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울산강의
2020-02-07 22:55:53 조회 : 199         
생명의 주기 레위기 25:4 200207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A-MzAJzoAEE"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iframe width="56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gbM-v3guH58"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allowfullscreen></iframe>

 한윤범(IP:119.♡.174.200) 20-02-10 17:41 
20200207a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생명의 주기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5장,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너의 곡물의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고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나무의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1~5절)

땅에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새겨 넣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땅이란 전적으로 인간이 주도적으로 자기를 위한 땅이 될 수 없겠지요. 땅을 산다는 것은 곧 땅에 하나님이 심어준 것을 건드린다는 겁니다. “야, 땅이다. 내가 알아서 해야지.” 이게 안 되고 건드리게 돼있어요.

그러면 땅은 누구한테 복속 또는 소속이 돼있습니까?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 소속돼있기 때문에 만약에 안식년을 지키라. 6년 동안 일하고 1년 동안은 땅을 완전히 푹 쉬게 하라. 여기에 만약에 도전하거나 반발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드는 셈이 되겠지요. 그래서 이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이란 것은, ‘약속+땅’이겠지요. 그러면 이것은 어떤 땅과 차이가 있느냐 하면, 약속이 없는 그냥 땅과 차이가 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은 어디와 관련돼있느냐 하면, 아담도 따먹지 못한 생명나무, 생명과 관련돼있어요. 그러면 약속이 빠져있는 보통 땅은 어디와 관련돼있느냐 하면, 선악의 저주, 선악의 죽음과 관련돼있는 땅이 약속 없는 땅입니다.

그러면 이게 땅이라면 약속이 있든 없든 간에 인간의 눈에는 뭐만 보이느냐? 땅만 보이겠지요. 땅에서, 울산이라 합시다. 울산에 많은 사람이 산다는 것은 결국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 생일 축하한다고 노래 불러주고 돌잔치하고 요양병원 가고 장례 치르고 하는 모든 것은 어디로 인도한단 말입니까? 선악의 저주, 곧 지옥으로 인도하는 겁니다. 약속의 없는 땅에 사는 것은 곧 지옥과 연결돼있어요. 많은 사람이 지옥과 연결돼있습니다.

울산에 유명한 태화강이 있지요. 태화강 까마귀들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지옥 가고 있는 거죠. 땅에서 태어나서 지옥 가는 거예요. 이 말은 지옥 쪽에서 방향을 화살표를 반대로 돌리면 우리가 이 땅에 왜 태어났는가?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는데 그 역사적 사명이 뭡니까? 이런 곳이 지옥이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러워하지 마세요. 절대로 부러워하지 마세요.

이 땅에 살면서 퇴직은 언제 했고 연금은 얼마 받고 요양병원은 어디가 시설이 좋은가, 그런 모든 순간들의 전부 다 약속이 빠져있는 약속이 없는 선악의 저주라는 그 범주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들만 하는 거예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걱정한다. 처음 발견한 의사는 죽었더라. 그러한 모든 이야기들은 그게 약속이 아니고 약속이 빠져있는 땅, 그러니까 지옥으로 이끄는 삶(목적으로 이끄는 삶이 있지요)에서 가면서 바퀴 달렸거든요. 지옥으로 가면서 말할 수 있는 에피소드지요.

이 에피소드, 선악 쪽으로 가면서 여기서 어떤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심지어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사람들이 교회 다녀요. 교회 다니면서 열심히 복 받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교회 다니면서 약속이 빠져있는 사고방식을 하면서 그들이 약속이 없는 교회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예요.

이건 굉장히 쉬운 이야기인데 죽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죽고 난 뒤에 부활이 있는 죽음이 있는 반면에 두 번째는 부활이 없는 죽음이 있어요. 부활이 있는 죽음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있는 죽음 안에다 자기 백성만 예수 안이라는 그러한 개념으로써 자기 백성을 포섭하지요. 예수 안은 왜 부활이 되느냐 하면, 예수님 자신이 약속대로 오신 분이기 때문에 약속+땅이에요. 약속이 있는 땅, 예수 안. 약속이 있는 예수 안에 되는 겁니다.

이것은 부활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약속이라는 것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고 허황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약속이 없는 게 아니고 약속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겁니다. 약속이 제일 중요해요. 사람들은 이걸 이야기해도 안 듣는 이유가, 지옥의 힘이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몇 분은 입을 가렸는데 입을 가리는 건 괜찮아요. 눈만 안 가리면 돼요.

고린도후서 4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이 세상의 신이 약속이 없는 선악적인 의식 있잖아요.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나는 잘났다, 너는 못났다. 선악적인 의식, 과거는 못났는데 지금은 잘났다는 것, 전부 다 자기 의. 이것으로 온 천지에 마스크로 해서 복음이 들리지 못하게 한다고 돼있어요.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한다고 돼있어요. 고린도후서 4장 4절에는.

누가 그렇게 했는가? 인간이 한 게 아니고 인간보다 센 것, 이 세상의 신이 인간들로 하여금 부활이 있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못 느끼게 하는 거예요. 부활이 있는 죽음의 특징은 뭐냐? 죽지 아니하면 부활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죽음의 최종 종착점이 아니란 말이죠. 왜? 죽음 뒤에는 약속이 있으니까.

몸을 구부려서 좁은 구멍을 들어간다 할지라도 안에 넓은 영토가 나온다는 그런 건 감수가 되는데 사람들은 복음 앞에 자기 자신 움직임을 자존심 상해서 내가 뭐가 못나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느냐? 나는 도저히 용납 못하겠다. 이런 식으로 버티기로 나오는 겁니다.

로마서 14장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신약 때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 말의 뉘앙스를 보세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다. 그러면 저주받을 선악적인 이 세상에서는 최종 관심사가 먹는 것, 입는 것이죠. 잘 먹고 잘 입으면 성공한 출세한 사람으로 보잖아요. 딱 지옥 갈 타입이에요. 스타일이 지옥 갈 스타일이에요.

보통 남녀가 선볼 때 부모가 강권해서 자기 딸에게 선보라 하면 갔다가 쀼루퉁해서 그냥 커피만 마시고 집에 온단 말이죠. 왜 그래, 하면 내 스타일이 아니라 하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 선악을 따지는 사람한테는 약속, 생명이 자기 스타일이 아닌 모양이에요. 먹고 마시고 출세하고 성공한 것, 그게 자기 스타일이에요. 그거는 부모들이 어릴 때 자기 부모한테 그렇게 배웠고 그 배운 것을 그대로 자식들에게 자기 스타일대로 전수하다보니까 그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자식을 잘 키운다는 것이 자식을 죽이는 일이에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가르쳐야 되는데 죽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 거예요. 죽음이 끝이라고 자꾸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먹는 것, 마시는 것,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게 인생의 전부가 되고 말았어요.

약속의 땅에서 약속이 빠지고 그냥 땅이 돼버리면 이건 선악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죽음이니까 약속에는 뭐가 와야 됩니까? 죽음이 아니고 생명이거든요. 그런데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생명으로 가는 길은 땅에서 가기 때문에 반드시 죽음 속에 들어가서 부활의 날을 맞이한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렇게 죽음 속으로 몰아넣을 때 거부하지 마세요. 그걸 섭섭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리려고 하는 일이에요. 그 길 외에는 없어요.

흔히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지요. 이런 이야기를 할 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 텐데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 맞는 말이겠지요.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 아닙니까. 나에 대해서 증거 한다. 문제는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 해놓고 여기서 뭘 빠트리느냐 하면, 십자가를 빠트려요.

죽음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되는데 죽음을 빼고 그냥 지식으로 예수님과 결부시키려고 그렇게 성경을 보게 되면 그건 가짜 예수입니다. 부활로 가려면 죽음 없는 데선 부활이 없어요. 약속된 죽음 안에서만 약속된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것은 이래나 저래나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반겨야 돼요.

그렇다면 오늘 레위기 25장에서 하나님께서 안식년이 있는 땅이다. 6년간 그 땅에 일하고 1년간은 푹 쉬게 해라. 경작하지 말고. 그러한 이유가 뭐냐? 그것은 방금 설명한 대로 예수님을 설명할 때 죽음을 집어넣듯이 하나님께서 약속이라는 것을 모세에서는 약속이 율법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안식년을 지키라는 것이 이 땅의 백성들에게 약속으로 율법으로 들어와 버리면 이것을 지키면 영생 얻는다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신약에 오면 율법이 주어진 것은 그들이 영생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생 얻을 자격이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를 더욱 더 죄로 드러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소에 인간들은 죄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지 잘난 척하고 있단 말이죠. 그럴 때 하나님께서 지시와 명령을 줘버리면 자기의 본색이 확 드러나게 돼있어요.

그 대표적인 해석이 뭐냐? 안식이란 것은 인간 세계 인류에게 하나님께서 복지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니까,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리면 이 해석은 어떤 해석이 돼버리죠? 여기서 뭐가 안 나타나지요? 너는 복지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사실이 이 해석에서는 안 나오지요. 죽어 마땅함이 안 나온다니까요. 우리 하나님 좋네. 복지까지 챙겨주고.

6일 일하고 하루 쉬라. 고생 많이 했다. 하루 푹 쉬고 다음 또 회사 나가야지. 하나님께서 언제 인간의 노동문제까지 다 관여하셨습니까? 최저임금까지 관여하십니까? 복지라는 말, 인간의 정서적인 안정, 이런 것 때문에 안식일을 줬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모든 율법은 인간의 죄를 들춰내기 위함이에요. 어떤 죄? 나는 하나님께서 이런 복지혜택을 받아야지, 라는 자체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한 바로 감추어진 죄가 되는 겁니다.

오히려 안식년을 지키라는 명령을 따라서 복이 올 것을 기대했건만 복은 안 오고 반대로 저주가 왔다면 이것은 정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합당한 조치입니다. 안식년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 줄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했었는데 복은커녕 나라 자체에서 추방돼버리죠. 그래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인간에게 오류가 있다는 것이고요 인간은 처음부터 오류가 있는 거예요. 안식년을 지키라고 한 것은 그 오류를 추적해 들어가는 겁니다. 안식년을 던져놓고 던져놓은 그것을 기준으로해서 추적해 들어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 1장 7절 같은 경우에 이런 말씀 있죠.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율법을 따라 살라고 돼있다고요. 그러면 네 하는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돼있어요. 그런데 인간에게 좌로나 우로나 벌써 본인에게 결정돼있습니다. 인간이 있고 자기가 길을 간다면 여기는 좌측, 여기는 우측이면 본인이 결정돼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을 빼는 거예요.

자기가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면서 자기 이익대로 간다면 그것은 율법을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고 기준이 율법 기준이 아니고 누구 기준이에요? 내가 잘 돼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준이 되죠.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서 이 자아를 긁어내라 했지요. 긁어내고 그 자리에 뭐가 들어갑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결국 무슨 경쟁입니까? 나냐, 아니면 말씀이냐?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야 되느냐, 아니면 말씀을 위해서 살아야 되느냐? 늘 이런 대치되는 기준으로 자기 정체를 들춰내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데? 왜 살지? 결혼했다. 결혼 왜 했는데?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나오잖아요.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기준을 발휘할 때는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어느 쪽이 내가 행복할 것인지로 기준을 정하겠지요. 이게 바로 안식년이나 모든 율법이 네가 지옥 가는 그런 종류라는 것을 들춰내는 겁니다.

만약에 목사가 개척교회 하나 세웠다. 그러면 말씀 위주로 살겠어요, 안 그러면 자기가 개척교회 목사 위주로 살겠습니까? 나는 개척교회 성공하겠다는 위주로 살겠지요. 그게 바로 오류가 되는 겁니다. 그런 오류를 인간 스스로는 뽑아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계속 율법을 주고 말씀을 줌으로써 비로소 내가 걸치고 있는 내 기준이 한 꺼풀 두 꺼풀 날아가는 거예요.

아까 로마서 14장 17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다. 잘 먹고 잘 입는다고 해서 하늘나라 도착한 게 아니에요. 그럼 하늘나라는 뭐냐 하면, 먹는 것이 아니요. 항상 성경에서 ‘아니요’ 할 때는 이미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은, 율법이 스스로 완성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관리하고 우리에게 신경 쓰는 것이 율법이 완성된 그 빛 앞에서는 시시하기 짝이 없음을 나타낼 때 그게 마음속에 평강이 찾아온 거예요. “붙들지 말아야 할 것을 붙들었구나. 내 목숨 안 붙들어도 되는데 괜히 붙들었어.” 이러한 기쁨의 반성이지요. 결국 환희 속에서의 자책이죠. “아이고, 쓸데없는 나를 위해서 살았구나.” 그게 내 인생 목적도 아니고 의미도 아닌데 것을 밝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주어진 기준이 어떻게 스스로 완성되어 가는가를 우리는 지켜보면 되지요. 내 안에 들어온 말씀이 내 위주가 아니고 오직 말씀 위주로 되어 가는데 우리는 휘말렸으니까 그 되어가는 추이를 과정을 지켜보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레위기 25장 본문에 적용시켜 봅시다.

안식년을 지켜라 할 때 지킬 생각하지 말고 안식년 스스로가 어떤 완성을 보이는지 그 추이를 보자. 안식년을 지키자. 6년 일하고 7년째 쉬면 그걸로 끝이냐? 끝이 아니에요. 25장에 보면 끝이 아니고, 8절에 보면,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칠 월 십 일은 속죄일이니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 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라고 돼있어요.

안식년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게 아니고 쭉쭉 더 나가지요. 스스로 안식년의 자체적인 완성은 뭐냐 하면, 6년 일하고 1년 쉬는 게 끝이 아니고 오십 년이 되는 날 모든 것이 종결돼요. 끝이 돼요. 여러분, 이런 것 다 아신다 치고 처음부터 간편하게 나가보겠습니다.

땅이 있습니다. 땅에 약속이란 이름으로 시간 요소가 들어왔어요. 시간은 뭘 목표로 하느냐 하면, 시작+마감, 마감 끝나면 또 시작+마감. 6년 경작하고 1년 쉬고 시작과 마감이죠. 또 그 다음에 이게 첫 번째 안식년이라면 두 번째 안식년을 뭡니까? 또 똑같아요. 시작과 마감. 이걸 비눗방울로 보세요. 안 그러면 헬륨가스 넣은 열기구로 봅시다. 공중에 붕붕 뜨는 거예요. 시작과 마감, 시작과 마감, 그러니까 이건 주기적이죠. 되풀이된단 말이죠. 이게 바로 질서가 되는 거예요.

땅인데 안식년, 율법이라는 약속이 들어왔다. 약속의 땅은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안에 질서가 돼요. 질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원칙과 원리가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 없는 땅은 지옥으로 저주로 통하잖아요. 약속이 아닌 땅은 약속이 빠져있는 거예요. 그냥 땅에서는 부활이 없는 죽음 밖에 없어요. 이 땅은 무슨 땅이냐 하면, 질서의 반대가 혼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땅=혼돈으로 보고 혼돈 속에 있는 인간들이 스스로 질서를 뽑아낼 수 있는지를 묻는 거예요. 혼돈은 창조성이 빠져있는 상대를 말해요. 창세기 1장에서 혼돈인데 하나님의 창조가 있기 때문에 보기에 좋았더라가 되거든요. 보기에 좋지 않은 것, 뭔가 하나님의 원칙이 빠져버리면 보기에 안 좋아요. 이게 혼돈이 되는 겁니다. 혼돈이 된다면 혼돈의 이유가 있을 거예요.

혼돈의 이유가, 인간의 죄, 그리고 악마와 결탁된 인간의 죄성, 이런 것들로 혼돈이 야기된 거예요. 그래서 제 말은 혼돈된 사회, 살기 벅차고 힘들고 어려운 저주받은 이 땅에서 뭘 찾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혼돈 속에서 나름대로 질서를 뽑아내는 그 원칙을 보고자 하는 겁니다. 내가 살기 힘드니까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하자. 그럼 주님께서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하는 그런 뽐새를 보잔 말이죠. 그래야 네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니까요.

여자가 결혼하고 아이 셋 낳았는데 남편이 일찍 죽었다 칩시다. 그런데 그 남편이 고위공직자였단 말이죠. 고위공직자로 고급정보를 미리 알아서 어디에 투자하면 아파트 몇 억 남는 걸 다 아는 그 정도 레벨에 있는 사람, 그런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고, 그리고 자기가 그런 계획을 입안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파트 사고 딸 둘과 잘 살았단 말이죠. 이런 정도로 가면 점점 더 승진하고 할 텐데 갑자기 그 남편이 자살했어요. 그 사람이 있던 곳이 기획재정부인가 그랬어요.

그러면 그 부인은 상당히 고급지게 살았지요. 자기 남편이 든든하니까. 그런데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여자가 고등학생, 중학생 아이 둘 키운다고 그동안 일을 안 했네요. 경력 단절되고. 아버지 죽고 큰 딸이 하는 말이, 자기는 학교에서 반장하고 공부도 잘해서 아버지와 계획을 세워서 영국으로 유학하기로 했단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죽었어요. 수입이 없어요. 영국은 물가가 비싼 데입니다. 엄마가 하는 말이, “유학 포기해라. 아버지 돌아가시고 수입 없으니 장학금 타고.” 그러니까 딸이 하는 말이, “엄마, 이 아파트 있잖아. 아파트 팔아서 나 유학 보내줘.” 이렇게 나온 거예요. 고등학교 2학년이.

왜냐하면 살던 가락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 친구들의 자기가 얼마나 잘난 줄 아는데 여기서 자기가 비참하게 되기 싫다는 거예요. 그 딸의 입장에서 아파트 있으니까 아파트 팔아서 유학 보내 달라 하니까 엄마는, “그럼 나는 뭐 먹고 살란 말이냐?”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 집안에 뭐가 찾아왔습니까? 몰락했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은 몰락해도 괜찮아요. 왜? 처음부터 추락하고 처음부터 몰락하고 있는 중이었던 거예요. 그게 돈 잘 버는 아버지가 갑자기 죽으니까 진짜 현실이 등장했을 뿐이죠. 그런데 아버지가 살아서 돈 잘 벌 때는 가족들이 몰락할 줄을 모르고 있어요. 다른 친구들보다 출세하고 더 뛰어나기를 성공하는 그 생각 밖에 없단 말이죠.

주님께서는 이 약속의 땅에 약속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희들의 혼돈에 빠졌으며 혼돈에 빠진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혼돈을 어떻게 하든 혼돈 속에서 나 잘 되기 위해서 어떤 질서를 따로 뽑아내려는 시도를 너희들의 꾸준히 해왔다는, 거짓된 시도지요. 그런 거짓된 시도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겁니다.

“엄마, 아파트 팔자.” 그 소리 듣고 깜짝 놀랐어요. 목사님은 남의 가정사를 어디서 들었습니까? 이게 드라마 이야기거든요. <머니게임>이라는 드라마에요. 엄마도 만만치 않아요. 나는 뭐 먹고 사는데. 갑자기 아빠 죽으니까 각자 자기 살 궁리하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자기중심이라는 걸 애써 감춘 거예요. 내가 공부 잘하면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할까. 아버지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아버지 생각한 게 아니고 뭔가 없어질 때 나는 주님 생각이고 주님의 십자가, 거짓말 좀 하지 마. 전부 다 자기 위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래요. 믿음이 없는 척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믿음이 없어요. 믿음이 없는 척한 게 아니고 진짜 믿음이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 혼돈세계에서 나름대로의 질서, 그리고 안정성을 얻었다는 것은 전부 다 나 위주였습니다. 이 땅에서 복음 있어야 돼. 그 복음 누구 좋으라고? 천국 있어야 돼. 그 천국 누구 좋으라고? 자기는 혼돈에서 빼달라는 거예요. 자기는 죄인에서 빼달라는 거예요. 나는 무조건 천국, 나부터 챙기고 보자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 생각하는 그 질서라는 것, 좋으신 하나님의 본 내용이 그거에요. 오류에요. 그게 엉터리 해석이에요.

안식년 지키라 해서 안식년 지켰어요. 재밌는 것은 이스라엘이 안식년 지키고 망했습니다. 희한하지요. 안식년 지키고 망했어요. 희년 지키고 망했어요. 자기는 지켰다고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열심히 안식년은 물론이고 안식일조차도 온 국민이 궐기해서 빨리 로마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안식일 제대로 지켜야 된다고 그렇게 힘주어 강조해서 집집마다 안식일 지키는 것 감시까지 했어요. 망했어요. 망했습니다.

안식일 지켰다는 그 질서요, 안정된 원칙, 그것 누굴 위함입니까? 그건 자기 자신을 위함이죠. 그래서 여기서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둘을 생각하면 돼요.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인간의 해방입니다. 벗어남. 요새 중국에서 빠져나오면 그게 출애굽이에요. 해방이에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지역에서 벗어난 해방입니다. 완전히 전세기 타고 온 사람들 해방감을 느꼈을 거예요.

첫째는 정치적 해방이에요. 정치적 해방을 다른 말로 생존보장, 생존위협으로부터의 해방.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바로 이 해방만 알았어요. 우리가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노예생활하지 않 해도 된다, 라고 정치적 해방, 자기의 생존, 목숨 보장하는 쪽으로 우리가 가야 될 곳이 그곳이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은 이제는 젖과 꿀을 퍼먹기만 하면 된다. 이런 관점에서 해방을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쪽 애굽 땅에서 이쪽 애굽 땅으로 옮겨가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정치적 해방을 생각할 때에 주님께서 이 땅과 땅 사이에 뭘 집어넣습니까? 광야를 집어넣었지요. 오늘 레위기 25장 2절에 보게 되면,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했지요. 그런데 그 땅에 들어갈 때 반드시 땅과 땅 사이에 뭐가 들어갑니까? 광야가 들어가지요.

지금의 생존과 나중의 부활 사이에 죽음이 들어간다고요.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죽어야 될 이유를 몰라요. 그들은 광야를 겪어야 될 거기에 대한 합리적 타당성을 모른다고요. 납득이 안 돼요.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때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름길이 있는데 왜 40년 동안 광야 헤매다가 다 죽게 하느냔 말이죠. 사막에서 우회할 길이 있는데 왜 의도적으로 사막 한 가운데를 통과하게 하느냐 말이죠.

그것은 그들의 몸에 맞는 정신에 맞는 땅은 광야가 적당합니다. 광야가 적절해요. 다시 말해서 너희는 살 수 없다. 사막이라는 것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들이 없어요. 죽으라고 있는 게 사막입니다. 사막에서 산다가 아닙니다. 사막에서 죽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발 사막에서 죽을 때 그냥 죽지 말고 죽어야 될 이유 알고 죽으면 내가 너희를 생명의 땅에 넣어줄게. 이게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코스모스, 질서에요. 원칙입니다.

지금 천국, 지옥이 문제가 아니고 본인들의 본인이 누군지 모르고 있다는 게 문제에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성경 보면 너무나도 성경에 대해서 잘 알지요. 하지만 막상 생존 문제에 어떤 사태가 벌어지면 아까 같이 아버지가 졸지에 돈 벌어주는 가장이 죽어버릴 때는 자연적으로 반항하고 반발하고 동시에 다른 가족은 어떻게 되든 유학 보내 달라.

친구들은 내가 반장이고 공부 잘한다고 희망을 걸고 있는데 아버지 죽어버리면 내 인생, 내 꿈은 어디서 찾느냐, 엄마? 이렇게 나오는 거죠. 엄마가 내 입장 돼봐. 지금 친구들은 나한테 주목하고 있다고. 그런데 지금 유학 못 가면 내 자존감을 어디서 찾느냐, 이 말이거든요. 애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엄마가 자기를 이해 못한다 생각하는 거예요.

언젠가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20대 생각은 대학 가고 취직하고 집 사고 결혼하고, 끝. 대학 가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집 사든지 집 사고 결혼하고, 이것 이외는 다른 생각 없잖아요. 이게 인생의 전분에요. 먹는 것, 입는 게 전부에요.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 부모라도 안 도와주면 부모를 원망한다고요. 부모는 내 꿈을 막는 사람이라고 하거든요. 부모가 만약에 예수님이라면 자식들의 누굴 죽이는 거예요? 예수님의 가슴에 칼을 꽂는 거예요, 그게.

그걸 자식 탓할 수 있습니까? 아이고, 철없어라. 네가 인생 살아보면 안다고 하지만 문제는 인생 살아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도대체 그 사고방식이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잠복돼있는 이미 그걸 품고 태어났다는 것. 하나님의 가슴에 칼을 꽂을 그런 속성을 품고 태어난 거예요. 모든 인간은. 그리고 그것을 자기가 사는 원리원칙으로 안정된 질서로 확정 시켜버려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대안은 뭐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대안은 뭐냐? 주기성, 다른 말로 하면 반복성이죠. 시작과 끝을 계속 반복시키는 거예요. 시작과 끝을 반복하게 되면 20대의 철딱서니 없는 애가 이 소리를 듣는다면 나라는 인생은 언젠가 끝이 나야 된다는 것, 이걸 분기점이라 하는데, 뭔가 나는 마감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 시작과 마감이라는 두 요소가 있어줘야 그게 바로 하나님이 생각하는 질서에요.

그런데 철없는 아이들은 약속 없는 야들은, “너 그러다 죽으면?” “죽는 건 나중 문제고. 지금 나는 유학 가야 된단 말이야. 엄마, 아파트 팔고 내 유학비 보태줘. 젊은 데 내가 왜 죽어.” 죽는 것은 나중 문제라는 거예요. 죽는 게 나중 문제입니까? 이건 젊은 20대뿐만 아니고 80대도 마찬가지에요. “아버님 요양병원 가셔야 됩니다.” “야 불편하다. 내 살던 집 놔두고 남의 집에 왜 가느냐?” 이게 뭐냐 하면, 결국 하나님의 질서라는 것은 내 인생 속에 주기성이 들어온 건데 그 주기성은 뭐냐? 태어났으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 내가 죽는 것이 질서라는 것,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

안식년이 시작과 끝, 안식이라는 시작과 끝은 아까 했지요. 안식일부터 시작해서 안식년을 거쳐서 마지막 마감을 뭐라 했습니까? 희년이죠. 이 자체가 반복적인 주기성을 갖고 한다는 말은 항상 시작과 끝, 시작과 끝, 시작과 끝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백성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언젠가 끝 날을 네가 미리 아는 것이 네 속에 하나님의 질서가 들어왔다는 티를 내는 거다. 너는 끝을 보여주는 존재가 돼야 돼.

왜냐하면 희년, 기쁜 날은 끝이 끝답게 될 때 기쁘니까. 지금 네가 기쁜 게 중요한 게 아니야. 하나님이 기뻐하는 게 중요한 거야. 그것 때문에 네가 이 땅에 태어났어. 하나님의 기쁨이 성도 속에 들어와야 돼요.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죽음이 남아있더라도 일찍 감치 죽음을 자기 안에서 마지막 죽음을 체험하게 되는 원칙과 기준을 우리 안에서 작열하고 있습니다. 이게 성도지요.

시작은 죄로 시작했으나 끝은 부활이라는 것, 부활이 있는 죽음이라면 오히려 반겨야 되고 감사해야 되는 겁니다. 정치적  그리고 생존적 해방, 이건 안 돼요. 해방에 두 단계가 있는데 첫째는 정치적 해방, 또는 생존적 해방. 애굽에서 벗어났다 이 말이죠. 애굽에서 벗어났는데 이게 땅은 땅인데 약속의 땅이 아니고 광야가 나온 거예요. 속에 원망이 막 불 같이 일어나는 겁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나로부터 해방. 왜냐하면 약속의 땅이 내 나라가 아니고 나를 위한 나라가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에 의한 나라거든요. 그래서 안식년이란 어디를 겨냥하느냐 하면, 아까 나왔지요. 25장 9절. 칠월 십일, 대 속죄일입니다. 대 속죄일을 겨냥한다는 것은 안식년 안에서는 뭐냐 하면, 누군가 나를 위해서 대신 죽고 있다는 사실, 이게 질서에요. 이게 굉장히 들어보면 고마운 일 아닙니까.

누군가 나를 도와주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 내 대신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죽음 빼놓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 한다? 다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믿지 마세요.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함이지 예수님 존재를 증거 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거예요. 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이지 예수님 저기 계시다, 그게 복음이 아니에요.

주님이 저기 계시다면, 그 다음에 필히 도와주소서. 이렇게 되지요. 도와주지 않습니다. 도와줄 것이면 예수님이 죽었겠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시는 것이 도와주는 거예요. 그 외에 다른 도움 필요 없어요. 그 죽음만이 부활이 있는 죽음이에요. 그동안 우리가 죽어야 되는 것은 선악적인 의식 때문에 죽은 것. 나는 잘난 척하는 것, 선악 때문에 죽거든요. 선악의식은 선악의식으로 해결책이 없어요.

그러면 뭐냐? 우리로 따먹지 못하게 한 생명나무에서 누군가 오셔야 돼요. 자체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라 했으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생명나무가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나에게 해방돼야 되는데 버티면 안 되잖아요. 나를 없애는 거예요, 나를. 그것도 즐겁고 기쁘게 없애는 겁니다. 집 안에 마당을 팠더니만 석유가 나왔다. 주께서 나를 없애는 방법이지요.

없애는 방법에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방법으로 없애버려요. “이런 짓을 하다니. 에라, 이 나쁜 인간아. 돈 벌어라.” “이런 짓을. 뻔뻔스럽게. 에라, 인간아. 네 자식 이번에 사법고시 합격해라.” 과분한 처사를 해서 “잘못했습니다,” “네가 이런 것 얻고자 했잖아. 너, 하나님 갖고 놀고 싶지? 그래 너한테 져줄게.”

마치 지난 낮 설교처럼 야곱이 하나님 이겨놓고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죠. “주여, 이럴 수는 없나이다. 제가 왜 하나님을 이겨야 됩니까?” “네가 하는 짓이 이기고자 하는 짓이야. 너 잘났잖아.” “아니옵니다, 아니옵니다. 저 잘난 것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자아를 긁어내지요. 그 사이에 말씀을 주신 분이 스스로 말씀을 이루어가는 방법.

그것은 내 인생을 내 손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스스로 성취하시는 주님 손에 맡김으로 교체해나가는 방법은 뭐냐? 지금도 주님이 내 대신 죽으셨다. 이 울산에서 죽으셨다는 사실. 예수님의 죽은 흔적을 찾는 거예요. 내가 안 죽는 방법을 찾는 게 아니고. 주님의 질서가 들어오는 것이 사실상 인생 최고의 순간입니다. 내 안에 주님의 질서가 들어오는 것.

원래 창세기 1장의 땅이라는 것은, 세 번째 날에 땅이 있거든요. 물이 갈라져서 땅이 있어요. 물에 덮여있단 말이죠. 창조란 처음부터 땅을 만드신 게 아니고 물을 만들어놓고 물을 비켜놓고 땅이 나오게 하거든요. 마치 지하에 있는 마사일 기지에서 뭔가 덮여있는 것이 갈라지면서 위로 솟아오르듯이. 이미 있는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주께서 심어준 질서, 대신 죽었다는 속죄의 죽음, 그것을 바깥으로 드러내게 되면 그게 바로 영원한 천국이고 약속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는 물로써 묻혀야 되겠지요. 정말 이 세상 전체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지배받듯이 이 땅 자체가 부정당해야 되고 그 위에 사는 나도 부정당하죠. 이 땅 자체가 완전히 물로 덮이는 사건이 무슨 사건이었습니까? 노아 홍수지요. 이게 아버지 뜻이에요. 딴 것 없다. 너희들은 땅에서 어떻게 살 걸 생각할 게 아니고 아예 땅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땅이 없다면 우리는 못 삽니다. 그러면 땅을 준다면, 땅이 없게 하고 땅을 준다면 이 땅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땅이 아니고 우리는 죽어도 마땅함을 드러내는 질서가 작용되는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그게 평강이고 은혜라는 거예요. 무지개 은혜 안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우리 안에 하나님의 질서가 오게 되면 이게 뭐냐? 우리 안에 뭐가 작동하느냐? 생명의 주기, 오늘 강의 제목입니다. 생명의 주기.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200) 20-02-10 17:42 
20200207b 울산강의-레위기 25장 : 생명의 주기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쟁이란 사람 죽이는 거죠. 죽이지 않는 전쟁은 전쟁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시는데 그건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일만한 해서 죽이는 거예요. 그럼 왜 하나님이 죽이느냐 하면 약속이란 타이틀을 걸어놓고 약속의 땅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나가라. 하나님이 주신 그 질서, 원리원칙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은 약속의 땅에 살 수 없다. 내쫓기 위한 전쟁.

율법 줘놓고 율법이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조건이 되는데 이 조건을 거부하고 무시하면 나는 너희들과 같이 살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조건에 부합되는 것은 어떤 것이고 부합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걸 알려줘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나올 때 그렇게 알려주는 환경을 광야라고 해요.

광야는 항상 약속의 땅 앞에 머뭇거리고 있어요. 쑥 들어가면 되는데 항상 요단강과 홍해 사이에 광야 있거든요.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 들어옴으로써 그들이 생각한 해방, 구원, 이것들이 전부 다 자기 위주였다는 겁니다. 자기 생각이었다는 것이 광야를 통해서 증거가 드러나는데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결국 눈에 보이는 지도자 이름이 뭐지요? 모세에 대한 원망이에요.

마태복음 5장 5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약속의 땅을 상속,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이거든요. 상속이란 반드시 맏아들이 상속을 받고 둘째, 셋째 동생들은 맏아들의 재산에 합류합니다. 이스라엘 원칙이 그래요. 모든 재산을 맏이에게 다 주고 그 다음에 둘째, 셋째는 맏이를 맏이라고 인정한 조건 하에 맏이로부터 삶을 보장받아요.

여러분 오빠나 형들과 매치시키지 마세요. 그 맏이가 맏이 아닙니다. 맏아들 되시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맏아들 형상,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거예요. 세상의 맏이는 믿을 ……. 그러면 하나님께서 맏아들 자리를 비워두십니다. 맏아들 자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차지하게 되거든요. 신약에 와서.

그런데 맏아들 자리를 비워둬야 되는데 사람들은 재산을 맏아들한테 다 주니까 맏아들 자리를 비워두겠어요, 차지하려고 하겠어요? 이걸 차지하려고 하겠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 아닙니까. 야곱과 에서는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붙들고 싸운 사이에요. 엄마 뱃속을 링으로 여기고 격투기를 벌인 거예요. 붙잡고. 누가 맏이를 차지하느냐, 누가 맏이가 되겠느냐?

하나님께서 철도 없는 두 사람을 엄마 뱃속에 집어넣은 것은 이 세상에 모든 전쟁은 누가 맏이인지에 관한 전쟁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리브가의 자궁 안에 원초적이고 시원적인 인간이 모르는 자기 모습들을 보게 한 거예요. 그 모습에서 싸우지요. 에서와 야곱은 싸우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본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던 간에 전쟁 중이다. 내가 복을 받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심덩어리 채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야심가로서. 어떤 인간도 여기서 예외는 없는 거예요.

맏이에게 주는데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할 때 기업으로 맏이에게 주는 상속으로 차지하는 거예요. 그런데 온유한 자가 어떤 자냐 하면, 마음에 순한 자, 성품이 어진 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은 공자, 맹자한테 배우라 하세요. 유교하는 사람한테 배우라 하세요. 온유한 자는 누구냐 하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보다 천하에 온유한 자가 없다고 했거든요. 민수기에 보면.

온유한 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길들여진 자, 하나님에 의해서 철저하게 길들여진 자가 온유한 자에요. 신약으로 하면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철저하게 길들여지는 자,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자, 내가 내세울 권리는 애초부터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 맏이 덕분에 들어가게 됐지 내가 들어갈 만해서 들어간 게 아님을 인정하는 자, 이게 바로 온유한 자에요.

그래서 온유하지 않은 자가 온유한 자, 성도지요. 성도한테 시비 걸기를, “너는 뭐 잘났다고 크루즈 여행 가서 일본에 갇혀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렸나. 무슨 돈이 많아서 수천만 원씩 들여서 하느냐?” 할 때 온유한 자는 말하기를, “내가 갔나. 주께서 가게 하셔서 갔지.”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수동형입니다. 피동적이죠.

그런데 묻는 사람은 뭐냐 하면, “인간은 지가 하고 싶은 걸 자기 의지대로 한다.” 자기가 평소에 살아가는 그 원칙을 딱 그걸 바탕으로 해서 너도 뭐 별거냐. 나랑 똑같겠지, 라는 식으로 시비 거는 겁니다. 그게 고라의 자손이에요. 고라의 당들이 모세한테 대들 때 너는 뭐 잘났는데 혼자 대장질하느냐, 라고 나왔거든요.

또는 미리암 같은 경우에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흑인 여자를 들이느냐. 안 된다. 네 아내감은 누나인 내가 정해야 되지 네 마음대로 좋다고 정하면 안 돼. 흑인 여자는 안 돼, 이런 식으로 구스 여인이란 이방여자란 뜻이에요. 이방여자는 안 된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미리암한테 문둥병에 걸리게 했습니다.

문둥병 걸렸다는 말은 인간은 본디부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아프다는 것은 자기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 거지 과분한 벌을 받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동안 은혜의 폭이 너무 컸지요. 그래서 까불었던 거예요.

여기서 두 번째 시간에 중요한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이란 걸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합니다. 안식년, 시간이죠. 시간개념에 대한 전쟁, 개념을 두고서 전쟁한 겁니다. 인간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시간개념 사이의 전쟁으로써 계속 시도되는 거예요. 그래서 안식이란 율법을 준 거예요. 안식이란 시간에 대해서 네가 갖고 있는 시간 감을 내놔라 이 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한테 물어보겠어요. 여러분, 전쟁을 원하십니까, 평화를 원하십니까? 어느 쪽입니까? 당연히 평화를 원하지요. 고요하고 평온한 생활, 우리는 이걸 원해요. 그런데 고요하고 평온한 이 생활이 바로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냅니다. 좀 이해가 안 되지요. 고요하고 평온한 생활은 뭐냐 하면, 인간들의 시간 계산이 부당하다, 잘못됐다는 거예요.

아까 안식일 할 때 시작이 있었고 끝이 있었지요. 그 다음에 뭡니까? 또 새로운 시작이 있지요. 사람들은 시간개념을 그렇게 가져가길 원하지 않아요. 인간은 주기성을 싫어요. 그냥 줄곧 잘됐으면 좋겠어. 끝까지. 자꾸 주기성 하면 어지러워서 안 돼. 사사기 11장 40절에 이번 수요 설교에 언급했습니다. 입다 이야기 나오잖아요. 수요 설교 때는 시간 관계상 다 언급을 못했지요.

40절 읽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여기 보면, ‘해마다’에요. 입다의 딸이 아버지의 객기 때문에 대신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암몬과의 하나님의 전쟁은 입다라는 사나이의 승리로 마감되는 게 아니고 그 마감은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입다의 억울한 딸의 죽음에서 승리가 마감돼요.

오늘 배운 걸 적용시키면, 인간들은 애굽이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서 정치적 해방을 원하지요. 1단계. 정치적 해방이 뭡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안 건드렸으면 좋겠어. 내가 제일 잘났고 편안하게 살 권한이 있고 나는 풍족하게 살 그만한 자격이 있음을 계속 그런 식으로 유지됐으면 좋겠다. 그걸 사람들은 평화라고 이야기하고 고요하고 평온한 생활을 추구합니다. 두 자로 말하면 ‘행복’이죠. 사람은 행복을 원해요.

하나님은 뭘 원한다 했습니까? 전쟁인데 인간은 뭘 원한다? 행복을 원하는 거예요. 여러분 상상해봅시다. 이사 갔는데 집 근처에 연못이 있더라. 낚시를 좋아한다. 그러면 인적도 드문 연못에 유명한 낚시터도 없고 근처에 민가도 없고 혼자 앉아서 연못에 낚싯대 드리울 때 얼마나 사람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됐을까요. 아무 생각 없이 인생 산다는 것, 이렇게 살아야 사는 거야,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철딱서니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바깥은 영적 전쟁 중인데 그런 감이 오질 않았어.

어항이 있는데 물이 이만큼 있고 금붕어들이 놉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금붕어들이 어떻게 놉니까? 싸우면서 놉니까, 평화롭게 놉니까? 평화롭게 노니나니, 하지요. 이게 갇혀있는 거예요. 자기 세계, 자기 상상의 세계에 갇혀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교회 올 때 이런 걸 원해요. 주님께선 선악적으로 나는 잘났기 때문에 행복해야 돼, 라는 그런 꿈들만 있는 곳에서 빠져나와야 이게 생명인데 생명으로 빠져나오질 못하고 찰랑거리는 고요한 물속에서 놀기만 하면 더는 소원 없다는 식으로 되는 거예요. 인생들이.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시간개념은 바로 이 개념,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시간개념입니다. 주기적이 아니라니까요. 여기 제가 사사기에서 입다 딸이 죽고 난 뒤에 처녀들이 그때부터 해마다 나흘씩 입다의 딸을 위해서 애곡했다. 주기성이잖아요. 반복성이잖아요.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이게 죽음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죽었다는 사실, 그것도 하나님과의 전쟁에서 죽었다는 사실 중심으로 그걸 되풀이하고 반복해야 되는데 십자가가 날마다 보여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십자가 때려치우고 나는 고요한 연못에 낚싯대 드리우면서 평안하게 인생을 보내겠다. 지금 이런 식이에요. 세상 보는 안목이. 이거는 갇혀있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여기 있는 사람을 어떻게 보느냐? 구천에 떠도는 혼령들이에요. 빠져나가지 못하고. 프로야구시즌 끝나면 프로야구 기다리며 농구 보고, 농구 끝나면 배구 보고, 배구 끝나면 밤새도록 유럽의 축구 보고. 구천을 떠도는 혼령들이에요. 본인이 죽은 자인 줄 몰라요. 거기서 거기야. 어항 바깥의 세계를 보질 못해요. 이거는 성령이 임해야 되거든요.

모세가 받은 율법은 이런 목적이 아니에요. 이런 평화로운 게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이걸 평화라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안식이라고 얘기해요. 안식일 잘 지키면 네 인생이 안식할 것이라고 이야기해요. 전쟁개념이 없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생각하는 시간개념은 뭐냐? 창세기 1장을 보겠습니다. 어떤 분이 중요한 질문을 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창세기 1장에 이미 빛이 있잖아요. 밝은 곳은 낮이고 어두운 곳은 밤이 됐잖아요. 질서지요. 간격을 짜 맞추는 거예요. 카스텔라 구울 때 직각 맞추잖아요. 이 세상은 각이 지게 하나님이 만든 질서가 있는 거예요. 그 질서가 모여서 안식일이 돼요. 하루, 하루, 하루, 그리고 일곱 째 날. 분명히 이 세상에는 시간 쪼개기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인간의 머리로선 물리학자, 어떤 철학자 동원해서 시간을 왜 쪼개지? 시간의 쪼갬이란 상상도 못합니다. 그것도 1234567, 7주기로 쪼개는 이유를 몰라요. 물리시간에 그걸 배웁니까? 물리시간 시간은 7의 반복주기라고 배웁니까? 안 배우지요. 시간은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르지만 영원히 죽 간다. 영원히 죽 가는 것으로 돼있어요.

만약에 우주비행사가 우주선 타고 가다 창문 열고 까불다가 휴대폰 흘렸다. 그 다음 질문은? 휴대폰을 어디서 찾겠느냐고 물으면 정답은 뭡니까? 영원한 우주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지요. 영원히 사라진 쓰레기가 되는 거죠. 이게 어항 속의 생각이거든요. 인간의 혼돈스럽고 살기 어려운 문제는 누구 아이디어에서만 해답이 있다? 인간들의 지혜를 끄집어내고 모으면 그게 해답이지 다른 해답은 필요치 않다는 것은 선악체계 안에서 악마의 지배 아래서 인간들의 아이디어입니다. 이게 모든 초중고대학에서 다 그렇게 가르쳐요.

끝은 없다는 거예요. 끝이란 말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끝은 끝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만 있지 끝을 인정하지 않으면 오직 영원한 것 밖에 없다. 그럼 시작은? 시작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영원부터 시작해서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게 오늘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의 의식이죠. 악마의 사고방식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은 미신이다. 미신은 인간들의 과학이 발달되기 전에 자연변화에 대한 공포와 그리고 대처할 수 없는 어떤 압박감을 느껴서 나름대로 세상을 해석해보려고 만든 것이 종교라는 겁니다. 그들을 비웃지 마세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간은 그런 생각이 있었음을 과학이 노골화시켰을 뿐이니까. 불교도 마찬가지고 소위 개혁주의신학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얘들 서슴없이 나오는 질문이잖아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 그럼 하나님 그분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거예요. 시작의 시작, 끝의 끝, 무한의 무한, 무한의 끝은 뭐냐? 수학에서 과학에서 우주의 끝은 뭐냐? 우주의 끝은 지구 똑 닮은 환경이 있을 것이다. 지구와 닮은 환경을 위해서 미국 나사가 백악관에 예산 세워라. 돈 내놔라. 연구하게. 왜? 지구가 잘못되면 빨리 탈출해서 이사 가야 되잖아요. 이사비용 미리 내는 거예요.

질문하신 분이 뭐냐 하면, 낮과 밤이 있는데 왜 4일째에 하늘에 광명이 있어 주야로 나누게 했고 하늘에 해가 있고 달이 있고 별이 있고. 이걸 따로 만들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이미 밝으면 낮이고 어두우면 밤이잖아요. 그런데 왜 해와 달과 별을 만드느냐 말이죠. 정답은 해와 달과 별이 있어야 시간이 있어요. 공간도 마찬가지지만 시간은 모든 만들어진 피조세계를 감싸는 담아버리는 보자기입니다.

모든 우주는 시간에 담겨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한 거예요. 해도 달도 별도 변화되기 시작한 겁니다. 시간 따라서. 그러면 시간이란 변화의 차이를 두고 시간이라 한 거예요.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라 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 창세기 1장에 나오잖아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14절)

해와 달, 별을 통해서 일년, 이년, 삼년, 일월, 이월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안식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말하는 안식은 뭐냐 하면, 모든 전쟁이 마감되는 걸 안식이라 해요. 그러면 마지막 안식 될 때까지 전쟁 중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은 지 몸 편한 게 안식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말씀으로 좌우를 살펴야 되는데 자기 몸을 중간에 두고 좌우를 살펴요. 그리고 나한테 이익 되면 축복이고 손해되면 저주라고 보는 겁니다. 뭐가 빠진 거예요? 나는 죽어야 된다는 사실이 누락이 돼버린 거예요. 나는 안 죽겠다고 버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복음을 믿는다고 주장해요. 그건 복음 아니고 예수 아니고 십자가 아니에요.

방금 시간을 세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보자기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안식년, 희년, 안식일이라 하는 것은 나라는 인간을 어느 보자기에 휩싸여라? 시간이란 보자기에 담겨야 돼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하나님이 만든 시간에 담기는 게 아니고 자기가 시간을 이용한다니까요. 자기 스케줄이 있어요. 나는 놀 때 놀고 쉴 때 쉰다. 자기 위주지요. 자기 몸 위주에요.

살다가 힘들잖아요. 죽어버릴까? 예순 믿어놨겠다, 복음 알겠다, 확 죽으면 좋겠다. 복음 안다고 이제는 사는 것보다 천국 가서 놀란다고 죽겠다는 것은 순전히 누구 위주에요? 본인 몸 편 하려고 하는 위주지요.

다루어진다는 것은 길들여진다는 것은 바꿔지는 거예요. 모세가 온유하다는 것은, 그 길들여지는 표준 모델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처럼 만들어져야 돼요. 모세뿐만 아니고 모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예수님은 사는 쪽으로 갔던가요, 죽는 쪽으로 갔던가요? 예수님은 그냥 죽는다 하지 말고 빠져나온다. 십자가란 개구멍 찾아서 빠져나온 거예요. 쓴 잔을 마셔가며 빠져나오는 겁니다. 빠져나올 때 베드로 같은 경우엔 성급해서 빨리 죽겠습니다. 내 목숨을 바쳐서 따라 가겠습니다, 할 때

“아서라. 너는 뭘 바꿔야 되는지 그걸 몰라.” 결국 주님께서 성령 오기 전에 뭘 보여줍니까? 베드로가 악마에 의해서 지금 당하고 있고 그리고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한다는, 내가 그 정도에요? 내가 그 정도였습니까? 그 정도로 예수님을 배신할까요? 자기는 못 믿겠다고 하거든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인간 베드로로 하여금 시작과 끝이 아직 되지도 않았는데 인간은 성급해서 이쯤 했으면 주님 같이 해서 천국에 같이 갈 타이밍입니다, 라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아직 자기 끝을 몰라요. 베드로 끝은 어디가 끝이냐 하면,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나는 모른다, 저 사람과 아는 사이 아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그것이 베드로의 본모습이에요. 예수님을 저주한다는 인간을 예수님은 구원한다고요. 이게 남의 이야기만 되겠습니까?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에요. 왜? 베드로가 교회 반석이니까.

내가 나를 버려야 돼요. 그런데 죽어도 안 버려요. 끝까지 나를 격려한다고요. 어떤 사람은 몸이 안 좋을 때는 이러라는 거예요. 티비 금요프로에 보면 몸을 따뜻하게 할 때는 이러라는 거예요. 이것 왜 합니까? 나를 포기 못하겠다, 더 오래 살아야 되겠다는 말이죠. 뭐 하려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위해서. 병원 왔다 갔다 하면 시끄러워서 안 돼요.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하기 위해서.

인간은 여기서 마감을 함으로써 육에서 육으로 반복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안식년이란 주기성을 줌으로 말미암아 이 주기성은 포클레인이거든요. 인간들 자기 나름대로의 시간은 뭐냐? 나의 완성을 향하여 주기적이지 않고 갈 때까지 가보자는 이것을 안식년으로 팍 싸잡아버리면 네가 매일하는 그 짓거리가 끝장나야 마땅한 짓거리인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난 안식년 세 번 지켰다. 너는 몇 번 지켰나?” “일곱 번 지켰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율법을 자기가 지킨 줄 알아요. 율법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닙니다. 율법과 매치가 됨으로써 나의 한계성, 내가 왜 구원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폭로시키기 위해서 말씀이란 포클레인이 우리를 덥석 물어버린 거예요.

전쟁, 그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한 용도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우리가 죽으면 되지요. 그래서 보자기에 쌌잖아요. 안식일에 쌌지요. 우리는 안식년의 포로가 되고 안식년 안에서 우리의 시간개념이 얼마나 내 중심인지 발각당하면서 죄인으로서 안식년에 싸이게 되잖아요. 그러면 안식년 자체가 이동해요. 어디로? 희년을 향하여. 마지막 최후의 완성을 향하여 희년을 향하여 안식년 자체가 움직인단 말이죠.

모노레일 달리는 전차처럼 우리는 그 안의 탑승객이고 그 전체가 말씀이 알아서 말씀대로 완성으로 간단 말이죠.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닙니다. 말씀 듣는 데 잠 오는 데 언제 지키고 있어요. 설교 시작했다면 벌써 5분 안 돼서 잠에 빠지고. 아침 되면 테이프 지 혼자 틱틱거리고. 우리는 말씀을 못 지켜요.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나는 못 지키는 데 말씀이 알아서 지키고 나가는 그 증거를 찾는 거예요. 야 안 되는 걸 되게 하셨구나. 나밖에 모르는 데 갑자기 왜 주님 생각이 나지. 이것은 말씀이 내 의지보다 강해서 그래요. 붙잡힌바 돼서 그렇다고요. 케이블카 보면 대롱대롱 달리잖아요. 케이블카 지붕에 올라가는 건 007이나 하는 짓이고요. 그냥 매달려갈 뿐이죠. 말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는 종속됐다는 이걸 영광으로 알아야 돼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증인되는 겁니다. 지키기는 뭘 지킵니까.

어떤 분이 유튜브에 댓글을 달아서 답변해드렸어요. 어떻게 신앙생활하면 됩니까? 노력하지 마시고 그냥 막 사세요. 나중에 생각하게 되면 지나온 모든 날이 내 과거를 지워주세요. 선악적으로 살아온 모든 과거를 다 지워지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 란 노래 있잖아요. 지워진 과거가 왜 자꾸 생각나노. 과거를 지워나가는 겁니다. 우리의 시간관은 과거를 붙들고 나 잘났다고 남들한테 떠벌이고 싶어 하는 게 우리 모습입니다. 이만큼 고생했으니까 이런 호강은 마땅하지 않느냐. 이제 선악적인 의식이죠.

그 다음에 전쟁 이야기 계속해봅시다. 이 시간개념이 반복적으로 주어질 때 이스라엘은 길들여져야 돼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길들여진다고 돼있는데 구약에서는 만나 정신에 길들여져야 돼요. 만나가 희한해요. 이틀 치를 허락을 안 합니다. 하루가 하루 다음에 내일이 없어요. 언제 내일이 있느냐 하면, 안식일 때만 내일이 있고 그 외에는 하루+하루+하루지 하루 다음에 내일이 없어요. 내일이 되려면 지난 하루+내일이 돼야 되는데 플러스가 없이 그날 먹고 그날 소비하고 죽으란 말이죠.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이 만나를 40년 동안 먹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누가 매일같이 살려주셨다는 거예요. 매일같이 살려주신다면 광야를 통과했다 칩시다. 매일같이 죽는 본인이 알아서 통과했겠어요, 아니면 매일같이 살려주시는 그분이 광야를 통과합니까? 그분이 통과한 거죠. 만나가 언제 이틀 치 줍니까? 안식일 맞이할 때 주기성이니까 이틀 치 줍니다.

이틀 치 주고 그 다음에 또 하루, 하루 살게 하셨다면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뭘 통과하느냐 하면, 바로 인간의 시간 층을 안식일의 주인 되는 하나님의 시간 층이 관통한다고 보면 돼요. 그러면 두 시간 층간에 전쟁이 벌어지겠지요. 어떤 전쟁이냐 하면, 언젠가는 이스라엘 나라에 약속대로 반드시 메시아가 온다, 오실 것이다. 기다리자. 이게 바로 유대인들의 시간관입니다. 인간의 시간 층이죠.

거기에 비해서 주님께선 뭐라고 합니까? 이미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이게 말이 돼요, 그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겠습니까? 하늘나라가 이미 왔는데 이미 온 하늘나라 무슨 나라냐 하면, 인간의 시간 층을 파괴하고 그걸 심판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미 임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구원되는 날, 저희는 구원받기에 합당하다고 우기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서 메시아 와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말하기를 너희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야. 심판의 대상이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세례요한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이 가까이 온 거예요. 심판의 날이 와야 이걸 거덜 내야 그게 교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씀대로 사시는 분과 말씀을 지켰다고 우기는 쪽과 전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강도가 그리고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하늘나라를 가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자기의 성과로 가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비유가 그 비유입니다.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그들의 공통점이 뭐냐? 전부 다 자기 시간개념에 의하면 내가 이만한 노동을 했다는 기억이 자기 시간개념에 들어있어요.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온 그 사람은 나도 한 시간 일했다고 이야기합니까? 품삯을 받을 때. 그건 한 시간 일한 품삯이 아니에요. 하루 종일 일한 품삯이라고요. 왜 하루 종일 일한 품삯이 한 시간 일했는데 그걸 왜 주느냐 말이죠. 최저임금 요새 얼마입니까? 8590원을 줘야 되는 걸 85만원을 준 거예요. 그러면 하루 열 시간 일한 사람은 850만원 받는 거예요.

이걸 받고 아르바이트 학생이 그냥 집에 갑니까, 주인한테 물어봅니까? 뭐라고 물어봐요? 왜 내가 일한 것보다 더 많이 주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 질문을 우리가 주님한테 매일같이 해야 돼요. 나 같은 인간에게 왜 영생을 거저 주십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너라는 성도라는 증거가 과분의 증거에요. 과분하게 얻어 챙겼다는 것을 나는 너희들이 행한 것 이상으로 줘도 너무 많이 줬다는 걸 증거 하기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가 있고 성도가 있는 겁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그러니까 교회가 내 목숨이 달아나든 애가 아프든 돈이 없든 구원받는 것 생각하면 그 앞에서 짜증내면 안 돼요. 우리가 짜증날 자리가 아니에요. 암 걸렸어요. 어쩌라고? 십년 전에 안 걸린 걸 천만다행인 줄 알아야지. 살만큼 살게 하고 암 걸리고. 여기서 어쩌라고. 천 년 백 년 살까, 그럼.

만나의 본체는 네가 하나님의 시간을 네 속에 먹었다는 거예요. 먹었으면 내 안에 구차 없이 만나 때문에 죽어서 가든 살아서 가든 약속의 땅에 기어들어가야 돼요. 왜냐하면 내 안에 들어온 어떤 칩이 자꾸 신호를 보내주는 데 그게 뭐냐 하면, 추격하는 발신신호가 왔다 갔다 한단 말이죠. 그러니까 만나의 최종 목적지가 뭐냐 하면, 더 이상 만나가 필요 없는 곳, 만나=젖과 꿀이 되게 하는 땅, 만나는 말씀이니까 말씀의 실현태, 실현된 상태, 상황.

내가 있다면 나한테 꼬챙이가 있어서 하나님의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이 꼬챙이에 오뎅이나 닭꽂이처럼 들어가는 방향대로 꽂혀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같이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이게 주 안에서 또는 십자가 안에서, 라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는 항상 과분함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베드로로 하여금 세 번 부인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때 누가 그렇게 하냐 하면, 악마가 그렇게 하게 하거든요. 악마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삼키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악마로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데 보탬 되도록 사용하신 거예요. 악마까지. 친절해도 이렇게 친절한 분이 없어요. 악마마저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는 데 악마가 가장 적절하거든요.

악마는 항상 우리한테 뭐냐 하면, 딴 건 다 골치 아프고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거야. 이걸 아침 눈만 뜨면 매일같이 생각나게 해요. 나만 잘 되면 돼. 남 살든 말든 남 기침하든 말든 신종 코로나로 죽어라. 인구 너무 많다. 우리 새끼들하고 우리 가족만 안 걸리면 돼. 내 하는 일만 잘 되면 되고 나만 안 다치면 되고 나만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하면 하나님 앞에 수월치 않게 헌금할 용의도 돼있다고 나오는 거죠.

그게 온유한 겁니까? 길들여진 거예요? 악마가 그만큼 우리를 길들였기 때문에 전쟁을 하는 거예요. 너는 전쟁 안 하고 싶지만 내가 전쟁하고 싶다. 네 속에 만나를 집어넣고. 만나는 말씀입니다. 신약 때는 만나가 하늘에서 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오시는 거예요. 말씀이 육신이 돼서 이 땅에 이미 말씀이 생명의 떡이 왔어요.

그런데 그 생명의 떡이 피를 토하고 살을 찢으니까 사람들은 나가자빠지는 거예요. 살기를 원했더니만 왜 죽음으로 다가오느냐 말이죠.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다 떠나고 말지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갈래, 하니까 못 가지요. 왜? 택했으니까. 한 놈만 죽인다 하는 것 있잖아요. 붙들고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 하신 일을 증거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야무지게 잡고 우리를 놓치지 않는 거예요. 꼬챙이에 집어넣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던 것 다시 해봅시다. 시간은 보자기라 했습니다. 시간이 움직임으로써 우리가 따라 움직이는 거예요. 그 점을 설명하겠습니다. 시간이 움직인다 할 때 시간의 폭이 있어요. 시간의 폭이란 뭐냐 하면, 제가 삼각 김밥이라면 삼각 김밥 안에 우리가 들어있습니다. 시간의 폭이 있다는 말은, 우리의 시간은 시간의 폭이 없고 단선이에요. 어렵지만 제일 쉽게 최대한 쉽게 하겠습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가요. 과거 없이는 현재 감이 없어요. 과거 때문에 현재라는 인식을 갖고 있거든요. 많이 어렵더라도 참아주세요. 단선으로 가는데 시간은 뭐냐 하면, 위에서 수직으로 내려옵니다. 내려오면 이게 점이 돼버려요. 미래까지 안 가도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낚아채었으니까. 시간의 폭이라니까.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거지 왜 폭이라 하느냐? 이 폭 안에서 계속해서 우리가 반복해서 세상적인 시간을 갖고 있다고 얻어터지고 또 돌아서면 세상적인 시간 때문에 얻어터지고. 그러면서도 그걸 3년, 4년 미랜 오지만 지금 현재 언제 가도 수직적인 시간 안에서 늘 현재가 돼버려요. 과거에 내가 이런 짓 안 했는데 지금 이런다. 이러지 마세요. 과거란 말 하지 마세요. 과거는 없고 시간 안에서의 그냥 회전이에요.

앞으로 잘할게요, 라고 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없어요. 왜냐하면 그때 그 시간 되게 되면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예상이 다 흐트러져요. 왜냐하면 내가 20대에 봤던 50대의 모습은 막상 50대에서 보게 되면 20대에 봤던 나의 세상 관으로 기껏 생각한 50대에 불과하거든요. 안 어렵지요.

평생 제주도 안 가본 사람들이 제주도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 혹은 내가 중학교 수학여행에서 제주도 봤는데 그때 너무 좋았는데 지금 가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나중에 퇴직하고 70대에 가보세요. 그 제주도 20대 때 제주도 아니란 말이죠. 그때는 철딱서니가 그것밖에 안 되니까 제주도 가서 갈치백반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갈치백반 칠성시장 가서 지금 먹으면 돼.

그때는 갈치 먹는 것이 너무나 맛있었기 때문에 과거기억 때문에 그런데 이게 수직적인 시간에서는 갈치가 그다지 나의 마음의 욕망을 충족 못 시키고 있어요. 왜? 과거가 내 발목을 잡아서 어지간히 만족 안 하면 감사가 안 나온다니까. 이게 우리의 약점 아닙니까. 과거에 이미 경험한 것 때문에 시답지 않은 거예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부부생활에서 첫사랑을 잊지 마라. 보기만 보아도 어떻고 지금 숟가락이 몇 개고 티비 있는지 없는지 문제 되지 않아요. 같이 산다는 것만 해도 행복 했었었었던 그런 기억이 있지요. 과거완료. 자식 없어도 괜찮아. 있기만 해도 행복했던 그 시절, 그것 어디 갔습니까?

주님의 수직적인 시간에서는 첫사랑을 회복하는 겁니다. 계속. 그러다가 아내가 직장에서 출장 가서 일주일 있으니까 밥 혼자 맛있게 해서 너 없이 홈쇼핑에서 육개장 사서 다 먹는다고 했는데 육개장 해서 혼자 먹으니 무슨 맛이 나노. 잔소리 좀 해줘야 맛이 나는데 잔소리 할 사람이 말을 안 해. 세상에 이럴 줄 몰랐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얼마나 마음이 교만하고 까불고 있다는 것을 수직적인 시간 안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구원이 안 된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을 해놓고 전쟁을 벌이는 거예요. 주님의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 오직 주님께 감사와 고마움이 넘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환경 주십니다.

왜 새로운 환경을 주시느냐? 우리가 맨날 육적인 시간관을 매일 아침 되면 이걸 못 놓고 있으니까 여기에 맞추어서 더 깊이 파 들어가는 거죠. 첫사랑과 첫 기쁨, 그냥 구원받았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죽겠다는 말이 아니고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상관없어요. 저한테 죽어도 괜찮아요, 하는 그런 자유로움, 마음의 안식, 그게 완성이거든요. 이미 안식을 얻어놓고 안식을 방해하는 것들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를 닦달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의 율법을 주심으로써 왜 예수 십자가 아니면 구원되지 못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알고 나 잘만, 내 위주의 시간이 아니라 말씀으로 이미 다 이루었음을 드러내는 시간 속에 우리가 놓여있음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