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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23:50:38 조회 : 492         
흠 19020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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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25.♡.150.13) 19-02-04 15:11 
20190201a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흠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할 것은 레위기 21장 21절 봅시다.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 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여기에 흠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16절부터 나와 있어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에게 고하여 이르라 무릇 나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라고 돼있고 그 항목들이 리스트가 쭉 나와 있습니다.

어떤 자가 흠이 있다고 보느냐 하면, 소경, 절뚝발이,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손가락이 여섯 개인), 발 부러진 자, 손 부러진 자, 곱사등이, 난장이, 눈에 백반이 있는 자, 괴혈병(비타민 씨가 모자란), 버짐이 있는 자, 불알 상한 자,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여호와에 나와서 화제를 드리지 못하고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한다고 돼있어요.

우리가 이스라엘의 율법을 대하면서 상당히 분위기가 고요하다고 느낍니까, 분주하다고 느끼겠어요? 말씀을 보게 되면 규격이 정해져있지요. 뭔가 원칙 같은 게 고정돼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주합니다. 굉장히 바빠요. 하루하루 일과가. 아침에 일어나서 쓰레기 비우는 것부터 해서 굉장히 바쁜데 레위기에 나오는 성경말씀은 세상 변화에 꿈쩍도 안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든 간에 흠 있는 자는 나한테 오지 못한다는 이 원칙은 어떤 변명이나 어떤 상황설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정지된 질서, 또는 정적인 질서라고 해야 됩니다. 기존 질서는 분주하다고 제가 방금 말씀드렸는데 인간들은 질서에 대해서 계속 변화를 추구하지요. 왜냐하면 적응해야 되니까. 내가 살아야 되니까.

그렇다면 방금 한 걸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율법은 내가 세상에 적응하고 변화시켜나가는 나의 생존의 의지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고 정리하면 돼요. 하나님의 뜻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든지 가족들 밥 먹고 살다보니까 제가 죄를 좀 지었습니다, 라는 구차한 변명도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말씀을 외면해버리고 기존의 생활에 연연하면서 거기에 열중하느냐, 왜 그게 우선이고 관심사냐? 그것은 우리가 장소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선 꿈쩍도 안 하지요. 이 장소에서 내가 백 살까지 살아야 됩니다, 애썼습니다. 그러니까 봐주세요, 라고 하질 않고 하나님은 장소가 아니고 소속으로 바꿔버립니다.

네가 이민하든지 몇 년을 이 땅에 살았는지 울산에 이사 와서 아이를 몇 살까지 키웠는지,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몇 년을 살든 어디서 살았든 네 소속이 어디냐고 묻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소속은 뭘 초월한다? 우리 삶의 장소와 환경을 완전히 초월해버리죠. 우리가 어떠한 변명을 하더라도 흠 있는 것은 안 받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안 받는 게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건 안 받아요. 이방인들. 이방인들을 왜 안 받느냐 하면, 그들은 확정된 고정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요. 율법이 없으니까 내놓은 자식들이죠.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어떻게 하시는가? 그걸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보시면 정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버려두시는 거예요. 내 자식 아닌 것은 내버려두는 방식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내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 쪽에서 유지하게 된다면 그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반면에 교회 가든 말든 말씀 보든 말든 관계없이 방치돼있으면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사생자라 해요. 남의 자식이다. 내어버려두다.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그럼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불쌍한 사람일까요? 부모 없는 자식이 제일 불쌍하다 하지요. 안 거둬주는 자식이 제일 불쌍하지요.

매를 맞든 얻어맞든 간섭 받든 꾸중을 듣든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찾아와서 꾸중을 하던 잔소리를 하던 간에 뭘 챙겨주는 부모가 있으면 결국은 그 사람 성공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부모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미운오리새끼가 있잖아요. 내가 낳지도 않았는데 둥지를 사용하는 것 있잖아요. 점유해서 사용료도 안 내고. 하나님은 그런 실수를 끝까지 용납하지 않아요. 너는 내 자식 아니니 나가라. 그런 대우를 받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물론 그런 불쌍한 사람이 거의 대다수지요. 왜냐하면 넓은 길을 가는 사람은 많으니까.

챙겨주는 사람은 극소수에요. 모든 사람이 재벌 3세가 될 순 없어요. 그러나 재벌 3세는 있습니다. 그것도 0.1% 잘 사는 사람 있어요. sky캐슬에 다 살 수 없지만 거기 사는 사람이 있다고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다행스럽지요. 왜냐하면 천국 백성이니까. 하나님의 자녀니까. 그 자녀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흠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흠이 없다는 말은 달리 말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 모델이 있다는 거예요. 처음에 율법을 보내실 때는 뭘 겨냥했느냐 하면, 완벽하게 흠이 없는 분은 이렇게 돼야 된다는 모델을 상정하고 그 모델에 입각해서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럼 흠이 있다는 말은 무엇과 비교대상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따로 생각해놓은 모델이 있는데 그 모델에 비교해서 네가 이만큼 거리가 있다는 거예요. 흠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을 할 때는 하나님께선 인간의 어떤 융통성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정적 질서에요. 꿈쩍도 안 해요. 살다보니까 주께 소홀했다는 그런 구차한 변명 같은 건 하지 마라. 그 원형을 나는 포기 못한다. 율법의 원형은 포기 못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흠이 없다는 말씀 자체를 듣는다는 것은 결국 장소에서 소속, 소속에서 초월을 추구해야 돼요. 이스라엘 사람도 땅에 살고 이방인들도 땅에 사는데 땅에 살면서도 땅의 사람이 아닌 식으로 살아가는 것.

제가 아까 정적, 고정된 질서란 말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그만큼 변화가 심하단 말이죠. 바람 부는 대로 심하잖아요. 우리 마음도 하루 종일 다르잖아요. 그런데 모형이 있는 최종 나라의 상태에서는 고정된 완벽한 원형을 기준으로 해서 율법을 주시고 주께서 초월의 위치대로 우리를 이끄시는 거예요. 개도 사료나 주면 잘 사는데 밥이나 먹는 게 이 땅에서 잘 사는 게 아니에요.

초월적 존재, 남들 보기엔 똑같아요. 장소에 살고 하루 세 끼 먹고 어떤 사람은 두 끼 먹고 사는데 별 차이 없는데 주께서는 초월적 존재를 모델로 하고 있는 거예요. 비교가 안 되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비교가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사는 장소, 장소를 다른 말로 위치, 우리는 위치적 존재고 장소적 존재인데 우리는 이 땅에서 살려고 애쓰는데 어떻게 우리 힘으로 여기서 벗어나 초월에 이를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씀한다면 여기에 전쟁이 개입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에 전쟁이 개입돼요. 이거는 싸움이 벌어져야 돼요. 지금부터 어려워지는데 잘 들으셔야 돼요.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은 무기와 무기체제의 다툼인가? 아닙니다. 율법을 중심으로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은 의외로 무기가 아니고 이야기와 이야기의 다툼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야기니까 스토리죠. 왜 갑자기 여기에 이야기가 등장하느냐 하면, 보통 싸움은 주먹질을 동원하잖아요.

하나님의 싸움은 뭐냐 하면, 주의 말씀을 듣고 반응을 나타내고, 주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반응을 나타내고, 주고받고, 주고받고 하는 대화하는 형식이에요.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치 한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하듯이.

그럼 그 대화가 왜 싸움이 되느냐? 우리가 평소에 이 지상에서 위치에서 또는 장소에서 살기 위해서 누구와 대화합니까? 하나님과 대화 안 하죠. 바로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죠. 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와 주님의 대화와의 겨룸, 경쟁, 다툼, 이게 바로 초월을 향한 전쟁이에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18절에서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지니 곧 소경이나 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불알 상한 자나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는 즉 나아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이런 이야기를 대화니까 던지면 선뜻 동의가 되겠어요? 동의 안 되지요. 인간은 자기가 절뚝발이 되고 싶어 되는 게 아니고 소아마비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게 아닙니다. 여기 보면 불알 상한 자, 어릴 때부터 자기가 불알 상하라고 애쓴 것 없어요. 성기능에 문제 있다는 것은 자기 책임 아닌 거예요. 태어난 게 이 몰골인데 어쩌란 말이에요?

만약에 여기에 보태서 쌍꺼풀 수술한 사람 못 들어간다 하면, 쌍꺼풀 없는 사람 못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발 부러진 자, 손 부러진 자는 흠 있는 자로 규정한다 할 때 여기서 우리가 할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닌 거예요. 공평치 못하다, 하나님은 불평등하다, 왜 기회를 균등하게 제공하지 않느냐? 공평하신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스스로 자기에게 손댈 수 없는, 여지도 없이 해서 주류에서 도태시켜서 비주류로 돌리느냐? 이렇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자비로운 인자한 하나님 상이 일그러지지 않느냐? 뭐 나올 이야기가 한둘이 아니지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그런 구구절절한 반발의 요소가 바로 이 세상이 잘못된 원천에서 나온 스토리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얼굴에 곰보가 있는 사람은 교회 나오지 말라고 목사가 이야기했을 때 저는 개 같은 여자입니다, 하고 안 나오면 되는데 세상에 내가 나쁜 짓을 했습니까, 태어난 걸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인간의 존엄성을 개무시하느냐고 나온다면, 그런 불만과 불평이 바로 인간 자체가 잘못되게 돌아가고 있다는 하나의 표징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흠이 있는 자를 21장 16절 이하에서 지정한다는 것은,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이 자동적으로 내부적으로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전략하니까 또 어려운 게 나와요. 방금 제가 전략이라고 했지요.

전략과 전술이 달라요. Strategy, 이건 전략이고 tactics, 이건 전술인데 전략과 전술이 다른데 어떻게 차이 나느냐 하면, 전략은 어떤 목표치가 있어요. 목표치를 정해놓고 일관되게 밀어붙이는 건 전략이고, 전술은 그때그때마다 융통성을 가지는 게 전술입니다.

예를 들면 토끼와 거북이가 경쟁을 한다. 경쟁하면 토끼가 늘 이겨요. 토끼는 육상 동물이고 거북이는 해상 동물이기 때문에 육지에선 이길 수 없어요. 전략상 토끼가 항상 이기게 돼있는데 여기에 임하는 거북이의 전술은 뭐냐? 100m 달리기하는데 그중에 99m는 물속으로 달리는 걸 하면 돼요. 자기한테 유리한 이게 전술인 거예요.

전략, 전술은 다 어디서 나왔는가? 전쟁개념인 거예요. 성경에도 이런 게 있지요. 위장 후퇴하는 게 성경에 여러 번 나와요. 또는 은폐, 엄폐하는 것. 적들이 기가 살아서 교만할 때 비겁하게 후방에서 치는 방식, 그 대목이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오거든요. 특히 사사기에서 베냐민과 전쟁할 때도 나오고.

주님께서 전술적이 아니고 전략적으로 흠 있는 자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다고 선언해버렸습니다. 아까 이야기한 고정적인 거예요. 확정적입니다. 변함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델까지 취소하면서 봐주는 분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흠 있는 자는 오지 말라는 이유를 아셔야 돼요. 깊은 취지를 알아야 돼요. 제가 물어볼게요. 지금 이스라엘은 누구와 전쟁 중입니까? 율법으로 무장하는데 율법 없는 자와 전쟁하잖아요. 율법 없는 자가 누구죠? 이방인이죠. 이방인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이 없어요. 거룩이란 윤리 도덕이나 정치적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면 거룩이고 언약이 없으면 거룩 아니에요.

나중에 여러분이 천국 가실 때 어떻게 천국 왔느냐고 물으시거든 최종 심사하실 때 요한계시록 말씀대로 하면 돼요. 예수의 피로 씻었다고 하면 돼요. 열심히 교회 봉사했다는 둥 이런 되도 않은 소리하면 탈락입니다. 그건 내어버려둬요.

우리 구원이 구원의 목적이 아니에요. 구원의 목적은 예수님이 기준이었다, 원형이었다, 모델이었다. 그게 기준이에요. 하나님 일의 목표에 대해서 혼동하시면 안 돼요. 내가 죽어서 천당 가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여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는 게 성령 받은 성도의 존재 이유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장소에 매인다고요. 장소에 매이는 이유는 뭘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장소 다음에 뭐라고요? 소속이죠. 소속을 고려하지 않으니까 울산 땅에서 밥 먹고 살아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누구 소속이다? 나는 내 소속이니까. 내 가정소속이니까, 난 가장이니까, 난 주부니까, 난 이 집안의 아들이니까, 딸이니까. 이미 소속은 자기가 아는 눈에 보이는 늘 변할 수밖에 없는 그 장소에 자기 소속감을 최종적으로 두는 거예요.

그러나 율법이 주어졌다. 오늘 레위기를 보잖아요. 우리에게 레위기를 보게 하는 것은 네가 어디에 살았느냐는 것이 소속의 전부가 아니고 소속은 율법의 완성된 나라가 네 소속이라는 겁니다. 그럼 벌써 장소적으로 여기서 생존하려는 우리의 모습과 하나님의 의도가 다르지요. 그게 스토리가 다르다.

한 평생 인생 산 것을 쓰라하면 소설책 일곱 개는 쓴다고 하는데 길게 쓰면 일곱 권 나오겠지요. 그러나 일곱 권을 쓰던 일곱 권의 일곱 배를 쓰던 그건 누구 스토리에요? 나의 스토리고 이 장소에서 이만큼 산다고 애 깨나 썼다는 자기 자랑이란 말이죠. 그런데 성도는 누굴 자랑하라 했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에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잖아요.

십자가는 누구 스토리입니까? 예수님 스토리잖아요. 그럼 나의 스토리와 예수님 스토리가 만나야 되지 않습니까. 만나서 누가 월등해야 돼요? 내 스토리 뭉개버리고 주님의 스토리가 더 위에 있어야 되겠지요. 뭉갤 때 그냥 뭉개지면 안 된다고요. 어떻게 뭉개지느냐? 나는 흠이 있습니다, 라고 뭉개져야 돼요.

나는 흠이 있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원천과 무관한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에 대적이 되는 원천에서 흘러나온 그러한 스토리에 매여서 살아왔습니다. 인생 헛살았습니다. 살았는데 소용없었습니다. 부질없는 세월 보냈습니다. 이런 고백, 이 장소에, 울산이란 이 위치에 붙잡혀 살라고 소속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광산 김 씨가 소속인 줄 알고 그게 전부인 줄 알고 명절에 집안 제사 지낼 때 제사음식 다 만들면 며느리 도리 다하는 줄 알고 그런 식으로 살았지요.

율법은 안중에도 없고 율법은 생각지도 않고 말씀은 다 잊어버리고 그저 나를 위해서 남들과 이야기하고 대화하는 그걸로 내 인생 장식하려고 오늘도 눈치코치 다 보면서 긴장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날마다 변화되고 있는 거예요. 고정된 게 없어요. 마음도 한결 같지 않아요. 일기예보처럼 늘 달라져요. 안정된 것도 일관된 것도 없어요. 꾸준한 것도 없고. 애 잘 되면 좋았다가 잘못 되면 울었다가 그저 바깥 환경에 웃었다 울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초월을 모르는 거예요. 일단은 현재 이스라엘은 한 소속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스라엘은 초월로 변모시키려고 합니다. 초월로 변모시키기 위해서는 거룩이 인간의 힘으론 확정되게 아님을 보여줘야 돼요. 그러면 이스라엘 바깥에 이방나라를 배치해야 됩니다. 그것은 뭐냐? 비거룩이에요. 언약이 없기 때문에 거룩하지 않은 겁니다.

전쟁을 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이기게 하는 거예요. 누굴 상대로 해서? 바로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이방민족을 상대하게 해서 승리케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이스라엘은 거룩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렇다면 거룩을 표현하는데 첫 번째는 이스라엘 바깥과 전쟁, 방금 이것 이야기했죠. 또 한 가지는 뭐가 있겠어요? 이스라엘 내부에 원래 모델과 다른 요소를 율법적으로 규정하는 방식이 있어요. 그게 뭐냐? 지금 우리가 보고자 하는 흠이 있는 거예요. 제물에 흠이 있다든지 또는 인간 자체에 흠이 있다든지. 흠이 있으면 하나님의 거룩에 가까이 오지 못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이런 생각할 겁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만들지 뭐 때문에 흠이 있고 이방만족이 있느냐 하시는데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스토리를 몰라서 그래요. 우리는 자꾸 내 구원만 생각하니까 흠 없이 그냥 태어날 때부터 지적당하지 않고 죄인 소리 안 듣고 해서 태어나자마자 의인이라 해서 천국으로 데려가자. 이렇게 하면 어떻습니까, 라고 항상 자기 구원에 몰두하다보니 그런 거예요.

그러나 흠이 있다는 이 자체가 완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차이 남.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의 차이 남, 그리고 온전한 것과 흠이 있는 것과의 차이 자체가 완전이라면? 우리의 발상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야 되겠지요. 예수님 오실 때 유대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완전한 것이 율법에 흠이 없는 것이 천국 간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장례식에 참석 안 했어요. 자기 가족 외에는. 왜냐하면 죽은 자의 신발이나 옷이나 뭔가 묻으면 부정 탄다는 거예요. 정결치 못하다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로마에 지배를 받는가? 그동안 정결치 못했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못 지켜서 멸망한다고 그들은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래서 그 증거로 율법의 일곱 계급을 정했어요. 제일 윗대가리, 피라미드 제일 꼭대기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있는 거예요. 서기관이 있고. 제일 밑바닥에는 세리, 창기들이 있고.

왜 그런 피라미드를 이스라엘 한 가운데 두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의 지향점은 우리의 초월은 이런 식으로 이런 과정으로 가는 게 옳다고 모든 백성들에게 가르쳤고 양육했던 겁니다. 율법이 이야기하는 바는 율법을 지켜야 지킨 양만큼 거룩해지고 못 지키면 못 지킨 양만큼 그들은 지옥 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세리와 창기들이 천국에 먼저 간다고 이야기했을 때 12년 동안 혈우병 걸린 여인에게 네가 믿음이 크도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그런 이야기한 이유가 뭘까요? 그 피라미드 구조를 엎어버리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그런 피라미드 구조를 만든 것은 그게 완전을 향한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던 겁니다. 예수님은 그걸 뒤집어버렸어요.

제가 질문합니다. 그러면 거꾸로 죄 많이 지면 천국 가는 길입니까? 아니지요. 죄 진다고 천국 가고 강도 됐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저쪽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반대로 이야기할 뿐이지 창녀 됐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거꾸로든 바로 세우든 인간에게는 천국 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없다?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흠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은, 사람들은 뭘 생각하느냐? 흠이 없는 자는 가까기 갈 수 있네요,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거든요. 여러분, 반대의 반대가 진리가 아닙니다. 반대가 나쁘다고 해서 그 반대의 반대가 꼭 옳다는 보장은 없어요.

여기서 한 가지만 빼면 돼요. 성경은 날 구원하려고 있는 책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다. 그것 하나만 바꾸면 되는 겁니다. 그것만 바꾸면 매치나 되치나 그게 완전이라는 거예요. 그 자체가. 쉽게 말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고 물으면 예수님께서 지시한 게 옳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지 않은 게 그른 거예요. 따로 옳다, 그르다를 편성하지 마세요.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옳은 것, 나쁜 것을 내가 편성하잖아요. 왜 편성할까요? 그렇게 해서 나한테 유리하도록 내 구원의 조건이 강화되도록 그렇게 하고 싶은 겁니다. 역시 나 위주에요. 나 위주는 나의 스토리가 돼요. 그건 하나님의 전쟁 상대가 되는 겁니다.

말씀 다시 하겠습니다. 율법이 있을 때 율법을 통해서 그 장소에서 소속으로 바뀌려면 스토리와 스토리의 대결로 나선다 했지요. 그렇게 나선 이유가, 이미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서 주고받고 한 것이 여기 있는 거예요. 이 몸에 장착돼있는 겁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가 이미 우리는 눈치코치 보면서 살아오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구성한 스토리 내용과는 너무나 원리상 안 맞는 이야기를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들로 하여금 반발을 유발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흠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을 뜻합니까? 반발심을 이야기해요. 반발심에 대한 유도에요. 신약에 몇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와서 어릴 때부터 착했습니다. 율법대로 시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의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빈손으로 나를 따르라 했잖아요. 그럴 때 부자 청년이 근심해서 반발해서 주님을 떠난 것은 물론이고요, 그 광경을 보고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어요? 제자들이 더 놀랐어요. 그럴 것 같으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라고 자기 구원에 대해서 여전히 집착하고 있었던 거예요.

앞에 하는 말이 있지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는 이야기를 십자가 지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했잖아요. 우리도 제자들의 심정을 알려면 십자가 지셔서 대속했다는 걸 우리가 일단 모른다고 칩시다. 그리고 주의 말씀이 자체가 진리고 반드시 그 말씀대로 지키기 때문에 허튼 말씀은 안 한다고 분명히 확정지읍시다.

그런데 주님께서 앉아서 하신 말씀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그럴 때 주님이 앞으로 할 일을 전혀 모르는 제자들한테는 이게 얼마나 난감하겠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자연스럽게 이런 반발이 나온 거예요. 그러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주님의 답변은 간단했어요. 사람으론 할 수 없다. 이게 복음이에요.

사람으로 할 수 없다는 말은 구원받으려고 애쓰지 말라는 거예요. 애써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으로 할 수 없다. 제자들이 그 이야기 듣고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헛짓하고 있구나. 예수 믿는 게 소용없구나.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이 뭐냐 하면,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신다. 제가 묻습니다. 첫째, 이게 위로가 된다. 둘째, 위로가 안 된다. 몇 번이겠습니까? 인간의 스토리는 살아온 경력은 뭐든지 내가 할 수 있어야 희망을 가져요. 내가 못하는 것은 희망을 안 갖습니다.

만약에 저쪽에서 날 구원 안 한다면 난 끝난 거예요. 그러면 저쪽에서 나한테 구원을 주려고 어떤 압력을 가했는데 그 압력조차도 안 된다는 거예요. 압력을 행사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안 주면 끝나는 이야기를 주께서 하신 거예요. 이건 미칠 이야기입니다. 사람의 희망이 완전히 작살나는 거예요.

이래도 믿을래, 나 따라올래? 하는 그런 발언을 주께서 하신 거예요. 떠나려면 떠나라. 가려면 가라.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반드시 내게 오게 돼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누구 이야기냐 하면, 내 쪽에 뭘 했다는 스토리가 아니잖아요. 모든 스토리가 나한테 유의미, 의미가 있는 겁니까? 주님이 나로 못하게 해놓고 모든 것을 주님 쪽에서 하셨다는 것을 의미 있게 살아나기를 우리의 몸을 통해서 증거 되기 원한 거예요.

예수님의 스토리는 예수님이 하셔야 의미가 발생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맹탕이 아니고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요. 우리 의미는 뭐냐? 내가 이렇게 믿었다. 내 쪽에서 뭘 했다. 그것이 나의 스토리가 되고 그게 의미 있는 게 돼요. 내가 이미 의미 있게 되니까 주님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반발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은 낙담하는 거예요. 할 수 없다니까. 그런데 할 수 없음을 포함시켜야 완전한 주님의 일이 돼요. 그러니까 우리의 못남이 주이 일에 흡수가 될 때 주님이 완전해진다고요. 그래야 십자가가 유의미한 게 되니까. 낚싯대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로 구원하거든요. 나로 인하여 상처받은 주님의 상처 있잖아요.

창 자국과 못 자국, 그게 있어야 주님이 주님으로 완전해요. 팍팍 찔러줘야 돼요. 우리가 주님에 반발해야 되고 주님께 대들어야 돼요. 그래서 주님이 주님다워요. 날 죽이라, 인간들아. 너 한 고집하잖아. 너 구원밖에 모르잖아. 하나님은 안중에 없잖아. 너만 잘 되면 그만이잖아. 그 식으로 찔러봐라.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의 철딱서니 없는 짓거리도 주님의 완전에 재료가 된다는 사실.

우리가 그런 주님 앞에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한 말이 있어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절망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절망적인 그 이야기가 저가 이야기인 동시에 주의 이야기가 돼요. 절망케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기 스토리에 이미 포함이 돼있어요.

다시 우리 일상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 일상은 뭡니까? 그저 명절 됐다고 장 봐놨나? 며칠에 촌에 가나 그 이야기지요. 그 이야기가 모이면 나의 스토리에요. 그러다 명절 잘 지내면, 올해는 아무 탈 없이 전 잘 부치고 하니까 다들 좋아하고 이번 명절은 성공했네. 내 자랑 되지요.

자식이 서울의대 가면 왜 좋냐 하면, 그게 자기 스토리가 되기 때문에. 엄마, 아빠의 자랑이 돼요. 그 자랑이 왜 기분 좋으냐? 그게 내 집안의 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확정된 소속에 이런 잘난 아들이 있고 딸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스토리, 우리의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가 원천이 달라서 그래요. 우린 이미 악마부터 시작하거든요. 악마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그런 스토리만 짜낼 수밖에 없어요.

나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건드리지 말라는 쪽으로 모든 이야기가 거기서 시작되는 겁니다. 가인의 후예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심하게 다쳤고 돌아가셨고. 그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스토리가 있는 이 세상에 주님의 자기 스토리로 찾아오시면 너의 죄도 그게 완전이었다. 의롭다는 게 아니고 완전이었다. 누구 안에서? 예수 안에서 완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안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정죄함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도 주의 완전함을 드러내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 우리가 흠이 있고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것, 이방인은 바깥에 있죠. 흠이란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원천이 다르기 때문에 거룩이라 할 수 없어요.

본문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할 때 무화과나무가 있었거든요. 목이 말라서 열매 따먹으려하는데 아직 열매가 맺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다음에 열매 맺을 때 오시면 되잖아요. 이게 우리 스토리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시간적으로 개입해버려요. 내가 요청할 때 열매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너를 저주한다.

여러분, 이게 우리 스토리 역사 속에서 가당치 않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진리가 뭐냐? 예수님의 지시가 진리에요. 예수님의 요구조건이 진리에요. 이 핑계, 저 핑계대지 말란 말이죠. 그래서 보니까 무화과나무가 저주받아서 바짝 말랐어요. 누가 놀랐는가? 제자들이 놀란 겁니다. 제자들 상식에 너무나 반한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받는다, 이게 진리가 아닌 걸 알게 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이 진리가 아닌 걸 알았습니다. 애초부터 우리가 하든 안 하든 주께선 우리 것을 안 받는다는 것이 진리에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진리에요.

우리는 잔뜩 나의 스토리를 많이 만들어놨습니다. 그 속에 주님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환장할 거리도 많아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주께서 받지 않습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내어버려두사. 아무리 훌륭하고 착해도 주께 내어버려둠을 당하면 하나님의 바깥이에요. 하나님의 언약, 율법의 바깥에 있다면 그거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지금 뉴스만 나오면 불쌍한 사람들로 도배가 돼있어요. 안희정, 이재명, 김경수, 손혜원, 문재인, 온 천지가 내어버려둔 사람들의 자기 스토리로 도배가 돼있어요. 이제는 우리가 복음으로 그런 현상을 볼 줄 알아야 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음주운전하다 귀가하던 경찰관이 죽었다. 내가 만약에 퇴근하다 음주운전 차에 치면 역시 나도 죽을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우리는 내가 산다는 것이 나의 고유권한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계속 살려두는 거예요. 같이 인생을 살더라도 내어버린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르게 되고 하나님이 챙겨주는 사람은 이 사실을 미리 당겨서 알려주는 겁니다.

어차피 천국 가면 다 아는 사실이거든요. 네가 몇 년도 태어날 때 내가 챙겼고, 몇 년도 네가 길에 갈 때 챙겼고, 네가 아플 때 챙겼고. 지금 이 순간도 주께서 계속 챙겨주고 있잖아요. 그런데 나의 스토리에 세상 스토리가 너무 둘둘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갇혀있다 보니까 율법의 취지가 전혀 먹히질 않는 거예요. 주님의 스토리가 내 일상 속에 들어오질 않는 거예요. 내 스토리가 꽉 차여서. 창고에 빈곳이 있어야 물건 하나 더 들여 넣지요.

주님 뜻은 이겁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린 한평생 그렇게 고생하고 눈물 콧물 다 짜냈는데 나중에 천국 와보니까 너로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아플 때 있었고, 차에 치어 죽을 뻔할 때 있었지만 그건 아무 일도 아님에 속합니다. 오직 아무 일은 하나밖에 없어요. 주님의 일. 너 같은 인간을 위해서 네 죄를 대신해서 죽었던 그 십자가만 일이 돼요.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해야 돼요. 성도는 자랑할 수밖에 없어요. 왜? 우리는 애초부터 흠 있는 자요, 우리는 내다버린 이방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체가 결국 버림받습니다. 율법을 못 지켜서가 아니라 율법을 몰라서 버림받았어요. 율법의 기능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율법의 기능을 여러분 아시지요. 율법의 기능은 우리의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거예요. 그 기능을 이스라엘 백성은 몰랐어요. 그들은 나는 절뚝발이 아니다. 나는 불알 안 상했다. 좋다. 불알 상하지 않으면 천당 갑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율법은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율법은 다 지켜야 하는데 이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그건 헛방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한두 개 지켰다고 우겨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25.♡.150.13) 19-02-04 15:14 
20190201b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흠
(강의:이근호 목사)


흠이 있다, 문제 있다 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흠 있는 걸 제거하고 문제 있음을 고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 성도인 우리 입장에서는 옛날 율법처럼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하면 안 되고요. 성육신을 생각해야 돼요. 말씀이 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죄 많은 세상에 왜 오셨는가? 죄를 만들어놔야 오실 것 아닙니까?

일을 사적으로 남한테 싫은 소리 안 듣겠다는 그 자체가 창세기 3장의 상황을 모독한 게 돼요. 이미 우리는 물 건너갔어요. 이미 우리는 내 힘으로 천국 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성경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만 우리가 천국에 대한 어떤 감각을 느낀다는 것은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건 내 구원의 일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 식으로 구약 레위기를 다시 보게 되면, 흠 있고, 문제 있는 사람은 오지 말라는 말은 뭐냐 하면, 그 정도로 하나님이 원하는 기본 모델은 완벽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점을 알아야 돼요. 우리의 모습과는 족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완벽이에요. 따라서 우리가 감히 그 완벽한 세계에 들어간다는 것은 주제넘은 탐욕이라는 것을 인정해줘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이 본문을 다시 보게 되면, 예를 들어 23절을 보면, “장 안에 들어가지 모살 것이요 단에 가까이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라” 이것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의 재탕이라 보시면 돼요. 아들이라도 죄가 있을 경우에는 아버지 있는 곳에 합류 못합니다. 사흘 동안이지만 잠시나마 주님과 결별해야 돼요.

23절 끝에 보면,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이 뭔가 지키고 싶은 게 있어요. 하나님 계신 자체를 흠이 없고 티가 없이 거룩하게 만들고자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오지 말라고 거부하지요. 누구한테요? 같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24절에, “모세가 이대로 아론과 그 아들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였더라”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은 한 고집부리죠. 뭐냐 하면, 거룩하지 않은 것은 천지가 개벽할지라도 용납 못하겠고 단호함을 우리한테 제대로 이야기해주신 겁니다. 나 있는 곳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더러운 것들은 여기 참석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흠이란 것, 비거룩이죠. 더러움이죠. 이 더럽다, 비거룩, 흠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율법에서 나왔거든요. 율법에서 알려주니까 우리가 아는 거잖아요.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율법은 뭘 염두에 두느냐 하면, 완벽한 원형, 완벽한 모델을 염두에 두고 언급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완벽한 이스라엘을 두고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완벽함을 자기 힘으로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홀로 남겨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동행하십니까? 하나님이 동행하지요. 그러면 문제는 간단한 거예요. 동행하신 하나님이 완벽하잖아요. 이스라엘은 완벽하려고 애를 쓰고. 그러면 전쟁이 일어날 때 그 전쟁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방과의 전쟁과 또 하나는 이스라엘 내부와 내부적인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걸 다시 합쳐보면 이방과의 전쟁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부 전쟁의 일환이에요. 이스라엘이 이길 수 없는 전쟁터에 이스라엘을 몰고 나감으로써 그 전쟁결과와 이스라엘 범죄를 연계시키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연계시키면 율법이 책 또는 말씀 자체가 율법인 동시에 나중에 뭐가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역할 자체가 율법이 됩니다.

이걸 이스라엘 자체가 텍스트(책)가 돼요.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가 돼요.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그래서 제가 아까부터 이야기했잖아요. 나의 스토리가 함께 계신 주님의 스토리라고. 주님의 스토리로 구원받는다고. 거기서 따로 내 스토리를 끄집어내면 안 되겠지요.

그러면 전쟁 중에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인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망가지지요. 확실히 망가져요. 세상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에서도 다른 작은 나라의 경제는 망가지잖아요. 실제로 폭탄이 날아다니는 전쟁을 하게 되면 신혼부부라도 군에 가야 되고 애 낳더라도 피난 가야 돼요. 완전히 나의 인생, 소박한 무지개를 염두에 둔 나의 인생이 망가져버려요.

그러면 이 세상은 전쟁 중입니까, 전쟁 중이 아닙니까? 전쟁 중이죠. 영적 전쟁 중이잖아요. 그러니까 사적인 인생은 아무리 자기가 소망하고 원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지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일으키는 그러한 상태를 현실이라고 하는 겁니다.

현실이란 언약의 본질이 외부로 발산되는 것. 언약하면 율법도 포함되지요. 율법은 모세언약이니까. 언약이 외부로 발산되게 되면 이스라엘에게 그것은 누구의 스토리냐 하면, 이스라엘의 스토리인 동시에 주님의 계시가 돼요.

방금 이야기한 것과 첫째 시간과 연결시켜봅시다. 첫째 시간에 흠에 대해서 이야기했지요. 흠은 파고 파도 계속 흠이 나와요. 왜 그러냐 하면 흠을 언급하면서 흠이 양산되도록 주님께서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율법을 여기에다 계속 주입시킵니다. 아까 이스라엘 역사가 율법이라 했으니까. 주께서 일을 만들어요.

명절에 예상하기로는 집에 가서 곱게 잘 있다가 떡국이나 한 그릇 얻어먹고 나중에 처갓집에 갔다고 집에 오면 되지, 뭐. 이런 계획을 잡아놓는다고요. 우리 자신의 계획이죠. 그러나 처갓집에서 시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복음의 텍스트로 삼는다면, 우리가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지 무슨 일을 만날지 장담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스토리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거든요. 말씀 지키면 되지 하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맞닥뜨리게 하는 전쟁 가운데서 그들은 이방민족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전쟁을 유발시킨 동행하신 하나님께 온갖 원망과 불평과 반발을 다 끄집어냈어요. 모세에게 욕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게 욕하는 겁니다. 선지자에게 욕하는 게.

우리도 평소에 이런 불평불만이 입에 달렸잖아요. 에이, 씨. 이런 식으로. 왜 내 뜻대로 은혜가 유지되지 않는지, 이런 식으로. 왜 하늘이 그레이 색이지. 계속 우리는 불평할 요소들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킵니다. 유발시키면 열심히 하나님께, 이론상 다 알지요. 열심히 감사하고 고마워하려고 애를 쓰고 온 노력을 다해도 이게 어느새 가식적이 되고 거북한 환경 속에서 불평불만이 안 나올 수 없어요.

우리 자신이 내 뜻대로 안 되니까 울화가 터지는 거예요. 그래서 영적 전쟁에서 내 인생이 내가 원하는 식으로 곱게 가질 않고 자꾸 망가집니다. 지금 강의하는 것도 내 뜻대로 안 되고 목소리 망가지는데.

이스라엘은 그럴 때마다 계시 하나가 더 추가되는 거예요. 철저하게 사용하니까. 그래서 구약 책이 이렇게 두꺼운 거예요. 하나하나 이스라엘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까불었다. 자기 자신도 모르고 하나님 안다고 까불다가 혼났다. 그런데 그 혼난 상황을 주께서 의도적으로 유도했다. 자력으로 앞을 헤치지 못하게 만들어요.

이스라엘에 사울 왕이 있을 때 이건 후대 이야기잖아요. 사무엘상에 나오니까. 골리앗이 전쟁터에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골리앗이 목소리는 얼마나 크고 얼마나 큰소리치는지. 이스라엘 사람들 전부 주눅 다 들었습니다. 기 다 죽었어요. 일대 일로 붙자. 사나이답게. 이 졸장부들아. 나와 붙어서 이기면 줄게. 너희들 지면 우리나라의 종 되라. 지금 이렇게 나오잖아요.

누가 그렇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유발하신 거예요. 마침 타이밍 맞추어서 소년 다윗이 거기에 왔다가 율법적으로 보기 시작했어요. 저 할례 없는 것들은 하나님이 내어버려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경우에는 허깨비에요, 허수아비거든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허수아비의 외형만 보고 전부 다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작자들이.

그래서 소년 다윗이 나설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거기에 둔 것은 소년 다윗의 가치를 의도적으로 타이밍 맞춰서 높여주기 위해서 세팅한 겁니다. 그 소년 다윗이 나중에 다윗언약이 되는 거예요.

다시 갑니다. 언약의 본질이 외부로 드러나는 그것이 현실이다. 소년 다윗에게 현실의 분석은, 할례 없는 자가 할례 있는 자를 욕하더라. 사울 왕과 다윗 형들과 대다수가 보는 현실은 뭐냐? 힘 있는 자가 지금 큰소리치더라, 에요. 동일한 현실인데 보는 분석의 평가는 두 개가 나왔어요.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봅시다. 현재 내 인생에 일어난 것은 주께서 아직도 미처 모르는 십자가의 고마움을 더 높이기 위해서 나를 더욱더 흠 있는 자로 주저앉히기 위한 상황이라고 보시는 현실관. 거기에 반한 또 다른 현실관은 이렇게 내가 신앙에 게을러서 지옥에 갈 거라는 벌벌 떠는 현실관, 이 조시로 가다가는 탈락이라는 염려, 걱정은 혼자 다하는 현실관.

이 현실관은 내가 뭔가 해야 유지하는 이 정도 돼야 신앙인이라는 자기 측정하는 모습이에요. 아까 첫째 시간에 배웠듯이 누구 스토리입니까? 자기 스토리에요. 주님의 스토리가 아니고. 나의 완전을 도모, 이 정도 되면 기분 좋을 텐데, 하는 내 완전을 도모하는 것과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뭐냐? 그렇게 망가진 그것이 주님의 완전함에 이미 내용으로 포함돼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이 바깥으로 발산된 게 지금 나의 현실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 외부로 발산한 것이 지금 내 모습이기 때문에. 또 다시 반복해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이것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관계고 혜택이다.

이게 바로 흠입니다. 흠의 유용성이에요. 흠은 누구나 있어야 되고 흠이 사라지면 안 돼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흠집이 있어야 돼요. 이렇게 해도 여러분이 안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다시 복습해봅시다.

흠이 뭐냐 하면, 간단하게 반발심.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흠은, 내가 보기에 외형적으로 율법에 안 맞는 걸 흠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흠이 아니고 내 속에 그런 것은 좀 봐주면 되지 않습니까? 나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잖아요. 구구한 변명을 내놓는 식으로 반발하는 것, 감사와 고마움이 없고 반발하는 것 이게 흠이 되는 겁니다.

그 흠을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게 원천이 달라서 그래요. 두 번째 시간은 원천에 관한 문제를 시작합니다. 정리할게요. 비-거룩 또는 더러움, 속된 것, 비-언약, 그리고 흠, 이 모든 것은 어떤 스토리를 갖고 있는데 그 스토리의 원천은 어디서 나왔다? 하나님의 거룩에 반발하는 세력에서 나온 거예요.

강의할 때 기침 안 하고 듣는 사람도 불편하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반발이잖아요. 기침하면 기침하는 거지, 뭐. 내가 하고 싶어 했습니까. 안 했으면 좋겠다, 깔끔하게 들렸으면 좋겠다. 이게 반발이에요. 그래서 하늘의 별 딸 일 있습니까, 그래서 천당 갈 겁니까? 아니거든요. 주어진 대로 살아야지요.

자기 인생이 아닌데 자기 스토리가 아닌데 내 스토리를 집어넣습니까? 집어넣는 것이 원천이 수상한 데서 나왔어요. 나만의 자랑거리, 나만의 가치, 나만의 의미를 챙겨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은근히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그러한 음성, 그러한 욕구 그게 죽을 때까지 우리 속에 계속 가동되고 있어요. 이게 흠입니다. 이게 문젯거리에요.

그렇다면 이게 맞는다면,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셨다는 것은 모델이 온 거예요. 율법의 완성은 이런 분이다. 모델이 오니까 모든 사람이 심지어 열두 제자들까지 다 떠났지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십자가에서 세 명의 마리아가 있었지만 전부 다 믿음 없이 있었어요.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생각 없었습니다. 시체나 찾으러 주님 무덤 찾아간 여인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었어요. 그걸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이 말은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와 달라요. 다른 이름을 제외시켜버리는 거예요. 예수 이름으로 하면, 이 이름도 믿고 나도 믿고 주님 믿잖아요. 너 믿지 말고 주님 믿으란 이야기에요. 니 스토리 말고 주님 스토리로 네가 구원받는다는 뜻이에요.

네가 한 평생 얼마나 열심히 예수 위해서 애썼는지 그런 것 믿지 말란 말이죠. 그건 믿을 게 안 돼요. 내 이름이니까, 내 가치고, 내 의미니까. 인간은 자기 가치, 자기 의미, 자기 과거, 기억에 굉장히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게 자아성을 형성하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나로 인해 산다고 했잖아요.

이번 수련회 아가 할 때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거예요. 사랑은 어느 정도냐 하면, 나는 없어져도 괜찮아요, 가 사랑이지요. 자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거예요. 자기가 생각나지 않는 순간, 내 눈에 그대만 보이잖아요. 그대는 내 눈에만 보여요. 다른 눈엔 안 보인다는. 꽂혀버렸지요. 오죽했으면 아가에서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나는 사랑 때문에 병이 낫다. 상사병이라 하지요. 상사병, 잠 못 듭니다. 그립고 보고 싶어요.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왔을 때 다 떠나고 말았어요. 의도적으로 의도한 거예요. 양을 치니 떠났지요. 그 말씀을 이루려하심이라. 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만큼 인간들 내부에 하늘에 이를 수 없는 천국 갈 수 없는 악마적인 원천이 계속해서 인간 육신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붙들고 있어요. 너를 놓치면 무슨 소용 있느냐? 한 평생 너 좋으라고 살아야지 남 좋으라고 살면 안 되잖아, 하는 그런 내면의 욕구가 자꾸 가동되는 거예요. 그게 흠이 되고. 그게 왜 흠이 되느냐? 주의 말씀에 변명과 반발로 작용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서부터 어렵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 드리면, 이스라엘 율법을 완성하는 방법은 뭐라 했습니까? 두 자로 전쟁이라 했지요. 전쟁은 전략과 전술로 이뤄진다고 제가 했잖아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역시 그 방법을 사용하신 거예요.

마태복음 12장 3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를 해치는 자니라” 기준이 누구냐? 나입니다. 고요한 바다에 그냥 고요히 가만있으면 돼요. 그런데 거기에 큰 바위를 던지면 갑자기 격한 파동이 생기잖아요. 주님께서는 화평한 이 세상에 불화를 일으켜요. 격랑을 일으키려 오신 분이에요.

고요하다는 말은 사람이 이미 정신적으로 안정 상태에 있다는 거예요. 안정 상태에 있다는 말은 서로 의기투합, 서로가 의견이 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을 보세요. 막 싸우듯이 하지만 결국은 양보할 건 양보하고 협상하고 타협해서 다시 평정을 유지하잖아요. 세상 자체가. 천하에 죽을 것 같이 달려들다가 나중에 사과한다고 몇 마디하고, 그런 적 없다고 했다가 국민에게 사과한다고 조아리고 쑥 들어가지요.

세상은 고만고만한 거기서 거기까지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어요. 백번 양보해도 등 따시고 배부르면 최고라는 거예요. 참 멋진 교훈인데 여기 쓰기엔 아까운 교훈인데 제목을 길게 하면 이것 하고 싶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만이다. 그러면 됐지, 뭐. 북한 주님의 소원은 하얀 쌀밥에 소고기국 먹는 거예요.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와 만났을 때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떡을 먹으라 했잖아요. 그 악마의 말은 지금 이 세상의 평정을 유지하는 원리를 대표해서 악마가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악마의 의도는 뭐냐 하면, 하나님 축복의 마지막 결정체는 등 따시고 배부른 것으로 보는 거예요.

악마가 그렇게 철이 없지 않거든요. 말씀으로 사는 걸 몰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씀으로 사는 목적이 뭐냐? 등 따시고 배부르면 최고 아니냐는 것이죠. 말씀을 지키는 이유도 말씀 자체가 종결되는 게 아니고 말씀 지키면 복이 되는데 그 복이 뭐냐 말이죠. 등 따시고 배부른 거예요.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그래서 성령께서 일부러 예수님을 40일 동안 굶겼습니다. 굶기고 악마를 만나게 한 거예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40일 굶었을 때 어디를 지향하게 돼있어요? 누구나 등 따시고 배부른 것을 지향하겠지요. 과연 목적이 그거냐, 왜 하나님께서 나를 굶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바로 굶는 가운데서 등 따시고 배부른 목적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그걸 제거해보잔 말이죠. 그게 마지막 스크린인지, 마지막 최종점인지 잘라보잔 말이죠.

왜냐하면 악마가 그 뒷부분을 알면서도 가리고 있거든요. 여기까지만 오면 최곱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죠. 그러면 하나님 복 받은 거예요. 전부 다 거기까지 스톱시키는 거예요. 주님은 그걸 뚫고 간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굶음으로서. 굶어도 하나님의 목적에 이를 수 있다는 겁니다. 굶어도 말씀만 있으면 그게 영생이고 그게 하나님 뜻이란 거예요.

벌써 악마와 만날 때 주님께선 풍랑을 일으킨 겁니다. 인간 세계에. 악마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 조용하게 가자. 하던 대로 하자. 풍속대로 전통대로 유난 떨지 말고 조용한 게 좋은 거예요. 그러나 주님께서 전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구원될 수 없습니다. 영적 전쟁을 일으켜야 돼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마태복음 12장 30절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영적 전쟁 이야기할 때 나오는 말씀이에요. 마태복음 12장 26절에 보면, “사탄이 만일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분쟁 이야기 나오지요. 27절에 보면, “또 내가 바알세블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이렇게 해놓고 28절에,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은 악마의 전쟁을 해야 돼요. 29절에 보면,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30절에, 나와 함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적이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면 이 본문과 아까 흠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의아해하실 건데 성경 예수님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를 더 찾으면 비로소 그 이유가 나옵니다. 마가복음 9장 40절에 이런 말씀 나와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마태복음 12장 30절,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께서 왜 이랬다저랬다 하시는 거예요? 헷갈리게. 일관성이 없어요. 마태복음 12장 30절에는 너, 나 안 할 거야? 그러면 넌 적이야. 상당히 적극적이죠. 그런데 마가복음 9장 40절에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 쳐다보고 그냥 지나갔어요.

마가복음 9장 38절에,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그냥 지나가게 되면 그 사람은 우리 적 아니야. 왜? 반대를 안 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여러분들이 이해하고 싶지요.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으면 반대한다는 마태복음 12장 30절은 이미 주님 쪽에 붙어있는 한 반대하는 자가 누군지 명확하게 드러나게 돼있어요.

그래서 제자들은 신난 거예요. 왜? 자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는 자는 자기 집단과 함께 있지 않으니까 자동적으로 예수님에 반대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씹을 수가 있다니까요. 오히려 분별하기가 쉬운 거예요.

그런데 마가복음 9장 40절 경우에는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노골적으로 적대시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한 자란 이 말은, 이것은 세상에 있는 사람이 다 주님 편이란 말이 아니고 현재 주님과 함께 있는 제자들조차 하나님과 함께 안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비춘 겁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지금 이 시점에서 주님을 반대 안 하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 홀로 지고 가실 때 목자가 치니 양들이 흩어졌을 때 그들이 예수님에 있다가 떠나버린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비로소 자진해서 예수님의 반대편에 선 셈이 돼버리죠. 아예 안 한 것과 있다가 떠난 것과 어느 것이 배신자가 되겠어요? 바로 있다가 떠난 자들이 또렷하게 배신자가 되겠지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아직도 너희들이 주님 앞에 흠이라는 사실을 인정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노골적인 반대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름대로 성실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예수를 믿으려고 애쓰고 신앙생활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여전히 자기가 어느 정도로 주님의 반대자인지를 본인이 혹독하게 철저하게 경험 못하고 있어요.

한가할 때 교회 나왔다 칩시다. 그럴 때 목사가 하는 말이, 노골적으로 반대 안 하는 걸 보니까 성도 맞습니다, 라고 했어요. 위로한답시고. 그런데 명절 바쁘다고 교회 안 나왔어요. 그러면 앞의 원리라면 또 봐줘야 돼요. 바쁘니까 나중에 한가하면 나오겠지, 이렇게 되잖아요. 그럼 그 사람이 언제 주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도대체 알 수 있는 기회를 그 사람은 제공 못 받게 돼요.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아는 것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정말 나는 배신자인 것을, 다시 태어나도 배신자인 것을, 또 태어나도 배신자인 것을 육으로 난 것은 백 번을 천 번을 죽고 태어나도 배신자인 것을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돼요.

오늘 본문에 흠이란 것이 나왔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흠이란 것은, 나는 절뚝발이 아니다. 나는 코가 괜찮아. 난 소경 아니야. 아이고, 난 기분 좋아. 복 받았어, 라고 어쭙잖게 자기 자신을 옹호했던 그것이 나중에 신약에 와서 그게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성경해석인 줄 알아야 돼요.

지옥 갈 때 소경만 지옥 갔습니까? 멀쩡한 사람도 다 갔어요. 무슨 뜻입니까, 이게? 멀쩡한 유대인들 지옥 갔다고요. 예수님을 배반하고 배신했던 유대인들이 어디 신체에 흠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안 그래도 멀쩡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주님이 자기 의롭다는 자를 죄인이라 욕하니까 주님을 욕하잖아요. 나 죄인 아닌데? 간음한 저 여인이나 문제 있지 우린 돌 던져도 마땅하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원리가 또 나와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이 붙었잖아요. 지금 바리새인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게 뭐냐 하면, 세리가 부러워져야 돼. 그런데 바리새인은 죽었다 깨나도 세리 되긴 싫어. 왜? 자긴 율법에 흠이 없으니까. 그런데 세리를 참 쉽지요. 왜? 율법에 흠이 있으니까.

그럼 오늘 레위기 21장 16절부터 끝까지 말씀에 흠이 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멀쩡한 인간이 흠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아니, 멀쩡한데 무슨 흠이 있어요. 기다려 보세요. 주께서 우리 인생을 어떻게 몰아세우는지. 왜 신앙생활 하려고 교회 잘 다니는데 저에게 이런 일이 납니까, 라고 반발심이 나오지요. 그게 숨겨놓은 흠이에요. 그게 악마에서 나온 원천이에요.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 해볼게요. 악마는 인간을 빈 통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 대신에 그걸 대체해서 다른 걸 집어넣었어요. 네가 알아서 선과 악을 헤아리면 너는 신이 된다. 그냥 빈 통이 아니라니까요. 빈 깡통이 아니라 꽉 차있어요. 그 놈의 양심이란 이름으로, 선해야 된다는 의지로 꽉 차있다니까요.

이걸 흠이라고 여기는 사람 있습니까? 이걸 착함으로 여기지 흠으로 여깁니까? 우린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 자신은 교만하기 짝이 없고 정말 성도라면,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자체가 주의 일에 방해물입니다. 주여, 죽여주옵소서. 이런 고백이 하루에도 몇 번 나와야 돼요.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체가 주의 일에 방해물이에요. 살아 있으니까 자꾸 뭔가 꾸역꾸역 계획을 집어넣고 내 잘남, 내 의미 쪽으로 계속 뭘 해놓는 거예요. 오늘 내가 기침 많이 해서 얼마나 흠이 있음을 드러내서 감사한지. 기침해서 살겠어요. 죽여야 되지. 주의 말씀을 기침으로 훼방했으니 죽어 마땅한데.

꼭 살 필요 없습니다. 안 살아도 돼요. 살면 나한테 화근 돼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도 바울이 사는 것은,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것 외치기 위해서 계속 살려주시는 거예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그 소리하기 위해서 살려주시는 겁니다. 그게 완전이에요. 내 자체로 흠의 창고인 것을 깨닫는 그게 축복입니다. 축복이고 무서운 게 없고, 아까 강의 처음에 안정돼있어요. 흔들림이 없어요. 내 인생에 무슨 일 있어? 원래 망가져야 되는데 무슨 일 있었나.

좀 잘난 척하니까 약점 들춰내 알리고, 조금 가정이 평안하니까 애가 무슨 일 있으면 우리 집에 그런 일은 없다며 그것으로 잔소리하고, 성적이 늘 1등하니까 2등 내려왔다고 애를 잡아 죽여. 코디 붙여야 되겠어. 이래서 서울의대 들어가겠어, 이런 식으로.

그걸 성경에선 교만이라 하거든요. 교만은 남과 비교해서 교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과 비교해서 교만이에요. 그러니까 교만 아닌 인간이 없어요. 흠 없는 인간이 없습니다. 원천이 수상하지 않은 인간이 없어요. 다 수상해요. 다 엉터리에요. 인간 자체가 인간도 아니에요.

최선을 다하여 지키면 되지 않습니까, 교회 열심히 나오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자기 자신도 모르는 흠이에요. 일종에 반발이거든요. 제발 내 인생 그만 괴롭히라는. 나도 안다고. 나도 선과 악은 어느 정돈지 기본적으로 안다고 그것으로 버티는 거예요. 왜? 인간은 빈 깡통이 아니니까. 악마가 집어넣어준 게 있단 말이죠. 그것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대전에 어떤 분이 성경공부하려 오셨는데 좀 수심이 있었어요. 그 수심이 뭐냐 하면, 세종시에 아파트를 사놨는데 그날 세종시에서 준공을 거절해버렸어요. <제보자>란 프로 봤어요? 울산 남구에서 아파트 준공이 안 나는 거예요. 남구청에서 고발해도 까딱 안 해요. 무조건 들어가라는 거예요. 들어가면 하자보수 해주겠다. 안 들어갑니다. 벌써 여러분들이 솔깃하잖아요. 현실 이야기하니까.

성경공부를 하든 뭘 하든 간에 현실은, 그러니까 그분은 오도 가도 못하고 있어요. 그 날짜 맞춰서 이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준공이 안 떨어져서 지금 데모하고 난리에요. 시청에서 준공 못 받는 게 내 뜻이었습니까? 내 뜻 아니지요. 나는 점잖고 성경공부 잘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복을 받아도 내가 받아야 되고 준공도 딱 맞춰서 들어가야 돼요. 내가 예상하기는 내 행세에 비하면 그 정도 기본 복은 당연하다고 여기죠.

그런데 현실은 오도 가도 못할 때 속에서 울화가 터지겠지요. 주여, 이럴 순 없습니다. 바로 존재한다는 자체가 주님 앞에 대드는 악한 원천을 보여주는 시간들이 된 겁니다. 내가 산다는 자체가. 우리의 흠은 내 힘으로 지울 길 없고 오히려 발휘가 되고 키워지는 겁니다.

주께서는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반대하는 자다. 이제 그 뜻을 알았지요. 주와 함께 있을 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로마서 5장에 나와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위해서 십자가 피가 있거든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10절) 이제 이 문장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아들의 죽으심에는 솔깃하지만 앞의 문장,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라는 문장은 이상하게 느낌이 없어. 동의가 안 되는 거예요. 교도소 왔다 갔다 하는 그 인간에게나 해당되지 내가 왜 원수인데? 하나님 믿으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그런데 성경에서는 원수 된 자에게 뭐가 보인다? 피 흘림의 가치가 유난히도 커지는 거예요. 원수 된 자가 오늘 본문에선 흠 있는 자에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저 사람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하는 말이,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내 편이다. 이렇게 이야기했고,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반대하는 자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어쨌든 간에 제자들 듣기에는 기분 좋은 거예요. 지금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걸 제자들에게 이야기한 줄은 세상에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십자가 질 때 예수님 홀로 졌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양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거예요. 그들이. 인간의 힘으로 주와 함께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구나. 우리 인간이란 태생이 나는 나와 함께 있지 내 가족과 함께 있지 주와 함께 있는 그런 위인들의 못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흠 있는 자는 거룩하지 못한다는 이 말씀으로 지금도 성령께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우리를 때려줘야 되지요. 네가 바로 그 인간이다. 그럼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제가 절망적인 존재 맞네요. 전에는 인정했지만 살다보니 잊어버렸습니다. 맞네요. 과연 그러네요. 내가 잘 살아보겠다는 자체가 욕심이었네요. 기침 안 나고 좀 더 살아보자 이것도 욕심이에요.

마지막 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실은 우리가 만드는 게 아닙니다. 언약에서 발산되는 게 현실이에요. 사람들이 아는 현실은 그저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아요. 지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손질했다고 해서 세상 달라졌다? 지 세상이나 달라졌지 옆의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세상이란 서로 엮여져 있기 때문에 내게 이익이 오면 저쪽은 손해 보게 돼있습니다. 주식해서 돈 벌었다. 뭔 뜻이겠어요? 나 때문에 주식해서 돈 날아간 사람이 있다는 거지요. 왜냐하면 도박판이니까. 도박판의 돈은 그 안에서 뺑뺑이 돌잖아요. 내가 땄다는 말은 누가 잃었다는 거예요. 내가 등 따시고 배부르다. 이 말은 누가 춥고 배고프단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회사에서 보너스 많이 받았다는 말은 우리 회사 보너스 주려고 여러 회사 망했다는 그런 뜻이에요.

위에서 보세요. 하늘에서 보세요. 다 보이잖아요. 인간이 얼마나 이기주의적인지를. 그래놓고 나름대로 반듯하게 사셨다고요? 그다지 죄 진 게 없다고요? 성실했다고요? 누굴 위한 성실입니까? 자기 집구석을 위한 성실이죠. 내 가족을 위한 성실이잖아요.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한 거예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하나님 위한 적 없어요.

인간의 근성, 본성이 흠 있기 때문에 나 잘 되면 좋은 하나님이고, 못 되면 악마로 간주했던 겁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에게 악마의 모습 같은 거예요. 그런 주님을 믿는다는 것? 이것은 성령 받은 기적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도저히 인간의 능력으론 예수를 못 믿게 돼있어요. 가짜니까 쉽게 믿어요. 엉터리니까 인형 같으니까 쉽게 믿어요.

진짜 믿는 사람은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저 같은 인간, 탕자는 아들로 안 받아줘도 괜찮아요, 란 고백이 서슴없이 나와야 제대로 주님 만나신 겁니다. 나 같은 인간 더 살려줄 필요 없고 죽여도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그걸 사랑이라 하는 거예요. 그대 있음에 나 같은 건 없어도 괜찮아요. 이 마음은 우리에게 안정을 보장합니다. 정돈돼있고 고정돼있고 확정돼있어요.

다만 우리가 돌아서면 또 세상 스토리, 내 스토리, 주고받는 스토리 때문에 주님의 스토리를 잊어버리게 되면 다시 우리는 흔들흔들 다 잊어버리고 그러는데 다시 성령께서 주님의 스토리로 돌아오게 되면 그런 불평조차도 이게 하나님이 주신 완전함 속에 포함된 주의 일인 것을 우린 놓치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가 원한 요구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일을 훼방하는 존재인 것을 깨우치는 사랑인 것을 도리어 그것을 고맙고 감사해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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