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기타강의
2014-08-05 13:44:22 조회 : 3125         
2014 여름 수련회 140803 이름 : 이근호(IP:119.18.89.5)

1강의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2강의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3강의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4강의      음성    혹은 5분잘린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5강의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6강의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7강의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8강의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9강의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관리자(IP:203.♡.42.222) 14-08-09 09:40 
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시작하지 않는 일이 되게 해주시고 마무리도 주로 마무리되는 그런 말씀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애굽기는 글자 그대로 애굽에서 떠나는 기록이거든요. 떠나는데 있어서 반대파가 있었습니다. 적이 있는데 적은 애굽이라고 성경에는 나와 있습니다. 지금은 실제적인 애굽은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있었지요. 애굽이란 나라가 있었던 이유가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단짝을 이루려고 애굽이 있습니다. 한쪽이 사라지면 저쪽도 사라지지요. 이스라엘이 사라지면 애굽고 사라지고. 애굽이 있다는 말은 반대쪽에 그림자로 이스라엘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번에 수련회에서 옛날 출애굽이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출애굽의 정신은 무엇이며 지금은 출애굽의 정신을 어디에 적용할 수 있는가? 대략 그런 쪽으로 정리하시면 되는 겁니다.

 

애굽이란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면서 애굽과 이스라엘로 분리됩니다. 이것이 출애굽 정신, 출애굽 사상, 출애굽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이 옛날이야기잖아요. B.C.1400년경인 옛날이야기를 알아야 되는 이유는, 그 출애굽 정신에서 메시아가 오셨거든요. 메시아는 출애굽 정신으로 실시한다. 또는 적용한다는 등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메시아, 예수님은 출애굽 사상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느냐고 물어야 되지요. 예수님은 출애굽으로 하더라. 예수님이 출애굽한다면, 옛날에는 애굽이 있었고 이스라엘이 있었는데 지금은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애굽과 이스라엘이 구분된다면 지금의 애굽은 누구며, 지금의 이스라엘은 누구인지 그것까지 제시되어야 되죠.

 

그냥 예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한국말로 ‘예수’고 영어로는 ‘JESUS’라 하고 그러면 어느 쪽을 따라야 합니까? 어떤 문자나 기호를 암기한다고 해서 거기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 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런 설교 했습니다만 암기한다든지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기계가 하는 짓이거든요. 부속품이 있는 기계. 인간은 60조개의 세포가 있고 세포마다 dna가 있고 그 dna를 디옥시리보핵산이라고 보통 학교에서 배우거든요. 그게 기계란 말이에요. 기계를 쪼개보면 역시 그 안에 기계가 있고 더 쪼개면 거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계가 있는 에너지 장으로 넘어가지요. 양자물리학으로 넘어가면 그렇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양자물리학이고 화학이고 간에 퉁 쳐서 이야기하게 되면 기계입니다. 기계란 원인과 결과, 외부에서 자극을 주면 반드시 반응을 나타나게 돼있는 자동화과정을 거치게 돼있어요.

 

그래서 암기한다든지 교육을 한다는 것은 정확한 결론을 유발하기 위해서 사람을 기계처럼 다루는 식으로 세상은 양육되는 겁니다. 그것이 일종에 애굽이라 할 수 있고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도 하나에 일하는 기계였습니다. 멈포드라는 사회학자는 말하기를, 옛날에는 기계가 사람을 대신했을 뿐이다. 지금에 노동자는 고대사회에서처럼 일하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럼 더 나아가서 일을 부리는 자본가는 기계 아닌가? 그것도 마찬가지로 기계다. 결국 남는 것은 매트릭스, 정보와 기계로 구성돼있는 세상, 그 세상의 특징은 탈출할 길이 없다는 것. 탈출할 길이 없다면 탈출 안 하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속 편하게 살다가 지옥 가는 거지요. 안 하면 되니까, 출애굽을 몰라도 되니까.

 

그래서 출애굽은 굉장히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겁니다. 기계한테는. 기계에 고향이 있습니까? 기계의 고향은 공장이지요. 애굽에서 애굽을 낳았고 아담이 자손을 낳은 거예요. 기계가 기계를 낳은 겁니다. 무슨 고향이 있습니까. 복제만 있을 뿐이지요. 제조만 있을 뿐이지 어떤 고향은 없어요.

 

여러분, 지금 출애굽 보면서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와서 가자. 히브리인들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어디로?” 몰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탈출을 원했던 게 아니고 정권교체를 원했던 겁니다. 너무 압제를 받으니까 같은 백성으로 이주민 취급받지 않고 토박이들과 동등한 대우해달라. 이걸 요구했지 여기서 나가자. 나가긴 어딜 나갑니까? 여기가 전부인데 나갈 필요도 없지요. 나갈 필요 없는 그들에게 나가자고 하니까 모세가 대단히 수상히 보였던 겁니다. “너, 어느 별에서 왔어?” 모세가 도민준입니까?

 

지금 출애굽 자체가 이건 종교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종교의 목적은 행복에 있지 탈출에 있는 게 아니거든요. 행복하자면 종교생활하면 돼요. 그러나 탈출해야 되겠네. 탈출하겠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탈출은 어떤 경우에 해당되느냐 하면, 어디 다른데 갔었는데 갔다가 와보니까 재미없어서 왔던 대로 가자. 이미 탈출해야 될 지역이 입력돼있다면 그때나 탈출이란 말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가본 곳도 없는데 나가자. 어디로? 몰라. 그럼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출애굽은 없습니다. 출애굽 자체가 인간에겐 없어요. 성경에 있잖아요. 성경에 있어봐야 기계가 성경을 모방할 뿐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용어들, 교재에 보면 ‘언어의 병기창’이라고 했는데 병기창에 보면 무기들이 나오잖아요. 막 쏟아진다고. 칼, 총, 활 등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이 땅에서 행복하기 위해서 인간의 상상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의 용어들을 다 차용합니다. 십자가, 언약, 예수, 메시아, 율법, 로마서, 하나님의 의, 십일조, 안식일, 십계명, 온갖 것 다 끌어 모아서 행복하자. 이렇게 나옵니다. 탈출하자가 아닙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탈출하려면 탈출할 장소를 미리 가본 사람에게나 여기보다 그쪽이 낫다고 할 수 있는데 가본 적도 없는데 무슨 탈출이 됩니까?

 

죽어서 천국 가자고요?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죽어 봤어요? 어디서 상상의 신화의 세계를 펼칩니까? 죽어봤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 말고 실제로 죽어서 갔던 천국을 봤느냐 말이죠. 19세기에 스웨덴의 스베덴보리라는 이상한 신비주의자가 있어요. 요새 그 사람 책도 나오는데, 펜시콜라나 그런 사람들 같으면 그런 구라도 되는데

 

어쨌든 출애굽 자체는 우리의 숙제도 아니고 특히 우리의 관심사도 아닙니다. 우리는 출애굽 의사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나의 자유를 훼방하지 않고 마음껏 성깔대로 살게 해주는 보장된 국가체제, 공동체체제. 결국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추구할 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철학까지 이구동성의 외치는 것은 뭐냐 하면, 착하게 살아야 된다. 왜? 그래야 행복하니까. 이게 칸트의 이야기에요. 소통해야 된다. 왜? 행복해야 되니까.

 

행복해야 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버려요. 이랬든 저랬든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행복하지 않으니까 교회에서 하는 말이, “지금 행복하지 않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주님 재림하시면 행복해질 겁니다.” 주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려고 오시는 분입니까?

 

맨날 골프에서 지는 사람에게 메시아는 어떤 메시아에요? 한번쯤은 큰 내기에서 이길 수 있도록 행복을 보장하는 메시아에요. 쌍꺼풀 없어서 수술했는데 마음에 안 들 때 그때 주님은 어떤 주님입니까? 어느 밤에 쌍꺼풀 천사가 와서 박아주는 그런 예수에요. 그러니까 행복의 조건이 다 다르기 때문에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예수가 다 다릅니다. 메시아가 다 달라요. 교회마다 다 달라요. 지금 구원파의 행복은 뭐냐 하면, 재산 손해 입지 않는 거예요. 기계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 정말 이상스럽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출애굽의 모든 기획안, 그리고 거기에 대한 모든 아이디어는 히브리인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아이디어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출애굽 정신으로 왔다면 그 예수님은 와도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알아볼 수 없습니다.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못 알아먹는 예수 대신에 알아 먹히는 예수를 교회에서 생산하고 상품화해서 사업적으로 판매하면 되는 거예요. 예수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 겁니다. 그 구호만으로 충분하거든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하는 말이, “나는 떠나고 싶다.” 이거거든요. 그러면 사도 바울이 여기 섰다면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떠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딸 시집가야 되고, 방금 무사히 제대해서 뒷바라지해야 되는데 떠나긴 뭘 떠나요. 혹시 여기 팔십 이상 되신 분 있습니까? 치매 걸리기 전에 떠나면 괜찮아요. 그러나 아직 치매 안 걸렸잖아요. 왜 떠나요. 할 일이 많은데. 그 이야기는 뭐냐 하면, “예수님 저리 가세요.” 그 말 외에는 다른 말이 아닙니다.

 

이쯤해서 정리해봅시다. 한 것도 없는데 정리는 해봅시다. 출애굽은 뭐냐? 두 가지에요. 하나님의 개입과 하나님의 개입이 없음. 있음과 없음, 그겁니다. 끝. 이번 수련회 끝났습니다. 출애굽의 아이디어는 절대로 인간들의 생각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생각은 자기 존재의 행복이에요. 마아슬로우의 욕구설에 의하면, 인간은 나로 인하여 행복하면 최상의 욕구입니다.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하는데 나, 여기 있음 자체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돈도 필요 없고, 권력도 필요 없고, 출세도 필요 없고 나, 여기 있음 그 자체로 계속해서 우려먹을 정도로 행복하다면 그것이 바로 해탈의 상태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개입의 없을 경우에 그렇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면 그 행복 뚝, 그 행복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왜 집어넣어야 됩니까? 너는 행복할 권리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치밀하게 보여주면서 주님 있는 곳에 데려가겠다. 그러면 백성들이, “그럼 주님 따라가면 행복합니까?” 방금 내가 조건을 달았잖아. 행복할 권한이 없다고. 그러면 우리가 따라갈 목적과 동기가 없잖아요. 따라갈 만한 의지가 동하도록 뭔가 고생한 보상이 있다는 그런 유인책이 없는 거지요. 그럼 왜 불러냅니까? 하나님이 하는 계획에 대해 무작정 말려드는 그것으로 끝이에요. 주가 주 되심에 의해서 피조물은 군말하지 말고 피조물은 피조물 자체를 위한 피조물일 수 없고 창조하신 분에 의해서 우리는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처음에 히브리인들이 나올 때는 자기는 애굽을 떠났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만 옛날 국민학교 입학식 할 때 아동들의 가슴에 수건 하나 늘어져있지요. 그때는 콧물이 왜 그리 많이 나던지 콧물이 나오면 닦으라는 거예요. 콧물이 떨어질 듯 말 듯 하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간장을 타게 만들어요. 지금 히브리인들은 애굽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애굽의 캡슐 안에서 흘러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애굽은 껍데기도 애굽, 속 내용도 애굽이지만 이스라엘은 껍데기는 벗겨졌는데 알맹이는 오히려 애굽적 요소로 노출된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광야로 가는 겁니다.

 

주님이 구원 이야기를 해도 인간은 기계기 때문에 구원을 자기 행복을 위한 조건으로 전부 왜곡해서 차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하는 구원, 여호와, 하나님, 어떤 기적, 그 모든 개념은 쓸데없는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어쨌든 제가 말하는 것은 모른다는 이야기에요. 몰라야 되고 모른다는 겁니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거예요. 납치된 겁니다. 하나님 앞에 무조건 납치된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아무 이유도 모르고.

 

그래서 그들은 누가 부러웠냐 하면, 차라리 떠나기 전에 살던 옆집에 있던 애굽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요.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거기는 부추도 있고, 마늘도 있고, 양념이 잘 된 모양이에요. 그리고 정력에 좋다는 것은 다 있고. 거기다 수박 있잖아요. 수박 좋다는 것은 여러분 다 아시죠. 요샌 전 국민이 건강매니저가 되어서 하여튼 해독주스부터 해서 모르는 게 없으니까. 좋은 것은 애굽에 다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몸은 어디에 맞춰져 있느냐 하면 애굽의 건강식품에 맞춰있는 겁니다. 우리는 애굽에서 뭘 익히느냐 하면, 인간이 살려면 이런저런 조건은 갖추고 살 때 행복하다는 그 구비조건을 이미 온 몸에다 짊어지고 온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그것과 의도적으로 어긋나게 거기에 부합되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우리 괜히 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모세 일파 죽이고 돌아가자. 우리의 행복이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다.” 세상적인 행복이 콧물처럼 늘어져서 그들은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란 어색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억지가 욕 얻어먹는 기행문이 출애굽기입니다. 그러면 억지스런 일은 안 하겠습니다. 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오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출애굽 정신을 품고 작용하실 때 그게 참된 진짜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복에는 관심 없고 그냥 손목 비틀어서 가자고 하면서 그리고 가기는 가되 이런 꼴로는 천국 가면 못 사니까 천국에 맞는 삶으로 바꾸어서 그렇게 하자고 끌고나간 겁니다.

 

알기 쉬운 예로 아침에 예를 들었는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은 이와 같으니, 어떤 사람이 포도농사를 짓는데 일꾼이 모자라서 놀고 있는 사람을 아침 10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불렀다. 조건은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 주겠다고 데려왔습니다. 나중에 주인이 품삯 계산하면서 5시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줬습니다. 그 사람은 한 시간 일했어요. 아침에 온 사람은 여덟 시간 일했어요. 그러니까 제일 늦게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아침에 온 사람은 여덟 시간 일했으니까 8데나리온 얻겠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처음에 온 사람까지 한 데나리온을 줬습니다.

 

세상에서는 불합리하다,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만 주님 생각은, 너희들이 원하는, 너희들의 합리는 뭐냐? 노동시간에 따라서 보수가 비례해야 된다. 두 시간하면 두 시간만큼, 네 시간하면 네 시간만큼. 이미 그것을 주께서 익히 아시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천국은 이와 같으니. 바로 천국과 그리고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어디서 차이 나는지 보라. 내가 노동한 만큼 나한테 보상이 주어진다는 그 생각 자체에서 죽어도 못 벗어난다. 탈출, 어림도 없다는 거예요. 왜? 노동시간과 비례해서 보수 받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이미 구축되어 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너무나 상식적이기 때문에. 노는 인간이나 일하는 인간이나 똑같이 품삯을 준다는 것은 너무 불합리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걸 아시고 천국의 원리가 얼마나 너희들 생각과 차이 나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차이 나는 정도가 아니라 배척당할 정도로 낯선 원리를 집어넣습니다. 이번 수련회의 제목이 [낯선 경계선]입니다. 낯설다는 말은 천국은 기계 같은 인간이 아무리 상상해도 정말 우리의 생각한 그 외의 요소로서 ‘낯선’이란 표현을 했고, 그 다음에 왜 경계선이라 했느냐 하면, 경계선이란 말은 우리말로 금을 긋는다.

 

이 교재를 읽어보셨습니까? 처음에 존재의 바다부터 해서 무슨 소린지 지만 알지 알아듣지 못하는 글들을. 그리고 이걸 하나하나 한다는 것은 끔찍스럽지요. 이것 하나도 안 합니다. 존재의 바다에서는 어떤 사건도 하나의 과정으로서 끝나는 거예요. 사건이란 것이 지나가면 없다는 것이 존재의 바다의 특징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존재의 바다에서는 경계선도 없고 금도 없어요. 금이라 하는 것은 식스팩 거기나 있지 실제로는 나중에 밥 많이 먹으면 그 마저도 다 지워지잖아요.

 

존재의 바다에서는 존재가 우선이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를 그어놓는 그 경계선도 일시적이에요. 사건이라고요? 이순신 장군이 있다는 말은 잘못된 말이에요. 이순신 장군이란 존재는 이 땅에 있었었다. 그 말은 지금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일으킨 해전 사건도 지금은 존재가 되어 없어요. 이순신 장군의 사건은 지금 [명량]이란 영화로 사건화 돼있지 명량 가면 일본군 나옵니까? 그냥 영화지요. 영화 보고 나면 우리는 다시 존재로 가볍게 돌아옵니다. 남자 보기에는 재미있는데 여자가 보기는 재미 하나도 없더라. 이런 소문 막 들리고. 저는 안 봤습니다만.

 

경계선은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있더라도 세월이 약이라고 지나가게 되면 다 묻힙니다. 그 배 이름을 얼마나 잘 지었어요. 세월호. 혹시 우리가 컨테이너 많이 실어서 물에 빠지더라도 국민 여러분, 잊어주세요. 세월에 묻히고 팽목항 앞에 묻혀버려요. 남는 것은 사람의 존재의 일부로 남아있는 기억뿐이지 지금은 태풍으로 넘실거리고 이미 사건은 지나가고 사건이 남긴 잔해만 있는데, 무슨 일 있었어요?

 

만약에 물에 빠진 그 사건 있을 때 강원도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 나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칩시다. 그리고 어제 깨어낫다고 칩시다. 그 사람이 바다에 가면 뭐가 있겠어요? “오, 바다다.” 끝이에요. 기억나지 않으니까. 사람은 기계기 때문에 노쇠합니다. 노쇠하게 되면 충격 준 부속품 하나를 떼어내면 그 충격의 사건은 날아가고 남는 것은 존재밖에 남지 않아요.

 

그래서 세상의 학문들, 과학, 철학, 의학 등 모든 학문들은 존재의 바다에서 살만큼 살다가, 멋있게 살다가 그냥 사라지면 여러분은 그걸로 족합니다. 행복합니다. 그렇게 가르쳐요. 눈에 보이는 존재가 우선이기 때문에. 살 때는 멋있게 살다가 죽을 때는 그냥 죽어버리면 그것이 세상을 초월한 사나이로서 멋있는 인생입니다. 끝. 그게 전부에요. 프랭크 시내트라가 불렀던 [My Way]에서 마지막 커튼이 쳐지는 날, 나는 살만큼 살고 제대로 살았다고 그 내용이 거기에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존재의 바다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건, 특히 십자가 이야기할 때 불교 쪽에선 한심스럽기 짝이 없지요. 이순신 장군의 1592년 임진왜란이나 B.C.30년경의 십자가 사건이나 그것도 역사 중에 한 사건으로 흘러가면 다 사라지는데 왜 자꾸 그걸 들먹이느냐? 제가 들먹였습니까? 사도 바울이 들먹였지. 사도 바울이 들먹였습니까? 예수님이 들먹인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와 같은 존재인 줄 알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란 존재는 죽으면 사라지고 주님도 나와 같은 존재기 때문에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께서 다시 부활하셨단 말이죠. 그들은 부활 소식을 듣고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내 존재가 길게 늘어질 수 있구나, 안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존재에서 사건으로 이동해요. 사건으로 이동할 때는 반드시 치러야 될 절차가 있습니다. 죽음이에요. 그러면 죽으면 천당 갑니까? 우리가 죽는 죽음은 존재의 연장에서 존재가 사라지면서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는다는 것도 존재가 없는(무존재), 어쨌든 죽음이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내가 없는 상태를 죽음이라고 표현하거든요.

 

사람이 괴로울 때 뭐라고 합니까? 이 괴로움을 잊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뼈 보세요. 신경조직도 없지요. 세상에 그렇게 편한 게 어디 있어요. 사람은 기껏 생각하는 게 존재에서 나왔기 때문에 죽음도 존재의 일부로 거둬주는 거예요. 그래서 죽어도 못 가요. 베드로가 주님 가시는 곳에 죽어서 가겠습니다. 너는 죽어도 못 와. 죽어도 안 되는 거예요.

 

사건이 적용된 그 죽음만이 사건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건과 존재의 차이점은, 사건은 존재에 포착되지 않고 존재의 손아귀에 쥐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불쑥불쑥, 그걸 우연. 우연의 반대말은 필연. 필연이란 말은 존재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원인과 결과, 이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연은 그야말로 예상치도 못하게 내 존재를 차고 들어와서 개입해서,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출애굽은 개입이라고. 사건으로 개입하면 나는 예상 못했다는 그것이 약점으로 등장해요. 하나에 실패로 등장한다니까. 내가 실패될 수 있다.

 

이 사건을 예상 못했다는 것은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뜻인데 전부를 알지 못하면서 행복을 논한다는 것은 뭔가 미흡한 것은 남겨놓고 나머지로 행복을 추구했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 오류가 될 수 있고 뭔가 모순이 쳐들어오게 되면 순간적으로 완전히 헛 살아온 것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요. 왜? 세상의 전부를 모르기 때문에.

 

욥이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하나님이여, 왜 아무 죄도 없는 나한테 고난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답변은, “나귀 낳을 때 너 있었나?” 갑자기 나귀 임신 문제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지금 욥은, “왜 제가 아파야 됩니까? 죄도 없는데.” 이러고 있는데, “네가 염소 새끼 낳을 때 있었나?” 산후조리원입니까? 여기서 염소 새끼 이야기를 왜 해요. “별 자리 정할 때 네가 있었나?” 왜 그걸 이야기하십니까? “네가 전부를 알아? 모르면서 그걸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나한테 나대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전부를 모르면 입 다물고 가만있지 마치 이 부분만은 자기가 전공분야인 것처럼 착각해서 이것만은 정답이라고 우기면서 왜 정답에 부합되지 못하느냐고 요구한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차원에서 시행되는 것과 일부만 알고 시행되는 차원과 다르다는 거예요. 그 소리 듣고 욥이 마지막에 어떻게 합니까? “주여, 제가 입 다물겠습니다.” 입 다물겠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돼요.

 

“욥아,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아느냐?” 황무지는 염소를 키웁니까, 채소를 키웁니까? 아무것도 경작하지 않는 땅에 비가 와야 될 이유가 없잖아요. 주님께서 그걸 물으시는 것은, 인간이란 작자들은 모든 것이 자기한테 의미가 되는 것만 질문을 해대서 주님한테 해답을 요구한단 말이죠. 그게 얼마나 억지냐 말이죠. 우리 얘가 의대를 갈까요, 법대를 갈까요? 그건 부채도사한테 물어야 되지요.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권리의 바탕을 우리는 태어나서 아는 것은 존재밖에 몰라요. 주님은 소급해서 원천적으로 우리의 태어남을 존재로 취급하지 않고 사건의 일부로 취급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출애굽 사건에 본의 아니게 이미 말려든 상황인 것을 소급해서 출애굽이란 계시를 통해서 일러줍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다니는 것은 내가 다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다니게 하시는 거예요. 주체가 바뀌는 겁니다. 기도하는 게 아니고 기도하게 하시고 헌금 하는 게 아니고 헌금 하게 하시는 거예요.

 

과부의 두 렙돈은 과부가 두 렙돈밖에 없기 때문에 칭찬받을 짓을 한 거예요. 제가 전부를 드렸다는 것에 대한 칭찬이 아니고 이걸 하게 하신 것은 주님이 하게 하셨다는 것을 칭찬하신 거예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헌금하고 난 뒤에 죽은 이유는 헌금의 주체가 본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가 주체가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헌금하지요. 여러분, 그럴 능력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다에 배 지나가면 물결이 일어난다고 그 물결이 동결 됩니까? 배 지나가고 30분 지났는데 물결이 얼음 되었나요. 바다에다 액화질소를 부었습니까? 지나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고요해지지요. 주께서 사건으로 사시미 칼로 찔러도 돌아서면 우리는 존재의 바다에 원상회복이 돼요. “주여, 헌금을 성령에 의해서 제가 했습니다.” 이러고 있다고. “성령에 의해서 제가 헌금했으니까 이것만은 영광이 되겠지요.” 그럼 주님이, “그렇게 해서 뭘 원하는데?” 정신분석학에선 그걸 케 보이(Che Voui)라고 해요.

 

네가 뭘 노리고 그런 행동을 하지? 이걸 묻는 겁니다. 그걸 사람들은 모른다는 거예요. 모르면 가만있으면 되는데 인간의 정신을 그렇지 않아요. 모르면 환상을 동원해서 그 구멍을 메워버려요. 메워놓고 나는 이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우기는 꼴이 가관이란 말이죠. “주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 다녔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정말 주의 영광을 위해서 교회 다녔다면 메시아 필요 없습니다. 네가 알아서 천당 오너라. 이렇게 될 거예요.

 

우리는 어떤 한 순간도 어느 한 시점도 주님의 용서 없이 천국 갈 수 있는 그러한 요건은 주님은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건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사건을 사건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로 하여금 존재로부터 시작해서 존재를 부정하는 새로운 날카로운 십자가 사건이 꽂히는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돼있어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좀 오래 산 사람의 배 들춰보면 온 천지에 그어있어요. 나이 어린 아이들은 배가 조용한데 그 옆에 아버지는 등어리에 다 그어져있어요. 돈에 고개 숙이다가 주님한테 당해서 칼자국 있고 출세하려고 아부하다 주님한테 멍들고. 모든 게 온통 주님이 그어버린 경계선, 사건의 흔적들이 가득 찰 때 그건 훈장입니다. 그게 많을수록 자기 자랑 안 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할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찬송하지요. 성경은 기호와 언어로 돼있단 말이죠. 기호는 기존의 언어 창고에서 가져온 거예요. 기존의 기호와 언어는 인간에 인간을 위한 공동체 사회를 만들면서 서로 의사소통을 위해서 역사, 시간의 흐름 따라서 정립된 거예요. 따라서 그것을 차용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숙달된 의미를 적절하게 반복하는 것밖에 안 돼요. 다시 말해서 존재를 대변해주는 것이 기호와 언어에요.

 

성경 원어연구요? 성경은 원어라는 게 없어요. 이제야 말한다. 왜 그러냐 하면 고대 언어의 특징은 경계선이 불분명하거든요. 인간의 언어라는 것은 개념이 있어야 되는데 그 개념이 다양하게 파생되려면 문명이 그만큼 발달해줘야 돼요. 문명이 발달할수록 새로운 신조어를 개발해야 되는 거예요. 그 신조어에 이미 우리는 몸에 젖어있습니다. 신조어가 없는 고대 언어로 된 성경책을 내놓고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물어본 사람이 사기 당하려고 환장을 한 거예요.

 

언어의 파생어가 계속 번지는데 지금 인간이 멈추고 있습니까? 계속 갈래갈래 개별화가 되는데 그 개별화 푹 젖어있는 우리가 그만큼 개별화 되지 않은 듬성듬성 개념을 잘랐던 그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지금의 자기 행동을 정당화해요? 말도 안 되는, 진짜 사기를 쳐도 그런 사기가 어디 있어요. 교수들이나 이런 사람들이 자기 밥벌이하려고 그런 짓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어떤 구원이라든지 십자가라는 개념을 차용할 때 주님께서는 존재에서 나온 개념이기 때문에 선을 그어버려요. 선을 그으면 두 동강나지요. 예를 들면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리아나 마르다가 예수를 믿는다고 했거든요. 그건 거짓말이거든요. 왜 거짓말이냐 하면, 자기 오빠 죽었다고 주님 멱살 쥐려고 달려드는 그게 믿음입니까? “주님, 내 오빠 왜 죽였습니까?” 존재에서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고 했지요. 죽음이란 뭐가 다가와야 돼요? 모든 개념은 언약이 담겨서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이 왔을 때 그것만이 죽음이지 인간이 아는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갑자기 게거품 물고 죽었습니까? 멀쩡했어요. 이건 뭐예요? 약사가 이것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 안 죽으면 고소할 겁니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죽음은, 네가 죽는다고 해서 경험될 죽음이 아니고 장차 이 말씀대로 죽어야 될 분이 따로 온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진정한 죽음인 이유가, 그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게 죽음이에요. 모든 성경 언어는 십자가를 경유해요. 십자가가 새 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죽는 날에 다 호출해요. 남자들은 알아요. 꿈꿨는데 제대 분명히 했는데 다시 입영영장 나오면 끔찍합니다. 그것만 끔찍한 게 아니에요. 죽어서 이제는 교회도 안 다니고 예수 안 믿어도 된다고 자부했는데 마지막 날에 예수님한테 호출 받아서 명단 보고, “26번 아무개 지옥 가!” 이렇게 나온다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하지요.

 

마리아가 신앙이란 용어를 사용했어요. 이 용어를 사건으로 자릅니다. 자르면 절개 면이 생깁니다. 이 자르는 데서 진짜 신앙이 나와요. 중요한 것은 누가 자르느냐는 겁니다. 누가 자르겠어요? 인간 쪽에서 볼 때 사건으로밖에 소개할 수밖에 없는 천국에서 오신 분이 존재의 바다에서 칼 쥐고 너희들의 신앙이란 것은 잘라버립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신앙이 아니었지요. 잘라줌으로써 이 절개 면에서 진짜 신앙이 나옵니다.

 

신앙과 더불어 나오는 말씀이,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절개 면에서 나오지요. 나올 때 이 말씀을 우리가 지켜야 된다?? 지킬 수가 없지요. 존재는 못 지켜요. 결국은 이 말씀이 배태되도록 그것이 나오도록 우리는 철저하게 존재의 일부로서 이용당한 거지요. 베임을 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피동적이고 매사가 수동적이에요. 주님은 말씀의 칼로 요리조리 다 잘라버립니다. 삼겹살은 삼겹살대로 등심은 등심대로 우리는 잘릴 때 말씀의 칼로 잘라질 때 그 속에서 우리가 미처 예상 못한 새로운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또 디모데전서에 보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돈을 사랑한다. 그걸 존재로 보게 되면, “주님이여, 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기존에 존재의 바다에서 알고 있던 그걸 모방해서 하는 거예요. 주님이, “너 돈 없이 어떻게 살래?” 그러면 이 말씀,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뭡니까? 그건 우리가 지킬 게 아닙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됩니까?” 못 지킨 사람이 되지요. “못 지키면 천당 못 가잖아요.” “네가 천당 왜 가야 되는데? 갈 이유 있나?”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 돼있어요. 창세기 3장 21절에. 우리가 들락날락하는 곳이 아닙니다. 갈 수 없는 곳이에요. 천국은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으로 따로 만든 게 가짜 천국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가짜입니다.

 

성경에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나와 있지요. 그 말씀은 사건이 와서 우리를 잘라줘야 그 말씀이 그 말씀이구나. 다시 말해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은 잘라보니까 부자 되도 갈 수 있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개념이. 너무 황당해서 안 믿어지지요.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돈을 사랑하는 내 주체를 부정한 상태에서 돈이 억만금 주어줘도 감사히 멋있게 쓰라 이 말이에요. 왜? 부자 되도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상 온갖 명품을 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상태에서 뭘 사도 그건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게 돼요.

 

 

10분 쉬고 합시다.
 관리자(IP:203.♡.42.222) 14-08-09 09:43 
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 기획안이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획안이었다는 이야기를 했고 하나님의 기획안은 하늘나라를 만드는데 있어서 지상에 있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아서 납치할 이유가 있는가? 전쟁할 때 승리자가 저쪽의 선량한 백성을 노예로 신분 바꾸어서 일시키잖아요. 로마제국이 키워졌는데 하늘나라에 일꾼이 모자라서 사람을 납치한다는 것은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고 꼭 하나님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전리품이라고 하거든요. 이것은 전쟁이 꾸준히 있어왔다는 뜻이에요. 전리품, 전쟁이 일어나야 발생되는 노예잖아요. 이스라엘 자체가 너는 나의 노획물이고 전리품이다. 그러면 천국이 어디 있느냐 하면, 전쟁을 하신 여호와 이름이 노획물을 옆에 배치해놓고 내가 거룩한 성소로 지정하겠다고 나와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제가 첫째 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해서 끝이라고 했지요. 이것이 수련회의 모든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자기 계획을 일방적으로 작업해서 모든 것을 완성시킨다 했는데 개입이니까 여기서 더 나가보잔 말이죠. 개입할 때는 하나님의 행동이지요. action. 하나님의 행동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행동을 그냥 행동이라고 해버리면, 예를 들어서 빈 벌판에서 아무도 없는 외로운 곳에서 공을 차거나 밴드 만들어서 고함치고 노래 불러도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아요. 그런데 새벽 2시에 밴드 연주를 한다면 신고 들어오고 난리 나잖아요. 경찰이, “당신이 밤중에 주택가에서 노래하면 되겠어요?” 그럼 그 사람이, “내 행동이 뭐 어때서?” 그럼 경찰이, “당신 행동은 당신 마음대로지만 주변의 이웃에 대해서 생각해봤느냐?”고 나온단 말이죠.

 

전쟁이란 결국 하나님의 행동만으로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성과를 얻지 못하도록 대적하는 숨겨져 있는 행동이 반격해서 나오겠지요. 그럴 때 전쟁이 되고 이 전쟁에 가담하는 분을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 4절에 보면, 전쟁에 참여한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이런 신학적인 용어를 우리가 왜 알아야 되고 이 소리를 들어야 되는지 물으신다면, 신약에서 사도가 하는 말이, 예수 믿으라는 게 아니라 앞에 뭔가 붙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 주 예수를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주’라는 것이 그냥 주인이라는 우리가 아는 존재적 개념이 아니고 제가 첫째 시간에 계속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뭔가 이 땅에서 사건을 존재에다 금을 그어서 낯선 경계선을 자꾸 만들어내는 주인공을 ‘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걸 진작 이야기하지 하지만 성경 전체가 이 이야기를 했는데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책에서 다른 건 다 버리면 예수만 찾아서 “내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하면, 오늘 밤 네가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해서 구원이 돼버리는 겁니까? 용어 하나 외워서. 남묘호렌게쿄에요? 주문 외우면 저절로 효과 보는 그런 겁니까?

 

주문이란 말이 나왔는데 이게 인간의 타고난 미신입니다. 기호와 문자가 나한테 자동적으로 효과를 준다는 겁니다. 타로 점처럼. 이것은 얼마나 인간이 형식에 집착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말라고 하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형식문제거든요. 나의 이미지를 만들지 말라. 나를 위해서 어떤 모습이나 형상도 만들지 말라. 이 말을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어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만들고 섬기면 우상숭배다. 미신이죠.

 

800년경에 동방교회에서 우상철폐하고 부수는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났거든요. 성상파괴하면서 자기 집은 왜 안 부수는지 몰라. 그리고 성경대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본인들이에요. 본인을 도끼로 내리까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관련되어 나온 모든 이미지는 우상입니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점점 더 이스라엘 역사가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그것이 성취 불가능한 말씀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형상인 하나님의 형상, 곧 인간은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존재로 발각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한 분이 죽음으로써 모든 인간은 다 죽은 것이다. 이제 살 수 있는 사람은 죽은 자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된 자만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개념에 있어서 왜 그걸 부수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이 저것은 하나님답다. 그것을 종교학에서는 신이라고 하지 않고 ‘신성’이라고 해요. 신을 달라도 신성은 하나니까. 복음이 아니고 종교학에서. 산이 있다면 그 진리의 산에 불교로 올라가나 기독교로 올라가나 모이는 곳은 한 곳이다. 왜? 신성을 동일하기 때문에. 그래서 신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다. 거룩하다, 고상하다, 전능하다, 아름답다 등 미학적으로 해야 한다고 하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인간은 뭔가 자기 초월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성을 끌어당겨서 강제로 엮어서 엮인 내가 신성에 의해서 끌려올라가는 것처럼 신을 마음대로 표출하고 표현하고자 본능에서 나왔기 때문에 모든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너희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형상, 이미지를 만들게 되어있는 필연적 존재라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새삼 지키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율법을 어기고 왔음을 새삼 너희가 파악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3:19)

 

자기를 신성화한다. 이건 모든 종교의 모티브에요. 초라한 자기의 모습과 대비되는 나의 인격과 나의 품위에 부합되는 새로운 제2의 자아를 상상하게 돼있습니다. 인간에겐 타고난 거예요. 말려도 안 돼요. 지금 교도소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비록 사회 탓으로 왔지만 나는 아직도 양심의 쪼가리는 남아있다. 옆에 있는 죄수한테 자비 행해서 구원받습니까?

 

전쟁을 통해서 구원받습니다. 주 예수의 주가 구약 때부터 줄기차게 너희들이 알지 못한 그러면서 배후에서 지배해왔던 보이지 않는 악마와 싸워서 승리한 열매가 너희들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나의 노획물이고 나의 전리품이다. 그 사이에서 인간이 고매하고 아주 경건해 보이는 인간의 품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이 날아가 버렸어요. 종교가 종교답게 사회에 대해서 기여하려면 종교인들이 깨우쳐서 돈과 명예에 대해서 초월하여 정부가 손대지 못한 구석구석을 자비의 손길을 베풀게 되면 사회는 결코 종교인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이런 소리를 합니까? 마귀가 그런 소리해요.

 

교회에 공부방 만들고 노인복지해서 정부 예산 따내고 해볼까요?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까? 그런 걸 이미 하고 있고 줄곧 해오고 있습니다. 서유럽, 동유럽 모든 교회들이 해왔습니다. 왜? 교회가 너무 오래되다보니까 피곤해요. 교회 자체가 자기 건물 모습처럼 전부 찌질 해졌어요. 쾰른에 가면 무려 150년 동안 지은 쾰른 대성당이 있습니다. 관광객들 오지요. 그런데 보게 되면 참 초라해요. 지하에 동방박사 해골이 왜 있습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인간이 아는 역사는 과거입니다. 과거는 지금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마음 놓고 과거를 볼 수 있는 현재 사는 사람을 호쾌하게 증명해주는 것들이에요. “나는 옛날에 태어났으면 큰일 날 뻔했어.”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는 것이 과거의 박물관이에요. “이 시대에 여자로 태어났으면 조졌네.” 지금의 자신의 모든 것이 행복이 충만한 상태임을 과거의 비참한 시절로 돌아가서 해석하면서 반대급부로 자기 행복을 챙기겠다는 수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다니는 교회도 수십 년 지나가면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교회역사를 자랑합니다. 이 역사를 역사로 키우기 위해서 박물관으로 키우기 위해서 현물을 더 내시기 바랍니다. 역사는 여러분의 자랑이고 자존심이라고 설교하거든요. 자식들에게 쓸데없는 유산 남기지 말고 그 돈으로 예배당에 헌금해서 자식들에게 경건의 모범을 보여주시면 자식들이 여러분을 존경할 것입니다. 잘도 존경하겠다. 그 돈을 교회 바쳐서 목사가 다 떼먹고 도망가고. 다시는 벌초하나 봐라. 사후 보복을 당할 수가 있어요.

 

전쟁이란 개념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어떤 데서 선을 넘었느냐?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이웃 봉사해서 경건 된 삶을 살자는 그 차원에서 이미 벗어나버렸어요. 우리는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고 평화를 원하는 사람이거든요. 그 평화를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아부 또는 굴종. 이 자리만 유지된다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양보의 미덕, 비겁하게 생존에 집착하면서도 그것을 평화로 위장하는 우리의 솜씨만 빛날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람이 회개하고 반성하게 되면 회개하면 할수록 자기는 훌륭한 사람으로 업그레이드된다는 딜레마에 빠져요. “넌 반성 안 했지만 난 반성했어. 넌 나쁜 짓해도 반성 안했잖아. 나는 곧장 반성한다고.” 뭐예요? 누구 약 올릴 일 있습니까. 납득이 되는 신앙생활은 마귀한테도 먹히지 않아요. 왜? 수준 낮아서. 마귀는 수준 낮아서 우리와 상대를 안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마귀를 뱀처럼 지혜롭다고 하거든요. 마귀가 겁내는 분은 딱 한 분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임성한 작가? 아닙니다. 오로라 공주? 아닙니다. 출생의 비밀, 뿌리를 알고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에서 입 다물라고 하지요.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입 다물라.” 어디서 알아듣지 못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몰라. 소통이 안 되는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하고 있는 거예요.

 

전쟁은 자기들끼리만 합니다. 전쟁은 자기들끼리만 해도 승자가 다 먹기. 완전히 카지노입니다. 올인해서 승자가 다 가져갑니다. 돈 놓고 돈 먹기. 이 세상은 인간 빼고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의 도박판이고 게임판입니다. 그게 욥기에 나와요. 주님께서 욥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욥보다 믿음 좋은 사람 못 봤다고 하니까 마귀가, “욥이 부자고 건강하니까 행복하니까 주를 섬기지 다 빼앗아보세요. 원망할 것입니다.” 그럼 내기해보자.


남의 노름판에 멀쩡한 욥이 날벼락을 받은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욥이 대들었다? 이것은 갑자기 피조물이란 자리를 망각한 겁니다. 어느 날 개가 침대에 올라오고 개가 수박 들고 하면, 이건 그야말로 사건입니다. 개 데리고 보신탕집에 가니까 개가 자기 친구 고기를 먹겠다고 포크 들면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이 세상이 영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혼돈돼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가 망하는 길인지 자기를 살리는 길인지 분간도 못하고 들이대요. 남 예수 믿는다고 하면 덩달아 예수 믿고, 십자가 믿는다면 덩달아 십자가 믿고. 온 몸에 어디서 주워왔는지 쓰레기 천지에요. 나중에는 어느 걸 꺼내야 될지 몰라. 왜 그걸 끌어 모으는 줄 알아요? 자기 전쟁한다고.

 

자기 전쟁을 이름 전쟁이에요. 결국 전쟁은 이름 전쟁이거든요. 누구 이름을 걸고 하느냐?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 또 어떤 사람은 그걸 감추는 묘한 방법으로 나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고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식으로 자기 가문을 빛내는. 안중근 의사처럼 조국을 위해서. 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정계를 은퇴한 경기도지사하신 분. 뭔가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전쟁이에요.

 

이름이 어디서 나오느냐? 그건 몰라요. 이름은 무에서 나왔습니다. 무는 유의 밑바닥을 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철학에서. 그러니까 우리 상식에서는 존재가 있고 그 다음에 존재를 지칭해서 이름을 붙이는데 이게 문제가 돼요.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강아지가 있다면, 오늘부터 나는 너를 강아지로 부르겠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피조세계의 이름을 부르지요. 너를 강아지로 부르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네가 부른 강아지를 지배하라고 돼있어요. 창세기 1장의 구조가 그렇게 돼있어요.

 

이름을 부르니까 이름을 부를 때는 좋았어요. 인간이 마귀의 수하에, 죄에 지배되고 난 뒤에는 자기가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강아지는 내 이름을 위한 내 소유가 돼버렸어요. 차지하고 정복하는 것이 내게 귀환, 귀속하는 쪽으로 모든 것을 행동하게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전쟁이 결국 영적 전쟁이거든요. 주님과 악마의 전쟁인데 악마가 누굴 앞장세웠느냐 하면, 인간을 세웠어요. 인간의 이름이 등장해요. 인간의 이름에 대해서 대응하기 위해서 하나님도 자기 이름을 가지고 이름 있는 곳에 뛰어들어서 한바탕 전쟁을 벌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와서 제가 누구 이름으로 가오리까 할 때 지금까지는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너에게는 이야기한다. 출애굽기 3장 16절에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다.

 

여호와란 내가 계획한 것은 반드시 스스로 알아서 이뤄낸다는 겁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고 스스로 사건을 유발시키는 자란 말이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다 나와 관련되어 일어난 사건인 줄 알라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다가와서 사건을 앞장세운 이름이냐 아니면 내 존재로 버티고 있는 이름이냐? 그 사건과 존재의 싸움 또는 인간의 이름과 하나님의 이름의 싸움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자존심과 주의 자존심의 싸움, 거기서 패배 당함을 안다면 그 사람은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패배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티는 사람은 지옥 가서까지 계속 버텼을 사람이에요.

 

그래서 정리하면 구원이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본인 스스로 설정한 그 계획에 모든 것이 말려들어서 순간순간 수시로 모든 상황과 모든 사태 속에서 내 이름이냐, 아니면 내 이름이 아니냐는 그 전쟁의 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자에요. 신앙생활이라고 해서 구제하고 하는 게 아니고 이번 일에 대해서 제가 주체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주체입니까? 이렇게 물음이 나오도록 상황이 그렇게 몰려가는 것, 그게 수동적 신앙생활이에요. 신앙생활은 수동적 밖에 없어요. 능동적 신앙생활은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이 주관하기 때문에 수동적 신앙생활을 지금 정상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지금 집사님이 커피를 마시는데 이 커피가 내가 힘주어 마시는 거예요? 주께서 마시게 하는 거냐? 평소에 마실 때는 전혀 못 느껴요. 그런데 마시는데 누가 가져가면 내가 마시려고 하는데 가져가느냐? 갑자기 주체가 내가 돼요. 주께서 마시게 하는데 니가 왜 가져가? 그건 맞아요. 그 순발력을 인위로 조작하면 기계의 숙달로 나왔기 때문에 그것도 가짜입니다. 이게 아주 어려워요. 순간을 포착해서 순간이 지나가면 존재로 바뀌기 때문에.

 

처음에 교회 나와서 찬양하라 하면 찬양 가락 보고 해요. 누가 음이 잘 맞는지 제 음을 찾아가는지 피아노 반주가 빠르진 않는지 피아노 반주 무시하고 목사가 지 마음대로 찬송을 부르는지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온단 말이죠. 그런데 정작 주님이 주체가 되는 찬양은 사실 따지고 보면 랩밖에 없어요. 결국 늙어서 혀 안 돌아가면 가락 안 맞으면 랩으로 끝나거든요. 시골 할머니들 찬양하는 것 보세요. 완전히 랩입니다. 랩인지 민요인지 판소리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사람이 열심히 소프라노, 알토 다 지키겠다는 그 틈새 속에는 찬양을 통해서도 나의 자존심을 상처 받을 마음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인간이 자기 이름이 있는 이상은 그 이름을 스스로 배신할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란 자기 이름을 사수하는 시간적인 긴 여정이거든요.

 

그래서 성경에서 복음이란 주의 이름, 주의 이름 배웠지요. 주의 이름은 존재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써 사건을 유발했던 개입하신 그분의 이름이죠. 따라서 주의 이름을 존재로 받으면, 존재의 특징은 존재는 존재를 소유한다고 했지요. “나는 5년 전에 예수 믿었었지.” 뭐예요? 5년 전부터 주님을 갖고 다녔지. 코카콜라입니까? 주님을 갖고 다니게. 주님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주님한테 지적 받고 있지. 어떤 점에서? 주님은 내 존재의 사수에 대해서 가만두지 않고 늘 간섭하시고 개입하셔서 너는 존재가 아니고 이미 사건에 편입되었어. 모든 사건이 주님의 사건을 증거하는 증거자로서 살아가게 된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복음이 주의 이름이거든요. 복음은 전쟁을 하는 주의 이름이기 때문에 반드시 적군이 있지요. 두 번째 시간에 우리가 원리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이라 할 때 인간의 품위 같은 것은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쟁을 유발시켜서 전쟁 노획물과 전리품이 바로 백성이라고 했지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이미 에베소서 4장에 나온 이야기이에요. 우리 존재를 지켜주시는 주님은 없어요. 오히려 우리 존재를 난도질해서 경계선으로 사건화 시키는 주님밖에 없는데 사건화 되는 이유가, 사건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필연이 아니고 우연이에요.

 

반드시 주님은 적군을 유발시킨다 말이죠. 그 적군의 특징이 바로 나의 이름, 나의 존재의 의미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서는 적이 뭐냐 하면, 비난받지 않겠다는, 비난받기 싫다는 이런 모습들이 주님에 의해서 적군 계열로 분류가 됩니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비난받기 싫어하는 쪽으로 행동하게 돼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비난받아도 구원받으면 되잖아.” 하는 게 주님 생각이에요. 네가 창기야, 네가 세리야, 네가 강도야? 그게 무슨 상관있어. 오늘밤에 낙원에 가면 되지.

 

“주여, 왜 비난받아야 됩니까?” 그건 네 이름을 소유하기 때문에 비난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내 이름이 통째로 주의 이름에 편입돼있다면 예수님을 비난했던 비난이 오게 되면 우리는 오히려 요한복음 15장에 의해서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도리어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태복음 팔복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마지막에 나와 내 복음을 위해서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 옛날 선지자들도 욕 얻어먹었느니라. 오히려 욕 얻어먹고는 로또 당첨된 줄 알라, 복 받은 줄 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나온 그 내용이 보편화 된 것이 사도 바울의 로마서 복음입니다. 거기에 보면 사람들은(유대인들) 자기 의를 추구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의를 힘써 거부하고 자기 의만 챙긴다. 자기 의가 뭐냐 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비난받기 싫다는 모습이죠. 비난받기 싫다면 그 사람이 하는 전쟁은 오직 자기 이름을 유지하는 전쟁 외에는 다른 전쟁으로 간주하지 않을 겁니다.

 

무엇이 진리냐? 관심 없어요. 내 마음이, 영혼이 안 다치는 그것이 내 편이고 다치게 하면 적이 돼요. 각자 나름대로 적이 따로 있습니다. 이건 주의 전쟁이 아니고 자기 자존심의 전쟁, 자기 이름의 전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왜 이 시점에서 이런 이야기가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을 끄집어냈잖아요. 이때 이스라엘이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편이지 이스라엘 편은 아니거든요. 지금 말장난도 아니고 여러분을 모독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원통을 두 개 그립시다. 주님께서는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고 겉에 있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아들(하나님의 아들=이스라엘), 이스라엘 속에 기존의 이스라엘을 담아서 이것들이 나중에 겉에 있는 진짜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공격하고 어떻게 적으로 행세하는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게 하는 겁니다. 결국 안쪽의 이스라엘이 망하고 겉의 이스라엘이 등장하게 되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게 로마서 11장 25절에 나와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둘로 되는 거예요. 이게 문자의 특징이에요.

 

이런 현상들이 현재 자본주의사회에도 있어요. 동전이 녹슬면 돈입니까, 돈이 아닙니까? 동전이 녹슬어도 돈이에요. 약간 녹슬어도 은행에서 바꿔줍니다. 옛날 돈은 그 돈의 가치가 자체적으로 품고 있어요. 금화 자체의 무게로 결정되게 돼있단 말이죠. 그런데 자본주의가 금융자본주의가 되면서 돈을 빌려주면서 시간 따라서 이자 받으면서 돈의 가치가 늘어나는 그런 시장이 형성되니까 그 다음부터는 돈도 그렇고 모든 물건도 그렇고 사용하는 가치는 이건 가치도 아니고 바꾸는 교환가치로 대신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되면 동전의 가치는 따로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유령이에요. 결국 자본주의사회는 유령입니다.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돈을 가져야 돼요. 물건을 가지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어느 것도 살 수 있는 돈을 가지는 시대가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유령은 지금도 계속 떠돌고 있어요. 왜 삽니까? 돈 유령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왜 공부해야 됩니까? 유령 때문에. 무슨 유령? 돈.

 

그 물체마저 포착되지 않는 물체의 사물 어떤 형상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여분의 남아도는 뭔가 있어요. 그래서 현대철학은 자본주의사회를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정신분열증. 이유도 모르고 목적도 모르고 무조건 돈 벌기에 나서는, 그것 모아서 뭘 할 건데 하면, 돈 버는 자체가 취미라고 나오거든요. 사업하는 사람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아니에요. 돈 버는 자체가 취미에요. 이 말은 사업하는 사람이나 화투 치는 사람은 둘 다 똑같아요. 전부 도박하는 사람들입니다. 돈 따는 그 재미에 자기의 가치를 결부시켜서 돈 딸 때마다 “거봐. 나 가치 있잖아. 비난하지 마.”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에게 닦달 낼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갑자기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는 뜻인데^^ 인간은 죄인이 아니고 예수님이 죄인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만 버림받았기 때문에. 모든 개념은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야 돼요. 만약에 인간이 죄인이라면 윤리적 영웅으로 바뀝니다. 대표적 윤리적 영웅은 가룟 유다지요. 자기 스승 팔았다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자살한 사람, 자살해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아직도 나에게는 선한 것이 있음을 장렬하게 보여줬잖아요. 주님 증거했습니까, 자기 증거했습니까? 자기 잘남을 증거했잖아요. 그게 전쟁이라니까.

 

주님이 벌인 전쟁이 그 전쟁하는 거예요. 나한테 돈 바치라고 하는 선교, 전도하는 전쟁이 아니고 매 순간에 도대체 나는 왜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를 내 쪽에서 찾지 않는 전쟁. 그리고 나의 행동의 어떤 정당성도 내가 정당성을 갖출 필요도 없는 전쟁이라는 걸 알란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 정당성, 우리가 정당하기 때문에 구원받는,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구원받는 그 모든 근거를 네가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착해서 구원받나?” “구원받습니다.” “어떻게?” “전도하고 선교했습니다.” 그건 내가 만들어야지 왜 네가 만드는데.

 

그러니까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행함과 믿음은 자기 행동한 것을 자기가 믿기 때문에 자기 행동에서 믿음이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빠져나오는 경우는 자기 행동에 대해서 본인이 꼴보기 싫을 때. 어느 정도로? 자기가 있다는 것이 싫어지고 미워질 그 때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을 손을 놓겠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다. 마태복음 16장에도 같은 말씀이 나오거든요. 그 말씀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교회 문 열 때 “주여, 오늘도 미워하게 하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예배 참석하시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주여, 오늘도 끌려왔습니다. 오늘도 마음껏 나를 미워하게 하옵소서. 하지만 미워했다는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본인이 얼마나 복잡한지. 차라리 그렇게 복잡하게 하지 마시고 그냥 사세요.

 

복잡한 마음을 잘 정돈하게 되면 그것은 구원받는 근거를 본인이 또 만든 게 돼요. 만들지 마세요. 만들지 마시고 여러분께 두세요. 주님께선 근거는 가져가시고 나는 두시고. 완전히 성령에 취해서 온 사람 같아. 저쪽은 만들어서 주시고 우리는 내가 새삼 만들 필요가 없음을 알아주시고 주님께서는 구원의 근거를 이미 십자가로 용서해주시고 우린 내 것 만들 필요가 없으시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전리품이고 노획물입니다. 우리 전쟁 아닙니다. 김의 전쟁도 아니고 비의 전쟁도 아니에요. 우리 이름을 걸고 하는 전쟁은 아닙니다. 그 전쟁터에 말려들었습니다. 창세기 3장의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입니다. 지난번 강의에서 여자의 후손에서 여자는 없다고 했지요. 그 여자가 마리아가 아니라고 했지요. 모든 사람은 남자 투성이기 때문에 여자의 후손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마리아는 성령이 임할 때 여자의 후손 역할을 해야 됩니다. 그것은 마리아만 여자의 후손이 아니란 말이에요. 성령 받은 모든 사람은 여자가 되면서 예수님이 남편이 되는 겁니다. 그 상황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없던 것이 새로 생길 때는 주체가 우리가 만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뭐냐? 내가 만들지 않은 운명에 의해서 우리가 편입되었음을 우리가 자각하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내가 만든 인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자기 계획 속에 집어넣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 다음 이야기해봅시다. 전쟁 이야기했고 전리품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출애굽기 15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됐지 출애굽기부터 시작된 게 아닌데 왜 불쑥 출애굽기 15장부터 이야기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원래 강의가 출애굽기에요. 그렇다면 그전에는 뭐가 있느냐? 그전에는 찾아오신 하나님이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거든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로 언약입니다.

 

그러면 전쟁이란 테마가 어디서 나왔는가? 언약 속에 포함돼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언약 속에 포함된 내용이 전쟁이라면 언약 자체가 적을 의식하고 주어진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 적이 뱀의 후손이에요.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던지니까, 모세가 지팡이 왜 들고 가는지 알아요? 모세가 원래 사십에 현상수배범 되고 팔십에 부름 받았어요. 모세가 허리가 아파서 지팡이 들고 가는 건 아니란 말이죠. 자기가 지팡이를 쥐고 있으면 이건 모세의 전쟁이에요. 모세의 전쟁은 출애굽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주의 이름의 전쟁이 되려면 모세부터 주님께 붙잡힌바 된 관계를 자기의 몸을 통해서 이미 갖추어져 있어야 되거든요.

 

모세에게 지팡이를 던지라고 했어요. 던지니까 뱀이 되고 말았어요. 모세가 지팡이를 소지했습니까? 소지한 게 아니에요. 소지했다면 모세도 존재고 지팡이도 모세 존재의 일부로 포획돼버려요. 존재가 돼버려요. 뱀이 된 걸 다시 집으라고 하니까 도로 지팡이가 됐단 말이죠. 그럼 모세 자체가 존재가 아니고 사건에 말려든 거예요. 무슨 사건? 주께서 전쟁을 하기 위해서 전 세계의 모든 것을 뱀이냐, 아니면 주의 편이냐를 재편성시키기 위해서.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평지를 전쟁의 배치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모세란 돌멩이 하나 집어던진 거예요. 그러면 파장이 퍼지면서 모든 역사가 전쟁 하나를 위해서 휘말려가는 전쟁이 될 겁니다. 거기에 자연현상까지 메뚜기, 독충, 해와 달, 별조차 모든 것도 여호와 전쟁을 보여주기 위한 배치물로 재조정되고 사건화 될 것입니다.

 

다윗은 사무엘하 22장에서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의 별도 떨어지거든요. 주님이 재림할 때 하늘의 별이 떨어진다.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보는 자연이 붙박이처럼 있는 게 아니고 자연세계가 다른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 같이 말려든 거예요. 관계구조 속에서.

 

신천지에서 잘 써먹는 요한계시록 보세요. 하늘에서 우르르 다 쏟아지잖아요. 쏟아지는 걸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디를 향하여 쏟아지고 있느냐, 누가 쏟아지게 하느냐? 쏟아지는 게 아깝다면 그건 아직까지 존재에 박혀있는 거예요. “별아, 떨어지면 안 돼. 내 머리 다치면 안 되거든요. 저리 가 있어. 이건 네 존재는 네 존재로 챙기고 그 대신 내 존재는 건드리지 마.” 이게 존재적인 입장인데 같이 사건화에 걸려든 거예요.

 

별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별은 그 자리에서 활동하도록 주께서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는 겁니다.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주님의 사건의 일부로서, 연로하신 참새들은 살만큼 살다가 죽거든요. 들풀도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때까지 기르시고 우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게 하시고 모든 만물은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창조된 거예요. 골로새서 1장 16절처럼.

 

여기에 인간의 존엄성, 나의 인격, 그런 아이디어가 왜 거기에 들어갑니까? 이런 아이디어는 네 존재가 잘났어, 내 존재가 잘났어? 우리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릴 때부터 아주 훌륭한 부모 밑에서 양육 받은 대가가 우리 몸에 익숙해지고 맞아서 그런 겁니다. 그게 바로 애굽이에요. 우린 이제 콧물 흘려야 됩니다. 콧물 흘려서 내가 얼마나 잘났나가 아니라 내 속에 이런 괴물이 들어있다는 걸 뽑아내야 돼요. 그래서 절대로 출애굽하면서 모세 편에 서지 마세요. 애굽의 바로 왕 편에 서게 되면 출애굽 전부 다 이해됩니다. 괜히 모세 편에 서지 마세요. 어딜 함부로 섭니까. 모세는 우리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워요.

 

모세가 애굽에 나타났을 때 누가 반대한 줄 알아요? 히브리인들이 반대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철야했겠지요. “하나님이여, 저 인간들 찾아오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사람 잘못 보냈다는 이 말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당회장이 아니란 이런 뜻이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벌 내리기를 바랍니다. 이편에 섰는데요? 그러면 출애굽 이해됩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실은 우리한테는 없기 때문에 빨리 끝내고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home again cross the sea 오늘 하나 배웠어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1975년에 로드 스튜어트가 불렀던 [Sailing] 나는 항해자 나는 항해자 험한 세상 당신이 있는 자유 찾아 가겠다는 그 의식, 그게 어딘데? 내 이름이 있는 곳, 내 이름이 만들어진 곳, 그래서 영원히 빛나야 될 내 이름이 존경받고 오히려 비난받는 것을 우리 부모, 형제, 처자식이 나를 보호해주는 그 행복의 자리, 거기서 탈출을 해요? 미쳤어요. 그 좋은 걸 왜 버려요. 절대로 우리는 탈출할 마음 전혀 없습니다.

 

정리합시다. 우리 신앙, 없습니다. 우리가 탈출할 마음, 없습니다. 주님 혼자 가라고 하세요. 우리는 이 땅에서 자식 키우고 딸 시집보내고 가더라도 늙으면 가야지. 우리는 갈 마음 없습니다. 우리는 그 대신 종교생활해서 아는 사람끼리 놀러가고 낚시하러 가고 가을에 전어 먹으러 가고 그런 것만 하지. 여전도회에서 돈 모아서 일본에 온천가는 그런 것이나 좋아하지 우리는 노는 것 외에는. 우리가 비난받지 않는 조건 하에서만 그에 맞는 하나님만 섬길 요량이 돼있습니다. 신은 바로 나의 이미지고, 나의 자존심이고. 왜? 내가 믿기 때문에. 너무나 착한 내가 남들 안 믿는 하나님을 믿어주기 때문에 얼마나 위대한 줄 몰라요. 우리는 그것부터 출애굽의 시작된 지점인 것을 우리가 수용합시다.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203.♡.42.222) 14-08-09 09:44 
2014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 자체가 억지스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억지스럽다는 것은 우리 생각에서 출애굽 사건은 우리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인간과 협상할 용의가 없다는 뜻이에요. 협상할 용의가 없다는 뜻은, 인간들이 추적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잠입할 수 있는 어떠한 여건도 인간에게는 실패로 끝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교회라는 것은 그 교회 안에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야기하고 교회 자체가 비밀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안에 뭐가 담겨 있느냐 하면, 실패성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해봐라. 결국 실패로 끝난다. 그걸 교회가 비밀이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비밀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말씀들이 신약성경에 붙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추임새가 늘 붙어있는 거예요. 그것은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이 세상 자체가 무덤입니다. 세상의 무덤화. 무덤이 아니라고 우기는 인생 자체를 무덤으로 보거든요. 19세기에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에서 공리주의가 등장해서 성경에 나오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것을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합니다. 복지정책인데 유럽에서 19세기부터 시작된 거예요. 거기서 나오는 구호가 있어요.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고 다 해주겠다는 것, 의료보험, 교육혜택, 이런 것들을 하겠다는 겁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하는 것은 존재의 버티기. 문제는 존재가 감히 전 세상을 무덤화 시키는 사건에 대항하고 버틴다는 겁니다. 버티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교회고 종교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회복이란 것. 하나님께서 인간을 힘들게 하지만 결국은 회복시키니까 여러분이 당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상해줍니다. 보상심리인 거예요. 지금은 괴롭지만 주께서 자비로 보상해줄 것이라는 보상받으려는 희망을 계속 집착을 갖고 있는 겁니다. 회복이라는 신학을 주장한 것이 통일교부터 시작해서 이단들이 회복을 주장해서 자기 아픔을 보상받기 위해서 자기 재산까지 교단에 다 갖다 바쳐요. 누구만 배부르고 나중에 보상할 길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듣기에 밉기 짝이 없는 게 힐링이라는 것. 우리가 치유의 대상이 되는 겁니까? 무덤을 리모델링한다고, 잔디 새로 입힌다고 그게 영생이에요?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아픈 사람을 건지고. 존재에서 신약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없어요. 신약에 들어가려면 구약부터 들어가야 돼요. 구약은 폼으로 있습니까. 어디서 내 존재로부터 주께서 귀신 쫓아내고 힐링한다니까 치료한다니까 치유한다니까 나도 치유 받아볼까? 그럼 예수 믿어봐야지. 돈만 날립니다. 힐링하는 게 싸게 먹히거든요. 기도안수 받고 낫겠다는 것, 그 약점을 노리고 힐링 사기꾼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성경은 존재에서 사건을 만나지 않습니다. 사건 속에 들어가서 사건의 터널을 통해서 사건을 이해해야 되는데. 신약에 들어가려면 구약부터 출발해서 신약에 도달해야 돼요. 그 구약에 들어갈 때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면서 들어가게 돼있어요. 우리는 힐링의 대상이 아니에요. 구약 이스라엘은 좋겠다. 하나님이 친히 찾아와서 구원해주니 얼마나 좋겠느냐. 좋기는 뭐가 좋아요. 나라꼴이 엉망진창인데, 혼돈인데.

 

왜 혼돈이냐 하면,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 애굽의 속성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사건이 이건 개입이 아니고 난입이 적당한데, 사건이 난입해서 들어가니까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겁니다. 뒤집어진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손가락으로 창호지를 뚫으니까 저 손가락은 누구 손가락이냐고 물으니까 뚫은 사람이 니 손가락이잖아.

 

그러니까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상태. 이건 뭐냐? 힐링, 치료받겠다, 또는 상처받은 심령을 보상받겠다고 자기에게 애쓰면 애쓸수록 그러니까 존재 문제는 존재 문제로 해결하겠다고 버텨봐야 자기 꼬리를 깨물어봐야 더 아파요. 그것을 자기 언급, 자기 자신의 부분집합, 자기 귀속,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카오스이론이라고 해서 저절로 에너지가 나오는 어떤 이상적인 장치, 나왔던 결과를 다시 원인으로 집어넣으면 예상 밖의 놀라운 효과를 본다는 그러한 것.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은 존재의 분열로 이어지는데 이 존재의 분열을 하나님께서 사건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겁니다. 그러니까 나가 있으면 둘로 쪼개지는 거예요. 원자핵분열처럼 둘로 깨지는 겁니다. 탁 치면 중성자 깨지고 에너지가 나오는 것처럼.

 

구약은 뭐냐? 구약은 이스라엘을 깨트려서 여기 이스라엘과 또 하나의 이스라엘을 새롭게 생산하는 작업에 하나님께서는 사건으로 잠입하고 개입하는 그겁니다. 그래서 깨어졌을 때 하나는 사건화 되고 하나는 역시 존재로 되는 겁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아무리 이 세상에서 사람이 상처받아도 세월이 약이라고 지나가면 무마가 돼요. 그럼 존재에서 하나님께서 금을 그으면 아파요. 많이 아파도 다시 세월 지나가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약간의 상처만 남고 다시 복원이 돼버립니다. 존재의 바다에서 다시 존재의 바다로 돌아가 버려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게 치유에요, 그게 회복이에요? 그게 강력한 죽음 세력의 저항입니다. 존재에서 사건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존재로 되돌아오는 관성의 법칙. 다시 내 존재는 내 존재로 인하여 내가 즐거워하는 것, 그 본성으로 관성적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무덤화 시킨다는 사실에 대해서 수긍하시면 자기 존재에 대해서 스트레스는 안 받게 되는 겁니다. 이게 해결책이에요. 처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치 여자 죄수가 교도소에서 출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수용생활이 시작된 거예요. 출생지가 교도소이기 때문에. 이게 바로 인생의 실상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주님이 일으킨 사건에 의해서 이미 죄 아래, 죽음 아래, 하나에 무덤화 돼있는 거예요. 콘크리트 돔 아래 있는 거예요. 뚫을 수가 없습니다. 이걸 어떻게 회복하겠다, 힐링하겠다고 하면 그걸 노리는 종교사기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전 세계의 무덤화는 존재의 나로서는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제가 출애굽은 거북스럽다, 억지스럽다, 부자연스럽다고 한 겁니다. 그저 우리가 익혀 온 것은 존재의 풍성함만 정겹지 그 외의 것은 나를 분열시키는 어떤 것도 우리는 배척하고 거부하게 돼있어요. 그러면 세상을 무덤화 시킨다는 하나님의 아이디어는 왜 이런 식으로 시작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해석할 때 반드시 살인사건을 집어넣어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살인사건을 집어넣어서 세상을 판정하는 거예요.

 

그 최초의 이야기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살인사건입니다. 살인이란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은 피를 의미하거든요. 그래서 율법의 중심이 뭐냐? 아침저녁마다 피 있는 제사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살인사건을 집어넣을 때 이 세상이 죽음의 세계고 무덤화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소급해서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이 세상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살인사건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나님이 꾸며요. 하나님은 연출가에요. 일부러 이 세상을 가지고 노십니다.

 

형 가인이 제사를 드렸는데 안 받았습니다. 조짐이 아주 수상합니다. 음침해요. 그런데 동생이 제사 드렸는데 받았어요. 이건 문제 큽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형이 동생을 죽이는 겁니다. 동생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동생이 없어져야 자신의 존재의 가치가 유지가 되니까. 동생이 있으면 동생과 비교대상이 돼버려요. 비교되면 자신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이인 것이 들통이 나고 발각이 나버려요. 그러면 나라는 존재를 쥐고 있어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돼버려요. 그 존재는 결국 지옥 행.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사람은 희망 없이는 못 사는데.

 

애당초 운명이 결정되었을 경우에는 그런 판정 자체가 존재에 섞이지 않도록 추방시킬 수밖에 없어요. 그게 아벨을 자기 눈에 띠는 곳에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런 아벨의 사건은 장차오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 취지와 연결이 돼있어요. 아벨과 사가랴의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예수님께서 자기 노선을 바로 아벨로 억울하게 죽었던 선지자 사가랴의 노선에 자기 자신을 이어버립니다.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가지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벨이에요. 아벨의 존재는 뭐가 됩니까? 제사 한 번 잘 드렸다가 쉽게 말해서 교회에 예배 참석하러 오는데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식이거든요. 예배 잘 드려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았는데 그래서 지는 팔자 피는 줄 알았지요. 형한테 맞아 죽었는데 그게 팔자 핀 겁니까?

 

여러분 성경을 보면서 세례요한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세례요한 태어날 때 요란스러웠어요. 이름도 자기 가문의 이름이 아닙니다. 가문의 이름인 사가랴로 지어야 되는데 아버지가 이름 지으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강제로 입을 봉해버렸어요. 말을 못해. 도대체 하나님의 사건이란 것이 아주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워요. 사람을 못 살게 굴어요. 입을 틀어막고. 칠판에 쓰니까 John, 요한이 나왔단 말이죠. 임신했을 때도 마리아와 둘이 만나서 뱃속에서 뛰고, 그리스도의 언약대로 태어난 자에게 복이 있도다. 하고 세상에 그렇게 요란스럽게 태어나면 나중에 위대한 사람 될 줄 알았지요. 그게 어떻게 교회에 계속 잘 다니게 하는 긍정적 동기가 되겠어요.

 

세례요한은 말하기를 나는 쇠해야 돼야 된다. 나는 그분의 스피커로 내 역할은 끝. 세례요한에게 존재는 없습니다. 그걸 배워야 돼요. 세례요한이나 아벨, 이런 사람들은 존재감이 없어요. CF에 보면 얘들이 놀다가 정수기 자랑하면서 우리 집에 물 나온다고 하니까 다른 아이가, 우리 집에 얼음 나온다는 소리에 자기 존재감이 팍 죽었어요. 어릴 때부터 정수기 하나로 존재에 상처를 입었어.

 

주님께서는 우리 존재에다 사건을 새겨버려요. 그러면 그 사건은 우리에게 거북합니다. 나는 흥하고 싶어요. 그러나 사건은 쇠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는 흥하다, 쇠하다 이것 자체를 주께서 허용하지 않습니다. ‘나는’ 자체를 목적어, ‘나를’로 바꾸고 미지의 X께서 나를 이런 식으로 활용한다는 사건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바꿔버려요. 이걸 이스라엘에게 실시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죽음 사건을 때려버리면 존재로 남아있는 이스라엘, 존재화 된 이스라엘, 죄지요. 악이고. 그 다음에 사건화 된 이스라엘, 사건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무존재기 때문에 붙일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이름 없음이 이름이에요.

 

이름이 없다는 말은, 이들 이름은 누가 붙여줘요. 주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오게 되면 각자 자기 이름을 포기하는 집단이 발생합니다. 그들은 자기 이름으로 자기 존재감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아낌없이 자기 재산을 내놓았고 자기 소유의 모든 것을 사도 발 앞에 던졌습니다. 그 중에 반만 내다가 걸린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주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인지 몰랐지요. 그냥 주의 이름을 부르면 오늘밤 구원받는 줄 알았지요. 구원에서 내려오는 계통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존재를 자기 존재 식으로 존재가 존재로 귀속하기 위해서 잠시잠간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는 줄 알았지요. 그 가운데서 존재 자체가 사건화 되어서 갈가리 내 존재가 사라질 줄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구약의 사건 속에 다시 들어와야 됩니다. 그 들어오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없다 하면, “안 하면 되지.” 하는데 한다, 안 한다는 이야기는 일단 존재로 구축될 때는 나란 존재로 해볼까, 말까라고 되는 거예요. 할까, 말까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존재를 주님의 사건 앞에 반납을 해버렸어요. 아예 거기다 일임을 해버리면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에 의해서 하게 되는 사람으로 되는 겁니다. 내 존재로 하는 일이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계셔서 주님의 일을 내 몸뚱아리로 펼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일은 나의 존재의 우수함을 증명하는 것을 수집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제한테 일을 맡기지 않은 것을 감사하면서 자기 존재의 실패성을 즐길 수가 있어요. 오늘도 실패하는 즐거움으로 시간시간 사셔야 돼요. 아침에 요 앞에 계곡 쪽으로 산책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실패로 끝났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오니 그래서 못 갔습니다. 주께서 비 오게 하셨고 타이밍 맞춰서 우산 없고, 그래서 안 간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자기 존재가 유지된다면 이것은 바로 주님이 주신 인간의 능력마저 내 존재의 위력에 묻혀서 “그래 없었던 걸로 해버려.” 이렇게 되어서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존재적 이스라엘이 존재로 가버리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살인사건으로 개입해서 이스라엘을 쪼개는데 출애굽 때 개입된 살인사건이 어린양의 죽음이었습니다. 피 발라라. 그러면 건너뛸게. 유월절이거든요. 문설주에 피 바르면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가겠다.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아이디어입니까. 바쳐라. 구원해줄게. 우리는 납득이 되는데 피 발라라. 넘어간다. 존재를 죽이면 존재적 차원해서 심판하지 않겠다는 취지거든요. 제가 너무 함축해서 어렵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와 함께 일년 동안 살았던 어린양이 우리의 존재를 대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옆집에 사는 애굽 사람들이 받는 심판을 일년 된 어린양이 그 존재로서 심판을 다 받았다는 표시로 죽였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진짜 죽였다는 혈관 밖으로 흘러나오는 피를 페인트칠하는 거예요. 우리 집에는 존재 없습니다. 우리 집에는 내 존재 잘났다고 주장하는 사람 없고 이미 죽었다고 한 거예요.

 

왜 하나님께서는 존재를 말살하려고 하시는가? 그것은 인간의 존재 속에 하나님의 일에 버티는 반항하는 세력이 이미 상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존재와 존재로 계속 이어가면서 대를 이어 반항하세. 인류역사가. “우리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는 존재가 누구야? 내 존재에 대해서 반항하는 존재가 누구야? 가만두지 않겠어.”

 

그게 바로 대학시험이고 취직시험이고 공무원시험이잖아요. 공무원시험이 150:1이잖아요. 내가 만약에 거기에 응시했다. “누구야? 나 빼놓고 합격한 사람이.” 이 세상 자체가 내 존재에 대항하는 것은 나의 적이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이건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문제에요. 왜 내 존재를 고집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존재는 왜 우리가 죽어야 되는지 어떤 이유와 해결할 자체를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만들었는데 왜 해체되느냐 이 말입니다. 이미 있잖아요. 있는데 왜 없어지느냐? 거기에 대해서 아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몰라요. “에이 그냥 살던 대로 살지.” 이게 해결책입니까? 그거는 무덤 안에서 이사하는 것 밖에 안 돼요. 무덤 안에서 실내 장식하는 것밖에 안 돼요.

 

이렇게 적용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부 좀비로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는데 간주하는 걸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없는데 네 존재가 우선돼야 된다고 부추기는 어떤 강한 세력이 힘들게 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 기운에 말려들어서 오늘도 버티고, 내일도 버티고 매일같이 눈만 뜨면, “하나님이여, 내 소원대로 해줘야 됩니다. 힐링해야 됩니다. 회복해줘야 돼요. 오년 전에 잃었던 오천만원 30배, 60배로 보상해줘야 됩니다.” 자꾸 이런 식으로 그래서 내 존재는 존재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그 재미로 살고 싶다는 요소가 있어요.

 

그런데 누가 그렇게 버티게 하느냐? 그건 인간들은 왜 그래야 되는지 몰아요. 프로이드라는 사람은 그걸 알았어요.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은 죽고자 하는 것이다. 그걸 알았는데 왜 그런 죽고자하는 의식이 무의식 속에 있는지 이유는 밝혀내지 못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자기만 그런 게 아니에요. 대대로 그래요. 우리 집안만? 남의 집안도 마찬가지에요. 왜 인간은 통째로 전부 다 죽고자하는 본능이 있느냐? 이로써 개인적인 질병이 전체 정치적, 윤리적 체험으로 확대가 됩니다. 방금 중요한 이야기했어요. 아침부터 잠이 와서 꾸벅꾸벅 조는데 강의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저는 참 난처해지는데

 

이게 출애굽 당시의 지리에요. 애굽이고 광야고 가나안 땅이고 지리적이고 2차적이고 평면적이죠. 여기에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건 신약입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구약은 지리적이고 공간적이고 실제적으로 전쟁, 칼싸움하고 있는 상황이 어떻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영적 싸움으로 개인적으로 마음적으로 전환되느냐? 그런 쪽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되거든요. 여기서 칼부림이 있는데 사건의 금들, 신약에서는 마음의 금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줄기차게. 이렇게 전환되기 때문에 무관한 게 아니란 말이죠.

 

신약에 와서 우리나라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건 묻지 마세요. 구약의 이스라엘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건 의미가 있는 거예요. 구약적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고, 블레셋은 어떻게 되고, 그런 건 의미가 있는 이야기지만 신약에서 필리핀 어떻게 되고 중국의 윈난성 지진이 일어나고 그런 건 묻지 마세요. 신약에서는 인간의 마음속으로 모든 것이 적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진이 나든 말든 “너나 잘하세요.” 이런 식이란 말이죠. 남 욕할 것 없어. 바깥에서 들어가는 게 더러운 게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게 더럽단 말이죠. 속에서 나오는 게 더러운데 눈 돌리고 남 지적할 일이 어디 있느냐 말이죠.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나오는데.

 

신약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고 확정날짜 받은 거예요. 완전히 모든 게 끝나버린 거예요. 그래서 종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종말은 더 이상 시간의 진척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신약은 해석하기가 너무너무 어려워요. 구약은 쉽습니다. 실제로 홍해가 갈라졌어요. 홍해가 갈라진 의미가 뭐냐? 그것은 신약으로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과 또 다른 마음이 있는데 그것이 갈라졌다. 이런 식으로 전환이 되는 겁니다. 이러니까 신약해석은 상당히 복잡한 논리적 절차가 요구되고 있지요. 구약에서는 간단한데.

 

어쨌든 간에 그 이야기 계속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살인사건을 집어넣는 이유가, 그러니까 왜 존재에 대해서 싫어하고 존재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인간의 존재 안에 하나님께 반발하고 반항하는 세력이 존재라는 이름으로 계속 살아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를 쓰게 된 모세가 받았던 계시 안에는 어떤 내용이 포함돼 있느냐 하면,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사고방식이 어떻게 달라졌고, 자기를 보는 관점, 하나님을 보는 관점, 세상 보는 관점이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제가 ‘변질’이란 말을 아예 써버렸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변질된 거예요. 왜냐하면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과나무 안에 해로운 독약 요소가 있어서 죽었습니까?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그날 당장 게거품 물고 죽어야 돼요.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서 멀쩡했단 말이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럼 선악과나무 과일을 따먹은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씀 자체를 인간이 따먹은 거예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 자체를 따먹고 영구 없다는 식으로 이제는 그런 잔소리는 내 눈앞에 없는 거예요. 무슨 말했어요? 없지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은 이제 삼켜서 없애버린 거예요. 없애라고 마귀가 없애라고 하는 거예요. 너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독소조항을 네가 없애면 된다는 거예요.

 

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을 지옥 간다는 그 말에 대해서 대처하는 방법? ①믿자. ②믿는 척하자. ③그 예수를 없애자. 몇 번이 제일 속 편해요? 그 말한 당사자를 없애는 거예요. 없애는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4대성자의 한 분으로 넣어주면 돼요. 소크라테스, 공자, 부처, 그 다음에 예수. 4대성자로 존경하면 되는 겁니다. 존경하게 되면 예수는 그냥 평범한 서른세 살 먹은 청년이지요. 그들이 믿는 것은 신성, 인간을 초월하는 신을 믿으면 되지 예수를 믿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꼭 예수이어야 할 주장은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지금 천주교는 옛날부터 그랬고 감리교, 그리고 대한예수교 통합측 전부 그쪽 신학으로 전환돼요. 종교는 인류의 평화와 공존에 이바지해야 된다. 그 독소조항이 뭐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다. 따라서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면 된다. 십자가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한 게 아니고 사랑이 곧 하나님이다. 따라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신성이 있고 신성을 받게 되면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다. 하여튼 인간이 신이 못 되어서 환장을 했어.

 

그러면 신이 되는 건 뭐냐? 사건이냐, 존재냐? 존재잖아요. 들통 났잖아요. 결국 존재에서 존재로 귀환되잖아요. 다시 말해서 “내 존재 누가 건드려.” 도대체 이것 자체가 이미 변질된 겁니다. 그러면 변질되지 않은 원형을 찾아가면 되지요. 찾아갈 길이 없네. 한 번 변질된 식품은 폐기처분해야 돼요. 폐기처분하시잖아요. 얼마나 고맙습니까. 칠십 살다가, 어떤 사람은 팔십 살다가, 또는 어린 학생이 일찍 폐기처분 당하고.

 

하여튼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하신 일이 하등에 주님 쪽에서 잘못한 일이 없어요. 잘못하신 게 없는데 지금의 내 인생은 내가 원치 않는 인생이라고 대드는 속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주님하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아무 문제없는데 “잠시 만요. 문제 있습니다.” 손들고 나오고. 왜 손들지요? “내 인생은 내가 원치 않는 인생입니다.” 이름 말해보세요. “이름은 아무개입니다.” 이름 있는 것 보니까 존재 있네. “존재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3번에서 이름이 없거든. 이름 있는 사람은 앞으로 안 주기.

 

주의 이름으로 살면 주가 하신 모든 일이 오케이가 되고 아멘 된다는 것을 원 없이 살아생전 가야산 정기를 마음껏 받듯이 활짝 펴고 모든 것이 주의 은혜고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무 많이 받아서 존재로 변하게 되면 그게 골치 아픈데

 

그러한 살인사건, 죽음의 사건을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겐 상당히 거북스럽지만 하나님 자기 일에 차질 없게 하시는데 그 살인사건을 집어넣는 내력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거죠.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들에게 살인사건들이 내장돼있었어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본인이 기대한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삭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도대체 내 존재가 내 대에서 끝이구나. 나는 항상 시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존재가 아니고 끝나야 한다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존재가 그동안 유지돼왔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동강에서 레프팅하는데 앞에 절벽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관님, 앞에 절벽이 있습니다.” 교관이 하는 말이, “절벽에 빠지도록 일부러 여러분을 돈 받고 보냈습니다.”라고 하면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게 바로 믿음의 조상이에요. 모든 인간은 절벽에 있다. 끝. 당황하지 말고 노 저어가면 내 존재가 사라지는 그 지점, 그게 뭐냐? 자살이 아니라 언약적인 죽음이 나를 대기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죠.

 

그럴 때 나란 존재는 인수인계 절차에 들어갑니다. 마귀로 배려버린 그 존재 이름은 이제는 주님의 것에 의해서 새롭게 탈바꿈 되면서 천국에 골인되는 겁니다. 로마서 14장 7절의 말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게 아주 어려운 신학이에요. 신학 자체가 어려워요. 만약에 구약을 통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통하지 않고 그냥 신약에 들어가 버리면 나의 존재는 주의 것이라고 하면 역시 존재로 끝나버려요. 그런데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새롭게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존재가 우리 존재를 대체하기 때문에 따로 내 존재를 구성할 하등의 이유도 없고 구성해서도 안 되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님의 몸의 지체로서 움직이는 거예요. 발가락은 결국 발가락 힘이 아니고 두뇌의 지시에 의해서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처럼. 내가 만약에 오늘 아침에 조깅했다면 우리의 머리 되시는 분의 지시에 의해서 조깅해야만 되는 거예요.

 

아까 아침에 식사할 때 수박이 달고 맛있었습니다. 수박 좀 더 먹었으면 했는데 양성수 장로님이 들어오면서 수박을 갖다 줘서 곱빼기로 더 먹었습니다. 저는 양 장로님이 그렇게 했다고 믿지 않고 주께서 그렇게 했다고 믿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 아닙니다. 주의 영광이에요. 그 차이가 이방인이냐, 아니냐.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고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하나님 영광이 되면 나라는 존재에 대비한 새로운 존재가 돼버려요. 존재와 존재로 대화가 되는데 주님이 끼어들면 나라는 존재는 내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주님이 부리는 하수인으로 종으로 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무익한 종이니 시킨 대로 할 뿐이죠. 시킨다는 것은 그때는 모르고 소급해서 돌아와 보니까 시켰구나 하는 거예요.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고 보니까 못 생겼어. 왜 했을까? 나중에 소급해보니까 못났다고 여겼던 아내도 주께서 시킨 대로 결혼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부부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어요. 왜 국이 짜냐? 짜증내다가 소급해보니까 주께서 짠 것도 먹어봐라 해서 한 거고, 안 그러면 짜증나서 소금을 일부러 부었든지 무슨 일이 있었겠지요. 늘 안 짜야 된다는 권리는 존재 없는 사람한테는 나올 수 없는 권리입니다. 짜지 않은 국을 먹고 싶습니다. 저 존재 잘라버려라. 주는 대로 먹어야지 말이 많아.

 

벌써 세 시간이 다 가는데 성경구절 봅시다. 성경도 안 보고 무슨 짓인지 모르겠네. 출애굽기 1장 8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장했어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왜냐하면 요셉은 우리 보기에는 존재로 보입니다. 왜 존재로 보이느냐 하면 내가 존재로 살기 때문에 나와 다른 무엇, 나라는 존재와 다른 존재로 보는 거예요.

 

여러분, 태풍이 무섭습니까, 외계인이 무섭습니까? 외계인이 더 무섭지요. 태풍은 낯설지 않고 외계인은 낯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태풍은 존재가 아니에요. 존재를 둘러싼 환경이 되지만 외계인이 존재가 될 때는 갑자기 인간은 어느 존재가 진짜 존재인지 검토해야 될 부담을 느끼는 겁니다.

 

요셉이 있을 때 요셉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벌써 잘못된 해석이죠. 제가 지난 대전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그 해석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성경에 나온 건 괜찮은데 그걸 해석하면 잘못된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땡, 탈락. -100점. 성경은 그렇게 돼있지 않고 예수님에 의해서 천지가 창조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창조했다는 그 말은 보지도 않고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그 하나님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내 존재가 평소에 늘 나의 초월을 기대하면서 여분의, 내 존재 이상의 존재로서 나보다 나를 책임질 어떤 종교적인 욕구에 의해서 아우라 같은 존재란 의미의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천지 창조했다니깐 “저 분이 창조했으니까 내 인생도 책임지겠지.” 이렇게 연결해서 해석해버린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건 탈락이 되는 거예요. 그건 유대인이나 모든 종교인이 다 그래요.

 

요셉이 존재한다니까 요셉의 존재는 위에서 조명을 비추면 이것밖에 안 돼요. 그렇다면 출애굽기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 왕이 나온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어색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요셉이 죽은 지 사백 년 됐습니다. 사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을 왜 기억해야 됩니까? 사백 년 전에 죽은 조선 사람들을 꼭 기억해야 되겠어요? 당연하지요. 과거는 흘러갔으니까. 존재가 죽었으니까 없어졌잖아요. 그걸 왜 기억해야 돼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요셉은 존재로 사건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관계망이 있는 겁니다. 이 관계망이 안 보이는 거예요. 이 관계망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까지 연결된 언약에 의해서 올라온 겁니다. 미국 미식축구에서 응원단이 있지요. 남자 응원단이 여자 응원단을 마지막 하이라이트에서 어떻게 합니까? 밑에서 받쳐 올려서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오지요. 깃발 하나 들고 올라오잖아요. 그처럼 요셉은 외부에 드러난 거고, 밑에 80%의 빙산처럼 언약이 인간 피라미드 만들어서 올린 거예요.

 

그렇다면 요셉을 기억 못한다는 말은 뭐냐? 요셉을 요셉 되게 한 언약의 그물망, 관계망을 바로가 놓친 거예요. 바로가 놓친 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요셉의 관계망 속에 누가 포함돼 있느냐 하면, 애굽의 존재도 같이 엮여져 있던 겁니다. 엮여진 관계망을 바로 왕이 뜯어버린 겁니다. 히브리 종족이 믿는 여호와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5장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왔다고 하니까 바로 왕이 아주 옳은 대답을 했어요. 여호와가 누구관대, 여호와와 나와 무슨 관계있는데?

 

제가 지난 끝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항상 출애굽할 때 어느 편에 서라? 모세 편에 서지 말고 바로 편에 서면 출애굽기가 전부 이해가 돼요. 꼭 바로가 우리의 평소 행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요새 말로 네 종교와 내 사업체와 무슨 관계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지요. 사백 년 전의 사람을 발굴해서 알아야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이 그물망을 우리 자신도 놓쳐버려요. 왜냐? 우리는 존재와 존재를 끊어서 하기 때문에 요셉은 요셉 나름대로 작은 그림자가 있을 것이고 나는 내 바탕의 그림자가 있을 테니까 네가 잘났냐고 비교할 뿐이지 요셉이란 언약의 그물망에 우리가 같이 놓여있다는 것을 감히 생각 못합니다.

 

파이프에 물이 흐른다면 우리는 우리 바탕에서 언약이 주는 생수를 날마다 공급받으면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돼있는 구조 속에 이미 놓여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 땡, 탈락. 왜? 주체가 내가 되니까. “주께서 성령으로 물을 공급해서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건 +100점이에요.

 

그래서 항상 우리는 관계망을 봐야 돼요. 가발 쓸 때 밑을 살짝 들춰보세요. 거기에 그물망이 있잖아요. 잔디는 잔디의 그물망에 단단히 있으면 잔디를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 자란 중에 하나가 요셉인데 바로는 그 요셉 덕분에, 언약 덕분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그 사건에 휘말리지 못하고 자기 존재를 고집하다보니까 요셉의 존재는 잊어버린 겁니다. 그때부터 언약사건은 터지게 되는 거예요.

 

 

그 다음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관리자(IP:203.♡.42.222) 14-08-09 09:45 
2014여름수련회(낯선 경계선) 출애굽기 제 4강


요셉이라는 인물이 우리 보기에 그냥 우리와 같은 어떤 사람인 그냥 요셉인줄 알지요. 요셉이 그냥 요셉이 아닙니다. 언약이, 주의 이름이 친히 만들어낸 작품이에요.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라 하지요. 천국에는 아브라함도 살아 있고, 야곱도 살아 있고, 이삭도 살아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아, 살다 죽으면 나도 천당 가겠구나.’ 하는데 그게 아니고 갈 수 없는 요셉이 갔고, 갈 수 없는 아브라함이 갔고, 갈 수 없는 이삭이 갔고, 갈 수 없는 야곱이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결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훌륭하고 잘나서가 아니에요.


아까도 했지만 그들은 카누를 저어갈 때 앞에 절벽이 있다는 것도 몰랐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각자의 절벽을 줍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아 죽여야 되고 이삭은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저주를 내려야 돼요. 자기가 좋아하는 타입, 자기스타일의 아들은 저주를 주고 자기가 안 좋아하는 스타일인 야곱한테는 축복을 줘야 되는 그것이 자아의 분열, 세상에서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명품 옷을 해 입혔어요, 야곱은 특별하게 옷을 해 입힐 만큼 사랑하는 그 아들을 죽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어요.


언약에 걸려들었습니까? 좋아하는 것을 주께서 다 죽여 버립니다. 요셉의 죽음은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삭에게 에서의 저주받음은 에서의 저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곧 자기 저주고 자기 죽음인 것입니다. 자기종말입니다. 강물 뒤에 사람들이 아무리 발견하려고 해도 발견할 수 없는 폭포, 나락, 지옥, 종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아무도 몰랐지요. 왜 그동안 몰랐는가? 사람이 죽어가면서도 죽음 뒤에 있는 것을 왜 몰랐는가? 사람은 그 죽음마저 존재가 존재의 연속에서 죽음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다 보면 죽을 때 있으면 죽으면 그만이지 뭐.” 죽음이라는 것을 죽음 저편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죽기 전에 인간이 죽음을 생각하는, 내가 있다가 없어지면 그만이라는 그 생각에다가 죽음을 포함시켜서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실제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을 해서 부활한 관점에서 애초부터 주님이 죽으시기 이전부터 부활의 관점으로 너희에게 말씀과 기적과 비유들과 여러 가지 일들을 해 주신 거예요. 너희들은 생명이 아니라고, 내가 찾아오게 되면 그게 생명이라고 이야기해 준겁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자에게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말 의미 없습니다. “죽으면 죽지 뭐.” 이런 식이지요. 요셉의 밑바닥에는 가발을 지탱하는 그물이 있듯이 언약의 그물망이 있었고 그 요셉의 등장은 죽어야 될 인간도 살 수 있다는 것, 단 조건이 있어요. 언약 안에 말려들었을 때, 언약에 의해서 포착이 될 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언약에 포착되면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의 이름을 갖고 있는 인간은 그냥 죽으면 안 되고 하나님의 언약이 내리는 심판을 경유해야 비로소 심판마저 극복된, 심판의 저주가 없는 상태로서 산 사람으로 영원한 하나님과 동행하고 살 수 있는 천국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과정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다 겪었어요. 겪은 그 언약에서 이제는 개인이 아닌 집단적으로 언약을 적용하기 위해서 히브리인을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히브리인의 운명이라는 것은 판명 난 거예요. 죽은 거예요. 죽을 때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 하나님이 주신 죽음 사건에 그들은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들어가서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언약적인 배려, 혜택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야 돼요. 그리고 다시 살아날 때는 존재로 살아나서는 안 되고 자신의 존재를 대체하는 존재, 하나님의 이름에 부합되는, 그 이름을 위한 백성으로서 그들은 광야생활을 이제 시작을 해야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만 높이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에게 가하는 모든 압박은 그냥 정치적인 문제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는 혁명인줄을 몰라요. 혁명이 끝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뒤에 가서 보면서 그것이 혁명이었다고 명칭을 붙입니다. 명칭을 붙일 때 그것이 바로 이름이죠. 어떤 이름? 사건에 관한 이름이 붙여지는 겁니다. 그러면 혁명이 일어나고 난 뒤에 그 사건이 반복해서 이루어질 때마다 그 혁명은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 있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십자가라는 것이 있거든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본 적도 없습니다. 그는 십자가 지기 15년 후의 사람이기에 십자가 본적도 없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는 마치 자기가 십자가를 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 봤어요? 봤냐고! 안 봤다는 말이지요. 안 봤는데 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느냐는 말이지요. 어디에, 어느 장소에, 갈릴리 그 장소에 가면 십자가 있습니까? 없잖아요. 거기에 지금 택지개발하고 있는데 무슨 십자가가 있겠습니까? 택지개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지금 거기가 다 관광지가 되어 있는데 무슨 십자가가 있어요. 그냥 갖다 붙여놓은 십자가나 있겠지만.


그래서 사건에 이름이 붙여질 때 자기 이름은 포기되어야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하는 그 순간 사도바울은 자기 이름으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십자가는 죽지 않고 계속해서 주의 이름 부르는 곳에 사건이 반복해서 터져 나오는 겁니다. 조건은 뭐냐 하면, 그 이름을 부를 때 반드시 자기 존재, 자기 이름을 포기하고 거부해야 된다는 거예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지요. 신약이기에 상당히 어렵게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혁명이 일어났다는 거지요. 모세가 애굽이 자기백성을 학대하는 것을 보고 안중근 의사처럼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혁명을 일으킨 거예요. 혁명을 일으키는데 나중에 그냥 도망쳐서 목자가 되지요. 광야에서 양이나 키우고 있었지요. 그럴 때 혁명이 일어났습니까, 안 일어났습니까? 그게 하나의 혁명이었다고 붙일 이름이 본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한 때 에피소드였다, 이러면 혁명은 없는 거예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당황하지 말고, 이런 거지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혁명은 누가 이름을 불러야 되느냐 하면 나중에 그 사건의 혜택을 입은 자만 그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 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십자가의 혜택을 입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뭐냐? 나처럼 십자가 혜택을 입은 사람은 여기여기 모여라, 이런 뜻이에요. 그 모인 곳이 뭐냐,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모일 때는 어떻게 모였느냐 하면, 아직 계시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물체화를 통해서 모였어요. 물체화가 뭐냐 하면, 주의 떡과 잔을 나누면서 이것은 주의 흘리신 피고 주님의 찢기신 살이라고 하면서 모일 때마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면서 성만찬을 행했잖아요. 아직 계시가 확정되기 전이기 때문에 모든 사건들은 사물화되고 물체화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그런 물체화와 사물화를 유지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연극이 되고 말지요.


연극이란 것은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마치 일어난 것처럼 위장하는 방법이 연극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인상 깊은 노래의 가사가 있어요. “연극이 끝난 후”라는 노래인데 1980년도 대학가요제 입상곡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앉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적이 있나요


음악 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셋트도 이젠 다 멈춘채

무대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배우는 무대 옷을 입고 노래 하며 춤추고

불빛은 배우를 따라서 바삐 돌아 가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 버리고 무대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무대에 남아

아무도 없는 객석을 본적이 있나요


힘찬 박수도 뜨겁던 관객의 찬사도 이젠 다 사라져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죠 침묵만이 흐르고 있죠


관객은 열띤 연기를 보고 때론 울고 웃으며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착각도 하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 버리고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끝난 후에 조명도 끝나고 관객도 없을 때 그 허무와 허탈감. 한 때 했던 마약 같은 느낌이죠. 한때 존재를 즐겁게 했지만 끊고 난 뒤에 현실로 돌아오게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 사람들이 예배를 하나의 연극의 일종으로 봐요. 예배 참석해서 은혜는 받았는데 문만 열고 나오면 마치 아무 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기 존재감으로 황급히 돌아옵니다. 심지어는 예배도중에 (걸려온 전화기를 받아들고 예배당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예, 예! 알았습니다. 지금 갑니다. 물건 와 있다고요? 지금 막 문 엽니다.” 그런 경우도 있어요.


이 세상 자체가 연극이라는 그 말은 다른 말로 해서, 세상을 어떻게 사나 전부 다 허구고 허망하다는 자기고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각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 존재의 바다에 일어났던 일은 다시 물결치게 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 꿰매집니다. 꿰매면 그 자국이라도 남지만 출렁이는 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됩니다. 이게 바로 교재에 쓴 “존재의 바다입니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다! 그런 식으로 해탈을 노리는 게 불교입니다. “세상은 모두 인연이다. 모든 것은 엮여있고 따라서 이 세상은 존재에서 와서 존재로 가버린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뭐가 사라집니까? 왜 있어야 되는 것이 없어지는가의 그 문제가 미궁에 빠졌지요. 왜 미궁에 빠진지 알아요? 모르면 없애면 되니까.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시비 걸면 아예 그 존재를 없애버리면 그만이거든요. 예수님 죽고 난 뒤에 로마 군인에게 보초하게 했습니다. 로마당국에게 예수는 그냥 한때의 인물이에요. 에피소드만 남기고 가버린 거예요.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구라를 쳐서 시체를 따돌려 놓고 하는 말이 “유 병언은 살아있다.” 이런 식으로 시체 바꿔치기 해서 주님이 살아 있다고 구라를 치면 국가의 존재질서가 문란케 되고 그러면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 될 치안의 책임이 상당히 난감하게 돼요.


따라서 범국가적인 치안유지목적 때문에 예수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한사람들을 체포해서 구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도들이 구금되었는데 문제는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렸다는 거예요. 사도행전에서(행 16:26). 여러분은 성경 안 봅니까?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지진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지진이라고 하지 않고 천사가 와서 했다는 거예요. 어느 말이 맞습니까? 우리는 천사를 믿지 않아요. 왜냐하면 천사가 나오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거든요. 존재는 뭐든지 소유가 될 때 존재에 편입이 되는데 사건은 찢어지고 째버린다는 말이지요. 째버리면 존재가 찢어지고 그걸 봉합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거든요.


따라서 사건이 침입했다는 이 소식보다는 아무 일이 없는 것이 더 나아요. “아, 그때 그건 지진이었어. 한 때 운이었지.” 베드로가 갇혔는데 옥문이 열렸고 사도바울과 실라가 갇혔는데 옥문이 지진이 일어나서 열렸다. 타이밍이 그렇게 맞았겠지요. 정말 당신이 잡힐 때 천사가 왔다면 한번 실험을 해보면 되지요. 잡혔던 그 사도바울과 실라를 다시 감옥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지진계를 놓으세요. 같은 일이 벌어지는지. 절대로 같은 일이 안 일어나지요. 왜냐하면 반복이라는 것은 존재에나 통하고 인정되는 물리학이지 절대로 우연은 아닙니다.


우연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필연 속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오히려 필연을 욕하고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우연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우연을 배경으로 해서 십자가를 언급하면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구원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한다.” 이렇게 되니까 자기 존재가 구원받고 싶어서 그 좋다는 십자가고 복음이고 다 존재의 바다에 끌어당겨서 고정화시키려고 했던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언약이라 하는 것은 해봐도 소용없고 지식의 교만만 더 높아지는 하나의 계기일 뿐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십자가를 모른다고 사도바울은 단서를 붙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4절에서 하는 말이 “내가 전하는 것은 설득이나 교육도 양육도 아닙니다. 내가 전하는 것은 성령의 나타남”으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성령의 나타났다는 것은 인간의 손에 체포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범위를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뭐냐, 인간이 현재 추구하는 모든 시도를 부정하고 고발하고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 잡는 것이 개인적인 종말이었지만 종말은 전 세계, 전 우주에 관한 종말을 이미 선언해버린 그 시점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름방학 되어서 애들이 봉화에 가서 은어축제에 참가할 때 그게 오만입니까? 그게 오만하고 교만한 짓이에요? 겨울방학에 외가집에 갔어요. 집 앞에 연못이 얼어붙어서 썰매를 탔어요. 일기를 씁니다. “오늘은 맑음. 집 앞 연못 빙판에서 썰매를 탔다. 재미있었다.” 이게 오만이고 교만입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그걸 교만과 오만으로 봅니다. 왜? 썰매를 타면서 종말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썰매 타는 자체가 죄라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게 오만으로 보는 거예요. ‘내가 지금 무슨 시대인데 이 짓을 하고 있나?’ 이렇게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 아이가 있으면 천재이거나 아니면 바보이거나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주님의 호명과 호출과 찾아오심으로 되는 것이지, 하나님의 개입으로 되는 것이지 신학적인 실력, 복음적인 실력이 있다고 해서 그 힘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자기구원이기에 우리 구원에 하나님이 배려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기 몸을 구원해버려요.


우리가 몸에, 지남철에 달라붙은 쇠붙이처럼 달라붙어있는 지체이기에 주의 이름 구원할 때 딸려서 같이 구원된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이렇게 합니다. “이미 예수님 부활할 때 너희는 구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구원이 되었다.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엡 2;6, 롬 8:30) 이미 과거완료, 확정된 사실입니다. 남아 있는 그 효과가 뿌리를 뻗게 되면 그 뿌리에 뻗친 현상들이 이제는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지요.


여기 무성한 나무가 있고 뿌리가 있는데 바다에서 파도가 쳤다 이 말이지요. 처음에는 땅 속에 묻힌 뿌리가 안 보였는데 파도가 자꾸 치니까 이 뿌리부분이 자꾸 드러나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했다고 할 때 우리는 잘나서 구원된 줄 알았어요. 그러나 주님이 찾아와서 사건을 주니까 우리가 구원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이 뿌리 자체가 주님과 언약적인 관계망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파이프로 계속 생수를 부어주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언약의 작품으로 이미 지금까지 소급해서 살아온 거예요.


제가 늘 이야기하지만 십자가 옆에 달린 강도 있잖아요. 그 사람은 강도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강도 되는 것이 일종의 풍선 같은 거예요. 주께서 풍선을 부니까 강도가 된 겁니다. 강도가 되었어요. 세리도 창녀도 훅 부니까 나는 창녀가 되고 세리가 되었어요.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다. 거기에 무슨 오만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편견이 있어요. 편견, 오만, 없습니다. 자기 존재를 지키려고 하니까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어떤 여자 분이 있었는데 간호사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간호사가 예뻤던지 그 병원 이사장과 결혼해서 사모님이 되었어요.


그런데 옛날 함께 병원에 있던 후배간호사가 볼 때마다 “언니! 언니!” 하더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게 약이 올라서 “언니라고 하지 말고 사모님이라고 해야지.”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요새 드라마 아니면 이야기할게 없어서……. 자기 과거를 자꾸 지키려고 하니까 자꾸 꼬이는 거예요. “네가 내 아들이다.” 이러면 끝날 문제 가지고 이게 막장 드라마가 되어서 되도 않는 문제로 계속 꼬여요. 임 성한 작가 같으면 벌써 다 죽였어요. 내가 작가 한다면 다 죽입니다.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이라는 것은 이미 언급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겪었던 그 죽음을 맛봐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본인들이 원한 게 아니었어요. 제가 지난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주께서 사건을 일으킬 때는 그 사건을 무효화시키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는 존재의 강력한 반발심이 드디어 이스라엘에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주여, 이것은 우리의 뜻이 아닙니다. 공동묘지가 없어서 이 광야에서 우리를 몰살 시키려고 했군요.”라고 모세에게 달려들고 원망을 하지요. 여러분이 다 아시지요. 성경을 읽어봤으니까.


“다시 존재로 돌아가자. 내 존재를 주님이 이런 식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너무 힘들고 우리로서는 감당 못하겠다.” 감당 못하겠다는 거예요. 누가 자기보고 감당하라고 했어요? 감당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저 원망, 그저 불평, 그러나 그때가 좋았습니다. 사람이 돈 없이는 살아도 심심하면 못살아요. 티격태격 할 그 때가 참 좋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홍해를 건너게 했을 때 그들은 신바람이 났습니다. 미리암이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가야 할 곳은 바로 죽음 속이었습니다. 죽음 속.


표어가 액자로 되어 있어요. 죽으면 살리라. 아주 무시무시한 표어를 걸고 그들은 광야에 들어갑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코스는 다 피해갑니다. 물이 있잖아요. 물이 있는 코스를 피해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내비게이션이 되어서 인도합니다. 천사와 주님이 교신합니다. “여기는 천사! 오버.” “여기는 주님! 오버.” “주님, 저들이 지금 물 있는 곳으로 갑니다.” “빨리 진로를 바꿔라. 물 없는 곳으로 가라.” 그러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인도해서 물 없는 곳으로 가요. “주님, 저 코스로 가면 거기에 양식이 있습니다.” “안 된다. 큰일 난다. 양식을 피해서 가거라.” 양식을 피해서 가요.


이것은 우리가 바로 편에 섰을 때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이런 식은 우리가 원했던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가 기피하고 싶은 1순위에요. 마이너스 백점, 땡, 탈락! 정말 이런 신은 버리고 싶은 그런 신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그들을 인도하는 신 말고 따로 그들이 정겹던 신을 따로 만듭니다. 이름을 지었어요. 여호와. 얼마나 재미있는 현상입니까? 요새 말로 하면, 예수 이름으로. 여호와, 우리는 여호와를 믿는 민족이라는 겁니다. 자기들이 원하고 자기들이 기대했던 신, 존재를 긍정해주고 자기의 모든 꿈을 이루어주는 신. 꿈은 이루어진다. ★은 이루어진다. 긍정적 마인드, 그것이 교회의 아이템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기에 힐링이라는 것. 지금 교회에서 템플스테이까지 나오고 있어요.


성령의 삶을 사시면 마음이 고요할 것입니다. 이상한 음악을 동원하면서. 꼭 전기톱 소리 같은 음악. “마음을 낮추시고…….” 천주교신부들이 예배인도 할 때 꼭 그렇게 해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주님의 떡입니다.” 의사들이 처방전 라틴어로 할 때 얼마나 짜증나요. 신부들도 라틴어 배웠다고 라틴어로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요. 그러면서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받아서 술이나 퍼마시죠. 그러면서 돌아서서는 “마음을 청소하세요.” 너나 청소하세요. 미신은 형식화를 모방함으로써 유지가 되는 겁니다. 그만큼 형식이라는 것이 장애요소입니다.


그러면서도 형식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교회도 전부 다 형식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왜 11시에 시간 맞춰서 딱 하느냐는 말이지요. 4절 찬송가를 시간 맞춘다고 3절로 줄여서 한다고요. 무슨 강박관념입니까? 이것은 히스테리 같아요. 예배할 때 일어서고. 이것이 형식이 아니에요? 형식을 안 한다는 자체는 자기가 죄인 아니라고 우기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형식을 함으로써 하되 이것이 의로움이 없음을 인지하면서 그 형식을 할 수밖에 없어요. 차 폐차할 때 수리해서 넘깁니까? 그런 것 봤어요? 병원에 가면서 병고치고 병원에 갑니까? 그런 것이 없잖아요.


이번에 제가 십년 넘게 타던 차 폐차장에 넘겼습니다. 15만원 받았습니다. 리오. 황금차인데 없앴습니다. 가다가 연기 나서 없앴습니다. 무슨 생각이 났느냐 하면 뉴스에서 보니까 고속도로에서 차 엔진에서 불이 붙어서 자칫 잘못하면 신고당해서 벌금이 더 많이 나올 가능성이 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폐차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왔는가? 주께서 오게 하셨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좋아하지도 않고 도리어 원망했습니다. 그게 오늘날 우리 모습입니다. 원망하면서 질질 끌려가듯이 그렇게 주께서 인도하십니다.


주님에게 구원받으면서 주님은 전혀 좋아하지도 않고 그것도 세월 가면 되겠지 하는데 세월 가도 안돼요. 점점 더 난처해집니다. 그럴 때 그들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마음을 낮추기 위해서입니다. 교체해야 되거든요. “나는 폐차다, 나는 폐차다. 내가 다쳐도 이것은 마땅한 조치다.” 늘 그런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유지할 때마다 잠시 사료 주듯이 맛있는 초콜릿 하나 툭 던져주는 방식. 초콜릿이 맛있거든요. 맛있으니까 다시 존재로 돌아올 때 또 초콜릿 말고 다른 것을 줘서 그야말로 당근과 채찍으로 강력하게 당기십니다.


“이런 식으로는 네가 약속의 땅의 장대 같은 거인족을 이길 수가 없다.”는 그 말이에요. 약속의 땅은 비어있는 땅이 아닙니다. 기존에 있는 집 주인 쫓아내고, 그러니까 박힌 돌 빼고 외부의 돌이 거기에 들어가는 반칙성, 그야말로 반칙성으로 주님께서 입주하는 거예요. 완전히 도둑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도둑입니다. 그리고 그 도둑을 믿으신다면 그 도둑과 한패가 되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 28절의 말씀입니다. 도둑이 담을 타고 넘어가서 집 주인을 묶어놓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그 집의 가재도구를 들춰내는,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라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믿을 리가 있습니까? 그 말을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에서 나오는 모든 선함과 경건함을 모독하는 행위이기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원통을 다시 그리겠습니다. 원통 이스라엘인데 바깥에 원통이 또 있어서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중구조는 언약에 의해서 되어야할 언약적 이스라엘입니다. 이 안의 작은 원통인 이스라엘은 애굽적이스라엘, 육신적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알아서 버리고 이쪽으로 나오라는 그런 것은 절대로 없어요. 그들은 존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존재를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자고 이것을 강력하게 쥐고 있습니다. 쥐고 있을 때 바깥에서 이걸 언약으로 작용하게 되면 발차기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싫습니다. 이것은 아니되옵니다.” 계속해서 발로 차면서 “나는 이런 식으로는 예수 안 믿겠습니다.” 계속 나오는 거예요.


주께서는 이 애굽적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이 모든 원망과 불평을 모아서 새로운 이스라엘 세우는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재활용이지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꼭 돼지 같아요. 족발이고 뭐고 다 먹어요. 우리에게서 마음껏 나오는 그 죄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그 분비물을 다 모아서 예수님 자신의 것으로 집어넣습니다. 집어넣고 난 뒤에 그 죄를 다 가지고 아버지 앞에 “이 죄를 위해서 죄 없는 제가 죽겠나이다.” 하고 아버지의 약속에 따라서 죽으십니다. 죽게 되면 그 죄를 퍼부었던 사람들은 주님께서 그 죄를 흡수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난데없이 졸지에 우발적으로 우연히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명단 잘못된 것 아니에요? 제가보기에도 제가 구원받을 입장이 못 되는데 왜 제가 구원되었지요? 명단 다시 살펴봐 주세요. 이름이 이 군호 아닙니까? 아니라고요? 그러면 제가 아니고 축구선수 이근호지요? 그 애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그러면 제가 왜 구원받지요?” 오히려 의아해 하는 그 모습이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입니다. 그 모든 모습들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반면에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주장할 때 그것이 육신의 열매에요. 시기와 질투와 형제다툼과 온갖 비난, 이게 다 쏟아집니다. 그걸 종합하게 되면 이 말입니다. “구원받지 마세요. 구원받지 마시고 구원된 상태로 계세요.” 구원 받지 않은 상태인 그 자체가 구원받았다는 상태임을 다른 쪽에서 우리에게 언급을 해줍니다. 그것은 본인들이 알아요.


성경에 자기들이 스스로 칭찬하는 자는 칭찬이 아니라고 했어요. 주님 쪽에서 칭찬할 때는 어떤 근거마저 외부에서 도입해서 하는 거예요. 내가 만든 근거를 가지고 서류를 꾸미는 것이 아니고 다른 근거를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대게 되면 내가 착실하게 경건하게 거룩하게 맨 날 다지고 다졌던 그 서류자체가 완전히 폐기처분됩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제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사람이 스스로 거룩해지려면 이 거룩이 둘쑥날쑥 해버려요. 늘어났다 줄어났다, 착한 일 하면 거룩해지는 것 같은데 나쁜 짓을 하면 그동안 따놓은 내신 성적 다 까먹어버리고 그동안 따놓은 거룩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드는데 그렇다면 이게 견고한 구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치매가 걸렸다 하면 이것은 횡설수설이니 거룩한 자인지 뭔지 분간도 안 되잖아요.


그러면 그 경건성이 어디서 나왔는가를 설명하면서 그 견고성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은 예상외로 어려운 말이에요. 제가 어떤 분에게 질문을 했거든요. 왜 피 흘려야 구원받지요? 간단한 질문이었어요. 왜 피를 흘려야 구원되는 거지요? 여러분, 그거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게 성경에 있다는 것을 저도 알아요. 난 알아요. 다 아는데 왜 피 흘려야 구원 받지요? 수십 년 복음 알고 신학교 졸업했다고 해도 피 없이는 구원이 안 되는 이유, 히브리서에서도 “피 없이는 사함이 없”(히 9:22)다고 하는데 왜 피냐는 말이지요.


주님이 운동하셔서 구원받았다, 이렇게 할 수 있잖아요. 주님께서 멱살 쥐고 흔들어서 구원하신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왜 피 흘려서 구원 받느냐, 그 말입니다. 원어? 원어 들고 나오지 마세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이 원통과 원통 사이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원통과 그 바깥에 있는 주님께서 이루시는 언약적 이스라엘 사이에서, 이것은 주님의 자기숙제인데 이 사이에서 죄가 쏟아지고 이 죄에 대해서 주께서 희생을 당하기 때문에 이 피가 흥건히 고이게 됩니다. 그 피가 이 죄를 용서해주는 거예요. 왜 피인가? 차이입니다. 또는 간격. 그러면 어떻게 거룩이 고정화되는가? 이 차이가 고정화 되면 우리의 거룩도 고정화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간격 그 차이가 고정화되는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이고 주님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죄에 대해서 이미 의인으로 해결 했다면 이 죄라는 이것과 의라는 이 간격은 고정이 되어버려요. 고정이 되게 되면 이미 거룩과 구원받았음도 고정이 되는 겁니다. 이 차이에서 피가 나오지요. 그 피가 나와서 용서받았다는 말은 너는 죄인이고 그 죄에 대해서 나는 희생된 구원자라고 그 차이가 고정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주목해야 되는 겁니까? 나는 죄인이다, 여기에 주목하면 안 되겠지요. 주님은 의인이다, 여기에 주목하면 안 되겠지요? 무엇에 주목해야 됩니까? 이 차이, 이피가 내 피냐 주님의 피냐? 주님께서 흘린 그 피의 차이의 확정성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 확정성에 의해서 우리의 존재도 확정된 가치를 부여받게 됩니다. “너는 뭘 해도 죄인이다.”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설교를 해도 강의를 해도 뭘 해도 죄가 되고 선교해도 죄인이고 전도해도 죄인이고, 이게 우리 거룩의 확정성입니다.


만약에 우리 죄인됨에 주목을 하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가 죄인이라는 이름의 존재로 전환되어버리는데 그렇게 존재로 전환되어버리면 계속해서 의문점이 나와요. ‘내가 성도인데 이런 죄를 지어도 과연 구원이 가능할까?’ 이런 의문점이 나오고 ‘내가 성도되고 난 뒤에 이렇게 착하게 사는데 저렇게 착하게 살지 않는 저 사람보다 양적으로 거룩이 더 많아지는 게 아닐까?’ 이렇게 되어버려요. 이렇게 되면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이 세상에서 노동시간에 따라서 임금지급에 차이가 나는 식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천국의 원리가 아니고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천사에게 “천사야! 쟤들 봐라. 웃기지?” “웃기네요. 일 좀 더 했다고 월급을 더 주고, 세상에 이게 말이 안 되네요. 우리나라에는 저게 말도 안 되는데 저들은 저게 옳다고 하잖아. 참 웃기는 인간들 많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주님께는 정 반대에요. 값없이 주고 대가없이 준다는 그것이 천국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어디 가려고 합니까? 이 세상이 확장된 나라에 갑니까? 여호와의 증인처럼 골프장 같은 너른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분수의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그런 곳에 가려고 합니까? 그러면 여호와의 증인한테 가면 됩니다. 『깨어라』 그 책자에 잔디밭이 그려져 있고 꽃이 피고 난리 났어요.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존재가 상상한 존재의 확장으로서 나온 유토피아지 실제 하나님은 이 차이를 확정시키는 그 차이 속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이게 새 언약, 언약의 완성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이스라엘백성은 율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구심점은 뭐냐?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제사제도였고 그 제사에는 일반인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테두리를 만들었습니다. 100규빗×50규빗(약 50미터×25미터) 크기의 직사각형을 만들어놓고 성소에는 레위인이라도 못 들어가고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고 제사장이라도 그냥은 못 들어가요. 제사장이라도 피를 뿌리고 들어가야 돼요.


그 피는 어디서 구하는가? 피는 백성들이 바친 흠 없는 양에서 피를 구해야 하는데 어떻게 구하는가? 피가 혈관 속에 있을 때는 피 때문에 외부의 물체가 살아 있거든요. 그런데 그 피가 혈관으로 흐르지 않고 이탈해서 외부로 쏟아져 나오면 그 양은 죽게 돼요. 그래서 레위기에서는 피는 생명(레 17:11, 14)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이 혈관에 흐르는데 바깥으로 흘러나오면 거기는 생명이 없는 거예요. 그 피를 뽑아서 이쪽에다 뿌리는 거예요.


그 피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면, 흠 없는 피에요. 흠 없는 피를 뿌려서 그 차이를 분명히 하고 그리고 분명하게 고정된 차이기 때문에 확정된 개념이거든요. 이것은 내 아이디어가 아니고 주님께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약속이기에 의심치 말고 그 피 믿고 그 피 뿌리고 들어가야 됩니다. 만약에 제사장이 피로 가다가 주춤주춤 하면서 ‘피 달라 해놓고 혹시 다른 것, 돈 달라고 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주춤거리게 되면 확정됨에 대한 불신 때문에 그 제사장은 죽게 됩니다. 제사장직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입니다. 왜, 조금만 수틀리고 조금만 정신이 이상하게 되면 큰 일 나요.


그 때 나답과 아비후가 소주를 먹었어요. 왜 소주를 먹었는가 하면, 인간이 기계가 되어서 늘 하던 대로 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어요. 하던 대로 하다가 소주 먹고 기분 좋아서 제단불이 아닌 다른 향로불을 들고 갔다가 졸지에 죽었습니다. 너무너무 무서운 곳이에요.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바비큐가 되어서, 홀라당 다 타서 죽었잖아요. 언약적죽음의 저주를 받은 거예요. 제사장이 그렇게 죽어나가는 것도 모르고 백성들은 좋다고 있는 거예요. ‘제사장이 알아서 잘 하겠지.’ 본인들은 지금 벌벌 떠는데.


이제는 우리가 떨 필요는 없습니다. 담대하라, 당당하게 주님 앞에 나가라는 말은 이미 주님께서 그 차이를 확정, 그 차이를 분명히 한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확정된 그것에 대해서 협조해 드립시다. 협조한다는 말이 어폐가 있지만 협조해 드립시다. 어떻게 협조할까요? 나는 뭘 해도 죄인이고 나의 구원은 이미 다른 근거, 다른 바탕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 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 십자가 피로 확정된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그게 구원파 아니냐고 나오는데 구원파는 자기존재의 정당함을 위해서 피를 이용한 거예요. 구원파도 그렇고 박옥수도 마찬가지고 그쪽 계통 다 마찬가지에요.


자기존재의 정당성인데 이렇게 되면 존재의 정당성이 아니고 우리가 만약 구원파라면 구원파 자체도 뭐가 된다? 죄인 것을. 십자가마을도 자체가 죄인 모임인 것을. 보세요. 죄인이잖아요. 꾸벅꾸벅 졸고 죄인 맞잖아요. 이 자체가 죄인인 것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수용해야 돼요. 우리가 조는 것은 지금 주님의 일에 협조하고 있는 겁니다. 말이 좀……. 차이를 분명히 하는 거예요. 이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마음이 오래 지속이 안 되지요.


베르그송이라는 철학자에 의하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외부의 새로운 상황이 감각되고 지각되기 때문에 어떤 복음생각, 은혜 받았다 하는 그 순간이, 교회 문 열고 나가게 되면 새로운 상황이 맞닥뜨리기 때문에 지속의 원리에 의해서 곧장 사라져버립니다. 따라서 존재라는 게 그만큼 위험해요. 나는, 나는, 이게 주체지요. “나는 복음을 알았으니 이제는 구원을 얻은 사람이다.” 하는 순간 그 나 속에 그 나가 복음에는 관심 없고 새로운 상황으로 바뀝니다. “어, 그 때 그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그 나가 없지? 왜 나는 딴 짓 하고 있지?” 이렇게 되어버리면 갑자기 본인이 불안해져서 이 차이성 자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돼요.


그래서 주께서는 그 사람을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해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 존재를 지키는 일이 다 무용지물로 되는 사태를 줘서 다시 한 번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할지라도 그것은 고무풍선에 훅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너는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너는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거야.” 차를 박았다. “주여, 제가 기도하고 운전했는데 왜 차가 박힙니까?” “그게 너의 힐링이야. 너의 치료야. 치료하기 위해서 박았어.”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금 주께서 치유 잘 하고 있는데 자꾸 치유해달라고 하면 안돼요. 너는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자꾸 남 흉내 내지 말고 너는 너만의 그래야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집단적 개념에서 깨지고 개별적 개념으로 흩어지기 시작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집단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을 메타조직, 자기보다 상위조직에 떠넘기는 겁니다. 국가라는 것은 없는데 개인이 모여서 국가 되었다는 상위조직을 일부러 만들어놓고 거기에 모든 책임을 다 넣는 거예요. 그 상위조직에 자기책임을 다 맡기는 식으로 가짜 이스라엘은 나중에 뭐로 바뀌는가? 이것이 국가형태로 바뀌면서 왕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조금 진도를 더 나갈 수 있는데 이런 상태로 나가버리면 여러분이 내용을 감당을 못합니다. 그래서 약간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국가체제가 되면서 그 안에서 피가 발생돼요. “임금님, 아니되옵니다. 통촉하옵소서.”라는 선지자가 등장해요. 선지자는 사건입니다.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선지자가 이실직고를 하면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할 때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국가 왕이 유사선지자를 양성합니다. 이것은 가짜 선지자에요. “너 아니라도 선지자 많다.” 그래서 무려 850대 1로 엘리야하고 바알선지자 850명이 붙습니다. 뭘 로 할까요? 고스톱 칠까요? 아니면 가위 바위 보로 할까요? 무슨 게임을 해서 판정이 나겠습니까?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거론하지요. 따라서 이 바깥 통, 이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여러분들의 죄를 뽑아내서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는 그 희생을 부각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돌을 열두 개 쌓음으로서 옛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 전의 요단강 건널 때의 상황을 연출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물통 넷을 세 번, 4곱하기 3은 열두 통입니다. 곱하기의 의미는 뭐냐 하면, 양에서 질로 바뀌는 의미의 곱하기를 합니다. 그냥 들어놓으세요. 그런 게 있습니다.


곱하기를 함으로써 열두 통의 물을 길어다 그 쌓은 단에다 붓습니다. 물 천지죠. 여러분, 물 천지가 되었을 때 과연 이 제물을 하나님께서 불로서 응답하겠느냐, 하는 그 문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부분에 피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피가 있어요, 없어요? 피가 안 나오지요? 그게 중요한 점이에요. 왜냐하면 갈수록 형식적인 피의 반복에서 피 자체가 양의 제물에서 희생자가 짐승이 아니고 차츰차츰 어떤 인격, 인간으로, 희생의 대상이 인간으로 바뀌는 과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신약에 와서는 직접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는 올 인 하게 될 때까지의 철로, 그 궤도가 중간부분에서 인격자로 바뀌게 되어 있어요.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라는 사람이 천사를 대접할 때 불량배들이 천사하고 동침하겠다고 왔을 그 때에 롯의 대처가 뭡니까? “아저씨들, 제가 맛있는 것 대접할 테니 돌아가세요. 돈 드릴까요?” 이렇게 했습니까? 뭘 내놓았습니까? 뭘 내놓았지요? 주님의 심판이 그냥 심판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희생, 주님 때문에 발생하는 희생물이 동반해서 같이 드러나는 거예요.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 시집갔다가 이혼해서 친정에 와 있는 40대 고물 딸이 있는데 드릴까요?” 그런 식으로 했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아직 시집도 안간, 물 좋은, 그야말로 처자 두 딸이 있는데 대신 이 딸들을 겁탈하고 저 사람은 손대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이야기한 롯이 신이 났어요? 기분 좋았겠습니까? 아프지요. 이게 희생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해서 좋겠다만 그 심판을 증거 하는 본인은 자기존재가 잘려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건의 개입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그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언약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우리에게 희생이 일어난다. “그런데 목사님이 아까 말한 대로 우리가 죄인이라면서요?” 죄인이기 때문에 희생도 아무소리 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죄인이기 때문에. 말만 “죄인입니다. 죄인입니다. 주의 피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구원파 돼요.


“죄인이기에 나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해도 저는 아무소리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할 때 “진정 네가 죄인인 것을 아는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무슨 힐링이 필요하고 무슨 원상복귀가 필요합니까? 죄인이 무슨 더 이상 욕심을 내요. 주어진 상황 자체를 주의 피사건의 개입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졸지에 죄인으로 드러나고 그걸로 우리는 감사하면 그만이잖아요. 우리가 다 전부 죄인이잖아요. 우리 십자가마을 지금 강의 끝날 시간이 넘었는데도 아무소리 안하잖아요.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203.♡.42.222) 14-08-09 09:48 
2014여름수련회(낯선 경계선) 출애굽기 제 5강


출애굽기 3장 1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만났는데 그러면 하나님 안 만나면 구원 못 받는 겁니까? 성경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났다. 우리는 하나님을 구경도 못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 만나는 것은 옛날 방식이고 요즘 방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방식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야산 계곡에 물 내려오는 것을 찍기 위해서 카메라 들고 올라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내려오면서 “아무개야, 여기는 신성한 곳이다.”라고 천사가 나타나면 우리가 이래야 됩니까? “천사님, 왜 자꾸 옛날 방식을 사용하십니까? 저리 가세요. 나는 당신을 안 만난 것으로 치겠습니다. 우리 요즘 방식으로 합시다. 찾아오시고 그러면 곤란합니다. 아, 되게 따라오네. 오지 마세요. 난 당신을 안 만난 것으로 치겠습니다.” 이렇게 강제로 떠밀까요? 어떻게 할까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다. 따라서 모세 만난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이 아니라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시작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된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찾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거부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그 찾아오심이 모세한테 왔다면 찾아오지도 않은 우리들은 그냥 방치되는 것인가, 소외되는 것인가, 우리는 배제되는 것인가,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기도원에 하나님 보고 싶다고 매달리는 사람도 있고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들 죽이겠다고 바치고 하는데 여러분, 자기 자식 하나님께 바칠 필요 없어요. 안 바쳐도 늙어서 다 죽게 되어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안 바쳐도 인간은 다 늙어죽게 되어 있으니까 뇌물 쓰려고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대표적 만남입니다. 대표적 만남. 대표적 만남이라 하는 것은 누가 우리 대신 주께서는 부르시고 우리는 빠져 있으면서 그냥 빠진 채로 있으면 안 되고 그 대표적인 만남의결과를 주시하면서 대기하고 그 정상회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그 결정을 따르려고 대기상태에 있어야 되거든요.


예를 들면 성경에서 탐내지 말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 난 그 말씀 못 지킵니다.” 성경에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줬다고 하면 우리는 “못 지킵니다.” 하는 동시에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못 지키니까 아예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어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고는 “얘야, 남편 생일인데 미역국 좀 끓여라.” 하면 “저는 미역국 끓일 줄 모릅니다.” 그 때부터 그 며느리는 그 앞에 뭐가 붙어요. 그냥 며느리가 아니고 뭐가 붙느냐 하면, “미역국 못 끓이는 며느리”라고 딱 낙인이 찍히는 겁니다. 이게 붙어주게 되면 며느리는 대표적 만남이 요청되는 대기자명단에 소속이 돼요. 주의 말씀을 줬지만 나는 미역국도 못 끓이는 며느리이기에 미역국 잘 끓여서 천당 가는 대표자가 하나님과의 어떤 회담결과가 있느냐에 따라서 미역국 못 끓여도 구원받는 혜택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도 못 지킵니다. 이것도 못합니다.”에 멈추지 말고 그러니까 우리를 대표하는 대표자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의존하고 그 분의 처리에 일임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의 만남은 대표적 만남이에요. 대표적 만남이라면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바쁘시다는 분이 왜 그렇게 만나는 사람이 많은지 모세도 만나야 돼, 엘리야도 만나야 돼, 아브라함도 만나야 돼, 만나는 사람이 왜 그리 많습니까? 대표자가 한두 명이 아닌 거예요. 베드로도 만났고. 그렇다면 그중에 어느 사람을 나의 대표자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으로 이 만남의 내막을 우리가 살펴보자는 거예요. 물론 그 논리를 따지겠습니다만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난해할 때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제 속이 편해요.


마지막 주님을 만난 분이 사도바울이거든요. 사도바울이 있는데 주님께서 찾아왔습니다.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사도바울을 찾아왔는데 그 때 사도바울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했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찾아오신 거거든요.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어요. 나사렛 예수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핍박을 하지요.


예수를 믿는 사람을 핍박한 적은 있지만 예수님 당사자를 핍박한 적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무엇을 빨리 성사시키는가 하면, ‘내가 핍박했던 사람과 예수님과의 관련성이 어떻게 엮여 있는 것일까?’ 하는 겁니다. 나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핍박했지 예수님 만났다면 핍박을 안했을 거예요. “살아 계셨군요. 몰랐습니다.” 하고 존경해 마지않았을 거예요. 예수님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서 마음껏 “어디서 죽은 것을 부활했다고 해?”하고 마구 핍박을 했는데 막상 죽었다고 여기는 분이 나타난다면, 그러니까 유병언씨가 다시 나타난다면 “미안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지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어떻게 핍박을 해요?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그런데 예수님의 논리는 뭐냐 하면, “네가 나를 직접 안 만나도 이미 핍박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는 뭐냐 하면, 도대체 내가 핍박한 그 사람과 예수님은 어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로 엮여졌기에 그 사람 핍박한 것이 주님 핍박으로 확장이 되고 그대로 전해져 있는지, 그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그것이 사도바울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 만나는 대표자, 대변자, 또는 중보자로 여기고 자기는 직접 하나님을 안 만나도 구원이 돼요, 라는 사실을 그들은 믿고 있었고 사울이라는 사람은 ‘예수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고 그 엉뚱한 인물에 대해서 어설픈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껏 핍박하리라.’ 하고 핍박을 했는데 과연 그들 말대로 자기들이 핍박하니까 주님이 나서서 “나를 왜 핍박하느냐?”라고 나왔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보이지 않는 주님과 보이는 인간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기에 이쪽 건드리면 머리가 반응을 나타내는 한 몸체가 되었는가, 그것이 상당히 신기하게 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흑마술, 백마술 한답시고 인형 만들어서 바늘로 찍으니까 어, 하고 이쪽 또 찍으니까 헉, 하는 그런 겁니까? 공간을 초월해서 뭔가 기(氣)로 연결되어 있는 겁니까?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시작은 바로 사도바울의 주체적 의식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사도바울은 “네가 핍박하는 예수님”이라는 이 단정적인 결과가 그대로 사도바울의 주체의 본래의 내용으로 들어와 버렸어요.


들어오게 되면 ‘내가 핍박했기에 주님을 핍박했다.’ 가 아니라 나 자체가 주님을 핍박하도록 되어 있는 주체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말은 뭐냐, 이제 자기 주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 흔들릴 필요가 없고 불안정할 필요가 없어요. 주체가 안정되었어요. 어떻게? 나는 주님을 핍박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도 그들이 예수님을 섬기거나 믿은 사람들이 아니고 주님을 핍박했던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지금 결과가 이상하게 되어버렸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칫 잘못생각하면 주님을 핍박했다는 그것을 근거로 구원받는 혜택을 누린 게 되어버리지요. 그것은 출발점을 내가 시작했고 결과가 주님 쪽이라면 그렇게 되는데 사도바울에게 먼저 찾아왔다는 말은 주님 쪽에서 먼저 너한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창세전에 이미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도록 결정된 그 사항이 사울에게 새로운 주체의 내용으로 이제는 들어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지만 미역국 못 끓이는 며느리는 “어머니, 저 미역국 못 끓입니다.” 하고 “여보, 이혼해. 미역국 잘 끓이는 여자 만나.” 하고 갈라서면 안 되고 “내가 다른 국은 다 할 줄 아는데, 소고기국도 끓일 줄 알고 북엇국도 끓일 줄 알고 다 할 줄 아는데 하필 빠진 게 미역국 못 끓이는 거예요.


미역국 못 끓이는 그것을 잡아서 너는 미역국 못 끓이는 여인이라는 것으로 말미암아 네 남편을 핍박하는 여인으로 만들어서,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억지지만 어쨌든지 그렇게 만들어놓고 미역국도 못 끓인다고 지적하시는 그 시어머니 곁을 못 떠나게 만드는 그 단단한 본드 같은 역할로서의 새로운 주체를 양도받고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 주체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바로 중보자, 예수님 본인의 주체에서 흘러들어온 겁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그 주체가 이제는 구원받는 모든 사람들의 주체로 스며들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버림받아도 마땅한 존재입니다.” 그게 바로 대표자와 그 대표자를 따를 수밖에 없는 구원 받기로 작정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끝.


주체가 안정돼야 돼요. 흔들리지 말아야 돼요. 내 쪽에서 원인을 끄집어낸다면, 그래서 내가 원하는 메시아, 내가 원하는 중보자를 내가 선택한다면 어떤 사람을 핍박할 경우에나 핍박이지 평소에 사도바울이 잠자고 있는 그것이 핍박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의 주체는 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를 핍박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 그런데 내가 아침에 밥을 먹는다? 이것은 나쁜 짓이 아니지.’ 나쁜 짓과 나쁜 짓 아닌 것을 구분지어서 이것은 나쁜 짓 아닌 것, 이것은 나쁜 짓, 이렇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쁜 짓 아닌 것만 수정하고 개선해나가면 합쳐서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은 기존의 주체를 옹호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부여받은 주체가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는 주체가 되기에 본인 스스로가 중보자가 되어버렸어요. 이해를 잘 못하시는 것 같아서 새로운 이야기를 해서 이해를 돕겠습니다만 기대는 안합니다. 상상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신도 인간이 필요하고 인간도 신이 필요한 그 관계가 인간들이 상상한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이 영광 돌리니 좋지요? 하나님도 인간이 없으면 심심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피조물에게 영광 받으시니 좋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신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으니 우리가 영광돌리겠습니다.” 이게 신도 인간이 필요하고 인간도 신이 필요하다는 것,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데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가는 길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그게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이게 인간의 상상이거든요.


상상을 구체화시킨 것이 상징적인 하나님관계입니다. 이것은 종교제도에요. 종교제도와 형식과 반복적인 규칙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도 만족하고. 창고를 새로 건축해 놓았는데 십일조를 드리고 그 다음날 가보니까 창고가 가득 찼어요. 의심치 말라, 시험해 보라고 했으니 창고를 지었다는 말이지요. 창고를 채우는 방법은 간단해요. 신용대출? 아닙니다. 제3금융권대출? 아닙니다. 십일조만 드리면 새벽 3시 몇 분에 이미 창고가 가득 채워져 있는 거예요. 말라기에 나옵니다.


윈윈, 서로 만족하는 거예요. 어떤 특정제도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겁니다. 2시 예배는 안돼요. 11시 예배에 와야지. 11시 큰 예배, 낮 예배에 와야지 뒤 늦게 오후예배, 2시에 하는 예배에 참석하면 축복의 감이 좀 떨어져서 행운이 적게 들어오는 겁니다. 이처럼 어떤 특정행동을 그대로 하게 되면 똑같은 효과를 반복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인간도 만족하고 하나님도 만족하는 것이 상징적인 하나님관계입니다. 상징이라는 것은 문자, 기호라는 뜻이에요. 상상한 것을 법으로 구체화시키면 이게 상징이 되는 겁니다.


이게 종교제도, 종교단체라 하는 것이 그 다음에는 실재, 진짜 실재의 하나님은 뭐냐 하면,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이 원수관계입니다. “너 죽었어.”하지요. 그래서 인간들이 신을 찾는 것은 진짜 다가오는 하나님을 피해보려고 신을 찾는 거예요. 인간이 신을 욕망하는 것은 진짜 신이 만들어준 현실을 외면하고 내가 그리워하고 내가 원하는 신과 하나님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혼신을 다해서 매달립니다. 그토록 매달려요. 그러나 중보자 되시는 하나님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지요.


예를 들면 애가 하나 있는데 맨날 학교 가서 사고치고 부모가 학교에 불려가고, 사고 치면 또 부모가 불려가곤 했다 이 말이지요.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 불러서 부모가 학교에 가요. 그런데 이 철없는 애는 “나 우리 담임 꼴 보기도 싫어. 엄마가 이야기해.” 하고 자기는 딴 짓하고 있습니다. 엄마가 면담하고 나오면서 “얘야, 오늘 너 뭐 먹고 싶니?” “나 오늘 짬짜면 먹을 거야. 자장면과 짬뽕 다 먹어야지.” “그래, 먹자.”하고 사줍니다. 애는 “야, 맛있다.” 하거든요. 그러면서 “엄마, 내일 또 사줄 거지?” 엄마가 “너, 오늘부로 퇴학당했다.”


지금 애는 부모하고 선생님하고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관심이 없어요. 자기는 그저 먹고 싶은 것이나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만났어요. 십자가에 죽어야 자기 백성의 죄가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철딱서니 없는 인간들은 짬짜면만 찾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 땅에서 고생 많은 인간들 행복하고 풍족하게 사는 것만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정작 아버지는 아들 만나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전혀 고려 못하고 그저 상상한 하나님, “하나님, 저 필요하지요? 제 찬양 필요하지요? 법적으로 지켜주시면 자동적으로 복 주실 거지요?” 상상과 상징에만 매달려 있어요. 실제로 하나님을 소개하니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서 도망치면서 나름대로의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하나님 섬기는 방법을 본인이 할 수 있는 역량대로 만들어서 자기가 스스로 법이 되어서 스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난리를 치는 거예요.


이번 강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종교나 모든 기독교는 잊어버리자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자신을 대변할 수가 없고 대변자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따로 있어서 그분이 내가 현재 쥐고 있는 주체를 완전히 바꿔버려요. 무엇의 주체로? 본인의 주체로 바꿔버립니다. 그 분 본인의 주체가 어떠냐 하면 그 분은 진짜 하나님을 만났던 분이거든요. 만났던 분이 생각하고 봤던 그 세계관을 우리의 주체에 집어넣습니다. 그렇다면 짬짜면 생각은 사라지고 우리는 미역국도 못 끓이는 며느리, 죄인으로 낙인찍히지요.


그렇게 낙인찍혀도 즐거운 이유는 낙인을 찍어주신 그 분이 책임지고 천국과 영생을 해결했기에 해결했다는 통지를 주기 위해서 “너는 미역국도 못 끓이는 며느리”로 낙인찍어 주시는 그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인.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다고 했어요. 그 십자가, 아버지와 아들과 담판 지었던 그 십자가, 그 십자가 말고 나는 다른 자랑거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 앞에 서야 나는 미역국도 못 끓이는, 미역국도 못 끓여서 지옥가야 마땅한 그런 존재로 분명히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나의 위상과 위치가 결정 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만났다는 이 사실은 이제는 우리가 대신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하고 이렇게 해야 돼요. “모세야, 하나님 만나서 너나 실컷 당해봐라.”라는 식으로 우리는 이 본문을 봐야 되겠지요. 이 본문을 보게 되면, 모세가 먼저 하나님을 만났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졸기 전에 정신 바짝 차렸을 때 후딱 해야 돼요. 다수의 집단성을 하나로 만들어요. 숫자가 많아요. 열 두 지파가 씨를 많이 퍼뜨렸거든요. 그 다수의 집단성을 하나, 숫자로 하면 1로 표기가 됩니다. 1로 표기한 그 분이 하나님과 만나게 돼요. 그러면 하나님은 하나인가? 이것은 몰라요.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시고 이방신은 다신이다. 따라서 하나의 신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그러면 숫자 하나를 믿으면 구원받는 거예요. 신은 하나이시라고 하면, 유일신을 믿으면 구원 받는 겁니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질 필요도 없네요. “여러분, 하나님은 유일신입니다. 아멘.” 그러면 다 구원받는 겁니까? 숫자가 적용되는 것은 인간세계에만 적용됩니다. 하나님한테는 숫자라는 자체가 적용대상이 안 되는 겁니다. “오직 중보자가 한 분이다. 따라서 중보자로 인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다.” 이것은 돼요.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인데 중보자가 한 분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따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 버립니다. 그런 오해가 생겨요.


그런데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의도한 거예요. 왜냐하면 오인이 있는 곳에만 반드시 진리가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진리라는 것은 실패한 장소, 우리가 시도했던 모든 실패한 것이 실패임을 들춰내면서 불쑥 올라오면서 진리가 튀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실패하는 것이 어쩔 수 없어요. 평생 실패합시다. 그 실패를 즐깁시다. 왜냐하면, 문제해결은 우리 쪽이 아니고 중보자가 해결했기 때문에. 대단한 빽이죠.


다수의 집단성을 하나로 하게 되면 간단하네요. 투표하면 되겠네요. 투표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만약 투표하는 인구가 40만 표라면 그 40만 표 중에서 20만 1표가 나오면 모세가 당선되어서 대표자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되겠네요. 이 방법 어떻습니까? 여러분 눈치가 이 방법은 안 된다는 눈치인데 이 방법은 왜 안 되는 거지요? 하나님을 대표로 만나기 위해서 한 분 뽑는다는데 이게 뭐가 잘못된 거예요? 여러분이 그걸 아셔야 해요. 투표해서 모세를 뽑게 되면 그 모세는 40만에 휘둘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한 표를 행사했다면 절대로 자기가 투표한 그 사람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찍어준 그 사람이 나에게 이용당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인간은 표 던진다고 자기 권리를 누구에 양도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누구에게 양도한다는 것을 몰라요. 이용이 있을 뿐이지, 상대방을 이용하려고 덤벼들지 양도한 것은 아니에요. 예수 믿는 것도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지 권리를 양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체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존재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지만 하나 깨보면 무려 40만이 들어 있기에 이 하나는 사실은 40만이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이 다수의 집단성이 하나로 된다는 말은 이 전체 존재 자체를 끊어버려야 돼요. 누구와? 이 모세와 40만을 끊어버려야 됩니다. 그 끊어진 상태, 40만이 아무것도, 어떤 상황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와 버리지요. 그 다음에 이 하나의 하나 됨, 모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 다수의 40만 히브리인들과 하나 사이에 뭔가 끊어진 사건을 주입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살인사건이에요. 살인사건, 또는 죽음사건을 여기에 집어넣습니다.


제가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은 죽음사건을 집어넣어서 이스라엘전체를 해석한다고 했지요. 여러분이 이 죽음사건이라고 하니까 어떤 점에서 오해를 하느냐 하면, 죽음에 두 가지 정의가 있어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죽음이란 1.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다. 2. 죽음은 공포스럽다. 여러분, 어느쪽이 맞습니까? 죽음은 사라진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이게 맞아요.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죽음이니까. 한 권사님이 “목사님, 죽는 것이 무섭습니다.” 하면 “인생 한 번 살다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아, 그렇군요.” “늙으면 죽기 마련이니까 그냥 차분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할 때 뭐가 해소가 안됐어요? 두려운 것, 이 두려움은 해소가 안 되지요.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면 되는데 왜 두렵지요? 불교 승려는 말합니다. “죽음이란 것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냥 자연에서 자연으로 돌아감이다.” 그러면 그 중한테 성질내면서 “에이 씨!” 하면 “엄마야!” 한다고요. 방금 죽는 것을 초연하게 맞이했다면서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면서 누가 성질내고 달려들면 당장 초연할 수가 없지요. 이론상 죽음은 사라짐, 혹은 없어짐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어요. 그 뭔가, 그 뭔가 세상 살면서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가 애를 아무리 써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비록 내가 죽어 없어진다는 그 점을 인정하고 믿는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자살한다고 물 깊은 곳을 내려다보면서 “아, 무서워라.” 하고 피하잖아요. 다리 밑으로 뛰어내린다고 내려다보다가 물살이 너무 세서 다음 날 와야겠다고 도로 간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죽음은 이겨도 죽음이 주는 공포는 못 이기게 되어 있어요. 이게 죽는 순간뿐만이 아니고 평소에 조용하게 자기 방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방에 있을 때도 갑자기 전기 나가면 무섭잖아요. 그렇게 말 안 듣고 뺀질거리는 애도 번개 치면 방문 활짝 열어 제치고 달려 나와서 엄마 침대에 개구리처럼 뛰어오릅니다.


<사운드오브뮤직> 이라는 영화 초반부에 보세요. 마리아선생님이 나오는데 갑자기 번개가 치니까 애들이 침대로 다 모여들어서 침대에서 뛰면서 노래 부르잖아요. 나중에 커튼 다 찢어서 애들 옷 만들어 입히고. 이 공포라는 것은 꼭 죽는 때만 엄습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나면 인간은 공포 속에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 속에 있는 거예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죽음 속에. 이것은 물리학으로 아무리 박사학위를 따도 이 공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더불어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 공포를 하나님께서 죽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산채로 죽여 버립니다. 어떤 죽음이 주어지느냐 하면, 자기가 경험했던 예상 밖의 체험을 만듭니다. 그게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떨기나무가 타지는 않는데 불이 붙었다. 그러면 불 따로 떨기나무 따로 입니다.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는 『하나님의 열심』이라는 책에서 이걸 오해하고 있어요. “여러분,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서 모세가 종이 되었으니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처럼 지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하는 겁니다. 네가 그렇게 해보세요. 그게 되는가? 주의 성령이 함께 있으면 교회 일도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진정한 주의 종이라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지금 이야기합니다. 지치지 않더라도 그 가운데 공포가 있다고. 지치지 않는 가운데서도 공포가 있는 거예요. 열심히 주의 일에 봉사하고 열심히 찬양하고 열심히 성경보고 하는 그 가운데서도 공포가 있어요. 새벽제단, 참 이 말 오랜만에 쓰는데 새벽제단에 앉아가지고 캄캄한데 기도해 보세요. 아무도 없을 때는 공포를 이기면서 기도하지요.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에 누가 문을 열고 드르륵, 하고 들어오면 “아이고!” 하고 기도고 뭐고 다 없어요. 그렇게 기도한 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사는 것 자체가 공포스러운데.


심지어 어떤 노인네는 자기 얼굴보고 놀라요.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할머니 치고 셀카 찍는 경우는 없다고요. 얼마나 혐오스럽겠습니까?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유명한 명언입니다. “내가 우에 하다 이렇게 되었노!” 떨기나무는 분리를 이야기합니다. 떨기나무 따로 불 따로 입니다. 왜, 불에 안탔으니까. 떨기나무를 재료로 해서 태우지를 않았으니까. 따라서 이 말은 뭐냐 하면, “모세야, 네 일을 하라고 내가 찾아온 것이 아니고 바로 내 일을 하기 위해서 너를 불렀다.” 하는 겁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불렀다면 무엇이 유지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 간격이 유지되어야 하지요. 아까 차이와 간격이야기 했지요. 간격이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이겁니다. 다수의 집단성, 다수의 집단성에서 하나가 될 때 이게 핵분열처럼 이 하나가 다시 점선으로 하나가 이렇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냐, 아니면 모세와 함께 있는 그분의 이름이 하나인가, 이게 분리가 되는 겁니다. 원통 두 개가 겹쳐져 있는 이 그림 또 안 그려도 되겠지요? 이것은 다 아신다 치고 다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릅니다.


따라서 하나님 쪽에서 관계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를 만드는데 그 주체를 만들면서 모세 따로, 모세와 더불어서 함께 계신 주님의 이름 따로, 이렇게 만듭니다. 그래서 모세를 추종하다가 주의 이름으로 나올 수 있는 경로를 모세 본인이 제공하는 겁니다. 죄인으로 왔다가 의인으로 구원받는 경로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한 것처럼 모세도 모세만 믿다가 주님을 믿게 된 그 경로를 그들에게 제시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들이 모세 믿는 것은 아주 간편합니다. 어떻게 간편한가?


투표를 한 적이 없지만 그들이 투표를 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모세는 자기에게 표 찍어준 사람들인 이스라엘, 현재 히브리인들의 말을 들어야 되겠지요. “우리가 표를 찍어서 당신을 대표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라고 하는 겁니다. 모세가 찾아왔는데요? 아까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잖아요. 모세가 찾아왔든 말든 이미 모세를 하나님이 보냈다 하는 순간 그들에게 그 하나님은 무슨 하나님이냐 하면 상상적 하나님이고 상징적 하나님이에요. 왜, 이들은 상상과 상징밖에 모르는 주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냈다고 하면 으레 그런 하나님인줄 알고 있다니까요.


이러한 모세와 하나님의 분리는 모세에게 찾아온 것같이 하나님이 찾아와 언약을 주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꼭 마찬가지에요. 아브람 따로 있고 아브라함 따로 있고, 이삭도 마찬가지고요. 은혜 받은 이삭과 실수한, 엉터리로 밀어붙인, 야곱보다 에서를 더 좋아한 그 잘못된 것, 아까 이야기했듯이 자기가 싫어하는 타입에 복을 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타입을 오히려 저주케 하는 그 현장에서 본인이 그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이삭, 그리고 야곱, 야곱 따로 있고 나중에 이름이 바뀐 이스라엘이 또 따로 있고.


언약 속에는 두 가지 속성을 다 같이 함유하는 대표자로서 미리 선택한 겁니다. 예수님도 속죄하는 기능만 있는 분이 아니고 아울러서 심판자잖아요. 공의와 자비의 두 가지 속성이 다 들어 있는 겁니다. 이걸 모세가 미리 앞당겨서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몰라요. 모세가 찾아와서 구원한다고 하니까 그 용어, 그 언어와 기호와 문자는 백성들이 당시 사용하던 문자이기 때문에 그 문자와 언어, 기호의 이해와 분석은 그들의 존재적인 주체에서 다 이미 접수를 하고 점령을 하고 말았어요.


“구원해 준다고요?” “고맙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렇게 따라왔다가 나중에 원망으로 끝나잖아요. 그만큼 그들은 처음부터 오해하고 오인하고 자기가 마치 구원받아야 될 자격자 인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모세를 따라 온 겁니다. 그리고 모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출애굽기 4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22절에,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이렇게 했습니다. 집단적인 그 단체가 아들들이 아니고 하나의 아들로 규정이 되고 말지요. 그리고 난 뒤에 2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문제 나갑니다. 모세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는 것은 분명히 뭔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죽이려 한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 당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 그렇습니다.


‘저 사람이 소경되고 못난 것은 반드시 죄를 지어서 그렇다.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은 것은 그만큼 우리보다 더 죄를 많이 졌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통용되고 있는 상식화된 우리의 주체의 바다에서 나온 오인이고 오해고 곡해입니다. 모세가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했을 것이다. 반대로 하면 모세가 제대로 굴었으면 절대로 하나님이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지 아니하면 이것은 애당초 구원의 출애굽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왜 당장 벼락 맞게 해서 죽일 수 없겠습니까? 당장 죽일 수 있는데 그냥 주께서 발로 차면 죽을 수도 있는 문제인데 모세를 죽이면서 그 뒤에 따라오는 부속반응들이 있어요. 그 부속반응들을 통해서 모세는 모세 이름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드러내는 사명을 띠고, 언약을 둘둘 감고 가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모세는 모세 이름이 아니고 피남편이라는 이름으로 모세가 가야만 했습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러분 부인이 여러분 보고 “피남편”이라 하면 기분 좋겠습니까? “당신은 피남편이다. 당신은 피하고 살아라.” 그렇게 되면 이상하잖아요.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출 4:26) 지금 애굽에 가서 구원하기 바쁜데 자기편끼리 토닥거려서야 되겠습니까? 모세하고 지금 하나님하고 동업자 아닙니까? 가는 와중에 자기들끼리 숙소에서부터 싸워서야 뭐가 되겠어요?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병사들 간의 내부폭력이 더 문제입니다. 합참의장이 그런 이야기 했답니다. 자기도 젊었을 때 사람들 많이 팼으면서 그런 소리 하면 정말 싫어요. 1974년도에 제가 군 입대해서 매일 같이 맞았습니다. 그걸 알고 저는 매일같이 안 때렸어요. 왜? 내 선에서 한 번 끊어보자 해서 결국 우리 부대는 완전히 폭력이 사라진, 폭력 없이도 잘 돌아간 군대가 되었습니다. 제가 군에 가서 하나 기여한 것은 그겁니다. “맞자. 그러나 때리지 말자.” 지금 내부적으로 자기 동업자끼리 때리면 되겠습니까? 죽이면 되겠어요?


예를 들어서 “주님, 선교하겠습니다.” 하고 필리핀 갔는데 가기도 전에 김포공항에서 하나님이 다짜고짜 죽여 버리려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들어가지도 못하게 집으로 와야 되지 않습니까?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정도도 아니지요. 아예 죽이려고 했으니까. 모세는 죽고 피남편으로 다시 태어난 그것은 개인의 구원문제가 아니고 네가 해야 될 본래취지가 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할례언약이 뭐냐 하면, 피입니다. 피라는 것은 근본적인 심판을 의미하는 겁니다. 심판이 한창 벌어지는 그 장소에 비로소 그동안 보이지 않던 영생, 구원이 그 현장에만 보인다는 겁니다.


심판 없는 곳에는 영생도 없고 심판 있는 그 장소에만 영생이 있는 겁니다. 부활, 그것은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 속에서만 그 다음에 부활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는 삶은 소생이지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안 죽은 사람이 많아요. 엘리야도 그렇고 에녹도 그렇지만 그걸 부활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언약에 의해서 살아나야 그것이 확고하고 고정된 영원한 운명으로 장착이 되고 고착이 되어버려요. 내 몸 살았다. 살아봤자 늙어서 또 죽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안되잖아요.


그러니 연세와 죽음과 아예 상관없이 다른 관계에 있어서 영생을 얻어야 그 다음에는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목 베인 영혼”이 나와요. 목 베인 영혼이 산자에요.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을 얻는다.” 이 모든 것이 언약에 의해서 죽어야지 그냥 살려고 애쓰다가 죽는 그런 것 말고. 그래서 영생 얻게 된,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산 사람은 진짜 연탄불 갈아도 순교입니다. 연탄불 갈아도 순교요, 차 운전해도 전도요. 저도 이쪽으로 이사 와서 십년 째 전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일체 말을 하지 않는 인내성이 있는 전도에요.


왜냐하면, 개 같은 자들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말아야 되기에 절대로 던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항상 대비되어 있어요. 언젠가 “교회가 어떻습니까?” 하고 물으면 그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하겠지만 “교회 좀 나가 보시지요. 영생을 얻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그런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말을 아낍니다. 보통 인내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데 ‘아니야. 전도해야 돼.’ 도를 전해야 되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그냥 계속 대기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우리 십자가마을만큼 전도를 많이 하는 단체는 없다고 봅니다. 아무 말을 안 해요. 그렇게 새벽 2시 3시까지 말을 많이 해도 “복음이 무엇입니까?” 해도 아무소리 없어요. “예수님이 죽어야 구원받지요?” “그래서 뭐가 좋은데?” 누구한테 이야기한다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고 내가 나한테 가르칠 용의가 되어 있을 경우에만 입이 열리게 되어 있어요. 나는 기껏 이것밖에 모른다고 상대방에게 자기 헛점을 공개할 용의가 되어 있는 이상 그것은 전도가 되고 자기 잘남은 전도가 아니고 자기자랑입니다.


“내가 예수 믿다가 이정도로 실패하고 이정도로 모르겠어.” 그게 전도에요. “그런데 나 같은 인간도 구원했다.” 이렇게 되어야지 “나는 완벽하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전도가 아니고 남 약 올리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약 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까지 열등의식이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모세보다 언약이 주도적입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은 진즉에 죽어야 될 입장이기에 백성 앞에 나올 때나 바로 앞에 나올 때는 반드시 그 점을 고려해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모세는 자기 말을 믿지 않는 바로 자기 말을 믿지 않는 히브리 백성들의 마음을 충분하게 이해를 하게 됩니다. 왜냐, 내가 그랬었으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 전할 때 충분히 인간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게 바로 인간들이니까. 그래서 모세가 바로 앞에 설 때는 바로가 어떻게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 이미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전쟁, 모세의 전쟁을 하지 않습니다. 뭘 하는가? 주님의 전쟁을 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의 전쟁에서는 누가 빠지는가? 모세 본인이 뒤로 물러나 빠집니다. 빠진다는 말은 자기가 그 사람을 전도한다든지 그 사람을 내 사람 만든다는 것이 없이 “그 다음조치는 주님께서 알아서 조치해주세요. 다만 제가 필요하다면 그 현장에 제가 나서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나서게 되지요.


그런데 모세가 초반에 이렇게 했어요. 초반에는 그랬는데 나중에는 그렇게 못했습니다. 나중에 왜 그렇게 못했는가 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종이지 아들이 아니거든요. 결국 인간적인 한계를 드러냅니다. “에이, 씨! 저렇게도 말을 안 듣고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몰라.” 하니까 갑자기 주님이 와가지고 모세한테 “네가 왜 성질내나, 네가? 네가 왜 성질을 내?” “말을 안 듣잖아요.” “너는 내 말 들었나?” 갑자기 사람들을 자기백성인줄 알고 착각을 해버린 겁니다. 그래서 모세는 결국 주의 이름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세도 결국 백성들 편에 있는 거예요.


결국 구원은 모세 더하기 주님이 아니고 오로지 끝까지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가 되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관리자(IP:203.♡.42.222) 14-08-09 09:49 
2014여름수련회(낯선 경계선) 출애굽기 제 6강


출애굽기 4장 26절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모세가 예뻐서? 아닙니다. 모세가 자기의 동역자라서? 아니에요. 모세를 놓는데 근거가 있어요. 어떤 이유 때문에 모세를 죽이지 않고 살려두셨습니까? 그것은 아내가 아들의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아줬습니다. 그러면 할례를 행한다는 이 아이디어는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이 할례언약 때문에 모세가 죽을 뻔 했다가 하나님 손에서 살림을 당했습니다. 이분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도대체 우리가 상상한 하나님은 뭐가 빠져 있어요? 할례언약도 빠져 있고 다 빠져 있지요. 언약자체가 빠져 있지요.


“나 여기 있으니 날 살려주세요.” 그것뿐이거든요. 나 여기 있음, 나라는 존재 여기 있음에 날 살려 달라는 거지요.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서 온 하나님이냐 하는 겁니다. 할례언약이 피가 없는 하나님과 피가 있는 하나님, 그 두 하나님의 전쟁이 시작되는 거예요. 하나님 안 믿는 사람과 하나님 믿는 사람의 전쟁이 아닙니다.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간의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 믿는 사람과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힌 사람의 전쟁이에요. 그러니까 이 출애굽이라 하는 것이 정작 구원받는 히브리인들도 출애굽을 이해 못했으니까요. 구태여 나갈 이유가 없는데 왜 자꾸 나가느냐는 거예요. 왜 자꾸 집을 나가요. 그냥 집에 있지 왜 자꾸 나갑니까? 나가면 산에나 들어갈 뿐이에요. 어디로 갈 데가 있어야지요. 갈 데도 없으면서 나가기는 어디로 나갑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상식화된 “갈 데 없다. 죽어도 이 세상과 함께 죽자.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다.”라는 이것이 우리의 보통의 삶입니다. 거기에 언약을 이야기하고 출애굽을 이야기하니까 출애굽이 얼마나 우리한테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럽고 가슴에 와 닿지 않고 마치 옛날의 에피소드가 지금은 전혀 현실성이 뚝 떨어져서 전혀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들리는 겁니다.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고 한다면 “그때는 그랬겠지. 지금은 그런 일이 안 일어나니 나는 성경 못 믿겠다. 믿게 하려 한다면 또 다시 홍해 한번 갈라지게 해 봐라.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까지 갈 것 없이 요 앞의 계곡물이라도 갈라봐라. 그러면 믿겠다.”라고 나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심판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무슨 구원을 논합니까?” 우리가 심판을 몰라요. 심판은 하나님이 오셔서 실시해줘야 심판이란 게 성사됩니다. 우리 자체적으로 심판받는 거요? 우리가 알아서 다 했어요. 나쁜 짓 하는 사람 있으면 잡아가두고 될 수 있는 대로 우리에게 해로운 것이 안 오도록 알아서 조치를 다 한 거예요. 그게 무슨 나라냐? 바로왕이 지배하는 애굽 나라입니다. 애굽나라가 뭐냐 하면, 집단성이거든요. 집단에서 대표로 누굴 뽑았습니까? 바로왕을 뽑았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질서가 유지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애굽이에요. 간단한 겁니다. 백성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바로가 정치적 책무를 다할 때 그 사람은 존경받는 왕이 되고 제국은 굳건하게 번영하고 그 안에 있는 다수의 백성들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정감을 얻는 이것이 전부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심판받을 상황인 것을 이 자체 내에서 그 이유를 찾아낼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찾아낼 수가 없지요. 이게 최선인데요. 더 이상 하지도 못해요. 아주 완벽해요. 완벽하니까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뭐든지 잘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부가 되어서 우리나라를 찬미하고. 아, 대한민국! 노래를 부르면서 꿈은 이루어진다고. 그래서 우린 이 나라를 사랑하고 좋아합니다. 더 이상 욕심도 없어요. 우리나라만 잘되기를 바랄뿐이에요. 그저 우리나라 잘되면 그 정도로 아주 소박하게 만족하는 거예요. 이런 나라가 심판받을 어떤 죄악이나 폭행이 있다면 교도소 지어서 자체적으로 해결해 버려요. “어디서 선한 나라에서 비 문명국가에서나 있을 폭력사건이 일어나나?” 해서 교도소에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어떤 여자가 남자 둘을 샌드위치처럼 포개진 것처럼 하고 있다. 희한하다. 다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이런 여자가 있으면 체포해서 법으로 처벌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건전하고 살만한 세상에서 사는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의 나라가 아닙니까? 그러면 되었잖아요. 종교요? 절이나 교회나 성당? 그것은 국가를 위해서 봉사하면 되는 거예요. 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데 서로 사랑하며 기여하면 되는 겁니다. 우리의 24시간 관심사가 이것뿐이에요. 태극기 휘날릴 때 눈물 흘리면서 “대한민국은 영원하라!” 기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이잖아요. 교회가 할 일이고.


심판?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뭐가 잘못되어서 심판을 받습니까? 심판받는 이유를 여기에서는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당사자 모세도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냥 양이나 치고 있는데 왜 나를 불렀습니까?” 결국 심판은 우리에 대한 심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이런 식으로 자족케 하는 주의 이름의 원수에 관한 전쟁의 선포가 심판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의 원수, 주의 이름이라는 분이 계셔요. 그 주의 이름의 원수. 우리는 그 존재가 어떤지 우리는 모르지요. 모르는데 주의 이름이 활동을 개시하면서 주의 이름의 원수의 실체가 서서히 배후에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 첫 번째 등장한 것이 출애굽기 5장에 나옵니다. 5장에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제가 벌써 몇 번째 이야기합니다만 우리는 출애굽 할 때 누구 편에 서라고 했습니까? 모세 편에 서지 말고 어느 편에 서라? 바로 왕 편에 서서 이 바로 왕을 한 번 보세요. 바로 왕이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대통령이고 대통령한테 어떤 목사가 와서 “내가 제주도에 나라 하나 만드는데 전라도 사람 한 5천명, 강원도 사람 5만 명 내 줘.” 하면 “드려야죠. 왜 이제 오셨습니까? 마땅히 드려야죠.” 이렇게 합니까? 국회동의도 안 나는데 자기 마음대로? “준비 다 되어 있습니다. 내 드려야죠.” 이렇게 합니까? 뭐라고 하겠습니까?


“뭐라고? 뭐라고 했어! 여호와? 유 병언 때문에 시끄럽더니 이건 또 유 병언이 아니고 다른 게, 또 딴 게 설치네. 여호와라는 새로운 단체가 있나?” 그걸 왜 내줍니까, 우리가. 정말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나님이 모세한테 시킨 거예요. 그래서 논리 따라가면 복잡하기에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뭐냐 하면, 딴 거 아니고 강퍅입니다, 강퍅. 로마서 9장에서 11장에 언급한 거예요.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7,18) 하나님의 적은 뭐다? 우리 마음을 강퍅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퍅한 사람치고 절대로 강퍅하지 않습니다. 다 어질고 순하고 크리스마스 때 되면 크리스마스 씰도 사고 구제하고 자선냄비에 1억짜리 봉투도 넣고 그렇게 해요. 그런데 그게 강퍅이라니까요, 강퍅. 강퍅 안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어요. “노바디노바디!” 강퍅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로마서 5장 10절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자신의 피로 의롭게 했다고 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아무도 강퍅 안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건드리지 않으면 강퍅 안 해요. 주께서 일부러 건드립니다. 건드리는데 건드리는 그 문제 제기가 익히 잘 할 수 있는 것을 피합니다. “미역국 끓여라.” 우리가 못하는 것, 아브라함에게 그 많은 것 가운데 “네 사랑하는 아들이 있지?” “있습니다. 지금 컴퓨터 게임하면서 잘 있습니다.” “네 아들 내일 가야산에 가서 바치라.” 이런 거예요. 우리가 제일 아끼는 것, 다른 것은 다 내놓아도 이것은 못 내놓습니다, 라는 것을 유발시켜놓고 꼭 그것을 달라고 합니다.


“주여, 이것만은, 제발 이것만은. 모든 것을 다 드릴 테니 제발 그 여자만은 허락하소서.” 임 재범이 그렇게 호소했던, 노래방에서 그렇게 불러대는 그 “어찌합니까?” 모든 것을 다 할 테니 이 여자만은 허락해 달라는 바로 그것, 그것을 가지고 “드디어 강퍅하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손가락 가지고 우리의 주체에다 찔러봅니다. 찌르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본색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냅니다. 강퍅합니다. “주여, 안 아픈 데를 건드려 주옵소서.” 엉덩이 종기가 난다든지. 우리 힘으로 원상회복 되는 것만 경고적으로 찔러주면 정신 차린다는 게 우리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달라고 합니다. 우리가 내줄 턱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강퍅하구나, 그것이 바로 주님 원수입니다. 나는 너에게 모든 것을 줬건만 너는 모든 것을 준 자에게 아무 관심 없고 그것을 모독하는 차원에서 따로 주님이 관여하지 않은 나의 것, 내 노동의 열매를 꼭 쥐고 네가 있으면 내 자존심도 같이 있고 네가 있으면 내 자존심도 아직까지 손상되지 않고 있다는 그 마지막 최후의 증거물들을 우리는 꼭 쥐면서 우리는 우리이름을 끝까지 사수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의 원수가 우리와 함께 있는, 일곱 귀신이 우리와 함께 있는 증거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곱이고 어떤 사람은 여덟인데 그 숫자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때그때 달라요.


출애굽에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바로를 건드리면 바로만 화를 내는 것이 아니고 누가 같이 화를 내고 있느냐 하면, 막상 건짐을 당해야 할 히브리인들도 같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어떤 인물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훌륭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얼마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인지를 다 보여준 사람들이에요. 주님이 가까이 했다고 해서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예수입니다. 온 방안에 예수 얼굴로 도배를 하고 성경책으로 도배를 하고……, <오멘>이라는 영화에 보면 침대에 앉아서 모가지가 홱홱 돌아가는 장면이 있어요.


그걸 방지하겠다고 퇴마사 신부가 성경책으로 도배를 하고 마늘 동원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데 그 사탄아 물러가라, 그걸 누가 전문으로 하느냐 하면 사탄이 전문으로 해요. 사탄아 물러가라, 한 그 배후에 정말 무엇을 지키기 위해 그 짓 하고 있느냐를 보란 말이지요. 무엇을 지키기 위함입니까? 내 나라 내가 지킨다는 것 아닙니까? 향토 예비군 정신이에요. 내 것은 내가 지킨다. 내 것이니까 내가 지킨다는 겁니다. 그게 마귀라니까요. 그게 마귀에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많이 참았어요. 제자들의 본색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누구냐 하면, 가룟유다입니다.


가룟유다가 가장 용감한 사람이고 가장 인간적인 면을 보여줬습니다. 무슨 뜻이냐, 이 스승은 이 시대에 안 맞는 스승이라는 겁니다. 3년 동안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지만 그 보상은 부도날 입장이에요. 완전히 인생을 잘못 투자하고 잘못 바친 것 같아요. 처음에 병 고쳐주고 할 때는 뭔가 형편이 피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좋았던지 주님 안 계실 때 “야, 하늘나라 가면 누가 더 높겠는가?” 선거 끝나고 난 뒤에 자리다툼을 미리 한 거예요. 승리할 것이 분명하니까. 그랬던 사람들입니다. 자기 쓴잔 마실 생각은 전혀 안하고 쓴잔을 피할 생각만 하고. 그것은 출애굽이 아니고 애굽의 확장이었어요. 애굽의 리모델링, 애굽의 번성을 원했던 겁니다.


제자들은 바로 우리들의 대표자였어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고. 어느 누구도 그들은 주님의 일에 합세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래 그래야 됩니다. “목자를 치니 양떼가 흩어지리라.”(마 26:31) 하는 말씀이 이루어져야 돼요. 목자 치는데 양떼가 끝까지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입력이 잘못됐나? 다시 찍어 넣자.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어? 그런데 저기 저 붙어 있는 저건 뭐야?” 주님이 “컴퓨터가 고장 났어? 큰일이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목자를 치면 양떼가 다 흩어져야 드디어 또 다시 성공을 한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는 이 지금 주어진 현실은 그 말대로 주님이 함께 있음을 보여준 유일한 증거가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상황입니다. 다른 욕심 내지 마세요. 다른 꿈의 세계, “I have a dream.” 이런 것 하지 마시고 또 “You raise me up.” 제발 그런 것 좀 말리세요. 나를 높은 산에 올린다고? 올리면 또 내려올 건데 뭐하려고 올립니까? 왜 자꾸 지금 상황이 주님의 상황이 아니고 다른 상황이 될 때 주님의 은혜라고 왜 자꾸 상상을 하고 상정을 하는 거예요? 그만큼, 나한테 모자라는 그 만큼 우리한테서 강퍅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왕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지금 모세는 궁지에 몰렸습니다. 덩달아 아론도 궁지에 몰려서 “난 안하련다. 이렇게 환영 못 받을 줄 몰랐다. 나 안할래. 내가 왜 합니까?” 한두 번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 “내가 무슨 소리 하면 욕한다고 해서 나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거든요. 에스겔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 자기 마누라까지 죽여가면서 이용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아내가 죽을 테니 너는 울지도 마라.”(겔 24:17,18)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입니까? 그것 안 지키면 원수라고 취급해버리고. 도대체 하나님은 그냥 막가시는 하나님이에요. 인간들의 소박한 정돈된 마음까지라도 완전히 흐트려 버립니다. 혼란과 혼돈 속에 빠트려 버립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정신을 못 차리거든요. 정신을 못 차릴 그 때가 성령의 열매가 나올 때에요. “도대체 정신을 못 차리겠어.” 일 잘 되고 있습니다.


부모가 딸 시집가라고, 아들 장가가라고 그렇게도 성화를 부리면서 선보라고 해도 싫다, 싫다, 했는데 “에이 모르겠다. 네 마음대로 해라.” 해서 나중에 보니까 여자 친구라고 하면서 데려오더라는 말입니다. 일 잘 되고 있어요. 괜히 개입했다가는 실망만 더 크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가 뭐냐? 그것은 모세를 통해서 일어나는 기적에 의해서 원수가 드러나는 겁니다. 출애굽기 4장에 원수이야기가 나옵니다. 4장에 보니 모세보고 지팡이를 던지라고 했습니다. 던지니까 그게 뱀이 되었습니다. 지팡이가 악마의 존재라는 뜻은 아니고요 뱀과 관련한 기능을 한다는 뜻입니다.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라고 봐야 돼요.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이 절차, 이 과정이 사실은 주의 이름이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아직 주의 일은 실체가 없고 몸체가 없어요. 몸체가 있는 것은 팔다리 달린 모세니까 모세의 배후에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좀 어렵습니다. 이해하세요. 어렵기 때문에 쉽게 질문식으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만난 사람이 1. 애굽백성이다. 2. 바로다. 몇 번입니까? 정말 쉬운 문제입니다. 누굴 만납니까? 바로를 만나지요. 그러면 벌은 1. 바로만 받는다. 2. 애굽전체가 받는다. 이것은 몇 번입니까? 애굽 전체가 벌을 받지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애굽이라는 백성에 의해서 바로가 나왔다는 것은 이들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일자(一者) 또는 신, 또는 유일자(唯一者), 최고자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되먹임 할 때, 자기가 스스로 되먹임하게 되면 자기를 포함해서 더 큰 범주를 인간이 상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국가요, 신이요, 그게 인간을 초월해서 집대성한 일자, 최고신이 되는 거예요. 그런 현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가정에 식구가 세 식구라면 가정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정은 각자 자기를 대장질하지 않고 자기를 부분집합으로 만들어서 자기를 속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추상적인 이미지인 그것이 바로 가정이 되는 겁니다. 대학교, 대학교는 없어요. 대학교에는 캠퍼스가 있고 교수가 있고 직원이 있고 건물이 있지 대학교는 없잖아요.


하지만 대학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직원, 학생, 건물, 이걸 다 모아서 그걸 초월한 총 집합적인 이미지로 대학이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추상화라고 하는데 그 추상화에 의해서 어떤 자리를 지정해주면 그것이 우리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알튀세르가 한 이야기거든요. 주체라는 것은 국가가 어떤 자리를 할당을 해주면 그 할당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기가 주체라는 것을 발견한다는 말입니다. 경찰이 “어이!”하고 부르면 어떻게 합니까? 경찰이 “아저씨” 하고 부르면 어떻게 돼요? 경찰이 부르면 “저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어이!” 하면 ‘할아버지가 노망했나?’ 하고 가버려요. 왜 경찰이 부르면 서고 할아버지가 부르면 안서는 이유가 뭡니까? 자신의 그 자리는 국가의 공익에 따라야 손해가 없다는 이미 짜인 법칙의 체제속의 한 지점을 할당받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갇혀 있는 거예요. 어디에 갇혀 있는가? 내가 상상한 구조에 갇혀 있는 겁니다. 내가 상상한 구조에. 왕과 대통령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잖아요. 대통령은 주권이 국민한테 있지만 왕은 주권이 왕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는 왕이 있는 국가보다 더 나은가? 그것은 아니에요. 왜 아닌가? 대통령을 뽑아놓았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노리는 것이 왕인데 그 노리는 것이 왕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는 근사하게 모든 권리는 국민에게 골고루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입니다. 실제로 모든 권력이 국민한테 있습니까? 얼마씩 받았어요? 너무나 비현실적인 것을 가지고 사실은 왕을 원하는데 그 빈 공백을 그냥 메우는 거예요. 제대로 솔직하게 하면 히틀러가 괜찮고요, 전두환이 괜찮아요. 그냥 패버려야 돼요. 군대는 그냥 패면 돼요. 그건 왕이거든요. 민주국가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독재국가잖아요.


독재국가는 우리가 싫어하면서. 왜? 우리의 권리를 앗아가니까. 독재국가는 싫어하면서도 우리는 내 권리를 제발 앗아가 주기를 고대하는 이 이중성이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너무나 민주적이고 참 어진 목사님이다.” 그건 그 교회 규모가 작다는 뜻이에요. “우리 목사님은 독재다.” 교회 규모가 좀 크다는 뜻입니다. 독재 안하고 커질 수가 없어요. 전부 다 밟아야 일이 돼요. 법으로 말 안 들으면 패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냥 패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어디 나오나 하면 <유나의 거리>에 나와요. 모르는 이야기 하지 맙시다. 이것은 보편성이 떨어지니까요. 케이블방송에서 하는 드라마인데 말로 해서 안 들으면 패야 된다는 거예요. 요새 드라마 거의 안 보는데. 월화드라마죠. 9시 50분에 하는 거. 세상에서 빠져나온다고요? 혼자서 지리산 속에서 살고 싶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리산에서 가끔 내려와서 시장에 가보면 물가가 산속에 있을 때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올랐어요. 양파 값도 올랐어요. 지리산에서 기대했습니까? 양파 값 오르라고.


세상은 내 맘대로가 아니고 세상 자기 맘대로 시장이 돌아가고 자기는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종속돼야 됩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개인의 권리를 주장해도 그것은 이론상 그렇고 실제는 우리, 너 나가 모이는 어떤 보이지 않는 유령에게 다 같이 고개 숙이면서 사는, 그리고 그 유령의 실체는 전혀 모르는 거예요. 바로 그 유령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소속되지 않고 자유를 얻은 사람만이 그 유령에 대해서 언급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분이 바로 예수님에 속한 성도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자유하니까 돈 벌지 말까요? 그렇게 살까요? 그 자유는 전쟁을 위한 자유인데 나의 전쟁을 위한 자유가 아니고, 내가 맘대로 살기 위한 자유가 아니고 주님을 위한 전쟁을 위한 자유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주님과 우리 사이가 먼저 정립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정립이 뭐냐 하면, 너와 나 사이에서는 확정된 거리, 관계로 엮여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네가 하는 모든 것은 이제부터는 네 눈에 너의 원수 말고 주님이 원수가 네 앞에 목도되는 쪽으로 너희를 활용하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4장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손을 두 번 넣었습니다. 첫 번째 넣어보니 문둥병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지시 없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없이 자기 품속에 백날 손 넣어도 손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것은 내 영역, 내가 생각한 현실, 내가 주인공인 현실에서 내 맘대로 하니까 ‘나는 옳다. 나는 정당하다. 나는 바르다. 나는 저주받을 필요 없다. 나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명령에 의해서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는 명령에 의해서 넣고 보니까 졸지에 그 명령에 대한 결과는 내가 문둥병, 저주받은 자로 달라져 있습니다. 그 말은 주님의 지시를 받을 때는 반드시 주님의 언약적인 명령에 따르는 것과 너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것과 이런 차이가 나는 겁니다. 어떤 차이인가? 문둥병은 주의 전쟁에 참여될 수가 없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게 비로소 하나님의 군사가 가능한 겁니다. 내 힘으로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을 둘로 구분해요. “아무것도 못한다.”에서 주님이 시킬 때 아무것도 못하는 것과 내가 알아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 내가 알아서 아무것도 못하는 것은 진짜 아무것도 못해요. 진짜 아무것도 안합니다. 전에 우리교회 교인들 보니 이런 분들이 가끔, 가끔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아무것도 안 해요. 기도하라고 해도 안하고 아무것도 안 해요. 못한다고. 주님께서 시켜서 아무것도 안 하면 뭘 자꾸 해요. 자꾸 뭘 해놓고 “주여, 저는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냥 할 바를 했을 뿐이지 제가 나서서 아무것도 한 것은 없습니다.” 자꾸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쪽으로 모든 결과를 경험하게 돼요.


그래서 주님께서 나에게 일을 시키는 그 현실 말고 다른 주님이 만든 현실은 없다는 것을 느끼고 감사하게 되지요.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가 있는데 거기 보게 되면 반칙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가게를 냈는데 거기 와서 “누구 허락 받고 가게를 냈는가? 가게 하려면 자릿세를 내야지.” 하고 탁, 탁, 탁, 탁, 몸 여기저기를 친다는 그 말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누가 반칙을 하느냐 하면, 그 가게 주인입니다. “유단잔(有段者)가?” 하는 그 사람 말고 같이 붙는 그 주인이 반칙을 해요. 한쪽은 천천히 흉내를 내면서 말로만 탁, 이런 식으로 하는데 실제로 때리는 쪽은 가게 주인이라고요.


그러니까 전쟁은 누가 이기느냐 하면, 이미 가게 주인이 이기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제발 흉내만 내세요. 치는 것은 주님에게 맡기고 내 노동의 결과를 찾지 마세요. 우리는 뭘 해도 구원받은 것으로 얻을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전쟁준비를 다 했습니다. 주께서 잡고자 하는 것은 주의 원수를 드디어 서서히 나오게 하는데 제가 아까 주의 원수를 뭐라고 했습니까? 강퍅한 거예요. 그 강퍅이 바로부터 시작이 되는 겁니다. 왜 바로부터 시작이 된다고 했습니까? 바로는 추상적인 존재라고 했지요. 바로의 존재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애굽 나라의 모든 강퍅이 대표로 다 포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죽 나가서 진도가 훌쩍 진행이 돼요. 문제를 다시 살펴봅시다. 아까 했던 4장이 중요해서 다시 봅시다. 4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아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놓아주었지요? 할례언약의 피 때문에 놓아주었잖아요. 그러니 피 언약을 실시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지요. 그러면 그 외에는 전부 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작업은 뭐냐? 애굽을 치면서 또 누굴 쳐야 돼요? 언약을 모르는 자기백성도 같이 쳐야 되겠지요.


왜 같이 쳐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이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야, 너희들은 다 저 산위에 올라가. 올라가서 애굽나라 멸망 받는 것을 보면서 박수나 쳐,” 하고 아예 그들을 떼어놓고 일을 할 텐데 하나님께서 유월절 피 바르는 그 일을 누구에게 시킵니까? 구원받아야 된다는 이스라엘 사람에게도 양을 잡아서 피를 바르게 했지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결코 주님의 심판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그 신분 자체로서 면제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그 때 그 때 마다 주어지는 언약에 동참할 경우에만 그들은 구원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 자체는 구원의 대상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존재자체는 구원의 대상이 안돼요. 감자를 그냥 먹지를 못하고 채를 썰지요. 채를 썰면 가볍게 썰리잖아요. 그래야 감자를 맛있게 볶아서 먹는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애굽 나라를 치면서 덩달아 이스라엘도 같이 쳐버립니다. 첫째부터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는 이스라엘과 같이 받도록 해요. 네 번째 재앙부터 이미 지역이 갈라지면서 4, 5, 6, 7, 8, 9까지 멀쩡하다가 열 번째는 이스라엘 사람에게나 그들에게나 죽음의 천사가 찾아와서 다 심판을 공히 해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뭐냐, 할례언약만 도드라지게 남게 하는 것이거든요. 왜 그런가 하면, 마지막 열 가지 재앙 때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면서 그 전에 먼저 주어진 요건이 뭐냐 하면, “너와 너에 속한 이방민족이라고 반드시 할례를 행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양을 잡아서 문에다 발라라.”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모세가 살게 된 것은 할례언약, 그리고 모세에게 일어난 상황을 같이 적용시킨 이스라엘도 같이 할례언약으로 살아나면서 결국 이 승리는 이스라엘 승리가 아니고 언약을 실시하신 주님의 승리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항상 어떤 일이 되었을 때 “주여, 제가 승리했습니다.” 하는 말은 못 나오고 그 와중에서 오직 승리는 주님만의 몫입니다,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태를 우리에게 자꾸 일으키시는 거예요. 이 점에 있어서 좀 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재앙이 내릴 때 자연을 동원시켰습니다. 애굽에 있는 대자연과 사람들 이 모든 것은 다 재앙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데는 뭐도 동원된다? 대자연도 같이 동원되는 겁니다.


창조과학회라는 것이 있지요. 창조과학회가 복음적입니까? 창조과학회의 주장은 이겁니다. 신이, 하나님이 자연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상상계입니다. 신이 자연을 만든게 아니에요.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만들었어요. 서른세 살 먹은 나사렛 청년이 만들었어요.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예수님도 신인데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같은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가 뭐냐 하면, 신이 만들었다는 것과 예수님이 만들었다는 것의 전쟁 때문에 그래요. 신이 만든 것을 인정하니까 우리는 정당하다고 본 것을 주님은 뭐로 봤는가 하면,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했습니다.


뭐가 빠졌기에? 하나님의 언약. 어떤 언약? 피 언약이 빠져 있거든요. 피 언약이 없이 존재론적으로 모든 것을 신이 만들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대상이 돼요. 주님의 전쟁에서 적군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뭐냐, 신으로부터의 해방이에요. 신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주의 이름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신은 우리의 존재와 관련되어 있고 주의 이름은 사건과 관련되어 있어요. 할례를 행하면 구원 받을까요, 안 받을까요? 할례를 행하면 할례를 행하는 그 자체로 구원이 될까요, 안될까요? 구원이 안 되지요.


왜 구원이 안 되느냐 하면, 피 할례를 행할 때 어떻습니까? 할례를 행하면 다 피를 흘리니까. 그 피 할례를 행하면 구원이 됩니까, 안됩니까? 구원이 안돼요.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상징계에서는 인간은 주께서 지시한 대로 모방해서 그대로 반복해 내기에 그런 거예요. 따라하게 되면 뭐가 생기느냐 하면, 강퍅이 생깁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제가 이것은 양보 못합니다. 사람이 같을 일을 반복해서 하게 되면 강퍅해지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 찬송가 405장 처음 부를 때 눈물 흘리지요. 두 번째 불러 보세요. 역시 눈물 흘립니다. 그 눈물은 강퍅의 눈물입니다. 옛날에 이 노래 부를 때 은혜 받은 것을 생각해서 눈물 흘리기 때문에 그것은 제대로 된 눈물이 아니고 자기가 만들어 낸, 감정이 욱해서 나오는 눈물입니다.


벌써 가짜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상징계에서 뭔가 확정된 형식을 반복하게 되면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닙니다. 사건은 존재에게 ‘잽히지’ 않습니다.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고 ‘잽히지를!’ 않아요. 손에 ‘잽히지를’ 않습니다. 늘 잡았다 싶으면 내빼고 잡았다 싶으면 내빼요. 참기름을 발라 놓았는지 미꾸라지도 그런 미꾸라지가 없어요. 쏙쏙 빠져버립니다. 네가 나를 잡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잡고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의 교만과 강퍅을 지적할 수 있는 자리, 곧 우리와의 간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만하면 우린 동업자죠?” “미쳤나? 내가 너하고 동업을 하게?” 절대로 주님은 우리하고 동업하지 않습니다. 빠져나갑니다. 이 언약달성에 대 자연이 합세해서 움직인다는 이 말은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언약 이후에 천지의 모든 지진과 재앙과 에볼라 바이러스인지 뭔지도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변화는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 심판을 내리는 현장입니다. 에스겔에 보면 천사들이 이 땅의 동서남북 사방을 관장하는 천사들이 보좌에서 나와서 활동을 개시하게 됩니다.


그들은 바퀴안의 바퀴에서 지시를 받습니다. 그 바퀴에 누가 있는가? 사람의 모습을 하신 분이 등장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인자라, 사람의 아들이라는 분이 있어요. 이런 이야기가 얼마나 황당무계하게 들립니까? 현실성이 뚝 떨어지지요. 그런데 그것을 언약이라는 것만 생각해 버리면 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됩니다. 언약은 무엇인가? 언약은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주테마이다. 언약에 의해서 주님께서는 주의 전쟁을 찾아내시고 밝혀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원수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는데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주의 원수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시면서 우리에게 이 거룩한 전쟁에 참전하도록 조치를 하십니다.


따라서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다 주님이 벌리는 주의 인생입니다. 주의 원수와 네가 어떻게 차이 나는지를 우리한테 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출애굽기 12장을 봅시다. 출애굽기 12장 1절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 대목은 제가 읽지 않고 누가 읽어보세요. 시편 147편 20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스라엘과 그 외 다른 모든 나라를 구분하십니다. 철저하게 구분하셔요. 사람들이 오늘날 성경을 봤다고 하면서도 이 구분의 취지를 놓치고 있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무슨 설명을 해도 할 수가 없어요. “에이, 출애굽? 그건 옛날 역사에요. 왜 자꾸 합니까?” 다른 나라는 규례를 몰라요.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내신 거예요. 그리고 오늘 본문 12장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이것은 시간 자체가 이스라엘로 인하여 재정비가 되고 재 정돈이 되는 겁니다.


그 달이 4월 달인데 그 4월 달이 1월 달로 바뀌어요. 1월로 바뀌면서 시간이 직선적으로 지속된다는 그 인간의 생각을 벗어버립니다. 시간은 순환된다고 봐요. 1, 2, 3, 4, 5, 6, 7. 그리고 다시 1, 2, 3, 4, 5, 6, 7. 이렇게 순환이 되는 거예요. 이 7이 종말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달리 뭘 품고 있는가? 종말을 품고 살아갑니다. 남궁옥분이라는 가수의 노래 중에 “꿈을 먹는 젊은이”(1982)라는 노래가 있어요.


“타오르는 꿈을 안고 사는 젊은이여

우리모두 같이 흥겨웁게 노래해요

푸른 나래펴고 꿈을 먹는 젊은이여

성난 파도처럼 이 자리를 즐겨요

행복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는 것

괴로움은 모두 저 강물에 버려요

사랑과 욕망도 모두 마셔버리고

내일을 위해서 젊음을 불태워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꿈을 품은 것이 아니고 뭘 품었습니까? 종말을 품은 이스라엘이에요. 다른 나라는 자신의 미래, 종말을 몰라요. 그러나 유독 이스라엘한테는 반복적으로 종말을 품게 하는 겁니다. 종말을 품은 쪽과 종말을 품지 않는 쪽, 여기서 누가 승리하는가? 종말을 품은 쪽은 하나님편이고 품지 않은 쪽은 종말도 모르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이 전쟁입니다. 그래서 강의 내내 계속해서 전쟁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전리품이 되고. 이 종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카누를 타다가 절벽으로 미끄러지는 것처럼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전부 다 종말을 품었다는 뜻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래서 합쳐서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은 끝을 싫어하고 모르니까, 그 모르는 종말을 이스라엘에게 미리 담아서 이스라엘역사를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망하겠어요, 안 망하겠어요? 늘 망하면서 따라서 늘 새롭게 창조되는 겁니다. 왜 1,2,3,4,5,6,7인가? 안식일이 왜 1,2,3,4,5,6,7이고 왜 희년이 7×7+1이냐? 천지창조하신 하나님께서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7이라는 숫자, 이 숫자는 인간세계에만 통용된다고 했지요. 하늘나라는 그런 것이 없어요. 인간 세상에 인간만 통하는 숫자를 가지고 하늘나라를 묘사하는 방법은 늘 7마다 돌아오는 순환구조 외에는 다른 구조가 없습니다. 7×7=49도 그렇지요. 70이레도 그렇지요. 안식일 날의 7도 그렇지요.


그래서 아브라함하셀이라는 사람은 유대인인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시간으로 만들어낸 것이 성전이라면 하나님은 시간 속에 계신다는 유명한 책을 지었습니다. 제목『안식』이라는 책입니다. 상당히 잘 쓴 책이에요. 그러나 뭐가 빠졌습니까? 피가 빠졌어요. 십자가 피가 빠지니까 그것은 유대인을 옹호하는 강퍅한, 주의 원수가 쓴 책이 되어버렸는데 그 안의 내용들은 유대인의 사고구조에 대해서 알 수 있어서 그 책이 상당히 중요한 책입니다. 순환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직선이 아니고 순환이라는 것.


늘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 종말을 맞이하면서 그들은 오직 7일만 보장되는 날입니다. 그 보장되는 7일이란 뭐냐 하면, 주께서 종말에도 살아남게 하는 민족은 너희민족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십계명중 제 4계명에서 뭘 지키라고 했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거예요. 그렇다면 안식일의 이 내용은 역사가 흘러가면서 계속해서 추가됩니다. 처음에는 창조를 기념하라고 했다가 그 다음에는 애굽에서 종 되었다가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안식일 지키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의 추가가 예수님이 오게 되면 이미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번제를 원치 않고 오직 자비를 원한다고 합니다.


자비를 베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는 것도 안식일 날 주님이 하셨거든요. 죽은 자를 건져내는 날을 기념해서 안식일이 완성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지금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마세요. “목사님은 새삼스럽게 그걸 강조합니까? 전부터도 지킨 적도 없습니다. 마트나 다니고 세일 한다고 하면 거기로 달려갔지 안식일 지킨 적도 없잖아요.” 그것은 안식일 안 지킨 것도 아니고 지킨 것도 아니고 그것은 아니에요. 안식일을 지키지 말라는 말은 여러분 인생 자체에다 종말을 집어넣으라는 이야기에요. 주일날에도 맘 놓고 물건사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주일날 교회 오나 안 오나 관계없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매일매일의 여러분의 인생에다 종말을 집어넣어서 살라는 거예요. 말귀를 한 번에 좀 알아들으세요.


간음하지 말라고 하니 간음을 안 하면 된다는 거예요. 간음을 안 하면 그게 그 계명 지키는 겁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를 지키는 것은 사랑하면 되는 거예요. 진짜 속 터진다, 속 터져. 탐내지 말라는 것을 지키는 것은 탐을 안내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면 되는 거예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로마서 13장 8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9-10) 얼마나 사랑이 안 되었으면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겠어요.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왜, 사랑은 이미 여러분을 죄인으로 간주하는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너 죄인이었어.” 라는 지적질속에, 그 손가락질 속에 이미 피가 묻었기에 우리는 어떤 잘못과 상관없이 자체로 죄인으로 고정되었다는 그 즐거움, 그 즐거움이 언약 완성에 이미 우리가 가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녁 먹고 다음 시간에 해 봅시다.
 관리자(IP:203.♡.42.222) 14-08-09 10:07 
2014 여름수련회 7강


교안에 있는 결론을 보도록 합시다. 왜 결론부터 보려고 하는가 하면, 여러분들에 제 강의를 이해 못하는 것 같아서 미리 결론을 이야기해서 먼저 방향을 잡아놓고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교안 마지막 페이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생활 경계선 밖으로 밀어내고자 한다. 하지만 경계선이 밀려서 생긴 빈 공간만큼이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 속에 더 깊숙이 들어온 셈이 된다. 이는 추가적인 반항과 불평으로 인해 ‘약속의 땅’보다 더 낯선 세계를 맛보게 되는데 그것은 죽음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다. 사건은 경험을 유발하고 죽음의 힘을 뒤집어쓰게 된다. 그 힘 속에서 비로소 낯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 죽음이 보인다.”


왜 이렇게 결론을 말했는가 하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출애굽을 하면서 하나님이 바라는 문제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문제되지 않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인간의 생활 경계선 밖으로 얼마나 밀려났는가를 보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출애굽기를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해결해야 될 내 문제는 애초부터 없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이 땅에 왔는데 사람에게 밀린 그분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내 문제 해결하기 위해 교회 오고 기도하는데 이것은 애초에 부질없는 짓이 되고 공연불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우리는 우리대로 사는데 이곳에 어떤 분이 오셨는데 그분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밀려났습니다. 성도들이여, 밀려나간 분에게 관심 가집시다.” 이게 바로 복음이에요. 우리는 내 문제를 신에게 호소해서 그것을 해결하고 내가 기대하는 인생을 살려고 했는데 주님은 우리의 기대에 관심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은 그분입니다.


지난 시간에 알튀세르의 주체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다시 조금 언급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상상세계에서 할당받은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는 사회에서 우리를 호명하는 거예요. “당신은 이 회사에서 중요한 분입니다. 이 자리에서 일해주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미용사, 혹은 간호사라면, 그것이 그 사람의 주체가 되는 겁니다.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저는 간호사입니다.”라고 답하면, ‘이분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존재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합니다.”라고 했다면, 이것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주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사회가 보편적으로 동의했던 일이 아니거든요.


예수님 직업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무직자입니다. 목수는 어릴 때 했고,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신 후에는 백수였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 세상에서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본인은 ‘아버지가 시켜서 일한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이 백수로 사회 질서를 문란케 하니까 정치적 조치를 취해 처리해 버렸지요. 그들로서는 정당한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법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당연히 추방되어야겠지요.


예수님은 다니시는 곳마다 ‘날 죽여라.’는 식으로 문제를 일으켰어요.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하시니까, 사람들은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라고 했어요. 요한복음 10장에는 ‘너희들이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제 3자가 냉정하게 예수님을 볼 때는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스타가 되려고 했는데 그것이 먹혀들지 않으니까 결국 반란을 일으켜서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서서 메시아로 칭송을 받고, 자신의 사상을 뒤늦게라도 사람들이 받아들여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을 바랐다.’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생각한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라는 존재의 바다에서는 어떤 일도 시간이 흐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잠잠해 지고 원상 복구되는데, 예수님은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나서 계속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메섹에서 사울을 만났고,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가 생겼고--


우리는 출애굽기를 보면서 뭘 생각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일이 아닌 예수님의 일을 앞당겨 특수한 민족에게 임하니까 그들은 죽음의 힘을 뒤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옛날의 에피소드며 남의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찾아와서 나라자체가 엉망진창이 된 거예요.


갈 곳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무작정 애굽을 나왔어요. 그래서 그들은 계속 하나님을 원망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잘라냈습니다. 구원해 주신다고 해서 나왔는데 그들은 구원이 실패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광야에서 다 죽였습니다.


죽이려고 했으면 왜 불러냈습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 받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 하나님은 뭔가?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현대건설 이명박 사장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불도저를 타고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들이 죽어가도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왜냐? 경부고속도로를 만들어야했기 때문이지요.


할례언약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용하신 겁니다. 죄가 가득한 곳에서 어떻게 거룩한 생명이 탄생하는가를 보여주시려는 하나님의 무지막지한 작업 때문에 이스라엘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꼭 우리를 모습처럼. 나는 내 문제 해결하려고 왔는데, 내 문제는 아예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반드시 해결책을 기대하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수학문제집 뒷부분에 보면 반드시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문제를 제기하실 때는 인간들에게 해결책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문제 제기는 반드시 하나님이 해결책을 따로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성도는 자기문제 해결하려고 왔다가 주님의 문제 제기로 그 노선이 끌려 들어가서 그것을 아멘으로 수용하는 현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의 문제 제기가 뭔가 하면, ‘너희들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렇지만 너희들만은 예수님이 심판주요 구세주인 것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주님께 영광이 됩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함으로 아버지가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기도 내용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2-3).”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내 것은 다 어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요17:9-10).”


이런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나옵니다. 그동안 성경에서 뭘 봤습니까? 대중들 문제 해결해 주려고 교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상상한 가짜 하나님이 만들 것이고 진짜 교회는 비밀입니다. 내가 원하는 교회는 가짜입니다. 할 수 없이 끌려나올 때 그게 진짜 이스라엘이고 교회입니다.


나와 보니까 내 문제는 문젯거리도 안 돼요. 하나님이 당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를 강제로 끌어들였고, 우리는 거기에 말려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어떤 일도 문젯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삽시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전혀 피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문제에서 손을 떼는 순간 인생은 힘든 것이 아니라 즐기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3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에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된다고 오인했어요. “아이고 내 큰아들, 죽지 않고 살았구나. 귀한 내 자식 잃을 뻔했구나.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네. 네가 죽지 않고 살아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요. 그 자식 빼앗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죽어서 빼앗기나 산체로 하나님께 빼앗기나 내 자식 아닌 것은 마찬가지에요. 맏아들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이 맏아들은 인질이 되었습니다. 맏아들이 하나님께 인질로 잡히면 모든 복은 남은 가족에게 고스란히 주어집니다.


고려의 여인인데 몽골에 인질로 잡혀가서 결국은 왕비가 되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드라마를 통해서 방영되었는데, 어쨌든 인질로 잡힌 여인 때문에 고려는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장차 오실 하나님의 맏아들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의 사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당신의 계획, 천국 만들기에만 몰두하십니다. 그 외에는 다 지옥이 되겠지요. 이 하나님의 작업에 이스라엘은 말려든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여전히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맏아들이 하나님께 인질로 잡혀서 그것으로 새로운 약속의 땅 천국을 이루는 그 노선으로 가기 위해서 그들은 애굽같은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추가적이 요소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입니다. 나중에 그 계명을 돌판에 기록해서 그것을 물체화시킵니다.


율법을 기록한 돌판은 우리 구원에 전혀 소용없는 것입니다. 돌판과 율법과 피의 만남을 위해 돌판을 만들라고 하셨고, 그 돌판은 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있는 거예요. 만약 제가 하나님이라면 그 돌판을 다이아몬드로 만들 거예요. 아무리 던져도 안 깨어지게. 그 돌판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깨어지게 만듭니까?


그런데 모세가 던지니까 깨어지고 말았어요. 과학자들이 현장에 있었다면 성분 분석에 들어갔을 거예요. 그 귀한 돌판이 왜 쉽게 깨어지는 재료로 만들었을까요? 쉽게 깨어지라고 만든 거예요. 스스로 깨뜨리는 거예요. 하나님이신 예수님 스스로 연약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내가 깨어져야 너희들이 더 이상 너희 문제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가해자로 규정하기 위해서 주님은 쉽게 깨어진 거예요. 예수님과 스킨쉽을 한 사람이 여럿 있지만 제일 요란하게 스킨쉽을 한 사람은 예수님 뺨을 때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뺨을 때렸어요. 그런데 그 현장에서 주님은 율법을 위반했습니다. 율법에는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대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왼뺨을 내놓지는 않았어요.


말씀의 물체화, 형식화가 되면 말씀에 대한 오해가 계속 발생됩니다. 어떤 형체로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자신만만해서 그대로 지키려 하고 그 과정 속에서 오해가 발생되는 겁니다. 철학자 라캉은 이런 주장을 했어요. ‘사람이 생각하는 모든 현실은 가짜다.’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본인의 욕망대로 제 마음대로 현실을 편집해서 만들기 때문에 그 현실은 가짜라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했던 현실이 가짜지만 가짜만이 진짜 현실을 가리는 가림막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현실에 대해서 감사하고 이런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 자신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잖아요. 내가 만든 현실은 분명 가짜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감출 수 있는 현실을 만들고 이것으로 진짜를 가리게 되면 내가 아는 현실이 현실의 전부가 됩니다.


제가 왜 라캉의 이런 주장을 언급했는가 하면 하나님, 교회, 성경 이 모든 개념은 반드시 주체가 관여해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믿고 종교적인 어떤 몸짓을 해도 이 전체가 가짜일 뿐입니다. ‘그러면 진짜를 찾으면 될 게 아닌가?’ 라고 할 수 있지요. 진짜를 찾으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정신병자가 되지 않고 정상인으로 살려면 가짜를 진짜라고 우기면서 평생을 살면 됩니다. 정신병자가 되기 싫습니까? 그러면 가짜라도 쥐고 있어야 됩니다. 왜? 어차피 진짜는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을 찾겠다고 있는 가짜마저 내버리면 그 다음은 대책이 없습니다. 대책이 없으면 피골이 상접해져 갑니다.


라캉의 주장은 간단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정신병자이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이 세상에서 정상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거지요. 왜? 다들 정신병자이기에. 그런데 세상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정신병자 아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인데, 이 사람을 세상은 정신병자가 내몰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짜들 노는데 왜 진짜가 끼여드냔 말이지요. 추방되어야 하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절대로 진짜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 입 다물기. 가짜가 좋은 점은 진짜가 있을 것이라는 미진함이 남아 있기에 그것이 힘이 되는 겁니다. 산에 올라간다면 정상에 오르기 직전에 내려오는 것이 좋습니다. 정상까지 오르게 되면 새로움이 없어서 그 산은 찾지 않게 됩니다.


산을 오르되 정상까지 올라가지 말고,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되 1등하지 말고 2등까지만 오르세요. 항상 정상은 남겨둬야 합니다. 만약 1등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목표를 상실했기에 정신병자가 됩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사람들을 보면 이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자리에는 없기에 제가 마음 놓고 이야기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학생들은 서울 법대에는 가지 마세요. 꼭 가고 싶으면 연세대 법대로 가세요.


정상인은 진짜를 만나지 않는다는 그 안심 때문에 가짜라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이 진짜를 이야기했고, 세상은 가짜로 인해 즐거워하는데 이스라엘을 재수 없게 진짜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래서 인간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출애굽기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가자고 이끄셔서 갔는데 그 땅에는 덩치 큰 사람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들이 들어가면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 계속 들어가라고 독촉을 합니다. 자기 백성을 그곳에 이주시키기 원하신다면 사전에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을 죽이든지 쫓아내신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어가라고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에 비하면 메뚜기 같고 그들은 장대 같다고 했지요. 이스라엘이 무슨 수로 가나안 사람을 이깁니까?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미친 자가 필요한 거예요. 이 사람들은 정상인이 아닙니다. ‘상대는 장대같고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이긴다.’ 이건 앞뒤가 안 맞는 주장입니다.


맏아들을 하나님께 인질로 잡힌 상태에서 모든 축복은 남은 가족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후에 이삭을 통해서 복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언약대로 인간은 일종의 파이프 역할을 하면서 낯선 경험을 계속 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십계명이 나옵니다. 이 그림으로 십계명 설명을 끝낼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세워두시고, 인간이 보는 십계명은 인간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은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면서 십계명은 하나님의 피를 만나고 인간은 자기의 본색을 만납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는 자기 의와 십자가가 대척 관계에 있습니다. 그 원인을 유발하는 요인이 뭐냐?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것입니다. 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의 주체를 드러내기 위함인데, 그 주체가 뭔가 하면, 향유, 즐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을 이용해서 즐기는 겁니다. 최고로 즐기는 방법은 얻어맞는데서 오는 쾌감입니다. 수도원, 수녀원, 티벳 불교 이런 곳이 대표적 장소입니다.


철학자 칸트가 말하기를 ‘인간은 이익이 있을 때 법을 지키는데, 이것은 법을 지키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 말은, 법은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어주신 것은 무조건적인 법이라는 것이죠. 이 법을 지키게 되면 법을 지켰다는 쾌감을 보상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법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어떻게 하면 극적의 쾌감을 맛볼 수 있을까 궁리했는데 마침 법이 주어져서 그 법을 이용해서 자기 주체가 추구하는 극단의 카타르시스를 찾는 거예요. 이처럼 주체는 법을 기다렸다는 겁니다. 기다린 자들에게 주님은 ‘여기 있다. 받아라.’하고 율법을 주신 겁니다.


선을 행하면 즐겁고 악을 행하면 괴로운데, 그 악은 자기학대를 통해서 물리쳤을 때 추가적인 쾌감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수련을 쌓는 수녀나 수도사들을 보면 항상 자기 숙제를 만들어냅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법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법을 볼 때는 제사법으로 봅니다. 피를 흘려 제사를 드리는 것이 법이지요.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하는 말이, ‘나에게 법이 주어졌는데 이 법은 나는 절대 의인이 될 수 없고 내가 법을 좋아하는 것은 타고났지만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어서 그 법이 나로 하여금 법을 위반하도록 했는데, 이 상황에서 나는 헤쳐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놓여 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한다.’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이용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이용한 것입니까? 예수님이 사도 바울을 이용한 거예요. 어떻게? 난처함을 경험하도록. 더 이상 너의 행함에 기대 걸지 말라고. 그러면 기대 걸 수 없는 죄인인데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나님께 인질이 된 맏아들이 사도 바울을 대신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기에 해결 못하는 나와 맏아들 되시는 주님과의 차이를 통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하면서 주님을 증거하고 찬양하는 것이 천국 가는 원리, 원칙입니다.


그러면 장대 같은 가나안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장대 같은 인간은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입니다. 허수아비는 아무리 커도 겁낼 필요 없습니다. 허수바이를 겁내는 것은 참새뿐입니다. 요즘은 참새도 영리해서 허수아비를 겁내지 않습니다. 왜 장대 같은 사람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가 하면 그들은 언약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언약이 있습니다. 강의 초반에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라고요? 하나님은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언약만 드러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언약궤를 앞세우고 건넜지요.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언약궤를 앞세우고 들어갔습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언약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언약궤 앞에서 여리고 성을 어떻게 점령하는가, 십계명은 몇 개나 지켰는가, 내 인생을 어떻게 완벽하게 가꾸어 나갈 것인가? 이런 문제는 걷어치워야 합니다. 십계명은 십계명을 주신 분이 도리어 십계명을 가져가서 ‘미역국도 못 끓이는 며느리’라고 확인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 말씀을 가져가서 말씀대로 피를 흘리는데, 맏아들의 위상을 가지고 희생하신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 강의를 처음부터 다 들었다면 주님이 자기 일을 스스로 해결하고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데 우리를 하나의 부속품으로 끌어들인 거예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 거예요(롬12:21).


그 가운데 주님께서는 죄인으로부터 영광받기 위해서 일부러 죄인 되게 하셔서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극대화 시켜서 천국에 온 모든 자들이 받은 면류관을 주님 앞에 돌려드리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향유, 즐김은 주님의 주 되심으로 바뀌어야 하고 우리는 그 앞에 죄인으로 드러남을 즐거워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런데 만약 율법을 주신 취지에 대해서 감감 무소식이라면 그 사람은 상상을 합니다. 상상계의 하나님, 상징계의 하나님, 실재계의 하나님에 대해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이제 이 사람은 이 법으로 확고한 의를 확보해야 구원 받을 수 있겠지요. 이렇게 되면 구원은 누구 책임인가 하면 본인의 하기 다름입니다.


그러면 십계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계명이 추가되는데 마지막 법은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법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 믿는 것이 법입니까?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안 믿어집니다.”라는 소리로 들으시면 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만날 때마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십니다.”라고 말한다면, 주위 사람들이 ‘저 사람 아버지는 친 아버지가 아닌가보다.’라고 생각할 거예요. ‘왜 자꾸 자기 아버지라고 말을 하지?’ 부부간에도 ‘사랑해, 사랑해!’를 반복하면 수상합니다. ‘아내에게 뭔가 잘못한 일이 있나?’ 이런 의심을 합니다. 갑자가 목걸이 사오고, 화장품 사오고, 아부를 떨고 하면 아내는 의심을 합니다. ‘내 남편이 나 몰래 은행 대출 받은 것이 있나?’


사람들이 ‘예수 믿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함으로 자기 즐거움으로 되돌아오는 겁니다. ‘내가 이만큼 잘났구나.’를 만끽하고 싶어서 법을 활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법을 주시면서 어기는 자에 대한 처벌 규정도 말씀하셨는데, 예를 들면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돌려 쳐 죽이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평소에 미워하는 사람이 안식일을 어겨 끌려왔다면 잘됐다고 생각하면서 돌을 기쁜 마음으로 던졌을 거예요. 그러나 안식일 위반한 사람이 자기 아들이라면 돌 던지는 일에 기권할 거예요. 왜 이렇게 될까요? ‘법은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있지 그 외에는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자기 주체를 발각 당하게 되지요.


그래서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맛만 보여주고 철수합니다. 십계명을 피와 연결시키기 위해서 돌판으로 만들어요. 그러면 십계명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 돌판과 하나님의 피 흘림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가지 제사 드리는 장치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 등의 이야기가 출애굽기 후반에 쭉 나옵니다. 이렇게 대충 살펴보니 출애굽기 종착 지점에 온 느낌이 들지요?


출애굽기가 방대하고 어렵기 때문에 어렴풋이 라도 윤곽을 잡아줘야 그 다음 강의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큰 밑그림을 제가 말씀드렸고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2-2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하면, 23절에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에서 ‘너희를 위하여’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한 헌금, 너희를 위한 전도, 너희를 위한 교회 세우기 등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은 없고, 인간은 하나님이 앉으시는 방석이라고 여기면 됩니다. 그런데 방석이 살아나서 깔고 앉은 엉덩이를 치우려 한다면 이건 안 될 일이지요. ‘너희를 위하여’가 빠지면 그 빈자리에 주님은 ‘나를 위하여’로 채워 넣겠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너희를 위하여’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이 어디 있습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의 반대말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가 아니라 ‘사랑하라.’입니다. 부부간에 사랑한다는 말은 어떤 행동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데 어떤 행동을 한단 말입니까? 오히려 행동이 사랑을 훼손시켜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당신 때문에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은 안 해도 이런 시절이 있습니다. 결혼 2주일 전에 남자들은 결혼할 상대에게 이런 마음을 가집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결혼 전날까지 “오빠, 나 사랑해?”라고 문자 보낸 후 결혼식이 깨졌다는 말을 들었어요. 계속 속을 썩이니까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데 ‘결혼할까, 말까?’ 고민을 하는 거지요.


결혼식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상대를 위한 결혼식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결혼식이란 말이죠. 자기 결혼식을 축복해 달라고요? ‘나를 위하여’하는 결혼식에 주님이 무엇 때문에 축복하시겠습니까? 주님의 자리에 내가 앉아있는데.



20장 24절에 “내게 토단을 쌓고 ---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했는데, 이 제단이 나중에는 인물로 바뀝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걸어다니는 제단이 되고, 이것을 성전이라고 하고, 고린도전서 6장 15절에서 “너희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고, 19절에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했고, 20절에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어요.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3:21).”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이야기입니까? 22-23절에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은 주님의 계획이 아예 들어있지 않다는 거예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끝났고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나만을 위한 것을 따로 뽑아낸다면 그것은 주님이 애초에 약속하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한 것을 구태여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신약은 어려운데 왜 어려운가 하면 정답만 나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 과정을 알기 위해서 구약을 봐야 합니다. 출애굽기 보면 제단이 나오지요. ‘너희를 위해서 제단을 만들지 말라.’ 이렇게 연결되는 겁니다. ‘너희를 위해 만들지 말라.’는 것은 ‘너희의 불행이나 행복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하나님의 일이 참여된 특수한 종족이기 때문’이란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주께서 허락하신 자리가 됩니다. 이 자리는 나의 자리가 아니고 주의 이름이 있는 자리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4절을 다시 봅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이러저러한 일을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서 이런 것은 만들지 말고 저런 것을 만들지 말라고 하면 아예 아무것도 안 만들어야지요. 이 말씀 지킨다고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안 만들고 상징화 된 문자로 신을 표현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고 해서 일체 아무것도 안 만들고 일체의 형상을 배제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고 ‘토단을 쌓으라’고 하시면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계속 토단을 쌓게 되면 주님께서 여기에 임하신다고 생각하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 실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상징을 찾아가고, 이것을 상상으로 찾아가서 나중에는 다 부수는 거예요.


하나님은 겸손하셔서 인간이 엉터리로 만든 상징을 도리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낮아짐을 증거하기 위해서 상징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라. ~하지 말라.’ 그 속에 들어가서, 이것이 상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제도구나.”라고 오해하고 확정지을 때 그 껍질을 벗기고 뛰쳐나와서 실재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제단을 만들라고 해서 만들었는데 그 제단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새로운 사건을 또 유발시킵니다. 예배시간에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는다고 생각하고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사람은 앞자리에 앉아 은혜 받은 적이 있을 거예요. 처음에는 ‘앞자리 앉아 은혜를 받았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앞자리에 앉으면 은혜 받을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직 은혜 받지도 않았는데 자기 주체가 은혜 받은 것으로 간주해 버린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스스로 만들 즐거움이 됩니다.


실재로 “이 자리는 내 자리입니다. 비켜주세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은혜는 자신만 받아야 합니까? 은혜 받았으면 양보도 할 줄 알아야지요.


25절을 보면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음은 돌로 쌓지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종하게 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축복과 저주가 갈라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본인은 축복과 저주에 대해서 관여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몸만 제공했을 뿐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통해 피를 내게 해서 이것을 거룩한 민족이라고 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거룩에 기여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아브라함 자리에 거룩하게 되는 모든 시스템을 일방적으로 설치한 거예요.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서서 일방적으로 저주를 주신 겁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선함이나 행실은 고려 대상이 아니지요. 그래서 사람 손으로 쪼개서 제단을 예쁘게 다듬어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제단이나 제물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할 문제지 인간이 간섭하고 개입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지요. 그냥 손 떼세요. 그것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주님 손에 맡기면 여러분은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겁니다.


아무 한 것도 없이 몸만 제공했는데 구원의 혜택을 입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관리자(IP:203.♡.42.222) 14-08-09 10:11 
2014 여름수련회 8장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느라.”고 해놓고 그 뒤 22장, 23장 계속 잔소리가 이어집니다.


남자들이 결혼생활 중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요? 아내의 잔소리입니다. 잔소리하는 것은 하나님도 만만치 않아요. 제가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거룩입니까, 어겨서 거룩입니까? 내가 말씀을 지켰기 때문에 내가 거룩한 것입니까, 내가 말씀을 못 지켰기 때문에 주님이 거룩합니까?


율법의 요지가 주님 거룩하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잘났다는 것이 요지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율법을 어기는 죄인이기에 거룩에 참여됩니다. 잔소리처럼 여기지는 율법을 우리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죽은 존재로 간주하는데 이것이 거룩의 효과입니다. 율법을 지켜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부하며 영생 얻기 원하는 부자 청년을 향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의 요지는 ‘네가 영생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스스로 돌아갈 자리를 마련해 놓았기 때문이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잘 지켜 하나님의 복을 받고 부자가 되었는데, 이런 내가 천국에 가겠지요?’라고 물은 부자 청년을 향한 예수님의 답변은 ‘내가 잘랐다는 자리에는 절대 영생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지 말고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이 거룩해 지기 위해 나는 완벽한 죄인으로 확정되는 그 자리가 거룩이 만개하는 자리며, 주님이 기뻐하는 자리며, 주님이 영광 받는 자리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총알같이 튀어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 영광 돌리기 위해 죄를 더 지으란 말입니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죄가 무엇인지 알아요. 아버지께 버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어설픈 죄인이에요.


여전히 우리 속에는 내가 죄를 반성했으니까 나는 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주도 면밀함을 우리는 포기 못합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해도 내 속에 작은 부분이지만 착한 구속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온전한 죄인이 안 됩니다. 잔인무도한 조직 폭력배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의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 입장에서 의리를 저버린 자에 대해서는 응징을 합니다. 길에서 고등학생이 담배를 피울 때 꾸지람하고 혼내는 사람은 주로 조폭들입니다. 자기는 그보다 더 개판으로 살면서 새까만 후배가 담배를 물고 있으니까 꼴 보기 싫은 모양이에요.


거룩은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로 우리가 죄 지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 거룩한 자가 누구인가? 우리에게 율법을 들이대신 분이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룰 때 거룩한 자가 되고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나는 율법을 2%밖에 못 지켰는데 예수님은 100%를 지켰으니 참 대단한 분이다. 나를 믿지 말고 예수 믿어야지.’ 이렇게 나온다면 이것이 제대로 된 믿음입니까?


키에르케골은 말하기를, ‘훌륭해서 예수 믿는 것보다 더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은 없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라서 예수 믿으면 그것은 주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이란 말이지요. 왜냐?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했던 사람의 그 인식자체가 곧 ‘당신이 선한 분임을 알아본 나의 판단력은 쓸 만하지요?’라는 인식이 깔려 있어요.


이렇게 되면 자신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자기 향락입니다. 향락도 술에 취해 즐기는 향락이 아닌 극도의 선함과 고상함에서 오는 쾌락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는데 기부를 해보세요. 이것은 마약 투약하는 것보다 더 짜릿한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2% 밖에 못 지키기에 98%의 미진함을 예수님을 통해 채울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성립이 안 됩니다. 정작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율법을 위반하는 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율법을 지키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율법 위반자로 보였어요.


내가 선한 자라고 여길 때 주님은 악마로 보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죄인이라고 여긴 문둥병자나 세리, 창기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로 보였어요. 나와 같은 더러운 죄인도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보았지요. 이 용서가 100% 율법의 완성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어요. ‘몇 번까지 용서하면 율법에 합당한 용서가 됩니까?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라고.


베드로의 입장에서 일곱 번을 거론한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용서는 이곳저곳 다니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피해를 입힌 자를 용납하는 것인데 그것을 일곱 번이나 반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490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인데, 이만큼 용서하다가는 늙어 죽습니다.


만약 예수님 말씀대로 490번을 용서한 후 ‘이제 됐습니까?’ 라고 묻으면 예수님은 뭐라고 답하실까요? ‘일흔 번씩 일곱 번에 일곱 번이라도 하라’고 하실 거예요. 결국 뭐냐 하면, 율법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 된 거예요. 율법은 튕겨 나오라고 주신 것이고, 죄인 되라고 주신 것인데 그것을 지키려고 달려드니 되겠습니까?


여권에 사진을 붙이는데 자신의 X-레이 사진을 붙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출입국 검사대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얼굴과 사진을 번갈아 보면서 통과시키지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사진은 우리는 갈비뼈 사진입니다. 우리 속의 죄를 드러내기 원합니다.


율법을 지키겠다는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율법을 못 지키겠습니다.’ 라고 인정할 때, 바로 그 율법 앞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확정됩니다. 이것은 주의 이름이 거주하기 위한 정지작업입니다. 주택을 짓기 위해 택지를 조성하지요. 그와 같은 것입니다.


강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에 따르면 “목사님, 제가 기도는 어떻게 하고, 예배는 어떻게 드리고, 헌금을 얼마나 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은 다 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선한 행동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생각자체가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선행 행동해서 뭣 하려고요? 내 문제 해결하려고 한 짓이잖아요. 그러니까 잘못된 거예요. 아무리 자신의 충성과 열심을 앞세워도 그것은 자신의 문제 해결해 보겠다는 얄팍한 노림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출애굽 시키시는 취지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출애굽 되지 못한 시점에서 출애굽을 봐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면 주님의 잔소리가 어떤 내용이기에 우리는 짜증이 나고 화가 나는가? 한 마디로 이것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식으로는 살지 말라.’ 그러면 애굽에서는 어떤 식으로 살았습니까? 애굽에서는 나만 챙기면서 살았어요. 그러면 약속의 땅에서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를 챙기지 않는 삶을 살면 되는 거예요.


나에게 이용당할 사람을 찾아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혹시 저를 이용하실 분 계십니까?’ 이렇게 살아야 돼요. 왜냐하면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너희를 위해 희생하기 위해 왔다.’고 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섬김의 도를 보여 주셨지요.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누가 더 높은 자냐?’고 서로 다투었지요.


출애굽기 22장의 내용이 뭔가 하면, 상대방이 왔을 때 “당신은 나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이 아팠습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주님이 일으킨 것이고, 그 일은 ‘나로 인하여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습니까?’를 생각하는 그런 사태를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거예요. 아파요? 아프니까 청춘이지. 이런 식이지요. 많이 아파요? 나도 많이 아픕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22장 21절입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이 말은, 주변에 있는 고아와 과부의 모습에서 진짜 너의 모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는 처음 사랑을 잊지 말라고 했지요. 나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하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그 자리가 본래 나의 자리에요. 그러니까 그가 나에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에게 요청하는 식으로 하라는 겁니다. 왜냐? 우리는 애굽에 있을 때 나만 챙겼기 때문에.


애굽에서처럼 나만 챙겨서는 안 되고, 상대가 요구하는 것은 내가 평소에 호소했던 것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 ‘선한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을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냥 다 지나갔는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도와주었지요.


왜 도와주었지요? 여기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강도 만난 사람의 가해자가 강도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길에서 만난 상대를 때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면, 때린 사람이 가해자가 아니고 그 광경을 보고도 그냥 가버린 사람이 가해자가 되는 거예요. 주님은 진정한 이웃을 생산하기 위해서 그런 사태를 의도적으로 유발하셨습니다.


이런 저의 주장에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율법은 못 지킨다고 했잖아요? 못 지킨다고 해놓고 갑자기 고아와 과부 이야기가 나오니까 네가 그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도와주라고 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 말씀을 하신 것이잖아요? 그러면 도와주라는 말입니까, 도와주지 말라는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저는 이렇게 답변하고 싶어요. “나는 고아다. 나는 과부다. 그러니까 날 도와 줘!”라는 사람은 절대로 도와주지 마세요. 율법은 우리의 이용물이 아닙니다. ‘내가 어려운데 왜 사람들이 안 도와주지? 율법에는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라고 했는데.’ 이것은 아닙니다. 고아와 과부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 고아와 과부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저를 고아(또는 과부)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이런 사람은 주변 사람이 날 안 도와줘서 괘씸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과부로 만들었습니다.’ 라는 믿으며 주님과의 이웃 관계가 성립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 사람을 안 도운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일으킨 사태에 대해서 주님을 빼버리는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도움을 요청한 권리는 없습니다. 만약 이 권리를 주장한다면 우리는 전부 성당에 가야 돼요. 성당은 오지랖이 넓어서 이사람 저사람 다 도와줘요.


성당에서 신부가 입는 복장한 하나의 권력입니다. 하나의 주체지요. 주체는 권력에 의해서 할당받은 자리지요. 그래서 그 자리는 주체기 때문에 그 주체는 곧 자기의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말이 됩니다. 중들이 머리를 깎고, 신부가 유니폼을 입는 것은 ‘나는 권력에 속했다. 이 권력에 손대지 마라.’는 권력의 표현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출애굽 사건이 유월절로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법으로 반복시키는데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법을 통해서 주체가 드러나는데, 그 주체가 거룩한 율법과 만나게 되면 우리가 애굽적인 속성을 유지하고 있음이 발각됩니다. 만약 우리가 율법을 지켜낸다면 주님은 추가적으로 더 난해한 율법을 주십니다. 기어이 주님이 건져주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다는 추가적인 법들이 계속 나옵니다.


구약의 법이 지키기 쉽겠어요, 신약의 법이 쉽겠어요? 겉으로 보기에 구약이 훨씬 쉬워 보여요. 그래서 구약의 유대인들은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고신측에서 율법을 다 지키려 하고 특히 안식일과 십일조는 반드시 지킵니다. 이렇게 되면 출애굽은 없어요.


출애굽이 뭔가 하면 ‘너는 그 때 고아와 나그네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후견자가 도와주지 않으면 보호받을 길이 없어요. 일부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었어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면서 주님의 언약의 내막이 장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음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 자체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너를 구원했는데 그 구원자를 증거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계속 법을 주셔서 한번 고아와 과부가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는 주님 없이는 못산다는 것이 반복해어 주어져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을 통해서 우리가 애굽적인 것이 들통 나야 되고, 그 들통 난 것과 제사법이 관련되면서 7월 10일(대 속죄일)날 일괄적으로 용서를 받습니다.


원래 죄는 회개하고 난 뒤에 회개한 사람에게만 용서가 주어집니다. 여러분이 아무나 용서해버리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고 굴종입니다. 실컷 얻어맞고 울면서 “나는 너를 용서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얻어맞는 것이 너무 수치스러우니까 힘이 모자라서 얻어맞았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용서한다는 식이 됩니다. 이게 무슨 용서입니까, 항복이지.


우리는 항복하면서 용서한다는 핑계를 댑니다. 특히 직장에서 상사에게 항복해놓고 상사를 용서했다고 합니다. “주여, 주님의 사랑으로 과장님을 용서합니다.” 이건 밥 먹고 살려고 굴복하는 것이지 이게 어찌 용서입니까. 용서가 너무 남발되다 보니까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께 용서받지 못합니까?”라고.


우리는 애초에 용서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남을 용서한 적이 없어요. 내 잘남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는 거예요. “나는 너를 용서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이 넉넉함을 자랑하기 위해서 나보다 더 개판을 사는 자들이 필요했던 거예요. 남편이 때릴 때 아내는 묵묵히 맞으면서 천사가 되는 겁니다. “주여, 오늘도 남편을 용서합니다.” 이것은 정신병 수준입니다. 그러지 말고 가까운 지구대에 신고해서 경찰을 불러야 합니다.


기계는 생각 없이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때리면 또 때리고. 사람이 술에 취하면 기계가 됩니다. 다들 경험해 보셨지요? 기계를 좋은 말로 ‘개’라고 하는데, 개보다 더 못한 말이 기계입니다. 사람이 술을 먹으면 기계가 됩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당신이 나를 이용해라.’ 그런 것 없습니다. 술을 먹으면 무조건 식구들은 나에게 굴복해야 돼요. 그게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의 모든 출애굽 상황이 신약에서는 하나하나 일대일 대응을 하는 거예요. 수학에서는 ‘선택 공리’라고 하는데, 하나하나 대응해서 나만의 주체를 이루는 계열을 만들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이스라엘의 마음속에 들어가면서 이 율법을 지켰다고 자부하는데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죽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해서 재판한 그들을 도리어 재판합니다. 즉 그들에 의해 피고가 된 분이 이제 재판장이 되어서 자신을 피고의 자리에 앉힌 그들을 도리어 재판하는데 그것이 주님의 심판입니다. 자리가 완전히 역전되지요. 우리는 그 역전된 사실을 받아들임으로 우리가 주님의 편임을 아는 겁니다.


율법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보통 회개하면 용서가 되는데, 7월 10일은 회개 안 해도 일괄적으로 다 용서를 해 주십니다. 작년 7월 10일 이후에 지은 모든 죄는 전부 용서가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언약의 갱신으로 새롭게 이스라엘이 유지가 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용서가 7월 10일에 이루어진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7월 9일은 마음껏 죄를 짓는 거예요. 마치 청년들이 군에 입대하기 직전에 사창가를 찾는 것처럼.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이와 비슷한 것이 희년 제도입니다. 50년 째 희년이 돌아오면 모든 부채나 종의 신분이 원래의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을 빌리는 사람이 희년 직전, 49년 12월 31일에 왕창 돈을 빌려는 거예요. 하루만 지나면 희년이 되고 그러면 돈을 안 갚아도 되니까. 이 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입니까?


철저하고 법을 이용할 수 있지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희년이 가까울 때는 돈 이자가 굉장히 올라가요. 위험 부담이 많기 때문에. 그러나 50년 희년이 되면 빚을 다 탕감해 주라고 율법에 규정하고 있지만 이 율법이 시행된 적은 없습니다. 유대인이 이 율법을 왜 안 지켰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이 법을 지키겠어요?


법이 중요합니까, 현찰이 중요합니까? 현찰은 눈에 보이지만 법은 나중 문제입니다. 십일조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굶어 죽은 레위인, 제사장이 한둘이 아닙니다. 열한 지파가 십일조를 내면 레위인은 밥 먹고 살아요. 그러나 대부분 안 했습니다. 왜? 십일조를 내려고 하면 급하게 돈 쓸 일이 생겨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하기 원해요. 단, 아무 일 없을 경우에. 그런데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마음을 아시고 십일조 못하게 일을 발생시킵니다. 십일조 하고 싶어도 급한 일이 생겨 그쪽에 돈을 쓰게 됩니다. 예를 들면, 딸이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십일조 할 돈을 먼저 병원비로 내게 됩니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이번에 못 낸 십일조를 꼭 내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것이 실천되지 않습니다.


법보다 돈이 우선이라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법이 주어졌기에 그들이 법을 지켰다고 순진하게 생각하는데 안 지켰습니다. 그러면 법 안 지키는 그들을 왜 보호하는가? 제사법 때문에 그래요. 일괄적으로 용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용서하려면 끝까지 용서하지 왜 이방 나라에 망하게 하는가? 그것은 용서 법이 점점 더 진화합니다.


용서 법이 진화하기 때문에 그들이 율법을 어겼을 때의 징벌 차원이 점점 심화됩니다. 이게 심화 학습이에요. 예전에는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적들이 물러갔는데, 나중에 블레셋과의 전쟁 때는 언약궤를 앞장세워 나갔는데 그 언약궤를 적들에게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졌어요. 세상에 이런 우사(창피한 일)가 어디 있어요?


블레셋을 통해서 제사라는 것이 언제나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심화되어야 해요. 아직도 인간에게서 나올 죄는 많아요. 거기에 따라 그 많은 죄를 처리하다보니까 용서하는 법도 점점 난폭해지고 냉혹하고 이스라엘 내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계속 제사법을 성의 있게 지킬 것인가, 아니면 국력의 신장이 우선이냐 갈등하다가 국력을 신장하는 쪽으로 기웁니다.


그래서 그 후 이웃나라와 관계하면서 ‘너희가 우리 문화를 수용했으니까 우리도 너희 문화를 일부 수용하겠다.’고 나왔고, 그 때부터 이방 문화가 이스라엘에게 밀려오는데, 그 중 바알 신을 섬기면 부자가 된다는 미신도 들어와서 여호와는 안중에도 없고 각 지역에 산당을 세워놓고 그곳에서 기도를 하게 되고, 또 기도를 하면 효과를 보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셨기에 그들은 더욱 우상에게 매달리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효과를 보게 하십니까? 그래야 죄가 더욱 더 심화되면서 이제는 제사장이 담당하는 제사로는 더 이상 감당이 안 되게 하시는 겁니다. 십일조도 제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제사장도 사기가 떨어져서 뿔뿔이 흩어집니다. 사사기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와요. 제사장 일을 해서는 못 먹고 살겠다고 해서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나지요.


백성들은 제사장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저 외국 문화의 번영과 사치에 현혹되어 빈부의 차이가 심해지고 그런 환경이 된 거예요. 그래서 전쟁에서 언약궤마저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한 거예요. 그러면 주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 주변에 있는 나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길들이는 거예요.


처음에는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싸우지만 그 힘이 다 소진되고 난 후에는 주님을 찾게 되지요. 움짐이 단 거예요. ‘움짐’이란 말뜻을 아십니까? 경상도 사투리죠. ‘몸이 달았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을 껍데기입니다. 율법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과 결합된 제사법이 사람들에게 점점 더 치열하게 심적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옛날에는 작은 죄를 지어도 양을 가지고 와서 제사 드리며 용서를 구했는데, 이제는 죄 짓는 것이 만성이 되어서 일일이 제사하는 것도 귀찮아서 여러 번 죄 짓고 나서 한 번 양을 잡아 제사를 드렸고, 제사장은 그것도 고마워서 제사하러 온 사람을 반기며 고기의 일부는 번제로 드리고 일부는 생고기를 빼돌려 구워먹고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제사장도 빈부의 차이가 생깁니다. 48개 지역에 도피성이 있었는데 그 도피성에 상주하는 제사장이 있었어요. 그래서 가난한 동네의 제사장은 생계가 아슬아슬하고, 중앙에 있는 예루살렘 제사장들은 양식이 차고 넘쳐서 감당을 못하고. 그러니까 나중에 솔로몬 이후에는 제사장이 권력 단체가 되는 겁니다.


권력을 가진 제사장은 축적된 자본이 많기 때문에 그 자본으로 값 싼 노동자를 고용하고, 노동자에게 줄 임금의 잉여분은 챙기기에 점점 자본이 축적되어 국가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자크 엘룰이라는 사회학자는 말하기를 ‘서구 역사에서 교회가 안정됨으로 교회는 교회가 아니었다.’고 했어요.


교회가 자본이 축적되어 안정되면 권력단체가 되고, 권력단체는 쉬운 말로 ‘지역 유지’라고 합니다. 운동회 때 귀빈석에 큰 교회 목사는 앞자리에 좌석이 배치됩니다. 물론 찬조금을 듬뿍 냈기에 앞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있어요. 그런데 이게 건성으로 다 넘겨 버립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생계가 안 되니까 부잣집에 복 빌어주고 점치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개인 가정의 제사장이 된 거지요. 오늘날로 말하면 한 학교의 교목, 한 병원의 원목. 이런 식으로 각자 살 길을 찾아가서 월급 받고 사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결국 말씀에 의한 희생자가 없어진 거예요.


율법은 인간의 주체를 드러내는 것이고, 그 주체는 발각되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다는 그 제사에 모든 것을 걸어서, ‘다른 나라는 왕이 있고 권력이 있지만 우리는 반복되는 제사가 있기에 다른 나라를 이길 수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를 유지하는 유일한 언약적 방법이다.’ 이런 이론은 세월이 가면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막상 이웃나라와 접하고 보니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돈이었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였음을 알았습니다. 즉 서서히 감추어진 본색이 드러나면서 우리는 출애굽 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 제 2의 출애굽이 대두됩니다.


제 2의 출애굽은 일단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하고 난 뒤(바벨론에 잡히고 난 뒤)에 바벨론에서 다시 본국으로 잡아당기면서 제 2 출애굽을 언급합니다. 그렇다면 제 2 출애굽을 할 때 추방된 자들이 돌아오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왜 추방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만 다시 본국에 돌아오는데 그들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와 함께 왔던 사람들입니다.


고국에 돌아와서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모든 것이 주의 약속대로 된 것 때문에 기뻤고, 너무도 초라한 성전을 보면서 그들은 울었습니다. 어떤 분은 성경에 보니까 이들이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잘 분간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쉬우면서 감격적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몇 년 못 갑니다.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언약은 유지되지만 인간은 그 언약을 지킬 수 없는 허약한 자임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제사법에는 인간이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한결같이 구원이 되는 장치가 제사법 안에 들어 있어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 제사법에 어떤 것이 들어있습니까? 세 가지 요건으로 이것이 보장됩니다. 첫째, 제사장이 있거든 안심해라. 제사장이 입은 복장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성전이 있거든 안심해라. 하나님은 성전을 버리지 않을 테니까. 셋째, 안식일 있거든 안심해라. 첫째는 사람, 둘째는 장소, 셋째는 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제사장, 성전, 안식일 이것으로 자신들이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의 이러한 요소는 성경의 문제 그대로 따온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상상적 동일시와 상징적 동일시를 구분해야 됩니다. 상상적 동일시는 ‘이상적 자아’라 하고, 상징적 동일시를 ‘자아 이성’이라고 합니다. 정말 용어가 어렵지요?


‘이성적 자아’와 ‘자아 이성’의 차이점이 뭡니까? 왜 이런 어려운 용어를 거론하는가 하면 사람들은 이 둘 사이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사귀는데 요즘 여자들은 욕심이 없어요. 남자가 세 가지 정도만 갖추면 만족합니다. 키 크고, 돈 잘 벌고, 성격 좋고. 딱 이 세 가지입니다. 신앙이니 뭐니 이런 다른 욕심은 없습니다. 여자가 이런 남자를 마음에 들어 할 때 이것이 ‘상상적 동일시’입니다. 남자대신 신을 대입해 봅시다. 성경 말씀 중에 내 마음에 쏙 드는 구절을 보고 “역시 예수님은 참 훌륭하신 분입니다.”라고 할 때 이걸 ‘상상적 동일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상징적 동일시’는 뭐냐? 여자는 남자가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남자가 자꾸 들이대요. 이 사람은 키 작고, 성격도 안 좋고, 직장도 시원찮아요. 그래서 여자가 남자에게 “아저씨 왜 자꾸 들이댑니까?”라고 할 때, 나는 당신이 마음이 든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자기가 마음에 들어서 자기 권력 속에 여자를 집어넣으려 하는 거예요. 상징이란 법, 규칙, 제도를 의미하는 겁니다.


나는 그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가 살기 위해 취직을 해야 될 때는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을 억지로라도 나와 동일시해야 내가 밥 먹고 사는 거예요. 이것이 ‘상징적 동일시’입니다. 이해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상상적 동일시’는 자기 착각이지만 ‘상징적 동일시’는 현실 문제입니다. 이 직장이 아니면 직장이 없으니까 억지로 다니는 거예요. 다니면서 그 직장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나는 직장에서 왕따 당하고 나중에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협조해 주는 사람이 없게 되고, 그러면 무능력자로 찍혀 후배들에게 추월당하고 결국 직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될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동일시하는 거예요.


당신은 어째서 나를 좋아합니까? 내가 왜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까? 라고 묻는 거죠. 신은 나를 선택했다. 상상적 동일시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선택했다. 어떻게 됩니까? 주님이여 저를 뭘 보고 선택하셨습니까? 라고 할 때 미지의 여분의 것이 남아있지요.


내가 그분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나를 원할 때, 대표적인 것이 마리아입니다. “처녀인 제가 왜 임신을 해야 합니까? 수많은 여자 중 왜 하필 제게 이런 일을 주십니까?” 이것이 바로 임신한 이유란 말이지요. “수많은 여자 중에 네가 선택되었기에 임신이 된 것이다.” 이건 말장난이 아닙니다. “허다하게 많은 사람 중에 왜 제가 암에 걸려야 합니까?”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너이기에 네가 암에 걸리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이것은 내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원해서 된 동일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뭔가 남아있어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주가 원해서 되었구나. 주께서 무엇이 필요해서 나를 이끌고 가시지?” 바로 이런 관계. 유대인들은 상상적 동일시에 빠져서 “주님이 날 선택했어. 날 무시하지 마.” 이렇게 나오지만 참된 선택은 항상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 평생을 살면서 체험 속에서 되새겨 보는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관리자(IP:203.♡.42.222) 14-08-09 10:13 
2014 여름수련회 9강


출애굽기 17장 5-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위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리라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모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은, 하나님과 접촉을 시작할 때 우리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타인과 접촉하는 방식을 그대로 하나님께 적용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 계시지요. 하나님 저의 정성을 받아 주시고 그리고 이 땅에서 힘들지 않게 살도록 해 주옵소서.”


이 방식은 결국 자기 존재를 강화하기 위해 신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런 식이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방식이 아니고 이방 방식을 따르는 셈이 됩니다. 애초부터 이런 하나님은 없어요. 그래서 제가 강의 중에 계속 강조했지요. 하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는 이방인에게 오지 않고 유대인에게만 왔습니다. 유대인은 특수한 상황이고 이 특수한 상황을 주목해야 돼요. 우리가 눈을 뜨면 신을 상상하는데 그런 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그리스도가 옛날에 어떻게 활동했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연결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라고 해서 하나뿐인 그 통로는 하나님이 아니고 그리스도입니다. 그냥 신이라고 한다면 일반 종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복음의 특수성이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성경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지리산에서 도를 닦다가 “오, 신이시여!”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의 대종교라든지 대순진리회와 똑같은 거예요.


복음이란 우리가 해낼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다 이루었기에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호들갑 떨게 없다는 거예요. 호들갑 떨지 마세요. 종교를 버리세요. 종교생활 하지 마세요. 우리가 남과 대할 때는 ‘상대방에게 잘 보이면 잘 해준다.’ 이것은 인간대 인간의 관계입니다. “내 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섬]이란 노래 가사입니다. 이런 사이가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너하고 나만 해결하면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접촉 사고가 났으니까 이 문제만 해결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다에 배가 지나가면 물결이 출렁이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그 물결은 잠잠해 집니다. 존재의 바다가 원래 이렇게 무궁해요. ‘사는 대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이게 무슨 복음의 특수성입니까?


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때 하나님은 거부합니다. 이미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이 차단된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특수한 방식을 제시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셨다할지라도 역시 우리 힘으로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모습으로 왔을 때 제자들은 다른 사람과 상대하듯 예수님을 상대했습니다. 제자 가룟 유다는 스승을 배반했다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지요.


이것은 접근하는 방식이 아니에요. 오해한 거예요. 진리는 오해를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진리가 드러납니다. 주님은 실패할 수 없는 방식을 사용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을 주니까 자꾸 법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법을 지킬 때 인간을 대하듯 율법을 대하니까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신은 점점 더 잘난 존재가 됩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시키는 대로 다 하게 되면 그 인간은 망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 방식이 아니에요. 그러니 나대지 말란 말이지요. 나대지 말고 그냥 사세요.


어차피 우리가 내미는 방식은 바리새인처럼 제 잘난 맛에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내가 너에게 잘해주면 너도 나에게 잘 해주리라는 생각. 내가 스스로 겸손해서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니꺼인 듯 니꺼 아닌 니꺼 같은 나’ 이렇게 하면 그 썸(something)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결혼까지 가겠어요? 썸은 썸으로 끝납니다.


교회 10년쯤 다니다가 재미없다고 안 다니고 이건 처음부터 하나님과 썸을 한 거예요. 그 방식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정화시킵니다. 광야는 탈출구가 없는 갇힌 상태입니다. 얼음으로 완전히 동결시키는 겁니다. 광야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게 만듭니다. 돌아갈 수도 없고 전진할 수도 없고. 마치 상자 속에 담겨 문을 완전히 닫는 식입니다.


인간들이 그동안 살았던 방식, 물이 있어야 살고 양식이 있어야 산다는 그 방식을 완전히 강탈해 버립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이에요.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말씀 지키고 기도하고 이런 방식이 아닙니다. 주님과 썸 타는 방식이 아닙니다.


광야라는 특수한 상황에 집어넣습니다. 애굽을 떠난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가서 행복하게 살 꿈에 부풀어 있었는데 약속의 땅은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이제 만들 거예요. 약속의 땅이 있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은 거기에 들어갈 백성들과 더불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광야에서는 양식과 물을 빼앗아버리죠.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어떤 공적이 이루어지는데, 사람과 (사람의)마음이 분리됩니다. 출애굽기 17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


하나님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왜냐? 그동안 내가 믿었던 하나님은 내 존재를 풍성하게 하고 내 존재의 가치를 보장해 주는 그런 분이었는데, 광야에 나타난 하나님은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기에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내 마음을 살펴서 신에게 드릴 마음과 친구에게 줄 마음을 내가 관리하겠다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분류를 시킵니다.


분류시켜서 무엇을 생산하는가 하면, 악을 생산합니다. 불평과 원망을 따로 분류해서 떠오르게 해요. 예를 들면, 튀김을 할 때 기름위에 둥둥 떠는 것을 채로 건져내지요. 주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 집어넣은 것은 불평과 원망을 떠오르게 해서 이것들을 건져내시려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사람과 마음을 따로 분류해서 사람 속에 괴물이 들어 있음을 확인케 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이 마음을 장악했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 마음은 악이 장악한 거예요. 악에서 인간을 떼어놓는 작업을 위해 광야라는 공장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점이 있어요. 사람이 죽으면 영혼도 같이 죽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지금도 하늘나라에 계시거든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삭은 아니고, 이삭이 야곱은 아니란 말이지요. 각자의 개성이 있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 주체는 이 땅에서부터 각자 분류된 주체란 말이지요. 거지 나사로가 천국 갔을 때 이 지상에서도 나사로였고 천국에서도 나사로라면 그 나사로의 주체는 나사로의 몸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다른 데서 나왔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을 광야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인간은 생각하기를 내 마음은 나의 것이라고 여겼어요. 내 마음은 내 것이기에 그만그만한 인간들끼리 서로 어울려 살아온 거예요. 내 마음은 내가 관리하고 네 마음은 네가 관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서로 썸 타자는 겁니다. 썸 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권사님들 모르지요?


마음은 그동안 네가 다뤄온 것이 아니고 악마에 예속된 마음이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너를 살려주기 위해서 인간의 육체는 죽입니다. 양식 없고, 물 없는 곳으로 데려가 인간을 죽입니다. 이제 몸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껍데기는 벗겨버리고 그 속의 알맹이를 끄집어내는데, 그 알맹이의 본질을 보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평과 원망의 지향성을 가지고 그동안 너라는 인간을 다루어 왔다는 겁니다.


‘힘들었지? 고생했지? 내가 따로 악은 분리해 처리해 줄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솟아오르는 마음, 악, 또는 악마에 속한 그 마음을 단단한 바위에 치게 만듭니다. 17장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했어요.


죄악 된 마음으로 반석을 치게 되면 그것은 원망의 완력이지요. 때리면 구멍이 뚫립니다. 거기서 물이 터져 나오지요. 그것은 물이 아니고 악이 악으로 충분히 노출된 상태에서 악을 노출시킨 언약적 작업 환경에 의해서 감춰놓은 새로운 생명이, 악마저도 이 작업에 동참시켜서 악의 힘으로 뚫린 구멍에서 새로운 생명이 터져 나오도록 하는 특수한 언약적 상황을 이스라엘에게만 보여준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을 자기가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거기서 나온 하나님 개념을 고수하다가, 진짜 생명과 접속된 자는 아무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충분하게 감지하게 만듭니다. 내가 종교생활 하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이것은 내가 날 지키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지팡이로 표현되었습니다. 지팡이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때리는 심판의 기능과 더불어 지팡이가 도리어 얻어맞는(죄로 인하여 피해를 보는 피해자의 모습, 즉 중보자의 모습) 이 양면을 다 보여줍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으니까 모세는 인간 편에 서 있고, 또 하나님 편에도 서 있잖아요. 모세가 지팡이를 쥐고 있다는 것은 지팡이를 통해서 인간의 나약성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다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 속한 인간의 기능이 하나님 자신을 때려서 생명수를 얻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특수하게 사용하신 거예요. 이게 고린도전서 10장 2-4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반석이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이 말을 오해하면 반석만 그리스도로, 반석의 존재 자체를 그리스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이고 존재론적 사고방식입니다. 이스라엘을 기능적으로 보면 때리는 지팡이와 지팡이에 얻어맞아 물을 내는 그 두 가지의 기능 전체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주는 겁니다.


선악과가 그리스도냐, 생명과가 그리스도냐? 둘 사이의 관계가 그리스도가 됩니다. 선악과를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도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나를 존재로 보기 때문에 내 속에 있는 마음이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을 모르고, 내가 나를 위해서 무엇이 유익한가만 생각하기 때문에 ‘저건 이용 가치가 있을까?’ 이런 생각만 한 거예요.


그러나 선악과와 생명나무 그 둘을 다 완성시킨 분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했어요. 마가복음 7장 15-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우리의 겉을)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십니다. 우리는 늘 발전과 성장, 미래의 아름다운 꿈 이런 것을 생각하니까 광야에서 꼼짝 못하도록 묶어놓고 수술로 해부를 하니 각종 더러운 것이 튀어나옵니다. ‘물 없습니다. 양식 없습니다.’ 등등 온갖 불평과 원망이 쏟아질 때, 주님은 자신의 일이 잘 진행됨을 흐뭇해하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할 일은 원망과 불평만 쏟아내면 되는 겁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원망과 불평이 있는 곳에만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바라는 것을 얻게 되면 점점 교만해져서 인간을 망칩니다. 일단 원망과 불평이 나오도록 해놓고 ‘웬 떡이지?’ 이렇게 될 때 감사가 감사답지 노렸는데 뭔가를 얻게 되면 여기에는 진정한 감사가 안 나옵니다.


마지막 시간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제발 목표나 기대나 희망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은 결국 좌절과 실망으로 돌아올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두 번 당한 것도 아닌데 돌아서면 또 기대를 걸고 희망을 품습니다. 자식들에게 기대하지 마세요.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해야 할 숙제가 밀려있습니다. 숙제 처리하는 것도 벅찬데 왜 쓸데없는 기대를 합니까?


살만큼 살고, 맡기신 일은 그때그때 처리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 하고 오늘 걱정은 오늘까지만 하고 밤에는 푹 주무시기 바랍니다. ‘나는 산 사람이니까 잘 살아야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사람 아닙니다. 우리는 수레인데, 평생 동안 악을 실어 나르는 수레입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내가 이런 (악을 실은)수레인줄 몰라요. 그런데 주께서 손을 댈 때 반드시 우리에게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때 천사가 주님께 보고합니다. “주님, 성공입니다. 지금 막 원망이 쏟아져 나옵니다.” 마치 마법사가 피리를 불명 뱀이 고개를 들고 올라오는 것처럼 주님이 피리를 불면(손을 대면) 우리는 불평과 원망을 쏟아냅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주체는 확정되고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이 뭔가 하면, 1, 2, 3, 4, 5, 6, 7이라고 했지요. 이것은 모든 것을 고정화(동결) 시켜서 우리에게 분류시킬 것을 분류시킵니다. 분류시킨 그 악마저도 하나님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악이 나왔을 때 하나님께서 준비한 새로운 신선한 물과 전혀 경험한 적이 없는 만나를 제공합니다.


이 만나는 약속의 땅의 상황과 애굽의 상황을 과도기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약속의 땅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안 됩니다. “모세님, 만나는 언제 과도기가 끝납니까?”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 도달하는 그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그날 만나는 과도기적 자기 역할을 마감하고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질 겁니다.


나를 살리기 위한 만나가 아니라 영원한 안식의 때를 위하여 만나는 우리에게 일종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만나가 그치는가 하면, 40년 광야 생활이 끝날 때 그치지만 중간 중간 그치는 때가 있었지요.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의 만나가 한꺼번에 주어지고 안식일에는 만나가 안 내립니다.


이게 뭔가 하면,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거든 이제 먹는 문제에서 해방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기 위한 하나님이 아니고 안식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들에게 물과 양식을 제공한 것입니다. 주님이 생각하시는 안식의 완성상태가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이 모든 일을 다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주로 영광 받는 것이 나의 존재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피조물보다 창조주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정된 상황이 신약에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주 전체가 고정된 상황이 됩니다. 달력이 하루하루 넘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을 포함한)우주 전체가 악에 예속되어 있어서 악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폭로된 상황입니다.


그래서 신약 때에는 이 땅에서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가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괜찮아요.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농협에서 대출 받으면 되니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런 것이 없어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여기에서 나와 분리된 새로운 주체, 광야에서 사람은 떨어지니까 없어요. 없고, 새로운 사람 예수님만이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는 겁니다. 새로운 주체에 예속된 주체를 우리가 부여받아요. 갑자기 어려워졌는데, 이렇게 보면 됩니다. 이 이야기하기 전에 지팡이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17장 8절을 보겠습니다. “때에 아멜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쪽에서는 고정된 공정에서 사람과 마음이 따로 분리되어 그동안 마음이 나를 악하게 지배했지 내가 마음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들통 났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을 침대에 묶어놓고 그저 원망과 불평만 계속 올라옵니다. “우리 하나님이 소용없더라.”


하나님이 소용없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소용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적인 관점은 여기에서 분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부터 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가 살리시는 인간은 그동안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이 아니고 새롭게 등장한 주체인 주님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살려지는 그러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주체는 어떤 주체인가?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말렉이라는 난데없는 적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여기에서 또 지팡이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지팡이 말고는 달리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가 웬만하면 지팡이를 들고 있어야 돼요. 지팡이 하나도 못 들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까? 힘이 빠져 지팡이를 잡은 손이 내려오니까 여호수아는 열심히 싸우는데 계속 적들에게 밀립니다.


모세가 팔이 아파 지팡이 잡은 손이 내려왔고, 그로 인해 여호수아는 전투에서 밀렸고, 그 때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높이 드니까 다시 싸움에서 이겼어요. 여기에서 모세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모세는 지팡이 하나도 제대로 못 드는 인간입니다. 모세든 누구든 이 전쟁에서 인간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는 방식이 이런 식입니다. 지팡이를 들게 함으로 지팡이가 부각되고 인간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특수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예상 못한 사태를 만나면서 느끼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표현했지요. 17장 15절에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닛시는 나의 깃발이라는 뜻인데, 여호와가 나의 깃발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여호와만이 진정 여기 계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있음이 아니라 사라져야 될 존재입니다. 우리의 몸과 모든 것은 다 무너져야 돼요. 하지만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그 주체는 분류되어 주님 손에서 새로운 주체로써 주님의 관리 하에 들어갑니다.


전까지는 나의 자아를 빛내기 위한 주체로 있었는데 이제 그 주체가 주님 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문턱을 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은 하나의 역할을 보여주는 겁니다. 신약시대에 오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 있는 말씀처럼 스스로 마귀로부터 공격을 자초하고 깨져서 마귀(우리)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깨어진 틈에서 생명이 나온 거예요.


이 모든 일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그냥 농사지어 밥 먹고 살면 되는데 괜히 주님이 찾아오셔서 난리가 난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이스라엘을 보라는 겁니다. 직접 하나님과 만났던 그 나라가 우리가 사는 이 나라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라는 거예요. 우리는 고요한 나라에서 예배당지어 찬양하고 즐기는데, 진짜 하나님이 찾아온 나라는 온통 소란과 난리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느 쪽이 하나님이 찾아 온 것이냔 말이죠.


우리가 상상한 신은 이런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의 솜씨 발휘해서 기도하고 찬양하면 기뻐하고 복주는 분은 진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전혀 낯선 모습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신명기 8장 2절을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누구를 만났습니까? 마귀를 만났지요. 예수님 눈에는 이 땅에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악이 다스리는 세상뿐입니다. 사람은 오직 예수님 본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아들은 예수님뿐입니다.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들 속에서 아들을 만들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죽잖아요. 죽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것은 돌아가고 영생하도록 되어 있단 말이지요.


이 모든 하나님의 숨겨진 프로잭트는 다른 민족, 다른 종교에서는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태국, 미얀마 이런 나라에는 곳곳에 종교시설이 지어져 있어요. 캄보디아에도 알코르와트라는 유명한 유적지가 있어요. 그곳에서 뾰족한 탑들이 이곳저곳 세워져 있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지난 시간에 라캉의 주장을 그림으로 설명을 드렸는데, 이 그림이 말하는 것은 인간은 반드시 신화로부터 시작해서 신화 속에서 주체를 꺼집에 내는데 이 주체가 온전한 주체가 아니고 흔들리는 주체예요. 분열된 주체라고 해서 S에 빗금(/)을 긋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신화를 상징화 시키는데, 상징은 문자와 형식과 제도를 만드는데 이것은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이미 만들어져있고 기존에 통용되고 있는 몇 개를 골라서 자기를 찾는다는 것이 인간의 분열된 주체입니다.


내가 누구냐는 기존의 좋은 것을 뽑아서 대충 채우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들면 바꿉니다. 인간의 주체란 몸만 있을 뿐이고, 몸에서 나오는 것은 욕구고 충동인데, 이 충동은 온순하게 다룰 필요가 있거든요. 온순하게 다루기 위해 율법을 도입하고 교회도 다녀보고 온갖 것을 하면서 누르는데, 낮에는 적당히 조절이 되는데 밤에 잠이 들면 꿈에서 다시 튀어나오지요.


이런 식으로는 욕망을 제어할 수도 없고 충족시킬 방법도 없습니다. 충족이 안 되니까 정신병이 되는데, 정신병에서는 간단하게 대처합니다. ‘그냥 충족되었다고 여겨라.’ 그러면 치유가 된 거예요. 임시 땜빵이죠. “사람은 살다가 누구나 죽기 마련입니다.” “예, 그런데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런 것은 묻는 게 아니야. 그것은 누구도 몰라. 아무도 가본 사람도 없고, 실험을 할 수도 없어. 그런 것 궁금해 하다가 정신병 걸려. 관심 끊어.”


이것이 땜빵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답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진리는 말하지 말기. 왜냐? 아무도 모르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신 분이 직접 찾아오신 거예요. 이것은 반칙입니다. 인간들끼리 사는 세상에 하나님이 튀어내려 오셔서 인간과 마음을 분류시킵니다. 그 마음이 주체가 되는 거죠.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살아있는 나만의 고유한 주체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5장 말씀처럼 이 몸을 빨리 벗어야지요. 어서 이 파자마를 벗고 새로운 명품 옷으로 갈아입어야지요. 이것이 사도 바울의 소망이었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5:1-2)” 라고 했어요.


신명기 8장의 말을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주님 눈에는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요. 사람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마귀가 대표자지 인간은 대표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마귀가 진검 승부에 돌입한 겁니다. 마귀가 먼저 공격합니다. “네가 배고픈데 일단 먹어야 살잖아. 돌이 떡이 되게 해서 먹어라.” 여하간 마귀는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예수님은 산다는 개념을 바꿉니다. 떡으로 사는 것 따로 있고 말씀으로 사는 것 따로 있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떡으로 살았기 때문에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늘 하는 소리가 ‘양식 없다. 물 없다.’ 이렇게 나오니까 주님은 그 사람에서 마음을 떼어놓고, 그것이 바로 네가 마귀에게 속한 증표라는 거예요.


그런데 주께서 물을 주시되 그들이 원했던 물이 아니고 물 없는 곳에서 물이 나옴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주십니다. 이 물은 원망과 불평의 대가로 주어진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분류된 대가로 준 거예요. 나와 마음을 떼놓고 보니까 내 마음이 착하고 순수하지 않다는 것이 폭로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하여 주신 것입니다.


“초코파이 드릴까요, 영화 관람권 드릴까요?” 이건 헌혈한 사람에게 간호사가 묻는 질문입니다. 저는 뭘 선택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내가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으면 내 주체가 이렇게 허접스럽다는 것을 밝혀지지 않고, 밝혀지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찾지 않아도 주께서 우리의 원망과 불평을 유도하면서 다가오시는데, 이것이 바로 구원자인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럴 경우에 낸 마음은 악마의 마음으로 들통 났기 때문에 옛날처럼 사람이라고 여겨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런 삶은 살지 않습니다.


만약 제게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막달라 마리아를 꼽습니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방에 숨어서 몰래 향유를 주님 발에 부었으니까? 아닙니다. 지금 자기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어요. 자신이 행실 더러운 여자라는 것은 온 동네에 다 소문이 난 상태입니다. 조소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자신에게까지 들려옵니다.


도대체 얼마나 자신과 마음이 분류가 되었으면 자신을 향한 비난도 전혀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힘든 이유는 따가운 외부의 시선을 본인이 의식하기 때문에 힘든 거예요. 다른 사람은 나에게 큰 관심도 없는데 본인이 괜히 상상해서 자기를 욕한다고 분노하고 있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분류 좀 해라. 이 세상은 네가 10년 후에 잘 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은 광야적 상황임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광야에 보내 마귀와 만나서, 이 세상 자체가 예수님이 투입한, 언약이 투입한, 언약에 의해서 고정된 광야같은 상황이 이미 예수님으로 인하여 개시되었음을 신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뭐냐? 만나지요. 40년 동안 만나를 주는데,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철없는 유대인들처럼 “주여, 지금도 우리에게 만나를 주옵소서. 그러면 얼마든지 주님을 믿겠습니다.” 이런 요청에 대해 주님은 이런 답변을 주십니다. “네 마음이 낮아지는 것이 만나다.” 네 마음이 낮춰진다면, 다시 말해서 네 마음이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어서, 내 마음은 원래 내 소속이 아니고 마귀에게 속한 것을 네가 안다면 그게 바로 과도기적인, 나중에 마귀도 없고 사기꾼도 없는 악한 자가 들어오지 못하는 그 나라가 너의 나라라는 사실을 미리 앞당겨 밑에서 예고편으로 우리에게 도장을 팍팍 찍어주는 그런 차원의 증거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시면 여러분 주변에 전부가 광야의 언약적 상황이니까 온 세상에 만나가 깔려 있어요. 옛날에는 아침에만 만나가 있었지만 지금은 발에 차이는 것이 만나입니다. 전부가 우리의 마음을 낮추기 위한 조치들입니다. 아볼로바이러스로 서남아프리카에서 1,000명 가까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우리나라에는 아직 그 바이러스가 들어오지 않아 다행이다.” 이 생각에 원망과 불평이 담겨 있는 거예요. 만약 내 친척이 그곳에 여행을 갔다고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었다면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진작 내 안에 괴물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했어요. 주님이 건드리니까 불평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주변에 있는 모든 상황들은 출렁이는 바다처럼, 존재의 바다처럼 파도가 쳐서 우리를 아프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위상, 우리의 본질, 우리의 주체, 우리의 현실을 똑바로 깨닫게 하는 준비된 하나님의 만나 덩어리입니다.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까지 세상 것을 탐한다면 그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그 만나가 주어질 때 ‘제가 바로, 제 마음이 바로 우상 숭배자의 마음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출애굽 되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눈에 보이는 이 땅이 가장 직감적이고 현실적이고 정이가고 이것만이 우리가 아는 세상의 전부라고 지금도 철썩같이 인정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웬 은혠지 웬 사랑인지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살아 있으면서 십자가가 웬 사건인지 관심을 두는 기회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예상치 못한 다른 현실에 놓여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로 91길 10-11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