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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지역강의 > 울산강의
2018-12-07 23:36:25 조회 : 512         
비-현실 181207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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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천상우리교회 특강       음성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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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25.♡.150.1) 18-12-11 10:24 
20181207a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비-현실적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1장 1절부터 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 골육지친인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친자매로 인하여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지니라 제사장들은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갈게 하지 말며 그 수염 양편을 깎지 말며 살을 베지 말고 그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고 그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 곧 그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

여기에 제사장들에게, 라고 했는데 제사장 그룹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어요. 그것은 그들이 특수한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소방관들이 출동할 때 갑옷 비슷한 것을 입지요. 소방관 복장이 따로 있는 것처럼 제사장 복장이 따로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순수한 차이 남 또는 차이를 제사장을 앞장세워서 보여주는 겁니다.

제사장이 없다고 생각해보면,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에요. 너나 나나 똑같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제사장이 눈에 띠는 복장으로 백성들 앞에 등장하게 되면, 뭐야 저 사람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에서 예수님이 독생자 되신 분이 하늘에서 이 땅에 왔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은, 뭐야 너? 이렇게 되지요.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이란 고만고만한 사람들 모방하고 흉내 내며 따라가면 그게 인생사는 것이라는 그런 것을 나는 포기했다는 겁니다. 고만고만한 사람, 괜찮아 보이는 사람을 흉내 내고 그 사람처럼 살겠다는 그 삶 자체를 거기서 돌아섰다는 걸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게. 눈에 확 띠는 어떤 특별한 존재, 그분에게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추종하고 그분에게 목을 매는 것, 만약에 그분이 살아 있다면 나 같은 건 죽어도 괜찮은 것, 그게 믿음이잖아요.

성경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너를 없앨 수 있느냐, 그것도 기쁨으로. 아주 즐겨, 아주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네 자신을 제거할 수 있느냐와 관련돼있어요. 교회 다닌다. 왜 다니느냐? 나를 키우기 위해서. 그거는 믿음이 아니에요. 그건 도 닦는 거고 절에 가는 겁니다.

제사장이 등장했다는 말은 제사장에게 일어나는 일과 평소에 네가 생각하는 그 차이, 그걸 무슨 차이라 했어요? 순수한 차이. 순수한 차이란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고, 이런 게 아니고 완벽하게 다른 것, 철저하게 차이나는 것, 그런 게 있어야 돼요. 그런 게 있어야 미련 없이 나를 위한 내 인생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아까 레위기 21장 1~7절을 읽었는데 이 말을 요즘 말로 번역해서 달리 소개한다면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만 챙기는 사람과는 만나지 말라.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과 상종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을 우리가 쉽게, 쉽게 만나는 이유는 나도 너 못지않게 내 자신만을 위해서 너 같은 인간을 만나준다. 이러거든요.

전부 다 누굴 만나든 누구와 대화하든 내가 나 챙기기 위해서 만나고 대화하거든요. 그러면 그건 제가 처음에 이야기한 고만고만한 사람 만나는 거예요. 보통 그걸 사람들은 인생살이 한다고 하거든요. 그런 인생살이 자체를 그만할래. 고만고만한 인생살이 이젠 지겹다. 그런 식으론 안 살래, 라고 그게 성립이 되려면 어떤 특정 분에게 아주 가볍게 맡길 수 있어야 돼요.

진주성에 논개 있지요. 논개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몸 바쳐서, 몸 바쳐서 죽었잖아요. <논개> 노래에 나오잖아요. 그 논개라는 사실은 결혼한 여자라는 설이 있는데, 관가의 기생인지 그건 딴 문제고, 하여튼 그런 여자에게 일본 장수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떨어져 죽었거든요.

떨어지기 직전에 어떤 매파, 중매쟁이 할머니가 와서 아가씨, 내가 좋은데 시집보내줄까? 이러면 논개가 나한테 장가올 사람 있으니까 일본 장수와 죽는 것은 나중으로 미뤄야 되겠다는 생각하겠어요? 원피스 하나 맞춰줄까, 좋은 아파트 하나 사줄까? 이러면 갑자기 자기 하는 일을 그만둡니까?

그래 아파트에 살고 나중에 일본 장수 껴안고 뛰어내려야지. 이러진 않는단 말이죠. 눈에 보이는 게 없지요.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고. 안중근 의사한텐 이토 히로부미 죽이는 것이 자기 믿음의 행함이잖아요.

성도가 됐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네가 알아서 대충 인생 살라고 하지 않았어요. 특출한 사람을 눈앞에 제시합니다. 너와 그 사람과의 순수한 차이를 네가 목격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순수한 차이를 위해서 제사장은 자유가 없어요. 왜 자유가 없느냐 하면, 복장으로 완전히 뒤집어씌웠으니까. 복장을 보게 되면 이렇습니다. 모자를 이렇게 썼거든요. 가는 실로 만든 관을 썼고, 머리에 금으로 만든 머리띠를 해요. ‘하나님의 성결’이라는 금테를 둘렀어요. 옷을 입는데 에봇입니다. 어깨에다 호마노라는 보석에 여섯 지파의 이름을 새겨요. 양어깨니까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깁니다.

소방관이 옷 입는 이유는 뭡니까? 자기 몸을 화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죠. 그런데 제사장 복장은 뭘 보호하기 위함인지 모르겠어요. 여기에 보석이 한 줄에 네 개씩 총 열두 개에 금테를 둘렀습니다. 여기에다 열두 지파 이름을 씁니다. 이걸 판결 흉패라고 해요. 에봇을 입었으니까 에봇 띠가 있고 앞에 앞치마 같은 에봇 겉옷을 입습니다. 에봇 밑에 속옷을 입고. 밑에 보면 금방울 달려있고 석류 달려있고. 금방울 하나, 석류 하나 번갈아가면서 달아놓고. 떨어지면 안 되니까 금사슬로 돼있고, 금 사슬 매는 금 고리 있고.

이게 제사장 복장입니다. 아까 소방관 복장은 화염으로부터 보호한다 했지요. 제사장 복장을 보세요. 모습이 다른 사람보다 특이하죠. 다른 사람들은 이런 복장 안 한단 말입니다. 평상복입지요. 특히 어깨에 열두 지파 이름이 있고 앞에도 열두 지파가 들어간 것은, 제사장이 속한 레위 지파를 빼놓고 모든 열두 지파가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가슴팍으로 어깻죽지로 완전히 이동했지요. 그러면 한 사람 몸에 열두 지파가 같이 결합돼있는 겁니다.

만약에 제사장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다. 그러면 제사장 개인에게만 추궁당하는 게 아니에요. 제사장을 홀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열두 지파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는 백성의 어른이라 돼있는데 짊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백성 입장에서 봅시다. 제사장 복장을 보니까 그 사람 가슴팍, 어깨를 보니까 누구 이름이 있어요? 내 이름이에요. 내 지파 이름, 소속 이름이 그쪽으로 날아가서 그쪽에 다 걸쳐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뭐냐 하면, 내가 날 위해 산다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답변해보세요. 의미가 없어요. 중지해야 돼요.

아까 그랬잖아요. 자길 위해 사는 사람과 상종하지 말라고. 그건 이스라엘 아니라고. 당신 이름이 부착된 곳에 가란 말이에요. 부착된 그를 위해 살아라. 당신 이름이 어디 부착돼있는가? 제사장. 그럼 제사장을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돼요. 하나는 벌써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나의 운명과 제사장 운명의 관계는? 두 번째는 정말 어려워요. 제사장에 붙어있는 것 누가 만들었어요? 하늘에서 막 떨어졌습니까? 여자들의 수놓고 하여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잖아요. 그건 인공물이죠. 인공물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올 수 있느냐? 인간이 만든 물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뽑아낼 수 있느냐는 문제에요.

인공물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나오느냐? 첫째는 나의 운명과 제사장의 운명의 관계는? 두 번째, 제사장 복장에 부착된 인간이 만든 것에서 어떻게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올 수 있느냐, 그 과정은 어떠냐? 이 두 가지에요. 이 두 가지를 오늘 되던 안 되든 풀어야 됩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다시 이야기해요. 고만고만한 사람이 있으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 있다. 너는 여기 있다, 있다. 둘 다 있다가 되겠지요. 고만고만하니까 인생사는 게 그렇고 그런 거니까 너는 네 인생 살아. 하나도 안 부러워. 나는 내 인생 살 거야.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가치를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제사장이 등장했는데 복장에 내 소속, 내 이름이 그 사람의 가슴팍에 있다. 그 사람의 어깨에 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과연 진짜 있는 것이냐, 아니면 소멸되기 위해서 있는 것인지 따져봐야 돼요. 내 이름을 가져간 저분은 창대하고 그분이 크고 클 때마다 나는 어떻게 됩니까?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전락하는 거예요.

신약성경에 사도바울의 편지들이 나오잖아요. 여러분들이 사도바울의 편지를 한 번쯤은 읽어보셨지요. 교회 다닌 세월이 몇 년입니까? 한 번쯤은 읽어봤잖아요. 한 마디로 그 편지에서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가 뭐였던가요? 예수님을 되게 부각하지요. 사도바울이 편지에서 만유의 주시고,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고 이렇게 쭉 나오는데 결국 그 말은 지금 우리에게 뭘 알라는 겁니까?

예를 들어서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재산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는 이 말이거든요. 도대체 뭘 손 놓으란 이야기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라) 그렇지요. 마태복음 16장,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천국에 못 가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말하는 편지는 뭐냐 하면, 쥐고 있어도 소용없는 걸 왜 쥐고 있느냐는 거예요.

내 몸이 있잖아요. 그거는 놓아버리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놓고 난 뒤에 아무것도 없으면 나만 손해잖아요, 라고 나오겠지요. 갑자기 40억짜리 복권이 당첨됐다. 그런데 친구가 와서 복권 당첨된 줄도 모르고 돈 만원 빌려달라고 했다. 옛날 같으면 안 빌려줘요. 그런데 40억 있는 사람이 돈 만원이 무슨 대수겠어요. 그래, 아니 그냥 줄게. 기마이 쓰고 은행에 당첨금 찾으러 갔을 때 지난 주 복권이라고 하면 돈 만원만 날아갔잖아요.

지금 교회 다니는 사람들 문제가 뭐냐 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주장하고 싶은데 예수님 재림하시고 예수 믿으면 용서받는다고 했는데 안 그러면 나만 등신되잖아요. 그러면 요령을 부려야 되지요. 어떻게 합니까? 발 하는 교회에 걸치고 발 하는 세상에 걸치고. 예수님 재림도 안 하고 천국 없으면 발 빼면 되니까. 몰빵할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오랜만에 고상한 용어 나오지요.

교회 가니까 고만고만한 사람들이에요. 믿음 좋은 줄 알고 복음 이야기하니까 완전히 욕만 얻어먹었어요. 교회 다녀도 복음 모르는 건 마찬가지네. 나와 똑같네. 이래서 우리는 벌써 안심이 되는 거예요. 그들이 전혀 부럽지 않아요. 지도 복음 모르고 나도 복음 모르는 건 마찬가지니까.

부럽진 않은데 문제는 고만고만한 인간에 만약에 제사장이 떴다. 제사장 복장을 하고 여기 새순교회에 떴다고 한다면 우린 그분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완전히 돈키호테지 뭐. 저거 미친 것 아니야. 제사장 복장하고 오면 기가 막힐 일이란 말이죠. 복장이 왜 그래. 연예인인가, 각설이인가? 이러겠지요.

2018년엔 그런데 만약에 레위기를 줬던 기원전 1400 얼마에 제사장 떴다 하면, 아저씨 미쳤어요? 이렇게 이야기하겠어요? 못하지요. 그 현장으로 갑시다. 우리가 그 현장으로 가야 돼요.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구약에서 발을 너무 빨리 빼버렸어. 구약의 복음을 충실하게 적시고 신약으로 와야 되는데 구약 안 적시고 처음부터 신약에 들어가 버렸어요. 1학년 안 거치고 2학년으로 막 들어가 버렸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제사장 특이한 사람이에요. 고만고만한 사람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선 안 믿는 사람들에겐 우스꽝스런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희들 공연하나? 사실은 예배가 공연과 똑같은 거잖아요. 어떤 경우에? 효과가 없을 때는. 하나님이 주와 함께 있는 효과가 없을 때는 여러분 예배시간에 공연 본 겁니다. 목사 하나 쇼하는 공연 보신 거예요.

그 효과가 뭐겠어요? 지금 2번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이 만든 건물 여기서 인간이 만든 성경책을 펴고 인간이 만든 찬송가로 노래 불렀어요. 전부 다 인공적이에요, 인위적이에요. 이거나 그 당시 제사장 복장이나 다 인위적이에요. 인간이 만든 거예요. 하나님의 손이 나와서 만든 게 아니에요. 인간 손으로 자기가 만든 거예요. 카메라 설치부터 해서 전부 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 일의 효과를 무슨 근거로 제시될 수 있느냐는 거예요. 은혜 받았다는데 그 은혜 받은 메커니즘을 설명해보란 말이죠. 찬송가 부르는데 은혜 받았어요. 그러면 찬송가 어느 가사에 그리고 솔이에요, 미에요. 어디서 은혜 받았어요? 도미솔도~ 여기서 은혜 받았어요? 파라시도 레파~ 거기서 은혜 받았어요? 정확하게 이야기해요. 어디서 은혜 받았어요?

그리고 그게 정확하게 예를 들어서 도미파솔에 은혜 받았다면 그 다음에 도미파솔 할 때로 똑같은 효과가 나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 번 도미파솔에 은혜 받았는데 오늘 도미파솔에 왜 은혜 못 받는데요? 은혜가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 은혜가 안 된다면 지난 번 은혜 받았다는 것도 구라일 수 있고 위선일 수 있어요. 착각일 수 있단 말이죠. 정확하게 어떻게 해서 거기서 은혜란 하나님의 작용이 되는지 이걸 밝혀야 되지 않겠습니까.

완전히 이 복장하면 또라이 되는 겁니다. 돈키호테 알지요. 풍차를 적인 줄 알고 싸움 벌이는 그 돈키호테. 세르반테스의 작품으로 판초와 같이. 미친 인간이거든요. 제사장이. 요새도 미친 짓하는 사람 있어요. 교황이라든지. 미사라는 공연에 보면 이상한 복장, 평범한 복장 안 하지요. 신부들 나와서 흔들기 하고. 시각, 청각, 심지어 성당에서는 후각도 동원해요. 향을 피우고. 청각은 2층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수녀들 찬송가 부르고. 제가 결혼식에 참석한다고 명동성당에 가본 적 있어요.

교회라는 걸 해놓고 예배라는 공연, 매주 돌아오는 지루한 공연, 따분한 상투적인 공연. 마음은 콩밭에 있고. 오늘도 교회 왔으니까 이번 주 나쁜 일 안 생기는 이마에 부적 붙이는 식으로 출석 도장 찍는 식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 이게 고만고만한 교회들이에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걸 배우잖아요. 다들 그래요. 신기한 것도 없고 기적도 없고 은혜도 없고. 참석 안 하면 험담한다고 그것 의식해서 나와 주고.

이러한 의식들이 결국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나 아니고서는 나를 관리해줄 사람이 따로 없음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큰소리치는 불신앙이에요. 평범하게 사는 게 불신앙이 돼버린 거예요. 아는 사람 안면만 생각하지 그저 같이 살아 있다는 인간만 염두에 두고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은 이거거든요.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인가, 네가 살아 있는 게 살아 있는 것인지 둘 중에 분명히 하라는 거예요. 니가 살아 있으면 예수님은 없는 존재고, 예수님이 살아 있으면 나는 눈에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없어져야 소멸돼야 마땅한 가상존재가 되는 겁니다.

가상존재를 붙들고 살아가는 거예요. 가상남편, 가상아내, 가상자식, 모든 걱정과 염려는 소멸되는 것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있어도 아무 의미 없는 것, 없어진다고 해도 그건 너무나 마땅하고 나이 90되면 다 죽잖아요. 없어지는 것에 연연하고 거기에 울고불고 짜증내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좋아하고 교만하고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아줌마들 만나면 그런 이야기로 세월 다 보내고. 도대체 우리 자신들이 뭐예요?

차이난다는 것은 현격한 차이나요. 나는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현격한 차이에요.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나는 오늘 죽어도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라고 주님의 가치와 나의 가치가 현격한 차이, 순수한 차이 그것 때문에 제사장이 제시된 거예요. 지금 1번도 아직 안 했습니다.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제사장의 특징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유가 없습니다. 왜 복장으로 뒤집어씌웠으니까. 만약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 석고를 뒤집어씌워보세요. 완전히 동작 그만이죠. 그대로 굳어버리죠. 제사장은 자유가 없어요. 1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라는 말씀의 석고로 완전히 굳어져버렸어요.

자유가 없다는 말은 곧 분발이 소용없다. 분발이란 말 아시죠. 분발해. 열심히 해봐. 노력해봐. 이게 분발이잖아요. 제사장한테는 분발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굳어져버렸는데 무슨 분발이 돼요. 성도에는 너는 이미 죽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은 분발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오늘날 제사장이 누구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 성도잖아요. 그러면 우리 선배가 누구에요? 선배가 바로 레위기 21장의 제사장들이에요. 대대로 내려오는 제사장들. 아까 복장 봤지요. 판결 흉패, 에봇 이것 하나하나 율법이라는 석고를 뒤집어썼다고 보세요. 자기가 폼 내려고 집에서 옷 해 입었습니까? 아니거든요. 폼 낼 복장이 아니잖아요.

사실은 이런 복장은 남들에겐 주제넘은 건방진 복장이에요. 왜냐하면 자기 옷에는 자기 이름만 써야지 왜 남의 이름을 쓰고 평생을 살아갑니까? 물론 50세까지만 하지만. 50세 되면 은퇴합니다. 이렇게 남의 이름을 짊어지고 남이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그 사람의 운명을 제사장 이름으로 빼앗아 와서 네 운명은 내 손에 나 하기 나름이야, 하고 강제로 전환시킨 거거든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끊으란 말이죠. 너는 그런 구조로 돼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제사장에게 이런 복장을 주신 것은 제사장에서 펼쳐 나갈 새로운 세계관 때문에 그래요. 성령이 임하면 세상 보는 눈이 확 달라집니다. 세계관이 달라요. 고만고만한 게 아닙니다. 아마 고만고만한 건 다 지옥이라고 보일 거예요. 세상 자체가. 부러운 것도 없고 재미난 것도 없고 신나는 일도 없어요. 반대로 이야기해서 좌절될 일도 없고 실망스러울 일도 없고 머리 싸매고 고민할 일도 없어요. 좋은 것도 없고 울 일도 없고 웃을 일도 없어요. 새로운 세계관에서는.

왜냐하면 내가 소속된 세계는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인간들이 만든 세계에는 없어요. 사실 인간들이 만든 세계란 말이 어폐가 있습니다만 인간들이 만들었다고 우기는 그 세계에는 새로운 세계는 없습니다. 인간들이 구성했다는 문명세계에는 없어요.

지금까지 한 걸 정리해보면, 첫째, 새로운 복장은 새로운 세계관을 표현한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네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말은 바로 천국 백성이 된다는 거예요. 옷을 걸친다는 것은 그냥 몸에다 옷을 걸친 게 아니고 옷이 새로운 몸을 스스로 내재적으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리스도 옷이, 성령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기존에 내 몸에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산다는 그 세계관이 소멸되고 주님이 준비해놓은 세계관으로 전환돼요. 사람 자체가 달라진다니까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람 자체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갖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사나죽으나 누구 것이다? 주의 것이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씀을 내가 외움으로서 내가 이 세상에서 출세한다는 노림수를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몸이 암에 걸렸는데 내가 무슨 고백을 하면 암에서 나을까? 옳지.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착하다고 해서 지금 병든 암에서 기적적으로 낫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은 갖지 마세요.

새로운 복장은 새로운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것은 기존에 몸에다 하나님이 이야기한 제사장 복장을 입히는 겁니다. 그러면 몸+복장, 몸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본인이 만들었습니까? 하나님 것이죠. 복장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인간이 만든 인공부착물이죠. 우리도 옷 입었잖아요. 옷 안에는 주께서 만든 몸이 있습니다.

원래 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돼있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시선을 어디에 둔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두는 거예요. 그러면 내 몸을 안 보게 되지요. 하나님 영광을 위한 소모용 몸이 되는 거예요. 죄를 짓기 전에는. 아담이 죄를 짓기 전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은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통로가 묵사발 됐잖아요. 완전히 훼손시켰잖아요.

하나님 영광으로 가는 길을 잘라놨으니 누구한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자기에게 관심 있지요. 이건 뭐냐 하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이미 비-정상 존재에요. 우리가 미친 거예요. 우리가 돌은 인간이에요. 고만고만하니까 고만고만하면 다 정상인 줄 아는데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같은 인간들끼리 비교해선 정상이 아니란 걸 모르잖아요. 그래서 돈키호테 같은 사람, 이상한 복장을 한 제사장을 앞장세운 거예요. 그걸 순수한 차이, 공통점이 없어요. 완전히 단절된 차이에요. 그 제사장을 보면서 하나님이 합니다. 백성들아, 저 제사장 어떻게 대우할래? 그러면 우리가 그 사람을 특별히, 천하보다 중요한 내가 있는데 왜 저 사람한테 신경 써야 됩니까? 그 사람 옷 한 번 봐라. 보니까 거기에 내 소속이 있고 내 이름이 있거든요.

내 지파, 내 가문, 내 이름이 왜 거기에 있지? 하나님이 이야기합니다. 난 너와 상대 안 한다. 이제부터는 제사장과 상대하겠다. 나와 상대 안 하고 제사장과 상대함을 믿는 사람, 이 사람은 더 이상 자기의 타락된 범죄한 비정상적인 몸에서 풍겨 나오는 세계관에 대해서 자기가 접어버립니다. 그걸 정답으로 인정 안 해요.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세계관을 향하여 구약 전도서에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헛되다고 이야기하죠. 믿음이란 것은 설치고 싸대고 열심히 하는 그것 아니죠. 주여, 이 몸이 태어날 때부터 환자라는 것을 수긍해야 돼요.

요즘 아침드라마에 아주 고집 센 57 먹은 남잔데 치매 걸렸어요. 제목이 <차달래 부인의 사랑> 그렇게 가부장적이고 고리타분한 사람입니다. 그걸 보면서 제가 느꼈어요. 치매 걸린 가부적인 사람이 본인을 정상으로 여기겠습니까, 비정상으로 여기겠습니까? 정상으로 여기는 거예요. 꼭 오늘날 우리와 똑같아요.

왜 정상으로 여겼을까요? 울산시내에 누가 없기 때문에? 돈키호테 같은 제사장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고만고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측정할 기준 자체가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았어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라고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거예요. 한 달 월급 얼마에요? 전부 이런 거 물어요. 아파트 사놨는데 요새 아파트 값 좀 올랐습니까? 그런 거나 묻는다고. 장사하는데 장사 좀 안 되죠? 차 언제 바꿨어요? 그런 이야기한다고요. 요새 시어머니와 잘 사십니까? 애 취직은, 결혼했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모아 놓으면 뭐냐 하면, 잘 삽시다. 우리 잘 살아봅시다. 그 이야기에요. 이건 아까 이야기한 분발이죠. 제사장은 분발이 없지요. 자유도 없으니까. 그런데 자유도 없고 분발이 없는 제사장 복장에는 바로 구원돼야 될 열두 지파 이름이 온통 거기에다 집중돼있다는 사실, 거기 다 모아져 있어요. 다른 데는 없어요.

제사장 이름이 있는데 따로 지도 제사장 흉내 낸다고 드르륵 박아봐야 그것 소용없습니다. 안 통합니다. 인정 안 합니다. 제사장이 백성들의 어른이 되고 싶어서 복장을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면 지금 제사장은 복장에 눌려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복장이란 율법에 눌려 사는 사람. 이제는 하나님의 일에 중심부가 되는 거예요.

따라서 제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로운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 부합되는 어떤 규칙이라든지 철칙 같은 것, 원리가 나올 때 이게 제사장에게만 나온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제사장 복장에 열두 지파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공히 백성들에게도 적용되고 요구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21장 1절에 보게 되면, 제일 먼저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게 뭐였든가요? 장례식에 가서 몸을 더럽히지 말라는 겁니다. 장례식에 예외는 있어요. 제사장의 가족들, 골육지친인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친자매로 인하여는 갈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장례식에서 하나님의 취지는 뭐냐 하면, 기존에 인간의 몸, 타락한 비정상적인 몸에서 가장 걱정되고 무서운 공포는 뭐였습니까? 살아 있다고 의식할 때 가장 그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그 일이 뭐겠어요? (죽음) 그렇지요. 죽음이죠. 그러니까 첫 번째는 뭐냐 하면,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게 바로 제사장 율법이에요.

보통 인간에게는 가장 무서운 게 죽음이에요. 왜냐하면 죽음 모든 가치의 끝이니까. 내가 가졌던 모든 것이 있다할지라도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다 쓰레기 돼버리니까. 내 것이 안 되잖아요. 죽으면 내 것이 안 된다는 것이 한탄스럽다는 말은 평소에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간다? 어떤 조건 하에 가치를 부여하느냐? 내 것이 될 때만 사는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죽음을 자꾸 뒤로 미룹니다. 죽음을 나중 일로 여겨요. 쉽게 말해서 죽음과 삶을 나누고 있다는 게 인간의 문제입니다. 사는 것 속에 죽음이 들어와 있다는 생각을 안 하고 죽음은 남의 이야기고 먼 이야기고 나한테 해당 안 되는 이야기고 지금은 집중해서 어떻게 밥 먹고 살아남는가가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식이 어디서 나왔는가? 범죄 한 우리 몸에서 나왔어요. 방금 이야기한 대로 몸에서 죽기 싫다가 나오지요. 그럼 우리가 걸치고 있는 옷들은 어떤 이유 때문에 어떤 의미를 갖고 옷들을 입고 거기다 부착물을 답니까? 그 이야기를 연결시켜보면, 나 안 죽었어, 나 팔팔해, 당당하게 살아 있단 말이야. 그것을 뽐내고 자랑이 담겨있는 복장을 우리가 선택해서 취득합니다.

흔히들 친구들 만나서 입은 옷을 보고, 노티 난다. 그러면 그 옷 입습니까? 노티가 뭐예요? 너는 죽음에 가까운 옷을 입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옷을 입었는데 20년은 젊어 보인다. 그러면 어떻게 돼요? 그 옷을 안 맞더라도 포기 못하지요. 내 몸을 줄여야지 하면서. 기어이 20년 당기고, 마치 쇠붙이가 지남철에 억지로 안 끌려가는 것처럼 뭔가 우리 인생사는 자체가 억지 같아. 애써서 내 속에 죽음 없다는 것을 가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죽음에 쫓기듯이.

그런데 제사장 복장은 나는 이미 죽었음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복장입니다. 아까 소방관 예를 들면 소방관이 평소에 두꺼운 갑옷 같은 옷을 입고 식사하면 안 되겠지요. 식사란 먹고 살려고 하는 건데 방해되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소방관 옷을 입고 식사한다는 말은, 너희들 보기에는 그냥 식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지금 불속에서 식사하는 중이다, 라는 것을 은연 중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제사장 복장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란 곧 하나님이 준비한 처절한 심판과 저주와 지옥불과 죽음을 전제로 해서 나는 너희들을 만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날 때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고 하나님이 용서하는 것은 무슨 복장? 제사장 복장밖에 없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 인생을 포기하고 제사장 인생에 우리는 모든 걸 몰빵해야 됩니다. 예수님께 모든 걸 맡겨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는 방법을 유일하게 갖고 계신 분이거든요. 영생이란 누굴 아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예수님을 아는 게 영생이에요.

영생이 없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있는데 사람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안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에 치중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포기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말로 하면 믿는데 누굴 믿느냐? 주님을 믿지 않고 믿어요? 사나죽으나 나를 믿고 나는 사나죽으나 나의 것이에요.

모든 사도바울의 편지에 예수님 다 빼버리고 거기다 뭘 집어넣습니까? 나를 집어넣고 전부 보는 거예요. 성경 말씀에 주님 자리 오리세요. 나란 글자를 집어넣으세요. 우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요. 하루하루 일과가 그래요. 그래서 고만고만한 사람들과 대화가 그렇게 잘 통하는 거예요. 과연 주님의 말씀과 대화가 되는지는 10분 뒤에 봅시다.
 한윤범(IP:125.♡.150.1) 18-12-11 10:25 
20181207b 울산강의-레위기 21장 : 비-현실적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제가 문제를 제기했지요. 어떻게 나의 운명을 제사장이 몽땅 다 가져가느냐? 그 과정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과 두 번째는 인공물이 만든 부착물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의 효과를 내는지 그 문제거든요. 그 문제를 오늘 본문과 해결돼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해결되는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제목이기도 해요. 비-현실(성)입니다. 비-현실성을 붙잡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운명을 제사장이 가져간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우리는 현실에 속해요. 나 자신이 제사장을 통해서 어떻게 좋게 달라질 것을 기대하고 그렇게 된다면 아낌없이 바칠 용의가 돼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섞여버리면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은 나로 인하여 계속해서 비-현실이 아니고 현실이 돼버려요. 비-현실은 현실에 없는 겁니다. 있는 데서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할 수 없어요. 없는 것은 없는 거고 있는 것만 있지요. 있는 것 속에는 없는 것은 없어야 되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있어도 결국 망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저 제사장이 우리한테 어떤 이득을 줄까를 늘 현실성 있는 결과를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현실을 잡아야 되는데 자꾸 현실을 이루려고 현실을 유지하고 그걸 발전시키려고 키우려고 애를 쓴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첫째 시간에 말씀드린 게 있지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죽음이죠. 그렇다면 현실에선 죽음이 끝자락이에요. 현실의 한계점이고 경계선입니다. 죽으면 허무하고 아무것도 아니란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과연 그럴까? 죽음 뒤에 모든 것이 허사고 아무것도 아니고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 현실에서는 죽음이 가장 진지하지만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것, 죽음조차도 시시한 일이 되는 그 무엇, 그것이 제사장을 통해서 뿜어져 나와요. 그게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게 비-현실적인 관련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그거지요.

여러분 아는 이야기하겠습니다. 제사장이 그런 복장을 하고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제사 드리지요. 제사는 반복, 죽음을 집어넣고, 원료가 죽음이고 결과물이 생명 또는 죄 사함이 나오는 거예요. 공장에다 죄를 집어넣으니까 제품이 죄 사함이 나오고, 죽음을 집어넣으니까 영생이 나오는 거예요. 생명이 나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도저히 제 명(목숨)을 가지고 같이 동거할 수 없는 입장이에요. 그걸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통해서 강조하는 겁니다. 너, 나 만나면 죽어. 이거거든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 만나면 죽습니다. 그런데 안 죽는 사람이 있어요. 불속에 들어가면 타죽지요. 그런데 불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어요. 소방관 갑옷을 입고 살아남았잖아요.

제사장 복장에 무슨 요소가 있단 말입니까? 죽어 마땅한 것도 살릴 수 있는 요소가 제사장 복장에 장착돼있다 이 말이에요. 그게 제사장의 효과입니다. 그 제사장 효과에 대해서 궁금합니까? 궁금하면 우리는 산 채로 다른 말로 하면, 현실감각으론 다가설 수 없어요.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채로 다가가게 되면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리고 싶은 인간의 생존 욕구가 작용되기 때문에 이건 비-현실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 계속 진행되는 연속에 불과하거든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과감하게 희생제물 죽을 때 자기가 산 자로 여기면 안 돼요. 희생제물아 너 죽고 나 대신 살자. 이건 안 되고 너 죽을 때 나도 같이 죽은 놈이란 인식으로 동참해야 됩니다. 그게 안수라는 거예요. 안수가 현실과 비-현실의 융합이에요. 양에게 안수한다. 어떤 사람이 죄 지었을 땐 죄 지은 사람이 안수를 해요. 어린양을 가져와서 할 때 제사장이 안수하세요, 안수하게 되면 전가라 하지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부탁한다, 양아. 옮겨지는 거죠.

이게 신약에 오면 세례와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물속에 들어갔다? 이건 의인이 죄인 속에 합류하는 거예요. 의인이지만 하나님 앞에선 죄인으로 다뤄지는 거예요. 반대로 예수님과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우리는 분명히 죄인인데 이제부터 의인으로 다뤄지는 겁니다.

그럼 세례 자체, 안수 자체에서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모든 현실적인 마감을 언도하고 선언해버려요. 현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란 사실을 선언하는 효과가 비-현실에서만 울려퍼지는 보이스, 음성입니다. 내가 정상이 아니란 것, 나는 환자에 불과하고 환자기 때문에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는 그 보이스, 영적 음성, 그게 비-현실이 나타나는 효과에요.

아까 제가 메커니즘을 언급했는데 철저한 메커니즘을 조사하라. 제가 그런 운을 뗐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영생을 얻는구나. 그걸 보고 싶어 하죠. 그러나 어느 순간에 현실적 경계선에서는 그걸 관찰, 조사하고자 탐색해서 내 지식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 자체도 거기서 그만, 우리가 주저앉아야 됩니다. 그 다음부턴 어떻게 하느냐? 맡겨야 되지요.

주님이 실제로 비-현실적 효과를 제공하는 경우에만 할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떼쓴다고 비-현실로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비-현실에서 이미 구원받은 효과가 영적 음성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 정상 아니야. 나 원래 하나님이 만든 창조물 아니야. 아름답지도 않고 쇠해야 돼. 나는 죄인이야, 라는 그러한 확인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나한테 확인되는 거예요.

그 순간 우리는 현실에서 소속이 비-현실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럼 비-현실 쪽에서 보면 나는 산 자에요, 죽은 자에요? 우리가 정상이 아니란 말은 결국 정상이 아닌 값을 해야 돼요. 죄의 값은 뭡니까? 사망이잖아요. 이런 이야기를 선취한다, 미리 당겨서 취하는 거예요. 죽기 전에 죽었다고 치는 겁니다.

내가 미리 죽었다고 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할 필요 없어요. 큰 손해 본 걸로 생각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씨앗이 있을 정도로 우리는 비정상이니까. 점점 아파가요. 점점 치매 돼가고. 점점 오그라들고 있고 주저앉고 있습니다. 고집 부려도 소용없어요. 헌금하고 기도하고 백날해도 계속 오그라들어요.

나 자체가 헛돼요. 헛되고 헛된 게 나라니까요. 여러분들이고. 헛되다는 말은 허공으로 보면 돼요. 아무것도 없음,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그렇게 울고 고민하고 걱정할 필요가 과연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제가 이런 소리하면, 목사님 돈 정도는 제가 초월했습니다, 하고 싶어 하겠지요. 돈 좀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러나 돈보다 더한 것은 명예, 자신의 명예에요. 명예를 다치는 경우는 남과 대화하며 다치는 거죠. 사람이 언제 격분하고 언제 화가 날까요? 물론 돈 좀 잃어도 화납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분노는 남이 나를 무시할 때 나를 무시하고 살아온 인생 전체를 완전히 개망신주고 무시할 때.

무시한다는 게 뭔 뜻이냐 하면, 나를 눈앞에 있어도 현실에 없는 사람 취급할 때. 우리가 격분한다는 말은 나는 현실적인 사람이야. 여기 내가 존재하는 게 안 보여, 라고 강변하고 외치고 있는 거예요. 믿음 같은 소리하고 있네. 믿음 있다고 해도 건드리면 격분하는데. 돈 한 백만 원 사기 당했다. 이건 참을 수 있어요. 식당에 갔는데 음식이 맛이 없다. 그 집에 안 가면 되지, 뭐. 애가 신경 썼는데 성적이 안 좋다. 잘하면 되지, 뭐. 이런 것은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면전에 예상 못한 무시를 당할 때는 격분하죠. 용수철을 눌러놨는데 건드리면 폭발하는 것처럼. 낡은 침대 위에서 뛰면 찢어지면서 용수철이 튀어나오잖아요. 그 식으로 그 순간 우리가 감추었던 것 다 찢어지고 하지도 못할 욕 같은 게 막 나오는 거예요. 안 죽었다는 이야기에요. 나 그렇게 없는 존재로 취급받은 녹녹한 인간 아니라는 겁니다.

그동안 스스로 좀 접었지. 접으면 접을수록 탄력이 강렬해요. 그동안 잠시 접은 것뿐이지요. 그래 놓고 믿음 있다, 복음 안다고 우겼지요. 창조된 인간은 절대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 있어도 망했어요. 제사장 있어서 망한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실패했다고 제사장 직을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확대시킵니다.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든 사람이 그 어떤 현실도 이깁니다. 원대한 비-현실을 붙들어야 돼요. 그럼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위기 21장의 제사장 율법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인공적으로 부착물이 된 인간을 뭐로 바꾸겠습니까?

사람들에게 비-현실적 제사장으로 확대시켜 나가고 그걸 성화시켜 나가고 완성시켜 나가겠지요. 예수님 옷 입을 때 제사장 복장으로 돌아다녔습니까? 아니지요. 그냥 평범해요. 예수님의 옷마저 나중에는 가위바위보 해서 이건 찢어지지도 않아. 통으로 빼앗겼습니다. 이 현실세계에.

주님께서 비-현실 세계를 드러낼 때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처참한 죽음으로서.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이 현실세계의 마지막 나락, 절벽이 죽음이거든요. 모든 인간은 죽음 근처에도 가기 싫어해요. 곧 없어져도 살고 싶어 해요.

죽음과 상관없으려면 현실에서 비-현실로 뛰어넘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 21장 1절에서 제사장들에게 너희들은 죽음과 상관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장례식에 가지 말라. 비-현실적 요소로 지금 모세를 통해서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가장 원대한 비-현실을 붙든다는 것은 곧 현재 우리가 현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살고 있는 사람을 비-현실로 옮기려면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하라고 하겠어요,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평소에 줄곧 해온 게 있잖아요. 그러면 그걸 계속 하라고 이야기하겠어요?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겠죠. 그게 2절~7절이에요. 계속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말은 네가 제사장이 아니면 의당 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이 뿜어낼 수 있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비-현실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현실적인 것만 아주 확실하게 보여줘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현실적인 나락의 끝은 바로 죽음이죠. 결국 일반인들은 죽음이라는 가마솥 안에 갇혀있는 겁니다. 죽음에 완전히 포위된 거예요.

제사장이 하는 장소가 뭐라 했습니까? 제사하는 거죠. 제사할 때는 죽음을 반복하죠. 죽음을 반복했는데 비-현실적 효과가 나타났습니까? 효과 나잖아요. 진짜 이런 게 어려워요.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데 중앙 성막이 있어요. 성막에서 하는 일이 양을 잡고 소를 잡고 죽음을 반복하지요. 죽음을 반복하는데 뭐라고 선언하느냐 하면,

특히 7월 10일에는 제사장이 지성소까지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피가 완료가 되면 어떤 효과를 봅니까? 죄 사함을 받지요. 그런데 죄 사함이 뭘 경유했어요. 현실의 죽음을 경유한 효과가 죄 사함이잖아요. 그렇다면 죄 사함을 고개 끄덕이면서 맞습니다. 죄 사함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밖에 없어요?

이 제사 기능의 비-현실적 효능을 인정해줘야 거기서 나온 죄 사함도 실제가 돼요. 하나의 위로가 아니에요. 격려가 아니고 생생한 실제상황이 된다 이 말입니다. 나 자신을 현실적 존재로 인정하는 경우에만. 나는 백날 죽어도 죽음의 근처도 안 가려는 그런 속성으로 매일같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짜증내고 살아간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거예요. 그걸 아까 세 자로 나는 비정상이다. 누구 앞에서? 비-현실적 효과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데 여호와를 안 믿는 율법을 안 믿는 이방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을 견학, 구경 갔다고 합시다. 그 사람들이 미친 짓을 하고 있어요. 양을 성막으로 끌고 가는 거예요. 소나 염소를 잡기도 하고. 그래서 인터뷰하면 묻습니다. 아저씨 양 끌고 어디로 갑니까? 내가 죄 지어서 양에 안수하고 죽이러 갑니다.

그러면 양 죽으면 당신한테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물으면서 내가 예를 들 테니까 그중에 어느 것인지 보세요. ①양 잡으면 내가 부자 된다. 양 잡으면 내 몸이 낫는다. 양 잡으면 우리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해진다. 양 잡으면 내 부동산 값이 오른다. 양 잡으면 승진해서 최고의 자리에 앉는다.

이중에 정답이 있습니까? 정답이 없지요. 정답이 없는 걸 보고 현실적인 이방민족은 더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 왜 갑니까? 예수 왜 믿어요? 라고 질책하겠지요. 이상한 사람들이네. 효과 없는 공연을 왜 보냐고 할 거란 말이죠. 문제는 제가 예를 들 때 이방인들이 그렇게 묻는다 했지요.

오늘날 내가 나한테 물어요. 매일같이 교회 가는 내가 나한테 묻는다고요. 안 가면 안 되나? 헌금 좀 하면 이번 주 수입이 오른 게 아니고 헌금해도 헌금한 만큼 날아가 버렸어. 십일조 10년 했는데 집안이 거덜 나고 적금도 곗돈도 깨지고 현실적으로 돌아오는 효과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교인들이 궁시랑 거리니까 목사가 총신 졸업해서 개혁주의신학으로 하다가 교인들이 나이 많은 장로부터 궁시랑 하니까 목사가 마음이 바뀐 거예요. 이제부터는 꿩 잡는 게 매지. 내가 매가 되려면 꿩을 잡아야 돼. 이제 간증설교로 바꾸겠지요. 복으로 바꾸겠지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에게 복 주는 분으로 살아 계십니다. 설교가 바뀌겠지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은혜가 되는 거예요.

이게 예레미야 44장 17절과 18절에 나오지요. 우리가 하늘의 별과 달을 섬길 때는 그렇게 복을 받더니만 여호와로 바꾸고 난 뒤에 환란밖에 없다. 그 당시 선지자에게 불만을 터뜨려요. 그게 그 당시 교인들이 자기가 정상이라고 여긴 거예요.

다시 이야기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제사장 주신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정상인 것을 확인하기 위함입니까, 비정상임을 확인하라고 준 겁니까? 우리가 비정상인 거예요. 고만고만한 사람으로는 우리가 비정상인 줄 몰라요. 우리는 나름대로 다 정당해요. 딱 깨놓고 사람 사는 게 뭡니까? 나 정당하다. 그 소리 외치며 살아가는 거예요. 나 나무라지 마라, 나 질책하지 마라. 나 정당해. 그것 때문에 살아가는 겁니다.

그럼 교회에 왜 옵니까? 정당함을 확인하고 싶어서 교회 온 거예요. 이렇게 정당하니까 복을 받는구나. 복을 받으니까 더욱 더 나는 정당한 사람이다. 평소에 자기를 정상으로 보는 사람이 더욱 더 확고한 자기한테 신뢰를 주기 위해서 교회를 오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도해보세요, 복 받습니다. 헌금해보세요, 복 받습니다. 교회 봉사하고 목사 섬기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소위 테스트를 시험해보는 거예요. 내가 정당한 걸 보여주기 위해서 봉사해야 되겠다. 교회 빠지면 나는 나쁜 사람 되지만 수요예배까지 참석하면 나는 더욱 더 정상인이 된다. 그게 성화론이잖아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 왜 졌습니까? 십자가는 허들. 110미터 허들에 허들이 10개 있잖아요. 어떤 사람이 자긴 정상이고 복 받으려고 하는데 허들을 높여놨단 말이죠. 허들 높이가 40cm면 넘으면 되지요. 허들 높이가 7m40인데? 밑으로 기어가나? 이 교회 가겠어요? 안 옵니다. 올 리가 있어요?

이 교회에서 제시하는 기준은 자빠지라고 넘어지라고 못 건너오라는 기준이거든요. 십자가가. 십자가를 지라해도 못 지거든요. 그래서 십자가 없는 다른 교회로 가지요. 그럼 다른 교회는 부흥되지요. 쓰레기는 모아 놔도 쓰레기입니다. 여러분 티끌 모아 뭐 되는 줄 알아요? 티끌 돼요.

평소에 우리가 현실 쪽에 살다보니까 외롭잖아요. 외로우니까 사람이 그리운 거예요. 사람은 자기 정당성 때문에 살고 또 사람은 그 정당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그리워서 살아요. 자기 정당성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는 그걸 두 자로 러브, 사랑이라 합니다. 퀸의 불렀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란 영화 보면 그 노래 나와요. 그리고 유명한 노래들.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분석해보세요. 나의 정당성에 내가 호응하는데 같이 호응할 사람을 찾는 거예요. 생활비 줄 테니까 내 정당성에 호응해줘. 이게 부부잖아요. 여자는 살림하고 남자는 돈 벌어오고. 여자가 할 일은 뭐냐? 우리 남편 정당하다고 해주면 남편은 아내에게 밥 먹여주고 생활비 주고. 애 낳을 수 있도록 해주는 거예요. 이게 현실입니다.

그 현실에 대해서 주님은 헛되고 헛되다고 이야기하죠. 이혼해도 헛되고 이혼 안 해도 헛되고. 결혼해도 헛되고 결혼 안 해도 헛되고. 차라리 혼자 살아라. 이런 식으로. 사도바울 대통령 시켜놓으면 결혼 아무도 안 할 거예요. 인구 단절이 있어요. 정 사랑이 그립거든 결혼하되 너한테 고난을 있을지어다. 이런 저주의 발언을 쏟아놓지요.

그게 바로 현실 속에서 사도바울 같은 비-현실적 제사장 같은 존재에서 쏟아내는 비-현실적 효과에요. 그런 발언을 할 때 우린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듣는 자체가 우리가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비정상이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나는 살았다고 했지요. 못 알아들어요.

듣는 우리 귀에 눈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치매에요. 얼마나 치매 걸렸으면 지 주체파악도 못하고 천당 보내달라고. 니가 뭔데 왜 천당 가야 돼요. 죽음이란 것을 경유해야 됩니다. 현실과 비-현실에는 중간에 죽음이 있어요. 자꾸 제목을 바꾸고 싶은데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것, 이것도 후보감이다.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것, 그게 비-현실이에요.

그 다음에 해보겠습니다. 3절부터 하지 말란 이야기를 계속 했지요. 하지 말란 이야기를 하시는 내막이 있어요. 이것 하기 전에 아까 그 문제를 풀어야지요. 어떻게 인공적인 것이 주의 일이 될 수 있느냐? 주님의 일이 인공적인 것의 비정상성을 계속해서 공략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잖아요. 손으로 만든 것에는 내가 내 몸이 만들었다는 것에 자꾸 머물러 있잖아요. 그 자체를 비정상이라고 쏘아대는 겁니다.

그러면 하지 말라고 할 때 무슨 대안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냥 하지 말라 하면 안 되겠지요. 하지 말라고 할 때는 왜 하느냐를 시비 거는 겁니다. 왜 그 일을 하느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7절에 봅시다. “그들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 것이며 이혼 당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

여러분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기생과 부정한 여인이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인간세계에서 비정상이죠. 남의 딸은 기생 되도 좋지만 자기 딸은 기생 되면 안 좋잖아요. 이 세상의 비정상인 존재를 통해서 나머지 우리가 정상이라고 꼼수를 쓰면 안 돼요. 비정상적인 요소가 있다는 자체가 늘 비정상적인 잠재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악하다는 것이 잠재화돼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했을 때에 만약에 우리가 기계라면 어떻게 됩니까? 예, 하고 우리가 그런 여자와 결혼 안 하겠지요. 기계는 비정상이 없어요. 기계 자체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그것이 정상이잖아요. 기계는 작동만 잘하면 되니까. 내가 만약에 기계인데 율법대로 하는 기계라고 봅시다. 선악과 따먹지 마. 예. 기생과 결혼하지 마. 예. 기계입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인간은 기계가 아니잖아요.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라고 했을 때 얼씨구나 좋다고 안 그래도 그 여자 찝찝해서 내좇으려고 했는데 주님 말씀에 순종해서 좇아내겠습니다, 라고 우리가 수월하게 내좇을 것 같지요. 만약에 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창녀고 부정한 여인이고 이혼당한 여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여잔데 그 여자 없으면 같이 죽고 싶은데. 밤에 잠을 못 이룰 정도에요. 잠자고 싶어도 그 여자가 떠올라서 잠을 못 이룰 정도에요.

그러면 우선순위가 뭡니까? 일단은 나의 그리움은 채워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법이 우선입니까, 나의 괴로움이 우선입니까? 나의 괴로움이 행복으로 바뀌게 우선이겠지요. 그런데 재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만약에 어떤 창녀를 내가 너무 사랑한다. 사랑이란 말은, 여러분 기계 같으면 내가 사랑하자 하면 사랑하게 돼요. 그러나 인간은 사랑 앞에 누구도 장담 못하고 자신 못해요.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사랑하고 싶은데. 오랜만에 좋은 말 한다. 사랑이 되는데 어떻게 그걸 금지한단 말입니까. 호텔 여자 사장과 신입사원이 어떻게 좋아질 수 있습니까? <남자친구>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이거든요. 여러분은 그런 현실적인 세계 아닌 비-현실적인 세계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 드라마 보면 난리도 아니에요. 호텔 여사장이 신입사원과 사귄다고 호텔 이미지 나빠진다고 반대하고. 송혜교는 이미 이혼한 여자에요. 나이도 물론 여자가 많지요.

그 드라마 보는 사람들은 박보검 보려고 보지 송혜교 보려는 게 아니거든요. 그 박보검이란 한참 연하의 남자가 하는 말이, 인간적으로 끊을 것 같으면 진즉에 끊었지요. 안 끊어지는 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율법이고 복음이고 복음 듣고 끊을 것 같으면 끊지요. 복음을 알고 철석같이 믿어도 이게 안 끊어져요.

다시 말해서 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사장도 못 지키고 일반인도 못 지키고. 일반인이 못 지키는 걸 대표로 제사장이 하라는 거예요. 그럼 제사장은 제사장 직을 걸로 하려고 애를 쓰겠지요. 백성의 어른이니까. 열두 지파를 가슴에 품고 열두 이름이 자기 어깨에 있으니까 책임이 막중하잖아요. 나 하나 망가지면 이스라엘이 망가지니까.

그래서 그 비장한 각오가 율법을 이길 수 있어요? 없지요. 그러면 해결책 어떻게 할까요? 바로 창기와 혼인하는 거예요. 이혼한 여자와 혼인하는 겁니다. 그리고 부정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거예요. 이게 중간 과정으로 호세아에 나와요. 이게 복음입니다. 안 되잖아요. 되려고 애쓰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왜? 자진해서 자기를 부정한 여인과 일치시키는 겁니다.

혼인이라는 게 뭘까요?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거잖아요. 부정한 여인과 하나가 되게 되면 옛날 유대인의 율법에 보면, 해설을 이렇게 해요. 왜 제사장은 창녀촌에 가서는 안 되는가? 죽은 자, 시체를 가까이 하게 되면 부정 타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저주받아 죽거든요. 저주의 효과가 제사장에게 묻으면 제사장은 나라의 대표자기 때문에 나라 자체가 저주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에이즈바이러스 병균 묻듯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현실적인 감각에서 율법을 바라보는 겁니다. 현실적인 감각에서 바라보는 이유는, 우리가 어길 경우에만 부정적인 사람이 되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 괜찮은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자기를 전적으로 부정한 사람으로 안 보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허들에 걸려넘어진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우리를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다시 말해서 환자며 죄인이며 비정상인 것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말씀만 보지 말고 교회를 보세요. 다 자기 정당성, 잘남 때문에 교회 가잖아요.

하나님 보세요. 출석했습니다. 이번 주 중요한 일 있으니까 복 주셔야 됩니다. 이렇게 한다고요. 지 잘난 맛에 가요. 그러다 더 잘난 사람 만나서 싸우고. 교인끼리 만남은 어떤 의미에선 싸우기 위해서 만나는 것 같아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가시가 있어. 새순교회는 예외고요. 여긴 말 함부로 하니 그런 게 없지만.

격식을 갖추어서 조심조심해서 내가 이 말하면 저기서 반발하고 명예가 어떻게 손상되고 그것 계산해가면서 기계가 아니고 완전히 죄인들의 모임 같아요. 그러면서도 죄인들의 모임이면서 죄인 아닌 척하니 더 큰 문제 아닙니까. 네 죄가 크니라.

율법에서 하지 말라는 것은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소지와 잠재적으로 다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장이 참다, 참다 그걸 할 수밖에 없는데요. 왜? 율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계속 늘어나요. 벌칙조항이 늘어난다고요. 결국 이 말은 영원한 제사장이 누구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어떻게 제사장 직으로 오셨느냐 하면, 이 하지 말라를 자기 한 몸에 다 짊어져요.

짊어지면 가슴에 열두 지파 있지요. 어깨에 열두 지파 있지요. 거기다 뭐까지 추가했습니까? 백성들의 죄까지 짊어졌잖아요. 짊어지니까 현실적 입장에서 예수님은 뭐냐? 저 사람은 나무에 죽은 걸 보니까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저주받아 죽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따라서 큰일 날 뻔했어. 저 저주받은 가짜를 메시아로 믿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사람들이 전부 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거예요. 예수 안 믿기를 잘했다고. 예수 죽인 걸 잘했다고 말이죠.

오늘날 복음 전하는 교회 한 번 왔다가 가버리잖아요. 오늘도 그런 교회 갔다 왔습니다만. 그 사람은 가슴 쓸어내려요. 아이고, 이단 교회 갈 뻔했다. 이런 식으로 오는 거예요. 내가 날 살리는 데 지장되는 교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 만났으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고상한 사람들만 호텔에서 만나서 그래요.

십자가 지신 예수님 만나보세요. 주님 몰골이 왜 그래요? 너 때문이다. 등짝에 보니까 채찍 왜 맞았어요? 네 죄 때문에 맞았어. 내가 맞음으로 니가 나음을 입었어. 이게 바로 비-현실적 효과입니다.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그걸 현실적으로 증명을 어떻게 합니까? 현실적 용어로,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공연프로그램으로 어떻게 그걸 증명해내요.

예배참석해서 이걸 증명 못해요. 다만 말씀 가운데 역사하다가 내가 예배 참석하는 이것도 죄구나 하는 것, 내가 뭘 해도 죄가 됨을 아는 것, 내가 죄를 아는 순간 악마를 이긴 겁니다. 악마가 내 멱살 잡고 흔들거리는 없는 거예요. 그것도 잠시 뿐이지만. 잘난 척하면 또 멱살 흔들어요.

그러나 못났다는데 나는 환자라는데 마귀가 와서 더 훌륭해야 돼, 더 분발해야 돼, 그러한 유혹이 유혹거리가 됩니까? 못났다는데 뭘 더 잘날 수가 있어, 잘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단 말이야. 그게 미끼상품이 되질 못하죠.

8절 봅시다. “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이 거룩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거룩이란 분리입니다. 분리란 창조주와 창조된 것 사이의 분리가 제사장의 거룩에 심어져 있어요. 그러니까 제사장도 인간이죠. 부착물도 인간이 만든 거죠. 인간이 만든 걸 비-현실적 안목 없이 현실적 안목으로 봐버리면 그냥 또라이지 뭐. 이상한 복장하고 돌아다닌 것처럼 보이지요. 그 속에 비-현실적 의미가 담겨있는 겁니다.

그 제사장에게 어떤 권한이 있느냐 하면, 설교권이 있어요. 설교란 입에서 말씀이 나오는 거예요. 율법을 가르치는 권한이 있습니다. 율법을 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면 율법은 뭘 재촉하는 겁니까? 너 정상 아니야, 너 환자야, 죽어도 억울하다고 하지 마. 진즉 죽어야 돼, 라는 소리가 제사장을 통해서 나오지요.

그러면 백성들은 삐질까요? 그래 너 잘났다 하고 토라질까요?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질책하면 할수록 고마워해야 되고 감사해야 되지요. 그렇잖아요. 목사가 복음을 전하면 감사해야지요. 도망가지 말고. 반대로 해야 돼요. 목사님, 어설프게 지적하지 말고 제대로 더 깊이 있게 내 죄를 들춰주세요, 라고 해야지요.

어설프게 위로할 생각 말고 달래서 내 교회에 돈 내는 교인 만들 생각 말고 제대로 진맥 짚어줘야 돼요. 아프지요. 마사지하면 아파요. 제대로 하게 되면. 왜 아픕니까? 몸이 정상이 아니니까. 주사 놓을 때 아프지요. 항상 우리 앞에 우리 힘으로 우리 행함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허들 같은 것, 걸림돌을 제시해야 돼요.

내 힘으로 구원되지 못하는 것을 명쾌하게 알아야 돼요. 왜냐하면 내게서 나오는 행함은 다 비정상적이고 죄악된 것만 나오기 때문에 그것으론 구원 안 됩니다. 구원은 시도하는 자의 소관이 아니고 지체하는 자의 소관이에요.

우리가 율법 보고 있는 거예요. 율법에서 빠져나가면 안 돼요. 율법을 통해서 율법 안에 들어가 십자가가 보이는 거예요. 구약 믿을까, 신약 믿을까? 골라잡을 입장 아닙니다. 제3의 중립지대가 있는 게 아니요. 우린 이미 심판 가운데 있어요. 심판 가운데 있으면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그냥 옴팍 당할 수밖에 없어요. 태어난 대로 죽고 지옥 갈 수밖에 없는 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창세전에 예정한 자를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건져내준다면 비로소 그때 우리는 현실 속에서 비-현실적 안목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에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거룩이란 분리된, 창조주와 죄악 된 피조물과의 분리, 이 분리를 제사장 속에 이미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제사장은 일반백성들과는 완전히 차이나는 분리를 분명히 하라는 겁니다. 복장 자체가 이미 뒤집어씌웠으니까. 그러면 제사장은 직장이 성막이죠.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무엇의 반복입니까? 죽음의 반복이죠.

거기에 비해서 울산바닥은 살아 보자의 반복 아닙니까. 오늘도 누구 만나서 계약하고 일하고. 일 왜 합니까? 살아 보자, 살아 보자. 왜 사는지도 몰라요. 그냥 옛 몸의 본성대로 안 죽어야 된다는 그러한 욕구와 본성만 남아있어요. 어쨌든 간에 안 죽어야 된다는 것, 그러면서도 지남철에 쇳가루처럼 늘 끌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보고 마귀가 얼마나 좋아하는지요. 마귀가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를 종으로 노예로 삼는 거예요. 너 그러면 죽는다, 하면 알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걸 철저화시키는 것, 그것은 그렇게 안 살면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고 오히려 그러한 비겁한 우리의 모습을 날이 갈수록 더 철저하게 하는 거예요.

막 살아라. 네가 얼마나 개판인지 막 살아봐라. 그걸 통해서 진정한 감사는 내 죽음보다 더 큰 내용이 우리의 감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죽음보다 더 진지한 것,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피의 효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제사장 뽑는 것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내가 앞으로 몇 년 더 사는가?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선에서 머물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우리 눈앞에 영원한 제사장 예수님이 피 흘리고 죽음을 되풀이하는 그러한 효과를 우리가 누리는 대상인 것을 저희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윤범(IP:125.♡.150.1) 18-12-11 10:29 
20181207 울산천상우리교회특강-판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제목은 ‘판결’입니다. 하나님께선 이미 인간에게 판결을 내렸어요. 그것이 요한복음 3장 18절, 19절이니까 강의 초반에 성경구절을 보겠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우리에게 내려진 판결은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판결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우리가 어떤 모션을 취한다든지 하나님 앞에 아양을 떤다는 것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없는 데서부터 개시하고 시작하려고 하잖아요. 이 천상 동네에서 만약에 치킨 집을 한다면 내 가게가 없는 데서 가게가 시작된다는 말이죠. 학원을 한다고 해도 내 학원이 없는데 내 학원이 시작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학원을 시작하자마자 망했다고 판결을 미리 내려버리면 뭔가 시작하고자 하는 자의 의도는 시작하면서부터 좌절 대상이 돼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안 망하도록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우리가 이야기는 할 수 있단 말이죠. 이 동네에서 가게를 하는데 안 망하는 쪽으로 해볼게요, 라고 하면 성경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에 대한 평가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바뀌지 않는 것, 확정적이 돼요.

이미 확정적이라는 사실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안심을 가져다주는 거예요. 추가적인 나의 노력과 나의 시도와 행함이 다 부질없는 짓으로, 바뀌지 않으니까 이미 확정난 거예요.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확정적이에요. 내 쪽에서 상대방의 마음을 돌이켜보려는 그런 시도는 다 쓸데없는 시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확정한 것을 받아버리면 하나님의 말씀과 연루된 사람이 돼요. 엮여버린 사람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장착이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고 어떤 모습으로 살던 간에 이미 확정된 겁니다. 어떤 확정이냐? 말씀이 확정된 그 테두리, 그 범주 안에 이미 우리가 들어와 버렸다는 데서 오는 확정. 그 확정이 우리에게 안심을 주죠.

안심을 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안정돼있다는 뜻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도 확정된 게 제공하는 그 안심을 우리가 그대로 누리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이라는 것이 지키려고 하면 불안정하지만 받아버리면, 지키려 하지 말고 그냥 수용해버리면 이처럼 편한 게 없습니다.

이걸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천국은 이미 너희 안에 있다고 이야기해요. 죽어서 가는 동네가 아니고. 내가 죽어서 좋은 데 골라서 가는 게 아니라 천국이 우리가 있는 자리를 통해서 구현한다, 또는 발현한다, 또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드러낼 때 그 특징은 계속해서 안심이 되는 거예요. 오늘 제목을 안심으로 바꿔버릴까?

계속해서 어떤 세파나 풍파가 인다할지라도 인생에 굴곡이 아무리 요동친다하더라도 롤러코스트 탄다할지라도 주님의 판결을 받아버리면 이미 그 자체가 확정적이기 때문에 자기의 남은 인생에 대해서 그다지 고민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네 자로 ‘기쁜 소식’이라 했고 두 자로 ‘복음’이라 전한 겁니다.

다시 설명합니다. 복음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내려진 바뀌지 않는 판결을 그냥 수용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판결이란 말을 함으로써 새삼스럽게 우리 쪽에서 판결을 뒤집거나 바꾸거나 하는 그런 시도는 다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조차도 우리가 받아들여야 돼요. 내 쪽에서 어떤 경건의 노력과 의로운 노력과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을 하겠다는 그런 시도가 다 헛짓이라는 것조차 다 그냥 받아버리란 말이죠.

왜냐? 안 바뀌니까. 바뀌지 않으니까. 판결이 바뀌지 않는 거예요. 너 하는 것 보고 바꿔줄게. 성경에 이런 것 없거든요. 너 하는 것 보고 지옥 갈 천국으로 옮겨줄게. 이런 게 성경엔 없어요. 그건 교회란 가게가 장난치는 겁니다. 인간 영혼을 마귀가 농락하는 거예요. 복음은 그런 게 아니에요. 바뀌는 게 없어요. 아무리 노력하고 울면서 통곡하면서 새벽제단을 쌓든 뭘 쌓든 간에 관계없이 한 결 같이 우리의 행동에 일체 대응 없이 확정적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3장 18절, 19절에서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거예요. 판결인데 그 판결은 벌써 심판을 받았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판한다는 판결은 바뀌지 않는다. 확정적입니다. 안심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우리 속에 여러분과 제가 포함돼있지요. 우리는 심판을 받았다는 이 선언을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했지요. 그러면 우리는 일방적으로 심판받지요. 그 심판이 바로 내 일인 것으로 받으면 우리는 안심이 되는 겁니다.

중간에 뭐가 날아갔습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다는 종교적인 의욕과 노림수, 기대, 희망 이 모든 것은 다 삭제되지요. 다 날아갔지요. 이게 진즉에 날아가야 돼요. 믿는다는 것은 내가 생각한 하나님께 뭘 드린다는 게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나는 어떻게 비칠까, 어떻게 보고 계실까, 하나님의 안목에 도달하는 걸 말합니다. 그리고 그 도달한 것은 바뀌지 않는 겁니다. 확정적으로 우리는 심판받은 겁니다. 끽소리하지 말란 이야기에요.

지금 이것까지만 들으면 복음 모르는 사람들은 문 열고 막 나갈 거예요. 모든 사적인 희망과 구원의 여망은 삭제됐으니까, 없어졌으니까.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요한복음 3장 18절, 19절에 분명히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다고 만약에 느껴진다면 평소에 하나님의 뜻을 우선한 게 아니고 어떻게 하나님에게 잘 보여서 내 미래가 잘 풀릴까, 라는 은근한 노림수를 아직 간직하고 있음이 티가 난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것도 노동이잖아요. 사람이 노동하면 반드시 대가가 있어야 보람이 있지요. 하나님께 잘 보이고 믿음으로서 현재 내게 미흡한 것, 또는 만회해야 될 것, 보상받을 것, 그래서 지금부터 더 나은 삶을,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니까 섭섭하지 않게 하시는 분이니까 보상해주실 거라는 그런 기대를 갖고 있다면, 그건 요한복음 3장의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할 거예요. 니 누고? 네가 누군데 감히 성경이 하는 것에 대해서 은근히 외면하느냐고 추궁하실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지요. 이미 심판을 받았으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챙길 수 있는 건 뭡니까? 약간 화는 안 내는 상태에서. 안심이 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안심이 된 상태에서 사적으로 챙길 건 뭐가 있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판결의 장(field)이 된다는 겁니다. 말씀의 장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찬 존재가 되는 겁니다.

전에는 악마의 마음으로 가득 찬 필드가, 영역이 됐다면 이제는 그 자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찬 영역이 된 거예요. 말씀이 피조물이 된 겁니다. 이게 원래 하나님의 뜻이에요. 안심하라. 심판이란 그 말씀을 네 속에 내가 집어넣어줄게. 이게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의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면 우리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이게 우리의 뜻이에요.

우리의 뜻은 항상 미완료로 이어지죠. 미완료는 바뀔 가능성을 노리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뭐라고 그랬습니까? 바뀌지 않지요. 내가 천국 가든 지옥 가든 주의 말씀은 바뀌지 않아야 돼요. 내가 천국 간다고 바뀌고 그러면 안 돼요.

하나님은 자기 말씀 위주거든요.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 위주란 말이죠. 말씀 위주기 때문에 말씀이 안 바뀌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격해야 되고 고마워해야 되고 찬미해야 돼요. 말씀 덕분에 내가 어떻게 바뀌느냐, 이건 아예 제거, 지워버려야 돼요. 말씀 덕분에 내가 지옥 가는 것으로 천국 가는 것으로 바뀐다. 이런 의도, 이런 상상력은 하지 말아야 돼요.

내가 어떻게 팔자 피느냐에 관심두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관심 둬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런 인간으로 확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안심해도 되는 거예요. 이래도 주의 말씀으로 움직이는 사람, 저래도 주의 말씀으로 움직인다면 우리가 더 무슨 소원이 있으리오. 그러한 태도,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굉장히 간단하지요.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말씀을 어떻게 하고, 복음을 어떻게 깊이 아느냐,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은 항상 시작은, 내가 바뀌기 위해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 좋은 쪽으로 잘되기 위해서 나는 뭘 해야 되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그 자리가 완전히 묵사발된 거죠.

내가 시도한 그 자리에 말씀이 들어온 거죠. 안 바뀌는 말씀이 확정적으로 들어와 버렸으니까 우리는 안심해도 된단 말이죠. 내 욕심만 없으면 안심해도 돼요. 그러나 내 욕심이 만약에 살아 있다면 우리는 원래 의도의 노림수가 좌절된다는 분노 때문에 안심은커녕 하나님과 바이바이 하고 싶어 해요. 나, 더 이상 당신과 안 논다고 될 겁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게 되면 애들한테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온다고 부모들이 이야기해요. 그럴 때 오든 말든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애들은 없습니다. 혼자서 시나리오를 생각하게 돼요. 크리스마스가 25일이니까 24일 밤에 온다니까 20일 쯤부터 착한 일만 골라서 해야 되지요. 어지간히 패도 안 울어야 되고 울면 안 된다니까 안 울도록 노력하고. 그게 뭐냐 하면, 뭘 얻는다는 걸 기대해서 내 쪽에서 수정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인들은? 똑같은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은 이런 짓은 해선 안 되지. 이 생각이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한테 원하는 선물 받기 위해서 자기 관리나 절제에 나서는 어린애나 다를 바가 뭐가 있어요? 똑같지요. 그러나 이건 항상 불안정한 거예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인생을 아무리 살려고 성경지식을 많이 갖고 있어도 신학을 해도 불안정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노림수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겨냥해서 뭔가 노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이해했다 치고. 1회전은 마감됐어요. 2회전은 뭐냐? 하나님이 심판을 확정지었다는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이게 2회전입니다. 인간이 어떤 시도를 해도 하나님이 안 받고 이미 이 세상을 심판하기로 판결을 내린 것은, 너희들이 아무리 겸손을 떨고 경건을 해도 일체 그런 것은 개 무시해버리고 판결은 바뀌지 않는다고 확정지어진 최종적인 증거가 뭐냐?

그것이 요한복음 3장 18절에 나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건 이렇게 설명됩니다.

이게 인간 세상인데 우리들 세계지요. 우리들 세계는 고만고만한 인간들만 있어요. 여기에 누굴 투입시켰습니까? 독생자의 이름이니까 예수님이죠. 독생자 예수님을 여기다 투입시켰습니다. 투입이 안 됐다고 칩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안 왔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뭐냐 하면, 미완료 상태에 있어요. 지금 우리가 힘들게 살지만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노력 여하에 따라서 자기의 결심 여하에 따라서, 그리고 행동을 얼마나 조신하게 조심스럽게 경건하게 사느냐에 따라서 현재 우리의 형편은 언제든지 얼마든지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미완료적 상태에 있어요.

여기에 우리들 나름대로의 세계에 뭐가 있냐 하면, 심판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은 사람들, 우리들에서 나왔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해가 안 될 거예요. 심판의 기준이 우리가 평소에 잘했다, 못했다는 선과 악의 기준이 우리들에서 나왔다는 말은 얼른 이해하기는 힘들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들 가운데 선한 사람도 있고, 의인도 있고, 도인도 있고, 지혜자도 많고, 목사도 있고, 장로도 있고, 신부도 있고, 중도 있잖아요.

이 사람들이 이렇다고 판결을 내리면 우리들은 그 사람의,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강의 중에 묻는 것도 강의니까. 우리가 그 사람 말에 추종합니까, 아니면 참조합니까? 둘 중에 하나에요. 어떤 훌륭하다고 자부하는 사람, 또는 목사가 이야기할 때 그 사람을 추종합니까, 아니면 참조합니까? 참조하지요.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자기 외에는 추종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북한의 김정은에 고개 숙이는 신하들이 김정은 추종하는 거예요, 김정은을 참조합니까? 참조를 하지요. 자칫 대항하면 죽는 수가 있기 때문에 지 목숨 살기 위해서 예예 해주는 거지요. 어떤 인간도 자식이 부모 말 듣는 것도 마찬가지고 애인 사이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나에게 날아오는 모든 의미를 본인이 종합하기 위해서 참조하는 거예요.

그럼 내가 최종 선하다, 악하다, 또는 내가 정당하다, 부당하다는 판결을 누가 내립니까? 내가 내리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2652만 4642명이 살고 있다면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몇 가지겠어요? 26,524,642가지. 한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달라요. 형제간에 다 다릅니다. 부부간에 판단 기준이 다 달라요.

판단 기준이 다 다른데 어디서 이것이 분명해지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검찰청에 가서 고개 숙이고 사진들 찍고, 국정농단 하셨습니까? 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이럴 때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욕하지만 그 사람 부인이나 자식들은 세상을 욕할 거란 말이죠. 너희들이 우리 사정을 알아? 각자 인간은 남의 사정을 몰라요. 남의 사연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끄집어낼 때 긴 그림자가 있어요. 인생이란 긴 그림자인데 사람마다 그림자 길이가 다르고 전부 다 색깔이 다르고 굴곡이 다 달라요. 과거에 살았던 자기가 체험했고 체험에서 나온 기억이 현재 자기에 담겨서 거기서 선과 악, 다른 말로 정당성과 부당함을 본인이 결정하는 기준이 된 거예요. 사람마다 다 달라요.

남자가 연애할 때 맞다고 생각하지만 뭐 하나 일이 터지면 안 맞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아이큐가 낮아서 그런 게 아니라 살아온 인생이, 자기 내부에 자리 잡은 인생의 사연들이 각각 달라서 그래요. 우리 집에선 이러면 안 되는데. 아니 우리 집에선 오히려 자랑인데. 서로 다른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 달라요. 직장이 다르면 경험했던 체험도 다르고.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 강조하는 건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살아온 이력이 다르기 때문에 지금 나는 정당하다, 나는 부당하다는 결정 기준도 사람마다 같은 경우가 하나도 없다는 걸 강조하는 거예요. 2500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르다면 2500만이 믿는 예수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지요.

주님께서 은혜 주셨다고 하면, 다른 사람은 그건 행운이야. 은혜 받은 게 아니야. 받은 것으로 지옥 갈 수도 있어. 이렇게 누가 나쁘게 평할 수도 있고. 뭐 대수롭지 무심한 일인데 옆에서 은혜 받았다고 오히려 외부에서 과도하게 나를 칭찬 못해서 환장해서 높여줄 수도 있는 문제고.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같은 게 하나도 없어요.

분명히 여기서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2500만이 아니라 75억~80억(현재 세계인구수)이 있다 할지라도 공통점은 딱 하나 있어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항상 자신은 늘 정당한 부분이 있다. 이겁니다.

교도소에 가나 누구한테 욕을 먹으나 항상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격려하고 용기를 부어주는 밑천이 뭐냐 하면, 그래도 나한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있는 거예요. 아직도 나는 정당하다. 내가 천사 같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아무리 내가 나쁘고 인간 말종이고 개차반이고 짐승보다 못하다고 욕을 한다 할지라도 그래도 내 안에는 내 양심에 비추어서 정당한 요소는 늘 있다는 점, 그 정당한 요소를 의지해서 그걸 믿고, 그게 자기한테 기쁜 소식이거든요. 그걸 믿고 버티면서 인간은 살아갑니다.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노인들이 살아가는 것이 악에 바쳐서 살아간다고.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악에 바쳐 살아가요. 욕하지 마. 나 보고 죽으라고 하지 마. 나 이렇게 정당하고 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야. 네가 네 기준에서 남을 함부로 폄훼하지 마.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모르면서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 그런 격분과 울분의 토대가 늘 우리 안에 울렁거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제가 모든 인간은 절대적인 기준은 없고 자기가 세상을 나름대로 보고 있지요. 쌍둥이라도 마찬가지에요. 이런 이야기할 때 조건을 하나 걸었지요. 어떤 조건 하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했어요? 독생자 예수님이 개입하기 전에는. 독생자 예수님이 개입하기 전에는 전부 다 나름대로 정당한 부분이 있어요.

내가 대략 정당하다면 그건 교만하다는 소릴 듣잖아요. 그게 아니고 내가 아무리 인생 밑바닥을 살고 사람 열댓 명 죽인 연쇄살인범이라 할지라도 내 속에는 아직도 약간이나마 내가 살 권리와 이유는 있다는 거예요. 너무 몰아세우지 말라는 거예요. 인생을. 네가 날 뭘 안다고 몰아세우느냐.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 3장 18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심판의 증거가 뭐라 해요? 너희들이 어떤 소릴 해도 이미 심판 받기로 확정됐다는 것은 어디에 기준해서 그러느냐는 거예요. 주님께서 한 사람씩 불러서 너 어떻게 큰소리쳤어, 네가 어떻게 잘난 척했어? 이걸 심사한 게 아니에요. 우리 인간이 겸손을 떨든 교만하다고 외치든 아직도 정당함이 있다고 하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직 한 분을 집어넣어요. 예수님을 집어넣고 예수님의 오심을 안 받아들이면 심판을 이미 받은 것이 되는 거죠.

그럼 정리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미 이 세상은 심판 받기로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란 것을 통보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리고 그 심판은 달라진다, 안 달라진다? 안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구원이란 언감생심 애초부터 해당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구원, 천국, 영생이란 게.

그럼 영생이란 게 어디 있는가? 잠시 이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죠. 여러분 이해했지요. 그러면 영생이 없다는 것은 조건이 뭡니까?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게 아니죠. 영생이 없다는 것은 무슨 요소가 빠져있다는 말이에요? 유일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그리스도가 빠져버리면 뭐예요? 빠져버리면 영생이 없는 거죠. 지옥이죠. 그럼 이게 들어와 버리면 그게 영생이고 천국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단 말은 이 세상에 누가 떴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등장했지요. 예수님이 등장해서 만약에 우리 마음까지 쳐들어온다면 그건 곧 뭐가 되는 거예요, 그 자리가? 영생의 자리가 되겠지요.

그래서 성경은 영생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미 심판 받은 우리에게 누가 찾아오는 거예요? 예수님이 찾아오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게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붙드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이 뭘 붙들 때는 다 노림수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을 믿게 되고 붙들 게 되면 뭐가 작용하느냐 하면, 봐 나 인간 개차반이지만 예수 믿는 착한 일은 했잖아, 라고 내가 전적으로 망가진 건 아니었었어. 내가 예수 믿는 여력은 아직도 배 열두 척은 남아있구나. 아직도 자기가 바뀔 가능성을 노리는 겁니다.

그렇게 돼버리면 그 사람에게 예수란 뭐냐 하면, 자기 팔자 고치기 위해서 은근히 노렸던 하늘에서 오신 분을 고대한 게 돼요.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했던 겁니다. 메시아 오게 되면 믿기만 하면 영생 얻는다. 그런 시도를 한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그 자체가 우리가 심판 받아도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럼 여러분이 잘 이해했는지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아까 예수님이 개입하기 전에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자신은 늘 항상 정당한 부분이 있다고 여겼지요. 만약에 예수님이 와버리면 내가 정당한 부분이 있다, 없다는 여부가 아무 짝에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안심 놓고 수긍하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나한테는 전혀 정당한 것이 없고 몽땅 부당한 것이고, 부당함은 내가 의도적으로 악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상 자체가 부당하고 옳지 않기 때문에 그냥 통째로 부당한 거예요. 그게 바로 19절에 나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어두움이죠. 여러분, 낮에 이 동네가 어둡다고 생각합니까, 밝다고 생각합니까? 밝다고 생각하지요. 밤이 왔잖아요. 밤에 이 동네가 어둡습니까, 밝습니까? 어둡지요. 그럼 이 동네가 어두워요, 밝아요? 빛이에요, 어두움이에요? (어두움) 그러면 낮에도 이 동네는 어두움이다.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재벌 됐다? 지옥 가요. 건강하다? 지옥 갑니다. 출세했다? 지옥 가요. 시험에 합격했다? 지옥 갑니다. 전부 다 어두움이에요. 어두움뿐이에요. 빛은 없어요. 어두움에 빛이 온 거지 빛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어두움인 줄 몰랐는가? 빛이 왔다는 사실을 모르니까 자기는 빛도 아닌 게 어두움이 빛인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격려해주고 속인 거예요. 속고 속이는 세상.

그러면 목사님, 문제는 이 세상이 이렇게 되도 그걸 모르고 있던 우리 자신의 인지, 그게 문제네요. 주님께서 일을 해도 그걸 모른다 하면 모른 자가 지옥 가는 세상이네요. 왜냐하면 수긍이 안 되니까, 동의가 안 되니까 우리한테 문제가 있네요. 우리한테 있는 문제를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고 다시 눈이 완전히 빛과 어두움을 알 수 있는 마음으로 달라질 수 있는 어떤 방법은 없겠습니까,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됩니다.

그것 이해하라 하면 욕 얻어먹어요. 어두움, 끝. 끝났어. 바뀌지 않는 확정 난 안심하라. 그럼 지옥 가는 걸 안심하란 말인가? 이건 너무 불안하지 않습니까. 로마서 7장 11절과 13절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떤 식으로 어두움을 깨닫는 거예요. 빛을 깨닫기보다도 자기 자신이 어둡다는 것을 인지해야 됩니다. 그래도 어두움은 바뀌지 않아요. 신앙생활, 교회 백날 다녀도 바뀌지 않아요.

내가 안 바뀌어야 돼요. 왜냐하면 내가 안 바뀌어야 주님의 영생이 계속 우리한테 장착하게 돼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달라져버리면 무엇에 위반돼요? 너는 바뀌지 않는다는 원칙이 틀려먹은 게 되지요. 말 어렵다. 만약에 예수 믿고 새 인간 돼버리면 무슨 원칙에 위배되는 거예요. 바뀌지 않는다는 원칙에서 내가 바뀌었지, 하나님 말씀보다 내가 더 세지. 이렇게 된단 말이죠. 바뀌지 말아야 돼요.

로마서 7장 11절에,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라고 돼있어요. 계명과 인간이 만날 때 인간은 뭘 못 보느냐 하면, 성경을 볼 때 뭘 못 보느냐 하면, 성경말씀을 내가 이해하고 의미를 찾아서 살아야지, 하는 그런 성급함이 우선해서 먼저 나오기 때문에 죄가 이 성경을 줬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성경을 죄가 다룬다는 사실을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을 볼 때 누가 갑자기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면, 내 속에 있는 죄가 이 성경에 대해서 마중을 나가요. 마중 나가서 이 말씀을 내가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지켜서 뭐하게? 지키면 안 지킬 때보다 달라지고 바뀌는 것을 희망으로 삼아서 교회 다니고 성경 보고 난 뒤에 새사람 됐네, 라는 뉘앙스를 획득하기 위한 어떤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말씀을 보는 순간 내 속에 있는 죄가, 내 속에 있는 죄가 작용한다는 것은, 내가 셉니까, 죄가 셉니까? 어느 것이 강해요? 죄가 더 세다는 거예요. 죄가 더 세서 우리로 하여금 날이면 날마다 점점 더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는 것은 안 바뀌었어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4,5살 어린아이한테 물어보세요. 요새 <나이거참>이란 예능프로에서 아이와 육십 된 노인과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이가 아주 당돌하게 이야기를 잘해요. 무슨 이야기하다가 ….

죄와 우리가 대화를 하게 되면 우리는 죄가 없다고 여기거든요. 왜냐하면 정당한 부분이 있으니까.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착한 것 총동원해서 보거든요. 그러면 뭘 의식하지 못합니까? 나보다 내 속에 죄가 작열하는 걸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뭡니까? 우리는 70, 80, 90 되면서 죽지요.

내가 만약에 어린애와 이야기하는 전원책이라면, 너 인간은 왜 죽는다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질문할 거예요. 혹시 교실에서 그런 이야기하면 교사 잘립니까? 묻는 건 괜찮지요. 정답을 이야기하면 잘리겠지만. 애들아, 사람이 나이 들면 뭐가 돼? 할아버지, 할머니 돼요. 할아버지, 할머니 되면 어떻게 돼? 죽어요. 그러면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안 죽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럼 왜 태어나고 왜 죽지? 엄마한테 물어보고.

처음부터 죄는 살고자 하는 의욕보다 더 강했어요. 아무리 살고자 해도 우리는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어디서 안심하느냐 하면, 이미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그처럼 세상 보는 게 안심되는 게 없어요. 이미 죽었잖아요. 어차피 죽을 거잖아요. 뭐 안 죽을 거예요? 그 나이로 스톱시킬 거예요? 어차피 죽잖아요.

어차피 죽을 것, 미리 당겨서 생각해보는 거예요. 98, 90이라든지 62, 어차피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잠시 사흘 만에 부활해서 땅에 묻기 전에 세상 바람 쐬려고 새벽 2시 46분에 관 열고 잠시 돌아다니는 귀신이라고 생각합시다. 세상 살 마음 필요 없지요. 되게 안심될 거예요. 이미 안 바뀌니까.

죄가 있다는 것은 어떤 몸부림 쳐도 이미 너는 죽어야 됨을 확정짓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무슨 자리냐 하면, 선과 악의 자리가 아니고 죽음의 자리에요.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죄는 왕 노릇하는 죽음의 자리에요. 죽음의 자리인데 왜 죽느냐 하면, 로마서 6장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거든요.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면, “죄의 삯은 사망” 이 문장을 담는 그릇이 우리 몸이 돼요. 우리의 인생이 되는 겁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우린 죽어야 돼요. 그런데 은사, 선물이죠. 예수님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선물로 우리 몸에 줬다면 이건 바뀌지 않아요. 그런데 로마서 6장 23절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고 하나님의 은사, 선물은 영생이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은 우리의 공로,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에게 영생이죠. 그러면 우리는 무슨 영역이 되느냐 하면, 죽음도 알리는 영역과 그 다음에 영생이 안착하는 공간, 필드, 영역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영생의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죄의 운반체 되었다고 선물 받아서 졸지에 이미 죽기 전에 영생을 뿜어내는 기능이 발휘되는 거예요. 영생이 막 뿜어져 나와요. 이미 죽었다고 치니까 살아가는 것도 영생을 발현하기 위해서 천상 동네에서 사는 거예요. 영생을 뿜어내기 위해서. 그걸 누가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영생이 되는 겁니다.

독생자가 오시고 난 뒤에 요한복음 3장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이야기했다고요. 읽지는 않았지만 요한복음 13절부터.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잖아요. 그 모습은 사실은 우리 몸을 사용해서 그 기능을 되풀이하는 거예요. 너는 백날 살려고 해도 너는 죽어. 하지만 네가 아무리 죽고자 해도 너는 살아. 왜? 죽음을 다뤘던 네 몸을 이젠 은사로 영생이 있음을,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는 몸으로 너를 활용하고 사용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천국 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강의를 마칠 텐데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오늘 제목은 판결이라 했어요. 일방적인 판결입니다. 사람의 판결은 내가 행한 것에 대해서 판결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된 겁니다. 판결은 일방적으로 이미 주께서 확정했어요. 그리고 인간에게 한 판결은 바뀐다, 안 바뀐다? 안 바뀌는 거예요. 어떤 조건 하에? 안 바뀌는 말씀이 우리 안에 장착되는 하에 우리의 운명은 말씀과 따라서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씀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밖에 없어요.

이건 내가 부인하고 거부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뭐지, 주님이 오신 의미가 뭐지,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피로 죄 사함 받는다는 의미가 뭐지? 이것이 생각 안 나려야 안 날 수 없게 해요. 왜냐하면 내 몸을 주님이 주관해서 그래요. 만약에 내 몸을 내가 주관하면 우리는 노림수를 갖고 있어요.

주님이여, 성경 가운데 어느 대목 보면 천당 갑니까? 노림수가 있는데 주님께선 우리를 완전히 개 무시해서 네가 뭘 노리는 게 아니고 이미 넌 죽은 자라 어떤 노림수라 해도 죄를 못 이겨요. 그런데 거기에다 주께서 자기가 규정지은 죄와 예수님이 스스로 규정지은 부활과 매치되는 현장으로 만들어버리니까 죽을 죄인이 주님의 공로로 영생을 얻는구나, 라고 앞에 있는 죽음과 뒤에 있는 영생이 둘 다 아울러서 내 몸에서 터져 나오는 겁니다. 뿜뿜 계속 뿜어져 나오는 거예요.

나, 영생 받았다가 아니라 앞에 먼저 뭐가 붙어야 돼요. 나는 뭘 해도 지옥 가야 될 인간이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영생 얻었다. 이렇게 짜이는 거예요. 앞에는 지옥, 뒤에는 천국. 이렇게 짜인 것이 우리 몸에 장착되어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하신 일만 증거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새로 만들어진 성도입니다.

진짜 성도라면 우리는 안심해도 됩니다. 왜냐하면 내 몸을 내가 주관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주님이 주관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떠한 굴곡진 인생을 살고 남들 손가락질 당하면서 너 까불다가 망했다, 사업 부도났다, 어떤 욕을 하고 봐라 네 건강 잃었으니까 지옥 간다 온갖 모함을 한다할지라도 이미 심판 받은 자의 입에서나 나올 이야기에요.

그렇게 하세요. 나도 그것 알거든. 옛날에 그렇게 그런 줄 알았거든.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주께서 죄를 전달할 때 나를 사용한 것처럼 이제는 하나님의 영생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에게 선물을 주셨고 나에게 찾아왔다는 것, 우리가 고백할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 했사온데 저희는 지금까지 내 잘남을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내 믿음을 증거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이러한 못난 우리를 주께서 영생 증거하는 용도로 쓰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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