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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5 00:29:36 조회 : 3626         
하나님의 오른손 110304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하나님의 오른손 1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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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210.♡.51.85) 11-05-03 13:03 
20110304a 울산강의-출애굽기 15장 6절 : 하나님의 오른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15장 6절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성경을 보면서 미제로 남겨진 해결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왜 오른팔을 사용하시느냐는 그 문제입니다. 사람에게 팔이 두 개 있잖아요. 왼팔, 오른팔 있잖아요. 하나님 같으면 적어도 오른팔, 왼팔을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 돼야 그게 하나님답지 않습니까?

야구선수가 오른쪽만 치는 것이 아니라 왼쪽, 오른쪽 스위치 타자라 하죠. 그렇게 될 때 만능타자라 할 수 있단 말이죠. 적어도 하나님 같으면 굳이 오른손을 고집하지 말고 그냥 왼손, 오른손 되는대로 다 치면 그게 가장 하나님답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의 원수를 칠 때 왼손을 놔두고 오른손으로 치느냐는 그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걸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넘어가면 안 되겠지요.

특별히 오늘 봐야 될 출애굽기 15장의 6절, 7절, 모든 말씀은 우리가 어떤 예상 못한 기적적인 일을 행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 능력입니다.’ 그렇게 해도 되는데 여기 출애굽기 15장 6절 이후 계속 보게 되면, 이것은 그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깊숙이 관여하셔서 흔히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일이 되었습니다.’라는 그 정도가 아니란 말이죠.

출애굽기 15장의 내용을 보게 되면, 이것은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도와주는 그런 차원이 아니고 아예 하나님께서 우리를 젖혀놓고 일방적으로 우리 인간이 해야 될 일에 ‘저리 가, 저리 가.’ 하면서 막무가내로 직접 뛰어들어서 모든 일을 홀로 끝장내는 그러나 세세한 그러한 과정을 표현해놨어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사람이 있는데 살아가면서 난처한 일, 어려운 일, 힘든 일이 생기잖아요. 그러면 난처한 일 또는 곤궁,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하나님, 난처한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여, 도우소서.’ 하면 현재 하나님께서 도와야 될 일이 어렵다, 힘들다는 결정을 누가 내린 거예요? 이 일이 이 정도로 힘들다는 판단을 누가 내린 거예요? 인간 자기가 내렸지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그래서 기적을 받아서 고맙다.’ 이것은 전혀 이스라엘이 말하는 그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인공이 인간이 주체 측이고, 주체 측이 일을 하다 난관에 봉착했으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내 일에 도와준 거예요.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의 이해는 이스라엘 자기 일에 하나님이 도와준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그렇게 오해했지요. 애굽에서 그들이 노예생활하며 힘들게 살 때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해서 정작 도와주러 온 사람은 모세와 아론이었잖아요.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도와주러 와도 오히려 그들은 그 두 사람을 하나님께 고소하죠. ‘하나님, 엉뚱한 사람 보냈습니다. 우리 일을 더 망치는 사람을 보내서 엉망진창입니다.’ 하는 식이란 말이죠.

마치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예수를 메시아로 보냈는데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헐~. 황당한 거예요. ‘나는 이런 메시아를 안 원했습니다. 하나님.’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입장은 뭡니까? 너희들 하는 일에 하나님이 도와주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 이런 일이 힘들다는 그것조차도 그걸 뭐로 발각되게 합니까? 그게 바로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만하는 죄다. 그러니까 이게 악한 것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와서 우리 히브리 사람들은 착한 사람, 애굽 사람들은 나쁜 사람, 이렇게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죠. 힘들게 사는 너희도 마찬가지고, 힘들게 했던 그 애굽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둘 다 하나님 보시기에 영 구원받을 자격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히브리인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을 왜 도와주십니까? 울산공부 한 번 건너뛰니까 잊어버렸죠? 그것은 바로 히브리인을 도와주는 하나님이 아니고, 히브리인은 새롭게 생산돼야 되는 겁니다. 그 생산하는데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들의 고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고통에서 나온다는 것은 해방신학이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들의 죄악을 도리어 이용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가 자기 민족을 해방시키려 할 때 도와줬습니까? 안 도와줘요. 자기가 애국자 하겠다고 안중근처럼 설치다가 깨졌잖아요. 그래서 모세가, ‘내 백성이고 뭐고 몰라. 양이나 칠래.’ 하고 목부 노릇할 때 누가 찾아왔어요? 하나님이 찾아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찾아왔어요. 그때 최초로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 이야기한 거예요. 누구한테 이야기했습니까? 모세한테 이야기하죠.

그럼 모세가 지시받고 움직이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할 일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할 일이에요. 하나님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할 일입니까? 구분하는 이 작업도 신학적으로 현재 정리가 안 된 상태에요. 이것이 학자들이 정리 못하고 있다고. 믿음이 없으니까 할 수가 있습니까? 못 하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찾아온 거예요. 모세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하신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가 뭐냐?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창세전의 계획, 예수 안에 있는 계획을 계획만 하나님이 잡고 실행은 인간이 하는 게 아니에요. 계획 잡은 것도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실행하시는 하늘나라는 그런 구조로 돼있다는 것을 세상 최초로 오직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만 그 계시를 알려준 거예요.

이방나라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어요. 이방나라는 신이 계획 다 세우고 신이 다 하고 그래요. 그걸 신의 주권사상이라 하는데 신이 알아서 다 해버려요. 계획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실행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런데 왜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을 구분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일을 하시느냐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들었다고 돼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으로 또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지요.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간이란 피조물은 인간 자체에 목적과 의미가  그들이 어떻게 행복하게 사느냐는 의미가 없고 그들에게 무엇이 뿜어져 나와야 됩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 경우에만 그게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안 나오면 그건 사람이 아니고 그냥 흙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발전하면 마귀 형상 되지만.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이 말을 요한복음 1장의 유명한 말씀에 보면, 태초에 무엇이 계시니라? ‘태초에’ 뒤에 괄호를 해놓고 다음에 괄호에 집어넣으세요. ‘태초에 (     ) 계시니라.’ 하면, 대부분 사람은,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할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있다는 이야기하려고 요한복음이 있는 게 아닙니다. 태초에 누가 있어요? 말씀이 있는 거예요. 기독교는 하나님 종교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교가 아니에요. 무슨 교입니까? 예수교에요. 말씀에 대해서. 그 말씀이 육신 되신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냥 일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일하는 것과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도나 개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요. 그거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한쪽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조작된 신이고 우상이고, 한쪽은 진짜 우리 앞에 나타난 나를 본 자가 누굴 봤다? 아버지를 본 자라 해서 나를 보지 아니하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숨어계신 분이고, 우리가 상상한 것은 헛껍데기, 그건 하나님도 아니에요. 그건 가짜라니까요.

어려운거니까 새로 하겠습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우리는 하나님 거기 계시고 나 여기 있고 그걸로 끝나는 줄 알지만 중간에 매개가 있어요. ‘매개’란 것 알지요. 공인중개사. 집거래 할 때 중간에 공인중개사 거쳐서 하잖아요. 그게 매개체. 보통 선 볼 때 중매쟁이해서 보잖아요. 보통 우리가 매개할 때는 매개는 매개로 끝납니다. 일 성사되고 난 뒤에는 당사자가 만나지 필요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할 때는 우리가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필요 없어요. 인간은 언제 인간으로 있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 될 때만 인간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빠져버리면 인간은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아는 이야기할게요. 먼저 것 있는 것은 먼저 것을 위해서 나중 게 있는 게 아니고, 성경은 나중 것을 위해서 먼저 것이 있어요. 먼저 것은 아담이고, 나중에 계신 분은 마지막 아담이고. 먼저 아담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모형이고.

매개되는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인간이 있는 것이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날 위해 죽었다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함이라 해서 처음 창조했던 그 형상을 그대로 지금 지속시키는 거예요. 그걸 주께서 포기 안 했어요. 그대로 유지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 취급을 안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교회가 예수님을 중보자라 해서 매개체로 보니까 일단 구원을 시켜놓고 그 다음에 누굴 치워버립니까? ‘매개자는 저리 꺼져. 이제 하나님과 맞상대할 거야.’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처럼 되는데 그런 예수가 바로 엉터리 예수, 가짜 예수에요. 진짜 예수님의 영은 그런 식으로 예수 믿으라고 그런 영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진짜 성령이 오게 되면 옛날의 사울처럼 내가 여호와에 대해서 살았던 그것이 곧 내가 알았던 여호와가 우상이고, 그 우상을 만든 내가 우상인 것을 고백하는 사람이지 성령 받아 놓고, ‘예수님 고맙습니다. 저리 가세요.’라고 치우는 그런 성령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왜 하필 오른손이냐는 그 이야기입니다. 왜 왼손이 아니고 오른손이냐? 왼손으로 비비고 오른손으로 비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오른손으로 비비시는 분이냐 말이죠. 이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 위해서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일을 젖혀놓으시고 본격적으로 하나님 자기 일을 처음도 주님의 이름, 끝도 주의 이름 그래서 주님의 이름만 높아지는 것, 그걸 처음부터 추진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가 필요한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주의 이름 앞에 우리 성도가 필요하죠.

그래서 출애굽기 15장 하는데 ‘주여, 우리 민족이 어려울 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우리가 난처한 지경에 도와준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일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어떻게 일을 일으켰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난처하게 만드는 일을 하신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말하죠. 목사님, 예수 믿고 난 뒤에 신앙의 삶은 어떻습니까? 막 사시기 바랍니다. 막 사시면 본인이 원치 않는 길을 가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은 게 아니고 구원을 당한 겁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싶죠. 구원받고 싶은 그 구원을 일체 주지 않고 그냥 구원을 당했으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구원의 길을 가는 겁니다. 내가 아는 구원의 길은 활짝 고속도로에요. 넓은 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당하게 하시는 구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주님 가셨던 그 오솔길이에요. 오솔길을 둘레길, 산책길. 그야말로 유명하지 않는, 알려지지 않은 그 길이 어디서 끝나는지 어디로 갈래길인지 아무도 모르는 다만 성령께서 샛별로 인도해줘야 갈 수 있는 그 길을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어려울 때 도와주는 신은 마귀가 도와줍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하나님은 없고, 어렵게 만드는 하나님은 계시죠. 흥분하면 소리 안 난다 해서 주의해야 돼요. 지금 흥분 안 하게 됐어요? 어려운 일을 도와주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지금 그냥 편안히 사시는 인생도 어렵게 만들어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우기지만 결국 어려운 일 당할 때 ‘주여, 어렵습니다. 도와주소서.’라고 우리 어려운 것을 기회로 해서 기도나 하는 그런 인간의 육의 본성을 폭로시킵니다. 그래놓고 정작 도와주기는 우리가 예상한대로 안 도와주고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처음부터 어려움을 줄 때부터 이미 스케줄 따라서 주께서 예상 못한 길로 우리를 데려가죠. 그럴 때 주의 오른손이 저희를 인도했다. 비로소 오른손이 나와요.

오른손이 뭐냐? 이제부터 이야기해봅시다. 오른손, 성경에 이런 단어가 나와서 굉장히 어려운데 그냥 어렵더라도 이야기할 때까지 해봅시다. 하나님이 천지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을 위함이라 했지요.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다 돼있어요? 태초에 말씀이 있다 했어요? 태초에 말씀이 있지요.

태초에 하나님이 있다면 창세기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게 아니에요. 태초에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은 16절에 보면, 육신이 되신 말씀 아닙니까. 결국은 요한복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한 자로 줄이면 ‘주’가 돼요.

그러니까 지금 천지 창조부터 요한복음까지 연결해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천지 창조한 게 아니고 주께서 주를 위해서 한 거예요. 그리고 주가 되신 자리가 누구냐 하면, 자기 아들만 주가 되세요. 그 아드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적어볼게요.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둘 중에 어느 게 맞는가 보세요.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 다음에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이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아버지에요. 아버지란 개념으로. 그냥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 하나님일 경우에만 이것이 진짜 하나님이고, 아버지로 나타나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이 조작해낸, 만들어낸, 꾸며낸 이미지에 불과해요.

이 모든 세계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로 짜여서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나, 아들이다.’해서 아들 되는 게 아니에요. 아들이라 해도 주가 되려면 반드시 십자가 피를 통과해야 아들이 돼요. 이게 굉장히 신기해요. 죄 없으신 분이 그냥 하늘나라 가도 괜찮아요. 에녹도 그냥 갔잖아요. 엘리야도 그냥 갔지요. 그럼 엘리야 그냥 갔으니까 그걸로 구원 안 됩니까? 엘리야가 하늘나라 천사가 와서 불수레 탔으니까 우리 보기는 최고 아닙니까. 하지만 변화산에서 엘리야가 예수님한테 뭘 부탁합니까? ‘주여, 언제 돌아가십니까?’ 이 말은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날 만드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가 되시면 그 효과로써 우리도 구원되는 거예요.

그걸 어제 가락교회 강의할 때 했습니다. 종소리, 이건 수요일 설교다. 종소리가 우리에게 들리면 종소리를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저쪽에서 댕댕 종을 치면 그것이 음파를 통해서 전달될 때 그 효과, 종은 저쪽에서 치고 그 결과가 우리에게 오잖아요. 주께서 하신 십자가의 파장이 댕댕 울려 퍼지면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도달하면 이것이 새 언약으로 도달하면 구원되는 거예요. 그러면 종소리를 내가 만들었다. 자기가 무슨 종소리를 왜 만듭니까? 종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그쪽을 쳐다봐야지. 그게 바로 주의 증인 되는 거예요.

‘인간이 뭡니까?’ 물으면, 인간은 예수님의 시다바리에요. 의의 종 되는 것, 그걸로 최고의 인간입니다. 천사도 흠모할 이야기에요. 천사도 부러워서 어쩔 줄 몰라. 천사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십자가를 통과하게 돼있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아들의 피로 말미암아 아들에서 주로 올라갑니다. 그럴 때 천지 창조를 하신 목적이 주와 주 사이에서의 거래와 창세전에 했던 의논에 의해서 전부다 완성되는 거예요. 그때 주가 둘이니까 한쪽의 주의 이름 자리를 ‘오른손의 자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시편 110편에 나와요.

시 110편 1절,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 다음에 5절에 보면,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여기에 오른쪽의 자리가 천지 창조할 때 우리 인간은 몰랐어요. 인간은 자기 만드는 것만 신경 썼지 언제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해서 의논해서 천지 창조했다는 것을 인간은 다 몰랐습니다.

그 당시 아담한테 알려준 힌트가 있었어요. 선악과와 생명나무였습니다. 처음에 등장한 선악과는 뒤에 나오는 생명나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선악과가 먼저 있는 거예요. 선악과가 존재해서 깨지는 순간에 생명나무는 그 진가가 발휘되는 겁니다. 선악과가 안 깨졌으면 나란히 있는 거예요.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뭘 의미하느냐?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의미하는 거예요.

선악과를 인간이 따먹었을 때 배후의 악마가 따먹게 했죠. 악마가 등장하고 그 악마를 하나님이 상대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상대해요? 시편 110편에 보니까 장차 주의 자리를 앉을 분이 주의 원수를 상대해서 꺾을 때 비로소 주가 주답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등장하지 않으면 주도 등장하지 않아요. 세상의 모든 악마란 피조물, 인간이란 피조물조차도 모든 것이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높이기 위해서 배치된 피조물들이에요.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고생했다. 고생하니까 도와주세요. 뽀빠이 도와 달라. 그들의 요구조건을 이뤄주는 게 아닙니다. 그들로 하여금 어렵게 만드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와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일부러 그들을 어렵게 한 거예요.

좀 더 이야기하면 그렇게 어렵게 된 것이 바로 왕이 등장하는데 이 바로 왕이 요셉의 은총을 모르는 사람이 등장한 거예요. 왜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까? 요셉의 은혜를 잊어버려야 히브리인들이 거기서 고생깨나 하고 노예생활하고 그래야 그들이 부르짖고 그래야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슬슬 등장하는 거예요.

맹세가 이뤄질 때 등장하는 것이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모세한테 처음으로 ‘나는 여호와라 너희 조상들한테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지금 이름을 밝힌다.’ 무슨 뜻입니까? 모세, 네가 하는 모든 일은 너의 이름이 아니고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 일이다?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일이다. 모세 앞장세워서. 그래서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이름이 주가 되기 위한 필수코스로써 이렇고 저런 과정을 밟아야 되고 그런 과정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원수, 악마의 정체가 부각이 되는 겁니다.

그게 여기 15장 6절에 나오네요. 다같이 읽어봅시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이 원수는 인간이 분간 못하는 원수에요. 우리는 자기 원수는 자기한테 사기 치고 도망간, 전세금 안 내주는 집주인이 원수지, 자기 욕하는 사람이 원수지, 주의 원수가 누군지 몰라요.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주의 원수에 장악돼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우리가 아예 주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의 심리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악마의 말이라면 껌뻑 죽습니다. 그렇게 악마의 말이 달콤해요. ‘목사님, 돌이 떡 되게 해보세요. 능력 있습니다.’ ‘당신, 날 알아주는군요.’ ‘목사님, 기적 일으켜드릴까요? 그러면 많은 사람에게 인기 있을 건데. 한번 해보실 랍니까?’ ‘아이고, 세상이 이렇게 고마울 때가.’ ‘목사님, 이왕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세상권력을 맛봐야 안 되겠습니까?’ ‘아이고, 고마워라.’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달콤한 악마의 유혹을 배척 정도가 아니고 기다리고 있다니까요. 그것도 간청하면서 간구의 영을 받아서 마귀의 기적을 기다리는 심정이라니까요. ‘좁은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이런 건 안 듣지요. ‘머리 둘 곳도 없으리라.’ 이런 소리는 아예 안 들으러 해요. 내가 잘못 들었나? 안 들은 걸로 친다니까요. ‘스데반 집사님 돌아 맞아 죽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어어. 애 시집도 안 보냈는데 왜 그러십니까?’ 사십대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 맞고, 강도의 위협과 도둑의 위험, 굶기도 하고. 굶기는 왜 굶어요? 일용한 양식이 있는데 왜 굶어요. 이런 것은 원치 않습니다.

우리 자체가 마귀를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고 마귀를 학수고대하고 있는 입장이에요. 이거는 우리가 나쁜 게 아니고 선악과 따먹어서 그래요. 선악과 따먹을 때 이미 우리는 물 건너갔어요. 맛이 가버렸어요.

사람이 아무리 진리가 중요하고 고상하게 해도 원하는 것은 그냥 즐길 거리입니다. 즐길 거리 중에 하나가 교회 나오기 아닙니까. 재미없으면 교회 안 나오잖아요. 즐긴다는 말은 내 욕망에 맞도록 외부환경이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걸 다 간파하시고 십계명 제일 마지막에 무슨 계명입니까? 탐내지 말라고 돼있죠. 탐을 내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새로운 것에 대한 탐, 호기심에 대한 탐, 탐내는 재미로 사는데 거기다 탐내지 말라는 초를 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누구야. 탐내지 말라는 게.’ 오히려 그걸 죽이죠. 돌판을 줘봐야 우리는 매일같이 돌판 깨기 바빠요. ‘이게 이따위 돌판이 다 있어.’ 십자가라면 십자가를 분질러 버려요.

우리가 원수인데 뭘 원수를 이겨요. 우리 자체가 하나님 원수인데. 로마서 5장에 나오잖아요. 원수 된 자 아닙니까. 하나님 원수 된 자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원수라는 것이, 너희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를 내가 데려가는 그 언저리, 그 옆에, 그 홈 패인 곳에 숨어있던, 쟁기로 파면 흙의 새로운 기운이 나오잖아요. 지렁이도 나오고 밑에 있던 거름도 다시 갈아입듯이. 주께서는 우리를 쟁기로 사용해서 데리고 갈아버리면 그 갈린 홈을 통해서 숨어있던 원수들이 달려들죠.

달려들 때 그 원수들이 노리는 건 뭡니까? 알려드릴게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은 무용지물이다. 이것 믿지 마라.’라는 것이 애굽과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을 무의식 가운데 본인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이미 거기에 푹 젖어 그동안 430년 동안 그들은 살아왔던 겁니다.

그러면 신약시대는 무슨 언약입니까? 새 언약이죠. 새 언약, 십자가란 말이죠. 결국 하나님의 원수란 뭐냐 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잘 먹고, 잘 사는 게 좋은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을 성도되게 하시고 그 성도로 하나의 쟁기로 삼아서 끌고 다녀버리면 홈이 파이고 홈 파인 곳에 십자가 믿어도 그 다음에 유명한 말, ‘십자가가 돈이 안 되고 힘이 안 된다. 십자가 포기하라.’ 돈도 안 되는 언약, 힘도 안 되는 언약. 제가 얼마 전에 칼럼 썼잖아요. 교인들은 분노하고 있어요. 건드리면 폭발하죠.

쉽게 말해서 ‘왜 복음을 아는데 가정형편이 안 나아졌습니까? 그러니 이건 엉터리 복음입니다.’라는 평소에 있던 생각, 스데반 집사나 사도바울이나, 열두 제자들이 갔던 그 길, 그 생각은 깡그리 다 잊어버리고 소위 예수 믿고 잘 됐다는 쪽이 그게 하나의 모델로 이미 자리 잡았어요. 그게 하나님의 원수인 줄 몰랐지요. 그걸 신봉하진 않았지만 어느새 보니까 그것에 우리가 아미 닮아버렸어요. 그쪽에 이미 젖어버렸어요.

그걸 어렵게 ‘언어구조’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구조는 어려운 말인데, 내가 말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위치를 말해줘요. 우리가 쓰는 용어자체가, ‘언어생활 바르게 하세요.’ 이 문제가 아니고 그런 용어를 쓴다는 자체가 어느 위치에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언어라 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 바깥의 환경이 나에게 말을 건네 왔고 우리는 거기에 응답했을 뿐이다. 세상이란 소통해야, 말이 통해야 하나의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대표적인 것이 김대형 씨가 질문하는 것 있죠.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 사람이 ‘아멘 할렐루야’란 말을 뒤에 추임새로 갖다 붙이는 것은 그쪽 교회에서 다들 그렇게 한 거예요. 만약에 그걸 사용 안 하게 되면 그쪽에서 왕따 당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아멘 할렐루야’란 말을 자기가 쓰고 싶은 게 아니고 이미 그쪽에서 그것을 썼고 자기는 거기에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했을 뿐이란 말이죠. 모든 언어생활이 다 마찬가지에요. 십자가마을도 뭔가 십자가 피 이야기해야 성도 값 하는 줄 알고 피, 십자가 이야기하잖아요. 소름끼친다니까. 이래서 원수에요.

출애굽기 15장을 하고 있는데 15장을 하면서 그냥 쉽게 ‘하나님, 우리 어려울 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면 누구 스케줄이냐 하면, 내 스케줄에 하나님께서 잠시 끼어든 것밖에 안 돼요. 그런데 출애굽기 15장의 모든 계획은 완전히 히브리인들이 예상도 못한 일방적으로 누가 정했어요? 하나님께서 다 정해놓은 거예요. 그 달성하는 방식까지라도 우리가 예상 못한 세상에 홍해에 사람을 몰아넣는 법이 어디 있어. 끊어진 다리로 건너라는 말과 똑같은 거 아닙니까.

그래서 출애굽기 15장을 하나님 이름이라 했는데 저는 이걸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 이름이란 죽음의 사자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모든 것을 다 죽여 놓고 그 다음에 구원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만 구원되고 버려야 될 사람은 버려버린다.

그 결정을 누가 하느냐? 죽어 있었는데 구원된 사람은 자기가 폼 잡아서, 예쁜 체 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그 모든 공로는 하나님의 언약을 홀로 다 이뤄내신 하나님의 이름,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댕’하고 종소리 나니까 성령이 와서 귀에 울림이 주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소리가 내 안에서 십자가 종소리로 변해버린 거예요. ‘이 모든 것은 주께서 나에게 일방적으로 껍데기로 사용해서 집어넣은 결과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출애굽기 15장 17절에서 하나님의 성소라 하는 거예요. 그러니 완전히 이스라엘 사람은 들러리에요. 하나님 일에 들러리였습니다.

그러면 오른손은 뭐냐? 왼손이 있고 오른손이 있는 게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언약을 이룰 때 사용하는 한 마디로 팔이에요. 팔이라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15장 16절에,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 한쪽 팔이 있는데 한쪽 팔만 사용한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룰 때 동원되는 로봇 팔은 오직 오른손밖에 없다 이 말이죠. 왼손을 사용 안 하고 오른손을 사용한다는 것이 아니고 일하시는 그것을 오른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냥 전담하는 일 자체를 오른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본체는 오른손의 본체는 지시와 명령은 왼쪽 팔에게 받는 것이 아니고 몸체 되시는 하나님 자체에서 모든 지시와 명령은 오른손으로 다 기울게 돼있어요.

왼손이라는 것이 사사기 3장 15절에 보면, 왼손일 때는 특이한 상황일 때 정상이 아닐 때 왼손이 등장해요. 왼손잡이 에훗 그리고 또 다른 데 보면 왼손잡이가 존재하는 게 나와요. 왼손잡이 에훗이라 해서 왼손잡이를 강조하는 걸 봐서 상당히 이건 장애자 같은 느낌, 정상이 아닌 그런 사람을 사용한 겁니다.

그렇다면 오른손의 자리가 결국은 하나님의 원수를 발치해내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를 이루가시는 능력 있는 그 기능을 하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주의 자리가 되는데 이러한 오른손의 이야기가 그 전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언약 가운데 오른손을 거론한 적이 있지 않겠느냐? 있어요. 창세기 35장 18절에 보면,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 아비가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베냐민’이 뭐냐 하면, 오른손의 아들이라. 이거는 언약대로 태어날 아들이지 ‘베노니’,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이놈이 태어났는데 엄마 없이 살 것 생각하니 내가 억장이 무너진다. 아이고, 불쌍한 자식아. 너는 살고 나는 죽는다만 너는 참 안 됐다.’ 이런 식으로 인간적인 애석함을 자식에게 둘 건 아니란 말이죠. 엄마의 죽음을 통해서 애가 나왔다면 이거야 말로 장차 오른손으로 주께서 하실 일을 자식이 하나의 징후로써, 증표로써 언약은 이렇게 실시된다는 걸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죽음 안에서만 비로소 새 생명이 탄생한다는 그러한 취지가 야곱언약 속에 이미 포함돼있어요.

그렇다면 최초로 오른손이 등장하는 것에 대비되는 것이 있죠. 베노니, 슬픔의 자식이죠. 그러니까 오른손이라는 것이 언제 등장하느냐 하면, 그냥 무턱대고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뭔가 어둠과 빛이 같이 등장하는 것처럼, 오른손이 등장할 때는 어떤 것이 육적이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아닌 것이며 어떤 것이 하나님의 원수와 부합되느냐는 것을 같이 대비가 되는데 같이 들춰내는 식으로 등장해요. 오른손이라는 것은 항상 맞은편에 뭐가 있다? 하나님의 원수의 실체가 서서히 부각되는 그런 면면을 보여주면서 오른손이 같이 활동하게 돼있죠.

정리해보면 하나님이 오른손의 기능을 할 때 다시 말해서 언약적 기능을 할 때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비 언약과 반 언약, 언약에 반대하는 것, 언약이 아닌 것들을 들춰내면서 일을 하게 돼있어요. 한쪽만 주님만 나오고 악은 절대로 안 나오는 그런 법은 절대 없다 이 말이죠.

적어보면, 언약적 일은 반드시 비 언약과 반 언약, 언약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것과 언약에 대해서 관심 없는 이것을 같이 들춰내는 거예요. 그래서 반 언약과 비 언약은 하나님의 원수에다 항목을 잡아버리고 언약적 일만 하나님의 일이 되는데 왜냐하면, 아들이 주 되심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 자기 아들을 주의 자리로 앉히는 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걸로 끝이에요.

그리고 그 일을 하려면 반드시 뭐가 하나님의 이름에 원수가 되고, 주의 이름에 원수가 되느냐? 그거는 더 깊이 들어가면, 이 반 언약과 비 언약이 호시탐탐 노리는 자리가 있어요. 놀랍게도 바로 예수님의 자리, 주의 자리를 노렸던 거예요. 악마가. 그리고 선악과 따먹으라는 것은 선악과를 무용지물로 만들라는 이야기거든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공격이에요. 선악과와 생명나무 양쪽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기능이기 때문에, 상징이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것은 예수님의 주 되심을 훼방하고 그 자리에서 끌어당기는 거예요. ‘인간아, 네가 이제부터는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네가 신되면 되지 왜 신을 섬기느냐?’ 이런 것도 참 어려워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마귀라 합시다. 집사님이 인간이라 합시다. ‘집사님, 인간노릇 그만하고 싶죠. 이제 하나님 되고 싶죠? 하나님이라고 하세요.’ 말로 하면 되잖아요. 말로 하면 되는데 선악과 왜 먹으라고 합니까? 그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 두 번 돌리세요?’ 이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습니까? 매직 두 번 돌려야 신이 되는 이유가 뭡니까? 왜 선악과 따먹어야 신이 되는 이유가 뭐냐 말이죠. 그냥 말로 ‘이제부터 나, 하나님이다.’ 하면 그만인데 왜 선악과 건드려서 신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마귀는 알았어요. 그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어떤 피조물도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홀로 차지하는 주의 자리에 넘봐서는 안 되는 조건 하에 이미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악마가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그 자리를 훼손시킴으로 말미암아 반란을 일으키고 자기 자리를 떠나죠.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주의 아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의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악마의 최후의 노림수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 이야기 아닙니까. 항상 ‘예수여, 당신이 메시아이거든.’ 항상 나오는 이유가 결국 나중에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 못 믿도록 아들 믿는 사람들 잡으려고 마지막에 강가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습니까?

신약이 그렇다면 구약에는 누굴 조져야 돼요? 이스라엘을 공격하겠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건 주변에 있는 이방나라죠. 이방나라가 이스라엘을 뭐 때문에 공격합니까? 이스라엘에 언약궤가 있죠.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중심을 차지하죠. 이스라엘은 왕을 부르죠. 그 왕은 세상 왕입니까? 아닙니다. 장치 왕이 되실 분이 동행하고 있는 거예요. 거룩함입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적이 있는 곳으로 모압과 암몬을 광야에서 만나게 하고, 아말렉을 만나게 하죠. 만나게 해서 이런 전쟁이 인간적 전쟁이 아니고 모세가 지팡이 오르락내리락 함으로 이 전쟁은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 언약의 달성 스케줄로 이미 이 전쟁이 포함이 돼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우리도 그 스케줄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현재 우리 입장이.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입장이 아니고 어떻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 언약을 만개시키느냐 그게 초점이에요. 관심사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복음 외에는, 새 언약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어요. 우리가 사탕을 빨고 있는지 오뎅을 빨고 있는지 아무 관심도 없고 저 인간을 어떻게 몰아넣어서 저 인간을 통해서 이 세상 자체가 어둠이고, 반 언약이고, 언약에 대해 무시하고 언약에 도전하는 세력인가를 어디다 끌고 긁어버리면 복음에 대해서 반발이 나올까? 지금 그것만 궁리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위해서 내가 매인 바 된 종이라고 사도바울의 거의 모든 편지 앞에 있죠. 특히 옥중서신에 나오죠. 매인 바 되었다. 복음의 종이요 그리스도 종이요. 이것은 바로 반 언약과 비 언약과 영적 전쟁 상태에 우리가 돌입돼있다는 겁니다.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IP:210.♡.51.85) 11-05-03 13:03 
20110304b 울산강의-출애굽기 15장 6절 : 하나님의 오른손
(강의:이근호 목사)


통역이 있으면 장점은 내가 한 틈 쉰다는 장점이 있고, 단점은 계속 이어져 나가야 하는데 그걸 길게 하면 통역을 못하니까 일부러 중간에서 끊어야 된다는 게 단점이에요. 끊어버리면 그 다음에 지금 여기서 3, 4 나가는데 쉬고 통역한테 맡기고 들어가자고 하면 네 번째 생각할 것을 생각 못하고 네 번째 지나서 다섯 번째 생각한 것이 여기 들어가 버려요. 그러면 논리 비약이 되어서 중간에 뭐가 빠졌더라, 빠졌더라, 다시 끄집어내어서 4, 5번 가야 돼요. 조각을 맞춰야 되니까.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주의 자리가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약속을 위하여 하나님이 개입합니다.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은 일상적으로 밥 먹고 사는 것과 아무 상관없잖아요. 그냥 일상적인 일이죠. 오늘 노랑 옷을 입어볼까, 파랑 옷을 입어볼까? 복음과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그런데 복음과 상관없는 일들 투성이 속에 하나님께서 거기에 개입하는 거예요. 이걸 약속으로 집어넣는단 말이죠. 집어넣으면 여기서 특이한 사건이 터지죠. 예를 들면 일상적으로 제사 드린 사람이 가인이죠. ‘하나님이 이렇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사건을 일으켜버려요. 제사를 안 받는 흔적이 나타나버려요. 기적이라는 것인 구원받는 것만 기적이 아니고 지옥 가는 사람이 지옥 가는 값을 하는 것도 놀라운 기적이에요.

왜? 우리가 천국, 지옥만 빼놓으면 하나의 동서기고, 난전에서 물건 파는 사람이고, 그냥 식당하는 아줌마고, 다정한 이웃이고, 같은 2층에 옆방에 사는 사람이고.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밑에서 만약에 찬송을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위에 있는 사람이 시끄럽게 하지도 않았는데 예민하게 반응해서 지금은 절에 안 다니지만 어릴 때 절에 갔던 그것 때문에 교회가 있으면 재수 없어서 망한다는 인식이 새롭게 발생돼요. 발생되면 똑똑똑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복음 중심으로 특이한 사건이 그때부터 일어나죠.

성도의 삶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약속으로 일방적으로 개입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저는 막 사는 거예요. 막 살아야 구멍이 뚫릴 것 아닙니까. 자기가 곱게 바른 짓 해버리면 일방적으로 마귀 일과 하나님 일을 본인이 결정해요. 그것도 본인이 행할 수 있는 걸 하나님 일이라 하고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일방적으로 정리정돈을 해놨기 때문에 그 자체가 언약이 아니에요. 왜? 자기가 예상할 수 있는 소망이과, 예상할 수 있는 자기가 만든 사건들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의 잘남을 과시하는 것밖에 안 돼요.

막 살지 아니하면 인간이 선악적인 사고방식으로 정리를 해놔요. 예를 들면 서랍 정리를 오랜만에 양말과 속옷이 엉망진창된 것을 어느 날 주부가 정리해놓은 거예요. 정리한 그때가 오후 2시인데 오후 3시 때 와서 ‘이 집 차압됐습니다.’ 서랍정리 아무리해도 다시 이사 가야 되잖아요. 왜 하나님께서 정리케 했느냐 말이죠. 흐트러질 게 뻔한데. 주께서 일을 그렇게 해요. 네가 원하는 선악을 펼쳐봐라. 그리고 엎어버려요. 엎어버릴 때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주님이 하는 주의 이름 들어가면, 그게 죽음의 사자.

이게 중국에서 강의할 때 성막하면서 성막을 p2라면 먼저 있던 성막의 의미가 뭐냐 하면, 죽음의 사자와 이스라엘 사람과 히브리인들 하고 선에 뭐가 묻었습니까? 피가 묻었지요. 마치 휴전선 같아. 북한군, 남한군 경계선 대치하는 것처럼. 피로 죽음의 사자와 이스라엘이 대치하는 거예요. 선이라면 두께를 면적을 늘여버리면 이 안에 왜 피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담겨 나와요. 그게 뭐냐? 인간의 죄가 성막구조에 들어갑니다. 성막이 그리스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인간의 죄도 거기에 들어가 있어요. 그걸 규명해줘야 돼요.

이처럼 하나님이 하는 일은 죽음의 사자가 오게 되면,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 죽음의 권세를 넘지 못했는가를 항상 보여주는 그런 영적인 일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구멍을 뚫듯이 우리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저주받았구나.’ 하는 그런 것을 구멍을 뚫을 때 2초 내지 3초밖에 안 되지만 하여튼 구멍을 뚫어요.

구멍 뚫을 때 그 장소가 깨끗하게 깔끔하게 정돈된 ‘이 정도하면 나도 성화됐지. 이 정도하면 착한 사람 됐지.’라고 자부하는 그 현장에다 구멍을 뚫어요. 구멍을 뚫는 예를 이번 강의에서 했어요. 그런데 오 목사의 평에 의하면 이번 강의 가운데 제일 좋지 않았다. 그런데 좋지 않은 평을 다시 해볼게요.

어떤 목사가 설교하고 난 뒤에 ‘이번 설교는 완전히 버렸다. 설교도 아니고 객소리다.’라고 다짐을 하고 있었는데 그 날 저녁에 전화가 오면서 ‘목사님, 오늘 설교 너무 좋았습니다.’ 이게 바로 구멍 뚫는 거예요. 우리가 반대로 생각하잖아요. 이번엔 잘했다 하면 그건 아무 의미 없고. ‘나 죽어 마땅해. 설교하지 말아야 돼. 목사 때려치워야 돼.’라고 했는데 ‘목사님, 그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요.’ 누가 한 거예요? 주님이 하셨지요. 왜냐하면 자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버려버렸어요. 그런데 그게 은혜가 되더란 말이죠. 결국 그건 뭡니까? 그 차이를 통해서 일은 주께서 하심을 드러낼 때 우리로 하여금 절망케 하시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반대로 ‘이번 설교도 은혜 안 받으면 그건 나쁜 놈이다.’ 했는데 설교 영 엉망이라. 또 다시 내가 무너지는. 결국 하나님은 누구와 싸워요? 이미 선악과 따먹은 우리와 싸우면서 너는 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에서 쫓겨나야 되는 이유가 이런 이유라고 계속해서 말해주는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게 있지요. 주께서 그냥 한 데나리온 주면 될 텐데 포도원 비유에서 처음에 아침 열시에 온 사람에게 ‘너, 아침 열시에서 일하는데 한 데나리온 준다.’ ‘알고 있지요.’ 그런데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도 한 데나리온 주거든. 미리 이야기했으면 아무 일 없었어요. 그런데 미리 이야기 안 한다고. 왜냐하면 천국이란 우리가 존재하는 게 아니고 우리 존재를 사건으로 바꾸는 거예요. 무슨 사건? ‘너 같은 인간이 바로 뱀의 후손의 면면의 바른 모습이야.’라고 알려주는 그 능력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돼요. 자기가 마귀 자식인지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갈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는 일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관심사가 우리의 관심사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비 언약이 뭔지, 반 언약이 뭐냐 하는 거예요. 비 언약과 반 언약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느냐 하면, 평소에는 조용하게 있어요. 하지만 언약이 등장할 때 언약에 민감하게 반응해요. 이것은 곧 평소에는 우리가 육적 존재에요. 그런데 이것이 언약이 오게 되면 우리는 영적 세계에서 못 빠져나오는 악령적인 존재로 발각이 되는 겁니다.

귀신들린 청년이 다른 사람은 가만있는데 ‘예수여, 우리를 멸하려왔지요?’ 다른 사람 들었으면 미친개가 미친 소리 한다고 할 거예요. 그러나 그 이야기를 누가 알아들었습니까? 예수님이 알아들어요. ‘이게 어디서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들어왔으니까 빠져나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주님 들어올 자리니까 다른 데로 빼 달라. 돼지 떼로 들어가야 해 달라.

육적인 그러니까 정치, 경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횡설수설한 이야기합니다. 그걸 무의미라 하고 의미도 안 되는 비 의미라 해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돼지 떼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돼지 떼에 들어간다고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아무 의미 없지만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언제 이런 아무 의미 없는 게 튀어나오느냐 하면, 우리 주변에 예수님이 나타날 때 우리는 거기에 강력하게 반대하죠. ‘주여, 26일 날 딸 치우는데 그때까지 재림을 좀 늦추면 안 되겠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뭔가 몰두하고 기대한 게 있으면 분명히 예수님이 이걸 훼방할 거라고 생각해서 사전에 타협을 해요. ‘주님, 일단 이것 성사되고 난 뒤에 주님 잘 섬길게요. 제발 이것만큼 손대지 마세요. 이건 나 하고 싶은 대로 놔두시고 이 일 끝나고 난 뒤에 헌금 듬뿍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것 훼방하면 주님, 나쁘다. 정말.’ 꼭 정치적인 협상의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 속에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지만 어느새 악한 영적 존재와 익숙하게 교류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 나게 돼있어요.

정리해보면 언약의 개입은 하나님의 이름, 나중엔 주가 되죠. 주가 오신 것은 원수를 발치하는 목적으로 오셨지요. 원수를 발치하는데 누가 반발하느냐 하면, 구원받은 우리가 반발해요. 우리가 반발함으로써 주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구원받는 그 안에 내장돼있어요. 우리 뜻대로 안 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있는 원수가 발작을 일으켜서 대들다가 주님에 의해서 추방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개입을 아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어제 강의한 중에 어려운데 여리고 성 할 때 몇 바퀴 돌죠? 일곱 바퀴 돌죠. 그럼 이걸 우리가 모른다 치고 여리고 성이 있다 합시다. 우리가 여호수아와 작전회의하면, 어떻게 무너뜨릴까요? 간단하죠. 이쪽에 무기가 있을 것 아닙니까. 이쪽 무기보다 더 발달된 무기로 하든지 무기가 모자랄 때는 신속하게 야밤에 하든지 하여튼 방법이 있잖아요. 이런 방법을 놓고 ‘하나님이여, 우리 방법에 하나님이 좀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미처 몰랐던 비 언약과 반 언약에 푹 젖어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약이 나올 수 없어요.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과거에 써먹었던 하나님의 방식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이게 바로 우리 방식으로 변해요. 하나님의 원수방식으로 변한다고. 언약궤로 적을 물리치니까 홉니가 비느하스가 언약궤 들고 다니다가 언약궤 때문에 죽어요. 놋뱀으로 사니까 놋뱀 섬기다가 죽잖아요. 성전 제사해서 복을 받으니까 성전 제사 드리다가 멸망당하잖아요. 십자가 구원한다고 십자가 목걸이 하다가 지옥 가잖아요.

이것은 뭐냐 하면, 어떤 하나님의 방법도 우리 속에 들어오면 더 이상 하나님의 방법이 될 수 없는데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방법을 받게 된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된 자로써 구원되는데 우리는 그 방법을 받아서 내가 간직함으로 구원되는 줄 알고 착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데 예수님의 피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는 줄 오해하고 있다고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고 구원받겠다는 것은 마귀들이 하는 짓이란 말이죠. 주님이 구원하는데.

그러니까 이게 고기고 내가 낚싯대라면, 낚싯대로 건졌는데 고기가 하는 말이, 내가 낚여줬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낚싯대만 보면 되는데 자꾸 자기 주체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체 이야기는 나중에 개혁주의와 라캉과 들뢰즈 특강 할 계획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건 목사님들만 참석하도록 하기로 했어요. 두 명 올지, 세 명 올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목사님들만 참석해소. 그러면 녹음 될 것 아니야? 될지 안 될지. 왜냐하면 너무 어려워서 그래요. 이걸 풀이하려면 열 시간, 스무 시간 더해야 돼요. 그런데 그걸 서너 시간 만에 하려면 용어 자체부터 새롭게 다 해야 되기 때문에 어려워요. 일반 교인들은 시험들 수가 있어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언약궤도 그렇고, 여리고 성도, 놋뱀도 그렇고, 십자가도 그렇게. 여리고 성을 할 때 방법이 뭐냐 하면,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돌면 된다. 몇 바퀴 돌까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몇 바퀴 돌면 이쪽이 어지러워서 빙빙 돌겠느냐? 기껏 생각한 게 그거에요.

예수님께서 배에 탔습니다. 베드로가 육지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내가 헤엄쳐서 갈 것이냐, 배 타고 갈 것이냐?’ 그런 생각한다면 못 갔어요. 그냥 주님만 보고 갔더니만 물인지, 바다인지, 땅인지 구분도 안 되고 간 거예요. 그러면 베드로가 갔던 그 환경, 현실은, 이번에 설교할 제목인데 실제적 현실인데, 베드로는 누구 현실에 들어간 거예요? 베드로 자신의 현실은 생각도 못하고 주님의 현실에 들어간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방식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가 언제 물에 빠졌습니까? 계속 가면 되는데 ‘내가 미쳤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하고 자기 생각으로 돌아올 때 언약이 깨져버려 물에 빠졌단 말이죠. 이게 바로 비 언약이고 반 언약인 거예요.

비 언약, 반 언약 하는 것은 우리로 구분하란 말이 아니고 우리는 가만있으면 그게 비 언약이고, 막 살면 그게 반 언약이에요. 반 언약, 비 언약 구멍을 뚫어버린 겁니다. 이건 우리가 예상 못한 방법이에요.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받는 걸 아는 것과 실제로 십자가 능력으로 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실제로 십자가 능력이 와버리면, ‘그동안 십자가 알아서 구원받는 것도 구원이 안 되는군요.’라고 그걸 자인하게 돼요. 매일같이 진짜 십자가의 능력이 임해야 구원되지 십자가 외우고 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닌 걸 아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뭐든지 좋은 것도 우리 속에 들어오면 육으로다 변질돼버려요.

여리고 성이 있는데 하루에 한 바퀴 돌았지요. 한 바퀴 돌아서 무너졌습니까? 안 무너졌지요. 또 돌았어요. 안 무너졌지요. 그럼 일곱 번째 돌면 무너졌습니까? 안 무너졌지요. 일곱 번째 일곱 바퀴 돌았지요. 결국 이건 뭡니까? 처음부터 ‘7’이라는 것은 어제 강의하면서 이렇게 설명했어요. 골프장에 잔디가 있지요. 잔디 하나하나가 다 7이에요. 이 세상이 골프장이라면.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전부다 다 이루었다,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7이라는 것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다 이루었다는 완성을 의미하거든요.

그렇다면 창세전에 이 여리고 성은 무너지게 돼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사람에 의해서 자꾸 도니까 그쪽 사람들이 어지러워서 무너졌는지 원래 무너지게 돼있는지의 구분은 7을 통해서 표현해주는 겁니다. 콧물 나면 감기의 증상이죠. 바로 7은, 우리가 지금 막 사는 것도 하나님이 다 이루었다는 스케줄 안에 포함된 막 사는 것을 느끼게 돼요. 결국 막 사는 게 없지요.

간음한 여인이 자기 딴엔 막 살았는데 나중에 용서받고 보니까 그 스케줄에 포함돼있는 거예요. 일종의 에로배우?? 성도는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해놓고 시작한 인생이거든요. 중간에 달라질 수가 없어요. 달라질 수가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달라지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그래서 주께서 실컷 그러니까 그들이, ‘내가 주님을 이렇게 안 믿어도 주님께서 날 구원해낼까? 이러면 구원 못할 거야.’라고 까불 때 주께선 가만히 놔둬버려요. 탕자는 돌아오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언제 주께서 하느냐 하면, ‘주여, 진짜 주의 사랑 알았습니다.’ 하면 더 밀어버려요. 진짜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자체가 진짜 주님 사랑받은 고백이잖아요. 그 고백이 몇 초만 지나면 뭐가 되는 줄 알아요? 내가 사랑하는 고백이 나의 구원의 능력으로, 밑천으로, 육적으로 달라져 있어요. 그래서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는 말이에요. 그날그날은 주께서 전부다 우리를 하나의 사건으로 사용해버려요.

중국에서 강의할 때 존재는 면적이라 했지요. 면적이 돼버리면 꼼꼼하게 거기에 역사를 새기게 마련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안개거든요.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 아닙니까. 안개라면 이거는 면적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이에요. 돌발적 사건이죠. 인생을 구십 년 살아보세요. 마지막 때 남는 게 뭡니까? 구십 년째 마지막 날만 남아요. 그렇잖아요. 제가 거짓말 했습니까? 그건 뭡니까? 마지막 날은 결국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다 있는 사건 아닙니까. 보세요.

자기는 구십 년이란 긴 역사가 있지만 주님께서 매일같이 가위로 다 잘라버리는 거예요. 남는 것은 구십 년째 마지막 날 운명할 그 날만 남았는데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구나.’ 하고 이게 바로 안개고 물방울이구나 하는 거예요. 하나의 사건으로 남죠. 그러니까 우린 존재를 우기기만 그걸 압축시켜서 하나의 사건으로 남죠.

그 사건이 바로 언약의 기능을 했던 사건이냐? 아니면 비 언약을 보여줬던 사건이냐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구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비 언약이죠. 이 비 언약을 비 언약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그러니까 다윗이 말한 상한 심령이 되게 하는 덮침이 바로 언약입니다. 나로 하여금 비 언약이며 나는 나밖에 모른다고 그걸 깨닫게 하는 능력이 언약이에요.

쓰레기에 보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쓰레기를 쓰레기 되게 하는 자체가 보물이라니까. 쓰레기에 대한 기쁜 소식은 ‘쓰레기 맞습니다. 쓰레기야.’라고 해주는 그것이 쓰레기 될 수 있는 최고의 축복된 말씀이죠. 목사가 심방 가서 ‘주여, 이 쓰레기 같은 집안에 쓰레기 되게 하옵소서.’ 사실 따지면 최고의 축복이라니까.

그러한 작업에 우리는 어떤 가능성도 없습니다. 결국 가능성이 없다는 말은, 우리는 하나의 전리품이에요. 전쟁을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대장이 이미 패배했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는 가구만 건져가는 빼냄을 당한 그런 입장이 우리란 말이죠. 이게 출애굽기 15장에서 구원의 개념입니다. 도대체 한국교회 구원의 개념은 엉망진창이에요. 주체가 살아있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그냥 전리품이에요. 일은 우리가 한 적도 없어요. 우리는 그냥 당한 거예요. 강간당하듯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당해버린 겁니다.

요셉의 꿈이나 계시는 자기가 꾸고 싶어서 환장해서 꾼 게 아닙니다. 그냥 꿈이 찾아온 거예요. 어느 날 우리에게 십자가 피로만 구원받는다. 네가 십자가 피를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네가 믿던 안 믿던 간에 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들어올 때 그 순간이 우리는 평생 살아도 헛짓밖에 할 게 없구나. 그렇게 정리돼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비 언약과 반 언약이 이겁니다라고 증거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아니요, 내가 아니요란 말을 계속 하죠. 우리의 믿음은 내 행함이 아니요, 내가 아니요. 자꾸 아니요란 말을 왜 집어넣느냐 하면, 바로 그 앞에 있는 우리는 비 언약입니다. 언약을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이 언약입니다. 같이 연결시켜서 이야기해줌으로 말미암아 이 연결고리를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결고리를 우리가 소유하면 안 됩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가 왜 의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는 아버지와 아들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르게 돼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내주는 그것이 의기 때문에, 성부께서 성자를 내주는 그것이 의기 때문에 그걸 율법 외에 한 의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소식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에 아무리 율법 지켜도 하나님이 원하는 그 의를 재료가 있어야 만들죠. 그래서 우리는 애초부터 율법에 갇혀서 죄만 양산할 뿐이지 하나님이 원하는 율법 외에 의를 우리가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흔히 개혁주의에서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그동안 옛날에는 성령을 못 받아서 율법대로 못 살았는데 이제 성령 받아서 의를 이루자.’ 그거는 의가 뭔지를 몰라.

언약의 상대자가 시편 110편에 나오는 말처럼 주가 주께서 그 뜻입니다. 인간은 먼저 있던 아담은 나중에 오실 마지막 예수님의 표상이라 돼있거든요. 먼저 있는 것은 나중을 위해서 먼저 있는 거예요. 이거는 아니고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무엇이 아니고’가 없으면 ‘무엇이 이고’가 없습니다. 교회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걸 아신다면 교회 다니세요. 교회 안 다니고 교회 다녀도 구원 못 받는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말란 말이죠. 교회를 다니면서 이 교회로 구원되는 건 아니고 예수 피, 이렇게 이야기해야지 교회도 안 나오고 혼자 그건 도 닦는 거예요.

13절에 봅시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보세요. 성결한 것은 우리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결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죄가 있는 사람은 그냥 죄와 관련을 지어줘야 돼요. 이런 것도 신학 새로 써야 돼요. 지금 교회사, 기존의 모든 신학 다시 써야 돼요. 죄가 없으면 우리는 죄가 안 됩니다.

죄를 씻어주는 건 괜찮아요. 나오는 건 괜찮다 했잖아요. 목욕탕에 있다는 말이 뭔 뜻입니까? 때가 나온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아예 때가 안 나오는 사람을 원하는 거예요. 때가 안 나오면 목욕탕은 왜 있는데? 구제역 할 때 간단한 방법은 우리가 소고기 안 먹으면 돼요. 소고기 안 먹으면 소는 누가 키우는데? 키울 필요 없잖아요. 하나님이 우릴 죄인 되게 하신 이유는, 죄가 계속 나와 줘야 한다니까. 그래야 우리가 부름을 알아요. 죄가 안 나와 버리면, 때가 없으면 목욕탕도 필요 없어요.

죄가 나온다는 말은 늘 우리가 죽을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고, 달리 말하면 우리는 늘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지 아니하면 용서가 없어요. 우리는 안 죽고 죄만 씻으려고 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발 씻을 때 주께서 이미 온전한 사람은 발만 씻어도 온전하다 이 말 아닙니까. 그때부터 베드로는 생전 목욕 안 했습니까? 늘 목욕했지요. 온전함이, 있는 때가 없어질 때 온전한 게 아니고 때 있는 자체가 주님 앞에서 이미 온전한 거예요. 그런데 때를 씻어야 온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게 바로 비 언약이고 반 언약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더러운 것이고 죄가 되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우리 속에 뭘 반대한다? 언약을 반대하는 비 언약이 나오는 거예요. 나와야 돼요. 계속 나와서 계속 오해하고, 계속 삐지고. 그렇게 하는 가운데서 어느새 주께서 구멍을 내면 중간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이런데도 구원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인간적인 방법에서는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죄가 없어져서 의가 돼야 구원인데 죄가 있는 체로 온전한 구원된다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속죄론 다시 써야 돼요. 조직신학자들이. 전부다 비 언약중심으로 출발하니까 속죄론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은혜의 완전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시는 겁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그렇게 사건으로 사용되는 사건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주신 완전한 사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완전한 거예요. 불신자 같으면 그런 사건 안 일으킵니다. 지 잘난 맛에 살아가지.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주여, 간음죄 졌습니다. 살인도 했습니다. 죄졌습니다.’ 할 때 주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윗도 살인하고, 다윗도 간음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에게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 했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 합니까? ‘맞습니다. 상한 심령이 있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에 나는 괜찮지요. 바로 그때가 위험한 거예요. 아까 간음했습니다, 살인했을 때는 위험하지 않아요. ‘저는 상한 심령입니다. 그러니까 의인 맞죠?’라고 하는 그것이 바로 원래 죄, 죄를 낳게 하는 기반의 진짜 죄가 잠시 표면에 튀어나온 겁니다.

비 언약이 튀어나온 거죠. 그것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나를 더 사랑해요. 주님을 사랑한다는 나를 더 사랑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라는 체계, 구조를 만드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자기한데 계속 몰두하고 있는 거예요. 관심사가 예수님 피에 있는 게 아니고 자기한테 관심 있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발각되어야 될 비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됐다? 이미 구원받았다했지요.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주께서 자기 백성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집어넣는다 했으니까. 이제 집어넣을 때 어떻게 집어넣는가?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스스로 구원받았다는 짓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짓인가를 깨닫게 하시면서 집어넣게 하시죠. 그렇다면 성결한 처소에 집어넣는다 할 때 일 번, 지금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성결한 소수의 들어갈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까?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이 사람은 또 오해하는 거예요. 자기만 생각하면 항상 오해해요. 어떤 말씀이 나한테 주면 그것이 나한테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의 관심사는 그 말씀, 복음에 관심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관심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떤 혜택을 입었는가에 관심을 두면 다시 또 비 언약과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고치느냐고 물으신다면, 살아계신 주께서 그렇게 자신의 비 언약을 늘 발각시키면서 그 사람들을 구원하죠.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 죄가 뭔지 모른다는 거예요. 만날 살인죄, 간음죄, 마음속으로 간음했고 자꾸 그걸 자랑하는데 그게 죄가 아니에요.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그 죄를 들춰내는 말씀과 하나님에 의해서 가까이 가도록 돼있습니다. 가까이 가도록 돼있지 가까이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없어요. 인력으로 안 돼요.

그런데 어떤 순간 보면 말씀을 당길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마을 강의 다니면 어떤 사람 부지런히 올 때 있거든요. 다른 사람이 시기해서 ‘저 사람 너무 나댄다. 너무 설친다.’ 하거든요. 속으로 하지요. 저것도 한 때입니다. 몇 개월 갈지 몰라요. 녹취해도 저게 몇 개월 갈지 몰라요. 하지만 몇 개월 가던 주께서 하실 문제고 지금 오늘 필요한 것이 녹취라면 그게 얼마나 귀하고 감사하냐 말이죠. 하지만 ‘당신, 왜 녹취하다가 안 하냐?’ 다그치지 말자 말이죠. 주께서 밀어내시면 못 오는 거거든요. 주께서 ‘이쪽 천국 자리는 네 자리가 아니야. 너는 지옥 네 자리야.’ 보내는데 오고 싶어도 못 와요. 올 수가 없어요. 그 자리에.

시편 1편에 말씀 이야기하고 끝에 뭐라고 돼있던가요?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이거나 출애굽기 15장 이야기나 똑같잖아요. 말씀으로 하나님의 계시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으로 다가와서 결국은 성결한 처소에 집어넣는 이 작업에 있어서 아무리 우리가 반발해도 하나님은 실수가 없고, 아무리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그 의의 자리에 들어가고자 해도 주께서는 기어이 ‘네가 올 자리가 아닙니다.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선생님이 가실 자리는 지옥이지 오시면 아니돼옵니다. 가 주세요.’ 밀어낸다니까. 삐져서 간다니까.

말씀에 관심 있어야 돼요. 그것도 한 때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걸 또 이근호 목사는 사악하게 인간을 이용한다고. 기가 차고 코가 차요.

주의 팔이 나타나서 일하실 때 주의 팔은 사울에게 나타나고 가룟 유다도 권능을 행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우리가 단정할 수 없는 이유가 두 가지 있어요. 단정하는 내가 언약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단정 못하고. 두 번째, 구원받은 그 사람이 자기 구원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주인공이에요. 구원은 주님의 일이지 구원받은 그 사람, 본인의 일이 아니거든요. 주님의 일이 그냥 일방적으로 쳐들어옴을 당했을 뿐이죠. 자기가 구원을 챙기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네 안에 믿음이 있는지 돌아보라 하는데 그게 그런 뜻이에요. 네 믿음 말고 주의 믿음이 있는지 그 이야기하면서 바로 십자가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죽음이 없이 구원 없는데 아무도 안 죽으려 한다는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미쳤습니까? 에녹처럼, 엘리야처럼 하늘나라 개인택시 와서 모셔 가면 좋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쳐들어오지 아니하면 그 사람 구원받은 사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모습 볼 때 사도바울은 예수님만 본 게 아니고 가만 보니까 그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자기가 들어있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 남들은 지나간 사건이라 하는데 15년 전에 지나간 사건 아니에요. 가만히 십자가 보니 십자가 안에 자기가 들어있네요.

이미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내가 십자가 알기 전에 이미 죽이고 난 뒤에 ‘너, 죽었단다.’ 하고 통보하기 위해서 다메섹에 자기를 찾아온 겁니다. 성령이란 그거에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날마다 십자가에 근거해서 책망하며 ‘네가 십자가에 달려죽을 당사자가 너야.’라고 통보해주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 통보가 없고 자기가 십자가 믿으려고 닦달내면 백날 해봐야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물러가고. 노래 나오잖아요. 다가서면 뒤에 물러가고. 다가서면 두 걸음 물러가고. 누가 누굴 붙잡아요? 어딜 감히 피조물이 어떻게 자기 일을 하려고. 모든 게 주의 일인데 왜 구원을 자기 일처럼 챙기려고 합니까?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결국 성소란 뭡니까? 성소란 온 사방에 피밖에 없어요. 언제 [피]라는 책에 나오죠. 초콜릿으로 지은 집이 있는데 불에 녹아내리니까 온 천지가 초콜릿이야. 옷이고 뭐고 온 천지가 초콜릿으로 뒤범벅이 돼버렸어요. 현재 피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 안에 있는 사람은 모든 게 나 때문에 피해 받았던 예수님의 아픔과 고통으로 그 안에서 우리는 뿜어져 나오는 생명을 부여받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주어진 일들 속에 우리는 옷 걸치고 생명유지하고 복음 이야기하고 이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주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자리거든요. 주께서 다 도와주셔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걸 성소라고 해요. 그래서 성소에서는 존재는 없어요. 성소에서는 우리가 화살촉 같은 하나의 사건들만 설치게 돼있습니다. 성소 안에 있는 사람이 어디 가도 부딪치면 거기서 피라는 것이 튀어나와요. 피의 사건으로만 나오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십자가를 증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정과 욕심을 매일같이 나를 죽이는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믿으세요.’가 아니라 이 십자가가 매일같이 나를 죽이는 십자가라고 고백하면서 십자가를 증거하게 되죠.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 안에 누가 살고? 그리스도가 살려면 매일같이 내가 죽어야 되죠. 그 말씀 보세요. 그리스도가 매일 살려면 매일 누가 죽어야 된다? 예수 믿는다는 나도 매일같이 죽어야 되고 예수 믿는 나를 매일같이 죽이는 그분만이 계속 살아있는 식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죠.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9절 보세요.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있잖아요. 히브리인들 찾으려면 말과 병거와 마병이 있어야 된다는 게 누구 아이디어에요? 인간들의 아이디어죠. 나중에 이스라엘도 이 짓하고 있죠. 이스라엘도 여호와 의지하지 않고 말과 병거 의지하죠. 그런데 이 인간들을 홍해, 죽음의 바다에 집어넣죠. 그런데 출애굽기 15장에서 이걸 하나님의 원수라 하죠. 그러면 바로 왕이 원수가 아니죠. 원수의 사주를 받고 있죠. 악마의 사주를 받고 있죠.

그렇다면 나중에 이스라엘이 말과 병거를 의지하면 그들이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결국은 악마의 사주를 받아서, 비 언약의 사주를 받아서 그들이 여호와를 버린 그 징후가, 증상이 뭡니까? ‘나는 여호와 안 믿는다. 말과 힘을 믿는다.’라는 식으로 약속의 땅에 툭툭 튀어나온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적이 누굽니까? 이방나라가 적이 아니고 이제는 자기 백성과 싸우는 거예요. 자기 백성과 싸우면서 나라가 둘로 갈라지는데 갈라진 위쪽 나라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죠. 중국 사람은 ‘북 이스라엘’이라 했어요. 틀렸거든요.

우리가 정통 이스라엘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잘못한 건 있지만 다시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과거라는 것은 새로운 일을 위해 있는 것이지 과거로 돌아가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회복신학이 잘못 된 겁니다. 문선명이라든지 개혁주의 회복신학, 위트니스 리나 회복신학을 이야기하는데 회복신학이 아니고 미래, 새로운 일을 위해서과거가 있는 겁니다.

그들은 옛날 열두 지파가 나올 그때 이스라엘로 돌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이름을 뭐라 짓습니까? 이스라엘. 요새 ‘원조 떡볶이’ 이런 거예요. 그런데 남쪽 나라 이름이 유다잖아요. 유다는 열두 지파 가운데 한 지파에 불과해요. 그런데 그 나라 이름을 유다라 지었다는 말은 옛날 율법시대는 끝났다. 율법을 어기는 그것자체도 하나님의 스케줄 안에 포함되어서 그 죄를 통해서 새로운 언약이 쓰레기 더미에서 주께서 다윗 언약을 일으켰는데 에브라임은 미워하고 유다는 사랑했다는 거예요.

보세요. 다 같이 나쁜 짓 했는데 에브라임은 내가 미워했고 유다는 내가 사랑해서 선택했다. 그렇다면 이 원리가 새 언약에도 마찬가지에요. 모두 죄인인데 왜 어떤 사람은 구원받는가? ‘내가 사랑하거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주를 사랑하게 돼있습니다. ‘주여, 주께서 먼저 사랑하셨군요.’ 끝나버렸어요. 그럼 그 증거는?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한 확실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주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 사랑을 위해서라도 구원을 포기하지 않는 그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사랑받은 사람은 누구세요.’란 뜻이에요. 그리고 사랑 없이 사랑하려는 사람한테는 ‘가 주세요.’ 이건 지옥 가야 되지 새삼 사랑한다고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그냥 본래 자리에 가 주세요. 제발 끼지 마시고. 여기는 먼저 사랑받은 사람만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스케줄 따라서 모든 것을 다 이뤘는데 참 우리 처지를 돌아보니 우리는 우리만 생각합니다. 이런 것도 다 주께서 뜻이 있어서 된 줄 믿사오니 주의 죽음의 엄청난 의미가 십자가 뜻이 다시 한번 우리로 하여금 주님만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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