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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7 20:56:43 조회 : 5836         
해외강의(연대연합) 140304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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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IP:119.♡.90.53) 14-03-22 02:08 
201403 연대연합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피]라는 책의 중요한 내용들을 보면서 핵심은 성경 전체 해석을 어떻게 일관되게 해석해야 되는가?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일관되게. 어떤 특정 구절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볼 때 어느 대목을 설교해도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 방법에 대해서 그동안 한국교회나 세계, 개신교 말고 천주교를 포함해서 교회사 말고 신학사라고 합니다.

 

신학사가 뭐냐 하면, 작년에 제가 대전에서 50시간을 강의했는데, 기독교 들어오고 이후부터 신학이 어떻게 발달했느냐는 정도가 아니고 그 전에 헬라의 탈레스부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왜 그들을 거론해야 되느냐 하면, 이미 그들이 신에 대해서 언급을 했거든요. 그래서 단출하게 이야기해서 교회의 신학은 히브리 사상과 헬라 사상의 결합이다.

 

그러면 단출한 것만 외울 게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란 말이죠. 그들도 지식인들은 성경을 알고 있거든요. 사도의 편지도 알고 있고. 구약성경은 옛날부터 신성시해서 알고 있고. 특히 유대교는 교육 자체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백성이라는 것은 구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잖아요. 인간이 만든 헌법이고 이런 것은 뒷전이고 중요한 것은 성경 법이란 말이죠.

 

그래서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권위는 구약성경입니다. 그걸 통할해서 율법이라 하고 나누면 지혜와 율법 또는 더 보태면 선지서 등 나오지만 어쨌든 전체를 합해서 법, 그리고 전통적으로 법을 해석한 추가된 주석, 신앙 있는 선배들이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연구해서 토를 달아놓고 거기에 대해서 해석을 가미한 그것도 일절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까지 합류해야 된다.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유대교 신학자들의 특징이 이거 하나거든요. ‘역사성’입니다.

 

역사는, 인간의 지식은 누적 될수록 진리에 접근한다. 이겁니다. 인간의 지식은 역사 흐르면 흐를수록 진리에 접근하게 돼있다고 그들은 믿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무엇인가는 시간이 흘러가면 인간의 지혜가 더 발달할 것이고 잘못된 것은 소거해버리고 진리에 부합된 엑기스만 모으는 겁니다.

 

모은 것은 후손들에게 물려줘요. 물려주면 그 다음 차례의 신학자들이 더욱 더, 지식이란 언어지식을 포함해서 어법, 문법, 역사적 상황들을 고려해서 “이것은 우리 선배들이 오해했네. 그것은 이 시대와 안 맞아.” 지금보다 지식이 발달하지 못해서 오해한 부분은 제거하고 충실하게 진리에 가까운 것만 따로 모으고 추가해서 그들은 역사적 해석법을 구축해서 이것을 전승이란 이름으로서 가르쳤습니다.

 

이 전승에 대해서 시비 거는 사람들은 역사적인 신학적인 작업을 거치고 난 뒤에 비로소 가타부타 이야기하라. 자기 마음에 안 맞는다고 성경해석 틀렸다고 일방적 주장을 할 수 없고 이 말씀이 옳다는 것은 그저 이 시대에 사는 신학자들의 권위가 아니고 아브라함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권위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교육을 시키기 때문에 감히 아마추어가 프로한데 시비 걸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의 해석법은 일단 역사적 해석법이 구축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뭘 하느냐 하면, 양육, 훈육이고 교육입니다. 전반적인 교육이지요. 잠언서에 보면 어린아이들을 가르쳐야 되니까. 아비는 가정의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부모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계시전달 노선에서 이탈 돼요. 이것은 아버지의 권위 정도가 아니고 대대로 아버지에게 부여된 가정의 영혼을 책임져야 될 가정의 목회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일년에 세 차례씩 세미나에 가야 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제사장들이 있어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하는 일은 방금 이야기한 역사적 권위가 어떻게 구축 돼왔는가? 그 신학역사를 공부하는 거예요. 지금 신학교에서는 신학역사 공부를 못해요. 왜냐하면 시간도 없고 급조해서 목회자를 양성해야 되기 때문에. 헬라철학부터 시작해서 터툴리안, 천주교 신학까지 섭렵해서, 개신교란 다른 게 아니거든요. 천주교에 반발해서 나왔잖아요. 반발했다면 반발한 정답만 쥐고 있으면 그 정답이 의미가 없어요. 어떻게 해서 반발했는지 그쪽 이야기를 다 들어줘야 돼요.

 

그리고 1517년 루터만 개신교라고 하는데 그전에 천주교에 대해서 반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많은 신비주의자들의 등장했고 많은 이단들이 있었지만 정치적인 조치에 의해서 한 우산 속에 포용시킨 거예요. 정치적으로 안 되니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신학이 갈라지지 않습니까. 나중에는 서로 다른 삼위일체가 등장하고요.

 

그런 과정들을 놓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우리는 개신교라고 한 우산을 썼는데 그 개신교에 대한 반발의 요소가 이미 개신교 이전에 천주교에서 나온 반발의 요소를 반복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단이라고 했다가 정치적으로 자기편이라고 한 그러한 정치적 조치를 개신교가 똑같이 하는 거예요. 안 맞는다고 했는데 갑자가 교세가 커지고 그 교회가 숫자가 많으니까 역시 하나님이 저렇게도 역사하네 하고 수용이 된다고. 순복음교회가 대표적인 경우잖아요. 교인이 수십 만 되니까 무시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면 우리의 교회는 진리다. 왜 진리가 한결 같지 않지요. 진리라고 해놓고 왜 양적 부흥에 쉽게 굴복하는지. 진리라고 했으면 끝까지 진리여야 되지, 무엇이 무섭고 무엇이 실용적이고 무엇이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겠어요? 안 되지요.

 

그래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적 해석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아까 이야기한 신학사, 신학에 관한 역사입니다. 여기에다 권위를 부여해요. 제가 방금 이야기했습니다. 신학 자체에 권위를 부여했지요. 그럼 물어봅시다. 신학 자체에 권위에 있습니까? 그 신학을 다루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겠습니까? 전자는 분명히 신학 자체에 권위가 있겠지요.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도 만약에 자기가 옳다고 했는데 위반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권위를 박달하든지 존중할 필요가 없겠지요.

 

로마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너희가 왜 지키지 못하느냐?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단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육신의 할례는 했는데 마음에 할례는 안 했다. 따라서 너희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진짜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행해야 이스라엘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런데 로마서 2장의 이 문제는 로마서 10장과 외형적으로 충돌해요.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 거냐? 아니면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 거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도 있는 문제냐, 아니면 둘 다 해야 되느냐? 아니면 하나를 했으면 하나는 없어도 괜찮으냐는 새로운 문제가 부각이 된단 말이지요.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쉽게 이야기하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 성경에서 그 말씀 외에 다른 말씀들은 안 해도 구원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진정한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한다면, 예수 이름을 부르면 그것으로는 모자라고 플러스 마음속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의 완성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건 또 문제가 있어요. 육신의 할례 같으면 문신 같이 한 번 해놓으면 지워지지 않아요. 마음은 심리거든요. 심리는 시간의 흐름에 저촉을 받게 돼있어요. 오전 10시에 믿음이 있다고 여기다가 오후 2시에 갑자기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날 때 천사가 와서 마이크 대면서 “당신, 믿습니까?” 물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마음의 할례를 유지하려면 새벽 3시든, 오전 11시든 언제 들이대도 항상 마음이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해야 되느냐는 문제가 발생되겠지요. 누가 와서 약을 올려도 온유하고 약을 안 올려도 온유해야 되는데 마침 주께서 내가 짜증낼 때 재림해버리면 마음을 찍은 엑스레이 시커멓게 될 수도 있는 문제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로마서 10장에서 이야기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할 때 주의 이름을 얼마마다 불러야 합니까?

 

그러면 나중에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할머니,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몰라.” “할머니, 사도신경은?” “나 그런 것 다 잊었어.” “할머니, 찬송가?” “나훈아 노래 틀어줘. 찬송가는 질색이야.” 이럴 때 그 사람이 50년 섬겼던 권사라면 구원받겠어요? 이것이 목사님들이니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일반 신도들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정신 있을 때 마일리지 바짝 쌓아야 되겠어요? “정신없을 때는 내가 정신 있을 때 고백 많이 했으니까 그걸로 때웁시다.” 이렇게 거래, 흥정에 나서야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유대교는 아주 명쾌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권위가 역사적이에요. 역사가 진리입니다. 역사가 계시에요. 논리적으로 이렇게 돼요. 그들에게 구약성경이 있잖아요. 백이면 백 해석이 다 달라요. 다 다르니까 권위가 없어서 역사에서 믿음이 정말 좋은 출중한 사람의 깨끗한 이성과 깨끗한 오성, 그리고 욕심 없는 마음으로 깊이 평생을 성경을 연구해서 얻어낸 놀라운 신앙적인 경건하고 고상하고 거룩한 누가 봐도 감동할만한 희생적이고 봉사적인 은사처럼 보이는 해석을 끄집어내요. 거기다 역사적 권위를 부여합니다.

 

이 문제가 뭐냐? 옛날에 유명했던 랍비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그야말로 식음을 전폐하고 금식하다시피 성경을 해석했던 놀라운 지혜거든요. 문제는 그걸 가르치는 사람, 본인은 금식을 별로 안 했단 말이지요. 금식도 안 한 상태에서 금식한 사람들의 놀라운 지혜를 속마음 그대로 전달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이걸 일반인들이 의심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한경직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이 훌륭했다. 교인들이 너는? 그분들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살았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정치적이고 돈 좋아하고 그러느냐. 목사들이 그걸 대비한 멘트들, 여러 버전이 있어요. 교황도 마찬가지고. 나에게 주신 것은 나의 개인적인 권위가 아니고 주께 주신 권위입니다. 이게 천주교 주교와 교황의 멘트에요.

 

혹시 교인들이 그렇게 이야기하거든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나의 권위는 나의 개인적인 성실도와 신앙도에서 나온 권위가 아니고 주께서 주신 권위입니다. 그걸 성령으로 기름 부은 권위라고 하는 거예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지도 않은 사찰이 성만찬 만지고 떼고 하면 안 되고, 천주교 같으면 평신도가 복장 갖추고 향 뿌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적어도 인간 속은 더럽지만 깨끗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어졌기에 할 수밖에 없는 권위라고 해서 테두리를 쳐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누가 지적질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하지 감히 네가 지적질하고 그래. 주의 종은 주께서 다루시고, 너는 섬기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1517년 루터가 외쳤던 만인제사장 이론은 어떻게 됩니까? 그거는 그런 뜻이 아니고. 아마추어가 프로의 깊이도 모르면서 들은풍월로 아는 척해. 루터가 그런 이야기했지만 천주교를 의식한 것이고 그 뒤에 갈빈 대에 들어가면 분명히 만인제사장이라 했고 성령 받은 사람은 모두 성도라고 했지만 교회 내에 딱 계급이 져버리지요. 3대 계급으로 정해버렸어요.

 

설교하는 권위는 신이 주신 권위인데 함부로 나대지 마라. 성만찬도 마찬가지고. 특히 성만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치리권. 그것이 만약에 구비되지 않으면 교회의 고상한, 거룩한 질서 자체가 무너진다. 그렇게 해서 목사와 장로직이 있는 것은 구약 때부터 내려오는 장로라는 특별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에 의거한 합당한 권위 있는 질서가 된다고 칼빈은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당신이 정말 교회에서 뭔가 일이 있으면 당신도 우리가 받은 교육 받고 특히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가르치는 은사를 받아서 하라고 나오지요.

 

현대에 칸트 이후에 리츨, 신학사에 보면, 개신교가 시작한지 미처 100년도 안 되서 개신교 스콜라 신학이 됩니다. 스콜라 신학이란 학자적인, 이론적인 것으로 개신교의 전통을 유지하려는 풍토를 말하는 거예요. 마치 천주교가 생기를 잃어버리고 교리가 이론으로 치우친 것처럼 개신교도 안착이 되면서, 개신교가 안착된 것은 국가 권력과 함께 한 거예요. 네덜란드 같은 경우 개신교 국가거든요. 루터가 개신교로 성공한 것은 국가가 영주가 보호해서 그래요. 그전에 루터 이상으로 외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다 실패했어요. 동조자가 없었고 특히 경제적인 후원자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타이밍이 맞아서 성공한 거고.

 

루터 성공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 칼빈입니다. 프랑스 사람인데 스위스로 도망가서 했고, 스위스는 정치적 독립을 바라면서 종교를 이용한 거예요. 나중에 칼빈 죽고 난 뒤에 스위스는 중립적인, 어정쩡한 위치에 처하지만. 그 당시 교회 역사를 보면 종교는 교회를 이용했고 교회는 종교를 이용한 겁니다. 왜냐하면 유럽의 국가개념은 19세기 들어오면서고. 그 당시에는 영주 개념이 있었어요. 영주 개념은 땅에서 나는 생산물을 다 차지하겠다는 경제적인 욕구가 우선이었던 겁니다.

 

개신교에서 신앙고백을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유대교 해석법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이라는 큰 역사적 이슈를 전통적으로 유지하려면 여기서 확정된 신앙고백서가 수십 개가 쏟아져 나왔어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백년도 못 되어서 신앙고백서 수정하기 시작해요. 수정하는데 두 가지를 수정했습니다. 하나는 예정론을 수정했고, 또 하나는 성경무오설을 수정했습니다.

 

왜 수정했을까요? 예정론이 예지론으로 바뀝니다. 여기 감리교 목사님도 계시지만 예정론과 예지론의 차이를 잘 아셔야 돼요. 예정론이 깊겠어요, 예지론이 신학이 깊겠습니까? 상식 밖으로 예지론이 더 깊어요. 예정론은 그 사람이 태어나서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로마서 9장의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는 거지요. 에서는 미움 받기로 결정되었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결정된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에서가 천국 가기를 애써도 그것이 다 괜히 헛짓이고 소용없는 짓인 거예요. 자기가 구원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모독과 모욕이 되는 겁니다. 지금 어른이 결정했는데 쫄다구가 변경하려고 해. 어른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한 게 아니야. 네 운명을 네가 결정해. 이미 결정했는데. 태어나기도 전에. 착해도 안 돼. 네가 착하려고 하는 짓이 나쁜 짓이야. 이게 예정론이에요.

 

예지론은 그것보다 더 깊이 나갑니다. 이걸 사후적, 또는 소급적이다. 그 사람은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 미 확정적이에요. 그래서 전도나 선교에 있어서 외부인이 장담을 하면 안 됩니다. 너는 천국 가게 돼있어. 너는 지옥 가게 돼있어. 그렇게 확정지으면 안 돼요. 목회자가 신이 아니니까. 그런데 분명히 천국 간다고 생각했던 알렉산더와 후매네오처럼 사단에 빠졌다고 해서 마지막 때에 배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했다고 뒷담화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 아셨구나. 감리교의 예지론은 사실은 라이프니치의 예정조화론이라는 겁니다.

 

신학자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그대로 아무 오류 없이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채 성경구절만 뽑았는데 세상에 그 안에 철학이 담겨있을 줄이야 그들은 상상도 못했지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철학적 존재기 때문에. 어떤 성경구절을 볼 때에 빈 마음에 볼 수 없어요. 가다머가 이야기한 것처럼 선입견, 선이해. 선이해는 역사적 전통,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변에 둘러 쌓여있는 모든 환경이 역사적으로 이미 무엇이 옳다, 그르다고 장착돼있는 것이거든요. 마치 붉은 단팥죽에 떡 알맹이 집어넣은 것처럼.

 

인간의 생각은 이미 기존에 확립돼있는 의식에다가 담갔다고 빼내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영향 줬던 그것은 자기와 상관없는 남이라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본인이 살아가면서 계속 내놓는 것이 어디서 들은 것이고, 누구의 주장이고 그런 것이 나오는 거예요. 자기는 순수하게 기도 가운데서 신의 응답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도서관에 가서 보니까 수백 년 전에 벌써 누군가 다 이야기한 것이고. 이야기한 정도가 아니고 나보다 더 정리가 잘 돼있고 나는 성경구절 서너 개 뽑았는데 저쪽은 250개나 뽑아서 그걸 확립해놓았을 때 그럼 내가 그 사람에게 신학적으로 종속돼야 되는가 하고 자존심 상하는 기분도 더러운 거예요.

 

그래서 예지론을 겸허하게 수용하자는 겁니다. 당신은 천국 가기로 예정돼있어. 당신은 지옥 가기로 예정돼있어. 그렇게 하지 말고 관찰해보자. 끝까지 어떻게 가는지 지켜보자. 다만 우리 할 일은 다 하고. 맞지요. 제 말이 틀렸습니까? 결국 주께서는 다 알고 계시는 이야기를. 그래서 선교도 의미를 살리고, 로마서 9장 의지도 같이 살 수 있는 방식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미리 예정돼버리면 그 다음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께 예정된 사람이라면 미쳤다고 선교해요, 미쳤다고 전도합니까? 입 다물고 있어도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는데 내가 왜 귀찮게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 전도해야 돼요. 전도 의지가 팍 꺾이면서 사명감이 성경적으로 발생되지 않지요. 성경 자체가 모순되는 거예요. 예정 돼있다고 해놓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고 한다면, 그럼 뭐예요? 하나님은 우리와 동업자인데 하나님 본인만 알고 있고 우리한테 전혀 내막은 알려주지 않을 때에 우리가 전하는 것이 과연 확신 있게 전했다고 내가 확정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사라지잖아요.

 

신학사에게 두 가지가 있어요. 유대교도 마찬가지지만 개신교도 역사적 해석으로 들어가서 양육과 훈육과 교육을 시키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일반 교인들의 영혼 상태에 대해서 교리적으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내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8년)에서 인간은 전적 타락했다고 돼있을 때 그것도 나중에는 손질하지만,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양육과 훈육, 교육이 아무 의미가 없어버려요. 타락했다면 에스겔 37장에 의하면 해골이잖아요. 해골한테 주님은 살아계신다고 해봐야 말이 안 먹히잖아요. 그러니까 넓은 범위에서 타락했지만 아직도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어떤 약간의 접촉점은 있어야 선교할 가능성이 성립되는 거예요.

 

칼빈의 기독교 강요나 루터의 주장에 의하면, 전적 타락이에요. 인간은 죽은 자에요. 전적 타락했어요. 그러나 루터교는 천주교 다 됐지만 개신교 칼빈의 후예들도 전적 타락은 교리만 이야기할 뿐이에요. 전적 타락은 어디에 써먹느냐 하면, 우리가 겸손해야 은혜가 높아진다는 그러한 취지에만 써먹지 실제 모든 교회 교육에는 전적 타락이란 성립이 될 수 없어요. 타락된 사람이라면 타락된 상태로 놔둬야지 만약에 내가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이 알아먹는다면 전적 타락이 아니잖아요. “이해되네요.” 이러면 전적 타락이 아니라니깐요. 그럼 덜 타락된 것이고 영이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은 척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죽은 척하고 있었는데 말씀을 주니까 그때 정신 번쩍 들어서 이제 깨어났습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역사적 해석법이었다. 그런데 그것에 쭉 가는 것은 아니다. 옛날 시대에는 맞는 것이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은 추려내고 이 시대에 그야말로 누가 봐도 믿음이 있다는 사람, 기도에 열심이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의 신앙적인 고백과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여 새로운 해석법으로 추가시키고 거기에 하나님의 계시라고 권위를 입히는 거예요.

 

그리고 권위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권위가 확장이 되고,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주의 말씀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가르칠 때 배우는 사람한테는 양육과 훈육과 교육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교육학이라는 있잖아요. 교육, 가르침이 성립된다는 거예요. 그럼 가르침 성립이 되려면 전적 타락, 예정론, 성경무오설 이런 것은 옛날에는 루터, 칼빈이 주장했는데 지금 이 시대에는 안 맞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강의 줄거리입니다. 손질을 해야 되는 거예요.

 

성경무오라는 걸 봅시다. 성경무오라면 설교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제가 만약에 창세기 1장을 한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만 이야기해야 돼요. 40~50분 설교할 때 시간이 남잖아요. 그럼 또 해야 돼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런데 만약에 창조라는 것은 ‘빠라’인데 무에서 유를 말하는 것이고, 창조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만들어진 것에서 변형되는 것과 등등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떤 청년이 원어를 더욱 더 연구하는 거예요. 이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까지 연구하는 거예요. 목사님은 빠라가 그런 뜻이라고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다른 뜻이 섞여 있었는데 기독교 신학에서 일방적으로 주목 되는 것은 의미를 남기고 나머지는 배제해서 전통이 됐습니다. 새로운 이론에 의하면 그게 아니었다고 나오면, 무엇에 어긋나요? 성경무오설과 관련 되면서 그렇다면 그 자료가 어디 있느냐?

 

그 자료가 원래 있던 히브리 성경 원판에 가장 가까운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까운 건 뭐냐, 덜 가까운 건 뭐냐? 이것 알려면 성경은 어떻게 편집 되었으며 어떻게 짜깁기 되었는지 다 나와야 돼요. 그렇게 되면 성경 번역서에 성령이 임하느냐는 문제가 생겨요. 쉬운 성경에 성령이 임할까요? 아니면 전통이 80년 된 개역 성경에 성령이 임할까요?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성경무오설이 생기면 그 다음에 계시가 뭐냐 하는 거예요. 전통적 칼빈 문서는 성경이 계시였습니다. 더 이상 빼지도, 더하지도 말라. 요한계시록에 의해서 사도 열두 명이 다 죽은 이유가, 계시가 확정됐다고 사도들이 다 죽었거든요. 사도가 있는 이유는 성경을 확정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고 방언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고 오직 이게 전부라고 해서 끝내버렸는데 만약에 지금 예수님의 어릴 때 흔적이 고고학적으로 새롭게 발굴 되었을 때 예수님이 어릴 때 갖고 놀던 장난감, 마굿간이라든지, 입었던 옷, 창 자국, 성배, 그런 것들이 발견되었다면 계시에 집어넣을까요, 말까요? 더 우습게 말해서 예수님 7살부터 16살까지 찍은 비디오가 있다면 그 비디오가 하나님의 계시입니까? 제가 예전에 총신대 강의하면서 이 질문을 했어요. 많은 학생들이 그것도 계시라고 했어요.

 

그게 신의 계시라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에요. 성경책이 신의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이 신의 계시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수들의 일관된 주장이 성경책이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이 계시라는 거예요. 칼 바르트에 의해서. 그런데 신학사에 보면 문제가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계시일 때 신의 계시가 예수님만이 계시겠는가? 삼위일체에서 성부와 성령이 있을 때 예수님만 계시가 되면, 성령이 하는 일은 계시이냐, 계시 아니냐가 돼버려요. 성령이 하는 일이 계시가 되면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지 않으면 계시가 돼버려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지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성령의 계시에 속한 사람은 주 예수를 안 불러도 구원이 되는 거예요. 신의 계시를 받았으니까. 그런 계시가 어디에 있는가? 시편 103편에 보면,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신이 다스리지요. 저 들에 있는 백합, 공중에 있는 새, 달, 별, 이 모든 것이 신의 솜씨지요. 그뿐만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만 신의 자녀가 아니고 지금 절에 가는 사람도 신의 자녀가 되지요. 하나님의 신이 모든 만물을 다스리기 때문에. 이사야도 그 비슷한 대목이 나와요.

 

그러면 예수를 꼭 믿을 필요가 있어요? 예수교라 하면 안 되고 하나님교라 해야 돼요. 그래서 순복음 교단이름이 하나님의 성회잖아요. 버전을 업그레이드한 거예요. 너희는 아래 단계에 머물러있지, 우리는 위 단계로 성숙돼있다는 겁니다. 성령을 통한 계시는 율법과 예수님이 하는 모든 기적과 관계없이 그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결국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인간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천주교는 불교와 악수하게 돼있지요.

 

옛날 천주교 신학이 다른 종교를 용납했습니까? 한국에 천주교 처음 들어왔을 때 제사 인정했습니까? 처음에 한국에서 순교자들이 제사 반대하다가 순교했다고요. 지금의 천주교는 어떻습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괜찮아요. 갑자기 역사적 해석법이 왜 달라졌어요? 그것은 오직 하나 선교 때문에. 그걸 신학의 토착화, 삶의 정황 속에 신은 계신다. 그 신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그 신을 인정하고 존중해주자. 비록 예수를 모르고 교회를 안 다니더라도 하나님이 만든 자녀라면 그 속에 하나님의 품성이 이미 들어있다. 이게 바로 양육과 교육을 성사시키는 새로운 이론으로 첨가가 되는 겁니다. 신앙고백서를 반드시 손질하게 돼있어요.

 

그러면 선교를 왜 하느냐? 항상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거든요. 교회의 확장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권위자고 나 홀로 있을 수 없고 나와 더불어 많은 성도들이 발생하고, 그걸 성령 공동체라 하지요. 성령 공동체가 발생될 때 과연 나는 주의 종 맞는다고 확인이 되지요. 교인들도 자기 교회에 헌금을 했는데 옆에 교회는 쪼그라들었는데 내가 헌금하고 헌신하고 새벽제단 쌓은 교회가 커질 때 그 안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나의 신앙감이라는 것은 점점 더 확신에 확신을 더할 수 있는 거예요. “역시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버리지 않았어.”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지요. 거기에 나온 신앙의 반열에 속한 사람들이 특징이 뭐냐 하면, 모범 답안이 없어요. 자기 주변에.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주변에서 만들면 따라하겠는데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신앙인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누굴 흉내 내거나 모방할 수 있는 어떤 에프엠이 전혀 없었어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한테 일부러 어긋맞게 축복하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양쪽으로 축복할 때 어떤 전통이 없었던 거예요.

 

이걸 사건이라 합니다. 이건 새로운 거예요. 오년 전에 느꼈던 감동과 달리 지금의 감동이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고, 남들이 다 따르는 자체가 이상하게 넓은 길처럼 느껴지고 그쪽으로 가서는 안 될 같은 느낌이 들고. 프로스트의 시처럼 숲 속의 두 갈래 길이 있는데 남이 가지 않은 길로 갔다. 요새는 남의 가지 않은 길로 가면 분명히 되돌아와야 돼요. 길도 없고 해서.

 

신앙인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똘아이에요. 사람이 정상이냐 할 때는 보편적인 상식으로 정상이냐, 아니냐 하거든요. 그게 권력의 힘이라 하는 거예요. 다수의 힘이 진리가 되는. 그런데 신앙인들의 특징은 다수가 아니고 낯설어, 이상해. 혼자다. 분명히 사람들은 안 알아줍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처럼. 분명히 무화과나무에서 혼자 있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나다나엘에게 “너 무화과나무에서 기도하던데?” “어떻게 알았지요?” 어떻게 알기는 기도를 받으니까 알았지. 나다나엘은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네 속에 간사한 게 없구나. 네가 참 이스라엘이다.”

 

그 규정은 주님 보시기에 일방적으로 규정했지만 제삼자가 보기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어요. 남 따라 하지 않는다는 것. 일부러 특이하게 수염 기르고 도사처럼 하는 그것도 유행이지만 그게 아니고 전혀 자기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주님만 생각하다 벌어진 일에 대해서 자기 공로나 자기 행함을 찾을 수 없는 상태로 주님께서 집어넣었을 때 본인 자체가 당황스럽기 짝이 없고 사람에게 위기를 줘도 피할 길을 주든지 하지 이렇게 절망으로 몰아넣을 수가 있습니까.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런 고백을 사건 만들어준 당사자, 주님에게 말할 수 있는 상황. 그런 상황이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났어요.

 

사람이 홍해를 건너고 또 홍해가 나타나면 옛날에 역사적 해석법에 의해서 홍해 건널 때는 지팡이만 있으면 되더라. 이미 입력이 돼있어요. 그런데 요단강에서는 지팡이 있는 사람을 일부러 없애버렸잖아요. 이제는 모세 없이 가봐라. 모세 대신할 사람이 없어요. 여호수아는 자기 계시 받은 적이 없어요. 여호수아가 고백한 것이 있어요. 내가 한 것은 내가 받은 계시가 아니고 모세가 받은 대로 움직일 뿐이라고 했어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서 제일 먼저 만난 것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군대장관이었어요. 꿇어! 이제부터 전쟁은 나의 전쟁이다. 그 전쟁을 신학적으로 붙여주는 전쟁, 여호와의 전쟁이라 하는데 말이 그렇지요. 완전히 도박과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이미 알고 있어요. 전설로. 이미 해본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방이 되고, 그것은 양육이고 교육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끄 엘룰 같은 사람은 천주교는 시작하자마자 망했다는 거예요. 시작하자마자 권력의 맛을 봤다는 거예요. 교회가 권력의 맛을 보면 교회가 아니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사건화 돼야 되는데 사건이 아니라 존재가 돼버렸어요. 주께서 어떻게 뒤집어놓는가는 사절이고 있는 교회 우리끼리 친목을 도모하세. 어떤 결속을 다지세. 이런 쪽으로 나선 거예요. 거기에 필요한 것이 교육이었고, 교육에는 역사적 해석법이 먼저 있어야 되고 그것에 권위를 줘야 되고 가르치는 사람에게 권위를 주고 권위에 복종해야 되고 교회 질서가 있어야 되고 교인들은 섬겨야 되고 밑에 사람은 무조건 그것을 믿으라고 단속해놓고 권위자가 판단해야 되고 판단자는 하나여야 되고. 교회에 태양이 둘이면 안 되거든요. 한 사람이 판단해서 너는 이단이야, 너는 삼단이야 하고.

 

이런 식으로 할 때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인간이 전적 타락하면 안 된다.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형상은 잠재된 상태지 죽은 상태는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에 신의 계시가 오게 되면 깨어나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잘 가르치면 되겠지요. 잘 가르치면 구원받는다. 잘 가르친다는 말은 설득력이라 하는 겁니다.

 

설득력은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위반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성령의 나타남이라 할 때 앞의 말, 내 말과 내 전도함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이 자리에 다른 분이 계시다는 거예요. 성령의 나타남은 어떤 어르신네거든요. 내가 생명을 대신할 자가 아니란 말이죠. 나 따로 있고 성령 따로 나타나고 나는 성령 앞에서 쪼다가 되고 나는 무익한 종이 되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죄인 중의 괴수고. 여러분은 안 보입니까? 저 말고 다른 분 안 보이냐고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은 마태복음 10장에서 열두 제자를 보내면서 하는 말이에요. 앞으로 너희에게 성령을 줄 테니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20절) 얼마나 위험한 발언입니까? 누구나 차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발언일 수도 있고 위험한 만큼이나 그게 진리잖아요. 악령 받은 사람도 그런 소리 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말씀이니까 함부로 하지 말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말씀의 취지는 네가 어떤 말을 해도 잘난 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거든요. 네가 얼마나 못 났으면 못난 너를 성령께서 사용하겠느냐? 성령께서 사용했기 때문에 덩달아 권위자라고 주장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요한일서 2장 27절, 28절에 나와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친히 모든 사람에게 직접 가르칠 것이라는 거예요. 그것은 에베소서나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치는 은사 받은 것과 대충돌이 일어나요. 분명히 은사 중에서 가르치는 은사가 있단 말이지요. 가르치는 은사가 있다는 말은 배우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은사에 대들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쪽이거든요. 성령의 은사에서. 제 말 맞잖아요. 다 가르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요한일서 2장 27,28절은 왜 나오느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네 안에서 성령이 친히 가르친다는 거예요.

 

이 충돌에 대해서 기존의 신학자들은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것은 초대교회 때 신학이 이미 세분화되었다고 봅니다. 사도 바울 계통 따로 있고, 베드로 계통 따로 있고. 초대교회가 세파로 나눠졌다는 겁니다. 각각 다른 소리한다는 겁니다. 요한파 따로 있다는 거예요. 현대신학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보수 말고 통합측, 감리교에서.

 

그렇게 되면 뭐가 깨져요? 사도바울 말이 다 계시가 아니구나. 사견, 개인적인 의견이구나.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 올 때 여자들이 구태여 머리에 수건 쓸 필요가 없고 여자라고 남자한테 복종할 필요 없구나. 그것은 그 당시 사회적 문화구나. 그렇다면 그 당시 문화를 하나의 계시로 사용했다면 오늘날 뭘 사용하든지 뭐가 나쁘냐? 까짓 것 우리 교회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면 된다는 아이디어가 여기저기서 올라올 때 그것을 되고, 안 되고를 누가 결정합니까?

 

 

그것은 10분 쉬고.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처음 시간에는 역사적 해석법이라는 것은 인간인 이상은 절대로 거기서 못 벗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괜찮아서 훌륭해서 이러면 반드시 후배에게 전달하기 마련이고 양육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선배 목사님이 이것으로 은혜 받았다는데 누가 토를 달아. 우리는 그것을 본 받아서 그분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식은 되지만 권위에 감히 도전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시대에 사람들도 또 구원해야 되니까 이 시대 형편에 맞도록 각색한다든지 내용은 달라지지 않지만 모양새는 더 맛있게 한다든지 이런 것은 유동성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처음에는 보통 그렇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다 바뀌지요.

 

아까 제가 바뀐 예를 들었지요. 성경무오설 지금 없고. 미국 개신교 신앙고백서에 예정론 다 수정돼있고 성경무오설 수정 다 돼있어요. 그러면 신앙고백서라는 게 왜 있느냐? 제가 지금 역사적 해석법의 문제점을 계속 하는 거예요. 천주교는 눈에 보이는 교회에 일반 교인들이 와서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 눈에 보이는 교회 질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질서를 세운 거예요. 그걸 실체론적 교회론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실체가 있는 거예요.

 

그게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국가 경영, 국가 행정에서 실체론적 국가론에서 나온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국가라 하면, 국가가 어디 있어요? 국가 없잖아요. 예를 들어서 대학 캠퍼스. 대학이 있다. 대학이 어디 있는데? 대학 가보면 대학이 없어요. 교수 있고, 교직원 있고, 학생 있고, 캠퍼스 있지만 대학은 없잖아요. 그걸 보편논리라 하는데. 세퍼트 있고, 발발이 있지만 개는 없어요. 그런 것들을 모아서 추상적 개념 하나를 따로 만들면 개가 되는 거예요. 철학에 보면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데 사람은 없어요. 그런 것들 모아서 추후적으로 말해서 사람이라고 하자 이런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가면 예배당 건물 있고, 사람 있지 교회는 없는 거예요.

 

국가가 만약에 실체로 없으면 사람들은 국가를 편리하게 이용하지만 예를 들어 도둑 들면 잡아달라고 하지만 세금 내라고 하면 도망쳐서 미국으로 이민 갈 수 있어요. 사람은 자기 보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용할 만한 것은 다 이용해 처먹는 거예요. 국가가 됐든 뭐가 됐든. 그러면 전쟁할 때 누가 지키는데? 희생? 없잖아요. 미쳤다고 희생해요.

 

그래서 실체론적 국가라 할 때 중요한 것은 여기서 법을 만드는 겁니다. 그냥 법을 만들면 아무 소용없어요. 반드시 상벌제로 만들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누가 상을 주고, 누가 벌을 주느냐가 문제가 등장하거든요. 지금 국가가 실체적 국가가 되기 위해서 법을 만든다고 했지요. 천주교에서 교회를 만들 때 법이 있는 거예요.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그 당시에는 귀족이었습니다. 지금은 헌법상 국민,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천주교에서는 법을 하나님에게로 돌렸습니다. 그 밑에 예수 있고, 그 밑에 바로 교황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과 교황의 이 꼬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동방교회 또는 개신교가 돼버려요. 그리스정교회는 이걸 인정하지 않아요. 마테란 공의회에서 성경무오설이 아니고 교황무오설을 주장했습니다. 지금 천주교 이야기가 아니고 개신교 이야기하는 겁니다.

 

개신교에서 당회장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로 와버렸을 경우에 이것은 당회장 목사 자기가 교주하고 싶어서 환장해서 한 게 아니고 실체론적 교회로 바뀌기 위한 법의 최종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목사가 싫더라도 하나님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이 돼야 돼요. 그러면 각자가 교주가 너무 많잖아요. 그걸 방지하는 대책이 교단을 만들었어요. 교회는 당회를 만들어서 의회 제도를 채택한 겁니다. 목사출신의 회원과 장로출신의 회원으로 저울의 균형을 맞추어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두 개의 수레로 서로 견제하는 방식으로 실체적인 교회를 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개신교에서 유형교회라고 해요. 히브리서 12장 23절에 나오는 하늘에 있는 총회를 무형교회라 합니다. 무형교회는 구원받은 성도의 집합이에요.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이게 144,000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항상 문제 있어요. 유형교회를 안 거치고 무형교회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루터는 안 그랬는데 칼빈은 유형교회를 거치지 아니하면 무형교회에 도달할 수 없다고 했어요.

 

거기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뭐냐? 치리입니다. 치리는 징벌을 가하는 거예요. 지금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핵심은 역사적 해석법의 문제점을 거론하는 거예요. 천주교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개신교가 닮아가고 있으니까. 실체적 교회에서 치리를 누가 하느냐 할 때 처음에는 목사만 한다고 했어요. 시간이 역사적으로 흐르면서 반발이 생기니까 목사와 장로가 한다고 했습니다. 투표를 하게 되면 숫자가 많으니까 장로 쪽의 의견이 채택이 될 가능성이 많지요. 그래서 당회를 열 되 당회장이 거부권을 갖는 방식을 채용하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아닙니까. 일반 동호회 회의할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아무리 장로들이 뭘 해도 당회장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안 되는 거예요. 도대체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게 뭐냐 하면, 법을 살리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이 법이 성경에 근거하느냐 하는 문제를 따져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개신교에서는 성경책이 하나님의 계시에요. 물론 지금 신학은 성경책이 계시가 아니고 예수님이 계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흔적이나 유품이 있으면 그것도 계시에 포함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발언 같은 것,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 편지가 발견되면 예를 들면 도마복음 같은 게 나오면 그것도 계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을 때 교인들에게 혼란만 가중하고 교인들이 빠져나갈 수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교인 숫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 힘이 중요하니까. 보수적인 의견을 채택하고 자기 의사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는 정략적, 정치적 조치를 융통성 있게 해야 돼요. 그걸 목회라는 이름으로 하지요.

 

문제는 이겁니다. 치리할 때 성경에서 누가 치리하느냐 하면, 마태복음 19장 같은 경우에, 누가 교회에서 범죄 하거든 두세 증인으로 하라고 하잖아요. 두세 증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에서 아니라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써먹을 수가 없어요.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자기 알리바이를 마련하기 위해서 돈으로 새신자 만들어서 표를 늘일 경우에 거기에 대한 대비책이 있느냐 하는 문제에요.

 

교회끼리 축구 시합하는데 축구 잘하는 절에서 데려와서 승리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 이것이 역사적 해석법에 다 나와요. 치리에 참여하는 교인은 적어도 일년 동안 교회에 나온 세례교인에 한한다고 돼요. 그 법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출석교인 2/3 이상의 찬성으로 장립집사가 된다는 법이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어디에 나와요? 안 나오거든요. 안 나오는 이야기가 왜 삽입되었는가? 중간에 이것저것 다 해봤는데 이게 가장 합리적이고 민주적이라는 거예요. 민주주의가 헬라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민주주의는 진리가 아니에요. 천국은 민주주의 제도가 살아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게 나오니까 하는 말이, 이 세상은 다 한계가 있는 세상이니까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필요하다고 보자. 그래서 필요-악이라고 해요. 이것은 옳은 것은 아닌데 어쩔 수 없다는 거예요. 도대체 어쩔 수 없는 것, 진리는 아니지만 이것을 대대로 해보니까 그나마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여겨서 계속 실체적 교회를 위해서 법들이 추가되고 추가된 겁니다. 10%로 하면 개나 소나 다 되니까 2/3로 하자. 어떤 교회는 그걸 반대해서 100% 찬성이 아니면 안 되게 돼있어요. 100% 찬성은 진리가 아니고 신라시대 때 화백제도에요.

 

하여튼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미 옛날에 다 나왔던 제도입니다. 전도서 말씀대로 해 아래 새로운 게 없다고 전부 다 나왔던 제도에요. 그러면 강사의 뜻은 뭡니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필요악도 소용없다면 뭐냐?

 

하나님의 계시, 성경말씀은 바로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죄를 더 죄 짓게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유대인들은 자기 의에 복종하는 것으로 끝난 줄 알았지요. 자기 의에 충실하게 마일리지 쌓이듯이 날마다 성화되고 착해서 점점 착해지면 그걸로 됐다 싶지요.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차버린다는 사실은 그들의 머리로써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말씀대로 착하게 사는 게 뭐가 나쁘냐?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상식적이고 보편화된 세계에서 누가 그걸 지적하겠느냐 말이죠. 안 착해서 문제지 착한 게 뭐가 문제 되고 오히려 장려될 문제지.

 

거룩하라, 거룩하라.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거룩한즉 너희도 거룩하라고 분명히 문장으로 나와 있단 말이죠. 에베소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새 형상을 입으라. 이제는 어둠에 속한 자가 아니고 빛에 속한 자다. 에베소서 5장 1절에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사랑하라는 명령이지요. 명령한다는 것은 우리 속에 명령을 하달 받았을 때 그걸 즉각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명령 아니냐 이 말입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미 인간에 말씀이 들어왔을 때 성령 받기 전에는 법을 못 지켰지만 성령 받은 뒤에는 온 율법을 지킬 수 있고 이제는 성령의 법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진짜로 제대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사도바울이 권면과 지시와 명령을 내렸다는 거예요. 근데 이상스럽게 왜 그 말을 거론하면 거론할수록 점점 더 십자가가 퇴색되고 십자가가 점점 멀어져가지요. 마치 기차를 타고 가면 서울, 대전, 대구 갈 때 지나가는 간이역들은 멀어지잖아요.

 

역사적 해석법에 대해서 사람들이 오해한 것이 있어요. 역사적 해석법에서 나온 결과들, 성과만 갖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유대인들의 역사적 해석법은 그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네 속에 시간이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흐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담아버리면 예수님의 일이 인간의 시간의식 속에 깔립니다.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그 다음에 승천하신다는 과거-현재-미래로 겸해서 같이 포개지게 돼요.

 

그러면 현재 십자가는 이미 과거가 돼버리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이 문제가 돼버려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자기는 몰랐었어요. 십오 년 전이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했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사는 거예요.

 

보세요.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예수님과 내가 십자가 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십자가 진 사람은 양쪽에 있었던 강도 둘뿐이었습니다. 분명히 삼종 세트에요. 그런데 만약에 사도바울이라는 이름 숨기고 어떤 사람이 와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아저씨,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고향이 어디십니까? 혹시 예루살렘에서 달렸던 그 강도?” 이렇게 묻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게 상징이다, 유비다 하는 것은 나중에 핑계 삼아 하는 이야기하고 그 사람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면 과장법으로 쓴 게 아니고 진짜 실체로 이야기한다면 진짜 십자가 옆에 사도바울이 꼬마가 되서 있던가 해야 돼요.

 

그러나 갈라디아서 2장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이 사는 거예요. 그리고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십자가가 어디 있는데? 이미 십자가는 과거 사건이에요. 대전에서 대구 가려면 이미 작은 역은 스쳐지나갔다니까요. 그것은 뒤돌아 볼 필요 없어요. 십자가는 과거 이야기니까. 지금은 부활의 새 생명 시대에 놓여있으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과 같이 승천할 그것만 기다리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기억 속에 집어넣으면 돼요. 이제는 내가 할 것은 새 생명 따라서 성령 따라서 살면 되고. 이제 남은 것은 예수님의 재림만 기다리면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성령 받았는데 예수님 재림할 때 깜빡 졸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 받은 사람은 온다고 힌트를 주는가요? 문제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기름 준비한 여인들과 열 명 중 아무도 깬 사람이 없었어요. 다 주무셨어요. 그런데 에베소서에 그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깨어있으라. 새벽 2:30에 도적 같이 와버리면 깨어있으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도둑놈이 미리 알려주고 오면 도둑이 아니에요. 친구지. 도적 같이 오려면 몰래 와야 되거든요. 그러면 몰래 왔을 때 몇 초 후에 깨어있을 때를 깨어있는 범주에 넣어줄 것이라는 문제가 발생돼요.

 

일단 도적 같이 오는 것이 성립해야 되고, 깨어있는 조건이 다 만족하려면 일단 도둑이 왔다고 할 때 깨어주지 아니했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하고 그 타이밍에 맞춰야 된다 이 말이죠. 그 힌트가 요한계시록이든 어느 구석에 박혀있어야 되는데 그 구석에 박힌 것을 캐내어주는 것이 천지, 천지, 신천지란 말이지요. 왜 사람들이 신천지에 빠지는데요? 가려운 곳을 긁어주니까 빠지는 거예요.

 

일반교인들은 신앙은 관심 없어요. 주님은 재림하신다는 데 깨어있으라는 데 어떤 정보를 미리 입수하면 무사히 144,000에 들어가서 천국에 가느냐? 지금 요점은 그거에요. 예정론이고 다 치우고 내가 구원받고 우리 가정이 구원받아야 되니까. 어떻게 준비하면 지금 오시더라도 구원이 됩니까? 그걸 제시하라니까 이 설교자들아. 다른 소리하지 말고 그걸 내밀라니까. 그러면 기존 교회 목사들은 너무 들어가지 말고 상투적으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하나님이 가르치는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이단에 속하는 것이고, 보태지고 빼지도 말고. 마지막 때에 이단이 등장할 때는 이단이 보좌에 앉아서 적그리스도고.

 

지금 그것은 다 아는 이야기고 그것 말고 우리 교단이 이단인지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제시해주면 신천지고 구천지고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고객만족을 해줘야 장사가 될 게 아니에요. 고객이 뭘 듣기를 원하는데? 그걸 왜 간파를 못하고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 말이죠.

 

몇 초 뒤에 오고 그 타이밍 어떻게 합니까? 바로 신천지는 통일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통일교는 흔히 말하는 알레고리라고 하는 거예요. 유비설교를 하는데 알레고리가 가관입니다. 알레고리는 1920년대 평양의 이용도 부흥사가 원조였고 그 설교를 모든 한국교회 부흥사들이 베꼈고. 거기에 나오는 알레고리 설교를 하니까 이게 신학적으로 옳다, 그르다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효과 본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파급효과가 있더란 말이죠.

 

성경도 모르고 신학도 모르고 성경도 읽을 시간도 없는 일반교인들에게 그야말로 맨날 보리밥 먹다가 맛있는 뷔페 요리로 다양하게 해서 “여러분, 원하는 게 뭡니까?” “구원입니다.” “어떤 구원입니까?” “승천할 때 내 가족들, 내 자식들 앉혀서 이 땅에서 못 다 누린 호사를 천국에서 누리기를 원합니다.” “일 단계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것 챙기고 헌금내고 자기 볼 일 보고 다음주에 또 오고하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실제에요. 조작한 게 아닙니다. 우리 동네에 있어요.

 

어떤 사람이 제가 따지니까 그 사람이 화가 나서 저한테 하는 이야기가, “성경의 중심이 뭡니까?” “성경의 중심은 로마서 11장에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가는 겁니다.” “목사님, 성경의 중심은 구원받는 겁니다.” 일반 평교인이에요. 신천지를 접했습니다. 신천지는 처음이고 끝이고 달랑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은 바로 구원론입니다. 구원론을 채워주면 목회 되고 구원론만 벗어나면, 신론이 어떻고, 예수님이고 뭐고 구원론만 제공하면 교인들은 대만족하고 은혜 많이 받았다고 돌아갑니다.

 

이 작업을 침례교에 있던 구원파도 시도했고 신천지도 같은 계통으로 온 겁니다. 따라서 신천지나 구원파나 이런 데로 가지 않게 하려면 그 사람들이 원하는 더 간편한 구원론을 제공해야 돼요. 그렇게 되면 그 교회나 신천지나 전부 구원론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론에 빠져있으면, 이것은 창세기 3장 21절이지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문을 활짝 열어놨습니까? 너희들 나중에 정신 차리거든 오라고 했습니까? 생명나무 가는 길을 동쪽을 막았지요.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인간을 화염검으로 막아놨잖아요. 하나님이 어디 갈굴 게 없어서 지렁이만도 못한 인간을 갈구요. 좀 하나님이 대승적으로 마음을 열어서 불쌍한 것, 철도 없는 것 하고 용납하면 되잖아요. 갈굴 게 없어서 마귀나 갈구지. 갈구려면 인간을 만들지나 말지. 선악과 하나, 하나님 비품 하나 건드렸다고 추방하는 건 이해돼요. 고생 좀 해봐라. 하나님 것 건드리면 혼나는 것 알지? 이러면 이해되는데 영광을 얻기 위해서 고난을 거쳐서 영광을 얻으면 그만큼 감사가 넘친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아예 오지 말라고 생명나무의 길을 차단하는 강한 의지는 뭐냐 이 말이지요.

 

신약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만 원하십니다. 그걸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지요. 기존 피조물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만 건져갑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란 사람은 손들고 구원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가 없다고 이야기해요. 그게 설득용입니까? 아줌마, 아저씨 설득하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의 이성에 호소하는 겁니까? 저 정이 많지요, 참 사랑 많은 메시아지요? 그렇게 대하는 겁니까? 쌀쌀 맞은 메시아에요. 싫으면 말고. 이런 식이에요. 전도를 하겠다는 거예요, 말겠다는 거예요?

 

구원론의 입장을 종교적으로 따지면 확실합니다. 불교는 자력구원이고,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구원받는 게 확실해요. 불교는 자기가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고, 기독교는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처럼 주께서 선물로 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말을 인간의 시간 의식 속에 집어넣어서 이게 몇 년 전부터 외우면 재림할 때 구원받는 거예요? 만약에 외웠는데 올 때 긴장 되어서 잊어버려서 고백 못하면 더듬거리다가 구원 못 받는 경우가 있잖아요.

 

고백하십니까? 손들고 나오세요. 고백할 때는 말이 나와야 되고 말은 기억 속에 해마에서 끄집어내서 말로 고백한단 말이죠. 그래서 예레미야에 보면 그 때 새 언약 때는 하나님의 신이 말씀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성령이 와서 우리 속에 새겨 넣는 겁니다. 마치 컴퓨터 칩이 우리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컴퓨터 칩이 우리 안에 내장이 돼있으면,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인 믿음으로 구원하잖아요.

 

이게 만약에 맞는다면, 제 말이 맞는다면, 성령이 와서 심은 칩을 내 행함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그 문제가 생겨요. 내가 심었으면 내가 끄집어내요. 성령이 말씀을 심어줬으면 주도권이 성령에 있고 말씀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에 종속될 뿐이지 내가 끄집어낼 수 없지요. 그러면 그 말씀에 대한 위반, 또는 어김이 성립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성령이 와서 말씀이 퍼지는데 박하사탕을 깨물면 입안이 화 하는데 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사라지느냐 말이죠. 말씀과 성령이 있는 이상은 성령이 박하사탕처럼 껌의 향기처럼 퍼졌다면 이걸 내가 인위적으로 흩어버릴 수 있고 제거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말씀을 지키라가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이것은 지키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미 내장된 문제인데 말씀을 어긴다고 어기고 싶은 게 아니고 말씀이 스스로 말씀 되게 퍼지거든요.

 

그게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있단 말이지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여기에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할 때 사람 속에 사도바울이 포함됩니다. 사도바울 개인의 의견이라고 샌더스란 신학자가 주장하고, 그 주장을 총신, 장신 젊은 신학자들이 주장하거든요. 물론 그 교수가 제가 총신 있을 때는 없었어요.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미리 그런 인간이 등장할 것을 예언하는 것 같아. 내가 말할 때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거기까지는 우리가 용납되지요. 이것도 문제가 있어요. 사도바울의 말한 것이 다 계시란 말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말 가운데서 성령이 조정해서 성경계시 되는 것이 따로 있다는 뜻이거든요. 이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지요. 역사를 누가 말립니까? 성령이 하는 일을 누가 말려요? 당사자가 말릴 수 있어요? 그렇다면 아까 제가 이야기하듯이 말씀이 지킨다 하는 것이 결국 이것은 헛말이 될 수밖에 없지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나오잖아요. 이 말씀을 내가 지키라고 하는데 성질 급한 말씀이 먼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내장된 칩처럼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러면 내가 은행에 간다든지 아내가 돈을 셀 때 또는 다른 사람이 돈을 많이 가질 때 자연적으로 뭐가 발생되겠습니까? “저 돈만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데.”라고 하는데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나의 행동과 따로 독자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말씀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한다면 그 둘 사이에 회개가 생겨나겠지요.

 

“주여,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이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모델을 바깥에서 찾습니까? 자기 내부에서 찾을 수가 있지요. 자기 내부에서 찾으려면 구원론이어야 되겠어요, 아니면 나에게 성령을 집어넣어준 그분의 의견, 그분의 뜻이 우선되는 겁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뭘 지킨다는 구원의 욕구가 우선입니까? 그 욕구와 상관없이 나에게 성령 받아야 된다고 집어넣어주신 그분의 취지가 우선되는 겁니까? 그분의 취지가 우선되지요. 그분이 누구십니까?

 

여기서 동방신학,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가 믿었던 동방정교회에서는 성령이 예수님을 통해서 오지 않아요. 성령은 성부에서 직접 오는 거예요. 성령은 두 종류에요. 성령은 성부에서 오는 성령과 예수님의 영을 통해서 오는 성령이 따로 있어요. 개혁주의는 로마 천주교 계통이기 때문에 성부로 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동방교회에서는 이 이론을 반대하는 거예요.

 

어떤 취지에서 반대하느냐 하면, 어느 집에 냉장고가 한 대가 왔어요. 퇴근한 남편이, “냉장고 왜 있지?”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폐가 있어요. “이것은 장인어른이 주셨고, 장모님이 주셨어.” 이렇게 되면 냉장고가 두 대가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장인어른의 명을 받아서 장모님을 통해서 냉장고를 줬어.” 그러면 이해가 되지요. 바로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이 그런 식으로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동방교회에서는, 당신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모른다고 했어요.

 

삼위일체에서는 상호협력이라는 게 있어요. 갑바도기아 세 신학자가 주장하는 유명한 이론이 있어요. 성부, 성자, 성령은 어떤 일을 벌였을 때 공동작업으로 하는 걸로 돼있습니다. 그래야 삼위일체 모두 다 동일하게 찬양과 영광을 받기 때문에. 트리니티신학이란 명칭이 삼위일체신학이잖아요. 삼위일체에서는 어떤 누구도 서열화 시키면 이단이고, 독자적으로 하면 이단이고. 항상 균형 맞춰서 성부, 성자, 성령 동일하게 시어머니가 세분인 거예요. 세 분 다 섬겨야 돼요. 그걸 만약에 한쪽으로 추리면 안 돼. 추리면 이단 되는 거예요.

 

왜 이단이냐? 역사적 해석법에 의하면 삼위일체가 교리과정에서 아닌 이단들을 추려내는 과정 자체가 신의 개입으로써 아주 경건한 개입으로써 자칫하면 큰일 날 뻔했던 아리우스 같은 그런 인간들을 정통으로 인정하려할 뻔했는데 아타나시우스란 정말 하나님이 준비한 성령의 사람에 의해서 삼위일체가 제대로 된 모양새가 갖추었다고 이야기하거든요. 누가? 천주교회가. 천주교회가 삼위일체를 인정합니다. 천주교가 이단인가요? 삼위일체 인정하는데 사도신경 다 외우는데.

 

하여튼 자기 교단 빼놓고 다 이단이라. 누구든지 자기를 욕하면 다 이단이고 자기를 찬성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돼요. 인간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나의 신학을 인정해주면 형제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형제가 아니에요.

 

신천지에서 나온 천지일보에서 저한테 한 질문 중에 하나가 이거에요.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입니까? 질문이 아주 간편하고 명료한 질문을 해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딱 듣고 싶은 이야기, 누가 가라지고 누가 알곡입니까? 그들이 원하는 답변은, 신천지는 알곡이고 신천지 외에는 다 가라지라는 답변을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답변하기를 질문을 바꿨어요.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냐고 개인이 알곡과 가라지로 연결될 수 없고 예수님이 알곡을 어떻게 만드시고 예수님이 어떻게 가라지를 만드시느냐고 질문을 해줘야 됩니다. 누가가 되면 구원론이 돼버리고 예수님이 하셨다면 그리스도론이 돼버려요. 항상 구원론의 모든 난맥은 그리스도에서 나왔거든요. 왜 그리스도에서 나왔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와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성령은 그리스도와 우리가 상대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생명나무 길을 차단해버렸기 때문에. 왜 그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상대해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창세전에 의견 된 그것을 역사를 깔아놓고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알려줘야 우리는 이 관계에 진입이 돼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율법을 주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을 받았고 신명기 28장에 보면, 이 말씀을 지키는 자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만약에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는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미 홍해를 건너온 우리에게는 충분하게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어떤 잠재능력이 있다고 주께서 인정한 이후에나 그 명령을 줘야 앞뒤가 합당하게 맞는 말이란 말이죠. 쉐마, 뭔 뜻입니까? 내 말을 들으라.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말씀에 순종해야 영광이 되고 순종하지 않으면 영광이 안 되고 내 백성 아니라는 그 조건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조건을 지킬 만한 여력이 우리에게 장착돼있기 때문이라는 전제를 깔고 하는 이야기라고 본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모든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도록 하는데 그 저주받는 이유가 뭐냐? 지킬 수 있다는 그것이 바로 저주의 확실한 증거가 된다는 거예요.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역사적 해석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 왜냐? 역사적 해석은 시간의식 속에 말씀이 들어와서 주무르고 조지고 하는 것이 내 시간에 따라서 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과거, 잊어도 좋아. 지금은 부활의 새 생명 그 다음에 기다릴 것은 예수님이 승천하셨기 때문에 재림을 기다리면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입력된 정보는 십자가는 과거로 기억하고, 재림은 미래로 기다리면 되고, 현재는 새 생명 가운데서 말씀을 실천화시켜서 성령의 온전한 열매를 맺으면 누가 봐도 나는 성도 맞는다고 박수 쳐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거기에 맞추어서 성경해석을 보는 거예요. 그러면 모든 성경해석은 숙제가 되지요.

 

이것까지는 지켰는데 돈을 사랑하는 것은 좀 미루었다. 올해는 돈을 사랑하는 것을 극복해볼까? 이렇게 되면 거기서 단계가 발생돼요. 단계가 발생되면, 단계 위에 당회장 목사가 있고 단계 초보에는 초신자가 있지요. 중간에 바로 먼저 된 자들이 끼어있어요.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원리를 여기에 적용시키면 안 되는 겁니다. 먼저 되면 어디 가야 돼요? 저 끝에 가야 돼요. 바리새인에게 너희들은 항상 제일 높은 자리에서 인사 받는다고 했다고요. 그 말씀을 기억하면 전부 다 낮은 자리에 가야 돼요. 그럼 낮은 자리에 다 모여 있어요. 낮은 자리에서 높은 체하는 사람들. 겸손의 대결, 누가 겸손한지 시합을 벌이는 교만한 사람이 돼버려요.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전부 다 율법화 돼버렸어요.

 

겸손의 법이 되는 문제가 다른 게 아니고 모델이 따로 만들어진다는 거예요. 우리교회에서는 ◯집사님이 신앙 제일 좋아. 제가 아까 히브리서 11장의 성도들이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자기 외에는 모델이 없어요. 자기도 모델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도 그 일을 예상한 게 아니고 성령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원치 않는 길을 갔거든요.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했어요? 너는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라고 했지요. 만약에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란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되면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니지요. 원치 않는 길을 자기가 결정하면 안 돼요. 본인이 원치 않는 길을 결정한 자기가 원한 길이에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제 취지를.

 

고난 받으라고 해서 자기가 고난 받으면 그건 고난 받는 게 아니라니까요. 자기가 선택한 고난 중에 하나에요. 그건 주의 순종이 아니고. 가만있어 보자. 내가 어떻게 고생길이 없을까? 집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차라리 나 혼자 기도원에 갈까. 이것은 자기가 결정한 거예요. 자기가 그래야만 뭔가 거룩해 보이고 좁은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고 주님의 고난을 본받은 것처럼 보이고 십자가의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것은 수작입니다. 그것은 남을 속이는 짓입니다. 자기 소설 쓰는 거예요.

 

그 소설이 어디서 나왔는가? 모델케이스가 있어요. 고난 받는 사람, 울지 마 톰즈, 아마존에 고생한 것, 손양원 목사. 이미 모델케이스가 있어요. 그 중에서 중요한 것 뽑아서 그 정도해서 존경받는다면 나는 그보다 더 세게 하면 40일 금식기도, 나는 42일째. 전부 다 모델이 있어요. 그러나 신앙에는 두 번 다시 홍해는 없습니다. 요단강 건너왔습니다. 그 다음에 요단강 없습니다. 언약궤 불타버렸어요. 모세 놋뱀 불타버렸습니다. 기드온이 입던 옷 에봇, 그것 우상이었어요.

 

네가 아무리 믿음 좋더라도 오늘 되면 그게 너한테 우상이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십자가를 경유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제 은혜 받았더라도 은혜 받은 걸 기억하는 그 순간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자신이 우상이 돼버려요. 그것은 자기 부인을 빙자한 새로운 자기 의가 되는 거예요. 역사적 해석법이 그런 것을 찾아낼 수가 없어요. 역사적 해석법의 허점은 바로 아무리 겸손을 떨어도 겸손한 만큼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싶은 충동을 인간의 본성상 지울 길이 없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403 연대연합 강의 제3강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아까 마지막에 드린 질문은, 말씀이 역사하는데 그게 위반이 되느냐?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 죄 되게 한 겁니다. 위반도 없는데 죄가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위반해야 죄지요. 성령이 들어온다면 위반이 없다며? 위반이 없는데 그게 왜 죈데요? 그냥 막 나가면 안 되지요. 납득까지는 안 되더라도 앞뒤 말은 맞아야 되지 않습니까. 위반이 없는데 죄인 된다? 거기에 대한 질문 하나로 설명하면 되지요.

 

회개하는 것도 죄입니까? 죄에 대해서 회개하는 것도 죄입니까? 이 문제는 칸트라는 철학자의 책 속에서 인간은 반성하는 주체라 했어요. 인간은 도둑놈이든 강도든 나쁜 짓을 해도 끊임없이 반성을 해야 변명거리가 만들어져요.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가만있지 않는다. 이성과 오성이 있기 때문에. 이성과 따짐이 그야말로 오기통처럼 움직일 때 반성이 나와요.

 

이번 선택은 실패야. 주식을 거기다 투자하지 않는 건데. 땅을 거기다 사지 않는 건데. 목사들 같으면 내가 심방 한 번 더 가는 건데. 심방을 안 가서 다른 교회로 갔어. 내가 관심을 뒀더라면 사랑 없는 교회라는 소리를 안 들었을 텐데. 부부싸움 같으면 내가 말을 함부로 하는 게 아닌데. “네 처갓집 다 그렇잖아.”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왜 했을까.

 

인간은 문을 열면서 닫으면서 반성하고, 주차를 여기 동쪽에 했어야 했나, 아니면 북쪽에 했어야 했나? 항상 인간은 행동하고 그냥 돌아서는 법이 없어요. 그 반성의 연속성이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라면 회개는 결국 일반 반성과 차이가 없지요. 그러면 반성하는 주체를 탐구해보니까 인간은 반성하면서 신에게 접근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신처럼 되는 거잖아요. 신처럼 될 때 회전하면서 되는 거예요.

 

“나는 잘못했다. 하지만 잘못을 아니까 그만큼 성숙했겠지. 성숙했다고 여기는 이게 교만이구나. 하지만 교만한 걸 아니까 그만큼 성숙했겠지. 아니야. 나는 죄인 중에 괴수야.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되는 그 고백을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점점 더 뺑뺑 도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한 마디로 조집니다. 너는 흙이다. 흙이 쫀득쫀득한 한 흙이 예쁠까요, 물렁물렁한 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요, 반짝반짝 윤기 나는 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까요, 아니면 잡것이 많이 섞인 흙이 예쁠까요?

 

주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든 것은 네가 아무리 회개하고 반성해도 네 본성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겁니다. 아담의 흙이기 때문에 너는 흙에 속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면 그때 너는 더 이상 흙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의 형상에 속한다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옵니다. 그걸 흔히 부활장이라고 하는데 부활장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 되심의 연속장이에요.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일하신다. 흙을 흙 되게 고발하고 노출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것이 부활하신 하나님의 주 작업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이 날마다 나를 죽이시고 죽이는 가운데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심이라.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날마다 “너는 죽어야 돼, 너는 흙이야.”라는 것을 반복해서 되풀이하면서 알려줌으로써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사는 것은 네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까발려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회개하는 것도 죄입니까? 정답은 죄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말은 틀렸잖아. 우리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과 방금 한 말이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할 거예요. 회개하는 것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나는 죄입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이건 이렇게 됩니다. 회개하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회개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나는 그 묻는 자체가 죄인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한데 계속 관심 두고 반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했지요. 사랑은 뭐냐 하면, 남자가 여자한테 반한 거예요. 반한 조건 하에서는 어떤 조건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이 두꺼운 성경에서 외치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 나한테 반했나?” “반했습니다.” “일체 너의 짓도 문제 삼지 않겠다. 따라서 너도 네 자신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말라.” 그래야 네가 주님께 반했다는 사실, 주와 소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네 교회 교인이 몇 명이냐? 그런 것이 주님께 문제가 안 돼요. 노아가 방주 지을 때는 수천 명 올 줄 알았지요. 방주에 몇 명 들어왔습니까? 말이 8명이지 자기 집안 식구들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평생 목회한 것이 자기 식구들밖에 구원 못한 거예요. 베드로후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그러면 노아가 천국 가서 꿇어앉아서 손들고 있습니까? “내가 복음 전하라고 했는데 네 집안 식구들밖에 없어.” 하고 꿇어앉게 했습니까, 아니면 잘했다고 하시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잘했다고 하는 거예요. “너 말고 한 명 더 들어올까 봐 조마조마 했는데 네가 내 은혜로 성공했네. 오지 않을 자를 오지 않게 하는 은혜는 너의 능력이 아니고 내가 너한테 준 은혜다.”

 

그걸 성경에서 두 자로 언약이라 합니다.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만 알고 있던 그 내용. 성부와 성자만 알고 있던 내용이기에 어떤 인간에게도 알려지지 않는 내용.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으로만 주어질 경우에만 비로소 그 사람은 창세전의 계획을 눈치 챌 수 있는 혜택을 입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창세전에 이미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음을 반해버린 거예요. 주님의 조치에 반해버리면, 반했다는 말은, 어떤 조건도 문제 삼지 않는 겁니다.

 

여러분도 처음에 연애할 때 다 반했잖아요. 반했을 때 고춧가루 끼고, 성질 더럽고, 키가 작고, 집안에 돈 없고, 어떤 신학교 나왔고, 그런 것들이 문제 되던가요? 뭐 성격이 좋고, 인품이 어떻고, 집안에 아버지가 기도 많이 하고, 그런 것은 핑계고 딱 깨놓고 반해서 그런 거예요. 그 첫사랑을 유지해야 돼요. 첫사랑을 유지해야 라면 하나 못 끓여도 그것이 가정불화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아이 못 낳고 바가지 끊더라도 헤어지자는 말이 나올 수 없어요. 반할 때는 일체 어떤 조건도 능가하는 겁니다. 그게 아가에요.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하겠습니다. 구약에는 두 종류로 돼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율법의 노선이고 하나는 지혜의 노선이 있다는 거죠. 율법의 노선은 피, 제사, 언약, 이런 노선이라면 지혜 노선은 이런 요소가 없는 거예요.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여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개입되는 것이 아니고 엘로힘 하나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세기 1장에 거론했던 6장의 언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란 인간에게만 제공하는 특별혜택이 아니라 모든 자연세계에 은혜를 주시고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그런 차원의 묵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 속에는 언약의 계통이 개입될 수 없다고 잘라버렸어요. 이스라엘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상식적으로 제대로 산 사람들도 나중에 연옥을 거쳐서 패자부활전이거든요. 연옥을 거쳐서 천국에 이룰 수 있는 연옥설이 천주교에서 나왔습니다.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겠지요.

 

연옥설이 왜 나왔겠어요? 교인들이 요구하는 거예요. 교인들이 신론, 기독교, 삼위일체, 요구하지 않습니다. 날 건져주세요.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으니까 죽어서는 누리면서 살도록 해주세요. 교회가 그런 여행사 역할을 하니까. 구원받으면 돈 드릴 테니까 어쨌든 이 몸 하나 죽어서도 살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연옥설이 나왔습니다.

 

연옥설은 그야말로 패자부활전이에요. 세상 돈 버는 데 바빠서 미처 보지 못했던 성경책, 기도 소홀히 했던 것, 연옥 가면 약간 살기가 괴롭잖아요. 괴로울 때 사람은 정신 바짝 들 수 있는 거예요. 인간은 반성하는 주체니까. 내가 미쳤어. 말씀도 안 듣고 너무 내 이익만 채웠구나. 마지막 기회줄 때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렇게 정신 차리고 회개하면 그것도 복역기간이 빨라요. 보석금내고 빨리 나올 수 있는데 그것이 산 사람한테 안 되니까 천주교에서는 같이 기도해주는 거예요.

 

야고보서에서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능력이 크지요. 그러면 교회에서 누가 가장 의인이겠어요? 바로 당회장 목사가 기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가 기도원 간다고 하면 차비 막 내줍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님이 기도하는데 그걸 미사 넣는다고 합니다. 미사 넣을 때 그냥 넣는 게 아니고 100~150만원 듭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때까지 복음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아서 이미 죽은 고조할아버지에 대한 구원을 위해서 후손들이 신부를 통해서 미사를 넣게 되면 먼저 갔던 신앙이 우수한 사람이 있어요. 열두 제자가 우수하잖아요. 그 다음에 성 프란체스코 같은 사람들이 우수하잖아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의 어머니한테 압력을 넣으면 어머니는 아들한테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빨리 빼달라고. 하여튼 천국이고 어디고 돈 없으면 되는 일이 없어. 빨리 빼주게 되면 기도와, 천주교 장례식에 보면 가면서 기도하고 그러잖아요. 믿는 사람의 기도발이 성모를 통해서 먹히는 거예요. 예수님에게 압력을 넣어서 빨리 빼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연옥설의 대충적인 시나리오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이것을 중보기도라는 겁니다. 너만 구원받으면 다야. 네 새끼들은 어떻게 하려고? 완전히 이기주의 아니냐. 예수님의 십자가가 뭐냐? 희생이란 말이지. 너도 교회에서 희생하란 말이죠. 어떻게 희생할까요?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 주께서 성령을 줬다는 것은 기도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본 방침을 줬다는 것이고 중보기도하게 되면 중보기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그걸 네 기도가 아닌 주의 기도로 쳐서 네 자식들이 빠른 시간 내에 구원받는다. 실제로 많은 큰 교회가 중보기도 해서 그 시스템 도입해서 실제로 많은 기적들이 있는데 해 보지도 않고 그런 기적이 없고 신학적으로 안 맞는다고 하지 말고 해 봐라. 해보고 난 뒤에 해보는 가운데 내가 이만큼 믿음이 부족하다는 걸 얻을 수 있는 혜택도 있고. 그래서 중보기도하는 거예요.

 

십오 년 전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그전에는 이런 게 없었어요. 그전에 왜 없었을까요? 성경이 바뀌었습니까, 신학이 바뀌었어요? 왜 도입을 안 했을까요? 바보들이에요? 도입 안 해도 저절로 교인들이 많아져서 그런 걸가요? 왜 중보기도 안 했을까요?

 

신학체제가 개신교 신앙고백서에서 계속 수정해나간다고 했지요. 신앙고백서는 그때뿐이에요. 그 시대에 토착화를 위한 하나에 법적인 장치입니다. 얼마나 실용적이냐가 진리가 돼요. 이걸 존 듀이의 도구주의 사상이라고 하는데 이론이란 실적을 얼마나 남기느냐가 진리에 부합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증거가 된다고 이렇게 믿는 겁니다.

 

그만큼 중보기도조차도 결국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이론이 아니고 출발이 밑에서부터 출발해요. 불교의 금강경인가에 나와요. 엄마가 극락에 갔는데 자기 아들이 지옥 불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한테 부탁을 했어요. 내 아들 좀 건져 달라. 부탁하는데 근거가 있어야지? 제가 업보를 많이 쌓습니다. 자기 항공 마일리지를 사용해서, 말 잘못했다^^ 아들이 먼저 받고 엄마는 지옥 불에 있는데 빽써서 엄마를 건져오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딸려오니까 발로 찼단 말이죠.

 

그러면 교회에서 중보기도하려면 자기 남편만 해서는 안 되고 남편 돈 떼어먹은 부도 낸 사기꾼도 함께 교회에 나오도록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중보기도할 때 중보기도 대상에서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만이 아니고 못하는 사람에게도 중보기도해야 되는 근거는 뭐냐? 마태복음 6장에서처럼 원수를 사랑하란 말이죠. 그런데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원수까지 하려니까 범위가 너무 넓어지니까 순서를 정합시다. 그러면 순서 정하기에 있어서 자기와 가까운 사람부터 정하면 그것이 주님께서 하신 기도와 부합되느냐는 문제가 생겨요. 결국 이것은 구원론과 관련 돼있고 이기주의적 구원론과 상관된 거예요.

 

결국 그렇게 중보기도를 교인들에게 믿음이 있는지 티를 내보라 하면 교인들은 오기가 나거든요. 믿음 있으면 중보기도해서 데려오든지. 교인들에게 자극을 줘서 교회프로그램에 관심을 갖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활성화될 수 있고. 그게 왜 십오 년 전에는 없었는가? 그때는 가만있어도 온 모양이지요? 갑자기 교인수가 늘지 않고 하니까 어떤 수가 없는지 틈새시장을 노리는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합리적인 것을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이미 모델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발적 사건입니다. 항상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벤트로 매일같이 우리를 다루셔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거나 반성할 공로를 일체 제공하지 않게 하십니다. 네가 회개한다고 원하는 게 제공되는 게 아니고 반성한다고 뜻대로 되는 건 아니고, 반성과 회개는 항상 성령께서 했던 것이고, 미처 주의 뜻을 몰랐다는 근원적인 문제에 다가서게 합니다. 근원적인 문제의 자리가 바로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십자가라는 겁니다. 십자가 자리에서는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기대와 우리의 시간적인 미래의 희망은 거기서 일체 박탈당한 상태에 있습니다. 주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얼마나 절망적이었으면 그런 가사를 썼겠습니까? 뭔가 노림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주 뜻대로 하옵시고 하려면 쥐포 찢듯이 힘이 모아서 집중해서 어떤 결과물을 얻고 싶은데 집중 못하도록 내 정신과 의지마저 온 사방팔방 완전히 전기톱으로 사지를 절단해서 한데로 모으지 못하게 찢어서 나란 것은 바람에 날릴 정도로 될 때 그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이 피 흘린 예수님이다.

 

그렇게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데 어떻게 행함을 주장할 수 있느냐? 네가 현재 살아있는 자체가 어렵다 하지만 성령의 은사인데 성령이 주신 선물을 발로 차? 네가 무슨 자격으로 발로 차? 은근히 나름대로 자기 영광을 빛내는 소설을 쓰고 있었구먼. 네가 드라마 작가야. 네가 자꾸 비전이라는 꿈이라는 말을 하면서 소설을 쓰는 거야. 구약 못 봤어?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한 거예요.

 

제가 이번 강의에서 본격적으로 하려는 것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성경해석입니다. 아직까지 서론 끝나지 않았어요. 끝날 부근에 와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출-애굽이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순간 출애굽됐다고 오해한 겁니다. 그런데 애굽이 이스라엘 덩어리에 붙어서 이스라엘 가는 곳마다 애굽이 확산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본인들이 몰랐어요. 그들이 광야에서 시험할 때마다 열 번이나 한 소리가 있습니다. “에이 애굽이 더 나았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부러 갈라요.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다는 그 속성은 지리적으로 수평적으로 공간적으로 애굽을 빠져나왔지만 애굽을 달고 나왔습니다. 애굽의 확산입니다. 진짜 애굽이 어떤 식으로 징벌 받는가를 통해서 약속의 땅은 네가 전에 살던 애굽이 아니듯이 네가 생각했던 어떤 특정 공간이 아님을 그들에게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아비 본토 집을 떠났지요. 히브리서 11장에 나왔지요. 떠났는데 갈 바를 알지 못했다. 미쳤어, 미쳤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는 분명히 약속의 땅으로 간다고 했는데 카메라 들고 가보니까 분명히 가나안 땅에 정착을 했단 말입니다. 정작 아브라함은 여기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성상납 사건이 있었잖아요. 자기는 복의 근원이니까 살아야 돼. 마누라는 죽이고. 완전히 [기황후]에요. 주진모가 사랑하는 아내를 원나라 왕한테 바치고 사랑하기에 버린다 이 말이거든요. 얍삽하기 짝이 없어요. 아브라함이.

 

인간은 기본적으로 살고보자에요. 그걸 극복한 사람이 미친 사람이에요. 아담이 흙인데. 흙은 흙이란 속성을 팍팍 보여줘야 돼요. 흙이 아닌 척하면 안 됩니다. 나는 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려고 아직까지 우리를 안 죽이고 있는 거예요. 흙이 얼마나 토핑을 잘하는지. 흙이면서 아닌 척하는 재주를 마음껏 피워봐라. 죽을 때 흙이 흙으로 돌아갈 테니까.

 

그게 이스라엘의 반복이거든요. 구약의 반복. 말씀의 칩, 구약성경의 칩이 우리한테 들어오게 되면 성경에 의해서 되풀이 되는 거예요. 계속 반복 되면서 이스라엘의 실패가 나의 이야기고 버전이 계속 업그레이드 돼요. 바리새인이 나고, 사두개인이 나고, 서기관이 바로 나고, 가룟 유다가 딱 내 취향에 맞고. 내 몸이 가룟 유다를 기억해요. 내 몸이 세 번씩 부인한 베드로를 기억합니다. 세상 권력, 중국 권력이 무서워요. 만약에 공안이 와서 예수님 사진을 밟으라고 하면 지근지근 밟습니다. 살아야 되니까. 내가 북한에서 잡혔다. 기자회견을 자청해서 해요. 나는 국정원에서 돈 받고 왔습니다.

 

순교는 우리가 조작해낼 수가 있어요. 멋들어진 순교. 방금 이야기가 김은국의 [순교자]란 소설에 나온 이야기에요. 북한 장교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시험해보니까 믿는다는 인간들은 다 배신자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막상 북한에 잡혔을 때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개 같은 자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 주님께서 그 말씀 안 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 말씀 없었으면 우리는 다 죽은 사람이에요. 얼마나 감사한지. 들을 귀도 없는 인간에게 할 필요도 없단 말이지요. 개한테 왜 복음을 전합니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지. 우리는 그런 식으로 처신해 왔지 않습니까. 아닌 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어떤 사건, 어떤 파도가 밀려올지 몰라요. 단단히 마음 준비하세요. 주님을 부인할 만반의 준비를 다합시다. 어차피 흙이니까. 그게 우리 칩이 요구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네가 중국에서 무슨 짓을 해도 일체 문제 삼지 않겠다. 왜? 너는 나한테 반하면 그만이니까. 창기나 세리가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 지금 바꾸란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기 직업 버리란 말이 아니에요. 창기는 창기 아니기에 착하다고 여기는 자를 고발하기 위해서 창기로 살아야 되고, 구원받은 강도는 강도되도록 조치가 그렇게 취해진 거예요. 강도라도 능히 구원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네가 오늘밤에 낙원에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공로가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 이야기가 끝난 상태에요. 그걸 수정하고 변경할 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왔을 때 애굽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요한 건 이거에요. 이스라엘이 나왔을 출애굽했다고 생각했던 신학 해석법이 뭐냐? 그들은 어떤 신학 해석법을 동원했기에 이미 우리는 출애굽했고 우리는 택하신 백성이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자부했던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우리는 승리하고 없는 적들은 물러간다는 그 사고방식은 어떤 논리에서 나온 잘못된 성경해석이냐를 보자는 겁니다. 그들은 물론 쉐마, 쉐마, 다 알고 있었어요. 율법, 십계명 다 알고 있었어요. 안식일을 어긴 사람들에게 돌을 던졌을 때에 어떤 해석법에 의해서 돌을 던졌느냐 말이죠. 돌을 던졌으면 구원해야 되는데 돌을 던진 그들도 멸망하거든요. 도대체 역사적 해석법이 왜 튀어나왔느냐? 현재 내 지점이 정당하다는 흙적인 요소, 육신적인 요소의 발현이 아닌가?

 

그래서 출애굽할 때 유일하게 출애굽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사사기에 보면, 레위인이 첩이 죽었을 때 시체를 열두 지파에게 다 보내지요. 예수님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사기의 반복이에요. 이스라엘을 멸망시켜서 전 세계, 열방에 뿌렸을 때 열방들이 여호와는 한물갔다. 여호와는 더 이상 천지를 창조하신 신이 아니다. 마음껏 모독을 받게 하신 거예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에요. 그런데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끝나고 난 뒤에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단체가 등장합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의 성경해석법을 그대로 인수합니다. 역사적 해석법입니다. 느헤미야가 어떻게 했느냐 하면, 이제는 성전도 없으니까 이제는 말씀을 생활화하자. 실천화하자. 그래서 말씀을 봉독하고 생활화하는 방식을 채택한 그 당파가 마카비 전에 등장한 바리새파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성전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사두개파고,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씀을 그대로 카피한 서기관들이고. 이놈, 저놈 다 꼴 보기 싫고 우리는 마지막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쿰란공동체고. 또 하나 열심당원이 있었고. 다윗의 약속에 의하면 네 번째 짐승, 로마에 승리할 때 감람산에서 기다리자는 열심당원. 이 다섯 개의 파에게 다 오해받고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오색 깃발을 끄집어내야 되지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섯 개의 해석법을 다 끄집어내면서 다섯 개의 해석법이 오늘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모델로서 우리 속에 육신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자백해야 돼요. 같은 아담의 자손이거든요. 네가 끄집어낸 해석법이 내 안에 내장돼있다는 것.

 

이스라엘을 온 천지에 뿌려놓고 주님께서는 무책임한 이야기를 해요.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 중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아브라함 자손?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면 돌들로도 이스라엘을 만들어낼게. 이스라엘과 천국을 절대로 연속시키지 말라. 내가 뜯어낼 거야. 백부장 이 사람을 천국의 본 자손이라는 자들을 다 끄집어내고 집어넣을 거야.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이 그 당시에 그런 이야기할 때는 이미 유대인에게 어떤 신학적인 체제가 갖추어져 있는 거예요. 그런 시스템이 갖춰졌다는 것은 그걸 근거할 수 있는 해석법이 있는 겁니다. 그 해석법이 어떻게 오늘날 개신교 해석법과 닮았는지, 천주교와 닮았는지 해석법 자체가 차이가 나지 않아요. 목사들의 심방해석법과 차이 나지 않아요.

 

신약성경의 모든 해석법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야 됩니다. 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모든 말씀을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돼야 되는데 목사들이 심방할 때 잠언서 끄집어내고 오른쪽은 부자고, 왼쪽은 건강이라고 할 때 이게 십자가를 경유한 건덕더기도 보이지 않고 끄집어내려 할 때 저쪽에서 싫어하면 곤란하고.

 

제가 대구에 대덕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일하면서 심방을 했거든요. 심방을 하면서 지금도 그 본문을 잊지 못해요. 새로 이사 온 수퍼하는 분인데 요한복음 6장으로 했어요. 하나님의 일은 다른 게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을 믿는 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안색이 달라졌어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우리는 촌에서 대구로 왔습니다. 촌에서는 목사들이 절대로 심방 가서 그런 식으로 하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건방지게 내 신앙을 숙제검사 하듯이 하는가. 그래서 그분 안 나왔어요. 저 때문에 안 나온 사람도 많지만 저 때문에 나온 사람이 더 많았어요.

 

심방 갈 때는 신명기 28장을 들고 가야 돼요.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얘들 군에 갔을 때는 여호수아 1장을 들고 가야 됩니다. 네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면 후방으로 빠진다. 병자한테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그리고 긍정적 사고방식,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그런데 그 모든 말씀들이, 긍정적이라고 했지요? 긍정적이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극단적인 부정적인 심한 본문들이 없어요.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지금 네 일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하면 죽으라는 말이에요. 지금 주어진 네 일에 대해서 은혜로 감사가 안 되거든 궁시렁거리지 말고 당장 내가 널 죽어도 할 말 없다는 뜻이란 말이지요.

 

항상 기뻐하란 말이 뭔 뜻이냐 하면, 기뻐하란 조건을 준 게 아니고. 이래도 기뻐할래? 이런 뜻이란 말이죠. 어쭈, 견디는데? 더 심하게 해서, 이래도 기뻐할래? 어이구. 세게 나오네. 이게 어떤 경우냐 하면, 믿음이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린 그 믿음이 온 것이냐, 아니면 내가 뭔가 노림수를 갖고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 자기 마일리지를 근거로 해서 이만큼 봉사했으니까 이 정도는 주셔야 흥정이 맞는다는 식으로 억지로 짜내는 믿음이냐를 항상 구분시키는 방법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나는 그 외는 없습니다. 다른 방식이 없어요.

 

왜 그러냐?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했거든요. 이스라엘 모든 왕들은 자기가 다윗의 혈통으로 봤어요. 다윗언약이 뭐냐?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온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큰바위 얼굴처럼 마을사람들이 큰바위 얼굴 닮은 사람이 와서 마을을 부흥시킨다는 거예요. 훌륭하고 소문난 사람도 아니고, 어떤 시인도 아니고, 어떤 재벌가도 아니고. 나중에 누가 진짜 그 마을에 대한 큰바위 얼굴이냐? 큰바위 얼굴을 기다렸다가 늙어버린 사람이 어느 저녁노을에 보니까 판박이라. 바로 어떤 비전과 꿈을 가진 사람만이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세속적인 문학의 멋진 교훈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이 시간 간다고 늙는 것이 아니고 꿈을 잃는 순간 그때부터 사람은 늙는다. 멋진 멘트 아닙니까. 그야말로 교인들이 듣고 싶은 긍정적인 사고방식, 적극적 사고방식. 부정적이 아니고. 고난 속에 이길 수 있는 것은 나의 믿음밖에 없다. 그 믿음은 신념이라 해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고.

 

그러나 열두 제자, 스데반 집사가 신념이 강해서 예수님 만났습니까? 돌이 날아오는데 “이건 돌이 아니야. 스티로폼이야.” 이래서 견뎌냈습니까? 주님께서 던지는 시늉만 하고 빨리 빼주든지 해야지 직접 날아올 줄이야. 아플 줄이야. 피를 흘릴 줄이야. 주님이 지금 장난치고 있습니까? 중국에 계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국에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을 대단하게 봅니다. 어떻게 저 세계에서 견디나. 하지만 중국에서 만난 목사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나는 그냥 놉니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사람은, “놀아도 안 갈 거야.”

 

다시 이야기합니다. 주님에게 반해버리면 그게 사랑이거든요. 주께 반하면 우리의 어떤 조건도 일체 묻지 않습니다. 아가서에 보면 남자가 여자를 지독하게 스토커처럼 따라다닙니다. 여자가 귀찮아서 문을 닫아버리니까 손이 문에 끼었어요. “자기야. 손 끼인 건 안 아픈데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귀한 약을 가지고 왔으니까 이것만 놓고 갈게.” 손 끼인 채로 돌아섭니다. 이건 일방적인 사랑이고 지독한 사랑이에요. [별에서 온 그대]보다 더 심합니다. 완전히 그 상대 없으면 못 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에요. 그걸 누가복음 2장에서는 내 기뻐함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 네가 나를 기뻐한 게 아니고 내가 먼저 너를 사랑했고 기뻐했다.

 

그래서 마을에 소문 나쁜 여자가 울면서 향수를 뿌리지요. 주님께 반해버렸는데 이런 나의 조건이 뭐가 문제입니까. 조건을 문제 삼는 자가 바로 역사적 해석법을 갖고 있던 바리새인들이에요. 저 여자의 역사를 압니까? 저 여자가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주님은 아십니까? 모르지요. 저 여자가 얼마나 소문이 나쁜지 아십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말이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겁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바로 단절이에요. 나는 흙과 안 논다. 흙이 아무리 예쁜 짓을 해도 그 예쁜 짓 때문에 근거하지 않고 네 속에 집어넣을 거야. 로마서 8장 11절 말씀처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영이 너희 속에 오게 되면 죽은 너의 몸도 너의 속에 있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끝.

 

우리를 비껴가서 대화해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끼리만 대화하고 일처리 다하고 우리를 끼어 넣어주지 않습니다. 네 속에 있는 성령만 있으면,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다. 그게 보증금이거든요. 아파트 보증금, 고린도후서 1장. 보증금이 미리 왔다는 말은 이미 접수했다는 것이고, 점령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하나님은 노가 없고 전부 예스에요. 여러분 인생이 어떻게 되든 노가 없어요. 예스에요. 집어넣으니까.

 

나머지 문제는 성부, 성자, 성령 자기들끼리(?) 다 처리해버리고 우리는 들러리. 우리는 결과물. 이걸 여호와 전쟁에 부산물이라 합니다. 붙여주는 전쟁에서 여호와 혼자 승리하고 용사가 되셔서 그 얻은 부산물 속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그게 성소가 된다는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말씀, 그게 성전이에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들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에베소서 4장의 말씀도 붙여주는 전쟁의 연장선에 있어요. 그래서 구약을 통해서 신약을 봐야 되고 구약해석은 십자가를 통해서 봐야 돼요. 점심 먹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해석에 들어갈 겁니다.

 

오전 공부를 마감하면서 정리하게 되면, 출애굽에서 어린양이 죽었지요. 그렇다면 어린양을 확대시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여기서 죽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씀을 지켰다고 할 때 그냥 보지 말고 자기 죽음을 경유해야 돼요. 그러면 거기에 마중을 나와요. 이미 십자가에 함께 죽었던 분이 마중을 나오게 되면 그때부터는 내가 해야 될 나의 숙제로서의 내 구원이 아니라 우리를 마중 나오는 주님의 숙제로서 나를 구원시켜버리는 일이 벌어져요.

 

제가 공항에 내렸을 때 말을 할 줄 압니까, 아무도 없고 찾아오라고 하면 못 찾아오지요. 정 목사님이 마중을 나왔어요. 천하보다 반갑지요. 한국에서는 별로 안 반갑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 이 정보, 144,000 그것만 알면 구원받는다고 했던 것처럼 확실한 정보를 기억할 수 있도록 치매 걸려도 안 잊어버리는 그런 정보를 알게 해주옵소서. 예수 안 믿는 내 남편, 내 딸도 구원받아야 돼. 이렇게 걱정하면서 와서 성령 인도로 출애굽하기 위해서 죽음이 와버리면, 누가 네 딸이야? 제 딸인데요. 마태복음 12장에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 네 마누라? 네 마누라 아니야. 네 남편? 네 남편 아니야. 내가 만들어서 너한테 붙여준 거야. 그동안 네 소유였지. 내 자식이니까. 그때부터 새로운 피조물로 바뀝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장 7,8절) 내 속에 장착된 말씀이 드디어 구체화 되면서 우리에게는 “죽어. 어디서 네 것이라고 우기면서 내 일에 방해했어.” 마귀 자식이 따로 없어. 얼마나 방해했는지. 하지만 방해한 것보다 내 일이 더 세기 때문에 십자가까지 온 거예요. 와서 드디어 우리를 그리스도 십자가에 죽이고 이제는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주의 마누라 되고, 주의 남편 될 때 에베소서에 의하면 남편에게 순종하고 아내 대하기를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게 되는 거예요. 내 마누라 되면 안 돼요.

 

말씀이 말씀 노릇하려면 반드시 경유해야 될 게 예수님 죽음에 경유해서 교체해야 되고 그동안 반성하고 회개한다는 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반성케 하시고 회개케 하시지 반성, 회개한 내가 죄인입니까, 아닙니까? 물을 자격조차 안 돼요. 주의 것이니까 반성케 하고, 주의 것이니까 회개케 했기 때문에 회개했다고 잘난 척하면 안 되고, 반성했다고 훌륭하다고 여기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걸 이미 주님은 일을 시작했는데 우리가 몰라요. 왜? 우리는 남과 이 세상에서 경쟁해서 잘남을, 자랑질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다고. 맨날 기도하는 게 자기 자랑질할 요소만 끄집어내서 새벽기도하고 있다고. 남에게 지기 싫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소급해서 주께서 일으키신 일을 마치 그래야 구원되는 줄 착각한 거예요.

 

결국 성도는 마지막에 만세를 부릅니다. 뭐라고? 다 이루었다. 십자가 이룰 때 시간적으로 이미 소급해서 다 이룬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십자가는 이미 이룬 사건인 것을 미처 모르고 새삼스럽게 십자가를 믿어야 되고 주님을 믿어야 되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받는 것처럼 내가 오해를 했습니다. 부르도록 했고 믿도록 한 것을 모르고 내가 불러야 내가 장착해야 구원되는 줄 알고 오해했던 것, 얼마나 그동안 세상 유혹에 내 자신이 주는 유혹에 빠졌는지요.

 

그리고 난 뒤에 나중에 천국 가보니까 면류관을 내가 쓴다는 게 말이 돼. 요한계시록 4장에 어떤 사람은 십오 미터 던진 사람 있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생명의 면류관, 무슨 면류관 다 던지는 거예요. 이것은 주님께서 쓰셔야 되지 절대로 우리가 써서는 안 됩니다. 왜? 모든 일은 주의 뜻대로 됐기 때문에.

 

목사님, 성경의 중심이 뭡니까? 성경의 중심은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그냥 주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식사합시다.
201403 연대연합 강의 제4강

(강의:이근호 목사)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해석의 중심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 나라다. 성경신학이 한 30년 전에 발전하면서 도널드 거스리, 리델보스, 게르하르트 보스, 화란개혁주의 계통에서 조직신학적인 교리신학은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 속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성경이 성경으로 말하게 하는 방법은 뭘까? 성경 속에서 교인들이 헤엄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그것은 교회를 마치 법률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눈으로 직접 성경을 보게 하는 방법이 어떨까?

 

보게 했을 때 전체적으로 요약이 되지 않을 때에 특정 교리, 특정 교단이 진리화 되면서 논리적 싸움이 되면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하시는 하나님 말씀이 죽어버린다는 염려 때문에 성경으로 하여금 성경을 말하게 하는 방법으로 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됐어요. 그동안은 성경이 말하게 하는 방법이 아니었고 각 교단의 교리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데 그냥 구절로 동원된 일꾼처럼 임의로 뽑아서 일방적으로 주장한 셈이 돼버렸어요.

 

따라서 성경 자체에서 말하는 방법은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그것은 문맥을 통해서 파악해야 되고, 프리셉트지요. 단어 의미는 가장 넓은 범위에서 살필 때 깊은 의미가 나오고, 그 문맥을 따라서 더 나가게 되면 성경 전체가 일목요연하게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일관된 구체적인 계획이 뭐냐? 하나님 나라라는 거죠.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이사야에서 예언 되고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되는 임마누엘 하나님.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있는 것,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그럴 때 모든 하나님의 일은 마감이 된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이 할 것 같으면 쫓아내지나 말지 이제 와서 인간이 뭘 새롭게 알았다고 해서 그 인간을 다시 포용하고 그동안 헤어져서 미안하다고 이제는 받아주겠다는 정당성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죠.

 

바리새인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물어야 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진짜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제일 먼저 접촉된 사람은 유대인이었어요. 한국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아니고. 오신다고 예언된 그분은 막상 왔을 때 잠입한 그 동네가 텅텅 빈 동네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를 학수고대했던 단체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나님 우리와 함께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그들의 경건함과 메시아가 만났으니까 아마 굉장히 서로 반갑다고 얼싸안고 좋게 끝날 줄 알았는데 웬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심지어 예수님이 뽑아놓은 열두 제자들마저 저쪽의 권세가 무서워서 예수님으로부터 다 도망가고, “나는 저 사람과 모르는 관계입니다. 자꾸 엮지 마세요. 골치 아픕니다.”라고 예수님이 가까기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고 말았어요.

 

베드로 장모를 낫게 했지요, 베드로한테는 물위를 걷게 했지요, 오병이어의 그 떡 먹었지요, 주의 권세와 능력으로 귀신을 좇아냈지요. 특히 물위를 걸은 특이한 경험은 아무나 하는 경험이 아니거든요. 베드로가 물만 보면 환장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하나님 세계에 뛰어드는 자체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정도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관찰자, 차라리 구경꾼으로 있는 것이 편하지 예수님의 현장에 뛰어들게 되면 뒷감당이 안 돼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가까이 할 수도 없어요. 멀찍이 서서 박수를 칠 수는 있는데 찬양한다고 노래 부를 수는 있는데 저하고 상관하지 말고 믿음 좋은 사람과 상대하세요. 주님이 갑자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면, 마음 준비가 안 됐습니다. 저한테 많은 요구를 하지 마세요. 열두 제자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혜택을 받는 것은 고마운데 주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자기가 어떻게 할 줄 모르는 끔찍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한 가지 기어이 놓치지 않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열두 제자나 그 당시 사람들이 구약을 보면서 내린 한결 같은 결론이 뭐냐? 하나님 나라가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의 모든 마무리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하나님 나라를 딱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어요. 어디에? 언제? 천국에 대해서는 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에서는 고생도 없고 아픈 것도 없다는 것은 안다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사자 굴에 손을 넣어도 다치지 않는 그런 정도라면 이것은 충분히 기다릴 가치가 있다고 본 겁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핍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좋은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면 골인 지점이라면 긴긴 마라톤을 마다할리 없다는 거예요. 일곱 번 쓰러지면 여덟 번 일어나면 되니까. 잠언에 나오는 말씀처럼.

 

기어이 상처 안으면서 천국, 천국, 주께서 이루는 목적이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이 오는 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 잠시잠간 고생하는 것, 큰 이득이 있는데 사소한 것에 내가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 천국이 아니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아닙니다. 도널드 거스리고 뭐 리델보스고, 게르하르트 보스고, 오스카 쿨만이고, C. H. 다드, 무천년설, 다 하나님나라 이야기했거든요. 그것 다 하나님 일 아닙니다. 성경을 그렇게 일관되게 묶을 수 없어요.

 

누가복음 17장 20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묻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합니까? 어느 곳과 어느 때를 묻는 것으로 봐서 주님께서 21절에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해서 분명히 너희 안이라는 장소를 이야기했는데 그 장소를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찾을 수 없는 공간에다 천국을 기다렸다는 자신의 문제점이 노출되고 말았던 겁니다. 우리가 찾을 수 있고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그 때와 시간의 조합은 주님이 이야기하는 천국과는 상관없이 상상과 망상에 지나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하는 목적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그냥 하늘나라 오면서 이것이라고 외친 게 아니고 같이 바리새인과 합류가 된다 이 말이죠. 바리새인들은 하늘나라를 기다린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온 목적은 하늘나라를 기다린 사람에게 그것이 바로 지옥임을 알려주는 것이 주의 일입니다. 천국을 기다린 사람에게 그게 바로 지옥임을 알려주는 것, 천국 기다리기 위해서 일곱 번 넘어져서 여덟 번 일어날 정도로 그 희망과 꿈, 그것 때문에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겨내고 들어가겠다는 그러한 미래에 대한 열망 속에 주님께서 오셔서 그런 식을 지옥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지옥으로 만들면 천국은 어디 있느냐? 네가 천국을 기다릴 입장이 못 된다는 이야기에요. 천국을 기다리겠다는 배후에 어두운 세력이 충동질했기 때문에 하나님 계신 곳이 천국이고 그 천국은 우리가 가야 될 나라라고 하는데 주님은 그런 제안을 인간에게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넘볼 걸 넘봐야지. 인간은 인간 나라에 살아야지 남의 나라에 왜 들어가는데? 지가 들어갈 권리가 있습니까? 선악과 따먹었다는 자체가 죄인데 무슨 죄인이 거룩한 나라에 갑니까? 섞일 수가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오신 것은 천국을 기다린 자체가 천국 못 갈 존재의 가장 확실한 이유라고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말씀해주고자 하는 겁니다. 천국 싫어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죽을 때가 된 사람에게, “할아버지, 천국 갈래요? 지옥 갈래요?” 길은 둘밖에 없습니다. 제삼의 길은 없어요. 노인정에 가서 다 물어보세요. “지옥.” 글쎄요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 같기도 하고. 대부분 사람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천국 가고 싶다고.

 

그래서 하나님나라 중심으로 생각했던 그 세상과 주님이 섞임으로 말미암아 창세기 1장 1절부터 새롭게 해석돼야 된다는 겁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해석이 어떻게 다른지 적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이야기해도 되거든요. 천지에 포함되니까.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했다. 이게 같은 말일까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사람은 어떻게 읽느냐 하면,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만물은 신이 창조했다고 하고, 이게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게 노림수가 있어요. 꿍꿍이가 있다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면 지옥도 만들었겠지요.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가 만든 인간을 지옥에 넣는다 할지라도 군소리 하지 마라. 왜? 천지는 내가 만들었으니까. 지옥이고 천국이고 내가 만들었으니까.

 

반면에 주어 자리에 인간이 들어가 있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으면 책임져야지요. 사랑의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나한테 이야기합니까? 잘만 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힌트를 뭔가 희망을 어떤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누설하기 위해서 너한테만 이야기하는데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었거든.” 그 말 뒤에 따라 나오는 말이, 그러니까 이 말은 너한테 해주는 것은 특별히 천국에 넣어주겠다는 제안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까?

 

“인간을 하나님이 만들었으면 이 땅에 살 때 편하게 살게 하고 지금부터 좋은 관계를 맺어서 천국 가서도 좋은 관계로 삽시다.”라는 나의 기대에 하나님이 호응할 것이라고 인간이 주어 자리에 있는 거예요. ‘주어+술어’잖아요. 나는 하나님이 만들었다. 따라서 ‘나’가 부각이 되지요. 여기는 뭐가 부각이 됩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따지고 보면 같은 말이에요. 같은 말을 주어 자리와 술어 자리를 의도적으로 바꾸는 이유는, 바로 똑같은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을 어릴 때부터 달달 외웠던 유대인들이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님을 죽어 버린 거예요. 잠언에 보면 예수님에 의해서 천지가 창조되니까. 지혜에 의해서. 지혜 되신 분을 죽여 버렸단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 본문을 보면서 뭘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왜 인간은 창조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능력이 내장돼있는가? 그 능력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 나온 힘마저 하나님께서 창조했다는 말이냐, 아니냐? 그러니까 사탄을 하나님이 창조한 게 맞는가? 만약에 하나님이 창조했다면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고, 그런데 지옥을 만들어서 인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가 무책임한 깡패 같은 하나님, 자기가 만들어놓고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자기가 뱀 만들어서 유혹해놓고, 선악과 없으면 되는데 있더라도 철조망 쳐서 출입 못하게 되면 되는데 괜히 보암직도 먹음직도 해서 저절로 충동적으로 따먹게 하고 따먹었다고 닦달내시고. 성경해석이 원활하게 뚫리지 않아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걸 알지요. 알면 말려야지. 왜 뒤늦게 보험처리하십니까? 죽이려고 할 때 멈추라고 해야 되잖아요. 하나님은 인간을 책임져주신다. 사랑이 많기 때문에. 산타클로스 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책임져주신다는 것이 틀렸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하나님한테 큰 실망을 했을 경우에. 믿는 도끼에 발등을 열두 번도 더 찍힐 때에, 내가 믿는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고 내가 싫어했던 부처가 도와 줄 때, 차 타려고 하는데 대한예수교장로회 교인은 그냥 지나가고, 침례교인도 그냥 지나가는데 지나가는 여호와증인이 도와줄 때, 내가 강도 만났을 때 우리교회 교인도 지나가고, 아는 목사도 지나가는데 신천지가 도와주고, 통일교, 여호와증인이 도와줄 때 누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까?

 

아무도 안 도와줄 때 나는 도움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인 것을 한 번이라고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마치 신은 마땅히 나를 도와줘야 신다운 분이라고 생각한 것이 엄청난 망상이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선입관에서 나온 내가 조작한 신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포이에르 바하는 그걸 지적한 거예요. 신이란 인간의 자기표현이다. 술어와 주어 부분을 바꿔놔요. 항상 인간은 신을 믿으면서 주어부분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이러한 인간들이 선입관은 비단 성경해석뿐만 아니고 일반사회, 과학에서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별 보신 적이 있지요. 별자리 보신 적 있습니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별은 별자리를 제시한 적이 없어요. 뭐 곰 별자리, 북두칠성, 전혀 제시한 적 없습니다. 별은 다같이 보고 있는 별자리가 민족마다 다 달라요. 별자리라는 게 어디서 나온 거예요? 여기에 만약에 복잡한 벽지가 있다고 합시다. 벽지를 20분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면 거기서 예수님과 열두 제자 얼굴 다 보입니다. 윤곽이 자기 마음대로 변별 지으면서 다 나와요. 그걸 게슈탈트 심리학이라고 해요.

 

인간의 두뇌는 관심을 집중하게 되면 이미 익히 하는 정보를 토대로 동일한 패턴을 찾아내면서 자기의 의식을 스스로 소유하게 돼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그냥 육신이 있는 게 아니고 몸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아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서 그동안 아는 것들을 총동원해서 이 자리에서 하는 거예요. 쉽게 예를 들면 바닷가에 왔는데 헤어진 첫사랑이 생각나네. 그 바닷가에 안 왔으면 육체가 이동하지 않았으면 그 모양새가 안 나타나게 돼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거예요. 자아는 뭐냐? 과거 덩어리, 기억 덩어리가 인간입니다.

 

제가 쓴 글에 이런 게 있어요. 나무라는 게 없어요. 나이테 덩어리에요. 나이테가 뭐냐? 시간의 흔적들의 덩어리에요. 나름대로 나이테는 나무의 기억들이에요. 인간은 세포로 돼있거든요. 세포 내에는 시간이 흐르는 흔적들의 집합체가 세포입니다. 인간은 60조 개의 세포로 돼있고 그 세포의 엮어짐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무의식이 90%고, 의식이 10%거든요. 프로이드 이후에 그게 발견된 거예요. 인간의 어떤 말을 할 때 90%의 무의식이 동원 되고 10%의 의식이 동원되어서 친절을 베푸는 것 같지만 90%의 무의식이, “너 옛날에 돈 떼어먹은 적 있잖아. 참고 있다.” 이걸 윤리에 의해서 참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자아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주체는 한분밖에 없어요. 예수님밖에 없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성경에서 자아, 주체라는 것은 반드시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비로소 언약 안에서 자아, 주체라고 인정하는 것만 자아, 주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을 육체로 보고 때로는 육으로 보고 육신으로 보는 겁니다. 헬라적 사고방식에서는 인간을 삼분설로 나눴어요. 육과 혼과 영. 그래서 워치만 니, 지방교회에서는 이중 중생설이 있습니다. 일단 육에서 혼으로 점프하고 혼에서 영으로 점프, 두 번 거듭나지요. 두 번 점프해야 됩니다. 그게 삼분설이라는 겁니다. 오리겐에서 나오는데. 삼분설이 교회에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피카르라는 철학자는 삼분설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세부분으로 돼있다. 첫 번째는 동물적인 부분인데 인간은 충동적으로 자기밖에 모르고 동물인지 짐승인지 막가파로 살아가는 것. 이걸 신경학에서는 시상하부에 있는 파충류의 두뇌가 있어요. 이것은 그야말로 가장 동물적인 것. 그 다음에 나온 게 양심적이고 윤리적인 요소. 동물적인 요소에서 양심적인 요소로 하려면 교육을 받아야 돼요. 교육은 당근과 채찍이 있습니다. 아기 태어나면 두뇌가 29세까지 계속 자라나요. 그 말은 29세 전까지는 두뇌가 완성되지 않았어요. 인간이 덜 됐어요. 그 다음은 내리막길입니다. 죽은 가수 김광석 말이 맞아요. [서른 즈음에] 노랫말처럼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게 맞아요. 이제는 주어진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를 채우는 것밖에 없어요.

 

따라서 그 아이 주변에서 하나의 자립적인 개체로 키워야 돼요. 교육심리학에 나오거든요. 그때는 인간의 도덕적인 어떻게 발달하느냐? 더불어서 인간의 신앙이 어떻게 자라나는가? 그걸 파악해야 거기에 합당한 교육지침이 내려지기 때문에. 아이들 가르칠 때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할 것인지가 나와요. 특히 피아제 이론과 존 듀이의 이론이 우리나라 해방 이후에 모든 교육학으로 진입했습니다. 목표는 자아성에 충실한 건전한 시민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는 자아나 주체라는 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점점 더 흙에 가까워요. 갈수록 죄를 더 짓는데 그 죄를 너무나 교묘하게 위장하면서 죄를 지어요. 경건해 보이는 죄, 거룩해 보이는 죄, 성화를 많이 한 죄, 마일리지 많이 쌓은 죄, 그래서 다른 사람은 한 수 아래로 내려보는 것으로 재미를 느끼는 죄.

 

사도바울에 있어서 인간론은 언약적 관계를 말합니다. 언약적 관계가 돼있으면 영, 언약적 관계가 끊어진 것은 육.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에요. 육으로 나타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이것은 요한복음 3장에서 하는 말이고, 구약에서는 언약이 영의 자리에 들어가요. 왜냐하면 성령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십자가 완성이 될 때 주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세례 줄 분으로 주로써 승격될 때 주 되심을 선포하는 입장에서 주 되심을 증거해줘야 될 보혜사로써 성령이 오게 돼있어요.

 

여러분이 신학 교수한테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교수님, 예수님이 바로 오시면 되지 아브라함 오고 난 뒤에 예수님 오십니까?” 학교 안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렇게 하나님이 걱정되신다면 신학이 왜 필요해요. 그냥 예수님 보내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 되는데 아브라함은 왜 보내고, 이삭 보내고, 절차가 복잡하냐 말이지요. 중보자 바로 와서 십자가 다 이루었다고 하면 될 텐데 괜히 이스라엘 뽑아서 실패케 하고 고생 실컷 하게 만들고 다윗이 쫓기게 만들고. 일종의 낭비? 구원 에너지의 낭비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신학 교수한테 물어보세요. 답변하는가. 강의 방해하지 마시고. 방해가 아니고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 이야기해보세요. 답변 못합니다. 왜 답변을 못하느냐 하면, 주어 자리에 인간이 가 있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는데 왜 주님이 늦게 오십니까, 이거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대전강의에서 한 수련회 교재에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 일찍 왔고 하나님은 우리 생각보다 늦게 오신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나라와 더불어서 심판이 개시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못하고 하나님 오신다니까 천국 가지고 우리 구원하려고만 왔지 화투패의 뒷면을 못 본 거예요. 화투를 덮어놓고 보면 똑같잖아요. 사람은 자기가 주인공이거든요. 나쁜 면은 감추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온다는 앞면을 내세운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질문이 뭐냐? 그렇게 복잡하게 하시지 마시고 바로 십자가로 구원하시면 되는데 왜 그동안 그런 일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심판 속에서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이야기하시는 이유는, 바로 너희들이 기피하는 지옥 안에서 천국이 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사기 치신 게 아니에요. 회개하라. 천국이 왔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하면서 세례 요한은 도끼 이야기를 합니까? 다독거리면서 이야기해야지 갑자기 도끼 이야기는 왜 나오고, 타작마당을 불사른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는 왜 나옵니까?

 

아직도 기억나는데 제가 옛날에 전도사로 있을 때에 주님께서 독사의 새끼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니까 아주 성화 오래하신 집사님이, 우리 주님은 그런 이야기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그분이 두 가지를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저주받았다고 하니까 저주는 예수님한테 해당이 안 된다는 이야기와 두 번째는 예수님이 욕설을 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찾아봤어요. 했어요. 주님이 저주를 안 받았다고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나와요. 율법의 저주를 받은 사람. 왜 화투짝이 보이면 뒤집느냐 이 말이죠.

 

왜 그런가? 자기의 구원의 희망, 여망, 자기를 주어 자리에 놓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주님이여 그런 건 잊어버리고 좋은 쪽으로 생각해서 구원받을게요.” 이렇게 나가고 싶은 자기 구원 욕구가 먼저 앞서서 나왔기 때문에 몰라도 되는 걸로 알고 있어.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만들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내놓은 해석이 뭡니까? 오직 하나님나라만 기다린 그 사람들이에요. 모든 성경해석이 하나님 나라만 기다렸다고. 임마누엘만 기다렸어요. 주께서 거론한 모든 것이 그들이 치중하고 집중하고 있던 계명들 사용하신 거예요.

 

요한복음 7장에서 내 배에서 생명이 나온다는 그 말은, 이미 에스겔 42장에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세상에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분명히 솔로몬 성전, 모세율법에 보면 성전에서 물 나온다는 말은 없어요. 성전을 연못 위에 지었습니까? 물이 왜 나와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안 해봤습니까?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성전은 원래 물이 안 나오게 돼있어요. 물이 나온다면 장화 신어야 돼요. 물 빼고 일해야 돼요. 철벅철벅 일 못해요.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일하지 말란 뜻이에요. 제사장, 레위인들 일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그 물이 나와서 젖히는 곳마다 모든 물고기가 살아나는 거예요. 안수기도가 아닙니다. 성전에서 나온 물이에요.

 

그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라고 말하면 그게 반칙이 되는 거예요.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오시는 것도 아니에요. 어디에, 언제라는 것은 우리들이 하늘나라를 기다릴 때 우리가 갖고 있는 자아를 구축하면서 동원되는 나의 존재를 구축하는 속성의 요소가 나는 어디에 있으며, 나는 몇 살이며, 언제 있으며, 인간들이 사용하는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 시간과 공간 개념을 찾아와요. 찾아와서 노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주님은 빈 터에 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고 지적하시면서 지적된 그 자리를 하나님께서 천국이 일어나는 곳이에요. 그러면 우리를 쓰레기지요. 쓰레기 돼야 돼요. 쓰레기 모아서 천국 이루는 겁니다.

 

에스겔의 성전은 죄로 이스라엘이 멸망한 자리에요. 힌놈의 골짜기에요. 거기에 은 삼십 개가 던져집니다. 은 삼십 개가 사람의 값이 아니에요.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종이 소한테 받힐 때에 소도 주인의 재산이고 종도 주인의 재산이에요. 일종에 가재도구에요. 둘 다 돈으로 측량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돈으로 때우는 게 아니에요. 가재도구고 물체기 때문에 돈으로 환산이 가능해요. 사람들은 소 죽었다고 사람 죽은 것과 같이 취급 안 하고 자기가 사람이고 노예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번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받은 [노예12년] 제가 그걸 봤어요. 노예는 사람이 아닙니다. 노예를 받으면 상해죄가 아니에요. 그냥 수선비에요. 수선비로 은 삼십 개를 주라는 출애굽기 21장 32절 그 말씀이 왜 있는가? 바로 너희들이 나는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라고 지정된 그 자리에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기 자리로 삼겠다는 거예요. 해석해보라는 거예요. 눈치 챌 수 있으면 눈치채보라는 거예요. 너희들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를 위한 우상숭배가 되는 거예요. 신? 천국?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해요. 성경으로.

 

언제 오십니까? 어디에 오십니까? 여호와증인, 그리고 세대주의, 그리고 신천지, 하여튼 이단이라는 이단 전부 다 한결 같이 목회 성공에 아주 크게 기여한 논쟁이 바로 주께서 언제 오시는가? 대구에 유명한 동부교회 지금은 죽었지만 김덕신 목사, 서울에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그들이 설교시간에 한 말은 주께서 몇 년 후에 오시는가?

 

1998년 10월 18일에 이장림이 온다고 해서 흰 소복 많이 팔렸어요. 아줌마들 흰 옷 입고 왔을 때 사람들이 비웃었지요. 한국의 큰 교회 목사들 다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날짜 이야기했는데. 시대가 보니까 어두운 시대고, 짐승이 설치는 시대기 때문에 이것은 대충 맞는가 싶어서. 정확한 시기는 모르지만 분위기는 잡을 수 있다는 식으로 슬쩍 넘어가버린 거예요. 이장림이 너무 노골적으로 하니까 쑥 들어가 버린 거예요. 뒤로 빠진 거예요.

 

나중에 이장림한테 물어봤어요. 당신 그때 왜 그렇게 이야기했어? 사람들이 요구하데요. 핑계치고는 간단해요. 목사가 사람들이 요구하는 걸 줘야지. 너는 믿었나? 내가 그걸 왜 믿어. 말도 안 되는 걸 왜 믿어. 사람들이 요구하니까 다니엘 70이레로 계산해서 내밀었어요. 지금도 소위 공부 좀 한다는 사람치고 70이레 계산 안 하는 사람 없어요. 7*7=49, 490년. 성전에 훼파할 때가 언젠지 계산해서. 토정비결 보는 것도 아니고 뭐예요, 도대체. 그때와 그 시가 언제입니까? 다른 소리는 듣기 싫다는 거예요. 그때와 그 시에 주께서 재림하는데 그 장소는 어디입니까? 감람산. 어디 나오는가? 스가랴. 그러면 그 날은 언제입니까? 가만있어 보자. 요한계시록 들여다보고.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제자들이 한 질문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하여튼 제자들은 안 돼. 그렇게 이야기해도 감을 못 잡아. 주여, 그때가 언제입니까? 왜 인간들은 그때와 그 장소를 원하느냐 하면, 지금 중요한 것은 주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니고 나란 주체거든요. 그런데 주체가 있습니까? 없어요. 거울 보면 주체 나옵니까? 아니에요. 내 몸이 있을 뿐이에요. 주님은 주체를 만든 게 아니고 몸을 만들었어요. 몸의 아우라가 주체에요.

 

제가 아까 사랑이 반했다고 했지요. 어떤 분이 이근호 목사의 신학은 십자가뿐이다. 십자가 그 다음에 뭔데?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하지요. 사랑해봤습니까? 사랑하는데 그 다음을 물으면 귀싸대기 맞습니다. 사랑이 끝이에요. 반한 게 끝이에요. “자기, 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하고 있는데 더 없나?” “뭘?” 사랑하니까 명품 프라다 하나 사달라는 말입니까? 그게 사랑입니까? 열두 제자가 왜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했지요. 받은 게 사랑인데 사랑 받고 난 뒤에 또 달라는 것은 사랑이 영 시답지 않다는 말이거든요. 사랑은 일단 챙기고 용서 받아야 되니까. 챙겼으니까 내놔라. 뭐? 뭐?

 

십자가는 뭐냐 하면, 주님의 목숨입니다. 아들이 죽어야 될 자리에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물에 빠졌을 때 딸이 엄마한테 “엄마, 그게 다에요?” 그럼 뭘 해야 돼요? 엄마 죽으면 내 공납금 어떻게 되느냐고 하는 게 죽은 엄마한테 할 소리에요? 줄 것 다 줬는데.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일으키니까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했어요? 당신 솜씨 보여주면 메시아라고 인정해줄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이 바로 그들의 기대한 것을 하나님이 줄 수 있다고 여기는 것, 하나님과 더불어서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런 복을 줄 것이라고 함께 한 세트로 주는 그런 기적을 원했을 때 그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게 내가 이야기할 것은 요나의 기적, 십자가밖에 없다. 네가 버림 받아야 될 진짜 모습을 내가 대신 하나님 앞에서 서있는 너의 모습을 보여줄게.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죄도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가져가셔서 우리 대신 아버지 앞에 설 때에 그 주님 당한 버림받은 그게 우리의 자아상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가 하시는 그 일의 우리가 재료로써 우리가 육체로써 왔고 육체가 갖고 있는 것을 통해서 우리 배후에 있는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선악과 따먹도록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그리고 철조망 쳐서 선악과 따먹지 못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마음껏 따먹도록 해요. 그래서 인간은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인간은 뱀과 더불어 있을 때 인간의 존재 이유가 나오는데 그 존재 이유는 인간 자체로서 멈춰서는 해답이 안 되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게 나오지요.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창세전에 성도가 예수 안에서 피 흘림을 위해서 인간은 있어야 된다는 것.

 

주어 자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언약의 완성이고 그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인간이 있는 거예요. 그걸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는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친히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로 통일되게 하심이라. 그리스도가 주어 자리가 아니고 왜 자꾸 어느새 보면 내 나름대로의 주어 자리가 생성돼있어요.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별이 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별자리는 인간이 정해요. 왜 정합니까? 하나님 좋으라고 정합니까? 별자리 바라보는 주체가 누구에요? 나니까. 별자리를 보고 내 앞의 미래를 보지요. 점성술이지요. 세상에 인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나 중심으로 돌아가게 돼있다는 것을 주께서 일부러 허락하신 거예요. 마음껏 까불어라. 나는 너희들이 가기 싫어하는 제일 밑바닥에서 천국을 만들리라.

 

 

10분 쉽시다.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5강

(강의:이근호 목사)

 

 

별자리 이야기 좀더 진행해보겠습니다. 성경해석할 때 교수들이 이야기해요. 원어를 알아야 된다. 원어를 왜 알아야 되는가? 나머지는 번역본이기 때문에 원어를 해야 본래의 뜻이 살아난다. 여러분, 원어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언어학을 몰라서 그래요. 20세기 들어 와서 언어는 기호학에 복속이 돼버립니다. 언어학의 범위가 더 넓어진 것이 기호학이 돼요.

 

그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소쉬르 이후에 기호학적으로 등장한 이론들인데. 먹구름이 몰려왔다. 잠시 후에 폭풍이 왔다. 그러면 먹구름이 언어인가, 언어가 아닌가? 그것은 일종에 언어가 될 수 있고, 상징은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일기 예보할 때 먹구름 표시한 것은 내일 비 온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린 구름은 먹구름은 아니에요. 먹구름 닮게 그려놓고 우리에게 폭풍우 오니까 주의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먹구름 그림을 개나 소나 돼지한테 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면 언어나 기호는 사람과 사람의 용도가 되겠지요.

 

그것은 기호가 될 수 없어요. 하나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데 흔히 상징이 자주 나오는 부분이 요한계시록이에요.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이것은 상징이란 말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상징이란 말을 쓰려면 상징의 의미를 알아야 되는데 상징이 두루 뭉실 너무 모호해요. 말 안 되니까 상징이란 말을 한 거예요. 해석 못했다는 다른 고백에 지나지 않아요.

 

기호는 위치 문제에요. 여러분이 바둑이나 장기를 두다가 돌이나 졸이 모자란다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지요. 그러면 졸과 다른 대체물과 안 닮아도 되지요. 다만 그 빈칸에 하나 들어가는 것뿐이지요. 그럼 닮았다, 안 닮았다, 흔히 말하는 상징적이라는 것은 의미 없고 위치가 의미를 낳아요. 위치들이 모여서 만든 게 시스템이거든요.

 

장기에서 게임의 룰이 있잖아요. 룰이 살리는 데 있어서 장기 알 대신 다른 것을 넣어도 괜찮아요. 심지어 종이를 오려서 ‘졸’이란 글자를 써서 하잖아요. 따라서 위치가 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졸이 장기에서 주인공 역할, 주체가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장기에서 주인공이 누구지요? 장기는 어울림이지요. 장기는 차, 포, 졸, 마, 상, 전체가 장기의 룰을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장기의 주체는 장기 알 속에 없고 장기 게임을 만든 인간들이 장기에 대한 주체가 되겠지요.

 

그걸 생각해서 성경을 해석해보세요. 성경에 놓여있는 사탄, 악마, 뱀, 인간, 사도바울, 아브라함, 전부 다 본인들이 주체로 할 수 없어요. 마태복음 17장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3:3 미팅했어요. 저쪽에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이 등장했습니다. 왜 3:3으로 만났느냐 하면, 그중에 누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느냐? ①여기서 주인공은 하늘에 속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이다. ②예수님이다. 몇 번입니까? 몇 번이 정답이겠어요? 예수님이 주인공이죠. 그 이야기가 뒤에 나오지요. 초막 셋 지겠다고 하니까 갑자기 세 명 있다가 둘 날아가고 예수님만 남았고 음성이 들렸지요. 너희는 주의 말을 들으라고 했지요.

 

그러면 모세와 엘리야 당시에 예수님이 안 나타났지만 구약의 장기판이 있었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중의 한 사람이 엘리야고, 모세니까 자기 중의 한 위대한 인물이 등장했으니까 이 인물의 등장은 바로 이스라엘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한 줄 알았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교인들이 목사님을 청빙했어요. 교인들은 주를 위해서 청빙했다고 봅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인 됨을 목사를 청빙한 거예요? 안 그러면 목사님이 새로운 당회장 되라고 청빙한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목사님이 당회장 되라고 청빙했잖아요. 그게 잘못이라니까. 그것이 이스라엘의 잘못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 교인들은 목사님을 청빙하면서 당신은 이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청빙해줘야 되지요.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이 청빙돼야 되고.

 

말씀이 해석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실제 모든 교회 구석구석에 파급이 돼요. 목사가 와서 하는 말이, “이 교회의 머리와 주인은 주님밖에 없고 저는 아닙니다. 제 지시 받으려면 성도 아니라고 간주합니다. 제가 하는 행동과 말씀 가운데 성령 받은 여러분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거든 잘못됐다고 지적하라고 저를 이 자리에 보냈습니다. 십자가 지신 분은 주님이지 제가 아닙니다.” 분명히 설교했을 거예요. 주님만 교회의 머리입니다. 분명히 했지요.

 

제가 이렇게 편해서 하는 이유가, 교인이나 목사가 수시로 그 점을 놓치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성경해석 제대로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훌륭한 종이라고 간주해서 정작 목사가 노리는 큰 교회를 주께서 보너스로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은근한 노림수가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인간이 그럴 수 있는 거예요. 바르게 했으면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바르게 하니까 키워서 크게 쓰시게 되면, 스데반 집사처럼 돌에 맞아 죽는 게 아니고 세상에서 기대하는 크게 쓰심 있잖아요. 마태복음 4장에 두 번째 시험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예수님 사명이 메시아 사명이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놀라 자빠져서 얼마나 많이 따라오겠습니까. 그렇게 크게 쓰시는 그것, 그게 유행 되었으니까. 사람은 환경에 따라 새로운 인식이 그냥 주어지거든요. 별자리 속에 있으니까 우리가 주체니까.

 

주체란 자아잖아요. 자아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타자, 타인을 불러내게 돼있어요.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남들이 나를 뭐라고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누군지 그때그때마다 확장하겠다는 겁니다. “머리했는데 내 머리 잘 나왔어?” 아내가 남편한테 묻는 이유가, 자아가 결정하기보다는 타자를 경유해서 말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 타인 중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가 같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 저 어때요?” 그걸 기도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하지요. “주님, 저 살아가는 것 어때요? 신앙생활 제대로 하고 있는 것 맞습니까?” 묻는 겁니다. 구정물에서 주님 얼굴 나타나서 두만강 건너서 그 사람들한테 가라. 그 계시 받은 영화가 [신이 보낸 사람]이란 영화거든요. 그 영화대로 적용한 사람이 다 죽어 버렸어요. 성공 못했다고. 성공 못했으니까 마귀가 준 계시입니까, 진짜 계시입니까?

 

계시는 이것밖에 없어요. 보탤 계시가 없어요. 우리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계시가 뭐냐는 첫째 시간 이야기로 되돌아갔어요. 자꾸 잊어버려요. 성경이 계시란 사실을 잊어버리고, 성령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내용만 반복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내가 주체가 돼있으니까 그리고 주체라는 것은 홀로 주체를 인정하지 않고 남들이 나를 신앙인이라고 간주해줄 때 우리는 그것을 되받아서 새로운 내 주체로 정립하고 싶어 하니까 자꾸 남의 평가와 남의 시선과 남의 인식에 대해서 귀 기울인다고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아요.

 

스데반 집사가 스트레스 받았을까요? 받은 적이 없겠지요. 성령 충만한 빌립 집사가 스트레스 받았겠습니까? 받을 수 있겠는데 성경에 나오는 그 순간만큼은 안 받았을 거예요. 제 생각에는. 주의 천사가 와서 보내서 에티오피아 내시 만났을 때 저 사람이 구원받을 사람인지 기다릴 때 스트레스 받았습니까? 전혀 그런 것 없었습니다. 무슨 대목을 가르치면 저 사람이 세례 줄까? 그 생각 미리 한 적 없어요. 오히려 그쪽에서 이사야 53장을 펴놓고 여기서 말하는 종이란 누구를 이야기합니까? 그쪽에서 먼저 언급을 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때 빌립은 그것부터 시작해서 성경 전체를 예수 그리스도로 설명해준 것, 단지 십자가 지신 그분이 주님이라는 그 사실밖에 할 수 없었어요. 세례 주고 난 뒤에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어요. 그 뒤에 만난 적 없어요. 빌립 집사가 총회장 됐어요? 그런 것 없어요.

 

졸이라니까. 상, 마. 게임은 누가 주관합니까, 누가 움직입니까? 주님이 움직일 때 법칙이 있어요. 언약 중심으로 언약 완성은 십자가니까 십자가 중심으로 자기를 부인하면서 그리스도의 공로만 드러내라고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가만있지 않고 자꾸 움직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의 움직임을 차단시켜서 그러면 안 된다고 하면, 우리는 씩씩거리면서 불평하고 짜증내면서 움직이다 보니까 이미 나는 주님께 짜증을 냈고 주님께 원망이 있는데 가보니까 예상 못한 주님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을 때 모든 공로를 오직 주께서 게임의 주관자라고 돌릴 수밖에 없지요.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전도할 때 그 주선을 천사가 했지요. 베드로가 먼 데까지 갈 필요도 없고 올 필요도 없고. 그냥 보자기 내려왔고 베드로는 안 먹겠다고 했습니다. 보자기를 누가 내렸겠어요? 선교, 전도 이야기할 때 분명히 한국에서 하는 게 아니고 어린양의 보좌에서 선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지금 주님이 놀지 않습니다. 쉬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겸손하게 논다고 하는데 노는 것도 일이에요. 왜? 주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자기도 놀면서 주의 일하심을 믿는 게 일이라니까요.

 

어린양의 보좌에서 선교할 때 선교 대상이 바로 우리에요. 선교사에게 주께서 선교하는 거예요. 정신 차리라고. 열 사람이 있다고 영광 더 되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만 믿어도 충분해요. 주님의 주 되심에 영광 돌리는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훼방만 안 하면 천만다행이에요. 아까 점심 먹을 때 시내에 차들이 다니지요. 차바퀴 누가 굴러가게 하십니까? 주께서 굴러가게 하신 거예요. 그걸 좀더 언약적으로 말하면, 주의 십자가 희생의 힘으로, 에너지 힘으로 차바퀴가 굴러가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마음대로 치고 들어오는데 그것도 주의 십자가 은혜로 마음대로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발걸음을 누가 세신다? 성경에 주께서 발걸음 세신다고 마태복음 10장에 나오잖아요. 그게 실감나야 돼요. 그게 실감나려면 발걸음에 관심 안 두다가 어느 사건이 터져서 갑자기 남의 발걸음 신경 쓰게 만들면서 마태복음 10장과 매치시키면서 저 사람의 발걸음을 주께서 세시는데 그럼 내 발걸음도 주께서 세시겠구나. 참새는 누가 키우지? 주님. 그럼 내 목숨은? 주께서 키우시는구나. 잠시 잠간이지만 몇 초 상관 아니지만 다시 말씀이 활성화되도록 주께서 우리의 원대로가 아닌 주의 뜻대로 지금도 부리고 계시는 겁니다. 주님은 심장 뛰도록 하시면서 안 놓아요.

 

괜히 내가 주인공이 된 장기 게임을 따로 벌이기 때문에 그저 주님한테 원망하는 거예요. 주님이여, 목회라는 장기판을 하는데 저쪽에서 졸이고 상이고 다 가져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을 우리 세 식구밖에 안 남았어요. 이래서는 목회할 마음이 안 납니다. 이래서 주님과 동업자 되겠어요? 뭔가 의욕을 북돋을 만한 어떤 계기를 달라고 솔직하게 하겠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아버지 뜻을 이루려 함인데 아버지 뜻은 내게 준 양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네가 그런 일을 한다고 해서 내가 양을 놓치는 법은 주님의 게임에는 일체 없습니다. 그게 믿어지도록 우리로 하여금 먼저 원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들이닥치도록 만듭니다. 짜증나는 일들이 매일같이 들어서 나는 기껏 짜증장이, 원망장이, 죄인 중의 괴수, 불평투성이. 그러면서도 십자가 통해서 저 같은 죄인을 구원을 해내시다니 이 게임 주여, 감사히 받겠습니다. 졸로 등록된 것을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밥이 탔다, 라면이 퍼졌다. 그게 그날 될 게임이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기분은 좋은데 너무 자기 행동에 대한 변명이나 합리화, 자기 태만 또는 방심, 개판, 막 살기를 옹호하는 셈이 되지 않느냐고 저한테 질문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삼십 년 역사 가운데 수 천 명이 넘습니다. 그러면 이야기하지요. 그런 질문 자체가 뭔가 자기는 부지런 떨었다는 거거든요. 그 부지런함이 태만인 것을 미처 몰랐어요. 왜냐? 주를 믿는 것이 주의 일인데 자기는 나름대로 막 살지 않고 부지런 떤 것을 자기의 주체, 자아성 때문에 역시 주의 일은 부지런해야 돼. 항상 부지런함으로 주를 섬기라 했으니까 그 부지런함이 이런 형태를 말하는 거야. 성경말씀을 일방적으로 자기 부지런함으로 자기가 말씀이 모델, 에프엠, 표준이 된 거예요.

 

그것 때문에 주님의 일하심이 방해되는 거예요. 막 사는 걸 오해했어요. 부지런 떤 것이 그것이 바로 막 사는 거고 막 사는 게 성실한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알아서 들으세요.

 

“목사님의 그 말을 이해는 하겠는데 우리끼리는 되는데 그걸 기초도 안 된 교인들에게 이야기하면, 그들이 그걸 잘도 이용해 처먹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자기 합리화에 나설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다면, 그들이 모르게 하면서 몰래 우리끼리만 했던 그 게임 방법은 주님한테 들통 났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일차 폭풍이 나한테 거치고 나는 당회장이고 권위를 부여받은 권위자니까 교인은 내게 복속돼야 마땅하다는 실체적 교회론에 의해서 했던 이 모습 자체가 진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일을 나의 자아성, 자존심, 명예, 체면 때문에 방해하지 않았는지 다시 돌아보는 기회로 삼으시면 되는 겁니다.

 

주시하는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말라고. 그러면 목회자가 늘 조마조마 떠는 것은 뭐냐 하면, 누가 불쑥 교인 몇 명입니까? 헌금 얼마입니까? 거기에 대해 답변하면서 초라한 나의 자괴감, 다섯 명이라고 외치지 못하는 뭔가 선입감, 언제까지 감출 겁니까? “다섯 명이라도 천국 간데요.” 이렇게 못하는 나의 자존심. “이번에 또 두 명 나갔어요. 이제 세 명 남았어요. 세 명이라도 십자가로 구원받는데요.” 그걸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괴감, 내 안에 누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분명히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복음에 대해서 부끄럽지 아니하노니. 복음만 있으면 부끄럽지 않다고 했는데 주님은 부끄럽지 말라고 복음을 줬는데 우리는 복음을 간직한다고 주장하면서 남들의 시선에 부끄러워한다면 내가 갖고 있는 복음은 엉터리 복음이에요? 가짠가요? 중국산 짝퉁인가요?

 

제가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하는데 그분이 이런 이야기해요. “목사님 말씀 다 맞는데 그래도 권위는 존중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분이 권위를 주장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가 옛날에 부교역자로 있을 때 당회장 목사가 그만두라고 할 때 분명히 정치적 수작인 줄 알면서도 성경말씀대로 권위에 복종하라고 해서 나왔는데 자기 결정이 옳지 않느냐는 식으로 이야기했어요.

 

제가 강의하면서 모든 성경구절은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된다. 그러면 사도들이 권위를 존중할 때 권위는 바로 복음의 권위였어요. 그럼 복음의 권위자가 누구냐? 사도보다 낫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에게 복음이 임할 때 사도는 그 어린아이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발견합니다. 어린아이라고 무시하는 게 아니고 너는 어떻게 해서 그런 선물을 받았는지 복음을 아는 자체에서 권위를 느끼는 겁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말씀 맞지요.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걸 주었고, 배고플 때에 먹을 걸 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걸 주었다고 했지요. 누가 돼 묻느냐 하면 천국 가는 양이 돼 묻지요. 제가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누가 물어요? 주님한테 양이 묻지요. 우리 상식은 뭡니까? “그때 봉사한 것을 주님이 알아챘구먼. 주님이 아실 줄 알았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도하는 것도 아시는 분인데.” 이렇게 나와야 앞뒤가 맞는데 오히려 누가 의아해 하며 묻습니까? “주님이여, 저가 언제 옥에 계실 때 돌아보았습니까?” 할 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살아계시는 겁니까? 복음을 믿는 초신자, 그들 속에 선물로 주신 복음의 권위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섬길 때 그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고 그 사람 속에 있는 복음을 인하여 목사는 섬겨야 되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길 때 너희들이 나를 섬기는 게 아니라 나는 너희를 섬기러왔다. 세상 권세자들은 자기를 섬기라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쓴잔을 마시면서 너희를 섬기노라 할 때 주님 무시하고 맞먹으라는 뜻입니까? 아니지요. 아버지의 뜻이 열두 제자에게 있는 거예요. 그걸 창세전에 이야기가 끝났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알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에 언약 완성에 주님께서는 복종하시는 거예요. 그 권위에.

 

그래서 반드시 성경에 권위라는 말이 있더라도 어떤 존재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십자가의 복음을 경유해서 이해하게 되면 성경해석이 다 이해가 되는 거예요. 누구나 십자가 앞에서는 의인이 없고 누구나 그리스도만 높여야만 될 입장이기 때문에 누가 나서서 대장질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에 그 기름 부음을 존중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 보면 그걸 영적 예배라 하고 그 다음에 일방적으로 섬기라는 게 아니고 서로 섬겨라. 왜 서로 섬겨야 되느냐 하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잖아요. 그냥 가면 안 돼요. 그냥 가면 자기 신앙 좋은 것 자랑질해서 안 돼요. 반드시 경유해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해서 가게 되면, 나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 되거든요. 죄인이 되면서 어떤 일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당신 죄인이니까 죄인 맞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뭐로 받느냐 하면, 온유와 화평과 양선과 형제우애로 이해가 됩니다.

 

목사는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데 교인들은 목사 얼굴에서 온유와 양선과 자비와 성령의 열매가 한꺼번에 다 튀어나오네요. 그런데 반대로 나는 목사라고 하니까 육의 열매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시기와 다툼과 이런 게 막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줘야 돼요. 은사가 그렇게 하게 만들어요. 손이 발더러 쓸데없다고 발이 손더러 쓸데없다 한다.

 

그러니까 실체론적 교회론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실체론적 교회론은 법 중심의 교회론으로 문제가 있는 거예요. 문제가 있으니까 없앨까요? 없애면 안 돼요. 제 말을 오해하는 부분이 거기에요. 없애겠다는 말은 내 힘으로 좋은 교회 만들겠다는 시도밖에 안 되거든요. 우리의 흙은 본성대로 실체론적 교회론이 마지막 모습이에요. 지금 천주교 모습을 개신교가 따라가는데 결국 천주교 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높고, 높고 최고 높은 사람 위주로 가야 결속력이 생기니까 힘이 유지가 돼요. 각자 자기 팔 흔들면 교회가 중구난방으로 잘났다고 다 깨져버리고 교회 중요한 돈 되는 비품들은 누가 가져갔는지 모르고, 누가 교회 담보로 돈 다 가져가고 희한한 일 생긴다 말이지요. 그러면 제직회할 때 2/3 찬성하지 말고 10% 찬성하면 되겠네? 그러면 교회입니까? 그렇게 하려면 지방교회하든지. 혹시 오늘 말씀 받으신 분 있으면 말씀하세요. 이렇게 할까요?

 

실체론적 교회론, 그게 맞습니다. 법대로 해야 돼요. 하나도 빠지면 안 돼요. 그래서 죄인입니다. 이 말은 아무리 이상적인 교회를 실시해도 이상적인 교회관을 실시하는 나 자신이 바로 죄인입니다. 이미 교회는 새 언약에 의해서 주님이 알아서 교회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고 내 자아 중심에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교회가 따로 있거든요. 그 그림이 될 때까지 만족함이 없고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어요. 아니야. 이건 아니야. 좀더 섬김, 더 관심. 이것으로는 모자라. 그렇게 되면 내가 그려낸 모델이 생기고 그 모델은 우상체가 되고 말아요. 나의 투영체가 되고 마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이 위치입니다. 게임이야기. 원어는 필요 없어요. 원어는 그 시대에 필요했던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고 지금 현대의 성경말씀은 바로 이 말씀이 성경말씀이에요. 한국말 때려치우고 헬라어 배우자는 것, 의미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헬라어, 히브리어는 고대어거든요. 고대어는 모든 것이 분명치 않아요. 두루뭉술한 겁니다. 하나의 대접이 구분이 되지 않아요. 사물이 그만큼 다양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원어를 캐보면 원어에서 새로운 개념이 나오는 게 아니고 희미한 경계선만 나와요. 희미한 경계선을 자기가 자르다보면 자기 마음대로 칼질을 해요.

 

베들레헴이 떡집이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배당 떡집 아니에요. 조직신학, 교리신학에 맞추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시대는 사물이 많지 않아요. 대충 묶어서 한 거예요. 대표적인 용어가 ‘날’ 개념. 날이 24시간이라고요? 24시간이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그럼 24시간이 아니면 ‘세대’라고 이야기하거든요. 누가 세대라고 이야기해요? 그럼 정답은 뭐냐? 몰라요. 진화론이 발달하고 설마 7일 만에 창조했겠는가? 주님께서 말하는 날이라는 단어는 전체 게임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졸로써 개입된 거예요. 졸 하나 떼서 거기서 장기 게임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상이나 마 떼어서 장기 게임 어떻게 하지? 몰라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언약이 주어져요. 앞에 있는 창세기 의미는 그 다음에 주어지는 언약에 의해서 창세기에 담긴 의미가 조금씩 깊은 내막이 밝혀집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다고 했지요.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놀랍게도 창세기 1장에는 죽는다는 이야기가 없어요. 나는 죽음이라는 그러한 숨겨진 비책이 있다고 창세기에는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죽는다는 이야기는 창세기 2장에서 따먹는 날에는 죽는다고 나오지요.

 

그러면 창조의 확산이고 확대에요. 창조가 7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끝내버린 창조가 2장, 3장으로 넘어오면서 계속해서 창조가 반복될 때마다 창조 밑바닥에 숨어있는 지혜와 비밀들이 하나씩 바깥으로 노출됩니다. 노출되는 계기로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 형상이란 이름의 인간이에요. 그러다가 잠언 8장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로 창조했지요. 그냥 지혜입니다. 지혜자라는 것은 지혜를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혜자라 하고 지혜는 그냥 지혜에요.

 

그런데 지혜가 어떤 인물로 등장해요. 그러면 장차 그 지혜는 어떻게 되는가? 어떤 인물로 등장될 지혜지요. 신약에 오면 그 지혜가 누굽니까? 예수님 본인이 지혜에요. 천지창조 때 계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한 꺼풀, 두 꺼풀 뜯기는 거예요. 뜯어내려가면서 내가 창조했다고 하실 때 솔로몬이 지혜 얻으려고 나한테 왔다고 했을 때 그 말씀하고 승천했습니까? 산상설교 잘 들었지? 난 이제 간다. 할 일 다 했다고 그냥 가버렸습니까? 왜 그냥 가시지 않지요? 산상설교 하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까?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지요. 요한복음 19장에.

 

왜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새 언약은 예수님의 살과 피지요. 그것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 열두 제자 가운데서 먼저 제안한 사람이 있어요? 없지요. 그렇다면 창조된 인간은 창조에 개입할 수 있습니까? 인간은 창조될 뿐이지 창조에 기여할 수 없습니다. 핵심을 모르니까. 핵심 안다고 기여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은 무지한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이야기는 아무도 몰랐고. 심지어 겟세마네 기도할 때도 제자들 세 명은 몸이 피곤해서 잠을 잤습니다. 네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은 잤다는 소리를 듣고 그럼 기도원에 가서 잠을 안 자야 돼요? 육신은 잠자게 돼있지 잠 안 자면 육신이 아닙니다.

 

모든 게 장기 알이라니까. 하나의 게임이라니까요. 졸이 상하고, 상이 졸 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육신다우면 되는 거예요. 그걸로 충실하면 되는 거예요. 인간은 무지하고 몰라요. 난 체하는 것이 주님을 힘들게 할 뿐입니다. 모든 일은 주님이 마무리하셔요.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걸 다 이루었다면 처음부터 아기 예수 태어나자마자 오른팔에 개 물린 자국, 사탄의 흔적이 나타나서 밤에 악몽 중에 개가 나타나서, 그때 은혜로운 유명한 말이 나오지요.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저주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 저주 보고 싶어? 내가 저주 보여줄게. 죽어? 아담은 죽으면서 죽음을 몰랐어요. 진짜 죽음은 기다려야 돼요. 언제까지? 십자가가 갈 때까지. 진정한 죽음은 예수님 오셔야 모든 성경의 단어, 개념은 십자가에서 밝혀지는 겁니다. 그걸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의, 하늘나라, 율법 개념, 사도바울은 그걸 알았어요. 새 언약이 이뤄져야 비로소 모든 개념은 완전히 진리를 드러낸다는 사실.

 

예수님이 오실 때부터 십자가에 죽지 왜 산상설교 하십니까? 쓸데없는 짓을 왜 했어요? 산상설교 듣는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지키나 안 지키나 구원과 관계없는데.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뭐가 찾아오느냐?

 

우리 노선은 자아 노선이거든요. 마귀가 우리한테 준 자아노선, 우리는 육이 아니고 자아란 이 말입니다. 나는 나라는 말을 두로의 왕이 이야기했고, 바벨론 왕도 이야기했고, 바로 왕도 이야기했고. 항상 이방나라 책임 추궁할 때 이방나라 멸망한다. 이유가 뭐냐? 나는 나다. 완전히 부처 이야기 아닙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는 나란 말이죠. 우리가 어떻게 거기서 탈피할 수 있습니까? 급하면 살고보자인데. 나는 나니까.

 

너는 그 여자 왜 좋아하지? 내가 좋아한다는데 니가 와? 너는 돈 왜 함부로 쓰지? 내 돈 내가 쓰는데 왜? 우리의 몸이 나는 나를 기억해요. 우리의 몸은 궁극적인 것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이에요. 신이 아니라고 추궁하면 짜증나. 스트레스 받아. 몸이 신이기 때문에 신으로 행세하도록 돼있기 때문에. 주님과 라이벌 관계에 있어요.

 

제가 주일에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이 강박증이 있으면 군에서 조교가 시키면 자기한테 명령한 건방짐을 능가하기 위해서 시킨 것보다 더 충실하게 해버려요. 나한테 시키기만 해 봐라. 이것은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뭘 이야기하면, 시킨 대로 반듯하게 해놓고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모독하게 돼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어딜 감히 나한테 지시해?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나야. 그게 어린아이 때부터 조금씩 나타나요. 아빠 있을 때는 아빠가 좋고 엄마가 있을 때는 엄마가 좋고. 아빠, 엄마 다 있을 때는 그런 것 묻는 것 아니야.

 

애들은 힘이 어디 있는지 알아요. 인간의 육신은 아담의 육신은 흙이에요. 흙이 될 수밖에 없는 몸이기 때문에 무엇이 힘이 될 수 있느냐? 힘이 될 수 있으면 그게 진리고 그 다음에 정의에요. 그게 선이고. 부자 청년이 왔을 때 영생? 영생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모든 재산을 팔라고 하니까 근심할 일이 아닌데 근심하면 돌아갔잖아요. 우리 같으면 안 돌아가겠습니까? 돈 있는데. 망하면 오겠지요.

 

내가 모아놓은 힘의 덩어리가 자아에요. 그 안에 나의 잘남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걸 누가 건드려? 예수가 건드려? 건드리면 다 사탄이에요. 이것 하나 구축하려고 얼마나 애쓰고 얼마나 양보하고 했는데 이걸 건드려?

 

창세기 1장에 죽음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나갔어요. 창세기 1장 자체가 나중에 언약이 오게 되면 그게 하나에 언약처럼 활용당합니다. 처음에는 약속이 있어요. 언약은 창세기 6장에 처음 등장해요. 노아언약으로. 인간을 죄 짓게 하고 만들어진 것이 창세기 3장 15절,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관계인데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정하는가? 자손이 누가 여자인지를 정해요.

 

아브라함 자손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정하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누가 아브라함의 계열인지 정해요. 바리새인과 그것으로 논쟁했던 대목인데 유일하게 예수님이 먼저 질문한 게 그거에요. 다윗의 자손을 다윗이 주라고 했을 때 이게 말이 되느냐고 주께서 질문했지요. 어떻게 새까만 후배한테 주라고 했느냐고 답변을 해보라고 하니까 아무도 없다고 했지요. 바리새인이 왜 답변이 못했을까요? 바리새인은 역사적 해석인데 한 방향으로 가요. 역사의 역전은 없어요. 거꾸로 된 역사는 없단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그걸 간파하시고 시간을 거꾸로 돌려버려요.

 

여러분 아브라함의 자손이 몇 명입니까? 수없이 많다, 아니면 한 명이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여럿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지요. 그 말을 곧이듣는 그 사람이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분명히 그 시대에는 아브라함 자손은 혈통에 속한 사람, 할례와 안식일을 행하면 전부 다 아브라함으로 쳐줬던 분위기에요. 그런데 갑자기 돌변해서 아브라함 자손이 모두가 아니고 예수님밖에 없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신다는 것은 완전히 부도난 언약밖에 안 되잖아요. 별처럼 많다며? 하나밖에 없는 별이 있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라니까요.

 

갈라디아서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한분부터 해서 다수로 이어지는 데는 인간이 개입될 수 없고 성령이 개입하면 다수가 되는데 이걸 절대로 다수라 하지 않고 다수를 1로 치는 거예요. 에베소서 4장에 몸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협의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협의하면 절대로 1이 안 됩니다. 이미 하나이었음을 인정한다면 그건 성령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 있다는 것은 내가 여기 하나 있다는 것은 주체가 있을 경우에는 오류고, 하나가 되려면 십자가 지신 분이 바로 한 분이잖아요. 한 분을 경유하다보니까 한 소망 맞네. 한 몸이 맞네. 반드시 모든 말씀은 이미 이루어진 언약을 경유해야 숫자가 여럿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겁니다. 손이 발더러 쓸데없다 해도 섬기는 이유가, 내가 너한테 잘해주고 네가 나한테 잘해주면 숫자가 내가 1이고 네가 1이면 2가 되잖아요. 그런데 한 지체가 돼버리면 1+1=2가 아니고 하나가 되는 놀라운 현상이에요.

 

목사님은 왜 저희 집에 심방 오십니까? 하나거든요. 제가 요청했잖아요. 요청한 게 아니고 하나 되신 분이 지시했거든요. 목사님은 왜 저를 위해 기도합니까? 하나거든. 왜 말씀 가르칩니까? 하나거든. 교인 하나 늘었군요. 교인 하나 늘면 숫자가 5678 이렇게 돼요. 그래서 진짜 복음 아는 목사는 교인 몇 명이라고 묻는 것은 실례입니다. 그러면 묻지 말까요? 그게 제 말을 오해한 거예요. 안 물으면 안 돼요. 물어야 돼요. 왜? 육신이기 때문에. 진짜 어렵지요.

 

목사님한테 교인 몇 명이고, 헌금 얼마 나오는지 묻는 것을 실례라고 했지요. 주님만 바라보는데 물으면 안 되니까 안 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안 된다는 그것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흙이니까. 빨리 참아야 돼. 몇 년 동안 참으려고? 말로 못하니까 메시지를 보내. 그것도 안 되면 교인 몇 명 나옵니까? 입이 근질근질 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자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그 말은 돈을 사랑하란 말이에요. 나부터 돈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란 말이지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을 봐야 돼요. 다 누구 이야기입니까? 그걸 위반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세상에 이렇게 많은 죄도 구원받았구나.

 

여러분 돼지 털을 몇 개 뽑을 때 돼지가 아픔을 느낄까요? 일곱 개? 42개 뽑으면 아픕니까? 하나만 뽑아도 몸통 된 돼지는 아프지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한 율법을 어겨도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거지요. 왜냐하면 같은 몸통에 붙어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걸 모르는 교인들은, 믿음이 약해서 이것부터 지킬게요. 온유, 화평은 내가 성질이 좋아서 지키고.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애 과외비 들어가니까 이건 못 지킵니다.

 

법을 자꾸 쪼개는데 몸통은 하나입니다. 털 40개 뽑으나 달랑 하나 뽑으나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0분 쉬고 이야기할 것은 도대체 인간은 그 몸통이 어디에 붙어있는가? 그것은 창세기 2장에 뱀이 등장함으로서 우리의 몸통은 어디 붙어 있는지 밝혀집니다.

 

 

10분 쉽시다.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6강

(강의:이근호 목사)

 

 

뱀 이야기, 마귀 이야기지요. 마귀 이야기하면서 반드시 쌍으로 나와야 될 게 뭐냐 하면,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옥이 무엇인지와 더불어 천국이 나타나야 되는데 사람은 지옥은 치우고 나는 천국 가고 싶으니까 천국에 관심 있으니까 천국만 이야기해 달라.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장갑이나 양말을 한쪽만 사지 않듯이 짝을 이뤄요. 한쪽을 물리치면 설명이 안 되거든요. 악마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하나님이 구상한 하나님나라가 동반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신학교 때 신성종 교수가 하나님나라를 가르쳤습니다. 그 교수가 하나님나라는 원어상 하나님 통치를 말한다. 그래서 제가 질문했어요. “교수님,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회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는데 하나님 통치를 거기다 집어넣으면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왔다는 말이 되지요? 그러면 구약에는 통치 안 했습니까?” 왜 새삼스럽게 예수님이 와서 하나님나라고 그전에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냐 이 말이거든요. 교수가 답변을 못해요.

 

그러면 궁색하게 답변을 하면, 과거에는 하나님나라의 그림자였다. 모형이었다. [계약신학과 그리스도]라는 책에 보면, 그 사람도 하나님나라 중심으로 언약을 보는데 에덴동산은 천국의 모형이었다고 해요. 문제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에덴동산과 하나님의 통치라고 한다면, 지금 신약의 예수님의 통치방식과 모형이 되고 그리자 되려면 좀 비슷해야 되지 않습니까. 설계사무소에 아파트 모형과 실제 아파트와 닮았지요. 작게 축소한 거잖아요. 모든 형태가 비율상 닮은 거예요. 반대가 된 건 아니란 말이죠. 설계사무소 모형과 실제 아파트가 아래 위가 뒤집히고 바뀐 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서 너희들이 알고 있는 회개의 관념을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야 된다는 거죠. 하나님 나라를 알라. 알기 싫어? 알기 싫으면 말고. 이렇게 해서는 하나님나라가 성립이 안 돼요. 하나님나라를 안다는 사람을 붙잡고 그들의 손에 주님이 살해를 당해야 돼요. 십자가 죽임을 당하면서 하나님나라가 이뤄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 문제가 인간이 있음으로 복잡해지는 거예요. 우리 인간 생각은 이래요. 우리가 무식해서 모르니까 그냥 내놓으시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데 그런 우리를 붙들고 하늘나라를 만들어내려고 하니까 우리가 생각한 하늘나라와 정반대의 개념을 하나님은 하늘나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로 인한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고 했지요. 장소와 시간이죠. 인간의 시간이니까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서 천국은 나중에 오게 된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할 때 그 가까이가 왜 그렇게 깁니까? 아직 재림 안 했으니까? 벌써 2000년이나 지났는데. 가까이 왔다는 뜻은 여기 왔다는 거예요. 가까이는 빼세요. 그냥 왔다가 정답이에요. 천국이 나타났느니라. 간단한 문제에요. 그래서 회개하라. 심판은 시작됐느니라. 세례 요한의 하나님나라는 심판과 동반해서 이뤄집니다. 심판 없는 하늘나라 없습니다. 심판하는 그 행위가 하늘나라 오심의 행위가 되는 거예요.

 

보통 옛날 양반집에 손님이 오게 되면 그냥 맞는 게 아니고 갑자기 하인들에게 마당 청소하라고 하지요. 손님 오기 때문에. 손님이 오기 때문에 마당에 있는 낙엽들과 종이들은 애매하게 아픔을 겪어야 됩니다. 평소에는 손님이 오지 않으면 그냥 곱게 낙엽이 떨어져 있는 것은 손님이 온다는 것 때문에 치워버려야 되겠지요. “회개하라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면 쓰레기와 오실 손님과는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낙엽과 쓰레기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세례 요한이 외치고 있는데 바리새인들이 왔지요. 오, 독사의 새끼들 잘 왔다. 누가 너희들 같은 인간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헛소문을 퍼뜨렸느냐?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면 돌멩이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했어요.

 

놀라운 사실은 세례 요한이 옥에 갇혔을 때에 자기는 분명히 큰소리쳤는데 아무 소식이 없는 거예요. 유황불 떨어지고 타작마당이 돼야 되는데 잠잠하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 전갈 보내서 물었어요. “예수님이 진짜 오실 메시아 맞습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엉뚱한 소리를 해요.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눈을 뜨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그러면 하늘나라가 눈에 보이려면 뭐가 전제로 깔려야 돼요? 그 당시 하늘나라 개념으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확정된 비리비리한 존재들, 절름발이, 소경, 저주받아 죽은 자들은 그 당시 유대인의 사고에 의하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으면 저주를 받겠어요. 저주받아 지지리도 못난 인간들이에요. 그런 인간들이 하늘나라 이미 여기 왔음을 증거물로 활용될 줄이야 세례 요한조차도 몰랐어요.

 

그들은 복 받은 사람과 저주받은 사람으로 분류를 했습니다. 그들의 분류는 신명기 28장에 근거한 거예요. 잘 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만약에 못 되면 꼬리가 될지언정 머리가 안 되고. 그런데 주님이 하나님나라 이뤄짐을 보여주는 현상은 꼬리부분 속에 제일 비리비리한 어느 누구도 축복과 행운을 찾을 수 없는 그야말로 거지 나사로 같은 존재를 활용하신 거예요.

 

만약에 소경이 눈을 떴을 때 그들이 금식기도 몇 번했습니까? 없지요. 절름발이가 얼마나 연습해야 낫겠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소경과 절름발이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문둥병은 순전히 하늘나라가 왔음을 보여주는 거죠. 하늘나라 왔음의 흔적이 바로 하늘나라를 기다렸던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예상 못한 방법으로 하늘나라가 온 거예요. 그러면 강의 처음에 하늘나라는 반드시 마귀의 나라, 사탄과 짝을 이룬다고 했지요. 그게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나와요. 하늘나라를 설명해줄게. 몰래 도둑이 담을 넘어와서 집주인을 꽁꽁 묶고 세간을 들고 나가면 그게 곧 하늘나라라고 했지요. 기억나십니까?

 

하늘나라를 빈터에 건물 짓듯이 만들면 되는데 왜 하늘나라의 작업이 묶는다는 것, 담 타넘고 온다는 것, 그리고 하늘나라에 포함되는 인간은 스스로 힘으로 주인에게서 탈출할 수 없습니까? 하늘나라 활동할 구성요소를 찾는데 왜 그런 자들이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그냥 빈터 하늘나라 왔다고 하면 끝날 문제를 왜 묶인다, 담 타넘고 온다, 잡혔는데 늑탈하듯이 가져간다는 부정적 단어가 동원되느냐 이 말입니다.

 

또 예를 들면,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놀고 있는 사람인데 갑자기 포도원 주인이 와서 아침 10시, 12시, 오후 3시, 그리고 퇴근시간이 6시인데 5시에도 일꾼을 불렀지요. 그 뒤의 말을 모른다고 칩시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설명하는데 포도원과 주인과 일꾼을 구성요소로 잡았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다음 이야기를 메우라고 해보세요. 인간인 이상 이렇게 합니다. 열심히 일 한 사람은, 이스라엘은 포도원이니까 일꾼으로 부른 사람은 다 구원받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함께 같이 출근하지 않고 왜 10시, 12시, 3시, 5시 이렇게 떼어놓는가? 이것은 하늘나라에도 등급이 있고 계급이 있는데 먼저 와서 충성한 사람은 상급을 많이 받고 구원받는 것은 기본급이고 봉사한 것은 성과급이에요. 경영학에서 포드시스템으로 처음 도입한 것이 성과급이었습니다.

 

10시, 12시, 3시, 5시. 구원받았다고 까불지 말고 은혜에 부합되도록 충성을 해야지 했더니만 먼저 봉사한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더라는 걸로 소설을 마감하고 싶지? 하고 예수님께서 묻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뒤에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을 붙이니까. 그걸 바리새인에게 한 이야기거든요. 너희들 바리새인들 이야기는 다 안다.

 

그래놓고 주인이 품삯을 줄 때 제일 나중에 온 사람부터 주지요. 그 이유가 먼저 온 사람이 보라는 거예요. 일한 것도 남보다 많이 했으니까 많이 쳐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다음에 품삯을 줄 때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주는 순간 제일 먼저 온 사람은 그걸 보면서 뭘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까? 한 시간에 한 데나리온? 8데나리온을 기대한 거예요. 그런데 계속해서 1데나리온씩 주는 거예요. “설마 섭섭하지 않게 쳐주겠지.” 했지만 결국 한 데나리온을 줬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불평을 하지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하지요. 천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이게 뒤집기. 천국과 지옥은 같이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입장은 생각 못하고 나는 얼른 천국 가고 싶다고 천국을 선택한다고. 천국을 선택한 순간 이게 뒤집어져요. 천국 선택한 놈은 지옥이 되고 지옥을 선택한 사람은 천국이 되는데 죄송하지만 지옥을 선택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저주받은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새로 시작하자.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구원받을 만해서 받은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 새로 시작함이 기존에 천국을 구성하는 시간과 공간 개념을 도입해서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예수님 천국이 된 사건의 반복이 돼버리면 장소와 시간과 관계없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바로 이겁니다.

 

무슨 글자입니까? 우발성. 비슷한 말로 우연성이지요. 우연성의 반대는 필연성인데 필연성은 원인과 결과가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우발성과 우연성은 결과가 곧 원인이 되는 거예요. 원인 없는 결과가 되는 거예요. 이걸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 인생에 적용시켰습니다. 아기가 먼저 있을 것이라고 했고 행여나 사라가 회임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을까 싶어서 주께서 아예 원인을 잘라버리지요.

 

사라가 임신 못하게 할 목적으로 임신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전에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지요. 아브라함의 생식기능이 정지가 돼버려요. 완전히 절단이 돼버립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온 자식은 기차노선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노선에서 절단됩니다. 할례의 의미가 아내의 임신을 통해서 구체화된 것이 불임여성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의 아내도 불임여성이고, 이삭의 아내도 불임여성이고, 야곱의 아내도 불임여성이죠.

 

자식이 등장 될 때는 반드시 원인 없는 결과만 나오는 우연성과 우발성을 통해서 자식이 나오게 되면 그 언약은 역사 속에 고정돼있고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늘나라로 통하는 새로운 역사를 계속 반복적으로 똑같은 성질을 되풀이하게 돼있어요. 십자가 한 번으로 끝났습니까? 십자가는 계속해서 성령 안에서 반복되듯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언약은 반복적 기능을 하게 돼있어요. 그러려면 인간의 시간과 공간, 과거-현재-미래라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 앞에 작살나야 돼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것은 우리 역사 속에 집어넣으면 말이 안 돼요. 생각해봅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됐지요. 그러면 나중 된 자가 누굽니까? 먼저 된 자지요. 제일 늦게 온 사람이 먼저 됐잖아요. 그러면 먼저 된 자가 현재 누구에요? 나중에 온 사람이지요. 그럼 누가 나중 된 사람입니까? 먼저 됐다고 까불다가 주님한테 혼나서 말석으로 내려간 사람이 나중 된 사람이지요. 나중 됐기 때문에 먼저 돼야지요. 이게 뭐예요?

 

둘이 붙들고 우리 중에 누가 먼저 되고, 나중 됐느냐? 주님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된다고 했다. 그럼 나중 된 자를 내가 할게. 아니야. 내가 할게. 이런 식으로 싸움이 일어나요. 노림수가 먼저 되기 위한 원인으로써 자기가 나서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천국 말씀은 원인이 없어야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게 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사라지게 만듭니다. 인간이 사라지다니? 아담의 이름이 흙이지요. 창조의 질서입니다. 인간이 사라지게 되면 원인도 사라져야 되지요. 원인이 사라지면 자기가 행위의 원인이 되어서 나온 결과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것은 하나님나라와 상관없는 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죽어가면서도 어떤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로 성장한다면 그 원인은 어디서 나온 거예요? 인간을 죽이는 작업에 같이 동참해서 뛰어든 인간과 함께 역사를 일궈나가는 미지의 X, 그분의 원인으로써 구원이라는 결과가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게 출애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신학교 때 물어보질 못했어요. 교수들 짜증을 낼까봐.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다릅니까?” 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겸해서 나오거든요. 이게 보통 골칫거리가 아니에요. 시편, 출애굽기, 민수기, 신명기 줄줄이 나와요. 전부 다 입을 다물고 있어요. 성경 백독했다면 도대체 성경 어딜 봤어요? 사적지에 놀러가면서 볼 것만 봤어요? 정작 중요한 노선을 빠지고 성급하게 지 천국 가는 방법만 찾는 그런 노선으로 코스를 골라서 성경을 백독, 천독을 한 거예요. 성경 보는 내가 주체기 때문에. 주체는 내가 살아야 말이 되기 때문에. 남 천국 가고 난 지옥 가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있습니다. 고맙게도 한신대 김이곤 교수는 그걸 눈여겨봤어요. 저는 신학교 다니면서 그것 하나 때문에 김이곤 교수를 그때만 좋게 봤어요. [신의 약속은 파괴될 수 없다]는 그 책을 필독서에 집어넣었습니다. 꼭 보시라고. 남이 그냥 넘어간 것을 그 사람은 봤어요.

 

창세기 4장 26절에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 여호와의 이름이 출애굽기에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고 물을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면서 이름이라는 것을,

 

모세는 자기가 자아, 주체거든요. 내가 누구에게 물을 때 예를 들어서 “목사님, 교인수가 몇 명이에요?” 이렇게 묻는 전제가 뭐냐 하면, 나는 몇 명인데 저 사람은 몇 명일까? 항상 뭔가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이 그냥 나온 게 아니고 존재의 발산으로 나온 거예요. “하늘색 예쁘지?” 이 말은 뭔 뜻이에요? 내가 예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동감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 책에도 나옵니다만 사람이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 것은 그 사람한테 지시하는 것이라 했어요. 하라고 명령 안 해도 “오늘 날씨 좋지요?” 내가 좋다는데 동의해야 돼. 동의 안 하면 이야기 안할 거야. 이런 것이 들어있는 거예요.

 

김이곤 교수는 놀라운 것을 찾아냅니다. 여호와 이름을 불렀던 것은 그 힌트가 뭐냐?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신을 주셨기 때문에 그때부터 여호와 이름의 솜씨로써 지상에 구체화된다고 본 겁니다. 그러니까 김이곤 교수는 말하기를 가인이 아담의 아들 맞지요. 하나님께서 그 아들 노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죽은 아벨로부터 새로운 신을 주신 거예요. 아벨은 죽었으니까 씨가 없지요. 이것이 바로 로마서 4장에 이삭을 주면서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린단 말이죠.

 

그것으로 창세기 1장을 설명해봅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제는 그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게 아니고 우리는, 천지만물은 신이 만들었다고 주체 자리에 우리가 와버렸지요. 그 다음부터는 누가 원인이 됩니까? 이왕 만들어놓은 것 하나님 잘해봅시다. 이미 원인이 나왔으니까. 만든 것을 자를 생각은 우리는 감히 상상 못하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같이 많다고 했으면 아브라함의 몸, 원인제공자가 있잖아요. 이미 사라도 있지요. 거기서 새끼 까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그 약속 주면서 원인을 자르고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고 거기서 나온 이삭은 미지의 X의 자녀가 되는 거예요. 누구 자녀는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식은 아니에요.

 

그것을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이미 구약의 선지자에게 예수의 영이 갔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 사도의 논리와 해석은 유대인들한테 맞아 죽었을 거예요. 왜? 역사적 해석법에 어긋나요. 우리의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흘러가는데 사도의 해석은 시간의 역전이니까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로 오는 것처럼 보이지요. 사실은 현재의 영원한 반복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고.

 

엘리야에 시대에 죽으나 엘리야가 죽어도 천국이고, 그 전에 모세가 죽어도 천국이고, 오늘날 우리가 죽어도 천국인 이유는 하늘나라에서는 계급이나 선후배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남자, 여자도 따지지 않기 때문에. 남자, 여자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아담에게서 나왔지요. 그러나 하늘에 속한 형상은 예수님이 모델 되지요. 예수님의 존재의 모델이라 하면 틀린 겁니다. 예수님의 기능의 모델이지요. 예수님의 기능이 뭐했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했지요. 살아날 때 창 자국, 못 자국이라는 기능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 바로 창세전에 있었던 언약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에서는 영원한 반복이 되는 거예요.

 

우리 눈에는 모세는 과거 인물이고 우리 눈에는 아브라함이 옛날 사람이지만 여러분이 만약에 천국 가보세요. 그 안에는 옛날이라는 게 없어요. 그리고 더 이상 남편, 아내 없어요. 바리새인들이 오해해서 꽃다발 들고 여자를 맞이했을 때 일곱 명 중에서 누구의 장미꽃을 받겠느냐? 예수님께 농담 삼아 시비 걸었잖아요. 예수님께서는 천사가 결혼하느냐? 너희는 살았다는 의미를 모른다. 네가 이 땅에 산 것은 산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현상의 일부지.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말은 마르다, 마리아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나사로 입장에서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마르다, 마리아는 자기에게 한 것으로 알고, “내가 믿나이다.” 하고 나섰어요. 예수님은 울었습니다. 믿을 것 같으면 오빠를 보여줄 필요가 없어요. 믿나이다가 안 믿는다는 이야기에요. 오빠를 보여줬습니다. 오빠가 살았나, 죽었나? 아직까지 여동생 둘은 이해를 못해요. 죽은 지 나흘 됐다고 다른 유대인이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이,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했어요. 나사로는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이미 함께 있었어요.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말은, “죽음이란 건 묻지 마.”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뇌사상태에 빠지고 심장 멈추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죽음이지 주 안에는 잠자는 것이지 죽음이 없는데 왜 자꾸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으로 천국까지 집어넣는 반칙을 범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을 못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이미 죽은 자에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나니 내가 사는 것은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미 그 말씀이 우리에게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육신 다음에 이미 죽어가는 현상이에요. 미끄럼틀 내려가고 있는 현상이에요. 미끄럼틀 하니까 얼마 전에 대전강의가 기억나는데

 

미끄럼틀 보면 뒷부분에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있잖아요. 계단으로 올라가서 미끄러져야 해요. 이게 노아언약이고, 이게 모세언약이고, 다윗언약이고 그 다음에 예수 십자가 언약이잖아요. 나머지는 뭡니까? 언약의 완성이니까 남는 것은 미끄러지기만 하면 되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제는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기어 올라가야 된다는 거예요. 이걸 왜 기어 올라가요. 높은 데서 누리면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마지막 때에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걸 없는 걸 족한 줄 알라. 그 말씀을 누리면 돼요. 그 말씀에 해당되는 바다에 우리가 풍덩 빠진 거예요. 있는 걸 없는 걸 족한 줄 알라는 말씀을 우리 육신으로는 못 지키니까 구원받은 거예요. 못 지키니까 그리스도가 보이는 거예요. 그걸 지키면 그리스도가 안 보이지요. 내가 올라갈 수 있으면 계단의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혼자 이뤘거든요. 하나님나라니까 시간을 초월해서. 그 다음부터는 성령을 통해서 바람 맞으면서 신나게 내려오면 되는 거예요. 이것도 못해요? 중력의 법칙인데. 가만있어보니까 이게 안 되는 모양이지?

 

내려가면 이게 죽는 자리에요. 늙어 죽은 자리, 치매 걸린 자리. 성경은 이걸 쉰다고 하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휴가 안 가실랍니까? 안 쉴래요? 맨날 목회만 하고 고생만 하렵니까? 목회 안 되면 쉬면 돼요. 완전히 똥배짱이 됐어요. 한 번 물어봅시다. 군대 생활 계속 할 거예요? 제대하는 게 나아요? 군대 생활하는 게 좋아요? 쉬는 것도 못해요?

 

그게 왜 안 되느냐? 외부의 시스템 때문에 그래요. 주의 종이라는 꼬라지하고는. 보니까 주의 능력 하나도 없으면서 혼자 주의 종이라. 그럴까봐 내가 싫어. 그런 자괴감, 모멸감, 모욕, 그게 싫어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했습니다. 쓴잔? 나만 마시는 게 아니다. 세상 권세보다 누가 높으냐는 시합, 경쟁자거든요. 너는 내 잔을 마시라 해놓고 그 다음에 아마 마시게 될 거야. 마시지 않으면 안 되게 돼있어. 너는 장기판에 졸이니까. 그래서 십자가의 길이 말로만 아니라 바로 푹 젖게 만드는 그런 육체로 다뤄주시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지기 위해서 재산을 교회에다 얼마나 내야 되고 얼마나 금식 기도해야 되는지 물으신다면, 그냥 사세요. 15만 평 땅 가지고, 아파트 세 채 가지고 그냥 사세요. 그것도 고난입니다. 괜히 고난을 흉내 내지 마세요. 집에 대형 티비가 세 대 있더라도 주께서 세 대 보면서 죽으라고 하는구나. 맨날 골프 치고 맨날 돈 따고 주여, 언제 쉽니까? 왜 저로 하여금 골프 치는 고생을 하게 하십니까? 맨날 맛있는 것 사주고 좋은 옷 사주고 때에 따라 차 바꿔주고. 제가 이런 고난을 언제까지 감당해야 됩니까? 마치겠네. 가만있어도 한 주에 교인들 200명씩 등록하고. 그런 경우가 없어서 못 믿으시는데. 인기가 좋아 미치겠어, 정말. 이놈의 인기 언제 없어지려나.

 

반대로 가세요. 항상 내가 생각한 반대로. 주께로 아무렇지도 않는데 내가 나한테 벌 세워요. 손들어. 오늘도 기도 30분해야 되는데 20분밖에 안 했어. 내가 나한테 율법적이라. 내가 나한테 너무 가혹해. 로마서 8장에 어긋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이미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이제 뱀 이야기하겠습니다. 뱀이 틈새시장을 노려요. 뱀이 없는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뱀은 사탄의 나라지요. 왕인데 창세전에 이미 뱀이, 악마가 있어야 되고,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하늘나라 전쟁이 있었지요. 미가엘이 등장했고 그 전쟁의 후속편이 바로 지상의 선악과 사건이라고 요한계시록에서 단정 짓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궁금해요. 뱀과 천사, 뱀과 예수님 가운데서 뱀을 선택하지 않고 예수님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뱀의 정체를 밝히고 싶어 해요.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북한의 기록영화 비슷한 순교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고문하는 거운데 나는 사탄을 보았다.” 누가? 자아가 보았지요. 육체가 본 게 아니에요. 육체가 보았다면 사탄을 보았다는 말을 안 해요. 나는 그 현장에서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되는 거예요. 인간의 육체는 언약 안에서 다룰 때 육체가 되는 거예요. 언약 안은 에베소서에서는 예수 안이라 하고, 갈라디아서 6장에서는 내가 십자가 안에 있으니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고 했지요.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세상 보기에 나는 이미 죽은 자가 된다고 했지요. 그 십자가 장치를 목수 불러다 하려면 돈이 들어요. 십자가를 나무로 만들면 안 되고 투명하게 만들어서 그 안에서 살아야 돼요.

 

제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미국의 어떤 목사가 마가복음에 나오는 독을 마실지라도 죽지 아니하고 해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독사 세 마리와 같이 살았어요. 주의 말씀은 빈틈없이 확실하니까 제발 세상 따라가지 말고 주의 말씀대로 살아서 영생 얻으리라고 그렇게 시범조로 보여준 겁니다. 주의 말씀이 실제로 이뤄진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주면서 확신케 하기 위해서. 목사가 물려 죽었어요. 죽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물려서 퉁퉁 부어올라서 911 전화해서 응급차가 오는데 목사 자존심이, 그동안 자기를 주시하는 교인들에 의해서 믿음 좋은 목사라고 칭송을 받았기 때문에 타인의 눈을 의식해서 구급차를 돌려보냈어요. 한 시간 만에 죽었어요. 장렬한 죽음입니다. 일종의 소극적 자살입니다.

 

구급차 부르면 믿음이 떠납니까? 믿음 아닌 게 돼요? 남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그런데 복음 아는 목사라면 자아가 없잖아요. 자기 육신밖에 없잖아요. 자기 육신을 다루는 주체는 주님이 언약 안에서 자기를 다루잖아요. 그러면 죽은 인간들이 나 보고 뭐라 그래도 신경 쓸 필요 있어요, 없어요? 저 목사 믿음 있는 줄 알았는데 없더라. 백날 퍼부으라고 하세요.

 

시므이가 다윗에게 저주했지요. 한칼에 베겠다고 하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가만두어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그 저주가 복으로 변한다. 지금 내가 복 받으려고 하는데 니가 훼방할 일 있느냐.” 언약 안에서 저주가 와서 복이 와요. 그러니까 복으로 오는 것은 오히려 저주가 바뀌지요. 사람에게 높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 받는다고 누가복음 16장에 나오지요. 그 말이 왜 있겠어요?

 

그리심 산, 에발 산이 있어요. 언약궤는 하나입니다. 둘 중에 어느 산에 놓았을까요? 에발 산은 저주 산이고 그리심 산은 축복 산이에요. 언약궤는 두 개가 아니고 하나에요. 하나의 언약궤를 어느 산에 놓느냐 하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축복 산에 놓겠는데 성경에서는 저주 산에 놓습니다. 왜 그러냐? 맞은편에서 축복이 오게 돼있어요. 정실부인 계통의 지파들은 축복을 외치게 돼있고 종의 계통의 지파들은 저주를 외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저주 산에 있다는 것 그리고 저주 산에 언약궤,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다는 것. 이것이 상당히 언약의 반복성에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인간이 찾지 못하는 노선을 계속 발굴해내요. 앞장서서 땅굴파시는 분은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여호와 이름입니다.

 

여호와 이름이 아벨을 죽였습니다. 왜 죽였는가? 창세기 3장 15절을 이루기 위해서. 3장 15절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이야기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제가 이야기했지요.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후손이 정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 창세기 3장 15절을 본 사람이 수십 억 명이 넘어요. 보는 사람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전부 다 입을 근질근질해요. 목사님들한테 묻고 싶은데 답변 못할까봐 묻질 못했어요. “여자의 후손이 누굽니까?” 묻고 싶어요. 천주교에서는 이미 해답 나왔습니다. 마리아에요. 개신교에서도 나름대로 해답을 내놨어요. 마리아라고 하면 천주교 똘마니라고 욕할까 싶어서 다른 걸 내놨어요. 교회.

 

개신교는 참 편리해요. 교회를 둘로 나눴어요. 무형교회와 유형교회. 유리한 대로 가는 거예요. 실체론적 교회론을 말하다가 뭔가 불리하다 싶으면 무형교회로 가버려요.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가 누굽니까?” 일단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럼 교회에서 사탄질하는 저 인간은 여자의 후손입니까?” “아니. 교회라고 다 교회가 아니야. 교회는 무형교회가 있는 거야.”

 

그러면 집합론을 해봅시다. A라는 집합과 B라는 집합이 있어요. 여기는 C라는 부분이에요. 아니면 무형교회 속에 유형교회가 따로 있는 겁니까. 이건 뭐가 문제냐 하면 유형교회를 통과하지 않더라도 세례, 학습 안 받아도 구원받을 수 있는 논리가 돼버려요. 이러면 또 안 되지요.

 

교도소에서 전도연이 아들 유괴해서 죽인 살인범과 만납니다. [밀양]이란 영화의 내용입니다. 전도연이 살인범이 누군지 모르고 복음을 전합니다. “당신도 예수 믿으면 죄를 용서 받습니다.” 복음 들은 사람이, “저는 사람을 죽였는데 이미 용서 받았습니다.” 그 순간 누가 삐졌습니까?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이런 예수라면 안 믿겠다고 발악을 해요. 그게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의 테마입니다. 종교가 인간에게 기껏 해주는 것이 타인에 의해서 의식된, 조성된 내 자아의 자존심과 명예를 정당화시키는 그 짓밖에 못하는 게 종교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무형교회와 유형교회를 합치면 어떻게 되느냐? 합치면 나눈다는 의미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그려야 되겠어요? 유형교회에다 배꼽을 그려 점을 찍어놔요. 평면으로는 이런데 이걸 옆면으로 보면 부엌의 싱크대, 앞에 동그라미, 뒤에 뾰족한 게 있는데 구멍이 너무 좁아요. 이래 왔다가 차여서 요리로 갔는데 이게 진짜 구원받은 거다. 그래서 교회를 거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는다는 말이 맞잖아요. 교회를 거쳐서 교회 아니라고 하면서 모인 사람들이 진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세운 교회는 바로 십자가 언약에서 하나 되는 겁니다. 설교 하다가 장로들한테 쫓겨나갈 때 이 목사는 싱크대 아래로 빠지는 거예요. 이상하다 내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왜냐하면 주님이 이 코스를 밟았거든요. 인간이 만든 하늘나라를 거부해서 왔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을 너는 귀신나라의 대장이라 했어요. 바알세블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서 도둑이야기를 한 겁니다. 하늘나라라는 것은 몰래 들어와서 임금을 묶어놓고 한 거예요. 그렇다면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등장은 결국 인간과 뱀은 한 통속이 될 경우에만 예수님이 주가 되시고 여자의 후손이 되신다는 그것을 미리 앞에서 담아낸 거예요.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가 누구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여자가 누구라고 지목하고 지적해주실 거예요. 그게 누구라고 묻는 것은 잠언이 되는데 왜냐하면 성경을 물을 때는 존재를 물으면 안 되고, 어떤 사건이 일어나느냐고 물어야 돼요. 그러면 그 사람이 착하고 안 착하고 관계없이 예수 이름을 부르는 사건이 일어나요. 그 사건을 본인이 말하기를 그것은 원인이 없는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예수님 부르기 위해서 사전에 준비한 것 없이 “내가 왜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사도행전 16장 31절. “내가 간수인데 죄수를 놓치지? 선생이여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지진 사건을 그 간수가 일부러 일으켰습니까? 그냥 당했지요.

 

그래서 이번 시간의 결론은 뭐냐? 당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당해버렸어요. 이것은 아벨도 마찬가지고 사가랴도 마찬가지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모든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그냥 어떤 사건이 파도가 밀려와서 당해버렸어요. 이걸 요한복음 3장에서는 뭐냐? 바람을 맞았다. 임의로 바람이 불되 바람을 내가 소유할 수는 없잖아요. 바람이 왔는데 빨래감을 날려버리고 옷을 휘날리게 만들고 잠간 거기 계시라고 했는데 바람은 그야말로 바람같이 스쳐지나가 버렸지요. 그러면 나는 바람한테 당하고 바람에 강간당한 사람이에요. 그걸 거듭남이라 합니다.

 

내가 성령을 삼위일체를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삼위일체가 원인이라면 나는 그분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어디 가도 항상 내가 원인이라는 소리를 못하고 나는 하나님의 결과물입니다. 그걸 디모데후서에서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10분 쉬시고 오늘 강의 마지막 해봅시다.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7강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일부러 그렇게 물은 게 아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부분지어야 돼요. 시편 110편에 보면, 주께서 내 주에게, 이미 다윗 때 나왔거든요. 그걸 그냥 넘어가면 안 돼요. 그 다음에 나온 게 원수, 그 원수가 뱀이란 말이죠.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의 정체가 뭐냐? 뱀을 후려치는 사람은 땅꾼이지요. 땅꾼이 메시아가 아니거든요. 땅꾼이 메시아가 아닌 것을 우리는 알지만 왜 하나님께서는 뱀의 머리를 후려치는 땅꾼을 마치 메시아인 것처럼 표현을 그렇게 하느냐 말이지요. 뱀 잡는 땅꾼을 메시아라고 할 위인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주님 쪽에서 표현을 어렵게 끄집어내시느냐 말이죠. 믿으란 말인지 믿지 말란 말인지. 딱 지적해서 이 인물이 사탄이라고 하면 안 하는데. 이건 데살로니가후서도 마찬가지에요.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온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이름을 밝히시고, 성은 누구고, 어느 동네에 살고 있는지 우리가 주체라 할 때 시간과 공간, 위치를 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주면 편하겠어요. 그런데 뱀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정도의 위치를 설명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뭐냐? 그래서 제가 답변한 것이, 우발적인 사태 속에서 발견된다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그럼 우발적인 사태가 어떤 사건이냐 물으시면, 원인은 없는데 결과만 들이닥치는 것. 그러면 우리는 그걸 볼 때 닥쳤다, 당했다고밖에 표현할 없어요. “형, 날 때릴 거지? 이쯤 가면 돌로 칠거지?” 아벨은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그냥 당한 거예요. 그리고 형도 마찬가지에요. “동생을 죽여 버리겠어. 내 취미는 동생을 없애는 거야.” 그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동등하게 같이 받으면, 동생 때려 못 죽여서 환장한 형 없습니다. 그리고 형도 동생을 죽이려고 않았어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지방에 죄가 엎드렸으니 들이닥치는 거예요. 죄가 꼭 개 같아. 죄가 엎드려서 지금 너를 덮치고 있구나. 그렇게 하나님이 미리 아시면 쫓아버리면 될 텐데 닥치고 있다고 해놓고 덮쳤네, 덮쳤어. 완전히 돌아버렸지요.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 사실을 하나님이 아시고 죽고 난 뒤에 찾아왔습니다. 당한 아벨의 입장에서는 무척 억울해요. 아시면서 왜 말리지 않았느냐.

 

제가 했지요. 우리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사는 것은 다른 노선에서 발견된다고. 이쪽 노선은 살아도 살았다고 할 수 없고 이미 죽은 자에요. 방향성이 흙이 되어가는 과정, 이름이 아담이니까. 그러면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생명은 특별조치로 같이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이 생명을 심어줬습니다. 여자에게. 여자의 이름이 졸지에 ‘생명’이라는 겁니다.

 

이것도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의 길을 차단했지요. 생명은 어림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철저히 차단해야 되는데 주께서 생명을 막아놓고 여자 이름을 생명이라고 해버리면, 어느 게 생명이고 진짜 생명이냐? 같은 생명이냐, 다른 생명이냐? 이런 복잡한 문제가 야기되는 거예요. 저만 복잡한가요? 여러분은 안 복잡하던가요?

 

여자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여자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묵시적 존재로 만든 겁니다. 방금 존재란 말 쓰지 말고 사건이란 말을 쓰면서 왜 당신은 존재란 말을 쓰느냐? 지상에서의 존재는 반드시 ‘역사적’ 존재에요. 역사적으로 인간의 흔적이 우선 있으니까. 그런데 ‘묵시적’ 존재라고 말할 때는 이 세상에서 사건으로 나타난다고요.

 

예를 들면, 물어봅시다. 어렵기 때문에 묻고 해야 돼요. 이삭이 태어날 때 누구 뜻이었습니까? 세 분의 천사가 왔지요. 이름을 누가 지어줬습니까? 천사가 지어줬잖아요. 이삭의 존재는 어느 소속입니까? 천사는 역사를 초월한 묵시적 존재지요. 그러면 천사가 이야기한 이삭은 묵시적 약속 인물이지요. 그런데 태어나기는 사라의 역사적 존재(늙어죽는, 흙으로 소멸하는)에서 태어났지요. 그러면 역사와 묵시의 유일한 만남은 묵시적 존재가 와서 약속을 남겨야 돼요.

 

천사 오라고 아브라함이 초청했습니까? 아니지요. 난데없이 천사가 들이닥쳤어요. 그러면 이건 누구 조치였느냐 하면, 아브라함은 그냥 당했을 뿐이에요. 그냥 왔어요. 다메섹에 내려가는 사울이, “지금쯤 나사렛 예수가 나타날 때가 됐는데?” 이랬습니까? 그냥 덮쳤잖아요. 우발적 사건이죠. 지금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우발적 사건은 원인을 제공할 수 없는 거예요. 결과만 사울은 바울이 된 겁니다. 똑같은 방식이 아니면 구원 못 받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면 거듭날 것이라고 예상하면 안 돼요. 예상하는 건 자유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만약에 복음을 알았다면 절대로 기도원에 가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거기다 접목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누가 뭐래도 자기 자랑이 돼요. 그 방법은 주께서 채택하지 않습니다. 금식하세요. 금식하시되 당한 당사자는 본인이 놀래요.

 

사도행전 3장에 성전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낫게 했지요. 누가 놀랬습니까? 앉은뱅이도 놀랬지만 관중들도 놀랬고 베드로와 요한도 놀랬습니다. 이미 예상한 대로 관중들은 묻습니다. 당신의 경건함으로 이 사람을 낫게 했지요? 베드로와 요한은 뭐라고 합니까? 저의 능력으로 건짐을 받지 못했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겸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사도행전 3장 16절에 보면, 저 사람이 낫게 된 것에서 우리를 빼주세요. 왜? 그 사람이 나은 것은 그 사람에게 주신 주님의 믿음으로 낫게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관중들 보기에 베드로, 요한, 앉은뱅이, 관중들 외에 그 무대에 등장인물은 없지요.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건을 통해서 누굴 등장시킵니까? 지금 주님은 이 현장에 방금 있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는 다만 목격자일 뿐입니다.” 그 목격자에서 나온 용어가 주의 증인, 전도자에요. 전도자, 선교사가 뭐라고요? 목격자에요. 어떤 목격자? “보세요. 지금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이상하네. 그게 왜 안 보일까?” 그걸 증거하는 목격자입니다. 이게 이해될 문제가 아니에요. 저도 그냥 증언할 뿐이에요.

 

그래서 누가 구원받았다는 말입니까? 아벨입니까, 가인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사람들은 성경해석하면서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의 받았다고 했잖아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아벨이 형한테 맞아죽는 일이 벌어져야 끝나는 거예요. 왜 그걸 쏙 뺍니까? 아직 드라마 50회 끝나지도 않았는데 25회 보고 드라마이야기하면 안 돼요.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음으로 주께서 유발시킨 우발적인 사건이 원인이 되어서 아벨이 죽었다면 아벨의 죽음은 우발적 사건이지요. 역사는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데 거기에 우발적이 되면 묵시적 사건이 개입되는 순간입니다. 묵시적 사건이 개입된다는 것은 묵시적 존재가 개입되는 순간이에요. 그것이 바로 약속을 이루는 주체의 등장입니다. 어떤 때는 아벨의 모습으로, 어떤 때는 스가랴의 모습으로.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합니까? “아벨과 스가랴의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예수님의 노선은 묵시적 노선인 거예요.

 

히브리서 7장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설명하면서 멜기세덱 족보와 연결시킵니다. 율법에 나오는 십일조가 몇 %냐고 묻지 않고 누구냐고 물어요. 예수님이 바로 십일조에요. 아까 돼지털 이야기했지요. 돼지털 하나 뽑아서 분석한다고 율법 되는 게 아니고 돼지털은 돼지 몸통과 경유해서 나와야 돼요. 십일조, 안식일, 그건 예수님 몸통을 경유해야 돼요.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누가 안식일 안 지킨다고 너희를 함부로 비난하느냐? 그럴 필요 없다. 이미 모든 율법은 주님의 십자가로 찢어버려도 괜찮다. 만약에 그걸 안 찢는다면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헛되이 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2장 16절과 갈라디아서 4장에서 아직도 절기와 월삭 지키고 한다면 내가 전한 복음이 헛될까 함이라고 돼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모든 사도바울의 발언은 우발적 사건이 되는 거예요. 그 말씀을 성령에 의해서 전하게 되면 우리는 그 우발적 사건에 의해서 빈번하게 당하고 또 당합니다. 성도는 매일같이 주님의 우발적 기능에 휘둘리게 되고 휩싸이게 되고 남들은 알지 못하는, “주여 그만 괴롭히소서. 정말 짜증납니다.” 주님이 와서 나를 힘들게 만들지요.

 

회사 경영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사람이 와서 당신 제품에 하자 있다고 덤벼들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뭡니까? 왜 하필이면 접니까? 제가 지난주일에 예배 참석한 줄로 아는데요. 왜 주여 하필이면. 그 비슷한 노래가 임재범이 불렀던 [고백] 저 여자만 허락한다면 제가 죽어도 좋습니다. 제발 저 여자만 주시옵소서. 무슨 그런 기도 응답이 다 있는 줄 모르겠어. 그 여자가 우상이 돼버렸지요.

 

우리 이 몸이 언약적으로 다루면 육신인데 언약을 생각 안 하면 자아가 돼요. 자아는 존재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존재가 되면 하나님을 존재로 봐요. 기능이 아니고. “주여, 거기 계시지요? 제 소리 들리지요. 주여, 지금 십일조 올라갑니다. 거룩한 제단을 특별히 구별했습니다. 주일성수 도장 찍었어요. 주여, 받으시옵소서. 했습니다. 이제 갑니다.”

 

존재는 존재를 부르지요. 포이에르바하는 그게 바로 신은 자기의 적응이라 해요. 배트맨 영화에서 옥상에 배트맨 상징물에 조명을 비추면 밤하늘에 배트맨 문양이 비추지요. 하늘에 배트맨이 있는 게 아니고 모양새가 건물 옥상에 있지요.

 

내가 여기 존재하매 신은 저기에 존재해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선악과 따먹은 속성들로 주고받는 겁니다. “주여, 선은 귀하게 여기시고 악은 버리라고 했지요. 지금 잘 버리고 있지요?” 선악으로 따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예 선악 자체를 몰라야 내가 원래 창조했던 인간이라는 겁니다. 선악은 주님만 알아야 되지 피조물 된 인간은 알면 안 돼요. 선악에 대해서는 주님이 알아서 해요. 악이 뭐냐? 악마거든요. 선악에 따른 조치는 주의 이름이 알아서 조치하는데 네가 왜 끼느냐? 마귀가 그걸 알고 일부러 집어넣었지만. 꼬셔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난처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집어넣었잖아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을 건드리면 곧 뭘 건드린 게 돼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중요하냐, 형상이 중요하냐? 이것은 마귀도 다 알고 있어요. 인간보다 형상이 더 중요하거든요. 우리의 형상이 들어있는 인간이 있단 말이죠. 마귀는 인간을 공격한 게 아니에요. 정작 뭘 모독하겠다는 거예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공격하는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이걸 철학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인간은 삼분설이지요. 동물적인 것, 혼적인 것, 영적인 것이 있다고 하지요. 조직신학에 이런 게 있어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있다는 겁니다. 공유적 속성은 하나님도 있고 인간에게도 있는 것, 비공유적 속성은 하나님에게는 있는데 인간에게는 없는 것, 그게 문제가 됩니다.

 

공유적 속성은 뭐냐? 에베소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으라. 이것은 새사람인데 거룩한 것이다. 거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도 갖고 있고 인간도 갖고 있는 공유적 속성이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구나. 이걸 내 몸에서 쇠퇴하면 안 되고 흐릿하게 하면 안 되고 기도하게 되면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이 밝아지게 만들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비공유적 속성에서 문제되는 것은, 예수님이 우신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이 그때와 그 시는 모른다는 거예요. 그때와 그 시는 아버지만 안다면 본인은 뭐예요? 앎의 한계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모르는 거네. 모르는데 하나님이 돼요? 거기다 부자 청년 만나서 하는 말이, 선한 선생이라고 하니까 선한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할 때 자신은 덜 선한 거예요?

 

비공유적 속성은 이런 문제점이 있어요. 예수님의 전지전능에는 한계가 있다. 또 울기는 왜 울어요. 예수님이 세 번 울었는지 두 번 울었는지 확실치 않아요. 성경은 우리가 원하는 해답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묵시적 기능만 보여주기 때문에.

 

아까 장기 알 자체가 존재가 뭐냐를 보여주는 아니지요. 그것이 어울려서 보여주는 게 장기 게임이고 규칙이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가 주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의 룰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존재가 되다보니까 우리는 내가 선택하고 싶은 거예요. 좋은 것, 선한 것, 주님이 기뻐하는 것을 내가 알아서 미리 알아채서 하게 되면 항상 내가 원인자가 되지요. 내가 예상이 돼버려요. 여기서 모델을 찾게 돼있고. 누구를 본받으면 주의 형상을 본받는 게 될까 하고. 가까운 교회부터 해서 훌륭한 목사를 찾게 돼요. 찾아서 타협에 나서요. 어느 정도면 따라붙을 것인지 계산하면서. 그리고 하다 안 되면서 항상 반성하고.

 

도대체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의 인식이, 바리새인은 안 죽었어요. 계속해서 우리 속에서 살아있어요. 주의 계시도 아닌데 좋은 경험을 계시에다 추가시켜요. 그걸 간증집회라 합니다. 제가 암에 걸렸었는데 나았습니다. 듣는 순간 교인들도 나도 암에 걸렸으면 좋겠다. 암이 좋아서가 아니라 암에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다는 이벤트가 그리운 거예요. 왜? 그렇게 되면 그 사람 못지않은 신앙인이 되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신화는 영웅설화입니다. 영웅설화의 특징은 잘 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일단 고난에 들어가요. 신의 도움으로 나중에 놀라운 파격적인 위대한 존재로 변화됩니다. 춘향전, 심청전, 그리고 안티고네. 하여튼 세상에 모든 것이 영웅주의에요. 모든 영화, 드라마를 보세요. 공통점이 고난을 받지만 인간적인 용기와 의지와 강한 신념(기독교에서 말하는 강한 믿음)으로 쓰러질 뻔하다가 이겨내서 마지막에 원수를 갚았다고 하잖아요.

 

[마법의 성]이란 노래에서 공주 하나 차지하려고 산 넘고 물 건너고 하잖아요. 그 노래가 우리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효과를 줍니까. 김종환의 [존재의 의미]란 노래 알아요? 실직자나 변변치 않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 여자들은 몰라요. 남자들은 눈물을 흘립니다. 조금만 기다려 줘. 달려갈 테니까.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야. 2절 가사에 보면, 쓰러져 피곤에 치쳤지만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성공해서 너와 결혼할 테니까. 그 노래 들어보세요. 조금 늦는다고 아주 늦는 건 아니라는 내레이션이 나와요.

 

왜 그런 노래가 사람한테 인기 있고, 왜 그런 설교를 듣고자하는 겁니까? 좋은 일에 대해서 자기도 한 다리 끼고 싶은 거예요. 내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자기도 조금이라도 기여했다고 하고 싶은 거예요. 나도 보탬이 되었습니다. 나의 회개와 나의 반성과 나의 성경공부와 나의 기도와 나의 금식이 약간은 동업자로 보탬이 됐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 해서 실패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고마운 소식은 이스라엘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 실패한 그것을 긁어버린, 동전으로 긁으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정말 주님께서 십자가로 긁을 때 듣기가 싫어. 긁을 때 홈이 생기잖아요. 그 홈에서 주의 피가 흘러나와요. 내가 그동안 엉뚱한 상상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주님은 죽으라 했는데 나는 죽음을 가장한 채 죽음을 근거로 내가 맺힌 한을 풀고 가려는 고집이 있잖아요. 잠시 만요, 한 풀고 가실게요.

 

그 한에 대해서 프로이드가 이야기합니다. 네 아버지가 무의식적으로 너에게 강박감을 줬다는 거예요. 아버지든지 아버지를 대신할 만한 사람, 교사나 교회 목사, 자기가 존경할 만한 어떤 영웅이, “내가 기대하는 걸 알지?”라고 평소에 세뇌를 줬거든요. 그 아이는 항상 타인의 욕망이 모델이 되어 흉내 내어서 어릴 때부터 나의 욕망으로 전이된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나온 게 보란 듯이 주먹을 쥐고 공부하는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코를 납작하게 만들기 위해서 MIT, 브라운대학, 하버드대학 가고야 말리라. 그게 뭐냐? 놀라운 초인의 능력을 발휘케 합니다. 니체가 그걸 주목한 거예요. 인간은 건들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다. 건드리면 오기로도 자기 이상의 능력이 발휘되는 거예요. 꿈과 비전을 사람을 일깨워주는 게 아니고 누가 건드려줘야 돼요.

 

“아빠는 돈도 못 벌고?” 그것도 제일 사랑하는 딸이 건드려줘야 돼요. “너, 아빠 우습게 봤지. 어디 두고 봐.” 보란 듯이 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서 존경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나의 존재에 대해서 광채(아우라)가 나도록 아버지의 권위가 팍팍 서도록 이미 타인의 욕망은 나에게 세뇌를 가한 겁니다.

 

바로 그렇게 하도록 여자의 후손은 묵시적 존재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존재가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본받도록 부추기고 조작하고 유발시켜요. 신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는 보란 듯이 인생을 멋들어지게 깨끗하게 살아보겠다고 용기를 북돋아줄 때 주께서 와서 긁어버리지요. 긁은 홈에서 피가 나오게 하는 겁니다.

 

“아벨이 보란 듯이 살았느냐, 보란 듯이 망했느냐?”라고 묻습니다. 아벨은 보란 듯이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사 받을 때 신났지요. 제사 받은 그것이 묵시적 원인이 되어서 묵시적 결과가 뭡니까? 거룩한 죽음의 노선에 합류되는 거룩한 결과를 낳았다면, “이제는 네 차례야. 네가 아벨이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성령의 노선이 아니고 율법의 노선이야.” 갈라디아서 4장에 노선이 두 개있습니다. 사라의 노선과 하갈의 노선이 나오거든요. 그걸 두 언약이라 합니다. 한쪽은 성령에 속한 사람, 한쪽은 율법에 속한 사람. 누가 누굴 핍박한다? 율법에 속한 사람이 약속에 속한 성령에 속한 사람을 핍박하게 돼있어요.

 

그게 역사적 존재에서 미지의 X라는 숨겨진 노선이에요. 숨겨진 노선을 우리가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만 우발적 사건이 매일같이 들이닥쳐서 우리로 하여금 깜짝깜짝하고 놀라게 만들어요. “기도했는데 기도한 대로 안 될 줄 알아.” 그러면 돼요. “내 기도 안 될 줄 알았는데 됩니다. 그래. 주께서 응답하시는구나.” 세상에 이런 일이 없어요. 됐다고 안심하면 다른 사건 터지고. 기뻐할 때 찬양하고 슬퍼할 때 기도하라 하는데 이제는 기뻐할 때 다른 사건 터져서 찬양을 무효화시켜버리고, 슬퍼하려 하는데 갑자기 예상치 않은 찬양이 되고. 기도할 때는 찬양이 나와 버리고 찬양할 때 기도가 나와 버리고. 나는 기뻐할 때 찬양하려고 마음준비하고 지키려고 하는데 그 지킴을 반대방향으로 말씀대로 활성화되게 만들어요. 그럼 나는 완전히 농락당한 게 됩니다.

 

이 소리 듣고 어떤 간사는 말하기를 “목사님. 인간이 로봇입니까? 인간이 기계입니까? 인간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인격’이란 말은 헬라철학에서 가면 썼다는 말이고 그 가면은 벗겨도, 벗겨도 본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 가면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헬라철학에서 인격은 무대장치에 쓰는 용어인데 무대장치는 관객에서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인격은 자기의 야망이 아니고, “이런 사람 되기 원하지요? 아버지, 어머니. 이런 아들 되기를 원하지요? 원대로 보란 듯이 하겠습니다.” 하고 사법고시 합격. 그것은 가면입니다. 자기의 본심은 감춰져 있어요.

 

로봇은 죄를 짓지 않아요. 주께서는 로봇보다 더 못한 존재, 하면 할수록 그것이 죄가 되는 존재로 만들고 거기다가 “남의 죄 따지지 마. 마귀 이야기하지 마. 네가 바로 마귀야.” 하고 우리를 긁으면 거기서 십자가 피가 나오면서 주께서 다루시는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대접했거든요. 대접을 받아도 너무 많이 받아요. 대접하는 보상은 주님 앞에서 대접하는 본인들이 신앙인이 아님을 들통 내는 것이 주께서 하신 대접이에요. 아프다고 전갈 보냈습니다. 주님과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닙니다. 주께서 고쳐주실 것이라고 했어요. 얼마나 요한복음 11장이 어려운지 보세요. 예수님이 그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갑시다.” “기다려라.”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이제 가자고 했어요. 왜 가시냐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잔다고 했거든요. 그걸 도마가 앞뒤를 맞춰보고 우리 죽으러 가자고 했어요. 그러니까 자기 딴에 나름대로 철저하게 한 해석이 엉터리 해석이에요. 왜냐하면 죽음이란 예수님이 십자가 져야 비로소 아는 거예요.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는 그 의미에 대해서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비로소 제자들이 그 의미를 알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삼 년 동안 예수님 재림의 의미를 몰랐어요. 모른 그것도 자체로 의미가 있어요. 모른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거예요. 삼년 동안 교육받았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안 게 없었다는 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취지입니다. 우리와 똑같네. 난 대단한 줄 알았는데. 세미나 받아도 소용없네. 바로 그거에요. 성령의 은혜가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모르게 돼있어요. 지식이 있다고 안다고 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열두 제자가 있음으로 무식해도 구원받아요.

 

16년 동안 아무 이유도 없이 애인이 안 생긴다는 개그콘서트에 코너가 있거든요. 16년 동안 열심히 일해도 믿음이 안 생겨요. 로마서 9장에 보면, 네가 달음박질해도 믿음이 안 생겨요. 열심낸다고 해도 믿음이 안 생겨요. 그러면 믿음은 오직 불쌍히 여겨주시는 사람만 생겨요. 열심히 한다고 안 돼요. 그러면 “열심히 하지 말까요?” 하잖아요. 열심히 안 해도 안 돼요.

 

그 말은 묵시적 존재는 이 땅에서 어떤 원인을 결부시키지 않고 차단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이름은 아벨의 죽은 신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아벨을 죽였듯이 내가 등장하면 너희를 죽일 거야. 원인을 제거할 거예요. 그런 기능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주의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하고 찾아갑니다. 찾아가지 마세요. 주께서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기능을 일으킵니다. 우리를 긁는 기능. 그 기능이 바로 말씀이 반복입니다. 성경을 반복해서 읽으라는 뜻이 아니고 똑같은 본문인데 전에 읽을 때는 놓쳤는데 그 다음 읽으니까

 

여러분이 큐티하면서 같은 본문을 열 번 읽으면 똑같은 해석이 나옵니까? 다른 해석이 나옵니까? 찬송가를 같은 찬송가를 불러보세요. [천부여 의지 없어서]를 눈물을 흘리면서 부릅니다. 두 번, 세 번 부르면 3절이 너무 길어요. 또 무슨 생각나는지 알아요? “주여, 용서하소서. 제가 짜증 안 내는 것도 오늘 기분 좀 뭐하네요. 다음에 기분 좋을 때 잘 부를 테니 오늘은 봐주고 넘어가 주세요.” 변명들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마귀가 원한 거예요. 여러분, 마귀가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그것 때문에 마귀를 허락했고 그것 때문에 우는 사자가 옆에 있도록 허용한 겁니다. 우리 같으면 마귀 있으면 파리채 들고 다 잡고 싶어요.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마귀가 오도록 하는 겁니다.

 

마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중요한 대목입니다. 마귀는, 내가 원하는 그것을 들어준 사람, 그게 마귀에요. 사실은 마귀는 묵시적 존재기 때문에 마귀의 존재를 말하면 안 되고 존재는 역사적 존재에만 붙이고 마귀의 기능이라고 하면 돼요. 내가 원하는 것, 나는 자아거든요. 자아는 육신에서 나왔지요. 언약성취가 완성이거든요. 언약성취를 위해서 우리는 육신으로 가담이 된 거예요. 그럼 육신은 육신 값을 하면서 죽어가야 돼요. 우리 이름이 아담이니까.

 

한 사람이 범죄 함으로 죄가 왕 노릇했지요. 어느 누구도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반란이나 시위나 데모가 일어나면 왕이라 할 수 없습니다. 도둑이 들어와서 문간을 넘어서면 세간이 주인이 온다고 냉장고가 옆으로 걸어서 마중 나오면 안 돼요. 그것은 제대로 마귀한테 붙잡힌 게 아니에요. 그리고 도둑놈이 주인을 묶어놓고 그 다음에 우리를 강제로 데려가요. 주께서 우리를 질질 끌고 가는 그 반복적인 기능이 바로 성령의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에서.

 

언약이 주어지기 위해서 우리는 언약적으로 인간이 아니고 육신이지요. 육신 나름대로 피어나는 것이 자아입니다. 자아는 나름대로 성경을 보고 해석을 해요. 이미 자아는 역사에 속했거든요. 역사에 속했다는 말은 선악과 따먹은 이전입니까, 이후입니까? 이후가 되지요.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 기본적으로 선과 악이 깔려있지요. 선과 악은 우리에게 간격을 줘요. 선과 악이 벌어질 때 거기서 나온 게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우리에게 공포를 가져다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십일조를 하다가 안 하고 일주일을 보내보세요. 언제 떨어질지 모르지요. 본인은 십일조 하는 걸 선으로 봤지요. 그런데 본인은 지금 십일조 안 하고 있지요. 악이지요. 간격이 벌어졌지요. 성경을 하루에 다섯 장 읽고, 기도는 30분 하는데 갑자기 손님이 와서 성경 다섯 장 못 읽고 나중에 밤 12시쯤에 할 때 그때 선과 악이 갈라졌지요. 내 숙제를 다 하지 못한데서 공포가 오지요. 오는 공포를 잠재워야 되겠지요. 다음날 열 장을 읽으면 상쇄가 되잖아요. 그러면 마음이 한결 놓이고 공포가 줄어지고, 이제 종을 쉬게 하는군요.

 

교인들이 11시 예배인데 11시 20분에 왔어요. 늦게 온 건 지각이니까 악이잖아요. 그리고 헌금할 때 천 원을 하는데 손에 만 원짜리가 잡혔다. 옛날이라면 바꿀 텐데 그대로 매미채에 집어넣을 때 이천 원을 해도 되는데 팔천 원을 더했기 때문에 마음이 어떻습니까? 뿌듯하지요. 충만한 의가 되지요. 잘못은 조금했는데 상쇄하는 비용이 너무 과했지만 마음은 뿌듯한 거예요. 로마서 5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넘친다는 표현을 그렇게 해요. 죄 졌잖아요. 죄를 용서하면 무죄가 돼버려요. 그럼 우리는 창세기 2장으로 되돌아가요. 그러면 또 지면 또 죄인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의는 무죄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의인이 돼버려요.

 

양동이에 물 담을 때 물을 알맞게 담는 것이 아니고 넘치게 담으면 그 안에 원래 있었던 오물이 씻기고 계속 신선한 물이 넘치지요.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을 영원한 생수가 넘치는 우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면 끊이지 않는 생수가 나오는 겁니다. 아까 백두수? 비교가 안 되지요. 삼다수? 비교가 안 돼요. 주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샘물로 바꾸겠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하는 행실이 뭐였습니까? 남자 다섯 명 사귀었고 방금 헤어졌고 지금 사귀는 남자, 여섯 번째고. 정말 뛰어난 미모, 봤다면 끌릴 수밖에 없는, 알 수 없는 마력 같은 것, 전지현, 김연아, 하여튼 그 레벨 쯤 되는 것 같아요. 본인도 알아요. 본인도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에 대한 본색을 드러내지요. 어디서 예배드리면 나 같은 사람도 구원될 수 있느냐는 조로 이야기할 때 자기가 아는 티를 내요.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데, 어느 공간에서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냐고 묻지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메시아가 와야 된다. 메시아가 오게 되면 에스겔에 나오는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그전에 먼저 메시아가 와야 된다고 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사마리아 여인에 성령이 덮친 것 같아요. 물동이를 버려두고 뭐라고 합니까? 메시아 오신다고 이야기했어요? 이미 나는 메시아를 봤다고 이야기합니까? 오신다는 것이 묵시적 존재에서는 이미 현재가 돼버려요. 메시아를 봤다는 거예요. 그제야 제자들이 왔을 때 예수님께서 나 추수 벌써 한 건 했다. 너희들의 심지도 않고 너희들이 애쓰지도 않은 것을 내가 독단적으로 했다. 너희들은 내가 한 추수를 같이 누려~. 누리면 돼요. 그걸 종말의 현상이라 합니다.

 

물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의 준비된 본인의 기능, 주로서의 기능, 에스겔 42장에 나오는 성전에서 물 나오는 그 기능을 염두에 두시고 그 기능을 그야말로 구원받지 못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께서 다가서고 찾아오시고 덮침으로 말미암아 여자로 하여금 자기의 살아온 인생을 드러내게 하시고 동전으로 긁어서 여자로 하여금 선악밖에 모르는 아담의 속성을 유감없이 드러내게 만들어요.

 

어디서 예배드리면 저 같은 여자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심봤다. 내가 메시아 만났다. 그것이 바로 수확물, 결과물이에요. 원인은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에요. 주님이 찾아오심이 원인이 됐고 그 결과가 추수물이라는 결과를 낳았어요. 그리고 이와 같은 식으로 앞으로 추수할 것이다. 너희들을 보내서.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언제까지? 성령 올 때까지.

 

주님 기적 일으킬 때 오천 명이 먹을 때에 뭔가 일이 잘 돼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떠났을 때에 그들은 모든 일이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뜻이 과거-현재-미래라는 역사적 존재로서 자기 자존심과 위상, 위치, 자기 게임을 계속하고 있었던 거예요. 주께서는 십자가로 긁어줌으로써 그건 그대로 하면 돼요. 내 게임, 자존심 게임 앞으로 하실 거예요. 나의 명예, 위신 찾을 거예요. 주님보다 남편이 더 좋고. 주님보다 아내가 더 좋고.

 

고린도전서에서 결혼 안 하는 게 낫다고 백날 해도 우리는 결혼하는 게 좋아요. 처녀로 혼자 사는 게 낫다고 해도 결혼 못했으면 하고 싶어서 환장해요. 그냥 사세요. 긁어주실 거예요.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할 때 선악 자체의 지평에 금이 가게 하실 거예요. 그래서 주님 앞에 나올 때 선악 바탕에 주께서 긁어주신 상처투성이를 보여주시고 거기서 피를 보여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게 새 언약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치겠습니다.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8강

(강의:이근호 목사)

 

 

어제 이야기한 전체적인 내용을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존재로 대할 것이냐, 기능으로 대할 것이냐? 지금까지 서구신학이 자아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존재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한 의도로써 욕구를 가지고 성경을 본 겁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이 아예 빠져버려요.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보다 인간이 주인의 자리에 놓여있게 되면, 동일한 성경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것은 날아가 버리고 인간이 구원받는데 있어서 정보를 획득하는 시도로써 성경을 이용할 뿐이지요.

 

기능으로 볼 것이냐, 존재로 볼 것이냐? “그러면 우리는 존재를 버리고 기능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육신을 언약적으로 다루는 기능적으로 보면 되겠네요. 우리는 그렇게 살면 되겠네요.”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가만있어. 내가 보는 관점과 네가 미처 네 자신도 모르는 내가 이런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까발려줄 테니까 그냥 가만있으라는 거예요. 출애굽기 14장 14절 말씀처럼.

 

홍해를 어떻게 건널 것이냐에 대해서는 홍해 유발자가 건너는 방법도 가르쳐주거든요. 그런데 홍해를 가르는 것은 하나님 몫이고, 홍해를 어떻게 건너느냐는 건너는 당사자, 또 주체입니다. 그걸 못 건너면 내 주체가 죽으니까 인간은 사는 쪽으로 움직이거든요.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는데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는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자동적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냥 살고 싶은 거예요.

 

언제까지 살 거예요? 95? 102살? 죽는다는 것만큼 현실적인 게 없는데 왜 죽는다는 현실을 놓치고 다른 조건으로 현실을 자꾸 재구성하면서 가느냐 말이죠. 그 재구성하는 것도 남의 사정을 인정하는 게 아니고 내 사정을 고려해서 나만을 위한 나만을 향상시키는 그런 쪽의 현실관을 매일 눈만 뜨면 다시 구성되고 구성되는 겁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심각할 때는 주식을 팔았다가 어떻게 해결됐다면 또 주식을 사고. 이러한 행동을 우크라이나를 걱정한 겁니까, 러시아를 걱정한 거예요? 이 틈에 돈 벌어볼까라는 자기 자신만을 걱정하는 거예요. 그러한 버릇이 성경을 대할 때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이야기 아니냐?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시겠지.

 

용납의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대로 현실을 구성하는 그 짓마저 허용하시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나로 하여금 내 멋대로 살고 내 기분대로 사는 것을 왜 하나님께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그걸 방치하듯이 용납해줘요? 내 돈 떼먹고 도망친 사람이 있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서 죽었으면 좋겠는데 들리는 소문에는 그 아들이 이번에 사법고시 합격했다는. 그게 뭐예요?

 

그게 시편 73편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나는 안 믿는 사람이 잘 되는 걸 보고 미끄러질 뻔했다는 거예요. 그들은 죽을 때도 고난이 없고. 그야말로 삼박자 구원이에요. 모든 일에 형통해요.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돼요. 안 믿는 자, 신앙에 태만한 자, 교회에 소홀한 자가 오히려 열심한 자보다 모든 게 잘될 때 거기서 무슨 신앙적인 의욕이 나겠습니까? 보람, 기대, 그런 것들을 찾을 수가 없어요. 계속 성경지식을 축적시켜놨는데 그것이 내 생활이 개선되는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을 때 과연 성경공부,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기능이냐, 존재냐 할 때 한쪽을 버리고 한쪽을 취하는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서는 둘을 나란히 다 함께 가져가요. 왜냐하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천국은 지옥과 겸해 있는 것인데 우리 같으면 지옥을 아예 없애버렸으면 좋겠어요. 여호와증인처럼. 하지만 나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 지옥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란 것도 그렇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기뻐해야 될 주체는 오직 한 분의 주체,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체, 그 주체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뤄서 진행되게 돼있어요.

 

그러면 피조물은 뭐냐? 피조물은 하나의 기능인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기능인으로 다뤄질 때 내가 보는 기능인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다뤄지는 기능인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언약이 종합이 돼버려요. 제가 대전수련회에서 창세기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사운드오브뮤직]이란 영화를 보면, 마리아 선생이 애들한테 도레미 송을 가르치는 게 있어요. 중창이 아니고 합창을 할 때 도 사라지고 레가 시작되는 게 아니고, 밑에 도가 계속 깔려서 가요. 그 위가 레가 등장해요. 미, 파, 같이 화음을 이뤄서 같이 가는 겁니다. 언약이 하나 끝나고 하나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하나 밑에 베이스로 깔리고 그 위에 중첩되어서 언약이 계속 되는 거예요.

 

기존의 언약신학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이렇게 같이 중첩되어 나가는 것을 모르고, 김의원 교수라든지 여러 교수들의 문제점은, 인간이 죽어서 천국 갈 거냐, 하늘나라를 어떻게 확장하고 하늘나라에 내가 어떻게 끼어들 거냐 하고 자기 존재부터 시작하니까 이 언약은 지나고 이 언약이고, 이렇게 보는 거예요.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전부터 개입했다는 여기에 초점이 있어야 되는데 어떤 언약이 내 구원에 필요할 것인가를 자기 원하는 대로 성경을 골라잡으려는 그런 의도 때문에 성경해석이 애초부터 암초에 부딪치는 거예요.

 

리델보스나 게르하르트 보스나 전부 그런 쪽이에요. 영 잘못된 거지요. 왜 그런 신학 현상이 있느냐 하면, 개신교 이전에 중세 때부터 살펴보게 되면, 신학은 유명한 명제가 있어요. 신학은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다. 정답은 복음에서 나온 신학이어야 한다. 이래야 하는데 신학을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 존재이유로 제공하는 그 교회가 실천적 교회냐? 아니면 유형교회냐, 무형교회냐? 그 문제를 또 따져야 되는 겁니다. 어느 교회를 말하는 신학이냐? 교단신학교의 존재이유는 뭐냐? 교단신학을 유포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럼 진리는? 진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교단과 교회가 중요하고 신학은 거기에 봉사하면 그걸로 끝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구원은 교단, 교회가 해주는 것이 아니고 제가 알기에는 예수님이 해줘요. 분명히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공격했어요. 그런 유대인의 공격을 우리가 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있어요. 왜 너만 진리고, 너만 길이고, 너만 생명이냐고 제대로 예수님을 향하여 항거해야 되고 대항해야 됩니다. 그게 우리의 본색이에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제거될 생각은 안 하고 진리라는 예수님 덕분에 나도 진리이고 싶어 하고. 뭔가 이용해 먹고자하는 주체적 속성이 또다시 발휘되는 거예요. 마치 제자들처럼. 하지만 베드로에게 권력자가 위협하니까 베드로는 나름대로 몸부림쳐 보지요. 칼을 빼서 말고의 귀를 벴지만 말고의 귀나 쳐서 혁명이 성사되겠어요? 어설프게 욱하는 성질에 칼 휘둘러서 되겠어요?

 

또 뭐라고 장담했느냐 하면, 다른 제자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는다. 입은 있어서 할 소리를 다해요. 베드로가 고마워요. 우리 할 소리를 대신 대해주니까.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 빠진 게 있다. 뭡니까? 악마다. 네 눈에 악마 안 보이지? 안 보일 수밖에 없지요. 성령을 안 받았으니까. 성령은 악령을 대동하고 오거든요. 성령 혼자, 악령 혼자 등장하지 않아요. 반드시 천국과 지옥은 같이 오고. 화투장에서 앞면, 뒷면 같이 오듯이,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같이 나타나듯이, 성령이 오는 것은 악령이 같이 와요. 내가 성령이다가 아니라 무엇이 악령인 줄 아느냐고 지적하면서 오는 거예요.

 

정통? 이단과 겸하여 와요. 네가 이단을 아느냐? 그렇게 부정적인 말씀만 하지 마시고. 이건 부정적, 긍정적 문제가 아니고 나는 구원받기 위해서 긍정적인 것을 선택하겠다는 것은 지 자유지만 주님의 차원에서는 짝을 이루고 온다니까. 한쪽은 버리고 한쪽은 선택하는 그런 권한이 우리한테는 없다니까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주신 아벨 대신에 다른 신을 주셨다 하고 그때부터 여호와 이름을 불렀잖아요. 여호와 이름의 기능이 뭘까? 여호와 이름을 왜 불렀지? 하고 보니까 5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와요. 하나님의 형상이 창세기 1장으로 끝난 줄 알았어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분명히 형상대로 만든다고 했단 말이죠.

 

그 형상의 기능 가운데 종속된 기능이 뭐냐 하면, 선교단체에서 애용하는 유명한 말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이 계명, 문화사명, 칼빈주의적 문화관, 아브라함 카이퍼, 네덜란드의 개혁신학, 존 스토트, 이런 계통, 소위 ccc 계통으로 들어오는 건 전부 문화사명이에요. 소년이여 꿈을 꾸어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여호와 이름이 등장하면서 형상이 다시 됩니다. 이 말은 창조는 1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여호와 이름이 주체가 되어서 시작할 거라는 거예요.

 

어린애가 엿 맛을 보고 엿이 너무 달고 맛있으니까 엄마가 외출하고 난 뒤에 엿 부대에 들어갔어요. 엿을 붙지 말라고 밀가루를 발라놓잖아요. 그때 엄마가 들어왔어요. 어린애는 마지막 엿을 먹고 입술을 닫았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보고, “너, 엿 먹었지?” 아이는 이상한 거예요. 분명히 입술을 닦았는데. 엿은 없어요. 과거에 먹었지, 현재는 남아있지 않았는데. “엄마는 도사다. 어떻게 알았지?” 옷에 온통 허옇게 다 묻혔는데 어디서 왔겠습니까?

 

선악과 이야기할 때 어떤 학생이 말하기를 “목사님. 우린 선악과 안 따먹었어요.” 맞아요. 주체 입장에서는 인간의 주체는 자기 생년월일에 있고 이전의 일은 책임이 없는 걸로 돼있거든요. 그런데 로마서 5장에 보면,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온다고 한 거예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개체적인 존재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의 기능으로 간주한 거예요. 기능으로 간주하면 인간을 계속 생성하면서 하나님의 형상과 창세기 4장에 있는 여호와 이름을 직접 결부시켜버립니다.

 

인간의 죄로 버려진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식으로 회복되는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간주되는 그분에 의해서 지상에서 인간과 동행하면 또는 간여하면서 훼손된 창조, 본래 형상이 있어야 인간이라고 쳐주는 그 인간, 그 형상을 이제는 망가진 인간 주체의 몸으로 회복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 이름이 그들과 동행하면서 지켜나간다는 겁니다.

 

아이가 하얀 밀가루 묻어있으면서도 모른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엿 부대 속에 집어넣어서 옛날에 있었던 창세기 2장, 3장 사건을 인간 대대로 이어지는 혈족 가운데 되풀이하는 겁니다. 그러면 선악과는 어디 있느냐? 그것은 움직이는 선악과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선악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거기서 독 안에 든 쥐가 계속 새끼를 까는 것처럼 거기서 선악과 확산되고 확대되면서 여전히 생명나무와 대치되는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제가 어제 강의하면서 사탄이 보고 싶지 않느냐고 했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사탄이 어디 있느냐? 뱀이 에덴동산에 등장해서 그 짓하게 된 원인제공자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면 인간이 범죄 하거나 고생할 이유가 없어요. 어떤 말씀을 하셨느냐 하면, ~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탄을 보려면 이 지점에 오시면 사탄을 만날 수 있어요. 이 선악지점에서 인간은 선악과만 보였던 겁니다. 뱀도 이것만 지적했고. 선악과 따먹어라. 생명나무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어요.

 

사탄이 알면서 그랬는지 모르면서 그랬는지 사탄이 못된 존재인데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짝을 이룬다고 했잖아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짝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사탄은 암시한 적이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따먹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은 그렇게 무심코 가는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따먹지 말라는 조건 속에 생명나무가 포함 안 됐거든요.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 조건은 어떤 사건 이후에 새롭게 밝혀진 사건입니다. 선악과 따먹을 경우에는 절대로 생명나무 따먹는 것을 허용치 않으리라.

 

그러면 진즉에 이야기하지. 왜 진즉에 이야기하지 않느냐 말이죠.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뒤쪽으로 서로 연결돼있다는 것을 진즉에 이야기하지.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안 먹을 거야. 그런 마음으로 아담이 따먹었습니까? 보이는 것은 선악과뿐이에요. 하나님께서 마귀를 선악차원에서 영원히 형벌을 주고자 하는 그 늪에 마귀와 인간은 다 빠져버렸어요.

 

악마가 하늘에서 미카엘과 싸우고 예수님과 싸울 때 그들이 시비 건 것은 이거에요. 왜 하지 말라는 것을 피조세계에 법칙으로 고정화시키느냐 말이죠. 왜 피조물은 하지 말라는 안에 갇혀야 되는 천지를 만드셨습니까? 그게 불만이에요. 이게 지금 마귀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우리 이야기입니까? 아이들이 엄마한테 대드는 경유가 뭐예요? 아이들이 처음 배우는 말은 맘마, 아빠. 조금만 지나면 뭐 배우는지 알아요? 하지 마아~. 하지 말라는 것은 엄마가 먼저 아이들한테 주입시켜요. “그것 하지 마. 고추장이야. 그건 나쁜 거야. 거기 가서는 안 돼.” 그걸 아이가 언어를 들었던 말이죠.

 

“이것 해?” “하기 싫어.” 이게 몇 살 때냐?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거울단계, 상상계에 속하거든요. 6개월 이후에 그 다음 단계(2년 6개월)에 생기는 현상이란 말이죠. 2년 6개월 지나고 신앙교육, 도덕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 채찍과 당근이에요. 그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싫어’, ‘안 해’를 알고 있기 때문에. 당장 기어 다니는 아이는 언어로 표현 못하고 동물처럼 그냥 울지요. 그래서 29세까지는 인간이 계속 성장한다는 거예요. 청춘? 아프니까 청춘인 거예요. 30 되면? [서른 잔치는 끝났다](최경미 시인)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창조 끝난 다음에 하나님을 안식하셨잖아요. 하나님에 영광이 되는 요건들이 갖추어져야 영광이 돼요. 하나님의 창조를 훼손케 할 때는 그걸 완성케 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관리하고 완성시키는 가운데 진행됩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이름이 형상의 만남.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뭐냐? 장차 어떤 인물로 되기 위한 동행하시는 하나님, 다른 말로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고난에 동행하셔서 그들이 뿜어내는 죄로 인하여 희생과 아픔을 손수 겪으시는 하나님, 그분이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이름은 번제와 속죄제,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릴 때 어린양, 흠 없는 제물로 제사 드릴 때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동행하지 않습니다. 동행하는 하나님은 하나님 쪽에서 따로 주어진 거예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 이름입니다. 주어질 때 언약을 가져왔어요. 그래서 하나님 이름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도레미 송 다시 하면, 도~, 레~, 미~. 도가 끝나고 그 다음에 레하는 것이 아니고 도는 도대로 그냥 가요. 도는 깔리고 그 다음에 레 끝날 지점에 미. 레도 살아있고, 도도 살아있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아브라함, 이삭, 야곱언약이 주어지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그 인생 아브라함언약에 저촉 받고 이삭언약, 야곱언약 다같이 합창단으로서 복합적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이 인간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 훼손당한 시점이 주의 이름이 개입하는 시점이거든요. 인간이 원망했던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나님 이름으로 어떻게 개입해서 다시 그것을 유지시키고 언약대로 성취시켜나가는가를 그걸 증거하기 위해서 그 다음 세대가 또 탄생해야 되는 거예요. 탄생했던 세대는 새로운 언약의 투입으로 그 언약에 맞추어서 실패해야 되고, 실패한 그것을 성공하면서 성공 자체를 새로운 언약으로 구축되고 집합되는 장소에서 계속 동행하는 겁니다. 완성의 때까지.

 

방금 제가 ‘완성의 때’라 했지요. 엄청 어려운 단어에요. 카이로스, 에이온, 크로노스. 이 셋 중에 때가 어느 시간개념을 도입하느냐에 따라서 성경해석 다 달라져요. 성경해석에 있어서 내가 있다고 하면 그때를 사람은 자기 자아성이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 계산하다보니까 주께서 오신다는데 벌써 이천 년이나 됐는데 온다는 거야, 오다가 갔다는 거야, 안 오면 안 온다고 통보나 해주지. 아무 소식 없고. 소식 없는 것을 예상하시고 이렇게 겁주네요.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어쩌라고? 견뎌야 되는데 너무 지루하단 말이죠. 사도바울도 그렇게 지루했겠습니까?

 

샌더스라는 지난 20년간 인기 있는 남아공의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쓰면서 곧장 올 줄 알았는데 안 오니까 다음에 편지쓰기를 미안하다. 우리 시대에 올 줄 알았는데 미안하다. 기다리는 형식을 수정하자. 가만 보니까 내가 착각했다. 이제부터는 느긋하게 기다리자. 교회 만들어서 직분 세우고 기다리자. 이랬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사도바울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거지요.

 

사도바울의 편지는 함부로 풀어서는 안 되고 성령에 의해서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함부로 풀다가 망한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내가 배운 것이 사람에게 배운 게 아니고 주님께 직접 받은 거예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의 말씀인데 그보다 더 어려운 말은 8절인데 그 말씀은 모든 철학자를 삐지게 만들어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지라도 그리고 우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는다 했거든요. 방금 우리 속에 사도바울 본인도 포함돼있지요. 사도바울도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전한 본인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제가 어제 지옥 갈 것을 선택할 사람은 없다고 했지요. 로마서 9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소리해요. 내가 유대인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걸 용납하겠다는 거예요. 미쳤어요? 그 대목에 있어서 목회자는 휙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목을 야무지게 씹고 새겨서 가다가는 교인들이 마음속으로 손가락을 그런 설교한 목사한데 향할 수 있거든요.

 

사도바울은 자기 유대인 구원하겠다고 자진해서 지옥 가겠다고 용감하게 나섰는데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목사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진해서 지옥 갈 그런 마음 준비돼있습니까? 우리는 성경 보면 잠 오고 실체를 보고 싶습니다. 성경은 마취용이고 실제로 말씀대로 산다고 우기는 당신의 사생활을 보겠습니다. 자기 교인 살리기 위해서 자진해서 지옥 갈 마음준비가 돼있습니까? 그래야 로마서 9장의 말씀이 성령이 구체화될 것 아닙니까. 혹시 따질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그냥 슬쩍 넘어가지요.

 

제가 지난 주일오후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목사치고 교인부터 먼저 챙기는 사람 없습니다. 항상 자기부터 챙깁니다. 그러니까 목사한테 주님의 희생을 기대하지 마세요. 목사가 십자가 진 게 아닙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손양원 목사, 주기철 목사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 말은 주의 종을 건드리면 저주받는다는데 축복의 저주의 기준은 도레미 송, 언어에 의하면 이미 확정돼있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저주받고, 부르면 축복을 받게 돼있어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파이프에 죄가 차있으면 저주되거든요. 그런데 파이프로 예수의 피로 죄가 없어지면 이제는 모든 것이 축복이 돼요(에베소서 1장 7절 참고). 저주로 오거든 반갑다고 마중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 저주가 다 복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상은 너를 미워하거든 널 보고 미워하는 게 아니다. 나를 보기 때문에 미워한다. 그 말은 은혜로운 말씀이 아니고 상당히 움찔거리게 하는 말이에요.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과 우리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있는 거예요.

 

어제 식당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어떤 목사님이 “정석훈 목사님이 이근호 제자입니다.”라고 하니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제자 아닌데요. 아무런 계약서도 없어요. 말은 소용없어요. 말은 오전 10시고, 오후 5시에 다를 수가 있어요. 말은 기분 따라 달라질 수가 있어요. 계약서가 없다니까요.

 

데카르트에 이후에 근대시민이 있고,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에 본격적으로 근대국가가 성립됩니다. 국가라는 개념이 18, 19세기에 생겼어요. 그전에는 국가가 없었어요. 놀랍게도. 그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경제, 사유재산이에요. 사유재산은 바로 법, 계약서로 유지돼요. 사유재산을 어디서 인정받느냐 하면, 아담 스미스에 의하면 시장에서 인정받는 거예요. 시장은 모든 종교, 문화로 확대됩니다. 이게 자본주의사회가 되는 거예요. 자본주의사회는 남자, 여자, 어린아이, 어른이냐를 묻지를 않습니다. 모든 가치는 두 가지밖에 없어요. 가졌느냐, 안 가졌느냐?

 

분명히 내가 정석훈 목사를 제자라고 했다가 여기 와서 딴 소리하면 정석훈 목사가 계약서를 가져와야 돼요. 목사님의 경거망동 때문에 정신적 피해를 뭐로 보상하라? 돈으로 보상하라. 이게 근대 자본주의사회에요. 그러면 제가 계약서 보자고 나오지요. 사인을 안 한 거예요. 사인 안 했으면 소용없는 거예요.

 

자본주의사회가 어디서 생겼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도레미 그 여파가 결국 자본주의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근거는 바로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야에 나오는 두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이 최초에 등장한 자본주의적 도시국가입니다. 무역이 없으면 잉여가치가 발생되지 않습니다. 잉여가치가 발생돼야 인간의 노동도 하나의 돈으로 환산돼요. 노동시장이 형성돼야 돼요. 그러면 그것은 바로 잉여가치지요. 그러니까 자본이 많은 사람한테는 인간의 가치가 인격, 믿음, 소망, 전혀 아닙니다. 그 사람이 그 시장에서 구매자가 얼마로 쳐주느냐가 가치가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나옵니다. 사람들이 사고파는 물품 속에 인간의 영혼이 포함돼있어요. 그러니 요한계시록을 풀려면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알아야 돼요. 그걸 알게 되면 요한계시록 해석에 어떻게 유리하냐 하면, 요한계시록을 푸는 나 자신도 자본주의에 말려든 거예요. 요한계시록을 잘 푸는 목사가 목사라는 노동시장에서 값을 많이 받는, 큰 교회에서 초빙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생활비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값어치가 높은 목사가 되고 요한계시록을 전혀 못 푸는 목사는 가봤자 쫓겨나고 갈 데 없고. 정확한 현실입니다. 꿈꾸지 마세요. 현실은 우리가 꿈꾸기 전에 먼저 우리를 덮쳤습니다.

 

철학을 공부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철학 공부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공부했을 때 노동시장에서 나의 가치를 철학을 모르는 사람과 대비해서 얼마나 생활비를 더 받겠느냐와 연관돼있어요. 그래서 결혼은 돈 보고 한다. 딴 소리지만. 자식을 교육시킨다는 것은 노동시장에서 자식이 얼마나 가치 있을 것인지 투자하는 형식입니다.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시장에서 마치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못 빠져나오듯이 자본주의사회라는 최종 형태의 애굽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속에서 단 한 분만 빠져나왔어요. 여호와의 이름. 이제 여호와의 이름이 새롭게 애굽을 만들어낼 거예요.

 

다시 합시다. 천국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지옥과 짝을 이루면서 온다. 여호와 이름이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애굽은 지리적으로 멀어졌어요. 하지만 여호와 이름이 가는 곳에서 새로운 언약이 투입이 되고 그 언약에 걸맞은 새로운 애굽이, 출애굽 되어야 될 애굽이 그 주변에 새롭게 발생됩니다. 이스라엘이 초반에는 모압, 암몬, 블레셋, 아람 그런데서 버텨내야 돼요. 그런데 그들이 언약을 잊어버린 사사기 이후에는 내부에서부터 내부의 이스라엘을 빠져나와요. 마치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처럼.

 

내부의 지파 간의 갈등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지파가 거기서 뽑혀져 나오느냐? 지파가 열두 지파인데 하나가 더해지면서 열세 지파 되면서 한 지파가 메타 차원으로 승격됩니다.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레벨로 등장합니다. 이 지파가 레위지파거든요. 레위지파의 숫자가 희한하게도 다른 지파의 족장들의 숫자와 동일해요. 일부러 광야에서 숫자가 엇비슷하게 가요.

 

레위지파 떼면서 열두 지파를 유지하기 위해서 요셉지파가 둘로 나눠지잖아요. 새로운 언약이 가미되면 레위지파는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원천으로 올라간다 이 말이죠.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제사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아니하면 다른 말로 하면 모세언약이 유지되지 아니하면 노동에 합당한 소산물을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레위지파가 제사를 제대로 드렸다는 증거는 그들의 노동에 달린 게 아니에요.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 때 산 밑에서 여호수아가 싸운 것과 상관없이 전쟁은 무엇에 좌우됩니까? 모세 지팡이가 올라가나, 내려가느냐로 좌우됐잖아요.

 

똑같은 구조로 지금 레위지파가 올라간 거예요. 올라가고 난 뒤에 모든 땅의 소산물 가운데 세금을 내요. 그것도 제일 좋은 것으로. 맏물을 십일조로 해서 레위지파에 드리고 그걸로 끝입니다. 그들은 땅을 갖지 않는 대신에 땅의 10%를 거두면서 유지되는 거예요. 사실은 레위지파가 수입이 제일 많은 편이 되지요. 열두 지파니까 100%를 넘어서거든요.

 

문제는 10%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그들은 10%를 내는 생각이 아니라 맏이를 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출애굽 이후의 맏이는 그 가정의 소속이 아니에요. 출애굽의 목적이 뭐냐? 맏이 생산에 있습니다. 출애굽 하기 전에 할례를 행했고 그 다음에 어린양 심판 오기 전에 미리 안 알려줬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갈구는 성질이 있어요. 뭔가 미리 알려주고 선택하라는 것이 아니고 미리 안 알려줘요.

 

애굽의 맏이들 다 죽었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반대는 뭡니까? 애굽의 맏이는 다 죽었다. 우리 집 아이는 살았다. 이렇게 반대로 생각하잖아요. 그것 틀렸습니다. 애굽의 맏이가 죽어서 없어졌잖아요. 동시에 이스라엘의 맏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3장 1절에 보면, 어린양 이후에 모든 맏이는 바로 내게 속했다. 첫 소산, 첫 아들은 다 내게 속했다. 강제로 맏이를 빼앗는 겁니다.

 

맏이를 빼앗아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언약 안에서 전환시키는 겁니다. 예수 안에 들어가면 다른 신분을 갖추는 것처럼 아직 예수 안이라는 완성이 아닌 그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아래서 이 맏이가 새롭게 다른 위상을 갖게 돼요. 그 맏이가 가정에 내려오게 되면 맏이와 더불어서 약속의 땅을 부여받을 수 있는 배급권을 가집니다. 그걸 기업, 상속이라고 합니다.

 

이 코스를 따라가 보면 출애굽 사건은 홍해 건넜다고 과거 사건이 아니고 도레미파솔~처럼 이스라엘이 있는 이상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반복적으로 이뤄진다는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역사적 해석법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반복해서 진행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어요.

 

보만이라는 유명한 교수가 지은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란 책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히브리적 사고는, 1234567 그 다음은 8910입니까? 다시 1234567.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이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늘 수직에서 수평처럼 누르고 튕기고, 누르고 튕기는 거예요. 누르고 튕기는 그것이 그냥 동일한 언약이 아니라 인간이 죄 지을 때마다 희생의 강도를 더하면서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 언약을 보여주는 외부적 환경이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드는데 바로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가 무엇이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과거 일이 아니고 현재진행형이 되는 거예요. “저 선악과 본 적도 없어요.” 이러지 않고. 선악과나무는 훼손되었지만 훼손되지 않은 나무가 있어요? 생명나무지요. 생명나무가 역사 속에서 여호와 이름과 함께 동행하게 되면 왜 그들은 인간의 힘으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가가 계속 취지가 살아있는 거예요.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존재여야 하는데 이미 그 형상이 마귀와 합작해서 깨어져버린 거예요. 깨어져버렸다, 깨어져버렸다를 반복하는 가운데서 뭔가 나오는 게 있어요. 깨어졌으면 끝내버리면 왜 유지됩니까? 유지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창조는 완성이 되는 수단 중에 하나가 죄라는 수단을 사용해서 하늘나라 완성을 이뤄가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난해하고 복잡한데 이것만 알면 난해하고 복잡할 것 하나도 없어요. 나는 존재가 아니고 나는 하나에 언약의 기능인인데 나의 육신은 뭘 주장한다?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내 존재를 주장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9강

(강의:이근호 목사)

 

 

진도 많이 나가는 건 의미 없고 하나하나 다지고, 다지고 나가는 게 중요하거든요. 제 이야기는 그거에요. 생명나무는 못 먹지요. 그러데 여자이름이 왜 하와, 생명이냐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담은 흙이 돼요. 흙은 죽음이란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죽더라도 내 마누라는 살면 되겠다고 했는데 그 여자의 후손에서 후손이 여자를 결정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름이 생명이란 말이지요.

 

그리고 우리 마누라가 여자 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마누라가 뱀의 후손의 정체를 몰라요.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움으로 모든 일이 종결되거든요. 우리는 여자 쪽에 서고 싶은데 부릅니다. “이 뱀에 대해서 아느냐, 마귀에 대해서 아느냐?” “나는 내 이웃집 아저씨밖에 모르는데요.” 그러니까 싸움이 안 되는 거예요.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온다고요. 옛 뱀.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목회란 다른 게 아니었어요. 영적 전쟁. 우리의 싸움은 혈육,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자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것도 사탄이 만든다는 것을 인식을 해야 돼요. 그리고 그 교회의 머리가 사탄이라는 사실도 수용을 해야 돼요. 언제 그게 보이느냐 하면, 내가 존재일 때 내가 주님에 속한 하나에 속성에 의한 기능이 아니고, 언약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사는 게 우선일 때 내가 목회한 교회는 사탄과 합작하고 사탄과 타협하고 사탄과 동업하고 있는 교회인 거예요. 거기에서 대해서 목회를 논한다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본인부터가 교회로 밥벌이하겠다는데 진리가 주님인데 주님이 거기서 무슨 조언을 하겠어요? 죽으라는 것뿐인데.

 

“저는 내 밥벌이하려고 하는 교회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하려면 자신이 싸우는 대상이 누구인지 겸해서 이야기를 해줘야 되지요. “저는 옆에 있는 불교신자입니다.” 이러면 안 돼요. 불교신자는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다 따랐으니까. “주님이 원수가 나의 원수입니다.” 나한테 사기 치고 돈 떼어먹고 도망간 사람이 원수가 아니고, 내 존재에 훼방되고 내 존재를 유지, 보존하는데 방해하는 건 육신의 원수지만 그런 게 원수가 아니고 내가 싸워야 될 대상은 내 생명을 앗아간다 할지라도 주님의 원수와 싸워야 될 입장입니다.

 

이건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나와요.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야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자기 존재 보존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게 영적 군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이라는 게 아닙니다. 생명은 주님이지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주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주님에게 소속된 속성을 보여주는 기능인이지요. 출발점 자체를 내가 주의 종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주의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면서 존재 가치가 유지되기 위해서 유지됨으로써 자본주의사회에서 그것이 나의 생활비로 들어올 수 있는 근거로써 성경을 본다면 그렇게 하는 자체가 주의 원수에요. 그런데 주의 원수가 안 되려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우리 육신 자체가 주께서 주의 원수하도록 아담으로부터 제공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 5장에 하나님의 형상이 나오잖아요. 그 다음에 바로 이어 나오는 것이 아담의 형상이에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을 만들었지요. 아담부터는 하나님의 형상이 날아가고 아담의 형상으로 대체되면서 자식을 낳았지만 결국 끝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 죽게 되는 기능에 우리는 감사합시다. 죽음으로써 우리는 주의 기능인에 속함을 확인시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걱정, 근심? 사치입니다. 걱정, 근심은 살아보겠다는 것에서 유발되는 것이지 죽는 입장에서 걱정, 근심은 사치가 돼요.

 

히브리서 2장 16절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이 개인의 취향도 아니고 취미도 아니에요. 죽기를 무서워하는 자체가 하나님 보기기에 사탄에 종노릇하는 관계에요. 제가 어제 그런 강의했잖아요. 두려움이란 선과 악의 갈라진 틈에서 일치되지 못한 상태. 자꾸 벌어지니까. 우리가 좀 착하다고 하면 피로감이 생겨요. 내가 이렇게 착해도 되나? 이제 마음대로 노래방에 가도 용납하시겠지. 주의 일한다고 너무 고생을 많이 했으면, 당분간 태만해도 주께서 이해하시겠지요? 고생 많이 했으니까.

 

항상 선과 악은 질량적인 관계, 양적 관계로 대차대조표를 이뤄요. 차변, 대변 나누고 당기순이익이 밑에 깔립니다. 살아생전에 선한 일을 많이 한 것과 그동안 악한 일을 한 것을 빼는 거예요. 빼서 남는 게 있으면 천국이고 남는 게 없으면 지옥 간다. 세상에 모든 민족들이 만드는 종교의 룰이 이거에요. 인간? 다같이 아담 줄기입니다. 선악과는 도~처럼 제거됐습니까? 넉넉히 살아있지요. 선악이 인간의 자아를 추진한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마귀가 대든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왜 피조세계에서 경계선을 그어놓느냐? 누가 하지 말라고 할 때 금지함으로서 우리에게 생기는 것은 자아의식입니다. 독자적인 자아성이 발생돼요.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비로소 어디까지 미치며 넘어서는 내 힘이 도달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금지를 시키게 되면 금지 다음에 소망이 나와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선반 위에 사과가 있을 때 엄마가 아무 소리하지 않고 출근합니다. 아이들은 과일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나가면서 이야기합니다. “선반 위에 사과 먹지 마!”라고 하는 순간 그 아이에게 그것은 하루 종일 소망의 대상이 돼버려요. 그걸 따먹었을 있을 나한테 혹독한 결과가 어떤 것일까? 그리고 따먹기 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던 짜릿한 쾌감은 내가 당할 징벌과 상쇄될 때 플러스가 될 것인가, 마이너스가 될 것인가? 그래서 이득이라고 생각한다면 먹게 되겠지요.

 

벤담의 공리주의사상이에요. 이 사회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한다. 사람의 모든 움직임, 모든 생각은 오직 하나입니다. 나한테 이익이 될까? 거기서 나온 경제논리가 자유주의,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그거에요. 가치를 따지지 말라. 믿음, 소망을 따지지 말라.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유용하다면 팔릴 것이고, 아무리 좋은 책, 훌륭한 내용의 책이라도 사람들이 찾지 아니하면 그 노동의 가치는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될 것이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기업에서 외치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타이밍을 차단하라. 질이 문제가 아니라 타이밍이에요. 한때 보리밥 먹는 게 유행이었어요. 보리밥 먹는 게 타이밍이에요. 다른 말로 운이에요. 목회도 교인 모이는 것도 운이라니까. 그 운을 전도서에 보면, 사랑할 때가 있으며, 미워할 때가 있으며, 어떤 때가 있으며 하지만 그 모든 때는 이미 바다 속에 물이 포함된 것처럼 희석돼버리는 것처럼 언제 그런 때가 있었느냐는 때가 올 것이다.

 

그걸 지혜라 하고 그 지혜가 신약성경 야고보서에서 전체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4장 끝에 이런 게 있어요.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엇어지는 안개니라”(13,14절)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나만 안개입니까? 야고보서 4장이 나한테만 해당되는 겁니까? 모두가 안개지요.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신의 주권사상이 얼마나 잘못된 사상인지 이야기합니다. 신의 주권사상에 존재로 접근하면 전부 다 이방종교가 돼버려요. 이슬람교, 힌두교.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 나라는 존재를 지금까지 키워온 것이 신의 섭리다. 섭리란 말은 철학에서도 사용해요. 유신론적 철학에서 사용해요. 신의 섭리고 신의 뜻이다. 운명을 수용하자. 인생이 너희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푸쉬킨의 시에 나오잖아요. 때가 되면 이뤄질 것이다. 뭘 이룬다는 말입니까?

 

내 존재를 다가서는 주권은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 속에 포함된 영원성입니다. 칸트가 그걸 구성해냈거든요. 인간은 종교를 만든다. 자기를 영원불멸의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구성자체가 인간 이성 속에 내장돼있다. 따라서 교회에 가지 말라. 네 속의 양심을 키우면 그 양심이 곧 신의 율법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리츨의 신칸트주의. 신칸트주의에서 나온 신학자의 주장은 산상설교만 잘 지키면 하늘나라가 이 땅에서 유지돼요.

 

가만 보니까 로이드 존스도 꼭 닮았지요. 벌써 선배들이 다 한 것 같아. 산상설교를 무시하지 말라. 교회가 이렇게 섞어서는 안 된다. 산상설교를 회복하자. 그 이야기를 요즘도 하잖아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는 것은 산상설교밖에 없다. 저는 묻지요. 산상설교하고 주님이 하늘로 올라갔습니까? 산상설교 끝나고 난 뒤에 이제 할 말 다했으니까 간다고 했습니까? 산상설교와 십자가가 매치가 안 돼요. 매치가 안 되니까 그 다음에 뭐해요? 회초리로 때리는 거예요. “왜 숙제 안 해.” 하고 숙제검사만 하면 돼요.

 

산상설교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문둥병자에요. 산상설교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문둥병자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만나고 난 뒤에 주님께서 문둥병을 낫게 했지요. 그리고 요구한 게 있어요. 네가 나았으니까 율법에 기록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받은 후에 취할 조치가 레위기에 있어요. 그 율법대로 제사장한테 보여라. 그리고 나아버렸습니다.

 

그러면 산상설교 빼고 가셔도 되잖아요. 주님께서 문둥병 낫게 하듯이 “죄 많네. 용서한다. 구원받았어.” 이래도 되잖아요. 산상설교를 구태여 말씀 안 하시고 그냥 오자마자 다 구원할 수 있는 문제인데 왜 산상설교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문둥병자 만나서 그런 조치를 하셨느냐 말이에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를 씻어주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볼테르가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교회에 가니까 예수가 죄 용서한다면서? 그럼 예수는 죄 용서하는 전문가네. 의사의 전문기능이 뭡니까? 환자를 고치는 거지요. 예수님과 의사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요? 의사는 환장의 병은 고쳐주되 자기가 병에 걸리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환자를 고쳐주되 환자가 갖고 있는 죄를 자신이 가져가지요. 그게 마태복음 8장에 나옵니다.

 

내가 앞으로 할 일은 저 문둥병자가 당했던 죄,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면서 자비를 베풀 때 값없이 베푸는 게 아니고 값이 있어요. 그 값을 용서받은 사람에게 추후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값을 누가 다 대신 치룬 거예요? 자기 아들, 흠 없는 아들을 보내서 그 값을 치루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되 절대로 우리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구원 자체가 다른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되는 겁니다. 어떤 수단이 되느냐 하면, 우리를 용서하되 용서받은 자로 하여금 자기 의와 자기 공로를 버리고 오직 우리를 대신해 죽었던 그분을 영원한 주님으로 높아질 때 발생된 것이 뭐냐? 하나님나라입니다. 그것이 아들의 나라에요. 골로새서 1장 14절에 나오는 아들의 나라.

 

아들이 없는 자는 영생도 없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따라서 어떤 교회 다니는 아가씨가 검사와 결혼했는데 검사는 예수를 안 믿어요. 그러면 영원히 저주가 있는 사람과 결혼 셈이 되고 그리고 그 가정에 영원한 저주가 있다면 그 아가씨는 결혼을 통해서 자기 집안에 저주를 불러온 셈이 된다 말이죠. 왜냐하면 저주는 언약이 없는 곳에 영원히 저주가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야고보서에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내 존재로 다가서면 야고보서 이해 안 돼요. 야고보서 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잘 들어보세요. 이게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내가 존재라고 하면 독자적이기 때문에 선택하면 돼요. 다시 말해서 내가 선택하면 추가인가를 하나님께 받으면 돼요. 그렇게 되려면 이 뜻이 성립이 안 돼요. 이 뜻이 성립되려면 우리는 안개에요. 안개니까 주체가 없지요. 주의 뜻만 살아있지요. 주의 뜻만 있다면 내가 먼저 어떤 뜻이라고 고를 자격이나 근거는 아예 박탈돼있고 주의 뜻이라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 이것이 뭐냐 하면, 바로 존재가 아니고 기능적으로 관여하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여호와 이름의 행함의 특징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그들의 모든 주체적인 예상은 다 끊어놓습니다. 끊어놓았을 때 그들의 주체는 멈추지 않고 어디를 향하느냐? 놀랍게도 애굽이 좋았더라. 애굽 사상, 애굽 정신상태가 몸이 기억해요. 그 몸은 애굽에서 떨어져 나온 몸이 아니고 끈질기게 엿가락처럼 늘어진 몸이에요. 애굽은 어떤 기능이냐 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실현하기 위한 환경으로서의 애굽입니다. 도~, f레~, 미~. 애굽은 영원히 같이 가요.

 

이사야에서 애굽제국을 멸망하신다고 언급하시기 전에 반드시 언급해요. 이스라엘아 너희는 절대로 애굽의 병거나 애굽의 말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애굽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다. 애굽의 바로 왕은 자체로 말합니다. “나는 신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두로 왕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바벨론 제국의 왕도 나는 나뿐이라고 이야기해요. 세 제국의 특징이 뭐냐? 애굽, 두로, 바벨론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려면 어렵지만 대충 해보겠습니다.

 

우선 공통점이 뭐냐? 높아졌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높으냐? 별이에요. 하나님께서 이걸 떨어뜨렸다는 거예요. 건방진 계명성아. 네가 어디까지 떨어질지 몸소 체험할 것이다. 이 계명성을 루시퍼라고 해서 마귀의 실체라고 하는데 마귀의 실체는 없습니다. 마귀의 실체를 본다는 것은 나를 실체로 봤을 경우에 마귀가 실체가 되는 거예요. 마귀의 실체는 우리 쪽에서는 파악이 안 되고 유일한 실체, 예수님 쪽에서만 마귀가 실체를 보이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날 마귀의 활동은 뭐냐? 예수님에 의한 역사 속에서 주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일에 대한 속성들이 그거에요.

 

야고보서 4장대로 이번에 서울에 가서 장사하려고 하는데 “돈가스 집을 할까요, 치킨 집을 할까요? 주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시작부터 내가 뭘 되겠다는 주체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안개가 아닙니다. 물론 돈가스 집을 하면서 안개 같은 돈가스 집이라고 간판을 걸 수도 있겠습니다만 안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면서 아브람의 주체는 날아갔어요. 왜 주체가 날아가느냐 하면, 주체는 한분이어야 되지 두 사람 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관여입니다. 주의 뜻이면 이것저것도 하리니 제가 거부할 주체는 저한테는 없습니다. 이 말은 결과적으로 말해서 내가 중국에 온 것도 주의 뜻이라고 한 순간, 나는 안개에 불과하다는 고백이에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기능과 주체만 바꾸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자꾸 내 주체가 나오고, 자아가 나오니까 그리고 그 주체, 자아라는 것은 누가 뒤통수를 째려보고 있습니까? 나한테 기대 걸고 있는 부모님, 마누라, 내 자식. 아버지가 그런 짓하면 안 되지요. 정 목사님 자식한테 시달리잖아요. 서열이 세 번째니까. 갑이 아니고 을 밑에 병이니까.

 

그러니까 찬송가에 어머니 기도 못 잊어 내가 나쁜 길로 안 간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주의 이름이 아닙니다. 주의 이름이 없을 경우에는 어머니를 집어넣으세요. 내가 주와 동행하지 않거든 어머니를 집어넣으세요. 그리고 인자하신 아버지를 집어넣고, 내가 모델로 삼은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를 집어넣으세요. 하지만 한경직 목사도 주체고 나도 주체입니다. 둘 다 안개가 아니에요. 아침에 먹은 멀건 좁쌀죽처럼 우리가 멀겋게 되려면 우리는 멀건 죽에 불과하고 그걸 떠먹는 분은 따로 상정이 돼야 되는데 그분은 주의 이름이고 바로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르면서 그 이름의 지시와 명령 따라서 이 땅에서 “이걸 할까요?”가 아니라 “하게 되었네요.”라고 과거완료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참 이 과거완료를 설명하려면 복잡해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to부정사거든요. to부정사에서 시간이 날아가 버려요. to 뒤에 동사원형을 붙여서 명사나 대명사 역할을 하는 거예요. 정통종합영어에 나와요. 시간요소를 빼버린 겁니다. 그걸 과거완료형이라 합니다. 그리고 또 있어요. 에베소서 2장에 이미 하늘에 앉히시고.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걸 풀기가 난해해서 에베소서 강해에 보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어요. 히브리적 시간개념을 몰라요. 헬라적, 철학적 시간개념으로 성경을 푸니까 억지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본인이 보통 헷갈린 게 아니에요. 이미 구원받았는데 명령이 또 튀어나왔거든요. 이제는 성령 받았으니까 제대로 법을 지키라는 모양이구나.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그 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 다음에 뭐가 발생하느냐 하면, 그 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는 판정을 내가 내리지요.

 

인간은 자기 합리화하는 속성이 있는데 좀 못 지켰다 싶으면 변명조로 하면 되는 거예요. 지키려고 했는데 갑자기 차사고가 나서 어쩌고. 온유하려고 했는데 아침에 갑자기 이빨이 아파서 인상을 찡그렸는데 어떤 집사가 왜 인상 쓰느냐고 해서 갑자기 온유가 깨져서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아이 성적이 떨어져서 인상 쓰고 있는 그 찰나에 마침 목사가 심방 와서 인상이 안 좋다고 해서 나중에 해명한다고 전화 걸고 복잡해진 거예요.

 

차라리 그럴 때는 주의 뜻으로 화냈었고, 이빨 아팠었고, to부정사. 그래서 그 목사는 오해해서 삐졌어야만 했고. 나는 내 육신으로 변명하고 싶었고 그래서 전화했고 전화 안 받았고 비는 왔는데 어쩌고저쩌고.

 

모든 주권은 이방종교에서 나온 겁니다. 신의 주권은 존재와 결부하는 거예요. 신이시여, 거기 계시지요. 나란 존재를 이렇게 만드니 고맙습니다. 신의 존재니까 건들지 마세요. 내 존재를 유지할 때 그게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모든 우상숭배할 때 특징이 있어요. ‘나를 위하여’가 반드시 붙습니다.

 

시편 135편에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해요. 내 이름 위하여 너를 택하였나니. 이사야도 마찬가지에요. 지렁이 같은 야곱아 내 이름을 위하여 너를 택하였나니. 이게 뭐냐 하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니. 그것을 저는 주권이라는 오해할 말 대신에 ‘관여’에요. 우리는 결과물이고. 관여할 뿐입니다. 늘 관여 당합니다. 관여하는데 그 관여의 목표는 어떻게 예수님이 주가 되시느냐에 집약이 되는 관여, 어떻게 해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고 다른 이름은 없는가? 주의 이름 자리에 내 이름을 집어넣으면 안 되지요. 그래서 주의 이름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 개인 이름은 사라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까, ‘아들’입니까?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내 아들이지요. 아들이 왜 그렇게 많아요. 왜 단수로 이야기하지요? 왜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이냔 말이죠. 아간 사건 알지요. 여리고 성에서 이겼다고 깐죽거리다가 당한 사건 있잖아요. 아이성이 작다고 저 정도는 우리끼리 손봐도 되겠다고 덤비다가 36명 죽었잖아요. 그런데 민주주의는 몽테뉴에 의하면 다수결로 처리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물건에 손대지 않았습니다. 신명기에서 정리된 여호와 전쟁은 몇 가지 특징이 있어요. 이겼거든 다 바쳐라. 두 번째는 몰살시켜라.

 

사람들이 별로 듣고 싶지 않는 구절 가운데 여호수아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수아 11장 20절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우리는 기능이지요. 이스라엘 기능이 이해되십니까? 이익 될 주체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단수니까. 여호와 이름의 소유거든요. 소유자가 기뻐하면 됐지 소유당한 우리가 기뻐하는 것과 관계없습니다.

 

“그들로 저주받는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누가? 이스라엘 소유자가. 그분이 누굽니까? 여호와 이름이. 어떤 기능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충실하게 역사 속에 남겨서 후손에 의해서 등장한 여자가 생명 되기 위해서 하늘의 생명이 땅에서 이뤄지기 위해서 언약을 투입했던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 이름이 사랑의 교회가 있어요. 옥 씨란 분이 있다가 돌아가시고 그 다음 사람은 논문 표절하다가 걸리고. 논문 표절 주의하세요. 진짜 내가 논문 쓰고 싶어. 왜냐하면 목사님 일이 아니고 내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 하나니까. 한 몸, 한 소망, 한 교회잖아요. 아니었습니까? 내가 오해했네.

 

한 지체 아니었던가요? 지체는 떨어지고 싶어도 못 떨어지지요. 한 성령 받았기 때문에. 돈 때문에 원수지간 되도 원수가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돈 떼먹어서 원수라면 하늘나라에서 멱살 쥘 일 있습니다. 그럼 하늘나라 치안경찰이 와요? 하늘나라에서 싸우는 일이 생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늘나라에서 데모하면 안 되잖아요. 사전에 조치하겠지만.

 

우리 존재로 알고 있는 사랑의 하나님은 만들었으니까 책임져주시는 하나님. 자식이 부모한테 요구하는 게 그거에요. 만들었으니까 책임지라는 겁니다. 똑같아요.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왜 이렇게 고생시킵니까? 책임지라는 거예요. 주께서 말하기를 책임지고 은혜 안 줄게. 네 말 맞아. 너를 그런 인간으로 만든 것은 지옥 가기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여기 본문 말씀대로 그들은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희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구체화되는지 보라. 천국은 지옥과 손잡고 나온다는 사실을 보란 말이죠. 저주받음으로서 네가 잘나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신명기 9장의 말씀처럼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네가 구원받은 것은 다른 근거로 구원받은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를 이루기 위하여 너에게는 은혜가 임한다. 따라서 너는 은혜를 소유하지 말고 은혜에 소유당하라는 겁니다.

 

들어보니까 성경해석이 전부 다 현장에서 갈라지지요. 존재냐, 기능이냐? 기능이냐, 존재냐? 항상 갈라져요.

 

다시 창세기 5장을 봅시다.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그리고 죽었다는 것은 아담의 형상 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이름, 그 이름이 여기서는 안 나타나지만 나중에 보니까 천지창조에 개입하신 그 하나님이었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말씀이 참 잘됐어요. 이런 것도 생각할수록 어려워요. 말 한 마디 떼기가 무서울 정도인데.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고 했지요. 우리는 말씀을 이렇게 안 썼으면 좋겠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계신데 그 옆에 말씀이 있었다. 이러고 싶어요. 왜? 서열이 성부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성자, 성령이고 하잖아요. 성경은 그게 아니에요. 성경은 바로 예수님이 위주. 성부의 주 되심을 증거하는 게 성경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 되심을 증거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은 이 땅의 역사를 체험했기 때문에, 죄를 체험했기 때문에, 언약을 완성했기 때문에.

 

이것은 존재론적 서열이 아니라 언약적 서열이 되는 거예요. 존재론적 서열은 성부가 우선이고 성자, 성령의 순입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3장 끝에 나와요.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21~23절)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 그 때는 아이온을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 말씀이 먼저 나오고 하나님은 보조 상태에 들어가는 겁니다. 인간들아 초점을 말씀에 모아라. 이 말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존재자, 주체가 된다는 거예요. 그동안 있었던 세상 만물은 중심인물이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네가 중심인물로 나대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믿는다고 하잖아요.

 

1장 18절에 보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여기서 나온 단어가 본 사람은 있다, 없다? 없지요. 골치 아픈 일입니다. 여러분 없는 데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 누굴 보내봤자 그건 소용없는 짓이잖아요. 욥기에 나옵니다. 욥이 하도 고난을 당하니까 짜증을 내고 원망을 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욥아. 내가 너한테 질문할 테니까 답변해봐라.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어떤 문화학자가 오지에 가서 풀이름이 뭐냐고 물으니까 토인들이 막 웃는 거예요. 쓸데없는데 이름을 붙이는 게 우스운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언어를 만들고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유용성과 관련돼있어요.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별은 그냥 있는데 별자리는 인간이 만들지요. 별자리를 만들 때 별한테 허락받았습니까? 받은 적 없지요. 인간들이 별자리를 만드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 개입하고자 별을 이동시켜서 동방박사 따라오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것을 철없는 것들이라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들이 내놓는 것에 인간이 저지른 모든 것에 주의 이름이 언약으로 내려오시는 거예요. 그들의 죄로 인하여 온 몸으로 받는 거예요. 그러면 언약적 죽음이 유발되는 겁니다. 아벨과 스가랴의 피가 곧 책임져야 된다는 것. 그래서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로부터 낯설게 마련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따져보겠습니다. 없다는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부터 하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했지요. 하지 말라는 것은 하라와 대조를 이룹니다. 이것을 숫자로 기호로 보겠습니다. 하라는 0으로 보고 하지 마라를 1로 하게 되면 짝이 이뤄지지요. 최초의 상태가 이겁니다. 하지 말라와 하라 사이에 차이성이 발생되지요. 그러면 이게 바로 정보에서 1비트에요. 이든지, 아니든지. “우리나라 사람은 아프든지, 안 아프든지. 둘 중에 하나야.” 맞는 말이잖아요. 가장 최초의 정보를 제공한 겁니다. 이게 바로 1비트 정보에요. 상태는 두 개에요.

 

형광등이 하나 있으면 켜지든지, 꺼지든지. 켜진 것을 0, 꺼진 것을 1로 본다면 이 정보량은 1비트에요. 그런데 형광등이 두 개라면 AB 둘 다 켜지든지, A는 켜지고 B는 꺼지든지, A꺼지고 B는 켜지든지, AB 둘 다 꺼지든지, 네 개가 되겠지요. 이 상태는 네 개고 정보는 2비트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위치상 많아지게 되면 점점 더 상태가 복잡해지고 확산되겠지요. 마치 동양사상에 나오는 음양사상과 유사한 논리가 되는 거예요.

 

음양사상이 기원전 5세기 경이에요. 그전에 있던 사상은 수메르에서 나와요. 기원전 3500년경에 수메르란 나라가 있어요. 메소포타미아. 메소포타미아는 지금의 이라크를 말합니다. 최초의 문명국가에요. 그것 약간 늦게 이집트의 고대문명, 그것보다 더 늦게 온 것이 유프라테스 강이고, 황하 강이 제일 늦어요. 기원전 1500년경. 그리고 2300년경에는 크레타 섬, 유럽의 최초 문명이 발전되는 겁니다.

 

흔히 에덴동산이라고 여기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에덴동산의 발원지거든요. 제가 물었어요. 에덴동산이 어디 있습니까? 궁금해 미치겠지요. 고고학자들 찾는다고 바쁩니다.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지 말고 정보량이 증가되면 어떤 상태인지 물어야 돼요. 시간이 역전 되는 그 안에 에덴동산이 들어있어요. 왜냐하면 선악과, 생명나무의 관계는 언약 안에서 계속 유지가 돼요. 상당히 모호하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것처럼 들리지요.

 

저에게 관념적, 추상적이라고 하지 말고 홍해가 갈라진 것을 관념적, 추상적이라고 봅시다. 그리고 여리고 성 무너진 것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몸무게 70~80킬로그램 나가는 사람이 물위를 걷는다는 말이 성립이 됩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물은 산소 하나에 수소 둘로 돼있어요. 이온 결합으로 돼있단 말이지요. 에너지 결합도가 크질 않아요. 밟으면 터지게 돼있다고. 그러면 80킬로가 올라가면 그게 되겠어요? 안 되지요. 그러면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은 물위를 걸은 게 아니고 관찰자가 오해했다는 불트만의 신학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든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 마태가 거짓말했다는 거예요.

 

목적만 좋으면 구라 쳐도 괜찮다는 게 우리의 기대지요. 그러나 주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구라 쳤습니까? 아니지요. 주인은 그런데 주인 따로 종 따로. 주인의 제자가 아닌 모양이라. 보니까 동업이 수상해. 정보량이 확산됩니다. 복잡해지지요. 하지만 그 원리를 캐보면 0과 1, 그러니까 하라와 하지 마라의 관계 속에 주님께서 끼어들고 선악과 속에 끼어들어서 어떻게 그걸 생명으로 인도하느냐?

 

 

그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201403 연대연합강의 제10강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5장에서 죽었더라, 죽었더라는 그것은 아담의 형상이 그렇다는 말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될 때 아담의 형상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살다가 힘 빠지면 죽는 게 아니고 내가 아담의 형상은 다 죽일 거야. 그러면 아담의 형상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죽음 속에서 언약을 끄집어내면서 죽일 거야. 죽는다는 것은 허무해. 절대로 허무하지 않아요. 귀중품들 빼놓고 죽이는 거예요. 폐차할 때 그냥 폐차하지 않지요. 중요한 엔진부품 빼내잖아요.

 

주께서 죽음에서 빼낼 때 나오는 게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죽음을 보지 않아요. 에녹을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그냥 하늘나라로 가게 함으로써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근거를 그 후에 주어질 언약에 근거해서 에녹이 올라갑니다. 그 근거가 노아에요. 이게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엘리야와 모세가 구원받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누가복음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어떤 주제로 이야기했는지가 나옵니다. 주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그리고 요한복음 8장에서 유대인들이 화를 낼만한 이야기를 해요. 아브라함이 내 때를 보기를 원했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게 주체로 자아로 가게 되면 아브라함이 어디에서 만났으며 언제 만났느냐고 내가 나를 주체할 때 나는 여기 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다고 하잖아요. 그 조건 맞추어서 아브라함이 언제 만났습니까, 어디서 만났습니까? 또 튀어나와요. 유대인들이 화가 난 거예요. 왜 우리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냐? 죽은 아브라함이 언제 서른 살밖에 안 된 당신과 이야기했느냐 이 말이지요. 믿지 말란 이야기지. 우리는 곧잘 믿는데 곧잘 믿는 우리가 수상한지 그쪽이 너무 치밀한지 누가 가짜인지 잘 모르겠어요.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가 먼저 있고 난 뒤에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바쳤다. 믿음의 조상이잖아요. 그럼 그 믿음으로 천국 가야 되는데 아브라함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누굴 기다렸느냐? 예수님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 오신 걸 보고 그는 오케이 하고 천국에 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한 천국은 하나님나라라면, 이것은 하나님나라가 아니었고 허망한 것이고 결국 아들의 나라에요.

 

아브라함이 만난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름이었습니다. 언약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자기와 동행이 가능한 하나님. 신을 만나면 우리는 죽습니다. 우리가 신에게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신이 알아서 인간 속에 들어갈 만한 조건을 스스로 갖추어서 그냥 내려오셔서 관여하시고 동행하시는 끝자락에 천국이 있었던 겁니다. 그 천국의 긴 그림자, 히브리서에서는 그걸 모형이라고 해요. 모형 중에 에녹이 있고 노아가 있는 거예요.

 

그럼 제가 질문합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에녹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지요. 그럼 에녹은 몇 번째라는 말입니까? 참 곤란한 질문이지요. 우리의 시간관은 과거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현재고, 그 다음에 미래잖아요. 예수님 오기 전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엘리야가 불수레 타고 갔잖아요. 그분은 안 죽었다는 이야기고 시체는 찾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살아났어요. 그리고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도 살아났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누구지요? 여전히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고 왜 첫 열매가 되느냐 하면, 그것은 인간의 자아중심의 시간관은 주님한테는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 15절에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것 같아요. 우리 같으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다. 주님은 창조하신 분이니까 나를 보낸 분이고 하나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차례가 나구나.”

 

그게 아니고 나보다 앞선 것은, 이것은 존재론적으로 하늘나라에 계시다는 말이 아니고 지상에 같이 뛰어든다. 그런데 누가 나이 많지요? 세례 요한이 6개월 많지요. 그럼 나보다 앞선 것이라고 했을 때는 하늘나라에 계셔서 앞선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따져도 6개월 늦은 분이 나보다 앞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역사 속에 시간 흐름조차도 새로운 시간을 몰고 새롭게 오시는 거예요.

 

요한복음 2장이나 그 뒤에 계속 보게 되면 그때가 항상 인간이 생각하는 그때가 아니라 시간의 역전이 계속 일어나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시간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철로라고 본 겁니다. 시간을 우리 시간으로 보지 말고 저쪽 시간으로 보라는 거예요.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요한복음 2장의 가나혼인잔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여, 포도주가 떨어졌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여자여,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내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속성이고 기능이란 말이죠. 그런데 마리아는 기능으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본 거예요. “예수님, 한편 맞지요? 이 결혼식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으니까 나를 위해서 포도주를 어떻게 조달할 수 없겠습니까?”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마리아 자리를 허용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마리아에게 이야기를 해버려요. “마리아야. 무슨 상관이냐. 내 때가 되지 않았다.” 우리 같으면, “그럼 삐질까?” 또는 말 취소. 아니야. 취소하지 마. 기능인 거예요.

 

장차 때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빈 물통으로 현장에 가게 만들었어요. 물이 포도주로 변한다는 것은 요한복음 6장에서 내 살과 내 피가 변한다는 새 언약과 관련돼있어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상관없다고 해놓고 상관없는 일을 장차 때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과 환경으로 하나님께서 접수해버리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살지만 단순히 먹고 사는 안개에요. 주체가 다 찢어버렸어. 예쁜 안개, 참한 안개 없어요. 안개는 그냥 물방울이고. 주체는 안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럼 자살하면 되겠네? 자살하지 말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돼요. 물론 뭘 할까요? 자살해라. 이렇게 하면 되겠는데 글쎄요. 그러면 거울에다 내 마누라는 사탄이란 말을 쓰지 말고 해야 돼요. “내가 죽는 것은 주의 뜻이다.” 이렇게 써야 되는데 원망조로 썼다는 말은, 자기 자아가 결정해서 일이잖아요. 내 자아 포기 못하겠습니다.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창세기 5장을 이야기하는데 죽었더라의 의미가 뭐냐는 겁니까? 죽었는데 안 죽었어요. 아담 죽었잖아요. 안 죽었어요. 좀 위로 받읍시다. 진짜 미치겠다, 정말. 십자가 사건 때문에 안 죽었어요. 아브라함도 안 죽었어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에요. 왜 살았다, 죽었다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개념을 정하고 평가하느냐 말이죠. 평가는 주님이 해요. 주와 함께 하면 무조건 산 자고 주와 함께 없으면 살아도 죽은 자에요. 왜 주님의 평가를 애써 외면하고 무시하는 겁니까? 목회라는 이름으로. 그게 무슨 목회에요. 목회자가 목회 방해하는 셈이에요.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세례 요한이 하는 말이,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떻게 보느냐고 묻지 마라.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못 보게 돼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난해한 이야기 중에 하나는 이거에요. 빛이 왔을 때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우리는 어두운 곳에 빛이 비추면 환하게 돼있어요. 저만 느끼는 겁니까? 손전등 비추면 환하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빛이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지요.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두움, 죽었다는 모든 개념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우리에게 주어지는데 우리는 그 속성을 증거해야 될 기능으로서 활동하게 됩니다. 그럼 열두 제자는 뭐냐? 깨닫지 못하는 기능을 해야 돼요.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소경이라고 하니까 본다. 요한복음 9장. 그 이야기를 왜 하시는 겁니까?

 

특히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 8장이에요. 예수님 계시는데 어떤 여자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왔어요. 율법에 속한 여인이 왔어요. 그 여인을 잡아온 바리새인들 율법에 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앞에 율법이 우르르 몰려왔다고 보면 돼요. 그리고 현장에서 그 여인을 죽이면 되는데 일부러 예수님한테 달려들었어요.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율법에 속한 것처럼 예수, 당신도 율법에 같이 속해서 살면 좋겠다는 요청을 한 거예요. 들어올래, 말래? 율법이 최고니까.

 

이에는 이에요. 눈에는 눈이라고 율법에는 율법으로 대항하십니다. 주님께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꿇어앉아서 뭘 썼어요. 율법밖에 볼 줄 모르고 법으로만 따지는 그 인간들이 뭘 봤어요. 뭘 봤는지는 모르겠어요. 이것은 분명합니다. 그들로 하여금 율법 주장하다가 율법 있는 곳에서부터 도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유발시킨 게 있어요. 그러면 인간인 진정 자기가 아는 율법 속에 속한 겁니까? 아니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율법을 이용해먹은 겁니까? 이용해먹은 거지요. 율법보다 독자적인 존재, 나는 나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나는 나라는 숨겨진 속성에 의하면 전부 다 자기 유리한 대로 해석한 거예요. 그 전통을 인간인 이상 유지되는 겁니다.

 

아담의 형상의 마지막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지요. 어떻게 살면 되는가를 묻지 마세요. 어떻게 사는 문제는 독점적으로 다음에 언약이 발생됩니다. 노아언약에 의해서 밝혀질 겁니다. 에녹은 살아있으면서 죽지 않는 게 목적이 아니고 뭐라고 외쳤습니다. 유다서에 나오지요. 노아의 마지막 때가 올 것이라고 외쳤지요. 이게 기능이잖아요. 나, 믿음 좋아서 구원받는다고 외친 게 아니지요. 장차 뒤에 오실 어떤 일을 외쳤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에녹 좋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에녹은 365년 동안 뭘 했느냐 하면, 장차올 일을 미리 앞당겨서 예고한 거예요. 마치 세례 요한처럼.

 

여러분 세례 요한을 보면서 우리 몸이 움찔하지 않습니까? 세례 요한이 성령의 뜻에 의해서 태어났지요. 이름도 천사가 와서 지어줬지요. 그 순간에 예상되는 세례 요한의 미래상은 총회장입니다. 간증으로 그만한 간증거리는 없어요. 이 정도 되는 사람을 주께서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잖아요. 누가복음 1장에서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 우리가 아는 세례 요한의 말로는 처참 그 자체였습니다. 가시나 말 듣고 아버지가 아이한테 장난감 선물 주는 식으로 머리를 잘라서 쟁반에 담아 공개적으로 웃음거리로 만들었지요.

 

그걸 보면서 세례 요한은 믿음 좋으니까 그 일 발생되겠지만 저는 그만한 믿음 안 되니까 제 주체와 자아를 막장으로 몰아치면 힘듭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자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목적은 뭐냐? 자기는 쇠해야 되고 주님은 흥해야 하는 이 원리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 계속 해봅시다. 율법이 와르르 몰려왔을 때 땅에 썼습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알았으면 간음한 여인뿐만 아니고 바리새인도 구원받았을 거예요. 희한하게도 간음한 여인만 빼놓고 다 도망 가버렸어요. 그러면 간음한 여인이 주님 앞에 왔다는 것은 바리새인은 자기가 위급하니까 율법이나 나발이고 다 도망쳤지만 그 여인은 어쩔 수 없이 여전히 율법 아래 있지요. 정죄 당해야 되지요. 너를 고소한 자가 있느냐고 일부러 물어요. 주님께서 시력이 나빠서 묻는 게 아니고 여인의 현 위치를 묻는 거예요. 너를 고소한 자라고.

 

예수님의 주 되심에 누가 필요하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고소한 자만이 그 여인이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주 되심의 기능이 살아서 이 세상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주님의 속성이 구원받고 기능이 살아나는 거예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 하나 재료를 삼아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사건 이후에 나오는 말이잖아요. 자유라는 말은 네 자체로는 할 수 없고 반드시 예수를 경유할 때 율법의 고소에서 벗어난 새롭게 매인 상태를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출애굽에서 애굽을 상정하듯이 자유란 말을 쓸 때는 반드시 율법을 전제로 깔아야 자유란 의미가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율법에 속합니까, 안 속할까요? 우리는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나한테 유리할 때는 율법을 동원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치잖아요. 목사한테 무슨 문제 있어서 당회 열리면 초청받은 목사가, “여러분, 은혜로 합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인데 우리가 그걸 믿으면 돈 문제 있더라도 그냥 넘어갑시다.”라고 하거든요.

 

그러나 제가 아는 은혜는 그 목사를 추방하는 게 은혜입니다. 제가 아는 법은 “나갈 때 얼마 받을래?” 이것이고, 제가 아는 은혜는 빈 손들고 쫓겨나가는 게 은혜에요. 그래야 그 목사는, “이 세상에 믿을 놈 없구나. 오직 주님 아니면 없습니다.” 하고 다시 말씀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교인들이 은혜를 빌미로 빼앗아 갑니까? 교인들이 너무 못 됐어. 너무 악해. 망해서 사는 그 길을 교인들이 도와주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게 돼요. 갑자기 분위가 숙연해져버렸는데 내가 말 잘못했다는 것 같은데.

 

노아언약 보겠습니다. 에녹은 노아언약과 관련돼있고 그 언약은 땅의 안식과 관련돼있습니다. 창세기 6장에서 유념할 단어가 하나 나와요.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육체란 개념이 왜 나오는지. 그러면 멸망한 이유는 그들이 단지 육체가 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도대체 육체란 것이 어디서 나온 것이냐? 이 개념 살필 때 반대로 해야 돼요. 그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육체냐는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되고, 이렇게 해야 돼요.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는 것은 육체라고 결과론적으로 해명이 돼야 돼요. 당신은 저주받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저주받습니까?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도대체 믿지 않으니 그 상태가 저주라고 설명해줘야 돼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그게 새 언약이기 때문에. 도레미파솔라시도, 정점에 새 언약이 있거든요. 새 언약을 경유해서 세상을 다시 봐야 돼요.

 

그러면 노아 홍수가 벌어진 이유는 알았습니다. 언약이 주어진 것은 개개인이 얼마나 훌륭하냐는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할 사람과 하지 못할 사람을 분류시키기 위해서 그렇다 했다는 거예요. 분류된 노아는 신나겠네? 신나지 않습니다. 왜? 언약의 구성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 기분 좋잖아요. 기분 좋지 않아요. 그 안에 다음 언약을 위해서 부정적인 요소가 합류가 돼야 돼요. 그게 바로 노아의 가족 가운데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이 있지요.

 

이상하다. 하나님께서 어떤 심판을 내릴 때는 정화의 차원에서 심판을 했는데 심판결과가 깨끗함이 계속 지속돼야 되는데 왜 더러운 것이 섞여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정화의 차원이 아니고 정화되기 위한 요소의 차원에서 심판을 일으킨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정화됐느냐가 아니라 누가 우리를 정화시키는 핵심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으킨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는 그 정화가 반복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정화돼야 될 더러운 것을 함께 동행시키는 동행이 계속 이어져가는 겁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보면서 또 궁금한 것은 분명히 노아 홍수 때 가인의 족속이 몰살당했지요. 그런데 가나안 땅에 가인의 족속이 왜 있습니까? 그 가인의 족속은 어디서 발생된 거예요? 몰살당할 때 좀 남겼습니까? 노아 여덟 식구 말고 다른데 빼돌린 사람들이 있어요? 아니면 과학적으로 따지는 사람들이 홍수가 메소포타미아 지역만이고 남극이나 북극에는 안 일어났다. 극소적인 홍수였다는 창조론에서 하는 주장을 하렵니까?

 

성경해석에 있어서 신약에 나오는 사도들이 구약을 해석할 때 어떤 관점으로 해석했는가를 보게 되면, 그들은 항상 새 언약, 십자가 완성을 통해서 해석해왔었어요. 이것은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고 구약 자체를 나와 동일한 지평선, 같은 바탕에 있다고 여기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모든 질문들은 성경에서는 어떤 해답도 주지 않습니다. 왜? 질문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그 악한 질문에 해답할 이유가 없어요.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뭐냐고 물었지요. 빌라도가 질문했기에 답변을 안 한 거예요. 아무 소리하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에티오피아 내시가 빌립한테 질문했지요. 아주 친절봉사를 다합니다. 빌립이 인물 좋다고 해주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역사가 그래요. 진짜 개한테 진주를 던지지 말라와 같은 말씀이에요.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해서 자기 아내를 삼았다고 할 때 여기서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며, 사람의 딸은 누구며, 거기서 나오는 네피림과 크로마뇽의 관계는? 거인족은 이 세상의 유인원, 원숭이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중간, 네안데르탈인 이런 것.

 

그런 육들은 과학적으로 어디에 점하고 있습니까? 또는 가인이 결혼했던 여자는 누구의 딸이겠어요? 그런 질문을 중세 때 아무도 안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쓸데없이 과학자가 있으니까 새롭게 질문이 나온 거예요. 이런 질문이 나오는 전제가 있어요. 과학은 가장 진리에 가까운 학문이다. 뉴턴 이후에 나오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산물입니다.

 

성경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백과사전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며, 사람의 딸이 누구냐 할 때 그 존재가 어떻게 생겼으면 어느 위치에 있었으면 몇 년도에 살았는지 시간과 공간으로 하지 말고 기능으로 설명해야 돼요.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기능을 하고, 사람의 딸은 어떤 기능을 하는지. 그 기능은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기능자로서 그들은 생산되게 돼있습니다. 언약에 대적하는. 그러니까 사탄이라 하는 것은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은 뱀이었지만 그 이후에 역사의 과정에서 천국의 실체도 점점 늘어나는 동시에 사탄의 실체도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경우를 같이 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거인족이죠. 이 거인족은 바로 이스라엘이 공격해야 될 가나안에 있었습니다. 정탐꾼을 왜 보냅니까? 자기가 자기 시간에서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안 돼요. 왜 자꾸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참 위대한 점은 안 보고도 믿는 게 아니고 보고서도 믿었다는 사실이 위대해요. 갈렙과 여호수아가 시력이 남보다 더 뛰어난 게 아니거든요. 동일한 조건에서 정탐했잖아요. 그런데 열명은 똑같은 것을 보고 망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들은 장대 같고 우리는 메뚜기 같다. 똑같이 보면서도 그러니까 우리 것이란 거예요. 열명이 제시하는 원인과 결과의 논리구조와 갈렙이 제시하는 논리구조가 서로 맞지 않아요. 그것은 바로 열명의 지파는 애굽의 논리구조가 그대로 유지됐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만한 믿음을 미리 당겼기 때문에 그 믿음을 경유해서 본 거예요.

 

그래서 천국은 하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이 바로 이곳이 천국이라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 얼굴을 보고 믿겠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이 이 소자한테 한 것이 주께서 한 것으로 믿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이스라엘 가야 성지순례라고 하는 반면에 여러분 계신 중국이 성지순례하고 있는 중이에요. 성지순례의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와 주의 원수가 만나는 지점이 성지순례에요. 거기서 십자가 사건이 발생되기 때문에.

 

어제 잠간 언급했는데 고린도전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시집을 가려는 아가씨는, 내가 남편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에 몰두하게 되고, 장가가는 인간은 아내를 어떻게 기쁘게 할까에 몰두하게 된다고 했어요. 요새 그런 남자 드물지요. 어떻게 하면 아내의 입술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할까, 어떻게 하면 웃겨서 사는 게 행복이 넘쳐서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대만족하게 할까 하는 남편이 40대, 50대 되어서도 효과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염려해서 차라리 혼자 살라고 할 때 열 지파 정탐꾼들은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라면 해보고 후회하겠다는 쪽이에요.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결혼 안 한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가 결혼 안 했다는 말이 아니고, 예를 들어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뜻이면 고자 되겠다고 나온 거예요. 안 하겠다는 것은 내가 권하는 말로 했으니까 안 해야 천국 간다는 뜻은 아니거든요. 혼인을 천하게 여기는 그것도 이단입니다. 하고, 안 하고 간에 해도 내 믿음 변동 없고 안 해도 변동 없다는 사람이 나중에 결혼 생활 때문에 신앙생활 못했다는 어설픈 그따위 핑계는 대지 말란 뜻입니다.

 

아가씨 때는 신앙생활 잘 했는데 결혼해서 잘 못했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선물로 주신 믿음은 오히려 어떤 환경 속에서는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돼있어요. 그렇다면 그 믿음은 뭐냐? 좋은 환경, 남편이 잘 해줌, 어려울 때 자기가 견딤, 그거 아니에요. 환경이 어떻든 간에 그냥 예수님 좋은 것, 그게 믿음이에요. 그냥 예수님이 구원해주셨다. 그게 전부에요. 믿음의 내용은 십자가로 끝나는 거지 뭐 있습니까.

 

그러니까 고난을 위장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개척교회하면서 고난 받는다고 우기지 마세요. 그건 지 살기 위해서 고생한 거고, 마음대로 안 되니까 고생한 것이지. 원수 앞에서 주의 편에 섰기 때문에 원수로부터 미움 받는 거예요. 복음을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아야지 얼굴 못 생겨서 미움 받는 것은 주의 고난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6장에서 계속 나오는 것은 육체 됨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 노아 홍수가 개입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먼저 던져놓고 그 말씀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역사 속에 우발적인 사태를 일으켜요. 그게 뭐냐? 언약 사건입니다. 노아 좋겠다고 하지 마세요. 노아는 남들이 하지 않는 힘든 일을 해야 돼요. 방주를 짓고 그 안에 타야 되고 그 자식이 어떤 자식인지 분간도 못하는데 고마운 게 있어요. 함이란 자식이 어떤 자식인지 모르겠고 가나안이 어떤 손자인지 모르겠지만 고마운 것은 동승자가 있어요. 정결한 짐승입니다. 일곱 쌍. 부정한 짐승은 두 쌍.

 

우리가 같으면 더러운 걸 알아서 제거해줬으면 좋겠는데 잡을 때 정결한 짐승을 잡아요. 이 덕분에 더러운 것도 무사히 심판을 통과했다. 내가 앞으로 다시는 물로서는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너희가 어려서부터 더러운 짐승으로 대변되는 쪽에 속했기 때문에 너희에게는 묻지 않고 정결한 짐승을 받고 내가 너희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인간성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있는 곳에는 봄여름가을겨울과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6장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아니하시고 햇빛과 공기와 물을 주시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신다. 그러니까 너희도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고 지옥 가는 사람은 은혜를 못 받아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못 받았다고 핑계 댈 수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서 지옥으로 보낼 것이다. 은혜 받은 적 없습니다. 세종대왕이 지옥 가는 이유는, 핑계 댈 게 없는 핑계를 댔기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진작 복음 전하지. 뒤늦게 1800년대 언더우드 앞세워서 보내서 우리는 맛도 못 봤습니다. 아니야. 이미 맛봤어. 왜냐하면 은혜는 누구의 희생 덕분에 준 은혜거든요. 햇빛과 공기를 받을 때 주여, 저 같은 죄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왜 주십니까?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어디를 추적해 들어갑니까? 나는 이런 은혜를 받을 이유가 없는데 도대체 누구야?

 

만약에 이방인이라면 이스라엘을 만나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성전을 만나고 성전 안에 매일같이 불 속에서 누가 타지요. 상번제, 아침저녁으로 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타고, 탄 그것이 모세언약에 충족되어서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이스라엘 주변에 모든 이방나라에 골고루 햇빛과 공기를 주시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을 이방나라 사람 백부장이 알았고 동방박사가 알았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이 백부장이 천국의 원 자손이 될 것이다.

 

노아언약의 시대에 돌입됩니다. 그전에는 약속이 있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복습하면 여자의 후손은 여자 이름이 생명이다. 원래 생명은 에덴동산에 생명나무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보내셔서 이제는 역사 속에도 생명이 출현할 수 있도록 주께서 약속대로 따라간다. 따라간다면 여자의 후손은 어디서 발견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있는 곳에만 발견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는 어디서 발견되는가? 이미 원수에 복속돼있는 선악과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함께 있기 때문에 인간은 발견되지 못한다. 그러면 흔적이 되는데 흔적이 있다. 죽었더라. 그럼 사는 게 정상인가, 죽는 게 정상인가? 죽는 게 정상이다. 아담의 형상은 죽는 게 정상이에요. 죽었다고 할 때는 마땅한 형벌이라고 생각하고, 고생하는 것도. 어디서 살았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그 원천을 찾아가라. 그게 언약을 있기 때문에 살았다고 봐라. 그게 그 시대에 전한 에녹의 복음이었습니다. 회개하라. 장차 주께서 심판할 날이 온다. 그게 노아 심판이었습니다.

 

노아 심판이 전부냐? 아니지요. 도니까. 깔렸으니까 나중에 새 언약에서 다 폭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언약 전체를 두 자로 이야기해요. 총 언약, 새 언약이라 하지 않고 약속이라 합니다. 이미 완성 단계에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에게 준 주님의 지시지요.

 

창세기 8장 끝에 보면, 봄여름가을겨울 이렇게 복 준다고 해놓고 있어요. 그러면 8장까지 알았지요. 그러면 9장이 비었다고 치고 여러분이 내용을 채워보세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았고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 번 다시 아무런 법을 주지 않는다. 법 없어도 이미 악한 걸 아니까 법 없어도 그들은 봄여름가을겨울, 햇빛과 공기가 있기 때문에 새 땅에서 만족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글을 쓰고 싶지요. 법이 없다고 여겼지요. 법과 무관해서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런데 법이 있어요. 갑자기 9장에 보면,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니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5,6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었다는 말은 창세기 1장 26절 말씀입니다. 어린애가 엿 부대에 들어가서 엿을 먹고도 자기는 안 먹은 척했지만 온 몸에 허옇게 엿이 붙어있지요. 하나님께서 기능으로 다룹니다. 기능으로 다루면 인간이 태어난 모든 곳에 선악과 따먹은 사건에 집어넣어요. 그걸 하나님이 지적하시면서 하나님 형상대로 지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고맙다고 하면 될 텐데 여기다 법을 집어넣어요. 절대로 피를 흘리지 말라는 새로운 법이 동원됩니다.

 

여러분은 율례와 율법을 모세가 처음 받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주의 율례와 법도를 따랐다고 돼있지요. 아브라함은 법을 어디서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성경 보면서 안 궁금했어요? 율법이라는 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아브라함 이후에 430년 후에 와요. 그럼 아브라함 때는 율법이 없어야 되는데 창세기에 막상 가보면 아브라함이 율례와 법도를 지켰다고 돼있어요. 그 율례와 법도의 내용도 나오지 않아요. 그럼 그 율례와 법도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전승이라는 게 있어요. 노아언약은 아브라함처럼 특정 가족이 누군지 구체적이진 않지만 이미 전승으로 흘러오고 있었어요. 그 전승의 내용이 비춘 것이 욥기에 나와요. 욥은 율법 받기 전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요. 욥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짓지 않은 완전한 의인이지요. 그렇다면 창세기 이야기가 도중에 소실되었을까요, 대대로 흘러왔을까요?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 계속해서 흘러오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을 왜 성경에서 이야기하지 않느냐? 성경은 바로 성령께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증거하기 때문에 언약 중심으로 증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것만 채택해서 쓴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해석할 때 너저분한 것 다 해석하려면 너무 과욕이고 목사가 오버한 게 돼요. 십자가 언약과 관련된 사항만 있다고 하고 그것을 해석할 때는 언약으로 모아서 해석해야 됩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울산에 가면 항구가 있잖아요. 항구에 골리앗크레인이 있어요. 골리앗크레인은 아주 거대해요. 그야말로 공중에서 노는 것 같아요. 크레인 기사가 조종해서 잡아당겨서 이동시켜요. 언약이 뭐냐 하면, 골리앗크레인이에요. 창세기 9장을 해석할 때 창세기 10장, 11장으로 바로 넘어가면 안 되고 그 시대에 적용되는 언약으로 끌어올려서 언약에 의해서 이동시켜줘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십자가 사건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그냥 가버리는 대표적인 해석이 뭐냐 하면, 성전과 그리스도의 관계, 이것은 언약이란 크레인이 없어요. 온갖 예수 그리스도를 집어넣어서 해석해서 정말 누가 봐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한 것처럼 보이지요.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성전의 구조란 책들이 나옵니다. 성전을 볼 때 관찰자가 있어요. 성경해석하려고 성전의 구조가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완성되는지 알고 싶은, 히브리서에서 모형이라고 하니까 모형으로 설명하게 되면 그것도 하나에 부흥집회에서 시간 때울 수 있는 멋진 재료가 되거든요. 그림 그려놓고.

 

문제는 그렇게 관찰할 때 관찰자가 관찰자로 머문다는 거예요. 야구 경기 볼 때 관중석에 앉습니까, 유니폼 입고 야구장에 나섭니까? 나서면 지키는 사람이 쫓아내지요. 우리는 성경을 관찰해서 해석해낼 자격이 없어요. 이미 우리 자체가 언약 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는 일부로 있어요. 일부가 전체를 본다?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거예요. 그럼 전체를 보는 분을 찾아야 되겠지요. 전체를 푸는 분은 나를 포함해서 일부에 속한 이것을 이미 다 이루었다고 외친 분이 있어요.

 

외친 분이 있다면 우리는 거기서 내가 내 주변을 둘러보면서 성경해석을 해서 다 알았다고 외치지 못하게 만들고 왜 따로 골리앗크레인처럼 새 언약의 완성자로서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느냐? 그것은 죽을 때 다 이루었지요. 그 죽음은 언약적 죽음이지요. 다시 말해서 언약적 죽음이 아니면 누구든지 전체를 볼 수 있는 해석권이 없다고 이미 판정이 나버린 상태에요. 그렇다면 그런 자격이 없는 우리가 성경 해석한다는 자체가 구라, 거짓말이 돼요.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걸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믿었지요. 그 믿은 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지요. 그러면 그들이 해석을 잘못한 거지요. 그 잘못된 해석을 헤쳐 보니까 뭐가 나왔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안 믿었지만 우리 이스라엘은 믿습니다. 그게 포함됐으니까 해석이 정당하다는 거예요. 그랬던 자들이 독사의 새끼들이었습니다. 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죽을 생각이 없어요. 안개 될 생각이 없습니다. 살아서 뭔가 정보를 확인하고 확인된 정보로 주님 앞에 구원해달라고 제시하고 싶은 충동으로 가득 차 있어요. 이것 아니까 주님께서 날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제시하고 싶어요.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그 자체가 잘못됐어요. 우리는 관여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놓쳐버리고 내가 나서서 “주님이여, 한 수 가르쳐 주세요.” 이렇게 나서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내가 된 것을 받기만 해라. 성령을 통해서 주어질 거야. 주어지면서 나는 뭘 받느냐 하면 모든 해석은 왜 잘못된 해석인가를 감사하면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해석 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받는 사실을 우리는 추후적으로 매일같이 느끼면서 오늘도 육신의 본성대로 해석하려고 덤벼들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합시다.


































연대연합강의 11

창세기 8장20절에서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에서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8장이 끝나고 난 후 법이 없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은혜 주신다는 것에 대해 무슨 말 할 수 있습니까?

이미 죄인인 것을 아는데 왜 법이 들어 와야 합니까?

어려서부터 악한 자를 용서할 때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의 번제로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뒤 법이 주어진다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9장4-6절을 보면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말씀하시는 법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 만드셨다면 우리와 연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나님의 법이 우리와 연관이 있죠? 그렇다면 우리 세계 속에서 이 법이 실현되어야 되겠죠?
법이 실현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가 법을 지켜야 합니까 어겨야 합니까?
질문이 간단합니다. 법을 지킬 때 법이 법다운 겁니까 법을 어길 때 법다운 겁니까?
법을 어겨야 돼요.

기독교 2천년 동안 이것을 몰랐던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법은 어길 때 비로소 내속에 법이 있음을  깨닫는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어기지 않으려고 하니 우린 도망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법을 어겨야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미운 사람이 있다. 그럴 때 내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간단해요. 죽여 버리면 됩니다. 사도바울이 발견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산상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다. 사도바울이 발견한 것은 하나님이 내가 착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법의 취지를 살려 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역할극입니다. 역할극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바로 효과입니다. 법과 죄인의 만남을 성사해준 주님의 언약의 효과를 우리가 누려, 누리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미울 때에는 그 사람을 죽여 버리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효과입니다.
그러나 노아 홍수 이후에 가인족속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족속이 아닌 족속에서 가인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법을 통해 하십니다. 법이 무엇입니까? 법속에 창조의 원리가 담겨 전수되고 전수됩니다.

우린 나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뒤따라 올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일 내가 미운 사람이 있으면 가인처럼 사람을 죽이면 됩니다.
죽이면 되는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저 사람을 못 죽이게 하십니까라는 이 말과 하나님이여 나는 저 사람이 싫습니다. 그러나 내가 알아서 저 사람을 죽이지 않음으로써 법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말 중 어느 말이 주님의 십자가의 효과를 드러내는 말입니까? 은혜와 은총의 효과를 드러내겠습니까?

아 죽이고 싶은데 말리시는구나! 나는 가장 극단의 나쁜 놈이 되고 극단의 나쁜 놈의 자리가 내 자리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안 죽이게 하신다면  그 여분의 고층건물은 무엇으로 채워집니까?
주님의 긍휼과 자비로 채워집니다.

아 죽이고 싶은데 아 주님의 은혜가 말리네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아 죽이고 싶은데 내가 착한 존재 선한 존재가 되려면 꾹 참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꾹 참으면 살인죄입니까 아닙니까? 꾹꾹 눌러서 참으면 살인죄입니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돌출합니다. 심지어 상대를 죽이지 못하면 그 분노가 자기에게 되돌아와서 자기를 죽여 버립니다.

저 인간 죽이지 못하면 차라리 내가 죽겠다.
이 말은 죽이고 싶을 때 죽이지 못하게 되며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책임은 하나님 당신에게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마저 죽이고 싶은 자리가 바로 주께서 마련하신 나의 자리입니다. 나의 위치가 되는 겁니다.

법은 내가 법입니다. 못돼먹은 내가 법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은 못돼먹은 내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효과로서 우리 온 몸에 피어오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10절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 후서 12장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한데서 은혜가 내게 넘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 주께 간구하였으나 거절당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안 생겨요. 주의 이름 붙여도 응답이 안돼요. 나중에 알고 보니 사탄의 가시가 박혀있는 것이 축복이었습니다. 사탄이 그렇게 유용하게 사용될 줄이야. 사탄이 없었다면 여분의 은총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탄의 가시가 있을 때 나는 여분의 은혜로만 주께 끌려가고 있고 살려지고 있음을 알 때 내가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15장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아이성 공격할 때 아간이 있습니다.
아간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이성 전투에서 하나님을 좋아하는 36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죽었습니다.

이때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으면 좋을 뻔 하였나이다”(수7:6,7) 라고 했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수7:11). 그런데 삽디의 아들 아간 한 사람만이 범죄했습니다.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편입니다. 문제 있는 사람은 셋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한 사람입니다. 누굽니까? 소수점 이하에 해당됩니다. 얼마든지 무시해도 되는 끝자리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아간은 지극히 작은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간이 하나님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자기가 챙길 때에 여호와전쟁이라는 하나가 아간 한사람으로 인해 훼손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이라면 한 사람, 하나인데 하나 , 물건을 많이 훔친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한명 찾아내라고 36명을 죽게 만듭니까?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하나라는 말씀은 너희들끼리 하나로 구축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 됨을 훼손했을 때 하나 됨이 깨어졌다고 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하나 됨이 깨어진 것을 하나 됨으로 회생시키는 작업을 하시겠지요. 이 작업에서 아간을 죽이니 하나가 승리했습니다.

사람들은 셈을 할 때 내가 1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2가 됩니다. 왜냐하면 같은 1 이 되면 그 사람과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2, 다른 사람은 3이 됩니다. 이것을 서수라 하지요. 마지막이 7이라면 여기에 몇 명이 있습니까? 7명이 있지요.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식으로 이해하여 용납하지 않으면 내가 칼 들고 다 죽여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나 한 사람만 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우리가 하나라고 했을 때 각 사람의 각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한분이신 주님을 위한 역할의 자리로 만듭니다. 그래서 각각의 자리의 존재에서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자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만일 1을 경유해서 형제라 했는데 상대 쪽에서 1을 경유하지  않고 그냥 오면 주님이 이것을 제거해 버립니다. 보편적인 1을 위해서. 이것이 이스라엘의 숫자 줄이기 원칙입니다.

1은 유지하면서 각지파의 숫자가 조정이 됩니다.  고라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할 때 고라에 속한 무리들을 모두 죽였습니다(민16장).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1은 새롭게 정립됩니다.  1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100명이 1을 경유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1입니다.

방금 하나님을 경유하라 언약을 경유하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이것을 추상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진행하게 만드셨습니다.

동쪽은 반드시 유다지파,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차지합니다.  이들은 모두 레아의 자녀들입니다. 
서쪽은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이 위치합니다. 라헬의 자녀들입니다.
남쪽은 르우벤, 시므온, 갓지파가 차지하는데 르우벤과 레아의 자녀이고 갓지파는  레아의 시녀 실바의 첫째 아들입니다.
북쪽은 단, 아셀, 납달리 지파입니다. 단과 납달리는 라헬의 시녀 빌하의 자녀들이고 아셀은 레아의 시녀 실바의 둘째아들입니다.


열두 지파를 둘로 나룰 때에는 첫째로 정실부인이냐? 둘째로는 라헬계통이냐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레아는 덤으로 들어갑니다.
언니와의 결혼이유는  정말 원했던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두 여인이 야곱과 에서의 사건을 반복시키는 언약적 역할임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것은 형 에서와 본인 야곱의 분주한 모든 갈등이 레아와 라헬사이에서 반복됩니다.

그래서 나온 12자녀에 대해 야곱은 축복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흔적이었습니다. 야곱은 죄의 흔적을 축복으로 오해했기에 죄의 흔적들을 지키기 위해 삼촌을 속여 많은 재물을 얻어 삼촌에게서 떠납니다.

이때 형 에서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고 홀로 얍복강가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 때 낯선 자객이 등장했습니다. 야곱 자신은 복의 근원입니다. 이미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꿈에 사자를 통해 약속을 받았기에 자신이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복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언약의 원수가 되가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싸웠습니다.

야곱 자신은 하나님과 한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작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처리하시는 방식은 야곱을 자기 자기로 돌려보냅니다.
즉 야곱을 죽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창32:30).
이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꿉니다(창32:28).
이스라엘의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의 이름이 아닙니다. 장차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이름대로 그 내용을 채우십니다.

요한복음1장51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미리 보여준 역할에 불과합니다(창28:12).

창세기 9장에서 무지개와 피 흘림이 관련 있습니다.
배트맨 표시가 하늘에 떠 올랐을 때 이것은 고담시 옥상 어디에서 비추는 것입니다.
무지개가 떴습니다. 무지개를 뜨게 만드는 출처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의 피 흘림 자리입니다.
은혜를 피어내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중심 자리 외에는 무지개가 뜬 것에 대해 고맙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죽어 마땅하다. 이런 죄인을 용서해 주는 자리가 그렇게 고맙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알려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법이 있어야합니다. 법을 주신 것은 죄를 지으라고 주신 겁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8,9).

만일 이 법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나는 그냥 구경꾼이 됩니다. 관람객이 됩니다.
돼지털을 몇 개 뽑아야 돼지가 아플까요? 한 개 뽑아도 돼지 몸통은 반응합니다.

하나의 율법을 어겨도 모든 율법을 어긴 겁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하나님의 은혜가 장차 어디에서 피어날 것인가? 바로 율법이 완성된 십자가 자리에서, 주님이 저주 받은 십자가 자리에서 피어납니다. 십자가 저주받은 흔적을 가진 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유일한 이름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법을 어김으로써 법을 지켜야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여러분 법을 어깁시다가 됩니다. 막 살지 마시고 법에 맞추어 법을  위반하면서 삽시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법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항상 잘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법이 들어오는 순간 내가 그다지 잘난 사람이 아님을 압니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6장4절 이하에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모든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언약이 중첩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모든 말씀을 뜯어보면 언약의 층층이 합창하고 있습니다.

한번 비췸을 받고 죄를 지은 사람은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법을 우리가 지켜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립니다라는 말씀을 우리가 지켜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딤전6:10).
우리는 위반해야 할까요 위반하지 말아야 할까요? 위반 할 수밖에 없지요.
돈 오천 원? 사랑하지 않습니다. 육천 원?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만 원? 사랑하지 않습니다.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화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국경을 지키는 전임자는 돈을 많이 챙기면서 봐주었습니다. 그런데 신임 수비대장이 와서 선언합니다. 나는 전임자와 다르다. 나는 돈 같은 것 모른다. 나는 원칙대로, 공화국의 법대로 하겠다고 합니다. 이때 주인공이 하는 말이 글쌔 그 원칙대로 하는 것이 얼마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라고 이야기 했어요.

바로 이것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지요. 천원? 만원? 십만 원? 잠깐 생각하고 무시할 수 있습니다. 100억? 목사 때려치웁니다. 100억 있는데 왜 욕먹어 가며 고생하며 목회하겠습니까? 100억이면 이곳 바닷가에 별장하나 구입해 종용히 살 수 있지요.

아 백억 이긴다고요? 좋습니다. 천억?
민수기에 보면 안식일 날 나무한 사람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류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영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니라”(민15:32-36).

그런데 만일 안식일날 나무한 사람이 나의 돈을 빌려가 떼먹은 사람을 어떻게 할까요? 가장 무겁고 뾰족한 돌을 들고 칠 겁니다. 그래서 십년 묵은 한 풀이를 하듯이 네가 감히 하나님의 법을 어기다니 하면서 돌을 그 사람이 가장 아픈 곳을 가장 앞장서서 쳐버릴 겁니다.

그런데 만일 안식일날 나무한 사람이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요. 오늘 몸이 왜 이리 아프노? 미안합니다. 제사장님 갑자기 몸이 아픕니다. 이렇게 말하겠지요.

하나님께서 민수기에서 안식일날 나무한 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는 말씀은 너희들의 혈족관계에 대해서도 동일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쵸코파이입니다.
피 책 처음에 나옵니다.
사람은 정으로 산다.

여러분 목회를 십년 이십년 계속해 보세요. 복음 핑계입니다. 돈 핑계입니다. 정주고 정받고 사는 것이 사는 겁니다. 왜 외롭게 삽니까? 그 놈의 정 때문에 사는 거예요. 왜 미운 겁니까? 그 놈의 정을 배신했기 때문에 미운 겁니다. 준 사랑이 있는데 준 사랑에 대해 뒤통수 칠 때 우리는 죽이고 싶은 겁니다. 죽이세요. 죽이고 싶은데 주님이 말리십니다. 이때 내가 살인자입니다. 이런 죄인을 왜 구원하십니까라고 하면서 십자가가 보이는 겁니다.  죽이고 싶은 것이 계속 발생됩니다.

다시 돌아가 만일 안식일날 나무한 사람이 내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식도 미운자식이 있잖아요. 이럴 경우 주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살짝 칠는 채 하겠지요.
그런데 정말 내 사랑하는 아내가 아니라, 젊은 놈이랑 바람피웠던 마누라면  안식일날 나무했다고 내가 밀고할 겁니다. 내가 죽일 겁니다.

신명기21장18-21절에 패역한 아들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나옵니다.
안산홍 집단이 하는 말이 구약성경대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러면 신명기21장에 아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않으면  장로들에게 가서  우리의 이 자식이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고 술에 잠긴자라고 고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1의 효과를 위해.
요즘 부모말씀 듣지 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녀들이 있지요.
그들의 부모가 ‘내 자식을 제발 죽여주세요. 주의 일을 훼손하는 아간 같은 존재이니 제발 죽여주세요’ 라고 하는 부모 있으면 나오라고 해 보세요.
없지요? 없으면 부모와 자식은 한 통속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9장에서는 많은 법이 있지 고기를 그 피째 먹지 말고.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법이 나옵니다.
이때는 아직 덜 죄인입니다. 조심해서 선지국 먹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되니까요.
그러나 그다음 갈수 록 법이 우수수 쏟아집니다.
지뢰가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온 천지가 다 지뢰입니다.
십계명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 지요. 탐내지 말라를 안 밟을 위인 있으면 나오라고 해 보세요.
우리는 마치 뽁뽁이 같이 터트리지요. 모든 것이 탐이 나요. 큰 교회가 탐이나고, 교인수 많은 것도 탐이 나요.

율법은 어기라고 준 거에요. 내 자식,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안되지요.

그러나 언약 속에는 사랑하는 자식 죽이기가 내장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였습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축복을 물려주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진짜 사랑하는 자식, 누구입니까? 요셉이지요. 가장 사랑하는 자식, 그래서 특별대우 해준 그 자식이 야곱에게는 영원히 다시 돌아 올수 없는 죽은 자 였습니다.
아들은 죽었지만 야곱언약은 계속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의 반복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네 아들을 바쳐라. 그 때 그 당시 하나님께서 자비를 주는 형식이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무엇일까요? 오늘날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는 겁니다.
백억 있어도 괜찮아요.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땅이 넓어도 괜찮아요. 십자가 있으면 구원받습니다. 십자가만으로 구원받습니다.

제 강의를 듣고 욕하는 사람은 한 종류인데 두 번 욕합니다.
하나는 너무 어렵다고 욕하고  또 하나는 너무 간단하다고 욕하고.
자세히 들어 보니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 이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 것 이것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라고 하면 자신이 주체가 됩니다. 역할이 아니고.
십자가 믿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십자가 믿는 내가 내 믿음을 유지한 공로로 구원받는 셈이 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믿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꼴이 됩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복잡하니까 이것저것 다 걷어내고 보니까 십자가만 있으면 되네. 십자가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피만 있으면 됩니다.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오직 둘 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에 한 번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히9:7).
명료하고 굉장히 간단합니다. 이렇게 간단한데 왜 이리 두꺼운가? 그것은 곁가지를 쳐 내는 겁니다. 피만 남기고 쳐 내는 작업인데 쳐 내는 작업이 만만치 않습니다.

십자가의 효과로 구원받았습니다. 우린 효과를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효과를 받았다는 역할극을 하라고 성령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 이, 삼, 사가 아니라 전부가 하나가 됩니다. 십자가를 경유하면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만약 둘이 되면 경쟁이 일어납니다. 너 기도 몇 시간 했어? 난 몇 분밖에 못했는데. 너 성경 몇 장 읽었어? 나는 두절 읽었는데. 경쟁이 됩니다. 교인 몇 명이냐? 난 몇 명인데.
모든 것이 경쟁이 됩니다. 하지만 하나, 즉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우린 모두가 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며, 그 십자가를 믿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가 됩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죄라는 것, 구약사람들은 모릅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죄를 압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죄가 아니고, 이미 죄인이라고 십자가 지신 분이 규정하기에 아 그렇구나 믿어질 뿐입니다.

다윗이 간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리바이를 성립하기 위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했습니다. 고의적이 아닌 척 하면서 살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달랑 두 가지입니다. 간음죄, 살인죄? 두 가지가 아니지요.
한 가지입니다. 한 가지 죄가 무엇입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죄였습니다. 내가 모친의 죄중에 태어나서 무엇을 해도 죄라는 사실을 몰랐던 그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죄를 공짜로 알았습니까 아니면 희생물이 있었습니까? 희생물이 있지요? 희생물이 우리아 장군이었습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 우리아의 죽음에 내가 참여하고 관여하면서 나로 인해 오직 하나님나라만을 생각했던 죄 없는 우리아 장군을 내가 죽였구나 아는 순간 자신은 이미 의인되었음이 확인됩니다.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있는 지하에 있는 우리아 장군은 얼마나 화를 내겠습니까?
‘네가 죽여 놓고 하나님의 은혜로 핑계 댄다면 일반사람들이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 하면서 하나님 끌어당기는 그 책임을 네가 질 거야?
그런 식으로 설교해서 교회가 죄 투성이 되고 막사는 교회, 그런 엉트리같은 교회, 그런 악령이 넘치는 교회가 될 때 너는 복음만 전했다고 그 책임에 대한 발을 뺄 수 있겠어?’ 라고 지적할 때 뭐라고 이야기해야 될까요?

어느 누구도 누구의 죄를 평가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요8:10).
죄 없는 자만이 돌로 쳐야 합니다. 아무도 없음이 이미 확인되었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태들을 나로 하여금 나의 본래의 자리, 죄인의 괴수의 자리로 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께서 설치한 배치물들입니다. 조성된 환경입니다. 그 속에서 주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왕궁에서 화려한 옷을 입고 연락을 했던 에스더(별)는 자신을 어느 누구도 다치지 못하게 할 줄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에스더 자리가 가장 위험한 자리로 만드셨지요. 그래서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신약시대로 바꾸면 이미 죽었습니다입니다.

다니엘 3장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출애굽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어려운 이유가 개인종족에서 국가로 바뀝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국가는 짐승입니다.
라인홀드 리버가 고민한 것이 이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데 모이면 개판이냐? 대안이 없어요. ‘도덕적 개인과 비도덕적 사회’ 라는 책을 지었습니다.

어떻게 개인은 다 양심적인데 예비군복 입혀놓으면 휘파람 휙휙 불고 왜 이래요?
유니폼이 무슨 죄가 있어요? 왜 그래요. 왜 집단성에서 인간은 자기의 본성이 드러납니까?

다니엘 3장에서 신상에게 절하지 않으면 불속에 집어넣는다고 했습니다.
왕들이 자신에게 죄를 지었을 때 취조하는 방법이 굉장히 심하지요. 주리를 틀어라.
왜 그렇게 주리를 틀까요? 왕에게는 신체가 두 개입니다. 첫째는 생물학적 신체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이미지로서 신체입니다. 이 신체를 건드리면 그 신체를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신성한 신체를 건드린 깊이만큼의 혹독한 아픔을 그 신체에 가해 줄 때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은 왕은 단순한 남자가 아니고 살아 있는, 성육된 신이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데올로기화 되어 모든 사상 속에 들어갑니다. 
이석기라는 통진당 간부가 사람 몇 명 죽였습니까? 슈퍼에 가서 물건 훔쳤습니까? 아니지요.
구형이 몇 년 내렸습니까? 20년이죠? 20년이면 일반 형법에서는 주로 살인죄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것도 술 먹고 개판치는 남편 죽이면 3년밖에 안 받아요.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데 20년구형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너로 인하여 온 사회 구석에 20년 구형받을 살인죄가 성립될 가능성이 많다는 겁니다. 장난감 총을 쏘면 죽을 수가 있어요.

국가란 자아의 투영입니다. 이것이 창세기11장에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의 명칭은 우리의 이름을 내는 겁니다. 그 속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불꽃놀이하면 재가 사방이 흩어지지요. 그 땅이 무슨 땅이냐 하면 함의 땅, 가나안 땅입니다.

함이 접수 점령합니다.

존로크라는 학자는 최초로 소유권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 전에는 소유권이 없고 신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왕이 분배받아 준 것입니다.

열왕기 상21장에 아합왕 시대 나봇의 포도원이 나옵니다. 아합왕이 자신에게 팔라고 할 때 나봇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주어진 유산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신상 숭배하라고 할 때 풀무불 가운데서 건져내지 아니하실지라도 라고 합니다.
다니엘 시대는 이스라엘이 없습니다. 언약만 남았습니다. 언약이 구체화 될 때 무엇을 경유하는고 하면 그냥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을 통과합니다. 그 투입된 관이 바로 바벨론이라는 관입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언약궤마저 불태웠던 제국입니다.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혔다는 것은 이스라엘 되기 전 애굽의 종살이 하던 때로 돌아간 겁니다.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은 단독행동을 못합니다.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빠져 나올 수 없는데 모세가 가서 빼내었습니다. 그 애굽을 바벨론으로 바꾸었습니다.
두로, 애굽, 바벨론 모두가 다 자신이 신이다고 우기다가 몰락합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애굽과 바벨론의 위치가 다릅니다.
애굽을 대체해서 이제는 바벨론이  애굽을 대신합니다. 차이점은 이스라엘이 온 세상에 흩어져버립니다. 바벨론 나라가 이스라엘 이웃 나라가 아니고 인류가 사는 전 지역이 바벨론 제국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17장1-16절에 음녀 곧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로마 아닙니다. 네 번째 짐승 로마가 아닙니다.

바벨론 금신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서 있을 때에는 바벨론입니다. 이것이 엎어지며 코가 어디에 닿습니까? 네 번째 짐승이 나오는 곳이지요. 신상은 금, 은, 동, 철과 흙이지요.
진흙과 철이 섞인 열 개의 발가락이 있습니다.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립니다.
분명 바벨론, 메데 바사, 헬라제국, 로마 제국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시간의식이 그렇지요.
그러나 성경은 메데 바사, 헬라제국, 로마 제국 모두가 동일할 바벨론으로 봅니다.
바벨론 1, 바벨론 2, 바벨론 3, 바벨론 4, 즉 바벨론의 연속입니다. 왜 바벨론의 연속인가?
유다 1, 유다 2, 유다 3, 유다 4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망했지만 언약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언약은 누가 이룹니까? 언약과 함께 동행하는 분이 계셨으니 바로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니엘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요구했습니다. 당신 메시야야 아니야? 구름타고 왔어? 죽여 버립입니다. 유대인이나 예수님이 알고 있습니다. 메시야는 반드시 구름타고 오신다는 것을. 그러나 예수님은 장차 구름타고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진작 구름타고 오시지 않았는가?
70이레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방인에 의해서 성전이 세워졌다. 이방인에 의해서 성전이 파괴되었다. 망한 그 자리에서 일 이레, 십자가로 승리하시는 영원히 망하지 않는 영원한 제국입니다. 영정조의 나라가 영원한 제국이 아니라 인자의 나라가 영원한 제국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인자로 불렀지요. 인자는 구약에서 세 사람이 나옵니다. 에스겔, 다니엘. 시편에서는 다윗이 나옵니다. 처음부터 국가였는데 우리는 일반적인 국가에 속하여서 국가도 있고 나도 살고, 나를 나답게 나의 존재를 인정해 주는 나라를 국가로 생각했지요.
그래서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내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는 국가입니다. 그전에 나는 망해야 됩니다. 나의 존재를 일체 인정해 주지 않는 짐승의 국가에서 혹독한 시련을 당해야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영장입니다.
군에 다녀오셨습니까?
누가 오라고 했습니까?
울면서 집떠날 때 뒷동산이 그립지  않았습니까?
이등병의 편지 써보지 않았습니까?
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왜 스케줄을 자기들 마음대로 짜고, 왜 다나까로 이야기해야 합니까? 왜 인간을 기계로 만들어요. 난 기계되기 싫은데. 밥먹여주는 것 싫고, 월급 몇 푼 주는 것 싫어요. 집으로 보내주세요. 집으로.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국가죠. 국가를 출애굽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 하나 들고 마치겠습니다.
아내가 바빠서 여보 의자 갖다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내가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지킵니다.

여보 의자 갖다 줘.   가만 있어봐. 나도 바빠.
여보 의자 갖다 줘.   가만 있어봐. 그래 갖다 줄게.
아내의 소리가 다가옵니다. 남편이 그 소리에 마중 나갑니다. 그래서 나의 놀라운 자비로움으로 의자를 갖다 주는 것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이 존재의 문제점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절대로 듣지 않습니다. 내 존재와 가치, 위상을 높이는 쪽으로 DMZ에서 포로교환 하듯이 내가 해 줄게요 라고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의자를 갖다 주었을 때 아내가 달라서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아내를 너그럽게 봐 주어서 자비가 넘쳐서 바쁜데도 불구하고 , 지금 게임하는 중이거든요. 바쁜데도 불구하고 아내를 협조하는 이 자비심에 대해서 나는 다시 뿌듯함을 느끼면서 나의 능력은 저만치 확장됩니다. 아내가 잔소리 하면 어제 내가 의자 갖다 주었잖아. 그만큼 자기 영역이 확장됩니다. 이것이 느부갓네살 왕의 특징입니다.



연대연합강의 12

창세기12장에서 아브라함이야기 나오면서 아브라함은 지리적으로 본향 떠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 우리가 궁금한 것은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의로움이 율법을 지킴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다른 노선을 통해서 나오느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21절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쪽 노선의 대표자로 아브라함을 제시합니다.

창세기12장 하면서 아브라함 시작합시다라고 하면서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율법이 없는데, 지킬 법도 없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는가하는 문제와 율법이 없으면 영원히 없어야지 왜 430년 후에 율법이 오느냐의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율법이 없으면 깔끔합니다.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입니다. 이것으로 종결해도 문제없습니다. 믿으면 의롭다. 그렇다면 끝. 문 닫으면 되는데 율법이 왜 와야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과 율법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입니다. 만일 연결이 되지 않으면 너 편한대로 골라잡아가 됩니다. 나 율법 지켜서 구원받을 거야. 난 믿음으로 구원받을 거야. 그러나 이것은 슈퍼에서 물건 고르는 것처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엮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위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본인의 자격으로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본인의 행함으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복의 근원이면서 복을 못 받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의 미끼상품?
아브라함은 빈 껍데기고 그 속에서 여자의 후손이 피어 나와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자리를 대여해 준 겁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자진해서 빌려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차출하셨고, 강제로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 차압당했습니다. 불쌍한 아브라함, 자기 인생을 다 날려버린 아브라함.
우리가 아브라함 될까 겁납니다. 네 아들 죽이라 할까 겁납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어떤 전도사는 기도하다고 아들 바쳐라 해서 아들 죽였습니다. 이게 무엇인고 하면 오기입니다.
아브라함 아들 바쳤어? 네만 믿음 있냐? 나도 믿음있어라는 태도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니 그렇게 믿어야 되는 줄 알아요. 그런 믿음 아니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설치는 우리 몸을 주님 앞에 대여합시다. 한국에는 대여차 번호판 앞에 무엇이 붙지요? 허.
헛되고 헛되니. 헛된 것이 그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안개가 그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대여해 드립시다. 어떻게 사용하시든 우린 손대지 맙시다.

이제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아브라함 당황하는데,  나름대로 그 속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데, 꼼짝 못하는데 , 조카는 지금 심판 속에 들어가는데, 구출할 방법은 없는데, 아브라함은 여섯 번이나 기도했는데, 기도하는 대로 되지 않는데, 약속대로 유황불이 떨어지는데, 결과적으로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건져내셨습니다.
왜 갑자기 아브라함이 등장합니까?
 창세기 19장29절“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 보내셨더라”

롯이 나름대로 천사를 대접하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끝에 롯은 역시 구원받을 만한다라고 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생각하사라는 말씀이 나옵니까?
아비멜렉 사건에서 아비멜렉 집안이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에 갑자기 회임을 해서 감축드리나이다라는 소리를 왜 듣습니까?  왜 임신하지 못한 여자가 임신이 됩니까? (창20장). 스캔들 중심에, 태풍의 눈에 누가 있습니까? 아브라함. 아브라함 본인도 미쳐요. 좀 조용히 살게 내버려 두시지.

애굽에 내려갔는데, 애굽의 바로 왕이 자기 아내를 원했는데, 성상납 했는데 갑자기 그날 밤에 애굽 바로 왕이 개한테 쫓기는데 팔에는 개에게 물린 자국이 있는데, 아브라함이 종이 태웠습니까?(기황후에서 하지원을 죽이려는 중전의 주술방법)
쿵다리 샤바샤바 했습니까? 주문 태워 올렸습니까? 저승사자 명부 땅에 심었습니까?

주여 왜 이렇게 저를 못살게 굽니까? 제가 무슨 나쁜 짓을 했습니까? 그게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에 산 욥 이야기입니다. 풀리지 않는 비밀이 있습니다.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욥이 모릅니다. 욥은 모르면서 왜 자신에게 고난을 내립니까? 저는 고난 받을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정답입니다. 무엇이 정답입니까? 무엇을 배제해 놓고 정답입니다. 황무지에 비 내리는 것을 모르면서, 염소가 산에서 고통스럽게 새끼 낳는 이유는 몰라도 나는 고난 받지 않아야 되는 존재라고 우기고 싶습니다라고 한 것이 욥의 한계였습니다.

전체를 모르고 부분이 전체 행세한 겁니다. 마치 자신이 중심인 냥 행세했습니다. 욥의 친구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친구들은 얼러리 껄러니, 마누라는 저주하고 죽으라 했고, 자식 열 명이 한꺼번에 죽습니다.
우리 같으면 돌아버리겠지요. 안 미친 게 이상해요. 여기에 대해 대단한 점수를 주어야 하겠지요.
욥과 우리가 일입니다. 같은 지체입니다. 아브라함을 펼치는 순간 재수 더럽게 없는 인간이다. 된 통으로 당했구나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입니다. 동시에 저주의 근원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들지도 안했어요. 건드렸으면 말도 안 해. 건드릴 뻔했지요. 건드릴 뻔 했는데 임신이 안돼요. 자신은 아브라함을 건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복의 근원을 건드렸습니다.
복의 근원과 아브라함을 분리시킵니다. 아브라함 그리고 복의 근원.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으로서의 자기 임무는 오년임기로 끝나버려요. 이제는 아브라함의 씨가 복의 근원이 됩니다. 이삭도 몇 년 가지 않습니다.  이삭은 복의 근원을 에서로 몰아주기 해 주었지만 그것이 어찌 되었는지 야곱으로 다 몰렸습니다. 야곱이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으로 몰아주었는데 요셉은 죽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에게 복의 근원을 물려주면서 어떤 사건 하나가 벌어집니다.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고 하면 아브라함 자신이 그동안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라는 겁니다. 여기서 시간의 역전이 일어납니다.
내가 이삭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장차 태어날 이삭이 아브라함 나를 용서하고 살려준 것입니다. 이미 주문받은 상품 때문에 이번 달만 더 일해라고 하면서 살아난 겁니다. 이번 달에 구조조정당해야 하는데 선적 납기 기일이 있어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의 역전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하다가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 때 기뻐한 것은 아브라함이 살아생전의 기쁨과는 질이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이삭은 자신이 원한 음식을 원했습니다. 그것은 이삭 자신이 복을 주는 줄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빗나가게 만드셨습니다. 네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바입니다. 이삭과 복의 근원은 또 분리됩니다.

야곱은 자신이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이스라엘이 또 분리됩니다. 복의 근원인 줄 알았더니만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야곱은 마지막에 요셉 자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합니다. 자리를 바꾸어 오른 손에 에브라임, 왼손 쪽에 므낫세를 두고 축복할 수 있지요. 그런데 자리를 안 바꾸고 팔을 엇바꾸어 축복을 합니다(창48:14).

이것은 누구에게 축복을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언약만 노린다는 것을 엇바꾸는 과정에서 표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뱃속에 있을 때에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창25:23).
 
이것을 빌립보서 2장6-11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코스는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사건입니다. 과정입니다. 그런데 현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존재로 봅니다. 예수님을 존재로 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언급하다가 제대로 언급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칼 바르트입니다. 처음에는 언약으로 시작해서 언약으로 끝내지 못했습니다.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엔 이웃 사람으로 나갔습니다. 이웃사랑으로 나간 것은 잘못 되었습니다.

껍데기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하나님의 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손을 빌려서 갖다 드린 것이 있습니다.
삼년된 암소, 삼년된 암염소, 삼년 된 숫양, 산비둘기새끼, 집비둘기 새끼입니다(창15:9).
삼년된 암소, 삼년된 암염소, 삼년된 숫양은 중간을 쪼갰습니다.
솔개는 쫓아내야 합니다. 솔개는 실체가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 본인은 쪼갠 후 손대면 안 됩니다. 쪼갠 후 그것을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곳에 새롭게 추가된 사건하나가 우발적으로 터져야 합니다.
난데없이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여기서 아! 하나님 자신이 곧 재물이 되시는구나! 여기에서 나는 뭐지? 나는 그냥 이용당했구나! 하나님에 의해서 이용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의가  자신으로 인하여 의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자신 안에 내장되어 채워지는 그분이 바로 창세전에 바로 아버지와 의논해서 이 땅에 의를 남기기로 작심하신 일에 대해 나를, 내 몸을 동원, 차출하신 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네 자식으로 인하여 의롭게 된다고 하면 아브라함이 자식을 낳으면 되지요? 그런데 사라가 늙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양자 삼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네 상속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임신합니다. 임신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텐데 꼭 이런 식으로 자식을 낳으려고 합니다.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창16장). 이 대목에서 상당히 혼란스런 대목이 나옵니다.
임신한 하갈이 고난 받을 때 여호와께서 그 고통을 들어 주셨습니다(창16:11).
하나님은 고난 받는 자의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그 앞에 한 단어가 더 붙어야 합니다. 언약적으로 고난 받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임신한 후 사라를 멸시하지요. 그래서 사라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사라가 착합니까 착하지 않습니까? 질투가 나서 미워서 쫓아냅니다. 하갈이 행세해서 미운 것 이전에 내가 없는데 네가 왜 가졌느냐 입니다. 타고난 겁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해체가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새롭게 정립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 앞에 서는 내가 작아져요.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이 떠나 버리면 갑자기 나는 커지게 됩니다.
자기를 사수하고 방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아를 심하게 지키는 사람은 나는 아무도, 나 외에 달리 내세울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내가 청바지 입고 남편이 학교 다닐 때 입었던 추리닝 입고 돌아다닐 때에는  그만큼 남편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화장할 때 이미 가정에 위기가 온 겁니다. 
거울 속에 나 말고 사랑할 대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그 때 그 남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복음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아이 부끄러워라).

사라 착하지 않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고만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가 질투 낼만 한 사건이 개입될 때 내가 얼마나 독한 여자인지, 나쁜 왕후 노릇을 하고 있는지를, 자신도 어쩔 수 없습니다.
사람보고 성질을 고쳐라고요? 성질은 이성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성은 기껏해야 난 성질을 변명하는데 동원됩니다.사회가 악해서 그렇다. 이렇게 더러운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절대로 이성은 감정을 점령할 수 없어요. 90퍼센트가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의 다른 말은 한입니다. 프로이드는 아이가 엄마를 떠난 후 엄마의 대체물을 찾는 한의 여정이 한 평생이라고 봅니다. 하나 밖에 없습니다. 누가 나를 사랑해 줄건가? 여러분? 그건 윤복희고.

누가 나를 사랑하는데? 세상에 죽은 남자친구에게 편지를 했더니 엉뚱한 여자에게서 답장이 오고.
러브레트영화이지요. 인간은 정이고 그 정은 나를 사랑해줄 사람, 이것이 육신의 근본입니다.  그 외에 복음이고 교회 나오는 것이고 모두가 다 정 찾아 사랑 찾아 가는 것입니다. 부교역자들이 왜 선교사로 갑니까? 이 씨 당회장만 주의 사자고. 나도 사랑받고 싶다는 겁니다. 
사랑 찾아 길을 떠나는 겁니다. 사랑해 주지 않는  조국은 더 이상 조국이 아닙니다. 몸 바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나의 투영채이니까. 내가 확산된 겁니다.

아프리카, 아마존 어디든 나를 원하는 곳은 다 갑니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갈급하고 목말라합니다.
프로이드와 라캉이 이렇게 논리를 펼칩니다.

사라는 자신이 그렇게 나쁜 여잔지 몰랐습니다. 하갈을 구박하고 쫓아냈습니다. 이스마엘을 임신한 하갈은 가출한 것이 아니라 쫓겨 났습니다. 여기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마치 아브라함에게 하시는 축복과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씨를 번성하여 수가 셀수 없게 하리라”  이름도 여호와의 사자가 직접 지어 줍니다. 이스마엘 이라고
이 이스마엘이 저주받기로 확정된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요? 누가 누구를 도와주어야 됩니까? 사라를 저주받게 하고 사라에게 당했던 억울한 하갈 편에 들어 하갈을 축복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사라 편을 들지요. 사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어떠한 자격도 없습니다.
일체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가 튀어 나올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인간의 의와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아브라함 가정에 그 터전이 마련됩니다.

첫 번째는 아브라함은 껍데기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 가정을 못된 가정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의를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일을 하지도 않고 경건하지 않았는데 의롭다 여김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방적으로 일을 하지도 않고 경건하지도 않았는데 의롭게 된 것이 아브라함부터 되어야 조상 값을 한다고 로마서4장에서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바울을 죽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유대인이잖아요.

세 번째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되었지 율법이 왜 연관됩니까? 이 세 번째가 제일 복잡한 부분입니다.
창세기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돌라오멜과 함께 한 왕들에 의해 소돔왕등 네 왕과 함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조카 롯의 사로잡힘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구출하러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생각에는 삼백십팔 명으로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없는 싸움임을 알고 있습니다. 절대 이길 전쟁이 아닙니다. 축구라면 심판을 매수하면 되는데 이 전쟁은 그런 것이 아니지요.
김연아가 은메달을 따는 것은 당연하지요. 심판 전체가 러시아 쪽인데.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지요. 푸틴이 경기에 나서도 금메달을 땄을 거라고.
문제는 이길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이 나중에 붙여주는 전쟁으로 바뀝니다. 붙여주는 전쟁을 통해 네 속에 다른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며 확인하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복의 근원이 아님을 압니다.  자신은 껍데기임을 압니다.
그래서 누구지? 누구지? 누구지? 하는데 누군가 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으니 전리품이 있겠지요. 전리품중 가장 좋은 것 십분의 일을 떼어 마주 오는 그 사람에게 드립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멜기세덱입니다.
이게 왜 복잡할까요?
멜기세덱이야기 하면서 그냥 끝나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점퍼해서 시편110편4절에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 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만 원수를 이기는 혜택을 입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중에 멜기세덱 지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시편110편은 다윗 언약 이후입니다.
다윗언약도 껍데기입니다. 아하스왕도 다윗의 혈통입니다.
아하스왕이 메시아입니까? 히스기야 메시야인가?  아니다. 요시야 왕은? 율법대로 시행했지요. 그러나 애굽이 앗수르를 치러  올 때 요시아 왕이 맞서 싸우러 나갔는데 므깃도에서 애굽왕이 요시야 왕을 죽입니다(왕하23:29).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왕하23-24장) 망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 다 날아갔습니다.

마태복음1장에서는 분명히 14대15대14대인데 14대14대14대로 적었습니다. 마태가 족보하나 제대로 못 적었습니까? 실수 했습니까? 실수 했다면 고치면 되는데 왜 그냥 넘어 갑니까?
유다지파는 다윗혈통이 맞습니다. 그러나 다윗 언약의 혈통은 아닙니다.
사도행전2장에 보면 누가가 다윗의 시편을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한 대목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설교한 대목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는고 하면 다윗이 메시야냐 아니냐 아니다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무덤은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 그렇다면 누가 메시야냐?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다. 예수님은 지금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주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시편에 이야기하는 말씀 그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비약적인 해석, 언어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해석을 사도라는 권위를 가지고 해버립니다.
시편에 나와 있는 그를 예수님으로 다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다 바꾸어 제대로 된 해석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골리앗 크레인이 동원되어야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적이 없습니다.
뉴턴의 중력에 의하면 달이 지구에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과가 지구에 떨어집니까? 아니면 지구가 사과에게 떨어집니까? 둘 다 맞아요. 그런데 우리는 사과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지구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과가 지구에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갈릴레이가 말한 상대성원리입니다. 인간에게 주체란 따로 없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에서도 벌써 성경해석학이 나오지요.
성경을 보는 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간 것이 아니고 붙여주는 전쟁에 의하면 골리앗이 다윗이 던지 물매 돌을 향해 달려 와서 자기가 알아서 이마에 맞은 겁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이런 조치를 했기 때문에 다윗은 이번 승리를 만군의 여호와의 승리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역할들을 맞추었다는 겁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군복을 입히고 놋 투구를 씌우고 갑옷을 입히고  칼을 군복위에 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익숙지 않아 다 벗어 버리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갔습니다(삼상17:31-40).
골리앗은 자신 만만했습니다.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먼지하나가 날아오네요. 맞았어요.
완전무장한 골리앗, 빈틈 자리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년 다윗을 통해 이기게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이 전쟁이 자신의 전쟁이 아님을 알았을까요? 하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17장입니다. 저쪽은 할례가 없고 이쪽은 할례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언약이 있다는 말은 이스라엘에 여호와의 이름이 있다는 말입니다.
골리앗 눈에는 아주 시시한 고만고만한 인간만 보입니다. 다윗의 눈에는 할례를 행하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보입니다. 
자신은 사울 왕이 시켜가 싸움에 나간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이 시켜서 골리앗과 싸움을 했습니다.
전쟁은 해보나 마나입니다. 하나님이 이깁니까? 사람이 이깁니까? 그것은 말 끄집어낸 내가 미워.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내가 나서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전쟁이니 아니고 나의 전쟁이 되니 전쟁하기 전부터 이미 실패한  겁니다.
목회? 주님과 주님의 원수와의 전쟁인데 여기에 내가 왜 끼어듭니까? 내가 한 기능인데 왜 끼어들어요.
다윗 보면서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사울 눈에는 그것이 안 보입니다. 이 단체는 내게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도 난처하지요. 자신은 양치고 있었어요.
이새의 아들은 여덟 명입니다(삼상16장).
사무엘도 다윗에게 기름 부으러 갈 때 사울 왕이 두려워 이새의 집에 몰래 갔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실 왕이 있답니다. 원래 사울왕도 있는데. 이중(두 명)왕입니다.
현장에 7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니다. 육대일. 여섯 번째도 아니다 할 때 일곱째 얼마나 기분 좋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소년 다윗도 현장에 있을 때 바로 직접 너다라고 하시면 되는데 사무엘도 누가 왕이 될지도 몰랐습니다. 사무엘도 인간적이라서 그중에 가장 잘 생긴 엘리압을 보고 여호와의 기름부으실 자가 여기 있도다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께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물에 중심이 나오잖아요.
그러니 사무엘도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섯째까지도 아니다라고 하니 일곱째 얼마나 기분 좋겠습니까?
이것은 백퍼센트 합격이잖아요. 그런데 아니랍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이새에게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고 물으니 양 지키는 막내가 남았답니다. 불러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으로 새움을 받을지는 몰라요. 그런데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왕됨을 두고 하나님 개입의 효과입니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기름 붓습니다. 한국에 있는 어떤 사람이 구원될까? 아니다.  된다 라고 했을 때 그 효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중보자입니다. 이런 역사적 수순을 밟으면서, 모세, 다윗, 엘리야를 왜 그렇게 층층이 깔아 놓습니까?
우리의 육신이 실패한 그 실패를 미리 선배들이, 우리가 끄집어 ,낼 수 있는 모든 죄는 이미 선배들이 다 보여주었습니다. 보여주면서 내 잘나서 구원받지 않았다는 것을 구약을 통해서, 바리새인을 통해서 낱낱이 알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창세전에 성부하나님과 예수님이 의논해서, 다른 말로 창세전에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 선과 악을 행하기 전부터 하나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는 사랑하기로 작정하셨느니라(롬9:11-13).
그것을 우리가 구약 같은 인생을 살면서 쭉 보여줍니다.
멜기세덱이 왔을 때 이번 전쟁은 당신과 함께 있는 분의 공로입니다라고 올리는 겁니다.
멜기세덱은 시편110편에서 다시 히브리서 7장으로 점프합니다.
히브리서6장에서 단단히 다짐을 합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는 것이 어려우니라(히6:11).”

젖을 먹는 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면서 말씀합니다.
멜기세덱은 ,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히7:3).
바로 없음이 곧 있음이고 그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 있음이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러면 이 족보에 가입된 모든 사람은 멜기세덱과 똑 같습니다. 없는 자인데 있고 있는 자만이 하나님의 양자가 됩니다.

유다족보는 왜 안 됩니까? 있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러면 유다족보는 구원못받습니까? 아닙니다. 있음이 없음으로 바뀌면서 유다족보가 구원받습니다. 유다족보는 일시적입니다. 멜시세덱에게 바통을 넘겨줄때까지 일시적이었습니다.
레위족보는 유대지파 올 때까지 임시적입니다. 레위지파에 속한 것이 모세율법이라면, 왕이란 이름으로 구심점을 가질 때 그것이 다윗언약입니다. `다윗 언약과 모세언약의 차이점은 집단화 되어 있는 것이 모세언약입니다. 그것을 왕이라는 개인화 된 것이 다윗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든지 법을 어기면 일에서 탈락되고 저주 받지만 다윗언약에서는 왕만 잘하면 죄를 범하더라도 용서받고, 왕에게 복속되었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그 시스템이 바로 다윗언약입니다.
그래서 눅18장38절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겁니다.
왕이시여. 왕 하나 잘 만나서 팔자 고칩시다가 됩니다.

존 로크 이후에는 왕개념이 없습니다. 바로코, 로코코, 신고전주의 미술사를 보게 되면 너만 귀족이냐 나도 귀족 누리자가 됩니다.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 왕, 귀족, 기사, 농민으로 구성된 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 잉여 자본을 가진 자만이 부르주아 도시민으로 등장함으로써  그들이 의회를 장악했습니다. 그 의회가 국왕의 권력을 견제하면서 이제는 협상에 의해서 새로운 국가단위가 형성되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가 등장함으로 왕이 날아가 버립니다. 왕? 왕 같은 소리하고 있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이런 사람에게 설교자는 우리들의 임금님이 계십니다라고 설교를 해야 합니다. 정서상 받아들이기 곤란합니다. 그래서 임금님이라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지냅시다. 김대중 대통령처럼 예수는 나의 친구다는 식으로 막먹으려고 합니다. 사실 우리의 임금님이신데. 임금은 왕노릇합니다. 왕은 무엇이 없다고 했습니까? 자기 밑에 권력 통치의 누수가 없는 것을 두고 왕노릇 한다고 합니다.

죄가 왕노릇한다는 말은 아무리 우리가 죄에서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죄의 왕노릇입니다.
의의 왕노릇이라는 것은 아무리 우리가 죄를 지어도 우리가 의인이 아니 될 수 없고 의인 될 수밖에 없다는 통치의 세력을 두고 왕노릇이라고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넘치지요.
한사람이 죄를 범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것은 모형인데 한 사람의 의로움으로 우리가 의의 통치를 받는 그것을 미려 보여 주기 위해서 아담은 죄의 왕노릇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로마서 5장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5:12-14).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지 않으려고 하지 말라. 오히려 원수가 되어야 됩니다.
경건치 않은 자 ,원수된 자였는데 하나님께서 율법 외에 한 의로 말미암아 원수된 자를 의롭게 하셨느니라는 완료형으로 로마서 8장30절에서 말씀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멜기세덱이라는 것은 없음이 진정이 있음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늘에서 준비된 미지의 X 족보입니다.
족보라고 했을 때에는 시간적으로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의 족보는 시간적 흐름이 없습니다.
시간을 깨어 버립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알파요 오메가인 영원한 현재가 유지되는 희한한 족보입니다. 그런데 그 족보의 그림자인 유다는 흘러가는 것이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멜기세덱 족보가 다윗족보에게  마중을 나가 흡수 통합하면 유다족보, 다윗 족보라도 하나님의  의가 안생기네요라는 것을 고백케 하기 위해서 유다 족보가 있고 이스라엘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껍데기였다. 아브라함과 복의 근원은 분리해야 된다. 그 원리는 이삭, 야곱으로 계속된다.
진짜 의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여호와가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우리가 행해서 상 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때 상 받았습니다.
율법과의 관계는 율법이 멜기세덱을 보여 주기 위해서 430년 후에 추가적으로 제공됩니다. 그 시대 부합되는 정도까지만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고 은퇴를 합니다. 은퇴 후에 아브라함언약에 맞추어서 이삭언약이 주어집니다.
이삭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은 같은 내용일까요 다른 내용일까요?
언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축복의 내용을 세 가지로 언급했습니다.
의와 자손과 땅이라고 했습니다.
만일 이렇게 되어 버리면 신약성도들은 의, 자손, 땅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땅은 무엇입니까?
나의 땅과 나의 자식이 축복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애기 못 낳는 사람은 저주 받았습니까? 땅 없는 사람은 저주 받았습니까?

이 세 가지가 있어야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세 가지를 하나로 통합했습니다.
의냐? 아니다. 자손이냐? 아니다. 땅이냐?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하는 복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구체적이지 않잖아라고 반문합니다. 그 이야기는 나도 하겠다. 주님인 것은 나도 하겠는데 주님이 주신 그 무엇이 뭐냐고? 그 무엇?
주님 믿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지는 행운, 로또복권당첨같은 것, 이런 것을 원하잖아요.

골로새서 3장에서는 이 땅을 잊으라고 합니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2,3).

잊어 버려야 돼요. 땅은 무슨 역할을 하는고 하면 성도는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땅은 따로 마려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주택단지가 새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은 모조리 우상 숭배로 규정합니다(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자식 잊으세요. 율법의 의 잊으세요. 선악 잊으세요. 그리스도 안에서 이 모든 것을 잊으라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왜 사람들이 이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는지를, 이 집착 때문에 인간들은 주어진 언약에 대해 미워하고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 구약입니다.
그러면서도 언약의 진정한 완성자는 사람의 이름, 아담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그분, 주의 이름으로 오신 그분이 바로 이 언약을 이루어나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언약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들의 뿜어내는 모든 죄를 다 감당하면서 희생희생 해 가면서 , 희생하는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인간이 못하는 일을 기어이 주의 이름으로 홀로 이루어 내시는 그분이 바로 주의 이름, 곧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 내용을 성령께서 채워주십니다.

 연대강의 13강
어떤 분의 질문-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죽었고 살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기적으로는 십자가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아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십자가를 모른다고 고린도 전서 2장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 같지도 통달하시느니라 ”

서른 세 살 먹은 청년이 자칭 메시아라고 우깁니다. 만일 내가 빌라도고 내가 제사장이고 내가 바리새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한복음11장47-53절을 보면 제거하자고 판정이 났습니다(성도는 이것을 현재로 봅니다). 한 사람을 죽여서 모든 민족이 살자라고 합니다. 여기에 가해자가 인간 맞지요. 그리고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 헤롯이 어떻게 했습니까? 화환을 보냈습니까 아니면 죽이려고 했습니까?

어떤 사람이 피를 흘릴 때 수사관이 와서 남편이 아내를 미워한 죄로 체포되는 것이 아니고 아내를 죽인 살인죄로 체포가 됩니다. 성경에 보면 살인죄는 자신이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분명 살인사건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해석해 낸 내용 중에 사랑이 나오고 하지요.
그러나 그 구심점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죽었으니 메시아는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구원자가 사라졌습니다.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왜 자신이 부활했다고 온 천하에 보여주지 않습니까?
부활하셨는데 왜 숨어서 부활하십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왜 다시 제자들을 모아 삼년동안 함께 하지 않습니까?
이미 세상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자체는 세상 자체가 가해자로써 이미 끝났습니다. 로마서에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원수된 자라라고 규정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10)”

창세기 6장3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없는 자들, 곧 육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심판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육신인데 이것을 육으로 보지 말로 인간으로 보자라고 한다면 말씀과 다릅니다.

십자가 피를 흘렸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어린아이들이 보기에 정서상 좋지 않지요. 그러면 얘들아 우리가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고 말로 할 수 있는데  아버지가 얘들 보는데서 양을 잡아요. 피를 문설주에 발라요. 피 없으면 죽음의 사자가 그냥 넘어가지 않고 그냥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이여 보소서 우리가 양 잡을 정도의 정성이 있잖아요 할 수 있겠지만 정성은 피 안에 담기지 못합니다.

우리의 어떤 의지적인 것도 담기지를 못합니다. 나의 정성과 열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대로 어린양의 피를 봅니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잡아서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지막에 모형으로서 역할 했다는 것을 보여 주면서 진짜 죽을 어린양이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다른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셨습니다. 아비도, 어미도, 족보도, 시작도, 끝도 없는 분입니다.

그분을 보고 세례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을 때(요1:29), 다른 이름은 안 되고  그분의 조치로 다 끝났음을 그냥 수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어둠이고 깨닫지 못하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그 유일한 증거가 십자가입니다.
성경에서 성도가 살았다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그 용어를 그대로 연장해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 쉬고 있는 것을 살았다고 넣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확실하니 나는 그 안에서 죽었고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겁니다.

13강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은 이미 지나 버렸는데 왜 알아야 합니까?
지난 일이 아니고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용을 갖고 일을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일을 반복시키고, 이삭에게 일어난 사건을 반복, 야곱에게 일어난 사건을 반복합니다.
문제는 출애굽이후에 국가적 단위에서 다루어집니다. 이전에는 가정사에서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이후에 국가가 만들어 졌습니다. 그 이름은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이제는 국가단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적용시킵니다.

우리는 왜요라고 반문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까?
출애굽기4장을 보니 그래야 아들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출4:22).
출애굽기4장에 모세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중 숙소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격려해 주었습니까?
그래 수고해. 잘 다녀와 했습니까? 숙소에서 모세를 죽여 버렸습니다.
김이곤 씨의 책에 이 본몬에 대해서 제대로 주석한 책이 없답니다. 어물쩍 넘어 갔답니다. 왜냐하면 앞뒤를 볼 때 하나님의 일관성을 구축할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자기 일꾼을 보냈으면 격려하고 해야 할 텐데 보낸 사람을 죽여 버리면 누굴 보냅니까?
죽일 것 같으면 보내질 말아야죠. 왜 죽입니까?
김이곤 교수 자신은 해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른 주석도 해답을 못 내놓으니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김이곤 교수가 무엇을 놓쳤는고 하면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라는 것을 놓쳤습니다(출4:22).
단수입니다. 이스라엘은 60만 명이 넘지요. 복수지요. 그런데 이 복수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의 언약에 저촉을 받게 합니다. 묶는 끈이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하나. 이삭의 하나님. 둘, 야곱의 하나님. 셋, 하나님본인 말씀에 의하면 벌써 끈이 셋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단수가 됩니까?
여기에 공통적으로 동일한 아들의 위상이 나옵니다. 요셉을 통해서 아들이 구체화 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나를 먼저 애굽으로 파견하셨습니다. 파견하는 꼴이 우습게 되었지만 어찌되었던 파견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종합적으로 볼 때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정된 계획에 의해 된 것이지 사적이 감정문제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모세 언약 이후에 더 확실한 깊이를 갖습니다.
시편 105편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 요셉을 앞서 보냈는데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손에 차꼬를 차고 몸은 쇠사슬에 매여 보냈습니다(시105:18,19).

차꼬를 차기 위해 요셉을 팔아먹는 역할을 하는 자가 있어야겠죠? 그 역할을 요셉의 형들이 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차꼬를 차게 한 원인 제공자가 누굽니까?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누굽니까?

한쪽은 아버지가 특별 대우한 것이 문제였고 더 중요한 것은 요셉에게 꿈을 두 겹으로 꾸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요셉의 생애는 장차올 하나님의 지상생애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럴 때 언약이 담겨 있는 언약이 양산한 아들입니다.

언약의 아들입니다. 이삭을 무엇이라 부르는고 하면 약속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무엇과 차별이 되는가? 이미 아브라함 혈통의 아들이 있습니다. 이스마엘. 이스마엘과 구별되는 의미에서 약속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구별된 이라는 말이 아주 중요합니다. 성화라고 하면 경건함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는 성화는 경건함이 아니라 구별입니다. 다시 말해서 분류닙다. 이유도 없고 근거도 없는데 너는 무조건 나와 달라요.

그럼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네 속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그 근거는, 분류 기준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2장에서 십자가의 피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고 합니다.
자르고 모읍니다. 은총을 부수고 다시 연락시킵니다. 스가랴11장4절 이하에 나오는 예언입니다.
은총이라는 막대기를 부수고 다시 연락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주님 앞에 주님의 언약을 보여주는 부셔지고
연합하는 자들이 됩니다. 병 주고 약주는 꼴입니다. 철저하게 농락당합니다. 철저하게 언약을 보여줍니다.
요셉이 그렇습니다. 요셉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면 자신은 이상하게 일이 꼬이지만 주변이 이상하게 재수가 좋아요. 왕이 오해해서 감옥에 넣은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만난 후 이상하게 감옥에서 나가 승진이 됩니다.

꿈을 해석해준 요셉도 인간인지라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창40:14).
그런데 이상해요. 신하가 요셉을 기억했습니까? 잊어버렸습니다. 그 잊어버린 기억을 누가 깨어 줍니까?
또 초월자가 개입을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 이름의 관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언약적 주권론입니다.

내가 결정해 놓고 주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상하지도 못한 돌발사태가 주어지면서 나는 선택된 효과로서만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일의 효과로만 존재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차후에 할 말이 있습니다.
형들이시여 나를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아버지 야곱이 돌아가신 후 이제 형들 죽었어 라고 하지 않지요(창50:21).
나를 앞서 보내신 분이 계신데 우리 아버지에게 언약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요셉의 고백이 무책임합니까?
너무 허무맹랑합니까? 남들은 그렇게 보일겁니다. 그러나 본인은 진심이었고 실제로 다른 형들은 그 혜택을 받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국가 단위로 적용을 시키겠다는 겁니다.

그 다음 이야기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다음 소설을 써 본다고 합시다.
우린 어떻게 이 드라마를 마무리 지을까요?
이렇게 개인가정사에 있었던 사적인 사건을 국가 단위로 하게 되면 난처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국가는 가정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이 동네는 아들 잡는다고 난리고 이 동네는 별미 바친다고 난리고, 저 동네는 꿈꾼다고 난리고 이렇게 되면 하나의 아들이 되지 않겠지요.

이 삼중 언약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어떻게 하나로 주어집니까? 해답은 신명기에 나옵니다.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신9:6). 너희들을 약속의 땅에 넣어주는 것은 너희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다. 너희들은 악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9:6).”

그러면 이방민족은 악하지 않습니까? 악하지요(신9:4). 그런데 왜 하필 우리만 특별하게 악하다고 지명해 줍니까? 그런데 그 악함이 어디에 활용되는가 하면 언약을 마주치면서 언약을 구현하는데 활용됩니다. 필수요소로서의 악함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모든 언약에서 구원받은 언약의 주인공들이 언약 때문에 선함이 하나도 없는 자로 드러나는 사태가 일어나야 되겠지요.

그 예로 유다를 봅시다.
창세기38장입니다.
유다에게 아들 셋이 있었습니다. 엘, 오난, 셀라입니다.
유다의 첫째 며느리 엘의 아내 다말이 있습니다.
다말의 남편 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해서 여호와께서 죽였습니다.
형이 죽자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형을 위해 씨를 잇게 하기 싫었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함으로 여호와께서 오난도 죽였습니다.
이제 셀라가 남았습니다.
유다가 셀라도 죽을까 염려해서 다말을 자기 아버지 집으로 보냅니다.

시아버지 유다가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녀가 없는 동네에서 창녀로 변장해 시아버지와 동침합니다.  왜냐하면 유다가 셀라가 장성함을 보고서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담보물을 받았습니다. 도장과 끈, 지팡이.

그런데 회임을 했습니다. 감축드릴 일이 아니지요. 다시 너울을 벗고 본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유다가 창녀를 찾았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석달후 며느리 다말이 행음했고 임신까지 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고 명합니다.
우리 가문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거룩한 구별된 가문인데 감히 행음하여 임신을 하였다니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복의 근원 저주의 근원입니다.

그때 여인이  자신이 받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 보입니다.

이때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중요한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여기의 다말이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갑니다. 그 이름이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희생자가 죄를 저지른 자를 도리어 구원하는 방식이 언약적이고 언약을 집단적으로 적용시킨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의 면류관을 반납해야 합니다. 이 영광은 오직 주님만, 어린양만 받아야 됩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계4:10)”
요한 계시록의 보좌는 어린양의 보좌입니다. 어떤 기능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보좌입니다. 그 기능을 증거하는 기능이 우리의 기능입니다.
어린양 때문에 살았습니다. 요셉처럼. 우리가 죽였는데 죽인 자가 언약 때문에 살았습니다. 죽임당한 자가 오히려 죽이는 자를 대신하셨습니다. 죄 없는  분이신데 죄를 대신 짊어 지셨습니다.
그 어린양이 아들이고, 이스라엘은 아들이어야 됩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아들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복의 근원을 제공하는 하나의 껍데기입니다. 이 껍데기 역할을 국가적 이스라엘이 담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알맹이가 나오는 순간 이스라엘 국가는 의미 없이 날아갑니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감람산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영화제목이 ‘회복’입니다.
로마서11장26절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이 말씀이 역사적으로 눈으로 확인되면, 즉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감람산에 재림할 것이고 거기가 메시아 나라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눈에 보이는 역사 외에는 믿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 즉 우발적 사건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한번 붙잡으면 계속 갈수 있는 덩어리로 붙잡고 싶은 것입니다.

출애굽기 4장3,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창세기를 새롭게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모세로는 창세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없습니다.
아들 된다는 것은 모세가 죽어야 합니다. 모세를 왜 죽입니까? 모세 네 자격으로 아들 만들 수 있다 없다. 없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껍데기입니다. 모세가 담고 있는 그것이 살립니다.

십보라가 모세가 숙소에서 죽는 것을 보고 후시딘 연고 바릅니까? 고려 침 안했습니다. 인공호흡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이 건강 매니저 아닙니까? 목사님은 어떻게 처치하겠습니까? 헉헉 숨이 넘어가는데, 누르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비틀거리고 있어요. 등 푸른 고기? 아닙니다. 십보라의 방식은 아들 게르솜이 할례를 행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칼을 가져 할례를 합니다.

아들은 모세에게 아들역할입니다. 모세는 아버지 역할입니다. 모세가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해, 국가적 단위로 언약을 이루기 위해 갑니다. 그런데 이 아들에게 뭔가 빠졌습니다. 뭐가 빠졌습니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행할 때에 그렇게 난해한 성경구절이 한 마디에 풀립니다.
당신은 피남편이라.

국가 이스라엘의 요점은 오직 피. 피작업을 위해서 있습니다. 마지막 재앙이 피라면 처음부터 아홉 번째까지의 재앙은 피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준비 절차입니다.
모세는 자기 아들이 할례를 행함으로 모세의 자격으로서는 이스라엘을 절대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할례 언약의 자격으로 가야됩니다.

할례 언약을 받은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리지요. 그 제사 재물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차량은 엔진이 있어야 가지요. 바퀴만 있으면 그림책처럼 차가 아니지요. 굴러갈 수가 없지요.
할례언약에 제사를 드려야 됩니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동행하신다 입니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히브리인들을  보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출5:1).
이 때 바로가 여호와가 누구지라고 말합니다(출5:2).
회사직원이 일요일 교회가기 위해 사장에게 묻습니다. 사장님 교회가야 합니다. 교회가 뭔데?
예수님을 믿는 곳입니다. 예수가 누구지? 너 예수 믿는 것과 회사 출근하는 것이 무슨 관계있는데?
여러분 누가 정상입니까? 회사 사자이 정상입니까 아니면 예수 섬긴다고 교회 간다고 하는 사람이 정상입니까?
사장이 정상이지요.
아니지 싶어요?
여러분 목사 그만두고 회사 차려보세. 내일 모레 선적해야 되는데 직원들이 평소에 교회 안가다가 초코파이 준다고 했는지 교회 간다고 할 때 누가 정상입니까? 직원들이 사장의 은덕을 모르고 말이죠.
우리가 비정상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반대로 바꾸어서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항상 비정상입니다. 분류가 거룩입니다. 거룩한 생활 따로 없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을 느끼고 사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나는 달라. 비정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이것이 유지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우리는 껍데기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라 내 속에 계신 분 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유지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무엇인가? 행함이 없는데 발생한 의. 이 의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이 됩니다.
사람의 행함, 인간이 지키는 의는 소용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의를 위해 우리를 다루었고 그 의는 제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 왕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광야로 나가야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바로 왕이 근본을 묻습니다. 똑똑하기 때문에.
여호와가 누구지? 난 모르는데.
그건 네가 알아서 할 문제지 왜 나에게 묻느냐?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가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출5:7-9)”
이때 누가 원망합니까?
종교적으로 원망합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출5:21).”
벌해 주옵소서라는 말이지요. 결속력이 깨어졌습니다. 힘을 합쳐서 나가자도 물 건너갔습니다.
다시 바로 앞에 서서 지팡이를 던지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모세 안에서 창세기가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을 기적을 통해 보여줍니다. 이 싸움은 인간의 싸움도 아니고 바로의 싸움도 아닙니다.
출애굽은 애굽의 신들과의 싸움이 됩니다. 그래서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잡신들과 싸우는 기능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국가, 자기를 반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 그리고 여호와를 모독하는 다른 민족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진짜 아들을 만들어내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동행하시어 작업하십니다.
놀랍게도 그 중에서 모세마저 제거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와. 하나님께서는 수고했다고 보너스 챙겨주시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십니다.
출애굽기17장6절에서는 모세가 반석을 치니 물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20장11절에서는 두 번 반석을 칩니다.
치면 안 되지요. 모세는 착각했습니다. 백성이 자기 수하에 있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백성인줄 알았습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이 오니 교인들 구원책임이 목사에게 있다는 것과 똑 같습니다. 사모님은 목회에 부담 느끼지 마세요. 마음대로 사세요. 목사도 책임지지 못하는데 사모가 왜 책임을 져야돼요. 뭐 국모인가요? 나는 조선의 국모다. 왜 자신이 책임을 집니까? 너무 건방을 떨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때 이동경로를 모릅니다.
더 경악할 일은 구름기둥이, 불기둥이 인도하는 곳으로 가니 뭐가 없었다? 물이 없었다. 이게 뭡니까? 이게 우리를 살리겠다는 말입니까 죽이겠다는 말입니까?
백성들이 정상이죠? 애굽이 정상이죠?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출14:11)”
너무나 지극히 정상인들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 욕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물이 없어 물이 없다고 했을 뿐이고, 양식 없어 양식 없다고 했을 뿐이고, 고기 먹고 싶어 고기 먹고 싶다고 했을 뿐이고 뿐인데. 인간의 한계인데 어쩌라고. 미리 물주고, 미리 오아시스 만나게 하고, 미리 양식 주시고 미리 고기 주셨다면 원망하라고 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을 유도했습니다. 아들 만들기 위해서. 애굽이 적이 아니고 출애굽한 너희들이 바로 하나님의 적이다. 40년 동안 광야생활에서 망하고 망하고 다 망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다만 남는 게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다는 것만 남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광야에서 망한 사람 지옥 갔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사랑과 전쟁에서 나쁜 역 하면 그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까? 역할만 그럴 뿐입니다.
완성된 것을 가지고 앞당겨 적용시키면 위험합니다.
성신과 성령이 어떻게 다릅니까? 간단합니다. 그 당시 언약을 적용시키는 분이 성신입니다. 성령은 완성된 새언약을 적용시키는 분입니다.
성령 받은 내용을 성신 받은 내용에 집어넣으면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성신을 받았는데 왜 악신이 들립니까? 사울 말입니다(삼상16:14).
사울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었다가 악신에 들렸다고 하잖아요. 역할입니다.

다윗도 죄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했는데 주어진 고백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시편22편.
그리고 시편23편에 곧장 바꿉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하지요.
시편22편을 거치지 않으면 시편23편이 나오지 않습니다.
시편의 특징은 고난을 앞에 두고 영광은 뒤편에 있습니다.
원수들이 있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심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억울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 때문에 시달리고 당했던 그 모든 것이 결국 할렐루야로 이어집니다.
시편 후반부에는 할렐루야로 도배를 해 놓았습니다. 그 앞에 사울에게 쫓기는 많은 시련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영광을 바라봅니다. 

연대연합 14강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이방인들은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른다. 이 이야기를 이방민족들이 들으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너희들의 신만 신이고 우리들의 신은 신이 아닌가 말인가 라고 나올 것이 뻔합니다. 이것에 대해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대화는 성립하는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직 정복함과 정복당함 관계뿐입니다. 현재 이슬람과 이스라엘이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이슬람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이스라엘에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자신들의 집합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택한 민족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짓는 그 계획에 대해서 인간이 함부로 변경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앙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신앙은 무엇입니까? 강력한 자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집단화 되면 집단적 주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만큼은 구원받을 백성이라고 여겼던 것을 이스라엘 내부에서 어떤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 이스라엘 가운데 다윗의 혈통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이 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시지 않을 때 여기에 대한 정치적 충돌이라는 것은 뻔한 이야기입니다. 둘 중에 누가 죽든지 죽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다수가 죽을 수 없고 예수님 한분만 제거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과거 사건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의 에피소드(일화)라면 우리가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성경에 담겼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성령에 의해 써졌습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쓰셨다면 지금도 성령이 활동하신다면 성령은 스스로 자기 제한에 들어갑니다.
나는 성경 내용 외에 다른 사건은 벌이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자기 약속이 됩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누가 내려옵니까?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오셨지요(요1:33). 하늘이 열렸습니다. 최초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열림을 신학적 용어로 종말이라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비둘기 같이 성령이 내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잉태도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마1:18).
마리아는 몸만 빌려주었을 뿐입니다. 껍데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 빼고 하나님과 성령님의 합의 하에 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후에 지상에 계신 예수님께서 여기에 가담을 하게 되면 성령이 있던 위치를 예수님께서 차지하시고, 성령은 이제 예수님의 지시를 받게 되고 오직 예수님께서 하신 일 안에서만 일을 하실 뿐입니다.

성경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할 때에 우리 인간이 성경말씀에 직접 다가 갈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직접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성령으로 써졌다면 성경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못갑니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성경에 다가 갈 수 없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만일 이 말에 동의한다면 여러분들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성경을 알 수 없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갈수 없다고 인정하고 동의 한다면 만일 우리 교인가운데 성령을 받지 않고 육적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제외 되어도 좋다는 것을 여러분이 인정을 해야 합니다.

숫자가 오천 명 왔는데 그 중에 성령 받은 사람이 두 사람이라면 4998명은 엉터리임을 감안해 설교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목회적 결심이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나의 자의식 투영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은 이렇습니다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짝을 이루어  말씀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이렇습니다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반드시 이렇습니다를 동반해서 이야기 합니다.
왜 자꾸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언급하느냐? 가짜가 많습니다. 가짜가 계속 들어옵니다.

성경은 사람에 대해 삼분설로 보지 않습니다. 이분설도 아닙니다. 삼분설이 문제가 있으니 이분설로 옮겨 탄다고 해서 인간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에는 관계로 설명합니다. 만일 육의 관계에 있으면 육이고 영의 관계에 있으면 영입니다. 이것을 헬라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히브리적 사고방식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인간을 다룰 때 관계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금 관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언약적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 안에서 택함 받은 민족입니다. 따라서 언약밖에 있으면, 아간처럼, 사울처럼 언약 밖에 있는 사람은 언약 하나를 굳히기 위해서는 그 하나를 삭제하고 배제합니다.  이 작업 기간이 이스라엘 역사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90퍼센트는 전쟁입니다. 그 전쟁은 외부전쟁과 함께 내부전쟁이 겸해집니다.

이런 성경말씀이 교인들에게 전혀 먹혀들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자의식의 실현을 위해 교회에 오기 때문입니다. 나를 천국에 넣어주는 이야기, 여기에 관한 것만 이야기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지나간 구닥다리 이스라엘 이야기는 난 관심 없습니다. 그런 것은 잘라 버리고 당신은 성경전문가이니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갈 수 있는지 이야기 해 주면 된다고 합니다.
선교단체에서 이것을 이용합니다.
사도행전16장31절에 나오는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알려줍니다.
본인이 구원받기 위한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왔는데 목사님 쪽에서는 주 예수님을 믿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그리고 난후 회중들 앞에서 고백하세요라고 하면 까짓것 회중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회중 앞에 나오라고 해도 부끄러움도 한번이지요. 나갑니다. 손들어라고 하면 손듭니다. 잠깐 나와 박수 받고, 꽃다발 받고 들어가면 됩니다. 육개월후 세례받으면 됩니다. 얼마나 간편합니다.
뒤쪽에 성가대 있습니다. 내가 노래 잘하니 성가대 하면 되고, 그러면 내가 하나의 공동체에 편입이 됩니다. 편입이 되면 남들이 나의 신앙을 알아줍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스스로 신앙을 확신하는 것 보다 남들이 인정하고 알아주는 신앙은 더욱더 확실해 집니다. 모든 것이 눈에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점점 더 멀어져 갑니다. 성경을 왜 봐요. 바쁜데. 오토바이 수리하는데 왜 성경을 봐야 합니까?
여러분 십자가 피가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을 믿습니까? 까짓것 믿지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나만 천국에 넣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자의식이 있으면 추억이 되고 기억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믿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첫사랑이 있죠? 첫사랑과 함께 삽니까? 첫사랑을 기억하십니까?
첫 사랑은 잘 이루어지지 않으니 대부분 첫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추억하십니까 아니면 함께 살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이론상으로는 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두 개의 태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내가 산다면 나는 누구를 미워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사랑한 대가는 나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합니다. 이것은 나 홀로 살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 곁에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함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분, 나는 부분을 알지만 그분은 전체를 아시는 분입니다. 함께 있다면 우리는 누굴 자랑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랑해야지요.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갈라디아서 6장에서 말씀합니다(갈6:14).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근호 목사는 십자가만 이야기 한다고 조롱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뭐냐고 묻습니다. 제가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의 자의식은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 자신입니다.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중요한 그분 앞에 부정되어야 될 나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래 나 십자가 기억할게. 이스라엘 기억할게. 홍해를 기억할게. 다 기억할게 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 말고 두뇌 속에 저장 말고, 천국갈 때 나 예수님  기억했습니다라는 기억 끄집어내어 통과할 생각하지 말고 동반자를 제시해야 합니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
동반자는 우리가 동반하겠습니다. 해서 동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반자께서 보내신 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신 후 예수님과 너를 묶어줄 보혜사가 옵니다.
이만희 아닙니다. 그 보혜사가 오는 것이 너희들이 나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유익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왜 유익됩니까?
주님 보이지 않으면 늘 주님 어디계신지 찾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령께서 함께 계시면 내가 화장실가도 거기 계시고 바다 끝, 땅 끝에 가도 계시고, 중국에 가도, 한국에 가도, 미국에 가도 거기 계십니다. 무얼 더 원합니까?

여성이 남자와 결혼하면 고향을 잃어버립니다. 물론 남자를 사랑하는 조건하에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남편 있는 곳이 곧 내가 있는 곳이 됩니다. 
남편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갑니다. 술집이든 어디든.
여자는 남자와 결혼하면 남자가 자신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항상 전화합니다. 오빠 어디야?
계속 전화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전화 그만해라 바이어 만나는 중이다. 그러면 또 전화합니다. 이에 남편이 전화 그만해라고 하면 아내가 그러면 나 싫증났어? 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제발 이렇게 해 주기를 원합니다. 딱 달라붙기를 원합니다. 그 틈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세상 출세욕, 자기 성취욕이 그리스도와 성도사이에 끼어들지 않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는 이 틈사이에 십자가를 놓습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1).
이런 식으로 성령께서 활동하십니다.

성령의 활동에 대해 너무 다양하니 그것을 객관화 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6장8절에 객관적인 성령의 사역을 말씀합니다.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책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상은 애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애굽에서 나온 이후 물 없고  양식 없으니 다시 어디로 돌아가자고 합니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원한 것이 아니라 물주는 하나님을 원하고, 나에게 양식 주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애굽에서 바로가 제공하지  못한 것을 제공하는 그런 하나님을 원합니다. 나는 사랑의 하나님을 원한다는 정신적 구조자체가 애굽적입니다. 바탕이 애굽구조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들에게 물을 주시면서 애굽에서 주는 물이 아니고, 양식을 주시면서 애굽에서 주는 양식이 아닌 만나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애굽적으로 받아내려고 하는 이스라엘의 기본구조를 깨트려 버립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 그 능력으로 있는데서 있게 되는 애굽적인 방식은 완전히 와해시키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우린 세상에 대해 관찰자, 구경꾼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헤엄치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이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 완전히 이분법이지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세상을 부정하게 되면 그러면 우리 어떻게 살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이 신명기 8장에 나옵니다. 
만나를 주셔 놓고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애굽적인 정신구조로 되어 있으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아 말씀 지키면 내가 먹었던 만나를 주시는 구나. 이렇게 말씀을 수단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주는 원인이 되어서 세상에서 얻을 것을 얻으며 사는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것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6장에서 내가 하늘에서 온 만나다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어려운 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이보다 더 어려운 말씀, 업그레이드 하면, 내 살을 뜯어 먹고 내 피를 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영생이 없느니라.
교회에서 세숫대야에 물 떠서 발 씻기기는 잘하는데 왜 그것만 하십니까?
예수님 살점 뜯고 피 퍼마시는 일은 왜 하지 않습니까? 너무 엽기적이라서. 너무 잔인 합니까? 18세 이하는 정서적로 용납이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성경을 보면서 왜 그리 쉬운 것만 하고 어려운 것은 넘어가버립니까?

성경이 있다. 성경은 성령이 쓰셨다. 따라서 육은 성경을 쓰신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육이 성경에 도착하면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성령이 경유한 그 경유로 되돌아갑니다. 따라서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19:30).”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내가 말씀을 지키지 않았고 다른 분이 다 지켰음을 발견하면서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의를 주님께서 다 이루셨네를 만나게 됩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반드시 은사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은사 없는 성령은 없습니다. 일시적인 은사는 날아가 버립니다. 영원한 은사는 세 가지 밖에 없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여기에 믿음은 에베소서 2장8절에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주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내통하면서 유지되었던 그 믿음, 주님 고유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 믿음과 다른 신념이 있고, 야심이 있고, 야망이 있고 집착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의 믿음으로 교체시켜버립니다.

사도행전3장16절에 성전미문의 앉은뱅이가 나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16).”
베드로와 요한은 목격자일 뿐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난 믿음으로 나았습니다. 따라서 믿음은 예수님으로부터 난 믿음이기에 믿음을 개인이 소요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추적해 들어가 보면 그 끝에 믿음을 주신 십자가 지신 주님이 계십니다. 믿음 주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고 하십니다.
성경의 일관된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못합니까? 인간의 자의식, 다르게 말하면 존재를 유지하려고 보니 믿음 소망 사랑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내가 원하고 야망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또한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해 초월적인 것을 힘입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서구에서 경제가 발전하고 식민지 개발이 일어나면서 인간의 과학 기술 발전에 인간이 도취되고 말았습니다.
과학기술은 전쟁무기로 이어지고 전쟁 무기는 상품으로 이어지면서 각 나라의 경제적 격차가 심해집니다. 그래서 제국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습니다. 활 쏠 때 총 쏘면 게임이 안 됩니다. 인디아나 존스를 보면 학자가 칼 잘 쓰는 무사를 총으로 쏴 버리지요.
인간은 과학 기술로 스스로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어느새 자본주의에 물들게 됩니다. 자본주의에 물들면서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물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치 마네킹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부만 꾸미면 됩니다. 나 전지현처럼 어떻게 해주고, 옷은 누구처럼 해주고, 성형수술하고 좋은 화장품 바릅니다. 거리에 나가면 마네킹이 한 둘이 아닙니다.
집안이 깨끗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세상에 합류하려면 그들이 원하는 패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자기 집안청소하지 않으면서 바깥으론 깨끗한 척 돌아다니고 마네킹은 마네킹과 만나서 결혼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이트 가서 부비부비하면서, 마네킹들이 춤을 춥니다.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물체가 되고 사물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장식하기 바쁩니다. 장식에 덧대기 덧대기 하기 바쁩니다. 
이렇게 되니 인간은 없고 돈밖에 없습니다.  믿음 좋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노동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다가 됩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이 되어버립니다.
당신은 팔십만 원짜리, 당신은 백만 원짜리 노예가 따로 없습니다. 과거 미국에만 노예 있는 줄 아세요?
지금 현재 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다 아시고 계셨지요.
마태복음6장24절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돈은 교환 수단이었지만 이후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돈을 버는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돈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프로이드는 인간스스로 인간을 진단해 봅니다.
지금 드리는 말씀은 인간이 성령을 통해서 성경을 보게 되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가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 없이 성경을 보게 되면 교회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자아를 보았습니다. 6세 이전에는 혼돈입니다. 6세이후에는 거울단계에 들어갑니다(라캉). 이때에는 임시적으로 저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인식합니다. 여기서부터 성장하는 중에 주변에서 많은 것들이 유입됩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계속 유입됩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자아가 누구냐를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지를 알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내가 누군지를 알려고 한다면 지금 현재 있는 내가 조작해낸 과거입니다. 지금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작해 냅니다. 조작이 가능한 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원초적인 욕망  즉, 부모의 나에 대한 기대, 타인의 나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 기대에 맞추어서 돌아가는 세상에서, 마치 부폐에서 음식 골라 먹듯이 자기 마음대로 퍼 담아 이것을 자신의 자아라고 합니다.
이것은 임시적인 조치입니다. 오늘도 임시땜빵 쉬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두리번거림이라고 합니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주위에 나의 욕망을 채울 것을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왜? 또 조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차피 나는 누군지 모릅니다. 나는 그때그때 마다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욕망만 채우면 그것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욕망이 생깁니다. 그래서 지난 것은 버리고 새로운 욕망을 채우려고 두리번거립니다.

이런 식의 자의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목회자는 성경에서 이상적이 교회상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이상적인 자아상을 찾습니다. 그것을 왜 찾습니까?
지금 불만족스럽다는 겁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이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물으면 내가 보고 싶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계속 추구할 뿐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수단으로 집어넣습니다. 하나님이시여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라캉의 유명한 말입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뭐냐고 나에게 물으면 우리는 답변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것이란 남들이 원하는 그것이 나에게 넘어와서 내 자아에 장착되면서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으로 재편집됩니다.
오늘 아침에 목사님이 박주영이 한골 넣고 손흥민이 한골 넣었다고 했습니다. 원했던 바입니까? 아니면 한국이 5대 0으로 지기를 원했습니까? 한국이 이기기를 원했습니까? 그리스가 이기기를 원했습니까?
한국이 이기기를 원했지요? 그러면 한국이 목사님과 무슨관계에 있습니까? 정말 한국을 사랑합니까? 그러면 다시 군에 갈 용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거든요. 나라는 것이 어떻게 조작되고 편집되었는가 하면 나는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조작되고 편집되어 있습니다. 만일 목사님이 속한 곳에 파벌싸움이 생기면 목사님은 러시아로 귀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큰 목회해서 금메달 딸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삼관왕.

세상은 내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조작했습니다. 왜 조작합니까? 내가 그러고 싶어서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그러고 싶습니다. 그래서 항상 임시 땜빵(땜질)입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고 계속해서 새로운 땜빵질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이 월드컵16강에 올라갔다고 했을 때 그것으로 만족할까요?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8강. 8강도 잘한 걸까요? 아닙니다. 4강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홍명보는 목사님께 뭡니까? 종입니다. 종이에요. 종.

세상은 나에 의해서 조작되고 왜곡되고 뒤틀려진 세상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봅니다. 성경을 보니 서로사랑하라가 나옵니다. 굉장히 이상적인 교회 상이 됩니다. 이상적인 교회 상이 나의 욕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회하면서 만족함이 없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통하지 않을 때 나오는 현상입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성령 받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있지요. 그러면 여기에서 성령 받은 사람 되고 싶습니다고 할 때 이것은 또 하나의 욕망이 됩니다. 또 왜곡된 욕망입니다. 너도 문제고 나도 문제고 계속해서 임시땜빵입니다. 자아상이라는 것은 작년에 다르고 올해 다르고 어제 다르고 오늘 다릅니다. 내년 다르고 내일 다릅니다.

교인수가 20명인데 갑자가 50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나 자아상이 왜곡합니다. 50명 교인의 당회장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20명이 빠져 버리고 30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만족하겠습니까? 전에 20명이었는데 만족한다고 하겠습니까? 왜? 왜? 제가 뭐가 잘못되어서 30명이 되었습니까? 라고 하겠지요.
나의 자아는 현재가 급조한 겁니다. 이런 자의식은 나이 90되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내 나이가 연애 못할 나이입니까? 지금 한국에서 유행하는 유행가 중에 오승근이 부른 내 나이가 어때서가 있습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90 되어도 연애합니다. 두근두근 거립니다. 안되어 봐서 모릅니까?
되어 보세요. 90되어도 20대 찾고. 30되어도, 40되어도, 50되어도 60되어도 예쁜 것만 찾습니다.
아침마당에 사별한 나이 많은 사람들 나오지요. 남자 하나 여자 셋. 결과 보나마나 입니다. 제일 예쁜 사람 찾습니다. 돈 필요 없습니다. 예쁜 사람입니다. 예쁜 사람 기준은 절대적 예쁨이 아니라 저 옆 사람과 비교해서 예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난 사람을 데리고 가야 채택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상대적 예쁨인데 남자는 그것을 절대적 예쁨으로 오인합니다.

여자가 민낯과 화장한 얼굴이 다릅니다. 다를걸?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화장 지울 때 실망감으로 상대를 좌절하게 할 수 있어요.
그래서 기초화장만 해야지 찐하게 화장하면 남자가 아내의 화장한 아름다운 모습을 몸이 기억해요.

이 문제를 성경에서는 하나로 끝내버립니다. 바로 왕입니다.
네가 스스로 왕이 될 수 없고 이 사람도 왕이 아니고, 저 사람도 왕이 아닙니다.
드디어 어려운 사사기가 나옵니다. 그 때에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라고 합니다.

자의식, 나는 누군지 모르겠다. 존재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 자리에 내가 앉을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언약은 주어자리를 빈자리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누구냐에서 나는 자리에 내가 있어 버리면 안 됩니다.
어제 질문하셨지요? 어떻게 행하느냐? 주어 자리에 앉아서 어떻게 행하고 어떻게 꿈꾸는 것은 자 자기 욕망입니다. 이 주어 자리를 비켜 술어 위치에 나를 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기능이 되고 역할이 되고 속성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첫시간부터 지금까지 존재와 기능이라고 그렇게 목쉬도록 이야기 했습니다.

지금 주어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으면 아무리 겸손해도 자기보다 겸손한 교인 있으면 그 교인 내어 쫓습니다.
목사님 두 시간 기도하는데 집사님이 새벽기도 와서 네 시간 해 보세요. 보일러 기름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자리를 그냥 말석이라 하지 마세요. 그냥 말석에 가버리면 그 곳에서 자기 자리를 또 쳐다봅니다.
주님을 주어 자리에 보내고 자기 자리에서 나가면서 그냥 나가지 말고 연결고리, 즉 성령이 주시는 새 언약, 십자가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그냥 주어자리를 비워  술어자리로 가면 그곳에서 또 딴 짓합니다.
멀리서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함께 동거한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24장13절에서 25절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님의 만남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소식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미지의 X 로 사라졌습니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중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서로 궁금한 것을 물을 때에 어떤 아저씨가 함께 동행합니다. 그러나 얼굴을 보아도 모르는 얼굴입니다.
제자들에게 끼어든 제 3의 인물은 타인이 됩니다. 남입니다.
그런데 음식 잡수실 때에 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갑자가 아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듭니다. 얼굴이 변검처럼 순간적으로 변했는지 아니면 그 얼굴인데 그들의 눈에 눈꼽이 끼었는지 모릅니다.
성경대로 한다면 두 제자는 갑자기 자기 자리에서, 주어 자리에서, 예수님은 별 볼일 없다. 우리끼리 해야지, 내 인생 내 맘대로 해야지, 내 몸 챙겨야지 하면서 주어자리에 있는 그들입니다. 예수님이 동행하실 때에도 여전히 주어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하시니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이는 자리로 갔습니다.  묻습니다. 식사하신 후 예수님이 함께 살았습니까 사라졌습니까?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때 제자들에게 있어서 주인은 누굽니까? 여전히 주님입니다. 주어자리를 자기가 차지할까요 차지하지 않을까요?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구만 증거합니까? 나는 그분 때문에 나임을 증거합니다. 내 욕심과 야망과 탐욕을 위해 그분이 있는 것이 아니고 ,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나를 만족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란 존재 자체가 의미 없는 존재입니다. 내가 스스로 구성이 되든 안 되던, 혼란스럽든지 그때 엠마오 도상에 나타나신 그분이 여전히 그분입니다. 나의 자리를 그분이 차지해야지 내가 건방지게 차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쓴 글이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 고린도 전후서입니다.

그런데 샌드슨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성경은 사견에 불과하고 옛날이야기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젊은 교수들이 참신하다해서 목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사람이 성경책을 어떻게 보는가 하면 로마서를 사도바울이 썼다고 합니다. 말은 맞지요.
그런데 이 사람은 사도바울과 나란히 섭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보는데 나는 이렇게 본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날아갑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이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갈1:12).
그런데 샌드슨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으면서 사도바울과 맞먹으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 된 바울이라고 합니다. 이 자체를 잘라버립니다. 너만 똑똑하냐? 나도 똑똑하다. 나도 하나님 믿는다.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사도바울과 나란히 보니까 사도바울이 생각했던 것, 교회 공동체가 그럴 듯합니다. 바울 네가 한다면 나도  성령 받고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사도가 쓴 편지가 나의 욕망을 달성하는데 하나의 재료가 될 뿐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가 있던 그 현장에 먼저 우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면 사도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 합니다. 사탄의 가시를 주셔서 오히려 능력이 약한데서 강하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도 됩니다. 여기에 함께 끼어들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현장에 가야 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밝혀 보여야합니다.
고린도전서2장2절에 나오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나니라는 말을 같이 내뱉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 죽었다는 것만 알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부활, 재림, 성령의 열매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면 부활, 재림, 성령의 열매가 다 어디에서 나온 이야기입니까?

너는 자아 자리에 있지 말고 어디로 오라고 합니까? 나는 예수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그 자리에서 펼쳐지는 모든 것이 사도의 권면이고 명령입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시고 해석하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는 사도바울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다는 입장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역사적 해석법에 의해서 진리에 가까운 액기스만 모아서 온 선배들의 공로를 함부로 갖다 버릴 수 없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전승에서는 성령의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예수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이란 주어 부분이 주님이고 우린 술어자리에 들어갑니다. 본인은 목회 잘되나 망하나 아무 의미 없고, 목회를 내가 소유할 입장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다루어 졌을 뿐입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교인3000명 되는 목회자로 다루어졌을 뿐입니다. 오직 내 자랑은 3000명 목회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뿐입니다. 목회 50년 한 후 고백은 나는 예수그리스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나는 끝까지 죄인중의 괴수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주께서 지금도 날마다 나를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고 고백해야 됩니다.

오늘날 개혁주의 신학은 주어 자리에 자기들이 있습니다. 왜 이 자리에 있으려고 합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이 세상을 기독교 세상으로 만들려는 야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콘텐츠는 성경의 내용으로 채웁니다.
이렇게 되면 야망가진 목사와 야망가진 교인, 똑 같은 사람끼리 모였습니다. 여기에 십자가 이야기 하면 지금은 부활의 새 생명인데 왜 지나간 이야기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지나간 이야기라면 사도바울에게 그런 소리를 하세요.
왜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이야기 합니까? 또한 저주 이야기를 합니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합니다(갈1:8). 이런 저주 이야기해서 목회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긍정적 사고를 펼쳐야지 저주 이야기를 왜 끄집어냅니까?

고린도후서2장에서 사도바울은  복음이 구원받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냄새요 사망을 얻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라고 합니다(고후2:16).
모든 사람에게 좋은 향기가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악취를 풍기게 할 자격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고린도후서1장1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어 자리에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 자리에 주님이 계시고 자신은 말석에서 십자가를 보고 있으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부족해서 십자가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보이니, 이 보이는 것을 부정할 수 가 없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 와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칼에 목베임 당해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죽는 순간에서 사람이 칼로 자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보내신 종들이 죽이는 것을 압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께서 군대생활 그만하라고, 쉬라고, 제대하라고 주께서 보낸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1장21절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다메섹에서 왜 도망쳤습니까? 도망치는 것도 선입니다(행9:25). 죽을 수 없기에 도망쳐야합니다. 로마로 갈 때 풍랑 이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아니요가 없고 모든 것이 예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날마다 주께서 열어주시는 그 길을 가셔야 됩니다.

연대강의 15
이스라엘에 왕이 있는 것과 이방국가에 왕이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세상의 왕은 창세기10장 8절에 니므롯이 나옵니다. 니므롯은 세상에 첫 용사입니다. 영웅입니다. 고고학을 보게 되면 모든 민족의
시조는 영웅입니다. 족보 머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옛날에 다 한 자리 했던 사람들입니다. 시시한 사람은 족보의 시조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은 지도자를 뽑을 때 그들 가운데서 뽑습니다. 상대적입니다. 전쟁에 이길 만한 사람을 뽑습니다. 전쟁에 이긴다는 것은 신의 도움으로면 이길 수 있습니다. 만일 누가 와서 전쟁에 이긴다면 그 사람은 우리와 격이 다른 신의 도움을 받는 사람이거나 신성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말할 때 영력, 영빨이라고 하시오. 우리는 그보다 영력이 미진합니다. 야고보서4장16절에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15일 기도해서 응답받는 것 2분 만에 응답이 되면 그만큼 절약이 됩니다. 영빨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웅이 됩니다. 이 영웅의 영빨을 개인적 솜씨로 보지 않고 신의 작용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신을 봅니다. 따라서 이 사람을 반대하면 악령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모든 민족의 왕은 그들 가운데서 뽑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시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 날 때부터 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 품에서, 아버지 품에서 태어납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연속성에서 아기가 됩니다.
이것이 싫어서 인간의 노선을 잘라버린 사람이 석가모니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그냥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만일 그냥 인간으로 취급하게 되면 천주교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흠이 없는 마리아라고 합니다. 마리아는 영원한 처녀여야 하고 보통사람하고 격이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모르고 죽었던 조상들을 구원하기 위해 마리아가 압력을 행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라가 됩니까?
사무엘상8장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시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이 있었고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자는 일 년에 세 차례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만나 뵈어야 합니다. 무교절, 칠칠절, 초막절에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려야 합니다(신16:16). 이때 세미나를 합니다. 계시 전승을 합니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배운 것,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출애굽 등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잠언서 1장8절에서 아들아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고 합니다. 십계명 제 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입니다. 아버지 술 먹는 것 공경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버지 다우려면  언약적 아버지가 되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의한 아버지가 되어야 됩니다.

에베소서 6장1절에서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를 공경하는데 그냥 공경하지 말로 주안에서 공경하라고 하십니다. 교회라는 것은 성경신학적으로 종말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렇다며 종말은 세상 끝을 말하는가? 세상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끝을 말합니다.
아직 산은 산대로, 물은 물 그대로 있는데 무슨 종말이냐고요?
종말이란 과학적으로 규명해서 종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추가될 언약이 없을 때 종말입니다. 마지막 언약에서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기준이 확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있는 사람은 천국이고 예수님의 피가 없는 사람은 지옥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다는 인간의 말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 고백되어지는 믿음만이 주님께서 합격점으로 쳐 줍니다.

계시록7장13절에 흰옷 입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음을 받아 희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후 곧장 하늘로 올라가시지 않았습니다. 물위를 걷고 곧장 하늘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셔야 다 이룹니다. 부활한 것이 다 이룬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너희 앞에 부활이 보이느냐를 말하지 않고 너희 앞에 십자가가 보인다고 말합니다.

부활이란 새언약을 보여주는 환경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영화의 필름이 십자가고 스크린은 부활입니다. 
부활을 만나려면 곧장 스크린만 만나서 되지 않습니다. 부활은 십자가가 담겨 있을 때, 십자가 담긴 전체를 두고 부활이라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빌3:10,11)”.
사도바울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부활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달려갑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고 아니라 오직 내가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고 합니다.
방향성은 이미 십자가 쪽으로 확정되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부자청년은 근심하며 가버렸습니다(마19:16-22).
만약 부자 청년이 부자가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라면 당장 따라 왔을 것입니다.
만일 소설 잘 쓰는 사람이라면 붓을 꺾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겁니다. 그러면 또 근심하며 가버립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보다 무엇을 더 자랑질 하는지를 아시고 , 그것을 스스로 버릴 수 있는가를 물으실 때 이것을 할 수 있어야 천국에 갈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말이라는 환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즉 새언약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제칠일안식재림교에서 특이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예수님 믿고 안식을 지켜도 최종 심판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조사심판이라고 합니다. 지상에서 사람들이 하는 것은 인정받지 못하고 하늘나라에서 다시 심사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 안식교에서 이렇게 했을까?
그 이유는 안식교에 가는 사람이나 교회 오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노리는 것은 교회를 위한 온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목사님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여기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줍니다. 정보를 알려주면 사람들이 머리를 굴립니다. 이제 내가 얻고자 하는 것 , 알고자 하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더 이상 교회에 이용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에 열심인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믿음 좋은 사람들이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을 다른 말로 하면 할 일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별다른 직업 없는 사람).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그 정보를 알려 달라는 겁니다.
이건 안식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종교는 돈이 많아야 됩니다. 어려운 사람 도와 교회로 데리고 오고, 미끼를 내어 놓아야 , 받은 게 있어야 내 놓겠죠. 이것이 증여사상입니다.
고대민족의 특징은 돌고 도는 것입니다. 무상으로 제공받은 사람은 무한한 책임감을 느껴 또 다른 사람에게 제공함으로서 사회가 돌아갑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상 이전의 모습니다.

이번에 이것을 많이 실감했습니다. 제 딸을 치우는데 서로 사돈에게 보내는 것 있지요. 사도끼리 만나 간소화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온 것이 간소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더 담아서 보냈습니다.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다시 더 담아 왔습니다. 제 아내가 당황하지 않고 제치고 더 많은 것을 담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또 고맙다고 하면서 당황하지 않고 제치고 또 더 많이 보내 왔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것은 누가 경우 바른가 시합하는 것 같아요. 누가 의로운 사람인지 시합하는 것 같습니다.
목사는 뻔뻔스러워야 합니다. 목사가 만일 증여방식에 빠져 버리면 교회에 파벌을 유도합니다.
누구는 신경써주고, 누구는 이삿짐 날라주고 나는 왜 안 도와 주는가? 누구에게도 이삿짐 날라 주지 마세요. 끝. 누가 도와 달라고 해도 당황하지 않고 끝.
교인수가 적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인수 많으면 권사 투표할 때 파벌이 일어납니다. 다 나옵니다. 안철수파 노무현파 등등 다 나옵니다. 겉모습은 하나인데.
천주교는 우산으로 다 덮었습니다.  어떤 이단도 오라. 우리가 천주교라 해 줄게. 파벌이 수백 개가 넘어요. 이단이라 하더라도 천주교입니다. 그래야 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부, 수녀가 그런 사람입니다. 경건한체하는 것이 수입이 되기 때문입니다.

왕이 없을 때에는 율법이 왕되신 분이 누구신지를 보여줍니다. 세미나를 열어 말씀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사람이 교훈과 훈육을 받으면 그것이 기억이 됩니다. 절대로 체험되지 않습니다. 기억됩니다. 기억된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기억된 것이 기억으로 남는 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지를 측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사기2장22절에서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을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 이방민족들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고 밀어냈습니다.
죄가 가인을 덮치기 위해 엎드려 기회를 노리다가 가인을 덮칩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민족들이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게 하셨습니다. 왜 제거하지 않고 그들을 밀어내셨는가? 그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지키나 안지키나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교회문제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잠시 덮고 지나가실께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싫은 사람 죽여 버리면 좋을 텐데, 미안합니다 목사님, 그러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완전한 내편, 제자? 없습니다. 망치 들고 스승님?

누가복음16장에 나오는 부자와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를 보면서 선한 사람도 지옥 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자가 지옥 가서 누구를 생각합니까? 자신의 형제 다섯 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발 그들은 고통 받는 이곳에 오지 않게 나사로를 보내 전도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예수님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자신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칸트에 의하면 양심은 신의 법입니다.
로마서 2장15절에 나오는 양심(비 요8:9), 이방인들의 양심도 신의 계시라 했습니다. 그러면 가룟유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스승 팔았다고 자살하는 훌륭한 제자 있으면 나오라고 해 보세요.
이 시대는 가룟유다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착한 사람도 지옥 갔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지옥 나누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착해도 안 생겨요. 달음박질해도 안 생겨요.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요소가 아닌 나에게서 나올 수 없는 요소가 가미되어야 됩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내산을 여덟 번 올라갑니다. 율법을 받아 옵니다.
 1.출19:3, 2.출19:8, 3.출19:20, 4.출20:21, 5.4.출24:4, 6.출24:13, 7.출32:31, 8.출34:4
왜 이렇게 바쁘게 오르락내리락 합니까? 이것은 기억이냐 체험이냐를 따지는 겁니다.
말씀 주면 이스라엘은 기억하지요. 그래서 모세는 직접 동행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 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출32:24).
주의 사자가 앞서가지 않으면 저는 이 백성 책임 질 수 없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 백성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이니 주님이 책임지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낯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갈 바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인도함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갈 바가 활주로입니다.
비행장이 있으면 비행기가 동서남북중 어디로 갑니까? 공중으로 날아갑니다. 땅에서 떠버립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땅에서 떠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땅에서 애굽화 되어 있습니다.  애굽이 세를 굳히고 있고 애굽이 행세하는 땅에서 출애굽, 떠야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머리 속에서는  땅에서 떠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없습니다. 주께서는 없는 땅에 가라고 하시는데 인간들은 인간 땅에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없는 땅에 가게 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못 가게 해 놓고 불평 늘어, 원망하세 하셔 놓고 가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홍해입니다. 가자 하셔놓고 인도하신 곳이 홍해가 가로막힌 곳입니다. 다른 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면 바다에 난 길은 무슨 길입니까? 바다는 죽음의 길입니다. 바다에서 죽은 자는 더 이상 산자가 되지 못합니다. 죽었다가 산 것이 구약이라면 신약은 진짜 죽었다가 다른 식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홍해 건너기 전의 삶과 건넌 후, 죽 죽음 이후의 삶이 다릅니다. 무엇이 추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포함됩니다. 성막입니다.

이후 요단강을 만나게 하셔서 또 못 건너게 합니다. 주여 길 열어 주시면 가겠습니다. 옛날 사건을 기억합니다. 주께서는 기억나는 것을 다시 하라고 지시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니라(딤전6:10) 는 말씀을 열일곱 살 때 이 말씀을 체험한 것과 사십세에 체험한 말씀이 다릅니다. 말은 똑 같습니다. 그러나 체험이 다르지요. 히브리서13장5절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 하십니다.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십 대, 사십대 다릅니다. 늘 새롭게 느낍니다. 기억이 아닙니다. 옛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지금 새롭게 느끼게 하십니다. 설교는 간단합니다. 목사는 자기 신앙생활 하는 본문을 전하면 됩니다. 이것을 정답으로 생각하세요. 만일 정답이 따로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지금 그때가 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건방진 말입니다. 주께서 그때는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석가모니 믿으라고 할지 누가 알아요. 내일일을 누가 알아요?
그건 걱정하지 말고 지금 주께서 주신 말씀, 과거에 느꼈던 말씀 말고, 지금주실 때 이 본문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라는 것을 교인들에게 제시하게 되면 됩니다. 성령이 있는 교인이 있습니다.
요한1서2장27절의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말씀과 같이
목사님이 나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목사님 말씀에 동의한다면 아멘 하겠지요. 성령이 직접 가르치십니다. 한 지체니 나는 이런 식으로 알았습니다를 제시하는 겁니다.  그래야 학원 강사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땅은 없는 세계입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따지면 죽음 그 다음의 세계입니다.
요단강 건널 때 죽음이었고, 홍해도 죽음이었고, 어린양도 죽음이었고, 가면 갈수록 죽음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해집니다.

이방민족들을 진멸하지 않으시고 이스라엘 주변에 배치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나 안지키나 시험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지키지 않는다면 저들이 쳐들어옵니다. 천사가 쳐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공격해 오면 이스라엘은 못 살겠다고 하겠지요.
신명기5장3절에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
하나님이 옛날이야기와 빠이빠이 했으면 우리는 알아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주의 이름이 함께 동행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은 주의 이름에 의해서 항상 현재화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억과 주님이 현재화 시키는 말씀의 성취가 같다면 말씀에 순종한 것이 되지만 다르다면 기껏 말씀을 기억한 것 밖에 안 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십자가 십자가 아. 압니다. 그러나 부도같은 어려운 일을 만나면 데모하듯이 새벽기도 나와 울며 불며 땅을 치며 기도하지요. 여러분 목회하면서 이런 분들 만나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지 않습니다. 해결되었다는 말입니다. 목사도 새벽기도 나오지 않기를 바라지요. 왜? 해결되기를 바라니. 아들이 가출했다. 그러면 또 새벽기도 나옵니다. 그러다 나오지 않죠. 돌아 왔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랑 어디로 갔습니까?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말씀의 상황을 지금 현재화 시키기 위해서 현재 그들의 죄와 연계되는 방식의 장치를 그때그때 마다 새롭게 장만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말을 누가 못합니까? 그러나 새로운 무대, 새로운 환경을 마련하셔서 이래도 왕이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러면 에이 왕이셔도 소용없네요. 내가 이렇게 고생하니. 이런 소리가 톡 튀어나오게 만들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예상치 못한 왕의 통치 방식을 처음으로 그 시대에 베풀어 주십니다.  이 방식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했지만 이것은 주변의 적들이 공격하지 않는 조건하에서였습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삽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인들이 믿던 신을 믿었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와 우상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   )이 없습니까? 우상은 언약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언약대로 시행하십니다. 그래서 사사기 2장을 보게 되면 주님께서 언약대로 하신다고 하니 울어버립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보김이라 하지요. 매맞을까봐 미리 울어버립니다. 자신의 믿음 없는 것을 우는 것으로 때우려고 하는 얄팍한 술책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다가 갑자기 이방나라가 공격해 왔을 때 처음에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던 힘으로 버팁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버리면 이스라엘이나 이방민족이나 모두 하나님의 적이 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상황이 얼마나 힘든 상황이 되겠습니까?
누가 더 힘이 셉니까? 이방민족들이 힘이 더 셉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도와주세요.

나를 지켜 주옵소서 하다가 안 되니 나라는 주체가 어디로 갑니까? 주님 언약대로 하옵소서 하면서 자신은 술어자리로 빠집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니 당연히 주어 자리에 주님이 오시게 됩니다.
오시는 방식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어떤 인간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해버립니다.
여호와의 신은 인간의 육체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창6:3). 인간의 육체가 포기될 때에는 여호와의 신이 임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랑 할 때에는 성령이 임하지 않다가 자기 완전히 포기할 때 성령의 은혜가 임하지요.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노림수를.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했는데 기도하지 않는 내용을 통해 우리로 감격케 하시고 감사하게 하십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구나. 주님을 조종하려는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주인 자리 앉았음을 깨닫게 합니다.

사사기에서 변변치 않은 인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왼손잡이, 깡패, 방앗간 주인 등이 있습니다.
방앗간 주인 기드온은 별 볼일 없습니다. 그러데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찾아와 큰 용사라 하시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만일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면  기적을 보여 주세요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양털 한 뭉치를 마당에 두면 양털에만 이슬이 젖도록 원합니다. 자기 수준의 지평에서 초월적인 놀라운 일은 그 정도 수준입니다. 주님께서 원대로 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원한 것은 자기 생각에 과학적인 사고를 해서 원한 내용입니다.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에는 이슬이 내리도록 원했습니다.

이후 미디안을 칠 군사 삼만 이천 명이 모였습니다(삿7:3). 여호와께서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들 손으로 자신들을 구원했다는 소리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돌아가라. 그러자 이만 이천 명이 돌아갑니다. 싸움할 마음 없어요. 만 명 남았습니다.
또 많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물가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많다 많다를 제거하시고 적다고 하는 숫자를 뽑았습니다. 삼백 명 이들은 물을 먹을 때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먹었습니다. 나머지는 무릎을 꿇고 먹었습니다. 삼백 명만 전쟁에 나서게 합니다.
여기에서 삼백 명이 침착했다. 아니면 무릎을 꿇지 않아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해석하면 전쟁 승리 요인이 삼백 명에게 있지 여호와께 있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많다 많다를 제거한 의미가 없어집니다. 언약에 위반됩니다. 언약은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주님의 구원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하게 하십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되는 세계가 언약의 세계고 천국입니다.

이제 삼백 명이 미디안과 싸우러 갑니다. 미디안, 아말렉, 동방사람들은 숫자는 셀수 없이 많습니다.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은 같았습니다(삿7:12).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시나리오를 짜더라고 이런 반전이 없습니다.
칼이 없는데 적들이 칼에 맞아 죽었다. 이게 앞뒤가 맞지 않잖아요.
주님께서는 원인을 잘라버립니다. 사라의 태를 죽이는, 이게 창조입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려내심으로 살려냄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어떤 공로가 끼어들지 못하도록 죽음과 없음으로 차단시킵니다. 죽음과 없음의 방식은 그 시대 시대마다 새롭게 만들어서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가 사전에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을 저는 우발적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요한복음3장에서 바람같이 왔다고 바람같이 사라지는 것
입니다.

옛날 앞자리에서 은혜 받았다고 그 자리에 또 간다고 은혜 안 됩니다. 주께서 하신 것을 내가 원인이 되었기에 그것을 하면 자동적으로 은혜가 온다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역사기 있기 때문에 똑같은 방법으로 하면 똑같은 결과가 올 것이라는 것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것을 피해버립니다.
기드온 쪽에서는 칼이 없는데 미디안 진영의 칼 가진 수많은 군사가 칼에 맞아 죽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는 알고 있으면 별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나 그 당시 기드온이라면 대략 난감입니다. 헐.
저들이 죽지 않으면 저들이 맹렬하게 공격해 올 것이고 그렇다면 삼백 명이 그 자리에서 꼼짝 없이 죽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관여합니다. 미디안 진양의 군사에게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을 친구에게 말하게 합니다.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덮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삿7:13)”
이 꿈으로 인해 미디안, 아말렉, 동방사람 진영에 꿈이 주는 공포로 휩싸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숫자 일로만 일을 하십니다.
주님이 계시면 나는 제로가 되고 오직 주님만 하나가 됩니다. 이런 방식을 미디안에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수십만이 있어도 그들은 하나의 꿈에 놀아났습니다. 바로 왕이 그렇게 위세가 대단하더라고 바로 왕에게 주신 하나의 꿈으로 인해 바로 하나가 넘어가고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하나의 꿈속에 귀속되어 버립니다(창41:25).

미디안과 아말렉, 동방사람들의 군사는 꿈에 이미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 즉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상한 확신이지요?
이제는 꿈이 실현된다는 작은 동기하나, 스위치만 켜면 됩니다. 그 스위치 역할을 삼백 명이 합니다. 이들도 여전히 하나의 꿈에 참여한 자들이 됩니다. 삼백 명을 세대로 나누어 나팔과 빈 항아리, 그리고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춥니다.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불고, 오른손에 나팔 불며 외칩니다.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라고.
저들은 오해했습니다. 꿈이 개꿈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상 밖의 숫자로 적들이 쳐들어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캄캄한 밤중에 누가 아군인지, 누가 적군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셨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게 하셨습니다.

이 방식이 열왕기하 7장에도 이런 방식이 나옵니다.
엘리사 시대인데 아람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에워싸서 물가는 폭등하고 먹을 것은 없고 그래서 아들들을 교대로 잡아먹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성문어귀에 있던 문둔병자 네 사람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마찬가지니 아람군대 진영으로 가서 먹을 것이라고 얻어먹고 죽자고 생각해서 아람군대 진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셔서 아람군대로 오인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고 말입니다. 

나병환자들이 자신들만 포식하기 미안해서 사마리아성에 알립니다. 물론 엘리야 선지자가 어제 예언했습니다. 곡물가격이 뚝 떨어져서 배부르게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군대 장관은 믿지 않았지요.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하면서 비웃었습니다(왕하7:5). 그래서 엘리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군대장관은 오랫동안 군인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전쟁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기엔 그럴 일이 절대 없다는 겁니다. 엘리사에 대해 네가 전쟁을 알아? 하는 식입니다.
엘리사에게 주의 이름의 조치를 알려 주셨습니다.
성경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동행,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성경해석이 하나도 안 됩니다.
동행, 언약, 백성들은 언약을 기억할 뿐 전혀 모릅니다. 인간들은 미래를 모릅니다.
이것이 그대로 실천이 되려면 인간이 무엇으로 등장합니까? 백성은 죄인으로 등장하고 죄마저 용서하신 여호와의 이름만이 자비로우신 분으로 등장합니다. 이것이 구약성경의 해석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삶,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삶을 어떻게 삽니까? 언약의 통치하에 살면 주님의 공로만 높아지고, 새롭게 느껴지고 나는 죄만 짓는구나를 발견합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성과에 매료되지 마세요. 성과 믿다가 망한 것이 사사기입니다.

사사기는 살만하면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반복해서. 어렵다 싶으면 자기 힘으로 해 보다가 안 되면 하나님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도와달라는 이스라엘 편이 아니고, 그렇다고 이방민족편이 아니고 하나님은 누구편입니까? 하나님은 오로지 자기편입니다. 자기 자존심, 명예, 자기 이름만 드러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도와 달라고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위해 일하십니다. 주기도문 아시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지요.
누구 이름입니까? 하나님 이름이지요. 하나님 자신밖에 몰라요.
우리는 주기도문 하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주기도문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자존감, 명예, 이름을 위해 이방민족들을 배치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용하실 뿐입니다.

입다를 봅시다. 길르앗에 암몬자손이 쳐들어 왔습니다. 처음부터 입다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암몬자손의 힘이 너무 강합니다. 그래서 입다를 자신들의 장관으로 모시려고 합니다. 물론 이전에 자신들이 쫓아낸 사람이기에 속으로야 그러했겠습니까? 입다가 기생의 아들이잖아요.
장로들 생각에 가장 힘이 센 사람을 찾아보니 김두한입니다. 종로통에서 놀던. 깡패 입다.
입다는 말합니다. 만일 암몬자손과 싸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넘겨주신다면 나를 머리고 삼겠느냐고 묻습니다. 급한 마당에 조건 따질 수 없지요. 길르앗 장로들이 승낙합니다. 
그래서 입다가 전쟁에 나갑니다.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여서 전쟁에 나갑니다.
그때 여호와께 서원합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암손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 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무로 드리겠나이다(삿11:30,31)”

입다 생각에는 개나 소, 동물이 나온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평안히 돌아오는 중에 누가 마중 나옵니까?
아브라함이 누구를 잡아야 했겠습니까? 사랑하는 독자 이삭입니다(창22:2).
이삭은 누구에게 축복을 해 주려고 했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에서입니다(창27:1).
야곱은 누구에게 가장 좋은 옷을 해 입혔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라헬의 첫 번째 아들 요셉입니다(창37:3).
이들의 공통점은 다 죽었습니다. 에서는 저주받았고. 빗나갔습니다. 언약대로 하나님께서 살려 내셨습니다. 그냥 죽은 자인데 야곱이 요셉을 살려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언약의 정형화, 이 땅에서 언약이 구현될 때의 틀입니다. 그 방식대로만 합니다. 일하지 않았을 때 거져주시는 고마움을 느끼게 합니다.
입다가 처음부터 제 딸을 바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입다가 처음 나오는 것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서원했겠습니까? 만일 자신의 딸이 죽어야 한다면 그는 국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번 전쟁에서 손을 빼겠습니다라고 나올 것입니다. 

그 딸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며 전쟁에 나갔고, 승리했고, 기뻐서 평안히 돌아오는데 경악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입다가 자기 옷을 찢으며 어찌할꼬라고 하는 것은 사전에 자신의 딸이 맨 먼저 나올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설마 주께서 그렇게 하시겠는가라고 생각했겠지요.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전쟁의 승리를 조폭 입다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승리 하셨습니까? 주의 언약이 어디로 흘러갔습니까? 딸에게 흘러갔습니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라(삿11:36).”
자신이 죽겠다고 합니다. 다만 두 달만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정도 딸이 정성을 보였으면 딸을 죽이지 않아야 할 것 아닙니까? 마치 이삭처럼. 그런데 숫양이 적용될 때는 그 시절 이야기입니다. 입다의 딸은 입다가 서원한대로 죽습니다. 이것은 십자가 사건이 시간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대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때에 왕이 없었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여기에서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것은 이방나라의 방식입니다. 영웅이 와서 자신들을 건진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영웅이 아니라 여전히 왕이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쪽으로 여호와께서 조치를 해버립니다.

사사기13장 이하에서는 삼손이 나옵니다. 삼손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임신하지 못하였던  마노아의 아내가 기묘자라는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으로 삼손을 낳게 됩니다. 삼손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입니다. 술과 시체, 머리카락을 주의해야 합니다(민6:1-12).
포도주를 먹지 말라는 것은 약속의 땅의 소산물이 인간의 노동이 아니고 누군가의 헌신에 의해서 헌신을 받았기에 주어지는 포도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그들은 원초적인 창조의 행위를 서원한 자에게 입혀서 서원하게 하십니다.
시체에 관해서도 죽어야 될 너희들이 사는 것은 너희들이 애써서가 아니라 이 땅에 함께 동행하시는 여호와의 이름 때문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이 머리카락을 자릅니다.
모든 재물에는 인간의 것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 나실인이 서원한 기간만큼 자란 머리털은 하나님의 제물에 첨가 됩니다(민6:18).

삼손을 그 시대의 나실인으로 보냄으로서 다른 나라처럼 인간적인 왕이 없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왕의 법은 율법이니 왕의 법은 살아 있다는 것을 삼손을 통해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왕이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삼손의 꼬락서니하고는 그 힘을 어디에다 사용합니까?
어릴 때는 몰랐지만 삼손이 힘을 제어할 수 없고 힘이 삼손을 주장합니다.
삼손에게 주신 힘이 삼손의 어두운 육신과 연계합니다. 삼손이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수년전에 나온 마스크를 보면 마스크를 하게 되면  녹색 마스크에 조정을 받는 것과 같죠.
일번이 여자고, 이번이 민족입니다. 여자가 일번이니 민족구원은 항상 뒷전입니다.
여자를 세 명 사귑니다. 여자를 사귈 때마다 삼손의 힘이 발휘되는데 여자와 관련된 보복과 복수입니다. 이 여자와 관련된 보복과 복수의 부산물로 떨어진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이었습니다(삿13-16장).

 
연대강의 16강
사사기13장-16장에서 삼손은 개인적인 야망을 이루는데 그 부산물이 이스라엘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삼손과 이스라엘 구원을 직접 연계시키면 곤란합니다.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구원을 삼손의 개인적 공로로 돌릴수 없음을 없게 만듭니다. 동시에 삼손은 왕일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삼손을 죽여버립니다.
죽음의 원인이 여자 때문입니다.

삼손 힘의 비밀을 들릴라가 알려 달라고 할 때 여자의 간청에 못이겨 알려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고 무엇이고 난 당신 없이 못살겠다. 사랑이 전부다 되었습니다(삿16:15-17).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게 자게 하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삼손의 힘이 없어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붙잡아 눈을 뽑고 끌고 가사로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삼손은 이제야 언약안으로 들어갑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속으로 들어갑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언약의 하나님을 보여줄 결정적 이벤트만 남아 있습니다. 삼손의 나실인됨은 삼손이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해서 나실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실인을 하나의 제물로 삼아서 죽였습니다. 삼손의 죽을 때 죽인자가 삼손이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 많았습니다(삿16:30).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만 일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책임자는 하나님 스스로 되십니다. 삼손이 아닙니다. 삼손이 그렇게 한 후 그것은 하나의 이벤트입니다. 그 순간 뿐입니다.

지금 모세 율법에서 다윗언약으로 어떻게 원활하게 넘어갈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구약성경에서 무척난해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겠습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즉 범죄한 이스라엘 내부에 긴급투입된 나실인에 의해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수 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준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율법준수는 구원의 혜택을 입은 이스라엘 손에 맡겨놓을 수가 없습니다. 알아서 잘해라고 부탁할수 없는 문제입니다.

율법준수의 완성은 모든 사람이 하는 행위가 율법을 위반 것이라고 다 들통 난 이후에, 아무도 율법대로 살지 못할 때(언약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시니) 율법대로 산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 사람이 왕이 됩니다.

사사시대와 같이 일어난 사건, 새싹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과 삼손이 같은 시대 사람입니다. 분명히 얼음장인데 안에서 새싹이 돋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나라이지 너희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요청한다고 도와주고 하는 식으로 유지 진행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요청할 때 도와주되 도와줌을 통해 이스라엘은 도움받을 존재가 못되는 것을 파악할 뿐입니다. 정작 이스라엘, 거룩한 나라는, 숨겨진 다른 움직임에 의해서 아무 차질 없이 진행됩니다

목사님들이 목회할 때 교인들이 이사가고 하면 아이구 망했구나 하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교회는 망한적도 없고 망할이유도 없습니다. 주께서 보내주신 자는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는다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6장3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읍시다. 나와 연계시키비 맙시다. 나는 농땡이고 게으르기 때문에 일이 안된다고 할 분이 아닙니다. 나 지쳤다. 너 때문에 못하겠다는 주의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항상 이벤트만 남길 뿐입니다. 혼자 울었다가 웃었다가 하지만 전체적인 주님의 일은 차질없이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고백속에는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고 하면 절대로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질수 없습니다. 내가 관리해야 할 내 인생이 아닙니다.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면 망합니다를 자인하면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사도행전16장에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들이 자신들을 심히 괴롭게 하니 귀신을 여종에게서 쫓아 내버렸습니다. 이 일로  돈벌이가 끊어진 것을 여종의 주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결국 감옥에 갇히게 합니다.

감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는 중에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합니다.

이때 바울이 소리질러 우리가 다 여기있다고 할 때 간수가 떨며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묻지요.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네가 구축한 현실세계, 애굽에서 빠져 나올 수 있으리라. 네가 상상도 못한 세계를 맛보게 되리라. 그것은 네가 손을 댈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았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율법이 지켜지는가입니다. 만일 지키지 않으면 없애지요. 없애는 것은 나중에 없앱니다. 지금 없애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율법 기능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해 오해해서 율법에 대해 반대한다는 기능을 해야 합니다.
사사기20장에 이스라엘백성들이 법대로 법대로 행했습니다. 그 결과는 베냐민지파가 날라가버렸습니다. 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 무슨 짓을 했는가를 소급해서 보니 율법대로 행했습니다.
율법대로 행하면 악한자는 죽이고 신실한 자만 살아가게 됩니다. 문제는 그렇게 했는데 결과가 열한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열한 지파로 살면 되잖아요? 안됩니다. 왜냐하면 야곱언약에 의하면 열두 지파가 다 복을 받는데 베냐민 지파가 빠져 버리면 야곱언약과 다른 노선으로 간다는 표가 나 버립니다(창49장). 마치 핸들을 제대로 돌렸는데 차는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현지 선수가 안되면 용병을 찾아야죠.
언약이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백성 입장에서는 저주 받은 백성입니다.
저주받은 백성중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 이름이 룻입니다. 저주받은 백성 룻을 만나게 되는 과정은 언약이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이 믿음이 없어 약속의 땅을 버리고 모압땅으로 내려감으로 그곳에서 룻을 만납니다.
그곳에서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 둘이 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후 빈손으로 베들레헴으로 돌아 옵니다.

나오미의 뜻은 즐거움, 희락인데 자신을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즉 괴로움입니다(삿1:20).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의 신학은 무엇일까요? 회복입니다. 이것은 한국교회 신학 문제점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바로 통일교교리입니다. 이것과 비슷한 것이 지방교회입니다. 웟치만니, 휘트니스 리입니다. 그런데 구속사, 하나님 나라 이야기 하면서 회복이라는 말이 또 튀어 나옵니다. 성경에는 회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회복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회복을 시도했지만 절데로 회복되지 않게 하십니다. 회복이 되어 버리면 그동안 자신이 저지런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움을 요청하는 자의 원하는 바를 절대로 채워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 편입니다.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들를리에 불과합니다. 콩국물 얻어 먹을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맡은 직분은 천사가 부르워하는 직분입니다(벧전1:12).

나오미가 모압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때 빈몸으로 오지 않습니다. 이름이 마라로 바뀝니다. 마라와 나오미의 뜻은 반대입니다. 기쁨으로 갔다고 슬픔으로 돌아옵니다.
여기서 나오미가 고백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리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나를 괴롭게 하셨다. 전능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셨다.

정말 조화되지 않는 고백입니다. 목사님 간증하겠습니다. 네. 간증해 보세요. 저 아파트 불이나서 일억원을 물어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분이 사랑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끝. 
그 다음에 누가 일원원을 주더라. 이런 이야기 없습니다. 새 아파트를 주더라 그런 이야기 없습니다. 지금 나오미의 상태가 이런 상태입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비로소 저는 전능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이전까지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신의 편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편일줄 이제야 알았습니다. 주어의 자리에 절대로 다시 들어올수 없습니다. 회복될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 예수님이 사라진 후에도 결코 주어의 자리에 자신들이 들어 올수 없습니다. 끝자리로 가야합니다. 물론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면서. 나 이렇게 망하게 하셨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끝.

여기에 룻을 연결점으로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출애굽기에서 고엘사상이 나옵니다. 후견인 사상입니다.
욥기19:25,26절에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 후견이 사상이 출애굽의 중심을 이룬다고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합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함으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싲음을 들으리라  나의 노가 맹렬함으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22:21-24).”

이스라엘이 고아요 과부일 때 후견인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약속의 땅에 가게 되면 역시 후견인 때문에 축복받아 산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서 후견인이 계시다는 것을 티내야 합니다. 어떻게 티를 내느냐 하면 주위에 고아와 과부가 있으면 그 고아와 과부의 자리가 원래 내자리다. 원래 내 모습이었어. 그러면 지금 내가 고아가 아닌 것은  폭만큼 후견인에게 감사해야 할 폭입니다. 고아와 현재의 나 사이의 폭. 감사의 폭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 율법, 흔히 구약학자들은 사회법이라고 합니다. 사회법이 아니지만 그냥 용어를 사용합니다. 사회법을 말할 때에는 후견인 사상 즉 나는 고와와 과부였었다는 것을 경유하여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냥 돈을 주는 것은 동냥이 되어 버립니다.
교회에서 구제할 때 여유있는 사람이 여유 없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구제가 아닙니다. 그 거지가 본래 나의 모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주님의 것이지요. 주님의 것으로 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비를 멸시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너를 죽여 너희 아내를 과부로 너의 자녀를 고아로 만들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가 되면 땅을 잃게 됩니다. 땅을 잃으면 종으로 팔려 가든지, 빚을 내서 농사를 짓습니다. 그런데 빚을 못 갚으면 몸으로, 종으로 팔려 갑니다. 노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유발시킵니다. 그것은 7*7=49. 49년 다음의 해가 희년입니다. 요즘은 목사들 노는날로, 안식년이라 해서 월급다 받고 쉬는 것으로 이용해 먹지요. 개척교회하는 사람은 상상도 못할일이지요. 월급주면서 놀아라고 하지요. 평소에도 노는데 또 놀아라고 합니다.

누가복음4장을 보면 희년(레25:8-12)사상을 예수님께서 복음으로 연관시켜버립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누구시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와 함께 동행하셨다가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동행하십니다. 동행하는 위치가 우리가 싫어버린 바 된 위치에 가 계십니다. 왜냐하면 힘으로 버티는 곳은 애굽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주님이 됩니다. 십자가의 잔을 거부했다면 절대로 주가 될 수 없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42).”
예수님은 구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결과만 먹으려고 하지요. 그러나 과정, 과정이 우리가 새로 살아갈 활주로입니다.

신약에서 이미 구약을 인용했기 때문에 구약을 모른다고 하면 안됩니다. 성도로 하여금 구약속으로, 신약속으로 밀어넣어서 그들의 갔던 그 경로를 밟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있다는 인식 자체가 얼마나 하나님을 힘들게 했는지를 그들도 몸소 겪어야 됩니다.
물론 겪다가 다 교회를 뛰어 나가겠지요.

룻기에서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보아스가 어떤 인물인지는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다만 나오미가 보아스를 끌어 들일 때 율법을 동원시킵니다(룻3:13; 신25:5-10).
사사시대에는 율법을 잊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려는 기회가 어떻게 왔습니까?
풍족할 때, 남편 살아 있고, 자식 둘 있을 때 율법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의지할 만한 고엘, 후견인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이방 땅 모압을 다녀오면서. 이제 믿는 구석은 이방여인 룻 밖에 없습니다. 이방인 룻은 율법과 상관없습니다. 나오미만 율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나오미는 이방인 룻을 율법과 관련시키는 일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사는 사람과 결혼시키려고 합니다. 율법속으로 룻을 밀어 넣습니다.
나오미는 계산합니다. 벌써 저쪽에서 썸이 왔습니다. 뭔가 썸띵이 있었습니다.
보아서가 재벌 3세가 아니면 나오미가 룻을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나오미는 어떻게 먹고 사는가가 문제입니다.
보아스는 법대로 하자고 합니다.  자신은 기업무를 자 2순위라는 겁니다.
기업을 무르준다는 말은 기업을 원상복귀해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업무를자 일 순위는 계산해 보니 자신의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기업을 무르지 않겠다고 합니다. 돈은 헛된 곳에 쓰지 않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보아스는 그 헛된 돈을 자신이 쓰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아스와 룻이 결혼을 합니다. 보아스아 룻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룻4:14,15).”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 났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씨형제 결혼법, 즉 신명기25장에 나오는 말씀을 확대해석해 버립니다.
여기에 나오는 룻이 마태복음1장 예수님 족보에 들어갑니다. 왜냐하면 언약이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있는 이스라엘을 없는 이스라엘로 만들고, 살아 있는 이스라엘을 죽은 이스라엘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약에 의하면 백성이 있어야 언약을 이루시기 때문에 없는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쪽에서 없다고 여기는 이방쪽에서 이스라엘의 씨를 만들어 내서 있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이 오히려 진짜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훼방하는 훼방꾼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죄인으로 구원받게 하십니다.

마태복음1장 족보에서 에게서(ejk)가 다섯 번 나옵니다.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마리아에게서.
‘에게서’가 나올때마다 철도 노선이 쫙쫙 바뀌게 됩니다. 이스라엘혈통이라고 여겼던 것이 새로운 혈통의 개입으로 바뀌면서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멜기세덱의 족보로 날아갑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족보도 없는 세계로 날아갑니다. 인간손으로 가는 것은 차단되어 있습니다.
창세기3장에서 24절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차단시켜놓은 것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아무도 자력으로 생명나무가 있는 곳으로 갈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상에 남겨진 여자의 후손, 즉 생명의 후손, 즉 예수님이 관여한 여성을 통해 그 비행기는 멜기세덱 족보로 날아갑니다. 그리고 생명의 나라에 도착됩니다. 복음의 비밀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전1:22-24).
남들이 보기에는 부끄럽고 어리썩은 것이지면, 미련한 거이지면, 거리끼는 것이지만 오직 성령으로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십자가는 어떤 조건, 어떤 생김새, 어떤 행위를 따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만 믿는다면 누구나 구원받습니다.  간단명료합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 것이 너희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예수님은 존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존재가 아닙니다. 피라는 사건입니다. 우발적 사건입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소유당함만 있습니다. 만일 내가 소유하게 되면 나는 어느 자리에 앉습니까? 주체자리에 앉습니다. 내자 술어쪽으로 밀려야 주님이 나를 소유한 것이 되고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겠지요.

모세율법과 왕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모세 율법은 개인개인이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언약에서는 왕 한 사람이 지키면 다른 모든 백성이 지키지 않아도 지켰다고 쳐주는 새로운 언약시대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되려면 율법을 아무도 지키지 못했다가 규정되면서, 없는데서 생기는 율법지키는 왕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왕을 구해야 합니다(삼상8장). 그 구한 왕이 사울왕입니다(삼상10:17-24). 사울왕에게는 백성들이 원한 왕의 소망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격체로 사울이 등장해야 합니다. 사울의 역할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신과 인간의 대결입니다.
언약의 하나님과 언약지키지 않는 백성과의 대결구조에서 엉터리인 백성들을 대표해서, 엉트리같은 율법과 사상을 토해내는 가장 앞장선 역할을 사울이 해 주어야 합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은 인간이 택한 왕으로부터 핍박받고 고난 받는 왕으로 등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언약은 유지되어야 하니 기름부음받은 것은 계속 유지시키지요. 그래서 다윗은 자기 손으로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삼상24:6; 26:11; 삼1:14)”
동행하는 하나님이 하시도록 했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은 어떤가요?
똑같이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쫓겨다닐때에는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였지만 안정된 자리에 있을 때에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주인공이라 생각했습니다.
인구조사할 때 요압장군이 반대했지요(삼하24:1-3). 요압이 다윗왕에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아 백성이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께서 격동시켰기 때문에 기어코 인구수를 세라고 명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고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그는 자신이 범죄하였고 악을 했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말씀합니다.
다윗은 껍데기로 주인공은 예수님이셨다. 신학을 배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정답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사시대에는 왕이 없어 자기 소견에 옳을대로 행합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이 있습니다.
당시 한나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엘가나의 아내입니다. 그에겐 브닌나라는 아내도 있었습니다. 브닌나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상황은 마치 아브라함언약시대에 사라와 하갈의 관계와 흡사합니다. 브닌나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복주십니다. 의로울 때 복주십니다. 따라서 나는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아들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믿음좋다고 하고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은 좋은데 자식있습니까? 자식없지요? 자식도 없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복받았다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내 놓을 것도 없으면서 복받았다는 일방적인 자기 주장입니다.

한나가 아무리 보아도 자신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데 브닌나가 자꾸 약을 올립니다. 심히 격분하게 합니다. 하나님께 따집니다. 하나님이여 약속대로 해 주세요.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들은 대가 끊이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한나에게 아들이 없습니다.
불임여성입니다. 사라,리브가, 라헬 모두가 불임여성이었습니다.
특히 리브가를 보면 리브가가 시집갈 때 오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 것이고 네 씨가 원수의 성문을 열것이라고 했습니다(창24:60).
그런데 막상 시집가니 한명도 낳지 못했습니다(창25:21). 하나님께서 임신하지 못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막습니까?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신다는 이 개입이 하나님의 언약의 개입으로 증거되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을 얻었을 때 내 힘과 능력, 잠재 능력으로 얻었다는 것은 누구나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낳게 하셨다고 했을때에는 그전에 당황스런 상황, 난처한 상황이 벌어져야 합니다. 이럴 때 아들을 주시게 되면 아들만 오는 것이 아니라 계시가 함께 따라옵니다. 그 계시에서 새로운 언약노선이 펼쳐지면서 기존의 육의 노선과 싸우게 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가 싸움에 돌입됩니다. 이것은 한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하니 그제서야 아들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진작 주시지 왜 안주셨습니까? 왜 그렇게 내가 멸시당해야 했습니까? 이렇게 주실걸 왜 빼시다가 이제야 주시는 겁니까? 힘들게 해놓고 왜 주시느냐?

그냥 주시면 그 자식이 내 자식이 됩니다. 그러나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자식을 주셨다면 그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다루어진 하나님의 자식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래서 한나가 하나님께 드립니다.

사무엘이 어릴 때부터 들어간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에 관심없는 시대입니다.
백성들이 율법에 관심 없으면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았습니다. 십일조 제대로 내지 않으면 십일조를 받아 생활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자기 배부터 채우지 않으면 살지 못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엘가나의 자식에서, 한나의 자식에서 엘리제사장집으로 갑니다. 사무엘은 아빠 엄마가 없습니다. 사무엘의 아빠 엄마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자식과의 싸움이 벌어집니다.
율법을 놓고 인간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사무엘이 개입되면서 위기가 옵니다. 둘줄 누구하나가 제거 됩니다.
이가봇 사무엘상5장21절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제사장, 그리고 비느하스의 아내가 한 날에 죽습니다.
엘가나 가문은 왕가문이 아닙니다. 사무엘은 위에서 내려온 가문입니다.
사무엘 가문도 없습니다.
다만 사무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기준 엘리가문을 무너지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하나님이 사무엘과 함께 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은 뻔히 압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켜야 하는 가문이 무너진 상황에서 율법을 지키는 가문의 등장은  사무엘 본인도 모릅니다. 새로운 가문이 옵니다. 어떻게 아느냐? 사무엘의 엄마의 찬송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삼상2:10)”
하나님이여 내 아들이 기름붙는 자의 가문이 새로운 율법의 가문이 되게 하옵소서. 한나가 이렇게 찬송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한나를 통해 찬송케 하신 것입니다.

여기 한나의 찬송을 마리아가 표절하듯이 그대로 해버립니다.
기름부은자가 등장할 것이다. 왕이 등장할 것이다. 사무엘 본인도 모릅니다.
지금 모세언약이 다윗언약으로 넘어가는가 연결고리를 설명하는 중입니다.
인수인계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쪽이 망합니다. 망하는 속에서 고난과 핍박이 일어납니다.

사사기 노선이 있습니다. 왕이 없음으로 소견에 옳은대로 합니다.
또하나 노선이 점으로 나와 있습니다. 점으로 끝난 곳에 실선이 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모세율법의 바탕위에 다윗언약 바탕으로 인수인계합니다.
그러면 구약은 이미 지나갔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가 왜 알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도레미파솔을 깔고 있습니다. 언약을 그대로 밟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십자가가 무엇입니까라고 할때에는 구약을 포함해서 이해가 되어져야 합니다. 그냥 오셨다. 피흘렸다. 피 믿으면 끝이 아니라 구약에서 어떤 식으로 활주로에서 동서남북으로 움직이는가를 보아야합니다. 어떻게 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죽어야 벗어나지 죽지 않으면 벗어나지 못합니다.

고린도후서5장에서 사도바울은 소망이 하나있다고 합니다.
8절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죽는 것이 소망입니다. 할수 있다가 아닙니다. 교회기둥에 올해 목표는 죽는 것.
선지자를 섬겨라 이런 것 필요없습니다. 죽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죽여주십니다. 죽을 때 고맙다고 죽습니다. 다윗도 죽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오시면 왜 안되느냐? 다윗왕을 거치지 않으면 언약의 깊이를 갖지 못합니다. 괜찮은 왕 왔으면 좋겠다해서 괜찮은 왕 와도 믿음이 안생겨요. 천국가는 믿음은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간의 언약속에 주어진 성자의 믿음이 와야 천국문이 열립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시24:7)” 이것은 다윗왕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지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영원한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본모습, 시편의 본모습이 보입니다.
사무엘도 어리둥절합니다. 세 번씩이나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릅니다. 물론 사무엘도 엘리도 처음에는 몰랐지요.

사무엘은 사사입니다. 장기근무 사사입니다. 사무엘이 왕은 아닙니다. 왕에게 바톤을 넘겨줄 사사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사사와 사무엘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기존의 사사는 이벤트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기존의 율법체계가 아님을(부정) 보여주면서 바톤을 넘어주는 두가지 기능을 합니다.

사무엘이 왕이 아닌 이유는, 엘리 아들들의 행실이 나빴지요. 그런데 사무엘 아들들로 마찬가지입니다(삼상8:1-3).

왕이란 반드시 세습됩니다. 사무엘은 사사이기 때문에 세습되지 않습니다.
사무엘은 율법이 아니다를 말해 줍니다.
사울왕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사무엘을 초청해 제사를 드리고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습니다. 도저히 기다리지 못해서 사울왕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왔습니다. 누가 잘못했습니까? 약속시간 어긴 사무엘이 잘못했지요.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여호와께서 당신을 버려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왕으로 삼았다고 합니다(삼상13:14).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자신이 늦게 와 놓고 왜 여호와께서 명하신 명을 지키지 않았냐고 책망하지요. 약속은 사무엘이 지키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 모든 잘못은 사울왕에게 있답니다. 이게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선지자면 다냐? 왜 억지를 부리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이 어처구이 없는 행동을 합니다. 합리적은 해석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사무엘의 해석은 미래에서 현재에서 과거를 제해석합니다.

요한복음6장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도 갈래라고 하니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계시는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보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수 없다고 하시지요. 내가 너희 열둘을 택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야기가 긍정적으로 좋은 분위기로 끝나면 되는데,  너희중  한 사람은 마귀라고 합니다.
왜 분위기를 깹니까? 이미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을 가룟유다에게 지울수 없지요. 예수님이 사탄을 택했잖아요. 그렇다면 자기도 모르게 불려 왔는데 그 책임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은  정의 사회 구현에 전혀보탬이 안되는 논리입니다.

가룟유다의 일을 하라고 지시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파는 일을 하라고 하는줄을 몰랐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시나리오에 말려드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세상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사람의 합리적이고 이성적 논리로서 따질 수 없는 논리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돌리지 마세요. 이것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권이 되면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팔았다가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고 예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에 의해서 피흘리신 예수님, 피해입은, 처단받은 그분만이 주님입니다. 그분의 주권, 언약적 주권입니다.

남는 것을 불합리입니다. 우린 똑똑하고 정도를 걷고자 했지만 그 정도가  불합리와 마주칩니다. 어떻게 설득되지 설명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영이 와서 믿어집니다.



연대강의 17 녹취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기준들을 언급하셨습니다.
몇 가지만 뽑아 보겠습니다.
처나, 자식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눅14:26).
천국에 어떻게 들어갑니까라는 정답은 이렇게 하시면 갑니다라고 하는 것이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런 경우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고 더불어 제공해 주어야 제대로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을 빼 버리니 어떤 경우에 천국에 못 가느냐에 대해서는 교인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지만 성경에는 있습니다.
처나 자식이나 남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처나 자식은 내 혈육의 연장입니다.

또 예를 들면 누구든지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마18:3).
아들이 없는 자에겐 영생이 없습니다(요3:36).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갑니까만 말하지 말고 어떻게 할 경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까를 함께 말해 주어야 천국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이런 경우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첫 번째 말씀드린 것이 처나 자식이니 아비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아들이 없으면 천국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사회적 관계라고 한다면,

고린도전서16장22절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십니다. 천국을 설명하면서 이것을 겸하여 증거해야할 필요성이 있겠죠.
가게 물건사면서 이거 얼마입니까 이거 얼마입니까 그러면서 나갈 수 있잖아요.

천국갈수 없는 조건 네 가지만 뽑아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내가 내 의사에 따라 의사결정을 제대로 하게 되면 천국에 가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지옥 가는 것으로 보이겠죠?
처나 자신이나 남편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겠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겠어. 예수님을 믿겠어. 주님을 사랑하겠어라는 것이 성립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미끼상품입니다. 정말 천국에 와보니, 자유의지라는 것이 천국 오는데 하나도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을 부활시킵니다. 요한복음5장25절에 죽은 자들이 주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잖아요.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입니까? 군데군데 공동묘지가 있지요. 오는 중에도 봤습니다. 그 죽은 자들이 죽어서 어디 갔을까요? 우린 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의 음성을 들어 호출되는 대상이 됩니다. 누구나 죽으면 호출당합니다. 호출당할 때 그들이 변명할 수 없습니다. .
그때 우리 마을에 복음 전하는 사람이 없어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라는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이미 택한 자만 구원하기 위해 적절하게 선교사, 복음전하는 자를 보내셨습니다. 모든 작업은 하나님이 손을 쓰셨습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요건을 어떤 인간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너, 자기를 사랑할래 아니면 나를 사랑할래라는 질문까지 나옵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고 합니다(눅14:26). 우리가 미워하는 재미로 살아갑니까? 오늘도 나를 미워하리라. 그러며 살아갑니까? 오늘도 열심히 자기를 미워하자로 살아갑니까? 아니면 그래 믿을 놈은 나밖에 없어. 나만 믿어야지라고 하지, 나는 믿을게 못돼, 나를 미워해야돼라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하루하루 이것을 교훈으로 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요건들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절대 지킬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것을 군데군데 깔아 놓고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걸려 넘어지게 하시면서, 넘어져야 마땅하고 천국 못와야 마땅한데 나 말고 다른 요인에 의해서, 주님이 스스로 깔아 놓으신 장애물을 주님께서 이겨내게 하셔서 천국 오게 하십니다.

특히 고린도전서16장22절에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예수 믿는 나를 사랑했지. 주를 믿는 나를 사랑했지. 주님보다 내가 더 귀합니다. 주님은 나를 천국보내주시는 이용물입이다.
어떤 경우에 주님을 사랑합니까? 왠지 모르게 내가 미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이 얼마가지를 않습니다.

구약에서 새언약으로 넘어갈 때 이 부분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99퍼센트는 나를 사랑합니다. 일기장에 오늘 맑았다. 오늘도 주를 사랑했다. 이렇지 않잖아요.
밥이 있는데 왜 나는 맛있는 밥을 원했는데 왜 밥이 맛이 없느냐? 오늘 소풍인데 비가 와서 기분이 나빴다. 왜 비가 오면 기분 나쁩니까? 이런 것에 기분이 나쁘다는 것은 내가 내 사랑하는데 방해 요소가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에 다 저촉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도무지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것들만 만나는데 이상하게 천국에 도달했습니다. 도대체 내가 지키지 못한 율법을 누가 다 지키셔서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정답으로는 압니다.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이것을 구약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의 연속적 흐름은 무엇입니까?
일번, 이스라엘 사람이다. 이번,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정체성이다. 삼번 율법이다. 사번, 땅이다. 오번, 선지자다. 육 번 왕이다. 칠 번 언약궤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연속된다는 것은 감 잡았는데, 실제로 연속되는 실체는 일곱 개중  어느 것입니까? 이중에 답이 있습니까? 답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실제로 읽어 보면 다닥다닥 끊어져 있습니다. 구약신학자들, 구약박사학위 받는 사람들은 난처했습니다.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인이고, 성경신학자인데, 그들이 해야 할 작업은 구약과 신약은 이러이러해서 연결이 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유대교가 됩니다. 유대교는 기독교를 참된 유대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디서 사이비 유대교가 진리인척 해? 어디 구약에 예수그리스도가 있어? 아직도 이러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유대교 입장에선 유대교를 모방한 하나의 사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15퍼센트가 급성분자입니다. 군에도 안가고 세금도 안냅니다. 안식일날 시장가서 문닫으라고합니다. 나머지 85퍼센트는 분해합니다. 돈은 자신들이 다 벌어 세금 내는 데, 그들은 병역 혜택 있지요. 세금 냅니다. 그들은 자신들 혼자 독점적으로 하나님 믿는 것처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를 믿지 않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지킨다만 믿어요. 이 나라를 여호와께서 지킨다고 믿는 사람들이지 개인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나라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던 저렇게 되던 이스라엘은 연속된다는 입장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렇다 칩니다.

그런데 구약학자들이 구약과 신약이 연결된다는 논문을 내 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세계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신약성경을 연구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연구합니다. 혹시나 메시아일까 하여연구합니다. 예수님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말씀 외에는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연구할까요 하지 않을까요? 예수님에 대해서 연구하겠지요. 그런데 연구결과는 예수님은 사이비이다 입니다. 그 사람들 바보 아닙니다. 합리적 이성을 갖고 있어요. 돈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상적으로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죽였던 그들은 미드라쉬, 탈무드 성경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법을 위해 인간이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건 그것이고 문제는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성경학자들이 무엇을 내 놓아야 하는데 그들이 유대교학자들 보다 더 잘 내어 놓을 수 있느냐 입니다.

조금 전 당회 실에서 서재를 보니 죤브라이트의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면 신약과 구약을 연결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히트 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죤브라이트의 논문은 나이 어린 신학자에게 욕 많이 얻어 먹습니다.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해서. 연결될 자료도 없는데 억지로 연결했다는 겁니다.

저는 말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고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구약성경과 사도들이 인용한 구약성경의 연결고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시 없습니다. 끊어져 있습니다.
마태는 너무 쉬워요. 마태복음1장23절에 이사야7:14절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라고 합니다(마1:25). 이것이 오늘날 구약학자나 신약학자나, 우리들이 볼 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이 네자입니다. 예수는 두자입니다. 이것이 같아요 같지 않아요. 다르지요. 예수님의 이름이 예수가 아니라 임마누엘이라고 한다면 구약이사야가 예언한대로 진짜 올 메시아가 임마누엘이네 하지 않겠습니까? 임마누엘 맞네. 그러면 우린 아무런 의심 없이 아주 쉽게 받을 수 있습니다. 마태는 자신이 틀린 줄도 모르고, 이게 무슨 자신감입니까?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런데 25절에는 예수라 하지요. 맞지 않잖아요. 마태혼자 일방적 주장이잖아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고 해놓고 맞지 않잖아요. 왜 그렇게 신약성경에 과잉충성해서 권위를 줘서 넘어갑시다라고 합니까?
왜 그냥 넘어갑니까? 이것 설명한 이론 있습니까? 예수님과 임마누엘이 맞지 않는 것.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번역은 참 잘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합니까? 임마누엘과 예수의 뜻이 다릅니다.

제가 말씀드립니다.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가는 연결고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있습니다.
죤 브라이트는 역사적으로 따집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어떠한 근거도 없습니다.
B. C. 400세기경 마지막 선지자가 말라키 선지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까지, 대략400년 동안 계시는 없었습니다. 400년 동안이 끊어진 다리를 남아진 유대인들이 어떻게 구라로, 계시가 아닙니다. 구라로 자신들의 존속을 정당화시켰습니까?
무엇으로 매꾸었습니까?
그들이 매꾸는 반복은 과거 이스라엘이 한 것을 인위적으로 흉내 반복합니다.
선지자들이 있을 때에는 선지자들이 언약을 갖고 새로운 일을 제공하고 새로운 일을 제공했습니다.
새로운 일을 제공할 선지자가 끊어졌습니다. 하늘로부터 새로운 것은 오지 않고. 사람들이 여호와를 떠나니 여호와 중심으로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비책, 장치, 종교시스템같은 것을 따로 마련해야겠지요. 그래서 그들의 연속성이라 주장할 수 있는 것을 내세웁니다.
혈통입니다. 다윗의 혈통이 있는 한 자신들은 비록 선지자들이 없지만 연속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처나 자신이나 남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혈통이 하나님언약의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근거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린 일차적으로 내 자신 내 아내 나 남편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다라고 했습니다.
성전의 뜰은 이스라엘 뜰, 여성의 뜰, 이방의 뜰, 나가면 예루살렘입니다.
현재 예루살렘은 네부분으로 부동산 등기가 되어 있습니다. 처음은 유대인들이, 두 번째는 동로마제국이, 십자가 운동 때 서유럽 쪽에 점령(신성로마제국), 마지막엔 오스만 투르크제국, 이슬람에 점령했습니다. 지금은 현재 이스라엘이 점령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연속성이라는 것은 유다, 다윗, 아브라함혈통만 있으면 하나님에게서 끊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연속성이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끊어지지 않았던 혈통과 메시아가 만나면 하나님께서 그동안의 한을 다 풀어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죤 브라이트는 그 흔적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혼혈아들이 차고 들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순수혈통 없습니다. 느헤미아까지는 순수혈통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 후 순수혈통이 없습니다. 지도자급도 없습니다. 지도자급들이 순수혈통 주장하다가 바사, 헬라 마케도니아가 지배할 때 돈 많은 자들이 돈을 주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짜들이 지도자가 되었고, 덩달아 이방여인들이 왔고 이들이 권력자와 관련되면서 새로운 혈통들이 파급됩니다.

요즘은 DAN를 통해 순수혈통을 확인하지만 몇 대만 지나버리면 순수혈통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순수혈통으로는 안되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 한 것이 우리가 율법을 정리하자는 겁니다.

헬라 마케도니아 이후에 나라가 넷으로 갈라집니다. 톨레미왕국이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합니다. 셀류쿠스 왕조가 시리아 터키 쪽에 자리를 잡습니다.
톨레미왕조가 이스라엘을 봐 주었습니다. 이 틈에 이집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70인경을 만듭니다. 혈통이 깨어 졌고, 성전도 세우면 다 부셔지니. 남은 것은 말씀 붙듭니다. 구약성경을 정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정경을 정리하는 유대인들이 이집트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같으면 예루살렘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이어야 믿음이 있는 자라 할 수 있잖아요.
이들은 신앙 내팽게 치고 돈 벌라고 이민간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태극기를 미국 이민간 사람들이 보존한 것과 같은 겁니다. 정체성을 저쪽에서 찾습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가 가짜가 됩니다. 우리는 핍박받으면서 포로 귀환한 후손들인데 우리가 전통이다. 이집트 쪽에서는 너희들 전통 전통하지만 혼혈아 되었잖아.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사랑하잖아. 이렇게 파가 생겨버립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떤 전통성도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성경은 이집트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이 사람들은 통치 받고 있기 때문에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할례 못하게 했습니다. 집회 못하게 합니다. 청년들이 유대교 될까해서 벌거벗고 하는 경기장 세웠습니다. 모든 곳에 아폴로 신전을 세워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민간 사람들이 더 잘 지킵니다. 예루살렘은 개판이 되었습니다. 메시아 온다고 하지만 기다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순수하지 않고, 더러운데.
무슨 연속성이 있습니까? 연속성 없어요.

남쪽 톨레미왕조와 위쪽 셀류쿠스 왕조가 일곱 번 전쟁을 합니다. 위에서 내려오면서 성전 밟고, 밑에서 올라오면서 성전 밟고. 예루살렘이 완전히 황폐화 됩니다.
이것이 다니엘 70이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일곱이레, 육십이 이레, 한 이레. 성전은 바사나라 고레스 왕에 의해 세워집니다. 이방인에 의해서 세워진 성정이 이방인에 의해 망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성전을 하나님에 의해서 성전을 부셔버립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성전 붙들고 메시아 기다리는 그런 발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혈통, 사마리아, 예루살렘 혈통 다 썩어 놓았습니다. 혈통 깨끗하니 혈통 깨끗한 것 골라서 구원하시겠지 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라입니다.

땅이 어디 있습니까? 그 땅은 70년 동안 안식하기 위해 내쫓았습니다. 돌아와 보니 힘센 나라가 점령했습니다. 아 언약 끊어졌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다고 하셨는데(시편89:34), 다 끊어졌습니다. 땅, 사람, 성전, 다 끊어졌습니다.
언약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언약궤 만들라고 지시한분도 하나님이시고 언약궤 불태워라고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보면서 하나님이 유다가 우상숭배 하니 바벨론을 통해 심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질까요? 감히 하나님 믿는 백성을 네가 모독하다니.
엘리야, 예레미야가 말합니다.
이런 소리 하지마라. 바벨론은 총동원 시킨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도대체 살리시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망하게 하시겠다는지? 이렇게 망하게 할 것 같으면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한번구원은 영원한 구원인데 왜 우리를 멸망시킵니까? 우리를 멸망시키는 것도 우리보다 더 잘 믿는 나라가 멸망시킨다면 우리가 할 말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보는데 남편이 사십구 년 만에 돌아 왔답니다. 그 아내가 알기로 그 남자의 여자가 다섯 명이고 지금 현재도 두 집 살림하고 있답니다. 엠비시 기자가 물었습니다.
사십구 년 만에 돌아왔는데 기분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대답하는 말이, 자신의 남편과 사귀는 여자가 자기보다 젊고 예쁘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데 나보다 늙고 못난 여인하고 사귀니 자존심이 상한답니다.

유다를 짓밟은 바벨론이 여호와를 잘 섬겼습니까? 아닙니다. 우상숭배의 온상의 나라입니다. 마르둑 신이 여호와의 신을 이기는 것처럼 되었지요. 그런데 그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여호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여호와가 여호와자신을 치는 게 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위한 하나님입니까? 절대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쳐버리면서 역사성이  진행될 때 인간들이 기대하는 역사적 연속성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 똑똑한 유대인들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긴 시간 동안 연속성이 있다고 했는데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알려 드리겠습니다.
죽음입니다. 죽음을 연속하는 것. 아벨의 죽음에서 스가랴의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언약에 의해서 죽는 자리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지난시간까지 모세언약이 다윗언약으로 넘어 왔는지를 했습니다.
다윗은 껍데기였고 다윗 속에 다윗언약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왕되기 전까지는 다윗이 고생했지만 다윗이 왕이 된 후에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착각했습니다.
착각하면서 벌어진 사건이 우리아 사건입니다.
암몬 즉 하나님의 원수와의 전쟁에서 우리아는 전쟁터에 나았고 다윗은 성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암몬과 전쟁하는 우리아장군을 죽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지금 이스라엘 왕다운 겁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전쟁의 훼방꾼입니까? 훼방꾼입니다(삼하11장). 어린애가 엿이 먹고 싶어 엿푸대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엄마가 돌아 왔을 때 엿 안 먹었어요 하지만 온 몸에 밀가루가 묻어 있지요. 다윗은 밧세바의 임신을 숨기기 위해 우리아를 죽인 후 입만 싹 닦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나단 선지가가 다윗에게 이야기를 하나 해 줍니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자, 하나는 가나한자인데 부한 사람은 양소 소가 심히 많았으나 가난한 사람은 암양새끼 한 마리밖에 없습니다. 암양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에게 딸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인이 왔을 때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해 자기의 양과 소는 아껴두고 가나한 사람의 양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해 잡았습니다(삼하12:1-4).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 왕이 대노합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가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다윗은 이렇게 율법을 어긴 사람은 죽여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죽어야 될 사람은 바로 다윗 당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순간 다윗은 산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 죽은 자입니다. 맞습니다. 죽어야 할 자가 다윗인지 다윗을 대신해서  우리아의 아내가 낳은 아이가 죽었습니다. 다윗노선은 죽었습니다. 다윗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왜 안 죽입니까? 그것은 다윗과 다윗언약이 관련 있기 때문에 다윗을 죽이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태어납니다. 우리아의 아내가 낳은 아이가 죽지 않으면 솔로몬이 결코 태어 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이 살려달라고 금식하며 울다가 아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었습니다.

그러니 부하들이 이 일이 어찌된 것입니까?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어찌 이렇게 하십니까? 할 때 다윗은 주께서 자신의 죄를 떼내어 주셨음을 믿었습니다.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삼하12:23)”

다윗은 다윗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언약에 의해 사용되어지라고 내 인생이 사용된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낳은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장 족보에서 다윗은 족보계산에서 빠집니다. 기록은 14대, 15대, 14대로 기록해 놓고 1장 17절에서 14대, 14대, 14대로 정리합니다.  여기서 빠지는 대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1장6절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아내는 누구의 아내입니까?
보통 아내는 한 남편의 아내이지요. 여기에서는 다윗과 우리아의 아내로 나옵니다.
솔로몬을 낳게 한 남자가 두 명입니다. 다윗도 남자, 우리아도 남자이름입니다. 남자가 두 명 등장하면서 철도 노선이 바뀝니다. 이것에 제가 말씀드린 ‘에게서’입니다.
‘에게서’가 들어가면 노선이 바뀝니다.
마지막이 마태복음1장16절에 마리아에게서가 나옵니다. 마리아에게서가 되면 비행기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지상에서 혈통은 연속성은 없습니다. 없는데서 있음이 되려면 철도노선이 하나라면 끊어지면 그것으로 끝이 나야 합니다. 그런데 철도 노선이 에게서가 나오면서 철도 노선이 바뀝니다. 끊기고 바뀌고 끊기고 바뀌고 끊기고 바뀝니다.
연속성이 없는 혈통인데 이 전체를 두고 연속성이 되었다고 해석을 해 버립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아는 혈통의 족보는 절대로 아니다입니다. 이 족보 속에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작용들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 스며들 때 마다 나타나는 현상이 죽습니다. 그러니 솔로몬 속에 무엇이 있는고 하면 다윗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고, 솔로몬의 아버지는 죽은 우리아입니다. 죽은 우리아의 자식으로 계승됩니다. 솔로몬 속에는 언약에 의해 죽은 죽음이 솔로몬 속에 담기면서 그 죽음만이 연속적으로 갑니다. 아벨의 씨대신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개입된 장소에서는, 그냥 죽으면 안되고 언약사건에 의해서 죽은 죽음의 사건을 연속시키는 작업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동행하십니다.

복의근원이 아브라함이었다 아니었다? 아니었다. 복의 근원이 어디로 바뀝니까?
네 자식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려고 할 때 야곱이 강탈해 가버립니다. 복의 노선이 야곱노선으로 가면서 야곱노선에서 야곱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습니다. 누굴 만나 죽었습니까?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이 사자를 만나 죽었습니다. 죽은 줄 어떻게 압니까? 야곱본인이 이야기하지요. 내가 하나님을 만났으나 생명이 보존되었다고 합니다(창32:30). 이름이 이제는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은 이제 본인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야곱을 살려갑니다. 사명에 종속됩니다. 사명이 주체가 되고 자신은 술어가 됩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습니다고 할 때 내가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소유하셔서 내가 주님 안에서 죽은 자가 되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죽어도 괜찮은 이유가 주님이 내 안에 자신의 인생으로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도 그 사랑을 사랑으로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미워하고 저주해도 그것을 미워하는 것으로 저주하는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누가 더 셉니까? 죽은 놈이 무슨 소리 못합니까? 그런데 내 안에 살아계신 분이 너는 나를 사랑했다고 규정해 버리면 결국은 천국갈 때 모든 장애물들은 함께 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극복됩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과 공로는 주의 이름에게만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복잡한 것 같지만 하나만 하면 됩니다. 나는 똘마니다만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종이 일한 후에 밭을 갈거나 양을 친 후 돌아왔을 때 종에게 않아 먹으라고 할 자가 있느냐 , 도리어 그더라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시중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6-10). 

주님 만났다고 주님과 맞먹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죽기 싫어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땅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건드립니다. 혈통 건드립니다. 그러나 이런 것 가지고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버립니다.
네가 죽어야 산다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는 맺느니라(요12:24)”
죽지 않으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하지 못한 것을 내가 할 테니 내 죽고 사는 곳에 네가 포함된다면  성경의 연속성속에 너도 포함된다고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고 하면서 다윗은 그 다음 14대에서 빠집니다. 우리아는 원래 죽은 사람이니 빠지고, 그래서 솔로몬부터 계산하면 딱 14대가 맞아요.

이제 죽음을 연속으로 한다면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솔로몬 속에 다윗언약이 들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했던 일 중에 여러 가지 일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잠언을 썼습니다.
예루살렘왕 솔로몬이 썼죠. 전도서도, 아가서도 솔로몬이 썼습니다.
그런데 잠언을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글입니까 아닙니까?
잠언을 보게 되면 잔소리입니다. 어찌나 잔소리가 많은지. 잔소리가 많고 스토리가 없습니다.
그게 과연 잔소리인가?
솔로몬의 위상이 무엇입니까?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연대연합강의 18 녹취
이스라엘이 두 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갈라져야 메시아가 옵니까? 갈라지지 않고 메시아가 오면 안 됩니까? 그런데 왜 북쪽 남쪽으로 갈라졌습니까? 갈라진 것과 메시아가 오는 것과의 특별한 인과관계를 우리가 찾아낼 수 있습니까?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시대 사람들은 천국 맛을 보았습니다. 온통 금입니다. 숟가락 젓가락도 금입니다.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돈을 주셨고, 건강을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건강을 주셨고, 원수가 망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는데 원수가 저절로 망했습니다. 저절로 고개 숙이고 들어 왔습니다.

솔로몬은 단지 기도하기를 거저 하나님이 다스려 달라고 했습니다(왕상3장). 이 혜택을 솔로몬과 백성들이 입지요. 그렇다면 역사는 끝이 났네요. 메시아 올 것도 없이 이 누림보다 더 호사스러운 누림이 없다면 이것이 만족스런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드라마가 드디어 솔로몬은 너무나 잘되었다 끝. 이것으로 드라마를 끝내면 좋은데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끝냅니까 끝내지 않습니까?
끝내지 않지요. 솔로몬이 메시아입니까 아닙니까? 메시아 아닙니다.

솔로몬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솔로몬이 메시아가 아니라면 솔로몬보다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하고 더 복되고 더 대단하고 더 지혜로운 분이 오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아들이 솔로몬보다 더 뛰어난 믿음과 지혜가 오면 아무 문제없이 깔끔하게 정리됩니다. 우리는 관찰자고 구경꾼입니다. 지켜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니 보자고 합니다. 솔로몬 믿음 좋네, 똑똑하네. 복주셨네. 솔로몬에게 잘 배웠으면 더 믿음 좋은 사람 오겠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둘로 쪼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11:13).
북쪽은 르호보암이, 남쪽은 여로보암이 다스립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 좋던 행복이, 축복이 왜 쪼개졌지? 돋보기 갖고 들여다봅니다. 우리는 관찰자, 구경꾼, 남의 나라 이야기를 듣는 입장입니다. 왜 깨어졌는가를 살펴봅니다.
성경은 우리가 보는 것을 이미 알듯이, 그에 대한 답변을 하십니다.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의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그가 또 그의 이방 여인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그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왕상11:5-8).”

하나님께서는 이런 솔로몬을 곧장 칠 수도 있지만 다윗의 등불(왕상11:36)을 생각해서 그때에는 치지 않고 그 후대부터 쪼개신다고 말씀하십니다(왕상11:12-13). 그렇다면 관찰자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릴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 믿음 좋은 것을 다 아시는데 믿음 좋은 사람이 왜 우상숭배 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허용하시는 가입니다.

우리는 항상 발전을 원하고 좋은 것이 누적되어 더 좋은 것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솔로몬을 지나자 말자 나라가 둘로 쪼개어 지니 우리가 어떻게 해석해야 될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둘로 쪼개어지는 것은 다윗언약의 구현체는 둘로 쪼개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윗언약에 의해서 메시아가 옵니다. 다윗언약이 지상체를 만나게 되면 그것이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되어 이 땅에서 쪼개어져  다 날아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있습니다. 솔로몬 재판아시지요. 열왕기상3:16절 이하에 나옵니다. 솔로몬 재판할 때 솔로몬의 지혜입니다. 솔로몬을 둘로 쪼개면 한쪽에는 지혜가 나옵니다.
솔로몬 이후에 드디어 지혜문서가 나옵니다. 욥기, 잠언, 아가서, 전도서, 시편이 나옵니다.

지혜문서가 액기서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솔로몬은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숭배의 댓가는 율법에 의하면 멸망, 저주 죽음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솔로몬은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제국은 무너져야 합니다. 그 무너지는 기간이 14대입니다. 솔로몬 제국이 무너져 포로로 잡혀갔던 나라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스가랴에 의하면 제 2 의 애굽입니다(슥10:10).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후 하나님의 약속은 두 번째 출애굽입니다. 첫 번째 출애굽은 어린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출애굽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릴 때 두 번째 출애굽이 성사됩니다. 그러면 두 번째 출애굽을 보전할 것은 율법이 아니고 지혜입니다.

솔로몬을 두 조각내면 지혜가 나오는데 이 지혜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어긴 인간이 지혜는 어기지 않겠습니까?
지혜는 인간이 어길래야 어길 수 없는 단단한 껍질 속에 있습니다. 율법은 인간이 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인간이 손탈 수 없는 곳에서 지혜가 작열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지혜서 자체가 헛되고 헛되기 때문입니다.
전도서1장2절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했습니다.
여러분 헛된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헛되지 않는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창세기4장에서 헛되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아벨입니다. 아벨이라는 용어를 전도서에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벨의 형 이름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던 가인이 뱀의 후손 쪽이 되어 버립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다고 생각한 가인에 의해서 헛되게 죽임당한 아벨 쪽이 여자의 후손 쪽입니다.

솔로몬을 두 쪽을 내어 지혜와 율법이 갈라지게 합니다. 이것이 솔로몬 이후에 갈라진 두 나라 중 지혜의 혜택을 입는 쪽이 있을 것이고 지혜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율법대로 망해야 하는 나라가 있을 겁니다. 율법대로 망한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입니다.
남쪽 유다지파는 다윗의 등불로 인해 지혜의 혜택을 입습니다. 그러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중 누가 더 나쁜가요? 둘 다 나빠요. 에스겔 선지자는 말하기를 둘 다 창녀인데 에스겔23장4절에 나옵니다. 어니가 먼저 창녀 짓을 하니(겔23:8) 동생이 언니보다 더 심하게(겔23:11) 창녀 짓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몰아넣고 그동안 인간이 손대지 못한 것이 인간을 구원합니다. 그러면 지혜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이스라엘의 멸망한 후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어떤 사람이라고 소문났습니까?
모든 지혜에 통찰했다고 합니다(단1:4). 다니엘이 지혜가 많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에게 당신 지혜가 많지요 라고 물으면 다니엘은 손사래 칩니다. 부담주지 마세요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느부갓네살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본인이 꿈꾸고 신하들을 모아놓고 어제 내가 꿈을 꾸었다. 그래서요? 꿈이 요상했거든. 그래서요? 그 꿈을 잊어버렸거든. 그래서요? 그 꿈을 찾아내라. 신하들은 항상 정상들입니다. 정상적인 답을 합니다. 임금님이여 임금님 개인이 꾼 꿈은 육체와 함께 살지 아니한 신들 외에는 왕앞에 그것을 보일 자가 없습니다(단2:11) 라고 지극히 정상적인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정상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정상적이고 합리적입니다. 이성적입니다. 정상적으로 비정상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때 느부갓네살이 아주 정상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내가  비싼 연봉주고 너희들을 고용했는데 이런 것을 알지 못하면 고용할 이유가 없지.
너희들은 분명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의 계시를 우린 알 수 있습니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나도 그런 줄 알고 내가 너희에게 월급주면서, 필요할 때마다 전쟁할 때마다 물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내가 진짜 신만이 아는 것을 이야기 하니 너희들이 그것은 신만이 안다고 답변하면서 우리는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지금까지 거짓말하면서 월급을 축냈다. 그러니 다 죽어야 한다. 그래서 바벨론의 모든 지혜 자들을 죽이라고 명합니다.

죽여야 할 대상자 가운데 다니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칩시다. 다니엘과 세친구가 죽는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연속성이 끊어집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대책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다니엘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보통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과 세친구가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하고 먹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는 지혜가 아니라 율법을 지켰습니다. 율법대로 지키면 다니엘과 세친구를 율법대로 지켜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율법 지킨다는 그것이 바벨론 나라에서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어떠한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율법은 아니까 지킬 수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지혜는 돌발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의 투입입니다. 지혜냐 아니냐는 우리가 지혜를 모르는 경우가 발각될 경우에 아하 지혜가 저쪽에 있구나를 아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벨살살 왕때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촛대 맞은편 석회 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보았습니다(단5:5).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글입니다(단5:25). 또 누가 해석합니까? 다니엘이 또 해석합니다. 다니엘이 손가락이 나타나는 것을 미리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글자내용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대략난감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다니엘은 왕에게 시간을 주시면 왕에게 그 해석을 알려 드리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한 것(꿈)을 밤에 환상으로 다니엘에게 나타나 보이셨습니다(단2:19).
다니엘 본인은 자신이 지혜롭지 않은 것이 압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사람들은 다니엘이 지혜롭다고 합니다. 다니엘의 지혜는 다니엘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결정적인 사실이 밤에 은밀한 것을 환상으로 보여주신 장면입니다.

여기서 다니엘은 자기에게 주어진 꿈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꿈과 자기가 속해 있는 이스라엘과의 연속성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힌 것이 아니라 바벨론이 멋도 모르고 삼키지 말아야 할 것을 삼켰기 때문에 결국 삼킨 너희들이 우리의 지혜자에 의해서 망하도록 전략이 그렇게 짜여 있습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단2:25-45).

그 이야기 듣고도 느부갓네살은 분노를 내는 것이 아니라 대인처럼 다니엘을 높여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습니다(단2:48).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죽지 않았다는 겁니다. 마르둑 신이 여호와를 믿는 민족은 잡았다고 우기지만 사실은 마르둑 신이 이스라엘을 잡아먹도록 하신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잡아먹히게 하셔서 이제는 이스라엘에게 내렸던 언약적 규정조항이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 전 세계로 확산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이스라엘 땅만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사로잡혀 간 모든 땅, 흩어진 곳들이 약속의 땅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입니다.

마태복음24장30절에서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고 하십니다.
누가복음21장35절에서는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지구상에 덮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개인적으로 살아날 대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책이 없습니다. 대책 세우지 마세요. 그냥 기다리고 반기세요. 우리가 주님반기는 것만 하면 됩니다. 반갑습니다. 이제 오시는 군요. 이것만 하면 됩니다. 무슨 대책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무슨 대책이 필요합니까? 대책이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율법에 속한 것이 아니라 지혜에 속했습니다. 율법이 깨어질 때, 즉 율법의 한계가 드러날 때 그 속에서 지혜는 기지개를 킵니다. 그 지혜는 율법 잘 지킨다고 소문난 이스라엘이 율법에 의해서 망한 후에 드디어 지혜가 기지개를 킵니다. 이 지혜를 인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호칭할 때 인자라고 하셨지요(마16:13). 에스겔을 부를 때 어떤 호칭을 사용합니까? 인자야라고 합니다. 에스겔은 B. C 586년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사로잡혀가서 바벨론 그발강 가에서 살았습니다(겔1:3).
에스겔은 동쪽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신이 동쪽으로 빠져 나가 포로 잡힌 사람들의 집단을 하나님의 성도가 되게 하셨다는 대목이 나옵니다(겔11:23,24).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연속성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솔로몬을 두 조각냅니다. 북쪽 남쪽으로 나눕니다.  솔로몬은 지혜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입니다.
이 솔로몬을 쪼갭니다. 지혜는 쪼개야 나옵니다.
창기 두 여자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삼일차로 낳았는데  한 여자가 밤에 그의 아들 위에 누으므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내 아들을 뺏어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서로 죽은 아이가 너 아이고 산 아들이 내 아들이다라고 우깁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판결했습니까?
칼을 가져오라해서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진짜 엄마는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짜 엄마는 그래 좋습니다.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로 나누라 하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두 번 다시 써 먹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은 이 수단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육과 교육이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똑 같이 흉내 냅니다.

둘로 나눌 때 진짜 엄마와 가짜 엄마를 가려냈습니다.
솔로몬 후 나라는 반드시 둘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대로 그냥 멸망해 버리면 건질게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시간을 초월합니다. 지혜는 시간의 저촉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시간에 따라 율법의 양태가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두 쪽이 나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대나무를 쪼개면 쫘하면서 두조각납니다.
지혜와 율법이 갈라져 흘러갑니다.
사무엘상하, 열왕기 상하, 역대상하를 역사서라고 합니다.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는 지혜문서라 합니다.

지혜문서와 역사서가 결합된 것을 두고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묵시문학은 지혜에 대해서는 역사끝 즉 종말을 채용합니다. 종말에는 역사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습니다.
역사서에서는 고난가운데 희망이 있다는 것을 채용합니다. 그러면 솔로몬 이후의 왕은 무엇입니까? 그 왕들은 가짜입니다. 모두 다윗혈통이지만 가짜입니다. 가짜라면 나라가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있어요.

가짜인데 왜 나라를 그대로 내버려 둡니까? 그것은 가짜 왕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가짜 왕이 있어야 합니다. 그 핍박받는 사람들은 진짜 선지자입니다.  여기에 진짜 라는 수식어를 왜 붙입니까? 왕들이 가짜선지자를 양성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양성되고 진짜 선지자는 거짓선지라로부터 핍박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 진짜 선지자가 나름대로 나라를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교회를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까? 선지자는 율법에 의해서 희생물이 되어야 합니다. 희생물은 죽음을 함유합니다. 자기 죽음이 끝나면 세습제로 누가 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선지자가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그 기적을 다음선지자가 그대로 인수인계 할 수 있습니까? 딱 한 경우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입니다. 그러면 엘리사 다음에 또 나타납니까? 아닙니다.
북쪽 남쪽 두 조각이 있어야 솔로몬제국이 갈라졌음을 언급할 수 있는데 만약 두 쪽 중 한 쪽이 사라져 버리면 기적을 베푸는 선지자의 존재 이유도 사라져버립니다.

그럼 그 다음 선지자들은 없습니까? 있지요. 문서선지자입니다. 이들은 돌아다니면서 기적을 베푸는 분들이 아니고 이제는 글로 남깁니다. 그 최초의 문서선지가가 이사야입니다. 이사야 다음 예레미야는 이사야 문서에 추가된 계시를 담은 문서입니다. 예레미아에 추가된 계시를 담은 사람은 에스겔입니다. 드디어 문서로 남기는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엘리야, 엘리사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비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1-12).
많은 기적을 행한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가 지난 후에는 문서선지자들이 활동합니다.
그렇다면 기적으로 하셔도 되는데 왜 문서입니까? 문서의 특징은 추후 확인해 보라는 기능을 갖습니다. 멸망은 기증사실이고 멸망당한 후에 다시 문서를 보라. 그것은 멸망하도록 예언되었던 시나리오대로 진척되었구나를 보여주는 것이 문서선지자입니다. 기적이 아니고 글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에스겔, 스가랴가 글을 썼습니다. 스가랴가 무슨 기적 일으켰습니까?
없어요. 이사야 예레미야가 무슨 기적 일으켰습니까? 없어요. 이사야는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며 애굽과 구스에 대한 예표와 기적이 되게 하셨습니다(사20:3). 이것도 기적입니까?

문서선지자는 맨날 말만 합니다. 문서의 내용은 망해라 망해라 앗수르 와서 북이스라엘 망하고 , 바벨론 와서 남유다 망해라. 문서만 남아 있으면 됩니다. 나라 정체성의 연속성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문서의 연속성입니다. 이 안에 묵시문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에도 묵시문학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제1이사야, 제2 이사야, 제 3 이사야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8). 역사적 연속성을 찾던 학자들은 많이 당황합니다. 연속성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유대교가 맞는 것 같아요. 문서내용들이 다 실질적입니다. 장소도 명확합니다. 스가랴14장4절에는 메시야가 예루살렘 앞 동쪽 감람산에 오신다고 합니다.
에스겔40장 이하에서 성읍과 성전설계도가 쫙 나옵니다. 천사가 측량합니다. 있지도 않는 것을 측량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48장을 보면 지파별로 땅 분배가 끝났습니다. 여호수아서를 다시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누가 보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보고 있습니다.  현재 회복하지 못한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에스겔에서 영원한 언약이 주어집니다. 바로 안식일입니다(겔46:1).
창세기17장에서는 할례입니다. 이 둘만 챙기면 그 땅은 유대인들의 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유월절(겔45:21), 초막절(겔45:25), 월삭(겔46:1), 안식일(겔46:1)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당시 유대인들은 에스겔47장의 성전에서 나온 물에 대한 말씀을 요한복음7장에서 재현합니다. 초막절8일째 초막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축제의 가장 큰 날에 실로암물을 떠서 성전에서 물을 퍼붓습니다. 그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그 물이 그 물이 아님을 압니다. 하지만 에스겔 말씀대로 우리는 성전이 올 것이고 메시야가 올 것이고 성전에서 물이 흘러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다 같이 한 마음으로 한 이데올로기로서 지켜냅시다라고 다짐에 다짐을 합니다.
어떤 역경과 고난이 있어도 그 가운데서 다짐과 다짐을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52,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즉 집단적 단수이다. 그것이 바로 고난 받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에 대해  과연 고난 받는 종이 이사야 자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지 물은 사람이 에티오피아 내시였습니다. 성령 받은 빌립은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도 아니고 이사야도 아니고 다른 어떤 사람도 아니고 얼마 전에 돌아가신 예수님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리고는 홀연히 떠나버립니다. 떠나게 하신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행8:39).

그리스도의 영은 묵시문학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3:17절에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곧 종말이라는 뜻입니다. 인자된 지혜는 완성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완성 앞에서는 무엇에든 꿀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어떤 연속성도 유지할 필요도 없고 유지를 내세울 이유도 없습니다. 어차피 우린 흙이라는 동질성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믿을 것을 믿어야지 왜 자신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다는 자체가 게임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 있어서 신학을 한다는 자체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받는데 신학 했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신학하지 않으면 구원받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신학은 왜 하는가? 주님 오실 때까지 뭐하겠습니까? 이거나 해야지요. 이거 하라고 주님이 시키신 겁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 일이, 신학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을 떠맡은 겁니다. 떠맡았기 때문에 종이 주인의 일을 걱정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문방구 점원이 물건 팔리지 않을까봐 왜 걱정합니까?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지.

부교역자는 너무 교회 걱정하지 마세요. 당회장 있잖아요. 우린 부교역자 잖아요. 주님이 계신데 건방지게 걱정을 왜 우리가 해요. 이것은 주님에 대한 모욕이고 모독이고 건방진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이것이 연속성이다라고 하면 부셔 버리고, 저것이 연속성이다라고 하면 부셔버립니다. 유대인들은 말라기 말씀을 기억합니다. 그때에 엘리아가 다시 온다는 말씀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4:5).” 그래서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묻습니다. 네가 엘리야냐?(요1:21)
예수님께서 이 소문을 들으신 모양입니다.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으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마17:11-12)”

유대인들이 세례요한에게 네가 엘리아냐 묻는다는 것, 또한 예수님에 대해 어떤 사람들이 엘리야(마16:14)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역사적으로 엘리야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노선은 분명 경부선입니다. 대전에서 한쪽으로 가면 부산이고 다른 쪽으로 가면 광주입니다.  유대인들은 광주로 가는 길이라고 우기는데 대전에서 노선이 바뀔 줄을  몰랐습니다.
천국이 부산에 있는 줄을 몰랐습니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대전에서 부산으로 가는 노선은 역사적 노선이 아니라 성령의 노선입니다. 역사적 노선을 붙든 사람들은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노선 바꾸는데 세례요한은 엘리야 흉내를 냈습니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마3:4).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취급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요단강 건너기 직전의 자리고 갔습니다. 그곳이 광야입니다.  새로 다시 하자. 이전에는 요단강을 건넜지만 이제는 내가 주는 물세례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물세례가 없으면 역사적이지만 물세례가 있게 되면 나에게 물세례 주라고 하신 분의 세례가 기다립니다. 두 가지입니다. 불과 성령의 세례입니다. 묵시 안에서는 시간과 상관없이 불세례가 주어집니다. 물, 성령, 불세례는 세트입니다. 메시아 오시기 전에 물세례를 주었고 메시아가 오셔서 성령세례를 주셨다면 당연히 그 메시아가 불로 심판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불로 심판하시면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십니다(마13:30).

이런 심판이 오겠나라고 하지 마세요. 이미 오셨잖아요. 앞의 두 개, 물과 성령의 세례를 주셨잖아요. 그러니 나머지 하나는 반드시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일을 초대교회에서는 세례라는 형식으로 반복했습니다.
그 흔적이 마태복음28장18-20절에 나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말씀은 시간이라는 것이 의미 없다는 말씀입니다. 현재의 영원한 반복입니다.
부산으로 가는 묵시적 노선에서는 광주로 가는 역사적 노선을 잊어야합니다. 역사적 노선을 잊어버리라고 합니다.

함께 계시면 되었지 다른 무엇이 의미 있습니까? 이미 종말인데. 그렇다면 이미 종말이라면 역사적인 기다림이 완전히 엉터리임이 확인이 되어야겠지요. 그래서 오히려 주님께서는 역사적 해석을 마음껏 하게 만드셨습니다. 마음껏 해봐라. 역사를 채워 보아라. 그것이 메시아와 얼마나 무관한 것인지를 네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역사적 해석법으로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을 찾아 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놓쳤습니다. 그러나 놓치지 않은 세력이 있었습니다. 누굽니까? 마귀입니다.

마태복음8장에서 거라사인 지방에 귀신들인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에게 다가가니 청년이 먼저 소리 지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라고 합니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습니다. 자신들을 멸망시키러 온 줄도 알았습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요청하니 예수님께서 귀신을 돼지 떼에 집어 넣었습니다.
이일로 거라사인 지방 사람들은 재산의 손실로 인해 예수님을 동네에서 추방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국지적 사건입니까? 아니면 보편적인 사건입니까?

이것은 일부의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8장44절에서는 너희 아비가 마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속에 들어 있는 귀신은 쫓아내지 않습니까?

답변한번 해 보세요. 왜 쫓아내지 않습니까?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핍박합니까 하지 않습니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핍박은 조직적으로 정치적으로 누가 했습니까? 정치적 조직적이라는 것은 잔챙이들 말고 전부를 통치하고 지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입니다. 그들은 독사의 새끼이며 그들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만일 병이 고쳐져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주님께서 병을 고쳐서 구원시켰을 겁니다. 눈뜨게 해서 구원된다면 눈뜨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죄가 용서 받아야 구원됩니다.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을 때 그들의 목적은 중풍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중풍병도 고쳐주시고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요한복음2장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포도주만 공급해 주면 그것으로 하실일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장차 진짜 출애굽, 죄에서부터 구원하는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 그런 사건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솔로몬이 둘로 나누어집니다. 나눠지는 이유가 우상숭배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상 숭배한 이스라엘을 끝내야 합니다. 솔로몬은 죽여야 하지요. 그러나 솔로몬을 죽이지 않고 깨어 버립니다. 솔로몬은 깨어지면서 지혜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나온 지혜는 시간과 역사의 제약, 저촉을 받지 않습니다. 영원한 현재입니다. 욥기, 아가, 전도서, 잠언, 시편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한 현재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현재이기 때문에 어겼다 어기지 않았다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지혜와 역사가 결합되려면 율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역사가 반드시 망해야 된다는 것을 확인되고 나고 지혜는 비로소 등장합니다. 지혜가 등장하고 나니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삼킨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의도적으로 바벨론이라는 최후의 애굽이 이스라엘을 삼키도록 유도하셨습니다. 삼켰다고 생각했는데 삼킨 자가 도리어 삼킴을 당하면서 인자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그때가 종말입니다. 이때는 할 수 있는 모든 구원의 시도는 해 본 것이 됩니다. 성전도 지어보고, 율법도 지켜보고, 역사의 연속성도 찾아보고, 메시아도 만들어 봅니다. 이 모든 것을 해보고 이것으로는 쓸데없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그 때 역사를 덮어버리고 인자가 오게 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묵시, 즉 하늘에 있는 완성이 지상에 나타나는 흔적이 바로 선지자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죽고 예수님도 죽고, 스데반도 죽고.
언약에 의해 죽은 자만이 영원히 산자가 됩니다. 이 죽음은 인간의 역사가 실어 나르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역사 밖으로 사라졌다가 지혜를 통해 역사 가운데 나타난 겁니다.

다니엘은 70년을 기다렸습니다. 70년이 끝날 즈음에 다니엘에게 계시가 임합니다. 70년이 아니었고 70이레였습니다.
역사적 해석법에 의하면 다니엘은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합니까? 70*7=490년이니까? 이미 70년이 지났으면 나머지 420년만 기다리면 되나요? 420년 기다리면 구원받습니까? 아닙니다.
이레는 묵시적 용어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에 나오는  한때 두 때 반 때, 천이백구십일, 천 삼백 삼십오일 은 역사적 시간으로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사건으로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에가 한때 두때,반때 이며 마흔 두 달이며 천이백구십일입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반복입니다. 날짜를 계산하지 말고 사건으로 계산하라는 말은 어려운 말입니다.
예를 들면 스프링을 톡 치면 다른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톡 튀어 올랐다가 내려갔다 하지요. 이것이 묵시적 사건의 특징입니다. 묵시적 사건의 특징은 전 우주를 상대로 되풀이합니다.

요한계시록6장 이하에 나오는 일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건이 그때그때마다 터지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을 역사적 해석법으로 보게 되면 이렇게 됩니다.
목사님 지금 다섯 번째 인입니까 여섯 번째 인입니까? 전염병이 있으니  네 번째 인이네요.
그러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는 이미 지나갔으니 매직으로 그 성경을 지워도 괜찮지요.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우리는 네 번째 인에 속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일곱째 인을 떼실 때 일곱 나팔이 나옵니다. 그러면 역사가 어떻게 됩니까?

1, 2, 3, 4, 5, 6, 일곱 번째 인, 1, 2, 3, 4, 5, 6, 일곱 나팔, 1, 2, 3 ,4, 5, 6 일곱 대접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펼쳐보면 오늘 2014년도는 어디에 위치합니까? 만일 여섯 번째 대접입니까? 그러면 지나 간 것은 버려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주눅들 필요도 없고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은 율법과 지혜가 복합되어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 죄가 드러나고, 십자가의 피로 의롭게 된다는 지혜가 반복이 되어 버리면 계속해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일어납니다.

연대강의 19강 녹취
다니엘 이후에 소선지서들이 나옵니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우리가 이 책들을 보게 되면 잔소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 책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잔소리 하지 마시고 기적 베풀어 주세요. 잔소리는 나도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잔소리, 남 비난 비판 잘하잖아요. 그러지 말고 병 고쳐 주고, 그러지 말고 축복해 주어서 나라가 잘 되게 하시면 감사합니다라고 할 겁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렇게 하지 말고. 무화가 소출이 더욱더 풍성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풍성하며, 감람나무 소출이 열배가 되며, 밭에 먹을 것이 엄치며, 우리의 양이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며,  외양간 소가 갈수록 늘어나는 이야기를 해 준다면 우리가 하박국을 싫어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는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조류 독감으로 인해 닭장에 닭이 다 죽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고 합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약속의 땅이 복 받았다 복 받지 않았다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땅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면 복 받은 것이고(출3:17), 즉 포도나무의 소출이 풍성하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풍성하다면 축복받은 것인데, 만일 포도나무의 소출이 없고,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다면 저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하박국에 와서는 그것이 축복과 저주가 된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십니까? 왜 이렇게 일관성이 없습니까? 우리가 어느 것을 채택해야 할지 헷갈리게 하시는 겁니까?
종말은 모레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현상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계신 곳이 천국이지 좋은 곳에 계신다는 생각을 버려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많은 소유를 가졌습니다. 요셉도 총리가 되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잘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가까이 오면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면 그곳이 가난하고, 소출이 없어도 그것이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조건이 됩니다.

왜 잘되는 것에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과 같은 이런 생각에 쉽게 동의할 수입니다. 그런데 쉽게 동의 할 수 있도록 해 주셔야 하는데 잘 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버리고 부자가 천국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 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십니다(눅18:25).
사람에게 높임을 받으면 하나님께 미움 받고(눅16:15),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은 부자는 지옥가고 거지 나사로는 지옥 갑니까(눅16:19-31)?

왜 이런 식으로 시대의 마지막, 종말을 거꾸로 장식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이야기가 목회에 도움 되지 않습니다. 복 받기 위해 교회 오는 사람에게 여러분 복이 저주일 수 있습니다라고 하면 교회 오려는 동기부여조차 제거하는 것이 됩니다.

왜 이렇게 거꾸로 되었습니까? 그것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의 기적이란 요나의 기적밖에 없기 때문입니다(마16:4). 주님이 충분히 기적을 베푸신 후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만일 기적을 베풀지 않고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기적을 충분히 보여주신 후에 하시는 말씀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 너희를 죽일 때 너희는 곱게 수용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와 동행하신다고 하실 때 너희들을 죽이기 위해서 동행하십니다. 너희들은 죽는 용도로 사용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한 손길입니다. 죽여주실 때 죽어 줘야 합니다.

이것을 요나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나를 보면서 선교이야기 하는 것은 잘못된 겁니다.
요나에서 핵심은 요나가 과연 선지자 맞느냐 입니다.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전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거처서 이스라엘을 전도하셨습니다.
멸망한다는 니느웨는 회개해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니느웨가 망한다고 했던 이스라엘은 그 모양 그 꼴이냐?

요나선지자 시대에 북이스라엘은 가장 잘 살았던 시대입니다(왕하14:25). 이것은 요나의 예언대로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나 왕 둘 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하나의 경로를 거치게 하십니다.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 멸망당한다. 요나가 상식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니느웨가 멸망할 것을 네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신났습니다.
신났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전하나 전하지 않으나 망하는 것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전할 이유가 없지요. 꼭 예정론 믿는다고 하는 목사가 선교에 소홀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전하나 전하지 않으나 지옥갈 자는 지옥가고 천국갈 자는 천국 가는데 갈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요나는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주님이 알아서 잘 하실 텐데 내가 거기에 끼어들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요나는 자신은 일단 구원받았고 그리고 난후 나를 제쳐놓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요나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 다시 손대지 않아도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죠?

합창할 때 도레미파솔 할 때 레 소리를 낼 때 도 소리를 내지 않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이스라엘 나라가 어디서부터 구원받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첫사랑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요나가 경험한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중심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존재한다. 언약의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

요나가 어디에서 알았습니까? 요나는 나 하나 너 둘, 너 셋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스로 가는 중 배가 풍랑을 만났을 때 요나는 나하나, 너 둘이 아니라, 나 하나, 나-둘, 나-셋이 됩니다. 그들의 운명은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스스로 그들을 구원할 위인이 못된다고 자처한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대도 않은 겸손이지요.
나 같은 인간은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나 없어도 주의 일은 주님이 하시니 저는 빠지겠습니다 하는 그런 요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런 요나를 사용해서 요나의 목숨과 함께 배에 탄자들의 목숨을 하나로 묶어 버렸습니다.
요나는 자신이 죽어야 당신들이 산다고 합니다.

요나가 과감하게 죽습니다.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요나는 드디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하는 것을 자신의 죽음으로 보여줬다. 그러니 요나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끝. 이게 일부입니다.
예수님은 요나를 성취해 버립니다. 요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그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혼자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요나가 살아날 때 함께 살아남으로 성전의 의미가 요나의 운명 속에 새롭게  별처럼 나옵니다. 그냥 죽지 않고,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고. 분명히 죽었습니다. 요나는 여기서 성전을 향해 기도합니다.
여기에서 묻습니다.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물고기 뱃속에 있는데 성전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어찌되었든 성전을 향해 기도하니 살아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선지자의 존재는 어디에 복속되고 어느 원천에서 나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요나를 위해서 요나가 살면 안 되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으면 안 됩니다. 성전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요나가 있고, 이스라엘이 존재합니다. 그 성전에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계십니다.
열왕기상8장에 솔로몬이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질병, 기근, 전염병, 전쟁 패배 등이 있을 때 죄지은 줄 알고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죄를 사하고 축복해 주시겠다는 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모세 율법은 개개인이 지켜야 합니다. 다윗언약은 왕하나 잘되면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있어도 왕덕택에 복을 누리는 체계입니다.
모세언약에서 왜 다윗언약으로 넘어갑니까?
율법으로는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제사장 가문 실패했습니다. 사울왕도 전쟁하기 전 제사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왕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유리한 대로 법을 이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금 전 쉬는 시간에 목사님이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을 때 교회 잘 나왔답니다. 그런데 암이 나은 후에는 교회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참 좋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암에 그냥 걸려 있었으면 참 좋을 뻔 했다고 했습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성령의 참여한바 되고  타락한 자들은 두 번 다시 회개가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나는 암 낫는 혜택을 못 받았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햇볕 쬐지 않았습니까? 숨 쉬지 않습니까? 물 안 마셨습니까?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미 혜택을 입었습니다. 세종대왕 강감찬, 이순신 모두가 혜택을 입었습니다(마5:45).

감리교에서는 복음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 죽은 사람들은 복음의 기준에 의해 지옥가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잖아요. 들은 것이 없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듣지도 못한 사람을 지옥 보내는 것은 과거 안기부가 고문하는 것과 같은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책임을 묻잖아요.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 본적이 없는 사람을 지옥 보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래서 이들은 양심 법에 의해서 심판받는답니다. 부흥사에게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것은 이미 가톨릭에서 나왔습니다.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천국 갔는가 지옥 갔는가?
천국 갔다는 겁니다. 연옥에서 예수님만나 천국 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석가모니도 연옥에서 예수님만나 알아 모시면 천국 가겠네요.  그렇다면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못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연옥에는 가시고 지옥에는 가시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근거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할 수 없지만 사랑을 받아주는 자라면 얼마든지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게 내버려 둔 것은 하나님이 시근이 없어 실수한 것이 됩니다.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아닙니까?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 지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변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하나님이 무엇으로 변합니까? 산은 하나고 길은 여러길이다로 변합니다. 올라가면 모든 종교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천주교신학자 칼 라너의 주장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이름 중심, 즉 성전중심입니다. 방금 감리교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죽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언약 안에서만 활동합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면 멸망시킵니다(신4:23; 신17:2; 신29:21).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신8:19,20)”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킵니다.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이 동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서 수난 당하신 그분이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곧장 하나님께 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14:16).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플러스 부록으로 예수님을 집어넣습니다. 성부가 대장이니까? 재벌이 중요합니까 재벌 2세가 중요합니까? 재벌1세가 중요하지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직접만나면 아들은 더불어 온다는 겁니다. 문제는 아들이 그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아들이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우상이고 마귀가 조작한 하나님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뭡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설명해도 모릅니다.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이란 모든 인간 속에 다 들어 있는 하나님상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워 우리에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요나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언약 속에서 알게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했습니다. 그곳이 니느웨 앞바다입니다. 니느웨는 큰 성이라 사흘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야 하지만 하루 동안 다니면 외쳐  이르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올을 입었습니다.  이 일이 왕에게 들렸습니다. 왕도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니느웨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말씀대로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매우 싫어하며 성을 냈습니다.
지시가 어긋났습니다. 하나님 저와 동업자 맞습니까?

그러면서 따집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지 않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반드시 니느웨 성이 멸망당하는 꼴을 보고야 말겠답니다. 그래서 성읍동쪽에 앉아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실 때 사십일 지나면 니느웨성이 멸망당할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셨을 때 무엇이 빠졌다는 겁니다. 회개하는 일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십일 후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회개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요나가 알아차렸다면 사십일 후 망하는 것이 유보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40일 지나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리 지시받은 그대로 알고 있습니다. 사전에 회개한다는 그런 이야기, 계획이 없었습니다.

죽는다고 해 놓고 죽기 전에 니느웨가 망하는 꼴을 보고 죽으려고 하는지, 그런데 더위는 또 참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지었습니다. 죽겠다는 사람이 그늘 아래 앉아서 니느웨성이 망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해 주셨습니다.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해 주니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했습니다.
한강 뛰어 내려 죽을 때 물살이 덜 센 곳에 뛰어내려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박넝쿨을 예비하신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들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소선지서에서 기적은 없고 왜 멸망소식을 외치느냐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였습니다. 그러자 요나가 혼미하여 이제는 더워 죽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요나가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여호와께서 네가 수고도 안 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즉 요나야 너는 내가 그쪽에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상상했느냐 못했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요나나 이스라엘은 자신들 쪽에만 하나님이 계시고 저쪽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대속의 효과가 자시에게만 있고 저쪽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성이 회개하는 모습을 볼 때 이스라엘, 요나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갑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이, 나중 되었던 자들이 먼저 되었다고 자처하는 자들에게 본래 그 자리, 은혜만 있는 자리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우리 공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자리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성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전도하신 겁니다. 전도 대상자를 통해 오히려 전도하셨습니다. 선교사가 선교지에 갔더니만 자신이 선교한다고 설쳤던 본인이 오히려 선교대상자들에게 선교당하는 것이 됩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심판의 대상이 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 과정 속, 즉 예수님의 코스가 요나의 코스입니다. 내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 자칭 천국 간다고 자청하는 이 세대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너희들은 지옥간다입니다.
지금부터 보여주는 표적은 너희들이 지옥가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너희들 속에 메시아 내가 친히 죽는 그 표적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제자들이 이 말씀을 알아들었을까요? 아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이미 제거했고, 이제는 열두 제자를 제거할 시기가 왔습니다.
열두 제자를 데리고 무화과 나무로 갔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정상재배입니다. 비닐하우스 재배 아닙니다. 속성재배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잎사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 열매를 거두는 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막11:12-14; 11:20,21).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무화과나무와 자신을 일치시켰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가 되었는데 과실을 못 내면 그 잘못을 무화가 나무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 어디 메시야가 달라고 하는데 안 줘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때가 되지 않아서 열매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터무니없이 저주를 하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잘못이 없는데 저주를 해버렸습니다. 이것을 제자에게 일치시킨다면 자신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주님은 축복할 권세도 있지만 저주할 권세도 있다는 사실에 제자들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께서 택하여 세울 때에는 나 좋아라고 택하여 세운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주님 좋아라고 주님 드러내라고 택하여 세웠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우린 동업자니 곁에 있으면 복 받을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사건과 일치 시킬 때 아무런 잘못 없는 무화가 나무가 저주 받았을 때 같은 동업자로 여기고 있던 사람들은 납득 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랍비여 보소고 저주하신 무화가 나무가 말라 죽었나이다.
예수님의 답변은 이것이 심판받아야 할 이유다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이런 성질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라는 장치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님께(메시아) 어떤 권한이 있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제거합니다. 메시아가 오면 왜 좋으냐? 축복해 주기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와서 심판하고 저주하는 것은 그들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축복 권과 저주권을 다 같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축복권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자기를 위한 메시아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무화가 나무가 된다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주받아 마땅한데 예수님의 피가 있으면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예수님이 다 가져가신 것이 됩니다.
무화과나무도 저주받고 십자가도 저주받고, 왜 저주가 둘입니까? 십자가 저주가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하는 일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옆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두 강도중 누가 정상입니까?
예수를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자가 정상입니까 아니면 그 강도를 꾸짖어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는 강도가 정상입니까(눅23:29-43)?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정상입니다. 메시아라면  본인부터 구원하고 자신들도 구원하여 메시아 나라를 이룬다면 참 메시야라고 생각합니다. 이 메시야 상이 어디에서 나온 메시아 상입니까? 구원받지 못할 자들에게서 나올 백퍼센트 맞는 메시아상입니다.

그런데 비정상적인 사람을 봅시다. 그 강도는 자신이 강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너무 오버하는 말을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물에 빠졌을 때 함께 물에 빠진 사람에게 살려달라는 것이 정상입니까 아니면 물에 빠지지 않은 사람에게 살려 달라는 것이 정상입니까? 이 강도의 말은 말이 안 됩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같이 죽어 가는데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죽으면 끝나는데, 무엇이 임합니까? 그러나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할 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로마 군병들이 들었으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또라이 둘이 놀고 있네라고 하겠지요. 유대인들은 표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원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보기에는 구원의 능력이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라이 둘이 놀고 있습니다. 그 또라이 행동에 자진해서 나설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린 또라이가 됩니다. 그 또라이가 되는 즐거움을 누리세요.

정상인들에 보기에 또라이로 보이는, 바보로 보이는 그 자유함을 마음껏 누립시다. 내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받고 내가 죄지은 것과 상관없이 구원받습니다. 구원받은 강도의 일생은 그것이 구원받는 코스였습니다. 강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강도보다 더 못한 창녀도 구원받습니다. 그것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롬5:20).
그래서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바울의 말씀은 윤리와 도덕이 됩니다. 이상사회 구현을 위한 규칙이 됩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 했습니다. 이웃 사랑하고 성전섬기고, 안식일 지키고, 할례행하고, 서로 결집하고 단결 해 봤습니다. 느헤미아 식으로 해보고 에스라 식으로 해보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다 해보았습니다. 천국 아니었습니다. 천국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짐승의 노림수였고 짐승에게 지배당하는 일면입니다.

너무나 간단명료합니다. 주님에게는 모든 것이 yes 가 되었는데 왜 자꾸 우리는 no 라고 합니까(고후1:19)?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에 시비를 걸지 맙시다.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주께서 아십니다. 그분이 주님만 내세우면 그 주님이 어떤 주님인지 시비 걸지 맙시다. 우리가 그 사람 속에 들어가 판정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전하면 다른 것을 전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합시다.
예수님을 믿는 코스는 각자 다 달라요. 강도는 강도 코스가 있고 부자 코스도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 못갑니다. 그러면 부자는 천국에 한명도 못갑니까? 갑니다. 부자라도 갈수 있다는 것을 주님 쪽에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부자 되더라도 그것을 자랑하지 말고 저는 부자 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라는 부자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벤츠타고 골프치고 했으면 좋겠는데 그 코스가 아닌 모양입니다. 내 코스는 고생하는 코스인 모양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바울 서신으로 넘어가는 결합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세기에서 언약으로 넘어올 때에는 언약이 없었고 약속이 왔습니다. 약속이 오면서 등장한 이름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6)”
여호와의 이름이 책임지고 역사에 개입하면서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역사 속에 집어넣습니다.
창세기5장에서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하면서 에녹은 죽지 않았습니다(창5:24).
이것은 언약을 미리 보여줍니다. 에녹은 물의 심판을 미리 당겨 보여 주었습니다 .때가 온다 회개하라.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1:14,15)”

회개한 사람이 없네요. 물론 그전에 회개한 사람이 있겠지요. 언약이 역사 속에 드러나면  하늘나라를 보여주는 지점이 됩니다. 처음에는 구멍에서 시작하여 종이가 찢어집니다. 이 찢어지는 지점에 언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이 법으로 바뀝니다. .
다른 것은 다 지키되 피체 먹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면 죽이시겠다고 합니다(창9:5.6).
이 말은 정결한 제물의 피 흘림에서 나온 혜택을 선인과 악인이 다 누리고 있으니 누리는 것으로 고마워하지 말고 도대체 나 같은 인간에게 이렇게 농사가 잘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누굽니까? 라고 찾아보니 노아 당시에는 노아가 있었습니다. 노아가 정결한 희생제물 드렸기 때문에, 피 때문에 이방민족 우리가 산다는 것을 안다면 언약 안에서 구원받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는 것과 동일한 원리입니다. 그 전에는 언약 안에서.

언약을 가정단위로 구체화 시키면서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세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첫 번째 아브라함은 껍데기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아니다. 그 안에 복의 근원이 들어 있습니다. 이 원리는 이삭과 야곱 안에도 들어 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의는 네가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잡을 제물 속에서 의가 튀어 나옵니다.
세 번째는 땅, 자녀, 축복개념들은 묵시적 인물로 구체화됩니다.

예를 들면 멜기세덱 반차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룻을 구하여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창14장).
묵시세계에서는 시간이 없습니다. 이유는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입니다(계1:8; 21:6).
묵시세계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래서 완성된 구원입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멜기세덱의 반차가 점으로 아브라함 가정에 옵니다. 이것이 복의 근원인 동시에 저주의 근원이 됩니다.
그렇다면 껍데기고 제물 되고 하늘과 연계되어 있는 묵시적 존재와 연계되어 있으면서 육을 잘라야 합니다.  그게 이스마엘입니다.  할례입니다. 내 자식이 아닙니다라는 뜻에서 잘라야 합니다. 할례를 행함으로 내 힘으로 태어난 자신이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아내가 임신하는 것에 남편이 어떤 기여도 못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두 번째 원리 제물이 되어야 됩니다. 제물이 되어야 되는데 그냥 제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개인단위에서 국가 단위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국가에 수많은 가정들이 있지만 아들들이 있지만 한 아들입니다(출4:22). 이것은 지상에 수많은 아들이 있어도 그 하나 되게 한 한 언약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하나 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너나나나 구원받는 것은 하나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풀장이 있습니다. 풀장에서 헤엄칩니다. 나는 A 문으로 나는 B 문으로 나는 C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떤 문으로 들어왔던지 관계없이 헤엄치잖아요. 어떤 교단, 어떤 교회 관계없습니다. 그들이 헤엄친 곳은 예수 안입니다. 그리스도 안입니다. 십자가 은혜입니다.
천국에서 누구만 자랑하겠습니까? 교단? 교회? 아닙니다. 죽임당한 어린양밖에 없습니다.
주님-1, 주님- 2 ,주님- 3이 됩니다. 둘이 아닙니다. 셋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경유하면 한 형제입니다. 본인이 싫다고 하면 할 수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가 설 때에는 주님을 경유해서 한 형제라 불러 주어야 합니다.  아니면 말고.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본인 신앙생활하시면 됩니다. 남 걱정 하지 마세요.

국가 이스라엘이 되면서 제물이 서서히 구체화 됩니다. 제물이 인물로 바뀝니다.
어린양이 죽어 사람이 살았습니다. 어린양은 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흐르면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은 기이한 노선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괴상한 이론입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철학입니다. 양은 양이 살리고 사람은 사람이 살린다는 것을 16세기경 아즈텍, 마야제국에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죽였습니다. 아포칼립토 라는 영화를 보시면 나옵니다. 같은 류가 죽어야 합니다. 신이 있다면 같은 류를 죽여야 합니다. 어디 비싼 것 살리려고 헐은 것을 내 놓아!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 쪽에서 사람을 살립니다. 같은 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니 천사들이 부러워 미치는 겁니다. 너는 무슨 팔자가 하나님의 대신 죽음으로 구원을 얻는 팔자가 되었는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의 특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국가단위로 하나 되면서 다시 깨어집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껍데기였습니다. 껍데기 속에서 알맹이가 나옵니다. 그 모습이 어린양의 모습이 아니라 왕같은 어린양이 나옵니다.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3,4)”

의인은 행함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면서 믿음을 설명하는데 율법을 제시해서 모든 인간의 행함은 율법에 의해 저주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고 경건치 않는 자인데 우리가 믿을 만한 근거를 따로 주셨습니다. 그 근거에 의하면 어떤 행함과 상관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세우셨다.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담겨 있고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 하기에, 하나님의 의가 되었기에 이미 되어진 신분을 스스로 부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심지어 어떤 환난과 핍박과 곤고나 적신이 오더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어떤 권세도 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나의 사랑이 아닙니다(롬8:33-39).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이런 일에 대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롬8:28).

성령에 의해 계시가 된 이상 이것을 반복합니다(사도들이 썼다고 다 성경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친히 쓰신 책을 반복하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 좋다. 은혜 받았다는 간증을 사도행전29장에 보탤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28장으로 끝났습니다.
그 후 내용이 궁금해도 그것은 계시가 아닙니다. 새로운 비디오가 나왔다 해도 필요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성경만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목회자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말씀의 반복입니다. 맨날 똑같은 말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요. 그런데 똑 같은 말이 똑 같은 말이 아니지요. 날짜가 바뀌고, 기후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었잖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은 들을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실 겁니다. 그러니 쓸데없이 종이 주인 하는 일에 걱정해서 걱정 끼쳐 드리지 마세요.
우리가 걱정하는 것을 걱정하십니다.
나름대로 꿈꾸지 마시고 꿈은 주님 홀로 꾸게 하시고 우리는 누리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안 되네. 아니고 실패했네 라는 것이 없습니다. 안 된다는 것조차 되어진 종류에 불과합니다. 안된다고 느껴진 것도 일이 이미 되어진 것인데 잠시 우리가 착오를 일으킨 것뿐입니다. 천국가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두려움에 떨고 무서워하고 공포에 떨고 미래를 걱정했습니다. 숨길 수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걱정하고 싶어서 걱정한 것이 아니고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입니다. 하지만 육신을 성령과 연결시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 그 주님의 작업을 의심치 않고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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