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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02 01:28:04 조회 : 2424         
수원강의 (서론) 1강-4강 140320-140501 이름 : 이근호(IP:119.18.9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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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은주(IP:218.♡.196.154) 14-05-06 10:57 
수원140320a-(언약)1강 - 이 근호 목사

제가 오늘하고 싶은 것은 성경 전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성경 전체가 우리한테 딱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제가 지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간단한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말하면 또 잠이 오니까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 이렇게 두꺼운 성경책이 있습니다. 성경책이 있는데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에 우리 인간들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성경책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하나님을 알고 그 다음에 성경책을 이렇게 들여다본다. 이게 ①번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을 아는데 내가 여기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있고 따라서 만드신 분에게 나는 성의를 다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 복주시고 죽어서는 천국 보내준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 다음에 성경을 보는데, 사실은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여기에 있다면 이렇게 성경을 거쳐서 우리가 봐야 됩니다. 성경을 거쳐서. 이게 ②번이에요. 성경을 거쳐서 이렇게 하게 되면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우상’이란 말이 나와요.

우상이란 말은 뭐냐 하면, 이게 ‘신’이라는 말입니다. 자, ①번을 보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섬긴다. 너무나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제대로 믿었다 할 수 있는데 막상 성경을 통해서 보니까 하나님이 두 종류가 돼요. 성경을 통해서 보니까 ①번이 아니고  ②번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이 두 종류가 있어요. 한 종류는 뭐냐 하면, 보통 사람들이 섬기는 신, 보통 사람들이 관계하는 신. 이게 창세기4장에 보면 누구냐 하면, 가인이에요. 여러분이 아시겠지만, 가인이 제사를 드렸잖아요. 가인이 누구한테 제사를 드렸어요? 자기 이웃사람한테 했습니까? 아니면 동네사람보고 했습니까? 제사를 누구한테 했습니까? 하나님한테 했지요.

가인이 하나님한테 할 때, 자기는 추수감사를 한 거예요. 다름 사람이 보기에는 가인의 믿음이 너무 너무 좋아 보이고 착해 보이고 “야, 세상에 가인처럼 자기가 챙겨놓고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면 훌륭하다.” 이 가인이 상당히 좋아보입니다마는 가인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저주받게 되어 있지요. 보통 사람들이 신을 섬길 때, 그냥 하나님께 섬기겠다는 게 굉장히 차분하고 성실하고 착해 보이지만, 가인에게는 이것이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 신 말고 다른 신이 뭐냐? 이것은 인간이 찾아갈 수 없는 하나님이 등장해요. 찾아갈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지시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①번처럼 내가 찾아가는 거예요. 내가 찾아가고, 찾아가고, 찾아가고, 찾아가는 하나님이지만, 이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하나님이 지시를 하죠.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요.  찾아와 가지고 너는 제사를 이렇게 드려라, 라고 지시를 합니다. 지시를 하게 되면 여기서 보통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뭐하느냐 하면, 미워합니다. 미워하게 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하는 것을 신이라고 하고, 진짜 하나님이 찾아온 사람이 바로 이것이 뭐냐 하면, 제가 오늘 첫 째 공부할 것은 ‘언약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자, 이쯤해서 다시 한 번 복습 들어가 봅시다.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찾아가는 하나님이거든요. 여기는 언약이라는 이 어려운 말은 없습니다. 그냥 내가 있고 신이 나를 만들었으니까 만든 신에게 그냥 섬기면 된다, 할 때는 언약이라는 게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 구약(옛 언약)과 신약(새 언약)은 언약이죠. 언약의 책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면, 거기서 언약의 하나님이 나오고 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요 사람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이 이스라엘 하나님에게는 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했습니다. 여기 나라는 하나님이죠. 다른 신은 또 신이지요. 우리가 이거 모른다고  칩시다. 사람인 내가 여기 있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있으면 그냥 섬기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어느 나라가 나온다고요? 이스라엘이 나오면서 뭐라 고해요? 나 외에 다른 섬기지 말라 해서 신의 종류가 몇 종류입니까? 진짜 하나님 있고 그것 말고 또 하나의 신이 있고. 신이 두 종류가 되는 겁니다.

성경을 안 보게 되면 신은 한 종류밖에 없지요. “하나님을 믿습니까?” “열심히 믿습니다.” 한 종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이스라엘 나오고 이스라엘에게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라고 되어 있어요. 나 외에 다른 신을 했는데 다른 신은 우상이라 했고 나는 어떤 신이냐 하면 바로, 언약의 하나님, 언약이란 말은 뭐냐 하면 쉬운 말로 약속입니다. 내가 너한테 먼저 찾아와서 약속을 주신 그 하나님만 섬겨야지 언약이 없고 약속이 없는 니가 보통 사람들이 하는 그런 신은 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신을 무슨 신이라 하는가 하면, ‘이방인의 신’ 또는 ‘이방민족의 신’ 또 다른 말로 하면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이 있고 다 신이지만, 이쪽의 이스라엘이 봤을 때는 뭐가 되느냐 하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 어렵지 않지요?

어렵지 않지만 제가 또 걱정이 돼서 또 한 번 복습 들어갑니다. 자, 성경을 모른다 하면, 하나님, 조물주, 모든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을 섬기면 되게 되어 있어요. 잘 섬긴다고 교회 와서 뭐도 드리고 잘 섬긴다고 하면 됐는데 막상 성경을 보니까 신이 한 종류인 줄 알았는데 신의 종류가 몇 종류 되었다고요? 두 종류 되었지요. 두 종류 되어가지고 보통 이스라엘 사람 아닌 사람이 필리핀,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 알레스카, 에스키모, 남미에 있는 인디안, 하여튼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고요? 이게 이방인의 신이 되는 거예요. 거기에 가도 교회 있고 거기에 가도 잘 보이는데 그것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너무 어려운 말하는 게 아니고 중요한 말을 한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었으니까 만들어진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들어보면 맞는 것 같은데 뭔가 빠졌어요. 뭐가 빠졌는가 하면, 언약이 빠져버렸어요. 예레미야11장3절,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언약을 모르는 자는, 언약을 쫓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고 했습니까? 저주를 받는다는 거예요. 세상에 언약을 모른다고.

다른 민족도 신을 섬겨요. 이스라엘 주변에 이방민족들이 많았거든요. 모압, 암몬, 블레셋, 아람, 구약 성경보시면 여러 가지 이름들 나오지요. 바벨론, 앗수르, 그 사람들 다 신을 섬기거든요. 신을 섬기는데 그 곳에는 뭐가 없다고 했어요? 다른 민족들이 섬기는 신에게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언약이 없어요.

아, 그렇다면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잖아.” 라고 말하기가 “우리는 우리끼리 우리 이방민족끼리는 그래, 같은 하나님이야.” 되는데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한테는 같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될까요? 안 될까요? 같은 하나님이라고 될까요? 안 될까요? 언약이 없으면. 안되지요. 안됩니다. 이렇게 답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왜냐, 진도가 나가니까. 고맙습니다.

언약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누가 뭐라 하거든 예레미야 11장 3절 대세요. 이 언약의 말을 쫓지 않는 자는 뭘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언약이 없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 성경에 나와요. 그리고 8절에 보면,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하였어도 그들이 행치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말로 그들에게 응하게 하였느니라 하라”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준비된 저주를 너희에게 퍼부을 것이라, 라고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을 앞장세워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제 강의가 여기까지 했는데 강의를 잠시 멈추고 우리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내 쪽에서 하나님께 다가서게 되면 언약이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언약이라 하는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하고, 하나님하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하나님끼리만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알고 있는 약속이 하나님만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창세전에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 누가 끄집어내는가, 내가 섬기고 싶은 대로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거예요.

그냥 우리 조상들은 맑은 정화수 떠놓고 그냥 정성들여 빌면 복 준다. 열심히 하면 복 준다. 이게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필리핀, 아프리카, 유럽 하여튼 이스라엘 빼놓고 모든 나라의 족속들은 그냥 성의 있게 빌고 열심을 다해 빌고 정성을 다해 빌면 복 준다. 복 준다는 것을 같은 나라끼리니까 다 같이 그렇게 공감하고 동의를 했어요. 거기도 교회 있고 다 있어요.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만큼은 내가 섬기고 싶도록 섬김은 안 된다는 걸 유독 이스라엘만 알아요.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한 사람 한 사람 있습니다. 이름이 뭐냐 하면, 모세입니다. 모세. 모세라는 분이 시내산에서 누굴 만나는가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만나요. 청와대 가게 되면 대통령 만나고 싶으면 만나집니까? 어디서 바쁜데. 안 되잖아요. “대통령 나오라고 그래, 내가 만나고 싶어.” 이러면 만나주지 않지요. 하나님은 내가 믿고 싶다고 쪼르르 쫓아와 믿는 게 아닙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어요. 모세도 벌벌벌 떨면서 시내산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누굴 만났는가, 하나님을 만났어요.

자, 이제 묻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맨 몸으로 내려왔습니까? 뭘 가지고 내려왔습니까?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그겁니다. 그게 필리핀, 알래스카, 미국, 브라질, 중국 사람들이 믿는 거하고 달라요. 그들은 맹탕이라,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정성으로 손바닥 빌고 정화수 빌고 착한일하면 천국 간다고 다들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뭘 가지고 온 거예요. 그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그게 십계명이거든요. 그 십계명 중심으로 더 붙어지면 그게 언약, 약속이 돼요. 그 약속대로 장차 메시아가 왔으니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달리면서 약속을 다 이루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 그 다음 문제입니다. 지금까지는 잘 이해했다 하고요, 그 다음 문제입니다. 제가 성경을 다 치우고 제가 강의 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 지웁니다. 강의 처음 할 때로 돌아갔습니다. 달랑 남는 건 이것만 그리겠습니다. 사람이지요. 다른 말로 ‘나’입니다. 여러분, 나입니다. 사람이 죽잖아요. 죽으면 죽어서 뭐가 될까? 궁금하지요. 죽어서 지옥갈래, 하는 사람 없다 말이죠.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편하게 살고 싶잖아요. 그러면 죽어서 어디 가는가, 극락 또는 천국가고 싶잖아요. 그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 계신 곳에 가야 좋은 곳에 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 계신 곳이 뭐냐, 그걸 하나님 나라라고 여기고 우리가 이렇게 나아가는데 나아가는 방법은 뭐냐 하면, 아마도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니까 내가 착해야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성의를 보시니까 열심과 성의를 다해야 된다. 라고 했습니다. 자, 강의를 처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거 맞습니까? 뭐가 빠졌다고 했습니까? 뭐가 빠졌다고 했습니까? 제가 3번째 묻는 겁니다. 무식해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다지고 다지기 위해서 합니다. 뭐가 빠졌어요? 언약이 빠졌지요. 언약이 빠진 거예요.

그러면 “아이고, 언약이 빠지면 집어넣으면 되겠네.”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 여기 있고 나는 가고 싶은데 이게 아니면 언약을 통해서 가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서부터 어려워요. 언약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우리를 뭐하는가 하면, 우리를 나무랍니다. 나무라고 언약이 우리를 공격해요. 요게 제가 설명할 때 제일 어려운 부분이에요. 우리는 뭐 하나 추가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추가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우리를 나무랍니다.

아까 제가 언약을 다 이룬 분이 누구라 했습니까?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이 응애, 응애 애기로 태어나서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이 청년이 되어서 성전에 들어가서 토론할 때 그 때 다 이룬 겁니까?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다 이룬 거예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외친 그 곳이 무슨 장소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맞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거든요. 이 십자가를 가지고 이게 언약이거든요.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를 나무라고 우리를 공격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우리는 이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쪽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 가는 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옛날에 모세 때 줬던 십계명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품고서 십자가의 피로 만들어서 그 피를 우리에게 주실 때, 우리는 뭘 느끼는가 하면, ‘어? 나는 착한데, 나는 열심히 믿는 사람인데, 나는 굉장히 성실한 사람인데. 예수님이 왜 피를 흘렸지? 이상하다. 나는 시키기만 하면 잘 따를 수 있는 사람인데. 왜 피를 흘렸지?’ 이리 되거든요.

그 피를 흘린 것이 왜 피를 흘렸는가 하면,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피를 흘렸거든요. 죄인의 피. 그러면 이 피를 알려면 우리가 용서를 알려면 우리가 먼저 뭐가 되어 있어야 되겠습니까? 죄인이어야 합니다. 죄인이었을 때, 주님의 피가 와서 용서받아서 주님 때문에 진짜 천국을 갈 수 있거든요. 이게 언약이에요. 요걸 가지고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어렵지만, 언약이 완성된 새 언약인데. 그럴 때 죄인의 죄를 용서함으로 구원받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이 자리에서 이거 다 지워버리고 벌써 다섯 번째 합니다.

다 지워버릴 때에 여기서 “내가 죄입니다.” 라고 말을 할까요? 아니면 “나는 성실합니다.”라고 할까요? 아무것도 없으면 어느 쪽으로 갈까요? 그 때 나를 죄인이라고 알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뭘 가지고 뭘 근거로 나를 죄인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몸에서 태어나서 죄가 있다고 여깁니다.  예, 제가 이제부터 설명하는 게 바고 그겁니다. 내가 죄인이다 하는 것, 이것을 우리가 이해는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살아가면서 언제까지? 평생. 평생 살아가면서 왜 내가 죄인인가를 살아가면서 온몸으로 체험이 되어야 돼요. 주부가 설거지 하면서도 내가 죄인이야, 내가 동네 목욕탕에 목욕하면서도 죄인이야,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나는 죄인이야, 심지어 기도 하면서도 내가 죄인이야, 목사가 설교하면서도 내가 죄인이야, 주부가 애의 기저귀를 갈아주면서도 내가 죄인이야, 밤에 자면서 베개 베고 누워 있는 것도 사는 것도 죄인이야, 라는 것을 느낄까요? 안 느낄까요? 평소에. 평소에 안 느껴지지요. 못 느끼지요. 바로 제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그거에요. 우리는 평소에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리니까 이게 신앙생활이 겉도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죄인임을 못 느끼면 반대말로 우리는 뭘 느낍니까? 나는 잘났어. 나는 자식을 이만큼 잘 키웠어. 나는 이렇게 남한테 뒤떨어지지 않아. 나는 우리 교회에서 제일 오래 기도해. 나는 성경을 제일 많이 알아. 나는 복 받을만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야. 나는 남한테 안질 정도로 나는 아주 두뇌가 명석해. 온갖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정반대로, 나는 이만큼 자존심이 세도 괜찮아. 나를 건드리기만 해봐 가만히 안 둬. 하는 쪽으로 그게 온몸으로 체험이 되지요.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그러니 겉으로는 진짜 하나님인데 살아가는 거 보면, 이방신을 섬기는 거와 같은 똑같은 차이가 나지를 않아요. 이제 가인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가인이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감사해서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 정도로 챙깁니다. 남들은 사는 것으로 제사 안 드리지만, 나는 신의 은혜를 받은 것을 챙길 정도로 나는 아주 우수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제사와 예배 분명히 받을 거죠?” 하면서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사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안 받았어요.

그 다음부터는 어떤가 하면 독이 올랐습니다. 동생의 제사를 받았거든요. 그때부터 문틈에서 마귀가 성경이 죄가 되었어요. 죄가 문틈에서 강아지처럼 엎드려 있다가 가인보고 “죽여라, 죽여라, 감히 너보다 우수한 동생이 있다는 것은 못 참겠지. 못 참겠지. 죽여야지. 동생이 없어져야 니가 훌륭한 사람이 돼! 만약에 동생이 있으면 니 동생보다 못한 형이 되는 거야. 죽일 거야? 말거야? 죽여야 돼! 니가 죽여야 니가 살아. 죽여야 니가 살아.” 자꾸 강아지처럼 죄가 덮이니까. 원래 형이 동생 죽이는 게 취미가 아니거든요.

‘아휴, 나는 그동안 내가 살아온 이 우수한 거, 가치 있는 삶, 내가 착하게 조심스럽게 살아온 이 모든 게 안 돼! 안 돼! 하지 마!’ 죄가 덮치니까 “에이씨”하고 동생을 몰래 죽였습니다. 그 가인의 후손의 인간들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아벨의 후손은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여섯 번째입니다. 이걸 지워볼게요. 이걸 지워버리면, “신이시여, 받으소서. 받으소서.” 조상제사 지낼 때 하잖아요. “받으소서. 이 착한 나의 소산을 받으소서.”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이 착한 마음을 다하여, 경건심을 다하여 받으소서.” 했는데 제가 아까 그림 그릴 때 무엇을 통과해라 했습니까? 이렇게 하면 안 되고요, 하나님은 뭘 통과한다고 했습니까? 성경을 통과하지요. 성경을 통과하니까 여기 가인나왔지요. 모세 나왔지요. 이스라엘 나왔지요. 아까 한 것만 하겠습니다. 언약 나왔지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뭐 받는다? 저주받는다. 예레미야11장3절에 너희가 언약을 따르지 않으면 뭐 받는다? 저주를 받는다, 이야기를 했지요.

성경을 모르기 전에는 나는 이 정도로 착하다고 우겼는데 성경을 딱 들어가 보니까 가인은 뭐며, 모세는 하나님을 왜 만났지? 이스라엘은 뭐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어떻게 신이 두 종류야? 라고 새로운 의문점이 자꾸 발생되지요. 거기다가 예수님께서 피 흘려 죽었다는 겁니다. “니가 받을 저주를 내가 다 받는다. 니는 저주 받아야 돼! 하지만 그 저주를 내가 담당하는 거야.” 라는 이야기가 이 성경에서 소리가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건물을 볼 때, 건물이 절인지 교회인지 뭘 보면 압니까? 교회가 절하고 다른 특징이 뭡니까? 앞에 지붕 꼭대기에 뭐 있지요? 십자가지요. 십자가. 십자가가 뭔 뜻입니까? 누가 죽었다는 이야기잖아요. 누가 죽었어요? 하나님이 죽었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이거든요. 나는 안 죽었는데, 나는 매일 살려고 하는데 나는 사는 게 취미고 사는 게 재미고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를 건드리면 안 돼! 나는 아파도 안 돼! 매일 우리는 나 살기를 원했는데. 정작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어떤 분입니까? 만약에 이 만포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나는 살려고 하는 내 곁에서 그 예수님은 죽어버렸어요. 자살했습니까? 아니면 맞아죽었습니까? 맞아 죽었잖아요. 찔러 죽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살려고 “신이시여!” 하고 있다 말이죠.

진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내 곁에서 지금 맞아 죽었는데 우리는 엉뚱한 곳을 향하여 “신이시여, 내 정성과 내 성의를 받으소서.” 이러고 있다 말이죠. 왜 그렇게 해요? 우리가 신을 섬긴 만큼 내가 대단하고 잘났고 훌륭하고 멋있고 대단하고 믿음 좋고 아주 우수하고 남은 망해도 나는 안 망해야 되고 그런 것을 갖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아까 말씀대로 하면 뭐가 없어요?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으니까 나보다 다른 사람이 믿음 좋으면 죽이고 싶다 말이죠. “저거 예배 받고 내 예배 안 받아. 죽여 버릴 거야.” 이런 가인 같은 생각을 가졌는데 막상 이 쪽에 오니까 바로 여기에는 십자가 등장하고 십자가 앞에 설 때에 나는 태어날 때부터 원래부터 의인이 아니었다는 거죠. 죄인이었거든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죄인인데 누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자기를 의인행세 하라고 누가 꼬드겼습니까? 마귀가 뭘 못 보라고 막은 거예요? 뭘 보지 말라고? 니 잘난 맛에 살라고 뭐만 자꾸 가리는 거예요? 뭘 못 보도록? 십자가 못 보도록.

그러니까 십자가 가리고 내 잘난 맛보면서 그냥 성경 다 하면 복 받고 천당 간다고 요쪽으로 하라고 하지 저쪽으로 십자가는 안 보이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십자가 보지 말라고. 십자가는 부정적 사고방식이고 이것은 긍정적 사고방식이고 보지 말라고 그렇게 말린 거예요. 마귀가.

그래서요, 성경에 보면 마귀가 언제 나타나는가 하면, 마귀는 보통은 안 나타나요. 나타날 필요가 없어요. 자기 다 수하고 자기 부하기 때문에. 언제 누구한테 마귀 나타나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과 연결된 사람이 십자가 이야기하고, 복음이야기하고,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요 이야기할 때는 그 때 마귀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마귀가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 알지요? 간질을 일으키는 것처럼. 발작을 일으키면서 갑자기 착하고 점잖은 사람도 갑자기 우울해지면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면서 “십자가 필요 없다. 십자가 없이도 우리가 천국 간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열심히 하면 천국 간다. 복 받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지요. 그게 그렇게 보고 싶었던 마귀의 모습입니다. 마귀는 나를 해롭게 하는 게 마귀가 아니고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 못하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마귀는 오히려 반대로 우리를 잘났다! 잘났다! 훌륭하다! 잘난 척을 하게 하도록 그렇게 하는 게 마귀의 역사입니다.

자, 지금까지는 잘했으니까 이제 진도 나가는 의미에서 지워버리겠습니다. 지워버리고 이거 하나만 남기겠습니다. 언약. 진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들이 설렁탕집에 간다 합시다. 설렁탕집에 앉으니까 설렁탕 두 그릇요, 하잖아요. 그럴 때 서빙하는 아줌마들이 앞에 뭘 앞장세우고 가져 옵니까? 손님, 자장면 시키셨죠, 하고 가지고 옵니까? 탕수육을 시키셨습니까, 합니까? 설렁탕집에서는 설렁탕 가지고 오지요. 이 언약의 하나님께서는요, 뭘 가지고 오느냐 하면 바로 언약을 앞장세웁니다. 약속을 앞장세워요.

언약은 뭐냐 하면, ‘어린양의 죽음’이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출애굽. 출애굽이라는 것은 애굽나라에서 빠져나올 때 있었던 일, 출애굽입니다. 합쳐서 출애굽. 성경에도 창세기 다음에 뭡니까? 출애굽기잖아요.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애굽에서 빠져나올 때 문지방에 뭔가를 발랐지요? 하얀 페인트칠했습니까? 어린양의 피를 발랐지요. 오늘 진도 참 잘 나갑니다. 어린양의 피를 발랐다 말이죠. 어린양의 피 인데, 요한복음1장에서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보라, 저분을 보라, 저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뭐라 했습니까? 예수님보고 하는 말이 요단강 세례 받을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뭘 보라? 어린양을 보라.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늘나라 보좌가 있는데 그 보좌는 무슨 보좌?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수가 흐르면 그게 천국이에요. 천국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만들어 놓고 우리보고 오라는 겁니다. 우리보고 오라하면서 자신이 들리면 자기 사람들을 거기서 데려온다는 그건 요한복음12장의 말씀도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설명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설렁탕 앞장세운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뭘 앞장세웁니까? 언약을 앞장세우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는 언약은 설렁탕이 아니고 뭐냐 하면, 어린양의 죽음. 어린양의 피. 어린양의 죽음, 피를 앞장세웠습니다.

자, 여기서 묻습니다. 그 애굽에서 이스라엘 나올 때, 인물보고 나오겠습니까? 신장, 몸무게 보고 나오겠습니까? 그들은 무슨 조건으로 애굽에서 나왔습니까? 체중이었습니까? 성격이었습니까? 성질이었습니까? 착함이었습니까? 죽음의 사자가 집집마다 죽이는데 어린양의 피가 있을 때는 약속의 피, 언약의 피, “그래, 이 집은 살았어.” 하고 그 다음 집, “오? 없잖아.” 죽였다 이 말이죠. 고 약속을 우리는 모르는데 창세전에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창세전에 이미 약속을 해놨어요. 에베소서1장4절에서 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몰랐어요. 우리는 그런 일도 모르고 아까 한 것처럼 알래스카 사람처럼 그냥 자식 바치고 여자 바쳐가지고 불태워서 빌면 복 받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창세전에 하나님이 우리대신 제물이 되셔가지고 우리가 천국 가는 그 아이디어는 하나님끼리만 알고 우리는 몰랐어요. 그런데 그걸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오직 그걸 누구한테만 알려줬는가 하면,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줬어요. 알려주는데, 이제부터 잘 들어보세요.

알려주는 것이 지식으로만 알려주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실제로 고생을 많이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니가 짐승의 피를 받지 아니하면 매매를 못한다는 그런 대목이 기억나지요. 666 나오기 직전에 나오지요. 바로 애굽에서 히브리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이것은 매매 못할 정도가 아니고 애굽의 산부인과는 아들도 순풍, 순풍 잘 놨는데 만약에 히브리인들이 아들을 낳았다. 이것은 법으로 매매정도가 아니고 법으로 아예 그 아들을 죽여 버려야 됐습니다. 이게 그냥 지식입니까? 아니면 체험입니까? 그 당시 사람에게. 실제 상황이에요. 실제 체험이에요. 체험이고 그걸 혹독하게 눈물 콧물 짜내가면서 도저히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 고생하느냐, 실제로 그런 고생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이란 이유 때문에 그들은 노예생활 했고 짚을 주지도 않으면서 벽돌을 그전만큼 해야 되고 혹독하게 했어요. 그게 삶입니다. 그건 지식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그냥 사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실제로 힘든 생활을 청산한 것은 지식이 아니고 실제로 어린양을 잡고 실제로 피를 바르니까 실제로 하나님이 나타나가지고 실제로 그들을 홍해바다 건너가게 해서 분리시켰거든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지식으로 신학으로서 성경책을 둘둘 외우는 하나님이 아니고 실제로 이 땅에 오셨어요. 그리고 실제로 죽었습니다. 실제로 사흘 만에 살아났고요, 실제로 살아나서 무덤에 시체가 없어요. 다른 종교에 이런 이야기 있습니까? 다른 종교는 도만 닦으면 되지 이런 이야기 필요 없잖아요. 그러나 이 복음은 종교도 아니에요. 실제로 현실이에요. 실제로 하나님이 이 땅에 다녀갔고 실제로 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실제로 다메섹에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났어요.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뭐한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착하게 살면 저주 안 받는다? 아니에요. 성의를 다하면? 아니에요. 아닙니다. 뭐냐?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간판이 목사가 되던 집사가 되던 관계없이 저주를 받는다. 그래서 저것이 십자가 복음이냐,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이야기이냐, 잘 구분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게 종교 문제가 아니고 실제 문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서 전설에 의하면 목 베어 죽었다고 하거든요. 목 베어 죽을 때, 우리 같으면 “총회장, 당회장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사람이 죽으니까 우리는 안타까웠는데. 평소에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자기가 소원이 있어요. 무슨 소원이냐 하면, 바로 내가 일찍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지금 그 상태에 있습니다. 빨리 죽어서 주님 만나고 싶은 소원이에요. 답변하기 참 곤란하지요. 더 살고 싶은데. 더 살아서 우리 딸 시집가는 것도 보고 싶고, 손자도 보고 싶고, 손자 잘되는 것도 보고 싶고, 보고 싶으니까 이상스럽게 더 살고 싶잖아요. 이게 뭐냐, 육신의 체험이에요.

우리가 성경에서 들은 것 말고 안 것 말고 실제로 육신을 더 살고 싶은데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그 때 그 때마다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사도바울은 빨리 죽고 싶어 하는데 니는 왜 자꾸 살고 싶어 하느냐? 니가 지금 천국, 천국하지만 천국보다 니가 눈에 보이는 세계가 더 마음에 드는 게 아니야? 마음에 더 들지? 아예 죽기 싫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 생활이 더 좋지?” 사실은 죽어서 주와 함께 거하는 것보다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다가 갑자기 주께서 갑자기 임해버리면 전부 다 유황불 받거든요.

성경에서 자꾸 그런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게 지식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조선일보, 동아일보, MBC, KBS뉴스에 나오는 것처럼 이게 실제상황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실제 상황이듯이. 그래서 제가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앞장세울 때는 출애굽을 할 때는 뭐했다? 어린양의 죽음, 피를 가지고 나왔던 게 실제 상황이라면 지금 2014년도 3월 20일 오늘 같은 경우는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 피로 다 이루었다!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누가 너희를 송사하리요, 누가 너희를 죄 있다 하리요, 내가 너희를 용서했다. 주님의 용서가 오직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게 실제상황이에요. 실제상황.

이것은 기독교 교회, 종교건 떠나서 이건 북한의 핵 준비 떠나서 말레이시아 비행기가 떨어진 것이 실제 상황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려 죽음으로서 피를 믿는 자는 피로서 깨끗하게 용서받는 것도 실제상황입니다. 실제상황이에요. 그래서 살아도 영생이요, 죽어도 영생이요, 살아도 영생 받고 죽으면 오늘밤에 낙원에 가있고. 병원에 가도 영생이요, 병원에서 돌아가셔도 영생이요, 이래도 영생이요, 저래도 영생인 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내가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이겼노라.” 세상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는 거예요. 겁날 게 없다는 겁니다. 왜? 실제상황이기 때문에.

“니가 예수를 만나봤어? 니가 다메섹에서 예수 만나봤어? 안 만나봤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났어. 그래서 같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 이 소식 전하라고 나보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어.” 자, 그러면 이방인의 사도 설명하고 10분 쉬겠습니다.

자, 뭐든지 복습을 해야 돼요. 7번째 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지? 아! 하나님이 만들었구나! 그래, 하나님 잘 섬겨야지.’ 신을 섬깁니다. 그냥 섬깁니다. 뭐가 빠졌어요? 언약이 빠졌어요. 설렁탕집에 서빙하는 분이 설렁탕을 안가지고 맨몸으로 온 거와 똑같아요. 하나님 쪽에서 뭔가 주시는 게 있어야 되는데 그냥 아무것도 없이 맹탕으로 온다면 우리가 알아서 갈 수밖에 없는데 그건 가짜거든요.

성경책, 언약 책을 통과해서 보니까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세워서 오십니다. 그 언약을 아까 비유로 뭐라고 했습니까? 설렁탕. 설렁탕집에 설렁탕을 앞장세워서 오는 거예요. 그냥 자장면을 들고 오는 게 아니고 설렁탕. 그 언약이 오니까 그 언약에 의하면 언약이 없는 이쪽은 뭐냐 하면, 저주 받을 자에요. 뭐가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제가 아까 강의하기를 사도바울은 무슨 사도라고 했습니까? 이방인의 사도라고 했지요. 이스라엘이 보기에 이쪽동네가 무슨 동네인가 하면, 이게 이방인의 동네거든요. 이방인의 동네. 뭐가 없다고 했어요?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으니까 그냥 자기가 섬기고 싶은 대로 그냥 정화수 떠놓고 옛날 우리 할머니도 그랬어요. 할머니도 교회 안다녔는데 매일같이 때가 되면 음력 월초가 되면 부엌에서 혼자 궁시렁, 궁시렁 했다 말이죠. 하여튼 새벽에 들어보면 그저 남산 위에 시계처럼 우리 자식 잘되게 해주시고 올 때 건강하고 사업 잘되게 하시고, 그냥 비는 거예요. 사람들이 정동진의 해 뜨는 걸 보고 빌듯이 보름달 뜨면 그냥 비는 거예요. 언약이 없어요. 나중에 알았지만, 언약이 없고 그냥 비는 거예요. 그저 하얀 소복입고 빌고 그 다음에 종이가 있어요. 종이를 가지고 성냥개비로 태우니까 종이가 불이 붙으니까 올라가잖아요. 올라가면 막 올려요. 아직도 그 기억나요. 그냥 비는 거예요.

요게 뭐냐, 이방인의 신이에요. 사도는 바로 언약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구하라고 사도가 이것 비는 대신에 십자가피를 소개하라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찾아왔습니다. 찾아왔어요. 옛날에는 너희들이 언약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 성의껏 정성을 다하여 깨끗하게 살면 천국 갈 줄 알고 빌었는데 이제는 이 복음,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뭘 받는다? 저주 받는다. 이 저주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협상할 대상이 아니에요. 봐주기가 될 수 없어요. 사도바울한테 무슨 봐주기가 있습니까? “사도바울님, 그 십자가 말고 구원 받을 거 있습니까?” 물으면 “아이고 뭐 당신한테는 특별히 십자가 없이도 구원받게 해줄게요.” 이런 식으로 사도바울이 나서서 협상을 못해요. 자기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교인이 몇 명이냐, 자기편이 몇 명이냐, 그거 지금 고려대상이 안됩니다. 자기는 죽고 싶은 거예요. 자기는 내편이 몇 명이다, 다 귀찮아. 빨리 죽어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달리신 그 예수님을 빨리 얼굴을 마주 보고 싶어요.

그거 보고 싶지, 자기 팬 관리하고 이런 것도 다 귀찮고 그저 죽고 싶은데 내가 못 죽는 것은, 빌립보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지금 죽고 싶지만 못 죽는 것은 너희들 때문에 못 죽는다. 전할 복음이 남아있기 때문에 못 죽는다 했어요. 자기는 막 가고 싶은데 사람들이 마구 잡아당기는 것 같아.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의 피로서 죄가 용서받는 식으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화가 이만큼 났어요. “사도바울 당신! 당신 율법이 필요 없다는 말이냐?” 이런 식으로 화를 냈거든요. 그럴 때 사도바울이 말하는 유명한 말이 있어요. 성령을 받는데 율법을 행함으로 성령을 받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갈라디아서3장에서 합니다.

내가 성령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았는데,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성령이 내려온 걸 봐서 성령이 와서 십자가 피를 알기 위해서 구원받는 데는 성령을 먼저 공부해야 된다는 조건 없이 왔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다시 성경책을 보게 되면, ‘아! 율법이라는 것은 법은 우리로 하여금 날 때부터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구나! 죄인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래, 나 죄인이야.’ 이제부터는 내가 자기 잘난 맛에 기쁜 게 아니고 내가 죄인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 다음부터는 스트레스도 안 받고 인생의 모든 짐이 진짜 배설하는 것처럼, 오줌 눌 때 쏴 누면 기분 좋잖아요. 배설할 때 화장실에서.

뭔가 온 몸에서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 무거운 짐이 ‘내가 잘나야 돼! 나는 뛰어나야 돼! 남은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오래 살아야 돼! 나는 망하면 안 돼, 나는 아프면 안 돼.’ 하여튼 이 모든 나는, 나는, 나는 잘되어야 돼! 하는 그 모든 스트레스, 자존심, 체면, 위신, 그게 배설물을 통해서 다 날아가듯이 나의 의로움이 다 내려가는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그래서 빌립보서1장에서 하는 말이 나는 그동안 내가 잘났다 하는 것은 지금은 나는 화장실에 가가지고 배설물로 다 버리고 왔다.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이 지식을 알고부터는 그동안 내가 자랑해왔던 철학과 모든 학문과 뛰어남과 착함과 완벽한, 사도바울은 사도되기 전에 율법에 완전한 사람이었어요. 자기보다 완전한 사람 못 봤어요.

그 완전함, 이런 것도 하나의 당뇨병 환자처럼 당뇨가 다 빠지잖아요. 포도당 빠지듯이 그냥 노란 오줌 속에 그 모든 자존심, 체면도 싹 빠지면서 죽기 전부터 이미 천국 생활을 사도바울이 했던 겁니다.

두 번째 시간에는 요 언약이 어떻게 진행 되는가를 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공은주(IP:218.♡.196.154) 14-05-06 11:03 
수원140320b-(언약)1강 - 이 근호 목사

정리를 다시 한 번 해드리겠습니다. 정리를 해드리는데 다른 거 없어요. 이쪽에는 언약이 있다. 저쪽에는 언약이 없다. 간단하지요. 어렵지 않지요. 언약이 없으면 그냥 없지만, 언약이 있으면 나중에 뭐냐 하면, 어린양이 되고 출애굽이 되고 갈라지고 어린양이 나중에 뭐냐 하면, 누군가 오셔서 십자가 지셔가지고 요 십자가 안에는 피가 있는데, 요 피를 무슨 피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언약의 피.

언약의 피는 공연한 게 아니거든요. 쓸데없이 예수님이 피 흘린 게 아닙니다. 다 피 흘린 이유가 있어요.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씻어내게 돼요. 이걸 우리가 피 발라서 씻어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씻어주시는 거예요.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님이 씻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어줄 때, 우리에게 뭘 발생시키는가 하면, 죄라는 것을 일부러 만들어요. 죄를 일부러 만들어서 죄와 십자가 피와 만나도록 하는 겁니다. 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요. 말씀을 주시게 되면 ‘아! 이런 것도 죄가 되었었구나!’ 화내지 말라. 화 내지 말라? 아! 화내지 말라는 것도 죄가 되는구나! 특히 성경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지요. 원수를 사랑 안하면 뭐가 돼요? 이게 죄가 돼요. 그런데 원수 보면 화가 나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원수를 사랑 못하는 육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또다시 또 십자가의 피로서 우리의 죄를 씻어줬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일을 언약을 통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전체적으로 아시겠지요.

이방인들은 지 잘난 맛에 살아가지만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고 그 죄는 예수님 안에서 의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 두 번째 시간에는 뭘 하는가 하면, 요 과정을 펼쳐보겠습니다. 성경을 찾아볼 수 있지만, 여러분들이 성경을 안다고 치고 그냥 성경에 있는 내용만 그냥 툭툭 던지겠습니다.

창세기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와요. 아브라함은 아직도 누가 못 왔느냐 모세가 아직 이르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 다음에 이삭, 이삭 다음에 야곱, 야곱 다음에 이스라엘, 이스라엘 다음에 모세 되거든요. 전체가 2000년이니까 600년 차이가 나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준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줬습니다. 그걸 아브라함의 언약이라고 하는 거예요. 자,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줬다는 말은 언약을 받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지금 어디가 있느냐 하면, 지금 천국 가있습니다.

요한복음8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아브라함이 예수님보기를 원했다가 예수님을 보고 기뻐했다는 대목이 나와요. 참 신기한 대목이죠. 아브라함은 여기 있고 예수님은 한참 뒤인데,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가 보고 기뻐했다고 되어 있어요. 성경에.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지금 천국 가있는데 지금 누굴 만났느냐 하면 예수님을 만났다 이 말이죠. 만났거든요.

그러면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 거예요. 이걸 제가 어제 수요설교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요게 만두피에요. 요 안에 돼지고기하고 잡채, 김치 좀 넣고 두부도 다져서 넣고 후추 뿌려서 이게 뭐냐 하면, 만두 속이 되지요. 만두피는 만두가 아닙니다. 제 말 맞지요? 만두 속을 가지고 만두피에 담아서 요렇게 하게 되면 만두가 됩니다. 찝니다. 갑자기 만두가 먹고 싶네. 요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요 만두피가 뭐냐 하면, 이게 아브라함이고 만두 속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 예수님의 언약이 되거든요.

아브라함이 지금 천국 가있습니다. 천국 가있을 때에 아브라함이 누구 공로로 가있다고 하겠습니까? 누굴 믿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하겠어요? 나는 내 잘나서 구원받았다고 하겠습니까? 누굴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 보기를 원했지요. 그럼 예수님 덕분에 아브라함은 지금 만두로서 지금 천국가면 만두가 한 두 개가 아니에요. 43300개 만두가 많이 있어요. 천국 가면. 만두가 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 속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요걸 ‘의’라고 합니다. 이걸 ‘하나님의 의’라고 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약속을 믿으매, 언약을 믿으매 뭐가 되느냐 하나님의 의가 돼요. 의가 되어서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의인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 이야기인데 물어보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죄인이지요. 그러면 따먹기 전에는 죄인입니까? 무죄한 사람입니까? 죄인은 없지만, 의인은 아니에요. 의인이냐, 죄인이냐 되기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아이고, 당신은 의롭습니다.”라고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죄가 없는 상태지만 의인은 아니에요.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무죄한 상태가 돼버리면 또 따먹을 수 있어요. 또. 또 따 막고 또 죄지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뭐 만드는가 하면 무죄한 자로 만드는 게 아니고 아예 의인으로 만들었어요. 의인으로.

만약에 우리가 그냥 죄 안 짓는 사람 돼버리면 또 실수해서 죄 지으면 아무리 평생 동안 죄 안 짓더라도 80되어서 죄 짓게 되면 졸지에 죄인 돼버리거든요. 아예 죄인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뭐냐 하면, 아예 의인이 되는 거예요. 이 의인은 율법을 지켜서 의인 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모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이대로 지켜도 제대로 지킨 것인가, 자꾸 뭔가 모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십계명 중에서 제일 마지막 계명이 뭐냐 하면, 탐내지 말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는 탐을 안내더라도 새로운 물건, 백화점에 새로운 물건이 나온다던지 어떤 남이 잘되는 것이라든지 새로운 것이 들어오게 되면 자동적으로 우리마음속에 뭐가 생깁니까? ‘아! 갖고 싶다.’ 탐욕이 생기지요.

이것은 내가 죄를 지으려고 한 것이 아니고 견물생심이라, 불교에서. 보기만 하면 탐이 나는 거예요. 보기만 보면 탐이 나는 거예요. 내가 이 예배당보니 탐이 나요. 없었으면 탐심이 없었을 텐데 보니까 탐이 나는 거예요. 나는 착하다, 법 지켰다 했는데 만약에 이런 게 생겨버리면 갑자기 졸지에 뭡니까? 탐심이 생기면서 탐내지 마라에 위반이 돼버리고 나는 졸지에 아무리 착하고 의롭고 의로워도 졸지에 뭐 됩니까? 죄인 되지요. 이리가지고서는 해결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예 의인되기 위해서 의가 될 수 있는 방법에서 아브라함의 행함을 끊어버렸어요. 아브라함 너는 행하지 말고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행함으로 아니라 믿으면 아브라함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믿으니까 아브라함은 의인이 된 거예요.

이걸 제가 설명하면서 만두피는 가만히 있으면 돼요. 만두 속을 넣고 오므리면 만두가 되듯이 만두피가 자기가 김치 다듬고 잡채 썰고 자기가 만들 필요가 없고 자기는 가만히 있기만 하고 만두 속이 들어오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싸면 되는 거예요. 이 만두 속이 뭐냐,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예수님을 감싸는 사람이 되고 그럼 이건 내 이름이 아니고 나는 주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거예요. 이 만두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만두지 내 만두가 아니다 말이죠. 아까 첫 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첫째 시간에는 설렁탕, 두 번째 시간에는 만두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님이 만드신 주님의 만두가 되는 거예요. 그 안에서 의가 나와요. 의는 어떤 것도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다시 합니다. 8번째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기 있다. 신이 있을 것이다. 믿자. 이건 뭐가 빠졌다 했습니까? 언약이 빠졌지요. 그런데 성경을 통해서 보니까 여기 아브라함 언약이 나오면서 이걸 믿으면 뭐된다? 믿으면 의인이 돼버려요. 믿으면 의인되는데 의인되는 근거가 뭐냐 하면, 바로 제사입니다. 제사.

어떤 제사? ‘피 있는 제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해서 그 제사인데 피가 있는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피있는 제사를 드리게 했는데 물론 거기 어린양을 잡아요. 어린양을 잡아 놓고 어린양이 나중에 어떤 인물과 관련되어 있어요. 어린양 잡아라 해놓고 나중에 인물을 보니까 누구냐 하면, 세상에 그렇게 아끼고 사랑하는 이삭을 아버지 손으로 죽이게 하는 거예요. 평소에 아브라함이 제사를 드릴 때, 기껏 잡는 것은 염소, 소, 양 그런 거 잡았거든요. ‘아이고, 뭐 이것만 잡으면 잡았다는 행함으로 구원받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하나님께서 이것도 제사 드리라고 해놓고 거기다가 또 나중에는 이삭을 잡으라고 하니까 참아 아버지로서 자식을 잡기가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이니까 자기는 만두피니까 할 수밖에 없지요. 할 때, 스톱! 하고 수풀을 봐라! 수풀을 보니까 거기에서 뭐가 튀어나왔어요? 수양이 튀어나온 거예요. ‘아하! 수양과 사랑하는 아들을 주께서 바꿔치기해서 살리는구나! 그렇다면 하나님아버지께서 장차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죄인을 의인 만들기 위해서 수양 같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그 때가 온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알려준 거예요.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이삭이 아들이잖아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요 방법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죽이는 예수님의 방법을 이미 당겨서 보여준 게 돼요. 그런데 아들을 죽이라고 했는데 수양이 튀어나왔으니까 아하! 수양이 내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어떤 사람이 된다면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였던 예수님이고 진짜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는 거예요. 이게 언약입니다. 이게 언약인데 그동안 사람들이 이 언약을 모르면 뭐만 남아요? 그냥 착한 것만 있지요.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 언약이 나와요. 언약이 나온다고요.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겁니다.

그 다음에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쳤다. 그걸 믿음으로 의인된 거예요. 그런데 이 아들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삭이죠. 이제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지금까지는 아브라함 언약이에요. 이제부터는 ‘이삭언약’이에요. 자, 언약이 뭐냐, 언약은 만두피인데 만두피 속에 담긴 이것이 바로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이걸 뭉쳐보면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의 언약, 야곱의 언약, 새 언약 이리 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가 나타나면 성도 속에 누가 있다? 성도 속에 예수님이 들어있으면 성도도 마찬가지로 언약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약속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삭언약이 있는데 이삭 언약은 자식이 두 명이에요. 하나는 야곱이고, 하나는 에서입니다. 자,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식이 몇 명입니까? 아브라함 언약의 자식은 이삭 하나밖에 없어요. 이삭이 죽어서 아브라함이 살고 죽었던 이삭을 하나님이 살려줌으로서 아브라함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 이삭에 와서는 자식이 하나같으면 하나를 잡던지 하겠는데 자식이 둘되었어요. 둘되었으니까 야, 이건 어떻게 하지?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좋아했습니까? 야곱을 좋아했습니까? 에서는 먼저 나와서 형이고 야곱은 나중에 나와서 동생인데. 아버지가 형을 좋아했습니까? 동생을 좋아했습니까? 성경에 보면. 형을 좋아합니다. 에서를 좋아했습니다. 좋아했는데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좋아하는 줄 알고는 에서를 없애버립니다. 이걸 저주받게 해버려요.

그리고 이삭은 야곱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연결시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장차 올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모습을 안 좋아하는데 우리가 싫어하는 그 모습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나타나서 우리에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어렵지요. 어려울 때는 다시 한 번 하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하나밖에 없어요. 이름이 뭐라 했습니까? 이삭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잡으면 돼요. 잡으면 수양 튀어나와서 아들 살고 수양 대신 잡아서 하나님께 구원받는 방법이었습니다. 옛날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이. 그래서 아브라함은 의인이 된 거예요.

그런데 이삭이 와서는 아들이 한 명이 아니고 몇 명이 됐습니까? 두 명. 둘 중에 하나는 진짜고 하나는 가짜거든요.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삭은 어느 쪽을 좋아했는가 하면, 자기가 형 쪽인 에서를 좋아했어요. 쌍둥이인데. 이삭이 좋아하는 쪽을 하나님께서는 선택을 안 한 거예요. 이삭이 안 좋아하는 쪽을 하나님이 선택했어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장차 예수님이 올 때는 누구나 박수치면서 “야, 나 예수님이 좋아.” 이렇게 반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왜? 예수님은 우리가 싫어하는 모습으로 왔어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이사야53장.

그 분이 왔으되 아무도 그 분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 분은 우리에게 싫어버린바 된 그 분. 심지어 12제자도 그 분을 포기하고 버렸습니다. 그 분이 채찍에 맞았잖아요. 그 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그러니까 이사야53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결국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없는 거예요.

여기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라, 되어있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찔리고 상한 그 일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인가 하면, ‘우리가 애초부터 못 알아본 허물과 그리고 우리의 잘못이 있구나!’ 하는 것.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내가 원치 않았던 것 때문에 내가 저 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받았던 그 채찍 맞음과 그 아픔을 십자가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이삭이 에서를 좋아했지만, 하나님은 그 방향을 바꾸어서 이삭이 아니고 야곱을 좋아하게 만들음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리고 그저 구원 해 주심만 해도 저는 황공무지로소이다. 우리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비켜서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건졌다는 사실을 말해줬습니다. 이게 이삭의 언약이에요.

세 번째, 오늘 세 번째까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세 번째 야곱이 나오지요. 야곱이 또 만두피입니다. 야곱에게 언약 만들면 그걸 ‘야곱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 “하나님 누구십니까?” 할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어렵지만, 요걸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을 설명해 드리는 겁니다.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부러 애먹이려고 한 게 아니고 이게 언약이 없으면 갈아버리면 그냥 구원받아요. 이 세상에서는.

그러나 성경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의 언약, 야곱의 언약이 나왔고 그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찾아왔기 때문에 지금 제가 귀찮지만, 그 설명을 지금 해드리고 있는 거예요. 왜 그리 복잡하냐고 욕하지 마시고, 복잡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해드리는 겁니다.

이제 야곱의 언약을 생각합니다. 야곱의 언약하면 또 다 잊어버렸어요. 다시 한 번 봅시다. 아브라함 언약은 자식이 하나밖에 없어서 자식을 죽이고 살림으로서 아브라함은 구원받았어요. 이건 예수님이 장차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함으로 우리가 의인된다는 그걸 미리 알아차린 겁니다.

두 번째 이삭 언약은 뭐냐 하면, 그런 예수님을 우리가 반기고 싶지만, 사실은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닌 싫어하는 방식으로 오셔가지고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다 떠나버렸는데 주께서는 떠나는 사람에게 또 찾아와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건져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고 우리가 싫어하는 타입으로 오셔가지고 아무도 자기 능력으로 “나 예수 알았다.” 고 주장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가지고 “이미 너의 죄는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이미 해결했다.” 하는 소식을 전하게 하는 것이 이게 ‘이삭 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아시겠죠? 죽음으로 사는 것. 이삭 언약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그런 분인데 오셨다.

세 번째 야곱 언약이 뭐냐 하면, 야곱언약은 이렇습니다. 야곱언약은 자식이 12명이었어요. 12명인데, 12명이 다 좋아했습니까?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 하는데 사실은 안 그렇거든요. 자식이 12명이 되면 특별히 좋아하는 애가 있었어요.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자기가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라헬이었어요. 사랑했던 여인의 첫 번째 자식 이름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을 볼 때마다 자기가 일찍 죽었던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12명 가운데 특별히 요셉을 사랑했어요. 그래서 요셉에게는 특별히 옷을 최고급으로 캠브리지 옷으로 최고급으로 옷을 한 벌 말끔하게 차려 입혔어요. 다른 11명들이 화를 내겠습니까? 안 내겠습니까? 화가 주먹만큼 나왔어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야곱은 자기의 라헬을 잊지 못했어요. 잊지못해가지고 그의 자식 요셉을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가 드라마의 기왕후에 보면 나오는데.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특별히 사랑했거든요. 거기다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연거푸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연거푸 꿈을 꾸는데 달 12개가 절을 하고 그리고 벼 짚단이 자기 앞에 빙 둘러서 포위해서 절하고 요셉은 우쭐대지요. 형들은 더욱 더 화가 났지요. 그러니까 11:1로 밉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요셉보고 “형들이 양 치는데 니가 도시락 갔다 줘야지.” 하고 도시락 가져다주러 갔었어요. 형들이 가만히 보니까 아는 애가 오거든요. 동생이라. 평소에 감정이 차별대우해서 감정이 심했던 형들은 이참에 요셉을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왜? 요셉이 없어져야 모든 아버지의 사랑이 자기한테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가인이 누구를 죽었습니까? 아벨을 죽인거와 똑같은 거예요. 인간은 똑같아요. 그냥 사랑 못 받으면 남을 죽여서라도 사랑이 자기한테 독점하기를 바라는 이 인간의 마음은 이 육신의 마음은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습니다. 형들을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니까.

어쨌든 요셉을 죽이려 하고 요셉을 죽이려 했을 때, 맏이가 죽일 것까지 있겠나, 그냥 없애버리자. 죽이지 말고 없애버리는 방법이 있다. 그게 뭐냐,  애굽으로 내려가는 장사꾼에게 요셉을 30냥으로 팔아먹었어요. 팔아먹고 요셉을 죽은 걸로 위장해서 짐승을 잡아서 짐승의 피를 요셉의 옷에다가 이쁜 옷에다가 피범벅을 해가지고 아버지 편에 보내버립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사랑하는 요셉이 죽었습니다.” 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못 믿으니까 그 때 죽었던 짐승의 피를 묻힌 요셉의 옷을 보여줬을 때 야곱은 내가 사랑했던 아들, 특별히 사랑했던 아들,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던 아들, 꿈을 꿨던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때부터는 어떤 위로도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자, 야곱의 언약이 뭐냐 하면, 아무리 세상의 부귀영화가 많더라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심정으로서는 달랠 수가 없지요. 야곱의 언약은 바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정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심정, 아들을 죽여 버린 심정, 야곱에게는 아무리 좋은 위로나 아무리 큰돈이라도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없다는 이 사실 때문에 자기는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야곱의 언약이 뭐냐 하면, 야곱의 언약이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세상에 살면서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애들 출세도 하고, 공부도 잘하고, 가정도 화목하고, 천하 교회도 부흥되고, 넓은 아파트에 좋은 차도 타고, 천하를 다 가져도 진짜 구원받는 사람은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는 거예요.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진짜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아무리 가져도 헛되고 헛된 것이 세상인데 진짜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중요한 것이 누구냐, 그것은 빈 공란, 공 칸, 비어있는 칸이에요.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도리어 야곱과 형제들을 오히려 용서하고 살려냅니다.

사람 손에 죽었던 예수님이 부활해서 오히려 사람들을 살려냅니다. 그러면서도 이 빈 칸이 공란이 채워집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주 예수 말고는 없다는 사실을 야곱은 드디어 알게 되지요. 내 아들이 돌아왔으니까 더 이상 내 여한이 없다. 그럼 나는 뭐냐, 나는 빈껍데기 만두피고 그 안에 내용을 채우는 것은 바로 요셉이 채우듯이 이 세상의 우리 같은 것은, 내 인생은 껍데기인데 무엇을 모시는 껍데기이냐, 예수님이 제일 귀하다는 것을 모시는 하나의 만두로서 살라고 아브라함의 언약, 이삭의 언약, 야곱의 언약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그대로 인생에다가 적용시키는 겁니다.

이제 모든 것을 제가 정리하면서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오늘 강의한 것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여기 있다. 신이 여기 있다. 그냥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으면 되잖아요. 이것은 뭐가 없다고 했어요? 언약이 없어요. 그런데 방금 첫 째 시간에 이 이야기한 것은 위에다가 뭘 집어넣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야기했거든요. 그 다음에 이삭의 언약을 언급했고, 야곱의 언약을 설명했어요. 왜 언약, 언약, 언약을 자꾸 하는가 하면, 요 언약대로 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고 십자가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돼있어요.

요것은 하나의 교리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고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진짜로 예수님은 죽었다가 진짜로 사흘 만에 살아났어요. 이것은 과학을 따지고 할 것도 없어요.  이것은 진짜입니다. 이것은 공부하자가 아니고 실제상황이에요. 공부를 하나 안하나 실제로 예수님 부활해서, 우리가 공부한다고 해서 부활하고, 공부 안한다고 해서 부활 안하는 게 아니고 지금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이 능력에 의해서 우리가 잘난 체 했는데 말씀 딱 보니까 말씀 안에 들어오니까 우리가 사실은 세상 돈을 원했고 세상 출세를 원했고 성공을 원했고 예수 좋아한다고 해놓고 말로만 좋아했고 딴 게 더 좋았으면 하는 그런 나의 빈 공란에다가 세상 세속적인 것으로 가득 채워가지고 이만하면 내가 남한테 끌리지 않겠지, 라는 그런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육신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거든요.

그런데 고맙게도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면서 그것을 우리의 만두피를 더러운 세상 것에서부터 예수님 십자가로 바꾸어주는, 교체해주는 이 작용을 성령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 실시를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강의를 끝내면서 부탁하고 싶은 것은 말씀을 보세요. 말씀을 보시면서 말씀 없이 그냥 믿는 것하고 말씀 속에서 언약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하고 ‘아하! 요런 차이가 있구나!’ 그 차이만 깨달으신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성경 없이도 그냥 착하게 살면 천국 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천국 갈 자격도 안 되는 인간이고 다만 십자가에 피로서 용서 받아서 이제는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것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남한테 끌리지 말게 하시고 사는 것이 목적이 되지 말고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 자랑하는 것이 사는 이유가 되고 목적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공은주(IP:218.♡.196.154) 14-05-10 16:39 
수원140403a-(사도행전)2강 - 이 근호 목사

진도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늘 반복하는 게 좋아요. 지난시간에 한 게 2주전이기 때문에 사람의 기억력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난시간에 뭘 했지? 할 수가 있거든요. 지난시간에 이거 했어요. 뭘 했느냐 하면,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있다면 요런 경우가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이렇게 해서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있고 그 다음에 여기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열어준 거죠. 그래서 이것은 이방나라인 방면에 이것은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에서는 반드시 그냥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믿는 겁니다.

지난시간에 예레미야 11장 3절의 말씀에 의하면 언약을 모르는 자는 그 다음에 아주 무서운 말씀을 하시죠.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면 이 원칙에 의해서 언약을 모르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했으니까 이 원칙에 의하면 이방나라는 뭐냐 하면, 저주받을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자존심 세우려고 한 것이 아니고 성경의 예레미야11장 3절에 근거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는 잘났고 너희는 못났고 그런 차원이 아니고요, 우리는 똑똑하고 너희는 어리석고 그런 차원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언약이 없으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약이 없으면.

요즘 교회에서 언약이야기 안하잖아요. 그냥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셨습니까? 하나님 믿으면 구원받는다. 이런 식이지 언약이란 말은 잘 안 듣게 돼요. 이 교회 말고 기존교회에서는. 그러나 성경의 예레미야11장 3절에 보니까 언약을 모르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 한 번 물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모르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그들 자신은 언약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그게 제 질문입니다. 언약을 모르면 저주를 받는다고 예레미야11장3절에 나와 있는데, 그러면 그렇게 이야기한 본인들은 언약대로 살았을까요? 못 살았을까요? 못 살았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한 겁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요, 같은 편끼리는 봐주기가 있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때에 사실상 가장 기본적인 것이 뭐냐 하면,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봐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봐주기가 없어요. ‘대충 넘어가기’ 이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속이지 않고 전하는 설교자 같은 경우에는 사실은 욕 얻어먹을 각오를 해야 돼요. 봐주기가 없거든요. 저분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그분들을 속일 수 있는 권한은 없습니다.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주의 말씀을 변경시켜서 그 사람 마음에 맞추어주는 권리는 설교자한테는 없어요. 그러면 안돼요. 속이지 말기! 사태가 어떻게 되던 화산이 나고 지진이 나더라도 속이지 말기! 주의 말씀은 그대로 전해서 실제로 그들이 싫어한다 할지라도 나를 싫어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감수하고 감내해야 됩니다.

이것은 목회자뿐만 아니고 복음 아는 성령 받은 성도한테도 똑같은 운명입니다. 운명이고 팔자고 그래요. 친구 떨어지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원래 사도들은 외로웠습니다. 좁은 길은 찾는 사람이 적은법이니까.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 살며 다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지가 딱 꽂혀버리면 하나님이 주신 그 약속, 언약 안에서 꽂혀버리면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이미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지난시간에 한 것을 간추려보면, 이방나라는 뭐가 없습니까? 언약이 없이 했고,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어서 언약의 하나님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이스라엘마저 망하게 된 거죠.  자, 여기서 질문하나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망해버렸어요. 그런데 망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실패했다는 것으로 의미할까요? 아니면 그 자체가 실패가 아니라 성사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까요? 이스라엘 멸망한 것이. 성사되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본인의 힘으로 언약을 이룰 수 없는 그 실패를 오늘날 우리들의 실패로 그대로 인수인계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자기가 실패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돼요. 자기 분수를 알게 되고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무능하고 실패한 것을 안 동시에 세상의 수고한 무거운 짐도 다 사라지는 겁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난 뒤에 예쁘지요. 하지만, 어떻습니까? 자식을 잘 키워야 된다는 책임도 같이 부여되지요. 이것이 엄마, 아빠한테는 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럼 자식 낳고 기쁘지만 또 하나의 엄청난 큰 짐을 지게 될 때, 그것은 이 세상을 불행스럽게 슬프게 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치고 자식을 맘대로 제대로 키웠다고 자부할 수 있는 부모는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원래 자식은 부모 말 안 듣게 되는 식으로 하나님이 자식을 붙여준 겁니다. 기존의 윤리 도덕에서는요, 자식들아 부모 말에 순종하라, 이리 하잖아요. 성경에서는 뭐라 하는가 하면, 앞에 뭘 집어넣어요. 자식들아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 이리 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 안에서 부모를 순종할 자식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어떤 능력도 그것은 실패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식이 부모 섬기는 것 실패하고 부모는 자식을 양육하되 주 안에서 양육하라, 했거든요. 이것도 실패합니다. 전부 다 실패자로 만들기 위해서 부모, 자식이 만난 거예요. 그런데 그 실패가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에 반복이라는 점을 생각해 주셔야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신명기에 보면 자식이 부모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자식을 죽이되 가만히 죽이지 말고 공개석상, 마을 공터에 가서 온 마을 사람 다 불러놓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부모도 아닌 자로 하여금 내 자식을 죽이도록 그렇게 조치하라, 라는 법이 신명기에 나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이삭을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모습이죠. 그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실천에 옮겼을까요? 안 옮겼을까요? 아무도 안하지요.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민수기에 나오지요. 안식일 날 나무하러 간 사람을 보거든 일하는 사람을 보거든 잡아다가 돌로 쳐 죽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그 안식일 날 나무한 사람이 내 아내고 내 가족이고 내 자식이고 내 부모라면 돌로 쳐 죽일 수 있겠습니까? 안되지요. 인간은 자신의 혈육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혈육과 가족과 친구정도는 몰라도 자기 혈육의 가족을 감싸게 마련이지 거기다가 자기 가족에다가 주의 법을 적용시키는 그런 매정스러운 인간은 없어요. 팔이 바깥으로 굽는 거 없잖아요. 팔이 안으로 굽잖아요. 팔이 자연스럽다는 말은 내 새끼를 건드리지 말라 라는 것이 나를 건드리는 것이다. 이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 자연스러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니 자식 이삭을 제물로 바쳐라. 할 때 우리 같으면 돈으로 계산해서 바칠 수 있지만, 자식을 그것도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능가하는 겁니다. 이것은 곧 자식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자신을 죽이는 거예요.

신앙이라는 것이 기존교회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것은 신앙 아닙니다. 신앙은 언약 속에 들어가야 신앙이 보여요. 어제 수요설교에서 우리교회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치는 몽둥이라면 오늘날 나에 대한 몽둥이는 내 자신이 나를 치는 몽둥이로서 하나님이 그렇게 사용한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들어서 나를 치는 몽둥이에요. 그것은 평소에 내 것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애착과 집착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지만 또 누가 압니까?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시거든요. “주님을 믿어? 주님을 사랑해?”이건 다 빈말이다 말이죠. 뭘 주님을 사랑해? 나를 사랑하지요. 왜 자꾸 그런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늘어놔요. 내 자식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내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했는데.

신앙이라 하는 것은 그냥 남들 보기에 근사하게 신앙, 교회 다니는 척하는 그것은 사람은 속여요. 절대로 하나님은 못 속입니다.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  삽비라를 알지요? 자기 부부끼리“여보, 드릴 거 반만 드리자.” 자기들끼리만 아는 비밀입니다. 속닥, 속닥 쥐도 몰랐고 참새도 몰랐어요. 그랬는데 설마 교회에 성령이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교회에 사도만 있고, 교회에 장로만 있고, 교회에 집사들 있는 건 눈에 보이는데 교회에 성령이 있는 게 눈에 보입니까? 그러니까 그 부부가 사람만 속이면 모든 속임은 다 완전범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드렸지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당신이 지금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고 성령을 속였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배후에 누가 있는가, 사탄이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베드로의 눈에는 지금 사람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사탄이 지금 그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게 눈에 보이는 거예요. 사탄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오랜 친국에요. 한두 해 친구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친구였어요. 항상 우리 위주로 우리 좋은 쪽으로 이익 되는 쪽으로 우리가 출세하고 성공하는 쪽으로 그렇게 한 거예요.

실패와 성공은 사실은 은닉된 거예요. 숨겨진 거예요. 지금 나타난 실패와 성공 배후에는 그것은 바로 숨겨진 진짜 성공과 실패를 감추기 위한 이 세상의 어지러움입니다. 혼란스러움이에요. 거기에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선지자가 하는 말이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보통 교회에서 선지자를 잘 안 해요. 선지자의 모든 이야기가 비판하는 것이고 부정적 이야기거든요. 그러니까 선지자를 자꾸 본문으로 끄집어내어버리면 교회가 긍정적 교회가 안 되어가지고 사람들이 부담을 느끼고 그 다음부터는 다른 교회로 가버려요. 성경에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 옛날 언약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특징이 뭐냐 하면 망해버려라, 그게 사는 길이다. 그 긴긴 내용이 간단해요. 망하는 자여, 기뻐하라. 그래야 산다는 겁니다. 망하는 코스를 밟지 아니하면 살 수가 없다. 이사야에도 나오지요. 이사야53장의 본문의 내용으로 그걸 지금 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서론부분을 이야기했어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망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 너희들이 지금 좋다고 살고 있는 이 현실, 이 세상 자체가 너희들이 문제 있다는 것을 너희들이 예전에 그런 걸 눈치 챈 적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의 정체가 노골화되고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이 만약에 우리 마음에 찾아오지 않으면 이 세상은 너무 좋은 세상이에요. 그러나 어느 날 그리스도의 영이 내 마음에 찾아왔을 때는 ‘뭐야? 떠나야 될 세상이네. 내가 나그네잖아. 어디 여기에다가 정주고 붙이고 여기다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산다는 거 이것은 신앙의 선배들 같은 그 길이 아닌 것 같은데.’라는 감이 오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효과에요. 이것은 사람의 인력으로 되지를 않아요.

그렇다면 만나야 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우리 주님을.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본다는 그런 이야기를 고린도전서에서 했거든요. 지난시간의 성경을 이야기해보니까 결국 언약이었고 그리고 언약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이 왜 멸망되어야 되는가, 하지만 그 멸망 그것이 진짜 이스라엘 만드는 하나의 과정 속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자기 자리가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실패의 자리에서 비로소 그동안 몰랐던 성공이 실패의 자리에서 새싹이 피듯이 실패한 내 자리에서 피어나는 겁니다.

에스겔31장에 보면 바로 하나님이 에스겔을 해골로 데려가지요. 해골로 데려가서 묻습니다. 이 해골이 살겠느냐? 에스겔이 하는 말이 자기는 모르니까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말씀이 임하니까 그 해골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방식대로 하나님이 해내겠다는 거예요. 다시 그 방식대로 적용되려면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에 예쁘장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짝 마른 해골로 본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수긍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고맙게 여겨야 돼요. 머리 잘나왔네. 그것까지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아 요거 사고 난 뒤에는 유행에 떨어진 거 때문에 몇 날 몇일을 후회하고 그러지 마시고 해골인데 오늘도 먹을 것을 주시고 단비주시고 항상 이렇게 은혜 받고 산다는 것을 우리가 늘 아시고 그 은혜라 하는 것은 우리가 부족한데서 주신 은혜이기 때문에 그저 우리는 나를 볼 때 그저 부족하고 참 믿음 없는 행동하고 하는 그것만 찾으면 되는 거예요. 부담 없이 삽시다. 사람이 몇 년 살지 모르는데 부담 없이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아무도 여러분들을 성령 받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북한의 김정은? 허수아비입니다. 미국은 큰 몽둥이에요. 이사야 10장 5절, 앗수르? 그거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거 몽둥이에요. 몽둥이. 때리면 맞으면 돼요. 왜냐? 치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감사히 맞으면 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를 길들이기 위한 몽둥이인데 세상 사람에게 복수하려고 보복하려고 “이씨, 한 번 두고 보자.” 이런 식으로 상대할 가치도 없는 허수아비를 붙들고 상대한다는 게 얼마나 사이코 한 겁니까?

들판에 가서 허수아비 만나면 멱살 쥐고 합니까? “허수아비야, 옷을 왜 그런 식으로 입었어?” 하고 허수아비 목 들고 하면, 이건 바보잖아요. 그동안 우리는 허수아비에 너무 주눅 들고 살았어요. 허수아비를 너무 부러워해요. 허수아비들이 모여 있는 그런 교회에 대해서 그걸 자랑질해요. 그만한 교인이 없어서 기죽었고, 어쩌면 우리가 그 허수아비와 동일한 허수아비처럼 못 되어서 환장한 그러한 모자람을 노출시키고 말았지요.

오늘 두 번째 시간에 지난번에는 예레미야11장3절, 이 언약의 말을 쫓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분명히 제가 언급했습니다. 다음 시간되면 또 복습할 거예요. 또 잊으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사도행전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8장32~33절,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이사야53장 7절,8절의 말씀이거든요.

자, 오늘 이 시간에 이 대목을 제가 택한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대목이 빌립이란 집사하고 그리고 이디오피아라는 그 당시에는 큰 나라였거든요. 큰 나라의 고관대작이에요. 직접 임금을 아뢰는 높은 지위에 있는 귀족이지요. 그 높은 내시라 할 수 있는데 그 높은 고관과 아주 하찮은 빌립집사, 사람들이 보기에는 하찮지만, 성경에 등장한 것도 대단하지만 이 빌립집사는 어떤 재산을 가진 것도 아니고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성령 받았다는 그것밖에 없어요.

성령 받은 사람이 이디오피아의 내시라는 고관대작과 만났을 때에, 물어봅시다. 여러분들이 사람과 사람 만날 때 어떻게 만납니까? 이 생명수 교회의 교인들은 전부 다 말씀으로 만나지요. 보통은 그리 안 만나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은 반드시 돈이 매개가 됩니다. 돈이 중개가 되고 매개가 되는 거예요. 편의점에 가서 “아가씨, 안녕하십니까?” 이리 하지 않잖아요. “이거, 얼마에요?” 묻잖아요. 돈을 매개로 해서 하는 겁니다. 부동산 중개소를 만나도 마찬가지고. 이 세상 살아가면서 가족 말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돈 관계로 만나요. 그게 육적인 이 세상의 특징입니다. 그걸 유식한 말로 ‘자본주의’라고 해요. 자본주의.

자본으로 말미암아 자본 안에 인간들이 각각 자기 위치를 갖고 있어요. 그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하거든요. 그럼 이 자본주의를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실이라고 해요. 현실, 실제. 병원에서 뭔가 의료사고나면 돈으로 때우면 그만이고요. 보험도 마찬가지고 돈으로 때우면 되고. 애가 만약에 눈이 덮여 무너졌다. 그럼 돈으로 보상해 주면 그만이고요. 모든 마지막 해결은 돈으로 해결될 때, 돈이 매개가 될 때 그게 자본주의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자본주의를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현실이라고 했지요. 이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없는데 여기 사도행전8장에 나와요. 생판 모르는 사람이에요. 빌립집사를 언제 봤다고. 모르는 사람이에요.  빌립집사와 이디오피아 내시가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그들의 만남은 바로 돈이 아니었고 뭐였습니까? 말씀이었어요. 말씀이라는 것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이걸 이렇게 봅시다. 예언으로 맞는다. 예언으로.

여러분, 예언이라면 상당히 이해하기 쉽잖아요. 예언이라 하는 것은 현재 있으면서 미래에 일을 앞당겨서 현재 말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그리고 예언의 특징은 뭐냐 하면, 말했던 것이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고 시나리오대로 스케줄대로 그대로 미래가 진행되기 때문에 예언 안에서 미래가 고정되었다 이렇게 할 수가 있어요. 예언 안에서 미래가 고정되었다.

이것을 저는 다른 강의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동결’상태라 합니다. 동결이라 하는 것은 어름이 이렇게 있습니다. 이게 물이 아니고 얼음입니다. 얼음인데 얼음에 나뭇가지가 한 들어갔어요. 나뭇가지가 이렇게 들어가고 요쪽에는 끝부분에 팥알이 들어갔습니다. 물 같으면 흔들면 서로 만날  회가 되지만, 어름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쨍쨍하게 얼었기 때문에 만나겠습니까? 못 만나겠습니까? 얼은 체 그대로 있지요. 이게 바로 인간의 위치라는 겁니다.

예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이렇게 각자 자기 역할 할 뿐이지 서로 관계성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 안에서 예언된 대로 얼어버렸으니까. 그래서 노래도 있지만,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란 노래도 있지요. 만약에 어떤 남자가 이렇게 같이 붙어산다면 이건 주의 뜻이 되는 겁니다. 같이 동결돼요. 하나님이 동결시킨 것을 누가 그걸 녹이리오. 안되잖아요. 연탄불 가지고 녹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모든 가족도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은 동결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에 이렇게 동결된 예언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 말씀가지고 만났을 때에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예언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여러분들이 안 듣던 용어를 써서 미안합니다만, 이게 적당한 용어가 돼서 그래요. 이 예언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매개’ 또는 ‘매개체’ 다른 말로 하면 ‘중재’ 더 쉽게 하면 ‘중매쟁이’ 이게 제일 쉬운 말이죠.

세상에서는 “나 이런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늘나라에서는 안 통합니다. 왜냐 하면, 매개가 없기 때문에. “저는 말씀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라고 한다면 저쪽에서도 “나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인입니다.” 할 때 형제가 되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의 매개, 언약의 매개, 새 언약의 매개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뭐냐 하면, 성령이 임해야 예수님과 제자가 두 번 다시 헤어지지 않고 하나로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누가 와야 된다고요? 성령이 그냥 오면 안돼요. 성령이 매개가 되어야 돼요. 제가 방금 성령이 매개가 되어야 된다고 했지요. 성령을 소유하면 안돼요. 그것이 내 것이 되어버리면 안돼요. 성령님이 매개가 되어야 돼요. 매개가. “주여, 제가 저 사람한테 이야기할 때, 성령을 통해서 성령을 매개로 해 달라.”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니까요.

나 성령 받아서 잘났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니까요. 흔히 성령을 부르짖는 순복음 많은 교회에서 성령을 받아버리면 이게 소유가 되잖아요. 그럼 성령을 내놓는 게 아니고 성령 받는 자기를 내놓으면 결국 자기 과시, 자기 자랑질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저쪽에서도 지지 않고 “니만 받았나? 나도 받았다.” 하고 자랑질해대면 온통 교회가 자랑하는 인간의 욕망을 자랑하는 자기 자랑하는 그런 난장판이 되어버립니다.

기도해도 경쟁적으로 큰소리치고요, 오래하고 누구한테 안 지려고 하고, 그것은 그걸 가지고 육의 열매라 해서 갈라디아에 시기와 질투와 탐욕과 이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반대의 육신의 열매라 했거든요. 성령을 빙자해서 육신의 열매가 나오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해결책이 뭐냐 하면, 내가 성령을 소유하지 말고 성령님으로 하여금 나를 소유케 해서 내가 등장할 때는 성령님을 소개하는 거예요.

성령님은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고 누가 주신 거예요?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신 겁니다. 성령이 그냥 예수님이 주셨다 하면 되는데 왜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셨다는 말을 왜 집어넣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십자가지지 아니하면 성령이 우리한테 오시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복잡하지요. 제가 복잡하게 이야기하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한테 복잡하게 교육받았어요. 굉장히 복잡해요. 요한복음1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말을 듣는데 제자들이 복잡하게 들었어요. 지금은 오지 못한다. 나중에 가서 처소를 마련하면 갈게. 주여 처소가 뭡니까? 처소는 나중에 성령이 처소다. 그러면 언제 오십니까? 내가 가야 오는데 가려면 내가 십자가에 지고 가야 돼. 왜 그리 복잡해요?

지난시간 다시 해봅시다. 지난시간에 뭐냐, 신이 있고, 인간 있고 성의를 다해 섬기면 간단했어요. 간단했잖아요. 그런데 지난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신이 있고, 인간이 있고 섬기면 된다. 이게 아니고 이건 가인의 제사고 진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하나님 계시고 여기 인간이 있다면 여기에 뭐가 있다고요? 언약이 있는 거예요. 언약이 있다는 것은 언약 자체 내에서 우리 보고 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고 언약이 완성되면 언약의 신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주님 곁으로 데려가는 그 방식을 하나님께서 채택하신 거예요.  

이렇게 복잡하니까 이런 교회는 교회가 잘 안돼요. 그런데 “신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 알지요? 정성을 다해 섬기시면 복 받습니다.” 이런 교회는 너무 너무 잘돼요. 이게 왜냐 하면, 무속신앙의 연장이기 때문에 너무 잘되는 거예요. 편하고 성경 볼 필요도 없어요. 그저 뭐만 하면 돼요? 기도만 하면 되는 거예요. 기도해놓고 응답은 지 맘대로 편집하고. 지가 역사를 만들고.

그런데 이쪽은 점검받아야 돼요. 언약에 합당하느냐, 합당하지 않는가, 십자가의 정신에 위배되는가, 아니면 부합되는가, 그걸 점검해야 되니까 사람들은 이쪽이 어렵다고 해가지고 고개를 설레, 설레 져버리지요. 왜 그리 복잡하게 돼서 이상하다. 잘 모르겠다 해가지고 알기 쉬운데 가자, 이리 가버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제가 아까 인간의 신을 할 때, 기도만 한다 했지요. 어떤 단체는 성경공부만 해서 가는 사람이 있어요. 헌금해서 가는 사람이 있는데, 헌금, 선금, 예배참석 뭘 해도 안돼요. 반드시 언약이 주어져야 된다니까요. 언약이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약속이 완성된 것이 새 언약이고, 새 언약은 바로 십자가로 주어지는 겁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아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반드시 마귀가 지금 계속 작용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귀는 십자가를 제일 싫어하니까. 어쨌든 사도행전8장에서 빌립과 내시 사이에 말씀을 통해서 만납니다. 만나는데 그렇게 된 것은 성령께서 빌립을 그렇게 성령께서 하신 거예요. 가까이 하게 되면 거기에 말씀을 읽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빌립도 마찬가지고 내시도 마찬가지고 말씀을 매개로서 만납니다.

오늘 이 강의할 때, 제가 준비한 취지가 뭐냐 하면 이 성경이 이렇게 두껍지 않습니까? 두꺼운데 이거 성경을 다 외워야 합니까? 다 외우면 구원받습니까? 지금 다시 물어봅시다. 빌립과 이디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다 외웠습니까? 안 외웠습니까? 안 외웠지요. 그러니까 뒤척이면서 보니까 이 대목이 안 풀리는 거예요. 그 말은 우리에게 뭘 시사합니까? 성경 전체를 풀 수 없는 대목이 있다는 거예요. 누가? 성령께서.

창세기부터 외운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시편 다 외운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 시편 외우는 사람도 있어요.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암기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였다 이 말이죠. 성경을 외운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성경 백날 시험 쳐도 구원받는 게 아니다 말이죠. 대학교 선교단체 성경 공부하는 거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닌데 그걸 성경 구절 많이 아는 걸로 해서 그걸 우쭐대면 안돼요. 여호와 증인도 마찬가지고. 신천지에서도 성경 많이 가르쳐요.

성경에는 핵심이 있는 거예요. 이 근호 제가 핵심이라 했습니까? 성경의 성령께서 생판 모르는 사람 만났을 때, 35절 봅시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이리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출발점이 뭐냐 하면, 이사야 53장 그 대목을 시작해서 성경 전체를 다 훑어버리는 겁니다. 제가 이 방식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지요. 제가 이 방식을 사용하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강의에서 이 구절을 한 거예요. 생명수가 나오는 구멍이 있는데 왜 그 구멍을 팔 생각을 안 하고 엉뚱한 이런 걸 팔 필요가 뭐가 있느냐 말이죠.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성령께서 시키는 일인데. 이디오피아 내시가 죽을 때 이 성경 다 외우고 죽는 게 아니에요. 몇 년 살다가 죽을 수 있고, 몇일 살다가 죽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내시는 구원받았습니다.

아, 성경을 다 몰랐는데도 구원받아요? 특정을 통해서 안의 내부로 들어가는 거예요. 특정 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내부로 휘저은 거예요. 성령과 더불어서. 성령 받은 빌립과 더불어서 휘저은 겁니다. 보니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다 한 분의 이야기가 돼요. 누구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 책이라는 사실을 성령께서 두 사람에게 다 알려주게 된 겁니다. 그걸 지금 저와 여러분이 같이 공유되기를 바랍니다.

그 때 그 시절로 같이 그 현장에 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현장에. 우리는 여기서 경청했으면 좋겠어요. 경청. 빌립이 이사야 책 펴고 할 때, 우리도 여기서 녹음기 들고 이렇게 경청했으면 좋겠어요. 성경 다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33절 끝에 나와요.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겼다고 되어있지요. 보통 사람들이 교회 올 때 빼앗기려고 교회 옵니까? 더 얻으려고 옵니까? 얻으려고 오지요.

그런데 정작 구원받게 하는 그 본문 말씀은 빼앗긴 사람을 알게 되는 그 순간 사람은 구원이 되는 거예요. 어디에서 빼앗겼느냐, 이 세대에서. 우리가 말하는 현실 속에서. 현실에서 얻어 챙긴 것이 아니고 현실 속에서 빼앗기러 오신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 분이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32절 보면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날에서 저도 같은 방식으로 이사야53장을 통해서 성경전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같이 알고 오늘밤에 낙원에 같이 갈 수 있다면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이걸 알고.

그러면 사도행전8장33절 말씀을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복잡해서 한도가 없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딱 2가지인데, 제가 방금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이 세대’거든요. 이 세대 나오고 그 세대입니다.  그 다음 한 가지는 뭐냐 하면, 빼앗김. 가정문제나 사회문제나 직장문제 해결하려고 교회 온 사람들이 이런 것들이 보이지를 않아요.

정말 말씀을 매개로 해서, 반복합니다. 돈을 매개로 해서 평소의 생활은 돈을 매개로 해서 아침에 눈만 뜨면 “여보, 요번 달 월급 얼마인데?” 돈을 매개로 해서 “야, 공부 잘해. 공부를 잘해야 이 땅에서 월급 많이 타고 하는 거야.” 모든 자식들이나 남편이나 또는 가족끼리라도 돈을 매개로 해서 “아이고, 형님은 또, 또 돈 빌려달라고 왔어.” 모든 게 사람 만남이 돈을 매개로 만나는데 여기서는 그 세대에서 빼앗겨버린 어떤 한 분을 통해서 비로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출구가 아주 작은 구멍이지만, 바늘구멍보다 더 작은 구멍이지만, 구멍이 비로소 나와 있다는 거예요. 분명히 탈출구가 있다는 것을 성령이 빌립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이 세대가 빼앗기니까 이 세대는 공격이고, 공격자가 되고 이쪽에서는 피해자가 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결국 공격하는 쪽과 그로 인하여 피해 받는 쪽의 결합에 의해서 이 세상이 실제로 이렇게 움직인다는 것이 예언입니다. 예언.

아까 제가 예언이란 말을 했지요. 예언의 특징은 동결되어 있다. 모든 구조는 이미 완결되었어요. 시나리오는 이미 굳어져버렸어요. 그 내용 구조는 뭐냐, 공격자와 피해자의 대립되는 두 요소로서 짜여져 있습니다. 공격자와 피해자로.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빌립보서나 그 뒤에 있는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으니 그와 함께 고난 받는 것도 당연하다는 이야기 나오고요. 로마서8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의 성령을 받게 되면 빌립보서1장도 같은 말이지요.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했잖아요. 제가 갑자기 고난 이야기하는 이유는 고난에 대해서 우리가 엄청나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겁니다.

고난이라고 평소에 알고 있던 사람은 테레사수녀, 주 기철 목사, 손 양원 목사, 한 경직 목사,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있는 선교사들, 이런 사람들을 고난의 대명사로 이렇게 간주하잖아요. 그것이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걷는 고난은 그렇게 티내어지는 게 아닙니다. 제가 어떤 면에 좀 과격한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아주머니들이 마사지 받는 그것도 고난이라고 제가 언급했거든요. 돈 깨나 있는 분들이 마사지 받을 때, “아이구, 시원하다!” 이것도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고난, 환란, 이 개념 하나 바꾸는 것도 정말 너무나 벽이 두꺼워요. 이게 자꾸 찡그리고 슬프게 사는 것을 자꾸 고난이라고 하는데 그건 위장이에요. 그것도 하나의 쾌락이고 즐거움입니다. 고난 받는데서 오는 즐거움. 자기가 천사가 되었다는 어떤 향락, 정신적인 심리적인 향락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수시로 이야기해요. 전도서를 좀 보셔야 돼요. 아내와 함께 즐겁게 맛있는 거 먹고 살아라. 그게 환란이다. 그게 환란이라는 거예요. 무슨 뜻이냐 하면, 주를 빼놓고 환란 같으면 뭐냐 하면 불교에요. 완전히 스스로 자학하고 때리고 낮추고 부족하다, 부족하다, 유대인들이 고난주일에 매일 했던 게 있잖아요. 금식하면서 때리는 거, 그걸 환란이라고 하지만, 주가 들어가 버리면 얼마나 어렵게 살았느냐, 얼마나 밑바닥 생활을 했느냐 놓고 환란이 정해지는 게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진짜 넉넉하게 누리는 경우에도 주님을 잊지 않았느냐, 그게 환란이에요.

마귀는 주님을 놓으라고 자꾸 부추기거든요. 안 믿는 사람들이 와가지고 돈10억 드릴 테니까 복음 이야기하지 마세요. 이것도 환란이에요. 이런 환란은 좀 괜찮은 환란이죠. 그런 환란 좀 받아봤으면 좋겠어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다줄 테니까 다 이루었다! 하는 이것만 하지 말라는 것. 그러니까 세상에서 “니가 앞으로 뭘 해야 구원받지? 안하면 구원 못 받아.” 이런 게 환란이에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 세상부귀영화 다 주겠다고 하잖아요. 그걸 주 안에 있는 사람도 동일하게 받아요. 세상의 부귀영화 누리라고. 누리세요. 누리면서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다 말이죠. 돈이 천억 있어도 괜찮아요. 왜? 누리세요. 하지만 어느 순간 천억 때문에 산다고 이리 돼버리면 지금 탈락한 사람이에요. 누림은 따로고 구원은 십자가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걸 잘못 생각하게 되면 인간의 사치와 향락을 조장하는 언사가 되어버려요. 자칫하면. 될 공산이 많지요. 성령을 받지도 않으면서 받은 척하는 사람한테는 아주 신나는 소리, 기쁜 소식일 거예요.

그러나 그것보다도 안 믿는 그 사람들이 그런 척하는 게 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진정 내가 내 영혼이 자유로운가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언제 자유로웠을까요? 언제? 성경의 환란, 고난 나올 때 우리는 자유를 느낍니까? “주여, 제가 환란을 받으려고 했는데 또 환란을 못 받았어요. 또 즐겼어요. 이래가지고는 내가 구원 못 받을까싶어요.” 이러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마귀가 좋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를 연출하지 마세요. 오늘 수원에는 비 오는데 대구에는 비가 안 왔거든요. 수원에 비오라고 누가 기도한 적 있습니까? 기도한 사람이 있긴 있겠습니다마는 여러분들이 기도했습니까? 그냥 비 온 걸 누리세요. 200mm오면 떠내려가면서 누려야 되고. 이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조장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그냥 십자가의 은혜 주신 주님에 의해서 주어진 상황인 것을 받는 그것이 우리는 감사가 되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을 못 마땅 해하는 세대가 있을 거예요. 이 세대가 여러분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이 사람아, 비오는 것은 이게 저기압과 고기압의 전선 때문에 그런 거야. 비는 하나님이 보낸 게 아니야.” 이런 식으로 자꾸 핍박을 가한다니까요. 핍박한다고 망치 들고 때리는 게 아니고 말로서는 때로는 어떤 때는 실제로 폭력이 있을 수가 있지만, 어쨌든 그런 것들이 환란의 소리이니까 그 소리를 우리는 듣는 것도 주께서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 멱살 쥐고 흔들어봐야 허수아비로 흔들리니까 싸우지 마시고요, “그래, 니가 그럴수록 내가 옛날에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왠 은혜인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이건 변함이 없어.” 내가 뭘 해서, 내가 환란 받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구원받는 거예요. 

환란은 뭐냐 하면,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겁니다. 환란 받는 행위를 해야 구원받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오는데 그 환란을 조장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일부러 찡그리고 일부러 고생한다고 하고 일부러 돈 바쳐서 어디 기도회에 바치고 그런 짓하지 말라는 말이죠. 가만히 있어도 환란이에요. 설친다고 더 환란 되는 거 아니니까. 그냥 가만히 있으면 성질나잖아요. 성질대로 사세요. 사시면 환란가운데서 내 성질이 더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모든 조치가 주님께서 협력해서 선을 이룬 조치인데 왜 그 현상을 반대합니까?

오늘 본문 보세요. 내시가 일부러 빌립집사를 요청한 것도 아니고 빌립이 내시를 만나려고 사전에 가서 미리 대기한 것도 아니었어요. 주님이 무엇 때문에 일하십니까? 주님은 살아계시거든요.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이루신 일인데 왜 자꾸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만 눈에 보이고 주님의 일은 왜 눈에 안 들어오느냐 말이죠. 세상 자체가 이 세대가 있는 이상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도 그 자체가 환란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살아도 환란이 되니까 일부러 환란을 조장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일부러 어렵게 살아서 “이게 환란 맞지? 그러니까 신자 맞지?” 이렇게 확인하려고 하지 마세요. 자기가 자기를 연출하게 되면 그건 위장술이 되어 버립니다. 고난 주일날 맛있게 잡수세요. 고난 주일은 인간이 만든 거예요. 부활절하는 것은요, 그건 죽은 사람 제사 드리는 거예요. 평소에도 살아계시는데 왜 부활절 드립니까? 평소에 안 살아있을 때는 부활절 제사 드리지.

교회에서 부활절, 맥추절하는 것은 목돈 더 얻어내기 위한 핑계에요. 돈 빼내기 위한 절기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매개로 합니다. 목사도 전부다 올 때, 교인들을 돈을 매개로 오잖아요. 돈을 매개로 저 사람은 얼마짜리로 오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교회는 성령에 의한 교회가 아니에요. 성령께서는 바로 뭐냐,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을 매개로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이 세대에서 그 분은 땅에서 빼앗겼다는 거예요. 빼앗겼다.

그러면 그 다음에 봅시다. 지난번에 했던 것은 인간이 그냥 섬기는 것이다. 이건 가인의 제사기 때문에 안 받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길 때, 언약을 통해서 했다, 했고.

지금 이 시간에 이야기하는 것은 언약이 둘인데, 하나는 공격자, 가해자와  그리고 피해자의 형식으로 언약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언약을 몰랐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약을 지킬 수가 없지요.

제사지내라, 하니까 제사지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종교적인 행함.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행함. 그런데 이 피해자에 가담하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이 언약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빌립과 내시를 이 안에 들어가게 하시지요. 들어갈 때는 출입구가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주 안에서 들어가야 돼요. 주 안에서. 주 안에서 언약 안에 들어가면 거기에 하나님 아버지도 계시고 예수님도 계시고 성령님도 계시고 언약이 있고 우리는 거기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공격자와 피해자를 통해서 언약으로 말미암아 바깥으로 공격자가 누구고? 피해자가 누구고? 물음표가 두 개 나와요. 어떤 의미에서 지금부터 이 성경공부가 새롭게 제대로 출발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창세기3장15절이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기3장15절은 뭐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이야기하거든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그리고 여자의 후손을 이야기하고 난 뒤에 그 여자가 누구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여자 이름을 하와라고 지어버립니다. ‘하와’뜻이 뭐냐 하면, ‘생명’이에요. ‘여자의 후손’은 곧 ‘생명의 자손’이에요. 생명으로부터 난 자손과 뱀 그러니까 생명이 없는 쪽과의 전쟁터. 그게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생명이냐, 아니면 저주냐, 그 싸움터의 군사로서 우리는 성령으로 인하여 부름을 받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8.♡.196.154) 14-05-11 05:06 
수원140403b-(원약속)2강 - 이 근호 목사

그림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피리가 있잖아요. 피리에는 관이 있는데 관이 중간 중간마다 구멍이 나있지요. 구멍이 있어서 손가락으로 막고 열고하면서 불면 소리가 나잖아요. 전체 성경의 역사에서 이렇게 구멍이 난 점이 있어요. 요게 아까 이야기한 사도행전8장 빌립집사 아까 봤잖아요. 그리고 여기서는 고린도전서 십자가 이야기, 특히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창세기3장에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이렇게 구멍이 나있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렇게 했다가 잠입을 하다가 이렇게 튀어나와서 들어왔다가 튀어나오면 되는 겁니다. 요 구멍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피리 생각하면 쉬워요.

언약을 통해서 어린양이 점점 더 사람이 돼가요. 처음에는 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해한 것이 양 잡으라고 하니까 양 잡으면 복 받는 줄 알았어요. 백날 잡아 봐도 복 못 받아요. 양을 잡으면서 사실은 양 잡는 우리가 ‘이 양의 죽음에 동참해야 사는구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양을 잡는데, 이 양을 잡으면서 양 잡는 전문적으로 잡는 사람과 더불어 그 다음에 뭐하는가 하면, 양 같은 사람이 등장해요. 양 같은 사람. 양 같은 사람은 뭐냐 하면,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신이 임해가지고 핍박을 받는 사람이에요.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지요.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애쓴 사람도 아닌데 다윗은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아버지 따라서 형님들에게 도시락 전달하는 현장에 갔다가 골리앗 만났고 골리앗이 할례도 받지 않은 인간이 너무 까불어서 할례 받은 쪽을 공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킨 대로 공격하니까 죽었고 난데없이 그 때부터 환영 인사되었고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 되었고 자기는 팔자 필 줄 알았는데 갑자기 쫓겨 다녔습니다.

그런 사람이 또 있어요. 요셉 같은 경우입니다. 요셉은 가만히 있었는데 꿈꿨고 꿈은 지가 꾼 게 아니잖아요. 꿈 꿨고 꿈 때문에 자기 처지는 형편없이 낮아졌고 자기가 봐줬던 사람들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꿈을 꾸게 하신 바로를 통해서 자기가 갑자기 국무총리로 승진되어 버렸지요. 또 있지요.  다니엘과 세친구도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양이 사람 될 때에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양 같은 그러한 사람이 등장하면서 양을 잡는 제사와 양같이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과의 간격이 점점 더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벌어지는 거예요. 양에서 갑자기 예수님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린양처럼 살아야 될 그 사람들이 앞당겨서 줄줄이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아시는 얼굴이니까 제가 그 다음부터 진도 착착 나가도 막히지 않을 것 같아요. 

제일 먼저 나온 게 아벨입니다. 아벨은 양을 잡았습니다마는 아벨의 운명은 뭘 닮았어요? 양과 닮았어요. 양이 죽었잖아요. 양을 드린 아벨도 양처럼 죽임을 당합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죽음을 유발시켜서 그 죽음 근처에 대한 본질을 드러내는 용도로서 죽음을 유발시켜요. 죽음은 언약 적 죽음인데, 그냥 자살하면 안 되고요, 그냥 살다가 늙어 죽은 것 안 되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게 되면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속성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이건 죽었으니까 이건 없어진 거죠. 잘 들으세요. 중요한 겁니다. 죽음은 구멍이 없어지고 이쪽은 살았다가 되고 여기서는 죽었다가 되지요. 자, 구원은 어디서 생겨나느냐 하면 죽었다, 에서 구멍을 통해서 죽었다가 올라옵니다. 어떻게 올라오느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올라오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4장 한번 봅시다. 4장 25,26절,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가 튀어나온 거예요. 여호와가. 이름을 부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름을 부른 사람은 그냥 역할이라 보면 되고 실제로 드러나는 것은 여호와 이름이 어디서 나온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오잖아요. 실제로는 여호와의 이름이 어디서 나옵니까? 주의 이름이 어디서 올라옵니까? 그냥 땅을 파고 올라오는 게 아니고 누가 죽어야 돼요.

언약이 먼저 주어지게 되고 언약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발생되고 그 죽음을 잊어버리거나 놓치지 않고 허비하지 아니하고 그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나오면서 여호와의 이름이 여기서 올라오는 거예요. 이게 주님을 발견하는 원칙입니다. 주님을 어디서 발견하는가, 주님의 발견 장소는 지금 오늘날 2014년도 4월 3일 날 우리 주님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할까요? 저기서 할까요? 특정 장소에? 수원에? 대구에 할까요? 어디에 할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했거든요.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고 어느 때에 있는 게 아니고 너희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안에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내가 싫어 죽은 자다, 라고 느끼면 내 안에서 주님이 “그래서 내가 너를 살려내는 거야.” 라고 하면서 주님이 부활하게 되는 겁니다. “주님, 오늘도 제가 죽어 마땅하죠?” 라고 물으니까 주님께서 “그러니까 오늘 아침부터 너를 살려냈잖아. 심장이 뛰게 하고 발걸음 세고 머리카락 세면서 살려냈잖아.” 그래서 항상 주님이 살아남은 뭐냐 하면, 우리가 언약대로 내가 죽은 자라는 것을 인정할 그 순간에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나는 겁니다. 이 말을 이렇게 해야 되지요. “살려내는 주님이 나를 들고 사용하실 때, 나를 죽이는 방향으로 일을 하신다.”라는 말과 같은 말이에요.

말을 타는 사람이 말을 다룰 때, 말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이랴!” 하고 말 타잖아요. 주님께서 우리의 등에 타고 우리는 말이라면 말이 자기 자존심을 내세울 때는 위에 타신 주님은 뒤로 넘어져버린다고요. 그런데 말이 고분고분하고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고 주인님은 내 등에 탔습니다, 하는 순간 우리는 누구를 증거 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삶이 된다 말이죠. 그게. 이런 마음이 오래 갔으면 좋겠는데 오래가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일부러 그래요. 이렇게 우리는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이라고 하는데, 그 때 누가 만약에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욕하게 되면 갑자기 죽었다고 여기던 말이 갑자기 어떻게 됩니까? 펄쩍대면서 성질이 나면서 “니가 뭐냐?” 이리 나온다 말이죠. 우리가 펄쩍 뛰는 순간 누가 떨어져버립니까? 우리 주인님이 떨어져버리지요. 그 다음부터는 너하고 나하고 싸우면 자존심 싸움에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신약시대에는 이렇게 즐겁게 할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그렇게 즐겁지가 않아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쪽 부분을 죽음의 상태로 유발시킵니다. 그런데 그냥 자살하는 게 아니고 가해자들을 유발시켜 놓고 주의 이름을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그게 창세기4장 이야기입니다.

창세기5장을 보게 되면 이건 좀 복잡한데요, 창세기5장21~24절에 보면,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앞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선배들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되었는데 이 에녹은 어떻게 됩니까? 에녹은 죽음을 보지를 않지요. 그건 왜 그런가 하면, 에녹의 4대손이 있습니다. 에녹의 4대손이 누구냐 하면 노아에요.

자, 여기서 그전에 몰랐던 새로운 법칙이 또 하나 추가가 됩니다. 기존 법칙이 뭐냐 하면, 언약에 의해서 죽음의 상황이 벌어지고 그 죽게 되면 죽음에서 생명이 나오면서 이 생명은 주의 이름과 동반해서 나온다. 그래서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생명을 준다. 낙후한 법칙을 세웠습니다. 그게 피리부분에서 구멍 난 부분에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다윗이 범죄로 죽어야 되는데 다윗이 죽지 않고 다윗 아들이 죽고 다윗 아들이 죽고 난 뒤에 이들이 하나님이 사랑하셨다. 이러면서 솔로몬이 다윗과 밧세바를 통해서 다시 태어나죠. 그렇지요? 다윗의 아들이 죽고 밧세바와 다윗관계에서 여디디아 솔로몬이 나오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다윗이 분명히 범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 한 자리가 주님이 나타나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범죄 하세요.”가 아니라 범죄 안 해도 우리는 범죄 한 자로 돼요. 하지만 주께서 그걸 이용한다는 점에서 영광스럽습니다. 이게 다른 사람한테 혜택이 안 되고 창세전에 구원될 사람에게만 주어진 혜택입니다.

뭐냐 하면, 니가 죄인임에 불구하고 죄인을 내가 충분히 사용하겠다는 거예요. 충분히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남이 버린 그 가건물을 주께서 돈 주고 사가지고 거기서 생명을 뽑아내겠다는 말입니다. 뽑았는데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생명의 면류관도 반납합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죽였어요. 사람을 죽인 사도바울에게서 뭐가 뽑아져 나옵니까? 복음이 나오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조치하신 거예요. 그 원리로만 구원받는 거예요. 따라서 자기 자신이 잘 날 존재가 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등의 그런 이유가 없어요. 그런 기대도 하지 마세요. 충분히 기대하지 마세요. 훌륭하고 잘난 존재 될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 그래도 돼요. 주께서 쓰시면 되는 거예요. 심적 부담을 갖고 살면 마귀만 좋아할 뿐입니다. 우리는 충분하게도 못난 존재에요.

여기서 노아와 에녹사이의 관계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는데 여러분, 출생이 먼저입니까? 장례식이 먼저입니까? 순서상. 출생이 먼저 되고 난 뒤에 늙어죽어야 뭐됩니까? 장례식 하잖아요. 우리의 생각은 출생이 먼저고 장례식이 나중인데, 성경에서는 이걸 바꿔버립니다. 장례식이 기정사실이 돼요. 장례식은 기정사실이고 그 장례식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게 해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선택을 하면서 내가 이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내가 살았다고 오해하는 거예요. 살았다고 오해하게 만들어서 출생에서 지속되는 것은 결코 장례식이 아니고 엉뚱한 데로 장례식이 없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이렇게 되어야 우리 자리가 죽어 마땅한 자리, 죽음의 자리, 예수님을 배태하는 자리, 예수님을 임신하는 자리가 되어버려요.

이렇습니다. “나, 부처 믿을까? 예수 믿을까?” “예수 믿어야지.” 이런 경우는 예수는 뭐냐, 살아있는 내가 보다 잘 살기 위해서 올바른 선택을 해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심하고 교회 등록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내 자신이 ‘문제없어. 나는 제대로 된 선택을 했어.’ 라고 이걸 기존사실로 했는데 이런 출발점은 성경에서는 어디에도 없는 출발점이에요.

주께서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했으면 우리의 모든 선택은 엉터리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철저하게 쓰레기 같은 존재이고 개 같은 존재고 죄인 중에 괴수되게 만들어서 그래서 우리 속에서 예수님이 등장해버리면 이 예수님의 등장은 내가 선택한 등장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 쪽에서 말도 안 되게 먼저 나를 선택했다는 그것을 확인해주는 겁니다. 처음부터 주님이고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주님이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이 있다는 것. 창세전에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은 주님이라는 것을 탄생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거예요. 야~ 참, 어렵다.

다시 하겠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께서 내가 태어나기로 작심했다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 내가 태어나서 하는 짓거리가 모든 것이 내 잘되는 위주로 하는 짓거리임을 폭로시키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나는 내 좋아라고 하는 거야.’ 라고 생각하게 되면 창세전에 우리가 미리 예상한 그것에 대해서는 내가 관여할 수가 없잖아요. ‘일단 태어난 거 잘해보자.’ 이 식이지, ‘내가 왜 태어났지?’ ‘뭣 때문에 태어났지?’ 그건 우리의 무지에 속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면 우리는 구원 못 받아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이 짓과 상관없이 태어나게 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말은 어렵지만, 알아서 챙겨 들으세요. 이해하실 겁니다. 평소에 우리의 신앙 생활하는 것이 다 내 살기 위해서 내 살기 위해서 유익되라고 했던 짓거리가, 사실은 짓거리라는 말을 상스럽게 말은 했지만, 짓거리라는 말이 맞아요. “일단 태어났으니 살아보자.” 이것은 창세전의 우리하고 이건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창세전의 우리가 어땠는지 알려면 우리의 죽는 것도 살려고 애써봐야 이미 죽기로 확정되었음을 우리가 수용을 해줘야 창세전의 모든 고난도 주님의 고난이라는 것. 나를 죽이는 그 주님이 창세전에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 이렇게 엮이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나는 빠져야 되지요. 그런데 우리는 잘 안 빠지려 해요. 우리 자신이.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자꾸 이런 고집을 부리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은 거예요. 에녹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에녹과 동행하신 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동행하신 분이 “에녹아!” “예” “니는 죽음을 보지 않는다.” “아이고, 제가 착하기 때문에.” “아니야, 그게 아니야. 니 4대 손자한테 내가 무슨 일을 할 거야.” 그 일이 손자에게 있는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4대전부터 주님께서 준비단계에 들어 간 겁니다.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은 것은 에녹과 관련된 4대후손이 어떤 일을 벌이게 되면 그 일을 벌이는 것이 4대 선배들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게 뭐냐, 심판에서부터의 구원. 단순히 안 죽고 사는 게 그게 문제가 아니고 우리 개인으로서는 안 죽고 사는 게 최고 중요한 문제이겠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사적으로 “니, 오래 산다.” 그거 해주려고 구원해 주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가지고 주님의 하신 일이 얼마나 거대하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고 싶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냥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살게 된 내가 하나님께서 어디에 우리를 종사케 하시느냐 더 중요한 문제에요. 에녹처럼 쓰셔도 되고 노아처럼 쓰셔도 되고 그건 주님 마음대로에요. 에녹이 노아 부러워하면 안 되고 노아가 에녹 부러워하면 안돼요. 우리 4대 고종 할아버지는 방주도 안 짓고 구원받았다. 이것을 너무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노아가 부러워요. 왜냐 하면, 방주 지었기 때문에 구원받았잖아요.

우리보고 뭐 만들라고 해보세요. 차라리 그게 나아요. 편해요. 우리가. “애야, 예배당 지어라.” “우리는 예배당 지으면 구원받습니까? 그러면 짓겠습니다.” 이게 편해요. 그런데 우리보고 뭘 요구합니까? “예수 믿어라.” 이건 더 힘들어요. 왜냐 하면, 우리는 나를 사랑하거든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 앞에서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불가능한 말인가 우리는 실감나야 됩니다. 우리는 매일 돌아서면 나만 사랑하니까. 차라리 무엇을 만들라하면 그게 더 쉽지, 그냥 망치 들고 만들면 되니까.

노아는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아요. 계속해서 선배들 믿을 때, 자기 행동으로 믿은 거 같지요? 선배들은 창세전까지 가야 돼요. 오늘날 우리와 똑같은 거예요. “아니야, 내가 뭘 행동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야. 분명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그 일이 나를 지금 구원시킨 거야. 그 일이 뭐지?” 그 일은 우리가 태어나서 주께서 시키신 안에서 나의 태어남과 상관없는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 태어나고 난 뒤에 시키신 일 속에 그게 합류되게 되어있어요. 포함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그걸 성령을 통해서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까발려주는 겁니다.

그렇게 밝혀진 그 사건은 우리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시간에 매이면 안 되고 우리의 시간을 초월한 창세전부터 창세 끝까지 모든 걸 그 안에 창세전부터 있었던 그 시간대로 해석을 해줘야 돼요. 그 해석이 얼마나 어려우냐, 어렵기 때문에 제가 장례식이 출생보다 먼저다고 먼저 설명한 거예요. 믿거나 말거나. 인간의 시간대가 아니고 주님의 시간대에서는 이게 가능한 겁니다.

세례요한도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나보다 뒤에 오신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이다. 엘리야, 모세도 마찬가지지요. 특히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먼저 계신 분은 내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다. 아브라함이 그걸 이야기한다 말이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은 내 후손으로 오실 그 분이 나보다 앞서 계시다. 요것이 내 시간인 걸 아는데 내 구원은 내 시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바깥에 있는 이 시간대가 나를 구원한다. 이걸 누가 고백합니까? 내가 고백하는 거예요. 어떤 경우?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나는 항상 나의 행동이 죄고 내 행동으로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 구원은 바깥에서 조종하고 이 바깥의 조종은 내 이 시간을 초월한 시간들을 갖고 있다 이 말입니다. 말은 어렵지만, 이해는 되시잖아요. 그렇죠? 느낌 아니까.

성경해석을 시간 속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고 뒤에서부터 소급해서 해석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아담은 어떻게 되는가, 아담은 구원받았지요. 아담도 구원받은 거예요. 아담은 에녹이 아닙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았고 아담은 죽었는데, 관계없어요. 아담이라는 이 열차가 있는데, 열차에서 객차가 자꾸 연결이 되는 거예요. 연결되면 이 아담의 형상을 닮은 에녹이 나오잖아요. 그럼 에녹이 나왔으면 에녹이 죽지 않았으면 아담도 죽지 않게 돼요. 왜? 한 열차로 묶여져 있으니까.

그런데 에녹의 역할은 뭡니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매 죽지 않았다, 잖아요. 그 뒤에 하나, 둘, 셋, 네 번째 누가 나와요? 노아.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매 뭐가 되었다? 방주를 지었다, 되었잖아요. 그러면 노아방주에서 노아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소급해서 앞에 있는 모든 아담부터해서 여기 이 계통의 창세전의 예정된 계통은 다 방주에 구원받지요.

노아로 끝났습니까? 방주로 구원받습니까? 또 나오지요. 셈. 셈의 계통이 또 나와요. 셈 계통에 누가 나와요? 아브라함. 아브라함 뒤에 또 나와요. 이삭. 이삭 다음에 야곱.  그러니까 계속 소급해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 엘리야와 모세가 같이 이야기하잖아요.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 제 죄 언제 씻어줄 건데요?” “언제 돌아가셔서 죄 씻어주실 건데요?” 엘리야와 모세가 변화산에서 같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정말 신기하고 신기한 이야기에요.

그저 내 자식 좋은 대학에 붙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헌금하면서 “주여, 받으소서. 이 헌금 받으시고 그저 복주세요.” 정화수 떠놓고 비는 그런 것. 인간이 신에게 비는 이런 거하고 이건 완전히 언약 이야기하고. 이 언약 속에 들어가야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냥 십자가는 차안에 덜렁대는 십자가지, 이 안에 들어갈 때, 내가 그냥 십자가 믿는 게 아니고 죄인이 되는 가운데서 십자가가 내안에서 유효하고 발휘가 돼요. 내가 죄인인 경우에.

나 잘났고 십자가 잘났고 그런 거 없어요. 나 못났고 십자가만 잘났어요. 나 못났고 십자가만 잘났고. 거기서 자랑하는 것은 오직 뭐만 자랑한다? 오직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리 되어야 돼요. 나는 훌륭한 목사라서 큰 교회 짓고 주님의 십자가 믿고, 그거 아니에요. 내가 선교사로서 29년 다니면서 선교했고 십자가 믿고, 아니라니까요. 어느 나라 가더라도 나는 그 나라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고. 탄자니아에 가도 나는 죄인이고, 내가 이디오피아에서 선교한 내가 죄인이고, 알라스카가도 내가 죄인이고, 영국가도 미국가도 죄인이고.

주의 이름은 여기다가 구멍을 뚫어서 주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노아가 무슨 머리가 좋아서 방주를 만듭니까? 노아가 “토끼야, 이리 좀 들어 와줘. 토끼야 나와 놀자.” 하면 토끼가 들어옵니까? 주께서 알아서 다 들어왔어요. 알아서 다 들어왔다니까요. 그러니까 노아가 방주이면서도 자기가 겁났어요. 왜? ‘아! 나 같은 인간에게 들어 쓰시지?’ 오직했으면 모세가 “주여, 저 말 못합니다. 저 상대하지 마시고 그냥 사는 대로 살게 해주시고 다른 사람 쓰세요. 다른 사람. 제가 감당 못합니다.” 그럴 때 그게 주의 종이에요. 감당 못한다는 소리가 늘 나올 때.

주께서는 “감당하는 것은 니가 감당하나?” “니 살대로 살았는데 감당은 왜 니가 하는데? 니 숙제야? 내 숙제지.” 자식문제도 그렇고 남편, 아내 문제도 그렇고 우리가 감당 못합니다. 주 안에서 하도록 하세요. 주 안에서 한다는 말은 내가 한다는 게 아니고 주 안에서 그렇게 주께서 하시는 것에 감사함으로 그냥 결과를 수용하라 그런 뜻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니까 니가 평가하고 니가 판단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6장에 봅시다. 노아의 뜻이 뭐냐 하면, 안식인 거예요. 땅의 안식. 에녹은 개인적으로만 구원받았지만, 노아 때 오게 되면 그 후의 노아 후의 사람들은 노아덕분에 땅의 안식을 누리는 그런 시대가 오는 겁니다. 6장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게 누가 이야기한 겁니까? 여호와죠. 여기서 하나님하지 마세요. 여호와가 등장합니다. 왜냐, 하나님과 여호와가 다르거든요. 엘로우힘과 여호와가 달라요. 여호와는 언약을 몸소 실천에 옮기신 분이고 엘로우힘은 천지를 창조한 그것을 유지, 보전하시는 분이 엘로우힘입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한 것을 유지, 보전하고 지키는 분이고 여호와께서는 지키신 그 환경 속에서 실제로 언약을 성취시키는 분이 여호와하나님이에요. 누가 주의 이름입니까? 엘로우힘이 주의 이름이에요? 여호와가 주의 이름이에요? 여호와가 주의 이름이에요. 그걸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여호와 또는 주의 이름 이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도 이렇게 갑자기 하나님이 두 분으로 나눠지잖아요. 하나님의 신까지 하면 세분됩니다.

하나님의 자신이 나눠지는 이것은 언약으로만 이해가 되지 그냥 하나님해서는 몰라요. 합체하지 마세요. 우리는 신은 하나라고 합체하는데, 합체하는 신을 하지 마세요.  일을 하실 때는 세 분이 나눠서 일을 하기 때문에 같이 우리도 덩달아서 나눠서 이해를 해야 돼요. 합체하는 것은 편리하기는 하지만 이건 하나님은 우상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현재하지 않는 하나님이고 이렇게 나누어서 될 때는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어요. 나누는 이유가 있다고요. 인간을 도외시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눠지는 겁니다.

도외시하는 이유가 뭐냐, 3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여호와께서 그 다음에 사람이 있을 때, 여기 여호와께서 뭐라고 합니까? 나의 신이죠. 나의 신. 하나님의 신을 통해서 사람과 함께 하겠다? 안 하겠다? 함께 안하겠다. 영원히. 영원히 함께하지 않겠다. 이유가 뭐라 했습니까? 그들이 뭐가 되기 때문에? 그들이 육체가 되기 때문에. 육체가 되기 때문에 함께하지 않겠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제가 쉽게 바꾸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체로 만들겠다는 뜻이에요. 흙이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창세기3장에 하나님이 약속한 “아담아, 니가 이름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을 반복해서 재확인해주는 겁니다. “너희들은 잊었지? 나는 안 잊었다.” 흙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라, 는 그걸 반복하는 거예요. 그럼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원히 함께하지 않겠다는 것은 육체로 만들어서 없애버린다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신이 임할 사람을 따로 만들어내지요. 그럼 육체에서 신이 임할 사람을 따로 만들어내는 방법은 여기에 뭐가 투입됩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투입될 때, 언약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신과 함께 동행이 가능합니다.

그 창세기6장9절에 보면,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지요. 에녹과 동행한 건 달라요. 여기서 동행한 것은 앞에 뭘 전제로 했습니까? 육체가 된 인간을 영원히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고 난 뒤에 노아와 동행하기 때문에 노아 본인의 자랑거리나 잘남을 가지고 동행했다고 하지 말고 노아에게 어떤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동행하신 거예요. 여호와께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야곱과 함께하신 것은 야곱이 착해서가 아닙니다. 야곱이 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함께하신 거예요. 그래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성도의 받은 사명이 중요한 겁니다. 그 사명은 그 때 그때 달라요. 사명을 본인이 예상하거나 짐작하지 마세요. 어떤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면 그 사명을 감당케 해주실 능력을 함께 주십니다. 사도바울이 말했지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했잖아요. 사람들이 이걸 오해해요.

사도바울이 건물을 왔다, 갔다 뛰었습니까? 사도바울이 공중을 날아다녔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사도바울이 물위를 막 걸었습니까?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모든 일을 했다고 했잖아요. 그 모든 일의 모든 것이 인간이 기대한 모든 일은 포함이 돼요? 안돼요? 안되잖아요. 그러니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을 일을 시키겠다. 그걸 사도바울이 볼 때는 모든 일을 한 게 되도록 그렇게 해석이 되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기대한 모든 일을 하게 하신 게 아니고 “하나님, 제가 남자인데 여자로 바꾸어주시옵소서.” 이런 거 안돼요. 주께서 복음전하는 일에 니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겠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모든 객소리치우고 간단히 말해서 “내가 하게 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도 어렵게 해. 쉽게 할 수 있는 문제를요. 사실은 쉽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쉽게 이야기했는데 하도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걸 설명한다고 복잡해졌는데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지금 살고 있고 내가 존재하는 것도 주의 은혜로 존재합니다.” 라는 말이에요.

그렇다면 우리도 성령 받은 우리도 매일같이 그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냥 마사지 받으면서 “아이구, 시원하다. 이것도 주의 은혜군요.”이리 하면 된다니까요. 뭐가 어려워요. 축구하면서 아침에 조깅하면서 “오늘도 모든 일을 하게 되는군요.” 할 수 있다 말이죠. 뭐가 어려워요. 꼭 2000명 전도하고 예배당 10개 세우고, 병든 자가 나아야 모든 일이 해당되는 줄 알아요?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사람 몇 명 전도했어요? 사도바울은 자기 할 일만 했을 뿐이고 죽을 때 되어서 죽었을 뿐이에요. 모든 소관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노아 때나 오늘날 우리 때나 달라진 거 하나도 없어요. 주께서 동행할 때는 주 안에서 동행하지, 뭐가 예쁘다고 동행해줘요. 우리가 십자가 안보면요, 동행 안하십니다. 니 맘대로 해, 니 맘대로. 니 맘대로 해. 니 잘난 대로 마음대로 해.

하나님께서 복음을 생각할 때는 도와주고 복음 생각 안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살려고 하면 절대로 안 도와줘요. 제가 장담합니다. 입이 백 개라도 장을 지을게요. 주님께서는 복음밖에 몰라요. 새 언약이기 때문에.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서 벌거벗은 것도 언약입니다. 노아가 실수한 게 아니에요. 그것도 언약이에요. 그렇게 해야 함과 가나안이 떨어져나가요. 떨어져나가거든요. 주의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술 마셔서 벌거벗자, 이런 말은 아니고 노아한테는 그걸 시켰지만, 우리한테는 다른 걸 시키지요. 부동산 투기하다가 망하는 거 이런 거 시키지요.

그러니까 그냥 사세요. 그냥. 그게 주의 일이니까. 자꾸 주의 일을 따로 뽑고 내 일 따로 뽑지 마시고 그냥 다루어지시면 됩니다. 하나의 도구로서 하나의 말로서 타시는 분이 “이랴!” 하면 가는대로 가면 되지 괜히 그걸 측정하거나 평가나 판단하지 마세요. 이렇게 사는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하시는데 우리는 논다고 착각했습니다. 절대로 우리를 놀리지 않고 창세전의 내용을 창세 이후에 태어난 작은 짧은 우리 인생으로서 말하게 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을 우리가 늘 매일 체험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공은주(IP:218.♡.196.154) 14-05-14 12:02 
수원140417a-(에스겔)3강 - 이 근호 목사

세 번째 강의인데, 세 번째 강의는 그냥 가지 않고 첫 번째, 두 번째 반복합니다. 현대인들은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제가 또 감안을 해야 되거든요. 첫 번째 한 게 뭐냐 하면, 예레미야11장3절에서 이 언약의 말을 쫓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고 내용가지고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시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처음오신 분도 계시니까.

신이 있고 여기 인간이 있으면 이방인들은 그냥 인간의 신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미리 하신 분들은 답변해 주시면 고맙겠어요.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방인들은 인간이 있고 자기를 만드신 신이 있으면 신에게 그냥 예배드리고 신을 섬기면 된다고 했지요. 이 제사를 무슨 제사라고 했지요? 가인의 제사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인간이 있고 이렇게 신이 있으면 하나님이 있으면 중간에 뭐가 있다고 했지요? 언약이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게 이방인의 종교에서는 언약이 없고 이스라엘은 언약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레미야11장 3절에 보면, 이 언약을 쫓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해서 갑자기 저주가 쏟아지지요. 저주 받으려고 신을 섬긴 건 아닌데 언약 앞에서 졸지에 인간은 저주의 대상이 있다는 것을 언약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우리가 자기 위치를 아는 거예요. 아! 내가 이렇게 신에게 갔다 빈다고 해서 이게 있는데다가 추가적으로, 추가적으로 복을 더 따내는 것이 아니고 이 저주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는 그런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거예요.

언약이 없었더라면, 나는 섬기는 대로 복 받고 좀 힘이 든다고 하면 쉬다가 또 다시 섬기면 기도하면 또 복 받고 그런 식으로 중립지대에 놓였다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난 뒤에 언약을 모르는 자는,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저주의 대상으로 이미 간주하시고 작업을 하신다는 사실을 다른 민족들은 모르고 이스라엘사람만 특이하게 알게 된 거예요.

이 중간에 언약이라 하는 것은 제가 전에 언급했습니다. 이 언약은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인간에게서 나온 아이디어는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몰랐지요. 하나님 안에 있는 독생자가 나올 때, 비로소 그게 하나님이지 인간들이 상상한 하나님은 독생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기껏 상상한 그저 꾸며내는, 상상만 해대는, 그런 추상적인 신이었는데 품속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날 때,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처럼 그건 신약의 이야기이고,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구약이야기에 보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이 우리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이 언약에 대해서 인간은 손댈 수 없다. 수정하거나 변경시키거나 협상의 대상이 대거나 타협하거나 “좀 봐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요청은 언약을 우리가 만들어내지 않은 이상은 용납이 되지를 않습니다. 이 언약을 옛날 언약이라고 하고 이 언약이 그대로 신약에 가게 되면 새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구약포크레인 이야기를 했지요. 골리앗크레인, 울산이나 부산의 항구에 보면 아주 거대한 크레인이 있습니다. 울산 자동차회사도 중공업도.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의 일어난 모든 인간의 일을 언약이라는 크레인으로 해서 인간은 그냥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고 언약이 자체적으로 이동을 시켜서 새 언약으로 혜택을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요 작업은 인간은 배제된 상태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사이에 체결된 언약이죠. 약속이죠. 약속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그 혜택을 입게 되어있어요. 가인의 제사는 성의를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내가 가진 것을 신에게 바치고 섬기고 애쓰고 노력하는 데서 어떤 기대한 것을 얻는 방식이 가인의 제사라면, 언약이 나오는 방식은 뭐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손을 떼어버리고 언약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에 의해서만 그대로 스스로 성취돼 나가면서 신약에 이미 완성을 주게 되고, 이 완성된 것이 우리에게 퍼부어 주게 되면,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 그런 시스템이 언약시스템입니다.

어떻게 낯설게 느껴집니까? 이게 맞는데, 이게 맞거든요. 이게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는 거죠. 달음박질하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부와 성자사이에 했던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전개라 하거든요. 하나님의 자기 전개. 스스로 자신을 전개시키면서 거기에 합당한 사람들을 생산하는 것, 발생시키는 것 그 방식대로 하나님의 천국은 이루어나가시는 거예요.  천국을 이루어나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언약 적 관점으로 봤을 때, 비로소 세례요한이 이야기하는 것이 이해가 돼요.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고 했다 말이죠. 그러면 그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없다? 없다, 이거든요. 그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시고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개시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굉장히 낯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는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맞다고 하는 이런 상식이 전혀 통하지를 않아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에 계시는 어떤 하나님이 계시는 그 나라를 하늘나라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이 오셔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나라가 하늘나라에요.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제가 목숨을 바칠 테니까 주님나라에 가게 해달라고 했을 때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목숨을 거절합니다. 니가 죽더라도 나 있는 곳에 오지를 못한다. 왜냐 하면, 처소가 마련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처소 마련되는 이야기를 사전에 왜 이야기 안했어요? 왜 베드로가 죽어서 주와 함께 하겠다는 그 때에 왜 거절하십니까? 애초부터 인간은 올 수 없다는 이야기를 애초부터 왜 안했지요?

그것은 인간이 품고 있는 인간의 심성 속에 인간이 상상하고 있는 천국과 지옥, 이런 것들이 어떤 것인가를 이렇게 완전히 폭로 당함으로서 그 인간이 품고 있던 천국과 지옥과 실제로 하나님이 계획한 천국과 얼마나 다른가를 확연하게 드러내기까지 기다린 거예요. 예수님께서 기다려가지고 ‘아이고, 목숨까지 바치면 설마 들어가겠지.’ 하는 그것은 주님 앞에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에요. 그런 건 없어요. 목숨 바친다고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목숨 바쳐도 못 들어간다면 다른 말로 하면 어떤 방식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 나라. 그러니 천국은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있지도 않은 나라를 주님께서는 새롭게 만들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상식은 이래요. 내가 여기 살고 있습니다. 내가 여기 살고 있다면 하나님이 살고 있는 곳이 따로 있을 거예요. 장소가. 여기 있는 장소는 천국이 아니고 하나님과 천사가 함께 있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교회에서 평생토록 배워왔던 그 상식적인 천국입니다. 그게 아니었습니다. 처소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갈 수가 없는 곳. 그 처소의 중요성.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천국 속에는 처소의 중요성이 전혀 발생되지 않았어요. 전혀 이것은 생겨남이 없었습니다. 이 몸 주고서 저쪽 간다. 이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죽으면 가겠지.’ 장례식장의 설교보세요. 이 땅에서 죽으면 하늘나라 맨션아파트 있는데 아파트에서 산다는 그게 주종이잖아요. 장례식장에서 하는 부활의 동산에서 입관예배 할 때하는 설교내용이 그거다 말이죠. 그것은 이방종교에요. 이것은 언약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는 인간의 원초적 욕구에 준한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으니까 저기서는 편히 쉬겠다는 욕구에 의한 조작된 천국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언약은 그런 이방나라적인 종교가 아니고 언약 자체 안에 천국이 들어있는데 그 언약 안에는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이디어이기 때문에 인간은 애초부터 생각지도 못하고 들어갈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들어가지도 못하는 나라를 분명히 함으로 말미암아 거기에 들어가게 했을 때는 그것은 순전한 예수님의 업적이요, 예수님의 은혜요, 공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이런 천국 앞에서, 언약 앞에서 우리의 태도는 간단합니다. 못 들어가면 안가면 되는 거예요. 간단한 문제에요. 뭔가 천국 가고자 하는 의도 자체가 굉장히 수상해요. 굉장히 수상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내가 고난 받고 내가 내 죄를 깨닫는 이것도 내 구원에 보탬이 되는 하나의 마일리지가 된다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겁니다.

내가 헌신하고 내가 순교하고 내가 선교하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 기도하고, 헌금하고, 십일조하고, 교회 충성하고, 교회 봉사하고, 목사 말 잘 듣고, 하는 이 모든 것이 이게 모여져서 하나의 쿠폰, 도장 찍듯이 그래서 짬뽕 하나 맛있게 얻어먹듯이 뭔가 마일리지를 쌓는 그런 식의 천국을 언약 없이는 그렇게 끄집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인간이 타고난 거예요. 이걸 누구 탓하는 게 아니고 인간이라면 이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어린애가 엄마를 사랑해요? 있을 수 없는 거거든요. 엄마를 이용하지요. 태어날 때부터. 엄마 말을 잘 들을 경우에 뒤에 나오는 반대급부가 있는 겁니다. 맛있는 거 사준다든지 장난감 원하는 것을 사준다든지 그 어린아이가 커서 어른이 된 거예요. 그러니 어른이라는 것은 어린아이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의 기초거든요. 핵심입니다. 어린아이는 쾌락에 의해서 주체가 형성된다. 이게 프로이드,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가장 명제가 뭐냐 하면, 어린아이는 쾌락을 통해서 자아를 구축한다. 자아를 형성하는 거예요. 자기 주체성을 형성하는 거예요. 쾌락을 통해서. 이익이냐, 손해냐, 이게 기독교 종교까지 확산되는 겁니다.

이익이라면 기도까지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이익이라면 십일조까지, 헌금도 아낌없이 하겠습니다. 그게 이미 어릴 때부터 자기 쾌락이라는 것, 자기이익이라는 것을 이미 바람 넣은 풍선처럼 확장된 거예요. 그래서 이 시점에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안가면 되는 거예요. 문제는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안가면 되는 거예요. 그럼 안가면 어디 가는가, 안가면 지옥 가요.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는 것이 너무 슬프지 않느냐, 한 번 들어가면 못 빠져나온다는데 10년 살고 나올 희망이 없어요. 들어갔으면 끝나거든요.

그렇게 될 때, 나한테 너무 손해가 아닌가, 나로서는 내가 나한테 어떤 나의 인생에 대해서 내가 손대어서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절망적인 것이 아닌가, 내 인생 내 건데 내 것을 내가 손을 대어야 되고 손 댄 만큼 효과를 봐야 되는데 애초부터 효과를 잘라버리면 지금 내가 시도하는 것이 의미 없이 되고 절망적일 때 뭔가 붙잡고 의지하고 믿고 열심내고 할 수 있는 어떤 기댈 수 있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그걸 사전에 잘라버리면 나 어떡하라고? 라고 이렇게 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육신가지고 만들어낸 창세기3장입니다. 우리가 창세기3장을 백독 만 독을 읽어도 우리는 이해를 못해요. 그런데 제가 안가면 돼요. 이것이 창세기3장이 그대로 가시화된 겁니다. 왜? 생명나무 가는 길을 내가 차단시켰다 말이죠. 차단시켰음을 내가 수용을 할 때 또는 창세기6장에서 보면 너희들이 육신이 됨으로 내 신이 너희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창세기6장3절의 말씀. 너희들은 육신이 되기 때문에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이 너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그런 성경말씀 그대로 수용했을 때에 우리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 ‘말씀의 가시화’가 돼요.

내가 그동안 말씀을 지켜서 내 쾌락에 만족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수법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가는 자체가 말씀 그대로 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사해야 되고 흔쾌히 수용해야 돼요. 전에 이걸 스폰지라 했습니다. 스폰지는 물에 들어가면 스폰지가 저항할 수 없어요. 흠뻑 물에 젖지요. 우리는 태어나면서 말씀에 흠뻑 젖었다는 생각을 왜 이런 발상을 그동안 못했을까요?

이게 우리 자아가 돌멩이가 돼서 그래요. 돌멩이가 되니까 내가 슈퍼에서 내 바구니에 내가 원하는 말씀만 골라 넣는 거예요. 원하는 말씀만. 기도얼마하고, 필요한 말씀, 니가 복을 얻으리라, 그런 거 하고 헌금 열심히 하고 니가 창고에 넘치도록, 그런 거 뽑아내고, 뭔가 내 쾌락에 만족하는 내가 요구하고 있는 그걸 바구니에 담았는데 내가 말씀을 지킬 경우에만 말씀이 나한테 실현됐다는 그런 생각 자체가 이것은 말씀이 없는 거거든요. 없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의 존재의 바탕을 나로부터 출발하지 말고 아예 바탕자체를 주님으로부터 시작해버리자 이 말이에요. 아파트에 가면 화장실 앞에 보면 털실로 짠 발판 같은 게 놓여있지요. 화장실 있고 그 앞에 발판이 있어서 발 씻고 나와서 대충 닦으라고 있잖아요. 이 발판을 말씀의 발판에 얹어버리고 우리를 여기다가 세웁시다. 발판에다가. 내가 말씀을 지키지 말고 내가 두 발을 딛고 사는 그 자리가 주께서 깔아놓은 말씀에 방석이라고 깔자 이 말이죠.

그러면 나의 육체는 여기서 스물 스물 뭐가 기어 올라옵니까? 이미 확정된 하나님의 약속이 스물 스물 기어 올라오지요. 날마다 말씀이 기어 올라오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전체가 말씀에 점령당하잖아요. 말씀에 점령당하게 되면 죽으나 사나 우리가 누구의 것이 된다? 주의 것이 되잖아요. 내가 여기 있음 자체가 자꾸 여기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에 의해서 내가 여기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느냐를 제가 여러분께 요청하는 겁니다. 그렇게 사시면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굳이 말씀을 지킬 이유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자체가 축복이다 말이죠. 축복. 무슨 축복? 내 잘남? 내 자랑거리? 내 위신? 내 체면? 아니에요. 말씀이 이 만큼 대단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인으로서의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백부장이 믿었던 게 그거잖아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 백부장 중대장입니다. 그 사람이 조직신학 공부 안했어요. 어떻게 그걸 알았지요? 예수님도 놀랬어요.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천국에서 다 기어 나와! 다 나와! 너는 못가! 백부장 너 들어가! 니가 들어가! 왜냐 하면, 그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한 천국이 아니고 아들의 나라거든요.

그래서 첫째는 천국 들어가지 말자는 이야기했고 두 번째는 말씀 지키지 말자에요. 말씀을 지키려고 천국을 들어가려고 하니까 주님은 없고 집착과 아주 집념에 깡깡 뭉친 나만 거울 앞에 보이는 거예요. 내 모습만. 기도하면서도 내 기도하는 자세가 상상되는 거예요. 기도하고 앉으면서도 ‘기도 지금 몇 시간째야. 20분 째네. 오늘 기도 발 되네.’ 기도 잘되는 자기 자신을 그리면서 그걸 이미지로 떠올리면서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안 해도 구원받는데 왜 그리 용을 썼을까. 그걸 저는 ‘도 닦기’다. 도 닦기 역사는 교회사에 보면 아주 오래됐어요.  수도원들 왜 그리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독일, 오스트리아, 수도원들이 곳곳에 있어요. 왜냐 하면, 교회사에 보면 그게 순례길이거든요. 그게 요새말로 올레길. 뭐냐 하면, 걷기 운동하는 길인 동시에 순례함으로서 그 순례 길에 성자들이 고생했던 그 명소에다가 지금은 그게 하나의 여행소가 되었지만, 그걸 죽 다니면서 거기에 수도사가 있어서 설교하게 되면 적절하게 헌금도 드리고 그래서 수도원이 유지가 되고 그랬어요. 7세기부터 12세기까지 그랬다 말이죠. 신학 교회사에 나오는 유명한 신학자들 가운데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중에서 츠빙글리라는 사람이 그 중에 한 사람이었어요.

보통 취직을 했으면 그 수도원에 의해서 “아이고, 순례하는 것이 복됩니다. 순례하게 되면 당신뿐만 아니고 먼저 죽었던 당신 친척도 연옥에서 빠져나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데 츠빙글리가 순례자에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여러분, 순례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만 구원받지 아무리 노력한다고 예정되지 않은 자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런 이야기하니까 그 소문이 그 수도원에 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소문이 퍼져버렸어요. 오다가 다시 돌아갔거든요. 그러니까 수도원장이 약이 올라서 해임시켰어요. 니하고 같이 일 못하겠다고. 츠빙글리가 바로 개혁주의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 개혁주의가 종교가 된 게 뭐냐, 개신교라는 겁니다. 개신교 들어본 적 있습니까? 기독교를 개신교라 하지요. 루터, 칼빈 이렇게 개신교라 하거든요. 그러면 개신교라 하는 것은 뭔가 반대자인데 뭘 반대한 거예요? 도대체. 요즘 와서 개신교가 뭘 반대한 겁니까? 뭘 반대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칫하면 교회가 업체가 돼요. 업소가 돼요. 이것 보세요. 맥추절, 부활절, 추수감사절 이거 뭡니까? 이게 기념일이에요? 하늘나라에 기념일이 있습니까? 이 기념일은 교인들은 그걸 눈치 못 채지만, 장로와 목사들은 알아요.

이 기념일이 뭐냐 하면, 봉투 나눠주고 돈 빼는 날이에요. 푼돈 말고 목돈가지고 오라는 그 날이에요. 예수를 상업화해서 하는 게 도대체 개신교가 뭘 한 거예요? 츠빙글리는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들의 면죄부라 하는 것은 구원에 도움 안 된다고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그 개신교의 후예들이 뭐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첫 번째 이야기한 것은 지금까지 첫 째 시간에 언약을 믿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언약이란 말을 하기 전부터 사실은 저주받은 자였다는 거예요. 따라서 계속 저주받으라는 겁니다. 저주 받다가 새 언약이 와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가 의로 바뀔 때, 너희는 무상으로 천국 가는 거예요. 오늘밤에 낙원에 가리라. 무상으로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의 예레미야나 엘리야나 모세는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없었는데 그럼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오실 분을 본 거예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오실 예수님을 보고 만나서 좋다고 고맙다고 했어요.

엘리야, 모세도 마찬가지로 변화산에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 빨리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됩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지 않으면 내 죄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고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했어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천국은 예수의 나라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과 한통속이 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 별로라고 하면 천국 못 갈 사람이에요.

이 땅에서 예수 외에는 귀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느끼는 사람만 결국은 죽어서도 주의 것이고 살아서도 주의 것이고 주의 나라에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양쪽에 돈 보따리 준 게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껏 제시한 게 뭐냐, 마지막 기적이 뭐였습니까? 예수님이 병 고침도 아니고 귀신 쫓음도 아니었어요. 마지막 기적이 뭐냐, 요나의 기적이거든요. 요나의 기적이 뭐냐 하면, 바로 본인이 십자가에 죽고 인간이 해결되지 않는 구원에 대해서 본인이 대표자로 나서서 대신해서 아버지하고 단판지어서 이루어냈다는 그 사실이잖아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잖아요. 요한복음19장에서. 다 이루었단 말이죠. 다 이루었다는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하리요.

“주님, 기도는 하루에 몇 분해야 됩니까?” 다 이루었다니까요. 다. “주정헌금은 1000원으로 할까요? 2000원으로 하면 되겠습니까? 제일 낮은 게 1000원이고 좀 많으면 어떻게 할까요?” 다 이루었다니까요. 다. “예배 집회가 일주일에 열 몇 번이고 중요한 것은 세 번인데, 교회 한 주일에 몇 번가면 됩니까?” 아이~ 다 이루었다는데.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사람이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안 믿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다 이루었다는 것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내 쪽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는 것이 따로 있어야 뭔가 안심이 되겠다는 발상을 하는 거예요. “이번에 예배당 교육관 주차장 넓히는데 적어도 장례집사는 얼마를 해야 됩니까?” 주께서 응답하기를 다 이룬 거예요. 니가 교회인데 무슨 주차장을 너희 집에 주차장 없어요? 니가 교회고 남편이 교인이고. 보세요. 남편 교인이고 애들 교인이고 자기 교인 같으면 교인 수 몇 명이에요? 4명이잖아요. 4명 같으면 벌써 교회인데. 두 세 사람도 나와함께 있다는데 벌써 4명이나 되니 숫자가 많네. 자기 집에 주차장 있으면 그게 교회 주차장이에요. 자기 집에 피아노 있으면 그게 교회 피아노라니까요. 자기 집에 아침마다 식사하면 그거 성만찬이고. 자기 집에 커튼 새로 바꿨으면 교회 커튼 새로 바꾼 거 돼요. 다 이루었다니까. 다. 도대체 말길을 못 알아들어요. 말길을. 제가 경상도 말을 해서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니까요. 이게.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그 예수님께서 이렇게 눈에 나타나서 키1m78Cm 에다가 몸무게 76Kg으로 나타나면 참 좋겠는데. 양복입고. 문제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는 사실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알짱거리는 거예요. 그저 가장 눈에 잘 보이는 게 누구냐 하면, 본인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나의 구원의 훼방자요, 최대의 방해자는 누구냐, 본인입니다. 선교하러 가가지고 선교의 제일 방해자는 누구냐 하면, 선교하는 본인이 선교를 가로막습니다.

제가 십자가마을에다가 ‘시선’이란 영화를 썼잖아요. 개봉하자마자 봤어요. 아침8시30분에 갔어요. 아침 8시50분에 조조 봤거든요. 줄거리 다 올려놨습니다. 시선이라는 영화, 단기선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장호감독이. 19년 만에 개과천선했어요. 술 먹고 방탕하다가 뒤늦게 예수 믿어가지고 내놓은 영화가 시선입니다. 필리핀 선교 이야기입니다. 이슬람반군 만난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제가 평하기를 다 이룬 입장에서 내가 순교를 하나, 아니면 배교를 하나, 그 자체도 의미가 없어요.

우리는 하루, 하루 살면서 배교 안한 적이 없습니다. 왜 배교를 하느냐 하면 자, 이것은 일부러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닙니다. 아침에 햇빛비치잖아요. 분명히 마태복음6장에 보세요. 그 햇빛하나도 그 햇빛이 있는 게 아니고 선인과 악인에게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햇빛 비치고 단비주시고 사계절주시고 특히 공기주시고 특히 내 심장은 어제 밤에 내가 심장 뛰라고 소리도 안했는데 그걸 자율신경계라 하거든요. 자율신경은 신장을 관장해서 뛰게 했다 말이죠. 그렇게 뛰게 했는데 아침에 눈떠서 지금까지 나오는 TV이야기가 진도이야기입니다. 사람 죽었다는 이야기. 애 죽었다는 이야기. 안산 고등학교 2학년 자체가 통째로 다 날아가게 됐어요. 그 이야기라.

이유는 한가지에요. “신이시여, 왜 죽입니까?”에요. 주의 답변은 뭔 줄 알아요?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아까 그 그림 다시 보겠습니다. 지금 이 발판을 잃어버린 거예요. 발판을 잃어버리고, 발판을 빼버리고, 애를 어릴 때부터 과외 시켜가지고 조기 유학 보내서 영어까지 배워가지고 안산 단원고등하고 입학시켰는데 왜 이제 와서 죽이느냐 이리 되거든요. 어릴 때부터 하나, 하나 부부의 정성과 그것도 안산에 가면 유명한 동산교회 있어요. 동산교회 가서 열심히 기도하면서 이 애를 고등학교 2학년으로 키워 놨다 말이죠. 왜 죽이십니까? 지금 뭘 빼버렸어요. 이 지금 모든 과정이 그 자체가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말씀덩어리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말씀덩어리가 아니고 내 자식, 내 육신의 분신덩어리로 본 거예요. 내 육신의 확장. 연장선. 내 분신으로 본 거에요. 정말 아들이고 딸이고 한꺼번에 죽으면 진짜 어떤 의미에서는 유월절 같은 느낌이 들지요. 이 세상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이 개입안한 사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죽을 때, 신이 개입했느냐, 안 했느냐, 따지는데 왜 평소에 그 애가 공부 잘하고 아무 사고 없이 “엄마, 나 학교 갔다 왔어.”라고 할 때, 왜 하나님의 개입을 생각 안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매일 숨만 쉬면 눈만 뜨면 우리는 배교자에요. 그리고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계속돼요.

주께서 너 같은 죄인을 용서하러 왔다 할 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용서받을 죄인으로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용서가 하루라도 용서가 사라진 적이 없고 죽을 때까지 용서가 계속 되는 거예요.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그 근거가 바로 십자가에서 나온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게 길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유효기간이 영원합니다. 천국 가서도 십자가고 창세전부터,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십자가고. 십자가의 용서는 유효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시작도 다 이루었고 끝도 다 이루었고 다 이루어진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 애 죽었다고 좋다고 춤이나 출까요? 어떻게 할까요?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잖아요. 죽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를 주께서 익히 아시고 하는 말이 “그들이 안 죽고 있는 너희들보다 죄가 더 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이야기했다 말이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이미 뭔가 일이 꼬이고 무너지게 되면, 분명히, 분명히 저 애들은 뭔가 일찍 죽을만한 죄가 있을 거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인간에게서 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을 감안한 거예요.

안 죽은 내 애는 죽은 애보다 더 착합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항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아! 이래서 내가 십자가로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구나!’ 그걸 그대로 알고 증거하고 살면 돼요. 그게 우리의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 안하나 우리는 상관없이 그저 용서의 대상일 뿐입니다. 편하게 삽시다. 그저 이것, 저것 순교 하나 안하나 배교하나 관계없이 의미 없어요.

우리가 지식이 모자라서 그렇지 조금 더 지식을 많이 쌓으면 우리 자신이 내세울 게 없는 의로울 수 없는 소자라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깊이 알면 알수록 점점 많이 알게 됩니다. 처음 교회 나왔을 때는 안 믿는 사람들을 욕하지만 성경을 좀 더 깊이 알고 십자가를 깊이 알게 되면 내가 돌로 남을 칠 수 없는 돌을 던져 남을 때릴 수 없는 죄 없는 자가 아님을 알게 되는 거예요. 이게 첫 째 시간이고 두 번째 시간에 한 게 뭐냐 하면, 사도행전8장의 이야기였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사도행전8장의 내시 이야기. 빌립집사 만난 거 기억나세요? 이게 두 번째였습니다. 거기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우연히 성령께서 빌립집사와 내시가 만났는데, 내시가 어떤 대목을 봤느냐 하면, 이사야53장을 펼쳤어요. 펼치고 하는 말이 이사야53장의 내용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어떤 사람이 아무 죄도 없는데 왜 그 분이 고난 받지요?” “분명히 메시아는 죄가 없을 건데 죄 없는 메시아가 왜 이렇게 고난 받고 채찍을 맞는 죽음의 자리에 왜 가지요?” 먼저 펴놓고 물었고 빌립집사는 그것부터 시작해서 성경전체를 확 뚫어버렸어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 제가 한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의 전체를 뚫어줘야 그게 성령의 해석이라는 겁니다. 기억나십니까?

송 장로라고 있어요. 신사도 운동으로 한창 지금 부흥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 사람은 성령을 이렇게 십자가 중심으로 보는 게 아니고 성령을 뭐냐 하면, 초대교회의 이적이 있는 것처럼 지금도 이적이 일어난다. 그래서 나한테 오라. 내가 병고쳐줄게. 이리 나오는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이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것도 중요한데 예수님의 그 모든 기적의 최고 기적은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였고요. 그게 사도바울에게는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는 니가 나와 함께 죽게 된다는 것이 이게 너에게 해당될 최고의 기적이라는 겁니다. 니가 나와 함께 죽고 나와 더불어 살게 됐다는 이것이 최고의 기적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신앙이라는 게 뭐냐 하면, 홍해라는 기적, 여러분, 홍해라는 기적이 뭐냐 하면, 바다가 갈라지고 바다 속에 간 거지요. 그러니까 죽음 속으로 간 거죠. 최고의 기적은 뭐냐 하면, 내가 죽음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신 그 기적, 그것이 최고로 자랑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나는 이미 죽음을 건너왔습니다.”그 기적, 살아있는 인간이 더 살고 싶어서 사는 것에 애착을 느끼면서 “낫게 해주세요. 병 낫게 해주세요.” 그건 아예 홍해 가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에요. 진짜 홍해바다를 건너온 사람 같으면 병 낫게 해달라는 그 본성은 나와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건 나와 있거든요. 아프니까 낫게 해달라는 기도하면서 기도 가운데 응답을 받게 될 거예요. ‘내가 주님의 십자가를 기껏 죽어 없어질 내 목숨하고 바꾸다니 주의 그 귀한 피를 내 하나 살겠다고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내 이익만 생각하는 내 쾌락만 생각하는 이 못된 것’ 하고 자기를 회개하라고 내가 이런 점에서 또 죄인이구나! 하는 걸 깨닫는 그러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 강의는 뭐냐 하면, 바로 성경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십자가 중심으로 전체를 해석하면 된다. 왜? 성령께서 그렇게 해석하기 때문에. 그래서 해석문제에 대해서는 이제는 그 기초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면 돼요. 창세기도 마찬가지고. 그게 두 번째고.

세 번째 이야기는 오늘 본문이거든요. 에스겔 3장1~3절 보겠습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입을 벌리고 먹으라, 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두루마리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라하지요. 시편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 있는데 뭐냐 하면, 입을 크게 벌리면 채우리라 하는 게 있지요.

사람은 입을 벌리는 것을 기도하는 행위로 보고 기도의 목적을 목표를 높게 가지면 다 이루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될 것이다, 이리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에스겔3장에서의 입을 벌리고 먹는 것은 뭐였습니까?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바로 말씀이 니속에 들어와야 된다는 겁니다. 말씀이. 니는 뭘 먹어라? 빵 먹어라? 충무로 김밥 먹어라? 이게 아니고 말씀을 먹으라. 말씀을 먹으면 안에 말씀이 들어가면 걸어 다니면 뭐가 출렁거리겠습니까? 말씀 먹었으니까. 성도가 출렁 출렁 걷지요. 뭐가? 말씀이 출렁 출렁거리는 거예요.

그런데 먹을 때는 굉장히 달지만, 일단 먹고 난 뒤에는 속이 쓰린 거예요. 위궤양입니까? 소화불량 일으킨 거예요? 그 쓴 이유가 뒤에 보면 나옵니다. 길게 나오지만, 간단히 말하면 이래요. 니가 말씀을 먹고 니가 먹은 말씀을 이제 뱉게 되면 아무도 그야말로 너의 말을 믿지 않고 너를 핍박할 것이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에스겔이 이 말씀 받은 시점이 이스라엘이 멸망한 시점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했어요.

자, 여러분이 다 아시니까 제가 여러분들에게 안다고 치고 제가 일방적으로 정답을 대게요.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언약을 위반해서 망했습니다. 맞지요? 언약을 위반해서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그럼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이스라엘 편이었습니까? 언약 편이었습니까? 언약 편이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모세율법 언약을 받았을 때, 어떤 오해를 유발시켰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려고 율법을 줬다고 오해를 한 겁니다. 주객이 바뀐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건지시려고 말씀을 줬다는 겁니다. 같은 이스라엘, 같은 인간들끼리 그것에 대해서 동조 안할 사람이 없어요. 왜? 인간은 애초부터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평소에 나 사랑했는데 더구나 하나님마저 내가 나 사랑하는 사랑에다가 참여하니까 세상에 이런 좋으신 하나님이 어디 있습니까? 얼마나 멋진 하나님이에요?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언약 피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지요. 언약 위반했다고 자기 백성이라고 생각했던 그 나라를 하나님께서는 망해버렸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성전 지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되게 좋아했어요. 성전만 짓기만 했습니까? 성전 짓고 난 뒤에 누가 들어왔어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열왕기상 8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누구든지 여기서 아프고 전쟁에 패배하고 가뭄 들고, 죄 지었거든 이 성전에 와서 기도하면 너희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 그들은 어디에 집착했느냐 하면, 성전만 집착한 거예요. 그 성전 집착이 지금의 유대인까지 이어집니다. 유대인의 6일 전쟁이 왜 싸웠는지 알아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그 헤롯성전을 자기가 차지하기 위해서 그런 전쟁을 일으킨 거예요.

자금은 4등분 되어있지만, 안가 봐도 알아요. 책에 보면 나오니까. 예루살렘시민의 호적 등기를 보면 4등분 되어있어요. 왜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십자가를 못 박아 죽게 된 요인이 어디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그냥 촌에서 돌아다니면 안 죽었어요. 뭘 했습니까? 성전에서 무슨 짓을 했습니까? 성전에서 성전을 모독했을 때, 그들의 핵심 엔진부분이 깨진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깬 겁니다.

요새 교회에서 예수님 욕해도 별로 사람들은 관심이 없지만, 교회를 부정해 버리면 그것은 단박 이단 됩니다. 이 교회가 수십년 기도로 세운 교회를 니가 부정해! 이리 되는데. 교회부정하면 난리나지요. 신천지가 예수님 이야기해서 욕먹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자기 것으로 등기이전하기 때문에 그게 문제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교회는 눈에 보이잖아요. 아까부터 계속 눈에 보이는 거 우리가 치중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눈에 보이잖아요. 성전은 눈에 보이잖아요. 성전은 눈에 보이는데, 예수님은 그걸 헐라고 했다 말이죠. 46년간 지었지만, 내가 그걸 몇 일만에 짓겠다? 사흘 만에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 성전, 하나님이 분명히 영원토록 준다는 그 성전이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바벨론제국에 의해서 그 성전에 있는 성전이 홀라당 불나고요, 거기에 있는 집기와 거기에 있는 제기들, 제사할 때 기구들은, 솔로몬의 모든 기구들은 느브갓네살에 의해서 바벨론에 전부 다 강탈당해서 거기에 다 모여졌어요. 그 때 뭐가 불탔는가 하면, 언약궤도 같이 불타버렸어요. 하여튼 홀라당 다 탔어요. 성전이 없습니다.

성전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어떤 연결고리가 없다는 거예요. 망한 거예요. 폭삭 망한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이 연결될 어떤 루트도 없는 겁니다. 구원이 날아가 버린 거예요. 성전은 어디서 찾느냐, 하나님의 언약의 영속성이 어떻게 보장되느냐,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인자라고 하는, 에스겔을 인자라고 했거든요. 사람의 아들. 인자야, 라고 부르면서 니가 말씀을 먹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성전 아니고요, 에스겔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이 이제는 없어진 성전을 대체할 성전으로 이제는 점차 구체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 마지막 대목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물이 나오는 최후의 성전의 설계도가 에스겔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에스겔은 끝나지요. 기존의 성전을 대체하는 거예요. 그럼 기존의 성전은 뭐가 안 나온다? 생명수가 안 나온다. 생명수가 안 나오지요. 그런데 신약의 성전 특징이 뭐냐 하면, 몇 층이냐? 몇 억짜리냐가 아니라 뭐가 나와야 돼요? 생명수가 나오지요.

그러면 사마리아여인에게 뭐가 왔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끊임없이 뭐가 나오지요? 목마르지 않는 샘터, 우물이 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마리아여인이 바로 뭐가 되느냐, 진짜 성전이 되는 겁니다. 고 과정 중에 뭐냐 하면, 바로 예레미야, 에스겔에게 말씀을 먹어야 되고 그 말씀이 바깥으로 구체화될 때, 왜 성전은 망해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에스겔에 나오는 말에 대해서 어떤 누구도 사람들은 절래, 절래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 나오는 말씀은 뭐냐 하면, 너희는 망해도 싸다. 너희는 저주받고 심판받아도 마땅해! 라는 그 말씀을 에스겔이 입으로 먹고 바깥으로 지금 토해낸 겁니다.

세 번째 시간에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지금 인자라는 에스겔에게 이런 현상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먹게 되면 이제는 주변상황이 내가 먹은 말씀으로 인하여 주변상황이 적당한 반응들을 나타내요.

그 반응들이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하고 심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유가 나오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새롭게 달라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걸 제가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8.♡.196.154) 14-05-14 12:02 
수원140417b-(에스겔)3강 - 이 근호 목사

에스겔 이야기입니다. 입에 먹으니 그게 내 입에는 달고 꿀 같더라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뒤에 보면 속에서는 속이 뒤틀리니까 쓰게 되는 겁니다. 자, 여기서 뭐라고 하느냐 이유가 나와 있어요. 이유가 뭐냐 7절에 보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이리 되어있어요. 완전히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약을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뭐냐 하면, “에스겔아!” “예” “말씀 받았지?” “받았습니다.” “전해라.” “예, 알겠습니다.” 하고 룰루랄라 신나게 가는데 이미 하나님은 알고 있어요. 네 말을 절대로 듣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하는 이 방법이 인간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하나님이 익히 다 아는 이야기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이 주의 말씀을 안 듣는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굳이 에스겔에게 말씀 줘가지고 꼭 안 듣게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이것 때문에 그래요. 에스겔이 인자의 대행자기 때문에 그래요. 장차 오실 메시아를 앞당겨서 메시아에 가는 고난의 길을 앞당겨서 보여줘야 되거든요.

방금 제가 뭐라 했습니까? 보여준다 했지요.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해요. “하나님은 보여줄게.” 하십니다. 반갑지요. 그 말만 들으면 되게 반가워요.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이 땅에 오신데. 합류한데. 봐야지. 봐야지.” 굉장히 보고 싶어 하는데 막상 품속의 독생자를 나타나게 하셨는데 하나님이라고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게 이사야53장에 흠모할 게 없었거든요. 사람들이 다 외면했습니다. “아이고, 목사님 사람들이 좋아했잖아요.” “좋아 했었었지요.” 왜? 오병이어를 했으니까. 보리떡5개, 물고기2마리가지고 배불러할 때,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했습니까? 도망쳤어요. 끝까지 따라왔습니다. 예수님 얼굴보고 왔습니까? 예수님 누군 줄 알고 따라온 겁니까? 그들이 채울 것을 준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은 이미 그들이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가 이런 것 같으면 내가 주의 기적,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로 저는 채택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이미 인간들이 자기 쪽에서 먼저 그걸 만들어낸 거예요. “이런 거미 망에 걸리기만 해봐라. 나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내가 확신하겠어.” 하나님이 믿는 조건을 내 쪽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쪽에서 이런 저런 조건을 먼저 제시한 거예요.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신다면, 이렇게 해주신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제가 확실히 믿겠습니다. 이렇게 해주신다면.” 이렇게 한 거예요.

제가 영화 ‘시선’이란 글을 쓰면서 그런 것을 감안했거든요. 하나님은 흥정하지 않습니다. 사람가지고 흥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거 해주면 살려줄게.” 라든지 “살려 줄 테니 이거 하라.” 흥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그 자체가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죽은 존재하고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게 제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에스겔3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골짜기에 가니까 바짝 마른 해골이 있었고 그 해골에 대해서 인자 에스겔을 같이 동참을 시킵니다. 묻습니다. “인자야?” “예”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이 뼈들이 살겠느냐 하는 질문에 답변에 대해서 에스겔이 답변하지 말고 에스겔이 어떻게 답변해야 된다는 것을 에스겔에게 알게 하는 거예요. 에스겔은 그 답변을 자기가 답변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넘깁니까? “주께서 하실 겁니다.”하고 넘겼지요.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베드로가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지 주님이 아십니다.” 주님이 아심을 넘겼지요. 이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보이던 안 보이던 주님이 보이는 나보다 더 생생하게 계신분이 주님이라는 겁니다. 내가 나의 문제를 넘길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것을 내가 여기 존재함으로서, 그걸 존재한다는 증거가 바로 내가 넘길 분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무엇이다, 가 아니라 누가 나를 되게 하셨다는 거예요. 주체의 자리에, 주인의 자리에, 주어의 자리에 내가 빠지고 주어의 자리에 긴 공백으로 남겨두고 이 공백의 자리에다가 예수님을 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 때문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살아가는 겁니다. 물어봅니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위치를 묻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어의 자리에 있는지, 주님 뒤에 있는지를 묻는 겁니다. 베드로가 제대로 말했어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주께서 아십니다. 개척교회하면서 이만큼 어렵고 힘들고 교인이 없고 그리고 이러다간 온 부부가 굶어죽겠다는 것을 뒤에다가 뭐만 붙이면 돼요? 주께서 아십니다, 를 붙이면 된다니까요. 부자 되게 해 달라, 소리 하지 말고, 안산의 애들 한 학년 다 날아가는데 “주께서 익히 아시고 벌이신 일이십니다.” 요 위치만 바꾸면 되는데. 위치만 바꾸면 간단한 문제에요.

에스겔로 하여금 말씀을 먹게 한 이유가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말을 지독히도 안 듣는 백성이라는 것을 확정짓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났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이여, 보여주시옵소서.”  “인자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 보여주시옵소서.”  “지금 내 종들이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보고 믿겠습니다.” “내 종들의 말을 들으라.” 계속 이 고집, 이 둘의 고집이 싸우고 있는 거예요.

마태복음25장에 보면,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벗었을 때에 입을 걸 주었느니라. 우리들이 언제 했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예수 믿는 이 작은 어린아이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이 복된 자들아, 너희는 양의 자리에 오른편에 가거라. 그런데 지옥 갈 사람이 나타나가지고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그렇게 고생하는데 안 도와줬습니까? 이 소자한테 안 한 것이 곧 나에게 안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요? 하나님이 눈에 안 보여요? 주님의 소자가 있고 형제가 있는데요. 그들 가운데 함께 있는데. 주님은 지금도 성령 받은 성도를 통해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우리로 다 느끼게 하는 겁니다.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고, 보지 못한다고 하니까 오히려 소경이 아니게 하는 그 말씀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거예요.

여러분, 12사도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12사도가 전부 다 순교 당했지요.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는 로마에 분명히 간다고 언급했을 때, 자기는 편안히 로마에 가는 줄 알았어요. 도중에 폭풍이 일어나서 죽을 뻔한다는 것은 전에 그런 이야기 없었어요.  니가 반드시 로마나라 앞에서 왕 앞에서 네가 서야 된다. 분명히 언급했지 도중에 니가 고생할 것이다. 도중에 니가 폭풍을 만날 것이다. 그런 생각 한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막상 로마 가는데 티켓 끊어 가는 게 아니고 가다가 죄수의 몸으로 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폭풍 맞아 배가 뒤집어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폭풍이 왔을 때, 주께서 하신 말씀이 걱정하니 말아라, 너는 반드시 로마에 서리라. 염려하지 말라 네 곁에 내가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사도바울에게만 이야기하고 같이 배 탄 사람한테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요. 다른 사람한테는. 다른 사람은 주님이 있다는 걸 몰라요. 그런 다른 사람은 누구만 쳐다보겠습니까? 사도바울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조치를 취해가지고 그들이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다 살았지요.

아마 요번에 진도에 배빠지면서 우리는 모르지만, 죽기 전에 니가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는 음성을 들을 학생도 있을 것이고 그런 성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배제 못하지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마르다 마리아가 제일 크게 오해한 것이 뭐냐 하면, 자기는 살았고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고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뒤바뀐 사고방식이었습니까? 오빠는 안 죽었고 오빠가 죽었다고 여기는 본인이 죽은 존재였던 거예요.

그래서 입장을 너희입장 생각하지 말고 죽은 오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안 죽었다고 여기는 인간들이 이미 죽은 존재고 죽은 존재지만,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나에게 적용하지 말고 이미 죽은 나에게 적용시키면, 그 말씀해석이 다 깨끗하게 정리가 돼요. 내가 죽었는데 이 말씀 주셨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 말씀이 나를 살리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도 살아있지요. 그리고 이삭도 살아있지요. 야곱도 살아있지요. 아브라함 품에 누가 있습니까? 거지 나사로도 살아있지요. 그리고 엘리야, 모세 다 거기 가있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 보면, 조상의 선배들이 다 가있다 말이죠.

지금부터 현실 이야기하는데, 현실문제 때문에 우리는 내 중심의 현실을 현실이라 보고 예수님이 있는 중심을 현실로 안 보는 경향 때문에 그러한 혼선이 일어나는 겁니다. 혼동이 일어나가지고 이 현실에 하나님이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현실문제에 대해서 에스겔 본문가지고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어렵게 설명하더라도 반가운 것은 우리 송 목사님께서 풀이해준다니까 제가 안심 푹 놓고 하겠습니다. 현실문제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시루떡 아시죠? 시루떡이 있는데, 시루떡이 2층입니다. 1층은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것을 현실로 봐요. 이걸 간단히 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태어나면서 내가 누군지를 알고부터 발생된 세계, 그걸 현실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는 뭐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내가 두 살 때, 한 살 때 기억은 포함되지 않아요. 내가 정신 차리고 내가 누군 줄 아는 그 때부터 계산한 현실, 그러니까 이 현실은 편집된 현실이고 조작된 기억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아까 차타고 오는데 나무가 있지요. 혹시 그 나뭇잎이 몇 개인지 헤아려본 적 있습니까? 저 앞에 나무가 있네. 나무 잎사귀 세어본 적 있어요? 없지요. 그럼 나무가 있는지 잎사귀가 있는지 기억 없지요. 왜냐 하면, 내 중심의 현실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보면 가로수 심어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현실을 다 포용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에요. 하나님의 현실을.

가로수 심어놓은 이유를 모르면서도 우리는 현실을 안다고 여기는 우리의 현실. 욥기에 보면, 욥이 하나님에게 말하기를 “왜 착한 저에게 고난을 내리십니까?” 하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니가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에 비가 올 리가 있습니까? 황무지는 채소와 시금치를 키우지 않는데. 우리는 내가 농사를 지었을 때만 비가 와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는 깊은 계곡에 황무지에 비가 온다는 것은 그건 낭비요, 그건 허비처럼 느껴지잖아요. 욥은 그걸 압니까? 모릅니까? 황무지에 비가 내리는 이유를 모르지요. 모르면서 뭐라고 우기는가 하면 “왜 하나님께서는 저한테 아픔을 주십니까?” 하는 거예요. 욥의 현실은 안 아파야 된다는 현실을 갖춰놓으니까 갑자기 고난이 날아오니까 이 화살은 왜 저한테 꽂힙니까?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는 말씀이 이런 겁니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네가 미처 알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해서 니가 항상 당황스럽고 모르는 사건만 사태만 일어나게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2층에서 찌르고 내려오는 겁니다.

찔러 놓으면 여기 홍해사건, 홍해사건이 모세의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지요. 모세가 홍해가 갈라질 걸 미리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모세가 몰랐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뭐라 했는가 하면, 가만히 있어봐! 불평하지 마! 가만히 있어. 모세는 지금 뒤에서 말 타고 애굽 군사 따라옵니다. 가만히 있어. 뭔가 있을 거야. 홍해 갈라졌습니다.

요단강 보세요. 요단강 들어섰을 때에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요단강이 갈라질 걸로 생각했지요. 왜냐 하면, 홍해가 갈라졌기 때문에. 그런데 아무리 지켜봐도 요단강은 어떻습니까? 안 갈라졌지요. 안 갈라졌습니다. 요단강 건너갈 때, 여호수아가 아무리 봐도 안 갈라지지요. 이게 뭐냐 하면, 그 다음에 홍해 침투했지요. 이번에는 뭐가 침투합니까? 바로 요단강 침투 나오지요. 자, 여리고성 봅시다. 여리고성이 강대합니다. 여리고성을 일곱 번째 날에 일곱 바퀴 돌면 무너진다는 그것이 여호수아의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그냥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와르르 무너졌어요. 또 침투하지요. 우리가 하나의 현실을 여기서 뭐냐 하면 파열, 찢어짐 또는 깨어짐 또는 불연속성 안 그러면 우리의 계획이 무산됨. 요걸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현실 속에 진짜 현실을 담는 방식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를 되풀이하고 반복시키는 방식,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방식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걸 베드로 식으로 이야기하면 니가 원치 않는 길을 띠 띠고, 띠 띤다는 말은 니가 알아서 간다는 것이 아니고 강제로 가는데 그 강제로 가는 길을 베드로가 안다? 모른다? 모르지요. 베드로가 순교하겠다고 나서도 그건 주의 뜻이 아닙니다. 순교를 하더라도 니가 모르는 방식으로 순교하게 하셔요.

곱게 자다가 또는 베드로가 당구 치다가 죽을 수도 있고. 이것은 예상 밖의 일이에요. 순교한다고 해가지고 그래서 제가 자학하지 말라고 했지요. 자학하거나 재산 바치고 그런 짓하지 말라고 했지요. 아줌마들이 마사지해가지고 “어, 시원하다.” 마사지 받으면서 순교할 수가 있어요. 하여튼 우리가 예상한 10가지 같으면 11번째 예상 못할 방식으로 현실을 우리에게 쏙 쑤셔 넣는 거예요.

쑤셔 넣을 때, 우리는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내가 현실이라고 여겼던 그 현실 바깥에서 나의 현실을 변화시켜 주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감사와 고마움이 나오게 돼요. 제가 어떤 강의에서는 아주 이런 심한 말까지 했어요. 여러분들이 간음한다고 해서 그게 간음죄가 성립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 어려운 걸 알아서 송 목사님이 설명해 주셔야 돼요.  왜 간음죄가 간음이 성립이 안 되는가 하면, 간음하면서 이걸 본인이 간음이라고 자부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간음하고 있는 거야. 지금 간통하고 있는 거야. 내 아내 몰래 지금 간통하고 있는 거야.’ 이미 아는 순간 그것은 간통죄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하고 동업을 안 해요. “주여, 제가 간통을 했으니까 제 죄를 회개하옵소서.” 하면 주님께서 “니 무슨 죄 지었어?” “제가 간통합니다.” “니가 간통을 제대로 알고 간통하는 거야. 그거 간통 아니야. 니가 도대체 뭔 줄 알고 니가 니 마음대로 그렇게 간통이라고 규정을 해.” 다윗이 간음을 했잖아요. 간음을 해놓고 자기가 간음이라고 여겨가지고 자기가 간음이라고 자부를 한 거예요. 죄 지었다고 여긴 겁니다.

다윗은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를 지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죄가 된 겁니다. 죄를 지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밧세바가 임신한 그 DNA를 조작하려고 했습니다. 자기의 DNA이면서 남편 DNA로 우리아 DNA 로 집어넣으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살인죄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나단이 와가지고 딱 지적하니까 내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 나타나는 거예요. 내가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나는 죄를 지을 때만 죄라고 오인한 거예요. 죄라고 여긴 것이 바로 죄였던 겁니다. 그게 자기의 일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죄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죽음의 위협이 무서워요. “니 죽인다!” 이게 무서워요. 죽음 직전이 무섭지 죽음은 안 무섭다 이 말이죠. 지금 진도의 애가 빠졌을 때에 애는 지금 물이 들어온다는 것이 일상의 일입니다. 누가 무서우냐 하면, 그 엄마가 무서운 거예요. 애는 지금 죽는지 안 죽는지 몰라요. 물이 들어왔을 뿐이고. 죽을 수도 있겠네. 지금 죽는 게 문제가 아니고. 지금 내가 할 게 뭘까? 물을 퍼낼까? 지금 구명조끼입고 뛰어 내릴까? 요 일상의 선택만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무서워해요. 내 자식 죽을까봐.

마귀는 죽음의 위협가지고 위협해요. “니, 죽는다!” 하는 죽는다 함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나의 자의식 속에 섞이게 만들어서 협박을 해요. 내가 죽으면 그만인데 우리는 내가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고 내가 죽는다고 생각해요. 아까 이야기한 내가 주어자리에 죽는다고 마귀가 이렇게 조작해 버려요. 주께서 죽이면 괜찮은데 우리는 죽을 때 그리 죽지 않고 내가 죽으니까 무서운 거예요. 내가 죽으니까.

암에 걸리면 무서운 게 아니고 아침에 찬거리 없어서 무서워요. 우리는 남편 월급이 적어서 죽어요. 왜냐 하면, 애 못 키울까봐 죽을까 싶어서. 그러니까 일상이 죽음이고 막상 죽으면 안 무서운데. 늘 마귀가 죽기가 무서워하므로 종들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히브리서 2장15절에. 마귀가 항상 “니, 그러면 죽는데이. 죽는데이” 자꾸 죽음 자체를 가지고 협박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우리 인생 속에 아예 DNA처럼 완전 박혀있어요. 육체 속에.

그러니 막상 지하철에 섰는데, 누가 술 먹은 사람이 넘어졌다. 그러면 누구나 거기 있으면요, 계단에 뛰어들어서 사람 구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만약에 멀리 있는 제 아내가 봤다면 아내는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막상 취객을 건져내고 지금 전동차 들어오고 하는 나로서는 내가 해야 될 일만 생각되지 바치면 아프고 아프면 죽어. 이런 생각은 들지를 않아요.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취객해가지고 올리고 왔을 뿐이에요. MBC에서 와가지고 “아이구, 어떻게 그런 귀한 일을?” “그게 무슨 귀한 일? 나 아닌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진짜에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 일에 참여하지 않은 제삼자가 볼 때는 상상하거든요. 상상할 때, ‘내가 만약에 저 사람처럼 가면 전동차가 오게 되면 그럼 내 가족은? 식구는? 우리 딸은 아직도 시집 안 갔는데. 안되지, 안되지, 바보같이 뛰어들긴 왜 뛰어들어.’ 이렇게 뭔가 생각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마귀가 준 무서움이 마구 들끓고 난리 나요.

지금 에스겔을 할 때 주의 명령은 뭐냐 하면, 바로 말씀이 니 주인이라는 거예요. 말씀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해요. “너는 해봤자 아무도 니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런데도 니가 말씀을 전해야 될 이유가 그들이 현실이 뭔지를 몰라요. 왜? 인자 에스겔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우리는 죄가 없어요. 돌 들고 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남으로서 어느 인간도 돌 들고 칠 의인은 없다는 것이 판명된 거예요.

사람이 간음을 해도 간음죄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자기가 한 간음죄에 대해서 간음을 하는 현장에서 간통을 하면서도 자기가 반성을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순순한 간음죄가 성립이 안돼요. 왜? 내 잘못을 누가 안다? 내가 알면서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몸이 내가 감당이 안돼서 하는 것이다. “주께서 아시지요? 주님 제가 이거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 줄 아시죠?” 라고 변명을 늘어놓을 여지들이 많아요. 내가 애를 때리면서 “주님이여, 이것은 내가 미워서 때리는 게 아니고 사랑의 매인 것을 주께서 아시지요?” 하면서 자기는 가면 쓰면서 때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이유가 반드시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반성이 뒤에 달려있습니다. “주님이여, 요번 일만 하고 난 뒤에 헌금을 곱빼기로 해드리겠습니다.” “이거하고 난 뒤에 제가 선교하겠습니다.” “요번 일만 허락해 주시면 제가 교회를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일 년 동안 출석 다하겠습니다.” 하면서 그 짓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건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어요. 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악을 들이밀면서 제가 선을 놓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일이 나쁘다는 것을 내가 아니까. 내가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다른 사람은 모를 거예요. 하지만 저는 요 짓이 나쁘다는 것을 아니까 요 안다는 요 착함만큼은 제발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리 나와요. 임 재범씨가 부르는 그 가사에도 나와요. ‘고해’라는 가사에 보면 나와요. 어찌합니까? 있지요. 어떻게 할까요? 뭘? 저 여자만 주신다면 제가 뭐라도 하겠습니다. 바로 조건부 아닙니까?

저 여자만 주신다면, 제가 뭐라도 하겠습니다. 그게 임재범의 노래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가 하루 눈뜨면 하는 일이 그겁니다. 안산의 애들만 살려준다면 제가 요번에 안산동산교회에 가가지고 헌금하겠습니다. 그동안 일년치 못했던 십일조 우리 애만 살려준다면 한꺼번에 다해드리겠습니다. 주님은 흥정이나 거래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인간이 자기 잘난 체를 끝까지 포기 안한다는 것, 인간이 육신이 있는 한 절대로 자기 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앞에 인자되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십자가에 죽을 때,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봐라, 너희들을 대표한 내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말은 사실은 이미 너희들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따라서 이 사실이 예수 내 이야기가 아니고 너희들 이야기라고 믿는다면 니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왜? 예수님만 높이기 때문에 천국 갈 사람이 맞습니다. 면류관 전부다 벗어서 반납할 사람이기 때문에 영원토록 예수님만 주라고 찬양할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과 한 통속으로 한 팀의 가족일수가 있는 겁니다.

에스겔이 이렇게 말씀을 먹은 것은 그 사람들이 자꾸 자기가 잘못한 것을 모르니까 새삼스럽게 후차적으로 가서 말씀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보고 싶다는 사람에게 에스겔을 보내가지고 인자를 보내가지고 초라한 행세, 알 수 없는 이상한 행세를 하는 그런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그들로 하여금 에스겔을 미워하도록 만듭니다.

지금은 그 사명을 말씀 받은 우리가 그 사명을 지금 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맡겨주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독한지. 매일 반성하는 게 매일 교회 가서 회개하는 게 그게 죄에요. 회개할 것도 없고 반성할 것도 없고 십자가 앞에서 뭘 해도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용서받으면서 감사하게 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성령의 온유와 화평과 자비의 열매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변명, 변명 또 변명, 핑계 또 핑계 24시간 스케줄이 변명과 핑계와 자기 잘남을 움켜쥐는 그런 삶이라는 사실을 육신이 살아가면서 늘 느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셨기에 저희들 십자가 앞에 세웠사오니 십자가의 용서가 유효하게 주님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공은주(IP:218.♡.196.154) 14-05-21 22:43 
수원140501a-(생명수)4강 - 이 근호 목사

저는 창세기부터 죽 할 예정인데 언약 적으로. 그 전에 지금 4강을 거쳐서 성경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석해야 되며,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며, 전체적인 것을 먼저 하려고 했습니다. 첫 째, 둘째, 셋째 지났고 오늘은 서론의 마지막 시간 네 번째 시간이에요. 오늘하고 난 뒤에는 제 생각에는 창세기를 할 예정인데 목사님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모르겠습니다마는 첫째, 둘째, 셋째, 넷째를 요 내용은 계속해서 반복되기 때문에 또 늦게 오신 분도 있으니까 첫째, 둘째, 셋째를 복습하고 오늘 넷째를 하겠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한 것이 예레미야11장3절 말씀을 했거든요. 이제는 아이고, 목사님, 그만하세요. 지겹습니다, 이렇게 하더라도 짧게 할 테니까 11장3절에 보면, 이 언약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제가 이 말씀을 거론할 때에 그 취지가 뭐냐 하면, 언약 없는 하나님과 언약 있는 하나님을 구분했지요. 그림 그리는 것도 시간 아까워서 안 그리겠습니다.

언약이 없는 하나님은 이방인들이 그냥 본성상 섬기는 신이고, 가짜입니다. 그걸 구약에서는 우상이라 하고 진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언약을 제시했다 했잖아요. 언약이란 말을 잘 안 쓰는 용어를 한 것은 제가 예레미야11장3절에 언약의 말을 쫓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해서 언약이란 자체가 성경에 바로 나오기 때문에 언약 말을 했습니다.

언약이란 말을 생소한 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걸 약속으로 바꿀게요. 같은 뜻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그냥 빈손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먼저 오시면서 뭐를 들고 온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오시는 거예요. 약속을 가지고 왔을 때, 우리에게 약속을 풀어놓으면서 그 우리를 통해서 약속을 다 이루시고 그 약속에 포함된 사람만 보따리 싸가지고 데려가면 그게 천국이에요.

그러니까 쉬운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껌을 좋아하신다고 합시다. 껌을 좋아해서 질겅질겅 껌을 씹으시면서 하나님의 껌이니까 덩어리가 아주 큰 것으로 생각하고 껌을 씹고서 오셔가지고 사람들이 오! 신이시여, 신이시여, 하니까 껌을 가지고 전부 다 몸에다 붙여놓고 예가 촌스럽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겅질겅 씹던 껌을 그 사람에게 붙여놓고 껌을 살살 잡아당기는 거예요. 이 껌은 안 떨어져요. 그러면 그 사람 몸에 뭐가 붙어있습니까? 주님이 씹던 껌이 붙어서 그 주인이 잡아당기면 마치 낚시하듯이 작살 던져놓고 감으면 낚시되듯이 그 껌을 감아버리면 그게 약속의 완성된 상태가 되고 그 약속의 완성된 상태를 천국이라,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껌이라는 것은 인간이 상상도 못한 거예요. 가인의 제사에서는 그냥 빌면 복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껌을 붙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그 껌을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껌을 하나님의 약속 또는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라 했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붙어있기 때문에 언약의 완성된 상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언약이 없는 사람은 언약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로마서8장9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요, 라고 있지요. 갈라디아서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영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걸 ‘약속’이라고 했어요. 약속.

그 약속은 무슨 약속이냐 앞에 뭐냐,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약속을 문자적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은 뭐로 보느냐 하면, 씨와 땅으로 보지요.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걸 생각해요. 자기는 약속의 땅에 살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이 약속이 씨와 땅이 아니고 뭐로 바뀌는가 하면, 이것이 성령으로 바뀌었어요.

요한복음14장에서는 성령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처소’라고 해요. 처소. 처소니까 이건 공간개념이잖아요. 이게 뭔가 어떤 제약된 공간이죠. 그 처소 안에서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 예수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처럼 그날에는 너희가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 내가 너희와 하나가 되어서 우리는 같은 처소 안에서 모두가 하나가 된다고 이렇게 요한복음14장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17장가면 예수님이 겟세마네기도 내용이 나와 있어요. 겟세마네 기도에서 피와 땀이 됐다 해가지고 그것만 신경 쓰는데 우리도 악발이  같이 기도하면 응답된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기도내용이 중요한 거예요. 기도내용이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아버지와 하나된 것처럼 주여, 저희들도 우리와 같이 하나 되게 하옵소서.” 이게 겟세마네기도의 요지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세상 중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바로 선택된 그 자를 위해서 내가 기도합니다.” 라고 요한복음17장에 나옵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이에요. 왜 중요한가 하면, 요한복음3장16절 때문에 중요한 말이 되어버렸어요. 요한복음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세상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그걸 이야기하는 사람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일이 진척이 되고 구체화되니까 요한복음17장6절에서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 게 아니고 세상 중에 따로 뽑아놓은 사람들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 요한복음3장만 들이대면서 전도하는데 그게 아니고 세상 중에 따로 포함된 그러니까 요한복음17장에서는 이렇게 조감도로 비춰보면서 세상을 사랑하되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세상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 기다려라 내가 간다. 자기 택한 백성이 따로 있는 겁니다. 따로 있는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하나님이여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함이 아니고 아버지 뜻을 위함인데 아버지 뜻은 뭐냐, 내게 주신 자중에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 다시 살리는 이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함으로서 이것은 사도 수준에서, 인간 수준에서의 전도와 선교가 모두가 의미가 없음이, 손 털어라 하는 그런 이야기죠. 인간이 하는 모든 전도, 선교, 교회 크게 키우기, 모든 어떤 시도나 노력이 의미 없는 거예요. 인간 수준에서.

사도에게 성령이 임해버리면 사도는 인간수준에서 전도, 선교하는 게 아니고 이미 완성했다는 택한 백성만 찾아간다는 주님의 수준에서 비로소 전도, 선교를 하는 거죠. 인간 수준에서는 전도, 선교 백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괜히 선교 전도했다고 그것가지고 닦달 낼 가능성이 있어요. “제가 공들였는데 왜 합당한 대가를 주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위할 가능성이 많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세상이 아니고 세상 중에 있는 내 백성, 그들에게만 껌이 있는데 아브라함이 약속한, 아브라함의 언약이죠. 언약인데, 언약의 뜻은 뭐였습니까? 바로 준비된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은데서 살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건 저주받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영이 있고, 없고 결정한다는 것은 오늘 강의하면서 요거하나 꼭 생각을 해줘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무 차별성. 인간 대 인간의 도토리 키 재기에서는 어떤 차별도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날 설교에서 언급한 게 있어요. “저 사람은 성질이 더러워서 성경이 나빠서 지옥가고 나는 성격이 좋아서 천국 간다.” 라고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 대 인간의 어떤 차별성은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이 와야 구원받고, 성령이 오게 되면 강도라 할지라도 창녀라 할지라도 구원받고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이 점잖다 할지라도 그것은 천국에 못 갑니다. 왜냐 하면, 약속과 성령은 아브라함의 약속과 관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목사님 약속을 수정하면 안 되겠습니까?” 약속은 수정이 안돼요. “왜 수정이 안 됩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두 분만이 머리 맞대고 창세전에 결정했기 때문에 그 뒤에 태어난 인간이 거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여러분, 자식이 부모보고 “부모님, 왜 저를 이렇게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없어요? “저는 왜 이렇게 들창코입니까?”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저는 왜 쌍꺼풀이 없어요?” 이런 거 따질 수 있습니까? 그걸 따질 수 없으니까 기껏 부모들이 하는 소리가 너도 나중에 부모 되면 알리라, 해서 노래가사에도 나와요. 부모 되면 알리라. 부모 돼도 몰라요. 과학에서는 DNA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DNA 때문에 그러면 나중에 왜 부모님은 병원에 가서 미리 DNA조작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따지고 소송 들어올 수가 있어요. 생명과학이 발달하면 소송 들어옵니다. 미리 IQ170만들지 않았던 부모를 향하여 고소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답변이 이거에요. “그러니까 내가 차이를 안 뒀잖아.” 그러니까 차이를 안 둔 거예요. 참 말 뉘앙스가 희한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차이 없이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 사람은 왜 일방적으로 천국가기로 결정했고 나는 왜 지옥가기로 결정했는가, 왜 차이를 두십니까?” 이리 되는 거예요. 갑자기 말이 어려워졌지요.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모녀 두 분이 만약에 외식을 갔는데 어머니께서는 자장면, 따님께서는 짬뽕을 시키고 있는데 제3자인 제가 차타고 가다가 갑자기 내려가지고 “여기 탕수육 하나요!”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맡기세요. 괜히 우리가 끼어들 문제가 아닙니다. 창세전에 결정한 것에 대해서 자장면 먹을 것인가, 짬뽕 먹을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끼어들어가지고 탕수육 하나요!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위하여 만들어졌지 나를 위하여 내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식이 부모보고 “어머니, 왜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런 소리 할 때는 뭐냐 하면 ‘나는 날 위해서 살지 나는 부모 위해서 안삽니다.’ 생각할 거다 말이죠. 만약에 부모를 위해서 내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런 반발을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안하겠지요. “어머님, 어떻게 낳아졌던 나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러면 어머니께서 “니는 영원토록 나의 나라에 살아라. 내가 만든 나라에 살아라.” 이렇게 되거든요. 따지고 보면 이야기가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부모가 만든 나라에 자식이 살거나, 아니면 자식이 따로 만든 나라에 부모를 모실 것이냐, 그 문제라니까요. 2000년 신학이 결국 그 문제에요.

인간이 편안하게 행복하기 위해서 만든 나라에 예수님과 하나님을 모실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결정 놓은 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서 살 것이냐 그 문제입니다. 들어가서 살 문제 같으면요, 군소리하지 마세요. 군소리하면 그 나라 데모 일어납니다. 시위합니다. 이 복잡한 성경이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되잖아요. 결국 문제가 뭐냐 하면, 나만의 따로 영광 받는 다른 세계를 내가 궁시렁 궁시렁하면서 자꾸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는 그걸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거예요. 마귀 사탄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4장 이야기입니다. 제가 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너희가 복음의 광채를 흐릿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신이 너희로 하여금 그 눈을 감기게 했다는 거예요. 눈 떠라. 주님이 부모라면, 부모의 나라에 들어가 살지 너가 영광 받는 이름이 영광 받는 니 세계 따로 만드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는 철저하게 마마보이 되어야 됩니다. 마마 걸, 마마보이. 마마보이, 마마 걸 할수록 사랑받아요.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애가 물에 빠져죽던지 이왕 죽은 애가 죽었다고 확인할 차원일 뿐이에요. 망대에서 떨어져서 18명 죽을 때에 “니, 살았다고 좋아하지? 회개치 않으면 다 같이 망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우리가 토 달면 안돼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라고 토 달면 안돼요. “왜 이 컵이 녹색입니까? 빨간 컵 안 가지고 오고.” 주신 사람 마음대로잖아요. 마찬가지에요. “내 애가 죽든 살던 간에 주신 분이 만든 거지 나만의 세계에 왜 손대십니까?” 이렇게 하게 되면 천국 가는 자세가 아니에요.

천국은 고맙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나라고, 내 것 따로 챙겨가지고 어디 천국 가서 부동산중개업할 일 있습니까? 따로 부스 만들어가지고 거기서 지가 딴 살림 차릴 일이 아니잖아요. 천국은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천국 사는 생활을 지금부터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어떻게 하느냐에 신경 쓰지 말고 저 분들이 천국 가는 삶을 보이고 있느냐, 눈에 보이는 교회의 삶이 아니고 지금 당장 죽었을 때, 천국 가는 그 삶의 자세가 천국에서 통용되는 삶이냐를 그걸 주시하면서 그쪽으로 말씀을 증거 해야 돼요. 그 쪽으로. “집사님, 그런 식으로 천국 가서 살겠어요?” 이런 식으로.

제자들이 말했지요. 예수님, 우리 중에 하늘나라가면 누가 높겠느냐 할 때, 주님 마음이 이래요. 니가 그런 식으로 천국 가서 살겠느냐, 천국이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갈 수 있느냐 말이죠. 차라리 어린아이 데려가죠. 있는 것 전체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런 자세가 바로 천국 가는 자세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은 누가 높으냐 따질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게 있다. 뭡니까? 내가 마시는 쓴잔을 너희들이 마셔야 된다. 아이고, 씁니다. 안마시겠습니다. 그렇게 빼지 말라. 주면 주는 대로 다 먹어야 돼요. 그게 천국생활이에요.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만들어가니까. 훈련을 시키는 겁니다. 천국에서는 이래도 니가 감사하느냐, 저래도 감사히 받느냐하는 그것이 되게 되면 그 환란가운데서 소망의 나라 ‘아! 천국은 뭐든지 감사할 것밖에 없는 곳이 바로 천국이구나!’ 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이야기한 겁니다.

두 번째 시간에 한 것이 뭐냐 하면, 사도행전8장에 보면, 빌립과 내시의 만남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기억나십니까? 그때 제가 한 것은 뭐냐, 성경해석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것은 알겠는데 성경해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데 구멍이 있어야 되거든요. 구멍 뚫고 들어와서 확 퍼지게 하면 된다 말이죠. 태백시 장성에 석탄 공사 있지요. 구멍 아무나 팝니까? 구멍 갱도 먼저 뚫고 옆으로 퍼져서 무려 지하1Km가가지고 지금도 파내고 있어요. 고 성경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 그 뚫고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저한테 어떤 분이 질문한 걸 가지고 십자가마을에 올렸어요. 질의와 저의 답변하는 제목으로. 성경말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를 들면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하기를 에스겔23장에 거기 창녀가 나오는데 창녀로서 오홀라와 오홀리바가 나오지요.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이스라엘을 비유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걸 보면서 어떻게 내 인생과 똑 같으냐 하면서 질문한 거예요. 나는 남자를 데게 좋아했는데 차였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남자는 앗수르같은 남자다. 너무나 잘 생기고 멋있는 남자를 좋아하다가 완전히 소 뒷발 차듯이 차여가지고 있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 아직도 나는 결혼도 안하고 임신도 한 적 없고 애도 없는데 성경에 보니까 니가 애를 불속에 집어넣는 우상숭배를 했다는데 왜 다른 건 다 적용되는데 나는 애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내가 애를 우상으로 불 속에 내놨다고 하십니까? 어떻게 설명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질문을 한 거예요.

질문 자체가 굉장히 순박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어떻게 QT를 해도 어떻게 성경문자대로 현실을 그대로 봤느냐 말이죠. 자기는 그게 천사가 와서 가르쳤다고 해요. 천사님이 와서 가르쳤다고 하는 거예요. 질문 자체를 그대로 올려놨으니까. 그래서 내가 답변을 했지요. 성경해석을 할 때에 사적으로 1:1로 맞아주는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일괄해서 성경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답변했거든요.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다 자기 아들을 우상의 제물로 불태운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그 당시 앗수르라는 강대국의 잘사는 것에 대해서 현혹되었고 마음이 빼앗겼고 그것이 삶의 목표였고 목적이 되었다는 겁니다.

지금 같으면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이게 지금 목적이 된 거예요. 빨리 돈 벌어서 호주로 이주 갈 생각을 하고 미국 갈 생각을 하고 유럽에 살 생각을 하고 성경을 해석을 할 때,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녀 짓을 한 게 아니고 이스라엘의 멸망된 시점에서 회개하고 다시 한 번 회구하는 입장에서 너희들은 창녀 짓했다. 왜? 앗수르, 바벨론 이처럼 멋있고 정력 좋은 남자를 찾았다는 것은 그만큼 종교가 어떻든 간에 결과가 너무 너무 잘사니까 잘살고 여유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고 여호와 다 버리고 여호와 섬겨도 껍데기는 완전히 저 쪽 잘사는 나라 종교로서 다 바뀌어버린 거예요. 솔로몬부터 이미 그랬으니까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거 유지입니다. 내거 유지. 더 나아가서 확장입니다. 이 공식이면 끝나는 거예요.

내 건 여기 있다. 그 안에서 나는 살아있다. 유지해야 돼! 그 다음에 아내는 유지 쪽으로 남편은 확장 쪽으로. “아니야, 세상에 나가봐라. 우리보다 잘사는 사람 많은 거야. 여기서 멈출 수 없어. 내가 일 들어갈 테니까 앞으로 아파트 평소 넓은 데로 옮기자. 차는 좋은 것으로 바꾸고. 애들은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이게 유지와 확장이에요. 그러면 유지와 확장이 아주 잘된 곳에 사람들을 인생의 모델로 삼는 겁니다. 이미 모델이 있다는 것은 자기 목적은 정해져 있지요. 사람은 목적 없이는 권태로워서 못 살아요. 목적 없으면 죽은 자입니다. 사람의 소망 없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끊임없이 소망을 만들어내야 되고 절대로 그 소망은 이루어지면 안돼요. 왜냐 하면, 소망이 조금씩, 조금씩 끌고 가야 하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소망이 마무리되면 허탈에 빠져요. 그러니까 소망은 계속 조작해서 만들어내야 돼요. 이번에 소치동계 올림픽 할 때, 이상화선수가 스케이트 타잖아요. 중계 방송하는 카메라 어떻습니까? 이상화선수보다 항상 조금씩 앞서가서 달리지요. 카메라가. 카메라가 자동적으로 앞서 달려가면서 찍잖아요. 그게 소망이에요. 소망은 나를 유인하는 유인책이지 우리가 달성용이 아닙니다. 하나 목적 끝나면 새로운 목적을 또 만들어내요. “엄마, 나 요번에 전교에서 10등 했어.” “그래, 5등까지 끌어 댕겨.” “5등 했어.” “2등 되어야 돼.” “요번에 승진했어.” “부장되어야 돼” 계속 끌어당긴다 말이죠.

그걸 누가 잘하는가, 그걸 앗수르가 잘하는 거예요. 이방나라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그건 앗수르만 잘하기 때문에 앗수르 같은 교회에 사람이 모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 계속해서 연초에 신년예배 드리면서 계속 목적을 하고 교회 자체가 계속 비전과 비전을 유발해내야 돼요. 프로젝트를 만든다고요. 올해는 600명. 3년 내에 1000명 만들겠습니다. 올해는 교육관 짓기, 주차장 넓히기, 여러분들이 아낌없이 헌금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조금도 우리가 뭔가 께름칙 않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나 회사나 자기 자신의 가정이나 앗수르에 물들은 걸 가지고 창녀라고 합니다. 그걸 가지고 창기라고 하는 거예요. 감사함이 없어요. 감사함이 없다니까요. 사람이 현재 현상유지하면 감사할 줄 알아요? 아닙니다. 여러분, 돈 많은 부자들이 행복하십니까? 아닙니다. 그 돈 노리고 사돈의 팔촌 다와 가지고 갈아먹을 가능성이 많아요. 좀 뭔가 맞벌이 하게 되면 뜯는 사람도 더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맞벌이 안하게 되면 주부가 놀게 되면 주위에서 또 찾는 사람이 많아요. 심심하니까 놀자 해가지고 찾는 사람이 또 많아요. 이 세상 자체가 잘되는 것에 대해서 타의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날마다 바꿔치게 하면서 우리는 뭔가 내 욕망이 목말라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다는 거예요.

주님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인데, 인간들은 뭡니까? 주님 이용해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낮은 곳에 가야 천국으로 빠지는 개구멍이 거기 있거든요. 개구멍이. 높은 곳에는 출구가 없어요. 마귀가 기다리고 있어요. 염라대왕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게 빌립보서2장 이야기입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복종하니까 주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잖아요. 빌립보서3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바울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어떻든 간에 십자가로 간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의 공식인데 사람들은 반대로 나가요. 집안 거덜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나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두고 사시라 이 말입니다.

남이 잘되고 남이 승진하고 부자 되더라도 그건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이니라. 물론 주는 돈까지 거부하지 마시고요, 또 잘사는 걸 가지고 죄악된 거라 그럴 필요 없는데 잘산다는 것이 소유의 넉넉함에 잘사는 것이 아니고 생명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을 보고 사는 게 잘 살고 있는 거예요. 물론 마귀가 와서 시야를 흐려놓지요. 안개가 끼어서 시야가 확보가 안 돼. 누가 잘된다는 소리를 들으면 갑자기 화가 치밀고요. “주님은 뭐하시노?” 이런 식으로 나오면, 하여튼 마귀가 와서 시야를 흐려요.

성경에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주님의 최소 교회는 두 명입니다. 충분해요. 주님이 계시느냐가 관건이지 5천명이 있어도 주님 없으면 그건 교회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앗수르 같은 교회, 바벨론 같은 교회를 원하는 거예요. 그걸 목표로 하고 있고 또 목적으로 하고 있고. 마귀가 누구를 무서워하는 줄 알아요? 십자가 보고 주님을 그리워하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오천명, 육천명 쓰레기 같은 인간들 겁나지도 않아요. 단 하나라도 자기가 돌아온 탕자라고 여기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해요. 주님의 껌이 붙어있는 사람, 주님이 늘 잡아당기는 사람을 늘 무서워해요. 그걸 가지고 히브리서11장38절에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세상이 감당치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둘째 날 한 것은 뭐냐, 십자가로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멍을 파서 십자가로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다. 니 계획 아니고 벌써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만의 확정된 그 계획이었고 너희들 있는 곳에 찾아온 것은 그 계획에 참여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는 겁니다. 쓸데없는 걱정하거나 쓸데없는 니 권리 있다고 주장하지 마라, 우리는 따질 권리조차 우리한테 없고 그냥 우리는 결과물로 하나님의 약속의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물로 오늘도 발걸음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면서 이 자체가 하나의 결과물로서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세 번째 한 게 뭐냐 하면, 에스겔3장 이야기했습니다. 에스겔3장이야기를  왜 끄집어냈느냐 하면 에스겔3장 이야기가 뭐냐 하면, 니가 이 말씀을 먹어라. 그러면 니 입에는 굉장히 달 것이다. 좋지요. 니 배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된다? 쓰디쓸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달면 끝까지 달아야지. 처음에는 달고 끝에는 쓰고. 무슨 이상한 한약을 집어넣었는데? “말씀이 왜 그렇습니까?” 했을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괜찮은데 너는 말씀 듣고 구원 받고 줬는데 주변 세상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죠.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게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길로 인도해요. 고난의 길로 가게 만들어요. 지금 말씀 전하는데 가만두지 않잖아요.

많은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정상이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참 좋은데, 이상하게 왜 성경내용에 대해서는 삐딱하게 보느냐, 모든 걸 매사를 긍정적 사고방식이 아니고 부정적 사고방식으로 보느냐, 많은 그러한 비난을 받을 거예요. 십자가 자체가 부정적입니다. 성경에 보면, 십자가 언급할 때는 반드시 나오는 게 있어요. ~~가 아니요, 가 먼저 앞서 나와요. 뭐가 아니요. “~~가 아니요 ~~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가 먼저 나와요. 내가 너희를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항상 무엇 무엇이 아니다, 가 먼저 나와요. 

“여러분, 외롭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천국 갈 때까지 재미있게 삽시다.” 이게 아니고 무엇 무엇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이 교회가 아니요, 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순교한 이유가 있지요. 긍정적이었으면 순교했겠습니까?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사람 같으면 이리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따라서 예수란 작자가 이상한 소리해도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니까 우리가 손대지 말라.” 라고 할 정도로 그만큼 마음이 넓은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하는 공부 보세요. 놀라울 정도로 삶이 성화된 삶이에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거기에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나와요. 소위 대자대비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리 했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인간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가장 자비롭고 경건한 것에 최종 주자, 제일 앞선 선봉주자가 누구냐, 바리새인이에요.

나머지 사람은 바리새인 저 뒷자리에 줄줄이 서야 돼요. 지금도 유대교에는 유대교에 대한 해석 책이나 유대교에 대한 성경 해석 책이 있거든요. 미드라쉬  그리고 탈무드라는 유명한 게 있지요. 탈무드 책에 봐도 그 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항상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먼저 사랑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것이 녹녹히 녹아져있고 그것이 예수님 이전부터 이미 그런 것이 역사가 되어있다 말이죠.

바리새인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구제했고 우리는 이레에 금식했고 십일조 했습니다. 십일조 왜 했는지 알아요? 구제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가난한 사람 돕자고 내는 겁니다. 그 십일조를. 그런데 그 바리새인은 성전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천국 갔습니까? 지옥 갔습니까? 누가복음18장에서 그 바리새인 어떻게 됐어요? 지옥 갔어요. 그리고 천국 간 사람은 주여, 죄인입니다 한 사람은 세리는 니가 의인이라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생각하는 그 기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바리새인이 다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한 가지 몰랐던 것이 있었습니다. 뭐냐 하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본인이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그들은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닌 중립지대에 있어야 하나님께서 말씀을 줘도 말씀에 주는 취지가 살아나요. “야, 똑바로 해!”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야, 똑바로 해. 니가 만약 똑바로 하면 복주고 못하면 벌 줄 거야.” 이 말은 그 말을 하는 순간은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 사람이 아직 죄인 자리나 의인자리까지 아직 모든 것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그 뜻이겠지요. 이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분류되고 악인도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의인도 될 수 있다는 그러한 중립지역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바리새인은 해석할 때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미 처음부터 죄 아래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리새인이 하는 말이 요한복음8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기 때문에 누구한테 죄에 매인 적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예수님은 그러니까 느그 애비가 사탄이라고 하는 거예요. 악마라고 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도 대화가 안 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과 대화가 된다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이 와야 이런 취지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돼요. 출발점을 중립지역에 놓지 마시고 아예 죄인으로 놔버리면 이해 안 될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볼 때 참 달지요. 단데, 그 달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단가 하면, 우리가 이 땅에 나와서 세상한테 시달릴 때, 그 시달리니까 말씀 포기할까요? 힘드니까 이제는 예수 없다고 할까요? 내 자식이 진도 앞바다에 창원 바다에 섭씨10도에 빠졌으니까 이제부터 하나님 믿지 말까요?

“하나님은 없습니다.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라는 밀양이라는 영화 테마입니다. 자기 아들을 납치해서 죽였던 사람을 만나고 난 뒤에 그 사람이 전도하기 전에 회개하니까 전도로서 복수하려고 하다가 그게 실패로 끝나니까 여자주인공 전도연이가 하나님은 없다. 다시 말해서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내가 어떤 뜻을 담고 기도해도 절대로 그 뜻에 장단맞춰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게 돼요. 그렇다면 자기가 믿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손에 쥐는 하나님을 원했던 겁니다. 내 손에 쥐이는 하나님. 아까 자식이 부모 집으로 가면 델 텐데 자식이 자기 집을 만들어 놓고 거기다 부모를 자기 집에 모셔서 쥐려고 하는 그런 심보를 우리도 여전히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에스겔 본문을 언급한 것은 이 땅에 살면서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달달하고 맛있다는 사실을 오히려 더 감사해야 된다는 그 취지로 제가 말씀드린 겁니다.

오늘 네 번째 말씀은 에스겔37장12,13절을 언급해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그 다음에 22절,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찌라” 요 대목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강의 내용이 저로서는 무척 쉬웠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할 강의내용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상당히 난해한 내용입니다. 어떤 데서 난해한가 하면, 에스겔37장 12절 말씀,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리라 할 때,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이게 오늘 네 번째 강의의 핵심내용입니다.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강냉이 죽 끓일 때 처음에 강냉이 들어가지요? 알맹이가 들어가요. 옥수수죽에 알맹이를 집어넣습니다. 물 넣고 센 불에 끓이면 알맹이가 어떻게 돼요? 다 뭉그러져서 알맹이가 없어지지요. 호박죽도 마찬가지고 없어지지요. 하나님께서는 개인적 입장에서 “저, 어때요?” “왠 이런 일이?” “저 어떻게 구원될까요? 지옥 갈까요? 알려주세요.” 항상 개인문제에서 출발하잖아요. 그걸 죽으로 녹여버리면 개인이 사라져요. 이 사실을 기독교 역사가운데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이 사실을.

자크엘룰이라는 사람이 그것 때문에 격분해서 L'homme et l'argent(하나님이냐, 돈이냐) 대장간에서 나온 책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시작! 일본 말로 요이 땅! 하거든요. 시작할 때부터 벌써 복음은 날아가 버린 거예요. 초대교회부터. 사도바울이후에 교회 시작하면서 이미 복음은 날아가 버렸어요. 자크렐룰은 그 책에서 말하기를 왜 교회에서 복음이 날아가 버렸는가 하면, 진리가 날아갔느냐 하면, 교회가 권력의 맛을 본 거예요. 교회가 힘의 맛을 본 거예요.

그 당시의 초대교회 때는 로마나라 아닙니까. 로마나라는 네 번째 짐승이에요. 다니엘에 의하면 네 번째 짐승이에요. 첫 번째 짐승이 바벨론, 두 번째 짐승이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사 바사, 세 번째는 바사를 공격했던 헬라BC313년, 그 다음에 그 헬라를 쳐 부신 것이 BC163년경에 로마에요. 바벨론 다음에 바사, 헬라, 로마. 첫 번째 짐승이 바벨론이에요. 그러면 그 전에는 왜 짐승이란 표현을 안 썼을까요? 그 전에는 뭐가 있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렵더라도 어차피 우리의 강의는 어려워질 것이니까 미리 맛보시라고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건재하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만 상관을 해요. 관계를 했습니다. 아직 이방인들은 놓아버리는 거예요. 이방인들은 그냥 묵인하신다. 사도행전17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방나라가 어떤 신을 섬기든 하나님은 묵인했으나 마지막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를 보내서 죽고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모든 민족, 민족이라 할 것 없이 모든 민족의 제한 없이 마지막 심판 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서 심판해버리겠다는 것이 사도행전17장에 사도바울이 아덴 설교하는 가운데 그게 나와요.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이 건재했던 그 시점과 그 후를 나누어서 발하는 겁니다. 현실이. 주님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관여할 때는 이방나라는 어떻게 놓든 관계있어요.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을 해서 저주받아서 없애버렸어요. 없애버리면 나라는 없어지지만, 뭐는 남아있습니까? 나라는 없지만, 뭐는 연속되어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은 연속되어야 되겠지요. 벌써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목사님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이 질문은 이미 벌써 끝났지요. ‘어떻게 하면 우리 남편 술 끊는가’ 벌써 이 문제도 떨어져 나갔어요.

하나님은 지금 사적으로 상대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다 떼어내 버려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잘 믿는 우리 언약의 하나님이셨던  그 언약 공동체를 없애버려요. 이 땅에서 이 지상에서 날아가 버려요. 없다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데 언약에 의하면, 언약에서 한 나라를 만들어요. 그런데 언약은 나라를 만든다는 약속은 있는데 이게 구체화 된 게 없지요. 왜? 있는 나라가 멸망했으니까. 그러면 이 나라가 역사 속에서 새로운 언약의 나라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겁니까? 아니면 역사를 초월해서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겨요. 어떻습니까? 역사에 있는 이스라엘을 한 번 실험을 해봤는데 이게 안 되니까 역사에서 사라졌지요.

역사에서 사라지면, 언약은 살아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언약마저 “아이고, 나 인간 때문에 일이 안되네.”이런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너희들이 못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성실하게 이루어지잖아요. 그 이루어진다는 것은  뭘 초월한다? 역사를 초월하잖아요. 역사를 초월하면서 그 때 등장한 용어가 뭐냐, 짐승이라는 묵시적 용어가 등장하는 겁니다.

왜 바벨론부터의 짐승이냐, 그 전날에 모압, 암몬, 이런 나라가 있는데 왜 그건 짐승이 아니고 왜 바벨론부터를 첫 번째 짐승으로 보느냐 하면, 이미 짐승이 등장했다는 이 말은, 사람보고 짐승이란 말은 기분 나쁜데 느브갓네살 보고 짐승이라 이야기했다 말이죠. 내가 보기에는 아저씨인데, 아저씨가 왜 짐승입니까? 짐승이라 하는 것은 소, 돼지, 가축 이런 것이 짐승이지. 하이애나 같은 거 있잖아요. 먹이 찾아 헤매는 하이애나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킬로만자로에서 볼까요? 짐승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하를 말하고, 땅에서 온 짐승 같으면 개나 돼지나 하이애나지만, 이 짐승이 어디서 올라와요? 바다에서 올라온다고요.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것은, 바다와 육지의 가름은 이것은 창세기 초반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창세기 초반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셋째 날에 뭐했습니까? 땅과 바다를 분리했잖아요. 그러니 이것은 창조이전에 숨겨진 비밀이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 드디어 배후에 숨겨진 아우라가 피어난다는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하니 마치 소설 쓰는 느낌 드는데. 소설이 아닙니다. 마치 세월호 침몰하고 난 뒤에 귀신들이 진도근처에서 피어오르는 그 느낌이 든다니까요. 눈에 보이는 역사만 인정되는, 눈에 보이는 역사와 이순신장군, 강감찬 장군만 인정되는, 이 세상에서 짐승의 역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짐승의 세계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건 상상도 못한 거죠.

그래서 느브갓네살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에 대해서 모든 역사는 실제에 있는 바벨론나라에요. 실제로 그 나라에 있었어요. 지금 북한이 있고 필리핀이 있는 것처럼. 실제 나라가 바벨론이거든요. 성경은 그렇게 보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은 짐승과 관련된 나라라는 거예요. 바벨론.

그런데 이스라엘 멸망하고 난 뒤에 이쪽이 묵시가 돼버리면, 묵시가 된 상태에서 이젠 짐승에 대한 공격이, 짐승에 대한 공격을 하려면, 인간은 짐승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증명되었어요.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는데 율법을 줬는데, 율법을 줬을 때, 나름대로 자기 딴에는 지킨다고 지켜봐야 율법이 완성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로마서 3장, 4장, 5장, 6장, 7장이 뭡니까? 율법을 준 것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모든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하심이라.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확장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확실하게 됐습니다. ‘아! 어떤 인간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도 십계명 지키려고 덤벼들다가는 십계명 앞에서 더욱 더 죄인 됨을 더욱 더 노출시킬 수밖에 없구나!’ 그 이유가 뭐냐, 너희들은 사단 밑에 짐승 밑에 예속돼 있는 거예요.

신약의 내용은 이거에요. ‘너희들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 왜? 짐승이 너희를 누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누구에게 시험받아요? 성령께서 일부러 광야에 보내가지고 누구한테 시험받습니까? 마귀한테 3번 시험받지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인간도 마귀의 시험에  안 겪게 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예요. 이겨낸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고 예수님 빼놓고 그 모든 인간들은 마귀가 누르는 그 압력을 그 힘에 대해서 지배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말입니다. 결국 구원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자기 힘으로 율법 지켜서 구원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오히려 죄가 더욱 더 증강하고 더욱 더 힘을 발휘하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자기가 점점 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어있는 게 인간이에요.

따라서 여기서 개인으로 어떻게 개인적인 나라, 이스라엘 나라가 어떻게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개인적인 시도는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났을 때, 그러면 약속대로 천국은 이루어지는데, 그 천국은 어떻게 구원되는가, 개인은 손들고 저 구원해 달라면 구원해 줍니까? 이미 실패로 끝났음이 확정됐는데.

이거 하나만 하고 10분 쉽시다.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하고 손들고 나와 버리면 그 사람은 그게 하나의 율법이 되어버려요. “내가 몇 월 몇일 날 예수 믿었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파에요. 구원파는 뭡니까? 개인구원이에요. 그야말로 이단이에요. 이스라엘이 했던 그 짓을 또 하고 있는 거예요. 신천지도 마찬가지고. 구원파도 마찬가지라면 나머지 모든 교파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님,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받습니까?” 이 시작부터가 이 언약 계통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지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이 짐승이 있는 시대에는. 그런 질문이 용납이 안 되거든요. 질문 자체가 용납이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공은주(IP:218.♡.196.154) 14-05-21 22:44 
수원140501b-(생명수)4강 - 이 근호 목사

얇은 베니아판(합판)을 한 번 그려보겠습니다. 우리 머리위에 이렇게 있습니다. 이리 있으면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 저 구원될까요? 안 될까요?” 옆 사람이 “저는 어떻게 됩니까? 저는 합격이에요? 불합격이에요? 천국에.” 다른 사람은 “설마 저는 지옥 보내지는 않겠지요?” 이렇게 할 때, 위에서 합판이 내려오면 합판은 넓고 개인전체에게 한꺼번에 떨어지거든요. 베니아판이 뭐냐 하면, 구원의 조직체에요. 성경에서는 이걸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내가 가입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가 내려와요.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 자체가 뭐냐 하면, 좌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빈자리가 그냥 내려오지요. 이미 구원에 있는 구조가 내려온다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구원이란 개념은 이 구원과 안 맞게 되어있어요. 안 맞는 게 뭐냐 하면, 그럼 당신은 안 맞는 증거는 있느냐, 있습니다. 안 맞는 증거가 뭐냐 하면, 처음 이스라엘 될 때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그들이 홍해바다를 건너왔고 애굽에서 탈출이 성공할 수 있었잖아요.

자, 그러면 제가 어린양의 피를 언급했는데, 이게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없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 나라 히브리인들밖에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애굽에서 고생합니다. 어떻게 저희들을 구원해 주시고 험한데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여호와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우리는 조상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구원해 주세요.” 할 때에 그렇게 요구할 때에 그들 머릿속에 어린양의 피라는 것이 그들의 머릿속에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처음에 그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을 때, 모세가 오기 전에 그들의 머릿속에 고생하는 히브리인들 속에 ‘어린양의 피만 있으면 되는데.’ 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했지요. 그러니까 일방적이에요. 일방적.

“하나님, 우리 가정 구원해 주세요.” 뭐 해달라는 것과 너무나 일방적이에요. 하나님의 진짜 준비된 천국은 전혀 생각 못하고 자기가 너무나 이 세상이 고생되니까 남자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되고 여자는 해산하는 고통을 하면서 남자한테 지배받는 그런 저주를 받았으니까 너무나 사는 게 힘드니까 힘든 것을 모면해 보자. 힘들면 불행하고, 불행은 눈물 나고, 눈물 나면 괴롭고, 그렇게 괴롭게 하다가 나중에는 죽으니까요.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제가 가슴이 아팠어요. “이래 살다가 내가 고생하다가 죽겠다.” 고 짧은 멘트에 굉장히 제가 실감나는 감명을 받았어요. 그게 당신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그래. 다 그렇다고요. 고생만 하다가 인생 끝나는 거예요. 언젠가는 고생이 면해지겠지~ 언젠간 고생이 면해지겠다고 그렇게 희망은 품고 있지만, 막상 살아보면 고생뿐이에요. only 고생. 오직 고생뿐이라니까요. 고생 좀 덜하다 싶으면 온 몸이 삭신이 쑤시면서 안 아픈 데가 없고 몸이 성한 데가 없고 사람이 늙어가는 모습이 그렇게 뭔가 자신이 파괴되어 간다는 걸 느끼지요. 왜냐 하면, 젊은 날을 기억하니까. 이놈의 기억이 문제라. 잘났을 때, 멋있을 때를 기억하니까 지금과 비교가 되니까 그만큼 자괴감이 더 커지는 거예요.

너무나 예쁜 여자하고 살다가 사별을 하거나 이혼을 해놓고 그 다음에 두 번째 결혼을 하려하면 반드시 찾는 것이 전번보다 더 예쁜 거나 더 나은 사람 찾지 못생긴 여자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혼자 살면 혼자 살지. 전처가 너무 예쁘면 그 다음 후처는 괴롭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이 기억이라는 것이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요인 중에 포함이 돼버렸어요. 애를 잃고 난 뒤에 애가 뛰노는 거 보면 미치고 환장할 거예요. ‘내 애가 살아있었으면 물에 안 빠졌으면 이 나이 때면 이렇게 뛰어놀 텐데.’ 지금 그걸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생각하니까 안 보이는 곳에 가야되는데 안 보이는 데가 있습니까? 다 TV있는데.

그러니까 사는 거 자체가 트라우마, 정신적인 상처를 다 지니고 살기 때문에 얼마나 사람들이 사는 게 힘들었으면 천국을 그리워하겠어요? 그래서 다 천국 갈 것 같으면 십자가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어요. 괴로우면 구원받으리라, 이런 공식이 있으면 돼요. “괴로우냐?” “예” “그럼 죽어서 어디 가고 싶은데?” 사람들은 “좋은데요.” “보내줄게.” 사람들은 그런 하나님을 원합니다. 어떤 공식도 필요 없고 방정식도 필요 없고 괴로움만큼 그만큼 더 상상을 하게 되는 그 세계. “그것만 하면 구원해 줄게.” 하는 우리는 편하게 그런 세계만 상상하고 있어요. 일부러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애굽의 복속을 받게 했습니다.

힘이 있다는 것은 힘은 주체를 만들어내요. 힘은 아까 말씀한 자아를 만들어내요. 힘이 있는 곳에. 무슨 말이냐 하면, 힘이 없으면 자아가 생각나지를 않아요. 힘이 있음으로서 여기서 반발하고 반항함으로서 주체가 느껴지는 겁니다. 가정에 문제가 없으면 전부 다 그럭저럭 살아가요. 가정에서 누구하나 도둑이 들어왔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거기서 도둑하고 싸워서 이겨서 그 도둑을 파출소에 신고했을 때에 그 때부터 식구들은 아버지를 와! 하고 아버지의 주체가 부하게 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논리로 정리할 수 있느냐 하면, 힘이 있고 힘에 저항함으로서 비로소 주체는 주체 값을 하면서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지금 성도님 직장에 다니시잖아요. 그게 힘입니다. 그 힘이 있음으로서 힘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 버틸 때에 비로소 자기가 자아다운 거예요. 그런데 아무도 여러분을 핍박하지 않고 누구나 여러분을 칭찬할 때, 사람은 내가 누군 줄 도대체 몰라요. 붕 떠버려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에요. 뭔가 헤엄을 치되 진공에서 헤엄을 치면 헤엄치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물에 빠뜨렸을 때는 악착같이 헤엄치면서 살아야 돼! 살아야 돼! 가 느끼게 되어있어요. 자아가 느껴진다니까요. 자극이 없으면 자아가 생기지 않는 법입니다. 미안합니다만, 현실이 그래요.

누가 나를 공격하고 쥐어뜯고 이렇게 해줘야 돼요. 누가 공격을 해줘야 되고 누가 자꾸 옆에서 시련을 줄 때, 나는 비로소 ‘나는 어떻게 하면 되지?’ 하고 자기 자아가 다시 부각이 되는 겁니다. 고요해 보세요. 이것은 공동묘지지 이건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니체라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힘이 아니고 반대로 힘이 없는 권태다.’ 사람이 권태로우면 사람이 사는 게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나이 80넘은 노인네들이나 할아버지나 할머니 사는 거 보세요. 행복합니까? 노인정해서 지하철도 공짜지요. 뭐든지 반값이지요. 하고 싶은 대로. “야, 야, 용돈 없다.” 전화만 하면 재각 와가지고 부모한테 탁탁 드려가지고 그놈의 유산 때문에 찾아오지요.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게 부모한테 행복하십니까? 물어보세요. 내가 사는 게 귀신이지 이게 무슨 사는 거냐, 사람은 부딪기고 뭔가 저항할 때, 주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할 때, 하나님의 원수를 배치를 해놔요. 하나님의 원수가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반대하는 겁니다.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한다는 것은 마귀는 알고 있는데 누구는 몰랐느냐, 애굽인도 모르고 바로왕도 모르고 인간이라고 생겨먹은 것은 몰라요. 왜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때는, 그 약속에는 사람들은 빠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빨리해서 미안합니다. 그런 것은 나중에 천천히 할 건데, 어쨌든 간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아이디어가 애굽에 있던, 고생했던 사람들은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지요. 몰랐다는 말은 구원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백날 고생 실컷 해도 고생했다고 구원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한 맺혔다고 구원해 주는 하나님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한의 교회에요. 한. 한 풀러 온 교회가 한국교회에요. 그래서 부흥된 거예요. 그렇게 맺힌 한이 많기 때문에. 그러나 한 맺혔다고 구원해 주는 게 아니거든요. 한을 달래서 교회가 부흥됐어요.

실제로 출애굽은 한 맺혀서 하는 게 아니고 어린양의 피로 구원받은 거예요. 어린양의 피로. 그러면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왜 애굽을 통해서 왜 그리 핍박을 했는가, 애굽 바로왕을 통해서 히브리인들을 핍박을 하니까 히브리인들은 자연스럽게 자아가 발생돼요. 자아가 발생되면서 그 자아가 얼마나 문제성 있는 자아인지 본인들도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가 지금 받는 것이 하나님 때문에 당하는 일이라고 해서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본 겁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 편에서 이렇게 고생하는데 지켜보실 분 아니지요? 어떻게 와서 사태를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마치 구원받는 것이 자기 권리가 되는 양. 그러한 정당한, 자기 있는 한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모세를 보내니까 모세가 왔으니까 하나님이 구원하러 왔는지 알았지요. 그런데 모세가 와서 하나님하고 의논하기를 “아직도 멀었어. 아직도 자기의 자아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몰라. 더 밝혀내야 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더욱 더 모세가 오고 난 뒤에 바로에 대한 학대정책이 더욱 더 강화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그 히브리인들이 누구를 공격하는가 하면, 바로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모세와 아론을 공격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의 소원은 뭐냐 하면, 애굽을 떠나는 게 소원이 아니에요. 일단 순서를 정합시다. 일 단계: 자아는 없다.  2단계: 자아발생 3단계: 발생된 자아 구원. 이것이 바로 인간 속에 내장돼 있었던 겁니다. 잠재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라 생각하는 구원이라는 문제, 하나님이라는 영광, 하나님이라는 문제는 먼저 하나님보다 뭐가 우선입니까? 이 자아가 우선이었어요. 나를 구원하라 이 말이에요. 이게 출애굽기32장에 나오지요. 모세가 하나님께 시내산에 가고 단 뒤에 밑에 있는 아론과 사람들은 금가락지 빼서 뭘 만들었습니까? 금송아지 만들었지요. 누구 위해 만들었습니까? 자기를 위한 하나님, 이것을 확연하게 굳혀줘야 됩니다. “고상하고 추상적인 관념적인 그런 신학적인 것은 다 때려치우고 지금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 이 말이야.” 라고 요구하지요. 그리고 난 뒤에 그렇게 해놓고 주님께서는 여기다가 뭘 만나게 하십니까? 어린양의 죽음을 만나게 하지요. 그럼 어린양의 죽음이니까 어린양은 어린양의 나름대로 뭐가 돼요? 주체가 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은 나라는 주체가 죽게 되었고, 너무 힘들게 되었으니까 살려달라고 하나님을 요청했는데 막상 자기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의 주체에 대해서 관여 말고 우리 주체를 덮어요. 우리 주체 말고 다른 주체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자 하는 우리 주체를 덮어씌우는 새로운 주체를 들고 오신 거예요. 나를 구원하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어떤 분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구원은 누가 독점합니까? 나의 구원은 물 건너 간 거예요. 내 구원 없어요. 애초부터 내 구원은 성립이 안 될 요소기 때문에 내 구원은 없고, 누구 구원하는가 하면, 바로 예수님 구원이에요. 오늘 핵심이 이겁니다.

구원은 누구만 구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구원해요. 인간은 구원 요구할 입장도 안 되고 자격도 안 됩니다. 애초부터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입장이기 때문에 쫓겨난 취지를 살린다면 구원해 달라는 소리가 나오면 안돼요. 주님께서 자기 아들 보내시고 자기 아들 다시 건져내심으로서 거기에 콩고물 묻히듯이 묻혀서 나온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지체 바로 천국의 백성이 되는 거예요.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주체가 자아라고 했지요. 그 자아는 뭔가 다른 자아에 의해서 덮여질 자아로서 건짐 받는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우리는 타고난 거예요. 인간의 자아는 뭐가 우선이냐 하면, 자아가 우선이 아니고 몸이 우선이고 몸이 만들어낸 이미지가지고 자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정신분석학자나 또는 생리학자들이 밝혀냈는데 아기가 6개월 이전에는 자아가 없어요. 엄마 몸과 자기 몸이 엄마 자아가 자기 자아를 대신하는 겁니다.

엄마가 장에 가변 아기는 울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가게 되면 내가 떠난 게 되기 때문에 떨어지면 안 되거든요. 엄마가 만약에 아빠한테 야단맞으면 아기는 울어요. 왜? 엄마자아가 자기 자아를 대신하기 때문에 엄마가 꾸중 들으면 자기가 꾸중 듣는 것이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 6개월 이후에 2살, 3살, 4살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면서 엄마자아 따로 있고, 내 자아 따로 있다. 그걸 가지고 거울단계라고 합니다. 하여튼 이것은 성경에 관계없으니까 그냥 들어나 두세요.

자아라고 하는 것은 몸부터 먼저 있지 자아는 없다. 왜 그러느냐 하면, 애가 엄마 자궁에서 나올 때부터 남들이 볼 때는 자궁에서 나왔지만, 아직도 탯줄은 끊어졌지만 절대로 정신적으로는 끊어지지 않았어요. 엄마 품속에 있는 겁니다. 언제까지? 28세까지요. 이 두뇌가 독립적인 두뇌로서 28세까지 자라나고 보통 19세쯤 되면 드디어 독립할 마음이 생긴다고 하는데 자라나기는 28세까지 자라나요. 어쨌든 간에 그 전까지는 의존적입니다. 참, 인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면서도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무지해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우리는 흔히 사랑하잖아요. 사랑은 뭐냐 하면, 엄마하고 한몸된 그 기억을 두고 사랑이라 해요. 엄마의 몸에서 하나로 있다가 떨어져 나오거든요. 사람은 19세까지 계속 떨어져나갑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는 떨어졌다고 하지만. 이게 떨어지게 되면 엄마 몸 있고, 아기 몸 있는 게 아니고, 엄마 몸 전체가 아기에게 퍼져있는 거예요. 이게 출산하면서 떨어져 나오거든요. 떨어져 나오면 엄마 몸 이만큼에다가 점선으로 자기는 일부 상실한 거예요. 떨어져 나오면서 상실해요. 두 살, 세 살 되면서 상실 폭이 점점 떨어지잖아요. 그 상실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엄마와 옛날에 함께 있었던 그 정서를 그대로 요청할 때, 그걸 요청하는 걸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상실된 원래 내 몸을 매워 달라고 요청하는 게 사랑이에요. “당신, 나 사랑해?”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엄마한테 받은 사랑을 당신이 줄 수 있어?” 그런 뜻이에요. 처음에 남편이 결혼해가지고 “아이고, 이 미역국이 이상해.” “왜 이상해? 내가 해주는 맛이 싫어?” “우리 엄마는 맛있게 하던데 당신은...” 보세요. 엄마 찾잖아요. 엄마의 맛을 어느 정도 잃어버렸어요. 기본이 엄마 거고 당신은 엄마에게 맞추기만 하라는 말이죠. 니 솜씨부리지 말고. 내 입맛은 엄마 입맛이지 니 입맛에 맞추면 안 돼. 그러다가 잔소리 몇 번 듣고 바가지 긁고 하면 알아서 감사합니다! 하면 입맛이 바뀌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중에 십년 살면 “엄마는 요새 음식을 영 못해. 당신 음식이 최고야!” 이리 나온다 말이죠. “당신, 음식이 최고야.” 그러니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자아는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주변에서 만들어주는 거예요. 이미 상주되어 있는 정신세계에요.

그러니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독자적으로 개인적으로 살아본 적이 없고 앞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다 들었던 풍얼 이고 다 들었던 정서와 감정을 그냥 수입해서 그냥 조립해 나온 거예요. 그게 꿈입니다. 도대체 현실이 꿈인지 꿈이 현실인지 둘 다 꿈인데. 인간이 사람을 너무 고상하게 만들어놨어요. 이 세상 자체가. 뭔가 독자적인데, 독자적인 것은 없습니다. 젊은 16살 애가 물에 빠졌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팍 쏟아지는 것, 누가 울라고 했습니까? 누가 아프게 했습니까? 왜 눈물이 납니까? 누가 돌로 나를 때리면 돌이 날아와서 때리니까 피부조직이 상처니까 거기에 신경조직이 그대로 있으니까 내가 아야! 를 느끼니까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 이것은 이해되잖아요. 과학적으로.

그런데 누가 나보고 욕을 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잖아요. 욕이 실체가 있습니까? 욕이 기어이 돌멩이가 되어서 나를 때렸습니까? 우울증으로 자살한 사람이 누가 목 졸라서 자살했습니까? 세상은 싫어. 약 먹고 죽었잖아요. 누가 당신의 육체를 힘들게 했는데? 아무도 해롭게 한 게 없어요. 그런데 우울하다. 왜? 몰라. 이미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정신은 본인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한 지붕 세 가족이라. 같은 지붕에 있다가 자기는 그걸 못 느꼈지요. 왜냐 하면, 나는 나다. 매일 자기는 나는 나다! 하는데 절대로 인간은 나는 나가 아니에요. 나는 나가 아니고 남한테 빚져있고 남한테 지금 놀아나고 있어요. 뭔가 다른 정신에 놀아나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악마의 정신’이라고 해요.

악마가 퍼트려준 유포한 스캔들에 허무맹랑한 낭설에 이미 우리는 푹 빠져가지고 몸이고 뭐고 돈이고 다 갔다 바쳤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걸 가지고 죄가 왕 노릇한다고 해요. 죄가 왕 노릇하는 입장에서는 이미 죄라는 베니아판에 있어서 우리는 이미 물려서 살고 있습니다. 나요? 베니아판이에요. 누가? 죄라는 베니아판이 내 육신을 이렇게 조작하고 있고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 다시 봅시다. 애굽에 살던 사람 중에 두 사람이 있어요. 하나는 애굽인이 있고, 또 한 사람은 히브리인들이 있었지요. 그 때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히브리인이에요. 히브리인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애굽을 형성합니다. 애굽의 정신이 양쪽 다 지배하고 있어요. 여기서 히브리인들이 탈출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과연 출애굽 했을까요? 정신적으로? 맨날 돌아가자는 거예요. 맨날.

몸은 나왔는데 마음은 기껏 아는 것은 애굽 이외에는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요. 아는 게 없어요. 우리가 천사를 이해합니까? 천사를 이해 못해요. 만약에 내가 어떤 프로야구팀을 LG를 응원한다. LG를 응원해가지고 LG하고SK하고 응원을 하는데, LG가 마지막 9회 말에 끝나기 전에 5점차로 이겼다. 이번엔 LG가 이겼다 했는데 9회 말에 투수가 엉뚱한데 던지더니만 5점차로 극복해서 SK가 이기면 내가 야구선수도 아니고 내가 서울가지고 않고 중계방송을 봤을 뿐인데 왜 그렇게 화가 나는지. 도대체 내 정신은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LG라는 그 팀이 내 정신을 줬다, 폈다, 가지고 놀았잖아요. 그 LG배후에 누가 있어요? 나는 LG응원해야 될 몸으로서 지금 부림을 당하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출애굽?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세요. 무슨 출애굽이 돼요. 우리가 이 세상 사람이 내려놔서 천국 만드는 게 천국이 그런 곳이에요? 주님께서는 말도 안 되는 우리 정신세계에다가 드릴로 구멍을 뚫었어요. 이걸 구멍이라고 하게 되고 이걸 철학에서는 공백이라고 해요. 텅텅 비어있는. 철학용어입니다. 공백이라는 것은 수학에서는 공집합이라고 합니다. 텅텅 비어있는 것.

뭐냐 하면, 우리가 애굽으로 꽉 차있는 것에 구멍을 뚫어버려요. 그 구멍을 뚫어버리면 바람이 어떻게 됩니까? 낯선 바람이 구멍을 뚫고 나오지요. 우리는 꽉 차있는데 이 세상으로 꽉 차있는데 어느 한 구석에 뭔가 비어있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마치 최백호가 불렀던 ‘낭만을 위하여’ 가사가 있거든요. 어느 한 곳에 비어있는. 가사 알지요? 여러분. 이 나이에 낭만이 있으랴마는, 뭔가 한 곳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 들지요. 내 것은 아닌데 분명히 내 것으로 채울 수 없고 내 것으로 마저 채울 수 없는 텅 빈 상태. 그것을 확장시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다가 어린양의 죽음을 집어넣어요. 그러면 나는 나머지 몸으로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이왕 사는 거 어떻게 산다? 행복하게 살아야 돼! 어떻게? 긍정적으로 살고 우리 가족, 내 새끼 너무 너무 잘 되어야 돼! 출세해야 되고 나는 교육 잘 시켜야 되고 잘 키워야 돼!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뭔가 한 쪽에 텅 비어있는 느낌, 누가 와서 드릴로 지금도 구멍을 뚫어가는 것. 그리고 우리의 밑바닥까지 내려앉아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붕 뜬 상태로 만드는 것. 그게 뭐냐, 살아야겠다고 하는 나의 정신세계 속에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로부터 놀림을 받고 지배를 당하는데 “너는 죽어도 이미 너는 살은 거야.” 라는 소식이 들어올 때, 내가 굳이 살려고 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마귀의 놀림 상대가 되었는가, 참 부끄럽고 미안하고 정말 그동안 속아 넘어가고 원통하고 분통하고 그래요.

이미 살았는데 내 식으로 나를 또 살려야 된다는 그것이 이 세상 정신에 젖어있는 거예요. LG가 8:0으로 져도 그게 주님의 은혜고 주님의 하신 일이 되거든요. 한국 팀이 일본에 가서 5:0으로 져도 그것 때문에 술 먹고 하지 마세요. 짜증낼 필요 없이 ‘주께서 그렇게 공 넣게 하셨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거든요. 왜냐 하면, 어린양의 죽음이 우리 몸속으로 하나의 정신을 불어넣을 때, 그게 성령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 주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붕 뜨면서 나중에 완전히 파쇄, 산산조각 내버려요.

뭔가 들여놓고 빵! 하고 터트려버리면 다이너마이트 집어넣고 하나, 둘, 셋 빵! 터지면 전체가 다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헝겊 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존재를 우리는 그동안 이 정신, 저 정신 어떤 철학 정신, 모험 정신 해가지고 대충 말도 안 되게 얼기설기 대충 우리의 껍데기를 이렇게 이어붙인 거예요. 헝겊 조각 공예품, 퀼트라고 합니까? 헝겊 같은 넝마 같은 정신세계를 가지고 주님이 주신 몸을 가지고 유지하는 거예요.

자, 여기서 제가 구분해 보겠습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넝마 같은 정신이라 했지요. 자, 지금까지 이거 설명했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뭐냐, 우리의 몸은 누가 준 거예요? 육신, 이건 하나님이 주신 거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는 일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꾸 넝마 같은 정신이 주님의 일을 자꾸 방해하지요. 이게 마귀에서 왔기 때문에. 이 이미지가 자꾸 방해하니까.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걷어내라, 말이죠. 넝마 같은 이것을. 제가 말함은 성경대로 하는 게 좋겠지요. 누가 너희를 속이거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 이 이야기에요. 누가 너희를 사기 치거든 그래, 차라리 사기 당해버려라.  “나는 사기 안 당해야 돼! 나는 똑똑하니까 나는 돈이 아까워.” 이게 바로 넝마 같은 정신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더 이야기해볼까요. 고린도전시11장, 누가 아내 있거든 아내 없는 자같이 하고 누가 돈이 있거든 돈도 다 소용없는 것처럼. 다 쓰지 않는 것처럼, 쓰지 못하는 것처럼 생각하라. 왜? 세상 흔적은 지나기 때문에. 만화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미키마우스가 주인공이잖아요. 모자를 이렇게 쓴다든지 옷을 입고 있으면 뒤에서 고양이가 잡아먹으려고 오잖아요. 그러면 놀래가지고 미키마우스가 몸이 확 빠져나오면서 그 순간 몸은 모자와 같이 옵니까? 공중에 붕 떠 있습니까? 몸이 너무 빨리 빠져나오다 보니까 모자부터 몸하고 그 현장에 그냥 붕 떠있지요. 만화에 보면 바퀴가 빙빙 돌아가고 먼지 일으키고 확 빠져나가면서. 고양이는 기다려라 하면서 오잖아요.

몸은 주님께서 어린양의 죽음으로 동참시키면서 손목잡고 몸을 확 빼내면 뭐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비로소 넝마 같은 정신세계가 애굽에서 배웠던 세계가 그냥 공중에 붕 떠있지요. 미련 끊어버려라.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살아왔으며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며, 내가 얼마나 착한 존재며, 얼마나 성실하게 자기를 관리했다, 이런 것을 실천했다 하지 말고 그랬기 때문에 일곱귀신도 오는 거예요. 니한테 의롭고, 착하고.

“이 더러운 몸아, 세리와 창기 같은 몸아” 하고 몸만 쥐고 가지고 오게 되면 이것은 마귀가 마음 놓고 짓밟던 놔더라,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몸은 빠져나오면서 이 몸은 뭐냐,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여, 제가 감히 얼굴을  못 들고 저는 죄인입니다.” 할 때 주님께서는 “니가 바로 의인이다.” 하시는 겁니다. 출애굽은 우리를 착하게 만드는 게 아니고 그 몸둥아리, 알맹이 원래 죄 짓게 했던 몸이 얼마나 죄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몸이냐, 그것을 까발려주면서 발가벗은 몸만 달랑 빼고 내빼는 거예요. 요거하고 마치겠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간음하고 잡히고 난 뒤에 사람들이 다 잊어버렸을 때, 주님께서 “너 간음했지? 용서해줄게.” 이게 아니고 간음한 현장에서 그 여자를 용서하지요. 그 다음에 다윗이 밧세바하고 관계를 끊어버리고 용서하는 게 아니고 밧세바하고 다시 결혼하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은 아무리 포장과 치장을 해도 주님보시기에 그 몸은 어린양의 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 덩어리로 보는 거예요. 그 죄 덩어리라 하는 사실을 육신이 있는 육신그대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주의 영으로 인도해 주시는 겁니다. 바로 어린양의 피로서 대체의 몸으로서 어린양이라는 주체가, 자아가 나라는 이 몸에 대체함으로서, 그걸 대신 죽으심으로서, 대신 용서함으로서, 우리를 같이 구원하는 거죠. 그런 하늘나라에 죄인들만 모여 있는 거예요. 그리고 공로는 누가 받습니까? 그 죄인들을 자기 피로 씻어주신 주님만 공로 받는 그 상태가 천국입니다.

문제는 바로 넝마 같은 우리 정신세계, 이게 애굽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훅! 성령께서 빼낼 때, 우리는 죄의 몸에서 얼마나 나를 건사하게 만들기 위해서 쓸데없는 것들을 많이 동원했느냐 함을 우리 눈으로 다시 쳐다보면서 감사해야 되지요. 이렇게 빼낼 때, 너와 내가 할 것 없이 다 같은 아담의 몸이기 때문에 사람이 잘나고 못나고 차이는 없는 거예요. 그리고 차이가 없는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성령 안에서 눈이 어떻고 발이 어떻고 코는 어떻습니까? 전부 다 한 성령을 마셔서 모두 다 육신으로서 그냥 맨몸으로 뽑혀져 나온 입장에서 니 자랑, 내 자랑할 수 없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입니다. 이게 바로 에베소서에 나오는 그 교회라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알곡 아닌 거 덮어 세워봐야 주님 십자가 앞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께서는 우리의 죄를 가지고 아버지께 버림받을 때, 우리도 마땅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을 날마다 십자가 생각하면서 되새기고 그게 우리의 진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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