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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3 23:04:27 조회 : 229         
죽음으로 연결 역대상 27:1 231103 이름 : 이근호(IP:119.201.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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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96) 23-11-06 07:03 
20231103a 울산강의-역대기상(25강) 27장 1절 : 죽음으로 연결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27장까지 할 건데요. 23장 3절부터 보면, “레위 사람은 삼십세 이상으로 계수하였으니 모든 남자의 명수가 삼만 팔천인데 그 중에 이만 사천은 여호와의 전 사무를 보살피는 자요 육천은 유사와 재판관이요 사천은 문지기요 사천은 다윗의 찬송하기 위하여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는 자라”라고 그렇게 돼 있지요.

23장부터, 24, 25, 26, 27장까지 무슨 이야기냔 하면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에 다윗 중심, 이스라엘 국가를 왕 중심으로 세워지는데 거기에 필요한 인사이동, 사람 배치/배정 거기에 관한 일이에요. 그 이야기 23장부터 27장까지 나와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를 만들 때 뭐가 필요하냐? 방금 23장에서 본 것과 같이 다윗의 국가가 필요한 것은 일단 왕이 있어야 되죠. 개인이죠.

그다음에 여기 다윗의 국가에 레위 지파한테 업무를 맡기는 데 그 업무의 종류가 재판장, 유사, 그리고 문지기, 그다음에 찬송하는 자, 그다음에 군대, 그다음에 왕실의 창고관리자,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겁니다. 이것은 일반 국가에서도 필요하지요. 재판장, 유사, 전부 다 공무원들이죠. 문지기는 계약직이고, 찬송, 군대는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군인들이고, 왕실관리자, 요새 같으면 계약제로 또는 맨 공직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다윗 왕국은 이런 일반 나라에서 하는 것 말고 제사장이 있어야 돼요. 여기 제사장이 필요한 거예요. 제사장, 레위 지파. 그러면 제사장들이 하는 일이 뭐냐? 성전에서 제사 지내는 일을 하는 겁니다. 적어 볼까요. 제사장들이 레위 지파에서 나오고. 제사장들이 성전을 관리하고 제사 지내는 일을 한다. 그런데 성전에서 제사 지내는 이 일은 일반 나라에서는 굳이 필요가 없지요.

다른 나라에도 물론 종교에 관한 제사장들이 있어요. 그들이 말한 종교란 것은 사람을 지키는 겁니다. 국가가 하는 일이 국가에 속해 있는 백성들의 재산과 목숨과 지켜주는 일을 국가가 하는 거예요. 안전망을 형성하는 거예요. 보호받는 그러한 토지 안에 영토 안에 보호를 해주는 권력체 안으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들어서 국가를 것을 만들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는 성전의 관리, 이런 것은 필요 없지요.

그 이유가 뭐냐? 모든 이방 이스라엘 말고 다른 국가에서는 출발점이 뭐냐 하면 개인부터 출발합니다. 모든 국가에서는 시작점이 개인이에요. 역대상 23장 5절에 문지기가 몇 명이냐 하면 사천 명, 찬송하는 자가 사천 명으로 돼 있어요. 그리고 군대가 있는데 이십팔만 팔천 명. 이거는 이만사천 곱하기 12해서 이십팔만 팔천이란 숫자가 나와요. 곱하기해서 12개의 부대가 1개월씩 돌아가면서 1년 내내 1월 군대, 2월 군대 3월 군대…… 이렇게 해서 번갈아가며 교체 근무하는 거예요. 다윗 군대가.

이게 27장에 보면 나와 있고요. 유사와 재판관은 23장 4절에 보면 이게 육천 명으로 돼 있어요. 사무직원이 이천사백 명, 그리고 왕의 창고 관리하는 사람이 이게 몇 명이냐 하면 천칠백 명. 이건 역대상 26장 30절에 나와 있어요. 군대조직, 국가조직이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국가가 이렇게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정을 하고 왕 있고, 왕 밑에 성전 지키는 사람, 그리고 제사장들, 재판관들, 문지기, 왕궁 지키는 사람 나오면 이게 나라입니까? 나라가 저절로 되는 거예요?

생각해봅시다. 하나의 나라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국가가 된다는 것은 왕이 있고 공무원 있다고 국가가 되는 게 아니지요.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개인들이 있어야 되죠. 각 개인들이 있어야 돼요. 개개인이 집합해서 뭉쳐야 나라가 되는 거예요. 그걸 국가의 인구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인구수가 모자라면 외국에서 노동자를 수입하든지 조치를 해야 되지요. 국가가 운영되려면.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만 여러분, 국가가 뭐예요? 굳이 있어야 돼요? 제 질문 취지가 이겁니다. 나만 있으면 되지 국가가 왜 필요하지요? 나 여기 있잖아요. 여러분 각각 여기 있지요. 그러면 됐잖아요. 여러분 자녀들을 교육할 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네가 열심히 공부해라. 바르게 살아야지.’ 그러면 커서, 그다음에 무슨 말이 나오지요? 그러면 커서 뭐된다? ‘훌륭한 사람’된다는 거죠. ‘돈 잘 벌고 부자 되고 훌륭한 사람 되고 행복하다’ 이 말이거든요.

거기 국가가 어디 나옵니까? 국가 안 나오지요. ‘너 열심히 공부해서 국가가 필요한 존재가 되어라.’ 그럼 얘가 묻지요. ‘국가에 필요한 존재가 되면 나한테 돌아오는 건 뭡니까?’ ‘너는 훌륭한 사람 되는 거란다.’ 국가가 필요한 사람 된다는 건 훌륭한 사람 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제가 계속 질문을 남발하는 이유가, 인간의 모든 시작은 개인부터지요.

개인부터해서 국가에 충성한 사람, 국가에 필요한 사람 백날 이야기해봐야 개인으로부터 어디로 갑니까? 개인으로부터 역시 괜찮은 개인은 뭐냐? 훌륭한 개인, 훌륭한 나로 돌아와 버려요. 딸이 있다. ‘너 착하고 바르게 살고 해야 돼. 그렇게 해야 네가 나중에 좋은 데 시집가는 거야.’ ‘시집가서 뭐하는데?’ ‘시집가면 훌륭한 가정을 이루는 거야.’ ‘가정은 왜 이뤄야 되는데?’ ‘가정 이루는 게 여자의 행복이야’ 이러거든요.

그러니 보세요. 제가 이야기한 것 중에서 어떤 논리를 전개하고 진행하다가 내가 빠지는 경우가 있어요, 없어요? 범위를 국가 범위로 하든지 가정으로 하든지 간에 항상 이야기의 핵심은 그 구심점 안에는 ‘나’가 안 빠지고 내가 제일 중요한 존재로 들어와 있잖아요. 그러면 국가라는 것, 가정이라는 것은 치장에 지나지 않지요. 가정보단 내가 중요하고 국가보단 내가 중요하니까요.

그러면 하나님께선 국가를 왜 만드셨습니까? 방금 이만큼 이야기했으니까, 뜸들여놨으니까 여러분들이 감 잡았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국가를 왜 만드셨냐 이 말입니다. 전쟁하는 사람이 이십팔만 팔천 명이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국가를 만든 이유는 전쟁하기 위함입니다. 누구와 전쟁하는가? 개인과 전쟁하는 거예요. ‘나’라는 개인하고.

성경에서 다윗 왕국이 생겼을 때까지 그냥 다윗 등장했다고 이렇게 나라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다윗이 오기 전에 모세 있었습니다. 모세 오기 전에 야곱 있었고, 야곱 오기 전에 이삭 있었고, 이삭 전에 아브라함 있었지요.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다음에 모세, 그리고 다윗 이 사람들 뒤에 붙는 게 있어요. 그들은 뭘 받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이스라엘 다윗 국가는 무슨 국가냐 하면 개인으로부터 시작한 국가가 아니고 언약부터 시작한 국가입니다. 언약부터 시작한 국가는 이게 전쟁채비를 갖춰요. 전쟁을 하기 위한 체제를 갖춘 것이 언약국가의 특징입니다. 그 상대는 누구냐? 각각 갖고 있던 개인의식, 개인주의와 상대합니다.

역대상 26장 4절 보겠습니다. “오벧에돔의 아들들 맏아들 스마야와 둘째 여호사밧과 셋째 요아와 넷째 사갈과 다섯째 느다넬과 여섯째 암미엘과 일곱째 잇사갈과 여덟째 브울래대니 이는 하나님이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셨음이며” 이게 문지기에 해당되는 사람들인데요. 문지기 하는 사람이 사천 명이라 했지요. 여기에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이 사람들은 오벧에돔이란 사람의 자손들에게 특별히 배정이 돼요.

그런데 오벧에돔이란 이 사람이 사무엘하 6장에 보게 되면 이렇게 돼 있습니다. 9절에서 11절에,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그다음에 뭘 주었다고 했습니까? ‘복’을 주었다고 했지요.

오벧에돔도 개인이에요. 이 개인이 복을 받았어요. 오벧에돔의 개인 집이. 복을 받았다는 데 복이란 것이 구체적인 내용이 오벧에돔과 만났거든요. 복이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가 오벧에돔 집에 오니까 오벧에돔은 성전에서 문지기로 있는 그러한 특별자리를 배정받는 혜택을 입는 거예요.

개인부터 해봅시다. 우리 각자 개인이잖아요. 개인이 소망하는 게 뭐냐 하면 복 받는 걸 원하지요. 그런데 아무것도 오지 않았는데 내가 여기 있다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나는 복을 받아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이거는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적어볼게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일인데 제가 문장을 적어볼 테니까 그 문장 틀렸다. 그 문장 아니라, 라고 할 수 있는지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나를 지키지 아니하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 물론 어떤 사람이 나에게 도움을 줄 수가 있어요. 가령 도움을 줬다. 저 사람 참 좋은 분이다. 저 사람 나한테 잘해줬다. 요런 말들의 모든 바닥에 뭐가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도 내가 나를 지키려고 했는데 내가 저 사람이 도움을 받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문장이 틀린 문장입니까?

내가 나를 지키지 아니하면 국가, 가정? 아니에요. 국가, 가정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 돼요? 나에요, 나. 평생을 내 한 몸 지키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내 한 몸 지키는 데 평소에 보통 ‘내가 복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지요. ‘내가 잘 됐으면 좋겠다’ 하지요. 세상에선 그걸 복이라 하지 않습니다. 앞에 글자가 하나 더 붙어요. 그 글자가 한 자인데 무슨 글자인지 혹시 아십니까? ‘행’복이지요, 행복. 나의 행복. 행복이라니까요. 이게 이방민족이에요. 세상의 모든 나라들입니다.

여기 문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나를 지키지 아니하면’ 이라고 돼 있지요. 평소에 나를 지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살잖아요. 내가 나를 지키는 것. 그러면 가만있으면 지켜집니까, 여기서 전쟁을 해야 돼요? 뭘 해야 돼요? 전쟁을 해야 되지요. 우리는 평생 전쟁하고 있습니까? 내가 나를 지키는 전쟁을 하고 있잖아요. 바로 이러한 개인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개인이 하는 모든 전쟁이 바로 이방나라기 때문에. 이게 이스라엘 외의 모든 나라에요. 이스라엘 외의 모든 나라가 국가를 만들고 종교를 지키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국가,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가정으로서 충실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나의 전쟁은, 가정이 있더라도 국가가 있더라도 중지될 수 없다. 중단된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런 이방나라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 군대까지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 다윗의 왕국이거든요. 이방나라에는 시작이 뭐다? 시작이 나가 중심이죠. 그러면 다윗 나라의 왕국의 취지, 이방나라를 이기려면 이방나라에 없는 다른 무기가 있어야 되잖아요. 이방나라는 내가 있기 때문에 나를 지키는 것이 이건 뭐 스물네 시간 온통 생각이 내 행복을 지키는 그게 전부였어요.

그러면 이걸 공격하는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에 없는 요소가 있어서 그게 무기가 되겠지요. 그게 뭡니까? 그게 뭘까요? 이스라엘의 무기는 뭐냐? 나의 죽음이에요. 한쪽은 나를 살리려 하고 한쪽은 나를 죽이려 하고 그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나라에서는 제사장, 선지자가 왕 바로 밑에 제사장이 있는 거예요. 성전, 그리고 성전관리에 나섭니다. 문지기, 찬양 다 사천 명이죠. 그 사람들은 어디에 복무하는 사람입니까? 성전에 복무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복무하는 사람이에요.

아까 이방나라에도 종교가 있다 했지요. 그 종교생활 왜 합니까? 누구의 행복을 위해서?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 다기고 절에 가고 하지요. 성당에 가고. 알라 신 믿고. 알라는 위대하고, 전부 다 자기 행복이잖아요. 다시 말해서 나는 어떤 경우라고 나를 잃어버리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내가 무너지거나 할 그게 없다는 거예요.

나를 지키는 싸움, 이걸 신약성경에선 악마의 대리 싸움. 악마의 핵심은 뭐냐? 악마 본인을 지키는 거예요. 악마 본인을 지키는 데 그 악마의 본성을 인간들이 다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하수인이기 때문에. 악마 마음이나 인간 마음, 인간 마음이 악마 마음이에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타인과 싸움을 벌이는 전쟁, 이게 바로 우리의 일상생활입니다.

왜 성경에 관심이 없고 성경을 안 보느냐? 그것은 나를 지키는 데 성경이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인생 경험으로 아는 거예요. 나를 지키는 데 성경이 필요할까요, 돈이 필요할까요? 문제가 너무 노골적이죠. 성경에서는 말씀이 널 지킨다고 돼 있어요.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로 하여금 자기 실력으로 못 살게 하신다.’ 성경의 취지가 내 실력으로 내가 살지 못하게 만든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성경에 있다 할지라도 성경에 손이 가지 않습니다. 어디 가느냐? 새우깡? 아니, 돈에 가지요. 이미 돈이 나를 지켜주기 때문에 돈도 안 되는 성경을 왜 찾습니까? 돈도 안 되는데. 돈이 있어야 나를 지키고 내가 나를 원래 의도가 날 지키는 것인데 나 지키는 것이 원활하게 움직일 때 그때 우리는 행복한 순간이라고 하는 거예요. 참 행복한 순간이다. 만족한다 이 말이거든요.

딸이 엄마한테 말합니다. “엄마, 남자친구 생겼어. 시집갈 거야.” “시집가서 뭐 하는데?” “시집가서 행복하게 살 거야.” 그때 엄마가 딸한테 묻습니다. “내가 문제 낼 테니까 맞춰봐. 네가 시집가는 게 행복해?” “행복해.” “왜 행복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사니까 행복해.” “자, 이게 문제 나간다. 돈 있는 신혼살림과 돈 없는 신혼살림 어느 게 행복할까?” “이왕이면 돈 있는 신혼살림이 행복하겠지요.”

그것 봐. 그거는 네가 시집가기 전부터 이 세상에는 나를 지킬 자가 나밖에 없다는 것이 철두철미하게 자기에 대한 충성심이잖아요. 내가 나에 대한 충성심이요. 평생토록 인간은 생각 없이 그냥 살아온 게 아니에요.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말 나한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항상 심사숙고했고 생각했던 거예요. 내린 결론은 돈이었습니다. 가면 갈수록.

오늘 질문이 많은데 또 질문해야겠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최종후보 두 개 남았습니다. 다음 둘 중에 어느 게 맞습니까? 나에게 중요한 것은, ①나의 양심이다. ②돈이다. 몇 번입니까? 돈이죠. 따라서 생활전선에 가까이 있는 쪽은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생활전쟁터에서 자기의 감추었던 추악한 것이 접근하면 할수록 그게 다 나와요. 돈 버는 현장에선 추악한 것이 다 나와요.

그런데 한 가정에서 돈 버는 것과 상관없이 멀찍이 추악한 것이 나올 기회를 갖겠습니까, 못 갖겠습니까? 못 갖지요. 자기를 뭐로 봅니까? 양심상 자기를 착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왜? 직접 돈을 안 벌어보니 남 돈 벌어주는 것 쓰기만 하니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보세요. 이 세상에서 제일 치열한 공간이 뭐냐? 돈 버는 공간이에요. 착함도 돈이 여유 있고 난 뒤의 착함이에요. 뭐가 진리냐, 뭐가 바른 것이냐, 뭐가 복음이냐? 일단 돈부터 챙기고 난 뒤에 일단 배부르고 난 뒤에 그다음에 복음이 뭐며 성경이 뭐냐, 하나님이 누구시지,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주께서 ‘네가 배불렀구나. 나 찾는 걸 보니. 아이고, 배불렀구나. 복음 찾고 성경 찾는 걸 보니.’

다윗 왕국의 중심은 다윗이 왕으로 돼 있잖아요. 하지만 다윗을 수렴 청정하는 보이지 않는 분이 있어요. 그분은 어디 계시는가? 성전에 있어요. 옛날 조선시대 사극에 나오지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들을 명의상 왕으로 세워놓고 뒤에 대나무 가리개 해놓고, 가리개 해도 안 보입니까? 다 보이는데. 실루엣이. 나이 많은 아줌마가 앉아서, 엄마지요. 공개석상으로 다 시켜요. ‘그래 이야기해. 저것 찬성하고. 저건 입 다물라 이야기하고.’

전부다 공개 다 보이는 데도 불구하고 앞에 노리개 삼아놓고 뒤에 대왕대비마마가 전부 다 진두지휘하고 있잖아요. 그게 이스라엘 나라의 조직이에요. 체계고 구조에요. 개인의 행복? 그런 것 없습니다. 이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언약에서 나왔거든요. 언약 중에 많지만 창세기 28장 12절을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제가 읽어볼게요.

10절부터 보겠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증권회사 12년 다니면서 지극 충성했던 어떤 40대 후반의 사람이 퇴직해서 고물상한다 이 말이죠. 공부도 많이 하고 머리 똑똑하고 그 어려운 시험에 통과해서 증권회사 들어갔는데 왜 고물상하십니까? 그 사람 하는 말이, 처음에는 억대 연봉 받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갈수록 회사에서 목표량을 계속 늘여가는 거예요.

자기는 증권하는 게 너무 좋아서 주식하는 게 너무 좋아서 하면 돈 법니다. 그건 개인 취미차원이죠. 남의 돈을 될 수 있는 데로 많이 끌어 모아서 그 사람이 원하는 이자율을 충족시켜주고 단골고객을 확보하는 걸 회사에서 요구할 때 그 사람은 처음에 취미로 했던 주식이 솔솔 재미있던 그 차원을 넘어서서 사기를 쳐야 되는 거예요. 사기도 처음에는 먹혀들어갔지요.

계속 해보세요. 세상에 주식이 내 마음대로 됩니까? 안 되지요. 회사의 높은 사람이 부르지요. ‘우리 부서 너 때문에 이번 기 실적 하락이다. 너 인사발령 낼 테니까 알아서 해라.’ 인사발령을 방문판매소에 했어요. 그건 나가란 뜻이에요. 앉아서 컴퓨터 하는 그게 아니고 돌아다니란 말이죠. 그건 쓸 것 다 썼으니까 쓰레기 치우듯이 치우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증권회사만 그럴까요? 모든 직장이 그런 것 아닙니까? 교사는 아닌가? 모든 직장이 그런 것 아닌가요? 그럼 제가 물어봅니까? 왜 사십니까? 이 세상에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 때문에 살아왔습니까? 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 살기 위해서 산다. 그다음 질문, 왜 사십니까? 살 이유 있어요? 살 뚜렷한 이유 있습니까? 없지요. 해답 없이 살아요. 해답이 없는 거예요. 해답이 없다는 말은 방향성이 없다는 거예요.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하는 팝송이 있습니다. 그 가사 내용이 이런 거예요. 어떤 춤추는 홀이 있고 술집인데 거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판당고라는 춤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 춤을 좀 췄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잘 춘다고 주위에서 부추기는 거예요. 신났지요. 열심히 춤을 췄어요. 아무 이유 없어요. 주위에서 으샤으샤~ 전달전달~ 아무 이유 없어요.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이 호응에 나는 충실했고, 그리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이것저것 하면서. 내 인생이 열심히 살았어요. 이유 없어요. 그냥 잘한다, 잘한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호응해서 열심히 살았고, 그리고 충실했고 진실 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는 촌 동네의 방앗간 주인이 술 먹으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그 여자의 과거이야기를 해버렸어요. 원래 옛날 미국의 방앗간은 동네 소문 돌고 도는 데입니다. 요새 한국 같으면 미장원이죠. 미장원에서 소문 돌 수밖에 없어요. 머리 손질하면서 가만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야기를 수다를 떨어야 되지 않습니까. 미국 촌에선 방앗간이 그 역할해요. 저 여자가 과거에 저런 여자란 순간 그 여자는 정신이 몽롱해지고, 그 가사에 보면, 유령 같고 몽롱해지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이야기하고 난 뒤에 그 여자는 춤을 끝내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더 이상 이 동네에서 못 살겠다고 저 바다로 갈란다고 했어요. 가사 내용이 시적이에요. 바다로 간다는 말은 세속을 떠나서 나는 이제는 이 세상과 격리된 다른 세계에 가겠다는 거예요. 가사에 보면, 열여섯 번째의 성녀, 거룩한 천사 같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바다 속이 뭐냐 하면 이 세상과 격리된 천국 같은 곳으로 여인이 사라졌다.

그게 가사가 3절, 4절은 안 나오지만 옛날에 나왔던 가사를 보면, 남들도 같이 따라서 여자와 함께 세속을 떠나서 종교에 귀의했다는 그런 내용인 거예요. 얼굴이 하얗게, 우리말로 창백한 얼굴. 여기서 그 가사를 보면서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남들이 시키는 대로 어릴 때부터 가족이 나한테 기대하는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주위에서 친구들이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했고 열심히 춤을 췄고, 그리고 진실했고 하루하루 삶에 대해서 게으르지 않고 살았고, 더구나 이것저것 하면서 생애를 보내왔다.

이것저것 하면서 이 장사, 저 장사,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다 해봤다. 왜, 왜 했는데요? 살고 싶어서. 왜 살아야 되는데? 몰라요. 그게 답이 없어요.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 내가 왜 행복해야 되는지 답이 없어요. 다만 어렴풋이는 알지요. 내가 행복해야 될 이유는 모르겠지만 행복하려면 돈이 있어야 된다는 그것, 현재가 내가 돈이 없다는 돈이 남자나 여자를 만나야 된다는 것, 그것 하나는 알지요. 돈이냐, 말씀이냐? 돈이죠. 묻는 사람이 나쁘지요.

인생은 이렇게 살아가면서 나름대로의 전쟁을 벌이는데 무슨 전쟁이냐? 나를 지키는 전쟁이에요. 이방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뭘 지킨다 했어요? 언약을 지키는 전쟁이죠, 언약. 언약을 지키는 전쟁을 여호수아 3장 5절에서 보겠습니다. 3장 5절도 되고 3장 14절도 되는데 이게 요단강 이야기에요.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13~17절)

아까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에게는 뭐가 왔습니까? 사닥다리에서 뭐가 쏟아졌습니까? 위에서부터 내려왔지요. 천사들이죠. 창세기 32장에 보면 그 천사들이 뭐냐? 마하나임이에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위에 있던 하늘의 군대가 이 지상에 대하여 전쟁하러 내려오는 거예요. 어딜 통해서 내려왔습니까? 야곱을 통해서 내려왔기 때문에 야곱이 언약을 받은 거예요. 야곱의 행보가 아닙니다.

야곱이 복 받는 게 딴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잡은 게 하나님의 이유 있음, 의미 있음, 하나님의 진리가 야곱에게 찾아온 거예요. 찾아온 그 진리 내용이 뭐냐 하면 이 땅에 있는 개인주의와 하나님께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이미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죽도록 돼 있어요. 인간은 일단은 죽어야 되는데 이상하게 중간에 뭔가 끼어들었어요. 사탄이 끼어들어서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막무가내로 버티기에 들어갑니다. 나는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너도 나도 다 여기서 죽을 사람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그저 매일 생각하는 것이 오늘도 살아야 되겠다는 것뿐이에요. 음식은 뭐 먹고, 옷은 뭐 입고 그건 뒤에 문제에요. 일단 기본 기둥은 뭐냐? 사는데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담배연기 피해서 10층으로 이사하든지, 일단 사는데 의미를 둬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적은 나 빼놓고 다 적이에요. 나를 지키는 전쟁이죠.

그러나 언약은 뭐냐? 이 땅에 와서 그런 인간에게 맞아죽은 그 주님을 지키는 전쟁, 어린양의 전쟁. 요단강 갈 때 그들이 뭘 멨습니까? 인간들이 요단강 들어갈 때 제사장들이 ‘물, 물, 물, H₂O, 물 오지 마, 오지 마.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지나가는 거야.’ 그들이 나서서 막았습니까? 자연이 인간의 말 들어요, 안 들어요? 안 듣지요. 자연이 피싯 웃습니다. ‘뭐냐 너? 아무 의미도 없는 존재가 내가 왜 네 말 들어야 돼? 나는 하나님 말 들어. 나는 네 말 안 들어.’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찾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은 바로 언약궤, 희생제물의 피가 발리게 되는, 하나님의 죽음이 발리게 되는 언약궤, 하나님이 어린양의 피 보고 넘어가듯이 언약궤 보고 자연이 스톱한 거예요. 물이 더 이상 아래쪽으로 흐르지 않고 요단강이 끊어졌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거는 행복의 문제가 아니에요. 신기해요. 내 위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래 됩니다. 세상은 내 말 듣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가 감안해야 돼요. 적어볼게요. ‘세상은 나의 말을 안 듣는다.’ 나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나를 지키는 전쟁이 주인공, 이게 나잖아요. 그런데 세상은 이런 나의 필사적인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말을 안 듣습니다. ‘제발 좀 죽어 줘.’ 그럼 인간은 하지요. ‘그래 죽어줄게.’

그러나 그 죽어줄 게 하는 것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죽어도 죽는 이유를 모르고 죽기 때문에, 이거 또 안 돼요. 살아도 답이 아니고 죽어도 답이 아니에요. 뭐 이유를 알아야 돼, 이유를. 살면 왜 살아야 되는지 이유를 알아야 되고, 죽으면 왜 죽어야 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돼요. 단 하루를 살더라도.

그래서 이스라엘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모든 중심이 성전 중심이고 제사장과 찬양대, 문지기 성전 핵심이거든요. 유사와 재판장은 뒤로 밀려요. 핵심은 레위 지파가 이루는 성전이 핵심이에요. 그렇다면 그 핵심에 있던 성전의 내용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주님께서는 인간 중심이 아니고 모든 우주가 중심이 아니고 장차오실 메시아가 죽는 어린양이 죽어서 이스라엘이 되듯이 메시아가 죽어서 영원한 천국을 만드는 그 중심임은 이미 메시아 오시기 전에 다윗 때에 그걸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알려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았다 하지요. 그것으로 안 돼요. 알았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다음부터는 이스라엘 몰고 이러한 하나님이 정신이 없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나라와 다윗이 대판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거는 나의 행복을 지키는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과 그 의미와 이유를 지키는, 인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 언약 속에는 어린양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죽으심 자체를 지키는 군사들로 살아갈 때 그들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국가의 백성이라는 것을 역대상이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96) 23-11-06 07:03 
20231103b 울산강의-역대기상(25강) 27장 1절 : 죽음으로 연결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27장으로 넘어갑니다. 거기에 군대조직이 나와요. 이만 사천 명씩 열둘로 나눠서 번갈아 전쟁을 벌인다 했잖아요. 근데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이 전쟁, 이스라엘 내 자체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군대를 만든 게 아니에요. 바깥에 이스라엘 외에 다른 이방나라, 사다리로 내려온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나라, 그 나라와 전쟁하기 위한 군대가 조직돼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적이 뚜렷해요. 언약이 없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의 적이다.

그러면 다른 나라 그 사람들은 자기를 짐승으로 봅니까, 사람으로 봅니까? 본인들은 사람이죠. 그런데 언약이 없는 것을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바로 악마의 대리자로 보는 거예요. 악마는 눈에 안 보이잖아요. 인간은 눈에 보임, 악마는 눈에 안 보임. 눈에 안 보이는 대리자가 인간들이 되는 겁니다. 이건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여호와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이스라엘도 눈에 보이는 여호와 플러스,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 이 집단과 이 집단이 전쟁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군대를 조직케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쪽 이방나라에서는 뭐냐 하면 악마의 마음을 그대로 개인이 다 분배받았기 때문에 개인의 안목이에요. 개인의 안목이란 보나마나 목표는 뭐다? 자기 행복. 자기 행복이 되려면 일단은 살고 봐야지요. 양심이고 뭐고 배부르고 난 뒤에 양심 찾고 바르게 사는 거지 일단 죽을 판인데 양심을 어딜 찾아요? 일단 살고 보자~잉. 살고 난 뒤에 여유 있으면 남한테 도와주든지 바르게 살든지 하겠다.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의 안목, 자기를 지키는 안목이죠. 반대로 이것과 전쟁을 벌이니까 반대가 되겠지요. 이스라엘은 누구의 안목입니까? 여호와의 안목이죠. 안목, 세상을 보는 눈, 세상 전체를 보는 눈.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여호와의 안목 가운데서 이스라엘은 무슨 중심이냐 하면 성전 중심이거든요.

성전에서는 매일같이 어린양이 죽어 나갑니다. 성전은 뭐냐 하면 죽음을 매일같이 살려내요. 죽은 데서 살려내는 게 아니고 죽음 자체를 살려내요. 어린양의 죽음 자체를. 그렇다면 이 성전이 없이는, 성전 앞에서 모든 이스라엘은 개인의 안목은 죽은 안목이 돼요. 개인의 안목, 다시 말해서 이방민족의 사고방식은 여호와 앞에서는 산 것이 아니고 뭐다? 죽은 것이 돼요. 이들이 죽었고 성전에 계신 하나님의 언약은 살았기에 비로소 이들은 언약 집단이 되는 겁니다. 전쟁에 승리할 수가 있는 거예요. 대자연도 그 말을 듣고요.

그래서 지금 방금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다른 간단한 문장으로 쓸 수가 있습니다. ‘죽음도 성도의 일과 중에 하나다.’ 어떤 경우라도 죽으면 안 된다가 아니라 내가 날마다 죽는 이것도 성도의 하루일과 중에 포함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할 때 전쟁의 성격이 뭐냐? 어떤 성격과 성격의 마주침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걸 하기 위해서 우린 어디서부터 하는가? ‘적이 무엇이냐’ 하기 전에 이스라엘 내에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는 ‘나는 무엇이냐’를 다시 규명을 해야 되겠지요. 규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가 스스로 해보는 겁니다. 제가 질문을 해볼 테니까 여러분들이 속으로 답변을 해보세요.

‘도대체 나는 무엇으로 압박을 받는가?’ 하루 일상 가운데서.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마음에 심적인 압력을 받습니까? 무엇 때문에? 주관식이 어려우면 객관식으로 고치겠습니다. 외부요소냐, 아니면 내 내부요소냐? 더 어렵게 돼버렸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외부 때문에 압력을 받습니까, 내 내부 때문에 압력을 받습니까? 기다릴 필요 없어요. 정답은 외부요소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이렇게 돈이 없고 어려워도 내가 신앙이 있으면 평화로울 텐데.’ 어디서 지금 꿈을 꾸십니까? 내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주님 생각하고 십자가 생각하며 마음의 평정을 마음을 낮추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라고?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무슨 망상을? 그런 망상이 어디 있어요. 도 닦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의 내부는 외부에서 주입된 거예요.

자, 외부. 우리 외부는 삶의 환경이에요, 환경. 우리를 둘러싼 삶의 환경입니다. 우리가 자꾸 개인 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서 나만 지키면 된다고 그런 생각을 하니까 환경이 절대적으로 나한테 작용한다는 그걸 모르고 뭔가 일이 안 되면 지리산 쪽으로 자연인 되어 도망치기 바빠요. 지리산 가면 장날 안 옵니까? 약초 팔러 안 내려옵니까? 지리산 가면 전기세 안 받아요? 인간이 환경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없어요. 자꾸 도망치고 누구 안 만나고 내빼고 숨고 그러면 행복합니까? 요새 빈대나 들끓지, 외래종 빈대나.

‘나는 도시가 싫어. 전원생활 할 거야.’ 전원생활 하면 그 근처 병원 있어요? 병원 한 번 오려하면 기름 값이 치료비보다 더 들 건데. 자연과 벗해요? 아이고, 참 내. 뭐 적게 먹으면 되지. 하여튼 시건머리 하나도 없어. 무슨 꿈을 꾸고 있어요.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그 두 나라 적게 먹고 바르게 살면 어려움 이길 수 있다고요? 그 두 나라에 뭐가 필요한 줄 알아요? 돈? 아닙니다. 달러입니다. 자기 나라 돈 받지도 않아요. 달러 있어야 돼요, 달러. 우리나라 전쟁 일어났다? 우리나라 화폐 받습니까? 일본으로 도망치려면. 달러내지는 금이 있어야 되겠지요.

사람이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기껏 불쑥 튀어나오는 성질이 뭐냐? ‘나만 적게 먹고 피하면 되지’ 이러는 거예요. 그게 자기를 지키는 극단적인 방법입니다. ‘세상만사 다 귀찮다. 어디 농약 없나. 먹고 죽으면 그만이지.’ 죽으면 그 뒤처리 누가 하는데? 사람은 존재하는 자체가 민폐 끼치는 거예요. 내가 존재하는 자체가.

인간은 주변에 있는 인간들에게 둘러싸여있고요, 주변에 있는 자연환경에 둘러싸여있고요, 그 인간과 자연환경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 환경이 아니에요. 그냥 주어진 거예요. 따라서 그중에 태어나고 살아가도 그냥 주어진 거예요. 던져진 존재란 말이죠, 우리가.

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어진 그 당시 환경을 요즘 말로 바꾸겠습니다. 시간+공간, 네 자잖아요. 세 자로 줄이면 뭡니까? 시공간. 합쳐야 될 이유가 있어요. 내게 주어진 시공간은 마귀와의 전쟁을 하기 위한 환경입니다. 이게 어디 나오느냐? 히브리서 13장에 나옵니다. 가기 전에 누가복음 12장 49절 잠시 보겠습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예수님 계시고 두 가지 요소가 더 있지요. 두 가지 요소, 무엇과 무엇입니까? 예수님 계시고, 불. 불을 어디 던진다? 땅. 예수님, 불, 땅 세 가지 요소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한 환경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제공된 거예요. 불을 땅에 던져서 세상을 불로 태우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요청한 것도 아니고 원한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그냥 실시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 불태우면 하나님은 얼마나 섭섭해 하시는가? 섭섭해 하는 것과 반대에요. 에스겔 5장 13절에 보면, “이와 같이 내 노가 다한즉 그들에게 향한 분이 풀려서 내 마음이 시원하리라” 하나님을 시원하게 해드립시다. 하나님을 시원하게 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시원하냐? 창세기 3장 15절에 메시아는 적이 있어요. 적이 누구냐? 뱀의 후손입니다. 사탄이에요. 인간은 사탄이 눈에 안 보이고, 역시 예수님도 눈에 안 보이고 하나님도 눈에 안 보여요. 보이는 것은 인간 밖에 없잖아요.

인간 밖에 없으니까 인간에게 물어봐요. ‘너 왜 살아?’ ‘그냥 살기 위해서 살지.’ ‘사는 목적은?’ ‘내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맨날 평생 동안 들어온 것은 그 말 외에는 딴 말을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럼 행복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한데?’ ‘돈이 필요하지.’ 여러분 그것 외에 그 말이 납득 안 되고 이해 안 되는 그런 것 없잖아요. 온몸으로 숙지했으니까. 온몸에 젖어들었어요. 우린 스펀지 같아서.

그럼 우리의 환경은 뭐냐? 사람은 무조건 살아야 되고, 사는 건 행복해야 되고, 행복하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돈 챙기고 난 뒤에는 그다음부터 착한 일 많이 하면 된다. 이러한 것을 우리가 환경으로 받은 거예요. 내가 골라잡은 게 아니고 환경 자체에요. 거기에다 주께서 뭘 던진다? 불을 던져버리는 거예요. 마귀가 만든 환경이거든요.

그러면 주께서 그렇게 불 던질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근거가 히브리서 13장에 나옵니다. 13장 11절부터 보면,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뭔 뜻이냐 하면 옛날 제사드릴 때 그랬어요.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고 피는 제사장이 가져가서 성소 안에 피 바르고.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환경, 환경입니다. 그런 환경을 시공간을 왜 이스라엘에게 마련했느냐 말이죠, 구약 때에. 그건 하나의 모형이거든요. 구약은 모형이고, 하나의 예비적인 것이고 그림자에요. 하나의 은유고 비유란 말이죠. 은유가 있다, 비유가 있다, 모형이 있다는 말은 완전한 실체가 언젠가는 등장한다는 뜻이거든요. 그게 등장했다는 거예요, 히브리서 13장에서는.

등장했는데 어떤 분이 오셔서 바로 제사법대로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 피 흘리시고, 12절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절,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이 말이죠. 왜? 이쪽 환경이 아니고 예수님 계신 곳이 언약이 완성된 환경이기 때문에 마귀가 있는 환경을 피해서 주님 계신 곳이 마귀 피할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에요.

거기서 뭐 하느냐? 14절,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그다음에 있다, 없다? 없고. 불사르기 때문에 영원한 곳은 없고.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사람이 그랬다는 말입니까? 예수님 당시 시공간이 그랬단 말입니까, 이렇게 물을 거예요.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고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모든 시공간의 가장 중심부에요. 거기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야곱의 사다리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꽂힌 거예요. 꽂혔는데 야곱의 언약, 사다리는 완성한 분은, 인자가 사다리 타고 올라가듯이 예수님께서 올라가버리면 이미 더 이상 우리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 할 건 아무것도 없이 그분 홀로 다 이뤘다는 거예요. 이제는 그분이 올라간 그 곳에 가면 되는 거예요.

그게 어딘데? 언제 가는데? 우리가 일곱 시에 갈까요, 안 그러면 어디 갈까요? 지금 전쟁하고 있는 하마스, 예루살렘에 갈까요? 시공간 문제거든요. 예수님 당시에는 십자가 믿으면 되는데 예수님 십자가 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믿고 그들이 구원을 받았는가? 이 문제가 시공간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요.

‘세종대왕은 착한데 지옥 갔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그때는 한국에 아직 복음이 안 들어왔는데 복음이 안 들어와서 세종대왕을 착하기 때문에 천국 갔겠지요? ‘천국 안 갔으면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에 갔다가 패자부활전 거쳐서 천국 갈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천주교에서 성당에서 연옥설 주장하는 것은 연옥에 있는 사람들은 죄를 정화하기 위해서 짜릿하게 벌을 좀 받아요. 따라서 선조가 성당을 안 나가고 있으면 후손 입장에서는 너무 아프잖아요.

천주교에서 한 것이 뭐냐 하면 이걸 만들었어요. 레오10세도 만들었지만 그전에도 만들었어요. 면벌부, 벌을 면제해주는 서류. 흔히 이걸 면죄부라 하잖아요. 그런데 연옥을 계산한다면 면죄부가 아니고 면벌부에요. 후손이 자기 조상이 아무리 봐도 전혀 마리아도 안 믿고 예수도 안 믿었다 싶으면 마음은 착하고, 착한 사람은 연옥에 갔을 거란 말이죠. 아주 지독하게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중간쯤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고 어중간한 데 갔다 이 말이죠. 갔으니까 후손이 선조를 구원하기 위해서 여기서 면벌부, 또는 면죄부를 돈으로 사는 거예요.

성당에 있는 면죄부에 땡그랑 하고 돈 소리 나는 순간, 여러분의 오대 손은 빠른 속도로 연옥에서 빠져나와서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갑니다. 이게 면벌부, 면죄부 판매 전략입니다. 장사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장사 너무 잘 됐어요. 지금도 장사하고 있으니까. 너무 잘 돼서 그 해의 판매 왕 같은 게 나와 있어요. 그리고 이제 너무 잘 되니까 프랜차이즈 해서 지방에다 돈 받고 팔아요. 10억 팔 권리를 사서 20억 팔아서 10억만 위에 상납하면 되고. 그게 독일과 전 유럽에 유행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조상은 불쌍하기 짝이 없겠어요? 후손이 돈이 없어서 면벌부, 면죄부를 구입을 못하니 이거는 불쌍해 죽겠어. 근데 이런 아이디어가 나왔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우리 마음에 이미 그런 요소가 들어있단 뜻이잖아요. 그 요소가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모든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포기 못하는 게 마지막 남아 있는 게 있다. 그게 뭐다? 내가 나를 지킨다.

그러면 면벌부 사는 것이 남의 조상 살리려 하는 겁니까, 내 조상 살리려 하는 겁니까? 내 조상이죠. 내 조상은 무엇과 연결돼 있다? 현재 있는 나의 존재와 연결돼 있는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고 그렇다 이 말이죠. 우리 할머니고. 우리 오대 손 할아버지를 면벌부 사서 연옥에서 빼냈다 할 때 그 돈을 지불한 나는 얼마나 존재감이 크겠어요.

‘야, 역시 열심히 살았다.’ 열심히 살았고 시키는 대로 했고 그리고 내 삶의 환경 속에 성당이 있으니까 천주교 있으니까 천주교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지요. 아무리 천주교에서 열심히 해도 그 중간에는 누가 있다? 내가 안 죽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악마의 씨앗입니다.

왜 남의 왕 착한데 천당 갔다는 소리 안 하고 세종대왕은 왜 끄집어내고, 이순신 장군은 왜 끄집어냅니까? 내가 존경하거든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죄가 있어요, 없어요? 물어본 내가 나빠요. 세종대왕은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세종대왕이 얼마나 며느리를 억압했고 압박했고, 세종대왕의 비사를 들어보면 얼마나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했는지.

하나의 지위, 하나의 자기의 업무를 지킨다는 것은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업무처리가 안 됩니다, 인간은. 돈 있고 돈이 넉넉해서 돈 쓰며 사는 사람이 인간성 안 좋을 리가 없지요. 그러나 없는 돈을 벌기 위해서 무슨 잔혹한 짓을 총동원해도 돈 벌까, 말까에요.

지금 문제가 뭐였느냐 하면 십자가 오기 전에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그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믿음의 조상들이 쭉 나와 있단 말이죠. 그런데 믿음의 조상들이 공통점이 있어요. 그게 한 결 같이 믿음으로 살았다는 거예요. 그들이 믿음으로서 산 게 아니고, 믿음이 그들을 살렸다 이 말이에요. 참 성경이 어렵지요.

그들이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고 믿음이, 낯선 믿음이죠. 믿음이 그들을 살렸다. 자기 믿음이 자기를 살린 게 아니고 믿음으로 표현도 예수 그리스도에요. 왜? 히브리서는 모든 게 비유고 모형이기 때문에. 어떤 분이 계시는 데 그걸 예수님 오시기 전에 각 시대에서는 믿음이라 하는 거예요.

이걸 식빵이 있다면 식빵을 쪼개는 거예요. 쪼개면 각 식빵이 같은 방향성을 가져요. 뭐냐 하면 아까 피를 흘리고 영문 밖으로 간다는 그 제사의 동일한 방향성이 식빵을 하는 거예요. 이걸 슬라이스 잘라보자. 식빵 자른 것 여러분 보신 적 있어요? 여러분 많이 보셨지요. 제가 가져왔어요. 이걸 보기 전에 히브리서 13장 8절 봅시다. 누가 읽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보세요. 이게 식빵이거든요. 식빵에 실이 있지요. 제 아내 솜씨입니다. 이게 여기서부터 들어가서 단면을 보세요. 전부 다 뭐가 꿰져있습니까? 실이 다 꿰져있지요. 모든 이 단면 하나하나가 그 사람이 살았던 시공간이에요. 그 시대마다 이게 예수님이 변신, 변신한 거예요. 그 시대에 맞게끔. 그럼 노아의 예수 그리스도는 뭡니까? 방주. 아벨은? 죽음. 야곱은? 지팡이. 사사기에서는 그냥 기드온 같으면 뭐겠어요? 삼백 명과 괭가리, 횃불, 항아리 그거겠지요.

그런데 이게 전부 다 동일하다 하니까 동일하게 뚫려있는 거예요. 이걸 히브리서 11장에서 이렇게 돼 있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1절) 여기서 우리 믿음은 아니지요. 믿음은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따로 있는 실상이 믿음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여기 믿음의 조상들의 특징은 뭐냐? 본인을 살리려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허상인 걸 알기 때문에. 허상과 실상 사이에 바로 이 믿음이 연결된 거예요. 오늘 제목을 연결로 할까?

각 시대마다 언약적으로 연결된 거예요. 물론 예수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더 이상 모형은 없고 오직 연결고리는 뭡니까? 예수님의 피 밖에 없어요. 그게 히브리서 13장에 나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20절) 무슨 피로? 언약의 피죠. 언약의 피의 효과를 보세요.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언약의 피가 지금 누구한테 있다? 이 시공간에서 우리에게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가짜지요. 아까 강의에 보세요. 세상에서 인간은 뭐냐? 인간은 환경이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해요. 그런데 언약에서는 환경이 중요합니까, 내가 중요합니까? 그리스도가 이루어낸 예수님의 피로 이뤄낸 그 환경이 나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여기 환경이 나오는데 12장 18절부터 보면,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이게 어떤 환경입니까? 무시무시한 환경이죠.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21절) 했다 이 말이죠. 12장 26절,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늘이고 땅이고 다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28절)

이런 이야기가 되려면 아까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살기 위해서. 왜 사는가? 몰라. 살아서 뭐 할 건데? 행복하려고. 왜 행복하려는 데? 몰라. 전혀 우리는 이 주변에 있는 환경이 누구 말 듣는지는 생각 못하고 모든 신경과 날카로움이 오직 자기가 돈 벌고 밥 먹고 사는데 집중, 집중하고 있어요. 이 세상에 진실 된 것은 나밖에 없고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은 나밖에 없고 모든 걸 잃어도 잃지 말아야 될 것은 오직 나니라. 이게 바로 마귀의 생각이에요. 악마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들어야 되겠네요’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제가 아까 물었잖아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압박을 받습니까? 외부적인가, 내부적인가? 이제 나왔지요. 외부적이죠. 환경. 환경의 일부가 우리 자신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환경을 한 번 바꿔보자. 전에는 절에 갔는데 교회 다녀보자. 환경 바뀌면 새 사람 됩니까? 그 몸으로? 말씀 들으면 되겠지. 그런다고 사람이 되겠어요? 안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 때문에 그래요. 사탄도 말씀 들고 나온다. 악마가 그냥 악맙니까? 사탄도 뭘 들고 나온다? 말씀을 들고 나와요. 그럼 사탄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시편 91편11절, 제가 읽겠습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서 40일 동안 시험 받을 때에 악마가 먼저 떡으로 이야기했어요. 요새는 돈이죠. 하나님께서 일부러 예수님을 40일 굶게 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본성은 어떻습니까? 눈에 뵈는 게 없지요. 우선 먹고 보자. 나 살고 보자잖아요. 그러니까 ‘나 살고 보자’ 할 때 ‘그래 너 살아야 돼’ 하고 동조하면서 등장하는 예수님 말고 다른 인간 같으면 언제든지 동조해요. 마귀는 항상 인간 편이에요. 마귀는 우리의 친구입니다. 왜? 자기의 부하니까 자기 부하 관리해야지요.

원래 악마가 하늘에 있던 천사에요. 하늘에 있던 천사가 땅까지 내려와서 인간과 합류했다는 말은 범죄 한 인간에게는 주인이 없어요. 잘 됐지요. 주인 없는 빈자리에 누가 주인 차지합니까? 마귀가 주인 자리 차지한 거예요. 그래서 으샤으쌰 해서 우리끼리 살자는 거예요. 제가 누구 글에 댓글 단 게 있어요. 오늘 아침에. 누가복음에 8장 30절에 나온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네 이름이 뭐냐고 물어요. 그러니까 사탄이 하는 말이, ‘군대’입니다. 군대가 뭐냐 하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라는 거예요. 여럿이 뭉쳐있다는 거예요. 군대, 집단이라는 뜻이에요. 집단을 풀이하면 이 세상에 진짜 모습은 우리 인간들끼리, 우리끼리. 유엔, 협상 뭐든지 우리끼리. 신은 그냥 들러리에요. 꼭 필요한 게 아니고 아쉬울 때 빌면 되는 거고요. 진짜 결정 내리고 모든 의사 결정하는 것은 우리끼리, 인간들끼리 해요. 그게 이 세상입니다. 형편입니다. 그게 바로 악마에요. 악마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악마 이름이 뭐냐? ‘우리끼리’에요. 군대.

그 악마가 알아요. 예수님이 자기를 멸하러 왔다는 걸 알아요. 악마는 알아요. 인간은 몰라요. 악마라는 마약에 도취되어서 그냥 나만 살면 끝나요. 나만 행복하고 나만 살면 끝나요. 인생이란 이유도 필요 없고 원인도 필요 없고 목적도 필요 없다는 거예요. 잘 먹고 잘 살면 끝이라는 거예요. 모든 인간의 말 대화에는 바닥에 그게 받쳐있어요. 무심코 내뱉는 말 한 마디가 전부 다 그게 받쳐있어요.

오늘 식사하는 데 아르바이트하는 직원이 우리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십니까?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기 바랍니다.’ 그게 왕한테 할 소리는 아니거든요. 왜? 소비자가 왕이니까. 그럼 그 사람이 나쁜 말 했어요?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잖아요. 우리 인간세계에서 듣기 좋은 말이 뭡니까? 나 잘 되는 것보다 듣기 좋은 말이 또 있을까요? ‘좋아 보입니다. 참 좋아 보이네요. 요새 신수가 훤하시네요.’ 모든 대화에 그게 바탕에 깔려있어요.

그러니까 시편 91편 이 이야기, 성경말씀이잖아요. 성경말씀이 사탄이 이야기할 때는 이미 사탄 나름대로의 해석이 품어진 채 우리에게 성경말씀을 전하는 거예요. 누가? 사탄이. 우리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원하는 걸 주는 거예요. 사람을 좋게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사도 바울의 말이,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사탄의 종이다.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사기 치는 사람과 사기 당하는 사람, 두 종류 있다 했거든요. 그런데 교회는 참 좋아요. 아무도 사기 안 당했어요. 왜? 다 사기꾼이기 때문에. 전부 다 믿음도 하나도 없으면서 믿는 척하고 앉아있는 거예요. 나 살기 위해서 왔으면서. 죽으려고 왔습니까? 교회라는 환경이 우릴 살려주질 못해요. 왜? 목사가 복음을 전해서 듣는 내가 사탄적 해석을 가미해서 들어버리니까.

그것도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교회에 있을 때나 하는 소리지 요새는 그런 목사도 거의 없으니까요. 아예 고객 원대로 사탄적 해석을 가미해서 해버려요. ‘이런 것 듣고 싶었잖아, 이런 것’ 하면서 다 알고 전해요. ‘일곱 번 넘어져도 말씀 들으면 여덟 번째 일어난다. 이런 것 듣고 싶었지. 희망적인 것, 긍정적인 것 이런 것 듣고 싶었잖아. 이야기해줄게.’ 고객이 좋아야 헌금이 들어오니까.

정리합니다. 사탄도 전쟁을 벌이는 데 뭐냐 하면 사탄의 전쟁, 주님이 자기를 공격하는 걸 아니까 대비해서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자기를 위한 전쟁. 나 천당 가는 것, 내 구원받는 것부터 내가 행복한 것, 내가 잘 사는 것, 부자 되는 것. 수요일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재산과 건강과 체면, 이 세 가지 지키는 거예요. 체면은 자기 의지요.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다.’

이 세 가지가 예수님 시험 받을 때 세 가지 시험 아닙니까? 마귀는 변한 적이 없어요. 예수님을 다루든, 우리를 다루든 이 환경이라는 것, 악마가 지배하는 환경은 조금도 이 세상 불바다 될 때까지 변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우리는 각자가의 슬라이스 우리 시대에 쪼개진 시공간을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빵 하나하나마다 각 시대 상황, 이것 우리 할아버지고, 이것 우리 아버지고, 그 뒤에는 우리 시대고, 후손들 시대에요. 각 시대마다 인간들은 똑같은 슬라이스 표면을 갖고 있습니다. 재산, 건강, 체면. 악마가 우리에게 습득되도록 주어졌어요.

그래놓고 교회 가면 사람 된다고요? 교회가 이미 마귀한테 넘어간 지 언젠데 아직도 교회 희망 겁니까? 생각해보세요. 복음 하는 목사 말고 세상 목사, 딱 두 가지입니다. ‘복음 잘 전했다’ 이것 때문이냐, 아니면 ‘교회 부흥됐다’ 어느 것 할래? 그러면 그거야 하나님 뜻은 복음 전하는 거지. 그러면 다시 질문합니다. ①복음 못 전해서 속상하다, ②교회 교인들 다 나가서 속상하다, 어느 것 할래요?

이런 건 목사뿐만 아니고 우리 가정도 직장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끝까지 마귀의 사람 아니었던 적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어요. 예수님의 무기는 뭐냐? ‘나 죽었다’였습니다. ‘나 하나님인데 너 때문에 죽었다.’ 이게 무기에요. ‘너 살려했잖아. 나 죽었다.’ 너는 살려했고 나는 죽었다. ‘너는 내 죽음 앞에서 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해?’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환경을 십자가란 환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시편 91편 이 말씀을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4장 6절,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사탄이 말씀을 가지고 거론하는 거예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라는 말씀이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이죠. 그런데 해석이 뉘앙스가 야리하죠. 이상하죠.

뭐냐 하면 말씀대로 하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중력에 의해서 부딪쳐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죽지요. 죽는데 말씀에 의하면 이게 말씀대로 한다면 너는 죽는다, 안 죽는다? 안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탄이 우리에게 말씀을 들이댈 때는 이미 객관식 문항이 정해져 있어요. ‘너 죽기 싫지, 그지?’ 이미 정하고 들어옵니다.

‘니 죽기 싫지, 그지? 너 살고 싶지 그지? 나 네 마음 다 알아. 너 살고 싶잖아. 그래서 교회 나왔잖아. 살고 싶어요. 재산, 건강, 체면 이것 지키고 싶어서 교회 나왔잖아. 더 키워달라고. 그래서 나와 내 가정 잘 되라고, 행복하려고 그래서 왔잖아.’ 이건 뭐 귀신이 아니라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마귀만 아는 것 아니잖아요. 우리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나 아니야, 할 때 돈이 한 200억 있든지 300억 있으면 아니요, 할 수 있어요. 돈이 그만큼 없는 이상은 이거는 절박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주님의 답변을 들어보세요. 사탄이 성경말씀을 앞장세웁니다. 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너 죽고 싶어, 살고 싶어?’ 이 질문은 예수님 빼놓고는 모든 인간들 다 넘어뜨린 질문이에요. 악마가 그동안 모든 인간을 다 넘어뜨렸어요. 심지어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마찬가지였어요. 무너뜨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살렸기 때문에 야곱이 이스라엘 된 거예요. 야곱이 삼촌 집에 있으면서 살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어느 인간도 사탄이 알고 있는 범주 안에서 헤매고 있는 거예요. 지금 완전히 포로 잡혀 있는데 어떻게 빠져나오지요? 예수님의 답변은 뭐냐?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가 이야기했다는데 <햄릿>에서. 주님께서 사느냐 죽느냐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뭐가 문제냐? 내가 죽는 것이 또는 내가 사는 것이, 같은 말이에요. 하나님의 일이냐, 아니냐는 거예요. 이렇게 묻는 거예요.

누가 로마서 8장 28절 크게 읽어보세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오케이 또는 다른 말로 패스. 작품 자알 나왔다, 이 말이에요. ‘작품 멋지네, 이것 누구 솜씨입니까?’ 사랑하는 자, 담당자가 누구에요? 전문가가? 주님이죠. 주님한테는 사랑하는 자가, ‘이것 잘 나왔네.’ 도자기를 굽는데 ‘빛깔 봐. 잘 나왔네.’ 사나죽으나 누구의 것이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에요. 차원이 달라요, 차원이. 시공간 차원이.

미안하지만 이 빵 보세요. 지금 우리는 눈에 보이는 시공간 이것만 보이죠.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에 관통하는 게 있어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실상은 죽음 방식으로 끝까지 통과하는데 그것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 그 동일하신 분이 역사 바깥으로 튀어나온 게 뭐냐?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그리고 부활이에요.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선이에요.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죽기도 하고 때로는 살기도 하고. 이거는 주님의 솜씨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은 사탄을 이겼어요. 다시 말해서 네가 나한테 그런 질문하는 것조차 누구의 뜻이었다? 그것조차 아버지의 뜻이요 하나님의 뜻이었다.

다시 마태복음 4장으로 가봅시다. 4장 10절에,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이게 신명기 말씀입니다(신6:13). 같은 성경말씀을 놓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한 해석을 하느냐, 아니면 이 말씀이 내가 원하는 나의 행복과 내가 건강하고 재산 얻고 내가 남한테 칭찬받는 이 노림수, 이걸 충족시키는 말씀인가? 한쪽은 사탄, 한쪽은 십자가는 주의 일, 이 전쟁을 해야 될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왜냐하면 왕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리에 앉은 왕이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에 다윗 왕은 하나의 장차 천국의 모형이고 비유인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세상 환경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 누가 누구와의 싸움인지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장악했던 악마를 이겼음을 깨닫고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간에 그것마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일인 것을 조금도 의심치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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