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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5 23:52:50 조회 : 238         
토해냄 181005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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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5) 18-10-09 09:07 
20181005a 울산강의-레위기 18장 : 토해냄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18장 24절.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을 인하여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거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가 성경을 믿어야 될지 아니면 무시해야 될지 당황스럽게 되는 대목들의 나옵니다. 그걸 제가 적어보게 되면, 땅이 토한다는 말이 나오지요. 땅은 그냥 흙으로 만들어졌잖아요. 흙이 무슨 혀가 있습니까, 입이 있습니까? 왜 땅이 토해요? 참 희한한 이야기가 적혀있지요.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면서 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것은 이 성경이 비현실적인 내용의 책이 아닌가? 우리는 현실을 살고 있는 데 성경은 비현실적인 책일 때 우리가 어느 것은 무시하고 어느 것을 받아들여야할지 상당히 모호해져요. 그래서 현대과학에 맞는 것, 윤리도덕에 맞는 것은 받아들이고 과학적 인식에 안 맞는 것은 내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걸 제가 설교에서 했는데 반은 믿고 받은 안 믿는 것은 아예 안 믿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보고 믿고 안 믿고 정할 수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범인을 잡는 형사가 범인이다. 드라마를 약간 이야기하게 되면 내가 지어낸 드라마지만, 형사가 경찰에 입문해서 잘하고 있었는데 임무 중에 머리를 다쳤어요. 그래서 기억상실증에 약간 걸렸어요. 한 일주일짜리 기억상실증에 걸렸다칩시다. 그러다 일주일 뒤에 사건을 맡았는데 도대체 범인을 모르겠어요. 그래서 옛날에 하던 촉으로 범인을 잡았는데 모든 증거가 누굴 가리키느냐? 나를 가리킬 때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나를 범인으로 가리킬 때 과연 자기를 범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잘 안 되지요. 범인 잡는 형사가 그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라면 어떻게 범인을 체포할 수 있겠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범인을 아담으로 봅시다. 창세기 3장의 범인이 아담이죠. 이 세상이 힘들고 사는 게 피곤하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나이가 들면 몸이 점점 더 말을 안 들어요. 쪼그라든다고 할까요, 몸이 회복할 수 없어요. 한 방향으로 쳐지고 있습니다. 갈수록. 백날 해독주사 맞아봐야 소용없어요. 범인이 아담이라면 어떻게 아담이 자기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아예 단정 짓습니다. 죄란 혼자 사는 거예요. 처음에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있었어요. 그 말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창세기 2장에서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먹지 말라는 명령 앞에 서있습니다. 잔소리지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어떤 잔소리도 인정하지 않아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예요. 본인이 형사라는 거예요. 옳고 그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어떻게 해야 천국 가고 어떻게 해야 지옥 가는지 그 정도는 내가 상식으로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고 있는 기준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본인이 만들었지요. 누구와 의논했어요? 의논한 적 없어요. 아무와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날 때부터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아담이 범죄 하고 난 뒤에는 모든 인간은 그 범인의 자식들이에요. 범인의 반복들입니다. 혼자 사는 것은 타고난 거예요.

여러분 다 손자, 손녀 키울 연세 됐지요. 아이들 보세요. 날 때부터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본인의 식성이라든지 밥 때 되면 알아서 찾아옵니다. 밥 달라고 땡깡을 부리죠, 울고. 젖 달라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젖 달라합니까? 무슨 주의 영광이 있어요. 부모한테 효도하기 위해서 젖 달라합니까? 그런 것 없어요.

인간 제대로 봅시다. 인간은 자기 사는 것, 그게 시작이요 그게 끝입니다. 날 때부터 혼자 살아요. 누가 만들어졌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그것 관심 없습니다. 관심 있다할지라도 그 밑바닥에는 내가 혼자 사는 데 필요한 정보, 그런 지식 같으면 내가 알아서 찾을게. 하지만 나 혼자 살겠다는 강한 의지는 양보할 생각 전혀 없다, 나는 포기할 생각 없다.

그것은 결혼하고 난 뒤에 부부생활하면서 확실하게 점점 느끼죠. 절대로 상대보다 궁극적으로 양보한 적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서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양보하더라도 내 행복이 돌아올 조건 하에 양보를 해주는 척하지요. 간 내놓고 쓸개 빼놓는 철딱서니 없는 일은 신혼 초에나 있지, 무슨. 누굴 등신인 줄 아나. 절대로 양보한 적 없습니다. 하여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자기를 누구한테 양보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없으면 모든 것이 없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요.

만약에 태풍 오잖아요. 내일 울산 한복판을 태풍이 지나가는 데 주차를 잘해놨는지 걱정이 된다. 그건 내일까지 살아있는 사람한테는 걱정거리가 되지만 오늘 열두시 반쯤 돌아가시기로 돼있는 요양병원 노인네한테는 태풍만 아니라 지진까지 진도 8.5로 와서 내가 죽는 마당에 다 죽여 버려라. 이런 심술을 부릴 수 있어요. 내가 죽는 마당에 내일 태풍 오고 노벨상 누가 타고, 아무 관심 없어요. 류현진 가을야구 1승하고, 내가 죽는 마당인데.

따라서 모든 인간은 아래지 나보다 위에 서서 나를 지시하는 자는 내가 용납하지 않겠다. 이게 범인이에요. 그런데 모든 인간은 그렇고 그런 인간이어서 서로 동의하는 데 땅은 동의가 안 돼요. 땅은 하나님 손에 있는 자연물이기 때문에 땅은 누구 지실 받느냐 하면, 땅은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 앞에 서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은 자기가 내려다보고 사는 것을 본성으로 태어났지만 땅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대거든요. 땅은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이게 창세기 4장에 나오지요. 몰래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이 나옵니다. 최초의 범죄는 살인사건이었습니다. 최초의 범죄가 살인사건이란 말은, 최후의 범죄도 살인사건이란 말이죠. 최초의 범죄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거거든요. 아벨을 죽이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고 동생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동생을 죽입니다. 이 세상의 속성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걸 용납하지 않는 세계에요.

마지막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살인으로 시작해서 모든 것이 살인으로 마감되는 세상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궁극적인 살인이 아니에요. 진정한 살인은 사람이 하나님을 죽이는 그것을 구현한다고 할까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땅에 사람이 번식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왜 사람들은 성경을 비현실적인 책, 전혀 현실과 상관없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아무 도움 안 되는 그런 책으로 보는 이유가, 나부터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철두철미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사는 것이 진리고, 내가 사는 것이 복음이고, 내가 영원토록 잘 되는 이것이 옳다. 그래야 돼. 너 말고 나, 나. 내가 우선 살고 잘 돼야 된다는 것은 본성적으로 철썩 같이 진리로 확정했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한테 그다지 필요한 책이 아닙니다. 현실과 괴리가 있고 현실에 보탬이 안 되는 책이라고 우리는 슬그머니 자꾸 치워버리죠. 남는 건 뭐냐? 나만 달랑 남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땅이 토해낸다고 했거든요. 그게 형이 동생을 죽였단 말이죠. 아무도 없었어요. 그 벌판에 두 사람이 나갔다가 한 사람이 죽었으니까 집에 한 명만 돌아왔어요. 보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보는 사람은 없었는데 보는 쪽은 있었어요. 그게 땅이에요. 피를 낸 모양이죠. 형이 짱돌로 쳤는지 피가 쏟아졌어요. 그래서 그 피를 머금은 땅이 누구한테 고소하느냐 하면, 하늘을 향하여 고소합니다. 이것을 인간들은 감히 상상도 못하죠. 땅과 하늘이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샌드위치가 뭐예요? 두 조각의 빵 사이에 내용물이 들어있지요. 햄버거도 마찬가지고.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들어있는 햄버거 속 같은 거예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는 겁니다. 바다 끝에 갈지라도 땅 끝에 갈지라도 인간은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요 근래 제가 자주 쓰는 멘트인데, 세상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갇혀있다. 성경에서는 세상이 갇혀있다고 해요. 하늘과 땅 사이에 갇혀있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이 흘러간다는 것을 어디서 이야기하느냐 하면, 유행가 가사에 다 들어있어요. 청춘을 돌려다오, 하잖아요. 현철이가, 나훈아가. 청춘을 돌려달라는 거예요. 아주 애통해해요. 또 이애란이 불렀던 <백세인생> 이 노래들의 특징이 뭐예요? 그리고 <봄날은 간다> 아는 것 다 나온다. 전부 다 수평적이에요. 단선적이에요. 과거에서 우리 알지 못하는 미래로 그냥 철로 위에 기차 달리듯이 인생이란 그렇게 흘러간다는 겁니다.

여러분, 종지기에 잣이 흘러가는 거예요, 갇혀있는 거예요? 그냥 동동 뜨는 거죠. 폐쇄된 것, 갇혀있는 거예요. 세상은 악마의 힘에 갇혀있는 겁니다. 신약에 보면 그걸 저주에 갇혀있다, 율법에 갇혀있다, 죄에 갇혀있다, 죽음에 갇혀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동그란 구라고 보면 돼요. 들여다보면 다 보이는. 그게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이었어요. 동그란 구에요. 죽으면 어디 가느냐? 땅 밑에 음부란 곳에 가요. 쓰레기장이에요.

땅의 기능은 사는 용도만 아닙니다. 파먹는 기능이 있어요. 인간은 죽는다고 딴 데 가는 게 아니고 땅에서 와서 그냥 땅으로 가는 거예요. 그걸 창세기 3장에서 흙에서 와서 흙으로 환원되는 거예요. 그렇게 흘러가는 게 아니고 갇혀있으니까 갇혀있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인간이란 흙이 뾰루지 돋아나는 것처럼 사람 되었다가, 그러니까 미술시간에 진흙으로 사람 모양 만들 듯이 지겹다고 뭉개버리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잠시 나온 것을 물방울, 안개 같다고 하지요. 잠시 등장했다가 없어지는, 날아간 겁니다.

요 그래 끝난 <미스터 션사인>란 드라마가 있는데 구한말 시대에 의병들의 활동을 그린 드라마에요. 의병들이 희생적으로 대한제국을 살리기 위해서 활동했고, 거기에 칠적, 오적 나오지요. 이완용부터 해서 나라 팔아먹은 인간들 있잖아요. 이게 세월이 흘러간다고 보면 참 분통 터지지요. 그때 고종이 잘만 했으면 일본한테 압제 안 당했을 거라고 후회하지만 세상을 흘러가는 게 아니라 갇혀있는 것으로 보게 되면, 일제한테 지배당하든 지배 안 당하든 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별 의미 없어요.

지금은 일본 통치에서 해방됐으니까 그때 고생, 고생했다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완용이 나쁘고 의병들은 훌륭하다고 보이지만 20~30년 후, 50년 후에 2018년도 울산에 사는 여러분 보세요. 얼마나 여러분들의 바보 같이 보이겠습니까. 그 땅 팔고 이것 샀으면 떼 부자 됐을 텐데. 사람들이 그런 머리가 안 돌아간 모양이라. 그러나 50년 전에 미리 알아서 부자 되는 것보다도 지금 자기 인생 만족하게 되면 50년 후에 부자 되는 것, 그런 것 귀찮아요.

지금 만족하면 지금 감사하게 되면 횡재한 겁니다. 과거 너무 애달아하지 마시고, 미래 너무 부러워하지 마시고 잠간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이 자체에 우리가 의미를 알아야 돼요. 우리가 왜 뾰루지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지, 누가 그렇게 했는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돼야 됐는지, 이 땅에 왜 태어나야 됐는지 그 이유를 알면 돼요. 그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아까 땅이 추궁한다고 했지요. 땅에 일어난 모든 범죄는 땅이 알고 하늘이 알아요. 땅이 인간이 다룰 수 없는 어떤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걸 알기 위해서는 땅의 속성을 알아야 돼요. 땅은 누구 말을 듣느냐 하면, 이건 어려운 게 아니고 간단한 거예요. 땅은 하나님과 내통돼있어요. 그래서 땅에서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무늬, 먹구름이 지나가면 땅에 그림자 생기잖아요. 하늘의 뜻을 반영해주는 무늬라든지 색깔이라든지 형태 같은 걸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게 땅의 현상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에덴동산에 살다가 근본 된 토지로 내려왔거든요. 토지 공개념은 대구강의에서 강의했지요. 땅은 하늘에서 어떻게 내정됐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으로, 약속으로. 약속이 실현되는 무대입니다. 이 무대에 하나님께서 언약 또는 약속, 어렵습니까? 그럼 계약이 실현되는 무대에 그때마다 주인공을 보냈습니다. 그 주인공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으로 돼있단 말이죠.

 이 땅에 하나님의 본뜻을 복사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림을 그리겠다, 하나님의 뜻을 복제하겠다. 땅은 빈 땅일 수가 없어. 땅에 하나님의 계획된 프로젝트가 실행에 옮기는 거예요. 그러면 두 가지가 나와요. 하나는 복이 나오고, 다른 하나는 저주가 나옵니다. 결국 나중에 세상이 망하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 것을 이 땅을 통해서 인간 역사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어떻게 이 땅에 실현되느냐 하면, 바로 애굽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애굽에서 토하듯이, 토하는 것 알지요. 누굴 토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토해냅니다. 마치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는데 물고기가 견디지 못하고 니느웨 앞 바다에서 토해내서 도착해보니까 그게 바로 울산 장승포라. 이건 완전히 운임도 안 받고 운송수단 됐어요.

그처럼 애굽 나라가 이스라엘을 성숙하게 만들고 이스라엘을 만들어내는 공장 같은 역할을 한 겁니다. 하나님을 도전하고 배격하고 잡신을 믿고 미신을 믿는 애굽 나라가 다 쓸데없는 게 아니에요. 지옥 같은 세상이 쓸데없는 게 아닙니다. 세상 자체가 공장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고 톡하고 토해내게 돼있어요. 그것이 우리가 아는 이야기로 분리잖아요. 이걸 오늘 성경에서는 거룩이라 합니다.

이제 머리 좋은 사람은 아실 거예요. 죄냐, 죄 아니냐를 생각해봅시다. 제가 뭐가 죄인지 자꾸 거론하는 이유가,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개념과 단어를 지가 범인이면서도 지가 형사노릇하면서 나쁜 놈 잡겠다고 설치는 데, 그 인간이 나쁜 놈이거든요. 내 안에 들어있는 벌레, 내 안에 들어있는 나쁜 생각, 악한 생각, 내가 천국 가는데 방해되는 지옥적인 요소를 핀셋으로 족집게처럼 뽑아내겠다고 설치는 내가 바로 지옥 가는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는 거예요.

뭘 뽑아냈습니까? 이놈은 나쁜 놈이라고 뽑아냈는데 이건 나쁜 생각, 이건 옳은 생각 그 작업하는 당사자가 나쁜 인간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선과 악을 본인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과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버린 자식이에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토해내면 애굽은 자동적으로 뭐가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입장에서 애굽은 버려진 대상이 되겠지요. 이게 바로 지옥 아닙니까.

그냥 애굽 하나만 있으면 뭐가 지옥인지 뭐가 천국인지 누가 지옥 가는지 누가 천국 갈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애굽을 다루고 때가 되매 숙성시켜서 그 안에서 애굽과 같이 살면서 전혀 애굽 같지 않은 비 애굽적인 그러한 균열 또는 차이, 갈등, 대립요소와 같은 결이 나오도록 해놓고 결국은 애굽이 못 견뎌서 토해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출애굽이에요. 출애굽을 두 자로 하면 구원이죠.

그럼 제가 여러분에게 묻기를, 구원이 내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주의 일이죠. 그럼 나는 뭐냐 하면, 구원받은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어떤 대장간에서 호미를 만든다고 칩시다. 대장간이 호미 겁니까, 아니면 대장장이 겁니까? 대장장이 것이죠. 대장간은 호미 것이 아니죠, 그렇지요. 분명하지요. 그럼 교회 누구 겁니까? 교회를 하나님 것이라 하지 말고 우리 것은 아니다. 말을 제대로 합시다. 인간의 것은 아니죠. 하나님 것이라 하면, 하나님 것이라 여기는 우리 겁니다, 라고 꼼수를 쓰기 때문에 아예 제거합시다.

이건 우리 것이 아니에요. 교회됨은 우리의 의사도 아니고 우리의 뜻도 아니고 우리의 소망도 아니고 우리의 기대도 아니에요. 우리는 범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나 홀로, 최후로 영광 받는 것을 목적으로 움직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그런 게 있어요. 심지어 하나님도 우리의 경쟁자로 여기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아주 못 돼먹었어요.

주님의 구원을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우리자신이 방해해요. 왜 구원하는 데 주님 혼자 했습니까? 그것 때문에 삐지는 거예요. 참 천국 가게 해도 불만이라. 나한테 묻지도 않고 내 장기 발휘하지도 않고 그냥 천국 넣어줬다고 그게 그렇게 불만이에요. 새순교회도 그렇지요. 새순교회 불만도 그거지요. 왜 나 같은 인간을 천국 넣어줍니까? 좀 나한테 시키지. 헌금 많이 해라, 봉사해라, 이런 것 좀 시키지.

이것저것도 없이 태풍 올 것 다 오고 몸 아픈 것 다 아프고 나중에 죽어보니 천국이라. 죽어서 천국 가면 안 돼요. 살아있을 때 천국인 걸 알아야 되니까. 이럴 때 우리는 잘난 나한테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내 미래와 운명을 확정지었습니까, 하는 거예요. 그럴 때 너희 구원을 인함이라, 하면 그건 정답이 아니에요. 우리가 아까 배웠으니까 이렇게 해야 돼요. 세상이 지옥인 걸 알려주고자 함이라. 분리니까. 갈라섬이란 말이죠.

왜 세상이 버림받아야 되는가, 왜 세상은 지옥으로 가야 되는가를 우리의 생산을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겁니다. 온 천하에. 그들은 얼마나 열심인 줄 몰라요. 자신의 가치를 자기가, 자기 자신을 너무나 귀하게 여기고 자기 자신을 빛내고 자신의 가치를 연마하고 어떤 누구한테 내세워도 자랑할 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평소에 모든 행위와 모든 생각에 자제하고 조심하고 철저하고 완벽에 완벽을 기하고 있습니까. 범인이 범인 잡는 식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이 이미 합격통보가 왔어요. 그래서 내가 행한 것과 천국에 합격한 것과 연결고리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에 매우 당황스러워요. 사람이 기뻐해도 이유를 알아야 기뻐하죠. 선거철 됐는데 여러분 집에 갑자기 큰 케이크가 왔다면 기쁩니까? 이거 선거법 위반해서 50배로 물어주는 게 아닌지 걱정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달라고 할 때까지 내가 기대했다, 내가 희망했다는 요소가 담긴 채 내 것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굉장히 기분 나빠하는 존재입니다. 내가 홈쇼핑에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택배 와보세요. 이건 남의 물건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죠.

심지어 선물도 내가 원하는 물건 아니면 기분 나빠요. 그런 단편소설 있잖아요. 남편 시계사기 위해서 여자가 자기 머리 다 잘랐는데 남편은 아내 생일선물로 참한 빗을 사보세요. 이건 타이밍도 안 맞고. 오랜만에 착한 일 해보려는데 영 안 맞아요. 꼭 우리가 그런 식입니다. 은혜 받고 주 앞에 뭘 하려했는데 그게 주님한테는 전혀 무의미하거든요. 나는 구원받아서 주님한테 찬양도 해드리고 싶고 봉사도 하고 싶은데 주님이 그것이 구원하고 관계없데요. 자존심 팍 상하지요. 그걸 극복해야 된단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구원받은 자가 생각이 완전한 자가 아니란 뜻이에요. 완전하기 때문에 구원시켜주는 게 아닙니다. 어설프고 등신 같아서 구원하는 거예요. 매사에 어설프고 등신 같아요. 그런데도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구원의 근거와 구원의 이유는 내가 너희에게 찾지 않겠다. 앞으로 네가 어떻게 잘 하는지 두고 볼 거야, 그걸 언급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도리어 구원을 시켜주고 네가 생각하는 세상과 나의 차이, 네가 생각하는 천국 가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의 차이는 완전히 잊어버려라. 저 사람은 지옥 가야 되고 나는 천국 가야 된다면 그 이유를 이제부터 내가 그때그때마다 새롭게 알려줄게.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이유입니다. 구원문제는 이미 해결됐어요. 구원문제 때문에 한 게 아니에요. 구원받은 근거가 네가 예상 못한 데서 왔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우릴 구원하신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런 입장에 있어요.

오늘 본문을 보시게 되면, 26절에, “그러므로 너희 곧 너희의 동족이나 혹시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이런 가증한 일의 하나도 행하지 말라”고 돼있지요. 여기에 ‘법도’ 나오지요. 이건 어렵지 않아요. 왜 어렵지 않느냐 하면, 법도라는 것이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규칙입니까? 자기들이 만든 거예요? 아니죠. 외재성이죠. 외부에서 제공된 거잖아요.

그러면 본받지 말라는 그것은 외부에서 제공된 법도에 준해서 본받지 말라고 된 거예요. 맞지요. 그 다음은 어렵습니다. 외부에서 제공된 법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할까요? 이해 못하지요. 이해 못하니까 이방민족, 즉 지옥 갈 사람들을 정죄할 때 자기가 옛날에 애굽에 살던 그 기준 있잖아요. 나는 잘 났고, 저 사람은 못 났다. 그 기준을 동원해서 저 사람은 지옥 간다고 퍼부어대는 겁니다. 심판하는 거예요.

형사가 범인인데 형사는 자기가 범인 아닐 거라고 장담하고 남을 정죄하는 겁니다. 네가 내 돈을 떼어먹었으니까 지옥 가도 마땅하다, 이런 식으로. 내 기도하는 것을 욕했기 때문에 너는 지옥 가라. 우리 교회 욕했기 때문에 지옥 가도 마땅하다. 이 기준은 본인을 뭐로 봅니까? 자기는 멀쩡하다고 보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구원받은 것은 누가 개입해서 그렇습니까? 언약이 개입했지요. 여기 떡 한 판이 있다고 칩시다. 칼은 계약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입니다. 언약으로 판을 둘로 쪼갰습니다. 한쪽은 천국 가기로 확정하고 한쪽은 지옥 가기로 확정했습니다. 그러면 둘로 쪼개진 양쪽 떡에 질적인 차이가 있어요, 없어요? 질적인 차이 없지요. 그런데 구원받은 떡이 지옥 간 떡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맛없는 떡이라 했단 말이죠. 그게 성립될 수가 없지요. 오히려 의아해해야 된다니까요.

나는 저것과 똑같은 별난 것도 없는데 왜 나는 천국 가고 저긴 지옥 갑니까? 둘 다 마찬가지로 본인 잘남의 기준을 본인이 정해요. 선악적으로. 본인이 알고 기준이란, 항상 자기는 좋은 편이고 자기는 훌륭하고 자기는 괜찮은 존재고 자기는 신사고 자기는 괜찮은 숙녀고. 뭔가 나는 탓할 게 없음을 기준으로 깔아요.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범인 된 형사가 범인 찾아다니는 것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어진 칼 있잖아요. 하나님의 언약, 법도, 율법이에요. 법도를 저쪽을 치는 것이 아니고 시범조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쪽에 적용시켜버립니다. 그 적용시키는 방법이 이방민족과의 전쟁입니다. 이방민족과 전쟁할 때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예를 들게요. 골리앗이 등장하는 전쟁 있지요. 골리앗이 뭐라고 큰소리치느냐 하면, 일대일로 붙자는 거예요. 그래서 이긴 쪽이 다 먹기. 신장이 3미터가 넘어요. 이스라엘이 벌벌 떨었어요.

이스라엘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적이 3미터니까 하나님이 우릴 도와주셔서 이스라엘 쪽은 4미터 등장해야 돼요. 4미터라야 3미터를 이긴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투입된 사람이 어른이었습니까? 소년 다윗이잖아요. 시편 8편에서 다윗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젖먹이와 어린아이 입으로 주께서 승리케 하셨다. 이건 인간들이 평소에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는지를 하나님의 칼을 통해서 다 보여줍니다.

지옥 가는 인간이나 너나 똑같은 사고방식, 뭐냐? 힘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사고방식, 권력과 명예와 자존심과 돈이 내 가치를 지켜줄 것이라는 사고방식, 인생 행복은 내 가치가 높아지는 데서 온다는 사고방식, 남한테 기죽지 않고 내세울 만한 것 있으면 그게 사는 재미라는 사고방식. 그건 바로 애굽 나라에 보편적인 거예요. 하나 예외 없이 전부 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고방식,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걸 그냥 내버려두면 우린 어느 쪽이냐 하면, 하나님의 법도에 의하면, 법도의 완성이 예수님이니까, 그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지옥 가야 합당한 자가 된다는 사실들을 아는 자가 이미 구원받은 자에요. 너무 착해서 토해내는 게 아니에요. 토해내는 방식, 애굽 나라에서 이스라엘 나라로 이르는 방식이 여러분 잘 알다시피 칼이 아닙니다. 말이 아니에요. 군사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피였습니다. 무슨 피였지요? 어린양의 피죠. 전혀 예상 못했지요. 똑똑하고 지혜로운 자가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피로써 구원받는다면 우리 인간은 모조리 피 앞에서 개 무시당함이 합당하다. 인간취급도 안 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네가 착해서 천당 올 수 없다는 거예요. 나눠짐이에요. 거룩이 훌륭함이 아닙니다. 착함이 아니에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눠진 거예요.

1학년 1반 같은 반 짝꿍이었다. 남녀공학에서 나란히 앉았는데 운 좋게도 정말 동화책에 나오는 상상의 그 소녀가 무슨 행운인지 1년 동안 내 짝이었다. 소원이 뭐겠어요? 2학년 진학할 때 같은 반에서 내 짝꿍 됐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담임선생의 칼날, 법도가 둘을 잘라냈죠. 그럴 때 기쁩니까, 섭섭합니까? 섭섭한 정도가 아닙니다. 공부도 안 될 거예요. 그리워서. 옆에 있을 때는 그리운 줄 모르는 데 떨어지면 더 그리워요. 사랑의 감정은 이별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거예요. 같이 붙어있으면 좋은 줄 몰라요.

김춘수란 시인이 자기 아내와 50년 살다가 아내가 먼저 죽었거든요. 김춘수가 지은 이런 시가 있어요. 아내가 죽은 걸 못 받아들이는 거예요. 고등어 굽던 당신 어디 갔나. 이젠 지가 구워야 돼. 빨래하던 당신 어디 갔어. 지금 이 시간에 고등어 구워야 되고 지금 이 시간에 빨래해야 되는데 당신은 어디 갔냐 이 말이죠. 너무 그리워하다가 1년인가 2년 후에 죽었어요. 아내는 아내고 나는 나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오래 살다보니까 아내가 나의 일부였습니다. 아내가 없으니까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결국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죽었거든요.

우리가 아무리 십자가, 예수님, 복음 하지만 여러분들이 복음 알고 살아가면서 세상이 주는 그 기쁨을 무 자르듯이 자를 수 있겠어요? 돈이 준 희열을 우리가 마다할 수 있습니까? 돈하면 대번 넋이 나가고 혼이 나갈 거예요. 돈에 환장합니다. 우리가 그랬던 자고 그게 습속이에요. 우리 몸에 이게 인습돼있어요. 몸의 모든 장치가 누가 잘한다고 칭찬하면 우린 껌뻑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3만원밖에 안 하는 황금이불을 34만원 주고 산 사람 있어요. 실제로 있어요. 노인들 속이는 사람들 있잖아요. 방송에 나왔습니다. 그걸 보고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로버트 할리 장모가. 이불을 빨지 않아. 황금이불 너무 비싼 거라서. 그 황금이불을 팔 때 얼마나 많은 말을 했겠습니까? 이 이불을 쓰면 온 몸에 건강에 좋고 자식 잘 되고.

건강, 자식, 돈, 명예, 이게 다 어디서 온 인습입니까? 애굽이죠. 세상에서 온 거잖아요. 이걸 어떻게 독소로 여기고 빼낼 수 있겠어요. 같이 살지요. 이것 안 빼앗기려고. 빼앗기면 자살까지 할 거야, 아마. 이것 안 놓치려고. 돈, 건강, 자식, 연세 많은 사람 이 세 가지 빼놓고 뭐가 있습니까? 없지요. 평생토록 노력하고 고생해서 다 누구 주려고 합니까? 대한민국 주려고 합니까? 자식 주려고 하는 거예요. 자식 주려고 그렇게 고생, 고생하면서도 보람을 느끼는 거예요.

너흰 없어. 내가 맛있는 것 사먹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해놓고 자식 못 줘서 환장했습니다. 마음속에는. 그 자식, 남의 자식입니까? 내 자식 아닙니까. 벌써 나잖아요. 보세요. 나를 못 떠났잖아요. 돈 벌면 누구 잘 돼? 나 못 떠났잖아요. 남의 건강이 아니라 내 건강이잖아요. 나 못 떠났잖아요. 때려죽여도 나를 못 떠나요. 나는 나를 벗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일 힘든 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속에서 나와 나를 분리시키는 이 작업이 되지 않으면 이스라엘 구원 없습니다. 이게 제일 힘든 작업이에요. 그래서 뭐가 필요하냐? 법도가 들어가는 거예요. 법도가 들어가고 쪼가리 내는 나에게서 나를 떼놓는 그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킵니다. 이방나라와 전쟁 붙여서 아까 골리앗, 다윗 이야기했지요. 이 이스라엘은 네 나라 아니다. 요즘 말로 하면, “어이, 구원받은 너. 니 인생, 니 몸 니 꺼 아니고 주님 꺼다.” 그렇게 주께서는 상황을 몰아세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5) 18-10-09 09:07 
20181005b 울산강의-레위기 18장 : 토해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30절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좇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더럽히지 말라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 새롭게 집어넣어주신 말씀의 입장에서 더럽다, 안 더럽다는 게 결정되는 거예요. 본인이 자기 잘난 맛에 질적으로 떨어진 것, 도덕적으로 모자란 것으로 저런 인간 죽어버리지 뭐하려 사나, 하는 식으로 차등화 시켜서 자기를 우월하게 보이는 식의 윤리도덕은 여기서 용서가 안 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그렇다면 우리가 새로운 기준을 안다는 것은 곧 나를 어느 수준까지 어떤 인간이 될 때 우리는 제대로 주님이 보시는 기준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까, 라는 것이 궁금하겠지요. 도대체 뭘 할 때 이건 올바른 선택이야, 아니야, 라고 기존에 내가 알던 것 말고 주님이 새롭게 집어넣어준 기준에 의해서 세상을 볼 때 나는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그 기준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 자신부터 이렇게 돼야 돼요. 마루타. 일제 시대 때 생체 실험했잖아요. 일본이 중국 사람을 치료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포로들을 생체 실험한 이유는 거기서 얻어진 의학정보라든지 원리를 자기 나라, 군대 살리기 위해서 활용하지요. 그럼 마루타는 실험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주님의 실험대상이 되는 거예요. 권선징악, 선악과 원리에 의해서 착한 사람은 안 다치고, 착한 사람은 오래 살고, 착한 사람은 행복하다. 이게 애굽에 있는 모든 사람 누구나 동의하는 겁니다.

<신과 함께>란 영화 있잖아요. 1편, 2편 나왔잖아요. 제가 <신과 함께> 1편을 보고 일부러 요약을 하고 평을 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아니고 동양인이 갖고 있는 자생적으로 나오는 선악의 구조는 어떠하며 그 기준에 의해서 세상을 봤을 때 그 윤리가 얼마나 우리 인간과 친근하고 친화적인가를 알리기 위해서 그 영화평을 했어요. 두 번째는 평할 가치도 없어서 안 했어요. 거기 보면 권선징악이에요. 착하게 살면 그만한 보상받고 악하게 살면 염라대왕이 가만두지 않고 조진다는 겁니다. 그 생각 자체가 하나님이 만든 인간이 아니고 악마의 심성이 거기에 다 삽입돼있는 인간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왜 이스라엘이 따로 분리돼야 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애굽은 선악 기준, 권선징악의 나라에요. 권선징악을 좀 더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이 이게 옳다고 세상은 착하게 살아야 하고 나쁘게 살면 벌 받는다고 할 때 질문을 그렇게 해야 돼요. 무엇이 착한 겁니까? 착한 것이 무엇이며 악한 것이 무엇입니까? 답변이 이렇게 나옵니다. 내게 이득이 되면 착하고, 내게 손해가 되면 악으로 봐요. 나한테 손해를 끼치면 무조건 악마에요. 마귀새끼가 되는 거예요.

내 돈 떼먹는다든지 자식을 해코지한다든지 나를 욕한다든지 하면 무조건 악마에요. 왜냐하면 권선징악 자체가 내 중심이거든요. 나의 가치 중심 아닙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몰가치 하더라도 그렇게 이야기하는 나는, 나의 발언만큼은 티가 없고 흠이 없고 완벽하다는 걸 기정사실로 출발하는 거예요. 나는 잘났다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이건 못 고칩니다. 고질병이거든요. 못 고치는 것을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담의 독약이에요.

어떤 마을 우물에 독을 풀었다. 그 우물물을 마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중독되지요. 독약 먹고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지요. 아담이 그 일 한 거예요. 온 세상에 마귀가 독을 푼 거예요. 그 독의 자식들이고, 독의 손자들이고. 내 자식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그건 본인이 할 소리가 아니죠. 왜? 아빠의 독을 자식이 물려받았으니까. 같은 독을 먹고 달리 생각하면 안 돼요. 똑같은 독배를 마신 거예요.

죽어가니까 죽는 게 무서운 겁니다. 왜 나는 나쁜 짓도 안 했는데 죽느냐? 그래서 그 문제가 풀리지 않는 거예요. 나쁜 놈들 그렇게 많은데 착한 사람이 왜 죽는지. 그저 불구덩이에서 건지려하는 소방관은 죽고 술 먹고 소방관을 폭행하는 그 인간은 오래 살고. 왜 세상은 불공평한지, 그러는데 권선징악이 불공평한 거예요. 이게 잘못된 거예요. 처음이 잘못되니까 모든 사고방식이 다 잘못된 거예요. 이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갇혀있기 때문에. 칼로 주의 법도, 계약으로 자르지 않는 한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요.

모든 사람이 독약을 마셨는데 자기 힘으로 독을 뽑아낼 수 없어요. 물에 빠진 자신을 자기가 신발 끈 잡아 올리겠다는 게 말이 돼요? 안 되지요. 그래서 뭘 보내느냐 하면, 속죄 약, 죄 사함의 약, 한 자로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아담이 되셔서 피를 뿌립니다. 독이 있는 곳에 해독제를 뿌리는 거예요.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구원받기로 정해진 사람에게만 해독제를 뿌려버렸으니까 예수님의 용서에 관해서 서로서로 이야기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어떤 사람이 택한 백성이 아닙니까? 또 이게 궁금할 거예요. 우리가 궁금한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그런 질문했을 때 우리는 어떤 답변이 준비돼있는지 그것과 관련돼있는 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물 위에 작대기로 경계를 그어보세요. 경계가 그어질까요? 안 되지요. 잠시 티 좀 나다가 물이니까 같이 섞여버리죠. 표시 안 나지요. 물 위에 경계를 정할 수 없듯이 사람이 자기가 신자란 입장에서 저 사람은 택한 백성, 이 사람 택한 백성이라고 우리가 정할 수 없어요. 마치 물 위를 작대기로 경계를 못 정하듯이 부엌칼 들고 한다고 갈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합니다. 네 자로 쓸게요. 기다려 봐. 기다려 본다는 말은 좀 깊이 있는 이야기인데요. 부부를 예를 들면, 남편과 아내는 서로 아는 사이죠. 그러면 그 사람이 나한테 왔습니까, 내가 그 사람한테 갔습니까? 만나고 보면 아는 사이인데 먼저 내가 저 사람을 알고자 했습니까, 저 사람이 나를 알고자 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결혼하고 난 뒤에 각가지 억측과 이론과 주장들이 등장합니다.

나는 그 사람 우습게 봤는데 광산 김 씨가 백옥자 씨 좋다고 오는 것처럼 나이도 적은 나를 꼬시려했다. 그러면 남자가 하는 말이, “그래 나는 너보다 나이 많다. 하지만 너도 뭔가 끌리는 게 있으니까 아무 소리 안 했지.” 이런 식으로 소극적 반응을 결정적 의지로 치부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자 쪽에서, “나도 그때 등신 같이 뭐 알았나. 아버지가 됐다, 하니까 했지.” 이렇게 자기 책임 아닌 양하는데, 그 이야기를 잘 들어보세요.

세상에 모든 인간은 자기 홀로입니다. 인간은 홀로거든요. 혼자 사는 게 죄라 했지요.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혼자 살아요. 혼자 사는데 어떤 사람이 아는 사이가 되고 아는 관계가 된다는 것은 이게 전부 다 우연입니다. 어떤 마을에 처녀가 하나고 총각이 열 명이다. 그러면 그 처녀는 열 명 중 하나와 결혼할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배우자감을 반경 40킬로 이내에서 정한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처녀가 열 명을 물리치고 두 개의 산을 넘어서 100킬로 떨어진 마을에서 배우자를 구할 확률은 제로에요. 주변에서 구혼하는 것이 그 동네 이야기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아는 사람이 만 명일지라도 여전히 혼자다. 부부가 자식을 열 명 낳아도 형과 동생 사이에 남남이에요. 부모와 자식 사이도 남남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끝까지 자기는 혼자에요. 아는 사람은 많은데 그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습니다. 자기 필요에 의해서 아는 사이를 사용할 뿐이지 그 누구에게도 깊은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비록 몸을 주고 정신적으로 뭘 빼앗긴다 해도 인간은 마음까지 남한테 줄줄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럼 부부가 왜 사느냐? 헤어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사는 거예요. 경제적으로 따지고 뭘 따져도. 이 나이에 연애하랴, 이러면서 이 나이에 팔자 고치는 것도 귀찮아. 인간은 편안한 게 최고 좋기 때문에. 편한 데로 가되 그것을 자기가 결정하는 거예요. 최후에. 남자가 꼬셔도 결정은 본인이 내리는 거예요. 북한 김정은 부하들이 백날 아부해도 그거는 김정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본인의 결정이에요. 이용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북한의 백성들도 마찬가지고. 국민이라 할 것도 없어요. 북한종교 신도들도 마찬가지로 지 알아서 하는 거예요. 인간은 지가 결정하는 겁니다.

따라서 누가 택하느냐, 누가 택하지 않느냐는 우리는 결정할 자격도 없고 할 필요도 없어요. 그러면 성경에서 교회는 뭐냐? 주께서 관계를 맺어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주께서 너희 둘 사이는 다 같이 천국 간다는 관계 맺으려면 뭘 극복해야 돼요? 나는 무슨 결정과 어떤 누구와 관계 맺더라도 우리 몸의 생리에 의하면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하지요.

내 결정할 때 뭐라 했습니까? 나의 이익이라는 것, 나한테 보탬이 된다는 조건 하에 그런 계산 하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에 나서는 겁니다. 아무리 윽박지르고 칼 들고 위협한다할지라도 내 목숨을 지키는 데 이익 된다면 협박 받고 우리는 동의하게 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내 목숨이거든요. 나 살기 위해선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요. 우리는 어떤 짓이라도 할 만반의 준비가 돼있어요. 끝까지 나만 남아요.

그런 인간을 주님이 개입하게 되면 내 결정이 아니고 주의 결정에 의해서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교회가 되는 귀한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뭐랬습니까? 기다려 봐. 아까 전쟁인데 그 관계 속에서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마루타가 돼요. 마루타란 살아 있으나 산 자가 아니고 딱딱하게 죽은 자가 돼요. 마루타는 나무토막이나 쇳조각 같아요. 아무런 감흥이나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요.

마루타라 했지만 주님은 성경에서 이미 우리는 죽은 자고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고 표현하고 있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주의 법도, 주의 언약, 주의 계약이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어도 산 자로 보지 않고 죽은 자로 보는 겁니다.

이쯤해서 우리가 성경을 찾아봐야 될 것 같아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의 용도가 뭡니까? 내 결정, 내 결심, 내 잘남, 그게 우리 성도의 용도가 아니죠.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도록 우리가 구성된 겁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에 넘기움은” □에 뭐가 들어갑니까? “죽음에 넘기움은” 우리 산 자가 마루타가 됨은, 이런 뜻이에요. 펄펄 살아있는 잘난 체하는 내가 마루타가 됨은, 주님의 실험대상이 되게 됨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이걸 마루타, 세 자로 이야기한 거예요.

죽은 인간은 지 자존심도 죽지요. 자기의 권선징악도 죽지요. 나한테 무엇이 이득이냐, 손해냐 따지는 것도 죽지요. 아니고, 너무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이것도 의미 없어요.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구원받고 난 뒤에 며칠 살았습니까? 두 달, 석 달, 일 년 살았습니까? 반나절이에요.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했으니까. 같이 사형수 동기인데 얼마 가겠어요. 아침 아홉 시에 달렸거든요. 죽은 것은 오후 세 시에요. 예수님께서. 같이 죽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네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 자기가 마루타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예수님 증거 하기 위해서 폼 잡고 있는 거예요. 마루타가. 실험대상으로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한쪽 강도는 끝까지 혼자 살아요. 예수, 당신이 나를 십자가에서 풀어주면 당신 믿어줄게. 자기한테 이익이 된단 말이죠. 그러나 강도는 마루타기 때문에 자기 이익, 손해 자체가 의미 없어요. 하나님의 법도가 자기 몸에서 발산되면 그게 끝이에요.

하나님의 법도가 살아있고 나는 죽으나 사나 관계없이 주님의 법, 주님의 약속, 주님의 복음이 내 몸에 살아있다면 그게 나의 용도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가 설쳐서 너는 택했다, 안 택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내가 누구를 관여할 권리가 없어요. 우리는 내 일하면 안 돼요. 내 일하는 나는 늘 죽어야 되고 우리 일 자체가 주의 일이 돼야 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집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옆집에서 시끄럽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조용하라고 하겠지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지금 공부에 열중 안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공부에 몰입해 있으면 떠들어도 상관없어요. 왜? 자기 일이기 때문에. 성도는 주의 일에 몰두해버리면 세상에 노벨평화상 누가 받든 류현진이 1승하든 태풍이 오든 지나가든 비가 몇 미리가 오든 그것조차 주의 일이잖아요. 북한이 핵을 60개를 만들든 성주에 사드를 배치하든 말든 중국 사람이 관광 오든 말든 그것조차도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난 마루탄데, 난 죽은 인간인데.

살아가는 것은 주의 일하기 위해서 살려주는 것이지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에요. 이 땅에서. 어떻게 차가 불법주차로 끌려갈지 알겠습니까? 사전에 알았으면 딴 데로 옮겼지요. 예상도 못했지요. 신발 가져갈지 누가 알았습니까? 알았으면 식당에서 신발 챙겼지요. 내일 일은 주께서 다 하신다는 말은 내일 일만 아니고 오늘 일도, 지금 내 일은 없고 주의 일만 있는데 우리는 옛날 습성이 있어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불신앙을 팍팍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떡을 두 조각내게 되면 똑같아요. 지옥 가는 인간이나 천당 가는 인간이나 살아가는 건 똑같아요. 그냥 상식이고 그냥 일상생활하고 세상 좋아하고 돈 좋아하고 자기 잘났다고 하면 좋아하고 사랑 받으면 감사하고 미워하면 싫어하고 똑같아요. 똑같기 때문에 나 같은 자를 주께서 주의 일에 쓰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고 고마울 일입니까.

아까 식당에 밥 먹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전화해서 목사님, 은혜 받은 걸 참을 수 없어서 전화한다고 해서 받았는데 전화내용이 이겁니다. 굉장히 간단한 이야기에요. 이 말이 스쳐갔다는 거예요.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님이여,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뒤에 밀려오는 게 뭐냐 하면, 감사. 그냥 감사가 아니고 범사에 감사.

이게 왜 귀한 고백이냐 하면, 그동안 내가 내 주인이었어요. 내가 주인되다보니까 예수님은 나한테 ‘너’가 돼버린 거예요. 내가 다룰 하나에 대상이 돼버린 거예요. 내가 믿어주면 믿어주고 내가 안 믿어주면 남남이 되는 겁니다. 그런 세월을 보냈는데 한 순간에 이게 잘못됐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게 잘못됐다는 거예요. 그게 엉터리란 겁니다. 그런 식을 하나님이 원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주인이 아닌데도 마치 주인인 것처럼 건방떨면서 주인 행세한 거예요. 그게 잘못됐다는 겁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주의 것인데 살아온 것이 주의 일인데 살아온 인생 굽이굽이를 내가 자랑할 내 인생, 내가 열심히 한 내가 수고하고 노력하고 희생하고 봉사하고 내가 참아서 있게 된 인간 승리의 장으로 오해했다는 거예요. 그게 내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잘못됐다고 해놓고 그 결과가 뭐라고 했습니까? 말할 수 없는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겁니다. 빙신 같이 그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뭐했나, 하고.

그 감사를 성경에선 범사에 감사한다는 거예요. 이젠 내가 어떤 사기를 당하든 몸이 아프든 죽어가든 관계없어요.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이라는 그 사실 하나만 건졌으니까 세상 모든 문제는 일거에 다 해결된 거예요. 모든 걱정, 근심, 두려움, 공포, 불안, 불안정 다 날아간 거예요.

성경적으로 보면 이러한 결과가 뭐냐 하면, 주님이 우리를 앞장세워서 악마와 전쟁에서 악마의 손에 있던 자기 백성을 빼내줄 때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할 때 아마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뭐가 잘못됐대, 하고 잘못된 이유를 물을 거예요. 그렇게 묻는 게 잘못됐어요. 이건 구체적으로 뭘 잘못했으며 뭘 실수했으며 그걸 묻는 게 아니에요. 다 잘못됐어요. 근원적으로 전부 다 잘못됐어요. 위치가 바뀌었으니까. 특정한 어떤 게 잘못된 게 아닙니다. 그냥 잘못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털고 나온 거죠. 내 안에 든 괴물이 벌레가 밖으로 나와 버린 거죠. 나라는 벌레가 나에게서 나가줘야 돼요. 그리고 그 빈자리에 주님이 내 주인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그게 교체, 바꿔치기가 돼야 돼요. 나는 주님이 다루시는 벌레가 되면 그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최곱니다. 나에서 나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분리되지 않으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최선을 다해서 바르게 사는 거예요. 죄 안 지으려 하고.

왜냐하면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랴. 내가 나를 간수하지 않으면 누가 건사하겠어요. 남한테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몰라, 인간들은. 지옥 간 사람들, 지옥 가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 지옥 갈 때 요란스럽게 가지 않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가요. 베어링에 치는 구리스, 기름 있잖아요. 세상에 기름이 쫙 깔려있어요. 매끌매끌해요.

이건 청춘들 20대에 그냥 가요. 술자리에 가게 되고 담배 피우는 데 가면 그냥 가요. 이래야 남자다운 것처럼 그래야 세상살이 잘하는 것처럼 그런 분위기 그 대화에 같이 휩쓸려야 같이 살 수 있는 사회적 사람이 되는 것처럼 그냥 미끄러지듯이 가요. 멈출 수 없고 브레이크도 없어요. 브레이크 잡을 손잡이도 없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지옥 가고 있는 거예요. 그게 넓은 길이에요. 많이 사람이 찾는 길이 그 길이에요. 태극기 아니면 촛불집회, 둘 중에 하나잖아요. 좌파 아니면 우파, 우파 아니면 좌파. 중간은 없어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이 살아있음을 자각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자기 잘남을 띄우기 위해서 어디에 가담하게 되고 그 사상에 뛰어드는 것이 내 소속감과 존재감을 그런 식으로 구축하려고 합니다. 너, 누구 편이고? 좌파야, 우파야? 보세요. 그것 왜 묻는데? 이런 소릴 할 줄 몰라요. 남 앞에 이런 인간이라고 내세워야 되기 때문에. 아줌마들 모여서 우리 자식 공부 잘해서 미국에 유학 보내고, 할 때 네 자식은 뭐하노, 하면 삼수한다고 나오겠어요? 부끄러워서.

왜 이 세상이 성도한테 꼭 필요한지 이제 아시겠지요. 세상과 더불어 살았던 사람이고 세상에 대해서 새롭게, 성도가 하루하루 사는 것은, 내가 모르는 새로운 차이를 매일같이 온 몸으로 느끼게 해요. 저 사람이나 나나 사고방식은 똑같은데 오늘도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저쪽과 이쪽의 차이점이 뭔지 알게 하는 겁니다. 그 차이점을 두 자로 뭐라 했습니다. 거룩입니다.

정리해봅시다. 거룩이란 내가 판단하지 않고 주님의 언약이 개입해서 판단하는 거예요. 언약은 한 자로 피지요. 어린양의 피로써 애굽과 이스라엘이 갈라졌고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의 노동력을 붙들고 안 놓으려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노예니까 노동을 해줘야 애굽의 부가가치가 올라가요. 잉여생산물이 있어서 자기들은 즐길 수 있고 전쟁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기거든요. 에너지가 생기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노예를 해방한다는 것은 자기 공장에 기계 다 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애굽 위해서 붙들려했는데 기어이 하나님께서 열 재앙을 내려서 어떻게 했습니까? 안 내놓을 수 없도록 토하듯이 내놓은 거예요.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온 겁니다. 피 바르니까 그들은 착각했어요. 피를 바름으로 왔기 때문에 피 바른 우리는 저쪽 애굽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이겠지, 라고 착각을 한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간 곳이 어디냐 하면, 약속의 땅을 바로 들어가기 않았습니다. 그들을 기다린 것은 광야였습니다. 광야에서 천국 사는 실습을 해야 했어요. 광야에서 인간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자기의 착함도 도움 안 되고 자기의 성실함도 도움이 되지 않고, 자기의 휼륭한 인식이 도움 되지 않고 광야에선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어요.

내가 갖고 있던 품성과 성격과 자질과 인품이 구원받는데 천국 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됐어요. 오히려 방해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여, 왜 우리를 죽이려 하십니까, 오히려 원망의 요소가 됐어요. 원망을 자아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나 같이 잘나고 나 같이 배우고 나 같이 인품 훌륭한데 왜 이 광야에서 굶주려 죽이려 합니까? 물도 없이 양식도 없이 고기도 없이. 그렇게 선동하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스라엘이 있는데 이스라엘 내부에 플래카드가 붙어있다면 딱 이거에요. 애굽으로 돌아가자! 강의 처음에 그런 이야기했죠. 성경이 비현실적 책이라고요. 그들에게 성경의 법도가 평소에 알고 있는 현실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돼요. 성경책 봐서 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아무 도움 안 돼요. 오히려 바쁜 시간만 빼앗을 뿐이에요. 오늘날 우리도 그런데 그들은 오죽 그렇겠습니까.

그들은 뭔가 심어야 거두는 농사, 애굽은 농경시대에요. 그냥 땅만 있으면 살았어요. 배운 게 뭐냐? 땅만 있으면 농사짓고 비 오면 산다. 그런 식으로 살던 사람에게 사막은 이건 죽으란 이야기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일부러 마루타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광야에 가니까 자신도 몰랐던 자기의 본색이 드러났어요. 그 본색이 뭡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줄곧 마음속에 뭐가 아직도 살았어요? 애굽이 좋았다. 우리가 애굽 외에는 달리 사는 방식을 알지 못한다. 제발 내 하는 식으로 사는 게 편하다. 우리는 기껏 그것밖에 모른다. 이게 우리의 본 모습으로 꽉 차있는 거예요. 바로 그것을 어린양의 피로써 구원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어린양의 피라 하니까 자기가 훌륭한 줄 알았어요. 오히려 어린양의 피가 광야로 데리고 가서 애굽 사람이 사는 모습과 그들이 사는 모습이 확연하게 이제부턴 차이 난다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바로 광야생활이에요.

레위기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광야 이후에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살 거예요. 그러면 광야에선 그렇게 힘들게 살았지만 약속의 땅에서는 농사지으면 되잖아요, 하는데 제 말은 그게 아니고 광야의 사고방식이 바뀌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 쫓겨나게 돼있어요. 약속의 땅에서 사는 사고방식은 광야에서 배워야 돼요.

광야에서 그것이 변하지 아니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들어가더라도 쫓겨나게 돼있습니다. 천국에 갔는데 거기서 쫓겨나면 말도 안 되잖아요. 주께서는 우리를 천국 보내기 위해서 천국에 부합되는 삶의 형태를 지옥 같은 세상에서 익히게 만들고 그걸 알게 만드는 작업을 하니까 주님이 얼마나 친절하신 주님입니까. 정말 친절해요.

그러면 그 차이가 뭐냐?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지옥생활과 세상 사람들은 지옥 가도 별 변화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사는 자체로 지옥에도 그대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자와 거기 나사로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부자로 살던 행세가 지옥 가도 그대로 남아있어요. 물 보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지옥의 생활을 만끽하면 돼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제가 우리교회 교인들 보고 그런 이야기하죠. 이제 예배 마쳤습니다. 세상 나가거든 귀신 들린 자들과 실컷 만나세요. 그 말은 뭐냐? 지옥 체험을 하시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들과 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그렇다면 그 차이를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주의 일로 나타내시는지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화내게 하신다. 여러분, 어떤 때 화가 나던가요? 화가 난다는 것은 사실 마태복음 5정 6장에 의하면 이건 반칙입니다. 이런 말씀이에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것을 구하는 자들은 이방인들이다. 마태복음 6장 이야기죠. 지옥 갈 이방인이라면 구하라. 그러면 천국 간 사람은 뭐냐?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분명히 그렇게 돼있어요. 제가 왜곡시켜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돼있지요. 마태복음 5장, 6장 산상설교대로 산다면 뭐가 없어져야 돼요? 화가 없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한다는 것은 애굽 사람들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내 뜻대로 내 노력에 의해서 내가 일구어나가고 천국도 내가 판단해서 내가 결정해서 내가 믿음으로 간다는 모든 걸 나에게서 나와서 내 인생의 결말을 확정짓고자 하는 자. 그런데 그것이 틀어졌다, 그것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뭐가 생깁니까? 화나게 돼있어요. 그래서 산상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화나게 하는 말씀들을 완전히 거기에 포진시켜놨어요.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에서 네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려라. 무슨 말이냐 하면, 너 지금 죽어서 천당 갈래, 지옥 갈래? 천당 가고 싶습니다. 천당 가려면 완벽해야 되니까 천국 가는데 조금이라도 지장이 되는 흠이 있으면 안 되니까 그 흠을 제거하고 들어가야 되니까 네 오른 눈이 범죄 하면 못 들어가요. 죄가 나온 오른 눈을 빼버리는 거예요. 그럼 애꾸지요. 빼고 나머지가 천국 가는 게 낫다고 했어요.

그러면 오른 눈 없습니다. 그 다음에 왼 눈으로 범죄 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여자를 보고 마음속으로 음란을 품었다. 차라리 안 봤으면 좋았는데 본 게 탈이잖아요. 한쪽 눈으로 본다고 여자를 반만 보는 게 아니거든요. 보고 마음속으로 간음했다. 그러면 나머지 그 눈도 뽑아야 돼요. 그런데 눈만 문제 있는 게 아니고 오른손도 문제거든요. 이것 자르고 저것 자르고 다 잘라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 허허 웃으면서 잘리는 사람 어디 있어요. 화가 나지요. 주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화나게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주의 말씀은 말씀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성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산상설교에 준해서 벌어지는 사건들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화를 내도 잔뜩 화나죠. 우리는 매사에 화나잖아요. 낮에는 괜찮아도 저녁에는 화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화낼 준비가 돼있어요. 우리는 지금 화 안 내도 일 터지면 화낼 거예요. 혹시 주식 좀 했습니까? 화낼 요소가 있어요. 요새 주식 팍팍 내려갑니다. 많이 내려가요. 사람들이 투자를 안 한다는 말이거든요. 항상 화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화낼 준비할 때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화내겠지요. 그럴 때 누가 다가오느냐 하면, 주님이 다가와요. 그 순간 화낼 공격의 대상이 주님이 되는 겁니다. 그럼 주님과 화낸 우리 사이에서 주님은 억울한 희생자가 되지요. 이 사이에 피가 성립돼요. 그래서 화를 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을 공격하는 셈이 되고 주님과 나 사이에는 착함으로 성실함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고 무슨 관계다? 대신 죽으신 피의 관계인 것을 또 다시 확인되겠지요. 이 방식으로 우리는 천국 가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래서 가는 게 아니에요. 앵그리버드라니까요. 화난 채. 주일에 교회 올 때마다 마음에 다짐을 해요. 오늘은 어지간한 것으론 화 안 내겠다. 이 말은 화낼 준비가 돼있다는 뜻이거든요. 건들기만 해봐라. 화는 안 내지만 내가 참기는 할게. 이런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내가 화내도 되는데 주님 생각해서 화 안 낸다. 이것 자체가 바로 보이는 사람들 관계를 주께서 맺어줬다고 생각 못하고 착한 내가 알아서 거기에 참여해준 게 돼버려요.

모든 것은 자기밖에 몰라요. 어떤 관계란 게 성사되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좋은 관계라 하지요. 나중에 필요 없으면 차버리는 겁니다. 사랑? 사랑은 없어요. 모든 것이 이해관계입니다. 부부도 그렇고 자식도 마찬가지고. 30년 우정, 50년 우정이요? 소용없습니다. 서로 조건 안 맞는데 관계 유지할 이유 없어요. 부부도 부부다워야 계속 살지 부부 같지 않으면 못 삽니다. 참는다고 더 착해지는 것 아니에요.

세상은 내 중심으로 보잖아요. 그건 지옥생활이거든요. 이런 우리를 지금 주님은 천국 보내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가 화냄의 피해자로 우리 앞에 등장하죠. “너, 화냈지?” “그런 일 없습니다.” “화냈잖아. 다 아는데.” “조금 냈습니다.” “왜 화냈나?” “나는 일을 바르게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여서 잘 안 되네요.” “그런데 그 일 누가 일으켰지?” “북한 김정은인가?” “김정은 누가 만들었지?” “주님이.” “그럼 내 탓이네. 결국 내 탓이잖아.”

어떤 사람이 미국에서 천연염색해서 크게 성공해서 섬진강에 일을 벌려놨거든요. 평소에 조금 오던 비가 하필 수백 미터 천을 널었는데 일기예보 틀려서 예상을 넘는 비가 200미리 와서 다 떠내려 보냈답니다. 사랑해 당신을 불렀던 <꽃반지 끼고> 불렀던 은희 이야기입니다. 자기 과거이야기하면서 사업 홀딱 망했어요. 누가 비 오게 하셨습니까? 주님이죠. 날 사기쳐먹은 인간 누가 보냈습니까? 주님이 보냈잖아요.

앵그리버드, 우린 항상 화낼 준비를 하고 있어요. 만반의 준비돼있어요. 이 말은 항상 우리는 주님이 나를 찾아올 속성과 그러한 성격을 지니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피로서만 우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께서 말로만 하신 게 아니에요. 옆에 강도 직업이 뭡니까? 강도. 강도되게 하셔서 십자가 동기생 만들어서 오늘 밤에 천국 보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주께서 천국백성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합당한 조건으로 우리를 이렇게 이끄신 겁니다.

이건 주님의 전쟁 결과에요. 우리가 내 인생 관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피로써 중간을 잘라버린 거예요. 그리고 일방적으로 천국 갈 수 없는 이 사람을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알아서 천국 보내도록 지금도 지옥 가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 빡빡하게 매일같이 만나게 해요. 드라마를 통해서 티비를 통해서 <같이 살래요>를 통해서 전부 다 지옥 간 사람이거든요. 행복한 가정이야기, 전부 지옥이잖아요.

우리도 거기에 친화되고 고개 끄덕이고. 저게 사는 재미지. 인생 저렇게 살아야 돼. 자식 잘 키웠다. 전부 다 애굽에 살던 우리의 숨어있는 본성을 유감없이 동의하고 찬동하고 박수치고. 교회 가면 간증집회에서 암 걸렸는데 기도해서 낫다고 하면, 멋있다고 자기도 모르게 애굽의 요소가 마구 터져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오늘 밤에 그냥 가는 게 좋아요. 최고에요. 살아있을 이유 없는데 우린 우리의 명예가 아까워서 자존심이 너무너무 소용해서 우리는 버티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보고 마치겠습니다. 18장 끝에 보게 되면, 28절.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 있기 전 거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이 말은 뭐냐? 땅이 이 세상이라면 땅은 우리 지시받지 않고 보이지 않는 숨어있는 살아계신 주님의 지시받고 모든 일들이 일어납니다. 전도서에 보면,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면 살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으면 나을 때가 있고.

세상의 모든 타이밍은 우리 손을 넘어섰어요. 주께서 모든 타이밍,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예수님의 법도,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지금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택한 백성, 차이, 거룩, 구분됨, 주님께서 구분했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선별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선 우리를 아바타로 세상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당당하게 우리 할 소리를 다 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너무 주춤했습니다. 너무 조심스럽게 살아갔습니다. 앞일에 너무 쓸데없이 염려와 걱정으로 당겨서 했습니다. 자기 가치를 너무 높게 보지 않게 해주시고 개 같은 존재요 벌레 같은 인간이지만 주님을 증거한다는 이유 때문에 천사도 부러워한 신부의 자격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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