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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2 00:22:25 조회 : 2510         
110701 광야와 죽은자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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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210.♡.51.85) 11-07-07 13:50 
20110701a 울산강의-출애굽기 17장 : 광야와 죽은 자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출애굽기 17장하겠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이란 걸 빼버립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신 광야를 떠나서 르비딤에 장막을 쳤다. 이것 육적인 사람이 이해됩니까? 충분히 이해되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나와서 어디서 텐트 쳤다. 이건 육적인 사람, 신앙 없는 사람도 충분히 이해되잖아요. 그런데 거기다 뭘 하나 집어넣어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대로 행하여서 르비딤에 장막을 쳤다. 그만 불신자들이 이걸 이해 못하겠죠. 뭘 하나 집어넣었는데 이해가 안 될까요? 여호와의 명령대로 또는 여호와의 스케줄대로 가서 르비딤에 장막을 쳤다. 이걸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쪽에 텐트 친 것 우리가 선택했다는 거예요. 자기가 결정했다는 겁니다. 뭘 노정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스스로 나에게 명령해서 내가 텐트 친 거죠.

그러면 육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사는 목적이 뭐냐 하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거죠. 그러면 반대로 해봅시다. 신자, 성도, 성령 받은 사람들은 누구 영광을 위해 사는 겁니까? 육의 사람은 아니죠. 자기 영광대로 사는 건 아니죠.

그러면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에서 육의 사람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영의 사람은 하나님 영광인데 여기서 뭔가 하나 개입되죠. 하나님의 노정대로 요새 말로 스케줄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영의 사람이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스케줄 중에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미래 또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그 길로 갈 때 비로소 육의 사람도 영의 사람도 되면서 하나님이 개입했기 때문에 육의 사람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살았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순간 개입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성경이 그렇죠. 하도 성경대로 안 한다고 해서 조심스럽다.

문제는 하나님이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안 보인다는 겁니다. 울산시내 사람에게 다 물어봐도 하나님, 무슨 동에 있습니까? 모른다는 거예요. 울산에 예를 들어 가지산이 있다면 찾아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거기가도 하나님이 안 계시니까 결국은 내 영광을 위해 살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으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찾아와 줄 때만 하나님이 계셔요. 하나님이 앉아 있고 우리가 찾아가서, ‘안녕하십니까? 하나님.’ 하고 방문한다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출애굽은 결국 이렇게 보면 돼요. 특수 상황입니다.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알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일반적인 걸 원하지 특수할 걸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출애굽의 내용이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셔서 그걸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면, 성령 안에 출애굽기 상황이 그대로 다 담겨있습니다. 담겨있게 되면 옛날 출애굽 당시의 광야라는 지리적 환경을 지나가면서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성령을 받게 된 울산 성도는 울산이라는 21세기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출애굽기 치우고 여기다 울산 이야기를 써야 될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동행하니까 우리가 그럴 필요 없는 거예요. 환경이 다른 거예요. 우리는 울산이고 저쪽은 광야라는 환경을 다른데 인도하시는 원리는 똑같은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면, 방금 십자가라며? 십자가를 울산 바닥에 퍼뜨려놨을 때 어떤 원리로 우리를 인도하느냐 하면, 출애굽 원리로 인도하는 거예요. 시간을 떠나서 공간을 초월해서 어느 시대든 간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원리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되고, 그것을 다 집대성한 것이 십자가고, 그 십자가에서 실타래에서 실이 솔솔 풀리듯이 풀리면 그것이 울산에 사는 우리 주변의 영적 환경으로써 조성이 되는 겁니다. 이걸 벤야민이라는 철학자는 ‘아우라’라 했지요.

아우라란 말은 흔히 쓰지요. 우리말로 하면 적당한 말로 후광? 광채? ‘너, 옷 입은 게 아우라가 피는 것 같다.’ 성령이 아우라 속에 있는 게 맞아요. 우리가 캡슐 안에 들어있는 쓴 약 같이 바깥에는 캡슐로 돼있고 안에는 진짜 약이 들어있고. 캡슐만 먹으면 안 나아요. 캡슐 안에 진짜 약이 들어있듯이 우리가 캡슐 안에 들어있는 약처럼 주께서는 출애굽기를 이 바닥에 올리는 겁니다. 캡슐 안에 들어있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차려야 되지요.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곤란하고요. 캡슐 안에 사람이 들어있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열 명이면 열 명에게 아우라를 다 입히는 거예요. 광채 나게 했다면

그림을 그려보겠습니다. 사람이 있는데 캡슐은 동그라미로 그릴 거예요. 여기도 하나 있고 동그라미, 여기도 하나 있고 동그라미. 그냥 쉽게 캡슐이라 했죠.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거예요. 이 안에 사람이 들어있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이 A란 사람과 B란 사람이 차이가 납니까, 안 납니까? 차이가 안 나는 거예요. 이게 정말 어려워요. 그걸 수학적으로 위상기하학이에요. 여러분 처음 들어보지요.

커피 잔과 도넛과 모양이 다르죠. 위상기하학에 들어가면 이것은 똑같은 도넛이 되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바깥의 형태가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고 이 캡슐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똑같은 존재로 취급을 받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원칙으로 깔리는 거예요. 이걸 우리가 명심을 해줘야 돼요. 명심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사람 보기에는 너의 과거 다르고, 나의 과거 다르지만 나는 아버지고, 너는 딸이고 다 다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동일하게 보신다는 거예요. 보편적으로 개별적 주체라 해요. 모든 것을 동일하게 같이 보는 거예요.

그렇다면 머리 좋으신 분은 그럴 거예요. ‘인간에게 각각 아우라를 입힐 때 광야라는 환경자체가 인간을 동일하게 본다는 말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딩동. 그게 정답이에요. 울산을 울산이라 보고 저는 대구 사니까 대구라 보시면 대구 사는 사람과 울산 사는 사람이 다르잖아요. 그런데 울산을 광야로 봅시다. 그러면 대구도 뭐로 보자? 하나님 보시기에 울산이나 대구나 광야로 보면 그 외에 사는 사람 모두 광야에서 살아가는 동일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각자 다르니까 각자 자기 영광을 취하지만 하나님의 동행이란 아우라가 오게 되면 각자 영광을 취하던 인간이 자기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뀌는데 바뀔 때 바뀌게 하는 원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맡기지 않아요. 인간은 초반부터 자기 영광이기 때문에 아무리 용을 쓰고 애써도 결국은 너 잘난 게 아니고 나 잘난 게 돼버려요. 벌써 너하고 나하고 차이가 나잖아요. 그걸 광야에 집어넣으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동일하게 취급하고 동일하게 보게 된다 이 말입니다. 광야의 의미가 그렇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광야에 들어가면 사람이 어떻게 다릅니까? 같아진다면 어떤 식으로 같아지는가? 그걸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죽은 자가 돼요. 살아있다고 생각하니까, 아까 목사님이 이야기한 소올드레스 카페, 명품만 좋아하는 여자들의 모임 다른 말로 교회. 교회란 모임이란 뜻이에요. 명품만 좋아하는 회원이 이십만 명 된답니다. 목사님은 명품 모른다고 무식하다고 취급받는데.

이렇게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살아있는 나를 스스로 광채가 나야 누구한테 돋보입니까? 살아있는 내가 돋보이는 쪽으로 행동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모든 행함은 죄가 되는 겁니다. 왜? 기본은 일단 내가 살아있어야 살아있는 내가 행동하는 것이 행함이니까. 죽은 자가 꼼짝도 못하는데 무슨 행함이 나옵니까. 그러니까 행함이 뭐냐 할 때는 일단 내가 살아있다고 간주하고 살아있는 내가 행동에 나서면 그 행동은 결국 ‘나는 살아있다’가 전제가 돼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광야라는 환경에 집어넣으니까 하나님은 광야 앞에서는 전부다 죽은 자로 간주하는 거예요.

날씨가 더우니까 천천히 나가겠습니다. 2절 봅시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하나님 노정대로, 하나님 스케줄대로 하니까 물이 없었지요. 내가 만약에 산 사람 같으면, ‘물 내놔.’ 요새 구미에서 수돗물 때문에 데모하고 있는데, 왜요? ‘살아있는 내가 물 마셔야 돼. 물 내놔.’ 살아있다면 반드시 물 내놓으라고 하겠죠. 그런데 만약에 내가 죽어있다면, 물 내놓으란 소리 못 하겠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광야에 물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물이 없어요. 진짜 한 방울도 없어요. 살아있다고 여기면 이 광야에 적응 못한다 이 말입니다. 내가 확실하게 죽여줄게. 환경에 맞추어야 돼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맞추어 살려면 선악과 안 따먹어야 돼요. 선악과를 따먹으면 에덴동산 환경에 안 맞는 인간이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뭐냐? 생명나무가 없는 것이 적당해. 생명나무 과실이, 영생이 없는 것이 아주 적절해요. 생명이 없다는 말은 생명나무는 천국에 많으니까, 천국에 못 가는 존재로 오늘날 인간에 아주 적합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국을 싫어해요. 차라리 울산이 좋아. 우리나라에서 제일 소득이 많은 도시, 울산이 좋아요. 태화강도 흐르죠. 까마귀도 날고 대나무 숲도 있죠. 참 좋아요. 그런데 천국은 싫어요. 거기는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니까.

이왕 따먹은 선악과기 때문에 이젠 하나님도 필요 없어. 이왕 따먹은 상태에서 거기에 합당한 환경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겁니다. 현재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그나마 살아있는 존재로 살기 위해서는 애쓰고 노력해야 다른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은 출애굽이라 하는데 애굽에서 나온 건 자기들 소망이 아니고 하나님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이란 남의 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려든 거예요. 불쌍해 죽겠어요. 자기들은 그냥 애굽에서 살고 싶어요. 거기에 정들었어요. 이웃집 아저씨들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어린양 피 때문에 강제로 갈라선 겁니다. 이건 이산가족도 아니고. 어린양의 피만 없었으면, 죽음의 사자가 오지 않았으면 옆집의 아저씨와 너무 잘 지냈어요. 음식쓰레기 서로 비워주고, 택배 오면 받아주고. 사람은 이웃 없으면 못 살거든요. 산 속에 가보세요. 깊은 산 속에서 텃밭 가꿔봐야 아는 사람 없으면 심심해서 못 삽니다. 괜히 장로님 말 듣고 가지 말고 울산바닥에서 사는 게 재미있다니까요. 처음엔 좋지요. 나중엔 심심해서 못 산다니까. 개나 키우면 몰라.

애굽 사람이 왜 미워요. 같이 동호회도 하고 낚시도 같이 하고 놀며 좋은데 강제로 갈라놨어요. 죽음의 사자와 거기에 대처하는 어린양의 피가 옴으로 말미암아 강제이주, 애굽 사람들과 강제로 헤어지게 된 거예요.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우리 아이디어 아닙니다. 누구 생각입니까? 우리 생각 아니에요.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 생각이야. 그 스케줄 따라 가면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는 거예요. 강제로 우리는 사로잡힌 거예요. 빼도 박도 못해요. 그런 강제성을 여러분들이 살아가면서 느껴야 돼요.

‘주님, 너무 저를 힘들게 합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 주님께선 약 올리듯이, ‘많은 사람들이 가는 곳은 멸망의 길입니다. 지금 관리실에서 광고합니다. 많은 사람이 가는 곳은 멸망의 길이고 영생의 길은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면 우리는 ‘아아악’ 하고 발작을 일으키죠. ‘아아악’ 하는 유명한 절규라는 게 나와요. 영생의 길은 찾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요. 마태복음 7장에 아는데 듣기가 싫은 거예요. 왜? 우리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내 취향은 여러 사람과 같이 노는 게 취향이고 어디 가는 게 취향이 아니라니까. 살아도 울산서 살고 싶고 죽어도 여기 사는 게 그게 우리 취향이지 딴나라 가는 멋도 모르고 원하지 않는데 가는 건 우리 취향이 아니란 말이죠. 취향이 아닌 것을 주께서 강제로 질질 끌고 가니까 얼마나 우리가 죽을 맛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주님 말씀대로 갈 테니까 그저 돈이나 팍팍 주소.’ 이러면 좋겠는데 주께서는 ‘네가 지금 어디 살고 있노?’ ‘울산입니다. 주소 대볼까요?’ ‘아니다. 너, 지금 어디 살고 있노?’ ‘광야입니다.’ ‘옳지. 그래야지.’

광야에 합당한 인간은, 산 인간은 거기 존재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날마다 우리를 죽게 만들어요. 사람 죽는 것은 간단하죠. 물 없고 양식 없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물 없고 양식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흐뭇해하죠. 이게 이제 죽는구나.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방금 한 걸 적어봅시다. 구원은 누구 생각이다? 하나님 생각. 그러면 구원을 할 때 아우라, 구원이 덮치는 환경은? 울산이 아니고 광야. 첫 번째 구원은 하나님 생각, 두 번째 환경은? 광야. 세 번째는 환경 속에 사람이 있는데 산 사람 아니고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낙원이 있다면, 생명나무 못 따먹고 죽음의 세계에 떨어졌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께서 데려오려면 먼저 이 구조에 따라서 자기 자리를 그렇게 볼 줄 알아야 되거든요. ‘나는 생명나무 못 따먹었으니까 지옥 가도 마땅하다.’ 이 구조를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내가 줄게.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해줘야 이 구조가 살아나요.’ 이 구조가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구조에 의하면 우리는 생명나무를 못 따먹은 죽은 자가 돼야 돼요.

그럼 정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살았다고 우기는 인간을 죽음 사람 만들어서 광야에 가두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업이 시작되는 겁니다. 아주 쉽지요. 굉장히 쉽습니다.

그런데 이건 알았으니까 신약에 그대로 적용시키면,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 외에는 너희가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예수가 죽었다는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바깥에서 끄집어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아예 이쪽으로 들어와 버려요. 예수가 들어올 때 마귀가 있거든요. 우리는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으니까. 이걸 갈라디아서에서 율법 아래 들어온 거죠. 율법 아래에 있으니까 어느 누구도 마귀에서 못 벗어나고 율법의 저주에서 못 벗어나는데 예수님께서 뛰어내려와 버렸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에 저주받고 돌아가셨어요.

그럼 그걸로 끝인데 하나님께서 못 빠져나온 예수님을 사흘 만에 구원시켜버리니까 여기에 새로운 구원의 나라, 천국이 생겨버리고 여기 인간들은 예수님에게 못 가는 거예요. 베드로가 자기 목숨 바친다니까 오지 말라 했어요. 예수님 홀로 가시고 자리가 마련됐다.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베드로 자리가 마련됐습니다.’라고 소리치는 게 뭐냐 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젠 목숨 안 바쳐도 돼요. 순교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성령만 오면 구원받아요.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안에 있으면 이 안에 갇힌 너희 몸도 살리시니.

이 구조를 광야구조로 옮겨보면 일단 자기는 죽은 인간인데 살았다고 우기는 거예요. 우기는 방법이 ‘물 줘야 살지. 양식 줘야 살지.’ 만날 광야에서 그런 소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야. 저 백성들이 자꾸 나 여호와와 다투네.’ 생각이 다르니까 다투는 거예요. 그걸 일반 사람들은 그건 여호와와 다투는 게 아니고 우리는 여호와 좋아하는데 모세와 다투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이것 중요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모세와 다투고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로 이해한다? 여호와 하나님과 다툰다고 단정을 해버려요. 하나님과 다투는 겁니까, 모세와 다툰 겁니까? 너희들이 모세와 다투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다퉜다고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 지팡이에 모세도 예속하게 돼있어요.

19세기 때 영국에 루팡이란 도둑놈이 있어요. 셜록 홈즈는 잡으려하고 루팡은 도망치고. 그 루팡의 특징이 높은 모자를 썼어요. 눈이 하나 애꾸인가 그래요. 소설에. 또 하나의 특징이 지팡이를 들었다니까. 슬슬 옛날 기억납니까? 19세기, 20세기 초에는 영국신사들이 지팡이를 들고 있어요.

보통 신사들은 지팡이를 자기가 돌려요. 그런데 모세가 지팡이에 예속돼버립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이 모세와 다투는 게 아니고 바로 하나님과 다툰다는 것을 모세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5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에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전에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지팡이를 강에 대니까 강이 피로 변했잖아요. 그게 모세 솜씨라는 말입니까, 여호와 솜씨라는 말입니까? 그게 여호와 솜씨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여호와와 함께 있다는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 했어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느냐 하면,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들이 광야에서 죽은 사람 돼야 될 텐데 펄펄 살아있는 거예요. 애굽적인 사고방식으로. 물 없으니까 물 내놔라. 양식 없으니까 양식 내놔라.

그러니까 하나님께 물 내라, 양식 내라는 하는 것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하던 버릇이고 지금 너희들이 구원받을 나라는 생명나무가 살아있는 나라거든요. 생명나무가 살아있는 나라에 들여보내기 때문에 일단 우리는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생명나무 구조 안에 죽은 자로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만 살아있으면 되는 거예요? 우리 예수님만 살아있으면 되는 겁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 누굴 죽입니까? 마르다, 마리아 오빠를 의도적으로 아픈데도 안 가고 죽기를 기다려서 죽고 난 뒤에 가서 이야기하죠. 무슨 그런 장치가 다 있습니까?

죽음을 느끼지 아니하면 예수님 말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살아있는데 평소에 성경 보면 이해 못한다는 말입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를 죽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실 때 허리띠나 노끈 들고 와서 목을 졸라 그렇게 죽입니까? 성령께서 노끈 들고 오십니까? 아니면 칼 들고 오십니까?

성령이 온다는 것은 언약이 최종적으로 다 드러난 상태에서 오기 때문에 그때는 노끈이라든지 그런 방법은 구약적 방법이고 신약적 방법은, ‘너는 죄인이야. 그리고 너는 살아도 할 말 없어.’ 죄인 맞는데 더 살려달라는 것은 앞뒤가 모순된다는 겁니다. ‘너, 죄인 맞지?’ ‘예.’ ‘그럼 어떻게 살래?’ ‘사는 게 은혜고 안 살아도 그만입니다.’ 이렇게 나와 줘야 죄인의 구색에 아귀가 맞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식의 구원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고 사람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거예요. 사람은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오직 주님의 생각에서만 나온 구원의 방법입니다. 보통 종교는 일단 살아있는 내가 어떤 행함을, 십일조하고, 주일성수하고, 성경공부해서 어떻게 살아보겠다. 내가 살아있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가 산다는 자체가 죽은 자가 아니란 뜻이고 그것은 선악과 따먹은 것은 내 책임 아닙니다. 내가 따먹습니까? 하고 내뱉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나는 구경도 못했어요. 억울하네. 난 안 따먹었어요.’ 이건 자기가 안 죽었다는 말이죠. 주님께서는 죄를 이용해서 모든 인간을 죽어 마땅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려요. 그걸 고상한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죽음이라 하잖아요. 그런 철학적인 이야기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생생하게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죽은 사람으로 만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산 사람이라면 기댈만한 모든 것을 주위에서 다 치워버립니다.

어린애가 죽음을 느낄 때가 언제냐 하면, 애가 연탄가스나 청산가리 마실 때 ‘엄마, 나 죽을래.’ 이런 것 없어요. 애들은 죽음이란 걸 몰라요. 애들은 엄마 없을 때가 죽음이에요. 아우슈비츠 다큐멘터리에 보면 거기에 아주 신기한 게 나옵니다. 애는 쓸데없으니까 빨리 죽여 버리잖아요. 엄마 노역을 해야 되니까. 유대인 엄마와 애를 분리시킬 때 처음엔 엄마를 안 떨어지려해요. 엄마는 나를 보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처음엔 울어요. 그러다 수용소에 적응하다보면 엄마한테 안 가고 수용소에서 애들 안심시키기 위해서 사탕 주고, 초콜릿 주는 그 아저씨가 아빠가 돼버려요. 이거는 강아지와 똑같은 거예요.

주인이 사료 주는 것이 아니고 사료 주는 자가 주인이 되는 겁니다. 내 딴에 중요한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그러니까 낳아준 사람이 엄마가 아니고 길러준 사람이 엄마가 되는 거예요. 이거는 아기든 누구든지 엄마한테 효도하는 게 아니고 나한테 잘해준 경우에게만 효도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를 버린 엄마, 아빠는 효도를 끄집어내지도 마세요. 이게 바로 선악과 따먹고 인간이 자기만 사는 적응한 방법이에요. 가인이 그걸 참 잘 보여줬어요.

하나님이 언제 하나님입니까? 나한테 잘해줄 때 내 원대로 해줄 때만 하나님이고, 내 원대로 안 되면 그거는 악마가 되는 거예요. 이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이성이 완전히 뒤집어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단입니다. 우리가 바른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 이단 되겠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 자체가 이단이었어요. 이단이었기 때문에 십자가 죽은 겁니다. 그 십자가를 믿겠다는 말은, ‘주여, 저도 이단 되겠습니다.’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자가 정통이에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리라 한 것은 예수님만 이야기할 수 있지 정통적인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내 신학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러면 안 되거든요.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는 나에게도 해당됩니까? 안 돼요. 앞으로 이근호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건 아니라 했는데 왜 그렇게 떠드는지 몰라. 이것 안 되고 예수 믿으라 하는데 왜 자꾸 엉뚱한데 공격하니 이유를 모르겠어. 도대체.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중심이 돼야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왜 자꾸 너 중심이냐? 나도 가수다. 이러거든요. 너만 가수냐? 나도 가수다. 나는 가수도 탈락하는 수가 있습니다. 정엽이, 김건모, 임재범이. 누가 위로해줍니까? 죽으면 무슨 위로받아요.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선악과 왜 따먹었느냐 말이죠. 독약이거든요. 독약 마시고 죽는 게 정상이지 뭘 위로받아요. 누구십니까? 여러분. 돌에 맞아 죽은 것은 당연한 건데.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에덴동산을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 그 판을 그대로 가져옵니다. 그 판을 그대로 가져와서 에덴동산을 씌워버려요. 네가 에덴동산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거예요. 그 말은 곧 생명나무를 주게 되면 너는 영생을 얻게 된다 그 말이에요. 영생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이 원래 짜놓은 장치 안에서 이야기돼야지, ‘나 여기 있고, 하나님 거기 있고 날 구원해보라.’ 자기중심으로는 성경 전체가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캡슐 이야기했듯이 여기서 모든 인간은 보편적으로 다뤄진다. 동일하게 다뤄진다.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광야에서는 너, 나가 다르지 않고 동일하게 똑같습니다. 다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에 보니까 사람이 먹을 것 없고 몸 아프니까 신사고 아이고 없어요. 오직 나만 살아야 되겠다는 그 본심 하나만 오기만 남아있어요. 그게 비정상이 아니고 원래 인간이 들어있어요. 사람이 죽음 직전에 가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나는 오직 자기 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평소에 관심이 없다는 걸 발각이 되는 겁니다. 그걸 십자가로 미리 발각시키겠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팡이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되는 건데 지팡이로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물이 없습니다. 물이 없다는 말은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물이 필요치 않아요. 물 줘서 살릴 이유가 없다니까요. 여기서 어려워요. 잘 들어보세요. 죽은 자라 물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물 줬다는 것은 죽은 자 살리기 위해서 물 준 게 아니에요. 물이 나오는 그 반석이 너와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물이 나온 겁니다. 그냥 물주면 되지 반석 치고 난리칩니까. 그래서 너희들이 물을 마시기는 마시는데 자꾸 반석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신명기 32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려고 예수님 보냈구나.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이런 인간도 사용한 것은 다 누구 덕이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떡 덕분이다 이 말이죠.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인간아. 널 구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주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아까 구조를 다시 보겠습니다. 현재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마귀에 잡혀있습니다. 그 안에서 새끼 쳐봐야 마귀에 잡혀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이 들어왔습니다. 이 사람들을 구원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마귀나 인간들에 구애받지 않고 반드시 이런 것을 승리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주로 드러나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람들 다 구원하지 않는 이유는, 구원받지 않는 사람이 있어줘야 죄 값을 반드시 치른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있는 겁니다. 지옥에서. 죄 값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죠. ‘그러면 쟤는 왜 천당  갔습니까?’ 하면, 걔가 잘해서 천당 간 게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몇몇을 뽑은 거예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야곱이란 말 나오는데 제가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한 것 같아요. 야곱이란 사건 내용이 굉장히 난해합니다. 하나님과 싸웠던 자가 야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싸운 자가 아니에요. 하나님과 원수가 돼서 싸워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야곱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야곱과 달라요. 이미 죽은 자가 마땅하다는 토대 위에 이스라엘이 주어지게 되면 결국 그 이스라엘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야곱 안에 들어와서 야곱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같이 가는 겁니다. 그때부터는.

자기는 야곱이에요. 하나님의 사자가 방문해서 이스라엘을 덮치니까 야곱이냐, 이스라엘이냐? 날마다 이스라엘이 야곱을 이기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아담이고 우리 안에 누가 있다? 새로운 마지막 아담,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예수님이 우리를 날마다 이기는 식으로 구원받으니까 이건 내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이 벌이시는 구원이에요. 이건 예수님이 안 들어온 사람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몰라요. 지금 이십 년 이상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니까 자꾸 예수님을 바깥 세워두는 거예요. 예수님이 없으니까 알지 못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울산 공부하러 오는데 십자가마을에 누가 글 올려서 답변하다보니까 기차시간은 5시 50분인데 5시 20분이라. 후다닥 저장하고 뛰어왔는데 처음에 썼던 내용이 이겁니다. 생물실험실에 어떤 사람이 개구리를 놓고 현미경으로 보는 거예요. 이게 뭘까? 동물도감 보니까 개구리거든요. 이게 개구리구나. 이렇게 살핀다 말이죠.   

그런데 성경을 볼 때 문맥적으로 어떻고 본다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은 뭘 모르느냐 하면 개구리가 자기를 본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무슨 괴물이 낯짝을 들이대느냐. 동물도감에 보니까 이건 개구리구나. 이건 인간들 역사 아닙니까. 개구리 역사는 인간 역사가 포함이 안 돼요. 개구리는 나름대로 자기 역사가 있다고요. ‘나는 어제 올챙이였어.’ 인간은 자기 역사에 준해서 상대방을 보게 돼있어요. 우리 역사에 저런 괴물이 없는데 뭔가 들여다보고 있네. 이런다 말이죠.

그렇다면 개구리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그 사람은 예수가 없어요. 없으니까 예수를 관찰해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살아계신 예수님은 예수님 나름대로 역사가 있죠. 그 역사를 인간들이 알 수 있을 것 같으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 안 일어났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사람이 예수님 역사를 알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안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너희들이 십자가란 말은 뭔 뜻입니까? 어떤 인간도 예수 알아서 구원받을 인간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말이에요. 그게 십자가에요. 없다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예수님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연구했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죽였지요. 바리새인들이 국어시간에 놀았습니까? 그 사람들이 문맥을 모르겠어요? 그 사람들이 율법에 대해 천 년 이상 신학이 누적된 고도의 신학이 거기 다 있는데 성경해석부터 해서 모든 걸 집어넣어서 결국 나온 게 뭡니까? ‘예수, 당신은 이단이다.’ 그게 결론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역사를 알아요. 예수님의 역사와 우리 역사가 마주치면 우린 그 앞에서 우린 천하에 내가 안다고 깝죽대는 이 자체도 죄입니다. ‘십일조, 안식일 자체가 죄입니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그걸 모른다고. 예레미야 설교, 한 마디면 끝납니다. 우리가 우상 숭배자니까 회개합니다.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개구리가 우리를 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없으니까, 옛날 사람이니까. 있는 것은 성경책밖에 없으니까 이걸 파고들면 된다는. 그래서 썼어요. 윤동주의 [서시] 분석하거나, 김소월의 시나 이상의 [날개] 그거 할 때 국어시간에 하라고. 그것 해도 인간밖에 안 나와요. 거기서 무슨 성경이 나옵니까? 참 기가차고 코가 찰 노릇이에요.

저한테 시비 걸기를 남의 교회, 늘푸른교회 시비 거느냐고 나오는데 복음을 아는 목사가 예수님의 안목을 가져버리면 무슨 교회, 무슨 교회가 없습니다. 왜? 성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 세상에 교회가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하나밖에 없는 몸, 교회도 한 군데밖에 없어요.

그런데 교인들이 우리 교회 만들면 목사로 하여금 주님의 안목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셈이 되고, 목사가 주의 안목을 버리게 되면 그 집단은 지옥으로 끌려가는 자진해서 요청하는 것밖에 안 돼요. 그게 교회가 몇 군데에요? 몸이 몇 개에요? 하나밖에 없잖아요. 무슨 니 교회, 내 교회가 어디 있어요. 지옥을 못 가서 환장한 것 같아. ‘남 지옥 가는데 왜 자꾸 간섭하는데.’ 그것과 똑같아요.

예수님의 안목을 가져야 됩니다. 그 앞에서 뭘 해도 저는 죄인이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 주신 피 외에는 다른 생명 없습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와 생명나무 낙원의 인식 틀이 그대로 머물러있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210.♡.51.85) 11-07-07 13:52 
20110701b 울산강의-출애굽기 17장 : 광야와 죽은 자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알아서 미리 물과 양식을 준비하지 않았느냐 하면, 미리 준비해버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렇게 하나님이 동행한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 오해하듯이.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 살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너희들은 할 말이 없다. 너희들은 지옥 가도 마땅하다. 혹시 살려주거든 주님의 은총이고, 긍휼이고, 불쌍히 여겨주심이고, 사랑인 줄 알아라. 너희들이 원하는 천국은 안 간다. 그런 하늘나라는 없고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어린양의 보좌가 있는 그 하늘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극락에 가는 게 아니고, 내가 살기 좋은 천국에 가는 게 아니고. 그런 것은 마귀가 지어낸 거예요.

진짜 천국은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사랑해서 예수님 보고 싶어 하는 사람만 가는 그 나라에요. 지상에서 예수님 보고 싫다고 도망치는데 어디로 가는데. 꼴보기 싫은 사람과 평생 살라고 하면 지옥이지 천국이겠습니까? 차라리 인간들끼리 축구동호회하는 게 훨씬 천국이지. 지옥에서 축구하면 안 됩니까? 얼마나 재미있다고, 지루하지도 않고. 지옥에서 도박하고 게임하고, 컴퓨터하면 지옥에서 평생 살겠다.

이것이 자기중심적인 구원에 대해서는 광야자체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의 구조를 주님은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 지팡이를 쥐고 반석에 서라 했지요. 그리고 반석을 지팡이로 칩니다. 여기에 대해서 박영선 목사가 잘 표현해놨어요. 왜 반석을 가리키지 않고 치느냐 하면, 누가 누구를 치느냐? 지팡이가 반석을 치지요. 반석은 생명의 물이 나오는 원천입니다. 생명의 물이.

인간들은 물을 줘도 원래 먹던 물로 여기고 주님이 물을 줄 때는 이거는 너희가 못 먹는 물이라 하는 거예요. 지하 삼천 미터인가 오천 미터 심층수, 못 먹는 물을 줬는데 인간들은 마셔보고 그 물이 그물이잖아. 십자가 이야기를 천 번을 들어도 ‘에이 그 십자가’ 하지만 어느 날 성령 받고 알아버리면 그 단 한 번이 ‘아, 십자가가 날 구원하는 십자가가 아니구나. 천당 가라고 주는 십자가가 아니구나. 너는 죽었다고 지적해주는 십자가 달린 것이 주님이 아니고 내가 달렸다고 주님이 그렇게 보시는 그 십자가구나.’ 단 한 방에 그 십자가가 날 위한 십자가가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예수님의 사람이 되게 만드는 십자가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 안에 주의 피가 흐르고 주의 성령이 흐르고.

그러니까 인간들은 물을 주고 양식을 줘도 우리가 떼썼으니까, 우리가 주님께 시비 걸고 원망하고 다퉜으니까 줬을 것 아니냐? 이렇게 부흥사들은 주장하는 거예요.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간절히 붙잡고 달라하니까 줬잖아.’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원망이든 아니든 물 없으면 물 달라고 가만있으면 안 되고 떼를 쓰면 물은 얻어먹잖아. 그렇게 얻어먹은 물은 지옥 가는 물입니다. 독사의 물이에요.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은 지옥 가는데 적합한 응답이에요. 진짜 천국 가는 응답은, ‘주여, 쓸데없는 것 달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같은 내 욕심이라고 느끼죠. ‘내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주님과 다툴 수밖에 없는 존재로써 이 땅에 살아가는군요.’ 그걸 느끼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게 나오죠. 반석을 쳐라. 반석을 쳤지요. 그 다음에 “그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7절)

그러면 그들이 여호와를 원망한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헷갈리니까 원망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따진다는 것은 누구에게 적합하다 말이에요? 누가 물어요? 내가 묻잖아요. 내가 묻습니다. 이거는 현미경 들고 조사해봐야 합니다. 하나님 계십니까, 안 계십니까? 묻는 자체가 원망이 되는 겁니다. 그걸 왜 묻느냐? 묻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하나님 계시냐고 묻는 것은 그 앞에 뭔가 생략돼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하나님 살아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죽어버리면 물을 수도 없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선 묻지 말란 말이죠. 죽은 놈이 뭘 물어? 실재 앞에서 우리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꾸 나불나불댄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십자가를 모른다는 뜻이거든요. 입을 꾹 다물고 뭐든지 감사합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뭘 할까요? 오늘 어떻게 살까요? 다음에 뭘 할까? 늘 지시받는 그런 게 있어야 된다 말이죠.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적어볼게요. ‘나는 확실한테 내가 확실한 만큼 하나님은 확실한지 아닌지 모르겠다.’라는 벌어진 틈에서 ‘그럼 하나님이 있는지 시험해볼까?’ 하고 시험이 나왔고, 그 시험은 하나님 보시기에 다투는 것으로, 원망하는 것은 이해하시는 겁니다.

철없는 애들 청소년 쯤 되어서 ‘엄마. 내 출생의 비밀이 뭐야? 내 엄마 따로 있는 것 아니야?’ 뒤통수를. ‘니가 공부는 안 하고 드라마만 봐서.’ ‘엄마. 사귀는 오빠가 있는데 그 오빠가 혹시 같은 엄마나, 같은 아빠가 아닐까?’ 막장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어.

이건 무엇입니까? 나는 날 알겠는데 내 바깥의 대상들, 하나님이든 누군지 잘 모르겠다. 거기서부터 생각나는 것이 원망이고, 다툼이고, 시험이고, 유혹거리고, 마귀가 그렇게 부추긴다 이 말이죠. 진짜 중요한 것은 새로운 환경 그러니까 물 없고, 양식 없는 새로운 환경에 진짜 나는 누구냐를 다시 보기 위해서 그런 환경에다 주께서 집어넣어버립니다.

그것은 울산이 아니고 옛날 출애굽 할 때 광야고 그럼 울산바닥에서 주님께서 광야의 의미는 어떻게 주어지는가?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물 출처가 어딥니까? 반석에서 나왔지요.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울산에 살면서 애 공부도 잘하고, 어떻고 이런 걸 원합니다. 반석 되시는 예수님께서 원하는 것 사이에 일치가 되지 아니하면 항상 입 다물고 있어도 원망과 다툼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일치가 되지 않는 거예요.

일치가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지지만 내가 꾼 꿈이라든지 내 소망은 다 개꿈이라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왜 개꿈이냐? 나는 조석으로, 아침 다르고 저녁 달라요. 아침의 소망 다르고 저녁 때 소망 달라요. 사람은 순간순간 누구와 마주치면 그때마다 소망이 달라져요.

다른 생각하다가 앞에 카메라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고요. 그때부터 밤새도록 걱정합니다. ‘그때 시속 얼마 나왔는데 여기 80인데 100나왔구나. 벌금 오만 원 나오겠구나. 하루 일당 오만원인데. 나올까, 안 나올까?’ 걱정하다가 일주일 지나도 안 나오면, ‘역시 나는 교통신호 하나는 잘 지켜.’ 하고 쓸쩍 걱정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망이 주특기입니다.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잘 때까지 원망과 다툼이 없으면 할 일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부러 카메라 있는 그때 잠시 주께서 허락하사 졸게 하시는 겁니다. 깜빡 졸다가 지나가버렸어. ‘아이고. 큰일 났다.’ 네비게이션도 안 달았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깜빡 졸게 하셨고 하나님께서 하필이면 카메라 있는 그 길로 가도록 했어요. 모든 발걸음과 모든 일이 전부다 하나님께서 하신 거예요. 숨쉬는 것도 시비 거는 사람이 있는데.

숨쉬는 것도 행함이냐고 하는데 숨쉬는 것을 내가 쉬면 행함이 되고 주께서 쉬게 하시면 예수 증거되는 겁니다. 신영록이라는 축구선수 병원에 입원해서 의식불명이죠. 숨 누가 쉬게 합니까? 답답할 때 보세요. 주께서 숨 쉬게 해야 숨 쉴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아요. 안 죽어보니까 내가 숨 쉬는 게 행함인 줄 모르는 거예요. 진짜 병원에 누워있으면 숨 쉬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한 되는구나. 주의 은혜다. 그때야 아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살아있다고 하니까 전부다 원망이고, 불평이고, 불만이고, 마귀에 시험든 거예요.

그렇다면 이 울산이 광야죠. 만날 지적당하고, 주의 뜻과 다르고, 내가 주님을 가르치려고 하고, 내가 원하는 걸 안 주면 짜증내고. 그게 계속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약간 어려운 걸 해보겠습니다. 여기 7절을 봅시다.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죠. 새로운 지명이 생겼습니다. 그 지명은 사건 때문에 생겼는데 하나님을 원망했던 사건, 지명의 뜻이 다투었다, 시험했다. 그러면 이 광야에 새겨지는 모든 인간의 흔적과 이름은 무슨 이름입니까? ‘인간은 죄인 중에 괴수다. 그러니까 죽어도 너는 할 말 없어.’라는 것을 깔리는 것이 바로 이 울산바닥이에요.

우리가 죽을 때 방에 누워서 벽지를 보세요. 온통 출생부터 그 날짜까지 과거기록이 파노라마처럼 깔려있으면 그 어느 대목 하나 찍어보세요. 1968년 5월 6일 찍어보라고요. 거기도 원망해놨어요. 인간은 한 평생 사는 게 수고와 슬픔뿐이고 원망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대구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애들 놀이에 동대문아 열어라. 동동 동대문아 열려라. 그처럼 주님께서 동대문을 두 팔 벌리고 그 밑에 우리를 지나가게 하는 거예요. 이 저주와 원망에 대해서 저주가 오지 않도록 주께서 예수 안에서 보호해주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광야에요.

실컷 원망하라. 또 원망해, 또 원망해. 예수 믿어도 원망해. 나중에 모세도 원망해. 그러면서도 만나와 양식과 물은 계속해서 제공됩니다. 결국은 우리는 양식과 그 물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을 자격이 된다, 안 된다? 먹을 자격이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는데 왜 주십니까? 너 좋으라고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 자신을 주라고 전파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솜씨, 예수님에게서 그 사랑의 놀라움, 창녀와 강도도 구원되는 놀라운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열심과 결과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울산바닥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라 했어요. 사랑의 열매 세 가지다. 그것 사랑의 열매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같이 원망하는 자체가 사랑의 열매에요.

그래서 우리의 바닥은 항상 므리바과 맛사고. 모든 하는 일이 하나님을 원망했던 걸로 깔려있습니다. 집에 침대 있으면 침대보가 맛사, 므리바. 바퀴벌레가 기어가면 맛사고 므리바고. 모든 것이 원망뿐이어서 ‘동동 동대문아 열려라’ 하는 식으로 우리는 거기를 통과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 따먹은 자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겁니다. 생명을 거저 준다는 거예요. 값없이 주는 거예요. 그 정도로 우리는 값을 못한다는 겁니다. 갚기는 뭘 갚아요. 뭐로 보답합니까? 보답한다는 그 자체가 수상하다. 지가 동대문입니까? 지가 어떻게 동대문을 만들어요. ‘너는 그냥 지나가기나 해. 쓸데없이 오바하지 말고.’ ‘아닙니다. 주께서 너무 힘드시니까 제가 서겠습니다.’ 꼭 귀싸대기 맞고 지나가요.

그 경우가 8절에 보면 나옵니다. 아멜렉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아멜렉과 싸움이 일어나는데 이 싸움의 의미가 15절에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돼있는데 여호와 닛시를 나의 깃발이라 했어요. 이 의미 때문에 아말렉으로 이스라엘을 침공케 하는 겁니다. 맞닥트리게 한 거예요.

적의 등장은 나의 정체성을 확립시킵니다. 형제들끼리 집안에서 많이 싸우잖아요. 집사님, 자녀들 많이 싸웁니까? 싸워도 바깥에 나가면 형제 하나가 모독을 받거나 조롱을 받으면 다른 형제가 가만있지 않아요. 꼭 나서서 형제 티를 냅니다. ‘누구야. 내 동생 건드리는 인간이.’ 그렇게 집안에선 싸우다가 밖에 나가면 단결이 잘 되는지.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바로 적이 등장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 있지만 아직도 사고방식이 애굽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이에요 . 자기중심적인 것을 한데로 뭉치는 본드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적의 등장이에요. 아말렉의 등장이에요. 이때 이스라엘이 느끼는 것은, 우리끼리 싸우는 것은 적 앞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오히려 우리끼리 싸우면 적한테 잡혀버립니다. 우리끼리 단결해도 적에게 이길까, 말까 하는데 자기끼리 못 싸우죠. 적의 등장이 이쪽의 결속을 유도하게 되죠.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적이냐 하는 겁니다. 이런 게 어렵죠.

아말렉의 적이 누굽니까? ①하나님, ②이스라엘. 아말렉의 적은 하나님이에요. 다른 말로 지팡이에요. 그러니까 아말렉은 지팡이가 물리치지 여호수아 장군이 물리치는 게 아니거든요. 아말렉 적이 하나님이라면 나중에 이스라엘이 누구 적이 되겠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이 돼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은 무조건 이스라엘 편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교회 편도 아니고, 새순교회 편도 아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 편이에요. 참 어렵다. 그 이름이 하는 기능을 미리 ‘여호와 닛시’로 지었어요.  

창세기 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나타난 새로운 지명이 나오죠. 여호와이레. 그 이름이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인데 그것은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그 기능을 하신다 이 말이죠. 어떤 기능? 우리가 제사 드려도 소용없는 것을 주께서 자기 몸이 대신 수양이 되어서 제사를 흠향하시고 자기 백성 삼으신다는 걸 보여주는 기능을 장차오실 메시아 되신 예수님이 한다. 예수님은 여호와 이레로 오는 거고 다음엔 여호와 닛시로 오는 거고 또 다음엔 어떻게, 어떻게 예수님이 하시는 기능으로 다 묶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아말렉은 하나님의 적이에요. 하나님의 적이기 때문에 아말렉을 칠 수 있는 무기는 어디서 나와야 돼요? 하나님에게서 나와요. 이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 내겠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키가 삼 미터가 넘는 골리앗이 긴 창 들고 까불락거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준비할 무기는 뭡니까? 문제 어렵다. 퀴즈 1단계가 아니고 5단계다. 키 큰 아말렉이 방패 들고 창 들고, ‘겁쟁이 이스라엘아. 나오라. 한 판 붙자. 누가 이기는지 결정하자.’ 할 때 이스라엘이 준비할 무기는 무엇일까요? 여호와죠. 여호와 이름이죠. 그걸 다윗은 만군의 하나님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은 소년 다윗으로 본 거예요. 소년 다윗이 돼버리면 다윗은 키 크면 안 됩니다. 계속 양철북처럼 크면 안 돼요. 과거에 은혜 받았다? 그건 마귀를 이길 무기가 되지 못합니다. 다윗은 그야말로 다윗으로 언약이 확정되는 것은 상한 심령이 될 때 다윗언약이 확정돼버렸어요. ‘주여,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동원시켜서 골리앗을 이긴 거예요. 소급해서 보면.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에 있지 십자가 믿는 대견하고 착한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이 보면, 그 사람이 했다고 보는 거예요.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요한과 베드로가 낫게 했습니까? 본인은 극구 아니라 주님이 직접 그 사람을 낫게 했다. 우리는 그냥 증인이고 목격자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 사람한테는 주님이 없으니까 알아듣지를 못하는 겁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만 증거하는데 주님이 없으니까 행함만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말하기를 ‘그건 아니야. 행함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야.’ 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만 한 게 아니에요. 벌써 이십 년 전부터 계속 해왔었습니다. 다 안다고 고개를 끄덕끄덕 했던 사람들이, 그랬었었었던 사람이 ....

‘예수 믿자’가 어느새 예수 믿는 자기를 믿게 됐으니까 문제된 거예요. 처음부터 예수 믿은 게 아니죠. ‘예수 믿습니다.’ 하다 예수 믿는 자기를 믿으니까 예수 믿는 나를 누가 건드려?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가? 십자가마을에 제가 어떤 목사님 설교를 보며 이분의 설교를 좋아하는가? 그 글의 내용에 이런 게 있어요. 목사는 사람과 싸우는 게 아니고 악령과 싸운다. 그러면 악령은 사람과 안 싸웁니다. 인간들은 자기 부하인데 왜 싸웁니까? 귀신 들린 청년이 뭐라 했습니까? ‘예수여, 때가 아닌데 왜 벌써 왔습니까?’ 그때부터 예수를 알아본 것이 마귀밖에 없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돼지를 키웠다니까요.

어제 대전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그때 질문을 했어요.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갈 때에 ‘돼지 떼가 바다에 빠지면 누가 섭섭해 합니까?’ 물으니까, 주인이 섭섭한 거예요. 원래 주인과 돼지 관계였는데 마귀가 들어가니까 돼지가 주인 말을 듣지 않고 바다에 빠져버렸잖아요. 귀신이 인간 속에 들어가면 인간은 원래 주인이 누굽니까? 주님 아닙니까. 하나님 말 안 듣고 귀신 따라 간 거예요. 그걸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돼지 주인들은 예수님에게 나가라 하는 거예요. 그들이 귀신 들렸어요. 구세주를 나가라 하니 이런. 목축하니까 돼지 값 날리니까 화나잖아요. 인간은 아무리 예수 믿는다 하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믿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다시 합니다. 악령의 적은 누구다? 인간은 적이 아니에요. 인간은 부하고 예수님이 적이고. 예수님은 뭘 기대한다? 내가 와서, 강도가 와서 집주인을 묶고 세간을 갖고 가면 그것이 하늘나라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보세요. 예수님이 들어왔습니다. 지금 세간들은 묶여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집주인은 자고 있습니다. 집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마음대로 세간들을 바깥으로 가져올 때 그게 바로 천국의 구원이란 말이죠. 전도고.

그러니까 예수님은 악령과 상대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님, 제가 죽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베드로야. 마귀가 널 청구하려고 청구서 가져왔다. 싸인 해달라는 거야.’ ‘예수여. 싸인 해주세요. 베드로는 내가 지옥 보내야겠습니다.’ 할 때 주님이 싸인 안 해줬어요?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순교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주제파악도 안 되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합니다. 주님은 마귀하고 상대합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원망해요.

우리의 행함을 받아요? 주께서 우리 행함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를 가지고 일하시는 주님의 성령의 행함을 하나님께선 찾으시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이러니까 지어냈다 해서. 여기 골로새서 1장 29절 보세요.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사도 바울은 내 속에 역사하는 게 따로 있다 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영지주의입니까?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1장 29절 이걸 사람들이 모른다 치고, 성경 어느 구절에 있다고 말도 안 하고 이걸 그대로 십자가마을에 사도 바울 해서 들어와서 ‘내 속에 역사하는 영으로’ 한다 하면, 영지주의 또 하나 등장했잖아요. 이게 영지주의입니까?

디모데후서에 보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나오죠. 그게 영지주의입니까? 내가 말하는 게 아니고 내 안의 성령이 말한다는 게 영지주의입니까? 하나님이 도우셔서 일한다 하면 전부다 영지주의로 몰아세워버려요. 인간이 행해야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사람들 주장은. 직접 일 안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주께서 일하게 하신다 해도 그 말을 못 알아들어요. 그럼 또 영지주의라.

그게 지금 주님이 인간과 상대하는 게 아니고 악령과 상대합니다. 성령은 악령과 상대해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성령 따라 갔더니만 악마가 기다리고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의 공생애 본질을 미리 다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상대하는 것은 인간을 묶고 있는 악령과 상대한다. 그 전체적으로 미리 한 번 보여주시고 그 다음에 십자가 죽기까지 마귀가 따라와서 시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가 신학 책에 안 나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신학 책에 성령, 악령 나오면 학위를 못 받습니다. 학위를 못 받으면 교수가 못 돼요. 가뜩이나 믿음 없어서 유학 가서 돌아와서 믿음 있는 척해서 교수하고 있잖아요. 믿음 있으면 개척교회 하지 뭐하려고 유학갑니까? 그만큼 믿음 없다는 거예요. 뭔가 행세깨나 해보겠다는 거예요. 진짜 성령 받은 믿음 있으면 유학 갔다 오면 박사학위 본인이 버려야 돼요. ‘이건 아무짝도 소용없는, 난 교수자리도 아무것도 아니다. 차라리 개척교회 하는 게 낫다.’ 이렇게 나오면 몰라.

아말렉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들러리입니다. 만날 벌벌 떨어. 떨 수밖에 없지요. 자기가 애굽에서 배운 대로 하면 모든 것이 불가능이에요. 우리가 예수 십자가를 믿으라는 이 말은, 십자가는 그 자체가 불가능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삽니까?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 이걸 느낀다는 것은 매일같이 기적의 아우라에 휩싸여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 나 오늘도 돈 못 벌었어. 그래도 천국은 가.’ 이게 성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못 나올 생각이란 말이죠. ‘교인 몇 명 안 돼. 그래도 천국 가.’ 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몰라요. ‘원래 죄인인데 밥 먹고 사는 것도 나한텐 덕이다.’ 그런 생각들이 성령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게 나옵니까.

‘기도 그만큼 했는데 이것밖에 안 주나. 심방 그만큼 했는데 교인 그것밖에 안 주나.’ 있는 교인도 나가고 심방해도 나가요. 목사가 직접 기도해보세요. 교인 나가버립니다. 주께서, ‘음흉한 생각으로 붙잡으려고 기도하는 모양인데 내가 네 수에 안 말린다. 어디 네가 십자가 바라봐야지 어디 교인 바라보고 있나.’ 그러면 목사가 교인 위해서 기도 안 하면 되겠네. 기도 안 하고 배깁니까? 답답한데.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하게 돼있어요.

항상 우리에게는 불가능을 줘요. 늘 깜짝깜짝 경기당하게 만들어요. 불신자는 스트레스 받아 죽지만 신자들은 젖혀놨어. 늘 예상밖의 놀라운 일들이 자꾸 발생돼요. 뭘 하나 해결했다 싶으면 뭐 하나 터져버리고.

아말렉을 누가 오라 했습니까? 아말렉이 몰려와서 이스라엘을 치게 할 때 벌벌 떱니다. 여호수아가 나가서 전쟁을 해보지만 그건 아무도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칼싸움해서 승리할 것 같으면 그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여기에 아말렉이 물러가고 다시 쳐들어오고 이기고 하는 것은 모세의 지팡이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이 모세의 지팡이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너의 전쟁에 네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전쟁이 너희들이 초빙되었다는 겁니다.

민수기에 나오죠. 놋뱀. 모세가 놋뱀을 들었잖아요.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쳐다보느냐 하면, 놋뱀에게 물렸다는 이 말은, 놋뱀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같은 동급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저 양반, 안 됐다.’ 그럴 게 아니다. 그게 네 꼴이다.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 죽어 매달린 이게 네 모습이다.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하여튼 경기당하게 만들어요.

그래 놓고 승리했다면 누구 승리입니까? 우린 불가능했는데 주님의 승리, 주님의 깃발 높이 들 때 우리는 주님을 앞장세워서 우리는 그냥 똘마니 되겠습니다. 사나 죽으나 이제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까. ‘내 안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기 때문에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죽는 것도 그리스도를 존귀히 여기기 위해서 죽이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하나님 내 생각하지 마시고 그리스도만 존귀히 하소서.’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영지주의죠, 뭐. 미쳤지, 미쳤어.

리처드 기어가 한국에 와서 자기는 티벳 불교 전파하러 왔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만나면 영화이야기하고 불교진흥이야기하고 했단 말이죠. 그래서 템플스테이도 안 하고 삐져서 가버렸는데 리처드 기어가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뭐냐 하면, 기독교에 대해서 KBS, MBC 특집한다 하면, 기독교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한 마디 이야기 안 해요. 고아원 구제하고 돌봐주는 것,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것, 결국 무슨 뜻입니까? ‘종교라는 것은 희생봉사해서 너희들의 종교인이니까 돌봐줘라.’ 그게 이웃사랑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주눅 들었으면, 그게 여호와 깃발입니까? 사랑받을만한 놈이 누군데 사랑해줘요. 우리 중에 사랑받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없어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사랑해줄 때 그게 사랑이지, ‘나는 사랑받을만한 해.’ 이러면 사랑이 아닙니다. 이 논리는 간단한 논리니까 해봅시다.

십자가가 있단 말이죠. 침례교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진 것까지만 했고 그 다음에 선택하는 것은 본인한테 달렸다. 침례교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지옥 간 사람은 자기 책임대로 가야 되기 때문에 주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다 졌는데 자기가 삐져서 안 믿어서 갔기 때문에 이건 못된 놈이라서 지옥 갔다고 이야기한다 말이죠. 십자가가 코앞에 몇 센티에 와있어요?

만약이 십자가를 선택해버리면 부처가 아니고 예수를 선택해버리면, 그 선택 속에 ‘내가 선택했기에’라는 게 포함돼있습니다. 인간의 공로가. ‘내가 예수 믿었기에 예수님은 믿음을 주었다.’ 이것은 에베소서와 다르죠. 에베소서에서는 믿음은 선물이죠. 이 사람들은 선물로 안 보고 홈쇼핑 택배물로 본 거예요. ‘주여, 성령 언제 옵니까? 벌써 사흘 됐다. 거래처 바꿔야 되나.’ 그게 선물입니까, 지 믿음입니까?

사람은 평소의 행세가 자기가 출발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고 보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주인이 되서 예수 믿는 거예요. ‘부처 믿을까, 공자 믿을까? 에라 예수 믿자.’ 어디 통 큰 치킨이에요. 슈퍼에서 물건 고릅니까? 그런 식으로 해야 사람들이 이해되는 거예요. 이해되니까 그것은 통 큰 교회가 되어서 통째로 지옥 가는 거예요. 그 가운데 아무도 예수님이 선물로 준 사람이 없고 전부다 결심해서 손들고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이에요. 주님의 사랑은 전혀 없고 자기가 사랑한 사랑만 되찾는 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천주교가 대표적이고. 일단 챙겨놓고 그 다음에 구제한다고, 자기 부인한다고 가슴 두드리고, ‘내 탓이오’ 차 뒤에 붙이고 돌아다녀요. 뻔히 다 아는데. 

유대인들 모아서 아우슈비츠에서 몇 만 명 죽였는데 그 주동자가 신부입니다. 예수님 죽인 놈들 욕보라고 다 죽여 버렸어요. 예수님이 유대인 위해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죄인이 누굽니까? 유대인입니까 아니면 이방인입니까? 다 죽어야 돼. 유대인이 살해했다고? 그럼 이방인은? 예수님은 모든 사람 위해서, 모든 사람 때문에 죽으신 거예요.

여기에 보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에 올라가죠. 그럼 이걸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산에 모세가 올라간다. 아론과 훌은 모세 때문에 와있는 게 아니고 지팡이 때문에 와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자기 증거할 때는 장로들이 뭡니까? 주님 이름을 증거하라고, 여호와 닛시를 증거하고 그걸 이야기해줘야죠. 복음 전하니까 반대로 욕을 하니 기가 찰 노릇이라.

백성들이 전쟁 중에 있습니다. 전쟁 중에 있을 때 뭘 봐야 됩니까? 적을 봐야 됩니까, 위를 봐야 돼요? 지금 자기 적이 아니에요. 자기를 못 살게 구는 김일성 집단이 아니란 말이죠. 교회 있는 사람은 교회의 적이 교회의 적이 아니에요. 악마가 교회 적이 아닙니다. 주님의 적이지.

하여튼 복음 아는 교역자 와서 설교하면 대번 종용히 불러서 쫓아버리고. 그렇게 설교하면 우리 교회에 도움이 안 된다. 주님을 증거하는 하나밖에 없는 교회 교인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증거하면 수 천 개 가운데서 하나밖에 교회가 돼요. 우리나라에도 수 천 개가 넘으니까.

백성들이 뭘 보느냐 하면, 이 아말렉은 우리 적이 아니고 누구 적이다? 우리와 함께서 계시는 여호와,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을 치는 무기는 하나님 쪽에서 나오는데 이 무기는 뭐뭐다 아니라 무엇은 아니고 무엇이다. ‘무엇은 아니다’에 뭐가 들어갈까요? 여호수아의 칼, 여호수아의 무기잖아요. 그래서 밑에는 무엇이 아니고를 결정해야 돼요.   
천국과 지옥이 있을 때 천국의 사자만 이 땅에 오는 게 아닙니다. 지옥의 사자가 와야 돼요. 이 말이 뭐냐? 어떤 인간도 자진해서 천국에 못 가는 것처럼 자진해서 지옥에 못 가게 돼있어요. 지옥은 지옥의 사자가 와서 호출해줘야 지옥 가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말굽자석에서 S극이 만약에 천국이라면 붙어야 되고, N극도 있어야 붙어야 돼요. 그러니까 지금도 지옥의 사자들이 활동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교인들은 몰라요. 지옥의 사자들이 외치는 게 무엇이며 천국의 사자가 뭘 외치는가를 양쪽 다 뚜렷하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보여줘야 되는 거예요.

이쪽은 행위책이기 때문에 죽자고 행위를 이야기해야 되고, 천국 가는 사람은 생명책이기 때문에 행함 없이 생명책에 기록만 되면 천국 갑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그런데 이쪽에서 뭐라 합니까? 생명책에 기록된 줄 모른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댓글 달았잖아요. 글레멘드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3절에 나오는 게 무슨 이야기냐 말이에요. 사도 바울에게 한 수 가르쳐서, ‘글레멘드가 생명책에 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멱살 잡고 흔들어야 됩니까? 모르기는 뭘 몰라요. 나와 있는데. 지옥의 사자가 활동을 해주고 행위책에 근거한 행위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설교를 처음부터 하잖아요. 끝부분에 행위가 나왔다는 말은 끝부분에 나온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이야기할 때 뒤에 행위가 이미 들어있었던 거예요. 결론이 행위란 말은 처음부터, 서론부터 행위가 다 숨겨져 있다가 이것 끄집어내니까 결론 내버리는 거예요. 행위노리기 위해서 처음부터 운을 그렇게 떼는 겁니다. 교회에서 돈 내라 할 때 처음부터 돈 내라가 있었다니까. 그런데 끝에 가서 돈 내라고 한다고 끝에만 있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괄호 열고 돈 내라가 붙어있는 거예요.

이러한 하나님의 전쟁에 대해서 여호와 닛시, 예수님이 깃발을 들기 때문에 일체 우리 행함은 천국 가는데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 우리는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만날 죽어있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지 내가 사는 게 아니라니까요. 내가 살지 않고 주님이 살아있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죽은 놈이 행위 해봐야 맨 죽은 행위밖에 안 나오잖아요. 원망과.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너는 죽었고 나는 살았고, 적이 올 때 내 힘으로 적을 이기고, 동동 동대문에 내가 커버해줄게. 너는 내 밑에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그늘 아래서 너는 지나가면 이 상태가 천국이다. 이 상태가 바로 어디가도 그게 하늘나라가 된다 말이죠.

뭐가 그렇게 불쾌합니까? 이게 왜 불쾌해야 됩니까? 도대체 어떤 점을 건드려서 불쾌합니까?

끝으로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내 것이 없잖아요. 내 교회, 여기까진 내 교인, 이 영역은 내 교회, 내 교단, 우리 교회, 내 것이 없잖아요. 내 새끼, 내 가족, 내 돈 벌은 것, 내 펀드 넣은 것, 내 통장, 내 것이 없잖아요. 네 것으로 골리앗 이겨 마음대로 이겨라.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 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겁니다. 그래서 부름 받은 성도에요. 주님의 것이 되기 위해서 부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것으로서 주변에 있는 피아노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고 동동 동대문 밑으로 그냥 지나가면서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며 평생을 원망하면서 애굽적인 습관, ‘내 것은요? 내 것은 없잖아요. 내 것은 망하잖아요. 나는 죽잖아요.’ 만날 잔소리하면서 지금도 울산바닥에 지나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은데 무엇이 그렇게 우리 자신이 불쾌한 복음으로 받는지 주여, 우리 속에 마귀가 떠나게 해주시고 그 빈자리에 예수님의 사랑만 가득 넘쳐서 간음한 여인도 용서받는 놀라운 주님의 자유를 주님의 자유답게 증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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