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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4 22:55:19 조회 : 279         
떡 191004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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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221.♡.126.52) 19-10-08 13:58 
20191004a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떡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4장 1절부터 9절까지 하겠습니다. 1절부터 보게 되면 제단 중에서도 성소에 대해서 나와 있어요. 성소구조에 대해서 나와 있는데 약간 큰 텐트라고 보면 됩니다. 동쪽으로 입구가 나 있는 큰 텐트. 이것은 실제로 이스라엘 가서 찍은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린 적이 있지요. 우리교회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동쪽에 문이 나있고 제단이 있고 물두멍이라 해서 손 씻는 데 있고. 성소 입구에서 삼분의 이 지점에 지성소 입구엔 커튼이 쳐져 있고요. 지금 레위기 24장은 성소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전체 입구가 동쪽이라면 성소 북쪽에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 떡이 한쪽에 여섯 개씩 두 줄로 모두 열두 개 떡이 있고, 안이 어둡기 때문에 남쪽에 조명시설을 해놨어요. 중앙 가지가 있고 양 옆으로 세 개씩 총 일곱 개의 등잔을 준비하고, 레위기 24장은 등잔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감람유, 기름이죠. 기름 이야기부터 나와 있어요.

지금 레위기 24절 1절에서 9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소 안에서 이야기할 때 유일하게 생물의 가공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떡입니다. 나머지는 생물이 아니지요. 곡물에 인간의 손을 가해서 만든 것이 여기 열두 개의 떡이 있습니다. 이 떡은 칠일마다 교체가 돼요. 이 떡은 누가 먹게 되느냐 하면, 곰팡이 폈다고 쓰레기로 버리는 것이 아니고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들이 먹게 돼있다. 그런 식으로 레위기 24장에 돼있습니다.

오늘 강의 초점은 바로 떡에 관한 문제에요. 논리적으로 길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이야기해서 떡은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어디서 근거 되느냐 하면, 여기 떡의 개수가 근거가 되겠지요. 떡이 몇 개지요? 열두 개. 열둘 하면 떠오르는 게 뭡니까? 이스라엘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떡이라는 개념은, 이걸 누가 먹게 돼있어요? 거룩한 인물의 양식으로 소비가 된단 말이죠.

아론 제사장이 거룩한 존재니까 거룩한 대변자로 이 땅에 나타났으니까 이 떡은 결국 하나님의 음식과 하나님이 잡수시는 음식물(땟거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뭘 먹어야 살듯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계속 산다는 것은 땅에서 계속 공급하는 게 있어야 되겠지요. 그 떡을 계속 하나님이 잡수심으로써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이라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계속 지속시켜 나가겠다는 취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레위기 24장 당시에 그냥 떡이에요. 곡물을 가공한 떡입니다. 송편 정도는 아니겠지만 호떡도 아니지요. 그냥 떡이지요. 이 떡이 곡물의 가공물이 성소 안에서는 제사장이 먹을 수 있지만 바깥에서는 특별히 제사장의 용도로 추가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떡의 떡 됨은 성분과 관계없이 어디에 놓였는가? 위치와 관련돼있습니다.

이 떡이 어디에 놓여있기에 하나님이 의미 있게 수용하느냐는 겁니다. 떡 자체가 잘 만들었다, 맛있다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모양이 둥글다, 네모다, 관계없습니다. 이게 어디에 있는 떡이냐? 이 떡이 하나님의 성소 탁자 위에 놓인 떡이에요. 성소라는 거룩한 곳. 이게 왜 거룩하냐 하면, 일반인들이 못 들어가니까 거룩한 곳이죠.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거룩한 거예요.

거룩한 장소에 놓인 떡이니까 이 떡이 성분상 바깥에 나가면 일반인도 먹을 수 있는 떡이에요. 하지만 위치, 장소가 장소인 만큼 다른 사람들, 비 거룩한 자가 먹을 수 없는 떡으로써 제사장,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잡수시는 떡으로써 규정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이 드리는 이 떡이 성소라는 위치가 그렇게 떡의 모든 본질 가치를 둔다면, 만약에 성소가 확장된다면 우주까지 성소가 팽창되고 확장된다면 덩달아 뭐도 확장되느냐 하면, 떡이라는 것이 점차 뭐로 바뀌느냐 하면, 떡이 인물 또는 사람들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떡은 그냥 곡물 찐 거죠. 사람일 수 없어요. 떡이 왜 사람입니까? 그런데 요한복음 6장 48절에 가면 이 떡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인물로 바뀌어요(“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처음부터 이스라엘로 바뀌는 게 아닙니다. 처음에는 이 떡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바뀝니다. 요한복음 6장에도 나와 있고 여러분들의 너무나 잘 아는 기존 교회에서 일 년에 두 차례씩 하는 정기적 하는 성만찬이 있어요. 이것은 내 떡이요 내 살이요.

그것은 뭐냐? 예수님이 지금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성소의 확장입니다. 성소의 확장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이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걸 이스라엘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거죠. 성소 안에 있는 떡과 성소 바깥의 일반인들이 명절에 먹는 떡과는 차원이 다르다. 같은 떡으로 보지 마라. 이는 하나님이 지정한 하나님이 함께 있는 그 장소에서는 모든 의미가 거룩한 의미로 전환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착해서 구원받는다는 생각 마시고요 우리가 어디 안에서 살아가는지 봐야 돼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설교했습니다. 기도 제목으로써 인간은 선행으로 구원을 바꿔서는 안 된다. 현찰 주고 상품 얻듯이 선행 주고 구원을 받아내는 그런 방법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장소가 날아가 버려요. 나 있는 장소가 괜찮은 장소라고 스스로 자부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장소는 뭐냐?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더러운 장소에요. 장소가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니까. 거룩한 장소가 아닌 데서 아무리 착하게 바르게 살아도 그 인간은 거룩하지 않습니다. 장소로부터 어떤 혜택을 입지 못하면 그 인간은 거룩한 떡이 될 수 없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떡은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그럼 그 장소가 왜 이스라엘 내에 생겼습니까, 라고 질문을 할 만 한데 원래 그 장소는 어떤 장소냐 하면, 이스라엘 속에, 이렇게 보면 쉬워요. 성소, 크게 보면 성막이라 할 수 있는데 성소, 성막을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것은 없는 장소에요. 없는 장소가 이미 기존에 있는 장소, 인간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 없는 장소가 침범하고 이게 이깁니다. 승리하죠.

장소 싸움에서 기존에 없는 장소가 새로 생기면 그 장소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예요. 없는 장소가 있는 장소에 파고 들어왔다는 말은, 기존에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아담의 자손들 틈바구니에서 분명히 아담의 자손에서는 이런 인간이 태어날 리가 없어, 라고 하는데 이게 태어난다고요. 그런 특수한 하나님의 백성이 태어난다고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모세가 성소의 모든 모형이나 성소의 모든 규격이나 성소의 모든 설계도를 지상에서 인간들과 협의해서 만들어낸 게 아니고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애굽에서 경험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괜찮은 곳이라고 여기시겠지가 아니라 그 하나님이 계실만한 장소는 하나님에 의해서 설계된 장소와 더불어 이 땅에서 만들어져야 돼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대리석 깔고 파이프오르간 설치하고 성가대석 웅장하게 만들고 고딕양식으로, 서양 중세 13~15세기를 대성당의 시대라 하잖아요(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표곡, 대성당의 시대). 대성당의 시대, 절대군주에서 자금이 들어오니까 삼포제로 인하여 잉여 생산물이 나오고 잉여 생산물들이 국가재산으로 모이니까 백성들을 하나의 종교, 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해서 저 천국을 내다보는 첨탑의 성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게 고딕이에요. 로마네스크가 아니고 고딕이라고요.

건축양식이 바뀌면서 권력구조도 병행해서 표상이 되는 겁니다. 심지어 성당 짓는데 130년 걸리고 이래요. 유럽에서 제일 높은 성당은 제가 알기론 독일의 퀄른대성당이에요. 가보니까 아직도 수리하고 있어요. 맨날 청소해요, 맨날. 지금은 대단한 관광수입이죠. 인간의 모든 기술과 모든 지혜가 거기에 다 집약돼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성전이라 하겠습니까? 안 하지요. 왜? 그것은 바로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잖아요. 그런데 그 성전을 주께서 인정을 안 했습니다. 이 땅의 성전은 아예 없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저는 성전의 파괴라고 봅니다. 성전을 폭탄장착해서 파괴되는 걸 인정 안 하고 주님의 복음에 의해서 파괴돼야 돼요.

주님의 복음에 의해서 파괴될 때 이 성전은 복 받은 겁니다. 왜? 파괴된 그 폐허에 비로소 성전이 되기 때문에. 왜 이런 원리가 있느냐 하면, 주님 자신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성전이 있고 더 어렵게 말해서 두 종류의 시간의 있습니다. 하나의 시간은 멈춰진 시간이고 또 하나는 불확실성 속으로 끌려가는 시간이 있어요.

인간들은 그 어떤 시간이 있던지 간에 현재와 비교해 볼 때 미래는 공허한 동굴 같아. 지금에 대해선 알겠는데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특히 주식투자한 사람들한테는 내일이 늘 조마조마하지요. 주식투자라고 해봐야 쪼는 것과 같은 거니까. 언제 사고 언제 팔면 되느냐. 그게 일종에 도박이고 투기거든요. 말이 투자지 투기잖아요.

지가 그 회사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투자합니까? 그냥 판돈 던져놓고 빨리 챙기는 것뿐이죠. 주식이 바로 자본주의의 꽃이고 인간은 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중소기업해서 상품 팔아 돈 버는 것보다 부동산 투기나 그것도 옛말이고 주식투자해서 돈 버는 거 버는 거라고 사장들 자기들끼리는 그렇게 생각해요. 회사 돈으로 해서 안 되면 말아먹으면 그만이니까.

이게 뭐냐 하면, 불확실성이에요. 모든 게 투기성이에요. 그러니까 인생은 뭐냐? 투기, 도박하는 거예요. 나는 뭔가에 도박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도박하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에. 매일 한 순간 한 순간이 도박이에요. 여자들은 말리지요. 남자들은 지루하다는 거예요. 교사 때려치우고 장사할까? 맨날 그 생각이에요. 교사보다도 주식투자하자. 셋째 시간 있고 일곱 째 시간 있다면 그 사이에 컴퓨터로 주식 얼마나 올랐는지 보지요. 교감 선생님은 혹시 그런가 하여 지켜보고.

이 세상의 불확실성에 기대를 거는 반면에 이미 멈춰진 시간이 있어요. 멈춰진 시간이 되게 되면 나는 뭐냐 하면, 나는 자체로서 없다가 됩니다. 없다가 이해 안 되면 앞에 가치라는 걸 집어넣어요. 나는 가치 없다. 나는 무의미하다. 내년 되도 무의미하고 5년 후도 무의미하고 죽어도 무의미하고. 따라서 사전에 가치 있는 어떤 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홀로 있으면 가치 없어요. 이건 하나님이 받아주질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니까.

기존의 시간에 시달리고 기존의 공간에 시달려요. 계속해서. 여기 살다가 캐나다 갈까? 캐나다 갔다가 망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캐나다 물가가 우리나라 두 배에요. 이게 살 수가 없어요. 세금 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의 방법은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파괴하고 친히 파괴시킨 그 장소를 성소로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의 성전은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기존 성전을 부정함으로써 비로소 성전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성전 파괴인데 개인적으로 하면 자기 몰락입니다. 오늘 제목은 이건 아닌데 이것 하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인간은 자기가 몰락하지 않으면 천국이 안 보여요. 주님이 안 보이게 돼있어요. 인간은 아까 투기하는 재미로 산다 했는데 저는 자기가 몰락하는 재미로 사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나는 없는 존재였어요. 자꾸 있음을 붙들면 안 돼요. 있음은 미래를 기대해서 내가 괴로워서 못 살아요. 내년은 잘 되겠지, 후년에는 잘 되겠지. 있기 때문에 자꾸 그런 걸 기대한다고요.

주머니에 돈 좀 있으면 근질근질해서 가만있질 못해요. 자꾸 도박판을 기웃거리면서 이것 바쳐서 여섯 배, 열 배 따볼까? 자꾸 그런 생각해요. 아예 주머니에 돈이 없어야 쓸데없는 생각 안 한다고요.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의 모든 카드들을 다 조회하고 전화번호까지 조사해서 남편한테 돈 한 푼 안 주잖아요. 특히 퇴직하게 되면. 하나하나 검사 다 받고 현찰 안 주고 카드 쓰게 해서 카드사용내역 다 알도록 만들어요. 쓸데없이 다방 마담한테 쌍화차 몇 잔 사줬는지. 나이 많은 영감들 이야기죠. <낭만에 대하여> 해서 쌍화차 사주고 커피 사주고 매일 출근하면 곤란하거든요.

인간은 가지고 있으면 없음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있으니까 내 것을 중심으로 새로운 자아가 피어납니다. 난 이만큼 있는 이게 나다. 재산이 이만큼 있는 그게 곧 나야. 그러니까 그것은 특별한 나를 계속해서 미래까지 이어지니까 멈춰진 시간이 아니고 이것은 영원히 끌려가 미래로 그것도 불확실한 어두운 미지 동굴 속으로 끌려가는 가련한 영혼이 되는 겁니다. 미리 완전히 멈춰야 돼요. 이미 종결돼야 돼요. 우리의 운명, 우리의 미래는 미리 확보돼야 되지 가보면 알겠지,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면 안 돼요. 그런 식으로 인생 살면 안 됩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가 성막의 구조를 다 보고 땅에 없는 곳에다 없는 건축물을 할 때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찾아온 줄 알지요. 그게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을 없애기 위해서 온 거예요. 없음으로 만들기 위해 온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자기 계실 곳이에요. 이게 주님의 자기 처소에요. 이 성막이.

그래서 성막에 있는 모든 구조는 누굴 증거하느냐 하면 주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없는 데서 새로 생겼으면, 없는 데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 화살표 여기에다 이 관계 주님이 계실만한 곳이라는 취지가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고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야 돼요. 이어져져야 이스라엘이 되지 몇 번 드리고 그 다음부터 이만하면 됐다고 하면 단박에 관계 자체가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의 대상이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이라 할 때는 한 번 소유하면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이 성전답게 만들어가는 친히 작업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 작업의 원칙이 뭐냐? 그것이 바로 오늘 레위기 24장 본문이 그걸 말해주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 안에서 주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가? 레위기 24장을 봐라. 24장 대로 내가 일할 테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하기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뭡니까? 너는 이익 없어. 내가 네 속에 거한다는 것뿐이지 주님 이익, 내 이익 따로 이익이 없어요. 주께서 내 마음의 평수를 넓히면 우리는 주님 안에 들어있는 셈이 되지요. 내 안에 주님은 들어오지만 내 안에 들어왔다는 나는 점점 더 없어지고 주님이 전체를 차지하고 그 주님 안에 내가 새롭게 등장하지요.

마술사가 분명히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보자기에 집어넣고 손을 넣으니까 비둘기 하나 나오잖아요. 여수에서 누가 벌인 마술하곤 차원이 다르지요. 카드 숨기는 마술, 어설픈 아마추어가 생전 처음 하는 마술하곤 달라요. 마술사는 정말 없는데서 비둘기 하나 만들어냅니다. 주님의 솜씨가 그거에요. 분명히 나는 주님 앞에 죽었는데 왜 죽은 내 대신 새로운 자아가 주님 안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그게 떡이란 말이죠. 떡을 빚은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로 빚은 거예요. 누가 맛있게 드시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맛있게 드시기 위해서 그 떡을 빚은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그 떡은 늘 있습니까, 며칠 만에 교체됩니까? 칠일 만에 교체되지요. 칠일은 안식일을 이야기합니다. 레위기 24장 8절에 보면, “항상 매 안식일에” 안식일이 등장하거든 여러분, 이것 하면 됩니다. 창조, 새 창조.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는 거예요. 안식일마다.

그러면 안식일마다 뭘 하느냐? 제사 드리거든요. 제사 드릴 때마다 새로운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은 제사를 몇 번 드립니까?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몇 번 드리는 게 아니고 뭐예요? 그걸 단번에. 단번에 드리심으로서 주께서는 성도를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 안에서 살게 하시는 거예요.

이 단번을 단번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존에 육신을 가진 인간세계의 시간관으로서는 이 단번이 단번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고 반복으로 드러나요. 그러니까 매 안식일이죠. 현재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이 땅이 지니고 있는 보여주고 있는 시간성 속에 있어요. 기존의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거든요. 그런데 여기 성소에 있는 시간은 안식일마다 반복이 되는 겁니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쭉 가면 동그라미, 큰 회전차 있지요. 뺑뺑 돌면서 가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는 방향성이고 지상에서는 칠일마다 바뀌는 반복성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선 실감이 안 나지요. 그렇다면 제가 강남강의에서 이야기한 초월 – 일반성 – 초월 – 일반성, 이런 식으로 반복을 설명했어요.

성령을 받으면 초월합니다. 이 땅에서 새 사람 돼요. 새 사람 되는데 이게 일반화되진 않아요. 나,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세상에 나가면 일반화되는 게 아니고 갑자기 자기 우월이 돼. 나, 잘났다가 돼버려요. 보편화되지 않고. 여기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인간이 육신이 있으니까 육신적인 욕심과 죄가 들어가게 되면 초월되었다고 까불다가 내가 죄인이지, 하면서 모든 것은 감사로 이어지면서 특별한 감사가 아니라 있는 것 자체가 성도된 자체가 감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몇 분, 몇 시간 못 가요. 나, 구원받았다고 까불다가, 이게 초월이거든요. 그러다가 새로운 애가 아프다든지 가정에 사업이 안 된다든지 하면 또 짜증을 부리면서 “주님이여,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이야기가 또 나오는 거예요. 주님만 쳐다본다고 하다가 주님 쳐다보지 않아요. 그 다음에 갑자기 자기 잘난 맛에 또 깨져서 역시 주님만 쳐다봐야 되는구나.

그러니까 일반성은 뭐냐 하면, 지상에 나타나는 천국의 모습입니다. 이 천국의 모습을 내 육신이 가리고 있어요. 가리고 있는 것을 성령이 와서 때려치우는 겁니다. 때려 칠 때 악마가 와서 협조해줘요. 악마 없으면 신앙생활 못합니다. 악마는 우릴 교만케 하거든요. 자랑케 하고 항상 섰다고 여기고. 섰다고 여기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잖아요. 맨날 우리는 나 혼자 있으면 돼. 나는 잘났어. 계속해서 신앙생활하면서 되풀이돼요. 마치 이스라엘 사람 같아요.

제가 악마가 도와준다고 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 초반기에는 광야가 도와줘요. 일주일마다. 만나가 주어지되 일주일 되면 만나를 끊어버립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만나 없이도 주께서 살려주신다는 것.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주님한테 무슨 이득을 뽑을 것이냐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계속 우리로 자기 필요한 것을 뽑아내는 대상으로 우리를 붙잡고 있어요.

우리가 반복해서 구원받는 반복해서 은혜 받는 감사가 나오는 것도 우리 좋으라고 나오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우리에서 쪽쪽 뽑아낼 것 뽑아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주님은 우릴 홍삼 주스, 맛있는 음식으로 보는 거예요. 이 맛있는 떡 봐. 매 일주일마다 주님은 잡수세요. 성소 안에 있는 테이블 위의 떡 열두 개를 늘 잡사요. 열한 개 잡숫고 배부르다 다음에 먹지. 그런 것 없어요. 열두 개를 늘 갈아치워야 됩니다.

언뜻 무슨 생각납니까? 우리나라 조선시대 제사 드릴 때 제사 지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대문간에 보면 하얀 종이 위에 음식 쪼가리들 있지요. 그건 왜냐하면 지나가는 고양이나 쥐가 먹고 우리 가정에 해코지하지 말라고 귀신한테 좀 떼어주는 거예요. 하여튼 귀신한테 인색해. 이것 먹고 떨어지란 말이죠.

그러니까 지난밤에 자기 조상한테는 밤, 대추 이만큼 세워놓고 아침에 귀신한텐 조금 떼어주는 거예요. 귀신은 아직 구천을 떠도는 미완성 死者에요. 죽은 자거든요. 빨리 니 집에 가라고 보내는 그게 귀신들이란 말이죠. 귀신들이 들어가면 재수 없다고. 그러니 조상들도 신이 뭘 먹는다? 인간이 먹는 음식물을 고기 먹는다는 생각을 조상제사를 통해서 할 수 있습니다. 조상제사가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전 세계 모든 민족에 다 있어요.

신과 인간이 교류할 때 인간이 먹는 음식을 드리면 신은 받아먹고 복을 준다는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세계가 그런 줄 아시기 때문에 말씀이 육신이 될 때도 하나님이 나타날 때도 인간적인 모양새를 가지고 인간의 문화와 전통 그 속에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과 교류가 가능하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그만큼 낮아져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범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교류를 하나님 쪽에서 시도한 겁니다. 구약 때는 그래요.

신약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교류가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신약 때는 이미 구약을 통해서 인간에게 받을 건 없음이 확정됐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무것도 안 받겠다는 거예요. 십일조가 되던 감사가 되던 모든 것은 네 것은 안 받겠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제가 이렇게 하면 참 편하다고 하는데 편하기는요 죽이는데요. 죽여 버려요. 받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죽여 버려요.

아직 떡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안 했어요.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떡을 드린다는 것은 떡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거예요. 곡물 찧어서 떡 만들면 되니까. 이 떡을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 하나님의 설계도로 만든 성소 안에 인간의 떡이 테이블 위에 열두 개가 들어온다는 사실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것을 안 받는다고 하면서 이 떡을 잡수시는 이유는, 인간의 것은 안 받는데 여기서 무슨 의미를 추구하느냐 하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내가 그것을 받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새로운 피조물이 드린 것을 받겠다고 시작하지만 안에 있는 정답은 뭐냐? 나는 새로운 피조물을 받겠다가 돼요. 새로운 피조물이 만든 것을 받겠다, 에서 출발하지만 새로운 피조물 받겠다가 돼버려요.

그러면 인간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떡을 열두 개 만들겠지요.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들었으니까 하나님께서 이 떡을 계속해서 받겠습니까, 안 받겠습니까? 안 받겠지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자체를 떡으로 받겠다는 그 취지에 의하면 떡을 안 받겠다는 말은, 인간 자체가 점차 하나님께서 받을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그 과정을 인간들이 깨닫기를 원하는 거예요. 내가 드리는 떡은 안 받는다는 쪽으로 뭔가 하나님께서 몰아간다는 것을 인식해야 되는 겁니다.

좀 어렵더라도 참아주세요. 쉽게 하겠습니다. 말라기 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여러분, 제사장이 아무리 바보라도 떡 만들다가 떨어져 흙 묻은 걸 털어내고 그걸 제단에 드리겠어요? 아무리 성의 없이 떡을 제단에 드려도 상사의 커피 타면서 침 뱉는 것처럼 떡이 너무 깨끗해서 싫다고 흙 묻혀서 제단에 바치겠습니까?

적어도 손 씻고 만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제단의 떡은 성의 없이 하는 떡이 아니에요. 성의를 다해서 합니다. 그게 뭐 어렵습니까. 정신 바짝 차려서 떡을 만들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잡티가 없는 고운가루로 고운 떡을 올렸단 말이죠. 전통적으로 올린단 말이죠. 무성의하게 오리는 게 아니고.

그런데 하나님께선 말라기에서 무슨 떡이라 합니까? 아이고, 깨끗한 떡이라 했어요, 더러운 떡이라 했어요? 더러운 떡이라 했거든요.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떡 드릴 때 상투적으로 드리는 거예요. 그냥 늘 하던 마음가짐으로 드린 거예요. 상용 적으로 하던 대로 매뉴얼대로 드린 거예요. 사람의 마음을 그 떡이 표현하는데 제대로 드릴 마음이 없이 드렸다는 이야기에요. 더러운 떡.

그러니까 더러운 떡이 어떻게 마음을 고약하게 먹어서 더러운 떡이냐고 분석하면 안 돼요. 그들은 결코 고약한 마음으로 드린 게 아닙니다. 반복해서 하다보니까 점차 크게 더 넓게 깊이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에 인간들은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고 그냥 반복해서 드린 거예요.

인간이 인간 자체를 문제 삼아야 되는데 인간은 떡 달라 해서 떡 드렸고 제사 드리라 해서 제사 드렸지 나는 지금 이 수준이 괜찮게 보이니까 수준을 유지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그 안일한 정신상태,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을까요, 변화 못 시킬까요? 변화 못 시키니까 그냥 이 수준으로 나가면 받아주겠지, 하는 거예요. 주님은 달라지기를 원하는데 인간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도대체 그 내용에 대해서 알 길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시험 치면 백 점이에요. 처음에는 백 점 맞았다고 엄마가 맛있는 걸 해줬어요. 두 번째도 백 점이에요. 또 맛있는 걸 해줬는데 전에는 맛있는 것 두 접시였는데 한 접시로 줄어들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백 점 맞았어요. 이번엔 맛있는 것 안 해주고 평범한 것 줬어요. 아들이 화가 나서, “엄마, 백 점 맞았는데 왜 전처럼 맛있는 것 안 줘?” 엄마가 하는 말이, “네가 네 마음가짐을 뜯어고쳐야지.” 하는 거예요.

엄마는 그때 점수 보고 한 게 아니에요? 점수 보고 한 게 아니고 처음에 백 점 맞을 때 마음가짐이, “나 같이 실력 없고 머리 나쁜 학생이 어떻게 백 점 맞았지?”라는 그런 겸비하고 겸손한 마음가짐 보고 내가 두 접시나 맛있는 게 했단 말이죠. 그런데 계속 백 점을 맞다보니까 걔가 어떻게 됐어요? 교만하고 자만한 거예요. “나 원래 실력이 백 점 아니면 안 돼. 백 점이 내게 딱 맞아.”라는 건방진 마음을 보고 엄마는 두 번 다시 맛있는 것 안 해주는 겁니다.

제 예가 이해가 되셨습니까? 이해된다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주님이 요구하는 수준과 표준은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님의 생명의 떡이라고 요한복음 6장 48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가 떡을 드렸데, 자기가 떡이래. 왜? 열두 개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받아먹겠데.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래서 매 안식일마다 떡을 바꾸면서 정성을 다하여 올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말라기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 더러운 떡은 안 받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너희들 마음가짐이 너무 안일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안일하다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안일 말고 내놓을 마음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우리가. 첫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주께서 원하는 심령과 영혼을 갖고 싶어도 우리는 그럴 능력도 없고 그럴 재주가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럼 그런 재주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몰락하면 되는 거예요. 주님이 보낸 악마한테 얻어터지면 되는 거예요. 내가 잘 되겠다, 내가 뭔가 잘하겠다는 말은, 적어볼게요. 내가 제대로 된 존재이고 싶다. 참된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할 때 앞에 뭐가 꿈쩍도 안 합니까? ‘나는’이라고 붙어있지요. 주님께서 이걸 친다니까요.

내가 괜찮은 존재라고 하는 이상은 이 괜찮음을 자진해서 철회할 마음이 없어요, 나는. 나는 죄인 되기 싫어요. 나는 의인되고 싶어요. 하늘나라 칭찬받고 싶고 남한테 욕 얻어먹기 싫어요. 그래서 우리는 열심을 다하여 신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게 화근인데요? 그게 문제에요.

표준이 예수님이 표준이 아니고 누가 표준이 됐어요. 예수 믿는다는 어제의 내가 나의 표준이 된 겁니다. “시켜만 주이소. 다 할게요.” 이런 정신머리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진짜 성도는 시키는 대로 다하고 바르게 살았는데 하는 인생 꼴이 말이 안 되네. 바닥을 쳤어. 내가 있다고 여겼는데 없는 순간이 와버렸지요. 암 걸리는 것, 내가 사라진다는 것을 전에는 고려 안 했는데 지금은 고려해야 돼. 내가 자식 낳고 내가 없어져야 된다는 사실을.

그게 기분 좋던가요, 아깝던가요? 기분 더럽지요. 남들은 나보다 못한 인간은 멀쩡히 돌아다니고 내가 왜 죽어야 되느냐. 아까워서 때가 아닌 것 같아. 지금은 아닌 것 같다고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말라고 그렇게 해도 기도가 안 나올 수 없어요. 살려만 주이소. 헬프 미. 살려만 주세요. 앞으로 똑바로 살겠습니다.

자기 죽을 땐 그런 생각 별로 안 들 수 있는데 아들이 죽을 때 딸이 죽을 때 자식이 죽어버리면 부모는 환장을 합니다. 세월호 물에 빠진 게 벌써 몇 년 전입니까? 갈수록 세월호 부모들은 악에 바쳤어. 광화문에서 보수 집회를 하는데 하다보니까 세월호 유족들을 포위하게 된 거예요. 상황이. 하늘이 열리던 날, 개천절이죠. 세월호 유족들은 하루 종일 울었어요. 왜? 포위됐기 때문에. 니 때문에 정권 바뀌었다고.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하루 종일 울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 맺힌 거예요. 상처받은 거예요.

상처받았다는 게 뭔 뜻입니까? 나는 내가 아깝다는 겁니다. 나는 상처 안 받아야 될 존재라는 거예요. 이 추잡하고 더러운 본성이 악마가 와서 치니까 비로소 들통 난 겁니다. 나한테 믿음이라는 것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나를 믿었지 절대로 나 외에 다른 것을 최종적으로 믿지 않았다는 그 진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지요.

그게 주의 뜻입니다. 구원은 믿음 없음을 가져와야 돼요. 믿음 없음과 믿음을 바꾸는 거예요. 내 믿음 없음을 주고 주님의 믿음이 내 속에 들어와서 그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뽐내고 싶어서 순종했다는 그걸 믿음인양 여기고 계속 괜찮은 믿음, 좋은 사람으로 우기면서 어떤 나쁜 일은 믿음 없는 사람에게 떨어지고 믿음 좋은 사람에게는 절대로 오면 안 된다는 식으로 버텼던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만인 겁니다. 이게 더러운 떡이에요. 우리가 깨끗한 피조물이 아니고 더러운 피조물 된 거예요. 더러운 피조물은 이 땅에서 반복이 돼요. 왜?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 더러움이 백 날 살아도 되풀이 돼요. 내가 더러운 떡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오직 구원받은 사람 외에는 없어요. 천국 가는 사람만 알지 지옥 가는 사람은 이걸 몰라요. 지옥 가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를 깨끗한 떡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에요.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에요. 누가 믿음이 없게 했습니까? 주님이 믿음이 없게 했어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스마엘을 자기 아들로 삼는 그게 아브라함의 믿음의 한계였습니다. 뭐 이스마엘 있으니까 됐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내를 통해서 남편을 깨우치는 거예요. 아내가 임신이 안 되니까 아브라함의 본색이 튀어나왔어요. 임신 안 되는 여자에게 임신하라는 내가 나쁜 놈이지. 물론 사라도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내 여종 하갈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뤄보자.

여러분, 약속은 있어요. 문제는 약속을 지킨다는 약속을 못해요, 인간은. 그러면 우리 안에서 약속이 이뤄지는 것은 약속을 지키겠다는 우리의 약속이 아니고 약속을 주신 분이 자기 약속을 자기가 성취할 때 우리는 주님이 스스로 약속을 이룬 결과물로서 우리가 변화될 때 그게 새로운 떡이 되고 그게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로써 우리는 내 안의 주님이 아니라 주님 안에 들어있는 주님의 생산물로서 우리는 그 안에 놓여있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소의 확장이에요. 떡의 확장. 떡이 인공적인 가공물로 인물로 바뀌어요. 인물로 바뀌는 그 과정 속에서 어떤 특별한 일들이 거기다가 주어져야 되겠지요. 그 특별한 일이 바로 떡을 바친 제단이 깨져버립니다.

말라기를 다시 보게 되면, 더러운 떡을 나한테 오지 말라는 말은, 성소는 그대로 두되 성전은 그대로 두되 떡만 갈아치우라는 게 아니라 아예 너희들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무효로 돌리겠다. 이스라엘 자체를 무효로 돌려버려요. 무효로 돌리면서 백성은 어디 있느냐? 백성은 내가 만들게. 누굴 통해서? 엘리야 다시 보내서.

그래서 말라기 마지막은 엘리야가 온다는 이야기에요. 엘리야를 보내서 엘리야가 하는 일이 있어요.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리죠. 그러면 만약에 엘리야가 안 오게 되면? 그냥 평행선이죠, 뭐. 그래서 그냥 나란히 가는 거예요. 전혀 접촉점 없이 이스라엘은 계속 떡만 공급하고 양 바치고 소 바치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계속 더럽다, 더럽다고 할 뿐입니다.

그러면 말라기에서 예언된 엘리야가 엘리야냐, 아니냐가 드러나려면 무엇이 먼저 환경적으로 구성되었느냐 하면, 둘이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린다는 정황이 주께서 만들어지도록 하겠지요. 대치관계, 하늘과 땅이 완전히 결별된 상태가 될 때 엘리야가 엘리야다운 모습으로 부각이 된다 이 말이죠.

그 엘리야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세례요한이지만 세례요한이 실패한 임무를 인수받게 돼요. 나중에. 엘리야가 세례요한이지만 세례요한이 제대로 성취를 못하고 다시 예수님이 인수인계해서 예수님이 선지자고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요 인간은 스스로 떡으로 변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없기 때문에 주의 약속을 멈추질 않고 계속해서 못난 인간을 통해서 기어이 성취하고 만다는 이야기를 첫째 시간에 했습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221.♡.126.52) 19-10-08 13:59 
20191004b 울산강의-레위기 23장 : 떡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걸 천천히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떡이라 하는 것은 사람에게 생명을 보장하는 가공물이죠. 인간의 노력이 들어가서 떡으로 만들어서 자연을 통해서 양식을 만드는 게 떡이라면, 인간이 떡을 먹는 방식 그대로 하나님 쪽에서 그걸 이용하셨다고 보면 됩니다. 너희들만 떡 먹나 나도 떡 먹자.

그런데 떡 먹자는 것이 성소에 있는 탁자 위의 열두 개라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왜 열두 개며 왜 안식일마다 교체가 돼야 되고 그걸 먹는 사람이 왜 제사장이어야 하느냐고 따져볼 때 하나님께서 정작 먹고자 하는 것은 인간적인 떡을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선 새로운 피조물과 살고 싶은 것을 떡을 먹고 싶다는 식으로 표현하신 거예요.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기존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 인간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솜씨는 뭐냐? 없는 것을 되게 하신 거예요.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솜씨. 없는 것을 있게 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옵니까, 할 때 현재 이스라엘에겐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고 약속의 땅의 산물로 떡을 만들라 하거든요.

그럼 없는데서 새로 만드는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 기존에 인간들이 먹고 있는 떡으로 새로운 피조물 만드는 게 더 어려워요. 왜냐하면 이미 있게 되면 거기에 죄가 스며들기 때문에. 그냥 없는 데서 있는 걸 만들면 되지만 주님이 원하는 것은 없는 게 아니고 죄가 있는 곳에서 의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죄를 자체적으로 해소해야 될 필요성이 추가적인 일이 필요한 거예요.

더러운 떡이라니까요. 인간들은 기껏 상투적으로 했는데 그게 주님 앞에선 더러운 떡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떡을 문제 삼는 게 아니고 이미 너희 마음은 안일한 거예요. 반복되는 제사, 지겹다. 매뉴얼대로 하지. 계속 반복하다보면 그 반복에 의해서 인간에게 새로움이란 의식이 날아가 버려요. 오십 년 동안 교회 다녀도 하던 행세대로 했는데 뭐가 더 필요하냐고 나온다니까요.

부부란 것도 그래요. 부부생활 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내나 남편이나 상대방을 볼 때 날마다 새로운 것이 나오면 늘 신혼 같아. 새롭고 신선하고. “당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당신이 이렇게 존경스러울 수가!” 이렇게 나오면 늘 신혼 같지요. 그런데 연애할 때는 늘 즐겁게 해주고 늘 나를 웃게 만들고 나를 늘 편하게 만들어서 파도파도 새로운 것이 나올 것으로 여겨서 결혼했는데 신혼여행 갔다 끝나버렸지, 뭐.

1960년에 애니타 브라이언트란 가수가 부른 올드 팝송이 있어요. 종이 장미란 노래가 있었어요. 우리 나이 대에는 굉장히 많이 불렀어요. 그 노래 가사에 보면, 당신이 나에게 장미를 줬어요.


Paper Roses - Anita Bryant

I realize the way your eyes deceived me

With tender looks that I mistook for love

So take away the flowers that you gave me

And send the kind that you remind me of

Paper roses, paper roses

Oh, how real those roses seemed to be

But they're only imitation

Like your imitation love for me

I thought that you would be a perfect lover

You seemed so full of sweetness at the start

But like a big red rose that's made of paper

There isn't any sweetness in your heart

Paper roses, paper roses

Oh, how real those roses seem to be

But they're only imitation

Like your imitation love for me

Like your imitation love for me



이게 오늘 본문과 적절해요. 이스라엘 백성이 떡을 줬는데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그 떡은 종이 떡이라는 거예요. 당신은 생생한 붉은 장미를 줬지만 당신의 마음을 실었는지 여부를 따져볼 때 그것은 마치 뭐와 같나 하면, 진짜 장미가 아니고 가짜 종이 장미라는 거예요. 그 가사에 보면, But they're only imitation 전부 다 모방이다. 이-미테이션~ 대목이 나와요.

페이퍼 로즈 거기에 보면 이미테이션이에요. 문제는 그 대목에서 우리가 놀라야 돼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다? 이미테이션이에요. 모방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모방이라는 것은 합치된다, 안 된다? 절대로 합치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줬는데 떡을 바쳐라. 인간은 떡을 바치는데 떡을 바치라는 그 말씀에 담겨있는 함유된 의미와 인간이 만들어낸 떡은 합치될 수 없습니다.

이게 괴리가 일어나고 벌어지면서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곧 우리의 멸망 같은 거예요. 결국 레위기 24장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우리가 어떻게 율법을 정성껏 성의껏 준비해서 드려도 하나님 성에 차지 않는 거예요. 나는 그런 떡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건 신약 때 이야기하지만 구약 때는 그 이유도 모르면서 더러운 떡 냈다고 구약 마지막 대목에서는 그런 이야기하지만 진작 이야기하지. 진작 이야기해도 소용없지요.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이미테이션 밖에 없는데. 모방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여러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교회에서 1년에 두 차례씩 하잖아요. 독일에 가보니까 한인교회는 성만찬을 한 달에 한 번하고 독일교회는 매주해요. 목사가 아니고 공무원들이에요. 뭘 하느냐? 이미테이션 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1장 보면 나오거든요. 11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그러니까 이미테이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명동성당에서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성만찬하는 거예요.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인간들은 이걸 함으로써 이게 뭔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이 대목을 설명했는데 기념하란 것은 뭔 뜻이냐 하면, 예수님의 살아 있음을 감지하란 뜻이에요. 그냥 기념이 되면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추도예배 드린 것밖에 안 돼요. 죽은 귀신을 기억하면서 회상하면서 자기들끼리 지금 노닥거리는 것밖에 안 돼요. 지금 주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인간이 성만찬을 하던 뭘 하던 간에 인간은 무슨 존재다? 이미 죽어 마땅함을 생각해야 된다. 왜냐하면 이게 구약이 아니고 신약이니까요.

구약 때는 이스라엘을 계속 살게 한다 해서 멸망할 때까지 그들로 계속 살게 해서 제사를 드리면서 그들이 드린 제사에다 새로운 신약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신약에 준한 의미를 거기다가 계속 부여를 한 거예요. 너희 봐라. 이사야에 나오는 대로 너희가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을 지켜도 마음이 딴 데 가 있잖아요.

마음이 딴 데 가 있도록 누가 그렇게 조종했습니까? 하나님이 조종했지요. 이스라엘 근처에 막강한 나라들을 만들어서 우리는 제사 드리고 여호와 믿어도 저 나라만큼 못 사네. 그래도 하던 대로 하지. 그러니까 억지로 할 수밖에 없도록 인간의 마음의 본질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 이미테이션 모방해도 모방에 그친다는 것은 주변 환경을 통해서 점점 더 무르익도록 몰아가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입니까. 처음에 절에 가다 교회 나오면 복 주리라 생각하고 아이들 공부 잘하고 하는 일 잘 될 거라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망하도록 하는 거예요. 교회 다녔는데. 괜히 종교 바꿨어. 바꿔서 이런 일이 벌어졌어. 시어머니는 핍박이 난리 나고. 종교 바꿔서 그런지 해서 또 다시 교회 갔다가 절에 가보고. 절에 가니 더 엉망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것은 내 자신이 누군지를 원래 우리가 모르고 있었는데 율법으로 건드리니까 그래서 이미테이션하게 만드니까 인간은 노림수가 튀어나온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기 때문에 뭔가 추가적으로 복을 주셔야 주고받는 게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아닙니까, 라는 식으로 자기위주의 본색이 튀어나온 거예요.

그럼 여기서 이게 필요하지요. 점차 교체가 필요합니다. 떡을 바치는 것이 율법이죠. 레위기 24장에 있으니까. 이 율법을 어떤 식으로 실행에 옮길 것인가? 인간들은 떡을 바치라 해서 떡을 바쳤는데 율법은 점차적으로 실행에 옮길 때 떡을 바치는 게 아니고 그따위 것 때려치우라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지 제사와 번제가 아니라는 식입니다. 시편 51편.

뭔가 인간은 자기한테 스스로 잔뜩 기대하기 마련이에요. 누가 자기한테 명령과 지시를 하게 되면 그 명령과 지시에 준해서 그 타인이 나를 우수한 존재, 괜찮은 존재로 봐주기를 기대하면서 뭔가 움직이게 돼있어요. 인간은. 뭔가 지시를 하게 되면 지시에 억지로 따르고자 합니다. 왜? 따를 때 내 능력과 자질이 남한테 인정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정받는 것.

그걸 지난 주일에 사회성이라 했지요. 다시 한 번 해볼까요. 개인은 뭘 원하고? 행복을 원하고. 개인이 사회에서 뭘 원하느냐? 인정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행복을 원하고 인정받는 이 둘을 합치면 자기 의에요. 인간은 목표가 있어요.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그것이 나의 행복으로 여겨질 때 인간은 사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의. 율법으로 자기 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의에 의해서 하나님께선 어떤 환경을 가져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을 때 그냥 죽지 않아요. 인간의 자기 의에 포위돼서 죽어요. 자기 의란 것이 결국 예수님을 죽게 한 원인으로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유도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누굴 죽인다? 하나님을 죽이니까 인간을 지옥 보내는 것은 합당한 조치지요. 인간이 지옥 가는 것은 당연한 조치입니다. 인간을 지옥 안 보내면 하나님께서 직무유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뭐냐? 사람 죽이는 겁니다. 뭔 상처를 받아요. 죽이는데 무슨 상처를 받아요. 분리수거해서 쓰레기장에 불태우러 가는데 이 비닐을 왜 태우십니까? 왜 하필이면 이 비닐을 죽이십니까? 비닐이니까 죽이지. 쓰레기니까 죽기는 거예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죽여야만 하나님다워요. 지옥 보내야 하나님답다고요.

오히려 살려준 것은 웬 떡입니까, 이런 식으로 해야 됩니다. 살려준 것을 자꾸 의심해야 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믿음 없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지옥 간다는 말은 나는 믿음 하나도 없음의 고백이에요. 그건 오직 성령을 받은 자에게만 나오는 인식입니다. 성령 안 받은 사람은 그걸 몰라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마지막까지 작은 쪼가리라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나는 잘났다는 것을 꼭 쥐고 싶어 해요.

그런 인간 찾으라 하면 울산시내 가면 20대, 30대 전부 다 마찬가지에요. 철딱서니 없는 애들의 정신은 뭐냐 하면,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사회로부터 인정받아서 이 땅에서 성공하려는 그 생각 말고 다른 생각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엄마, 내가 제대하고 취직해서 엄마 잘 모실게.” 엄마를 모시는지 자기 마누라 모시는지 분간이 안 되지만 부모는 그것 듣고 기특하다고.

기특하면 뭐 합니까. 새 아파트 대출받아서 돈 거기 다 들어갔는데. 엄마 용돈, 차비도 안 주는데. 자기 아이 낳으면 계산하는 거예요. 바깥에 맡기면 150만원, 엄마한테 맡기면 20만원. 엄마가 낫다. 애들이 결혼하게 되면 돈에 빠져버립니다. 절약에 빠져요. 갑자기 돌변해요. 그 애가 그 애가 아닙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말로 못해요. 결혼하면 입 싹 닦아버립니다. 조건부에요. 부모가 내 애 맡아주는 조건 하에 잘해줍니다. 엄마가 아프든 말든 관계없이.

본색이 드러납니다, 본색이. 이스라엘이 갈수록 본색이 드러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도 갈수록 본색 드러납니다. 인정받고 싶고 행복 하고 싶다. 이게 뭐냐? 자기 의고 그 자기 의로 인하여 결국 우리는 뭐냐 하면, 완전히 평행선이에요. 하나님 생각 따로 있고 내 생각 따로 있고 만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 와서 하는 모든 것이 이미테이션이에요. Paper Roses 종이 장미들이에요. 오늘도 시간 때웠다. 오늘도 예배 참석했다. 끝. 예배 참석하는 것도 귀찮아. 누구 만나는 것도 귀찮고. 집에서 인터넷 들으면 되지. 처음에는 반듯이 들어요. 경건하게 듣습니다. 나중에 보면 인터넷 틀어놓고 듣지도 않고 할 것 다하고 택배 다 받고 가스 불 다 끄고 나중엔 잠 오고 다리 책상에 올려놓고 듣고. 뭐 나쁜 짓해도 천당 가면 됐지.

천당은 누가 갑니까? 문제는 내가 간다는 게 문제에요. 내가 가는 천당은 없습니다. 주님이 실어줘서 가는, 주님이 바구니라면 우리는 그 안에 계란이거든요. 주님이 만든 천국에 내가 놓여있지 내가 가는데 주님 도와주는 그런 법은 없어요. 그 생각은 옛날 이스라엘의 잘못된 생각이란 말이죠. 주님 품 안에서 가는 거예요. 우린 주님 밖에서 독립할 수 없어요. 독립되지도 않고.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면, 떡을 철폐하되 떡을 예수님 안의 떡, 그걸 성소 안의 떡으로 만드는 거예요. 떡은 실패했습니다. 실패작이에요. 그럼 뭐냐 하면, 성소를 만들어서 성소 안에 주님이 스스로 떡이 되시고 이 떡으로 안에 집어넣으면 되지요. 그러면 성소도 이뤄지고 떡도 영원히 영광 받는 떡이 되는 거예요. 주께서 받으시는 양식이 되는 거예요. 이 방식을 주께서 사용하신 겁니다.

떡 될 자격도 없어요. 우린 이미테이션밖에 안 되니까.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몸이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율법이 완성이 되면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실패해서 남겨둔 모든 레위기 24장을 비롯해서 23장, 22장,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완성될 때 다 딸려 와요.

쇳가루가 멀리 있을 때 떨어져있다가 강력한 자석 하나 중간에 놔두면 흩어져있던 쇳가루가 전부 다 예수님 몸에 달라붙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순간 구약의 레위기 24장뿐만 아니고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게 돼요. 떡이든 성소든 향단이던 향유든 뭐든지 다요.

요한계시록 1장 12절에 보면,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예수님이 금 촛대를 새롭게 구성한 거예요. 그리스도 중심으로.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인자 같은 분이 있지요. 예수님 몸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모든 시간은 스톱이 된 겁니다. 완성이 된 겁니다.

그리고 공간은 어떻게 되는가? 크라운프라자호텔, 백두산 밑에서 해외특강 네 번째 동영상에 보면 은은한 조명 아래 강의한 게 있습니다. 그 강의내용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내용이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절) 그 대목을 제가 짧게 하겠습니다.

어떻게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지 제가 이야기한 것은, 스테인리스 돔 커버, 서양 파티에서 음식 내올 때 그걸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 말은 두세 사람이 있는 예수님 합세해서 세 사람 된다는 말이 아니고, 이렇게 되면 두세 사람 기도하다 흩어지면 예수님도 자기 집에 가야 돼요. 너희가 있는 곳에 함께 있겠다는 말은, 스테인리스 돔 커버로 접시 위를 덮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이 장소는 이 세상에 없는 장소에요. 없는 장소란 말은 여기 침투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제가 주일에 설교하면서 예수님 무덤을 지키는 것이 두 부류가 있다고 했어요. 하나는 로마군인 두 명이 있었고 또 하나는 천사가 지키고 있었거든요. 마리아는 천사와 이야기했으니까. 로마군인은 시체를 훔쳐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지만 천사는 들어오지 말라고 지키기 있었던 거예요.

예수 안에는 아무도 못 들어온다. 왜? 그게 창세기 3장에 보면,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겠다는 취지가 계속해서 살아 있어야 돼요. 내 백성, 내 이스라엘 아니면 못 들어오는 거예요. 그럼 누가 이스라엘이고 누가 지옥 가느냐? 그건 예수님의 고유권한이에요. 우리가 거기에 압력을 가하면 안 돼요. 빨리 정경심 교수 구속하라고 압력하면 안 되듯이, 그건 윤석열 검찰총장의 고유권한이듯이 심판주이신 주님의 고유권한이에요.

백 쓴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래 성도가 없어야 돼요. 다 지옥 가야 됩니다. 사람 죽이는 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누굴 건지고 안 건지고 하는 것은,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지만 그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 이루고 난 뒤에 하나님의 긍휼의 자리가 마련되거든요. 긍휼의 자리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홀로 이뤘기 때문에 혼자만의 고유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요. 아버지 앞에 유일하게 모든 말씀을 지킨 분이 예수님 딱 그분이거든요.

그분이 알아서 너, 너, 너 나와. 들어와, 하면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 이름으로 인간들의 어떤 자질과 권한과 실력 그런 것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예수님의 긍휼로 호출 당한 사람만 주님의 긍휼 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긍휼 받은 사람이 긍휼 티를 낸다는 것은 뭐예요? 이건 내가 뭘 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냥 불쌍히 여겨줬어, 라는 말을 함으로서 내 구원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노릇하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제가 긴 이야기했는데 떡을 먼저 만드는 게 아니고 성소부터 먼저 만든다 이 말이에요. 성소부터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단독행위에요. 단독행위로 주변에 뭐가 피어나는가? 성소가 피어나요. 일곱 촛대부터 영광스런 모든 성전의 영광이 아우라가 퍼지거든요. 그 속에 예수님 자신은 뭐냐? 생명의 떡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구약에서 이야기했을까? 미리 이야기했어요. 이야기하기 전에 첫째 시간에 제가 놓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성소가 확장되면서 이 점을 다시 봅시다. 성소가 확장된다. 구약은 점점 더 확장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떡을 바칩니다. 율법이니까 기계적으로 반복적으로 습관적으로 바쳐요. 성전이 있으니까 바치고 성소 있으니까 바치는 거예요. 바쳐야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니까. 우리는 다른 민족 달리 안식일 지키고 제사 드린다. 그래서 복 받는다는 그러한 고유한 정신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구약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반복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점점 더 와해되지요. 깨지지요. 이상하게 제사를 드렸는데 율법대로 살았는데 왜 되어진 상황은 이상스럽게 이스라엘 역사가 꼬여서 제대로 되는 법이 없지요. 어디서 문제가 됐을까요?

새롭게 추가되는 요소를 무시한 거예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율법을 줄 때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이 율법을 담당해서 지키는 방법이 있지요. 두 번째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예언자 또는 선지자가 지키는 방법이 있어요. 선지자의 방식이 추가되는 요소에요.

그럼 선지자는 어떤 때 추가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율법을 지켰다 했지만 율법이 실효성이 없을 때 전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이 흡족하지 못할 때 그걸 지적하는 식으로 누가 오느냐? 선지자가 오는 겁니다. 다윗은 율법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율법을 알았지만 밧세바와 간음했지요. 간음만 했습니까? 밧세바의 남편을 살인했지요. 그래 놓고 다윗은 율법을 모르는 게 아니고 알아요.

어떤 사람이 자기는 양이 많아요. 그런데 손님이 오니까 자기 양 놔두고 하나밖에 없는 종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한다고 죽여 버렸어요. 그걸 듣고 누가 화가 났느냐 하면, 다윗이 화가 난 거예요. 이스라엘에 그런 인간 있으면 율법대로 하면 네 배로 갚아야 되고, 아니 네 배고 뭐고 간에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 했거든요.

그때 이름도 유명한 선지자, 나단이 그게 당신이야.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남 지적할 것 없이 지적하게 되면 구멍이 나고 그 구멍에 하나님이 성령을 담는 방식이 바로 주께서 새롭게 추가한 요소에요. 내가 지켰다, 내가 믿었다, 내가 행했다, 내가 섬겼다, 내가 순종했다가 아니라 그게 빵꾸나야 돼요. 진즉에 죽어야 될 인간이 아직도 버티고 살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우리가 반복적으로 일상을 살면 이것 못 느껴요. 가끔은 죽었다가 살아나야 정신 버쩍 차려요.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구나.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고 내가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구나. 내가 노력했다고 해서 그 보상으로 천국 가는 게 아니구나. 나는 내 의, 내 잘남밖에 이미테이션 외에는 할 줄 아는 재주가 없어요. 우리는 자기 잘남 외에는 아무것도 못해요. 그것만 할 줄 알아요. 자기변명하고 자기수습하고 나의 캐슬 지키고 나의 의를 지키고 그것밖에 할 줄 몰라요.

우리는 점잔해도 건드려보세요. 대번에 그 본색이 유감없이 노출되지요. 네가 뭔데 날 건드리나. 시비 걸지 말라고 나오지요. 이건 교회를 몇 년 다니고 교인 수가 몇 명이고 목사든 장로든 직분과 아무 상관도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지키는 이미테이션으로 자기변명과 자기핑계 외에는 우리가 나올 게 없습니다. 그것밖에 안 나와요.

왜 주께서는 그렇게 나오시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허접스러운 우리를 계속 질질 끌고 다니는 겁니다. 평생을 두고서. 결국 우리는 너무 끌고 다녀서 닳아 없어져요. 나중에 화장터에 가면 닳아 없어진다고요. 지난 낮에 그런 설교했잖아요. 사람은 닳아 없어지면 배와 등짝이 붙는다고. 들러붙어서 원래 폭이 없어져요.

그런데 폭이 생겨버리면 이게 아까워. 폭이 생긴 내 덩치가 아까워서 이것 지키려고 하는 거예요. 그 과정을 이스라엘 역사가 다 보여준 겁니다. 하나님 제사 드렸잖아요. 성전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가 이렇게 힘듭니까. 하나님 이제는 할 도리 다했으니까 우리도 할 수 없이 잘 머고 잘 사는 옆의 나라 다른 신 섬기겠습니다. 그렇다고 욕하지 마세요.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힘들게 했기 때문에 우리 책임 아닙니다, 라는 식으로 우상숭배로 쉽게 나가버린 거예요.

이게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복음 들을 때 그렇게 기뻤지요. 기뻤지만 숨 좀 트고 살만하면 뭐가 탐나던가요? 삼성재벌이 어떠니 현대가 어떠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이 정치를 하고 서초동에 모이고 광화문에 모이는 이유는 단 하나에요. 복수심이에요. 알 수 없는 복수심. 그런데 구약에선 이 복수심은 한 곳에 나서서 자기 몸으로 받아 챙기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이에요.

우리나라는 그 복수심을 받는 쪽이 없어요. 구약에서는 인간의 본색은 끄집어내고 그 본색이 오는 것을 다 받아먹어요. 이스라엘이 죄를 본인이 담당하는 겁니다. 이사야 53장처럼 우리는 양 같이 제 갈 길 갔거늘. 주께선 누굴 파견했느냐 하면, 그들이 하는 불평과 불만과 오만함과 자만을 네가 나서서 온 몸으로 다 거둬들여라.

구원은 뭐냐? 더러운 죄를 대신 수거해서 가져가신 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쓰레기 같은 모습으로 온 거예요. 지저분한 모습으로 온 거예요. 꼴도 보기 싫은 모습인데 그 꼴 보기 싫은 것이 누구 때문에 꼴 보기 싫은 거예요? 주님은 죄도 없는데 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그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까?

그 죄에 누구 죄가 섞여있습니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의 죄가 섞여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죽였고 우리가 죽인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거예요. 그래서 주님과 성도 사이는 뭐냐? 죽음이라는 관계 외에는 다른 관계는 필요 없습니다. 나 너를 위해서 죽었고 네 죄 때문에 나는 죽었고 너는 네 죄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그걸로 끝이에요. 헌금이고 선교고 필요 없어요. 오직 죽음의 관계뿐이에요.

그걸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이렇게 돼있어요. 요 근래 이걸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이야기할 때마다 제가 은혜 돼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제가 말하는 건 15절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모든’이라 해놓고 ‘산 자들’이죠. 산 자들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산 자가 아닌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죽음이 또 나와요)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간에 너를 위한 몸이 아니고 그 자체가 주를 위해서 아팠고 주를 위해서 나았고 주를 위해서 밥을 먹고 있고 주를 위해서 조깅하고 에어로빅하고 있다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결혼했고 주를 위해서 헤어졌고 주를 위해서 열심히 지금도 싸대고 있다 이 말입니다. 모든 게.

여기서 여러분 다음과 같이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제부터 예수 믿었으니까 주를 위해서 살자. 이런 식으로 오해하면 안 돼요.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 직분과 어긋납니다. 선지자의 존재 의미는 선지자 등짝에 주님과의 천상회의와 연관돼있어요. 선지자는 꼭두각시에요. 그걸 구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성신이라고 돼있다고요. 이 성신이 신약에 오면 성령으로 완성됐다고요.

그럼 성령이 뭘 하느냐 하면, 이제 같이 사신 자로 하여금 주를 위해서 살도록 조치하시는 분이 성령이에요. 알아서 우리가 정신 차려서 살자가 아니라 살도록 하는 거예요. 주를 위해서 사는 방법 중 하나가 골프 치는 거고 크루즈여행 가는 거예요. 백두산 관광 가는 거고. 왜? 성령이 하게 되면 감사가 나오게 돼요. 그런데 억지로 내가 구원받았으니까 주를 위해 살자가 되면 전부 다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고 자기 의가 나오고 억지가 나와요. 비자발적이 나온다고요.

그래서 제가 막 살자고 안 합니까. 사세요. 어차피 지옥 갈 것 막 살지, 뭐. 막 살게 되면 성령께서 옛날 구약 선지자처럼 조정을 해주게 되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성도들도 막 살고 싶지요. 막 살지 못하게 했는데, 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그 당시 구약대로 하면 언약을 위해 살도록 그렇게 주께서 인도하신 거예요.

그럼 오늘 본문과 관련해선 뭐냐? 아예 떡이 되게 하셔요. 참 맛있다. 너란 인간 볼 때마다 내가 맛있어. 그러면 사도 바울처럼 이야기하지요. 제가 뭘 했다고요. 각도가 요 각도거든요. 제가 뭐했는데. 니가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 그게 예쁜 거예요. 만약에 내가 헌금을 해야지, 하면 안 예뻐요. 헌금을 하면 내가 한 게 의식이 돼서 오른손이 할 걸 왼손에 다 들통 난다니까요.

그냥 살아가는 것이 성령이 임하면 그 자체가 선지자에요. 왕 같은 제사장 삶이라니까요. 그러면 그냥 막 사는 것과 차이가 뭐냐? 감사가 나오지요. 고마움과 감사가 순간순간 터져 나오게 돼있습니다. 참 아무것도 아닌 나에게 또 해외여행을 가게 하시고 효도관광하게 하시는구나. 헝가리까지 아무것도 아닌 나를 가게 하셨구나. 그런데 배가 자꾸 갈아않네. 아무것도 것을 여기서 인생 마감하라고 헤엄도 못하는 걸 뻔히 아시면서 배를 타게 해서 이걸로 인생 끝내자. 죽으면서도 감사해요.

“이러면 안 돼, 안 돼. 주여, 왜 나에게.” 이것 아닙니다. 이미테이션, 그건 종이 장미지요. 그동안 지가 지 믿음 생활한 그걸로 천당 가려는 흉내 내기에 열중한 거죠. 작은 것에 감사한 것이 큰 것에 감사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작은 것을 흉내 내면 큰 것도 흉내 내요. 그러니까 작은 것에서 깊은 감사가 나온다면 그 사람은 어떤 일도 감사가 나올 사람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기념물. 이제 기념이란 말 아시겠지요. 누구 작품, 누구 솜씨란 말이죠? 바로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자기가 스스로 이루는 기념물로 떡을 바치라는 거예요. 기념물로 여호와께 드리라. 이게 화제다. “유황을 그 매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항상 매 안식일에 이 떡을 여호와 앞에 진설하지니”

모든 떡부터 유황, 화제, 등잔 모든 것이 세팅돼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념물 되기 위해서. 기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기념하는 거예요. 놀랍게도 또 감사하게도 우리가 주님의 그 기념물에 일부로 참여돼있다는 것,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 보통 신분이 아닙니다. 대단한 거죠.

이제 여러분들이 이 정도 아니까 어려운 것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던질 테니 답변해보세요. 자동차 타이어 가는 것이 어렵습니까, 쉽습니까? 그것도 여러분이 하는 게 아니고 전문가들이 자동차 정비소에서 타이어 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요? 쉬운 일이지요. 내게 하나님의 요소가 타이어 갈아 끼우듯이 이식되는 게 가능 하냐, 가능하지 않느냐고 제가 묻는 겁니다. 이식이 될까요, 안 될까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지요.

어떤 회사 높은 임원의 은퇴하는 기념으로 어떠한 선물이 가장 좋을까요? ①난, ②기념패, ③새로운 간이식, 몇 번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선 생명을 집어넣는 거예요. 이것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어요. 문제는 그 생명을 집어넣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거지요. 주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됐으니까 그 원칙을 그대로 살립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요셉의 부인, 이름이 뭐지요? 마리아. 마리아 몸에 들어오지요. 얼마나 신비로운지. 성경에서 이해 안 된다, 어렵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것은 뭐냐 하면,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다시 태어날 때 이 육으로 태어난 것은 안 된다는 조건 하에 육으로 태어난 것은 내가 인정 안 한다는 조건 하에 다시 태어나보세요.

뒤에 정답은 모른다 치고 주님께서 다시 태어나야 하늘나라 본다고 언질만 주시고 우리가 니고데모라 여기고, 육은 안 된다. 네가 다시 태어나는 그건 안 돼. 다시 태어나야 돼. 그러면 니고데모가 고민하면서 어떤 아이디어를 내세우겠습니까? 내세울 아이디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거에요. 우리 쪽에서 할 게 있어요, 없어요? 없다니까. 그런데 왜 기존교회에서 자꾸 하라고 합니까, 없는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선행으로 구원과 맞바꾸는 게 아닙니다. 선행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현찰로 물건 구입하듯이 자기 의로 천국을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경건이나 거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없어요. 없음을 유지해야 돼요. 우리는. 없다는 걸 안다는 것이 보통 성령 받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방법은 뭐였습니까? 성령으로 해야 된다. 그럼 성령이 인간 쪽엔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없으니까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건져주면 건져주는 거야.” 이 말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렇게 난해합니까? 그게 납득이 안 되지요. 성령이 없는 사람한테만 납득이 안 되게 돼있어요.

그래서 납득이 못 되게 한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성령 받은 유무로 결정하기 위해서 일부러 성령 받은 사람만 아는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에요. 그 방법을 저와 여러분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써먹어야 돼요. 마태복음 10장에선 이렇게 합니다. 네가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께서 하시는 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약을 올리는 거죠. 얼레리꼴레리 놀리는 겁니다. 누구한테 가느냐 하면, 이건희는 죽어가니까 이재용한테 가서 얼레리꼴레리 천국 못 가지. 놀리는 거예요. 또 누구한테 갈까요? 조국한테 갈까요. 당신이 복음을 알아, 놀리면서 오는 거예요.

떡의 특징은 뭐냐?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거예요. 왜? 그쪽에 없는 게 내 쪽에 들어와 버렸으니까. 내가 달라고 안 했는데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오고 난 뒤에 사람이 달라졌어요. 소속이 달라졌다고요. 아까 처음에 했지요. 떡은 어디에 놓여야 된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늘에 속한 위치에 있어야 떡이 떡다운 거예요. 그 위치가 인간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겁니다.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에요. 교회 왔다 갔다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거는 내 힘으로 안 되는 현상이 나를 가지고 주께서 일으켰다는 거예요. 주님이 오라 했습니까? 그런 적 없어요. 나를 구원하려 했습니까? 그런 적도 없어요. 그냥 내가 육이라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그 육은 육일뿐이고 지옥 갈 뿐인 것을 내가 그렇게 감사함으로, 그것도 짜증스러워서 고민거리가 아니라 되게 감사한 거예요. 내가 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소용없게 된 사실을.

그걸 두 자로, 내게서 손을 떼는 걸 자유라 합니다. 자유의 조건은 뭐냐? 내가 이미 죽었다. 왜 죽었느냐 하면, 구태여 내가 살 이유가 없어요. 사신 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사신 분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 역할은 죽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니까. 내가 만약에 살아서 앞에서 얼쩡거리면 이건 주님 영광을 가리는 골키퍼 밖에 안 돼요. 지가 해결 다하려고 설쳐대면 어딜 까불고 있어. 나, 구원받았다고 하면, 까불지 마. 니가 구원받은 게 아니야. 니가 구원 안에 있지. 우리가 소유한 게 아니란 말이죠.

산다는 자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거예요.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이해 안 될 때는 가까운 장례식장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곧 우리 모습이에요. 전에 했잖아요. 관 속에 누워서 입관할 때 죽어서 열어보라니까요. 묶여서 누워있는데 열어보면 자식들 도열돼있고 보람상조에서 와서 할 때 보란 말이죠. 내가 죽어있구나. 그런 자세지요.

그건 관 속에 있지만 우린 예수 안에 있어요. 내가 살았다고 구태여 이야기할 필요 없다니까요. 주님이 살았으면 되지 주님이 대표자기 때문에 주님 살아 있으면 내 몸으로 보여주면 되지 그걸 예수님의 증인이라 하거든요. 꼭 구태여 내가 주님한테 나서서 내가 살아 있다고 외칠 이유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햇빛이 더 오는 것도 아니고 비가 울산에 덜 오는 것도 아니고 태화강 범람 할 것이 안 할 것도 아니고 세상에 까마귀가 오고 안 오고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아니라 주님 마음대로 움직이기 우리는 감사, 감사, 감사, 감사로 그냥 공짜로 주는 걸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모든 일상에 대해서.

목사님, 말은 좋지만 사람이 계획이 있어야 되고 사는 목적이 있어야 되는데 계획과 목적을 하지 말란 말입니까, 하는데 하지 말라가 아니라 주께서 목적과 계획도 우리에게 아이디어를 줘요.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아침이 뭘 해먹지? 그냥 가만있으면 입에 밥 들어옵니까? 주부가 뭘 움직여야 되지 않습니까? 남편은 밥 달라하고. 오뎅탕 해줄까? 어제도 먹었는데. 그럼 뭐 해줄까? 콩나물국 끓여줄까?

뭔가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 생각조차도 주께서 주신 아이디어란 말입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어제 콩나물을 사놓을 걸. 후회하지 말란 말이죠. 어제 생각 안 났는데 어떻게 해요. 주께서 생각 안 나게 했으면 그걸로 끝내야지 자기를 자책하고 그놈에 콩나물 내가 꼭 해줄게. 이렇지 마. 그러면 그것은 앞에서 골키퍼가 설치는 것밖에 안 돼요. 생각이 안 나게 하셔서 콩나물 못 산 거예요.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그 말씀 아닙니까.

그게 뭐냐? 성소 안의 떡의 위상이에요. 왜? 주님의 기념물이 돼야 되니까. 계속해서 기념물 돼야 되니까. 후회도 못합니까? 후회하세요. 주의 뜻이니까. 후회해놓고 아, 이게 바로 내가 오만이구나. 이게 자기 의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왜 하나님께서 주님의 피로만 용서가 되는지 왜 주님께서 다가와야만 구원을 받는지 왜 설쳐서 구원 안 되는지를 새록새록 아니까 그걸 통해서 새로운 감사거리로 나한테 주입된 거예요.

우리가 교만한 것은 그냥 교만할 순 없고 주께서 보낸 마귀가 우리로 하여금 우쭐대게 만들어요. 너는 주의 종이다. 너 죽으면 안 돼. 너를 통해서 할 일이 많아. 이게 마귀의 장난이거든요. 제가 전에 강남강의에서 했거든요. 박사교회 12년 동안 여자 교인과 악수도 안 했어요. 왜냐하면 그때 내가 잘못 생각했지요. 내가 경건하게 살아야 계속 주의 종으로 쓰인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떤 여자 분이 간혹 악수하려고 하면 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나는 주의 종인데 복음을 전하는 종인데 여자의 손을 만지다니 그러면 주께서 이놈. 네가 그러고도 주의 종이냐? 나는 너를 쓰지 않는다. 이러면 나만 손해인데,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것도 하나의 과정이었지요.

그게 바로 악마가, 내가 쓸모없다는 생각을 안 하고 교만 떨었던 겁니다. 주님 앞에 주님의 영광을 십자가를 모독한 거예요, 그게. 막 살면 되는데. 여자 손과 악수하게 되면 이게 웬 떡이고. 만져야 되는데 그걸 하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감사가 억지에요. 억지로 뭔가 노림수를 가지고 목적을 가지고 자기 잘 되기 위해서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을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그 짓한 거예요. 하다보니까 사적인 것이 주님 가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말씀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게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떡이 되게 하셨는데 떡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악마성을 주께서 불쌍히 봐주셔서 도리어 그게 있음으로서 십자가를 높이는 감사하는 일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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