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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울산강의
2018-03-15 23:47:43 조회 : 577         
하체 1 180315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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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25) 18-03-20 10:46 
20180315a 울산강의-레위기 18장 : 하체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18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과 무엇을 비교하느냐 하면,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구례도 행하지 말고”(3절)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 풍속도 따르지 말고, 가나안에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민족의 풍속도 따르지 말라. 따르지 말라는 것이 둘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둘 사이에 끼어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살던 사람이기 때문에 애굽의 풍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풍습은 모르지 않을까 생각할 거예요. 이 점을 일단 유념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살던 사람이 한국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 미국의 풍습을 따르지 말고 한국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할 때에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미국 풍습과 한국 풍습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만약에 다르다면 어떻게 합니까? 미국 풍습과 한국사람 풍습이 다른 데 비행기 타고 태평양을 건너올 때 도중에 미국 풍습도 따르지 말고 한국도 따르지 말고. 미국과 한국이 전통과 역사가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선에서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하게 된단 말이죠.

여기서 첫 번째 나오는 어려움이 그거에요. ‘~하지 말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라는 대안을 제시해주길 바래요. “너는 반찬 이것 먹지 말고 이것 먹지 마.” 저는 옛날에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할아버지 계모임을 주로 우리 집에서 했는데 상을 차려놓으면, 삼촌이나 손자들이 먹고 싶어 하잖아요. 그때는 뭐 먹지 말고, 뭐 먹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이것 먹으라고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게 있어야 돼요. 이것 먹고, 이건 먹지 마. 이래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애굽 풍습 따르지 말고 가나안 풍습 따르지 말고, 끝이에요. 이것 하라는 게 없어요. 그냥 붕 뜬 거예요. 하지 말라만 있어요.

가나안 풍습과 애굽 풍습 둘 중에 하나 잡으라는 것도 아니에요. 둘 다 잡을 게 못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풍습을 따르란 말입니까? 따를 수 있는 풍습은 이 땅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 수 있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것이지 이 풍습 따르라는 것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 하라는 것도 많이 있잖아요. 왜 없다고 합니까, 라고 할 때 ~하라고 할 때는 반드시 전제로 이것 하지 말라는 것이 현장에서 하라가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것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애굽 사람들입니다. 애굽 사람에게 뭘 하라는 것은 네가 이미 익히 해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네 힘으로 내가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할 재주 있거든 해봐라. 그래서 ‘~하라“가 아니라 ’~하지 말라‘고 한 거예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요. 배운 가락이, 배운 도둑질이 그것밖에 없어요.

하지 말라고 할 때 방금 이야기한 것을 글로 쓰면 쉬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감당이 안 됩니다. 이유가 뭐냐? 우리 몸을 우리가 감당 못할 몸이에요. 왜? 몸이 변했으니까. 하나님이 만든 몸이 아니에요. 범죄 한 몸입니다. 범죄 한 몸이 거룩한 법이 마주칠 때 범죄 한 몸으로 하나님의 법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감당할 수 있냐고 하니까 누구 생각난다. 김제동이 이야기한 것 같은데.

우리가 이런 몸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음란하지 말라. 그런데 몸은 이미 음란을 발산할 잠재성으로 가득 찬 몸이에요. 툭 치면 음란이 나올 수밖에 없는, 남자들은 특히 술 먹으면 그렇거든요. 술 먹으면 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몸인 줄 아시고 주께선 애굽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돼있어요.

쉽게 말해서 2차 노래방이나 3차 가지 말라. 회식하는 목적이 2차, 3차 때문에 가는 것이지 1차 진지하게 회의하려고 가는 게 아니잖아요. 저녁식사만 하는 게 회식 아니잖아요. 2차, 3차 때문에 저녁식사를 참는 거예요. “더 좋은 게 있을 거야. 참아, 참아. 확 속풀이 할 수 있는 멋진 기회 있을 거야.” 우리 몸이 감당이 안 됩니다. 음란이란 것 자체에 대해서 음란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음란에 대해서 자극을 받게 되고 본격적으로 음란을 할 육신적인 준비가 돼있어요.

레위기 18장의 내용은 성경에 나오지만 청소년들에게는 19금 동그라미 칠 내용이에요. 오늘 강의는 18세 이하는 안 듣는다 치고 성경 그대로 읽어볼게요. 6절부터.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그 다음에 계속 하체 이야기가 나와요. 10절에 보면, “너는 네 손녀나 외손녀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너의 하체니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잖아요. 그 다음에 12절에 보면, 고모까지 확대시킵니다. “너는 네 이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의 골육지친이니라” 이모까지 확대가 돼요. 14절 끝에 보면, 백숙모까지 건드리고 15절에는 며느리 하체까지 언급까지 언급하고 있어요. 그 다음에 형제의 아내를 범치 말라. 이건 형수, 제수씨까지 거론하거든요.

사람이 가만 놔두면 하체를 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체, 하체, 하체를 자꾸 언급하니까 이상하게 발동이 되지요. 언급하니까 가만있는 걸 건드린 셈이 되지요. 하고 싶다고 나와요. 로마서 7장 이야기입니다. 하지 말라는 순간, 너 말고 네 속. 너의 번지르르 한 점잖은 너 말고 점잖은 껍질 안에 들어있는 점잖지 못한 그것이 발작을 일으키도록 내가 법으로 자극을 주고야 말리라. 지금 이런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이 나왔다는 그 의미를 그 취지를 당사자인 이스라엘은 전혀 몰라요. 자기는 홍해 건너왔다고 특별 대우받는다고 생각하고. 얼마나 예쁘고 참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면 우리에게 약속의 땅을 주게 될까. 노예생활을 벗어나서. 만약에 2차 대전 때 연합군이 군함도에서 일제 압제에 있던 우리나라 조선 징병인들을 해방시켰다고 했을 때에 <군함도> 영화 보면 나와요. 마지막 장면에 일본군을 잡아가고 조선과 중국의 징병인들을 풀어주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풀려났을 때 그 사람들이 일본사람들보다 더 착하고 온순하고 훌륭하고 마음씨가 정결하다는 자부심을 얼마나 크게 갖겠습니까? 저들은 나쁜 놈이고 우리들은 훨씬 더 고상하고 죄 짓지 않은, 잡힌 게 죄는 아니잖아요. 잡은 게 죄지 잡혀 간 게 죄가 됩니까? 아니잖아요. 미군이 와서 해방됐다. 우리는 해방된 동시에 착하다고 생각할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물어봅시다. 잡혔으면 착합니까? 잡아가둔 사람과 잡힌 사람, 누가 더 착해요? 둘 다 똑같은 것 아닙니까. 둘 다 마찬가지거든요. 역할이 바뀌었다 뿐이지.

이 세상에서 고생 많이 하고 집구석이 굉장히 가난하니까 이상하게 재벌 3세보다 훨씬 착해 보이는 이 느낌은 어떡하지? 가난하고 수입이 적은 만큼 착하다는 이 착각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여러분 제대로 알아야 돼요. 애굽 사람을 애굽 같은 나라에 집어넣는 그것이 바로 출애굽 의미입니다. 애굽에 살던 애굽과 똑같은 사람들이에요. 애굽과 똑같은 사람을 데려다가 지금 애굽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을 내쫓고 애굽에 살던 사람들을 자기 백성이란 이름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뭔가 중간에 달라져야 돼요. 착하게 달라져야 되겠습니까, 거룩하게 달라져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떻게 달라져야 되느냐 하면, “주여, 우리는 이 법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걸 유일하게 아는 사람들이에요. 사람들 앞에서는 네가 잘났어, 내가 잘났어, 라고 싸울 수 있지만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잘난 사람이 하나도 없어야 돼요. 그래서 신명기 8장에 보면 광야에서 마음을 낮추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건짐 받았으니까 착할 것이다. 우리를 포로 잡은 애굽 사람보다 더 거룩할 것이라는, 우리는 잠재의식 속에도 음란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에도 거짓말 한다든지 도둑질한다든지 살인한다든지 간음한다든지 우상 숭배한다든지 일체 우리 마음엔 아예 없을 것이야. 얼마나 착했으면 착한 인간들이 고생한다고 해서 고생 그만. 착하니까 착한 데 가야지, 라는 착각들을 그들은 갖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그걸 장담합니까? 장담하지요. 광야생활에서 열 번이나 그들은 하나님의 취지에 도전했기 때문에. 그리고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 다 죽었습니다. 달랑 두 사람 빼놓고 다 죽었습니다. 유적 답사했는데 거기에 사막이 있어요. 그 사막에 40년 동안 돌려서 그들을 기어이 다 죽였습니다. 죽어도 그들은 할 말이 없어요. 그들이 법을 안 지켰기 때문에 죽은 게 아닙니다. 이런 게 중요한 거예요. 간음했기 때문에 몰살한 게 아니에요.

그들의 죽음은 무슨 죽음이냐 하면, ‘집단 죽음’입니다. 개인별 죽음이 아니에요. 개인적으로 선과 악을 따져서 죽이는 죽음이 아닙니다. 물론 두 사람은 빼놓고. 집단 죽음이 될 명분이 뭐냐 하면, 법을 어겨서도 우상 숭배해서도 아니라 음란해서도 아니고 믿지를 못해서 그런 거예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완벽하게 착하게 살아서 살아남은 게 아니에요. 단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뿐이에요. 남자만 40만 명이거든요. 40만 대 2에요. 이 말은 대다수가 안 믿을 이야기를 하나님이 하셨다는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을 만하네, 라는 식으로 이끄신 게 아니고 그들의 기본 속성, 근본적인 근성에 의하면 절대로 믿지 못할 상황을 하나님께서 유도하시고 만들어내신 거예요. 그래서 안 믿는 게 정상이고 믿는 게 기이합니다.

신명기 7장 7절에 이런 말이 있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너희들은 수가 많은 것이 아니고 지극히 작은 자라. 하나님의 의도를 보세요. 왜 못 믿을 이야기인지 한 번 들어보세요. 너희들은 극히 숫자가 적다. 그리고 너희들이 만나야 될 민족들은 숫자가 상당히 많다. 해놓고 하시는 말씀이 그러나 내 약속이니까 믿으라. 이 말을 간단히 풀이하면, 네가 애굽에서 경험적으로 알아왔던 모든 선입관과 모든 신뢰성은 말씀 앞에서 스스로 부정하라.

이것은 적들과 싸우기 전에 누구와 싸워야 하느냐 하면, 내가 그리고 내가 기대하고 내가 목적으로 삼고 내가 희구하고 희망하는 나의 현실과 싸워야 돼요. 내가 꿈꾸는 현실, 내가 기대하고 희망하고 소망하는 것을 내가 완전히 좌절시켜야 돼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구원은 몰락이라고. 자진해서 몰락하는 게 구원입니다. 자기 믿음을 신뢰한다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하게 되면 이건 믿음이 없는 거예요. 내가 품어온 게 내 몸이 경험한 것들의 집합이거든요. 내 몸이 경험한 것이 뭉쳐서 지금의 나의 믿음의 내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럴 땐 이렇게 하고, 부동산 투기할 땐 이렇게 하고, 어떤 사람 선볼 때 인상이 이렇고. 모든 게 평생 익히 몸이 습관화 되어 몸에 스며든 그런 것들의 나는 이것을 믿습니다, 라고 내용을 채우는 거예요. 몸에 잔뜩 들어있는 것을 어떻게 그 독소를 무슨 수로 빼냅니까. 빼내는 것을 우리는 강력하게 싫어하는 데.

주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집단화는 무슨 뜻이냐 하면 대다수가 동의하지 않는 믿음의 내용을 주님께선 믿으라고 제시하더라 이 말이죠. 그게 광야생활이에요. 그래서 레위기 18장 1절부터 3절까지 가나안 풍속도 따르지 말고 애굽 풍속도 따르지 말고, 이 말은 지금 네 자신과 싸우란 말과 동일합니다.

이 말과 더불어 내용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아까 결론부터 말씀드렸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 자신을 안 믿어요. 자기가 경험을 안 믿습니다. 새롭다고 느껴져야 돼요. 주의 말씀은 내가 다가가서 이해해서 받아들이란 말씀이 아니고 나를 개무시하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믿는 것, 인정하는 거예요. 스스로 주여, 나를 때려주시고 밟아주세요, 라는 심정으로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는 겁니다.

나 같은 인간은 밟아서 나는 인간 말종입니다. 이런 인간을 살려주신다니 황송스럽습니다. 이런 자세가 아니면 주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하나님, 저 잘났으니까 약속의 땅에 가면 쓸모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라내도 저는 살려주셔야 돼요, 아시겠습니까?” 그렇게 나와서는 그런 식으로 안일하게 나와서는 끝난 이야기죠. 그건 약속의 땅에 못 가는 겁니다.

그래서 레위기 18장에 나오는 내용의 가장 근원은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음란. 음란=우상숭배. 논리가 이렇게 전개됩니다. 음란을 터치해서 우상 숭배자로 몰아넣고 우상 숭배에서 다시 음란을 끄집어내는 두 가지 계통을 밟아요. 상당히 함축됐지요. 인간 속에 음란을 품어서는 안 된다. 애굽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우상 숭배라는 것이 내 자신이 납득이 되는 신을 내가 선택한다는 의미에서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우상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내가 아는 상식을 내가 지키고자 하니까 그것이 바깥으로 현상화 되면 그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음란해서 멸망시키는 게 아니고 우상 숭배했다고 멸망시켜요. 그리고 갈렙과 여호수아가 무사히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갈렙과 여호수아가 하나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들어간 겁니다. 고로 우상 숭배란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들어있지 않는 것,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어요. 우상 숭배란 기괴한 동굴형상이나 이런 형상을 안 섬겼다고 우상 숭배가 아닌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포함되지 않은 모든 발언이 나오는 진원지, 그것이 바로 우상이에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에 대한 기쁨과 감사와 고마움, 신뢰성이 나올 턱이 없는 것. 그걸 불모, 풀이 자라지 않는 삭막함,

하나님의 약속과 다 이루심, 그러니까 행함으로 따지는 게 아니에요. 믿음이죠. 다 이루심을 믿지 못하는 게 나오는 것, 행함으로 뭔가 틈을 두는 것, 이만큼 행하면 나는 구원받는다고 이게 우상 숭배에요. 인간은 기껏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내가 이 정도 착하니까 더 착해야지. 더 착해서 영광 돌려야지. 이게 우상 숭배에요. 다 이루심이 더 보탤 행함이 없는데 또 보탤 행함이 튀어나오는 것, 그게 우상 숭배입니다. 툭 치면 행함 나오는 사람과 툭 치면 복음이 나오는 사람과 이건 사람 자체가 다른 인간입니다.

툭 치면 어떤 사람이 복음이 나온다는 말은 그 사람이 착하다는 뜻이 아니에요. 얼마나 못났으면 복음이 나오겠어요. 얼마나 못났으면 용서가 나오겠습니까. 한 평생 이렇게 완벽하고 조심스러웠고 철저에 철저를 기했다. 이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난 개판이었어. 그런데 용서받았어. 도대체 그런 희한한 대단한 소식이 어디서 들어왔느냐? 그게 바로 복음이야! 라고 당당하게 주저 없이 그걸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레위기 18장을 보지만 복음입니다. 이걸 율법이라고 율법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복음은 그 안에 인간의 실패를 담보로 해서 이뤄지는 거예요. 인간이 성공하면 복음이 아니죠. 주님이 성공해야 돼요. 우리는 실패했지만 주의 성공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게 나와야 됩니다. 당신은 어떤 점에서 실패했느냐? 아담에게 물려받은 죄 된 몸을 주의 법을 감당 못할 몸인 것을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제는 그 깨달음의 과정에 들어가 봅시다. 하나님이 음란에 관한 법에 대해서 깨닫는 과정이 어떻게 이어지느냐 하면, 두 가지 안목을 상정할 수 있어요. 첫째는 창세기 2장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안목,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죄로 죽은 자의 안목, 이 둘이 달라요.

죽은 자의 안목은,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조상이 보여줬어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1번은 벌거벗은 몸이에요. 벌거벗은 몸을 하나님이 만들어줬습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몸이 정상이에요. 그런데 범죄 하고 난 뒤에, 죽은 몸이 되고 난 뒤부터는 아담이 수치를 느끼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수치를 가렸다고 돼있습니다.

그러면 2번에서 하는 질문이 이렇게 돼요. 벌거벗으면 안 된다는 것이 죽은 자의 죄 된 입장에서 하는 질문이에요. 1번, 아무것도 모를 때 질문은 뭐냐? “옷이라 것이 왜 필요하지?” 이런 질문이 돼야 되는 거예요, 안목이. “옷을 왜 입지? 옷 안 입어도 되잖아. 그게 옳잖아. 저 사람도 옷 입고 저 사람도 옷 입는데 왜들 옷을 입지? 죽은 모양이구나. 저 사람들 잘못 되도 보통 잘못 된 게 아니구나. 옷을 왜 입지?” 이래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떤 입장이냐 하면, 발가벗고 돌아다니면, “애도 아니고 발가벗고 다니지? 부끄러워라. 경찰이 잡아가야 된다.” 우리의 안목이 비정상인 것을 감지 못하고 집단적으로 다들 옷을 입으니까 옷을 입는 게 정상인 줄 알고 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개입할 때는 2번에 와요. 이미 범죄 한 인간에게 온다고요. 범죄 한 인간이 자기의 부끄러움을 가렸단 말이죠. 옷을 입은 상태가 되면 덜 부끄럽게 되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안 느끼잖아요. 수치가 사라졌다는 말은 잘난 존재가 됐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2번을 향하여 과연 너희가 잘난 존재 맞느냐? 옷 속에서 무엇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내가 캐볼까, 라고 옷을 벗긴 채로 법을 감당하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그러면 두 사람이 옷을 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관계가 어떤 관계냐? 부부관계지요. 부부 외에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부끄럽게 여기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부부 사이에 벌거벗고 있으면 뭐라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부부기 때문에 같이 목욕할 수 있고 침대에서 같이 잘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상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걸 주님께선 거부하는 겁니다. 부부기 때문에 해도 된다는 그것을 인간이 부부라는 명분으로 부부기 때문에 우리는 옷 벗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자 없지요, 라는 그 고집스러움, 약간이라도 정당성 확보하려는 것, 그것을 주님께선 용납하지 않지요. 우회로 쳐들어옵니다.

다른 아내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러면 그 소리 듣고 한 번도 바람피우지 않은 부부가 어떻게 생각합니까? 신난다, 신난다. 우리는 죄 안 범했다고 하거든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부부가 지금껏 바람피운 적 없는 그 부부에게 하나님께서 찾아가서 다른 아내를 범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 사람을 비껴가야 되잖아요. 너희들은 사랑이 깊어서 다른 여자, 다른 남자에 대해서 신경 쓰는구나. 너희들은 착하니까 이야기할 필요 없고. 바람난 옆집에나 이야기해야 되겠다. 이래야 우리의 상식이죠.

그러면 정상적인 부부니까 레위기 18장 지워버릴까요? 찢어버리든지 매직으로 새카맣게 칠해 버릴까요? 우리한테 해당사항 없네. 특히 새순교회 교인들에겐 하나도 해당 없을 거예요. 물론 미투 해봐야 알겠지만. 왜 착실하게 정상적인 부부한테 이런 낯 두꺼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애들 볼까봐 겁나는 그런 말씀을 왜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까? 우리 부부는 정상이라는 그게 가식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부부는 의인이 되고 법 없이도 산 사람이 돼버려요. 법 없이도 산 사람이 되면 애굽에서 나왔던 의의가 날아가 버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유가 없고, 천국 갈 필요도 없어요.

죄인 아닌 데 왜 천국 가죠? 희한하죠. 천국은 죄인들만 가요. 지옥은 누가 갑니까? 죄인들만 가요.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죄인 밖에 없어요. 천국은 죄인은 죄인인데 용서받은 죄인이 가고, 지옥은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가요. 의인은 없어요. 그런데 정상적인 부부 생활했다고 자기는 다른 죄는 몰라도 레위기 18장에선 자유롭다고 해당사항 없다고 성경책에서 빼버릴까요? 하나님이 빼고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까? 바깥에 나갔다 다시 들어와라. 정상적인 부부라 생각하지 말고 정상적이 아닌 부부라고 생각했을 때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마음으로 간음한 자도 이미 간음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은 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에요. 주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 말씀이 간음과 관련되어 말씀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비록 약해도 소수라도 약속의 땅에 네피림 민족은 거대한 거인이라도 장대 같이 버티고 있더라도 주의 약속이니까 그들이 키가 크든 작든 관계없어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관계없어요.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 주의 약속이기 때문에 이유 불문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대다수가 안 믿은 거예요.

왜 안 믿었을까요? 자기 자신에게 아직도 기대 걸고 자기의 의로움을 포기할 생각이 없는 거예요. 뭔가 지킬 만한 것을 지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 숭배와 관련돼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간음을 통해서 그걸 우상 숭배라 하는 거예요. 우리 부부는 간음한 적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상 숭배야. 그게 불신앙이야. 왜 그러냐 하면, 그 부부가 밖에 나갈 때도 옷 벗고 나갑니까? 아무리 부부라도 집 안에서도 뭐라도 하나 걸쳐요. 밖에 나갈 때도 걸친다고요. 진짜 그 부부가 태초에 하나님이 만족하신 1번, 아무것도 모르는 부부라면 밖에 장 보러 나갈 때도 골프 치러 나갈 때도 옷 벗고 나가야지요. 그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그렇지 못하거든요. 하체를 가리고 있잖아요. 하체 가린 인간을 하나님이 만드신 적이 없어요. 인간들이 죄 짓고 정당화하니까 더 못 됐어. 그게 못 돼 처먹었어. 주께선 정상으로 되돌리려 합니다. 정상으로 되돌릴 때는 반항하지 마세요. 우린 착합니다. 바람피운 적 없습니다. 이모의 하체를 건드린 적 없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반항하고 거부하지 마세요. 아담에겐 얼마든지 그런 능력이 잠재돼있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끔찍하든 말든 우리 몸은 우리가 감당이 안 됩니다. 어디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장담 못해요.

보통 남자들이 그런 능력이 없어서 바람 못 피우지. 돈이 없어서. 미투도 유명해야 당하지 울산바닥에서 비실비실해서야 대상도 안 된다. 김흥국 정도 돼야지. 이윤택이란 사람이 16명이나 성폭행했는데 그만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인 거예요. 대단한 위치에 있잖아요. 출세를 안 해봤으니 알 리가 있나. 그렇고 그런 서민들에겐 해당 사항도 없어요. 우리가 그 정도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 있을 때에 우리의 잠재적 욕구는 과연 잠자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자기 아내보다 월등하게 아름답고 더 지적이고 고상하고 엘레강스 할 때에 그건 장담할 필요도 없어요. 누구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애굽의 삶을 진실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을 부르러 온 하나님을 하기 위해선 주님께서 왜 하체를 범하지 말라. 이것부터 출발해야 되겠지요. 하체가 뭐냐? 하체는 창세기 3장에서 인위적인 조작이 가해졌던 겁니다. 자아의 의미가 부여된 게 하체에요. 그러면 상체와 하체를 달리 생각해야 돼요. 성경에서 하체가 부끄러웠지 상체가 부끄러운 게 아니거든요. 왜 상체는 부끄럽지 않지? 같은 신체인데. 부끄러워서 눈썹 가려야 되겠다고 왜 안 합니까? 상체는 눈이 있고 하체는 눈이 없잖아요. 눈에서 시선이 나오는데 인간의 시선은 반드시 상대를 대상화로 봅니다. 대상화는 사물로 보는 거예요. 사물의 특징은 주고받는 정신적 교류가 일어나지 않아요. 일방적으로 응시하고 일방적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군에 가기 전에 남자들이 총각 뗀다고 옛날에는 흔했거든요. 친구들이 술 먹이고 사창가에 데려갔다. 그 창기와 국제평화에 대해서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합니까?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트럼프와 회담에 대해서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지 앞에 아가씨와 침대에서 두 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돈 주고 나옵니까? 아니지요. 정신적 교류를 안 하지요. 하나의 사물이에요. 대상이라니까요. 포르노도 야동도 마찬가지에요. 하나의 사물로 보는 거예요.

사물로 볼 때 사람은 스톱이 돼요. 시선 스톱이 된다고요. 어떤 것을 집중해서 볼 때 스톱이 돼버리면 고정되면서 내가 쏘아 댄 의미를 회수하는 대상이 된다고. 나의 것이 돼요. 스톱이 되면서 순간적으로 자아가 굳어져요. 너는 내 거야. 마치 매직이 내 거야, 이 안경은 내 거야. 책은 내 거야. 내 거야, 하는 동시에 그쪽과 교류가 단절돼버려요.

상대방과 이야기할 때 눈과 눈이 마주치며 이야기해야 된다고. 하체를 사물로 보지 말고 하체의 주인공을 봐야 돼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아담대로, 하와는 하와대로 자아가 확정되었어요. 자아가 확정되었으니까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저 대상자는 내 성욕을 채울 것인가, 나한테 생활비를 얼마 줄 것인가? 또는 당신과 결혼해서 아내로 들어가게 되면 아가씨 때 못한 유럽여행을 해줄 것인가? 그리고 친구들에게 우리 시집 잘 산다, 용돈 오백만원 준다고 자랑질할 수 있도록 남편이란 작자는 나한테 후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보는 동시에 그 여자는 자아가 굳어져요. 남자와 시가 쪽은 하나의 대상으로 스톱이 된다고요. 사물이에요. 돈 내는 기계, 현금자동지급기처럼 돼버리죠. 자식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너 오늘 몇 등 했어? 수학점수 얼마야? 애는 점점 기계가 돼가요. 엄마한테 기계처럼 된다니까요.

인간이 자기의 하체를 숨겼다는 것은 상대방을 볼 때에 자기 위주로 보는 거예요. 자기를 감추고 자기 눈이 있는 것으로 상대를 쳐다보는 겁니다. 주고받는 교류가 없지요. 이걸 대구강의에서 중층결정이란 어려운 말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인간부터 일을 저질러놓고 뒤에 하나님이 투입됩니다. 그렇게 해야 인간으로 하여금 잘난 게 없음을 완전히 들춰낼 수 있어요. 그렇게 해야 예수님 십자가의 의미가 살아요. 내가 건져주지 아니하면 너는 네 자신이 우상화 돼있고 독자적인 하나님처럼 살아간다. 내가 네 하나님 되는 것, 네 힘으론 스스로 깨부술 수 없어요.

그러면 진짜 하나님이 오셔서 그 우상 됨이 악마의 속성인 것을 완전히 박살내야 되는 겁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번지르르한 외부, 점잖은 체하고 잘난 체하는 그것에 민망스러운 이야기를 집어넣어요. 평소에 이모의 하체, 백숙모의 하체 생각도 안 했는데 이 용어를 집어넣으면 그때부터 상대방에게 “이모님, 옷 좀 잘 입고 다니세요.” 지가 욕정을 품어놓고 책임을 이모한테 돌린다고.

남자가 자기 욕정을 감당을 못하니까 요새 아가씨들 치마가 짧아? 탓을 남에게 돌리느냐 이 말입니다. 치마라도 하나 사주고 그런 이야기해라. 색조화장이 어떻고,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것을 하느냐 하면 본인이 감당이 안 되니까 본인의 욕망을 본인이 덮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자기가 책임을 못 지니까 남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옷차림이 너무 도발적이라서 너만 보면 껄떡거려서 안 되겠다. 그러니까 점잖게 옷을 입어줘. 그러니까 상대방은 뭐냐 하면, 자기가 건전함과 고상함과 우아함을 유지하기 위한 사물로 변해버려요. 눈에 띠는, 나는 널 응시해도 너는 날 응시하면 안 돼. 이런 식이에요.

남자, 여자를 평등하게 하자. 헌법정신에 그런 게 들어있을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억지인 줄 몰라요. 남자와 여자는 절대 평등하지 않습니다. 남자들의 용납을 안 해요. 어떻게 여자와 남자가 평등합니까? 남자가 힘이 세도 세고. 힘이 세서 남자가 우월한 게 아니라 남자가 우월하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남자는 우월해요. 남자는 여자보다 더 대단하고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남녀평등이 아니에요. 성경도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성경은 남자를 사람 취급 안 해요. 남자는 인간도 아니고 짐승 같은 존재라고 들춰내기 위해서 여자를 약하게 만들었어요. 남자가 개라는 것, 짐승만도 못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자는 남자한테 치어 살도록 돼있어요.

그것도 모르고 남자는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하거든요. 여자를 사람 취급 안 하기 때문에 남자들은 사람 취급 받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메시아는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사람 취급 안 하는 여자의 후손으로 와요. 마태복음에서 족보 바뀔 때 남자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여자의 개입으로 족보가 땅으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여자 덕분에 살아요. 남자는 힘만 세지. 그래서 이름이 남자는 흙이고 여자는 생명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25) 18-03-20 10:47 
20180315b 울산강의-레위기 18장 : 하체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하체에 대해서 보지 않으려면 상체와 교류해야 된다고 했지요. 이 이야기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 어떤 젊은 분이 저한테 자기는 야동을 너무 많이 봐서 고민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했어요. 그것은 자기를 가르치고 자기 죄를 들춰내고 자기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일깨워주는 사람과 만나야 돼요. 자꾸 야동만 보지 말고. 내가 이렇게 무지하나, 이런 것도 못하나, 라고 뭔가 배울 수 있는 사람에게 주위에 배울 수 없는 사람은 동물화 돼버려요. 뭘 배운다는 말은 빈자리가 커진다는 것이거든요. 바보같이 이것도 모르고 뭘 생각했나? 내 인생 어떻게 살아가? 한 평생 살면서 이런 것도 모르고,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시선과 눈, 시선은 마음의 눈이니까 마음을 살찌우게 하는 교류의 장을 많이 가져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딱딱한 석화, 돌처럼 돼버리는, 본인도 물체가 되고 물체 같은 인간들은, 소위 머리에 든 게 없는 인간들은 맨날 자극적이고 쾌락적인 즉흥적인 것에 술이나 도박이나 그런 데 빠지니까 점점 모든 걸 자기 쾌락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겁니다. 누굴 만나면 돈을 얼마나 빼먹었나?

사진을 찍는다면 시간이 날아가 버려요. 순간적으로 되니까. 그래서 사진은 어떤 의미에서 대상을 죽여 버려요. 그 이후를 남기지 않으니까. 그 순간으로 끝나니까. 사진을 찍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영정 사진이 돼버려요. 그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된다고요. 그 뒤에 남아있는 변화 같은 게 있는데

결국 레위기 18장은 사라집니다. 율법은 모두 사라져요. 사라진다는 것은 시간적 요소가 개입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해서 율법 안에서 미래가 나오고 율법 안에서 새로운 시간이 흘러나옵니다. 시간이 흘러나온다는 것은 율법이 자기의 역할을 다 해야 사라져요.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고. 그 법을 줬을 때 법을 준 취지의 성과가 있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법이 없고 사라지고 다른 법으로 대체되어 또 다른 율법의 시대로 넘어오거든요. 완료가 됐을 때 사라지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오늘 18장 11절에 보면, “네 계모가 네 아비에게 낳은 딸은 네 누이니 너는 그 하체를 범하지 말라” 그리고 14절에,“너는 네 아비의 형제의 아내를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이런 이야기는 그것은 이미 애굽이나 가나안 땅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예요. 레위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이 이야기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짓을 안 하겠지요. 이런 짓을 안 하면 율법 지킨 것이고 의인 되는 겁니까? 아니지요. 이 율법을 준 용도는 마감이 되는 거예요.

여기 19절에 보면, “너는 여인이 경도로 불결할 동안에 그에게 가까이 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월경할 때 성관계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돼있으면 아내라도 월경할 때는 안 하겠지요. 안 하게 되면 그 사람 의인 된 거예요, 율법 지킨 게 된 겁니까? 복 받겠네. 아니지요. 그 법의 용도는 된 거에요. 더 깊은 죄로 법이 또 그들을 데려갑니다. 레위기 18장에 따라 나는 한 번도 월경할 때 한 적 없다고 천국 넣어달라고 할 순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이 법은 어디까지 인도하느냐 하면, 십자가까지 데려갑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난 그때 레위기 18장 위반하지 않았는데요. 백날 해도 그건 위반 안 했다하더라도 그 뒤에 나오는 율법은 어떻게 했나? 이러면 할 말 없지요. 왜냐하면 법이란 그 시대에만 적용되고 그 다음에는 그 다음 시대에 필요한 법이 추가적으로 하늘에서 적용됩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게 만들어요. 어떻게 완벽에 완벽을 기해도 죄라는 수렁에서는 백날 허우적대고 거기서 온전하게 의인 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만들어요.

초등학교 1학년 더하지 뺄셈 한다고 수학 끝, 할 순 없거든요. 미국에서 좀 산다고 통역 좀 한다고 해서 영어한다고 하면 오산입니다. 그래서 영어를 한다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어는 끝이 없다고 해요. 영어만 끝이 없는 게 아니라 모든 게 끝이 없어요.

그리고 22절 봅시다.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다시 이야기합니다. 동성애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이미 애굽이나 가나안 땅에서 동성애가 있어요.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레위기 18장에 여성의 하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남성의 하체에 대해선 이야기한 적 않지요.

그 이유는 첫째 시간 끝에 이야기했습니다. 남자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남자가 짐승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약한 여자가 남자의 밥이 되는 운명을 감당해줘야 돼요. 약하기 때문에 힘으로 밀어붙임을 당해야 되지요. 당하면서 남자가 짐승이 됩니다. 그러면 여자는 저절로 짐승이 돼요.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에 예속됐기 때문에. 여자는 착해요, 이런 것 없어요. 마찬가지에요. 여자도 남성 되려고 시도합니다. 이게 범죄 하고 난 뒤에 남자, 여자가 저주받은 역할이 그거에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두 번째 해보겠습니다. 사라짐에 대한 겁니다. 레위기 18장에서 이야기하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내용을 음란이라는 개념으로 묶어버리면 반드시 이유가 뭔지 나와요. 바로 그 뒤에 법에 따라 계속 나와요. 18장 이후에 음란을 하게 된 이유는, 그게 이유라면, 또 거기에 대한 이유는? 결국 인간 자체가 신이 아니면서 가짜 신으로 행세하기 때문에 파생상품이죠. 다양하게 파생된 것 중에 하나가 음란죄가 돼요.

이게 왜 중요하느냐 하면, 음란죄를 위반 안 했다고 해서 예를 들어서 20절에, “너는 타인의 아내와 통간하지 말라” 남의 아내와 통간 안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우상이 아닌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파생된 거니까 다양한 것들이 나와요. 신명기에 보면 이런 게 나옵니다. 네가 이방민족을 공격할 때는 어린아이나 노인이나 관계없이 진멸하라고 해요. 진멸은 싹쓸이하라. 가축이고 뭐고 어린아이까지 불쌍히 여기지 말고 다 죽여라. 신명기에 불쌍히 여기지 말고 다 죽이라는 것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동성애하지 말라는 법과 이방민족을 보거든 우상 숭배자가 되기 때문에 다 죽여 버려요. 진멸하라는 법과 어떻게 내부적으로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지 찾아내야 돼요. 그런 게 중요해요. 그래야 복음이라는 것이 어떤 행동 하나 한다고 복음이 되고 안 되는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이란 믿는 것이지 행동을 똑바로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여러 번 강조합니다.

나는 음란죄 안 해야지. 어떻게 남의 여자와 관계해. 이러지 마세요. 지금 믿어야 돼요. 약속을 믿어야지 안 하고 하고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믿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막 살아요. 막 사는 데서 믿음이 나온다고. 막 살게 되면 음란 법은 피했지만 또 다른 법이 나온다고요. 네 이웃이 통일교 교인인데 왜 그렇게 친하나? 여호와증인한테 왜 그렇게 잘해주는데? 종교는 다르지만 인정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우리교인보다 더 사랑스러워요. 그렇게 발언하는 네 의식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는 말이죠. 너한테 잘해주니까 잘해주잖아요. 여호와증인이든 관계없이 사람들이 잘해주면 좋은 게 좋다고 사람 사귈 때는 복음 빼고 이야기합시다. 복음을 빼자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다는 의식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냐 말이죠.

그게 뭐가 누락됐느냐 하면, 집단의식이 누락된 겁니다. 집단에서 개인별로 한 거예요. 아까 집단 이야기했지요. 하나님께선 특정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특정 집단을 구원해요. 이 말은 개인의 능력으론 결합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남남이라 할지라도 하나로 결합되는 요소를 믿음의 내용으로 집어넣었다는 이야기에요. 쉽게 말해서 둘 다 못난 인간이 될 때 둘이 하나 될 가능성이 높아져요.

부부 싸움하다가 한 달 뒤에 갑자기 부부가 좋아진 이유가 그 집에 강도가 들어왔을 때. 저 인간 언제 죽나. 이 귀신아 죽어라. 싸우다가 강도가 들어왔을 때 남자가 결사적으로 몸 바쳐서 강도와 사투를 벌이고 여자는 벌벌 떨고 있었는데 남자가 강도를 제압할 때 남편이 얼마나 멋있게 보이겠습니까? 그럴 때 전에 나한테 친정집 욕한 것, 한 번 용서해줄게. 돌대가리라고 두 번 이야기한 것, 다 용서가 돼요. 사이가 좋은 거예요. 위기 왔을 때 둘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따로 놀 수 없을 때 그렇게 되는 겁니다.

어느 가정에서 자식들 간에 화합되지 못했어요. 가정교사가 새로 왔는데 가정교사를 놀릴 정도로 됐어요. 그런데 일곱 형제가 언제 하나가 됐느냐 하면, 번개 칠 때 무서워서 가정교사한테 다 왔을 때 <사운드오브뮤직> 영화 이야기입니다. 그때 노래가 나와요. 노래 부르면서 개인이 아니고 집단이 되는 거예요.

위기와 무서움 속에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응시, 자기 자신의 시선을 믿지 않아요. 내가 요청하지 않은 위기가 왔을 때 그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겁니다. 내 힘으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실력과 믿음의 능력을 총동원해도 난관을 극복 못할 때 기적적으로 하나님께서 거기서 용서하시고 은혜를 주실 때 그들은, 더 이상 날 믿으면 개다, 할 정도로 자기 자신의 사적이고 자기 옹호, 자기변명, 자기가 모든 걸 쥐어야 된다는 사고방식을 잠시 내려놓습니다. 잠깐이지만 그때만큼은 내려놓지요.

보통 남편들이 바빠서 자녀들 운동회할 때 잘 못 가잖아요. 운동회에 가보니까 이번에는 아버지들 나오셔서 100미터 달리기합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남편이 조퇴했는지, 연차 냈는지 해서 와서 누구 아빠, 여기 있습니다, 할 때 엄마가 예상 못했는데 갑자기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남자가 얼마나 멋있게 보이겠어요. 저 남자가 내 남편이다. 자랑스러워 할 거란 말이죠. 결혼한 보람을 느끼고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새순교회야 늘 그렇게 살아가지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고 사라지게 하는 것은 위기가 곧 기회가 되는 것을 계속 반복해서 그들을 이끌어가서 개인적인 의식에서 탈출해서 집단 구원하신다는 것, 하나의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을 느끼게 만들어요. 그렇다면 음란죄도 덩달아 변천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18장 이야기는 조심하면 돼요. 남자와 사랑 안 하면 되고, 남의 아내와 통간 안 하면 되고, 월경할 때 성관계 안 하면 되고, 이모나 백숙모는 아예 생각 안 하면 돼요. 하지만 그런 결과가 뭐냐? 역시 나는 잘났어가 되죠. 내가 살아있으면 우상이 되는 거예요.

레위기 18장을 주신 이유는, 바로 네가 속한 애굽과도 달아야 되고 네가 들어갈 가나안 땅과도 달아야 되고. 그럼 뭡니까? 그건 안 알려줘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는 안 알려주는데 새로운 법들이 주어지고 음란 법이 확대되면서 점차 약속의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나오는데 그건 개인적인 삶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형성된 삶을 만듭니다. 제가 어렵게 이야기했지요.

개인으론 간음죄가 형성되지만 집단이 됐을 때는 집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간음죄와 동등한 죄가 돼버려요. 간음 안 했더라도 이 집단에서 튀려하고 집단 속에서 자기만 챙기려고 하는 것,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겠어요? 여리고 성 칠 때 몰래 금과 외투 훔쳤던 아간이란 사람 있지요. 이 사람을 집단의 이름으로 죽여요. 돌무더기 만들었어요.

신명기에 나오지요. 여러분의 자식이 말 안 듣거든 여러분이 다루지 말고 그 집단의 수장, 장로한테 맡기면 네가 차마 던지지 못한 돌을 그들이 던져줄 테니 가져오너라. 신명기 21장에 나오지요. 저는 남의 아내와 통간 안 했습니다. 저는 동성애자 아닙니다. 저는 네 아내라도 월경할 때 관계 안 했습니다. 백날 손들고 나와도 소용없어요. 무슨 개인적인 문제를 집단 문제로 다루는데. 그렇게 착하니까 내 아들 나쁜 짓해도 살려주세요, 하면 안 된다니까요.

왜 이 점이 중요하냐 하면 오늘날 세상 교회들이 현대인들이 개인주의 아닙니까. 여러분이 똑바로 살면 여러분이 구원받는다고 강조하니까 개인구원이 발달하고 집단구원은 들어본 적도 없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구약 전체가 집단적인데. 집단 관계를 훼손하게 되면 그게 간음죄고 그게 우상 숭배 죄인데 그걸 전혀 모르고 있어요. 집단의식 한다고 교회 행사 빠지지 말고 교회에서 뭐 하자 하면 우르르 가야 하느냐? 이스라엘 유적 순례할 때 이번에 보니까 대구 남산성당에서 왔어요. 다니면서 자주 만났어요. 어떻게 우리 십자가마을도 한 번 해볼까요?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건 그거에요. 저에게 레위기 18장 이야기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간음죄고. 왜냐하면 간음죄는 우상 숭배의 다양성에서 나온 거예요. 여러 가지 죄들을 모아 보면 우상 숭배에요.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우상 숭배 때문에 망했습니다. 우상 숭배를 안 하면 될 것 아니냐? 안 할 수 없는 데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단체로. 이스라엘 자체가 우상인데 어떻게 합니까? 집단 자체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음란죄를 거론하면서 계속 죄의 깊이를 우상 숭배까지 끌고 가는 거예요. 우상 숭배로 가려면 한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집단적으로 그런 성향을 결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음죄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전개시키느냐, 전개방법이 나와요.

민수기 25장에 보면, 바알브올 섬겼지요. 우상이지요. 우상을 섬겼는데, 민수기 25장 8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보고 회중의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이만사천 명이 간음했습니까, 이만사천 명이 바알브올을 섬겼습니까? 아닙니다. 바알브올 섬긴 사람은 다 죽였다. 아니에요. 그 이상이에요. 이만사천 명이 죽은 원인은 한 남자와 한 여자였어요. 그런데 전염병은 그 한 사람이 원인이 되어 무려 이만사천이란 애꿎은 사람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또 있지요. 다윗이 요압이 말렸지만 다윗이 고집 부려서 인구조사를 했는데 사흘 만에 죽은 자가 칠만 명이었습니다. 칠만 명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도망쳤을 때에 베들레헴에서 두 살 아래 아이들 다 죽었지요. 그들이 나쁜 짓해서 죽은 겁니까?

사람들은 자꾸 인생이 꼬이고 뭔가 지진이 일어나서 집이 무너지고 가족 중에 교통사고로 죽으니까 전부 자기가 잘못해서 죽은 줄 알고 있어요. 여러분, 이 세상은 신자든 불신자든 운명은 같이 말아먹고 있어요. 애굽과 같이 망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속히 망하라고 소원하고 있고, 불신자는 망하면 안 된다고 김정은과 트럼프가 회담한다고 박수치고 있고, 신자는 이참에 울산에 핵폭탄 한 개 떨어져서 몰살해야 되는데, 이러고 있고. 정말 이러고 있었어요? 빨리 죽은 게 소원이잖아요. 천국 가면 되잖아요. 복음적으로 따져서.

내 행동 나빠서 벌 받는다는 그 자체가 우상 숭배라니까요. 이 세상 전체가 우상 숭배가 폭발하는 장소인데 왜 개인으로 우상 숭배라고 몰아붙입니까? 전체가 다 그런데. 같은 운명공동체에요.

그래서 에스겔에서 이스라엘아 너는 간음한 여인이라 하는 거예요. 이게 되지 않으면, 요한계시록에서 이 세상을 음녀라 했어요. 이 세상에 도성이 하나밖에 없어요. 바벨론의 속성을 음녀라고 했어요. 음녀라고 한 이유가 있어요. 음녀는 무엇과 대비되느냐 하면, 정결한 신부와 대비됩니다. 정결한 신부는 없어요. 성령이 임하면 생겨요. 네가 정결한 신부라고 하면 개인적인 의식이 돼버려요. 성령은 개인 용도가 아닙니다. 성령이 오순절처럼 와버리면 전부 다 한 몸이 돼버려요. 한 몸이 되고 한 지체가 돼버린다니까요.

전체가 한 지체가 되면 개인은 쑥 들어가야 돼요. 예를 들어서 머리는 그리스도지요. 몸은 성령 받은 지체잖아요. 어떤 사람은 주부고, 어떤 사람은 의사고 박사고, 어떤 사람은 약사다. 어떤 사람은 공장 사장이다. 직업이 다르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직업이 다른 것은 개인의식에서 나왔기 때문에 주님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목사든지 집사든지 따지지 않아요. 오직 하나만 봅니다. 성령 받았느냐? 그래서 몸도 하나요, 그 다음에 성령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내 사랑 없어요. 우리의 사랑이지. 내 믿음 없어요. 우리의 믿음이라니까요. 내 믿음 되면 음란죄에요. 우상 숭배고 자의식이라니까요.

신약에서 음란을 집단으로 봐요. 전 세상 모든 것이 음녀에요. 음녀는 정결한 신부와 대조시키기 위해서 음녀에요. 더러운 여인, 여기는 깨끗한 나의 신부. 내가 아니라 성령 집단이 그래요. 그래서 성도는 내가 나오면 안 되고 우리가 나와야 돼요. 아마 미국에도 나 같은 우리가 있을 걸? 브라질에 나 같은 우리가 있을 걸? 성령은 국가별로 할당 받는 것 아니거든요. 멕시코라고 세 개 주고 미국이라고 더 많이 주고 그런 것 없어요. 성령은 주시는 대로 주시는 겁니다. 아프리카라고 안 주는 것 아니고 북한이라고 안 주는 게 아니고 한국이라고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성령은 주시고 싶은 택한 백성에게 그냥 주거든요.

제가 지난 강남강의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오지 못한다고 해서 그 집합 장소가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에요. 예수님이 집합장소가 되는 이유는, 성령이 처소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만남의 장소기 때문에 그래요. 거기에 가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할 필요 없어요. 예수님 계신 곳에 아버지와 함께 있고 우리도 함께 있고 성령도 함께 있고. 그래서 우리까지 포함해서 성령 안에서 4위1체에요. 모두 하나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너희도 나와 하나라 했어요. 왜 삼위일체는 이야기하면서 사위일체는 이야기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율법을 보면서 인간은 이런 생각을 할 거예요. “하나님, 저는 다행입니다. 이런 민망한 짓을 저는 평생에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음녀지. 또 나는 이런 적 없습니다. 그게 행함이잖아요. 행함으로 버티려는 거고 행함으로 견디는 거잖아요.

제가 아까 우스운 이야기했는데 사실은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해보겠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총각 뗀다고 창기와 이야기할 때 하체 보지 말고 상체끼리 눈으로 마주보면서 복음을 논한다고 합시다. 그것도 한 시간 반 동안. 둘이 관계할 마음 하나도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둘이 이야기하다 성령 받았어요. 생각만 해도 참 그런 일이 있을까 싶은데. 하나님이 하시면, 무슨 말이냐? 하나님은 장소에 구애 받지 않잖아요. 창녀촌인지 술집인지 교회인지 분간 안 하고 성령을 줘버리는 거예요. 말씀 주는 끝에 성령을 주면 안 받을 수 있어요? 받아야지요. 온다 사랑. 받아라, 빈자리야. 빈터에 받는 거예요.

받으면 둘이 성령 안에서 우리가 되지요. 형제, 자매가 되지요. 아가씨는 자매가 되고 총각은 형제가 되고. 둘이 마주보고 이야기했지요. 그러니까 하체를 보고 싶어도 볼 필요가 없지요. 둘이 합쳐서 음녀가 아니고 성녀가 돼요. 하나님의 거룩한 신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창가에 전도하자는 게 아니에요. 이걸 또 모험 삼아 슬슬 수작부리고 딴 생각으로 복음이란 명분하에 자기 욕정을 채우는 그런 짓을 하면 안 되고요. 제가 말하는 것은 어떤 상황이 주어질 때 그 상황은 레위기 18장뿐만 아니고 요한계시록 7장, 17장과 함께 작용하는 상황과 맞닥트린 거예요.

그런데 이걸 집단적으로 생각해야 되는데 만약에 개인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지금 이 순간이 저 여자가 나를 꾀려고 하는구나. 그렇다면 레위기 18장을 생각해야 돼. 레위기 18장에 남의 여자의 하체를 보지 말라. 주여,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주여, 안 봤습니다. 안대했습니다. 그 여자의 상체만 봤고 하체는 안 봤습니다. 보여주려고 하는 걸 안 봤습니다. 그러면 승리했습니까? 승리 안 해놓고 주여, 드디어 승리했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간음이에요. 그게 바로 자기가 우상 숭배와 관련돼있는 겁니다. 나만 지키고 나만 잘 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율법의 사라짐을 몰라요. 그때 그 율법 말고 더 센 율법이 기다린다는 걸 몰라요. 개인주의는 반드시 음녀로 통한다는, 에스겔에 나오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음녀라.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잘 되는 것 밖에 몰라요. 나라 자체가 우상화된 거예요. 그런 말씀을 다 놓쳐버렸어요. 혼자 도 닦았어. 참아야 하느니라. 안 볼란다. 이상한 달력 안 본다고 구월까지 다 떼서 나중에 달력도 없고. 발악을 해. 누굴 위한 법 지킴이에요?

주어진 상황이 왔을 때 다시 천천히 하겠습니다. 주어진 상황은 레위기 18장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그 주어진 상황 때문에 갑자기 레위기 18장이 생각납니다. 생각나면서 우리는 거기서 그 법을 위반하지 않으려는 발악하는 개인주의적 의식을 실감하게 돼요. 평소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구나. 내 잘남을 지키기 위한 범죄 한 이후에 옷입고 다니면서 이걸 정상이라고 우기고 싶은 나의 잘남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18장 어기지 않았다고 발악을 하지요.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없던 죄도 만들어내기 위함이에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저주 아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간음죄가 확산이 되면서, 옆집에 여호와증인 사는데 어제 도움 받았습니다. 죽여 버려라. 저한테 밥 없다고 햇반 사주고 아프다고 약 사주고 얼마나 고마운데. 죽여 버려라. 여호와증인.

갑자기 신명기에 나오는 진멸하라는 그 말씀을 나한테 잘해줬다는 이유로 내 쪽에서 아니 된다고 이렇고 있단 말이죠. 자식이 말을 안 들어? 그러면 집단의 수장인 장로에게로 가서 돌 침을 당하도록 내놔라. 아니 되옵니다. 내 자식은 죽이든 살리든 지옥 보내든 내가 알아서 합니다. 네가 바로 파생된 죄인이 되는 거예요.

다윗의 인구조사가 그리고 한 남자와 여자의 간음이 이만사천 명이 죽어버린, 진짜 죽은 사람만 억울한 거예요. 여러분이 아무 일도 없는데 울산화학공단에서 냄새 날아와서 코를 막아야 된다면 이 세상에서 운명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같이 죽어가고 있어요. 저주 안 받으려고 하지만 독한 냄새 안 맡겠다고 혼자 도망가지 말고, 청도 같은 데 살지 말고. 이 세상은 도피할 데가 없어요. 피했는데 옆집이 시비 걸어. 이상한 사람 와서 애 먹어. 밤낮 싸우고 그래. 어차피 우리는 피할 곳이 없어요. 왜냐하면 주님은 이 저주받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간음죄, 음란의 확산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보겠습니다. 민수기 25장에서 바알브올이란 바알 신에 드디어 이스라엘에 일차 간염 됐어요. 바알 신이 오기 전까지는 그들의 민수기 25장 정도야 충분히 개인적으로 벗어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실습을 해본 적 없고 다만 주의하라는 통보만 받았을 뿐이었어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바알 신을 경험할 때 이들은 여호와를 건성으로 섬기고 내용은 바알에 확 끌리게 됐습니다. 오늘날 교회 같이.

여러분 교회 가면,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십자가 피로 구원받습니다. 죄 씻음을 이야기 안 한 교회는 없어요. 그런데 막상 교인들이 붙들고 있는 것은 기도하면 복 받는 것 때문이에요. 이 교회 앞자리에서 기도해서 복 받았다는 가정이 한둘이 아니고 그러니까 이 교회를 하나님이 축복해줘서 커졌다고 보는 거예요. 만약에 어느 교회에서 지난해에 교인수가 250명인데 올해는 300명 하자고 하면 그건 백발백중 이단입니다.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하면 자의식에 있어요. 자기 집단에 있어요. 하나님을 빙자해서 정작 자기가 사랑하고 믿고 붙들고 지키고자 하는 것은 지가 속해 있는 자기 자리입니다. 그 종교가 바로 음란하다고 유명한 바알 종교에요. 바알 종교는 정착된 민족에서 가나안 민족이 나왔고, 정착된 민족에서 사유재산이 인정됐기 때문에. 공유재산이 아닙니다. 개인재산을 개인이 지킬 수 있다는 것이 바알 종교에요. 내가 기도한 만큼 내 것이 돼요.

미쳤다고 남 부자 되라고 기도합니까? 교회에서 왜 철야합니까? 남의 자식 잘 되라고 기도합니까? 내가 기도하면 내 자식 잘 되지요. 남의 자식보다 기도 많이 한 어미를 가진 내 자식이 성적이 높아진다는 기대하면서 기도하는 거예요. 남한테 지지 않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속도내서 남보다 앞서 가는 재미로 산다 말이죠. 그게 바로 바알 종교라니까요. 바알 종교는 자기 소유와 관련돼있어요.

이건 수요일에 약간 했는데 바알 종교의 특징은 자기 소유의 증대와 관련돼있습니다. 이게 정착 민족들의 특징이에요. 노하우가 그겁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다가오니까 그들은 유목 생활, 양이나 염소를 키웠어요. 농사지을 줄 몰라요. 토착민들은 대대로 농사졌기 때문에 과수농사는 이렇게 해야 되고, 물은 언제 줘야 되고, 씨는 언제 뿌려야 되고, 언제 가지치기해야 되고 다 안다 이 말입니다.

가지치기는 이렇게 하시고 씨는 이렇게 뿌리세요. 그렇게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가지치기할 때 동쪽을 향하여 바알 신에게 세 번 하면 효과 있습니다. 나도 안 믿었는데 해보니까 정말 효과 있어요. 모든 시행에 있어서 종교적인 의식, 행태, 습관, 풍습이 개입 안 된 것이 없어요. 영화 만들 때 돼지 코에 돈 오만 원 꼽고 절하지요. 공장 상량식 할 때 다 절하지요. 이사 올 때 시루떡 용도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붉은 팥은 귀신 쫓아내는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별 의미 없지만 찝찝하니까 한다는 식으로 전부 다 하는 거예요.

일 년 농사지을 때 스케줄 나오잖아요. 그것이 바로 토착민들 가나안 땅의 스케줄이에요. 월삭이라는 게. 거기에 이방요소가 다 개입되는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는 전부 예수님의 제사로 다 바꾸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는 여호와께 드리고 잔뜩 기대하고 희망 갖는 것은 뭡니까? 옛날 전처럼 토착민들 가졌던 풍요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짓거리 때문에 농사가 안 된다면, 여호와께 빌겠습니까? 잘사는 옆 나라에 가서 조언 받고 그 종교를 수입해서 쓰는 거예요. 온 산당마다 기도처가 왜 있어요? 아쉬워서 가까운데서 하는 겁니다. 율법이 없는, 약속이 없는 곳은 우상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자기한테 없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갔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믿어야 될 것은 자기의 소유와 자기가 잘 되는 것을 굳게 믿는 입장에서 어떤 신을 동원해도 예수를 동원해도 바알이 되고, 여호와 믿어도 바알 되고, 삼위일체 믿어도 바알 되고, 전부 바알종교 외에는 사람들은 믿을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레위기 18장 내용과 관계없이 완전히 바알종교화 되고 말았어요.

본문 24절 봅시다.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했는데 바알종교나 애굽에서는 자아 자신이 주체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것은 물체가 되고 스톱이 된다니까. 저걸 내 것 만드는 순간에 사진 찍으면 시간 요소가 날아가는 것처럼 기어이 그때 좋았던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겁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 있지요. 제가 사해에서 롯의 처를 봤어요. 키가 20미터나 되는 소금 기둥을 봤는데 롯의 처가 왜 소금 기둥 됐습니까? 간음했습니까? 다른 남자와 바람피웠어요? 성경에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뒤돌아봤잖아요. 그럼 진작부터 십계명 1계명부터 뒤돌아보지 말라고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율법은 법을 지키는 게 아니라 네가 누군지 알려주는 거예요. 네가 무엇에 관심 두고 무엇을 쥐려고 하고 죽어도 못 놓는 무엇인지 캐내는 게 율법이에요. 그런데 율법을 자꾸 지켜요. 왜? 정작 쥐고 싶은 것을 안 뺏기려고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법 지키는 데 도사에요.

제가 주일 오후에 엘리베이터 이야기했지요. 안식일에 엘리베이터 버튼 안 누르고 가만있다고. 이방인들이 누르니까 같이 내려가고. 안식일에 엘리베이터 이동시키는 노동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가만있는 거예요. 비겁한 인간들. 우린 뭣도 모르고 누르고. 정신병자도 아니고 뭐예요? 왜 안식일 법을 안 지키면 내 것 빼앗기니까 저주받으니까 그 유대인과 오늘날 우리와 다른 점이 뭐가 있어요?

하나님 왜 믿습니까? 내가 공들여 키운 것을 안 빼앗기기 위해서 더 키우기 위해서. 롯의 처가 왜 뒤돌아봤습니까? 자아 됨이, 내 것 지킴이, 평생에 내가 수고한 것들이 뒤에 있거든요. 뒤돌아보는 순간 짤칵 찍혀서 물체 됐어요. 주님의 응시에 의해서.

하나님은 레위기 18장을 보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을 바로 봐요. 레위기 18장은 뭐냐? 우리 자신이 어떠한 인간이기에 이런 식의 행동들이 잠재돼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건성으로 이걸 안다고 해서 우리 자신이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구십이 되고 백 살이 되도 달라지지 않아요. 92살 노인이 87살 자기 아내를 때려죽였어요. 징역 4년 받았습니다. 96살 돼야 교도소에서 나오겠지요.

나이 많다고 인간되는 것 아니에요. 이걸 못 놔요. 놓지 못한다니까요. 이건 예수 믿고 뭘 믿어도 소용없어요. 내 것을 왜 빼앗겨요. 미쳤어요. 빼앗기게. 얼마나 착했으면 복 받아서 이만큼 됐다고, 착한 덕분에 복 받은 거라고 여기는 거예요. 개인적이고 우상 숭배적이고 집단의식 하나도 없고 그저 지 잘난 맛에 살아갑니다. 성령이 옵니다. 성령 오면 인간 안 돼요. 성령이 와도 레위기 18장을 못 지킨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지 이것 못 지킵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요.

성령이 오게 되면 뭘 아느냐? 지나 나나 똑같다는 걸 압니다. 중요한 것은 똑같은데 왜 천당 갑니까? 그것은 주님의 자비로운 일방적인 택함 때문에. 주님의 자기 의지가, 주님이 사랑한다는 의지가 내 행함을 이깁니다. 나의 못남과 음란을 이겨요. 우리가 증거할 것은, 이것 지켰다고 레위기 18장 어기지 않았다고 증거하지 마세요. 개인을 증거하지 마시고 우리의 머리 되시는 그리고 몸이 되신 못난 인간 하나로 만들어주신 그 주님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실컷 욕정대로 우리의 육신대로 살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감사함으로 봤습니다. 기쁨으로 봤습니다. 초조함과 아슬아슬함이 아니라 절망이 아니라 성령 받았기에 구원받았기에 안심하고 우리가 저주받은 세상에서 마음껏 휘저으면서 수용하면서 질주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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