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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6 22:54:43 조회 : 450         
죽는 이유 191206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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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29) 19-12-09 11:44 
20191206a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죽는 이유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4장 15절부터 23절까지 하겠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 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짐승을 쳐 죽인 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며 사람이 만일 그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그렇게 진행돼있지요.

성경은 상당히 무거운 책입니다. 왜 무거운 책이냐 하면, 거기에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 나와 있어요. 인간은 보통 살면서 끝에 죽게 되는데 죽어가면서 이유를 알고 죽어야 되거든요. 죽음이란 것인 인생의 끝에 있지만 죽는 이유는 죽음이 오기 전에 모든 하루하루의 그 이유가 바닥에 다 깔려 있습니다. 결국은 죽기 때문에 그래요. 이래 죽든 저래 죽든 죽기 때문에 인간은 사는 이유가 죽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왜 사는지, 왜 죽는지 같은 이유가 돼요.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과 죽는 것이 구분이 없다. 구분되지 않는 겁니다. 사람들 모여 있으니까 죽는 것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고 죽는 것도 이게 하나님의 일이에 돼요. 그러면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이러이러하면 죽는다는 말은, 사는 것이 조건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 죽는다는 말은, 그것도 돌로 쳐 죽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 죽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걸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사는 이유가.

그것 아니면 우리가 왜 사는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아요. 어차피 사는 것의 끝은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과 삶이 구분 없다면 죽는 이유가 곧 사는 이유가 된다면, 그 죽는 이유를 성경에서는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 죽는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 죽는다는 그 사실만이 유일한 현실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인간의 무대가 아니고 하나님의 무대란 뜻이에요. 이 세상 현실은 인간의 무대가 아니고 하나님의 무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작용하는 나타나는 무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위한 세상은 없지요. 나를 위한 그런 현실도 없고요.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하면 죽는다는 말은 이걸 바꾸어서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너의 생명은 어디 있지? 너의 목숨은 어디 있지?

길 가는 사람에게 물어봅시다. 당신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화낼 겁니다. 질문을 해도 알아먹게 해라. 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이 내 목숨이 내 안에 들어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당신의 생명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저의가 뭐냐? 아마 굉장히 분노할 거예요. 과학에서 말하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는 에너지 때문에 살아간다. 그 에너지는 어디서 왔는데? 우주에서 왔다. 그럼 우주는 어디서 왔는데? 그건 모르죠. 어디서 온 걸 몰라요.

인간에겐 대략 60조 개의 세포가 있는데 세포는 각자 살아 있습니다. 과학에서는 살아 있는 그것이 에너지의 힘으로 살아 있다. 쉽게 말해서 그 힘 때문에 인간은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그 힘은 어디서 오는데? 모르지요. 그럼 죽는 건 왜 죽는데? 에너지가 빠지면 죽는다고 하겠지요. 그러면 에너지가 왜 빠지냐고 물으면, 또 답변 못해요. 에너지가 지가 빠지고 싶어서 빠집니까? 세포가 암세포 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까? “주여, 세포가 암세포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검사 해보니까 암세포가 퍼져있는 거예요.

그럼 그 암세포가 어디서 온 겁니까? 암세포가 도대체 멀쩡한 세포를 잡아먹는 거예요? 그걸 암세포에 물어봅시다. 암세포야, 너는 왜 멀쩡한 세포를 잡아먹는데, 라고 물으면 암세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잡아먹으면 안 되는데?” 오히려 이렇게 대꾸할 겁니다. “도대체 네가 뭔데 내가 안 잡아먹어야 돼. 네가 하나님이라도 돼?” 하나님 아니지. 하나님도 아닌 게 너의 고유 권리를 주장하느냐 말이죠. 하나님 되지도 못한 게 살아야 되겠다는 고집을 부리느냐 말입니다.

암세포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느냐 하면, 암세포처럼 인간을 잡아먹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인간을 잡아먹는 하나님. 그만한 권리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이란 누구에 의해 잡아먹히는 기간, 이게 인생이죠. ‘누구에’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하나님에 의해서 잡아먹히는 그 기간이 인생이라는 거예요. 우리의 수명입니다. 하나님과 이렇게 엮여 있어요. 그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은 없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의 목숨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 질문조차도 이해 못합니다. 그 질문이 성립이 되는 이유는, 당신의 목숨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지금 당신은 죽어 있다는 뜻이에요. 당신을 내가 보니까 당신은 산 게 아니야. 지금 죽어가고 있어. 그렇다면 당신의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이에요. 이게 의미 있는 질문이에요.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되게 무거운 책이에요. 이 성경은 우주보다 무게가 더 나갑니다. 왜? 거기에 인간의 죽음, 하나님의 죽음 이야기가 이 책에 들어있기 때문에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하는 레위기 24장 15절에서 23절 이야기도 죽음 이야기에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모독하면 모욕하면 또는 무시하면, 외면하면, 거부하면 반드시 죽일 지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밥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밥이라니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공식이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모독 안 하면 되잖아요. 사람 쳐 죽이면 반드시 죽일 지라고 했는데 안 죽이면 되잖아요, 라고 우리는 반발하고 여기서 대들기 마련이거든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취지는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서 생명이, 현재 갖고 있는 그렇게 해서 유지되는 생명은 온전한 생명이 아니라는 취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15년 동안 살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다음 해에 사람 안 죽인다는 법 없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법 없어요. 마태복음에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라 했어요. 아무리 버텨봤자 그것은 영원히 삽니까? 한 번도 하나님을 모독하지 않고 한 번도 살인하지 않고 팔십, 구십 평생 살았다고 해서 죽음이 아예 없어지는 겁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취지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처벌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죄 짓게 돼있어요. 마음을 이렇게 먹어야 굉장히 속이 편해요. 처벌이 먼저 있고 하나님의 조치가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니까, 하나님의 처벌이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모든 인간으로 거기에 걸려들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다 죽는데 죄 때문에 죽지요. 로마서 6장에.

인간이 죄 때문에 죽는다면 이 공식이 틀린 공식이 아니고 이 공식이 유일하게 맞는 공식이에요. 죄 지어서 처벌 받는 게 아니고, 그건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거짓말로 계속해서 속여 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인식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죄가 있는 자에게만 처벌이 오기 때문에 우리는 죄만 안 지으면 죽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처벌은 없을 것이라고 악마한테 속았고, 그걸 교회 수십 년 다니면서 계속 속아온 거예요. 어느 누구도 반대로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처벌이 먼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사람이 없어요.

사람이 구원받는 방법은 의인되는 게 아니에요. 반대로 사람이 죄인 되면 구원받아요. 예수님께서 죄인 되게 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래야 예수님 오신 티가 나잖아요. 예수님이 일부러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죄인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에 죄 안 지으면 그 사람한테는 예수님과 무관한 사람 돼버린다고. 예수님이 쓸모없는 사람 되고 예수님이 필요치 않는 존재가 돼요. 그 사람한테는.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죄 짓기 위해서 산다는 그 사실을 보고 우리는 무한히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책 펴놓고, 보자. 오늘은 어느 항목에 걸려들었는지 찾아보는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여러분 오늘 무슨 죄를 지었는지 제가 토정비결 보는 점쟁이처럼 찾아드릴까요? 디모데후서 3장 1절부터 열다섯, 여섯 가지 나오는데 한 번 읽어보세요. 읽어보고 해당 안 되거든 돌로 치고요, 해당 되거든 돌을 놓고. 나이 많은 사람부터 젊은이까지 집으로 돌아가야 돼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첫 번째,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사람들은 자기에게 목숨이 있다고 여깁니다. 목숨이 있는데 목숨을 더 든든하게 오래 지키는 방법은 뭘까요? 돈입니다. 돈 있으면 사는데 유리하고 돈 없으면 사는데 불리해요.

내일 결혼식이 부산에서 있는데 남녀가 결혼하는 이유는 돈 때문입니다. 남녀 관계, 부모자식 관계에서 돈 빼면 이야기가 안 돼요. 부부관계도. 일단 돈이 되니까 좋다고 희희덕거리면서 같이 놀러 다니는 거예요. 기본 베이스가 돈입니다. 돈 없는데 왜 삽니까? 말도 안 되는 거거든요. 이 말은 뭐냐? 상대를 볼 때 배우자를 볼 때 내 돈 얼마나 관리 잘 하느냐, 또는 내가 먹고 사는 돈을 얼마나 충당해주느냐? 보이지 않는 돈의 생각, 이미지로 상대하고 한 가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같이 있는 거예요. 돈 벌어줄 때까지만.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를 살리는 방법은 돈 외에 달리 적절한 방법이 생각이 안 나네요. 하나님이 한 푼도 안 보태주니까. 하나님은 돈 보태주는 분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한 푼도 안 보태주니 믿을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돈만 믿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빈다고 들어오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은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해서 있는 돈까지 다 빼앗아갈 요량으로 쳐들어오는 데 그 하나님을 감당하겠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 뜻은 인간을 잡아먹는 거예요. 하나님은 암세포입니다. 멀쩡한 우리를 잡아먹습니다.

죽음과 더불어 있는 하나님, 같은 말로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죽음. 죽음과 함께 있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어요. 십자가지요. 그 다음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죽음, 그것이 바로 영생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돈과 함께 있고 싶지요. 그 말은 현재 있는 내 에너지, 내 힘, 내 목숨과 함께 있고 싶어요. 달리 말해서 나는 힘 있는 나와 함께 있고 싶어요.

이미 범죄 한 인간으로서는 다른 속셈 없습니다. 최후의 속셈은 바로 그것뿐이에요. 힘 있는 나와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 불멸의 존재, 그것 외에는 진짜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솔직하게 그렇게 존재하는 거예요. 내가 힘 있는 신이 되는 것, 하나님 되는 것, 그게 가장 솔직해요. 누구도 나를 개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 그게 인간이 가장 솔직한 겁니다. 그 방법은 돈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여기 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그 다음에 “돈을 사랑하며” 다 같은 말이거든요. ③“자긍하며” ④“교만하며” ⑤“훼방하며” ⑥“부모를 거역하며” ⑦“감사치 아니하며” ⑧“거룩하지 아니하며” ⑨“무정하며” ⑩“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⑪“참소하며” ⑫“절제하지 못하며” ⑬“사나우며” ⑭“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⑮“배반하여 팔며” ⑯“조급하며” ⑰“자고하며” ⑱“쾌락을 사랑하지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⑲“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우리가 그렇게 사는데 어딜 돌아서, 돌아서긴 뭘 돌아서요. 매일매일 이렇게 사는데. 하나둘 셋에서 열아홉까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사람과 대화할 때 이 주제 말고 다른 주제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대화할 때 그게 주제가 된다는 말은 속에 담겨있는 것이 솔직하게 밖으로 표현된다는 거거든요. 그 표현은,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이것을 인간은 매일같이 숨기지 못하고 타인에게 드러냅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타인을 대상화한다. 나의 대상으로 삼는 거예요. 대상의 특징은 거리가 만들어져있다. 거리란 말, 알지요. 내 몸이 있고 대상이 되는 타인의 몸이 내 몸과 앞에 있던지 떨어져있든지 그게 거리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잡아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가 띄어있는 거예요, 안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암세포가 멀쩡한 세포를 잡아먹으면 암세포는 들어와 있지요. 그건 곧 죽음이죠. 하나님이 원하는 건 바로 그거에요.

하나님과 더불어 있다는 말은 곧 너를 죽게 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있으란 말이거든요. 아무리 살려고 애써도 결국은 죽잖아요. 그걸 미리 하나님과 더불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더불어 있을 때는 더 이상 내가 하나님과 있다고 하면 안 돼요. 나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죽음으로 바꾸는 거예요. 또는 죽음의 증거, 죽음의 징후, 징조로 바꾸는 거예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이 죽음, 김 죽음, 최 죽음, 박 죽음이 된다 이 말입니다. 나는 죽은 자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 우리가 죽었으니까 우리 죽음을 통해서 유감없이 발휘가 돼요. 그분이 누구냐?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이 본문에서는 구약에서는 주의 이름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주님을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잠식하려고 하는 거예요. 잠식해서 뭘 얻고자 하느냐? 예수님 자신을 우리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성령 받은 그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죽었음을 늘 인정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 지금 돌이 날아와도 설교하잖아요. 죽은 자가 죽는 게 뭐 이상스런 일입니까, 자연스런 일이지요.

예수님도 그런 말 했거든요. 어떤 제자가 예수님 따라가려다가 갑자기 계획을 변경시킵니다. 다음에 따라갈게요. 왜?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요.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너무나 매정하게 들리지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 지내고 너는 나를 따르라.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다시 말해서 너를 어디서 어디로 끄집어내느냐 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 죽은 자의 입장에서 죽은 자란 표현형에서 이제는 나의 죽음과 같이 죽음의 길 가자. 동행하자. 그러면 그것이 바로 네 목숨 어디 있느냐, 할 때 영생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겁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면 죽인다, 저렇게 하면 죽는다. 나중에는 더 추가가 돼요. 끊임없이 추가가 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의 나라가 둘로 쪼개졌지요. 북쪽과 남쪽으로 우리나라 남북처럼 갈라졌잖아요. 쪼개졌고 나중에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이 먼저 멸망했고, BC586에 남쪽 유다고 멸망하거든요.

그럴 때 그들이 아주 곱게 망했습니까, 아니면 무수한 사람이 죽어서 망했습니까? 무수한 사람이 죽어서 망했지요. 그 죽음에 대해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은 내가 죽인다. 나라 전체가 나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죽인다고 했어요. 그걸 한 사람, 한 사람 다 끄집어내서 저울 달아서 “너, 바알 섬겼지? 죽어라.” “넌 여호와 섬겼나? 그럼 합격.” 이랬습니까? 집단적으로 죽였지요.

이스라엘은 내가 손대서, 바벨론이라든지 앗수르는 몽둥이라 했어요. 이사야에. 몽둥이로 패서 남쪽, 북쪽 나라 멸망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불러내서 착한 것, 빼주고 이런 것 없어요. 그냥 단체로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그럴 때 그들이 우리가 뭐가 잘못해서 죽이느냐고 나오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돼있다는 하나님의 처벌이 먼저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처벌하겠다는 예언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 위해서 그들은 주변에 많은 이방민족들이 포진해 있다가 그들이 이방민족의 잘 사는 면면을 보고 따라갈 수밖에 없도록 유혹을 허락하신 거예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죽는다 했지요. 창세기 2장에 있거든요. 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었어요, 안 따먹었어요? 따먹었잖아요. 따먹었을 때에 유혹을 한 피조물, 뱀이 있었잖아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 뱀을 에덴동산에 들어오도록 허락을 했습니까? 이미 따먹도록 돼있는 프로그램에 의해서 인간은 따먹을 수밖에 없어야 돼요. 그게 피조물의 운명이에요. 안 오십 년 버텼다고 해서 선악과 치워주는 그런 배려 없습니다. 오십 년 버텼으니까 인간답구나. 선악과 뽑아버릴게. 이런 것 없어요. 백년 버텼다고 선악과 치워버리지 않습니다.

백년이 가도 천년이 가도 우리가 칠십 평생 동안 하나님을 모독 안 해도 이 레위기 24장 15절, 16절 말씀은 우리 코앞에서 없어지지 않아요. 여전합니다. 여전히 작요해야 돼요. 그것은 이 모든 성경은 우릴 구원해주는 성경이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돼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 부활을, 그게 복음이거든요. 그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있는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실 때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가, 로 보시면 안 되고 도대체 예수님은 왜 그런 행위를 했을까? 출발을 그것부터 해야 돼요. 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누가 죽어 달라 했습니까, 누가 고생하라 했습니까? 본인이 알아서 죽어놓고 네 책임이라고 하실 때에 그게 하나님의 일이거든요. 자기 아들을 죽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운전할 때 차가 없고 시원하게 달리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요.

주의 일은 복음이 주의 일이에요. 나머지는 다 삭제당해야 돼요. 왜 복음만을 생각 못하느냐 하면, 주님의 죽음 앞에 실은 다른 문제는 문젯거리도 안 되거든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복음 앞에서, 아까 뭐라 했어요? 우리는 이미 죽은 자죠. 최 죽음, 박 죽음, 김 죽음 이미 죽은 자거든요. 주님의 죽음 앞에 이미 죽은 자라는 그 사실 그 유일한 현실 빼놓고 나머진 다 꿈같은 거예요. 헛방이고 허상이고 아무것도 아닌 문제에요.

그런데 아까 제가 읽었던 디모데후서 3장 같은 그런 경우를 보게 되면, 사람이 마지막 때 자기를 사랑하니까 자기 문제가 예수님 죽음 문제보다 더 급한 문제고 더 심각한 문제라고 오인하는 겁니다. 사람이 돈을 사랑하고 자기 잘난 체하니까 자기가 남에게 못나고 창피하게 되는 것이 아주 중차대한 자살할 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착각들 하는 거예요. 시작을 예수님 죽음부터 안 하니까.

교통사고 나서 내가 다리가 부러졌다. 그게 문제돼요? 죽은 사람 공동묘지 파헤쳐서 다리 하나 부러뜨렸다고 해서 시체가 뿔따구 나서, “누구야. 내 다리 부러뜨린 사람.” 이래서 일어섭니까? 죽은 인간 다리 하나 부러졌다고 해서 그게 무슨 고민거리가 되고 눈물 흘릴 일입니까. 내가 남의 돈을 훔쳐서 교도소 갔다. 그게 뭐가 중요한 문제에요. 배고프면 훔칠 수도 있지. 애가 성적이 내려간다든지, 수능 잘못해서 혼자 고민하다 4수한다든지, 4수를 하던 5수를 하던지 그러다가 백수 해서 나이 팔십 돼서 수능 치라 해라. 그게 뭐 그리 문젯거리가 됩니까.

성경이 무거워야 되는데 본인이 너무 무거워. 본인 문제에 시달려 본인이 눌려서 어디서 돌이 굴러왔는지 여러분 옆이 공사 중이었습니까? 자는데 돌이 와서 여러분을 뭉개버리듯이 우리는 매일 삶이 본인이 본인 지키려고 본인 생명 있고 목숨 있다고 우기고 그걸 지키려 하니까 개미 같이 바퀴벌레 같이 기도 못 피고 기어가고 있어요.

골프장에서 캐디 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복음을 알게 되면, 복음을 모를 때는 오늘도 어떤 단골 고객이 나를 성추행하고 얼마나 놀리고 내 신세를 무시할지 그게 고민이 돼서 출근하는 것이 어두워요. 암울해요. 내가 돈만 있으면 이런 짓 안 할 텐데. 돈 때문에. 또 돈타령. 그런데 복음을 아는 캐디 같으면 골프채를 들고 다닙니다. 나한테 걸리기만 해봐라. 머리 부셔버릴 테니. 그게 큰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남한테 왕따 당한다고 하는데 그게 남 문제 아니에요. 전부 다 본인 문제에요. 본인이 주관이 없어서 그래요. 본인이 인생관이 없어서 그래요. 부모가 자식한테 인생관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어요. 부모부터 돈에 벌벌 떠는 그것만 보여줬거든요.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고 돈에 벌벌 떠는 거예요. 돈에 벌벌 떨면서 그 탓은 내가 부모를 잘못 만났다. 내 부모가 재벌이었다면 이런 모욕을 안 당할 텐데. 부모가 나한테 변변치 않아서 이런 모독을 당했다는 겁니다.

내가 결혼하는데 엄마, 아빠는 아파트 안 사주노. 또 돈 문제. 자식과 부모가 돈 문제 빼놓고 나눌 이야기 있던가요? “아이고, 이놈의 자식, 어디서 나왔노?” 어디서 나오긴 본인에게서 나왔지요. 자식은 결혼하면서 아버지,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조그마한 빌라로 만족합니다. 자식이 오히려 빌라라도 괜찮아요.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 되지요.

본인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거는 아버지, 엄마가 나대서 공장 대출 받아서 집 사줄게. 이래서 광산 김 씨 대출 받아서 집 해줬다는 것 아닙니까. “너는 나의 명예야. 네가 못 살면 내가 못 참아.” 그따위 사고방식으론 안 되는 거예요. 그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것에 찌들어 평생을 살아오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요? 대상화. 남을 앞에 두고 자기 옆에 두고 거리를 띄우면서 너희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란 말이야. 나 이정도야. 누가 뭐라 했어요? 본인이 거기에 굉장히 예민해있는 거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그게 바로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훼방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을 모독하고 훼방하는 그 의미를 여러분 잘 아셔야 돼요. 대놓고 하나님 욕하고, 물론 그것도 모독이죠. 난 하나님 안 믿는다. 하나님 앞에 욕설을 퍼붓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신 일을 훼방하는 거예요. 하신 일을 거부하는 거예요. 하신 일이 뭐냐 하면, 자리 만들기. 네가 지금 있는 자리 누가 만들어줬느냐? 자리 만들기에요.

이스라엘 자리를 누가 만드십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그럼 하나님이 만든 자리는 어떤 자리에요? 인간이 우선입니까, 말씀이 우선이에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에게만 이렇게 계속해서 벌칙을 내리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특별한 민족이다. 특별하다는 말은, 다른 민족은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인 줄을 꿈에도 몰라. 하지만 너희들은 알아.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새롭게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을 너희들만 경험한 거잖아. 그럼 경험에 담긴 의미가 뭐냐? 인간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고린도후서 5장에도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이렇게 나와 있지요. 그리고 15절에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은 뭐냐? 자기를 위해 사는 자는 무조건 죽은 자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자는 무조건 산 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럼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라는 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은, 내 몸은 이미 죽은 몸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활용당하고 있는 중이란 말이죠. 죽고 싶어도 이 몸은 못 죽어요.

주께서 활용하는 몸이기 때문에 몸이 아프든지 건강하든지 돈이 있든 없든 간에 그거는 내 문제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거든요. 하나님이 적절하게 필요해서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건강하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고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의 예언처럼 그렇게 하나님께서 활용해주시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더 이상 하나가 된 이상은 하나님을 대상화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대상화하면 어떻게 되느냐?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은 여기 내 자리가 마련돼 있는 거예요. 이것은 내 것이 되겠지요. 아까 거리가 있다고 했지요. 거리를 띄워야 대상화된다. 화가가 그림 그릴 때 그림판과 화가가 거리를 두고 있잖아요. 손대서 그리잖아요. 화가가 정물화 그릴 때는 정물과 화가의 눈이 떨어져 있잖아요. 그게 대상화란 말이죠.

대상화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으면 이건 하나님의 것이 되겠지요. 내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돼있는 이상은 이미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공통의 자리가 아니잖아요.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면 그건 이스라엘이 아니지요. 그냥 이스라엘 속에 있는 박물관을 하나님을 모셔두는 거죠.

성령이 왔다는 것은 더 이상 예수님이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왔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마음이 왔다. 예수님의 마음이 온 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두 자로 ‘은혜’라고 하거든요. 은혜란 말은 항상 목표가 뭐냐 하면, 너는 죽었고, 이것을 확인해주는 게 은혜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상 나만 생각하게 되면 나한테 나오는 것은 전부 다 고민거리고 걱정거리에요. 돈이 많더라도 더 갖고 싶은 내 욕망이 있고 이미 가질 때는 좋아하지만 이건 며칠 안 가요. 새 집 입주할 때 두 달간은 기쁘겠지요. 석 달 이후에는 이게 마땅하고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고요. 감사의 폭이 휘발성이 있어서 감사가 날아가 버렸어요. 마치 새 집 들어올 때 무슨 냄새 나던 것이 삼 개월 지나면 그 냄새 다 날아가는 것처럼. 은혜를 줘도 고마운 줄 모르는 거예요.

그럴 때 다시 한 번 주께서 은혜를 줘버리면 이 집이 내 자리가 아니고 주님의 명의로 돼있다는 사실, 주님이 주님 닮기 위해서 이 집에서 나로 하여금 내가 하는 계획, 나의 스케줄, 나의 시나리오, 나의 모든 어떤 목표 같은 것을 주께서는 완전히 개 무시하고 없애버리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사람이 계획이 있으면 그 계획 때문에 조마조마하고 가슴 졸이고 그래요. 어쩔 줄 몰라서 벌벌 떨고. 벌벌 떨고 가슴 졸이고 걱정된다는 말은 주님에 대한 감사가 이미 날아가 버린 거예요. 감사가 날아가 버린다는 것은 이 집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되는 거예요. 내 것이 되면, 내 것 앞에 있는 모든 것은 대상화되면서 주님이 주신 은혜를 모독하게 되고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뭐라 했습니까? 주의 이름은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있을 경우에 인간이 잘난 체하는 것을 주께서 죽은 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함께 나타나신 그분이 주의 이름이거든요. 하나님이 죽일 리가 있습니까. 하나님 대신 이 땅에 와서 죽은 분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만나면 죽여 버려요.

죽어야 되는데 죽은 자를 주께서 거둬줄 때 그때 그냥 거둬주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유지된다는 조건 하에 주의 이름과 함께 사는 조건 하에 우리를 살려주시는 겁니다. 그냥 죽을 때 혼자 죽고 살 때도 혼자 사는 게 아니에요. 죽을 때 혼자 죽더라도 살 때는 주의 이름과 함께 죽으면 그게 함께 살리라가 돼요.

아까 처음에 질문이 뭡니까? 당신의 생명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의 목숨이 어디 있습니까? 주 안에 있지요, 뭐. 주님 안에 있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하늘나라에 있어요. 하늘나라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 안에 있어요. 주님 안에 있으니까 내 안에 생명 있다고 자꾸 묻지 말라. 짜증난다, 정말. 주님 안에 있어.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생명이다, 라고 답변하게 되지요.

그러면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그다지 심각한 문제 아니고 중차대한 문제도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이 죽으셨고 다시 살았다는 그 복음이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한 걸 기준으로 해서 인간을 네 가지 유형으로 제가 임의로 나눠봤어요. 인간 삶의 네 가지 유형. 첫 번째는, 악착같이 살려는 자. 99.999%에요. 두 번째는, 살려고 애쓰지 않는 자. 겉으로는 이런 사람이 많은데 건드려보면 2번에서 1번으로 가버려요. 겉으로는 빈 말로 요양병원에 가면 이런 사람들 많아요. “나, 나이 95이다. 죽으란다.” “오늘부로 어머니 밥은 없습니다.” “너, 죽을래.”

세 번째는, 죽음을 목표로 사는 사람. 이 더러운 세상, 너무 괴로워서 못 살겠다. 콱 죽었으면 좋겠다.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죠. 네 번째는 뭐냐? 이미 죽은 자. 1번부터 3번까지는 사는 게 힘들어요. 왜? 3번 같은 경우엔 목표가 있으니까. 살려고 애써봤자 2번이 되려고 해도 몸은 자꾸 1번을 추구하니까 이건 또 갭이 있어서 힘들어요. 그러나 이미 죽은 자는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29) 19-12-09 11:45 
20191206b 울산강의-레위기 24장 : 죽는 이유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죄라는 것 또는 하나님 모독이라는 것은 대상화로부터 생겨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 나오는 살인 같은 것도 너의 자리와 나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고, 뒤에 나오는 폭행이란 것도 남을 손상 입히는 것도 나의 자리와 너의 자리가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자리는 어디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는 너의 자리, 나의 자리 구분이 없습니다. 왜? 둘 다 죽은 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이 땅에 죽음의 자리를 만들고 그 죽음의 자리가 하나님에 약속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 아들마저 그 죽음의 자리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몽땅 다 죽어 마땅한 고장, 영역이라는 사실, 그런 공간이라는 사실을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일을 벌이신 거예요.

그래서 이 땅의 정체,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주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에 본질을 드러내주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마땅히 죽어야 된다는 사실을 마음껏 발휘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대표적으로 성경 초기에 들어가면 아벨이죠. 노아도 그렇고 아벨도 그렇고.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선진들 리스트가 쫙 나오는데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아벨이죠.

살아 있는 아벨을 죽게 하는 그 원칙을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로 결속된다는 것이 히브리서 이야기, 성경 내용이에요.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뭘 하면 되느냐? 그냥 우리가 처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나는 게 아니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 결국 죽이시는 이유는 살아 있음과 그리고 죽어 있음이 어느 쪽이 하나님 앞에 진리냐 하면, 예수님이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진리가 되겠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뭡니까? 살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죽기 위해서 오신 이쪽 편에 속한 자가 바로 진리에 속하고 믿음에 속한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진짜 아담이거든요. 나머지는 죄 지었던 첫째 아담이고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 그리고 두 번째 아담, 진짜 아담이란 말이죠. 하나님 보시기에 유일한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진짜 아담을 증명하기 위해서 진짜 아담이 아담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간이 악마로 하여금 자기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고 우기게 만든 것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산 사람들이니까 살아 있다는 고유의 힘들이 있겠지요. 고유의 자기 자리가 있겠지요. 자기 자리가 있으니까 자기 자리 전체를 자리를 위한 힘이라고 보고 힘과 힘의 충돌에서 뭐가 생기는가? 폭행과 살인 같은 것이 벌어지는 거예요. 죄가 되는 거예요. 간음이 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게 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걸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 자리가 있으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대상화시키는 거예요. 거리를 두고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한다면서 자기 자리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 자리를 도와달라고 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은 무슨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이미 하나님은 죽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어린양의 표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제사의 취지가 그거잖아요. 이러면 굉장히 간단하지요.

문제는 뭐냐 하면, 살아 있는 이 죄에서 어떻게 주님의 자리에 올 수 있는가? 여기는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배신이 필요해요. 자기가 자길 향한 배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배신 해봤습니까? 자기 자신이 배신이 안 되지요. 손해 안 보려 하잖아요. 왜? 내가 실망하니까. 손해 보면 내가 바보 같으니까. 바보 되기 싫거든요.

그런데 이미 죽은 자에게는 어떤 개념이 해당이 안 되느냐 하면, 바보 같다, 등신 같다, 손해 봤다, 망했다, 실패했다는 게 이미 죽은 자에게는 이게 전부 다 해당이 안 되는 개념들이에요.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죽음보다 더 확실한 현실은 없습니다. 나머지는 현실이 아니고 망상들이에요. 잘났다, 출세했다, 성공했다, 건강하다. 전부 다 망상입니다.

나이 구십 아홉 되서 잘났다, 건강하다 해보세요. 젊은 사람들이 웃지요. 나 구십 아홉인데 아직도 뛴다, 마라톤 한다. 기록이 어떻게 되십니까? 17시간 25분. 적어도 2시간 6분대에 들어가야 되지 17시간 이래서는 기어가는 거지 이게 무슨 마라톤이에요. 하룻밤 자고 가겠다. 인간은 자기 기록에 대해서 어째 그렇게 자기 우호적인지. 인간은 자기 배신 못합니다. 자기 연민이 너무 강해요. 이걸 자기 애착이라 할 수 있는데 자기 애착, 자기 연민. 헤어져도 꼭 저쪽에서 안 찼어. 내가 찼대. 이혼해서 내가 먼저 찼대.

이렇게 인간들이 자기 애착, 자기 연민에 빠져서 결국 자아도취에 빠진 거거든요. 자아도취에 빠져서 이게 정신병 된다고 정신분석학에선 이렇게 진단하고 있어요. 모든 정신병은 자아도취에서 되는 겁니다. 자아도취라는 것은 자기를 둘러싼 그 현실에 대해서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데 본인은 현실에 대해서 해석을 해요. 해석을 할 때 동원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걸 언어에요. 말. 언어가 자기가 아는 개념 또는 의미가 주어진 현실을 자기한테 그냥 해석이 아니고 일방적 자기를 위로하는 해석으로 해버린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보고 예수님을 죽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짓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한 짓이 이 짓이에요.

모세율법을 들고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들은 지금 건전하다, 아무 문제없다. 우리들이 문제없다는 말은 우리를 욕하는 이방민족은 필히 멸망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신다. 이런 식으로 해석한 거예요. 특히 시편 대목으로. 여러분, 혹시, 혹시 시편 보신 적 있습니까? 혹시 보시게 되면 일방적으로 뭡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하지요. 그 ‘나’에 본인들을 대입해버린 거예요. 이거는 신앙인들의 고백이다. 그러면 신앙인은 누구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내가 신앙인이다. 따라서 시편은 나에 대한 시편이다. 거기서 나온 것들이 찬송가잖아요.

그러나 사도행전에 2장에 보면 시편은 누굴 위해 쓰인 시편이냐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쓰인 게 시편이에요. 성경 전체가 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위해 썼기 때문에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사람에게 미움 받은 예수님이거든요. 사람에게 미움 받은 예수님이라면 시편에 나오는 원수라는 것, 다윗의 원수라는 것은 결국 누굴 이야기합니까? 모든 인간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성경이란 언어로 개념을 가지고 자기위주로 하는 거예요. 자기위주의 극치가 뭐냐? 나,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구원에 대해서 자기와 결부시켜버립니다. 첫째 시간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은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죄인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우리 자신을 의인으로 몰아가면 안 되고 죄인으로 몰아가야 예수님의 생각과 합치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본성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지요. 아까 디모데후서 3장에서 자긍하며 나오지요. 자기를 사랑하며 그 다음에 교만하며 자긍하고 나오지요. 교만하고 자긍한다는 것의 공통점은 뭡니까? 나는 나를 지키는 쪽으로만 모든 태도가 나오고 생각이 나오고 행동이 그렇게 나온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지요.

그렇다면 내 중심을 못 떠난다면 방법은 뭡니까? 내가 나를 배신해야 되는 거예요. 왜냐? 평소에 육체의 자연스러운 본색은 내가 승자가 되고 패자가 되지 않는 쪽이지만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나로 하여금 주님 앞에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는 죄 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을 게 없는 인간인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왜 평소에 감사 못합니까? 너무 생각이 내 수준을 높여서 그래요. 나 이 정도 돼야 성에 차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께서는 어디까지 낮춥니까? 예수님의 죽기까지 낮춰버리면 밥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과분한 일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맨날 세 끼 밥 다 해내라 하고 지는 라면도 못 끓이고. 그러면 안 되고 자기를 낮출 때에 상해죄, 폭행죄, 살인죄, 하나님의 이름 모독,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지요.

천하제일 못난 게 자기 자신인데 어떻게 화낼 여지가 없잖아요. 지금 존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한다면 누구한테 분노하거나 누구한테 그 분노를 폭발할 일 없지 않습니까. 왜 팼느냐? 술김에 팼다. 술을 왜 먹어요. 왜 그랬습니까? 필름이 끊겨서 그랬다. 술 먹어서 내가 욱하는 성질에 그랬습니다. 왜 술을 먹어요? 자기를 낮추려고 술 먹습니까, 높이려고 먹어요? 세상 더럽다고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과장 놈이, 부장 놈이. 더러워서 회사 때려치우지 하면서 퇴근하고서 한 잔 한다고요.

내가 염두에 두었던 그 수준이 타인들에 의해서 짓밟힐 때 모욕감을 느끼고 그 모욕감을 빠른 시간 내에 회복하기 위해서 가까이에 있는 술병을 당기는 거예요. 이걸 지난 낮 설교에 연속성이라고 했지요. 할 수 있는 것, 할 수만 있다면 나를 높이고 싶은 거예요. 디모데후서 3에 보면 자긍하며 교만하며, 라고 돼있지요.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토는 뭡니까? 자존감을 가져라. 자긍심을 가져라. 어딜 가도 줏대를 놓치면 안 돼. 부러질지언정 꺾이면 안 돼. 이런 것.

참, 마귀가 웃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을 모으는 이 방식은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에요. 오직 마귀가 인정하는 방식입니다. 첫째 시간 10분 쉬니까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외우는 셈 치고 합시다. 네 가지 타입이 있다. 네 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지요. 첫 번째 뭐라고 했습니까? 악착같이, 이것 들어가야 돼요. 악착같이 살려는 사람. 두 번째 뭐라 했어요? 살려고 애쓰지는 않는 타입. 세 번째는 뭐라고 했습니까? 10분이란 시간이 그만큼 길어요. 죽음을 목표로 하는 것. 네 번째 타입은 뭐라 했습니까? 이미 죽은 자.

1번부터 3번은 아무리 애써도 결국 1번에 다 달라붙어요. 죽음을 목표로 한다 해도 결국은 건드리면 이건 자기 말뿐이고 실제 몸은 1번을 벗어날 수 없어요. 악마가 우리 몸을 그런 식으로 훈련시켜놨기 때문에 악착같이 사는 방법 외에 다른 생각이 일체 들어있지 않습니다. 괜히 이론상 성경 보고 그럴싸하게 신앙인 티, 신앙인 척 흉내 내고 모방하는 것이지 1번밖에 없어요. 그래서 1번에서 4번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4번 된 사람에게 이야기합니다. 4번 된 사람의 특징은 뭐냐? 나는 매일 나를 배신하는 거예요. 그것도 억지가 아니라 즐겁게. 그러면 나를 배신하는 방법은 평소에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내가 다른 사람한테 어떤 힘을 빼어보기 위해서 강제로 빼어오든지 아부해서 빼어오든지 뇌물주고 비굴하게 고개 숙이고 빼어오든지 하여튼 간에 인간은 남의 힘을 뺏어서 내 힘 만드는 그것 외에는 다른 아이디어가 없거든요. 사는 방법이.

그런데 이미 4번이 된 사람은 뭐냐 하면, 인간을 피하는 방법이죠. 사람과 엮이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나를 배신하겠다는 뜻이거든요. 나를 배신 안 하려면 남을 이용할 타인들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배신 안 하는 방법은, 사람을 피하는 방법은, 자기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순간순간이 내가 자체로 죽은 자인 것을 인식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살아 있다면 더 살기 위해서 뭘 해야 되는데 충분히 죽어 있다면 구태여 남을 이용할 생각 없잖아요.

그런 삶을 산 사람들이 성령 받은 사도들이에요.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이었고. 그 사람들은 국가가 뭐라 해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실라와 바울은 옥에 갇혔을 때,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는 깊은 단잠을 잤고,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을 때 도리어 찬송했어요. 둘 다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옥에 오래 있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리고 둘 다 탈출하려고 애쓰지 않았다는 겁니다.

베드로 같은 경우는 천사가 옥문을 열고 나가라고 이야기했고, 바울과 실라 같은 경우에는 옥문이 열려서 다른 죄수들은 다 갔는데 그들은 바깥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마찬가지라고 앉아 있었던 거예요. 그 이유가 있었어요. 옛날에는 죄수 풀어주면 간수가 목숨을 자기가 갚아야 되니까 스스로 자결하려고 했을 때 말리기 위해서 있었던 거예요. 어찌할꼬? 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유명한 사도행전 16장 31절 말씀이 거기 나옵니다.

그럴 때 그 대목에서 간수가 왜 자살하려고 했는지 깊이 생각해보세요. 오늘 본문과 더불어서. 간수가 왜 자결하려고 했을까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죠. 간수가 왜 죽으려고 했을까요? 인간이 자기 자리가 확보돼있으면 그 경계선 바깥에는 다른 사람, 타인이 있다고 했지요. 항상 남들이 나를 어떻게 바보로 보지 않을까, 나를 병신으로 보지 않을까, 나를 잘났다고 보지 않을까? 항상 타인을 의식해서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내가 행동에 나서지요.

학교에서 학생들 시험 치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가 문제 내고 자기가 채점합니까? 아니지요. 채점은 선생님이 내는 거니까 많은 점수를 받아야 평소에 내가 살아온 것처럼 남들에게 인정받는 그것이 가장 나다운 거예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남이 인정해주는 그것이 나거든요.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나가 한 개가 아니고 나가 두 개에요. 나가 두 개로 돼있다고.

이미 이걸 정신분석학에선 정신병으로 보는 거예요. 자아가 분열돼있는 거예요. 자아와 주체로 분열돼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거기에 맞춰주려는 것을 주체라 하고, 내 욕망이 너는 이렇게 돼야 돼, 내가 호소하는 걸 자아라고 하는 거예요. 실제로 있는 것은 자아도 없고 주체도 없고 뭐만 있느냐? 몸뚱이만 있는 거예요. 정신분석학에선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이 자꾸 가졌든 못 가졌든 배웠든 못 배웠든 인간은 왜 정신병자냐 말이죠. 왜 초연하게 못 사느냐는 말입니다. 왜 세상을 초연하게 못 사느냐? 그거는 홀로 살기 때문에 초연하게 못 살지요. 홀로 살면 홀로 살아야 될 것 아닙니까. 말로는 홀로 산다고 청도나 지리산이나 들어가 놓고 계속해서 남들을 의식하는 거예요. 끊임없이 소식 전하고. 우리 아들 사우디아라비아 가 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소식 전하고 소식 받고. 이게 뭐냐 하면, 나의 나다움, 평소에 살아왔던 모든 것이 그런 거예요.

“아이고, 아들 장가보냈습니다. 딱 떼놨습니다.” 떼놨으면 아들 낳든지 딸을 낳든지 관심 놓아야 될 것 아닙니까. “너희 아이 생겼느냐?” 아이 생겼는지 왜 묻습니까? 엄마가 떼놨으면. 이것은 바로 주체라는 것과 자아라는 것이 하나로 묶어져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주체가 변변치 않을 때 자아가 살 힘도 없고 여력이 없을 때 여기서 뭘 택하는가? 자살을 택하지요. 죽어 버립니다. 이런 식으론 수치스러워 못 살겠다. 차라리 내가 콱 죽으면 되지 않겠느냐.

크리스마스트리라는 이름을 가진 혜성이 길이가 800미터, 폭이 500미터짜리가 지금 지구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충돌할 가능성은 거의 없데요. 그것과 충돌하게 되면 지구멸망이죠. 충돌 소식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걸 다행이라고 여기지요. 그런데 그걸 다행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의 글이 있어요. 이참에 너 죽고 나 죽자. 왜? 나는 통장에 120만 원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람 있습니다.

아이고, 꼬시다. 잘 됐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또 그 사람은 외부에 있는 현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거예요. 남들은 120만 원 이상 있는데 본인만 120만 원밖에 없어요. 그러면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통장에 50억 있는 것과 120만 원 있는 것은 숫자에 불과하거든요. 한 번 적어볼까요. 1,200,000원 있다. 5,000,000,000 있다. 숫자에 불과하잖아요. 보세요. 그냥 숫자잖아요. 120만 원 있다고 오줌발이 약해지고 그런 것 없잖아요. 그냥 숫자에 불과하단 말이죠.

그러니까 정신병을 연구하는 정신학회에서는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숫자에 불과한데도 벌벌 떨고 있는 이유가 뭐냐? 이거는 남들에 의존하는 인간의 주체의식이 인간의 자아를 통제하고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요. 그 사람들은 악마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기껏 밝혀낸 게 인간은 주체가 있는데 이게 허당이다, 허구다. 그래 보는 겁니다.

중들이 동안거 들어가요. 동안거는 겨울에 홀로 있겠다고 들어가는 거예요. 한 번 보세요. 동안거 할 때는 조그만 틈이 있어서 밑에다 밥만 넣어주고, 안에 화장실 구비돼있으니까 밥만 넣어주고 점 하나 찍고 그것 들여다보며 하루 종일 도 닦는 거예요. 부처가 되겠다고 모든 욕심을 버리고 자아마저 없애버리겠다고 아주 독을 품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언제까지 한다고요? 삼 개월 겨울동안 하거든요. 그럼 그 사람들의 무한대로 합니까, 삼 개월만 합니까? 삼 개월 하잖아요. 보세요. 시간에 얽매었잖아요. 일종에 자살 아닙니까. 뭘 도를 닦아요. 미친 짓이지요. 정신병자들이에요. 전부 다.

인간을 자기를 배신할 수 없어요. 자기를 포기 못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작용합니다. 이래도 배신 안 할래, 이래도 너한테 의지할 만한 것이 남아 있느냐, 라고 계속해서 갉아먹고 잡아먹고 찾아와서 들볶고 말씀으로 귀찮게 하고 억압할 때 그게 주의이름이 하시는 일이에요.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이런 네가 의로우냐? 주여, 맞습니다. 죄 맞으면 네가 살고 있는 것도 감지덕지하고 고마워해야지 의인도 아닌 주제에 그만큼 살았으면 됐지 뭘 그렇게 불평이 많으냐, 라는 방식을 지금 레위기에서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게. 율법이 여기는 상해죄, 살인죄,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만 나와 있거든요. 그러나 들어가게 되면 점점 더 추가가 돼요. 계속 추가가 된다고요.

하나님과 함께 전쟁할 때는 전리품들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그러한 조항이 있거든요. 민수기에 보면 나와요. 그렇게 민수기에 나와 있을 때 사람들은 그러면 승리하면 하나님께 드리면 되지. 전부 다 자기 일이 아닌 듯 여겼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여호수아에 보면 아간이란 사람이 등장하지요. 아간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여호수아 7장에서.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여러분이 맞춰보세요. 하나님의 전리품을 숨긴 자가 누구지요? 아간이지요. 그리고 난 뒤에 작은 성 아이 성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그냥 공격했어요. 너무 작으니까. 했는데 몇 명 죽었느냐 하면,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아이 사람이 그들의 삼십 육 인쯤 죽이고” 여기 죽은 사람은 무슨 죄로 죽었습니까? 이게 제 문제입니다. 36명이 죽었어요.

그 사람들 무슨 죄로 죽은 거예요? 본인들이 외투 숨긴 적 없어요. 하나님의 전리품 받아 챙긴 적 없습니다. 그런데 서른여섯 명이 죽었어요. 그 가족들까지 계산해보세요. 백 명 이상이 슬퍼하게 됩니다. 누가 이렇게 슬퍼하게 했습니까? 이 문제 어려운 문제에요. 누가 이야기해보세요. 왜 이 사람들 죽습니까? 첫째 시간부터 이야기했습니다. 정답은? 첫째 시간부터 했는데 다시 해야 됩니까?

이 사람들 왜 죽습니까? 처음부터 이 사람들은 죽었던 자에요. 아간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 마세요. 여호수아가 교만해서 죽었다고 하지 마세요. 죽음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라 했잖아요. 하나님과 있는 죽음이라 했잖아요. 첫째 시간에 말씀드렸지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만 살아도 할 말 없는 사람인데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우리 살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남아있는 거예요.

레위기의 이 말씀은 어디를 통과하는데 유효하게 쓰여지느냐 하면, 광야입니다. 레위기 자체가 광야에서 주신 말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말씀입니다. 광야란 환경을 생각해봅시다. 광야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광야란 환경은 뭐냐 하면, 약속이란 경험하지 않더라도 아는 것이어야 돼요.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님 말씀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질 것이라고 아는 것, 또는 믿는 것, 또는 그 사람 안에 이미 현실화된 것, 이게 바로 약속이거든요.

약속이란 경험하지 않더라도, 라고 돼있지요. 그러면 인간이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반드시 뭘 하냐? 경험을 통과해야 믿을 것이 만들어져요. 인간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약속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거예요. 광야에서 들어간 사람이 두 사람밖에 없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갈렙과 여호수아가 정탐을 했는데, 아까 제가 강의한 걸 생각해보세요. 인간들은 어떤 주어진 상황을 해석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개념을 동원해서 해석한다 했지요. 그러면 인간이 어떤 해석을 통해서 내가 지금 내 안에 나는 어떤 마음 상태인 것을 그대로 폭로당하고 발각당하는 계기가 되는 거죠.

약속의 땅에 들어가 보니까 정말 젖과 꿀이 흘러요. 문제는 그것이 그들의 것이 절대로 되지 못하고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눈으로 온 몸으로 체험을 한 겁니다. 가질 수 있음을 체험했다, 안 그러면 못 가질 것을 체험한 겁니까? 못 들어간다, 못 가진다는 것을 체험한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못 들어간 사람이 된 거예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이게 왜 어려운지 아시겠어요?

아까 첫째 시간의 어려운 것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니까 처벌하신 게 아니고 처벌이 먼저 있고 그 처벌이 왜 정당한지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죄를 짓게 돼있다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이게 우리 현재 인생 경험상 체득되고 체감됩니까? 지옥이 있는 이유는, 죄 지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지옥 가는 사람을 분류하기 위해서 지옥이 있는 거거든요. 그러면 천국은 내가 예수 믿고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아서 가는 게 아니고 천국을 위하여 우리는 간택된 거예요. 뽑혀 나온 거예요. 일방적으로.

천국 가는 데 우리가 할 게 남아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예 남아있지 않지요. 이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천국 개념과 이 개념이 서로 일치가 안 되는 거예요. 뭔가 해야 될 것 같아.예수를 믿든지 뭘 해야 될 것 같아. 주님이 구원한다는 것은 누가 반대하느냐 하면, 내가 구원받아야 되겠다는 나의 의지지 반대해요. 온 천지가 구원파 아닙니까. 한국교회 전체가 구원파거든요. 구원파 모토가 뭐예요? 아무것도 안 하면 천국을 못 들어간다는 것 아닙니까.

그게 지옥 가는 사람들에게 먹혀들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그런 교회들을 허락하신 거예요. 너희들이 아는 천국은 악마가 조장한 거짓 천국이고 그런 거짓 지옥인 것을 주께서는 티내기 위해서 지옥 보내기 위해서 교회를 만드신 거예요. 얼마나 주께 우리가 감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로 성령이 아니면 옛날에, 옛날에 속아 넘어갔어요. 십오 년 간 십일조 했다. 한 번도 안 빠졌다. 부도나도 십일조 했다. 그런 것 있잖아요.

십일조를 하라는 말은 그게 구원과 아무 의미가 없음을 뒤늦게 체험하는 거예요. 주의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요지가 돼야지 내가 했다는 게 요지가 되면 안 됩니다. 요점이 되면 안 되거든요. 인간이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은 누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가 죽어서 좋은 나라 가는 이 사실이 더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이 누구냐는 그보다도.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 이게 바로 정신병, 악마가 만든 정신병이에요.

요한복음 21장 마지막에 보면, 베드로가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간다고 할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보니까 자기 옆에 요한이 있거든요. 그때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고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나 잘하세요. 남이야 어떻게 되든 너나 잘하세요. 왜, 편하게 노니까 너보다 팔자 좋은 줄 알아? 대상화시킨 거예요. 자기와 사도 요한을 경쟁 라이벌로 여기는 겁니다. 대상화시킨 게 죄가 되는 겁니다. 대상화시켰다는 말은 천상천하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그만 노출시킨 거예요.

다시 광야로 돌아가 봅시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체험케 하시는데 어떤 체험이냐 하면, 네가 약속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세상 돌아가는 것과 네 생각에 전혀 안 맞는 것처럼 내가 그렇게 몰아넣을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믿음의 삶과 실제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하나의 공통점도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너의 믿음을 네가 배신할 줄 알아야 된다. 나의 소망과 사랑과 믿음을 내가 배신할 줄 알아야 돼요.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약속은 내가 이룬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룬다는 것을 믿어야 돼요. 나와 상관없이. 다만 그 사실을 나를 통해서 드러낸다는 것뿐이에요.

자, 광야가 왜 있어야 되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광야에서는 그들을 어디까지 낮추는가? 신명기 8장 봅시다. 낮추는 이야기를 또 제가 해야 될 이유는 오늘 본문의 범죄 자체가 마음이 교만해서 생긴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디까지 낮아져야 되느냐 이 말 아닙니까. 거기에 대해 광야 언급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 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고 너로 주리게 하시며” 나오지요.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이유는, 만나의 취지와 광야의 환경이 딱 들어맞는다는 말이거든요. 만나의 취지가 뭐냐 하면, 만나는 농사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냥 한 푼 주세요, 와 똑같은 거예요. 빌어먹는 거예요. 인간이 농사짓게 되면 여분의 것 생산물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거지나 노숙자는 빌어먹기 때문에 내 것이 없잖아요. 나의 자리도 없고 나의 영역이 없단 말이죠.

그럼 어디까지 낮아져야 되느냐, 광야에서. 빌어먹어라. 매일같이. 한 달 수입, 한 천오백만 원 정도. 집은 이백 평정도. 그것조차도 빌어먹는 레벨이라고 봐라. 나한테 어떤 수준이 오더라도. 진짜 빌어먹는다고 해서 돌아다니지 말고. 내게 준 어떤 것도 이게 광야에서 빌어먹는 수준이란 말이죠.

마음을 낮추게 되면 내 것이 없으면 오늘 본문 레위기 24장에 나오는 누굴 치거나 분노하거나 화를 낼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자기 것이 없으니까 내 것을 침범한다고 상대방을 공격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 것이 있어야 침범이고 자시고가 있지요. 나는 이미 죽은 자인데. 죽은 자인데 그냥 죽었으면 좋겠는데 죽이지 않고 계속 주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살려내는 거예요.

그러면 자, 약속입니다. 살려냈으니까 내가 납니까, 죽은 내가 납니까? 죽어 있는 나가 그거지요. 그러니까 경험하지 않은 것, 아직 안 죽었으니까 경험하지 않은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약속이다, 복음이란 말이죠. 내가 안 죽었지만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 이 경험이 나를 죽은 것으로 경험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성령의 해석입니다. 주님이 함께 있는 해석이 되는 거죠. 미래에 대해서 초조하거나 불안해하거나 과거에 대해서 특히 후회하지 마세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 살인하지 말라 할 때 같은 성도들끼리 인간은 인간과 싸우니까 같은 이웃끼리 성도끼리 형제끼리 이렇게 살인하지 않는다는 말을 신약에선 살인의 반대말을 했어요. 살인의 반대말은, 네 가지 타입이죠. 살인의 반대말은 안 죽인다. 두 번째, 안 죽이고자 노력한다. 세 번째, 안 죽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네 번째, 이미 용서했다. 몇 번입니까? 4번이죠. 4번입니다. 4번이에요.

1번부터 3번까지는 이게 자기 의가 되어 높아져요. 나 이정도로 잘났다, 믿음 좋다. 자기 의로 높아져요. 이거는 자기가 굳어지게 되면 예수님마저 대상화되죠. 대상화되면 주의 이름 모독하는 게 되니까. 나 이렇게 믿음 좋은데 왜 믿음 없다고 하느냐? 다시 뭐가 일어나요? 분노가 일어나요. 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이미 용서한 거예요.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제발 강의나 설교 시간에 대중가요하지 말라고 당부하는데 대중가요 안 하면 내가 의인되는 겁니까?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란 노래에 보면, 우연히 옛날 헤어진 남자를 만나지요. 우는 거예요. 나, 너 떠나보내고 얼마나 후회한지 모른다. 과거를 생각하면 너한테 잘못 많이 했어. 그럴 때 여자가 어깨를 두드리면서 벌써 용서했노라, 하잖아요. 집에 가서 들어보세요. 벌써 용서했단 말이죠.

과거에 얽매인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높아졌다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말씀으로 낮아졌다는 것은 내가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이미 죄인 중에 괴수가 된 입장이고 죽어야 마땅한 존재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내 볼 일을 찾는다든지 내 주장을 부릴 수 있는 그런 입장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약속이란 내가 경험하지 않지만 이미 현실이 된 게 약속이거든요.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약속을 믿는 게 아니고 약속이 이미 와버렸단 말이죠. 약속이 약속대로 파급되고 퍼져있는 거예요. 그러면 약속 앞에 십자가 앞에 나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건 앞으로 처벌이 있고 죄를 짓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 다음부터 계속 우리로 하여금 그걸 평생토록 경험케 하실 거예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게 없다고.

여러분들이 약속을 알았고 주님의 용서를 알았다면, 여러분들의 지난날을 생각해보세요.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 남이 잘못했다고 얼마나 탓을 했습니까? 부부나 가족에 대해서. 내 딴에 자식 잘 키웠다고 자부했는데 완전히 자식을 개판으로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지요.

끝으로 한 말씀드릴 것은, 그러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나의 것이 아니라면 뭐만 있느냐? 사명만 있어요. 내 것은 없고 사명이 있기에 그 사명이 나를 다시 한 번 쪼가리, 쪼가리 진 것을 하나로 뭉치게 합니다. 이 집과 너의 현재 목숨과 생명은 너를 위함이 아니고 네가 해야 될 사명과 관련돼있다.

사람이 사명이 없으면 은퇴하면 심심해서 우울증 걸려요. 퇴직해서 등산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중엔 관절 아파서 올라가지 못해요. 해야 될 일이 없어. 그러나 성령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해야 될 일을 알려주면서 이제는 이미 죽은 몸이니까 이것을 위해서 네가 매진해야 되지 않느냐고 주께서 우리에게 지시를 내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전하는 사명 감당하게 하옵소서. 그들이 세상이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든 어떻게 태도가 달라지든 관계없이 우리는 주님이 하는 대로 주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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