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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03 22:59:43 조회 : 227         
텅빈 형상 레위기 26:9 200703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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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4.♡.134.78) 20-07-06 17:49 
20200703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텅 빈 형상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6장 9절부터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 너희는 오래 두었던 묵은 곡식을 먹다가 새 곡식을 인하여 묵은 곡식을 치우게 될 것이며” 그렇게 돼있지요.

하나님의 세운 언약으로 인하여 번성케 된다는 말은, 그리고 묵은 곡식보다 새로운 곡식을 준다는 말은 언약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사는 게 힘들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 세상이 평안히 돌아가니까 저절로 돌아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언약 때문에 너희가 번성하고 언약 때문에 햇곡식을 먹는다는 말은 너희들의 행복과 번영, 그리고 만족스러운 삶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놓치기 싫어하는 것, 챙기고 싶어 하는 것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지 언약 빼고 혜택주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가 언약에 가있어요. 하나님이 약속을 세우는데 완성하는 데 가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언약에 가있단 말이죠.

언약이 제대로 지켜진다 싶으면 너희가 번성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산다. 언약이 중요한 조건이죠. 언약이 세워진다는 조건 하에 번성하고 만족스러운 삶이 된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참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언약에 있으니까 그들도 관심을 어디에 두는 게 마땅합니까? 언약에 관심을 두는 게 마땅하지요.

언약에 관심을 둔다는 말은 무슨 관심? 번성하고 만족스러운 삶, 이걸 두 자로 행복이죠. 건‧행이라 하지 않습니까. 건강하고 행복하고. 행복, 건강 이것은 우선 관심사가 되지 말아야 된다는 뜻이에요. 레위기 26장 9절에 의하면. 언약에 관심을 둬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걸 요구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내가 번성하고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에 관심을 둔다면 이것은 번성이 아니고 쇠퇴지요. 만족스런 삶이 아니고 고생길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복을 주고 번성하는 조건 자체가 우리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언약이 우선이라는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에 언약 우선이란 조건이 없는 인간들 입장에서는 결국 만족스런 삶은 포기 돼야 되고 번성하는 것도 안 되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기중심이란 걸 알 수 있지요. 하나님의 자기중심에 대해서 우리가 삐질까요, 기분 나빠 할까요, 속상해 할까요? 기분 나쁘다고 한 대 더 때리면 우리는 때린 데 또 맞는 게 되어 억울함 느낄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언약이 오지 않았으면 만약에 이스라엘에게 언약 자체가 아예 없었으면 비록 우리가 번성을 요구하고 만족스런 행복을 요구하더라도 우리는 불행하고 비극적인 삶이 우리의 본모습과 부합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불행해야 된다, 비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이 마땅하다, 라는 결론에 도달됩니다.

그러면 땅과 인간의 만남, 땅+인간=불행. 다른 말로 하면 저주, 고생, 괴로움. 다 같은 말이죠. 슬픔. 다 같은 겁니다. 인간에게 땅은 무엇이냐? 땅은 인간에게 불행과 저주와 고생과 슬픔과 괴로움을 마땅히 주는 곳,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이 땅의, 땅과 인간이 만날 때 마땅히 그렇게 힘들라고 땅에서 인간은 살아가는 겁니다.

땅 없이는 못 살지요. 요새 서울에 부동산 가격, 아파트 가격이 오르잖아요. 그게 전부 다 땅에 속한 겁니다. 땅+인간=불행. 마땅히, 여기에 ‘마땅히’를 집어넣어야 돼요. 이것 빠지면 안 됩니다. 마땅히 에요. 마땅히 불행하고, 마땅히 저주받고, 마땅히 고생해야 되고. 마땅히 슬프고. 마땅히 괴로워야 되는 이것을 신약에선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육, 인간의 육이라고 이야기해요.

자, 이게 육이란 말이죠. 육과 인간은 다르지요. 육이란 뭐냐? 인간이 땅과 만나서 이렇게 육으로 규정받습니다. 평가받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대해서 지금 하나님께서 지금 뭘 주입시키느냐 하면, 언약이 이 땅을 방문한데요. 방문하게 되면, ‘언약+땅+인간’에서 이게 저주가 되는데 언약과 땅과 결합된 인간을 육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게 되면 땅에서 인간이 사는 게 아니고 육이 살아요. 인간과 육의 만남이 인간에게는 저주가 된다. 이 공식이 나오는 겁니다. 공식이 산뜻하지요. 이 공식 말고 다른 엉뚱한 상상을 하지 마세요. 모든 상상은 성경에 위배됩니다. 되지도 않은 희망과 꿈은 파괴돼야 됩니다. 안 돼요.

여러분들이 아시는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육이 나왔으니까 말씀드립니다. 육이 뭐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투자하는 자는, 자기의 육체를 제일 처음에 신경 써서 제일 우선적으로 신경 쓰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제가 세 번째 하고 싶은 데요. 세 번씩 하는 취지가 있어요.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벌써 세 번 이야기했어요. 왜 세 번씩이나 말씀드리느냐 하면, 인간 치고 자기의 육신을 지키는 키우는 유지하는 그걸 우선시하는 사람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여러분들이 육이라 해서 남녀관계 간음이나 남을 때리는 폭행이나 죽이는 살인이나 자꾸 흉악하고 골치 아픈 그런 것들만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그것만 육이 아니에요.

육이란 양치질하는 것, 그리고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마스크 하는 것, 잠잘 때 자기 머리에 맞춰서 베개 조절하는 것, 좀 낮은 걸 벨까, 높은 걸 벨까? 이런 게 다 육입니다. 이번에는 밭에 야생화를 심어볼까? 이게 육이에요. 이가 아픈데 치과에 가서 치료해볼까? 육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는 것 중에서 육에서 안 나오는 것 없고, 육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일은 인간에게는 없어요.

아이들이 책가방 메고 학교 가는 것부터 해서 버스운전사가 버스운행하면서 자기 생계를 책임지는 것, 모든 게 육입니다. 그렇게 육에게 시간을 투자하면 무엇이 거둬지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 8절에서 어떤 게 거둬진다 했습니까? 썩어진 것. 육 자체가 썩고 육에서 나온 것도 썩고. 너도 썩고 나도 썩고 에브리바디 다 썩고, 썩고. 음식 밖에 놔두면 쉰다 하지요. 음식 상한다, 쉰다, 박테리아 꽃폈다 하지요.

인간은 그걸 후패했다, 부패했다, 썩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내부적으로 썩어 들어가서 마지막 죽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썩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 가는 노선이에요. 다른 노선을 없습니다. 기대하지 마세요. 인간은 날 때부터 썩어지는 것이고, 여러분들 집에서 사시고 아파트에 사시고 부동산에 사시지요? 저주입니다. 땅과 인간의 결합은 저주에요. 그것도 마땅히.

‘마땅히’란 말을 하는 것은 여기서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악한 자가 되면 저주받고 착하면 복 받고 그런 것 없어요. 마땅히 라는 것은 착한 자, 선한 자 따로 없습니다. 그냥 슬픔이고 괴로움이에요. 시편에 나와요. 인간의 한 평생은 슬픔과 괴로움 밖에 없어요. 남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 집의 사정 알아요? 가보면 나름대로 고민 많아요, 다. 이 세상 사람들 다 슬퍼요.

제가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레위기 26장 9절에서 번성하고 네가 새 곡식을 먹는다고 할 때 우리는 이렇게 전제를 깔아줘야 새 곡식을 먹는다 할 때 어째 그런 일이, 번성해? 땅에서 사는 인간이 육이고 육에서 나올 것을 썩어질 것밖에 없는데 썩은 것이 아니고 새로운 곡식을 먹는다고, 어째 그런 혜택이?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조건은 제가 강의 처음에 했지요. 뭐가 먼저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다. 하나님의 언약만 먼저 된다면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너희에게서 새로운 곡식이 나오고 너희들은 불행 끝, 행복 시작이란 말이죠. 당신은 행복이 시작되고 불행 끝났습니다, 라는 말이 여러분들에게 듣기 좋아요, 아니면 언약을 우선적으로 보신다면 여러분들은 불행 끝, 행복 시작입니다. 어느 말이 더 좋습니까?

앞에 조건 안 다는 것이 더 좋지요. 무조건, 무조건 행복하게 해달라고 하고 싶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우선이 아니고 레위기 26장 9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중심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우선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걸 정리해보면,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어떠한 혜택이 주어지느냐 하면 마땅히 저주받을 자도 마땅히 영생 얻는 자, 복을 받을 수 있는 자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짐작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을 스스로 따내겠다고 설레발치지 마시고요, 성급하게 나대지 마시고요. 중간에 언약을 통해서 행복하게 하소서. 나의 기대만큼 행복한 게 아니라 언약에 의해서 행복하게 하소서. 이것은 첫 번째 조건을 언약에 양보하게 하소서. 내가 사는 이유를 언약에게 돌리소서.

내가 사는 이유가 내가 살기 위함이 아니라 내 안에서 언약이 살아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있다고 할 때 언약과 우리는 관련성 있는 사람입니다.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이죠. 따라서 내가 살아 있는 게 우선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아 있어서 모든 일을 다 하셨다, 라는 것을 드러내면 여러분들은 새로운 곡식을 접하게 될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약속한 바입니다. 우리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위주지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 기도 가운데 이런 게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권세를 제게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모든 권세, 권력. 여러분, 권력 하면 딱 생각나는 두 사람 나오지요. 추미애와 윤석열, 누가 더 센지 하는 그 권세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는 누구 손에 있다고 돼있어요, 요한복음 17장에서? 바로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신 거예요. 이 말은 나한테는 권세가 있다, 없다? 나한테는 일체 권세가 없어요. 우리는 행복 하고 싶어요. 그러나 행복 하고 싶어도 권세는 나한테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여러분 다 아셨다 치고 이걸 지우겠습니다.

레위기 26장 9절, 그리고 전체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언약이 우선이란 말씀을 했고, 언약을 지키면 행복이죠. 복을 받고, 언약을 안 지키면 저주받는데, 여러분이 잘 들었는지 복습합니다. 이게 plan1입니다. plan2가 뭐냐 하면, 아예 언약이 없다면 우리는 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지금 복습하는 겁니다. 언약이 없다면 우린 마땅히 저주입니다. 당연하게 저주에요.

그렇다면 머리가 있는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현재 내가 저주받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요. 그것은 언약이 들이닥친, 언약이 찾아온 후, 사후의 모습이죠. 언약이 들이닥치게 되면 그 사건 이후에 자기 자신을 볼 때 나는 저주 아래에 있었구나. 밥 잘 먹고 건강하고 운동 잘해도 그게 저주였구나, 라는 걸 아는 거예요.

왜냐하면 언약이 없으면 재산이 200억, 300억을 가지고 권세가 많더라도 언약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저주가 돼요. 돈 많은 것도 저주가 되고 인물 예쁜 것도 저주가 돼요. 잘 생긴 것도 저주가 돼요. 노래 중에 이런 노래 있어요. 인물 잘 생겨도 슬퍼진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좋은 옷을 입어도 나중에 저녁 되면 벗으니까. 청춘은 빨간색도 아니고 사랑은 핑크 빛도 아니라.

인생이란 따지고 보니까 순간순간 기뻐할 때도 있지만 결국은 어디로 끌려가는 것 같아. 잠지 잠간 웃고 신나고 천하를 얻은 것처럼 객기를 부리지만 끝나고 나면 즐거운 만큼 허무가 다가옵니다. 그 허무함, 그러니까 불행지요. 그 많은 재산 나의 기쁨과 행복을 채워주지 못한 걸 알게 돼요. 재산을 가져봐야 알지. 교인 오백 명 돼봐야 허무하고요, 예배당 천 평 넘어봐야 허무합니다. 취미생활 몰두해봐야 다 허무하지요.

문제는 허무한테 허무하면서 발악을 하는 거예요. 안 허무하려고. 그런데 이스라엘은 딱 지적, 네가 언약이 없으니까 허무하다는 거예요. 말이 재미있는 게 언약이 이미 와버리면 내가 그동안 저주스런 생활을 했다는 자체가 슬픔이 아니고 감사가 되고 고마운 게 돼요. 내가 저주받았었구나. 주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없이는 내가 어떻게 살아도 그 자체를 주께선 저주로 간주하시는구나. 내 위주가 아니고 주님의 언약 위주구나. 그걸 알 때 나한테 어떤 형편이 온다할지라도 심지어 몸이 아프고 돈이 없다할지라도 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내 인생을 대체했고 대신했기 때문에 빈궁한 나를 안 보고, 몸 아픈 나를 안 보고 언약을 보기 때문에, 언약을 본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어떤 경우라도 이미 복의 사람이 된 거예요. 내 보일 수 있는 언약이 늘 있으니까. “주님, 이것 찾았지요. 여기 있습니다. 주님, 이것 보시잖아요. 여기 있어요.” “네가 복되구나.” 이런 거죠. “세상에 내가 준 보물을 갖고 있다니 복되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2장 10절에 보면 혼인잔치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에 재미있는 구절이 있는데 누가 큰소리로 읽어보세요.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여기 보면 임금이 말하기를 거리에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다 혼인잔치에 오게 하라. 선한 자만 데려오라 아니라 악하다고 여기는 자나 선한 자나 다 데려와.

다 데려오고 혼인잔치에서 인정받는 것은 유니폼, 혼주 쪽에서 제공한 예복을 입지 아니하면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전부 다 사그리 작살납니다. 이게 하나님 뜻이에요.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무엇을 추궁하시느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 선한다, 악하다 자평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선 지금 체크하고 있어요.

자기들 중심으로 저 사람 악하다, 저 사람 선하다. 저 사람보다 내가 좀 악한 것 같아, 하고 자평한다는. 자기를 스스로 평하고 그 기준으로 남을 평하고. 스스로 악하다, 선하다는 그 기준을 사그리 주님께서는 인정하지 않아요. 마태복음 22장 혼인잔치, 마지막 잔치에서. 혼인잔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인간들이 평생 어떻게 선하게 살았는지 보는 게 아니고 그건 무효로 돌리고 하나님 쪽에서 제시하는 것, 아까 언약이죠. 하나님 주신 예복을 입었느냐, 그것이 없느냐가 문제에요.

예복의 특징은 일괄성이에요. 다시 말해서 이게 유니폼이거든요. 교복이거든요. 사람이 네댓 사람 있으면 착하다 선하다는 각자 개성이 있지요. 살아온 인생이 있잖아요. 서로 낫다 못하다 견주게 되고 비교하게 되는데 만약에 주인 쪽에서 제공한 유니폼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칩시다. 그러면 무슨 옷은 아낌없이 갖다 버려야 돼요?

평생토록 내가 이루고 이뤘던 것, 내가 조심하면서 나의 가치를 높여서 나를 개성화시킨 하나의 유별난, 너와 다르다고 내세웠던 그렇게 동원된 모든 조건들은 쓰레기로 다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아까 했잖아요. 인간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 육이라고요. 육으로 심는 것은 거두긴 거두는 데 뭘 거둬요? 썩어진 것을 거둬요. 천국에선 안 받아줍니다. 썩은 걸 왜 받아요.

언약이란 무엇인가 구약에서는 모호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확고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완성은 인간이 지키려고 애쓴다고 그렇게 온 성과가 아니다. 인간들이 만약에 언약이나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이건 덜 지킨 사람, 많이 지킨 사람, 또는 적게 지킨 사람이 차이 나겠지요. 그러면 그건 각각 그 사람의 개성이 돼버립니다. 자기의 우수한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개인에 속한 가치가 되지요. 그건 폐기돼야 됩니다.

그냥 폐기하라 하면 인간은 절대 폐기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너무 아까워서. 그러나 일괄성이 있지요. 예복은 너, 나를 따지지 않고 똑같은 옷을 입혀버립니다. 제가 젊었을 때 노래 잘하는 아이들 뽑아서 전 세계에 한국의 이름을 선양한다 해서 외국에 보낸 합창단이 있었는데 그 합창단 이름이, 리틀엔젤스. 그 아이들이 노래 부를 때 지문은 다르고 dna는 다 달라도 외국 사람이 볼 때는 똑같은 옷을 입혀놨어요. 하나로 보는 거예요. 일괄성이에요.

그러니까 천국에선 누가 더 행복하고 누가 더 불행하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천국 가서 꾸리하게 있으면 천국 왜 갑니까. 천국은 임금님의 아들의 혼인잔치의 기쁨으로 꽉 차있는 게 천국이거든요. 그래서 제대로 된 기쁨이기 위해서는 평생 동안 나에게 관심을 두면서 내 기쁨은 내가 챙겨온 모든 것은 그 기쁨 앞에서 양도해야 돼요. 내 기쁨은 갖다 버려야 돼요. 왜? 그건 육을 위해 심은 거니까. 그 기쁨은 용납되지 않아요.

인간들의 결정적 실수는 인간들은 인간들만 상대한다는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쭉 성경을 보니까 인간들의 실수는 뭐냐? 인간들을 상대로 해요. 모든 게. 부모는 자식을 상대하고 자식은 부모를 상대로, 친구를 상대로, 회사원은 회사원을 상대로 모든 걸 사람을 상대로 해요. 상사가 애 먹일 때 직원들은 죽고 싶어 하지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살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왜 하나님께선 못 돼먹은 상사로 직장 못 다니도록 괴롭게 하냐고 할 때 그 답은 너는 인간과 상대했다. 언약을 상대해야 되는데 인간을 상대했어요. 상사라는 인간을. 올림픽 나가려고 훈련하는데 감독과 의사도 아닌 팀 닥터가 술 먹고 와서 선수들을 때렸다. 그래서 선수는 삐져서 자살했다. 죽었어요. 뉴스에 나오지요. 왜 죽었는가? 속상해서 죽었지요. 기뻐서 죽습니까?

왜 속이 상했습니까? 그 선수는 23살까지 사람만 상대하는 그것만 배웠어요. 딴 소리 들어본 적이 없어요. 오늘날 20대의 실수, 30대의 실수, 40대의 실수가 사람은 사람만 상대한다는 겁니다. 과연 내가 살아 있는 겁니까? 아니죠. 그럼 남은 살아 있는 겁니까? 아니지요. 살아 있는 것은 영만 살아 있어요. 육은 육 자체가 다 죽은 것이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인간 대 인간에서는 죄가 성립 안 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을 죽이는 게 죄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안 죽여도 죄가 되기 때문에. 구태여 안 죽여도 그 사람을 사랑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죽인다고 해서 더 죄가 되는 건 아니에요. 인간 대 인간에서 죄가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인간 대 인간에서 억울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 사람 안 죽어야 되는데 죽었단다, 너무 억울하지. 그런 존재는 인간 속에는 없습니다. 그런 인간 없어요. 어차피 죽어 마땅해요. 자살하든 어떻게 죽든 진즉에 죽어도 죽은 거고 살아도 저주고 죽어도 저주고. 그게 인간이에요. 왜 그래야 되는가? 언약이 인간보다 더 중요하고 요긴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레위기 26장 9절의 말씀이에요.

언약 지키면 내가 너희를 번성하게 해줄게. 뭔 뜻입니까? 언약이 없으면 너희들은 쇠퇴하는 게 마땅하고, 그리고 굶어죽는 것이 마땅하고 병들어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마땅함을 언약이 오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는 거예요. 나는 언약이 없어도 나 혼자 행복해야 마땅하고 잘 돼야 마땅하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보고 성경을 지키고 교회 와서 말씀대로 산다고 그런 마음자세로 교회를 오니 신앙생활 될 리가 있습니까.

진도를 나간다고 다 아시는 게 아니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리해보겠습니다. 인간이 힘들게 사는 이유는, 사는 게 참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지요. 전부 다 힘들어요. 골프 치는 그 사람들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골프를 치든 바둑을 두든 취미생활 자체도 힘들어요. 인간이 힘든 이유는 앞에 뭐가 있기 때문이다? 땅이지요. 보세요.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다 잊어버렸잖아요.

인간이 힘든 것은 땅이 있기 때문이에요. 땅에서 인간에게 저주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저주를 막 쏘아대고 있으니까 인간이 땅에서 살면서 힘든 이유는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주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3장이지요. 어쩔 수 없어요. 우리의 운명이니까. 나 빼주세요, 할 수 없어요. 그래서 힘든 인간이 힘드니까 여기서 피하고 싶지요. 환상을 만들어내고 꿈을 꾸게 되고.

힘드니까 잊기 위해서 그게 뭐냐 하면, 영의 세계를 생각하는 거예요. 천국을 생각하게 됩니다. 힘드니까.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땅에서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이걸 육이라 보고 착한 일을 생각하면 영이라 보는 거예요. 그런데 아까 혼인잔치에서 누가 온다 했습니까? 악한 자, 선한 자 가리지 말고 다 오라 하지요. 인간들이 생각한 그 기준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준다 했지요.

영의 세계는 따로 있는데 영의 세계는 언약을 통해서 내방해요. 찾아와요. 영의 세계는 따로 있는데 인간들 나름대로 사는 게 힘드니까 영의 세계, 전혀 힘든 게 없고 아픈 것도 없는 그런 세계를 꿈꾸게 된 거예요. 대표적으로 불교 아닙니까. 생로병사. 여기에 신앙이 아무것도 없어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데, 생로병사의 속세가 끝나면 그들은 극락 간다는 거예요.

이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육에서 나왔지요. 그러니까 극락도 저주받을 거예요. 썩어질 거예요. 썩어질 아이디어에요. 방금 제가 불교 이야기했지요. 그러면 교회 와서 천국 이야기는 이와 다르다고 자부하십니까? 사는 게 힘들어서 천당 가고 싶다. 이게 영적 세계에요, 육의 세계에요? 육의 세계지요. 왜냐하면 거기에 뭐가 빠졌어요. 언약이 빠졌지요. 누가 외부에서 가져다주는 유니폼이 빠졌어요.

하나님이여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내밀 때 주께서는 그것을 걷어 차버리는 거예요. 썩어질 육이 어디서 나한테 결재 해달라고 서류는 들이밀고 있어. 치워라. 내가 영이 되어서 찾아갈게. 그 언약 속에는 저주를 복으로 바꾸고 죄를 의로 바꾸는 기제, 메커니즘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런 방법이 언약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언약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언약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보다도 언약이 오면 평생 내가 생각한 모든 것이 저주를 유발한 생각만 했다는 것을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아는 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 받은 사람은 내가 저주받을 짓거리만 성령 받은 이후에도 죽을 때까지 내놓는다는 사실을 굉장히 반갑게 그리고 아주 고맙게 여기면서 고백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육의 사람은 언약이 없이 고생스러우니까 하늘나라는 괜찮겠지, 하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추상화, 추상적인 형식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어려우면 다른 말로 하겠습니다. 이걸 이념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념이란 이데올로기죠. 이 말도 어렵지요. 어쨌든 허황되지만 다 같이 동의하는 그 무엇. 이래도 어렵지요.

그러면 진짜 쉽게 하면, 그게 바로 신이에요. 그냥 신이 아니고 신의 주권사상, 절대 신.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소서. 왜 도와줘야 되는데? 무조건, 무조건이에요. 날 도와달라는 거예요. 왜? 힘드니까. 언약이 찾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마땅히 힘들어야 되지요. 마땅히 힘들어야 되는데 힘드니까 도와달라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신을 찾는 이유는 뭐냐 하면, 관심사가 언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우선적인 관심이 있어요. 아파서 못 견디겠고 힘들어서 못 견디겠고 내 인생 완전히 작살나서 힘들어서 못 하겠다, 내 인생 박살난 게 너무 속상합니다. 그러면 주께서 묻겠지요. 네 인생 박살나는데 왜 네가 속상하냐?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할 말이 없지요.

그래서 인간들은 땅의 괴로움을 환상으로 해소한다. 환상이란 바로 내가 신을 믿고 신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써 땅의 괴로움을 잊으려고 해소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종교가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땅의 괴로움을 신을 찾음으로 해소하려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억지가 아니라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신을 믿고 신에게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그리고 이것은 바로 육이고.

하나님 믿고 썩어진 것을 거두고. 예수 믿고 썩어진 것을 거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이런 재주 밖에 없어요. 육에서 나온 것은 다 육이니까.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지옥 가고. 인간의 아주 멋진 재주에요.

따라서 레위기에서 하나님이 경품을 걸었잖아요. 네가 언약대로 살면 번성하고 네가 햇곡식을 먹을 수 있다고 경품을 내세웠잖아요. 그런데 그 경품을 내세울 때 인간들에게 말씀을 언약을 주신 이유는, 인간이 숨어있는 본색을 딱 드러냅니다. 언약에 관심이 없고 언약이 제공한다는 경품, 상품 있잖아요. 그게 탐이 나는 거예요. 어떤 상품이 탐이 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햇곡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이 말은 나는 마땅히 저주받는다는 것을 잊어버린 거예요. 그걸 거부한 거예요. 나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경품을 따낼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는 자격자라고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위선적으로 꾸미고 그걸로 바꾸고 있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결정적 실수는 누굴 상대한다? 인간을 상대로 하지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맨날 자기를 상대하고 남을 상대하지요.

인간은 신이 있다는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런데 언약은 방향은 하늘에서 어디를 쳐다봅니까? 땅으로 쳐다봐요. 하나님의 언약 완성은 내가 땅에 사건을 일으킬 것이다. 땅을 보라고 한 거예요. 땅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것은 출애굽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나는 거니까 출애굽의 특징은 탈출이에요. 탈출한 사건이에요. 탈출했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 힘으로 탈출이 가능한 지역이다, 아니다? 절대로 인간의 힘으로 탈출하지 못하는 거예요.

인간이 갖고 있는 모든 육의 능력과 재주와 지혜를 다 짜내고 역량을 다 보태도 탈출 못할 곳에서 탈출 시킨 거예요. 그러면 탈출함으로서 애굽 사람들아 약 오르지, 하는 게 아니라 탈출함으로서 내가 생각한 하나님과 실제 하나님이 다르다는 말이에요.

우리가 생각한 하나님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내가 갖고 있는 역량을 발휘하게 되면 주께서는 그걸 귀히 여겨서 그것이 탈출에 보탬이 되는 근거로 삼고 싶은 것이 우리가 믿던 환상 속의 신인데 진짜 신은 뭐냐? 아주 밟아. 우리의 재주나 우리의 역량을 그냥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이에요. 우리의 역량 대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빠져나갈 수 없는 그 세계에서 빠져나갔음을 추후적으로 우리로 보게 하는 거예요.

처음에 그들이 나올 때는 어린양 때문에 우리가 나왔으니까 대단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보니까 왜 어린양이냐? 우리가 얼마나 내 주제를 모르는 못난 존재기 때문에 주께선 우리가 보탤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다 배제하시고 인간들의 어떤 아이디어에서도 나오지 않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이 쓸데없게 만든 방식이 나를 구원한 겁니다. 내 솜씨나 내 능력이나 내 기도나 내 헌금이나 예배나 순종, 어떤 것도 다 부질없음을 깔끔하게 알려주는 방식, 그 방식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방식입니다.

인간은 왜 자기 방식으론 안 됩니까? 살아 있는 내가 내 방식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게 나오는 그 재주로 더 잘 살아 있게 하는 방식으로 우린 구원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나 어린양은 피를 흘렸다. 어린양이 그냥 어린양이라고 플랜카드 건 게 아니고 피를 흘린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 가운데서 죽어 마땅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거예요. 죽어 마땅하다는 거예요. 망해도 마땅하고 아파도 마땅하고 빚더미 앉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왜? 사람은 누구와 상대하기 때문에? 같은 인간들과만 상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상대한 적고 하나님을 상대한 적 없어서 너한테 질까보냐? 너한테 지면 자살한다. 맨날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살려보려는 식으로 하나님까지 그걸로 돌파하려고 시도한 거예요. 부질없이. 악바리처럼 기도하고요. 그걸 간절히. 단어가 간절히 밖에 없어서 그렇지 간간간간 간절히 있으면 그 단어를 썼을 거예요. 간절히 기도하고 진심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앞에 순종해서 자기의 종교적인 성과를 얻어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그것 다 썩어진 것 밖에 안 되는데.

아무리 인간은 전적으로 죄인임을 알려줄 그런 요소가 없어요. 십자가 앞에 와서 십자가를 만나야 안 인간도 아니구나, 이렇게 되지 자기가 십자가 없이 남 따라 기도하고 이래서는 계속 하게 되면 자기가 그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 돼버려요. 기도도 이만큼 했고 헌금도 했다. 자기 가치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더 높아져요. 그러니 이건 사단 난 거지요. 점점 더 십자가에 멀어지는 거죠. 이런 자기 구원 시도를 자기용법이라 합니다. 다 부질없는 짓인데 자기용법임을 알고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78) 20-07-06 17:50 
20200703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텅 빈 형상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인간의 육에서 이념이 나온다는 말이 절대적인 신인데 그건 언약이 아닙니다. 내가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율법은 나를 율법이 돼버립니다. 내가 뭘 지켰으니까 이제부터 잘 될 거야,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잘 되기 위함이란 목적을 가지고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어떤 법을 지키고 어떤 시험을 할 때는 내가 잘 되기 위한 목적을 빼놓을 수가 없어요. 그걸 생각 안 할 수 없다고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 언약을 지키라 한다면 이스라엘 자체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에서 율법이 정치적 이념이 되는 겁니다. 모든 백성들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이념, 더 쉬운 말로 명분, 우리가 적들과 싸울 수 있다는 명분이 있는 거예요. 대의명분, 하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힘을 합쳐야 된다는 대의명분용으로 율법이란 게 있지요. 생기게 돼있어요.

그러면 대의명분이 설정이 돼있으면 여기서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율법의 위반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정치적 이념에 대한 반발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율법을 위반했다는 말은 너, 나 다 지키는 율법을 너는 왜 어기느냐? 이렇게 되면 정치적 이념에 대한 반발, 배신으로 이해되지요. 정치적이란 집단화시키기 위해서 결속하는 이념이란 말이죠.

우리는 이 뜻 때문에 모였다는 결속시키는 이념이 있잖아요. 어느 단체든. 콜센터 같으면 콜센터의 목적은 놀려는 목적이 있습니까? 전화 걸어서 고객 확보한 목적이 있잖아요. 학교의 목적은 아이들 교육시키는 거고요. 야구팀의 목적은 이기는 데 있고, 항공사의 목적은 비행기 띄워서 회사 이익을 창출하는 거고. 전부 다 그런 목적이 있단 말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정치적 이념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이건 율법이 중요한 게 아니고 율법을 지킨 우리들이 중요해요. 감시하겠지요. “너 왜 율법 어겨? 네가 율법 어기니까 우리가 힘들잖아.”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란히 가야 되는데 너 하나 삐딱하면 그 피해는 네 죄까지 감당해야 되니까 우리가 힘들어 안 된다. 정신 바짝 차리고 뜻과 마음을 하나로 결속해야 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복을 준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흔히 집안에서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너 같은 게 태어나서 다른 사람 속을 썩이느냐. 나가 죽든지 해라.” 그런데 율법이 이렇게 이념화되게 되면 나중에 그 율법을 지키다 사람이 지쳐버립니다. 율법이 이념화되면 우리가 하나로 되기 때문에 에고, 자기밖에 모르는 에고 요새로 전락하고 맙니다. 나를 지키는 요새로 전락해요. 모든 회사면 회사, 가정이면 가정, 교회면 교회, 병원이면 병원, 군대면 군대, 국가면 국가. 나를 지키는 폐쇄적 요새로 다 바뀌어버려요.

그리고 그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율법을 따라야 되는데 종교적 요구에 대해서 사람이 나중에 지쳐버려요. 종교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썼던 에너지가 다 소진돼버립니다. 처음에 그 교회에 등록할 때 그 사람들 보세요. 남자는 말쑥한 양복 입고 와요. 구두 신고. 여자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오지요. 2개월도 안 지나서 집에서 입던 옷 입고. 처음에 열시 반에 와요. 열한 시 예배인데. 한 달도 안 가서 열한 시 5분 전에 옵니다. 한 2달 지나면 열한 시 5분 후에 오고.

왜? 법을 지킨다는 것, 내가 세운 내 법을 지키는 에너지가 지쳐버렸어요. 본인에 의해서 에너지가 소진돼버렸어요. 나도 할 만큼 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무엇이 편한 짓인가를 따라가요. 아이들 처음에 엄마 지켜본다고 동영상 시청할 때 바로 앉아 있지요.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턱 되다가 나중엔 엎드리죠. 그러다 한 바퀴만 돌면 누워버리고. 뭐가 편한 것인가? 내가 편한 것이 진리다.

이건 율법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몸이 율법보다 더 세게 말해요. 율법이고 하나님이고 네 몸이 최고 중요한 거라고 내 몸이 나한테 그러게 설득한다니까요. 몸에 인 박혔다 하지요. 인 박혔어요. 그럴싸하게 대세를 따라 간다 하지만 조금만 한 눈 팔면 다시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옵니다. 탄력성이 그만큼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하느냐?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적인 명분으로 했잖아요.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워하기 때문에 이걸 개인으로 적용시켜봅시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교회 와서 성경을 봤습니다. 은혜 받은 몇 구절, 다섯 개 정도 뽑아서 이것을 내 인생, 나를 천국 보내겠다고 나름대로 법칙화한 거예요. 율법이죠. 율법을 만들어놓고 나는 이것만 지키면 된다, 라고 생각해요.

이게 뭐냐? 예를 들어서 2019년 12월 18일 날 지킨다 말이죠. 그런데 이미 이게 이 사람한테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잘났다는 걸 보여주는 명분이 돼버리고 이 법칙이 이념이 돼버린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나는 시간을 어기는 사람과는 상대 안 한다. 10분 늦는 사람과 상대 안 한다. 이런 게 있다면 자기는 그걸 지킴으로써 나다움을, 정체성이라 하는데, 나다움을 그렇게 유지하려고 한단 말이죠.

이게 뭐냐? 나에 대한 나의 철칙이에요. 나의 나다움은 철칙이라서 이 철칙을 위반하면 바로 나한테 징계를 하고 나는 나답지 않다고 내가 나한테 자책을 할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철저히 지키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지요. 12월 18일에. 그런데 12월 19일에 선을 봤는데 아가씨가 30분 늦게 왔어요. 그러면 어제까지 있었던 자기의 삶의 대원칙에 의하면 그 여자와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가 너무 예뻐. 너무 예쁘지만 자존심이 있어서, “아가씨, 처음 보는 자리인데 30분씩이나 늦게 오니까 기분 나쁜 건 아닌데 좀 거시기 하네요.” 그럼 여자 쪽에서, “그래서 제가 싫다는 거예요. 그럼 갈까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 쪽에 바꾸면 되지. 30분이고 20분이고 그게 뭐 중요하다고.” 갑자기 12월 18일 다짐을 다 뒤엎어버려요.

또 어떤 할아버지가 2018년도 7월 6일에 나는 손녀 있다고 해서 사진 보여주고 그것만 자랑하는 것 꼴도 보기 싫다. 이 할아버지가 7월 7일에 손자가 태어나고 손녀가 태어나면 지가 세운 원칙을 지가 뒤엎어버려요. 명분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명분 없어요. 이 말은, 내가 율법을 지키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내가 율법을 지키기에는 율법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율법을 지켰다고 안식일 지켰다고 십일조 했다고 너무 쉽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율법은 어딜 지향하느냐 하면, 이게 오늘 제목입니다. 텅 빈 형상. 율법, 십계명에 보면 나 외에 다른 형상을 섬기지 말라 했잖아요. 자, 그러면 다른 형상을 섬기지 말라. 제가 객관식 문제를 낼게요. 하나님 외에 다른 형상을 섬기지 말라 했는데 다음 중 하나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에 위배된 것은 뭐냐?

①여호와는 소의 형상이다.
②여호와는 마귀의 형상이다.
③아무런 형상 없이 그냥 백지다. 혹은 말씀만 적었다.
④내 생각에 구멍 났다.

몇 번입니까? ①②는 아니지요. 이건 하나님 형상 아닌 것. 마귀라 했지만 점잖은 인간의 형상, 이것도 하나님 형상 아닌 것, 이거는 잠깐만 생각해도 알지요. 그러면 아무리 형상을 안 만들고 말씀만 적는다. 이건 이슬람이었어요. 이슬람은 모든 성전에 보면 형상은 없고 성경 말씀이나 무작위로 어떤 연쇄적인 도안이나 이미지로 돼있어요. 그런 이미지도 없어요.

④는 뭡니까? 아무런 형상 없이 안 그리는 것이 형상 섬기지 말라는 것의 완성이 아니고 내 생각에 구멍이 나버린 거예요. 인간의 두뇌가 이렇게 생겼다면 윗부분이 날아가 버렸어요. 분화구처럼. 나의 생각의 알맹이가 중앙이 함몰되어 뻥 뚫렸어요. 날아가 버렸어요. 이게 텅 빈 형상이에요.

뭔 뜻이냐 하면, 나 외에 어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그 말씀에 대해서 예예 안 만들게요.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 형상을 안 만들겠습니다, 라고 해서 지키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을 누가 지키느냐 하면, 그 말씀을 주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을 우리를 대상으로 우리를 도화지로 여겨서 자신의 작품을 거기에 남겨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두뇌를 뻥 뚫게 하는 것은 인간의 두뇌가 마저 채워서 있는 이상은 항상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서 위반 요소가 터져 나온다는 거예요. 인간은 육이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시켜도 그 시키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내뿜게 돼있어요. 하는 짓이 말씀보다 나 위주기 때문에 항상 나 좋은 대로 살아요, 그냥. 그러니까 율법은 우리에게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율법은 지키는 분이 따로 있고 그 율법의 결과물로 자기 백성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자, 그 다음이 어렵습니다. 구멍 났다는 것이 ④입니다. 그렇다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논리에 의하면, 나는 머리에 구멍 났다고 2020년 7월 3일에 이렇게 생각했다 합시다. 그러면 내일 7월 4일 되면 이걸 그대로 가져가겠어요, 안 가져가겠어요? 나는 이렇게 구멍 났다는 생각을 가져가겠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니까. 과거 없는 현재는 없으니까.

너, 누구야? 나, 주님한테 구멍 났어. 그게 나야, 라고 그대로 내일 가져가겠지요. 내일 소용없습니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나의 나됨의 명분과 이념화됐기 때문에. 하루만 지나도 이미 이념화됐어요. 나, 이 정도야, 라고 자기 자신을 어제 구축한 것을 또 가져오지요. 그러면 주께서는 구멍 난 것에 구멍을 더 내는 거예요. 7월 4일에 더 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율법에 의한 재편성입니다. 어떻게? 에브리바디 날마다. 날마다 내 삶의 기준은 내가 정하지 않아요. 우리는 자꾸 어제 괜찮았다. 괜찮은 것을 그대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나는 교회 오면 앞자리에 앉는다. 앞자리에 앉는 것이 은혜가 되더라. 고집을 계속 부리는 거예요. 새로운 사람(열시 반에 온)이 모르고 앞자리에 앉았단 말이죠.

내 자리라고 교양 없는 분은 없고. 왜냐하면 나의 이념 속에 뭐가 있다? 나는 교양 있다. 이게 자기의 이념이거든요. 이념이고 명분이기 때문에 그런 말은 못하고 속으로, 남의 자리에 앉아서. 물어보고 앉지. 그러니까 겉 다르고 속 다른 거예요. 왜 그런 생각을 합니까? 나는 교양 있기 때문에. 뭘 봐서? 무조건이에요.

그래서 주께서 일할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리에게 딜레마를 통해서 통합시켜요. 우리의 난처함을 통해서. 전에 써먹었던 원칙이 오늘은 먹혀들지 않게 만들어요. 한 때 그런 것 있잖아요. 아버지가 자식을 훈계하면서, “회초리 가져 와.” “아버지 다신 안 그럴게요.” 아버지가 스스로 자기의 바지를 걷고, “네가 나를 때려라. 내가 자식을 잘못 키운 죄로 내가 맞아야 돼.”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니야. 내가 잘못 키웠다.”

그걸 3년 6개월 전에 써먹었다 합시다. 그런데 지금 또 써먹으면 자식이 아버질 때릴 수가 있습니다. 옛날에 써먹었기 때문에. 한 번 써먹어서 효과 본 것이 자기 정당성, 자기 잘남을 자기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보여주는 내용으로 이미 삽입돼있어요. 자기 명분이고 이념이에요. 죽어도 이것을 하겠다고 우기고 싶어요. 그래야 내가 나다우니까. 머리에 구멍 안 났어. 구멍이 메워졌어.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도로 나로 돌아와요. 잘난 나, 가치 있는 나, 복음 아는 나, 복음 전했던 나, 텅 빈 형상을 텅 비게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인도하면 그것조차도 묵사발 내버리지요. 묵사발 내면서 내게 있던 교양 자체도 아무짝도 소용없게 만들면서 여기서 새로운 동기, 삶의 이유와 삶의 동기가 부여됩니다. 새로운 삶의 동기에요. 사람이 사는 게 지루하고 짜증나는 이유는 새로움이 없어서 그래요.

교사 처음 할 때 “나는 드디어 밥 먹고 산다. 월급도 왜 이렇게 많이 주는 거야. 신난다. 아이들아 고맙다. 너희들 때문에 내가 밥 벌어먹고 사니 네가 나를 먹여 살리는구나.” 하니까 아이들이 귀엽지요. 1년만 해보세요. 남자 교사는, “이것 말고 다른 거 할 것 없나. 사표 낼까. 그 말썽꾸러기 지겨워서 못 보겠다. 내가 할 게 없어서 이것 하지 미치겠다, 정말. 아이들 꼴도 보기 싫어. 질문 하지 마. 니가 알아서 해.” 물론 교양 있는 명분상 속은 불이 나지만 참는다고.

이것은 교사뿐만 아니고 모든 직장이 다 그래요. 모든 직장이 처음 할 때는 신선하고 새롭게 의욕이 나고 동기 부여되지요. 반복이란 것은 사람을 질리게 만듭니다. 산다는 게 결국 “나란 인간이 평생 이것 하려고 사나? 이것 말고 때려치우면 할 게 없는 줄 아느냐?” 이런 객기 같은 걸 부리지요.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식이에요.

이스라엘 역사가 계속해서 율법이 추가됩니다. 이스라엘은 추가적인 율법이 주어짐으로 기존의 율법이 아무짝도 없게 만들어요. 어떤 능력이 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난 법에 무슨 능력이 있었는데. 아니에요. 항상 내가, 그러니까 지난번에 내가 소유한 명분과 원칙으로 오늘까지 그 식으로 못 살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매일의 하나님이니까. 어제의 하나님이고 오늘의 하나님이니까.

우리는 어제의 하나님으로 오늘 살려고 해요. 그리고 내일 되면 오늘의 하나님으로 내일까지 더 혜택을 얻으려고 합니다. 주께선 매일 장을 지평을 바꿔요. 매일같이 새 판을 짜요. 주님은 매일 새로워요. 왜? 살아 계시니까. 우리는 기존의 것을 굳히는 경향이 있어요. 이 조시로 쭉 가면 된다는 식으로. 안일에 빠지려고 하거든요. 그러나 주님은 그걸 그 판을 뒤엎어버립니다. 계속해서.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추가적인 율법으로 해서 기존의 율법은 뭐가 되느냐? 죄가 드러나지요.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죄란 새로움을 모르기 때문에 기존의 것을 고수하기 때문에 죄가 되지요. 이게 육이 되지요. 육은 항상 깨어져야 돼요. 자, 육이 깨어지게 되면 뭐가 될까요? 영이 되는 게 아니고 육이 돼요. 그러면 영은 어디 있느냐? 이 깨어짐에 있어요. 이 육에 대해선 감사가 돼버려요. 깨어지고 난 뒤에 감사가 와요.

그러나 인간이 기존에 자기가 실력을 발휘하게 되면 자기가 애썼다, 노력했다, 열심히 했다. 자기자찬, 자화자찬만 있지 누구한테 대한 고마움이란 없는 거예요. 성도의 특징은 고마운 거예요. 성도는 감사하고 고마운 것이지 본인이 본인 스스로 격려하고 노력하는 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누가 상대가 있어야, 고맙게 하신 어떤 분이 있어야 관계란 게 성립됩니다.

그러면 고마운 분이 새로운 게 오기 전에 만약에 오늘 것으로 내일까지 온다면 그때 이스라엘은 장애자가 되지요. 딜레마로 인하여 늘 장애자가 됩니다. 장애란 것은, 새로운 것은 그들만 느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언어로 표현 못해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해야 되는 이스라엘, 이것이 다른 사람들 보기에는 장애자가 돼요.

“말을 해라, 말을.” “이건 말을 할 수가 없어. 말을 할 수가 없으면서 자기 할 말 다하면서 네가 이 말 듣는다고 해서 믿을 네가 아니지. 이건 주께서 정말 나를 박살냈기 때문에 내가 느낀 거야.” 그럼 듣는 사람이, “그게 뭔데?” “아니, 말을 할 수 없다니까, 그걸.” 자기변호나 자기옹호를 할 수 없단 말입니다. 나, 이렇게 잘났어, 라고 할 수 없어요. 왜? 나를 박살내는 나를 텅 빈 형상으로 만드는 그분이 매일같이 새롭게 나를 다루기 때문에 그래요. 다뤄졌다고 인간 되는 건 아니고 육에서 나온 건 육이에요.

하지만 감사한 건 뭐냐? 내가 깨뜨릴 수 없는 걸 깨뜨렸다는 거예요. 내 고집을 잘난 나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그 점이 고귀하고 감사한 거예요. 정말 감사한 거예요. 사람이 언제 감사하느냐? 더 준다고 돈 주고 복 준다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진짜 감사한 건 뭐냐 하면, 내가 죄인인 걸 알 때 너무나 감사해요. 모든 것이 과분한 은혜인 것을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한꺼번에  밀려오지요. 언제? 오늘. 그런데 내일까지 써먹지 마세요. 어제 분명히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내일 되면 내일치의 새로움이 또 있어요. 내일 되면 깨질 일이 또 있다니까요. 깨어진다는 말은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아 있다, 내 곁에 누가 살아 있다?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있다는 거죠. 보이지 않지요. 보이지 않으니까 남한테 이야기하면 병신 소리 듣는다니까요. “니 이야기해. 왜 안 보이는 이야길 왜 해.” “너는 그래도 나한테는 느껴져.” 그래서는 친구 사이에 대화가 될 리가 없지요.

그 다음 진도 나갑니다. 그럼 새로움이 뭐냐? 새롭다는 것은 깨어진다는 말인데 새로움이란 의미의 추가입니다. 내일 되어서 새롭다는데 기다려봐다 하나도 안 새로워요. 그렇게 하루가 지나다보니까 이미 갖고 있는 가운데 내가 놓친 감사거리를 찾게 해주시는 겁니다. 분명히 주실 때 건성으로 받았는데 따져보니까 그게 얼마나 고귀한 것을 주셨는지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목숨부터 해서 햇빛과 공기……

유월에 한참 더울 땐데 서늘한 것, 여러분들은 예상했습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쾌적하잖아요. 환경이. 비 온 뒤의 서늘함. 감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에어컨 틀고 선풍기 틀고 했지만 이런 쾌적함은 없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쾌적함이 일괄적으로 주어질 때 감사하지요.

그리고 네가 이런 짓을 하다니 너는 죽어 마땅해, 라고 했는데 그 죽어 마땅한 인간으로 인하여 내가 몰랐던 내가 얼마나 혜택을 입고 있는지 나한테 죽어 마땅한 그 인간으로 인하여 내가 혜택을 입고 있다는 사실, 욕 얻어먹는 사람이 희생해서 욕 덜 먹으려고 꼼수 부리는 우리가 혜택을 입었을 때 그 사람한테 굉장히 미안한 일들이 문득 생각납니다. 오늘 생각나지 않던 사람이 문득 생각날 때 그것은 바로 추가된 의미를, 새로운 물건이 들어와 추가된 게 아니라 현재 있는 모든 것이 녹녹치 않은 감사거리가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이야기를 이렇게 하면, 개별적 의미는 전체 의미와 함께 일어난다. 뭐냐 하면, 공사하면서 이것만 파라했는데 곡괭이로 팠는데 시멘트가 옆에 있는 것까지 한꺼번에 다 드러난 것 있지요. 자식한테 칭찬하면서 네가 이번에 수학을 잘했구나, 라고 하는 순간 “엄마. 내가 수학 잘하기 위해서 일찍 세수를 한다. 엄마는 그것 몰랐잖아.”

그러니까 수학 잘하는 것과 일찍 일어나 세수부터 먼저 하는 새로운 의미가 같이 드러났지요.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내가 시간 맞춰 잠을 잤거든. 모든 게 연계, 연계, 연결됐다는 거죠. 한꺼번에 다 등장하는 거예요. 어떤 특정한 것만 잘했다는 게 아니라 다 잘한 것으로 등장하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예수 믿는 것만 받는 게 아니고 살아온 모든 죄 지은 것, 우리가 성질부린 것, 교회 농땡이 부린 것까지 주님의 죄 용서와 유관하고 관련돼있다는 사실이 다 드러나게 되지요.

전에 그런 것으로 스스로 가슴을 치면서 아이고, 인간아. 내가 등신이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했는데 구원받고 보니까 등신짓 없었으면 구원 못 받을 뻔했어. 끊어진 게 없어요. 모든 게 다 그랬어야 하는 일들만 일어나요. 천국 가기 위해서 일어날 일들만 일어났어요. 손가락을 깍지 끼게 되면 한 손가락을 못 떼요. 같이 일어나니까.

난 너 같은 친구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없어져야 친구 때문에 오늘날 내가 된 거예요. 모든 것이 주께서 다 엮이고 엮이게 하신 거예요. 저 자식은 죽어야 돼, 하지만 내가 구원받은 걸 생각해보세요. 그 엮인 범위를 더 알아가는 게 새로움이에요.

26장 13절은 애굽 땅에서 인도했다는 건 아까 했고 14절을 봅시다.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치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나의 법도를 싫어하여 나의 모든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파종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아닐까요? 필히 일어나지요. 왜?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했을 때와 지킬 때가 같이 엮여졌기 때문에 그래요. 전에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을 뗄 수 없게 돼있어요.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고 악이 있는 곳에 선이 있어요. 인간은 선악 때문에 자기 내부로 아주 미쳐버리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분화가 돼요. 분화가 되면 선한 쪽에서 또 선이 있고 악이 나와요. 그래서 우리는 순결한 선, 순수한 선, 백 퍼센트 선을 위해서 악을 버리잖아요. 이 선을 택한 순간부터 예상 못한 악이 또 나오지요. 여러분, 이런 경우는 일상입니다.

전기 든다면 전기청소기 안 쓰고 빗자루로 청소했다. 나름대로 자기는 그 결정을 선이라고 하겠지요. 빗자루로 청소할 때 빗자루에서 빠지는 것이 먼지보다 더 많은데요? 그건 빗자루 살 때 몰랐지요. 왜 그걸 몰라,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가 결정하는 안에 어떤 부정이 있는지는 그 누구도 몰라요. 주께서는 그걸 선택하게 해서 내가 선택한 속에 내가 싫어하는 원치 않는 악도 같이 딸려 들어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새로움으로 주는 거예요. “봐라. 네가 하는 일이 제대로 되는 일이 있더냐? 짜증나지.”

대표적으로 흔한 예가 뭐냐 하면, “여보. 코로나 19 때문에 신경도 쓰이는데, 요새 코로나블루라 하지 않습니까. 이번 토요일에 간절곶 놀러 가자. 김밥 싸고.” 이런 선택이 있을 때는 어떤 악이 기다릴 줄 상상도 못했지요. 김밥 먹고 가족끼리 룰루랄라 다정히 올 줄 알았지요. 남편이 막상 김밥 보더니, “김밥 꼬라지하고는. 김밥 옆구리는 왜 터졌느냐.” 가기 전에 했던 부부싸움을 모래사장에서 하는 거예요. 이건 예상 못한 악이에요.

대충 화해하고 오는데, 그만하자. 당신 먼저 그만 하면 가만있겠다. 그래서 김밥에 대해선 일체 문제 삼지 않기로 했는데 오다가 남편이 성질나게 되면 화풀이를 운전으로 풀거든요. 운전하면서 부부싸움 제2라운드가 시작되는 거예요. 당신 어지러워서 멀미난다. 운전대 못 맡기겠다. 이게 뭐냐 하면, 매사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어떤 악이 낄지 우리가 모르는 겁니다. 알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선을 선택할 때는 내가 행복하기 위한 명분이나 이념에 맞추어서 양보할 건 양보했거든요. 이 정도 양보하고 이 정도면 가정에 평화가 왔겠지. 그건 어제의 명분이에요. 어제의 내 삶의 기준으로 적용했는데 오늘 주께서 새로운 기준을 매길 줄이야, 생각도 못했지요. 앞으론 김밥 옆구리 터져야 된다. 새로운 명분이 등장한 거예요. 그러면 다음에 놀러 갈 때 김밥 안 터지면 됩니까? 다른 게 터지는데.

그러니까 사람이 언제 감사하느냐 하면,  예상 못한 일이 왔을 때 우리가 예상하게 되면 항상 짜증나요. 뭔가 무서워요. 그러나 예상 안 했는데 낯선 사건이 터져버리면 그게 기쁨이 돼요. 놀라 갔는데 예상보다 더 재밌고 날씨 좋았고 갈 때부터 올 때까지 화기애애했어요. 이건 예상 못했어요. 예상 못했다는 말은, 내가 선이라는 그 선을 넘어서 선이에요. 내가 이 정도하면 선이라고 행복이라고 봐주는데 그 선을 넘어서 행복이 온 거예요.

그래서 그 가족들은 앞으로 이 자리에 다음 토요일에 또 오자고 하거든요. 이미 넘어선 행복이 지금 나의 예상 안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우리 다 같이 가는 거야, 했는데 다음 토요일에 역시 날씨 좋았고 음식 김밥 옆구리 터지지 않고 정말 다 좋았는데 큰 애가 하는 말이, “나 놀러 가기 싫어. 친구와 놀러 갈 거야.” 세상에 예상 밖에 삐딱 선이 등장했네요.

그래서 이건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의 선하기 위해서 내 결정이 옳았음을 위해서 이게 자기 행동의 동기부여가 되는 거예요. 평소에 인간의 삶이. 그걸 제가 처음에 그게 육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왜 육에서 나온 게 썩어진 것 밖에 안 나오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인간은 백날 최선을 다해봐야 육에서 육이에요.

깨뜨려주는 것, 예상 밖 깨뜨려주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이 생각 못한 예상 밖의 인위적이지 않고 작위적이지 않고 비인위적인 것, 그걸 보통 우연 또는 우연한 사건. 주님이 선물을 줘요. 우리가 이렇게 있으면 주님께서 텅 빈 형상, 어떤 율법을 지켜도 인간은 텅 비게 돼있어요. 형상에 이르지 못해요. 텅 빈 형상 속에 주님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선입관들 예상 밖의 기대를 없애고 깨죠.

깨고 주님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으로 채우게 되는 겁니다. 밑에는 육이죠. 위에는 영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이 만약에 7월 2일이라면 7월 3일도 그렇게 하고, 7월 4일도 그렇게 하고 항상 고맙고 감사한 것은 내가 예상 것 말고 다른 요소를 여러분들의 일상 가운데 있어요. 성도라면 있어요. 그걸 찾아보세요. 내 계획대로 말고 계획대로 안 됐는데 주께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건 주도권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내게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신호 같은 겁니다. 시그널 같은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종교적 어떤 요구나 종교적 에너지가 소진될 이유가 없지요. 필요가 없지요.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26장 16절에 보면,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 할 때 내 몸을 보면서 내가 죄를 지어서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게 되었구나. 이건 잘못된 선악구조에 의한 해석입니다.

인간에겐 선악구조가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 선이고 율법을 어기면 뭐로 본다? 악이다. 그래서 나한테 폐병이 왔다. 이거는 내가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보잖아요. 이렇게 되면 자기가 텅 빈 형상이 아니에요. 머리가 텅 비지 않았어요. 자기결정을 또 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폐병과 열병이 온 것은 네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언약이 언약대로 주어지기 위해서 온 거예요. 언약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일체 못 지키기 때문에  폐병 드는 것은 마땅해요.

지금도 우리는 마땅히 폐병 돼야 되고 마땅히 코로나 19 돼야 돼요. 그런데 열이 36.6도거든요. 아까 재봤어요. 식당에서. 아직까진 그것 아니잖아요. 왜 아닌 거예요? 왜 아닙니까? 이것 모르면 오늘 강의 헛수고인데. 왜 내가 지금 코로나 안 걸린 거예요? 침 튀겨도 괜찮아요. 확진자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왜 안 걸린 거예요? 이게 해답인데. 의외지요, 의외. 내가 잘나서 안 걸린 게 아니고 예상 밖이죠. 성도는 이렇게 사는 거예요. 여기서 벌칙이 주어질 때 내가 무슨 나쁜 짓했으니까 그것 고치겠다. 이렇게 나오지 마세요. 고치겠다는 그것도 선악에 매여 있는 거예요. 자기의 미래를 자기가 결정하겠다는 그것은 아직도 그 자체가 육이고 나는 멀쩡하다고 우기는 겁니다. 나는 내 식대로 살겠다. 일종의 지난날의 명분과 이념을 고집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상 밖을 찾아야 돼요. 아까 운전을 했다. 내가 운전을 좋아서가 아니에요. 주께서 천사가 와서 지켜준 거예요. 천사가 지켜주는데 어느 날 앞 차를 박았다. 차 한 대만 박았잖아요. 천사가 지켜줘서. 두 대 안 박았잖아요. 사랑하는 자식들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우리는 다 내 덕이고 내가 조심했고 내가 착실한 덕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거는 자기를 선한 자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아까 혼인잔치에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다 데리고 와. 다 무효에요. 하나님의 피 묻은 예복 없이는 천국 못 갑니다. 혼인잔치 참석 못해요. 선이나 악, 그것 다 헛짓이에요. 남을 욕하는 환경에 우리가 들어가 보세요. 우리도 그 짓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법무부 장관 시켜줘 보세요. 성과는 내야 되겠지, 누구 하나 잡아야 되지. 큰 걸 잡아야 역시 대단한 장관이란 소릴 듣지요.

인간은 어떤 자리에서나 위치에서나 자기를 잊지 못합니다. 자기 잘남을 포기 못해요. 이게 육이에요. 이게 썩어질 거예요. 썩어지면서도 아직 건장한 걸 보면 이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겁니다. 나 잘남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은 피거든요. 어린양의 피.

그 언약을 언약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마땅히 못난 존재고 마땅히 지 고집 밖에 모르고 마땅히 지가 나쁜 짓하면 변명으로 일관하는 아주 자기 자신은 무조건 잘 돼야 한다고 우기는 세상은 다 내 중심으로 돼야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그러한 의식 되돌아보면 그러한 죄마저도 주께 감사거리가 돼야 됩니다. 못났는데 이 못난 걸 구원해주시다니요. 주님의 언약 찾아오심을 감사합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처럼 남한테 이야기할 수 없는 일종의 우리가 주님 앞에 장애자 같아요. 뻔한 데 인간의 힘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은혜는 은혜대로 받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언약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 언약의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신 거예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육을 심는 것은 썩어진 것을 거두고 영을 심는 것은 영생을 거둔다 할 때에 우리가 심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그 사실, 그러한 언약, 성령을 심은 자는 영생을 거둔다는 그 언약을 우리가 인정을 하고 수긍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그 사람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한데 주도권이 없고 인간들에게 주도권이 없는데도 우리는 그동안 눈에 보이는 사람만 상대했고 겸사겸사 내 잘난 척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주여, 하나님은 언약에 주안점을 두는데 우리는 나에게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제는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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