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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울산강의
2018-11-02 23:35:31 조회 : 220         
차이의 생산 181102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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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122) 18-11-06 07:41 
20181102a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차이의 생산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0장 22절은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땅이 너희를 토하리라고 해서 땅이 토한다는 게 참 이상하잖아요. 땅은 그냥 흙덩어리인데 사람을 토해낸다는 것은 약속의 땅이 흙으로만 돼있는 것이 아니고 흙과 더불어 하나님의 약속이 거기에 첨부돼있습니다. 참 이상하죠.

흙+약속, 이렇게 돼버리면 땅에 약속을 첨부한다는 것은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약속이란 게 살아있는 사람들끼리 또는 살아있는 어떤 인격적 존재들 사이에서 성립되잖아요. 땅에 있는 돌과 돌 사이에 약속이란 게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땅에서 약속을 한다는 말은 이 땅에 누가 들어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은 약속이 아닌 것은 토해내 버리는 거예요. 거부하는 겁니다. 결국 여기서 무슨 이야기가 성립되느냐 하면, 약속의 없으면 약속의 땅에 못 가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약속의 땅은 나중에 신약에 오면 천국이 되는 겁니다. 교회 나온다는 것은 천국 간다는 희망을 가지고 나오잖아요.

천국이란 약속의 땅이에요. 당신은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강렬하게 주장하느냐? 구약에 근거해서 그렇습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어졌습니다. 신약은 모든 민족에게 주어졌지만 모든 민족에게 주어진 약속이 구약에선 하나 유일한 특정국가에만 완전히 퍼부은 거예요. 그리고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어떻게 변화돼 가는가를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이스라엘이 변화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그냥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인수인계 받는 게 아니고 약속이 받아 챙기는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품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보통 교회에서는 예수님 믿고 천국 가고 하나님 믿고 천국 간다고 하잖아요. 저는 그것을 거부해요. 그 믿는다는 것을 포기해야 됩니다. 약속이 없을 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약속이 오게 되면 우리는 결코 믿는 자가 아니란 것이 들통 나야 됩니다. 예수 안 믿고 천국 가고 예수 안 믿고 영생 얻는 겁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걸 믿음이라 해요. 내가 믿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 내가 구성하는 믿음은 하늘나라에 아무 쓸데없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게 믿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돼있고 이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단서를 붙여놨어요. 그러면 선물 안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선물 안 받았으면 그냥 지옥 가시면 되는 겁니다. 깔끔해요. 이야기가 아주 단출합니다. 믿음의 선물 안 받았으면 믿을 생각 말고 믿으려고 애쓰지 마세요. 자기 갈 길이 지옥이라고 그냥 가시면 되는 겁니다. 복잡한 게 전혀 없지요.

그런데 이 세상 살면서 어떻게 그걸 구분하느냐고 하는데, 이렇게 구분하는 거예요. 인간이 믿는다고 하는 것을 따져보면 문화입니다. 문화를 이제 설명할 텐데 문화는 쉬운 말로 오락이에요. 또는 취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유흥이에요. 즐기는 것. 그럼 여기서 줄줄 내려가면 뭐냐 하면, 낚시, 등산, 주부가요교실.

주부가요교실을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앙과 주부가요교실이 어떻게 일치되는지. 직장도 안 다니고 집에서 놀고 있는 아줌마들이 주부가요교실에 가게 되면 여러 가지 면으로 자기에게 유익되는 게 많아요. 일단 마음을 열고 외쳐보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소리 지르고 울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고 분풀이하기도 하고. 혼자 집에서 노래 부르면 재미 하나도 없어요. 같이 부르는 겁니다.

<안동역에서>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오지 않는 사람아~” 집에서는 안동역 생각 안 나는데 거기선 안동역 생각나는 거예요. <고장 난 벽시계> 같은 것.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잘 모르지요. 얼마나 유익되는 게 많아요. 스트레스 풀지요, 기분 좋지요, 화병 다 달아나지요, 정신적으로 안정되니까 몸도 건강해지고. 집구석에 있어봐야 짜증만 나는데 밖에 나가 서늘한 가을바람도 맞고 거기서 적당한 사람 만나서 가요교실 끝나고 찜질방 갔다가 술 한 잔하고 저녁 시간 맞춰서 놀고. 다 유익되는 게 굉장히 많아요.

다시 적어보겠습니다. 이런 취미, 오락, 유흥은 소용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유익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실제적인 이익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줌마 남편이 갑자기 실직을 했다, 사업부도가 나서 어렵다, 애는 아직 어리다, 남편은 빚 때문에 도망갔다. 그러면 주부가요교실에 나올 수 있습니까? 못 나오잖아요. 아르바이트 하거나 애 키워야 되니까. 오락, 문화, 취미, 유흥, 낚시, 등산, 주부가요교실, 이런 것은 유익은 되지만 진정성, 진지함은 없어요. 이건 부차적인 거예요. 반찬? 인생에 대해서 반찬 같은 거지 밥은 아니란 말이죠. 주식은 아닌 거예요. 이게 바로 문화에요. 신앙이란 겁니다.

신앙 있다는 사람들, 돈 문제 건드리면 한순간에 신앙은 다 날아가 버려요. 왜? 그동안 취미생활로 교회 나왔고 여흥으로 교회 나왔고 오락으로서 교회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락을 오래 하게 되면 집사에서 권사 되고, 남자들은 장로 되고. 전부 다 오락단체, 문화센터에서 오래 하게 되면 지분 좀 늘어나게 되면 장로도 되고. 그건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보조역할이지 주가 되지 않아요. 그럼 신앙 자체가 뭔가 다른 주가 되는 게 있고 시간 남아서 보조로 신앙생활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주가 뭐냐는 겁니다. 주가 돈입니다. 목사가 왜 그렇게 교회에 목을 맵니까? 다른 사람은 교회가 취미단체고 낚시동호회지만 목사는 거기서 돈이 생기는 자기 가족들 생계가 달린 문제거든요. 그래서 교인들 닦달 내는 거예요. 전도하세요. 전도한다고 노는 노인들 불러오지 말고 돈 되는 사람 불러와라. 돈푼이나 내는 사람 불러와야 돼요.

그래서 주부가요교실에서 가장 진지한 사람은 누구냐 하면, 거기 참석하는 주부들 아닙니다. 이것해서 자기 생계유지하는 사람이면 진짜 주부가요교실에 목매지요. 정리해봅시다. 주가 되는 것은 뭐다? 내가 살기 위한 활동이 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믿었다는 것은 사실은 거짓말이죠. 뭘 믿었습니까?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을 믿는 거예요. 살려면 이 땅에서 돈이 있어야 되지요. 친구 있어야 되고 권력 있어야 되고. 그래야 행복하니까.

인간이 신앙한다는 것은 사실은 창세기 3장에 의하면 자기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보조적인 활동을 이야기합니다. 이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문화 활동, 오락 활동, 취미 활동처럼 신앙 자체가 신앙 아닌 걸 알아야 되죠. 왜냐하면 이런 취미는 나름대로 유익과 실익을 주기 때문에. 누구한테 유익을 줍니까? 주님한테? 아니에요. 본인한테 이익이 되는 거예요.

보험을 들 때 생활비 하고 여분이 있을 때 보험을 드는 겁니다. 만약에 정말 부도나서 집안이 어렵다면 보험 해약하지요. 천국 가는 보험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약간 밥 먹고 살기 때문에 여유 있어서 교회 나오는 거예요. 만약에 여유가 없다면 보조적인 실익은 나중으로 미뤄야 되겠지요. 나중 문제에요. 실제 문제 아니란 말이죠.

지금 이스라엘을 제쳐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신약부터 이야기하는데 신약에서는 복음이 나타났고 복음을 믿으면 천국 간다 하지요.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방금 뭘 배제했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을 배제했지요. 제 말의 취지를 아시겠습니까?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이스라엘부터 출발해야 된다 했지요.

이스라엘을 배제하고 신약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나타났다, 복음을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니까 그 좋은 것 왜 안 믿겠어요. 왜냐하면 자기에게 실익이 있고 유익이 있기 때문에 믿지요. 지금 뭘 빼놓은 거예요? 우리가 지금 레위기 20장 23절 하는데 뭘 빼놓은 거예요?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의 운명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완전히 빼놓고 이야기하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주가 된다는 것은, 벌써 내가 뭘 믿어야 된다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인간이 궁극적으로 놓치지 않고 이것만은 꼭 쥐고 믿고 싶은 게 뭐냐 하면, 나는 이유가 어떻던 어떤 경우든 지진, 태풍, 화산폭발 어떤 경우든 비행기 사고가 나든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이 ‘나’를 쪼개보면 내 안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내 가족은 살아야 되겠다. 내 가족, 다른 말로 하면 나는이죠. 남의 가족 아니잖아요. 내 가족이니까 나잖아요.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걸 철석같이 믿습니다. 이건 뭐냐 하면, 강한 자기집착이에요. 이거는 천하에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와도 포기 못해요. 이미 이걸 믿고 있는 거예요. 이걸 믿고 있다가 다른 것, 성경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이건 주가 돼있고 보조로 뭘 믿느냐 하면, 죽으면 천당 가고, 여러 가지 믿는 거예요.

이걸 아까 제가 뭐라 했습니까? 문화 활동이에요. 이게 문화 활동이고 취미고 오락이고 여흥이고, 낚시, 등산, 주부가요교실 이런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다지 다급하고 시급한 문제는 아니에요. 애 아픈 게 중요해요. 애 사고 난 게 중요하지 애 성적 오른 게 중요하지 예수님이 어떻게 되고 관심 없다니까요. 구약성경 레위기 20장 그걸 왜 알아야 되는데,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냥 보조니까 교양 또는 자기의 지식확보, 하나님께 잘 보이면 혹시 천국 갈까하는 기대감, 이런 거지만 정작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죽지 않고 버텨내야 한다는 그 사실은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누가 와도 나는 양보 못한다는 자기집착은 대단한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는데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뭘 누락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했어요? 이스라엘을.

정작 하나님께 계시 받은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에서 바겐세일 하듯이 복음입니다. 받으세요. 아멘 천당 가게 됐습니다. 거듭났습니다. 신앙인입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이 값싸게 남발되는 게 아니에요. 정작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는가?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뭘 변화시킨다 했어요? 우리와 똑같아요.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했으니까 우리가 잘 될 것이라는 그 사고방식을 하나님 쪽에서 강제로 변화시켜 버립니다.

신약에서 아까 이야기한 문화센터에서 모든 결정은 누가 합니까? 본인이 결정하는 거예요. 내게 도움 되고 내게 이익이 있으면 이런 건 얻어 챙겨야지 하면서 극히 자기 자신에 대해선 손톱만큼도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내 인생 흠집 내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굳은 신앙이라니까요. 진짜 나를 믿는 신앙 확보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보여주는 신앙은 따로 구성하고 조작해내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 저도 아는데. 오락 생활하고 교회 와서 취미 생활하는 걸 모를 리가 있겠어요?

무엇이 진지하냐? 내가 존재하는 게 진지하고 내가 사는 게 진지해요. 그게 우선이에요. 그 다음에 살기는 살되 윤택하게 남한테 좋은 소리 들으면서 교회 와서 칭찬 들으면서. 그거는 좋긴 좋지만 실익은 있지만 부수적인 거라니까. 교회에서 누가 욕하면, 여기 아니면 교회 없나, 하고 딴 데 나가면 그만이니까. 내가 원하는 게 없을 땐 딴 데로 빠지면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딴 데 갈 때 나만은 귀함을 내가 양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마음을 갖고 딴 데 가요. 모든 취미 모임이 그렇잖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놀라운 나라입니다. 딴 데 갈 데가 없어요. 마치 조롱박에 사로잡힌 참새 신세라고나 할까요? 원래 이스라엘은 그들이 나라를 만든 게 아닙니다. 히브리 민족은 있었지만 나라 만들 생각은 전혀 못했어요. 왜냐하면 잘 먹고 잘 사는데 자기가 나라를 만들어요. 우리 따로 국가를 만들세, 히브리인들 속에 나와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애굽나라 백성으로 충분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셉 이후에 바로가 나와서 히브리인들을 노리고 공격하니까 그들이 힘들었을 뿐이지 애굽 말고 다른 나라라는 의식은 전혀 없습니다. 만약에 여기서 경상도 대통령이 나와서 전라도 사람들을 다룬다면 전라도 사람들이 모여서 북한 가자, 이런 식으로 하진 않는단 말이죠. 이러진 않거든요.

북한이 저런 나라 된 것도 북한주민의 의사가 반영돼서 그런 게 아닙니다. 소련 점령 하에 있었고 김일성이 인수인계 받았을 뿐이에요. 일반국민들은 이제 일제에서 벗어나서 뭐가 어떻게 되는지 몰랐어요. 사람들은 원래 정치에 관심 없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에 관심 있느냐 하면, 내가 사는 그 땅 있잖아요. 땅에 농사짓고, 장사하면 그걸로 만족해요. 인간들은 원래 소박해요.

후삼국 이후에 고려 시대 될 때 궁예란 사람이 있지요. 자기가 자칭 부처라고 등장한 사람 있잖아요. 관심법이라 해서 뭘 본다 하잖아요. 그 뒤에 나오는 왕건, 최수종입니다. 그래서 학교 시험에서 고려를 누가 세웠느냐고 하면, 최수종이 세웠다고 해요^^ 이 사람들 깡패에요. 이성계도 마찬가지고.

나라 안 바뀌었어요. 대장질하는 자리만 바뀌었을 뿐이지 일반백성들은 그냥 조상대대로 내려온 자기 토지나 가꾸고 소박하게 그것뿐이에요. 인간은 나와 내 가족, 내 새끼 그거면 끝이에요. 나 잘 되고 내 자식 잘 되면 끝이에요. 하늘의 별을 따겠습니까, 달을 따겠습니까? 그런 욕심 없습니다. 바깥 사회가 가만두질 않아요.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라 소설이 있어요.

원제는 〈더버빌가의 테스〉이며 '순결한 여성'(A Pure Woman Faithfully Presented)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여주인공 테스는 몰락한 농가의 딸로, 더버빌 가문의 후예라는 벼락부자 집에서 하녀로 일하게 된다.   집의 아들인 바람둥이 알렉에게 유혹되어 사생아를 낳지만 아이가 죽자 남몰래 매장하고 타향으로 도망가 목장에 취직한다. 몇 년 후 부모의 신앙에 반발하여 농장 경영을 지망하는 목사의 아들 엔젤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와 결혼한다. 결혼 첫날 서로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데, 테스의 과거에 충격을 받은 엔젤은 그녀를 버리고 브라질로 떠난다. 그 후 테스는 그녀의 부모형제가 마을에서 쫓겨나 유랑하게 되자 이들을 구하기 위해 알렉과 다시 동거한다. 이때 엔젤이 뜻하지 않게 돌아오자 격정에 사무친 테스는 알렉을 살해하고 엔젤과 도피하지만 곧 체포되어 처형된다. 운명에 희롱당하는 한 여인의 삶이 극적인 구성에 의해 표현된 작품으로 19세기 후반 영국 문학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다음백과*

이 책의 주제가 뭐냐 하면, 남성 위주의 사회적 편견이 그저 조용하게 살고 욕심 없이 소박하게 애 낳고 살겠다는 일반적인 가련한 한 여성의 꿈을 짓밟아버린 것이 사회란 것을 고발한 소설이에요. 뭐 대단한 여자로 외무부장관 되고 그런 것 안 했다고. 여자가 공부해서 사법고사 합격하고 그런 것도 안 했어요. 그냥 남자와 결혼해서 애 낳고 애 키우고 소젖 짜고. 그것도 죕니까? 그 여자를 몇 번이나 버린 것은 여자 쪽이 아니에요. 남자가 여자를 버린 거예요.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이란 노래를 불러야, 눈물로 지새우는 거예요.

자, 그 [테스]에 나오는 여자가 지옥 갔다면 이유가 뭡니까? 그 여자는 뭘 모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기 때문이에요. 지금 제가 테스 이야기하면서 마음이 갑자기 그 불쌍하고 가련한 시대를 잘못 태어나서 남자한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여인 편을 들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여자만큼은 천국에 보내주고, 그 여자를 찼던 목사 아들부터해서 지옥 보내고 싶지요.

그러나 그건 이스라엘을 배제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네가 착하면 천국 가고 나쁘면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의해서 변화되지 아니하면 전부 다 지옥 갑니다. 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소박하든 욕심이 많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에서 끊어진 자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 만들 때 그 나라 만드는 계획과 작업은 누구 소관이냐 하면, 하나님 소관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히브리인들이, 더러워서 못 살겠다. 애굽에서 나오자, 지금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인간은 관성의 법칙이 있어서 살던 대로 살아요. 어지간하면 안 가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이북 사람들 운명은 그야말로 타이밍 문제에요. 그때는 삼팔선이 있어도 왕래가 되었어요. 차도 다니고. 언제 남쪽으로 갈 거냐? 그 타이밍 놓쳐서 죽어요.

이차대전 때 독일에 사는 유대인들 있잖아요. 처음부터 유대인들 다 잡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야금야금 잡아갔어요. 그때 유대인 지도자들과 독일이 한 패였어요. 나치가 유대인 지도자들을 회유한 거예요. 내 말만 들으면 유대사회를 봐줄게, 라고 한 말을 그들이 믿어서는 안 되는데 유대인들이 믿었어요. 그러나 유대인 지도자들은 그 말을 안 믿었지만 너희들만은 특별대우해서 빼줄게, 라는 말을 믿었지요.

왜? 인간 누구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은 믿음이 있어요. 어떤 믿음입니까?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살면 된다는 믿음이 확고해요. 이 믿음에 예수 믿음, 하나님 믿음이 들어갈 침투할 여지가 없어요. 이미 믿음은 확고해요. 나만 살면 돼, 나만. 우리가 구약성경을 왜 봅니까? 구약 나라가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안 믿는다고 데모하는 나라에요? 아닙니다. 가면 갈수록 하나님만 믿겠다고 우겼던 사람들이에요. 다 망했어요. 이상하지요. 철석같이 하나님에 매달린 사람들이 다 죽었어요. 이스라엘 전부 다. 몽땅 다 망했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주사바늘 주입하듯이 선지자들을 통해서만 주입됐어요. 선지자는 일시적인 지도자지 지속적인 세습적인 지도자는 아니에요. 순간순간 불쑥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의 계시를 줬어요. 계시를 줄 때 선지자의 자세나 특징은 뭐냐 하면, 현재를 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오실 메시아니까 오실 메시아를 믿는 안에 뭐가 빠져있냐 하면, 나는 이 복음 전하다가 밥 먹고 살아야지, 하는 것이 빠져있어요. 그래서 선지자는 천상회의를 본 사람들이에요. 이미 하늘의 계획이 어떻게 잡혀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과 차별화하면서 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물론 모세도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으니까.

이들은 현재를 위한 믿음이 있는 게 아니고 미래에 오실 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은 지금 소개하는 사람들이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일반 사람들은 누굴 소개해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요, 자기가 자기를 소개하지요. 이게 바로 선지자와의 차이점입니다. 예수 믿으면 어떤 실익이 나한테 있습니까? 우리 가정에, 내 신상에 어떤 이익이 있는지 묻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닌 거예요. 그건 문화 활동, 오락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쥐고 있으니까 놓을 줄 모르고 있단 말이죠.

신약에 와서 그걸 지적하는 말씀이 한두 개가 아니고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그 말씀을 이야기하면 안 들은 것처럼 합니다. 뭐냐 하면,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말씀을 또 끄집어냅니다. 더 쉽게 하면 고린도전서 6장에 의하면, 내 몸은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니고 내 몸은 누구 것이라 했습니까? 주의 것이지요. 그러면 내 몸으로 인수되는 내 몸은 이 세상에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나는 없는 거예요. 내 몸에 근거한 나는 없어요. 주님의 몸에 근거했다는 전제 하에 주님이 원하시는 나, 약속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나만 있어요.

그러나 그 조건이 내 몸이, 내 인생이 내 계획대로 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전제로 해서 나에요. 그렇다면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권리주장하지 못하지요. 왜 어릴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습니까,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거는 아직도 지 인생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왜 내 자식은 공부를 못합니까? 그렇게 우기지 마세요. 왜 내 남편은 술 먹고 늦게 들어옵니까? 그러지 마세요. 술 먹고 들어오는 건 프라이팬으로 안 패서 그런 거고. 내 인생을 가꾸려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내 인생 자체가 없어요. 그런 조건 하에 내가 되는 거예요. 이게 신약입니다. 복음 밖에서 시작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에 의해서 다른 인간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원칙은 어디서 나오느냐? 구약부터 나와요. 이제 진도 좀 나가볼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정리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에요. 맞지요. 아까 히브리인들이 고안해낸 게 아니라고. 따라서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이 결론이 도출돼야 돼요. 이걸 믿어야 돼요. 이스라엘은 아무도 못 들어가요. 허락된 사람만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이 있다면 히브리 백성이라도 못 들어가요. 들어갈 때는 조건 하에 들어갑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사람만 들어가는 거예요. 이 조건은 인간들이 만든 조건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 되기 위한 조건이거든요. 그럼 이스라엘 내부에 이 조건이 멈추겠습니까, 계속 가동되겠어요? 이스라엘 내에 계속 가동되겠지요. 그게 오늘 22절 토해낸다부터 시작해서 27절까지 계속해서 그 이야기에요. 내 율법의 율례를 지켜야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23절부터 보면,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기업이란 유산입니다. 너희가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란 말이죠. “내가 그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너희에게 주어 유업을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나는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이 모든 이야기에 하나님의 조건이 있어요. 그 조건이 약속 또는 언약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조건을 걸어서 이 나라를 만들었다면 이스라엘은 무너질까요, 안 무너질까요? 안 무너지는 거예요. 안 무너지니까 이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얻어요. 여러분, 울산바닥에 살면서 안정감 얻었습니까? 현대중공업 부도나도 안정감 얻겠어요? 울산경제가 위축돼도 여러분 안정감 얻겠습니까? 울산이 아파트값 제일 많이 떨어진다는데 안정감 얻겠어요?

만약에 세상이 요동치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거기에 대해서 마음이 흔들린다면 아직도 우리는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내가 내건 조건을 집착하는 가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가짜 믿음은 특별한 사람만 아니라 성도라 할지라도 모든 인간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가짜 믿음이 발산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돼요. 나는 옳은 믿음을 유지해야지. 그거는 본인이 손댈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몸은 내게 귀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 귀한 몸이에요. 주님께 귀한 몸을 주께서 쓰시도록 내놓으세요.

우리의 몸은 아담의 죄의 몸이에요. 그 몸은 비록 쓰레기지만 주님한테 들어가면 그 쓰레기가 보석이 돼요. 그게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옵니다. 황금집이에요. 하늘에서 내려온 예루살렘 보석집이고, 보석으로 단장한 이유는 신랑을 빛내기 위해서 신부 단장하는 게 정상이지, 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신부 자체를 위해서 단장하는 게 아니고 신랑이 대단하니까 격에 맞추기 위해서 보석 같은 신부를 만드는 그 작업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 포함된 겁니다. 그 약속이 우리를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낼 거예요. 쓰레기를 찬란한 백설공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못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하면, 아예 내가 나한테 손 안 대기로 명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쓰레기니까. 쓰레기 몸인데 쓰레기에서 나온 손가락으로 손대봐야 쓰레기가 더 쓰레기 될 뿐이에요. 막 사시면 됩니다. 그냥 막 사세요. 막 살지 않는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한테 가치가 남아있다고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냐하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어요.

평생을 신앙인으로 살아왔는데 그 신앙은 자기를 교주로 만드는 신앙인으로 살아왔어요. 아파트는 자기 성전이고 자기는 제사장이에요. 그걸 네 자로 하면, 광산김씨. <살림하는 남자들>에 나오는 김언중, 백씨 부부 보게 되면 모든 행동이 오직 종교에요. 가장이 유일한 교리가 돼요. 우리 집에 내가 가장이라는 게. 가정이 하나의 종교단체에요. 가부장제도.

교주 되는 아버지한테 머리만 숙이면 사십 된 아들 둘도 빈대 붙어 살 수 있어요. 자식이 독립하는 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아버지라고 가치를 인정해준다면 모든 걸 용납하고 자식을 위해 헌신할 마음준비가 돼있습니다. 나만 절대화시키는 조건 하에. 그런데 칠십 된 노인에게 그걸 변하라고 요구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우리도 서서히 그렇게 돼가니까. 돈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아직도 내가 가장으로서 꿀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교구 자리에서 내려올 줄 몰라요. 다시 말해서 자식이고 아내고 오직 나만 알아요.

아까 차타고 오는데 안 보려고 했는데 보였어요. 휴대폰에 전화가 어디서 왔는지 나오잖아요. 마누라. 아내, 부인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마누라. 참 소박하고 순박하게 보인다는. 나한테는 상당히 낯설어 보였어요. 그런 걸 탓하는 게 아니고 은연중에 우리는 자기 자신 위주로 옛 신앙, 옛 종교의식을 아무리 해도 죽을 때까지 변경이 안 됩니다. 주께서 손을 대줘야 돼요. 그러면 이걸 변경해서 사모님으로 할까요? 그것도 이상해. 부인님도 이상하고. 그냥 하던 대로 하되 그것이 주의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 없다는 거예요.

지금 뭐가 문제냐 하면, 그걸 바꿔서 믿음 없는데 믿음 있는 척하는 그 믿음을 저는 빼라 이 말이죠. 니가 믿음 생활 잘하면 그걸 근거로 구원해주시겠다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변화시키는 내용이 뭐냐 하면, 네가 전에는 나를 무시하다 또는 잘 안다, 이게 아니라 내가 내 구원에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그것이 확정적으로 받아지는 그 자유함, 그런 식으로 변화돼야 돼요. 내가 내 가치를 훌륭하게 조정하거나 관리해서 구원되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것. 확정이죠. 확정 난 존재. 우리 힘으로 절대 구원받을 없다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다시 봅시다.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못 들어가요. 유월절 양 피 바른 조건으로 들어왔다면 이스라엘 내부의 원칙이 뭐냐 하면, 인간의 행함으로 약속의 땅,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그 원칙이 계속해서 가동되는 중이에요. 처음에 들어올 때만 믿음이고 그 다음엔 행함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에 들어와도 처음 들어올 때 조건이 계속 반복해서 적용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천국은 내가 못 들어가. 예수 믿음으로 들어가. 예수 믿음으로 들어간다고 해놓고 믿었으니까 바르게 살아야지. 오늘 본문에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가 거룩하라 했으니까 거룩하게 살아야지.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이 피를 통과할 때 뭔가 포기해야 되는데, 나의 행함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동안 나만 집착했다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들어와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포기가 안 되잖아요. 안 되니까 주님께서 예수님의 반복적인 십자가의 피로 또는 언약의 피로 매일같이 이스라엘 내에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인간이 아는 죄만 아니에요. 모르는 죄까지 7월 10일에 한꺼번에 드려요. 그래서 죄 용서가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서 뭐가 중요하냐 하면, 내가 스스로 훌륭하다가 아니라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훌륭한 거예요. 이게 거룩인 거예요.

용서 없는 사람과 용서 있는 사람 사이, 이걸 차별하는 것이 주님의 심판입니다. 잘났는지 훌륭한지를 묻는 게 아니고 용서받았는지를 묻는 거예요. 그럼 용서란 게 성립되려면 우린 죄인이란 건 기정사실이죠. 그럼 용서받기 위해서 우린 어떤 걸 해야 됩니까?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용서받으려고 사람들이 뭘 시도하느냐 하면, 자기 행함 가운데서 선한 것은 빼는 거예요. 착하기 때문에 용서받을 게 없고 나쁜 짓한 것만 뽑아내요.

여러분 옛날에 부흥회 참석한 기억이 납니까? 목요일 쯤 되면 죄 회개하란 말 많이 하잖아요. 부흥회에서 목요일은 끝날 때에요. 이 날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목요일 저녁에 헌금하는 순서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 죄용서 받고 돈 아끼느냐는 마지막 멘트를 날리기 위해서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서 회개하란 말이죠. 사람들이 회개할 때 죄가 생각나야 하잖아요.

그러면 작년 부흥회 때 회개해서 용서받은 죄까지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왜냐하면 용서받을 재료가 변변치 않아요. 주님 앞에 회개라는 잔치를 벌여야 되는데 반찬이 몇 가지 돼질 않아. 그래서 용서했다는 것까지 끄집어내서 다시 시작해요. 최근에 사태를 볼 때 용서받을 만한 일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회개한다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 교회, 하나님나라는 행함이란 게 없어야 돼요. 행함이 없이 용서되려면 용서가 먼저고, 왜 용서돼야 되는 이유를 새삼스럽게 필요한 죄를 깨닫는 작업이 본격화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계속된 율법의 투입이에요.

옛날에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우리 동네에서 유교적으로 엄격하기로 소문난 분입니다. 깐깐한 할아버지, 동네에서 자칭 유지고 자식들만큼은 남한테 욕먹지 않기 위해서 이걸 신조로 엄격하게 했어요. 물론 대가족으로 삼촌, 고모, 손자들까지 살았으니까 나한테도 그 여파가 오은 거예요. 그래서 자식 하나하나 면담해서 하나하나 지적해요. 너가 뭐가, 뭐가 잘못됐고, 그 다음 너는 뭐가 잘못됐고. 그걸 아침마다 계속하는 거예요.

나한테는 여러분 다 아시다시피 성질이 급하고 신발 함부로 던진다는 것, 문 닫을 때 몸부터 나가고 뒤돌아서 문을 닫아야 된다는 그런 것.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취미가 관찰하는 거예요. 그 다음 날 잔소리할 걸 관찰하는 거예요. 그래야 점점 더 어른다우니까. 그 당시는 몰랐는데 복음을 알고 보니까 문제가 할아버지를 가장 힘들게 화나게 만드는 것은 자기 지적대로 그게 따라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부터 지적할 게 없기 때문에. 할아버지 권위가 추락할 판이에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자기 말을 그대로 하는 사람에게 부담을 느껴요. 또 계발해야 돼요. 죄를. 이건 기 싸움이라. 손자나 자식들과 기 싸움하는 거예요. 식사할 때 소리 내지 마라. 된장찌개는 두부부터 먼저 건지지 말고 국물부터 하고 먹는 사람이 넷인데 두부가 다섯이면 그걸 계산하고 건지라는 거예요. 소고기라면 몇 개인지 계산하고 혼자 먹지 마라. 그리고 갈치는 중간부터 먹지 말고 꼬리부터 먹고. 중간은 어른 몫으로 남겨두고. 그런 지침들이 계속 계발되는 거예요.

그런 영향 때문에 나중에 교회에서 교인들 모습 보니까 복음을 모를 때 평신도일 때 사람들의 태도가 얼마나, 지옥 가겠다 싶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행동을 함부로 하고 말을 함부로 해요. 남을 배려하지 않고. 유교교육을 단단히 받은 괜찮은 나와 저쪽이 완전히 차별화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바로 그 작업을 벌이시는 겁니다. 백 개를 지키면 그 다음에 백한 개를 내세워요.

그래서 이렇게 합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기 아니하면 저주 아래 있다. 천 개를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다. 끝까지 몰아붙입니다. 예수님은 더 몰아붙여요.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다. 더 매몰찹니다. 구약에선 맹세한 것은 지키라 하지만 예수님은 아예 맹세조차도 하지 말라에요. 기도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기도할 때 맨날 맹세하잖아요.

이건 뭐냐? 주님께서 끝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 왜냐하면 천국은 인간의 행함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동네기 때문에. 그래서 십자가의 강도는 자기가 강도인지 내가 강도질할 때 자기 때문에 피해 입은 가족들 생각하고 자기한테 도적질 당해서 굶어죽은 사람 생각하는 것 없어요. 강도는 본인이 강도인 줄 모르고 다만 내가 어떤 직업이냐, 과거에 한평생 어떻게 살아왔는지 일체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생각해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그렇게 나아갑시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122) 18-11-06 07:44 
20181102b 울산강의-레위기 20장 : 차이의 생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레위기 20장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끝내지 않지요. 레위기 21장, 22장, 23장이 계속 있고. 하여튼 이스라엘에 대해서 주님께선 끊임없이 추궁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궁지로 몰아넣어요. 인간에겐 원래 신앙이 없어요. 왜냐하면 창세기 3장의 마귀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만 절대화시키고 자기만 붙들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은 없는 거예요.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은 신앙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 있다는 신앙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계속 제거하기 위해서 궁지로 몰아넣는 겁니다. 니 신앙 아무 효과 없잖아. 봐. 신앙 있다는 것은 자기 신앙으로 뭘 해보겠다는 거예요. 하나님, 이 신앙 있으니까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 축복해주옵소서, 하겠지요. 그걸 주님께선 계속 거부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거부했으니까 다른 신앙으로 실습에 나서고 실험해보는 겁니다. 그것도 거부해버리죠.

그러면 나중에 이스라엘은 우리 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번제를 원하는 것도 아니에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제사 드려라, 번제 드려라, 민수기, 출애굽기, 레위기에서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내가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는 겁니다. 상한 심령이 어떤 심령이냐는 것은 굉장히 쉬워요. 냉장고에 들어갈 물건에 밖에 내놓고 여름철에 일주일 놔두는 겁니다. 그 식품 상하게 되죠. 그것 상한 심령입니다. 못 먹어요. 더러워서 못 먹습니다. 그게 우리 마음이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곰팡이 피어 더러워서 못 먹는 마음으로 곰팡이로 주물러서 주여, 받으시옵소서, 이러고 있단 말이죠. 믿씁니다, 이렇고 있단 말입니다. 할렐루야 찬양하고. 주님께서 이스라엘한테 아모스, 호세아 선지자 계속 보냅니다. 네가 기도할 때 손을 들었는데 그 손에 피 묻었다. 억울한 자들 괴롭혔잖아. 니 살기 위해서. 너 잘기 위해서 해놓고 그 피 묻은 손을 나한테 벌리느냐? 네 제물 바친다고? 제물 가져가. 더러워서 안 받아.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기름이라도 안 받는다.

그 이야기가 호세아, 아모스에 나오거든요. 처음에는 그 이야기 안 해요. 계속해서 몰아붙이는 겁니다. 그들은 계속 밀리면서 하나님 이것 원하십니까, 저것 원하십니까? 자기가 만들어낼 수 있는 걸 다 만들어내요. 그 만드는 공장이, 나다. 나라는 것을 포기 못하는 겁니다. 그럼 나는 어디서 나왔는가? 나는 내 몸이라고 여기는 것에서 나왔거든요. 인간의 원칙은 뭐냐? 하나님 말씀을 안 듣고, 인간은 나름대로의 종교가 있는데 그 종교가 뭐냐? 내 몸이 잘 되는 나, 내 몸이 원하는 나, 내 몸을 지켜주는 나, 이게 인간의 종교입니다.

지난주일 낮 설교에 욥 이야기했지요. 내 몸이 괜찮은 몸인 것을 증명 되는 나. 남들 보기에 이 몸과 나는 괜찮은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받고자 하는 종교를 갖고 있어요. 혼자 살 때는 아무렇게나 하다가 누가 오게 되면 난리 치잖아요. 시아버지, 시어머니 둘이 사는데 갑자기 며느리 와 보세요. 청소하고 화장실 정리하고 난리 난다고. 며느리 이름의 손님 온다고. 명절 되면 며느리만 애 먹는 게 아니고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애 먹어요. 시아버지는 갑자기 안 보던 애까지 보려니, 애들한테 에헴 하는 게 안 통하거든요. 애들과 같이 뿡뿡하면서 체면을 다 구길 때 오는 그 손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칙은 뭐냐? 내 몸을 살리는 나, 그래서 내 몸은 나의 착함을 보고 계속 건재해야 되고 유지돼야 된다는 종교, 인간의 타고난 종교지요. 창세기 3장에 악마가 집어넣은 종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 의식하고 이와 다른 원칙이 가동되는 신앙을 준 거예요. 뭐냐 하면, 니 몸을 죽였는데도 살아 부활된 나, 이걸 만들어내는 겁니다. 엄청나지요.

인간이 성령 받지 않고 갈 수 있는 천국은 없어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성령 받은 모델로 사도 바울을 봅시다. 사도 바울은 어떤 고백이 나오느냐 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조건 하에 구원받는다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하는 조건입니다. 요즘은 그런 식으로 해선 교회 장사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내가 나한테 손댈 수 있는 여지를 다 박탈해서 그래요.

기도하라면 기도합니다. 돈 내라면 돈 냅니다. 전도하라면 친구들 데려올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죽었고,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란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기본 종교가 뭐냐? 열심히 교회 봉사하는 이유가 괜찮은 몸에 근거한 괜찮은 나를 목표로 잡아서 여기다 행함과 모든 시도를 다 했기 때문에 이것을 충족한다면 나는 기꺼이 하나님이고 예수고 다 믿을 용의가 된 인간이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몸과 나 사이에 죽음을 집어넣었단 말이죠.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무슨 수로 이걸 실천에 옮깁니까? 칼 쥐고 죽어야 산다고요? 이케요? 더 쑤셔라. 이러면 진짜 죽는데요? 진짜 죽어라. 안 된다고 손 놔버리죠. 죽는 시늉은 할 수 있어도 어떤 인간도 자기를 안 죽입니다. 자살할 때도 자기가 가치 있는 존재인 것만 남기고 영혼만은 건지려고, 몸은 죽지만 영혼만은 괜찮았다. 내 인생에 책임질 줄 알잖아, 라는 가룟 유다 같은 심보로 자살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영혼이고 몸이고 몽땅 쓰레기라고 인정할 위인은 아무도 없어요.

오늘 본문 27절 봅시다.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곧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앞에 26절에,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한 것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민족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거룩의 조건이 뭐냐 하면, 27절,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죽음을 집어넣는 거룩이에요. 죽음 없는 거룩이 아니고. 거룩을 위해서라면 나는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데 거기에 네가 동의할 마음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네 몸보다 거룩이 더 중요한데 내 거룩을 위해서 네가 죽을 수 있느냐고 요구하시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이미 하나님의 거룩보다 뭐가 더 소중하다고 여깁니까? 하나님이고 자시고 간에 우선 내가 산다는 조건 하에 그 다음에 하나님이에요. 내가 죽으면 하나님도 소용없고 예수님도 소용없어요. 일단 나 속에 뭐가 들어있어요? 내 가족. 나와 내 가족이 산다는 조건 하에, 가족은 왜 들어가느냐? 내 자존심이기 때문에.

조건 하에 하나님도 믿을 용의 있고 예수님에게 굴복하지만 그러나 이 몸을 유지해달라고 굴복하는 것이지 실제적인 이익을 있을 때나 굴복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인간은 절대로 양보 안 하거든요. 인간의 마음이 악마의 마음인데 양보합니까. 내가 하나님한테 이것 줄 테니까 하나님은 뭐 줄래요, 라는 식이에요. 도대체 인간이 하나님에게 뭘 줄래요, 할 수가 없어요.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이런 질문을 했어요. 디모데전서 3장 16절, 유명한 구절이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인데 경건한 생활하라고 준 거란 말이에요. 그걸 보고 이분이 진짜 울었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원하는 경건한 말씀을 이룰 수 없어서 어쩌면 좋아요? 이게 질문이에요. 흔히 하는 질문인데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도대체 피조물이란 의식이 없어요. 피조물 잘 되기 위해서 창조주가 있는 게 아니에요. 창조주를 빛내기 위해서 피조물이 있는 겁니다.

제가 내린 답변은 이거에요. 경건은 주님의 경건이에요. 내가 쓰레기 될 때만 주님은 경건해요. 이 쓰레기와 주님 경건 사이의 연결고리, 이게 신앙이거든요. 이게 성령이란 말이죠. 우리가 잘나면 주님은 잘나지 않아요. 우리가 못날 때 주님이 잘나잖아요. 우리가 못나면 못날수록 주님은 잘났어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주님을 많이 사랑하잖아요. 나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대 있음에, 그걸로 족한 게 사랑이에요. 사랑을 석 자로 이야기하면 ‘상사병’입니다. 상사병이란 보고 싶어도 그대를 못 봤을 때 평소에 그대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떡볶이에다 치킨에다 맛있는 것 먹고, 맛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이 등장했다. 그 다음부턴 뭘 먹든 이걸 먹으면 무슨 소용 있냐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 큰 처남, 칠십이 넘었는데 월남에 파병됐었어요. 그때 우리 장모님은 한 번도 잠을 집에서 잔 적이 없어요. 아들이 제대할 때까지 교회에서 철야합니다. 지독하지요. 우리 장모님은 믿습니다. 뭘 믿습니까? 내가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 응답하사 전쟁 한 가운데 있는 아들이 살아 돌아올 줄 나는 믿습니다, 라는 걸 믿어요.

믿음의 내용을 풀어봅시다. 거기에 성경말씀이 없지요. 누가 창조자고 누가 피조물이에요? 창세기 3장에 근거해서 본인이, 내가 신이에요. 내가 신이 되기 위해서 철야가 뭡니까, 뭔들 못해요. 내 자식 지키기 위해서. 그것도 맏인데. 이 이야기 들으면 여러분도 만만치 않지요. 이건 일부러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밥이 안 넘어가요. 맛있는 것도 맛이 없어요. 지금 월남에서 고생하고 있는 큰아들 생각하면 잡채고 뭐고 아들이 살아 돌아올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해요. 이게 상사병이에요. 내가 나한테 반해버린 거예요. 내가 내 뜻에 반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장모님이 아들이 없다. 딸밖에 없어서 군에 간 자식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장모님에게 아들을 주셔서 하필 월남전에 가게 함으로써 미처 내가 무엇에 푹 빠져 있고 무엇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가를 주께서는 아들을 통해서 낱낱이 전개되게 한 거죠. 펼쳐지게 만들었어요. 나란 여자는 이것밖에 안 된다고. 하나님? 하나님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 자식이 하나님보다 더 중요해. 예수님보다 내 자식이 더 중요해요.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뭘 바치라 했습니까? 돈 바치라 했습니까. 곶감 바치라 했습니까, 굴비 바치라 했어요, 양 바치라 했습니까? 아낌없이 드릴 용의 있어요. 그러나 뭘 바치라? 혹시 꼴 보기 싫은 자식 바치라 했습니까? 아닙니다. 가장 사랑하는 자식 바치라 했어요. 나는 오로지 나만 사랑하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나밖에 모르는 신앙인.

이런 인간이 어디 간다? 지금 주님만 사랑해야 될 하나님의 룩을 이야기해야 될 천국에 하나님이 보내시는 거예요. 보내시는 방법은 중간에 죽음을 집어넣어요. 너, 자살하라는 게 아닙니다. 자살하라면 자살하지요. 자살보다 힘든 게 바로 내 자식을 그것도 남의 손이 아니고 월남전이 아니고 베트콩 손이 아니에요. 내 손으로 내 자식을 잡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그 마음가짐입니다. 그 마음가짐에 합치될 수 있는 사람, 일치될 수 있는 사람만 천국 갑니다.

그건 인간의 능력이 아니에요.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런 마음이 생깁니까? 아니에요. 성령이 임하면 그런 마음이 생기도록 쓰레기 같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순간순간 정신이 나가버려요. 치매 같아.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그것도 오래 안 가요. 2초 내지 3초인데. 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미쳤는가봐. 내가 얼마나 대단한데. 아니야.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 진면목을 6개월마다 2초? 너무 심했나. 1년마다 3초^^ 그것도 안 되면 2년마다 2초. 3년마다 4초.

십자가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다는 것, 주님 십자가 진 것 생각하면 나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평소에 자기 잘났다 하다가 순간에 진짜 자기 모습을 불연 듯 번개 치듯이 떠오르는 거예요. 번개는 자주 치는 게 아니잖아요. 번개 치는 그 짧은 순간에 진짜 내 모습을 알게 하시는 겁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황 전도사님이나 그렇고. 손자 보고 너 죄인이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도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는 한 자기 자신을 제일 먼저 챙기게 돼있어요. 이걸 인위적으로 억지를 부려서 믿는다고 하지 마세요. 그 몫은 내가 할 게 아니고 주님 살아 계시니까 알아서 죄인 되게 하실 거예요. 복권 샀는데 갑자기 20억 생길 때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20억은 일단 챙기고 내가 돈만 사랑했던 인간입니다, 하고 20억 챙기고 한 2초 동안 생각하는 그런 일이 생길 거예요.

갑자기 자식이 효도한다고 해외여행 가라고 할 때 우린 예상 못한 일에 뭐라 합니까? “주여, 내가 평생 죄인입니다. 자식한테 이런 대우 받을 일 있습니까?” 그것도 자식 있는 데서 하면 도로 뺏을 수 있으니까, “주여, 제가 하와이 갈 자격이 됩니까? 내가 은근히 기대했던 이것이 죄인 줄 몰랐습니다.” 이러면서 챙겨놓고 보는 거예요. 이건 예상 밖의 일이거든요.

돈을 좋아하는 것이 발각됐잖아요.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항상 잘난 내가 못난 나라고 어떤 계기가 왔을 때 성령께서 그렇게 한 거예요. 왜냐하면 평소에 모든 인간이 자기 잘났다는 걸 선전하고 광고하는 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남한테 안 꿀리고 싶은 거예요.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다음에 말씀 들어가죠. 그러면 그만 살아도 좋으나? 그 짧은 순간은 살아온 것도 죄 지었는데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그게 바로 주께서 집어넣은 계약의 약속입니다.

이번 주일 낮에 한 걸 다시 언급해보겠습니다. 노아방주 언급하면서 잣나무로 만든 노아방주 안에 위에서 봤을 때 이쪽에는 홍수에요. 노아방주 안에만 물이 없어요. 이쪽은 심판이고 이쪽은 용서받음이란 말이죠.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은 세상을 볼 때 얼마나 다행스러워요. 이 바깥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우리가 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야말로 소박한 소시민의 꿈같은 것들이 여기 있단 말이죠. 남한테 해코지도 않고 그냥 밥벌이만 하겠다는 그런 겸손한 마음도 주님의 언약에서는 저주가 되고 심판이 돼요.

그러니까 용서받은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도 평소에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이게 몇 초가 안 된다니까. 몇 초 지나면 나는 이렇게 잘 먹고 잘 산다고 또 이 바닥에 뛰어들어요. 음주고 방언이고 십자가고 다 잊어버리고 이 바닥에서 날 무지하지 말라고 또 설친다고요. 주님께서 또 찾아와서 십자가 안에 가끔 집어넣지요.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단 한 번도 내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그런 기억이 없어요. 그저 교회 나와서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부터 레위기 보니까 내 몸이 나는 거룩하다니까 바른 생활하면 신자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하는 거예요.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들은 이야기하게 되면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한테 지지 않기 위해서 신앙을 만들었는데 성경말씀은 뭘 걷어냅니까? 그들이 조작해낸 신앙을 뜯어내잖아요. 진짜 성도는 뜯어내게 되면, 들켰네. 나는 이렇게 죄인인 것을, 하고 그 벌거벗은 모습을 감사합니다. 주님한테는 못 속이겠어. 난 아무것도 아니야. 신자는 뜯어내면 죄인인 나만 남아있는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어떠냐? 뜯어낼 게 아무것도 없어요. 뜯겨나간 그게 자기 인생의 전부에요.

뜯어낸다고 난리도 아닙니다. 욕하고. 너만 믿음 있나. 너만 신자냐고 욕하고 말이죠. 십자가마을에 왔다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 왜 왔다 간 줄 알아요? 보자. 믿음이란 게 어떤 건지 보자 하니까 왜 부정적이냐, 왜 인간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느냐? 날 욕하려면 사도 바울을 욕하세요. 사도 바울은 저보다 더 합니다. 욕하고 반발하는 이유는, 뜯겨버리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잘난 것만 줄곧 무장해왔던 겁니다.

27절 다시 봅니다.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돼있지요. 오늘날 현대와 비교해봅시다. 현대인들 타로 점치는 것, 궁합 보는 것 장난이라고 치잖아요. 교회 권사도 결혼할 때 재미로 날자 맞는지 본다 하잖아요. 궁합, 사주팔자 재미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당이냐, 점치느냐, 별 점 보느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게 남자냐, 여자냐가 중요할 거예요.

남성과 여성으로 돼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이 돼있는데 구분이 되지 않으면 이게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과 만나서 다시 말해서 피 없이는 이스라엘 속에 못 들어간다고 만나버리면 인간은 졸지에 뭐가 되겠어요? 피는 대신 용서하기 위해서 흘린 피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죄인 되겠지요. 죄인을 다시 소급해봅시다. 나는 남성이란 말을 지워버리고 나는 죄인이 돼야 되고, 나는 여성이란 말을 지워버리고 나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죄인이란 말은 무채색이에요. 알록달록이 없어요. 그냥 시커먼 색깔이에요. 색깔이 없는 거예요. 삭막하지요. 주님 보시기에 이렇게 보여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인간은 더 나갑니다. 죄인 정도가 아니에요. 그냥 바짝 마른 뼈에요. 인간이란 자체가 바짝 마른 뼈에요. 코도 눈도 없어요.

새로운 백성, 새로운 이스라엘 되려면, 대전강의에서 했는데 이스라엘 영이 임하면 공통점이 있어요. 나나 너나 죄인에서 뼈가 됐잖아요. 뼈에 성령이 임하면 죄인에서 인간, 인간에서 남성, 여성으로 나가는 겁니다. 처음 시작할 때 남성은 나란 가치를 보완하기 위해서 남성이 있었는데 방향이 성령이 와서 뼈가 죄인 돼버리면 뼈인데 남성되게 하고 뼈인데 여성되게 하신 여기에 예수님의 공로, 취지와 언약이 담겨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은 예수님의 언약을 운반하는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이게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물론 외형적으로 볼 때 남자고 여자에요. 하지만 그 안에는 뼈가 있단 말이죠. 뼈 없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제가 말한 뼈란 주님의 죄인에 대한 심판의 결과물이 뼈니까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 안에 나의 죽음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것을 죽음 임플란트라고 했잖아요. 임플란트할 때 이렇게 시키죠. 딱딱 해보세요. 나의 죽음이 감촉되는지 느껴지는지.

나중에 늙어 죽는 게 아니고 벌써 죽은 거예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벌써 죽어 있는 상태에요. 이렇게 움직이는데 왜 죽었어요? 죽었다는 말은, 나 죽었다는 걸 자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살아 있다면 곧 주님이 살아 있는 결과물로 내가 살아 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이고 더 기쁘고 더 좋은 것은 뭐냐? 주님이 부활해서 살아 계시는 겁니다.

사도 바울 기준으로 봤을 때는 지금 엄청난 걸 요구하지요. 이것은 예수님 계실 때  열두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 이상입니다. 구약 선지자들보다 더 이상이에요. 구약 때 아무리 훌륭해도 신약의 어린아이보다 못하다고 했거든요. 천국에서 작은 자가 구약에서 큰 자보다 더 크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이에요.

죽은 자가 뭘 하겠어요, 뼈가 뭘 하겠습니까? 그냥 주께서 인도하는 데로 시키는 대로 막 살면 돼요. 막 살 때 신나게 막 사는 거예요. 왜? 아무리 내가 막 살고 싶어도 막 살게 하는 방식은 주님이 쥐고 있기 때문에. 내 식대로 막 사는 것은 이미 끝났어요. 주님이 시키는 대로 막 사는 겁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사도 바울을 로마로 막 살게 만들죠.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폭풍을 일으켜서 그게 네 뜻이 아니었다. 내 뜻이었다. 로마 가는 게. 네 뜻은 없어. 그리고 나중에 독사에 물리잖아요. 독사에 물리는 것도 막 사는 거예요. 독사에 물리게 하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도 주께서 막 살게 하신 것이고. 세밀하게 쪼개보면 아침에 눈 뜨는 것도 막 살게 하시려고 눈 떴고 저녁에 자게 한 것도 주께서 막 살게 한 것이고. 어느 것 하나도 나의 행함의 보상으로 이뤄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 있어서 오늘도 우리가 매일같이 사는 거예요. 에브리데이 매일같이 우리는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주님이 나보다 확실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그걸 늘 인식할 순 없어요. 세상에 먹고 마시는 이 동네에 뛰어들어서 잘 나기 때문에.

그래서 남은 시간에는 이걸 해봅시다. 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요즘 세상을 경제적으로 표현해요. 자본주의사회라 하지요. 경제가 정치를 앞서서 대표가 된 거예요. 옛날 같으면 민주주의사회라 하는데 그게 아무 느낌이 안 와요. 지금 진짜 제대로 꼭 집어서 이야기한다면 자본주의사회가 더 확실하게 다가오지 민주주의사회는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자본을 지켜주기 위해서 민주주의란 정치적 체제가 도입된 거예요. 사유재산 보호하기 위해서. 존 로크의. 자본주의사회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보는 것은 뭡니까? 이스라엘이죠.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두 사회의 차이를 이야기해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란 뭐냐, 라고 물을 때 반드시 뭔가 어떤 개념을 설명할 때는 반대되는 개념을 거론해서 그 차이를 발견해야 제대로 양쪽의 개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다고 알 수가 있어요. 선생님이 학생에게 물을 때 반대되는 개념을 물으면 제대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지요. 어떤 단어를 물을 때 이 단어와 이 단어의 차이점이 뭐냐고 물으면 두 개의 단어를 한꺼번에 알고 있을 때 그 사용을 혼동하지 않는단 말이죠.

마찬가지에요. 성경에 이스라엘 나오니까 믿습니다. 이러면 거짓말이에요.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와 다르지요, 라고 물어야 돼요. 그러면 이방나라와 다르다고 하거든요. 옛날에 그 시대에 이방민족이 있었지만 지금 시대는 모든 이방민족이든 이방나라는 자본주의사회에요. 자본주의와 이스라엘의 차이점, 다시 강조합니다. 차이점이에요. 왜 차이점을 제가 언급하느냐 하면, 교회 나올 때는 이스라엘 되고 사회 나가면 자본주의사회, 이렇게 두 패를 다 쥐려고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한 몸이 양쪽 다 소속되는 법은 없어요. 자본주의사회에 소속되면 이스라엘에서 빠지든지 이스라엘이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빠지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왜냐하면 가랑이가 찢어져버려요.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일반 존재적 이야기할 때는 이런 차이가 안 나타나요. 집에 가면 아버지고 회사 가면 사장님이고. 이땐 차이가 없잖아요. 기능만 바뀌죠. 몸은 하나고.

그러나 이스라엘은 살아서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죽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 속에 들어갑니다. 아까 뭐라 했어요? 이스라엘은 무너지지 않지요. 이스라엘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차이점이 뭡니까? 자본주의사회는 반드시 무너지게 돼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지만 언급 안 해도 알겠지요.

자본주의가 버티며 자체적으로 안 무너지려고 애를 써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보면, 자본주의사회 바깥에서 계속해서 폭격을 해요. 천사들이 가만두질 않아. 이 세상 사회를. 인간들이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역량을 다해서 계속 반발을 다 해요.

요한계시록 18장 10절에 보면,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 큰 성 바벨론이 어떤 것으로 가득 찼느냐 하면,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이 나라가 몇 개라 했습니까? 큰 성, 단일성, 단일 시장이에요. 단일시장에서 가치를 뽑아낼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농사짓는다고 가치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가치를 교환해줘야 돼요. 교환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상인들이에요. 상인들 입장에서는 옛날부터 그랬어요. 국가의 경계, 국경이란 건 의미 없습니다. 나한테 커피가 있다. 저쪽에서 커피를 달라고 한다. 사상이 문제겠습니까, 국가가 문제겠습니까? 아무 문제없어요. 커피를 요구하는 사람에게 비싼 값에 팔면 되는 거예요.

옛날에 자본주의가 태동할 기미가 뭐냐 하면, 후추에요. 인도에서 나오는 향신료 후추를 유럽 사람들이 원하는 겁니다. 돈 가진 유럽 사람들이 원할 때마다 계속해서 자본주의사회로 접어가는 겁니다. 영국에서 차를 원할 때는 은으로 바꿨기 때문에 아편전쟁이 일어났거든요. 네덜란드 같은 경우에는 튤립이 가치 있다고 해서 어떤 사람은 집을 팔아서 튤립의 구근, 뿌리에 투자를 한 거예요.

자본주의사회는 미래를 계속 지속된다는 보장 하에 미래 안정성을 보고 투자하는 게 자본주의에요. 이걸 주식시장에서는 선물거래, 먼저 물건을 사는 거예요. 공매도, 주식도 없는데 먼저 계약해서 주식을 사잖아요. 이게 신용사회에요. 카드로 물건 살 때 뭐라고 합니까? 일시불로 할까요, 할부로 할까요? 묻지요. 뭐냐 하면, 당신은 몇 달 동안 살아 있다는 걸 보장한다는 겁니다. 홈쇼핑 보세요. 이 상품에 대해선 10개월 할부로 해줍니다. 그러면 내일모레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물건을 못 받지요. 산다는 보장 하에 하는 거예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물건이 있고 이윤 남아서 파는 게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건 상업주의고. 자본주의는 먼저 살 것을 생각하고 거기에 필요한 물건을 찾는 거예요. 자금을 대고 이윤이 많이 남는 쪽으로 필요한 물건들 갖다 대는 거예요. 돈의 가치, 돈의 본질이 뭐냐? 관계없어요. 이익만 많이 남으면 그게 좋은 물건이에요. 아무리 가치 있다 해도 그 다음엔 때려치우는 거예요.

노래방 처음 할 때는 장사 잘 되다 노래방 많으면 안 돼요. 노래방 왜 하십니까? 난 노래 부르는 걸 너무 좋아해서. 거짓말하지 마라. 이게 돈이 벌리니까 하는 거예요. 자기 하고 싶은 걸 하고 직장생활하면 그게 보람 있다고요? 자기 하고 싶은 걸 다른 사람도 하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윤이 적기 때문에 그만둬야 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꼭 테스 같아. 나는 소박하게 살고 싶어요. 그러나 자본이란 사회가 가만두질 않아요. 나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게 만들어요. 10년, 20년 한 장사를 그만두게 만듭니다. 이윤이 없으니까. 이윤이 뭐예요? 이윤이란 지금만 살지 않고 내일도 내가 살아야 돼. 거기에 필요한 돈을 이윤이라 합니다. 내일 산다는 보장 하에 내일 필요한 돈을 지금 만들기 위해서 이윤, 이자 이런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정신이에요.

제가 성경으로 이야기하니까 이게 뭔가 나쁜가하는 이런 느낌 들지만 성경 덮어버리세요. 그렇게 안 살아가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다 그렇게 살아요. 처음에 우리 대학 나올 때 교사하라고 해도 안 했습니다. 삼성, 현대에서 스카우트하는데 교사 월급이 반밖에 안 되거든요. 나는 애들 가르치는 게 사명이다. 사명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중에 현대 막히니까 교사라도 뚫으려고 하는 거예요. 이윤 때문에.

그 이윤 어디 쓸라고? 지금만 사는 게 아니고 내일도 살고 모레도 살고 한 달 뒤에도 살아야 되고. 일 년 뒤에 결혼하게 되면 여자를 위해서 살아야 되고, 여자와 사이에 자식이 나오잖아요. 그럼 내 가정을 위해서 내가 사표내고 싶어도 못 내는 거예요. 미래한테 얻어맞아도 살아야 돼. 석궁으로 쏴도 살아남아야 돼, 직장에서.

오야봉이 어떤 괴물 같은 짓을 해도 참아내야 돼요. 너 나와 같이 패자. 같이 패는 거예요. 회장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주목하고 있는 고향에 있는 부모를 생각해서, 대학 나와서 취직했다고 쳐다보고 있는 부모를 위해서 여기서 성급하게 사표내면 안 되는 거예요. 소박한 꿈도 없어요.

자본주의사회는 뭐냐 하면, 주님께서 결핍으로 몰아넣습니다. 계속해서 결핍하게 하는 거예요. 청년들 나라에서 돈 주잖아요. 그 돈으로 사이판 놀러갑니다. 그 청년들에게 뭐가 필요하냐 하면, 지금 밥이 중요한 게 아니고 다른 청년들이 놀러가니까 자긴 놀러 못 가니까 뭘 느낍니까? 결핍을 느끼는 거예요. 난 인간도 아니야. 놀러갔다와야 인간 되는 거예요. 사이판이나 괌이나 놀러갔다와야 돼요. 나라에서 돈 주니까 사이판 가고 장사하니 안 됩니다. 이러고 끝나는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 알라. 성경에 있더라도 그 말 안 듣습니다. 남들처럼 그럴싸한 인생이 될 때만 자기가 약간은 결핍을 줄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우리가 사는 사회입니다. 나를 가만두지 않고 나에게 계속 결핍을 조장해내요. 골프 치십니까? 못 칩니다. 아이고, 그 나이에 골프도 못 치고. 팔 부러졌나? 항상 약을 올려요. 바깥에서.

자기 인생에 만족하도록 가만 놔두질 않는다니까요. 결핍하도록 쑤시는데 그게 바로 천사의 활동입니다. 인간은 결핍하면서 스스로 망하라고. 원래 망하도록 된 인간이기 때문에 네가 아무리 살고 싶어도 망하는 쪽으로 살게 돼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각인시키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버려요.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은 죽었으니까 남은 것은 막 살면 되는 거예요. 이왕 죽었으니까. 살고 안 살고는 주님 소관이에요. 아침에 눈을 떴다? 내가 손가락으로 벌린 게 아니에요. 주께서 눈을 뜨게 하신 거예요. 인간은 잠잔다고 해서 잠자는 게 아닙니다. 잠자면서 나는 자고 있다, 나는 자고 있다. 이런 잠은 없어요. 그건 깨어 있는 거예요. 나는 자고 싶다고는 할 수 있는데 잠이 들면 귀신이 가져가도 몰라요. 이미 죽은 존재니까. 잠든 순간만큼은. 아침에 눈을 떴다? 죽은 데서 눈 뜬 거예요. 그 날 염려는 그 날 할 것이요 내일 염려는 할 필요 없어요. 이게 예수님께서 우릴 그렇게 다루겠다는 거예요.

신약에서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과 인간들이 속해 있는 자본주의사회 또는 옛날 같으면 농경사회라 할 수 있어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을 차별화시키는 겁니다. 차별 없이는 거룩이 없어요. 혼자 도 닦는다고 거룩이 되는 게 아니고 뭔가 거룩하지 않는 그 사람들과 만나게 하고 맞대게 만들어요. 거룩은 인간들이 평소 하는 것들과 마주하면서 그때 눈에 들어오게 돼있어요.

거룩이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닌 사람, 죽음의 용서라는 조건에 가동되는 나라와 용서가 전혀 없이 자기 행함으로 도 닦아서 천당 가겠다는 것과 대비를 시킴으로서 거룩이 나오지요. 그러면 이러한 요소가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죽을 때 있지요. 그러면 나와 나 사이에 거룩이죠. 육적인 나와 주님이 달리 보시는 이 사이가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거룩이 생산되는 거예요. 굉장히 쉽지요.

이게 막 살아야 돼요. 사람이 막 살게 되면 막 사는 본성이 뭐냐 하면, 결핍을 줄이려고 해요. 내가 저 사람만큼은 해야지. 적어도 내가 대학 나왔는데 차는 이 정도는 굴려야 되지, 라는 육적인 요소가 계속 나와요. 그러다 차를 박았다. “미쳤어. 주께서 나를 신자로 다루시는구나.” 그러면 주께서 차 고치는 값 주십니까? 안 줘요. 안 주는데 뭘 알았어요? 주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것.

나한테 이렇게 하게 되면 차 자랑이나 집 자랑이나 자식 자랑밖에 할 줄 모르는데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하시죠. 모든 변수는 주께서 하는 거예요. 뮤지컬 사장님이 술 먹고 차 몰 때 동승한 아가씨들 세 명인가 죽었지요. 그런데 내 딸은 왜 거기 안 탔어요? 일단 나이가 많고 그 동네 사람 아니고. 내 딸 사는 동네와 다르지요. 만날 기회 없지요.

그럼 묻습니다. 누가 만날 기회를 조성했습니까? 출신성분 다르고, 지방 다르고, 대학 다르고, 전부 다 달리하신 분이 누굽니까? 그 변수를 누가 만들었어요? 주님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벤츠에 탔던 사람은 주의 뜻인 거예요. 그리고 살았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지금은 다른 변수가 내 딸과 나한테 따로 인도하고 계신 거예요.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스라엘 속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이 점을 안다는 거예요. 내 일은 없고 모든 것은 주의 일만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주의 일뿐이라는 내 일은 아예 없다는 그것을 감사함으로 믿어질 때 이미 그 사람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인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을 언약으로 다시 보게 하옵소서. 그저 살면서 남하고 이야기할 때는 기죽고 살고 약 올림 당하면서 살았는데 성경말씀 보니까 그런 인간은 이미 죽었고 주께서 주님 증거 하라고 새롭게 인도하는 자를 발견했습니다. 주님의 거룩만 나타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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