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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9 20:27:28 조회 : 3431         
2014 문등 레위기강의 140826 이름 : 이근호(IP:119.18.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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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18.♡.140.69) 14-09-04 09:07 
레위기 20140726-0728
레위기 문등 제 1 강

레위기4장32-35절입니다.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 제물로 가져 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그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아 속죄제를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를 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양의 기름을 취한 것같이 취하여 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의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과정이 매우 복잡합니다. 현대인에게 복잡한 것은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린양 제물 바치면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이렇게 됩니다. 레위기 시작하자마자 끝났습니다. 어린양을 잡으면 중간과정을 거쳐 마지막에 사함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용서함을 얻으리라. 어린양을 바치면 용서함을 얻으리라가 되는 겁니다.

레위기는 어린양을 바치면 용서함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빠진 부분을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누구에게, 그리고 어떻게 바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데 어떻게 바칩니까? 공중으로 짐승 던질까요? 어떻게 바칠까요?

세 번째, 어린양이 중심인데 어린양 외에 또 바쳐야 될 제물이 있느냐, 또는 인물이 있느냐? 이 인물이 누구인가? 제사장입니다.

네 번째, 제일 중요한 것은 어린양 바쳐 용서함을 받는데 여기 앞에 ‘속죄한즉’ 이라는 단어가 35절에 나옵니다. 속죄와 용서는 각각입니다. 속죄와 용서의 차이점은 용서는 너는 나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결과를 의미하고, 속죄란 값을 지불했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이 모든 말씀을 누구에게 말씀 하셨는고 하면 레위기 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분명 레위기가 간단하다고 했습니다. 어린양 바치면 용서받는다. 그런데 어린양 바치는 것과 용서받는 사이에 부수적인 요소들이 마구마구 첨가 됩니다. 그래서 레위기가 점점 복잡해지고 다양해지고 늘어납니다. 특히 레위기는 스토리도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회막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가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습니다. 지금 모세가 없습니다. 또한 장막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있다고 간주합시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있음은 내가 거울을 보고 내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에 그 있음과 같이 있을 때에만 있음으로 쳐 주는 겁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있다고 할 때 그 있음은 내가 여기 팔짝팔짝 살아 있다는 그 있음을 가지고,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고 열기가 나고, 대화가 될 때 있음이 됩니다. 귀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귀신은 손에 안 잡히고, 눈에 보이지 않고, 사진으로 찍히지 않습니다. 귀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있음이라는 범주 속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없다는 말이 맞는 말이 됩니다.

만약 귀신이 있으면 우린 없는 존재가 됩니다. 동일한 범주에 넣으려면 공통된 개념이 들어가야 됩니다. 내가 있다는 것은 눈에 보이고, 사진으로 찍히고, 거울에 보이는 것, 이것이 있는 겁니다. 질문합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울을 보면 거울에 누가 비췹니까? 본인이 비췹니다. 거울 앞에 서면 내 상이 거울에 비췹니다. 그렇다면 거울 속에 내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만일 거울 속에 내가 있다면 내가 둘이 됩니다. 거울 속에 있는 것은 내 상, 내 이미지가 있지요. 내가 만일 거울 앞을 떠나 버리면 거울 속에 내가 있나요, 없나요? 없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수학자 루이스 캐럴(Lewis Caroll)이 지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거울 앞에서 내가 사라졌는데 거울에 내가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고양이는 대답하고 천천히 사라졌는데 처음에는 꼬리가 점점 없어지더니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이 조금씩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고양이의 웃는 입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랄 일입니까?

바로 성경이 그런 것입니다. 내가 먼저 있고, 모든 것은 나로 말미암아 투영된 것들입니다.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전도사님이 절 보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사님이 생각하는 저랑, 제가 생각하는 저랑 동일할까요, 다를까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면 제가 한국에 가버린 후 전도사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는 제가 아니고 전도사님이 꾸며내고 조작한 것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항상 내가 먼저 있음에 나의 기억도 거기에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레위기를 볼 때 내가 레위기를 백독했다, 천독했다, 은혜 받았다라고 하지만 사실은 레위기 속에 들어 있는, 거울 속에 들어 있는, 진짜 레위기 주인공 되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고 단지 자신이 레위기를 보면서 느낀 인상입니다. 레위기를 보면서 얻을 것은 얻겠다, 이익 되는 것을 찾겠다, 레위기를 통해 구원받겠다는 것들을 뽑아낸 것들의 집합 이것을 나의 있음, 나의 존재에 집어넣어 나는 레위기를 알았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합니다.

성경은 거울 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거울 속에 들어가지 않고 성경을 보게 되면 나는 관찰자가 됩니다. 창세기 구경하기, 출애굽기 구경하기, 레위기 구경하기, 민수기 구경하기가 됩니다. 성경 열 번 읽기, 마태복음 다섯 번 읽어보기를 하는 것은 있음, 즉 내가 여기 있기에 내가 읽어보고 은혜 받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절대로 자기 부정,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성경은 오히려 자기 긍정을 더욱더 단단하게 해 줍니다. 성경 때문에 나는 없는 존재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성경 속에 있는 그분이 진짜 있음이고 나는 그분이 만든 임시적인 것, 안개 같은 배치물이 내 인생이지, 성경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을 위해 있다는 고백이 나오려면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성경을 가지고 이것을 어디에 이용해 먹을까 하는 것은 성경 해석자체가 잘못된 해석입니다. 나 있음을 시작점으로 삼겠다. 나 있음을 죽기 살기로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하나님은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니 나랑 거래합시다.’가 생략되어 있지요. ‘우리 흥정합시다. 나를 지켜주시는 한 나는 하나님께 영광돌리겠습니다.’ 이미 나라는 것이 더 강하게 의식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항상 나를 위해 뒷일 해 주는 비서 같은, 종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하면서 레위기를 달달 외우고 레위기 말씀에 충실했던 이스라엘이 멸망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레위기를 몰라서 멸망당했습니까? 유대인들은 어릴 때부터 레위기도 외우고 시편을 달달 외웁니다. 그런데 망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망한 것으로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망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본인이 왜 망했는지를 모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알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망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망한 정도가 아니라 더 심도가 깊어집니다. 사울은 여호와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면서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일이 자신이 믿는 여호와에 대한 최고의 충성이라고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더 높이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하는 방법 중 하나가 예수 믿는 자를 이단으로 규정해 잡아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알 수 있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간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머리 빚고 있는데 그 모습이 죄란 말입니까? 거울 보는 것도 죄입니까?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데! 머리스타일 바꾸고 화장하는 것이 죄입니까?

사울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죄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목이 마르니 물 좀 주시겠습니까? 물이 여기 존재하네요. 나는 내 존재만 알았는데. 물의 존재가 나에게 다가와 나에게 의미가 될 때에 물이 나에게 존재하는 겁니다. 목마르지 않을 때는 물이 옆에 존재하더라도 나에게는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필요치 않으면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라는 말로 자기 존재를 지탱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망했지만 우린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을 깨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대표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한마디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내가 여기 있음을 근거로 해서 내 잘되기 위해 레위기를 바라보는 것은, 마치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레위기라는 거울을 통해 되받아 온 것뿐입니다. 레위기 속에 전혀 들어가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레위기 속에 누가 들어 있다는 말인가?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속에 계신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레위기에 예수님이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당신은 예수님이 들어 있다고 하느냐? 그것은 여기에 ‘어린양으로 인하여 사함을 얻으리라’가 되어 있죠? 어린양으로 인하여 사함을 얻으리라는 말씀, 즉 수많은 사람들이 레위기를 읽고, 연구했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 관찰자로 본 겁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 하나님께 어떤 복을 받을까?

복을 받을 때 어떤 식으로 해야 복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 자기 존재 위주로 생각해서 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이 어린양과 속죄를 자기인생에 적용시키셔서 레위기라는 율법을 온전히 다 이루었습니다.

레위기, 하나님의 말씀, 율법이라는 것은 장차 예수님 자신만이 하실 일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레위기 지키지 마세요.’가 됩니다. 이것은 기쁜 소식입니다. 건방떨지 마시고 레위기 지키지 마세요. 레위기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지켜서 거룩해질 것 같으면 예수님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오신 것도 모르고 레위기 지켜서 거룩하겠다는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정도가 아닙니다. 오신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그들이 원한 메시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죽였습니다. 성경을 읽으세요. 그러나 지키지는 마세요. 그런데 사람들은 지키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아예 성경을 읽지 않으려고 해요.

성경을 읽고 여러분 생애에 도움 되라는 식의 몸짓을 보여주세요. 그리고 그것을 잊으세요. 그것은 여러분 생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초신자가 계신데 이런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곤란합니다. 성경을 가지고 교회 충성하시고 봉사하시고 여러분의 길에 빛이 되고 등불이 됨을 이야기해야 되는데, 지키지 마세요가 나오니 제가 말하기 곤란합니다만 이 교회는 주님이 관리하시기 때문에, 목사님이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관리하시기 때문에 주님 말씀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자주 보시되 지킬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다른 분이 다 가져가셨습니다. 다른 분이 다 가져가서 다 지키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어떤 하나의 율법이라도 지킬 여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만 아시면 됩니다. 우리는 왜 우리 실력대로 성경말씀을 지켜서 거룩하지 못하는가를 평생에 걸쳐서 여러분들이 이제는 생활을 통해서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행해서 절대로 거룩한 적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을 네 자로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벌, 곧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데 아직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려주시는 것은 바로 저주받아 마땅한 그 사람을 카펫으로 깔아놓고 그 위해 예수님이 내가 어린양이다, 내가 속죄할 수 있으며, 나의 일방적 권한으로 너희를 용서했다는 것을 그 카펫 위에 지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위에서 주님이 지근지근 밟아나가는 것을 증거하는 사람,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주의 증인이 됩니다. 어린양이 되시고, 속죄해 주시고 용서하시는 모든 기능이 레위기 4장 32-35절에 나오지만, 이것은 이 밑에 카펫처럼 깔려 있는 우리 자신이 나름대로 내가 지키셔 거룩하겠다는 모든 것을 지근지근 밟아 버리시고 내가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여기 들어오시지 않으면 우린 관찰자가 됩니다. 관찰자란 기본적으로 자기 존재가 우선입니다. 자기 존재가 우선이라는 말은 내 가치는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나 잘난 맛에 살아가겠다는 겁니다. 나 잘난 맛에 살아가겠다는 이 말을 어떤 철학자는 세자로 이야기했습니다. 아주 정확히 이야기했는데 바로 ‘동질성’입니다. 동질성이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주체의 확장으로 봅니다.
쉽게 말하면 ‘나는 무엇무엇이다.’에서 ‘나는 무엇무엇 답다.’ 로, 더 나아가면 ‘나는 무엇무엇이기에 가치 있다.’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 없이 그냥 거울 보듯이 봅니다. 거울을 보면 내 모습 그대로 비췹니다. 그러면 우리는 관찰자가 되고 관찰자가 되면 성경을 보면서 무엇을 확고히 하게 되는고 하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한 나다, 나는 무엇 무엇답다. 나는 무엇 무엇답기 때문에 가치 있고, 그러기에 나는 구원받는다는 식의 자기 주체성을 확고히 합니다.

예를 들면, 엄마가 자녀에게 ‘야, 공부해, 숙제해’라고 할 때, 여섯 살부터 좀 컸다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엄마가 뭔데 나에게 숙제하라고 해.’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엄마가 말하기를 너를 낳았고, 젖을 먹였고, 밥 먹였고, 유치원 보내 주었기 때문에 네가 커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여섯 살 먹은 아이가 너무 천재입니다. 나이는 여섯 살이지만 행동은 나이 육십 육세입니다. 엄마는 어제의 엄마와 오늘의 엄마가 늘 다르다는 것을 왜 이해 못해. 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람은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나라는 것은 채 썰 듯이 쪼개져 파편이 나 있습니다. 사람은 어제와 오늘이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기억으로 날마다 새롭게 조립합니다.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안개라고 합니다. 안개라고 하면서 시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인간이란 없다. 60 살았으면 59년 다 날라 갔습니다. 90되면 89년 다 날아갔습니다. 지금 여섯 살 되었습니까? 5년 11개월 29일이 다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그러면 다 날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라 생각했지만 존재가 아니라 없습니다. 유일하게 있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있음에 우리가 가담됨으로 우리는 영원히 있는 겁니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계심에 내가 있습니다. 이렇게 됩니다. 주님이 창조하심에 비로소 제가 있습니다가 됩니다. 주님이 살아계시기에 저도 지금 숨 쉬고 있습니다가 됩니다. 참새를 누가 키웁니까? 우리는 참새를 누가 키우는가에 대한 정답을 자연, 생물시간에 참새 어미라 배웠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6장 26절을 보면 참새를 주께서 키우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들풀은 누가 키웁니까? 하나님이죠. 이제 심화학습 응용문제에 들어갑니다. 솔로몬의 옷과 들풀 중 어느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있음에 가깝습니까? 들풀입니까, 솔로몬의 옷입니까? 들풀입니다. 좀 더 나가 봅시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이 아름답습니까, 거울 앞에 선 내가 아름답습니까? 어느 것이 더 아름답습니까? 솔로몬도 들풀에게 기죽었다면 우리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십니다. 만일 구하지 않으면 너는 들풀보다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해야 됩니다. 그 나라 의를 구한다는 말은 이 땅에 주님의 의가 없고 주님의 나라가 없다는 말입니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들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중요하기 때문에 부모님을 속 썩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중요하면 여러분 속에 퍼져 있는 아버지 엄마가 중요하고, 여러분이 속해 있는 국가가 중요하고, 여러분이 장차 가질 직장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여학생이라면 앞으로 더 멋진 남자친구를 만나는가는 지금 공부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왜냐? 여러분은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이의를 다는 학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고 났습니다. 그래, 역시 내가 중요한데 선생님도 여기에 동의해 주시는구먼, 그리고 집에 가면 아빠 엄마가 너는 공부 잘해야 돼. 라고 합니다. 아빠 엄마가 머리 좋은데 공부 못하면 엄마 아빠를 웃음거리고 만드는 거야, 우리 가정은 중요한 가정이야, 난 너 때문에 살아, 너 공부 못하면 나 죽을 거야. 라고 심리적 압박을 가하면서 우리끼리 우리 끼리를 외칩니다.

그 우리끼리가 중요합니다. 그 우리끼리가 모였던 대표적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에게 레위기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레위기를 덥석 물었습니다. 그렇다. 우리끼리 우리나라 잘되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구나. 율법 내용을 보니 거룩하라고 하니 우리가 거룩하게 되면 우리가 원했던 복은 거룩을 근거로 해서 다 주어지겠지.

이렇게 오해해서 다 망했습니다. 망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존재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의 주제를 좀 고상하게 표현하면 ‘언약이 품고 있는 거룩이 스스로 어떻게 등장하는가?’ 이것이 레위기의 주제입니다. 언약이 품고 있는 거룩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거룩이 없습니다. 언약이 주어질 때 거룩이 찾아왔고, 그 거룩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접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이 스스로 날개를 펼칩니다. 우주선이 달에 착륙할 때 다리 같은 것들이 나옵니다. 언약이 올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 덩어리가 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정착되기 위해서, 언약자체 안에서 펼쳐지는 언약 구조가 나옵니다.

착륙구조는 언약이 스스로 거룩을 펼치면서 안착되는 식입니다. 그 펼치면서 나온 것이 무엇이냐? 어린양을 희생하여 속죄가 되어 용서를 베풀겠다는 식입니다. 이 용서는 어디에서 나온 용서입니까? 거룩 자체에서 나온 용서입니다. 그 거룩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은 있음이 되고, 언약에서 나온 착륙구조도 있음이 되고, 이것이 있음이 된다면 우리는 이 있음 때문에 우리는 없다, 없다가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없는 바탕위에 거룩이 있을 때 이것을 두고 거룩한 사람, 성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말씀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말씀보시고 내가 왜 거룩하지 않고, 내가 왜 의인될 수 없는가를 아시고, 그 알게 하시는 작업이 나의 있음을 없는 존재로 바꿉니다. 만약 이렇게 되지 않으면 나는 있음이 되고, 있음이 되면 여기에서 주체가 발생되고, 주체가 발생되면 동질성이 유지되고, 이 동질성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행함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더 높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를 증거하는 자기 우상화하는 식이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입니다.

신이시여, 우리 이스라엘 잘되기 위해서 오셨군요? 주님 말씀은 진짜 이스라엘은 내가 품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여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천국 가겠지요? 예수님 말씀은 저 이방인 백부장이 천국을 차지하고 너희들은 천국에서 쫓겨 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8:1-13).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며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8:8-9).”

백부장에게는 도대체 누가 있고, 누가 없습니까? 자신에게 명령하시는 분만 있고 자신은 없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천국이 어떤지 본 사람을 보면 됩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천국을 봤습니다. 그곳에 있는 천사들이 어떤 자세를 하고 있습니까?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창화하여 가로되(사6:2)”

날개를 어떤 용도로 사용합니까? 자기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천사는 자기를 가립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가릴 날개가 없으니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천사가 와서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이사야의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했습니다.

인두로 입술을 찌집니다. 그것이 거울속입니다. 이사야 6장에 나타났을 때 우린 거울 밖에서 그것을 보면서 저것이 내 존재 가치에, 생존에 무슨 도움이 될까? 보니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은 도움이 되는데,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이런 말씀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마트폰 넘기듯이 쓱쓱 넘어 가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관찰자의 모습입니다. 그 세계, 거울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기 자신이 이용해 먹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인가를 확인하게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겁니다. 예배 참석하고, 성경보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서 남은 죽어도 나는 얼마나 살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확인합니다. 남의 가정은 다쳐도 내 가정은 다치지 않아야 하고, 안산에 있는 아이들은 세월호에 사라져도 내 집안은 결코 사라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놓여 있는 세상 그 자체입니다.

여기에 대해 문제 있다고 언급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들 각자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나 잘되기 위해 신을 믿고, 신을 믿으면 지금보다 복 받아 더 잘되고 그것 외에는 아무 생각 없이 교회 나옵니다. 오직 나의 존재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레위기를 펼치니 이 말씀이 왜 나왔는지 모릅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면 그냥 용서하면 될 간단한 문제를 왜 복잡하게 어린양이 나오고 제사장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왜 복잡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끼어들 수 없는 부분을 하나님께서 직접 해내시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의 모든 말씀은 우리가 해야 할 기능이 아니고 주께서 홀로 담당하실 기능을 레위기에 미리 알려 주신 겁니다.

레위기를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만일 지키려 한다면 망합니다. 거룩하게 되려고 하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면 거룩할수록 자신에 대한 집착과 자기 동일화는 더욱 더 강열해서 완전 마귀가 되어 버립니다. 누구든지 날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겠어. 점점 더 자기 경직화, 우상화, 콘크리트가 됩니다. 자기 자신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여러분들은 레위기가 성경 뒷부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의미심장하게 보셔야 됩니다. 레위기가 전부가 아닙니다. 레위기가 하나의 문제라면 해답은 따로 있습니다. 수학문제를 풀려면 해답을 보고 문제를 풀면 빨리 풀 수 있지요. 해답 없는 문제지를 누가 사겠습니까?

레위기는 해답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해답을 우리는 모릅니다. 그냥 문제만 던져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시로 그 답이 바깥으로 튀어 나와 우리를 치게 됩니다. 우리를 치게 될 때 우리는 아파요. 몹시 아파요. 왜 아프냐 하면 내 뜻과 내 소망이 부서지기  너무너무 아파요. 교회 올 때 은근히 노리고 왔던 것, 하나님을 믿고 행운을 잡고 나는 출세한다는 아름다운 무지개 같은 꿈과 비전과 아름다운 이상 자체가 주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지옥 가는 길임을 우리가 알게 되면 아파요. 아프니까 청춘이잖아요. 아프니까 성도입니다.

성경보고 아파할 때, 내 뜻이 꺾어질 때, 무산될 때, 아플 때 아프게 하신 분이 해답으로서 우리에게 이미 접촉이 되어 있습니다. 너는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의 기호요 신호입니다. 제발 거룩하지 마라. 이것이 너를 거룩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우리가 거룩한 세계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다시 레위기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성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질문 다시 드립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 같고, 왜냐하면 하나님은 안보이기 때문에 애매모호해요. 지금 성막은 없습니다. 모세도 죽어 없어졌습니다. 이순신 영화는 있지만 이순신 장군 없지요. 그렇다면 성막도 없고 모세도 없다면 하나님도 없다가 되지 않겠습니까?

성막 없다, 모세 없다, 하나님 없다는 것은 누가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까? 내가 있다는 것 때문에 성막, 모세, 하나님은 없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레위기에서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는 이곳에 침투하기 위해 모세를 성막에서 부르신 겁니다.

모세는 백성들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시로 눈에 보이는 모세에게 반항합니다. 홍해가 가로 막혔을 때, 물이 없을 때, 먹을 것이 없을 때, 고기가 먹고 싶을 때마다 원망합니다. 애굽이 좋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모세에게 닦달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아는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경유해서 백성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자기 존재에 준해서 직접 모세에게 달려듭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경유해서, 보이지 않는 분을 경유해서, 마치 없는 존재인데 나보다 더 있는 존재를 경유해서 백성에게 다가갑니다. 이 백성을 어떻게 감당하라고 나에게 주셨습니까. 라고 하지요. 

이 모세에게 준 것이 레위기입니다. 그렇다면 레위기와 모세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모세는 레위지파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면서 모세뿐만 아니라 그들 눈에 보이는 특정지파에게 기능을 줍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모든 기능은 장차오실 예수님이 하실 기능입니다. 그 기능을 레위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기능이 무엇인가? 이것을 설명하면서 첫째 시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민수기3장보겠습니다.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겠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수족관입니다. 수족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사자? 코끼리? 아닙니다. 물고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레위기라 했을 때 우리는 관찰자입니다. 그 속에는 점선으로 있는 어떤 분이 계십니다. 어떤 분이 어린양과 속죄제물의 모습으로 가면서 수족관 안에서만 미래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수족관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관찰자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수족관 안에 계신 분을 알고 있는 모세가 등장합니다. 모세가 백성을 볼 때 곧장 보는 것이 아니라 수족관에 계신 예수님을 경유해서 본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변형되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두 분이 계셨지요.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베드로 입장에서는 모세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함께 등산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변화산(다볼산)이 588미터입니다. 모세 엘리야가 함께 할 줄 생각도 못한 겁니다. 살아 있었던 겁니다. 사람은 내가 여기 있다고 하니 죽지요.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영원히 죽지 않아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말씀이 빈말이 아닙니다. 죽는다고 하는 것은 마귀가 우리에게 협박 공갈치는 겁니다. 심지어 불신자도 죽지 않습니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7-29)”

한번 태어나면 안 죽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안 죽습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고생하는 이유가 안 죽어서 고생해요. 요양병원에서 있는 돈 다 까먹고, 링거 맞고, 젊어서는 살아 보겠다고 했지만 늙어서는 죽겠다고 하지만 자식들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호수 꽂아 국가가 주는 보험금으로 고생을 더 시킵니다. 이제는 갈까 하지만 다리미 두 개로 털썩 하여 다시 심장 뛰게 하여 또 살게 합니다. 이 세상이 감옥입니다. 이 세상이 교도소입니다. 여자들은 교도소에서 임신하여 자식을 낳은 겁니다.

지금 수족관에서 예수님이 달리고 있습니다. 모세의 장점이 무엇인고 하면 모세는 백성도 보이고 예수님도 보인다는 겁니다. 양쪽이 다 보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중보자적 기능이라고 합니다. 중보자는 양쪽을 다 보는 겁니다. 모세가 양쪽을 다 보기 때문에 모세 같은 지파, 즉 레위지파를 통해서 장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속죄가 되고 어떻게 용서가 되는지 메커니즘(어떤 대상의 작동 원리나 구조) 그 과정을 레위기에 담아 두어서 모세 같은 레위지파를 통해서, 제사장을 통해서 어떤 행동을 보여줍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이 다 이루실 것을 광야에서부터 보여줍니다. 이것을 모형과 그림자라 합니다. 이쯤에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을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성경 속에 뭔가 살아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 꿈틀거림과 나의 살아 있음을 비교할 때 나의 몸을 가려야 할 지경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 존재의 가치만을 위해 살아가지만 그분은 그런 못된 죄인을 용서하기 위해서 꿈틀거리고 계십니다.

그 레위지파에 대한 일이 민수기 3장에 나와 있습니다. 12,13절입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스라엘은 열 세지파가 됩니다. 열 세지파가 되면서 따로 한 지파를 끄집어냅니다. 열두 지파가 되면서 12라는 숫자가 한 지파로 응축되면서 하나의 지파가 하나이신 하나님을 대표해서 만납니다. 레위지파는 대표자 자격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바치라 하셨습니다. 또한 레위인들은 그 십일조 받은 것의 십일조를 제사장에게 바칩니다(민18:26-28). 제사장은 릴레이 최종주자로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속죄제물을 드림으로 십일조가 무사히 하나님께 전달이 됩니다.

이렇게 십일조가 전달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사는 땅이 하나님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 세금을 낸 겁니다. 그 땅이 하나님의 땅, 약속의 땅인데 임대차 계약을 해서 품꾼으로 살아가야 할 자들이 이스라엘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의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전달하는 임무를 가진 자를 장자라 합니다.

그래서 장자는 몽땅 다 가지고, 둘째 셋째는 장가도 못갑니다. 큰 형 집에 머슴살이해야 합니다. 그런데 장자가 아들 없이 죽었을 때 둘째 동생은 형수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을 맏이의 자식으로 올립니다.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은 맏아들로 오시는 분, 맏물로 오시는 분에게 우리가 종속됨으로서 그 맏이가 중보자 되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주님의 영광과 함께 존재하는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과정에 필수적인 것은 속죄와 사죄입니다. 죄는 죗값을 치르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죄 값을 다 치러 주셨습니다. 우리의 십일조로, 헌금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참석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값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값에 근거해서 우리에게 용서가 주어지는 그 메커니즘, 그 과정마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그리고 지키지 마세요. 이미 다 이룬 상황을 괜히 우리 손톱 떼 묻히지 마세요. 묻히면 거룩을 흠집 내는 겁니다. 100% 온전한 새언약이 포함된 거룩 앞에 말도 안 되는 자신의 거룩을 내세우면 그것은 자기 자랑이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마세요. 레위기는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는 그냥 당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밀려오시면 우리는 그 피를 증거하는 널려있는 카펫 같은 인생이 됩니다.

민수기 3장41-43절
“나는 여호와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에 레위인을 내게 돌리고 또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 중 모든 처음 난 것의 대신에 레위인의 가축을 내게 돌리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를 계수하니 일 개월 이상으로 계수함을 입은 처음 난 남자의 명수의 총계가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이었더라”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가 이만 이천 이백 칠십 삼명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칠십 삼인이 더 많습니다(46). 이렇게 되면 레위인은 이만 이천 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의적으로 남기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처음 난 자가 레위인보다 이백 칠십 삼인에 더 많기 때문에 이들을 속하기 위해 매명 오세 겔씩 취하되 성소의 세겔대로 취합니다. 이 속전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줍니다. 모세가 레위인으로 대속한 이외의 사람에게서 속전을 받았습니다(민3:49).

여기에서 273*5=1,365 세겔 됩니다. 각 지파의 숫자가 레위지파 숫자보다 이백 칠십 삼명이 더 많은 것은 레위지파의 존재 이유가 속전하기 위해 대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의사를 반영하기 위해 대표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표자가 없으면 속죄가 안 됩니다. 그 레위지파의 대표자가 제사장이고 제사장의 대표자가 장차오실 예수님입니다.

레위기가 무엇일까요?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우리에게 회상하면서 옛날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자진해서 돈 들여서 값을 치루셨습니다. 본인이 값을 치렀다는 사실을 수족관에서 나타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고 영생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것이 없음을 알게 하십니다. 또한 그 다음부터는 왜 할 것이 없을까? 뭘 해도 거룩하지 않기 때문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거룩해지려는 것조차 내 존재에 입각해서 만들어내는 자기 우상화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서 이미 다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 감사하라고 예수님이 미리 가셔서 주님의 영으로 모세를 통해 레위기를 말씀하신 겁니다.

레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세세하게 일하시는가? 레위기 속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 하는 것은 십분 후에 하겠습니다.
 서경수(IP:118.♡.140.69) 14-09-05 09:04 
레위기 문등 제 2강

첫째 시간에 속죄와 용서함을 구분했습니다. 속죄란 값을 치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는 대신 치른다고 해서 대속이라고도 말합니다. 값을 치르는 것과 용서 받는 것을 왜 별개로 할까요? 어떤 분이 값을 치렀다고 그 치른 값의 효과가 전달될 때 우리가 접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값을 치렀네, 그렇다면 이제 용서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여 덥석 무는 것은 우리에게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 저 값을 치른 것을 내가 가져야지. 라고 생각하여 덥석 가질 수가 없습니다.

값을 치렀습니다. 그 다음 그 값을 치른 효과를 가져가는 것은 셀프가 아닙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으세요. 값을 치른 것을 쟁반에 얹어 먹는 것까지 주께서 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지신 것을 나의 신념과 강한 집념으로 내가 결사적으로 믿어야지. 라고 해서 붙잡힐 십자가가 아닙니다. 만일 이렇게 되면 구원파의 질문 “당신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에 걸려들면 많이 당황하게 됩니다.

값을 치르고 적용하는 것까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택배는 집에 없으면 내가 있는 곳까지 따라와서 배달해 줍니다. 이것까지 약속해 주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 이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제가 과거에 대구에 있는 역사가 백년이 넘은 교회에 가서 수련회를 하는데 그 수련회 주제가 전도하기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 전도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전도한다고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도하지 않아도 주님께 택한 백성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때에, 내가 설치지 않아도 주께서 분주하게 일하시는 것이 느껴지신다면 그것이 바로 전도자의 모습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그 교회 설립자 자손이 화가 나서 뒤에 있는 제 책을 다 치워버렸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보험회사 영업사원이라면 열심히 해서 한 사람이라도 가입하게 하여 실적을 올려야 하겠지만 우리는 보험회사 영업사원이 아닙니다.

만일 사도바울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시키려고 했다면 절대로 십자가 복음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라도 더 건지시려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7-38)”라는 말씀을 하시면 안 되겠지요.

주께서는 모종심어 놓은 자기 백성만 데려 가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한 사람만 데려 갑니다. 혹시 이 중에 복음 아는 사람 있습니까? 물어서 있다고 하면 그 사람만 데려 갑니다. 따라서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게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행28:26-27)” 라는 말씀을 지금 드리는 겁니다.

저도 알아듣겠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갑습니다가 됩니다. 복음을 알아들으면 세상에서는 비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오히려 복음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정상인입니다. 당연히 그러해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드리는 것은 여러분들이 전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주눅 들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전도하지 않았다고 너 저 바깥 어두운 곳에서 손들고 영원히 꿇어 앉아 있어. 라고 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몇 명 전도했습니까? 노아가 평생 전도한 사람은 일곱 명입니다. 말이 일곱 명이지 그냥 자기 가족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천국 가서 벌 받았습니까? 방주는 크게 지어놓고 들어 온 사람은 자기 식구뿐이고 온통 동물들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이 너희 가족 전세 배냐? 왜 너희들만 탔느냐고 책망 받고 벌 받았습니까?

도리어 반대입니다. 아홉 명 전도할까봐 아찔했습니다. 열 명 전도하지 않은 것을 너무 잘했어.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8,39)”

노아의 방주를 보면서 그 어느 누구도 물 심판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관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한다고 노아가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노아의 믿음을 히브리서에서는 대단한 믿음으로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11:7)”

노아를 본받아라. 전도하지 마라, 전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친히 분주히 일하신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사도바울처럼 나를 붙들고 분주히 일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붙들고 일하시기 때문에 본인이 전도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하게 하시는 조치에 의해서 전도합니다. 결국 나의 일은 없고 내 평생에 주님의 일만 남도록 주님의 일에 집어넣습니다. 그것이 내가 하는 전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전도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귀한 것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모두 다 귀하게 여깁니다. 그 생명 같은 돈을 교회에 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헌금을 하게 하실 때 우리가 헌금하는 순간 내가 얼마나 돈에 대한 애착이 지독하냐를 다시 한 번 느끼게 하십니다.

헌금할 때 덜덜 떨면서 딸 피아노 레슨비 지불해야 하는데, 떨면서 헌금 내려고 하는데 전화 와서 아이가 아파 병원에 가야된다고 할 때 얼른 목사님 다음에 봅시다. 라고 하면서 헌금하지 않고 가버립니다. 그때 목사는 그것 주고 가지, 그것 내고 가지. 라고 하면 다음에 낼게요. 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엔 다 잊어버립니다. 목사와 사모는 그것만 기억하는데 헌금하는 것 잊어버리면 목사는 또 아이고, 손해 봤구나. 합니다. 돈이 근본이 되지 않는 인생은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돈으로 시작되고 돈으로 끝납니다. 얼마면 되겠어? 사랑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하지요. 

이 속죄와 사죄에 대해서 주님께서 제물을 마련하셨습니다. 또한 ‘주께서 용서하십니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라고 했을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으면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합니다. 성경 공부하면서 상대가 어떻게 말하는가를 예상해서 답변할 것까지 준비했는데 상대가 그래서 어쩌라고 하니 갑자기 말문이 막히면서 자손심이 확 상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에 대해 답변해야 내 실력을 보여줄 것인데 예상 못한 돌발 질문이 나왔습니다. 전도하기 위해 많이 준비했는데 한 번에 다 날아갈 판입니다. 그러면 다음을 기약해야 됩니까?

그 ‘어쩌라고?’에 대해 답변을 제시해 드립니다. 민수기3장38절입니다. “장막 앞 동편 곧 회막 앞 해 돋는 편에는 모세와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이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의 직무를 대신하여 성소의 직무를 지킬 것이며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일지니라.”

죽음이 코앞에 있습니다. 속죄했습니다. 용서 받았습니다. 상대가 ‘어쩌라고’ 할 때, 죽음이 네 코앞에 있다고 해야 합니다. 죽음에 완전히 포위 되었습니다. 죽음이 있습니다. 사람이 늙어서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나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이란 내가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는 삶과 다른 삶을 또 살아야 됩니다. 태어 날 때 삶이 애굽의 삶이라면 죽은 후에 사는 삶은 약속의 땅이 됩니다. 그래서 죽음과 삶을 수평적으로 출애굽 사건을 통해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냥 건지시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 한번 푹 적셨다가 약속의 땅에 데려갑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항상 기능입니다. 기능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기능 없는 존재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도가 성도되는 것은 기능 때문입니다. 성도는 주님이 하시는 기도와 전도와 헌금 등 모든 것을 기능하기 위해 있습니다. 예배참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보내셔서 여기 참석하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능인데 그 기능은 구출, 탈출, 구원의 내용을 보여주는 기능입니다.

출애굽의 전제, 탈출의 전제는 갇혀 살고 있음입니다. 이것이 기정사실화된 구출입니다.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가족, 가문, 국가에 갇혀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구체화된 형식들입니다. 가족과 가문에 갇혀 있는 것을 자기 이름에 갇혀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도 관련 없고, 다른 종교와 관련 없는 어떤 자식이 어릴 때 아버지와 싸워 가출했습니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미국에서 성공해서 돌아 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묘지에 소주와 오징어를 갖고 애인과 함께 갑니다. 묘지 앞에서 ‘아버지 불효자가 이제 왔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보고 싶은 성공했습니다. 옆에 있는 여자는 재벌 삼세인데 이번에 상속자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에게 ‘자기야 잘해’라고 하면서 무덤 앞에 절을 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지켜보세요. 제가 사랑하는 여자와 잘 살겠습니다. 라고 하지요. 장보리인지 무슨 보리인지에 나오지요. 역경을 이겨내고 한복에 장인이 되어 잘 살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모든 드라마의 주제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나의 가문과 내 가족, 이 이름을 위하여 평생 몸 바치기로 작심하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보여주는 기능은 내 이름의 영광을 위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잘도 외웁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누구 이름입니까? 아버지의 이름이지요. 우리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지요.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은 우리가 착하게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만나처럼 이미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어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이름이 어디있습니까. 라고 묻지 마세요. 우리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짓밟고 있습니다. 내가 움직이는 곳마다 아버지의 이름을 내 이름으로 짓밟고 있습니다. 이것도 월급이냐. 하면서 짓밟고 있고, 아들 성적이 30점 나오면 이것도 성적이냐. 하면서 짓밟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희생의 업적을 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때문에, 내 이름을 먹칠한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는 말씀을 우리는 짓밟고 있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을 우린 남들처럼 먹어야 하고 남들처럼 입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욕심 때문에 짓밟고 있습니다(히13:5).

교회가 무엇입니까? 자기 거울만 들고 오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수족관 속에서 움직이시는 피 묻은 주님의 손을 보면서 왜 속죄물이 되셨는가? 어떻게 내가 저분 때문에 용서 받았지? 속죄물이 되시고 용서하신 그 은혜 속에 들어가려는 우리가 어디에 갇혀야 됩니까? 자기 이름에 갇혀야 되지요. 신약에 오면 이것을 한 자로 ‘죄’라고 합니다. 죄에 갇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3:22)” 갈라디아서 3장23절에서는 율법아래 갇혔다고 하십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율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4:15).” 우리로 하여금 죄의 그물망 속에 머물게 하십니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지만 그 자유의지는 죄 짓는데 사용되는 자유의지만 있습니다.

갇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살아온 것이 죄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없지만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다. 두려움을 느낍니다. 무슨 일을 해도 두렵다는 식으로 죄 있음이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이렇게 행동하면 저주 받을 수 있어. 하늘나라 CC TV가 온 세상에 쫙 깔려 있습니다. 내가 예배시간 늦은 이유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다 알고 계시니 이것을 하나님이 벌하기 위해 화요일 바이어 만나는 것을 꼬이게 하실 것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 주엔 더 일찍 오도록, 성가대 빠지지 않도록, 주일학교 성실히 봉사하게 조치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체를 두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것을 미지의 X라고 합니다. 알 수 없는 두려움, 자꾸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습니다. 성공했다고 남들이 이야기 하는데 그 성공이 나의 두려움을 쫓아내지 못하는 성공이라면 그 성공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모든 것을 가졌는데 못 가진 것이 더 크게, 더 많이 보일 때 그것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작은 산이 있어 올라가 보니 그 뒤에 에베레스트 산이 보입니다. 에베레스트에 올라 보니 그곳에 먼저 올라온 사람이 당신은 어느 코스로 왔느냐고 묻습니다. 먼저 올라온 사람이 제일 어려운 코스로 왔다고 합니다. 자신은 제일 쉬운 코스로 올라 왔는데. 이럴 때 결핍을 느낍니다.

수영장 갔을 때 자신은 수영 못하는데 어린 아이가 선수처럼 수영을 할 때, 오기가 나서 자유형으로 두 번 왕복하겠다고 다짐해서 수영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수영장에 수영선수가 나타납니다. 어느 곳이든 도착해 보면 그곳엔 도사들이 먼저 자리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낚시, 화투, 레이스 도사들이 가득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 우리가 기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까?

그 두려움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미지의 X에서 왔습니다. 나의 영광, 나의 만족을 위해, 결핍을 채우기 위해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 결핍을 채우고, 그 차이를 줄여나가면 나는 성공한 사람이라고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있다는 자기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가 우리입니다. 가문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가문의 영광을 훼손하지 말라고 세뇌 받은 것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심지어 찬송가에 어머니의 기도가 있습니다. 나는 소름끼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기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4).” 예수님의 간구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여기에 어머니의 기도가 왜 나옵니까?

어머니의 기도가 얼마나 자기 자식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기도인지 모릅니까? 어머니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식을 키운다는 사실은 시집가면 안다고 하지요. 맞아요. 시집가면 알아요. 아하, 그래서 어머니의 딸이구나! 나는 내 자식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요.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정당화합니까? 위대한 의지의 한국인, 의지의 사람처럼, 마치 강연100 도시에 나오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라는 간증을 얼마나 많이 접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결국 자기 이름 자랑입니다. 주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기 자랑하는 겁니다.

내 목숨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합시다. 성경을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죽는 것이 우리의 팔자며, 운명이기에 우리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나에게 주어진 공포와 두려움과 염려는  우리가 평생 안고 가야할 우리의 숙명 같은 겁니다.

두려워하세요.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그 죽음은 수족관에 계신 주님의 온전한 죽음, 즉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십자가에 죽으심이 참 죽음입니다.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15:34).” 십자가가 죽음의 최종점입니다.

아담은 이 죽음을 몰랐습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안 죽어요. 이상하지요? 왜 안 죽을까요? 분명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왜 곧바로 안 죽을까요? 따먹는 날이라고 했으니 24시간을 지켜보지만 안 죽어요. 죽기는커녕 오히려 자식만 더 많이 낳습니다. 가끔은 이마에 땀이 남으로 흔적은 나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진짜 죽음은 아담이 몰라요. 진짜 죽음은 예수님만 알아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버림받음, 끊어짐을 수족관 밖으로 끄집어내면 언약궤가 됩니다. 언약궤 근처에 가면 사람들은 죽습니다. 언약궤는 죽이는 일을 합니다. 죽음을 품은 궤짝이니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언약궤 주변에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포진시킵니다. 이 말은 곧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날마다 죽어야 되지만 죽지 않고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바탕과 근거가 늘 자기 속에 장착되어야 됩니다.

소방관의 ‘화재 현장에 들어오지 말라’는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입는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소방관만 입는 옷을 입습니다. 당신들은 죽지만 우리는 안전한 제복을 입었기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라고 할 때 장비와 제복이 눈에 보입니다. 그 장비가 제사장들의 옷입니다. 그 옷(장비)을 보면서 ‘아, 우리는 죽어 마땅하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언약궤 있으면 왜 죽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제사장의 대답은 당신들은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죽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더럽기 때문에, 비거룩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이십니다. 그래서 제사장을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하시고 이스라엘을 거룩한 제사장들이 운영하는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여자가 월경을 할 때 몸에서 피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가 나오는 것을 더럽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레위기를 봤습니다. 레위기 말씀대로 거룩하게 합시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자가 월경한 후 용서 받았다면 그 다음부터는 월경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런데 월경은 매달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더럽다고 하시는데 왜 그렇습니까? 더러우니 안해야지 한다고 해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내 말을 안 들어요.

두 번째 기쁜 소식입니다. 첫 번째는 성경을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두 번째 기쁜 소식은 내 몸이 내 말을 안 듣는다는 겁니다.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육일을 지나야 하리라(레12:5).”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고(마5:28),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습니다(마5:22). 이것도 살인죄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이 나를 떠밀었습니다. 떠민다는 것은 물체의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어서 미는 겁니다. 몸이 떠밀리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은 나쁜 사람이야. 라고 했습니다. 음파에너지는 세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 듣고 가만히 있는 내가 떠밀리지도 않았는데, 에이 씨 기분 나빠. 나가 버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나가게 되었습니까? 떠밀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갔을까요? 몸은 누구의 지시를 받는다는 겁니까? 우리의 사상과 정신의 지배를 받아요.

그러면 몸이 셀까요, 정신이 셀까요? 정신이 지시하는 것 같아 정신이 몸보다 더 센 것 같지만 밤에 가위눌릴 때 누가 꿈을 꾸는 겁니까? 내가 꾸는 겁니까, 내 몸이 꾸는 겁니까? 내 몸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7장 22절 이하에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고 합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베드로전서 1장 16절을 인용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라’고 하지요. 거룩하고 싶지요. 해 지도록 분을 품지 않고 싶지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는 말씀대로 하고 싶지만 내 몸이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몸이 내가 아는 지식을 따라 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이 FACT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종교생활이라는 것은 위선생활, 위장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몸이 뻔합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뻔한데 아닌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이 위장이고 위장은 습관이 됩니다. 날이 갈수록 위장술이 더욱 더 정교하게 됩니다.

차라리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는 것이 좋지요. 내 몸이나 네 몸이나 다 아담에게서 나온 몸이니 너나 나나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주님만 자랑하는 것이 차라리 속편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 동네 가면 [속편한 내과]가 있는데 진짜 속 편한 것은 남들이 내가 거짓말 한다는 것을 미리 눈치 챘을 때 속이 편합니다.

정신병자의 특징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겁니다. 정상인의 특징은 거짓말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거짓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정상인입니다. 그래서 정신병원에서 정신병을 거짓말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으면 이제 다 나았습니다, 퇴원하세요.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말만 유통되는 세상에서 거짓말 못하는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야 됩니다.

차라리 교회를 거짓말 연습하는 장소로 삼아 버립시다. 그래서 교회 와서 누가 위선을 잘 떠는가를 시합 해 보는 겁니다. 목사님들은 위장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겁니다. 처방전을 내려 줍니다. 새벽기도 다섯 번 나오고 주기도문 두 번 외우면 당신은 거룩해 집니다. 라고 하면서 뒤에 무엇을 붙여야 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위장된 신자인데 효과가 있습니다. 라고 해주게 되면 교인들은 아주 잘 따라 하게 됩니다.

제 말은 갇혀 있음을 인정하자는 말입니다. 갇혀 있는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강하게 압박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천번 하면 방언(혀가 꼬여)은 터질지 모르지만 신자는 안 됩니다.

여기서 결론 내리겠습니다. 레위기는 모든 것이 거룩하다 입니다. 새, 물, 고기 등 모든 것이 다 거룩합니다. 단 레위기는 수족관에 있는 그리스도를 경유했을 때 모든 것이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경유했을 때 모든 것이 거룩해 집니다. 따라서 너희도 언약에 걸려들면 거룩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언약에 걸려든다고 해서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언약에 걸려들면 우리가 죄인인 것이 폭로되면서 거룩해집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 처방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 처방전은 우리가 만든 처방전이 아닙니다. ‘네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속죄물을 준비했고, 네가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용서함으로 거룩해 진다는 그 거룩을 네가 비춰내면 너는 거룩의 그물망에 걸려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더러워서 안 먹는다가 없습니다. 감사함으로 먹으면 다 거룩한 겁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생활을 어떻게 하는지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개고기 잡수세요. 오골계 잡수세요. 조건은 감사함으로. 손바닥 아프십니까? 아픈 것 감사하세요. 주께서 뜻이 있어서 아프게 하셨으니 감사하세요. 이것이 거룩한 생활입니다. 거룩을 경유하시기 바랍니다.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4:3-5).”

독단적으로 자신의 명예와 이름을 따로 챙기는 거룩을 만들지 마시고 보편적인 거룩을 경유하세요.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잘난 사람, 못 난 사람, 거지, 창기, 세리나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속죄와 용서가 될 수 있는 보편적인 바탕을 주님 쪽에서 마련했다는 선포를 하는 것이 레위기입니다.

인간들끼리의 차이와 차등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잘난 자나 못난 자나 공부 잘하는 자나 못하는 자나 모든 사람이 주 안에서 거룩함을 받아 들여야 됩니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방식을 눈에 보이는 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레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보이는 식으로 하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맞추어,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한다는 것에 맞추어서 어린양의 모습으로, 죽는 새의 모습으로, 낮은 모습으로 그 당시 제사로 보여주셨습니다.
아주 유치한 방법으로.

지금도 어떤 집단(안**)에서는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고 합니다. 어떤 것을 지켜야 한다는 집단의 끝을 찾아가 보면 다른 것이 아니라 돈 내놓으라는 겁니다. 반드시 마지막에는 돈 바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니 돈을 내라는 겁니다.

시편50편에서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1-3)”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이동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제물은 시편40편 7절 말씀처럼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분이십니다. 이 인물을 준비하셨는데 이 인물이 예수님이십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7,10).”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유치한 방법을 주셨습니다. 레위기 시작할 때 레위기는 스토리가 없어서 재미없고, 또한 레위기를 지켜야 하는가 하는 두 가지 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유치하니 지키지 맙시다. 그러나 유치한 것 속에서 숨어계신 그분의 스토리는 스토리 없는 레위기에서 뽑아 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뽑아냅니까? 레위기는 법입니다. 이 법에서 사랑을 뽑아내면 됩니다. 법의 완성이 사랑입니다.“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롬13:9).”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는 것은 간통하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난 평생 간음하지 않았음을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사랑하라는 겁니다. 아내는 여호와께서 주셨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여호와를 사랑하는 겁니다.

아내는 사랑받기 위해 아내가 되었고, 남편은 사랑 주기 위해 남편이 되었습니다. 남자가 되어 사랑받는다는 것은 남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남자란 예수님처럼 혼자 고생, 희생해서 그 희생의 혜택을 혼자 다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희생의 대가를 다 주는 것을 흐뭇해하는 것이 남자의 사는 보람입니다. 고생은 자신이 하는데 고생 안한 아내가 쇼핑할 때 그것을 보고 흐뭇해하는 겁니다. 그 쇼핑하는 것이 여자의 임무고 역할이며 사명입니다. 돈 벌어 주세요. 아내들은 쇼핑하세요. 돈 쓰세요.

요즘 결혼한 신혼부부가 각자 돈 챙긴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얼마 전에 제 딸이 결혼했는데 각자 통장을 갖고 서로 안 가르쳐 준답니다. 물론 남자는 여자가 얼마 버는지 모르지만, 여자는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주특기입니다. 부부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남편은 몽땅 다 주고 아내가 어떻게 쓰는지는 남편이 간섭하지 말고 믿어야 돼요. 믿어줄 때 여자는 남편이 자신만 사랑한다고 여기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남자를 위해 사용합니다. 백화점 명품도 남편을 위해서, 머리도 남편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 같이 남편도 아내를 위해 목숨을 주라고 하잖아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 이런 남편들에게만 아내들은 복종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남편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죠? 복종하지 마세요.

남자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다가 결혼하면 자신이 손해 봤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들은 여자를 만나므로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아는 기회가 됩니다. 법에서 사랑을 끄집어내려면 반드시 희생이 나와야 합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자기 위선에 불과합니다. 허풍에 불과합니다. 대표적이 허풍이 의리입니다. 의리, 의리, 의리. 얼마나 사랑하지 않았으면 의리를 주장하겠습니까?

사랑이라는 말을 늘어지게 한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 평소에 희생하는 면을 보여야 합니다. 여기서 희생이 나오려면 연약한 자와 강한 자라는 요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연약한 자는 여자가 하고, 강한 자는 신랑이 합니다. 이 여인의 역할이 커져 교회가 됩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해도 벌벌 떨지요. 가나안 족속들은 장대하고 자신들은 메뚜기 같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땅에 못 간다고 벌벌 떨지요. 하지만 자기 여자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넣어 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교회를 신부로 보십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 당시 사람에게 백날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습니다. 다만 완성된 주님의 입장에서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예초부터 모든 것이 이미 예정되어 있는 코스대로 가서 구원받았기에 소급할 줄 아는 안목을 성령을 통해 부여받게 됩니다. 내가 뭘 하느냐가 아니라 나 있기 전에 어떤 희생과 어떤 코스가 있었는가를 성령께서 소급해서 신구약을 다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야기도 지금부터 2천여 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성령께서 소급해서 지나간 이야기,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원칙과 법칙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강한 자가 희생을 하려면 강한 자가 강한 티를 내어야 됩니다. 그래서 강한 자가 죽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세상에 죽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난 사람보다 더 강한 사람 나와 보라고 해요. 없잖아요. 무덤을 열고 나오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돈 많은 외삼촌을 믿습니까? 이 세상에 예수님 보다 더 강한 사람 없는데 왜 우리 아줌마들은 자식, 공부 잘하는 딸을 의지합니까? 강하지도 않은데 강하다고 하니 더 부담만 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의 운명도 예수님처럼 된다는 겁니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 강한 자라면 아무리 약한 자라도 이처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히브리서 11장에 선배들이 쫙 나와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이 모든 것이 진짜 강한 자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연약하게 만든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친히 손으로 작업해 오신 겁니다. 따라서 연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에 강한 자가 연약한 자를 위해 희생합니다. 법에서 사랑을 끄집어내면서 그 가운데서 이야기가 생깁니다. 레위기가 재미없다고요. 그렇다면 법에서 사랑을 끄집어내시면 됩니다. 레위기에서 끄집어낼 수 있습니까? 레위기는 하나의 파편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어떻게 끄집어냅니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순입니다.

레위기는 세 번째입니다. 레위기라는 법을 가지고 창세기에 적용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레위기가 뿜어내는 스토리가 됩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레위기가 반복되면서 레위기는 거미가 거미줄을 뽑아내듯이 스토리가 막 쏟아져 나옵니다. 스토리 내용은 간단합니다. 법을 형식적으로 지켰더니 매 맞았다. 그렇다면 형식적으로 지키지 않고 제대로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하나님께서 갑자기 낯선 사람을 희생자로 만듭니다. 그 희생자 덕분에 우리가 살았네. 그렇다면 그동안 하나님의 희생이 우리를 지켜 왔구나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우리는 매일 죄인이며 실수하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희생 덕분입니다. 예를 들면 집에서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는데 갑자기 천장에 걸려있던 형광들이 뚝 떨어졌습니다. 나사가 풀려서 떨어졌지요. 그런데 얼마나 감사한지 땅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닥에 떨어졌다면 파편이 많아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전선은 끊어지지 않고 나사만 풀렸던 겁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주님의 십자가 피가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희생이 형광등 고정하는 것에도 개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힘으로 창고 문을 힘들에 열어, 주님 주신 힘으로 드라이브를 찾아, 주님주신 힘 가지고 의자를 들고 와서, 주님 주신 힘 가지고 나사를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돌렸더니 고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주신 힘으로 스위치를 올렸더니 불이 켜졌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에 나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1).”

신앙생활은 교회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사는 모든 곳에서 하는 겁니다. 주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은혜 받아 살도록 매사에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주의 이름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이름으로 짓밟았습니다. 코스모스를 예쁘다고 하지 않고 짓밟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은혜에 대해 내 뜻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여 편집해서 잘라버렸습니다. 빚쟁이가 찾아온 것도 주님의 은혜인데 우리는 빚쟁이가 나빠서 찾아 왔다고 생각합니다. 옆집에서 말썽 일으키는 것도, 윗집에서 시끄럽다고 내려오는 것도 모두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삶은 모든 것이 과분한 주님의 희생 덕분입니다. 그 희생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치하지만 그 속에서 스토리를 끄집어냅시다. 연약한 자는 여자입니다. 교회입니다. 강한 자는 예수님입니다. 강한 자가 희생해서 내어 놓은 그 열매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가 공짜로 참여해서 구원받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우리의 면류관도 도로 반납해야 됩니다. 이 면류관은 제가 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도로 반납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반납하는 연습을 교회에서 해 보세요. 잘했다고 하면 던져 버리시고. 자꾸 연습해야 돼요.

연약한 자는 여자라 하고 강한 자를 남자라 하는데, 남자는 암컷입니까, 수컷입니까? 남자는 수컷이고 여자는 암컷입니다. 제물에 이것을 고정시켰습니다. 제물에서 수컷과 암컷의 관계를 통해 희생을 끄집어내는 것이 레위기입니다. 수컷과 암컷의 자리가 레위기입니다. 이 레위기를 끄집어내어 창세기까지 소급해서 본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들어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 나옵니다. 여자의 후손과 남자의 후손이 아닙니다. 왜 뱀과 싸웁니까? 나타나는 것은 유치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약 역사에서 주님 스스로 유치한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심을 포기하시고, 정말 유치한 방법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린 너무 유치해서 안 믿어요. 너무 허접하고, 초라해서 못 믿어요.

우리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큽니다. 그런데 너무 초라합니다. 너무 거지같습니다. 제물에 수컷과 암컷을 집어넣어 그 관계 속에 강한 자와 약한 자를 형성시켜 그 속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위해 희생함으로써 법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레위기입니다. 따라서 레위기에서 암컷, 수컷의 구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암컷과 수컷은 어떤 상황일 때 등장하는가? 이것을 아시면 레위기 구조가 대충 잡힙니다. 제사장은 암컷입니까, 수컷입니까? 수컷입니다. 수컷이기 때문에 완전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은 여자의 후손입니다. 제사장은 남자이기 때문에 위쪽에 클래스가 다른 비어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남자가 활동하면서 내가 전부가 아닙니다. 라고 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해야 할 임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립니다. 그러면 제사장 자신은 잘났습니까? 그러면 제사장이 잘 못한 속죄제를 누가 드립니까? 제사장 본인이 드리지요. 그러면 제사장 자신을 위해 드리는 속죄제의 잘못은 누가 드립니까? 그것은 없습니다. 제사장 자신이 드리는 속죄제가 완벽하냐, 완벽하지 않느냐에 대한 결정은 미래로 미루어 놓아야 합니다.

만약에 미래로 미루지 않고 시키는 대로 속죄제 드렸습니다. 라고 하면 그 사람은 수컷 자체를 앞장세운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이 아니라 남자의 후손이 되어버립니다. 항상 윗단계의 공백요소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여자가 동원되면 되겠네요. 하시겠지요? 그런데 남자 밑에 여자가 있습니다. 남자 위에 있는 여자는 남자 밑에 있는 여자와 다릅니다. 그 여자는 남자 밑에 있는 남자의 아내로서의 여자가 아닙니다. 그 여자 아닌 다른 여자가 와야 됩니다. 다른 여자가 마치 남자 밑에 있는 것처럼 이 땅에 오시기 때문에 여자라고 한 겁니다. 

여자처럼 무시를 당하지만 여자는 아닙니다. 아내와 남편의 체계를 갖추는 어떤 초월자, 그분이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합니다. 그 작용은 십분 후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경수(IP:118.♡.140.69) 14-09-10 06:39 
레위기 문등 제 3 강

지난 시간 끝부분을 다시 말씀 드리면, 백성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속죄와 용서를 위해 제사장은 속죄물을 준비해 속죄제를 드리면 속죄와 용서가 됩니다. 그런데 제사장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제사장 자신이 속죄제를 드립니다. 첫 번째 속죄제는 백성들을 위해, 두 번째는 제사장 본인을 위해 드립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제사장 자신을 위해 드리는 제사가 죄가 될 경우 어떻게 속죄가 되는가에 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에서 세 번째 속죄제를 드린다 할지라도 속죄제 다섯 번째가 필요하고 이것은 무한 수열(항이 끝없이 계속되는 수열)로 계속 이어집니다. 이것을 두고 수학에서는 가무한(가능성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무한)이라고 합니다. 끝없이 계속해서 숫자를 추가해서 덧붙일 수 있다는 겁니다. 가무한을 바구니에 담는 것을 두고 무한 집합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바구니에 담는가? 가지고 관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속죄제에 대해서 수학의 집합론으로 말합니다. 집합론으로 말한다는 것은 곧 제사장들이 많이 제사 드리면 그 자체에서 의미가 나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학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장차 오실분이 인간들이 저질러 놓은 모든 잘못을 십자가 피로써 모든 것을 해소하는 그날이 온다는 겁니다. 그분이 바로 메시야입니다. 그분이 저희 죄에서 구출할 분이되십니다. 

여러분들이 교회 처음 나왔을 때 목사님들 하시는 말씀이,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용서를 해주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오늘 밤 죽더라도 낙원에 갑니다. 라고 합니다. 그때  끝에 믿습니까? 라고 윽박지르지요. 윽박지름에 대해 어쩔 수 없이 기싸움에 밀리지 않기 위해 믿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음부터 교회 나오지 말라고 할까봐 그렇게 합니다.

믿습니다. 라고 해치워버립니다. 그러면 학습 받고, 세례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되는데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본인도 어리둥절할 지경입니다. 믿습니다. 한마디로 구원되었데. 구원은 믿음으로 구원받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신념이라는 행함입니다. ‘믿습니다.’ 하는 행위로 구원받은 겁니다. 이것은 행함에 속하지 믿음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이 오시게 되면 내가 믿습니다. 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이 임해서, 용서가 임해서 구원받는구나. 라는 결과를 소급해서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출발을 나부터 하는 것은 신념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주어진 상황에서 확인하는 차원으로 고백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백성을 위해 드리는 제사가 문제가 있다는 말은 제사장 자신을 위해 드리는 제사도 문제가 있다는 말이지요. 만일 제사장 자신을 위해 드리는 제사가 문제가 없다면 그 제사장이 메시아입니다. 그러면 왜 문제가 있어야 되는가? 문제가 있어야 제사장 본인도 용서받습니다. 사람이 죄가 없으면 용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구원이란 잘난 맛에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죄가 유발되는 몸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죄가 계속해서 발생되어야 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용서가 계속 살아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몸이 주님의 용서를 보여주는 계획에 참여된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젊을 때 허장강이라는 배우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역할은 항상 악역입니다. 독고성도 악역입니다. 이춘도 악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재미있는 겁니다. 주님 홀로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빛내는 죄인 역할입니다. 이것은 천사도 부러워하는 역할입니다.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에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1,12).”

네 번째 복음입니다. 막 삽시다. 막 살아 봐야 내 마음대로 막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느끼게 됩니다. 나는 막 살고 싶은데 막 살지 못하게 하시는 보이지 않는 분이 함께 계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더 이 악물고 막 삽시다. 모든 결과가 내가 죄 지은 탓이요, 그 모든 결과는 주님이 죄를 용서한 탓으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내 자랑하지 말로 주님만 자랑하는 생애가 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 복음은 막삽시다.

법에서 사랑을 끄집어 낼 때 스토리가 나온다고 했습니다. 법은 스토리가 없습니다. 법이 역사와 만나면서 스토리가 나옵니다.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은 희생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희생이 나오려면 약자와 강자가 등장하고 강자가 약자를 위해 아낌없이 자기 목숨을 바칠 때 비로소 희생이 됩니다. 약자의 역할은 여자가 담당하고 강자는 남자가 담당합니다. 남자의 이름은 아담이고 여자의 이름은 하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홀로 두시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8).” 그런데 여자를 붙여 주실 때 비서하나 붙여주신 줄 알았지요. 남자하는 사업에 뒤치다꺼리 하는 줄 알았지요. 남자가 하는 것에 여자는 소모품에 불과한 줄 알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법에서 사랑을 끄집어냅니다. 저주받아 마땅한 너희들을 천국에 넣어주는 사랑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만 가능합니다. 생명나무 되시는 분이 아주 유치하지만 이 땅에 사람의 모습으로 개입하셔서 희생을 남기시고, 희생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되신 분과 영원히 천국을 이룬다는 스토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자, 여기에서 남자가 여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레위기에 집어넣습니다. 법에서 사랑이 나온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법에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법에는 사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을 꼬깃꼬깃 접어서 법속에 한 자리를 마련해 집어 넣어봅시다. 이렇게 되면 법이 펼쳐지는 곳에 꼬깃꼬깃 접혔던 사랑도 펼쳐지겠지요.

법은 죄를 더욱 죄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롬7:13).” 법은 죄를 더욱 죄 되게 만들어 놓고 그 죄마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용서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전략에 말려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주 예쁜 장난감입니다. 우린 하나의 장난감으로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창녀로 봤습니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 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사1:21).”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람난 아내 모셔오기 작전이 벌어집니다. 그것이 호세아의 스토리입니다. 우리는 율법이 법이라 생각했는데 법속에서 스토리가 솔솔 나오네요. 그 사랑의 스토리는 이스라엘 역사와 더불어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는 죄를 반복해서 나타날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랑에 대한 배신을 반복하는 역사입니다. 그 사랑에 대한 배신이 나올 때마다 주님께서는 이전에 사용하던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보다 더 자기 자학적이고, 아픔을 많이 품고 있는 더 큰 사랑으로 데리고 옵니다. 심지어 호세아의 경우에는 정숙한 신사임당 같은 여인과 선보면 안 됩니다. 아주 음란한 아내를 취해야 합니다. 이전에 음란하여 자식도 많이 깔아 놓은 여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호세아와 결혼한 음란한 아내는 자신의 속성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 바깥으로 돌아다닙니다. 그때 비로소 법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 다섯 개와 부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는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호3:1-3).”

남자에게 빚진 값을 다 값아 주고 아내를 데리고 옵니다. 속전입니다. 레위기에서는 속전이 소나, 양이나, 염소, 비둘기, 곡물 같은 것들입니다. 여기에서 제물의 등급은 속전의 대상과 관련해서 등급이 정해집니다. 보다 포괄적이면 제물의 등급이 높아지고, 개인적이면 제물의 등급이 낮아집니다. 이렇게 함으로 가난한 자나 부자나,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관계없이 하나님의 죄 용서에 다 같이 놓이게 만듭니다.

레위기 12장 4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면 삼십삼일 동안 더럽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법으로 정한 겁니다. 딸을 낳으며 육십육일 동안 더럽다고 하십니다. 왜 아들과 딸이 제물에서도 차이가 나고, 더러운 날도 차이가 날까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육일을 지나야 하리라 자녀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레12:2-7)”

그것은 창세기 3장에서 여자가 먼저 뱀에게 유혹받아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 만큼 속죄제물이 배나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죄를 깊이 짓더라고 제물은 그 죄마저 씻을 수 있도록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용서 못할 죄는 없습니다. 주님의 희생은 인간이 저지른 어떤 죄도 다 용서가 됩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지옥자체를 없애야 하지 않습니까? 지옥이 있는데 어떻게 자비의 하나님이라 할 수 있습니까? 자기가 만든 사람이 지옥에서 고생하는데 아이 즐겁다고 한다면 그것은 변태적인 하나님이잖아요. 그것은 성격이 이상한 하나님이지요. 자기가 만든 피조물이 고생하는데 나는 기쁘다고 한다면 성질이 이상한 하나님 아닙니까? 정말 대자 대비한 하나님, 모든 것을 포용해 주는 하나님이 진정한 자비의 하나님 아닙니까?’ 라고 반박이 들어오겠지요.

여러분들이 주께서 시켜서 전도할 때에 이런 반박이 들어 올 겁니다. 사람이 지은 죄는 다 용서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배후에 마귀가 못 믿게 만드는 죄이기 때문에 용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지옥은 마귀를 위해 만든 특별한 영원한 집입니다. 사태가 그렇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계12:7-9).”

하늘에서 싸움에 져서 땅으로 쫓겨 내려와 인간을 인질로 잡습니다. 나를 죽이면 너의 자녀도 죽는다는 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탄을 위해 지옥을 만들어 놓고 그와 함께 하는 자들을 지옥에 보냅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이것은 인간이 지은 죄는 용서 받지만 마귀에 의해 짓는 죄는 용서 받지 못합니다. 마귀에 의해 짓는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죄입니다. 이것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합니다. 요한일서 5장16,17절에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마태복음 12장 23절에서는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법에서 사랑을 끄집어내는데 그 사랑은 인간이 무슨 죄를 지어도 언약에 따라 제사장이 드리는 속죄 제물로 다 용서가 됩니다. 용서가 성립되려면 반드시 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 지은 자는 스스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누군가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개입된 분을 높이기 위해, 주님의 주되심을 위해 우리는 그 관계망에 걸려 든 겁니다.

수영할 때 힘을 빼야 하듯이 힘을 빼세요. 여러분 꿈에 절벽에 매달렸습니까? 손을 놓으세요. 꿈이니까. 떨어지면  아침이 됩니다. 꿈에 시달리는 것은 바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자신이 사는 것이 꿈이 아니라 실재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을 때 내가 꿈이 아니라 실재라고 여기는 순간 연결이 안 됩니다. 자기는 살아있기 때문에 산사람에게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이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꿈이 아니기 때문에,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죽은 오라버니 나사로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사로는 살아 있는데 누가 죽었다고 우기는고 하면 마리아와 마르다, 주변 유대인들은 나사로가 이미 죽었다고 여깁니다. 예수님도 별수 없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 마르다를 나사로에게 데리고 갑니다. 나사로야 나오느라고 하실 때 죽은 지 사흘이나 되고 냄새나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왔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는 자신이 살았다고 하는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확장을 못했습니다. 축구를 볼 때 전반전만 본 것과 같습니다. 전반전 있고 후반전이 있습니다. 양쪽을 다 알아야 인생을 아는 것인데 전반전만 알고 울고불고 하다가 오빠가 살아나니 드디어 ‘죽어도 살겠고’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재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어도 삽니다. 그러면 ‘죽어도 살겠고’를 모르는 자들이 불쌍한 사람들이죠. 여기 이 주변 동네 사람들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죽어도 살겠고’를 모릅니다. 단지 지금 사는 것만 알아요. 마치 부자와 나사로에 나오는 부자처럼 그렇습니다. ‘죽어도 살겠고’가 있다면 죽는 것이 없잖아요. 그러면 절벽에서 손을 놓아도 되잖아요. 가끔은 공중부양, 떨어지는 즐거움이 있어야지요.

수컷과 암컷의 배치가 있습니다. 레위기4장 32-34절입니다.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 제물로 가져 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그 속죄제 희생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잡아 속죄제를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 희생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를 단 밑에 쏟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속죄제부터 먼저 드립니다. 레위기 1장에 번제부터 나오니 번제부터 먼저 드린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속죄제부터 먼저 드립니다. 죄 해결하기 위해 속죄제 먼저 드리고, 그 다음 번제 드린 후, 그 다음 화목제 드립니다. 먼저 속죄제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과 더러운 것의 만남에서 우리는 내 힘으로 이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죄를 벗을 날 수 없다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지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죽음을 벗어 날수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도 추상적입니다. 늙어 죽을 때에야 현실이지 지금 살아 있을 때에는 그것조차 추상적입니다. 그렇다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실감납니다. 전세 값 오를까 하여 공포, 비자 취소할까봐 공포, 목회자라면 교인들이 어느 날 모두 다른 교회 가 버릴까봐 공포, 사모라면 마지막 인사해야 할 공포, 자녀가 중학교 다니다가 엄마 나 공부하기 싫어, 기타 칠래! 라는 공포, 아침에 차 몰고 가다가 오토바이를 쳐 오토바이 값 물어줄까 봐 공포(오늘 아침에 이 앞쪽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사고 났어요).

그런데 이것은 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남편이 운전하고 있다면 사고 나면 안 돼, 자차 보험 넣었을까에 대한 공포, 사람은 눈만 뜨면 공포에 시달립니다. 이 공포에 대해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은 기껏해야 교회 가서 기도하는 겁니다. 예배당 가서 잠시 기도하는 것이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한 아편처럼 기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이름을,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암컷을 드리라는 것은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으로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레위기의 제물은 유치하게 보이는 양 같은 제물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양을 끌고 올 때 암컷과 수컷의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높은 제사장 단계에서는 수컷이 수컷으로 이전되면서,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곳으로 점점 더 확대해 나갑니다. 속죄제(레4장): 제사장-수송아지(3), 온 회중-수송아지(14), 족장-숫염소(23), 평민-암염소 혹은 흠 없는 암컷 어린양(28,32). 번제-수송아지(레1:3); 수양, 숫염소(레1:10), 산비둘기, 집비둘기(레1:14); 화목제-수소, 암소(레3:1); 수양, 암양(레3:6); 염소(레3:12).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법이 줄에 매달려 내려 왔습니다. 법을 제정하신 분이 법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법을 제정하신 분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법을 제정하신 분을 암컷이라는 이름으로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합니다. 창세기 15장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제가 앞서서 말씀드렸습니다. 소가 등급이 높습니다. 그 다음 등급이 염소, 그 다음 등급이 양입니다. 이것이 레위기 16장 대속죄일 제물에서 그대로 적용됩니다. 온 이스라엘이 지은 모든 죄(알지 못하는 죄까지)를 대속해 주는 날이 대 속죄일입니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라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16:21-22).”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레16:30).” 일반적인 속죄제는 본인이 그 죄를 알게 되었을 때 속죄제를 드립니다(레4:13,23,28). 사람은 한번 용서하고, 두 번 용서하고 하지만 용서가 늘어날수록 용서는 더 안 됩니다. 7월 10일 대속죄일 날 등급이 높은 제물부터 나옵니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 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레16:3).”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 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을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레16:5).”

이 등급은 이미 창세기 15장 9절에 등급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9절 전후에 나오는 말씀이 아브라함 언약이라고 합니다. 레위기는 아브라함 언약의 적용입니다. 레위기가 궁금하면 아브라함 언약을 봐야 됩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법은 무엇이냐 하면 이 지상에 없는 인간 만들어 내서 그 인간만 구원해 내겠다는 것입니다. 지상에 없는 인간이라는 말은 지상에 있는 인간은 인간 취급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지상에 있는 인간은 아빠 엄마 때문에 나온 겁니다. 아빠의 육과 엄마의 육이 결합해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은 육과 육속에 친히 약속을 집어넣겠답니다. 그렇다면 육밖에 없는 자리에 약속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야겠지요. 약속이 만들어진 자리가 육을 짓밟아야 됩니다. 이렇게 되려면 사라의 임신되는 태를 임신 되지 않는 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절대로 임신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라도 알고 아브라함도 아는 것이, 사라는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태가 죽었기 때문에 절대로 임신이 안 됩니다. 그런데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육에서 나올 수 없어요. 육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마지막 정답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믿음의 축이 된다는 말입니다. 믿으려면 이렇게 믿으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나는 내 힘으로 구원이 안 돼, 그런데 돼.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 착함으로, 내 거룩으로, 내 선함으로 구원이 안 돼. 그러나 예수님의 피 능력이 내게 임하면 나는 구원받아.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특징은  주의 피만, 예수의 피만 최종적으로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연습한다고 될 문제는 아닙니다. 태가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새로운 아들을 낳게 하십니다. 그 아들은 약속의 아들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두 언약(갈4:24)을 말씀하십니다. 육으로 할 수 있는 언약과 육으로 이룰 수 없는 언약을 말씀합니다. 한쪽은 어머니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4:26).” 이 말씀은 곧 이삭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지상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지상에 애비 어미가 없습니다. 이 말은 곧 남자 없이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여자는 남자 아래 있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위인데, 그 위에 비어 있는 공간에 여자가 들어갑니다. 이 말은 곧 남자에게 여자가 지배받는 것이 저주인데 저주받는 상황을 유지하면서 도리어 남자로 하여금 남자 역할을 하도록 하는 그 비어있는 그 무엇 X 로 여자의 후손이 옵니다.

그러면 여자의 후손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창세기15장 1절입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여러분 방패는 어디에 사용되는 물건입니까? 전쟁 때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전쟁하는 대상은 하나님의 원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은 누구와 싸우는가 하면 남자의 후손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뱀의 후손과 싸웁니다. 결국 뱀의 후손이나 여자의 후손은 인간의 손을 떠나 있습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영적 전쟁을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것은 영적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유치한 방법으로 보여주는 생을 사는 하나님의 전리품입니다. 본래의 역사는, 현실은 영적 전쟁이고 우리는 이것에 대한 표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살아도 사는 목적도 모르고, 있어도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면서 그냥 그대로 주는 밥이나 먹고, 돈이나 벌고 살면서 늙으면 죽는 줄 알고, 태어나면 태어난 줄 알 뿐입니다. 처음도 끊어졌고, 끝도 끊어졌고 도대체 왜 내가 여기에 존재해야 되고, 이 땅에 등장해야 되는지 아무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면서 삽니다.

[올드 보이]에서 이유도 모르고 15년 동안 군만두만 먹었던 것처럼. 그저 남 꽁무니만 따라다니면서 남 아파트 사면 자기도 삽니다. 어제 목사님과 이야기하면서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에서는 평생 처음 살아 본다는 겁니다. 앞으로 화장실 세 개짜리가 나옵니다. 풀장 있는 것도 나옵니다. 목표가 생겼습니다. 요트가 목적입니다. 왜 오골계를 먹어야 하는지, 두 개짜리 화장실이 있는 아파트에 살아야 하는지 앞뒤가 다 끊어져 있습니다. 몰라요.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서 앞뒤를 이어 주셨습니다. 바로 욥기입니다.

욥이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고 했습니다(욥1:21). 주신 분이 있다는 것은 주신 분에 이해서 얼마든지 회수가 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욥기는 본인이 이렇게 고백해 놓고 막상 자신의 몸의 한계를 맞게 되니 처음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 입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발각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변자 욥의 입을 통해 우리는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릅니다. 왜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나를 태어나기 전으로 돌려놓으시든지, 아니면 태중에 죽었으면, 태어나지 말게 해 주셨으면-- 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육입니다.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그렇게 아니하였더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욥10:18).”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레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욥26:12).”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1:33).” 이게 육입니다.

육을 육 되게 하는 것은 이 땅에서 새로운 영적존재가 등장해서 언약 안에서 교제를 할 때 우리가 육임을 폭로 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삭입니다. 그 이삭의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입니다. 이것은 육으로 태어나지 않는 약속의 자녀 이삭이라는 것을 표출하는 장치가 언약입니다. 언약 안에 주님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언약이라는 장치를 통해 유치한 방법인 법으로 자기 자신을 펼쳐 보여주시다가 마지막엔 본인이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8절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드디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나는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보이기 때문에 존재하지만 하나님이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어렵다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유치한 방법으로 사람들 눈에 보이고, 함께 술 마시고, 함께 음식 먹고, 함께 잠을 자는 가장 낮은 방식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낮은 방식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하셔야 합니까?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좋았겠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봤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주님이 안 보이잖아요. 부활하신 주님 보여주면 저희들도 믿지 말라고 해도 믿을 겁니다. 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5).” 육의 횡포 때문에 희생당한 자가 바로 소자입니다. 내가 내 이름을 위해서 말도 안 되는 횡포를 부릴 때 주의 이름으로 치인 자들이 소자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지요. 온 천지가 밟히는 곳마다 만나입니다. 밟히는 곳마다 주님의 희생이고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희생은 귀찮다고 버리고 내 힘으로 쟁취하여 얻을 수 있는 것만 노리다 보니 주님의 희생이 우리에게 무시당합니다. 저는 우리교회 교인들이 예배 참석하면 늘 놀라고 있습니다. 안 오셔도 되는데, 동영상 보시면 되는데 왜 친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예배당에 오셔서 참석하십니다. 오실 때는 빈손으로 오시지 않고 오천 원 하나 넣어 주시는 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없음을 기본으로 하는 겁니다. 내가 인간 같지가 않습니다. 내가 죽어야 마땅하고 아무것도 아닌데 나보고 오는 것은 아니잖아요. 주께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을 모이게 하셔서 예배시간을 성사시키시고....그 다음 예배시간은 기약이 없습니다. 올지 안 올지는 주님 소관입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고 하시지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4).” 주체성을 연장하지 마세요. 우린 그때그때 달라요. 누가 옆에서 잘해 주시거든 저것은 그 사람 본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이라 생각하시고 주님을 찬양하세요. 또 누가 나쁘게 대하면 내가 당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기도하세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5:13).” 이것이 바로 주의 뜻이 이 땅에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소자에게 한 것이 주님께 한 겁니다. 수염 있고 도포 걸치고 키가 180센티미터 넘는 사람은 조작된 겁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에게 치인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이는 그 사람 속에 있습니다.

제사 드리라는 말씀은 네가 제물이 되라는 말로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등이 있을 때 레위기를 돋보이게 들어 올리면 창세기에서 우리까지 적용시킬 내용을 분사하듯이 뿌려 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사장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몸을 통해 레위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컷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은 우리 머리 위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계십니다. 마귀와의 전쟁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마귀를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위에 계신 분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유발시켜 놓고 그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으로, 너는 주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십니다. 주님이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너무 얄미운 것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꼭 우리 힘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사태를 주심으로 우리 몸에 두려움을 유발시켜 놓고 평안을 주십니다. 병 주고 약을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질병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질병을 주고 약을 줍니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면 넘어지게 합니다. 고민거리를 만들어 놓고 스스로 해결 못하게 만들어 놓고 주님이 도와주시지요. 사사기가 그러합니다.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주변에 모압, 암몬, 아람, 블레셋이 웅크리고 이스라엘을 칠 기회를 노리고 있지요. 이스라엘을 보면 장기판입니다. 이스라엘을 포위해 으르릉 으르릉 거립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이 평안하다 생각할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치라고 하시면 이스라엘을 때립니다. 이럴 때 이스라엘이 처음부터 여호와를 찾지 않습니다.

은행 잔고로 해결할 수 있다. 내 선에서 보험처리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더 강하게 으르렁 합니다. 나중에 다 털리고 빈털터리가 되었을 때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주님이 ‘무슨 일 있냐’고 하시지요. 그러면 이렇게 말합니다. ‘큰일 났습니다. 제가 가진 것 모두 날렸습니다.’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죽어라고 했잖아’라고 합니다. ‘너는 살 가치도 없는 존재라고 평소에 이야기 했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농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라고 말하지요. 주님은 ‘농담이 아니라 그것이 FACT야’ 라고 하십니다.

우리 몸은 우리정신이 조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조정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은 주님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내 몸이 성질나서 나로 하여금 나의 신앙을 모독하는 식으로 몸을 움직여 나갑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죄라 하셨지만 사람은 남을 미워하지 않으면 자기 사랑이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식의 자기 사랑 밖에 없습니다. 남 못되는 꼴 봐야, 연예인이 이혼해야 기분이 좋아집니다. 누가 이혼했데, 누구 죽었데-- 라는 것이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습니다. 일본축구가 패해야 한국이 기분이 좋잖아요. 우리 몸이 그런 몸입니다.

그러니 우리 간단하게 삽시다. 몸은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내 몸은 기도한다고 내 마음대로 안 됩니다. 헌금 많이 한다고 안 됩니다. 인간은 본성대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물을 내가 수리하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께 드리면 주께서 새 몸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새 몸으로 교체를 해 주십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

‘헌 것 갖고 와. 하루 종일 살았느냐? 헌 것 다 되었네. 내일 아침 새것 줄게’ 새 것 주면 또 망칠 겁니다. 망치면 또 가져와 또 새 것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의 소자입니다. 형제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주님만 자랑하는 겁니다. 이것이 매일같이 희생되어야 될 레위기에 동원된,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매일같이 동원되는 그 어린양이고, 숫염소고, 깨져야 할 곡물입니다. 소제는 고운 가루나 화덕에 구운 것, 철판에 부친 것, 냄비의 것을 드립니다. 첫 이삭의 소제는 볶아 찧은 것으로 소제를 삼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를 가루로, 화덕에 굽고, 냄비로 끓이고, 볶아 찧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으르릉 으르릉 사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시간 마다 깜짝깜짝 놀랍니다. 까꿍 까꿍 카톡 들어오듯이 사태가 벌어집니다. 우리는 겁을 집어 먹고 일을 합니다. 까꿍 하면 스팸이고, 까꿍 하면 어머니 치매 걸려 집 나갔습니다. 하면 깜짝 놀랍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한시도 긴장을 풀지 못하도록 살아갑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나그네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선반자체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이것을 자랑합시다.
 서경수(IP:118.♡.140.69) 14-09-11 08:08 
레위기 문등 제 4 강

성경은 보시되 지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담당자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의 담당자가 따로 있음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말씀의 담당자가 따로 없는 것을 두고 행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지키지 않아야 할 이유는 성경은 성경의 담당자, 즉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한, 하나님 자존심을 위한 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나의 자존심을 높이고, 나의 이름을 높이고, 내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내가 거룩하게 되려고 성경을 봅니다. 이런 성향을 발휘하기 때문에 성경은 보시되 지키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거룩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그 죄인을 위해 속죄제로 용서를 베푸시는 결과로서 거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을 위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선악과를 심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선악과를 왜 만들었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말든지, 아니면 선악과를 만들더라도 아담과 여자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주 찾기 힘든 곳에 두셔야 하지 않습니까? 왜 선악과를 동산 한 가운데 두시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 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까지 하게 만들었습니까? 마치 이것은 먹지 않으면 먹을 때까지 따라 오면서 먹어라하는 것처럼 그런 나무를 만드신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합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거룩에 있지 인간의 거룩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위해서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창조하신 깊은 내막에 참여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게 하셨고, 마귀를 에덴동산에 들여다 보내시고, 마귀로 하여금 인간을 유혹하게 해 놓으시고, 인간을 거기에 걸려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었는데 다 죽지 않고 마지막 날에 인자의 음성을 듣고 다 다시 살아나도록 조치를 해 놓았습니다.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지옥 가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는 늙어 죽을 때 깜짝 놀라지요. 이것으로 끝인가 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른 세계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계획은 주 되신 예수님이 다 꾸며낸 것이라고 통보해 주실 때 우리는 우리가 받은 면류관을 어린양 앞에 돌려 드립니다.

인간은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가는 그 작업 속에 만들어진 존재로, 엑스트라로 가담된 존재일 뿐입니다. 어느 시점에 성령이 와서 우리는 알게 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미래가 보장된 사람, 보험 들지 않아도 미래가 이미 확보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살아갈 때 이것을 가지고 주님의 자유에 참여한 자라고 하여 이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나의 자유를 탐닉하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진리 안에서, 주 안에서 자유입니다.

그런데 주 안에서 자유라는 말은 모순되는 말입니다. 어디 안에 있다는 말은 자유가 없다는 말인데 성경은 주 안에서 너는 자유케 된다고 하십니다. 네가 기대하지 못한 예상치 못한 영광에 네가 참여케 될 것이다. 네가 해서 참여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에 너는 공짜로 참여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전체를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레위기가 성경전체 안에 하나의 과정으로서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레위기를 레위기에 가두어두고 보게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레위기를 뽑아 올려 위에서 보게 되면 비로소 레위기 안에 흐르는 전류를 알게 됩니다. 방금 제가 전류라고 했는데 이런 뜻입니다. 주님 자신은 알파요 오메가라고 하셨습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흔들다리를 만듭니다. 그 다리에 66개의 빨래가 걸려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다른 빨래는 다 말랐다고 치고 다 거두어 버리면 레위기만 남겠지요. 그러나 레위기만 남았지만 레위기는 알파와 오메가를 연결한 다리, 줄에 매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이 빨래 줄에 창조부터 심판까지 전류가 흐릅니다. 이 전류를 레위기 구조전체를 통과해서 흐릅니다. 그래서 레위기를 해석 할 때에는 레위기 단독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흐르는 흐름을 여기에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넣습니까? 관찰자? 아닙니다. 관람자? 아닙니다. 구경꾼? 아닙니다. 야경꾼 일지 쓰도 안 됩니다. 우리는 수족관 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러나 들어갈 때에는 그냥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동화 이야기를 했습니다. 고양이는 사라져도 미소가 남아 있는, 거울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거울의 기능을 반사기능이지요. 그러나 거울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들어갈 수 없는 레위기 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레위기 속에 우리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레위기를 추상적인 대상으로 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추상적인 것이 눈에 보이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어제 우리는 보이는 것을 가지고 존재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만일 보인다면 우리는 존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왜 존재를 보이는 것에만 국한 시키는가 하면 우리는 늘상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처럼 보일 경우에만 같은 존재 범주에 넣어주기로 우리 마음이 결정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치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인간들이 유치하게 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유치한 방법으로 나타나십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면 어린양을 잡는 겁니다. 어린양을 잡게 하시면서 거기에 추상적 의미를 가미시킵니다. 속죄와 용서의 의미를 가미시키지요.

그런데 속죄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양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프리카 양과 브라질 양, 러시아 양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양은 속죄양이 됩니다. 이게 무슨 일방적인, 독단적인, 말되 안 되는 주장입니까? 김용옥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각 민족의 신이 다 있는데,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 천지를 창조하신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다른 신은 없는 것이고 우상이라고 독단적으로 주장하느냐? 이스라엘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우리 한민족도 그렇게 주장하자 하여 우리 단군 할아버지도 진짜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에 속한, 육에 속한 자들의 발상입니다.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이 신봉하는 여호와, 그리고 그에 대한 계시, 율법, 언약이 있으니 다른 민족이 시기가 난 겁니다. 우리도 비슷한 것 있다는 겁니다. 요나 있냐? 우리는 심청전 있다. 이런 식입니다. 이것이 학교에서, 교육현장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종교를 만들고 우리 사상을 결집시킬 수 있는 요인들을 뽑아 우리 민족이 살아 있는 한 지상에 널리 유포시키자고 합니다. 이 넓은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좋은 것을 다 도입해서 이 나라 정신적 지주로 삼겠다는 것이 국가의 먼 미래를 보는 국가 교육의 모토가 됩니다.

이것은 국가 정체성입니다. 한국, 미국 정체가 무엇이냐? 국가 이념이 무엇이냐? 이것이 헌법안에 들어 있고 이것을 부정하면 용서가 안 됩니다. 레위기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사용하는 유치한 방식을 통해서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 시킵니다. 구체적이라는 것은 존재적인 인간이 해낼 수 있는 행함, 즉 얼추 모방이나 흉내가 가능한 조건의 구체를 만들어 추상으로 이끕니다. 추상에서 나왔던 구체를 다시 추상으로 이끄는 장치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용서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할 때에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됩니다. 값을 치르는 것을 속죄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대신 치르는 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속죄하여 용서한다는 말을 바꾸어 표현하면 너는 죄인이야.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지은 죄를 여러분 스스로 의로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임시적 죄인이지 영구한 죄인이 안 됩니다. 예배시간에 늦게 왔다고 했을 때 헌금을 천 원 하면 서로 상쇄할 수 있잖아요. 지각에 대한 벌금은 자신이 측정해서 자신이 처리해 버립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실수 했을 때에는 자신이 자신을 심판해서 벌까지 자신이 내립니다. 예를 들면 자기 자신 머리에 꿀밤을 세 번 때리면서 바보야! 바보야! 라고 합니다. 그러나 더 잘못했을 때에는 꿀밤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가슴을 세 번 칩니다. 자기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범주 내에서 상쇄가 가능한 상벌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속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 체제는 그 인민들, 백성들이 용인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상벌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들끼리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국가에서는 형사법이 되고 민사법이 됩니다. 이것은 관습에서 나온 법들입니다. 그래서 시대가 바뀌어서 도덕적인 것이 변형되면 고정되었다고 생각되던 법 조항도 바뀌게 됩니다. 어제는 죽을 죄인이 오늘은 의인이 되는 것을 세계 역사 속에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들의 지혜를 모아 꾸려나간다고 자부하는 인간세상이라면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는 원리를 숨겨 놓았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아는 이스라엘 족속들에게, 선악과체계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생명나무가 들어올 때 법의 모습으로 들어왔습니다. 법의 모습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들어감으로 이스라엘은 속죄와 용서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속죄와 용서는 실제로 있지만 그들에겐 추상적인 겁니다. 그러나 추상적인 존재지만 실제로 속죄되고 용서가 됩니다. 속죄와 용서는 추상적인 것에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해하기에 이것이 실제적으로 효과가 날 때 안심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속죄제 드리면 용서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속죄되고 용서 받을 수 있다는데 그것 못할 것 없지. 라고 합니다. 그 예 중 하나가 말라기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이 말씀이 어떤 뜻이냐는 관심이 없고 이 말씀을 보고 창고부터 짓습니다. 창고를 크게 지으면 믿음이 좋은 것이고, 창고를 적게 지으면 믿음이 적은 겁니다. 입을 크게 벌려야 많이 채운다고 하니 아주 크게 벌리려고 하다가 턱 빠집니다.

말라기 말씀은 창고에 차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생각대로 차면 고맙고 안 차면 어쩔 수 없다가 나입니다. 레위언약의 완성에서 창고에 가득 차지 않으면 너의 행동이 문제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십일조를 어느 정도 드려야 창고에 가득 차겠습니까?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창고에 가득 찰 만큼 십일조 할 만한 위인이 없다는 말입니다. 은근히 기대하여 시험 해봅니다. 시험 해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해봐도 자기만족이 안 됩니다. 인간은 욕망이 지배합니다. 욕망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여러분 몇 년 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백 삼십년? 백 삼십년 산 사람에게 백 삼십년 사셨으니 만족하시겠지요? 라고 하면 뺨 맞습니다. 그 사람은 내 년을 기약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에게 내년이면 백 삼십 한 살 인데. 라고 하면 뺨 맞지요. 그러면서 너도 한번 살아 봐라. 너는 살 욕심이 안 생기는지? 인간은 산만큼 산 것이 삭제가 됩니다. 하루살이입니다. 오래 살아도 다 날아가 버립니다.

속죄와 용서는 추상적인 요소입니다. 이렇게 추상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너희는 구체적인 것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 벗어나는 방법을 속죄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속죄제도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속죄물을 드리면 용서된다는 아주 간단한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제대로 속죄제를 드리지 않으면 용서가 되지 않지요. 주님은 구체적이고 유치한 방법을 미끼삼습니다. 속죄제사가 완벽한 줄 알고 속죄 제사를 법대로 드리지만 그 법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의견이 달라집니다. 여기에서 속죄제사법과 실제적용에 있어서 차이가 발생합니다. “속죄물 곧 그들을 위임하며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데 쓰는 것은 그들은 먹되 타인은 먹지 못할지니 이는 성물이 됨이며(출29:33)”

레위기 10장을 봅시다. “모세가 속죄제 드린 염소를 찾은즉 이미 불살랐는지라 그가 아론의 남은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노하여 가로되 이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 거룩하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거룩한 곳에서 먹지 아니하였느뇨 이는 너희로 회중의 죄를 담당하여 그들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하게 하려고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그 피를 성소에 들여오지 아니하였으니 그 제육은 너희가 나의 명한 대로 거룩한 곳에서 먹었어야 할 것이니라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다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레10:16-20).”

모세가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꾸짖는 장면입니다. 너희들은 속죄 제물에 대한 해석을 잘못했다. 분명  거룩한 공간에서 먹어야 하는데 먹지 않고 왜 모두 다 불살랐느냐? 라고 하니 아론이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론이 모세에게 이르되 오늘 그들이 그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어도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거늘 오늘 내가 속죄 제육을 먹었더면 여호와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 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습니다. 자기 견해를 철회했습니다.

모세 자신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보세요. 법대로 라는 것이 틀어집니다. 분명 율법을 주셨으면 율법대로 하면 모든 것이 완결된 상태라고 자부했는데 같은 법조항에 대해 다른 해석이 나오는 새로운 사태를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율법이 진리입니까? 법이 진리라는 것은 법을 지킴으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위반한 곳에서 진리가 나옵니다. 율법대로 지키면 그 결과가 자신이 기대한대로 나와야 하는데 예상 밖의 결과가 나옵니다. 그때  그 차이나는 만큼 새롭게 진리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운전할 때 조심하세요. 라고 하지요.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면 조심의 양이 어느 정도입니까? 벌벌 떨면서 하는 것이 조심이라면 일분에 몇 번 떨어야 조심이 될까요? 법에 대한 오해는 법이 세밀하게 적용되는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일조 하라고 하니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십일조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시점입니다. 십일조하면서 복을 받아야 하는데 살림이 어려워질 때 십일조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나옵니다. 십일조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십일조는 내는 것이 아니라 완료된 결과를 받아 누리는 겁니다. 우리가 빈 창고인데 십일조 되시는 주님이 십일조를 드림으로 우리 빈 창고가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하는 입장이 아니라 십일조의 결과물을 받은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니 십일조의 혜택을 받는 자들이 십일조를 내는 입장이 아니잖아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형식입니다. 산에 있는 동물을 우리가 드린다고 우리가 드리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것을 장소 이동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우리가 드린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성경에는 초반에 드리라고 하십니다. 명령입니다. 이렇게 명하심은 네가 드림으로 네가 얼마나 잘난 척 하느냐를 들추어냅니다. 나는 용서받는 행위를 했습니다. 라는 자신 만만한 꼴을 발견하라고 명하신 겁니다. 

이정도 열심히 주님께 봉사했으면 내가 그 동안 뒤에 숨겨둔 자식성적 올라가는 것쯤은 전능하신 주님이 들어주실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 봉사해도 성적이 내려가면 어떡합니까? 그 차이를, 오해를 알아야합니다. 네 속에 법이 들어오면 네가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네가 얼마나 많은 문제점이 있는지 발각시키는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학생이 자기 생일날 친구들을 초대합니다.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친구들이 참 맛있네. 네가 다했지?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존심을 발휘할 찬스가 됩니다. ‘그래 내가 다했어.’ 라고 할 때, 엄마가 뒤통수 때리면서 네가 한 것이 무엇이냐, 이 모든 것을 내가 했지. 라고 하시지요.

여기에서 얻어맞는 것을 차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다 했지 어떻게 네가 했니? 라고 하시면서 때려 주실 때 얻어맞는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추상적인 존재가 나를 때려 줄 때 그것은 간극이라고 합니다. 이 틈이 발생되면서 주님과 나와 보통사이가 아님을 알게 되지요. 사생아라면 때리지 않으실 것인데 아들이니 날마다 나를 때려주시는 것을 알게 되지요. 우리 평생에 남아 있는 자국들은 주님께 얻어맞은 자국들입니다. 수술한 자국, 차사고 나서 보상해 주고, 평소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주께서 때려주시는 귀한 매 자국입니다. 

속죄와 용서는 추상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속죄제물을 드리면 속죄가 되고 용서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소용없다면 하나님께서 추상적인 것을 속제물을 통해 속죄하시고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을 실제로 성취시키는 분은 누구십니까? 유치하지만 그 시대 시대마다 인물이 있습니다. 대제사상입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차례, 7월 10일, 대속죄일 날 제사를 드림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습니다(레16장). 

지성소에는 대제사장 외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특정 공간과 일반적인 공간을 구분하시는 것도 유치한 방법입니다. 유치의 극은 제사장 복장입니다. 이건 각설이도 아니고. 꼭 경극의상 같아요. 거룩을 그런 식으로 표출해 냅니다. 너무나 유치하기에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그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에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냥 유치한 것을 그대로 남겨 버리면 구체적인 것에 머무르지요. 그래서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을 연결하는 고리는 피와 기름입니다. 피와 기름은 죽음이 아니면 발생될 수 없는 겁니다.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 오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가락과 오른 발 엄지가락에 그 피를 바르고 또 그 피를 단 주위에 뿌리고(레8:25)” 피와 기름을 단에 일곱 번 뿌립니다. 피가 없으면 성막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피는 추상과 구체적인 것의 접점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계속 구체적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것은 죽음과 만날 때 끝이 나고 추상으로 넘어갑니다. 따라가도 따라 갈 수 없는 곳은 죽음의 자리입니다. 이것에 대해 잘 표현한 영화 [러브레터]입니까? 거기 잘 계십니까? 오깽끼데스까? 죽은 자를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은 자를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쪽에서 부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송아지, 염소, 어린양 등을 쪼갤 때 나오는 피와 기름입니다. 이것들을 한꺼번에 끄집어냅니다. 우리처럼 서서히 늙어가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칠팔십 인생을 압축해서 한 순간에 피와 기름을 끄집어냅니다. 이렇게 해야만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으로 넘어 갈 수 있습니다. 만약 피와 기름이 없으면 교회는 상상력이 집합된 놀이터가 됩니다. 거룩한 천국과 거룩한 삼위일체를 조작해내는 놀이터가 됩니다.

피는 모든 유치함을 취소합니다. 무의미하게 합니다. 일곱 군데 개척 교회했습니다. 박사학위 했습니다. 죽으면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십자가 마을에 쓴 칼럼 중 “80% 백골화”라는 무시무시한 글이 있습니다. 왜 100% 백골화가 아니라 80% 백골화인가? 유병언씨도 운이 없어요. 100% 백골화가 되었으면 누군지 알아내지 못했을 것인데 80% 백골화 되었을 때 발견되었어요. 100% 백골화면 죽음의 세계로 넘어가 버릴 것인데 남아 있는 20%로 국립과학수사대에서 조사해 보니 유병언씨가 맞다고 과학에 걸려들었습니다. 만일 100% 백골화가 되었다면 유병언 이름은 삭제되고 흙이라는 포괄적 이름 속에 들어가 버려 망각이 될 겁니다. 그런데 20% 남아 있어서 죽은 채로 유병은 이름으로 다시 끌려들어 왔습니다.

죽음은 일체 우리의 이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고 난 뒤의 상황을 살아생전에 인간이 조작하거나, 관여하거나, 영향을 입힐 만한 행위를 해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형이 저쪽에 있고 이곳은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모형 따라 원형이 만들어지는 그런 법은 없습니다. 원형이 먼저 있고 그림자가 있지 그림자가 먼저 생기고, 원형이 생기는 법은 없습니다. 본체가 있는 상황에서 그림자가 비치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신앙생활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됩니다. 전도서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죽음은 차이 없이 당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의 결국이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이며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전9:2,3)”

물에 빠질 때 착하다고 빠지지 않고, 악하다고 빠지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묻지도 않고 다 같이 빠집니다. 어떤 사람은 천국가고 어떤 사람은 왜 지옥 갑니까?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에 대해 본인의 행함이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은 우리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우리가 천국과 지옥 가는 것에 대해 어떠한 압력이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가슴이 털썩 주저앉습니까, 날듯이 기쁩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천국 가는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라고 할 때,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이쿠 큰일 났네. 라고 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털썩 가슴이 내려앉는 사람의 예를 들면, 주를 위해 살겠다고 총신 들어갔는데, 이 복음 들은 후 총신에 가나 동국대학 불교학과에 가나 구원받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죽을 때 교회 나와 믿으면 되겠네. 라고 말도 안 되는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실컷 나쁜 짓하다가, 요트 타보고, 골프 치고, 도박도 하고 해볼 것 다해보다가 심심해서 교회나 가야지 했는데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모태신앙들은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엄마 때문에 주일학교 봉사하고, 구름기둥 불기둥 다 만들고, 땀 흘리면서 일했는데 목사님 말씀대로 아무 소용없다면 물러달라고 할 수도 없고..

우리가 추상적인 것을 접하게 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 포괄적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사람이 노는 것이 죄가 될 것 같으면 마음껏 노세요. 그러나 사람의 죄라는 것은 나름대로 의라고 여기는 그 속에 틈이 갈라지면서 내가 몰랐던 죄가 나옵니다. 부지런히 충성하고 남들이 칭찬하는 가운데서 나만이 감각되어지는 은밀한 죄가 나옵니다. 내가 충성해서 반대급부를 노리고 있는 그러한 심보, 내 착함이 내 구원 얻는데 압력요인으로 작용시키고 싶은 나의 내밀한 욕심을 경험하도록 주께서 조치를 취하십니다. 이것은 구름기둥 불기둥 만들지 않았으면 미처 알지 못하는 죄가 구름기도 불기둥 만들면서 죄가 나오는 겁니다.

추상적인 속죄와 용서를 구체적인 유치한 방법(율법)으로 적용시켰습니다. 그런데 율법대로 했는데 항상 미흡하고 틈이 발생됩니다.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에서 새로운 여분의 것이 발생됩니다. 그렇다면 속죄되고 용서 받는 것은 인간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알파와 오메가 되신 분에 의해 일방적으로 자신이 속죄물 되시고, 그 속죄물에 근거해서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기 맹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하신 맹세만 현실화 되지 인간의 맹세는 현실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마5:34).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는 우후 신난다는 반응과 어쩌라고. 하는 반응이 나옵니다. 아들 못 낳았는데 사무엘상을 보고 기도해서 아들 낳으면 신학교 보내겠다고 맹세하지요. 그래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얘가 공부를 못하면 손해를 안 보는데 공부를 너무 잘해요. 공부를 못하면 신학교 보내겠는데, 문제는 공부를 너무 잘해요. 이거 미칩니다. 그 다음부터 엄마가 방해 공작에 들어갑니다. 얘야, 컴퓨터 해라, 여자 친구 소개시켜 줄까? 일찍 자야지. 해도 얘가 하는 말이 난 공부가 제일 재미있고, 공부가 제일 쉽다고 해요. 이거 미칩니다. 성적이 떨어져야 되는데 성적이 올라가네. 그 성적으로 총신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겁니다. 점수가 너무 많이 남아. 손해 보는 기분입니다. 서울대학 보내야지요.

그래서 서울대학 보냈지요. 그런데 아프네. 그러자 주여 제가 잘못 했습니다. 하지요. 자기가 임성한 작가입니다. 자기가 [오로라 공주] 다 써 버리고. 이게 뭡니까? 처음부터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찌르는 겁니다. 주여 농담도 못합니까? 하면 끝날 문제를. 주님께서 자기 백성은 자기가 지킨다는 것은 자기 자존심과 자기 영광과 관련된 겁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습니다. 두려움, 공포심이 문제입니다. 당해 봤다 죽는 것 외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저주 끝은 죽음이잖아요. 죽음 넘어가는 부활의 세계가 나오잖아요. 좋잖아요. 벌 받으세요. 벌 받고 천국가면 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추상에서 구체적인 것이 나왔는데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세계로 끌어당기는 방식을 주님께서 레위기를 통해 기록해 놓으신 겁니다. 추상에서 구체적으로, 구체적에서 추상적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것은 항상 미진합니다. 구체적으로 행했는데 결과는 항상 원한 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틈, 여분이 생깁니다. 그래서 틈, 여분을 메우기 위해 더욱더 열심히 기도해 보니, 열심을 통해서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에 더 속도를 내는데 내는 만큼 또 여분이 남습니다. 정 목사님 차에 빠른 성경듣기가 있어요. 빠른 시간 내에 성경을 통독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한번 통독했다고 했을 때 그 다음 무슨 욕심이 들겠습니까? 더 빨리, 더 빨리 해서 일주일 만에 듣는 것을 사흘 만에, 나중에는 하루 만에 통독하고 싶어 하지요. 더 빨리 해서 한 시간만에 통독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레위기 7장 16절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 네가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제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는답니다.

레위기 8장 35절입니다. “너희는 칠 주야를 회막 문에 거하여 여호와의 부탁을 지키라 그리하면 사망을 면하리라 내가 이것이 명령을 받았느니라.” 

어떤 분이 여기에 배를 썰어 와 갖다 놓았습니다. 배를 세어보겠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상당히 복음적인 숫자로 썰어 왔습니다. 물론 우연이겠지요. 이 숫자를 세는 동안 제가 달라졌습니까,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개수를 세는 동안 세는 주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이는 다르지요. 50세, 51세, 53세, 나이를 세면서 세는 주체도 늙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통해서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 잡아당기는 방식을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은 헤아리면서 뭔가 허무하게 되면서 말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하면서 잠에 말려들지요.

창세기 15장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에 도달했습니다. 레위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해 있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반복적인 적용이 레위언약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중요합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 하나님과 이 땅 사이에 중보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 땅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약속의 자녀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자녀는 반드시 육의 자녀가 꺾인 자리, 육의 자녀가 부정 당하는 자리에 약속의 자녀가 나옵니다. 이삭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약속의 자녀는 어떤 내용을 품고 있습니까? 그것은 약속의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투입되는 제물의 모양새를 통해 약속의 자녀가 해야 할 기능이 나옵니다. 즉 약속의 자녀에 제물의 모양이 투입되어 담겨 있습니다. 약속이란 추상이 구체적인 인물, 이삭으로 등장할 때, 그 인물은 본래 없는 인물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아난 인물이어야 합니다. 그 인물이 어떤 기능을 하는가는 창세기 15장 8, 9절에 나옵니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주를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창15:8,9).”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암소, 암염소 이야기를 어제 강의 시간에 했습니다. 법에서 사랑을 뽑아낼 때 희생이 필요합니다. 희생이 나오려면 반드시 약자와 강자가 있어야 합니다. 중성이 되면 희생이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잘났는데 희생이 필요할 이유가 없습니다. 약자가 있어야 합니다. 약자는 강자를, 강자는 약자를 쳐다보아야 합니다. 약자 역할은 여자가, 강자 역할은 남자가 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 희생할 때 그것이 사랑입니다. 말로만 한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강자는 여호와 전쟁을 치룰 수 있는 자가 강자입니다.

창세기 15장 1절을 보면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사람은 죄와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약속의 자녀는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말씀하실 때, 여자의 후손은 남자 밑의 여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여자처럼 약해 보이지만 남자, 여자를 창조하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전쟁을 이길 때 무엇으로 이길 수 있습니까? 마귀를 이기려면 마귀를 이길 무기가 있어야 합니다. 마귀의 무기는 선악과입니다. 그런데 기껏 가진 것이 선악과밖에 없는 인간이 마귀를 당해 낼 수 있을까요? 이길 수 없습니다. 선악과를 무기로 삼은 마귀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이번 일을 성공하려면 기도를 다섯 번 해야 한다. 나쁜 짓을 많이 하지 말고 착한 일을 더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그 말을 알아듣습니다.

그러면 한번 해보세요. 그렇게 되든가요? 안 되면 더 완벽하게, 더 철저하게, 더 간절하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까 생각하지요. 헌금 드릴 때도 다리미질을 하든지, 은행가서 신권을 바꾸어서 헌금 드리면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요. 우리는 그런 속성에 갇혀 있는 존재들입니다. 아침에 설거지하다가 그릇하나만 깨어져도 전화합니다. 여보, 오늘 운전 조심하세요. 오늘 그릇 깨졌어요. 꿈에 아들이 나타나면 전화합니다. ‘네가 꿈에 잘 나타나지 않는데 어제 꿈에 나타났다. 조심해라.’ 조금 전에 정 목사님이 앰프에 걸려 넘어질 뻔 했어요. 오늘 강의 조심해야 합니다. 우린 징크스를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뭔가 터부시 되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가지고 찜찜하다고 표현하지요. 뭔가 찝찝함을 유발하기 위해 마귀는 약점을 잡고 그곳을 집중 공격합니다. 목사에게 대적하면 저주 받습니다. 라는 말이 엉터리 소리인 것은 알아요. 그러나 듣는 순간 찝찝해요. 예배당 짓는데 헌금하지 않으면 저주 받습니다. 라고 하면서 저주 받은 예를 나열합니다. 어떤 장로 인색하게 헌금하다가 다리 부러졌고, 아들은 사업 망했는데 다시 회개하고 기도하니 주께서 원상복귀 해주셔서 오늘 이렇게 많은 감사 헌금을 드렸습니다. 라고 하지요.

이런 것을 너무 많이 들어서 이게 사기 수법인줄 알아요. 그러나 찝찝해요. 거지가 무서운 게 아니라 찝찝해. 그래서 봉투에 돈을 넣어 헌금해 버려 찝찝함을 제거하려 합니다. 그러나 찝찝함이 그 돈 냈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온전하게 드리라고 하지요. 그러면 온전함의 극이 어디입니까? 정말 애매모호하지요. 온전함의 최종 수치가 얼마입니까? 고혈압은 최종수치가 나옵니다만 온전함은 얼마입니까? 헌금할 때 교인들을 검색기로 통과시켰으면 좋겠어요. 온전한 헌금인지 아닌지? 이런 기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온전한 십일조를 하라는데 어느 정도해야 온전할까요? 온전하게 하라는 말을 듣고 헌금을 해도 찝찝해요. 벌 내릴까봐.

성경 보시고 하지 마세요. 마귀를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는 이삭이 이깁니다. 상급은 아브라함이고 자기 아들이 방패가 되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어 죄인을 의롭다 해주십니다. 이것이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약속입니다. 창세기 15장 9절에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이 나옵니다. 여기에 삼년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삼년은 일 년, 이년, 삼년이니 우리는 사년, 오년, 육, 칠, 팔, 구, 십, 십일..... 년으로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일과 이와 삼으로 끝납니다. 그만 헤아려! 일, 이, 삼으로 끝내 버립니다. 이스라엘은 7 이상 넘어가는 숫자를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일, 이, 삼, 사, 오, 육, 칠, 일, 이, 삼, 사, 오, 육, 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숫자로 표현된 창조 밖으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의 헤아림을 멈추는 것, 이것은 숫자 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새로운 작업입니다. 조금 전에 배를 헤아릴 때 내 주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관찰자고 배는 관찰 대상입니다. 그러니 나는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헤아림 하나 둘 셋에 들어가면 나의 유치한 육의 몸은 날아가 버리고 주님의 추상적인 몸의 일부로서 새로운 몸으로 기능을 부여받게 됩니다. 참 신기하지요. 말은 참 신기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보란 듯이 팔, 구, 십, 십일, 백, 이렇게 갑니다. 나는 삼뿐만 아니라 사(4)도 안다고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유라고 보고 싶잖아요. 일, 이, 삼이 고정되어 버리면 아담으로서의 주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삼천, 오백, 이백 오 등 마구마구 이야기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약속이 주어진 기능은 일, 이, 삼입니다.
 
창세기에서는 일곱째 날로 모든 것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완성에 대해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됨으로 일, 이, 삼으로 고정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일, 이, 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속죄와 용서가 되는 희생제물입니다. 레위기 8장 33절에서 제사장 위임식은 칠일 동안 행하라고 합니다. 8장 35절에는 칠 주야를 회막 문에 거하라고 하지요. 레위기 7장에서는 화목제 제물을 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르라고 하셨습니다. 칠이라는 창조의 완성을 삼이라는 숫자로 채울 때 본래 창조완성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왜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까? 오일 만에 부활하면 왜 안 됩니까? 하루 만에 부활하시면 왜 안 됩니까? 그 이유가 호세아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6:2)”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삼이라는 숫자는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으로, 아브라함 언약에서 이 지상의 인물이 아니라 약속된 인물에 주어진 추상적인 약속의 인물이 구체적 인물로 등장할 때, 아브라함 언약에 준해서, 그 언약 범위 내에서만 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시간의 고정화가 됩니다. 삼이라는 것이 고정됩니다. 따라서 역사는 삼이라는 숫자로 고정됩니다.
 
창세기 2장 1-3절을 보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이더라.” 일곱째 날에 복 준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 복종해야 하는데 전혀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보란 듯이 까불면서 천구백오십, 오만 사천칠백이십사. 라고 소리칩니다. 테두리를 벗어나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심정, 이것이 육입니다.

십분 후 계속하겠습니다.
 서경수(IP:118.♡.140.38) 14-09-12 07:30 
문등 레위기 5강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2:3).”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칠이라는 숫자 속에 갇혀 있어서 못 벗어납니다.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가 안식일입니다. 일, 이, 삼, 사, 오, 륙, 칠. 일, 이, 삼, 사, 오, 육, 칠이 고정이 되면 등달아 그 속에 있는 일, 이, 삼도 고정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삼을 부각시키기 위해 칠을 고정 시키셨습니다. 칠 속에 갇힌 인간들은 삼일간의 새로운 약속이 없으면 창조에 참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호세아 6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 예언대로 주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호세아의 계시와 호세아 이전 계시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그것은 창세기 15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삭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삼년 된 수양은 구체적인 것이고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는 구체적인 것을 낳는 추상적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하나님의 처음계획이 이삭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이게 됩니다. 즉 아버지 아브람이 아들 이삭을 잡아 죽입니다. 아들 이삭이 인간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 기능은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한 제물로서의 기능으로 이 땅에 나타나야 하고 출연되어야 할 인물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이미 죽고, 이미 죽었다고 표내는 것이 이삭을 잡을 때, 수풀에 걸려 있던 수양이 이삭대신 번제로 드려집니다. 이것은 이삭이 이미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양이 번제물로 드려질 때 마다 이삭은 죽었다가 반복됩니다. 죽음이 살았다는 자를 생명으로 이끄는 매체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창22:13).”

제사장은 자신의 몸에 피와 기름을 바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된 죽음이 겉에 뿌려지면 우리의 겉은 죽음이 되고 우리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목숨은 속으로 들어갑니다. 겉과 속, 죽음과 생명이 바뀌게 됩니다. 제사장은 이미 죽은 자로서 하나님께 회막 곁에서 봉사하고 있고, 회막 밖에 있는 백성들은 살았다고 우기면서 어떻게 하면 죄 지은 상태에서 살 수 있습니까? 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막 안에서는 제사장의 오른 귀, 오른 엄지손가락, 오른 엄지발가락에 피가 발립니다. “모세가 잡고 그 피를 취하여 아론의 오른 귓부리와 오른 손 엄지가락과 오른 발 엄지가락에 바르고...모세가 관유와 단 위의 피를 취하여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에 뿌려서 아론과 그 옷과 그 아들들과 그 아들들의 옷을 거룩하게 하고(레8:24, 30)” 제사장에게는 죽음이 묻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겉이 속으로, 속이 겉으로 나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이삭처럼 바꿔치기 합니다. 이삭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살아 있지요. 그 살아 있음은 죽음을 걸치고, 덮어 쓰고 살아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수양이 죽어 나가기 때문입니다. 고정된 것은 반복을 통해 동일한 언약적 효과를 내는 원리입니다. 매일 같이 양을 잡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 둘씩 상번제로 드리되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양은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민28:3,4)” 늘 드리는 번제라 하여 상번제라 합니다. 

백성들이 매일 밥을 먹기 때문에, 그 노동의 댓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회막에서 드려지는 그 희생이 그들을 먹여주고 살려 줍니다. 이것이 사랑이 지배하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농사짓고, 장사하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레위언약의 완성을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칠로 확정된 세상에서 삼을 부각시켜서 속죄 제물 없으면 새로운 창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 전체 내용이며 그 일부가 fp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나오는 질문이 왜 우리는 안 됩니까? 입니다. 우리가 양 잡고 소 잡으면 되지 왜 안 됩니까? 요즘 같으면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십일조 하는 식의 구원은 왜 안 됩니까? 라고 묻는다면 레위기에서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럽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23).”

국회의원이냐, 장관이냐, 목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악합니다. 악한 생각을 계속해서 내 뿜는 것이 더럽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더러운 것이 나오는 것을 아주 유치한 방법으로 레위기에서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유다의 아들 오난은 정액을 밖으로 쏟아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사람 몸에서 나온 것이 더럽다고 하십니다. “설정한 자는 전신을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무릇 정수가 묻은 옷이나 가죽은 물에 빨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남녀가 동침하여 설정하였거든 다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레15:16-18).”

여자는 한 달에 한번 생리를 하지요. 그런데 더럽다고 합니다. 부정하다고 합니다.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 유출이 피면 칠일 동안 불결하니 무릇 그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요 그 불결할 동안에 그의 누웠던 자리는 다 부정하며 그의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한즉 그 침상을 만지는 자는 다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 좌석을 만지는 자도 다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그의 침상과 무릇 그 좌석에 있는 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누구든지 이 여인과 동침하여 그 불결에 전염되면 칠일 동안 부정할 것이라 그의 눕는 상은 무릇 부정하니라(레15:19-25).”

부정합니다. 인간 자체가 부정합니다. 문둥병자가 부정하다고 하시지요(레13:8). 물론 문둥병이 전신에 퍼졌으면 정하다 하지만(레13:13) 문둥병 걸린 것이 누구 잘못입니까? 문둥병자의 잘못입니까? 기침 한 것이 잘못입니까? 내 몸이 기침이 나오게 하는데 기침을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게 잘못입니까? 인간은 설정이나 월경을 통해 자신이 부정한 티를 모두 냅니다. 인간이 나쁜 짓 해야지 해서 더러움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더러움을 쏟아 냅니다. 그런데 더러움을 쏟아 내면서 더럽지 않다고 우기는 것이 더 더러워요. 인간은 몸 자체가 부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력으로 자신의 더러움을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몸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육으로부터 물려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삭과 대조가 됩니다. 이삭은 죽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 살기로 살아보자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죽을 정도로 충성하라는 말씀이 아니지요. 정말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죽을 지경까지 충성하면 이 말씀 지키지 못한 것이 됩니다.

우리가 충성 봉사 했으면 죽음 근처까지 가서 되돌아오면 자신이 충성했다는 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남습니다. 그런데 충성 끝가지 가다가 죽지 않고 돌아서면 충성이 안 됩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아무도 지킬 수 없습니다. 결국 죽도록 충성하게 주님께서 죽이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십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떠미신 겁니다. 이 말씀을 확장시키면 샌드위치 먹는 것도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맛있게 잡수세요. 그것이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주의 일 하기가 참 쉽습니다. 껌을 씹으세요. 죽도록 충성하는 겁니다. 이것은 궤변이 아닙니다. 눈이 침침하면 안경 끼세요. 이것도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 성취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몸이 하라는 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만일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자신이 관리하겠다는 교만에 불과합니다. 몸은 주님께서 관리합니다. 몸은 조상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면 조상의 모든 속성이 어떻게 옵니까? DNA로 옵니까? 이렇게 주장한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영혼의 기원에 대해서 유전설을 취했습니다. 당시 유행한 영혼설은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선재설(Preexistence)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의 영혼은 존재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설입니다. 둘째는 창조설(Creationism)입니다. 하나님께서 개개인의 영혼을 만드셨다는 설로서 히라피로와 헤로니머가 이 설을 취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인간의 영혼은 몸과 같이 부모로부터 출생한다는 유전설로써 터툴리안이 주장하고, 어거스틴이 이 설을 받아드리고, 레오1세에 의하여 카톨릭 교회의 신앙의 일부분이 되었습니다. 영혼기원에 대한 견해입니다. 문제는 영혼과 몸을 구분했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이런 주장들이 나옵니다. DNA 어디에 죄가 있습니까?
 
*DNA의 구조: 디옥시리보핵산(Deoxyribonucleic acid)의 약자.2중의 긴 폴리뉴클레오티드 사슬로 구성되어 있으며, 2개의 폴리뉴클레오티드 가닥이 퓨린과 피리미딘의 염기결합으로 2중나선을 이룬다. 구아닌염기(퓨린)는 시토신염기(피리미딘)와 3중 수소결합을 하며, 아데닌염기(퓨린)는 티민염기(피리미딘)와 2중 수소결합을 한다. 당(디옥시리보오스)은 인산 이에스테르 결합으로 뉴클레오티드를 연결하여 각 DNA 가닥의 뼈대를 이룬다. 염기는 소수성(疏水性)이 커서 두 가닥의 DNA 안쪽에 체적되며, 두 DNA 가닥은 2중나선 구조를 이룬다. 인간세포의 DNA는 일직선으로 폈을 때 약 2m가 되며, 인간을 구성하는 세포들 전체에서 DNA를 분리하여 연결하면 지구와 태양 사이를 연결하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을 만한 길이가 된다. 핵 안에서 DNA는 히스톤 및 비(非)히스톤 단백질과 결합하여 염주 모양의 뉴클레오솜을 형성한다. 약 140개의 염기쌍에 해당하는 DNA가 이 뉴클레오솜을 감고 있으며 뉴클레오솜 간의 거리는 20~40 염기쌍 정도가 된다. 이러한 뉴클레오솜 구조를 취함으로써 길이가 긴 DNA가 매우 좁은 공간의 핵 안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엽록체·미토콘드리아·플라스미드 등의 DNA는 고리 모양이며, 8자모양으로 감기어 초나선구조(超螺旋構造)를 이룬다. 브리태니커.

물질이 어떻게 죄를 인수 받습니까? 말도 안 됩니다. 만일 죄가 유전된다면 사람마다 죄가 다 다르게 됩니다. 죄는 유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경유해서 반복시킵니다. 육은 아담의 육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육의 확장입니다. 확장된 육은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음이 계속해서 반복되어 이어집니다. 아무리 애써도 죽습니다. 그런데 처음 아담은 몸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럽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뭔가 부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담이 어깨가 부끄럽다고 어깨를 가렸습니까? 여자는 이마가 부끄럽다고 이마를 가렸습니까? 그들은 하체를 부끄럽게 여겨 하체를 가렸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왜 하체가 부끄러워야 할 부분인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7).” 그런데 레위기에서 하체가 부끄러운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기적으로 하체를 통해 뭔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상스럽게도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그 부끄러운 부분에 말씀은 주목합니다. 레위기를 보면 부정하다(레11:32;13:3;13:8;13:11) 그리고 정결하다(레4:12;6:11;10;14;12:4;13:7;14:2)는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네가 자랑하는 것은 네 속으로 들어가고 겉은 언약 속으로, 율법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율법 속에 들어갈 때 칠 속에 갇힌 우리가 삼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창조된 자로서 삼이라는 고난과 희생을 드러내는 임무를 부여받는 중입니다.

레위기 12장 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여자가 임신하면 얘기가 몸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출산하면 몸 안에 있다가 몸 밖으로 나옵니다.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얘를 낳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레위기에서는 죄를 낳았다고 합니다. 육이 육을 낳았습니다. 얘기 낳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얘기 낳는 자체가 축복으로, 얘기 낳는 자체가 저주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다만 얘기 낳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쪽의 좋은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작업의 일종임을 아는 것 자체가 축복이 됩니다. 그러니 죄의 몸이 죄의 짓을 하면서 축복과 연결시키면서 사시면 됩니다. 즉 구체적 의미를 추상적 의미로 연결시키면서, 언약적 의미로 연결시키면서 사시면 됩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말씀을 늘 보세요. 그러나 지키지는 마세요. 지키지 말라고 하니 성경을 전혀 안 보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막 사세요. 결코 내 뜻대로 막 살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막 사세요만 들어요. 자기 주체를 가두어 놓는 다른 언약적 주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자를 낳으면 정결케 되는 기한이 삼십 삼일입니다(레12:4). 우리는 자신이 더러운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말씀을 통해 남자를 낳으면 삼십 삼일동안 부정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아들을 낳으면서 자신이 부정하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렇게 되면 아들 낳는 것이 기분이 안 좋아요. 그런데 옆집에 딸을 낳았는데 이번에는 육십 육일동안 부정하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비교 대상이 생기니 아들 낳은 사람은 기분이 좋아질 뻔 하지요. 그러면 왜 딸과 아들에 대해 부정한 기간의 차이가 날까요? 그것은 창세기의 반복입니다. 창세기 3장에 뱀이 여자를 유혹해 여자가 선악과를 따 먹었고, 여자가 아담을 유혹해 선악과를 먹게 하여 온 인류가 죄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들어 왔습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2:11-15).”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 들어 왔습니다. 

사람들은 선과 악을 자신의 결정에 의해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리, 네가 있는 자리가 너의 모든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어두움이라는 공간 개념으로 말씀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어둠의 자리에 있는 인간들 자기들끼리 아무리 잘났다 해도 주님께서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자기들끼리의 경쟁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의미합니다. 이 어둠의 공간에서 어떤 인간도 자기 힘으로 죄를 이기고 나올 수 없습니다. 죄 아래 가두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32).” 

일차적인 것은 뱀이 여자를 유혹해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유혹해 남자가 선악과를 먹었지요. 그래서 남자아이를 낳았을 때에는 삼십삼일, 여자 아이를 낳았을 때에는 육십육일 동안 부정합니다. 여기에서 누가 더 부정하다는 말입니까? 여기에서는 누가 더 부정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여자에게로 끌어가시면서 부정의 원천을 찾아가는 길목의 기능을 여자가 하게 됩니다. 남자를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지? 여자다. 그렇다면 여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누구냐? 뱀입니다. 그러나 뱀은 추상에 속해 있습니다.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남자와 여자밖에 없지요.

이 세상은 왜 남자와 여자 밖에 없는가? 철학자들은 엄청 고민을 합니다. 생물학자들은 남자와 여자밖에 없는 것은 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암컷 수컷으로 진화된 이유는 암수가 있는 것인 진화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것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지금 많이 살아남았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은 하나마나입니다. 암수가 많이 살아 있으니 유리했을 것이고, 유리 했으니 이런 식으로 진화 했다는 겁니다. 그 말이 그 말이지요. 그들은 왜 이 세상이 남자 여자밖에 없는지를 몰라요. 이 세상에서의 남자 여자는 임시적입니다. 천국에 가게 되면 남자 여자가 없습니다.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갑니다. 천사와 같이 됩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 그러니 이 땅에 나를 남자로 봐줄 때, 여자로 봐줄 때 시집 장가가세요. 이 땅에서 시집, 장가 못 간 사람은 죽어서도 가지 못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예수님이 하시는 기능을 보여줍니다. 성도는 신부가 되며, 여자가 됩니다. 예수님만이 영원한 남자가 됩니다. 신랑신부, 남자 여자가 부부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임시적으로 정한 겁니다. 드라마 끝나면 배역도 끝납니다. 천사와 같이 됩니다. 후회할 일도 없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경유해서 뱀에게 갑니다. 그렇다면 뱀과 싸우는 남자는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됩니다. 처음 여자와 뱀이 만나 죄의 문제가 발생했듯이 해결도 여자와 뱀이 만나 해결하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씀에서 여자는 누굽니까? 천주교는 8월 15일을 마리아 승천일로 기념합니다.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12세가 정식 신앙교리로 선포했습니다. 물론 그전부터 서방교회나 동방교회가 마리아 승천을 믿어 왔습니다. 이게 뭡니까? 만화도 아니고. 과거에는 유치하게 제사를 드리게 하셨지요. 그런데 지금도 그들은 미사를 할 때 화려한 옷을 입고 미사를 하지요.

뱀이 추상입니다. 그렇다면 뱀과 싸워야 하는 여자의 후손을 낳는 여자도 추상이 되어야 합니다. 여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안 됩니다. 여자는 어떤 사건의 결과입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추상이 추상을 보여 주기위해 이스라엘 자체가 임시적으로 여자의 기능을 합니다. 그리고 여자의 기능, 신부의 기능을 하지만 남편은 항상 눈에 띄지 않습니다. 또한 신부는 결코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신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 신부는 남편 없는 신부가 됩니다. 그런 것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남자 없이 여자가 되어 버리면 여자는 신부라는 호칭으로 불릴 자격이 사라집니다.

나는 누구누구의 신부라고 할 때에는, 나의 남편이 먼저 있고, 나는 남편을 위해 후차적으로 존재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우린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을 믿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드신 분이 따로 계시다는 고백이 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과 함께 신랑이 동행해야 합니다. 신부라는 말은 물론 출애굽기 레위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이사야나 아모스 호세아에서 신부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뒤 쪽에 나오는 계시는 앞에 나온 계시를 포괄 소급해 해석해 줍니다. 뒤에 나온 해석이 앞에 나온 계시보다 더 깊이가 있습니다. 신약은 구약보다 더 깊이 있습니다. 구약의 큰 선지자라 할지라도 천국에서는 어린아이보다 못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11:11).” 천국의 어린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큰 세례요한보다 더 큽니다. 그들은 모형밖에 모르지만 우리는 실재를 압니다.

이스라엘이 여자, 즉 신부가 된다면 신부이기 때문에 힘을 쭉 빼야 됩니다.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온 이스라엘 사람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내려갔었는데 곧 그들이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 때에 그리하였으므로 싸우는 날에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백성의 손에는 칼이나 창이 없고 오직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으니라(삼상13:19-22).”

주변이 으르렁 으르렁 거립니다. 힘이 없는 이스라엘이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지요. 이런 상황에서 주변국이 침입하면 신부가 힘이 있어, 힘을 합쳐 적들을 물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이 전쟁은 이스라엘 전쟁입니다. 이스라엘 전쟁은 뱀을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전쟁을 해야 합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셀라(시44:6,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가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5-47).” 전쟁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도 주의 이름으로 전쟁에 승리합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시8:2).”

다윗이 어른이라면 블레셋과 싸워 이기도록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소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꾸짖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되지요. 소년인데도 불구하고 어른들도 두려워하는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삼상17:33).”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여호와 이름의 전쟁이 됩니다. 이스라엘을 신부로 여겨 신랑이 대신 싸움해 주는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의 특징은 붙이시매 전쟁입니다. 전쟁은 반복입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법이 고정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신부됨도 고정됩니다. 이 고정됨을 해체시키기 위해 사단의 앞잡이, 언약이 없는 이방인들, 우상 숭배자들을 앞장세워 이스라엘을 압박합니다. 이럴 경우 이스라엘 자신들이 전쟁에 나서면 안 됩니다. 그들과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적절할 조치를 내리실 것을 믿어야 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열두 명 정탐꾼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탐을 해 보니 그 땅은 비어 있는 땅이 아니라 아낙자손들,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이스라엘 백성은 메뚜기 같았습니다(민13:32-33). 이런 조건에서는 싸움을 해보나 마나입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이 이런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와 보고 했습니다. 갈렙의 보고는 무시되고 나머지 열 명의 보고에 이스라엘 온 백성이 밤새도록 부르짖으며 울었습니다(민13,14장). 그러면서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차라리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더면,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거라고 합니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3).”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메뚜기 같고 저들이 장대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만일 그들이 메뚜기 같고 이스라엘이 장대하다면 이 전쟁은 자신들끼리 해서 얼마든지 차지할 수 있지요. 만일 그러하다면 그 땅은 애굽 땅의 연장이지 그들이 기대한 약속의 땅은 아닙니다. 나의 동질성, 주체성, 자존심, 명예가 살아 있는 곳이라면 우리가 들어갈 천국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문턱을 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죽으려고 하겠습니까? 살려고 합니다. 내가 살려고 합니다. 나라는 주체가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의 동질성을 유지하게 되면 우리는 죽음의 문턱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죽이실 때에는 과거도 죽이시고, 꿈꾸던 미래도 죽이십니다. 그리고 마중 나오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주님의 미래, 주님의 세계, 아들의 나라입니다. 천국 가서 당신을 만나겠다. 오깽끼데스까? 천국 가서 누굴 만나요? 누가 누군지 모르는데. 그 동네는 남자, 여자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 할아버지와 손자의 만남을 갖고 싶습니다. 만일 이렇게 되려면 우리 정체성이 유지될 때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정체성이 죽음과 함께, 나의 야심도 죽습니다. 나의 야심 때문에 주님의 계획이 무시당하고 모독당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는 말은 내가 갖고 있던 생각들이 주님면전에서 볼 때 모든 게 날아갑니다. 주님 만나면 이것 궁금한 것 물어봐야지. 저것 물어봐야지 하지만 주님 만나면 그 순간 다 날아가 버립니다. 선보는 아가씨에 대해, 직업, 취미, 직장 등을 묻고 싶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괴물입니다. 그 순간 궁금한 것이 다 날아가 버렸어요. 무서워서 말을 건네지도 못하지요. 좋게 말하면 너무 예뻐요.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 그동안 제가 무엇을 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냥 우리는 신부로 지정되었기에 신랑 잘 만난 덕으로 호사를 누리면 됩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여호와는 나의 방패요 상급이라 했습니다. 전쟁 없는 상급은 없습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이 하시는 전쟁입니다. 문제는 여호와의 이름이 추상적입니다. 모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치한 율법을 반복함으로 추상을 끄집어내려고 부질없는 짓들을 한 겁니다. 율법 반복하면 착하다고 복 주는 줄 알고 전쟁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여 전쟁 나가서 개피 봅니다. 민수기 10장에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적들이 물러간다고 합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셨고(민10:35)” 이 말씀이 너무 좋아요. 하나님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존재하듯이 언약궤가 존재합니다. 언약궤만 앞장세우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고 하셨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언약궤를 앞장세웠는데 전쟁에는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삼상4:10,11). 우리는 말하기를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라고 합니다. 그러나 법은 위반을 통해서 법속에 담겨진 내면의 깊은 진리가 나옵니다. 우리가 법을 위반함으로 법속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내용이 담겨 있음을 발견합니다.

레위기는 고정된 법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법을 반복하시고 인간들은 이 법을 지킴으로 자신이 알던 법과 원래 법속에 담겨 있는 것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알던 법이 그 법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제사장이 복장을 갖추고 속죄제를 드린다고 해서 속죄되고 용서받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제사장이 어린양을 잡어 속죄물을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존재함, 제사장의 존재함, 레위인의 존재함, 양의 존재함, 제사 드리는 존재함으로 죄가 용서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차이를 만드시고, 그 보이지 않는 차이가 보이는 차이를 만들어 그 보이는 차이를 통해 용서하십니다.

인간의 행함과 관계없습니다. 인간에게 제사를 드려라 하셔놓고, 인간이 드리는 제사의 제물과 절차등과 상관없이 다른 노선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이 용서는 우리의 행함 노선이 아니라 다른 노선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3장에서 율법 외의 다른 방식으로 용서하는 겁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

석양에 비친 긴 그림자라면 그 그림자의 실체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그림자로 레위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용서는 인간의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자기 선택으로 인한 일방적인 용서입니다. 끝.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이제 왜 신약에 사는 어린아이가 구약의 가장 큰 선지자보다 더 큰지를 아시겠지요? 구약에는 고정된 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악지식을 총동원해 법을 지키면 선하고, 지키지 않으면 악하다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법을 지키려고 하지만 법을 지키려고 할수록 간격이 벌어집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고 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명령입니다. 그렇다면 그 명령대로 해 봅니다. 이웃을 사랑하여 용서해 줍니다. 그런데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용서해 주지만 사람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시지요. 그러면 베드로가 칠백구십 번 용서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일흔 번에 일흔 번에 일곱 번씩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하면 용서가 됩니까? 라는 질문 속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법 안에 죄인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선악과의 반복만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켰습니다. 라는 모든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들추어내면서 새로운 율법의 정신을 우리에게 심어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보면 인생을 산다는 자체가 요령부리기의 달인이 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처음에는 진지하게 안식일을 지키지만 나중엔 요령이 생깁니다. 성경 읽으라고 하면 처음에는 진지하게 읽다가 나중에는 빠른 테이프 들으면서 한번 들은 것을 성경 다 읽은 것으로 대체해 버립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처음에는 너무 기쁩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요령 있게 믿지요. 우린 요령만 쌓일 뿐입니다. 요령 덩어리! 우린 요령 덩어리입니다. 요령으로 일관됩니다. 레위기의 모든 법은 여호와께서 친히 의로움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의로움을 주시려면 여호와 전쟁이 있어야 하고 그 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이스라엘이 됩니다. 여호와가 상급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 백성 만든 자체가 더 이상 받을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레위기 13장에 문둥병이 나옵니다. 질문, 답변으로 하겠습니다. 문둥병은 자기의지로 걸립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으로 걸립니까? 하나님의 뜻이지요. 그렇다면 문둥병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문둥병 걸리지 않는 백성보다 문둥병 걸린 사람이 더 나쁜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아니지요. 똑 같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는 대표자입니다. 다른 사람도 문둥병 걸려야 마땅하지만 문둥병자만 대표로 문둥병에 걸린 겁니다. 사실 모세도 문둥병자지요.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 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출4:6).” 모세도 문둥병자인데 하나님의 일에 참예한 것으로 멀쩡하게 보일 뿐이다. 따라서 주가 하는 전쟁은 저주 받아 마땅한 인간들의 저주를 해결하는 그 일에 모세가 참여되었음을 알려 주신 겁니다. 이것이 모세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특징입니다. 이런 내용을 개인 모세에서 집단화 시킨 것이 레위기입니다.

우리는 그냥 새로운 현실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 현실은 내가 상상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상상하기 전 주님께서 먼저 찾아 오셔서 우리를 죄인으로 고정시키셨습니다. 또한 동시에 그 고정된 죄는 주님이 알아서 해결해 주시어 영생에 참여시키는 분주하신 주님의 작업에 우리를 넣어주신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의 모든 일을 용서 받았기에 주어지는 현상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고 사랑은 온 율법을 이루었습니다. 자식 사랑한다고 오냐오냐 하지 않고 매를 들고 때리는 것도 자식에 대한 사랑일 수 있습니다. 내 자식이라면 때리지 않지만 주님께서 맡겼기 때문에 너를 때리니 이해해다오. 그러니 이것을 이해할 자식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해케 해 주시면 어머님 그 때 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기적을 만날 수 있지만 기적은 기대해서는 안 되지요. 기적을 기대한다는 것은 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걸렸습니다. 그 다음 문제 나갑니다. 만일 문둥병자가 병에서 나았다면 자신의 노력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니 문둥병자는 자신의 역할만 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라 문둥병자가 되었다가 깨끗하게 되는 역할만 보여 줄 뿐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되었다가 눈을 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요9장). 그래서 잠언에서는 가난한 자를 주께서 만드셨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14:31).” 가난한 자나 부자들을 다 주께서 지으셨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주변에 배치해 놓으셨습니다. 나는 잘났기에 부자 되었고 너는 얼마나 죄를 지었기에 과부되고, 고아 되고, 거지 되었느냐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서서 그런 자를 고아와 과부로, 거지로 만드십니다.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22:22,23).”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출애굽정신의 반복입니다. 사랑의 반복입니다.

그러면 왜 문둥병이 나옵니까? 문둥병자가 진 밖에 살다가 진 안으로 들어올 때 행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문둥병자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왜 자꾸 죄만 짓고 욕심을 부리는가? 주님께서 속죄물이 되셔서 속죄와 용서를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욕심과 탐욕과 이기주의를 평생 동안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 인생 자체는 죄를 지어야 합니다. 문둥병자체가 이 세상에서 저주받은 생입니다. 지금 이 땅은 우리가 살 땅이 아니라 추방되어 살아가는 땅입니다. 우리가 살 땅은 에덴동산입니다. 그 때가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공짜입니다. 값없이 모든 것이 주어졌습니다.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것이 원래 우리가 살아야 하는 땅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엇입니까? 왜 지옥 같은 생활을 해야 합니까? 이마에 땀을 흘려도 결국은 죽습니다. 여자가 고통가운데 해산하지요. 여자는 남편을 그렇게 미워하면서도 결국은 남편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없으면 뭔가 허전하고, 빈자리가 커 보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잘해도 영감밖에 없다고 합니다. 남편이 평생 먹고 놀면서 지낸 남편입니다. 사람은 타인이 없으면 존재의미가 없어집니다. 타인과 엮여 있기 때문에 그 타인은 나의 나됨을 늘 인식시켜 줍니다. 그 타인이 사라지면 존재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살합니다. 그가 있음에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레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법에 의해 문둥병 같은 생활을 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로 죄인의 삶을 살기 때문에 이 죄는 반드시 하늘나라와 영생과 연관을 두어야 합니다. 레위기 14장 49절 이하를 보면, 새 두 마리가 나옵니다.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또 다른 새는 잡은 새의 피를 찍어 성 밖 들에 놓아 보냅니다. 날아간 새는 죽은 새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이 날아감이 반복입니다. 우리는 피 묻은 채 죄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피로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다만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피만 자랑하라고 퍼덕이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자가 나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 율법에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했는데 예수 당신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간음 현장에서 붙잡혀온 여자나 서기관과 바리새인 모두가 죄인입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처라는 말씀은 율법에 근거한 말씀이지요. 따라서  율법 안에는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없는 요소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율법의 실행자, 집행자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간음해서 죄가 된다면 저 사람은 간음했어요. 라고 고소하는 그것도 간음죄의 연장이 됩니다. 간음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잠재된 간음자가 됩니다. 왜냐하면 간음자에 대해서 나는 간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 안 지었다고 여기는 그것이 간음죄에 의해서 직접 죄인으로 정죄됩니다.

누가 과부가 되었다면 나도 과부될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고, 누가 간음했으면 나도 간음할 가능성이 있는 자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율법의 정신을 살리는 것이 됩니다. 집행자는 우리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간음한 사람을 보고 간음했데요. 라고 하면서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이 아닙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지 간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간음할 걸. 이라고 하지요. 기회 왔을 때 했을 걸이라고 생각 하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또 옵니다. 레위기는 우리 몸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잊지 않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사랑입니다.
 서경수(IP:118.♡.140.38) 14-09-12 21:23 
레위기 문등 제 6 강

법은 문자화 되어 있는데 문자화 된 것을 인물화 시킵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법을 인물로 바꾸었을 때 그 인물은 어떤 모양세로 드러나는가? 법은 각자 개인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법이 인물화가 되어 버리면 특정인물과 자기 자신과의 격차를 보이게 됩니다. 레위기 10장에 나답과 아비후는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었습니다(1,2). 이것은 그들의 실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입니다. 법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법 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내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백성들에게 이런 진노가 임하지 않은 이유는 제사장들이 그 진노를 막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막아 준 제사장들이 온전해야 하는데 제사장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을 담아 여호와께 드리다가 죽었습니다. 사람에게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이 있고 법을 사람에게 적용시키는 것 외 법 자체가 인격화 되면 어떤가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다윗 언약으로 가야 됩니다. 사무엘 상하로 가야 됩니다. 어떤 한 분이 제대로 살면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그 한 분으로 인해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어떻겠습니까? 참 좋겠지요.

양을 잡고 소를 잡는 제사장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또한 늘 제대로 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차라리 법 자체가 어떤 인물이 되고 ‘당신은 법의 완성입니다.’ 라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법의 완성인 사랑의 혜택을 받는 사람이 되면서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납니다. 법이 사람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레위기 중반부터 소개합니다. 먼저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를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제사장조차 법을 지킬 능력이 없어 이 제사법으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법 자체가 어떤 특정한 인물로 바뀌면서 우리는 그 인물에게 우리의 모든 주도권을 넘깁니다. 당신은 우리가 이룰 수 없는 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라면서 그분의 공로만 바라보면서, 우리가 법을 지키지 않아도 그분이 법을 지킨 그 혜택을 우리가 누리면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십니다. 법의 인격화가 멋있지요. 만일 내가 법을 지키려면 항상 지켜야합니다. 한 순간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법을 인격화 시키는 방법에 동원된 사람이 희생자의 모습입니다. 법 자체의 제물이 양이 아니고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이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법의 인격화되면서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다 이루었다는 공식이 다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수족관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입니다. 성경을 보실 때 이런 식으로 보시면 간단합니다.

천지를 창조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법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 법은 십계명이고 제사법입니다. 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와 진노를 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천국 갈 수 없는데 주님께서는 법을 인물로 변형시켰습니다. 우리는 그 인물이 법의 완성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법이 주는 완성의 혜택, 즉 사랑을 공짜로 누리며 천국 갑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이렇게 전환 되는가 입니다. 바로 희생자의 모습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문둥병자입니다. 우리가 문둥병자를 보면서 꼴좋다고 합니다. 인생이 어떻게 저렇게 망가졌는가? 그러나 나는 망가지지 않았다. 우린 문둥병자가 아니다. 저주 받은 자를 욕하고 그 반대편에 있다는 여유로 기뻐하면서 살자고 합니다. 간음한 여인이 잡혔을 때 나는 간음한적 없으니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희생자가 우리를 대표합니다. 그들은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입니다.

희생자의 특징은 죽음을 겉으로 돌리고 살았다고 하는 것을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우린 평소 밥 먹고, 강냉이 삶아 먹고 있지만 주님의 피로 코팅되어 있으면 커피 내려먹으면서 천국 갑니다. 이 코팅을 앞장서서 미리 보여준 사람들이 법에서 인물화 되는 희생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이 코팅될 때 죽음이 어디에 접착될까요? 찢어진 피부에는 후시딘 연고를 바르면 후시딘 연고와 상처의 만남이 됩니다. 그런데 상처 나지 않은 곳에 후시딘 연고 바르면 안 되지요. 후시딘 연고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상처가 나야 합니다. 그 상처 난 곳에서 우리의 속에 있는 것이 바깥으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출병에 대한 말씀입니다.

레위기15장입니다. 유출병 있는 자는 부정합니다. 18절입니다. “남녀가 동침하여 설정하였거든 둘 다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남녀가 성관계 해 설정했을 때 둘 다 물로 몸을 씻으라고 합니다. 건강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설정을 통해 바깥으로 드러냈다는 겁니다. 어떤 연고든 속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후시딘 연고를 바를 수 있는 상처라고 주님께서 정해 버립니다.

그런데 18절에서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합니다. 듣는 우리 입장에서는 참으로 거북합니다. 그렇다면 결혼은 왜 했습니까? 늘 부정하기 위해서 결혼한 겁니다. 신혼 초에 늘 부정합니다. 그러나 결혼 20년 지나면 각방 씁니다. 이제는 부정할 기회마저 스스로 반납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죄인의 모델이 되겠습니까? 결혼해서 살아가는 것은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법의 인격화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몸 자체는 정신으로 관리할 수 있는 관리 대상이 못됩니다. 몸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참 모습은 나 잘났다는 주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대변합니다. 아무리 잘나도, 돈 많이 벌어도 몸은 늙어갑니다. 나는 깨끗한데 닥터피시가 뜯어 먹는 것과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닥터피시가 많이 모여 뜯어 먹지요.

레위기에서 유출하는 요소는 후시딘 연고를 바를 수 있는 접촉점이 됩니다. 우리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 몸 자체가 죄를 생산하는 공장입니다. 몸이 그러하기 때문에 정신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위선만 더덕더덕 붙일 뿐입니다. 법이란 것은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우리가 자진해서 덮었던 위선의 꺼풀을 뜯어내는 겁니다. 택배 왔을 때 뜯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몸을 겨냥해서 뜯어냅니다. 난 너의 정신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직접 상대하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법과 몸이 만나게 해서 인격화 시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유출병 걸린 사람입니다. 남녀가 동침해서 설정했을 경우입니다.

18장 6,7절입니다.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지니라.” 그 다음에는 계모, 이모, 손녀 등을 언급합니다. 근친상관 하지 말라고 하면 간단한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여기 말씀은 근친상관 문제가 아닙니다. 가까운 친척과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장애아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근친상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체부분은 몸 안에 있는 요소가 바깥으로 쏟아지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결혼한 사람만 그 하체를 감당하게 되면 그곳에서 자식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나와 같은 자식이 나왔을 때 죄의 반복을 기정사실화 하는 목적이 이루어집니다.

자식을 낳을 때 죄의 자식을 낳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식을 주시던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특히 목회자 가정에서 정신지체 자녀가 있으면 목사 가정이 평생 몸부림칩니다. 남들이 뭐라 이야기할까에 대비해 많은 답변을 준비합니다. 이것은 주의 뜻입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닙니다. 등등. 묻지도 않는데 변명조로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이럴수록 더 사랑하며 키웁니다. 나는 비록 이 아이가 장애자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합니다.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괜히 혼자 몸부림 치고 있어요. 특히 사모 같은 경우는 어떻게 이것을 감당하라고 합니까? 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한 문제의 원인은 자기 부모에게 있습니다. 부모 탓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부모가 나에게 이런 것을 물려 주셨습니까? 그 부모는 할아버지에게. 계속해서 찾아 올라가면 아담을 만납니다. 언약적인 반복, 죄의 반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가정에 그 역할을 맡기신 겁니다. 왜냐하면 아들, 딸이 여자의 하체를 통해서 나옵니다. 여자의 몸에서 나왔다는 것은 곧 죄 덩어리가 나왔다는 말입니다.

죄를 보여주는 반복이 있듯이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는 반복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라는 여인이 자식이 없을 때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시킵니다. 원래 언약적 반복을 보여주는 여자는 불임여성이 되어야 됩니다. 사라도 불임여성이었습니다. 리브가도 불임, 라헬도 불임여성이었습니다. 얘기를 못 낳는데 얘기를 주셨다는 것은 나는 얘기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반복시키면서 그 얘기가 성장합니다. 인간은 죄의 반복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죄의 반복밖에 없어야 하는데 의의 반복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들어오려면 죄의 반복 속에 무엇인가 누락이 되고 빠져야 합니다. 얘기를 못 낳든지, 얘기를 낳더라도 얘기를 버려야 합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가 얘기를 못 낳습니다. 그런데 기도해서 얘기를 낳았다면 그 얘기는 누구의 아이입니까? 못 낳는 것이 반복되어야 하기에 얘기가 있어도 내 자식이 없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나실인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나실인이 삼손입니다. 삼손 엄마는 얘기를 못 낳습니다. 그런데 삼손을 낳았지요. 그러면 삼손의 엄마는 못 낳는 것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삿13:3)”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잉태되었다면 죄의 반복 아닌 다른 것을 반복해 보여주는 사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은 어떤 특정 법을 인격화시킨 겁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의 초나 독주의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민6:3-9).”

이런 조건을 갖춘 인간이 인격화되는 과정은 그 사람이 맹세한 기간 동안 자란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에 넣습니다. 거룩한 제물만 들어가는 곳에 인체가 포함됩니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민6:18)” 인간의 신체 일부가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물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나실인이 그 맹세를 성취할 그 때 민 머리털입니다. 이 말은 인간도 어린양처럼 제물이 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기 위해 투입된 사건입니다. 성경이 쉽다고 하지만 법이 인격화 되는 과정이 있으니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법을 우리가 지키면 되지 인격화 될 것이 무엇이 있냐고 할 겁니다. 그런데 법을 우리가 못 지키잖아요. 우리가 법을 왜 못 지킵니까? 우린 지키고 싶은데 몸 자체가 더러운 것을 쏟아내는 바구니 역할을 하니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월경하지 말까요? 우리 몸 자체 관리는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얘 낳아도 죄고, 얘 길러도 죄고, 아담의 속성의 반복인데--.

성경에 보니 불임여성이 등장합니다. 이 불임여성을 주목합시다. 불임인데 얘가 생겼습니다. 사라의 경우 이삭을 낳았지요. 이삭은 죄밖에 없는 그곳에서 죄 용서가 되어 의롭게 되는, 율법이 완성되는 인물도 법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죽었더라. 죽었더라. 했지만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그래서 성경이 설명하기도 벅찰 정도로 복잡합니다. 레위기 속에 그것이 들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인격체이지만 제사장 자체도 붕괴됩니다. 제사장도 완전하지 않고, 백성들도 죄 짓기 때문에 제사장이 있는 겁니다. 백성들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면 제사장보다 더 뛰어난 제사장이 있어야 하겠지요. 그것이 바로 문둥병자입니다. 문둥병자가 문둥병에 걸려 진 밖으로 나갔다가 진 안으로 들어오는 그 과정 속에서 제사장 위임식 방식을 그대로 뒤집어 쉬웁니다. 

레위기 8장에서 제사장 위임식과 14장에서 문둥병 정결케 되는 의식을 비교해 보시면 됩니다. 이것은 제사장 위임식 절차를, 문둥병자가 기적으로 병이 나아 진 밖에서 진 안으로 들어가는 절차에 깔아 놓았습니다. 이렇게 깔아 놓았을 때 묻습니다. 이 중에 문둥병 될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지요.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데 예수님이 낫게 해 주셨어요. 그러면 날 때부터 소경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우리 몸은 죄를 짓는 몸이지만 이미 우리는 주체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몸 없이는 내 주체가 없어요. 그래서 몸을 갈아 탈 의사가 우리에게 전혀 없습니다. 싫든 좋든 이 몸 가지고 끝가지 가겠다고 버티는 것이 우리 고집입니다.

그래서 한나가 아들을 부러워합니다. 아들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죄 속에서 의를 유발하는 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사무엘입니다. 드디어 새로운 노선이 생겨납니다. 율법외의 한 의, 그 당시 제사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을 차버리는 새로운 노선이 등장합니다. 엘리 제사장과 사무엘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 사무엘을 세 번씩이나 부르시지요.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대답하되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하니라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여호와께서 세 번 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일어나서 엘리에게로 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삼상3:6-9).”

엘리 제사장도 세 번째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 그 부르심이 여호와의 부르심인 줄 알았습니다. 네 번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궁금했습니다. 사무엘을 불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하나라도 숨기지 말고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그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 가문을 영원히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엘리 제사장은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압니다. 율법의 시대가 끝났음을 압니다.

율법 속의 간극, 차이, 틈이 갈라집니다.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것은 이제 옛날 말이 되었습니다. 율법 외에, 율법의 인격화, 율법을 완성하는 특이한 인물이 등장해서 그분 덕분에 율법 지키지 않아도 공짜로 구원 얻는 새로운 시대가 드디어 시작됩니다. 그 언약을 다윗언약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레위기는 모세 언약에 속합니다. 모세는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 언약입니다. 그런데 레위지파 언약으로 쭉 갈 것 같았지만 레위지파에서 곁가지가 생깁니다. 레위지파 자식이면서 레위지파 자식이 아닌 새로운 자식으로 변형되면서 다윗지파가 등장합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에 속합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투톱 작전입니다. 야곱이 열두 지파를 축복할 때 유독 돋보이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유다지파요 하나는 요셉지파입니다(창49:8,10;22-26). 두 지파에 유난히 축복이 가득합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에브라임 나라가 되고 남쪽 이스라엘은 유다나라가 됩니다. 두 지파가 열두지파를 대변하는 내부전쟁이 일어나는 양상으로 발전합니다. 누가 마지막에 승리합니까? 요셉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입니다.

시편 78편에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시78:67-69)”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 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히7:12-15).” 이것에 대한 해석은 어렵다고 하십니다(히5:11).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 전체가 흘러가는 것을 간파해야 되니 어렵습니다. 그것을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레위기 속에 갈라짐의 조짐이 보입니다.

법을 따른 제사장조차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법의 완성은 법 자체를 인격화 시키는 것으로 나갑니다. 이 과정에서 법의 완성체를 보여주는 인격은 문둥병이라 했습니다. 왜 문둥병이냐? 왜 유출병이냐? 그들은 몸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죽음의 표면화라고 부르겠습니다. 죽음으로 코팅되어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죽음으로 코팅되어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 강도도 죽음으로 코팅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메시아의 모양새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점잖은 우리와, 죄지은 기억도 없는 우리와, 너무나 순박하고 착한 우리와, 이 땅 외지에 사는 여러분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죄인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직업은 창녀고, 강도의 직업은 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가 아브라함의 자손들보다 천국에 먼저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이 나라에 들어가리라(마21:31).”

주님은 자신의 죽음, 즉 밖에 나와 있는 죽음을 도로 회수하시면서 구원하십니다. 닥터피시 같아요. 여러분 표면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코팅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코팅된다면 우리의 죽음은 무시당하고 모독당해야 됩니다. 이 내용이 레위기 17장에 나옵니다. 레위기 17장에 피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라도 같은 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와 우리 피는 같은 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는 언약의 피고, 우리의 피는 언약이 적용되는 피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 더러운 피의 반복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반복이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죄 밖에 없는 세상에 자신의 의를 집어넣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출생은 우리가 아는 육의 출생이 아니라 다른 출생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성령에 의해 태어난 분입니다. 마리아가 죄 있는 육신의 몸이기에 빌리신 겁니다. 마리아도 죄인입니다. 마리아의 몸은 죄인의 몸일 뿐입니다. 아무 여인도 괜찮습니다. 아무나이기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본인이 아무나가 되어야 됩니다. 주여 제가 어떤 장점이 있어서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주님께서 아무나 구원하신다고 하시면 맞습니다. 제가 아무나 중에 아무나입니다. 라고 하면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구원받은 후에는 머리가 좋기 때문에 등, 되도 않는 것을 갖다 붙이는데 주님께서는 아무나(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자를) 구원하신 겁니다. 아무나 구원한다는 말은 아무나 천국에 못 간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자격 들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자격을 찾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습니다. 기다리면 주님께서 직접 가셔서 건져주십니다. 건짐 받을 때에는 법의 인격화에 우리가 동참된 겁니다.

피는 동일한 피가 아닙니다. 생명이 흐르는 특정한 피가 있고 죽은 피가 따로 있습니다. 언약의 완성을 품고 있는 피는 생명의 피고 언약에 위반된 피는 죽음의 피입니다. 저주의 피입니다. 우리 피는 속으로 사라지고 주님의 언약의 피가 겉에 코팅되면 우리가 삽니다. 백성들이 죄를 지어도 제사장이 어린양의 피를 뿌리면 죄용서 받습니다. 유월절 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니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 갔습니다(출12:1-14). 언약이 없는 피는 저주가 내려야 합당하고, 언약에 의해 완성된 피는 축복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창세전에 결론 내린 것을 실행에 옮긴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입니다. 우리가 착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을 예수님의 피로 구원한다는 것을 증거물로 남기기 위해서 믿음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피로 인하여 죄짓는 피는 항상 뒤로 처져야 합니다. 피 끓는 정열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외친 것이 죄입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도시락 폭탄을 던진 것이 죄입니다. 라고 하면 윤봉길은 구원받습니다. 안중근이 민족의 원수 이또오 히로부미에게 총을 쏩니다. 내 몸이 어쩔 수 없이 하긴 했는데 주님 만나서 이것도 죄입니다. 라고 한다면 주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막 사시고 피 코팅해서 구원받으세요.

레위기 17장 3,4절입니다. “무릇 이스라엘 집의 누구든지 소나 어린양이나 염소를 진 안에서 잡든지 진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 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이 말씀이 앞서 말씀드린 내용입니다. 어디에다 가짜 피를 진짜 피에 섞습니까? 생명의 피는 어떤 특정 장소, 자리에 흘려야 합니다. 이 자리를 확장시키면서 인격화 시킵니다. 이 피 흘리는 자리가 특정인물이 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직은 인격화되기 전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피 흘리는 것과 구분해야 하기 때문에 소나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을 때에는 특정 장소, 즉 여호와의 장막 앞을 경유하면 백성 중에서 끊쳐지지 않게 하실 것을 말씀합니다. 인생들이 하는 모든 것이 죄이지만 주님의 피로 코팅하면 모든 것이 용납되고 용서가 됩니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진짜 생명의 피를 흘린 곳을 경유해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피와 생명이 없는 피의 차이점은 언약이 완성되면 생명의 피고 언약이 미진하거나 완성되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피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반복을 통해 생명과 구원의 반복으로 이어가십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이것이 없으니 외부조건을 보고 쳐들어옵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하늘에서 우박을 내리시든지, 자기들끼리 싸움을 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적들을 물리치십니다(수10:11; 삿7:22). 아람 군대가 사마리 성을 포위했을 때 아람 군대로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심으로 황혼에 일어나 도망하게 하셨습니다(왕하7:5-7).

굶어죽을 위기에 처해 있던 문둥이들이 아람군대 진영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은, 금, 의복을 챙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준비한 의입니다. 사는 방법은 있습니다. 나의 반복을 지탱하기 때문에 살지 못합니다. 나의 반복이 조롱당하고 무시당해야 합니다. 타인을 통해 내가 인간 취급받지 못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간 이하, 짐승 같은 존재임을 늘 깨닫는 사태가 일어나 줘야 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이 말로만 하지 말로, 지식으로면 외우지 말고 진심으로 알아야 됩니다. 차에서 전도서 일장을 듣고 있는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를 듣고 있을 때 사고가 나면 얼마나 실감나겠습니까? 그래 새 차 뽑은 것도 헛되구나. 하면서 말씀이 살아 계심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말씀에 코팅됩니다. 그럴 때 친구가 새 차를 샀다면 그에게 새 차 산 것도 헛된 것이라 실감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법의 인격화, 말씀의 인격화입니다. 언약이 완성되지 못한 피는 언약이 완성된 피에 그 자리를 내 주어야 합니다.

레위기 17장 11절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을 우리가 모르는 입장에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는 말씀을 봤을 때 수혈해야 됩니까, 하지 말아야 됩니까? 언약의 피와 언약이 아닌 피에 대해 모른다면 수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언약의 피와 언약 아닌 피를 안다면 헌혈 많이 해서 빵 많이 먹고 영화표 많이 얻으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내 피는 아무리 흘려도 생명이 없는 죽은 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증인은 레위기 17장11절을 보여 주면서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으니 당신이 헌혈했다면 말씀에 위반된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속한 장로교는 레위기 말씀을 위반합니다. 오직 말씀대로 하는 단체는 여호와 증인 밖에 없다고 하면서 여호와 증인에게로 오라 할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박하시겠습니까? 레위기를 다 지킨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진짜 생명이 있는 피는 이삭같이 약속을 따라 난 자, 육을 따라 난 노선이 아니라, 율법 외에 다른 노선으로 오신 화목제물 되신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 피가 우리 모든 죄를 씻어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그 자리에 우리는 죄인 된 모습으로 참여되어서 주님의 피로 코팅됩니다.

제사의 순서는 속죄제, 번제, 화목제 순입니다. 소제는 번제에 포함되고, 속건제는 속죄제에 포함됩니다. 순서로는 속죄제, 번제, 화목제 순인데 마지막 순서가 화목제입니다. 화목제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때 제사를 통해 그 근거를 마련해 놓으신 제사입니다.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값을 치렀습니다. 값을 치루기 위해 예수님이 투입되었는데, 죄를 대신 가져가셔서 처리가 끝나야만 용서가 됩니다. 대속하신 분은 그 속에 하나님이 의를 품고 있습니다. 용서와 더불어 의가 나옵니다. 용서하신분도 의로우시고, 용서받는 자도 의로워집니다. 의와 의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이것을 화목제라 합니다.

화목제란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과 의가 구비될 경우에만 화목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무엇을 소유하거나 가지게 되면 그것을 자기 자신이 관리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의를 주어도 인간은 의를 관리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왜 자꾸 성도에게 들락날락 하시는고 하면 이것이 우리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 잘 있는지 늘 들락날락하셔서 관리를 하십니다. 기도하면 그것도 기도야 라고 하시지요.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지요(롬8:26). 우린 랜탈(임대)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관리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린 화가 나서 내 몸의 주체가 내가 아니란 말입니까? 라고 하지요. 아닙니다. 로마서 14장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하시지요. 자식이든 아내든 어떤 것도 내가 관리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한평생이란 우리가 빌려온 겁니다. 임대차 계약입니다. 레위기 25장에 나옵니다. 자기 땅이 없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25:23).”

성경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위해, 자존심을 위해 피조물을 만드시고, 그 죄지은 피조물이 죄지은 방향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기 위해 죄가 유발되는 쪽으로 관리하십니다. 그 관리 체제는 하나님의 의가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 의란 중보자, 예수님이 온전히 점령된 상태에서만 온전한 의가 됩니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온전한 의입니다. 이 관계가 우리 속에 유지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이유는 예수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믿음이 내 관리 대상이 됩니다. 아침에 좋았다가 저녁에 안 좋으면 어떻게 합니까? 젊을 때는 좋다가 늙어서 좋지 않다면 어떻게 합니까? 치매 걸리면 어떻게 합니까? 치매 걸린 사람에게 예수님 믿습니까? 라고 하면 당신 미쳤나 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은 우리 몸을 관리하는 우리 손을 떼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면서 네 몸에서 손을 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토라져서 난 아무것도 안 할래. 라고 하지요. 교회도 안 나올래. 라고 하지요. 그러면 주님이 네가 교회 안 나오고 배기는지 한번 보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란 예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관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행위가 많습니다. 그 행위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고, 경건치 않고, 불의한 행위입니다. 이런 것들을 내어 놓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 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 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4-8).”

주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일을 하면 삯을 받아야 된다고 우기고, 경건치 아니한 자로 만들어 내시면서 주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조건에 맞추기 위해 어떤 일을 해도 일 안한 것으로 간주해야 하고, 아무리 경건해도 경건치 않은 것으로 간주하셔서 구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삭도 바쳤지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이야기 하지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일을 많이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요.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니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이것은 놀라는 말이 아니라 나름대로 경건하고자 했는데 항상 성령이 찾아오시니 그 모든 것이 일 안한 것이 되고, 경건치 않는 것이 되더라는 것을 깨닫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주십니다. 얼마나 즐거운지 모릅니다.

7절을 보면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복이라는 것은 죄를 짓고, 불법을 저지른 그 현장에서 예상치 못하게 나오는 겁니다. 나 잘나기 위해서 받는 복은 사실 사단이 제공하는 또 다른 선악과의 반복입니다. 나를 섬기면 복 받는다, 교회섬기면 부자 된다는 것은 마귀의 음성입니다. 부자 되는 것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부자 되기를 원하지만 부자 되고 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한 근심에 쌓입니다. 솔로몬이 부자였지만 마지막 내 뱉은 말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가난한 자나 부자나 있는 대로 먹고 즐기는 것이 너희에게 준 복이라고 하지요.

법이 인격화 되면서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내 몸의 피는 피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가 등장합니다. 새로운 노선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등장시키시는 새로운 인물이 생명을 주는 인물입니다. 레위기 당시는 동물의 모습으로, 수소, 숫염소, 수양의 모습으로 어린양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렇게 유치하지만 그 속에 생명이, 인격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어떻게 압니까? 십계명을 지켜보려고 하지만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사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수기 15장32절 이하를 보면 안식일에 나무한 자를 진 밖에서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이 법대로 하려면 안식일 날 이런 자를 찾아 다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찾으면 반갑지요. 돌로 쳐 죽이겠지요. 주의 법대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겁니다.

그런데 돌로 쳐 죽이려고 했는데 가만히 보니 자기 아들입니다. 자기 아들을 칠 사람이 있을까요? 주여 제가 아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서 손을 거두어들이지요. 법을 실행하면서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나 잘남을 위해서 법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주체 자아상의 한계임을 아는 겁니다. 신명기 21장18절 이하에서는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면 그 부모가 그를 잡아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여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21:18-21).”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목사들이 말씀대로 삽시다. 라고 주장하는데, 말 안 듣는 네 아들 말씀대로 심판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언약 없는 내 피가 급한데 어디에 레위기가 들어오겠습니까? 그런데 성령께서 강제로 집어넣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내일 보겠습니다.
 서경수(IP:118.♡.140.38) 14-09-13 20:56 
레위기 문등 제 7 강

우리는 레위기를 조금만 들었지만 레위기를 전부 들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레위기를 다 듣고, 잘 들은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과 독대하여 레위기를 직접 들었던 모세로부터(정통) 레위기를 다 들었을 때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 지시를 하셨다는 것은 너희들이 지킬 것이라는 것을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해 보아야 너희들 구조상 말씀을 듣지 않도록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레위기를 주신 이유는 멸망시키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들이 나의 법도를 싫어하며 나의 규례를 멸시하였으므로 그 땅을 떠나서 사람이 없을 때에 땅이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자기 죄악으로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레26:43).” 멸망당할 때 억울하다고 하지 마라, 다만 이스라엘은 멸망한 이유를 알고 멸망당할 만한 것을 아는 유일한 민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자신들이 멸망당한 이유를 모릅니다. 어찌되었든 망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 들었다고 하여, 율법을 듣고 외우고 배웠다고 하여 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히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올드 보이]라는 영화에 보면 최민식이라는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군만두를 15년 동안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15년 동안 군만두를 먹었는지 그 이유를 차츰 소급해서 알아갑니다.

이스라엘의 역할이 그렇습니다. 멸망한 후 소급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당연함을 증거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 오셨습니다. 인간되라고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목회 희망이 날아갑니다. 몇 명이라도 건지는 그것이 목표가 되어 열심을 낼 것인데 해봤자 믿지 않을 텐데. 라고 나와 버리면 애초부터 구원받겠다는 싹을 싹둑 잘라 버린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반응은 너무 잔인하다고 느껴집니다.

사람에게는 희망이라도 남겨주어야 기회가 생기는데 희망마저 싹둑 잘라버리면 일어설 힘을 낼 수 없잖아요. 잠언서에서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는데 여덟 번 일어나도 소용없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하나님께서는 왜 레위기를 주시면서 듣기는 듣되 지키지 마라 하실까요? 그 이유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망하게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율법의 목적을 변개합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식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이 행하는 역할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과 차이가 납니다.

너무 심하다고 생각되시지요. 질문하나 드리겠습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 엘리아가 함께 있었지요. 모세가 천국에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직접 봤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코앞까지 인도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항상 하나님 편에 서서 바르게 살았기 때문이다. 아니면 주님의 피로 용서 받았기 때문일까요? 주님의 피로 용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모세, 엘리아의 대화 주제가 예수님 별세에 대한 것입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새(눅9:29-31)”

우리 같으면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까? 라는 이야기를 할 겁니다. 그런데 모세와 엘리야는 주님 언제 돌아가시는지, 돌아가셔야 그 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용서 받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 모세와 엘리야가 못한 율법의 완성을 주님께서 언제 완성시키셔서 우리가 그 완성의 혜택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 라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함께 올라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다가 깨어 보니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고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된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별장 세 채를 지어 한 채씩 드리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주 목적은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떠나야 한다고 하시지요.

이것이 레위기의 주제입니다. 레위기의 주제는 분리, 즉 거룩입니다. 거룩을 사적으로 적용시킬 때에는 자아가 쪼개집니다. 하나님, 저는 어떻습니까? 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쪼개십니다. 땅콩 껍질 예쁘다고 그 껍질을 보존하기 위해 땅콩 먹지 않는 사람 거의 없지요. 땅콩 껍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속 땅콩이 중요하지요. 그러니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껍질을 깨어 버리고 그 속에 있는 땅콩을 먹지요. 땅콩 껍질을 사당 만들어 모십니까? 주저 없이 갖다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은 육의 껍데기를 가차 없이 버리고, 육을 통해 죄를 바탕으로 해서 레위기 말씀이 완성이 되면, 상처 입은 조개에서 진주가 나오듯이 생성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진주만 빼고 조개는 아낌없이 버리지요. 주님은 진주 양식 업자입니다. 쪼개야 합니다.

그 쪼개는 대목이 레위기 11장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 약대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레11:1-4)” 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음식까지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건강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일까요? 우리 몸이 귀한 몸이니 돼지고기 같은 것을 먹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 몸은 땅콩 껍질에 불과 합니다. 쪼갬의 대상입니다. 왜 이러한 것들을 먹지 말라고 하셨는지 4절 끝부분에 나옵니다. “약대는 새김질을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라고 하십니다.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먹지 말라 하십니다. 부정한 이유는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낙타에게 물어 봅시다. 낙타야 하나님께서 네가 더럽다고 하시는데 너의 의견이 어떠냐? 라고 하면 낙타가 푸푸 하겠지요. 만일 낙타가 말을 한다면 주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나는 부정합니라. 라고 하겠지요. 짐승이나 식물들 즉 코끼리, 원숭이, 개, 고양이, 낙타, 돼지, 해바라기, 나팔 꽃 같은 것들은 주님께서 맡기신 그 기능대로 존재합니다. 코끼리가 선악과 따먹지 않았고, 낙타가 선악과 따먹지 않았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자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낙타나 돼지가 부정함이 폭로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룩 앞에서 부정한 자로 폭로 되어야 할 자들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정결하고 거룩함의 기준을 만듭니다. 예를 들면 낙타야 너는 왜 부정하니? 라고 하면 낙타가 제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겠습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너는 선악과를 따먹어 부정하다고 하면 인간은 제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겠습니다. 라고 하지요. 열심히 기도하겠다는 자체가 저주받을 죄가 튀어나오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본래 자아가 아닌 마귀와 한통속이 된 자아를 챙겨놓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아와 마귀와 한통속이 된 자아의 간격을 이런 식으로 채워 거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말씀을 준 이유가 말씀을 지켜 거룩하라고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낙타보다, 코스모스보다, 하늘의 달이나 해보다 못해요. 만일 달이 해를 가릴 때 해가 달에게 지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달아 너 좀 비켜라. 고 말합니까? 모든 피조물은 거룩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19:2-4).”

인간은 이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나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나 날, 밤,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님을 경유하여 자기 위치를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사나 죽으나 믿을 놈은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믿을 것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성경 공부한다고 자신을 믿지 않는 인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믿는 성깔을 타고 났기 때문에 목사, 장로, 성경으로 뒤집어써도 죽을 때까지 갑니다. 평생 동안 자신만 믿습니다. 사람은 자신 외에 아무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신앙생활 사십년을 했든 교회를 들어 본적도 없는 칠십 먹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나는 나만 믿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레위기 26장에 도달합니다. 레위기 끝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믿을 인간 없다고 합니다. 아니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분류작업이 됩니다. 만일 본인이 알아서 분류작업에 참여 한다면 자신만은 천국에 집어넣고 타인들은 지옥에 밀어 넣는 것을 죄로 아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외에는 믿을 대상이 없습니다. 임시 땜질로 가족을 믿든지, 아내를 믿든지, 자식을 믿는다, 목사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 유리한 상황이 유지되어질 때 그렇게 합니다. 자신에게 불리하면 내가 언제 너를 믿었는데 단지 이용했을 뿐이야. 라고 하면서 발로 차버립니다. 이것은 제가 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그렇고 아버지 어머니도, 딸도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편이고 다른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너무나 확고하게 믿는 대상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경계선을 넘어가면 의심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인간은 자기 밖으로 한 발작도 못나갑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의 거룩은 지상에 있는 것을 분리해서 주십니다. 새김질하고 굽이 갈라진 짐승은 먹되 새김질하고 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은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새김질은 거듭남이고 갈라짐은 분리입니다. 되새김을 먹고 갈라짐을 먹으라는 것인데 우리 내부에 되새김과 갈라짐이 들어오면 기존의 자아는 죽고 다른 자아가 생성됩니다. 나는 나를 믿는다는 자아와 둘로 쪼개지면 자아가 애매모호하게 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가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15-25).”

자아와 자아가 갈라진 상태에서 통합이 안 됩니다. 갈라짐에서 공통요소를 끄집어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김질하고 굽 갈라진 것을 먹으라는 이유는, 네 자신이 하나님 만나서 통합된 자아를 달랑 천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땅콩껍질처럼 쪼개어 정작 건지고 싶은 진주를 끄집어냅니다. 그런데 진주가 우리 안에 없어요. 그러니 상처를 만들어 진주를 만들어 냅니다. 기존의 자아가 파괴되고 붕괴되고 모독당하니 우리는 아파요.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만났을 때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것이 하늘나라 완성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자아가 존재하면 되겠네. 라고 생각했습니다. 존재하는 방법은 내가 집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함께 모시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쪼개지고 요한이 쪼개지고 안드레가 쪼개지지 아니하면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아이 생일잔치하려고 방울토마토를 반쪽씩 주려고 할 때 같은 접시를 위쪽에 눌러 칼로 그 사이를 지나가면 반쪽으로 쪼개집니다. 십자가로 쪼갭니다. 분리합니다. 이 가운데서 진주조개가 나옵니다. 이것을 공식화 시키면 천국백성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식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이 쪽발이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이 되새김입니다.

쪽발은 1에서 갈라졌습니다. 하나에서 갈라지면 둘이 되고 셋이 되지만 외부자극을 받아 갈라져도 하나입니다. 하나님 저를 갈라 주세요, 저는 저 믿기 싫어요. 하는 사람 봤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시만 하면 나를 살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 때문에 목숨 걸고 그 지시를 따라 하나 속에 들어가겠습니다. 라고 하지요. 이것이 우리가 평소 하나님을 믿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을 일절 믿지 않습니다. 그 믿지 않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구원받는 것은 숨어 있는 다른 칼날이 우리를 쪼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쪼개지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 자아는 쪼개집니다. 구약적으로는 분리입니다. 쪼갬, 분리, 거룩, 거듭남이 같은 의미이지만 우리의 생활면으로 보게 되면 에베소서 5장 31, 32절에 나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부모를 떠나지 않으면 한 몸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비밀이라고 합니다. 자식이 부모 떠나 결혼하는 것이 어떻게 비밀입니까? 누구나 다 알고 다 하는 것 아닙니까? 모든 예식장에서 하는 그 결혼이 무슨 비밀입니까? 다 안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 하면 인생과정은 떠남의 연속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사태와 사건은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임을 모르기에 이것이 비밀입니다. 이것이 비밀이라는 말은 어느 인간도 자신이 일군 노동의 결집물을 자진해서 떠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좋든 싫든 자기 자신 외에 믿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도 한국도 심각한 것이 자녀가 결혼해도 부모를 떠나지 않아요. 처음에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정신적 이유로도 부모를 떠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부모에게 물어봅니다.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부모에게 전화해서 묻습니다. 이혼하라고 하면서 평생 먹여 살려 줄게. 라고 합니다. 너 같은 귀한 딸을 누가 힘들게 하니? 이혼해라. 다른 사람 소개 시켜 줄게. 라고 합니다. 도무지 자식은 부모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부모는 자식은 떠나보낼 생각을 하지 않아요. 남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제 이야기합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보내려니 아까워서 못 보내요. 늘 곁에 두고 싶어요. 한 시간 내에 두고 싶어요.

왜 인간은 못 떠나는가 하면 인간은 자기 영역에서 떠날 줄도 모르고, 떠날 방법도 모르고, 떠나라는 소식도 들어 본적 없고, 떠날 마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계선을 넘어버리면 지금 내가 구축하고 있는 자아를 온전히 보존하는 조건하에 떠납니다. 이것은 장소만 이동되었을 뿐이지 자아는 떠난 적이 없습니다. 교회 다니지 않다가 교회 와봐야 자기 밖에 모르는데 이것이 무슨 떠나는 겁니까? 자기가 자신을 키우는데 그것이 무슨 진주입니까? 언약이 담겨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습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굽이 갈라짐과 되새김은 쪼개짐과 분리를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 어떤 일관성을 갖고 있었기에 모세에게 이 말씀을 주셨을까요?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아브람이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습니다. 새는 쪼개지 아니합니다. 쪼갠 후 마주보게 하는 것은 쪼갠 의미가 통합되는 과정을 통해 성공적으로 드러납니다. 쪼개신 목적이 쪼갠 것이 다시 통합이 될 때 처음부터 쪼개신 분의 의도가 있어서 쪼개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제물과 아브람의 동격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다루시는 방식은 아브람이 드린 제물의 쪼갬과 마주보는 식으로 다루십니다. 이것이 언약이 지배하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긴 주랑이 있습니다. 비가 내릴 때 주랑 아래 a 지점에 있으면 비를 맞지 않습니다. b 지점에 있어도 비를 맞지 않습니다. 비를 피했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주랑아래 통제 받기 때문에 비를 맞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아브라함 때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오심과 천국까지 쭉 뻗어 있습니다. 아브람을 이곳에 세웠다는 것은 아브람을 제물화하시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 쪼개시는 대상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이 관찰자가 이 노선에 합류된다면 아브라함처럼 쪼개지는 제물로 합류됩니다.

아브라함 개인의 집단화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유지 보존하려다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주랑, 즉 하나님의 언약을 날려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기억하사’입니다. 이것을 늘 반복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마지막에도 나옵니다.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레26:42).”

우리가 낙타처럼, 돼지처럼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분류하신 그 분류가 내가 분류한 그 분류보다 월등합니다. 내가 분류하겠다는 것은 끝까지 나만 믿겠다는 것이고 끝까지 쪼개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욕심으로 내 편에 서면 다 거룩이고 나를 반대하면 모두 이단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고 이것마저 쪼개실 때 우리 자아는 애매모호하게 됩니다. 내 자아가 뚜렷하게 되면 굳어집니다. 그러나 애매모호하다는 것을 액체주체라 표현합니다. 그릇 모양에 따라 모양이 달라집니다. 고형화 되지 않습니다. 상황 따라 흘러갑니다. 한국에서는 저렇게 살다가 미국가면 거기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도대체 자존심이 있는 인간인지, 주체가 있는 인간인지 그냥 웃을 때 웃고, 아프면 웁니다. 주체가 모호하게 되어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붙잡고 있다가 자신이 쪼개지면서 진주하나가 튀어 나옵니다. 그 진주가 이삭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진주는 내가 믿고 섬기고 노력하고 일해서 나온 진주가 아니고, 때려 죽어도 못 내놓는다고 고집부리다가 주님의 칼자루에 의해 둘로 쪼개지는 그 자리에서 나온 진주입니다. 두 동강 날 때에는 내 몸이 두 동강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동강 내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일을 둘로 쪼개니 그 속에 일이 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쪼개져 둘로 될 때 내가 일이라 생각했는데 내 속에 다른 일이 있는 겁니다. 이것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입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신만 믿습니다. 신앙생활 사오십년 했다는 것은 나만 믿었다는 것이 들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나 외에는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랑, 언약을 덮어쓰면 그 속에서 아브라함을 만납니다. 첫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거울 속에 들어갈 수 없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속에 들어갑니까? 아브라함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나도 믿고 들어가지. 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믿는다는 나를 믿는 믿음입니다. 자신이 거울 속에 들어가려다가 코만 다칩니다. 내 행함을 하나님께서 죄악된 것으로 만들어 들어가게 했습니다. 라고 하면 바리새인들은 그렇다면 내 스스로 내 자신을 낮추고 죄인되게 하면 되잖아요. 합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차례씩 집단적으로 금식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합니다.

이 앞을 예수님과 열 두 제자가 지나가면서 술 먹으로 가자고 합니다. 세리와 창기를 데리고 음식 먹으로 갑니다.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고 이렇게 거룩한 고난주간에 너는 어떻게 술을 먹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고 따지지요. 이 때 예수님께서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합니다.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5:30-33).”

네가 스스로 만든 죄인은 네 스스로 칼질하기 때문에 그것을 죄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교만으로 보시겠다는 겁니다. 교회가 자기 죄인 만드는 기법을 가르치는 양육방법이 유행입니다. 단계를 통해 일 단계 이 단계 삼 단계 사 단계 오 단계 육 단계 칠 단계를 가르칩니다. 이렇게 함은 교회에 붙들어 놓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단계를 높이면 높일수록 땅콩 껍질만 두꺼워질 뿐입니다. 인생은 자기 두께를 두껍게 만들면 안 됩니다. 홍두깨로 밀가루반죽을 납작하고 얇게 하듯이 인생의 두께가 습자지처럼 얇아야 됩니다. 시스룩(see through look) 같아야 됩니다. 얇아서 속이 다 비치도록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조금만 갖다 대도 톡 쳐져 버려야 합니다. 자기를 얇게 가져가야 하는데 그 방법은 과거를 잊어버리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잊어 버렸기 때문에 두께가 생성되지 않아요. 이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되겠지요. 그건 주님의 소관입니다. 아브람이 제물을 반으로 쪼개 놓고 마주보게 했습니다. 쪼개진 제물은 자체적으로 융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쪼개진 사이로 하나님이 횃불이 되어 지나갑니다(창15:17). 횃불이 되어 지나갈 때 쪼개진 것이 하나가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인식이 나옵니다. 하나를 쪼개면 이분에 일 더하기 이분의 일이 됩니다. 이것을 결합시키면 도로 남이 됩니다. 이분의 일이 하나요, 또 다른 이분의 일이 하나면 이가 됩니다. 이것도 안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관여하십니다. 이분의 일, 이분의 일은 수평적입니다. 이것을 수직적으로 바꿉니다. 이렇게 되면 본래 일과 같은 성질의 일이 아닙니다. 이 일은 과거 일은 죽었습니다를 자인하는 일입니다. 나만 믿는 나는 주님의 언약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나가 아니라 주님의 언약 속에 담겨 있던 주님의 준비한 낯선 나가 기존의 나를 밟고 사는 식이 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이르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엡5:31)”라는 뻔한 말씀이 왜 비밀입니까? 이것은 가정 이루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어떻게 하나 되는가에 대한 원리를 설명했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결혼식을 통해서 교회까지 넘어 올 수 없는 사람은 비밀에 의해 막힌 사람입니다. 일반가정에서 교회로 넘어 온 사람은 비밀을 아는 사람으로서 가정도 알고 교회도 아는 사람, 밑도 알고 위도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들도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집사님이 주기도문을 외우실 때 누구를 포함하여 우리라고 하십니까? 목사님 사모님도 포함됩니까? 만일 사모님 목사님이 자신만 믿는다면 우리에 포함됩니까? 하나님의 언약 밖에, 하나님께서 쪼개신 그 쪼갬이 없어 분리가 되지 않았기에 우리 속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레위 언약 밖에 있기 때문에, 융합이 안 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주기도문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이 훨씬 편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보다 더 편한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하지요. 그래서 사도신경이 틀린 겁니다. 주님은 사도신경을 알려주신 적이 없습니다. 삼위일체 앞에서는 내가 사라져야 합니다. 내가 있고 삼위일체 아는 것은 우상입니다. 우리라는 것은 일인칭 복수입니다. 우리라는 것은 숫자로 표현하면 1입니다. 그런데 수준이 높은 다른 곳에서의 1은 우리가 됩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나오지요. 그런데 낮은 수준에서의 우리라는 개념은 나를 포함하여 플러스알파가 됩니다. 여기 몇 명 놀러 왔습니까? 라고 물으면 나를 포함하여 몇 명을 말합니다. 지상에서 우리라는 것은 단수가 아니라 다수가 됩니다. 지상에서 ‘우리’라는 것은 먼저 나를 포함 시킨 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체를 ‘우리’라고 합니다. 이것을 갖고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밋밋하니 성령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공동체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내가 만들었지요. 그래서 만일 내 마음에 안 들고 나를 무시하면 그 공동체를 나가 다른 공동체가 가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처음의 공동체는 우리가 되지 않고 너희가 됩니다. 이제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잠시 우리가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임시 땜질이라고 합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우리는 하나에서 나온 우리입니다. 그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우리가 되는데 우리는 건방지게 변화산의 베드로처럼 함께 모여 우리가 됩시다. 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마26:75). 왜냐하면 나만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훌륭한 점은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나게 인생을 통해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이 평소 우리에게 잠복되어 있는 나의 모습입니다. 그것 때문에 성경에 베드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의 주제는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을 능력이 애초부터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교회란 무엇인가? 뜯어내어 먹을 수 있을 때만 임시적으로 자매님 형제님이라고 해주는 단체일 뿐입니다. 진정한 교회가 되려면 성령을 통해서 내가 부정당해야 합니다. 그 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내가 문제 있음이 발각 되면서 부정당해야 합니다.

우리라는 단체는 내가 나를 믿는 자체가 범죄임을 지목하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임시적으로 모이게 하신 단체로서 교회를 만들어 주신 겁니다. 교회의 특징은 교회는 교회를 만들 수 없고 교회는 교회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경유할 때만 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경유하지 않고 나의 대상체로 생각한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저 교회에서 나를 얼마나 예뻐하고 사랑하고 관심 갖고, 내가 어려울 때 도와주며, 내 신용대출을 얼마나 해주며, 내 정수기는 얼마나 팔아 줄 수 있느냐, 내 보험은 얼마나 들어 줄까, 내 아이 피아노 학원비 얼마나 할인해 주는가, 내가 외로울 때 목사님이 얼마나 자주 심방해 주시는가, 나를 위해 새벽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기도를 해 주시는가?

이처럼 나를 기점으로 생각하는 단체는 절대로 우리가 아니라 나의 확장, 나의 확산에 불과합니다. 서로서로 뭔가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어설피 얽혀 있고 관계될 뿐입니다. 여기에 뜨거운 물 한 방울만 떨어뜨리면 정태호씨처럼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가버립니다. 그러나 다섯 번 이혼하고 여섯 번 결혼해도 주님 만나면 영생 얻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얼마나 미모가 뛰어나기에 남자가 끊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주 유치한 방법입니다.

레위기 11장에 나오지요. 새김질하고 굽이 갈라진 것은 먹고, 새김질 하고 굽이 갈라지지 않는 것은 부정하니 먹지 말라는 유치한 방법입니다. 이렇게 유치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숨겨진 추상적인 하나님의 완벽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유치한 방법이 끝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 부정한 돼지고기 안 먹겠습니다. 라고 하고 안 먹지요. 그래서 망했습니다. 누구를 위해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까? 자기를 위한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음입니다. 이것을 발각해 내는 방법이 율법을 집어넣어 죄와 만나게 해 예상치 못한 진주가 나오게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로요 자비입니다.

수평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주님께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 안에서 새로운 진주를 만들어 내시어 천국에 합류시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흉내를 낼 수 있고 모방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국가 조직은 무엇으로 맺어져 있는가? 현재 사회학자나 정치학자들은 이데올로기로 맺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에 의하면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환상을 통해 착취체계의 유지에 참여한다고 봅니다. 자본주의에서의 이데올로기는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서 됩니다. 이 말은 개인이란 것은 나 여기 있음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그 사람을 호명해 줄 때 그 사회에 자리를 점유하게 됩니다. 이때 너는 누구냐? 라고 하면 나는 어느 회사에 취직한 누굽니다. 라는 주체가 확립됩니다.

오늘도 주부들은 자녀들이 이 사회에 근사한 자리를 점유한 한 주체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그러면서 자녀에 이 사회에서 아무도 너를 불러주지 않으면 굶어죽는다고 가르칩니다. 이 사회에서 아무도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흔히 보는 꽃도 내가 불러 줄 때 나에게 다가와 의미가 되었다고 김춘수 시인이 말했지요. 평소에 늘 같이 있어도 나에게 의미가 없으면 너에게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진솔한 모습입니다. 당신이 잘나서 나에게 도움 줄 수 있다면 우린 형제가 됩니다. 얼마나 위험하고 수상한 우리입니까? 이런 환상 속에서 우리는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서경수(IP:118.♡.140.38) 14-09-15 08:42 
레위기 문등 제 8 강

비밀과 반대되는 말은 유치함입니다. 유치함을 안다는 말은 이미 비밀 속에 들어간 사람의 고백입니다. 비밀의 세계 속에 들어가 보니 레위기가 유치해 보입니다. 제사를 반복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세상이 유치함을 알기에 비밀을 아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16장과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만세 전에 감추어진 것이 공개 되었다고 합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롬16:25-2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2:7).”

이 비밀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비밀은 인간의 지혜와 총명, 노력으로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완전 거짓 십자가입니다. 진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나의 지혜와 나의 노력과 나의 공부로 안 것이 아님을 고백하면서 십자가를 안다고 내어 놓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4, 5절을 보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나도 복음을 전할 때 내 마음대로 못하고 오직 성령의 종으로서,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움직였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낫게 할 때 사람들은 유치한 수준에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과 권능으로 하나님께서 앉은뱅이를 고쳐 주셨다고 칭찬할 때 손사래를 치면서 극구 부인합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는 너희가 죽인 생명의 주되신 예수님 목격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저 사람이 나은 것은 우리의 개입이 아니라, 우리가 개입 안한 것이 저 사람을 낫게 했다는 말입니다. 지금 살아계신 주님께서 살아 있는 믿음을 앉은뱅이에게 주니 앉은뱅이가 낫게 되었고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3:16).”

사도행전 5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소유를 팔아 헌금할 때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베드로가 이것은 나를 속인 것이 아니라 성령을 속였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은 자기 자신에게 공과가 오는 것을 피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원치 않는 길로 갔습니다. 만일 자신이 예상한 길로 갔으면 주님과 자신이 동업자가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자신만 믿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베드로를 주님의 일을 방해하고 훼손하는 자로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나는 나만 믿지만 주께서는 나를 종으로 부리십니다. 그래서 나는 지워버리시고, 주께서 친히 마련한 우리라는 몸으로 이끄십니다.

앞 시간에 말씀드린 ‘우리 아버지여’에서 ‘우리’라는 것 속에 ‘나’는 1이 아니라 0이 되어야 합니다. 0이 되는 구절이 갈라디아서 2장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은 한 분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면 나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로 들어 있는 것으로 해 달라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계속해서 나를 죽이시는 방식으로 그분만 내 속에서 뽑아내는 방식이 되게 해 달라는 겁니다.

커피를 내려먹는다고 하는데, 커피원두를 갈아서 종이로 걸러 내려 마시지요. 이처럼 사도바울은 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가루가 되면서 내놓는 것은 커피입니다. 자신은 가루가 되고 주님의 하신 일을 내어 놓습니다. 주님이 마시는 커피는 직접 원두를 갈아 내려 마시겠다는 겁니다. 남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내가 거울을 보면 분명 내가 살아 있는데 어떻게 내가 없음이 되느냐? 나는 있음에 합류될 자격이 없습니다. 있음은 예수님만 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른다고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기 인정하는 자만 아들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1:11).”

아들이란 아버지와의 정상적인 관계에 준해서 아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아들이 되면 반드시 아들 기능을 해야 합니다. 아들의 기능은 성령을 받아야 그 기능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하늘로부터 내려 왔습니다. 아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본인의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시키시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성령의 일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부터는 주님 되신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다 이루신 분, 곧 주님 되심을 증거하는 사람들로 차질 없이 만드십니다.

한국의 남탕에 있으면 이런 일이 있습니다. “1234번 차주 되시는 분은 잠시 밖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혹시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믿는 사람 있으면 잠시 밖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심은 자기 사람을 뽑아 가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으라고 홍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 귀 없는 사람은 들으면 안 됩니다. 오직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들어야 합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말씀이 그대로 실현될 때 우리는 일(1)이 아니라 제로(0)가 됩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있어 날마다 나의 존재를 제로로 만드십니다. 주님이 존재하심으로 내가 존재합니다. 우린 주님의 존재에 종속되어 늘 부정 당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라고 말합니다.

이름이란 존재가 먼저 있고 이름을 붙입니다. 존재된 이차적 결과가 존재하게 하신 일차적 어떤 분이 존재라는 공통된 있음을 밝히는 것이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름이란 소유용이 아니라 지향성입니다. 내 이름은 누가 지었느냐를 알라고 이름을 지어주셨지 ‘나는 이름이 있다’를 자랑 하라고 이름을 지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강아지가 있다면 이름을 붙여주지요. 그런데 그 강아지가 남의 집에 가서 살면 어떻게 됩니까? 이름 붙여준 사람 집에 있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되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만 따라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 앞에 각종 동물을 지나가게 하실 때 아담이 각종 동물에게 이름을 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2:19).” 이렇게 되면 모든 동물은 아담의 운명에 종속됩니다. 아담이 범죄 하면 죄 없는 코끼리도 죽고, 코스모스도 죽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합니다(롬8:20). 피조물들은 자신들이 왜 허무한데 복종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아들들이 제대로 아들 값을 못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피조물들이 탄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고 합니다(롬8:21).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것을 지금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전 우주가 한 통속으로 엮여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름을 자기 스스로 개선할 수가 있습니까? 자기 이름을 개선해 봤자 역시 자기 이름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을 부여 받게 되면 그동안 내 이름으로 점유한 자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산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이것이 기도 마지막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쉬는 시간에 어떤 분의 따님이 이화여대에 합격했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걱정되시겠습니다. 삼가 위로의 말씀드립니다.

이화여대는 존재하는데 이 존재가 주체로 바뀝니다. 그런데 주체는 현재 이화여대가 존재하는 국가적 상황이 호명을 해 줍니다. 이화여대가 한국에서 일류대학이다. 그 일류라는 것을 기존에 포진되어 있는 관계망, 이데올로기로 정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화여대에 들어가는 학생은 이화여대의 이름을 욕보이면 안 되는 할당 받은 주체를 위한 작은 주체로 할당받습니다. 졸업해서 고시에 합격하면 동네에 플래카드를 붙입니다. 또한 여기에 결부된 다른 주체들, 성씨가 김씨라면 ‘안동김씨 김00 셋째 딸 사법 고시 합격’을 동네 어귀에 붙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딸은 그 동네의 호명에 대한 역사적 사명을 갖게 됩니다. 도무지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고 하지요. 꿈에 본디오 빌라도 아내가 애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마27:19). 그래서 본디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 주려고 묘안을 냅니다. 유월절에 죄수를 풀어주는 관습에 따라 바라바를 예수님과 함께 내어 놓는 방식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민중들은 당연히 민란 일으키고 살인한 유명한 죄수인 바라바가 아니라 예수를 풀어주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막15:7). 본디오 빌라도가 나름대로 머리를 썼지만 자신이 왕이 아니라, 지도자가 아니라 지도자라는 자리를 점유한, 그 당시 이데올로기의 하나의 분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민란이 날까봐 바라바를 풀어줍니다. 자신이 맡은 치안 문제를 제대로 담당하지 못하면 로마에서 추궁당해 처벌받겠지요. 그렇게 되면 성공가도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공한 자만이 성공이 뭔지가 새롭게 보이기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압니다. 사람들은 그 동네 가지 않으면 되는데 그 동네 가면 새로운 목표가 생깁니다. 말려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화여대를 간 학생에게 주님의 이름이 점유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주님이 강한 자가 되고 자신은 연약한 자가 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라고 합니다. 내가 힘이 강할 때 강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 세상 이데올로기가 요청하는 주체입니다. 주님나라에서는 주체가 얇으면 얇을수록 주님의 활동이 비치니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 사도바울이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12:7).”

이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無라는 것은 有가 있음으로 유를 째고, 찌르고, 떠나면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추상의 세계, 질적으로 다른 수직적 세계, 초월의 세계, 하나님의 언약세계가 피어나옵니다. 제가 어제 연극 한 편을 봤습니다. 연극을 보면서 느낀 점은 그 예술엔 상처가 빠져 있다는 겁니다. 허무했지만 나중에 잘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서양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서양은 기념적인 겁니다. 목적을 이 땅에서 찾지 않습니다. 십자가 운동도 땅을 뺏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어차피 이 땅에서 결과물을 끄집어내는 자체가 의미 없는 일로 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꼭 잡아야 합니다. 이것을 꼭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지해야 하는 곳에 온갖 힘을 소진해 버리니 서양에게 먹히는 겁니다. 드러내면 강한자인데 숨기고 수비로 나서니 스스로 그 안에서 무너지는 겁니다.

레위기를 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진다는 겁니다. 레위기대로 살아보려고 아무리 애써도 무거운 율법의 무게에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님이 레위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레위기 21:7절에서 제사장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반드시 처녀와 결혼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자기 교회 목사님이 이혼 경력이 있는 황..변호사와 결혼 했습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레위기 말씀에 근거하여 그 목사를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누가 레위기를 그런 식으로 적용하라고 만들었습니까? 목사가 자신에게 이익되리라고 생각하여 레위기의 제사장이 바로 목사 자신이라고 틈만 나면 부흥사 불러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이 자기에게 적용될 줄 생각도 못한 겁니다. 아내와 사별하면 처녀와 결혼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황.. 변호사는 아주 유명하고, 돈도 많습니다. 즉 당시 이데올로기에 의해 유명한 주체의 자리를 점유한 사람이 자신에게 통째로 들어오는데 이것은 퇴직금이나 연금 받는 것보다 훨씬 좋잖아요. 이 횡제를 왜 놓치겠습니까? 스펙도 뛰어납니다. 만일 아무것도 없는 이혼한 여자가 와서 결혼하자면 그 목사가 결혼 안합니다. 노후 대책은 없고 기도만 하겠습니다, 저는 사모가 소명입니다. 라고 하면 결혼 하겠습니까? 목사란 남편을 소유하고 싶습니다. 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유란 자신이 일(1)이라 여길 때 소유가 됩니다. 자기 자신을 계속 증강시킵니다. 주님께서 교회자체를, 나 자체를 제로(0)로 만드시면 하나님이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닌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해나 달이나 코스모스나 낙타처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낙타라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굽을 갈라지게 만들어 놓고, 뒤늦게 와서 부정하다고 하시니 정결할 수 있는 기회는 처음부터 부여받지 못한 겁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런 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가 나무에서 먹을 것을 얻을까 하여 갔는데 문제는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무화과가 없겠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주해 말라 죽게 했습니다(마21:19). 무화가 나무를 주님이 키우십니다. 그런데 열매 없다고 무화가 나무를 저주해 버리시면 어떻게 됩니까? 무화가 나무가 저주받을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저주 받았습니다. 주님은 이것이 복음이라 하십니다. 저주받을 짓을 해서 저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준 낮은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주하면 저주며, 주님이 축복하면 구원이 되는 것은 복음 안에 있는 비밀입니다.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카운트 하지 않고, 창세전부터 카운터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자에 속합니다. 우린 성령, 아들의 영을 통해 우리의 제한된 것을 넘어서 주께서 창세전부터 어떤 계획이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법이 내 몸에 흘러 들어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식으로 우리를 사용합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이중구조입니다. 개념은 하나인데 둘로 나누어집니다. 사람이 이층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도록 언약이라는 주랑을 설치하셨습니다. 날마다 우리를 없이 만들고 없게 하시는 그분이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은 주님의 솜씨입니다. 있는 데서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예술 작품은 처음 시작부터 끝을 다 알아버렸습니다. 영웅설화는 거기서 거기지요. 이데올로기 세계에서는 바다에 용왕이 있다고 합니다. 용왕이 십자가지지 않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보니 중국남부에 용왕과 부처와 여신을 함께 섬기는 곳이 있답니다. 그 부처에, 해신(바다 신)에 십자가 흔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흔적이 없다고 해서 믿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갑습니다. 울산에 있는 어떤 아이가 날씨가 좋지 않아 물질을 못합니다. 그래서 용왕에게 뇌물을 줍니다. 20분도 지나지 않아 맑게 개이면서 바다가 잔잔해 졌습니다. 이런 것은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는 존재를 존재답게 키우기 위해 용왕이라는 존재를 인정해 드립니다. 는 흥정이요 거래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신이 부담이 없습니다. 뇌물 받으면 좋다고 챙겨놓고 받은 양만큼 더 챙겨주는 그런 신은 성경 볼 필요가 없습니다. 레위기를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신은 알라딘 램프처럼 내어 놓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입니다. 이런 것들은 상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처에 모든 율법을 쏟아 부었습니다.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창 자국, 못 자국을 보여 줍니다. 도마에게도 보여줍니다. 이상하지요. 왜냐하면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면 예수님에 대한 인상, 기억이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얼굴만 보여줘도 충분히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못 박힌 손과 창자국을 보여 줍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0-27).”

이것을 레위기 19장23절로 연결해 봅니다.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삼년 동안 열매가 할례를 받지 못했다고 하십니다. 레위기 25:3,4절입니다. “너는 육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년 동안 그 포도원을 다스려 그 열매를 거둘 것이나 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관심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 관심이 있습니다. 엄마에게 자식이 있는데 자식이 화단을 어지럽게 했다고 자식을 죽이려고 한다면 자식 얼마나 섭섭하고 기분 나쁘겠습니까? 그래서 묻습니다. ‘엄마는 내가 중요해 화단이 중요해?’라고 말입니다. 엄마는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화단이 중요하다.

그러니 이중구조를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알아들을 수가 없지요. 사람보다 땅이 중요하다는 발상이 어떻게 나옵니까? 사람은 장난감 같습니다. 레위기의 인식자체가 이스라엘이라는 엄청난 집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집단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생각하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땅을 위해 일꾼으로, 품꾼으로 임대인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레위기 25장55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는지라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너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마21:33-41).” 

농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포도원이 중요하지요. 제때 실과를 바치지 않으면 농부를 진멸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멸망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정사실로 해야 합니다. 상처가 있어야 피로 코팅됩니다. 우리는 상처 없이 곱게 천국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천국은 곱게 자란 나의 천국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목적지와 다른 반대방향 버스를 탄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땅을 사랑합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할례를 행해야 하지요. 그런데 레위기 19장23절을 보면 열매가 할례를 받지 못했다고 하시지요. 즉 땅이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땅이 어떻게 할례를 받아요. 과목이 어떻게 할례를 받아요.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언약은 사람 할례이지 땅의 할례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 할례에서 땅의 할례로 넘어가는 그 방식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 방식을 모르면 우리는 그 할례의 땅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합니다. 너는 너만 믿고 너만 챙기기 때문에 네가 생각하는 천국은 애초부터 천국이 아니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인간을 천국에 넣어주지 않는다고 분명히 하십니다. 땅이 있는 이유가 나를 위해 있다는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오히려 땅이 땅답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곳에 들어가야 하는 식으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인간에서 땅으로 넘어가는 논리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에덴동산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람을 위해 에덴동산이 있다면 선악과를 만들지 마시든지, 아니면 선악과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시든지, 선악과에 접근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부모는 어린 자녀가 뜨거운 것이나 매운 것에 손대지 않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지요. 이렇게 하는 것이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선악과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악과와 생명나무 중 선악과가 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입니다(창3:6). 물론 한 두 번은 ‘이건 손대면 안 되지.’ 하면서 지나가겠지요. 백화점을 그냥 지나쳐 갔지만 백화점 쇼윈도에 걸려 있던 명품 옷은 꿈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다음날 시장가면서 가격표만 보고 나옵니다. 용돈을 계산해 보고 다시 생각하지요. 그리고는 대출해서 사 입습니다. 내가 이만큼 고생했는데 이정도의 보상은 받아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변명거리를 확보해 놓고 구입한 후 남편에게 한 말이 ‘여보, 나 달려진 것이 없어?’라고 합니다. 물론 아내도 달라졌지만 카드지출도 달라졌지요.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6,27)”,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1:15)” 십자가 사건을 포함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처음부터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님이 참 하나님의 형상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주님의 피를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겁니다. 이것이 감추어진 계시이며 예정된 코스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자신 속에 소유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에서 그렇게 가르치지요. 사실 철학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이지 않는 신이 인간에게 보이는 이미지를 남겨두었는데 그것은 착함과 선함과 양심이라고 했습니다. 신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비교대상이 짐승입니다. 짐승에게는 없고 인간에게 있는 것을 찾아보니 착함과 선함과 양심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신의 형상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신학 안에 정통이론으로 들어왔습니다. 천사는 의와 거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지요. 그런데 천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히브리서에서 2장 16,17절에서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은 천사를 위함이 아니라 인간을 위함입니다. 천사는 고결하고 착하고 깨끗합니다. 천사 같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나 다 압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사도요한이 천사가 너무 고귀하니 천사에게 절하려고 할 때 천사가 자신은 종이니 이러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하지요.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22:8,9).”

예수님은 그 깨끗하고 고귀하고 흠도 티도 없는 천사를 위해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닙니다. 언약적으로 상처를 입은, 죄를 지은 자를 위해서입니다. 이런 자가 십자가의 피 공로를 드러내는데 최고입니다. 이것보다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창세기를 지나면 점점 하나님의 이름의 형상으로 변하고, 마지막엔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보내진 천사들은 본래 형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장차오실 예수님의 기능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마치 예수님인 것처럼 적재적소에 필요한 형상들로 인간들 앞에 등장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그 형상보고 그 때 그분이시죠? 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부활한 후 형상이 그 때 그때 다르게 나타난 것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24장13절 이하를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분명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대화까지 나눴는데도 예수님을 못 알아봅니다. 식사할 때 눈을 밝게 해주시니 예수님인줄 알았습니다. 주님은 비존재도, 무존재도, 사라짐도 아닌 존재하시는 분임을 믿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시네요? 하는 순간 주님은 그들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기본입니다. 항상 보이는 실적으로 믿음 있다 우기지 마시고, 오히려 내가 볼 수 있고 내가 만질 수 있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고 하셔야 합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있고 인간들을 만드신 이유는 인간들로 하여금 선악과를 만드신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선악과의 취지를 드러내려면 선악과 앞에서 사진을 찍든지, 선악과를 빙빙 돌든지, 선악과 앞에 제단을 쌓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를 딱 먹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 집의 강아지가 너무 짖어 주위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민원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강아지를 잡아 먹어버리면 문제 해결입니다. 마귀가 하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없애는 방법은 선악과를 따먹어 버리는 겁니다. 선악과가 없으니 잔소리할 근거가 사라졌습니다.

마귀는 하늘에서 처음부터 이것 때문에 전쟁한 겁니다. 선악과 때문에 지옥 가도록 예정된 겁니다. 하늘에서 미카엘에게 쫓기니 땅으로 내려 왔습니다. 땅에 내려와 인간을 인질로 삼지요.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12:7-11).”

선악과 자체를 인간을 사용해 없앰으로 선악과 없는 에덴동산이 되기를 사단이 소원합니다. 상처 없는 기독교, 십자가 없는 깨끗한 예수님, 성의 있게 바치면 복 주시는 그런 예수님. 하나님이신데 내가 생각한 하나님,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나타나셨는데 너무나 깨끗한 예수, 이것이 바로 마귀가 소개하는 예수입니다. 인자스럽고 보기만 해도 자비심이 흘러나오는 그러한 예수 그림들, 예수 그림치고 인상 나쁜 예수 상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작된 예수상입니다. 수염 난 예수님이 어디 있습니까?

주께서 내 인생에 상처를 내셔야만 십자가의 피의 능력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17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사도 바울은 이미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거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나는 이미 죽은 자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너희들은 장관이 되었던, 국회의원이 되었던, 대통령이 되었던 모두가 죽은 자로 보인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대기하는 대기자로 보이는 겁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자, 권력 있는 자들에게 굽신거리는 이유는 내가 점유하고 있는 것을 놓치기 싫고, 그 안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늘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마귀에게 말려든 것입니다. 선악과 없는 천국을 꿈꾸는 겁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그 신호가 생명나무로 전달됩니다. 우리는 선악과와 생명나무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생명나무는 자리를 피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그 연결고리가 있음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주체가 되어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먹어도 되는 것을 생각했지 둘 사이에 은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선악과 없는 생명나무는 없습니다.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짝을 이룹니다. 선악과를 먹게 되면 생명나무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장차오실 예수님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자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에덴동산에 게임 판을 만드신 겁니다. 그 게임 판에서 마귀의 흔적은 다 빼내 버리시고 주님의 흔적을 차곡차곡 채워 넣으시기 위해 우리에게 언약을 보내셨습니다. 처음에는 물로 심판하시고 마지막에 불로 심판하시어 하나님의 언약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언약을 다 이루었다는 역사적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하지요(고전2:2). 갈라디아서 6장14절에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4절에서는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라고 하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못 알아듣습니다.

그렇다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목욕탕 들어가서 차주 찾는 방송처럼 말하는 겁니다. 여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 있습니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사람 있습니까? 이런 사람만 데려가는 게임 판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지 마귀가 나에게 굴복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20절에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0장15절에 심판의 기준이 나옵니다. 이것을 행했다 저것을 행했다는 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오직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리라(계20:15).” 생명책에 명단에 없는 사람은 그가 어떻게 살았던 지옥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 십자가 중심으로 볼 때에만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을 죽여야 산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만 믿기 때문에 타인은 항상 무시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은 항상 내가 무시하는 그 자리에 계십니다. 그때 밀어버려라, 예배당에서, 어디서든 밀쳐버려라, 그리고 네가 밀었다고 이야기 하라는 겁니다. 내가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주체로 인해 예수님이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떠밀었고 주님을 무시했다고 소급해서 고백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 중심이 아니라 땅 중심으로 게임 판에 나를 하나의 졸로서 사용하심에 이용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땅이 할례 받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할례를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만 행합니다. 할례란 오늘날로 말하면 남자의 포경수술을 말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은 인간을 추방했고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출입구를 봉쇄해 버렸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힘으로 생명나무 있는 곳에 못 들어오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2절을 보면 생명나무가 한 거루가 아니라 매우 많습니다.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계22:2).” 

24장로들이 이미 그곳에 들어가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들어갔습니다. 너무나 무수하게 많이 듣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진지하게 좋았던 적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기 자리유지와 소유가 중요하기 때문에 어린양의 피로 천국 간다고 하니 늙어 죽으면 그렇게 되겠지.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천국 가는 자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늙어 죽을 때에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삭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말은 이미 그 사람 속에 진주 조개잡이가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진주가 없는 인간 속에 진주가 만들어집니다. 할례라는 것은 육을 제로로 만듭니다. 제로로 만들어진 육은 죄뿐입니다, 더럽습니다, 부정합니다. 를 고백하게 됩니다. 할례의 자리는 언약의 자리입니다. 공터에 모종을 키우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할례하려면 땅을 더럽힌 이스라엘을 몽땅 들어 더러운 땅으로 이동시켜 놓으면 원래 이스라엘이 머물든 땅이 빈 땅이 됩니다. 빈 땅이 된 상태를 할례라고 합니다.

구약의 할례는 신약에 반복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할례라고 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골2:11).” 낮에는 있고 밤엔 없습니다. 또 낯엔 있고 밤엔 없습니다. 낮만 되면 우리는 자존심을 채우려고 발버둥 치지만 밤만 되면 주님은 자존심을 걷어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계속해서 이 작업을 반복합니다. 이 반복되는 하루를 주님의 십자가로 영원히 고정시킵니다. 새언약 안에 집어넣습니다. 사람이 살던 모든 것을 통째로 들어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버거운 율법을 주시면 우리는 무너집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무거운 율법을 주셔서 도무지 지키지 못하게 하시는가 합니다. 그래서 너무 무거운 것은 훌쩍 뛰어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무너지라고 주셨습니다.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레 18:4).”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레19:20)” 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고기를 먹을 때도 물어봐야 합니다. 이 고기는 무슨 고기 입니까? 새김질 하고 쪽이 갈라진 짐승입니까? 물속에 살고 지느러미는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어떻게 살아갑니까? 숨이 막혀 못 삽니다. 그러나 율법은 숨이 막히라고 주신 법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합니다. 그런데 다음날 눈이 떠집니다. 눈이 뜨지는 것은 할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터가 만들어 졌습니다. 비록 나는 언약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고, 말씀에 대해 반항하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공터(할례)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지속적인 작용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레위기 26장을 21절 이하를 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거스려 내게 청종치 않을진대 내가 너희 죄대로 너희에게 칠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너희 도로가 황폐하리라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칠 배나 더 칠지라(레26:21-23).” 율법이 더한 곳에 죄가 더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전략에 딱 맞아 떨어집니다.

아담 자손에게 율법이 들어오면 자신의 자존심을 걸고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법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막 쏟아집니다. 그러면 주저앉아 두 번 다시 성경 안 보려고 합니다. 성경 봐도 행운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만 부어지니 성경을 덮어 버립니다. 이런 인생이 되도록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노렸습니다. 이런 인생이 마귀와 결탁된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에게 떠밀려 주님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갔습니다. 이 십자가 상처를 우리 속에 집어넣어 우리 안에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진주를 만드셨습니다. 그 진주만으로 우리는 어떠한 우리의 공로 없이 창세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대로 영생을 얻게 됩니다.

십분 후에 마지막시간 하겠습니다.
 서경수(IP:118.♡.140.38) 14-09-15 22:13 
레위기 문등 제 9 강

레위기가 무엇이냐? 열 세 지파 중 한 지파를 대표자로 세웠는데 그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그들은 우리들과 달리 생존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대표자입니다. 생존을 위해 하는 일과 생명을 위해 하는 일의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생존은 내 몸을 지키기 위해 내가 노동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는 그 일이 생존에 관한 일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일은 장차 오셔서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피 흘리심의 사랑과 심판을 미리 앞당겨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존은 땅을 갈아 씨를 뿌려 그 결실로 밥을 해 먹고, 고기 먹고, 과일 먹으면 삽니다. 70조의 세포가 에너지를 공급 받아 살아갑니다. 그러나 생명은 속죄물을 드림으로 공급받습니다. 속죄물을 드리는 자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자리라야 합니다. 그것이 속죄제물을 의미 있게 드러내는 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 지은 기억이 없습니다. 생존하기 위해 고생 많이 했고, 남을 위해 밥을 퍼주기는 했지만 내 스스로 죄지은 의식이 없을 때 주님께서는 율법을 주십니다. 율법을 받게 되면 그동안 내가 잘났다는 것이 내 위주의 테두리 안에서 잘난 척했지 주님을 목숨 바쳐 사랑하거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나의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죄인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우리 속에는 본인이 들어 있기 때문에 가짜 우리가 됩니다. 그러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받는 우리라는 집단은 땅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땅을 떠나야 만들어 집니다. 즉 이 땅의 공간 개념이 아니라 할례 없는 쪽에서 할례 있는 쪽으로 떠나야 됩니다. 할례 있는 땅은 안식한 땅입니다. 평안한 땅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안식케 하는 사건으로 안식이 이루어집니다. 그 땅으로 떠나는 시점은 내가 알아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건을 일으키실 때, 우리가 정들었던 땅이 모두 불바다 될 때, 이미 사전에 준비된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에 들어옵니다. 안식의 땅은 우리의 피와 우리의 거룩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피로 안식케 하는 땅입니다. 생존의 피가 아니라 생명의 피로 안식케 하는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미 그 땅이 마련되었기에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 들어갑니다.

생존과 생명을 우리 삶에 적용시켜 보면 고생과 고난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밥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것이 고생입니다. 고난은 내가 고생하기 싫은데 주께서 허락하신 고생을 고난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이 고생이며 어떤 것이 고난인가 하면 아파트 백 평 소유는 고난입니다. 십 오만 평 부동산 상속도 고난입니다. 교회에서 쫓겨나는 것도 고생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시험가운데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입니다.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8:12-14).” 장사 잘되어 수입이 많아 큰 집 짓고 살 때 위험하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언약, 즉 대속물을 잊어버리고 내가 잘나서 복 받았다고 우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지옥 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 때 얼마나 죄인이었으면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것을 주십니까? 라고 하면서, 생명은 이런 것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노선으로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아주 좁을 길을 가고 있습니다.

백 평 관리하는데 얼마나 힘들고, 많은 유산 관리하는데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생명의 노선이 따로 있음을 믿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은 고난처럼 보이지만 고생입니다. 왜냐하면 빨리 다른 교회로 가서 자신의 자리를 점유하고픈 마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일 없고 평안할 때 걸려들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뭔가 일이 잘 될 때 훅 갑니다. 나는 이만큼 잘 났고 복 받은 존재라고 할 때 지옥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됩니다. 많은 재물을 주시더라고 그것은 생존노선이며, 생명 노선은 다른 곳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처럼 아무리 부자가 되더라도 그것은 헛되고 헛된 요소 중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를 공부한다든지 레위기를 읽을 때 일장 이장 삼장을 보다가 덮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법이 너무 많다는 말입니다. 법이 내 머리위에, 어깨위에 버티기 힘들 정도로 쌓여 짓누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는데 교회는 왜 그렇게 무거운 짐을 지웁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없애버리는 것이 우리 몸에 맞습니다. 그런데 레위기를 펼쳐 읽게 되면 그 무게에 주저 않게 됩니다. 주저 앉아라고 레위기를 주셨습니다.

나는 생존에 바쁜데 레위기를 어떻게 지킵니까? 아무 것도 지킬 능력도 안 되고 지킬 마음도 없습니다. 하는 자리가 바로 안식의 자리입니다. 왜 그곳이 안식의 자리냐 하면, 못 지킨다고 했기 때문에 안식의 자리가 됩니다. 주님은 그 소리를 듣고 싶어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가 나와야 합니다. 헌금을 예로 들면, 헌금하기 전까지는 교회 헌금을 초월했다고 생각했지만 헌금하는 순간 다시 이 헌금을 꼭 해야 하느냐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드리라고 하니까 드려야지. 하는 것은 온전한 헌금이 아닙니다. 이것은 억지로 드린 겁니다. 주님께서는 억지로 드리라고 기쁘게 드리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9).” 그냥 헌금하면 억지로 드리는 것을 감추게 됩니다. 말씀은 너 잘났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셨음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왜 내 스스로 구원되지 않는가를 드러내기 위해 헌금을 억지로 내 주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2장31-32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이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이 땅은 인간이 살고 예수님이 사신 땅입니다. 우리는 땅에서 들리는 것이 소원이 아니라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우리가 믿고자 하는 주님은 땅에서 사신 분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땅에서 들려버리면 이 땅은 불로써 심판받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맷돌 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가시고 한 사람은 남겨둡니다.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집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마24:40-41).” 주님께서 땅에서 들림으로 말미암아 땅 자체를 불로써 심판해 버립니다. 인간을 상대한 싸움이 아니라 땅을 상대로 전쟁을 하셨습니다. 땅이 주님을 미워하는 것을 밝혀내시고 땅에서 들림으로 땅을 심판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땅을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태어난 우리에게는 책임을 일체 묻지 않습니다. 인간이 잘못하나 잘못하지 않나 주님의 계획에는 차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11절 이하에서 탕자비유가 나옵니다. 거기 나오는 탕자의 안목이 대단합니다. 자신의 분깃을 받아 허랑방탕하게 놀다가 재산을 모두 허비했습니다. 그래서 돼지보다 못하게 살아갈 때 그에게 아버지는 여전히 아버지임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이 믿음이 대단한 믿음입니다. 욥기에 엘리후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죄를 범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35:6-8).”

피조물이 죄 짓는다고 주님이 하시는 일에 차질이 생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제대로 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했다, 실패했다, 어떻게 행했다가 하나님의 일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주께서는 그러려니 합니다. 일기를 쓴다면 날씨가 맑았다. 그러려니. 오늘은 비가 왔다. 그러려니. 오늘은 누굴 만났다. 그러려니. 80살다가 죽으면 그것도 그러려니 입니다. 인생은 안개입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마귀는 이런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이 땅이 아니면 네가 믿을 구석이 없다고 하면서 철두철미하게 땅의 사람으로 양육을 시켜 놓았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최면을 걸고 세뇌를 시켰습니다. 이 땅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 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주님께 인정받지 못한다고 세뇌를 시킵니다. 어느 단체에 가도 이런 식입니다. 낚시 동우회, 당구 동우회, 골프 동우회, 교회, 어디를 가더라도 땅에서 인정받으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임에서 나가라고 하지요. 그래서 자존심 상해도, 두 개를 얻기 위해 하나를 양보하며 고개를 숙이며 몸을 굴려 왔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살면 살수록 더 많이 쌓입니다. 더구나 레위기까지 읽게 되니 세상이 주는 법칙은 법칙도 아닙니다. 짐이 너무 무거워집니다. 마치 남대문 시장에 음식 배달하는 아줌마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 머리, 어깨위에 무거운 짐이 가득 올려져 있습니다. 교회에선 교회법을 지켜야 하고, 국가의 법도 지켜야 하고 가정의 법도 지켜야 합니다. 아내의 잔소리 등 온갖 짐을 져서 도무지 쓰러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않으면 자살합니다. 자신이 쉬고 싶은 방법은 자살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내가 어쩌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인간은 “주님이 레위기에서 그런 잔소리를 했잖아요, 레위기에서 지키라고 했잖아요.”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내가 그렇게 한 것은 너희들을 할례 받는 속에 집어넣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겁니다. 그들이 주님의 땅에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려 주어야 그곳에서 나갔다가 다시 돌아 올 때에는 애굽에서처럼 기존에 알고 있던 생존이 아니라, 다른 방식 즉 생명나무의 방식으로 깔끔하게 바꿔치기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애굽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피로 다시 들어갑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처럼 피로 씻음을 받은 자들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언약 안에서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언약 안에서 빠져 나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바벨론이요 애굽입니다. 애굽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오직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12:7).”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라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3-14).” 너희들의 어떤 행위도 기대하지 않으니 너희들은 어린양의 피만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들었습니다. 이 방식이 너무 유치합니다. 어린양의 피 바르는 것을 누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그런 유치한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를 믿으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믿는 나를 타인에게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타인이 나에게 신앙심이 없다는 말에 대해서는 ‘너나 잘 하세요.’ 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믿는 것을 어떤 근거로 확인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미워지고 싫어지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주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고 손대고 수술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평생 동안 주님께 까불다가 수술 받은 수술자국만 가득 남습니다. 주님 앞에 교만하다가, 예를 들면 목사님이 개척교회 시작해서 200명이 되었을 때, 이만하면 되었다고 하다가 교인들이 모두 빠져 나가버릴 때, ‘주여 나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며 나옵니다. 주님은 이렇게 십자가를 만나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들린다는 의미를 레위기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의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하는 객과 네 육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지니라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25:6-10).”

이 말씀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지키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진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일을 진행하시는데 우리들이 참여되었고, 참여된 것에 대해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안식년을 지켰다고 믿음이 있고 없음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방식이 유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의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자신이 주님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발각당하는 상처가 있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늘 내 뜻과 다르게 일하시고, 보장해 주시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어 더 이상 교회오기 싫은 마음을 주셔서 갈등을 만드시는 주님이 살아계신 주님입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 땅에서 발을 떼게 하십니다. 미련두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땅에서 들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가신 곳에 가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이 몸에 맞춘 옷처럼 우리에게 딱 맞습니다. 그러니 주님혼자 가시고 난 이 땅에서 더 살다 가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시 유치한 방법인 레위기로 되돌아가서 봐야 됩니다. 레위기에 희년이 나옵니다. 희년은 즐거운 해입니다.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25:10).” 라고 하십니다.

희년은 누구에게 즐거운 해입니까? 모든 것을 잃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타인의 종노릇하는 사람에게는 희년이 됩니다. 아무 공로 없이, 수고 없이, 공짜로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그 땅을 되찾을 때 이 사람만큼은 하나님께 희년이라는 제도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희년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을 소유했던 사람이나 토지를 본래 소유한 것보다 많이 가졌던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여기에서 분리가 일어납니다. 남탕에 가서 ‘1234 차주 있습니까?’ 라고 부르는 것은 분리시키는 겁니다. ‘혹시 여기 예수님 믿는 사람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통해 분리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먼저 마련한 후 아담을 만들어 그곳에 살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천국을 먼저 마련하신 후 천국백성을 그곳에 집어넣습니다. 인간 위주가 아니라 땅 위주입니다. 인간들이 아파트에 살고 싶다고 해서 아파트 마련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완성된 자리를 만드신 후 그 자리에 거지꼴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날린 후 거지꼴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드신 곳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앞서 백 평짜리 아파트를 가진 것이나 땅 15만평을 유산으로 받는 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그것을 자기 소유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물론 시에서 나오면 자기 소유라고 하지요. 이것은 땅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소유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자신이 무슨 짓하는 지도 모릅니다. 모르면서 당시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자리에 점유해서 그 자리를 지키려 하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면 됩니다.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과 구원은 상관없습니다. 성도에게는 자신의 소유가 없습니다. 임대인입니다. 은혜입니다.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 자기 조상들의 땅을 점유하려고 하니 그 당시 권력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요11:48).” 이런 이유로 인해 마카비 전쟁을 했고,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나타난 이유입니다.

말라기 이후 계시가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끊어짐 속에서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가짜 사독지파, 가짜 유다지파 왕을 옹립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역사를 보장했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것이 정치 경제적 논리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짐승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짐승의 나라, 유다나라에 잡혀 돌아가셨습니다. 계시의 역사와 정통성을 자랑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입니다. 이것만은 버리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희년은 아파트 열채 있어도, 요트 있어도, 자식 있어도 그것은 세상에서 볼 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주님이 내 안에 사시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없습니다. 사나 죽으나 그리스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의식이 불과 몇 초 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질문이 나옵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라는 고백이 불과 삼, 사초 밖에 가지 않는다면 삼, 사초 후엔 불신앙으로 전락합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외부의 반응과 교류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녹음하는 녹음시간이 몇 분되었을까 확인해 보는 중에 갑자기 누가 문을 똑똑 두드리면, 녹음시간에 주목하던 것이 누가 문을 두드리는지에 주목하게 됩니다. 인간은 몸에서 유발한 의식의 흐름에 놓여 있습니다. 삼, 사초 주를 위해 산다고 하지만 다른 것이 밀려오게 되면 곧장 다른 것에 주목하게 됩니다.

새벽기도 하다보면 꿈인지 생시지 구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갑자기 잠꼬대합니다. 기도를 하려면 집중을 해야 하는데 새벽이라 집중하지 못하고 가사상태에 빠집니다. 이렇게 되면 꿈의 소리가 막 나옵니다. 그 때 옆에서 깨우면 다시 본류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몸이 인간의 정신 집중으로 관리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도 자기가 관리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지속적으로 믿음을 유지하겠습니까? 주님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열다섯 시간동안 집중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열 다섯 시간 동안 휴대폰이 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집중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을 만드시고 애굽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탈출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은 출애굽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반해 다른 민족은 약속의 땅과 접촉한 적 없습니다. 어떤 축제에 보면 서예가가 자기보다 더 큰 붓을 들고 먹물을 흠뻑 적셔 무의식이 이끄는 대로 몸이 원하는 대로 글을 씁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자기백성에게 먹물을 흠뻑 적셔서 질질 끌고 온 동네를 다닙니다. 온 동네로 끌고 다니실 때 먹물, 즉 애굽적인 요소가 줄줄 흘러나옵니다. 애굽백성은 자신들 이데올로기로 살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된 거룩과 더러운 인간이 마주치는 코스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쉴 새 없이 먹물을 흘립니다.

쉴 새 없이 이럴 것 같으면 왜 애굽에서 구원했습니까? 라고 하면서 원망이 나오게 하시는 겁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뒤쪽에 풍선과 종이로 만들어 놓으셨는데 구름기둥, 불기둥은 하늘나라 네비게이션입니다. 물이 먹고 싶으면 물이 없는 곳으로, 떡이 먹고 싶으면 떡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본적인 밥벌이도 안 되고, 생존이 안 되는 이런 상황에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탈출했지만 질적으로 애굽사람이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애굽은 자신들이 탈출했던 땅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이유는 그들의 몸이 약속의 땅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애굽 땅에 딱 적합한 몸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마주칩니다.

물이 있어야 산다는 것은 애굽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물이 없어야 약속이 보인다고 하십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물이 없을 때 호렙산 반석을 치라고 하십니다.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반석아래 물이 있어서 반석을 치라고 하셨을까요? 반석 안에, 반석 아래에는 물이 없습니다. 반석을 치니 물이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생각에는 반석아래 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생각이 애굽적인 논리구조입니다. 사고방식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니 반석 안에, 반석아래 틀림없이 물이 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애굽적 사고방식이요 인간이 가진 사고방식의 한계입니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이 없었는데 주께서 주셨습니다. 애초부터 바위는 바위일 뿐이었는데 주님께서 물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물이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을 마셔 네가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생명나무와 함께함만으로 족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4절에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며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고 하십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철저하게 애굽 티를 내게 하셨습니다. 출애굽할 때 그들은 홍해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느 누가 홍해가 갈라질 것을 알았겠습니까? 또한 홍해를 가르는 방법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요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2).” 왜냐하면 몸이 애굽에 딱 맞아요.

우리의 모든 정신은 애굽 몸에서 나온 이미지입니다. 이것이 주체가 되었습니다. 주체는 애굽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몸이 가뿐하면 타인에게도 상냥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몸의 열이 40도가 되면 화평, 양선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몸을 제대로 보셔야 합니다. 우리 몸이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하늘나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그냥 성깔대로 삽시다. 사실 성깔대로 삽시다가 아니라 성깔대로 살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홍해가 가로막힌 쪽으로 이스라엘을 몰아갔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출13:21).” 여기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네 자신이 땅이 있느냐 없느냐, 홍해를 건너가느냐 못 건너가느냐를 걱정할 처지가 아님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일에 대해 너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4).”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마음껏 설침으로 말미암아 어디 하나 주님의 말씀을 지킬 몸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알게 하십니다. 애굽에 적합한 그들을 질질 끌고 약속의 땅으로 갑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 이월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16:1-3).” 이렇게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만나는 양식이 아닙니다. 말씀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다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삽니다. 여기에 대해 마귀가 잘 알고서 예수님을 다른 방식으로 시험합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으니라(마4:5,6).” 마귀는 시편 91편11절 말씀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91:11).”는 말씀을 이용해 시험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시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띄게 일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피하면서 일하십니다. 어제 우리가 강의 들을 때 점심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반찬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만나입니다. 내가 애굽에서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것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몸은 세상을 거쳐 한번 죽고, 죽은 후 예상하는 그 예상마저 꺾으시고 낯선 몸으로, 하늘에 속한 영광의 몸으로 다시 만들어 주기 위해 우리와 의논이나 어떤 협상도 없이 이미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오늘 점심이 만두라면 어느 집사님 고생하셨다고 하지 마시고, 그 집사님은 만두를 준비할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주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자만이 십자가를 경유한 자의 말입니다. 주님의 오묘한 솜씨가 집사님을 통해서 이렇게 맛있는 만두를 만드셨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셔야 합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남편과 이혼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할 때 어떻게 답변하겠습니까? 주께서 이혼하라는 생각을 주신 것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의 몸이 힘들기에 주님께서 이혼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이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혼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기 자존심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혼하면 얘는 누가 키우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등등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갖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혼하라고 하셨지만 그 사람은 저는 그냥 남편과 살래. 라고 하지요.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였습니다. 인간은 자기 필요한 것 밖에 모릅니다. 때문에 말썽부리는 남편을 통해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만 얻으려 했지 주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내 몸이 원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썽쟁이 남편과 살면서 깨닫게 하십니다. 이 세상에 참 잘했다는 것은 주님뿐입니다. 주님 외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광야 길을 가면서, 이 세상을 살면서 애굽의 몸과 새 몸의 차이를 보여주게 됩니다.

문제는 우리 눈에는 애굽 몸 밖에 없는데 새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3,14).”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더러운 세상이 좋아서 있는 인간들아 잘 있거라! 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32절에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며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주님 계신 곳으로 뽑아 올리십니다. 이렇게 뽑아 올릴 때 자기 눈앞만 보이든 것이 높이 올라갈수록 세상이 더 넓게 보입니다. 전에는 내 자식, 내 집구석 밖에 모르든 것이 점점 더 올라가니 세상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이 점점 더 커집니다. 단 조건은 내 발이 세상과 멀어질 경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발을 떼고 하늘로 올리웁니까? 주님께서 하늘로 들리우실 때 절차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낮아졌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넓게 보는 조망권은 세상높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 못한 낮은 곳으로 가게 되면 전에는 나의 원수라 여기든 것이 천사가 보낸 하나님이 종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전에는 신경질 나던 일들이 사실은 나에게 꼭 필요 했던 환난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교만하면 안 됩니다. 낮추어야 합니다. 어린아이까지 낮추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마19:14).”

레위기 마지막은 몽땅 다 쫓아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는 그곳에 살 자격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했다고 하지만 우리 몸은 애굽 몸이었음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이제는 유치한 방식인 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과거 애굽과 약속의 땅과 이 세상과 주님께서 만드신 약속의 땅과 세트가 됩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것은 우리 몸을 이 세상, 애굽에서 벗어나게 합당한 몸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바꾸어진 몸은 곧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는 몸입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죄인중의 괴수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주셨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마음을 낮추시고 낮추십니다. 

낮추는 방법은 사도 바울을 통해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하십니다. 예를 들면, 해를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 이 말씀을 지키려고 어떤 식으로 합니까? 해가 질 때까지는 분을 품지 않다가 해가 지자 말자 분을 냅니다. 이게 얼마나 유치한 방법입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시면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하셨지요. 그러면 우리는 있는 돈을 이웃에게 준다든지, 교회 다 바치려고 합니다. 얼마나 유치한 방법입니까? 그렇게 되면 자신이 더 높아집니까? 우리가 가정에서 사용하는 돈을, 당연히 없어야 하는데, 없어야 되는 돈을 주님께서 주셨다고 믿음으로 받는 그것이 유치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피아노를 사든지 무엇을 하든지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그 자리가 주님께서 천국에 부합된 몸을 만들어 주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안목에서 모든 것이 보입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8:19-22).”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장례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너무 심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하셔도 좀 정겹게 말씀하시면 좋을 텐데 너무 잔인합니다. 그 제자가 따랐는지 따르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같으면 삐져서 따라가지 않습니다. 삐지는 모습이 우리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삐지든 삐지지 않던 우리 구원이나 심판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악착같이 따라 가서 구원 얻는다면 도대체 언제까지 따라가야 합니까? 칠년 째 삐지면 어떻게 됩니까? 모든 것이 소용없는 짓이 되지요.

레위기에서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가 애굽에서 못 벗어남을 아시고 말씀을 주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며, 애굽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았기에 말씀에 비춰볼 줄 알고, 말씀에 비춰보니 어느 하나 제대로 못 지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행함과 자기 열심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일절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주님의 언약의 피를 의지하는 겁니다. 내 쪽에서 언약 완성할 수 없습니다. 말씀 지킬 수 없습니다. 어떻게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십년간 돈을 미워하더라도 십일 년째 돈을 사랑하게 되면 십년간 돈을 미워하는 것이 무효가 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성경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지키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미 모든 말씀을 지킨 분이 따로 있습니다. 또한 그분이 우리가 갈 곳을 따로 마련하셨습니다. 다만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가 튀어 나오면 땅이 몇 평 있든지, 집이 몇 채 있든지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숙제물임을 알게 됩니다. 내 뽐내라고, 축복받았다고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신다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구름 사이에 파란 하늘이 살짝 드러나듯이, 천국이, 우리의 낙원이, 새예루살렘성이 보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련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16:22).” 내가 내 자신을 미워하는 그 손가락이 주님의 사랑의 손가락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저희들을 미워할만해서 미워하게 해 주시옵소서. 눈만 뜨면, 자기 자랑, 남과의 비교, 경쟁합니다. 낙담하고 실망하고 절망합니다. 이것이 24시간을 점유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사서 짊어지고 신음소리 내면서 평생을 짓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어진 모든 것이 주님의 인도로 주님께서 마련하신 천국으로 향하는 코스이기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임을 십자가 지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오히려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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