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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00:22:35 조회 : 2261         
110902 사람과 백성 이름 : 이근호(IP:117.55.1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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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210.♡.51.85) 11-09-08 13:11 
20110902a 울산강의-출애굽기 18장 : 사람과 백성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합시다.
출애굽기 18장 할 차례입니다. 제가 18장 1절 읽어볼게요. “모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하나님이 모세에게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모든 일을 들으니라” 출애굽기 18장 내용은 모세와 장인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만날 때 모세 곁에는 누가 있느냐 하면, 전에 만날 때는 마치 추방자, 현상수배범 같이 모세 혼자 있는데 지금 18장 들어와서 모세와 더불어 있는 사람은 수십 만, 오십 만? 하여튼 엄청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모세와 장인이 상봉하는 장면에서 모세 배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그 내용인데

장인이 볼 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모세한테 나오는데 모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가 일일이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율례와 법도를 전하는 걸 보니 옆에 장인이 보기에 딱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큰일은 혼자 하되, 작은 일은 좀 나누어서 대수롭지 않은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맡겨서 하는 것이 네가 편하다고 해서 18장 후반부에 가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서 천부장이니까 사단급, 백부장은 대대, 오십부장은 중대, 십부장, 열 명당 한 사람을 세워서 그들로 때를 따라서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들이 모르는 것은 모세한테 묻고 해서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었다는 게 18장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18장 내용에서 우리가 오늘날의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살펴봐야 됩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스라엘은 폐쇄적 집단이라는 점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자기들끼리만 아는, 자기들끼리만 정당하고, 그 이스라엘 빼놓고 다른 집단은 사람도 아니고, 그것이 그 안에 구축돼있는 폐쇄적 집단이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폐쇄적 집단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데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이 지상에서 ‘나라’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 백성들의 집합을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현재 민주국가에서 나라라는 것은 영토가 있어야 되고, 왕이 있어야 되고, 주권이 국민에서라는 조건이 있는데 신약시대에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대부분 영적통치라고 관념적으로 생각하는데 구약에서 나라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이 모여 있는 것을 나라라고 해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백성이 사람은 아닌 거예요. 울산 사람 모였다. 그게 하나님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이게 아니라니까요. 울산 사람들 자기가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러면 어디서 뭘 정하는 게 중요합니까? 사람이었는데 나는 사람이 아니고 백성이 돼야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 이게 뭡니까?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아니고 백성이 되는 거예요. 백성은 오야봉이 어디 있습니까? 지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겠지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지상의 반대말이 하늘이지요. 그런데 주의할 것은 성경에서 지상의 반대는 하늘이 아니고, 지상의 반대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에요. 지상에서 하늘나라 가려고 하늘 쳐다봐도 소용없는 겁니다. 하늘도 같은 우주창조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것 봐야 별 있고, 공기 있고 그것뿐이에요.

지상에서 반대는 하늘나라인데 이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이냐 하면, 상주해서 존재하고 있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펼쳐 보일 때만 접선이 되는 그런 숨어있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지상과 이 하늘나라의 중간에 스크린이 있어요. 막이죠. 또는 커튼. 내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커튼 뒤에서 하나님이 주먹으로 등을 치면, 사람들이 있다가 ‘누가 칩니까?’ ‘하나님이 친다.’ ‘오, 백성이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등을 안 치면, 뒤에서 안 건드리면 무대 앞에 서있는 사람들은 백성이 아니고 사람이 되는 거예요. 울산시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스크린, 막, 커튼 뒤에서 하나님께서 ‘살 거야, 안 살 거야?’ 하고 주먹으로 치던지, 안 그러면 야곱처럼 환도뼈를 때리면 ‘어, 누군데? 하나님이십니까?’ 그게 백성 되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될까요? 이스라엘 나라가 원래 이스라엘 이름 되기 전에 야곱이었지요. 야곱이 인간적 차원에서 하나님을 언제 만났습니까? 그냥 음성으로 들은 것 말고 직접 사람의 모습으로 한바탕 붙은 게 얍복강 가에서였어요. 그때 야곱은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이스라엘은 사람이 아니고 백성이 돼야 돼요. 사람에서 백성 되는 방법은 하늘 쳐다본다고 될 게 아닙니다. 하늘 쳐다봐야 소용없고 숨어있는 하늘나라에서 막을 통해서 우리를 때리든지, 치던지 안 그러면 관리하던지 그러한 다루심이 있을 때 우리는 사람이 아니고 백성으로 다뤄진다는 느낌들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 스크린, 이 막, 숨어있는 스크린을 구약에서는 언약이라 하고 신약에서는 묵시라 하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게 되면, 오늘 본문 출애굽기 18장에 나오는 모세와 더불어 있는 사람은 첫 번째 이스라엘은 폐쇄적 집단이다. 자기들만 아는, 자기들끼리만 정당하고 이스라엘 빼놓고는 그야말로 사람이에요. 사람이기 때문에 곧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죽여도, 진멸이라 하죠. 진멸이 뭡니까? 완벽하게 멸절시키는 거죠. 진멸해도가 아니라 마땅히 진멸해야 될 대상이 되는 겁니다. 백성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끄집어낸 목적은 쉽게 말해서 울산시민 중 한 사람에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모세를 보내어서 이렇게 인도하게 한 거예요. 그러면 사람인 모세가 백성인 모세가 되려면 누가 다루어야 됩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다루어져야 돼요. 모세가 마치 막이나 스크린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에게 백성 되기 위한 하나의 커튼이나, 막이나, 스크린 이런 역할을 해서 그걸 백성들이 인정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 모세한테 찾아온 거예요.

18장 15절 봅시다. “모세가 그 장인에게 대답하되 백성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내게로 옴이라” 이렇게 돼있죠. 자기들이 자기 집에서 기도하면 안 됩니까? ‘신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애굽에서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이여, 이것이 옳습니까? 아닙니까?’ 왜 자기한테 안 묻지요? 어려운 질문이죠. 왜 본인이 알아서 신에게 하면 안 되느냐 말이죠. 그걸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 설명이 너무 혹독하게 어렵기 때문에 미리 다짐에 다짐을 놓기 위해서 먼저 이야기한 것이 울산시민에서 묵시적으로 언약이 관여하게 되면 울산시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하면서 그 다음에 중요한 것, 폐쇄적 집단, 얼마나 폐쇄적인지 사람의 힘으로 여기에 가담하려고 해도 가담이 됩니까? 가담이 안 되지요. 커튼 뒤에 있는 묵시적 인물이 ‘까불래, 안 까불래? 이렇게 살아야 돼.’ 묵시적 인물이 관리해서 이렇게 살아야 돼. 묵시적 인물이 관리해서 백성 됐는데 어디 그걸 흉내 내서 교회 등록해서 백성 되려고.

교회 등록한다고 백성 되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직접 터치를 해줘야 돼요. 하나님이 직접 그 영혼과 그 인생 발자국마다 전부다 관여를 해줘야 돼요. 그러면 백성들이 내놓는 건 뭡니까? 주께서 나를 이렇게 관섭하고 관리하고 나를 매몰차게 혹독하게 다루고 있다. 어디에서? ‘이 울산바닥에서 나로 하여금 이 시간, 이 인생 대에, 이 나이 대에 주께서 혹독하게 지금까지 이끌고 있다.’라는 그런 고백을 내놔야 돼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묻기를 ‘하나님이 왜 간섭하는데?’ 시민에서 다른 말로 인간에서 백성 되라고. 그 백성은 이 지상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하늘나라 백성 되기 위해서 시민을 그렇게 혹독하게 다루는 겁니다. 이 시민은 육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육으로 가지만 백성은 육에서 났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이 된 사람은 하늘나라 볼 수가 있지요. 이 작업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용접하고, 쇠 깎고, 자동차 만든다고 백성 되는 게 아니에요. 주부들이 살림 산다고 백성 되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마을에 막 산다는 질문 들어와서 답변 하나 했죠. 막 결혼해서 새댁이 애 낳고 보니까 너무 예쁘단 말이죠. 그래서 넓진 않은 아파트지만 하루 종일 애 돌보고 젖 주고 애와 함께 까불고 놀고 모빌로 이야기하고 그렇게 소박하게 사는 그 새댁이 막 사는 삶이에요. 그게 왜 막 사는 삶일까요? 그 뒤에 토를 달았죠. 그 새댁은 리비아 내전에 쫓기는 카다피와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막 산다 했어요.

저의 댓글은 이해하라는 댓글이 아니고 백성이 아닌 사람은 이해 안 되는 댓글만 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이해하는 척 하지요. 그래서 입만 열면 거짓말하고 있어요. 이해가 안 되는데 이해된 것처럼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숨어있는 거짓말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댓글 달수밖에 없어요.

새댁과 카다피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그래서 약간의 해석을 해놨습니다.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내가 이렇게 행복한 것은 내 행동이 막 살지 않고 정당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그러한 동네가 이 세상이 아니에요. 혼자 행복할 수 있는 그것도 정당하게 옳게 행동할 수 있는 그러한 조건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 서로 다 얽혀있기 때문에. 한쪽이 울고 있기 때문에 한쪽이 웃고 있는 거예요. 한쪽이 사업이 망했기 때문에 한쪽이 잘되고 있는 거예요. 이 모든 세상에 자기 혼자 착해서 자기 혼자 잘 되는 그런 구조가 아니에요.

이제부터 어렵게 합니다. 할 수 없어요. 어렵게 해야 돼요. 진짜 어렵게 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하나의 상품입니다. 상품은 시장에 내놔야 돼요. 시장에 내놓을 때 그 다음에 왜 상품이냐 하면, 누가 사갈 때 사용가치 및 교환가치가 있을 경우에만 우리 가치를 인정해줘요. 저 사람은 얼마짜리, 저 사람은 얼마짜리 인정을 해줘요.

사람들의 원래 자신의 가치라 하는 것은, 상품의 가치라 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열두 시간 일해서 얻어낸 상품입니다. 예를 들면 볼펜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돼있으니까 잘 들으셔야 돼요. 이 볼펜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잖아요. 이미 자본가들이 돈 대고 여러 가지 재료로 볼펜 하나 만들어냈잖아요. 이것과 성능은 같은데 디자인이 예뻐서 다른 회사에서 나온 볼펜을 학생들이 다 사고 이 볼펜은 재고만 쌓인다면 이 볼펜의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지금 열 시간, 스무 시간 일했으면 이 안에는 노동의 가치가 있잖아요. 노동의 가치가 있어도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 사회의 다른 사람이 돈과 교환하겠다고 교환가치나 사용가치를 느끼지 않으면 자기의 노동가치는 제로가 돼요. 마이너스가 된다고.

학생이 와서, ‘문방구 사장님, 이 볼펜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볼펜 안 나가잖아요. 이것 없애버리세요. 괜히 팔리지도 않는 시시한 볼펜 나와서 내가 좋아하는 볼펜도 진열 안 됐잖아요.’ 이렇게 된다 이 말입니다. 성형수술도 안 한 못 생긴 탤런트와 진짜 예쁜 여자탤런트가 있는데 예쁜 탤런트는 인기가 있고 김연아처럼 에어컨 선전하면서 드라마 주연급으로 한다면, 똑같이 고생했는데 스카웃되지 않고 일거리 안 오면, 그만큼 고생하고 연기한다고 강사비 내고 한 그 노동의 가치는 어디서 찾습니까? 그 가치를 못 찾지요.

그게 뭐냐 하면, 방금 이야기한 것이 지금 현실이 그런 거잖아요. 볼펜 하나 만들어도 안 팔리면 볼펜의 가치는 없는 거예요. 본인은 있지요. 왜? 볼펜 만든다고 손톱 까지고 피 나고 했으니까. 하지만 남들 앞에서는 가치가 없잖아요. 그게 가치 기원의 소멸현상. 진짜 내가 애쓴 가치는 소멸되고, 남들이 나를 필요한 가치만 주어질 때 인간은 상품이 된다는 겁니다. 제가 요한계시록 18장, 19장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성 바벨론에서 인간의 가치라 하는 것은, 본인이 애쓰고 노력한 이게 아니고 큰 성 바벨론에서 나를 알아주느냐, 안 알아주느냐 그게 결정적인 겁니다.

파출부를 해도 첫인상 보고, 인상이 영 도둑놈 같으면 안 돼요. 같은 파출부라 해도 잘 빠지고 예쁘고 하면 잘 팔리고 서로 데려가려 하고, 그러면 ‘한 시간에 육만 원 주세요.’ 이렇게 단가가 올라가고. 그럴 때 뭐가 소멸된다고요? 나라는 존재의 기원, 기초가 소멸된다. 그걸 지난주일 아침에서는 우리의 존재의 기반이 작살나는 거예요.

결국 우리는 남들이 원하는 상품으로써 일종의 기생이죠. 창녀고. 남들이 원하는 상품으로만 인간이 될 때 우리 자신도 뭘 포기하느냐 하면, ‘나는 어디서 왔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지? 내 존재의 의미는?’ 이런 것을 본인이 알아서 다 포기하게 됩니다. 본인이 알아서 그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회사에 왜 취직하려 합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만드시고 ....’ 이렇게 나오면 떨어지는 거예요. ‘난 이 회사의 제품생산에 동참할 수 있으면 평소에 영광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회사를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목숨을 걸만한 가치 있는 회사로 지원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돼야 된다고.

이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어디서 왔고, 왜 태어났으며 사는 목적이 뭐냐? 이런 것을 전부다 삭제시키고 현재 그 사회가 요구하는 상품으로 전락해야 될 나라가 세상이 애굽이며, 사실 그 애굽이 확산되면 우리가 딛고 있는 울산바닥이에요. 이 세상입니다.

그런 세계에서 사람은 사람으로 인정받는데, 사람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거예요. 남이 안 알아주면 그 사람은 자살해야 됩니다. 쓸모가 없으니까. 취직도 안 돼, 사업해도 실패해, 집에서 쫓겨나. 그러면 갈 데가 어디냐? 한강 또는 연탄가스. 자살해야 돼요. 자살한다는 말은, 평소에 본인이 그나마 갖고 있던 마지막 가치마저 약봉지와 함께 그나마 남아있는 가치라도 입에 털어 넣고 죽어버려야 돼요. 그게 바로 애굽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그들이 벗어났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스스로 포기하고 스스로 감추고 있었던 진짜 우리의 존재의 기원, 왜 만들었는지,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지, 만들어서 뭐에 써먹으려고 했는지,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초가 되시는 분이 직접 자기 집단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사람에서 백성이 되죠.

백성이란 말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은 백성의 주인 또 왕 때문에 존재하는 존재가 백성 아닙니까. 그래서 이 백성은 스스로 나는 날 위해서를 포기하는 거예요. 애굽 같은 세상에서는 남이 나의 롤 모델이기 때문에 남들의 욕망이 내가 추구하는 욕망이 되는 겁니다. 환상공식 $◇a, 라캉의 공식.

내가 불안정해요. 날마다 돌아서면 불안정해. 왜 그러냐 하면, 이만하면 됐다가 아니라 사회 나오니까 내가 갖고 싶은 게 또 있는 거예요. 현재 갖고 싶은 게 있다는 것 때문에 현재 갖고 싶은 게 없으니까 불안정하게 되는 겁니다. 그걸 갖기 전에는. 재미있는 영화가 나왔다. 그런데 회사 바빠서 못 봤다. 회사 안에서 항상 불안정한 거예요. ‘내가 그 영화 봐야 하는데. 이놈의 회사 때문에 바빠서 끝나버렸다.’ 항상 불안정하죠.

친구들 간에 이야기하는데 드라마를 안 봤다. 그 다음부터 친구들과 대화가 섞이질 않잖아요. 그러면 언젠가는 드라마를 봐야 된다는 결핍과 미비점 때문에 주체가 불안정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드라마 보면 만족합니까? 또 생기죠. 어떤 사람의 가방을 보니까 ‘저 가방은 전 세계에서 일곱 개밖에 없다는 가방인데 저걸 내가? 아니야. 접어야 돼.’ 하지만 그걸 본 이상 접기는 접지만 자기 가방이 전보다 좋아지질 않아요. 더 좋은 가방이 눈에 띠었으면 가치가 식어버렸어. 그 가방을 가져야 나는 새로운 가치로서 도약되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주변에 둘려 쌓이다보니까 내가 하루는 저 사람 됐다가, 하루는 저 사람 됐다가 도무지 내가 누군지 몰라. 내가 무슨 인간인지 몰라요. 요새 젊은애들 다 그래요. 엄마가 종용이 불러다 ‘네가 인생을 왜 살며 누군지 아느냐?’ ‘엄마, 바쁘다. 바빠.’ 그런 이야기하지 말자는 거예요. 5등 했는데 이번에 1등 해야 돼. 1등이란 새로운 욕망을 향하여 부지런히 뭔가 지남철 같아. 1등이란 욕망이 가만있지 않고 빨아들여요. 빨리면서 ‘내가 누구며 나는 누가 만들었으며’ 그런 건 다 놓쳐버려요. 무조건 올인, 몰두하는 거예요. 도박이나 게임하는 사람이 죽도록 하는 이유가, 욕망이 그 인간을 잡아당기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여러분은 어떤 욕망이 잡아당깁니까?

여자들한테는 욕망의 핵심부분에 자식이 있어요. 나 잘 되는 것보다 자식이 잘 될 때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요. 내가 이것 때문에. 내가 너 때문에 산다. 자식 있음에 내가 사는구나. 그렇게 돈 버는데 힘들고 괴로우면서도 따지고 보면, ‘돈, 이런 것 좀 여유롭게 살지 못하고 내가 왜 이렇게 시달려야 되나? 뭔가 이유가 있을 건데, 목적이 있을 건데. 있구나. 너 없으면 이런 고생 안 한다. 똑바로 해라. 너 때문에 이렇게 고생한다.’ 그런데 남편이 한 일주일 간 출장을 간다면 그렇게 애먹이던 남편이 없으니까 삼사일 간은 좀 수월하다싶은데 오륙일 지나니까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평소에 남편 때문에 살았다는 걸 느끼죠.

그래서 나 됨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나로 하여금 나 되게 만드는 주변에 배치되는 인간들이 있어줘야 비로소 내가 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어낸 말이지만, ‘영은 육처럼 강하다.’라는 말을 지어냈어요. 육이란 부정할 수 없잖아요. 내 자식을 내 자식이 아니라 할 수 없고, 내 남편을, 내 아들을 아니라 할 수 없잖아요. 이건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와도 내 자식은 내 자식이고. 아버지 죽으면 장례식 누가 치를 거예요? 옆집 아저씨가 치러요? 자식인 내가 치러야지. 육은 너무나 강렬하게 끈끈한 그것에 연결돼있어요.

그런데 영은 육보다 더 강하다니까. 죽을 때 가족들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죽은 자가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인자, 예수님과의 관계는 육보다 강해요. 환란과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한다. 심지어 악마가 너의 허점과 너의 도덕적인 것으로, 비 영적인 것으로 계속해서 정죄한다 할지라도 육으로 정죄 받아도 영으로서는 사랑을 받게 돼있어요. 로마서 8장에.

현재 자식과 아내와 남편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질긴, 더 단단하고 끊어지지 않는 그 다른 관계에 소속돼있음을 인정하는 그걸 믿음이라 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했잖아요.

지금 하나님이 찾아와서 ‘이게 어디서 까불어.’라고 하는 이 끈끈한 관계는 내 몸에서 나온 내 자식과의 관계보다 더 단단한 관계에요. 내 자식은 때론 끊어질 수 있지만 주님과 성령으로 맺은 관계는 악마가 총동원해서 시험하고 지옥 보내려 해도 이게 안 끊어지게 돼있어요. 얼마나 질긴지. 그 안 끊어지는 이유가 십자가라는 본드로 이어졌기 때문에 끊어지지 않아요. 십자가는 죽었다가 살아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를 맺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는 죽여도, 죽어도 살겠고, 이렇게 되기 때문에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를 이야기한 신약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는 출애굽기 18장 구약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 증후를 증상을 보고 있는 거예요.

다시 한번, 이건 여러 번 해도 괜찮아요. 애굽 시민에서 백성으로 바꾸는 데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해야 된다는 것 그리고 관여하게 되면 반드시 개방적인 집단이 되는 게 아니고 철저하게 폐쇄적 집단이 되어서 누구든지 여기 오고 싶어도 발로 차이게 돼있어요. 교회 등록하고 세례 받는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인도하지 아니하면 주님의 세계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어요. 육의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천국은 개나 소나 다 가요. 지가 만들어놓은 나라기 때문에. 육이 생각한 천국은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기중심으로 생각한 좋은 나라기 때문에 누구든지 갈 수 있는 나라인데 진짜 나라는 그분이 오셔서 그분이 데려가지 아니하면 진짜 천국에 아무도 못 갑니다.

제가 십자가마을이나 욕 얻어먹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기존교회는 다 예수 믿고 천국 간다 하는데 왜 그게 문제냐 하는 거예요. 그거는 천국이 아니고 그게 지옥이라니까요. 십자가마을과 친하게 지내자. 친해서 들어갈 것 같으면 나도 친하고 싶어요. 폐쇄적 집단이라니까.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새순교회 교인들까지 간판 만들고 친하게 지냅시다. 이래서 들어가는 나라 같으면 친하게 지내지요. 식사하고 야외예배 다니고 이래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맨날 야외예배 다니겠다.

어떤 방법이 없단 말이에요. 천국에 왔지만 와 있으면서 남을 천국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은 설교를 똑바로 하고 제대로 하면 안 됩니까?’ 하는데 환장해요. 예수님이 설교해도 못 들어갔어요. 사도바울이 설교해도 안 들어간 건 물론이고, 예수님이 설교해도 그들은 안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해도 안 믿는 걸 제가 무슨 수로 사람을 믿게 해요. 폐쇄적 집단인데. 하나님이 직접 찾아와서 데려가야 구원받는데. 어떻게 그걸 무슨 수로, 어떻게 들어가요.

그러면 성도의 삶은 뭐냐? 성도의 삶은 ‘사람의 힘으로 못 들어갑니다.’ 그 이야기밖에 못 하는 거예요. 예수 믿어도 못 들어가고, 회개 뭘 해도 못 들어가고, 반성을 해도 못 들어가고, 십자가마을 가입해도 안 되고, 새순교회 등록해도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고. 왜 안 되고, 안 되고냐? 죄고, 죄고, 죄고. 그러면 성도의 삶의 끝이 죄냐? 끝, 죄로 끝나는 거예요.

생각해보면 참 괴로운 게 주께서 하신 일을 왜 사람 보고 멱살 잡고 닦달 내느냐 말이에요. 십자가마을 사람들 붙잡고 왜 자꾸 닦달 내느냐 말이에요. 주께서 넣어준 사람을.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지난주일 아침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머리 빠진 이야기. 두 사람이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머리 빠졌고, 한 사람은 머리 안 빠졌던 말이죠. 머리 빠진 사람이 약이 올라서 ‘당신은 왜 머리 안 빠졌는데?’ 머리카락 세신 분이 하나님인데 왜 멱살 쥐고 흔드느냐 말이죠. 흔들지 말고 기존교회 가보시면 돼요. 거기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이야기 다 해요. 그쪽에 가라 이 말이죠. 실컷 예수 믿고 지옥 가라 이거에요.

주께서 반드시 우리를 안 되는 일을 되게 하려고 애쓰는 죄인인 것을 규정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예수 믿어도 가짜 신자에요. 성령 안 받은 거예요. 우리 다 아는 이야기합시다.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영이기 때문에 우리를 죽이는 영이다. 고기가 죽어버리면 팔딱거리겠습니까? 이미 죽어서 팔딱거릴 것도 없는 인간이 무슨 ‘죽어서 좋은데 가야지, 구원받아야지.’라고 하는 생각조차도 이거는 죄가 되는 거예요. 죄, 죄, 죄로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알아서 창세전에 예정한 사람을 택해버리면 이게 웬 일이에요? ‘너는 사람이 아니고 백성이다.’ ‘제가 백성 되고 싶어서 환장한 것도 아닌데 언제 백성 만들었습니까?’ ‘네 소원이 아니고 내 소원이야.’ 크게 쓰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 마태복음 13장의 허락. 허락하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거예요.

제발 십자가마을 사람 붙들고 멱살 잡고 흔들지 마라. 주께서 허락 안 한 걸 무슨 수로, 누가 이걸 들어가게 할 수 있어요? 허락이 안 됐는데. 그럼 그쪽에서 뭐라 합니까? ‘당신들만 허락했느냐?’ 진짜 허락된 사람은 네 편, 내 편이 없어요. 진짜 허락된 사람은 ‘나는 가수다’가 아니라 ‘나는 이단이다’ 이런 고백이 나와요. ‘주여, 저는 이단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단입니다.’ 다른 말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것이 바로 울산시민에서 백성으로 전환된 사람이에요.

그럴 때 옆 사람이, ‘당신 이단인데 왜 천국 가?’ 할 때 무슨 소리합니까?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해서가 아니라 거기서 방향을 어디로 틉니까? ‘나, 죄인이고 이단인데’ 해놓고 무슨 이야기해요? 찾아오신 주님에 대해서 증언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무슨 방식이냐 하면, 모든 성도는 잃어버린 자로 만드는 겁니다. 한 번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다고 돼버리면 그 인간은 잃어버린 자가 아니고 맏아들 돼버려요. 나도 옛날에 한 번 잃어버린 적이 있었지. 지금은 탕자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주께서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 버리면 여기는 잃어버린 자는 아버지가 건진다는 규칙이 나와 있어요. 그러면 아버지가 잃어버린 자라 할 때 잃어버린 칸에 매일같이 주께서 여기다 집어넣습니다. 9월 1일 잃어버린 자, 9월 3일 잃어버린 자, 이렇게 잃어버린 규칙 안에 하나의 세팅된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관리하기 때문에 나는 매일같이 잃어버린 자로써 내가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업무와 활약상을 증언하는 세트된 도구가 되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가 되는 게 아니고 이러한 말씀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물로서 남은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신다.

그럼 맏아들은 왜 버렸느냐? 맏아들은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자기가 자기 잃어버린 게 아니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잃어버렸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찾은 사람. 그래야 이게 허락이라는 것이 생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진짜 울산바닥에 공장이라든지, 어떤 농장에서도 거기선 들려질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배 잘 만들고, 자동차 잘 만들고, 농사 잘 짓고 돼지, 소 잘 키우면 되지 이 이야기를 왜 해야 됩니까? 그것은 애굽시민이 애굽시민 되는 거예요.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 되는 겁니다.

그들이 자동차 만든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또 다 잊어버렸죠. 타인의 욕망을 내가 빨리 따라잡아서 남들처럼 되는 그런 주체성, 지금의 주체성은 불안하니까 계속 내가 되고 싶은 목표지점을 만들어서 내가 저 지점까지 가지 않으면 내가 불안해서 못 살아요. 막상 그 지점에 가면 또 저쪽이 보이는 거예요.

보리밥만 먹는 사람이 고깃국에 쌀밥 먹고 싶어서 쌀밥 먹고 난 뒤에 이만하면 살만하다 했는데 보니까 잘 사는 사람이 보리밥 먹거든요. 그럼 또 보리밥 찾아 먹어야 돼요. 이것은 남들 인생에 내가 그중에 하나의 사람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겁니다.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전환되면서 나는 매일같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말씀이, 이미 잃어버린 자로 규정이 돼버리면, 우리로 잃어버린 자 되게 하신 그분이 잃어버린 자도 거뜬하게 끊어지지 않는 끈으로 늘 구원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우리를 ‘잃어버린 자’라는 성경단어 속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집어넣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매일같이 잃어버린 자가 되는 거예요. 목사가 되던, 장로가 되던 우리는 잃어버린 자로 쓰입니다. ‘저는 잃어버린 자입니다. 주께서 십자가 져서 구원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안정돼있습니까?

이거는 그야말로 계속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백만 세 번 계속해서 에너지가 나와요. 목마르지 않는 물처럼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이래서 내가 잃어버렸구나. 이번에 땅 하나 샀는데 땅값이 세 배 올랐다. 좋다고 까부는 것 보니까 내가 잃어버린 자 맞구나. 애가 이번에 좋은 대학 들어갔다고 좋아하는 것 보니까 정말 내가 잃어버린 자 맞구나.  

우리 남은 생애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 맞는다는 걸 보여주는 이래서 너는 탕자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앞으로 어떠한 무수한 경험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잡채도 있고 탕수육도 있고. 저 세상 끝까지 죽을 때까지 내가 얼마나 세상 좋아하고 돈 좋아하고 탕자처럼 살고 있는가를 낱낱이 밝혀내는 주님의 작업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울산시민과 차이점이 전혀 없어요. 외면상. 다만 영적으로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자의 모습인 것을 안도감에서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에서는 성도지만 구약에서는 백성이라 해서 왕 되신 여호와를, 구원자 되시는 분을 역사 속에서 드러내가 위해서 이런 폐쇄적 집단을 만들어서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어느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기들끼리의 단단하게 뭉쳐진 그 집단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대동해서 이드로 장인을 만나게 된 겁니다.

이제 제가 드리고 싶은 것은 18장에서 이드로 장인을 만나서 사정이 더 나아졌는가, 못해졌는가? 그걸 우리는 물어볼 차례지요. 그러면 모세가 그렇게 잘 되고 모세가 무사히 임무를 수행했으면 이제 모세 외에는 모세를 간섭한다든지, 모세한테 시비 건다든지, 모세한테 조언하는 사람이 일체 없어야 되는데 왜 이드로라는 장인이 등장해서 모세한데 천부장, 백부장 세우는 게 낫습니다. 효율적이라는 말을 하게 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육의 욕망, 아까 이야기했지요. 육의 욕망은 우리의 기원을 모르고 사회에 나가서 남들이 필요한 교환가치로서만 상품으로 등장하는 그래서 그것을 빨리 내가 상품가치 있게 하기 위한 육의 욕망이 어떤 식으로 영의 욕망으로 바뀌는가? 다시 말해서 육을 위하여 하나님을 찾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욕망의 대상으로 전환됩니다. 이 말도 어렵다. 나 잘 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던 사람이, 너는 반드시 이런 백성이 되라고 하나님이 친히 깎고 바르고 땜질하고 문지르고 광내는 어떤 대상으로 전환되는 그 갈등이 이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육적으로 행동적으로 편리하다는 그 편리가 과연 하나님의 영적으로서 합당한 그런 인간을 생각해봐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210.♡.51.85) 11-09-08 13:11 
20110902b 울산강의-출애굽기 18장 : 사람과 백성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중요한 게 많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애굽의 사람들은 남들처럼 되고 싶어 했고 남들이 모델이 되었고 나도 그들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하루 일과를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이 되고 동기유발이 되겠지요.

그러면 뭘 놓친다 했습니까? 우리 히브리민족은 왜 히브리민족이며, 누가 우리를 만들었으며, 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근원적인 물음을 묻기 위해서 택함을 받았는데 그런 선택받은 본인의 임무와 책임은 완전히 날아가 버리고 애굽사람처럼 애굽에서 어떻게 잘 살까? 그만 이런 눈에 보이는 피상적인 것에 온 청춘을 다 바치는 그러한 극히 평범한 온통 사람들처럼 그렇게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냈으면 그때부터 그들의 묻는 물음이 달라졌을까요, 안 달라졌을까요? 애굽에 살면서 남들처럼 자기도 잘 먹고 잘 살고 싶고 내 가족 최고고, 우리 집안 잘 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애굽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질문을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인간은 다른 질문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떨어져나간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한 모퉁이만 떨어져나간 것뿐이기 때문에. 애굽은 거기 있고 애굽에서 떨어져나간 게 현재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 묻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 뜻을 묻고 싶은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일어난 그것이 나한테 이득이 될까요, 손해가 될까요? 순전히 자신에게 육적인 욕망과 야망, 애굽에서 익히 눈으로 보았던 그것이 여전한 삶의 목표기 때문에 그걸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를 구원한 하나님을 거기다 종속시키고 끌어당기고 사용하는 그런 질문을 하는 거예요. 그런 질문들이 지금 모세한테 퍼부어지는 겁니다.

그 질문 중에 많은 대목이 나중에 출애굽기 율법 안에 나옵니다. 소를 누구한테 맡겼는데 잃어버렸을 때 보상을 어떻게 해야 되는 문제, 어떤 애가 장난치다 애를 다치게 했을 때 어떤 식으로 보상해야 하는지 전부다 육적이고 사적인 개인적인 재산문제, 자기 체면문제, 명예문제 거기에 대해서 옛날에는 추상적으로 묻던 신을 이제는 구체적으로 애굽에서 건져낸 매일같이 제사 드리는 그 하나님께 자기문제를 가지고 문제를 들이대면서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거예요.

문제 나갑니다. 그래서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러분, 이걸 아셔야 돼요. 질문은 하나님만 질문하는 거예요. 우리는 피조물은 질문할 자격이 안 돼요. 왜냐하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친히 창조주가 운영하는 단체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의 부분으로 배치돼있는 개인은 그걸 전체를 내다보고 질문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는 막 살지 않습니다.’라고 했을 때 저는 새댁과 카다피를 연결시키죠. 그러면 막 산다는 문제를 네가 생각하는 그런 좁은 범위 내에서 내가 막 산다, 안 사냐 하지 말고 전 우주를 다 포괄해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막 사는 게 돼요. 전체를 봤을 때.

개인적으로 봤을 때 자기가 절제도 하고 반성도 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것 같지만 전체로 범위를 넓혀보면 어떤 인간도 자기 좋으라고 막 사는 게 돼요. 강원도 할머니가 신장 아프다는데 신장 못 떼어주는 이 형편, 자기 새끼를 위해서는 뭐든지 주지만 남의 새끼 잘 되는 걸 못 보는 이 심보, 이게 여전히 막 사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막 살게 돼있어요. 자기밖에 모른다고.

그게 뭐냐? 애굽에서 배웠던 육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육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찾아요? 찾는 이유가 뭡니까? 내 육이 잘 되라고 찾는 거예요. 질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을 우리는 기도라는 이름으로 매일같이 하나님께 질문을 쏟아냅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질문은 누가 한다고요? 질문은 피조물이 자기 사적인 용도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질문은 하나님이 하시고 해답도 하나님께서 주시고.

그래서 어제 가락교회에서 한 것은, ‘성도는 주님의 해답이다.’라는 말을 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가 주님한테 나는 어떻게 구원받고 세상은 어떻게 돌아갑니까? 해답을 낚아채서 소유하는 게 아니고 성도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죄인 된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이고 그게 하나님의 해답이에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핍박하지 않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죠. 예수님은 그걸 뭐라고 합니까?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죠. 그럼 예수 믿는 자들은 뭡니까? 예수님의 해답들이에요.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예수님을 건드리는 겁니다. 예수 믿는 본인들이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본인이 알고 있어야 해답이 되는 게 아니고 모른 것 그 자체도 해답이에요. 여러분들 어렵게 사십니까? 주님의 해답이에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머리 아프십니까? 머리 아픈 것도 주님이 주신 해답입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란 말이 있잖아요.

우리는 자꾸 육의 버릇처럼 해답을 내가 갖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답표를 주머니에 넣고 다녀야 필요할 때마다 끄집어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가 그냥 철부지처럼 살아가는 이 자체가 성경에 나와 있는 해답이에요. ‘네가 죄인 중의 괴수다. 네가 잃어버린 자야. 네가 탕자야.’ 이 자체가 해답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걸어 다니는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두 번째 이야기하는 것이, 질문은 하나님이 하고 해답도 하나님이 내린다. 적어볼게요. ①질문도 하나님, 해답도 하나님. ②질문은 내가 하고 내가 원하는 답을 내가 골라서 선택한다. 내가 한다. 이 두 가지 것이 함께 갈등을 일으키면서 움직이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해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이건 내 것이고 주님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주님의 해답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이런 육적인 것을 기대하면서 추구하면서 오늘도 계속해서 돈벌이에 나서는 이 과정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야만 되는 십자가 피를 흘려야 되는 해답이 되는 거예요. 질문이 되면서 해답이 되는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이 이해가 잘 안 되도 기다려보세요. 이해되도록 노력해볼 테니까. 그게 이렇습니다. 제가 쉬운 예를 들게요. 제가 이스라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약속의 땅을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누구신지 정답을 알려주세요. 십계명 주신다고요? 고맙습니다. 천지를 창조했다고요? 고맙습니다. 장차 메시아 온다고요? 감사합니다.’라고 해답을 우리가 가질 때 질문을 누가 했습니까? 우리가 던졌지요. 이게 육이에요.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까? 기다렸지요. 기다려놓고 오신 메시아를 어떻게 했습니까? 죽여 버렸지요. 왜? 자기가 질문한 그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질문해서 기대했던 해답에 해당되는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을 달리 이렇게 하면 돼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사람들이 퍼붓는 기대한 답변을 피해가면서 메시아를 주신 겁니다. 이사야 53장에.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건전한 해답을 내린 그 사람이 설마 메시아를 죽일까?’라고 감히 예상 못한 그 자리에 메시아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약속대로 살게 하옵소서. 메시아만 주신다면 메시아가 말씀되고 우리는 다시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합당한 해답을 갈구했던 그들의 손에 의해서 진짜 메시아를 죽임으로 말미암아 어떤 인간도 너희들 쪽에서 출발하는 해답과 질문에서 난 고리에서는 메시아는 주께서는 가담하지 않는다. 모든 게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지 나로부터 출발해서 주님께 가서 그것이 나의 구원으로 이뤄지는 그런 방식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 존재의 기원에 우리는 포함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제일 마지막에 태어났습니다. 이미 밥상 다 차려놓고 단지 숟가락만 올린 게 인간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걸 뭐로 이해했습니까? 많은 만물을 마치 숟가락으로 퍼먹으라고 주신 걸로 이해한 거예요. ‘사랑의 하나님, 사랑 감사합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고맙습니다. 이것 다 우리가 차지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중에 선악과도 있고 생명나무도 있고 선악과 따먹은 사람 생명나무도 따먹고. ‘아서라. 이놈아.’ 대번 가로막아버렸죠. 네가 따먹지 말라는 것을 먹었기 때문에 너는 죽었다는 거죠. 너는 하나의 인간이 아니고 흙이라는 하나의 물질에 불과한 거예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울산시민에서 백성이 될 때만 하늘나라 인간으로 대우받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인정받아요. 하지만 여기서 이 갈등에서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맨날 하나님이 구원해도 질문을 우리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번에 어렵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합니까? 이자 너무 많은데.’ 그것조차도 해답이다. ‘힘듭니다.’ ‘힘들지? 그것도조차도 주님이 당했던 고난이다. 그것도 해답이다.’ 모든 것이 전부다 이미 주께서 예측한 대로 가는 정상적인 코스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정상이 아니고 잘못된 길로 가고 있고 아슬아슬한데 주님은 아슬아슬한 게 없어요. 그쪽으로 가야 돼요.

그래서 이것 하나 아세요. 사람은, 주의 백성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일만 한다.’ 제가 하나 예를 들면, 만약에 우리 십자가마을이나 우리교회, 새순교회 와서 복음을 잘못 이해해서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행함 없어도 구원받는데.’ 이런 사람이 있다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만약에 서울로 여행가면서 여행가방을 기차 안의 통로에 놔두면 안 되잖아요. 사람이 왔다갔다하니까. 여행가방을 선반 위에 올릴 때 그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해야 됩니까?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받는다며 가방을 통로에 놔둘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걸 치워야 될 것 아닙니까. 통로에서 선반 위로 올려야 되죠. 그게 뭡니까?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 그것의 연속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애 주님이 키우지 내가 키우나. 난 애 어떻게 되든 몰라.’ 그랬는데 애가 ‘엄마. 여기 유치장인데 빨리 면회 온나.’ 할 대 어떻게 합니까? 행함 없이도 구원받는다고 버팁니까? 가지요. 모든 우리의 한 걸음이 어쩔 수 없이 해요. 좀 쉬려고 하는데 손자 봐달라고 해서 봐주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쪽에서 뭔가 아니한 우리 존재의 기원이지만 주께서 찾아오시면 왜 어쩔 수 없는지 묻는 그런 것은 하나님과 만남에서 해답이 주어져요.

‘너는 교사가 되어라.’ ‘교사가 주의 뜻입니까? 이것 말고 아이만 키우고 남편이 돈 벌고 나는 놀고 이러면 안 됩니까?’ ‘아니야 너는 교사를 해야 돼.’ ‘알겠습니다.’라고 하지요. 여기 질문을 누가 했습니까? 내가 했는데 해답은 교사하는 것이 주께서 주신 사명으로 그 길로 가야 되는 주님의 해답으로 보지요. 이것 정답입니까? 죄송합니다. 정답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의 궁금증을 내가 원하는 기원을 이미 내가 미리 짐작해놓고 그게 맞는지 선택을, 결재서류를 주님 앞에 던진 것밖에 안 돼요.

그럼 주님의 진짜 해답은 뭡니까? 내가 왜 태어났으며, 왜 이런 일을 해야 되며, 어쩔 수 없이 나는, 예를 들어서 가정에 장애아가 있다면, 왜 다른 애들은 다 정상인데 하필이면 내 아이가 장애아일 때 우리가 흔히 아는 답변이 뭡니까? 그것도 주의 은혜고 주의 자비다. 이게 우리가 예상한 해답이잖아요. 그게 해답이 아니라니까요.

모세한데 질문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질문 작성을 자기로부터 출발해서 해답이 자기가 객관식 문제 내놓고 그중에 아주 건전해보이고, 고상해보이고, 종교적으로 보이고, 신앙심 깊이 있는 것만 골라서 하는 거예요. 주님은 그런 식으로 기회 주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뭘 바치라 했습니까? 그것도 미워하는 자식이 아니고 사랑하는 이삭이죠. 사랑하는 이삭이란 사라에게 일치성, 이삭 없으면 사라는 죽는 거예요. 이삭을 바치라는 아이디어가 아브라함이 평소에 ‘하나님 누구십니까? 궁금합니다.’ 자기가 예상한 택한 항목에 이것이 들어있습니까? 안 들어있어요.

그것이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바로 율법 주심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감질나게 만들면 안 그래도 나쁜 인간이지만 더 나쁜 인간이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질게요. 주께서 주신 해답은 항상 하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질문자요 해답자입니다. 예수님이 질문자고 해답자라는 것은 우리는 어디에 근거되느냐 하면, 질문이 지상을 거치면서 해답이 주어질 때 이 과정 안에 걸려든 사람이 누구냐 하면, 울산시민이 아니고 백성이 돼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주님이 질문하시고 주님 쪽으로 해답이 되는 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간다는 이 노선을 모르기 때문에 출발점을 우리부터 한다고요. ‘하나님, 도대체 나의 인생 존재이유가 뭡니까?’ 나로 출발해서 고상해보이고 굉장히 신앙심 깊은 것을 성경말씀 적어서 그것으로 내갈겨버리니까 결국 누가 잘난 사람 돼버려요? 해답을 쥐고 있는 나는 의인이 돼버리고, 잘난 사람 돼버리고, 나는 잃어버린 자가 아니고 탕자도 아니고 그때부터 맏아들 돼버려요. ‘내가 아니면 아버지를 누가 지킬까?’ 이래 나온다 말이에요.

며칠 후 주일아침 설교가 뭐냐 하면, 잃어버린 양, 그 몇 주후에 불의한 청지기가 나오는데 불의한 청지기를 누가 칭찬합니까? 불의한 청지기한테 돈 뜯긴 횡령당한 사장님이 칭찬해요.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불의함을 빛내기 위해서 ‘나쁜 짓 참 잘했어.’ 그걸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피해 입은 사장님이 참 지혜롭다고 칭찬해줘요. 무슨 의미입니까?

인간들이 예상한 해답은 절대로 주님께서 피해가는 방식으로 구원한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예상한 것은 바르게 살면 부자 되잖아요. 그 뒤에 나오는 게 부자는 지옥 가고 가난한 자,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잖아요. 인간들이 예상한 것을 피해가는 방식으로 구원하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의 지혜로서 십자가를 못 믿게 만드는 메시아의 독특한, 메시아만 알고 있는 지혜를 고집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알지 못한 인간을 그 사람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미리 구원시켜놓고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서 ‘네가 예상 못한 일을 미리 알아서 처리했다.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것들아!’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로만 백성 되게 하기 위해서 그런 작업을 하신 거예요.

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이것조차 해답으로 간직하고 있다면 또다시 이것을 해답으로 소지하려는 버릇. 그것은 가락교회에서 했지만 우리가 실체, 흙이면서도 실체가 주체로 변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우리 몸은 누구 것입니까? 우리 몸의 주체는 예수님인데 예수님을 지워버리고 예수님 자리에다 가상, 몸의 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인간이 예수님 자리를 차지해서 예수님과 맞상대하려는 심보, 그것이 지금 19장 시내산에서 율법 받기 이전에 이미 백성들이 조짐을 보이고 있어요.

거기에 육적으로 가담한 자가 이드로라는 장인이에요. 이드로는 홍해를 건너온 경험을 안 했지요. 그래서 이드로는 주의 이름으로 벌이는 전쟁을 모르죠. 왜? 출애굽기 4장에서 십보라란 아내 있었잖아요. 친정에 보내고 모세와 아론만 애굽으로 갔거든요. 거기서 헤어졌다가 18장에서 상봉한 대목이잖아요. 그렇다면 아내와 장인은 무엇을 경험 안 했습니까? 특히 어린양이 죽어서 애굽의 장자를 다 죽였다는 경험을 못했고, 홍해가 갈라지는 경험도 못했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시껍한 경험을 못한 거예요. 표준어로 고상하게 말하면 낙담, 하나님 믿었다가 쪽 났다는 낙담,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꼴좋다. 하나님 믿고 이제는 절망, 일말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그 자리까지 가본 적이 없어요. 시껍, 분명히 표준말은 아닌데 그냥 편하게 씁시다. *시껍->식겁(뜻밖에 놀라 겁을 먹음)

그러니까 뭐만 남아있어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는 걸 모르고 사람들이 육으로 알 수 있는 요령, 일을 그렇게 합니까? 천부장, 백부장 해서 다단계로 합시다. 전산시스템으로 합시다. 이게 주님을 만난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항상 나올 수 있는 교회행정시스템이에요.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데인지 알겠지요. 그러면 형식이 내용보다 중요하게 돼버렸어요. 그래서 심지어 나중에 정기적인 제사, 율법, 제사장들이 속죄일,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전부다 형식, 형식에 불과해요. 만만의 수양이나 천천의 기름도 주님한테 통하지 않는 거예요. 왜? 다 형식이 됐어요.   

심지어 율법도 그래요. ‘어떤 부자가 있는데 자기 양을 놔두고 하나밖에 없는 하인의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이런 놈을 어떻게 할까요?’ 율법에 뭐라고 돼 있느냐? ‘네 배로 갚아라.’ 해놓고, ‘당장 목을 쳐라.’ 그때 나단 선지자가 ‘니가 바로 그 자야.’ 다윗이 아는 율법은 형식이죠. 내용이 없지요. 결국 왜 내용이 없습니까? 다윗이 율법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자신은 의인이며, 나는 정당하며, 너는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하며, 나는 신이며, 나로부터 출발한 질문의 해답을 얻으면 그걸로 땡이고, 교회 가면 보람 느끼고, 나만 천당 가면 끝났다는 것, 카다피가 쫓겨나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것.

나단이, ‘당신이 그런 사람이다.’ 그런 쪽으로 율법을 생각하고, 율법을 해석하면 모두 엉터리 같은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다윗이 성령 받아 뭐라 합니까? 주여, 성령이 나에게서 나가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번제나 소제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시스템 형식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진짜 내용은 뭡니까? 내가 나밖에 모르는 탕자입니다. 상한 심령, 이것 자체가 해답이에요. 죄 많은 내가 주님의 해답이라니까요. 죄 많은 나를 죄 없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작업이거든요.

그리고 탕자의 자리, 죄의 자리, 그 세팅된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울산시민이 아니고 하늘나라 백성이 돼요. 울산백성이라는 게 없습니다. 대구 사나, 미국 사나, 어디 사나 하늘나라 백성이에요. 이 작업을 어떤 집단에서 하나? 폐쇄된 집단이죠. 폐쇄된 집단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고 빠져나오고 싶어도 한 번 들어간 사람은 못 빠져나옵니다. 찬송가에 이런 찬송가 있잖아요. 닫히고 나면 다시 열리지 않지요. 그걸 우리가 절망하지 말고 굉장히 기쁘게 보자 말이죠.

문이 있는데 이 문을 세상에서 보면 천국 문이 닫혔으면 아무리 ‘기름 있습니다. 오빠, 열어주세요. 세 시에 왔는데 문 안 열어줍니까?’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안에 있는 여인들, ‘오빠 문 좀 열어주세요. 지옥 좀 구경하게 열어주세요.’ 안 열려요. 이미 천국 간 사람은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 안 열립니다. 골이 있어서 이쪽에서 이쪽으로 부자도 거지 나사로한테 못 가지만 거지 나사로도 가고 싶어도 건너올 수 없어요.

그 천국과 지옥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울산바닥이 이미 지옥이고 이 지옥에서 폐쇄된 집단이 일어난다면 이미 천국의 시작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백성의 등장, 백성들의 출몰. 백성들이 출몰하면 이미 천국은 시작된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미 주님을 믿는 주님의 소자들을 건드리면 주님을 건드린 거니까 주님이 친히 관리하고 스크린 뒤에서 계속 주님께서 관리하는 사람이 등장했다는 말은 이미 천국이 시작된 거예요.

그리고 지옥을 구경하고 싶으면 지금 살아서 실컷 구경하세요. 태화강도 있고, 대나무 숲도 있고, 식당도 있고 많습니다. 드라마도 있고, 애정만만세, 여인의 향기도 있고. 전부다 지옥이에요. 지옥을 실컷 보는 거예요. 지옥의 행세가 지옥 가도 안 없어져요. 부자가 평소에 살아있을 때 행세가 거지를 깔보는 행세가 되서 지가 지금 지옥 불에 들어가도 행세를 못 버려서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걸 보고, ‘나사로 보고 손가락으로 물 찍어오라고.’ 그 개 같은 버릇을 지옥 가도 안 버렸어.

그래서 다른 말로 해서 가서 지옥이 아니고 평소에 이 땅에서 하는 행세가 그게 지옥 행세입니다. 지밖에 모르고. 남들한테 가치 있게 보이면 그게 성공인 줄 알고. 어떤 식겁한 것도 없고, 낙담한 것도 없고 그것도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폭삭 망한 것도 없고 그저 자기 관리 잘해서 신앙바닥에서 하나의 좋은 상품으로 유지되는 걸 자랑스러워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들, 뜯어보면 타인의 욕망이에요.

사람은 양파껍질 되서 이건 일곱 살 때 희망사항, 이건 아홉 살 때 희망사항, 이건 스무 살 때 기대했던 것, 이건 스물네 살 때 기대했던 것 다 나와요. 특히 여자분들 스물네 살 때 기대했던 남자 만나서 아이 둘 낳아서 잘 살고, 스물세 살 때 이런 시어머니 원했는데 마침 그 시어머니 주셔서 좋은 시어머니 만나고. 쉰아홉 살 때 이런 노후 원했는데 됐고.

양파껍질 뜯어보면 안에 알맹이는 없어요. 남는 것은 전부다 추억이고, 우리의 희망사항이고,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내 마음대로 지어낸 해답들뿐이고, 뜯어보면 양파처럼 아무것도 없어요. 주체라고 생각했는데 보니까 실체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게 해답이라. 주님께서 그렇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해답이라니까. 네 안에서 없는 것이 주 안에서는 주체가 돼요. 주 안에서 인장의 음성을 들을 때가 되면 주님 것이 우리 속에 담기면 주의 은혜가 담기면 성령이 담기면 우리는 성령 받은 주체가 돼버려요. 이 주체는 오직 주님만 섬기기 위한 주체로서 천국에서 영원히 면류관 반납하고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에서 19장에 넘어오면 율법을 받는데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율법이란 우리들이 예상했던 그 해답이 아니고 원초적인 우리의 질문조차 엉터리니까 그걸 까발리고 진짜 모든 것을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하나의 과정 속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편입된 겁니다. 우리는 편입생이에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천지창조는 누구를 위하여 누가 만드는가? 그것은 율법 안에 있소이다. 율법 안에 있다는 말은 율법을 짜내면 나오는가?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어린양이 죽어요. 그리고 안식일은 바로 어린양을 희생물로 드려요.

결국은 율법 속에 희생이 들어있어요. 그 희생은 신약적으로 하면 새 언약이고, 모든 율법 안에 십자가가 들어있어요. 이 십자가란 희생이기 때문에 무엇을 위한 희생입니까? 내가 나한테 아쉬운 것을 질문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해답을 얻고자 하는 이 죄, ‘교회를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복음 전하고 많이 구원할 수 있습니까?’라는 것부터 출발해서 십자가 이용하려는 그것이 죄라고 규정짓는 그 십자가에요.

‘구원받고 안 받고는 폐쇄된 집단인데 네가 그걸 시도한다고 해서 끌어 모은다고 구원되느냐?’ 이 말이에요. ‘네가 잘하면 네가 알아서 해.’ 그래서 율법의 존재 의미는 우리의 모든 입을 막고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있으면 우리는 그걸 좋아하죠. 그게 아니고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음이라.

이왕 어려운 것 끝까지 가봅시다. 세상의 모든 인간 몸은 실체거든요. 흙이니까. 흙으로 변해가니까. 실체인데 주체로, 나 여기 있다. 여기다 구멍을 뚫어요. 주체한테 얻어맞는 진짜 주체, 사실은 유일한 한 분밖에 없는 온 천지를 만드신 그 주체에다 가짜 주체, 주체라고 우기는 인간들에게 죽임을 당함으로써 구멍이 나버렸어요. 이 구멍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부끄럽게 만드는 겁니다.

밧세바란 잘 빠진 몸매 좋은 여인을 준비해놨다가 하필 그 시간에 별 할 일 없어서 다윗이 거닐다가 눈이 맞았네. 그때부터 욕망이 생기죠. 왜 저 여자가 우리야의, 내 신하의 아내여야 되는가? 왜 저 여자가 내 아내가 되면 안 된다 말인가? 그러면 질문을 누가 던졌습니까? 다윗이 던졌지요. 다윗이 던진 질문은 세 살 때 만든 질문입니까? 일곱 살 때? 아니지요. 눈앞에 잘빠진 몸매 좋은 여인이 그것도 목욕하고 있을 때 그 여인을 갖고 싶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다윗 입장에서 잘못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그 여자가 없었다면 그러니까 뚱뚱한 여자였으면 다윗은 자기가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 길이 없었을 겁니다. 탐나는 여인이기 때문에 일이 꼬인 것이 아니죠. 축복이죠. 다윗의 주체에 구멍을 뚫는 축복을 받은 거예요. 나는 없고 나는 죄만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러한 작업에 주께서 친히 장갑 끼고 출동하신 겁니다. 주께서 손을 댄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막 뒤에서 ‘네가 왕이야? 네가 죄인 중의 괴수야.’라는 작업을 진짜 우리의 존재의 기반, 원래 인간을 만들었던 취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묵시적으로 개인적으로 다윗을 다루니까 다른 사람은 모르죠. 다윗은 ‘내가 죄인이군요.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이런 고백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관리해서 드디어 다윗의 중앙에 다윗이란 주체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신다. 그게 신약에 가면 주 안에 있다. 십자가 안에 내가 있는 거예요.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다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았기에 주께서 나를 상한 심령이란 제물로 번제, 예물 그런 제물이 아니고 썩어빠진 죄밖에 모르는 나를 귀한 제물로 사용케 하시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해답이 되는 거예요. 나도 미처 발견 못한 해답을 주님께서 친히 관여함으로써 죄 많은 내가 주의 영광을 위한 재료가 되고 소재가 된다는 거예요. 도구가 된다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시면서 우리의 본래적 기원은 이 사람한테 달렸다, 교회에 달렸다가 아니고 나는 뭘 해도 내 안에 주님 계시는데 매일같이 죽어 마땅하다. 뭘 해도 잃어버린 자고, 뭘 해도 탕자며, 뭘 해도 나는 매일같이 주께서 살려낸다는 사실. 왜? 주께서 손 안 대면 못 살아내니까. 해답을 한 번 쥐었다고 해서 그 해답이 날 살리는 것이 아니고 어제 아는 해답은 오늘 찢어버립니다. 그 해답을 소유한 순간 우리는 실체에서 또다시 구멍이 메워진 주체가 또 등장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었잖아요.’ 또 쥐어 박히죠. ‘선물이지 니가 뭘 했는데.’ 하면서. 성질대로 그냥 사세요. 잠 오면 주무시고. 모든 게 어쩔 수가 없어요. 잠이 오는 게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게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책임을 져야 되지 않느냐? 책임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소문 듣기에는. 내가 그걸 듣고 얼마나, 그런 코미디 있나. 성도가 자기 책임 못하면 구원 못 받는데요. 대신 죽었다는 말은 책임 안 졌다는 말 아닙니까. 대신 죽었다는 말은 뭔 뜻이에요? 네가 지은 죄를 책임을 예수님 내가졌다는 것 아닙니까. 아사셀 염소가 뭡니까? 바로 대신 죄를 지고 광야로 죽음의 땅으로 가버린 그것이 바로 우리 예수님 아닙니까. 책임론 주장한 사람은 그동안 뭘 듣고 있었어요? 지가 질문 던지고 지가 해답 던지고 다해요.

어려운 것 계속하려 하는데 시간 조금 남았으니까 해봅시다.

모든 성경이 그렇게 풀려요. 그래서 그냥 사시란 말이 이런 배경을 갖고 있어요. 이미 구멍 뚫린 사람은 매일같이 구멍이 뚫려요. 뚫릴 때 우리는 안개요 흙이죠. 안개, 흙이 뭐로 바뀝니까? 안개, 흙인 줄 아는 괜찮은 주체로 바뀌어버려요. 그러면 구멍을 또 뚫어버려요. 구멍이 뚫릴 때 내가 생각한 ‘나는 예수님이 날 만들었고,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었고, 말미암아 만들었어. 그런 해답을 알고 있는 나는 괜찮은 주체야.’라고 하는 거기다 진짜 주체가 구멍을 뚫어버려요. 그걸 안다고 해서 네가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거죠.

너는 나를 위한 해답, 나를 보여주기 위한 실체에 불과하단 말이죠. 예를 들면 크레파스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에요. 크레파스를 들고 화가가 그림 그리잖아요. 화가가 주님이고 우리는 크레파스에 불과한 거예요. 크레파스가 지가 한 게 뭐 있다고 주님이 하셨지요.

바로 이러한 기원의 문제, 진짜 기원이 구원받는 내 자신이 우주의 기원이냐 아니면 구원시켜주는 그분이 구원의 기원이냐 하는 그 문제와 마주치게 하기 위해서 진짜 구원은 어디 있느냐? 마지막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우주의 주인공이냐? 주인공이다. 아니다. 예수님이 주인공이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우주의 주인공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님이라고 이걸 반기면 반기는 나 자체가 괜찮은 주체로 돌변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주인공이라는 것은 지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어떤 형편에서든 스스로 우리로 하여금 뭔가 실망스럽고, 하나님께 원망하고 퍼붓고 싶은, 화를 내고 싶은 그런 상황을 만들어버려요. 이 둘 사이의 출동에서 피가 나와요. 이 피가 바로 주체에요. ‘나 예수 잘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라고 반항할 때 주님께 감사가 나와야 될 주님에 의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반항이 나올 때 그 반항 때문에 상처 입는 그분이 바로 우리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다윗 같으면, ‘평소에 여자 안 좋아하는데 진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왜 옷 벗고 내 앞에서 목욕하게 하십니까? 다 주께서 주신 여자 때문에 했습니다.’ 하고 반항할 때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낳은 아들이 죽지요. 그 죽음의 바탕 위에서 여디디아, 주님의 사랑이 거기서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아들 왜 죽입니까? 그게 예수님의 모습이에요. 어른들 잘못으로 아이가 죽는 거예요. 죽는 애가 사랑의 모습으로 솔로몬에게 입혀집니다. 여디디아, 다른 말로 솔로몬,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그것은 다시 다윗과 밧세바가 낳은 아들에게서 태어나는 겁니다.

만약에 이것이 주께서 관여하지 않고 인간적인 계산에 의한다면, 내가 만약에 밧세바와 관계했다. 애가 죽었다. 재수 없는 여자구나. 하나님께서 이 여자를 멀리하라고 낳은 자식을 죽게 했구나. 주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이제 저 여자와 이혼하겠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게 아니고 처음에 낳은 애가 죽는 그 자리가 비로소 다윗이 주님을 만나는 자리가 되기 때문에 그 여자와 다시 동침해서 애를 낳습니다. 그 말은 죽은 아이의 희생의 덕분으로 계속해서 영적인 씨가 퍼지게 하는 겁니다.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란 아들을 낳지요. 가인은 저쪽에 살아있는데 아들로 여기지 아니하고 죽었던 자의 씨가 진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씨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를 위해서 죽었던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어줘야 우리 안에 있는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몸도 주께서 살릴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이끌려오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걸 못 느끼겠다고요? 못 느끼는 것은 여러분이 평소에 여러분의 문제를 너무 바쁘게 하나님께 문제 해결해달라고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 그래요. 커피 마셔가면서 철야해가면서 ‘주여, 이 문제 해결해줘야 주께서 살아계심을 믿겠습니다.’ 하고 살아계심을 지 마음대로 상상해서 어느 날 그것이 부질없는 기도였다는 걸 깨닫는 구멍 난 그것이 기도응답 말고 주님의 기도응답으로 찾아오신 주님이 야곱처럼 완전히 절뚝이게 만드는 ‘너는 이미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야.’라고 우리에게 그러한 성령의 축복을 주시는 겁니다. 자기 부인하라고. 십자가 알라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과 백성들의 만남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원망 받고 욕을 얻어먹은 것은 모세인 줄 압니다. 이 모세 같은 입장에서 주께서 살아계시기에 맨날 모세 같은 주님한테 얼마나 원망을 해댔습니다. 이제부터는 바로 그것이 죄인 줄 알고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얻어맞고 깨어지면서 그 희생의 예수님의 피를 다시 한번 눈에 볼 수 있는 마음에 느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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