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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5 23:03:57 조회 : 374         
시간의 선회 19070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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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25.♡.150.22) 19-07-08 17:23 
20190705a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시간의 선회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3장 4절부터 봅시다.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여기 ‘절기’라고 나오지요. 절기라고 했을 때 골로새서 2장에 있는 내용과 연관시켜야 됩니다. 2장 16절을 읽어 보면,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구애받을 필요 없다는 거죠.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에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겁니다.

골로새서 2장 17절에 보면,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라 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구약을 무시하고 가야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약이 장래 일의 그림자라 한다면 우리는 구약을 뛰어 넘어서 바로 복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구약을 경유해서 그림자를 경유해서 나와야 돼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구약이 있고 신약이 있다면, 골로새서에 의하면 구약은 신약 밑으로 들어가요. 그러면 신약이 실체가 되고, 하늘에 빛이 있다면 신약은 실체가 되고 실체의 어두운 그림자가 여기에 구약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기획된 계획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골로새서 2장에 보면 예수님의 몸에서 이런 계획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이 여기 있잖아요. 우리의 몸이 바로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몸은 일단은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가 되어서 이렇게 들어가서 구약, 신약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걸 보고 바로 뛰어 들어갈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구약의 그림자가 되는 세계 속에 들어가려면, 그러니까 월삭이나 절기나 안식일 이런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으려면 우리 몸이 그냥 들어가면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가서 이렇게 가야 돼요.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몸에서 나온 결과기 때문에 업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이 예수의 몸으로 가게 되면 우리가 달라져야 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의 행함으로 구원 얻겠다는 이 시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들어가면서 포기돼야 됩니다. 이게 없어져야 돼요. 방금 나의 행함으로 되겠다는 그런 의욕, 의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가 안 받아주는 이유가, 행함이라 돼 있잖아요. 이 행함이 누구의 행함이라 돼 있습니까? 나의 행함이죠. 내가 의도하고 있는 나에게서 나온 행함은 그리스도 몸에서 그대로 인수되질 않아요. 나의 행함을 접어야 돼요.

나의 행함을 접는 것과 골로새서 2장 16절에 나오는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지적받을 필요 없다는 뜻과 연관이 있는데 안식일은 인간의 노동, 행함이죠. 인간의 행함이 정지되는 날이에요. 안식일의 취지가 인간의 행함이 정지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에 인간 자체가 결과물이지 인간의 협조를 통해서 창조가 완성되지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 완성에 인간의 행함은 조금도 보탠 적이 없어요. 그 완성을 하나님의 안식이라.

안식이란 완성으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칠일 동안 천지를 만드시고 쉬셨다. 그래서 안식인데 칠일 동안 창조할 때 인간의 행함은, 인간의 노동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안식이란 너희들의 노동을 중지하라, 너희들은 일하지 마라, 하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일하지 마라, 일하지 마라 하시는 그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시고 그 날엔 노동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되지요.

우리가 교회 와서 성경을 보면서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 이유가 뭘까, 이유가 뭘까,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그 이유를 모르게 되면 이것은 곧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뜻과 마찬가지거든요.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이에요. 이유를 알게 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내가 누군지를 다시 재조명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진정 내가 누군지를. 남들이 나를 누구라 하는 것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누구라고 할 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안식일이라든지 십계명이라든지 율법이 거기에 게재되는 거예요. 들어가는 거예요.

지난 울산강의에서 율법을 언급하면서 시내 산 올라갔던 모세의 안목과 시내 산 밑에 이스라엘 백성의 안목이 완전히 대비가 되고 서로 대립이 일어나는 걸 말씀드렸지요. 대립이 된다는 것은 평소에 내가 거울 보면서 내 인생 살아오면서 나는 이 정도라는 것은 완전히 오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창조주가 나를 뭐라고 보느냐, 라고 해야지 창조 된 내가 뭐 되고 싶다는 것은 너무 일방적인 욕심입니다. 세상에 모든 불행과 근심걱정은 자기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세리와 창기와 강도를 자꾸 거론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문둥병, 앉은뱅이, 그리고 절뚝발이, 귀머거리. 왜 자꾸 예수님께서 그들을 관련시켜서 부각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귀머거리, 앉은뱅이, 죽은 자, 귀신 들린 자.

그게 인간이 평소에 내가 이 정도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닐 거라고 빼먹는 그 요소거든요. 나는 소경 아니야, 나는 귀머거리 아니야, 나는 문둥병 아니야, 나는 세리 창기 아니야, 죄인 아니야, 라고 빼먹는 그 자리, 그것을 도로 우리 얼굴에 처발라버리는 거예요. 빼먹기는 뭘 빼먹어. 이게 네 얼굴이야. 이게 네 현주소야.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이 세상이 어둠이란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이 세상이 어둡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 태양이 있다고 밝은 게 아니에요. 빛은 예수님이 빛이고 나머진 다 어두워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장에 그렇게 돼있습니다.

어두움은 빛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러면 빛의 세계에 가려면 어두움이 뭐로 바뀌어야 되겠습니까? 빛의 자녀로 바뀌어야 되겠지요. 빛의 자녀는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빛의 권세가 아들이 되는 권세가 부여돼야 돼요. 제공돼야 된다고요. 어두움에 빛이 와야 된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두움이 안 되려고 해요. 어두움이란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해서. 앞에 ‘이’ 같으면 ‘이 어두움’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최, 김 이렇게 나가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우리 집에 전에 미국 갔다 오고 난 뒤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아내가 기념물로 뉴저지 어느 대학의 셔츠 두 개 샀어요. PRINCETON이라고 적혀있는 그 셔츠를 입으면 프린스턴대학과 관련 있는 사람처럼 되잖아요. 프린스턴대학이 뉴저지에 있는데 거기 안 가봤으면 살 수가 없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려면 PRINCETON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마크가 찍힌 그런 새로운 피조물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프린스턴대학에서만 파는 거예요. 딴 동네에선 팔지 않아요. 주님이 와서 우리에게 주는 게 있어요. 주님께서 주는 것이, 이 땅에서 내가 얻는 펀드나 은행잔고, 부동산, 자식 공부시키는 것, 그것과는 족히 비교가 안 됩니다. 교회 부흥시키고, 어떻고 그것과 비교 안 돼요.

주님이 주시는 것은 주님의 노동과 그 결과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우리의 노동과 평생 수고한 것을 거부한다는 뜻이에요. 그건 어두움이니까. 질이 나빠요. 질적으로 나빠요. 양이 아무리 우리가 부자 되도 질이 나쁘면 양은 소용없는 겁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이 거짓된 믿음인 것은 자기가 눈치 채야 됩니다. 나의 믿음, 소망, 사랑은 전부 다 거짓된 것이라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은 다 거짓된 거예요. 왜냐하면 아무리 믿음, 소망, 사랑이 좋아도 내 소유가 된 순간 나는 어두움의 인식으로 믿음, 소망, 사랑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믿음, 소망, 사랑은 다 거짓된 겁니다. 거짓된 믿음은 통하질 않지요.

우리가 주님의 자리에 가려면 나의 행함과 나의 믿음, 소망, 사랑은 전부 다 거부당합니다. 이거는 뭘 의미하느냐? 나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내가 소멸되고 나의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와 버린 겁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죽고, 내가 있던 그 자리는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차지한 자리가 되었다고 이야기해요. 이걸 사도 바울은 성령이 임한 모습이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내가 주도권을 쥐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성부든 내가 관리하고 내가 관계 맺으려고 내가 수고하고 애쓰고 있는데 성령이 와버리면 주도권이 바꿔요. 내가 주님 것을 가지는 게 용납이 안 되고 주님이 갖고 있는 그것을 우리에게 집어넣게 되면, 우리가 소용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한테 소유당하는 게 됩니다. 나의 것은 소멸되는 거예요.

나의 것은 소멸되지만 내 몸은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나의 것이라 할 때 그 ‘나’라는 게 가설이에요. 나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일단은 나라고 해보는 겁니다. 현재 몸이 있는 나를 나라고 해보는 거예요. 그런데 점점 세월 가면 나라는 것이 닳아지지요. 죽게 되면 나라는 것도 없지요. 몸이 없다는 말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몸은 있어요.

이 몸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일단 어두움의 세계에서 나온 가설이라고. 가정해보는 거예요. 네 것 아니잖아. 아버지 것 아니죠? 그러면 내 것 맞네, 라고 주님 오기 전에는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제가 지금 억지 부리는 것 아니에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다. 너희를 값을 주고 산 것이니 너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이라도 돼있어요.

하도 요즘 세상이 성경 안 보는 분위기가 돼서 봐도 기억 안 날 정돈데 아예 안 보니까. 왜 성경을 안 보느냐 하면, 가설로 된 내가 자기한테 흡족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아파트, 내 몸, 내 것이라는 것이 별로 이것이 거북스럽질 않아요. 좋아 보이고.

고린도전서 6장 19절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니까 우리 몸은 내 것으로 있는 게 아니고, 그건 나의 가설이고, 성령이 임할 거니까 잘 간수하라고 주신 몸이 주님한테 부여받은 몸이 우리 몸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몸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고 장차 성령이 오게 되면, 내 자리 여기네, 하고 본인 자리 찾아가게 만드는 그릇이 우리 몸이 되는 겁니다.

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영광을 돌리라는 이 명령은 성령께서 수행하시는 겁니다. 성령 없이 수행을 못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대신 말씀을 받아서 성령께서 기어이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되도록 조치를 해주시는 겁니다. 성령께선 우리가 육적으로 방해 놓는다고 실패할 분이 아니거든요.

강의하면서 중요한 걸 다시 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거짓이란 거예요. 나의 믿음은 거짓이에요. 나란 자체가 가설이고 거짓이기 때문에 내가 갖고 있는 믿음도 거짓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거짓된 믿음과 주님이 주신 믿음과 이 몸을 가지고 평생토록 바꿔치기하는 작업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네 믿음 말고 주님의 믿음, 네 소망 말고 주님의 소망, 네 사랑 말고 주님의 사랑.

그러면 주님의 사랑인지 내 사랑인지 어떻게 구분하느냐? 내 행함과 공로와 수고와 노동이 들어가면 내 거고, 주님의 수고와 노동이 들어간 결과로써 주어지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면 이거는 우리 몸 자체가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 오기 전까지 악이라 하는 것은 내가 판단해서 나쁜 짓을 해서 악이라고 보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악은 뭐냐 하면, 주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는 것, 그게 악이 되는 겁니다.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했다고 여기는 것이 악이에요. 내가 선하려고 노력해서 선하다. 내가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 이런 게 전부 다 악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만약에 왔다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내가 평소에 자연스럽게 했던 모든 것이 거짓임이 드러나지요. 특히 나는 거짓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사랑받고 싶다. 인간의 본성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만 최종적으로 하나로 정리하고 결론을 내리면, 모든 인간은 사랑받고 싶어요. 아무로 돈을 많이 가지고 친구가 많아도 사랑받는 게 아니거든요. 사마리아 여인이 남자가 여섯이어도 그게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조건 사랑을 갈구하는 거예요. 사랑받고 싶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버림받기 싫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망하기 싫다. 나는 사랑받고 싶다. 같은 말로 버림받기 싫다, 나는 망하기 싫다, 남한테 욕 얻어먹기 싫다, 하는데 이 모습이 바로 창세기 3장에 보게 되면 타락한 모습이에요. 인간은 창세기 3장 딱 그대로 맞다. 벌써 너희들은 타락했구나. 우리의 본성이 창세기 3장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고생하게 돼 있잖아요. 땅에 저주받게 돼 있지요. 왜 고생하게 되느냐 하면, 고생할 만하니까 고생하는 거예요. 우리의 몸이, 나라는 게. 평생 낙이란 없고 늘 근심과 탄식과 힘든 인생, 고난, 육체적 아픔, 이걸 겪는 것이 마땅한 존재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마땅함으로 받아주는 게 아니고 우리는 싫어, 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조치에 대해서 그런 상황, 현실을 강력하게 반발하고 억지를 부리면서 밀어내고 있는 거예요. 난 사랑받고 싶어. 저주받기 싫어, 망하기 싫어. 무슨 권리로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뭔데 버림받기 싫어요?

버림받는 것이 합당합니다. 왜 이런 고백 못해요? 나라는 가설에서는 절대로 그게 나올 수 없어요. 나 자체가 수상하고 나 자체가 꼬였고 나 자체가 거짓된 나로 완전무장 돼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고 뭐고 간에 무조건 나는 망하면 안 되고 무조건 나는 천국 가야 되고 무조건 나는 행복해야 되고 고통이 없어야 되고 만사형통해야 되고. 이건 무조건, 무조건이야.

그 무조건, 누가 가르친 거예요? 그 배후가 누가 일방적으로 뒤에서 부추기는 겁니까? 하나님께 대들라고 하나님이 하신 일에 반발하라고 누가 그렇게 하는 거예요? 너에겐 너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 너만 편하고 너만 잘 되면 되잖아. 그게 모든 생각의 일순위입니다.

그래서 일순위로 생각한다는 자체가 내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란 말이죠. 진짜 하나님이 아니란 뜻이에요. 하나님 믿는다 하지만 항상 생각은 내가 일순위에요. 내가 일순위란 말은, 그만큼 내가 믿는 하나님은 엉터리였고 있지도 않는 거짓된 하나님을 걸치고 있는 거예요.

이것도 지난번에 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육일 창조하시고 칠일에 쉬셨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만든 시간 안에는 무슨 내용이 꽉꽉 담겼느냐 하면, 육일 창조했고 하루 쉬었다.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그 내용이 꽉꽉 차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 시간을 계속 그런 원리를 담고 세상 끝 날까지 끌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시간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간에게 시간은 자기가 수고하고 노동하고 애쓴 것을 기록하는 자기의 과거 일기장 같은 거죠.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살아온 기억 속에서 자기의 지난 긴긴 인생이 다 담겨있어요. 경쟁이죠. 주님이 인정하는 시간은 창조와 안식, 그게 내용으로 꽉 차있는데 인간에게는 그런 내용이 들어올 틈이 없어요. 왜냐하면 아름다운 나의 추억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두 시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의 시간이란 내가 살아 있는 한 끊어지지 않아요. 그걸 대구강의에서 뭐로 그렸느냐 하면, 뱀으로 그렸어요. 날름날름 뱀이에요. 내 인생 자체가 안 끊어진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시간은 칠일 단위로 끊어져요. 인간의 시간은 길게 늘어졌지만 주님의 시간은 시간의 선회에요. 선회 또는 순환(circle), 뱅뱅 도는 겁니다. 미지의 X가 있고 X 주변을 빙빙 돌아요. 칠일 주기로. 계속 도는 겁니다.

소용돌이는 중심이 있고 주위에 빙빙 도는데 그러면 중심에 뭔가 물을 빙빙 돌게 하는 끄는 힘이 안에 있지요. 주인공이 있을 거란 말이죠. 주님께선 미지의 X, 아까 이야기한 구약에는 그림자고 신약에는 그리스도에요. 모든 시간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빙빙 도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알파요 오메가기 때문에. 하나님은 주님과 함께 있고.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니까 순환구조로 되는 겁니다.

구약에 초기에는 안식일로 칠일 단위로 끊어서 순환했지요. 나중에는 절기 단위로 끊어요. 나중에서는 50년 단위로 끊고. 그 50년을 바로 기쁨의 날, 희년이라 합니다. 희년의 의미는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내가 가난해서 토지나 가옥을 팔아먹었는데 50년만 기다리면 다시 돌아오게 돼있어요. 50년 되기 전에 돌아올 방법이 있어요. 내가 돈을 벌어서 빚진 걸 갚을 때는 다시 내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왜 내 소유를 남한테 팔아서는 안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토지나 모든 가족은 이스라엘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에요. 하나님이 아파트 분양하듯이 분양해준 겁니다. 주께서 빌려준 거예요. 이 몸이 내 몸이 아니에요. 주께서 빌려준 몸이에요. 내 몸 같으면 이게 내 이름 되는데 이게 주의 것이라면 내 이름으로 구원 못 받고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느냐 하면, 원래 주인 되신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의 이름이란 뜻은, 주의 영이 여기에 들어와 버리면 정말 그때는 내 몸이 내 소유가 없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원래 주인이 차지하고 난 뒤에는 그동안 나는 무슨 착각, 헛된 망상을 했구나, 라고 알게 돼요.

인간의 시간은 뱀이거든요. 어느 한 순간도 끊어짐이 없어요. 계속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어지고 있으니까 옛날 초등학교 때 필통도 아까워도 못 버리죠. 왜? 내 거니까. 자식은 물론 내 자식이고요. 손자도 내 거고. 이사 갈 때 벽지에 붙어있는 그것, 물론 뒤에 비자금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비자금이 너무 오래 돼서 바꿀 수도 없는 옛날 돈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장판 하나 벽지 하나 전부 다 내 눈물과 한숨과 슬픔과 애씀과 죽을 둥 살 둥 내 목숨 바쳐 만든 돈 주고 산 벽지들이고 장판들이에요. 얼마나 그게 아깝겠어요.

대전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우리나라 영화 <수상한 그녀>(2013)에서 하얀 나비 불렀던 나이 칠십 다 된 노인네가 행복사진관에서 사진 잘못 찍어서 이십 대 초반이 돼서 다시 옛날 청춘을 살고 싶다고 하는데 애 키운다고 시장바닥에 애쓰며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거기에 감정이입이 되는 거예요.

그래 나도 60년대 참 어렵게 살았다. 신혼여행이라고 겨우 경주 불국사에 갔고 신혼집에 아무것도 없고 비키니 옷장 하나, 부엌도 없이 방 한쪽에 석유곤로로 밥해 먹고 살았다. 둘이 같이 있는 것만 좋아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겨울 되면 외풍이 있어서 옷으로 막고 살았다. 방 한 칸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좋았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결혼한다고 하면 2억 대출 받아서 헌집은 들어갈 생각도 안 하고 새 아파트만 찾고 있으니, 참. 어른들 입장에서는 그 집도 깨끗하구먼, 그냥 살면 되지. 그런 것 없어. 무조건 대출, 빚내서라도 동창생한테 남한테 안 지려고 기 안 죽으려고 허풍과 허세를 떨고 있고. 한심하지요. 이러나저러나 성령 안 받긴 마찬가지에요.

그만큼 애지중지하면서 인생 살아왔던 그게 화근이 되는 거예요. 도리어 너무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버릴 수 없어요. 아까워서. 엄마, 아빠 재산 다 날리고 집 나가서 어디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하면, 그런 자식은 반갑다 해서 얼른 경찰서 가서 혹시 그 애 생명보험 든 것 없는지 그런 거나 찾고 있을 거란 말이죠.

그런데 너무나 애지중지하던 걔가 세월호 타고 가버렸을 때, 그때는 미치는 거예요. 그것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해요. 우상. 우상을 제가 다른 표현으로 하겠습니다. 특화. 특별하게 특화하는 거예요. 야곱은 요셉을 특화했어요. 그 많은 아들 가운데 유난히도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선 그걸 야곱 앞에서 소멸시키죠. 없애버리죠. 그게 야곱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간다는 것,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냥 못 들어가요. 너의 우상을 가져오너라. 그게 언약이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너무 사랑했어요. 하나님의 지시는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그것에 꽂혀있습니다. 그 아들을 내 앞에 제물로 바쳐라. 하나님이야, 네 아들이야? 확실히 하자. 네 아들 믿는 거짓 믿음이야, 하나님 믿는 진짜 믿음인지 확실히 하자.

내게 특화된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죽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창세기 3장 이후에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고 이 땅에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주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망해야하기에 망하는 것을 저는 수긍하겠습니다. 버림받는 것을 수긍하겠습니다. 어떤 사랑도 받지 않는 것이 내 처지에 합당하다고 수긍하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에요. 어찌 이런 믿음이 인간의 능력, 인간의 지혜와 과거에 뱀 같은 인생 경험에서 지혜에서 어떻게 나올 수 있겠어요. 안 나옵니다. 쥐어짜도 안 나와요. 평생을 신학공부해도 안 나와요. 신학이란 하나님은 없음을 제대로 증명해주는 게 신학이에요. 신학은 모든 신은 인간이 염원에서 나온 상상의 대상이다. 그게 신이다. 그게 신학의 결론입니다.

신학교 간 신학생, 졸업한 목사 가운데(서 목사님 빼놓고) 신자 있거든 찾아보세요. 신학을 못 버렸다는 말은, 나는 신자 아니고 인간들이 원하는 우상의 신을 잘 활용할 준비가 돼있다는 뜻이에요. 인간이 원하는 신으로 장사할 준비가 돼있다는 그게 목사나 전도사들이 할 짓이에요. 신학을 해놓고 신학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법학을 하고 난 뒤에 법학박사 되고 난 뒤에 법학이 죄란 걸 모르면 학위 몇 개 가져도 그건 신자 아니에요. 의학을 해놓고 의학이 나를 망하게 하는 죄라는 것을 모르면 그거는 신자 된 의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지요. 예수님도 병 고쳤다고. 여러분, 예수님이 고친 병은 흔히 의사들이 고치는 병이 아닙니다. 진짜 인간을 치료한다는 것은 자기 죽음을 영생으로 바꾸지 못하는 한 그건 치료된 게 아닙니다. 어느 의사가 어느 성형외과가 영생을 주던가요? 어느 산부인과가 영생을 주던가요? 영생 주는 내과 봤습니까? 속 편한 내과야 우리 대구에도 많아요. 한둘이 아닙니다. 같은 상호, 속 편한 내과라고. 그러나 영생 주는 내과 어디 있습니까?

속 편한 게 뭡니까?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거지요, 뭐. 사랑 받고 싶으면 사랑해주겠다는 거예요. 해독주스가 영생 줍니까? 분명히 성경에서는 이 땅은 우리가 고생하는 곳이에요. 결국 의사가 하는 일은 뭡니까? 고생하는 길에 더 고생하라고 수명 늘려주는 일이 의사가 하는 일이에요. 주님은 서른세 살에 일 다 끝났어요. 의사는 질질 끕니다. 골병이 들도록 질질 끌어요. 무슨 흉한 꼴을 보려고.

칠십에 죽을 사람을 구십까지 살려놓으니까 이십 년 동안 본인도 끔찍스러운 경험들을 하는 거예요. 살아도 산 게 아니고 망가진 귀신처럼 험한 이십 년을 더 보내게 만들었어요. 왜? 의학의 발달 때문에. 코에 호스 꼽고 있는 돈 다 날리고 보험 있는 것 다 써서 나라 재정까지 말아먹고.

인간은 시간을 자기 시간이고 싶어 합니다. 결국 인간의 자기 사랑은 성경을 안 믿어서 그래요. 영생 주는 기쁨은 이 세상에 죽어도 좋아요. 우리 죽음의 위협보다 능가합니다. 그래서 영생 얻은 기쁨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마음 놓고 살질 못해요. 영생 얻은 기쁨이 있으면 이 땅에 강도가 되도 괜찮고 창녀 되도 괜찮아요. 마음 놓고 살아요. 왜? 얻을 것 다 얻었으니까.

그럼 영생은 어디 있는가? 바로 내가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 몸 안에 들어가면 영생 있어요. 그래서 몸 안에 들어가는 순간 안식일과 절기와 모든 율법에 대해서 이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율법이 뭐라고 지적하든지 성경말씀이 뭐라고 죄인으로 꽂아주든지 그건 우리와 상관없는 거예요. 마음대로 꽂으라 하세요. 마음대로 죄인 되면 되니까.

마음대로 죄인 되는 즐거움이 있고 자유가 있어요. 왜? 그게 바로 우리 몸 맞으니까. 죄인 맞으니까 죄인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먹는 것 입는 걸 족한 줄 알라. 그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못 지키는 몸을 갖고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 그 말씀 주신 거예요. 무슨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신발도 좀 좋은 것 신고. 대구까지 걸어가야 돼요? 차비도 해야 되고. 먹는 것 입는 걸 어떻게 족해요? 어딜 나가지 말란 말이에요? 아니거든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는 말은 뭐냐 하면, 참새 같이 살고 들풀 같이 살란 말이죠. 오늘 죽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너무 심통 내지 말란 뜻이에요, 그게. 어차피 니 몸 아닌데 내일까지 버티려고 살려고 애를 쓰느냐 말이죠. 수련회 꼭 해야 됩니까? 영생 얻으면 됐지. 이러면 수련회 참석 안 하면 안 되는데…

희년을 되돌려받는 건데 첫 번째 지가 돈 벌어서 되돌려받을 수 있고, 돈 없으면 유력한 친척이 와서 물어주면 다시 돌려주는 게 있고. 세 번째는, 50년 되면 하나님이 그냥 돌려줘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척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척이에요. 왜? 50년 시간 됐거든. 그래서 이건 우리한테 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기 것을 되돌려받으면서 너희가 갖고 있어도 결국 내가 모든 걸 빼앗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수고와 노동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게 성경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그림으로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두 개의 선이 나란히 갑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게 있지요. 고속도로와 ktx철로와 나란히 가는 코스 많지요. 하나님의 시간은 안식일의 취지를 담고 갑니다. 구약에서는 그림자, 신약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이 없어요. 완성됐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시간이 스톱되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 고속도로는 인간들의 역사와 전통, 관습, 관행, 가문의 뼈대 이런 것으로 계속 달리는 거예요. 아까 뱀처럼 계속 가는 겁니다. 여기는 심판, 멸망이죠. 여기에 악마가 동승하고 있습니다. 악마는 말합니다. 최후로 네가 믿을 너밖에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악마는 인간에게 그런 식으로 부추기고 그런 인식을 계속 심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란 너한테 도움 될 때나 하나님이지 도움도 안 되는 하나님을 왜 믿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무슨 결론을 내리느냐 하면, 신학을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없다.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특히 교회 장로들이 그런 결론을 많이 내려요. 목사도 그렇지만 안 그런 척하고.

모든 교회가 신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행복하고 몸 건강한 것, 이게 주 안건이에요. 교회에서 기도하고 주로 그걸 추구하는 거예요.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왜 사느냐고 물어보면,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당신은 무슨 근거에 의해서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느냐, 라고 물으면 내 마음이다, 이러거든요.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느냐.

주님께서는 성도한테는,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주님의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성도한테는 철도가 고속도로로 달리는 이 몸에다 등에 올라타요. 그러면 성도에겐 두 개의 시간이 중첩되어 달리고 있습니다. 위에 지나가는 인간의 몸, 악마의 사주 받아서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그 몸을 주께서 뒤에 들러붙지요. 들러붙으면 내 뜻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줘요.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기존에 인간의 몸이 성경을 보잖아요. 안식일 나오고 희년 나오고 십계명 나오면 그걸 지키려고 해요. 왜 지킵니까? 누구 좋으라고 지켜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기 위해서 지키려고 한다 이 말이죠. 내가 지키면 나의 믿음, 나의 소망, 나의 사랑 다 동원하지요. 내가 뭔가 지키게 되면 그게 그대로 기억 속에 추억 속에 누적이 될 게 아니냔 말이죠. 나 이 정도로 착실하게 충실하게 교회 생활 잘했다.

전부 다 앞에 ‘나’가 붙어있지요. 나는 가설이라 했지요. 내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임시로 붙여보는 거예요. 내 몸은 내 거라고 임시로 붙여보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성령을 받아야 아는데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모른다 이 말이죠. 그러나 성도는 성령이 와버리면 이 둘 사이에 계속해서 티격태격 투쟁과 갈등과 다툼과 그리고 밀고 당기는 사이가 돼버려요. 그걸 어려운 말로 긴장관계라 하는데, 계속해서 한계에 부딪치게 만들어요.

나이 팔십 먹은 노인이 운전할 때 젊을 땐 운전 잘했는데 아이고 눈이 왜 침침하노, 하고 여기 한 번 박고, 또 고속도로 가보면 역주행하고 있고. 술도 안 먹었는데. 이게 뭐냐 하면, 방향을 몰라. 한계에 이른 거죠. 어디 처박는 거예요. 놀이동산에 범퍼카처럼 박아놓고 딴 길로 가지요. 성령께서 그렇게 유도하고 인도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네가 했다는 걸 털어내라고.

안식일 자체가 인간은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주님의 공로만 찬양하는 것이 안식일이고 그 안식일의 완성이 안식의 세계, 영원한 천국이거든요. 그런데 천국 간다고 우기면서 자기의 열심을 내세우고 바르게 살았다고 하는 게 있으면 그걸 털어내는 작업을 성령을 통해서 필히 조치를 하게 돼있어요.

그 털어내는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단절입니다. 그 단절을 오늘 본문에서는 유월절 단절, 맥추절 단절, 수장절 단절, 그리고 대 속죄일, 절기 때마다 딱딱 끊어주는 거예요. 절기 때마다 끊어주고 절기와 절기 사이에 안식일을 집어넣어요. 이것은 곧 하나님이 너희와 협의하고 의논하려고 한 대상이 아니고 네가 없는 데서 만들어진 안식의 창조의 원리로 또 다시 주께서 끊어진 그 다음부터 창조의 원리를 다시 주입합니다.

인간들의 육일 동안 일하면서 또 자기 쪽으로 온 걸 안식일로 끊어서 창조 될 때 네가 거저 받았다는 거예요. 은혜라는 것은 네가 얻을 수 있는 데서 은혜가 안 나오고 네가 얻을 수 없는 다른 곳에서 은혜를 받아놓고 너는 네가 힘들여서 이만큼 살아왔다고 우기니까 주님께선 성령을 받은 사람한테는 계속해서 그걸 지적을 해주는 겁니다. 올라타서.

그래서 올라탈 때는 그러니까 주일에 교회 와서 복음 들을 때는 내가 참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라는 가설 자체가 허망한 거고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고 깨달았다가 교회 문만 나가면 계단만 내려가면 벌써 내가 아는 주님은 등짝에 있기 때문에 안 보이잖아요. 안 보이니까 눈앞에 것만 보이는 거예요. 다시 열심히 살아야지.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애 학원이라도 보낸다고 또 열심히 사는 거예요.

열심히 사는데 성령께서 또 힘들게 하니까 주여,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날 힘들게 하고 아프게 만드십니까? 또 눈을 희번덕대고 뒤집어져서 원망하기 바쁘고. 나는 하나님 잘 섬기려 했는데 하나님 쪽에 나의 섬기는 환경을 허락하지 않았잖아요. 섬기려고 했는데 주님께서 자꾸 막으니까 못 했잖아요. 책임지세요. 주님께서 우리 수고 받지도 않는데 지가 수고하려고 했는데 안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는 시간 속에 인격이 어떻게 담기는지 그 이야기 해봅시다.
 한윤범(IP:125.♡.150.22) 19-07-08 17:23 
20190705b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시간의 선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시간이 선회한다. 시간이 빙빙 도는데 중심부가 있고 중심부를 미지의 X라 했습니다. 이것은 시간을 통해서 어떤 인격, 또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안식이란 창세기 1장에서 천지를 창조하고 쉬셨다고 돼있지요. 시간 안에 창조의 원리를 담는다 했습니다. 시간 안에 하나님께서 천지창조의 원리가 들어있다는데 그것이 신약에선 예수님 중심이죠.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걸 만들었다고 돼있지요. 골로새서 1장 16절.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러면 예수님의 인물과 천지창조의 원리에서 서서히 예수님의 요소 쪽으로 접근해 나가는 거예요. 이걸 그림자라 했지요. 실체가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쪽으로 가게 되면 시간이란 미지의 X가 아니라 신약 입장에서 보면, 아예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시간이 선회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선회할 때 예수님 중심으로 작은 범위는 안식일이지만 좀 더 범위는 절기가 있고 마지막에 도는 테를 뭐라고 했습니까? 희년이라 했지요. 희년은 이사야 62장에 나오고, 절기는 오늘 레위기에 나오고, 그리고 안식일은 창세기 2장에 처음부터 나오는 겁니다. 점점 퍼져 나오는 거예요.

창조의 원리라 하면 이론처럼 느껴지고 모호하게 느껴지잖아요. 구체적이 아니잖아요. 창조의 원리가 예수님에선 아주 구체적이고 역사적이죠. 그럼 창조의 원리에서 예수님으로 가면서 이 사이에 누가 투입되는가, 무엇으로 깔아야 인물, 인격 됨에 점점 더 가까이 가겠느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어린양 또는 수양, 제물이 등장하는 거죠. 절기에 제물이 등장하면서 거기에 영원함을 부여하는 겁니다.

레위기 23장 12절을 봅시다.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리고 14절에 끝에 무슨 어떤 규례라고 돼있어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림자인 줄 모르고 안식일은 영원하다고 여기고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는 겁니다. 그리고 제칠일안식교도 안식일은 영원하다 했으니까 딴 건 다 없어져도 안식일은 계속 지켜야 된다고 해서 그들은 지금 토요일 지키고 있잖아요.

이런 제물이 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님 쪽으로 접근한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무슨 요소가 삭감 당한다는 뜻이 되겠어요? 첫째 시간을 안다면, 내가 안식일 지켰다는 나의 노동도 제물에 의해서 바꿔치기 하면서 내가 안식일 지켰다고 하는 이것도 소멸 대상이 된다는 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쪽이 부각이 되면 한쪽은 점점 더 쇠퇴해지는 거예요. 날이 갈수록. 안식일 지킨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 아니거든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그 중심 되는 인격에 대해서 이렇게 돼있습니다. 인격을 사람으로 돼있어요. 마태복음 12장 8절에 보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지요. 참으로 예수님께서 정말 믿음만 있다면 전혀 헷갈림 없이 깔끔하게 알기 쉽게 단박에 이야기했지요. 안식일의 주인은 누구라고요? 예수님이다.

그러면 안식일을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안식일 지키시는 당사자가 되는 겁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법이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주인공, 완성 모습은 바로 예수님 본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후에 안식일을 더 이상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럼 안식일을 주님이 지키니까 우린 안 지키고 그냥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안식일의 완성이 돼버리면 그 안에 예수님이 제물이 되잖아요. 안식일이 되면 여기에 수양이 제물로 바쳐지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안식일 자리는 뭐냐 하면, 수양이 장차 보여줄 인격에 서서히 접근하는 그러한 매개로 들어간다면 준비단계에 들어가는 예수님의 인격을 미리 보여주는 모델로 들어간다면, 이 모형은 그냥 가만 서 있는 게 아니고 안식일을 위하여 어떤 기능을 하게 됩니까?

수양 자체가 안식일에 옆에서 구경하라고 있는 겁니까? 수양은 뭐하는 수양이에요? 안식일을 드러내는데 필수적으로 희생제물이 되지요. 따라서 주님께서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은, 너희가 나와 함께 희생제물 될 수 있느냐고 묻는 것과 똑같은 말씀이에요. 완성을 향하여 네가 희생될 수 있느냐? 희생하면 완성되는 게 아니고 이미 완성된 것에 대해서 네가 주저 없이 뛰어들 수 있느냐는 겁니다.

네 목숨, 생명 같은 그런 것 신경 쓰지 말고 주님의 완성된 뜻을 위해서 마음껏 저의 목숨을 사용해주시고 제 평생을 활용해주세요, 라고 그걸 드릴 용의가 돼있는지 묻는 겁니다. 이건 안식일을 지키는 게 아니죠. 안식일이 완성되었음을 증거하는 증인 노릇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하면. 성령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대단하게 얼굴에 광채가 빛나고 그런 것 아니에요. 광채라 해봐야 나이 육십 넘으면 광채 다 없어져요. 백날 수술해도 소용없어요.

어린양을, 그냥 안식일과 절기 안식일에 차이가 나요. 절기 안식일이 되면 시간이 안식일 지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제자리 뛰기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 중심으로 빙빙 도는 순환이 보다 폭넓은 쪽으로 점점 넓혀지면서 선회하게 돼있어요. 안식일은 칠일 단위로 끊어지지만 절기는 일 년 단위가 가는 거거든요.

처음에 일주일 단위의 안식일이 일 년 단위의 절기로 바뀌고 일 년 단위의 절기가 50년 단위로 바뀝니다. 그러면 희년이 되면 모든 것이 끝나지요. 희년이면 50년 주기가 아니냐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에서 희년에 대해서 이사야 62장에서 한 예언을 본인이 그냥 인수해버려요.

그림이 시간이 예수님에게로 간다고 해도 맞지만 풍선을 시간이라고 한다면, 예수님 인격 속에 구멍이 있고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고요, 시간이. 예수님 속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을 설명할 때는 예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고 그걸 역으로 예수님의 몸이 풀어진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절기라고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일대기, 또는 예수님의 인생, 인격화된 시간.

그냥 옛날 창세기 1장의 시간은 해와 달과 별이 있으면 시간측정이 가능했어요.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게 되면 내가 시간을 모른다가 돼버려요. 예수님을 위한 해 뜸이고 예수님을 위한 해 짐이거든요. 이것은 무엇과 대결하느냐 하면, 나를 위한 저녁, 나를 위한 아침과의 대결 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루하루가 나를 위한 시간, 나를 위한 스케줄과 주님 스케줄과 충돌되게 돼있어요.

나를 포기하고 주님이 주신 스케줄로 바꿔져야 되는 거예요. 일주일 단위도 마찬가지고요. 그렇게 될 때 50년 주기가 아니고 더 이상 주기라는 것은 끝났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주님의 시간이다. 주님께서 나한테 허락하신 시간, 주님 자신을 드러내는 기회를 부여받은 시간. 우리가 시간을 얻었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는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하시면 돼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봅니다. 시간을 통한 예수님의 징후, 징조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상식적으로 이야기하지요. 예수님 보여주면 믿겠다고. 그게 왜 잘못이냐 하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내가 믿음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준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과 공간이.

내 믿음을 가지고 예수 믿겠다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이게 충돌이니까. 내 믿음을 용납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을 우리에게 허락한 거예요. 내 중심의 믿음을. 우리는 시간을 내 중심으로 보잖아요. 우리는 내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의식하고 공간을 의식하는 겁니다.

특히 삼차원 시공간은 오늘날 물리학의 핵심주제가 되잖아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내지 못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창조과학회, 또는 과학을 통해서 창조를 증명하겠다는 모든 시도가 거짓 믿음이 되는 겁니다. 과학 자체가 헛방이라는 걸 알아야 돼요.

과학이 예수님 즣으라고 있는 과학이 아닙니다. 인간이 과학 하는 이유는 열심히 합리적으로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자기 존재증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을 위한 시간이 돼버린 겁니다.  

출애굽기 23장 14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내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중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이제부터 이야기하기가 상당히 복잡한데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남자들은 세 번씩 절기를 지켜야 됩니다. 중심으로 다시 모이는 거죠. 그들의 절기를 지키면 평소에 만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요. 누굴 만나느냐 하면, 절기 때에 만나야 될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제사장입니다. 절기에 세 번 나오란 말은,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제사장 만나라는 말이에요. 제사장을 만난다는 것은 중심성, 이스라엘에 어떤 중심이 있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제사장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거죠.

그러면 이스라엘의 시간이란 것은 미지의 X가 있고, 오늘날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이죠. 미지의 X 중심으로 돌아갈 때 그 당시 이스라엘 입장에서 볼 때에 미지의 X가 아니고 누굴 만납니까? 제사장을 만나는 거예요. 제사장을 만나고 절기니까 또 희생제물을 드리죠. 희생제물과 제사장이 결합됨으로써 이스라엘이 정상적으로 이스라엘답게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시간은 뭐냐 하면, 제사장과 제물의 만남에 종속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만약에 이스라엘 이 규례대로 안 살게 되면 그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방민족에게 포로 잡혀서 핍박받아 해체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깨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에 제사장이 없고 희생제물도 없기 때문에 이거는 이스라엘에 중심부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민족한테 포로 잡혀가고 압박받는다는 말은, 이방민족이 이스라엘을 구박한다는 뜻이 아니고 여기에 희생제물과 제사장, 짐승과 인간의 인격이 결합된 이것이 누굴 공격한다는 뜻이에요? 소위 이스라엘이라고 우겼던 그들을 공격하는 근원이 되는 공격하는 근거를 이 안에서 계속 마련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과 제물 빼놓고 나머지는 뭐냐? 그냥 형식이고 껍데기죠. 이스라엘이 몇 명이든 앞에 종속되는 겁니다. 이 구조를 이스라엘이 용납을 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절기 지키란 말은, 너는 어디에 매여 있고 어디에 종속됐다는 것을 네가 인정하겠는지 그걸 묻는 거예요. 독자적으로 행동 못한다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행동한다면 이방민족이 치기 전에 하나님이 이방민족을 통해서 내가 너를 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절기를 안 지키게 되면 안 지킴으로 그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제사장과 제물을 중심으로 삼았던 어떤 분이 이스라엘 내부에 실제로 살아 계시다는 걸 느끼는 겁니다. 매 맞으면서 얻어맞으면서.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 보여주면 믿겠다. 우리가 어떻게 데려가야 돼요? 예수님 보여주면 믿겠다고 할 때 믿겠다는 그것이 백날 믿어봤자 중심은 누굽니까? 조금도 자기중심을 포기 안 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없지요. 백날 하나님 믿고 예수 믿어봐야 턱하니 자기가 중심부를 차지하고 난 천당 간다고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건 이스라엘일 수 없어요.

또 이야기해봅시다. 그러면 제사 드리면 되잖아요. 절기 지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이거에요. 절기 지키고 제사 드리면, 제사장 말 듣고 절기 지켰다는 본인이 이스라엘의 중심이 돼버려요. 미지의 X가 가린다고요. 자기가 중심 되면 말씀 지켰다고 하나님을 자기 시다바리로 심부름꾼으로 써먹게 돼요.

따라서 이 절기는 어디에서 해야 되느냐 하면,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요소가 있어야 돼요. 절기를 지킬 때 절기를 지켰다는 내 중심이 안 되게 하는 요소가 절기 지키는 요소 속에 포함이 돼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은 아무리 큰소리쳐도 양식 없이는 못 살지요. 바로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곡물, 또는 생산물, 농작물로 이스라엘을 꽉 잡아두는 겁니다.

너희가 맥추절에 보리농사 첫 이삭을 가져오너라. 이 말은 뭔 뜻이에요? 첫 이삭이 나온 것이 너희들의 노력이냐, 아니면 수양과 제사장들의 결합이냐? 이걸 묻는 겁니다. 네가 다른 민족 같이 땅 캐서 얻은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수양의 제물을 흔쾌히 받으시고 제사장의 제사를 받았다는 그 증거물로 이 땅에서 뭔가 나왔는지 네가 분명히 보라는 거예요.

그게 곡식이 바로 생명의 씨앗이에요. 약속의 땅에서 나온 약속의 곡식이에요. 약속의 양식이죠. 그리고 추이를 봐야 됩니다. 추이란 어떻게 달라지는가, 변천의 모습을 추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 곡식, 첫 이삭이 어떻게 해서 추수가 되고 그걸 모으고 하는 게 있지요. 그것을 계속 지켜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친히 약속의 땅에서 곡물을 생산토록 하시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약속의 땅에서 곡식 키우는 품꾼이에요. 품삯 받는 직원에 불과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땅에 하나님의 생명을 그들이 곡식을 먹을 때 그들이 곡식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그게 영생이라고 보면 돼요. 영원한 생명. 왜? 안식일은 영원과 결부돼있기 때문에.

정말 이스라엘이 믿음이 된다면 그들은 아브라함처럼 누굴 오기를 기다리느냐 하면, 이 땅에 곡식이 풍성하기를 기다리면 안 돼요. 이 땅에 포도주가 넘치도록 기다리면 안 되고 외양간에 소가 많기를 기다리면 안 돼요. 누굴 기다리는가? 아브라함처럼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려야 돼요. 아브라함은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다고 보고 기뻐했다 했지요.

단순히 곡식이, 곡식이 아니고 영생을 줄 수 있는 어떤 인물이 약속의 땅에 도달하고 도착하는 겁니다. 그때까지 그들은 그림자, 모형으로써 거기에서 연극무대에서 연기들을 펼치는 거예요. 주님 오실 때 이런 취지에 맞춰서 온다는 걸 보여주는 연기자로 있는 겁니다.

세 가지 절기가 있는데 제일 먼저 절기가 유월절, 그 다음에 맥추절, 그 다음에 수장절. 이 모든 것을 여기에 ‘수양+제사장’이 동원해서 이 절기를 주관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은 장차오실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수양+제사장. 제사장은 수양의 효과에 대해서 가장 가까운데서 알게 되는 사람이에요. 이사야 61장에 희년이 되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대목이, 너희들이 몽땅 제사장이 돼요. 이사야 61장 6절,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라 할 것이며”

하나님의 계획은 분명합니다. 제사장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지 못해요. 핵심은 수양에 있어요. 수양이라는 장차오실 희생제물 되실 분을 미리 보여주는 희생제물과 희생제물로 제사 드리는 제사장 역할이 이스라엘 존속하는 이유가 되는 거예요. 다른 핵심은 없어요. 이 핵심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했어요. 종속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땅에 이스라엘은 품꾼이에요. 이건 안 찾아봐도 알지요. 레위기 25장에 나와요. 이스라엘은 자기 땅이 없어요. 그래서 희년 되면 다시 돌려받는 겁니다. 계속해서 이 땅에 품꾼으로 살기 위해서. 그러니까 자기 땅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인인데 주인의 주인 됨을 위해서 품꾼 노릇하면서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증거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한 배치가 오늘날 천국의 배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천국 간다는 것 구원받는 게 뭘 의미하느냐 하면, 내가 주인이었고 내가 주인공 노릇하는 이것을 철회하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이걸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다 예수님이 다 이룬 완성한 그 안식의 세계(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니까)의 혜택을 우리가 입고 있음을 이 세상에 제사장으로써 증거하는 것이 오늘날 신약의 성도의 모습이에요.

그 작업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지금부터 이야기하겠어요. 그 작업이 구체적으로 되는데 하나님을 보이라 할 때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것은 내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 정도로 나밖에 모르고 나는 내가 최고 귀하며 나는 하나님보다 우선순위가 나다, 라는 사실을 거침없이 이걸 남한테 까발려주는 거예요. 행동이나 몸짓이나 까발려주는 그것이 바로 제사장이에요. 오늘날. 등짝 누가 올라탔기 때문에.

나는 내 중심이라는 것을 그냥 가만 놔두면 좋겠는데 이걸 바깥에 터뜨려야 돼. 왜? 뒤에서 압박을 가하니까. 진짜 주인공 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바깥으로 진솔한 내 모습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함께 있으면 요한복음 16장 말씀처럼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여지없이 다 까발려 이야기하지요. 이 세상은 심판 받아 합당하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나는 망해도 싸다. 이걸 아주 여지없이 이야기해요. 싱글싱글 웃으면서. 너무 기분 좋아서. 이게 예수님 중심성입니다.

예수님의 중심성에 이스라엘이 껍질처럼 있잖아요. 이 모델을 이 시스템을 그대로 신약에 가져오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미지의 X라 했잖아요. 구약적으로 하면 주의 이름, 주가 계시다 하면 돼요. 주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뭐라 했습니까? 복습해봅시다. 수양+제사장, 여기서 뭐가 나온다? 귀한 양식이 나와요. 이삭이 나오고 창고에 들일 곡식이 열매를 맺고. 이 모든 것이 시다바리 같은 이스라엘이 노력해서가 아니라 수양과 제사장이고 그들은 품꾼으로서 이 땅에서 농사짓고 사는 겁니다.

이 구조를 신약에 그대로 가져오는 거예요. 신약에 성령이 임하면 우리 가운데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구약 전체, 이스라엘이 그림자잖아요. 왜 이런 그림자가 있어야 했는가를 우리가 그 그림자 노릇을 하는 거예요. 그림자는 두께가 없고 얇아요. 그림자는 지면 딱 붙어서 두께가 없잖아요. 헛방이에요. 살아도 헛방인 거예요. 습자지 인생이에요. 살아도 우리 나름대로 두께가 없어요. 바람 불면 날아가면 그만이에요. 그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니까. 그림자 같은 요소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전체 그림을 이렇게 그리면 비로소 이해돼요. 구약에서 신약으로 온다고 성경을 보통 그렇게 이해하는데 신약에서 도로 구약으로 갑니다. 구약에서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있어요. 그 이스라엘이 지금 우리가 해야 될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다가 실패했어요. 그 실패했음을 우리가 자랑 삼아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 인생 실패했다고.

그럼 니 인생 실패했으니까 지옥 가냐 하잖아요. 내 인생, 내게 속한. 나는 가설이죠. 가설 그것이 가설에 불과했다는 거예요. 가설은 정답이 아니었다는 사실, 나라는 인간이 나에 있어서 정답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고 나에 있어서 나는 복음이 아니었던 거예요. 인생 성공이란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자식 잘 키웠다는 것도 애초부터 없던 거예요. 훌륭하게 살기도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패배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받기 위해서 구약에서 율법을 줬잖아요. 그렇지요. 율법이 옴으로써 저주받잖아요. 그 율법이 오늘날 말씀이 복음으로써 우리에게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그 말씀대로 산다, 못 산다? 성도에게 주어지게 되면? 못 살지요. 못 산다는 걸 이야기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구원받은 관계인 것을 증명하는 거예요.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야 돼요. 그건 뭐냐 하면, 모든 구약 말씀이 그 당시는 곡식이고 제사고 제사장이죠. 그런 것은 인간이 시키는 대로 얼추 모방할 수 있잖아요. 가인이 하나님에게 무슨 제사 드렸습니까? 추수감사제사 드렸잖아요. 추수감사 드리면 되지, 뭐. 고구마 했으면 십일조 해서 강단에 바치면 되고. 강단이 좁으면 옆에 놓으면 되고. 그건 할 수 있단 말이죠.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박사교회 있을 때 온 동네에 자두농사지어서 밥도 못 먹었어요. 자두 먹는다고. 서로 목사님 대접한다고 아침도 자두, 점심도 자두. 자두는 놔두면 썩어버리기 때문에 나눠주고 나눠줘도 나눠줄 데가 없어. 밥 먹고 싶어도 양심의 가책 상 자두를 소비해야 돼.

종교적인 행동과 행위를 인간이 해낸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못 하는 게 아니고 다 해내요. 기도, 십일조, 교회 참석 다 해내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 이건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우린 결부되어 있어요. 내 행동과 내가 살고자 하는 본성과 종교적으로 살려고 하고 말씀 지키려하는 이런 욕망과 은밀하게 수상하게 비복음적으로 결탁이 돼있습니다.

복음은 저리 가라. 내가 바르게 살아서 천당 가겠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은 말씀으로 보여줬고 그것을 신약에 오늘날 우리가 보여줄 일입니다. 별로 어렵지 않잖아요. 딱 우리 모습이니까.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이 딱 내 중심이잖아요. 뭐가 어려워요. 일부러 안 그런 척하는 게 더 어렵지요. 돈 좋아하고 항상 자랑거리 챙기고. 뭔가 기도하면 벌써 두 시간 지났다. 이것 자랑해야지.

십자가? 십자가 잘 믿지요. 십자가 믿는 게 죄인 줄 상상도 못했지요. 십자가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십자가 피로 구원받지. 십자가 피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 피 믿어주는 게 한계에요. 나의 한계라니까. 성령의 한계가 아니고 내가 십자가 피를 믿어주는 게 나의 한계에요.

그게 바로 우리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요. 성령께서는 피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 피를 내가 믿어줬잖아, 하고 기어이 나를 부각시키는 것이 우리의 주특기고. 그러니까 내기 예수 믿음으로 지옥 간다는 사실을 남한테 이야기하면, 그게 바로 그리스도를 가장 확실하게 증거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복음 듣기를 싫어하고 교회 오기를 싫어하고 자꾸 교회 근처만 빙빙 돕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 할 도리를 다 했다. 더는 못한다. 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이냐. 감당 못하겠다. 이게 불신자에요. 신자는 뭐냐 하면, 못하겠다가 아니라 그냥 나는 감당 못한다, 하면 돼요. 난 할 도리 다했다고 우긴다고 하면 돼요. 더 못하겠다고 변명한다고 하면 돼요. 애초부터 감당할 인간이 아니라고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이미 영생 얻었으니까.

이게 영생이 주는 기쁨 아닙니까. 이미 영생을 얻은 입장에서는 어떤 우사 당하고 어떤 모욕당해도 오히려 그걸로 인하여 영생의 기쁨이 더 크지요. 내가 실패하고 못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확보한 기쁨은 배나 증가하는 거예요. 내가 내 행동에 의지했으면 아직도 난 지옥이에요. 내 열심에 의지했다면 아직도 점점 더 깊숙이 지옥 갈 수밖에 없어요.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줬기 때문에 이제는 믿는 것도 믿는다, 소망한다, 사랑한다, 거기에 대해서 짐스럽지 않습니다. 나중에 여러분 치매 걸려서 예수님이 누구고, 하면 어떻게 할래요? 상상만 해도 끔찍스럽지 않습니까. 치매 걸려서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상상의 예수를 왜 알아봐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해요. 보이도 않는 예수를 왜 알아봐요.

그리스도는 어디 있느냐 하면, 나로 하여금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고백이 튀어나오는데 그리스도가 함께 있는 겁니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망해도 싸다. 이게 어떻게 인간의 능력으로 나옵니까?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에요. 주님이 이미 영생을 줬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능력이에요. 아낌없이 거침없이 자기의 수치와 자기의 패배와 망해도 좋다는 여과 없이 배설물로 막 나오는 거예요. 뭔가 먹은 게 있으니까 나오지요.

주님의 영생을 먹었기 때문에 그동안 내 자랑, 믿음 좋다는 것, 내가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믿는다는 그 죄, 선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똥, 오줌으로 배출되는 거예요. 아예 갖다버리자. 버려봐야 내일되면 또 나올 거니까 계속 버리는 거예요. 평생 동안 계속 버리는 거예요. 이걸 제가 등짝 올라탔다 하는 거예요.

등짝 올라탄 걸 나도 안 보이고 남도 나 보여요. 예수님 어디 있느냐 하면, 나도 안 보이지만 달라요. 등짝에 올라탄 사람은 주께서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등짝에 안 올라탄 사람은 죄인 되면 지옥 간다고 겁을 집어먹고 평생을 벌벌 떨어요. 교회 가서 벌벌 떨고 금요철야하면서 벌벌 떨고. 기도할 때도 아프게 기도하면 좀 봐주겠나, 이러면서. 헌금할 때 좀 빳빳한 것 내야 될 걸 주께서 삐지지 않을까. 이러고 있다고.

성경을 눈 감고 어느 구석을 봐도 전부 다 명령입니다. 하지 않아야 될 것은 하지 않아야 되고 할 것은 하라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옳다구나 하고 기꺼이 받아들이죠. 하라 하는 것은 안 하게 되고, 안 하게 되는 것만 하게 되고. 청개구리 심보도 그런 심보가 없다는.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주께서 죽으셨다는 양과 제사장 역할 하셨다는 이 사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영생의 이삭이 되고 영생의 맥추절이 되고 우리 자신이 영생이 수장절이 되는 겁니다.

주님 어디 있느냐 하고, 내 자신을 봐라. 내가 이런 고백하잖아. 솔직하게 난 나쁜 놈이고 지옥 가도 마땅해. 너는 그런 고백 입에서 안 나오지. 안 나오니까 지옥 가는 거야.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이게 변함없는 원리거든요. 하나님 본인이 왔다고요. 뒤에서 제사장 보내고 한 게 아니고 아예 마지막 때는 본인이 왔어요.

오신 예수님을 누가 죽였습니까? 어디 개 같은 이방인들이 죽였어요? 누가 죽였어요? 그것도 유대인들 가운데 세리, 창기들이 죽였어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장로들 그들이 주동이 되어 백성들이 거기 동조했지요. 왜 동조합니까? 그리고 열두 제자는 어디 있습니까? 지켰습니까, 도망갔습니까? 도망갔지요. 이게 무슨 현상이에요? 성령 없는 현상. 인간의 한계가 다 드러난 현상.

인간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나님 죽이는 배후세력이 인간을 끝까지 놔두질 않았구나. 죽여라, 죽여라 해서 죽였잖아요.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예수님 귀찮아 죽겠어요. 하지만 우리 육의 등짝에 주님의 성령이 들어가니까 네가 하는 모든 것이 바로 나의 열매다.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다. 배고플 때 먹을 걸 주었다.

성령 받은 성도는 이야기합니다. 저 같은 주제에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언제 그런 일 했다고 이렇게 나오시시십니까, 주여. 저는 주님한테 해준 기억이 없습니다. 나는 나 밥 먹는 것만 챙기고 나만 살면 행복이고 그런 인간밖에 안 됩니다. 제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오히려 반문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내 행한 것으로 절대로 구원될 인간 자체가 아니란 사실이죠.

하나님께서 양과 염소를 구분할 때 양의 특징은 뭐냐?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거고, 염소의 특징은 뭐냐? 자기 자신을 계속 우기고 자기 자신의 잘남을 계속 견지하고 있다는 것. 자긴 못남이 아니고 잘남이에요.

이런 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우리가 겸손 떠는 것도 그야말로 겸손 떠는 것에 불과합니다. 겸손 떠는 것도 가증스러워요. 겸손하다고 해서 우리가 진짜 겸손한 인간 안 됩니다. 등짝에 있는 성령께서 우릴 낮춰야 그 순간만 겸손하지 다시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오게 되면 절대로 우린 겸손할 수 없어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진정으로 자기 죄를 아는 것은 주님의 솜씨로 봐야 되지 내가 평소에 기도의 열매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의 기도도 인정하지 않고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 다 뭐라 했습니까? 첫째 시간에 했지요. 거짓됨이에요. 오늘 제목은 거짓된 믿음.

이 세 가지 절기를 통해서 나중에 23장 끝까지 다 돼있어요.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제물들이 계속 나와요. 23장 26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 월 십 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18절에는 어린양, 수양 드리고.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안식일보다 더 많은 숫자의 제물이, 양적으로 더 많은 희생제물과 복잡한 제사가 계속 투입되는 겁니다.

그래서 절기 때마다 거기 참석하는 남자 성인들은 정신을 집에 두고 온 가정사에 신경 쓸 데가 없어요. 아이들 교육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핵심은, 이게 핵심인지 애들 공부 잘해서 출세시키는 게 핵심 아니에요. 세 번씩 제사장 앞에 나올 때마다 정신 다시 한 번 이스라엘 됨에 있어서 내가 기여할 것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 나와서 복음 들을 때마다 늘 그걸 반복해서 들어야 돼요. 새삼스럽게 내 영생에 인생 사는데 내가 노력한 것 전혀 없다는 것, 이런 희생 덕분이란 사실이죠.

끝으로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선회. 오늘 제목을 시간의 선회로 해야 되겠네. 예수님 중심으로 뱅뱅 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은 여기에 놓여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종속돼있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도 주님에 의해서 선회하는 시간에 따라서 우리가 오 년을 살고 다시 한 번 성령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죄인인 걸 안다면 오 년 살고 죄인인 걸 안 거나, 십 년을 살고 죄인인 걸 알거나 십오 년 뒤에 알거나 관계없이 항상 우리는 예수님 중심과 연관돼있다는 이 사실에 우리가 도달되게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반복이에요. 이스라엘은 일주일마다 반복하고 일 년마다 선회했지만 우리는 평생을 두고 매일같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반복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항상 주님 중심에 묶어두기 위해서 성령께서 뭘 사용하느냐? 신약+구약 말씀 전체를 성령께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지적하지요. 말씀 성경공부를 한다는 게 아니고 전에 알던 성경말씀을 반복해서 우릴 깨우치게 하지요.

만약에 회사에서 자기가 의견을 냈는데 소수가 돼서 자기를 왕따시키고 다수로 밀고 나갔을 때 처음에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화날 때 원망을 누구한테 쏟아내느냐 하면, 가만있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거예요. 열심히 회사 다녔는데 회사에서 나를 왕따시키고 승진에서 뺐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는 순간 떠오르는 게 뭐냐 하면, 넓은 길로 가지 말라, 에요. 좁은 길로 가라.

옛날에 들었던 아는 말씀이잖아요. 그 말씀을 반복해서 되풀이해서 써먹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경말씀은 이미 완료된 거예요. 완료된 성경말씀 중에서 어느 것이 나오더라도 적절하게 우리에게 성령께서 말씀으로 네가 영생 받은 관계라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거죠. 성령이 오면 늘 반복해서 깨우치는 거예요.

한 번 좁은 길 간다고 그 다음에 넓은 길 안 오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성령께서 반복해서 있으려면 우리는 반복해서 죄를 지어야 되지요. 그래야 반복적인 성령님의 일이 한 번 하고 끝내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등짝에 붙어있어야 되니까.

또 좀 잘 되게 되면 마태복음 16장,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네가 좀 배 불러오니까 더 오래 살고 싶어서 운동하고 까부는 것 봐라. 이 땅에서 운동해서 더 살래, 일찍 나한테 올래. 이런 말씀 깨닫게 하는 거예요. 주여, 그러면 제가 여기서 죽겠나이다. 죽어도 좀 건강한 모습으로 죽겠나이다. 해서 운동하는 거예요.

공돈 어디서 들어오게 되면, 내 영혼아 걱정하지 마, 하고 붙들겠지요.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요. 우리가 양 같아서 제 갈 길 가는 줄 아시고 인생은 주님께서 책임지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주께서 조치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선회하는 시간 속에 우리가 놓여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내 인생 뱀처럼 따로 꾸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같이 예수님 중심으로 선회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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