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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1 22:59:31 조회 : 219         
표면존재 레위기 26:1 200501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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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07) 20-05-04 21:37 
20200501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표면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6장부터 하겠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1절에 그렇게 돼있지요. 성경 볼 때 믿음이 있다고 보시면 안 되고 믿음의 전혀 없다고 보셔야 돼요. 현재 나한테는 믿음이 없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귀한 믿음을 인간이 갖고 있으면, 경상도 말인지 상스런 말인지 호작질한다고 하지요. 갓난아이한테 수표나 오만 원짜리를 주게 되면 걔들은 호작질하게 되지요. 어린아이한테 볼펜 쥐어주고 수표 있으면 입에 들어간다든지 찢어버리든지 하겠지요.

평소에 성경을 볼 때 인간을 성경을 볼 능력도 없고 권한도 없고 자질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준다든지 성경을 준다든지 믿음을 준다는 일은 없습니다. 줘봐야 그 가치를 모르니까요. 그래서 구원받는 것은 내가 가질 믿음이 없는 것으로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믿음 가지고 구원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구원받을 때 믿음 없는 채로 구원을 받게 돼있어요.

그 이유가 있어요. 쉬운 예로 고기가 낚싯대에 걸려서 잡힐 때 낚싯바늘과 낚싯줄은 고기 쪽에서 만듭니까, 아니면 낚시꾼에 의해서 제공된 겁니까? 낚시꾼에 의해서 제공된 거죠. 세상에 어느 고기가, “나 물에 살려니까 너무 추워서 안 되겠어. 따뜻한 선실에서 배 위에서 살아볼까? 내가 낚싯줄을 혼자 수작업으로 만들어서 자기 목에 꿰어서 잡아당기세요.” 이런 고기 없잖아요.

낚싯줄은 고기가 스스로 만드는 게 아닙니다. 믿음이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낚시꾼이 고기한테 낚싯대를 던질 때 이런 식으로 고기한테 이야기하지 않아요. “고기야. 내가 낚싯줄 던질 테니까 네가 알아서 목에 걸든지 묶든지 알아서 내가 건지기 좋도록 해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어부는 없지요.

바다에 고기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배에서 낚시할 때는 낚싯줄이 목에 걸리지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관계 또는 관계성이라 하는 겁니다. 이 낚시꾼과 고기 사이의 관계,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가지고 있어봐야 우리는 호작질한다니까요. 이건 중요하지 않고 그보다 더 중요한 돈이 있는데 믿음으로 뭐 하려고요? 우리한테는 믿음이라는 게 아무 쓸모가 없어요.

인간이란 평소에 하던 행세가 있어요. 하던 습관이 있다고요. 그건 뭐냐 하면, 자치단체에서 주는 상품권으로 재래시장에서 물건 사는 것, 그것 잘해요. 돈 주고 마트에서 물건 사는 것, 그걸 잘하지 마트에 가서 믿음 내고 빵 사고 소고기 사고 그런 것 못해요. 믿음은 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한테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믿음은 돈이 아니에요. 여러분, 믿음이 귀합니까, 돈이 귀합니까? 묻는 내가 나쁘다, 정말. 내가 너무 못돼먹었다. 이거는 묻는 게 실례지요. 무례한 짓이 되는 겁니다.

믿음이란 낚싯대와 같아서 딱 걸리도록 돼있고 걸린 사람이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네가 이제부터 고기 잡는 어부가 되지 말고 뭘 낚으라고 합니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이야기했지요. 이것은 구원받는 사람이 자기 믿음을 조작하거나 소유하거나 만들어 내거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질과 능력은 전무합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냥 걸린 거예요. 낚싯대에 그냥 걸린 겁니다.

고기가 낚싯대에 걸리면 반항합니까,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까, 어떻게 됩니까? 반항할까요, 좋다고 구원받은 걸 기뻐할까요? 반항합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 속에 믿음이란 내용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다음에 성령이 와서 믿음을 줬거든요. 따라서 믿음 안에는 뭐냐 하면, 내가 이 땅을 빠져나올 때 죽을 것처럼 너도 이 땅에서 나올 때 나와 같이 죽어야 산다. 이 내용이 들어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믿음 안에는 죽으라가 들어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평소의 삶은 죽음의 정반대로 살자. 경상도 말로 우짜기나 살자. 살아남아보자. 신종코로나한테. 살아남은 자가 승자다. 그런데 하나님의 믿음은 죽어라, 이놈아. 이러니까 여기서 강력한 반발이 나오고 강력한 반항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고기들은 낚이게 되면 점잖은 신사 같지 않고 정말 온 사력을 다하여서 바닷물을 치면서 내가 살던 곳으로 다시 돌려놓으라고 반발합니다. 고기가 살던 동네가 어딥니까? 바다지요. 나는 요트 생활 싫어. 육지 생활보다도 나는 바다 생활이 익숙해. 다시 말해서 인간은 믿음 없는 생활이 익숙합니다. 믿음 없는 생활이 반항할 이유도 없고 반발할 이유도 없어요. 평소에 살던 대로 살면 됩니다.

우짜기나 살자. 우짜기나, 이걸 표준말로 뭐로 번역하면 좋겠습니까? ‘어쨌든’ 일단 내가 살고 내 가족이 살고. 그걸 합치면 어쨌든 내 가족부터 살아보자. 두 식구 의료보험료 팔만 원 되면 칠십 만원 받고 삽니다. 네 식구 되면 이십삼 만원 아래로 떨어져야 혜택 받는다는 거예요.

그 소릴 들을 때 나라에서 돈 준다는 소리를 듣고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빨리 죽어서 천국 가려는 사람에게 왜 이렇게 나를 괴롭게 하느냐고 청와대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저 사람 부자인데 돈 왜 주느냐고 나오지, 나는 죽고자 하는데 날씨는 점점 더워지는데 왜 자꾸 살게 만드느냐, 정말 짜증난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건 없습니다. 구원받을 때 믿음 없음을 들통 내면서 구원하십니다. 나한테는 믿음을 가질 권한도 없고 줘봐야 호작질이나 하고. 이 호작질을 표준말로 고쳐야 되는데...... 호작질이라는 게 옛날 마적들의 불 지르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야말로 어린아이가 돈의 가치를 모르고 찢어버리고 수표 가치를 모르고 그걸 훼손하는 것처럼 우리의 본성은 믿음을 유지하거나 갖고 있을 위인들이 아닙니다. 뭔가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게 되면 반발하게 돼있어요. 몸에 바이러스 들어오면 반발하듯이. 그걸 면역체계라 합니다. 평소에 나와 안 맞는 게 들어오면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을 거부햇서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네가 믿음이 없는 채로 성경을 봐라. 그렇게 성경을 보게 되면 고맙게도 내가 믿음이 하나도 없구나, 라는 것을 밝혀줄 것이다. 성경이 그걸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상식은, 우리나라 기독교 들어오고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반대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들 믿음 없으면 지옥 갑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시면 그 믿음으로 사시면 천국 갑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어느 교회든 어느 강사 목사가 부흥회를 하든 어느 교회에서 헌신예배를 하든 항상 내뱉는 것은 뭐냐? 여러분의 믿음을 잘 관리하셔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보너스로 천국 가시기 바랍니다. 행함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갑니다. 그런데도 있고 행함으로 간다고 하는데도 있고. 어쨌거나 당신은 구원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남는 겁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지요.

성경은 오늘 본문 1절에 의하면 그걸 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명칭이 예수가 됐든 하나님이 됐든 명칭은 신경 쓰지 마시고. 1절을 다 같이 읽어볼까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됐어요. 거기까지만 하면 돼요. 나를 위한 신, 나를 위한 예수, 나를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 다 우상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짜 믿음이 오게 되면 내가 신을 찾을 위인이 아닌 것을 알려주게 돼있는데 이게 진짜 신이 없으면, 모든 신은 오직 나를 위해서 존재해야 그것이 사랑의 하나님이고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누가 판정하는가? 내가 판정하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강의를 어디서 출발했느냐 하면, 믿음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로 출발하는 거예요. 믿음 없다는 게 어떤 거냐? 그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오늘 강의뿐만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성경 볼 때 “하나님, 저는 믿음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구원받겠습니까?” 이렇게 시작하란 말이죠.

믿음이란 게 없는데, 좀 뻔뻔스럽지요. 뻔뻔스러워도 좋아요.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천사가 있다는 주님이 가신다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습니까, 라고 보자는 겁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네가 뭔 일이야. 네가 믿음 없음을 어떻게 알게 되었어. 그러니까 네가 구원받는 거야.” 믿음 없음을 안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 내 믿음보다도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더 유일무이한 확실한 구원의 근거라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이에요.

이건 아이큐 190 돼도 몰라요. 좋은 대학 나와도 몰라요. 희한한 사람입니다. 자기 믿음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자기 믿음도 없이 천국 간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이 얼마나 그 뻔뻔스러움에 기가 차겠습니까. “개코나 믿음도 없는 게 천당을 간다고? 그래 너는 뭘 믿고 천당을 가느냐?” “나는 아무것도 나한테 기대할 게 없다는 그걸 믿는다, 왜?” 이렇게 나와 주셔야 돼요.

거기에 비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항상 조건을 따져요. 감사하라 하면 조건 따져서 감사가 나옵니다. 조건이 있을 경우에만 감사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조건이라는 것은, 내가 지금 근사하고 잘났다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지적질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내 나름대로 얼마나 공들이고 애를 썼는데 지금 나에 대해서 하나님이랍시고, 너 그렇게 살면 되겠느냐, 라고 지적질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잔소리 듣고 그렇게 천당 가고 싶은 마음 없어요, 라고 지가 삐져서 나가버리죠.

인간이 원하는 하나님은 뭐냐 하면, 나에게 지적질 안한다는 조건 하에 나에게 착하다, 훌륭하다, 대단하다, 참 네가 성실하구나.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마음 낮아졌지, 라는 칭찬 일색으로 나를 위해주는 조건 있다면, 그리고 나 하는 모든 일에 기도 응답해주고 잘한다고 격려해준다면 그 조건부로 감사하고 하나님을 모실 의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은 레위기 26장 1절부터 벌써 핀트가 안 맞아서 다른 성경을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1절에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만들지 말라는 것은 이미 네 평소에 습관과 삶의 모든 방식은 너를 위하여 네가 존재한다는 식으로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께서 지적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이.

내가 감추고 있던 것을 들춰낼 때에 고마움과 감사가 어차피 일어나야 돼요. 고맙소, 참 고맙소. 누가 노래 부른 것처럼. 정말 주님 아니면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누가 지적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나는 나만 위해서 삽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신은 그게 여호와든 예수든 다 가짜요 우상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 드리는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내 쪽에서 천국 갈 시도는 안 하셔야 됩니다. 하실 필요가 없어요. 뭔가 천국 가려고 나서면 내 쪽에서 조건을 걸기 때문에. 이번 소송사건만 잘 되면 예수 잘 믿겠습니다. 이런 것. 우리 얘가 난치병이 있는데 이 병만 고쳐준다면 제 목숨 바쳐서라도 주께 충성하고 교회에 충성하겠습니다. 자꾸 조건을 걸어요.

그렇게 조건 걸 것 같으면 처음부터 아예 하나님 찾지 마세요. 우리가 백날 조건 걸어봐야 조건 걸어서 나온 결과마저도 누구에게 좋은 결과겠어요? 나 좋은 나를 위한 조건이잖아요. 그래서 일단은 우리가 구원받기에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말씀을 거의 20분 동안 해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관심 있는 것, 아무것도 내가 시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 보내준다는 거예요. 믿기지 않지요. 왜 믿기지 않느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경험상 결과를 낼 때는 내 쪽에서 설쳐야 된다는 그것이 체험적으로 당연한 거거든요. 설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구원받는 우리의 운명이다, 미래에 결정타를 날리는 미래의 문제에 있어서 내가 손 놓고 있을 정도로 참을성이 있을까요, 우리가? 그렇게 배포 있게 나갈 수 있을까요?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가 손을 놔도 괜찮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어떻게 보느냐 하면, 땅이 있지요. 땅에다 이불을 덮어요. 땅이라는 이 범주 또는 더 넓은 범위의 이불을 깔아버립니다. 이불의 크기가 땅을 다 덮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하는 땅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요. 이 이불이 율법입니다. 또는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땅을 덮어버리면 이 땅에 사는 우리가 땅을 밟을 때마다, 이불을 덮는다고 제가 이야기했는데, 만약이 눈이 많이 오는 노르웨이 폭설이 내려서 온 지역이 하얀 솜이불처럼 덮였다고 봅시다.

그러면 노르웨이 주민들이 아침에 나와서 자기는 땅을 밟는다고 하지만 그것은 무엇을 먼저 밟은 셈이 되지요? 눈을 밟지요. 울산바닥에 율법이 쫙 깔려있고 말씀이 깔려있으면 우리는 한 걸음 두 걸음 밟을 때마다 무엇과 마주치고 무엇과 만나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율법과 마주치게 돼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전략이에요.

집에서 혼자 자가 격리해서 성경연구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라면 하나 사려고 집에 나설 때 마스크 하고 모자 쓰고 마트 갈 때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율법과 말씀과 마주침이 성사되게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마치 공기를 마셔야 사는 것처럼 말씀과 마주치게 돼있어요. 이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먼저 모든 약속의 땅에다 율법을 다 깔아버려요.

오늘 아침에 뉴스 보니까 스웨덴 나라에서 방역을 하는데 천주교 축제가 있어서 삼만 명이 모인데요. 스웨덴 당국에서 흩어놓을 재주가 없어서 닭똥을 뿌려서 닭똥 냄새 때문에 못 모이게 했답니다. 멋진 방법이죠. 주께서 닭똥 대신 말씀을 뿌려놔서 혼자서 집에서 성경 공부한 것 아무 소용없어요. 평소에 누굴 만나고 누구와 이야기하고 물건 하나 사고 차를 타고 운전한다든지 어느 지역에 가든 그 현장에 하나님의 말씀이란 조건과 대나무 숲처럼 촘촘한 말씀의 숲에서 우리 자신이 지적받게 돼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도 관행상 나를 위해서 하게 돼있어요. 기도를 해도 나를 위해서 헌금을 해도 나를 위해서 교회 다녀도 나 천당 가려고 오지요. 예수 믿어도 우리 집안 잘 되라고 오지요. 오늘 교회 가운데 신종코로나 물러가라고 철야 기도하는 교회 있겠습니까? 아무리 교회가 엉터리라고 해도 그런 교회 있겠어요? 있다고 칩시다. 있을 가능성 많아요. 절에는 그렇게 하지만 교회마저 그렇게 할 것인가. 또 아이가 수능 가까이 되면 엄마가 수능 잘 치게 해달라고 새벽기도 하겠지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로 묶어버려요. 네 자신을 위해서 이 세상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했다, 모든 말씀이 네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믿음 없는 바닥을 들춰내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게 하십니다.

그러면 정리해봅시다. 믿음 없다는 것은 방금 잘 들으셨으니까 어려운 표현도 감당하리라 싶습니다. 믿음 없는 생활은 단독자 의식, 다른 말로 하면, 개별자 의식, 이렇게 어려운 표현으로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나로 출발해서 나 밖에 모르는 것, 그게 믿음 없는 생활이에요.

왜 이렇게 정리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믿음 있는 것은 무엇이냐? 믿음 없는 세상과 반대라고 쉽게 정리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가 믿음 없는 것부터 먼저 정리해드린 겁니다. 믿음 없는 것은 단독자고 개별자라면, 믿음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집단적이고 전체적이에요.

집단적이고 전체적이란 그 안에 너나 할 것이 공통적인 다 담겨있다, 공통 조건이 담겨있다. 너나, 남녀노소, 직업을 불문하고 구원받은 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너한테 하나님이 주신 것과 나한테 하나님이 주신 것이 나의 노력과 성과와 재질과 자질 전혀 관계없이 무관하게 그냥 주시는 거예요. 그냥 똑같은 주시는 거예요.

그럴 때 너와 나 사이에 경쟁이란 게 성립이 안 되지요. 우리 집과 저 집과 경쟁이 안 되지요. 저 집 얘 좋은 대학 가고 우리 집 얘 떨어지고, 이게 천국에서는 그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저 집은 늘 아프고 우리 집은 건강하고, 이런 것으로 인생 성공 했니 못 했니 비교가 안 돼요. 할 수가 없어요.

믿음이 있는 집단은 개별자가 죽습니다. 개별자 의식을 용납하지 않아요. 독단적이고 단독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사람이 단독적이 되면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는데 온 혼신의 노력을 거기다 집중해서 평생을 살아도 옆집 아저씨 이기려고 살아요. 참 정말 치사하게 살아가요. 기껏 저 인간 이기려고 아등바등 평생을 허비한 거예요.

저 인간이 나보다 바둑을 잘 두고 얘도 성적이 내 얘보다 낫고 사위를 봤는데 그렇게 멋있고 우리 집 사위는 엉망이고 눈 뜨고 못 보고 저쪽은 눈 바짝 뜨고 보고. 이게 버릇이다 보니까 다른 사람 볼 때도 그 사람과 또 비교한다고요. 사는 보람이 뭐냐 하면, 남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게 있는 것이 오늘의 기쁨이 되는 양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옆에 나와 비교되는 아저씨가 만약에 오늘 아침에 음주운전 걸려서 죽었다. 그러면 누가 허탈하겠어요? 길가에 죽어있는 인간과 쓸데없이 경쟁했던 자기의 애씀이 헛발질했다고 느낄 때 도대체 나는 왜 사냐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래놓고 다른 사람과 또 경쟁을 시작하는 겁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남을 이기는 데서 내 존재 의미를 찾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얘가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이 태어나면서 언니나 오빠는 새로운 자기 사는 의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 아빠, 엄마는 나한테 사랑을 듬뿍 줬는데 동생 생겼다고 자기한테 소홀하고 뭘 달라 해도 안 주고. 속으로 미워 죽겠다고 동생 죽으라 하고, 동생 생각만 해도 짜증난다는 식으로 그럴 정도로 인간은 자기 밖에 모름을 타고났습니다.

방금 타고났다고 했지요. 제가 타고났다고 할 때 무슨 뜻이냐 하면, 고칠 생각 마시란 말입니다. 타고났는데 어떻게 고칩니까. 기도한다고 고쳐질 줄 알아요, 성령 받는다고 고쳐집니까? 안 고쳐집니다. 타고났다니까요. 타고난 것은 죽을 때까지 가져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말하지요. 예수 믿고 개과천선했다고. 믿지 마세요. 사기입니다. 그런 사람은 또 남을 속이려고 하는 음흉한 계략이 들어있어요. “나, 예수 믿고 새 사람 되었다.” 그럴 때 이렇게 하세요. “너, 지금 무슨 짓하고 있는지 네가 아느냐? 어디서 내 앞에서 사기를 쳐. 목사님 말씀 들어보니까 타고난 것은 고칠 생각 말라는데.”

남한테 양보 좀 한다고 개과천선 된 것 아니에요. 그냥 양보했을 뿐이지요. 환경 바뀌면 본색 나오게 돼있습니다. 지금 환경에 따라서 위장을 잘해요. 자기조작에 능하다니까요. 인생을 오래 살았다는 말은 사기에 능한 기술을 그만큼 획득을 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젊은이들은 그게 좀 어색하고 연세 많은 이는 그게 숙달되어 잘 안 들키는 것뿐이지 인간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언제부터 예수 믿었다고 주여, 주여. 하여튼 입에서 내놓는 종교적인 용어나 주여 믿습니다, 라는 단어 남발, 그것 다 흉내 낸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인정하는 것은 개인을 두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집단에 속했다는 것을 보고 규정해주시는 거예요.

서울에 회사가 있는데 휴가내서 대구를 다녀왔답니다. 그 다음부터 회사에서 책상을 빼낸 거예요. 대구 갔다 왔다고.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얼마나 착하냐, 성실했느냐, 그동안 회사에 충성한 것 묻지 않고 대구 갔다 온 것 때문에. 왜냐하면 대구 갔다 온 사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집단적으로 규정을 받아요. 개인적 단독적이 아닌 집단적으로 규정을 받아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집단적으로 규정됐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개인적인 솜씨를 발휘해서 구원받는 그런 건 없어요. 집단적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개별자, 단독자에서 이 집단의 단일화, 집단 전체를 하나의 개인처럼 단일화시켜서 구원하는데 이 집단의 단일화를 이스라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벌을 받아도 단체 벌을 받아요. 아간이 하나님께 대드는 행동을 했더라도 벌은 다른 사람이 다 받아요.

대구 청정지역이거든요. 그런데 한 사람, 31번 신천지 아줌마 때문에 전부 다 벌 받은 거예요. 우리교회 어떤 분은 부산에 일하러 갔는데 대구 출신이라고 계약파기 됐어요. 대구출신이란 게 아무 상관도 없는데. 일체 모든 단독자, 개별자 요소를 다 빼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행하겠습니다, 바르게 살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 다 제거돼버립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26장 2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안식일은 시간이지요. 시간인데 그냥 시간이 아니고 시간의 단일화에요. 그 다음에 성소란 공간이지요. 공간의 단일화입니다. 단일화란 것은, 개별적으로 단독적으로 이건 믿음 아니라 했지요. 개별적으로 단독적으로 갖고 있던 고유한 공간과 고유한 본인만의 시간 같은 것을 전부 다 주께서는 의미를 제거해버린다는 뜻입니다.

개별적인 공간이란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나 집을 의미하겠지요. 교회라면 교회. 여기 무슨 동입니까? 학산동이라는 동네에 교회가 있잖아요. 새순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개인적으로 있고 다리 건너 쪽에는 새순교회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아파트가 있다면 저쪽에는 내 아파트가 없지요. 그러니까 개인적인 공간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시간이란 개인적인 추억이에요. 개인적인 기억. 개인적인 추억과 기억이 그 사람의 시간을 형성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20대에 얼마나 잘 나가고, 30대에 얼마나 잘 나가고, 주께선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별적이고 단독적인 시간과 공간은 무엇을 위해서 이것이 날아가야 되냐 하면, 집단적인 시간과 집단적인 공간을 위해서 이런 것들은 다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걸 축출하고 다 없애버려요. 이걸 다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제거할 때 쉽게 제거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단독자란 아까 했잖아요. 타고났다고요. 인간이 자길 위해 사는 건 타고난 거고 이걸 중간에 고친다, 못 고친다? 안 고쳐져요. 어느 교회 가도 자기 교회 자랑하고 어느 단체 가면 자기 단체를 자랑하고 어느 회사 가면 자기 회사를 자랑하다가 거기서 잘리면 욕한다고. 새로운 회사 가면 또 칭찬하고. 모든 것은 전부 다 현재 내가 있는 공간과 내가 있는 시간이 최우선이에요. 이걸 어떻게 고칩니까? 못 고치지요.

평양 살다가 코로나 도니까 지도자란 인간이 어디로 내뺐느냐? 원산으로 내뺐잖아요. 보세요. 지도자 동지부터 해서 자기 밖에 몰라요. 우리가 만약에 북한의 지도자급이라면 평양에 남겠습니까, 원산으로 빠지겠습니까? 우리도 역시 원산으로 빠지지요. 그러니까 남을 욕할 것 하나도 없어요. 타고난 것은 우리 힘으로 고쳐지질 않아요. 다만 제거대상이에요.

제거할 때 어떻게 하는가? 잔인한 처단. 다른 말로 하면 과도한 잔인성, 이것이 동원됩니다. 레위기 26장 27절부터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세상에 아들딸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게 내 아들딸인데 내가 살려고 아들의 고기를 먹고 딸의 고기를 먹는다면, 그리고 그 앞에 17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너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쫒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너희는 그렇게 되어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면 너희 죄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 20절에, “너희 수고가 헛될지라”

이 땅에서 살아보려고 어쨌든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다 깨지고 집구석은 파탄 나고 모든 가족은 아프고 뿔뿔이 헤어지고 교통사고로 죽고 병들어 죽고 완전히 산산조각 날지라도, 23절에,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도 돌아오지 아니하고”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레위기 하나님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처단이 너무 잔인하지요. 우리 보기에 과도한 처벌이라고 느껴질 겁니다. 왜 이렇게 과도한 처벌을 내리느냐 하면, 우리를 어르고 달랜다고 우리가 새 사람 될 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자, 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하면서 너무 차갑고 너무 잔인하게 처단하고 처벌하시는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포기 안 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물고기 비유를 드렸잖아요. 온갖 반항을 다 해요. 나는 나만 잘되길 원할 뿐이다. 줄곧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여기서 지적질하면 하나님이라도 가만두지 않겠다. 이런 본성이 매일같이 터져 나와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 하고 매일같이 쳐버리죠. 매일같이 이 땅의 삶이 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신종코로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나오겠지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심하게 다루어서 도대체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게 뭡니까? 그것이 레위기 25장 제일 마지막에 보면 나와요.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품꾼이니까 주인은 따로 있지요. 누가 주인입니까? 하나님이 주인이 된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종, 품꾼이 되는 관계가 이뤄지는 겁니다.

품꾼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일이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모든 시간을 단일화시키고 공간을 단일화시키는 이 말이거든요. 안식일이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홀로 일해서 창조를 완성시키는 겁니다. 따라서 시간의 단일화는 시간의 중지, 시간이 중지된 것을 뜻해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대로 가는 거예요.

시간의 중지=영구화. 영원히 만들어서 이걸 단일화시킵니다. 안식일의 영원함. 영원한 안식. 시간이 흐르지 않고 그 자체로 정지돼있으면서 그 자체가 완성이 되는 그 안식의 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개인적인 시간, 개인적인 기억과 추억 같은 것, 사진첩, 앨범, 그런 것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이 얼마나 지독한지 1234567 그 다음에 8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8이 없어요. 꼭 모래시계 같아. 다하면 거꾸로 돌리듯이 끝나면 또 다시 1234567, 끝나면 또 1234567. 그러니까 1부터 7은 천지창조가 완료될 때 7일 만에 완성됐거든요. 7일 만에 완성됐다는 이 조건이 단일조건이 돼버렸어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천지창조 할 때 1부터 7까지 할 때 인간이 한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 창조할 때 인간이 도운 게 있어요, 없어요? 도운 게 없지요. 그 원리가 천국의 원리에요. 천국의 원리가 뭐냐 하면, 내가 한 것도 없이 혜택 누리는 상태가 천국이 되는 겁니다. 한 것도 그냥 혜택 입었다는 조건을 유지하려면 내가 조금이라도 이 정도 했잖아, 라는 요소를 그냥 방치하겠어요, 그걸 제거하겠습니까? 제거하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잔인하게 제거하느냐? 잔인하게 제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인간이란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하는 것이 타고났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뭘 하나 봐도 저건 내가 열두 살 때 한 것, 저건 내가 서른네 살에 했던 것, 내가 이십 년 동안 적금 부어서 0순위 되어 산 집. 자꾸 뭘 하나 볼 때에 그 기념물이 무슨 기념물이냐? 내가 이만큼 살기 위해서 애썼다는 것이 전부 다 있는 거예요. 그것 폭탄 맞아버립니다. 폭발해버립니다.

내가 애써서 아파트 샀는데 사기 당해서 홀라당 다 날릴 때 우리는 뭘 느끼겠습니까? 주께서 참 천국 넣어주려고 이런 복까지 주셨구나, 이런 생각하겠어요, 안 그러면 그동안 예수 믿은 보람이 없구나. 오늘부터 교회 빠이빠이다. 목사님, “왜 나오십니까?” “집에 일이 있어서.” 집에 일이 있어서 못 나오겠다는 거예요. 빠이빠이에요. 이런 식으로 해서 그 다음에 뭐가 틀릴지 알 수 없거든요. 집을 가져가는 하나님이 딴 건 안 가져가겠어요? 내 건강 안 가져가겠습니까? 그러면 나한테는 남는 게 없잖아요. 나한테 남는 게 없는데 미쳤다고 교회 다녀?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안식이라는 시간의 단일성, 이걸 고정성, 고정성과 성소의 영원성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뭘 하셨느냐? 그냥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안식일을 완성했고,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죽어서 성소를 영원화시켰어요. 예수님의 방식이 우리로서는 엉뚱하다는 거예요. 너무 극단적이어서.

주님이 죽으셔야 이게 된다 말이에요. 그런데 주님이 자살하신 게 아니고 오자마자 베들레헴에 태어나자마자 번개탄 피워놓고 돌아가신 게 아니고 율법대로 사시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인간이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안식일이고 성소고 모든 율법을 자기한테 다 집어넣으니 그것이 뭐가 되었다? 그게 하나님의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에 담긴 의미가 그 의미에요. 인간이 지킬 수 없었던 것, 그래서 인간은 버림받아야 되는 것 그걸 대신해서 주님께선 모든 율법을 자기한테 다 쏟아 붓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뭐라 하느냐? 아까 땅에다 이불했지요. 이불을 뭐라 했습니까? 율법이죠. 이 율법을 하나님께서 완성을 시키는데 율법을 율법대로 남기는 것이 아니고 그걸 인격화시키는 거예요. 성소에 있는 단일 제사가 그걸 의미합니다. 성소에 있는 제사만이 제사로 인정받아요. 그 말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써 바쳐서 일반 집단이 단체로 용서를 받아요. 개인으로 용서받는 게 아니고. 믿음으로 죄 용서 받는 것이 아니고 집단 이름으로 단체로 용서받는단 말이죠.

이해 안 되시면 쉬운 말로 이렇습니다. 콜센터 여자 직원들 같아. 콜센터 위에 사장, 회장단에서 무슨 일을 정해놓으면 밑에 있는 여직원들은 그 소식을 알릴 수밖에 없어요. “예예예예. 대구생명보험인데 이제부터 보험료 올리겠습니다. 이번에 회사방침이 바뀌어서, 윗사람이 바뀌어서 알립니다.” 이게 바로 품꾼이란 말이죠.

품꾼이란 자기가 모든 기획을 하는 것이 아니고 윗사람, 하나님이 정해놓은 그 계획과 프로젝트를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증거하는 거예요. 이 관계, 일은 위에서 정하고 우리는 밑에 말단 여직원이에요. 그냥 전화 걸어서 고객들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이제부터 대출이자 올린 것 통보해드립니다. 앞으로도 신한은행 계속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5월부터 대출이자를 0.2% 올리고 예금이자는 마이너스고. 이런 식으로.

그러면 “신한은행 왜 그래.” 하면, “저 보고 이야기하지 마시고요. 우리 회사 방침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고 그냥 통보하는 거예요. 집단 단일체계가 우리는 다양성으로 하늘의 이야기를 지상에 증거하라고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성령을 받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07) 20-05-04 21:37 
20200501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표면존재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끝에 콜센터 여직원 이야기를 했지요. 콜센터 여직원이 고객들에게 대출이자 높였다는 이 말이 자기가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똑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위에서 이미 결정한 결정된 사항이 말단 직원을 통해서 다양하게 퍼지지요. 할아버지든 할머니든 자기 고객들이라면 조건 달지 않고 은행의 조건만 그냥 내뱉을 뿐입니다.

이걸 이렇게 보면 돼요. 부분 속에서 전체가 나옵니다. 성도란 하나님과 낚싯대로 관계가 돼버리면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를 위한 내용이 나오지요. 그러면 개인적인 시간과 개인적인 공간 이야기가 카페나 커피숍에서 세 시간, 네 시간 수다 떨면서 나오는 거죠.

만약에 여고 동창생 다섯 명 모였다. 각자 과거가 다르고 살던 모습이 다르고 현재 사는 형편이 다 다르겠지요. 다섯 명 전부 다 동일한 내용이 안 나옵니다. 각자 지 잘난 이야기만 나오지요. 자기 잘났다. 남편이 외국 나가서 뭐 사오고 다이아 5캐럿짜리 사줬다. 안 끼려 했는데 결혼기념일이라 해서. 다이아가 너무 많아서 귀찮아 죽겠다. 그 중에 어느 걸 끼고 나갈지 오늘 30분 동안 고민했다는 둥 그런 이야기 나온단 말이죠.

그런데 성도는 자기 부분 속에서 전체, 이미 합의가 된 하나가 된 천국이야기가 개인을 통해서 터져 나옵니다. 그럼 여기서 단일 시간과 단일 공간이 나올 때 단일 시간을 뭐라 했습니까? 안식일. 단일 공간은 성소. 이 이야기 나올 때 뭐가 방해되겠습니까? 남한테 이야기할 때 하늘의 방침이 그대로 서슴없이 나올 때 방해되는 게 있어요.

뭐가 방해되겠습니까? 바로 나의 시간, 나의 과거이야기, 자기 잘났다는 과거이야기나 형편 이야기, 그리고 사적인 소망, 사적인 욕심, 그것도 욕심 아닌 척하면서 부리는 욕심. 나는 내 힘으로 새순교회에 50명 전도했으면 좋겠다. 그런 욕심 있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전도해서 뭐 하려고? 남이 날 믿어줬다고 알아보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나의 믿음이 사적인 거예요.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나의 탐욕이죠.

이런 것들이 주의 일에 방해가 되는 겁니다. 방해가 되니까 고맙게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이 방해물을 방치하지 않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이걸 뜯어내요. 마치 배에 이끼 끼고 녹이 꼈을 때 망치로 패가면서 그걸 뜯어내듯이. 뜯어내야 하늘나라 공적인 것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걸 안 뜯어내면 사적인 자기 잘남, 이것만 덕지덕지 붙어 있으니까 그걸 떼어내는 겁니다.

그걸 떼는 방법 뭐냐? 율법이에요. 하나님의 율법. 네가 이웃을 사랑했나? 하나님을 사랑했나? 그런 식으로 계속 지적질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게 짜증나서 성경도 안 보지요. 교회도 안 나오고 말씀도 안 듣고. 나한테 지적하기만 해봐. 하나님도 가만 안 둔다. 계속 나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나로 인하여 사는 그것이 인생을 사는 보람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확신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토 달지 마라.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제부터 상당히 어렵습니다. 다만 다시 강조하는 것은, 성도란 부분을 통해서 전체가 나오기 때문에 그 전체는 자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전체 이야기가 뭐냐? 전체 이야기는 예수님의 희생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희생 이야기할 때 방해되는 것은 나의 희생, 내가 얼마나 교회 봉사하고 남보다 더 충성한 이런 것들이 예수님의 희생을 방해하는 불신적인 요소라는 것은 여러분들은 새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희생만 이야기하면 될 것을 왜 나의 희생, 나의 봉사를 방해되더라도 이야기하고 싶은가? 그것은 바로 세상 살기가 무섭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무서움이 있어요. 그 무서움의 정체를 까보면 이런 거예요. 나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한다고 했잖아요.

이번에 주식에 석유에다 투자했는데 동학개미라 했는데 남편 몰래 오천 만원 넣었는데 그것 깡통 되면 쫓겨나면 뭐하고 살지? 뭐든지 움직이고 행동할 때마다 바들바들 떤다 할까요, 무서운 거예요. 마치 초등학생이 문방구 물건 훔칠 때 벌벌 떠는 것과 똑같아요. 물건 훔친다는 것은, 첫째, 손을 내민다. 두 번째, 저기 있는 장난감을 손을 터치한다. 세 번째, 가볍게 내 쪽으로 끌어당긴다. 네 번째, 집에 간다. 이러면 아무 문제없잖아요.

팔만 움직이면 물리적으로 볼 때 가볍거든요. 저 물건까지 1.8미터, 다가가서 가져간다. 물리적으로 수학적으론 아무 문제없는데 인간의 마음은 그런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하는데 화장실 갔던 문방구 주인아줌마가 하필 그때 나오면 어떡하지? 걸리면 엄마한테 나는 도둑놈이 될 거고 옆에 친구들은 도둑놈이라고 나이 팔십구 세까지 계속 갈 건데 그 우사를 내가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이 그런 마음이 계속 떠오르게 하지요. 무서움이거든요. 그냥 팔 내밀어서 쥐면 되는데 계속해서 이게 들켰을 때 어떻게 되고 내가 망신살 뻗치면 어떻게 되고, 이 모든 생각이 든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은 이미 누구 지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냥 물리적으로 하면 될 것을, 이게 기계잖아요. 어린아이가 젖을 먹을 때 내가 젖을 안 먹으면 엄마가 때리면 어떻게 하지? 얘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어린아이 거의 기계에요. 본능이라고.

아이 좀 더 크면 인간이 육적인 본능 말고 덮여진 것, 더 추가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법이에요. 선악과 따먹은 선악체계, 악마가 이것으로 인간을 지금 지배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할 때 뭐로 지배한다 했습니까? 선이냐, 악이냐를 집어넣어서 선과 악의 갈등을 일으키게 만들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벌벌 떨게 만드는 겁니다. 악을 저지르면 죽게 되고 선을 행하면 살게 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에 나오지요.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데요 햄릿에서 뜻이 뭐냐? 다 죽여 버려요. 모든 등장인물을 다 죽여 버리는 것이 햄릿의 내용입니다. 주인공부터 해서 다 죽입니다. 어떻게 죽이는가? 서로 관련되어서 다 죽여요. 햄릿이 비극이라 하는데 인간이 비극을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내 뜻대로 안 되면 어떻게 되나? 정말 비극적으로 되면 안 되지. 비극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자체가 이미 비극의 요소가 우리 안에 잠복돼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집어넣었겠어요?

선과 악 중에서 어느 것이 비극에 가깝겠습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선한 쪽이 비극이 되겠어요, 악한 쪽이 비극이 되겠어요? 악한 쪽은 비극이 되고 선한 쪽은 뭐가 된다? 희극이, 기쁨이 되겠지요. 이 발상이 바로 뭐냐? 악마가 지금도 내 마음을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악마가 나를 다스리고 있다는 증거에요. 선악체계가.

착하게 살면 복 받아 천당 가고 나쁘게 살면 하나님이 분노해서 지옥 간다. 이러한 발상을 누가 집어넣었느냐? 세상에 악마가 집어넣은 거예요, 악마가. 우리는 거기서 발을 못 빼고 있습니다. 아까 문방구 예를 들어볼게요. 자, 손을 뻗었다. 마침 그때 화장실 갔던 주인이 왔고, 안 그래도 도둑놈 잘 잡았다. 한 달 동안 이십육만 사천오백 원어치 나왔는데, 그 얘는 처음이에요. 문방구 주인이 덤터기 다 씌운 거예요. 니 아버지 불러와. 안 그러면 파출소 불려가서 콩밥 먹고 교도소 가서 호적에 뻘건 줄 그어져서 팔십구 세까지 도둑놈 소릴 듣고 취직이고 뭐고 결혼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한다, 라고 했지요.

자, 문방구 주인은 뭐가 됐습니까? 제 예에 의하면 문방구 주인은 천사가 됐어요, 악마가 됐어요? 답변을 하세요. 답변하셔야 진도 나갑니다. 문방구 주인은 악마지요. 문방구 주인이 하기 전에 먼저 문방구 주인의 논리가 내 안에 있는 거예요. 이걸 이기는 방법은 뭐냐? 간단합니다. 잡히면 되지. 이십육만 오천 원어치 갚아주면 되지. 못 갚으면 소년원 가면 되지. 가면 얻어맞겠지. 얻어맞으면 되지. 얻어맞으면 아파 죽겠지. 그 다음 마지막에 뭡니까? 죽으면 되지. 이게 해결책이에요. 그게 해결책인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 어느 누구도 악마에게 못 벗어난 거예요. 우사스러워서, 부끄러워서. 적어도 나는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선한 천사로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 선한 천사란 자부가 남들에게 너는 나쁜 놈, 악마의 앞잡이 그런 소리 듣는 것을 내가 용납 못하는 거예요. 뭘 느꼈기 때문에? 그걸 창세기 3장에서 이렇게 했어요. 수치, 부끄러움이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거예요.

얼굴 들고 못 다니겠다는 말이 있잖아요. 부끄러워서. 나는 이제 이 동네에서 이사 가야 돼. 부끄러워서. 어떤 집은 아들 사고 난 뒤에 대번 이사 갔어요. 부끄러워서 못 살아요. 저 집안은 저주받아서 그렇다고 할까봐. 인간은 부끄러움을 못 이기는 거예요.

부끄럽다는 말은 누가 누굴 지적한다? 남들이 나를 지적하는 것도 있지만 그 전에 누가 누굴 지적해요? 남이 욕해도 버티면 되잖아요. 그런데 못 버텨요. 왜? 남이 이야기하는 것과 평소에 내 안에 내 마음이 지적하는 것과 어찌 그리 똑같은지 지레 겁을 내고 있는 거예요. 사모님 말씀대로 죽으면 되는데, 그냥 죽으면 되잖아요. 예수님이 돌아가셨으니까 그냥 죽으면 되는데 그걸 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내가 남한테 걸레 같다, 쓰레기 같다는 소리를 남이 하기 전에 내가 용서가 안 돼요.

주님은 우리한테 지시합니다. 네가 너를 구금하라, 체포하라. 범인은 네가 범인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데 범인은 누구라고요? 누가 하나님의 방해물이라고요? 내가 방해물이에요. 그게 레위기 26장 1절에 “너희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사는 이게 범인입니다. 주의 일의 방해꾼이에요. 우리가 악마의 앞잡이입니다. 그 잘난 우리가.

이왕이면 선을 행하면 살고 악을 행하면 죽는다. 이게 거짓말이거든요. 그러나 이 거짓말 이외에는 우리가 아는 말이 없어요. 이 거짓말을 진리라고 우리는 장착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보세요. 새순교회 말고 다른 교회에 가보세요. 전부 다 이런 인간들 악마의 아바타, 악마의 가면 쓰고 다 앉아있어요. 가면 쓰지도 않았어요. 악마를 탑재하고 다 앉아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 사이에 누가 더 의로운지, 누가 더 착한지 경쟁을 뭐로 비교하느냐? 누가 더 부자인가, 누가 집안이 행복하냐, 누가 우환이 적으냐, 작년에 누가 가정이 더 행복했는가? 그런 것들을 끄집어내서 누가 복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누가 저주받고 있는지, 저주받고 있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벌 받고 있는 거고 복 받고 있는 우리 집안은 분명히 하나님 보시기에 착하기 그지없다고 지금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반대라고 보여주는 책이 바로 구약에 욥기입니다. 성경이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상식에서 벗어납시다. 그런데 구약에서 문제는 이거에요. 말씀이 있고 우리가 따로 있어서 우리가 선+악으로 말씀에 다가가니까 결국 말씀을 지키는 목적이 뭐냐 하면, 내가 보다 악을 버리고 선을 얻기 위해서, 선을 얻어야 내가 복 받고 천당 가기 때문에 말씀에 있는 좋은 말씀과 나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용을 쓰고 애를 쓰는 거예요. 나의 선행을 키우기 위해서, 내가 착하다는 것을. 착해야 복을 받으니까, 나쁜 짓하면 벌 받으니까. 내가 용서가 안 되니까 말씀으로 내가 선을 높여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이 뭐가 문제냐 하면, 말씀이 지금 이 사람 속에 들어온 겁니까, 아니면 지가 다가간 겁니까? 이게 본인이 말씀으로 다가가서 얻을 것 얻고 다시 내 것 키우고 내 자랑거리 키우고 또 다가서서 또 키우고 하지요. 이게 바로 구약입니다. 구약의 특징은 말씀은 말씀대로 남고 나는 안 죽고 멀쩡하게 따로 남는 게 구약이에요. 그런데 약속의 땅에 말씀 차버리면 약속은 날아가 버려요. 멸망해 버립니다.

그 이유는, ①내가 여기 있고, ②말씀은 저기 있고, ③내가 그 말씀을 내 안에 담고, 마지막으로 ④나는 여기 있고. 1번, 내가 여기 있고 4번도 내가 여기 있지요. 그럼 2번, 3번은 뭡니까? 말씀은 저기 있고, 그 말씀의 좋은 걸 내가 정보를 중요한 것을 내 안에 장착하고 채택하고 거둬들이는 거죠. 이게 구약인데 구약은 결국 인간은 왜 망해야 되고 악마인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이 순서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간들의 누굴 죽였습니까?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십자가가 그래서 중요한 거예요.

십자가가 왜 중요하냐? 십자가는 쇼윈도가 아닙니다. 그냥 보고 지나가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 안에 들어가야 돼요. 다시 말해서 말씀의 완성자가 처음에 누구라 했지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는 겁니다. 들어와 버리면 우리가 지킬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으면서 뭐냐? 네가 하는 모든 선악적인 스케줄, 이 계획이 나를 죽이게 했다. 예수님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했다. 따라서 섞자. 네 안에 내가 들어갈게. 섞어버리는 거예요.

섞어버리니까 그 다음부터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 벌벌 떠는 이것도 내 안에 있고 또 뭐냐 하면, 그것을 선악과 따먹은 악마의 모든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낚싯대로 우리를 딱 걸어버린 예수님의 용서하심도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둘 중에 어느 걸 자랑하겠어요? 나는 이만큼 잘났다, 기도 잘한다, 헌금 많이 했다. 이게 아니라 절대로 나는 타고났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 고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요. 나는 안 고쳐집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에요. 이건 갈수록 나라는 인간은 나 밖에 모른다는 것이 절절하게 연세가 많아도 느껴져요. 지금은 연세 많은 사람 별로 없지만 나중에 팔십 넘어 보세요. 팔십 넘으면 완전히 전영록이에요. 전영록이란 가수 알지요. 또라이, 돌아이. 돌멩이 같아. 사람 마음이. 연세 많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돌멩이 같아. 이걸 경화증이라 합니까? 딱딱해지는 거예요. 씨도 안 먹혀요.

“어머니, 그만 고집부리지 마시고 요양원에 모시겠습니다.” 어머니 하는 말이, “내 집 놔두고 어딜 가노?” “어머니, 이러면 자식들 다 불효하게 만듭니다. 자식들의 힘듭니다. 어머니 하나만 이동하시면 자식들의 편하게 모실 건데 이러면 자식들 간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이러지 마시고 요양원에서 모시겠습니다.” “못 간다. 내 집 놔두고.”

자, 내 집 놔두고, 아까 배웠잖아요. 내 집 놔두고, 라고 고집부리는 것은 인간은 단독적인 뭐가 있다? 단독적인 시간과 단독적인 공간 내 집. 내 추억이 있고, 어릴 때 내 모든 추억이 있는 지점이잖아요. 보세요. 현관에서 유리액자로 손자 돌 사진부터 흑백사진까지 붙여놨잖아요. 그 집 놔두고 요양원에 왜 가지요? 내가 죽어도 이 집에서 죽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식들 멀리서 사륜구동 차타고 촌까지 와서 반찬 해대고. 자식 다섯인데 지가 반찬 해대면 반찬 하는 그날부터 자식 하나가 단독자기 때문에 누굴 욕합니까? 5-1 나머지 넷을 욕하는 겁니다. “하여튼 형님은 싸가지가 없어.” 이런 식으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돌보지 않고. 내가 멀리서 서울서 여기까지 와야 돼?” 그때부터 드디어 이웃사랑 날아가 버리고 개판 돼버리지요.
 
인간은 안 고쳐집니다. 나 밖에 몰라요. 이건 부부도 예외가 없지요. 전에 이야기했는데 남편이 죽도록 고생해서 나이 칠십 넘어서 은퇴했는데 부인이 구박하는 거예요. 왜? 돈 벌어오라고. 칠십 넘었는데. 돈도 못 벌어오는 인간은 밥 먹을 자격도 없다. 돈을 벌어줘야 반찬이 있지 돈도 안 벌어주는데 무슨 밥을 달라하느냐, 이 염치없는 인간아, 라고 얼마나 구박을 하던지. 그동안 남편이 벌어준 건 주식해서 다 날려버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은 자기밖에 모릅니다. 이제부터 왜 그런지 그 점을 설명에 들어갑니다. 이건 아시겠지요. 성도가 오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이 직접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악마의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무서워 벌벌 떨고 남한테 비난 들을까봐 벌벌 떨고. 벌벌 떨면 떨수록 또라이가 되는 거예요. 전영록이 해야 되는데. 돌+아이. 완전히 돌처럼 자아가 딱딱하기 시작해요. 그만큼 인생을 살면 살수록 갈수록 자기를 철통같이 방어해요. 철통같은 방어는 국방부에서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철통같이 방어해요.

뭐만 민감하게 남는가 하면, 자식이 와서 내 집 잡히라고 하지 않을까. 요양원에 앉아서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첫째 왔다 갔지. 둘째는 언제 오나, 정기적으로 봉투에 얼마 넣고 오나. 이런 것. 내가 너한테 뭘 해줬는데 너는 왜 자주 안 오냐.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리고 옆에 할머니한테는 우리 자식 잘한다고 칭찬하고. 며느리 자랑하다가 오게 되면 며느리 욕하고 가고 나면 옆에 할머니한테 며느리 자랑하고. 전부 다 내가 자식 다 키웠다는 자기 자랑 외에는 나올 게 자기 시간, 자기 공간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게 없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정리가 될 수 있느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땅이 두 종류입니다. 그냥 기존에 있는 땅이 있습니다. 물어봅시다. 땅 위해서 삽니까, 나란 인간을 위해서 살아요? 땅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살지요. 땅이란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있는 게 땅이지요. 텃밭을 가는 것은 텃밭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배추나 상추 먹으려고 텃밭 갈잖아요. 나를 위해서 하잖아요. 이게 이방민족의 땅입니다.

이방민족은 나라는 인간을 위해서 땅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가 1순위고 땅이 2순위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땅이 1순위고 인간이 2순위입니다. 땅이 마음에 안 들면 다 나가. 다 내보내요. 이게 바로 레위기 26장 그 뒤에 쭉 나오는 이야기에요. “네가 만약에 이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이 백성에 쫓아내고” 땅이 우선이고 인간은 나중이에요. 그래서 땅에 뭔가 문제 있다면 인간을 없애버려요. 죽여 버립니다. 이건 이스라엘 땅이에요.

사실은 세 번째 땅이 있는데 이건 어렵기 때문 보류하고요. 첫 번째는 인간이 우선이고 인간이 밥 먹고 살리기 위해서 땅이 있다. 대지가 있다. 다른 말로 토지가 있다. 토지는 날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있다고 박경리는 <토지>에서 그렇게 봤어요. 일제시대의 그것을 다뤘습니다. 그런데 그건 이방민족이고요.

이스라엘에서는 바로 이스라엘이 땅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혼자 사는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땅이에요. 하나님의 땅입니다. 이걸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약속이 빠져버리면 살 수 없는 땅이에요. 참 희한하죠. 이게 굉장히 신기합니다. 여기 레위기 26장 3절에 보면,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 비를 그 시후에 주리니 땅은 그 산물을 내고 밭의 수목은 열매를 맺을지라”고 돼있어요.

그러니까 일기예보를 비롯해서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인간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 사는데 접합한 땅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인인데 거기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에요. 이게 천국이에요. 예수님이 주인이고 예수님이 천국을 만든 주인공이고 우리는 보탠 게 없어요. 내가 사는 여기에 너도 같이 살자, 하고 낚시 던져서 꿰서 강제로 끌어당긴 것이 뭐냐?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나 위주가 아니고 예수님 위주지요. 나의 살던 고향과 달라요. 나의 살던 고향은 단독적인 나를 위한 땅이지만 천국은 그런 자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뭐가 어렵다는 말이냐? 이 땅이 없어져버려요. 2번 땅이 없어진다고요. 왜냐하면 땅은 뭐로 바뀌느냐 하면, 여기에 이불 덮였으니까 땅은 율법으로 바뀌겠지요. 율법은 예수님의 인격이라 했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있지 않고 어디로 올라갑니까? 하늘로 올라가지요. 하늘로 올라가게 되면 지상에 있던 율법도 예수님의 인격도 땅도 다 없어져버려요. 물론 교회도 마찬가지고. 하늘로 올라가니까. 하늘로 올라가는데 생기는 게 뭐냐?

제가 자꾸 뜸 들이는 이유가 있어요. 지금껏 제가 강의 중에 제일 어려운 대목에 여러분들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면, 인간이 여기에 땅을 잡게 되면 여기를 안이라 보고 바깥 또는 밖이라 하잖아요. 이것은 땅 위에 있을 때는 내가 사는 아파트, 내 집은 안에 있고 그 외는 바깥이다. 그것이 성립이 되는데 이 땅 자체가 둘둘 말려서 없어져버리면 인간의 밖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돼요.

안과 밖이 성립되는 것은 이 세상 자체를 성공적으로 빠져나간 분에 의해서만 안과 밖이 돼요. 이걸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 안은 인간이 내 안에 있는 식으로 갈 수 없어요. 성립이 안 돼요. 왜? 땅이라는 조건 하에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그림을 그려보겠어요. 저는 이걸 좋아합니다만 도넛이에요. 수학 위상학적 용어로 토러스라 하는데 쉬운 말로 도넛. 도넛이 있는데 여기에 개미가 있다고 합시다. 이 벌레는 아무리 평생을 돌아다녀도 도넛 위를 돌아다니겠지요. 이것이 뭐냐? 표면존재. 이 개미는 도넛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요. 평생을 기어 다니니까. 계속해서 기어 다니면서 이 땅에서 자기가 먹고 살아야 되니까.

공부한 것 다시 복습해봅시다. 먹고 산다. 살려면 뭘 해야 산다? 선해야 돼요, 악해야 돼요? 선하면 살고 악하면 죽는다. 벌벌 떠니까. 선하기 위해선 뭘 해야 되겠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섬기고 예수 믿고 하여튼 할 짓을 다하지요. 그렇잖아요. 1~4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하는 거예요. 내 가족이 살기 위해서. 사실은 내가 살기 위해서예요. 내 가족도 날 욕하면 빠이빠이에요. 내가 살기 위해서 모든 짓을 다하는 거예요.

여기서 내가 착하다는 티를 내야 되겠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선하다면 그냥 선한 게 아니에요. 무슨 증거가 있어야 되지요. 그 증거가 뭐라 했습니까? 하는 일이 만사가 형통하고 잘되고 부자 되고 건강하고 가정이 행복하고 다복할 때 우리는 선하다고 자부할 수 있겠지요. 장담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하는 일마다 안 되고 집에 불나고 부도나고 이러면 주여, 뭔가 이상합니다.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 안 되겠지요.

여러분, 스트레스를 왜 받습니까? 스트레스를 내가 살려고 받는 거예요. 내가 착해서 욕 얻어먹지 않고 살겠다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에요. 스트레스 안 받으려면 돈 수십 억 가지고 자연인, 산 속에 갈 수밖에 없어요. 가끔 읍내에 나와서 돈 찾아서 쓰는 것, 그게 소망이에요. 돈 많이 벌어서 노후에 가정이고 뭐고 혼자 사는 것. 산 속에 집 지어놓고,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에서처럼 남자들의 로망이라니까. 돈 들고 혼자 살며 지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예요.

어느 날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남자들의 어떤 여자를 원하느냐 하면, 여자는 돈 벌고 남자는 그냥 취미 생활하는 것, 이게 남자들의 로망이거든요. 여기는 그런 분이 안 계시는 모양이네. 반응이 없는 걸 보니까. 그냥 노는 거예요. 노는데 돈이 필요해서 돈은 니가 벌고 놀긴 내가 놀고. 그게 제일 좋은 아내에요. 그래도 잔소리하지 않는. 그걸 줄이면 잔소리하지 않는 여자, 최고의 여자에요.

이게 이 땅에서 계속 내가 선한 걸 증명하기 위해서 부자 되기 위해서 애를 쓴 사람은 도넛 위에서 한다. 이게 땅이거든요. 땅인데 자기는 편평한 땅이라고 여겼지요. 안에 구멍이 뚫렸다는 걸 인간들은 상상도 못했지요. 이게 뭐냐 하면, 비어있는 곳이 구약의 성소입니다. 성소는 인간이 못 들어가요. 못 들어가는데 그 곁에서는 살 수 있어요. 이게 이스라엘 구조에요. 제사장만 1년에 한 번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가요. 들어갈 수 없어요.

하나님 사는 구역 따로 있고 인간이 사는 구역 따로 있는데 이스라엘입니다. 그 안의 성소의 단일성과 영구성, 그 시간도 안식일을 반복하면서 영원하다고 했지요. 1234567, 1234567 계속 돈다 했지요.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그냥 뺑뺑이 도는 거예요. 단일화로 봐야 돼요. 그것을 성소에 하나님이 계심으로서 하나님 자기의 계획을 스스로 이뤄나가시는 겁니다.

이 성소가 구멍이거든요. 비어있단 말이죠. 비어있다는 말은 비어있을 때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의 완결성, 모든 단일성이 완성이 되면 이 땅에서 빌빌빌 다니다가 이렇게 구멍 속으로 와버려요. 그런 사람은 더 이상 평생을 살아보겠다고 두려워하면서 착한 사람 되겠다고 노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같이 동행해서 들어와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그게 없어요. 모든 이 세상은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결국은 내가 복 받고 선한 사람 되어 죽어서 천당 가고 이런 것을 미래에 다 보장받고 다 나를 위해서 미래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다보니까 최종적으로 예수님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되는 거예요. 내가 돼버리면 내가 있는 곳이 안이 되고 밖은 바깥이 되지요. 이런 것은 성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건 마귀 들린 인간들이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성소라 할 수 없어요.

성소는 이 안이 비어있습니다. 비어있는 구조를 주께서는 이걸 영구화, 고정화시켜버린 거예요. 동결시켜버린 겁니다. 그러면 여기는 뭐가 되느냐 하면, 천국이 되겠지요. 이게 천국이 되고 바깥은 그야말로 밖이죠. 주 밖에. 이건 주 안이고.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들어오려면 어떻게 들어오느냐? 예수님께서 여기 있다 들어올 때 죽어서 들어왔습니다. 희생물로 들어왔거든요. 따라서 여기 있는 사람이 예수 안에 함께 있으려면 예수님과 함께 죽어서 들어와야 돼요.

이 그림이 어렵고 이제부턴 쉬워요.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말은 무척이냐 쉽습니다. 왜 쉬우냐 하면, 예수님과 죽으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채찍으로 자기를 때리고 어떤 사람은 굶고 어떤 사람은 선교사 간다고 난리고 철야하고 금식하는데 그건 자기를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막 사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팔을 뻗었다. 장난감 쥐었다. 걸리면 소년원 가겠지. 그러면 난 집에서 쫓겨나겠지. 하지만 그 마지막은 뭐냐? 그렇게 비리비리 살다가 죽겠지. 할 때 막 산다는 것은 이미 내가 죽은 자로 산다. 이걸 더 간편하게 하면, 죽음을 드러내는 식으로 산다. 내가 사는데 뭘 사느냐? 나는 죽음을 드러내는 식으로 산다. 죽음으로 사는 이유가 있어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 조상이 따먹었다. 따라서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죽은 상태인 것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선악으로 산다는 것은 뭡니까? 그야말로 막 사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미 주님한테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내가 왜 내 힘으로 구원되지 못하는 걸 보여주려면 나는 선과 악 사이에서 매일같이 내가 요동치고 있으면서 그걸 겁내고 발발 떨며 살아가는 거예요. 내가 행동했을 때 이 행동이 옳았을까 틀렸을까, 바보, 바보, 병신, 병신. 그런 실수를 왜 했을까? 그런 실수를 왜 했을까 후회하고 반성한다고 그 다음부터 그런 실수를 안 합니까?

이건 실수가 아니고 자기의 본질이에요. 실수란 말하지 마세요. 자기의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본색이 본색대로 살 뿐이에요. 죽은 자가 죽은 자답게 사는데 그게 뭐가 흠이 됩니까.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게 되면 나는 그것이 정말 부끄럽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내가 정상이 아니고 악마에 사로잡힌 자란 뜻이다. 따라서 물건을 훔치느냐, 안 훔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내가 훔치고 싶다. 안 훔쳐도 괜찮아요. 저 물건이 탐난다는 자체가 그 순간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뭐냐? 주여, 내가 죽은 자 맞습니다, 라는 걸 아는 기쁨이란 말이죠. 물건을 훔치라 했다고 괜히 남 탓하지 말고.

여러분들이 사십 대나 오십 대 동창생 만날 수 있잖아요. 그럴 때 좀 산다고 여유 있다고 부부동반 골프모임, 여기와는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부부동반 일본 온천 가기 그런 모임 있잖아요. 부부동반으로 갈 때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늘 신경 쓰이는 게 있어요. 내 아내가 다른 여자보다 얼굴이 못 생겼다든지 특히 얼굴은 어느 정도 따라가는데 몸매가 박스형이라든지 밑바닥이 안정돼있다는 뜻이에요. 든든하게. 이럴 때 데려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 친정이나 갔다 오라고 이런 식으로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왜 내 아내가 몸매 좋은 다른 부인들보다 부끄럽게 느껴지느냐 하면, 그게 선과 악과 관련돼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부부동반 골프모임, 주께서 주신 시추에이션, 상황을 통해서 내가 죽어있다는 것을 내가 이미 선악적으로 약간에 탐을 내고 갈등을 일으키고 주저한다는 자체가 내가 죽어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멋진 기회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우리는 사랑의 콜센터 직원입니다. 주께서 선악과는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우린 콜센터 여직원이 되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걸 마음껏 이 세상을 향하여 바깥을 향하여 외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내를 데리고 다녀야지요. 이게 막 사는 거니까. 그래 내 아내, 니 여자보다 못 생겼다. 어쩌라고, 이런 식으로 이게 막 사는 겁니다. 본래 우리가 이렇게 생겨먹었어. 이렇게 태어났어. 태어난 거야. 그렇지 여보? 이러다가 여보한테 잔소리 듣고 아내한테 확인할 필욘 없고요. 눈치 없이. 본인의 신앙과 관련돼있기 때문에 그냥 막 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한 여름 밤에 풀숲에 놀러가잖아요. 작은 길에 후레쉬 들고 가면 뭐가 달려듭니까? 나방하고 온갖 벌레, 모기, 파리들이 다 달려들지요. 이 세상이 비어있는 게 아니에요. 선악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인생을 살아보면 부딪치는 모든 문제가 선악 문제입니다. 우사스러워냐, 남한테 부러움을 사느냐. 그 문제가 매일같이 살아도 부딪쳐요.

그게 내가 남한테 욕 얻어먹기 싫어서 철저하게 철통같이 자기를 방어하고 사수하다보면 아까 뭐가 된다 했습니까? 인간은 또라이, 돌 되지요. 그게 연세 많은 사람의 특징 아닙니까. 평생을 자기 잘난 맛에 살았고 자기의 허점과 약점을 누가 지적하고 자식 욕하면 용서하지 않는 것, 그게 습관이 돼서 나 이렇게 잘났다고 계속 가는 거예요. 그래놓고 십자가 전하면 나, 십자가 알아. 교회를 몇 년 다녔는데 십자가 모를까봐. 이런 식으로 버티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죽은 거예요.

다시 합니다.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이걸 못 고칩니다. 그 자체가 죽은 거니까 죽은 것을 죽음으로 드러내주는 것이 콜센터 위층에서 윗분들이 결정한 사항이에요. 이 땅에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은 지금도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 성경에는 모든 말씀이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는 그 사실을 우리 생을 통해서 그걸 체득하고 체험하고 그걸 뿜어내는 거예요.

그런 여유, 그런 자유. 막 사는 자유. 이미 죽었는데 이미 죽은 것을 죽어줘야 되지 죽어있는 게 산다는 것은 억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죽은 인간이 돈 벌고 살려하니까 너무나 뻔해 보이는 억지고 위선인 거예요. 돈 있다고 삽니까? 지옥 가지요. 바르게 산다고 사람들은 칭찬할지 모르지만 우리 일가친척은 칭찬하지요. 예수 믿더니 인간 됐구나. 그건 인간 될 수 없어요.

그냥 인간 바뀌었다면 전에는 내가 죽은 인간이란 걸 몰랐는데 십자가 앞에서 이왕 내가 주님 보시기에 주님께서 안 받아주는 지옥 갈 인간인 것을 깨달을 때 주님의 낚싯대가 유효한 겁니다. 낚싯대가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희생 때문에 네가 살았지 네가 교회 충성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다. 네가 행동에 조심한다고 해서 대인관계가 원만하다고 천당 가는 그런 건 없다.

그런 걸 알려면 네가 세상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친한 친구들, 직장 동료들, 주변 일가친척들 만나봐라. 전부 다 그 사람들은 네가 복음을 모를 때 사고방식을 그대로 날파리처럼 계속 부딪치게 될 겁니다. 전에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니가 잘났나. 나도 잘났다. 이렇게 살았는데 이제는 복음 알고 어떻게 산다고요?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래 니 잘났다. 나 못났다. 난 못난 재미로 산다.

왜 그런 배포, 그런 배짱이 없습니까? 바로 이 세상에는 율법의 세상이고 말씀의 세상이에요.  이 세상은 이미 멸망당하도록 돼있습니다. 둘둘 말이에요. 세상은 말려서 불타버립니다. 이 사악한 세상에서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같은 선악과끼리 비교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죽은 놈들인데. 말 좀 심하게 했다.

죽은 자들인데 죽은 분들인데 이미 지옥 갈 분들인데 그 사람들에게 잘해주세요. 칭찬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훌륭하다고 맞춰주세요. 비유 맞춰주면 돈이나 생깁니다. 속으론 니가 십자가 복음을 알아? 나는 주님의 희생을 알아. 얼마나 감사한지. 그래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무섭지 않아요. 어떤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신발을 신고 살잖아요. 이것부터 우리가 문제 있다는 뜻이에요. 무슨 신발 신고 삽니까, 옷을 입어요? 이건 원래 인간 아닙니다. 우린 이 땅이 아니고 새로운 땅, 주님 가신 그 땅이 영원한 새 생명의 천국인 것을 여러분들이 성령으로 관계있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온 천지가 말씀에 부딪치고 또 악마의 얼굴들에 부딪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에는 그들의 정상이고 우리가 비정상인 줄 알았는데 성경을 보고 이스라엘 역사를 보니까 진짜 정상인 것은 주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했다는 사실 그것만이 유일한 현실인 것을 단일한 현실인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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