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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6 22:58:25 조회 : 227         
목숨과 생명 19090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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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75) 19-09-09 16:33 
20190906a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목숨과 생명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3장 22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 유독 이스라엘에게 신경 쓰는 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다른 게 늘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보여주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여야 한다는 겁니다. 적어볼게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되는 과정이에요. 그러면 시작을 ‘살았다’부터 시작해야 되겠어요, ‘죽었다’부터 시작해야 되겠습니까? 시작은 ‘죽었다’부터 시작해야 되지요. ‘죽었다’부터 시작해줘야 이 생명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되는 이 생명만 생명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만약에 인간이 죽었다고 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하면서 또 사는 것은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고 자기의 노력과 지금까지 살아왔던 요령 같은 것 있잖아요. 텃밭에서 열댓 가지 채소들 키우는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건 자기가 이런 것들 뜯어먹고 산다는 그런 지식을 본인이 다 확보하고 있겠지요. 그러면 텃밭에 먹을 게 있으면 그다지 하나님이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텃밭이 넉넉하니까 먹을 게 있으니까. 하나님의 개입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생각되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 특징은 항상 죽음부터 출발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이 안 도와주면 그냥 죽어가는 거예요. 그들이 22절에서 누구냐 하면, 가난한 자와 객이 되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내에서 사라지게 하면 안 돼요. 남들보다 죽음을 더욱 더 화끈하게 제대로 노출시키는 그러한 부류가 있어야 됩니다. 이걸 22절에서는 객이고, 또 하나는 뭡니까? 가난한 자죠.

옛날 농사짓고 살던 때에 나그네와 가난한 자의 공통점은 둘 다 자기 토지의 텃밭이 없다는 거예요. 토지가 없는 거예요. 떠돌이지요. 머물 곳이 없는 거예요. 이건 매일 죽음에 내몰리는 겁니다. 이 사람들과 넓은 토지를 갖고 있는 사람의 차이점은, 넉넉하게 갖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매일같이 죽음과 멀어지는 태도를 갖고 있지요. 왜? 넉넉하니까. 죽음은 자기와 상관없다고 여겨지니까.

거기에 반해서 레위기 23장 22절에 나오는 가난한 자와 객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잖아요. 토지가 없으니까. 그러면 어디에 굉장히 민감하겠습니까? 늘 죽음과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죽음에 노출시키겠지요. 여러분, 주기도문, 하나님이 기도하라고 시킨 내용에 보면, 이틀 치 기도하라 했습니까, 일주일 치 기도하라 했습니까, 뭘 기도하라 했어요? 일용할 양식이죠.

일용할 양식이니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스트레스 받을 일이란 말이죠. 매일같이 내일 것을 보장 안 해주니 쫓기듯이 살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그렇게 쫓기듯이 살아가는 그 모습 속에서 인간 자기의 본질을 알 수 있어요. 나는 내일을 보장받을 권리가 없음을 하루하루씩 살아가면서 절감하는 겁니다. 내일은 마땅히 살아야 돼, 라는 주장을 할 수 없는 입장이 인간이란 거예요. 이스라엘의 특징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곡식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토지 주인이 씨앗을 90을 뿌렸다면 하나님께서는 90을 주는 게 아니고 10을 더해서 100을 주시는 거예요. 그럼 10은 씨 뿌린 땅 주인이 몫이란 말입니까, 남겨두란 이야기에요? 남겨두란 이야기에요. 그러면 90 말고 10을 가져갈 사람이 따로 있겠지요. 이 따로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선 굉장히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90을 가져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까요, 10을 가져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까요? 10을 가져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는 거예요.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됨을 나타낼 때에 넉넉한 90을 통해서 나타내는 게 아니고 아슬아슬하게 목숨 부지하는 10으로 겨우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의 면모를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90과 10 가운데 누가 하나님의 대변자냐 하면, 90을 가져가는 넉넉한 사람이 하나님의 대변자가 아니고 10을 가져가는 자가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내에서 실제적으로. 이 말은 자기가 넉넉하게 가지게 되면 자동적으로 누구를 멀리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하나님에 관심도 없고 그래요.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은 목숨을 부지하는 나라가 아니고 생명을 이야기하는 나라에요. 그리고 그 생명이란 하나님과 관련성이 있을 때만 생명이지 기존에 목숨 부지하는 것을 이방나라들도 그렇게 해요. 목숨과 생명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목숨 안에는 내가 악바리처럼 살았다는 나의 잘남과 자기 증명이 들어있는 반면에 생명 안에는 주님의 살려주심만 들어있어요.

목숨은 내가 애썼다. 이만큼 고생 많이 했다는 자기의 공로가 들어있는 반면에 생명은 주님 아니었으면 우리는 못 살았습니다, 라는 주님의 혜택과 은혜가 담겨있는 게 생명이에요. 오늘 제목이 벌써 나왔습니다. 목숨과 생명. 그 차이점 분명히 해야 돼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레위기 23장 2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하나님께서 아주 치중하십니다. 주목하시죠. 가난한 자와 객에서 아주 주목하시는 거예요.

만약에 자식이 열 명인데 유난히 자식 하나에 주목하는 부모가 있잖아요. 그것처럼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와 나그네에 주목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정한 본질,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그들의 삶의 현장을 통해서 더욱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입장이고 인간 입장에서 보게 되면, 하나님께 그렇게 챙기시고 주목하시고 관심 두면 가난한 자와 객한테 좀 풍성하게 해서 두 번 다시 나그네가 되지 말고 가난하게 안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요. 인간적인 의미에서, 인간적인 바람에서 말이죠. 하나님께 네 가정을 굽이 살피시고 절대로 시선을 떼지 않고 너를 늘 지켜보고 챙겨줄게.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한다면 기도응답이 그렇게 나왔다면 우리는 뭘 생각합니까? 얼마 주실 건데요? 한 달에 얼마나 더 주실 거죠?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생명 위주가 아니고 목숨 위주지요.

목숨과 생명의 차이점은, 목숨은 뭐가 들어있다? 내가 이만큼 살기 위해 힘들었다. 나는 이렇게 고생했다가 들어있는 건 목숨이고 생명은 뭡니까? 살 필요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매일같이 살려내셨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것이 생명이에요. 목숨을 부지하는 사람은 지옥 가고 생명이 계속 지속되는 사람은 천국과 연결돼있어요.

그러니 이스라엘에서 두 가지 면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목숨을 부지하는 유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간다는 반면에 생명을 품은 사람은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양면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천국과 지옥, 두 면을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나타나지 다른 나라에는 나타나지 않아요.

아브라함언약을 여러분 들어보신 적 있지요. 창세기 12장에.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을 택하여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내린다 했지요. 복 나왔지요. 그 다음에 아브라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했습니까? 저주 나왔지요. 그러니까 언약을 복만 주는 게 아니고 필히 뭐가 와야 돼요? 저주가 필히 나와 줘야 돼요. 언약은.

복음전파란 것은,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만 복음전파가 아니에요. 복음전파는 절대로 구원되지 못함을 보여줄 때 전도가 돼요. 전도란 것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두 가지가 나오기 전에는, 하나의 기준에서 나와요. 이럴 경우에는 천국 간다. 이것만 전도로 여기지 마시고요. 그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필히 어디 간다? 반드시 저주받고 지옥 간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줘야 돼요. 그게 전도입니다.

어디 천국에 사람 모자라서 땜빵하려고 전도하는 게 아니에요. 천국에는 창세전에 예정된 자만 가요. 그걸 사도행전에서는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만 가기 때문에 누가 작정됐는지, 작정 안 됐는지 모르지요. 그때는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을 던집니다. 그 기준에 물리면 천국이고 그 기준을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지옥 갈 사람이에요.

따라서 그 기준은 어떤 경우라도 변함이 없어야 돼요. 총장상을 줄 때는 딱 그 기준에 맞아야 주는 거예요. 어떤 권력자라 할지라도 그 기준을 고쳐서 총장상을 주면 안 돼요. 그 기준에 딱 맞춰야 총장상이 주어지는 겁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은 인간과 의논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그 기준이 중요합니다. 그 기준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 주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라는 그런 내용이 담겨있는 일생, 그것이 매일같이 되어 지거든요. 그게 바로 레위기 23장 22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고 23장 23절부터 봅시다.

23장 22절과 23절이 연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어집니다.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 월 곧 그 달 일 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이게 칠 월 달이에요. 왜 칠 월 첫 날은 안식일이 돼야 되는가? 왜 그런가? 유월은 안 되고 왜 칠 월만 되는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만 궁금한가. 이스라엘 절기가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개 되는데 첫 번째는 유월절이 있어요. 유월절은 단 하루입니다. 1월 14일 딱 하루에요. 두 번째는 무교절이라 하지요.

유월절은 넘어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심판의 천사가 넘어가는 거예요. 심판의 천사가 넘어간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좋게 다가온다, 심판하려고 작심하고 다가온다? 어느 쪽입니까? 아예 심판의 대상으로 봐요. 그래서 뭐가 복이냐 하면, 심판을 안 하고 그냥 넘어가면 복인 줄 아세요.

뭐 복 달라 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인진 모르지만 그냥 봐주고 쳐도 되는데 치지 않으시고, 저주해도 되는데 저주가 와야 되는데 무슨 근거에 의해서 저주가 사라져버리고 저주에서 면제되는 그 날을 기념하는 게 유월절이에요. 그러니까 유월절, 하나님의 저주에서 풀렸다는 이것만 해도 한 평생 살면서 군소리하면 안 돼요.

애가 성적이 안 오르니 고부간에 갈등이 있니 아랫배가 튀어나와 뚱뚱하니 그런 되지 않는 건 하면 안 된단 말이죠. 저주를 면제했으면 내 인생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진다 할지라도 저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부세요. 법무부장관 돼도 저주받잖아요. 제사 지내는 것 보니까 교회 안 다니는 건 분명하고.

법무부장관 된들 그게 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그게 저주지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교회 나오고 법무부장관. 이러면 법무부장관 복 아닙니까, 이러는데 교회 나오고 법무부장관 되면 어느 것에 치중하고 어느 것에 더 우선하겠어요? 그러니까 이것도 저주인 거예요. 차라리 법무부장관 청문회 해서 떨어지면 다행인데 돼버리면 이게 저주인 거예요.

세상에 어떤 가치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이게 유월절 가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고 심판주로 오셨기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끼리 지어낸 하나님이에요. 진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만들어낸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것만 해도 충분해요. 저주 안 하고 그냥 넘어가주기만 해도 정말 감사해요. 차들이 엄격하게 노란불이면 건너가면 안 되는데 건너가더란 말이죠. 앞차 걸리고 그 다음 내 차 걸릴 참이고 그 다음 뒤차 걸리려고 하는데 경찰이 잡으려고 하다가 그냥 통과시켜주더란 말이죠. 보니까 조카라, 아는 사이라. “아재, 빨리 가소.” 뭔가 봐주는 느낌이 든단 말이죠.

그 순간만 일까요? 한 번 봐준다는 것은 평생을 봐주는 거예요. 어떤 짓거리해도. 나중에 칠팔십 넘어 노인정에서 10원짜리 화투쳐도 봐줘요. 하나님께서. 한 번만 봐주는 게 아니고 늘 평생을 봐주는 식으로 그 정도로 아는 사이, 그것이 바로 유월절 의미를 아는 사람이죠. 유월절은 한 마디로 말해서 신나지요. 살았다. 나는 살았다. 이렇게 되지요.

무교절을 뭐냐 하면, 그 다음날 15일부터 21일까지 칠일 동안이죠. 무교는 빵을 맛있게 하는 이스트가 없는 날을 칠일 동안 지내라. 그러니까 이스트가 없는 빵을 만들되 딱딱하고 맛없는 빵을 먹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빵 종류가 몇 가지나 되겠어요? 맛있는 빵이 있고 맛없는 빵이 있겠지요. 이 날만큼은 맛없는 빵을 먹어야 돼요. 칠일 동안이나.

왜냐하면 맛있다는 것은 나의 미각을 나를 기쁘게 하는 나의 쾌감을 증강시키지만 맛없는 빵은 씹으면 씹을수록 딱딱하니까 나의 쾌감을 줄여주지요.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죽음의 고통을 빵을 통해서 맛보라는 절기가 무교절입니다.

첫째는 신났다로 끝날 게 아니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그냥 봐주기로 넘어갔는데 그 근거가 뭐냐? 어린양이 고난 받았다는 사실. 따라서 나의 구원받기 위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니고 정작 하나님이 주목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봐줄 수밖에 없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대신 수난 당하신 그분이 천국의 주인공입니다. 관심사가 거기에 있어야 돼요. 그런데 그 관심사가 죽어서 시작하는 게 아니고 살아있을 때부터 관심사가 나보다 주님한테 가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무교절의 의미를 알고 유월절의 의미를 알겠지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1월 21일 지나고 그 다음 22일 되겠지요. 이 날을 안식일로 정해라. 이 날에 노동하지 말란 말이죠. 노동하지 말라는 것은, 너의 노동으로 네가 사는 게 아니고 그건 목숨 부지하는 것이고 생명은 너의 노동과 상관없다.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네가 열심히 공부해도 생명 없는 곳에 갈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안식일이죠.

진정한 의미를 안고 안식일 지킨다는 그 자체도 참된 성도라면 오히려 감격스러워야 돼요. 왜냐하면 평소에는 열심히 이것 아니면 나는 굶어죽는다고 했던 오직 나에게 나의 목숨 부지에 치중하다가 안식일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되면 목숨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나한텐 목숨이 중요하지만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내 목숨 부지가 하나님한테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서 나는 안 중요하고 내 안에 나 같이 목숨 부지하는 인간을 살려내는 주님의 생명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중요한 겁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성자 하나님이라면 하나님과 아버지의 관심은 성자에게 있어요. 대신 죽으신 분이 아들이기 때문에. 우린 아니거든요. 우리는 그냥 건짐 받았으니까.

그래서 이 날은 첫 이삭을 바치는 날이라고 돼있어요. 레위기 23장 9절에서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걸 첫 번째 이삭을 바친다고 초실절이라고 해요. 1월 22일. 제가 아까 던진 질문, 아직 답변 안 해드렸습니다. 왜 칠 월이냐는 거예요. 레위기 23장 15절에서 22절에 보면, 그 다음 절기. 초실절 이삭은 보리에요.

그 다음 네 번째 맥추절로 밀의 첫 이삭을 바치는 날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이라 해서 첫 이삭을 바치고 오십 일 후에 와요. 오순절에서 오가 다섯이고 순이란 10을 의미하거든요. 5x10의 절기. 오순절을 다른 말로 칠칠절. 7x7=49, 얼추 50이죠. 이 날은 밀의 첫 추수하는 날로 맥추절이다. 보리로 돼있는데 사실은 밀 추수에요. 초실절은 보리의 첫 이삭이라 해도 되고 첫 소산이라 해도 되고. 그리고 유월절도 사실은 농사짓는 절기인데 그것도 첫 이삭과 관련돼있어요.

오십 일째 되는 날에 하나님께 바친다고 돼있는데 오순절, 다시 정리합니다. 분명히 합시다. 첫 이삭 바치는 날을 초실절이라 했지요. 보리 추수하고 첫 소산을 바치는 것이고 칠칠절, 오순절은 보리가 아니고 밀입니다. 그런데 밀을 추수하는 날로 정리합시다. 50일이니까 한 달 20일 정도 되겠지요.

그리고 난 뒤에 칠월에 나팔절이라고 등장합니다. 그러면 칠월 첫 날을 나팔절로 하느냐? 안식일이란 말 들어봤지요. 안식년 들어봤지요. 일 년의 중간 달을 안식 달로 정한 겁니다. 그게 칠월 달입니다. 초실절은 보리의 첫 소산을 바치는 것, 칠칠절은 밀의 추수하는 그런 절기, 나팔절은 그 달 자체가 안식 달이 돼요. 안식 달이 되고 칠월 일일에 나팔을 불게 돼있어요. 오늘 본문 24절에. 나팔을 왜 부느냐?

지금까진 쉬운 축에 들어가요.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인생을 오십 년 산다 합시다. 또는 육십 년 산다 합시다. 우린 분명 오십 년, 육십 년 살았잖아요. 성경에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이것을 축소시켜버립니다. 시간의 축소. 시간이 축소된 것이 절기에요. 내 인생이 오므라드는 거예요. 솜사탕이 부풀어있지만 그걸 압축하면 손바닥에 다 들어오지요. 압축을 시켜버리면 시간의 압축이 절기에요.

왜 시간을 압축, 축소하느냐 하면, 절기라는 것이 제사하는 날이고 이것은 곧 죽음을 뜻하거든요. 처음에 강의할 때 목숨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중요하다? 생명이 중요할 때는 그냥 목숨 유지하고 생명으로 올 수 없어요. 여기에 죽음을 경유해야 됩니다. 죽음은 한 순간이거든요. 죽을 때 한 순간이잖아요. 한 순간을 펼치면 이게 오십 년이 되고 육십 년이 되는 거예요.

그냥 제사, 절기와 상관없으면 나는 육십 년 살았다, 오십 년 살았다 그냥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버리면 목숨은 연장되는데 어느 노선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생명 노선에 들어갈 수 없어요. 중간에 무슨 계기가 있어야 돼요. 목숨을 압축시켜서 이건 죽은 목숨인 것을 드러내려면 블랙홀처럼 어디에 빠져야 되느냐?

싱크대 구멍 있잖아요. 모든 물이 그리로 빠지듯이 어디에 빠져야 되느냐 하면, 시간의 구멍, 시간이 압축된 것, 우리가 백 년을 살아도 그것은 죽음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것이 기다리는 곳, 그게 바로 절기에요. 왜? 절기는 곧 제사고 제사는 누가 죽습니까? 제물이 죽기 때문에.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이 제물 받고 이스라엘과 맞바꾸신다. 제물 주고 이스라엘 살리거든요. 어린양 주고 이스라엘 백성 살려내는 겁니다. 바꿔치기한다니까요. 그게 언약이니까요. 이삭 주고 누가 삽니까? 이삭 죽고 아브라함이 살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이삭 죽음 안에 계속 놓여있을 때 아브라함은 목숨의 사람이 아니고 생명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어렵다했지요. 그냥 훅훅 넘어갑니다.

십자가를 안 만나면 우리는 삼십 년, 사십 년 그냥 목숨만 부지하는 시간만 와요. 그렇지만 십자가 만나는 순간 나는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죽고 내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육십이든 칠십이든 이건 내 목숨 아니에요. 주님이 자기가 필요해서 이어지는 세월을 살아가는 거예요. 신약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그걸 지금 구약의 제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압축할 때 절기가 하나만 아니고 여러 개로 많습니까? 여러 절기가 있더라도 그 절기는 칠월 달(안식월)을 중심으로 경사지게 돼있어요. 칠월 달이 산봉우리라면 나머지는 산기슭이라 보면 돼요. 모든 것은 칠월 달로 최종 마감이 되는 겁니다. 애들 방학 전에 기말시험 치잖아요. 마지막 시험이 칠월 달로 다 몰려요. 칠월 달 다음엔 절기가 없어요. 마지막 회개에요.

칠월 십일 같은 경우는 단 하루인데 그 날은 대 속죄일입니다. 대 속죄일은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그전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반성하는 죄만 제물 바쳤습니다. 자기가 죄라고 인식하는 죄만 드렸어요. 그러나 인간이란 자기가 죄라고 느끼는 것만 죄일까요, 아니면 다른 것도 죄일까요? 인간이 산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해를 주잖아요. 내가 산다는 것은 남이 힘들다는 것과 같은 뜻이거든요.

서로 윈윈한다, 서로 도와준다. 그런 것 없어요. 나는 그 누구에 대해서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해선 자기만 살아야 돼요. 그래서 인간은 누굴 원하느냐? 타인을 원합니다. 내 밥이 될 타인. 옛날에는 노골적으로 노예라는 타인이 있었는데 지금은 근대사회로 피상적으론 노예가 없어요. 하지만 사회 나가면 자진해서 노예 되겠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고 강압적으로 노예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협박에 의해서 노예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집안이 가난해서 노예로 시작해서 노예로 가는 그런 사람들.

촌에서 올라와 아무것도 없이 서울에서 식모살이부터 술집에 팔리는 꽃분이를 아시나요. 옛날에 그런 영화, 그리고 <별들의 고향>.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노래. 산업화 시대에 험악할 때 그런 사람들. 그뿐만 아니고 서울에 구로공단이라 해서 60~70년대 여공들 다 모아놓은 데에요. 그리고 유명한 평화시장에 재봉사 같은 경우에 하루 근무시간이 16시간이나 되는. 그게 너무 심하다 해서 자살하고 데모 일으킨 사람 있잖아요. 유명한 노동자 전태일이라고.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살기 위해서 타인을 찾지만 타인을 만나는 순간 누가 주인인지, 누구 노예인지 결정되는 거예요. 그 순간. 따라서 그걸 벗어나려고 하면 다시 못 먹고 살고 목숨 부지가 안 되고. 목숨 부지 되려면 또다시 누구의 노예가 돼야 되고. 그래서 인간은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누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타인, 남이 필요한 거예요.

왜 교회 안 나오고 왜 말씀 안 봅니까? 교회 말씀은 타인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 없는 거예요. 누굴 만나야 돈이라고 한 푼 나올 게 있지요. 오늘 누굴 또 만나야 돈이 나오느냐? 그래서 내 목숨 부지하느냐? 그것만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몰라. 연금이나 많으면 안 만나겠지만. 따로 나는 외진 데 살겠지만. 돈이 없을 때는 부지런히 가야 돼요.

백화점 평소엔 안 가다가 아파트 광고에 붙은 걸 보니까 세일한다 하니까 아침 9시부터 새벽 5시부터 세일하는 그 타인을 만나고 남을 만나려 가는 거예요. 그런데 왜 성경 안 보고 하나님 안 만납니까? 제사는 타인이 아니거든요. 자기가 이용할 타인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안 보는 거예요. 평소에는 남을 만나야 되는데 그래야 돈이 생기는데 성경은 돈이 생깁니까, 떡이 생깁니까, 뭐가 생깁니까? 우리교회는 나오면 생기는 게 있어요. 점심.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뭘 찾고,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남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알면서 하나님의 제사, 하나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너의 죽음을 네가 만나야 된다. 너의 실상을 아는 그러한 장치를 제사. 제사와 더불어서 절기,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죽음을 만나는 것은 곧 평소에 우리가 살고자하는 자체가 사실은 사는 날이 아니고 죽는 날의 반복이었다. 연속이었다는 거예요.

제대로 사는 노선은 보지 못하고 자꾸 죽어가는 노선으로서 이게 자꾸 연장되니까 자기가 살 수 있는 희망 가지고 사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을 안 만나니까 그래요. 하나님의 제사, 절기를 안 만나고 만나기 싫어하고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거예요. 배부른데 왜 하나님 만나야 되느냐는 거예요. 아까 강의 처음에 했지요. 인간이 배부르면 안 만난다고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할까요. 레위기 23장 22절.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두라”

이 말은 하나님의 주 관심사는 그 땅주인에 있는 게 아니고 나그네와 가난한 자에 있는 거예요. 왜? 그 사람들은 무엇을 보여주는 사람들이에요? 땅이 없다는 말은 죽음을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죽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진짜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가는 제대로 그걸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은 거기에 주목한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23절이에요. 칠월 달 제사. 한 달 자체가 대부분 제사하는 날, 한 달 자체가 안식해야 될 날. 인간의 노동을 반 이상 중지해야 될 그런 날이 된단 말이에요. 반까지는 안 되지만.

속죄일이 7월 10일이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속죄일 지나고 뭐가 나오느냐 하면, 다 지워버렸네. 지워졌으면 또 쓰면 되지, 뭐. 첫 번째는 유월절 1월 14일, 유월절 다음에 무교절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세 번째는 보리의 첫 이삭을 베는 초실절 1월 22일. 그 다음에 오십 일 되는 날, 밀을 추수하는 날 맥추절. 맥추는 보리인데 사실은 밀이에요. 같은 말로 오십 일 됐으니까 오순절. 여러분 오순절 아시죠.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오신 그 날.

그 다음에 다섯 번째가 나팔 부는 나팔절. 나팔절 아직 설명 안 했습니다. 이게 어렵기 때문에 설명 안 하고. 이게 7월 1일에 하는 나팔절이라 했어요. 여섯 번째가 7월 10일에 대, 큰 속죄일.

큰 속죄일은 뭐냐 하면, 인간이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좀 봐달라고 할 수 있지요. “인간인데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못 지켰습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내가 하나님입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 그래놓고 죄 지었으면 잘못됐다고 제물 드리면 되지만 자기가 모르고 지은 죄가 있어요.

결국 죄라는 것은, 하나님이 살려주는 생명을 생각하지 않고 내 몸이니까 내가 목숨 부지해야겠다는 자체가 전부 뭐가 된다? 죄가 되지요. 그러나 이 죄를 그대로 놔두면 저주받지요.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유월절에 봐주고 넘어간 취지가 취소된다는 말이 아니고 찾을 길이 없어요. “분명히 너를 구원했는데 너한테는 그게 안 보이네.” 보이질 않아요. 보이지 않으면 치워버려야 되지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봐준 게 있는데 말이죠.

화투를 치는데 벚꽃 광자 있는 것 삼월 벚꽃에 광자 있는 건 48장 화투장에서 그것 하나란 말이죠. 그걸 화투 뒷면으로 다 엎어놓고 찾는 거예요. 분명히 있는데, 하고 여기 있다고 찾듯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 행세 일체 묻지 않고 목숨 부지하는 것 묻지 않고 생명으로 그냥 생명 주기로 작정한 자가 어디 있을 건데, 하고 들춰보다가 여기 있네, 라고 마주치는 거예요.

그 마주치는 순간이 바로 네가 목숨 부지해서 사는 사십 년, 오십 년은 세월로 간주하지 않고요, 그 마주치는 순간 있잖아요. 그 순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생명주는 의미 있는 시간으로 봅니다. 그 시간 아래 우리의 모든 생애가 축소되고 압축되고 거기에 응축이 되는 거예요. 그게 나중에 십자가 사건 됩니다.

그게 7월 10일 대 속죄일이에요. 대 속죄일은 지을 때도 죄인 줄 몰랐고 죄 짓고 난 뒤에도 죄인 줄 몰랐고. 그리고 죄 지었다고 반성한다고 제물 바쳐봤자 그게 일종에 주술적인 그냥 때우는 식으로 해줬습니다, 하나님 교회 나와 줬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그런 죄가 있을 수 있단 말이죠.

여러분들이 안 믿는 사람이라 합시다. 그런데 가까운 친척이 음식가게를 열었는데 안 믿는 친척이 와서 개업선물로 꽃 같은 것보다도 앞으로 잘 되라고 부적을 하나 용한 점쟁이한테 오십 만원 주고 사왔다 합시다. 여러분이 안 믿는 사람이라면 그 부적을 찢어버리겠습니까? 식당 구석 어디에 붙이겠지요.

그 부적이나 오늘날 교회 다니는 것이나 차이점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걸 주술적이라 합니다. 재수 좋다는데 내가 왜 버려. 그럼 누굴 위한 재수고 누굴 기쁘게 하기 위한 영광을 위한 재수 좋은 겁니까? 살고자 하는 내 욕구를 만족시키는 그런 재수 좋은 것은 교회 백날 나와도 무당 짓이에요. 그건 이방나라에서 하는 거예요.

얼마나 주술적인 것이 강했던지 교회에다 십자가를 붙여놓는다고. 십자가인지 주술인지 부적인지 분간이 안 돼. 십자가 왜 붙이느냐? 혹시 손님 많이 올까 싶어서. 또 같은 교인들이면 이 집에 믿는 사람이네, 가야지. 그것도 단체손님들 올 수 있거든요. 교회 손님. 이능우 집사님, 십자가 붙여있습니까, 식당에? 가만있는 것 보니 붙여있는…

십자가는 숨겨야 되지 나타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옛날 영화 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 십자가로 하지요. 사탄아 물러가라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나거든요. 십자가는 내 안에서 내 사탄이 물러가야 돼. 내 목숨 부지하는 이 귀신이 가야 돼. 십자가로서. 이미 생명으로 바꿨으면 봐주는 거잖아요. 봐줬으면 이제는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닙니다. 도대체 누구 덕분에 구원받았는지 구원받기 위해서 주께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그걸 아는 일만 남아있어요. 딴 일이 남아있는 게 아니고.

뭘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질문을 반대로 해야지요. 이런 죄도 용서됩니까? 이렇게 돼야지요. 내가 무슨 죄인지 몰라요. 하지만 무슨 죄를 지었든 7월 10일은 내게 있었던 모든 생애는 전부 다 그 안에 집결되어서 한 방으로 다 용서가 되는 그러한 날이 7월 10일. 그래서 속죄일도 집단으로 되기 때문에 여기서 이스라엘은 개인주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에 개인구원은 없어요. 집단구원이에요. 왜? 7월 10일 때문에 대 속죄일 때문에.

A란 사람, B란 사람 두 사람이 있다면 용서 얼마 빌었나? 난 5일 동안 했다. 난 7일 했다. 개인적인 용서 같으면 둘이 싸운다고요. 7월 10일은 이런 것 다 없애버립니다. 세리가 되던 창기가 되던 일체 묻지 않고 7월 10일은 날짜가 구원하는 거예요. 희한하죠. 그 날짜가 그 절기가 구원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누굴 찾는다고 했지요. 타인을 남을 찾지요. 제사는 남이 아닙니다. 왜 남이 아니냐 하면, 내가 원하는 남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거예요. 기쁘지 않습니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용서받기 위해서 용쓰고 애쓸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왜? 내가 용서받기 위해서 어느 부적을 갈아치우느냐, 어떤 점쟁이를 찾아가느냐? 이건 나의 선택이고 7월 10일은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거예요. 정해놓은 그 지점에 우리가 참여할 뿐이지 내가 골라잡는 게 아니에요, 이게.

그 날에는 큰 걸 잡아요. 돼지 잡는 게 아닙니다. 염소 잡는 게 아니에요. 염소보다 더 커요. 소를 잡습니다. 왜 소를 잡느냐 하면, 개인용도가 아니기 때문에. 나 구원받습니까가 아니라 그때는 우리라는 말을 해야 돼요.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우리 안에서는 나는 소멸돼야 돼요.

따라서 시간은 용서는 뭘 소멸시킨다? 나를 소멸시키는 겁니다. 나를 소멸시키면 내가 갖고 있던 걱정근심도 내가 죽는 순간이 같이 소멸되는 겁니다. 시간이 구원시킨다는 말은 달리 말해서 나는 소멸될 인간으로 진즉부터 나는 나라고 챙길 권리도 없고 이유도 없었다는 것을 7월 10일 대 속죄일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75) 19-09-09 16:34 
20190906b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목숨과 생명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을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는 제사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지요. 이 말은 제사 앞에서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마귀한테 속아서 벌벌 떨고 아버지, 예수님 부른다고 아버지 어떻게 생겼는지 주님 앞에 제사 앞에선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게 왜냐하면 내가 나답다는 것은 그걸 어려운 말로 정체성이라 하는데 나는 이 정도야, 이런 인간이 나야, 라고 그게 자기의 정체, 자기 본체를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은 개인의 정체, 본체를 인정하지 않고 집단적인 정체성을 위해서 제사 의미를 거기다가 심어놓고 그 절기에 총집합하게 돼있어요. 모든 사람은 몽땅 절기에 참석하라고 돼있어요.

그러면 절기가 한 번만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많으냐? 라는 이야기에 대해서 아까 제가 언급을 했는데 하나님의 일은 빈칸이 없습니다. 쉬엄쉬엄이 없고 띄엄띄엄이 없고 연결돼있거든요. 하나님의 일이. 7월 달에 안식을 위해서 1월부터 계속 올라오는 거예요. 반복해서 계속 올라오는 거예요. 대 속죄일을 겨냥해서.

아까 대 속죄일일 몇 번째였지요? 또 하면 되지. 유월절-무교절-초실절-맥추절(오순절)-나팔절, 여섯 번째가 대 속죄일, 7월 10일. 그 다음에 일곱 번째가 초막절, 7월 15일부터 21일까지가 초막절이에요. 이것이 1년 동안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빈칸이 없어요. 계속 쭈우욱 산을 오르듯이 윙~하고 추진력을 더 높이고 가속도를 높이는 거예요, 지금. 어디까지? 대 속죄일까지.

초막절은 텐트 치는 거거든요. 대 속죄일 지나고 난 뒤에 우리가 옛날에 이 약속의 땅에 오기 전에 어떠한 생활을 했는가를 보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23장 22절에 하나님께서 누구한테 주목한다 했습니까? 땅주인한테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땅이 없는 가난한 자와 나그네한테 주목하지요. 초막이 뭐냐 하면, 초막절이 이스라엘 전체가 다 객이 되고 가난한 자가 되는 그런 체험하는 기간을 일주일 갖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상해보세요. 그 이스라엘 나라가 해야 될 일이 뭔지를. 지금까지 절기를 들었잖아요. 도대체 그들은 하는 짓이 무슨 왜 그 짓을 하는지 무엇 때문에 하는지 그들이 사는 이유가 뭔지, 목적이 뭔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다른 민족은 목숨 부지하지 위해서 자기 살기 위해서 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왜 그렇게 행동하지요? 자기를 보이기 위함입니까, 누구를 보이기 위함이에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애썼고 이렇게 동행하셨음을 보여주는 하나님을 증명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그 역할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오늘날 성도다 이 말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흔들리지 마세요. 혼란스럽게 여기지 마세요. 딱 하나에요. 자기 증거하지 않는다는 것. 나 이렇게 고생했다고 자기 증거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집단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런저런 일을 했다. 어떤 일? 유월절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유월절-무교절-초실절-오순절, 오순절에 벼가 다 무르익었거든요. 추수할 때 됐으니까. 그 다음에 나팔절, 그 다음에 대 속죄일, 그 다음에 초막절. 그 날이 자신의 어떤 행복이나 편리를 위함이 아니에요.

자 그렇다면 나팔절, 나팔은 왜 부는가? 이제 설명할 때가 됐어요. 나팔의 용도는 싸움이고 더 어려운 말로 ‘싸움+승리’에요. 싸움하고 승리는 미뤄지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 하게 되면, 승리를 위한 싸움을 하는 나라가 우리 이스라엘 나라다. 승리를 위한 싸움이다. 승리는 따 논 당상이에요.

왜 이렇게 승리해야 되는지 보여주는 싸움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움직이는데 이방민족 속으로 움직여 들어갑니다. 이방민족들이 있으면 그 속을 통과하는 거예요. 통과하면서 싸울 때 되면 나팔을 부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나팔은 한 번 붙어보자는 나팔이 아니고 이미 끝났다, 이미 이겼어, 라는 나팔.

승리하게 되면 슬픕니까, 기쁩니까? 기쁘죠. 그래서 기쁜 소식, 복음이에요. 복음 안에는 뭐가 들어있다? 한 번 해봐라가 아니라 끝났네. 복음은 끝났네, 에요. 그러니까 기쁘지요. 일체 우리의 모든 것을 묻지 않으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정체성은 내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나의 본질이 아니고 나의 임무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냈다. 어떤 취지를 가지고 어떤 희생을 하시고 건져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제가 빈칸이 없다고 했지요. 더 쉬운 말로 하면, 주님 앞에 다른 현실은 없다. 모든 것이 주님을 드러내기 위한 현실만 있습니다. 그러면 이 울산바닥은 누가 만들고 누가 이끌어 가십니까? 주님이 만드시고 주님이 이끌어 가시는 현실이에요. 울산에서.

온 사방이 눈밭이고 어젯밤에 눈이 왔다 치고 완전히 눈으로 싸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내가 저쪽 마을로 가는데 눈 안 밟고 가는 방법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신체를 안 밟고 가는 방법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안 건드리고 가는 방법 없습니다. 왜? 사방에 눈이니까. 하나님의 승리가 꽉 차있으니까. 물론 신자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모든 순간순간이 생명 없는 우리에게 생명 주시고자 깔아놓은 은혜의 벌판이에요. 은혜의 눈밭. 그런데 우리는 매일 살면서 그걸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거기서 고마움이나 기쁨도 없고 짜증 지대로 짜증만 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건 우리의 정체성이 없고 나의 정체성으로 전환됐기 때문에 그래요.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것, 내 목숨만 부지되면 그만이다. 이거는 유지되지 않아야 될 정체성인데 나의 본질인데 이걸 계속 쥐면서 이것과 주님이 하신 눈밭과 주께서 만드신 현실을 억지로 내 행복을 위해서 끼어맞추려고 하니까 이게 됩니까? 안 맞지요.

돈가스 집을 내서 장사를 하려하니 젊은 사람이 안 와. 이제는 칠천 원짜리 돼지고기 덮어주는 걸로 바꾸고. 그것도 장사 안 되면 그 다음에 뭐 하려고? 뭘 할지 모르지요. 매 생각하는 게 도대체 왜 사는지 모르고요, 왜 존재하는지 모르고. 이 말은 뭐예요? 살아서 뭘 할지 이유도 모르고요. 혼자 부스럭거리면서 살긴 사는데 이유가 없어요.

결국 이건 근본적으로 자기한테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요. 이 현대인들이. 내 잘못이 뭔지 몰라요. 레위기를 옆에 두고도 몰라요. 레위기 23장을 옆에 두고도 몰라요. 절기가 있는데 그 절기가 왜 있는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월절, 맥추절을 왜 지키는지 전혀 몰라요.

만약에 그렇게 자기만 생각하다 교회 오면, 맥추절 지키면 제 개인적으로 행복해질 거야. 또 자기 행복을. 성경말씀을 지키면 개인적으로 잘 될까 싶어서 또 그런 시도를 하는 거예요. 그걸 아까 주술이라 하고, 그걸 만약에 붙인다면 부적. 교회 다니는 게 실제로는 부적됐어. 사적인 행복을 위해서 교회 다니니까.

그렇다면 제사를,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첫째 시간에 한 걸 정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복습이니까. 여러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니까. 땅이 있는데 땅주인이 있겠지요. 하나님께서 추수할 때 100을 줬다면 90은 땅의 주인 것이고 10은 땅이 없는 사람의 몫이지요. 주님께서는 90을 보는 게 아니고 10을 먹어야 될 사람에게 주목하는 이유가, 왜냐하면 사람이 넉넉하게 되면 자기 목숨에 관심이 있고 무엇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생명에는 관심이 없어요. 지 목숨 살면 되지 생명까지. 여기에 정신 팔리면 생명에 관심 없어요.

그런데 목숨은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나 이렇게 살았다가 들어있는 반면에 생명은 뭐냐 하면, 나는 죽을 인간인데, 객과 가난한 사람은 가장 죽음에 근접한 사람이에요. 죽음을 보여주는 사람이고 넉넉한 사람은 뭘 보여준다? 신난다를 보여주죠. 나 이만큼 넉넉하다는 걸 보여주겠지요. 부자들은. 나는 죽음하고 거리가 멀다는 걸 보여주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주관심사가 돼요. 객과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지요. 부자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어요. 왜? 넉넉하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뭐냐? 하나님이 더욱 더 중요하게 여기는 쪽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 죽음을 반복하는 형식이 바로 제사고, 제사하는 날이 절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절기는 쭉 이어져오면서 이스라엘이 하는 거죠. 이스라엘이 하면서 하나님 제사 앞에서는 인간의 개인적인 것을 일체 묻지 않지요. 그 이유가 뭐냐? 7월 10일은 어떤 날이었습니까? 대 속죄일이죠. 대 속죄일은 본인이 뭐가 잘못됐는지 몰라도 그 날은 용서받는 거예요. 신기하지요.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내가 알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도 이미 용서가 되는 날이에요. 일괄적으로.

그 취지나 유월절에 하나님께서 저주를 안 내리고 봐주고 넘어가는 취지나 서로 통하고 있는 거예요. 유월절부터 시작한 것이 어디서 완성됩니까? 대 속죄일로 구체화되는 거예요. 다만 유월절은 희생이 어린양이지만 대 속죄일은 이스라엘 집단을 위한 희생제물은 양이 아니고 양 단위가 아닙니다. 더 비싼 것 드려요. 더 크고 비싼 것, 흔치 않는 것, 소를 잡습니다. 그 소가 대 속죄일에 언약궤 뚜껑에 바르면 일괄해서 완전히 죄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사는 일체 인간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을 안 받습니다.

그렇다면 목숨에서 생명으로 전환돼야 되지 않습니까? 전환되려면 그냥 내 목숨 살려주세요, 생명이여. 할 순 없고 이 목숨이 죽음에 다 블랙홀처럼 빠져야 돼요. 그러면 나라는 것은 제사 앞에서 집단적으로 소멸돼야 됩니다. 소멸되면서 그 동안 내가 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행동에 조심했잖아요. 이것 하면 벌 받아. 이건 나쁜 짓이야. 이건 착한 짓이니까 복. 그 모든 두근거림과 조마조마함과 그리고 윤리, 도덕적으로 신경 쓰이는 것이 일거에 다 날아가야 돼요. 그 의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그 의도 자체가 내가 구원받기 위한 의도기 때문에 제사의 취지와 안 맞습니다. 제사는 집단적인 정체성을 주지 개인적으로 괜찮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제사와 절기는 인간들의 사적인 행동을 묻지도 따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배제해버려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괜히 우리가 사적으로 잘못했느니, 잘했느니 완전히 우울증, 조울증처럼 좋았다가 울었다가, 울었다가 기뻤다가 혼자 좋고 혼자 까불고 혼자 롤러코스트를 타고 다녀요. 매일같이. 불상사 일어나면 착한 일하면 만회해주시겠습니까, 보상해주시겠습니까? 지가 법을 만들어서 지 마음대로 하는데 그래봤자 그 결과는 사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 제사에 모으고 그 다음에 전쟁에 나서게 되는 겁니다. 전쟁에 나설 때 그 전쟁은 어떤 전쟁입니까? 승리를 위해서 해보는 겁니까, 아니면 이미 승리했기에 치르는 전쟁입니까? 이미 승리자 입장에서 하는 전쟁이에요. 승리된 상태에서 벌이는 전쟁이란 말이죠.

그러면 이 승리는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 승리죠. 유월절에 죽음의 천사가 와서 애굽 사람들이나 히브리 사람들이나 어린양의 피 없는 사람은 다 죽였지요. 여러분 전쟁이 좀 비겁하다는 생각 안 듭니까? 세상에 낮에 지진이 일어나면 덜 죽어요. 흔들려도 낮엔 피할 수 있는데 밤에 새벽 3시에 지진이 일어나게 되면 꼼짝 못하고 파묻혀 다 죽어요.

미국에서 유람선에 35명인가 탔는데 몽땅 다 죽었어요. 왜? 새벽 3시에 불났거든요. 전부 다 선실에서 자고 있었어요. 문은 닫혔지 그대로 다 죽었어요. 아무도 깨어나지 못한 돌아다니지 않는 그 새벽 시간에 하나님께서 급습한 겁니다. 다만 잠 안 자고 있었던 가정이 있었지요. 뭐냐? 유월절 피를 바르고 양의 고기를 먹으며 밤샘했던 히브리인들은 살았지요. 그 취지가 신약에 깨어있으란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전쟁은 좀 비겁해요. 남자 대 남자가 아닙니다. 몰래 뒤에서 급습해서 전쟁에서 승리케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패배하기로 작정됐기 때문에 칼 들고 나서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전쟁의 취지는 뭐냐 하면, 유월절 취지를 계속 살려주는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쪽에서는 발달된 철기문화의 칼 들고 나오고 많은 숫자의 군사가 나오고 옛날에 애굽에는 말이 유명했어요. 전투용 말이 있고 거기다 전차까지 온갖 인간의 발달된 무기를 들고 나오면 이스라엘이 내세울 무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전쟁 끝났는데 뭐. 이스라엘은 파장이거든요. 장사 끝났어. 이것 사세요, 저것 사세요, 할 것 없어요. 이미 끝났어요.

끝났다는 그 신호, 그게 뭐냐 하면, 나팔 부는 겁니다. 빰빠라밤빠 나팔 불면 여리고 성 완전히 다 무너지지요. 그 나팔 부는 걸 슬픈 소식이라 했습니까, 기쁜 소식이라 했습니까? 기쁜 소식, 그게 뭐냐? 복음이에요. 복음 앞에서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홀로된 전쟁 우산 밑으로 우리가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로 승리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죽어야 될 분이 죽었는데 죽지 않고 죽음마저 이겨냈으니까. 사흘 만에 살아났잖아요. 그러면 죽음이 마지막 무기였거든요. 악마가 내세운 무기는, “너 죽으면 실패야.” 죽음이 마지막 무긴데. 그래서 노인들이 늙고 아프면 겁내잖아요. 요양병원 안 가려하고. 죽음을 반겨야 될 텐데 안 반기고 벌벌 떠는 거예요. 자기 꼴이 망가진다고. 처음부터 망가진 꼴인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호들갑떨기는.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산 사람이에요. 이미 산 입장에서 죽어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죽는 즐거움, 그렇다고 번개탄 고르지 마시고요. 매일매일 사는 것이 그냥 놔도 되는 날들이에요. 그냥 신경 안 써도 되는 날들, 고민할 필요 없는 날들.

이게 절기라는 시간은 안에 뭐가 기다리느냐? 바로 목숨에서 생명으로 전환되려면 여기서 반드시 죽어야 되는데 자살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고 이 죽음은 하나님의 절기, 하나님의 제사에 합류한 죽음이기 때문에 절기라는 시간 속에서 모든 인간은 절기 제사 앞에서 자기를 소멸시키는 기회를 갖습니다. 자기를 없애버리죠. 나는 없고 우리로 태어나는 거예요.

성도가 사적으로 거듭나는 건 없습니다. 나는 죽고 우리로 거듭나지 다시 개인적으로 거듭나는 건 없어요. 중생은 개인적이 아닙니다. 집단 중생이에요. 왜냐하면 나중에 죽었다가 깨어보니까 똑같은 혜택을 입은 사람이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여러 명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주님의 복제라 합니다. 아바타들.

주님의 복제를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뭐냐? 주님의 복제기 때문에 그들 이름이 누구의 이름입니까? 바로 주의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 그렇다고 여권 할 때 Jesus Christ라고 하지 마시고요. 이 세상은 안 통하니까. 예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여권 보니까 Jesus. 이건 뭐야? 성은? Christ. 말이 안 되지요. 세상에서 그건 안 통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귀신을 상대할 땐 누구 이름으로 하라? 예수 이름으로. 그걸 실제적으로 하면 나 죽었다. “너, 나 죽이러 왔지? 그래 죽여라.” 이게 귀신 이기는 방법이에요.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하면 귀신 안 물러갑니다. 그건 부적이고 그건 주술이죠. 그게 아니고, “죽었는데 아직도 더 죽을 게 있나?”이런 식으로.

마귀가 재미가 없지요. 네가 착해야 복을 받는다. 나 죽은 놈인데. 착하라고 요구한 마귀는 떠나버리죠. 네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런데 착해야 된다. 이런 귀신 있잖아요. 착하고 뭐고 이미 게임 오버, 끝났거든요. 복음이 그거잖아요.

사람들이 이 소식을 안 듣는 이유가 목숨 부지하는데 바빠서 복음을 못 듣는 거예요. 듣고자 하지도 않고. 목숨 부지할 때는 누굴 만난다 했습니까? 제사와 만납니까, 누굴 만납니까? 타인을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남 만나기 바빠요. “어서 오이소.” 이런 것. 남을 만나야 돈이 생기고 돈이 있어야 내 목숨 부지하니까. 하루 온종일 거기다 치중합니다. 몰입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말씀은 언제 보고 복음은 언제 들어요. 들을 기회가 없지요. 내 목숨 부지한다고 사니까.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어렵다 해놓고 별로 어렵지 않다 하는데 진짜 이제부터 어려워요. 제사가 위기를 조장하고 위기를 초래합니다. 왜 그러냐하면 제사 지내면 최종 구원이 아니고 제사에서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이어져야 되거든요. 제사 지낼 때 레위기 23장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는 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이게 툴툴 털어내야 돼요. 털어내야 될 사람은 털어내야 돼요.

터는 방법은 바로 나팔 부는 것, 전쟁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쟁에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다른 이방민족과 전쟁하는 방법, 두 번째는 자기 이스라엘 안에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방법. 내부전쟁. 그 내부전쟁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나중에 둘로 나눠지죠. 우리의 남북한처럼. 북쪽은 북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나라.

북쪽은 자력으로 이스라엘 나라답게 설칠 때 북쪽 이스라엘. 남쪽 유다는 남쪽 유다의 유지는 인간의 힘이 아니고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실현하는 운반체 또는 운반책으로서의 유다가 있다고 약속이 살아있는 것은 바로 유다. 북쪽은 우리 힘으로 이 약속의 땅을 붙들어야 우리 목숨이 부지된다고 하는 것은 북이스라엘.

그러면 유다나라 백성들은 다 한 결 같이 이스라엘의 약속을 믿었는가? 아니요. 북쪽 못지않게 오히려 더 심하게 바알 신을 섬겼습니다. 바알 신에 대해서 지난 수요일 호세아 설교 때 하고 있어요. 예수 찾는 게 요즘 바알이라고 설교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남쪽 백성들이 훌륭하고 북쪽은 훌륭하지 않느냐? 그게 아니고 둘 다 마찬가지로 우상 섬깁니다.

그런데 왜 유다나라는 남고 북이스라엘은 잘리는가? 유다나라에 누가 있느냐 하면, 바로 이 사람들이 있어요. 선지자. 어떤 선지자? 문서선지자. 이사야, 예레미야.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언약이 백성들이 안 받아주니까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 운반하지요. 그러면 선지자들은 자기 목숨을 부지할까요, 생명일까요? 어느 쪽에 가까울까요? 하나님의 생명 노선에 가깝지 목숨 부지 노선에 가까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모습은 늘 아슬아슬해요.

그러나 이사야 같은 선지자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미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빈틈없는 일들로 꽉 채워져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사야 40장에 보면, 인간은 풀이고 꽃 같으나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히 넘친다. 말씀의 바다에 파도가 넘실거리듯이 한시라도 말씀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선지자는 넓게 봐요. 넓게 보고 길게 보고 높이 보고 전체를 다 보고 살지요. 이게 선지자에요. 따라서 선지자에게는 세상이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까짓 것, 뭐.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 레위기 23장에서 제사, 절기죠. 제사 절기로 위기를 조장하고 초래한다 했어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장차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그 백성, 예수님이 용서한 백성을 찾기 위해서는 기존에 현재 혈육적인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제사 절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에 이스라엘의 제사 절기는 나중에 형식이 되고, 이게 주술이 돼요.

이 일을 되풀이하면 우리나라 잘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지켜주시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관심사가 하나님의 생명, 희생에는 관심이 없고 고난에도 관심 없고 현재 내가 터 잡고 사는 이 땅, 약속의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르길 원하는 겁니다. 누구 좋으라고? 자기들 좋으라고. 그러니까 그들은 생명을 생각 못하고 뭘 생각하느냐 하면, 집단적인 목숨 부지하는데 급급한 용도로써 여호와의 절기와 제사를 드렸던 거예요.

그런데 그걸 하나님께서 안 받겠다는 겁니다. 어디 나오느냐? 이사야 1장에 나오지요. 너희들의 무수한 제물, 그리고 찬양, 기름 그만 가져와라. 내가 배부르다. 그 딴 게 무슨 소용 있나. 내 뜻은 모르고 내 취지는 모르고 형식적인 것, 재수 좋으라고 자꾸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는데

게다가 성가대까지 크게 해서 파이프오르간 10억 들여서 예배당에 설치하고 1부 성가대, 2부 성가대 하고. 노래하려고 오는지 예배드리려고 오는지 성가대 있어야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고. 봉사할 기회가 부여돼야 교회놀이에 맛이 들거든요. 교회놀이에 맛이 들면 소일거리 쏠쏠해요. 점심 주지요, 중요한 정보 교환할 수 있거든요.

김 집사, 서울대 가려면 인턴 뭐하면 돼? 동양대학에서 총장상 받으면 돼. 이런 식으로. 서울 교회들이 하는 정보 교환이 뭡니까? 과외는 어디 하면 되고, 미국 유학 가려면 뭐하면 되고. 아주머니들이 정보 얻지요. 유력한 부자들 많지요. 그게 바로 바알과 아세라 종교, 우상 종교 아닙니까.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쟁 중이란 걸 몰라요. 자꾸 위기를 초래하고 조장해버리면, 사람이 배부를 때 얼마든지 복음에 기뻐해요. 그러나 위기 오게 되고 초래하면 여기서 자기 본색이 툭 튀어나오는 겁니다. 오늘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레위기 23장 22절. 오늘 몇 번인지 모르겠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러니까 내 땅이라고 내 것이라 하지 말고 남겨두라. 남겨두는 이유가, 진짜 주인은 따로 있는데 그들이 객이고 나그네라는 거예요. 자, 그 사람들은 날 때부터 객이고 나그네고 고아고 가난한 자고 그랬습니까? 아니지요.

그들이 뭐하는 사람이냐 하면, 과부가 됐다는 것은 이미 그중에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와 전쟁을 벌였다는 거예요. 전쟁을 벌이니까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어버리면 집에 있는 아내는 졸지에 과부되지요. 고아는 뭡니까? 남편 죽었다고 힘들여 일하다가 허리 다쳐 죽어버리면 아이들이 고아로 남지요. 고아와 과부는 전쟁의 부산물이에요.

고아와 과부는 누가 봐도 신세 조져놓은 거고 처량하게 보이겠죠. 하나님은 뭐 하시노. 하나님은 이들을 돌봐야지. 측은하게 여기고 동정하면서 이렇게 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만들어놨다고 보는 거예요.

출애굽기 22장 21절부터 보게 되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아무리 너희가 이스라엘 나라를 독립된 나라로 만들고 아무리 젖과 꿀이 풍성하게 나는 땅이라 할지라도 무엇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너를 나그네로 보고 고아로 보고 과부로 보는 그 하나님의 시선을 놓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신명기 8장 11절 보게 되면,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되지 않도록 삼갈찌어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이렇게 돼있지요.

하나님은 뭐냐? 너는 아무것도 없는 거지고 가난한 자고 나 아니면 의미 없어, 라는 시선을 계속해서 부지하고 있고 유지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갑자기 배부르고 좋은 집 짓고 우양이 번성하고, 요즘 같으면 재산이 많아지니까 이제는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게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왜? 신명기 8장 초반에 보면, 말씀을 잃어버리면 그거는 죽은 것이지 사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양식을 잃은 것이 되어 그건 죽은 게 돼요. 그럼 왜 양식을 잃는가? 살만 하니까 잊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걸 아까 읽었던 마음이 교만해서. 교만하게 되면 뭐냐? 신명기 8장 20절에 보게 되면, 내가 너희를 멸망한다는 거예요. 자, 신명기 이야기하면서 여러분들이 이걸 보면서 ①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 ②차려도 소용없다, 멸망한다. 몇 번입니까? 2번이에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배부르면 하나님한테 관심 덜 하게 돼있다는 거예요. 내가 네 본성을 모를 리가 있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해답은 신약까지 가야 돼요. 구약의 가나안 땅, 그게 천국이 아닙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니에요. 진짜 이스라엘은 신약에 가서 그들이 최종적으로 확정이 돼버립니다. 자기 백성 다 마감이 돼버려요. 원서 마감하듯이 끝나버립니다.

그건 뭐냐 하면, 세리와 창기에요. 물론 세리와 창기 중에서도 부자도 있지만 그래도 세리는 세리고 창기는 창기에요. 그들은 자력으로 자기 의로 어떤 경우라도 내 잘나서 천국 가는 일은 아예 본성상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한 사람입니다. 매일같이 그걸 경험하는 사람들이에요. 내 잘나서 천국 들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을 하루치 살면 그만큼 더 절감하고 또 하루치 살면 절감하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그 관계를 견지하고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걸 유지하려면 어떻게 되느냐? 그게 전쟁이죠. 편안할 땐 전쟁이 아니죠. 우리한테 뭐가 온다? 위기 찾아오죠. 위기가 찾아올 때 자기 본색이 드러납니다. “안 돼. 이거는 안 돼. 주여 너무 심합니다.” 아니면, “옳거니. 그렇지. 요새 별 일 없다 싶더라. 요새 사는 게 조용하다 싶더라. 아무 아픈 것도 없고 고민거리도 없고. 내 이럴 줄 알았어.”

위기가 오고 항상 아홉 가지 해결하면 열 번째 일이 터지게 돼있고. 이 세상에 대해서 애착과 미련 갖지 못하도록 주께서 매일같이 흔들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흔들 때 가짜는 어떻게 됩니까? 우르르 다 떨어지겠지요. 제가 첫 번째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의 기준이라 하는 것은, 천국 가는 기준뿐만 아니고 반드시 지옥 가는 기준을 증거하는 것도 전도라 했지요.

이래서 지옥 간다는 것, 이래서 너는 절대로 천국 못 간다는 걸 분명히 보여주는 기준이 흔들리지 말아야지 사람보고 사람 따라 천당 간다 이렇게 해선 안 된다.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당신은 구원받습니다가 아니라 기준이 이겁니다, 라고 기준점을 이야기해야 돼요. 기준점은 우리가 알 수 없어요.

8월 5일에 알았던 기준점은 8월 6일에 수정돼야 됩니다. 8월 6일에 알았던 기준점은 8월 7일에 수정돼야 돼요. 늘 새롭게 기준점이 바뀝니다. 그러면 어떤 특정 기준으로는 만약에 8월 5일 기준으로는 내가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8월 5일에 알았던 기준으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건 안 돼요. 어떤 날짜라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기준은 아니에요. 주님의 복음의 기준이 내 기준을 대신해야 된다는 거예요. 주님은 이런 식으로 일괄되게 일하는구나. 그러면 됐지 내가 구원받아야 된다는, 내가라는 것을 여기다 집어넣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8월 5일 기준과 8월 6일 기준의 차이가 뭐냐? 여기서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 새로운 위기가 오고 조장이 돼버리면 여기서 8월 5일에 몰랐던 내 죄를 8월 6일에 내가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준은 뭐냐 하면, 기준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십자가입니다. 8월 5일에 내가 아는 십자가와 8월 6일에 아는 십자가가 그게 급이 달라요. 느낌이 달라요.

그럼 이렇게 되면 여러분이 걱정될 거예요. 8월 6일까지 가지 못하고 8월 5일에 죽어 버리면 지옥 갑니까, 천당 갑니까? 또 이렇게 걱정되겠지요. 문제는요 하나님은 기준을 살리기 위해서 8월 5일에 죽을 사람은 8월 5일에 다 죽였고요, 기준을 살리기 위해서 8월 6일에 죽을 인간은 8월 6일에 다 죽이는 거예요.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움직인다는 이 점을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돼요. 내가 움직이는 것은 움직임으로 보지 않습니다. 주님이 움직여요. 주님이 움직여서 8월 6일에 살려준다면 우린 사는 거고 8월 6일에 안 살려주면 죽는 거고. 그 권한은 주님한테 있어요.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고. 중요한 것은 8월 5일에 죽던 8월 6일에 죽던 우리는 뭘 봐야 돼요? 십자가를 봐야 돼요. 구원받은 내 모습 보지 말고 십자가를 봐야 된다고요.

목사님, 십자가 바라보라해도 또 나와 결합이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위기와 복음적으로 조성된 어떤 절박함은 뭐냐 하면, 그 순간만큼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날아가 버릴 때 이게 주님이 주신 위기에요. “그래 내가 살겠다는 이게 죄다. 아이고, 살면 뭐하노. 나는 안 살아도 돼요.” 이렇게 나올 때 관심사가 나에게서 뭐로 이동했습니까? 십자가로 이동하는 거예요. 내가 움직였다에서 나의 노동이 아니고 주님이 지금 일하고 있다는 그쪽으로 가는 겁니다. 시간이 3초 내지 5초밖에 안 돼서 5초 지나면 도로 다시 나한테 오는 게 문제지요.

그래서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구약에서는 갈수록 제사를 반복해요. 제사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제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제사는 십자가로 끝났기 때문에 뭘 반복하느냐 하면, 성령의 일하심이 반복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는 이야기해봅시다. 성령이 한 번 오면 떠납니까, 안 떠납니까? 성령이 한 번 오면 떠나질 않아요. 이걸 성령의 보증이라 합니다. 고린도후서.

그런데 구약에서는 완료된 게 아니기 때문에 성신이 오더라도 떠나버려요. 성령은 한 번 오면 떠나지 않지만 성신은 한 번 사울에게 와도 악신이 오게 돼있어요. 악신이 오더라도 성신이 오게 되면 일하게 돼있어요. 사울 왕은 몇 번 성신 왔다가 몇 번 악신 들렸는지 몰라요. 하지만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게 되면 떠나지 않는 이유가,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인식은 주님의 몸이란 인식은 없고 어디까지나 내 몸은 내 것이라고 자꾸 쥐고 있는 거예요. 성령이 하는 일은 간단해요. 어떤 위기를 주던지 어떤 계기를 주던지 내 인생이라는 게 없다. 니 몸이라는 것도 없어. 값으로 산 것으로 돼있으니 사나죽으나 주의 몸이지 남의 몸 붙들고 왜 그러냐. 자다보니까 남의 남편 붙들고 있어. 그건 말도 안 되잖아요. 남의 아기 붙들고 내 애라 하는 것은 솔로몬 재판 때나 나오고. 남의 총장상을 지 총장상이라고 우기는 그런 부인도 있어요.

지금 세상을 닮다 보니까 남들이 안 믿는 사람들이 자기 몸이라고 꾸미잖아요. 이 옷 어떠냐? 이 반지. 안 사주려했는데 가방 또 사줬다고 가방 보라 하는데 모든 집중이 나한테 집중돼있어요. 그런데 그게 언제 사단 나고 언제 삐걱거리느냐 하면, 예상 못할 위기가 왔을 때 우리는 갑자기 내 몸을 내가 지키려는데 시비 거니까 반발하지요.

주님, 이렇게 나오기 있어요? 제가 뭘 잘못했는데, 하고 자기 윤리, 도덕 다 끄집어내고. 이만큼 착한데 하다가 나중에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게 되면 계속 쥐어박고 정신 좀 차려라, 꿈 깨라, 하면 “주여, 내가 또 헛짓했군요. 쓸데없는 근심걱정을 했군요. 아버지도 내 아버지 아니고 어머니도 내 어머니 아니고 자식도 내 자식 아니고 다 주님이 주신 건데 내 것이라고 여겼던 잘못된 연결고리, 그것 끊게 하시고 다시 원래대로 주님이 알아서 하세요.”라고 내맡길 때

왜 주께서는 8월 5일에 안 죽이고 오늘 며칠입니까? 내일 태풍 오는데 9월 6일까지 이끄시는 이유를 알겠지요. 내일은 몰라요. 죽을지 살지 몰라요. 몰라도 괜찮아요. 이미 오늘 나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보다 기준이 십자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챘으면 된 겁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란 것은 주님이 나를 다룬다는 것을 내가 아는 거예요. 주님이 원인이고 나는 결과물이죠. 결과물이 원인을 조정하려하지 마세요. 시건방지게. 주시면 주시는 대로 그 자체로 기쁜 소식이고 복음인 겁니다.

자,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33절에 보면,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제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것은 그겁니다.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칠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35, 36절)

43절 봅시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아까 설명한 대로 초막절은 텐트 생활하는 거예요. 그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강의한 것 연결시켜보세요.

안정적인 사람인데 안정적인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무슨 생활을 한다, 잠시 동안? 초막생활을 한다는 이 말은 이 과정을 반복시키는 거예요. 광야에서 사용했던 초막이잖아요. 텐트 생활하던 데서 약속의 땅으로 올 때 우리가 지금 잃어버리고 놓친 게 있어요. 그 은혜를 놓쳤잖아요.

그럼 약속의 땅에 있으면서 초막절을 지킨다는 말은 뭡니까? 약속을 약속답게 되풀이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인생이란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다른 말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용서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걸 매일같이 되풀이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는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그 이야기에요. 우리 일상이.

그러니까 내일 되면 또 초막이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또 빨래해야 되고 어서 오이소, 해야 되고 사람들에게 아부하면서 한 푼이라도 더 빼내려 해야 되고 더럽다고 사표 낼까, 이런 경우 그것 초막입니다. 초막생활 실컷 해도 괜찮아요. 이미 우리의 생명은 천국에 가있기 때문에. 이왕 초막생활 할 것, 예 바보 되겠습니다. 돈 한 푼 준다는데 바보 안 될 것 뭐 있어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더 낮아지고 더 굴욕적이 되고 더 쪼다 되고 바보 되도 괜찮아요. 왜? 그것과 우리의 운명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용도로서만 천국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무엇이 우리를 흔들었습니까? 내 인생 잘해야 천당 간다는 그 악마의 소리에 우리는 홀딱 넘어갔습니다. 좌지우지했고 흔들렸고 고민했고 걱정했습니다. 주여, 이게 다 악마의 장난인 것을 주술이고 부적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이 구원받는 것보다도 십자가의 그 기준을 기쁨으로 증거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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