자가 지 소중하다는 객기를 왜 여자가 다 맞춰줘야 돼요? 그리고 뒤에 5장에 족보이야기 나오는데 족보에 여자이름 안 나오지요. 전부 다 남자이름만 나오지요. 남자가 인류이 대표가 돼버렸어요. 여자는 종속이 되고. 남자는 능동적이 되고 여자는 수동적이 됐어요. 남자가 주는 것을 여자는 받아먹는 존재가 된 겁니다. 남자와 여자가 전혀 대화가 안 되는 것이 남자 쪽에선 여자와 대화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대화의 반대를 독백이라고 해요. 남자는 독백하고 여자는 독백을 들어주는 역할만 할 뿐이에요. 여자가 자기 의견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남자한테 안 통합니다. “이게 어디서 말이 많아.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너는 나 아니면 못 먹고 살아. 나 아니면 어딜 가도 못 살아.” 그러니까 창세기에 보면, 여자는 남자의 배필이잖아요. 배필이 아니고 남자의 남자 됨을 받쳐주는 희생물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함부로 다뤄도 되는 대상, 남자가 화날 때는 패도 되고, 남자가 욕정이 넘칠 때는 강간해도 되고.

하여튼 어떤 식으로든 여자는 남자가 원할 때 무조건 다 들어줘야 될 대상으로 삼는 그 여자에게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합니까? 여기에 금지조항이 기재가 되는 거예요. 금지조항이 새겨지면 그때부터 남자는 여자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신을 상대하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상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하나님이 집어넣은 금지조항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런데 여자를 금지조항으로 할 때 금지조항이 어느 부분에 있느냐 하면, 창세기 3장을 읽어보겠습니다.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벗은 줄을 알았는데 그 알은 게 뭐라고 하체를 치마로 부끄러움이 나오는 모습을 가리게 되는 거예요? 모든 몸이 다 부끄러운 게 아니고 신기하게도 하체부분이 유난히 수치, 부끄러울 요소가 계속 나와서 그걸 아담이나 하와가 가릴 필요가 있다는 이 자체가 인간의 몸이 인간의 요구를 충족할 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원리와 원칙에 의해서 다뤄져야 될 몸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질문할 수 있는 것은, 발을 감춘다든지 머리카락을 감춘다든지 코를 감춘다든지 이렇게 하지 않고 왜 하체를 감춰야 하는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돼요. 부끄러운 부분이 왜 하체에 집중돼있는가? 여러분, 보통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 하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 사랑한다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게 어느 정도냐 하면,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가 될 때 사랑이란 말이 돼요. 부끄러움을 벗어난 상태. 이 상태는 죄 짓기 상태에요.

로마서 1장에 보면, 복음을 아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지요. 무죄, 또는 뭘 해도 의로움, 무죄 상태일 때만 부끄럽지 않게 된다. 강의 처음부분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범죄 하고 난 뒤에 나, 그 다음에 나는 내 것이 되지요. 나에서 내 것이 됐다는 것은, 나라는 것은 실제적으로 내 것이라는 의식, 이걸 소유의식이라 하는데, 그냥 나라고 하면 안 알아줍니다.

당신 누구야? 하면, 나는 이런 것 갖고 있다는 소유의식으로 자기를 표현해요. 그런데 내 것인데 줄까? 이러지 않아요. 내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내 것이에요. 소중한 내 것이니까 이미 인간의 행동은 지키려고 해요. 왜 소중한지 물으면, 이게 거룩하고 착하고 훌륭하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의롭기 때문에 악한 것이 아니고 유지될 만한 가치가 있는 계속해서 손해 보면 안 될 정도로 가치 있기 때문에 의롭기 때문에 소중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럼 자기 스스로 의롭게 되려면 부끄러움이 없어야 돼요. 모든 것이 잘났는데. 없어야 되는데 인간은 뭔가 부끄러움을 갖고 있다는 말은, 인간 자체가 금지에 속해있는 거예요. 금지가 인간의 경계면입니다. 인간의 육에서 영으로 가는 경계면이에요. 여자의 하체는 18절에 보면, ‘여인의 근원’이라 돼있어요. 여인의 하체는 육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금지의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이것 넘어서면 영적 세계에요. 인간은 범죄 했기 때문에 절대로 영적 세계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육적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 되는데 육적 세계는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 나는 내 것이 있다. 내 것은 지킬 만한 가치가 있다. 소중하니까. 이 모든 것을 수치를 발산하는 경계면으로 계속 공박하는 겁니다. 인간, 너는 본래 인간 아니다. 문제 있다는 겁니다. 잘못된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 역할을 여자의 하체가 하는 겁니다.

피는 육체 안에 들어있어야 돼요. 피가 나온다는 것은, 인간 속에 죽음이 가득 들어있다는 뜻이에요. 죽음이 인간의 몸을 지배한다는 겁니다. 원래 생명이 있으면 피부 바깥으로 안 나와야 돼요. 피가 나온다는 것은 인간 속에 생명이 작용하는 게 아니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처럼 그 죽음이 변함없이 계속해서 인간을 다스리고 있고 통치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초등학생들 싸우다 코피 나오면 졌다는 느낌이 들어요. 코피 안 나오는 쪽과 멍은 들었지만 코피 안 나오는 쪽과 판정내릴 때 누가 이기고 누가 집니까? 코피 난 쪽이 지게 돼있어요. K-1 격투기에서 코피 나면 관객들은 벌써 끝났다고 봅니다. 피가 흐른다는 것, 피가 계속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내 것으로 유지하고 그걸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계획이 무산돼있다는 겁니다.

그 무산됐다는 것을 무슨 소식으로 이해하느냐? 남자의, 남자가 인간의 대표니까 여자들은 남자에 복속돼서 여자는 존재가치도 없어요. 인간을 대표하는 남자에게 극히 무시당하는 여자로 하여금 들이대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금지조항이 자기한테 오게 되면, 제가 아까 했잖아요. 인간이 외부에서 뭔가 오게 되면 가만있는 점잖은 인간들도 잠자는 마성이 발작하게 돼있다고.

아버지가 되어서 딸과 성관계 안 한다. 자기 아내와만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되어서 아내를 배려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되어서 친척집에 가서 외숙모나 또는 고모나 백숙모 만났을 때 절대로 겁탈하거나 이상한 더러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처제도 마찬가지고 제수씨나 21절에 형수의 아내나 이런 사람의 하체를 범하지 않는 것이 아버지로서 바른 취지다, 라고 하는 그 아버지는 하나님이 만든 아버지가 아니고 본인이 본인을 가치 있는 존재로 계속해서 지속하기 위해서 스스로 외부에서 자기에게 지워진 위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위치로 인하여 자기가 괜찮은 존재, 아버지로서 남한테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 누구 말대로 한 점 부끄러움 없다고 나는 아버지로서 또는 남편으로서 또는 어떤 교회 목사로서 누구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장례식에서 일가친척 중 여자들을 만날 때 아무 생각 없는데 레위기 20장을 주님께서 들이대면 이게 잠자는 마성을 깨운다니까요.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씀을 몰랐을 땐 거짓말할 줄도 몰라요. 그런데 누가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씀이 떨어지게 되면 잠자던 마성에 의해서 거짓말 해볼까가 나온다니까요.

이 세상은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나의 순수함을 훼손하는 쪽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독자적인 나의 의로움을 용납하지 않아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금지가 오게 되면 잠자던 나의 악마성이 깨어난다니까요. 하지 말라 하면 더 하고 싶다니까요. 하라 하면 안 하고 싶고. 가만히 점잖게 사는 나를 들쑤셔놔요. 누가? 말씀이. 누가? 하나님이. 이게 바로 복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대할 때 저 사람은 사랑하게 되면 지도 감동받아 사랑하겠지, 하잖아요. 세상에 그런 여자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여자는 자기를 남자의 종속으로 보는 게 아니고 절대자로 봐요. 나, 이것 아는데 애먹었어요. 여자는 스스로 자기를 신으로 간주합니다. 신인데 왜 남자한테 복종하는가? 지금 억지로 참는 거예요. 때를 기다리면서. 아이 낳고 보자, 딸 시집보내고 보자. 억지로 참는 거예요. 남자들은 그걸 몰라요. 여자가 착하다고요? ㅎㅎ 개가 웃을 일입니다. 여자는 헌신적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가 신인 것을 남자가 못 알아보는 이유가, 여자가 눈물 흘리는 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남자보다 단수가 높아요. 남자처럼 참질 않습니다. 남자는 세 번 울지요. 태어날 때 울고 나라 잃을 때 울고 부모 잃을 때 울지만. 그것도 옛말이고.

남자나 여자나 선악과 따먹고 스스로 자기를 소중하게 여깁니다. 어떤 식으로? 절대적으로 소중하게 여겨요. 그 소중함이 어디까지 가느냐? 절대로 나한테 대외적으로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정도 나는 완벽하게 의로운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데 하나님께서 여기다 말씀을 줘버리죠. 말씀을 주면 여기서 잠자던 반발성, 악마성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 19절 봅시다. 내가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대번에 이렇게 나와요. 내가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 정도 내가 막가는 인간으로 아십니까, 하나님이여? 그럼 하나님이 뭐라 하십니까? 그러니까 너는 너를 모르지. 이모, 고모, 조카, 삼촌, 그것 다 떼어내 봐요. 떼어내면 나는 신이라는 것만 남아요. 남자란 신과 여 자란 신만 남았어요. 그 신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한 행동은 절대로 수치스럽지 않아야 내가 하나님다운 거예요. 신다운 거예요.

그런데 인간 속에 남자나 여자나 마성 나오지요, 욕구, 욕정 나오지요. 그들이 이모인지 고모인지 그런 건 문제 삼지 않습니다. 수치에요. 그 수치스러운 것을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따먹은 악마의 본성이 그대로 작용해서 여자가 부끄럽다는 것을 자기 힘으로 정복함으로써, 하체입니다. 하체를 내가 정복함으로써 너는 영원히 나한테 코 꿰인 내 것이야.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내 것으로 정당하게 소지하는 게 돼요. 왜? 나는 소중하니까. 나한테 피해보는 너는 소중하지 않아요. 내가 소중하니까 나한테 강간당해도 끽소리하지 말고 가만있어.

그동안 남자들이 힘이 세고 남자들이 인류를 대표하고 남자들의 모든 권력을 다 갖고 있잖아요. 아까 창세기 4장 보셨지요. 라멕이 그런 소리할 때 아내 둘이 왜 들어야 돼요? 라멕은 하나잖아요. 여자는 둘이잖아요. 지가 뭔데 둘을 가집니까? 이게 뭐냐 하면, 여자는 남자가 원하는 데로 다 들어줘야 될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에게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사랑한다고 해요. 그게 사랑입니까? 소유지요. 인간이 이미 신이 된 입장에선 사랑이란 없어요. 그냥 항복하고 내 것이 되라는 뜻이에요. 끽소리하지 말고 나의 노예가 돼야 된다. 노예가 딴 것 있겠어요.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되는 거예요.

남자는 이미 그걸 성공적으로 했어요. 그런데 성공적으로 했다는 그게 문제가 돼요. 왜냐하면 잠자는 신을 건드렸기 때문에. 여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신입니다. 남자가 여자의 하체를 폭력으로 드러내는 것은 곧 신의 하체를 드러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자는 영과 관련돼있어요. 여자의 근원이 죽음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여자 몸 자체에 하나님의 지시가 연결돼있어요. 여자를 함부로 남자 입장만 생각해서 다루는 것은 곧 하나님이 설치한 부비트랩, 지뢰를 건드린 게 돼요. 동시에 지뢰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걸 건드린 남자는 악마의 괴물로서 노출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노출돼야 돼요. 노출되지 않으면 인간은 영원히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릅니다.

남자가 누군지 모르는데 연약한 여자가 등장함으로서 힘을 가진 남자가 그 여자를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억울하고 상처받느냐 하면, 여자 쪽에서 억울하고 상처받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하나님과 영적 세계에 연관돼있다고 했지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겁니다. 그런데 조건이 뭐냐? 남자 없이 남자를 배제하는 겁니다. 남자 없이 하나님을 임신하게 돼있어요. 뱀을 이기는 것은 남자가 아닙니다. 뱀을 이기는 것은 여자에요. 여자의 자손이 뱀을 이겨요.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IP:119.♡.174.132) 18-09-11 10:30 
20180907b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하체
(강의:이근호 목사)


어떤 인간도 하나님과 연애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최종 확정된 신이 자기기 때문에 자기가 이미 완벽한 신인데 또 뭘 더 얻겠다고 신에게 연연할 필요 없지요. 그러면 다른 신들은 자기 정복의 대상이에요. 내가 원할 때 다 줘야 되는 그럼 의무가 있는 그런 신들이에요. 마치 남자가 여자를 다루듯이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약한 여자 쪽에 하나님의 흔적과 지시를 배정해버리죠.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설 때 여자의 인격을 소유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남자 자체가 이미 신이기 때문에 인류의 신을 여자가 아니고 남자가 대표하기 때문에 가정에서 내 인격이 대표가 되기 때문에 여자 같은 인격을 필요치 않아요. 너는 하체만 제공할 뿐이에요. 그리고 이 가정의 법도 남자가 정하면 법이에요. 여자 법 따로 필요 없어요. 가정에 태양 둘되면 가정 꼴 되질 않아요. 남자는 하늘이거든요. 남자가 다 해요. 그리고 이 가정의 희망과 소망은 시키는 대로 따라오면 돼요. 여자가 어디서 암탉이 울면, 여자 목소리가 담을 넘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것처럼 여자가 무슨 자기 희망과 자기 보람을 왜 느낍니까? 내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까.

그렇다면 남자의 수치 됨을 스스로 가릴 수 있는 그걸 뭐냐 하면, 모든 걸 자기 소유화시켜서 자충, 스스로 만족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합니다. 바게쓰에 물새면 안 되잖아요. 가정만큼은 빈틈없이 완벽하게 그 자체로 천국을 이루려고 시도하죠. 그렇게 자기 아내를 소유했다는 증거가 뭐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선언이에요. 이건 일종의 선언이죠. 제가 아까 남자와 여자가 대화가 안 된다고 했지요. 대화가 안 되니까 남자의 독백이에요. 남자, 여자의 대화가 동일하지 않아요. 그걸 비-동일성이라 하는데 서로 빗나가고 있어요. 빗나가고 있으니까 그걸 조정하기 위해서는 힘으로 강압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여자를 여인으로 보지 않고 여자의 머리, 여자의 사고방식, 교양, 전부 다 남편에 의해서 삭제되고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남자의 욕정을 자극하는 여자의 하체만 있으면 여자는 충분하다고 보는 겁니다. 여자의 하체라는 것이 여자로서 남자한테 제공할 수 있는 마지막 최후의 선물이거든요. 그 선물부분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 버리면 그 선물부분이 영적 세계와 단절돼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가 돼요. 단절돼있으면서 그 단절 때문에 영적 세계와 연결되게 돼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여자 쪽에서 감히 남자가 범접할 수 없고 손댈 수 없는 요소를 심어줬다는 것은, 육과 영이 단절돼있는데 단절된 면을 영적으로 뚫어서 여자 몸에 새겼다고 보면 돼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에요. 남자야, 여자가 네 것으로 보이느냐? 그런데 왜 이것을 남자한테 안 하고 여자한테 하느냐? 그 당시 모든 인류 대표는 남성의 가정의 대표고 인간의 대표는 남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남자가 범죄 해서 나는 신이라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걸 견제하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남자의 직업이 군인이라서 월남전에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훌륭한 남자 같지요. 훌륭한 인간입니까, 훌륭한 남자입니까? 훌륭한 남자가 아니고 훌륭한 인간이죠. 그런데 훌륭한 인간이 가정에서도 훌륭한 남자가 될 수 있겠어요? 훌륭한 인간이라고 해서 훌륭한 남자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나라를 구해도 훌륭한 남자가 되는 게 아니에요. 훌륭한 남자라는 것은 여자를 대하면서 내가 정복의 대상으로 안 보는 거예요. 여자를 볼 때 그냥 보지 말고 영적인 요소가 거기에 삽입된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 집에 찾아온 천사로 보면 돼요. 우리 집에 찾아온 하늘 쪽에서 파견한 어떤 존재물로 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존재물을 그냥 집안에 결혼할 때 맹세처럼 손에 물도 안 묻히도록 모셔두게 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아내를 당신은 천사 같은 존재기 때문에 내가 당신 원하는 대로 다해줄게. 나보다 당신이 더 소중해. 진정 당신을 사랑해. 이렇게 모셔두게 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그 여자 쪽에서 가만있는 게 아니고 잔소리를 해대게 됩니다. 그러면 남자가 꾹꾹 눌렀던 마성이 등장해요. 친척끼리 모이고 왔다 갔다 하면 피곤하잖아요. 손님 보내고 난 뒤에 당신 수고했어. 하는데 아내가 하는 말이, “작은 고모 보니 예쁘지? 당신이 작은 고모 보는 눈빛이 이상하던데?” 이게 날 어떻게 봐. 나는 너만 사랑하지 다른 여잔 사랑한 적이 없어, 라고 사랑이란 말을 해요.

이 사랑이란 말이 왜 성립이 안 되는지 지금부터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이 문장들의 차이점을 보세요. ①“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②“나는 당신을 씻어드리겠습니다.” ③“나는 당신을 먹여드리겠습니다.” ④“나는 당신을 잠재워주겠습니다.” ⑤“나는 당신을 치료해드리겠습니다.” ①~⑤번이 전부 다 같은 말로 보이지요. 하지만 ①번 빼놓고 ②~⑤ 같은 거예요.

왜? “나는 당신을 씻어드리겠습니다.” 씻어주면 되니까. 밥 먹여주면 되니까. 병든 아내를 위해서 숟가락으로 먹여줄 수 있어요. “나는 당신을 잠재워주겠습니다.” 아내가 잠이 안 온다하면 동화책 백설공주 읽어주고 토담토담 노래 틀어주고. 잠재울 때는 십자가마을 강의 틀어주면 그냥 자요. 딴 거 필요 없어요. 성경말씀 읽어주면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들어요. 그리고 치료해드리고 공부시키고 유학 보내고 할 수 있는데 이건 뭐냐 하면, 육체가 다른 육체한테 하는 거예요.

육체가 다른 육체한테 뭐든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씻어주고 아무리 먹여주고 아무리 잠재워줘도 인간은 사랑은 안 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하는 행동은 행동한 자기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 쪽에 잘해도 되돌아오게 돼있어요. 여자를 신으로 인정 안 해준다니까요. 신은 독자적이에요. 신은 나만이 신이 돼야 신다운 거예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동등한 신으로 대우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여자 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당신을 먹여드리겠습니다, 하는데 “당신이 내가 몸 아프다고 먹여주면서 당신의 첫사랑을 생각하고 있지?” 그때 남자가 하는 말이 한 자가 있어요. 헐. 당신 우울증이야. 갱년기 현상이라 하지요. “당신 내 말에 뭐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이지?” 다시 남자가 헐~ 찔리기는 뭘 찔려. “거 봐. 당신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지잖아. 당신 목소리 높아지는 것 보니까 뭐 찔리는 것 있지?” 남자는, 참자, 참아야 돼. 사랑한다 했으니까 이렇게 당신을 대우했으니까 참아야 된다. 그러면 여자가, “저 억지로 참는 것 봐라. 참는 꼬라지 봐라.” 그럼 남자가 참다못해, 그럼 어쩌라고? “거 봐. 내 맘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평소에 40년 동안 한 번도 내 마음을 몰랐어.” 그러면 가락지라도 사줄까? “가락지로 때우려고?” 당신 원하는 것 다해줄 테니까 이야기해봐. 원하는 게 뭔데? “거 봐. 내 원하는 것 아직도 모르고 있잖아.” 참자, 참아. “저 봐. 억지로 참는 것 봐.”

치료를 해주니까 “여보, 걱정하지 마. 치료했어. 당신 오래 살아야지.” 여자가 하는 말이, “그래 내 오래 사는 게 당신 싫지, 그지? 빨리 죽으면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 싶지, 그지? 내가 콱 죽었으면 좋겠지, 그지?” “당신 왜 그래. 당신 안 그랬잖아.” “이게 내 본심이야, 어쩔래.”

자, 제가 방금 예상된 대화를 했는데 대화중에서 누가 나쁩니까? 둘 다 금지에 갇혀있다는 걸 모르고 있어요. 금지에 갇혔다는 말은, 금지에 갇혔기 때문에 그들은 신도 아니면서 신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둘 다. 신이 둘이 만났어요. 결론은 시작부터 끝까지 주도권 싸움을 멈춘 적이 없어요. 남자의 잘못은 신도 아니면 누굴 사랑한다고 시도한다는 점이에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절대로 나는 소중한 자기가 되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자기가 될 수 없어요. 그런데 남자들은 자기가 보기에 선한 일을 함으로서 자기가 전보다 선하다고 그래서 신에게 가까이 간다고 자꾸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의 잘못은 나는 신이기 때문에 당신은 당연하게 나한테 해줘야 된다는 말을 솔직하게 이야기 안 한 게 문제에요. 남자가 여자를 씻어주고 먹여줄 때 여자는 절대로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극히 당연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신되기 위해서 결혼한 거예요. 여자는. 하녀 되려고 결혼한 게 아니라니까. 내가 되고 싶은 신, 하나님 되고 싶어 한 거예요. 내가 왜 절대자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왜 돈 버는 남자가 나한테 껌뻑 죽고 나한테 돈을 갖다 주고 아양을 떨 정도로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결혼한 겁니다.

여자들 결혼할 때 보세요. 몸빼 입고 결혼한 사람 봤습니까? 최고의 옷을 입잖아요. 옷은 최곤데 얼굴은 영 아닌데 그래도 줄이고 아닌 것을 화장발로 가리고. 합동결혼식하면 누가 자기 아내인 줄 몰라요. 같은 미장원에서 같이 화장해서 구분이 안 된다고요. 남자들 보기에 정말 어리석게 보여요. 나중에 신혼여행가면 다 물로 씻어내야 되거든요. 잠깐의 공주가 자기 본 얼굴이 아니란 말이요. 씻어내야 돼요.

하루 스물네 시간 중에 맨얼굴 시간이 길어요, 화장해서 보여주는 시간이 길어요? 맨얼굴이 길잖아요. 그러면 남자한테 맨얼굴을 적용시켜야지. 그런데 맨얼굴은 본인이 신 되는데 미흡해요. 그래서 여자가 못 생긴 이유는 게으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부지런을 떨어서 화장을 떡칠해야 예쁘다는 겁니다. 이것은 역할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것도 인간은 자기 자신의 금지라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하체만 노리는데 여자는 남자 인격보다 더 센 인격, 남자의 품위보다 더 높은 품위, 남자의 지식보다 더 높은 지식, 남자의 무엇보다 더 해서 남자로 하여금 너보다 더 완벽한 인간인 것을 설득시켜서 남자가 자진해서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식으로 여자는 살아가요. 남자보다 더 겸손하고, 남자보다 더 헌신적이고, 남자보다 더 희생적이고, 자식에 대해서 더 낮추고 해서 인격적으로 어떤 면에서도 내가 너보다 천사답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남자와 더불어 살고 있어요.

남자와 이혼하게 되면 그걸 증명해 줄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면 여자는 외로워서 우울증 걸려요. 자기를 높여줄 하인이 없어요. 그래서 나이 60~70 돼서 십년 전에 남편 죽고 혼자 남았다는 여자들이 굉장히 힘들어해요. 정말 치매 걸립니다. 그렇게 싸우다가 눈만 뜨면 우리 영감 어디 갔노, 우리 영감 어디 갔노. 맨날 영감 찾고 있으니. 돼지라고 악담을 하다 막상 돼지고 난 뒤에는 영감 한다니까. 자식도 싫어요. 자식 오는 것도 싫고 그저 나를 여자로 봐주는 것.

처음에는 여자지요. 나중에는 여자가 여인이 되는 거예요. <고히비토요(戀人よ)> 그런 노래가 있어요. 일본가수가 부른 거예요. <연인이여> 하는데 하도 유명해서 한국가수가 나훈아부터 해서 부른 가수가 한둘이 아닙니다. 여자에서 어느 날 여인이 돼요. 여자였을 때는 남자의 여자가 되지만 여인일 때는 남자를 하인으로 부리는 존재가 여인입니다. 여인이고 싶어요, 여자고 싶어요? 영원한 여인이고 싶어요. 이게 뭐냐? 최고의 미를 갖고 있는 신의 모습입니다. 어느 인간도 인간에게는 사랑이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고의 신을 잡아당기는 것은 수치, 다른 말로 하면, 부끄러움 때문에. 부끄러움을 유지한다는 것, 여자의 하체를 가리고 남자의 하체를 가리고 부끄러움을 유지한다는 것은 너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이 언제 드러날까 벌벌 떠는 거예요.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신혼 초에 부끄러움이 노출되었으면 그때는 부끄러움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을 대가를 남자한테 요구하게 됩니다. 네가 내 하체를 봤으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니 월급부터 다 가져와라. 집도 내 이름으로 등기해놓고. 니가 내 하체를 봤으니까 부끄러움을 이길 만한 요소, 나는 당신의 여자로서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부끄러움 드러내놓고 다른 여자한테 간다? 그러면 자기의 부끄러움을 소비해서 그 남자로 자기의 신 됨을 증명하고자 했는데 남자가 가버리면 여자가 자기의 하체를 드러낸 투자는 부도났잖아요. 어디서 보상받습니까? 이 말은 모든 남자는 육에서부터 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예요. 남자는 부끄러움을 노출시킴으로서 그 여자를 자기 소유화시키는 거예요. 니 볼 것 다 봤다. 무조건 내게 오지 않으면, 수치를 공개한 자에게 바치지 아니하면 네 존재는 어디 가도 환영받지 못한다. 여자는 내 수치를 드러낸 만큼 충분하고 합당한 보상을 평생 동안 해다오.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려고 해요. 심지어 하나님마저. 인간은 모든 걸 소유함으로써 자기 충족을 채우려고 해요.

자, 이런 이야기를 이런 본문으로 결혼식 주례해야 돼요. 제목은 하체. 결혼이 자랑거리인 줄 알고. 잔소릴 들어야 돼요. 결혼이 덫이란 사실을 어른들한테 배워야 되는데 그동안 모든 주례가 애들 붕 띄워주기 바빠. 아이고, 잘했다, 가정 행복해라. 작살을 낼 주례를 해야 되는데 붕붕 띄우는 주례를 하니 애들도 주례가 거기서 거기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예 주례 없잖아요. 안 하잖아요. 시시한 것. 지밖에 모르는데. 그렇게 둘이 한 몸 되면 그게 사랑인 줄 알고.

인간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정도 돼야 인간을 상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내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바칠 정도로 사랑하게 될 경우에만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 있어요. 하나님 사랑, 목숨 바치지 않으면 사랑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여자 쪽에 하나님이 금지를 준 것은 바로 죽음이 너의 바탕이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죽음 대 죽음의 만남입니다. 죽음 대 죽음의 결속입니다. 죽을 여자와 죽을 남자가 결혼식한 거예요. 우리 따님도 그걸 알아야 돼요. 하나님은 인간이 왜 죽어야 되는가를 율법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모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사랑은 어디 있느냐? 어떤 상태에서 사랑이 오는지 아까 했습니다만 다시 할게요. 무죄 상태에서만 사랑이 와요. 육의 세계를 벗어난 영의 세계에 왔을 때 비로소 사랑이 되는 겁니다. 육의 세계는 뭐냐? 율법이 작용해요. 율법은 인간을 죽어 마땅하다고 보는 겁니다. 살 가치도 없다는 거예요. 이것을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로 인하여 영으로 넘어가게 되면, 그래서 여기는 뭐냐? 어떤 것을 해도 무죄하기에 죄가 없기에 의롭기에 본격적으로 뭘 할 수 있어요?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사랑하는 거예요.

부부는 아내 보기를 교회 보듯 하고 남편 보기를 예수님처럼 보라는 말은, 주 안에서 둘 다 죽은 존재로 간주했을 때 죄로 말미암아 당연히 율법으로 죽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금 당신 앞에 남편으로 살고 당신 앞에 아내로 오늘도 살고 있다, 라고 할 때 그 사이에 성립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생명이에요. 용서고 용납이에요. 둘 다 예수님의 성령을 받았다면 무죄 상태기 때문에 둘 다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 질책하거나 나무랄 수 있는 권한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둘 다 죽었기 때문에 누가 죽어요? 나라는 게 죽었잖아요. 나가 죽으면 나의 것도 죽지요. 나의 것도 죽으면 소중한 나의 것도 죽지요. 나의 것이 죽으면 소중한 나의 의로움도 죽지요. 그러면 죄인밖에 안 되는데 주의 사랑으로 살고 있잖아요. 나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내 것이 없지요. 내 것이 없기 때문에 지킬 게 없는 거예요.

부부가 서로 사는데 아내가 바빠서 설거지 시켜놨더니 남편이 설거지했는데 아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게 이유가 있어요. 남편이 설거지를 소홀히 한 게 아닙니다. 여자가 설거지한지 40년 됐다. 그 세월이 그냥 지나간 게 아니고 설거지 달인이고 노하우가 있어요. 설거지는 이 정도는 돼야 하는 기준점이 있거든요. 그런데 남편이 하는 설거지는 퇴직해서 한 거기 때문에 이제 시작하지 4~5년밖에 안 돼요. 남자로선 최선을 다한 거예요. 남자의 기준으로 봐서.

그런데 여자는 밖에 나가선 우리 남편 설거지? 콧방귀 뀌면서 설거지하는 꼬라지 보니 답답해서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지. 내 몸 아파서 설거지 좀 시켰더니 참 내. 맡긴 내가 잘못이다. 이러면 남편은, 그러니까 나한테 맡기지 말든지. 나한테 맡길 때는 당신 기준에 열심히 했으면 나는 오케이 하겠다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맡겨야지. 내가 니 아니고 니가 내 아닌데 어떻게 니가 원하는 기준을 나한테 적용시키느냐 말이죠.

그런데 둘 다 무죄상태, 예수님 십자가로 죄 없는 상태, 이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상태 같으면 그냥 죽은 자를 일방적으로 살리는 입장이거든요. 사랑으로. 우린 죄인이니까. 살리는 입장에서 설거지 해달라는 요구를 남편이 들어줘서 덜거덕거리든지 어떻게 하든지 그것도 고맙고, 그리고 설거지 한 것에 대해서 지 딴에 자랑질해도 자랑질할 때 입안에서 혀가 놀지요. 그러니 아직 안 죽었다는 것도 고맙고, 설거지 좀 했다고 피자 한 판 시켜먹자고 내 귀에 아직도 쟁쟁하게 파장이 울리는 것도 고맙고. 왜냐하면 살아 있으니까 그 목소릴 듣잖아요. 좀 했다고 어린 양 부리면서 주물러 달라 하고. 물론 주물러주면 안 돼요. 버릇되니까. 그래도 고마운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설거지를 이 정도 돼야 한다는 것은, 아직도 내 것이 있다는 거예요. 내 기준을 고집하겠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남편한테 맡겼으면 나는 이미 죽은 자에요. 설거지는 이 정도 돼야 되는 그것도 죽은 거예요. 지금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정답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이 있을 때는 사랑만 해주면 돼요. 사랑은 용서거든요. 내가 용서 받은 것이 용서하는 거예요. 상대방이 어떤 짓거리해도 용서해주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죽고 용서만 남았기 때문에. 나는 죽고 용서받은 자로서만 남았기에 푹 쑤시면 용서가 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론상.

이해가 안 되실 것 같아서 마태복음 3장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 세례 받는 대목입니다. 16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고 돼있지요.

지금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베다니라는 곳에 있어요. 베다니가 두 군데 있는 예루살렘 근처도 있고 요단강 옆에 요르단 지역도 베다니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베다니에 가보면 예수님 세례 받은 곳이 요르단과 이스라엘 두 군데로 돼있어요. 요단강 폭이 한 20미터 정도고 시설 잘 돼있는 곳은 이스라엘 쪽 세례터, 시설 시원찮은 쪽은 요르단. 여기에 물이 흐른단 말이죠. 여기서 옷을 빌려줘요. 빌려주는데 22,000원 해요. 이스라엘 쪽에선 집어넣어주고 요르단 쪽은 지가 알아서 들어가면 되고. 나무계단으로 들어가게 돼있는데 여기에 우리가 세례 받고 있다고 봅시다. 목사가 잠시 집어넣었다가 빼는데 집어넣을 때 한 1초 정도.

그런데 예를 들어서 갑자기 하늘에서 비둘기가 내려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이 사람들이 들었다고 칩시다. 이들이 자기 세례 받은 걸 자랑할까요, 아니면 관심사가 자기한테 있을까요, 예수님한테 있을까요? 예수님한테 있지요. 그 순간 자기는 날아가 버리죠. 잊어버리죠.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둘을 용납하지 않아요. 하나 앞에서 나는 제로가 되는 게 사랑입니다. 신앙이란 것은 예수님한테 꽂히는 거예요. 아내가 나한테 잘해줬으면 남편이 나한테 잘해줬으면 이건 신앙이 아니에요. 예수님 덕분에 우리 가정 잘 되자. 우리 가정에 꽂힌 것이지 예수님한테 꽂힌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예수님한테 있지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에요.

이번 우리 어머니 장례식 하면서 최초로(마지막일지 모르지만) 일가친척 모아놓고 제가 설교했어요. 성당 다니는 사람도 많고 교회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제가 거기서 강조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관심사는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한테 있는 거예요. 성당이든 교회든 어디 다니든 관계없이 주님께서는 예수님한테만 꽂혀있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꽂혀있으면 내 인생이 어떻게 꼬이고 비틀어지고 뭐가 안 되고 하나님이 내 뜻대로 안 되고, 이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이 그 사랑이 꽂힐 때 그게 바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이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주 앞에 섬기는 것은 뭐냐? 그냥 예수 믿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그게 몸과 마음과 정성이 다 포함이 돼있습니다. 성령이 와서, 예수님만 사랑하라, 그게 성령이 오신 목적이에요.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기 때문에.

우리가 남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나라는 게 있거든요. 오늘 중요하니까 다시 해볼게요. 나라는 게 있는데 그냥 가만있는 게 아닙니다. 내 것이 생성돼요. 내 것에 어떤 게 있는가? 일단 부동산 있지요. 내 자식 있지요, 내 학력 있지요, 내 명예 있지요, 내 교회 있지요, 내 현찰 있지요, 내 건강 있지요, 그리고 내 권력, 집안에 아는 사람 누가 있다, 내 친구 몇 명이다, 내 통장, 잘 나간다. 전부 다 나를 위주로 모인다고. 나를 위해서. 교회 몇 년 다녔다는 것, 권사 장로 목사다 이런 것, 전부 내 것과 관련돼있어요.

사람들은 이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나의 수치를 자꾸 감추는 거예요. 그런데 감추는 그 수치가 육의 범위를 못 벗어나요. 육의 범위 안에서 마지막은 뭐냐 하면, 모든 남성은 욕정을 갖고 있어요. 그게 이모든 조카든 아들이든 딸이든 관계없어요. 그저 여자의 하체에 모든 욕정이 쏠리는 그것을 인간을 꾹꾹 누르고 있는 거예요. 사회 윤리적 태도 때문에, 자기 정당성 때문에. 개망나니 되면 안 되잖아요. 그걸 감추려는 거예요. 감춘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 무섭다는 거예요. 들키면 안 된다는 거예요. 들키면 누가 조진다? 괜찮은 내가 조지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사는 방식이 이렇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선 뭐냐? 율법에 의해서 이미 너는 죽어 있다는 거예요. 내가 죽어 있기 때문에 내가 죽었고 죽은 자에서 내 것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어요. 내 남편, 내 자식, 내 아내, 내 가진 것, 찬란한 내 역사, 내 한 것, 책 많이 낸 것, 이것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순수하게 죽은 자에요. 죽은 자를 주님의 무죄, 그러니까 주님의 죄 사함으로, 사랑으로 우리를 살려낸 겁니다. 살려낸 자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사는 근원은 니 행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함이 사랑하는 아들이 너를 사랑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네 안에 있으니 니는 어떤 경우라도 니가 수치를 느끼지 마라. 복음은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 수치를 느낀다는 말은, 움찔하는 거고, 움찔한다는 것은 다시 내가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게로 되돌아가는 모습이에요. 되돌아가게 되면 사람이 경직하게 돼요. 자유가 없게 돼요.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어디서 여자 머리 풀고 나오면 귀신이라고 도망갑니다.

귀신이 나타났을 때 왜 사람이 무서워합니까? 죽은 자는 귀신을 안 무서워하지요. 그러니까 무서워한다는 것은 살고 싶다는 것을 계속 자기 안에 자기 본성으로 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고 싶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마귀를 보내요. 욥으로 하여금 시험케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중에 욥이 재를 뒤집어씁니다. 재라는 것은 제물을 태울 때 죽음이 나를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성도는 날마다 수님의 죽으심으로 뒤집어써야 돼요. 생명이 피거든요. 예수님의 피가 뒤집어씌워야 돼요.

뒤집어쓰게 되면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수치를 느낄 필요가 없어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기 때문에 율법에 시달릴 이유가 없어요. 뭘 해도 무죄 상태가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그건 자유가 아니고 그건 방탕이고 방종이 아닙니까, 하는데 방종과 방탕을 두려워한다는 자체가 아직도 사랑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죽은 자는 죽은 자가 인도하는 게 아니고 살아있는 주님이 죽은 자를 마음대로 부리십니다. 어떤 일을 해도 주께서 뜻이 있어서 행한 일이에요. 그건 방종이 아니고 타락도 아니에요. 그냥 자유에요. 그러니까 성도는 이미 죽은 자가 되지요.

주일 낮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살고자하는 사람에게 말 섞지 말라고 했지요. 살고자하는 것은 지 가치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니보다 나 먼저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이것은 율법에 의해서 지가 죽은 자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탐하지 말라는 게 뭐냐 하면, 이미 이모든 고모든 딸이든 관계없이 내가 남자라면 육의 여자의 모습을 나의 욕정의 대상으로 볼 뿐이라는 것을 내 속에, 나도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게 있다는 거예요. 그거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품게 해서 그런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께서 율법에 의해서 우리는 죽은 자에요.

지금 우리가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씀이 고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고 했으면 이미 우리는 그런 짓할 인간이고 그것 때문에 죽은 자가 맞는 이야기에요. 죽을 때까지 보자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 안 하나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율법이 그런 평가를 한다는 자체가 니가 니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오죽했으면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 자라 했겠습니까. 그 이야기 듣고 나는 마음속으로 간음 안 해야지, 라는 말은 아까 간음을 안 했단 것은 그 아내에게 밥 먹여주고 치료해주고 씻어주고 진짜 모든 걸 다 해주더라도 그건 사랑이다, 아니다? 사랑이 아니죠.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알아버렸는데 그게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눈물이 난다. 왜 웁니까? 우는 이유가 뭐예요? 들인 밑천이 아깝다는 거예요. 붙든다고 공들인 밑천이 아까운 거예요.

I’m missing you. 이건 사랑한다는 상투적이고 식상한 발언보다 더 절실한 게 뭐냐 하면,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리워한다는 것은, 나는 별 볼일 없어요. 그 사람이 있으매 비로소 나는 살 이유가 있는 거예요. 그게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달려갈 테니. 그런데 그 여자는 드라마 보고 있는데? 모든 사랑은 독백입니다. 제목을 독백으로 할지 하체로 할지 모르겠는데.

모든 인간의 사랑은 혼자 하는 사랑이에요. 여러분, 드라마나 대중가요 가사를 보세요. 전부 다 독백이에요. 애원도 그렇지요.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이승철이 불렀던, 슬퍼도 행복하다는 그거. 그리고 임재범이 불렀던 <전쟁 같은 사랑>도 그렇고. 모든 대중가요 전부 다 본인이 독백하는 거예요. 노래방에 울면서 부르는 거예요. 여자와 헤어지고 난 뒤에.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와 헤어졌다고 산장에 가서 죽겠다는 <산장의 여인>부터 해서 <여자의 일생>도 그렇고. 나를 여자가 아니라 여인으로. 하나의 여자로 상대해주는 것, 나를 여인으로 대우해 줄 남자가 필요한 것.

하나님의 뜻이 뭔지 우리가 주님의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지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아들 복음도 모르지요. 인간은 이렇게 금지된 테두리, 죽음의 테두리 안에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이유도 없이 나는 무조건 신이어야 해,, 라는 그러한 고집으로 계속 헛되이 살다가 살고 싶어도 결국은 죽잖아요. 죽기 전에는 너 놔두고는 못 간다. 널 보낼 순 없다. 이러다가 죽고 나면 또 외롭다고 돌아다니고 하지요. 인간은 본인을 몰라요. 왜?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속의 괴물, 악마와 상대합니다.

끝으로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 사랑은 없고 이 세상엔 여자도 없어요. 그냥 여자의 모습을 띤 흙일뿐입니다. 남자도 없고.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삭막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역할이 여자 역할과 남자 역할 할뿐이에요. 여자에게 월경이 있는 것은 여자 역할 하라는 것이고, 남자에게 여자를 정복하는 욕정이 넘치는 것은 테스토스테론 호르몬이 넘치는 것은 남자 역할 하나는 거예요. 결국 호르몬이 신이네^^ 나이 육십 넘어 호르몬 다 떨어지게 되면 남자도 여자 같고 여자도 남자 같고 분간도 안 되다가 나중에 둘 다 동일하게 흙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이 내뱉는 것은 악마가 내뱉는 것에서 신이기 같은 신을 용납 못해요. 자기보다 낮은 신이기를 원하고. 서로가 다 그래요. 비-동질성입니다. 하지만 이 비-동질성이 마지막 때가 되면 다 같이 전부 다 흙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동질성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나중에 하늘나라에서는 그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갑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 결혼 많이 하라 이 말입니다. 실컷 결혼 여러 번 해보고. 그것도 주의 뜻대로 돼야 하지만.

주의 뜻입니다. 우리 뜻이 아니에요. 주께서 죽은 자를 다루시기 때문에 어떤 여자는 남자가 다섯 명이래요. 그것도 벌써 끝났고 여섯 번째 사귄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디 갑니까? 천국 가요. 다른 여자들이 봤으면 되게 부러워할 거예요. 세상에 남자를 다섯 명이나 갈아치우면서도 가기는 어디 간다? 천국 간다. 부러워하지 마세요. 주께서 그 역할 맡긴 거예요.

물론 남자 다섯 거치면서 지 딴에 마음고생도 많이 했을 거예요. 하지만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자기가 책임질 필요도 없고 양심 가책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죄 짓는 거고 죽음이 죽음으로 발산된 것뿐이니 오직 믿는 구석은 “심봤다!”하는 것처럼 나는 메시아 만났다는 겁니다. 남자 다섯 명 사귀어놓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저 내가 한 과거는 부끄러움도 없고 수치는 없는 거예요. 왜?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모든 수치를 덮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복음을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지금 살아 계셔서 자신의 신부인 것을 우리가 깨닫게 하옵소서. 살아가면서 각가지 일을 당하지만 예수님 사랑만이 사랑인 것을 더욱 더 확인하는 그런 시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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