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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9 23:01:56 조회 : 173         
율법의 저주 레위기 26:33 201009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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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96) 20-10-12 16:02 
20201009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율법의 저주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강의는 레위기 26장 27절부터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치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나 더 징책 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레위기 26장 이야기는 율법을 준행치 아니할 경우에 나오는 하나님의 벌칙에 대해서 쭉 나열하고 중이었습니다. 예를 들게 되면, 16절에 폐병 나오고 열병 나오지요.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고, 그리고 파종이 안 돼요. 헛되게 되고 농사 지어봐야 적들이 와서 그 농산물을 다 먹을 것이고, 17절에 보면 전쟁해봐야 패할 것이고,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자가 우리를 지배할 것이고, 쫓는 자가 없어도 두려움에 떨면서 도망치기 바쁘고.

그래도 그들은 청종치 아니할 것이니까 20절에 보면 너희 수고가 헛되고 땅은 소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징벌을 받아요. 그리고 21절에 들짐승을 보내서 재앙을 더하고, 너희 자녀를 들짐승이 와서 죽여 버리고 가축도 죽여 버리고 가축 숫자가 감소될 것이고, 늘 잘 닦았던 도로가 황폐해지고. 그래도 너희들은 나를 대항할 것이다.

그 다음에 25절에 보게 되면 악한 원수가, 너희 중에 염병, 전염병이 퍼지고 적들에 사로잡히고 양식이 끊어지고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떡을 먼저 굽겠다고 난리도 아니지요. 그리고 먹어봐야 배부르지도 않지요. 그 다음에 오늘 27절에 오게 되면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게 될 것이고 딸의 고기를 먹게 될 것이다. 사람이 먹을 게 없어서 자식의 살점을 구워서 먹게 될 것이란 거예요.

여기 나오는 율법의 벌칙들은 인간들이 거부하고 싶은 인간들이 그런 일은 안 닥쳤으면 하는 그러한 조항들은 다 나와 있는 것 같아요. 놀부도 이런 징벌을 안 받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은, 징벌이란 것은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벌도 받고 복도 받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율법이 갖고 있는 심판성, 율법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성을 품고 있어요. 율법을 줬다는 것은 이제부터 너희에게 심판을 내리겠다는 뜻입니다. 뭐 받을까 말까라는 그런 결정권도 없고 선택사항이 아니란 거죠.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그 자체로선 왜 이스라엘이 있는 줄 몰라요. 근데 율법이 옴으로써 율법이란 심판성이니까 동일한 심판성의 요소를 이스라엘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겁니다.

율법을 줬다는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심판성이 이스라엘 안에 들어온다는 뜻이에요. 그래야 율법과 이스라엘이 뭐가 되느냐 하면 동질이 됩니다. 같은 질이 돼요. 하나님의 심판이 들어온다는 것을 누가 원하겠어요? 아무도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운명이 그런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운명 자체가, 하나님의 법(율법)은 대단히 무섭다, 그 무서움이 말로 무섭다는 게 아니라 그 무서움이 이스라엘 내부, 안까지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엄청나게 무서운 것, 그 무서움이 이스라엘 안 쪽까지 들어와서 이스라엘 되게 한 핵심 조건으로 심판성이 자리 잡겠다는 겁니다. 율법이 얼마나 무서운지 율법이 있는 이스라엘은 필히 멸망하게 돼있어요. 율법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법이 있는 민족은. 이스라엘은 수동적 입장이에요. 주면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사람들의 생각하기를 이스라엘이 말씀을 지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데 그걸 만약에 지켰다고 하면 못 지키면 사례를 발생시키지요. 발생시켜서 율법 정도는 우리 속에 안 들어와도 우리가 알아서 그만큼 착하니까 굳이 율법이 언급하는 율법을 안 지켰을 때는 이런 벌칙이 있다는 것이 굳이 이스라엘 속에 들어올 필요 없도록 사전에 착하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 라는 것을 하나님께선 용납하지 않습니다. 허락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심판성이 없으면 그 자체가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게 아닙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을 선택해서 창조한 거예요. 왜? 율법이 이 정도로 무섭다는 것, 하나님이 이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본인이 골라잡아 이건 집어넣고 저건 안 하고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아요. 이스라엘이 그런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이방민족이야 율법이 있으나마나 자기 인생 살면 그만이지만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율법과의 만남, 율법이 무엇인지 증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벌칙이 받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죽음보다 더 무거워요.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제 그만 밟으란다, 이런 것 없어요. 우리 죽음보다 더 나가요. 네가 죽는다고 해서 율법의 처벌을 이제는 그걸로 종결된 줄로 아느냐 어림도 없지. 죽어서 본격적으로 내가 손볼 거야. 죽음도 주님의 저주를 회피 수단이 될 수 없어요. 나의 죽음이. 목숨보다 하나님의 거룩이 더 무거우니까, 엄중하니까.

사람들의 이러려고 교회 왔나, 하는데 싫으면 교회 나오지 말든지. 이러려고 교회 왔나, 하면 교회 오는 것을 누가 선택했다? 본인이 선택했다는 이야기 밖에 안 되거든요. 본인이 선택한 사람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선택하면 그 본인 안에는 본인이 선택한 것만 모여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해코지 할 것은 들어온다, 안 들어온다? 들어올 리가 없지요. 사전에 검열해서 다 내쫓아버리지요. 이스라엘은 그게 반대라니까요.

그러면 우린 생각하기를 아이고, 이스라엘 불쌍하다, 이러잖아요. 이스라엘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있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고 있다고요. 하나님의 이름은 쉽게 말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냥 하나님이거든요. 보이지 않는 것 빼버리면 그냥 하나님이에요. 그러면 율법의 저주와 징벌은 누가 받아요? 하나님 본인이 받아요.

이게 인간이 상상도 못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한 하나님,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율법의 저주를 자처하시는 하나님, 모든 저주를 하나님이 하나님께 때리시는 그 하나님. 인간은 다 쳐버리지요. 인간은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나를 안 다치게 하는 하나님을 교회 와서 믿잖아요. 교회가 그걸 상품으로 제시했고 교회 오시면 복 받습니다, 했잖아요.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그런 가짜 교회가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되고 싶어서 이스라엘 된 게 아니고 친히 선택해서 됐어요. 하나님의 이름이 선택했어요. 내가 너와 함께 있음으로써 너희는 무엇을 목격해야 되느냐 하면 모든 저주는, 하나님이 내린 저주는 하나님 내가 받는다는 사실을 너는 목격하고 증거하라고 이스라엘을 만든 거예요.

이것은 우리의 안일함을 깨우는 거예요.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오늘도 복 받을 거야. 장난하느냐? 그건 장난이에요. 그건 절이나 다를 바 없지요.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어느 누가 율법에 죽 나열한 이 율법의 저주를 누가 자처해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걸 자처해서 감당하신 분이 계셨으니 예수님입니다. 너, 감당할 수 있겠어? 안 되지? 내가 감당할게.

이스라엘에 처음부터 율법을 준 게 아니고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만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 처벌이 따르는 법조항이 주어집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이런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을 안 가르쳐줬습니까, 하는데 처음부터 가르쳐줬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이 발생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디서 시작하느냐? 유월절부터 시작해요.

히브리인들이 생각하는 유월절에서 주목되는 것이 두 부류인데 첫 번째는 히브리인들, 혈통으로는 아브라함 자손들이죠.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이 유월절에 주목을 받는 중심 되는 위치에 있느냐, 아니면 중심 되는 위치가 히브리인들의 아니고 바로 어린양이 주목을 받느냐, 하는 겁니다.

여러분, 유월절 다 아시지요. 하나님의 심판의 천사가 드론처럼 날아와서 집집마다 빠짐없이 도망쳐도 소용없어요. 빠짐없이 그 집안의 제일 맏이는 본때 보이듯이 잘라버려요. 장남을 죽인다는 것은 아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혈통을 유지해야 될 책임자가 맏이입니다. 장녀는 시집가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맏이를 아버지 기력의 스타트, 시작이다. 장남이 살아 있으면 아버지는 죽어도 자기의 요소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죽어도 혈통 안에서 영원하다는 그러한 인간들의 의식 같은 게 있어요. 그래서 유교에서 조상제사를 그렇게 강조하는 겁니다. 모든 민족이 조상제사가 있는 이유가 자식이 나의 분신이라는 거죠. 나는 늙어죽어도 나를 대리해서 자식이 계속해서 또 자식을 낳으면 나는 계속 영원하잖아요.

현대 분자생물학의 이론에 의하면 dna가 그거잖아요. 50%, 50% 받고 그 다음에 손자 대에는 내 dna가 16%인가 있을 걸요. 나중에 희미해지겠지만 어쨌든 간에 나는 자식 안에 살아 있잖아. 그런 자부심을 갖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내가 영원불멸하고 싶어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누굴 닮았겠어요? 나를 쏙 닮았겠지요.

그러면 그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내 목숨보다 더 무거운 것을 죽이는 거예요. 내가 한평생 살면서도 언젠가 죽는 것이 그다지 서럽지 않는 이유는 나의 분신이 내 대신 계속 살아 있으면 나는 그 안에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면 맏이를 죽인다는 것은 네 혈통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막혀버렸다는 겁니다. 너의 영원불멸을 하나님 쪽에서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거예요.

그래서 유월절에 죽음의 사자가 집집마다 방문해서 맏이 다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히브리인 집에 가니까 어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어린양의 피를 문지방과 문설주에 발라놨잖아요. 유월절 뜻이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천사가, “야, 이 집 그냥 건너뛰자.” 여러분, 건너뛰게 되면 천사가 그냥 건너뛰는 거예요. 건너뛴 그 자리에 뭔가 건너뛸 수밖에 없게 만든 그것이 유난히 눈에 부각이 되겠지요. 눈에 띄겠지요. 그게 뭐냐? 어린양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히브리인이란 인간들이냐, 아니면 어린양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냐? 어느 것이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까? 어느 것이 핵심요소가 되어서 얼마 안 있어 생겨나는 민족, 이스라엘 민족의 핵심요소가 되겠어요? 히브리인들이겠어요, 안 그러면 어린양이겠어요? 어린양이죠. 어린양이 부각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약속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유지시켜주는 거예요. 어린양의 취지가 계속 살아나야 된단 말이죠. 어린양의 취지가, 어린양이 어떤 인물이라고 봅시다. 그 당시 어린양이 양이 아니고 인격적 소지를 갖고 있다고 봅시다. 그러면 어린양이 그 문 앞에 무엇을 봤겠습니까? 죽음의 천사가 맹렬하게 죽여 버리고 심판을 행사하는 것을 어린양이 다 목격했겠지요.

인격적인 인간적이 속성이 그대로 지니고 있다면 눈이 있다면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선 봐주지 않고 다 죽여 버린다는 그 정도로 하나님께선 죄에 대해서 일체 양보가 없고, 죄라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허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목격했겠지요. 살아 있는 어린양이 목격했느냐는 겁니다. 그게 어린양의 피를 발랐지요.

그러면 하나님도 주목하고 천사도 주목하고 바깥에 정면으로 죽음의 천사를 맞이해야 될 어린양의 요소, 피가 어린양에서 나왔으니까 피의 한 요소, 어린양의 부분도 그걸 목격했다면, 어린양이 피 흘렸으니까 죽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이에요. 이건 좀 어렵지만 여러분 이해할 거예요.

어린양의 죽음 자체를 계속 살려내는 식으로 이스라엘이 유지돼야 되는 거예요. 어린양의 죽음 자체를, 어린양이 죽었다는 것 자체를 손실시키면 안 돼요. 이걸 없애버리면 안 돼요. 피라 하는 것은 이 땅에 죄의 자국을 남기는 게 피에요. 이 땅에 피를 흘렸다는 말은 이미 너는 애초부터 죽은 자이기 때문에 그 죽은 자가 어떤 것이 하나님이 만든 깨끗한 세상을 더럽혔다, 라고 할 수 있는 표식 같은 것이 하나님께서 피를 사용한 겁니다.

이 땅을 더럽게 하는 액체가 더러운 인간에서 땅을 더럽힐 수 있는 요소로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 뭐냐? 피가 적시는 것을 죄가 땅을 적시는 것으로 보시는 거예요.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창세기 4장에 보면 그게 아벨이란 사람이 피를 흘리지요. 그 피를 흘리는 사건에 악함이 개입된 사건입니다.

멀쩡하게 아벨이 짱돌로 자기 머리 쳐서 피 흘린 것 아니잖아요. 외부에서 누가 가해했잖아요. 죄악 된 폭력을 행사했잖아요. 누구지요? 가인이지요. 가인의 죄가 아벨을 통해서 죄의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벨의 죽음으로 땅을 적신 거예요. 액체로써. 적시니까 창세기 4장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땅이 땅에 죄 묻었다고 누구한테 호소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향하여 땅이 호소를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땅은 하나님과 잘 통하는 사이였어요. 땅에서 일어난 일을 그때그때마다 즉시로 하나님께 다 보고가 되는 겁니다. cctv가 없는 시대에서도. 피를 흘린 거예요. 피를 흘렸다는 말은 악한 사건, 용서받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죄가 이 땅에 자국을 남긴 그 사건에 전부 다 몰입해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주목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3장 35절에서 36절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하나님께서 괜한 사람 죽였다, 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 있는 사건들을 배열시켰어요. 그 대표적인 것이 아벨에서 사가랴, 그리고 마지막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

그러면 이스라엘의 기능이 뭐냐? 어떤 귀한 사건을 모시고 가마 태우듯이 계속 모시고 유지해야 될 기능이 이스라엘 기능이에요. 그 귀한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그냥 어린양이 아니고 어린양의 죽음 사건이에요. 어린양 피 발라서 우리가 구원받았다. 그 개념이 아니에요. 그건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아주 환장한 것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 우릴 구원했다, 피 줬다가 아니에요.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이유도 없고 율법을 줘도 지킬 만한 것만 지키고 복 받을 것만 지키지 저주받을 조항을 아예 제시 안했겠지요. 이스라엘 구원하는 데 얼마나 용을 썼는데 또 망치게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망치느냐, 안 망치느냐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는 이스라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된 게 아니란 말이죠. 뭔가 다른 귀한 핵심적인 본질적인 요소를 위해서 이스라엘 된 거예요. 어떤 사건을.

어린양, 그것도 흠 없는 어린양이 죽어서 피 흘렸다. 피 바르면 구원된다는 뜻이 아니고 이 피에 대해서 너희도 주목하고 하나님 나도 주목할게. 왜? 그 저주를 유월절은 어린양이지만 그 실체는 하나님 본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본인이 하나님 심판을 다 담당했어요. 다 감당했어요.

그걸 모셔야 되고 그걸 운반해야 될 임무가 누구냐? 바로 성도지요. 구약에선 이스라엘. 거기다가 자기 구원을 왜 쓸데없이 끼어들어요. 자기 구원을 빼버리세요. 날 구원하려고 하나님께서 오신 게 아닙니다. 내 행복 주시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인간의 죄라는 것은, 땅을 뭐로 보느냐 하면 땅을 이렇게 봐요. 땅은 나를 기념하는 곳, 이렇게 본다고요. 기념 오래 하려면 내가 생존해야 되니까 내가 여기 이 지점에 터를 잡고 살란다. 왜? 살면 살수록 나는 그 동네에 이십 년 살았다고 자기를 기념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어느 교회 다닌다. 왜? 그 교회 다녀서 구원받았다는 자신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하면 그 의미가 자기한테 도로 소환돼요. 그런 성경말씀,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나 구원받고 천당 보내는 하나님은 애초에 없단 말이죠.

우리가 사건을 모셔야 돼요. 하나님께선 우리 자신을 죄로 규정하는데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있습니다.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해서 죄인 만드는데 모든 역량을 투입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마저 이 땅에 와서 죄가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피 흘린 거예요.

땅은 인간을 기념하는 곳이 아니고 신명기 12장에 보면 약속의 땅이란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에요. 구약에는 그냥 이름뿐이지요. 여기 몸이 붙어 있으면 신약의 예수님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거예요. 구약의 주의 이름은 약속대로만 하나님이 창세전에 생각한대로만 일을 하시는 분의 이름이에요. 그걸 언약이나 약속이라 하는데 이미 창세전에 결정된 그 원리원칙만 고수하면서 줄곧 오셨고 그 주의 이름과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온 마리아의 몸과 결합이 되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목적은 죄가 무엇이냐, 그 죄라는 것은 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 본인이 직접 죄가 되신 거예요. 죄인이 되신 거예요. 모든 율법의 저주를 다 받아서 하나님 자신이 죄인 되려면 율법이 주어져야 돼요. 율법의 조항이 주어졌고 그 율법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온 것 맞는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뭐냐?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에요. 죄인이란 이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그 사실이 객관적 사실이에요. 이 땅에서.

인간들은 겁나서 다 내빼고만 거예요. 율법은 이스라엘 속에서 동질의 미지의 인물을 찾고 있어요. 율법의 정신과 동일한 인격을 갖고 있는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찾아내는 거예요. 율법과 율법을 완성시킬 분의 만남. 율법의 저주가 율법의 완성을 뜻하거든요. 율법대로 저주받는다는 것이 뭔 뜻입니까?

율법은 생생하게 현실이란 뜻이에요. 율법은 장난이 아니라는 겁니다. 농담이 아니란 뜻이에요. 하나님의 뜻이 농담이 아니고 헛소리가 아니에요. 그냥 지나가다 하는 농담 삼아 던진 말이 아니에요. 실효성 없는 말이 아니라고요. 율법은 정말 하나님의 법대로 뜻이 담겨서 이게 농담이 아니고 실효성 있다. 정말 세상은 율법대로 움직인다, 라는 어떤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되죠.

그 증거가 뭐냐? 갈라디아서 3장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저주대로 죽으셨는데 그게 십자가죠. 그게 십자가라고요. 무슨 십자가 믿어서 천당 간다는 그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살아 있는 나 예수님 십자가 믿고 천국 갈래요.” 그럼 십자가는 우리에게 뭐라고 하느냐? “죽어 인간아. 너 죽었어.”

하나님은 어떻게 살릴 것인가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누가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표현하느냐, 온전히 증거하느냐. 그 사람만 하나님의 관계고 다른 사람은 관계 지어지지 않아요. 죽은 자에요. 예수님만이 온전히 그 율법을 완성시켜서 죽었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생명이 되셨잖아요. 예수님 빼고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의 생애는 나를 기념하는 생애가 아닙니다. 율법의 본질과 동일한 본질을 내놓으라고 지금 우리가 율법의 상대역이 되었어요. 율법의 상대자가 된 거예요. 도망치지 말고 하나님의 법 앞에 피하지 말고 내빼지 말고. 하나님의 법 이야기하면, “많이 먹었다. 그만해라.” 말씀을 기피한다는 것은 나 건드리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말씀을 안 듣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나 건사한 걸로 그냥 보람 있게 살래. 나 건강하고 행복하고 이걸로 족해.”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를 기념하는 용도로 이 세상을 살고 있어요. 자기 잘남을 증거하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 안에서 심판이 계속 살아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심판이 살아 있을 때 십자가가 계속 살아 있게 되고 우린 십자가의 증인이 되는 거예요.

출애굽기 12장 15절에 보게 되면 유교병을 먹는 자는, 적어 볼게요. 누가 읽어볼까요. “너희는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유교병을 먹는 자는 그 다음에 뭐에서 끊쳐지리라? 이스라엘에서 끊쳐지지요.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이스라엘 아니지요. 이스라엘 위한 이스라엘 같으면 끊어진다는 그러한 조항은 애초부터 이거는 안 줘야 되잖아요, 이스라엘에게. 끊어진다는 말은 이스라엘보다 더 우선되고 중요한 게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단 말이에요. 이스라엘보다 더 중요한 것.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최종 목적이 아니란 뜻이에요.

이스라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담길 때만 그런 조건 하에서만 이스라엘 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끊어지리라. 이스라엘에서 제외되리라. 뭘 먹는 자는? 유교병을 먹는 자는. 유교병이 뭐예요? 누룩이 있는 병이니까, 떡, 전병할 때 그거거든요. 누룩이 있는 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누룩, 이스트, 폭신폭신하게 달콤하게 만드는 이스트. 인간이 먹기 좋은 빵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물론 매일 그러면 안 되고 조건이 있어요. 1월 14일. 1월 14일은 봄 절기라 하는데 봄 절기는 유월절, 초실절, 오순절. 오순절은 50일, 49가 마감됐다는 49를 기념하기 위해서 +1이 추가되는데 이 1일이 오순절, 5 곱하기 10이니까 순은 10이거든요. 오순절이 되는 겁니다. 유월절은 하루고, 그 다음에 15일부터 21일까지 바로 무교절이라고 누룩이 없는 떡을 먹어야지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누룩이 뭐냐? 고난이거든요. 그걸 누룩의 떡, 다른 성경에 보면 고난의 떡. 고난, 그러니까 딱딱하다 이 말이죠. 인간이 자기가 식성 좋으라고 먹는 그런 용도가 빠져있는 떡, 내가 먹는 즐거움을 채우고자 하는 나의 즐거움조차 박탈당했다는 걸 시그널처럼 알려주는 떡, 그게 바로 무교병이에요. 너는 하나님이 당한 고난에 참여해야 될 백성이라는 걸 알려주는 떡, 이게 무교병이에요.

따라서 무교병 절기에서는 나의 고난보다 우선되는 고난이 있었으니 그것이 뭐냐?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저주했다는 사건. 하나님이 자기를 어린양으로 상대해서 죽여 버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죽이는 그것을 두 자로 ‘약속’이라 해요. 그 약속을 본질로 담는 그 민족을 이스라엘이라 하고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죽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하는 것은 다 빼세요. 하나님이 날 천국 보내주고 날 지옥 안 보내주고. 그것 다 빼세요. 그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관심사가 나에게 없어요. 있어선 안 됩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이 땅에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그건 이스라엘이 아니지요. 성도 아니지요. 지 잘난 맛에 사는 거죠. 그건 본인이 본인을 선택하는 거죠.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이 무서운 벌칙이 있는 율법을 이스라엘에 일방적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분통 터질 일이에요. 내 쪽에서 하나님에 다가서면 안 되겠습니까, 라는 그러한 제안이 절로 나오지요. 가만있는데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 갑자기 율법 주면서 안 지키면 저주, 도대체 이런 일방적으로 당한 처지가 됐다는 것이 인간의 입장으로 봐서는 얼마나 자기 신세가 처량하고 가련하겠습니까.

누가 그런 신세를 좋다고 선택하겠어요. 내빼지.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선택이 이스라엘 선택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에요. 내뺄 수가 없어요. “이놈, 와.” 하고 집어넣었단 말이죠. 왜냐하면 이스라엘 나라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미 확정되었어요. 어린양의 약속의 내용을 담아내는 조건 하에서만 이스라엘이다.

그 예가 뭡니까? 1월 15일부터 21일까지 무교병, 누룩이 없는 떡을 먹는 절기에 누룩이 있는 떡을 먹는 자에게는 어디서 끊어지리라?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이스라엘 조건은 이스라엘 네가 정하는 게 아니야. 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야. 일방적으로 내가 결정하는 거야. 네가 천국백성이냐, 아니냐는 것은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란 거예요. 네가 천국 가고 싶어서 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떤 천국의 조건이 내 안에 들어와야 되는데 천국의 조건이 뭐냐 하면, 고난 받는 주님을 내 안에 품는 겁니다. 저주받는 주님, 하나님을 내 안에 품는 거예요. 하나님이 저주받았다면 우리는 마땅히 저주받는 거죠. 마땅히 저주받음을 인정한다면 자기 가치에 대해서 자기를 자꾸 살피겠습니까? 살필 권리가 없지요. 하나님이 나를 지목하지 않는데 왜 내가 나를 지목합니까. 그거는 하나님의 원리에 위배되지요.

내가 날 볼 가치보다 주님의 가치가 월등해요. 주님의 가치가 월등하다는 말은 이제부터 우리는 나 안 보기,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제부터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나 안 쳐다보기, 이렇게 나와야 된다고요. 그게 바로 나로부터 자유입니다. 사람의 모든 고민과 걱정이 누가 짐이 되어 생기는 겁니까? 내가 짐이 되잖아요, 내가.

물론 밥 많이 먹어 짐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땐 살 빼면 되지만 살 빼도 안 되는 게 내가 태어난 자체가 헉헉거리면서 끌고 가야 된다는 이게 얼마나 힘들어요.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그 힘든 것 왜 쳐다보냔 말이죠. 힘든 알면서 왜 쳐다보냐? 그러면 우린 뭐라 합니까? 나 안 바라보면 누가 보는데? 이렇게 하면 너보다 월등하게 가치 있는 분을 보면 되잖아. 그분을 업고 살아라.

둥개둥개 그분을 업고 살아야 돼요.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게 주의 이름으로 함께 사는 거예요. 율법은 날 벌주려고 주신 게 아니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율법의 저주를 다 받아냄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실효성 있는 객관적인 현실 그 자체인 것을 하나님의 뜻 그 자체인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율법과 동일한 뜻으로 있는 그분을 말씀으로 안에서 우리를 깨워요. 너 말고 네 안에 계시는 분을 깨운다고요. 그 관계를 선택이라 하는 겁니다. 이미 선택했기 때문에 율법을 의미 있게 우리에게 제공해서, 나 율법 지키지, 나대지 마세요. 너 비켜, 율법은 너 말고 너를 저주케 하신 분이 네 안에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네가 살았다고 우기는데 그 우기는 네가 실은 죽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그분이 너와 함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죽었으니까 더 이상 나의 행동거지나 또는 나의 선택이나 나의 생각에 대해서 우리가 기대해야 돼요, 안 해야 돼요? 할 이유가 없어요. 해봤자 걱정근심인데 무거운 짐인데. 우리가 우리 쳐다보라고 우릴 만든 게 아니에요.

사가랴, 아벨, 예수님 이 땅에서 억울한 피를 남긴 사람들 특징이 뭡니까? 자기 자신 다독거리다 순교했습니까? 아니에요. 아벨이 내 재산은 하나님이 받을 거야. 형보다 낫다. 그런 생각 아벨이 했겠어요? 안 했어요. 아벨은 그냥 자기 직업대로 제사 드렸거든요. 그런데 받고 안 받는 결정은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했어요.

결정이란 말을 했지만 다른 말로 합시다. 선택. 하나님이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배제하는 것은 하나님 일방적이에요.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으로 인하여 선택했음, 그게 하나님의 뜻임, 그것이 이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진짜 하나님 뜻이었다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아벨의 피 흘림으로 나타나지요. 하나님께 응답 받아놓고 하나님의 벌은, 인간의 벌은 누가 받고? 가인이 받는 게 아니고 아벨이 받아버렸어요.

그게 어린양의 피의 의미 아닙니까. 아니 내가 죽어야 되는데 왜 어린양이 죽었지? 아아 더 이상 나에게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구나. 나는 나를 목적으로 살 존재가 아니었음을 알게 하고 내 안에 율법의 완성으로 오신 분을 드러내가 위해서 우리가 선택적으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선택에 의해서.

베드로가 예수님 떠난다고 하니까 제 목숨 드릴 테니까 주님 가신 데 따라간다 할 때에 주님께서 “어이고. 목숨이나 내 났어? 그 귀한 목숨을?” 이렇게 반길 줄 알았지요. 네 목숨이 얼마치나 한다고 내놔. 네 목숨 원래부터 죽은 건데 죽은 목숨 어데 쓸데 있다고 내놔? 순교하지 마. 죽은 목숨이야. 하늘나라 통하지도 않는 목숨.

우리 목숨은 율법에 의해서 율법의 구현자가 아니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목숨은 하늘나라에 쓸모가 없습니다. 쓸모없어요. 따라 오늘 밤에 죽더라도 너무 자기한테 애도하지 마세요. 쓸데없는 것 주께서 쓰레기로 치웠을 뿐이에요. 우린 가치 없는 걸 왜 자꾸 지키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조금만 아프면 링거 맞고 난리도 아니야.

하늘나라 통하지도 않는 화폐, 부도수표, 주께서 안 받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 목숨 안 받습니다. 왜냐? 우리 목숨엔 율법의 완성이 안 들어있기 때문에 받질 않아요. 약속의 완성이 안 들어있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거룩하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아요. 우리 목숨은. 내 목숨 안 받으면 내 자식 목숨도 안 받지요. 그 아비에 똑같은 그 자식인데, 뭐.

그래서 강의 처음에 처벌의 조항을 봤지요. 율법대로 안 살면 어떻게 합니까? 데쳐먹고 볶아먹고 비벼먹고. 하여튼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서 인간이 싫어하는 모든 조항을 구색 따라서 다하잖아요. 어떤 때는 굶게 하고, 어떤 때는 적들에게 쫓기게 만들고, 어떤 때는 들짐승 보내서 자식을 죽게 하고, 어떤 때는 과수농사 지었는데 태풍 불어서 다 망하게 만들고, 어떤 때는 염병 만들고 전염병, 코로나 퍼지게 만들고.

이게 무슨 신호에요? 지킬 가치가 없다는 시그널이에요. 네가 지금 힘들게 지키는 네 목숨, 하늘나라에선 안 받아줘. 왜? 율법의 완성이 안 들어있으니까. 어디 교회 와서 기도 같지도 않은 기돌 해. 내 자식 시험 치는데, 어쩌고. 시험 치면 쳤지 뭐 어쩌라고? 떨어졌어요. 떨어진 목숨도 가치 없고 합격해도 가치 없는데. 내년에는 우리 아들 장가갑니다. 어쨌다고? 부조나 받아라. 장가간다고 새로운 피조물 됩니까? 인간 되는 진 모르겠지만.

다시 말씀드립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것은, 율법의 저주는 저한테 와야 합당하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율법이 퍼붓는 모든 저주는 딱 저한테로 와야 됩니다, 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왜? 자기 안의 모든 저주를 받아버린 하나님과 함께 합숙하고 있기 때문에, 원룸에 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을 한 자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의’ 그게 의인 거예요. 십자가 의인 줄 알겠지요. 십자가가 날마다 내 가치와 내 의미와 목숨을 개무시 해주기 때문에. 그게 더 이상 내가 내 걱정, 날 쳐다보지 않게 만드는 그 안식, 그 평화 도대체 돈 주고 이걸 살 수 있겠어요? 못 사면 10분 쉬시죠.
 한윤범(IP:119.♡.174.196) 20-10-12 16:03 
20201009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율법의 저주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하겠습니다.

율법에 속죄라고 있는데 그러면 율법으로 죄 짓고 속죄로 용서하는 게 아닌가 하는데 속죄가 뭐냐 하면, 속죄를 이렇게 보시면 제일 수월해요.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안에 빈자리 마련되는 것, 이게 속죄가 돼요. 나의 가장 중심 되는 자리, 이거는 나의 이름의 가치, 나의 존재의 가치가 자리 잡고 있어요, 우리는, 모든 인간은. 왜냐?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나는 누구한테 꿀릴 필요 없이 나 자체적으로 신이다.

신이란 말이 거창하면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것은 나라고 버티는 것, 내가 내 안에서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한다는 겁니다. 천국 가는 거? 내가 예수 믿기로 선택하면 되고. 천국 백성 되는 거? 내가 말씀대로 살기로 내가 결정하게 되면 결정한 내가 내 결정으로 인하여 난 천국 간다, 라고 하는 것이 우리는 굉장히 자연스럽고 거기에 어떤 낯선 것이 개입되지 않잖아요. 나의 결정이 내 자체에서 순환이 된다 이 말입니다. 나의 결정과 내 의미 파악으로만 충족되어서 내 안에 뱅뱅 돌거든요.

그러면 타인이 것이 나한테 침범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내 안에서 하니까. 생물학에서 인간의 유기체라 하는 것은 자기 안에 백혈구가 있어서 외부의 침입에 대해서 자체적으로 면역체계가 가동이 된다고 하거든요. 그게 깨지면 병이 들었다고 한단 말이죠. 모든 유기체는 자체적으로 자기 방어체제가 갖춰서 그 자체 안에서 생명을 유지시켜준다고 보통 생물학에서 하듯이 우리 정신도 마찬가지에요. 내 안에 빙빙 도는 것은 나의 것만 빙빙 도는 거예요.

그런데 낯선 타인의 것이 내 안에 돌입하게 되면, 오늘 본문도 그렇게 나와 있지만, 아무리 그들이 벌을 받을지라도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청종치 아니한다는 말이 뭐냐? 강력하게 저항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담의 후손이라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 생존을 지탱하는가, 어떤 본성으로 버티는가를 하나님이 다 알고 있어요. 내 선택에 위배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은 다 거절해버립니다. 그런데 그 선택을 박살내버리지요.

속죄란 무엇이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침입에 내가 패배당하는 게 속죄에요. 내 속에 내 것이 아닌 것이 전에 내가 주인공으로 있던 그 의자에 제일 중요한 중심 의자에 주님이 턱하니 앉아버리는 것, 이게 속죄 상태입니다. 그러면 그 속죄가 파고 들어오는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율법의 저주지요. “에이 인간아 저주받아라. 죽은 인간아.” 이러면서 들어오는 거예요.

파고 들어와서 우리를 저주하신 분이 우리 마음의 중앙에 앉아있으면 그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할 수 있는 분이 되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 하나님 본인이 율법의 저주를 몸소 받아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이 땅에 들어온 모든 인간들은 율법의 저주를 피할 위인은 하나님마저도 없어요. 모두 이 땅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율법의 저주 대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양으로써 이스라엘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어린양을 모시는 주도권이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에게 있어요. 어린양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우리는 어린양을 모시는 들러리로서 그런 관계가 있을 때 어떤 관계냐 하면 속죄의 관계, 죄 용서받은 관계가 돼버립니다.

그러니 우리가 편하게 속죄, 속죄, 뭐 로마서에 법정적 칭의가 어떠니 이런 단어 장난하면서 하는 그런 소리는 전혀 복음과는 상관없는 장삿속이죠. 예수 믿으면 여러분 죄를 없애줍니다. 그러면 여러분 깨끗하게 됩니다. 그럴 것이면 처음부터 선악과나무를 심지 말아야지요. 뱀이 에덴동산에서 설치지 않도록 뱀탕을 만들든지 뱀주를 만들든지 해야지요. 왜 뱀이다, 뱀이다 쫓아다니면서 설치게 놔둡니까.

떠먹을 줄 알면 사전에 전기장벽을 쳐서 선악과나무를 아예 둘러치든지,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유혹거리로 해놓고 거기에 아무런 조치도 안 해놓고 20년, 30년 안 먹어도 그 다음날 먹게 만드는 이유가 뭡니까? 네가 너 잘 나기 위해서 내가 있은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가치와 하실 일이 얼마나 결정적 일이고 최종적 일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는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들러리로 이 땅에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생각을 바꿔야 돼요. 우리 생각을.

아모스 3장 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면 이 예언 또는 말씀, 율법이라 했고 언약, 약속 다 같은 말이죠. 예언은 인간이 요청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밀고 들어온 거죠. 일방적으로 밀고 들어온 거예요. 누굴 향하여? 이스라엘이니까. 그게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밀고 들어온 하나님을 받아야 될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의무가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받을만한 빈자리가 자체적으로 만들어져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자리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오늘 본문 레위기 34절에 나옵니다. 33절부터 보게 되면,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 좋은 땅 아깝다고 하지요. 그게 아까울 게 아니에요. 당연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다음에 34절에 보면,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쉬어 안식을 누리리니” 안식을 누린다고 돼있지요. 경상도 말로 이런 말 있잖아요. 네가 와서 다 삐대놨다고 안 합니까. 천지삐까리로 삐대놨다 이 말입니다. 다 어지럽혀 놨고 그 본래의 가치를 훼손시켰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이 자기 생존을 위해서 선물로 주신 땅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그래요. 울산 땅에서 사는 이유는 누굴 위해서? 내 안정적인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고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이 땅을 우리가 내 것인 양 고정적 발상을 하게 돼요. 안양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이 땅에 어떤 것도 내 고정적인 것을 허락받은 적 없습니다.

하나님께선 이 땅을 지정해줬지요. 주의 일하라고 지정해줬지 고정적인 내 땅이 없어요. 고정적인 내 것이라는 걸 하나님께선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내 것이라는 그걸로 의미가 나로 인하여 종결되는 것을 하나님이 허용하신 적이 없어요. 피조물이 피조물 자체로서 모든 가치가 피조물 그 선에서 마감되도록 주께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담아내야 돼요. 땅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사는 땅이 아니고 누가 사는 땅이냐 하면 하나님이 주의 이름이 사는 땅이에요. 신명기 12장에 아까 그런 말씀 나온다 했지요. 내가 내 이름을 두려고 너희들을 데리고 온 거예요. 똘마니로. 우리 백성은 성도는 똘마니에요. 예수님의 똘마니라고요.

똘마니란 개념은 민주주의사회에선 굉장히 낯설다. 봉건주의사회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거지만 봉건주의 정치적 제도가 사유재산의 발달, 자본주의 발달로 말미암아 사유재산 보호에 합당하도록 정치제도가 변형이 된 겁니다. 내 돈, 내 재산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치제도가 적당할까? 왕? 왕은 내 재산 다 빼앗아갈 텐데. 그럼 어떤 정치제도가 적당할까요? 민주주의.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밑에 인간 없다. 그걸 절실하게 번역하면 내 것은 내 거고 니 것은 니 꺼다. 이거에요.

내가 돈 벌어서 미국에 요트 사러 가겠다는데 니 돈이가 내 돈이지. 내 돈 내고 미국에 요트 사러 가는데 코로나 걸려도 니가 걸리나 내가 걸리지. 걸려도 내가 걸린다. 마스크 많이 가져간다. 강경화 남편이 공항에서 그런 인터뷰 했잖아요. 내 인생은 내 꺼라니깐. 그게 민주주의에요. 니 꺼는 김정은 꺼다. 그게 북한의 사회주의에요. 내 놔, 이러면 사회주의 돼요.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가장 비복음적인 정치제도지요. 가장 악마적인 정치제도지요. 왜? 나는 신이니까. 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신이 되리라. 그걸 그대로 현실화시킨 제도가 민주주의입니다. 뭐 민주주의 투사가 어떻고 열사가 어떻고. 악마의 열사라 하세요. 지금 민주주의사회에서 왕이라 하는 것은, 으흠 왕이 뭐예요? 아빠, 왕이 뭐야? 왕을 잊은 지 오래 됐어요.

“저 아저씨 앞에서는 얼굴 들지 말고 엎드려야 돼요.” 그럼 애들이, “저 아저씨, 싸움 잘해?” 이러거든요. 좀 커서 청소년 되면, “저 아저씨, 돈 많아?” 이래 되거든요. 왜? 자기 아버지가 사장 앞에서 꼼짝 못하고 있으니까. 자본주의사회에서 이미 왕이 있어요. 누가 왕이냐? 가진 자가 돈 많은 사람이 왕이에요. 왕이 없다 하는데 우리는 가진 자에게 빌빌 기잖아요. 나한테 힘 되는 사람, 나의 지저분한 인생에 대해서 한 방에 핵심적으로 바꿀 수 있는 그 사람에 꼼짝 못하잖아요.

하나님은 주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왕이기 때문에 사유재산이니 나의 인격이니 나의 인권이니 이런 것은 왕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졸개입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 앞에 졸개, 우리는 백성이고 그는 왕일 때 그 나라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 그 나라를 두 자로 천국, 그 나라가 바로 아들의 나라.

지금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무슨 훈련하고 있습니까? 민주주의 훈련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똘마니 훈련하고 있습니까? 도대체 어느 쪽이에요? 천국에 갈 마음은 있어요? 천국에 하나도 쓸모없는 것들만 훈련하고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이 왕 같은 이 신 같은 내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박살날 수 있습니까? 그런 마음가짐으로 교회 와야 될 것 아닙니까.

나를 안 알아주나. 나를 무시하지? 나를 존대해줘. 은연중에 그걸 노리면서 교회 오고 있다고요. 이 교인들은 나한테 관심도 없어. 살짝 기분 나쁠라하네. 다른 교회 갈까. 그건 바로 민주주의 사고방식이에요. 제발 나 보고 믿음 없다 하고 너는 인간도 아니고 지옥 간다. 그런 이야기를 옆에서 노골적으로 해주는 그런 분들이 있는 교회를 가야 돼요. 그래야 인간이 됩니다. 그게 바로 고난의 떡을 먹는 겁니다.

아까 쉬는 시간에 주 예수는 나의 소망이라는 복음성가에 주된 노래를 부른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기타 치면서 노래를 책임진 사람, 할렐루야 외치는 그 사람이 서 목사님 사모님 닮았다 하면 사모님 별로 기분 안 나쁠 거예요. 그런데 저 뒤에 빼빼한 사람 닮았다 하면 사람 무시하나, 왜 시마리 없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노. 살짝 기분 나쁠라한단 말이죠. 얼마나 우리가 우리 안 쪽에 나의 이름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왜? 육신 때문에 매일같이 살아 있어요.

매일같이 우리는 말씀을 피하면 안 돼요. 속죄가 유지되려면 너 때문에 함께 저주받았다는 그분만이 도드라지게 계속 노출되고 주목이 되어야 그게 속죄 관계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요. 이스라엘은 바로 인간들이 지겹다는 거예요. 제발 좀 비워줘, 이 땅. 더러워서 너희들 때문에 이 땅 자체의 본래의 기능을 못하니까 에이 쫓아버리자. 그러니까 이 땅에서 온갖 벌을 받더라도 마지막 벌은 뭐냐? “나가, 인간아. 이 땅에서 살지 마.” 천국에서 나가란 말이에요. “이 천국에서 나가. 너희는 합당치 않아.” 그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럼 주님은 어떻게 되느냐? 주님도 같이 쫓겨나갔지요. 그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성경이 레위기 다음에 바로 신약이 아니거든요. 한참 뒤에 보면 에스겔이 나와요. 자, 에스겔은 주제가 뭐냐? 스스로 유배를 자처하시는 하나님. 이게 에스겔 주제입니다.

원래 성전이 하나님 이름이 계신 곳이에요. 그런데 자진해서 성전을 떠나버립니다. 떠나서 유배당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바벨론에 앞장서서 포로 잡혀가요. 이스라엘의 원수가 바벨론이거든요. 바벨론, 하나님의 대적에게 자처해서 볼모로 잡혀가시는 하나님,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인자인 에스겔이 에스겔의 주제입니다.

땅을 70년 동안 비워놔 버려요. 거의 아무도 못 살게 만들었어요. 바벨론도 안 살아. 앗수르도 안 살고. 시시한 사람들이 드문드문 살 뿐이에요. 비워놔 버려요. 70년 동안 안식케 해버리는 겁니다. 70년 동안 안식했다는 말은 율법이 일방적으로 다룬다는 뜻이에요. 율법을 지킨다? 지키는 게 아니고 율법 스스로 율법을 지켜가는 거예요. 저주할 건 저주하고 내보낼 것은 내보내면서 율법이 스스로 인간이 없어도 알아서 율법을 지켜나가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전에 룻기 수련회하면서 말씀 드렸어요. 율법은 스스로 율법을 완성시켜나가는 겁니다.

율법이 스스로 완성시켜나가는데 레위기 입장에서 핵심은 뭐냐 하면 출애굽 원리, 아까 출애굽 원리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유월절의 주인공이 누구라 했습니까? 히브리인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아니고 어린양이죠. 어린양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주인공이 빠진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주인공은 무조건 아니에요.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렇지 않고 주인공 아니에요.

주인공 아니기 때문에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나를 오늘 어떻게 바르게 살까,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거는 자기 짐만 지울 뿐입니다. 내가 주인공 아니라니까요. 주님 오늘도 찾아와서 주님의 속죄적인 객관적 성취를 저를 졸개로 사용해서 마음껏 사용하셔서 발휘하소서. 아침기도가 이렇게 돼야지요. 아침기도 쉽게 하는 방법은 내용을 쉽게 하면, “하나님이여, 오늘도 하루 종일 나를 쳐다보지 않게 하옵소서.” 중요한 것은 받아 적으세요.

하나님이여, 나를 쳐다보지 않게 하옵소서. 나를 쳐다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 것, 대표적으로 자식이죠. 내 자식이든지 내 친척, 내 남편, 아내라든지 내 것을 바라보지 않게 하옵소서. 나와 결부된 관계에 대해서 쳐다보지 않게 해주시고 그 모든 관계가 내 안에 계시는 주님과 연관된 사람인 것을 목격케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되지요.

자, 그렇게 유배를 했습니다. 에스겔 1장에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타나요. 하나님의 보좌에 나타나요. 원래 성전에 계시는 분인데 성전이 더럽다고 바벨론 신 섬기고 우상 섬기니까 같이 못 있겠다고 더러워서 떠나버려요. 그런데 모습은 천사 네 그룹이 사면으로 돼있어요. 어디로? 동서남북으로 다 쳐다보고 있다고요. 그래서 항상 스가랴나 에스겔도 이렇게 예언서에 4가 나오거든 사방천지라고 보면 돼요. 구석구석 하나 에누리 없이 하나 빠짐없이 다 주시함.

그래서 천사들의 몸체에 왜 그리 눈들이 많은지 촘촘히 눈들이 박혀있어요. cctv가 다 박혀있어요. 제가 수요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컴퓨터게임에 보면 또또로또 또또또 구석구석 다 돌아다니면서 점수 삼켜먹는 예를 들었거든요. 꼭 그것 같아. 샤오미라는 중국 진공청소기 같아. 진공청소기처럼 지가 알아서 충전하고 안 시켜도 알아서 휴식하고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청소 다하듯이 천사들이 사방을 다 살피는 거예요.

천사 위에 뭘 받드느냐 하면 여기에 가마처럼 좌대가 있고 너무 눈부셔서 사람 얼굴 같은데 자세하게 안 보이는 윤곽만 보이는 어떤 분이 계셔요. 그럼 천사가 받들어 모시는 겁니다. 그리고 천사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좌우로 이동할 수 있는 바퀴가 있어요. 안 가는 데 없고 못 가는 데 없어요. 딱 로봇청소기에요. 모양새는 다르지만. 마치 병원수술대 바퀴처럼 좌우앞뒤로 움직일 수 있는 바퀴.

바퀴가 달렸다는 이 말은 이제 이 땅을 떠나는 겁니다. 고정된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고장된 자리를 포기하고 지정된 장소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성전에 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이 이렇게 생겼다 합시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을 땐 여기 계셨잖아요.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이 예루살렘이거든요. 그게 레위기에 보면 약속의 땅이에요.

약속의 땅을 떠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심판이 전에는 누굴 상대로? 이스라엘 자기 선택한 백성들을 상대로 해서 자신의 심판성을 했다면 주님이 공중에 드론처럼 떠서 온 세상에 만방에 간다는 말은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성이 이스라엘 약속에 제한되지 않고 온 천지에 하나님의 심판이 적용되는 거예요.

숨을 곳이 없어요. 아프리카 가도 소용없고, 마다카르카스 가도 소용없어요. 파나마 운하 깊은 산골에 가도 소용없어요. 뭐, 파나마 가고 싶다. 거기는 날씨도 좋고 하와이 니가 가라 하잖아요. 미국에 제일 살기 좋다는 곳이 하와이라는데 하와이 니가 가라 해서 간 게 아니고 지옥 갔지만, 영화에.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그 영화에 보면 파나마가 그렇게 좋데. 결국 가지도 못하고 같이 죽는 대목도 나오지만.

인간이 자꾸 피할 곳을 찾아요. 나중에 벙커를 만들어서 피하겠다든지.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피할 곳이 없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을 포기한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미 너는 땅에서 죽었고 너의 생명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있어요. 그걸 하늘에 있다 했어요.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드론이 가 계신 곳이 바로 새로 시작되는 구성되는 조성되는 천국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지요. 그럼 구름 타고 어디 갔습니까?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그럼 그쪽이 뭐냐? 천국이 돼요. 이 지상은 지옥이죠. 지옥 불이 없어도 주님 안 계시면 지옥이에요. 주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지옥이란 말이죠. 그럼 그 하늘을 지상적 표현으로 보면 예수 안, 십자가 안, 성령 안, 약속 안이라고 이야기하고 이 세상은 안과 그리고 저주받는 바깥으로 구분됩니다.

이게 뭐냐? 율법이 완전히 완성이 돼버리면 진짜 율법의 완성자 있는 곳에 가야 그게 바로 구원이지 완성자는 저기 있는데 예수님 없는 곳에 가서 잘 먹고 잘 살고 연매출이 50억이니 대박 터져봐야 머리만 터질 뿐이지. 주님 없는 곳은 그것은 저주 그 자체에요. 주님이 떠나버린 곳에.

그래서 에스겔에 보면 주님께서 성전을 떠나버립니다. 에스겔 10장에 보면 나와요. 예루살렘을 떠나버리죠. 떠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에스겔에 보면 심판이 확산되니까 에스겔 25장부터 35장까지는 뭐냐? 이방민족을 하나하나 다 열거해요. 열거해서 하나님이 직접 심판해버립니다. 그중에 이스라엘도 포함돼요. 작살내버려요.

하나님의 이름이 떠나버리면 주의 이름이 떠나버리면 그거는 사람 취급을 안 합니다. 지 딴에 사람이라 해도 소용없어요.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 들어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의인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에서 안 받아주고 천국에서 안 받아주게 되면 그 자체가 사나죽으나 지옥 백성이죠. 지옥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약속이야기가 안 나오고 복음이야기가 안 나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복음도 모르는 남편과 살면 죽은 시체와 산다고 보시면 돼요. 아침마다 시체 밥 해주면 돼요. 아나 이것 먹고 죽어라, 지옥 가라. 복음 모르는 데도 그 사람 도움 줬다는 것은 그건 그 중심에 속죄 상태가 아니고 내가 여전히 내 주인공인 상태지요. 그 나물에 그 밥이에요. 똑같아요.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똑같아요.

울산에 불났잖아요. 무슨 동입니까? 주상복합아파트에 불이 났잖아요. 불이 났을 때 사람 안 죽었습니다만 고정적인 공간이 불이 났습니다. 그럼 불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주님이 일으키신 거예요. 네 주제 파악하는데 적절하다고. 내 것이 없다고. 너 한 평생 뭘 바라보느냐? 내가 끌어 모은 내 것 쳐다보면 살지. 시범조로 불난 거예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었잖아요. 제자들은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뭐 다행이다? 회개 안 하면 똑같아. 죽은 사람이 너보다 더 죄가 있는 줄 아느냐? 아니야. 똑같이 있어, 똑같이. 정신 차리라고 하는 거예요. 네 안에 너만 있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네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돼요. 왜? 율법 완성이니까. 율법 완성이란 의가 있어야 되니까. 복음이 있어야 의가 있어야 이게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는 사람이에요. 가겠다고 해서 받아주는 건 아닌 겁니다.

그럼 에스겔은 어디 있습니까? 에스겔은 예루살렘에 살까요, 아니면 유배지 유배 갔을까요? 에스겔이 유배 갔거든요. 유배 간 그것을 에스겔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소라 해요. 신종 성전이에요. 지금 유배지가 이스라엘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이냐 아니냐는 것은 고생하시는 하나님과 같이 붙어있으면 그것은 안 죽어도 이미 천국에 온 거예요. 지금 우리 목숨이 있더라도 천국 온 거예요. 성령 안에서.

그래서 성령 안에 있으면 주와 함께 있는 겁니다. 왜? 내가 주인공 아니니까. 나는 왕의 똘마니니까요. 내가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지 내 인생 내가 사는 게 아니니까 더 이상 나를 쳐다볼 필요 없지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바로 에스겔 34장에서 37장에 보게 되면 내가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줄게. 그때는 합당한 정말 영원한 이스라엘 왕을 줄게. 다윗의 후손으로서.

그럼 신약에 로마서에 보면 복음의 조건으로 무엇이 붙느냐 하면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이가 붙어요. 그건 바로 에스겔 35장부터 37장 내용을 함빡 예수님한테 다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예언이 완성체로 우리 이 세상에 우리한테 섞여서 들어오신 거예요. 속죄, 인간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 우리에게 함께 들어온 거예요.

여기서 물어야 되겠지요. 예수님은 남이고 나는 따로 인데 어떻게 남이 내 속에 들어올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 이걸 본드로 스카치테이프로 묶어주는 것, 이게 바로 율법을 먼저 깔아버려요. 율법을 깔아버리면 우리는 율법에서 못 벗어나서 저주받은 입장에서 율법 안에 연결이 돼요. 율법으로부터 마땅히 저주받는다는 그러한 관계성 안에서 율법을 못 벗어나고 발버둥 쳐도 못 벗어나고 묶여있어요.

그 묶인 율법 안에 누가 차고 들어옵니까? 우리 주의 이름이, 내가 여기 있잖아, 하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니만 저주받나. 나도 저주받는다. 같이 저주받고 죽은 자 되자.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 다음에 예수님만은 유일하게 율법의 완성자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그냥 두지 않고 죽음에 머물지 않고 빈 무덤 만들어서 부활시켜버리죠. 부활시키니까 같이 율법 안에 저주받았다는 조건 하에 그 예수님의 부활이 묶여진 우리의 부활이 되는 겁니다.

그 묶여단 말을 두 자로 ‘세례’라 합니다. 세례란 묶였다 하지만 연합이라 합니다. 로마서 6장.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 잘났다는 게 아니지요. 나를 묶었던 청테이프, 스카치테이프를 내놔야지요. 니 잘났나? 아니. 그럼 가진 것도 없는데 왜 당당해? 청테이프, 청테이프는 너무 촌스럽다. 스카치테이프, 주님과 우리가 묶여있거든, 관계. 그것도 말로만 묶여있는 게 아니고 피 흘림으로 묶여있다. 객관적 증거가 있는 묶임이에요. 말로만 위로삼아 하는 게 아니고 어떤 증거가 있어야 돼요.

그럼 우리 증거는 뭘 증거로 봅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뭘 발랐어요? 천사의 드론 떴을 때에 피 발랐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지혜를 박살내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가장 깊숙한 지혜는 하나님이 고이고이 담아놓은 지혜는 바로 십자가 피에요. 그걸 히브리서에서는 피 언약이라 하는데 피 언약,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 피에요. 가장 귀한 것.

여러분들은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 훌륭한 교인들이지만 포도주도 싫어. 그런데 보통 안 믿는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오게 되면 뭡니까? 안방에 45년 묵은 고이고이 간직한 가장 귀한 술, 뱀술, 그 다음에 인삼주 끄집어내지요. 오늘 병 땄다. 너 주려고 45년 동안 기다렸다. 오늘 개봉하자. 그렇게 그 안의 내용물 주잖아요.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 할 때는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루었다가 충분히 증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포도주를 담근 거예요. 이 포도주를 다시는 먹지 않을 날이 올 것이다. 이 포도주가 담긴 의미가 십자가로 완성이 되면 두 번 다시 포도주 나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를 기념하고 이 잔을 마시라. 예수님의 피를 오실 때까지 증거하는 이것이라.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나오지요.

이제부터 좀 어렵습니다. 지금까진 별로 어려운 것 없었는데. 주님께서 지상에 성전 건물을 뜯습니다. 34장에서 37장까지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든다 했잖아요. 거기 이스라엘 만들면서 스카치테이프를 뭐라 하느냐 하면 이렇게 봅니다. 적어볼게요. 에스겔은 신약에 위한 예언이니까. 새 언약을 주는데 새 언약이 어떤 언약이냐 하면 율법, 문자로만 끝나는 게 아니고 율법의 완성이 우리의 심령까지 들어온다. 들어오게 하는데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우리까지 들어온다. 이게 에스겔에 예언 된 거예요.

요새 말로 성령이죠. 성령이 들어오게 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이에요. 하나님이 애써서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힘과 혼신의 노력을 다한 작품이 우리 허락도 없이 성령이 쑥 들어온 그 현상, 성령이 훅 들어오게 되면 성령이 없게 되면 그동안 누구만 쳐다보고 누구만 기대해야 돼요?

내 솜씨, 내 실력, 내 윤리적 도덕적 실력, 선과 악을 구분하는 내 판단력 이것만 쳐다보면서 내가 나를 건전하게 만들어서 이 몸을 천국에 그대로 밀어보겠다는 말씀을 순종해서 밀어보겠다는 그 모든 노력으로 버티던 것이 한 방에 성령이 쑥 들어오게 되면 그게 다 소용이 없어요. 그럴 필요조차 없어요. 왜? 선택이 내 행함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택한 순간 택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유입되는 겁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다 이루신 것이 우리 안에 유입이 돼요. 그러면 율법의 완성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의가 되는 겁니다. 왜? 예수님의 영이니까. 이게 내 영이 아니잖아요. 내 영혼이 아니고 예수님의 영이라니까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 확정 되고 난 뒤에서만 제공이 되는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서 제공된 그것이 들어오게 되면 이것은 하나의 짝대기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 안에는 뭐가 들어있냐 하면 완성했음, 의로움, 거룩함 이것이 그냥 계속해서 유입되는 거예요. 빨대 꽂은 겁니다, 빨대. 주님이 우리 안에다 빨대 꽂은 거예요. 쪽쪽 뽑아먹지요. 자신의 즙을, 성령을 주신 자신의 의를 맛보면서 나는 너를 기뻐한다, 이렇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던 버릇, 행세, 내 인생은 내가 판단한다는 내 판단이 도리어 주님이 하신 일을 훼방질하고 있어요. 방해질하고 있다고요. 지가 판단하고 지가 좌절하고 지가 넘어지고. 이러다 저주받겠다. 저주 안 받으려면 착한 일, 헌금을 얼마나 해야 돼? 지가 알아서 단도리하고 조치하고 말이죠. 왜 그런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냐 말이죠. 성령을 안 받으니까.

성령을 안 받으면 일주일 만에 나훈아 됩니다. 가는 세월 지가 모가지 비틀어서 가자는 거예요. 함 가봅시다. 청춘을 돌려다오. 가는 세월 모가지 비틀고 모든 걸 내가 해야 돼.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정신 차리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조심, 조심, 조심. 최후의 관리자가 내가 되어야 안심이 되는 이거는 그 사람에 자기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뭐 안 왔다는 겁니다. 말로만 성령이고 십자가 복음이지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자기 잘남으로 가득 차있어요, 그게. 그러니까 거기다 복음 전하고 말씀 전하니까 율법으로 너무 몰아세우지 마세요. 나도 최선 다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고 삐져서 교회 안 나오잖아요. 자꾸 삐져버려. 동질의 미지의 것을 찾겠다고 말씀 줬거든요. 성경말씀을 외치잖아요. 외치기 전에 말씀이 어디 안에 있다? 에스겔의 예언에 의해서 이미 네 안에 있어. 이 말씀이 네 안에 있다고.

십자가 형태로 있다. 있어야 있지 없는 사람한테는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얼마나 난감하네. 성령 내놓으라 하니까 지 착한 일 내놓고 성령 내놓으라 하니까 교회 봉사하고 목사 말씀 듣고 순종한 것 내놓는다고, 선교하고 전도한 것 내놓는다고. 시시한 것 내놔요. 그것 말고 네가 죄인이란 것을 내놔.

나중에 그 사람들 몰아세우면 버티다, 버티다 결국은 자기 본색을 드러내요. 내가 어딜 봐서 죄인인데? 짝짝짝 박수, 다 같이 박수. 드디어 들켰습니다. 가짜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안 믿는 남편한테 실컷 전도하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그런데 물어보자. 내가 왜 죄인인줄 모르겠다.” 그땐 박수치면 돼요. 짝짝짝. 그게 니 한계야.

34장에서 37장까지 이스라엘을 그렇게 구성하고 그다음에 38장, 39장에 보면 거기에 누가 나오느냐 하면 곡이 나와요. 마곡. 이 곡이란 나라는 깡패에요. 가장 깡패다운 깡패, 곡이에요. 그 곡은 일곱 개 나라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 사고방식은 에스겔 26장과 32장에 반복해 나오는 두로와 애굽의 그 정신을 가지고 곡이란 나라가 품고 있는데 두로와 애굽은 그 당시 최고로 잘 사는 나라에요. 따라서 건방지기 한량이 없어요. 이사야에도 예레미야에도 나옵니다.

내가 신인데 누구 날 지적질해. 감히 나에게. 내가 이렇게 못 살아도 나는 내가 제일 귀해. 나한테 지적질하지 마. 짜증나. 잔소리하지 마. 난 열두 살 이후에 잔소리 들은 적 없어. 용서 안 해.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두로와 애굽은 잘 사나 못 사나 관계없이 교만해요. 교만이 어디까지냐? 누가 나한테 비할 수 있으랴. 학교교육의 목표가 두로 거주민 만들고 애굽 거주민 만드는 거지요. 그냥 최고가 되는 거예요.

성도는 최고가 되는 게 아니고 초월이죠. 최고에 비교되는 마당 자체도 떠나버린 거예요. 너희끼리나 비교해. 비교대상도 안 돼요. 왜? 죽은 자인데 뭐. 주님을 누구와 비교합니까? 우리를 대신한 분이 주님이에요. 주님과 누굴 비교할 거예요? 주님께서 못난 죄인 세리와 창기 같은 우릴 구원했단 말이죠. 그럼 세리, 창기가 나서지 말고 주님이 나서면 돼요. 누가 주님을 이깁니까? 아무도 못 이기지요.

그게 바로 39장까지고 40장부터는 뭐냐? 새로운 성전 나옵니다. 이것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에스겔에 보면 새로운 성전 나온다고요. 이게 중요한데 여러분한테 먼저 물어보겠어요. 에스겔에 나오는 성전은 여러분 골라잡기 쉽도록 딱 두 개만 이야기할 거예요. 성전은, ➀건물이다. ➁인간군, 群이란 집단, 집합체. 인간 집합체다. 어느 게 성전입니까?

콘크리트처럼 건물이다. 안 그러면 인간의 집단이다. 어느 쪽입니까? ➁이에요. 왜냐? 숫자로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144000처럼 숫자의 헤아림이 돼요. 그만큼 한 인간도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가 섞이지 않도록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하도록. 그래서 에스겔 40장부터 나오는 성전은 측량을 해요. 수치를 측량한다고. 그리고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가 성전이 완공되고 난 뒤에는 동쪽으로 떠난 보좌가 그 영광이 동쪽을 통해서 다시 성전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6장에 보게 되면 고린도후서에도 나오지만 성령이 있는 곳이 곧 성전이라. 하나님의 영이 있는 곳이 성전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죽고 사흘 만에 다시 지은 성전이에요.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에요.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에스겔의 예언은 요한복음 7장에 보면 바로 성령이 있는 사람 몸에서 배에서 성령이 나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성전이란 건물 안 보이지요. 만약에 보이는 건물이라면 그 보이는 건물이 허상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인간 무리가 이게 실상이에요. 신약에서는 생각을 반대로 가져가야 돼요. 눈에 보이면 무조건 그거는 비유고 실체 없는 허상이라고 보시면 돼요. 왜? 곧 있다가도 없어지고 눈에 보이다가도 불나면 없어질 거니까.

우리 몸도 눈에 보이지요. 하지만 늙어죽으면 이 몸은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처럼 새로운 몸으로 옷을 갈아입듯이 갈아입어버려요. 그러니까 아쉽더라도 우리 몸과는 빠이빠이를 해주셔야 됩니다. 뭐 좀 잡숫고 쪄도 찌나 빼나 마찬가지고 피트니스 해도 다시 먹으면 찌개 돼있어요. 이 몸은 아무리 노력해도 보습해도 점점 더 화장발 안 받습니다. 피부가 밀어내요. 피부는 주님 따라가지 율법 따라가지 우리의 화장술에 따라가지 않거든요. 내 몸이 내 말을 안 들어요. 그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주도권이 바뀌었잖아요, 주도권이.

에스겔 40장부터 48장 끝까지 보게 되면 거기서 성전 중심의 복합단지가 성립됩니다. 성전 중심이 있고 그 다음에 주택단지도 있어요. 제사장도 있고. 그 모든 것은 인간들의 집합체, 요한계시록에 말하는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집합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들의 집합체가 된다면 그들이 사는 공간은 뭐냐? 그거는 내 공간이 아니고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내 시공간이 아니라 이미 성전의 모퉁이 된 예수님이 가지고 있었던 환경이 있어요. 시공간이 있었어요. 그게 우리의 성전의 새로운 시공간으로 둘러쳐버립니다. 아픈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그때는 해도 달도 필요치 않는 세계,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세계, 이런 멋진 세계는 율법의 저주를 우리가 흔쾌히 이거는 내 팔자다 하고 받아들여야 돼요. 율법의 저주.

그러면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먹을 게 있는 데요? 먹을 게 있거든 잘해서 먹을 있는 게 아니고 지금 은혜를 주고 있는 거예요. 봐주고 있는 거예요. 그것 빼어도 되는데 계속해서 먹을 것, 입을 것, 건강 허락하시는 겁니다. 아프면 아픈 만큼 허락하신 거예요.

은혜 줄 때 내 공로로 이만큼 얻었다 생각하지 마시고 이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증거하라고 하나의 밑천, 주께서 수고료 주는 거다, 봉사료 주는 것이다. 마땅히 내 것이라 하지 말고 이것마저도 주의 것이라서 가져가시면 가져가버리고 주시면 받고, 주시는데 또 안 받고 이러지 마세요. 한 50억 주시는데 아닙니다. 나는 그런 되도 않는 본심과 다른 소리하지 말고 주실 때는 고맙고 가져갈 때는 섭섭하지만 섭섭해도 잊으시고 내 것이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이 우리를 저주케 함으로써 주님이 우리와 저주받아 함께 있음을 그 주님이 모든 걸 율법을 완성시켜서 의인되었음을 율법의 자체적인 작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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