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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4 00:23:36 조회 : 2781         
율례 위의 광야 110603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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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210.♡.51.85) 11-06-09 13:52 
20110603a 울산강의-출애굽기 16장 : 율례 위의 광야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16장 4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그들이 광야라는 환경에 처해졌습니다. 광야라는 것이 언젠가는 지나갈 것이라는 생각을 그들은 가졌을 겁니다. 매일 광야는 아닐 거야. 뭔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통과하면서 그들이 미처 자신들이 알지 못했던 평소에 하나님과 내가 다투리라는 것은 감히 생각도 못하지요.

야곱이 하나님한테 계시를 받고 축복을 받고 나갔을 때 설마 하나님과 붙들고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싸울 것이라는 것은 야곱이 그전에 상상도 못했습니다. ‘항상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축복 주셔서 늘 고맙습니다. 덕분에 삽니다. 그래서 지식도 잘 낳고 재산도 불었습니다.’ 항상 우호적으로 그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았지 정작 하나님과 싸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좋게 생각하는 것에 뭐가 빠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좋다, 하나님이 정말 축복이다 할 때 하나님 입장에서는 항상 심판하심을 전제로 해서 심판받아서 멸망될 인간인데 살려준다는 것은 하나님 생각이에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는 우리가 심판받고 멸망 받을 대상이라는 것을 안 하고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잘해보려고 생각했지 심판받는다든지 하나님께서는 나를 섭섭하게 생각한다는 이런 생각은 못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날 때는 야곱이라는 것이 결국은 형과 다투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시운전이고, 시작하는 점이고 형의 자리에 하나님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야곱이 싸우게 되는 거예요. 이 싸움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과 야곱이 생각했던 것 사이에는 다툼이라는 관계 속에서 평소에 그렇게 지내온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평소에 하나님을 좋게 생각했다는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이 하나님이 아니고 자기가 엉뚱한 하나님을 생각한 겁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에게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야곱이라는 육적인 것에 문제가 있어서 야곱이 뭐로 바뀌죠?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이 될 때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돼요.

그러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뀔 때는 산 채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야곱이 심판을 경과해야 됩니다. 야곱이 심판받는 과정에 이스라엘 모습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안에 심판받는 야곱이 들어있어요. 하나님과 다투었던 야곱. 이 개인적인 경험이 집단화 되면 이것이 이스라엘 이름 그대로 집단적으로 체험을 해야 됩니다. 이런 체험을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했는데 이스라엘 나라는 바로 광야에서 이런 체험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에게 이 세상은 광야 같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성도 아닌 사람의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살기 힘든 세상이 되겠죠. 살기 힘든 세상을 경과하면 좋은 나라 오는 겁니까? 성도나 불신자나 다같이 살기 어려운 이 세상을 통과하고 있다면, ‘이 세상 살면서 고생 많이 했다. 이제는 편히 쉬어라.’ 이런 혜택이 주어집니까? 안 주어지죠. 뭔가 바뀌어져야 되죠. 세상은 어차피 고생스러워요. 힘들어요. 그런데 무엇을 만나야 되느냐 하면, 구원의 하나님이 바로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만나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판받을만한 정도로 우리는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다툴 수밖에 없는 그런 본성을 지녔다는 것을 감 잡아야 돼요.

세상은 힘듭니다. 그냥 힘들다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상대해서 다투고 하나님과 씨름하고 하나님께 대들고, 원망하고 그러한 모습이 진짜 모습인 거예요. ‘아이고, 살기 힘든데 견디지.’ 이건 나의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어디까지 몰아붙이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원망하고 다툴 수밖에 없는 지점까지 계속 몰아넣어요. ‘저는 하나님과 다투기 싫어요.’ 왜? 마음씨가 너무 착하니까. 아직 멀었습니다. 우리의 본색이 드러날 때까지 계속 몰아넣습니다. 그래서 기어이 하나님을 원망하고야마는 겁니다. 그때 이 세상은 제대로 된 광야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광야 될 때 그 광야는,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한,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은 우리가 고생 안 해야 될 자가 고생하는 게 아니고 마땅히 고생해야만 하기에 고생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환경에, 그러한 처지에 우리가 이 땅에서 놓여있다는 겁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하고 원망한다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나는 힘들게 안 살아야 될 존재인데 주님께서 처신을 잘못해서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힘듭니다.’ 그런 뉘앙스가 강해요. 그러니까 뭐가 버티느냐 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까지 이렇게 고생한다는 것은 이것은 뭔가 하나님께서 잘못 생각하시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는 예수님께 구원받았습니다. 제가 왜 심판받아야 됩니까?’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 한해서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혜택을 누립니다. 다른 사람한테는 그런 혜택이 없어요. ‘구원 챙기면 그만이고 심판 챙기면 그만이지.’ 아니에요. 그렇게 돼버리면 우리가 심판이라는 그 경험, 체험을 우리가 유용하는 법이 돼버려요.

심판 속에 들어올 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게 거저 주는 구원이라는 걸 알아서 나에게 일어나는 것은 어떤 것도 원망할 자격도 못되는 것을 느낄 때 진정한 찬양과 감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하나님 믿어줬으니까 하나님이 나한테 이런 혜택을 마땅히 줘야지.’ 이렇데 돼버리면 그 사람은 심판을 통과하지 않는 엉뚱한 천국을 상상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필히 심판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고생을 죽도록 해도 할 말 없는 존재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겁니다.

여기 새순교회 표어를 지으라면, [새순교회입니다. 심판받으러오세요.] 이렇게 한다면, 안 그래도 합기도에 아무도 안 오는데 누가 오겠어요. ‘심판받으러오세요.’ 보통 전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모든 걸 잃어도 주님을 잃으면 다 잃습니다.’ 그런 멘트 날리면서 ‘건강의 행복도 행복이지만 영생 얻는 게 더 행복입니다.’ 이런 것 하는데 그게 아니고 전도지 돌리면서 ‘심판받으러오세요’ 이 전도가 주님께서 새순교회에 하시는 전도입니다. 이 전도 말고 다른 전도는 주님은 새순교회를 통해서 전도하지 않습니다. ‘심판받으러오세요. 그래서 본인이 심판받아 마땅한 걸 아세요. 그래서 세상에 주어진 이 땅에서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원망할 입장이 못 된다는 걸 아세요.’

구원은 심판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구원의 고마움이 제대로 보이게 마련입니다. 만약에 심판자리에 있지 아니하면 심판자리를 비껴서 우회해버리면, 차를 타고가다 턱이 있으면 돌아서가잖아요. 만약에 심판이라는 턱이 귀찮아서 돌아서가버리면, ‘이렇게 나 같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이 세상이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당히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하고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다툴 수밖에 없죠.

그래서 우리는 본성상 ‘심판받으러오세요’ 하면 심판받으러 안 옵니다. 우리는 심판의 요소는 있는 대로 다 피해서 옵니다. 피해서 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여기서 헌병대에서 파견 나온 헌병들이 검문해서 계속 막습니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지금 심판 안 받았네요? 저리로 가세요.’ 그러면 또 피합니다. 피하면 음주 측정하는 경찰관 있어서 ‘이 길은 아닙니다. 이것 받으세요. 통과하세요.’ 그럼 또 내뺍니다. 계속 내빼요. ‘내가 왜 심판받아야 돼. 내가 왜 이 땅에서 고생해야 돼. 내가 얼마나 성실한데.’ 계속 도피합니다. 도피하다가 결국 심판 속에 들어올 때 심판의 자리에서 바라본 구원의 감격과 심판을 요리조리 요령껏 피해 다니면서 생각했던 상상했던 그 구원의 깊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렇게 해병대나 경찰 음주 측정할 때 여기서 바로 다툼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어느새 출애굽기 16장, 17장에 도달한 겁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16장, 17장이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오늘 분명히 출애굽기 16장, 17장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말씀이 우리 이야기인데 다른 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우리가 따로 있어요. 다들 바쁘잖아요. 직장에 근무하시고.

거기서 우리란 뭐냐 하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그걸 그들은 우리의 일로 보는 겁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 일이 아니에요. 그건 성경과 상관없는, 성경에서 인정하지 않는 여기 출애굽기 16장과 무관한 우리의 일입니다. 성경과 떨어진, 성경과 상관없는 나의 일이 있으면 그것은 지금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나라 하는 것은 어디에서 파악해야 하느냐 하면, 바로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나를 보면 안 돼요. 성경 앞에서 나를 봐야 돼요. 그래서 성경이라는 말이 거울이라는 뜻입니다. 몰랐어요? 성경은 거룩한 거울이에요. 성경이란 거룩한 거울을 보면서 나의 일은 성경 속에 있지 성경 빼놓고 나의 일이 없어요. 그건 기껏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판 겁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 때 노아가 뭐라고 전도했는지 우리가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알려줬어요. 노아 때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다가 그들이 갑자기 홍수가 났을 때 방주 안에 못 들어가고 다 죽었다고 돼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서에 나오듯이 노아가 전도했는데 왜 노아 방주에 자기 식구밖에 오지 않았느냐 하면, 노아가 전도한 내용이 다른 게 아니고 언약이었어요. 하나님 약속이었단 말이죠. 그 당시에 노아언약이니까. 이게 하나님 약속이라고 분명히 말을 했단 말이죠.

그런데도 언약으로 오지 않은 것은 그들이 나름대로의 나의 일, 우리 가정의 일 등 따로 뽑은 자기 일이 있었던 겁니다. 그 일을 우리는 몰랐지요. 예수님이 알려주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러면 거기서 나온 결론이 그게 진짜 우리에요? 나는 오늘도 아침 먹었다. 저녁 먹었다. 오늘 장가갔다, 시집갔다. 물건 하나 팔았다. 샀다. 그 주체가 진짜 우리에요? 그게 진짜 제 모습 맞습니까?

그게 언약이라는 거울 앞에 서지 않은 남들 모방하는, 남들 흉내 내고, 세상 사람들과 견주어보면서 대충 감 잡은 내 모습이잖아요. 그렇지요. 우리가 이 시대에 노아가 있다면, 울산의 태화강변에 뭔가 건축물이 만들어지는데 보니까 방주가 만들어졌다 합시다. 노인네들 시간 때울 게 없어서 아침 먹고 심심해서 ‘이것 뭐하는 일이야?’ 들여다보긴 하겠지요. ‘짐승 몇 마리하고 희한하네. 보니까 옛날 방주 같네.’ 하고 그냥 가버린다니까.

방주가 있더라도 내가 저 자리가 가야 된다는 하는 생각을 사람들이 할 수 있습니까? 못 해요. 왜냐하면 자기 일이 따로 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 속에서 나를 구체화시키는 게 인간입니다. 내가 열중하고, 돈 투자하고, 나의 모든 정력과 노력과 열성을 다 집어넣은 그 일속에 마치 마술사 비둘기 하나 끄집어내듯이 거기서 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나의 노동과 나의 열성이 집결된 그 장소에서 나를 새롭게 끄집어내는 것이 기껏 인간들이 만드는 자아상입니다.

그때 우리는 투자하고 노력한 가치를 거기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데서 못 찾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데 눈을 돌리지 않죠. 그런데 방주에 가면 그건 내 노력도 아니고 노아의 노력이 내 노력이 아니잖아요. 방주에 가면 아무것도 한 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뭡니까? ‘너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너는 물 심판받아 마땅해.’라는 이런 심판의 소리를 듣는데 미쳤다고 자진해서 들을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안 그래도 힘 남겠다, 머리 좋겠다, 재주 있겠다, 그 정도 되면 뭐 때문에 거기 가서 무가치한 소리를 자진해서 듣겠습니까? 안 듣지요.

나를 전적으로 ‘너는 아무 가치 없어. 무가치해. 심판받아 마땅해.’ 그런 소리가 들리는 그곳이 바로 십자가 언약입니다. 그 자리가 우리 자리에요. 거기에 포섭되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거기에 보자기 쌓여서 구원받는 거예요. 내가 돋보이는 자리는 결코 내 자리가 아니고 마귀가 만들어준 자리에요. 우리는 거기에 익숙해있고 거기는 세상 사람과 소통하는 자리입니다. 행함의 자리고 육의 자리에요. 거기에는 내 모습을 조율하고 지적할만한 게 없어요. ‘나도 잘하면 잘하겠다.’ 그런 가능성만 키우는 자리지, ‘나는 아무것도 안 돼. 뭘 해도 소용없어.’라는 것을 확인해주는 자리는 아니에요.

옛날에 어떤 목사님이 그랬답니다. 교회 출석하면 출석도장을 찍어줬답니다. 일수도장 찍듯이. 촌이겠지요. 촌에는 애 같은 사고방식이라서 법이 동원되지 않으면 소용없는 데에요. ‘이 법 안 지키면 지옥 갑니다.’ 하면 무슨 수를 써도 법을 지켜요. 그 법 중에 하나가 출석도장 받는 거예요. 출석도장 받는 것도 있겠지만 비교하기 위해선 그래프를 그려놓고, 옛날에 그래프 많이 그렸거든요. 빨간 그래프해서 올려놓고 색깔로 해서 길고, 짧고 비교되도록 자극을 주도록 목사님이 했어요.

그런 식으로 할 때 그런 교회에서 뭘 느끼겠습니까? 가능성을 느끼는 거예요. ‘출석하면 구원되는 수가 있구나. 바지런하게 출석해야지.’ 노아방주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노아가 전도할 때는 일말의 가능성도 전부다 싹을 잘라버렸어요. 노아는 ‘홍수다!’ 왜요? ‘너는 가능 없거든. 홍수다. 심판 날이다.’ 깔끔하고 간결했습니다. ‘심판이다!’ 지금도 간결하죠. ‘불이야!’ 아주 간결해요. ‘불이야’란 소리를 듣기 위해서 교회 나와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 자리잖아요. 그게 언약 앞에 있는 우리 자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자리를 따로 만들어놨어요. 그 앞에선 내 자리 없고 내 자리 따로 만들어놨어요. 스물네 시간 온전히 신경 쓰는 그 자리, 나의 가정일수도 있고, 사업체일 수도 있고. 그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내가 나라는 것, 내가 가치 있는 것, 남한테 기죽지 않는 자리, 그 자리를 나의 자리로 턱하니 있으니 그게 무슨 언약의 자리입니까? 거기서는 자기가 존경받고, 위대해지고, 대단한 존재로 드러나는데 그게 어떻게 심판의 자리고, 하나님과 다툰 자리가 되겠어요.

‘내가 하나님과 다투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애를 먹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은혜보다도 하나님 잘못했다고 입이 튀어나온 이런 존재밖에 안 됩니다.’ 거기서 발각시키는 자리는 말씀의 자리밖에 없어요. 고맙게도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자리를 선배들, 오늘 본문에 우리의 선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코스에 먼저 선배 격으로 접어들어서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좋다고 까불다가 하나님과 다투는 처지에 있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광야의 의미를 아는 거예요. 우리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자리가 우리 자리에요. ‘이 무가치한 것이 뭐가 가치 있다고 까불었어.’ 하고 주께서 십자가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멱살을 잡고 얼마나 흔들어대는지 우리는 앞뒤로 까딱까딱, 네가 뭐 잘났다고 흔들어대는 그 자리.

그러나 우리가 선호하고 좋아나는 자리는 어느 누구도 멱살 잡는 자리는 없잖아요. ‘수고했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애 썼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노력하고 희생하니까 이런 성과를 얻었네요. 하나님의 축복이십니다.’ 그런 소리를 듣는 자리, 멱살 잡는 대신에 칭찬해주고 장미꽃송이 던져주는 그 멋진 자리를 우리는 선호하고 있잖아요.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광야가 비현실이 아니고 실제고, 그 광야에 참여된 사람이 이스라엘이라면 우리도 거기에 예외가 없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만약에 예외가 돼버리면 진짜 우린 버린 자입니다. 성경 속의 말씀이 현실이거든요. 그런데 이 현실을 현실로 안 받아들인다면 남의 이야기로 들린다면 우리는 언약 밖의 존재밖에 더 됩니까? 필히 이 코스를 밟아야 돼요. 시편105편 보면, 광야의 시절이 계속 반복돼요.

나중에 광야 지나서 약속의 땅 되잖아요. 나중엔 약속의 땅이 광야 돼요. 그리고 약속의 땅은 뒤로 지연되고. 왜 그러냐 하면, 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수위와 깊이와 장차 시편105편에서의 언약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를 긍정해주는 그런 자리를 찾습니다. 지옥 가려고 환장을 했어요. 정말 지옥 가려고 환장한 거예요.

광야를 철수해버리면, 광야 바깥에 튀어나온 광야 없는 세상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몽상가에요. 환상 속에 있는 사람이에요. 광야 속에 들어올 때 비로소 우리는 얼마나 한시도 쉬지 않고 하나님과 다투기를 원하는 다투는 존재인 것을 우리는 광야를 통해서 드러나는 겁니다. 다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누가 조성해주느냐? 고맙게도 주님께서 언약대로 조성해줘요. ‘이게 인간이야. 죽어 마땅한 인간아. 네가 구원의 은혜도 모르고 뭘 원망한단 말이야.’ 하고 멱살 쥐고 흔드는 그러한 환경은 주님께서 특별 배려로 그런 환경을 조성해주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 조치가 광야에서 일어납니까? 그러한 질문을 여러분 가지셔야 돼요. 우리로 하여금 다투는 자요,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로 드러나게 만드시는 갖가지 장치들이 광야에 있다면 그 장치가 어떤 장치냐고 물어야 됩니다. 그 말은 그 질문한다는 자체가, ‘우리는 광야라는 특이한 장치 속에 이미 들어와 버렸군요. 빼도 박도 못하게.’ 왜? 우리는 구원된 자기 때문에.

구원된 자기 때문에 이 광야라는 환경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집어넣어서 우리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광야가 제공하는 특이한 장치가 어떤 게 있을까요? 아까 노아방주에서 심판을 이야기할 때 방주를 만들었죠. 그 방주의 존재의 의미는 뭐냐? 곧 종말이고 심판이라는 거죠. 광야라는 장치가 한 마디로 심판을 밑에 깔아버리는 겁니다. 심판을 까는데 타일로 깔까요, 자갈로 깔까요, 뭐로 깔까요? 율례와 법도로 깝니다. 율법을 밑에 깔아버립니다. 완전히 돌 침대죠. 돌 침대보다도 가시 침대.

옛날에 제가 어릴 때는 과외도 없어서 학교 끝나면 시장통에 돌아다니고 했는데 유심히 봤지요. 쌀 튀긴 것을 넣고 상인이 위에서 아래서 압축하니까 뻥튀기를 만들죠. 자세히 보니까 위에서도 내려오고 밑에서도 올라오죠. 중간에 끼어서 납작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밑에 율례가 있다면 위에서 이 율례에 호응하는 것은 율례에 합당한 같은 속성이 위에서 내려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밑에도 율례고 위에도 율례와 법도가 되겠지요. 그러면 안에 끼어있는 자는 심판이 되는 겁니다.

왜 광야에서 심판되게 하느냐고 하는데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거든요. 약속의 땅은 우리가 심판자리에 있지 않으면 약속의 땅이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잊어버렸습니까?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심판주를 만나지 아니하면 야곱은 결코 이스라엘이 될 수 없었지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야곱이 처음에 복 받았을 때 ‘나는 이름 바뀌어야 돼, 바뀌어야 돼.’ 이런 생각 했습니까? 상상도 못했어요. ‘내가 복 받고, 인간성 좋다고 복 주는데 주는 복 받아야지. 내가 왜 변해. 받기만 하면 되지.’ 자꾸 내가 왜 변해야 되느냐는 거예요.

왜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야곱은 구원받을 수 없는 겁니까? 구원이란 인간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인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구원받는 식입니다. 처음부터 인간 구원일 것 같으면 애초부터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도 않았어요. 하나님은 자기의 생명나무를 도로 건지는 셈입니다. 생명나무를 도로 건지기 위해서는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만남에서 심판이 이뤄지게 되고 심판이 이루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생명나무에 거기에 포함됐다는 것을 발견하고 선악과를 치시는 생명나무의 심판성, 그게 그대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게 하나의 작품으로 구원받을 때 그게 하늘나라의 갤러리에 전시관에 전시되는 겁니다. 누구누구 하나 끼여서 구원받았어. 이종호 목사는 여기서 끼여서 주님한테 완전히 납작하게 되어서 구원받았어.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았어. 이게 전부 액자화되는 겁니다. 그걸 그리스도의 것이라 하는 거예요. 크리스천이라 하죠.

성경의 그림의 주제가 뭡니까? 인생 주제가 뭐예요? 사나죽으나 누구의 것이다? 주의 것이다. 이걸 어떻게 우리가 실천합니까? 실천 안 돼요. 주께서 실천케 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만들어놓으신 겁니다. 뻥튀기처럼. 위에서 아래서 눌러버리는 겁니다. 눌러버리면 분명히 쌀 튀긴 거지만 작품은 압력이죠. 이 압력, 최 압력, 박 압력. 전부다 아래, 위로 된 압력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면류관도 주께 반납하고 전부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요소가 있어서 구원되는 거예요. 로마서 8장에 보면, 네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라. 죽을 너희 밥풀도 뻥튀기 되어 살리라 이 말이에요.

그리스도의 영은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영 아닙니까. 죽음을 이기는 요소가 우리와 함께 썩여있어야 생명의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는 말은 주님의 요소가 내 안에 개입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죽음의 심판과 동참돼야 되는데 주님의 심판에서 주님만 죽으세요. 우리는 살짝 빠지려는 경향이 많아요. ‘내가 왜 죽어야 되는데? 이 잘난 내가 왜 죽어야 돼.’ 주께서는 죽이는 환경을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잡았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죽어도 고스톱 판에서 죽으면 재미나 있지. ‘죽었다.’ 안 그러면 야구장에서 쓰리아웃, 체인지 이런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케 해서 생명을 건져 가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내 자리고, 그게 내 모습이에요. 그 모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금 엉뚱한 자기 모습을 자기가 따로 제조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주인공 되고 자기가 공장장 되서 근사한 자기 모습을 만드는데 저는 그걸 마네킹으로 봐요. 마네킹은 생명이 없습니다. 어떤 미친놈은 마네킹 붙들고 하죠.

옛날 고대에 결혼도 않은 조각가가 솜씨가 정말 좋아서 이상적인 여자를 그리면서 조각했는데 자기가 만들어놓고 반했어. 그 여자를 껴안고하다 생명이 들어가서 그 여자와 살았어요. 자기가 만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만 자기한테 맞는 여인이 되었다. 이게 인간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자기만의 세계입니다. 친구도 내가 생각한 친구, 스승도 내가 생각하는 스승, 목사도 내가 생각한 목사, 자식도 내가 원하는 자식, 그러다 자기가 원하는 자식 아니면 패버리고. 부모도 내가 원하는 부모. 자식이야 자기가 낳았으니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겠지만 부모는 뭡니까? 부모는 자기 태어나기 전부터 먼저 있는 사람인데 자기가 어떻게 합니까? 말도 안 되지요.

세상이란 창조주도 아닌 게 흉내 내면서 자기와 닮아있는,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에 열중해서 그걸 제2의 마네킹으로 그 안에 자기가 살려고 합니다. 부자 농부가 그리워하는 것은 곳간을 크게 짓고 많은 곡식을 쌓는 자기 영혼을 거기다 안치하려고 했어요. 그날 밤 오후 2시 44분인가 주께서 그 영혼 데려가면 .... 그 모든 것이 자기가 만들어서 공 들여서 평생을 공 들였던 그것이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엉뚱한 짓을 한 거예요.

누가복음 15장에 큰 아들이 평생 동안 아버지와 함께 했습니다. 왜 가출 안 하는데? 왜 가출 안 했어요? 아버지 것이 자기 것이라 생각한 거죠. 그런데 가출한 탕자는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 것이 자기 것 됐어요. 이게 주님의 구원방법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간 것이라고 하나님은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괜히 우리가 하나님마저 독차지하려고 헛된 망상을 꾼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려면 이런 상태론 되지 않고 반드시 가출해야 돼요. 가출해서 완전히 거덜 나야 됩니다.

그 대목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6장 20절 봅시다.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양식을 배터지게 먹도록 해주면 되는데 그건 율례가 아니잖아요. 아래쪽에서 율례라는 압력에 맞추어서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죠. 만나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율례의 가시적 증거물이 되겠죠. 아시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율례의 특성이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증거물이 새벽마다 오는 만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줘서 사람들이 원하는 양식을 준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자기 율례에서 이탈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이 말씀대로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말씀에 어긋나면서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아요. 자기 말씀에 손해 보는 짓은 안 합니다. 항상 말씀 위주로 구원을 시키지 말씀을 제외하고 구원하는 법이 없어요. 우리 위주의 구원이란 애초부터 없습니다.

말씀으로 구원한다고 하니까 말씀 주고 떠나는 게 아니에요. 그 순간부터 말씀에 종속되는 겁니다. 말씀이 우리보다 위에 있어요. 우선이고. ‘헤헤~ 구원받았다.’ 이런 구원을 하나님께서 용납한 적도 없고 그것을 허용한 적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 갈 수 있을까? 말씀 있구나. 말씀 지키겠다. 주여, 감사합니다.’ 이런 구원은 모든 종교에는 있지만 성경에는 그런 구원이 없어요.

그런데 만나가 오니까 사람들은 뭘 오해했습니까? 율례와 짝이 되는 만나가 오는 걸 모르고 율례를 걷어 차버리고 만나 온다고 ‘야 양식이 왔다.’고 해요. 말이 좀 어려우면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놀부가 흥부한테 물었어요. ‘흥부야, 너 어떻게 갑자기 부자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나, 놀부 목적이 지금보다 부자 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한 겁니다. ‘내가 부자 되는 걸 원하는 것처럼 너도 평소에 부자 되고 싶어 했지?’라고 한 거예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각이 남도 똑같은 줄 알고 있어요. 내가 평소에 부자 되길 원했는데 동생이 됐잖아요. 그러면 질문할 때는 동생의 의견을 듣는 게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질문합니다. ‘내가 부자 되고 싶어 했듯이 네가 부자 되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 났었는가? 그런데 네가 나보다 먼저 부자 되었구나. 흥부야, 너 어떻게 해서 갑자기 부자 되었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 믿으면 믿는 합당한 행함이 있을 때 예수 믿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데 합당한 열매가 없으니까 너는 신자 아니잖아.’라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합니까? ‘믿음이 행함이라는 당신의 기준을 내놓으란 말이야. 맞는지. 그런 질문을 던질 때    그 질문을 만드는 기준이 성경적으로 맞는지 보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쑥 들어갑니다.

새순교회에 만약에 어떤 교인이 안 나옵니다. 목사님이 찾아가서 ‘왜 안 나오십니까?’ ‘새순교회 교인들은 예수 믿는다고 해놓고 예수 믿는 사람 같지 않더라.’ 할 때 ‘새순교회 교인들이 예수 믿는 사람 않더라고 결정지었던, 판명했던 그 기준을 이야기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면 쑥 들어가 버리죠.

지금 이 이야기가 방금 흥부, 놀부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시내산 갔다 왔던 모세를 앞장 세워서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양식 줬지요?’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야기하죠. 그러니까 하늘에게 만나 내리니까 그걸 뭐로 오해했습니까? 배고프니까 양식 준 걸로 오해한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 진짜 웃기고 있네.

하나님은 양식을 준 게 아니고 율례를 준 거예요. 그러면 그 소리 듣고 이스라엘이 뭐라 합니까? ‘언제 우리가 율례 달라 합디까. 양식 달라 했지. 양식을 줘야 율례를 지킬 것 아닙니까.’ ‘밥벌이가 있어야 교회 나오지.’ 이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집에 돈 한 푼도 없는데 무슨 교회 나옵니까. 교회 나오려도 차비가 있어야지. 차비 주면 교회 나오겠습니다.’ 이것과 똑같은 소리에요.   

제가 지금 이 소리하는 것은 그들은 왜 하나님과 만나로 다투는가 이 말입니다. 다툴 수밖에 없지요. 출발점이 뭡니까? 주님은 율례로부터, 말씀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생존과 더 나아가서 내가 평소에 나다운 것, 한 달 수입이 최소한 칠백만 원 이상 돼야 되고, 아파트는 한 50평 돼야 되고, 이렇게 평소에 나다운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놀부가 ‘너, 어쩌다가 이렇게 부자 되었느냐?’ 흥부가 ‘형님, 내가 제비다리를 고쳐주었습니다.’ 놀부는 뭐라고 흉내 냅니까? 놀부는 제비다리를 고쳐주는 게 목적이 아니고 부자 되기 위해서 제비다리를 분질러버린다고. 분지르고 치료해주죠. 그 제비 혼났습니다. 놀부한테 걸려서. 놀부한테 걸린 제비도 혼났는데 지금 새순교회에 걸린 예수님 혼나셔야 돼요. 예수님을 분질러서 고치려는 거예요. 예수님 돈 내라고. 그런 사람 없지요. 괜히 새순교회 이야기했다. 우리교회 이야기할 걸.

율례에 애초에 관심이 없어요. 율례는 우리의 그림인데 우리는 율례 없는 내 모습만 평소에 구축하고 있었던 거예요. 말씀 없는 언약 앞에서 노아방주가 살아야 돼. 그런데 태화강에서 낚시나 하는 여유만만 돈 많은 영감 그 모습만 본 거예요. 노아방주에서 우리 모습을 발견하지 않은 겁니다. 우리에게 언약이 없어요. 언약 없이 내 모습을 구축해놓고 넣어달라는 거예요. 안 넣어주면 원망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뭡니까? 만약에 흥부가 그 소리 듣고 놀부 한 짓을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형님, 네 꼬라지나 알라. 부자 되려고 하지 말고. 당신이 나하고 같은 줄 아는 모양인데 나는 불쌍한 제비 고쳐줬고 당신은 제비가 불쌍하지 않고 누가 불쌍해요? 자기가 원한 욕망을 채우지 못한 본인이 불쌍한 거예요. 얼마나 개인주의입니까? 자기로부터 출발해요.

그래서 만나가 왔을 때 분명히 ‘만나를 아침까지 놔두지 마세요.’ 했거든요. 만나는 그날 치는 그날 옵니다. 이게 뭡니까? 이게 율례에요. 그러니까 ‘저장하지 마세요.’라고 한 거예요. 이거는 만나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율례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걸 못 믿고 저장했지요. 그러니까 썩었지요. 꼭 우리 모습 같아. 평생 동안 내 영혼아 염려하지 마라. 평생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공들였지만 나중에 우리가 죽고 나면 자식들이 시체 쓰레기 치우듯이 치워버립니다. ‘치매도 오래하더니 갔구나.’

사람이 죽음이란 단어 말고 더 정확하게 우리의 엑스레이, 확실한 단층촬영이 없습니다. 죽음이 최고 단층촬영이에요. 건강 관리한다고 MRI 찍고 하는데 우리는 죽어 마땅함이 찍혀 나와야 돼요. 그것은 바로 새 언약, 십자가 앞에서 비로소 나타납니다. 예수님 죽은 것은 곧 나의 죽음이다. 우리는 그 나의 모습을 비껴서 엉뚱한 것에 상상해서 조형물처럼 만들어서 그걸 우상처럼 섬긴다고 기껏 거기에 들어가는 율례는 뭐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 외에는 다른 율례는 없어요. 하나님도 뒷전이고 그저 자기 몸밖에 모르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하면, 그거야 원래는 만나는 하루 지나면 썩게 돼있어. 그게 아닙니다. 24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아침까지 간수했지만 벌레도 생기지 않고 썩지도 않았지요. 성분이 왜 갑자기 달라졌습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만나는 성분에 관한 문제가 아니죠. 율례에 관한 문제고, 모세의 법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만나는 만나 자체의 아미노산 몇 퍼센트고 그건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성도의 가치는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가는 그게 가치 있는 거예요. 이건 내 것이라고 고집부리면 그건 썩어빠진 거예요. 주의 말씀이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들지 내가 내 스스로 존재한다고 가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한테 왔다는 것은 주의 새 언약이 우리를 지배한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우리 위주가 돼버리면 그 성령도 우리 소유가 돼버립니다. 인간의 존재라 하는 것은 그냥 존재라는 게 없어요. 반드시 내가 갖고 있는 소유물을 통해서 차후적으로 존재를 파악하게 돼있어요. ‘내가 이 정도 가졌으니까 이 정도 존재구나.’ 반드시 내가 가진 것으로 하는 거예요.  

성령이 나오니까 성령 받아서 구원받은 존재로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성령을 우리가 소유하고 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성령 뒤에는 주님이 있어요. 성령 받아서 우리가 성경대로 행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성령 받은 우리는 날마다 책망 당합니다. 놓으라고.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만날 우린 책망 받지요. 탄식하고. ‘빌 바도 알지 못하는 게 까불고 있어.’ 우리는 만날 멱살 잡히고 흔듦을 당합니다. ‘놓으라니까. 이건 네 것이 아니야. 주님 거야. 성령은 주님 거야. 네가 주님 것으로 살아야지. 왜 성령을 네 것으로 만들어서 네가 멋있어 보이려고 해. 놔 마. 네가 주님 것인데.’ 하고 흔들어대는 거예요. 성령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60) 11-06-13 15:07 
20110603b 울산강의-출애굽기 16장 : 율례 위의 광야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야곱을 얍복 강에서 하나님은 만난 것처럼 그때 야곱이 하나님과 다투었거든요. 출애굽기 17장에 ‘므리바’란 장소가 다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다툼으로써 율례가 우선이지 네 생존이 우선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하죠. ‘율례를 안 지켰으니까 다투었잖아. 율례를 모르니까 원망했잖아.’ 자꾸 하나님은 율례를 앞장세워요.




율례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너 있는 자리에서는 구원의 기쁨, 구원의 환희 같은 것이 피어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란 상상의 자리 말고 진짜 심판자리, 율례가 있는 하나님 말씀대로 성취된 그 자리에 섰을 때 비로소 구원이란 것이 엄청난 행운이고 복이고 진짜 축복이란 것을 아는 거예요. 마치 야곱이 하나님과 직접 너 죽고, 나 죽고 싸울 때 이게 ‘브니엘’이구나. ‘내가 하나님을 만났는데도 세상에 이런 법이 있나. 생명이 보존되다니. 이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왔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과 다투어도 생명을 얻었구나.’를 아는 겁니다.




죽어도 사는 그것보다 더 큰 행운이 어디 있습니까. 로또도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인데. 죽어도 산다는 건 로또보다 더 한 거잖아요. 그 혜택으로 너를 구원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는 주께서는 필히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 본래의 자리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포기 못해요. 그러나 인간들은 말씀 바깥에 있으니까 그 인간을 말씀 속으로 일치시키는 겁니다. 그 일치시키는 그 장면에서 그들의 양식을 없애버리고 양식이고 물도 없앰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원망과 불평이 나오도록 만들고 그때 준 양식은 그들이 기대했던 양식이 아니라 양식 하나하나가 율례가 되고 말씀이 되는 양식만 주는 겁니다.




요새 레이저분수라 해서 춤추는 분수 있잖아요. 무지개 색깔로 밤중에 춤추죠. 그냥 분수 같으면 음악도 필요 없고 레이저도 필요 없어요. 다만 음악을 시각화하기 위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음악 만들기 위해서 분수를 음악에다 춤추게 만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만나라는 게 그냥 춤추는 율례라고 보면 됩니다. 아침에 콩나물 다듬었습니까? 춤추는 콩나물이에요.




‘일용할 양식 주옵시고’ 감사하는 것은 다시 한번 양식 앞에서 내가 과연 이 양식을 받을만한 인간인가를 되비춰보는 그러한 식탁이 되는 겁니다. 하루하루가. 그게 우리의 진면목이거든요. ‘내가 이렇게 애썼는데 기껏 하나님은 이것밖에 안 줍니까?’ 그거는 말씀 자리에 있는 내 자리를 포기하고 내가 애굽에서 상상한 다른 사람을 모방해서 따로 챙겨놓은 내 모습을 그렇게 고집스럽게 우기는 겁니다. 그러면 둘 사이에 므리바, 다툼이 생기고, 맛사, 원망, 시험을 벌이는 겁니다.




그러한 광경을 광야라 합니다. 이 세상이 그래서 광야입니다. 이게 성도 아닌 사람은 광야 아니에요. 그냥 지옥 가는 출입구에요. 지옥의 앞마당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약속의 땅의 앞마당 되기 위해서는 이 땅에 피로 우리는 옛날 이스라엘이 과거가 완전히 폭로된 장, 엑스레이로 투사했던 그 광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에 들어와 있다는 걸 감사히 여겨야 됩니다.




첫 번째 율례가 안식일이 나와요. 16장 5절 봅시다. “제 육일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예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매일같이 하루치가 오기 때문에 저장하지 말라 했는데 육일 째는 이틀분이죠. 갑절이 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참 어려운 거지만 해봅시다.




율례 안에서 안식일을 기억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칠일 만에 창조해서 생긴 환경 속에 네가 놓여있다는 걸 기억하라.’ 이 말입니다. 안식일은 기억하란 말은, ‘하나님이 칠일 만에 완성한 그것을 기념해야 될 존재로서 특별히 너희들이 참된 인간으로서 동행한다.’ 그걸 보란 말이죠.




그러면 율례는 안식일을 기억하라고, 안식일을 기억하란 것은 하나님이 칠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면 천지창조의 내용을 담고 있을 때 율례가 되겠죠. 그러면 창조가 완성된다면 율법이 완성되겠죠. 그 율법을 노아언약과 달리 모세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말씀 안에는 시작하는 분도 하나님이고 마무리 짓는 것도 새 언약으로 마무리 지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했거든요.




그럼 모든 율례를 해석할 때는 창조가 나와야 되고, 그 창조의 마지막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런 쪽으로 나와야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례를 줬다는 것은 창조했음을 잊지 말라는 그러한 말씀 책을 우리에게 준 게 되죠. 




그런데 여기서 어렵지만 잘 들으세요. 책자만 준 게 아니고 율례를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우리들이 그렇게 아름답도록 애쓰는 우리의 생존과 결부시켜서 율례를 줬다는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십계명 알려줄 테니 받아 적으세요.’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안식일에 만나 간다. 만약에 네가 안식일에 곱빼기로 주어진 의미를 모른다면, ‘오늘 무슨 날인데 곱빼기로 주나? 보통이 아닌데.’ 하고 갑절로 주는 의미를 모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잊어버리고 자기 생존만 몰두하고 있는 그런 모습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갑절로 준 의미로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창조의 완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다 완성되는데 그 매개체로 고맙게도 우리의 생존을 사용해서 마음껏 우리 속에서 창조의 완성을 세상에, 만방에 전달하도록 우리를 매개체로 사용하신 겁니다. 그걸 언약에 속한 백성이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구원했어요.




애굽에 사는 사람 배고프다고 구원한 게 아니고 언약을 증거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똑같이 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장가가고, 사고팔고 해도 다른 쪽에선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해도 우리는 언약을 위해서 먹어야 되고, 언약을 위해서 시집가고 장가가야 되고, 언약을 위해서 사고팔고 해야 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것을 드러내가 위해서 우리에게 이러한 광야라는 환경을 줬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15장, 16장, 17장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울산에 사는 우리 이야기로 연관되는지 살펴봅시다.




18절에 보면,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 방금 나왔던 이 이야기가 고린도후서에 보면 헌금 이야기에 나와요. 혹시 기억나시는 분 있지요.




헌금 이야기할 때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람이 없다. 이 말의 뜻은, ‘이 사람들아. 인간이 되어라.’ 헌금을 이렇게 하란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 먹고 살란 뜻이 아닙니다. 만나를 먹는 순간 네가 만나를 돼야 된다는 거예요. 말씀을 듣는 순간 네가 말씀 듣는 사람 되지 말고 네 자체가 말씀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말씀 듣는 사람은 적어도 모자람이 없는 소리해야 되고, 남아도 남는 게 없다고 해야 돼요. 우리는 어느 쪽을 더 선호합니까? 집에 한 오천 억 있으면, ‘주여, 오천 억 있지만 저는 남는 게 없습니다.’ 이게 더 좋지요. 이것저것 쓰다보면 남는 게 없습니다. ‘건물임대료 한달 1억 돼도 이것 떼고 저것 떼면 남는 게 없습니다.’ 이게 훨씬 좋단 말이죠. 그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임대료 일억 받기 전에 그 이야기하라니까요. 그런 인간이 돼야 돼요. ‘딱 들어맞게 주시네요.’ 한달 수입이 이천 만원이라면, ‘어떻게 이렇게 딱 들어맞게 주십니까?’ 이래야 돼요. 이천만 원 주고 연습하면, 그 다음 달 마이너스 천만 원 주십시다. ‘세상에 딱 들어맞네.’




아까 저 뒤에 보니까 마이너스다. 우리교회와 똑같아요. 우리는 더 많아요. 앞에 뭐 작대기가 붙어요. 남는 게 없이 딱 들어맞게 주세요. 그게 헌금정신이에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왜 그러냐 하면, 돈이 문제가 아니고 사람이 문제인 거예요. 아나니야와 삽비라 이야기 들어봤죠. 초대교회에서 그들은 사람의 집합으로 본 거예요. ‘아이고, 똑같은 인간이네.’ 똑같은 인간으로 보면 애초부터 교회 아닙니다. 그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까지 봐야 교회거든요.




그런데 아나니야와 삽비라는 뭘 놓쳤느냐 하면, 사도 있고 인간 있고, 그렇게 본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헌금한 걸 숨기고 냈죠. 그러니까 베드로는 말하기를 네가 사람을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임이라. ‘네가 인간이 돼야 된다.’ 헌금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사람밖에 없네.’라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성도가 됩니다. 그런 생각 갖고 있으면 교회 백날 다녀도 성도 아니란 말이죠.




교회는 교인 백 명 중에서 다 떠나고 두 명이 있으나 모자람이 없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해야 돼? 교회는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는 곳, 오지 못하게 곳인데 왔다면 그것이 기적이 되는 겁니다. 왜 오지 못하느냐 하면 이것이 바로 생명나무기 때문에. 생명나무 가는 길은 항상 갈 수 없게 돼있어요.




이걸 닫힌 문이라 하는데 천국문은 닫힌 문입니다. 닫힌 문을 여는 것은 교인들이 아니에요. 다윗의 자손만이 열쇠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닫힌 문을 백날 똑똑똑 해봐야 안 열립니다. 여러분, 기름 준비했다고 해서 정신 차린 게 아닙니다. 다같이 졸았어요. 다같이 잠자고 있을 때 온 거예요. 기름 준비했다고 눈 뜨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무세요.




교회라 하는 것은 절대로 사람 이름으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교회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교회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유지 되는 게 아니고 시작이 교회고, 그리스도의 머리가 시작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교회기 때문에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을 수가 없어요. ‘그리스도의 몸이 뭡니까?’ 물어야 돼요. ‘그리스도의 몸은 교회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거꾸로 뒤집을 순 없어요. 교회를 그리스도 몸 되게 하는 방법은 없어요.




그렇다면 머리 되시는 분을 모독하는 겁니다. 머리 되시는 분은 예수님이 유일하지 사람이 머리로 갈 수 없거든요. 그러면 머리 되시는 분이 완료했으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손댈 게 없어요. 완벽해요. 완벽하기 때문에 사람 손으로 뭘 해보겠다는 건 떨어져 나가줘야 돼요. 교회 오지 말라고 해야 돼요. 천국 못 갈 사람은 제발 오지 말라고 해야 돼요.




아까 ‘심판받을 분 오세요.’와 같은 말이에요. 안 나와야 돼요. 오시면 안 될 곳입니다. 열쇠로 열어줘서 올 사람만 와야 된다니까요. 그리고 그 열쇠는 계속 복음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복음 외에 사람이 납득이 될 수 있는 소리해버리면 안 돼요. 이해 못할 이야기를 해서 천국이란 우리가 원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가게 하시는구나. 그것이 중풍병자 이야기가 되죠.




중풍병자 친구들이 지붕 뚫고 들어올 때 거기 모여있는 사람들 전부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분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자기가 아는 예수는 병 고치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 진짜 예수님과 일치가 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할 때 인간들이 갖고 있는 예수 상이 전부다 엉터리라는 것이 드러나요. 주님의 말씀은 더 하이라이트입니다. ‘나는 죄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느니라.’




병을 고쳐 달래서 병 고쳐준다면 이건 합작품이에요. 지붕 뚫는 그 수고와 그 수고를 애썼다고 할 때는 인간과 예수님의 합작품으로 병 나은 거예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합작품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이야기해버려요.




그러면 그들이 생각했던 기대했던 예수가 아니란 말은 죄 사함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선언함으로 완료된다는 것이 새롭게 다가오겠지요. 그것이 진짜 성도한테는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지붕 안 뚫어도 되는 거예요. 어느 것이 쉽겠는가?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죄 사함이 더 쉽지요. 왜? 본인은 쉬운 정도가 아니고 아무것도 한 게 없기 때문에.




애쓰고 빈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해준 사람만 남게 되는 그걸 두 자로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계속 교회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예수님의 선언만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깨집니까? 인간의 행함은 가란 말이죠. 그 동안 왜 붙어있었어. 쓸데없이. 제거돼야 돼요. 인간들 제거할 순 없지만 복음 들어가면 제거되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다는 그 측정을 누가 내리십니까? 누가 만나를 적당히 내리시는 겁니까? 그걸 하나님이 적당히 내리신 거예요.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사전에 그 정도 내리는 겁니다.   




율례는 어디까지나 율례 편입니다. 말씀은 말씀 편이에요. 우리 좋으라고 말씀 주는 것이 아니고 말씀은 오직 말씀 좋으라고 말씀 주신 거예요. 괜히 우리가 헛수고한 거예요. ‘저 말씀 지키면 복 받습니까? 안 지키면 벌 받습니까?’ 괜히 떨었어. 괜히 부산떨었어. 그런데 주님께서는 관심도 없는데. 말씀은 어떤 경우라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적절했어요.




그것이 창세전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일관되게 나갑니다. 변하는 것은 인간이 변하지만 주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습니다. 괜히 우리가 오해해서 주의 말씀이 변했다고 그렇게 닦달내지만 주님은 변한 게 없습니다. 일관성 있게 나는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율례는 율례를 위해서, 말씀은 말씀을 위해서만 말씀이 존재할 뿐입니다. 괜히 말씀을 이용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우리의 뜻을 포기해야지 누구보고 포기하라 합니까? 주님 보고 봐 달라고 하면 안 돼요.




7절에 보면,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세 앞에 백성들을 불러놓고 하는 말이 9절에 보면,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명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을 들으셨느니라”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는 원망이 끼어있죠. 하나님은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이고, 원망을 한 자는 이스라엘 백성이고. 그렇게 합작해서 광야라는 환경이 형성되는 겁니다.




다음 중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자비하신 분 사랑이 많으신 분, 제4번, 매일같이 우리의 원망을 들으시는 분.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광야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느낍니다. 오늘도 얼마나 하나님은 원망을 한 바가지나 들었어요. 우리한테. 주님한테는 아무 문제없는데 괜히 문제를 일으켜서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에 문제가 많습니다.’ ‘어디 보자. 내가 보기엔 부족함이 없는데.’ 부족함이 없는데도 굉장히 우리 가정에 문제가 많대? 다시 한번 보자. 다시 봐도 문제없는데. ‘새순교회 문제 많습니다.’ ‘문제없네? 뭐가 문제가 많단 말이고?’ ‘저 사람도 안 나오고 이 사람도 안 나오고.’ ‘원래 안 나올 사람이야. 내가 못 나오게 했어. 오지 말라했어. 뭐가 문제인데?’




사람이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말씀의 자리가 우리 자리인데 자꾸 말씀 바깥에 내 자리를 따로 해놓고 그 자리와 말씀자리가 격차가 일어나니까 그 격차로 인해서 분통을 터뜨리면서 우리는 원망을 하죠. 주님은, 네 자리가 지금 말씀에 위배되는 자리니까 원망이 나왔다고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자리를 찾아가면 안 됩니까? 말씀은 우리 힘으로 말씀의 자리를, 격차를 좁히지 않도록 그렇게 하셨어요. 이게 참 재미있어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찾아가면 저만치 가고. 노사연 노래에 [님 그림자] 있어요. 달이 있는데 달을 잡으려하면 저만치 가있고, 저만치 가면 저만치 가있고. 우리 힘으로 말씀을 일치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일치를 시킬 수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돼요. 날마다 지키지 아니하면 말씀의 저주를 받습니다. 모세의 율법과 지시도 마찬가지에요.




난 진짜 경건한 자 보고 싶어. 경건한 사람 구경하고 싶어요. 혹시 경건한 사람 보신 적 있습니까? 현상수배, 경건한 사람 보신 분은 현상금 오천 만원 드리겠습니다. 주위에 경건한 사람 봤습니까? 경건하자고 외치는 사람 말고 경건한 사람 봤습니까? 없습니다. 말씀의 자리는 우리 힘으로 갈 수 없어요




예를 들어서 지난주에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피로 사신 겁니다. ‘내가 그걸 몰랐구나. 그래 교회는 하나님의 피지 내 노력이 아니었어. 은혜 받았어.’ 했잖아요. 그 다음주 되면,‘주여, 지난주 은혜 받은 일주일 동안 버틴다고 애먹었습니다.’ 그러면 지난주 받은 은혜를 버틴다고 자기 힘으로 유지한다고 애를 먹잖아요. 그게 딱지, 껍데기에요. 그것 벗겨내야 돼요. 그걸 경계해야 돼요. 교만입니다. 또다시 주께서는 율례를 써서 또다시 그 교만을 뜯어 가버립니다.




그래서 매일 만나에요. 한 달 치 주고 하면 될 텐데. 안 썩을 것 같으면 왜 매일 줄 때는 썩고 안식일엔 안 썩습니까?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고 완성한 날이잖아요. 하나님의 완성이 올 때만 우리는 썩지 않는 걸 받습니다. 우리 힘으로 안 썩기 위해서 저장방법을 동원한다면 우리가 손댔기 때문에 썩게 돼있어요. 율례는 우리 힘으로 손대면 깨지게 돼있어요. 우리가 지킨다면 다 깨지게 돼있어요. 절대로 우리 힘으로 못 지키기 돼있습니다. 다만 격차를 넘어서 우리는 매순간 격차를 바라보게 만들죠. 원망이 나타나도록. ‘지난번 은혜 받은 것 또 은혜 주시지 은혜 안 주셔서.’ 은혜 안 줬다고 원망하고 있네.




예를 들어봅시다. 중풍병자가 죄 사함 받고 집에 갔잖아요. 그러면 가서 자랑한다고요. ‘주님께서 내 죄 사함 하셨다, 나 구원받았다.’ ‘주님 어디 계신데?’ ‘전에 울산서 집회했는데 이번엔 아마 안동 갔을 걸?’ 하면 안동 갑니다. 이번엔 지붕을 제대로 뚫기 위해서 포크레인 들고 갑니다. 포크레인 들고 가면 주께서 죄 사함 주십니까? 벌써 뭐가 작용했어요? 주님의 일방적으로 죄 용서 받았는데 우리는 죄 용서 받아놓고 그 방법을 흉내 내는 거예요. 모방하는 거예요. 이런이런 메커니즘, 이런 절차를 밟아서 죄 사함 받았으니까 내 친구한테 소개하면 진짜 똑같은 방법으로 용서받지 않겠느냐고 일방적인 수작이 거기에 들어가죠. 그게 바로 주님의 일방적인 것을 모독하는 겁니다.




교회는 주님의 일방적인 용서로 나온 결과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로 목회하려고 해요. ‘일방적인 구원받은 사람 오세요. 목회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교회 자체가 완성인데 목회할 게 뭐가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목회하려고 시작하는 거예요. 하려고 하면 인간의 손때가 묻어있지요? 그러면 그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인간 교회 돼버려요.




목회에 대해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것을 감독하는 그것뿐이에요. ‘나는 십자가지지 않습니다.’ 그게 진짜 목회지. 목사란 설교하는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그게 목회지요. 주께서 시켰습니다. 그뿐이지 거기서 자기 존재를 항상 설교하면서 자기 자리는 설교하는 것이 자기 자리가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죄인의 자리가 내 자리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광야의 자리, 항상 원망의 자리가 내 자리가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주께서 완성품, 만나가 주어질 때 이 만나는 다 이루었다가 포함된 만나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바로 광야의 떡이다. 내가 바로 광야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먹습니까?’ ‘내 살과 피를 먹으라.’ 하니까 도대체 못 알아듣는 거예요.




전에 며칠 전인가 설교했다고요. 사람이 먹는 것은 자기가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서 자기 입에 집어넣는 걸 먹는 것으로 보는 거예요. 자기가 하고 있는 먹는 방법대로 주께서 주시면 먹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 방법대로하면 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먹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했던 행동대로 집어먹으면 결국 우리 행함이 포함되어서 우리가 주님은 이만큼 하고 음식을 우리가 집어서 먹으면 우리 것이 되잖아요. 그 방법대로 구원을 해달라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일을 합니까? 주님께서 네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한 것을 믿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했죠.




내가 행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면 인간들은 방법을 전기톱으로 잘리는 느낌이 들어요. 완전히 사지 잘리는 느낌이라니까요. ‘주여, 제가 어떻게 하면 직장 옮깁니까?’ ‘그냥 막 살아.’ 하면, 팔다리가 다 날아간 느낌이 든다니까요. ‘구원을 받아야 되는데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하니까 네가 그따위 소리하는 자체가 지금 구원받았다, 못 받았다? 구원을 못 받았으니까 그런 소리 나와요. 믿음의 없으니까 그런 소리 나오는 거예요.




출발점을 예수님부터 출발 못하는 거예요. 항상 예수님은 하나의 대상이 되고 내가 뭘 주물럭주물럭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출발점 되는 거예요. 그럼 육에 속한 사람은 다 알아듣는 거예요. ‘내 쪽에서 출발하는구나.’ 하지만 육에 속한 것은 육은 육이니까요. 육에 속한 사람이 알아듣는 소리 하면 안 돼요. ‘그게 바로 성령 안 받은 증거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고요.




광야라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백성들은 원망만 해대고, 일방적으로 원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꾸준하게 만나를 내리면서 밑에서 위에서 압착을 가하면서 ‘너는 율례대로 살아야 돼. 안식일을 지켜야 돼. 안식일 아침에 가지러 나가지 마. 안식일에는 없어. 어제 이틀 치 했잖아. 나갈 필요 없어.’ 그래도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뒤에 나옵니다. 26절. “육 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돼있죠.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무슨 사람으로 훈련시킵니까? 철저하게 안식일이란 틀에 완전히 포로 잡힌 그런 백성들로 만든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우선입니까, 안식일이라는 율법이 우선입니까? 안식일이란 율법이 우선이에요. 안식일 때문에 백성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신약성경에 뭐라 했습니까?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했죠.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죠. 그러면 율법은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예수님을 위해서 있고, 예수님이 완성했고, 그 예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되는 겁니다. 율법은 우리 위해서 있구나. 그건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율법 있다면 율법 때려치워야 돼요. 율법 폐기론이에요. ‘율법 필요 없어. 율법 말고 사랑 받을 거야.’ 누가 자기 마음대로 사랑받고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까? 율법에 철저히 종속돼야 되는데.




여기 26절 보면, “육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이걸 그들이 회의해서 한 게 아니에요.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거고 만나는 율법에 춤추는 겁니다. 매일 같이 새벽에 오다가 안식일 아침에는 안 오고. 그러면 만나는 누구만 먹는 거예요? 만나는 말씀에 따라 움직이지 만나는 백성들이 배고프다하면 더 주고 배부르다 하면 안 주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만나를 따라야지 만나가 백성들 생존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백성들이 섬기려 주님이 있는 것이지 주님이 백성들 섬기려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까. 그게 바로 그 자리가 우리의 자리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이 이런 이야기하죠. 내 밑에도 부하가 있는데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상관이잖아요. 주께서 가고 오는데 주께서 친히 오실 필요 없습니다. 명령만 내리소서. 명령만 내리시면 내 하인이 낫습니다. 나았잖아요. 주님이 놀랬어요. ‘세상에 이스라엘에 이만한 믿음 못 봤다. 나라의 본 백성은 천국에서 쫓겨나고 천국은 너희 차지다.’




왜 바리새인들은 천국에서 쫓겨납니까? 말씀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지 우리 인간이 아닌데 그들은 자기가 주인공 되어서 자기가 지켜낸 만큼 구원의 축복을 더 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말씀을 자기가 갖고 노는 거예요. ‘일단 줬으면 지켜야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성경에 말씀이 나오니까 말씀을 지키는 게 뭐가 나쁘냐고 나와요. 사람들이, 목사들이.




성경에 하라고 하신 말씀은 문자만 이야기는 것이 아니고 그 문자의 완성자가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라, 하게 되면 너는 그 가운데서 네가 십자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성경을 다 알고, 사도 바울의 권면을 다 알아도 진짜 알아야 될 것은 백날 성경 알아도 소용없어요. 진짜 알아야 될 것은, 내가 그 성경말씀을 하나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 그 죄인을 십자가 피만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이걸 알면 그것이 바로 영의 사람에 속한 겁니다.




성경을 달달 외우고 신학박사들 모르는 게 없어도 그것은 전부 다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들이 그것 알아서 구원받겠다는 건 다 어리석은 짓이에요. 하여튼 주님은 인간 보고 어리석다하고, 인간은 주님 보고 어리석다 하고 누가 어리석은지. 그 다툼의 절정이 십자가 아닙니까.




주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간단하게 이런 겁니다. 네 죄로 인하여 내가 채찍을 맞는 거예요.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께서 빌립을 인도할 때 이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53장 펼쳤잖아요. 네 죄로 인하여 내가 채찍을 맞는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는 뭐가 되는 거예요? 채찍 맞을 짓들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보여주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채찍 맞아 나았다. 이제는 내가 한다.’ 이런 소린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왜 내 대신 주님이 채찍 맞아야 돼?’ 이제 본격적으로 그걸 알아가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알아야 될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것만 알아야 되겠구나.’




로마서만 알면 갈라디아서는 언제 알고? 사람이 갈라디아서 알면 로마서 잊어버리고, 로마서 알면 갈라디아서 잊어버리고, 갈라디아서 알면 사도행전 잊어버리고, 사도행전 끝나면 요한복음 잊어버리고 그래요. 여러분 안 그렇든가요? 여기 목사님 열왕기하 합니까? 상 다 잊어버렸지요. 그 모든 것이 오직 하나에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율례는 하나의 바탕이거든요.




말씀의 바탕이 되서 그 말씀 때문에 우리 대신 압사 당하신 분, 끼어서 우리가 더불어 성도와 함께 압사 당하신 분, 사실은 그분의 죽으심이 우리 죄인데 죄도 없으신 분이 우리 때문에 같이 동참해서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정치범으로 죽었다고 우리는 우겨댑니다. 사실은 우리는 그런 소리 할 자격도 없이 우리가 죽어야 되는데. 그러니까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십자가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 왜 우리가 죽어 마땅한 죄인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풍성하게 그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알아가는 겁니다.




결국 오늘 강의의 핵심은 우리 자리가 말씀 밖에 우리 자리를 따로 설치했다는 게 문제입니다. 바빠서 못 왔습니다. 다른데 간다고 신앙생활 못했습니다. 그 엉뚱한 자리에 우리 자리가 있으면 안 돼요. 바빠서 교회 못 올 순 있지만 바쁜 그 자리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난 그 자리에요. 그걸 이해하셔야 돼요. 만날 교회에서 살라는 말이 아니고.




그런데 여기 봅시다. 나오지 말라 했거든요. 그런데 27절에 백성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했지요. 하여튼 말을 지독히 안 들어. 말을 왜 안 들을까요? 본성상 조바심 나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 지금 이틀 치 받았잖아요. 모자람이 없지요. 그런데 이틀 치 받아놓고 지는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무래도 모자라.’ ‘엄마. 이틀 치 받았는데.’ ‘입 다물고 있어. 내가 보기 모자라. 너, 많이 먹잖아.’




결국은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갔다는 말은 출발점이 말씀부터 출발점을 삼은 게 아니고 평소의 습관, 평소에 내가 했던 짓거리, 내 중심에서 출발하니까 행여 있는가 싶어 나갔다가 못 거두고 온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성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앞으로 무슨 사태가 일어나면 원망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식일 아침에 만나 거두러 간 그 행세가 집에서 센 바가지가 밖에서 안 새겠습니까?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뭐라고 또 원망하겠습니까? 하여튼 틈만 나면 원망하기로 만반의 준비가 돼있어요. 가득해. 성령 충만한 게 아니고 원망 충만해. 하루라도 원망하지 않으면 가시가 돋을 정도로, 원망 없이는 사는 재미를 못 느낄 정도로.




그런 인간을 대신해서 채찍을 맞으신 거예요. 그 증거가 찢기신 살이고 흘리신 피란 말이죠. 피를 믿는다고 페인트 칠 한다고 될 문제입니까? 아니지요. 본인 자리가 율례 앞에서 이걸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나도 나를 다룰 수 없는 태어날 때부터 주께서 범죄 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그걸 아는 순간 십자가 공로만 활짝 드러내고 십자가 공로만 드러낼 때가 다 이루었다가 활짝 드러날 겁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부족함도 없고 모자람도 없는 겁니다. ‘주여, 십자가가 있는데 제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고백이 그 순간 터져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 있는데 내가 뭘 하겠습니까?’ 행함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것 해서 뭐 할 건데. 행함이라는 순간 또다시 행할 수 있는 내 자리 따로 만들어요. 우상이죠. 




31절 봅시다. 이것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 그러면 안식일을 그들이 지킨 겁니까, 강제로 지키게 하신 거예요? 참 재미있어요. 인간이 광야에서 기껏 하는 짓이 아침에 만나 거두러가는 거예요. 농토가 없으니까. 추수할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안식일은 뭘 강제로 못하게 만들었다? 아침에 만나 거두러 들판에 가는 것조차 막아버리니까 어떻게 돼요? 평소에 하는 날과 안식일의 차이점이 뭡니까? 아침에 만나 거두러 가는 일이 있을 때는 평일이고, 그 일이 없을 때 안식일이죠. 결국 안식일이란 철저하게 먹을 것조차 챙길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그 안식일을 미리 맛 본 사람은 모세지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사십일 동안 거기서 장사했습니까? 레코드 가게 했습니까? 파리바게트 체인점 했습니까? 그냥 말씀 받았지요. 이 안식일에 그들이 양식에 대해서 거두러 가는 것조차 안 했다면 안식일에 무슨 그림을 머리 속에서 철수해야 됩니까? 오늘도 만나 있어야 먹고 산다가 그날만큼은 없지요. 이틀 치가 있으니까. 왜 안식일에 곱빼기로 주셨을까? 이게 창조 완성 속에 우리가 포함되었구나. 하는 그런 율례 속에, 하나님의 안식 속에 강제로 그들은 놓이게 되는 겁니다. 본인이 믿든 안 믿든 관계없이 상황 자체가 완성체 속에 놓이게 되죠.




그래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게 해야 지킨다는 겁니다. 이것이 신약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안식일 지키는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십일조요? 예수 믿는 게 십일조입니다. 그 소리 듣고 교인들이 온 얼굴이 갑자기 활짝 핀 것 처음 봤어요. 예수님 믿는 것이 십일조 지키는 거예요. 왜? 십일조는 율법이잖아요.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이죠? 예수 믿는 것이 십일조 완성이란 말이죠.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을 드리는 거죠.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진 겁니다. 우린 예수님 바치는데 예수님보다 더 확실한 십일조가 어디 있습니까. 돈 계산, 십분의 일 계산 안 해도 되잖아요. 예수님 자신을 바치면 그게 십일조의 완성이고, 주일성수의 완성인데 예수 믿으면 그게 율법의 완성인데 더 지킬 게 뭐가 있어요? 십자가에다 승리했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안 살아났으면 오늘도 율법 지켜야 돼요. 그런데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은 그냥 혼자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에요. 모든 율법을 완성하시면서 살아나시고 그 살아난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선물로 줬으면 율법을 지키는 책무와 의무가 일체 남아있지 않습니다. 율법이 없는데 무슨 행함이 있어요.




야고보서의 행함이란 믿음을 행함이라 해요. 아브라함이 자식 바치는 것을 야고보서에선 행함이라 하고, 창세기에선 그걸 뭐라 합니까? 믿음. 믿음 맞잖아요. 기생 라합이 거짓말하는 것이 야고보서에선 행함이지만 히브리서 11장에선 믿음이잖아요. 믿는 모습이 행함이에요. 믿음 따로 있고, 행함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믿는 모습이 행함이에요. 그걸 야고보서는 행함이라고 한 거예요. 참내. 곧 들통 날 사기를 치고 있어요.




만나가 여기 32절에 보면, 언제까지 하느냐? 원망할 때 만나 안 오고 그런 것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만나는 율례기 때문에 원망한다고 율례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율법을 못 지키겠어요.’ ‘그래 살려줄게.’ 이런 광야란 아니란 말이죠. 그들의 원망을 하든 다투던 간에 아래서 위에서 계속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왜냐하면 너희들이 어떻게 행동하던 간에 약속은 약속대로 그냥 꾸준하게 진행될 뿐인 겁니다. 그 앞에서 네가 고생을 하든 어떻든 간에 약속대로 돼요. 그래서 약속대로 되어진다는 것은 만나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까지 주어진다.




그러면 만나는 작대기, 무슨 작대기?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비춰주는 그 작대기, 그게 만나에요. 화살표 작대기. 이게 만나라고요. 지향점이 약속의 땅이에요. 그러면 지향점이 약속의 땅 같으면 만나가 주어질 때까지 사십 년 동안 그들은 다 망해야 됩니다. 결국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입을 틀어막고 끽 소리 못하고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준 거예요.




약속의 땅에 대해서 너의 자격으로 못 들어간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있으면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 그리스도, 율법의 완성이 올 때 너희는 완성한 천국에 들어가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면 어떤 열쇠도, 네가 행한 것으로 열리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그걸 가질 수 있는 우리 자리는 없어요.




‘목사님, 그걸 내가 믿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그걸 믿어버리면 내 자리가 또 생겨버려요. 그걸 소유한 내가 또 생겨버려요. 우리가 그 말씀에 도리어 소유 당하게 되는 거죠. ‘목사님, 그걸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면 내가 또 생긴다니까.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나가 깨지고 또 깨져야 돼요. 마치 말씀 앞에서 은혜준 것처럼.




그래서 사십 년 광야를 통해서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약속의 땅이 어디 있습니까? ‘약속의 땅은 광야 지나서 있습니다.’ 그러면 틀렸어요. 약속의 땅은 만나가 그 순간이 약속의 땅이에요. 율법이 율법의 기능을 다했을 때 만나가 율법이니까. 율법이 율법의 기능을 다했을 때 약속의 땅이 드디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죠.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할 때 율법 끝, 사랑 시작, 천국 시작이에요. 그걸 갈라디아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자기 자신 위주로 구원하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을 자기가 계속 소유하려고 하는 거예요. 율법은 끝났고, 복음을 가져야지. 복음을 가지는 그런 식으로 구원받을 수 없어요. 복음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거죠. 복음이 우릴 가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 그 앞에서 죄인이 돼버려요. 죄 짓는 게 아니고 죄인이 돼요. 죄인으로써 죽어 마땅하고 거기서 그리스도가 계속 살려내는 작업이 이뤄집니다. 그 살려내는 작업이 하나님의 의의 관계가 되서 우리가 주 안에서 의인이란 신분자로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성령을 안 받으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자꾸. 가질 수 있는 주도권을 자기가 쥐려고 하는 겁니다.




오늘 강의를 한 마디로 마치겠습니다. 우리 자리는 내가 설정한 상상한 그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우리 자리는 말씀의 자리, 십자가 자리가 우리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교회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 하시는 직장과 가정 그곳에서 다시 한번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가 죄인으로서 이런 일할 수 있는 혜택과 은혜를 입고 있구나.’ 그래서 주 앞에 그 자리에서 주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우리가 감히 들어갈 수 없는 방주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십자가 안에 이미 들어가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이 십자가 안이 얼마나 큰 축복인 것을 우리가 목숨 바쳐도 얻을 수 없는 축복인 것을 살아가면서 더욱더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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