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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울산강의
2007-03-03 01:38:45 조회 : 4996         
울산 3월 2일 강의 이름 : 우리교회(IP:122.47.5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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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교회(IP:122.♡.55.30) 07-03-10 14:02 
20070302a 울산강의-창세기 9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창세기 9장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창세기 9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무지개 언약이라는 게 나오는데, 언약이라 하는 것은 모든 걸 통합시키는 흡입, 잡아당겨서 전부다 한 구덩이에다 다 집어넣는 그런 힘이 쏟아지는 원천이 언약입니다. 휘휘 감아서 한 곳으로 확 낚아채는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게 언약. 모든 세상에 소소하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휘휘 감아서 결국은 언약이라는 그 구멍 속으로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도록 잡아당기는 그 힘을 갖고 있는 게 언약이죠.

그래 언약이 등장했다 하면, 이 세상은 중심없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무의미하게 뜻이 없다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소용돌이죠.

언약이란 뭐냐? 하나의 휙휙 돌아가는 모든 것을 늪 같이 여기 다 언약 안으로 빨려 들어오게 되어 있고, 언약으로부터 모든 게 능력이 나오게 되어 있고, 언약에서 나오는 능력이 주변에 있는 것들을 꽉 잡아서 일관성 있게 다 잡아당기는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걸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언약이 등장했다는 말은 이 세상에는 모든 힘을 갖고 있는 중심지가 따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이 활개 치는 중심지가 있다는 말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 중심 되는 하나님의 뜻, 언약을 모르면 그거는 심판받고 저주의 대상이라는 그런 뜻도 이렇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타나죠.

그 요한복음 5장을 보게 되면, 방금 제가 하는 말과 연관해서 이해가 됩니다. 5장에 2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심이라"

이 세상에 모든 심판의 기준이 확정되었다는 겁니다. 확정된 체계. 그것은 뭐냐 하면, 심판은 예수님이 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공경하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은 게 되고, 예수님을 공경하게 되면 그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것은 처음 교회 나와서 처음 방금 이 강의를 처음 듣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은 복된 말씀입니다. 복음입니다. 축복입니다. 왜? 인생의 핵심을 알았으니까. 세상이 아무리 복잡다단하게 움직이고 북한의 김정일이 어떠니, 이라크에 테러가 터져서 병장 하나가 죽니 사니 이렇게, 벌써 죽었지만.

죽고 이렇게 났더라도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면 여기에 마음 빼앗기고 저기 지진이 일어나면 지진에 마음 빼앗기고, 무슨 세상에 어느 마음이, 그럴 필요 없이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딱 마음은 한 구석에만 두게 되면, 그건 이미 인생 성공한 겁니다. 예수님만 알면 더 이상 우리는 사망에 이르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산에서 하늘에서 구름, 하나님이 음성을 내린 경우가 별로 없는데, 그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을 내린 경우가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하고 같이 있는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만 들으라.” 예수님 말만 들으면 아무 탈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의 말을 들을 생각 안하고 자기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려고 하다보니까 이래 좌왕 저리 우왕좌왕하고 마음 흔들리고 요동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해결책이 뭐냐고 고민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점검하려고 하니까 그런 오류에 빠져요.

배가 배를 잡아당기는 그 소용돌이를 알아야 하는데 자기가 스스로 배를 기관실을 절제하고 관리하려고 하면, 배는 파도에 따라서 올라가고 내려갈 때마다 한번씩, 한번씩 울어야 된다고.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성경의 이런 뜻을 볼 줄 모르고 성경을 가지고 자기 마음 다잡기 위해서 보는 경우가 제가 보기엔 거의 태반이에요. 자기 마음을 안정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시는데, 그건 자기가 중심이 아닌데 그래 보면 해석 잘못이죠. 그거는 해석 처음부터 잘못된 겁니다. 내 마음 다잡기 위해서 성경 보게 되면 그렇게 해석하는 당사자는 누굽니까? 마음 다잡지도 못하는 내가 또 해석을 내가 한다는 식이 되니까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말 어렵게 했어. 쉽게 해 봅시다. 내가 마음에 번민이 많다. 그런데 내가 성경을 보면서 번민 많은 마음 다잡아야겠다, 안정시켜야 되겠다. 라고 성경 말씀을 보면, 그 성경 말씀 해석을 누가 합니까? 요란스러운 불안정한 내가 해석하잖아요. 내가 해석하니까 해석하는 내가 그렇게 해석하는데 본인도 본인 정리 안 되어서 어쩔 줄 모르는 판국에. 어쩔 줄 모르는 그런 마음 가지고 성경해석을 하니 성경해석이 제대로 될 리가 있습니까? 엉터리죠.

그래서 아침 본 성경 다르고, 저녁에 본 성경 다르고 지 마음대로라. 아침이든 점심이든 저녁이든 상관없이 모든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태들, 상황들, 사건들 그런 걸 획 잡아서 한 곳으로 이렇게 확 흡수하고 잡아당기는 그 힘이 뭐냐? 창세기 9장에 보면 언약이라 하는 겁니다. 무지개 언약.

이 언약에 의해서 여기 9장 2절에 보면, "땅과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모든, 모든 계속 나오죠. “그들은 너희를 두려워 할 것이며 산 동물도 이제는 너희들의 음식물이 될 것이며” 이래 죽 나오고, 다시 8절부터 보면, “내가 노아 언약을 세울 테니”, 10절에 보면, “너와 함께 한 모든 생물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이렇게 다 다시는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물로서는 너희들을 멸하지 않을 것이며”, 여기 15절에 봐도, “너희와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로서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지 홍수 되지 아니할지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스스로 언약 세워놓고 스스로 내가 이거 안 할게, 이거 안 할게, 이거 안 할게. 하는 식으로 스스로 자기 조건을 내세우는 거예요. 이걸 방금 제가 이야기를 하나의 그림으로 그리면, 언약에서 언약이 설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스스로 언약에서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해놓고 그런 요소들을 그냥 자유롭게 내팽겨 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요소들이 언약에서 비롯되어서 여러 요소들이 터져 나오더라도 모든 생물과 모든 육축과 뭔가 오더라도 그건 다시 어디에 통합됩니까? 언약에 일관된 법칙에 다시 붙잡혀서 하나로 굳혀진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 9장 이야기에요.

이렇게 하나로 모든 것이 네가 보기에 세상에 어떠한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언약에서부터 나왔던 일인 것을 기억하고, 그것이 다시 언약 안으로 다시 굳어지고 흡수 통합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다오, 그겁니다. 그게 창세기 9장이에요.

그리고 창세기 9장만 그런 게 아니고, 성경 전체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십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게 일한다는 걸 제가 말씀드리기 위해서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를 공경하는 자만 다시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하는 그 이야기를 제가 신약과 구약을 이렇게 연관시켜서 일관되었다는 것을 방금 제가 이야기해 드렸잖아요. 흔들리지 마세요. 

‘흔들리지 마세요.’란 말은 마음에 안 흔들린다는 말이고, 흔들리면서 끌려가는 곳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안 흔들리면 나한테 모든 사태가 나 좋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 흔들리지만 흔들려도 좋아요. 흔들리는 것을 너무 안타깝게 여기지 말고 흔들리면서     따로 존재한다는 걸 가지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흔들리는 내 마음. 하지만 그것이 결국은 어디 빨려 들어가는 수채 구멍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어떤 여자애가 머리 약간 긴데 목욕탕에 수압에 못 이겨서 아이 머리카락 해서 죽을 뻔 한 적 있어요. 머리카락이 수채 구멍에 빨려 들어가서 빼지 못해서 물에 감겨 숨도 못 쉬어서 죽을 뻔 한 애 있거든요. 그처럼 우리는 지금 우리의 요구사항, 우리의 욕망과 희망사항이 어떠한지 관계없이 믿던지 안 믿던지 김정일든 노무현이든 누구 관계없이 인간이든 세상의 모든 생물과 모든 육축과 코끼리와 모든 것도 들국화도 결국은 한 수채 구멍으로 쫘악 쫙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게 신약의 구멍이 뭐냐? 구멍을 가지고 십자가라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십자가를 증거하지요. 십자가가 수채 구멍이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십자가=수채 구멍. 십자가가 수채 구멍, 다른 말로 하면 같은 말이 뭡니까? 이게 죽음이죠. 죽음인데 더 상세히 이야기하면 저주죠. 우리 성도는 수채 구멍을 미리 통과했기 때문에 이 십자가 뒤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는 예수 안의 세계에 들어오고, 불신자들은 십자가 가지고 계속 끌려가면서 이 십자가 뒤에 죽음의 세계 안에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요.

죽음의 세계 뒤에 비로소 생명이 있어요. 우리가 살고자 하는 것은 생명 아닙니다. 죽음의 또 다른 모습이에요. 우리가 살고자 하는 행동 이 자체는 힘차게 죽음이 우리를 목 죄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흔적들이에요.

그런데 정작 생명은 어디 있느냐? 사도 바울처럼 죽고 싶다. 난 죽어도 좋아. 나는 죽어도 내 운명과는 상관없어. 죽음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내 운명은 달라질 게 하나도 없어. 라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십자가를 통과하고 그 뒤에 있는 십자가 뒤에 있는 예수 정죄함이 없는 세계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에 자신의 죽음을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처럼, 나는 내 소원이 있는데 내가 지금 빨리 죽는 것이다. 빨리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거. 그것보다 더 좋은 희망사항은 없다 이 말입니다. Boys, be ambitious.가 아닙니다. 세상에 야망을 갖는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의 야망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빨리 죽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그런 식으로 목회하고 그런 자세로 설교한다면 참, 그 교회는 복음이 언약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그저 언약이라는 것은 빨려 잡아당기고 수채 구멍처럼 화악 흡수해서 잡아당기는 식으로 지금 이렇게 소용돌이치는 세계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에서 나오는 게 뭐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축복과 저주가 나옵니다. 축복과 저주가 나오는데 이 이야기가 그 뒤에 노아 아들이야기입니다. 아들 가운데서 세 명 다 축복된 자가 아니라 그 중에 아들 하나와 손자 하나, 가나안과 함은 저주 받아야 될 그러한 운명으로서 이 언약이라는 수채 구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고,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반드시 받아야 될 사람으로서 이 수채 구멍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 이 수채 구멍 된 언약 속에는 뭐가 들어있겠어요? 저주와 축복의 기준이 들어있겠지요. 근거지. 저주와 축복의 근거지. 기준들이라는 말도 되고, 더 보탠다면 근거지가 되는, 근거지. 저주 받을 근거지도 언약 안에 들어있고, 축복될 근거지도 언약 안에 들어있고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은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을 왜 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느냐 하는 망하기 위한 이유로 십자가고, 십자가는 믿는 사람에게는 왜 그 믿는 사람이 영생 얻을 수밖에 없느냐 하는 것을 알려주는 근거지로서 작용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같은 십자가 사건이 사람이 상대방이 확정된 운명에 따라서 적용이, 하나는 저주로 적용되고, 하나는 축복으로 용서로 사랑으로 적용되는 겁니다. 동일한 사건인데 동일한 사건이 그 사람이 품고 있는 창세전의 운명에 따라서 한 사람은 저주스런 십자가로 다가오고 한 사람은 고마운 십자가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내가 뭐 했다, 내가 어떻게 했다, 자꾸 자기를 중심으로 삼지 말고, 그건 주변에 지나지 않고, 변두리 진짜 중앙 되는 십자가를 증거해야 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려면 자기 자신이 왜 십자가 아니었으면 구원 받을 수 없는 죄인인가를 알아야 돼요. 평생 살면서 우리는 내가 왜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 구원될 수 없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이렇게 언약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작용 가운데 하나가 창세기 9장에 나오는데 그거 좀 상세하게 봅시다. 약간 복잡한데요, 이렇습니다. 창세기 9장 5절에 보면,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여기 4절에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원래 창세기 9장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었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은 창세기 1장 28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 한 것처럼 보일 겁니다. 창세기 1장 28절 유명한 거잖아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렇게 똑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은 똑같은 말씀을 주지 않아요.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 창세기 1장 28절에서는 대상이 그때는 범죄하기 전이거든요. 범죄하기 전에는 인간은 완벽하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이 형상 자체에 문제점이 없어요. 문제점이 없고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세상 피조물에 대해서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느냐? 세상 피조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창세기 1장 28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형상 자체가 어떤 문제점이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곧 하나님을 대변하는 겁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그런데 창세기 9장에 들어오면, 인간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라는 이 방식이 깨져버려요. 인간이라고 다 인간이 아니고, 추가된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을 모르면 나는 그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조건이 갖다 붙는 창세기 9장입니다. 아, 이거 좀 어렵다. 말이 좀 어렵지요.

창세기 1장 28절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범죄하기 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인간, 인간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문제점이 시비 걸 게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고 인간이 형상이기 때문에. 단지 하나님 형상과 인간이 세상 만물과 어떤 위치에 있느냐 그것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창세기 9장에서 똑같은 말씀, 똑같은 축복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 형상과 인간이 동일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 따로고 인간 따로 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형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나는 인간이다. 만물을 다스리겠다. 이래 나온다면 그것은 주체파악이 안된 인간이에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하면, 먼저 오신 분도 이야기하세요. 언약은 뭐라 했습니까, 언약은 네 자로 뭐라 했어요? 수채 구멍이에요. 확 모든 것을 사로잡아서 휘감아 흡입하는 능력이 나온다 하지요. 쫙 빨라 당기지요. 중심점이 언약 아닙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그 언약의 중심점에 있다면, 옛날에는 인간이 언약이고 언약이 인간이라면, 지금 창세기 9장에서는 하나님 형상 따로고 인간 따로 에요.

하나님 형상이 점점 더 인간과 괴리, 뭔가 균열이 일어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피를 피에 대해서 인간이 범접하지 못하는 딴 거는 다 먹더라도 딴 거는 다 먹을 수 있으되 피를 못 먹는 그 바깥에는 인간은 그대로 있어야 돼요. 그리고 피에 관해서는 인간이 관여 못하고 하나님의 형상만이 피 가지고 뭔가 미래에 다루실 겁니다. 그것은 십자가 피죠. 언약의 피.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자만이 생명을 얻는다는 그 피를 말합니다. 그거는 신약 시대에나 구체화될 정체고 본질이고.

구약에서는 신약의 모형이기 때문에 뭔가 피를 머금은 채 인간과의 거리를 약간 띠우면서 좋다. 다 먹어라. 심지어 고기까지 먹어라. 줄게. 하지만 뭐는 손대지 마라? 피는 니가 인간이라도 손 못 댄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라 할지라도 손 못 대. 피는 너를 능가해. 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써 세상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혜택을 준 것은 너가 잘나서가 아니라 너는 어려서부터 약함이라.

창세기 8장 그거 몇 절입니까? 8장 21절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그 다음에 다같이 읽어봅시다. 시작,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너는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너로 인하여 이 땅을 저주 안 하겠다는 게 아니고, 너 말고 다른 하나님의 형상 되는 다른 어떤 원인 때문에 혜택을 누가 입는다? 어릴 때부터 악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형상의 혜택을 입는 조건 하에 너는 피라는 것에 대해서는 손을 떼라. 손을 떼야 된다 이 말이죠.

이걸 방금 제가 길게 이야기한 걸 축약하면 뭐냐? 피 때문에 사람은 날 때부터 악함이라도 피 때문에 은혜를 입는 그런 입장에 놓이게 되는 그런 시대를 이제 개시하는 거예요.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 시대를 개시하는 거예요. 그래서 피를 먹지 말라하는 거예요.

저는 대구 칠성시장 선짓국 오천 원 어치 사면 한 냄비 사서 세 식구 삼사일 동안 맛있게 먹습니다. 선짓국이 핏덩어리에요. 맛있게 먹거든요. 왜 먹느냐? 이미 죽은 놈이라서. 내가 먹고 안 먹고 상관없이 내가 그걸 핏국을 먹고 안 먹고 상관없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실체가 드러난 이상은, 내가 행동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한테 생명이 빼앗아가고 주고 그런 시대를 이미 날아가 버렸어요. 끝나버렸어요. 그건 지나가버렸어요. 내가 어떤 법을 지켜서 구원 얻고 구원 안 얻고는 그런 시대는 지나가버렸어요.

그런데 창세기 9장은 아직 그런 시대가 도래되지 않은 시대기 때문에 피를 먹지 말라 하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의 모형입니다. 실체의 피는 언젠가는 나타나실 거예요. 우리 행위와 관계없이. 그래서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참 죄송하지만 성도 맞지만, 성도라면 자기 행동 결정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악마의 시험에 빠지고 악마로 인하여 자칫하면 자살까지 일어나는 그런 떠밀림을 당합니다.

저도 학교 선생님해서 알지만 예수 믿고 난 뒤에 학교 선생하면, 애들한테 체벌하고 난 뒤에 후회 많이 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행동을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고, 거 담배 한번 피웠다고 아를 패서 벌겋게 만들고 요새 같으면 고소감인데 그때는 휴대폰 없어서 안 찍었기 망정이지, 막 했다고요. 그런데 복음을 알게 되면 내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게 잘했을까 못했을까? 연관 안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따진다는 자체가 그것은 지금 언약이 무슨 언약 시대인지 구분도 못하는 시대에요.

이건 노아시대가 아니에요. 노아언약을 대체할 언약이 나왔으면 그 대체시키는 하나님의 입장을 존중해 줘야지, 우리가 존중 안 하면 누가 존중하겠습니까? 아직도 자기를 자책하고 이렇게 하면, 우리를 거저 구원하신 주님의 손이 허전하잖아요. 주님의 사랑이.

지난 목요일 날, 가야산 등반하신 분 다 아시잖아요. 내가 참고 중간도 못 올라가서 초반에 앉아서 퍼졌는데 내가 지짐을 먹을 자격이 되나 안 되나 후회할 필요 없어요. 애는 중학생 하나 와서 지짐 들고 드실래요? 들고 있는데, 이거는 산에 몇 미터 올라갔나 관계없이 지짐 들고 잇는 것, 그냥 먹으면 되지, 맛있게. 먹으면 안 돼. 한 백 미터 올라갔나? 이거 먹어도 되나?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자책해서 들고 있는 애 손이 미안스럽게 만들고, 그러지 말라 이 말이죠. 

주님께서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하는 피를 흘렸는데 그 쟁반에 담긴 생명의 피는 들여다보지 않고, 자기 혼자 이 잡는 것도 아니고 빈대 잡는 것도 아니고 뭐 하고 있는 거예요? 킥킥 이카고. 그러면 깨끗해집니까, 지가? 이미 복음은 창세기 9장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내가 다 이루었다. 창세기 9장까지 다 이룬 거예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또 한번 합니다만 늦게 올 때마다 계속 반복하자. 하나님의 언약이란, 이미 오신 분도 중요하니까 또 자꾸 들어놓으세요. 언약이란 뭐냐? 우리가 여러 가지 무자격적으로 우발적으로 생긴 것, 그거는 원인도 결과도 없이 턱턱 생긴 것이 그게 다 듬성듬성 일어난 것이 한 쪽으로 휙 감아서 수채 구멍으로 쫙 빨아 당기는 중심이 있더라 이 말입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은 ‘우연’이 아니에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온 것이 하나에서 다시 회수하고 회귀 되는 모든 사건의 다발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이에요, 언약.

어떤 것도 언약의 밧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언약의 포로들이에요. 그런데 언약에서 뭐가 나온다 했어요? 언약에서? 두 가지 나오는데 하나는 뭐가 나온다? 축복이 나오고 하나는 저주가 나오지요. 그러면 언약은 무엇의 근거지다? 저 사람은 저주 받아야 될 근거지도 언약이고, 축복 받을 근거지도 언약에서 나오고.

언약을 탁 깨보면 그 안에 피를 머금고 있고. 그 언약에 대해서는 니가 피에 대해서는 손 터치, 손대지 접촉하지 마라. 이것은 하나님의 고유권한, 하나님의 고유적인 축복이요 하나님의 고유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저주하는 것도 하나님의 자기 고유권한으로 저주하는 건데, 교회에서 잘못 생각해서, 왜 우리 어머니는 예수도 안 믿고 돌아가셔서 지옥 가게 하십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자꾸 울지 마세요.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너가 구원받은 것도 내 고유권한인데. 너의 어머니 예수 안 믿고 죽은 것도 예수님 부인하고 죽은 것도 내 고유권한이라면, 너는 잘나서 구원받은 게 아니야. 너가 구원받은 것도 나의 고유권한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왜 그렇습니까? 나도 자유가 있고 자율이 있고 나도 인간이고 이성이 있고 나도 판단력이 있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너는 하나의 주변이거든. 왜 주변이냐? 우리는 주변이고 변두리거든요. 우리는 핵심이 아니고 빨려 들어가야 될 하나의 머리카락에 지나지, 머리카락 한 가닥에 지나지 않거든요.

왜 우리는 주변이냐? 그거는 우리는 뭘 다룰 자격이 없기 때문에? 피를 다룰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는 안 그랬어요. 죄 짓기 전까지 우리는 모든 걸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다릴 수 있지만 창세기 9장부터는 모든 걸 다스리되 그 모든 걸 다스릴 수 있는 권한까지 어떤 조건 하에서 다스릴 수 있다? 피를 손대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그걸 다루는 거예요.

신약시대에 의하면, 나는 예수님의 피를 믿습니다. 하는 사람에게만 천지를 천하 만물을 다스릴 열두 보좌에 앉아서 천하만국을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있지, 세상에 예수님 피도 모르고 예수님 피의 의미도 모르고 나는 인간이니까 만물의 영장이다. 이거는 저주받을 인간입니다. 그거는 자기 주체파악도 안 된 인간이에요. 이런 복음적인 핵심이 이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창세기 9장에.

앞으로 여러분들이 주변에 인생을 살면서 저도 마찬가지고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요. 그런데 제발, 크게 써야 돼. 말로 해서 안 들어. [자책하지 말라] 주님의 피 묻은 손이 부끄럽다. 제발 자책하지 말라. 아, 행동을 바르게 했으면, 그때는 이렇게 했으면. 스스로 자책하지 마세요. 우리를 구원한 주님의 손이 부끄럽습니다.

사람이 자책을 이렇게 하려고 치면 벌써 기준이 누구냐 하면, 자기가 기준이 돼버려요. 이거는 멋드러지게 잘한 짓. 자기가 스스로 나는 이거는 예쁜 짓, 이거는 미운 짓, 스스로 결정해 버려요. 자기가 피도 만지지 못하는 피 흘릴 자격도 없는 주변, 변두리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 마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주변이면서도 중심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바로 중보기도라는 그러한 이상한 미신이죠. 자기가 중보기도 할 자격이 못되는데 자기가 마치 중심이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자, 그렇게 창세기 9장 저물어 가지요. 그래서 창세기 9장 20절에 보면,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그러니까 창세기 9장 그걸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이미 확정된 책입니다. 이 세상은 이젠 빈틈이 없고 이 세상에 예외 규정 없습니다. 모든 게 언약 중심으로 팽팽 돌아갑니다. 소용돌이 치고 있는 세상, 이게 세상입니다. 모든 게.

세상에 착한 사람 농사짓는다고 비 더 오고, 나쁜 사람 농사짓는다고 비 덜 오는 경우 있습니까? 없지요.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착한 사람이 스스로 자책할 거 없어서 착한 사람이 아니란 뜻이지요.

그럼 제가 문제 낼게요. 욥기 나오는 것처럼. 광야에 비를 내리시는 이유는? 이거 여기서 연장된 문제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광야에 비를 내리시는 이유는 뭘까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 광야에 불과하다 말이죠. 스스로 갖고 있을 어떤 스스로 챙길 의가 필요치 않아요.

하나의 우리는 광야의 비를 내리는 걸 보면서 그걸 자기 입장에서 같이 일치 시켜보면, 광야에 비 오듯이 내가 잘했다고 비 더 오고 못했다고 비 안 오는 게 아니고, 이거는 그냥 다른 출처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그냥 고맙게 은혜로 쏟아지는 거다. 이렇게 이해하라고 광야에 비를 내리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하는 이야기가 그거에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니가 하마가 애기 낳을 때 새끼 낳을 때 어떻게 낳는지 알았느냐? 묻는 이유가, 고래가 새끼 낳을 때 니가 알았느냐? 당나귀 낳을 때 니가 아느냐 묻는 문제는 그거 알라는 말이 아니고, 그거 알든 모르든 우리는 혜택을 입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아시라 이 말입니다. 혜택을.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새삼스럽게 예수 내가 믿는다는 말이 어폐가 있어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이 끌어안고 있는 상황을 눈을 떠서 알게 된 상황이 믿어지는 거지요. 믿을 때 비로소 끌어안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팍하고 끌어안았는데 우리는 눈은 엉뚱한데 가 있는 거예요.

그래 나중에 성령이 와서 눈 떠보니까 우리가 믿기 전부터 이미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끌어안고 있는 거예요. 자기 품안에 있는 거예요. 우리는 철딱서니 없어서 이래 두리번 저리 두리번, 또 자기 자신 보면서 또 좌절하고 그래 왔다 이 말이죠. 나중에 믿어 보니까 믿음이 있어 보니까 아하, 내가 내 쪽에서 하기 이전부터 이미 주께서 모든 걸 해 오셨다 이 말이죠.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중에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구십 몇 장인가 이런 게 있잖아요. ‘주 예수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 주 예수님을 내가 알기 전부터 주님은 나를 알고 있었다. 얼마나 좋아요. 제가 또 좋아하는 가사에, 하도 생각하면 잊어버리고, 생각하면 잊어버리고. 유행가는 잘 생각나는데 찬송가는.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이 쓸데없는 자에게 왜 은혜를 주셨는지. 은혜를 쓸데없는 자라는 것을 정확히 하는 것이 은혜를 주신 목적이죠.

은혜를 받고 난 뒤에 은혜 받았다고 까불락대는 게 은혜가 목적이 아니라 나는 쓸데없는 자였다. 은혜 받을 쓸데없는 자였다는 걸 새삼 깨닫는 거. 이거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최고 행복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 때 가장 큰 행복이죠. 그 약간 유사한 찬송가는 아니고, 대중가요인데 유사한 가사가 뭐냐 하면, 아무것도 해 준 것도 없는 나 같은 여자에게 왜 나를 사랑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나 같은 여자를 사랑하는지. 그게 있어요. 왁스가 불렀던.

아무것도 해 준 것도 없어. 해 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했다. 가장 하나님의, 그래서 제가 방정식을 제공, 제시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의 특징은 뭐냐? 항상 나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 일에 쓸데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쪽으로 하나님이 움직이면 아하, 지금 하나님이 성령이 나를 충만케 하시는구나. 사람이 그렇게 충만하게 되면, 심지어 남이 나를 돌 들고 때려 죽여도 나는 맞아 죽으려고 기쁨으로 웃으면서 맞아 죽습니다. 스데반 집사처럼. 그게 성령충만이에요.

그런데 성령충만도 받지도 못하고 흉내 내면, 하나님이시여, 나 같은 인간을 왜 죽이십니까? 이래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거는 가짜였습니다. 그거는 잠시 흉내 내다 들통 난 겁니다, 그거는. 교회봉사하실 때 아하, 나 같은 쓸데없는 자를 이렇게 청소하게 하시느냐? 또 헌금하시면서 나 같은 인간에게 이 귀한 돈을 하나님께 바치게 이렇게 하시니 참 하나님, 얼마나 큰 은혜인지 이런 마음으로 헌금을 해야 되지, 장로 시켜 줄 게 돈 내라. 이래 가지고 도저히 안 되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창세기 9장에서 이미 확정된 책입니다. 이미 신약에 있던 모든 복음이 구약에 왕창 이렇게 들어있어요.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할 일은 뭡니까? 그 언약에서 무엇이 뽑아져 나오느냐 그것만 주목하면 되겠지요. 그것이 바로 뭐가 뽑아져 나오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가 뽑아져 나와요. 축복과 저주가 뽑아져 나오는데, 그러면 사람이 아닙니까? 사람은 축복과 저주를 수레에 지게에 진 사람이 나오죠. 그러니까 우편배달부 같아요. 한 쪽은 저주를 전달, 전달, 전달하는 우편배달부. 한 쪽은 축복을 전달, 전달하는 우편배달부란 말이죠.

이번 주일날 제가 여자와 아이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데 뭐냐 하면, 남녀가 창세기 3장에 남자하고 여자가 나오잖아요. 죄짓고 난 뒤에 남녀 구분이 뚜렷하게 됩니다. 창세기 2장에서 남녀 구분이 뚜렷하게 되질 않아요. 그냥 한 몸이죠. 한 몸인데 죄짓고 난 뒤에 남자 따로 여자 따로 이렇게 됩니다.

남자 따로 여자 따로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은 사실은 이 자식이 하나님이 주신 자식이면서도 남자, 여자가 뚜렷하게 되는 상태에서 자식을 낳게 됨으로써 이 자식에 대해서 남자와 여자가 더욱더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가 뚜렷하게 확연하게 계기를 줘버려요. 그러한 기회를 줘버립니다.

그렇다면 이게 부모와 자식간에 갈등이 계속 일어나고, 또는 아버지와 엄마 사이에 갈등이 계속 일어나고, 서로 소유권주장 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의 이건 이 땅이 살만한 세상이 못된다는 것을 일, 이, 남자 일, 여자 이, 삼, 자식, 세 가지의 구조를 가지고 계속해서 이걸 굴리는 거예요. 수레바퀴 굴리는 거예요. 자전거에다 촛불을 꽂아서 자전거 돌려버리면 다른 사람에게 불이 획획 돌지요. 원 운동하잖아요.

그처럼 이 축복과 저주, 저주와 축복이 자식을 통해서 계속해서 전달, 전달되는 겁니다. 이런 남녀, 이런 관계를 알지 못하고 그냥 축복과 저주가 전달된다고 한다면, 어거스틴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뭐냐 하면, 어거스틴은 영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육체는 사람이 줬다. 이렇게 본 거예요. 이거는 문제가 안 되지요. 이거는 참 문제가 되는 겁니다. 큰 문제가 되는 거예요.

심지어 어거스틴 이후 16세기에도 사람이 여자는 밭이고 남자는 씨인데, 사람의 그 정자 안에 작은 사람이 들어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사람이 정자가 이렇게 있다면, 정자 안에 새끼 아이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문제가 있지요. 새끼 아이가 갖고 있는 정자 안에는 또 뭐가 들어있어요? 또 새끼가 들어있지요. 이런 문제가 생겨요. 성경 말씀을 기계적으로 그냥 기계적으로 이렇게 축복, 저주가 이렇게 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렇게 담겨서 온다고 기계적으로 담겨서 온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축복과 저주는 남자 일, 여자 이, 자식 삼이라면, 삼이 자식을 낳음으로 말미암아 남자, 여자가 구분되는 자체가 이것이 인간의 한계이며 이게 죄라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자식을 통해서 부모를 부끄럽게 만드는 식으로 전달되는 겁니다.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육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요. 이삭의 출현은 엄마, 아빠의 생각이 아니에요. 엄마, 아빠의 생각은 이스마엘로 끝나는 겁니다.

이삭이라는 자식을 통해서 엄마, 아빠 아브라함과 사라가 얼마나 육적인 생각이며 그런데서 이삭이 나올 수도 없는데 나왔다는 겁니다. 이거는. 이것은 아까 제가 찬송가 부를 때 하나님의 하는 일은 어떻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뭐 되게 합니까? 우리로 하여금 죄인을 죄 되게 하는 하나님 일이에요.

우리가 예상한 것도 하나님의 예상한 것을 정면으로 부딪치게 해서 거기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우리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형식으로 피를 흘리는 순교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성도는 부끄럽게 만듦으로 은혜라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와 용서로서 말미암아 주께서 구원하신 걸로 깨닫게 하는 식으로 주께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축복과 저주할 때 그냥 쉽게 말하면, 어떤 자식은 축복을 전달하는 지게에 이고 축복을 전달하는 노선이 있는 반면에 가나안과 함은 저주에 지게에 이고 후대까지 전달한다. 지금 제가 쉽게 이야기하잖아요.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후대가 자손이 선조의 자칭 축복이고 자칭 저주라 여기는 것을 수정하는 식으로 계속 간다 이 말입니다.

말 어렵다. 예수님께서는 더 어렵게 이야기했어요. 뭐냐 하면, 다윗의 주가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이 질문한 거예요. 다윗의 주가 누굽니까? 다윗의 주가 되려면 다윗의 조상이 돼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하죠. 시편에 보면. 다윗의 주가 저 끝머리에 대대 선조의 할애비, 할애비에 주가 있는 게 아니고, 세상에 다윗의 새끼, 새끼, 자식에 주가 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에. 우리 보고 성경해석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태어나지도 않은 분이 주가 되고, 우리는 그 주님의 후손이 돼버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선배와 후배는 시간이 과거에서 이렇게 오는 게 우리의 시간개념인데, 이건 거꾸로 돼서 나중에 오신 분이 먼저 된 자를 구원하는 식으로 잡아당기는 식으로 하더란 말이죠.

참, 그러니까 축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잠시 뭐 복 받았다, 병 나았다, 지금 우리교회 권사님 한 분은 당뇨 걸려서 오늘 아침에 동산병원에 가서 중환자실에 가서 투석한다고 지금 가서 권사님 고생하시는데.

그 뭐 병에서 나았다, 또는 돈 좀 벌었다, 이게 축복이 아니고, 진짜 축복은 십자가가 축복인데 그런 돈 벌고 건강한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하고 수정케 하는 그것이 죄로 인하여 세상 것을 바라보는데서 오는 그러한 거짓된 축복이라는 것을 수정케 하는 것이 뭔가 올 때 그게 축복이에요. 그 관계가 축복이다 말이죠.

내가 글도 그래 쓰고 이번에 사이트에 글 써놨습니다. [큰 사기]라고 써놨습니다만 MBC-TV에서 '디톡스'라고. '톡스'라 하는 것은 독초라는 뜻이고, '디'라 하는 것은 뺀다는 뜻이거든요. 영어로. 디톡스 기계를 해서 발만 쑥 담그면 발이 누렇게 되는 거예요. 그걸 독소 빠졌다고 해서 350만원에 팔아먹는 사기꾼으로 고발하는 프로가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거기다 썼는데 세상에 디톡스라 해서 350만원 날리면 그만이지, 한국교회의 사기는 영혼을 날려요. 영혼을. 350만원 정도가 아닙니다. 3500만원 정도가 아니고, 인간의 영혼을 파멸케 하는 사기를 한국교회가 치고 있습니다. 디톡스, 발 해서 색깔 보니까 당뇨군요. 색깔 보니까 위장이 안 좋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아이구, 사업이 안 됐습니까? 벌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엉터리 같은 판단을 내리고 검진을 내리고 진단을 내리더란 말이죠. 십자가가 복인데 어디서 엉터리 같은 돈 번 거, 건강한 거, 애 공부 잘한 거, 이런 것 가지고 사기로 해서 축복 받았습니까, 저주 받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사람 윽박지르니, 세상에 그게 얼마나 큰 사기입니까? 그래서 [큰 사기]라고 이름을 했어요. 큰 사기라고. 작은 사기도 아니고, 최후의 큰 사기라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창세기 10장에 들어가 봅시다. 이제 어쨌든 간에 이 세상에는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중립이 없어요.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아니면 축복입니다. 염소 아니면 양, 양 아니면 염소. 오른편 아니면 왼편, 왼편 아니면 오른편이에요.

이게 그 중앙에 누가 서 있어요? 예수님께서 인간 세계 한 복판에 중앙에 '기준'하고 섰기 때문에 예수님 자리 빼놓고 나머진 전부다 왼편 아니면 오른편, 오른편 아니면 왼편. 예수님 때문에 세상은 이미 둘로 쫙 갈라졌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게 언약입니다. 여기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복습하면 하나님 형상이고, 이분만 뭘 다룬다? 거룩한 용서의 피만 다루고, 다른 사람은 못 다루죠. 다른 사람은 다룰 수 없고, 다른 사람은 피에 접근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새삼스럽게 창세기에 보면, 사람은 식물성 음식만 그러니까 미나리, 고사리, 어제 먹어봤지요. 산채나물. 그런 것만 먹게 되어 있다가 창세기 9장에서는 개고기, 무슨 땅개, 뭐 온갖 것 닭고기 다 먹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서도 동물성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됩니까? 이게 하나님이 나한테 주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내 권한이라는 생각을 꺾어버리고 뭘 조심해야 돼요? 그래, 피는 피해 가야 돼.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생각해 보면, 인간은 이 세상 나머지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언약의 주인 되시는 그분의 소관이지, 결코 내가 다스리고 정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분리되죠. 괴리가 벌어집니다. 하나님 형상과 인간의 괴리가.

창세기 10장에 보면,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 이렇게 되는데, 드디어 이 세상에는 세 아들이 분할되는 상태에 있는데, 사실은 세 아들이 분할되는 게 아니고, 결국은 둘로 나뉘죠. 하나는 가나안과 함, 한 쪽은 이게 저주죠. 이쪽은 뭡니까? 셈과 야벳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이것이 이런 게 어렵다. 하나의 공식을 제가 제공할게요.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는 공식은 뭐냐? 자연환경은 인간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같이 축복을 받을 환경인지, 저주를 받을 환경인지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식이에요. 저주 받을 인간이 거주한 땅은 저주의 땅이 되고, 축복받을 인간이 거주한 땅은 축복의 땅이 되는 겁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주변이 뭐가 받고? 복을 받고. 그래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면 복을 받고. 자연환경은 이 축복에 따라 운명이 발생되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축복의 땅에 섰다하면 예수님은 더불어 온 것은 뭡니까? 새 하늘과 새 땅. 그럼 예수님 빼놓고 여기는 뭡니까? 이것은 저주받아야 될 유황불로 사라져야 될 유황불 받아야 될 저주받을 현재 보고 있는 하늘과 땅,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오게 되고, 쉽게 말해서 땅은 어떤 인간이냐에 따라서 축복은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축복을 따내려고 하지 마시고 내가 어떤 인간만 되면, 복은 오지말래도 오게 되어 있어요.

다윗을 시므이가 저주했잖아요. 다윗은 신나는 거예요. 왜? 전부다 저주가 오는 도중에 뭐로 변하느냐 하면, 복으로 변해서 다 오니까. 세상에 그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마치 무식한 토인들이 백인 보고 백인을 공격한다고 길에 있는 다이아몬드 주워서 죽어라 던지고 금 던지고 다 던지는 거예요. 백인은 다이아몬드, 자기는 저주한다고, 다이아몬드 주워서 더 주세요. 하고 끌어 모은 거다 말이죠.

다니엘의 세 친구가 세상 사람이 보기에 가장 저주스런 곳에 갔어요. 그게 뭔가 하면, 풀무불. 다니엘서에 풀무불 속으로 들어갔지요. 가장 저주받은 곳인데 그곳이 뭡니까? 예수님이 기다리는 곳이잖아요. 예수님이 함께 있는 곳이잖아요. 환경을 별 문제 안 돼요. 거지 나사로가 환경은 거지였지만 인간만 똑바로 돼 있으니까 나중에 어디 갔어요? 아브라함 품에 안겼지 않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장에는 뭐냐 하면, 꼭 환경과 대조해요. 모세는 애굽의 바로의 아들인 것을 거절하고 하늘의 상을 바라보면서 고난 받기를 즐거워 기뻐했단 말이죠. 그리고 마태복음 5장에 봐서는 내 의와 내 복음에 의해서 즐거워하라. 억지로 미소 띠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기쁘고 즐거운 거예요. 자기는.

왜? 자기는 복음이 있으니까. 환경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환경은 뒤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가는 곳이 축복이니까. 복이 줄줄 따라 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 믿는 사람은 복을 따내는 사람이 아니고, 복이 따라 오게 되어 있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어린이 집을 하든지, 그냥 백수 같이 놀던지, 항상 가는 곳마다 복이 줄줄. 오지말래도 귀찮아 죽겠어. 그 사람이 대전, 서울, 대전, 부산 찍고 어디가도 그거는 복이 따라 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어는 곳에 가든지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복이 오게 되어 있어요. 구태여 축복을 안 원해도 본인 자체가 축복을 부르는 이름이에요. 본인 자체가 축복을 부르는 힘이 돼요. 언약의 소용돌이, 수채 구멍이에요.

아까 시작하기 전에 사람은, 우리 정 목사님이 이야기하셨듯이, 덕이 되는 사람이 있다 하거든요. 물론 정판옥 목사님 보고 했지만. 성도는 항상 어디가도 덕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언약으로 확정된 체계입니다. 확정된 체계.


10분 쉽시다.
 우리교회(IP:122.♡.55.30) 07-03-10 14:04 
20070302b 울산강의-창세기 10~12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여기 10장에 보면 지명들이 많이 나오지요. 그 지명들이라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 아까 이야기한 것은 지명이란 게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은 지명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울산서 언양 가는데, 지명이라 하는 것은 사람 있는 곳만 지명이 붙어있지, 울주 이 옆에 지명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사람이 사는 중심 따라서 지명이 넓어지잖아요. 그죠?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람이 여기 살았었땃다. 흔적을 남길 때, 지명이 붙어요.

그게 어렵게 말하면, 의미라 하는 것은 사람 위주로 의미가 붙거든요. 사람이 없는 곳은 의미가 없어요. 황무지에 지명이 붙일 필요 없잖아요. 개가 오줌 누고 가는 곳에 지명 붙일 필요 없어요. 어느 개와 왔다. 그럴 필요 없어요. 사람이 뭔가 했을 때 내가 여기 왔노라, 보았노라. 뭐, 지명을 난 오줌 누고 할 수 있지만 개는 필요 없잖아요.

그런데 그 많은 지명도 저주라는 범주를 벗어날까요, 안 벗어날까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그 지명들이 많은데, 아마 아나운서 시험 칠 때 이걸 시험문제로 내면 좋겠어요. 여기 10절 같은 경우에 그의 나라는 시날과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랄랄라라. 여기 나오는 어려운 용어들, 루딤과 아나님과 르하빔과 납두힘 이렇게 쭉 나오는 거 있잖아요. 발음 연습하면 좋겠는데. 

이러한 숱한 사람들이 거쳐 갔지만 저주라는 하나님의 큰 범위에서 저주를 벗어날 그런 힘들을 발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 받은 땅에 우리가 주목되는 것은 바벨이에요. 그 바벨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여기 10절에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 전부다 조상들 이름들이에요. 이름들인데, 촌장들 이름들.

주몽이라는 드라마 보면 나오잖아요. 다물군, 다물군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해모수와 관련되어 있는. 이게 삼국유사에 보면 주몽이 일을 할 때 사람들 가지고 일하지 않았어요. 주몽이 진퇴양난에 빠졌을 때는 거위들이 와서 길을 열어 줬습니다. 이거는 사람이 하나 가면 천지자연은 모든 하늘의 별까지 총동원해서 그 인간을 팍팍 밀어줍니다. 그럴 때 이 자연과 인간과 이 모든 것은 서로 막힘없이 통용이 돼요. 경쟁 없이 경계가 사라지고 하나로 숨통이 터지는 그러한 체제를 이룬다 이 말이죠.

창세기 10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나오는 지명들 아무리 해도 이미 조상이 함과 셈과 저주 받기로, 여기 창세기 9장에 보면,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확정지었으면 빼도 박도 못해요. 저주 받은 운명이. 어떤 저주 받기로 되어 있으면 그 저주 받은 운명에서 인간의 힘으로 헤쳐 나올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아까 남여 같이 또 오해하는 거예요. 그러면 한번 조상이 저주받았으면 그 후손은 저주받을 수밖에 없겠네요. 라고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데 그걸 대비해서 그렇지 않습니다를 대비하게 해서 바로 그것이 하나의 오해며, 저주와 축복은 모형에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고, 장차 후손에서 거꾸로 소급해서 결정된다 하는 그 이야기를 한 겁니다.

제가 아까 원, 투, 쓰리. 남자 원, 여자 투, 자손 삼 할 때 삼이 남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지, 이건 내 자식이니까 내가 결정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소급해서 올라가는 시간관 때문에 그렇다 이 말입니다.

제가 보통 어려운 말할 때는 다 이게 유식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고, 뭐 여러 가지 질문들이 나올 걸 미리 대비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함의 자식은 무조건 저주 받고 가나안 저주 받는가? 예. 무조건 저주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신약시대에 보면, 이 저주 받을 자식에게 영생이 들어가고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을 받는 일이 벌어져요. 축복의 계통이 아닌데 다른 계통에서 축복이 계통을 떠나서 축복이 오게 되면, 지나온 축복과 저주의 계통은 하나의 모형이었습니다. 라고 하나의 모델하우스였습니다. 하고 그게 다 들통 나 버린다 말이죠. 들통 나 버리죠.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계통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 뭐래도 우리는 천국에 간다. 라고 우기는 그 사람들에게 믿음 있는 백부장을 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들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은 천국의 본 자리에게 쫓겨날 것이고, 이젠 이방인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할 것이다. 라고 이렇게 역전을 시켜버려요.

그것은 바로 어떤 사람이든 나는 이래이래서 복 받았다. 구원받는다. 라고 우기는 사람은 그거는 구원받은 사람 아니고, 나는 아무 구원 받을 것도 없는데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원하시니까 그 언약의 능력이 쏟아져 왔으니까 구원받았지, 내가 뭐 구원받으려고 애쓰지도 않았는데 구원해줬어. 이런 주님에 대한 고백, 주님에 대한 증거로 나타날 때만 성도라 이런 이야기가 법칙이 지금 이것과 적용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동일하게.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거 볼 때에 자꾸 기계적으로 우리의 상식적으로 하시면 안 됩니다. 심지어 세대주의 같은 보통 목사들 설교할 때는 한번 저주받으면 영원한 저주받았기 때문에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예정론을 설명하는데 그거는 옳지 않습니다.

어쨌든 간에 여기에 바벨이라는 땅은 상당히 중요한 땅인데, 8절에 보면, "구스가" 구스라 하는 것은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라는 설이 있고 에티오피아 남쪽이라는 설이 있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이 지역 명들을 보면, 함의 자손의 지역 명들이 주로 어느 쪽이냐 하면, 이스라엘 중심으로 해서 남쪽입니다. 지구가 이래 있다면 지중해, 이스라엘, 이스라엘 이 밑에가 이쪽입니다. 이스라엘 쪽은 셈이고, 이쪽은 야벳이고 그런데, 이쪽은 함인데 그 당시는 아프리카고 뭐고 없었어요. 그냥 셈을 중심으로 해서 아래쪽이 함이고 위쪽은 야벳이고 그렇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흑인들은 저주받는다. 이것은 바로 아까 이야기한 기계적으로 적용한 거예요. 그러면 흑인 중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리고 백인 중에서 지옥 간 사람은 어떻게 설명돼요? 이건 말이 안 된다니까. 어중이떠중이 같은 황인종은 그럼 뭐예요? 말이 안 되거든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건 모든 종족은 오직 노아의 언약에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그거 하나 정답이에요. 모든 종족은. 필리핀은 저주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안 돼요. 모든 종족은 저주 받는 거 이전부터 이미 은총을 자연 은총이라 하는데 모든 혜택을 입고 있어요. 그리고 진짜 그 사람이 영원히 저주 받을 자인지 안 받을 자인지 그것은 우리가 판정을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만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이 저주받은 사람이에요. 그런 점에서 우린 알고 있지요. 그런 점에서 우린 알고 있다 이 말이지요. 이근호 목사 당신이 뭔데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안 받은 사람이다 당신이 예수님도 아닌데 어떻게 측정하느냐? 라고 할 때 나는 누구를 측정할 자격이 못되고 예수님만이 어떤 사람을 측정합니다. 라고 나는 고백하기 때문에 나는 측정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어려운 말 하지 맙시다. 항상 뭘 아느냐가 아니라 뭘 증거하느냐 가 중요해요.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만 증거하면 신자입니다. 그렇지 않고 거기다 꼭 자기를 포함시키면 수상한 사람이죠.

여기에 가나안 땅, 셈과 함도 가나안 땅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가나안 땅에 사는 소돔과 고모라, 전부다 저주 받은 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10장 21절에 보면,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쭉 나옵니다. 그래서 셈과 야벳은 이쪽에 이제 대표적인 축복과 저주로 둘로 나누죠.

이렇게 나눠 놓고 창세기 12장 봅시다. 12장 2절,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그 다음에 뭡니까? "복의 근원"이죠. 복의 근원이 이렇게 아브라함 인물 중심으로 돼버리면, 더 이상 지명은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리고 종족의 의미도 없습니다. 비록 이방인이라도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그는 복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앞에 있는 저주, 축복은 뭐냐? 이거는 몽땅 지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준비한 어떤 새로운 인물에 의해서 과거에 정해놨던 모든 경계가 저주와 축복의 경계가 무의미하게 뒤에 나오는 분에게 흡수 통합된다는 걸 알려 주는 겁니다. 흡수 통합되는 거.

어떤 예수 믿는 아가씨가 불도가 심한 집에 시집갔다. 그 불교 집안은 저주받고 예수 믿는 아가씨만 새댁만 구원받는다. 맞아요. 하지만 십년 뒤에 자기 살아왔던 친정집은 저주받고, 자기가 불도가 심했던 그 집은 구원받는 가정이 될 줄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까 했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복을 몰고 간다고. 예수 믿는 사람을 떠나버린 것은 저주가 될 가능성도 있지요. 하여튼 성도가 가는 어느 곳이든지 복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 받는다 해서 이거는 움직이는 복이 아니라 근원이 아니라, 아니다. 고정된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복의 근원, 새로운 무빙, 움직이는 뭔가 움직여 나가는 복의 근원되는 거예요.

이게 야곱에게도 나옵니다. 하늘의 문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벧엘이라는 지명이 하늘의 문이 아니고, 처음에는 야곱이 가만있을 때는 거기에 꿈을 꾸는 그 장소가 하늘의 문이 되겠지만 일단 복을 챙기고 난 뒤에는 야곱이 가는 곳마다 그게 벧엘이 돼요. 하나님의 복이 떨어지는 곳이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받을 때는 요단강이 복의 근원 되다가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낫게 했을 때는 문둥병의 현장이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다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는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하다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는 십자가가 복의 근원 되다가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제자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 문 노크도 없이 그 속에 들어왔을 때 그 예수님이 함께 있는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가 되는 겁니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있으면 그곳이 천국이다 이 말입니다.

교인 적다고 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제가 아까 목사님 설교 보니까 여긴 전부다 이 교회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어진 것 없고, 전부다 마징가 Z 조립하는 것처럼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화평교회에서 저기서도 날아오고 여기 오고 그렇게 해서 하는데, 그거는 좋다고 봐요. 왜냐? 그 자체가 뭔가 움직인다는 뜻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모든 걸 갖춰 다 놓으면 나중에 교회 찢어버리면 저 환풍기도 어느 교회 갈 줄 모른다. 뭔가 움직이는 거.

교회 보면 어떤 사람이 열심히 봉사, 청소 잘 하다가 하루아침에 말 한 마디 삐져서 교회 안 나올 때 있어요. 그때는 어쩌나 할 때 또 다른 평소에 농땡이 부리는 어떤 집사가 그 자리를 채워서 청소하고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목사가 계획 세운다고 집사님, 삐지시고 그 다음에 이렇게 하세요. 이렇게 지시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목회자는 주님이지 목사가 아닙니다. 다 주님이 알아서 교회를 잘 꾸려가고 있는데, 우리가 교회보고 낙심하고 실망해 버리면 그거 자체가 주님의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거죠. 주님의 손을 부끄럽게 만드는 겁니다.

복이라 하는 것은 성도가 모인 곳, 그게 바로 복이 되지, 움직이는 것이지 한 곳에 고정 잡아서 할 수는 없어요. 하나님은 법률을 능가합니다. 사랑은 법을 이깁니다. 사랑은 법을 없애 버려요. 법이 있는 곳엔 두려움이 생기지만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사랑인데 무슨 두려움이 있어요. 오빠 못 믿나? 이카거든요. 물론 못 믿죠.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입니다. 사랑하니까 믿고 내게 맡기라 이 말입니다. 물론 발로 차버리지만.

창세기 11장에서 어떤 지명, 확정된 저주의 땅, 축복의 땅이 나중에 모든 것은 다 희석돼버리고 거기서 한 인물이 나옵니다. 그러면 인물 하기 전에 지명으로서의 축복, 저주는 이제 수명을 다해야 되거든요. 거기서 나온 사건이 뭐냐? 바벨 사건입니다.

이 바벨탑에 동조한 사람이 뭐냐? 그 지명을 축복된 지명을 하나님 주신 땅을 영구히 천국으로 만들게 하는 수작,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영원히, 그걸 뭐냐? "흩어짐을 면하자" 흩어짐을 면하자는 말은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관계 위주가 아니라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이 땅 위주로 세상을 한번 재정립해보자는 그런 욕심에서 나온 겁니다. 흩어짐을 면하자는 말이죠.

사람이 형제간에 우애 좋을 때는 부모님 앞에 두고 이런 약속을 합니다. 아빠, 엄마 연로하신데 그만 돈 이렇게 재산 있는 것 모아서 4층 지어서 아버지, 어머니는 제일 어른이시니까 아래층에 사시고, 제일 막내는 4층에, 중간은 3층에, 맡이는 2층에 살아서 화목하게 살자. 의가 좋을 때는 동서 간에 의가 좋으면 그거 대찬성이죠. 서로서로 탁구공 넘기듯이 시어머니를 안 떠맡아도 되지만. 그런데 의가 나쁘면 그때 그 계획 백지화시킨 것 너무너무 잘했다. 이젠 전화도 오지 마라. 꼴 보기 싫다. 아예 상종도 하기 싫다. 형님 댁이라 하면 아주 진저리난다. 이럴 수가 있는 겁니다.

사람이 기분 좋을 때는 4층 건물 빌딩지어서 살자 하잖아요. 그게 바벨탑이에요. 그건 뭐냐? 흩어짐을 면하자에요. 여기가 좋사오니 더 이상 뭐. 베드로도 그런 실수했다고. 우리끼리 살면 좋다. 박태선이, 얼마 전에 기장을 갔다 왔는데, 신앙촌이에요. 신앙촌을 왜 만들었습니까? 같은 신앙 같이 공동재산 만들어서 소비도 공동소비, 생산도 공동생산해서 한번 지상천국 만들자 했잖아요. 결국 박태선의 아들 칠공파 갸가 돈 다 떼어먹고, 나머지 완전히 노예생활 한 것 전해지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렇게 지명, 어떤 특정 그것으로 붙여지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럴 수밖에 없지요. 그것은 뭐냐? 눈에 보이는 게 전부니까, 땅이니까. 소유니까. 그것이 바벨로 구성됩니다. 바벨탑이라 하는 것은 이 땅의 영원성, 영원히 흩어짐을 면하자, 이 곳에 살자, 하는 그것이 높아져서 하늘까지 닿아요. 이제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어서 흔들림이 없는 기초를 쌓자. 이렇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걸 목적이 '흩어짐을 면하자'가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저주를 하는 게 흩어버리리라는 거죠.

왜 그러냐? 사람이 생각한 축복과 하나님이 따로 준비한 축복이 질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의 축복은 형님, 동서여, 동생아, 우리 흩어짐을 면하자. 이렇게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 복음 안에서 멀리 미국 가 살고 캐나다 살더라도 복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면 그건 안 뭉쳐도 그건 친한 형제보다 더 친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주님 안에서 흩어짐을 면하지 않아야지, 내가 가질 수 있는 소유개념으로 흩어짐을 면하자 하는 것은 원래부터 생각한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발 가지고 쓱 모래성을 휘이익 묻데 버리죠.

바벨탑이 [하얀거탑] 아닙니까? 명인대학, 자기 권력을 쥐고 거기에서 자기 편 아닌 사람은 다 잘라내 버리고. 그 드라마 보면서 이거 진짜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요. 하여튼 바른 소리하고 뭐 증언하려고 해도 나한테 이익일까 먼저 챙기고. 먼저 챙기잖아요.

그래서 제가 교회 떠나 나올 때 사람들이 주위에서 하는 소리가 고개 한번만 더 숙이지. 그런데 그분들은 몰라요. 고개 숙이는 정도가 아니고, 멱살을 쥐고 싶다는 사실을 내가 많이 양보해서 아무 소리 안 나오는 걸 모르고, 고개 한번 숙이면 아무 탈 없을 건데, 하는 거예요. 아무 탈 없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결국은 예수님을 빙자해서 교회, 내 교회 만들어놓자는 수법 밖에 안돼요. 이건 축복이 아니거든요. 바벨탑이라니까. 허연거탑이거든요. 허연거탑.

차라리 (     ) 될지언정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주님만 믿는 사람이 같이 모인 게 교회지, 기존교회, 부동산 있고 그걸 중심으로 해서 모여 봤자 그거는 제일 먼저 그 교회에게 뭔가 재산을 헌납하고 했던 시조의 똘마니 밖에 안 됩니다. 시조의. 자기 아버지가 세운 교회 같으면 그 아들 대대로 자기가 명예를 빨아 먹어요. 영광 받고자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들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새순교회 할 때 주식 누가 제일 많이 쌓습니까? 오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 교회 주인 따로 있는 나 같은 거 인간취급 해주나? 나, 나가버린다. 이래서 한두 명 다 빠져나가 버려요. 그래서 기존교회에서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목돈을 강제로 태우게 해서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집사에서 장로 될 때까지 목돈 집어넣어서 이제는 못 빼게 만들잖아요.

그런데 새순교회나 우리교회나 그런 것이 일체 없기 때문에 이건 뭐, 왔다가 갔다가 왔다가 갔다가 좋은 소리 한 번 못 듣고. 십일조 한 게 있나 투자 한 게 있나, 이거는 뭐, 심심하면 와서 아직도 복음 전하네. 하고 조금 잇다 봅시다. 그리고 일년 뒤에 안 와. 안 온다 싶으면 삼 년 뒤에 또 등장하고. 또 한 두 번 나오다가 이년 뒤에 행방이 불명이고. 또 안 나오고. 편한 거예요. 우리교회 안 나온다고 탕자라고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몸은 이런 공간을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전, 믿습니다. 택한 백성은 결국 모이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창세기 11장에서 흩어짐을 면하자 하는 것 때문에 주께서 그것을 맞받아서 흩어짐을 면하는데 그때 그 사람들이 동원된 게 뭡니까? 흩어짐을 면하자 할 때 일치된 마음을 강조했죠. 일치된 마음을 모아서 탑을 쌓으면서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닿게 하자 이렇게 했잖아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시다. 뭘 제거해야 됩니까? 이건 축복이 아니잖아요. 왜냐? 이거는 땅 중심의 복이기 때문에 인간 고정개념의 복이기 때문에 미래에 서 있다. 미래의 약속이 아니다. 이거는 모형을 가지고 만들어놓고 실제라고 우기기 때문에 아니잖아요. 실제 축복은 미래의 십자가로 오잖아요. 따라서 이 이름을 십자가 이름으로 바꿔야죠. 무슨 이름으로 바꿉니까? 이거는 주의 이름으로 바꿔야죠. 그래 일치된 마음은 뭐로 바꿔야 됩니까? 성령으로 받은 마음으로 바꿔 줘야겠죠. 이건 주님의 뜻입니다.

설혹 흩어짐을 면해도 나중에 주의 이름으로 하나의 마음이 되려면 무슨 마음이 돼야 돼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언어에요. 그게 뭐냐? 성령 아닙니까. 그러면 성령이라면, 지금 바벨탑 쌓는 사람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성령이 안 왔지요. 성령을 대신할만한 게 뭐예요? 성령을 대신할만한 게 뭐냐 하면, 그게 언어입니다. 마음을 서로 의사소통하고 마음을 전달할 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잖아요. 그 언어가 인간의 마음의 의미를 한단 말이죠. 그것까지 한다고요.

그런데 오순절 날 다락방에 뭐가 옵니까? 불이 혀같이 임할 때에 그들은 각각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면서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하죠. 참 재미있지요. 각각 다른 언어로 흩어질 수밖에 없는 보통 같으면 안 통합니다. 안 통하는데 그게 마치 바벨탑처럼 모이죠. 어디로 모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것이 한국어로 하든지 중국어로 하든지 필리핀어로 하든지 간에 누구든지 어떤 언어든 개의치 않고 어떤 표준어도 없고, 다만 성령이 아니고서는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그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생각했던 영원한 축복의 나라. 그것이 이미 바벨탑, 11장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11장에서 남긴 과제가 뭐냐 하면, 우리 이름을 뭐로 바꾼다? 우리 이름을 뭐로 바꿔요? 주의 이름으로 바꿔야 되겠지요. 처음에 누굴 선택합니까? 인간의 이름, 아브람을 선택해서 아브람에다 주의 이름을 대입해 보니까 아브람의 이름이 뭐로 바뀝니까? '아브라함'으로 바뀌죠.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는데 누구가 개입되면 안 됩니까? 이거는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고, 주의 이름이 개입될 때 여호와께서 개입될 때만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사래가 ‘사라’로 바뀌죠.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면 사람이 영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느니라. 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뭘 알아야 돼요? 도대체 내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냐를 알아야 돼요.

그게 뭐냐? 기도하기, 전도하기, 설교듣기, 교회 나오기,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하고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것을 주어모아 봤자 내 이름을 하늘까지 높이는 것 밖에 안 됩니다. 기존교회가 다 그렇게 해요. 내가 집사에서 장로되고 목사되고, 이거는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봐야 결국은 육에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나버려요. 내 이름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육으로 하면서도 뭔가 내 힘으로 안 될 때도 있더라. 그건 뭐냐? 내 죄를 아는 것. 주여, 이런 것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 피로 구원받습니다. 이런 것은 은혜로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예요. 그것은 바로 우리 힘으로 흉내도 못 내고 우리 힘으로 재생도 안 되는 거. 그것은 주여, 제가 바로 쓸데없는 자군요. 주께서 인도하니까 구원받는군요. 라는 그 스쳐가듯이 짧은 그 순간이지만 깨닫는 겁니다.

아까 같이 내가 주님을 붙들 때 붙드는 게 아니고, 주님이 이미 우리를 창세전부터 붙들고 품에 안았는데 잠시 성령을 받고 보니까 내가 참, 여러분, 캥거루 엄마 배, 자궁에 누구 들어 있어요? 애가 들어 있잖아요. 애는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엄마 붙들어서 구원받은 줄 알지만 사실 이미 포대기에 들어 있잖아요. 제가 갓난 애기 업은 새댁을 가만히 보면, 애가 등어리에 애가 그 보태기가 자기 세계의 전부라고, 거기다 마음껏 기분 좋으면 마음껏 흔들어댄다고. 그럼 엄마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어어, 야가 왜이카노? 붙들지요.

자기 세계에서는 마음껏 자유를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은 포대기 가지고 묶어놨기 때문에 안 떨어지는 줄 모르고 자기가 균형 맞춰서 안 떨어지는 줄 알고 착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로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눈 떠보니까 아하,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보대기 안에 지금 처음부터 있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걸 우리가 또 다른 포대기에 있는 아이하고 싸워서 잊어버려요. 저는 35명 보대기, 나는 12명 보대기, 이게 뭐고? 죽어버릴까? 이게 사는 기가? 저쪽 교회는 삼천 명, 여기는 열두 명, 아니 나 죽어버릴까 이래하고. 예수 안이 중요한데, 예수 안의 집이 축복이란 걸 모르고, 그 안의 숫자 세고 있다고.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이면서 아브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라이면서도 사래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지금 창세기 12장부터는 뭘 보여주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어떤 장소에 가든지 간에 그 장소가 문제가 안 되더란 이 말입니다. 어떤 장소든 간에 아브람은, 제 발음이 안 좋기 때문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아니고, 세 자로 아브람은 육적인 아브람이기 때문에 장소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져요.

저 사람을 의식해서 애굽에 갔을 때는 야, 저 왕에 내 아내가 너무 예쁘기 때문에, 물론 그게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만, 내 아내가 예쁘기 때문에 분명히 내 아내를 뺏고자 장애물 되는 나를 제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지혜를 짜내서 나도 살고, 아내도 사는 수가 뭘까? 아, 이러면 되겠네. 아내의 미모는 어쩔 수 없는 거, 아내의 미모를 통해서 당신도 살고 나도 살자. 라는 제안을 자기 부인보고 이렇게 하지요.

요즘 부모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어요. 의사하고 결혼, 남자는 의사인데 돈은 없고, 그런데 친정에는 부자니까 친정 식구들 돈 확 끌어 모아서 병원 지어서 자기는 원장하고. 보통 그렇게 합작하잖아요. 그대로 인하여 내가 살고, 내로 인하여 그대도 살고. 동업처럼 된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그게 지금 남녀 관계만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통박 굴리는 게 그 범위 내에서 안 벗어납니다.

우리 정석훈 목사님, 사모님 때문에 정석훈 목사님 살고, 정석훈 목사님 때문에 사모님이 어떤 의미가 생기고. 그게 육적인 거예요. 다 그럴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우리 개혁노회에 있는 목사 보고 다른 목사들이 빈정대기를 사모가 버니까 저렇게 목회 복음 전하지, 사모가 안 벌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느냐? 그렇게 바른 소리들을 해요. 제 아내도 지금도 하고 있고, 피아노 레슨 얼마나 했다고요. 말도 못하지요. 그런 오해 아닌 오해들, 참된 오해를 하고 있어요.

그럼 우리는 아니라고 할 거냐?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 이름이 아니고, 아내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원받은 것을 왜 너희들이 이야기하지 않느냐? 당신의 문제점은 이렇게 살았다가 아니라 당신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사는 것이 부족한 것을 인정하잔 말이죠.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게 한계입니다. 순교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순교 해봐야 맨 육으로 순교하니까. 아니고.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이런 나에게 주의 이름으로 이것도 용서될 수 있다는 거. 언약에서 나오는 그 능력으로 축복된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처럼 돌아다니면서 이제 깨닫게 해요. 아브라함이 돌아다니는 것은 모두 아브라함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고, 죄와 더불어서 축복이 되게 하시는 놀라운 기적적인 기적들이 죄와 동시에 죄가 나타나고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축복으로 변하는 겁니다.

그 한 예를 들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좋다, 해서 자기 아내를 상납을 하잖아요. 성 상납을 하잖아요. 바로한테. 그래서 바로는 당신은 자발적인 성 상납입니다. 이렇게 하면서도 밤에 합궁을 동침을 하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큰 혼쭐을 내지요. 그러니까 정신이 번쩍 들어서 당신 때문에 내가 죽게 되었다고. 왜 당신은 당신의 아내와 당신의 가치를 왜 스스로 무시하느냐?

제가 아까 했지요. 우리는 가는 곳마다 뭘 몰고 다닌다? 복을 몰고 다니는데, 우리는 철이 없어서 주께로 받은 복을 세상 사람들에게 빼앗길까봐 철없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복이 소유될 것 같으면 빼앗길 수 있는데, 우리가 주는 복은 소유가 아니라 계속 주시는 복이잖아요.

아까 울산에 비 올 때 울산의 태화동에 비 올 때 저쪽에는 방어진은 비 안 왔습니까? 비 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태화강에서 비 왔다고 방어진 가면 비 안 옵니까? 내가 비를 맞지, 내가 비를 소유해서 자기가 스스로 뿌려가면서 쏘아대는 게 아니잖아요.

축복이라는 것은 위에 저 스스로 오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받은 복, 끄집어내고 쏘아댄다고 그게 복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얼마나 복을 못 받았으면 지가 이렇게 연기를 내겠습니까마는 아브람이 깜짝깜짝 놀라는 것은, 자기가 가는 코스가 이미 확정된 코스를 가고 있지, 그런데 다만 자기는 그걸 계속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돌아보면 확정된 코스인데 한 걸음 디디려면 난감한 거예요. 난감하니까 한 것은 뭡니까? 인간적인 것은 다 동원하는 거죠. 주님께서 안 가르쳐주니까 내 마음대로 하렵니다. 해서 지 마음대로 이스마엘 낳아 버리고, 지 마음대로 해 버려요. 믿습니다. 하고 지 마음대로 해 버린다고. 그걸 갈 바를 알지 못했지요. 히브리서에 보면.

갈 바를 알지 못했는데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해서 그걸 근거로 지옥 보내는 하나님이 아니고, 갈 바를 모르는 게 우리의 본심이었고, 갈 바를 몰라도 괜찮아요~ 하는 게 주님의 뜻이다 말이죠. 갈 바를 알아서 가면 그거는 지가 예수님이게. 갈 바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갈 바를 모르는 것은 갈 바를 모르는 거고, 인도하시는 건 따로 인도하는 거고. 왜 스스로 자기를 잡아당기면 그건 연기하는 것이지, 이게 자기 허점만 늘어날 뿐이지, 소용없습니다.

창세기 12장의 흐름은 뭐냐 하면, 이미 우리는 축복의 샤워실 속에 그냥 통과하면서 그 축복으로 인하여 내 본색이 검은 더러움이 드러나는 그런 겹치는 두 가지 양상으로 보여준다는 거예요. 가만있으면 깨끗한데 축복 받는 순간 더러움이 더러움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축복을 안 받으면 죄가 안 드러나는데 축복 받은 자이기 때문에 감출 수 없이 자기의 죄가 드러나는 그런 축복의 샤워시설이 잘된 곳을 통과하고 있단 말이죠. 그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여러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 하잖아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봤습니까? 아니지요. 모세도 하나님을 정면으로 안 봤잖아요. 성경은 하나님을 봐서 믿는 게 아니고, 안 봐도 만나는, 안 봐도 다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안 봐도 알 수 있는. 어떤 지식이냐 하면, 보통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경쟁합니다. 네가 잘났느냐, 내가 잘났느냐 경쟁하는데.

언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냐 하면, 아예 잘났다, 못났다 경쟁이 안 될 정도로 어떤 분이 다가왔을 때 그게 하나님이 다가 온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 당신은 게임이 안 돼. 나는 무조건 졌어. 무조건 당신 앞에 죄인이야. 그저 나는 뭐, 고개도 못 들겠어. 라는 분이 떡 하니 나타날 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나타납니다.

만약에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자기를 부끄럽게 만드는 행동을 부끄럽게 만드는 진짜 자기를 변명의 여지도 없게 만드는 어린애가 왔다면, 어린애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고, 어린애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다. 이 뜻입니다. 제 말을 그렇게 해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서로 잘났다 할 때 하나님이 나타나는 방법은 어린애를 동원해서 잘난 제자들 앞에 내세우는 방식이에요. 어린애가 하나님입니까? 이렇게 따지지 마시고, 어린애를 내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제자들은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죠. 주여,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것을 느끼게 만드는 그 순간이 하나님이 여러분 곁에서 촛대 밑 까듯이 정강이 까는 그런 순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정신 차려. 내가 옆에 있잖아. 너는 내 포대기에 담겨 있잖아. 또 잊어버려, 또 잊어버렸어.

범사에 감사해. 항상 기뻐해. 너는 나와 기도로써 교제해. 걱정하지 마. 너의 장래 일이 폈어. 이미 확정된 코스야. 이건 이탈 될 수도 없어. 그것을 알려 주지요. 알려 주면 우리는 한없는 기쁨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는 한없이 작게 느껴지고, 내 앞에 등장한 분은 너무나 가슴팍이 넓은 미스터코리아 보다 더 큰 가슴으로 다가 올 때 항공모함에 붙어있는 보트처럼 초라하지요.

그런데 갑자기 그분이 새로 등장하면 내가 갑자기 보트가 내가 항공모함이 돼서 설치지요. 그거 반복되는 코스가 아브라함 코스입니다. 이거, 정식 코스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다? 방금 제가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무슨 뜻이냐 하면, 누구든지 진짜 하나님을 찾아온 사람은 이 아브라함 코스, 이삭 코스, 야곱 코스를 경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거기서 하나님의 보화를 느끼게 되고 살아계신 것을 느끼고,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 코스를 통과하면서 뭐가 배설물로 없어지느냐 하면, 바로 철학의 하나님이 배설물로 버리게 되지요.

지난 토요일 날 제가 [인간구원의 신학] 하면서 제일 첫 번째 강의가 뭐였습니까? 성경에 보면 세상 철학을 배설물로서 예수님을 아는 순간 예수님의 고상함을 인하여 그런 것을 배설물로 여기 버리노라 하는데. 그 ‘버리노라’ 하려면, 세상 철학이 왜 배설물일 수밖에 없는가를 알아야 버리지요. 자기 딴엔 버렸다고 하는데, 내가 들여다보니까 철학인데, 자기는 철학공부를 안 함으로 말미암아 버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에게선 계속 철학이 나오는데, 자기 속에서 나오는 것은 생각 안 하고 나, 철학공부 안 한다. 과학공부 안 한다. 그렇게 안 함으로 말미암아 복음만 달랑 남았다. 이렇게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들여다보면 철학이야. 불교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 그게 하이데거 철학이고 헤겔 철학이고 주~욱 다 나온 칸트 철학이고. 성화론 같은 건 완전히 칸트 철학이거든요. 버리려야 버릴 길이 없는 거예요. 공부한 적이 없어서. 공부한 적이 없어서 버릴 게 없는 거예요. 자기는 복음이라고 착각하고.

하나님께서는 계속 자기가 남의 경험을 듣고 남의 설교를 듣고 공부를 계속 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욕했던 사람이 딴 모습이 아니고, 내 안에 이미 들어 있는 모습을 내가 나보고 욕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쉽게 합시다.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이걸 미리 이야기할게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끝나면 그 다음부터는 뭐 치기에 들어가느냐 하면, 신 치기에요. 신을 친다 말이에요. 신을 치는데 신을 치는 이유가 이게 뭘 치기 위함이냐? 인간을 치기 위함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맨 날 이러거든요. 하나님 앞에서.

하지만 그 사람이 내세우는 신을 보면 그 사람의 감출 수 없는 본성이 다 들어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신이란 누가 만들어요? 내가 미처 내 욕망이 현실적으로 안 받쳐주는 것을 신의 이름으로 걸어놓고 욕망이 안 되는 것을 욕망을 최고로 극도로 갖다 올려서 뭉쳐놓은 것이 자기만의 신이거든요. 그래 그 신을 친다는 말은 자기 속의 감추어 놓은 깊은 욕망까지 다 쳐버리게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각종 신을 침으로 말미암아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마라 하는 것은, 나는 처음부터 너, 인간 자체를 쳐버리는 그런 과정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도 치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로를 통과하면서 축복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이미 뭐로 드러났습니까? 자기가 죄 됨을 드러났잖아요.

그리고 또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은 뭐냐? 우리의 죄를 긍휼히 보신다는 겁니다. 죄를 알아야 그 다음에 뭐가? 용서가 의미가 있는 거예요. 죄도 모르면서 무슨 용서라는 게 의미가 있습니까? 죄도 모르면서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너, 까불면 나한테 맞는다. 하면 잘못됐습니다. 자기 죄를 진짜 알아야 이야기하는데, 안 맞으려고 잘못됐습니다. 이거는 그냥 그 위험한 사태를 모면하려는 하나의 트릭에 불과하지, 이건 진정한 회개가 아니잖아요. 

[고교천왕]이라는 개그코너에 보면, 한 대범이 와서 선도부가 와서 아이들 손들고 까불래 하면, 개그맨 하나가 연기를 잘 하대요. 미워하든 말든 안 맞으려고 빼는 거 있지요. 그걸 심리적으로 잘 묘사했는데 자존심은 챙기고 안 얻어맞으려 하고. 양쪽도 다 챙기려고. 이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정 코스는 아닙니다. 우리가 그 코스를 밟으면 아아, 이래서 내 대신 누가 돌아가셨구나. 깊이 아는 코스를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가고 있는 겁니다.

방금 한 것은 창세기 12장 들어가기 전에 12장부터 해서 창세기 끝날 때까지 대략적인 것, 전체적인 흐름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그 지명 속에서 인간에게 두려워 할만한 요소들을 만나게 해서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핑계고, 실은 자기 육적인 힘으로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인간의 본심을 다 토해 놓게 만들고, 구원은 하나님이 개입해서 구원은 구원대로 이끄시고 우리의 부족 됨은 부족 됨으로 그대로 노출시키시고. 그것이 창세기에 쭉 이어져 갑니다.

나중에 창세기에 보면 야곱을 거꾸로 어긋맞게 하잖아요. 자리 바꿔놓고 이렇게 할 수 있는데 축복을 반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너희들이 생각하는 건 축복이 아니고 저주였고, 내가 저주라 여기는 것이 축복이었다. 나로 하여금 거꾸로 뒤집어놓기 위해서 지금 이 험한 인생 꼴로 살게 했다. 130년이란 험한 인생 꼴로 살게 했다. 그런 고백이 주님 이름에 대한 고백, 자기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고백하는 형식으로 그렇게 나온 겁니다.

그러한 깊은 과정을 우리 같이 탐색을 해봐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창세기 12장 한번 들어가 봅시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기 때문에 해 봅시다. 창세기 12장에서 8절에 보면,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는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이렇게 되어 잇지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요.

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건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동행했기 때문에 이름을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이름을 부르는데 잘 들어보세요.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가 아는 수준만큼 아는 여호와 하나님이에요. 뭐, 전체를 다 몰라요. 자기 딴에 부른 거예요. 놀라운 것은 여호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뭔가 여호와 단을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혼자 있지 않고 주께서 나를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라는 것을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그 고백이 어설프기 짝이 없지요. 나중에 보면 아마 아브라함이 뒤돌아보면 그때 무슨 정신으로 불렀는가 싶을 겁니다.

이건 우리가 마치 어릴 때 이십 대에 교회 다니면서 온갖 상상을 동원하면서 기도하고 있잖아요. 철야 기도할 때 여러분들 철야 기도해 봤습니까? 다 해봤지요. 저도 철야기도를 제법 했어요. 코피 터지고 이랬어요. 철야 기도할 때 제일 난감했던 것이 보통 리포트 용지로 기도문 작성하면 읽어보면 3분하면 끝나는 거예요. A4 용지로 한 두 장씩, 3분하면 끝나는데.

교회에서는 뭘 하느냐 하면,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여섯 시간을 하라는 거예요. A4 용지로 몇 장을 작성을 해야 됩니까? 캄캄해요. 그래서 처음 할 때는 옆 사람 컨닝을 해요. 뭐 해서 시간을 때우는지, 들어보면 그쪽에서 오래한 권사님들은 오래한 사람이기 때문에 대통령부터 나와요. 대통령부터 국무총리 쭉 나오는데 역사, 우리나라 역사 다 나옵니다. 자기 올케 집안부터 나와서 보니까 식구가 많으신 사람은 시간 보내기가 유리한데 식구가 단출한 집은 불리한 겁니다. 우리나라 육이오부터 해서 다 나와요.

처음에 흉내 냅니다. 흉내 내보면 흉내 내 봤자 그것도 얼마 안 가거든요. 그땐 어떻게 하느냐? 그냥 요령 부리죠. 천천히. 하나님 아버지 하면, 하-나-님-아-버-지-  아이씨, 오 분 지났구나. 당회로부터 어린 주일학교까지 15초 지났네. 이게 잘 안 간다고요.

그래서 처음에 해보니까 방언이 터지데. 하도 안 가니까. 뭐라도 지껄여 보는 거예요. 지껄여 보니까 기역, 니은, 디귿이 막 깨져서 나오는데 기역, 니은이, 니은이, 미음에 붙고 미음이 붙어서 이거는 갑자기 시간이 빨리 가요. 룰라라 라라 하니까 한 번 발동 걸리니까 그 다음부터 완전히 내리막길이에요. 두 시간, 세 시간하는데, 내가 그렇게 부럽던 권사님이 벌써 뒤쳐져서 벌써 깨어서 커피 한잔 하시고, 나는 계속 버티고 있고. 아이고, 권사님 30년, 나는 2년, 나보다 기도 못하네.

방언 터지고 난 뒤에 그때부터 하니까 기도 두 시간, 세 시간, 다섯 시간하고 나니까 그 다음부터는 10분 기도가 되고, 20분 기도가 되고 구체화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부터는 기도의 은사를 받았다 할까. 기도하면 겁이 나지 않고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사랑에 두려움 없는 게 아니고, 방언이 기도에 두려움이 없게 만들어요. 기도기술이에요.

그렇게 기도 두 시간, 세 시간 기도하시는 분이 우리교회에 가득합니다. 가득한데 우리교회 조 장로님이 딴 데 설교하러 나가시고 안 계시고 다른 사람이 기도하라 하면 그렇게 기도 유창하게 철야했던 사람이 우리교회 기도하면 10초, 20초면 끝나버려요. 괜히 했다가 설교시간에 기도가 예화로 튀어나오면 만인 보는데 우스꽝 당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후예배다 넣었거든요. 지금은 오후예배 하겠다는 사람이 점점 줄어서 이제는 전교인의 1/3이 오후예배를 못하겠다. 오후예배 기도순서에 넣지 마라해요. 넣으면 교회 안 나오겠다는 거예요. 나중에 1/3이 1/4, 처음에는 반 하겠다 하는데 이제는 30%, 지금은 20% 한 사람 또 돌아오고 한 사람 또 돌아오고. 교인 수는 많은데 돌아오면 한 사람 또 하면 안 돼요. 그래 단체로 가나다순으로 강제로 다 해버렸어요. 강제적으로 다 했어요. 제가 하는 게 아니고 예배부장 되는 최종훈 집사님이, 예배부장이 그때 필요한 거예요.     

어쨌든 간에 옛날 기도했던 거, 지금 복음 알고 기도하면 쓸데없는데 귀한 시간 다 빼앗기고 우쭐되는 나도 기도 두 시간한다고 우쭐되고 그게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지. 그런데 주의할 것은 그 철없음을 통각하게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제발 통각 할 때 미리 앞서서 계단 뛰어올라가지 말고 있는 그대로 다 기도하세요. 우리 애가 35등인데 제발 25등 되게 하옵소서. 있는 그대로 다 하세요. 남들 욕하든 뭐하든 기복신앙이니 욕하든 말든 씹든지 말든지 목사가 씹든지 말든지 거기 개의치 말고. 현재 있는 그대로 그 마음.   

새순교회 교인들 대신 속에 담아 있는 기도 제가 대신 기도해 드릴까요? 주여, 한 삼백 명 되게 해주시고 그저 교회 짓게 하옵소서. 기복신앙인 줄 알지만 제가 이것 밖에 안 되는 걸 우예 합니까? 그저 되게 하옵소서. 합니다. 해놓고 그 다음에 주여,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덧붙여 놓고.

속마음 안 그렇습니까? 제발 부자 좀 오게 해주시고. 삼성 중공업 뭐하노. 좀 와서 부장들 좀 와서 쭉 와서 부자 해서 저 콧대 높은 저 큰 교회 완전히 콧대 꺾어놓고 여기에 크게 해서 하고, 땅을 하나 해놓으니까 땅값 올라서 삼십 배, 백 배, 오십 배, 육십 배 올라서 땅 팔아서 더 넓은 주차장 넓고, 옆에 (      ) 보다 더 큰 주차장 넓고. 이게 소망 아닙니까?

왜 그런 기도를 물론 공중기도하면 욕하기 때문에 못하겠지만 집에서는 통과하세요. 하시고 그게 깨지는 맛도 보시고, 아예 그걸 알려고 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하세요. 애 큰 딸 있거든 시집보내 달라 하시고. 주여, 치워야 됩니다. 지금 돈 없는데 돈 많은 남편 와서 돈 없는 내 딸 가지고 내다치게 하옵소서. 뿅 갔다, 한 눈에 반했다 뭐 이런 애 와서 가게 해달라고 하시고 주여, 통과합니다. 통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괜히 아닌 척 해봐야 아닌 척하면 주께서 통과시킵니다. 

T코스하고 그 다음에 S코스 가야 하는데 그냥 S코스 타려하면 교관 잡아서 T코스 통과시킵니다. 그것은 남하고 보지 말고 하나님이 특별히 날 다루시는 하나의 사랑의 영인지 아시고. 기도하는데 부담 느끼지 마시고. 내가 다시 또 다 잊어버렸을 거예요. 뭐 하지 마라? 아예 잊지 마세요. 노래 불러야 돼. 자책~하지 말라. 후회~하지 말라~.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잖아요. 자책, 절대로 기도해놓고 자책하지 말고.

주께서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그 코스 밟고 이삭 때문에 나름대로의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니다. 더 높다, 낮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은 그럼, 목사님 그거는 성화론이잖아요. 처음에는 쳐지지만 지금은 고상한데 이러는데, 천만의 말씀. 우리가 고상하게 여기는 거 십년 뒤에 유치하게 밟는 그 코스 다시 밟게 하십니다.

나는 그런 돈 몇 푼 가지고 기도 안 한다. 라는 뻐기는 것이 십년 전이라면, 십년 후에 돈 십 원 없어서 주여, 살려 주옵소서. 할 때 다시 그 코스를 밟게 하시기 때문에 성화론 아니죠. 점점 발달된 건 아니고, 하여튼 간에 언젠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가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아닌 이상, 죄인인 이상 어떤 코스를 밟던지 간에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음을 명심하시고 주께서 자책하지 말고 이 코스를 이 창세기를 통해서 한번 밟아 봅시다. 주의 이름 부르세요. 나머지는 주께서 책임지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솔직하지 못했었고 고상한 척했고 복음 아는 척 했고 믿으면 예수님처럼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솔직한 심정 따로 숨어져 있었습니다. 있는 대로 다 털어 내놓고 아브라함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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