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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3 00:26:43 조회 : 3586         
율법 적용 120302 이름 : 이근호(IP:117.55.16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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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210.♡.51.85) 12-03-09 11:37 
20120302a 울산강의-출애굽기 21, 22장 : 율법적용
(강의:이근호 목사)


21장, 22장에 나오는 내용은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십계명이 나오죠. 계명이란 법률인데 법이잖아요. 법이란 뭔가 위반했을 때 그 법이 진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법이라는 것은 “너, 잘못한 거야. 이것은 네가 죄 지은 거야.” 그걸 밝혀내는 용도로 법이 주어져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법을 받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인간들은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환경 속에 그러한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우리는 그 법을 위반할 존재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게 어떤 경우에 십계명을 위반한 게 됩니까? 그러한 질문이 돼야 되겠죠.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먼저 주시고 그 다음에 자기 백성들한테 십계명을 알려준 것은 너희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법에 위반 될 사례들을 많이 보여주게 될 것을 예언한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십계명에 나오는 위반사례가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말이죠.

그것을 위해서 위반사례, 제일 위에는 십계명이 있고, 위반사례에 해당에 되는 것이 출애굽기 21장, 22장에 나열돼있습니다. 제5계명이 뭐죠? “부모를 공경하라.” 6계명이 “살인하지 말라.” 우리가 십계명밖에 모른다고 치면 부모 공경이 어떤 게 공경이고, 살인하지 말라는 게 어떤 경우인지 잘 모른다 말이죠. 그런데 21장을 찾아보면 그게 나와요.

21장 12절에 보면,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이게 십계명과 관련할 때 무슨 뜻인지는 상당히 난해하지만 어렴풋이는 감이 오는 겁니다. 십계명에는 살인하지 말라고만 돼있지 그 뒤에 살인하면 어떤데? 나는 살인할란다. 이럴 때 십계명 자체에는 없지요.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건방지게 하나님이다. 살인하지 마세요. 내가 기분 나빠서 좀 하면 어떤데? “부모를 공경하세요.” 하면, 부모 공경 안 하면 어떤데? 이게 우리 속에 잠복돼있단 말이죠.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이고, 출애굽기 21장, 22장은 위반사례죠. 살인했을 경우에 십계명에 지시한 것이 농담이 아니고 십계명이 있다는 그 자체가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제가 설교하고 할 때 사람들이 잘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뭐냐 하면,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저는 거기다 좀더 깊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는 것도 현실에 포함시켜놓은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십계명이 현실 맞지요. 그 다음에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도 현실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전체 현실을 다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십계명을 위반을 해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십계명만 현실이라면 우리는 어떤 오류에 빠지느냐 하면, 어쩌다 십계명을 어겼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십계명 위반한 걸 본인만 알고 그걸 현실로 안 치려해요. “나는 입 다물고 있겠어. 어겼다는 소리 못하겠어.” 자꾸 숨기려는 버릇이 있어요. 선악과가 현실이죠.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것도 현실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선악과 있다는 것은 현실로 간주하되 선악과 따먹은 것은 안 먹은 체 하면서 무화과나무 밑에 숨잖아요.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현실이죠. 그 다음에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오니까 하는 말이 뭡니까?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잡니까?”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고 그 말씀에 대한 위반사례까지 포함해서 그걸 현실로 모으는 거예요. 그렇게 주어모아야 거기서 십자가가 피어나는 겁니다.

우리에게서 십자가가 피어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우리가 성경말씀 아는 것만이 십자가를 피어내는 방법이 아니고 성경말씀 하나하나에 대해서 어떤 점에서 위반하고 있는가를 거기다 같이 세트로 붙여줘야 거기서 뭐가 나옵니까? 이런 죄를 지어도 십자가 피로 용서가 된다는 것이 십자가라는 나무가 살아나는 거예요. 그게 로마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겁니다.

일반교회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십계명인데 지키시오.” 하고 끝나는 거예요. 출애굽기 20장에서 끝나버려요. 21장, 22장은 언급할 수가 없어요. 왜? “난 위반 안 했는데.”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21장, 22장이 나온 것은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어길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있는 겁니다. “십계명을 지키시오.” 하면 안 돼요.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것도 우리에게 돌아오는 우리의 현실이라고 수용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느 장소에 가도 십계명을 못 지킨다는 것을 수용할 때 그게 믿음이에요. 보통은 십계명 잘 지키는 걸 믿음이라고 보잖아요. 그게 아니고 “그러면 그렇지. 십계명 못 지켜.” 십계명 못 지키는 것이 우리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 그것이 현실인 것을 믿을 때 그게 믿음이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줄 때 위반사례를 감안해서 줬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위반할 수밖에 없는 움직임으로 나오는 겁니다. 방금한 것을 여러분들이 많이 하신 분들이니까 어렵게 하겠습니다.

①생각하고 행동합니까? ②행동하고 생각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고 행동하죠. 이것은 틀렸습니다. 사람은 행동해놓고 거기에 대해서 정당화에 들어갑니다. “어쩔 수 없었어. 할 수 없는 거야.” 사람은 행동이 먼저고 생각은 뒤에 나가는 겁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사람이 자기 혼자 살면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 옆에 가족이 있고 다른 사람이 있고 얽히고설킨 사람이 많다면 그 사람이 밀어버리면 나는 자빠지게 돼있어요. 우리는 하나의 만원 버스라든지, 꽉 찬 지하철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행동하고 난 뒤에 그걸 생각하는 이유가, 이 행동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 혼자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고 구조적 행동, 행위. 우리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얽히고설킨 게 많아요. 굉장히 많습니다. 아이 성적 올랐다고 기분 좋아하는 그 순간, 땅값 내려갔다고 하면 기분 나쁘죠.

지하철 같으면 육체적으로 밀고 당기는 게 있지만 밀고 당기는 것만 구조에 있는 게 아니고 어디서 멀리서 날아오는 풍문에서 들리는 어떤 소식이 나와 연관될 때는 우리는 그것 때문에 좋았다가 나빴다가 얼굴이 울그락붉그락 한단 말이죠. 그것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스트레스 받고. 누가 우리 집 유리창을 깨지 않았는데 내 마음 잔잔한 호수에 돌 던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떤 아주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아들 셋 있는데 첫애를 군에 보내니까 잠이 안 오더라는 겁니다. 겨우 면회 가서 잘 있다는 걸 보고 안심돼요. 두 번째 아들 보낼 때는 처음 논산훈련소에서 보고 잊어버리고. 세 번째는 걱정도 안 한다는 거예요. 그게 구조적으로 몸에 익혀져서 그래요. 내 아들 몸은 내 몸은 아니지만 아들과 엄마의 관계가 구조적으로 엮여 있잖아요.

이 세상에는 얽히고설킨 구조가 나로 하여금 행함을 유발해요. 이 행함 속에 제일 중요한 게 마음의 요동, 마음이 늘 요동치는 거예요. 좋았다가 나빴다가 슬펐다가 겁냈다가 안정됐다가 이 마음의 요동이 주변의 얽히고설킨 그런 것 때문에 다 엮어져 있다 이 말이죠.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십계명이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십계명만 현실이 아니고 십계명을 위반하는 그것도 현실로 집어넣기 위해서 출애굽기 20장만 있는 것이 아니고 21장, 22장 위반사례를 거론한 거예요. “너희들이 위반하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거래할 입장이 못 돼요.

아이가 엄마와 무슨 거래를 합니까? 자기 혼자 무슨 생각을 해도 엄마가 다 알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뭘 해도 주께서 다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십계명을 위반한다는 걸 이미 주님이 다 아시고 십계명을 줬다 말이죠. 그럼 우리는 “개인적으로 십계명 잘 지킬 건데.” 그런 허세를 부리지 말란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십계명을 지키고 싶어도 누가 못 지키게 만들어요? 나는 가만있는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풍문과 소리와 소문 그리고 갑자기 옆집에 불나면 우리 집도 홀랑 다 타고. 주변이 얽히고설킨 것 때문에, 우리는 이미 구조적 관계 때문에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에요. 이걸 아셔야 돼요. 혼자 살고 싶다고 혼자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이혼한 부부가 싸워서 전처를 죽이고 하는 그런 일이 있잖아요. 이혼했으면 끝인데 끝이 아니라니까. 이게 법적으로 이혼해도 나보다 못난 남자와 살면 또 약이 오른다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동안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크게 오해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오해를 안 하고 계신 분은 하나님밖에 없죠. 하나님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현실 말고 하나님이 진짜로 알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게 출애굽기 21장, 22장이란 말이죠.

“네가 어디서 어떻게 살든지, 뭘 먹고 살든지 간에 나의 십계명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준 현실입니다. 이미 이것을 알고 십계명을 줬다는 점에서 얼마나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하는지 몰라요. 안돈하게 하고 그게 믿음 안에서 평안이죠. 뭘 해도 말씀 하나 못 지킨다. 나는 지키고 싶죠. 뒤에서 떠미는데 어떻게 해.

엄마 혼자서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아들 세 명 중에서 아들 하나가 이혼해서 촌에 엄마와 살겠다고 오면 엄마 혼자서 생활비 얼마 안 되는 것으로 겨우 살고 있는데 집 있는 것 노리고 와서 살면 두 아들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혹시 집을 자기 앞으로 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냥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우리 형제 하나 들어간다는 소리에 약이 올라서 화가 날 때. 그게 남남 같으면 화가 안 나는데 얽히고설킨 것 때문에 괜히 밥맛이 뚝 떨어지고 그 다음부터는 “이걸 해대나 말아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그것이 출애굽기 21장, 22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죠. 십계명이란 너무 추상적이니까 세부사항까지 법으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지키라 하면 지키겠는데 하는 생각을 하겠지요. 그게 21장, 22장인데요. 그것도 못 지켜요. 이 말은 인간과 하나님이 밀고 당기는데 자꾸 하나님은 우리에게 못 지킨다고 하는데 인간은 지킬만한 것 주시면 지킬 수도 있다고 가는 거예요. 자꾸 뭔가 지키는 쪽으로 계속 나가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것마저 못 지킨다고 계속 쏘아붙이는 거죠. 주님은 우리로 기어이 죄인으로 몰아넣고 우리는 내빼면서 그래도 나는 착할 수도 있다고 내빼는 이게 이스라엘 구약역사고, 우리의 한평생 신앙생활입니다.

22장부터 봅시다. 소를 도적질했을 경우에는 다섯 배로 배상해야 되고, 양을 도적질했을 때는 네 배로 배상하라. 해 질 때 강도가 들어서 그 강도를 죽이면 살인죄가 안 되지만 해 떴을 때 강도를 만나서 죽이면 상해죄에 해당돼요. 이게 그 뒤에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 5절에 봅시다.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먹이다가 그 짐승을 놓아서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제일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이것은 기존의 함무라비 법전이 있으면 제일 좋은 것으로 주는 게 아니고 짐승이 주인 말 잘 안 듣잖아요. 짐승이 옆집 밭의 곡식을 먹었다면 어떻게 보상하느냐? 기원전 이천년 경에 함무라비 법전에 이것과 비슷한 것이 있어요. 소출의 평준적 작황 중에서 갚아주라고 돼있는데 성경에서는 제일 좋은 것으로 배상해주라고 돼있어요. 이것 지킵니까?

창틀 할 때 제일 좋은 것으로 하라 하는데 업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제일 나쁜 것으로 하죠. 제일 좋은 것을 주인이 요구했는데 나쁜 것으로 하느냐? 업자 아들이 맹장 수술한다고. 그럴 수 있거든요. 업자 딸이 암에 걸려서 갑자기 수술비가 필요해서. 이 수술비를 어디서 각출하지 하다가 공사비에서 뜯어야 되겠다고 그렇게 행동하겠지요.

지금 남 문제가 아니고 항상 인간은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누가 우선입니까? 하나님 좋으라고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남이에요. 제일 다급하고 배고픈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배고프고, 세상에 몸이 아프면 모든 행동이 거기서 결정되는 거예요. 몸이 아프냐? 그러면 몸 아픈 것이 진리고, 몸에서 나는 것이 진리에요. 몸이 낫고 난 뒤에 말씀을 지키든지, 십계명을 지키든지, 교회를 나가든지 하지 지금 몸이 아프면 그것이 현실이고 그 외에는 자기한테 현실 값도 못하는 겁니다. 이걸 하나님이 아신다니까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인간은 말씀을 못 지키는 이유가, 자기 밖으로 벗어날 수 있다, 없다? 때려죽여도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너는 너부터 생각하지 말고 말씀 주신 하나님부터 생각하라. 네 영광보다 하나님 영광이 우선이라고 나오니까 우리가 이걸 지킬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킬 수 없는 그게 현실이라는 거예요. 네가 현실을 똑바로 보란 말이죠. 나는 말씀을 못 지킵니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걸 현실이라고 믿으란 말이죠.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지키려고 하니까 주님의 취지와 거꾸로 가는 거예요.

일반 법정에서는 소를 도적질하면 많이 줘야 두 배, 소 한 마리 도적질 했는데 걸렸다면 소 두 마리로 배상해요. 이것도 100% 배상이에요. 그런데 성경에는 얼마입니까? 500%입니다. 합해서 600%에요. 옷 장사 하는데 “주인님. 집에 가서 보니까 봉제가 잘못 되어서 손이 안 들어갑니다.” “그래요? 죄송합니다. 여기 옷 다섯 개 드리겠습니다.”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무슨 옷을 다섯 개나 줘요. 말이 안 되지. 보험회사가 500% 주는 보험 봤습니까? 양은 네 배나 갚아야 돼요.

22장 3절 봅시다.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배상하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21장 2절 보세요. 다같이 읽을까요?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 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 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왜 히브리 노예라는 게 발생됩니까? 22장 3절 보니까 이해되지요. 부자 같으면 도적질 하겠습니까? 돈이 없어서 굶어죽기 직전에 도적질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안 잡히면 다행인데 잡혔단 말이죠. 그래서 소 한 마리에 다섯 마리로 갚는 게 법이다. 그러면 돈이 없으면 자기 몸으로라도 때워야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뭘 생각하느냐 하면, 그래서 성경이 만만치 않아요. 굉장히 어려워요. 뭐냐 하면 육에서 어떻게 영으로 해석해내느냐 그 문제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게 전부다 육적인 문제 같지요. 그런데 성경은 영적으로 해석하라고 고린도후서 3장에 나와 있단 말이에요. 육에서 어떻게 영으로 해석하느냐 이 말입니다. 중간에 육에서 영으로 넘어갈 때 구조를 거쳐요. 또 잊어버렸지요.

이스라엘 역사가 주님께서 너는 절대로 이 말씀을 지킬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끝까지 몰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것 하나는 지켰다는 것을 자꾸 내세우면서 도망치죠. 도망치는 걸 끝까지 추적해서 기어이 우리는 하나도 지킨 게 없다는 것을 발각시키게 하죠. 그런 것은 바로 말씀과 우리 개인을 앞장세우지만 사실은 개인이 어떤 구조 안에 놓여있고, 이 구조가 신약성경에서는 악마, 이 세상 신에 있고,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법 아래서 죄인으로 발각되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율법 안에, 신약에서는 악마 안에 놓여있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나와요.

법이 너에게 온 것은, 이번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너 말고 네 안에 괴물 내라.” 괴물이 죄 아닙니까. 너는 어떻게 해도 말씀을 못 지키는 이유가 있어. 그것은 구조적으로 죄 안에 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어쩔 수 없어요. 우린 그걸 현실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나는 어떤 식으로 해도 이 말씀 하나 못 지킨다는 것을 인정하면 돼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잘난 사람 부르러 온 게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잘난 척해서 그것으로 한 주일 동안 복 내려달라고 자꾸 그런 버릇들이 있어요. 무슨 영수증도 아니고, 연말 정산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현실을 구조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하나 착실히 하면 복 받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해밀턴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는데 신은 죽었다는 사신신학을 펼쳤어요. 어제 87살로 죽었어요. 그 사람이 왜 하나님 믿다가 하나님 없는 신학으로 돌아섰느냐 하면, 너무나 신앙심이 좋은 사람은 벼락 맞아 일찍 죽고, 진짜 신이 없다는 사람은 오래 사는 걸 보니까 자기가 신학적으로 하나님이 없는 게 맞다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한 게 어떻게 됩니까? 결국 백날 신학 공부해봤자 욥의 믿음에 합류할 수가 없었지요. 신학박사가 되도.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은 살리시기도 하고 죽이시기도 하는 한나의 기도도 전혀 안 믿은 거예요. 신학자들은 원래 안 믿어요. 주의 말씀을 비평하는데 바쁘지 주의 말씀은 안 믿어요. 사람의 말로 바꾼다니까. 이건 목사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에요. 차라리 그 사람은 솔직한 면이 있었죠.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 사람에게 복이 와야 되는데 오히려 안 지킨 사람에게는 복이 오고 잘 지킨 사람에게는 저주 같은 모습이 오니까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 내린 거예요. 그럼 그 소리 듣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말씀을 지킨 적이 없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알아야 된다 이 말이죠. 교회 가서 배워야 되는데 우리는 교회 갈 때 말씀은 생각 안 하고, “오늘도 교회 왔습니다. 착한 일 했으니까 이번 주 복 많이 내려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신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놓고 신봉한 것밖에 안 돼요.

사도 바울한테 주님이 이야기했잖아요. 네가 일해서 상 받는 것이 아니고 고난의 일 자체가 상이라고. 왜 그러냐 하면, 사도 바울은 구조 안에 있기 때문에 생각하고 행동한 게 아니고 행동한 그것이 내 생각이 아니고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은 생각하고 나는 행동에 옮겨지고. 내 생각으로 행동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바르게 생각해서 바르게 행동했으니까 복도 당연히 나한테 와야지. 저 사람은 기도 안 했고 나는 기도했으니까 기도한 나한테는 복이 오고, 기도 안 한 저 사람에겐 복이 안 오고. 이렇게 돼야 옳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그건 뭘 모릅니까? 자기만 생각하지 자기보다 큰 구조 안에 놓여있다는 생각을 못 해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과 위반사례를 통해서 네 자신이 생각하는 게 현실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위반사례가 벌어지는 상황, 바탕, 환경이 현실인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걸 보면, 왜 같은 히브리 사람이고, 다 같이 애굽에서 나왔으면 복을 받아서 다 잘 살아야 되는데 왜 종이 되느냐? 종이 된 이유가 있어요. 누구나 돈 없으면 도적질 하게 마련이고, 그것도 하나님께서 안 들키게 하면 좋은데 들키게 만들고, 들키더라도 가난해서 훔쳤다면 정상참작이 되어서 법에는 다섯 배로 갚으라했지만 너무 불쌍하니까 주인 쪽에서 “내가 소고기 먹은 걸로 하지.” 이렇게 끝내면 되는데 법이 소 주인이 만든 것 같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당신 사정 들어보니 딱하네. 소 한 마리 잔치해서 먹은 요량하죠. 그만 잊어버리세요.” 이러면 얼마나 인간적으로 대자대비하고 대승적인 인품이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고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하면 안 돼요. 참 어렵다. 성경말씀.

내가 법 만들고 내가 십자가 졌으면 다 용서했어요. 내가 십자가 지고 구세주라면 의존교회, 우리교회 교인들 아는 사람들 전부다 빽써서 천당 다 보내죠. 그러니까 날 십자가 안 지게 하신 거예요. 우선 내 가족, 내 아내와 딸 천당 보내고⋯⋯ 그게 인간은 항상 출발점이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나의 천국을 내가 가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의 천국은 우린 갈 생각 없고 내 천국에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지옥 가도 마땅하죠.

그러니까 지금 그런 육적인 인간을 주님의 나라에 주님의 사람으로 가게 만드는 작업을 구조적으로 우리는 죄 지을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만들어서라도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천국 못 간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성경 전체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 다 오라고 해요. 어차피 못 지킬 거니까. 다만 그걸 통해서 왜 우리는 이걸 못 지키느냐를 따져야 돼요.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걸 따질 때 영적 해석으로 전환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겁니다.

21장 봅시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 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 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현대인들은 사람을 볼 때 그냥 아무리 못 살고 장애자고 병들고 해도 사람은 사람으로 보잖아요. 현대 민주주의국가에서 화나면 개xx 하지만 사실은 같은 사람이죠. 

그런데 21장 21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가 일 일이나 이 일을 연명하면 형벌을 면하리니 그는 상전의 금전임이니라” 상전의 금전이라는 말은 누구보고 하는 말입니까? 듣는 사람 기분 나쁘죠. 옛날에 식모가 있었거든요. “저 아줌마 누굽니까?” “우리 집에 일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돼야 되는데 “우리 집의 푼돈 아닙니까?” 이러면 듣는 푼돈 기분 나쁘거든요. 식모에게 식모라고 해도 굉장히 기분 나쁘거든요. “우리 집에 도와주는 먼 친척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우리 집에 식모입니다

이런 것도 설명해야 돼요. 금전하면 재산이죠. 그래서 노예를 죽이면 살인죄가 안 됩니다. 제육 계명에 살인하지 말라했을 때 그 대상에서 뭐가 빠집니까? 노예는 여기서 빠져버리죠. 이것은 하나의 금전이니까, 하나의 재산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죠.

21장 22절 보면,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아이 밴 여인을 다쳐 낙태케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낼 것이니라”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재판장이라면 업무가 바빠요. 시시껄렁한 것 판결 다 해줘야 됩니다. 그 판결을 어떻게 하느냐는 다음에 이야기할 거예요. 오늘 내용이 많으니까.

여기에 어떤 사람이 낙태을 했다는 말은 여자 안에 아기가 들어있죠. 그런데 낙태를 했으니까 아기가 죽었지요. 아기는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벌금형이 돼야 되죠. 상해죄에 해당돼요. 21장 15절 봅시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에 해당되는 사람은, 아비나 어미. 그 다음에 16절, “사람을 후린 자는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참 가만히 따져보면 왜 어려우냐 하면, 요즘은 개인의 문제로서 모든 걸 파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에 익숙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떤 구조의 만남에서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가 나온다니까. 그런데 제가 설명할 때 “그 정도는 내가 봐주겠습니다.” 이게 안 되고, 아까 소 다섯 마리 갚아주라고 하는 것을 주인이 인심이 후해서 “놔두세요. 받는 것도 미안하다.” 할 때 그 사람은 소 다섯 마리 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두 마리만 받는 것은 안 돼요.

그게 왜냐하면 나는 개인적인 자격이 아니고 내가 소속돼있는 구조적 작용으로 도적질 당했고, 저 사람은 저 사람의 구조 안에 내 것을 도적질한 게 아니고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법대로 해서 법의 엄중성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법의 거룩성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잖아요. 먹는 것, 입는 걸 족한 줄 알라. 할 때 이것이 내 편리한 대로 “하나님, 입은 걸로 족한 줄 압니다.” 이러면 안 된다니까. “우리는 한 달 생활비 오십만 원만 하면 됩니다.” 그게 니 마음대로 안 돼. “우리는 한 달 삼백만 원 있어야 돼.” “주여, 삼십 만원 이면 떡을 칩니다.” “아니야. 너는 삼백만 원 돼야 돼.” 주님이 이야기하면 우리는 삼백만 원 살림해야 돼요. 웃기지요. 우리 마음대로 겸손하고 마음 낮추고 하면 안 돼요. “나는 무소유니까 가산 다 팔아.” 그것 헌금 아닙니다. 그래서 이번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돈 같은 것 사회 환원하지 말고 갖고 죽으라고.

사람들이 법을 지키려고 할 때 꼭 자기 잘난 것, 으스대면서 법을 지켜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법 지키지 말라고. 왜냐하면 법 지키면 지킨다고 나대는 꼬락서니가 꼴보기 싫어요. 우리는 지키지도 못하고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지키고 싶지만 구조를 생각하면 완벽하게 구조에 합당하게 지킬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 다음에 17절.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것 설명해보겠습니다. 제5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 뒤에 위반사례 안 나오죠. 21장, 22장에 가면 부모에게 어떻게 할 때 죽이라고 돼있지요. 이걸 정리해보면, 부모를 공경 안 하면 너는 죽는다. 살인하지 말라. 위반하면 죽는다. 간음하지 말라. 위반하면 죽는다.

그래서 이 죽음이 모여서 십자가 죽음이 된 거예요.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는 말이 여기에 초점 모인 겁니다. 볼록렌즈에 햇빛 모아보세요. 그러면 하나의 초점에 의해서 종이도 태우고 잠자는 사람 이마도 태우고 하잖아요. 모든 율법의 초점을 모아서 볼록렌즈의 초점이 십자가에요. 다 이루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는 의는 십자가 피에서 나온 의지, 우리가 착한 일 해서 구원 못 받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의도 모르고 자기 의로 구원받으려고 설치다 지옥 갔잖아요.

지금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자기 딴에 열심히 살고, 교회 좀 다니면서 세상에 열심히 한다고 안심하고 있는데 그게 현실을 몰라서 그래요. 진짜 현실은 교회 와서 말씀 들을 때 복음 들을 때 현실을 압니다. 내가 세상에서 까불고 설치는 이것은 결국은 “이 정도하면 복 받겠지. 이 정도하면 남보다 더 복 받아야 될 걸.” 이러한 자기 규칙을 따로 조작해내는 그런 버릇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주님 주신 구조를 생각 안 하고 자기 위주의 구조를 따로 생각하는 겁니다. 거기서 자기가 돗대가 되고 잘난 존재로 부각이 되는 그런 구조.

그런 구조가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말씀의 구조로 발각시키는 거예요. 부모를 저주하면 죽여 버려라. 어미를 저주하거든 죽여 버려라. 사람을 유괴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 버려라. 그리고 15절에 보면,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신명기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누구든지 자식이 부모 말 안 듣거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돌로 쳐 죽이라고 돼있어요. 만약에 이 말씀대로 다 지키지 아니하면 들어가도 저주 받고 나가도 저주 받는다는 겁니다. 성경말씀 갖다 대면 우리는 아무도 못 살아있습니다. 다 죽었어요.

우리가 평소에 부모를 상당히 공경한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죽을 때 모든 재산을 형한테 다 주고 동생한테 한 푼도 안 줘 보세요. 그동안 부모 아플 때 병원비 계산한 것 생각 안 나겠습니까? 생각나죠. 안 난다면 인간이 아닙니다. “나 죽을 때 큰 집, 큰 애 해라. 그 다음에 청도에 있는 밭 이만 평도 큰 애 해라. 그 다음에 울산에 있는 아파트도 큰 애 해라. 그리고 둘째는 내 빚이나 갚으라.”고 나온다면 죽어가는 아버지 멱살 쥐고 흔들 거란 말이죠. “아버지 이럴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그 입 다물라고 나오겠죠.

사람은 자기가 최종 자기 우선입니다. 초점이 십자가로 모인 게 아니고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나한테 모여 있어요. 그래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분명히 지구가 태양을 도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걸로 여겼죠. 그러니까 얼마나 속이 탔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돕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도는 거예요? 우리가 도는데 세상사람 모든 사람은 신이 나를 도와준다고 내 옆에 천사도 돌고 바빠 지금. 완전히 지구 중심설이 아니고 내 중심설이에요. 수금지화목토천해명 다 돌아버렸어. 내 옆으로, 내 주위로, 세상 모든 것이 내 위주로. 그러니까 현실관이 뚝 떨어진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인간은 애초부터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안 된다는 것을 눈을 확 떠서 그걸 볼 수 있는 사람 같으면 그 안 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생생하게 보이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현실이고 내가 성경 덮어버리고 나 혼자 찧고 까불고 하는 모든 것은 가상현실이라는 걸 느끼게 만들죠.


10분 쉽시다.
 한윤범(IP:210.♡.51.85) 12-03-09 11:38 
20120302b 울산강의-출애굽기 21, 22장 : 율법적용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22장에 보면, 제가 무슨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재판장이라고 봅시다. 백성들이 여러분 앞에 와서 재판을 받습니다. “재판장님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할 때 재판장은 성경책을 보고, “이럴 경우에는 성경에 이렇게 돼있네요.”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세세한 경우에 융통성을 부려야 돼요. 그래서 재판관들은 지혜롭게 하라는 말이 나와요. 지혜롭게 하라는 말은 모든 일을 하나하나 재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뭘 알아야 합니까? 우리나라의 판사, 검사, 변호사는 헌법정신에 의해서 융통성이 있어야 됩니다. 모든 재판하는 것이 헌법정신 범위 안에서 얼마든지 융통성 있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그 헌법정신이 여기 이스라엘에도 있다 이 말입니다. 제사장 같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서의 정신에 입각해서 자기 나름대로 주관적으로 하는 권한을 부여받은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22장 3절에 보면, 도둑이 소를 훔쳤어요. 아까 다섯 배 갚으라 했잖아요. 이게 소를 도살할 경우에 다섯 배에요. 그런데 아직 소가 살아있을 때는 두 배로 갚으면 돼요.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는 겁니다. 아까 융통성 이야기했으니까 그것과 연관시켜보면, 도적질할 때 아주 계획적으로 도살해서, 요새 한우 비싼데 마트에 넘겨?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했을 경우에는 일찍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우발적으로 너무 가난하다. 그런데 소가 보이네. “저 소만 팔면 우리 애 수술비를 할 수 있는데.” 했을 때는 아직 소가 안 죽었잖아요. 이럴 경우에는 다섯 배가 아니고, 4절에 보면, 갑절만 배상하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것도 안 될 때는 자기 몸을 노예로 팔아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주인을 기쁘게 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모든 주인은 이스라엘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이 주인이고, 그 주인에게서 나온 게 율법이고 그렇습니다.

아까 5절을 했고요. 그 뒤에 22장 7절~11절 내용은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잘 맡아달라고 맡겼을 때 잃어버릴 경우에는 범죄가 성립되는데 주인이 같이 있을 때 잃어버리면 범죄가 성립이 안 되지만 주인이 없을 때 보관을 잘못했을 때는 배상을 해줘야 돼요.

또 어떤 경우가 있느냐 하면, 가축을 맡겼는데 다른 짐승이 와서 물었다. 10절에 보면 나와요.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해를 입힐 때는 그 사람한테 배상을 요구하지 못한다고 돼있습니다. 그것은 천재지변에 속하기 때문에. 이런 소소한 이야기는 결국 재판장이 융통성을 부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겁니다.

그리고 21장에 들어가 봅시다. 어떤 사람이 돈을 못 갚아서 노예로 팔렸습니다. 노예라 해도 되고, 식모, 머슴이라 해도 돼요. 그 사람은 돈 갚을 때까지 일을 해야 돼요. 일을 못하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걸 노예계약이라 하잖아요. 젊은 여자들 선불 받고 다방레지로 와서 “너는 돈 다 갚지 않으면 못 나가. 끝까지 쫓아가서 고소할 거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여자들은 꼼짝 못하고 빚 갚는다고 평생을 다 보내잖아요. 그런 경우를 이야기하는 건데 그런 경우에 있을 때 어떤 정신 또는 어떤 구조로 자기 집의 종들을 대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돈이 없어 노예가 되었다면 이것은 사람의 법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게 하셨죠. 지금 돈이 없어서 노예로 우리 집에 왔다. 오늘날 우리들 입장에서 보면 이런 점이 좋습니까? 귀찮지요. 안 그래도 핵가족인데 남의 식구 들어오면 짜증납니다. 개나 소로 키우면 예쁘기나 하지. 그 사람 데려다 일시키고 하면 양심에, “사람을 어떻게 개처럼 일을 시켜요. 우리 집에서 나가소. 나중에 돈 생기면 주소.” 이게 마음 편하지 노예로 데리고 있으면서 일시키는 것도 귀찮아. 지가 알아서 하면 제일 괜찮은데 일시키는 것도 귀찮아.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뭘 배우느냐 하면, 21장 2절에, “육 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 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라” 자유할 때 값없이. 만약에 일년에 그 사람의 노동력이 1억이라 합시다. 그러면 6년 동안 일해야 6억인데 그런데 그 사람이 빚진 것이 20억이라면 7년 해봐야 7억밖에 안 되니까 13년을 더 해야 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6년 끝나고 7년째는 6억이 20억이라 치고 값없이 자유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무슨 정신을 심으려고 그렇게 했느냐 말이죠.

신약성경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이 정신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잘 아는 게 구출 개념이 있지요. 이쪽 영역에서 이쪽 동네로 빠져나오는 것. 신나지요. 그 다음에 구속 개념이 있고, 속죄. 그 다음에 대속. 이렇게 보통 세 가지가 있어요.

속죄란 죄 용서 받는 것이고, 대속은 대신 값을 치루는 거예요. 그래서 ①구출, ②속죄, ③대속이라면, 우리는 구출에 대해서만 신납니다. “드디어 자유래, 자유.” 그런데 속죄나 대속은 은근히 미안하죠. “내가 이번에 시험에 합격했다. 역시 나는 실력이 너무 좋아.” 그런데 어떤 학생이, “너의 합격은 내가 포기해서 된 거야.” 하면 은근히 속상하고 자존심 상하고 미안한 게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일번에 너무 정신이 빠져있으면 이번, 삼번을 자꾸는 안 보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번을 이야기하면서 자꾸 이번, 삼번을 계속 집어넣어요. “너, 구원받았나?” “구원받았습니다.” “넌 이제 죄가 없지. 자유다.” “자유입니다. 천국 갑니다.” “그런데 내가 너를 위해서 대신 죽었다.” 이러면 사람들은 시큰둥한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번, 삼번을 예수님이 했다는 것이 짜증나서 구원받은 내가 이번, 삼번을 만들어가는 가요. 구원받고 난 뒤에 은혜에 보답하면 돼요. 내가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거예요. 아이고, 속 터져.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닌데, 속 터져.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을 설명하면 사람들은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 간다는데 마음이 꽂혀서 이번, 삼번을 끝내버렸는데 보기도 싫어. 챙길 것 챙겼으면 끝났다는 거예요.

아들 결혼할 때 엄마가, “내가 너 결혼시킨다고 네가 고등학교 때 이렇게 고생하고.” 하면 “엄마 그만해라. 이제 결혼해서 다 끝났다.” 이러거든요. “너 키울 때 얼마나 아팠는지 너도 애 키우면 다 안다.” 그런데 애 키워도 몰라요. 지만 아프지.

사람들은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 누구 혜택입어서 구원되지도 못할 구원된다는 것을 굉장히 듣기 싫어요. 내가 구원될만한 존재인 것을 후차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구원되고 난 뒤에 열심히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는 착한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것 신앙 아니거든요. 엉터리거든요. 뭔가 자기 자존심 훼손되기 싫어서 그냥 공짜로 받는 것이 미안해서 지가 열심히 뭘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나 인간적이죠.

종을 6년 동안 일하고 7년째, 물론 그 빚이 3년 만에 할 것 같으면 이런 일이 없고요. 6년 동안 빚을 못 갚을 경우에 이야기합니다. 여기 나오는 주인도 주인이지만 특히 노예 된 사람은 뭘 생각해야 됩니까? 주인에게도 감사해야 되겠지만 나로 하여금 빚을 다 갚지 않더라도 갚은 걸로 쳐주시는 그런 법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행함으로 말씀을 못 지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빚진 자에요. 어떻게 말씀대로 삽니까? 쉬지 말고 복음 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는데 언제 했습니까? 딴 생각했지. 그러니까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에요. 빚진 자인데 그 빚을 갚을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대신 고마워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께서 구원주신 것을 감사하라는 것이지 되갚으라고 준 게 아닙니다. 환장합니다.

목사들이 강단을 치면서 “이 뻔뻔스런 인간들아, 은혜 받아놓고 왜 돈을 갚느냐?”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이야기하죠. 갚는 게 아니고 계속 공짜로 주신 것에 대해서 고마운 느낌을 가지면 돼요. 그게 사랑이에요.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요새 유행하는 유행어, ‘스펙’이란 뜻이 뭐예요? 조건? 구비조건 그런 거죠. 처음에 사랑할 때는 서로가 조건을 생각 안 합니다. 사랑이 없어지면 스펙 생각한다고. “네가 좋은 남자 만날 줄 알아.” 이런 식으로 나온다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종이 있는 이상 계속 하나님께서 감시할 수 있는 여건이 생겨요. “네가 과연 6년 만에 네 종을 내놓는지 두고 볼 거야.” 그러면 7년째에 종을 자유하게 하는 주인이 있을까요? 거의 없어요.

그래서 그 다음에 21장에 보면, 네가 만약에 사랑하거든, 나는 나 혼자 자유하는 것보다 주인집에 사는 게 너무 좋다고 사랑하거든, 그 다음부터는 자유할 필요 없이, 5절에 보세요.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성전을 섬기리라”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는 만약에 자유 해버리면 옛날에 노예 이전에 독자적인 자기 생각이 있었잖아요. 그러다 돈을 못 갚아서 잠시 노예가 됐잖아요. 다시 자유하면 독자적인 자기 세계로 돌아오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노예 생활하는데 하다보니까 주인이 너무 좋고 주인님을 사랑해. 그래서 주인의 소유가 되고 싶어. 그럴 때는 송곳으로 귀를 뚫어서 영원한 종이 되란 말이죠.

구출, 속죄, 대속. 대속, 속죄를 같이 보면 구속이라 볼 수 있죠. 어쨌든 간에 이렇게 되어서 나온 신분이 옛날 구원받기 전이 A라면 그대로 A냐? 아니면 이 A가 사라지고 예수님한테 귀 뚫린 종으로서 A냐? 어느 쪽이냐 말이죠. 처음에는 나는 나였지만 나중엔 주님의 것으로 나로 달라지는 경과가 이게 바로 제대로 된 구원의 능력, 성령이 왔을 때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것은, 사랑이 모든 자유라든지, 모든 값을 초월하는 거예요. 사랑하면 이런 법이 문제가 안 돼요.

21장 17절에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전에 저주한다는 말은 결국 저주 안 하고 가만있다고 해서 법 지킨 게 아니죠.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하는 거고 아비, 어미를 치는 것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치는 거죠. 그러면 사랑하는 가운데서 실수로 “엄마” 하고 쳤다면 이거는 치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래서 모든 것은 사랑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 로마서 13장 8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가 있더라도 사랑이 모든 법의 완성이니라. 다 이루었느니라. 그 사랑은 법과는 상관없고 예수님 앞에 구원받았을 때 주어지는 그 사랑이 모든 법을 이긴 겁니다.

그 다음에 21장 6절에 보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 앞에 가죠. 재판장 앞에 간다는 말은, 사실은 하나님 앞에 간다는 말이죠. 하나님 앞에 가는 이유는 이 법을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만드신 분 앞에 하나님의 법대로, 법의 구조 안에 놓여있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천국이라는 그 법 안에서 우리는 그런 법칙의 저촉을 받았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는 내가 사랑한 자만 천국 간다는 그런 원칙이 저한테 덮쳤습니다. 그래서 덮침 받은 제가 여기 나왔습니다.” 그래서 뭐든지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어요. 서로가 개인적으로 보니까 문제인데 서로가 사랑의 구조로 보게 되면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없어요. 부부도 마찬가지고.

부부가 서로 주님의 구조로 보면 부부가 어떤 의견충돌은 있지만 미운 감정을 있을 수 없지요.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하다 “짬뽕에는 염분이 하루치 다 들어간다. 짜장면도 못지않다.” 그걸로 싸우더라도 나중에는 진짜 사랑하게 되면 짬뽕이나 짜장면이나 주님 사랑하면 되지. 빨리 짬뽕 먹고 죽을게. 문제 될 게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조 안에 우리가 놓여있는 거예요. 구조 안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지킬 수 없는 겁니다. 이걸 지키려고 하면 안 된다 말이죠.

그 다음에 상전이 여자노예를 자기 아들에게 아내로 주겠다면 딸 같이 대접하라.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사랑 안에서는 지금까지 십계명이고 모든 것이 녹아버리고 그게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율법이란 사랑을 얻기 위한 중간과정으로 도입됐다는 사실이 드러나죠. 율법을 몽학선생이라 하죠. 유치원 선생님, 학교 갈 때까지 임시로 키우는 선생을 몽학선생이라 합니다.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를 때 예비단계로 가르치는 것이 율법이에요.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예수님을 알게 되면 율법이 몽학선생인 줄 알지요. 율법 봐서는 모르지만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걸 다 인정하게 돼있다 그 말입니다.

10절에 “만일 상전이 달리 장가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이게 뭔 뜻입니까? 아들한테 아내로 주기로 했는데 아들이 살아보니까 영 마음에 안 들어요.

원래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구애를 하고 암컷이 선택을 합니다. 코모도 드래곤이 구애하는 것을 보게 되면, 원숭이도 그렇고, 일부러 암컷이 수컷들을 싸움을 붙여요. 그게 재미있는 모양이라. 서로 날 차지하려고 결투하고. “이 여자는 나의 것이야. 어딜 건방진 놈. 내가 점찍었어. 그래 한 번 붙어보자.” 그게 동물의 세계에는 흔하답니다. 그걸 쳐다보는 여자의 여유. 

여자들은 왜 선택을 하고, 남자들은 여자한테 그렇게 구애를 하느냐? 그걸 생물학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일단 자식을 낳게 되면 여자 쪽에서 나오는 희생이 너무 많기 때문에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 처음에 여자한테 남자가 용 쫌 쓰라 하고 일단 새끼 낳고 난 뒤에는 여자가 책임지고. 그래야 밸런스가 맞는다고 그런 이론을 내세우는데 맞는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과학을 들여다보면 우스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또 남조류에 해당되는 어떤 식물은 암컷, 수컷이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 몸과 합치다가 영양분이 없어지면 다른 몸과 부딪쳐서 만든다고. 그때부터 남녀구분이 생겼다는 이론도 있어요. 그리고 오키나와에 있는 어떤 물고기는 암컷이 없고 수컷들만 있을 때는 몇 개월 지나면 수컷이 성전환해서 암컷이 돼서 자기 새끼를 낳는답니다.

하여튼 간에 만약에 그 아들이 그 여자와 살기 싫다고 하면 그때는 장가들더라도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까 첩으로 계속 있는 거고 나가라고 할 수 없고 계속 살되 만약에 세 가지를 실행하지 아니하면 속전을 내지 않고 그냥 나가게 하라. 나도 너 같은 남자는 싫다고 나갈 때 그때는 돈 안 받고 그냥 나가라.

이걸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를 두고 이런 법을 만들었을까요? 인간은 항상 누구 위주다? 어느 순간에 말씀 지키기로 결심하잖아요. 하지만 그 결심은 항상 그 순간의 결심이지 내일 되면 몰라요. 이 말은 인간은 변한다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안 변하는 게 아니고 변하게 돼있어요. 인간은 또 변해야 되고. 그래야 인간은 변해도 안 변하는 것은 주님밖에 없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지 변하는 나를 믿으면 안 된단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법을 만들면 본인이 변함에도 불구하고 맨날 맹세해. 벌써 담배 끊겠다, 술 끊겠다 하는 사람들 못 끊고 있잖아요. 변하는 자기한테 맨날 “난 결심했어. 반드시 이것 할게. 믿어줘. 다시는 이런 일 안 할게.” 그때뿐이에요. 그게 인간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믿음과 소망, 사랑을 믿지 말라. 자기 자신을 믿지 말라. 그건 다 헛방이다. 그래서 진짜 성령이 온 사람은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성령이 안 오고 흉내 내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자기를 믿게 되기 때문에 그건 다 헛방입니다. 그 패 들고 있어봐야 소용도 없어요. 입장권도 아니고 천국티켓도 아니고 그냥 자기가 심심해서 만들어낸 거예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믿음을 만들려면 반복적인 학습을 최면을 자기한테 걸면 되는 겁니다. 반복적인 행위는 그 사람의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마치 자기한테 믿음이 있는 것처럼 착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착각이 들면서 그 다음부터 더 큰 마귀의 시험에 들어와요. “똑바로 해야지. 왜 지난번엔 했는데 이번엔 안 해. 정신 차리고 하란 말이야.” 자꾸 마귀는 인간 갖고 노는 게 재미있답니다. “끝까지 널 믿어야지. 하면 돼. 안 된다고 하지 마. 넌 될 수 있어.” 결국 변하는 우리에게 안 변하는 존재라고 우리한테 강요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마귀한테 그동안 얼마나 속아왔습니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다 말하세요. “이래서는 안 돼.” 뭐가 이래서는 안 돼요. 사흘도 못 가는데. 어떤 남자들 술 먹고 와서 마누라 패놓고, “술김에 그랬다.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목걸이 사들고 뭐 사들고 해도 얼마 안 가서 또 패고 그러지요. 안 돼!

내가 나를 관리하고 다루면 안 돼요. 그냥 주님한테 맡기세요. 그러면 밀고 당기고, 당기고 밀고 어느 가족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그건 가만있어도 그런 소식이 들어오면 혼자 평안을 외치고 혼자 행복을 외치더라도 그 행복을 깨는 것들이 꼭 있어요. 좀 조용하게 살 수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 갑자기 연변에 사는 조선족이 와서 일년 동안 살았다고. 우리 처가 쪽 가운데서 있어요. 어디서 누가 들이닥칠지 알 수 없어요. 내 인생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준 인생이고, 집어넣어준 하나의 움집, 새장 같은 겁니다. 거기 있다가 다음에 옮기고, 옮기고 하는.

그 다음에 21장 12절 봅니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노예를 죽이면 형벌은 받아요. 살인죄에는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재산이기 때문에. 마치 남의 집 가구 긁어놓으면 배상하듯이 노예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면 배상은 하되 살인죄에는 해당이 안 돼요.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사람은 고의로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한 곳을 정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게 도피처라 하는데 도피성, 여덟 군데 있지요. 사람이 죽였다. 사람을 고의로 죽이면 나로부터 출발해서 그 사람을 죽게 한 거예요. 그러면 나는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내가 위반했죠. 처음에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에 괄호에 뭐가 안 나와 있지요. 그런데 21장에 보니까 살인한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고 돼있죠.

뭐가 어려우냐 하면, 21장 없다 치고, 살인하지 말라 해놓고 괄호 해놓고 반드시 죽일지라도 있지만 죽이지 말라도 있죠. 이게 감추어져있었다고. 그런데 우리는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하면, 내가 만약에 살인하면, “하나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그러면 안 되지.” 우리가 지 마음대로 생각한다고. 그러면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뭐가 어려우냐 하면, 이 말씀을 증명하면서 나오는 벌칙조항도 우리가 지어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미 주님이 정해놓은 벌칙조항에 죽이라는 경우에 해당될 수도 있고, 죽이지 말라에 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살인강도 그 사람이 죽었습니까, 안 죽었습니까? 둘 다 죽었지만 한 쪽은 천국 가고, 한 쪽은 지옥 갔잖아요. 보세요. 살인하지 말라고 해놓고 한쪽은 천국 가는 살인하지 말라요 한쪽은 지옥 가는 살인하지 말라죠. 모든 말씀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보여주는 하나의 매개체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십계명을.

그런데 우리는 이것도 모르고 살인 안 함으로써 천당 간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죽이지 말라. 누구와 함께 있기 때문에? 도피성에 대제사장이 함께 있기 때문에 죽이지 말라는 거예요. 이 대제사장이 예수 그리스도죠.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일 짓을 한 강도도 오늘밤에 어디 간다? 낙원에 간다. 죽어도 산다. 어디서? 천국에서.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래서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우리 잘남을 위해서 성경말씀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 잘난 척하기 위해서 성경말씀 찾고 있단 말이죠. 혹은 “주여, 이 말씀 어겼지만 벌은 내리지 마옵소서.” 맨날 자기 유익과 도움만 자꾸 계산하면서 말씀을 보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전부 다 예수님을 위해서 한 겁니다.

그러면 고의로 한 경우와 고의로 하지 않는 경우가 어떻게 다르냐? 거기에 대한 조항은 이래요. 맹세하는 거예요. 이게 참 애매합니다. “너, 고의로 했나, 안 했나?” “고의로 했습니다.” 그러면 고의로 한 거예요. “고의로 했나, 안 했나?” “고의가 아닙니다.” “아니야? 그러면 네가 하나님 앞에 맹세하나? 만약에 네 말이 틀리면 저주받는다.” “저주받아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네 맹세는 확실하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런 구절이 뒤에 22장에 나오거든요. 그냥 제사장 앞에 나와서 말발, 누가 아나. 그러니까 재판 받을 때 잘못됐다고 하면 한결 형이 확 줄어들어요. 그런데 판사 앞에 잘난 척하면 형이 올라가요. 그러니까 재판장 앞에서 “내가 너무 나쁜 짓해서⋯⋯” 이러면 갑자기 형량이 감해지는 것처럼 재판장이 “너, 도적질했지?” “안 했습니다.” “진짜 안 했나?” “예.” “그럼 도적질 안 했구나.”

그러면 이쪽에서 한 번 더 물어보세요. “이놈. 이실직고 하렸다! 너, 도적질했어, 안 했어?” “전혀 안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나? 만약에 거짓말로 드러나면 저주받아도 좋은가?” “좋습니다.” “봐라. 안 했다잖아.” 그러고 끝나는 거예요. 참 쉽지요. 그러니까 거짓말탐지기만 통과하면 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법이 유효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백날 나쁜 짓 해놓고도 재판장 앞에서 “내가 고의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쁜 짓 한 게 문제가 아니고 고의냐, 아니냐고 물으니까 “너, 고의로 했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하겠느냐?” “절대로 고의가 아닙니다.” “고래. 그렇다면 사람 불러야 돼. 애는 평가하면 안 돼.” 이러면 끝난다 이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나오죠. “이것에 네가 작정한 헌금 다냐?” “답니다.” “진짜냐? 저주받아도 좋으냐?” “좋습니다.” 죽었잖아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네가 나를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임이라.”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만약에 그 사람이 성경을 안 믿는다면 어떻게 돼요? 이것은 이야기할 것도 안 되죠.

결국 이 이야기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진짜 성령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성경말씀대로 내가 해놓고도 빠질 구멍을 찾는 작업이 내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인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고의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다 고의로 은근히 노리고 해놓고 막상 “고의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뭔가 법대로 지켰다는 것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그 심보, “주여, 그것이 바로 내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진짜 성령 받은 성도는 자유입니다. 죄 지어놓고 죄 지었다는데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 있어요? 고아원에 쌀 갖다 주고 노인들 돌보면서 “집사님, 권사님 착한 일 합니다.” 이게 무슨 착한 일입니까? 이것도 죄인인데요. 이런데 무슨 마귀의 시험에 듭니까? 뭘 해도 죄라는데, 죄인 중의 괴수라는데 할 말이 있어야지. 그런데 꼭 마귀에 시험 든 인간들이 착한 일 했는데 안 알아주니까 교회도 안 나오고.

그 다음에 21장 18절에 봅시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하나가 돌이나 주먹으로 그 적수를 쳤으나 그가 죽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가 지팡이를 짚고 기동하면 그를 친 자가 형벌은 면하되 기간 손해를 배상하고 그로 전치되게 할지니라”

그 사람 치료비는 다 주고 형벌은 면하라. 형사책임은 묻지 않고 민사책임은 묻는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소 훔치고 죽인 것은 형사법에 해당되는 거예요. 둘 사이에 해당하는 문제다. 왜? 처음부터 둘이 치고 박는다는 것은, 내가 널 안 때리면 네가 나를 때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누구한테 형벌을 요구할 수 있는 참된 사람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은 이것은 저주받을 수밖에 없어요.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셨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지옥 가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5장 26절을 봅시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어디서? 옥에서 나오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대로 할 때 하나라도 어기면 너는 지옥에서 못 벗어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죄 짓게 돼있고 형벌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에 26절 봅시다.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을 것이며 그 남종의 한 이나 여종의 한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 대신 그를 놓을지니라” 종은 금전의 문제기 때문에 배상의 대상이 안 됩니다. 자유인이 아니기 때문에 종에서 종으로 다루죠.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룰 때 종으로 다루기 때문에 우리와 예수님과 거래, 흥정 같은 것은 일체 성립이 안 됩니다. 그저 우리는 용서 받고 주님은 우리 귀 뚫어서 주님의 종으로 삼았고 그 관계에서 우리는 감사하고 사랑할 뿐이죠. “주님이 너무 좋아요.” 이렇게 돼야지 주님한테 은혜를 갚고, 얼마를 갚으면 됩니까? 이런 소리하는 것은 자기가 독자적인 존재라고 착각해서 그런 겁니다.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 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를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면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21장 28~30절)

사람 또 죽이네. 자기가 안 죽였는데 자기가 키우는 소가 사람을 죽이면, 소 대신 자동차로 바꿔 생각하면 돼요. 자기가 안 치었는데 자기가 몰던 자동차가 죽이면 하나의 흉기가 되어서 그 사람도 같이 죽여 버려요. 이래 죽이고 저래 죽이고 다 죽여요. 살인하지 말라고 해놓고는 누가 살인 많이 합니까? 하나님 혼자 살인 다 하고 있어요.

지난주일 아침에 했지만 보통 아버지가 아들 사랑하면 아들은 살리고 아버지가 죽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아들이 죽어서 아버지에 영광을 돌리니까 아들 죽고 난 뒤에 아버지가 기분 좋게 여기니 문제가 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과 영 다르죠. 하나님께서 마구 죽입니다. 왜? 모든 율법으로는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너를 살리는 것은 너 때문이 아니라 내 아들 때문에 살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라는 환경을 조성해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33절 봅시다.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주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함으로 소나 나귀가 거기 빠지면 그 구덩이 주인이 잘 조처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지니라”

이런 이야기 아시죠. 맨홀 뚜껑 열어놓아서 소가 죽었을 때 배상해줘라. 그 대신 죽은 소는 네가 가져도 좋다. 이건 일상생활이죠. 일상생활은 구조에서는 예상 밖에 그러니까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그냥 장난삼아 돌을 던졌는데 담 넘어 할머니가 맞아 죽는 그런 경우도 있고, 또는 차를 몰고 가는 타이어에 돌이 튀어서 운전자 이마에 맞아서 일가족이 다 죽었다. 그럴 경우에 누가 죽였습니까? 이 구조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살인하는 행위에 참여시킨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형제에게 욕하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되죠. 그러면 우리로 하여금 어떤 것이 죽어야 마땅한지 알려주기 위해서 욕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과 사태를 계속해서 유발시키는 겁니다. 오십 살까지 욕 한번 안 해도 쉰한 살 때 욕할 수 있어요. 이것은 어쩔 수 없어요. 요새 애들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는지 욕을 달고 다니지만 차라리 욕하는 것은 나은 거예요. 욕 하나도 안 하고 말 좋게 하면서 “너는 죽인다.” 속으로 미워하는 마음, 그게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에요.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본다는 것은 죽은 자로 간주하고 보는 거예요. 이래서 내가 죽어야 되는구나. 이런 식으로 보는 거예요. 물론 우리는 주님 은혜로 살았지만.

22장 6절. “불이 나서 가시나무에 미쳐 낟가리나 거두지 못한 곡식이나 전원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 할지니라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 이웃의 집에서 봉적하였는데 그 도적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 도적이 잡히지 아니하면 그 집 주인이 재판장 앞에 가서 자기가 그 이웃의 물품에 손 댄 여부의 조사를 받을 것이며” 나중에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절대로 아닙니다.” 하면 배상 안 해도 된다고 돼있어요. 그러면 도둑놈과 짜면 돼요.

11절에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로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 만일 자기에게서 봉적하였으면 그 임자에게 배상할 것이며 만일 찢겼으면 그것을 가져다가 증거할 것이요 그 찢긴 것에 대하여 배상하지 않을지니라”

이건 뭔 뜻이냐 하면, 나는 이걸 지키려고 했는데 어떤 짐승이 오든지 도둑놈이 오든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지켰는데 도둑놈이 힘이 세서 가져갔다면 배상 안 해도 된다 말이에요. 이것도 속임수가 가능하죠. 짜고 자기도 피해자라고 하면 배상 안 해도 돼요.

이런 것들은 결국 뭐냐 하면, 나중에 법이 바뀝니까, 안 바뀝니까? 계속 바뀌죠. 왜냐하면 사람이 인간 자체가 바뀌니까 계소고 이 법이 바뀌는데 우리가 지킬 수 있다는 걸로 바뀝니까? 절대로 못 지키는 걸로 바뀌는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로 알라는 그 말씀도 계속 못 지키는 말씀으로 남아있는 겁니다.

16절에 “사람이 정혼하지 아니한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으면” 사람이 처자를 보고 마음에 들어서 동침을 했으면 아내를 삼을 것이요. 이렇게 되면 골치 아프죠. 순간의 실수가 평생의 짐이 될 수 있다니까요. 정말 괴물 같이 생긴 사람 선보면 곤란하잖아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예를 들어서 만약에 배용준이 술을 한 잔 먹고 어떤 처자를 건드렸다. 그럴 때 배용준은 인물 잘 생기고 돈 있으니까 술 깨고 나서 출애굽기 22장에 의하면 아내를 삼아야 돼요. 그런데 그렇게 강간을 당해놓고 가만히 보니 배용준이라. 평소에 배용준이 자기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돈은 받되 안 살면 돼요.

그렇게 되면 누가 낭패를 당합니까? 남자 쪽이 낭패를 당하죠. 부부란 서로 마음이 맞아야 되는데 순간의 실수로, CF에 나오잖아요. 컨디션 먹고 술 깨보니까 막 돼먹은 영애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남자는 곤란한 게 부부가 될지 안 될지 선택권이 남자는 박탈당한 거죠. 당한 여자가, “이왕 이렇게 된 것 살아줄게.” 이러면 부부고, “너 같은 남자 내 타입 아니야.” 이러면 안 살면 되는데 남자는 싫은데 여자가, “웬 떡이고. 이런 게 다 들어왔나?” 하고 달라붙으면 아내가 돼야 됩니다. 그럴 땐 골치 아프죠. 그때부터는 스스로 떨어지도록 구박을 해서 쫓아내야지 진드기도 아니고 맨날 출애굽기 22장 16절, 온 집에다 붙여놔요.

그러니까 사창가에 갔는데 창녀가 살기를 원한다면 못 헤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청년들이 이걸 보고 마음에 상처를 입었겠어요. 군에 가기 전에 총각딱지 뗀다고 했는데 성경에 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그 처자를 불러다 결혼해야 돼요. 그 처자가 싫다고 하면 안 해도 되지만. 세상에 어느 청년이 이걸 지킵니까? 거기다가 예수님은 한 수 더 뜨시네. 창녀촌에 안 가도 마음속으로 음란 품으면 이미 간음함이라. 그러면 티비도 못 보고 영화도 보지를 못해요.

“만일 그 아비가 그로 그에게 주기를 거절하면 그는 처녀에게 빙폐하는 일례로 돈을 낼지니라” 그러니까 돈만 받고 안 살아도 된다 이 말입니다. 아버지나 딸이 거부하면. 그 당시에 딸은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그것은 보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말씀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구조적으로 지게 돼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얼마나 우리한테 마지막 보물이고 정말 귀한 보물인지를 깨달으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말씀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말씀이 주의 십자가로 모인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우리가 왜 죄인인가를 주님은 왜 죄인을 부르러 오시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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