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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7 00:19:27 조회 : 2713         
110506 거짓말 하나님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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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210.♡.51.85) 11-05-12 14:23 
20110506a 울산강의-출애굽기 16장 : 거짓말 하나님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출애굽기 16장 할 차례입니다. 출애굽기 16장은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상당히 좋아했는데 하나님이 인도하는 경로가 그들이 전혀 예상 못한 다른 하나님으로 비춰지게 되는 그 일이 출애굽기 16장입니다. 우리가 상상한 그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수월한 길로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절망의 길로 자꾸 몰아넣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생전 처음으로 그걸 느꼈어요. 그들만의 경험인데 거짓말하는 하나님, 하나님이 거짓말하는 거예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간다 했는데 오히려 그런 것이 없는 그런 경로를 선택해서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16장에 보면 자연적으로 원망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자기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니라 거짓말하는 하나님으로 알 때 인간들은 원망을 쏘아대는 겁니다. 보통 어린이날 때 자식이 부모한테 뭘 사 달라 할 때 엄마가 잊어버리고 안 사주면 원망하잖아요. 부모가 어떻게 합니까? 애가 원하는 걸 줌으로써 원망을 무마시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원망을 받으시고 원망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하는 걸 주시는 게 아니고 도무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다른 걸 주시는 겁니다. 다른 걸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적으로 푹 젖어서 살아간다는 것을 까발리는 그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말고 다른 낯선 하나님으로서 행동하는 겁니다.

그 한 예가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데 벌써 3절부터 보면 나오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죽었으면 좋았을 거라 했죠.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인도한다는 것을 그들은 애굽에서 느끼지 못한 다른 걸 느끼게 하는데 그 다른 걸 느낀다는 게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인도할 것 같으면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라는 것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죽음을 이해 못하면 네가 천국에 가는 코스가 아니라는 거죠. 천국에 제대로 가는 코스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혹독한 죽음의 경험을 낯설게 예상치도 못한 그런 경험을 갖게 되면 제 코스로 들어온 거예요. 제대로 된 코스를 밟아가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모세도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길로 접어들죠. 처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맹세가 그때에만 해당되는 줄 알았더니만 그 뒤에 모세와 따라 나오는 사람들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똑같이 이 땅에서 나그네 생활, 광야생활하고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마지막에 보면, 광야에서 유리한다 하죠. 성도들이. 광야에서 유리하면서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을 하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언약 그때로 끝, 이제는 우리와 상관없다고 내동댕이치는 게 그런 언약이 아니라 그것이 계속해서 집단적으로 그 뒤에 일관성 있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입니다. 다른 구원의 길, 없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을 받아야 구원되는데 그 언약이 실제로 이 땅과 마주칠 때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나그네 생활을 가야 되고,

그 나그네 생활이 어떤 생활이냐? 편한 생활이 아니고 혹독하게 애굽과 끊어내는 잘라내는 그 경험을 하면서 광야의 길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환경만 광야가 아니라 그 광야에 적응 안 되는 광야생활을 상상도 못했던 그들이 오직 희망만 쳐다보고 살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언약은 아주 단호합니다.

그래서 오늘 16장 강의를 펼치려면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바로 애굽에서 알았던 하나님 그리고 그들에게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 이 약속이 실제로 하나님과 동행했을 때 속았다는 거죠. 원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쪽으로 경험이 되는 겁니다. 이게 현실화되고 실제화 되는 겁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차라리 죽여 달라는 식으로 이러한 혹독한 어려움을 주시느냐 하면, 이거에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것은 사람이 생각했던 그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란 그냥 하나님이 계시는 거예요. 하늘이란 개념이 어떤 이상향, 우리의 비전, 소망, 멀찍이 떨어져있는 곳, 이런 식의 하나님이었지, 그 천국이 이 땅에 직접 방문하리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직접 먼저 오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생각한 하늘, 천국, 하나님 이 모든 것이 바로 죄악 된 세상에서 조작된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 자체가 조작된 거예요.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건 종교를 떠나서 하나님이라 하면, ‘어지신 하나님, 저 하늘나라 계시겠지.’ 자꾸 하나님이란 이름의 허구적인 요소를 거기다 걸쳐놓는 거예요. ‘하나님, 비록 부족하지만 나중에 죽어서 만납시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죽어서 만나자 하는 것은, 이 땅에서 편하게 살다가 나중에 죽으면 그냥 예수 믿었으니까 천국 가겠지 그런 상상을 하는데 직접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와서 데려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내가 죽을 때나 만나지.’ 주님 쪽에서는 이 땅에서부터 삶 속에서 동행해서 나를 이끄시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 알겠다, 하나님 알겠다, 살다가 죽으면 올라가겠지.’ 절대로 그런 식이 아니에요. 하나님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강의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속였다, 거짓말했다는 이 하나님 관념인데 이 관념이 신약성경에서 직접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온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이야기인데 양치는 소년 이야기 알죠. 양치는 소년이 거짓말을 두 번 했고, 세 번째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 아무도 안 들었잖아요. 양치는 소년이 다른 사람에게 ‘늑대가 왔다. 이거는 진짜다.’ 세 번째는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아무도 안 갔습니다. 양 다 날렸죠. 두 번씩이나 거짓말했기 때문에. 그런데 양치는 소년이 이리가 왔다고 하면, 늑대가 왔다는 걸 거짓말로 알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이리가 왔다고 하면 믿겠습니까? 안 믿지요. ‘거짓말쟁이가 또 거짓말한다. 늑대나 이리나, 이리나 늑대나 그 짐승이 그 짐승이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써보겠습니다. ‘늑대가 왔다’ 거짓말, ‘이리가 왔다’ 거짓말, ‘곰이 나타났다’ 거짓말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그 소년이 이렇게 이야기해봅시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걸 마을사람들이 진짜로 받겠습니까, 거짓말로 여기겠습니까? 생각해보세요. 마을사람들이 듣기에 그걸 거짓말로 듣지요. ‘늑대가 왔다’에서 ‘이리가 왔다’고 하면 거짓말로 듣겠는데 ‘내가 한 말은 거짓말입니다.’라고 했을 때 늑대, 이리, 곰은 거짓말+거짓말 돼요. 그거는 전체가 더 큰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소년이 하는 말이, ‘지금까지 늑대 왔다는 것은 내가 거짓말한 겁니다.’라고 그 말을 했을 때 ‘늑대+이리’는 되지만 ‘늑대+거짓말했습니다’는 말은 더하기가 안 되는 거예요. 그 말을 부정하면 양치는 소년 말이 진짜 말이 되고, 양치는 소년이 거짓말이지만 그 말은 진짜 맞는 말이 되잖아요.

‘저, 거짓말했어요.’ 이러면 ‘나, 너 거짓말인 줄 알아요.’ ‘그러니까 제 말이 맞잖아요.’ ‘아, 그렇구나.’ 어떤 사람은, ‘그래. 네 말은 맞아.’ 이렇게 되니까 아까 늑대, 이리 그것도 맞을 수가 있다고 되는 거예요. 이게 혼선이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실 때 혼선을 야기 시켜버립니다. 그 혼선을 야기 시키는 원인이 하나님 쪽에 있을까요, 인간 쪽에 있을까요? 이게 오늘 강의 핵심입니다. 인간 쪽에 있는 거예요. 인간은 자신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이 땅에서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여긴 상태에서 ‘진짜 하나님 나와. 그거는 가짜야. 이거는 진짜야. 이거는 자비로움이야. 이거는 엉터리 하나님이야. 이거는 우리가 원망할만해요. 이거는 하나님을 영광 돌릴만해요.’ 그 판단을 내가 내리죠.

오늘 출애굽기 16장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란 하나님이 인도한다는 증거 아닙니까. 인도했을 때 백성들이 하나님을 칭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원망했죠. 원망했다는 말은 그들 속에 다른 하나님 상이 이미 장착돼있다는 뜻이다 이 말이죠. 제가 지금 왜 하나님께서 먼저 이 세상에 방문했느냐 그걸 설명하는 겁니다. 신약시대에. 하나님은 기다리고, ‘너 알아서 오너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 먼저 이 땅에 뛰어 들어와서 사람 속에 섞인 이유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의 혼선을 야기 시키는 거예요. 하나님이란 항상 우리로선 고상한 거고, 멋있는 거고, 아름다운 것이고, 신비로운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 보기에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은 깨끗한데 우리는 더럽고, 하나님은 훌륭하신데 우리는 그보다 수준 낮은 못난 인간이라고 스스로 자인하고 인정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인정이 인간이라면 다 나올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금식 기도하고 회개 기도한 것 아시죠. 예수님 당시에. 그때 예수님께서 그 회개와 금식을 인정했습니까? 인정 안 했잖아요. 옛 술은 옛 부대에 담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 하잖아요. 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마음에 스스로 낮추고, 스스로 겸비하고 스스로 힘들 게 하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 저 어때요? 저, 이렇게 겸손하고 나쁜 짓도 그때그때마다 회개하고 하는데 저 어떠냐?’고 했을 때 그러한 하나님 관에 혼선을 야기 시키는 거예요. 누가? 하나님이.

결국 하나님이란 인간의 상상 밖의 존재로서 항상 찾아드는 겁니다. 상상 밖의 존재가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항상 뭐할 준비가 돼있습니까? 하나님에 영광 돌릴 준비가 돼있습니까, 원망할 준비가 돼있습니까? 원망할 준비가 돼있는 겁니다. 그 외에 다른 하나님 없습니다. 우리에게 원망을 포대기로 받으시면서 접근하시는 그 하나님 외에는 참 하나님 아닙니다. 우리의 층층이, 겹겹이 쌓여있는 가짜, 잘못된 인간성을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 사건을 일으켜서 전부다 노출시켜서 벗길 때마다 원망 하나 튀어나오고 벗길 때마다 원망 나오고.

마치 흥부전에서 슬근슬근 톱질하세. 박 하나 켤 때마다 똥물 튀어나오죠. 놀부 집에선. 그런데 흥부 집은 톱 하나 켤 때마다 펀드 나오고, 귀금속 나오고, 부동산 등기 나오고, 보험증권 나오고. 그런데 저쪽은 안 좋은 게 막 나오죠. 그것도 제비다리 분질러서. 제비다리를 분지르면 예수님의 다리가 분질러야 되는데 문제는 그 아저씨는 지가 분질러서.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아이디어에요.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께 잘 보일 필요 없이 원망만 하면 돼요.

양치기 소년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이제 이해될 거예요. 양치기 소년이 있습니다. 여기 마을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늑대가 왔다.’ 진짜인 줄 알고 우르르 갔어요. 양은 마을사람 재산이니까 양치기 소년은 자기 양 아니니까. 늑대가 왔다니까 진짜인 줄 알고 쫓아왔어요. ‘거짓말했지롱.’ 해서 갔잖아요. 두 번째, ‘늑대가 왔다’ 해서 와봤습니다. 이번엔 거짓말 안 하겠지. 아무리 철없는 아이지만. 보니까 또 거짓말했습니다. 세 번째, ‘늑대가 왔다’ 하니까 안 갔지요. ‘이리가 왔다’ 하면 역시 안 가지요. ‘곰이 왔다’ 하면 안 갈 겁니다.

그런데 양치기 소년이,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라고 한다면 오겠어요, 안 오겠어요? 이중에서 다는 안 오겠지만 ‘그래. 이제 정신 차렸구나. 인간성 됐구나. 매 맞아봐야 알아.’ 하고 왔다고 칩시다. 소년이 하는 말이, ‘그것도 거짓말이지롱.’ 했을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예수님 믿습니다. 이제는 인간 됐습니다.’ 했을 적에 쫓아와서 ‘인간 된 것 맞네.’ 하니까 이 사람이, ‘목사님 놀리고 싶어서 거짓말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는 실망해서 집에 갑니다. 그 다음에 전화해서 ‘목사님, 지난번에 목사님한테 누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는 예수 믿습니다. 세례받을랍니다.’ 또 쫓아가니까 ‘거짓말했지롱.’

양치기 소년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의도적으로 거짓말하지만 현재 우리 인간은 본인도 자기는 참말인 줄 알고 했는데 나중에 집안이나, 교회나, 사업이나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니까 그때 예수 믿은 게 아니고 예수 믿어준 거였어요.

왜 예수 믿어줬느냐 하면, 지난번에 특강할 때 라캉 이야기했지만, 양치기 소년이 양을 치면서 마을사람들을 의식하는 거예요. 마을사람들을 어떻게 골탕 먹일까. 양 치는데 심심하잖아요. 마을사람들 보고 싶잖아요. 마을사람들을 골려먹으려고 의도적으로 하지만 우리는 의도적이지 않으면서도 뭔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늘에 계시고, 성령이 계신다면 성부, 성자, 성령이나 다른 교인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잘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있는 거예요.

우리 교인들 안 알아줘도 만약에 주님이 계시다면, ‘주님, 제가 이렇게 은혜를 받아서 사니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단 말이죠. 그게 5월 5일이라면, 5월 6일에 집구석에 큰 사건이 일어나니까 ‘5월 5일에 그렇게 믿음으로 기도하고 사랑했는데 왜 우리 집안에 우환이 있습니까?’ 그걸 오늘 본문에서 두 자로 ‘원망’이죠. 양치기 소년은 의도적으로 했지만 우리는 의도적인 게 아니고 생리적이고 본성적이에요. 본성적으로 내가 어느 정도로 하나님을 원망할지 본인도 몰라요. 아마 죽을 때까지 계속 나올 거예요. 나풀나풀 뗄 때마다. 마치 일곱 인 떼는 것처럼, 요한계시록에 인 하나 뗄 때마다 심판 나오는 것처럼. 우리에 층층이 쌓여있는 원망이 떼는데

예를 들어서 ‘주님, 너무 사랑해.’ 이럴 때 주님도 좋은 반응을 나타내서 ‘그래, 이제부터 다시는 너한테 어려움 안 주겠다.’ 이러면 아무 문제없는데 분명히 그런 고백을 하고, ‘주님, 이제는 주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고 내 쪽에서 좋게 나와 줬으면 하나님 쪽에서 어려운 일들은 알아서 해결해주면 되는데 그러한 고백이 부끄럽도록, 그런 고백을 했다는 자체가 미안스러울 정도로 어려운 일들이 왔을 때는 전보다 두 배, 세 배 더 큰 화딱지, 원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세상은 항상, 세상이란 말도 되고, 이웃이 되고, 타인, 하나님이라고도 되고, 또는 환경이라고도 되는데 ‘세상은 항상 나를 배신한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이 땅에서 나그네 생활한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 있었던 모세, 이스라엘도 나그네 생활했고, 그 뒤에 예수 믿었던 성도들도 몸이 톱으로 켜이면서 죽음을 당한 사람도 이 광야에서 유리하면서 살았던 겁니다. 세상은 항상 나를 배신하게 돼있어요.

그런데 이것 보세요. 세상은 항상 나를 배신했다 하잖아요. 누가 배신한다고요? 내가 서있는 환경이 나를 배신하잖아요. 그러면 이 ‘나’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세상이 나를 배신해요.’라고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너는 아직도 배신의 깊이를 모른다. 네가 뭔데 배신을 운운하느냐?’

다시 말해서 세상이 나를 배신하지 않아야 될 정도로 나는 나한테 귀한 존재라고 여기는 이것이 결국 뭐냐 하면,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 자신에게 한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한 거짓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내 뜻대로 안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거짓말했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 욕 얻어먹게 생겼습니다.  

자기들이 엉터리 하나님을 만들어놓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잘 섬기고 어떻고 해놓고 막상 일 터지니까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가 뭘 어쨌는데? 내가 뭐?’ ‘하나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간다면서요?’ ‘가잖아. 그래.’ ‘가는데 왜 이렇게 힘듭니까?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아니면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시든지.’ 여기 본문에 나오니까. ‘옛날 살던 식으로 살게 하시든지 젖과 꿀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양단간에 결정을 내달라.’라고 그들이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 짝짝짝 박수를 치십니다. 비로소 이제 구원이 시작된 거예요.

그들은 애굽에서 구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애굽이 자기 몸속에서 이동하는 애굽인 줄 몰랐던 겁니다. 전에 있는 애굽을 떠나왔다고 생각한 거예요. 애굽을 잊어도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애굽의 지체, 애굽의 무릎, 발, 애굽의 기다란 그림자, 애굽이 하나의 밀가루반죽덩어리라면 그 반죽덩어리에서 길게 튀어나온 게 현재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 뜻인데 그들은 오해하기를 애굽이라는 지리적인 공간에서 떨어져 나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간다고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은 골로새서 3장에 보면, 땅에서 떨어져서 하늘로 구원받는데 우리 인간들은 이쪽 땅에서 이쪽 땅으로 수평적인 이동이 구원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모든 종교가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하겠지요. 아까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하면, 하늘 자체가 허구성이에요. 모든 종교와 관계없이 인간은 태어났다 하면 하늘은 신비롭고 좋은 것은 저 위에 있고 우리는 이 땅에서 고생한다. 죽어서 좋은데 가야지. 이거는 종교성이기 때문에 기독교만 관련돼있는 게 아니고 다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옛날 구약에서 출애굽기 16장에 보면, 애굽에 살던 사람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데려간다 이 말이죠. 그들은 생각하기를 애굽이라는 지리적인 공간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에 죽으면 하늘로 올라가면 되고. 하늘은 저 위에 있고, 예수님은 왼편에 있고, 약속의 땅은 오른편에 있고 죽으면 하늘로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한 이것이 세 개 다 틀린 거예요. 어디서 틀렸느냐 하면,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 거기 계시는데 뭐 합니까? 복 주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저기 있으니까 사람들은 정월대보름에 밑에 보고 비는 사람 없잖아요. 보름달 땅에 안 뜨잖아요. 하늘에 뜨죠. 그리고 1월 1일 구정에 해가 땅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갈 때 따라가서 빌잖아요. 빈단 말이죠.

이게 환상이고 그 하늘이 직접 이 땅에 내려왔을 때 하늘, 땅에서의 하늘이 뭐냐를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그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알았던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늘을 새로 만들어 가시면서 오시는 거예요. 우리가 전제하고 있던, 미리 알고 있던 그 하늘은 그렇게 주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한 하늘을 비껴가면서 이것이 하늘이라고 지상에서 새로 만들어가는 거예요. 언약으로, 아브라함의 맹세로.

하늘을 지상에 만드는데 그 만들어진 하늘은 애굽을 떨쳐가면서 하늘을 새로 만들어가는 거예요. 여기 애굽은 고정돼있지만 여기서 떨어져나간 움직이는 자식은 애굽은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천국을 만드시고자 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계속해서 애굽 쪽을 떼어내는 작업을 시도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은 바로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바로 애굽의 자식이고, 애굽의 새끼라고 너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사건을 통해서 이끄심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인간들이 애굽일 때 그리고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이 천국이라 하는 것은 애굽에서 만들어낸 애굽적인 하늘이고, 애굽적인 천국이고, 애굽적인 약속의 땅이고, 애굽적인 언약이고, 애굽적인 하나님의 사랑이고 용서고 그렇게 되겠죠.

그러니까 근본 자체가 애굽에서 나왔던 모든 애굽적인 하늘, 요새 같으면 애굽적인 십자가, 애굽적인 언약, 애굽적인 천국, 애굽적인 율법, 애굽적인 성령, 전부다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애굽 이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서는 그들로 하여금 예상치도 못한 사태를 일으켜서 오히려 애굽이란 인간의 속성이 진짜 하나님나라, 천국을 만드시는 분을 향하여 ‘당신은 우리를 배신했습니다.’라는 말이 순식간에 그대로 다 노출되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배신했습니다.’라는 그 말이 조롱하듯이 해학적으로 비웃듯이 썼던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이 예수님 십자가의 명패였습니다. ‘유대인의 왕’ 덧붙인다면, ‘꼴좋다’ 이렇게 되겠죠. 우리가 알던 다윗의 자손, 유대인의 왕은 예수, 당신은 아닙니다. 당신은 그냥 정신병자지 우리가 기다렸던 메시아는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성공을 한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밖에 없는 그런 태생을 성격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십자가 믿는다는 것이 바로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 믿을 때 그 십자가는 가짜로 나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난데없는 사태를 일으켜서 ‘십자가 믿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는 소리를 하게 만들어서 그 십자가 믿는 것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에너지로 사용되는 겁니다. ‘십자가 잘 믿잖아요.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나오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배신했습니다.’ 원망투로 쏟아지도록 막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애굽에서의 구원이 인간 입장에서는 애굽이라는 지역에서 약속의 땅이란 지역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지리적인 약속이지만 ‘나는 진짜 애굽 맞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걸 느낀 사람 같으면 우리가 생각했던 약속의 땅도 가짜일 수 있다는 것, 이게 우리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 있다는 게 출애굽기에 나오질 않아요. 모세도 오해했으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약속의 땅에서 모세가 죽고 난 뒤에 여호수아의 인도로 갔지요. 그러면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을 정복했습니까, 누가 정복한 거죠? 그건 전에 했잖아요. 약속의 땅을 이스라엘로 정복케 한 것은 여호수아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모세언약이 했지요. 여호수아 언약은 없어요. 죽은 모세 언약입니다. 모세는 죽고 언약은 살아있고.

모세언약의 주인공이 모세일 수 없고, 모세언약을 쥐신 그 분이 모세언약을 이루는 주인공이 되어서 모세가 빠진 상태에서 모세언약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거죠. 그 주인공이 누굽니까? 신약성경의 예수님이죠. 그리고 변화산에서 누구와 이야기합니까? 모세가 예수님과 이야기하죠. 엘리야와 나타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기를 원했죠. 아브라함언약을 이루는 주인공은 아브라함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혜택을 입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아브라함언약을 쥐신 분도 예수님이고, 성취하신 분도 예수님이고.

결국은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는 천국은 허구고 없어요. 천국은 우리 죄인으로 죄인 안에서 천국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누구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너와 함께 있음을 보여주면서 만들어갑니다. 그때 우리 역할은 아주 간단해요. 수시로 원망하고 수시로 배신했다 하고 나는 거짓말한 적 없는 주님께서 내 기도 응답한다 해놓고 응답 안 해줘서 약속 안 지킨 것은 내 쪽이 아니고 주님께서 약속 안 지켰다고 스스로 자신의 애굽성을 그대로 다 드러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계속 박수만 치는 거예요. ‘잘했어!’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7장 미리 봅시다.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분명히 노정대로에요. 주님께서 이끄는 대로 갔는데 물이 없지요. 그러면 애굽적인 사고방식에서 산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일단은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은 있어줘야 그 다음에 그 기초위에 산다는 게 성립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출애굽의 의미가 뭡니까? 물이 있어야 되고 양식이 있어야 된다는 이것을 뭐로 규정한다는 겁니까? 이게 바로 애굽 식으로 말한다면 산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물과 양식을 줘버리면 광야에서 먹고 살기는 하는데 어디서 구원은 못 받습니까? 애굽에서 구원 못 받지요. 애굽에서 구원 못 받으면 그들은 백날 배부르고 잘 살기는 살았는데 약속의 땅, 천국에 못 들어가는 거예요.

천국에 들어가는 요건은 물과 양식이 있어야 산다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탈출해야 될 애굽이라는 것, 애굽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과정이 바로 천국으로 가는 과정이고, 그게 천국의 능력이 임한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물과 양식을 주시는데 무슨 조건으로 주십니까? 그들의 하나님께 원망했던 조건 하에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너희가 결국은 떠나고 사실은 네가 애굽이라는 것이 발각되는 그 근거 하에서 주께서 그들에게 물을 주시고 양식을 주시잖아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그건 누가 구하는 거라 했습니까? ①사람이 구하는 것이다. ②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 몇 번입니까? 그게 이방인들이 구하는 건데 우리는 이방인 아니면서 뭘 구해요? 말은 이방인 아닌데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 섬기려고 하면 기본적으로 입을 것, 먹을 건 줘야 안 됩니까?’라고 여전히 그걸 붙잡고 있다는 자체에요. 그런 자체에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은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그런 것을 구하면 주께서 이런 것, 저런 것도 채워주시리라 했는데 왜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교회 갔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오는 도중에 단속 걸려서 오만 원짜리 끊게 만듭니까? 그 나라, 의를 구했으면 더 안심하고 먹을 것, 입을 것 풍족하게 주도록 약속돼있는데 마태복음 6장에서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했잖아요. 더 하는 것도 귀잖아. 빼가지나 말라. 있는 것도 빼가니까. 십일조 하면 십일조보다 두 배나 손해나면 무슨 재미로 십일조 합니까? 그런 일이 허다합니다. 그걸 참 고맙게 여겨야죠. 십일조하면 분명히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받는다고 해서 기다렸죠. 어차피 돈 놓고 돈 먹기니까. 십일조란 종자돈 바치고 기다린 거죠. 펀드, 주식 해놓고.

그 나라, 의를 구하면 먹을 것, 입을 것을 더해주시리라는 약속을 하고 그 나라, 의를 구하면 그게 바로 이방인이에요. 산상설교에서 이방인에서 우리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본인은 철석같이 믿는다는 거예요. 그 나라와 의를 구했으니까 된다고. 그 나라와 의라는 것은 우리가 구할 수 없게 돼있어요. 우리는 애굽이기 때문에 항상 구하는 것도 애굽 식의 천국이고, 애굽 식의 성령이고, 애굽 식의 십자가고 항상 애굽을 경유해서 모든 것을 더해주십시오. 이래 나오지 애굽인인데 애굽을 벗어나다니 못 벗어나요.

그런데 애굽을 벗어나게 하는 방법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애굽이게 하는 방법만 줘요. 애굽이게 하는 게 뭡니까? 성경말씀대로 하다가 나만 손해 봤다는 그러한 자기의 진실 됨이 드러나게 합니다. 결국은 내가 그 동안 교회 다니고 한 것은 말짱 나 좋으라고 한 짓이고 주님 사랑이 우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완전히 발각당할 때 그 능력이 우리가 애굽에 있으면서 그것을 천국 되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 되시는 예수님이 애굽에 있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새 언약의 완성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언약밖에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은 언약만 완성하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언약만 완성해야 돼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고생시키고 그러면서 계속 뽑아내는 태평양판과 대륙판이 마주칠 때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났지요. 밑에 지구의 에너지가 있거든요. 잠재된 에너지가 충돌하면서 솟아올라서 바닷물이 일본 동북부 해변을 덮치잖아요. 감추어진 주님의 언약의 힘이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밀어붙이는 사태와 이쪽의 사태가 충돌하면서 균열이 벌어지면서 언약이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 언약 안에서 ‘주여,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하는 고백이 튀어나오고.

나를 구하려고 언약이 있는 게 아니고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날 이용한 겁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하필이면 날 밀어냈다는 것이 축복이요, 그것이 구원입니다. 다른 집은 조용하고, 다른 교회는 조용한데 자꾸 원망이 튀어나오고 하나님께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자체가 동행하고 있다는 증거거든요. 그것이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복이라는 겁니다.

그걸 제일 먼저 이야기했듯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결과적으로는 나그네 생활했지만 본인들이 얼마나 그 땅에 정착하고 싶어 했겠습니까? 양도 늘어나지 뭐 때문에 떠날 이유가 없는데. 얼마나 그 땅에 발을 빼기 힘들겠어요.

야곱이 자기 아들이 애굽에서 불러도 안 가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가라, 가.’ 해서 간 거예요. 얼마나 약속의 땅이라는 곳이 소중한 땅이고 막벨라 굴이 있고.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어요. 그런데 애굽을 거쳐야 약속의 땅이 보인다는 사실을 주께선 계속해서 언약을 통해서 가르쳐 주는 거예요. 교회 붙들고 천국 붙든다고 천국 가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천국을 붙들어봐야 조작된 내 의지로 나 살고자 하는 가짜 천국이지 진짜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그야말로 ‘나는 천국보다 이 세상이 좋아’ 하고 천국을 포기하고 싶고, 예수도 포기하고 싶은 그런 막다른 곳에 집어넣을 때 그렇게 집어넣는 그것이 곧 구원의 십자가로 통하는 진짜 이것은 자기가 스스로 한 게 아니라 하나님 힘에 의해서 이뤄지는 자기 부인의 경로가 되는 겁니다. 과정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하고 10분 쉽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이스라엘을 만듭니다. 이것을 모세가 알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줬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젖과 꿀이 들어간다는 것만 귀에 들어왔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애굽에 있을 때보다 더 좋은 땅이라는 것만 알고 나선 거예요.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만약에 그렇게 유지한다면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배신당하고, 그 하나님은 거짓말만 남발하는 정말 도저히 믿지 못할 분이라는 것을 처절하게 온 몸으로 그걸 그들은 느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느끼도록 주께서 일부러 몰아가요. 물이 없는 곳으로 보내고 양식 없는 곳으로 보내고. ‘물이다’ 하고 가서 마시려하니까 써서 못 먹고. 누구 약 올릴 일 있습니까? 끊임없이 약 올려요. 주님을 소유하려 하면 참기름 바른 듯이 쏙쏙 빠져버려요. 주님을 만들어서 좋은 방향으로 해보려한다면 어느새 빠져나가있습니다.

왜 그렇게 돼야 하느냐 하면, 주님은 애굽에 소속되는 게 아닙니다. 끊임없이 주님은 애굽에서 구원을 해내는 분이기 때문에 이미 우리가 예수님을 붙잡아버리면 주님은 애굽에 갇힌 분이 돼버려요. 애굽에서 탈출시켜야 될 분이 갇히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현재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하면 그 자체를 어느새 그것이 또 새로운 애굽으로 탈바꿈 돼있어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이미 내가 구축한 나만의 세계에서 나는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사업을 했는데 사업이 몽땅 망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는 모든 걸 접고 하나님한테 영광 돌리고자 작은 서점, 그것도 기독교서점해서 오직 주님의 영광만 돌리고 주일에 문 닫고 교회 와서 봉사하겠다는 그러한 구조, 그렇게 만들어진 그것은 새로운 애굽이 돼있는 거예요.

그래서 애굽에서의 탈출이기 때문에 서점해서 이 안에 예수님을 가두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애굽은 뭐든지 밖에서 끌어당겨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애굽이라면, 천국은 내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을 끊임없이 깨부수고 거기서 빼내는 일을 하는 거예요. 만들어지면 빼내고, 만들어지면 빼내고. 그래서 누가복음에 보면 나오죠. 천국은 보이는 것으로 오지 않는다 했지요.

그러면 이렇게 하면 나타나는 게 뭐냐? 이게 이 강의 마지막에 제일 중요한 건데요. 하나님이 지옥 같은 죄악 된 세상에 친히 방문하셨다. 이 취지입니다. 내가 뭔가 서점해서 이제 신앙인답다 싶으면 이 안의 하나님이 돼버려요. 바깥에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깥에 새로운 사태를 일으켜서 찾아오시게 되면 내가 이만하면 됐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죄며, 그 죄 속에 주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그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죠.

그러면 현재 이 서점에서 건져냈으면 어디 갈 것인가? 사람은 끝없이 변하기 때문에 건져낸 다음에 또 하나 있겠죠. 그러면 여기에 주님을 모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죄악 된 세상에 찾아오시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면 이 자체를 사태를 일으켜서 이것이 원활치 않도록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또 원망하고 또 배신감을 느끼고. 그 과정 속에서 성령으로 깨달음을 주시면 다시 십자가라는 깨달음을 주면 또 나는 내가 근사하게 여겼던 나의 영역이 또다시 우상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런 과정을 겪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하나님이 의인을 만나러 온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부르러 온 이 원리는, 예수 믿고 계속해서 증인 되는 원리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죄인이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이게 하는 것이 고난주일 반성하고 회개하는 게 아니고 그냥 사시면 돼요. 사시면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면 거기에 대해서 우리 기대치에 영 못 미치고, 그 정도가 아니고 아예 ‘우리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어려움을 주지?’ 그렇게 원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태 속에서 그 동안 나는 이만하면 됐다는 자기 만족성에 있던 새로운 죄를 거기서 스스로 애굽적 요소로 구축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몸이 떠나지 않는 한, 아담의 몸이 있는 한 쭈욱 계속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서 이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할 그때가 그립다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210.♡.51.85) 11-05-12 14:25 
20110506b 울산강의-출애굽기 16장 : 거짓말 하나님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원망케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이 공중 권세 잡은 악마의 지배 하에 있으면서 악마의 지배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만 눈에 보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악마라든지 그런 것은 열외로, 상상의 산물이지 실제는 현실 속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듯이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그 뒤에 나오는 게 중요하죠. 네가 진노의 자식, 진노 받아 마땅한 그러한 진노의 자식으로 살았다는 거죠. 그런데 그 사실을 우리는 말로서, 지식으로서, 들어서는 무시할 수 있는데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우리 같은 죄인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그대로 버림받음이 있을 때 십자가에서 모든 사실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가 진노의 자식이라는 거예요.

로마서 5장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원수 되었기 때문에 원수 된 것은 원수 되지 않은 자로 바꾸려고 시도하는 그것도 원수 된 자의 행세입니다. 그러면 안 돼요. 왜냐하면 원수 된 관계를 변경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원수 된 것을 원수 안 되게 한다는 그 결정을 우리가 하면 안 돼요. 우리가 환경을 바꾼다든지 ‘나는 원수 안 할 거야.’ 이렇게 지가 나대면 안 됩니다.

원수 된 것이 무엇 때문에 원수 안 되느냐는 결정은 또 주님께서 새로 개입해야 돼요. 그건 뭐냐? 십자가의 자기 피로만 원수가 안 될 뿐이에요.

-모두가 자기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 하거든요.

영광은 예수님 통해서만 받습니다. 우리 인간을 통해서 영광을 안 받아요. 예수 안에서 영광 받도록

-내가 주님을 원망하는 그 자체도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서 한다는

그렇죠.

-그러면 모든 게 인간이 어떻게 하는 것 자체가 주님이 시켜서 자기 스스로 영광 받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이제 마귀의 활동을 허락하신 이유가 거기 있죠.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되는데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결국은 ‘네 영광을 포기해서는 안 돼.’라고 이미 우리는 그러한 게 습관화 돼있고 태어날 때부터 그런 죄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그게 우리 몸에 합당한 거예요. 그렇지.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면서도 나만의 고유의 나의 자리는 따로 확보하는 방법,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방법을 생각한 거예요. 이게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도 바울이 보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거예요. 모든 것이 죄고,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사도 바울은 기쁘게 비로소 알게 된 인생의 무거운 짐이 다 날아가면서 외치는 찬양입니다. ‘주여, 의인은 하나도 없나니 죄인밖에 없습니다.’라고 십자가 앞에서 그걸 너무도 감사하며 고백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사정을 변경하는 것은 내가 예수 믿어줘서도 아니고 내가 예수 따라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스스로 화목제물 되심으로써 이 사실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과 화목 된 관계 속에 들어오게 한 거죠. 그것이 바로 출애굽에도 역사로 설명하는 겁니다.

아까 했잖아요. 원망하고 난 뒤에 양식과 물을 준다고요. 원망을 다 나오게 만들고 그 다음에 양식과 물을 줌으로써 내가 너 살리는 게 목적이 아니고 네가 애굽이라는 사실을 발각시키는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하나님의 희생해 주시는 자비를 자비롭게, 사랑을 사랑답게 높이는 하나의 배경이 되는 겁니다.

‘나는 애굽입니다.’ 하는 그것이 하나님 보기에는 애굽 같은 너를 내 희생으로만 건졌다는 것이 바로 천국의 본질이다 이 말입니다. ‘너는 죄인이었어. 너는 지옥 가야 되었어. 하지만 내 덕분에 네가 산 지 알아.’ 그것이 천국의 본성이죠. 내가 천국 챙기는 것이 천국의 본성이 아니고.

-그럼 목사님, 원래 하나님은 그런 분이었는데 각각 개인이 이런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만들어놓고 그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 믿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각각의 하나님이 아니고, 각각의 하나님을 뭉쳐봅시다. 애굽적인 요소가 상상한 하나님.

-우리가 우리 편리를 위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으로 보는 경향이 많잖아요. 그렇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기 때문에 원래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쉽게 말하면, 원래의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우리가 믿었던 하나님과 너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서 우리가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불편할 수가 있지요.

불편할 수밖에 없죠. 우리가 상상한 말고 다른 게 있을 거라 해도 그 다른 것에 주께선 초점을 안 맞추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까 강조했잖아요. 하나님이 이 땅을 먼저 방문했다 이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을 오라고 하지 않았어. 그냥 하늘 쳐다보고 가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이 죄악 된 세상에 와버렸을 때 어느 누가 그분을 하나님을 알아 볼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기 입으로. 아무도 없었죠. 베드로가 주는 메시아라 해도 그건 자기 혈육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만들었죠.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알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베드로 세 번씩 부인한 것 알잖아요. 그러니 주님의 언약적인 작정을 아시면 돼요.

-그러면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게 애굽적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우리에게 진짜 하나님, 낯선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는 우리가 불평할 수밖에 없죠. 하나님 편에서는 불평해라. 불평하는 게 맞다. 아까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 불평의 내용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게 포함이 돼있다니까요. ‘찬양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것이 자기는 불평이 아니고 오히려 구원받은 기쁨인 줄 알지만 내일 되고, 모레 되면 무슨 사건이 벌어져버리면, ‘내가 어제 그렇게 찬양하고 감사드렸잖아요. 그런데 어찌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는 말이 튀어나올 수 있는 바탕이 마련돼 있는 거예요.

자기 딴에 찬양하고 기뻐했는데 그것이 어느새 자기 의가 누적이 돼있어서 그 다음에 어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버리면, ‘도대체 하나님 믿으란 말입니까, 믿지 말란 말인가? 진짜 해도 해도 너무 심하네. 왜 이래 하십니까?’ 하는 거예요. 그럼 주님께서 그 따위 소리하는 네가 나그네가 아니라는 거예요. 떠날 준비가 아니고 현재 있는 걸로 정착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거죠.

사람은 몸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공중에 못 뜹니다. 주님만이 구름 타고 올라갔지 뜰 수가 없어요. 죽었을 때는 몰라도. 나중에 마지막 휴거할 때 재림하실 때 뜹니다. 인간은 그냥 땅에서 와서 땅으로 사라지는 거죠.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이고 끝까지 불가능이에요. 조금도 가능을 비치면 안 됩니다. 이제는 구원은, 내가 이렇게 하면 가능하겠다고 하면 안 돼요. 끝까지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주셔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행함을 믿지 않는 게 믿음이에요. 믿음의 반대가 행함이에요. 행함을 신뢰하지 않는 게 바로 믿음이 돼요. 예수님이 행한 약속만 믿는.

그 예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기를 못 낳게 하잖아요. 이미 아브라함이 아들 하나 엉뚱한데 하갈에게 낳아놓지만 그건 아들이 아니라 하잖아요. 일은 우리 힘으로 다 저지르게 만들어요. 그야말로 아브라함이 막 사는 거예요. 아이 낳고 싶으면 아이 낳고, 지하고 싶은 대로 다 해요. 해놓고 결국 뭡니까? 그게 아니라는 거죠.

야곱으로 하여금 형의 장자권을 갖기 위해서 팥죽으로 속이고 하는, 자기하고 싶은 대로 다 해요. 뒤돌아봐서는 그게 뭡니까? 그게 바로 육에서 나오는 축복 챙기기라 하는 거예요. 육에서 지키는 언약수완이 그 정도밖에 안 돼요. 요셉이 고생하기 이전에 야곱이 알았던 흔적 중에 하나가 죽음인데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언약에 따라서 죽잖아요. 마지막 베냐민 낳고 이게 언약의 조치인 줄 알아요. 이것은 슬픔의 아들이 아니고 오른손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인간은 있음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했기 때문에 부활의 하나님이 찾아올 때는 항상 예수님 자기 죽음을 앞장세워서 죽음을 밀면서 오죠. 우리 인간은 살고 싶은데, 예수 잘 믿고 복 받아 살고 싶은데 그 자체를 그게 십자가 죽음을 대체할 수 없다고 보는 거예요. 죽음 안에 부활, 천국이 있으니까.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이 경로 아니면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부활의 경로를 통해서 십자가로 오죠. 우리로 하여금 다시 죽게 해서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부활에 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은 이 땅에 와서 다른 것 안 했어요. 그냥 십자가에 죽었어요. 석가모니처럼, 공자처럼 뭘 훈계한 게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의 모든 산상설교 말씀은 자기 죽음을 이야기한 거예요. 내가 이런 소리하면 너희는 날 죽일 것이고, 이런 소리하면 날 죽일 것이고. 왜? 너희들이 마귀 속에 있기 때문에. ‘마귀야. 빨리 정체 드러내.’ 내가 이런 기적하면 결국 그런 기적 보여 달라고 나를 죽일 것이고, 제자들도 나를 팔아먹을 것이고. 모든 주변에 있는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만드는 요소들로 전부다 집대성되죠.

두 번째 시간에 그걸 뭐라고 하느냐? 구멍. 이걸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진짜 천국, 다른 말로 언약의 완성은 이 지상, 인간세계와 만들 때 여기에 구멍을 내버립니다. 이 구멍이란 말은, 인간이 익히 알고 있는 고상하게 말하면, 애굽에서 바라본 세계관 한 복판에 구멍을 내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멍 난 것은 기존의 인간의 세계관의 구조 속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생겨날 수 없는 구멍이 생겨버려요.

내가 생각했던 인생관, 세계관에서 그것이 이 원칙, 원리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어떻게 원인도 결과도 규명이 안 되는, 돌발적이고, 난데없고, 특이하고, 당황스럽고, 희한하고,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그러한 구멍을 내어서 주변에 내가 만든 모든 세계관을 못 쓰게 만들어요. 쓸모없게 만들어요. 휴지로 만들었다고. 찬송가에다 드릴로 구멍을 뚫으면 못 쓰잖아요. 내가 구축한 세계관에 구멍을 뚫어서 전혀 못 쓰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사람이 손톱 하나 깨져도 하나님께 원망하는 법인데, 발가락은 말할 것도 없고. 내 인생에 이렇게 흠집과 구멍을 내고 호되게 해놓으면 원망 안 한다는 것이 더 위선적이죠. 도대체 어떻게 살라고? 걸레같이 만들어놓고, 내 인생을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이 인생을 다시 거둬서 짜깁기해서, 얼기설기해서 그나마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을 아예 차단시켜버리죠. 그러면 걸레조각 같은 너덜너덜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게 바로 광야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뭘 하게 되면 인간은 저번에 실수를 했기 때문에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지. 해서 지난번의 잘못한 것을 거울삼아서, 그걸 교훈삼아서 두 번 다시 그런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완벽을 기하는 게 인간의 입장 아닙니까. 그게 바로 애굽이란 말이죠. 거기다가 얼추 대치가 되고, 어지간히 잘못해도 견딜만하다고 여기면 거기에 그것마저 못 견디게 만드는 더 큰 분노가 와버린다니까요.

그래서 원망이 갈수록 줄어지는 게 아니고 갈수록 원망의 도가 심해져서 신약시대에는 메시아까지 죽여 버렸잖아요.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예화가 포도원비유 아닙니까. 종들을 보냈고, 또 종들을 보냈고 심하게 때렸고. 마지막에는 자기 아들을 보내면 되겠지 했는데 아들마저 죽였을 때 너덜너덜한 인생 되고 말았어요. 우리는 그 인생 조각이지만 그래도 인간이 자기가 살아야겠다는 끈질긴 생명력에 의해서 주께서 너덜너덜하게 만든 인생이라도 그 조각들 다 주어모아서 그래도 성실하게 살려고 주께서 날 망쳤지만 나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는 잠언서 말씀처럼 일어나면 또 거기다 구멍을 뚫어버려요.

우리 장로님 질문대로 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두 번 해도 이거는 내 몸이 있는 한 정신 차리지 않습니다. ‘그래. 내 몸이 아니야.’ 이것 몇 초 안 갑니다. 내 몸이 아니라고 우겼기 때문에 역시 내 몸은 괜찮은 몸이라고 하는 거예요. ‘늑대 온다.’ 거짓말, ‘늑대 온다.’ 거짓말, ‘여러분, 제가 이제 반성합니다. 늑대 온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반성해요.

그런데 그 반성을 거짓말을 마이너스라 봅시다. -7, -6, -5 더하면 얼마 됩니까? 늑대가 온다, 구원이 온다 또는 이리가 온다 하면, -18 되잖아요. 거짓말의 더하기가 돼요. 뭘 해도 거짓말이 돼요. 그런데 기독교식으로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하면, 이것도 거짓말이잖아요. 거짓말과 마이너스가 목사님이 -6을 해버리면 이게 -42가 아니고 +42가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바리새인 방법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하는 그 순간 자기는 죄인이 아니고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의인 돼버렸어요. 이게 개혁주의 성화론의 딜레마에요. 성경에서 늘 이야기해요. ‘예수님 중심입니다.’ 이러면 그들은 ‘그래요. 나는 예수님 중심입니다.’ 방금 한 것처럼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주의 몸입니다.’ 하면, ‘그래요. 나는 주의 몸입니다.’ 항상 ‘그래요’가 돼요.

그런데 결국 어떤 사태가 일어나면 그것이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 됩니까? ‘예수님 중심으로 알고 있고, 나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인생 어떻게 살라고 여기다 또 구멍을 내버립니까? 걸레를 만들어버립니까? 나는 어찌하라고?’ 바로 그 순간이 주님과 동행하는 순간입니다. 그 소리를 주께서는 원하시는 겁니다. 상한 심령, 거울 같은 심령.

그런데 방금 제가 이렇게 광야를 설명하면서 광야 자체도 그래요. 힘들게 살았다 하는데 만약에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도 힘든 게 없고, 애 서울대학교 다 합격하고, 장가시집 잘 가고, 진짜 가족 다 건강하고, 사업도 잘 되고, 교회도 부흥되고 넘쳐서 저쪽 큰데 사서 옮길 정도로, 교인도 오천 명, 그렇게 되었을 때 성령 받은 진짜 성도는 뭘 느끼겠습니까? ‘주여,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세상적으로 힘든 것과 똑같은 고백을 하게 돼요.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잘된 것도 애굽이고, 못된 것도 애굽이고. 이래도 애굽이고 저래도 애굽이고 모두 다 진짜 예수님만 사랑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로 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돈이 많고, 가족도 화목하고, 교회도 잘 되고, 다 믿음 좋다고 칭찬하고 이 모든 것이 진짜 성령 받아버리면 자꾸 십자가를 작게 오그라들게 만들고 십자가 아닌 세상 것과 비교해서 우위를 가지고 세상 것에 기죽지 않는 나의 가치를 또다시 넓히는 악마적인 요소기 때문에 그런 것이 시험이 돼요.

예수님 처음 시험이 뭐였습니까? 힘든 시험이었잖아요. 두 번째 시험은 뭐였습니까? 신나는 시험이었습니다. 세 번째 시험은 뭐였습니까? 완전히 출세하는 시험이었잖아요. 첫 번째가 뭐죠? 돌이 떡 되게 하는 것, 고생이죠. 두 번째는 신나는 거예요. 네가 뛰어내려라. 천사가 와서 받들면 메시아로 뜬다. 그럼 네 하는 일은 수월하게 된다. 세 번째가 뭡니까? 진짜 큰 힘을 갖는 거예요. 세상 모든 부귀영화를 다 쥐는 거잖아요.

그러나 예수님 입장에서는 뭐가 중요합니까? 어떻게 하던 언약을 이루는 거죠. 말씀을 이루는 거예요. 아버지 말씀대로 십자가에 죽는 겁니다. 그 완성태, 그게 천국이에요. 그 천국의 십자가의 씨앗을 지금 성도들에게 언약으로 그대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땅에 것이 잘 되던 못 되던 땅에 것을 생각하지 말라. 그건 우상숭배다. 위를 보고 살아라. 그런데 그 위라는 것이 세상적인 일방적인 종교적인 위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갑자기 200억 재산이 생기고 이럴 때는 성도한테는 ‘주여,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좀 이상하죠. 200억 안 받아 봐서 모르죠. 저도 안 받아 봤습니다만. 자식이 잘 되고, 모든 게 잘 풀릴 때 십자가가 쪼그라들죠. 십자가가 안 보여요. 교회가 부흥되면 목사가 십자가 안 보입니다. ‘주여, 이 오천 명 되는 교회 다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게 안 되는 겁니다. 그게 전부다 마귀의 시험에서 오는, 예수님 시험에서 나온 거예요.

진도 나가봅시다. 그러면 제가 애굽이라 했습니다. 그럼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이 애굽적인 인간들이죠. 애굽을 떠났지만 이들이 가고 있는 움직인다는 자체가 애굽이 움직이는 겁니다. 항상 애굽이 있을 때 분명히 애굽에서 떠나라 했으니까 애굽적인 요소가 만들어져야 여기서 애굽에서 떠난다는, 애굽에서 벗어난다는 진정한 의미가 뭐냐? 여기 반드시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희생이 없이는 애굽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에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 오기 전에 유월절 했지요. 유월절에 누가 죽었습니까?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흠 없는 어린양이 죽었죠. 흠 없는 어린양이 죽었기 때문에 애굽적인 인간에게는 ‘어린양 피, 효과 좋대. 다른 집은 다 죽었는데 우리 애만 살았잖아. 그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멋있대.’라고 생각한 거예요. 과거에 한번 지나간 그때 이벤트로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 희생양, 어린양이 어디로 쏟아졌습니까? 한 번 지나간 것 같은데 이것이 지속적으로 어디 갑니까? 이들과 하나님과 애굽 같은 이 사이에 그 시대에 중보자가 누굽니까? 모세지요. 그런데 모세 오른손에 지팡이가 쥐어져있죠. 그러면 모세 본인이 일찍 죽은 어린양이란 뜻은 아니고 모세가 철저하게 어떤 구조에 놓여있어요. 하나님 언약 이루기 위해서 중간에 흠 없는 어린양 죽는다. 그리고 거기서 건져낼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렇게 되잖아요.

적어볼게요. 어렵네. 하나님 계시고 그 다음에 어린양 있고, 어린양의 혜택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죠. 이 백성은 현재 이스라엘은 자기와 일치시켰지요. 그게 오해죠. 그리고 어린양은 모세와 일치시켰죠. 이것도 모세가 오해한 거예요. 이 구조는 하나님과 어린양 그리고 백성이란 이것은 언제 실체가 드러나느냐 하면, 신약성경에 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예수님만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고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성령 받은 사람만이 백성이 되는데

구약에서는 언약적 구조를 갖고 있어도 여기다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임의대로 여기다 대입을 시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철저하게 애굽적이고 다른 말로 육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육적이 되느냐 하면, 애굽에 있는 이 사람들은 무엇과 비교해요? 애굽에 있는 애굽 사람들, 애굽 민족들과 비교하겠죠. 우리는 애굽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 하는 거예요. 그리고 모세는 지도자가 되고. 이러한 오해에서 모세 본인도 묻혀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디서 그게 탈피되느냐 하면, 아말렉 전쟁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멜렉 전쟁이죠. 아말렉 전쟁에서 모세가 주도권 갖고 있습니까, 모세가 쥔 지팡이가 주도권 갖고 있습니까? 지팡이에요.

모세가 ‘여호수아 이리 와. 작전 이거야.’ 여호수아가 ‘모세님이 어떻게 그런 것을.’ ‘내가 바로 어린양이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는 중보자야. 내 말 들어. 이리 와. 전쟁은 이렇게 하는 거야.’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죠. 모세가 지팡이를 들었죠.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지팡이가 모세를 지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지팡이에서 보여주는 것은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상했던, 아까 이야기한 그 세계관, 애굽에서 배웠던 세계관을 완전히 반대로 돼요.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한다니까요.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한다는 것이 뭔 뜻인지 참 힘들지요. 설명해드릴게요. 다르게 하면 내 방법 말고 딴 방법 있다는 게 다른 거고, 반대로 하게 되면, 현재 내 식으로 하는 그것이 하나님 일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런 죄악 된 일이 된다는 것을 까발리는 것이 반대 일이에요.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일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지금 애굽에서 나왔다고 촐랑댈 입장이 아니고 너희들 때문에 주님께서 계속해서 희생을 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너희들은 옛날 유월절 어린양 때문에 손 털고 이제는 우리는 이스라엘이라고 장담하는데 그 상황 자체 때문에 계속해서 희생이 필요하다 말이죠. 그런데 거기서 모세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 말이죠.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잖아요. 왜 그랬어요? 성질나서.

여기 있는 애굽 사람들 누구와 비교합니까? 나는 저쪽 애굽에 있는 사람들과 다른 이스라엘이라고 좋다 하잖아요. 모세는 누구와 비교해요? 모세는 지팡이와 비교해야 되는데 어리석은 백성과 안 어리석은 나하고. ‘주여, 백날 가르쳐도 안 됩니다. 성질나서 쳐야 되겠다.’ 모세 본인도 이러한 인간 중에서, 애굽 틀에서 온전할 수 없는 겁니다.

아말렉 전쟁에서 새로운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현재 물도 없다, 양식도 없다, 겨우 사는 가운데서 전쟁까지 터졌다. 이거는 애굽에서 여유 있는 가운데 전쟁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죠. 그때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갑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호수아로 하여금 기존에 하는 방법대로 하게 합니다. 그러면 여호수아는 칼 들고 나가겠죠. 장수니까. 이쪽에서는 무엇이 일어납니까? 애굽적인 방식으로 애굽적인 전쟁을 벌이는 무대를 만들어놓고 이쪽에서는 뭐가 오르락내리락합니까? 지팡이가 해요.

아론과 훌이 받치는 것은 모세 팔 때문이 아니고 모세 팔에 들고 있는 지팡이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예요. 백성들이 양쪽을 다 보게 하는 거예요. 여호수아의 전쟁의 진도상황과 지팡이 양쪽 다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하나님의 전쟁은 도저히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되는 거예요.

아마 지팡이가 계속 올려져 있으면 여호수아 장군의 능력이라든지, 모세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그런데 지팡이가 내려옴으로 말미암아 여호수아 장군이 밀리는 것을 보게 하죠. 그래서 전쟁의 좌우가 인간의 설치는 것과 관계없이 지팡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지팡이가 내려옴을 통해서 보게 하는 겁니다.

여기 16장 4절 봅시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기에 율법이 나오죠. 율법이라 하는 것은 아직은 시내산에 도착 안 했잖아요. 시내산에 도착도 안 했는데 무슨 율법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율례와 규례와 법도, 이런 것들은 양식이 비같이 올 때 우리가 애굽인이 그냥 받아버리면 양식을 먹게 되잖아요. 그런데 양식을 주는 것은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요구화시키면 이건 양식을 먹는 겁니까, 율법을 먹는 겁니까? 율법이 없이는 양식을 안 준다는 것을 알게 되죠.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할 때 요한복음 6장에서 주께서 먼저 뭘 줬습니까? 떡과 고기를 주고 살과 피를 마시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 입장에서는 떡과 고기를 주신 것은 이걸 먹고 배부를 까닭이 아니라 자기의 살과 피와 연관시키려하는데 이 연결점을 인간들은 알지 못하고 떡과 고기를 나 살찌우기 위해서 주님을 좇아온 거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 주신 떡과 고기를 준 취지를 연계되지 못하고 자기 몸과 연관된다는 그 자체가 결국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흐리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거예요. 네가 살고자하는 것 때문에 내가 죽는 그 죽음을 네가 받아버리면 너는 제대로 사는 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원망과 인간의 죄가 필요한 거예요. 살과 피를 찢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우리가 죄인인 줄 모르고 떡과 고기 안 주고 그냥 살과 피 같으면 살과 피를 마셔서 또 내 몸이 있으니까 해석하게 될 겁니다.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네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할 때 우리의 노림수가 있어서 그 나라와 의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내가 원래부터 원했던, 내 몸이 원했던 그걸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복음 들어주고 교회 가서 기도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이 안 나옵니다. 주님의 언약이 안 나오고 주님이 안 나와요. 계속 애굽에서 왔다가 애굽에서 마감돼버립니다. 주님의 일이 성사가 안 돼요. 이스라엘은 들러리입니다. 이번에 영국왕실 결혼식에서 신부 뒤에 따라다닌 여자 하나 있어요. 신부의 동생이라 하던데. 그러면 그 결혼식 따라 다니는 아가씨도 드레스 입었잖아요. 그래봐야 들러리 아닙니까. 피조물이란 주님의 들러리로 만드는 거예요. 우리 몸은. 우린 울산에 살면서 ‘하나님이여, 이 몸 어떻게 살라고?’ 자기가 주인공이야. 자기 때문에 예수 있고, 자기 때문에 하나님 있는 줄 알고 자꾸 자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니까요. 이 버릇이 광야에서 계속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기 전에 먼저 율법의 정신부터 줘요. 양식과 율법의 관계. 그래서 그 다음부터 시내산 이후에도 계속 양식이 와요. 시내산 율법 주고서도 양식 주는 것은 이 율법을 준해서 맥추절, 유월절, 수장절 이 모든 열매는 율법 먹으라고 준 게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을 드러내라고 주신 땅의 축복이라는 것을 알지요. 그들이 알면 이방나라한테 안 잡히고 그걸 모르고 ‘이젠 살만하네’ 하면, 다시 주위에 있는 짐승 같은 이방민족한테 삼키고 잡아먹히게 되죠.

이게 율법이라 하는데 다른 말로 모세언약 아닙니까. 모세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된 거예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 겁니다. 들러리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노아언약에서 선인과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신 걸 알고 있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햇빛과 공기를 주십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노아언약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 속에서 노아언약이 완성되기 때문에 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고통과 예수님의 신음소리와 희생 없이는 십자가에서 이루지 못했잖아요.

그렇다면 선인과 악인에게 현재 공짜로 햇빛 주고 공짜로 단비 주는 것은 누구의 희생 덕분 때문입니까?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피와 아픔과 신음소리와 고통의 혜택을 입고 내리는 햇빛과 비다 말이죠. 그런데 이 불신자들은 예수님의 신음소리와 고통을 빗속에서 찾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죽게 되면, ‘제가 언제 주님 앞에 그렇게 주님을 영광 돌리지?’ 이따위 소리를 핑계치 못해요.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모든 살점들, 세포덩어리가 공짜로 주시는 햇빛과 공기 덕분에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서 온다니까요. 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희생자가 누구냐를 보여주기 위한 아말렉 전쟁이란 말이죠. 그 전쟁에서 승리해서 마음 편하게 살라는 목적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켜서 이런 전쟁에서 승리하고 양식을 주시는 율법의 주인공 되시는 분이 누구냐 그쪽으로 이끌기 위한 쪽으로 데려가는 여정 중에서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그런 식으로 오는 겁니다. 그런 걸 통해서 우리가 사는 것이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희생 덕분에 주님의 십자가 피 덕분에 지금 밥 먹고 사는구나. 이렇게 건강한 것도 주께서 은혜 주셔서 감사하구나 하고, 항상 성도는 매사에 주님의 희생과 고통을 연관시켜서 생각해야 됩니다.

지팡이가 지향하는 것은 나중에 모세가 사라지면 지팡이 시절도 사라집니다. 모세가 죽으면 지팡이도 함께 죽죠. 결국 모세는 희생자죠. 희생자를 보여주기 위해서 희생되어야 될 인물로서 희생자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모세조차도 진짜 희생에 방해꾼이 되게 한다는 의미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을 쳐다보지도 못한 억울한 희생자가 된다 말이죠. 모세가 화를 낸 것은 백성들이 말을 안 들어서 그랬잖아요. 백성들이 말을 안 들어서 성질나서 반석을 가리켜야 되는데 두 번 쳤단 말이죠.

어떤 의미에서 모세가 백성들 때문에 약속의 땅 구경도 못한 희생자가 된다. 그런데 그 희생은 진짜 숨어있는 희생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억울하게 본인은 약속의 땅을 가지 못하고 그냥 천국만 바라보는 희생자가 되는 겁니다. 그 역할을 모세가 한 겁니다. 모든 목사나 장로들이나 성도들이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든지 예수님의 희생을 가리면 안 돼요.

그러면 모세가 가리지 말고 ‘주님이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느냐? 그 방법은 안 돼요. 왜냐하면 무엇이나 희생하는 방법으로만 하거든요. ‘모세, 너도 아니야.’라는 식으로만 예수님이 등장하기 때문에 모세는 나름대로 까불어야 돼요. 모세가 겸손해서 ‘저는 아닌데요. 주님, 다하셨어요.’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지가 너무 의인돼버려요. 모세도 마찬가지로 자기 성질대로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주실 때 주께서 수고했다고 치워버리고 죽은 모세를 대신해서 여호수아가 들어가겠죠. 모세는 죽었어도 모세언약을 살아있고.

이게 바로 부모가 자식들에게 교육할 방식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희생을 다하시고 자식을 위해서 복음을 다 전하시되 그렇게 한 우리가 공로를 받거나 영광을 받을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는 자식 위해서 하면서 나름대로 남의 자식은 지옥 가도 내 자식은 천당 가야 한다는 자기중심주의는 항상 내 몸이 있는 한 떠나지 않습니다. 결국 나도 복음 하지만 막 살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어요. 평소에 복음으로 막 사는구나. 그것이 모세가 보여주는 겁니다.

진도 또 나갑시다. 피곤하시니까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6장 돌아와서 웬만한 이야기 했으니까 그 다음에 13절에 봅시다. 고기 없다고 고기 내놔라 할 때 고기이야기한 겁니다. 그 다음에 16장 20절 봅시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옛날 티비 외화, 미국드라마에 [미션임파서블]이 있어요. 우리나라 번역으로 [제5전선]이라고 있었는데 거기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뭐냐 하면, 비밀명령 받는 테이프가 5초 후에 자동적으로 파괴됩니다. 누가 명령했는지 모르게 하기 위해서. 여기 만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율법이 들어있어서 율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양식도 5초 후에 자동적으로 소멸하는 거예요. 없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지금도 그러느냐?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하나 예를 들면 찬송가 405장 있잖아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교회 처음 나와서 이 노래 부르면서 눈물 흘리면서 다 부르지 못하고 우는 거죠. 이걸 기표라 하는데 기호학에서. 나-같-은 이것이 눈물 줍니까? 아니면 음표가 눈물 주는 거예요? 음표나 가사가 주는 게 아니잖아요. 이건 자기의 감정이 실려서 울었잖아요.

그런데 십년 뒤에 이 노래 부를 때는, ‘나~같~은 빨리 안 끝나나. 왜 또 4절까지야. 목사님, 1절, 2절만 합시다.’ 이런다고요. 뭐가 소멸됐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소멸됐지요. 왜 똑같은 찬송하는데 빨리 시간가는 걸 바라고 소멸됐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마음이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옛날에 한번 은혜 받았기 때문에 그걸로 계속 먹어주는 거예요. 그래도 은혜 받은 사람인데 은혜 받은 이게 교만하게 만들었어요. 이젠 은혜 받아버렸는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할 때 아무 의미도 없어요. 뭘 또 살려? 이미 살았는데.

그래서 이 찬송가에 눈물 흘리려면 옛날 방식 아닌 다른 방식의 지시와 명령을 받아서 다시 또 시작하게 만드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야 돼요. 아까 했지요. 갑자기 한 200억 들어온다든지, 갑자기 부동산 두 채가 들어와서 ‘주여, 나로 하여금 이 짐을 주십니까? 이걸 달라하지 않았는데 난 죽기를 원했는데 왜 부동산 두 채를 주십니까? 내가 원한 게 아닙니다.’ 꼭 주께서 주실 때는 원하는 걸 안 줍니다. 돈이 되던 뭐가 되던 내가 원하지 않는 걸 줘요.

줘놓고 그것이 우리 인생에 십자가를 방해하는 세력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 그런데    애굽에서부터 탈출은 오직 십자가 피밖에 없다는 사실을 또다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이 찬송 부르면서 또 우는 거예요. ‘나 같은 죄인 이번에 부동산 세 채를 공짜로 얻었는데 부동산 부자,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살리신 은혜, 부동산보다 난 주님이 더 좋아.’ 깨닫고 하시는 고마움에 눈물 흘리는 거예요.

집사님 딸 시집보냈잖아요. 그때 눈물이 좀 나던가요? ‘저 자식 키운다고 돈 얼마나 들었는데. 머슴아한테 다 뺏기고. 저게 잘 살아야 될 텐데. 그래 잘 살아라. 예수 믿고 잘 살아라. 엉뚱한데 절에 가지 말고.’ 그런 감회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딸이 멀리 시집 안 가고 바로 옆에 차려서 만날 김치 가져가고 된장 가져가면, ‘그만 와라. 시집 간 거 맞나? 힘들어 죽겠다.’ 이렇게 되죠. 옛날 결혼식 때 울던 감정 사라졌습니다. 실제로 우리 고모가 그랬으니까 알아요.

그래서 항상 처음 사랑, 주님만 사랑스럽고 다른 것 다 사라져도 주님만 있으면 좋다는 그 마음이 유지하게 하는 그게 세상적으로 잘되던 못되던 관계없이 어쨌든 십자가를 가리는 것을 벗겨내는 것이 주님 자신의 숙제고 몫입니다. 주님은 그 일밖에 안 해요. 십자가 앞에 거치면 다 깨버려요. 고름 있으면 고름 떼버리고, 십자가 피를 가리는 것은 무조건 다 떼는 일을 해요. 뗐으면 좀 돌아서면 거기서 또 애굽으로 가있고 또 그것도 떼면 돌아서서 또 세상적으로 젖어있고. 이 과정이 그렇습니다.

고기 먹고 싶다, 고기 줘. 떡 먹고 싶다, 양식 줘. 그러나 그 모든 취지는 뭐냐? 바로 그것이 5초 후에 자동 소멸되는 것. 율법을 준 것은 말씀을 준 것이지 양식을 준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신명기 8장에 보면,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 주께서는 양식을 주지 않고 만나를 줬다는 거예요. 그 마음을 낮추는 것은 안에 말씀이 담겨있어서 네가 이 말씀이 완성되는 그 세계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 네가 양식 먹는 땅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거예요.   

약속의 땅이라 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가 바로 애굽이고, 내가 바로 죄인이라는 것을 혹독하게 느끼게 하는 그 세계, 주님만 영광 돌리는 그 세계를 주께서는 지금도 5초 후에 소멸되는 것들을 주시는 겁니다.

돈이 아쉬울 때 갑자기 어떤 친척이 와서 전에 네가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미안했는데 백만 원 쓰라고 주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고맙지요. 그런데 고맙게 잘 썼지만 돌아서보면 그 돈 준 집안에서 애가 또 새 학기에 공납금 필요하던데, 받아놓고 안 줄 수도 없고 그게 짐이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받을 때는 챙기세요. 그거는 주님이 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걸 갚을 생각을 하지 마세요.

오랜만에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것 했네. 절대로 그걸 갚을 생각하지 마세요. 갚는다는 말은 아직도 애굽적입니다. 우린 항상 거지가 돼있어야 됩니다. 부동산 네 채 있는 거지, 땅 한 십만 평 있는 거지, 거지가 될 때 우리는 제대로 광야 생활하는 겁니다.

어제 서울역 갔는데 서울역 앞에 거지들이 있어요. 거지들 특징이 항상 손 내밀고 바라는 거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살아갑시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거지 아닙니까. 주기도문 자체가 거지 기도 아닙니까. 오늘 일용할 없다는 거예요. 부산저축은행에 다 집어넣어서 달라는 거예요. 일용할 양식도 없어. 이게 바로 지금 너는 광야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천국은 가서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천국은 너를 거지로 만드는 그 세력이 악마 같은 애굽에서 벗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천국 안에 있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혜택이라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희생에서 왔기 때문에 십자가의 희생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기도하는 그 수밖에 없어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희생 없이 내 희생만 느끼면서 의식하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만날 원망밖에 안 나오는데 원망밖에 안 나오는 몸을 갖고 있지만 성령께서 역사하사 때로는 죄를 깨닫게 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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