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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5 22:56:34 조회 : 215         
예 아니요 레위기 26:42 210205 이름 : 이근호(IP:119.18.8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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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96) 21-02-08 09:20 
20210205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예 아니요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26장 40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들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및 그들이 나를 거슬린 허물을 자복하고 또 자기들이 나를 대항하였으므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그 대적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하나님께서 이 많은 땅 중에서 다른 땅과 약속의 땅을 하나님 쪽에서 구분을 해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살고 있잖아요. 이 동그라미가 전체 땅이라면 이 땅에서 특수한 땅을 정해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땅을 땅₁이라 하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땅을 땅₂라고 생각합시다. 이 땅이나 저 땅이나 사람들한테는 이게 구분이 지어지지 않아요. 아무 땅이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게 되면, 땅₂을 하나님께서 뭐로 보느냐 하면 안식해야 될 땅으로 봅니다. 특수한 땅을 따로 구획지어 놨어요. 안식해야 될 땅.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사람들은 땅₁과 땅₂를 구분 못해요. 그냥 땅이에요. 내가 사는 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땅에서 살면서 땅₁이고 땅₂고 없는 거예요. 경계선도 없는 거예요. 그냥 부동산이죠.

자 이렇게 땅₁과 땅₂를 구분하지 않을 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땅에 철저하게 순종했다고 볼 수 있어요. 땅에서 사는데 거기에 아주 몰입했다고 보는 겁니다. 사람이 땅에서 땅을 좋아하고 땅에 대해서 미련 두는 것은 본인 살기 위해서 그런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에 철저하게 순응해버리면 땅₁과 땅₂가 경계선이 없어요. 차이가 없어요. 그래서 땅에 철저하게 순응해버리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식해야 될 땅의 취지가 날아가 버립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아들이 둘 있었잖아요. 이스마엘과 그리고 이삭이죠. 만약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이나 이삭을 똑같이 자기 아들로 인정한다면, 차이가 없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아브라함 집안에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약속이란 게. 이스마엘과 이삭 아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나야 돼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잡으려고 했습니까? 이스마엘을 모리아 산에 가서 칼 들고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건 아니죠. 이삭을 죽이려고 한 그것도 중요하지만 이스마엘에게는 제물을 안 바치려고 했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해요. 그렇게 해줘야 둘 사이에 차이가 난다 이 말이죠.

자, 여기 그냥 땅이 있다면 우리가 여기에 서 있다고 봅시다. 우리가 과연 땅₁과 땅₂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우리한테 있느냐 말이죠. 우리한테는 그게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내가 사는 게 우선이고 내가 사는 게 급하기 때문에 아무 땅이라도 내 땅이라면 다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을 때 저 두 자식의 차이를 우리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 없어요. 그저 나 죽고 난 뒤에 아들 하나보다 둘이 나으니까 차이를 못 느낀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땅₁과 땅₂를 구분 짓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아무리 해도 이미 우리 자체가 문제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한테 들키지 않습니다. 우리 손에 잡히지 않아요.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요. 죄인이 간파하는 하나님은 그거는 제대로 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의 죄를 지적해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죠.

오늘 본문 내용이 그거에요. 하나님께서 세상 이방민족이 사는 땅 말고 안식하는 땅을 구축해놓고 그 땅을 안식하는 방법에 대해서 레위기 26장에 펼쳐졌어요.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 좀 맞자, 이거에요. 때리겠다는 겁니다. 그 때리는 방법은 염병일 수도 있고, 25절에. 전염병이죠. 24절에 보면,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 그 다음에 이방민족이 찾아와서 너희를 아주 작살을 내고, 그 다음에 33절에,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그 다음에 18절부터 보게 되면, 너희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농사가 안 되고 땅이 그 소산물을 내지 않고, 21절에 보면, 재앙을 받게 될 것이고, 22절에 보면,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더구나 아주 비참한 것은 29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사랑하는 자식, 이게 배부를 때나 내 자식이지 본인 부모가 먹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을 그냥 사람 고기로 먹는 거예요. 또 낳으면 되는 거니까. 이 정도로 비참하게 때린다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땅₂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에 나오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치신다 할 때에 아마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하는 말이, 바보같이 왜 얻어맞고 그 땅에 사냐. 이민 가지. 너 바보 아니야. 하나님이 널 친다고 한다면 네 쪽에서 먼저 선방 날려서 네가 하나님을 버리면 될 것 아니냔 말이죠.

하나님이 너한테 문제 있다고 너를 지적하게 되면 너를 지적하는 그 하나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피해버리면 되잖아요. 다른 교회에. 다른 교회에 등록하면 되잖아요. 아예 하나님 없는 곳으로 가든지. 교회 안 나오든지. 바보 아니야. 왜 얻어맞고 있느냐 말이죠. 안 그러면 종교를 불교로 바꾸든지. 불교에는 레위기 없잖아요.

불교든 다른 종교는 이게 없어요. 땅₁과 땅₂를 나누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와 대자연은 누굴 위해서? 나를 때리는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내가 이용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내가 복 받을 수 있다는 그러한 환경으로 이 세상이 있는 걸로 하나님 있고 하나님도 나를 위해서 있고 대자연도 나를 위해서 있고 뭐든지 나를 때리기는커녕 나를 더 못 줘서 안달이 난 그런 좋은 하나님 믿는 거예요.

뭐 내 자식을 고기로 잡아먹고 내가 전염병 걸리고 내 민족이 다 흩어지고 내 곡식이 안 되고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하나님을 굳이 뭐가 좋다고 거기 붙어있습니까? 다른 교회 가면 되지. 교회 많잖아요. 교회 많다고요. 내가 원하는 소리 안 나오면 그 모임 안 오면 되지요. 내가 뭐 답답할 일 있어요? 언제부터 우리가 하나님 뜻 알기에 미쳤습니까? 우리는 나 자신에 미쳐있어요. 나 자신이 어떻게 더 풍요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거기에, 나는 나 자신에 미쳐있는 겁니다. 나는 나 자신에 너무 미쳐있기 때문에 나 빼놓고 하나님이든 타인이든 누구한테 미칠 여력이 없어요.

예를 들면 옛날 소학교(->초등학교->초등학교) 운동회 할 때 그 풍경을, 제가 운동회 얼마나 많이 봤겠습니까. 어린 마음에도 운동회 하이라이트는 역시 점심시간. 그 점심시간을 보게 되면 어린 마음에도 그랬었어요. 뭐 달리기 하고 막 뛰라고 나무랐던 엄마가, 그때는 할머니까지 와요. 아빠는 바빠서 못 오고. 점심시간 되면 자기애가 못 찾을까 싶어서 나중에 점심시간 되거든 이 느티나무 여기 오너라, 하고 약속을 단단히 하잖아요.

불러서 김밥에 그때 칠성사이다 없었고 말표 사이다 꺼내고 삶은 달걀, 최고의 만찬 아닙니까. 그렇게 해놨을 때 옆에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안 오고 지 혼자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옛날에. 그러면 자기 애 운동회 때 밥 먹는 거기에 미쳐있어요. 밥 먹고 난 뒤에 배불러서 엄마 못 먹겠어, 하면 혹시 밥 못 먹는 아이 있으면 좀 주려고 배려하지만, 지금 점심시간 딱 됐을 때는 누구 먼저 챙깁니까? 자기애한테만 다 줘요. 저쪽에 김밥 싸왔나 보고 자기는 김밥이 아니고 초밥 있잖아요. 유부초밥, 저쪽보다 맛있는 것.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하면 자기 것 챙기는 데는 타고났어요. 지금 내가 내 인생에 미쳐있는데 이 시간에 언제 하나님 뜻 알려고 올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왔긴 왔지만. 누가 오겠어요? 핑계 좋~잖아요, 코로나.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는 이 말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 자기 사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뭐냐? 이삭을 죽이게 해요. 그러니까 이삭은 죽어야 됩니다. 이삭은 죽어야 되는데 옆에 수풀에 숫양이 한 마리 걸려있지요. 준비됐습니다. 이걸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에요.

내가 죽어야 네가 사는 식으로만 나와 함께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죽지 아니하면 그냥 죽어 있어. 내가 만약에 이 땅에 오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지 않았으면 그냥 그대로 죽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언약을 줘서 언약의 완성이 안식의 땅인데, 언약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왜 너희는 죽어야 되면 왜 너희는 살아야 되느냐, 그 두 가지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 25과 26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했거든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냥 예수님한테 이 멘트 있잖아요. 이 문장, 이 멘트를 그냥 날리면 되는 줄 아는데 주님께선 그런 뜻이 아니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할 때 왜 예수를 믿는 것이 죽어도 사는 결과를 낳느냐를 그러한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주님께서 실질적으로 죽어도 사는 일을 예수님이 이제 보여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내 새끼 챙기고 운동회 때 내 새끼 점심 주고 그리고 나는 나에 미쳐있고 나는 사는데 미쳐있고 이 땅은 내가 살기에 필요한 땅이고 그걸로 끝이고 나만 잘 살면 된다, 라는 그건 네가 믿어야 될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정작 믿을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삽니까, 하는 것을 믿으면 안 돼요. 어떻게 죽어야 될 내가 죽었는데 왜 삽니까? 이걸 믿어야 된다고요.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할 때 그 죽어도는 내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죽은 거예요. 예수님이 죽어도 살았기 때문에 그 죽었다가 사신 분을 내가 나를 믿는 나에게 미쳐있는 나의 믿음의 내용을, 이게 바로 주님이 죽을 이유인 줄 알고 이걸 작살내는 거예요.

레위기 26장은 저주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저주하는 이야기에요. 이 말은 너희가 살고자, 너희들이 안식의 땅을 이루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아 협조 좀 해라. 도망칠 생각 말고. 때리거든 좀 막고. 저주하거든 저주받아라. 나는 네가 네 사는 걸 포기할 때까지 너를 향한 저주를 내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레위기 26장 이야기에요.

저주해주시는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워낙 아니니까. 우리가 믿는 내용이 워낙 아니니까요. 하나님 믿든 예수님 믿든 항상 나는 살아야겠다는 자기 사는 게 우선이고 자기 사는데 미쳐있기 때문에 이런 미치광이 crazy man, 이런 미치광이는 안식의 땅에 어울리지 않아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이중에 성령 안 받은 사람 있으면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내가 저런 소리를 꼭 계속 듣고 앉아있어야 되나 하는 이런 생각한다니까요. 미닫이로 된 문 가볍게 밀고 나가시면 되는 거예요. 내가 교회 온 것은 살기 위해서 왔지 저주받으러 안 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레위기 26장 말씀이 오거든 이걸 덮고 안 들었다 하고 흔들면 돼요. 난 안 들었네, 하고. 집에 가면 자식 있고 손자, 손녀 있고 하니까 걔들 챙기는 게 급선무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살아야 되니까.

어쨌든 간에 살아야 되겠다가 돼버리면 어떤 땅이든 나 살기 위한 땅이 돼버려요. 땅에 철저하게 순응이 돼버리면 땅에 할당된 하나님의 특별한 안식의 효과가 사라져버려요. 땅₁과 땅₂가 구분되지 아니하면. 인간은 땅₂에 못 들어가요. 하나님의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땅₂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안식을 위해서 땅₁에 집착하고 거기에 몰입해 있는 인간을 향하여 주님께선 이렇게 레위기 26장을 통해서 철저히 저주해주시는 사랑을 베풀어주는 거예요. 얻어맞으면 언약 성취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울산 땅에 사는 게 하루하루가 저주입니다. 저주인 줄 믿으셔야 돼요. 내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이 땅에 죽으라고 사는 거예요. 하지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안식의 땅의 효과가 녹록치 않게 살아 있게 되지요. 그 사람을 통해서.

자, 땅을 구분했습니다. 땅₁과 땅₂가 있는데 땅₁은 뭐냐? 그냥 사는 땅. 땅은 두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그냥 사는 땅, 두 번째는 얻어맞아가며 사는 땅. 인간의 본성상 인간은 그냥 살고 싶어요. 앞에 뭔가 붙인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냐? 조용히, 평온하게, 행복하게 그냥 살고 싶어요. 무탈하게 아무 문제없이. 그렇게 살고자 하면 티비 예능프로그램 있잖아요. <자연인> 지리산 깊은 산골에 혼자 사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얻어맞는, 그냥 때려달라고 약속의 땅에 안식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때려 달라하는 그것도 일종의 나 살기 위한 수작일 수 있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얻어맞고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 하나님이잖아요. 이스라엘 만드신 당사자 자기 하나님한테 외려 된 통으로 얻어터져야 될 그만한 이유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왜 그들이 그냥 사는 땅에 대해서 엉덩이 펑퍼짐 앉아서 나올 수가 없는가? 사람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서 왜 그렇게 복음을 듣기 싫어하고 원치 않는가,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은 Yes냐, No냐를 유발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갑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집에 강아지를 키운다. 강아지를 키우는 이유는 내 집에 강아지가 있는 것이 나한테 no가 아니고 yes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강아지 키우는데 고양이도 하나 키우시죠? No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아침에 눈을 떠서 세상에 나갈 때 뭘 하느냐 하면, 저건 나한테 yes가 될 것인지 no가 될 것인지 본인이 선별하고 선택하지요.

이 물건 내가 가져도 돼요, 안 돼요? 어떤 복잡한 질문을 해도 마지막은 뭐냐? yes입니까, no입니까, 를 질문을 누가 만들어요? 내가 yes, no라는 답변을 유발하는 식으로 내가 질문을 던지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 주변에 있는 것은 전부 다 yes가 되었던 것들만 자기 주변에 포진 돼있는 거예요.

할머니, 손자 좀 맡아 줘. Yes. 그러면 그 다음부터 손자가 내 앞에 있는 거예요. 내가 요새 몸이 아파서 안 되겠다. 그럼 손자는 어떻습니까? 손자는 없지요. 왜? 아들 지가 키워야 되지. 이게 뭐냐 하면 나만의 안식을 누리는 나만의 공간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나만의 안식,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항상 우리는 yes나 no로 끝이 갈라지는 질문을 그 답변이 유도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매일같이 살아갑니다.

오늘 아침에 비가 올 건가, 말 건가? 비가 오면 우산은 yes가 되고, 비가 안 오면 우산은 없는 게 돼요. no가 되지요. 그러면 인간의 세상이란 뭐냐? 내 눈이 보이는 범주 안에서 내가 yes한 것들만 놓여있는 것들이 나의 고유의 나의 영역이 되고 나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우리 집을 불시에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전화도 없이 찾아왔다. 딩동 누르지요. “누구십니까?” “아이고, 아주머니 접니다.” 어떻습니까? 문 열어줍니까,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좀 기다려보이소. 집안 꼴이 엉망입니다.” 문밖에 손님을 세워두고 안에 들어가 주섬주섬 정리하지요. 만약에 그 사람이 정 나한테 이익이 없으면 우리는 yes라 합니까, no라 합니까? no라고 하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레위기 26장을 들고 우리한테 딩동 하고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문 열어줘야 됩니까, 안 그러면 바깥에 세워둬야 돼요? 내가 너희한테 염병을 보내고, 염병이란 말 좋으네요. 내가 너희로 하여금 완전히 집구석 망하고 너희 자식들 다 죽는다. 네가 네 자식을 삶아먹든지 구워먹든지 할 것이다, 라고 했을 때 세워둬야 됩니까, 내쫓아야 됩니까, 아니면 받아줘야 돼요? 굉장히 당황스러워요.

왜 당황스러우냐 하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yes냐, no냐 하는 그 답변을 누가 먼저 시작해서 이 질문을 유도한 거예요? 내 쪽에서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불시에 들어와 버리면 이건 뭡니까? 주도권이 나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한테 없지요. 그냥 밀고 들어온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하려고 왜 쳐들어왔는지 듣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입장을 받아들일 만한 하나님이 우리 집, 나한테까지 들어올 만한 자기 안에 어떤 구조를 만드느냐 하면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 집까지 온다는 것은 항상 no에요. 다시 설명해드릴게요.

왜 우리가 no냐 하면, 모든 인간이 yes 쪽은 누가 선호하느냐 하면 내가 yes가 되기를 내 쪽에서 yes란 답변을 유도하는 문제를 낸 거예요. yes냐, no냐 둘 중에 하나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또 세상은 그런 질문이 만들어지는 장이 되기를 우리가 생각하면서 질문을 던져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여, 우리 집에 저주를 내려주소서.” 이렇게 한다면 거부감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 지금 내가 고생한 내 것, 나의 땅, 나의 안식처 이것 부수면 진짜 교회 안 갈 생각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입장에서 갑자기 하나님 찾아오시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이 찾아왔기 때문에 이쪽의 하나님은 no거든요.

왜냐하면 나한테 미쳐있으니까, 나밖에 모르니까, 내 자식밖에 모르니까, 내 몸뚱이밖에 모르니까 예수님은 타인이잖아요. 남이란 말이죠. 그래도 찾아왔으니까 갑자기 no를 yes로 바꾸는데 허겁지겁 난리도 아닌 거예요. 예수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 집까지 모셔오기 위해서.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선 청소 좀 하고요. 아이고, 내 사는 게 볼품이 없어서 이 누추한 곳까지 오시겠습니까, 이렇게 너스레떨면서 겸손하지도 않은데 겸손한 척하면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뭐냐 하면 평소에 자기 왕국을 따로 챙겼다는 거예요. 자기 바깥은 땅₁이 되고 자기는 땅₂가 되는 거예요. 나만의 안식을 따로 챙긴 겁니다. 그럴 때 주님 오셔서 하는 말이, 기다리세요. 하도 사는 꼴이 어설프고 서글퍼서 우선 대충 치워놓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선 치우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너 개판이야.” 그 이야기하러 왔단 말이죠. 개판이면 어떻게 해요? 개판 그대로 노출시켜야지요. 그걸 다 보여줘야지요.

자기 왕국 따로 있으면 이게 충돌된다고요. 충돌되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그냥 가만두지 않지요. 아주 박살내는 겁니다. 쉬운 예로 남자는 스물다섯, 여자는 스물세 살인데 둘이 너무너무 열렬하게 사랑을 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둘 다 남자보다 2년 후배가 여자인데 남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고 여자가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그쯤 되는데 그 오빠가 뭐라고 했냐 하면, “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 그 한 마디에 꽂혔어요. 자기에게 너무 귀엽다는 소릴 듣고 2년 후배 되는 그 여학생이 그 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그때부터 6년을 사귀었어요. 이 이야기 전혀 어렵지 않지요.

6년을 사귀어서 20대가 되었어요.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는 오빠가 얼마나 착한지 비 오는데 길 가다가 할머니가 비 맞으면 자기는 비 맞고 할머니한테 우산을 줄 정도로 마음이 너무나 착한 오빠란 말이죠. 그래서 결혼을 약속하면서 열렬하게 사랑하면서 그야말로 둘만의 세계에 푹 잠겼어요. 좀 지나서 안정되면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 스물다섯 남자가 아르바이트 하던 동기들한테 맞아 죽어버렸어요.

그때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뉴스에 이렇게 돼있어요. “둘만의 세계뿐이었는데....” 자, 그 아가씨가 뭐가 문제입니까? 아가씨가 레위기 모른 게 문제입니까. 그건 당연히 모르지요. 요한복음 11장도 당연히 모르고. 지금 뭐가 문제입니까? yes, no에 있어서 오빠 있으면 yes고 오빠 없으면 뭐가 돼요? no가 되는 거예요. 이제는 세상 살 맛이 없게 된 거예요. 그래서 판사님께 편지를 보냈어요. 천벌을 내려달라고. 나와 오빠만의 둘만의 세계, 그걸 아작은 낸 같이 일하던 청년들 네 명 인가에게 엄벌을 내려달라고 판사한테 보낸 편지가 언론사에 공개가 된 겁니다.

지금 우리가 레위기를 접어버리고 성경 덮고 그 이야기만 딱 접해보세요. 그 아가씨가 어떤 문제 있는지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뭐. 네가 그렇게 사는 것이나 지금 오늘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나 똑같아요. 하등 차이가 없다고요. 그리고 이 당시 저주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 사는 것에 차이 있습니까? 차이 없어요. 똑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이고 성경이고 안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만 행복하면 되고 나만 편안하면 돼요. 아무 생각 없어요. 그럴 리는 없지만 행여나 스물세 살 먹은 아가씨가 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내가 죽도록 사랑한 오빠를 데려가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언뜻 봤는데 레위기 26장에 나오는 그 말씀,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그 자가 천국 백성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실제로 나에게 일으켰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그 아가씨가 바로 성도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백성 땅₁에서 땅₂로 데려가기 위해서 자기 백성에 대한 저주를 멈출 생각이 없다고요. 아작을 내든 박살을 내든 너희는 살 가치도 없음을 분명히 해야 인간은 그제야 자기 안식의 땅을 자기 왕국을 포기합니다. 절대로 인간은 포기할 의사가 없어요.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내가 개판이 되던 뭐가 되던 다 나를 위한 거예요.

하나님께 레위기 26장에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은 딱 이겁니다. 상표와 내용물이 차이가 나는 거예요. 상표는 이스라엘인데 내용물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걸 상표위조 범이에요. 본인은 백성도 아니면서 하나님이 날 도와주실 거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엉뚱한 브랜드를 라벨을 붙이는 거예요. 여기다가. 성도도 아니면서 자기만 위해서 살면서 어딜 감히 ......

레위기 26장에서 말하는 것은 언약의 땅을 이루는데 있어서 네가 협조하라는 것이 레위기 26장의 뜻이었잖아요. 아까 읽어봤지요. 네가 나한테 많이 얻어맞아야 너는 나중에 깨닫고 네가 형벌을 받아봐야 42절,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이게 언약대로 움직인다는 걸 안다고요. 눈이 뜨인다고요.

비로소 내가 죽어도 살겠고, 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죽어도 살겠고 라는 실제적인 내용을 본인이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써 마련하신 거예요. 너의 안식을 네가 믿으면 안 돼. 나를 믿어야 돼. 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 그걸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다른 걸 다시 봅시다.

창세기 3장 14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여기에 뱀이 받은 저주가 뭐냐 하면 배로 다니는 거죠. 배로 기어가는 거예요. 이 땅₁, 그럭저럭 사는 땅, 살기만 하면 되는 땅, 살기 위한 땅, 땅₁입니다.

저주받아야 사는 땅 말고, 그냥 그럭저럭 살면 되는 땅, 흔히 말하는 그냥 땅에서는 표면입니다. 표면이지 결코 부피가 아니에요. 껍질만 있으면 돼요. 기어가면 되니까. 기어가는 그 뱀이 그것도 사는 겁니까? 여기서 악마에 이런 저주를 준 것은, 인간이 이차원 존재에요. 부피가 아니고 표면이에요. 표면만 기어 다니면서 그걸 자기는 땅 투기하고 부동산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인간이 뭐냐? 인간이 뱀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유명한 노래. 뱀이다~ 하는 노래 있지요. 인간이 뱀이에요. 지평선밖에 볼 줄 모르니까. 이차원이에요. 삼차원이 아니고 이차원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신약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신약에 와서 땅₂를 하늘로 옮겨버렸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 이뤘기 때문에.

땅₁에는 구약에서는 표면적이기 때문에 땅₁안에 이방민족 안에 약속의 땅, 땅₂가 따로 아요. 같은 평면에 있으니까. 신약에 오게 되면 골로새서 3장 같은 경우에 보면 우리는 하늘에 있다 했어요. 안식의 땅이 위로 올라가요. 왜냐? 주님께서 위에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그래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위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위로 올라감이 아니냐는 말씀이 나오거든요.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땅₂가 뭐가 되냐 하면 yes가 돼요. 땅₂가 yes가 되면 땅₁은 전부 다 뭐가 되겠어요? no가 되지요. ‘아니요’가 되지요. 이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니요’에요. 스물다섯 먹은 남자와 스물셋 먹은 여자와 서로 사랑하다가 남자가 죽었단 말이죠. 그럼 여자가 뭐라고 울부짖겠습니까? 하나님,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할 거지요. 그럼 주님께서 yes하겠어요, no하겠어요? no지요.

개인적 사정을 봐줄 수 없는 이유는 너는 죽으라고 살 땅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은 죽으라고 사는 땅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저주가 숨 쉬는 땅이어야 돼요. 내가 숨 쉬는 땅 되면 안 돼요. 주님이 주시는 재앙과 저주와 심판이 살아 움직여서 그게 살아야지 내가 살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 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여러 가지 터키 쪽으로 전도하잖아요. 할 때 그게 땅이잖아요. 아까 부피가 아니고 평면, 표면이죠.

신약이니까 표면을 하면서 사도 바울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특수한 공간을 입체적 공간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예수 안이에요. 이 세상이 되어지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예수 안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지장도 없고 차질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이 복음 전파에 아니요는 없고 전부 다 예가 된다, yes가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아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특수한 공간 예수 안이죠, 성령 안이죠, 십자가 안이죠. 안에서 그냥 예가 아니라 얼마든지 예가 된다는 말은 어떠한 경우도 하나님의 계획에 실패하거나 지연되거나 차질이 있는 일은 없다 이 말이죠.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 세상에 어떤 일도 하나님께서는 no라고 규정한 그 규정에 변동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을 심판하고 멸망하기로 작심한 그 작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과 비교해봅시다. 인간들은 살 때 평소에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자기 선택과 자기 결정을 긍정하기 위해서 어떤 질문이 어떤 답변으로 맺어지기를 질문을 던지면서 산다 했어요? 예 아니면 no지요. 나한테 유리하면 yes, 나한테 불리하면 no지요. 그런데 하나님도 똑같이 일하시는 거예요. 하나님도 하나님의 자기 언약,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yes만 이뤄져요.

그 yes가 yes 되는 그 원칙이 레위기 26장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좀 맞자는 거예요. 너 좀 얻어맞아야 되겠다. 네가 많이 얻어터져야 되겠다. 거기 나오지요. 네가 깨닫고 순하게 받으면, 42절에 순순히 받으면 그 다음에 뭡니까? 내가 잘 된다는 거예요? 아니지요.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목적은 내 목적이 아니에요. 우리의 목적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게 사는 것, 그게 내 목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체 우리의 목적을 편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목적은 하나님 목적 앞에 완전히 박살나야 돼요. 그걸 다른 이방민족보다 이스라엘 민족한테 뚜렷이 보여주는 겁니다. 네가 내 약속에 의해서 얻어맞으면 너는 고맙다 해야 된다는 거죠.

왜? 얻어맞았다. 날 때부터 죄인인 내가 언약으로 얻어맞았다고 되면 얻어맞았다는 그 내용이 모아져서 이게 안식의 땅이 돼요. 천국 가게 되면, “너 어디서 얻어맞았나?” 여수서 얻어맞았다. 난 울산에서 얻어맞았다. 난 대구서 얻어맞았다. 그 얻어맞았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구나.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내 모습이 아니라 아예 나를 죽이는 식으로 이 천국까지 오게 하셨구나, 하는 그런 고백들만 모아놓은 그게 무슨 땅이다? 그게 언약대로 이루어진 땅이에요. 왜냐? 언약은 죽여 놓고 그 다음에 뭡니까? 살리기 때문에, 그게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에. 성도는 그 사실을 믿는 거예요. 나를 죽이는 그분이 나를 살린다는 그걸 믿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96) 21-02-08 09:22 
20210205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예 아니요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 줬잖아요. 그 율법이 yes, no를 유도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질문을 먼저 던질 때 딱 둘로 나눠져요.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지 마라. 그러한 지시는 딱 두 가지 경우만 용납이 돼요. 따먹었다, 안 따먹었다. 그렇게 되지요.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죽는다는 것은 소멸이죠. 왜냐하면 아담이 흙이 되니까, 없어지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선 인간을 구원하지 않아요.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고요. 왜? 없애버리고 새로 만들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은 어설픈 유사 삼차원, 이게 참 가관인데 지금 표면이죠. 점은 일차원이고 표면은 이차원이고 그 다음에 입체는 뭡니까? 삼차원이죠.

인간은 표면을 통해서 삼차원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게 요물이라서 영물이라서 영적 존재라서 그래요. 마귀 들려서 그래요.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왔지요. 하늘이란 삼차원 세계에서 이 땅에 왔으니까 이차원으로 왔지요. 다시 어디로 올라갔지요? 들리시니, 하늘로 들렸지요. 삼차원이죠.

유일하게 삼차원에서 이차원 거쳐서 삼차원으로 가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미끄럼틀 타고 올라간다. 내려왔다 율법 타고 올라갔잖아요.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그럼 율법 자체가 삼차원에서 꽂아주는 거란 말이죠. 삼차원 세계, 하나님 세계에서 이 세상을 향하여 질문을 던진 거예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은 먹지 말라 할 때에 아담은 이차원적으로 생각해서 따먹어도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배후가 누가 있었습니까? 영물, 악마가 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yes냐 no냐를 묻는 식으로,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식으로 율법을 이 지상에 이차원 세계에 보내버렸어요. 그럼 그게 십계명이죠. 십계명은 뭡니까? 전부 다 yes 아니면 no잖아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어기면 너는 삼사대 저주받는다. 지키면 천 대까지 복을 받는다. 모든 계명이 yes 아니면 no로 규결된다고요. 그런데 이 세상이 그냥 조용한 표면이 아니에요. 이 세상은 표면, 이차원적인 인간들이 마귀의 술책에 의해서 여기서 뭐냐? 나름대로 삼차원 세계를 상상합니다. 이게 종교지요. 이게 하나님 믿기입니다. 하나님 믿자. 구약에선 이걸 뭐라고 하지요? 우상이라 하지요. 성경에선 우상이라 하지만 그들에겐 참 된 신이죠.

우리나라도 보세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노래 중에 제일 유명한 게 아리랑이에요. ‘아리+랑’이에요. ‘랑’은 ‘함께’란 뜻이에요. 너랑 나랑 하지요. 달래랑 먹고 나오지요. ‘아리’가 뭐냐? 이게 ‘엘’에서 나온, 중동부터 중앙아시아 거쳐서 전부 다 ‘엘’에서 ‘알’, ‘알’이 이게 하나님이에요. 핵심부분, 영어로 하면 egg, 계란이란 뜻이지요.

알과 더불어서 태양이 알이라면 밑에 있는 광채 있지요. 이 광채가 금빛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랄알타이 민족이라 하는데 우리 민족 원조가 샤머니즘 민족이에요. 신을 믿는 민족인데 그 신을 믿는다는 것이 가장 국가를 정립하는데 기조가 되는 겁니다. 요새 같으면 헌법이 돼요.

인간의 사고, 인간의 정신을 하나로 보편적으로 모을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우하사, 하나님이에요. 로마서 1장에 나오잖아요. 21절에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하잖아요. 신 의식은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타고난 거예요. 왜냐하면 이차원에서 뭘 꿈꾸는 거예요? 삼차원, 나름대로의 신의 세계를 계속해서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삼차원 신의 세계는 이차원을 다치게 할까요, 보호할까요? 보호하지요. 우리나라 애국가에 나오잖아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아닙니까. 하나님이 깽판 놓아, 안 하지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두가 하나로 대동단결한 거예요. 저쪽에 중앙아시아, 중국부터 해서 몽골 저쪽 카자흐스탄, 이슬람 알라신도 마찬가지에요. 알에서 나온 거예요. 엘에서 나온다고요. 바알신도 엘에서 나온 거예요.

각 민족마다 알, 엘이란 신에 의해서 마음이 하나가 된 겁니다. 국가는 신이 있어야 성립이 됩니다. 신이 없으면 국가가 성립이 안 돼요. 아무리 과학시대라도 모든 국가는 다 신이 있어요. 태국이란 불교국가도 마찬가지고. 태국 불교에서는 미륵보살이 신이에요. 석가모니 말고 따로 있어요. 석가모니가 진화되고 발전된 게 미륵보살이에요. 미륵보살이 더 세요. 부처보다. 미륵은 신이 인간으로 성불한 거예요. 신이 육신이 된 게 미륵보살이라니까. 중국에서 얼음판에 넘어지면, 아이고 하나님 하는데.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비전, 꿈꾸는 것, 계시 받는 것, 그래야 종교가 되니까요. 모든 종교, 계시는, 이번에 사무엘상 할 때 박수무당과 점쟁이는 죽이라 하잖아요. 왜 죽이냐 하면 이 신은 우리를 안 때려요. 우리는 지켜준다고, 보호해준다고요. 여러분들이 교회, 기독교를 생각해보세요.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개혁주의신학이 철학인 이유가 있어요. 왜 철학이냐 하면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에게 비전을 줘요. 비전이란 말은 신의 계시란 뜻이에요. 신의 계시에 대해서 우리가 no하겠어요, yes하겠어요? yes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yes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나를 박살내라고 yes하는 게 아니고 현재 있는 나를 천국에 가도록 고이고이 지켜달라고 yes가 되는 거예요.

아까 그 상표와 내용물과 우리 인간은 다르다고 이야기했지요. 내용물은 이스라엘도 아닌데 상표는 이스라엘로 돼있어요. 왜 인간은 자꾸 이렇게 자기를 조작합니까? 그것은 자꾸 자기 뒤를 돌아봐서 아직도 자기로 인하여 숨 쉴만한 공간을 확보하고 싶은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죽어서 관 속에 있고 거기다 흙으로 덮었다고 보세요. 아직 나는 숨이 안 끊어졌는데 나쁜 사람들이 산채로 관 속에 집어넣고 못질해서 못 나오도록 흙까지 덮어버렸다. 여러분 딱 인상이 느낌이 뭡니까? 야 답답하겠다, 하지요. 마스크 쓰는 것보다 심하게 답답하지요.

그런 영화 있어요. <킬빌>이란 여자 사무라이 나오는 그런 영화가 있어요. 손가락으로 관을 뚫고 아주 무술이 뛰어나기 때문에 탈출에 성공하는데. 왜 그게 답답하지요? 내가 답답증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살아생전에 내 죽음을 목격한다는 뜻이거든요. 느껴진다는 거예요.

왜 내가 죽는 것이 답답하냐? 내가 관 속에 있고 다른 식구들은 우는 척하고, 요샌 울지도 않지요. 아이 잘 갔다, 이러고 있을 때 그게 답답하냐 하면 평소에 살아 있을 때 내가 살아야 될 이유, 내가 사는 목적, 그래도 힘들지만 내가 살아가는 그 근거는 나만의 숨 쉴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만의 공간. 따라서 그것을 계속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아직도 지킬 게 약간은 있겠지,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하나님이 밀어오면 작전상 후퇴하지요. 후퇴하지만 점점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의 소박하고 작지만 그 공간이 나를 위한 공간이잖아요. 나를 위한 공간이라면 그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람은 희망을 갖고 살 용기를 냅니다. 왜? 그것이 뭐냐 하면 표면은 뭘 희망한다? 삼차원을 희망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입체가 될 거야, 삼차원이 될 거야란 희망. 나는 답답하면 못 살아. 나는 내가 있어야 살아.

이걸 생각하게 되면, “나 예수 믿어요. 목사님, 나 예수님 사랑해요.” 그 말을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끝까지 고집부리면서 극히 작으나마 나만의 공간을 따로 갖고 싶어 하는 거예요. 심지어 50평짜리 아파트 살다가 쫄딱 망해서 원룸에 있더라도 그 원룸이 어딘데, 얼마나 좋은데. 비록 좁디좁지만 문 열고 들어가면 그 세상 어떤 세상이에요? 그 세상은 누구의 세상이죠? 나만의 세상, 천국이 따로 없어요. 나만의 세상이에요.

땅₁입니다. 땅₂가 아니에요. 땅₁이에요. 자기가 왕이 되는 거예요. 그 안에서만 주변은 다 자기가 정 주었던 거예요. 저 소파, 저 책상, 저 책들, 다 아끼고 아낀 것들이에요. 만약에 결혼한 남편이 애먹인다. 나가! 쫓아내버리죠. 정 줬지만 지금은 정 안 주니 나가라. 왜? 나의 yes에 침입하기 때문에. 내 공간은 나의 yes만 남아야 돼요. 강아지는 들이고 남편은 내보내고. 그 안에서는 아무도 내가 나를 때리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한테도 내가 당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 그 안엔 yes가 있지요.

그런데 레위기에 보면 그 안에 누가 찾아옵니까? 그것은 바로 언약이 없다는 거예요. 그거는 네가 있지, 네가 최종적으로 자리 잡지 언약이 자리 잡은 곳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레위기입니다. 언약이 자리 잡았단 말은, 그 중심 공간을 펑퍼짐은 네 엉덩이로 깔고 앉았다는 거예요.

이게 원룸이라 합시다. 원룸 중앙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레위기 언약에 의하면 비워있어야 되고 여기는 불이 타야 돼요. 무슨 불, 누굴 태우는데? 정결한 짐승이 타는 제단 불이 있어야 돼요. 뜨거워라. 뜨거워야 돼요. 그러면 나는 뭐냐? 여기에 하나의 관람객이죠. 엮여진 불에 태워 저주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언약의 구조입니다. 국가 이스라엘 나라의 구조에요.

아까 스물다섯 먹은 남자와 스물세 살 먹은 여자 그 둘, 그 제목을 뭐라 했습니까? 둘만의 세계지요. 그 두 젊은이만 나무랄 수 없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 전체가. 그렇게 안 살아가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차이도 안 나지요. 관계없이. 다들 그렇게 살아요. 나만의 세계, 그 나만에 대한 집착과 말이 좋아 집착이지 아까 말대로 하면 그냥 미친 거예요. 나한테 미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올 때 하나님이 아주 날카로운 연필심 끝이라 봅시다. 율법이 들어오잖아요. 아까 우리 배웠습니다. 율법의 끝은 뭐가 있다 했습니까? yes와 no가 있지요. yes와 no라는 답변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을 율법으로 주신 거예요. 그러면 yes가 뭐냐 하면 바로 천국이고 no는 지옥이지요. 그러면 율법, 다시 구세주, 삼차원에서 이차원으로 오신 그 구원자는 구원을 하시는 목적뿐만 아니고 뭐도 있습니까? yes와 no로 나누는 겁니다.

“좀 맞자.” 할 때 때리시옵소서. yes가 되겠지요. “좀 맞자.” “내가 미쳤다고 레위기 26장 듣습니까? 나 당신 같은 하나님과 볼 일 없습니다. 나는 나를 지켜주는 하나님을 내가 선택해서 믿겠어요.” 왜? 그 신은 나에게 yes가 되기 때문에 나가겠지요. 그게 바로 no에요. 그게 지옥이에요. 때릴 때 “때리옵소서.” 해야지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다윗이 시편 22편 1절에서 하나님에 맞는 백성 맞지요. 하나님의 백성 정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왕 맞지요. 분명히 왕입니다. 사무엘이 기름 부었으니까 왕인데 그 왕의 결정적인 고백이 뭐냐 하면 시편 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지요.

그 버림받음 요소가 없으면 이스라엘 왕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버림받는다는 것이 내 가운데 내 죄 때문에 버림받는 어린양의 희생이 제단에서 지금 태워지잖아요. 그것이 원룸이든 투룸이든 간에 내 중앙은 내가 차지하면 안 돼요. 뭐가 차지해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차지해야 된다고요. 아버지가 이삭을 잡는 그게 차지해야 돼요.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을 잡는 그것이 사랑이에요. 안 잡으면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미움이에요. 이스마엘은 미움 받은 거예요. 하나님이 야곱을 죽여서 뭐로 만듭니까? 이스라엘 만들지요. 그게 사랑이라고요. 그냥 야곱을 야곱으로 보내면 사랑이 아니고 그거는 배제된 거예요. 지옥에서 배제된 것, 버림받은 겁니다. 영원히 버림받은 거예요.

지난 서울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성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중보자의 속성과 하나가 될 때 성도거든요. 그럼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문둥병자에요. 저주받은 문둥병자와 중보자의 조합, 그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무슨 다른 종교적인 삼차원적인 비전해서 이런 것 상상하지 마세요. 내가 여기 있으면 나는 천국 간다는 그런 이상한 착각하지 마세요.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만드는 그게 홀로그램이라 해서 그걸 허상이라 합니다. 인간은 눈만 뜨면 허상이죠. 그 허상을 위해서 주변에 있는 원자재를 세상 속에서 자기 눈에 띠는 속에서 그걸 찾고 있습니다.

어떤 대학 4학년이 군에 갔다 왔는데 대학공부가 취미도 안 맞고 공부도 잘 안 되고 그런데 장래는 걱정되잖아요. 보통 군 제대하고 난 뒤에 철이 드는 이유가 그 다음부터 친구들과 놀 생각 안 하고 지 살 궁리하는 거예요. 그걸 세상에선 철이 들었다고 하는데, “아빠, 나 대학교 치우고 유튜브해서 돈 벌래.” 유튜브 구독자가 얼마나 돼야 한 달에 이백만 원 나오겠어요?

어떤 사람이 유튜브로 10억 벌었다, 20억 벌었다 하니까 철없는 대학생들이 통박 굴리는 거예요. 그냥 카메라 하나 빌려서 중고로 사서 앉아서 말 몇 마디하면 구독자 수만 명 되면 나는 가만있어도 한 달 수백만 원 들어온다. 이것 벌어서 아버지 효도할게. “그럼 네가 콘셉트를 뭐로 잡을 건데?” “난 노래할거야. 노래해서 구독자 많이 모아서 한 달에 수백만 원 벌어서 아버지께 효도하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철없는 생각입니까? 그게 누구냐 하면 박완규 아들이에요.

그걸 보세요. 아까 말한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안 망하는 쪽으로 주변에 있는 원자재 있잖아요. 원자재 알지요. 뭘 만들 때 재료로 쓰는 그 원자재를 유튜브 보고 인터넷하면서 그걸 찾아내는 거예요. 그걸 발굴해내는 거예요. 내가 이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다 그렇게 살잖아요. 부모가 20대 자식에게 밥상머리에서 다그치는 게 뭡니까? 남자애한테는, “너 뭐하고 밥 먹고 살래. 공부 다 시켜줬다. 언제까지 이렇게 놀래.” 이것 묻고, 딸한테는, “너 언제 시집갈래?” 나이 서른 넘었는데 언제 시집갈래. 요샌 딸한테도 시집가는 건 모르겠고 언제 돈 벌래. 딸도 마찬가지로 언제 돈 벌거냐고 묻지요.

내가 이상한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땅₂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땅₁이야기하는 거예요. 땅₁은 표면적이에요. 표면적이기 때문에 뱀으로 생각하면 돼요. 뱀이다, 뱀이다. 뱀은 엎드려서 본다고요. 보면 지평선이 보인다고요. 지평선, 눈앞에 보이는 것 있잖아요. 어떤 사람 유튜브 해서 10억 벌은 것, 음식 10인분 시켜서 그걸 홀라당 다 먹고 한 달 수입 몇 억씩 버는 것 있잖아요. 먹방 있잖아요. 밥만 먹고도 돈 버는 거예요. 한 자리에 10인분씩 먹고. 그게 어떻게 자기가 죽는 거예요. 몰라. 밥 먹다 배 터져서 죽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거기에 빈자리가 있어요, 없어요, 중앙에? 없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아버지가 아들 잡는 아브라함, 이삭 언약 있습니까? 없지요. 이 소리하는 내가 미친 사람 같아. 내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저 보고 왜 그렇게 유별나냐고 욕하는 것 같아. 제가 말하는 것은 지금 교인들이 무식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육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식함이 아니라 육적이에요. 성경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육적이에요. 육, 육신적이에요. 너무나도.

천국 같은 소리, 누가 천국 넣어줘요. 고린도전서 봅시다. 사도 바울이 천국 가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2장 14절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여기 보면 육적의 일은, 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여기서 사람의 지혜와 무엇과 대결이 됩니까? 사람의 지혜와 무엇과 극한 대조를 이뤄요? 성령의 지혜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 말에 사람이 알아들을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아들을 말이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 자체가 개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라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에게 철저히 가려져 있습니다. 막혀 있어요.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잠시 열어주고 도로 닫아버려요. 여기 13절에,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 얼마나 사도 바울이 철저하게 육적인 것과 영적인 사람을 이렇게 구분합니까. 철저해요. 교인수 많고 적고 그딴 것 신경 쓰지도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은 자기가 숨 쉴 공간만 있으면 제대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숨 쉴 공간 있고 언젠가는 옛날처럼 넓은 아파트 산다고 지금 희망과 비전을 꿈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꿈만 꿉니까? 아니지요.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나한테 yes가 되고 긍정이 되는 것이 오도록 자꾸 세상을 향하여 질문을 만들어간다 이 말이죠. “저 것 내 가져도 좋습니까? 그 직장 내가 들어가면 어떻겠어요?”

어떤 분이 생활이 너무 극한까지 몰려서 호텔 주방일 하려고 갔는데 뽑는 사람이 보더니만, “아줌마는 안 됩니다.” “왜요?” “아줌마, 이것하면 몸살 나서 안 됩니다. 쓰러집니다. 그럼 다른 사람 뽑아야 되니 귀찮아요.” 그러니까 허드렛일을 하겠다는 그것도 마음대로 안 돼. 나한테는 그걸 기대해서 yes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no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지혜의 말씀, 성경말씀을 어떻게 아느냐? 바닥을 체험, 여기 바닥체험이 나와요. 바닥체험은 지난 주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는데 깡패가 긴 파이프 들고 거친 콘크리트 바닥을 끌고 지나가면 소리가 어떻습니까? 참 짜증나는 소리 나오지요. 주의 말씀은 우리의 바닥을 끌고 지나가는 쇠파이프 소리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항상 환상으로 솜사탕 같은 솜이불 두껍게 깔아서 내 바닥이 안 들키길 원하고 있어요. 아까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손님 오니까 세워놓고, “아이고, 내 사는 꼬라지가 더러워서 좀 가만있어 봐요. 청소 좀 하고.” 청소하고 오겠다는 거예요. 항상 자기 자신을 어느 편에 서냐? 천사 편에 세워두는 거예요. 그게 아까 브랜드와 내용물이 다른 점이에요. 자꾸 자기 쪽을 천사 쪽에 세워놔요.

그러나 주님의 말씀의 끝, 그것이 우리를 끌고 지나가게 되면 우리는 온 천지에 긁히지요. 이렇게 우리 바닥을 할퀴는 이유는 뭐냐 하면 중심자리를 비워 놔라 이 말이에요. 중앙자리를. 그게 어렵습니까? 나의 마음의 한 자리를 제일 정중앙이에요. 내 정중앙을 주님의 약속이 들어오도록 비워놔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나는 뭡니까? 내가 중앙에 있으면 나는 누굴 믿어요? 중앙 지키기 위해서 egg 중앙 알을 지키기 위해서 살았는데 내가 나가버리면 이 중앙에 누가 찾아온단 말입니까? 죽어도 사신 분이 있어요. 그럼 나는 아까 요한복음 11장 말씀처럼 누굴 믿어요? 살고자 하는 나를 내가 안 믿어요. 애써서 살아야 한다는 이것이 거짓말인 것을 이제 알았어요. 그럼 누굴 믿어요? 죽어도 산다는 걸 믿는단 말이죠. 그럼 우린 뭡니까?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게 돼요. 이게 바닥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공식 하나 나오지요. 율법은 누구에게 주었느냐? 율법은 율법에게 가지요. 그럼 율법 주신 자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율법을 누구한테 주었느냐? 하나님의 아들에게 줬지요. 이게 정답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겨냥해서 한 거예요. 그게 무슨 땅? 안식의 땅. 그게 땅₂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미 태어나면서 죄인인지라 다시 말해서 악마의 속성으로 사는지라 항상 추구하는 게 뭐냐 하면 악마가 악마한테 하는 그 행세를 우리가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 시작합니다. 옛날부터 줄곧 들었던 이야기, 마태복음 4장 이야기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세 가지였지요. 악마가 예수님 시험할 때 세 가지했지요. 순서상 있더라도 하여튼 세 가지에요. 첫째는 뭐냐 하면 생존하라. ‘생존하라’의 반대말은 죽으리라.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그런데 악마는 그 반대로 나가잖아요. 네가 떡을 먹고 생존하라, 살아라. 이 말입니다.

창세기 2장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네가 알아선 안 된다 했지요. 두 번째 시험이 뭐냐? 악마가 말씀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네가 알아라. 네가 지식을 알게 되면 지식이 곧 뭐로 바뀐다? 지식이 곧 현실이다. 아는 게 힘이라 이 말입니다. 지식이 곧 현실이다. 이거에요. 내가 아는 그것이 나의 현실 되기를 우리는 소망하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 아까 이야기했지요. 대학 4학년이 제대해서 그 다음부터 아름아름 뭘 압니까? 자기의 지평선 안에서 세상에서 자기가 밥 먹고 살 독립할 원재료들을 얻지요. 결국 내린 결론은 뭡니까? 집에서 밖에 안 나가도 돼. 방 하나에 커튼 쳐놓고 조명시설, 마이크 하나 해놓고 노래 부르면 구독자 한 천만 명 넘으면 월 백 만 원씩 나오는. 지 노래 부르면 구독자 나옵니까?

내가 아는 것이 곧 무엇이 되고 싶어요? 나는 아니까 아는 것을 누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게 현실이기를 원하지요. 젊은 사람뿐만 아니고 인간은 늙어죽을 때까지 그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애가 이번에 중간고사 백 점 맞았으니까 세상은 우리 애가 천재이기를 알아줬으면, 내가 애를 좋아하는 것처럼 남들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게 현실이고 싶지요.

두 번째 시험이 뭐냐? 내가 아는 그것이 곧 현실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시험에서는 사탄이 시편 91편으로 뛰어내려라.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뛰어내리면 천사가 와서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뭐로 변한다? 말씀이 곧 현실화되기를 현실화되는 그것을 네가 실시하라고 악마가 예수님한테 시험하고 있는 거예요.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내게 절하라. 왜? 나는 신이기 때문에. 신이면 모든 것을 소유한 신, 이게 세 번째에요. 그러니까 레위기고 뭐 이런 것 다 접어두고 나는 생존하고 싶다. 나는 아는 것이 현실이고 싶다. 결국 나는 내가 신이다. 내가 신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나만 믿을 거야. 이 세 가지 현상이 울산이고 서울이고 대구고 간에 미국이고 간에 이게 바로 현실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현실이잖아요.

그러니까 굳이 성경을 안 봐도 성령 받은 사람은 현실을 보게 되면 거기서 뭐가 보입니까? 예수님의 원수들이 지배하는 세계가 뚜렷하게 보이지요. 그리고 이런 요소가 육신이 있는 우리 속에 스펀지처럼 들어왔잖아요. 이게 바닥입니다. 이 바닥을 평소에는 정답인 줄 알아요. 남들 다 그렇게 하니까 자기도 이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없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연필심 같이 날카로운 하나님의 말씀 또는 말씀의 완성인 십자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찌이찍 거리는 깡패들이 거친 콘크리트를 끌고 지나가는 쇠파이프의 거친 소리가 우리 마음 밭을 긁고 지나가지요. 아 내가 맞아야 되는구나. 내가 진즉에 죽어야 되는구나. 내가 중심 되면 안 되는구나. 나는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하나님은 나를 때리기 위해서 찾아오신다는 거예요.

그게 무엇에 협조입니까? 언약을 언약대로 이루는 일에 우리가 참여된 모습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일기장을 쓰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나의 일기장은 존재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없어요. 전부 다 주님의 일기장이에요. 말썽꾸러기를 내가 데려왔다는 주님의 자기 공로와 자기 성과가 기록된 것이 천국입니다. 말썽꾸러기 천하의 죄인을 내 몸을 바쳐서라도 내 피와 살을 쏟아서 기어이 그들을 나 있는 곳에 데려와서 오직 나에게만 찬양하고 구원자가 하신 구원의 공로만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준 거예요.

여러분 이것 시뮬레이션입니까, 홀로그램이에요, 허상입니까?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게 허구에요? 지어낸 겁니까? 이스라엘 멸망을 보세요. 이게 지어낸 이야기인지.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들 죽은 것 보세요. 이게 지어낸 이야기인지. 십자가 죽었다 부활한 게 지어낸 이야기인지. 이게 진짜 현실이거든요.

현실을 가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뭘 만드느냐? 교회를 만든 거예요. 이걸 감추기 위해서. 기독교를 만들고 교회를 만든 거예요. 말씀이 와야 되는데 말씀은 안 오고 자기가 교회 찾아와요. 그리고 예배드리고 오늘 교회 갔다 왔다. 하나님 출근도장 찍었습니다. 이번 주 벌 내리기만 해봐라. 분명히 교회 갔다 왔습니다. 복음 들었습니다. 가버렸어요. 뭐에요, 그게. 도대체 뭐하고 사는지, 하루 종일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를 모르겠어.

이야기하면, “아이고 성경에 무식해서.” 성경에 무식한 게 아니고 관심이 없어요. 너무 육적이에요, 육적. 너무 육적이라 미안해서 영적인 것을 흉내 내는 거예요. 복음을 이야기하고 세상 교회 썩은 걸 이야기하고 우리 교회는 안 그렇다고 자랑질하고. 너는? 이 세상은요 기대하지 마세요. no입니다. yes 없어요. no 자체가 주님 앞에 yes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망하고 죽는 것도 주님 앞에는 yes가 되는 거예요. 합력하여 뭘 이룬다 합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주님의 계획엔 차질이 없어요. 왜냐? 이미 원칙을 정해졌어요. 죽어라. 살려줄게. 가자, 이삭아. 나와 같이 너 잡으러 간다. 바위 위에 엎어지고 아무 소리 말고 내 칼아 맞아죽어라. 제발 좀 죽어줘. 펄떡이는 광어처럼 나대지 말고.

네 한 가운데 중앙에 앉아서 제단을 다 가리고 십자가 다 가리고 펑퍼짐한 궁둥이로 깔아 앉아서 이 가정은 나만의 가정이다. 남 오면 아이고 부끄러워라. 신앙생활 잘 못해요. 이런 식으로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놓지 말고. 중앙자리 다 차지해놓고 세상에 나가선 누가누가 잘난 존재인지 그것이나 비교하면서 그래도 내 인생 그나마도 선방했잖아. 맨 날 선방했데, 그 정도로. 몇 달 전까지 교회 안 다녔는데 교회까지 나오니까 얼마나 내가 착해. 이런 식으로요. 자꾸 천사 편에 서는데 그게 상표가 달라요. 자기 간접광고하지 마세요. 유사품에 주의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얻어맞는 아픔이 담겨있는 곳이 이스라엘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이 때리더라. 그 때리는 것만 살아 숨 쉬어야 돼요. 맨 날 얻어맞아요. 매일같이. 나중엔 나이 들어서 화장도 안 받아. 왜? 얻어맞아요. 우리는 하루 살면 하루 얻어맞는 거예요. 또 하루 살면 또 얻어맞은 거예요. 갈수록 피부도 안 좋아지고. 이게 얻어맞아서 그런 거예요.

끝으로 민수기 봅시다. 민수기 24장 17절,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첫째 시간 공부했기 때문에 왜 이스라엘이 이 민족들을 치는지 알겠지요. 땅₂가 땅₁을 치는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그냥 살기만 하는 땅, 그 땅은 저주받은 땅이에요. 그걸 이스라엘이 나올 때까지는 모압이나 세일 이런 사람들 몰랐지요. 에돔도. 이스라엘이 와서 거침없이 쳐버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 자격이 아니구나. 그걸 알아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 다음에 17절에서 제가 이야기한 것은, 한 별이 애굽에서 나오며, 그 다음에 뭡니까? “한 홀” 왕이죠. 자 이스라엘 중앙에 비워 놔라 했지요. 이 말은 우리 가운데를 비워놔야 돼요. 이스라엘 한 복판에 뭐가 있습니까? 제단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마음 한 복판에 삼차원 세계에서 오신 분이 이차원적으로 여기 있어야 돼요. 여기서 나오는 외치는 말씀은 매일같이 똑같아요. 죽으면 살리라, 죽으면 살리라.

그럼 이쪽에 있는 사람, 바깥에 중앙 밖에 있는 사람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죽어도 살겠고. 나는 죽을 거야. 주님이 죽이시는 그 죽음으로 나는 살겠고. 이게 끊어지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마지막 율법의 완성이 누구냐 하면 왕이 오십니다. 왕이 오셔서 이 중앙부분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그러면 진짜 성도는 자기 중앙에 자기 집안의 중앙, 자기 교회의 중앙, 자기 마음의 중앙이든 이 안에 뭐가 보여야 됩니까, 이 안에 무슨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그것도 이틀에 한 번이 아니고 매일같이 뭡니까? 십자가가 계속 일어나야, 계속 보여야 되지요. 이게 바로 성령의 사람이에요. 이게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내가 오늘 저녁에 맛있는 자장면을 먹었다. 그 자장면을 왜 먹었습니까? 죽으라고 먹은 거예요. 너는 먹을 가치도 없는데 자장면을 줌으로써, “주여, 살 가치도 없는 인간에게 또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감사와 늘 고마움이 나오게 하는 거예요. 내가 젓가락 들고 내가 먹은 게 아니기 때문에.

젓가락 들고 먹으려고 하면 만약에 손목 부러지면 못 들어요. 우리가 멀쩡한 게 아니고 주께서 멀쩡하게 하신 거예요. 뭘 위해서? 언약을 위해서. 뭘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뭐가 아니게? 나의 yes가 아니게. 누구의 yes? 주님이 하는 모든 일에 yes가 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no. 너 빠지고 주님의 yes에 네가 합류된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yes에 합류된 거예요.

제 머리 많이 빠졌지요. 주님의 yes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있지요. 네가 염려한다고 키가 한 자나 더 자랄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참새를 누가 키운다? 주님이 키운다. 이 말은 참새가 참새 나름대로 자기긍정, 자기 yes하지 말라는 거예요. 반드시 yes의 출처가 따로 있어야 돼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복음으로 하신 일, 십자가로 다 이루신 일을 위해서 우리가 지금 울산바닥에 이렇게 아직도 숨 쉬고 있지요. 그럼 우리 안에 십자가가 숨 쉬고 있는 거지요. 들숨날숨 안에서 십자가가 숨 쉬고 있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이것이 상표에 합당한 우리의 내용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우리가 이렇게 세상 사람과 차이 나지 않는 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이젠 알았습니다. 바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죽어 마땅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 말씀 주셨사오니 이제는 세상 말보다 주의 복음과 말씀을 더 좋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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