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강남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기타강의
2014-10-11 22:07:28 조회 : 6585         
2014 미국 강의 140924, 대전주례사 141108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미국 동부 오전강의

음성1        음성2        음성3
음성4        음성5        음성6

미국 동부 오후강의

음성1        음성2        음성3
음성4        음성5        음성6

미국 맨해튼교회

음성1        음성2

미국 뉴욕교회

음성1

미국 뉴저지교회

음성1        음성2

이상현목사 교회집회a      이상현목사 교회집회b

중국인교회

예배

미국동부예배           뉴욕교회예배


뉴저지1부예배        뉴저지2부예배

맨해튼교회예배 

 

동영상

 

질문답변  맨해튼  20140928
출애굽기  맨해튼  20140929
로마서               20141001
욥기                  20141002
사마리아여인       20141005

 

대전주례사

 

음성

 관리자(IP:203.♡.42.222) 14-10-25 14:59 
20140924 미국동부오전a
 
(강의:이근호 목사)
 
 

 

~와 말씀을 생각할 수 있는 여건이 주님으로 시작했기에 마침과 모든 과정도 주님이 개입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후강의가 교회에서 신약이기 때문에 가정에서는 구약을 생각했습니다. 구약을 하게 된 이유가 신약부터 시작하면 흐름에서 중간부터 시작하니까 앞의 내용이 어떻게 되었기에 예수님 오심이 복음이 되느냐? 복음은 기쁜 소식이거든요.

 

여기서 질문이 뭐냐 하면, 그렇게 기쁜 소식이라면 천지창조부터 해서 기쁜 소식으로 집어넣으면 될 텐데 왜 예수님 오시고부터가 기쁜 소식이냐는 말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복음이다. 이러면 되잖아요. 그런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해놓고 기쁜 소식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 예수님 오시고부터 시작이 되니까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오시고 난 뒤에 이천 년 뒤에 예수님 오셨습니다. 이야기할 때 듣는 사람이 그걸 생각하셔야 돼요. 아브라함 오시지 말고 예수님 바로 오시면 될 텐데. 그 생각 안 해봤습니까? 아브라함 오실 것 없고, 예수님은 다 이루셨다는데 그 이루심을 앞당겨서 하게 되면 더 편리하지 않습니까. 불필요한 과정을 생략해버리고 바로 아담이 범죄했다. 예수님이 바로 들이닥쳤다. 그래서 천국 가서 자식들 많이 낳아서 천국은 풍성해졌다. 이러면 이야기가 간단한데 어떻게 해서 복음이 예수님부터냐? 왜 그전에는 복음이 아니냐는 그 의문점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이걸 신학교 때 제가 신학교수한테 질문을 했지요. 신학교수가 알 리가 있습니까? 제가 수업시간이 이렇게 질문한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세례요한이 이야기하기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신학교에서 배우기를 통치 개념으로 배웠는데 통치 개념이 맞는다면 구약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냐는 말이죠. 구약은 인간의 통치였는가? 아니란 말이죠. 구약부터 하나님의 통치였고 신약신학에서 전통적으로 배우는 것은 에덴동산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라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럼 에덴동산이 하나님 나라인데 세례요한이 이야기한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은 어폐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수님 답변해주세요. 알 리가 있습니까. 몰라요. 어느 누구도 답변을 못하네. 그 이야기나 아브라함 오시지 말고 바로 아브라함 자리에 예수님 오시면 될 문제인데 왜 아브라함 오시고 예수님 오시느냐? 그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에요. 그런 중요한 문제, 일반 교인들도 그런 의문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쉬쉬하고 있으니까 그냥 넘어가는 거지요. 그냥 예수 믿자.
 
 

그런데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 이야기거든요. 하지만 도서관이나 일반 서점에서공부를 하게 되면 거기는 예수 이야기가 아니고 이슬람 이야기, 유대교 이야기, 힌두교 이야기, 부처 이야기가 나온다 이 말이죠. 인간의 종교적인 것. 역시 종교에서는 신을 이야기하잖아요. 신을 이야기한다면 왜 인간이, 특히 문화인류학에서는 종교 이전의 신부터 나와요. 알타미라 동굴에 보면 신을 섬기는 내용이 나오잖아요. 왜 그들이 섬긴 신의 내용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정복이 안 되느냐는 그 문제가 또 있어요.

 

교회에서는 편하게 여러분 하나님 믿습니까? 믿습니다. 누가 만들었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지요. 그래요. 이제 신약이 되었으니까 하나 더 추가하세요. 그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되면 차려놓은 밥상에 그냥 숟가락 하나 얹듯이 예수님 하나 얹으면 완성된 신의 체계라고 그렇게 생각들 하거든요.

 

그렇다면 다른 종교가 믿는 신, 절대자에다 예수님이 접목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지요. 접목이 될까요? 접목이 안 되지요. 중요한 것은 이슬람이나 다른 신, 그러니까 철학적으로 말하는 신입니다. 신이란 말은 공통적으로 최고의 인격적인 존재를 말하거든요. 절대적인 존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관리 운영하시고 마무리도 그쪽에서 처리하시면서 인간처럼 이성을 가진 인격적인 존재를 신이라 한단 말이죠.
 
 

그것은 특수한 종교 말고도 아프리카 토속 민족에도 그게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어린양으로 제물을 드리고. 지금도 부두교 같은 경우에서는 피 흘리는 닭의 목을 비틀어서 신에게 드립니다. 그런 자들에서 그리스도가 접목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접목이 된다면 그것은 문제가 커요. 예수님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접목이 안 된다면 문제가 더 커요. 왜 더 크냐 하면 우리가 이방인이거든요. 한국사람, 미국사람은 이방인이에요. 같은 이방인이 믿는 이방종교에는 접목이 안 되면서 특별히 단군의 자손이란 이방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 개념과 접목이 된다면, 그 가운데 뭔가 반칙이, 안 맞는데 억지가 개제돼있어요.
 
 

과연 천지 창조했던 조물주에 예수님을 접목시킬 수 있느냐? 아니면 반대로 그 조물주가 너희들이 알고 있던 신이, 신이 아니고 마귀가 조작해준 상상의 절대적 존재, 그것을 철학적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종교적 본성에 의한 하나님, 나의 존재성을 투시한 다른 존재, 포이에르 바하가 이야기했지요. 신이란 인간의 투시라고. 나를 투시한 또 다른 존재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숟가락 하나 얹듯이 부록으로 그러니까 버전을 하나 업그레이드한 거죠. 예수 하나 더 집어넣으면 미흡한 것이 보충되면서 온전한 신의 체계로 삼는 것이 과연 합당하느냐 하는 겁니다.

 

신학교에서는 합당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왜 그걸 합당하다고 가르쳤을까? 성경에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그걸 거부했는데 왜 신학교에서는, 교회사 역사에서는 합당하다고 이야기할까? 그것은 모든 인간들이 나면서 신에 대한 의식이 있기 때문에, 접촉점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 아시죠? 거기다 예수님 이야기 추가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이 됩니다.”라고 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교회로 포섭할 수 있는 논리적 전제가 되기 때문에.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호와를 신봉하는 사람이었고 남들보다 유난히 열심을 내서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게 할까, 남들보다 더 영광 돌릴지를 늘 생각했던 사람이었거든요.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인데 세 가지 유대교 해석 노선이 있는데 그 중 제일 열심이었던 노선이 가말리엘 문하였던 거예요. 가말리엘 문하가 요새처럼 신학 중의 한 부류가 아닙니다. 옛날 유대사회에서는 모든 지혜의 총화에요. 지혜의 총체고 궁극적인 지혜입니다. 그 신 밑에서 경제든 과학이든 거기서 예수든 다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신을 연구한다는 것은 다른 것과 같은 레벨이 아니고 최고에 신에 접근된 레벨입니다.

 

유대신학을 일반교인들은 모를뿐더러 신학교에서도 안 가르치거든요. 유대신학이 커리큘럼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분들이 바리새인이니 사두개인이니 성경에서 예수님이 욕하고 악마의 후손이라고 하니까 자기도 욕하는 대상인줄 알고 있어요. 유대교가 어떻게 유대교인지 몰라요. 그 유대신학이 얼마나 철저를 기하는지 일반 신학교 나온 사람들은 감을 못 잡고 있습니다. 왜? 그걸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반대하기 위해서 배우지 그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 사상이 체계와 합리화가 얼마나 철저한지 생각 못하고 있거든요.
 
 

유대교는 한 마디로 누적된 진리체제입니다. 누적이란 쌓이고 쌓이는 겁니다. 이것은 ‘진리는 역사를 따라서’ 이겁니다. 역사가 진척이 되면 진리가 더욱 더 정확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멸망 자체를 신의 뜻이라고 봤거든요. 개신교 신학을 한 사람한테는 유대교인들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인지 상상을 못합니다. 지금도 서점에 유대교에서 잠언서를 해석하고, 창세기를 해석한 책들이 가끔 나와요. 거의 팔리지는 않지만 유대교 해석법이 나옵니다. 탈무드가 아주 대중적인 것이지요. 탈무드보다 더 깊이 있는 주석책이 나와요.

 

그들의 체계가 뭐냐? 유대교의 원리가 뭐냐? 한 마디로 이겁니다. 토라 중심이라 하는데 우리말로 말씀중심입니다. 말씀중심이란 뭔 뜻이냐 하면, 인간 존재보다 말씀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바로 목회하는 목회자들이 누구나 자기 교회가 가장 완벽하고 제대로 된 교회임을 드러내면서 교인들한테 할 수 있는 최고의 호소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은 말씀중심으로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왜 주셨는가? 쉐마! 듣고 지켜라.”

 

따라서 인간이 피조 된 목적이 뭐냐? 사람이 사는 존재 이유가 뭐냐? 말씀에 순종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첫째 되는 목적이다. 이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오는 제1조항이거든요. 이게 유대교신학에 이미 담겨있다는 사실을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사람들이 아마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 모른 척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생각을 그들은 감히 못했을 거예요. 인간의 이성으로 놀라운 진리체제에 경외성에 구멍을 낼 생각을 감히 못했을 거예요.

 

사람이 상식적으로 뭘 안다는 것은 우선 선배들이 이 대목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살펴주는 것이, 선배에 대한 존경심보다도 내 자신의 해석이 옳은지 그른지 평가하는 방법은 결국 선배들의 평가와 대조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기존에 뛰어난 사람들은 이 대목을 뭐라고 해석했는가?

 

그래서 유대교나 현재 개신교 신학은 다른 게 아니고 선배들이 했던 솜씨에 대한 답습과 장점, 좋은 점을 뽑아서 이 시대를 살지 않은 선배들이기 때문에 혹시 미흡하거나 빠진 부분이 있을 거예요. 그것을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이 보충하게 되면 보다 완벽한 체제를 이룬다. 이게 칼 포퍼가 이야기한 거예요. 영국의 실용주의 철학자인 칼 포퍼라고 있습니다. 진리는 항상 과오를 반성하고 거기에 대해 새롭게 개선책을 내놓음으로써 진리는 발전한다는 철학적 논리적 사상이 신학에서 유감없이 적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는 대단한 선배로 칼빈과 루터를 제시하는데 막상 개신교에서는 루터는 별로 관심이 없고 칼빈에게 관심이 있어요. 집사님들이 평신도지만 신학교 사정을 알고 있어야 돼요. 왜 루터는 인기가 없고 칼빈은 인기가 있느냐? 그 이유를 아무도 이야기 안 해주지요. 루터는 교회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시스템 중심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칼빈이 일단 혁명에 성공하고 난 뒤에는 그 다음에는 빨리 조직 정비에 나서야 돼요. 왜냐하면 사람은 보이지 않는 신은 항상 뒷전이에요. 뭔가 결실이 있어야 되고 결실에 가입함으로 신적인 안정감을 누리게 돼있습니다.

 

진리가 뭐냐? 평신도는 힘들어요. 하지만 진리를 외치는 교회에 등록하게 되면 오늘밤에 죽어도 낙원에 가 있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예요. 특정 제도에. 그러니까 목사들은 빨리 특정 제도화시키는데 그 제도화를 굳히는 것이 뭐냐? 전통적인 해석을 우리는 고수합니다. 그 전통적인 해석을 고수하려면 반드시 무엇과 대비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런 이단들이 교회사에서 발생했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배격합니다. 그렇게 해서 교인들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줄 수가 있어요.

 

우리 교회에 잘 나왔어. 등록 참 잘했어. 큰일 날 뻔 했어요. 대한예수재림예수교, 몰몬교, 통일교. 요새 뜨는 신천지. 내 영혼이 엉뚱한데 갈 뻔했어. 그러면서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교회를 주셔서. 그렇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게 되면 교회 질서가 유지가 돼요. 그러면 쉽게 목회가 가능합니다. 누구 노리고 비판하는 게 아니고 지금 사정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것이 이미 신학교부터 루터는 별로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부터 인기가 있었다는 것은, 그걸 가르치는 교수나 신학생들은 무엇이 궁금하느냐 하면, 어떻게 성경에서 진리를 뽑아내고, 그러니까 진리에서 쉽게 칼빈과 루터가 엑기스를 뽑아내면 뽑아놓은 것으로 주택가 한 복판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걸고 그것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구원에 대한 안정감을 제공할 때까지의 프로세스, 연결고리, 이것이 진리고 이 진리를 실처럼 뽑아내게 되면 논리적인 하자가 없을 때는 교회에서 하는 제직회는 목사 뽑을 때는 ⅔ 찬성이 있어야 됩니다. 일반 집사는 과반수 찬성하면 됩니다. 과반수 찬성하면 된다는 그 이야기는 믿음 없어도 들을 수 있는 말이잖아요.
 
 

그리고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가 디모데전서에 안 나오거든요. 예레미야에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 “돌아가면서 청소합시다, 돌아가면서 반찬 해옵시다.”라는 것까지 하나님의 손길로 접촉이 돼있는 진리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것, 그 중간에서 목사는 카리스마가 보유돼야 돼요.
 
 

교인들은 자기 할 일이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바쁩니다. 성경까지 신학 옳고, 그름까지 관심을 둘 수가 없어요. 관심 두면 자기 생계를 포기해야 되니까. 일단은 ‘뭘 해야 됩니까?’까지는 전공자인 목사가 다 해주고 교인들은 어디까지 하면 되느냐 하면, 경상도 말로, “시켜만 주이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그것이 어디에 포함돼있더라? 하나님의 진리에 하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충성된 종아, 네가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했구나.”라고 납득이 될 수 있도록 목사님이 우리에게 안심과 평안을 정서적인 안정을 해결해 주시오. 그러면 존경하지 말래도 존경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목사들이, “여러분 그래서는 안 되고 목사는 섬기는 사람이지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니까 직접 성경을 보셔야 됩니다.” “목사님 말씀 맞지요. 하지만 우리가 뭘 압니까? 우리는 봐도 모르니까 이것 믿으시면 오늘밤 천국 가 있습니다. 그것까지 깔끔하게 해주시면, 시켜만 주이소. 나는 목사님 권위를 믿습니다. 영적 목자의 권위로 인정하고 믿습니다.” 이러면 교인들은 죽고 난 뒤에 걱정은 한시름 놨잖아요. 세상에 그런 보험이 어디 있습니까. 든든한 보험 들었으니까 생업에 종사해서 살 수 있거든요.

 

바로 베버란 사람이 이렇게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은 개신교의 정신에서 나온다. 19세기 말에 베버란 사회학자가 그런 이야기해서 대 히트를 쳤습니다. 베버의 사상이 지금도 있어요.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제는 구원 걱정은 뚝, 열심히 생업에 종사하게 되면 여러분이 획득한 모든 재화와 재물은 신의 축복의 증거물입니다. 이렇게 한 겁니다.
 
 

개신교가 그렇게 편안하게 한 증거는 베버의 주장에 의하면 딱 하나였습니다. 그게 바로 유명한 칼빈의 예정론이었습니다. 구원은 여러분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믿음이 왔습니다. 따라서 믿고 안 믿고 간에 예정론만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해도 구원되기 때문에 교회 운영은 목사한테 다 맡겨두시고 여러분은 교회 목사가 소명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는 치과, 농사짓기, 호텔에서 서빙하기 이것조차 여러분 스스로 탓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열심히 종사한 그것이 목회자가 교회를 통해서 목회하는 것만 소명이 아니고 여러분의 일도 소명이니까 안심 놓고 하시면 소명에 대한 대가는 아니지만 축복으로 여러분의 사랑하는 가족을 평생 동안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생계비와 여유 자금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하는 일에 조금도 양심 가책 느끼지 마시고 오히려 신의 뜻을 받든다는 그런 심정으로 간호사하시고 의사하시고 판사하시고 여러분 생업에 종사하시고 군인도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것이 미국 같은 데는 미국이 개신교잖아요. 크게 작용했다는 겁니다. 그럼 미국과 유럽의 차이점이 뭐냐? 유럽은 한 단계를 거친 거예요. 신은 귀족을 주시고 귀족과 같은 레벨이 성직자고. 그 다음에 여러분에게 왔기 때문에 여러분이 감히 직접 하나님 뜻을 안다는 것은 건방진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직자를 주시고 귀족들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 일부러 해놓은 배치입니다.

 

미국에 건너온 사람은 귀족, 성직 개념이 날아가고 누구나 성직자고 루터가 이야기한 것처럼 만인제사장설이거든요.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자본주의가 거칠 것 없이 질주하고 발휘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걸 역사적으로 증명해준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도 바티칸 천주교와 미국 천주교가 달라요. 역시 여기는 신부에 대한 계급의식이 희박해요. 그런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남미의 천주교는 신부에 대한 권한이 절대적입니다. 헌금은 미국에서 제일 많이 나오고 전 천주교 ⅓이 미국에서 헌금 나옵니다. 바티칸은 미국이 살린다고 보시면 돼요.
 
 

그런데 문제는 방금 베버이야기하고 근거 하나 댔는데 예정론이죠. 칼빈은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유대교가 말하는 예정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피지 못했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유대교 예정론과 똑같습니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몰랐지요. 이걸 최초로 시비 건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누구냐 하면, 독일의 목회자, 신학자도 아니네요. 박사학위도 없습니다. 목회자 칼 바르트였습니다. 들어본 적 있습니까? 여기 평신도도 계시지만 신학이라 하지 마시고 상식으로 들으시면 됩니다.

 

칼 바르트와 칼빈의 예정론은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에서는 그 사람을 자유주의라고 규정했어요. 그러나 다른 교파에서는 이 사람을 보수주의라고 합니다. 동일한 사람이 한쪽은 보수주의가 되고, 한쪽은 자유주위가 됐어요. 같은 대한예수교장로회지만 통합 측에서는 칼 바르트는 보수주의로 취급하고 감리교에서도 그렇고.

 

합동 측에서 자유주의라고 칭한 이유는 칼빈의 예정론을 안 따랐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칼 바르트의 사상을 연구한 게 아니고 단지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예정론과 다르다. 그럼 차이점이 뭐냐? 간단해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했다는 겁니다. 칼 바르트의 예정론을 이야기 안 하고 잠시 거수투표에 들어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했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집사님 같은 경우에는?

 

-아니죠.
 
 

아니에요? 공부 많이 했네요.
 
 

틀렸다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고 어디서 틀렸는지 알아야 되겠지요. 칼 바르트는 이야기합니다. 뭔가 하나 빠졌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에게 과연 예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경로가 이스라엘을 통하지 않고서는 마련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이해될까 걱정되는데.

 

이방인에 대한 창세전의 예정이 이스라엘이란 경로를 통과하지 않고도 예정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칼 바르트는 예정이 안 된다고 본 것이고. 유럽 자체가 이방이니까. 칼빈 당시에. 로마인이나 게르만 민족은 이방인들이에요. 이방인들은 성경을 다이렉트로 봤거든요.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구약성경 자체가 하나님을 애 먹였잖아요. 그러니까 통째로 빼버린 거예요. 믿음도 없는 인간들, 세상이 이렇게 은혜 받고도 하나님께 대항하다니. 거기에 비해서 로마인과 게르만족은 얼마나 착한지. 이스라엘이 버렸던 하나님을 통째로 믿으니까 그들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직접 우리와 상대합시다. 우린 하나님 믿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사실 게르만 민족은 북방민족이잖아요. 476년인가 로마 멸망하고 난 뒤에는 국교를 기독교로 바꿔버렸어요. 바꾸는 과정에서 그들은 신학이고 뭐고 없습니다. 오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신이 오딘입니다. 오딘의 절대적 존재가 졸지에 성경에 나오는 용어로 바뀌어버린 거예요. 수월하니까. 그리고 선교나 전도하는 사람이 세세하게 신학 따지면 전도 안 돼요. 여러분 알고 있는 그대로 숟가락만 얹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신은 맞는데 빠진 게 하나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만 부록으로 집어넣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바탕은 남겨둔 채 예수님만 집어넣은 거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호와를 믿던 사람이잖아요. 사울이 직접 예수님 만날 때 무슨 소리를 듣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지금 사울이란 사람이 하는 행동이 본인의 명예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여호와지요. 여호와가 모세와 독대해서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 그 하나님이잖아요. 그 하나님을 믿는 연장선에서 활동한 그것이 예수님을 보태면 될 문제가 아니고, 숟가락 하나 얹을 문제가 아니고 이게 핍박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연장선 위에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통째로 전부 다 삭제시킨다는 거예요. 내가 알고 있던 여호와가 여호와 아니었음으로 삭제시키는 그 능력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페인트 칠 다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창세기 시작하면서 생각하는 건 뭐냐 하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이슬람교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힌두교, 우리나라 아무 종교 없는 무속신앙에서 신의 이름이 조물주에요. 뜻은 모든 세상을 창조하신 분. 교회 다닌 적도 없는 돌아가신 할머니도 알고 있습니다.

 

이 조물주라든지 모든 것을 예수님이 삭제해요. 삭제하는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런 식으로 창세기 1장 1절을 해석할 용의가 돼 있느냐?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다가 숟가락 하나 얹는 것처럼 그분의 아들이 예수님이라고 내용을 보태는 것이 아니고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내가 예수님을 핍박할 이유로써 작용할 수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이여, 모든 천지만물을 신이 만들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이 고백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요인인 것을 자인하겠습니다. 누가 나서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있으니까 눈에 보이니까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멘 붙여가면서 받아들이면 이제부터 나는 신자의 생활이 스타트되는 데요? 이게 죄라고요? 마귀라는 유령이 날 속여서 이런 고백을 했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과연 그런 건가요? 과연 그렇다는 겁니다. 무슨 수로 이런 고백이 나옵니까. 이건 우리 자존심이 걸린 문제입니다. 40,50년 교회 다니고 목사, 장로 되고 신학박사 되도 이 자존심은 항상 남아 있는 거란 말이죠.

 

우리는 빠졌다고 생각했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백하는 이것도 맞고, 빠진 것이 뭐냐? 골로새서 1장에 보니까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래서 만들었다. 그럼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일단 맞는 이야기고, 거기에 추가해서 예수님이 했다는 내용을 보완해가면 나도 맞고 주님도 맞고. 그로 인하여 옛날보다 더 확실해지고. 그럼 그 동안 믿었던 내 자존심도 유지가 될 수 있으니까 즐겁다.
 
 

중세에는 신학과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어요. 이건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인데 이 말은 중세 신학이 뭐냐고 물으면서 이미 그 사람 본인도 알지 못하게 중세 철학으로 빠졌다는 생각도 같은 뜻이에요. 신학과 철학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말은, 신학을 하고 있다는 말이 철학을 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 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돼요.

 

그러면 중세 철학이 뭐냐 하면, 빛에 가까이 있는 사람은 진리에 가깝고 빛에 멀리 있는 사람은 진리와 멀어진다. 이것이 유명한 어거스틴의 신학입니다. 하여튼 중세 때 무슨 이야기만 하면 그 말도 맞는다는 인상을 갖고 있어요. 빛에 가까이 가게 되면 진리에 가깝고 빛과 멀어지게 되면 지옥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발생된 것이 천주교의 연옥설이거든요. 사람들은 천주교의 이론들이 막 나온 줄 알고 있어요. 철두철미한 체계 앞에서 누가 따져도 결국 성경과 연결되도록 해놓고 일곱 성사가 나왔다는 사실을 개신교에서는 공부를 안 하니 모르는데 이런 철학이 돼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못난 사람 죄 짓는 사람에 대해서 저주받는다고 이야기하는 그렇게 선언하는 소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판결은 정당화돼버려요.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 일곱 계급으로 구분되면서 정당화를 유지한 겁니다. 유대교에서 빛에 가까운 사람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들은 말씀과 가까웠습니다. 아까 제가 유대교 해석의 기본이 말씀중심이라고 했잖아요.

 

따라서 말씀과 접촉을 덜 갖거나 평소에 율법/토라를 적게 보거나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돈 벌어도 일곱 단계에서 아래 단계에 있으면서 그들을 통째로 죄인으로 분류한 겁니다. 왜? 토라, 말씀이 중심인데 사람은 말씀으로 사는 게 목표인데 어디에 천박한 돈 번다고 나 같은 목사들은 그저 말씀만 하기 때문에 존경을 해야 되고 천박하게 돈만 버는 인간들은 저주받아 마땅하고. 따라서 신의 권위에 입각해서 신의 카리스마에 입각해서 너는 내 말에 꿇으라는 지시와 명령이 정당화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미 어거스틴 체제 자체가 빛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진리에 가깝고 빛과 멀리 있는 사람은 저주에 가깝다. 이러한 사상이 사회적으로 체계화되고 구체화되거든요. 사회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관념의 체제에요. 그래서 이 사회란 희한하게 모르는 사람은 아는 사람에게 굴복하게 돼있고 굴복의 사슬이 연결돼있습니다. 그걸 탈피하기 위해서 자본주의는 사유재산 중심으로 체인이 돼있어서 개인의 재산이 많은 사람은 위에, 적은 사람은 밑에 이렇게 돼있지만 지금 이 시대로 마찬가지고.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않아요. 어쨌든 그 시대는 그렇게 돼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다 보니까 여기서 빛이 있다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과 예수님과 충돌을 일으켰고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가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해서 주님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단 말이죠. 거꾸로 올라오니까 단순히 이것은 네 자리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사상의 방향이 위에서부터 내려오는데 위로 올라가니까 물어봅시다. 어느 쪽이 빛입니까? 현재 인간들이 하나님이 빛이라는 그게 빛입니까? 아니면 예수님 쪽에서 출발한 게 빛이 되는 겁니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빛이 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빛이 되면 자동적으로 소위 여호와를 섬긴다는 이쪽은 빛의 반대말, 어둠이 되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에 처음부터 나와 있다고. 여러분들의 그렇게 보셨던 요한복음의 사상적 환경이 이렇습니다. 뒤집기에요. 빛은 어둠이 되고 어둠이 빛이 되는 거예요. 요한복음을 교회에서 해석을 제대로 한다? 아주 위험합니다. 정말 위험해요. 오래된 장로는 졸지에 어둠이 돼버리고 새로 온 신참이 빛이 되는 수가 생겨버려요. 그러면 그 교회 체제, 정서적인 안정, 심리적인 안정에 혼란이 일어나면 반드시 반발이 반항이 나오게 돼있어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다 할 때 칼 바르트가 하는 이야기가 유대교의 예정론과 차이점이 없다는 겁니다. 유대교는 우리 민족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정되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예정되었다는 성경적 근거가 뭐냐?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예정된 거죠. 칼 바르트는 말합니다. 그 언약을 예수님이 다 이루었는데.

 

그러면 다 이루었다는 말이 그냥 양적으로 미흡한데 완전한 것이 예수님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했다는 말도 맞고 다만 미흡했지요. 이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맞는데 플러스알파 들어가는 식으로 예수님을 넣으면 되는데 예수님이 언약을 완성할 때 어떻게 완성했느냐 하면, 십자가 죽음으로 완성했잖아요. 그런데 십자가 죽을 때 예수님이 피해자거든요. 그럼 피해자가 있다는 말은 가해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시작합니다. 그 가해자가 누구냐는 겁니다. 가해자의 정체가 뭐냐? 가해자가 품고 있던 성경 해석적 사고방식이 뭔지 따져보자는 말이죠. 그것이 뭐냐 하면, 그 당시 우리는 언약으로 하나님이 택해서 창세전부터 예정된 민족이라는 것이 예수님을 가해할 수밖에 없는 동기로 작용한 거지요.

 

그러면 그 유대인이 누구 후손입니까? 아담의 후손이지요. 그럼 우리는 누구 후손이지요? 아담의 후손이지요. 우리 안에 유대교 있는 거예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이 세상에 있어도 예수님을 가해할 수밖에 없는 가해 동기가 우리한테 발생되고 있다는 겁니다. 신은 우리 편이다. 이건 이슬람 테러집단의 구호 아닙니까. 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 그게 유대교뿐만 아니고 힌두교도 마찬가지에요. 모든 철학이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물론 모든 게.

 

그런데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너희는 내 앞에서 얼마나 의인인지를 생각하지 말고 왜 죄인이어야 하느냐고 내게 물어라.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은 예수님께서 가져가셔서 다 이루셨지만 그 언약의 구체화는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반사된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뭘 해도 죄인 되게 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죄인 되게 하는 능력이, 우리가 기껏 생각하는 것이 윤리 도덕적 죄를 끄집어내면서 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은 피아제 심리학까지 공부 안 해도 일반적 교양공부만 해도 윤리는 진화하게 돼있어요. 도덕과 윤리는 서양역사에서 진화했습니다. 페스탈로치 교육철학은 나중에 피아제 교육심리로 보면 발전되게 돼있어요.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도덕과 윤리라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나의 개인적인 양심이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양심과 어떻게 부딪치지 않을 수가 있느냐? 그게 도덕이고 윤리에요.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닙니다.
 
 

다음 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철학을 공부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게 창세기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관련돼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 플라톤이거든요. 플라톤이 신이 창조하고 이 땅에 있는 것은 안개 같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게 중세 철학까지 연결되고 오늘날
 
 

중세 철학이고 뭐고 목사고 뭐고 그냥 장사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양심을 쪼개보면, “집사님,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어요.” “이 세상은?” “이 세상은 나그네지요.” 그게 플라톤 철학이라니까. “그럼 집사님, 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그저 이 땅에서 살다가 나중에 죽어서 주님 만나는 게 제 소원입니다.” 그냥 아무 꾸밈없이 어떤 깊은 신학 같은 것 따지지 않고 장사하면서 느낀 양심이 뭐냐 하면, “살아보니까 믿을 놈 없고 그저 믿을 사람은 주님밖에 없어서 나중에 주님께 갑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주님은 하나님이시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입니다.”

 

세례 받을 때 잠시 교육 받으면서 이야기했어요. 목사가 하는 말이,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요. 집사님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예수님은 누구시지요?” “하나님이고 인간이십니다.” “왜 인간이 돼야 되지요?” “인간이 되셔야 우리 죄를 대속하기 때문에. 됐습니다.” “합격입니다. 세례 줍니다.” 요새는 그 정도 가는 것도 대단한 목사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담이 품고 내려왔던 상식의 이어짐이라고 생각해볼 때 그것을 다시 수술대에 끄집어내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세워놓고 다시 점검을 해야 돼요. 이게 유대교 역사가 아닌가? 내가 믿는 예수님을 내가 싫어하는 요인이 아닌지 점검해봐야 되지요. 점검하는 방식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끄집어내는 게 복잡하지 점검하는 방식은 쉽고 결론은 굉장히 쉬운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습니다. 끝. 결론은 너무 쉬워요.

 

여러분 피 흘렸습니까? 피 안 흘렸습니다. 피는 누가 흘렸지요? 예수님이 흘렸습니다. 그 피로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왜 그분이 피 흘렸는데 우리가 구원받지요? 그분 피 안에 대신 해주는 요소가 있기 때문에. 따라서 그 대신을 받는 자는 가만있어야 돼요. “가만있어 내가 다 해줄게.” 이게 대리 요소거든요. 그런데 문제가 어려워지는 것은 뭐냐? 대신 요소라고 할 때 대신 해줄게라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피를 흘렸다는 말이거든요.

 

그건 우리가 요구한 게 아니고 우리 아이디어가 아닌데 어떻게? “죄인 이리 와.” “여기 왔습니다.” “너, 조인이지?” “죄인 맞습니다.” “걱정하지 마. 대신 용서해줄게.” 이렇게 말도 해도 될 것을 피를 흘렸다는 거예요. 왜 피를 흘려야 되지요? 말씀으로 되는데. 우리는 알아듣는 사람인데 우리는 거기에 감동할 준비가 된 사람이거든요. “너, 죄인이야.” “저도 압니다. 하지만 밥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걱정하지 마. 내가 다 해줄게.” 피를 빼고도 할 수 있는 문제잖아요.
 
 

실제로 자유주의적 교회에서는 피를 다 빼버립니다. 피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을 집어넣었어요. 하나님은 사랑을 베풉니다. 베푸니까 여러분은 죄인이기에 사랑 받아야 구원받습니다. 할 때 그 교회는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받게 돼있어요. 그러다보니까 그쪽 교파 교인들은 감리교, 불교, 천도교 어떤 종교 지도자와도 충분히 대화가 돼요. 모든 종교는 뭘 이야기하기 때문에, 티벳 불교도 마지막으로는 뭘 이야기합니까? 사랑이죠. 요한일서에 하나님은 사랑이다. 산에 정상은 하나라도 어떤 종교로 올라가도 사랑의 길로 가게 되면 다 만나게 된다. 모든 종교는 사랑이거든요. 기독교만 해서는 독선적이 되니까. 신은 사랑이다. 끝.
 
 

중간에 뭐가 빠졌지요? 피가 빠졌지요. 그들은 성공회 교수가 지은 이만큼 두꺼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고 제가 서평한 게 있습니다. 그 두꺼운 책의 결론은 마찬가지에요. 신은 사랑이다. 죄에 대한 우상의 사랑이다. 하여튼 기독교에서 하는 이야기 다해요. 그런데 뭐가 기어이 빠져요? 피 흘릴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도대체 모르겠다는 거예요.

 

햇빛과 공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태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의 사랑이고 자비지요. 우리가 사는 것도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게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피가 들어갈 틈이 없어요. 이상하게 피가 왜 들어가지? 피는 그때 유대인들이 흥분해서 죽였구나. 피는 하나에 에피소드고 지금 와서 피 이야기 하지 말자. 그러나 막상 신약성경을 보세요. 히브리서 마지막에 피 언약이라고 돼있어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7장에 보면, 피로 하얗게 되지요.

 

이제 첫째 강의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에서 피로, 이게 지금 해결이 안 됐습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되면 죄인을 용서할 때 이 죄는 아까 이야기한 윤리적, 도덕적 죄거든요. 그런데 공동체에 따라서 그리고 사람이 나이가 많을수록 윤리, 도덕, 양심이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죄인이라고 간주할 때는 윤리, 도덕적인 거예요. 그럼 윤리, 도덕 앞에 법이 있거든요. 법을 못 지켜서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법이 없다면 법이 없는 곳에 죄가 안 나오게 돼있어요. 아까 제가 법이 진화한다고 했거든요. 인도 사람들은 숟가락으로 먹으면 죄가 돼요. 인도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문화적 요인에 의해서 손으로 먹잖아요. 그런데 미국 사람들은 포크로 먹잖아요. 부모님이 손으로 먹으면 안 된다고 하고.

 

어릴 때부터 공동체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나요. 그러면 인간들에게 심리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구축된 모든 죄의식은 일생동안 살아온 공동체의 보편적인 윤리체계에서 나온 거지요. 이게 일반적이 아니고 보편적이라 하는데 이건 나중에 시간 있으면 하겠는데 하여튼 대충 알아들으세요.

하여튼 보편적인 윤리 도덕에 그들은 그것으로 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미 보편화돼있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뒤집어버린다. 마음속에 간음한 것도 간음이다. 이것하고 쉽시다. 법이 없는데 죄인의식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게 바로 인간은 주님 앞에서 죄인이라 해도 죄인 아닌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10분 쉬고.
 관리자(IP:203.♡.42.222) 14-10-25 15:02 
20140924 미국동부오전b
 
(강의:이근호 목사)
 
 

 

전에 이 세상에 인간이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인간들이 있어요.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너도 있고, ‘나’와 ‘너’가 있으니까 합쳐서 ‘우리’라고 해버렸어요. 그러면 우리에 해당되지 않은 이것들을 영어로 ‘it’ 그것이라고 해버렸다고. 이런 게 문제가 됐어요. 예를 들어서 너라고 이야기할 때는 나가 먼저 있는 거예요. 나에서 사물로 넘어가면서 나를 사물화 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름을 만든 겁니다. 그 이름을 누가 불렀어요? 내가 부르면서 여기서 의미가 생긴 겁니다. 꽃을 내가 부를 때까지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사람이 이름을 부르면서 자동적으로 나에게 종속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거든요. 그 하나님은 나에게 종속된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람은 무슨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자기가 기도해놓고 뒤에 주문처럼 붙는 게 있어요. 기도 끝날 때 언제 끝나는 겁니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 이름을 기도했지만 거짓말이에요. 방금 기도한 모든 내용은 누구 좋으라고 기도한 거예요? 자기 좋으라고 하나님 이름을 부르면서 하다 보니까 내가 집어넣은 의미를 내가 다시 회수하는 셈이 돼버렸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라는 말이 성경이 있으니까 집어넣었고 다시 될 줄로 믿는다고 기대하는 기대치에 대한 응답은, 결국 그 기대치는 옆집 사람들이 부른 거예요? 누가 만들어낸 거예요? 내가 만들어냈지요. 내가 만들어낸 의미를 사물에 이름 붙이듯이 이름을 불러서 한 겁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종속된 겁니다. 이런 것을 성실, 다른 말로 충실이다. 나는 나에게 충실하고 성실해요.

 

여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 수 없어요. 아담이 자기 부인 보고 이름 불렀지요. 아담이 부를 때 그 여자는 아담 없으면 없어져야 되겠지요. 그러면 아담이 먼저 있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담은 항상 생각해요. 저 여자는 내가 이름을 주어서 나한테 종속된 여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고 돼있지요. 아담은 그 순간 뭘 잃어버렸습니까? 내가 여자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한테 종속된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아담은 하나님이 나의 관계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겁니다.

 

그것을 한 자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꽉. 자기 인생에 꽉 찬 것, 아까 이야기한 성실, 충실. 게으름아 꺼져라. 나는 나의 게으름을 용납 못해. 이런 식으로 보면 돼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결국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자기한테 회수하는 식으로 인간은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항상 그 의미가 나에게로 되돌아오도록. 심지어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내가 실패하니까 아쉽다. 아쉽다는 말은 꽉 차 있었는데 사업에 실패했으니까 빠져나간 거죠.
 
 

또 예를 들면 나의 배우자가 죽었어요.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가 죽었단 말이죠. 자기 아내가 죽어서 자기는 우는데 다른 남자들은 울지 않아요. 그럼 물어봅시다. “내 아내가 죽었는데 당신은 왜 울지 않나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쳤나. 니 마누라 죽었는데 내가 왜 울어?” 그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 마누라 죽으면 나도 울 거란 뜻이거든요. 각자, 각자 꽉꽉 차 있어요. 자기 속에 남이 절대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흘러간 1950년대 팝송에 보면, 내 아내와 헤어졌는데 태양은 왜 빛나는지, 파도는 왜 치느냐. 나는 이렇게 아픈데 파도는 치고 한결같고. 여자와 헤어졌는데 새는 전과 같이 짹짹거리고 해는 왜 뜨느냐 이 말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에 알던 새소리와 아름다운 해도 의미 없지요. 그럼 사랑하는 여자가 죽고 난 뒤에 같이 따라 죽는다는 말은, 더 이상 그 전에 내가 봤던 해와 달과 별들은 그냥 자연이 아니고 현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누구한테 예속된 현실이었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살아있다는 조건 하에 나는 이걸 현실로 봐주는 겁니다.
 
 

자연은 누가 만드는가? 자연 어디 있는가? 자연은 내 안에 있어요. 내가 의미를 줄 때만 자연이에요. 내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만 별을 별, 달을 달이라고 불러 줄 때만 “달이 거기 있네. 참 아름다워.” 할 때만 그 달은 의미가 있는 겁니다. 자식이 공부 못하고 있을 때 달은 백날 아름다워도 좋아지지 않아요. 나한테 종족 되는 것. 따라서 종속된 이것을 이제부터 합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했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부를 때 나에게 종속된 하나님이고, 이 천지, 자연도 종속된 것이고, 창조라는 것은 마치 내가 창조가 뭔지 이미 아는 것처럼 건방을 떨면서 세 단어 다 이해하니까 합친 것도 이해한다고, 이걸 ‘믿습니다’라는 말로 우린 그냥 내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라고 믿고 난 뒤에 갑자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멀쩡합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뭐. 아내 죽어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죽여겠지 나와 무슨 관계있어.” 이렇게 멀쩡한 정신으로 정상적으로 됩니까? 안 되지요. 뭐라고 따집니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여, 왜 하필이면(Why me?) 저에게 이런 불상사를 주십니까?” 이 말은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조건 하에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뒤늦게 들통 났어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순수하게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노림수가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단계를 높입시다. 꽉꽉 차 있던 내가 안다는 것을 한 단계 높이면, 비어있음, 뭔가 빈 게 돼요. 비어있다는 것은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겁니다. 사업 망하고 난 뒤에, 가족이 죽고 난 뒤에. 내가 뭔가 완성됐다고 여겼던 것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비어있으면 자아가 구멍이 뚫렸는데 그것이 채워졌을 때만 자아가 되거든요. 그런데 뭔가 허전하단 말이죠.

 

아내가 죽고 난 뒤에 6개월 넘지 않아서 사랑하는 사람을 새로 만나서 이 남자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전처 죽었을 때 하나님 앞에 왜 나를 죽음으로 몰아세웁니까? 이제 살 소망 없습니다.”라고 했는데 당신 만나려고 아내가 죽었구나. 이럴 줄 몰랐다는 것예요. 갑자기 비어있던 것이 채워졌지요. 채워져서 이제 하나님 뜻을 알았다고 장담했는데 두 번째 아내가 바람이 나서 떠났어요. 또 비었지요. 1층에서 2층으로 3층에서 또 비어졌어요.

 

그런데 아내가 그냥 가지 않고 재산을 챙겨서 젊은 남자 만나서 가버렸을 때 이 남자는 비어있음이 돼버렸지요. 그러면 아내가 죽은 것은 마지막 여생을 행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만났다는 그것은 제대로 세상을 간파한 게 돼요? 몰랐지요. 재산이 날아가고 난 뒤에 또 다시 나오는 용어가 Why me? “주여, 주님을 사랑하고 주께서 저를 사랑하는지 믿습니다. 절대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나를 이런 식으로 몰아넣는지 이유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빈자리가 생기지요.

 

제가 이런 예를 드는 이유가 이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이 남자는 계속 믿는다고 생각하는데 뭘 생각이 안 나느냐 하면, 뭐는 실감이 안 나느냐 하면,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 17절 말씀처럼 태초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지를 창조했고 모든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라고 할 때 골로새서에 나오니까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글자를 받아들인 것처럼 골로새서 1장에 그 말씀도 자기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구멍이 나고 비어있는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위하여’란 의미가 뭔가 내 중심의 인생과 자리바꿈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을 간파하는 거예요.

 

그동안 중보자가 빠진 거예요. 자기는 중보자란 개념을 1층에 있을 때부터 안다고 자부했는데 구멍이 뚫릴 때마다 도대체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걸 믿는 그 믿음을 본인이 믿은 거예요.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리라는 믿는 이 믿음은 절대로 그리스도가 원하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건 유대교에요. 유대교는 구약성경을 어릴 때부터 다 외웁니다. 하지만 그 유대교에 의해서 예수님이 살해당했습니다. 예수님 자리가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리 비워놓고 예수님 들어오셔도 되는데 그게 아니고 비워놓은 자리에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고 아내는 죽었지만 나는 살아있다는 이 자체를 가위질해서 죽이시는 것을 앞장세워서 주님께서 내가 중보자라고 외칠 줄이야 감히 생각도 못했지요. 나 여기 있고 주님 저기 있으니까 주님 저와 좋은 관계로 악수합시다. 왜? 계속 살아있으니까. 이렇게 예수님과 악수할 줄 알았지요.

 

선교단체에서 많이 가르치는 구절이 있어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 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은 내가 일단 살아있고 그 다음에 안녕하십니까? 예수님이십니까? 저는 아무개입니다. 이렇게 악수하면 함께 살아있는 걸로 생각한 거예요. 자기 인생에 구멍 날 이유가 없거든요.

 

“여기 앉으세요. 주님 자리라고 만들어놨습니다.” 선교단체에서 동그라미 그려놓고 의자 하나 놓지요. 당신이 중심이 되지 말고 중심은 주님한테 양보하라. 양보하지요, 뭐. 양보하고 자기는 밖에 나가서 주님께 감사하면 되잖아요. 주님 자리를 이 자리입니다. 하고 자기는 이제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한 거예요. 그것이 꽉 차있는 진리체제를 완수했다고 했는데 왜 Why me? 그렇게 완성된 나에게 구멍을 일으키느냐 이 말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됐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 붙이는 겁니다. 누가? 내가 사물이나 어떤 인물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사람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나에게 종속돼요. 내가 절대자가 그분이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예수든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름을 불러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이름을 부르면 안 되고 방향이 반대가 돼야 되지요. 내가 부를 이름 자체가 완전히 붕괴시키면서 그 현장을 만들어가면서 내 이름을 새롭게 불러줘야 될 분이 계신데 그 분은 내가 생각한 체제 속에 안 담겨있지요. 왜냐? 내가 생각한 체제는 나에게 의미로 엮여져있는 체제기 때문에 그것은 백날 기적으로 해도 돌아서면 나 잘남으로 환원되게 돼있어요. “나, 예수님 계시 받았다.” 이러면 안 되거든요. 나 말고 내가 미처 생각 못해 다른 곳에서 찾아오시면서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걸 호명이라 합니다.
 
 

알튀세르란 유명한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사람의 주체란 호출로 말미암아 주체가 생긴다. 사회에서. 누가 나를 불러줄 때 비로소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하나에 주체로서 활동하다가 만약에 그 사람이 나를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있어도 죽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인터넷에 사이트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아무도 조회수 한 명도 없을 때 나는 이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지요. 아무도 나를 불러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취직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고. 뭔가 나를 불러줄 때 불러준 사람 앞에서 주체로 살게 돼있어요. 하늘나라가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주는 거예요. 불러준다는 것이 일시적으로 불러주면 안 되잖아요. 궁극적으로 불러줘야 돼요.

 

궁극적으로 불러주는 그 대목을 제가 성경 찾아보겠습니다. 제가 말은 어렵게 하지만 실내용은 간단한 거예요. 내가 생각한 예수님 말고 실제로 나를 찾아오신 그분을 상정하자는 내용이거든요. 로마서 8장 29,30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건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리 정했다는 사실을 내가 정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 대목을 보는 순간 내 중심의 체제기 때문에 불러준 것이 마치 나인 것처럼 나에게 의미를 일방적으로 부여했지요. 내가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담의 본성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그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제 말에 사람들이 제일 오해하는 게 뭐냐 하면, 그러지 말라는 거구나.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우리는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우리가 살아왔던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수긍하자는 이야기에요. 별난 인생 없고 별난 재주 없거든요. 제가 이야기하는 모든 이야기는 이단이고 삼단이고 없어요. 모든 인간은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아주 적합하게 자기에게 하는 이야기라고 일방적으로 수입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야기는 그것을 바꾸고 수정하고 손대는 작업은 절대로 우리가 손대는 작업을 하지 말자는 거예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우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설명하려면 두세 시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는 이걸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 완전히 와이미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러면 자살합니다. 살고 싶지 않습니다. 죽이든 지옥 가든 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주님 섬겼으니까 더 이상은 못 섬깁니다. 정말 주님 이렇게 나온다면 저도 더 이상 주님 못 믿겠습니다.”라는 것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도해요. 드디어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유단자인가? 이게 네 본색이야.”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사실을 누구한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남한테 이야기한다? 이건 말이 이야기지 자기 성질부리는 거예요. 못 알아듣습니다.

 

이 포도를 먹고 난 뒤에 맛있다고 하잖아요. 얼마나 맛있는데? 뭐로 표현합니까? 맛있다는 것 외는 표현할 수 없어요.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맛있어요. 어떻게? 참 맛있어. 좀더 정확하게. 억수로 맛있어. 그냥 맛있는 것과 억수로 맛있는 것과의 차이가 뭔데? 코미디에 보면, 말꼬리 잡고 제대로 표현하라는 거예요. 이걸 말할 수가 없지요. 남자한테 참 좋은데. 산수유가 남자한테 좋다는 거예요. 말로 할 수는 없고. 말로 어떻게 표현해요.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을 하지요.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는 게 뭔데? 몰라, 몰라. 그냥 믿어. 우리는 주님과 사귀면 돼요. 그걸 남한테 표현해서 믿음 좋다는 과시할 필요 없습니다. 목회자는 남을 설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주님한테 당한 것을 지난주에 이렇게 당했다고 성경말씀으로 화풀이하는 거예요. 자기 성질 드러내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자기가 주님한테 당했는데. 자기는 꽉 찼다고 여겼는데 주님께서 꽉 찬 것을 후비고 완전히 도려내고 구멍을 뚫고 쥐포 찢듯이 찢으니까 얼마나 아파요. 이것이 복음이라고 정립했는데 그걸 찢어버리니까, 컨닝페이퍼 준비했는데 그걸 찢어버리니까 시험을 어떻게 쳐요. 빵점이지요.
 
 

우리나라 가수 중에 노래 잘하는 백지영이라는 가수가 있어요. 그 가수가 부른 <총 맞은 것처럼>이라고 있잖아요. 그게 사랑을 표현할 때 도대체 그 아픔을 달리 표현해서 총기까지 집어넣는다니까. 총 맞은 것처럼. 하지만 기껏 그 표현이지만 그 사람이 총 맞아 봤습니까? 모르잖아요. 자기는 총 맞은 것처럼 아프지만 자기도 직접 총 맞은 게 아니에요. 총 맞았으면 죽었지요. 자기도 모르면서 ‘근접성’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모든 언어는 은유에 불과하다고 언어학자들이 결론내린 거예요. 언어는 달라지게 마련이지 그래서 언어는 게임이고 그림이라고 비트켄쉬타인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이건 어떻게 정확한 표현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원어 찾는다는 게 속임수입니다. 원어라는 게 없어요. 지금 언어의 다양성을 추구했지만 옛날에는 몇 개 안 되는 단어로 변화를 표현하다보니까 고대 언어거든요. 히브리어, 헬라어 특징이 단어 몇 개 되지도 않은 것으로 이것도 써먹고 저것도 써먹는단 말이죠. 그걸 원어를 찾으면 오늘날 세분화 사회에 맞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원어하는 사람들이 자기 지식자랑해서 교인들을 자기 수하로 만들기 위해서 하는데 그건 사기에 해당되는 겁니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느끼는 것은 누굴 전도하는 건 주님 소관이고 자기는 날마다 총 맞고 있어요. 그러면서 자꾸 비워지면서 나 아니고 당신입니다. 중보자입니다. 이 세상은 중보자가 만들었고 중보자가 관리하고 중보자가 책임지고. 거기서 누구는 빠져야 돼요? 내 인생에서 나를 드러내야 돼요. 절대로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강제로 총 맞는데 자식한테 총 맞고, 재산 있으면 재산한테 총 맞고, 온통 인생 자체가 누더기가 되는 겁니다. 총 맞은 것처럼~ 주님이 계속 쏘아대는 거예요. 하여간 내 뜻대로 되는 법이 없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하잖아요. 주님을 본받으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윤리, 도덕으로 생각하는데 성경에는 그런 뜻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 땅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신 것을 본받으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아버지 뜻을 몰라요. 아버지 뜻이라고 우기는 낮은 계층이 있지요. 1층, 2층. 그것이 나중에 3층으로 올라가면 1층으로 변해요. 5층 올라가면 1층으로 변해요. 맨날 우리는, “이만하면 됐어. 이만하면 복음 압니다. 이만하면 주님 압니다.” 맨날 이래서 총 맞는다니까. 그러면 겸손하게 “주여, 저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총 맞아요. 그러니까 “주여, 제가 아는 게 뭡니까? 오직 주님만 생각합니다.” 그런다고 총 안 맞을 줄 알아요?

 

인간이란 뭔가 진리로 규정이 되거든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전적으로 죄인이며 오직 구원은 주님만 하게 됩니다. 라고 해봐야 시간 지나면 되돌아와서 내 존재됨에 대한 좋은 완벽한 진리처럼 내 창고에 역사를 통해 진리가 저장이 돼요. 저장이 되면 나는 이 정도까지 아는 사람이라고 자아를 뽐내는 근거가 됩니다. 제가 고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건 어쩔 수 없어요. 누구도 마찬가지로 어쩔 수가 없어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신다고 할 때 그 부르심은 그냥 부르심이 아니고 중보자를 위하여 네가 존재한다는 걸 드러내면서 나타나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얻어맞은 경험이 있어서 싹싹 빌면서 이제는 내 뜻이라는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중보자의 뜻이라고 일단은 고개 숙입니다. 아직까지 내일을 모르니까 9월 26일을 안 살아봤으니까 25일 오늘까지는 남은 여생은 주의 것이지 내 것은 아니야. 이게 25일치에요. 내일 되면 25일치가 나를 섬기는 우상의 재료가 돼있어요. “나는 복음 안다. 물어봐. 나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다. 틀렸어?” 내일 되면 주께서 총 들고 나섭니다. 개념과 아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과 내가 예상 못한 다른 느낌을 또 다시 주십니다. 주시면서 내 인생은 중보자의 것이라고 깨닫는 거지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게 틀린 겁니까, 맞는 겁니까? 강의를 지금까지 하고 돌아보니까 이 고백은 맞는 고백이에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내가 고백한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중보자가 고백케 하신 겁니다. 수동적입니다. 수동적이 제일 중요하지요. 우리는 십자가를 경유해서보니까 수동적으로 했는데 우리는 내가 눈으로 보니까 보이네요. 따라서 ‘믿습니다’라고 자동적으로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내가 한 걸로 생각하면서 살아온 것은 결과적으로 보니까 소급해서 보니까 주께서 나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이 맞는 고백이 되는 거예요.
 
 

또 하나 예를 들면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성질나서 딸의 뺨을 때렸다. 때리면서 단서를 달았지요. 네가 맞으면서 엄마가 때렸다고 생각하지 말고 사랑의 매라고 생각해라. 사랑하니까 때리지. 봐라 히브리서 12장에 봐라. 자기가 아는 성경 동원돼요. 남의 아이 같으면 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만 징계를 내린다. 또 잠언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죽인다. 내가 보니까 남의 자식이면 안 때렸어 나는 널 살리기 위해서 때린 거야.

 

그러니까 자기 딴에 온갖 아는 성경구절 다 동원했지만 저 같으면 다른 구절 댑니다. 신명기에 뭐라고 돼있어요? 자식이 말 안 듣거든 네 손으로 죽이지 말고 마을 원로한테 가서 맡겨서 돌로 쳐 죽이라고 돼있어요. 그것 실시한 부모 아무도 없습니다. 세월호 물에 빠졌다고 지금까지 데모하는 있는 판에. 누가 자기 자식을 남의 손에 맡겨요. 그런데 성경은 그걸 이야기한다고요. 일반 평신도는 그 구절을 모르니까 기껏 아는 구절, 매를 아끼면 자식이 망한다는 그런 구절 동원한다고요.
 
 

나중에 주님 진짜 찾아와서 해보니까 자식 사랑해서 때린 게 아니고 내 자식이기 때문에 때린 거예요. 그러면 마태복음 10장에 어긋나요. 누구든지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참, 성경말씀이 그렇게 엮여져 있어요. 좋은 것 지 마음에 맞는 것 어디서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골라내요. 자기 정당화가 될 수 없어요.

 

그러면 그 구절을 일단 들었다 칩시다. 그 다음에 나오는 핑계가 있어요. “주님이여, 제가 자식 때린 것이 내 자식이라서 때린 게 아니고 주님의 자식이니까 때렸다.”고 비겁한 변명을 할 수 있겠지요.

 

강의가 끝났다 치고 돌아보니까 남은 것은 뭡니까? 그때 내 자식을 때린 것은 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참 문제 어렵다, 정말. 이런 강의도 모르고 그때 성질나서 성경구절 대면서 공부 좀 하라고 때렸는데 그게 잘한 짓이에요, 잘못한 짓입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제가 답변할게요. 잘했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주님 안에서 잘했습니다. 주님이 나도 모르게 딸에게 손질하도록 시킨 겁니다. 물론 이 이야기를 딸한테는 하지 마세요. 딸들은 뭐라고 합니까? “어머니, 그건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어머니는 스스로 속이고 있습니다. 분명히 때려놓고 이제 와서 주님한테 핑계를 댑니까?” 그걸 변명하지 마세요.

 

이건 누구만 알아요? 총알에 구멍 난 본인만 알지 다른 사람은 몰라요.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 이야기를 잘못 들으면 철저한 허무주의에 빠지고, 난 뭘 해도 죄인이야. 극단적 허무주의지만 달리 들으면 자기가 한 일은 무조건 잘한 짓으로 탈바꿈 시키는 비겁한 이기주의가 돼버려요. 따라서 인간들이 알고 있는 사상체제는 이기주의냐, 아니면 허무주의냐 그런 개념으로 성도를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런 주장이면 목사님한테 묻고 싶습니다. 누가 성도인지, 아닌지를 당신 주장에 의하면 아무도 평가 못한다. 목사가 되어서 당신은 아무리 봐도 성도 아니에요. 우리 교회 나가도 할 말 없습니다. 당신은 붙어 있으니까 성도에요. 이렇게 지적하는 그것도 너무나 잘못된 평가가 된다면 목사가 하는 목회를 무슨 자신감을 가지고 어떤 확신도 없이 목회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 아니냐고 나올 수 있지요.

 

정말 성도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 그대로에요. 너희들 가운데서 주님 죽으심과 십자가 못 박히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2장 2절 말씀입니다.

 

이걸 설명하면서 이번 강의를 정리해봅시다. 이것 하게 되면 머리 깨져요. 강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제로 깐 게 있어요. 저와 여러분은 살아있습니다. 제가 목사님한테 “목사님, 살아있습니다.” 하면 목사님은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그럼 내가 죽었어. 이렇게 되거든요.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있다는 말은 인격모독에 해당되는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전제로 깐 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죽어있습니다. 죽어있는데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피를 이야기하면 입술을 나불나불해야 되잖아요. 죽은 자는 피부조직이 죽어있기 때문에 나불나불하지 않지요. 예수님의 피, 이것만 이야기해도 입술이 살아있어야 된다니까. 누가 뭐래도 스스로 말하는 내가 살아있는 것 맞아.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사도 바울은 죽어있는 걸 전제로 할 때만 예수의 피로 살았다는 말이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살아있다는 걸 전제로 한단 말이죠. 그러면 뭔가 다녀가야 한다고. ‘나는 살아있다’가 주님께서 찾아오시면 나는 죽었는데 내 안에 주님이 살아있어서 나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 이야기했다는 복잡한 문장이 고백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지금 질문이, “누가 성도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지요. 답변이 뭐냐 하면, 예수님 살아있다고 이야기할 게 아니고 내가 죽었는데 주님으로 인하여 살아있다는 것과 아울러 이야기하면서 “이건 컵입니다, 이건 포도입니다, 이건 과자입니다.”라고 일상적인 생활을 하시는 것이 성도라고 하는 거예요.

 

문장이 길어서 이해 못하는 거예요? 정리가 안 되는 거지요. 정리해봅시다. 정신 차려야 돼요. 제가 지금 전혀 시차를 못 느낍니다. 왜냐하면 정신이 없어서.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여기 있고 사물이 있는데 사물에 이름을 붙임으로 이름을 내가 부른다. 물론 사물의 이름은 내가 정하지요. 내가 정하는 게 아니고 주위에 있는 공동체가 정하지요. 컵인데 주전자라고 하면 안 돼요. 공동체가 주전자라고 했기 때문에 교육을 받아서
 
 

복습합시다. 공동체가 나를 불러주면 나는 주체가 된다. 너는 딸이라고 할 때 비로소 딸이 되는 거예요. 꽃이라고 할 때 꽃이 되는 겁니다. 남이 나한테 “기타 참 잘 치네.” 하면 나는 기타에 달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변에서 “포기해라. 넌 기타리스트 아니야.” 이러면 기타리스트가 아닌 거예요. 기타리스트로 취직이 안 돼요. 나는 기타리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기타 치는데? 안 돼요. 남들이 불러주지 않으면 나는 그 사회에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남이 정해줘요. 호명한 그분이 정해줘요. “사장님, 저는 과장하고 싶습니다.” “아니 말단 사원해.” 이러면 말단 사원이에요. 이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누가 나를 지정해줘야 돼요. 왜냐 하면 내가 남을 지정하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을 사장이라고 부를 때 그 사람한테 종속되는 겁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장이라고 불렀다는 말은, 당신을 사장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사장 시키는 대로 말단직원 하는 겁니다. 사회라는 게 그런 관계로 되거든요. 그게 전부 이름이에요.

 

이름이 되는 이것이 나의 살아있음의 근거로 했단 말이죠. 주께서 이걸 교체하는 게 아니고 이걸 통째로 죽여 버린단 말이죠. 주께서 통째로 죽이면서 통째로 죄로 살려내요. 제가 말은 어렵게 했지만 결론은 쉬워요.

 

이걸 컵이라고 할 때 일방적으로 컵이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아까 제가 질문을 했잖아요. 딸을 때리는 것이 잘했다고 했지요. 내가 컵이라고 부른 것은 잘한 거예요. 그런데 지금 경우에 의하면 잘한 것이 아니고 이걸 컵이라고 할 때 교육을 받아서 컵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 있지만 주께서 나를 죽은 자로서 내 안에 주님께서 컵이라고 부르게 하셨다면 내가 컵이라고 부른 것은 주님 안에서 정당한 겁니다.

 

왜 자꾸 제가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기 때문에. 세리도 의인 되고 창기도 의인되고. 의인 안 되면 천국을 못 가요. 그러니까 천국이란 내가 가는 게 아니고 누가 나를 데려가야 돼요. 그것을 로마서 8장에 이미 아신 자를 불러주고. 호명하지 않으면 주체가 없거든요. 우린 이 땅에서 주체가 있지만 천국에 주체 있는지 몰라요. 하지만 생명책에 명단이 있기 때문에. 생명책에 명단이 있다는 걸 예수님이 알아요.

 

창세전에 불러줄 때 우리는 부름을 받을 때 기존에 죄 짓는 것이 날아가는 것이 아니고 죄 짓는 그 버릇과 성질 그대로 고스란히 살려내면서 누가 봐도 죄에요. 내가 봐도 내 행동은 죄고. 왜? 돈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는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남의 가정은 몰라요. 내 가정만 챙기면 되는 거예요. 그야말로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우리는 그것부터 우선적으로 사랑해요. 남은 뒷전입니다. 유치원 달리기할 때 남의 아이 넘어지면 박수치고 자기 아들 달려가면 대신 뛰고 그럽니다. 누가 봐도 나밖에 몰라요.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디 가느냐? 천국 갑니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는 그걸 고치라고 이야기해요. 이건 위선입니다. 절대로 고치면 안 돼요.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중국 문둥에서 강의할 때 성경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누가 지킵니까? 주께서 지키면서 우리를 누더기로 만들고 너는 뭘 해도 죄밖에 나오지 않는 식으로 이 말씀이 성취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재산이 한 20억 된다. 남들은 복 받았다고 한다. 복 받은 게 아니에요. 재산 20억 교회에 바친다. 바치지 마세요. 그냥 먹고 싶은 것, 좋은 차 사세요. 신자가 사치한다고 공격하면 받으세요. 왜? 내가 사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게 의가 돼요. 예수 안에서 의가 된다니까요.

 

이걸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철저하게 성화를 주장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거예요. 신은 존재하시고 신이 말씀을 주셨다. 우리 사명이 뭐냐? 말씀 지켜서 주께 영광 돌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물론 우리는 천사가 아니고 우리는 신은 아니지만 신이 아니라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고 주어진 형편 따라 최선을 다하여 지키는 만큼 영광이 되니까 만약에 못 지킬 경우에는 돌아서서 회개하고 회개한 것으로 끝나지 말고, 회개했으니까 잘못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그런 짓하지 말고 좀더 말씀의 진보, 거룩의 진보를 보이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 그대로고 완벽한 해석이다. 아래층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참 총알 맞아야 됩니다. 구명 나야 돼요. 그래서 와이미가 나와야 돼요. 나올 때 결국 사도 바울을 말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미 우린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9월 26일을 안 살아봤어요. 9월 26일을 안 살아봐서 25일에 하는 이야기,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라는 느낌과 9월 26일 하는 느낌이 다를 것을 미리 당겨서 우리가 예상을 합시다. 9월 27일 되면 또 몰라요. 다만 제가 확증할 수 있는 건 이겁니다. 천국 가면 한 평생 살아왔던 모든 것은 면류관 벗어서 주님 발 앞에 내놔야 됩니다. 그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입니다. 그때는 모든 것은 끝이에요.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변화산 이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엘리야, 모세가 주님과 의논한 것이 누가복음 9장에 나오거든요. 예수님과 무슨 대화를 했느냐? 예수님의 별세,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이미 하늘나라에 도착한 사람은 바탕에 예수님의 죽음이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뭐라고 합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제가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자기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진, 중보자가 빠진, 피가 빠진 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말씀 주시고 말씀대로 지켜나가는 영광된 거룩한 분위기가 주께서 원하는 분위기가 맞죠? 이것이 그 당시 베드로가 생각했던 겁니다.

 

물 위를 걸었지요. 오병이어 먹었지요. 이만하면 됐잖아요. 그런데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랐던 거예요. 내가 누군지 몰랐던 거예요. 그런데 그 점은 우리도 베드로와 진배없습니다. 똑같아요. 지금도 마음 같으면, “주여, 제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을 말합니다. “목숨 드리지 말고 너는 너를 위해서 살면 돼.” 중보자가 관여할 상황을 중보자 안다는 네가 작업 빼앗지 말란 말이죠. 너는 네 행세, 버릇, 네가 잘하는 것 있잖아. 너 잘하는 것 하라고. 우리 잘하는 게 뭔지 알아요?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는 걸 제일 좋다고 하고 있어요. 이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참 잘해요.

 

요새 한국에 한 살배기, 두 살배기 노는 게 인기 있어요. 이휘재 아들 둘하고, 송일국 아들 셋하고, 추사랑 해서 출연료 대단하답니다. 손녀는 안 될까? 됩니다. 이제는 미국 편해서 미국 동부부터 시작해서 할 수 있어요. 제가 그 아이들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제일 잘하는 게 그겁니다. 내리 사랑입니다. 남의 아이 물에 빠져죽어도 아무 관심 없어요. 자기 아이 다칠까봐, 그 잘하는 것 쭈욱 하세요. 이미 아시고 중보자 보내셔서 그것마저 나중에 의가 될 겁니다. 잘해서 의가 아니고 그게 죄라는 걸 알게 하셔서 주 안에서 의로 나타나게 될 겁니다. 아무 염려하지 마시고 안정감을 가지시고 이래도 죄인데, 뭐. 편안하게 하는 대로 사시면 절대로 막 살지 않도록 주께서 작용해주십니다. 그야말로 막 살지 않도록 그때 내가 정신 차렸다고 하지 마시고 주께서 관여하셨다고 자기를 수동적으로 맡기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203.♡.42.222) 14-10-25 15:09 
20140925 미국동부오전c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형상이야기가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다뤄졌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에게 할 말이 있어요. 목표가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회복하세요.” 간단한 문제에요. 목회가 뭐냐?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 회복하기.

 

교인들은 당연히 궁금하지요. “형상이 무엇이며 회복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형상은 하나님의 진면목, 참된 본성인데 청조 때는 있었는데 그 뒤에 잃어버렸거나 잠복되었거나 그렇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성령을 받게 되면 성도가 되게 되면, 하나님을 본받으라.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대로 그 거룩을 회복하시면 여러분은 드디어 신앙생활의 목표점을 제대로 찾으신 겁니다. 특히 에베소서 5장에서 새사람을 입어라. 하나님 형상을 입어라. 너희는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이제는 빛의 형상을 입어라.

 

따라서 목회 목적도 확정되었습니다. 믿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안 되고 성령에 의해서 되지만 그 다음에 성령 받은 사람에게 삶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 형상을 본받으라는 것으로 확정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교회라는 것은 믿음 생겼다고 구원받았는데 교회 나올 필요 없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왜냐하면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교회 등록하시고 봉사하시면서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형제들의 모임을 통해서 회복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본래 구원의 완성에 부합되는 겁니다.

 

그렇게 단출하게 정돈되면 여기는 어떤 하자도 없고 완벽한 신앙생활의 스케줄이 짜여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다들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거든요. 그런 주장을 할 때 제일 큰 두 가지를 놓치고 있는 겁니다. 이 주장은 이천 년 교회 역사 가운데 계속해서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주장해왔던 건데 그들은 두 가지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교의 사상과 일치됨에 대한 무지. 유대교 신학은 뭐냐 하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셔서 구원을 받는 상태에서는 추가적으로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맞지요. 홍해 건너갈 때 율법 없었습니다. 홍해 건너고 난 뒤에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으로 인도하지요. 시내산에서 그 유명한 돌판이 제공되면서 줄줄이 돌판 중심으로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사실 출애굽기, 레위기 설명하려면 율법을 설명할 때 왜 돌판에 십계명만 써있고 다른 계명은 안 써졌는지 그 문제도 다뤄야 돼요. 그것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하늘나라에 돌이 모자라서 그랬던가요? 안 그러면 모세가 들고 오기에 너무 무거워서 십계명만 새기고 나머지는 외워서 가라고 된 걸까요? 이러한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책에 나오질 않아요.
 
 

맛 좀 보여드릴까요? 왜 돌판에 십계명만 써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10초 동안만 말씀드릴게요. 돌판이 있어야 깨어짐이 성립되기 때문에. 깨어짐에서 새로 시작하자.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너희들 내 백성이야.” 백성이 듣고, “예. 주의 백성 맞습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아니야.”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냈잖아요. 그러니 주의 백성 맞잖아요.” “네 속에 애굽 요소가 가득 들어있어.”

 

만약에 무슨 일만 일어나면 무조건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때는 수박도 있었고 부추도 있었고 향신료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로 끌고 가냐? 만나, 메추라기, 이제 지겹다. 질린다. 차라리 뭐가 그리워져요? 애굽에 맞춘 몸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선 자칭 자기를 출애굽했다고 여기는 무리에 대해서 너희들은 출애굽을 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홍해는 뭔데? 출애굽이잖아요. 지리적으로 애굽이란 공간을 벗어나서 빠져나왔으면 출애굽이 아니냐.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애굽의 확장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기 바지에 잉크물이 들었으면 그 사람 바깥에 산보하면 길바닥에 잉크물이 가는 곳마다 묻어나겠지요. 애굽에 살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칭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막상 그들이 가서 발 딛었던 그곳은 애굽의 확장이었고 애굽의 본성의 발휘였습니다. 애굽이 확장된 것이지 그 애굽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애굽과 애굽을 벗어남의 경계선은 어떤 지점이냐? 단순히 지리적 지점이냐? 아닙니다. 어린양의 죽음과 합치된 인생을 맛볼 때 벗어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은 특수한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아까 목사님 병 이야기하니까 가슴 아프지만 특수한 죽음이 전제돼요.
 
 

어제 오후에 강의하면서 죽음 이야기를 초반에 안 끄집어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기어이 끄집어내지 않는데 성공했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죽음 이야기해버리면 실례고 너무 잔인한 이야기 같은 거예요. 살아도 죽었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끄집어내요. 교인들이 더 잘 살려고 교회 오지요.

 

기존교회에서 성화론할 때 성스러움을 이야기합니다. 저는 이런 분에게 물어요. 이 땅에서 성스러워질래요, 이 땅을 벗어날래요? 둘 중에 하나만 고르세요. 이 땅에서 내가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 이 정도로 내가 착해질 수 있구나. 자기가 착해지는 그 모습에 자기가 반하는 것이 소원이십니까? 아니면 훌쩍 제대하는 게 소원이십니까? 사람은 자기가 위대해지기는 게 소원이지 떠나기를 싫어해요. 떠나더라도 자랑 좀 하고 떠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그러니까 떠나기보다는 차라리 성스러운 쪽을 택해서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는 그러한 성스러움의 욕구가 작용합니다. 수도원 수녀들이 그러거든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수녀원에 뛰어드는데. 사실 수녀원에도 그런 여자는 싫어해요. 수녀들도 공부 잘해야 되고 환경 낮으면 차별대우가 심해요. 똑똑한 수녀는 대우받고.
 
 

성스러움이란 애굽에서 익힌 버릇이에요. 주님의 성스러움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경계선이 뭐냐? 방금 이야기했듯이 어린양이 죽어서 문설주에 바른 피의 어린양과 합치된 인생을 살 때 경계선인데 그것은 이미 먼저 죽었지요. 어린양이 먼저 죽으시고 그 어린양에 동참함으로써 비로소 출애굽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러면 죽으면 안 되잖아요.” 하잖아요. 그래서 대신 죽는 죽음을 반복시키는 장치가 바로 제사법이에요. 그 제사법을 쓰려면 희생, 죄에 대한 주님의 용서니까, 죄와 용서의 만남이니까 죄의 기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십계명이 주어지는 겁니다. 십계명이 주어지면서 돌판이 깨어지지요. 그 뒤에 십계명 안 주어지면 또 주어지지요. 그러면 주어진 십계명 안에 뭐가 품어져 있느냐 하면, 이미 십계명을 못 지키는 걸 확정된 상태에서 십계명을 안겨줍니다.

 

그러면 로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율법을 준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 되게 우리의 모든 입을 저주 앞에 두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모든 율법 주는 것이나 출애굽하는 모든 기능이 어디에 투입되느냐 하면, 코끼리나 코스모스가 아니라 어떤 주체, 인간에게 투입되는 겁니다. 그 인간은 그냥 인간이에요.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그냥 인간이라 하지 않고 언약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참 어려운 용어가 나왔어요. 주체. 이것을 영어로 하면, self인데 셀프는 ego와 다릅니다. 그래서 언약의 자아가 아니고 언약의 주체가 돼버려요. 언약의 자아와 주체의 차이점이 뭐냐? 알아듣든지 모르겠다. 할 수 없어요. 알아서 들으세요. 여러분 알아들을만하다고 믿습니다.

 

자아는 영어로 we가 아닙니다. I가 돼버려요. 그런데 주체는 분명히 셀프라고 돼있지만 사실은 we 안에 셀프가 돼요. we 안에 셀프와 we 없는 셀프의 차이가 뭐냐 하면, 그냥 셀프면 나의 개성은 내가 살아온 인생이 내가 되지만 언약 안에 셀프가 되면 외부에서 마련된 그 자아가 그대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게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우리 허락도 없이 그냥 침투해버리지요.

 

그게 우리 믿음은 죄로 깨어져야 되고 예수님이 지상에서 다져진 믿음이 우리 믿음으로 들어오고, 예수님의 소망이 우리 소망으로 대체 되고 주님이 아버지와 관계한 그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을 대체해버립니다. 그러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는 겁니다. ‘헌집 다오 새집 줄게’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면 헌집을 고물로 받아들이고 새 것을 주는 모든 작업에 주님께서 관여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주체를 발생시키는 새 언약의 특징이에요.

 

이로써 개인 구원은 없어요. 집단 구원 이외는 개인 구원은 없어요. 찾아오기는 개인으로 찾아오되 we라는 확정된 속성으로 우리에게 집어넣기 때문에 찾아오는 순간 나는 에고/자아가 아니고 셀프가 되는 겁니다. 우리 속에 내가 되는 겁니다. 나의 속성은 강탈당하고 일반적 속성, 주님과 더불어 있는 그리스도 몸과 지체된 그 속성이 우리 속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형제를 대할 때 그냥 대하지 않고 경유해서 대하는 겁니다.

 

머리 되신 주님을 대하게 되면 내가 죄인 된 것처럼 저분도 죄인이다. 그런데 저분은 어떻게 구원받았을까? 그 경유를 다시 그리스도고 당겨오면 주님의 피로 용서받은 입장으로 나에게 만남이 이뤄졌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만약에 피자를 못 먹는다. 그러면 어제 저녁에 한 것처럼 저분은 피자를 못 먹는 에고가 아니고 피자 못 드시는 셀프를 예수님으로 부여받은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저분의 개성이 아니죠. we라는 고물 소속이기 때문에 저분이 만약에 편찮다하면 내년에 내가 동일한 것을 할 수 있고, 저분이 만약에 창기라면 나도 내년 되면 창기 될 속성이 있고, 저분이 강도라면 나도 강도 될 속성이 공유돼있지요. 그러니까 어떤 죄인이라고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받은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형제 되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친교단체, 친목회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에고가 모인다고 we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중국에서 이 강의하는데 중국 목사들이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I 모이면 we가 되는 게 우리 상식이잖아요. 그게 아니고 I를 깨야 준비된 we가 있는 겁니다.

 

오늘 주인 되시는 집사님이 피자를 준비했는데 그것도 모르고 제가 집에서 피자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준비된 피자에 대한 내가 사적으로 모독한 게 되거든요. 이미 we 안에 거룩이 있는데 내가 따로 성스러운 욕구를 발휘시켜서 이 정도로 착합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에 대한 모독이에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몰라요.

 

키르케고르란 유명한 기독교 실존주의 철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예수님이 착하다고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어요. 그것은 주님을 빙자한 자기 착함의 우회적인 과시거든요. 이렇게 되면 이천 년 신학 다 바뀌어야 돼요. 어디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다 뒤집어져야 돼요.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유대교 신학은 뭐냐? 홍해를 건너온 것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구원받았다. 이제부터 율법을 준 것은 구원받은 사람끼리 율법을 지킴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유대교 신학이라는 것을 그전의 사람들은 몰랐던 거예요. 칼빈이 성화론을 주장하면서 그게 바로 이미 선배들, 유대교 신학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연장이란 것을 몰랐던 겁니다. 천주교와 싸우느라 바빠서. 유대교를 반복한 거예요. 기독교적 유대교가 돼버렸어요. 그게 바리새인 되는 거예요. 누가누가 잘하나. 금요일 다섯 시에 어린이방송처럼 제목 자체 누가누가 잘하나에요. 교회 와서 누가 헌금 많이 하고, 기도 오래하고, 누가 목사님 잘 섬기고, 누가누가 잘하나.

 

두 번째 문제가 뭐냐 하면, 형상을 잃어버렸잖아요. 형상을 되찾는 경로는 잃어버린 경로를 밟아가야 돼요. 그런데 잃어버린 경로를 완전히 무시하고 우리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윤리, 도덕으로 시도하게 되면 이것은 세상적인 철학적 형상론입니다. 그건 세상적 윤리, 도덕이에요. 정말 형상을 잃어버렸다면 그걸 되찾는 방법은 잃어버린 경로를 밟아나가서 되찾게 돼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드라마에 보면 출생의 비밀이 있어서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재혼했다. 그런데 버려진 딸의 아버지 직업이 소매치기여서 소매치기했다. 그런데 우연히 남자친구를 통해서 엄마가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만나고 난 뒤에는 너무 잘 살아서 어떤 이질감을 느껴서 “난 엄마라고 부르기 싫어.” 이건 셀프가 아니고 에고가 되겠지요. 자기는 자기로 인한 주체, 엄마 없는 에고를 임시적으로 주체성, 셀프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엄마의 자리가 엄마를 만날 때 진정 엄마와 화합하려면 그때 엄마가 왜 자기를 버릴 수밖에 없는지 엄마를 이해해줘야 되지요. 그런데 이미 엄마와 떨어진 상태에서 형성된 자기 주체로 엄마를 싫다고 하면 곤란한 겁니다. 방금 예는 케이블에 나오는 [유나의 거리]라는 게 있어요.
 
 

 

-목사님, 에고와 셀프를 한국말로 어떻게 표현될까요?
 
 

에고는 자아, 셀프는 자기. ‘자기야’라고 하는 오글거리는 것 있잖아요.

 

-개별자?
 
 

개별자는 집단과 연관해서 하는 용어고. 개별자라는 것은 어떤 집단을 먼저 전제로 하고 하는 거예요.
 
 

-we가 집단으로 보면? 우리라고 이야기하시니까.
 
 

집단에서 개별자로 돼버리면 부분집합으로 들어갈 수 없어요. 이 정도만 하면 돼요.

 

 

지금 제가 하는 것은 애굽에서 나올 때 에고로 나왔다가 이제는 하나님 이름으로 하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에고 시대는 날아가고 주님의 이름으로 대신 표현해야 될 셀프로 살아간다는 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라는 집단체제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집단체제를 아까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경유해서 창기, 세리도 구원받고 하려면 그것을 경유하는 분은 집단이 아니고 한 명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여호와 이름으로 또는 하나님 이름이라고 합니다.

 

지금 신학교 교수들도 어려워서 안 가르치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무도 가르친 적이 없어요. 책에도 안 나옵니다. 구약에는 분명히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이 구분돼있는데.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이름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언약의 실행자에요. 그래서 이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분을 이름이라 해서 그 이름은 존재라는 표현을 하지만 사실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입니다. 바람 같아서 붙잡을 수가 없어요. 이름은 우리를 붙잡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은 기능적이기 때문에 환경 따라서 계속 기능이 바뀌어요.

 

율법 지키라고 해놓고 율법 지키면 죄가 되는 기능으로 또 바뀝니다.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적들이 물러간다고 해놓고 언약궤 앞장세우다가 블레셋에 언약궤를 빼앗깁니다. 그런 관점으로 구약 전체를 통으로 뚫어야 돼요. 민수기 10장에 나오지요. 왜 언약궤 앞장세우면 적들이 물러간다고 해놓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 앞장세우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겼지요. 왜 하나님은 이랬다, 저랬다 하느냐는 말이지요. 성경에서 일관성을 뽑아내지 못하게 되면 설교하는 본인이 혼란스러울 정도입니다.

 

두 번째 해봅시다. 잃어버린 경로를 밟아서 잃어버린 경로로 돌아가야 된다. 따라서 자기 엄마를 만날 때 “엄마는 날 버렸어.” 이렇게 하지 말고 옛날에 왜 나를 버렸는지 무엇 때문에 버렸는데 엄마가 버릴 때 아빠는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알 때 엄마는 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통감하면서 그 사람은 엄마와 셀프로서 제대로 된 결합을 할 수 있습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에 당신 같은 남자는 두 번 다시 보기 싫어. 울고불고 하는데 상대방 말도 들어봐야 되거든요. 안 들어보고 일방적으로 상해서 그렇게 하면 정말 극단적인 경우가 생기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린 그것마저 버림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한 재료로 활용하신다는 겁니다. “잃어버려도 괜찮아.”라고 해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됩니다. “주님이여, 이번에 제가 너무나 나쁜 짓을 했어요.” 할 때 주님은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고 하면서 구원을 해주시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예를 들 때 제가 한 동안 든 예가 뭐냐 하면, 아프리카 밀림에 가면, 날아가는 파리가 나무 밑에 있으면 긴 혀가 나와서 양탄자 굴리듯이 접어서 입 속으로 집어넣는 그런 동물 있잖아요. 도마뱀도 있고 그걸 전문하는 게 있어요.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범죄 했습니다. 나무 밑에 있어요. 파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혀 돌돌 감아버린 겁니다. 돌돌 감을 때 이렇게 범죄한 것까지 필요한 범죄였다는 겁니다. 구원에 필요한 범죄를 우리가 저지른 거예요. 필요해서 범죄했다 이 말입니다. 더 심하게 이야기해서 죄 지어야만 하는 존재가 인간이란 뜻이에요. 유일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아담은 예수님의 표상이다. 그냥 모델이었고 그림자였고 진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인자,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유사품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안개에요.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 소모품이고. 인생이란 시편 90편처럼 넓으면 손바닥이잖아요. 좁히면 손바닥 자체가 날아가 버리잖아요.

 

90년 살았으면 90년 살았다는 게 남는 게 아니고 죽는 그 날만 남아있어요. 89년 11개월 29일은 이미 소모되고 말았어요. 건전지 같으면 약이 다 달아서 딱 하루치만 남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치만 부여받은 거예요.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고. 그냥 하루치만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기도문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며칠 양식을 달라고 하던가요? 딱 하루치 양식만 달라는 거예요. 완전히 만나에요. 우리가 부여받은 것은 만나입니다. 하루치만 적당한 존재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거든요. 인간은 따로 있고 너는 그 인간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모사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인간은 잃어버린 형상이 돼야 됩니다. 잃어버린 형상을 자기의 재킷으로 여기고 뒤집어쓰면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한 방금 그 이야기가 로마서 8장 3절에 나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예수님께서 입은 것이 뭡니까? 그냥 죄 없는 육신 몸이 아니고 죄 있는 육신의 몸. 그러니까 죄 있는 육신의 몸은 아담이 그 몸이거든요. 아담의 몸이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데 필요한 조치가 인간이 죄 짓는 게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궁극적인 죄는 뭐냐 하면, 내가 죄 지었다는 사실, 죄 지음을 당했다가 아니라 그게 옳은 이야기인데 인간은 에고에 머물기 때문에 내가 죄 지었다. 주님께서는 네가 죄 지은 적이 없어. 왜? 우리는 죄를 몰라요. 유일하게 죄를 아시는 순간은 예수님뿐입니다. 죄의 전부를 예수님이 언제 알았느냐?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을 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할 때 유일하게 저주를 알고 유일하게 죄를 알고 죄의 깊이를 통달하신 것은 그 순간밖에 없어요.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고 특히 한국에서 감리교, 통합 측, 자유주의 진영에서 대 히트를 친 사람이 몰트만입니다. 그 사람이 지은 책 중에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 있어요. 그걸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봤거든요. 십자가에 대해서 몰라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가 십자가에 대해서 몰라요.

 

몰트만은 기존의 신학자와 동일하게 주님을 어떻게 이해하면 우리한테 유리하게 작용하느냐? 지금 에고를 전제로 하고 있어요. 내가 없는 상태에서 십자가 속에 들어가서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저 십자가가 나한테 무슨 보탬이 되느냐고 생각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니 십자가는 그걸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본인은 몰랐던 거예요. 십자가 피를 찍어 바를까. 그 사람은 기존의 삼위일체 이론에 의해서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버릴 수가 있느냐? 그걸 내재적 사랑이라고 표현한다고 하거든요. 그 내재적 사랑이라는 것은 몰트만이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헤겔이란 사람이 변증법에 한 이야기란 말이죠. 헤겔 철학에서 나온 이야기란 말이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삼위일체 내재적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버린 아들을 되찾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완성한다는 것이 아무리 옳다하더라도 현재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어떤 사슬은 끈은 연결은 거기서 전혀 나타날 수 없어요.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아버지 폐쇄적인 관계인데 어떻게 외부에 놓여져 있는 것에 그게 주어집니까? 주어질 수 있는 근거가 그 안에서 찾을 수 없다면 하나에 허구적인 이론에 불과한데요. 그래서 십자가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죄는 뭐냐 하면, 죄를 모르면서 이미 죄 속에 있다는 겁니다. 차라리 로마서 5장대로 이야기하면 맞아요. 몰트만처럼 하지 말고. 인간이 죄 지었는데 어디서 죄 지었는지 따지지 말고, 그냥 인간은 태어났으니까 죄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게 로마서 5장 10절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대로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죄 지었다고 하지 말고 태어난 것이 산후조리원이 아니고 간판이 죄라는 이름의 산후조리원에서 태어난 거예요. 이미 죄 속에서 태어난 거예요.
 
 

그걸 누가 아느냐?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고백한 겁니다.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모친의 죄가 아니겠지요. 모친의 죄 중이니까 모친 빼버리면 그냥 죄 중에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죄 안 짓는 내가 아니라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이 그동안 내가 감추었던 나의 본래의 모습인데 뭐 잘났다고 상한 심령을 곱게 포장을 했는지 이제는 그 포장을 벗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께서는 번제를 원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그냥 고물 그대로 가져오너라. 헌집 다오 새집 줄게. 헌 몸 그대로 갖고 오게 되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이것 잘했습니다. 주체를 앞에 세우지 마세요. 주어를 앞에 세웠는데 내가 했다고 하지 말고, 나를 목적어로 세우세요. 주께서 하셨고 나는 주님이 하신 일을 당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주께서 하신 일에 맨날 당하기만 했습니다. 양파껍질 벗기듯이. 나는 이런 성스러움을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그것조차도 위선이었습니다.
 
 

다윗에게 범죄 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어요. 어제 오후에도 이야기했지만. 어제 오후 강의가 어려웠습니까? 피곤해서 그런지 안 그러면 탐색하느라 그랬는지. 저 인간이 무슨 소리하는지 조사한다고 그랬는지. 천주교는 자유의지가 있어야 책임을 묻는다고 했는데 저는 그걸 반대한다고 했지요. 그건 천주교의 잘못이라고 했지요. 책임이 있는 곳에만 벌을 물을 수 있다는 게 상식인데 그건 잘못이라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것은 밧세바가 뒤태가 잘 빠져서 그래요. 좀 뚱뚱했으면, “에이 씨. 밑에 이상한 여자 이사 와서 눈만 버렸다.” 이럴 건데 왜 매력덩어리냐 이 말이죠. 이건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어제 목사님이 강의 시작하자마자 질문했잖아요. 신이 되고 싶어서 따먹었다. 인간은 신이 뭔지 몰라요. 뭔가 알고 있어야 되고 싶다가 되거든요. 그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도대체가 악마가 인간에게 뭘 노리느냐는 그 문제는 악마의 일방적인 주장이지 당사자 아담은 악마의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가 분명히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악마를 알았으면 악마를 탈출할 비법을 만들었을 거예요. 인간은 이야기합니다. 나는 악마고 뭐고 누구한테 매인 바 없다. 그게 바로 악마에 매인 거예요. 악마의 생각? 아니야. 내 생각. 이렇게 돼있어요.
 
 

그 원인은 주님이에요. 먹임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과실로 인간 앞에 제일 중앙, 깊숙한 곳에 안 들키는 곳이 아니고, 늘 보고 따먹을 수밖에 없는 대형백화점에서 명품 의류를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디스플레이해서 여자들로 하여금 안 사고는 못 배기게 하는 겁니다. 그 옷에다 루이뷔통 신상 가방 하나 놓고 고급 지갑 해놓고 이래도 안 사나 보자. 처음에는 견뎌요. 예수 믿는데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알기는 알아요. 야고보서에 나오는 이야기니까. 소용없어요. 성경은 우리 변화에 보탬이 안 됩니다. 성경은 보고 지키지 말라고 준 게 성경이에요. 보세요. 지키지 마세요. 안 보는 게 더 문제지만.
 
 

보고 지키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용도지 내 잘남을 증거하는 용도는 아닌 겁니다. 우리는 탓을 하려면 조상 탓하시고 조상은 독사한테 미루세요. 모든 책임은 아담한테 미루세요. 그분 잘못으로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잉크 속에서 태어났고 상한 심령으로 태어난 겁니다. 죄를 거기에 더 보탠다고 악한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누구나 인간은 악한 자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을 품고 있습니다.
 
 

20세기 들어와서 유명한 노벨상 받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 특히 카뮈의 [이방인] 같은 작품을 보게 되면 이겁니다. 인간은 혼자는 잘난 척해도 상황이 들이닥치면 자기 원치 않는 행동이 나오게 돼있다. 이것이 부조리다. 라인홀드 리버가 미국의 신학자거든요. 그 사람의 책에 이렇게 돼있어요. 왜 개인은 도덕적인데 집단화되면 완전히 비도덕적인 사회가 되느냐? 도대체 그 원인이 뭐냐? 정답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알 수 없어요.

 

남자 하나는 괜찮아요. 예비군복 입으면 휘파람 불고 왜 그렇게 돼요? 갑자기 집단화되게 되면. 그걸 밝혀낸 사람 없어요. 밟힐 수가 없어요. 개인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해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하는 겁니다. 집단 속에 일부인데 그걸 개인을 먼저 설정하고 난 뒤에 집단은 이렇습니까? 그건 현실과 다른 질문을 한 거예요. 개인은 없습니다. 집단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거예요.

 

자기가 성실하게 사업했다. 소용없습니다. 저쪽에서 imf 터지면 가만있는데 다 말아먹게 돼있어요. 자기 잘못 아닙니다. 성실했어요. 정직하게 물건 제조하고 팔았습니다. 부도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타이밍이지요. 시대를 잘못 탄 거예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사업은 도박이죠. 고스톱과 사업의 차이는 없어요. 패가 잘 들어오면 따고 못 들어오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땡겨봐야 패 안 들어오면 접고 다른 것 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는 파도에 실리는 물방울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옛날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물방울과 파도의 차이점, 불교에도 이런 게 있어요. 물방울이 파도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냥 바다 속의 일부에 불과하지요.

 

그러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제발 이것은 내 책임이요, 내 탓이요 하지 마세요. 내 탓이요 하는 것이 가장 간교한 죄의 극치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하세요. 내가 잘못한 것은 다 주님 탓입니다. 주께서는 이제야 네가 마귀와 함께 있다는 본색을 비로소 솔직하게 고백하는구나. 그래 너와 함께 있는 마귀를 내가 십자가로 승리했다. 이젠 마귀와 상대 안 해도 돼. 죽는 것 두려워하지 말고(마귀는 죽기를 무서워하는 너를 자꾸 협박, 공갈하지만) 이미 너의 생명은 살았고 너는 이 땅에서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에 간직돼있느니라. 하늘나라 은행에. 골로새서 3장 5절의 말씀, 땅의 것을 생각하는 모든 것은 우상숭배니라.
 
 

그런데 제가 이런 말하기가 겁나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땅의 것, 탐심을 없앤다고 난리를 쳐요. 그러면 그야말로 내가 욕 얻어먹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냥 막 사세요. 뭔가 옷 한 달 동안 입으시고 빨래하지 마시고 입을 채로 펄럭여줘야 냄새나잖아요. 그 냄새를 피우시기 바랍니다. 냄새를 피워줘야 계속 상한 심령이 되거든요. 성경말씀에 상한 심령이 돼야 된다면 우리는 상한 심령을 벗어나지 말고 상한 심령이 되라는 그 말씀 속에 놓여 살면 되는 거예요. 어렵지 않아요. 우리의 살아온 버릇이 그것이기 때문에.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했다고 상한 심령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고 말씀이 그렇게 지정했으면 지정된 것에 그냥 주를 경유해서 상한 심령을 수용하면 되지 개과천선하지 마세요. 개과천선은 나를 주인공으로 삼는 하나에 소설이 되고 우상숭배가 됩니다.

 

첫 번째는 유대교사상을 몰라서 형상을 오해했고, 두 번째는 타락한 경로를 주님이 책임질 문제를 내가 책임져서 형상을 회복하겠다고 경로를 가는 것은 주제 넘는 짓입니다. 아담이 못한 것은 두 번째 아담이 해결합니다. 믿습니까? -아멘. 그 사이에서 우리는 빠져주세요. 어른들 노시는데 우리는 제발 빠져주세요. 전쟁, 우리 전쟁 아닙니다. 마귀를 이겨요? 못 이깁니다. 주님이 마귀를 이기게 해주시는 겁니다. 우는 사자가 달려들어도. 우리는 주님한테 목줄이 묶였지 저쪽에 묶인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설교 때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그 예가 지금도 들어보면 스스로 은혜 받는 예가 있는데 얼마 전에 들었던 예에요. 노사연이 불렀던 <님 그림자> 나는 최고의 은혜, 성경 빼놓고 너무 은혜가 돼요.

 

 

님 그림자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황한 달빛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저만치 앞서 가는 님. 보세요. 님이 있잖아요. 왜 현대인은 홀로 삽니까? 잘못은 내가 책임지고.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님이 있는데 그 님은 어두운 이 세상에서 달만 있어도 님에서 님 그림자가 나오죠. 그래서 제목이 <님 그림자>에요. 뒤따라가는 여인은 앞서가는 남자의 그림자를 밟아가죠. 그 순간 그 여인네는 뭐가 날아가 버려요? 에고가 없고 님의 셀프의 연장이 돼버립니다. 나는 님의 셀프 속에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분이 한 발자국 떼면 나도 한 발자국, 그분이 두 발자국 떼면 나도 두 발자국, 먼 곳을 바라보면서 님이 계신다는 그 사실을 만끽하기 바빠서 내가 몸이 아픈지 교인수가 몇 명인지 세 명 있다가 두 명 나갔는지 그냥 님 그림자. 노랠 불러야 되는데.
 
 

 

-목사님 말씀하실 때 우리가 죄 지은 것도 다 하나님 안에 있다. 그래서 죄에 대해서 예수님이 죄 값을 치러주시고 큰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권한에 속한 것이라고 할 때는 선택받은 자한테는(아멘) 다 되는 논리인데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사실 이 사람한테는 죄 지은 것이 구원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사람들은 죄를 지은 게 심판을 받기 위한 것이
 
 

지금 목사님 위치가 바뀌었어요. 주님이 선택했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 순간 선택받은 자가 주님의 위치에 올렸어요. 선택받은 자, 이렇게 주체 위치로 옮겨버리면 반칙입니다. 안 됩니다. 주님에 의해서 선택받은 자는 방금 그렇게 생각한 것은 맞는 이야기인데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허용하지 않는 관계에요. 이렇게 되면 나는 선택됐는데 왜 너는 선택 못 됐느냐고 해서 주님이 판정할 것을 선택받은 내가 판정관으로 서고 심판자로 나서버리면 야고보서 2장에서 네가 뭔데 형제를 심판하느냐? 거기에 걸려들게 돼있어요.
 
 

주님께서 일을 맡기시면 결과적으로 선택된 자인 것을 확인될 뿐이지 그걸 확인되었으니까 가져오게 되면 그건 9월 26일 생각이면 모르지만 9월 27일로 가져올 수 없습니다. 이미 9월 27일에서 보면 선택받은 나를 믿어버리는 믿음의 대상이 돼버리죠. 그래서 주체 위치를 조심해야 됩니다. 결과적으로 선택된 자가 되어야지, 되었으니까 일단 되었다고 치고 이렇게 나가면 안 됩니다. 방금 님 그림자 틀어준다고 해놓고. 님 그림자 있으니까 10년 간 밟았으니까 이제는 혼자 걸으면 안 돼요. 10년 간 밟아도 또 앞에서 님이 당기고 있어요. 갈 데까지 빨리 와. 20년 되도 또 와. 항상 주체 자리에 있고 나는 주님의 결실물이고 열매에 불과한 겁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에 불과한 거지요. 주체가 우리 자리에 있으면 안 됩니다.
 
 

 

조금만 하고 쉬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1장에서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해서 드디어 우리라는 개념이 나오지요. 우리라는 개념을 하되 지상에서 나라는 개념으로 보시면 돼요. 여기 우리라는 용어를 지상에서 평소에 우리는 나만 가지고 에고가 되잖아요. 에고를 뜯어보면 나만 달랑 있잖아요. 이게 엄청난 오해인 거예요.

 

이렇게 그리면 제일 좋은데 목사님 같은 경우에 많은 주석이 있어서 오히려 방해가 되는데. 표면에 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형상대로 너를 만들었다고 하면 우리는 이해되잖아요. 이해된다는 자체가 잘못된 성경이에요. 이게 우리가 돼버리면 난데 왜 우리가 나오지? 이렇게 당황스러워할 때 이미 성경을 대하는 우리 자신이 형상을 떠났다는 것을 각오하란 말이죠.

 

저는 어떻게 하느냐? 나에서 우리로 어떻게 전환시키느냐? 하나에 괴암, 바위덩어리, 표면의 나라도 괴암이 되면 우리가 되지요. 만약에 지진이 일어나서 분명히 지표면 중에 한 면인데 솟구쳐 올라오면 뿌리까지 보이지요. 나라고 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위에서 볼 때는 나와 관계가 되지요. 나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사실은 입체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창세기 1장 26절에 보면, 우리에 속한 분이 지상에서는 나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과 막 먹는 거예요. 주님 안에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걸 모르고 내가 나밖에 모른다는 인식 하에 그런 한계 된 인식론으로 내가 한 사람으로 나니까 예수님이 한분이시니까 당신도 너가 되는 거지요. 그 자체가 형상을 잃어버린 상태에 나온 거란 말이죠. 그래서 입체적으로 나라는 오해를 끌어당기면 우리가 되겠지요. 그래서 구약은 신약을 경유해서 예수님을 경유해서 구약을 다시 보게 되면 우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집합을 우리라고 한다 이 말이에요.

 

 

-우리 속의 나.
 
 

그렇지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기 나는 주님에 의해서 다시 편입되게 되면 비로소 우리가 보이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 기도할 때 네가 나와 하나가 된다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우리에 대해서 칼 바르트를 비롯한 많은 주석가들이 너무나 많은 주석을 냈어요. 그 주석 가운데 하나가 히브리적 용어 자체가 엘로힘과 여호와가 차이가 나는데 엘로힘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복수적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이건 히브리 용어뿐만 아니고 근동지방에 모든 신을 표현할 때 엘로힘, 복수 개념을 사용한다고 알브라이트를 비롯한 유명한 여러 학자들이 주장했거든요.

 

그거는 아니에요. 그건 잘못된 겁니다. 원어 자체가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한 거기 때문에 우리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예수님만 알고 있는 하나님 형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요. 당연하고 우리 힘으로 해결 안 된다는 자체가 이미 우리 자신의 해석법에 문제 있다는 것을 수용하면 돼요.

 

그 우리는 나중에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아버지와 우리가 하나 된다는 그 우리를 앞당겨서 보여주는 그림자로 보신다면 간단히 해석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가 돼요. 나는 없어지고 우리 속의 나가 되는 그게 우리의 목표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당장 나라고 설명할 수 없지요.

 

또 어떤 사람은 해석하기를 하늘나라 천사가 함께 있어서 우리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또 이 지상에서 쓰는 존재론으로 하늘나라까지 확장시킨 것이기 때문에 애굽의 확장이지 전혀 낯선 해석이 아니거든요. 그것도 해석이 잘못됐습니다. 성경을 예수님을 경유해서 다시 보게 되면 나가 모여서 우리가 되는 그런 우리 개념이 아니고 우리가 먼저 있고 우리를 증거하기 위한 그 속에 포함된 나라고 그 해석에 의한 우리라고 보면 제일 적당합니다.

 

생각을 바꾸세요. “하나님은 나의 형상대로”라고 꼭 그렇게 해야 된다는 고집, 우리의 납득을 위해서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인정하면 문제는 깨끗하게 해결되는 거예요. 내 쪽에서 잘못했다고 하면 간단한 문제를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바꾸라고 하는 것은 이건 너무 큰 억지가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203.♡.42.222) 14-10-25 15:10 
20140925 미국동부오전d
 
(강의:이근호 목사)
 
 

 

2장에 선악과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선악과 위치가 중요합니다. 크게 써야 돼요. 중요하기 때문에. 자리입니다. 어제 오후 강의하고 난 뒤에 고함지르지 말라고 하는데 사실 변명 같지만 설교자가 고함지르는 것은 들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재촉하는, “정신 차려 이놈아!” 정신을 안 차리면 다음 단어가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한테 질책하는 거예요. 그건 목사님들은 다 그래요. 그 다음 생각이 흐름이 이어지기 때문에.
 
 

어쨌든 자리가 중요합니다. 어떤 자리냐? 그걸 괄호를 치겠습니다. 중심자리입니다. 중심자리에 뭐가 있느냐에 따라 에덴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만약에 중심자리가 깨지면 에덴 깨집니다. 따라서 해석을 주께서 주신 자리라고 해석을 출발해야 할 텐데 우리는 에덴을 볼 때 나 여기 있음, 에고, 행복할 권리 있는데 불교적으로 생로병사, 창세기 3장으로 하면 이마에 땀 흘리고 해산하는 아픔과 연약한 존재로서 남자에게 구박받는 가운데서 남편을 지향하는 그런 이상한 존재로서 여자의 운명, 남자의 고생.
 
 

나부터 출발하면, “신이시여, 회복케 하옵소서.” 자동적으로 나와요. “사랑 많으시다면 서 그 사랑 어디에 써먹으려고 아끼십니까? 저 불쌍하잖아요. 도와주세요. 저 행복할 자격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행복의 수준에 도달되게 하옵소서.” 이것은 바로 뭘 날려버리느냐 하면, 내 중심이 아니고 자리중심이란 걸 완전히 놓치게 되는 거예요.

 

이 자리만 들어가면 오지 말라는 행복도 오게 돼있는데 엉뚱한 자리에서 주님에게 오라는 거예요. 그 자리가 아닌데 다른 자리에 가서 주님에게 합류하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합류될 수 없지요. 이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복의 자리입니다. 에덴이란 뜻이 즐거움의 자리거든요. 이 자리만 즐거움의 자리고 나머지는 이 자리와 관계와 끊어지면 저주의 자리입니다.

 

그 저주의 자리에 인간들이 놓여있다면서 날 생각해서 자리 묵살하고 그냥 도와달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 자리가 복의 자린인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가 앉은 방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자리가 방석인 근거는 신약에 나옵니다. 중심이 유지되게 되면 그 효과로 에덴동산은 전체가 자리가 됩니다.

 

목사님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를 대세요? 에스겔 47장. 새 성전을 만드는데 거기서 물이 나오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성전 행사를 놀렸습니다. “너희 지은 성전, 물이 안 나오지?” 얼마나 놀리는 말씀입니까. 어떤 성전도 물 나오는 성전을 인간이 지을 수 있습니까? 못 짓지요. 건물은 지었는데 물 나오려면 거기에 수도 공사해야 돼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실로암에서 물을 길러서 성전에 부어서
 
 

물이 안 나오면 하나님이 원하는 새 성전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7장에서 네 배에서 영원토록 생수가 나올 것이다. 그 이야기가 창세기 2장에 에덴동산 중앙에서 물이 나옵니다. 네 개의 강이 나오지요. 첫째는 비손, 두 번째가 기혼, 세 번째는 힛데겔, 네 번째는 유브라데. 따라서 이 세상의 창조의 중심은 에덴동산이다. 그 에덴동산에서 물이 나와서 생명이 고기가 살고 넘쳐나는 겁니다.

 

그걸 그대로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나오는 물은 그냥 흐르다마는 물이 아니고 점점 깊이가 더하지요. 그 강물에는 물고기가 뛰놀고 생명을 부여받습니다. 그 중심자리를 에스겔 마지막 48장에 보면 왕의 자리고요, 그 주변에 제사장 자리가 있고, 그 주변에 이스라엘 자리가 터 잡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나라가 완성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여호와삼마, 하나님이 바로 거기 계시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2장에 생명수 강이 흐르는 그 대목이 또 나와요. 요한계시록 해석은 한두 시간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어렵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구약에 있는 전 말씀을 가위로 잘라서 퀼트라고 하지요. 자수 비슷한데 천을 잘라서 예술작품 만드는 것 있잖아요. 되게 비싸데요. 중국에서 살려고 들어갔다가 금방 나왔는데.
 
 

요한계시록은 흐름이 없어요. 예언서를 잘라서 다니엘, 에스겔을 마구 했고 창세기, 출애굽기를 무차별적으로 붙였기 때문에 역사적 해석으로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묵시적으로 해석해야 되지요. 시간이 고정돼야 됩니다. 동결된 상태에서 해석이 돼야 됩니다. 그렇게 해석해야 신천지가 잘못된 줄 아는 거죠.

 

그러면 인간은 뭐냐 하면, 네가 이 자리를 보존할 수 있는 자격자인지 보자는 겁니다. 이 자리는 인간은 차지하지 못하고 인간은 이 자리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인간이 마음 놓고 동산의 모든 실과를 따먹는 것은 이 자리가 근사하게 유지될 경우에만 보존되는 거죠.

 

그래서 이 자리에서 외치는 유일한 계명이 뭐냐 하면, 죽음을 전제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선악과 과실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은 에덴동산 자체가 죽음을 전제로 해서 설치돼있다는 겁니다. 만약에 에덴동산에 뭐 하나 잘못 건드리면 죽음이 너희를 덮칠 것이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죽음에 대해서 인간은 압니까, 모릅니까? 전혀 경험한 바 없어요.

 

그런데 경험한 바 없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이 에덴동산의 모든 조치,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죽음이라는 것, 죽음과 현재 선악과 따먹게 생겼으니까 온전하게 생명의 강이 흐르잖아요. 생명과 죽음, 모든 것은 장차 이 자리에 오실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한 생명의 공간, 천국 만드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영원한 죽음의 공간, 지옥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은 무엇인가? 이 죽음은 여러 가지 할 수 있지만 어렵기 때문에 하나만 이야기합시다. 창조 전으로 되돌아가는 거죠. 창조행위의 무효현상. 창조 전으로 되돌아가면 흙을 통해서 인간 되었지요. 흙이었는데 인간이 되었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의 약점입니다. 인간 속에 흙의 요소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될 텐데 지금은 흙은 더 이상 없다고 여기면서 살아가게 돼있어요. 인간의 시간 요소, 과거는 흘러가고 현재만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때는 흙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흙은 아니라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건 너의 일방적인 생각이고 네가 만약에 범죄 하면 어디로 돌아간다? 너는 아담이니,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러면 흙이 중요합니까, 인간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흙에서 인간, 인간에서 흙으로 가는 이 과정이 중요합니까? 어느 게 정답이겠어요? 과정이 정답이에요. 그 과정이 있을 때 비로소 드러나지 않던 자리가 품고 있던 하나님의 비밀이 드디어 공개되는 겁니다. 그 과정을 보여줄 때. 존재적 해석법은 여기서 날아가지요. “나라는 존재에 하나님의 존재가 무슨 도움을 주시겠습니까?”라는 존재적 인식은 과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런 질문하지 말기.

 

그 질문을 하다가 그 질문이 잘못됐다는 걸 안 사람이 바로 아하수에로 왕의 별이란 이름을 가진 왕비가 있었어요. 이름이 에스더지요. 에스더가 한 유명한 말, 죽으면 죽으리라. 더 말하면 죽으면 죽는 것이 내가 해야 될 이 왕국에서 주께서 맡겨주신 역할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주관하시고 나는 그 역할을 일부 담당하는 것이 제가 종으로 할 일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주체성은 누구한테 헌납했어요? 헌 것 받고 새 것 주시는 거예요. 에스더 받고 에스더 주시고. 그런데 받은 에스더는 에고의 에스더고, 부여받은 에스더는 셀프가 주어지고. 진짜 셀프는 예수님의 것과 연결된 끊어지지 않는 에스더가 주어지면서 그 여인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남편에게 찾아갑니다.

 

그 순간 아하수에로 왕은 눈이 열리면서 세상에 그렇게 예쁠 수가. 이것은 에스더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미 아하수에로도 말려들었어요. 누구한테? 에스더의 자질이 아니고 에스더의 솜씨도 아니고 에스더가 화장해봐야 소용없어요. 이미 에스더 속에 있는 주님의 화장발이거든요. 그 화장발에 바보 같은 아하수에로라는 남정네가 말려들었어요. 그래서 에스더의 주제가 뭐냐 하면, 미인은 권력보다 세다는 겁니다.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의 이성은 죽어야, 무릎을 꿇어야 돼요.
 
 

그게 칸트의 판단력비판입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력비판하고 그 다음에 마지막 판단력 비판은 미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미학은 숭고의 미학입니다. 광엄의 미학. 할 말을 잊어버리는 것은 그랜드캐니언인데 갈 계획 거의 무산됐습니다. 처남이 하는 말이 반드시 그랜드캐니언 가봐야 된다. 아마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너의 이성, 너의 판단이 초라해지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허무해지는 즐거움. 허무는 어떻습니까? 슬프잖아요. 내가 허무해질 수 있다는 행복에 잠기게 된다는 것이 그랜드캐니언, 처남이 이런 이야기한 게 아니고 내가 주를 단 거고 처남은 그냥 가보라 했고.
 
 

그게 바로 칸트의 숭고의 미학입니다. 모든 언어를 닫아라. 그걸 유구무언이라 하지요. 이사야가 봤던 하나님은 그저 유구무언이지요. 욥이 재를 뒤집어쓰고 했던 고백이 뭡니까? “주여, 제가 유구무언입니다.” 저에게 고난을 주십니까하는 이런 소리가 얼마나 망발인지. 욥은 자기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고. 거기가 예수님 자리거든요. 십자가 고난 자리란 말이죠. 그런데 그걸 모르고 에고가 있었던 거예요. 왜 하필이면 고난을 주십니까. 에고로 셀프는 상대하니까 대화가 안 되잖아요.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태어나게 하지 말지 태어나게 해서 고생시키십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네가 정신 못 차렸구나. 염소새끼 있는데 봤냐. 하늘의 별, 북두칠성이 어떻게 만들었는지 네가 내 자리에 있었는가?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는가? 나는 모든 것을 비켜, 네가 딛고 있는 자리를 볼 거야. 너는 네 자리를 보지 못하고 너만 바라보고 있어.” 이왕 태어난 것 좀 잘해주지.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게 죄입니다. 그 죄를 주께서는 대신 죽으신 거예요. 죽으시고 자리 만드신 겁니다.

 

어떤 자리? 죄인도 믿음으로 의인되는 자리를 만드신 거예요. 그 자리는 이미 피가 고여 있는 자리고 어린양의 피를 발라서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는 출애굽 당시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신 그분에 의해서 우리가 하지도 않은 일을 주께서 이미 자리를 마련하시고 거기에 집어넣어서 어떤 죄도 용서되는 일흔 번에 일곱 번도 용서되는 사랑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때 면류관은 우리가 감히 쓸 수가 없지요. 얼른 벗어서 상급이고 면류관이고 주께서 받으셔야 한다고 들이미는 곳이 24장로가 어린양 보좌 앞에서 했던 일이 그 일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에게 예고편을 잠시 보여주셨어요. 천국 보고 싶으냐? 보여줄 때는 면류관 던지는 일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걸 이 지상에서 미리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자리는 주님의 자리인 것을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인 것을 주님이 마련한 자리에 우리는 공짜로 걸치고 있는 걸 생각 못하고 자기 자랑질하고 싶어서 환장했습니다. 비교의식에서 온 자존심의 고수를 위해서.
 
 

이 사실을 예수님이 아시도 또 누가 아느냐? 마귀가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마귀를 못 이깁니다. 마귀가 보는 사람을 우리는 못 알아봐요. 귀신 들려서 무덤가에 있던 청년, 그 사람을 사람들은 병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청년 본인도 자기가 왜 그런지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니까 속의 마귀가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마귀가 말한다고 하니까 상당히 엽기적이고 오멘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생각하는데 성경은 마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그날 너희가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이라고 해서 상당히 엽기적인 이야기를 해요. 네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네 속에 있는 성령께서 너를 통해서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박수무당도 아니고 어떤 경지에 이르면 우리가 박수무당처럼 성령이 말하는 대로 말하지? 정말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요.

 

마귀가 알아봤어요. 우리를 멸하려 오신 분이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오십니까? 때가 안 됐는데 일찍 오셨다는 말은, 마귀는 이미 멸망 받기로 작정이 돼있었습니다. 그 내막은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그 이유가 나와 있어요. 에덴동산에 찾아왔던 그 마귀는 그전에 한 차례 전쟁을 치렀어요. 하늘의 전쟁에서 미카엘에게 좇기고 난 뒤에 갈 데 없어서 지상에 내려와서 분탕질 일으킨 겁니다. 그러니까 에덴동산은 결국 또 다른 전쟁터고 전쟁의 거점이 되고 말았어요. 하늘의 전쟁이 이동해서 에덴 전쟁으로 전환되고 만 겁니다. 인간은 가만있다고 친 거예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겁니다. 그게 숨겨진 복음의 비밀이에요. 창세전부터 숨겨진 것이 그리스도로 나타났다는 말은, 그때나 지금이나 너희들은 있어도 모른다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에스더는 본인도 몰랐지요.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찾아오기 전까지는 공주처럼 누리면 되는 줄 아는 자리에요. 그 자리는 나의 자리가 아니고 에고를 셀프에 종속된 에고로서 있는데 그 에고는 에고가 지워질 때 비로소 나를 위한 자리가 아님을 아는 거죠. 무슨 자리냐? 공주의 자리가 아닙니다. 죽음의 자리였어요. 자기 십자가로 죽지 아니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는 자리에요. 자살하란 말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네가 원하는 게 아니고 내가 원해서 철저하게 써먹을 거다. 네 밧데리 다 닮을 때까지 써먹을 거다. 너는 무익한 종이라 할 바를 했을 뿐이라는 고백만 내놔다. 어쨌든 다 써먹을 거란 말이죠.
 
 

만약에 서울에 있는 삼성그룹 회장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이건희는 삼성그룹을 절대로 자랑하지 않을 거예요. 삼성그룹 회장됨을 자기는 그냥 당해버린 거죠.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 뜻이란 말은, 그러니까 소유가 아니고 구원이에요. 소유냐, 존재냐 하는 것은 에릭 프롬이 한 이야기고.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한 철학자의 유명한 책이죠. [소유냐 존재냐] 사람은 자본주의적인 소유가 자아가 될 수 없고 어떻게 사느냐가 자아라고 해서 자본주의의 윤리관을 펼친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그게 아니고 이 땅의 소유냐, 탈출이냐? 어제 누가복음의 본문에 보면 다윗과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탈출할 것이다. 구원을 이룰 것이다. 전혀 탈출할 마음이 없는데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탈출하는 거죠. 소유가 아니고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럼 에스더나 욥이나 아담이나 어디에 말려든 거예요? 지상에 왔던 전쟁터에서 인간은 승리하지 못하고 다만 승리자가 따로 와야 되거든요. 하늘의 승리를 이어가야 된단 말이죠.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분이 되지 말고 지상의 하나님으로 와야 되는데 올 때 언약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피조물이거든요. 만든 자가 만들어진 것에 붙이는 것이 이름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스스로 창조주이면서 피조물이 되면서 여기서 명찰이 생겨버린 겁니다. 그 말은 붙여진 이름대로 실행하게 되면 마귀한테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 눈에 보여야 부르지요. 그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주의 이름에 의해서 언약이 주어지게 되고 언약이 주어진 특수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언약맨입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 때 이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노아가 설계사 찾았습니까? 누가 한 거예요? 일방적으로 언약을 받았는데 그걸 노아언약이라 합니다. 노아언약에 의해서 방주를 만들 때 노아는 자기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의 일을 하는 겁니다. 방주 만드는 주의 이름이 노아 시대에 끝나고 아브라함에서는 방주가 아니고 인간으로 들어와요. 아브라함에게 복 주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지요.

 

그러면 에덴동산에서 생명의 주요, 죽음의 주가 되시는 분이 이미 에덴동산에 자리를 잡았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축복하는 것도 아브라함이고 저주하는 것도 아브라함 때문이라면 아브라함 속에 주님이 살아 계신 거죠. 그것을 그 당시에 아브라함 자손이 주가 된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아브라함 자손을 끄집어내면서 장차오실 예수님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을 죽일 때 옆에 수풀 속에 숫양을 대기시키면서 이삭을 살려내지요.

 

살려낸 이삭은 이삭이 살아난 것이 아니고 장차오실 예수님이 숫양의 모습으로 죽었던 이삭을 살려내는 양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이 땅에서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택한 백성은 마귀한테 죽더라도 다시 마귀 손에서 죽음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거예요. 지옥에 있더라도 천국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이 너 말고 따로 오셔서 그 사람이 구원의 혜택을 입게 되면 그 사람은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서 영원토록 천국에 가야만 하는 팔자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을 봉사했다는 게 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행함을 삭제해버리고 모든 행함을 죄로 몰아넣고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주체적인 믿음에 의해서 관계 맺을 때 믿는 자는 의인이 되는 겁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구약 전체가 단어 하나에 다 포함이 돼있는 겁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행함이 섞여들지 않습니다.

 

믿음이니까 이 지상에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행함이 아니고 다른 세계의 행함을 믿음이라고 하거든요. 그건 주님의 행함이 이 지상에 들어오게 되면 인간 행함은 아니라는 부정적 의미에서 행함은 아니라고 해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되는 겁니다. 선물을 어떻게 받습니까? 하지 말고 누가 받았느냐고 할 때 선물인 것을 고백하면 받은 자고 선물을 모르고 자기 행함이 섞였다고 하면 아직 선물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죠.

 

그 열매를 다시 주체 자리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선물 주는 자는 주님이어야 되고 나는 염치 불구하고 매일같이 선물을 받아 챙기는 역할을 해야 돼요. 주면 받고. 이것도 못해요. 일용할 양식을 주면 받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맛있게 먹고. 직장 찾지만 그 직장도 주님 주신 것이고 잘리면 잘린 것도 주께서 주신 잘림이고 자리고 그저 매일같이 당하면서 살 수밖에 없죠.
 
 

그래서 선악과는 악마를 처단하기 위한 용도였음을 나중에 알게 되지요. 지옥은 인간을 보내기 위한 동네가 아니고 전쟁에 의해 즉 하나님의 원수 마귀를 보내기 위한 곳이 지옥이었습니다. 그래서 무덤가의 청년, 그 속에 있는 귀신이 미리 눈치 챘지요. 우리를 멸할 때가 안 됐는데 왜 벌써 왔습니까? 협상합시다. 임시적으로 저 돼지 떼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어차피 멸망할 것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습니까? 가라. 돼지 한 마리 속에 들어가니까 돼지가 미쳤어요.

 

돼지가 저주와 죽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다는 물고기 사는 데지 돼지 사는 곳이 아니거든요. 바다에 빠져 죽는 자살하는 그 돼지가 만드는 귀신이 그 사람 속에 있다면 그 사람도 자살하지요. 그 귀신이나 저 귀신이나 같은 귀신이니까. 뭐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모르고? 주님을 알면서. 우리를 멸하러 왔지요? 잠시 어디 이동하면 안 되겠습니까?

 

결국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마귀는 불쌍하게도 님 그림자가 없는 거예요. 밟을 그림자가 없는 거예요. 살아도 죽어도 내 인생 누가 책임져야 돼요? 내가 책임져야 되지요. 극단의 죄입니다.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 이건희 회장들입니다. 돈 있고 권력 있는데 예수 믿을 이유가 없어요. 회개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병철이 죽을 때 그렇게 고민한 거예요. 이병철은 늙어죽었지요. 자살한 겁니다. 어차피 주님 모르면 모든 게 자살이 돼요. 안에 마귀가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도록, 고린도후서 4장의 이야기에요. 세상은 마귀가 들어 있느냐, 성령이 들어 있느냐 둘 중의 하나밖에 없어요. 칼빈의 신학이 잘못된 거지요. 칼빈은 선한 것 있고, 악한 것 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립적인 게 있다. 무서운 이야기에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나와요. 깜짝 놀랐어요. 이 사람이 미쳤나.

 

성경은 그게 아니에요. 마귀한테 우리가 세간으로 붙잡혀있으면 주님이 들어와서 그 주인을 꽁꽁 묶고 난 뒤에 세간을 마음 놓고 냉장고고 뭐고 들고 나갈 때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나오거든요. 하나님 나라가 뭐냐? 주인을 묶어놓고 거기에 세간을 보쌈 당하듯이 나가는 그런 식으로만 탈출이 가능하고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네 힘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이 안 된다. 왜? 인간이 개입할 전쟁이 아니고 영적인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어른들 싸움에 왜 끼어듭니까. 끼어들면 안 되지요.
 
 

주의 원수를 노리고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하늘의 전쟁이 지상의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네요? 예. 바뀌었습니다. 지상까지 따라와서 전쟁을 수행하는 하나님 편은 누굽니까?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이라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데 저 사람은 주님 쪽이고 이런 식으로 알아먹어야 우리가 그쪽 편에 서서 나는 주님 편에 섭니다. 전쟁 같이 합시다. 이렇게 될 텐데 어떤 식으로 알아먹습니까? 여자의 후손의 특징이 오늘 저녁에 할 내용인데 또 해도 괜찮거든요. 자꾸 해도 딴 게 나와요.

 

여자의 후손 특징이 있어요. 잉태치 못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고 그것은 이사야 내용이거든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사라의 특징이 불임여성입니다. 이삭의 부인 특징이 불임여성이에요. 아기를 못 낳아요. 석녀라고 하지요. 이미 태가 죽은 사람. 잉태치 못했기 때문에 여자 혼자 살아요. 이사야 54장의 말씀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잉태치 못하면 자식이 없지요. 잉태함으로 자식을 생긴다는 것은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는 바잖아요. 그렇다면 이건 마귀를 못 이깁니다. 마귀의 전쟁의 승패는 인간들이 아는 수준에서는 될 수 없어요. 오늘 오후에 할 이야기를 미리 하게 되면, 마리아가 처녀입니까, 기혼녀입니까? 처녀지요. 처녀가 아기를 낳지요. 그걸 지난 시간에 ‘위반’이라 했고, 다른 말로 ‘이탈’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도저히 납득이 안 돼요. 왜 처녀가 아기를 낳습니까?

 

처녀가 아기를 낳은 것에 대해서 천주교가 한 오해와 개신교의 오해, 두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일단 천주교의 오해는 뭐냐? 마리아가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의미가 있다. 마리아에게 의미 있다고 여긴 우리 종교는 하나님에게 유일하게 합법적인 종교가 된다. 이게 천주교입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뭐냐 하면, 마리아가 처녀로 아기를 낳았다는 건 인정해주자. 그러나 그건 과거에 있었던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다. 지금은 예수님이지 천주교처럼 마리아를 섬기면 안 된다. 둘 다 오해한 거예요.

 

개신교는 역사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오해한 거고 천주교는 자신의 구원 욕구를 위해서 마치 성경이 있는 것처럼 오해했기 때문에 오해한 거고.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 못해서 환장한 것이 천주교의 오해고 개신교는 우리가 역사에 대해서 아니까 우리가 판단해서 우리가 알아서 중요한 포인트 잡아서 구원하겠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닙니다. 그 뒤에 보니까 마리아 별 대우를 못 받아요. 여자야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책망 받고. 사도 바울 서신에 마리아 이야기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마리아 믿어 구원받으라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마리아는 젖히자.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만 되지 다른 이름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개신교가 이야기한 겁니다.

 

천주교는 성경을 인정합니다. 어떤 분이 천주교에 대해서 질문하는데 천주교와 개신교의 신학에 차이가 없어요. 교황 오고 난 귀에 어떤 목사님은 교황과 천주교와 싸워야지 왜 개신교를 비판합니까? 이러면서 전화로 30분 동안 했는데 그 사람은 천주교를 몰라도 너무 몰라요. 마리아 섬긴다고 마리아 섬기는 게 아닙니다. 신자들이 마리아 상 앞에서 성호 긋는다고 마리아 섬기는 게 아니에요. 그건 미끼 상품이고. 혜화동 천주교 신학교 도서관을 가보세요. 거기서 나온 논문들을 보세요. 신부들이 어떻게 하는가? 개신교 신학과 똑같아요. 루터를 존경합니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요.
 
 

신부들의 능력은 얼마나 헌금을 많이 끌어내느냐에 있어요. 헌금을 많이 끌어내는 신부는 큰 성당으로 승진이 돼요. 그러나 헌금을 유지 못하는 신부는 한직으로 밀려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천주교는 기업이기 때문에. 수녀는 직원들입니다. 천주교라는 이름의 주식회사를 운영하는 직원들이 신부와 수녀들이에요. 사람들이 원한다면 뭐든지 상품으로 제시할 용의가 있습니다.

 

신학이 개신교를 포함한 폭넓은 신학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개신교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이걸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에요. 옛날에 천주교를 그들이 더 냉철하게 비판합니다. 중세 때 잘못 알았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맞춤이다. 다만 개신교가 폐쇄된 교리 때문에 못하는 것까지 우리는 손을 벌인다. 이게 바티칸의 자신감입니다. 바티칸 교황의 자신감입니다. 교황을 섬긴다고요? 그거는 천주교 신부가 웃을 일입니다. 이런 무식한 것. 어느 신부도 교황 섬기는 사람 없어요. 교황은 하나의 봉사자로 알고 있어요. 명목상 대표자지 우리의 대표자는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신부들이 이야기해요.

 

그것을 개신교에서 안 가르칩니다. 집단과 집단의 이기주의 싸움이기 때문에 적의 비밀을 불리한 건 안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비겁해요. 진리가 중요하지 전쟁에 승리하는 게 안 중요해요. 자기 집단화 전쟁은 주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둘 다 오해했다. 둘 다 잘못된 거죠.

 

그럼 목사님 답변은 뭡니까? 그 뒤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든 족보는 명목상 남자의 이름을 붙이게 돼있어요. 교회에 나오면서 제일 먼저 대하는 마태복음 1장을 대합니다. 1장부터 재미없어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 해놓고 그 뒤에 뭡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그게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자기 조상 족보도 모르면서 남의 족보 이스라엘 족보까지 보려 하니까 한심스럽지요.

 

그 족보가 남자 이름으로 돼있어요. 그런데 남자를 살리는 것은 ‘~에게서’라는 말로 되는 네 명의 투입된 특수 여군에 의해서 그 족보가 유지됩니다. 제일 마지막이 ‘마리아에게서’ 여자가 살리게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 살리는데 역사 표면적으로는 여자가 등장해야 돼요. 왜? 여자는 남자로부터 무시당하고 인간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겁니다. 보조적 존재에요.

 

그래서 라캉이란 철학자는, 여자는 마이너스 남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남자 없이 여자가 없다는 겁니다. 남자가 있고 남자의 결핍 요소가 여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는 부단히 남자를 찾게 돼있고 남자는 부단히 여럿 여자를 거느리고 싶어 환장하는 겁니다. 어떻게 평생에 한 여자하고만 사느냐 말이죠. 지루하게. 그게 숨겨진 남자의 본성입니다. 고칠 생각하지 마세요. 차마 돈 없어서 차마 능력 없어서 여러 여자 못 건드리지 능력만 받쳐준다면 현지처가 각 지점에 두는 소망이 잠재돼있습니다. 문제는 돈이 없다는 거예요. 고급 레스토랑 데려가서 음식값 지불할 능력이 없는 거예요.
 
 

남자는 그 자체로서 충족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결핍존재에요. 이 결핍존재를 하나님은 충실히 이용합니다. 이 결핍에서 새삼스럽게 남자를 집어넣지 않고 미지의 남자를 집어넣고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이 여자를 살려요.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 누구냐? 그건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봐야 아는 겁니다. 그 여자는 누구냐? 바로 오늘날 교회를 말합니다. 마리아가 아닙니다. 마귀가 옛 뱀이 여자의 남은 자와 싸우기 위해서 강가에 버티고 있다는 내용이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지요.
 
 

정리해봅시다. 에덴동산은 움직이는 장기판의 말들은 중요하지 않고 자리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자리가 의도적으로 손상이 가게 만들었어요. 생명나무가 선악과와 배후에 연결돼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노출시킵니다. 선악과만 못 따먹는 게 아니고 결국 선악과 따먹으니까 선악과 뇌관 건드리면 생명나무 터지는 거예요. 이젠 따먹고 안 따먹고 간에 자리 보존을 위해서 인간은 거기서 전부 나가야 돼요.

 

바퀴벌레 방제한다면 집주인은 잠시 두세 시간 동안 집을 비우고 나가야 돼요. 그게 이스라엘 역사 속에 안식의 땅을 쉬게 하기 위해서 우상 숭배로 인하여 손상된 안식의 땅을 청소하기 위한 기간이 몇 년입니까? 70년이지요. 70년 동안 원래 살던 거주민들은 어디 가야 돼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야 되고 이방나라에 종으로 팔려야 되고 그렇게 해서라도 안식의 땅이 되기 위해서 70년이라는 것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에덴동산이 제대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인간들은 나가야 됩니다. 내 보내야 돼요. 선악과와 생명나무와 연관된 모든 훼손된 것은 주님의 손으로 온전하게 만드는 것을 마련하고 다시 인간의 저주의 대지에 찾아오셨는데 찾아오는 모습이 처참하고 비참합니다. 육신의 죄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러면 에덴동산은 어디 있는가? 예수 안에 있어요.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내가 바로 천국이니라. 천국은 어떤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기능을 말하는 겁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라고 해서 농부가 씨를 뿌리면, 이게 전부 어떤 기능이죠. 천국이 어디 있다가 돼버리면 이건 에덴동산 시절 이야기고 에덴동산이 공간적 의미를 상실하고 난 뒤에는 에덴동산이 어떤 특정 주체의 기능으로 전환됨으로 말미암아 주께서 집어주면 호출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농부가 씨를 길가에 뿌리니 마귀가 와서 날름 먹더라. 또는 어떤 땅에 뿌렸는데 처음에는 잘 자라는 듯하다가 거기 큰 돌에 기운이 막혀서 결실을 맺지 못하더라. 천국은 이와 같으니 씨를 뿌렸는데 열매를 따는가했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가시덤불이 와서 기운을 막아버렸다. 천국은 이와 같으니 옥토에 뿌렸는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더라. 네 가지 결론은 뭡니까? 천국은 내가 만든다.

 

천국은 네가 자리 이동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자리는 내가 곧 천국 자리고 내 자리에 호출 당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다만 그 방식이 네가 범죄 한 방식을 밟아오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타락한 자의 죄악 된 방식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기능이 강해요.
 
 

어제 저녁에 강의한 것처럼 땅을 샀다고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 자기 장가가야 된다고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참석 못한 사람, 또는 소를 샀기 때문에 소가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하는지 시험한다고 핑계대고 참석 못한 사람, 아들의 혼인잔치는 누가 갑니까? 길에서 놀고 있는 자를 무작위로 불러다가 혼인잔치 자리를 채우잖아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인간 요소 밀어내고 주님 요소로 은혜로 일방적으로 당길 때 천국은 완성된다는 겁니다.

 

끝으로 이 말씀드릴게요. 자진해서 자기를 포기할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천국 갈 사람? 저요. 손 내리세요.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것처럼 빛에 가까운 사람은 천국에 가깝고, 빛과 멀어진 사람은 지옥에 가깝다. 저는 말씀을 연구하기 때문에 빛에 가깝다고 하면, 손 내리세요. 그건 인간적인 방식이고 그래서는 마귀 못 이깁니다.

 

그럼 어떻게 들어가는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주인이 개를 묶고 다닙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을 공격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생각합니다. 개가 탐이 나서 주인을 때려서 기절할 때 개만 데려간다. 주님의 방식은, 개를 때려서 주인을 데려가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마귀를 닮았기 때문에 자기가 주인이고 주인 밑에 개 목줄로 삼위일체 주님을 묶는 방식이 꼭 마귀가 하는 것과 닮았어요.

 

나의 주체가 절대자가 되고 하나님은 내가 이용할 수 있는 나의 보디가드 역할로 있단 말이죠.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사는데 절대로 이런 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고 주님에 의해서 묶였다는 식으로 우리가 스스로 또 다른 나로 위장하는 재주가 있어요. 그게 마귀의 재주입니다. 내가 주인공이면서도 마치 아닌 척하면서 살아가는 게 있어요.
 
 

그래서 주님 방법은, 네가 주인이었잖아요. 내가 네 종노릇했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을 없애고 그 주인을 납치해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부끄러워서 할 말을 잊어버려요. “어떻게 알았지? 내가 신으로 행세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바로 그런 방식으로 가야 저는 이제 더 이상 신이 아니라는 말을 함으로서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항상 살아가면서 내가 주님을 젖히고 내가 주인 노릇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늘 있기에 주님, 저를 늘 때려달라는 자기 부인이 가능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203.♡.42.222) 14-10-25 15:13 
20140926 미국동부오전e
 
(강의:이근호 목사)
 
 

 

여러 번 했으니까 간단, 간단하게 핵심만 집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만 앉아 있어도 이해되도록 해드리겠어요. 창세기 4장, 형이 동생 죽였다. 간단한 이야기에요. 가인이란 이름도 외우기 싫어, 아벨이란 이름도 외우기 싫어. 그냥 간단하게 봅시다. 형이 동생 죽였다. 성경이야기지요. 아니면 아니라고 하세요. 맞지요.

 

두 번째, 인간들의 반응은? 나는 안 죽였어요. 성경을 보면서 형이 동생 죽였다는 이 말은, “그래. 가인 성질 더럽네. 아이고, 다행스러워라.” 아직도 내 동생은 아직 살았어요. 나는 안 죽였어요. 그러니까 성경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돼버리죠. 가인이 동생 죽였어요. 설교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앉아있는 교인들이, “목사님, 저는 안 죽였어요.” 그러니까 말씀 앞에서 자기 정당성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말씀은 들었는데 성경 세계에 잠입하는 데는 실패한 거죠. 형이 동생 죽였다. 남의 이야기네. 나는 안 죽였으니까. 옛날의 에피소드로 그때 그런 일이 있었었지. 남의 이야기에요. 내 이야기 아니에요. 나는 안 죽였으니까.

 

주님께서 성경 속에 교인들을 집어넣기 위해서 산상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다. 네 번째는 여러분한테 의견을 묻습니다. 산상설교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다. 그 다음에 반응이 재미있지요. 어떻게? “나는 안 미워했습니다.” 나는 동생을 안 미워했습니다. 여전히 자기 세계는 확보되는 거예요. 설교자들이 설교하면서 앉아있는 교인들 모습이 예민한 설교자의 눈에는 들어와요. “목사님, 저 건드리지 마세요. 저 그런 나쁜 짓 안 했어요. 저한테 회개 강요하지 마세요.” 이런 식으로 점점 더 딱딱하게 자기 토치카 속에 숨어들어가요. 그럼 여기서 포기하실 주님이십니까? 아니지요.

 

다섯 번째, 이건 예를 들겠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형은 동생을 안 미워했지요)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기 직전에 동생에게는 부동산을 남기고 형한테는 빚을 남겼어요. 그 순간 형이 동생을 미워하겠어요, 안 미워하겠어요? 미워할 수밖에 없지요. 이제는 동생이 좋아하는 축구도 미워. 동생의 친구들, 동생이 좋아하는 노래도 미워. 사람의 특징이 누가 밉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연관된 모든 것이 미워요. 가인과 한 핏줄이었습니다. 성경 속에 안 들어가려고 그렇게 몸부림쳤건만 주님께서 이렇게 유발하셔서 이미 성경 안의 세계에서 새삼스럽게 들어오고말고 마시고 할 것도 없이 성경이란 보자기가 우리를 덮어씌웠습니다.

 

첫날 오후강의 때 이런 이야기했어요. 지금 현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 했지요. 그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들은 지금 현실은 이렇게 돌아간다고 했는데 자기 코앞에 자기 일이 전부인 줄 알고 성경의 현실은 시큰둥하고 들으나마나가 돼버린 겁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이야기하면서 부분적이고 뭐고 전체를 보시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누가복음으로 시작한다고 했지요. 해도 피곤하고 나도 피곤해서 그랬지만.
 
 

사람이 고민, 걱정, 전체를 보게 되면 고민, 걱정거리가 안 되는데 너무 그동안 개인적인 자기 일에 승부를 거니까 그 옆에서 하는 일을 몰라요. 이것 실패하면 죽고, 이것 성공하면 살겠다는 자기가 설정한 그 현실에만 모든 것을 거기에 올인해버렸어요.

 

예수님께서 어떤 제자를 불렀을 때 그냥 따라가면 될 텐데 그 제자가 하는 말이, “예수님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아버지 장례는 치러야 이것이 자식 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그는 상식에 의거해서 정당한 답변을 했을 때 예수님의 답변은 너무나 매정했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하고, 요새 같으면 보람상조에 맡기라는 거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러니까 아버지 장례식에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한테 한 수 배운다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네 인생은 끝났고 내가 접수한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너는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접수 당하기는커녕 내가 뭔가 모자란 것을 예수님한테 한 수 배워서 내 것을 윤택하게 살찌우려는 목적으로 주님한테 한 수 배워봐? 이런 식이 있는데 그런 것은 제자답지 않다는 것을 주께서 그런 일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또 한 가지를 예를 들면 오병이어 사건에 떡 먹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지요. 홱 돌아보시면서 “왜 따라왔지? 너희가 따라온 이유를 알려줘? 너희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반박 못하지. 맞지?”라고 지적하신 거예요. 그런데 그 지적을 듣는 사람들은 매우 억울합니다. 떡을 누가 제공했습니까? 떡을 주셔서 주신 떡 맛있게 먹지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요. 떡을 먹고 배부르단 말이죠. 그래서 앞으로 저분과 함께 있으면 경제난은 해소되겠고 싶어서 따라왔는데 먼저 제공해놓고 고맙다고 붙들려고 하니까 이제 와서 딴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가 따라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그지?” 이 사람들이 뭘 잘못했는데? 떡 먹는 것도 죕니까? 주신 떡 먹는 것도 죄에요?

 

주신 떡 먹는 것이 죄가 아니고 죄를 생산하기 위해서 떡을 주셨지요.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알지요.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우리는 죄의 생산 공정기라고요.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주체의 확대에 있어서 어떻든 간에 정당화, 자기 의를 유지하고 싶어 하지 나는 죄 만들어내는 기계라고 자진해서 신고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세무신고도 안 하는데 그런 걸 신고해요. 세무신고 자진해서 합니까? 그래서는 사업 못하는데.

 

하여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종잡을 수 없는데 여기서 공식을 해봅시다. 이 정도 했으면 공식 낼 때가 됐어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 죽인 것으로 공식을 만들어봅시다. 사건 유발자는 예수님이고 성경 밖에 있는 자들을 성경 안으로 합치시키기 위해서 사건을 유발했다고 보면 돼요. 이 말은 인간이 알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일방적인 자기 위주의 현실이라면 그건 가짜 현실이고, 진짜 현실은 성경이 소개하는데 사람들은 성경에 나타난 현실이 자기 구미에 안 맞는다고 자기는 따로 놀겠다고 할 때 사건을 유발시켜서 강제로 현실 속에 우리를 집어넣는 일을 지금도 주님이 하십니다.

 

하다보니까 길게 했는데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만드신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게 공식이죠. 그걸 더 정리하게 되면 여러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여러분 뜻대로 일어난 게 아니고 주의 뜻대로 일어난 겁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공식 간단하지요.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찬송가에 나오지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주님한테 요청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행하시라고 한다고 행하시는 게 아니거든요.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을 내가 뒤늦게 수용하게 하옵소서. 내 발톱이 아픈 것도 내 일이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일인 것을 내가 뒤늦게 회개하고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그래서 온 천지가 주의 뜻으로 싸라기눈이 내리게 하옵소서. 눈 떠보니까 온 천지가 하얀 눈밭이 되는 것처럼 눈 떠보니까 온 천지가

 

제가 집사님 보니까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이라고 돼있어요. 이건 찬송가에 나오는 건데
 
 

 

-옛날에 붙여놨어요.
 
 

그런 변명할 줄 알았습니다.

 

주님만 섬기면 주님이 대상이 되잖아요. 그런데 어떤 아는 집에 가니까 딱 한 마디였어요. “다 이루었도다.” 그것도 길었던지 그 다음 달에 가보니까 한 자였어요. “끝” 당황하지 말고 탁, 끝. 그 집사님은 딱 한 자에요. 끝. 이걸 예수 안 믿는 자식들 보라고 화장실에 해놨는데 자식들은 이게 무슨 선문답도 아니고 불교의 도 닦는 것도 아니고, 딱 한 자에요. 끝.

 

내가 아닌 다른 분이 만든 현실 속에서 다 이루었다에 참여된 사람, 이 지경, 이 모습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장에 내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 네가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내가, 하나님의 기쁨에 의해서 구원됐다는 것이 누가복음의 복음의 소식입니다. “내가 기뻐서 하니까 너는 네 인생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기쁘다잖아. 네가 기쁜 게 아니고. 네 일이 아니고 네 일은 없어. 널 구원하는 것은 내 일이야. 왜 걱정해. 네 일도 아닌 것을.” “주여, 지옥 갈 것 같습니다.” “네가 걱정하지 마. 그런 염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나만 믿어. 네 안에 나 있어. 예수 안에 네가 있는 거야.” 이렇게 나가시죠. 이게 첫 번째 공식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창세기 4장에서 두 번째 공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파호, 어떻게 집어넣느냐는 겁니다. 우리는 자기중심의 잘남을 유지하는 현실밖에 몰라요. 코앞의 현실밖에 없는데 대단한 고집이거든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베드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도 이야기했고, 욥도 이야기했고 엘리야도 이야기했습니다.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죽어버리겠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요나. “주여, 동업자끼리 왜 이러십니까? 사십일 만에 망하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왕 망할 것 나는 다시스로 빠지겠습니다.” 그런데 마침 배가 있어서 이것도 주의 뜻이라고 해서 배 타고 갔는데 도중에 배를 뒤집어버리지요. 심청이처럼 물에 빠지잖아요. 그리고 난 뒤에 전했는데 자기는 산에 가서 팔짱끼고 구경한 거예요. 유황불이 언제 떨어지는지. 사십일 됐는데 아무 소식이 없는 거예요. 완전히 자기는 거짓말쟁이가 돼버렸어요. “왜 주님은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동업자끼리 사업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하청업자가 지금 난처하게 됐습니다. 뭐합니까? 분명히 사십일 되면 망해야지요.” 안 망하거든요. “이래선 일 못합니다.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깊은 뜻은 이거에요. 요나의 모든 모습은, 북 이스라엘이 그 당시 갖고 있던 신앙적 태도를 요나를 통해서 대표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요나는 니느웨 선지자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니느웨를 가든, 다시스를 가든, 이스라엘을 변화시키기 위한 이스라엘 선지자입니다. 니느웨 회개했다고 해서 니느웨가 안 망했습니까? 몇 십 년 지나서 바벨론한테 망해버려요. 그러니까 바벨론을 우회해서 북이스라엘을 회개를 통째로 하게 하는 방법으로써 멸망돼야 될 니느웨를 잠시 회개케 해서 도대체 이스라엘의 신앙상태가 어떤지 우회적으로 촉구하는 말씀이 바로 요나서입니다. 전도나 선교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선교단체에서 요나 이야기하는데 그건 해석 잘못한 거예요. 선교단체치고 요나 언급 안 한 곳이 없어요.

 

 

-니느웨의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라는 그걸 알려주시기 위해서

 

본 자손은 회개 안 하고 분명히 이스라엘 보기에 이방인이고 멸망 받아야 마땅한 그들이 회개하는 걸 봐서 얼마나 그들이 부끄러우냐 말이죠. 자기 엄마가 김밥 싸니까 아들이 오해해서 오늘 맛있는 김밥 먹겠구나. 했는데 점심 때 고아원에 줘버리는데 누가 기분 나빠요? 본 아들들이 기분 나쁜 거예요. “엄마, 김밥 좋아하는 걸 뻔히 알면서 그걸 왜 주십니까?” “네가 전에 김밥 말아줄 때 감사했나?” “아니요. 당연하다고 여겼지요.” 바로 그게 문제인 거예요. 은혜 너무 주다보니까 이건 마땅히 늘 오는 줄로 착각한 겁니다.
 
 

여러분 주기도문 외울 줄 알지요. 외울 줄은 아는데 문제는 주기도문을 제대로 생각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사업이고 가정 문제고 그건 고민거리가 되질 않습니다. 왜? 거기에 보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는 두 달 치 없다고 닦달하는데 주께서는 정작 네가 기도할 내용이 두 달 치가 아니고 내일치가 아니고 알약 먹고 죽듯이 하루치만 달라고 해야 될 위치가 정작 네가 은혜를 발견할 위치가 그 자리밖에 안 되는데 우리는 일용할 양식 정도는 늘 확보되어 있으니까 우리는 욕심을 내면서 욕심 아닌 줄로 착각하며 사는 거예요.
 
 

그리고 저에게 이런 시비 거는 사람이 많았어요. 이 목사는 맨날 죄, 용서, 그것밖에 모릅니까. 그건 기초가 그 이후의 이야기는 왜 안 하십니까? 그것 말고 다른 이야기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왜 자꾸 그것으로 돌아오느냐고 하는데 저는 이렇게 해요. 주기도문 다시 보세요. 일용할 양식 주옵시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죄와 용서가 끝이에요. 그게 출발점인 동시에 회귀점이에요.

 

용서 받은 은혜 같으면 우리가 세리, 강도, 창기가 돼도 할 말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죽인다 할지라도 왜 죽이느냐고 우리는 거기서 반항하면 안 돼요. 하루치인데. 일용할 양식이잖아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틀 치 양식을 주옵시고, 이런 주기도문은 유사품입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 없고 죄 용서 빠지면 그건 주기도문이 아니에요. 주기도문의 확장이 일반 기도거든요.
 
 

일반교회에서 장로들이 대표 기도할 때 쓰는 상투적인 용어가 뭡니까?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남북통일까지 온 천지 다 돌아다니고. 옆의 교회 크게 해주시고 이번에 땅을 위해 기도하는데 빨리 땅값 오르게 해주시고, 계약했는데 저쪽 주인이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교회가 산다면 그냥 드리겠다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온갖 것으로 포장을 하잖아요. 진짜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어요. 코앞에 있는 걸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놓고 뒤에 뭘 붙이세요. 제가 요령 가르쳐드릴게요. “주여, 이런 죄를 용서하옵소서.” “남편이 아직도 교회 안 나오고 있습니다. 술 먹고 있습니다. 주여, 남편이 개과천선해서 부부가 같이 나와서 온 교회에 모범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뒤에 뭘 붙인다? “주여, 이런 욕심을 부린 저희를 용서하옵소서.”
 
 

 

-주기도문을 가르치시고 바로 강청 기도를 말씀하시잖아요.
 
 

그렇죠. 그것은 바로 주기도문을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네 길을 경유해서 다시 오라는 거예요. 그리고 주기도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우리 뜻 말고 예수님의 성령이 하는 기도가 따로 주어집니다. 그 기도가 주님의 고난으로 탄식하는 기도로 옵니다. 로마서 8장이지요. 너희는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 다음에 너희를 위하여 내가 기도해서 기도 응답대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다 하시느니라. 이 모든 것은 우리 기도의 응답이 아니고 누구의 기도의 응답입니까? 택한 자를 위해서 기도했던 성령의 기도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분은 아버지 뜻을 아시나니.

 

로마서 8장에 그 이야기 나오기 전에 하는 이야기가,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제가 어제 저녁의 블로흐의 소망철학 했지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 아닙니다. 애굽에서 끌어 모은 소망은 우리 소망이 될 수 없고. 그럼 뭘 소망하느냐? 모르지요. 우리는 경험한 것만 소망하니까. 경험 되지 않은 소망이 미래에서 현재로 찾아오는 거예요. 그거는 시간론인데 그걸 이야기하면 너무 어려워요. 보통 과거-현재-미래로 가는데 미래에서 우리를 낚아채는 식으로 찾아오는 식으로 현재 속에 미래가 미리 와있는 것, 이런 용어가 참 어려운 용어에요. ‘선취’라고 합니다. 미리 와서 취하는 거예요. 낚아채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에 이런 게 있습니까?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4~6절에 나오고 로마서 8장에 도 나옵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볼까요? 진도 나간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 정리할 것을 정리합시다. 로이드 존스는 이것 해석한다고 아주 고생, 고생해요. 에베소서 강해에서 해석이 안 되고 있어요.
 
 

에베소서 2장 5절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놀라운 사실은 6절에 보면 더 기절초풍할 구절이 나와요.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와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로이드 존스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청교도신학, 개혁주의신학에서는 역사는 미래에서 완성되는 것이지 미래로 표현돼야 되거든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미래가 아니고 과거완료가 돼버렸어요.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의식으로 이걸 해석할 재주가 없네요. 인간의 미래는 아직이에요. 이미 된 것은 already not yet 될 때만 우리가 납득이 되는데 성경은 이미 되어버린 것으로 되었어요.

 

신학교 때 고민되데요. 저도 고민했어요. 강단에 못 선다. 전도사로서 설교 못한다. 미치겠다. 이건 모르고 숨겨놓고 넘어가면 불안정한 표정이 설교할 때 교인들에게 포착이 돼요. “목사님 이야기가 틀린 말은 아니데 왜 그렇게 불안하지, 뭐지? 뭘 감추고 있는가?” 혹시 이런 질문 쑤시고 들어올까 봐, 그런 것 저한테 묻는 게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할까 봐, 지금 그 설교자는 교인들과 상대했지 교인들 속에 함께 있는 두세 사람과 함께 있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기 고백을 못 토해놓는 거예요. 주님 빼고 무식한 인간들 가르치는 스승 행세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 앞에 고백하는 게 아니고. “주님 주셨잖아요. 이런 믿음을.” 이게 아니고, “한 수 배워.” 이렇게 되면 학원이 돼버립니다. 주산 학원이든지, 태권도학원이든지.

 

심각해요. 이건 남의 문제가 아니고 나의 개인적인 문제인데 도서관에 가지요. 선배들밖에 없으니까. 루터, 칼빈, 벌코프, 자유주의고 그 대목에 주석 책들이 많잖아요. 이것 베끼고, 저것 베끼고, 서로 베끼고. 베낄 때 글자도 틀리게 베끼기도 하고. 이게 주석이야. 남한테 틀렸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이단이란 소리 안 들으려고 믿을만한 것만 골라서 베낀 거예요. 완전히 논문 베끼는 것과 똑같아요. 아무도 해결 못한 거예요. 그렇지 로이드 존스만큼은 해결했겠지. 청교도로 유명하니까. 없어요. 중구난방, 횡설수설이라. 설교가.
 
 

어디서 찾았는가? 오스카 쿨만(보수에서는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그리스도와 시간]이란 책이 있어요. 세계기독교사상전집에 나오는데. 우리는 신학교 다니면서 시간을 언급한 적이 없어요. ‘믿으세요’라고 했지 시간 자체가 뭐냐는 불편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가만 보니까 우리는 너무 성급했어. 나는 문제없고 나는 순수한 경건심으로 성경 본다고 착각한 거예요.

 

사실은 내가 갖고 있는 노림수가 있었는데 마치 없는 것처럼 나는 어떤 노림수도 없고 경건으로 성경에 다가선다고 착각했어요. 그런데 나중 알고 보니까 성경이 그것을 노출시켜요. 나도 모르는 그러한 노림수를 얄팍한 수를 노출시키는 쪽으로 말씀 자체에서 움직이고 활동한다는 겁니다. 말씀은 살아서 움직여서 나를 발가벗은 채로 드러내는 이것이 성경 자체의 고유의 활동이다.

 

데살로니가후서에 그런 말씀 나오지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너희들이 나의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로 들으니 정말 그러하도다. 분명히 사도 이야기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사적인 견해로 받는데 그들은, 사도 바울은 우편배달부고 소포 내용이 중요하니까 우편배달부한테 절할 필요는 없고 예수님께서 사도에게 뭘 전달하는가? 그걸 받으면 사도가 전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향하여 전한 걸로 받으면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나는 사도 편, 나는 바울 편, 나는 베드로 편 그건 성립이 안 됩니다.

 

거기에 보니까 to부정사입니다. to부정사는 동사로 명사나 대명사 역할을 하는 겁니다. 명사화 되면 시간 요소가 날아가지요. 한국말로 하면, ‘의로움이 되었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시간 요소는 다 빠지고 2013년 의로움 되었음, 2014년 의로움 되었음, 2015년 의로움 되었음, 주님 재림할 때도 너는 애초부터 이미 의로움이 되었음.

 

그래서 도대체 to부정사 용법이 과거완료에 해당되는 히브리 용어로 썼는데 그렇다면 일반언어학에서는 어떤 때 쓰느냐? 동사를 동결시키면 명사가 돼요. ‘비가 오고 있다’를 동결시키면 ‘비가 왔음’이 됩니다. 또는 다른 말로 그냥 비. It's raining. 하나에 사물 대하듯이 붙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행함을 자랑질 못해서 환장을 사람이거든요. 행함은 동사에 속해서 명사에 속해요? 행함은 동사잖아요. 뭔가 행해서 더 얻어낼 걸 생각하거든요. 재롱을 부려서 내가 원하는 걸 받아내려고. “주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런데 예수 안에서는 동결, 냉동상태에 들어가 버린 겁니다. 냉동상태는 얼음이 아니고 반복이에요. 주께서 하신 일의 또 주께서 관여하셔서 또 반복케 하시는 겁니다. 어제도 주께서 잠자고 있는 가운데 수염을 자라게 하셨어요. 오늘도 자라게 하셨어요. 이게 뭐냐? 반복입니다.

 

이걸 간단하게 정리합시다. 우리의 행함은 보다 발전을 기대하면서 과거-현재-미래로 달려가는 지향적인데 주님께서는 이미 완료된 동결된 확정 내에서 스프링처럼 그 자리에서 튀면서 이미 너희 자리는 시간에 따라서 변동될 자리가 아닌 것을 반복을 깨닫고 느끼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어제 주기도문과 오늘 주기도문이 달라진 적 있습니까? 아니지요. 어제도 “주여, 우리의 죄를 사해주옵소서.” 오늘도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그러면 주님께서 화를 내면서 “어제 용서받아놓고 또 용서해달라고 하느냐? 좀 발전 좀 하라고 주님께서 닦달내십니까?” 없지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언제까지 찡찡대고 있어 이틀 치 양식을 달라고 해.” 이렇게 요구하십니까? 아니지요.

 

 

-그럼 자람 자체가 반복의 연속이네요? 발전이 아니고.

 

자람, 이걸 아주 쉬운 말이 있어요. 주님의 은혜의 구현 또는 구체화. 구체화와 구현을 합쳐서 발현됨. 발현됨의 가장 좋은 예가 옛날 국민학교 때 겨울 되면 소사가 교실마다 넣잖아요. 그러면 당번이 일찍 와서 나무를 넣게 되면 시커먼 쇠 난로가 발갛게 발현되잖아요. 그냥 피어오르지요. 그렇다고 쇠가 쇠 아닙니까? 우리 육이 육 아니에요? 우리는 여전히 이기주의입니다. 우린 육밖에 몰라요. 그런데 육밖에 모르는데 생소하게 발갛게 그리스도 은혜가 죄와 더불어 같이 나올 때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그게 to부정사고 하늘에 이미 앉히시니. 그리고 로마서 8장에는 이미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하지 않고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누가 너희를 주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십자가 사건이 이순신 장군 사건처럼 고정된 게 아니고 지나가면 끝나는 게 아니고 그것이 지금 역사를 움직이는 역사를 반복시키는 유일한 중심체가 되는 겁니다. 어제도 십자가, 오늘도 십자가.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나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고 할 때 이미 십자가 사건 지나고 난 뒤에 대략 15년 후입니다. 그런데 그때 십자가 진 사람은 예수님과 양 쪽의 두 강도밖에 없어요. 아무도 십자가 진 적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누가 포개지지 않았어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할 때는 이건 누가 봐도 십자가에 사도 바울도 함께 포개졌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역사적 사건으로 고고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는 나에게 일어난 일이 너희들에게 일어난 게 맞지요? 맞는다면 성령 받은 사람이고 모르겠다면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이게 창세기 4장을 봅시다. 창세기 4장에서 공식 하나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한다. 첫 번째 공식, 저는 동생 안 죽였다고 하지 마세요. 미워하는 것도 살인자입니다. 우리는 동생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으면 동생을 미워할 수밖에 없게 만들지요. 가인을 동생을 미워하는 게 평소의 취미였습니까? 아니었지요. 그런데 동생을 미워서 죽이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일부러 개입했잖아요. 모처럼 제사 드렸는데 받지 왜 안 받아요? 가인이 동생을 죽이라고 요청한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첫 번째 공식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성경의 현실이 나의 현실을 대체해서 진짜 현실은 성경 속의 현실밖에는 없다. 하나님의 관여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제가 중국에서 강의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인용했어요. 그게 뭐냐? 거울 속. 거울 앞에 서면 내 모습이 비추지요. 놀라운 사실은 내가 섰는데 다른 사람이 등장하게 되면 이건 기절초풍합니다.

 

제가 어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호텔에서 잠을 자는데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불을 켜면 가족들이 깨니까 배려하는 차원에서 불을 켜지 않고 몰래 나가는데, 저는 화장실 입구에 전면 거울이 있다는 것은 이 호텔이 처음이거든요. 여러 모텔에 가도 이런 게 없었거든요. 뭔가 희미한 가운데 괴물이 등장하는데 평소에 주를 사랑하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지요. 갑자기 가슴이 내려앉고. 누구야? 가만 보니까 내 모습이 괴물인지 알았어요.

 

거울 앞에 서면 항상 선 사람의 모습만 보여줍니다. 이게 상식이죠. 그런데 거울 앞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우리는 상당히 위기를 느낍니다. 거울보고 합니다. “거울 안에 계시는 아저씨, 내가 어떻게 하면 이쪽에서 그쪽으로 건너갈 수 있습니까?”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불가능이지요. 주께서 개입하시면 건너가게 해주십니다. 건너가지 않으면 구원 없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이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이에요. 니고데모는 걱정이에요. 어떻게 육에서 영으로 건너갑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못 건너간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육에서의 아이디어가 뭐냐 하면, 자기가 과거만 기억하잖아요. 엄마 뱃속으로 갔다가 태어나면 비로소 존재하는 경험을 했잖아요. 그래서 그 수법을 또 쓰겠다는 거예요. 엄마 뱃속에 갔다가 다시 나오면 되느냐고 하니까 그것은 육에서 제자리 뛰기밖에 안 되죠. 육의 방법으로 육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안 된다는 이야기죠. 하늘나라는 볼 수 없다는 이야기죠.

 

그러면 하늘나라에 간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영의 반복에 의해서 육이 영으로 들어가면 되지요. 그러면 그 일을 보여주옵소서 하니까 이미 보여줬잖아요. 네가 땅에서 일어난 일도 모르고 어떻게 하늘의 일을 생각하느냐?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모세가 놋뱀 들었잖아. 요한복음 3장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모세가 놋뱀 드는 이야기가 네가 보기에는 육으로 보이지? 왜? 놋뱀 사물체지, 모세 인간이죠. 그런 지팡이 있으면 나도 들겠다. 하지만 그게 영적인 거예요. 영적인 일이 이 땅에 사건을 일으키면 어찌 그리 육적으로 보이는지. 그러니까 못 믿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내가 이 땅에서 십자가로 죽을 때 사람들은 에서라는 어떤 청년이 죽은 줄 알았지요. 그것이 모세가 놋뱀 드는 것처럼 영적인 일인지 모르고 육속에서 어제도 말씀드린 것처럼 죄는 죄로 해결해줘야 됩니다. 죄 속에서 해결책이 있다니까요. 화장실에 휴지 없으면 화장실 안에서 찾아봐야 돼요. 없는 데서 나와요.

 

우리가 예수님에게 창을 찔러 상처를 냈잖아요. 상처는 상처를 통해서 해결되는 겁니다. 뒤에 독일약이 있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 지고 따라 갈 때 그게 해결책이에요. 주님께서는 죽으라는 이야기구나. 살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애당초 성립이 안 되는 말이구나. 주여, 저를 살려달라는 질문은 애당초 해서는 안 되는 요구를 한 거예요.

 

“이왕 죽는 것 어떻게 죽을까요?” 이건 되는 기도에요. “살기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이건 애당초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주와 함께 죽으면 비로소 살리라. 나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러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으리라. 아무도 못 따라 갑니다. 못 따라 가는 것을 따라 가게 하시는 것이 to부정사, 이미 주의 일이 나를 사용해서 반복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거울 속의 세계는 주님의 관여로 들어가게 해주십니다. 이게 공식 1번입니다.
 
 

이제 공식 2번 해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들어가게 하시느냐? 그걸 공식화시켜야지요. 교인들은 공식을 좋아하니까. 하나님의 개입으로 우리는 낯선 현실 속에 있습니다. 두 번째, 어떻게 우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까? 2번 공식, 그것은 주님께서 유발한 죽음을 통해서.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어요. 자살하면 사는구나. 아닙니다. 자살하면 본인이 가해자가 되고 본인이 피해자가 되니까 가해자와 피해자가 구분되지 않아요. 포켓볼 예를 들었지요. 공을 하나치니까 깨지면서 각자 다른 구멍으로 가잖아요. 지옥 가는 사람, 천국 가는 사람 가는 것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드러나는 죽음, 이 죽음 사건을 1번 공식에 의해서 주께서 유발시킵니다. 1번 공식은 주님께서 사건을 유발시켜서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2번 공식은 어떻게? 답변은 가해자와 피해자와 알 수 있는 방법으로 1번 공식과 결합하면 그렇게 주께서는 일하고 계신다. 합치면 이 현실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유발시켜서 건질 자만 건지는 사건의 덩어리가 곧 현실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축약하면 이 세상은 기능적 현실입니다. 그 기능적 현실은 약간 더 이해하기 쉽게 한다면, 천국은 기능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요. 부연된 설명을 붙인다면 천국은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다. 다른 말로 하면, 천국은 존재가 아니고 사건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면, 천국은 존재가 아니고 바람이다. 김범룡의 노래 아십니까?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바람은 소유 대상이 아니고 소유당할 뿐이에요. 부대효과라고 이야기했지요.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도를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여러분 무시하는 게 아닌데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1번 공식, 하나님의 개입. 2번 공식, 가해자와 피해자가 드러나는 그런 구조와 질이 우리가 예전에 미처 몰랐던 현실의 기능적이다. 그 기능의 집합, 사건의 다발이 곧 현실이다. 그러니까 자기 존재에 집착된 인간들은 그 영적 세계를 모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여, 이런 일이 있으면 내 존재가 윤택해집니다.” 항상 돌아오는 것이 내 존재의 가치, 내 존재의 잘남, 내 존재의 뽐냄에 집착하고 있으니 뭐든지 존재로 생각하는 거예요. 저 인간 존재를 만나면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가 되겠는가.
 
 

아까 차타고 오면서 집사님과 바둑 이야기를 했거든요. 왜 바둑이 허무한 걸 느꼈느냐 하면, 죄인이 이겼다고 더 잘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걸 신경 쓰고 하는 거예요. 그걸 알고 제가 바둑 1초 만에 두는 겁니다. 상대방에게 복음 전하는 거예요. 의미 없다, 의미 없다, 땡 탈락. +100점? 의미 없는 거예요. 골프요? 프로한테는 괴로워요. 아마추어는 즐기면 되는 거예요. 물론 돈 내기만 안 하고. 그런데 즐기다보면 드디어 목표가 생기고 언더파 했다든지, 홀인원 했다든지 갑자기 아마추어가 프로 흉내 내게 되면 늪에 빠집니다. 골프 나이 많으면 못 칩니다. 한때 잘했지만 한때는 날아가 버립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의 게임에 불과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는 장기판에 하나의 졸이 되어서 졸의 특징은 자기는 여기 있다고 전체에서 볼 때는 하나에 기능인에 불과하거든요. 자기는 중요하지만 졸은 차를 위해서 희생타가 되게 됩니다. 여자 분들은 장기 잘 못 두지요. 장기에서 졸은 맨날 초반에 죽어요. 꼭 장군이 아끼는 것은 차, 포만 아까지 나머지 졸은 엑스트라입니다. 왜 죽이는가? 전체를 위해서 죽여야 돼요. 그것이 바로 아벨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졸이 돼도 좋으냐고 우리한테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는 낯선 현실 속에 일원으로 기능으로, 사건의 다발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졸을 움직이는 것은 내가 아니고 주께서 움직여서 적합한 졸로서 그 자리에 버지니아 비치에 살게 하신 거예요. 이 세상은 거대한 장기판입니다. 전체 조망? 우리는 몰라요. 주께서는 알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겁니다. 때를 따라 적합하게 한 겁니다. 잠언서에서는 더 잔인하게 이야기해요. 가난하냐? 그거는 주 앞에 가난하라는 것이 네 팔자고 운명이니까 까불지 마. 적당해. 너한테는 가난이 적당하기 때문에 가난해야 구원받기 때문에 가난했어야 해.
 
 

그 다음에 부자? 너는 부자 됐으니까 재산 팔아서 교회 바치고 그런 짓 하지 마. 너는 부자로 살아 줘. 부탁이다. 제발 아파트 평수 넓히고, 차 바꿔. 세 대 더 추가해. 그게 네 팔자다. 또 차사야 되나? 보석 또 바꿔야 되나? 고민이다. 만수르도 아니고. 부자라서 지겹다. 어쩔 수 없지 뭐. 주님이 주신 시련이니까 부자로 살아야지, 어쩌느냐.

 

그 이야기를 제가 중국에서 하니까 목사님들이 잠간 이해를 못 했어요. 보통 교회에서 말하는 고난이 뭡니까? 지지리 궁상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객관식 문제 냈어요. 다음 중 고난은 뭐냐? ①순교한다. ②가난하게 되었다. ③선교사로 가서 많은 희생을 했다. ④부자 됐다. 정답은 4번이거든요.

 

부자 되고 예수 믿기가 얼마나 힘든지 가난한 사람들은 몰라요. 돈 있는데 왜 기도합니까? 말도 안 되지요. 그러니까 얼마나 고난입니까. 문제는 저도 그런 고난 좀 돼봤으면 좋겠어. 외출할 때 옷 열 벌 가운데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는 고난, 차 열 대 중에 어느 차를 타야 파티에 적합한지 고민하는 고난을 좀 누려봤으면 좋겠어. 왜 못 누리느냐? 주께서 허락하지 않는 졸이기 때문에. 그건 포나 차가 할 일이지 졸은 해당사항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이혼하거든 이혼해버려라. 참 이 이야기가 감히 신명기, 출애굽기 내용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거잖아요. 산상설교와도 안 맞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혼했거든 될 수 있는 대로 같이 하고 간음한 연고 없이 헤어지지 말라고 돼있는데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남편이 이혼하다고? 하라 해. 주의 뜻이라면. 제가 방금 너무 어려운 이야기했는데 10분 쉬고.
 관리자(IP:203.♡.42.222) 14-10-25 15:15 
20140926 미국동부오전f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가해자, 피해자 만드니까 하나님의 개입은 가해자, 피해자가 드러나는 쪽이구나. 쉽다. 쉬운 게 아니에요. 방금 제가 중요한 걸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게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돼야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에 의해서 되지 않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면 우리는 뭐가 남느냐? 복수심이 있어요. 원수를 내 손으로 잡으려고 합니다.
 
 

중국영화의 흐름이 이거에요. 착하게 식당하고 있는데 옆의 도장에서 쳐들어와서 아버지 무술 좋다고 죽이고, 겨우 탁자 밑에 숨어서 살아남은 아들이 금강산에서 무술 익혀서 십년 만에 나타나서 이제 원수를 갚고자 칼을 갈았다. 이게 중국영화의 테마잖아요. 무협지죠.
 
 

그러나 로마서 15장 끝에 보세요. 원수 갚는 것은 주께 있다. 신앙이 있다,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저는 단적으로 이야기해요. 여러 가지 이야기하면 복잡하니까. 원수 갚는 것을 본인이 갚겠다고 하면 신앙 없습니다. 사람은 주께서 가해자, 피해자 있는데 내 돈 떼먹은 사람에게 내가 원한이 없다? 이게 인간입니까, 천사지요.

 

그런데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의 윤리, 도덕은 저리 가라에요. 네가 차라리 돈 떼이는 게 낫다는 겁니다. 어떻게 같은 성도를 법원에 고소하느냐. 우리는 천사가 판사인데 어떻게 세속적인 판사한테 신앙문제를 판결해달라고 요청하느냐. 차라리 네가 돈 떼여라. 산상설교에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내놓으라는 이야기고, 차마 목사 입에서 주저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나옵니다. 돈 빌려주려거든 거저 주어라.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말이 됩니까? 강남의 부자 동네 교회에서 그 설교를 했다가는 그 다음에 헌금 들어오겠어요? 주께서 갚아주신다고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떼였습니까? 왜 애초부터 줘버리지 않았습니까? 떼일 사람에게 미리 줘버렸으면 떼였다는 감정도 안 생길 텐데 당신이 떼였다는 악함이 생겼다는 말은 처음부터 산상설교를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떼여도 쌉니다. 이렇게 설교하면 그 목사가 그 교회에 못 붙어있습니다.

 

 

-형제들끼리 얘기죠?
 
 

그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존재론으로 하게 되면 나, 성도로 존재하고 너는 형제로 존재하지. 이렇게 존재와 존재로 만나면 성경으로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기능이거든요. 존재로 해석하면 항상 나를 주인공으로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존재는 따로 있어요.

 

목사님, 1번 공식을 잊어버렸어요. 성경 속의 현실은 따로 있는데 거울 속에 있는데 우리는 내 위주의 현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속에 들어가려면, 1번 공식,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니까. 1번 공식이 뭐지요? 주께서 유발시키지요. 나의 존재를 위한 현실은 날아가고 주의 존재만 드러나는 현실만 기능적으로 있고 그 기능에 우리는 장기판의 졸로써 활용되지요. 그러면 내 돈 떼먹은 사람은 내가 그 존재 탓을 할 게 아니고 기능 탓, 너는 이번에 맡은 일이 내 돈 떼먹고 싹 닦는 기능을 한 거예요.

 

그래서 다가올 때 내 존재로 다가가지 말고 주님을 경유해서 다가서게 되면 주께서 보내셨구나. 그리고 나는 사기 당한 거지요. 그 사람은 사기 치는 기능을 하는데 그 사람도 마음도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 사람이 사기 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기 치고 싶어서 사기 치는 것이 아니고 물결이 밀려왔으니까 지하철에서 옆 사람이 미니까 본의 아니게 아무 사적 감정 없는데 같이 밀려버린 거예요. 이쪽 어음 받아서 갚을 생각했는데 대기업이 부도나는 바람에 하청업체가 돈을 못 받으니까 자기가 갚을 재료상에 돈을 못 주고, 재료상의 경리 아가씨와 같은 교회 형제자매라고 부른다면 이건 어떻게 됩니까?
 
 

 

-성경에 나오는 명령이나 권유들이 형제들끼리 한 몸을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될 일들에 대한 되어짐에 대한 약속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존재가 되고 한 몸이 뭔가를 새롭게 발현하기 위한 임시적 존재에게 이야기해요. 임시적, 존재는 아닌데 사람은 돌아서면 존재로만 이해하거든요. 인간의 의식 자체가. 여기 지우개가 있다고 하지 지우개가 발현됐다고 이런 소리 안 하잖아요. 항상 지우개가 주께 있게 하더라도 우리는 존재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존재, 나는 즉자존재고 이건 존재로 보는 대상이 되니까.
 
 

그래서 형제가 네 돈 떼먹고 달아나거든 차라리 돈 떼여라.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러나 1번 공식에 의하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지키지 못하는 것을 주께서 지키도록 조치를 하게 되면 우리는 감사하지요. 나라는 졸을 통해서 주의 말씀이 발현되게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하지요. 물론 돈은 떼였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을 갖는다는 게 인간으로서 힘든 것 아닙니까?
 
 

그게 1번 공식이에요. 주께서 개입해야 되지 이번 일은 주께서 개입하셨지 내가 일부러 그 말씀 지키려고 애쓴다는, 사도의 권면과 명령을 내가 지켜볼까 하는 이건 기능으로 나선 게 아니고 내 존재의 잘남을 어느 정도 의식하면서 나선 거거든요. 그렇게 되면 죄 짓는 기능이 아니잖아요. 우리는 잘만 하면 죄 안 지을 수 있다. 그것을 무산시킵니다. 그 일이 주께서 벌어지게 되니까 너도 기능이고 나도 기능이고, 둘 다 잘났다, 또는 둘 다 못났다 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에이,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게 정답이죠. 그런데 본인이 찾아가게 되면,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도 밀리니까 밀렸습니다. 돈 생기면 갚을게요.”
 
 

방금 질문에 답변은 하나밖에 없어요. 베드로가 한 이야기에요. 형제가 죄 지으면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할 수 없지요. 왜 할 수 없어요? 우리는 항상 나를 존재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할 수 없는 것을 기능으로 바꾸게 되면 주께서 던진 언약을 주께서 회수하면서 부대효과로 구원받은 거예요. 할 수 없었는데 이미 의인돼버렸어요. 우리는. 주의 일에 말려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이 의인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돼버렸어요.
 
 

 

-거기서 형제는 누구인지는
 
 

그때그때 달라요. 존재가 아니니까. 기능 속에서 형제적인 기능이 나타나죠. 만약에 어떤 사람은 형제로 생각하고 돈 빌려주면 큰일 납니다. 왜? 내가 너를 모르는데~ 어떻게 돈 빌려줘요. 너, 나 모르나? 그건 지금까지고 내일 일을 누가 압니까. 믿는 놈이 나쁜 놈이지요.

 

 

-형제라는 건 꾸어주는 게 아니고 거저 주는 마음으로 줄 수 있으면 주라는 뜻이고

 

그러니까 제 말은 지키는 방법은 절대로 차용증 받고 주란 말이죠. 그래야 내 의가 나타나지 않아요. 나는 이 말씀을 못 지킨다는 걸 분명히 해줘야 돼요. 자칫 그냥 줘버리면 나는 형제를 이용해서 잘난 내 존재를 부각하는 용도로서 형제를 이용한 셈이 되지요. “주여, 보시옵소서. 내가 이 정도로 대단한 존재입니다. 말씀 지키잖아요.”라고 자기 의를 고취시키기 위한 용도로 “형제여, 너한테 돈 갚으란 소리 안 할게.”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돼버려요. 그게 가인입니다. 졸지에 가인 돼버렸는데.
 
 

성경에 나오는 현실 자체를 우리가 자꾸 흉내 내요. 그런데 주님의 진짜 현실에서는 가해자, 피해자만 나눠지고 피해자는 오직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아벨은 얼마나 주님을 원망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벨은 피해자가 아닙니다. 아벨 속에 계신 분만이 피해자지요. 그분이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만 증거합니다.

 

저는 이해된다고 생각하는데.
 
 

 

-제가 지금 형제라는 단어에 매이는 것 같아요. 성령을 같이 받은 사람이 형제인데
 
 

그렇게 되면 존재론적 공동체가 된다니까. 너, 너, 너, 존재들 모여. 존재들 모여서 건전한 존재가 돼버렸지요. 그러면 그 존재가 이데올로기의 가치가 이미 확정된 존재가 돼버리면 그것은 대상이 돼버리고 그 대상을 바라보는 나는 또 하나의 존재로 굳혀지지요. 그러면 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실천이 돼버려요. 말씀 실천이 돼버리면 내 조직이 우상화되지요. 해체돼야 되는데
 
 

 

-결국은 우리가 교회를 이루려는 노력이라든가 교회가 되어지는 것은 이 땅에서 볼 수 없는가
 
 

교회가 되어지는 것은 매일 보지요. 어떻게 보느냐? 존재라고 우기는 그 교회는 절대로 영원한 교회가 아님을 늘 느낄 때 이게 발생론적 교회입니다. 발생은 주께서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매일 해체해나가시는 그 손길이 진정한 교회가 되는 거예요.

 

형제라고 믿었는데 형제답지 않은 행동이 나올 때 우리는 실망할 때 누가 실망했는가? 1번 공식에 의하면, 주님의 개입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한 시도 주님의 개입이 없는 날이 없음을 그게 현실인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되는데 우리는 뭔가 좀 된다 싶으면 이제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구태여 간절히 기도할 필요 없네. 이 정도면 저는 만족합니다. 저는 아주 소박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나오는데 소박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 건드리면 화나는데.

 

 

-목사님, 방금 진정한 피해자는 예수님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진정한 가해자는 하나님 아닌가요?
 
 

그렇지요.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니까 하나님의 자작극이란 말도 되는 거네요?

 

자작극이란 말을 로마서 11장 36절에 이렇게 돼있어요.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께 돌아간다. 그 앞에 나오는 말이 놀라운 말이에요. 누가 알았으리요, 이 비밀의 지혜를.

 

그러니까 이걸 예수님과 하나님의 언약이거든요. 언약 안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당구공 치면 둘로 갈라지잖아요. 택한 백성은 천국으로 안 택한 백성은 지옥으로. 이것을 구체화시킨 것이 인류의 역사지요. 인간은 태어나고 난 뒤에 이 현실을 잊어버렸지요. 잊어버린 것을 성령이 오게 되면 to부정사, 이미 확정된 사실 속에서 이 언약이 나한테 반복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면서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어떤 특정 공식을 믿어버리면 주께서 그것을 다치게 하면 섭섭해져요. 우리끼리 참 좋았는데 갑자기 어떤 유력한 헌금 내던 교인이 이사 가버리고, 이사 가는 건 좋은데 더 기분 나쁜 것이 그 교회에 헌금 낸다는 사실이 더 기분 나빠요. 저 돈이 우리 교회 올 돈인데 미치겠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누가 그걸 유발했습니까? 1번 공식에 의하면 주께서 했지요. 주님은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할 때 우리는 졸지에 가인으로 변해버려요. 그러면 유발하신 분이 내가 가해자로 등장하면, 예수님 하는 일이 잘못된 일이 되기 때문에 피해자가 되지요. 그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면 성도가 되는 거예요.

 

성도는 온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활발한 활동 속에 하나의 졸로 부단히 쉴 새 없이 절대로 이것이 나라고 확정되지 않도록 늘 조치를 해주시는데 우리의 확정된 자리는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는 있다가 없어지는 그냥 안개로 만족해야 돼요. 따로 있다고 계속 하려고 한다면 이건 존재가 되니까 자칫하면 사실은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게 베드로였던 거죠.

 

예. 맞습니다.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 뭐하십니까? 한 패잖아요.” 주께서는,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그럴 리 없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내 기도 아니면 거기서 못 벗어나.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너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니까 배신하라. 빼주는 사람은 누구다? 네가 알아서 빠져나올 수 없고 주께서 빠져나오게 했다. 앞으로도 네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그러면 베드로는 이 사실을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창세기 4장을 하면서 사실은 성경 전체를 다 한 셈이 돼요. 아벨이 죽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히브리서 11장의 어려움이 거기 있어요. 아벨이 죽었잖아요. 죽은 공로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아벨은 모자이크에요. 모자이크 타일 중에서 한 조각에 불과해요. 아브라함 타일, 야곱 타일, 모여서 그리스도가 나온 겁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 미리 당겨서 아벨에게 그 역할을 일부 맡긴 겁니다. 아벨 속에 그리스도 영이 들어있어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과 11절을 다 같이 읽어봅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떤 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유대인들은 강력하게 반대합니다. 나사렛 예수는 최근에 생긴 사건이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뭐라고 합니까? 이미 구약 때 하나님의 신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미리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신약 때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새롭게 밝혀진 확정된 진리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고, 아벨도 예수님 십자가 피를 흘려야 자기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고, 노아도 방주 만들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방주 만들면서 자기 죄를, 방주 만드는 것이 결코 내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방주 만들면서 비로소 그리스도 십자가를 알게 되는 거죠.
 
 

모든 인간은 아담이라는 선상에서 그리스도가 보이도록 조치한 겁니다. 물론 택한 자에게만.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에게만 그게 해당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 가기 위해서 “그리스도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나는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1번 공식에 해당되죠. 주님의 개입으로 한 거예요. 2번 공식은 주께서 어떻게 개입했는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걸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은 가해자가 되더라도 천국 가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가서 땅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그는 때는 늦으리.
 
 

사람 잘나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성령이 와서 문을 열어줄 때 비로소 거울 속의 현실을 알 때 공로로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구원되지 내 힘으로 구원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구멍 나야 돼요. 총 맞아야 돼요. 우리 인생 자체가 누더기 돼야 됩니다. 사람의 심리는 어제 오후에 이야기했듯이 구멍 나면 봉합하고, 구멍 나면 봉합하고.

 

저는 그걸 실감나는 장면을 [터미네이터2]에서 봤어요. 기계로 만든 액체인간인데 호박엿처럼 늘어졌다가도 다시 붙는. 그러니까 마지막에 용광로에 집어넣잖아요. 본인도 들어가면서 엄지손가락 하나 남기면서 하는 말이, I'll be back. 다시 돌아오겠다. 3탄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3탄은 기계가 여자로 태어납니다.
 
 

그야말로 [매트릭스]가 정답 같아요. 모든 것이 예수님이 뿌려놓은 정보세계. 잠시 인간 같은데 흩어지면 언약적 정보로 흩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매트릭스에 나오는 용어들이 전부 언약적 용어들이에요. 다윗, 시온성, 그 용어들이 다 메시아 용어에요.

 

 

-그 원칙 가운데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자유의지는 필히 등장해야 됩니다. 그래야 봉합이 되니까. 앞으로 잘 하라는 이야기이구나. 사실은 자유의지란 말은 없어요. 사실은 자유란 말은 필요 없어요. 의지만 있으면 충분해요. 의지 자체가 나만의 의지지 자유의지가 아니거든요. 의지란 말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벨라르 이런 사람들이 사용했습니다. 자유의지란 기독교 쪽으로 선악과 따지면서 한 이야기고, 뒤에 칸트 이야기고. 앞에 중세에는 의지 충분했어요.

 

신은 의지다. 따라서 신의 형상을 받으면 우리도 의지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로 이전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의 뜻이다. 이게 중세에서 벗어나면서 기존의 교리를 반대하면서 나온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오캄이란 사람의 주장이었지요. 이걸 의지주의라. 의지주의의 끝은 니체로 끝납니다.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신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이성으로 만난 신은 죽고 남는 것은 존재가 아니고 의지의 바다다. 이게 화엄경에 의하면 인연의 연결이다. 출렁이는 인연. 바다에 뱃길이 나오지요. 그 뱃길이 두 시간 지나면 다시 봉합되지요. 불교 말이 맞지요. 인간은 항상 무슨 일이 있어도 봉합이 돼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찢어짐 속에 잠시 숨통 트인 것이지 결코 휴식 가운데 잠시 고난이 있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한데 주의 은혜로 잠시 수영 강습하는 것처럼. 수영 강습할 때 음-파-
 
 

숨쉴 때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숨 못 쉬고 병원에서 뭘 꽂을 때 우리는 재주 없는 게 아니고 원래 우리 모습이에요. 병원에 있을 때 밖에 있는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죄 있는 놈은 튼튼하고 착한 사람은 왜 누워있느냐고 하잖아요. 마치 건강해야 당연한 것처럼 살아가는 이 교만, 주께서 은혜 주셔서 다시 마음을 낮춥니다. 하나님께선 겸손한 자라를 찾으시고 교만한 잘을 물리치신다. 백날 글자 써놔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사건 터져야 다시 한 번 잃어버렸던 주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이틀 치가 아니고 하루치만 있어도 과분한 조치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현실을 확정지어야지요. 1번 공식은 주의 개입, 2번은 주의 개입의 목적은 가해자와 피해자, 3번 공식에서 우리는 그걸 보고 싶지요. 간단합니다. 유일한 역사의 구체화, 숨겨진 영적 세계가 역사와 만나는 접점 지점에서 나타나는 유일한 것은 피. 이걸 예수님은 아벨의 피에서 스가랴의 피까지 너희가 담당하리라. 아벨의 피, 스가랴의 피, 그 다음에 누구 피? 주님의피, 끝. 신천지에서는 이만희 자신의 지혜가 등장합니다. 이게 이단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피로 끝나야 되는데 자기가 보혜사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만희가 그런 소리를 할 때 교리를 이야기하는 줄로 생각하지요.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돈 내란 이야기에요. 결국은 돈과 결부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하나님의 라이벌로 누굴 제시했습니까? 무엇과 무엇은 겸하여 섬길 수 없는 의식구조로 너희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느냐? 돈을 마다해요? 미쳤어요.

 

그래서 어떤 조사에 의하면, 조사니까 가설인데, 정신적 장애자가 암이 거의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 있게 전혀 없다는 거예요. 왜 지적 장애자는 암이 없을까요? 스트레스를 안 받으니까. 오뉴월의 개가 암 걸립니까? 오뉴월의 개는 칠월이면 사라지거든요. 그러면 유월 말쯤에 스트레스 잔뜩 받습니까? 아니지요. 결국 인간이 어떤 암에 걸리고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은 오뉴월의 개가 되기 싫다는 말이거든요.

 

그걸 빗댄 유명한 최초의 근대소설이 있어요.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지요. 그게 왜 유명하냐? 세상은 미쳤다는 겁니다. 바짝 마른 기사가(이미 기사 계급이 날아간 이후의 시대에) 이미 구닥다리 기사가 풍차 돌아가는 걸 보고 적으로 간주하고 긴 창을 들고 나쁜 놈이라고 쑤셔댈 때 그게 왜 근대소설이 시초가 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구조를 엎어버리는 겁니다. 조롱하고 놀리는 거예요. 위선을 까발리는 겁니다.

 

이것은 곧 신의 질서에 대한 인간의 과감한 도전입니다. 그때부터 나온 게 도전해야만 생기는 게 주체입니다. 반항하지 않으면 주체라는 게 없어요. 복지부동은 주체가 없어요. 물에 물 탄 듯이 되지요. 그러나 직장에서 바른 소리한다는 것은 내 목소리 내겠다는 것은 주체가 유지되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 직장에서 주체 많이 과시하시지요? -자기 목소리를 많이 낸다는. 그게 주체라니까. 그게 근대사상이에요. 파묻히지 않겠다는 거예요. 있으나마나한 존재로 끝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숨 막혀 못 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네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다. 누가 합니까? 아까 봤지요. 예수의 영이 그때그때마다 진짜 영적 세계에 있음을 주님 담당으로 시킬 때 시킨 대로 살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창세기 4장, 아벨 이야기 마무리 짓겠습니다. 아벨은 죽었지요. 제가 묻습니다. 승리자입니까, 패배자입니까? -승리자죠. 죽었으니까. 바로 둘 다 정답이 되는 이유가, 오늘날 우리의 삶의 현실이 두 가지 다 나올 때 이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게 안 나오면 성도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승리자다? 성도 아닙니다. 승리자라고 하면서 말꼬리가 미묘하게 떨리게 돼있습니다. “에이씨. 한 주먹도 안 되는데 성도니까 참는다.” 이것 자기 신앙 믿는 거예요. 이러면 안 돼요. “주여, 패배자 맞습니다. 주님 안에 승리자 맞습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러니까 패배자입니다. 그래서 승리자입니다. 절대로 자기 위안, 변명하지 마세요. 바둑 져놓고 주의 뜻이라고 하지 마세요. 실력 없어서 진 거예요. 그런데 진 걸 인정할 때 승리자가 되는 거예요.

 

세상은 게임이에요. 도박판이고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세상 속에서 자기 존재를 승리자라고 구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성도라고 해서 왜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정말 주의 뜻을 모르는 거예요. 성도라도 똑같아요. 문제는 뒤늦게 깨우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패배자가 비겁하게 변명하는 거다. 그걸 아는 순간 우리는 승리자 품속에 있는 거예요.
 
 

내 이야기 같은데 그게 아니고 신명기 9장에 나옵니다. 사람들은 비겁하게 변명하는데 변명할 필요 없어요. 돈 못 벌었다? 재수 없어서 못 벌은 거예요. 신명기 9장 4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은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복습합시다. 주의 말씀은 반복된다고 했지요. to부정사니까. 배운 것 응용해봅시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그때 옛날 에피소드가 아니죠. 지금 현재 상황이지요.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이것 한 것은, 내가 기도 40일 해서 그렇고, 내가 주께 봉사했기 때문에 그렇고, 내가 열심히 심방 갔기 때문에 교인들 붙들고 있다고 했지요.
 
 

그 다음에 보면,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성실함도 아니고 네가 신앙 좋아서도 아니고, “이 민족들의 악함을 안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쫒아내심이라”(5절) 그 뒤에 보게 되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6절)
 
 

그 뒤에 나오는 게 쉽게 말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용했다는 겁니다. 감독은 주님이지 우리가 감독이 아니고 우리는 엑스트라였습니다. 따라서 제가 부탁합니다. 제발 착하지 마세요. 안 착합니다. 세상 사람들 욕하지 마세요. 그런 형편 되면 돈 떼먹어야 돼요. 꼭 사기 당한 사람이 사기를 쳐요. 그게 복수심이기 때문에. 그 사람한테 복수를 못하니까 암에 걸릴 지경이니까 다른 친구한테 되받아 사기를 칩니다. 해놓고 탓을 “주님이여, 저를 원망하지 마세요. 주께서 그렇게 했으니까 살기 위해서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물론 잘못된 걸 알지만 주께서 이해는 해주시옵소서.” 그런데 그건 주께서 이해해주시도 않고 원래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졸이었습니다. 졸이 기분 나쁘면 상으로 마로 승격시켜드릴게요.

 

사실은 창세기 4장하면서 세상 끝나는 방법은 이미 결론 났어요. 예수님 빼놓고는 다 가해자. 가해자인 걸 아는 사람이 주님의 성도. 1번 공식은,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개입함으로써 이 현실은 주님이 주인공이다. 2번은, 방법은 뭐였습니까? 피해자와 가해자를 예리하게 드러내게 한다. 3번은 그게 관념이 아니고 상상력이 아니고 실제로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나는데 그 사건이다, 그 사건이 아니라는 증거는 하나밖에 없다. 그게 피지요. 앞에 뭘 하나 붙이면 이해하기 쉽지요. 억울한 자의 피, 이것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다. 자진해서 하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는 남한테 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니까.

 

그래서 저는 이렇게 내 자신과 여러분을 위로하고 싶어요. 우리가 주님 때문에 피해봤다고 치자. 어떤 피해냐 하면 우리는 거룩하고 싶어요. 정말 우리는 착하다는 소릴 싶어요. 그 소리를 못 듣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되는 거예요. 사기 안 치고 싶었는데 구멍가게에 제 때 돈 갚으려고 했는데 이사하느라고 경황이 없어서 두루마리 화장지 값 안 갚았는데 하필 왜 2년 뒤에 생각나느냐 말이죠. 본의 아니게 악한 자가 되는 피해를 우리는 날마다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피해 준 것도 있지만 주님한테 피해 본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좀 위로 되십니까.
 
 

5장 넘어갑시다. 4장에서 방정식이 확정됐기 때문에 더 이상 공식을 하게 되면 합쳐야 되기 때문에 간단하게 합시다. 주께서 개입했다. 피해자, 가해자가 갈라진다. 천당, 지옥 노선 확정되었다. 그다음에 천당 간 사람은 희생자가 피 흘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면 그 다음 이야기 전개는 어떻게 됩니까? 피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게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입니다. 피가 징검다리에요. 피를 찾으면 되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그 말을 찾고 싶습니다. 찾아드릴게요. 창세기 8장에 나옵니다. 20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기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뒤에는 읽지 않고 여기까지 제가 일부러 끊었습니다.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의 논리가 어렵기 때문에 묻고 답하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은 애초에 저주거리가 없다는 말입니까, 저주할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까? 있습니다. 됐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단계, 저주할 게 있는데 네가 착해서 저주하지 안 하겠다는 말입니까, 다른 걸 봐서 저주 안 하겠다는 말입니까? 다른 걸 봐서 저주 안 하겠다는 말입니다. 통과. 그 다음에 마지막 것, 그 저주하는 분이 멀쩡합니까, 피 흘려죽었습니까? 피 흘려죽었지요. 드디어 가해자, 피해자, 2번, 3번 공식 다 됐습니다.

 

주께서는 너, 구원받았다고 했어요. 우리는 감사합니다하고 다시 우리 일상으로 돌아가려는데 붙들고 하는 말이, 네가 3번 공식 받았으니까 2번 공식으로 가야 돼요. 가기 싫어도 무조건 끌어당겨요. 내가 가해자구나.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다시 한 번 끌어당기니까 우리는 나만의 현실을 현실이라고 우기며 살아왔어요. 남들처럼. 나 잘되면 행복이고 못되면 슬펐어요. 이게 뭐냐 하면, 전체를 모르고 내 중심의 부분을 마치 전체인 양 그렇게 착각하며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개입이 마지막 3번 공식에 의하면, 물어보지도 않고 피 흘렸어요. “피 흘렸구나. 나와 상관없네.” 하고 가니까 2번 공식이 멱살 쥐고 내려가 보니까 “네가 가해자야.” “왜 그러세요. 나는 예수님을 싫어한 적이 없습니다.” 1번 공식에 가보니까 나는 나밖에 모르는 그 자체가 엉뚱한 현실, 마귀가 준 현실을 현실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1번, 2번까지 왔는데 3번까지 못 간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 그 사람은 영생 얻기 위해서. 영생 얻는다는 말은 소망의 철학이지요. 꿈이죠. 살기 힘드니까 멋진 세계를 유토피아를 그립니다. 영생 얻기 위해서 선하다고 소문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1번 들어왔습니다. 들어오면서 2번을 예상하고 자기는 착하기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가해자가 아니라고 자부했습니다.

 

3번에 들어서면서 주께서는 그 당시에 피다운 요구를 한 거죠. 피 앞에서 누구도 자기 자신의 것을 가지면 안 되니까. 그 방식을 그 사람에 맞추어서 이야기하지요. 네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르라. 부자가 근심해서 3번까지 못 하고 2번까지 맛보고 돌아섭니다. 히브리서 6장의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맛보고 결국 피는 체험되지 못한 채 자기 체험에서 갈 데까지 가보고 다시 자기 세계로 귀환하고 말았어요. 주의 뜻이에요.

 

멋지게 주께서 활용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봤지?” 그때부터 제자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부자 청년이 만약에 열두 제자들을 후원해주면 재정을 염려 없겠지요. 그래서 하는 말이, “부자도 저렇게 가버리면 천국은 누가 갑니까?” 예수님이, “봤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불가능한 예를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어요.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게 힘들다는 겁니다.

 

주님의 예에서 구멍이 나오지요. 구멍의 의미를 주님이 두 가지 용어를 합쳐서 사용했어요. 일단은 통과된다. 두 번째는 통과 못 된다. 첫 번째는 통과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구멍 크기와 부합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구멍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두 가지 양상이 다 포함된 겁니다.

 

제자들은 이걸 보고 제자들 상식에서는 낙타는 바늘구멍에 부합치 않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그들이 아는 기준에 맞추어서 예를 들면서 불가능을 선포하니까 제자들은 오버하기 시작합니다. “주여, 우리 중에 아무도 구원받을 자가 없으니 어떡하면 좋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히 부자에 국한해서 이야기했는데 제자들은 그걸 알아듣고 확장시켜버렸어요. 누구도 아무도 통과할 사람이 없다는 것, 그만큼 제자들은 부자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구원받으면서 평생 부자도 못되고 죽는다고 그게 아쉽다는 뜻이죠.

 

그러면 주여, 누가 구원됩니까? 주님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어제 제가 한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구원되지 못한다.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 아담, 아무도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유명한 말, 1번 공식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앞의 긴긴 이야기하고 난 뒤에 그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은 그 긴 이야기는 생략하고 일부만 챙겨서 할 수 있단다. 이런 식의 이해는 제자들의 이해는 아니에요. 제자들 이해는 뭐냐? 충분하게 자기 속내를 다 드러내고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그 다음에 제가 묻습니다. 제자들이 낙담했을까요, 즐거워했을까요? 정답은 낙담했다. 안 된데. 왜냐하면 인간은 성령이 올 때까지는 나의 실력만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밖에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그렇고 다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나밖에 믿을 수 없는 것을 고치는 게 아니고 주님의 구원에 훌륭한 소재로 사용함을 당할 때 그게 구원이에요. 그래서 구원은 소유가 아니고 관계입니다. 이런 못난 놈을 멱살 쥐게 하시는 성령의 손길이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따지고 보면 너무 쉬워서 놀랄 정도로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 되는데 되게 했다. 우리 성경공부하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한다고 절대로 구원 안 됩니다. 안 되는 줄 아신다면 구원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것 외워서 구원돼야지 절대로 그런 사람 구원 안 해줍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하게 되면 구원한 사람입니다. 말만 내가 잘못이다. 되도 않는 말해서 미안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의 목회는 도박입니다.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고 강조하느냐 하면, 혹시 안 떠나거든 기적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설교 잘해서 붙어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주께서 임시적으로 붙여준 거예요. 저분은 우리 교인이다. 믿지 마세요. 내일 떠납니다. 고마운 줄 알아라. 이 설교를 듣도록 마련해준 것에 대해서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우리는 그만한 가치가 없어요. 주께서 졸과 졸을 만나게 해주신 것도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내일 나가면서 욕하더라도 어제까지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어제 떠나지 않고 오늘 떠나 준 것을 감사합니다. 어제까지 얼마나 기뻤는데.

 

목사님들은 교인들이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두세 사람만 있어도 주께서 함께 있다고 했잖아요. 내 이름으로. 노아가 여덟 명밖에 구원하지 않았어요. 방주는 크게 지어놓고 삼천 명 전세버스인데 달랑 탄 사람은 여덟 명. 운전사가 뒤돌아보면 기가 막하지요. 주께서 작업을 할 때 너무 허비가 많은 것 같아. 빈자리가 너무 많아서 노아가 꿇어앉았습니까? 그것도 여덟 명도 남의 식구가 아니고 자기 식구뿐인.
 
 

저는 개척교회 목사한테 이야기하고 싶어요. 자기 있고, 마누라 있고, 딸 있지요. 세 명이잖아요. 목회 성공하신 겁니다. 심지어 사모가 복음 알게 되면 이건 잠언서 말씀 그대로입니다. 여호와께로 온 아내에요. 지혜로운 아내, 복음을 아는 아내는 여호와께로부터 왔다. 주의할 것은 복음 아는 아내가 언제까지 갈 것인지 남편은 짐작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주께 맡기세요. 계실 때까지만 아내고 떠나면 남남입니다. 지금 붙어있어 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기고 감사해야 됩니다.
 
 

그 뒤에 마저 봅시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그 뒤에 제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괄호를 치시고 괄호의 내용을 여러분이 문장으로 써보세요.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그 다음에 들어갈 말이, ①인간은 이제는 정신 차렸기 때문에, ②때려죽여도 정신 못 차릴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게 맞습니까? 2번입니다.

 

20년 전에 대구 삼익뉴타운아파트에서 40대 주부들 모아놓고 성경공부하면서 이 이야기했더니만 그들이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성경에 그런 말이 있느냐? 보니까 있거든요. 저들은 예상은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은혜를 베풀었으니까 이제는 보답을 해야지. 자기들은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너희를 저주하지 않는 이유는, 네가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이 악하기 때문이다. 설마 그 문장이 뒤에 붙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성경공부하면서 했던 교재가 모여서 나온 책이름이,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입니다. 그 책을 완성한 역사가 10년이 넘었습니다. 한 자료도 버리지 않고 모아놓았더니만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그걸 다하셨네요?
 
 

다 못했지요. 제가 그랬잖아요. 항상 임시적이라고. 그리고 있을 때 감사하라고. 정말 여러모로 감사했습니다. 그것이 연줄이 되어서 그분들 없어지고 신학생들 왔고 그분들 사라지고 연줄로 다른 데서 오고. 그렇게 해서 차곡차곡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는 요한계시록까지 마감이 될 수 있었어요. 나중에 뒤돌아보니까 마치 아침에 닭이 가고 난 뒤에 그 자리에 계란이 있는 것처럼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가 계란처럼 있는 거예요.
 
 

 

-그거는 책으로는 안 나왔나요?
 
 

못 냅니다. 제가 쓴 게 아니라. 왜냐하면 참고도서가 나와요. 제가 그 중에 베낀 것도 있고. 기껏 편저라고 하는데 편집한 내용이 10%도 안 되지만 어쨌든 간에 편저기 때문에 제가 저자로 낼 수가 없어요. 필요하면 복사하면 돼요.

 

 

9장에 봅시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지요. 그야말로 그 시대에 새 하늘과 새 땅이지요. 이제는 선원생활 그만하고 땅에 나가 농사지면 되겠지요. 그런데 피를 잊어서는 안 되거든요. 그래서 피를 집어넣은 새로운 시대가 시작됩니다. 그게 창세기 9장 5절에서 6절이에요. 제가 공식에서 3번에서 피라고 했지요. 그러면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는 이미 정답이 나왔지요. 피만 찾아가면 된다. 이근호 당신 주장이 아니냐? 아니에요. 아벨의 피에서 스라랴의 피로 그 다음에 예수님의 피로 요한계시록에 그 피로 말미암아 하얗게 입었다. 그러니까 성경은 예수님 자체가 세운 징검다리의 행렬이거든요. 피만 발견하면 되는 거예요. 피를 따라가면 돼요. 그걸 고난만 애매한 선지자의 억울한 죽음만 따라가면 돼요.
 
 

물론 그것 이야기한다고 교회 부흥되지는 않습니다만 진리를 그래요. 그러니까 수사극에 보면 범인이 총 맞고 도망갈 때 수사관은 뭐만 따라가면 돼요? “형사님, 피가 여기에. 피가 여기서 멈췄습니다.” “그래? 이 근처에 있겠구먼.” 그 피가 하늘나라까지 올라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하늘나라는 어린양의 보좌라고 합니다. 죽었던 분이다. 너희들이 피 흘리게 하신 당사자가 지금은 주가 돼있다.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는 간단하지요. 연필에 심이 있지요. 심지를 못 찾아내면 성경 만 독해도 소용없어요. 그 심지는 피로만 만들어졌어요. 피로만 이어지게 돼있어요.

 

피라는 것이 너무 엽기적으로 들리니까 ‘죽음’으로 바꾸면 안 되겠느냐고 하지만 죽음으로 바꿀 마음이 없어요. 죽음에는 여러 가지 죽음이 있어요. 자살이 있지요, 순교 있지요, 타인의 죽음 있지요. 이러면 복잡하게 돼요. 사람들은 죽음도 듣기 싫어서 이걸 ‘희생’으로 바꾸었어요. 희생으로 바꾸면 갑자기 세상적인 도덕, 윤리가 돼요. 부처도 희생했어요. 소크라테스도 악법도 법이라고 지키기 위해서 희생했지요. 복음은 날아가고 어느새 완전히 인간 중심이 되잖아요.

 

피라고 하면 오직 한 분의 피지만 죽음으로 되면 다양한 죽음이 되니까 테레사 수녀의 죽음, 울지 마 톤즈, 갑자기 영웅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정신으로 희생했다. 손양원, 주기철, 메시아에 왜 그렇게 많아요. 도대체 어느 이름을 불러야 됩니까? 테레사 수녀를 만약에 원하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따라잡을 수 있어요. 그러나 아무도 이미 확정된 죄 없는 어린양의 피는 그분만으로 좀 스톱시켜주시고 다른 분은 죄인으로 그냥 남아주세요. 괜히 스트레스 받지 말고.

 

피가 반도체 칩처럼 삽입이 됩니다.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피가 삽입이 되면서 피 중심으로 피로 소환시키는 피에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 능력이 새로운 현실의 무늬, 물결치듯 피 중심으로 물결이 파동을 일으키면서 세상은 숨겨진 피를 소환하는 쪽으로 세상의 모든 일이 벌어지는데 그것을 실재 현실이라고 되는 겁니다.
 
 

이걸로 창세기 끝냅시다. 사실은 이걸로 성경의 중심사상은 끝난 거예요. 피 묻은 징검다리로 그 피를 언약이라 합니다. 언약을 펴보면 안에 어린양 피 있다. 새 언약은 십자가에 들어있다. 그게 성경 중심입니다.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203.♡.42.222) 14-10-25 15:17 
20140925 미국동부오후a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고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셔서 준비한 말씀의 모임에 전적으로 주님의 승리에 복종하는 시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중요한 것은 복음이요, 말씀이오니 다른데 마음 두지 않고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가슴에 가득 품을 수 있는 어떤 경계나 방해받지 않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누가복음 하겠습니다. 저녁모임은 누가복음 전체를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장에서 시작하면서 성경구절은 1장 68절에서 74절까지 제가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이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이스라엘 입장에서 몇 가지 특수한 용어들이 나오는데 이 용어들이 없으면 구원이 안 됩니다. 제가 방금 던진 이야기조차 이방인으로서 참 낯설지요. 왜 낯서냐 하면 이방인 입장에서는 신, 하나님 여기 있고 인간이 있으면 이것으로 하나님 있다는 것은 존재지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알아요. 있음과 있음 사이에는 어떻게 연결되고 소통되느냐? 이건 뻔히 알지요. 우리 인간들이 내가 여기 있고 타인이 있으면 대화한다든지, 대화는 기도지요. 그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든지, 헌금이지요. 그 사람 앞에 재롱을 부린다든지, 이거는 착함이지요. 착함과 정성과 그리고 요청, 이 세 가지가 있으면 타인은 거기에 응답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왜?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니까. 이걸 합쳐서 존재의 묶음, 존재의 장, 존재의 바탕. 적당한 것은 그걸 존재의 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누가 있을 때에 집이라든, 나무가 있을 때는 이야기를 안 합니다. 비록 같은 있음이라도 나같이 있음은 아니잖아요. “소나무야, 소나무야. 나에게 그늘이 되어다오.” 이렇게 중얼거리면 좀 이상한 사람이잖아요. 나 같은 인간은 아니니까. 그런데 소나무가 나를 안 만들었지요. 그래서 소나무한테 부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강아지야, 나에게 양식을 다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강아지도 나를 안 만들었다. 소나무도 나를 만들지 않았다. 그럼 누가 만들었습니까? 여기서 문제가 큽니다. 누가 만들었습니까? 아무도 나를 만든 분이 없지요. 만든 분이 없으니까 사람마다 공통적인 의견 수렴에 나서는 겁니다. 의견을 모아보는 거예요. “누가 만들었지?” “신이 만들었어. 신은 절대자니까.” “봤어?” “안 봤어.” “안 봤다면 이상한데.”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누가 만들었어?” “신이 만들었어.” “그런데 당신이 그 신을 본 적이 있어?” “못 봤어.” “참 사람들 이상하네.”

 

보지도 않았으면서 있다는 거예요. 보지도 않았음에도 있다고 하니까 그래 신이 만들었다고 치자. 신을 섬기는데 소나무나 돌멩이나 이것에 기도하고 헌금하거나 착한 재롱을 부리진 않잖아요. 그런데 신은 나 같은 자가 있다는 것은 나 같이 생긴 어떤 분이 있는데 그분은 우리보다 능력이 많으시고 창조의 능력을 가졌으니까 그분이 신이라고 치고 신이 먼저 있기에 우리는 신의 모습을 닮았기에 신이 먼저 있고 우리를 만들었고. 따라서 만들었다는 말은, 그분은 너무 위대해서 보이진 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호의와 재롱과 정성과 정의, 이것을 확장시켜서 신에게 드리자. 따라서 이방인들이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들의 있음은 신에게 접촉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게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것은 서로 물어보면 의견 통일이 되니까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되 신이 만들었다고 하니까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크로마뇽인. 크로마뇽인이 있다는 것은, 진화론이 주장이기 때문에 제가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초기 문화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상태에서 일단 그들의 이론이 맞는다고 치면 크로마뇽인에서 최초로 신에 대한 예배와 제사가 있었다. 동굴 속에서. 신이 시작한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그 후예니까 그 전통을 이어받아서 모든 민족은 신을 섬기는 겁니다. 그게 발달되면 나중에 죽은 조상신이 신과 합류가 되니까 죽으면 사라지니까 사라진 사람끼리 따로 모이는 어떤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게 신의 세계고 그 신의 세계에 합류하는 방법은 후손들이 조상 숭배를 함으로써 조상을 매개로 해서 신에게 우리의 정성을 전달하고 신은 우리가 필요한 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이 현재 인류문화학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 증거가 뭐냐? 모든 민족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조상 숭배였다. 조상이 신이라는 뜻은 아니고 조상이 죽으면 어딘가 합류하는 곳이 있더라. 성경에서는 이걸 음부라고 이야기합니다. 죽은 자들의 집합 장소.
 
 

방금 제가 이야기한 이것을 누가 틀렸다고 이야기할 나설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만약에 틀렸다고 한다면 직접 본 사람이 있어서 당신들 무식한 거야. 없는 거야.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공통점을 동의한 점을 차출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달리 대안이 없기 때문에 동의할 수밖에 없고 동의된 것이 조상숭배고 조상숭배가 유발한 것이 집결력 또는 단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의 대표적인 결과가 국가공동체,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 발전하면서 결국 공동체가 된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뭐냐? 고대국가의 특징이 뭐냐? 공통의 신을 섬기는 겁니다. 그걸 제천의식이라고 하죠. 우리나라에 삼한 시대가 있잖아요. 마한, 진한, 변한 그리고 주몽 나오는 동예, 옥저. 우랄알타이 계통에서 나온 한반도에서의 특징은 제천의식이 있었어요. 신을 섬기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멀리 갈 것도 없지요. 기독교 오기 전에 한민족의 공통적인 의식이 있었습니다.

 

죽은 조상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그건 제사를 통해서 하는 것이고, 그 제사를 통하려면 제사장이 있어야 되는데 그걸 가장이 담당했습니다. 평소에는 술 먹고 살다가도 조상 제삿날이 되면 갑자기 두루마기 입고 그날은 목욕 갔다 오고 티비 놓던 자리 치우고 그곳이 거룩한 성소가 되는 겁니다. 그건 가정이고 그게 마을 단위로 한다면 늙은 느티나무 있는 곳이 갑자기 지성소가 돼버려요. 이것이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초월세계로 집결하는 유일한 방식은 조상을 통해서 이렇게 했습니다.
 
 

조상제례, 지금도 아프리카나 많은 연구에 의하면 모든 민족의 공통점이 조상을 통한 신에 대한 접촉이었습니다. 조상한테 잘 보이면 후손이 복을 받고. 지금도 기독교에서는 교회 다녀도 이 신화적 잔재가 남아있지요. 교회 다니면 조상제례가 졸지에 추도예배로 바뀌지요. 추도예배가 죽은 조상을 위함입니까, 자기를 위함입니까?

 

조상숭배가 무엇의 집결에 도움이 된다? 현재 있는 공동체에요. 작은 단위는 가족이고 보다 큰 단위는 집안이고 그렇겠지요. 조상숭배를 하게 되면 흩어져 있던 결혼한 형제들이 다시 모이면 우리 가문은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걸 재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요. 만약에 조상숭배를 거부하면 그 집안에서 왕따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물론 자기가 배부를 때는 왕따 당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아쉬울 때 갑자기 사업을 망했을 때 누가 도와줍니까? 여러분 외로울 때 윤복희가 도와줍니까? 여러분이에요?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도와줘요? 여러분이 누굽니까? 호적 파내라 백날 해도 역시 아버지는 아버지고, 자식 도울 사람은 부모밖에 없고 아무리 원수처럼 싸우더라도 형제간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동안 왜 그렇게 잘난 척하며 조상제례에 참석 안 했어요? 기독교라고, 교회 다닌다고? 절 안 해도 좋으니 와서 참석해서

 

결국 눈에 보이는 가족들의 공동체에 집결해줘야 나중에 새로 결혼한 새댁한테 교육을 시켜서 우리 집안은 15대 선조가 이항복인데(경주 이씨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훌륭하고 임진왜란 때 우리 조상은 이런 소리를 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할 정도로 뼈대 있는 집안인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이게 이방인들의 신과의 접촉방법입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에요. 인간은 사회 없이는 못사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사실은 펼쳐봐야 아무 의미 없는 거죠. 왜? 우리의 본성은 내 가족, 내 집안, 내 공동체, 내가 아쉬울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그 공동체가 멀리 있는 신보다도 나한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보탬이 된다는 말이죠.
 
 

만약에 우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라면 감히 불교로 전환할 용기 없고, 만약에 우리 집안이 불교라면 함부로 명절에 교회 다닌다고 함부로 못 끄집어내지요. 그 경계, 그 한계를 자신만만하게 넘어섰습니까? 인간은 못 넘어섭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맞아요.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니까. 혼자 있어도 가족 생각하고 아내에 집에 있어도 바깥의 남편 생각하듯이 사람은 혼자서 못 삽니다. 살 수가 없어요. 비록 다투고 형제간에 싸우더라도 내 핏줄을 버린다? 죽으려고 환장했어요? 왜 핏줄을 버립니까. 안 돼요. 아버지가 있음으로 유산 하나라도 받고 마지막 늙어가면서 유일한 소망은 유산 받는 거잖아요. 참, 나라법이 좋아서 딸이고 아들이고 골고루 나누게 된 시대가 되었지만. 살아있을 때 부동산 하나라도 챙기고 현찰 챙겨야 되지.
 
 

하나님이란 결국 결집력에 대한 상징물이었다. 사실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이방인에게 신이란 공동체가 유발한 상징물이다. 이거는 제가 내린 결론이 아니고 모든 학자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신은 꼭 필요한 거예요. 그 말은 사람은 공동체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목사님,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잖아요. 그건 이스라엘을 몰라서 그래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그럼 뭘 믿는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 유대나라는 결집력을 믿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 미국 유대인들이 헌금하는 이유가, 그 나라가 있어야 자기 정체성이 확보가 되니까. 사람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니까.

 

그게 우리의 전제인데 그런 입장에서 누가복음을 펼친다? 뭐 하려고? 뭘 위해서 펼치지요? 이렇게 체계를 갖추었는데 뭘 얻겠다고 펼칩니까? 이렇게 전제로 보면 누가복음을 펼치는 이유는 간단한 거예요. 내가 생각했던 그 신이 구체적으로 계시를 줬다니까 그 계시를 통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가 복을 받아 잘 될까 싶어서, 그 속에 있는 나도 덩달아 잘 될까 싶어서, 그분이 천국을 만들었다니까 그곳에 갈 수 있겠다 싶어서 그렇게 하나님을 믿은 거죠. 그런 마음으로.
 
 

본론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지금까지는 서론이고. 서론부분을 다시 요약하게 되면, 이방인 입장에서 이미 신이라는 것이 무슨 용도로 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뻔히 아는 입장에서 내가 소속돼있는데 나와 가족과 단체가 잘 되기를 바라서 신이 필요하다는 그런 입장에서 집 나간 아들과 딸도 하나님 믿는 가운데 믿음의 가정이 된다는 그런 필요에 따라 신을 찾고 있는 입장에서 성경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이 주어졌을 때 이 누가복음은 현재

 

여러분, 곽이라고 알지요. 박스. 이미 곽은 짜여졌어요. 성경으로 내용을 채우면 된다는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지요. 그러면 곽이라는 박스, 테두리는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 우리 집에 들어올 때 주의해야 됩니다. 하나님 믿어드릴 테니까 이 정도는 안 건드리고 그냥 곱게 우리 일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되는 겁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 뱀을 통해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이 되리라고 해서 하와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건 잘 몰라요. 확실치 않습니다. 하나님 되기를 원해서 따먹었는지 안 그러면 먹음직, 보암직해서 따먹을 때 결과에 대해서 뭔가 확정된 게 없어요. 그건 창세기할 때 합시다. 이것만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요. 그런데 아담이 죽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죽어본 적이 없지요. 그리고 눈이 밝아진다고 했는데 밝게 보인다는 걸 본 적이 없지요. 없는 상태에서 동기유발이 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본인이 뭘 경험해야 그게 되는데
 
 

 

-조상신을 숭배한다고 해서 결국은 자기 자신 안에 자기가 신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투영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아닙니다. 그건 곤란해요. 연관돼있는 걸 해볼게요. 출애굽을 할 때 애굽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 출애굽에 대해서 동기유발이 되겠느냐 하는 겁니다. 애굽이 전부인데 무슨 출애굽을 해요.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출애굽을 원하는 게 아니고 애굽의 정권이 바뀌어서 노예생활 벗어나서 예전처럼, 인간은 아는 게 과거밖에 없어요. 미래에 대해서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과거에 괜찮은 시절로 되돌아가기를 원해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지 애굽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은 하나님 아이디어지 히브리인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출애굽할 때 누가 당황했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당황했어요. 그래서 다시 자꾸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잖아요. 그래서 출애굽은 하나님 작전인지 히브리인들의 소망이 아니라는 거예요. 사람이 천국을 기대한다는 것은, 사람은 천국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기대하는 천국은 실제 있는 천국이 아니고 자기가 살아가면서 괜찮다고 여기는 그런 경험들의 집합, imf 터지기 전으로 돌아가면 저는 천국으로 봐주겠다는 것밖에 없지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누가복음은 이방인들 눈에 보이는 것은 현재 같이 살고 있는 공동체가 우선이에요. 그런데 읽었던 본문에서 특이한 용어가 나온다. 이방인들의 존재 개념이 아니고 나는 여기 있고, 누가 만들었지? 신이 만들었고 만든 신을 우리가 믿으면 우리 집안은 죽어서도 함께 한다. 그런 아이디어가 아니고 특수한 용어가 나오는데 그 특수한 용어가 72절에 보면,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이것 설명해야 돼요. 이 설명이 상당히 중요한데 언약을 기억한다는 말은, 언약을 누가 기억한다는 말입니까? 사람이 기억한다는 말입니까? 언약을 내린 당사자가 기억한다는 말이지요. 말로 하면 어렵고 행동하면 쉬워요. 이 지우개가 집사님 지우개지요. 제 지우개 아니지요. 집사님께서 이 지우개를 던져요. 보니까 내 지우개가 아니에요. 그냥 길을 간단 말이죠. 그런데 집사님을 아무리 찾아도 지우개가 없어요. 어디 있지? 했는데 지우개를 주웠을 때에 이것은 자신이 던진 지우개를 자신이 기억하여 건지는 게 되지요.

 

하나님이 언약 던져서 구원하는 아이디어가 인간의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지요. 그럼 인간이 관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걸 주울 필요도 없고 건질 마음이 안 들지요. 주께서 자기가 던진 언약을 자기가 도로 회수하고 건지면서 완성하면서 나온 부대효과, 부대효과란 용어가 어려운데

 

부대효과는 ktx 지나갈 때 치마 입은 여자 분이 앉아있다고 가만있는데 치마가 날릴 때 이걸 부대효과라고 해요. 뭐야. 방금 뭐가 지나갔어. 가만있는 내 치마가 흔들려. 그럼 옆에 있던 할머니가, “아가씨 다리 자랑하려고 치마 들췄어요?” “할머니, 왜 그래요.” “다리 예쁘다고 약간 들었잖아.” “그렇게 몰아가지 마세요. 저는 그런 적 없습니다.”

 

“집사님, 구원받으려고 교회 나갔잖아.” “왜 그래요. 그런 적 없습니다.” 부대효과입니다. “공동체 복 받으려고 같은 예수 믿어서 가족끼리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 전도대회 할 때 나갔었잖아.” “왜 그래요. 저 모함하지 마세요. 제가 유발하지 않은 사태에 대해서 원인제공자로 몰아가시면 곤란합니다.” 부대효과입니다.

 

ktx가 지나갔는데 왜 치마가 흔들지요? 사실은 하나님께서 언약 던져놓고 줍는데 옆에 있는 볼펜까지 주울 때 걸어든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이야기, 그걸 전리품이라고 해요. 우리는 전쟁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우리는 애굽에 살고 싶어요. 우리의 과거의 기억 속에는.

 

프로이트는 의식을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무의식과 의식으로 나누었는데 그 사이에 전의식이란 것도 있고. 의식은 아무리 연구해도 무의식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무의식이 잠잠할 때 무의식이 활동하면서 나오는 것이 꿈이고 꿈을 의식세계로 바꾸기 위해서 의식세계가 알아먹도록 꿈을 조작하는데 조작된 편집내용이 꿈이 되는 거예요. 꿈은 꿨지만 해석은 불가합니다. 해석이 안 돼요. 해석한다는 것은 의식세계에서나 통용되지 진짜 무의식에는 근처도 안 갔지요.

 

꿈같은 나의 본성이 해석이 되면서 사람은 정신병이 나아요. 그래서 정신병이란 뭐냐? 표현하지 않은 표현이 표현되면서 정신병이 낫습니다. 정신병에서 못 나으면, 어어어어. 말을 해. 내가 왜 그런지 내 마음을 표현을 못할 때 표현이 터지는 순간 그 사람의 정신병은 나아버린 거예요. 자녀 가운데 뭔가 어려울 때 문을 닫잖아요. 문 닫지 말고 대화로 하자. 대화를 하면 그 아이는 치유가 돼버렸어요. 그런데 너무 답답하면 문 닫아 걸고 게임에 빠져버려요. 치유가 안 되지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인간이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웠으면 기껏 집안이나 공동체에 의지하겠습니까? 쉴 새 없이 ktx가 지나가거든요. 바람이 불거든요. 바람이 불면서 너무 흔들리니까 도대체 정신을 못 차려요. 대충 미친 상태에 빠져요. 그럴 때는 교회 나와서 기도하면서 부르짖는데 부르짖는 것도 성경적으로 맞고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한 맺혀서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냥 짐승이 부르짖듯이 터져 나오는 거죠. 누가 손대고 있었던 겁니다.

 

너를 이렇게 만든 게 누구야? 말을 못하지요. 말을 못하던 것이 말이 트일 때 그것이 바로 언약이 접촉할 때입니다. 누가 지나간 걸 몰랐는데 ktx가 지나간 걸 안 순간 치마가 약간 들린 그 아가씨는 비로소 정상인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ktx가 방금 지나갔구나. 나라는 인생, 누가 지나갔어요. 누구냐? 언약의 하나님이 지나갔습니다.

 

목사님, 그럴 것 같으면 언약의 하나님이 그냥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지나가지 말고 보이는 상태로 다가오게 되면 문제 해결 간단하지 않습니까? 보이는 상태로 지나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은 보는 것을 신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만약에(만약이란 말이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이 신으로 나타나게 되면, “저나 나나 똑같은데 뭐.”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어도 예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내왔습니다. 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랍비라고 했지요. 랍비가 뭡니까? 신은 때려죽여도 아니고 그냥 훌륭하신 분이지요. 당신을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하더이다. “그래. 베드로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들 말이 맞아, 틀려?” 여기서 베드로에게 갑자기 ktx가 지나갑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가 자기 본심이 아니고 부대효과로 아주 엄청난 말을 해버렸어요. 그 말은 뭐냐? 우리 인생은 주님의 효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네가 알게 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나님 내 아버지시니라. 이 세상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베드로의 간접적인 고백을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이제 진짜 본격적으로 강의 시작합니다. 미국이니까 What happened? 세상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전혀 종교적이지 않지요.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지요. 다만 무슨 일을 느낄 때나 관심 있는 거예요. 그걸 두 자로 하면, 뭐지? 이걸 모르는 사람은 뭐, 뭐, 뭔데? 뭐지, 무슨 변화지? 옆에서 변화는 무슨 변화, 이 사람 갑자기 왜 이래. 갑자기 이렇게 변했어. 가만있어 봐. 뭐지?
 
 

다메섹에 내려갈 때 사도 바울과 일행이 같이 내려갔잖아요. 지금 주님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레가 쳤어요. 그런데 갑자기 사도 바울이 땅에 엎드렸고 장님이 됐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지?” 하니까 옆에 사람이, “뭐야. 우레 쳤는데.” “아니야. 분명히 나한테 음성이 들렸어. 사울아, 사울아.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니라.” 이런 부대효과가 일어난 겁니다. 이 세상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누가복음 시작하면서 이 이야기부터 하고 싶은데 마침 이틀 간 버지니아 비치에 비가 왔지요. 그 예를 들겠습니다. 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살고 있습니다. 혹시 비 오라고 요청한 분계십니까? 없지요. 비가 오게 되면 특징이 그냥 당한다는 겁니다. 지금 비가 온다는 말을 하는데 정확하게 이야기합시다. ‘우리는 비 옴을 당한다.’ 이렇게 말해야 돼요. 왜냐하면 비 오라고 먼저 요청하고 하나님이 내리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지요.

 

우리는 비가 오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비 내리고, 눈 오면 눈 내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비 왔다고, 눈 왔다고 우리 운명이 바뀌지는 않잖아요. 만약에 우리의 운명이 바뀌는 소나기가 온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겠습니까? 비 올 때 “나는 이제 천국 가.” 이럴 리는 없을 거예요. 눈 올 때 “나는 드디어 천국 가.” 이런 사람 없지요.
 
 

그런데 언약이 내리게 되면 갑자기 졸지에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일으킨 부대효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때 우리의 태도는 이겁니다. 뭐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야. 그러면서 황급히 누가복음 1장 68~74절을 읽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세상은 결국 뭐냐 하면, 언약을 던져놓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언약을 만드는 부대효과로 이 사람한테는 이게 바로 내가 그동안 몰랐던 현실 전부요, 현실 그 자체, 올 현실이에요. 그러면 코앞에 있던 나의 사업체, 아이 키우기, 얘 공부하기, 이건 부분 현실이죠.

 

“하나님, 우리 얘가 감기 걸렸어요? 비 내리시면 안 되는 것 아시죠.” 이렇게 요구할 입장이 못 돼요. 감기 걸렸는데 하필 비가 오다니. 그래서 감기 더 들었어요. “와이미. 주여,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우리는 항상 당하고 살면서도 우리를 당하게 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려울 때만 잠시 눈 돌릴 뿐이지 평소에는 나만의 것, 나의 공동체, 나의 가족, 눈앞에 있는 그것을 박스로 만들고, “신이시여, 이 박스 다치지 않게 잘 키워주세요.” 이런 식으로 믿어왔던 것이 이방인 신이라고 누가복음의 언약서는 이방인은 상상도 안 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 이스라엘 나라는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지? 그 내용만 알면 우리의 강의는 끝났어요. 뭘 버려라? 나만의 현실을 현실 아닌 걸로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려라. 참된 현실, 모든 현실이 있다면 우리가 거기에서 누리면서 살면 되지 그 현실을 독자적으로 따로 상자를 만들어서 그 안에서 폐쇄적으로 담겨서 살게 되면 스스로 현실에 대해서 충돌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가련한 인생입니다. 현실도 모르고 자기 욕구, 욕망밖에 모르는 그래놓고 평생 40, 60, 70을 살았다고요? 어떤 분은 90까지 사시는 분도 있어요. 들은 이야기인데 90 되도 안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그렇게 살면 뭐합니까? 90까지 살아도 자기밖에 모르는데. 기껏 안다는 게 자기 가족, 공동체 그리고 기독교 하나님이라는 것은 내 가족, 식구 지켜주는 보디가드 같은 하나님, 그건 바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에요. 상상의 가짜 하나님, 내 존재가 확장되어 생긴 하나의 투사체에 불과한 겁니다.

 

투사체하니까 생각나는데 어릴 때 만화 봤는데 굉장히 신기한 게 있었어요. 배트맨이 있는 옥상 하늘에 배트맨 그림자가 비추더란 말이죠. 어릴 때 신기했죠. 사실은 옥상에 조명기구설치하면 만들 수 있는데.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신입니다. 내가 있는 현장에서 나만을 위한 신은 내가 죽는 순간 이것도 커져버리지요. 내가 죽는 순간 내가 한동안 신이라고 여겼던 것도 같이 공중에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란 사람은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있고 난 뒤에 하나님 있지 하나님 있고 내가 있지 않다. 가장 정확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내가 정확하다.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죽으면 내가 믿던 하나님도 같이 날아가 버린다. 하나님 믿지 말고 하나님 잘 믿는 나 자신을 믿고 살아라. 이게 근대주체사상의 시작입니다. 데카르트 전제가 기독교 세계관에서 나온 거죠.

 

언약의 하나님은 전쟁을 했고 그 전쟁은 사람과 의논한 바 없고 일방적으로 전쟁을 했고 그 전쟁의 부대효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납치를 당했다고 할까요, 건짐을 받은, 서 있다가 손으로 낚아챔을 당한 거죠. 들어가 보니까 안에 ktx 열차를 타고 있어요. 저쪽 칸이 아브라함 칸이고, 이쪽 칸이 다윗 칸이고, 제12호에 보니까 십자가 칸이 있는 거예요. 어느새 혈육이 아니면 갈 수 없는 아브라함 자손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자손 아닌 자가 영적으로 이미 아브라함 자손의 열차에 동승을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창문을 바깥을 보니까 나 같이 생긴 사람들이 그대로 코앞에 있는 자기 현실, 자기 가게, 자기 가족만 챙기면서 오늘도 24시간 그것만 집착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럴 때 외칩니다. 다윗의 언약이 어떻고, 아브라함언약이 어떻고 하면, 바깥사람들이, “뭐, 뭐라고?” “다윗의 언약, 아브라함의 언약을 하나님 스스로 던지고 하나님 스스로 완성하면서 구원이 되었어요.” 저 안에서 저 사람이 뭐라는 거야. 여기 72절 봅시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언약을 기억하지요. 언약을 교회에서 이야기하기가 참 난처해요. 이방인들은 나의 존재로 신을 섬기는데 충분하다고 보는 겁니다. 나 존재한다. 누가 만들었지? 조물주가 만들었다. “하나님, 거기 잘 계시지요? 죽어서 만납시다. 정성, 열심 드릴게요. 성의표시 하겠습니다.” 내가 이웃사람에게 잘하듯이 내가 다른 존재에게 좋은 관계 유지하듯이 남한테 하는 내 성의와 모든 걸 표출하게 되면 그것이 신에게 도달되면 신이 복을 주실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자기를 위한 약속을 만들어내지요. 물론 그 가운데 자기 돈 사기 친 사람 빨리 죽으라고 포함됐지만 그런 식으로 하는 거지요. 하지만 그것은 내가 지어낸 배트맨, 몽상이고 환상에 불과하지요.

 

그렇다면 누가복음 1장 전체 줄거리는 뭐냐고 물으면 간단해요. 하나님이 던진 언약을 회수하면서 그동안 구원받았다고 자처는 이스라엘을 밀어내고 그 밀어낸 빈 공간에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구원의 ktx를 태우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근거 확보에 누가복음의 주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밖에 있는 사람은 진짜 하나님, 모세가 독대한 여호와 하나님이 만든 그 노선에 집어넣는데 근가 필요해요. 왜 근거가 필요하냐 하면 이들은 언약도 모르고 그냥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이거든요. 그것도 마귀에게 속하고. 이 죄인을 의인으로 전환시키는 근거가 필요한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 속에는 죄인인데 의인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제부터 이 땅에서 만들어 가시는 그 작업을 누가복음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북 치고 장구치고.

 

누가복음이 어렵지만 쉽게 말해서 북 치고 장구치고 혼자 다 하시고 성령 보내시는 부대효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공짜로 참여하게 된 거예요. 혼인잔치 때 길에서 놀고 있는데 원래 잔치할 손님들은 소 키운다고 안 와, 자기 장가간다고 안 와, 밭을 샀다고 안 와, 본 자손들은 다 초청 거절하고 초청되지 않은 거리에 있던 빌어먹고 아무 가치 없고 현실구성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자를 무작위로 무조건 불러다가 아들의 혼인잔치에 집어넣고 거기서 일방적으로 천국을 확정지어버리는 그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듣는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너, 아니란 거죠. 그리고 네가 저주했던 이방인들이 너희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식으로 이제부터 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셨다는 겁니다.

 

방금 이런 이야기가 구원받는 우리와 사전에 조율이 있었습니까? 없었지요. 우리는 주께서 그런 효과를 줄 몰랐어요. 우리는 조상숭배라는 공동체 그리고 가족중심의 내용물로 꽉 차있기 때문에 특정민족이 믿는 여호와라는 특정종교가 여기에 삽입할 틈이 없어요. 여지가 없어요. 내 종교 관리하기도 바쁜데 어디 그런 걸 수입해서 합니까? 오면 튕겨버리고 오면 튕겨버리죠. 아무리 튕겨도 들어오게 되는 방법도 누가복음 안에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하면서 그걸 찾아볼 거예요.

 

“아, 나는 예수 안 믿습니다.”라고 강력하게 거부하는 거부 능력마저 극복하고 만약에 방파제를 파도가 넘치면 어떻게 됩니까? 타고 들어오지요. 누가 허락 받고 들어오세요? 할 정도로 우리 허락도 없이 타고 들어와서 완전히 덮쳐버리는 거예요. 이것을 아까 제가 누구 허락받고 여기 비 내립니까? 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모든 현실은 절대로 우리 허락 받지 않고 일어난 일들이에요. 우리는 그냥 당한 겁니다. 매일 당하고 살아요. 그래서 제가 설교할 때 했지요. 뭘 했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앞에 하나 붙여라. 당했다고 이야기해라. 이렇게 살라는 거예요.

 

만약에 로또 당첨되거든 1등 당첨됐다고 하지 마시고, “오늘도 부대효과로 1등 당첨되도록 당해버렸다.” 얘들이 만약에 복음을 안다면, “엄마 오늘도 전교 1등 당했어. 2등이 양보해주는데 미치겠어, 정말.” 그렇게 되는 거예요. 물론 그런 얘를 기대하진 마세요. 걔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 자랑질 하기에 급급하지 안 하거든요. 우린 어떤 경우에 당했다고 하느냐 하면, 내 기대에 못 미칠 때 당했다는 거죠. 나는 그만한 위치에 있지 않은데 재수 없어서 당했다는 거죠. 이제는 재수 있는 것도 당했다는 걸로 바꾸세요. 오늘도 당신 같이 미인을 아내를 만나는 그런 일을 당했다든지, 이렇게. 처녀는 결혼을 좀 당하면 좋겠고, 총각은 장가 당하길 바랍니다.

 

소나기 올 때 우리와 의논한 적 없습니다. 소나기뿐이겠습니까, 비 오고 눈 오고 뿐이겠습니까? 사실은 우리 운명도 당해서 확정된 천국 가기입니다. really? 누가복음이 말해줘요. 누가복음 구원할 자를 구원하고 또 한 가지 구원받지 말 사람을 기어이 추방시키는 상반된 작업이 예수님을 통해서 재배치가 되고 조정이 되게 돼있습니다. 현실을 언약 완성에 맞추어서 조정하기, 누가복음의 주체입니다. 테마입니다.

 

그 테마는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자신이 아버지께 받은 그 테마, 일방적으로 건지고, 일방적으로 퇴출해버리는 그 테마가 주님의 모든 사역과 말씀 속에 담겨있어요. 그래서 구원받으려고 누가복음을 보지 마시고 이미 부대효과를 받아서, “뭐지? 왜 갑자기 내가 예수에 관심이 있지? 예수님이 도대체 누구지?”라고 보신다면 누가복음은 의외로 대단히 쉽습니다.

 

 

그 쉬운 작업을 10분 쉬고
 관리자(IP:203.♡.42.222) 14-10-25 15:18 
20140925 미국동부오후b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첫째 시간에 전제로 깐 것이 뭐냐 하면, 이방인인데 언약이 없지요. 언약이 없으니까 저주지요. 아브라함이 복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복이 전수되면서 그 증표가 할례입니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복에서 이미 제외된 사람들이에요. 아마 제가 이런 이야기하게 되면 김용옥 교수가 대번에 이렇게 나올 거예요. 이 세상에 많은 수천 민족 중에 한 민족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떻게 대표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있다면 우리 한민족에는 우리 신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끼리 신을 믿으면 저들은 저들의 신을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언약에 없으니까 그런 소리한다는 거예요. 자기 결속하기 위해서 자기 공동체 혈통 유지하기 위해서 한다는 겁니다.
 
 

그럼 언약이 있을 경우에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린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한 자는 저주받지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니까. 근원된다는 것은 후손들이 자동적으로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추가적인 조건들이 들어가요. 조건이 인간의 신체에 남깁니다. 그게 바로 할례언약입니다. 할례 받지 않는 것은 내 쪽에서 끊어지리라. 끊어진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이미 ktx가 확보돼있는데 문 열고 달리는 기차에서 집어던져버린다는 말이죠. 끊어진다는 말은 추방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인간으로서는 듣기 힘든 이유가 ktx는 몸체가 있잖아요. 그런데 언약체가 만져집니까? 언뜻 들으면 일방적으로 있는 듯해서 사기 치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언약의 공동체만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할 때 증거대라. 어디 있는데? 아브라함이 기껏 이야기하는 것이, “봐. 우리 가족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 행했잖아.”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은 너희들의 일방적인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폐쇄적인 주장이다. 보편적인 증거를 대라.

 

보편적인 증거 있습니까? 보편적인 증거는 이방인들이 확보하지요. 우리 여기 있다. 신이 존재한다. 우리가 하는 식대로 하면 신과 접촉된다. 너희들 빼놓고 나머지 모든 사람, 그들의 여집합이지요. 그들 빼놓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있음 자체가 신의 존재를 의미하고 우리가 성의를 표하면 나중에 천국 있으면 간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할례를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걸 아브라함 이쪽을 ‘위반’입니다. 위반사례를 모아서 언약이 이뤄지는 겁니다. 이게 누가복음에 첫 번째 나오는 특징이에요. 위반사례는 사람들이 거부하고 싶고, 위반했다는 말은, 이미 그 전제돼있는 다른 세계, 현실이 따로 정립돼있다는 말이고 여기는 이미 사람들의 동의와 동조를 충분히 확보된 거예요.
 
 

1장에 나오는 사가랴는 제사장인데 아내가 잘못됐는지 무정자증인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누가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아기를 못 낳아요. 하나님께서 아기를 낳게 해서 넣으면 위반사항이 안 돼요. 아기 못 낳는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계시가 와버리면 여자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 아기 못 낳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동의된 바입니다. 동의된 쪽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위반사례를 만들어버린 거예요. 이쪽의 사람들은, “뭐야 그 위반은?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하지 않고 납득이 안 되는 위반사태가 벌어지는 거야?”
 
 

위반사례를 통해서 아기 못 낳는 자들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아기 이름을 자기 아버지가 짓든지 해야 되는데 사가랴가 갑자기 말을 못해요. 말을 못하고 아기 이름을 부친 이름 따라서 사가랴라고 하니까 이씨 집안이니까 이씨라고 써야 되는데 권씨가 나온 거예요. 이씨 집안에서 무슨 권씨가 나와요. 또 위반, 이탈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언약은 정작 구원할 자를 일방적으로 자기 노선에 집어넣고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추방하는 형식이란 그러한 양면 활동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인간의 기대를 이리저리 다 무산시키기 위해서. 왜 기대를 무산돼야 될까요? 천국이란 인간이 예상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천국은 우리가 기대한 그 천국, 과거에 좋았던 걸 끌어 모아서 천국 되는 것이 아니고 낯선 세계기 때문에. 얼마나 낯설고 놀랐으면 자기의 면류관도 다 던지겠습니까. “이런 세계에 들어온다면 이것은 주께서 일방적으로 끌어당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면류관 주님이 받으셔야 됩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이 땅의 천국은 반드시 누굴 포함시키느냐? 나 잘되기, 내 소망 달성하기가 반드시 끼어들어야 돼요. 정작 주님은 우리가 예상한 모든 것을 비껴가는 거예요. 비껴가면서 이탈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저는 틈이 벌어졌다고 이야기해요. 분명히 하나인데 분명히 1인데 틈이 갈라지면 두 개가 되지요. 그리고 두 개가 되면서 1은 어디 있느냐? 갈라진 틈 사이에서 1이 새롭게 솟아나면서 처음에 1이라고 여긴 것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틈이 갈라질 때 기존의 지층이 아주 강력하게 반발하겠지요. 반발하는 힘과 터져 나오는 힘에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했지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드로라 하지 않고, “사탄아 물러가라!” 베드로가 바람이 불어서 아버지에 의해서 신앙고백이 된 이상은 인간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지층에서 대립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했거든요.

 

베드로가 그런 고백하는 순간 배후에 감춰져 있던 사단이 주님 앞에 등장한 걸로 보는 겁니다. 이제는 인간 대 사단의 대결이 아니고 주님과 사단의 직접적 대결 상태가 되는데 이럴 때 나오는 특이현상, 공통점이 바로 예수님에 대해서 “주여, 이러시면 우리의 상식과 예측에 벗어납니다. 주님은 우리와 같은 편이기 때문에 우리가 납득이 되는 식으로 일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거죠.
 
 

그게 바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악마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탄은 가짜 사탄이에요. 악마였어요. 사탄은 절대로 인간의 손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황금색 얼굴로 양쪽에 검은 날개를 단 그런 사탄은 악마가 지어낸 사탄입니다. 차라리 천한 천사가 아마 그런 모습으로 올 걸요. 천사가 사탄의 모습으로 올 수도 있어요. 사탄으로 여기기 때문에 천사가 되고 천사로 여기기 때문에 사탄이 되는 역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거예요. 오래 누적된 우리의 정보력이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것으로 배제되고 맙니다.

 

그런 이탈사태, 위반사태가 누가복음을 처음부터 드디어 지진이 벌어집니다. 갈라집니다. 거기서 하나님,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눈에 보이지 않기에 모든 인간은 동의했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면 우리가 알아볼까, 못 알아볼까? 하는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모든 사항을 정보를 집결해서 나타나기만 하면 즉각 신고가 되도록 알아보는 체계가 잡혀있어요. 이런 하나님이다. 메시아는 다니엘에 의하면 구름 타고 오시게 돼있어요. 그리고 각종 모든 귀한 것들은 다 오게 돼있어요. 사무엘하 22장에 보면 메시아가 오는 정경이 나와 있습니다. 아주 화려하고 한강의 불꽃놀이 이상입니다. 멋져요. 대단합니다. 깜짝 놀랍니다. 모든 사람이 보게 되고. 그래서 플래카드 준비하고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오신 분은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그는 흠모할 가치도 없고 믿을만한 어떤 티끌도 없는 모습으로 오셨고 그분은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에 의해서 채찍을 맞고 버림받고 무시당하면서 나는 화목제물로 이 땅에 버림받은 양으로 왔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채찍은 우리를 위함이라.
 
 

그래서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혈통적 우리는 깨져버리고 주님의 새로운 우리가 성립되는 겁니다. 나라는 원래부터 없어요. 나라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고 우리에게는 나가 없어요. 반드시 아담 혼자 나고, 주님 나에요.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지 독특하게 나라는 말을 지칭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우리를 주께서는 새롭게 만들어내지요.

 

그래서 특이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이야기할게요. 제가 욕심내서 진도 빨리 나가진 않겠어요. 하지만 다 합니다. 하다보면 다 하고 있어요. 이게 1이죠. 수학전공자를 다 아실 거예요. 1이란 바로 존재의 시작입니다. 1+1이 되고 1+1+1이 들어가죠. 1+1을 2라 하고, 1+1+1을 3이라고 해서 점점 더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0이라는 것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기호라는 것은 사물이나 세상이 먼저 있고 그 있음을 근거로 해서 붙여야 되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은 어떤 기호도 없어야 된다는 것이 당연한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0이라는 게 처음 나와서 갑자기 수학이 비현실적 기호화 되고 말았어요. 비현실적 기호화 되면서 인간의 모든 상상력을 만족시키는 체계로 학문이 되는 겁니다. 오히려 만족시키는 거예요. 참 신기하지요. 현실이 아닌 것이 도리어 현실을 설명하는 높은 단계의 위상에 도달한 게 수학입니다. 그래서 기원전 오백 년경의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은 수로만 돼있고(오늘날 정보로만 돼있다는 뜻) 그 수의 조화에 의해서 우주는 움직인다고 보는 겁니다. 그 증거로 음의 기, 음파, 현의 줄에 따라서 아주 정확하게 8단계로 나눠지는데 참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미술이란 것도 1:1.6일 때 가장 아름다운 비율이 나오고. 8등신이 나오죠.

 

수학에서 이렇게 나오는데 1은 반드시 존재의 시작, 있음의 시작이지요. 0이란 이처럼 있지 않은 걸 0이라 한단 말이죠. 그런데 지지직, 이걸 자르고 올 줄이야 생각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있고 따로 하나님이 하늘에서 나타나게 되면 나 1이고, 존재함이고 또 하나님이 존재하는 1이 되지요. 둘 사이에 존재적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이것이 백성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 구약의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나 있음이 쪼개지면 존재가 날아가 버려요. 재미있는 것이 1이 쪼개지니까 1이 안 되고 1+1이 돼버렸죠. 그러니까 존재가 갈라지니까 존재의 하나 되게 하는 본성이 찢어지지 말자고 붙들지요. 붙드니까 깨어진 1이 도로 1이 되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찢어짐이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봉합이 되는 거예요. 있다가 봉합함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의 모든 존재는 주님 보시기에 찢어주시는 그 능력과 관계없는 또 다른 세계에 이미 사로잡혀있다는 것이 증명이 돼버린 겁니다.

 

첫째 시간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의 언약에 있어서 던져놓고 언약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언약이 품고 있는 내용물이 쏟아지는데 그 내용이 뭐냐? 내가 구원받을 자를 구원하고 버릴 자를 버리는 내용이 있거든요. 아브라함에게 축복만 이야기한 게 아니고 저주도 이야기했어요.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축복만 이야기했다면 우리는 중립지대에 있고 아브라함을 믿으면 복 받고 안 믿으면 그냥 복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믿으면 복 받고 안 믿으면 뭐가 되지요? 저주를 받는다니까요. 세상에 이런 생떼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보통 저주는 어떤 경우에 저주를 받습니까?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 네가 한 일에 책임지라고 저주내리잖아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야 된다는 가장 철학적인 당위성이 뭡니까?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일에는 책임질 수 없다. 모든 인간이 동의한 바에요. 인간들이 동의한 바에 의하면 신이 있고 신의 법칙은 서로 물어보고 일치된 의견을 뽑아냅니다. 일치된 의견 중에 하나가 책임을 질 수 없는 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거예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걔가 지옥 갑니까, 천국 갑니까? 천주교에서는 난처한 질문이에요. 그래서 천주교에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빠, 엄마가 얘를 대신한다고 치고 아빠, 엄마가 영세 받으면 그 얘도 구원받는다. 그러면 아빠, 엄마가 영세 안 받으면 어떻게 할 거냐? 일단 죽으면 패자부활전으로 가요. 이게 연옥입니다. 연옥이론이 11세기경에 처음 등장했어요. 전 국민을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그걸 국가종교라 하는데 한바탕 가는 거예요.
 
 

그 사람의 자유의지를 묻는 것이 아니고 그 얘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돼있으면 봐주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형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속에 공유적 속성이라 해서 의와 양심과 착함이 들어있으면 그것은 그 사람 것이 아니고 누구나에게 할당된 것이라고 한 겁니다. 마치 커피믹스 안에 커피뿐만 아니라 프리마, 설탕도 들어있지요. 그러면 커피인데 그게 왜 들어있지요. 그게 맛을 해주잖아요.

 

인간은 죄인 맞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전적인 죄인은 아니다. 왜?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선한 게 있기 때문에. 선한 걸 따로 뽑아서 하나님 것이라고 본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것을 스스로 처단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모순된 이야기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해도 전적으로 타락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도 그 속에 있는 의와 신과 양심에 호소하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을 잠재성이 있으니까 꼭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잠재적인 신자라고 하는 것이 현대 천주교의 교리입니다.
 
 

칼빈의 전적타락, 아니에요. 티벳불교, 라마불교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일단 중간단계에 가니까. 여러분, 자판기에서 덜컹하고 한 단계 떨어지고 또 한 단계 나오잖아요. 보이지 않는 중간단계에 연옥이 있어서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착하냐에 따라서 하는데 어린아이는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어린애. 그래서 천주교에선 어린애를 축복했다고 말해요. 이 말은 그들의 이론에 의하면 네 속에 있는 내 것을 축복한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그게 납득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얘가 잘 켜줬으면 그럴 리가 있느냐고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죽었던 얘 생각해보세요. 그 소식이 기쁜 소식입니다. 내 얘도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얘까지 생각할 정도로 사랑의 범위가 넓구나. 세상에 이런 사랑을 모르고 말이야.” 하면서 굉장히 좋아하지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상하게 사람 기쁘게 하는 요소가 구색 맞추어서 다 들어있습니다. 천주교 가게는 없는 게 없어요. 뭘 원하십니까? 다 들어있어요.

 

다시 해봅시다. 어려운 이야기에 들어갔는데 하나가 갈라지니까 “우리의 단결력을 누가 훼손해?” 하고 다시 문을 닫아버렸죠.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어려운 이야기를 여러분 수준 믿고 합니다.

 

무가 두 종류가 있어요. 현재 내가 있음에서 없는 것을 무라고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라는 철학자는 없다는 게 없다는 거예요. 없으면 없다는 말도 하지 말해야 진짜 없는 것이다. 없는데 무슨 없다고 하느냐. 만약에 없다에 무를 붙이면 없음이 있음이 되니까. 없는 게 말이 되느냐.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철학자를 말하기를, 없음을 이야기해야 있음이 의미 있다는 거예요. 밤이 있어야 낮이 있듯이 질서 잡기 위해서는 없음이 필연처럼 들어가야 한다고 본 겁니다.

 

인간이 생각한 없음은 내가 있음을 기준으로 하는 거예요. 하여튼 누가 있다? 내가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 여러분, 내가 있는 것 맞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안 했지요. 우리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지요. 결국 없어지지요. 결국은 없는 거예요. 임시적이에요. 우리는 계약직입니다. 정규직이 아니에요.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이를 보려고 하는 자들아 너희는 안개인지 알지 못한다.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해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그러면 뭔 뜻입니까? 있음은 나는 부속품으로 있는 거고 본체가 있지 부속품에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부속품이 소속돼있는 그 몸체를 유일하게 있다고 해야 된다. 주가 있음에 내가 있다고 해야 그게 맞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하면 우리가 평소에 일상생활 못해요. 병원에서 “전에 주사 맞은 아줌마 오셨습니까?”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있다고 없는 거고 그냥 있음을 저한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거든요. 주께서 있음인데 나는 있다가 없는 건데 ....” 무슨 이야기야. 주사 맞으란 이야기인데 딴 엉뚱한 소리하면 이 세상 불편해서 못 살잖아요. “혹시 여기 주인장 계십니까?” “주인장 없는 데요. 없지만 있거든요.” 이러면 일상생활 못 하지요.

 

또 하나 없음은 뭐냐 하면, 있음을 찢고 들어오는 있음에서 상상도 못한 없음. 나중에 보니 그 없음이 있음을 대체하는 겁니다. 구원받은 인간을 대리하면서 유일하게 아버지를 아시는 분이 바로 아들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빼놓고 아버지를 아는 사람 없어요. 아버지를 모르면서 그동안 하나님을 믿는다고 우겼던 거예요. 그 거짓말을 진짜 아들 따로 있는데 아들도 아니면서 아들 행세하는 그것을 저주받을 짓이라고 째고 들어온 거예요. 째고 진짜 아들로 나타나는데 그 나타나는 현장이 뭐냐? 우리의 주체 자리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은 코끼리와 상대하지 않고 코스모스와 상대하지 않고 인간을 상대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우리를 왜 쨉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싫어서가 아니고 주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겠다는 신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소 양복 한 벌 없는 동생이 오랜만에 소개팅 나가려고 형한테 양복을 빌려달라고 할 때 이건 무슨 소리입니까? 오늘 특별히 여자친구를 만난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께서 주가 되신다는 것은 그냥 주가 되지 못해요. 반드시 육신의 죄를 입어야 인간의 죄를 입어야 주가 되기 때문에 인간은 그 주를 위해서 죄를 지어야 하는 겁니다. 죄 지은 겉옷을 본인이 입으시고 주가 되시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주님한테 본의 아니게 당하고 만 겁니다. 그 당했다는 것을 추후에 알게 된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 사람은 구원이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이지 원래부터 우리와는 상관없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주님께 소속된 구원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불교가 이미 해답을 내놨습니다. 생로병사라는 고통의 질곡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 인간의 생각은 구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구원을 뭐로 봤는가? 행복으로 봤어요. 그의 선배, 선배 격인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목적은 지식이라 했어요. 인간이 죄 짓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에 죄 졌다. 플라톤은 스승처럼 인간의 목적은 진리에 합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에 내려옵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은 행복에 있다. 얼마나 행복한가?
 
 

이 셋 진리와 진리의 합류, 행복 중에 어느 것이 우리 일상에 가장 와 닿습니까? 교회 왜 나가십니까, 예수 왜 믿습니까, 하나님 왜 믿기로 결심했습니까? 결국 끝에 풀어놓은 마지막 실타래를 보니까 거기에 주님의 행복에 있는 게 아니라 나의 행복이 숨어있었던 거예요. 좀더 범위를 넓히면 나의 가족의 행복.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 믿고, 행복하기 위해서 신을 찾고. 그 외에 다른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 행복에 그리스도는 방해될까요, 도움이 될까요? 아예 찢어버립니다. 어디서 죄진 주제에 (행)복을 찾아. 오직 너희들은 저주밖에 없어요.

 

그래서 누가복음은 저주에 있는 인간을 어떻게 복의 자리로 옮겨갔는지 옮겨가기 위해서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근거가 뭐냐? 누가 나의 의견을 묻지 않고 죄진 내 죄를 그냥 자기 몸으로 걸쳐버린 분이 우리 존재를 뚫고 들어올 때 아버지로부터 죄인의 길로 들어서신 분이 나타나신 거예요.
 
 

죄진 것도 없는 분이 죄인의 모습의 길로 가셔서 그 죄는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지은 죄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모든 행적은 전혀 외부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능력으로 눈치 챌 수 없는 일방적인 작업이었습니다. 심지어 열두 제자의 존재의 목적이 뭐냐? 무지의 대표자로 모아놓았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베드로가 자기를 물위로 걷게 했고 장모의 병을 낫게 했고 오병이어 했고 자기를 칭찬했던 그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뭔가 아우라가 쳐져있지요.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한 발자국도 벗어날 리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어도. 베드로뿐만 아니고 열두 제자가 함께 다 있어도 그들은 자신의 행복, 자신의 위대함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합니다. 어떤 인간도 그 난관을 뚫을 수가 없어요.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습니다. 너는 네 자리에 있어라. 내가 찾아갈게. 네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내가 다시 찾아오마.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 끝까지 너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사랑은 죽음보다 더 세기 때문에, 아가서 마지막 8장에 나오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더 세기 때문에 지옥 간다고 절망하지 마라. 사랑은 지옥에 있는 인간도 끄집어낼 능력으로 내가 지옥 다녀간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지옥에 들어갔으면 못 빠져나오는데 예수님은 지옥 갔다가 사흘 만에 다시 나왔기 때문에 건질 수 있는 능력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분의 능력으로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뭡니까? 진정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는 내가 못하는 것 주께서만 해주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서 오늘도 주님한테 당하고 삽니다. 쉬는 시간에 피자 먹으면서 피자 먹음을 당했습니다. 피자 먹기 싫고 김밥 먹어야 되는데 김밥 못하고 피자 준비함을 또 당했어요. 세상에 어떤 인간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남 탓하지 마세요. 배후에 주님께 그렇게 하신 겁니다. 발걸음 세시고 머리카락 뽑고 빠지는 것, 댕기머리 백날 해봐야 소용없고요. 댕기머리 주신 것도 주님이시니까 열심히 바르시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세요.

 

네가 염려함으로 키가 한 자나 자라게 하지 못한다. 성장판이 닫혔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그 말은 키 작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고 키 큰 사람도 한 자 더 자라게 못합니다. 2미터 35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클 만큼 컸어도 소용없어요. 세상에 모든 것은 주님한테 당하고 사는데 문제는 아는 사람은 천국 가고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가고. 그들은 지옥 가서 비로소 알게 되고 뒤늦게 후회하지요. 로마서 1장 이야기입니다. 그때 지옥 가서 핑계치 못하리라. 주님 언제 저한테 은혜 줬습니까? 핑계치 못한단 말이죠.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받은 질문 중에 하나가, “전도사님, 세종대왕은 천국 갔어요, 지옥 갔어요?” 목사님, 답변해보렵니까? 제 답변은 간단합니다. 구원이란 자체가 애초부터 구원이라고 해도 그건 가짜에요. 째고 들어와야 구원이에요. 만약에 존재 자체를 있음이 없음으로 바뀌는 나는 없고 주님만 있는 존재로 바뀐다면 세종대왕이란 그런 존재는 없지요. 그냥 아담의 옷자락에 불과한 겁니다.

 

세종대왕이라고 말하지 마시고 제66번째 아담이라고 보면 돼요. 일종의 기계론적이지만 기계가 똑같은 복제품을 만들어내듯이 서른일곱 번째 아담, 칠천사백오십육 번째 아담. 그중에 하나가 세종대왕입니다 이순신 장군이고. 그리고 팔천육백사십육 번째 아담이 전데 그것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천오백사십오로 바뀌어버리죠.
 
 

어떤 경우에? 돌아보니까 뭔가 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장벽을 이미 넘어왔어요. 이미 닫혀버린 홍해가 바로 보이는 거예요. 누구지? 내가 건널 수 없는 것을 누가 건너게 하셨지? 그것은 바로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피로 허락도 없이 건너게 해놓고 건넌 입장에서 뒤돌아보면서 주께서 그렇게 하심을 우리로 증거하는 겁니다.
 
 

수면내시경 해보셨습니까? 마취주사를 놓지요. 프로포폴 마취주사를 저는 몇 번 해봐서 일부러 시험해봤어요. 나는 마취 들지 않는다. 나는 의사가 하는 걸 생생하게 다 체험할 거야. 눈 떠보니까 다 끝나고 침대에서 치워져서 누워있어요. 뭐지? 누구야. 내 허락도 없이 날 잠들게 한 이 누구지. 뒤돌아보니까 수면내시경 끝나서 위에 염증도 없고 괜찮습니다. 이런 소식 온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수면내시경 다해놓고 구원받는데 영생 얻는데 전혀 지장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내 위신과 체면과 자유의지 발휘함, 나의 당당함, 내가 얼마나 착한가 하는 솜씨 발휘 이런 것들을 밑에서 솟아오른 어떤 예상 못한 낯선 존재에 의해서 그것이 쓰레기 취급 받아서 쓰레기통에 보니 거기 다 들어있네. 결국 주님께서 나를 쓰레기로 간주한 거예요. “주여, 왜 저와 의논이 없었습니까?” 하니까 “너는 안개니라. 왜 너와 의논하지. 난 아버지와 의논하면 되지 너는 전리품인데. 너와 의논하느니 마귀와 의논하는 게 편한데.”
 
 

우리는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구원받겠다는 행함으로 구원받겠다는 것은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해놓고 그걸 잊지를 못해요. 차변, 대변으로 장부 만들어서 착한 일 적고, 나쁜 일 적는 것, 일종의 일기장 아닙니까. “오늘 날씨, 맑음. 오늘도 착한 일해서 어머니한테 칭찬받았음. 내가 강아지 때렸음, 이건 나쁜 짓. 계산 해보니까 하루 일과, 착한 것이 많으니까 주여, 오늘도 착한 얘로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단 말이죠. 맨날 전체를 볼 때.
 
 

그런데 그게 쓰레기통에 있는 겁니다. 쓰레기통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쓰레기통을 들여다보니까 주께서 대신해야 될 일들이 그 쓰레기통에 가득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을 증거하려면 그 쓰레기통을 못 본 척하면 안 되고 그 쓰레기통에 들어가서 일일이 내가 행할 것, 행할 수밖에 없던 것들,

 

인간은 같은 몸이니까 옛날 행세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성질은 변하지 않아요. 다만 환경에 따라서 약간 숨고르기 순간은 있지만 다시 끝나고 나면 달려듭니다. 사료 건드리면 강아지 달려들 듯이 우리는 날 건드리면 달려들어요. 착한 어린이 없어요. 건드리면 다 개입니다. 치매 걸리면 다 세 살짜리 어린이 되잖아요. 그냥 밥그릇만 챙기고 달려들고. 그 모습이 우리 모습이에요. 선배입니다. 남의 이야기 아니에요. 같은 아담의 몸을 입었으니까.

 

그런 죄를 어디서 찾습니까?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 다 나와 똑같은 내가 지을 죄를 먼저 짓고 또 내가 먼저 지은 경우가 있어요. 내가 먼저 지은 것은 나는 선배가 되고 내가 미처 못 지은 죄를 선배가 바라보고 있고. 그걸 우리가 쓰레기통에서 끄집어내죠. 끄집어내면서 감사합니다. 이 죄도 용서하신다니 감사합니다. 그저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뜻이라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렇게 되기까지 주께서 무슨 일을 이 땅에서 하셨는가? 그렇다면 주님께서 저를 위해서 그런 일을 했습니까? 아니요. 그럼 목사님을 위해서? 아니요. 우리 중에 누굴 위해서 주께서 일했습니까? 아무도 우릴 위해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굴 위해서 일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너가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함이라. 그렇다면 누가복음에서 이스라엘을 위함이라고 한다면, 예수님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되겠어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부터 멸망한 이유를 쓰레기처럼 끄집어내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온 인간의 쓰레기를 자기 몸에 뒤집어씌우면 그 이스라엘 쓰레기를 오늘날 이방인을 대표하는 쓰레기로 우리에게 적용이 가능합니다.

 

수면내시경 이야기했는데 그걸 다시 적용하게 되면, 수면내시경 임상실험을 몇 명 쯤 했겠습니까? 설마 한 명으로는 인가 안 되겠지요. 그러면 넉넉잡아 백 명이라고 합시다. 백 명이면 통과되지요. 정확하게 하려면 60억 명 다 해보고 부작용이 없다고 해야 되겠지요. 그런데 표본조사를 하는 겁니다. 이 정도 하면 학회에서 인정해주는 숫자가 있어요. 물론 약효에 따라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많은 숫자로 하고.
 
 

그런데 주님은 그 표본조사를 누구 보고 합니까? 이스라엘 보고 한 거예요. 우리 보고 안 해요. 우리는 가만있어. 이스라엘에게 성립했으면 우리한테 성공한 거예요. 그럼 여기서 문제점이 뭡니까? 이스라엘이 뭔데 우리 대신 표본으로 하느냐? 이스라엘은 특징이 있어요. 이스라엘은 죄 지을 때 그냥 죄 짓지 않았습니다. 죄를 유발하는 요인이 들어왔어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철저하게 인간을 이용하지요.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언약을 줘버립니다.

 

그 언약을 줄 때 지킬 수 있는 언약을 주십니까, 못 지킬 언약을 주십니까? 못 지킬 언약을 줘요. 네 목숨을 다하여 네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게 됩니까? 데카르트가 뭐라고 했어요? 내가 있는 이상 하나님이 의미 있지 내가 없는 이상은 하나님은 의미 있다, 없다? 나 죽으면 하나님 없어요.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내가 먼저 있고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거예요. 데카르트에 의하면.

 

이건 데카르트뿐만 아니고 이스라엘도 마찬가지거든요.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그 땅이 비어있습니까, 사람들이 꽉 차있습니까? 꽉 차있는 사람들이 작은 요정들이었습니까? 그들은 거인들이었습니다. 상대해도 게임이 안 되죠. 못 들어가지요. 홍해 건널 때 물이 빠졌습니까, 물이 넘실댔습니까? 넘실댔잖아요. 주께서 하는 모든 일은 다 그런 겁니다. 우리로서는 하지도 못할 일이에요. 분명히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한다고 했는데 양식 있었습니까? 양식 없지요. 물도 없지요.
 
 

뭐예요?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망했다고 그들의 남보다 더 범죄 했다고 하지 마세요. 우리도 그 상황 되면 범죄 할 수밖에 없고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에게 원망을 유도하느냐? 인간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 골이 인간을 포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할 수 없습니다. 사울 왕은 골리앗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주께서 함께 한다면 우리에게 나의 나락과 나의 절망을 보게 합니다. 그걸 제가 번지점프라고 했잖아요.

 

주께서 밀어낼 때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건 제가 감당 못합니다.” 그 말은 그동안 감당할 범위 내에서 주를 섬겼다는 말이거든요. 그건 취미생활이다. 진짜 신앙생활은 네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가 주인공인데 너는 주여, 주여 하면서 사실은 네가 네 자신을 관리해왔다. 그런 식이라면 이스라엘은 절대로 범죄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는 바로 우리 선배들이거든요. 그들이 원망하고 우상을 섬긴 것은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유의지의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백성들은 굶지요. 양식을 떨어졌지요. 국가적인 이방나라, 종교 따질 것 없이 그들의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바벨론, 앗수르의 군대의 발굽은 오지요. 그 당시 잘사는 나라 군사력은 애굽밖에 없지요. 그래서 애굽에 가서 그들의 말과 군사를 도입을 요청했는데 그때 이사야, 예레미야가 와서 하는 말이 시편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의 말과 병거를 의지했도다. 너희들은 필히 멸망할 것이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너무 억울해요. 주께서 안 쳐들어왔으면 우리가 애굽을 의지할 마음이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안 들지요. 주께서 일부러 우리가 감당 못할 일을 던져놓고 우리에게 감당 못했다고 책임을 지라하면 연약한 인간은 어쩌란 말입니까. 그 순간에 우리 속에 들어있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지만 그건 표피 2센티미터고 사실은 우리는 주님을 믿은 적이 없고 항상 나는 나의 실력만 최종적으로 믿어왔다는 불신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사건이 언약적 사건입니다.

 

그럼 믿음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 믿음 없으면 그대로 노출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죄인을 부르러 온 주님의 작업에 당한 거예요. 스스로 고치면 환자가 아니고 의사겠지요. 환자는 의사한테 맡기라고 병이 생긴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되지 못하게 만들어서 유일하게 의를 제공하시는 분은 이미 죽었다가 모든 걸 해결하신 삶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죽음을 건너오고 새로운 영생의 세계에 계신 분이 우리를 유일하게 해결하실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에게 맡겨야 되지요.

 

이렇게 오늘 밤 지나면 걱정스러워서 혹시 잠 못 자는 분이 있기 때문에 제가 너무 염려스러워서 한 마디 첨가합니다. 갑자기 여러분이 돈을 잘 벌고 사업이 잘 되고 얘들이 공부 잘하고 가정이 화목할 때 “주여, 이런 징벌을 왜 주십니까?” 이렇게 해야 돼요. 너무 일이 잘 풀리니까 “주여, 이렇게 나오면 내가 예수 잘 믿는 사람 되잖아요.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그게 바로 신앙이에요.

 

이런 식이 되면 남들이 다 이야기해요. 너 믿음 좋아서 기도 열심히 해서 복 받았다고. 남들 다 구라를 치는데 저도 휘말립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왜 이런 것을 주십니까? 죄인인데 탁구대 주시고, 피아노 주시고, 죄인인데 염색 안 해도 머리 새카맣고, 갱년기인데 얼굴이 벌겋지 않지요. 남의 얘는 세월호참사로 물에 빠져죽었는데 우리 얘는 멀쩡하게 왜 있지요? 주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한 것처럼 내가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하나. 그게 신앙은 가난하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절망을 봤다고 신앙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부자 됐다고 신앙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 이야기하려고 지금까지 버텼어요. 여러분, 잘 먹고 잘 살고 부자 됐다고 해서 신앙 없는 게 아니에요. 강조하는 제가 이상하네요. 다만 그것이 내 믿음의 보상으로 여기시면 신앙 100% 없는 거예요. 믿음의 보상이 아니고 부자 됨을 당하신 겁니다. 참 삼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 안 믿고 내 소유를 믿으라고 그러한 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계신 거예요. 주의해야 됩니다.

 

나는 돈 있으나 없으나 다 주의 것이고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저 피는 제가 받을 저주인데 언제 절로 가버렸습니까? 저는 쓰레기통을 다시 뒤지면서 이런 죄도 용서받았다는 것을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제가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살아가면 신앙생활을 또 당하신 거예요. 신앙생활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당하면서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집사님 요새 온유하고 화평하고 자비롭습니까? 성령의 열매 맺기 위해서 따로 훈련받는 것 있습니까? 아니고 주님 바라보니까 나머지 뭘 해도 그게 성령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자아를 스스로 관리하면 아무리 착해도 그건 시기와 질투가 되고 다툼이 되는 겁니다. 미움이 생기고. 난 기도 끝났는데 더 오래하다니 건방지게. 나보다 성경 더 많이 알고 오늘 기분 나빠.

 

그러니까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는 환경은 내가 만든 환경이 아니고 주님이 시키시는 신앙생활에 때로는 가난하게 되고 때로는 부하게 하면서 어떤 환경에도 그것은 하나에 구색, 껍데기에 불과하고 이미 너는 내시경검사를 통과한 상태에서 이것도 견디시고 저것도 견디시면 언젠가는 죽는 날이 계실 겁니다. 그때는 나그네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하나님 형상을 입을 겁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냥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203.♡.42.222) 14-10-29 14:16 
20140926 미국동부오후c
 
(강의: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장 30~32절까지 제가 읽겠습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멀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아멘.
 
 

지난 시간에 누가복음의 내용은 테마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방인이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구원이 된다고 했고, 그럼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구원될 수 없는 자도 구원이 되는 그 요소가 담겨있으니까 우리는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행적 속에서 죄인이 의인 되는 요소가 어디에 담겨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지요.
 
 

그래서 제가 던진 질문이 뭐냐 하면, “세종대왕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할 때 제가 답변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세종대왕은 아담의 자락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담의 옷자락이라고 보면 되죠. 아담을 펼쳐진 주름치마라고 볼 때 세종대왕은 이쪽에 한 점으로 꽃그림으로, 광해군 이쯤,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는 이쯤, 이순신장군은 이쯤 되겠지요.

 

어쨌든 간에 세종대왕이라는 개별자가 우리가 보기에는 개인이라고 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담이라는 옷자락의 한 지점에 불과합니다. “세종대왕은 구원이 됩니까?”라는 질문을 저는 의도적으로 수정하기를 바란 거예요. 아담은 구원됩니까? 제 정답은 아담은 죄인이기 구원되지 않습니다. 고로 세종대왕은 아담에 소속되었고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구원됩니까? 우리도 역시 세종대왕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자락에 있기 때문에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변화산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는 구원될 수 있습니까? 모세와 엘리야도 구원되지 못합니다. 지금 하늘나라에 있다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구원됩니까? 구원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옷자락의 하나의 꽃무늬기 때문에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러면 천국 가 있는 사람은 뭡니까? 아브라함은 구원되지 못한다. 그러면 천국 가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냐 이 말이죠.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저 사람들은 뭐냐 이 말이죠. 그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이죠. 그리고 예수 안에서 아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수정하라고 이야기한 게 거기에 있어요. 어떤 개별자가 구원된다고 할 때 특정인과 구원이 바로 연결되는 질문은 성경에서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특정인은 구원됩니까?”라는 말은 안 돼요. 왜냐하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옷자락의 수에 놓여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구원이라는 게 성립돼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조건 구원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구원자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구원받은 분이기 때문에 그 옷자락에 무조건 속해집니다. 세종대왕이 아니라 어떤 죄인이라 하더라도 세리와 창기라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는 구원이 되는데 예수 안을 빼놓고 세종대왕은 개별자죠. 세종대왕은 구원됩니다. 하면 애초부터 구원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개별자는 구원이 안 돼요.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개별자는 아담의 죄와 더불어 멸망돼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걸 간추리면,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만 구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된 자는 뭐냐? 예수님의 자기 구원을 자기 안에 구원이 있는데 그 안에 우리를 포섭해서 집어넣을 때 비로소 구원이라는 게 성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구원은 예수님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찾아오셔서 낫게 하면서 바리새인들과 주위에 있던 군중들은 중풍병자가 어떻게 낫게 되는지 개별자의 치유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거든요. 예수님께서는 그 개별자에 대한 집중을 내가 여기 왜 왔는지 돌리기 위해서 개별자란 중풍병자의 변화는 병에 걸렸다, 나았다로 포착이 되지만 이것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려면 죄 사함을 받아주셨다, 죄 사함을 받았다로 해야 관심사에서 중풍병자에서 중풍병자를 낫게 한 예수님에게로 초점이 모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마태복음 9장을 보면서 지붕 뚫어서 구원받았데. 우리도 나라는 개별자가 지붕이라도 뚫고 들어가게 되면 그 열심 보고 병 낫겠다는 것으로 돼버리면 그것은 무엇이 누락되느냐 하면, 여전히 아담의 옷자락이라는 아담의 필드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거예요. 병 고침은 받았는데 구원이 안 되는 겁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 지나가니까 병 고쳐주는지 알고 불렀지요. 불쌍히 여기소서. 이 저주가 풀리게 하옵소서. 이 병이 낫게 해달라고 할 때 예수님께 그 문둥병을 낫게 했지요. 그랬으면 예수님과 관계는 끝난 거예요. 고맙다 하고 집에 가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한 것은 거기까지예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에 가면 되는데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왜 아홉 명과 같지 않고 도로 예수님께로 오느냐 하는 겁니다. 오는 게 이상하죠. 챙길 것 챙겼으면 집에 가면 되는 거예요. 왜 옵니까?

 

“주님, 잘못됐습니다. 주님을 몰랐습니다. 병 낫고 난 뒤에 주님은 병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님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병을 낫게 해달라는 이 죄를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의 능력 빌려서 내 고질병을 낫게 해달라는 이 죄를 용서하옵소서.”

 

주님께선 내가 온 것은 요나의 기적을 이루기 위해서지 너희가 기대하는 병 고치는 기적을 제공함이 아니고 십자가 지기 위함인데 십자가는 죄와 용서의 관계로서만 비로소 예수님의 목적은 완전히 다 드러나는 겁니다. 주님 지나갈 때 병 고쳐 달라고 할 때 그 사람은 뭘 오해했느냐 하면, 나는 병 나아야 될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란 것을 자부했기 때문에 나는 병 들 그런 무가치한 존재는 아니니까 자신의 본래의 가치를 회복해달라는 식으로 예수님께 호소를 한 거예요. 결국 이것은 주님 위함이 아니고 자기 가치 유지책으로 예수님을 자기 인생에 관여하고 개입하라고 요청한 겁니다. 그게 바로 죄의 극단이지요.

 

이방인들을 왜 구원하느냐? 바로 본래의 이스라엘이 어떤 사람들이냐? 이미 저는 해답을 내렸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예수 안에 이스라엘이지 아담 안에서 친목계 만든다고 그게 이스라엘 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적인 아담을 버리고 새롭게 예수 안에 이스라엘을 창조하면 간편할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고 기존에 있는 이스라엘을 배격해야 되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제가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원래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 어려워요. [우월이 아니라 근본이다.] 제가 이렇게 썼는데 우월이 된다면, 나보다 나은 어떤 초월적인 가치가 새로 발생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저분은 나보다 낫다는 것은 성립이 되는데 현재 나의 가치는 그대로 유지되지요. 나 말고 나보다 나은 사람, 그러면 두 노선이 성립되는 겁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부족한 나, 죄 많은 나를 건지기 위해서 나보다 우월한 존재로써 메시아가 오셨으면 우리는 그 간격을 통해서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믿고자 한다는 그런 아이디어가 인간에게는 생겨납니다. 모든 사대 성인들이 자기보다 초월한 영웅적이거든요. 부처, 소크라테스, 다 뛰어난 사람이잖아요. 나보다 우월한 존재가 나를 건져주시면 참 고맙겠다고 할 때 사람은 우월한 것을 생각하지요. 그러나 그런 예수님은 없어요.

 

예수님은 근본으로 오신 겁니다. 근본으로 오셨다는 말은, 현재 여기에 나라는 게 있음을 째야 돼요. 근본은 우리 안에 포함이 돼있습니다. 따라서 나 밖에 초월적인 분이 계셔서 그분 같으면 의지하자는 게 아니고 그 안에 내가 있는 식으로 솟아나면 나의 가치가 유지되지 않고 이게 찢어져야 되지요.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서 제가 연기를 얼마나 연습하면 좋은 배우, 우월한 배우가 되겠습니까? 할 때 선배 배우들의 상투적인 충고가,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이 되어라. 좋음이란 네 속의 네 근본을 찾을 때 비로소 좋은 배우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바깥에 초월적으로 계시는 분이 아니고 이건 우리의 신 관념이고. 네가 나밖에 없다고 여기는 그 가치가 부정당하는 작업을 통해서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인간의 근본 되시는 분이 차고 올라오는 거예요.

 

여기서 발생되는 것은 뭐냐 하면, 제가 생각해낸 아이디어, 적당한 개념은 트랜스포머입니다. 그런 영화 있잖아요. 자동차가 로봇이 되고. transformation, 변형체 또는 변형체화. 분명히 나라는 인간이 있는데 이 자체가 형태가 바뀌는 거예요. 어떤 형태냐 하면, 그리스도가 우리 몸을 통해서 등장하기 적합한 몸의 변형체가 일어나면서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우리보다 우월한 분이 우리 바깥에서 우리의 시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죄 많은 육신의 몸 안에서 창조주가 계시다는 사실은 인간의 능력으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메시아가 올 때 이스라엘은 자기 집단 있고 구름 타고 외부에서 오고. 따라서 쳐다보면서, “오신다, 오신다. 준비 해. 플랜카드 걸자.” 이것이 인간들이 생각한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가 오시는 거예요. <부시맨>이란 영화의 첫 장면이 그거에요. 아프리카를 횡단하면 소형비행기에서 코카콜라 병을 던졌는데 그것이 부시맨 부족 안에 떨어졌습니다. 부시맨은 신의 선물로 여겼습니다. 코카콜라 병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게 나오지요.
 
 

이것이 현재 나의 생로병사, 모든 고통의 해결은 어디서 온다? 나의 경계선 바깥에 계신 분이 이쪽을 방문하면서 우리가 그쪽 세계에 간다는 종교적인 우리의 인식의 틀을 부시맨이 아주 명쾌하게 잘 이야기했어요. 부시맨 생각이 오늘날 보편적인 아담의 주름치마에서 같이 어떤 지점을 차지하기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게 얼마나 고상한지 이집트 종교처럼 화려한지 아니면 토속적으로 소박한지 그것과 관계없이 인식의 틀은 동일합니다. 외부인이 우리를 데려가 고통을 끊어버리고 영원히 행복을 누리는 천국에 간다는 모든 민족과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다들 그런 식입니다. 불교의 해탈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우리 안에서 천국이 꿈틀거린다는 것을 누가 예상했습니까? 아무도 예상 못하지요. 우리는 누가 만들었다? 신이 창조했다. 신은 우리와 함께 했다? 아니다. 신은 창조하시고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계시다. 그러면 황폐한 우리의 삶의 환경은 다시 외부에서 와서 손대시면 새롭게 변화시키면 우리는 행복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굉장히 상식적이고 자연스럽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기 싫은 이 세계 한 복판에서 천국이 이뤄진다는 아이디어는 예수님 아니고서는 누구도 그것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죄 속에서 의가 나온다는 그런 아이디어는 도저히 없는 거예요. 죄수들이 철장에 갇혀있는데 “판사님, 저희를 끄집어내달라.”고 부탁할 때 판사가 하는 말이, “저는 여러분을 끄집어낼 권한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어떻게 용서받습니까? 여러분 속에 들어 있잖아요. 그러면 경상도 말로, 어데예?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이야기가 누가복음은 그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물건 찾기 위해서 근본의 자리, 우월이 아니고 근본이다. 그 근본이 어디 있느냐?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죄 짓는 네가 근본이라는 거예요. 로마서 8장 4절에서 예수님은 죄인의 모습으로, 섞인 모습으로,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던 모습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종교가 일종에 착각이죠. 천주교, 기독교, 모든 종교가 착각이었습니다. 그 착각을 우리 선배인 바리새인이 했던 착각을 같은 아담의 옷자락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하고 말았어요. 이방인들도 마찬가지고.
 
 

이방인들은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방인들은 구원 돼야 될 유대인을 대체하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만든다는 것은 진짜 근본은 아담 속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겁니다. 아담 죽이고 아담 만드시는 게 아니고 죽어야 될 아담이 결정적으로 죽음까지 가서 완전히 죽어버린 상태가 될 때 그 아담 속에서 새로운 아담이 죽어야 될 이유를 품고 거기서 나올 줄이야 아무도 몰랐습니다.

 

저녁 시간에 입맛 없게 이런 예까지 들어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화장지가 없어요. “엄마, 화장지 좀 줘.” 하니까 엄마가 하는 말이, “변기 안에 있잖아.” 지저분한 예라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어디요?” “네 안에 있잖아.”
 
 

그럼 내가 어떻게 끄집어냅니까? 내가 변형되게 되면 그 안에서 구세주가 나오는 겁니다. 그 모델이 마리아에요. 마리아의 몸이 변형이 돼요. 마리아에게 없는 것이 마리아의 근본의자리에서 마리아의 구세주가 나오는 거예요. 그동안 마리아는 개별자, 본인의 마리아만 본 거예요. 그런데 어떤 자리를 깔고 앉았다는 자기는 느끼지 못했지요. 마리아가 있던 그 자리에서 마리아를 뚫고 마리아를 변형시키면서 새로운 아기를 탄생시키는 몸으로 트랜스포메이션이 이뤄지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본문에 나오거든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대목을 그것은 한 때에 그 여자에게만 일어났던 기적이지 우리한테는 해당되지 안 된다고 그렇게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왜? 우리는 임신이 안 되는 남자기 때문에. 만약에 마리아가 임신해서 구원된다면 모든 사람은 여자로 변형되어서 각자 작은 꼬마 예수님을 잉태할 때 동일한 방식으로 구원됐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마리아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상황이지 우리한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에게 일어났던 일이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 중 누구도 마리아에 속했던 예수 안의 세계에 합류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마리아 몸이 변형이 되어서 남자가 있어야 될 아담의 몸이 남자 없이도 아기 낳는 이상한 몸으로 변형되었다면 나도 그렇게 변형돼야 마땅하지 않느냐? 마땅합니다. “그러면 내가 여자로 성전환수술을 할까요?”라고 하신다면, 마리아가 본인이 스스로 변형시켰습니까? 마리아가 자기가 알아서 임신하려고 시도했습니까? 마리아에게 천사가 와서 아기를 잉태한다고 할 때에 34절에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했지요.
 
 

내 몸이 임신할 줄은 마리아가 사전에 몰랐지요. 그렇다면 구원이란 뭡니까? 사전에 알고 있는 방식으로 찾아온 게 구원이 아니고 이렇게 하면 구원될 것이라고 사전에 모든 것을 대비된 상태에서 그 모든 예상을 피해서 구원이 된다면, 그렇게 구원된 사람의 고백은 마리아와 동일한 고백을 내놓게 돼있어요. 내가 이런 식으로 구원될 줄은 저는 몰랐습니다. 그 말은 내가 내 몸에 손댄 것이 아니고 전혀 내 몸에 손대지 않았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제 몸에 손대어서 저로 하여금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게 하셨다는 고백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동일하게 나오게 돼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단출하게 표현이 되지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전체 누가복음 맥락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겠습니다. 이 그림을 보시면 제가 복잡하게 이야기했던 것이 간단하게 이해가 될 겁니다. [시작은 쪼개져있다.] 대나무를 쪼갤 때 신기하죠. 처음만 쪼갰는데 끝까지 갈라지죠. 시작이 쪼개져있으면 결국 끝도 쪼개져있지요. 시작을 쪼개져있다는 말을 어제 밤에는 이렇게 했습니다. 1+1로 변형을 시켜놓고 1+1이 찢어지면서 들어오게 되면 1+1은 황급하게 다시 1로 환원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1이 몇 개냐 하면, 처음에 1이 있었고, 그 다음에 갈라진 각자가 1이라고 주장하고, 세 번째 갈라진 틈을 통해서 이미 올라온 낯선 1이 있고. 세 종류의 1이 발생되는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이 되는 거죠.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구원받으려고 하는 나, 이게 첫 번째고, 그 다음에 내가 죄인이 되어야 주님의 용서를 받고 구원된다고 생각하는 주님의 복음에 관한 교리를 듣고 우리가 상상하는 나, 이게 두 번째. 이런 식으로 관통하면서 올라오는 세 번째 나, 세 종류가 있는 거예요. 첫 번째 나, 두 번째 나는 아담의 속성이 살아있는 나지만 세 번째 나는 밑에서 누가 나를 들어올렸으니까 이것은 예수 안의 나가 되는 거지요.

 

처음에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이 아브람이죠. 아브람에게 주께서 약속을 줬습니다. 아브람1. 아브람이 스스로 아브라함이 되어서 구원받는 나가 된다는 두 번째. 그 다음에 아브라함을 째고 올라온 세 번째 있지요. 이삭이 올라옵니다. 이게 세 번째가 되는 거예요.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의 근원이 된다. 자기는 자신이 복의 근원이 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게 아니고 나의 근본이 복의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바칠 때 비로소 아는 겁니다. 내 후손의 나를 살리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은 누굴 기다립니까? 예수님을 기다리죠. 왜 기다립니까? 본인이 아들 바쳤으면 그걸로 믿음이라고 칭찬받았으면 본인의 믿음으로 믿으면 구원되는 게 아니겠어요? 본인이 그렇게 훌륭한 일을 했는데 왜 자기의 믿음으로 구원 못 되는 겁니까? 그렇게 교회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자. 어떻게요? 자식까지 바쳤다. 그 정도로 순종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본받자. 이렇게 되면 첫 번째 나와 두 번째 나로 끝나지요. 그러면 예전의 나는 새로운 나를 믿게 되지요. 예수 안 믿던 내가 예수 믿는 나를 믿게 되는 거예요. 나는 이미 예수 믿게 되었고.

 

그렇게 되면 신천지나 구원파, 박옥수가 하는 말이, “실례지만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여기에 당황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정답은, “나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를 째고 들어오신 예수 안에서 발생된 새로운 나만이 구원된 나입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되지요. 첫째, 두 번째 나는 아담의 옷자락에 있기 때문에.
 
 

블로흐라는 철학자가 있어요.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독일의 철학자인데 이 사람은 소망의 철학을 주창했는데 소망의 철학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현재 인간은 이 지점에 있을 때 이 지점의 자아를 보면서 절대로 확장하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은 뭐냐? 점, 점, 점, 점 더 나가서 점으로 되어있는 새로운 이게 자아1이라면 인간은 자동적으로 자아2를 상정하게 돼있고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사고방식은 현재 자아를 확정짓기 위해서 자기가 상상한 자아를 상상으로 경유해서 현재의 자아로 규정하게 돼있습니다.

 

이걸 현재의 자아는 즉자존재라 하고 내가 예상한 자아를 대자존재라고 사르트르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인간은 돌멩이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즉자존재에요. 나는 난데 어떤 나냐?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상상함으로써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소망을 품은 그것이 진정한 나의 모습이다. 소망 없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동기, 일하고 활동하고 사업하고 농사짓고 교사일하고 공직 일하는 모든 일은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상상한 자아2를 잊지 못하고 그것을 어떻게 근접하게 일치시키는 그것이 나의 삶을 일깨워주는 유일한 에너지가 되는 겁니다.

 

죽어도 좋다. 하지만 희망이 있는 이상은 사람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 수용소군도에서 또는 나치의 유대인수용소에서 살아난 유일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난 내 모습의 미래를 당겼기 때문에 남들이 뭐라 해도 어떤 유대인 정신과 의사는 종이쪽지 주워서 자기 논문을 씁니다. 왜 쓰느냐? 언젠가 자유를 얻을 자아2를 바라보기 때문에. 이것이 인류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윤리라는 겁니다.

 

Boys, be ambitious! 꿈을 꾸라.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것이 너희를 살리게 될 것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꿈을 잃으면 그 사람은 산 사람이 아니고 죽은 사람이다. 비전과 꿈이 우리를 지금보다 더 진보하게 할 것이다. 이것만이 이 시대가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구호, 다른 구호는 필요 없어요. 이것이 바로 블로흐의 소망의 철학입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난 뒤에 절망에 빠져있는 독일 사람과 전 유럽을 향하여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 자체가 자기가 소망을 뿜어낸다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왔을 때 주께서 이름조차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꿔줄 때 그는 기대했습니다. 기어이 내 자식 낳아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내가 만들어서 하나님의 약속에 부응하겠다는 이 용기, 희망으로 인하여 자기는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걸 믿음이라고 여겼지요. 그게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블로흐의 소망의 철학이지 믿음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연장선에 있는 아담의 자락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안이 아니고 아담 안에 있었던 거예요. 죄에서 못 벗어난 상태란 말입니다. 구원되지 못한 상태였어요. 구원되지 못한 상태의 극단은 뭐냐 하면, 언젠가는 구원받는다는 그 희망 자체가 구원되지 못한 유일한 이유가 돼요.

 

보통 문제 아닙니다. 교회가 보통 문제 아니에요.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딜레마에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어서 새 사람 되었다는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담의 속성이에요. 인간이 갖고 있는 숨길 수 없는 희망입니다. 그 희망을 어떻게 버립니까? 희망 자체가 우리의 속성 중 일부인데 어떻게 희망을 버려요. 여러분, 희망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부탁할 것은, 희망을 가지세요. 그게 죄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이야기밖에 못하겠어요.

 

성경에서 예수 안에서만 다른 말로 하면,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주님께 있다는 것. 중풍병자가 나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군중들과 본인과 친구들의 한계에요. 비록 왔지만 꿈을 가져라. 주께서 병을 낫게 해준다. 이건 아담 영역 안에서 이뤄지는 소망이에요. 그런데 주님은 그걸 뭐로 변환시켰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어요. 이것은 중풍병자나 친구나 그걸 관람하는 어떤 사람도 예상 못한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거기서 죄 문제가 왜 나옵니까? 병만 고치고 집에 가라고 하면 끝날 문제지요.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중풍병을 낫게 해달라는 자체가 너희들은 불가능성을 요구했다. 하지만 불가능성의 원인은 네가 죄인인데 그 죄를 네가 어찌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에 근거해있다. 따라서 묻는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서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제가 지어낸 질문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한 질문이에요. 어디 게 쉽습니까? 그럼 말을 바꿔볼게요. 달 따는 게 어려워요, 별 따는 게 어려워요? 둘 다 안 되지요. 지금 너희들은 우리가 하면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건방지게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나는 내 힘으로 되지 못했다는 결과만 남는 불가능성만 너희에게 안겨주겠다는 거예요.

 

병든 사람이 병고치고 싶어 하지 병든 사람이 내 죄를 용서해달라는 소리를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그 말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에. 머리 좋은 사람 이걸 알아들어야 할 텐데. 병만 나으면 도로 나는 온전한 사람으로 가치가 유지된다는 전제 하에 병만 낫게 해주세요. 하거든요. 병원에 오십견 걸려서 왔는데 “주사 한 대 주세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오십견만 나으면 내 가치는 얼추 온전하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여자 의사가 하는 말씀이, “이 죄인이 어딜 건방지게 병 고치러 와. 죄인이라면 지옥에 가 죽으라.” 하면 “아멘.” 하고 갈 사람 있어요? 없지요. 아무도 그렇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스스로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 근본을 끄집어낼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우리를 죄인 되게 만들어버리면, “이게 어디서 건방지게 중풍병을 낫게 해. 너는 죽어도 싸.” 하면, “아멘. 감사합니다.” 그게 바로 아담 안에서 어디로 건너왔어요? 예수 안에 들어와서 이제는 나를 위한 이 세상이 아니고 오직 주님에 의한 주님만이 죄를 용서하고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이 새삼스럽게 나의 근본을 발견하게 된 그 현장에 그 사람이 놓여지게 된 겁니다.
 
 

넌 어떻게 해서 갔느냐고 물으면, 그 사람이 도로 묻습니다. “친구야. 네게 걷는 것과 죄 사함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 이건 내 힘이 아니고 내가 상상치도 못하고 예상치도 못한 사태가 주께서 손대서 일으켰다.” 따라서 이제부터 내 믿음의 증인이 아니고 내 소망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왔어요. 여러분 그 대목 기억하지요.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 버려둔 것 아십니까? 물 길러 올 때는 물 항아리에 꽉 찬다는 처음에 왔을 때 포인트1이라면 p1은 반드시 상상하게 돼있어요. 블로흐에 의하면. 빈 통으로 왔는데 꽉 채워 돌아가는 p2 지점을 생각하면서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 자체를 던져버리고 왔어요. 이게 가능합니까? 예상 못했지요. 뭐지? 누가 날 손댔어? 이게 부대효과라고 어제 밤에 이야기했죠. 미쳤어. 내가 왜 이래.
 
 

“물 길러 간다더니 어떻게 됐어?” 딴 소리합니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그때 무대 저편에서 빵 사러 갔던 열두 제자가 등장합니다. “예수님, 양식 조금 사왔습니다.” “너희들 없는 상태에서 양식 내가 먹었어.” “누가 우리 말고 양식을 사다 주던가요?” “나의 양식은 추수하는 것이 양식이다.” “추수를 하다니요? 넉 달이나 남았는데 무슨 추수를 하십니까?” 계속 제자들은 아담 안에서 익히 아는 이야기를 해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만 통용되는 이야기를 해댑니다.
 
 

“나는 이미 추수가 시작되었다.”라고 하시면서 그렇다면 우리가 좀 도와줄 건데. 너희가 한 사람은 수고하고 다른 사람은 수고하지 않는 추수에 너희들은 거저 참여되는 식이 내가 원하는 양식 구하는 추수가 되는 겁니다. 인간에 대한 철저한 배제, 배제된 자가 주님만 했다는 것을 증거하는 유일한 증거물이 되게 하는 그 구원의 방식, 그것이 누가복음의 테마로 여전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천지나 구원파처럼 내 구원을 언급한다는 자체는,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을 언급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자격도 없습니다. 그저 희망일 뿐이지요. 그러면 진짜 구원은 외부에서 오느냐? 아닙니다. 구원될 자격도 없으면서 구원을 논하는 그 존재를 찢으면서 거기서 내가 구원을 얻고자하는 자체가 바로 나의 최종 죄라는 것을 까발리면서 그걸 밀어 올리면서 구원은 등장하는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007 영화를 보게 되면, 닥터 노가 007과 마지막 대결을 벌이는데 호수에서 지구를 멸망시킬 기지가 올라오면서 덩달아 미사일도 함께 올라오거든요. 주님께서 우리의 존재의 기반 되시는 분이 죄인을 너 같은 인간은 오직 나만 잘 되고 나의 가치만 잘 되는 식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가수가 무대에 올라오듯이 그 죄인을 의인이라고 선언하고 말지요. 우리는 부끄럽지요.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서 우리를 발가벗긴 채로 드러내지요. 그 말씀 앞에 드러내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된 자의 표상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다윗의 두 번째 처가 누굽니까? 밧세바지요. 사실은 본처라고 할 수 있는데 마태복음 1장에서 다윗의 본처가 밧세바가 되는데 밧세바가 결혼해서 솔로몬을 낳았다는 말은 뭘 인정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밧세바와 있었던 과거의 행적, 밧세바뿐만 아니고 밧세바의 본 남편이었던 우리야 장군이 어떻게 살해당했는지 그 사실을 본인이 노출시키면서 감히 밧세바와 결혼했다는 말은,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아니고 나를 죄인으로 한껏 높여주시는 다윗언약의 주인공이 진정 이스라엘의 살아있는 왕임을 증거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두운 과거가 있으면 다방에 앉아서 밧세바한테 봉투 내밀면서 네가 실수로 내 아들 건드린 모양인데 5년간 프랑스 유학이나 갔다 오라고 하잖아요.
 
 

사람은 자기 어두운 과거는 숨김으로 자기 가치를 유지하려는 것은 바로 나1과 나2 그 수준이에요. 그걸 사도 바울은 육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육을 고치는 게 아니고 육을 드러내게 하시는 그것이 영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워치만 니는 크게 오해한 겁니다. 육에서 벗어난 게 영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현실교회의 비리, 모순을 느낀 사람들이 워치만 니 쪽으로 많이 넘어간 거예요. 많은 목사들과 워치만 니에 빠졌어요. 열두 광주리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봤거든요. 제가 보기에 마귀의 마지막 노림수에요.

 

삼분설은 이중 중생설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과 혼과 영이 돼버리면서 점프를 두 번 해야 돼요. 육에서 혼으로 중생해야 되고 혼에서 영으로 또 중생해야 되는 이런 교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분설, 육에서 영으로 거듭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런 교리고 요한복음 3장에 안 나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지요. 이 육은 개별자 육이 아니고 현재 속해 있는 필드, 장 전체를 육이라 하지 내가 육이란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죄 진다고요? 우리는 죄를 모릅니다. 죄를 알아야 죄를 짓지 죄도 모르는데 무슨 죄를 지어요. 우리는 죄를 짓는 자가 아니라 죄를 생산하는 자지요. 알아서 생산한다? 아니지요. 알게 모르게 생산하지요. 우리보다 더 센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그 상태를 그대로 원반에 얹어서 우리를 높이 들면, 들게 하시는 그 관계가 주님이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노출됩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

 

마리아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마리아가 임신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시작은 쪼개져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인간 자체 속에서 인간이 기대하는 인간 노선 말고 바깥 노선이 새롭게 철로가 놓여져서 한쪽은 지옥으로 한쪽은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아담 노선 안에서 천국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나서시는 겁니다. 그때 인간의 아이디어나 희망이나 인간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지요.

 

 

이야기하다보니까 50분 됐네. 10분 쉽시다.
 관리자(IP:203.♡.42.222) 14-10-29 14:18 
20140926 미국동부오후d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지요. 지난 시간에 한 것 중에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이야기하면 우리는 죄를 모르고 죄를 생산하는 도구다. 죄를 생산하는 그 사실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를 쪼갭니다. 그럼 이스라엘 자체가 없지요. 쪼개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이 건전한 이스라엘로 유대인들은 알았는데 봉합하는 과정에서 가짜 이스라엘이 본색을 드러냅니다. 메시아를 숨 막히게 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본격적으로 악마의 앞잡이가 되는 이스라엘로 전환시키고 말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죄 속에서 메시아를 끄집어내놓고 끄집어내는 어미 역할하는 그 이스라엘과 예수님이 새롭게 창조한 이스라엘과의 그야말로 두 개의 노선,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누가복음에 아주 간편하게 알 수 있는 테마의 양상입니다. 그리스도 편에 서느냐, 아니면 기존에 유대인 편에 서느냐? 이건 누구나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야 그 충돌 사이에서 십자가 고난이 성립되니까. 충돌 없는데 고난 없잖아요. 계속 고난으로 충돌을 일으키는데 충돌한다고만 이야기하면 누구나 아는 건데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은 충돌이 어디서 나왔느냐?

 

갈라지기 전에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이스라엘 자체에 있었잖아요. 1이 2가 되고 난 뒤에 3이 등장할 때 이 3을 반대하는 새로운 1로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면서 십자가가 이뤄지는 거예요.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아주 점잖은 사람들이에요.

 

명절에 일가친척들 서로 사랑하는 사촌이고, 팔촌이고, 부모님이고 다 점잖고 서로 사랑하고 위합니다. 그런데 명절에 주의할 게 있어요. 다른 건 다 좋은데 제발 복음 이야기만 안 하면 돼요. 복음 이야기하는 순간 땡 탈락이에요. 명절분위기 싸늘해집니다. 그래, 너만 잘났다. 딱 한 마디로. 처음에 정종 사들고 와서 절하고 하는데 그냥 고스톱만 치다 오시란 말이죠. 고스톱 치다가 무심코 “주여” 하면 그 다음부터 문제 커요. 종교와 정치 이야기하면 안 된다니까요. 정말 종교이야기는 나타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점잖은 관계에요.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복음이 째고 들어오면 그때부터 충돌이 일어납니다.

 

사실은 충돌이 일어나야 마태복음 10장이 이해됩니다.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너의 원수는 너의 집안 식구니라. 거기까지 보시면 집안 식구가 원수인 줄 알지요. 그 뒤에 보세요. 누구든지 네 자신을 부인하라. 1을 부인하라. 1을 부인하면 이것이 포켓볼에서 공을 하나 쳤는데 구멍 둘로 들어가지요. 중성자 연쇄반응 같아. E=mc² 반응식에 의해서 두 개로 갈라져버려요. 치니까 한쪽은 복음이고 한쪽은 옛날 점잖은 분이 아니고 극단적인 반 복음이 돼버렸어요.

 

그리고 말합니다. 네 속에 이야기하는 분은 네가 아니라 성령이니라. 이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저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옛날의 친척이 아니고 악령이니라. 그러면 육의 지평에서 이미 영의 지평으로 전환됐어요. 이게 바로 거듭남이라는 거예요. 개별자로 거듭났다고 하지 않고 바로 판 자체가 다른 판으로 갈라지면서 대조가 될 때 그게 영의 세계입니다. 영의 세계는 영의 세계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영의 세계가 아니에요. 영의 세계가 있음으로 이 땅에서 빛과 어두움, 육과 영으로 두 노선이 나란히 병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방금 제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브라함에게 두 아내가 있었다. 그럼 두 여자가 있었네? 아니지요. 두 언약이 있는 거예요. 그 두 언약이 아브라함이 공을 때리니까 둘로 갈라진 거예요. 그 말은 다시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아브라함 안에 아담이 있었다는 거예요. 육에 속한 아담과 영에 속한 아담이 있었는데 육에 속한 아담이 영에 속한 아담이 알지 못해요. 알지 못하지만 거기서 일부러 분리시킨 것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새로운 이름을 주신 분의 작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서 낳은 아기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는지 그것은 바로 누가복음 1장에 나옵니다. 51~55절에 보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이 찬양을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임신한 채로 하지요. 마리아의 솜씨입니까, 마리아의 신앙이에요? 하나님의 성신이지요. 제가 이걸 설명할까, 말까 주저하고 있는데 짧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복잡한데. 인간의 역사는 이방인의 역사는 역사로 간주해주지 않아요. 하나님 관점에서. 역사는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로 인류 역사는 다한 거예요. 처음에 아담의 역사는 이스라엘 멸망에서 마감이 돼요. 민족이 이스라엘밖에 없는가, 우리 민족도 있는데. 그것은 역사로 쳐주지 않아요.

 

역사가 끝날 지점까지는 인간의 활동을 마음껏 역사의 지평에 토해내게 하고 역사가 끝날 지점에서 누가 관여하느냐? 영적 존재가 관여합니다. 그러니까 누가복음 1장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투입되어 인간으로선 이미 할 도리를 다했어요. 말씀을 못 지켰다는 것이 이미 들통 났습니다. 그 결과가 이스라엘의 멸망이에요. 그러면 말라기에 보면 엘리야가 오게 돼있어요. 엘리야가 오게 된다는 그 작업을 가브리엘 손에서 성취시키지요. 물론 성신이 개입하고. 이스라엘은 당하기만 하죠.

 

그게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1장 17절 말씀은 말라기 4장에 나온 말씀 맞지요?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이스라엘은 모든 말씀은 내가 지킵니다. 이제는 그만 해라. 많이 먹었다. 끝났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말씀은 지켜야 되고 인간은 못하고. 대책은 천사를 투입하는 거예요.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지진을 일으켜서 끄집어냈잖아요. “아이고, 천사님.” 하니까 “왜 저한테 그러십니까.” 누가 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셨다.

 

정리합시다. 역사는 이스라엘로 끝났습니다. 그 다음에 말씀 성취는 오실 메시아의 자기 숙제로 이미 넘어가서 완성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완성된 것을 값없이 선물로 나눠지는 식에 돌입했습니다. 에베소서 4장 이야기에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그때 우리 왕은 이미 승리했군요. 그 왕을 메시아라고 이야기하고 제사장, 선지자, 왕적 기능 그래서 메시아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전통적인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 과정은 모르지만 하여튼 칼빈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맞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람이 참 신기한 게 3을 이야기하면 서열을 만들어버려요. 그래서 3은 제대로 3이 될 수 없어요. 인간의 정신구조가 둘이 용납 안 됩니다. 하나를 미워하게 되면 하나를 사랑하게 돼있고. 두 주인을 못 섬기게 돼있어요. 삼위일체를 이야기하게 되면 꼭 성부를 섬기게 돼있어요. 그것은 성경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섬기지 아니하면 아버지도 없어요. 요한복음 5장의 말씀처럼.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방금 이야기한 마리아의 찬양에서 나오는 내용들에서 부자, 권세 있는 자들이 누굽니까? 지금 이 활동이 어느 자리에요? 방금 제가 힌트를 드렸어요. 역사는 이스라엘이 주인공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모든 찬양에 대한 부정적 대상은 이스라엘을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54절에 보면,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했다.
 
 

여기 이스라엘이 등장한다면 기존에 우기는 이스라엘입니까, 아니면 그 속에서 째고 나온 새로운 이스라엘입니까? 새로운 이스라엘인 거예요. 그래서 그 창조를 낳는 창조라고 하지요. 아기 낳듯이 배태해서 나온 새로운 창조에요. 기존의 창조를 무로 돌리고 기존의 창조를 임신하는 창조로 간주하시고 그 속에 들어있는 숨겨진 새로운 창조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언약을 사용하신단 말이죠. 그러니까 죄 짓는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제 입에서 귀한 존재라고 하니까 이상하지요. 갑자기 아부하듯이 귀한 존재라고 하느냐? 아부하는 게 아닙니다. 못난 죄인이기 때문에 더욱더 귀한 거예요. 수학 0점을 맞을수록 서울대학 합격은 은혜가 빛나는 거예요. 99점인데 1점 보태서 온 것은 지 자랑해요. 그런데 0점인데 합격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마구 넘쳐요. 몽땅 은혜에요. 그러나 99점 받은 사람은 은혜 내라고 하면, 은혜 받았습니다(마지못해 작은 소리로). 가라. 지옥으로.

 

제가 오전 강의에서 그랬잖아요. 여러분, 성스럽게 되렵니까, 탈출하렵니까? 주께서 탈출했다면 그 경로를 따라 탈출해야 돼요.
 
 

현재 이스라엘은 이단입니다. 그 증거 하나가 바로 마태복음에 나오는데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는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실제로는 뭡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애굽에서 애굽이란 이름의 이스라엘로 옮겨가는 그 대목을 성경은 그렇게 적용시킵니다. 너희들이 애굽이라 생각하느냐? 그게 이스라엘이다. 왜? 아기 예수가 거기 잠시 기거하시거든요. 네가 이스라엘이냐? 사실은 애굽이다. 왜?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짐승의 속성이 발휘되는 장소기 때문에.
 
 

그래서 구약에서 언급하는 모든 개념은 A가 축복이고, B가 저주라면, 이것이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축복은 저주의 자리로 가고 저주라고 여기던 것은 축복의 자리로 허황된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거꾸로 지요. 거꾸로 기 때문에 예수님은 낮은 곳에서부터 오신 겁니다. 나귀 타고 오시고. 저쪽은 낮은 곳을 공격하지요. 나사렛 분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의미는 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자체를 마리아로 본다면 죽은 자리에서 생명을 피워내는 본래의 목적을 위해서 나사렛부터 예루살렘에 접근하는 식으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전개되고 있습니다.

 

자가. 예루살렘. 선지자가 예루살렘 바깥에 죽는 법은 없느니라. 내가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면서 이 예루살렘이 마귀의 소굴인 것을 증명하리라. 아줌마들이 울면서, “예수님 불쌍하다. 훌륭하신 분인데.” “나보고 울지 말고 네 딸내미를 위해 울어라. 누가 불쌍한지 구분도 못하느냐. 너희들이 날 동정하는 모양인데 정신 차려.” 자기 자리, 자기 주제를 파악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불쌍히 여긴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모든 것은 역사가 끝나고 난 뒤에 묵시가 되고 묵시는 인간이 손 못 댑니다. 스가랴에 나오지요. 성전 지을 때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고 사람의 능으로 짓지 않고 어떻게 짓는다? 하나님의 신으로 짓지요. 하나님의 신과 성령의 차이점은,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되고 성령 안에서는 성령이 되는 겁니다. 이미 누군가 완성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는 것은 성령이고, 하나님께서 관여했다는 것은 성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신 받은 사람은 타락이 되지만 성령 받은 사람은 확정이 돼버려요.

 

성신의 시대는 아직 이스라엘이 살아있는 시대입니다. 역사가 끝나지 않았어요. 역사가 끝나야 종말이라고 하고 종말 때에 모든 말씀을 완성할 때는 그 솜씨는 인간의 솜씨가 아니고 오신 메시아의 솜씨로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돼있습니다. 그때까지 가는데 갈 때 어떻게 간다? 죄 속에서 의를 끄집어내지요.

 

이제부터 지난 시간에 한 것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예루살렘에 있는 역사적 혈통적 유대인들은 의가 되고 이것이 의가 됨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바깥은 죄가 되고 심판 되고 지옥이 되고 저주가 되겠지요. 바로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공략한 이유가, 그들이 말하는 죄, 저주, 심판 속에서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기존에 예루살렘 유대인 속에서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유대인 속에서 소위 이방인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그 이방인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전환시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이방인의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신학자들은 뜻도 모르고 이야기해요.
 
 

방금 이야기했던 마리아의 찬양 가운데서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시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진짜 잘 알아들었는지 응용문제를 냅니다. 이 대목으로 제가 30초간 설교하겠습니다. 이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메시아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그것을 마지막 시대에 우리에게 예언해주었습니다. 여기 보세요.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주린 자, 비천한 자, 그 시대적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도우러 왔습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부자가 만들었고 권세 있는 자가 만들었습니다. 그럼 이 시대의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세상의 자본주의사회에서 권세 있는 자에게 억눌린 그런 자에 편에 서는 것이 이 시대에 예수님의 정신에 부합되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앙생활이고 활동입니다. 여러분,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옥에 갇힌 자, 가난한 자를 위해서 분연히 해방의 손길을 잡고 일어섭시다. 끝.

 

이 설교의 문제점은?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강정마을 강정기지 반대할 때 많이 듣던 이야기 아닙니까. 이 설교의 문제점은? 해답도 알려드렸어요. 나1과 나2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우리가 사는 이상적인 희망적인 공동체가 뭐냐? 누구나 얽매이지 않고 누구나 평등한 사회, 공히 자기의 노동의 대가는 자본가에서 탈취당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노력한 대가를 받는 이상적인 사회, 그것이 바로 육에 속한 사람들이 기대하는 유일한 천국 같은 지상 세계, 유토피아를 말합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쨈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기껏 블로흐의 소망의 철학. 소망의 철학을 참고해서 쓴 책이 소망의 신학이란 책이 몰트만에 의해서 나왔지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몰트만. 그게 블로흐의 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가난한 자의 복음, 해방신학, 들어보셨습니까? 출애굽기에 나오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 많이 들어보셨지요. 억눌린 자의 하나님, 광주사태 때 목 잘린, 혀 잘린 하나님은 들어보셨습니까? 노동현장에 나타난 이 가락은 뭐지? 태진아의 손수건을 흔들어 표절한 거예요? 운동권에서 이야기하는 것, 뭐가 문제에요? 역사는 끝났습니다. 역사가 할 수 있는 모든 시험을 다했어요. 다 불합격이었습니다. 불합격인 정도가 아니라 그 자체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악마의 마지막 모습은 이상적인 지상 공동체, 지상 사회를 건설하는 겁니다.

 

사람은 그리스도가 그리운 것이 아니고 내가 소속된 교회가 정말 이상적인 교회를 그리워하는 거예요. 믿음의 결실을 눈으로 목격하고 싶은 겁니다. 나, 이런 교회 다녀. 무시하지 마.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런 것처럼 무시하지 마. 나, 이런 교회 다녀. 네가 다니는 그런 교회 아니야. 이상적인 교회야. 그게 자기 갖고 있던 희망이에요. 그것 찢어져야 돼요. 아담에 속한 겁니다. 하지만 우린 어쩔 수 없이 그걸 기대하게 돼있지요.

 

아까 낮에 어떤 분이 질문한 것처럼 “어떤 복음적인 교회에 가야 됩니까?”라는 말. 뭘 가요? 본인이 주께서 다루시는 훌륭한 기계가 되는데 우리는 죄를 생산하는 용도로 드러내면 그게 성도에요. 나는 뭘 해도 죄를 생산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내가 불가능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구나. 마치 마리아처럼. 마리아의 반복이지요. 그게 마리아의 반복인지 어떻게 확정할 수 있습니까? 바로 마리아에게 했던 찬양이 우리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그 찬양 중에 하나가 사가랴가 한 찬양 속에 이런 게 있습니다. 어제 한 본문이죠. 72절에,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하지는 않겠습니다. 여기 중요한 단어가 뭐가 나오지요?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지우개 던져놓고 누가 기억해요?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도로 잡는 부대효과로서 누가 걸려들었습니까? 사가랴가 걸려들었고 마리아가 걸려들었습니다. 주인공은 누구시지요? 없어요. 그 죄인 속에서 그 기계 속에서 의인 되시는 분이 분출되는 겁니다.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제 세상은 죽었어. 세상은 어떤 것도 주님의 심판에서 핑계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실험을 다해봤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은 우리는 회개합니다가 아니라 저 사람을 없애버리자. 바라바를 풀어줄까, 자칭 메시아라는 예수를 풀어줄까? 할 때 만약에 그 자리에 우리가 모여 있다면 어디에 가표를 던지겠습니까? 참 어려운 문제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지지 않습니다. 예수님 편에 선 사람까지 바라바 투표할 때까지 기다려요. 제자들 도망 안 치면 안 돼요. 도망칠 때까지 주님의 십자가는 연기가 되는 겁니다.

 

다른 이름으로 어떤 이름도 주의 이름 외에는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이 없는 것이 확정되기까지는 어떤 누구도 자기 구원에 자기가 도움을 줬다는 생각에 솔직하게 전혀 보탬이 안 되고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 들통 날 때까지 주께서는 대기하다가 십자가가에 돌아가셔야 돼요. 그것은 구원문제는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고 나와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그 언약의 긴 그림자가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모세언약, 엘리야언약이지요.
 
 

혹시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지만 염려되어 다시 묻습니다만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것 맞지요. 구원받았다면 증거가 어디 있지요? 변화산에서 주님과 나타났지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갔지요. 그럼 모세만 못 들어갔습니까? 홍해 건너온 그 사람들도 못 들어갔지요. 그 사람들 구원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모세도 못 들어갔고 그들도 못 들어갔다는 조건은 동일한데 모세는 변화산에 등장했어요. 구원받았어요. 광야에서 죽은 그들은 어떻게 됐느냐 말이죠.

 

그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고린도전서 10장에 나오고 히브리서 4장에 보면 나오지요. 믿음이 없어서 믿음에 화합치 않아서 안식에 참여치 못했다고 되어있지요. 그래서 그들이 지옥 갔습니까? 그 질문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왜 할 수 없느냐 하면 종말에 벌어진 사건으로 소급해서 그때가 종말도 아닌데 그들의 운명을 단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멸망했는가? 주님의 속성을 증거하는 연극배우들이에요. 이렇게 할 경우에 약속의 땅에 넣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기능을 발휘한 거예요. 다시 묻습니다. 이게 마지막 질문인데 모세가 구원받을 짓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이진주 씨께서 말씀해보세요. 안 한 게 맞습니다.

 

모세가 구원받을 짓을 못했다는 증거가 누가복음에 나옵니다. 변화산에 나타났을 때 주님이여, 언제 돌아가십니까? 주의 피 없이는 나는 어떤 경우도 내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엘리야도 합세했습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제단 쌓고 불내려도 그것은 자기 구원에 손톱만큼도 보탬이 안 되는 짓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로마서 3장 말씀이 맞아요. 다만 그 일은 연극이었습니다. 시켜서 한 일이에요. 역할이었습니다.
 
 

인간의 최종 운명은 성신의 시대가 아니라 성령의 시대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인자를 우습게 여기는 건 좋은데 성령을 우습게 여긴다면 너는 오는 세계에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요한일서에 죄가 두 종류가 나오는데 이것 때문에 박옥수, 구원파가 설치게 된 거예요. 첫째는 뭐냐? 용서받을 죄가 있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용서받지 못할 죄가 따로 있는 거예요. 구원파는 유병언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죄는 다 용서받았으니까 니 마음대로 살아라. 이렇게 된 거예요. 전양자부터 해서 기분 좋았지요. 얼마나 편해요. 이건 한국교회에서 듣지 못한 복음이다. 진짜 복음 여기 있다. 재산 바치고 난리 났습니다.

 

그러나 뭡니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는 이야기를 그들은 빼먹은 거예요. 그러면 용서받지 못할 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파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나를 구원해주소서. 여기서 내가 주체 자리 마치 내가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주체 자리에 자기가 있는 이상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그것은 창세기 3장 22절을 위반했어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고 그 다음에 생명나무에 오지 말라고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완전히 차단시켰지요. 그 말은 어떤 인간도 생명나무 근처도 못 오는 자격으로 이 대지에서 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대지에 간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도 안 된 구원이란 희망을 언급하면서 나름대로 패권을 만든 거예요. 이것이 바로 악마가 조작한 거죠. 주께서 이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주께서 하신 구원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의 전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주께서 전부 밀어 내시지요. 밀어내신 빈 터에서 묵시의 세계, 마지막 때 예수님이 실패의 자리에 들어서시면 되겠지요. 그러면 누가 와서 하는 거예요? 아까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을 이야기했지요. 성령의 시대가 도래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도 성령을 받아야 되겠지요. 그래서 요단강에서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면서 특히 누가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어요. 주님의 어떤 일도 누가 하셨다? 성령께서 하신 거예요. 성령에 종속된 주님이 되는 겁니다. 그 주님이 십자가 지고 난 뒤에서는 오히려 성령을 자기에게 종속시킨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제2편 누가복음이 사도행전이죠. 사도행전을 보통 성령행전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잘못된 표현이고, 사도행전의 주제는 예수님이 주시다. 예수님이 살아계시다. 그게 주제가 돼야 돼요. 어차피 역사가 아니니까.

 

그 사도행전에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고 나오잖아요. 그것은 요엘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인용한 겁니다. 인용할 때 어떤 개념을 그 자리에서 뽑아서 옮길 때는 그 개념의 자리에서 쓰는 용어를 옮기면 안 돼요. 새로운 필드를 묻혀서 옮겨야 됩니다. 나무를 어떻게 옮기지요? 나무뿌리 다 털고 옮깁니까? 죽지요. 어떻게 옮겨요? 나무뿌리에 있던 뿌리에 맞는 흙을 감싸서 새끼줄로 묶어서 옮기잖아요. 그 개념이 필요한 그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장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서 마련한 자리에 심어지면 그게 구약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누가 손대고 나갔다? 인간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포기하고 나간 빈자리지요. 그 공터를 마지막 때 성령 받은 예수님이 그 자리를 차지했지요. 그러면 그 자리에 우리가 초청받아 가게 되면 먼저 주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 “나는 성령 받았어.” 하고 까불다가 막상 성령 주신 그 자리에 가보니까 누가 주셨어요? 주님이 주셨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만 증거해야 돼요? “주께서 이벤트를 아예 벌이셨군요.”

 

이방인이 어떻게 구원받는가? 그것은 이방인이라고 개념을 호칭한 유대교 구약적 개념을 지닌 본부, 센터를 폭파시켜버리죠. 우리는 이방인 아니고 너희들이 개 같은 이방인이라는 개념을 폭파시키고 그 폭파 자리를 주님이 차지하셔서 이스라엘은 누가 만든다? 내가 이제부터 이스라엘을 새로 만든다고 나서게 되면 거기에 초청받은 이방인들은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유대인의 메시아 유대인을 물리치고 감히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고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 주님이 메시아로 증거 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주께서 하신 계획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겁니다.

 

답을 미리 알려주고 난 뒤에 질문을 해야 예의인 것 같아서 이렇게 답부터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받지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지요. 간단합니다. 정답은 예수님께서 이방인 자리를 친히 마련하셨습니다. 왜 마련하셨지요? 유대인들이 그동안 잘못된 이방인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잘못된 개념은 어디서 나왔지요? 자기는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바로 죄였습니다. 예정론이 죄였고 선택론이 죄였습니다. 예수 안에서 선택론만 정답이었습니다. 그냥 선택론은 하나님과 나, 나의 구원욕구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봤거든요. 이게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선택론이고 칼빈의 선택론인데 그것이 죄였고, 주께서 선택되었기에 주님의 선택에 합류한다고 제가 선택되었습니다. 칼 바르트의 이중 선택론의 그래서 나오게 된 겁니다.

 

금강산에 가면 이중 폭포가 있다는 거예요. 사진으로 봤어요. 한 번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선택하시고, 근거는 요한복음 5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이 택하신 아들을 통해서 이제는 선택을 아들에게 일임하시고 아드님이 자기가 원하는 자를 따로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선택 하나, 선택 받은 예수님의 선택 둘, 그래서 이중 선택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누구냐? 아들이지요. 아들에 의해서만 선택된 자만이 진짜 완벽한 아들이 되지요. 이 아들의 특징이 뭡니까? 또 역사 주장할까요? 이미 구약에서 실험했고 안 된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래서 여기서 주께서 혼자 다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고기 잡으러 갔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할 때 베드로의 답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님 사랑하지요.”라고 답변했습니까? 주체를 어떻게 해요? 너라는 주체가 나라는 객체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베드로가 어떻게 대꾸합니까? 주체를 누구로 돌립니까?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갑니다. 나는 주님의 주 되심의 증거물에 불과합니다. 네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주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을 공략합니다. 그 공략 방법이 출생 장소를 예루살렘 근처로 잡았습니다. 그 장소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무엇을 찾아야 되느냐 하면, 그동안 유대인에 의하면 이방인이라고 배제당한 또는 마리아 찬양에 나오는 가난한 자, 눌린 자로 여겨지는 그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통과하게 돼있어요.

 

천사가 관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역사적 실험은 이미 실패로 끝난 상태에서 말씀은 성취해야 되겠고 인간의 능력은 이미 좌절된 상태에서 영적 존재가 관여하는 거예요. 여기 베들레헴에서 하는 거예요. 여러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차이를 아셔야 되거든요. 예루살렘이 더 중요해요. 십자가에 죽은 것도 예루살렘이고 부활도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그럼 베들레헴은 뭡니까?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 등극할 왕의 고향입니다. 고향이라니까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썼지요. 다시 쓰겠습니다. 반복해야 돼요. 아무리 여러분이 천재일지라도 반복만한 건 없거든요.
 
 

우월이 아니라 근본이지요. 베들레헴이 다윗의 고향입니다. 본적입니다. 그런데 거리는 얼마 떨어지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은 정치적 수도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 예루살렘이고 메시아가 재림하는 자리가 베들레헴이 오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재림하셔요. 예루살렘 근처에 감람산이 있는데 감람산에 메시아가 두 발로 딛고 선다는 겁니다. 갑자기 <회복>이란 영화가 생각나는데. 지금도 보수주의 계통에서는 그걸 실제로 예루살렘에 메시아가 온다는 겁니다. 그 생각할 때마다 일본만화가 생각나요. 간담브이. 도쿄에 가면 커다란 로봇 형사가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두 발로 버티고 섰는지.
 
 

다시 이야기할게요. 구약의 어떤 개념을 끄집어낼 때 그것만 끄집어내면 안 된다고 했지요. 역사적 토양과 함께 묶어서 가져와서 그 토양이 묵시를 얼마나 비난하고 반대하는 속성을 드러내는지 아울러서 가져와야 돼요. 애굽은 주님이 가 계심으로서 이스라엘이 되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이스라엘은 애굽이 되기 때문에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는 것이 성립이 된다고 했잖아요. 하루아침에 이걸 다,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비 올 때 길가의 물이 어디로 빠집니까? 많은 물이 맨홀로 빠지지요. 맨홀이 지하에 있잖아요. 그 지하가 십자가가 있는 자리라니까요. 우리는 자꾸 주님이 하늘에서 온다고 위만 쳐다보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이 메시아냐? 구름 타고 와야지.” 그들은 다니엘을 기억하고 있어요. 구름 타고 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인자거든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검색했어요. 인자의 특징은 구름 타고 온다. “너, 구름 타고 왔어?”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인자는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채찍을 맞고 고난 받는다. 다른 검색을 내놓습니다. 내가 찔림은 너희의 허물을 인함이라 너희 죄악으로 내가 찔리고 내가 맞음으로써 너희가 평안을 누리고 할 때 너희는 너희들 속에 숨어있는 주께서 생각하는 진짜 이스라엘은 우리 죄 속에 있는 겁니다. 변소 이야기 안 해도 되지요. 화장지 어디 있습니까? 말 못하겠다. 더러워서.
 
 

내 죄가 날 살린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면 우리 죄를 귀하게 생각해주기 바랍니다. 주께서 당해서 생긴 죄에요. 그 죄는 우연이 아니고 실수가 아니고 나를 살리는 환경으로 전에는 착함이라고 여긴 헌금이 죄고, 전에는 잘한 일이라고 여긴 강의가 죄고, 목사가 설교한 게 죄고, 예배 참석한 게 죄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그 사람은 성령의 죄를 용출하는 사람입니다.
 
 

너무 진도 나가면 감당 못하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옛날에 대덕교회에서 어떤 집사님이 근심어린 상담을 하러 왔어요. 그때는 목사가 없고 내가 대리 목사로 있을 때 아주 성실하게 성화를 추구하시는 집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제가 남편을 전도하려고 계약을 했습니다. 등산 갈 때 한 번 따라 가주면 교회 한 번 와주는 계약을 흥정을 했는데 제가 이래서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거냐는 질문을 했어요. 이 정도 들었으니까 여러분이 답변을 할 차례 같은데 이제는 수학정석에 나오는 해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항상 제일 먼저 볼 것은, 그 사람이 말하는 행위의 주체 자리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보세요. 내가 남편과 더불어 교회 나왔다. 할 때 내가 남편 데리고 나왔지요. 물론 그는 한 번은 등산 가주는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주님의 십자가 희생정신으로 교회 나왔다고 할 때 내가 전도한 셈이 되겠지요. 내가 남편을 전도했지요.

 

이걸 생각해보세요. 다른 가족은 다 나란히 나왔는데 그걸 그 사람은 내심 부러워한 겁니다. 그런데 사실 나란히 오게 된 것은 나란히 교회 나오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에요. 그 역할을 누가 줬습니까? 주님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그런데 이 부부가 맡은 역할은 혼자 나오는 거예요. 그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주님 말씀에 순종하면 되지요. 뭐라고 하느냐? “저 혼자 나왔습니다. 혼자 나온 이걸 감사하면 안 되고 혼자 나오면서 둘이 나오는 걸 부러워하게 만든 죄를 생산해서 이런 죄도 주께서 용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뭐든지 감사가 안 나오면 주의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야기했습니다. 집사님, 집사님은 누가 누굴 정죄하십니까? 그 집사님은 본인을 정죄하는 기준을 외부에서 따왔어요. 나란히 예배 참석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그게 왜 아름답지요? 그게 아름다운 순간 p1에서 p2로 달아나버리고 말았어요. 나는 언젠가 남편과 저처럼 아름답게 되겠다. 나란히 온 사람이 예수님이십니까? 혼자 오게 만드신 분이 예수님인 걸 믿을 때 만약에 남편의 폭력으로 혼자라도 못 올 뻔했는데 주께서 남편의 폭력을 막으시고 한 번은 와주도록 허용하시니 이 감사와 기쁨은 너희 나란히 오는 자들아 모르지. 자동적으로 오는 이들이 혼자 오는 기쁨을 맛볼 기회를 그들은 없는 거예요.

 

이건 가상 실험인데요. 나란히 오신 분에게 묻습니다. 오늘도 나란히 부부가 같은 신앙 생활하니까 기쁘지요? 저는 왔는데 우리 시어머니가 아직도 불도가 심해요. 나란히 와도 문제라. 왜 갑자기 시어머니까지 걱정하느냐 말이죠. 그렇게 해서 자기를 자책하는 기준은 뭡니까? 어떤 권사님은 시어머니까지 모시고 나란히 왔다는 거예요. 도대체 나를 정죄하고 나를 벌세우고 나를 끊어 앉게 만드는 어디서 수입한 겁니까? 브라질 산입니까, 칠레산이에요? 이 세상에서 온 겁니다.

 

주님은 단 한 명도 전도한 적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결국 혼자서 안녕, 빠이빠이 했습니다. 베드로가 따라 붙겠다고, “예수님, 제 목숨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그것도 목숨이라고. 그걸 어디 쓸모 있다고. 네가 목숨 바쳐도 내가 있는 곳에 못 온다. 내가 처소 마련하게 되면 내가 비행기 티켓 끊고 표 들고 너한테 찾아갈게. 찾아갈 때 성령 오거든 주님이 찾아온 줄 여겨라. 내가 보냈으니까.” 찾아왔다는 자체가 이미 자리가 있다, 없다? 이미 자리가 마련돼 있으니까 빨리 오너라. 또 감사지요.

 

죄 사함의 권세는 주님한테 있습니다. 왜? 이 시대는 역사가 시험하는 시대가 아니고 새삼스럽게 내 신앙이 잘났는지 시험하는 시대가 아니고 이 세대는 이미 죄인으로 확정된 시대에 우리는 주님께 구원받아 가면서 이런 죄까지 감사로 이어지도록 용서를 해주셨구나.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그 기준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고 주께서 확정시킨 기준입니다.

 

전두환 전대통령, 이건희 회장 지옥 갑니다. 왜 지옥 갑니까? 돈이 많아서? 아니에요. 교만해서? 아닙니다. 뭐 때문에?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형벌이 있으리라는 데살로니가후서의 말씀처럼(1장 8절)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일가친척 누구라도 저주를 받는다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귀한 존재입니다.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175.♡.188.166) 14-11-01 17:19 
20140927 미국동부오후f

(강의:이근호 목사)

 

 

노아의 전도방법은, 인간이 집착하는 모든 것을 끊는 방법이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수선하고 이럴 때 갑자기 홍수 온다는 거예요. 이 직업이 얼마나 중요해요. 직업이 없으면 생계가 안 되잖아요.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방주 만드는 소리라는 것. 그러면 방주에 들어오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들어오겠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더 황당한 게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걸 포기할 용기가 돼있는 사람만 방주에 들어간다. 이건 방주에 들어오지 말라는 말과 똑같은 겁니다. 가려면 가란 말이야.

 

그래서 제가 십년 전부터 이야기했지만 전도란 오지 말라는 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전도란 “가세요. 오지 마세요. 당신 올 데가 아닙니다.” “저는 가겠습니다.” 오지 말라니까요. “모든 걸 포기하고 오겠습니다.” 그러면 오세요. 하지만 이것 챙기고, 저것 챙기려면 오지 마세요. 그건 우리가 용납해도 저쪽 분이 용납 안 해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 노아 때와 같이 인자의 때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고 두 사람이 잠을 자도 한 사람은 포착되고 한 사람은 둔다. 두 사람이 쟁기를 간다. 쟁기를 간다는 것은 노동을 한다는 거예요. 똑같은 노동에 똑같은 연금 받고 살아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한다. 그것은 재산을 포기하고 직업을 포기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재산을 가지던 부자가 되던 연금을 받고 이문을 더 얻고 하는 이것보다 더 좋은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아는 사람은 구원받고 이것이 중요하니까 주여, 도와주소서. 이것은 땡 탈락이에요.

 

주님의 자존심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이렇게 돼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다음에 나오는 용어가 우리의 모든 것은 잘라 버립니다. 나의 이름을 잘라버리지요.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거기서 나는 이미 탈락이에요. 나의 이름, 나의 자존심 다 탈락이에요.

 

노아는 예배당 크게 지을 때 수천 명 들어올 줄 알았는데 달랑 여덟 명이고 그것도 자기 식구밖에 오지 않았어요.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미치지 않은 이상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노아를 가지고 노아언약이라 하고 그 노아언약을 믿음에서 발현된(난로가 발갛게 되는 것 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원하지 않은 것을 보고 믿을 수 있는 초인적이고 초월적인 그런 현상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접촉점? 없습니다. 주의 선물로만 가능하고 눈에 띠고 믿어지는 것, 그것이 방주입니다.

 

일단 방주로 노아는 구원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비 올 때 사람들은 뭘 준비하겠습니까? 사람은 과거를 알기 때문에 방주를 준비할 거예요. 땡 탈락입니다. 홍해는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고 방주는 두 번 다시 만들지 않습니다. 홍해 경험 사람, 홍해 올 줄 알았지요. 그 다음 요단강 준비돼있습니다. 홍해는 자동문이에요. 서면 열리는데 요단강은 죽어야 열리는 것. 똑같은 문제를 작년에 출제된 문제를 올해 내지 않습니다.

 

성경이, “네가 이래도 올래?” 그런 이야기에요. 결국 주님은. “잘 먹고 잘 사는데 미쳤어? 왜 예수를 믿어?” 지금 이런 이야기를 안 믿는 자들이 하는 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한다니까. 네가 뭘 보러 왔던가? 좋은 옷, 그것 왕궁에 있어.

 

예상 외로 믿는 자가 주님을 모독하고 있다는 현상이에요. 믿는 자가 주님을 남보다 존경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예수님이 하는 일을 조금 안다는 이유로 더 생활면이나 실천면에서 주님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있지 않는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 자신이 복음을 모독하고 시답지 않게 여기고 자기의 생계수단으로 삼고 있지 않는지 늘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믿음의 ktx 노선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그래요. 같은 일을 반복 안 시켜요. 그러면 흉내 내기가 가능하거든요. 테레사 수녀가(거의 구원받았다고 보진 않는데) 만약에 인도에서 구제해서 천국에 갔다면 그때부터 구원을 쉬워요. 구제하면 되니까. 그런데 어떤 인간도 행해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이상 행함을 모아도 구원 안 되기는 마찬가지인 거예요. 예배 앞자리 앉아서 구원받았으면 누구다 앞자리 앉으려고 프리미엄 오백 만원 붙어요. 가난한 자는 밀립니다.

 

그런데 특정 방법이 행함이 결코 구원을 제공할 수 없도록 주께서 그렇게 만들었거든요. 행함 없이 구원받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누구도 구원되는데 아무도 구원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에브리바디 구원, 노바디 구원. 미국 와서 말도 안 되는 영어, 세관 통과하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영어도 된다는 사실.

 

늦게 왔으니까 다시 해보면, 성경에서 구원이란 그냥 손에 쥐어주는 게 아니고 네가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스스로 그것을 영생보다 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본인이 이미 수용하고 있는지 물으면서 주시는 겁니다. “버리면 구원받습니까?”라고 할 때 버린다는 행위도 구원에 아무 보탬이 안 되고 쓸데없는 짓을 한 거죠. 버리지 마시고 간직하시되 간직하시나 버리는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은 주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구원받습니다. 세리나 창기 직업을 버리던 안 버리던 강도짓을 버리던 안 버리던 아무나 되는데 구원은 아무나 되는 건 아니에요.

 

인간 입장에서 로또처럼 당첨된 자는 구원되는데 그것이 우연인데 그 우연이 주님의 입장에서는 우연이 아니고 아무나 주지 않겠다는 그 귀중함, 이것은 개나 돼지한테 줘서는 안 된다는 그것을 엄중히 고수하라는 쪽으로 “너만 줄게.” 하고 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받은 것이 주님의 결단에 의해서 준 것인지 그 심정을 안 다면 이 구원은 아무나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들었다고 해서 구원이 아니다. 보기는 보아도 본다고 해서 구원이 아니고, 구원이란 네가 들었다 봤다는 행함과 연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사야 말씀, 보았는데 깨닫는데 이르지 못하고, 들었는데 믿지는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해서 인간 선에서 구원을 받아낸 자격이나 방법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죠.

 

이제 본격적으로 누가복음 한 구절 읽어보겠습니다. 2장 22~24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이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이 말씀으로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여기서 제가 포인트로 잡은 것은 23절에 첫 태에 처음 난 남자. 그러니까 남자가 몇 명이죠? 숫자로 치면 2가 됩니까, 3이 됩니까? 1일죠. 이걸 성경은 맏이라고 해요. 회사에서 맏이란 말 씁니까? 아니죠. 맏이란 말은 가족에서 쓰죠. 그러면 제가 이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가족이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있습니까? 질문 자체가 좀 엉뚱한 질문이죠.

 

우리의 상식은 내가 있고 내 가족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상식에 맞는 것 같지만 상식에 안 맞아요. 왜냐하면 부모 없는 자식이 있습니까? 없지요. 가족이 우선이고 내가 있지요. 그런데 왜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족이 먼저 있다는 생각이 안 들고 반드시 내가 있고 가족은 나를 도와줘야 한다는 후차적 순서로 자꾸 밀리게 되지요? 뭔가 잘못된 생각이 안 들어요, 이 세상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주시면 제 가족도 구원시키겠습니다. 마치 순서가 나로부터 해서 가족으로 나가는 순서로 하는데 그 순서가 하나님 앞에 동의가 될 순서냐에 대해서 저는 반대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원하는 순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첫 태에 첫 남자, 이게 맏이거든요. 맏이가 있다는 말은 본인이 원치 않아도 나 이전에 내가 소속된 가족이 먼저 있다는 것을 말해주지요.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내가 믿고 내가 구원받지 내 가족이 먼저 구원받아서 그 가족에 소속되어서 구원받을 생각을 우리는 잘 안 하게 되는 겁니다.

 

유명한 구절,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예수를 믿어라 그러면 누가 구원받죠? 너와 네 가족이 구원받죠. 가족이 우선이 된다면, 다시 말해서 내 가족이란 건 애초에 없고, 가정이 있음은 맏이가 있음으로 증명이 되고 그 맏이가 있는 가족에 일원이 될 때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겁니다.

 

여러분이 익히 아는 이야기를 먼저 하겠어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그 말 맞는 말이죠. 그 예수님이 누굽니까? 로마서 8장에 예수님은 맏이잖아요. 그러면 말을 바꿉시다. 우리의 맏이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이미 천상의 패밀리를 주님이 준비했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나부터 우선이니까 가족은 나의 어려움을 도와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가족을 위해서 내가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안 합니다.

 

그런 것을 요 근래 티비 프로그램에 추사랑이라든지, 이희재 아들 둘, 송일국 아들 셋을 통해서 분명히 압니다. 얘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고 이런 소리 안 하거든요. 이상하게 인간은 뭔가 태어날 때부터 문제성이 있어요. 저는 그것을 신앙적 장애자라고 해요.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장애자. 단지 에너지가 넘치니까 에너지 방향이 자기의 편함과 행복을 위해서 쏟아지니까 그게 장애자가 되는데 그런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세상에 누가 장애자라고 합니까? 없습니다.

 

오히려 피아제라는 심리학자는 그것을 장려했지요. 인간이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자의식이 빨리 발달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자의식이 발달했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자의식이란 가족도 자기한테 유리할 때 가족이지 불리할 땐 차버리라는 거거든요. 네가 중요해. 너보다 중요한 건 없어.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가족이 중요해. 네가 가족에 속하지 않으면 네 구원도 없는 거야.

 

그러면 우리 가족의 책임자가 누굽니까? 맏이지요. 맏이라는 영생을 얻는 중대한 자리는 우리가 준비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지요. 하나님께서 맏이란 이름을 준비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특수한 가족을 준비한 거예요. 누가복음은 가족에 관한 이야기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 다 특별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2절 다시 보겠습니다. “모세의 법대로” 부연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독대해서 준 하나님의 법은 틀린 말 아니죠. 같은 말이죠. 모세의 법대로. 하나님이 주신 모세의 법의 지향점은, 같은 말입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의 목표는, 같은 말입니다.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 드디어 율법과 주께서 지정한 맏이, 첫 남자와의 만남의 시간, 카이로스, 만남의 때가 온 겁니다. 뭐 하려고? 하늘나라 준비된 패밀리를 만들려고 만났지요. 율법은 맏이 만들기에 집중된 방향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걸 실패한 이유가, 율법은 내가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자체가 이미 실패가 돼버렸죠. 율법의 방향은 준비된 맏이를 향하여 가게 돼있는데 이것을 요한복음 5장에 의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책인데 유대인들은 내가 살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모든 율법이 예수님 맏이 되는데 소비한다면, 나는 뭐냐? 이걸 ‘상징’이라고 합니다. 요 근래 이걸 라캉이란 학자가 밝혀냈습니다. 인간은 상징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실재가 아니다. 인간이 생각한 것은 모두 상징인데 그것은 뭐냐? 자기 것이 아니고 살아오면서 듣고 보았던 것이 집대성하여 그것이 나의 정신세계를 꽉 차고 있다. 바깥에 있는 것이 상징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도 상징이다. 우리는 상징이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 모르고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죽을 때도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 버려요.

 

상징이란 말은 실재가 아니란 말이죠. 진짜 그 인간이 아니란 말이죠. 마치 돋보기에 빛이 모이듯이 돋보기 같은 역할로 모든 율법을 집중시키는 특정한 인물이 있어요. 그분이 마지막 아담이에요. 우리는 마지막 아담이 아니라니까. 마지막 아담이 따로 있고 마지막 아담을 드러내기 위해서 모든 율법은 달려가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자기 살리기 위해서 율법이 왔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지킴으로써 구원되고 하나님께 영광 된다고 그런 오해를 한 겁니다. 자기는 안개인데 상징이란 실체가 없어요. 있어도 없어도 그만입니다.

 

여러분, 성만찬 해본 적 있습니까? 성만찬 할 때 그 떡과 그 잔이 예수님의 피던가요, 예수님의 몸이던가요? 천주교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몸이다. 그런데 개신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이것 상징이다. 만약에 떡을 먹다가 놓쳤다. 그러면 예수님을 다치게 한 것입니까? 그렇게 되면 그 떡은 상징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변형된 거죠. 잔을 마시다 좀 흘리면 예수님의 피가 흘려진 거예요.

 

그걸 우리는 상징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의 상징은 몇 그램이냐, 또는 몇 리터냐고 의미를 두지 않지요. 우리는 의미를 두지 않지요. 그저 주께서 죽으신 날 그 밤을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주께서 죽으셔서 우리가 영생 얻었다는 것을 표하는 그냥 상징물이란 말이죠. 상징물을 들여다보세요. 분명히 거기에 바이러스 있고 대장균 있을 수도 있지요. 예수님의 더러운 몸에 더러운 피에 세균, 바이러스 퍼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예수님께서 이런 더러운 것은 주다니? 이렇게 하지 않지요. 상징은 상징이니까. 실체가 아니니까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거예요. 상징이 상징으로서의 가치는 실재와 관계성, 거미줄처럼 연결될 때만 비로소 실재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 겁니다.

 

우리요, 우리요? 맏이가 있음에 우리가 의미 있지 맏이 없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로마서 8장 보세요. 맏아들 구원해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는 양자고. 내가 교회 다니고 내가 예수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다. 성경에 그런 구원 없습니다. 맏이에 소속돼요.

 

제가 첫 번째 날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아버지를 모르면 아들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를 아는 분이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에요. 만들었다고 아들이 아니에요.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린 아들이 아닙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님, 아들 만들기 위해서 집중하지 만약에 날 구원하려고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아놓질 않습니다. “선악과 따먹었어요? 내가 실수했네. 사랑의 하나님이 그것까지 생각 못했어요.” 하고, “실수했어요? 다음엔 조심하세요.” 더욱 더 활짝 열어놓고 생명나무 마음껏 따먹으라고 했을 겁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한 통속이에요. 생명나무가 영원히 못 따먹는 나무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너 같은 존재에게 생명나무를 허락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사상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은 뭡니까? 인간은 이미 창조했고 그런데 인간이 없다면 기존의 인간을 흙으로 돌려보내고 상징물에 불과한 것을 드러내고 진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만이 참된 창조의 원리에 합당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야 될 분은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써 그분 보좌 옆에 기념수, 생명나무 가로수가 연못과 더불어 요한계시록 22장에 펼쳐지잖아요. 그게 누구 덕입니까? 우리 먹고 살라고? 아니에요. 어린양 기념하라고. 어린양만 참된 실재물이고 그분의 가족에 편입되지 아니하면 누구도 생명나무 거기에 갈 수 없는 겁니다.

 

주께서 생명나무 못 가게 하고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게 만들고 이름도 아담으로 지어서 만들고 주께서 모든 말씀을 주셔서 누굴 만드느냐 하면, 생명나무 따먹을 자격과 나눠줄 자격이 있는 새로운 인물을 율법이 맏아들이란 개념으로 이 땅에 이스라엘 속에 실시한 겁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이게 바로 복음의 비밀입니다.

 

예수 믿어라. 구원받는다. 그런 복음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를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게 누구에요? 주에요, 주. 주라니까. 모든 언약이 율법에 속했다는 그래서 생겨버린 주에요. 우리를 찾고 있던 마귀를 홀로 이겼다는 그 주에요. 주라는 단어 외운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지가 이름 부른다고 뭔지도 몰라요. 그냥 예수 이름 흉내 내서 된다면 앵무새도 되겠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주 예수, 주 예수.” 그럼 앵무새 구원받았네??

 

제가 첫날에 이야기했지요. 지금 우리가 아는 현실 말고 어떤 다른 전체 현실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걸 누가복음이 보여주고 있지요. 가족이 있느냐고 묻는 거예요. “가족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제가 있습니다.” 네가 있다는 말하지 마. 너는 없어질 존재기 때문에 이름을 아담으로 지었기 때문에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요. 혹시 가족이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뽑았지요. 열두 제자가 가족입니다. 없는 가족, 맏아들 되신 분이 친히 만듭니다. 어떤 자리? 야곱의 자리에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했지요.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나다나엘 네가 볼 때가 있으리라. 주께서 가족을 만들었지 날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그 가족에 오려면 나는 상징물에 불과한 것을 동의하고 죽여도 괜찮다는 동의가 있어야 돼요. 수술동의서에 사인하듯이 예수님 가족이라면 죽어도 좋다고 동의서에 사인해야 돼요. 성령께서 사인을 대신 해버리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인하나마다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가족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지옥을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세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 모든 의사와 의견과 요구는 주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갈취당하고 박탈당했기 때문에. 마치 내가 착하고 싶어도 아담 속성 때문에 죽였다고 여긴 욕심이 새로 나오는 것을 통해서 나는 욕심의 왕 노릇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이제는 그 욕심마저 처리하시고 주님의 욕심이 아담의 욕심을 대신해서 나는 너를 기어이 건지겠다는 의지 천명과 강렬한 의지를 그 사랑을 마귀가 와도 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난처한 입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은 것은 욕 얻어먹는 거예요. 싫으면 말고. 배짱도 무슨 배짱? 똥배짱. 그러한 배짱 장사 성도에게 꼭 필요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할 때 인자가 도적같이 오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하면서도 이것보다 더 중요한 상황 속에 내가 놓여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으면 되는 겁니다.

 

의사, 판사, 수학박사, 교수 짓을 하면서 진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이것보다 중요한 것이 나한테 있음을 나는 주님의 가족임을 알 때 그 사람은 수학박사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낙타되면 안 돼요. 그러면 천국 가는 구멍이 열리지 않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고 하신 그분의 가족이 된다면, 가족의 이름으로 무사통과가 되는 그런 시스템을 하나님께서 준비해주셨습니다.

 

제가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그 대목이 누가복음 2장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 2장 48,49절을 읽어봅시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아이고, 사춘기도 아니고 되바라졌지요. 사흘 동안 찾았어요. 112 신고하고 여기저기 전화 다하고 전단지 인쇄해서 전봇대에 붙이고 뿌리고. 말이 사흘이지 72시간입니다. 엄마, 아빠 애간장 다 녹았어요. 그런데 다행스럽게 찾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하는 말이,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너는 어디 소속이다? 너는 아빠, 엄마 소속이라고 언급했지요.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길을 잃어버린 이유가 뭡니까? 아빠는 아빠가 아니요 엄마는 엄마가 아닙니다. 아빠, 엄마는 본인의 가족이 우선인데 저는 우선되는 가족이 따로 있습니다. 잃어버림이 됨으로 엄마, 아빠는 내가 소속된 가족을 비로소 발견할 것입니다.

 

그래서 49절에 하는 말이,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찾는다고 또 문제에요. 부모가 자식 찾는 것이 당연한 거지요. 그 당연함 때문에 노아의 방주에 안 들어갔다니까. 그 놈의 당연 때문에, 당연함.

 

아이야 우리 가족은 중요하고 너는 거기에 소속돼있으니까 중요한 우리 가족부터 챙겨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 예수님의 아버지, 어머니의 의견이었고 예수님의 의견은 뭐냐 하면, 지금 번지수를 잘못 찾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보다 내가 더 중요해야 돼요.”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뭐라고 합니까? “그래서 너를 찾은 거야.” “아버지, 어머니 나를 찾지 말고 내 아버지를 찾아야지요. 내가 아버지 있는 곳에 내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아버지가 있는 곳이 어딥니까? 간단한 문제인데. 예수님의 아버지 있는 곳이 그 당시에 성전이지요. 성전에 왔으면 제꺽 예수님을 찾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가족은 성전을 경유하지 못하고 내 아들이니까 나 말고 다른 아버지 없고, 나 말고 다른 엄마가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상징물의 특징이에요. 우리가 실체고 우리가 실재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아니에요. 노, 노, 노. 아빠, 엄마 왜 이러십니까? 노, 노, 노.”

 

사람이 무슨 수로 이런 인식을 가질까요? 성령이 아니면 도저히 이런 발상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동안 여러분은 신앙생활 누굴 위해 했습니까? 자기 자신 구원받기 위해서 했어요. 결국 우리는 본문에 의하면 주님을 찾은 게 아니고 나를 찾았지요. 나를 다치지 않기 위해서 주님을 보디가드 삼기 위해서 찾아다닌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이 평생 우리의 철칙이었습니다.

 

심지어 나를 지옥 보내도 지옥 가는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 겁니다. 그런 비장한 각오로 살아왔습니다. 신이시여, 나를 지옥 보낸다할지라도 신은 버릴지라도 나는 나를 버릴 수 없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내가 왜 존재하느냐? 내가 생각한다는 이것이 중요하기에 내가 생각하는 이상은 모든 일은 내가 생각한대로 현실과 내세관과 천국은 내가 결정할 것이다. 주께서는 가려면 가라. 똥배짱이에요. 그래. 그렇게 살아라. 방주 만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의 그 고집.

 

그리고 소위 방주 안에 들어선 사람들도 사실은 방주 안에 있으면서 홍수 맞으면서 그 의를 몰랐습니다. 언제 알았는가? 홍수 끝나고 난 뒤에 동승한 짐승들 가운데서 더러운 짐승과 정결한 짐승을 같이 실었지요. 우리 같으면 어느 걸 숫자 줄이겠습니까? 깨끗한 것은 번식시키고 더러운 것은 줄여나갈 텐데 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깨끗한 걸 잡아서 오히려 희생시켜서 더러운 것도 공짜로 구원 얻는 혜택을 누리는 이것이 하나님이 전략이었다는 걸 보여주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세기 8장에서 깨끗한 것을 잡아서, 그것 때문에 희생물로 실었던 거예요. 깨끗한 것을 잡아서, 다시는 물로서 심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은 너희가 날 때부터 악함이니라.

 

도대체 우리는 교회에서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오늘도 시간 때우고. 예배라는 상징물은 상징물로 때우는데. 저는 가본 적 없지만 중국에 이런 게 있답니다. 상징물에 적절한 예가 있어요. 중국의 어떤 황제가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자기 영혼 지켜달라고 흙으로 말과 병사들 수만을 만들어서 무덤 안에 포진해놨다는 겁니다. 진시황 때지요. 그렇게 한지 벌써 천 년 지났잖아요. 그 중에서 한 명이라고 부활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부활 안 되지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맏아들에 속한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맏아들을 세웠다는 말은, 맏아들 중심으로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겁니다. 그 가족을 만드는 절차와 방식은 옛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을 준 그 방식을 그대로 반복을 해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았지요. 이삭을 잡으라고 해놓고 살렸지요. 이건 뭐냐? 장차오실 우리의 맏아들도 그 모습대로 오신다는 거예요. 자신을 죽음에 넘겼다가 부활한 모습으로 오시지요. 이삭은 똑똑한 줄 압니까? 이삭은 자기 취향대로 맏아들에게 모든 축복을 물려주려고 하다가 결국 자기를 속인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전달됨으로 말미암아 이삭은 뭘 보여주느냐 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역할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줬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올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위대한 영웅? 아니요. 흠모할 게 있다? 아니지요. 출세한 사람? 아니지요. 대단한 사람? 아니지요. 흠모할 것도 없고 보잘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이 외면해버린 쓸데없고 무가치하다는 것, 제발 무가치한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성전을 사람들이 필요 없다고 갖다버린 돌 하나, 하나가 쌓여서 성전이 된다는 거예요. 사람이 버린 돌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된다. 이 증거를 끄집어내라면 한도 없고 끝도 없어요.

 

그 많은 증거를 다 어디에 묻어놓고 가짜 예수가 교회에 주인이 돼버린 이 사실, 누가 그렇게 만들어냈어요? 마귀가 메시아를 제작해낸 겁니다. 그리스도를 반대하기 위해서 유사 그리스도로 마귀가 만들어냈습니다. 그 이야기가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옵니다. 너희가 좋아하는 마귀는 양의 탈을 쓰고 악마의 앞잡이들이 직원들이 이 땅에 와서 활동한 결과가 너희들이 좋아하는 가짜 예수, 가짜 복음, 가짜 성령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나는 진짜 예수, 진짜 성령이다. 증거대라고?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내가 약한 데서 강함이라. 아무것도 빼낼 게 없는 그것이 주의 사도의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이렇게 합니다. 예수님이 약하심으로 십자가 졌지요. 그러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이 땅에서 누가 봐도 약한 분이죠. 따라서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너희 속에 그런 예수를 믿는지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이야기하지요.

 

아버지께 대든 사춘기인지 모르지만 성질 더러운 소년 예수님. 방금 한 이야기 어버이날 설교입니다. 사람들이 기대하고 듣고 싶어 하는 걸 주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원하는 그리스도는 이미 많이 있습니다. 강한 예수 믿어서 자기도 덩달아 강해지겠다는 거예요. 그런 예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종의 형체를 지녀서 낮아지기를 어디까지 낮아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걸 포기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너희는 누구 마음을 품으라? 최홍만, 양준혁, 박찬호, 류현진, 금메달 그 마음이요? 그게 귀한 거예요? 이건희? 하면 된다는 조폭 마음 품을까요? 어떤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까? 이 마음을 품으라. 누구 마음? 어디가 가장 낮아진 마음인지 그것 찾으란 말이죠.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주여, 지금 이 신분이 나한테 과분합니다.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닌 상징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유일하게 보여주는 실재물은 어디 계십니까? 내가 상징물이라는 것을 지적해주시는 유일한 상징물이 아닌 분은 어디 계십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돈을 교회에 바치는 시간이 아니고 가난하게 되는 게 아닙니다. 가난하다고 약한 게 아니에요. 가난하면 돈 더 밝혀요. 그것은 결코 가난한 자가 아니고 집념이 강한 자에요. 뭐가 약한 자냐 하면, 나 같은 상징물에 돈이란 이런 상징물도 같이 내가 약한 것처럼 이것도 나를 강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 말고 다른 것을 생각할 때 그게 정말 어린애 마음, 약한 마음, 그야말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그런 마음, 빈 마음이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은 그런 쪽입니다. 맏아들께서 어떻게 이 땅에 오셨나? 그 맏아들은 가족을 만드는데 가족을 만들기 위해서 뽑은 숫자가 열두 제자. 자기는 야곱의 자리에. 그러면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은 야곱입니다. 자신이 맏아들, 야곱의 자리에서 자식을 낳게 되면 이스라엘, 국가가 되거든요. 이스라엘 국가는 지파의 이름이 아니고 열두 지파 아버지의 이름이죠.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이죠.

 

야곱은 어떤 점에서 자기가 상징물인지 아느냐 하면, 이삭은 자기가 원하는 자를 밀려고 했지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됐지요. 먼저 된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되지요. 야곱의 경우에는 어긋맞게 한다고요. 우리 같으면 어긋맞게 하면 오십견 걸린 사람은 당겨서 못합니다. 자리 바꾸면 될 것을 의도적으로 한다는 과정이 중요한 거예요. “너희들은 이것 하고 싶지 하지만 이걸 알면 구원 못 받아.” 나중 된 자가 큰 자인 것을 알아야 돼요.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리를 바꾸지 않고 어긋맞게 축복하는 것은 바로 내가 이런 주님의 과정에 의해서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주님의 맏아들 되는 과정은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고 가족 밖의 인간들이 오해할 내용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주변에 있던 유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예수님을 무가치하다고 배격하지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어떤 언질이나 어떤 기대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없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내용이에요.

 

이것만 하고 첫째 시간 쉽시다. 맏아들이 있지요. 맏아들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가족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맏아들과 가족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는 문제가 남게 됩니다. 그것은 맏아들을 맏아들 되게 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어요. 그 관계가 그대로 이어지게 되면 이들은 가족이 됩니다. 다른 방식, 다른 길은 없어요. 아버지께서 맏아들 만드는 방식만 다시 반복하면서 우리가 맏아들의 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아버지가 맏아들 될 때 하늘에서 뭐가 내려왔습니까? 맞아요. 성령이 내려왔지요. 그래서 어제 이야기했지요. 누가복음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사도행전까지 계속 이어진다고. 누가복음 지은 저자와 사도행전 지은 저자가 동일하게 누가입니다. 그 전체 흐름은 성령에 의해서만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베드로가 예언하기를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오게 되면 젊은이들은 예언하고. 그게 인간의 솜씨가 아니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구약은, 율법에 초점이 있으니까 그때는 성령이 안 오니까 지상의 육적인 방식으로 표현된 방식이 있어요. 그게 시형제결혼법이란 게 있어요. 시형제결혼법이란 것은, 형이 자식을 낳지 못할 때는 여분의 동생, 그것도 장가가지 않은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의 자식을 낳는 방식입니다. 잘 기억하세요. 본인이 씨가 없을 때는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기어이 아들을 이어가는 방식을 시형제결혼법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남자가 무정자증이에요. 아들이 기업을 이어야 되는데 자식이 없으니까 곤란하잖아요. 그럴 때 동생의 정자를 받아서 형수를 통해 아들을 낳아 기업을 잇겠다는 방식, 시형제결혼법이 그겁니다. 그것을 <청담동스캔들>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몰랐지요. 동생의 정자를 정자은행에 보내서. 그걸 알고 부인 난리 났어요. 복음과 관련해서 드라마 보시면 재미있어요. 그러면 교체가 되지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같은 형식이 생긴다 말이죠. 왜 그렇게 했는가?

 

 

10분 쉬고 합시다.
 관리자(IP:175.♡.188.166) 14-11-01 17:21 
20140927 미국동부오후g

(강의:이근호 목사)

 

 

구약 이스라엘에게 시형제결혼법이 있다. 형이 아기를 못 낳을 때는 동생이 낳게 해야 된다. 그걸 반대한 사람이 있었어요. 오난이란 사람이 땅에다가 설정했지요. 그래서 죽었어요. 죽은 게 아니고 죽였지요. 땅에다 설정했다고 죽였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언약을 짓밟았으니까 언약대로 저주받으라는 이야기에요.

 

도대체 이 현실은 우리가 아는 현실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첫날에 이야기했잖아요. 지금 우리가 아는 현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그러한 현실 말고 진짜 현실은 도대체 어떻게 움직이는가? 그건 주의 계시에 의해서만 되는데 그게 너무 이상하고 낯설다. 왜 낯선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눈이 감겼기 때문에 감긴 상태에서 만들어낸 모든 세상은 주님 보시기에 상징, 쉬운 말로 허상, 허구, 사라질 것.

 

다시 말해서 주께서 창조하셔야 되고 따로 있다면 없앨 것을 없애고 빈 자리에서 새로 만드는 겁니다. 화장실에 휴지 없으면 바깥에서 주는 게 아니고 없는 그 안에서 주는 식이에요. 죄를 지었잖아요. 죄를 구원하는 능력이 죄 속에 있다니까요. 어제 목사님이 이야기했잖아요. 죄가 나를 구원한다고. 기절초풍할 이야기에요. 다만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느냐는 거죠. 그러면 네가 이야기한다고 알겠나. 이걸 보고도 모르는데 이야기한다고 알겠어요? 상처는 상처로 치유된다는데. 도대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에요. 선문답도 아니고.

 

그러나 시형제결혼법은 분명히 있는 거예요. 그냥 말로만? 아니에요. 죽여 버립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진지하기에 얼마나 하나님께서 그 법칙을 사수하기에 이것 무시하면 죽여 버릴 정도로 그 인간을 개 취급해서 죽일 정도로 중요하다면 왜 우리는 그 시형제결혼법이 적용되지 않고 살아가느냐? 뭔가 우리가 허상을 따르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해야 돼요. 성경 따라 나 따로. 성경에서 나오는 발현되는 진리는 모르고 나의 의를 정당화하고 변명하는데 성경을 한껏 이용함으로 주를 모독하는 삶이 아닌가를 돌아봐야 되겠지요.

 

누가복음 2장 23절, 시형제결혼법과 맏아들의 관계는 뭐냐? 둘째 아들은 자식이 없어도 좋다. 셋째 아들은 자식이 없어도 좋다. 하지만 누구는 자식이 있어야 된다? 심지어 그 남자가 죽는다할지라도 남자의 씨는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룻기에요. 그 룻에 따라 온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다윗이 죽는 자리에 진짜 다윗언약이 나와요. 다윗은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언약했다. 아니에요. 다윗이 죽을 때 죽은 다윗에서 언약이 나오는 겁니다.

 

다윗은 하나의 제물이었습니다. 다윗은 무슨 제물이야. 다윗은 어린양이 아닌데? 다윗 인생 자체가 제물이었습니다. 무슨 제물? 세상 죄를 대표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제물이었고 그 제물을 하나님의 언약이란 제단에 바침으로 말미암아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다윗언약에 의한 용서가 죄에서 구원이 나오듯이 죄 많은 다윗에게서 다윗의 자손이 나와서 소급해서 다윗을 건져내시는 방식을 하나님께서 그것만 고집하고 고수했다. 이것을 믿느냐? 이것이 구약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길고 복잡하고 얽힐 때에 하나님의 언약이란 징검다리를 통해 살펴보면 찾아낼 수 있는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이 뭐냐? 죄인을 구원한다. 그걸 줄여서 말하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죽으면 죽은 이도 산다. 내가 죽으면 네가 산다가 아니라 말 한 마디도 주의해야 돼요. 내가 죽으면 죽은 네가 산다는 거예요. 따라서 너는 주님 없이는 살아도 죽은 자라는 걸 인정한 사람에게만 주께서는 메시아를 알아보도록 성령께서 사전 조치가 그렇게 이뤄진다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살 것이요. 디모데전서에도 그게 나와요.

 

중보자요? 우편배달부는 그냥 산 채로 부치잖아요. 그러나 하늘나라 생명의 전달자는 죽음으로 받아서 “나는 주기 싫어요.” 하면 안 되고 이분은 내 죄 때문에 죽은 거야라고 고백하면 그 속에 생명이 들어있어요. 생명의 편지, 자기가 죄인인지 알아먹는 자만 알아먹는 그런 편지.

 

그렇다면 시형제결혼법은 뭐냐 하면, 바로 죽은 자도 씨를 낳을 수 있다는 겁니다. 자손을 낳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씨를 어디에 써먹으려고 강조하는 겁니까? 아브라함의 약속에 의하면 세 가지를 축복했어요. 하나는 씨, 두 번째는 땅, 세 번째는 의. 하나님의 의, 땅, 씨, 이것을 복으로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씨가 만들어지는 땅을 주고 땅에서 온 씨가 의를 갖고 있다고 하나로 묶어낼 수 있어요. 예수님이 씨고, 예수님이 땅이고, 예수님이 의입니다. 그 중에서 사람들이 제일 못 알아듣는 게 두 번째입니다. 예수님이 땅이라는 걸 못 알아들어요.

 

땅은 공간개념이고 예수님은 인물이잖아요. 인물이 어떻게 땅이 될 수 있을까요? 도저히 그건 납득이 안 되지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축복이 땅에 있잖아요. 사도 바울은 땅이 바로 예수님이라 하지 않고 중간에 거쳐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뭘 거치느냐 하면, 아브라함 자손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성령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영적 공간 속에 예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공관복음에서 예수 안(In Christ), 예수님 자체를 공간개념화해서 사용하고 있어요. 네가 의로운 것은 예수 안에서 의롭다는 겁니다. 공간개념이니까 그 비유를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만 의인 되고 영생을 얻는다면 예수 밖에 있는 자는 저주뿐이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그들은 대대로 그 땅이 그 땅이고, 그 씨가 그 씨고, 그 의가 그 의다. 그 땅은 가나안 땅을 말하고, 그 씨란 할례를 행한 아브라함의 혈통, 야곱의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가 대표니까(멸망하고 난 뒤에) 그게 유다나라거든요. 유다지파가 여전히 dna가 흐르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 자손이니까 그 씨가 됐고, 의는 구약에서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고 율법을 어기면 저주받으니까 율법을 지킨 만큼 양적으로 누적이 되겠지요. 마일리지 쌓이듯이 쿠폰 모으듯이 자꾸 자기 장부에 예수 믿고 난 뒤에 날로 의가 저축이 되는 보람을 느끼잖아요.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모르기 전에 했던 방식이에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우리 자신이 선악과나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나무는 하늘나라에 없습니다. 에덴동산 회복 안 됩니다. 회복되려면 선악과나무가 있어야 되는데 선악과는 지옥 가 있으니까. 선악과는 악마를 악마로 드러내기 위해서 심어놨는데 그걸 알고 악마가 같이 죽자고 따먹으라고 한 거예요. 인간을 조지기 위해서 따먹으라고 한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행함에 대한 심판이고 구원은 행함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생명책에 명단 있으면 구원합니다. 이걸 잘 모르는 사람 있어요. 생명책은 말라기에 보면 기념 책이라고 돼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기념하는 거예요. 평생토록 예수님 때문에 존재했음을 기록한 명단이 있어요.

 

기념했기에 기념하는 주인공이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나무가 있는 그 나라에 지상에서도 기념하고 지상에서 기념한 것처럼 영원히 살면서 기념하라. 예수의 주 되심을 기념하라. 그런 역할로 천국에 입성하게 된 겁니다. 합격통지를 미리 당겨서 받았어요. 전화 걸면 불합격입니다. 안 됩니다. 합격자 발표했느냐고 물으면 안 돼요. 그러면 회사에서, “이미 통보했습니다.” “저한테는 통보 안 했는데요?” 바봅니까? 불합격이란 뜻이에요.

 

성령의 보증금으로 이미 와버렸으면 그 아파트는 성령으로 등기가 되면서 아브라함의 땅에 해당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우리나라에 이것으로 논문 쓴 사람이 있어요. 성령이 곧 땅이라는.

 

천국은 어디 있다? 성령 안에 있지요.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요한복음 14장. 내가 가는 것은 처소를 마련하기 위함인데 그 처소는 곧 아버지와 예수님과 올 수 없는 너희도 함께 하게 할 새로 만든 처소지요. 그것은 성령의 기능 속에 확장되게 업그레이드 된 성령의 기능이 인간도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마련한 겁니다.

 

식사 초대했는데 예상 못한 사람이 왔을 때는 한 사람 더 왔으니까 숟가락하고 음식 더 내오세요. 그리고 자리 좀 당겨서 앉고. 의자 하나 마련해. 옛날에는 아버지와 예수님만 있을 자리에 의자 하나 더 허겁지겁 준비해서 예수님이 선택한 자를 거기에다 앉히면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는 방식으로 너희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게 되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도 아니고. 그런데 이게 맞아요.

 

지금 이런 이야기가 있으면서도 왜 우리가 놓치느냐 하면, 내 행함으로 어떻게 구원되는지 내 쪽에서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안 행해도 다 마련했다는 말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행하게 되면 자기 명예가 높아져요. 그게 주기도문과 안 맞아요. 내 이름이 살아있어 영원히 빛나게 되면 그건 천국이 아니고 아들의 나라가 아니고 내 나라가 돼요. 나만 내 나라입니까? 나 같은 인간 또 있잖아요. 그러면 천국에서 투쟁하게 돼요. 꼴좋다. 아직 싸움 안 끝난 모양이라. 천국 가서 멱살 쥐고, “네가 여기 올 줄 몰랐다. 돈 내놔라. 돈 떼먹고 결국 여기 왔구나.” 주님께서 둘이 싸우지 마라. 그러면 골목으로 가서 “내가 여기까지 따라올지 몰랐지?” 이게 무슨 천국입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인간들. 좋은 환경 줘도 안 되는구나. 내가 못 살아.”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을 때 환경이 나빴습니까? 먹을 게 없어서 배고파서 따먹었습니까? 희락의 동산, 최고의 동산에서 그들은 범죄 했습니다. 부자 된다고 죄 안 지어요, 가난하다고 죄 안 집니까?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주를 위해서 우리는 죄의 생산 공정도구가 돼야 됩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은 구원된 사람이고 그 사실을 모르고 자기를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지옥 갈 사람입니다. “목사님, 원색적인 설교는 좀~” 원색이고 뭐고 포기했어.

 

맏아들은 무조건 씨가 있어야 된다. 시형제결혼법은 아들이 있으면 안 돼요. 둘째, 셋째 낳으면 안 됩니다. 그건 형수가 바람난 게 돼요. 아들이 있는데 왜 해요. 우리의 부부는?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아들을 낳아야 돼요. 어떤 아들? 맏아들. 그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입니다. 결혼의 목적은 부부의 행복에 있는 게 아니고 아들을 낳는데 있어요. 아들을 못 낳으면 저주, 낳으면 축복입니다.

 

아비멜렉에게 어떤 손님이 찾아오는데 그때부터 아비멜렉 모든 가문의 여자들이 임신이 안 되네. 아마 누가 약을 먹인 모양이라. 그게 창세기 20장에 나오지요. 물론 아비멜렉이 예쁜 처자를 데려오니까 “당신 부인인가?” 아브라함이 두 가지 카드를 갖고 있었어요. 자기가 세다 싶으면 부인이라 하고, 자기가 약하다 싶으면 누이동생이라고 적절하게 써먹으려고 했어요.

 

아비멜렉이 자기보다 세니까 누이동생이라 카드를 내밀었지요. “누이동생이라면 내가 부인으로 맞이해도 되겠네요.” 그때 사라가 뭐라고 그러겠어요? “왜 저 여자가 내 여자라고 말을 못해.” 분명히 이렇게 나와야 되는데 사라가 뭐라고 합니까? 논개라. 이 몸 바쳐서 나라 구하겠다고. 왜냐하면 남편이 복의 근원이잖아요. 이 몸 희생해서 복의 근원 유지하라고 이슬처럼 사라지겠노라고 자기는 성상납에 자진해서 나섰습니다.

 

그런데 제삼자가 개입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갑자기 아비멜렉이 이 여자가 괴물인지 알고 이상한 기운을 느끼고 불렀지요. 이실직고하라. 부인이냐 아니면 네 친척이냐고 물었지요. 그때 비로소 가족이 아니고 자기 부인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입니까? 복의 근원이 싫어도 될 사람입니까? 싫어도 복의 근원이 될 사람이지요. 맞지요. 그럼 여러분은 천국 갈 사람입니까, 가야만 할 사람이에요? 천국 가야만 하는 사람이에요. 돈을 버세요. 나쁜 짓하세요. 막 사세요. 절대로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아니고 주님이 개입된 운명으로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예레미야가 선지자 노릇 못하겠다고 때려치우겠다고 자격증 반납했어요. 말만 하면 욕하는데. 여러분도 실감하고 있지요. 말만 하면, “나 밉지?” 이런다는데 에이 씨. 못 해먹겠다고 반납하니까 주께서 말립니다. 네 일이 아니고 엄마 태에서부터 간택 됐기 때문에 취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조져놨어. 예레미야는 해야 돼요. 에스겔 같은 경우에는 욕 얻어먹는데 정말 맹렬한데 임금은 죽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성경책을 드리니까 난로 불에 집어넣고, 이게 내 뜻이야. 가봐.

 

예레미야가 힘이 나겠어요? 권세자 잡으면 선교에 도움 되겠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선 어떻게 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미리 경험하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장난이 아니고 실제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는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노선이 주님과 같은 성령의 노선인 것을 일깨워줍니다.

 

여러분 기대하지 마세요. 정말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하지 않을 때 감사가 일어나고 기대하면 실망밖에 오지 않습니다. 기대 안 하되 더 낮게 십자가 자리에서 하세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 것을 나라고 알아듣는 건 아닌데 성령이 왔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수님의 피로만 용서된다는 말도 안 되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진짜 귀한 것으로 알아들을 때 주의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맏이를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아비멜렉 전체 가문의 태가 닫혔지요. 이 말은 아비멜렉의 패밀리라면 이쪽 반대편에 있는 아브라함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고 아브라함 가족이 반대로 복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맏아들이 누구와 연계되는가? 그 맏아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주님의 계획과 연계됩니다. 그때부터 맏아들이 어떻게 생기느냐? 죽은데서 살아나기 위해서 사라의 태가 죽지요. 거기서 이삭이 나오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바로 죽음을 장고처럼 관을 끌고 가는데 그 관 안에 생명이 들어있어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바다에 뱃길을 낸 거예요. 그러나 배 지나가자마자 바다는 본성적으로 언제 배가 지나갔냐는 듯 다시 봉합이 돼버렸지요. 그리고 쉬쉬한 겁니다.

 

누가복음 4장에 봅시다. 27절 읽어보세요.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왜 엘리사는 많은 사람을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까? 이게 제 질문입니다.

 

25절, 제가 읽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왜 많은 과부를 찾아가지 않습니까? 구제차원에서 많이 하면 사랑을 보다 많이 전파하는데 이 본문 해석 어떻게 할 거예요? 뭐예요? 성질내시는 겁니까? 왜 그렇습니까? 간만 보시는 거예요? 지금 한 사람을 건졌다는 걸 강조합니까, 많은 사람이 배제됐다는 걸 강조합니까? 많은 사람이 배제됐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건짐 받은 것은 건짐 받을 만해서 받은 게 아니고 그 한 사람도 배제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건짐으로서 모든 인간이 건짐 받을 자격이 없는 겁니다.

 

제가 물리적으로 말씀드립니다. 고요한데 바늘 하나 떨어지면 더 조용합니까, 약간 더 시끄럽게 되었어요? 약간 더 시끄럽게 됐지요. 그런데 표현을 어떻게 합니까? 바늘이 떨어져서 소리가 날 정도로 그 다음에 시끄럽다고 합니까, 고요하다고 합니까? 고요하다지요. 고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더 시끄러운 요소인 바늘을 일부러 던집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이 상황은 어떻다? 너무나 고요하다.

 

이 세상은 죄가 많다.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 없다. 다 저주받아야 돼. 이게 이 세상에 대한 저주의 강조점입니까? 아니면 일부러 한 사람만 건지는 것이 이 땅이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걸 강조하는 거예요? 한 사람을 무심코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건짐 받을 때 건짐 받은 당사자도 이게 뭐야? 왜 나한테 찾아오지? 이것이 세상은 아무도 구원받을 자격 없다는 겁니다. 바다? 홀로 뱃길 가고 있습니다. 지나가게 되면 다시 봉합돼요.

 

그런 예수 말고 우리를 인정하는 예수만 사람이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그 어두운 바다를 주님 홀로 가는데 고마운 것은 그냥 가지 않고 아무 이유도 없이 난데없이 무작위로 한 사람 뽑아서 데려감으로서 이 정도로 세상은 악하다고 증거하는 그것이 누가복음 사실은 오늘로 끝이에요.

 

모든 사람이 배제되는데 배제시키는 그분마저 나중에 세상으로부터 배제당하지요. 그러면 사흘 뒤에 부활을 생각하지 맙시다. 십자가 달린 그 순간만 생각합시다.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누가 하나 설치고 까불다가 정치범으로 몰려서 그냥 고요하게 사라졌지요. 죽고 난 뒤에 24시간 지났습니다. 소식 없습니다. 그냥 고요하지요. 둘째 날 고요하지요. 그러니까 셋째 날도 고요하겠지요.

 

세상에, 어둠의 새벽을 깨고 무슨 난리가 났습니까? 예수님의 시체를 찾던 두 사람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인상을 압니까, 모릅니까? 알지요. 낯선 사나이가 자기 옷 하나 걸치고 앉아있어요. 마주쳤지요.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자기 아들 얼굴 못 알아보는 그런 엄마는 없어요. 그런데 알아보기는 뭘 알아요. 누구십니까? 동산지기인 줄 알았어요.

 

본 것은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이 삼년 동안 본 것은 육신,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에 이제예수님에게는 지나갔어요. 수술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흙을 잡아당겨봐야 흙 됩니다. 상징물입니다. 흰머리 빠져도 그것도 흙머리 빠진 게 돼요. 부활되면 아담의 형상은 끝나고 예수님의 하늘의 형상을 입을 겁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 46절, 48절.

 

그것은 우리가 기대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보느냐, 못하느냐? 그겁니다. 인물 보고 알아볼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실패했는데. 그럼 신장 보고 알아볼까요, 외형 보고 알아볼까요? 그것도 실패했는데요. 그럼 뭘 보고 알아볼까요? 주님께서 도마에게 제시한 게 뭡니까? “너, 모르나. 그새 잊어버렸어? 내 얼굴 몰라?” 주님께서 이랬습니까. 그전에 열 제자에게 다 보여줬어요. 뭘 보여줬습니까? 창자국과 못자국. 그래서 기념하라고 한 거예요. 뭘 기념해요? 내 살과 내 피를 기념하라.

 

이 살과 피는 상징에 속하지 않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성만찬은 잘못된 거예요. 상징이 아닌 상징. 그래서 개신교 성만찬은 잘못된 겁니다. 상징이 아닌 상징, 그것 구원받는데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상징인들이 같은 상징인으로 봐야 믿겠다는 자기의 고집으로 매주, 또는 일년에 두 번씩 한 겁니다.

 

중세에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무식하니까 연극 이벤트용으로 성만찬을 자주 했어요. 떡 봐라. 떡 보니까 뭘 기억해? 죽으신 주께서 이 피는 뭘 생각나지? 주께서 흘린 피. 이것으로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용도로 했던 거예요. 그러나 성령님이 그걸 이용했느냐가 중요하거든요. 성령님은 상징을 피해버립니다. 상징을 찢어버립니다. 상징 자체가 우상이 되기 때문에.

 

인간은 상징을 받으면 자기가 상징이기 때문에 같은 상징영역 속에 추가된 상징으로 그것을 소유하게 돼요. 그러나 성령은 절대로 소요대상이 안 돼요. 오히려 나는 상징에 불과하고 허상에 불과하다고 고백하는 것은 물과 피가 아니고 물과 피마저 부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겁니다. 구원의 능력은 여기서 오지 않습니다.

 

그럼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뭡니까? 그건 저한테 묻지 마시고 갈라디아서 3장 1절,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나오는 말씀을 보세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제가 적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이야기하는지 보세요. 십자가가 어떻게 된다? 보이거늘. 보입니까, 보여요? 얼마짜리 십자가에요? 이런 십자가.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십자가 보여주고 그런 이야기합니까? 손에 십자가 백 개 들고 있다가 보는 사람마다 십자가 보이고 그랬습니까? 십자가는 이미 끝났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눈에 보이거늘. 그 사람한테만 보이는가. 한 번 그려보라고 할까요? 그리면 안 돼요. 그리면 상징이 돼요.

 

여러분, 사도 바울이 손수건으로 죽은 사람 살려냈지요. 그러면 그 손수건을 기념물로 박물관에 놔둘까요? 안 그러면 그 손수건을 구조를 해체해서 손수건을 제작할까요? 안 그러면 손수건을 어떻게 할까요? 손수건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바늘 떨어뜨린 것과 똑같은 거예요. 손수건과 관계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손수건을 사용한 겁니다. 손수건은 보이지 않는 분의 십자가가 보이지는 않지만 십자가 중심으로 지금 일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잊어야 될 손수건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습니다.

 

홍해요? 홍해 가면 열립니까? 홍해가 백화점 자동문입니까? 지금 홍해에 간 사람 홍해 열렸다는 소식 들어봤습니까? 일회용입니다. 요단강요? 요단강 용기 있게 물 속에 들어가면 열립니까? 아닙니다. 여리고성요? 실험 삼아 성에 서보지요. 독일의 유명한 성이 있는데 엽서에도 나오고 드라큘라 영화에도 나오는 노이슈반슈타인 성, 시에도 나오거든요. 진짜 예뻐요. 그 성 일곱 바퀴 돌아보지요. 무너집니까? 미쳤어요, 무너지게. 어떻게 상징이 상징한테 져요. 앞자리 앉으면 은혜 받습니까? 은혜 받는다고 최면을 걸면 은혜 받겠지만 그건 다 가짜지요.

 

우리는 우리 쪽에서 행함을 시도하는 게 아니고 그냥 있으세요. 그 자체가 주님의 행함의 결과물입니다. 캔슬 되도 결과물이고 할 수 없어. 주께 당하신 거예요. 결과물이에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 겁니다. 어디에? 출세하는데? 아니에요. 성공하는데? 아닙니다. 직장상사 인사 받는데? 아닙니다. 영생 얻는데. 이래도 구원받았다는 걸 깨닫게 하는 요소가 내 뜻대로 안 될 때 뜻대로 안 되도 구원되는 걸 새삼스럽게 느끼라고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겁니다. 나도 못 믿는데 누굴 믿어요. 남을 믿어요? 본인도 안 믿으면서 감히 남을 믿어요.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니가 나를 알아요.

 

누가복음의 흐름은 뭡니까? 다 배제하는 거예요. 배제를 어떻게 합니까? 배제하라? 아닙니다. 이방인을 구원하고 소경을 구원하고 세리와 창기가 너보다 먼저 천국 갈 사람을 툭툭 던지면서 유대인들을 배제합니다.

 

참 이런 이야기할 때마다 미안하지만 성경에 있기에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6장 21절, 하여튼 이런 걸 끄집어내는 나도 미운 거예요. 할 수 없어요. 성경에 있으니까.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5절,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해서 전도해야 됩니까? 좋게, 좋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웃는 것은 축복이니까 많이 웃으세요. 개콘 다 봤다, 이제. 웃는 것도 문제라. 뭘 어쩌라고. 볼링장에서 스트라이크 치고 울까요? 실제로 그런 사람 있어요. 내가 눈을 의심했는데 실제로 있었어요.

 

연말에 개그부문 최우수신인상을 신보라란 사람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소감을 말하는데 내가 자랑할 것은 예수의 피밖에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했다니까. 생중계로 전 국민이 시청하는 가운데서.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 나왔어요.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신보라라고 여자 코미디언이지요. 예수님을 자랑한 게 아니고 십자가의 피라고 이야기했다니까요. 장난도 아니고 얼마나 심각한 문제에요. 그때부터 간증집회가 들어오는데 돈 많이 벌었을 거예요.

 

이렇게 예수님께서 삐딱하게 이야기하면 전도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말은 예수님 하신 말씀대로 네가 같은 시대에 같은 세상에 산다면 우리에게 너도 이렇게 전도하라는 이야기잖아요. 전도 이렇게 합니까? 못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무도 자력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해서 구원받을 위인은 없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일부러 피해가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는 걸 피해가요.

 

그러면 이 세상에 맏아들은 누굽니까? 결국 예수님만 인간이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될 자격이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그게 누가복음이 터 잡아놓은 택지조성이에요. 모든 사람을 죽여 놨습니다.

 

34절 봅시다. 참 이 이야기할 때는 여러분 귀 좀 막으시기 바랍니다. 안 돼. 무슨 소리이기에 벌써 호들갑을 떠느냐?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이 말은 뭔 뜻인지 알아요? 돈 빌려주지 말고 돈 줘버려. 받을 생각하지 말고 주라. 만약에 받을 생각하고 줬다면 하나님의 칭찬은 없다는 겁니다.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할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두 번 다시 너한테 돌아와서 그때 대접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서 잊지 않고 제가 보답하겠다는 여력이 없는 사람에게만 대접하라. 그것을 말로만 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따님 치울 때 혼수 보낼 때 그렇게 하세요. “사돈이여, 예단 있습니까?” “예단요? 예단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예단 하세요. 그런데 “사돈, 예단?” “받았으면 해야지요.” “미안합니다. 혼사 없는 걸로 합시다. 우리 사정 때문에. 예단 한다니까 더 이상 안 되겠습니다.” 지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이 이유가 있어요. 율법은 누굴 지향한다고 했습니까? 율법은 우리한테 오는 것이 아니고 맏아들 만들기 위해서 오지요. 예수님한테 오지요. 율법 중에 출애굽이 있거든요. 출애굽이 올 때 이스라엘 전체를 고아와 과부로 만들었습니다. 고아와 과부가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는 주위 사람들, 친척이 없습니다. 친지가 하나도 없어요. 전혀 도움 줄 친지가 없을 때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보겠지요. 그게 바로 성도 만들고자 하는 모델인 거예요. 이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걸 몸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그런 환경을 주신 것에 대해서 할렐루야 감사합시다. 이 세상에 믿을 놈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면 믿을 놈 없으면 믿을 분만 찾아야지요.

 

왜 갚을 여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느냐 하면, 하나님의 상은 그때 주는 거거든요. 네가 너에게 도로 갚을 것이 없이 줬다는 말은, 거지한테 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런 사람을 이렇게 했기 때문에 함께 계시는 주님에게 제 것을 드리겠다는 뜻이에요. 드린다는 말은 있어도 고아고 부모 있어도 고아고 남편 있어도 과부입니다. 진정한 나의 부모는 주님밖에 없다는 고백이에요. 그것을 지금 예수님께서 바닷길로 가면서 뿌렸다는 것은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지요. 없기 때문에 성령을 통해서

 

맏아들이 있는 이유는 유일하게 아버지를 알기 때문에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의 관계를 여기에 적용시킴으로 아들도 아닌 자를 아들로 만든다고 했지요. 그러면 맏아들과 예수님 사이에 비둘기 같이 성령이 오지요. 성령으로 오신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네가 네 행함으로 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안 되는데 되네. 못하는데 되네. 돈을 사랑하는데 돈을 사랑하지 않고 헌금이 되네. 예단 줄 수 없기에 오히려 예단하고 싶어지네. 돈 빌려달라고 왔는데 그냥 가져가라는 말이, 내 입에서 왜 나오지? 이건 누가 한 거예요? 내 속에서 성령께서 하게 하셨지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나는 죠다입니다. 나한테 존경의 표를 하지 마세요. 얼마나 내가 못하면 성령께서 와서 나를 사용해서 너는 못하고 내가 한다는 식으로 했겠어요. 그러니까 신보라처럼 내가 개그맨해서 신인상 탄 것은 뭐다? 내가 겸손한 것도 내 자랑이지요. 그러면 주체를 바꿔야 되지요. 내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예수님 피밖에 없다. 예수님이 신인상 탔습니까? 아니지요. 신인상에서 관심을 끊어주세요. 저는 다른 큰 자랑거리가 따로 있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하는 것은 신보라가 믿음있다는 조건 하에 이야기하지 저는 그런 기대는 안 합니다. 사람을 안 믿으니까.

 

신보라가 진짜 성령 있다면 그 마음을 대변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 부럽습니까? 내가 탈 것은 네가 탔으니 기분 좋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의 큰 자랑거리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신인상 타고 대상 타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의 말씀은 신보라가 착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고 신보라와 함께 있는 성령께서 기어이 신보라로 그것을 토해내도록 사용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똑같은 팔자에 있는데 그 이유는 맏아들의 관계 속에서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는 맏아들이 계시다는, 그분만 자랑한다는 쪽으로 오직 자랑할 것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누가복음은 펼쳐진 겁니다.

 

 

내일 낮에는 누가복음을 마저 설교로 그때는 50분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203.♡.42.222) 14-11-05 22:02 
20140929 미국맨해튼교회a,b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 앞에서 말씀하라고 했어요. 고넬료와 베드로는 하나님 환상 가운데 만났기 때문에 그랬잖아요. 그런데 요나와 이방인들이 배에서 만났을 때는 너는 누구냐고 물어봐요. 요나가 나는 히브리 백성이라고 말하잖아요. 우리는 지금 환상 가운데 만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목사님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목사님께서 저희에게 소개해주시고 시작하면 되겠습니다. 박수로 환영
 
 

저는 from Korea. 저의 영어는 간단명료합니다.
 
 

 

-여러분, <7번방의 선물>이런 영화 보셨어요? 감옥에서 이렇게 소개했다가는 엄청 맞는 거예요. 짧게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목사님의 신학이 어떤지 소개해주셔야 합니다. 피상적인 말로는 통과가 안 됩니다. 감옥에 들어왔다고 생각하시고 초범 입장에서
 
 

저는 한국에 대한예수교장로교 합동 측 목사였고, 목회는 한 30년 이상했고, 제가 책을 35권정도 썼어요. 쓴 내용은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더 이상 교인들이 목사한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성경을 관통해서 다만 목사들이 앞에 있는 것은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고 성령께서 친히 가르칠 때에 목사들이 한 의견은 그냥 참고로 듣고 우리 속에 과연 성령이 친히 나를 가르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는 작업에 도움이 되고자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떻게 일관된 하나의 주제가 뚫려나가는지 그것을 위해서 30년간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제 책의 특징이 있다면, 시편 속의 그리스도, 욥 속의 그리스도, 레위기 속의 그리스도, 창세기 속의 그리스도, 출애굽기 속의 그리스도, 그리고 로마서 강해도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책을 냈습니다. 책을 내서 후학들이나 성도들에게 살아있을 동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해왔습니다.

 

그것을 인하여 전통적인 기독교 이천 년 신학과의 차이점이 드러나지요. 이천 년 기독교역사는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교인들에게 무엇을 제공한다는 쪽이라면 제 쪽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셔서 결과적으로 교회가 나타나게 하는 거예요. 발생하는 거예요. 누가 교회 만들고 등록하면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당신도 형제였어요?” 새삼스럽게 만나게 해주시는 그 만남 자체가 이미 존재하는 교회임을 확인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겁니다.
 
 

 

-이제 소개가 됐지요. 요나를 물 속에 집어넣듯이 목사님을 강의 속에 집어넣겠습니다.
 
 

 

기도 잠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한 일이 하나님이 준비된 결과로 나타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제가 할 테마는 출애굽기입니다. 출애굽기는 여기서 선을 하나 그어야 됩니다. 어떻게? ‘출’에다 선을 긋는 거예요. 출-애굽, 애굽에서 탈출한다는 겁니다. 애굽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를 B.C.1440년경, 오늘은 A.D.2014. 2014에 어떤 인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 자기 나름대로 상황을 갖고 있어요. 현재 내가 어렵습니다. 나는 기쁩니다. 방언을 합니다. 나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여러 가지 교회의 사건을 접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거죠. 지금 이걸 하고 있어요.

 

이 인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에고, 한국말로 ‘자아’, 나란 자아가 상황을 유발시키면서 신의 계시/뜻을 알고자 신에게 접촉하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이것 이기주의입니다. 자기중심이거든요. 따라서 저는 이걸 붉은 글씨로 No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내가 신에게 접촉하는 것이 no고, 성경은 기원전 15세기경에 일군의 사람들이 상황을 만들고 신으로부터 나가는 것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출발한 상황 속에 일단의 무리들이 여기에 덮쳐지는 거예요. 이게 Yes입니다.

 

한 개인을 에고, 여기는 집단이지요. 집단이 하나님으로부터 집단적 체험을 할 때 이것이 예스가 되고, 개인적으로 어떤 은혜 해버리면 항상 이기주의로 전락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소개하는 것은, 노가 아니고 예스 쪽을 소개하려고 해요. 이쪽을 소개하면 현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은, ‘나+너=우리’가 되는 것 아닙니다. 이 상황에 의하면 we가 먼저 내려오고 we 속에서 I를 새롭게 발견하는데 이걸 영어로 self라고 이야기해요. 이것을 한국말로 ‘자기’라고 하죠. 에고는 자아.
 
 

이 자기가 오기 전에 자아와 자기가 큰 충돌이 일어나요. 그 충돌의 현장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출애굽기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과 이미 하나님께서 준비한 하나님과의 충돌, 그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는 것이 출애굽기에요.
 
 

이 당시에 일군의 사람들이 아담의 후손이에요. 오늘날 우리도 역시 아담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출애굽 체험이 없는 사람은 나의 상황으로 직접 하나님과 접촉하는 이것이 마치 성령의 체험이요, 하나님의 체험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지요.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은 나의 체험을 신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고 we우리 안에서 너는 뭐냐? 네 역할, 기능이 뭐냐를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옛날 히브리인들이란 아담의 후손들은 여기에 대해서 순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내가 원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모습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그 저항한 것이 아담의 후손의 속성의 표출입니다. 아담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죠. 지금 출애굽은 바로 그 저항성을 이미 우리가 발휘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 하나님이 내가 조작한 하나님인지 아니면 성경을 통해서 직접 나타난 그 하나님인지 만나게 해줘서(만남 자체가 축복이에요) 얼마나 우리는 진실로 주신 하나님의 출애굽 사상에 대해서 극렬하게 저항하고 반항하고 Why me?왜 하필 저에게 이런 일을? 이건 제가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을 제가 원한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잘못 관리하신 거예요. 나보다 못한 인간은 잘 되고, 나한테는 어려움을 주고. 이러시면 하나님께서 혼동하신 것 아니에요? 생명책 명단 보세요. 이렇게 어려움을 주는 것은 제가 원하는 하나님에게는 그런 내용이 없다고 강력하게 저항할 때 하나님께서는 박수를 치시면서 걸려들었어. 가짜 하나님은 사라지고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는 겁니다.

 

일단 공식 하나 제시합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가짜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저항하면서 고백하는 현장에만 진짜 하나님이 나타나요. 좀 극단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죄 짓는 죄 속에만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상현 목사님이 놀라운 발언을 했어요. “주여, 나의 죄가 나를 구원하는군요.” 나의 죄가 나를 구원했습니다. 나는 어질고 고상하고 착한 점잖은 훌륭한 남들보다 뛰어난 나를 받아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영접하는 나를 주께서 영접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저항하게 만들어서(수동적이죠) 저항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을 경험케 하시는 방식으로만 저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왜? 출-애굽이니까.
 
 

이러한 사실은, 사실은 출애굽이 끝날 쯤에나 알아요. 초창기 히브리인들은 정권교체를 원했어요. 애굽에서 벗어나는 걸 원한 것이 아니고 그냥 정권교체, 전처럼 히브리인들에게 우호적인 모습으로 평화롭게 각 종족들이 애굽에서 살기를 원했는데 갑자기 뭔가 바로가 잘못 생각했던지 히브리인들을 집중 공략하면서 그들은 힘들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예전처럼 되게 하옵소서.”
 
 

여기서 ‘예전처럼’이란 말이 제 강의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간의 시간 의식은, 현재란 과거의 누적으로만 이해하게 돼있어요. 미래는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를 뜯어보면 겹겹이 층층이 과거에 있던 체험 중에서 나에게 유리한 것만 편집해서 들어있어요. 역사란 조작이고 편집이거든요. 편집해서 나한테 유리한 내가 얼마나 잘난 존재며, 내가 얼마나 훌륭하게 살아왔는가를 남한테 증명하기 위한 증명 책으로 우리는 좋은 것만 골라서 모아 놓은 겁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서 인간에게 출애굽이란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이란 애굽을 벗어난 경험이 있어서 다시 애굽에 살면서 “이건 아니야. 난 탈출할 거야.”라고 할 때는 출애굽 의지가 생기는데 이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애굽 바깥의 세상을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따라서 그들의 천국을 상상하든, 지옥을 상상하든, 어떤 좋은 것을 상상하든, 나쁜 것을 상상하든 그것은 항상 애굽이란 자기가 체험된 세계보다 더 좋은 것, 더 나쁜 것 그것뿐이에요.

 

살짝 어려워지는데 미안합니다. 이렇게 어렵지 않게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할 수 없어요. 다시 하겠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탈을 하겠다든지 나는 여기서 도저히 못 살겠다고 하는 것은, 그 주장의 전제가 이미 살아봤던 것을 근거로 해서 부정이 되는 거예요. 이것을 살아봤는데 이것 아닌 무엇. 그럼 그게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니고 그건 회피지요. 자칫하면 자살로 이어지지요. 회피지요.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 아닌 곳에 나아가봤자 그건 애굽의 확장입니다. 애굽의 확장이지 절대로 그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출애굽 없습니다. 출애굽은 없고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상상의 세계, 상상일 뿐이죠. 지금 힘든 것보다 더 낫겠지. 자기가 되고자하는 그러한 환상을 따로 꾸미면서 차이 속에서 희망과 꿈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조작한 소망의 세계에요. 이것 출애굽 아닙니다. 착각입니다. 그것을 파헤쳐보면 자기가 경험한 것밖에 없어요.

 

그러면 못 살겠다고 불만해서 나가버리면 그 새로운 세계의 주인공은 못 살겠다고 나가버린 결심이 정당화되는 세계, 철저한 이기주의적 세계지 하늘나라 아닙니다. 그런 나라 가봤자 사실은 자기만을 위한 나라에요. 아무리 기독교적이고 종교적이고 복음적인 것을 온통 때려 넣어도 결국 남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돌아오는 나만 위대해지고 대단한 존재로 부각되고 너무 자기에게 관대한 자기에게 너무 후한 점수를 주는 자기만의 폐쇄적인 세계, 그래놓고 자기는 천국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 다른 세계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나 빼놓고 나 없는 다른 세계를 그려낼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실존적 한계에요.

 

내가 거기에 한 다리 끼어야 비로소 납득이 되지 나를 빼놓고 따로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게 세상의 모든 종교의 한계요 거짓입니다. 그 속에 기독교도 포함돼있어요. 천주교는 물론이고. 천주교, 기독교 다 깨보면 나의 야심과 야망을 천국이란 이름으로 데커레이션, 포장한 겁니다. 물론 이 희망을 갖고 있는 만큼은 마치 마약처럼 고통을 잊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인간은 결국 제자리 뛰기. 침 뱉으면 자기에게 그대로 떨어지지요.

 

이것이 에고, 자아가 만든 상징계입니다. 라캉이 주장했지요. 자아에서 셀프로 넘어가는 브릿지 없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셀프에서 자아로 나가게 하십니다. 어떻게? 출애굽을 통해서. 그래서 기원전 15세기경에 히브리인들은 자기가 도저히 예상 못한 그러한 낯선 세계에 살면서 애굽에서 나온 것이 출애굽이 아니고, 참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이런 것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물을 이렇게 해서 소매를 적셨습니다. 이 사실은 몰랐는데 걸어가니까 자꾸 물이 떨어지는 거예요. 보니까 물이 소매에 있어요. 자기는 홍해 건너서 애굽에서 탈출했다고 생각했는데 애굽이 늘어진 거예요. 자기가 가는 곳이 지리적으로는 애굽을 나왔는데 본인이 애굽에서 만들어진 생산물이에요. 내 에고가, 철저하게 에고야. 아무리 애굽에서 멀어져도 계속 애굽은 오히려 더 확장되는 겁니다. 애굽에서 못 벗어나는 거예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벗어났다고 착각했지요.
 
 

처음에 홍해 갈라지고 애굽 군사들이 바닷가에서 시체로 나올 때 이제 됐다. 심지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할 때는 가로등까지 만들어놨으니 우리는 성공한 거야. 그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어디로 했는가? 물 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정확하게 인도해요. 여러분 교회도 일단 먹을 것, 입을 것 되고 난 뒤에 다니는 거죠. 굶으면서 교회 다닐 일 없습니다. 내가 우선이고 하나님은 뒷전이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도 내가 우선이고 나에게 잘해줄 때 하나님 섬길 용의가 있다는 것이 인간의 근대주체사상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어느 정도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지옥 보내도 내가 지옥 가는 나를 걱정하지 말라고 어깨를 두드리면서 용기를 불어넣어줄 용의가 돼있어요.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윤복희? 아니에요. 그 여러분은 1+1, 나와 너와 모인 we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준비된 we에요.
 
 

애굽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영원히 출애굽은 없습니다. 공식 하나. 어떤 인간도 애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인간에게는 출애굽 없습니다. 아이고, 아쉽다. 큰 일 났습니다. 성경 보고 기도하고 성령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신이시여, 내가 원하는 세계를 펼쳐주옵소서.”라는 에고중심의 사고방식 어떻게 할 거예요? 오늘 주제는 출애굽이 어떻게 관통할 것이냐는 겁니다.

 

뜸들이면 제가 욕 얻어먹으니까 빨리 시급한 대책을 내놔야 되겠습니다. 더 하다가는 정말 큰 일 나겠어요. 출애굽 1장 8절은 누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요셉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일단의 그룹이 있습니다. 이들은 에고입니다. 자기 자아밖에 모르는 자기 생존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사람. 생명, 아닙니다. 생존입니다. 신, 아닙니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거예요. 마아슬루의 심리학에서처럼 생존의 욕구가 가장 기본 욕구에요. 교회 간다고 안 사라집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 소속. 뭔가 소속이 될 때 어떤 기쁨을 느끼고.

 

이런 사람은 에고기 때문에 항상 꿈을 꾸지요. 노동의 대가가 주어지는 세계. 내가 노력한 것에 정확하게 그걸 보상해주는 정의로운 하나님. 내가 노력한 만큼 정확하게 보상을 제때 해주는 그러한 정의의 하나님을 내 중심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내 뜻대로 내 노동의 대가가 안 될 때는 반드시 억울함, 분통터지는 일에 대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기 때문에 반드시 내 편이 되어서 내 힘이 없어 복수 못하는 악한 세대에서 대신 복수해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믿고 견디며 살아가는 자들? 에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완전히 이들을 배제합니다.

 

한국이 북한과 전쟁할 때 해병대 졸병과 대통령과 의논합니까? 총참모총장이나 미군사령관과 의논하지요. 그건 일종에 배제입니다. 졸병, 취사병과 회의합니까? 말이 안 되지요. 배제하지요. 졸병은 시키는 대로 가만있어. 너는 우리가 하는 일에 그냥 얻어먹기만 하면 돼. 이걸 효과, 부대효과라고 합니다. 구원은 효과입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것을 그저 효과 때문에 그 상황 속에 사로잡혀서 구원되는 거예요. 여기서 무엇이 탈락하느냐 하면, 나의 노동의 가치가 탈락해버립니다.

 

세상은 여러분이 노동한 대로 뜻대로 변화되던가요? 이번엔 미국대통령으로 민주당에서 되어라. 그러면 민주당 대통령이 되던가요? 안 되지요. “나의 노동의 대가만큼 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그게 소원입니다.” 하는 것을 하나님은 그게 에고다.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중심의 현실감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출애굽이란 할 때 탈출해야 될 당사자와 의논하지 아니하고 바로 왕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바로 왕이 요셉을 알지 못하다는 겁니다. 요셉은 이미 죽은 사람, 고인이에요. 죽은 사람을 요셉을 모른다고 해서 그 여파로 벌어진 사건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신기하죠. 오즈의 마법사와 비슷하게 정말 신기한데
 
 

당사자와 의논하지 않고 그냥 보내버리고 바로 왕과 직접 이야기하느냐? 요셉은 죽었는데. 여러분, 요셉이 죽었습니까? 맞습니다. 죽었습니다만 요셉언약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 언약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원리에요. 언약의 특징은 뭐냐 하면, 우리에게 나가 놀라는 거예요.

 

그러면 에고는 배제된 자리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셀프를 대동해서 셀프와 하나님과 의논한 결과에 의해서 에고가 구원을 받든지 탈락하든지 결정 나는 겁니다. 그러면 셀프는 어디에 담겨 있느냐? 언약 안에 담겨 있어요.
 
 

옛날 팝송에 하늘에서 신랑이 떨어진다는 노래가 있지요. 할렐루야 하는. 그런 노래 아세요? 언약이 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에요. 얘들은 있어도 괜찮아요. 이것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무에서 출현되는 거예요. 이것이 언약이란 모습으로 떨어집니다. 잡았습니다. 언약이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명령 모습으로 왔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드디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됩니다. 인간은 에고였습니까, 셀프였습니까? 에고였지요. 하나님께서 어떤 지시와 명령이 떨어지니까 에고가 드디어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 고통스럽고 생로병사의 이 세계에서 내가 비록 지금 이 땅에서 힘들게 살았지만 나중에 죽어서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면 주께서 주신 이 언약, 이 약속, 이 지시와 명령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붙잡았습니다. 붙잡는 순간 하늘에서 하나님이 드디어 네가 네 에고성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노출시켰다고 외칩니다.

 

그들은 이걸 지킴으로 말미암아 지킨 나는 구원받고 지키지 못한 사람은 지옥 간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냐? 신명기 28장에 이 말씀을 지킨 자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만약에 못 지킨 사람은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는다고 하니까 과연 그런지 하나님 테스트하고 나를 테스트할 거야. 나는 과연 천국 갈지 지옥 갈지 이 말씀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수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 사람들이 뭘 몰랐느냐 하면, 그게 바로 죄였던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이 이 말씀을 지켰다, 안 지켰다는 판정을 어떻게 내리느냐 하면 본인이 판사가 됐어요. 본인이 결정해요. 본인이 지킨 것 같으면 지켰고, 자기가 어겼다 싶으면 안 지킨 걸로 돼있어요. 이 말씀을 지켰는지, 안 지켰는지 결정하는 요인을 인간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양심 같은 것을 동원하는데 거기에 선악과 요소를 동원하게 돼있어요. 선악과 요소를 동원하는 자체가 에덴동산에 의하면 그 자체가 죄였던 겁니다.

 

그래. 나 오늘 51% 착한 일했어. 나쁜 짓은 49%지. 그러면 밤에 잘 때 51-49=? 어, 남는 장사네요. 2% 착하잖아요. 그러면 오늘 밤에 만약에 죽는다면 우리는 천국에 갈까요, 지옥에 갈까요? 차변, 대변, 당기순이익 2% 남았으니까 천국 가는 거예요. 교회에 만약에 좀 늦게 왔다. 죄진 느낌이거든요. 그런데 헌금시간에 이천 원을 더 보탰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양심이 편해졌어요. 내가 스스로 나쁘다는 것을 스스로 착한 것으로 메웠으니까 여전히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18세기에 칸트라는 철학자가 이야기하기를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반성하는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반성하는 그것이 바로 죄의 극치였습니다. 아무리 천 번, 만 번을 반성해도 에고에서 출애굽되지는 않아요. 그 반성하는 것, 남 좋으라고? 반성하는 나 좋으라고.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점점 더 예뻐지고 점점 더 고마워지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집착으로 이어지게 돼있어요. 남들은 반성하지 않는데 내가 대견스럽게 반성한다? 나는 더욱 더 나에게 고귀한 존재로 탈바꿈 돼가는 겁니다. 그냥 해탈이죠. 빗자루 들고 개미 쓰는 거예요. 주여, 나는 개미 생명을 함부로 밟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기장을 쓰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예를 들었는데 안에 뭔가 다른 게 들어있지요. 여러분 실력을 무시하는 건 아닌데 이것과 이것의 차이점이 뭘까요? 겉으로 보면 차이점이 있습니까? 없지요. 지시하고 명령했다. 율법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명령인데 이 안에 열어젖히면 여기에 셀프가 들어있어요. 이것 들어있었네요.

 

율법이 오면서 율법 담당자, 율법 전문가, 율법을 친히 이룰 분이 율법 안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을 못한 겁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요. 율법은 어떤 누구도 지킬 재주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겉으로는 누구도 못 지킨다. 하지만 율법이 폐하느냐? 아니요. 율법을 오픈하세요. 오픈하시면 이 분이 등장하는 거예요. 오픈할 그냥 여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사람들한테 주먹질을 당하면서 이게 열립니다.

 

 

-지금 다시 설명하셔야 돼요. 못 알아들었을 거예요.
 
 

그래요. 너무 무시하시는 것 아니에요? 겉으로 봐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태어날 때부터 납득하고 있어요. 그래서 피아제의 도덕심리 이론에 의하면 얘들에겐 논리적인 설명이 안 되고, 이것하면 안 돼. 이것하면 잘했어. 상줄 게. 이것밖에 없어요. 선악이니까. 얘들이 무슨 이유를 알겠어요. 때리면 아프니까 안 하고 상주니까 하고. 부모가 갖고 있던 이미 확정된 윤리체제를 어린아이들은 선악과 체제로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대대로 선과 악 윤리도덕이 형성되는 겁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그거에요. 아버지, 어머니의 관계가 자식들이 그대로 그 환경을 물려받아서 자식은 어떤 경우라도 부모가 가르친 윤리도덕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만큼 집안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지만. 선악적이기 때문에 주님께선 그걸 전제로 해서 언약을 줄 때 선악적인 요소로 그 형식으로 하늘에서 툭 떨어졌어요. 그것도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에게만. 주니까 모든 게 하면 복 받고 안 하면 저주받는다고 돼있으니까 오케이, 내가 얼마나 평소에 착하고 절제하고 나를 잘 관리하는지 테스트를 해보자는 겁니다.

 

테스트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테스틀 그냥 하면 기준이 성립되지 않으니까 가상적인 형제와 가상적인 이웃을 여기에 세웁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나는 부모를 공경한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멀리 있는 부모님께 전화하는데 다른 집사님은 한 달에 한 번씩 전화했어요. 나는 저 사람보다 네 배나 부모를 공경한 사람이 됐으니까 이긴 거예요. 그런데 교회에서 보니까 나처럼 일주일에 한 번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명절에 두 번 하는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아는 교회 내에서는 복이 우선 자기한테 온다고 생각했는데 새로 등록한 어떤 아주머니가 하루에 한 번씩 하네. 갑자기 이인자로 밀렸습니다. 만약에 이런 상황에서 하늘의 복을 받게 되면 복이 몽땅 저쪽으로 가게 돼있지요. 왜? 말씀을 지킨 자는 복 받고 말씀 안 지킨 자는 저주를 받으니까. 갑자기 아파트 청약순위처럼 두 번째로 밀리게 되는 겁니다.

 

전화하는 것은 이겼구나. 그렇다면 기도하는 것은? 저분은 새벽기도에서 정확하게 32분 기도했어요. 나는 37분을 기도했어요. 5분 이겼어요. 이 말은 뭐냐? 나의 윤리도덕에 합함은 옳다, 그르다는 주변의 다른 에고와의 경쟁에서 임시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이 에고의 성격이 어디까지 가겠어요? 평생 가도 다 못하지요.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데 그야말로 몸 바쳐서 의료행위하면서 우간다 사람 이백 명을 전도했다. 그래서 유엔에서 상 받고 칭찬받고 간증집회하고 했다. 그런데 웬걸 5년 후배가 우간다보다 더 심한 가나에서 칠백 명을 전도하면서 심지어 그 사람은 멀쩡한 의사인데 수단에서 암에 걸려 돌아가셨네. 자기하고는 게임이 안 돼요. 명함도 못 내. 미치겠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떤 분은 아마존 가서 20년, 30년 선교하시는 분, 어떻게 할 거예요?

 

그게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게임이에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장기판, 바둑판이고 그런 거예요. 새로운 라이벌 일부러 찾아서 꺾는 묘미가 내 삶을 부흥시키는 동기로 작용한 겁니다. 그것이 교회라고 제외되는 게 아니에요. 교회는 에고들의 집합체기 때문에. 우리 교회 교인 25명, 저쪽 교회 교인 450명, 분발해서 부흥하세. 이게 에고의 정확한 발산인 거예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선과 악의 판정을 본인이 내리는데. 그런데 그러한 것을 주께서 중지하지 않고 마음껏 발휘하게 해서 어떤 분이 오셨는데 이분이 말씀하기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 그러면 게임의 룰이 변화가 왔어요.

 

막달라 마리아, 창녀가 울면서 향수를 뿌릴 때 바리새인들이 저 여자는 더러운 여자라고 지적할 때 주님께서는 많이 용서받은 줄 아는 사람이 베스트가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에고를 셀프로 이어주는 다리는 오직 무한한 사랑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의 놀라운 점은 예수님 발에 울면서 향수를 뿌리는 이벤트를 나를 욕하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했다는 것이 무지무지 대단한 거예요. 몰래한 것이 아니고. 그걸 통해서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관계는 다르다. 이것은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끌고나오면서 그들은 애굽의 요소를 계속 쏟아내게 하는 겁니다. 출애굽의 구호가 있어요. 출애굽기나 민수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특징이 있어요. 그것은 애굽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거기서 맛있는 부추도 먹었고 마늘도 먹었는데 정력이 쇠해졌다. 정력 따라 사는 몸에 적합했어요. 애굽에 몸에 적합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시하는 약속의 땅은 자기 몸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전혀 맞지 않아요. 나오는 것은 원망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원망이 나올 때마다 주님께서는 박수를 치는 거예요. 어떻게 되고 있어? 수술 잘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죄가 너를 구원하는 거예요. 죄는 죄로 구원받는 겁니다. 상처는 상처로 구원받는 거예요. 상처받은 자만이 상처받을 때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준비된 구원 줄이에요. 성경지식, 오래하는 기도시간, 방언 터짐, 이것이 구원의 밧줄이 아니라 “내가 이걸 해도 진짜 원하는 소원 안 들어주네, 에이 씨.”라는 말이 나올 때 그것이 바로 접촉되는 인식되는 순간이에요.
 
 

에고의 예수님을 버려야 돼요. 그래야 나도 같이 버려지거든요. 인간은 잘난 자기를 천국 가서 잘나게 해주는 그런 하나님밖에 생각 못해요. 나를 못나게 만들어서 나를 인간도 아닌 것으로 취급해서 주의 날에 합류한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가 없고. 막상 그런 일을 실시하게 되면 우린 당황스럽고 거북해합니다. 동업자인 저를 못나게 만드시냐고 나와요.

 

요셉과 야곱과 아브라함 이 모든 사람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위도 부정당한 사람이에요. 이건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인데요. 어려운 이야기할 때는 제가 항상 물어요.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이 ①자기 아들, 이삭을 바쳐서 구원받았습니까? ②장차올 예수님의 십자가 피 때문에 구원받았다. 몇 번입니까? 요한복음 8장 보세요. 아브라함이 누굴 기다렸습니까? 예수님을 기다렸지요.

 

유사응용문제 또 나갑니다. 엘리야가 제단을 쌓아서 850:1로 붙어서 물을 붓고 해서 엘리야가 구원받았습니까? 아니면 엘리야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구원받았습니다. 정답은 항상 끝에 있어요. 이번이 정답이에요. 정답인 증거를 대야 하잖아요. 그것이 마태복음 17장, 누가복음 9장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한 내용이 나와요. “주님이여, 내 죄 때문에 언제 돌아가십니까?”
 
 

인간을 행위를 하게 되면 그 행위를 잊지 못해요. 도저히 잊지를 못해요. 내가 아들 바쳤다. 내가 십일조를 냈다. 내가 봉사했다, 청소했다. 도저히 잊지를 못하는 것이 내용으로 쌓이게 되면 나의 의가 되는 거예요. 내가 회개를 했다. 회개한 것을 잊지를 못합니다. 회개함으로 점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회개 안 한 것보다 상대적으로 잘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준비된 복은 회개한 나에게 와야 되지 절로 가면 안 돼요. 그러면 내 에고가 화를 냅니다. 에고의 집합, 집단, 그것은 진정한 준비된 교회가 아닙니다. 그건 다 자기 잘난 체의 경쟁마당, 자기가 갖고 있는 솜씨를 발휘하는 마당. 참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몰라요.

 

요셉 안에 들어있는 이 분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이에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가 뭐냐?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에요. 이름 하나 추가했을 뿐이지. 아니지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의 차이는, 이름은 피조물에게만 붙는 게 이름이에요. 창세기 2장에 아담이 피조물에게 이름 붙이듯이 이 말은 이름을 붙이시는 분의 역할을 이 땅에서 대행할 때 이름이에요. 이름을 불이려면 이 땅에서 활동성을 보여줘야 되고, 그분의 이름은 이름 붙여주는 분의 기능을 그대로 수용해야 될 책임을 지고 있는 분이 그 이름이에요.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아버지 하나님이 갖고 있던 이름이니까 지상에만 이름이 있거든요. 지상의 이름에서 다른 이름과 차별 나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능을 온전하게 수행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름의 이름은 소위 인간의 이름과 대결하면서 강제로 질질 끌면서 출애굽시킵니다. 강제로, 억지로.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행위를 발휘하게 되면 다 털어내고 가만있으라고 하면서 가게 하시는 거예요. 사람들이 가만있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요? 뭔가 하고 싶어 하고 답답해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지금 자기한테 주어진 상황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몸부림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지요.

 

중요한 부분이라 천천히 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어떤 과제가 주어지고 그 과제 앞에서 인간을 세우게 될 때 그 과제가 인간이 할 자신이 있다든지 난관을 극복한다든지 뭔가 해야 돼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할 때는 이것은 한 마디로 절망입니다. 사람은 물고기가 아니기 때문에 바다에서 못 살아요. 그런데 갑자기 바다가 있을 때 사람들은 절망을 느낍니다. “신이시여, 너무 하십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그때 신의 응답은 하나밖에 없어요. 뭡니까? 가만있어. 출애굽기 14장 14절 말씀. 가만있으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①가만히 있다. ②반발한다. 몇 번입니까? 반발하게 돼있어요. 그 반발을 주께서는 보고 싶은 거예요. 그 반발을 보면서 그 반발이 출애굽 성향이 아니고 그냥 애굽에 살고 싶은 성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또다시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한 겁니다. 못 사는데 못 살면 뭔가 해야 되는데 그걸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홍해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히브리인들에게 제일 마지막 장면을 보여줬어요. 집집마다 모든 장자를 다 죽이는 작업이 있었어요. 하나님이 약속대로 문설주에 피를 바른 사람한테는 어린양의 피, 약속이 묻어 있지요.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면 피를 보고 넘어간 거예요.

 

북한과 전쟁할 때 해병대 취사병과 이야기합니까, 총사령관과 이야기해요? 취사병은 배제되지요. 하나님이 심판할 때 우리와 의논합니까, 우리를 대신하는 분과 하는 거예요? 어린양이 대신한다면 우리는 빠져야 돼요. 빠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최종심판 앞에 우리가 행한 것이 아무 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 사건이 뭐냐? 피를 바르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어린양 바치면 돈을 번다든지, 어린양 바치면 병이 낫는 그런 사건이 아니고 죽음이에요.

 

그래서 다시 봅시다. 율법 안에 명령 안에 어떤 분이 나오시는데 이분이 죽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에요. 그렇다면 정리해봅시다. 에고에서 셀프로 이동하면서 뭐가 개입된다? 죽음이 개입돼요. 여기 젊은 분들이 많은데 앞에 계시기 때문에 묻는 건데 여러분, 지금 죽음 생각합니까, 죽음 안 합니까? 안 하지요. 감사합니다. 앞당겨 넣어버려요.

 

예수님의 죽음으로써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아시지요. 그럴 때 사람들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나의 행함, 내가 믿었다는 자기 믿음을 믿는 경우가 많은데 분명히 뭘 믿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연루돼야 되거든요. 예수님의 죽음과 연루되면서 에고는 죽음에 섞이고 주님의 셀프/자기도 함께 해서 에고의 죽음을 대신해서 주님의 죽음이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같이 동참한 모든 것이 주님의 몸의 일부로 같이 부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전략이거든요.

 

그런데 젊은 분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생존이 우선이지 죽음은 나중에 늙으면 생각해보겠다고 하거든요. 여기 다른 사람보다 연세가 많은 분이 계신데 지금 죽음을 생각합니까, 하루하루 사는 그게 더 중요합니까?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저 하루하루 몸 편하게 사는 게 최고에요. 죽음은 죽을 때 생각하지 미리 당겨서 생각하는 인간 없어요. 그게 에고에요. 그게 나에요. 부모로부터 죄 속에 태어난 나에요. 그것 버리지 마세요. 여러분이 버리면 그건 반성이 되고 버렸다는 것이 잘난 내가 되거든요.

 

주께서 쓰레기차가 옵니다. 주께서 버릴 수 있게 하는 순간들이 와요. 어떻게? 절망으로서, 모든 것을 다 상실한 순간이 젊은 얘들도 옵니다. 열두 살, 아홉 살도 와요. 일곱 살 때도 그게 옵니다. 엄마, 시험 쳤는데 내가 모르는 게 나왔어. 죽어버릴까? 엄마, 형한테는 장난감 좋은 건 사주고 왜 나한테는 선물 없어. 나 삐졌어. 가출할까? 이거잖아요. 절망이에요.

 

주께서는 절망을 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의 마음, 오직 에고, 나밖에 모르면서 신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정작 내가 중요하다는 그 죄악 된 본성을 절대로 그것까지는 우리는 손대지 않고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해먹는 그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그럴 때 주님의 대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자아가 오히려 실망케 하는 자아로 바뀌지요.

 

내가 집사인데 집을 하나 샀는데 앞집에 새댁이 목욕을 하는데 뚱뚱하면 괜찮은데 너무 잘 빠졌어요. 뒤태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을 강제로 범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이라크 전쟁에 가있는 장군인데 불러서 아내와 동침하라 해도 안 먹히니까 그 사람을 시리아 내전에 보내서 죽게 했습니다. 이것 범죄 맞지요? 이 범죄는 누가 저질렀습니까? 에고, 내가 저질렀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한 응용문제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지어도 누굴 변호한다? 나를 변호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쁜 여자 줬잖아요. 하필 이사를 다른 곳으로 하게 하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잖아요. 뚱뚱하면 저는 마음에 없었는데 다이어트 해서 잘 빠졌습니다. 모든 탓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탓입니다.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제발 제 탓이라고 하지 마세요. 누가 누굴 지킵니까? 에고 에고를 지킵니다. 변명으로 일관하지요.

 

방금 이야기한 게 구약의 다윗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윗을 다그치는 것은 다윗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이미 다윗과 언약 안에 예수님과 창세전에 구원되기로 약속됐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거예요. 에고를 지키는데 에고는 천국 못 갑니다. 에고를 셀프로 바꿔주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예수님 안에 우리, 예수님과 함께 있는 무리 안에 예수 안에 우리를 집어넣기 위해 한 거예요. 그래서 신약성경에 너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다. 너 말고 형제들 많다는 뜻이에요. 너 혼자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어. 그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너뿐만 아니고 다른 사람도 있어. 따라서 천국 가거든 그때 누가누가 높으냐는 그런 것 하지 마. 피로 말미암아 동등하게 균등하게 다 구원받은 거야. 그걸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어떤 남자가 여자를 따라옵니다. 따라오니까 여자가 겁이 나서 도망을 치는 거예요.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데이트 할 시간 없어요.” “그게 아니고 뒤에 자크 열렸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교회 다녔고 성경공부하고 멋지고 남보다 착하고 저 사람은 교회도 안 다니는데 나는 교회에 간다. 맨해튼 교회에. 여기 오는 게 얼마나 착합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아가씨, 당신은 에고를 갖고 있어요. 에고를 예수님의 준비된 셀프로 바꿔야 합니다.” 그걸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곳에 보낸 거예요. 와서 누가 예쁘냐, 잘난 척하다가 그게 아니었던 거예요.

 

다윗이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는 것은 자크 열린 것을 원했던 겁니다. 나의 자랑, 장점들이 아니라 내가 숨기고 싶은 그것을 주께서는 그것을 접촉점으로 해서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도 아니고 예배도 아니고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이라고 지적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통역 잘해야 돼요) 우리가 죄인이라고 고백해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창세전에 구원받은 자에게만 내가 상한 심령이라는 고백이 주님의 압박에 의해서 주님이 조지는 상황에서 터져 나오게 하는 겁니다.

 

그 상황을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광야에서 물 없고, 양식 없는 가운데서 그걸 완전히 노출시킵니다. 우리에게 물을 다오. 주님께서 그렇지. 우리에게 양식 다오. 그렇지. 그게 너희의 본색이야. 우리에게 고기를 다오. 그렇지. 그것이 바로 너희가 애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네 몸으로, 완전히 몸 자체가 애굽의 사람으로 철저하게 만들어졌어요. 그런 사람이 교회에 왔다. 교회나 세상이나 똑같은 거예요. 교회도 세상이고 세상도 세상이고. 서로 소통 잘하고 그럴듯한 행세,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게 돼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만나는 것은 율법이 아니고 율법에서 복음으로 열어줘서 뭘 보게 하는가? 율법 안의 예수님의 떨어지게 돼있는데 예수님이 멀쩡하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피를 흘리며 떨어지게 함으로서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앞으로 내 인생에 몇 차례 절망이 올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죽는 순간이 온다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표를 끊으려고 하는데 앞에서 하지 마세요. 제가 이미 다 값을 다 지불했습니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성령의 마지막 열매는 다른 게 아니에요. 감사하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탱큐.
 
 

문제 나갑니다. 고마워하면 인간될까요, 인간 안 될까요? 고마워했으니까 인간됐다. 고마워해도 인간 안 된다. 몇 번입니까? 고마워해도 인간 안 됩니다. 끝까지 인간되지 마세요. 끝까지 에고 주장하세요. 만약에 여러분이 에고를 버렸다고 착각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죽을 때까지 여러분의 이기주의는 그리고 돈 사랑은 절대로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유지될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오직 천국 갈 때까지 예수님 때문에 갔다고 이야기해야지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나의 멋진 결단력으로 갔다는 소리하게 되면 그게 마귀의 시험이에요. 교회를 오십 년 다녔느니 목사인데 신학을 몇 년 했니 책을 몇 권 냈느니 그거는 전혀 우리의 구원에 도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막 사세요. 성깔대로 사시고 성질대로 사세요. 땡큐 나왔습니다. 다른 곳은 아멘 하는데 여기는 땡큐 나왔습니다. 막 사세요. 그리고 느끼세요. 절대로 주께서는 나를 막 살도록 방치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수동적 인간이에요. 뭔가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의 창세전에 예정하신 그분이 나와 함께 동행함을 더욱 더 나를 죄인 되게 만드는 작업을 통해서 오직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께만 감사하는 그 마음으로 살게 하시는 그 작업, 그것이 바로 출애굽의 작업이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노래가 있어요. 노사연의 <님 그림자>라고 있습니다. 가사에 달이 떴는데 님은 저만치 가고 자기는 그 님의 그림자를 밟아가는 거예요. 현대 젊은 사람들 님이 없어요. 경쟁 대상밖에 없어요. 사랑의 대상이 없습니다. 저분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게 없어요.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칭찬받기 위해서. 칭찬받으면 인정받고 인정받으면 돈 생기고. 그런 식으로 어릴 때부터 훈련받았습니다. 수학성적, 생물, 영어, 모든 게 주변의 기대감을 충족하기 위해서 우리는 애썼어요. 특히 음악 하는 사람들 콩쿨.
 
 

아버지의 귀신이 뒤집어쓴 거예요. 그것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의 사상을 그대로 강요했고 우리는 얻어맞지 않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그것이 선인 줄 알았고 아버지가 원하는 게 출세였다면 아버지의 목표를 만족할 때 이미 아버지는 고인이 되어서 따뜻한 양지 밭에 묻혀 있으니까 소주와 마른 오징어 들고 가서, “아버지, 제가 왔나이다. 그토록 바라시던 판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야, 인사해. 그토록 날 사랑하시던 아버지야. 아버지 제 여자친구 여기 왔습니다. 제가 손자 보면 다시 와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동안 노예 생활한 거예요. 정신적 노예를. 아버지 말 들어야 유산 생기고. 아버지 말 들어야 용돈 생기고, 아버지 말 들어야 공납금이 생겨요. 아버지를 사랑한 적 없어요. 인간은 에고, 에고는 나만 사랑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은 나의 이용물이에요. 그 이용물 중에 하나님이 끼어있어요. 하나님은 뭘 원한다? 헌금과 기도를 원하는 거예요. 기도해주고 줄 건 주고 정작 받아 챙길 건 챙기겠다는 흥정하는 심보, 장사하는 심보, 누굴 위해서? 셀프가 아니고 에고를 위해서.

 

그럼 셀프는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율법에 둘러싸여서 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셀프가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선악과기 때문에 에고로 작용하지 셀프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나 잘난 쪽으로만 살게 돼있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인간을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에 죄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다) 나를 죄인으로 만들게 하는 그 작업이 나를 구원하는 프로세스고 과정이었던 겁니다. 나의 죄가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 죄가 바로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졌기에 주님으로 인하여 날마다 우리의 죄가 생산되는 겁니다. 내 몸은 죄를 생산하는 기계고 공정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오해할 소지가 많아요. 제가 이 정도 이야기하면 반박 들어옵니다. “목사님, 성경에서는 바르고 하나님 형상을 본받으라고 했는데 목사님 이론이 아무리 기묘해도 성경과 다르지 않습니까? 성경과 다르니까 당신 이론이 멋져도 그건 성경과 어긋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반박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그것에 대한 답변을 해드리겠습니다. 예배 마치고 형제간에 모여서 어려운 고아원, 노인들에게 봉사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아직 선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예배드리는 착함도 했고 끝나고 난 뒤에 고아원을 방문하는 착함, 플러스 백점이에요. 착함에다 또 착함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교회 와서 십자가 피 앞에 설 때에 내 구원문제, 영생문제를 해결했기에 내 죄를 지적하시는 거거든요. 다른 사람은 지적 안 하는 이유가 이미 구원받은 자에게만 골라서 지적해요.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다시 살리는 이것이라.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오는 말씀이란 말이죠.

 

그렇다면 옛날에는 착한 일하는 주체도 나였는데 그때부터 뭐냐 하면, 과연 고아원 방문하는 것이 착한 일인가? 나의 죄를 끄집어내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고아원 방문하고 난 뒤에 돌아서니 왜 그렇게 마음이 흐뭇한지 착하지 못해 도를 닦는구먼. 내가 그 귀한 돈을 교회 나오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다니. 아차. 이것이 바로 미처 내가 몰랐던 깊은 바닥에 있는 자기 의라는 것은 고아원 방문이란 계기를 통해서 다시 한 번 드러내는 겁니다.

 

 

-중요한 것이라서 다시 한 번 해주시겠어요?

 

제가 잊어버렸어요. 중요한 건 다시 반복할 테니까.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전에는 착하다고 여겼다는 것이 나중에 새롭게 주께서 어떤 계기를 만들어주니까 그 착하다고 여긴 것이 악의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럼 고아원 방문하지 말까요? 하세요. 하시고 가세요. 가시고 내 죄를 내 앞에 두세요. 그때 고아원 방문 안 했으면 얼마나 자랑질했을까? 이것을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죄가 나를 구원한 거예요.

 

 

내가 아는 죄는 그건 죄가 아니고 주께서 발굴해주시는 죄, 그 죄는 헌금하는 죄, 기도하는 죄, 사십 년 전도하는 죄, 저처럼 강의하는 죄, 설교하는 죄, 개척교회 열 군데 하는 죄, 그리고 순교하는 죄.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의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해도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게 하시는 그 작업 주께서는 멈추지 않고 자기 백성에게만 그런 혜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런 작업에 참여시키는 겁니다.

 

 

-전적 타락 개념인가요?
 
 

타락 개념은 그건 신학에서 고안한 개념이고 성경에서 나오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에 제가 뭐라 설명할 수 없어요. 신학 개념의 타락은 전제가 뭐냐 하면, 회복된다는 걸 연결시켜서 타락을 했기 때문에 그 타락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것을 믿으시면 당신은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건 하나님의 구원방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를 알지 못해요. 에고적 차원에서 죄는 한계가 있어요. 나이 구십이 될 때 지은 죄를 알아서 백 살까지 살다 죽은 사람에 비하면 모자라요. 사람이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가 안 만큼 살았던 환경만큼만 세상을 평가하게 돼있지 규정하게 돼있기 때문에 온 세계 모두를 아는 그런 입장에서 나는 과연 죄냐를 판정내릴 수 없습니다.

 

아담 스미스란 경제학자가 이런 말을 했거든요. 치과의사는 이기적으로 자기 돈 벌기 위해서 치과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를 봐서는 공익이 된다. 그게 보이지 않는 손, 시장에서 이상한 원리에요. 각자는 모두 이기주의인데 전체를 봐서는 이빨 아플 때 얼른 가서 도움 받는 공익적인 혜택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것을 수용하세요. 하지만 그것을 이기주의기 때문에 죄라고 하시면 안 돼요. 죄는 몰라요.

 

죄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죄가 확정됩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 죄를 아담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어요. 사람이 뭔가 경험한 걸 지시해야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휘할 수 있는데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 할 때 아담과 하와는 죽어본 적도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건 아이큐가 필요한 대목인데 그래도 중요하니까 해야 되겠어요. 다섯 살 먹은 유치원 아이한테 너, 숙제해. 숙제 안 해? 돋보기 씌운다. 얘가 돋보기 써 본적 없잖아요. 너, 자꾸 그런 일하면 고혈압 약 안 준다. 이게 해당이 안 되잖아요. 만약에 걔가 돋보기 쓴 경험을 한다면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자유의지로 선도 행할 수 있고 악도 행할 수 있게 되는데 전혀 경험하지 않은 걸 벌로 내세우면 이건 인간의 자유의지 자체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아울러 이야기한 바가 되는 겁니다.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죠.

 

죽는다는 것은 아담이 죽어도 죽음을 몰라요. 죽음은 누가 아느냐? 십자가에서 죽음이 제대로 예수님만 죽음을 알고 있어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참 그 십자가의 비밀이에요. 우리는 몰라요. 버림받았던 그것을 주님만 아시고 우린 졸병입니다. 취사병이고. 구원문제는 아버지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부대효과를 받아서. 백날 내 뜻대로 안 되네요. 저만 경험한 겁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뜻대로 되던가요. 특히 복음 알라고 해도 자식 마음대로 안 되지요.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게 창세전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구원되시거든 내가 구원받고자 노력했기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구원에 관심도 없고 내가 생각한 구원은 에고의 구원이었는데 주의 뜻대로 셀프의구원이 되었다고 천국 가서 면류관을 주 앞에 반납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구원을 제쳐주시는 고마움, 내가 상상한 것을 이뤄지게 않게 하시는 그 고마움.

 

그러면 목사님, 그렇게 됐다, 안 됐다는 것을 어떻게 판정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에게만 감사할 때 나의 행함은 아무것도 내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을 때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그래서 하세요. 하시고 어차피 우리가 하는 것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에고니까 기억할 거예요. 기억하면서 우리는 자랑질을 하겠지요.
 
 

어떤 식으로 자랑질하는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오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절대로 내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입니다. 오직 성령께서 인도했습니다. 하나님 영광 받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도 멋들어진 기도를 내가 이런 기도를 제작하다니 내가 이만큼 신앙이 자라났어?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볼 때 상대적인 어떤 승리감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에고적인 것이 절대로 고쳐지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것마저 했음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노렸던 뜻이 있었어요. 주여, 이 정도로 내가 괜찮게 신앙생활 하니까 정작 아버지 제가 원하는 걸 아시지요. 결혼문제, 준비된 게 있을 거예요.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오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흥정에 나섭니다.

 

출애굽에서 어린양의 피가 인간의 의식 속에, 인간의 시간의식은 과거-현재-미래입니다. 현재가 되면 과거는 날아가 버리죠. 현재가 되면 미래는 날아가 버립니다. 한 번 피 발랐다. 그러면 우리는 잊어버렸어요. 요단 강 건넜다. 신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거의 에피소드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 장군이 1592년에 그렇게 해도 나와 상관없어요. 왜? 나는 2014년이니까. 참 훌륭하셨습니다. 박수쳐줄 수는 있어도 그건 남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시간이 그것밖에 안 되는 줄 알고 어린양의 죽음을 제사라는 법을 통해서 매일같이 동행하면서 반복케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이렇게 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러분,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할 때 십자가 사건은 십오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맞지요?

 

그런데 십자가 사건 그 당시에 사도 바울은 다소라는 다른 동네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과학적으로 확인 안 되는 소리를 사도 바울이 내뱉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예수님과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구라, 거짓말이잖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요? 십자가가 가로 몇 센티인데요? 이게 보입니까? 여러분, 성경이 쉽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사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합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니. 너희 눈에만 보여.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우리는 과학적, 논리적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할 거예요.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증거를 눈에 보기를 원하거든요.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 했는데 우리는 자꾸 보는 것을 통해서 어떤 실적과 업적을 통해서 복 받았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하는 에고적인 우리 몸의 본성적인 것을 발휘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걸 비껴가는 겁니다.

 

뭐냐? 신앙에 실패하라는 거죠. 실패하면 안 되잖아요? 실패해보라. 실패한 자리에 네가 미처 신앙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너의 신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게 뭐냐 하면, 작은 일에 그리고 실패 자체가 감사로 느껴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에게 너무 심한 부담을 줘서 미안합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고 내가 신앙인 것을 확정하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했는데 그걸 비껴버릴 때 우리는 어떤 실패를 느낍니다. 실패를 느끼면서 해는 그대로 뜨고 파도는 칩니다. 1962년에 나온 유명한 팝송에 이런 게 있어요. why does the sun go on shining 나는 사랑을 잃었는데 태양은 왜 빛나고 있느냐 말이죠. 내가 여자와 헤어지면 해가 시커멓든지 안 떠야 되잖아요. 도대체 세상은 누구 중심이냐는 겁니다. 내 남자친구 만나는 중심이냐? 아니요. 내가 취직해서 안정된 자리를 확보하는 중심입니까? 아니죠.

 

그럼 세상은 무슨 중심입니까? 죄인을 의인 되게 하는 언약이 중심입니다. 못 먹고 못 살아도 구원받았으면 영생 얻었으면 주께로 받을 것 다 받아 챙겼어요. 그러면 더 달라고 기도하지 말까요? 아니요. 하세요. 왜? 우리 에고는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그것을 그대로 노출시키세요. 주님께서는 한 때 죄인인 것을 의인 만드는 게 아니고 늘 죄인인 자를 의인으로 만드는 겁니다. 한 때 죄인으로 예수 믿었습니까? 이제는 착한 일하세요. 그것 아닙니다. 그 착한 일이 내가 의라고 여겼던 색다른 죄로 진화된 거예요. 어떤 겸손을 위장한 교만이에요.

 

새로운 상황이 오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악마로 돌변합니다. “하나님, 나는 맹세하겠습니다. 이제 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해도 오년 뒤에 이백만 원 뇌물 생기면 우리는 전에 약속한 것이 있어서 밀어냅니다. 저는 오년 전에 돈을 사랑하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업자가 천만 원 냅니다. 아닙니다. 저는 약속했습니다. 업자가 이십육억 오천육백만원 줍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동안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은 대가로 목돈으로 적립되어 드디어 주께서 축복으로 주시는군요. 날름 받아버립니다.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을 때마다 적립된 게 뭐냐 하면, “주여, 보시옵소서. 돈을 사랑하지 않음으로 이 보상이 큰 목돈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라는 간절한 자기 행동이었지요.

 

여러분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 막 사세요. 막 사시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돈 받아 챙길 때마다 돌려주지 마세요. 받으면서 몰랐던 죄가 발각되면서 십자가가 같이 동반해서 보일 때 이미 나는 예수 안에서 오늘밤 죽어도 천국 가도록 확정되었기에 이러한 놀라운 사태가 우리에게 찾아온 걸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편하게 살면 된 일을 그저 내 몸대로 살면 될 일을 우리는 뭔가 조작을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아닌 것처럼 했고 주님을 이용하면서 주님을 사랑한 척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주님의 십자가 드러내고 하나님 은혜를 아는 좋은 재료가 되었사오니 죽을 때까지 주께서 원하시는 죄인이라는 재료로 남게 하옵소서. 그래서 죽을 때 오직 십자가 피로만 용서받았다는 것을 그 은혜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감사합니다. 목사님. 시간이 좀 남았는데요. 오늘 들은 것은(질문할 게 많을 거예요) 현대기독교의 허를 찌르신 거죠. 그래서 누구든지 오늘 들은 것 중에서 이런 것이라고 sentence(?)를 알려주세요. 누구든지. 목사님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살라는 게 아니라 사실은 그렇게 사는 현대교회를 고발하신 거예요. 사실은 현대교회는 예쁘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하죠.
 
 

위장하죠.
 
 

 

-나중에 복을 많이 주시겠지 하는 그런 흥정 같은 걸 굉장히 selfish하게
 
그저. 오늘 말씀하신 중에 있죠.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 또요?

 

끝까지 유지하세요.
 
 

 

-그 부분에 대해서 저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서는 지금 말씀하신 것과 상충 것과 같은 부분이 있거든요. 그 부분은 아마 다음 섹션이나 전체적으로 해주셔야 되는 게
 
 

아닌데 간단하게 지금 답변됩니다.
 
 

 

-이런 거죠. 목사님은 누가복음부터 하신 거예요. 출발점이 성경의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이 갖는 개념으로 시작하신 거예요. 여기서 말씀하신 에고라는 게 성경에서 셀프죠. 그런데 셀프는 예수 안의 개념으로 만들어내신 거죠. 사실 혼선을 빗을 수가 있습니다.
 
 

제가 간단히 답변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분을 품되 해지도록 품지 말라고 하지요.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지 보세요. 십자가에서 나왔지요. 아까 통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지요. 십자가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지요. 그러면 이건 율법적 기능이라 하는데 이것은 죄를 더 죄 되게 하는 기능이에요. 로마서 3장에. 해를 품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분을 품되 시계 보는 거예요. 해질 때 언제인가.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을 취하라 한다면, 술 몇 잔 먹어야 비로소 취함과 취하지 않음의 경계선을 따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품고 있던 새로운 죄를 발견하는 계기로서 주님께서는 여전히 율법적 기능으로 사도 바울의 권면과 명령이 우리에게 유효한 겁니다.

 

 

-자기 부인이 혼의 부인과는 다릅니까?
 
 

혼이란 헬라적 철학에서 나온 개념인데 히브리적 사고에서는 혼과 영이라 하는 건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돼있습니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과 관계가 이어지면 영이고 하나님과 끊어진 것을 육이라 합니다.

 

 

-이건 설명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헬라어나 히브리어나 영, 혼, 육이 있지요.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단스러워지는 거죠.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은 유대개념이에요. 유대개념은 통합하는 사상, 하나로 보는 거예요. 헬라개념은 분석하는 거예요. 목사님 사고방식은 완전히 유대개념의 무반복을 쓰세요. 조금 아까 지나간 것을 repeat하라고 하시니까 못 하시는 거예요. 그게 무반복에서 나온 설교세요. 너무 설명 잘한 것 같아요. 또요. 다음 강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구원이란 전적으로 we에서 내려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이 저희를 덮으시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경험 없이 교회 나와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은 주님이 주신 은혜라는 것에 이미 덮여져 있습니다. 코끼리, 코스모스도 이미 예수님의 은혜가 삽입된 채 코스모스와 참새와 들풀도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키가 자라는 것이 성장판 훈련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은혜로 이만큼 자랐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받은 주님의 은혜는 생각 안 하고 그건 기본으로 생각하고 서로를 비교하면서 욕심을 낸 거죠. 그래서 어떤 누구도 핑계치 못합니다. 나중에 죽어 보니까 주께서 은혜를 주셨구나. 햇빛과 공기주시고 악인과 선인과 가리지 않고 은혜를 주신 거예요.

 

 

-저는 주님이 해설해주시는 것 같아요. 목사님은 설교의 시작을 사람으로 시작해요. 누가복음처럼. 사람이 아는 바로는 이런 예수다. 우리가 만든 에고가 만든 예수라는 거죠. 그런데 마지막에 어느 순간에 뭘 말씀하시느냐 하면, 모든 구원은 주님께 예정이 됐고 준비된 대로 되는 것이라는 거예요. 이게 확 바뀌거든요. 제가 제동을 거는 것은, 이 바뀌는 순서가 너무 빠르시다는 거죠. 거기서 필름이 끊어지는 거예요.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니까.

 

 

-오늘 큰 명제인데 지금 자매님이 중요한 말씀하셨어요. 목사님이 말씀하신 또 하나 포인트가 뭐냐 하면, 주님이 됐기 때문에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노력한 것 때문이 아니라는 그걸 흥정이라고 하죠. 오늘 너무 감사해요. 세 분이 우리 쪽에서의 반성에 대한 말씀을 잘해주셨고 자매는

 

그러니까 주님께 완전히 달려있다는 걸 들고 가신 거죠. 그리고 장로님께서는 미들필드시거든요. 성경 개념의 자아란 목사님 말씀하신 자아라는 것이 설명이, 사실은 에고가 자아죠. 너무 감사합니다. 목사님은 인터넷 보시고 수요일은 뉴저지
 관리자(IP:203.♡.42.222) 14-11-05 22:04 
20141002 미국뉴욕교회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욥기 하겠습니다. 욥기 1장 6~8절까지 제가 읽습니다. 구약성경 761페이지.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아멘.
 
 

복음이란 것은 죄인을 예수님의 희생으로 용서하시는 겁니다. 죄를 용서할 때 죄를 용서할 만한 죄는 예수님이 대신 희생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해서 복음이란 자기 죄에 대해서 자기가 뭔가 관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희생하심이 나의 온전한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을 받아들이신다면 장담합니다. 오늘밤에 낙원 갑니다. 돌아가셔도. 이게 기쁜 소식이라 해서 복음이라는 거예요. 인간이 나에 대해서 하지 않아야 될 이유가 욥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내 구원에 어떤 것도 관여하지 않아야 될 이유는, 내 몸이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몸이지 내 영광을 위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몸이라면 예수님의 처분에 맡겨주시면 되는데 예수님의 처분이 나에게 어떻게 오느냐 하면, 예수님 홀로 희생하시고 고생하시고 애쓰심이 우리를 완전히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듯이 온 전체에 예수님의 희생하심이 범벅이 되고 넘쳐흐를 때 그때 가장 예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주장하는 근거가 있어요. 로마서 3장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머리 좋은 사람은 감이 옵니다. 잘 들어보세요. 죄 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는구나. 그보다 머리가 더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죄만 없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네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죄가 있으면 영광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죄가 없으면 영광이 됩니다. 그렇다면 죄를 없애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 다른 건 일체 생각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죄만 없애는 작업만 하셨겠네요.”라고 하신다면 아이큐가 한 150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인간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었습니다. 그 다음 우리 생각이, 죄만 없애면 영광되겠네. 오케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일을 하실 때 자기 영광을 포기할 일은 없잖아요. 그러면 자기 영광을 위해 하실 일은 뭐냐 하면, 죄 없애는 일만 하십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일번으로 옮겨가요. 죄가 없으매 자동적으로 영광이 되는 겁니다. 전혀 복음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죄가 있으면 영광이 안 된다. 이건 알아요. 자기 죄를 해결 못하니까 다른 열심을 가지고 영광 돌리려는 다른 루트, 통로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의 원래 의도, 죄만 없으면 영광 되는데 이건 뒷길로 돌은 거예요.
 
 

사업자가 건축사에게 설계도대로 잘 지으면 건축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건축가가 실력이 없어요. 그래서 발주한 사람에게 뇌물주면서 좀 부실해도 봐주세요. 실력 없는 것 눈감아주시면 황금덩어리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주문자가 나의 관심은 이 집에 제대로 잘 지었는가에 있는데 당신은 다른 방식으로 열심 내고 뇌물 바쳐서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데 애당초 나는 당신에게 그런 것 요구하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집 지어내세요. 이러면 당신은 나와 거래 못합니다. 그러면 이쪽에서 사람이 왜 융통성이 없어요?

 

여러분, 하나님은 융통성이란 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만 있으면 저주하고 죄 없으면 무조건 영생에 넣어주시는 전혀 융통성이 없으신 분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 지부터 압시다. 하나님, 저 예쁘지요? 귀요미, 어떠니. 죄가 없으면 귀요미고, 죄가 있으면 마귀가 되는 거예요.

 

이 성경을 어떻게 다 압니까? 이 두꺼운 걸 어느 세월에 신학교 갈 것도 아니고 어떻게 다 알겠어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립니다. 죄가 있으면 영광 아니고 죄 없으면 영광입니다.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가난합니다. 영광입니까, 영광 아닙니까? 가난해도 상관없어요. 그러면 내가 몸이 약합니다. 영광입니까, 영광 아닙니까? 몸이 약해도 괜찮아요. 죄만 없으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제가 열심히 노력해서 죄 없애겠습니다. 주님께서 부릅니다. 그 죄 없애는 방법은 하나님이 따로 준비했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이타이 풀어서 이태리타월로 문지른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고 내가 착한 일 많이 한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가 없으면 영광이 되는데 없애는 방법도 이미 하나님께서 따로 준비했어요.

 

세 살 먹은 소녀가 엄마 손님들 오니까 엄마 도와주겠는 가상한 마음으로 잡채도 만들고 탕수육도 해봅니다. 엄마가 보니까 이건 엉망이에요. “엄마, 내가 정성을 다하여 성의를 다하여 열심을 다하여 했으니 제 성의를 받아서 어머니의 영광이 되시옵소서.” 엄마는 쓰레기통에 그대로 넣습니다.

 

너는 죄 짓는 방법에서 따로 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지 마라. 죄 짓는 방법조차 내가 준비한 방법을 그대로 받으시면 그것이 영광이에요. 따라서 키르케고르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기의 정성을 드리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사람이라고. 19세기에 유명한 기독교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이 주시는 방식, 십자가 외에 다른 방식으로 영광을 돌리면 그거는 주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마귀의 장난이니까 주께 영광이 안 되는 겁니다.

 

제가 초반에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하나님 섬기는데 너무 부담 갖지 마시라고 이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야말로 실질적으로 기쁜 소식이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영광 받는 방식을 주께서 친히 준비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친히 예수 그리스도 자기 몸을 드리사 화목제물로 드림으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 경건치 않은 자, 이런 자까지 자신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도 의롭고 본인도 의롭고.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없는 이야기 기쁜 소식 지어내려고 일부러 만든 게 아닙니다.

 

정리합시다. 일 아홉 시에 마치고 오셔서 힘드신데 그 다음에 정리할 몫은 제가 해야 되니까 할 수 없어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1.하나님의 영광은 죄 없으면 된다. 2.그 방식도 하나님이 준비했으니까 받아 챙기면 된다. 강의 끝낼까요? 아닙니다. 그 다음 문제입니다.

 

당신 주장이 맞는다면 성경에 창세기도 필요 없고 데살로니가도 필요 없고 당신이 말한 로마서 3장, 5장 달랑 두 장만 있는데 욥기는 왜 있느냐?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질문이에요. 저는 그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출애굽기 왜 있고 민수기 왜 있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과 같은 거예요. 아까 식당에서 목사님이 뉴욕모임에 초신자를 위해서 살살 하시라고 하셨는데 아무리 초신자라도 창세기 다음에 출애굽기 있다는 그건 아시죠. 그 출애굽기에(이건 안 믿는 사람도 아는데) 십계명 있다는 걸 아시죠.

 

이야기 다시 합니다. 하나님이 죄 없으면 기뻐하시고 죄 용서하는 방법도 친히 준비했기 때문에 따로 준비할 것 없다. 그것 알면 영광이다. 그러면 십계명은 왜 있습니까? 이근호, 당신 말이 옳다면 출애굽기 20장에 십계명이 왜 있느냐 말이죠. 그것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것과 욥과 관련돼있어 그래요.
 
 

이건 여러 번 해도 참 기쁜 소식이라서 씁니다. 죄가 없으면 영광이 된다. 죄가 없어야 영광이 되기 때문에 죄는 필히 등장해야 됩니다. 죄가 필히 등장해서 그 죄가 사라져야 영광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병 주고 약줍니다. 병 주고 약 줘야 약사와 의사가 먹고 살아요. 죄를 발생시켜놓고 죄를 없애는 방법에 하나님이 친히 투입해서 영광을 홀로 다 받으시거든요. 죄를 만드는 방법은 우리가 나가서 칼 들고 설치는 게 아니고 법이 있어야 돼요. 법이 있는 곳에 필히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이 법이에요. 십계명이 왜 있느냐? 법이 있는 곳에 죄가 있고 그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있고 그 저주가 지상에서 구체적인 방법은 죽음입니다.

 

우리교회는 이처럼 좋은 예배당이 아니고 허름한 상가거든요. 예배드리고 있는 중에 가스배달 오고, 뒤에 수도 검침합니다. 저는 그걸 보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 사람이 분명히 우리교회에 왔는데 자기는 자기 생존하는 일만 신경 쓰기 때문에 마이크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들을 수가 없어요. 검침하면서 제 설교를 듣는지는 모르겠는데 무리한 요구겠지요. 어쨌든 검침을 해요. 검침하면 그 사람 밥 먹고 살고 가스배달하면 밥 먹고 삽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자기 죄를 압니까? 죄를 모르지요. 문제는 그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에요. 지금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깨나지 않고 있어요. 돈 수십조 원이 넘잖아요. 그런데 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죽는데. 죽는 거야 다 죽지. 죽는 이유를 모르는데요? 가스배달하고 수도 검침할 때 지금 강단에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죽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죽는 이유 안다고 가스배달하지 말까요? 아니에요. 우리는 밥 먹고 살아야 됩니다. 이왕 죽는 것, 죽는 이유나 알고 죽읍시다. 우리 아버지, 우리 할아버지 돌아가셨습니다. 남의 이야기 아닙니다. 그 다음에 누구 차례인지 모르겠어요. 죽음엔 순서가 없으니까.

 

그러나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간다. 이 말은 병 주고 약 주는 겁니다. 강도, 살리지 않았습니다. 강도를 강도짓해서 죽이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에요. 그 죽은 강도를 살리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놓고 누가 영광 받느냐? 주님이 영광 받는 겁니다. 내 죄 효과 만점이네. 강도도 천국 가잖아. 세리도 천국 가잖아. 창기도 천국 가잖아. 봐라. 내 솜씨 봤지. 어떤 죄도 용서받는 것 봤지. 그 이야기를 설교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검침 옵니다. 가스배달와요. 그리고 삼성그룹을 위해 너무 과로했는지 지금 혼수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어디서 영광이 오는지 그 영광의 구체적인 방법은 죄 씻음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심지어 죄 씻는 방식은 따로 이미 주님께서 피로써 다 해결했다는 화목제물로 해결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오늘도 살아야지. 살기는 뭘 살아요? 결국 죽는데. 평생토록 최선을 다해서 다 살아왔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정말 사는 것, 영생은 어떻게 살까요? 영생은 내가 만들었습니까? 주께서 영광 받으시려고 만들었다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마지막 죽을 때 십자가 피만 외쳐야 돼요. 주께서 친히 준비한 것을 외쳐야 돼요.

 

참 이민 올 때 기막힌 사연들 갖고 왔잖아요. 어떻게 다 말할 수 없지요. 고생 무지무지하게 했지요. 하지만 고생하면 구원받습니까, 최선 다하면 영생 얻습니까? 영광이 안 되는데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할까요? 영광이란 죄가 없어야 돼요. 그러면 뉴욕에 이민 오면 죄가 없어집니까? 안 돼요.

 

율법을 준 것은 인간이 지킬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하게 함이라. 모든 사람의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따라서 내가 죽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죄 진 자가 저주받는 것이 아버지께 영광이라면 아버지여 그렇게 조치하시옵소서. 그게 주의 법에 합당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저 뒤에 검침하러 오신 분, 당신 죽습니다. 하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아직 젊은 사람에게 죽는다는 말하지 말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고 우리는 그 영광을 위하여 주어진 겁니다. 일단 이것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죄를 만들어내기 법을 주셨다는 겁니다. 북 치고 장구 치고 다하셔요. 그렇다면 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죄 안 짓게 하면 어떻습니까? 법이 안 줬으면 우리가 죄인 안 될 건데 그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심으로 예수님이 주가 됨으로써 영광이 되는 거예요. 지금 제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잖아요. 일부러 병 주고 약 주는 거예요. 일부러 병 줘서 병자로 하여금 약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도록 병부터 주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물어보지도 않아요. 죄 줘놓고 죄 씻어주고 모든 영광은 오직 주님만 받으면서 천국 갈 때 면류관도 반납시키는 겁니다. 천국 가서 면류관 던지기 바빠요. 제가 쓰는 건 합당치 않습니다. 주께서 쓰셔야 됩니다. 그것을 지금부터 시작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피아노 반주하는데 “집사님, 피아노 반주합니다.” 하면 피아노 반주하다 면류관 던져버리고. “집사님, 꽃꽂이.” 꽃꽂이하는 면류관을 던져버려요. “목사님, 설교도 잘하시고.” 설교 집어던져. 모든 영광은 나같이 반주하면서 지 자랑하는 이런 죄를 십자가 피로 용서하신 그 피 흘리신 그것으로 인하여 그 방법으로 영광 받는 거예요.

 

지금까지 서론입니다. 욥은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법이 있음으로 죄가 있고 이 죄를 씻어줌으로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법이 있다는 것은 출애굽기고 민수기입니다. 그래서 이 노선을 언약노선, 율법언약,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가 드러나게 되면 다윗 한 사람이 받은 용서로 수하에 있는 모든 백성이 공짜로 구원 얻는 다윗언약으로 책임이 이전됩니다.

 

문제는 구약에서 이 노선만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 노선만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떤 노선이 있느냐 하면, 이 법 안에 누가 들어있으면, 법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려주는 노선이 있어요. 그 노선이 욥입니다. 어렵지요.

 

죄 짓기 전에 인간은 무엇 때문에 생겨나야 하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욥기 1장 6절에 보면,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이 안에 인간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 없지요. 천사와(사단도 천사니까) 하나님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란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은 왜 있는지 거론함으로서 죄 짓기 이전에 인간이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 밝혀집니다. 인간의 원형. 하나님 계시고 천사 있으면 그걸로 족하지 인간은 왜 있느냐 이 말이죠. 하나님이 천사로 충분히 영광 받으실 수 있는데 인간은 왜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을 알려면 살짝 컨닝을 해야 돼요. 인간이 빠진 상태에서 뭐라고 하느냐고 봐야 됩니다. 오늘 같은 선선한 가을에 부부가 저녁에 퇴근하고 만나서 “여보, 당신과 이야기할 게 있어.” 철없는 얘가, “아빠, 무슨 이야기인데?” “너는 네 방으로 가. 엄마와 이야기할 거야.” 그러면 얘들이 더 궁금해요. 얘는 문 열고 본다고요. 컨닝하는 거예요. 나를 빼놓고 무슨 소리하는지. 그 무슨 소리가 인간을 태어나게 만들었어요.

 

부모만 있는 상태에서 어떤 이야기가 인간이 미처 자기 한계 때문에 뚫을 수 없던 인간 존재의 비밀이에요. 거기서 천사와 하나님의 대화 속에서 내용이 나오고 그것이 인간 속에 담기게 되면 인간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어려운 말로 묵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욥기를 묵시문학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무엇과 대조되느냐 하면 투입된 법이 진척되면서 죄가 더욱 더 증가하게 하는 이런 죄의 이동을 역사라고 하거든요. 바르게 살고 싶지만 점점 더 죄 쪽으로 가는 간격이 벌어지는 이동의 사태가 다음 순서로 자꾸 밀릴 때 이걸 역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민수기 10장에 보면,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반드시 적들이 물러가게 돼있고 또는 패배하게 돼있어요. 만약에 여기 교회에 언약궤처럼 상자가 있다고 합시다. 이 상자를 어떤 가게든지 어떤 집 문 앞에 들이대면 무조건 24시간 내에 그 집안의 가족이 몽땅 회개해서 이 교회로 다 올 수 있는 신기한 상자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로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민수기 10장에 보면,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적들이 너희에게 돌아온다는 거예요. 굴복해서. 세상에 아직도 그런 무기가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좋아요.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살리는구나. 이제 이스라엘은 걱정 없다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앞장세웠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언약궤 빼앗겼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언약궤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다고 해서 전쟁에 써먹으려고 했는데 써먹기는커녕 언약궤 빼앗기고 그럼 언약궤가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했는데 그럼 그 효능과 그 작용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한 것인가? 그 다음에 보니까 그 언약궤가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블레셋 진영을 완전히 초토화시켰어요. 다곤 신상 앞에 여호와를 이겼다고 전리품이라고 언약궤를 모셔놨더니 아침에 가보니까 다곤 신상이 발목 다 부러졌어요. cctv 놔봤으면 좋겠어요. 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옛날 고대에는 신과 신의 전쟁이거든요. 새벽 2시 30분에 어떻게 해서 다곤 신상이 엎어져서 관절이란 관절은 다 부러졌어요.

 

그래서 감당이 안 되니 제사를 안 드려서 그런 줄 알고 이스라엘 흉내 낸다고 제사를 하지만 그 마을 쪽에, 예를 들면 뉴욕 중국거리에 에볼라 바이러스 완전히 퍼져버렸고, 뉴저지 저쪽에 전염병이 퍼져버리고 도대체 감당이 안 돼요. 보세요. 누가 이겼습니까? 언약궤가 이겼지요. 약속 지켰지요. 그런데 승리의 영광이 이스라엘한테는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인간이거든요. 인간은 주님의 영광을 가로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뤄지되 그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체면과 자신의 자존심과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의 죄 용서 방법을 자기 자랑을 위해서 사용한다면 주께서는 피해갑니다. 난 너와 안 논다.

 

법을 주었지만 지킨다고 착각했지요. 하지만 그걸로 통해서 숨어있는 주어진 법 때문에 안에 내장된 법이 더욱 더 크게 노출되면서 역사는 흐른다. 이스라엘 역사는 망할 때까지 흐르는 거예요. 이게 구약의 흐름입니다. 죄가 얼마나 깊이 있게, 주님이 주신 말씀을 주면 줄수록 인간은 마치 드릴 같아. 주신 법을 지키려고 하면 점점 더 인간 자신도 알지 못하는 더 깊게 빠지게 되지요.

 

그럼 목사님, 그 당시 사람들 지옥 갔습니까? 아니지요. 죄가 깊은 만큼 선지자의 희생도 같이 비례해서 깊어지는 겁니다. 나중에 어느 정도까지 되느냐 하면, 메시아가 와서 채찍에 맞아야 나음을 입는 지경까지 가는 거예요. 얼마나 인간이 죄에 대해서 해결책이 없으면 구원자 자신이 말로 해서는 안 돼요. 아예 구원자가 내 몸 줄게. 너 살리기 위해서 네 대신 내가 모든 저주와 사망을 다 받을 테니까. 그때에 너는 나로 인하여 구원되리라. 그게 일관된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했어요. 그래서 너무 쉽습니다. 그런데 법의 노선이 욥에는 정차를 안 하네요. 그냥 지나가요. 욥이 여기에 투입되는데, 아까 한 걸 다시 이야기하면, 율법이 있어 죄인 되었는데 선악과 따먹기 이전에 진짜 인간은 무슨 내용으로 되어 있느냐? 그 점은 이런 역사와 관련 없는 역사를 떠난 묵시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주어지게 되면, 끝이 시작이 되고 시작이 끝이 돼요. 이 말은 괜히 했다. 하여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여러분, 수평선이나 땅 끝을 보면 지평선이 있지요. 수평선이나 지평선 가까이 가보세요. 선이 있습니까? 선 없지요. 지평선, 수평선 어디로 갔습니까? 지평선이라고 플래카드 걸어놨어요? 없지요. 그런데 멀찍이 보세요. 분명히 선이 있지요. 묵시와 역사가 맞닿은 선이 있습니다만 막상 묵시와 역사가 같이 있는 데는 이게 역사인지 묵시인지 구분이 안 돼요. 그래서 제자들이나 심지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했습니다.
 
 

알파요 오메가, 시작과 끝이신 분이 오셨는데 사람들은 자기와 똑같은 아저씨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사울은 그런 이단을 죽이는 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서 네가 역사도 분간 못하고 지평선도 모르냐는 식으로 네가 핍박하던 나사렛 예수니라. 내가 선이다. 내가 유일한 선이었단다. 네가 보기에는 보통 평범한 서른세 살 먹은 청년이지만 이게 선이다. 나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다. 왜? 나는 화목제물로 왔기 때문에.
 
 

율법으로 죄를 만들어주시고 그 죄를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대신 처리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의 죄를 잃었다가 얻는 방식으로 그 과정 자체를 영광으로 받는 거예요. 잃어버린 적이 없는 아흔아홉 마리 양은 소용없어요. 잃었다가 찾은 사람. 아버지 돈 다 날리고 온 탕자가 그 과정과 예수님의 희생이 매치가 되면서 주님을 우리가 알아본 겁니다. “주님, 피 흘렸지요?” “어떻게 알았지?” 우리가 생각하는 주님은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아닙니다. 피 흘린 분이에요. 훌륭하시고 똑똑하시고 아이큐 2500이고. 아니에요. 그냥 피 흘린 분이에요. 피 흘린 분으로 알 때 우리는 나와 주님과 관련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피 흘렸는데 누구 때문에? “나 때문에 피 흘렸지요?” 하고 묻는 것, 이 말은 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죄를 있게 하시고 그걸 없애는 과정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예수님 찾지 마시고 피 흘린 예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제 수요일에 했어요. 죄인은 죄인으로 구원한다는 겁니다. 죄인을 신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죄인이 죄인을 구원합니다. 십자가 세 개 있었습니다. 가운데 예수님, 양쪽에 강도. 한 사람 건짐 받고 한 사람 지옥 갔지요. 죄인이 옆에 있는 죄인을 구원합니다. 구원받은 강도, 믿음 최곱니다.

 

물에 빠졌으면 뭍에 있는 사람한테 건져달라는 게 상식인데 옆에 같이 허우적거리는 물에 빠진 사람에게 물에 빠진 박태환아, 네가 나를 오늘밤 낙원에, 이런 식으로 대화가 오고가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놀랐습니까? 돈 많은 사람이 뉴욕에 사는 한인들 도와주는 건 되는데 같이 사업 망한 사람이, 네가 나와 함께 내일 부자가 되리라. 이게 말이 됩니까?
 
 

교회 목회 어려워서 허덕거리면서 한 달 전에 오십 명, 그 다음에 사십 명, 삼십 명, 이제 열 명 남았는데, “목사님, 개척교회 안 되지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교인 몇 명입니까?” “두 명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두 명이 무슨, 지나 나나 같은 신세인데 어떻게 돕는다고 해요. “당신을 위해서 내가 채찍 맞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대화가 되는 겁니다. 이게 유일한 영광이에요. 다른 영광 찾지 마세요.

 

저분은 죄가 없는 데도 불구하고 저분에게 있는 죄는 내 죄를 가져가기 위한 죄라고 알아보는 이 안목, 성령, 예수님의 영이 아니면 누구도 그 안목 없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주장하면서 그들은 남북통일문제, 경제문제 해결하는 예수를 들고 나왔어요. 그 예수는 예수 아닙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을 어디서 찾을 거냐는 겁니다. 욥기 1장 6절 다시 읽겠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하나님 계시고 그 앞에 천사들 있고 사단도 있습니다. 이 광경에서 주목 받는 무리는 천사가 아니고 사탄입니다. 제가 지금 묵시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역사 말고요. 죄 짓기 전에 원형적인 인간은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느냐? 더 나가서 인간은 왜 있느냐? 그걸 푸는 겁니다. 인간은 왜 생겨나야 하는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지금 천사도 제치고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이야기합니다. 욥기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사단과 내기를 하는 겁니다. 욥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욥은 지금 이 땅에서 정신없이 농사짓고 바빠요. 하늘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전혀 깜깜합니다. 다만 욥과 전혀 다른 욥이란 역사적 구체적 상황과 다른 욥이 묵시적 상황에서 하나님과 사단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어떻게 옵니까? 위에서 오지요. 여러분이 한국을 떠나서 여기에 살 때 비록 고국은 멀지만 천국은 한 뼘이에요. 고국 가야 구원받습니까? 오순절 성령의 의미가 그거에요. 천국은 묵시는 지금은 지평선 없지만 멀리서 보면 지평선이에요. 내가 보면 지평선이 손에 안 만져지지만 여기서부터 5킬로 떨어진 친구가 보면 나는 지금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 서있습니다. 욥기는 묵시와 역사의 지평선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의 의견도 묻지 아니하고 일방적으로 사단과 내기에 욥의 운명을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결론부터 던지겠습니다. 인간은 뭐냐? 하나님의 승리를 의로움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 사탄과 대결했던 결과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악을 이겼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들어놓고 사단으로 하여금 인간을 마음껏 유린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미처 가담하지 않은 낯선 묵시에 의해서(역사만 알기 때문에) 당할대로 다 당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궁지에 몰려서 이제는 인간이 스스로 지탱할 수 있는 여력이 다 소진된 상태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사단도 주목하고 하나님도 주목하지요. 왜? 이게 내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좀 더 알기 쉬운 예를 들면, 하나님과 사단이 화투를 치는데 사단이 9땡을 쥐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장땡을 쥐었어요. 이걸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 나도 궁금한데 장땡이 9땡을 이깁니다. 사탄이 주님의 장땡을 38따라지로 만듭니다. 이런 일방적인 내기에 인간은 어떤 자기주장을 내세울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 있고 묵시는 역사적 상황을 농락합니다. 여러분도 평생 동안 농락당했을 거예요. 분명히 한국에서는 장땡인데 여기선 38따라지.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은 창세전부터 너는 내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 하나가 사탄에게 우리를 내어주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승리(나의승리가 아니고), 사탄한테 다 빼앗겼다고 만들어서 빼앗긴 자를 되찾아오는 방식으로 기어이 주님만 승리하고 우리는 승리 못했는데 주님이 승리했다는 전리품으로 천국에 합류하는 방법, 이게 하나님이 계획입니다.
 
 

돈을 한 200억 가졌습니까? 38따라지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래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영광 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피를 대신할 것이 없을 보여주기 위해서 욥을 부자 되게 만들었어요. 욥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많이 들었겠지만 1장 21절 여기에 보면,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이렇게 하지요. 저는 욥기의 말씀 가운데서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팻말은 많이 봤는데 이 팻말 붙인 집은 못 봤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그랬으면 심방 갈 때 선물했을 거예요. 문제는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야구하면서 1회에 25점 얻었는데 9회말에 30점 내줘서 완전히 역전패한 것과 마찬가지거든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주님이여 감사합니다. 거기까지만. 가만있어봐.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 제발 그것만큼은. 빼앗아 갈 것 같으면 차라리 주시지나 말지.
 
 

세월호.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부모들과 아예 아기 못 낳은 사람의 차이점은? 하나는 잃어버린 아픔이 있고 한쪽은 잃어버린 아픔이 전혀 없다는 거예요. 자식을 낳아봐야 잃어버린 아픔이 있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신자와 더불어 세상 것을 마음껏 누리게 합니다. 그런데 세상 것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고 성도한테는 지금 내가 가진 은과 금이 결코 하나님이 정말 주시고자 사탄 앞에서 내기했던 그 장땡은 아니라는 겁니다. 7땡, 6땡은 모르겠지만 진짜 천국 가는 장땡은 아닌 거예요. 50억, 100억 가져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정말 영생 주는 그건 아니다. 은과 금으로 구원하지 못하거니와.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시험대상으로 욥이 걸려든 거예요.

 

그러면 욥의 이야기에서 묵시가 분명히 지평선에서 역사와 닿는다고 아까 이야기 드렸잖아요. 그러면 닿는 지점에 뭐가 있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그게 시형제결혼법이에요. 시댁 형제 결혼법과 로마서 8장에 우리가 맏아들의 형상과 본받기 위해서란 말과 연관이 돼요. 시형제결혼법을 먼저 설명하고 맏아들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맏아들을 통하지 아니하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우리는 양자에요. 우리는 맏아들 아니라고 하니까 어떤 분이,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못하겠네요?”라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맏아들이 아니더라도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요. 예수님만 알았던 아버지를 이제 우리도 알게 된 거예요. 아버지 모르면 아들 아니거든요. 이 세상에 아버지 아시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몰랐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지어내니까.

 

그런데 세상에 주께서 성령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예수님이 아는 아버지가 우리도 아는 아버지가 됐는데 조건이 있어요. 예수님이 맏아들이란 사실을 징검다리를 딛고 하는 겁니다. 그 맏아들을 위하여 출애굽기의 어린양이 그렇게 발휘된 거예요. 어린양 피 바르고 난 뒤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 각 사람에게 살아남은 맏아들 다 나한테 공출하라. 이제는 너희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것이니라. 출애굽기 13장 1절에서 2절에 나옵니다. 좋다 말았지요. 우리 아들 살았다고 했는데 빼앗겼어요. 이제 여호와의 것이에요.

 

그럼 여호와의 것이 되면 어떤 혜택이 있느냐? 이제 모든 정보는 아들을 통해서 남은 가족에 복이 전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맏아들이 왜 중요하냐? 어린양의 피가 내용으로 담겨있거든요. 세상 죄를 진 어린양의 피가 담겨있는 각 가정에 증명하는 대표인물이 맏아들이에요. 그래서 맏아들 없으면 축복이 잘립니다. 축복이 저주가 돼요. 그래서 맏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형이 결혼을 했는데 자식을 못 낳을 때는 동생과 형수와 결혼하되 그 동생에 의해서 낳은 자식은 형의 자식으로 옮겨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받는 그러한 세태가 이스라엘이 살아남게 하는 제도가 바로 묵시와 역사의 만남, 지평선이에요.
 
 

오난이란 사람은 형수와 합궁해서 자기 자식이 안 된다는 걸 알고는 땅에다 배설했어요. 죽었습니다. 세상에 하나님 법도, 설정한다고 죽여 버리고. 남자들 다 죽어야 돼. 무슨 그런 법이 있어요. 또 이 이야기 듣고 난 조심해야지. 그 이야기 아니잖아요. 꿈꾸다가도 나올 수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자살할 거예요, 연탄불 피울까요? 그런 이야기 아니에요. 지평선 이야기에요. 묵시, 역사 양쪽을 다 증거하라고 법 만든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형이 무정자증이에요. 큰 재벌회사 이을 후계자가 없으니까 엄마가 동생의 정자로 형수 몰래 인공수정하려다 걸렸잖아요. <청담동 스캔들>에서. 돈 번다고 바빠서 연속극 볼 시간도 없지요. 시형제결혼법이 거기서 나올지 몰랐어요.
 
 

하나님께서 주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고 뺏는 과정에서 사탄은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섬겨도 주고 뺏으면 화냅니다. 개 키워보세요. 아무리 친한 주인이라도 개 밥그릇 발로 차면 뭅니다. 이게 본성인데 저한테 안 됩니다. 장땡인 인간 완전히 조져놓겠습니다. 됐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선 무슨 배짱으로 니 마음대로 하라고 한 거예요.
 
 

중요한 대목 남아있는데 어려울 때는 미리 한다고 했지요. 욥의 존재는 단절입니다. 절단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절대로 욥을 이해할 수 없어요. 욥 본인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지평선입니다. 그러나 묵시를 모르는 사람들은 욥을 하나에 역사적 인물로 봐서 자기가 이 세상을 살아왔던 판단기준을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욥아, 네가 지금은 힘들지만 회개한다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 다단계회사 아침마다 외치는 구호가 그겁니다. 전기장판 팔 때. 기숙사에 가 보면 기숙사 벽에 써놨어요. 시작은 두 개 팔아도 나중에는 천 개 팔 것이다. 그것 마귀가 이야기한 겁니다.

 

묵시를 맛보지 못한 자들, 주님께서 구원이 대상이 안 되는 자들은 자기가 역사에서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고 지평선을 경유하지 않은 채 하나님과 접촉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건 마귀가 그렇게 사주했기 때문에 마귀는 자신만만한 거예요.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를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만든 겁니다. 안목을 흐리게 해서 묵시는 느끼지 아니하고 그저 검침이나 하고 가스배달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지가 왜 죽는지 팔십 넘어 구십 되고 왜 죽는지 이유도 몰라요. 죽는 이유도 모르면서 살 때까지 살지, 그뿐입니다.

 

그런데 왜 은혜인지 죽기도 전에 주여, 왜 죽이십니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정말 연세 좀 되는 사람은 몰라도 연세 안 되는 사람한테는 기적적인 거예요. 우리교회에 스물 몇 살 먹은 청년이 있는데 세상에 이야기할 때 자기 또래와 이야기 안 해요. 전부 오십, 육십, 칠십 하고 이야기합니다. 인생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이며, 스물두 살 먹은 청년이. 전부 다 뭐지? 신기한 겁니다. 그 청년의 친구가 납득이 안 돼요. 이해가 안 돼요.

 

우리가 고마운 것은, 욥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거든요. 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탄이란 것을 보고 싶냐? 보여줄게. 단 조건이 있다. 욥이 고난 받는 현장에서만 비로소 사탄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왜? 두 사이는 단절이기 때문에. 아무리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고 아무리 설득해도 못 알아듣고. 심지어 봉투에 돈 넣어도 교회만 왔지 봉투에 돈만 빼내지 서너 번 나오도 돈 떨어지면 교회 안 나오고. 관심 없다. 복음 들으니까 잠 온다는 식입니다.

 

단절이란 장차 예수님이 오실 때 묵시가 역사 속에 풍덩 빠질 때 역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묵시를 파악할 수 없는 그 방식이 뭐냐? 자기의 죄를 씻는 방식은 결코 자기 아이디어에서 끄집어내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에요. 만약에 자기 죄를 자기 식으로 해버리면 주님께 돌아가야 될 최종 승리가 시시한 인간의 승리가 섞이게 되기 때문에 온전한 주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욥마저 낙담에 빠지도록 시나리오 그렇게 짜여있어요. 이런 드라마가 없어요. 믿었던 욥마저 드디어 낙담에 들어가고 하나님께 원망할 때 그때가 하나님께서 박수치는 시간입니다. 스탬프 도장을 찍습니다. 참 잘했어요.

 

여러분, 집에 돌아갈 때 여러분의 등에 참 잘했어요, 스탬프가 찍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도 손님 한 명밖에 안 왔어요. 참 잘했어요. 오늘도 얘가 성적이 또 내려갔어요. 참 잘했어요. 왜냐하면 사탄은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낙담시켰습니까? “너, 그렇게 사느니 약 먹고 죽어라.” 평소에 사탄이 얼마나 주둥아리를 놀려왔습니까? “니 그렇게 사나? 아이고, 등신아. 나 같으면 죽었다. 치워라. 인생 그만 살아라.” 그 사탄, 우리 고마우신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만의 승리를 위해서 나를 괴롭히는 일군으로 사탄을 내 곁에 딱 들어붙어서 조롱과 멸시와 놀림을 해대는데 그 체험은 우리만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도 함께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낙담했습니까? 여기 필살기가 있습니다. 뭐냐?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난 손들었습니다. 이라크 전쟁 때 이라크는 사막이거든요. 미국이 전쟁하기 좋은 곳이에요. 숨을 데가 없어요. 나오라고 하니까 전부 손들고 다 나왔어요. 우리는 숨을 데가 없어요. 우리는 수시로 사단과 짝짜꿍이 되어 그렇게 십일조를 했더니만 십일조 한 것 적립해도 지금 집을 두 채 샀겠다. 십일조하면 창고 넘친다고? 내 창고 불날 뻔했어. 하나님 믿는 내가 바보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평선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역사에서 실패자, 머리 둘 곳도 없었던 분이 예수님이고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예수님을 희한하게 십자가 동창생, 옆에 있던 강도한테는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바로 강도가 욥이었습니다. 욥이 강도였고. 정확하게 말해서 욥 안에 강도 들었고, 창기 들었고, 저와 여러분 들어있습니다. 이제부터 욥이 받는 고난, 여러분도 지금 5학년 2반 학습을 같이 받고 있고 내년 되면 6학년 1반 진급해서 또 받게 됩니다.

 

뭘 받느냐? 과정입니다. 어떤 과정? 주신 것도 빼앗기는 과정. 제가 아까 했지요. 돈 빼앗기고 건강 빼앗기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남들처럼 가진 것이 날 살리지 않는다는 것, 이게 의미 없다는 것, 내 구원에 의미 없고 오직 장차 어떤 분이 내 대신 죄를 가져가줘야 비로소 그게 의미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누리면서도 우리가 없는 가운데서도 풍족한 가운데서 그게 밝혀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 속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인생을 갈 수밖에 없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입니다.

 

끝으로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욥이 이런 이야기할 때 1장으로 끝난 줄 알았어요.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겠지. 분명히 뭔가 좋은 멘트 날렸으면 심판도 피해갈 줄 알았는데 결과가 더욱 더 어려워졌습니다. 문제는 욥이 말만했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시험이 뭐냐? 욥에게 질병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욥은 지식과 몸이 이제는 떨어질 수 없어요. 아프다고 말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송곳으로 찌르면 큰 비명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건 몸 덩어리 자체가 신앙도 필요 없고 멘트도 필요 없고 삼위일체 지식도 필요 없고 어떻게 성령 달라는 것도 필요 없고 나는 네 몸 자체를 사용하겠다는 코스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 이것 해드리겠습니다. 저것 해드리겠습니다.” “가만있어. 네가 나대지 마. 내가 알아서 아침부터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할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따로 신앙생활 없습니다. 그냥 살아가는 자체가 신앙생활이에요. 먹는 것, 입는 것도 신앙생활이에요.

 

그것을 로마서나 고린도전서에서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또는 먹든지 입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것은 주님의 것이고 이것은 내 것이고, 없습니다. 교회에 내든 안 내든 다 주의 것입니다. 주도권을 주님이 갖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어요. 이제는 욥의 동창생이니까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걸 쳐다보니 주변의 시선입니다. 죄 짓더니만 망하네. 그 이야기를 함으로서 그들은 마귀에 속한 존재임을 스스로 폭로하는 계기를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마련하셨습니다.

 

승리한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이 패배인 것을 증명하는 쪽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욕했고 이 시대는 욥을 바라보면서 욕했습니다.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아주 합리적이고 신학자들이에요.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정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악을 모르시기 때문에 벌을 내렸다는 것은 반드시 죄가 있는 곳에 벌을 내린다. 욥아, 정신 차려라. 네가 모르는 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회개하면 정상참작은 해줄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뭘 모르느냐? 낯선 고난을 몰랐어요.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띠 띠고 원치 않는 곳으로 가게 할 때 베드로가 미리 예측한 게 전혀 없어요. 낯선 것을 줍니다. 우리는 똑같은 생각을 해도 항상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남을 전도하기보다 주님이 나부터 전도 개시하다보니까 전도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 지식으로 남한테 하면, 이건 나의 몸에 체험이 안 돼요. 아픔이 안 돼요. 내가 주님한테 아야 해야 옆의 사람이, “누구한테 얻어맞았어요?” “예. 주님한테 얻어맞았습니다.” “이상한 사람이네. 주님은 없는데 왜 당신은 주님이라고 해요?” 이렇게 그들에게 전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점점 더 친구들 세 명은 설명을 해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인데 죄가 있는 것에 벌을 내린다. 맞지? 그러니까 너는 벌을 받았다. 내 논리에 문제가 없지. 그런데 욥은 논리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데 무슨 논리가 필요합니까? 주님의 피만이 날 용서했다는 걸 아는데 거기에 무슨 논리가 필요해요. 성도님, 이리 와보세요. 예수의 피가, 당신의 죄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어떻게 다가와서 했는지 해보세요. 그걸 어떻게 논리로 설명합니까? 이미 논리란 낯선 것이 아니고 예측된 논리를 동원해서 논리를 소유화하면서 구원받겠다는 자기소유욕인데. 전혀 그건 통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아프다고 할 때 찾아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께 대듭니다. 이야기합시다. “하나님이여, 제가 뭔데 인간이 아무것도 아닌데 죄 지은들 주님한테 영향도 없는데 왜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 하나님 말씀이, “황무지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채소 가꾸는데 말고요?” “그래. 황무지에.” “황무지에 비가 왜 옵니까? 채소도 없는데.” “모르겠지?” “모르겠습니다.” “그처럼 내가 너한테 고난주는 것 아무 이유 없다. 인간은 몰라도 돼. 이건 묵시에서 하는 것이지 역사는 당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어쨌든 너로 인하여 내가 승리했다. 참 잘했다. 스탬프 하나 찍고, 친구들을 위해서 네가 제사 드려라. 그러면 그 죄가 너로 인하여 구원받을 것이다.”

 

욥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무리 이유도 없이 아들은 순종했습니다. 아들 한 명의 순종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지고 예수님 시시하다고 예수님께서 나한테 돈 벌어준 적 없다고 나를 고생시켰다고 원망한 우리에게 난데없이 영생이 주어지고 천국이 주어졌습니다. 얼른 면류관 벗어서 주의 발 앞에 던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친히 다루실 줄 몰랐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룰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에 사람에게도 낯선 존재인 것처럼 나에게도 내가 낯선 존재로 달라지게 하셔서 기어이 예수의 십자가 공로만 높이시는 주님이여, 실제로 죽으신 그 피가 무용지물 되지 않도록 저희들은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관리자(IP:175.♡.188.230) 14-11-07 22:45 
20141001 미국뉴저지교회a

(강의:이근호 목사)

 

 

성경 로마서 1장 2~4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아멘.

 

이 대목부터 시작해서 목표는 로마서 1장에서 8장까지 어떻게 관통되는지 그것을 제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번 계획으로는 금요일에 9장부터 16장까지 다 할 텐데요, 로마서 내용이 관통된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로마서 1장에서 보는 관점이나 4장, 5장, 15장 어디를 봐도 통일된 사도 바울의 복음이 나오는 안목을 목회자뿐만 아니고 평신도도 갖기를 바라서 그렇게 생각해봤습니다.

 

로마서 1장에서 16장까지 일관된 복음이 나온다면 그건 곧 예레미야, 이사야, 출애굽기, 성경 66권 어디를 건드려도 로마서와 동일한 결론과 내용이 나올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있기를 제가 바랍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1장 2절에 보니까 “이 복음”이라고 해서 복음에 대해서 언급이 돼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이 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입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거든요. 우리는 생각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가 복음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 않았느냐? 그걸로 끝이 아니냐? 그렇다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으로 충분한데 왜 로마서 1장 2절에서 또 복음이 언급이 돼있느냐는 것부터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거든요. 미흡한가, 아니면 모자라는 건가? 아니면 마태, 마가복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봐도 몰랐는가? 도대체 어느 쪽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또 다시 복음을 언급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최종 정리한 것까지 마태, 마가, 누가(공관복음이라고 하는데)에서 흘러나오는 복음이 참으로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로마서에서 일치되게 정립될 수 있어야 된다고 해서 로마서에서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백 사람이 마가를 보고 천 사람이 마태를 볼 때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구구절절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 모든 해석을 바울 서신에 의해서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무엇이 옳은 복음인지 최종 정립하는 역할을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을 유대인을 향하여 복음을 외쳤다면,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느냐? 그것은 아니다. 그럼 뭐냐? 이방인들이 아는 복음이나, 유대인들이 아는 복음이나 출발점은 자신의 삶의 정황(독일말로 sitz im leben)에서 나왔든 결론은 하나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 대목을 사실은 약간 더 설명해야 되는데, 설명 안 한다고 질책 많이 받았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하거든요. 여러분, 여기서 뭔가 빠졌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는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해야 저주 안 받는 진짜 영생 얻는 복음이라고 단박 오지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뭔가 빠져있어요. we우리라 할지라도, 그럼 우리 속에 사도 바울 본인도 포함이 돼있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 내가 믿지 않는다면 나라도 저주받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옳고 너희는 틀리다는 그런 대립논리가 복음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9장에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우리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설교가 충격이라고 하는데 저는 사도 바울의 그 이야기가 충격이에요. 사도 바울이 하는 그런 주장을 같이 하는 설교자나 교인들 찾아보기가 참 힘들어요. 우리 교회는 복음을 알고 있다는 사람들 참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우리 교회마저 항상 저주에 노출돼있고, 우리 교회가 십 년 동안 복음 전해도 십일 년째 복음 안 전하면 우리 교회라도 저주받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 빨리 지나가면 그렇게 들리는데 자세히 보면, 천사뿐만 아니고 우리라 할지라도 그런 복음을 전한 나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는 자동적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그런 욕구와 욕심은 복음에서는 수용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 본성을 복음이란 이름으로 신앙이란 이름으로 교회 다닌다는 이름으로 어떻게 그걸 무슨 수로 확보합니까? 도를 닦으면 닦을수록 자신은 점점 더 빛나는데 닦은 도를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냐 이 말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거예요?

 

“목사님, 사도 바울이나 위대하지 우리 같은 초자한테는 해당 안 됩니다.”라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신다면,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요한복음은 시대적으로 뒤에 있기 때문에 빼놓고)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서 뭔가 느끼는 게 있잖아요. 그 느끼는 것을 어디에 모으느냐? 나의 구원욕구를 만족하기 위해서 그걸 채워줄 때 그렇게 해서 나타난 정리된 복음이 갈라디아서 1장과 로마서 1장과 일치되는지 확인해보라고 로마서, 갈라디아서 주신 거예요. 일치될 수가 없지요.

 

사람의 모든 노동은 누구 좋으라고 합니까? 노동 당사자인 노동 주체인 자기 좋으라고 노동하지 남 주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니잖아요. 공부해서 남 준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빼놓고 남 구원하려고 자신은 자진해서 지옥 간다면 구태여 신앙생활, 교회 나올 필요 없지 않습니까. 다 교회 나오고 예수 믿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주여, 저는 기어이 살아남았습니다.” 그것 외치는 것을 최후의 희망사항으로 삼고 사는데 그게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어디서 끄집어내느냐 하면, 이거는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 이걸 모르는 사람 없기 때문에 내가 기분 편하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장에서 복음을 어디서 끄집어내느냐 하면, 사람들이 구원받고 싶어요,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어요, 나 살려주세요, 지옥 가기 싫어요. 이러한 욕구사항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복음이 나옵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이 우습지요.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지요.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초신자도 여기에 반대 안 할 거예요.

 

그 다음에 제가 말을 끄집어내면 반대할 사람이 혹시 있을까 염려됩니다. 그 복음 예수님에서 나온 복음이 여러분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 안에 도로 회수되고 환원됩니다. 이것 참 난처하네요. 조금 전에 명동칼국수에서 푸짐한 해물칼국수 먹고 왔습니다. 명동칼국수 주방장이 칼국수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문했어요. 한 15분 기다렸는데 맛있게 나왔지요. 그런데 15분이 아니라 15일 동안 기다렸는데도 명동칼국수가 안 나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홀라당 먹어버렸어요. 뭐예요? 우리 같으면 항의하겠지요. 칼국수 주문했는데 15일 동안 기다렸는데 왜 안 나옵니까? 칼국수집 주인이 하는 말이, 네가 인간이 아니거든. 얼마나 모독적인 이야기입니까.

 

인간의 행복과 진선미를 위해서 인간이 어떻게 위대해질 수 있는가를 위해서 종교가 있는데 인간을 비껴간다면 미쳤다고 교회 다니고 예수 믿습니까? 왜 나왔어요? 여러분의 행복을 비껴가서 예수님 혼자 좋으면 우리는 뭐예요? 혼자서 다 하세요. 우리는 삐졌어요. 이렇게 갈 게 뻔하단 말이죠. 사도 바울이 전하기를 그게 복음이라는 겁니다.

 

제가 너무나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제가 옆에 계신 분에게 여기 오기 직전에 물어봤어요. 사진 찍힌다는 것을 영어로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까 당황하셨는지 의논해서 답변해주셨습니다. 사진 찍힌다는 것은 수동, 다른 말로 피동. 정말 알기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상대로 찍으시고 “참 내 모습 잘 나왔네.” 하고 필름으로 간직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의 나라에 편입된 존재라고 규정합니다. 철저하게 수동적이죠.

 

원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이 원해서 오셔서 부대효과를 거치면서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을 구현하면서 네가 구원받은 것은 행함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행함으로 된 것이다. 엘리야 시대 때 많은 사람이 있지만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 자만 건지겠다. 이게 로마서 9장, 11장에 연속되어 나옵니다.

 

저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설교 다시해요. 그분이 진도 따라잡도록. 다시 하겠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서 사람들은 천국이 가깝다는 소식에 대해서 아주 반가워했습니다. 그래, 불교에 없는 천국, 힌두교에 없는 천국, 바로 여기에 있었네. 신이시여, 이런 계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여, 뭘 해드리면 될까요? 어떻게 믿으면 될까요?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죽어서 영원한 천국 보장해주소서. 이사야에 보니까 양이 사자와 놀고 신났어, 신났어. 요한계시록에 보니까 생명나무에서 헤엄치고.

 

그 좋은 세상이 있다면 그게 희망이라면 이 땅에서 뉴저지에서 뉴욕에서 어떤 시련과 고통을 받는다할지라도 내가 기어이 예수님 믿고 견디리라.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면서 기어이 남들이 가지 못한 천국에 골인한다면, 여러분,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거든요. 거기에다 마태복음 7장에 좁은 문 나오니까,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어떤 자부심, 산상설교 나오니까 “야, 이런 법이 있었구나. 이걸 한 번 지켜 봐. 어, 되네.”라는 그러한 자긍심.

 

그런데 그 모든 결론이 주님의 것을 내 것으로 전환시키는 종교적인 수완, 테크닉, 기술발휘를 내세운 어떤 능력으로 마중 나온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셔야 돼요. 자기 좋으라고 예수님 주신 것을 이용해먹으려는 그러면서도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니까 이건 자기를 낮추라는 이야기죠. 낮춰서라도 기어이 얻고자 하는 천국까지 확보하겠다. 십자가 지고 가라? 테레사 수녀, 울지 마 톤즈, 그렇지 그 어려운 일이 십자가라면 한 번 해봐? 언제? 사업 망할 때. 지금은 안 돼. 나중에 망하고 난 뒤에 아프리카에 가 봐? 이런 생각까지 하면 뭔가 내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집념의 소유자인지, 그걸 한국에서는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상대로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하니까 예수님의 나의 라이벌 대상 되는 거예요. 그대로 완전하진 않지만 건방지게 완전하다는 말은 못 붙이지만(자기도 건방진 건 알거든요) 금식 40일? 그럼 나는 겸손하게 39일. 뭔가 해보면서 기어이 보라, 나는 믿음을 얻었노라. 그러한 집념을 발휘하는 그걸 시험하는 장을 자기 인생을 활용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그 끝은 뭐였던가요? 누구 영광이었던가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가 있습니다. 당신은 마태, 마가, 누가 해석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한 해석을 수정할 능력은 당신에게 없습니다. 그것은 타고난 본성입니다.

 

로마서 1장 2~4절에서 복음은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설명을 간단하게 하면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것이 복음이다. 아까 보셨지요.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이렇게 돼있지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서 왜 우리가 복음을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었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분을 내가 그걸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고 할 때 지금 입술이 떨려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게 아니라고 한다면 욕 얻어먹을 판이에요. “이것 맞잖아요?” 이런 표정들인데 그것이 잘못이었다고 하면, “그럼 당신의 대안이 뭐야?” 지금 저한테 쏟아대는 것 같아.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을 내가 영접하면 믿으면, 로마서 10장 13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온다면 들어올 때부터 우리는 크고 예수님은 우리보다 작은 분이 되는 겁니다. 복음이란 뭐냐? 여기서 여기까지 연결시켜주는데 우리의 보는 것, 이해하는 것으로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돼있지요. 아까 로마서 1장에.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한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를 보면서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죽어서 어디 갈까? 이왕이면 좋은데 가야지. 돌아가신 아버지가 장로님이고 어머니가 권사님이라면 또는 사랑하는 애인이 천국에 가있다면 우리는 합류하고 싶은 거예요. 오겡끼데스까, 거기 잘 계십니까? 제가 갈 테니까 가다리세요. 난 당신을 잊지 못합니다. 합류하겠습니다. 그런 희망을 보여주는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으로 구원받는 나를 통째로 집어서 죽여 버리는 거예요. 이런 나를, 지그 살듯이 천국 가서 살고 싶은 나를 아예 납치해서 죽여 버리면 그러한 희망과 꿈을 꾸는 내가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내 꿈도 희망도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눈 떠보니까 나를 위한 예수로 눈 떠진 게 아니고 주님의 소유로 달라진 채 내가 등장하니까 우리는 생각합니다. “주여,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한국에서 3년 전인가 유명한 치킨cf가 있었어요. 차태현이란 탤런트가, “도대체 닭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오묘한 맛이 어떻게 나타난 거야?” 주여, 저에게 무슨 짓을 했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나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 무조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야 된다는 나는 신을 찾아요. 신 또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함, 그런 전제를 깔고 자기는 복음을 이해하려는데 결론은 뭐냐 하면, 아까 목사님이 중요한 걸 지적했어요. 이근호 목사님은 명제부터 던지고 난 뒤에 하기 때문에 이해 안 되거든 질문하라고 하잖아요.

 

명제부터 던지겠습니다. 뭐냐 하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여러분, 죄인이 죄인을 구원해요? 너 같은 인간한테는 나 같은 죄인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눈앞에 죄인을 모르고 뭘 찾느냐 하면,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 신이시여(그것도 그냥 신이면 무식하니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건져주소서.”라고 그런 마음으로 실은 자기 자신을 살리겠다는 자기가 자기를 살리는 방법으로 하는 거예요. 왜 우리가 살아야 되느냐 하면, 누가 뭐래도 나는 잘난 존재고, 정의를 사랑하는 존재고, 나한테는 내가 제일 예뻐.

 

예쁜 내 존재가 나보다 더 훌륭하신 신이시여, 나를 건지소서. 그것이 인간의 타고난 종교라는 거예요. 기독교, 천주교, 다 종교라면 실제로 성경에서는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는 방식을 하나님은 채택했습니다. 죄인이란 생각이 안 들거든 너는 구원자도 못 알아보는 안목을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죄인임을 알지 못한다면 실제로 네 곁에 오신 구원자도 전혀 눈치 못 채고 있고 무식한 채로 있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죄인이 죄인 되게 하는 공식을 제가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타고난 공식을 또 다시 적용시키겠습니다. 나는, 그냥 나가 아니죠. 예쁜 나는, 그냥 예쁜 나가 아니죠. 천하보다 귀한 나는 어떤 식으로 천국, 죽어서도 내가 지금 사랑하는 이상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이상한 목사가 하는 말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한다고 하니까 다시 말해서 자기가 죄인 됨을 알 때 그 죄인 됨을 건져주시는 분은 똑같은 죄인 취급받은 분이 나를 건진다고 이야기할 때 그 공식을 적용하게 되면, “좋습니다. 제가 죄인 되겠습니다. 내가 자진해서 죄인 되는 한이 있더라도 비로소 죄인 됨으로써 구원자가 죄인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을 파악해서 그 죄인에게 나의 모든 것을 헌신해서 기어이 나는 나를 건지고야 말겠습니다.”라는 전략을 또 세우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십자가도 이야기하고, 여기 로마서 1장 3절에서 뭐라고 하는지 읽어보겠습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이 대목에서 방금 이야기한 내가 죄인 되어서 죄인으로 오신 구원자를 만나서 기어이 나를 천국까지 건져 올리겠다고 할 때 하나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너는 아무리 노력해도 네가 죄가 뭔지 모르는 존재라고 아예 단정을 짓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언급해드린다면, 죄라는 것은 다윗언약에 의해서만 죄가 밝혀져요. 스스로 죄를 많이 진다고 죄를 아는 게 아니고 죄 짓는 방식까지 덮쳐야 됩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두 자로 율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3장에 율법이 주어진 것은 죄로 더욱 더 죄 되게 하고 모든 사람의 입을 막아서 저주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헌금하면서 헌금 내는 손은 떨리지요. 돈을 쥐고 있으니까. 헌금하면서 내가 얼마나 돈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헌금하지 않는 사람은 몰라요. 헌금하세요. 하면서 헌금하는 자체가 돈이라는 강한 집념이 담겨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하도 어떤 분들이 이근호 목사는 헌금하지 말라고 강의했다고 해서 지금 여기서 딴 소리를 해야 돼요. 헌금하세요. 죄를 받으세요. 헌금하면서 헌금하기 전까지는 몰랐던 죄를 돈에 대한 집착과 애착을 헌금함으로써 더욱 확실하게 느끼세요. 이제 아멘 나왔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을 모세언약이라고 하고 그 다음에 나온 언약은 다윗언약이 주어집니다. 율법언약으로 인간이 실패했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이동하는 겁니다. 뭐가 이동하느냐?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매개체가 얼마나 부실한지 보여주면서 그 간격을 유지하면서 이동하는 것이 역사거든요. 역사가 흘러가면서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성전 지었지만 실패했고, 율법 지킨다 했지만 실패했고, 제사장 주었지만 실패했고, 선지자 주었지만 실패했고, 간격만 점점 더 늘어나지요. 저는 이걸 가랑이 찢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세언약과 다윗언약을 통해서 뭘 아느냐 하면, 인간 내부를 찢습니다. 찢는다는 말이 너무 참혹하고 잔인해 보이잖아요. 그래서 이걸 저는 망사스타킹이라 합니다. 망사스타킹을 가게에서 살 때는 촘촘해요. 신으면 쩍쩍 갈라지지요. 망사스타킹이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나 바깥의 나는 하나님의 법을 좋아해요. 7장 끝에 보면 또 다른 게 내 안에 들어있어서 이게 죄의 법인데 이게 나를 찢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럼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마태복음 시키는 대로 하는데 주께서 구원하는 방법은 그 나를 쥐포 찢듯이 찢어버려요. 그럼 나는 없어집니다. 구원받을 내가 없어지면서 나는 말씀을 증거하는 필름이 돼버리고 말죠. 아까 사진 찍혔다고 했죠. 수동형으로 사진을 찍어놨는데 그 결과는 필름이잖아요. 필름처럼 나는 없고 나라고 우기던 그것을 주께서 언약을 찍어서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대외적으로 오직 예수님 사랑만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만드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그때 말할 때 네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네 속의 성령이 말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자아를 유지할 때는 그 말씀이 해당이 안 되고 성령 오기 전에는 내 악이 내 이름을 사칭해서 나라는 이름으로 내 악이 나를 사용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 오기 전이나 온 후나 우리는 누구의 노리개에요. 마귀는 뒤에 숨어버리니까 우리는 마귀도 없고, 마귀라 하면 얼굴이 녹색이고(오즈의 마법사도 아니고), 그 정도로 마귀를 생각하는데 뿔나고 박쥐처럼 무대에 돌아다니면 그게 마귀인 줄 아는데 마귀는 망사스타킹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걸 고집하는 그게 마귀에요. 내가 뭘 하고 내가 십일조하고 내가 청소하고 내가 봉사하고 그게 마귀입니다. 또 실수했다. 설명하는데 갑작스럽게 도약해버렸네. 내가 주의해야 되는데 급진적으로 진도가 확 나갔어요. 죄송합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이건 제가 설명을 좀 더 하기 위해서 이걸 먼저 첨부합니다. 나라는 게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 앞에서 10미터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멈추는 것이 옛날 방식의 법이었어요. 그게 돌 판이었어요. 돌 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것이 내 코앞에 스톱이 돼요. 내 마음에는 안 들어와요. 예레미야 31장 32절에 나오는 새 언약의 예언에 의하면 내 앞에 있는 말씀이 허락도 없이 내 마음까지 장악하게 되는 그런 것까지 책임지고 서비스해주겠다는 것이 새 언약 시대에 구원받은 사람에게 혜택이에요.

 

전에는 내 앞에 스톱이 됐지만 예를 들어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면 내가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살인하지 말라는 내 앞에 스톱이 돼야 되고, 그 다음에 “주여, 보소서. 아직도 내가 살인하지 않았습니다. 어때요?” 이렇게 되는데 그런 모든 실험을 다 실패로 끝났어요. 신약 때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쳐들어오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살인 안 하는 행위로 전환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지키지도 않았는데 지킨 것이 되고 말았어요. 왜 그러느냐? 우리의 모든 것이 갈기갈기 말씀에 의해서 찢긴 망사스타킹이 되어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말씀으로 하게 되면 우리는 살았네. 그걸로 끝났네, 없네. 이렇게 되는데 말씀이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여러분 다 이해하신다 치고 넘어갑니다. 여기에 언약이 찾아와요. 언약도 어렵지요. 그럼 바꿉시다. 하나님의 약속이 찾아오는 거예요. 약속이 찾아오게 되면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 이미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간음 안 한 게 돼요.

 

여러분이 만약에 결혼했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보, 나는 지금까지 바람피운 적 없어. 다른 여자한테 음란한 마음조차 품지 않았어.” 이것 간음한 겁니까, 간음 안 한 겁니까? 바람피운 적도 없다. 소주광고 달력에 나온 여자 보고도 절대로 음란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것 간음한 거예요, 간음 안 한 거예요? 이건 누가 봐도 간음 안 했지요. 간음할 잠재성 많습니다. 제가 여기 나이로 61세거든요. 61년 동안 간음 안 했다할지라도 내년 되면 보장 못해요. 내년은 안 살아봤으니까. 잠재된 간음자 돼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것은 간음 안 할 것으로 쳐주는 것이 아니고, 말을 바꾸겠습니다.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해.” 간음 한 거예요, 간음 안 한 거예요? 그게 바로 신약에만 최종적으로 적용되는 간음 안 한 거예요. 사랑은 모든 율법을 완성시킨다고 로마서 13장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게 로마서거든요.

 

만약에 내가 당신에게 남편도리로서 바람도 안 피우고 간음도 안 했다고 해버리면 이것은 바로 자기 의가 되면서 진정한 주께서 원한 약속의 완성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내가 망사스타킹이 안 됐기 때문에, 내가 찢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잘난 내가 계속 유지되니까 그 아내는 잘난 남편 뒷바라지한다고 스트레스 받고 나중에 우울증 걸립니다. “어이구. 잘났어요.” “이 정도야 빨리 밥 해내.” 이렇게 되면 자기 의로 상대방을 지배하는 그런 관계가 됩니다. 신약 시대는 주께서 모든 것을 다 찢어서 죄 없는 자만 돌로 쳐야 될 그런 원리가 적용된 시대가 이 시대입니다.

 

돌 판이 우리 속에 나올 때 내 안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언약 자체를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이여, 이렇게 십자가 언약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이 간음을 완성하는 사랑인 줄 압니다.” 하고 이걸 받아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우리 안에서 내가 자아를 상상하고 우리 안에서 예수님을 상상해서 그 상상된 내가 상상된 예수를 또 다시 내가 그분을 가져야 된다는 바깥에서 하던 행세가 안에서 똑같이 벌어집니다. 이거는 교묘한 지식이에요. 이러서는 안 되거든요.

 

그럼 언약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언약은 피 흘린 어린양과 마주치는 이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립니다. 그럼 죄인의 역할을 누가 하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죄인의 자리에 서있어야 되고 그것을 매일같이 되풀이해서 용서해주는 역할은 누가 하느냐? 성령을 통해서 언약의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우리를 계속해서 용서해주는 방식으로 언약은 우리 안에 자리 잡습니다.

 

이렇게 자리 잡아서 구원을 받게 되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신약 시대에는 이근호 목사에 의하면 사랑하는 것이 간음의 완성이다. 그렇다면 아내를 사랑해야지. 주여,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했으니까 사랑하는 재롱잔치 보세요. 이런 식으로 돼버리면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잘난 자기만 턱하니 버티고 있는 셈이 돼버려요.

 

그런데 오후 2시 40분에 사랑하다가 오후 4시 반에 아내가 차 끌고 장에 가다가 속도위반에 걸려서 육만 원짜리 티켓 끊고 나올 때 갑자기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지요. 그러면 2시 45분의 사랑이 왜 유지가 안 되지요? 그때 마침 예수님 재림하시면 어떡해요? 하필 오후 4시 43분에 재림하시면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하고. 생각만 해도 끔찍해. 하필 그 타이밍에 오시다니.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다음부터 걱정이 뭐냐 하면, 대비책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니까 깨어있으라 도적같이 온다니까 이제는 성냥개비로 눈을 감기지 않게 하든지, 쉬지 말고 기도하라니까 시간 재서 50분 기도하고 10분 쉬든지, 이건 그야말로 광신도입니다. 정신병자에요.

 

제가 중간에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죄를 안다, 모른다? 인간은 죄를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명령과 권면은 십자가 이후에 구원받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죄가, 우리가 미처 이것도 죄라고 할 정도로 죄를 더욱 더 풍성하게 만들어서 이미 그것마저 용서하신 분이 우리 안에 장착 돼있음을 다시 말해서 예수 믿고 더욱 더 잘난 나를 믿지 말고 예수 믿고 난 뒤에 더욱 더 내가 이 정도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있어서 오직 그분만,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6장입니다. 나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나는 예수님과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사도 바울 끝났어. 백날 성령 받았다고 해도 사도라도 지옥 가는구나. 이렇게 하지 마세요. 그것이 바로 진정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이 공통점이고 보편적인 현상이에요. 마태, 마가, 누가 제각기 보게 되면 자기 정립했다고 우기는데 그것이 사도 바울의 복음을 통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동일한 고백이 나올 때 그것을 후차적으로 교회라고 이야기하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이 세우는 것이 아니고 발생되고 출현되고 나타날 때에 우리가 애썼다고 하지 마시고 주께서 지금도 이 교회 가운데 애쓰고 계시다는 것을 체험으로 온 몸으로 만끽하라고 늘 우리 식의 교회는 어긋나게 돼있어요. 저 사람은 분명히 앞으로 이년 후에도 아마 교회 봉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엉뚱한 짓을 일으킬 때 “주여, 이것이 진정 교회란 말입니까?” “원래 그랬어. 원래 그렇다니까. 교회가 부서져도 교회는 부서지지 않는 거야.” 교회는 부서져도 그리스도 몸은 부서질 일이 없어요.

 

그리고 남들 욕하지 마. 육십 세까지는 안 그랬지? 내년 되면 네 몸에서 어떤 짓이 나올 때 너도 장담 못해. 하지만 주의할 것은 지금 죄인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은 것을 믿는 사람은 내년 되서 내가 깜짝 놀랄 죄가 나온다할지라도 그것마저 이미 용서가 된 상태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상황을 의도적으로 유발하신 겁니다. 갑자기 문장 길어져서 미안한데 문장이 길어질 수밖에 없어요.

 

다시 하겠습니다. 나는 저 사람 같이 되지 않았어.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란 말이죠. 그런데 같이 형제들 중에서 돈에 미혹 받아서 사기 치고 그런 사람 있잖아요. 그래서 저 사람은 신자 아니라고 했는데 갑자기 그 다음 해에 자기 집에 예상 못할 어떤 재정적인 어려움이 왔을 때 성도 여러분, 저도 인간입니다. 저는 천사가 아니었어요. 너무 무리하게 기대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번 일만 잘 되면 신앙생활 잘 하겠다고 편지 한 통 남기고 떠나버릴 때 얼마나 뒤에서 씹을까요?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몰랐다, 갑론을박한단 말이죠.

 

그럴 때 교회는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과연 그 교회가 엉터리 교회냐 하는 겁니다. 그거는 엉터리 교회가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뭔가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이 망대가 무너져서 18명 죽을 때 세월호 물에 빠져 안산 얘들 죽을 때 그것이 그 사람이 잘못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 너에게도 직접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너는 과연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지금 일어나기 전에 미리 보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럴 때 그런 일이 일어나도 믿음 지키겠다는 것이 성도가 아니고, ‘아니고’에 악센트, 저는 지켜낸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고 그런 일은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걸 지금 미리 믿는 사람은 그런 일을 당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본인의 믿음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 이것 정리 안 되면 타인을 통해서 시험 받아 낙담합니다.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다음 해봅시다. 죄인+의인도 아닌 죄인+피로 용서하신 그것, 그렇게 되려면 죄인으로 하여금 죄인 되기 위해서 모세언약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다윗언약은 무엇이냐? 둘의 차이점을 이야기하세요. 이것 신학교에서 신학생에게 적당한 문제에요. 모세언약과 다윗언약의 차이점은 뭐냐? 혹시 여기 신학교 다니는 분이 계시면 이렇게 하시면 정답입니다. 모세언약은 개인이 지키는 반면에 다윗언약은 왕이 되신 분이 항상 대표로 지켜서 율법을 못 지키는 다른 사람에게 공짜로 혜택이 주어지는 구조가 다윗언약입니까? 이해되시죠.

 

모세언약은 사적으로 지켜서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지키는 내가 복을 받고 못 지키면 내가 저주를 받는데 다윗언약은 한 분이 제대로 지키면 다른 사람은 그 혜택을 입어서 졸지에 그분의 백성이란 이름으로 단체로 입장이 가능한 시스템, 그게 바로 다윗언약이에요.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온 거예요. 다윗언약의 완성이기 때문에 다윗언약이 구원해주는 그 구원시스템을 견지하면서 성령을 통해서 한꺼번에 완전히 덮치게 하겠다는 거예요.

 

덮칠 때 나는 죄인인데 예수님이 의인이니까 나 아니고 주님이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의인이 되는 그러한 상황에 드디어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가 이야기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의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용하기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유명한 현대미술작가가 삼면화를 그렸는데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어요. 아마 경매하는 작품 하나에 200억 할 거예요. 그의 그림에 보면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일그러진 사람을 묘사해놨어요. 들뢰즈란 [감각의 논리]란 책에 이것을 많이 인용해놨어요.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일그러진 사람, 얼굴이 흉측한 괴물, 괴물이니까 피부가 벗겨진 거예요. 김태희나 전지현이나 영화배우 예쁘지요. 피부를 벗기면 안에 세포가 나오겠지요. 예쁠까요? 결국 예쁘다는 것은 피부만 껍데기만 예쁘다는 거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율법 안에서 구원받는 것,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의 완성입니다. 거기서 뭘 보느냐 하면, 나는 나 자신을 제대로 보게 돼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십자가 피 흘림 앞에서 죄나 의나 용서에 대해서 유일하게 아시는 분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뿐이에요. 우리는 생각하는데 하나님 계신 곳에 예수님 있다고 하는데 그거는 잘못된 말이고요, 예수님 계신 곳에 아버지가 있어요. 인간이 아는 하나님은 하나님 아닙니다.

 

아까 목사님 기도한 내용에 나오잖아요.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 갈 때 무슨 근거로 그런 짓을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근거 하에 그 짓을 했거든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이 정작 예수님한테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가 된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땅에서 죄인으로 이미 규정받은 분이 예수님 아닙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예수는 정치범이에요. 죄인이에요. 그런데 하찮은 죄인이 세상에 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어요.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만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의 모습으로 올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죄인으로 모습으로 오면 알아듣습니까? 모르지요. 왜? 우리는 잘났으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죄인이 죄인을 구원하는 방법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서 모세언약, 다윗언약의 완성이 새 언약입니다. 그 십자가 피 앞에서 우리를 다시 보게 하는 겁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지 확실치 않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거울 속에 들어가 있어요. 거울은 내 모습이 비치게 돼있는데 거기는 나 말고 다른 모습이 있을 때 우리는 들어가고 싶어도 유리면 때문에 못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주께서는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라는 거예요. 무슨 수로 들어갑니까? 성령의 손이 나와서 우리를 십자가 안에 집어넣으면 그때부터는 예수 안이라는 동그라미, 거울 속의 예수님과 우리가 함께 있게 되는 겁니다. 함께 있으면서 우리는 강도가 되고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되고 옆에 거울, 용서하신 분은 주님이 함께 있고. 우리는 하나에 필름이죠. 사진 찍히고 필름이 된 겁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일을 실제로 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디 나옵니까? 로마서 4장에 아브라함이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란 사람의 특징은, 그분이 믿음의 조상이거든요. 그분이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믿을 보여주거든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갈라짐이에요. 어떻게 갈라지냐 하면, 죄와 의가 갈라져서 합치될 수 없음을 그 빈 간격을 보여주는 것이 아브라함이란 탤런트의 역할이었습니다.

 

죄와 의로 갈라지기 전에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 또는 죄와 선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해서 선과 악을 인간은 차변, 대변, 장부에 기재해놓고 그것을 매개체, 매개란 연결체, 연결체로 누가 들어가 있느냐 하면, 자아를 여기에 집어넣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올 때는 선과 악을 통합시키는 자아를 빼버립니다. 이걸 빼면서 아브람이란 이름을 빼면서 아브라함을 집어넣어요.

 

그러면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가 뭐죠? 아브라함이 되어서 해야 될 추가적인 기능이 있어요. 그 기능이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잡습니다. “아버지, 뭐 하십니까? 제사 드린다.” “불쏘시개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지요?” “넌 몰라도 돼. 여호와이레,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셨어.”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산에 올라갑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입니다. 죽이려고 할 때 스톱! 멈추자 갑자기 수풀에 수양이 있지요. 하여튼 하나님도 미리 알려주면 얼마나 마음 편하겠습니다. 미리 알려주지 않고 잡을 때 알려줬습니다.

 

따라서 인간과 진짜 신과 접촉되는 것은 그냥 수양이 아니라 죽어야 될 사람을 대신한 어떤 무엇이거든요. 그러면 아브라함에서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나의 혈통이란 이삭에서 나의 노선이 통로가 이미 죽음을 통해서 하늘로 연결되는 다른 노선으로 노선이 갈라져요. 경부선, 전라선이 대전에서 갈라지듯이 하나님께서 갈라지면서 선과 악, 악과 선을 통합시키는 것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친히 준비하신 X, 친히 준비하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진정 선과 악을 통합시켜서 진짜 지옥 갈 사람은 지옥 보내고 그쪽에서 판정내리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는 거기서 자아 자리를 내놔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나 믿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나 믿지 않고 나를 완전히 들어내게 하신 그분이 내 자리에 계실 때 우리는 그걸 믿음이라고 하고,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조상이 되는 겁니다. 말로 하니까 정말 어려운데요. 말로 하지 말고 실제로 하면 어떻습니까? 하신다면 이렇게 되지요.

 

요한복음 8장에서 현장에서 간통한 여인을 바리새인이 데려왔습니다. 여러분, 그 바리새인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현장에서 죽여도 되는데 안 죽이고 질질 끌고 예수님한테 데려온 거예요. 졸지에 그 여자는 구원받았어요. 누가 데려왔습니까? 율법을 주장하는 율법이 우리를 몽학선생 만들어서 데려왔습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너를 고소한 자가 있느냐? 없지요. 여러분, 남한테 고소 안 받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지 않습니까? 심지어 뻔뻔스럽게 간통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소 안 받는 그 즐거움. 이거는 노선이 인간 노선이 아니고 다른 노선, 예수 안에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 골로새서 3장처럼 다른 노선에 가버렸어요.

 

그게 뭐냐? 그 뒤에 나오는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더 간단하게 하면, 누려. 누리는 거예요. 뭘 누리는가? 용서하심을 누리는 겁니다. 잘나서? 아닙니다. 훌륭해서? 아닙니다. 완벽해서? 아닙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주님 때문에. “주님께서 도대체 나 같이 아무것도 아닌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것만 증거할 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울 속에 함께 들어온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제부터는 예수님만 증거 됩니다. 나 아니고 주님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 “아이고, 집사님. 무슨 바람이 불어서 청소하십니까?” “나, 아니거든요. 나 아니고 주님이거든요.” “에이, 장난치지 말고요. 주님이라 하지 말고 무슨 기분 좋은 소식 있습니까? 얘 성적 올라서?” “아니거든요. 나 아니고 주님이거든요.” 무슨 뜻입니까? 내일 할지 안 할지 나도 장담 못합니다. 오늘까지만. 내일 목사님이 하라 해도 안 할 거야.

 

만약에 내일까지 이어지면 나는 나를 믿는 자가 되고 갑자기 이 안에 십자가 쳐다보던 죄인이 청소하고 난 뒤에 10월 1일 나는 청소를 말끔하게 한 죄인이라도 전적 죄인이 아니고 1% 착한 일이 섞여 있는 죄인이 돼버리면 이건 선과 악 사이를 통합하는 통합체에 괜찮은 나가 스며든 게 돼요.

 

죄인은 항상 뭐가 있든지 선과 악은 내가 판단해요. 내가 평가합니다. 저 사람보다 나으면 착한 거고, 저 사람보다 못하면 나쁘다고 내가 판단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평생 살 동안에 매일 일어나야만 하고 일어나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야 돼요. 왜? 로마서 7장은 우리보다 기니까. 내가 원하는 법은 원치 않고 다른 법을, 이건 계속 가야 돼요. 감사한 것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교회 청소하게 만들어서 청소하기 전까지는 “주여, 죄인입니다. 못났습니다.” 하다가 청소하고부터는, “뭐야, 사람들. 나 봐. 몸 약해도 청소하는데 당신은 놀면서 왜 안 해.” 갑자기 자신이 청소한 만큼 마일리지가 쌓여버려요. 그걸 성화라고 합니다. 이건 모든 불교에 다 있는 거예요.

 

예수님 증거하다가 자기 증거하거든요. 그런데 일부러 청소하게 하셔서 또 다시 나로 하여금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하셔서 이미 그 죄는 일방적으로 다윗언약, 새 언약에 의해서 해결이 되어버린 거예요.

 

죽었다는 것은 소멸이 아니고 사라짐이 아니고 망사스타킹, 오늘 이것 하나 기억하세요. 잘난 내가 갈갈이 찢어져서 그야말로 현장에서 간통한 여인처럼 주님 앞에서는 용서받았고 막달라 마리아처럼 못났지만 못난 강도, 못난 세리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그냥 사진 찍혀버렸어요. 사진 찍힌 것이 로마서 1장에서 8장, 거기서 나온 필름은 9장에서 16장. 그 9장에서 16장은 금요일에 계속 이어서 하겠습니다.

 

 

그대로 마치겠습니다. 기도는 금요일에 해야 되니까.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다음 금요일에 할 때는 창조와 종말이 진짜 종말이 있느냐, 처음에 창조가 있느냐? 그것이 십자가가 역사를 중간을 쪼개서 십자가 안에서 창조가 나왔고 십자가 안에서 종말이 미리 나오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를 예고편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관리자(IP:175.♡.188.230) 14-11-07 22:47 
20141003 미국뉴저지교회b

(강의:이근호 목사)

 

 

로마서 9장 3절을 제가 읽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아멘 안 할 줄 알았습니다. 중요한 대목을 다시 말씀하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자신 없으면 안 해도 돼요. 아멘 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이 말씀대로 실시할 테니까

 

자기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이용한다? 감사하게도 주께서는 로마서 9장 3절을 통해서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구원론으로 시작하면 구원파로 끝나지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그 이야기를 길거리에서 구원파에 다니는 사람한테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으면 상당히 당황하지요. 언제 구원? 11월 15일 오후 두시? 우리 교회에서는 그런 이야기 안 하는데. 구원을 받았으면 날짜를 기억해야지. 태어났으면 생일이 있듯이. 이렇게 나오면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응수해주시기 바랍니다. 구원이란 것이 어디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이렇게 응수해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언제 저주받았습니까? 그쪽에서 답변 못합니다. 구원이란 저주받은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당신은 언제 저주받았는데, 5월에 저주받아서 6월에 구원받았다고 돼야 되는데 자신은 중립지역에 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저주받아 놓고도 저주받은 상태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구원이란 말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주께서 구원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저주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소급해서 수용하는 사람에게만 이 말이 가능한 거예요. 중립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으로 갈까요, 천국으로 갈까요? 골라잡을 문제가 아니고 골라잡을 그런 권리나 선택이 우리에겐 아예 없었고 처음부터 태어나자마자 저주 속에서 죄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그리고 그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만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셨다고 믿어지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에서 끊어지는 것이 곧 저주임을 증거하는 용도로 사용하여 달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초반부터 어렵게 해서. 저번 강의하고 난 뒤에 어렵다고 질타가 날아왔어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제가 여러분이 놓치고 있는 것을 끄집어내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죄를 짓고 난 뒤에 이 세상으로 쫓겨났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는, 성령이 임해서 믿게 되어서 믿는 자가 되게 하시고, 전에 죄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했지만 성령 받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령 받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교회를 유지하게 되면 그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가 되어 살아가는데 이 성령의 공동체에 사도의 권면과 명령이 주어져서 말씀대로 살면 영광이 되고 말씀대로 못 살면 영광이 안 되는 교회가 되기 때문에 교회는 사도의 권면과 지시를 받아서 성령을 받은 상태기 때문에 충분히 지킬 수 있는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공동체를 통해서 영광 돌리면 이 성령의 공동체가 그대로 주님 재림하시면 천국에 가게 되고 천국 백성 된다.

 

이 이야기가 맞습니다. 이게 틀린 이야기거든요. 전부 다 틀린 이야기에요. 이거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고 이것이 성경에 나온 그대로 압축을 한 것이고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이런 식으로 나온다. 나오기 때문에 저는 틀렸다고 보는 거예요. 백 명이 봐도 성경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틀린 거예요. 이게 왜 틀렸는가? 이천 년 역사가 옳다고 이야기했는데 왜 틀렸는가? 틀린 것, 하나하나 지적해볼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죄를 지어서 이 땅에서 쫓겨났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지만 죄를 진 상태에선 이 땅에 인간이란 게 없어요. 죄인밖에 없어요. 죄인밖에 없다는 말은 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그 다음에 어떤 생각을 끄집어내고 성경에서 어떤 것을 참고할지라도 그거는 죄보다는 죄의 오류로 가는 모습인 거예요. 비록 성령을 언급해도, 삼위일체를 언급해도 삼위일체이란 이름으로 죄 짓고 있는 거예요. 심지어 예수님이 피 흘리고 그 피를 믿고 구원받는 것도 오류고 또 하나 죄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그런 생각 안 들었습니까? 다들 그렇게 하니까 동의하지요.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세요. 이미 죄를 짓고 죄 아래 있다는 말은, 죄 아래에서 바깥으로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고 이제는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 아래 있는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가 죄가 뭔지 모르고 죄 아닌 채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죄 아래 있는 거예요.

 

제가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당연한 말을 하는데 이것이 새롭게 들린다는 것은 정말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거예요. 특히 예수님을 믿어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 같으면 예수님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보다 아이큐가 높아요? 그 똑똑한 유대인이 예수님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배척했는데 우리가 다들 서울대학 나왔습니까? 뭐 그리 똑똑해서 예수님을 영접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의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믿어지게 돼있어요. 이 예수님을 선물로 받았기에 믿어진다는 말은, 예수님이 믿을 수 없는 존재로 너희 앞에 섰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가 저에게 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옆에 사람이, “목사님, 물이 있네요? 이 물 어디서 생겼습니까?” “누가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뻔해요. 누가 주셨습니까? 아까 질문은 내가 물을 가졌다고 했는데 상대방의 질문이 그 다음부터 바뀌기 시작합니다. 주체가 바뀌어요.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고 누가 당신에게 물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까? 당신은 주체 자리에서 비껴나고 누가 당신에게 이 물을 줬느냐고 할 때 정말 선물을 받은 사람은 어떤 분이 물을 줬다고 해야 이게 정답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당신은 믿음이 생겼느냐고 하니까 기도를 빡세게 해서 믿음 생겼습니다. 사십일 금식해서 믿음 생겼습니다. 서울 아니네. 이거는 서울이 아니고 노동이네. 종교노동. 누가 주셨습니까? 글쎄. 성경에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니까 믿음을 선물로 준다고 하니까 그 믿음 가지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열심히 노력하니까 그 믿음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여러분, 선물이란 주기 전에는 추구할 수 있는 그런 생각도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제가 말을 하면서도 너무 어렵게 하는지 미안해서. 지금 녹음되니까 다시 들어보세요.

 

선물은 예상하는 게 아니에요. 예상한 걸 주게 되면 그거는 선물이 아니고 어떤 협박이에요. 성경에 믿음을 선물로 준다고 하는데 이것 주세요. 이건 협박이지 선물이 아니라니까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믿음이란 선물을 받았느냐고 하니까 내가 주님을 협박하니까 주님도 못 견뎌 줬습니다. 이러면 그 믿음은, 주님 주신 것+나의 협박성, 이것이 포함된 겁니다. 믿음은 올 줄도 몰라야 돼요. 받으니까 내가 놀란 거예요. 여러분이 놀란 거예요. 이것 왜 주시냐고 오히려 따져야 돼요. 네가 주가 아니고 주가 주거든. 쓸데없는 인생을 살게 됐네. 난 그 인생 원하지 않았습니다. 받아. 원하든 말든 내가 주면 받게 돼있어. 이게 선물입니다.

 

물이 갈급한데 물주더라. 이건 아니에요. 물 먹고 싶지 않은데 물 주게 되면 “주여, 내게 속한 상황이 아닙니다. 가져가세요.” 하니까 물 줬다는 말은, 너 자체가 네게 속한 상황이 아니야. 네가 어디서 살든지 몇 살에 죽든지 그것은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네가 걱정하면 믿음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 것이라 여기는 것을 몽땅 선물로 바꿀 거예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사람은 거기서 멈추는 경향이 있어요. 그 다음 말은 안 들으려고 해요. 가져가신 자도 주님이요. 주실 때는 고맙다 하고 그 다음 가져갈 때는 안 빼앗기려고 악을 써요. “주여, 줘놓고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빼앗아가려면 왜 주셨습니까?” 주고 빼앗는 가운데서 뭐가 바뀌느냐 하면, 내가 내 주인이 아니고 원래 내 주인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사도의 권면과 명령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거룩한 생활을 해서 거룩한 사람만 천국 간다고 했지요. 이러한 사고방식이 인간의 죄에서 나왔습니다. 내가 거룩해서 천국 간다는 그런 것은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거룩하고 우리는 주님한테 붙어있는 지체가 되어서 주님께 붙어있다는 이유 때문에 거룩해지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단독적으로 거룩하게 되면 그때부터 주님과 독자선언, 빠이빠이 하세요. 나 혼자도 거룩 되는데 주님이 왜 필요합니까?

 

최성수가 불렀던 유명한 노래가 있지요. <동행> 동행의 뜻이 뭡니까? 같이 사는 거잖아요. 주님이 같이 왜 살아요? 거룩 될 자질이 있습니까? 없으니까 동행해 주시는 거예요. 노사연이 불렀던 <님 그림자> 님 그림자의 내용이 뭐예요? 달은 떴는데 저만치 앞서가는 님이잖아요. 뒤따르는 여자는 자기 그림자 밟아요? 지는 좀비에요. 그림자 없어요. 주님의 그림자 밟고 가는 거예요. 지금은 님 그림자 없어서 슬프다는 노랜데 저만치 앞서가는 님을 밟는 거예요. 님이 가는 곳에 가겠다는 겁니다. 불이라고 물이라도. 님 없으면 나는 죽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결혼이라는 것은 억지로 붙어살면 결혼 되는 게 아니에요. 그대 없이는 죽겠다고 해서 하는 게 결혼이여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려면 다 이혼해야 되지만 할 수 없지. 대충 살지가 아닙니다. 당신 없으면 결혼도 안 했어. 물론 말도 안 되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이게 왜 죄에서 나올 수 있는 형태냐 하면,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이런 논리에 보면, 이 논리로써 내가 죽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거짓이에요. 이 속에서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야겠다는 것만 증명되지 이러하기에 나는 죽는 것 맞는다고 증명할 수 없어요.

 

인간이 아무리 과학, 신학과 철학이 발달해도 그래서 나는 죽은 자 맞는다고 그걸 증명하는 목적으로 논리를 전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잘났다는 걸 증명하는 논리는 되지만 나는 이미 죽은 자에 불과하다고 쓸데없이 그걸 증명하는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남은 다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될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도 오늘도 악착같이 살잖아요. 교회 나와서.

 

제가 본 <매드맥스>란 호주영화의 첫 장면에 때는 2040년도 인류는 핵폭탄으로 다 죽었다. 하지만 폐허된 뉴욕항구 험악한 곳에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았으니, 하고 난닝구 다 찢어진 것 입고 총 들고 그는 살아남았다. 이것부터 영화가 시작되거든요. 남은 다 죽었는데 나는 살아있다. 그것 우리 모습입니다. 나만 기어이 영원하리라. 반대로 해봅시다. 남은 다 살았는데 나만 죽었다. 이건 재주 되게 없는 얘기죠.

 

이런 논리로서는 절대로 인간은 죽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논리는 거짓입니다. 거짓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십자가에 예수님이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활동하는 모든 것은 바로 죽은 자이기에 토해놓는 죽음의 이론이고 철학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은 자이기에 여기에 폭 빠져있다고 해도 같은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죽은 거라면 생명으로 가는 논리는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네가 뭔데 생명을 넘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 하면 죽은 것이고, 죽었으면 죽은 채라도 하란 말이죠. 죽었는데 살겠다는 것은 덜 죽은 거예요. 확인 사살해야 됩니다. 덜 죽은 거거든요. 주의 말씀이 죽었다고 하면 그건 죽어있어야 돼요. 옛날 sbs 코미디에 이런 게 있어요. 한참 연기하는데 성우가, 그래서 누구는 죽었다고 하니까 연기하다가 곧장 다 죽어 버려요. 무슨 일을 하다가도.

 

그래서 인간은 죽었다고 하면 이게 하나님의 지시와 뜻에 의해서 자체로 죽은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의 길을 터놓은 적이 없습니다. 혹시 올까봐 두로 도는 화염검으로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완전히 막아놨어요. 어떤 누구도 생명을 논할 수 없습니다. 죽은 것 맞습니다.

 

그 다음 질문입니다. “인간은 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까?”라고 여러분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정말 성경에 합당한 말이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둘로 나눴습니다. 만든 것과 있음으로 구분했습니다. 만든 것과 있음만 구분하면 성경은 해석이 돼요.

 

있음이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보면,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장차오실 분,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 처음도 있었고 나중도 있었고. 있었다는 말을 쓰려면 지금만 있다가 없어지면 있었다는 것에 부합되지 않아요. 있으려면 영원토록 끝까지 있어야 되는데 그 있었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있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다른 사람은 뭐냐? 만들어졌다고 이야기해요. 주님만이 영원함을 보여주는 증거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사라져야 됩니다. 기분 나쁘십니까? 만들어졌는데 나이 많아서 돌아가셨다. 참 잘하셨어요. 왜? 그게 만들어진 것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들어져놓고 주님처럼 계속 영원히 있으려고 시도하려면 이것은 만들어졌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주제에 감히 하나님 되려고 하는 시도의 양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어떻게 합니까? 제가 오늘 강의가 초장부터 어려워서 어려울 때는 결론을 먼저 던진다고 했지요. 이게 친절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습니다. 만들어진 자로서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중요하기 때문에 또는 결론부분이기 때문에 적어보겠습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는 것이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 영원히 있음, 알파요 오메가인 분이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주님께서 이것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들어진 우리가 대표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모든 우리의 신앙생활은 다 오류고 거짓말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뭔지 보여주겠습니다. 쓰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교회에서 찬양하는 것만 신앙생활이 아니고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결론부분이기 때문에 이해를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래. 아들아, 차 조심하고 공부 열심히 해야지.”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주님께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평소의 일을 통해서 신앙을 보이기 원합니다.

 

모여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이 자체만으로 따로 신앙생활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교회 와서 신앙생활 시작해볼까? 집에 가면 일상생활해볼까? 그것 아닙니다. 정말 진정한 신앙은 종교의 허구를 갈아엎고 평소에 나는 무엇에 주력하면서 살아가는지 그게 바로 우리의 대표적 신앙생활이 돼야 되는 겁니다. 평소에 자기가 꾸며낸 연출된 신앙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어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이게 어떻게 신앙이 되는지 보세요. 이걸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앞에 뭐가 붙어요. “만들어진 아버지와 만들어진 어머니, 만들어진 제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만들어진 아들아, 공부 열심히 해서 다시 만들어진 아들로 돌아오너라.” 이 만들어짐은 하나님에 의하면 죽게 돼있습니다. 다 죽어 버려요.

 

내가 아버지한테 인사하고 효도하고 아버지는 자식의 건강 걱정하는 이 자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라지고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신앙생활입니다. 산수 100점 맞고 온 상황에서 죽어야 됩니다. 이것이 사실이에요.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꾸민 신앙생활 속에는 아들 죽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지요. 그래서 주님께선 그걸 신앙생활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만들어진 자리에 만들어진 속성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면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내 아들, 내 부모 죽는다는 게 어디 나오느냐? 히브리서 1장 10절에 나옵니다. 성경에서 그런 것만 찾는다고 욕하지 마세요. 성경에 그런 게 있어요.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러니까 만들어짐 속에 저와 여러분도 포함돼있지요. 그 다음에 보세요.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요” 내가 지금 잘못 봤습니까? 멸망 속에 우리도 포함돼있지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만들어졌습니까? 멸망하세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찢어진 난닝구 입고 핵폭발 일어나고 난 뒤에 자기만 기관총 들고 일어나는 게 신앙생활 아니고 멸망하는 역할을 하세요. 멸망해야만 한다는 것이 믿어질 때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만들어졌기에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은퇴를 해야 사라져줘야 진짜 영원토록 알파요 오메가는 오직 주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활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 무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져야 되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오케이. 이렇게 돼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신앙생활이라면, 우리는 없어질 것인데 왜 만들어졌는지가 등장하겠지요. 이제부터 제가 말씀드리겠어요. 보신각종이 있지요. 광복절 그리고 1월 1일에 유력인사들과 무작위로 뽑힌 서울시민들이 여기서 종을 칩니다. 보신각종을 치면 소리가 나지요. 묻습니다. 소리가 보신각입니까, 보신각 아닙니까? 소리는 보신각이 아니지요. 보신각에서 나왔지요. 하나님이 왜 만들었느냐? 거기서 소리를 끄집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소리는 다른 말로 하면 리듬이에요.

 

세례요한이 왔을 때 사람들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당신은 제사장입니까? 아니요. 당신은 선지자입니까? 아니요. 정체를 밝혀라. 너는 누구냐? 나는 소리로다. 나는 보신각에서 울려나는 소리에 불과하다. 보신각은 내 뒤에 온다. 영원히 있는 존재는 내 뒤에 오고 나는 쇠해야 되지만 그분은 흥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이고 구약의 완성이에요. 뭘 자기를 구원받아. 몇 날 며칠에 구원받았습니까? 그걸 왜 묻는데? 말려들어간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도를 아십니까,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인간이 범죄 해서 오직 자기만 살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악마가 간파했기에 나는 당신의 행복을 돕고자 합니다. 이렇게 하면 행복하십니다. 그게 바로 마귀가 하는 짓거리잖아요. 도를 아십니까, 대순진리회가 했든 심지어 교회에서 했든 간에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소리에요. 소리는 리듬입니다. 이걸 현대용어로 바꾸면 정보에요.

 

홀로그램이라는 게 있거든요. 자외선을 두 군데 비춰서 빛의 간섭효과로 그냥 보면 얼룩무늬지만 안경 쓰고 보면 실물,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 그것은 필름이거든요. 필름 안에는 정보가 담겨있는 겁니다. 그 정보만 빼내는 거예요. 그게 세례요한의 소리입니다. 내가 진짜 있음 앞에 나도 있다고 할 입장이 못 되고 그런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빨리 등장해서 빨리 역할하고 사라져줘야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 생명책이란 게 있지요. 생명책 명단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생명책이 어떤 책이냐 하면, 말라기 3장 16절에 보면, 기념 책이에요. 무슨 기념 책이냐 하면, 평생 동안 주님을 기념했던 명단들이 거기 나와 있습니다. 자기 뽐내는 책이 아니고 자기를 기념하는 책이 아니고 주님을 기념하는 책이 곧 생명책이라. 이것 중국교회에서 할 것을 미리 당겨서 하면 안 되니까 이 정도로 합시다.

 

여기 있는 소리, 리듬이라 하는 것은 물체가 있는데 거기서 리듬이 나왔고 소리가 나왔다. 따라서 만들어진 자들의 목표는, 나는 일개 정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물체에서 정보가 나오게 하는 그 솜씨와 능력은 누가 때려줘야 돼요. 때려줘야 소리가 날 것 아닙니까.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릴 만드신 그분이, 내가 만들었다고 먼저 와서 접촉해주시면 그 접촉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나도 모르는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보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이것이 만들어진 목적입니다.

 

이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세상에 모든 것은 오직 주를 위해서 만들었고 주로 말미암아 만든 거예요. 창세기 1장 아무리 들여다봐도 안 나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다고 나왔지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안 나오거든요. 그래서 신약에 있는 작은 소자가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큰 자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 목적을 비로소 알게 된 사람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있다는 아니니까 존재는 아닌 거예요. 존재란 말이 어렵기 때문에 있다는 말로 계속 갑니다. 있다는 것은 소리다. 그러면 방금 제 이론에 의하면 누가 자극을 해줘야 된다. 자극을 하지 않으면 나는 영원하다. 신을 닮아서 남은 죽어도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된다는 것만 남는 거죠. 그렇게 남은 사람들이 죄거든요. 주님이 자극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유지되는 자기 자랑만 자기만 기념하는 소리가 자기 가문, 자기 가족자랑, 그것만 계속 리듬으로 나오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쏟아내는 것이 무엇인가? 그걸 지금부터 잠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이 안 왔을 때 주님이 오지 않았을 때에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게 뭐냐는 겁니다. 그걸 왜 알아야 됩니까? 그걸 알아야 자기 자신부터 해서 남들이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인지 분간할 수 있잖아요. 툭 치면 예수님이 나와야 될 건데 툭 치면 지 자랑질하게 되면, 나는 있다, 나는 지금도 살아있지만 천국 가서 영원히 산다. 맨날 자기가 존재도 아닌 게 존재 행세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나는 있다가도 빨리 은퇴를 해야 되고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진정 나를 있게 하신 분이라고 예수님만 증거하게 된다 이 말이죠.

 

그걸 알기 위해서 제가 신앙생활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이라고 했지요. 그처럼 교회에서 말하는 것 말고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뭐냐 하면, 이런 겁니다. 보신각에서 소리가 나왔다. 보신각은 그대로 있고 보신각에서 어떤 효과로 나왔다고 할 때 이 사람들은 손을 번쩍 듭니다. 보신각은 물질로 돼있고 물질은 분자로 돼있고 분자는 원자로 돼있고 원자는 핵과 전자로 돼있고 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돼있다. 이건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나오거든요.

 

소리라고 하는 것은 이쪽에 있는 물질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에너지가 손상된 그만큼만 소리로 나온 거예요. 이게 학교에서 배운 겁니다. 소리는 그냥 음파에너지지요. 에너지의 향상입니다. 보신각은 물체지만 에너지 덩어리에요. 에너지 덩어리가 어떤 누가 치면 소리가 나오니까 이것이 물리학에서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성령을 받지 않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과학을 진리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 이야기하는 겁니다. 유식한 척해도 그뿐이에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과학만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그 과학이 뭔지 알아요? 유에서 있음에서 역시 있음이죠. 있음에서 있음으로 분산된 겁니다. 없는데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어떤 것도 먼저 있었고 그 있는 것이 모습만 바뀔 뿐이지 있음이 없어지지 않고 없음 자체가 애초부터 없다는 거예요. 없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세상에 우리가 놓여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는 진리입니다.

 

그것을 제가 방금 과학이라고 했지요. 저와 여러분이 다 아는 상식을 이야기해봅시다. 과학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으로 나눕니다. 자연과학은 물리학, 생물학, 의학 이런 것이고 사회과학은 경제학, 경영학, 언어학, 심리학 이런 것이고 인문과학은 영어 또는 수학, 신학, 철학 이거지요. 과학을 사람들은 진리라고 하지요. LG화학연구소가 신약을 개발했습니다.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과학이지요. 과학이란 예측한대로 반드시 나와야 과학에선 진리로 수용합니다. 만약에 다른 게 나오면 진리로 수용하지 않는 냉철한 이성이 작용합니다. 진리입니까?

 

우리가 마귀가 어떠니, 신이 어떠니 하는 것은 교회 내에서 하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학교 다녀오겠다는 말은 불교신자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학교 다녀오겠다는 말이 잘못된 줄 몰랐지요. 불교신자는 뭘 모르느냐 하면, “만들어진 아버지여, 만들어진 어머니여 만들어진 내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혹시 학교 파하고 집에 오기 전에 만들어진 속성대로 돌아가셔서 소리로 변해도 나는 섭섭지 않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학생 봤습니까?

 

LG연구원이 기도하면서 드디어 힌트를 얻어서 약을 개발해서 수많은 사람을 에볼라 바이러스에서 구했다 합시다. 그게 진리입니까? 그 속에 뭐가 빠져있어요? 나는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진즉에 죽어도 할 말 없다는 그 느낌이 신약 개발하는 가운데 오겠어요, 안 오겠어요? 안 오지요. 다른 제약회사 다 죽어라. 기도까지 하면서 신약 개발하는 나는 가치 있다. 이게 바로 악마의 모습이잖아요.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다고요. 이게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로마서 16장에 나오니까 제가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어떤 목회자가 개척 교회하는데 사람 다 떠나고 두 명 남았습니다. 그래서 생계가 안 되니까 “목회해서 자식은 먹여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밥을 먹어야 목회를 하지요.” 기도하는데 갑자기 옆의 교회 분열되어 50명 왔습니다. 그것도 돈 되는 사람만 왔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나 같은 인간은 죽어야 돼. 그런 생각이 들겠어요? 아니면 이 지역에 진정한 살아있는 종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다른 목사는 다 죽어도 나만 살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마귀에요.

 

피타고라스는 세상의 모든 것은 수의 질서로 봤거든요. 그러면 수학자가 새로운 집합론을 연구하고 새로운 이론을 펼칠 때에 논문을 발표해서 필즈상을 받고 할 때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이 작업을 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내가 바로 나의 영광과 나의 명예를 위해서 지금 하나님께 기도하는 나의 신적인 요소로 뜨려는 육의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구나. 나는 이 논문 발표하기 전에 교통사고로 죽어 마땅해.”라는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진정 그리스도가 작용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온 모든 결과는 누구 작품입니까? 주님의 작품인데 이게 주님의 작품인 이유가 정말 훌륭한 논문을 써서가 아니라 그 작품 과정에서 내가 미처 몰랐던 죽어 마땅한 그저 만들어진 멸망되어 마땅한 한 사람일 뿐인 것을 깨닫게 된 사실로 인하여 진리가 된 겁니다. 자기 부인된 거예요.

 

다른 목사 다 죽어라. 나만 목사다. 왜? 나는 기도 응답이 되었으니까. 너는 기도 응답 안 되니까 죽어라. 이것이 바로 악마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진정 주의 종으로 바라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의 역사를 눈으로 목격해야 믿겠다는 심보가 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아요. 내가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밀칠 때 그 순간 하나님이 예수님 편에서 나타나요. 내가 사랑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수님이 나한테 해준 게 없다고 빠이빠이 할 때 밀칠 때 밀치는 그 자리에 아버지가 함께 있음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나는 주님 편에 있지 않고 주님만이 아버지 편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특히 아까 처음에 했던 것이 다 인간의 죄악 된 인간의 신학에 해당된다. 신학이란 이름의 과학에 불과하다는 것은, 있는 나를 천국으로 보내는 천국에도 있는 나, 있음에서 있음으로 이어지는 성경구절을 차용한 큐티해서 얻어낸 그런 아이디어의 뭉치기 때문에 나는 저주받아도 마땅하다는 생각이 절대로 들지 않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그건 진리가 아닌 거예요. 로마서 9장 3절과 어긋나는 겁니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가 시간인데 시간은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게 있어요. 또 어려운 것 시작했다. 또 하나는 카이로스, 그리고 아이온, 이 세 가지가 성경에서 쓰이는 시간입니다. 이 세 가지를 성경에서 사용한 이유가 있어요. 크로노스는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로, 이런 시간관이에요. 이건 죄악 된 우리 몸의 (시간)의식이 항상 이걸 느껴요.

 

과거, 현재라고 할 때 과거의 누적이 현재가 되는데, 그냥 과거의 누적이 현재가 아니고 과거를 기억으로 변형시켜서 현재를 만드는 겁니다. 왜 현재가 과거의 체험 중에서 기억할 것만 기억하느냐 하면, 현재 자기가 만들어짐을 부인하고 있음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료들을 기억 속에서 편집해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고생한 것도 다 주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그럼 고생한 게 뭐냐? 지난번에 사업하다 망한 게 고생한 것이다. 여러분, 사업하다 망한 게 고생한 겁니까, 일곱 살 때 친구와 싸우다 코피 터진 게 고생한 겁니까? 지금 자기가 사업 망해서 섭섭하니까 과거에 친구와 싸워 코피 터진 건 잊어버리고 사업이 망했다는 것을 현재 자기가 회개하고 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기억에서 뽑아내는 거예요.

 

베르그송이란 철학자가 이걸 증명해냈어요. 사람의 현재란 절대로 과거와 일치되지 않다. 편집하는 거예요. 그 편집을 얼마나 했으면 꿈속에 나타납니까? 프로이드는 꿈이란 편집이라는 겁니다. 의식은 무의식을 절대로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무의식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무의식이 의식이 납득이 가도록 일방적으로 의식에 의해서 편집되고 조작될 때 그걸 꿈이라 합니다. 그래서 꿈은 해석이 되지만 무의식은 해석이 안 돼요. 꿈 해석은 의식이 자기 변명하기 위한 해석이지 진짜 무의식은 해석이 불가능한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이란 현실의 나를 만들어지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기어이 계속해서 나를 있음을 붙들려하는 거예요. “주여, 이 정도까지 왔는데 지금 죽이면 섭섭합니다.” 자꾸 죽이지 말라는 거예요. 전쟁영화에서 엑스트라는 원래 시나리오대로는 총 한 방 맞고 죽게 돼있어요. 그런데 총을 맞고 빨리 죽어야 되는데 안 죽고 있는 거예요. 카메라에 지 얼굴 다 나옵니다. 주인공 따로 있는데 엑스트라가. 감독이, “컷! 다시.”

 

만들어진 것은 여러분, 또 잊어버렸지요. 소리입니다. 소리는 자기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무조건 살아야 된다는 나를 주님의 뜻에 의해서 움직이는 소리에 불과하다고 변형시킨 그분만 증거하면 됩니다.

 

강의 새로 합시다. 물아, 미안하다. 선물 받았습니다. 이게 접니다. 묻습니다. “당신이 물인데 한 15년 물 생생하겠지?” “아니야. 선물 받은 거야.” 그 다음에 질문이 바뀝니다. “넌 언제까지 건강한데?”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니고 “누가 너를 건강케 해?” 또는 “누가 너를 몸을 망치게 해?” 질문을 “너로 하여금 만들어진 존재로 하게 하신 그분이 누군데?” 할 때 “그분은 진짜 영원히 있을 주님이야.”라고 증거하라고 병들게 하기도 하고 낫게도 하고 나은 후에 또 들게도 하고 하나님 자기 마음대로 하니 붙잡을 수 없어요.

 

우리는 주님의 정보기 때문에 정보만 나오면 되는데 지금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정말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존재에 집착하고 있는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현재에 집착이 있으니까 성경에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선악과 따먹었지요.

 

지난 시간 복습해봅시다.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죽어봐야 나중에 무덤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다 호출하기 때문에. 그때 주님 진작 믿을 걸. 그래도 소용없어요. 무덤에서 모든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모든 사람이 죽지 않는 이유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지 않아요. 그런데 죽는다는 것은 있음의 말씀이에요. 예수님 입장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에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 말씀 봤잖아요. 주님이 죽으심으로 나처럼 너희도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죽님의 죽음을 증거하는 용도로 하면 되는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우리는 죽어있어.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해야 돼.”라는 소리가 그 정보가 자극을 안 받아서 나오지 않는 거예요. 언제 나오느냐? 죽고 난 뒤에 지옥 가서 주는 주시라고 고백하게 돼있어요. 제가 이야기해도 너무 섭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게 섭하고 자시고 간에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만 안 해도 이런 이야기 안 합니다. 실제로 아무도 부활한 사람 없는데 혼자 부활해서 우리의 모든 사고방식을 뒤집을 판이에요.

 

부활만 안 해도 너 죽고, 나 죽고 이러면, 우리가 예상해서 “인간은 그냥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야. 오케이. 됐어. 살 동안 살자.” 이러면 되는데 우리 허락도 없이 죽은 자가 덜렁 살아나버렸으니까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이에요? 주님의 부활을 맛보고 정상이 되고 싶지만 주님께서 부활하고 나니 부활을 포함해서 정상이 되려고 하니까 그분을 우리가 밀쳤잖아요. 그러니까 밀친 그분이 부활했으니까 그분이 정상이라면 졸지에 모든 인간은 다 비정상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팩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걔가 커서 예수님을 죽이게 되는 그런 소리를 내게 되는 겁니다. 효자 같지요? “하나님이여, 저는 효자니까 어떤 경우에도 나만 살려주옵소서.” 이러고 있는데. 효자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고 할 때 거룩의 기준을 자기가 뽑아냅니다. 어디서 뽑아내느냐? 과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이 벌어진 것을 자아를 집어넣어서 봉합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선과 악이 봉합되지 않고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그럼 죽음은 뭐냐? 선과 악이 봉합되지 않은 채 벌어진 것이 죽음이에요. 이것이 합치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안 죽으니까.

 

그런데 이게 죽은 거거든요. 주님께서 오호라 주의 이름으로 찬양하리라. 선과 악을 하나로 만들어서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진노라는 모습과 긍휼이라는 모습이 나올 때 주님께서 봉합했다는 결과로 그것을 보신각종처럼 우리를 치면 우리 속에서 진노가 무엇이며 긍휼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그런 소리로 이 땅에서 활동하게 돼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과 저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늘 결부합니다. 왜? 신앙생활이란 교회에서 우리끼리가 아니라 실제 있는 것을 따와야 돼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전두환은 내가 알기로는 불교신자거든요. 그럼 저주받은 자란 안목이 나올 수 있다. 우리가 그런 안목이 있다면 소리로써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네가 감독으로 악한 일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닙니다. 우리는 선악과를 내가 봉합했기 때문에 선은 취하고 악을 버리면 거룩인 줄 압니다. 이것은 있는 나를 계속 있게 하는 나의 죄악 된 본성의 발동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거룩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말씀대로 따랐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크로노스, 우리가 알고 있는 몸이 지니고 있는 육이 지니고 있는 과거-현재-미래란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전체를 과거-현재-미래라 하는 모든 것을 아이온에 집어넣습니다. 아이온은 세대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세대는 개인용이 아니고 인류 전체를 하나로 통합해서 시간 속에 집어넣을 때 그것이 아이온, 우리말로 세대입니다. 너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 세대가 기적을 원하지만 표적을 원하지만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내가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이것이 에베소서 2장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참 에베소서 2장은 겁나는 이야기인데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인데 너무 겁나서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것은 전두환이고 노태우 관계없어요. 인간이십니까? 그러면 불순종 영 안에 갇혀 살았습니다. 이 세대 속에 살았습니다. 같은 말이에요. 못 빠져나옵니다. 이 세대 자체가 모든 인간을 다 아우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이 세대를 모르고 어차피 태어난 자체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적으로 악하고 음란한 그 세대에 소속물인데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크로노스를 작동시켜서 어제보다 오늘 더 낫다고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대에서 자기만 따로 빼달라는 그런 주장입니다. 나만 살고 남 다 죽으라는 이 말이죠. 내 앞에 무릎을 꿇으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이온에서 어떻게 구원하느냐? 카이로스입니다. 이걸 성경에서 ‘때’라고 이야기해요. 여자여, 아직 내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개입이 되지 않았어요. 내가 보신각 작업을 줄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때가 되면 이게 갈라집니다. 갈라지면서 묵시와 역사가 만나는 순간입니다.

 

제가 뉴욕교회에서 강의할 때 멀리 보면 지평선, 수평선 보이는데 가까이 가 보세요. 선이 보입니까? 5키로 전방에 보이던 선이 현장에 가면 없어요. 선이 어디 갔지요? 묵시와 역사가 함께 있는 거예요. 멀리서 보면 보이는데 가까이서는 같이 있어요.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묵시가 교회에 있다고요?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여기 안에 묵시가 있어요. 뭐만 붙이면, “만들어진 아버지, 만들어진 어머니여, 내가 학교 파하기 전에 돌아가셔도 주의 뜻인 줄 알고 순종하세요.” 이게 묵시에요. 이게 팩트에요. “어머니, 내가 수학 시험 100점 맞고 와도 좋아하지 마세요. 나도 만들어진 존재인데 100점 맞고 오다가 자동차에 치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각오하세요.” 이게 묵시와 역사의 만남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모든 인간은 죽은 세대 속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충분한 소리로써 제 역할을 다한 겁니다. 내가 있어야 된다는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있음은 알파요 오메가인 그분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분이 카이로스, 때를 따라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면 우리가 선물을 받은 겁니다.

 

우리가 선물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바늘로 쑤셔서 나에게 바늘의 효과가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내 안에 잠재돼있던 만들어진 속의 정보가 나오는데 그 정보에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인지, 안 받은 사람인지 판정이 나는데 그 정보가 뭐냐? 주를 사랑하는 자는 저주받지 않고 축복 받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진노와 긍휼을 우리가 보여준다면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강의하고 난 뒤에 성 목사님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했어요. 목사님의 설교는, 침도 작은 침이 아니고 기다란 큰 침으로 쑤시기 때문에 잘못 맞으면 작살난다는 거예요. 우리는 끝까지 갈 때까지 가야 됩니다. 어설프게 신앙 흉내 내서는 안 되고 관통해야 돼요. 도대체 누가 신앙생활 못하게 합니까? 그거는 일상생활에서는 효도인 척하고 신앙생활을 교회에서 하려는 우리가 자로 신앙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시편 136편에 보면, 해를 지으신 분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지요. 해를 보라. 너보다 훨씬 철이 있다. 해는 자기 영원함을 보이잖아요. 무엇의 영원함? 인자하심의 영원함을 보이잖아요. 별을 지으신 분에게 찬양하라. 주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나의 영원함을 찬양하라. 댕~ 하고 소리가 나야 되는데. 우리에게 나오는 소리는 유에서 유가 나오는 소리에요. 이렇게 훌륭하니까 더 살아야 된다는 자기의 생존의지만 나오는 그런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나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것만 나오는 거예요.

 

목사님, 그래도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까? 여러분, 안 죽습니다. 그런데 인자의 긍휼, 주님의 속성이 안 나오면 그거 죽은 겁니다. 방금 안 죽는다며? 안 죽거든요. 안 죽는데 그게 죽었어요. 분명히 안 죽는데 주님께서는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죽었다고 하는 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진노와 긍휼이 안 나오니까 죽은 거예요. 그러면 죽으면 죽습니까? 죽으면 안 죽어요. 왜? 나중에 마지막에 무덤에서 끄집어내서 지옥 보내니까. 지옥 가는 사람 안 죽어요. 지옥에서 살아있어요. 그런데 그게 죽은 거예요.

 

성경에 영과 육이라는 게 있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에 보면,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렇게 돼있지요. 영과 육은 관계로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 관계돼있는 사람은 영이고 그리스도의 작업을 받지 못한 사람은 육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났으면 영이에요. 이렇게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선물로 줘야 육에서 영으로 갑니다. 영에 속한 사람일 경우에만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채로 자기가 신의 흉내 낸 사람이 육이란 걸 압니다. 따라서 육이 알고 있는 인간의 존재는 육과 혼과 영으로 돼있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육과 혼과 영은 뭘 근거로 하느냐 하면, 내가 있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내가 있음이 아니고 만들어진 거거든요. 만들어질 때 주께서 죽이면 죽이시고 살리면 살리시고 주님 마음대로 합니다. 그 관계가 바로 영의 관계에요.

 

분석하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분석해서 알아서 내가 이중중생, 이게 워치만 니 주장인데 육에서 혼으로 한 번 점프하고, 혼에서 영으로 점프하면 두 번 거듭나야 그게 영생 얻는다는 거예요. 기존교회에서 하는 중생은 첫 번째 중생이고 우리 지방교회에 와서 한 번 더 거듭나야 천당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무슨 노림수입니까? 살고 싶습니까, 행복하고 싶습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혹 하고 말려들었지요.

 

관계입니다. 관계라는 것은, 우리는 나뭇잎의 물방울 같아서, 제가 관계라는 어려운 말을 했는데 사실은 야고보서에서는 간단하게 돼있어요. 너희는 안개니라. 야고보서 4장 13,14절에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는 주님의 관계일 뿐이니라. 독자적으로 존재라고 주장하는 그것이 아니니라. 너는 주님의 관계기 때문에 그 뒤에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리니. 제가 지금 공자, 맹자 책 폈습니까? 야고보서 4장 14절, 15절 읽고 있잖아요. 성경에 있잖아요. 존재가 아니고 주님에 붙어있는 물방울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만 증거하면 되지 따로 독자적으로 내 존재의 가치를 논할 그런 자격이나 권리가 우리한테 없다는 이야기에요. 따라서 허탄한 네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일해서 얻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주의 뜻으로 얻었다고 이야기하라 이 말입니다. 주의 뜻으로 이만큼 많은 재산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인지 알아요? 주의 뜻이면 있는 재산 다 가져가도 참 잘하셨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런 각오가 돼있느냐, 이 말입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를 준비했는데 그것은 시간상 안 되고요. 마지막으로 전도서 5장을 보겠습니다. 마지막이니까 조금만 견뎌주세요. 제가 부탁드립니다. 전도서 5장 18절,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노라 이것이 그의 분복이니라”

 

전도서 9장 7절에 보면,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성경에서 지금 포도주를 권하고 있네요. 8절,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게 주의 명령입니다. 이게 팩에요.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즐겁게 사세요. 왜? 어차피 헛된 인생인데.

 

주실 때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주실 때 즐기라고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을 그냥 알아서 하라가 아니라 즐겁게 살라고 선물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즐겁게 살면서 이게 만들어진 임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진노 받아도 마땅한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이 이러한 분복을 주셨사오니 이것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라고 마음껏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제약회사 연구원이 열심히 신약 개발한 그 즐거움에 탐닉하시기 바랍니다. 수학자가 자기 연구실에서 새로운 수학이론을 발견하는 그 즐거움에 매진해주시기 바랍니다. 교인이 다섯 명이라도 열심히 기쁘게 목회하는 즐거움에 매진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자기 영광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살아도 남은 다 죽으라는 이런 용도로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관계입니다. 관계는 뭐냐? 부분 속에 전체가 다 포함돼있습니다. 집합론에서 이걸 부분집합이라고 합니다. 홀로그램, 입체사진이에요. 우리는 보신각종입니다. 주님이 들어있어요. 주께서 때릴 때 우리는 진노 받아도 마땅하고 오늘 죽어도 되는데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여러분에게 주신 일로 즐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지요. 만약에 현대인이라면 주께서 명령합니다. 고스톱을 즐겁게 치라. 고스톱 저주하면서 온 사람에게 미안한데요, 끝까지 갑시다. 이제는 고스톱 안 친다고 하지 마시고 전에는 나는 돈 벌어 살아야 된다는 마음으로 했다면 주여, 저는 고스톱 끊었습니다. 고스톱 이야기 괜히 했다. 오해의 소지가, 후회스럽네요.

 

좀 건전한 것으로 합시다. 박태환이 수영하면서 금메달 못 땄어요. 하지만 즐겼으면 분복입니다. 만약에 금메달 스트레스 받으면 그것은 자기가 계속 잘난 존재로 우기겠다는 악마적 속성의 발휘에요. 금메달 주시면 금메달, 은메달 주시면 은메달, 그것을 목적으로 하지 말고 주께서 주신 분복으로 즐기면 그게 은메달이 되던 동메달이 되던 주님의 긍휼에 대한 우리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교회 나오시되 즐겁게 나오세요. 주님 주신 분복입니다. 아프면 못 나오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교회 나오면서 빨리 1부 예배 마치고 도망가서 <왔다 장보리> 보려고. 그런데 그걸 저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진짜 끝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교회 봉사할 때 로마서 14장에 나오기 때문에 제가 할 수밖에 없는데, 봉사하라니까 갑자기 어떤 집사님이 봉사 안 합니다. 목사님이, “왜 같은 조인데 봉사 안 하십니까?” 하니까 “내가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 낯짝 보니까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어떤 여자는 남편만 보면 토하고 싶은 여자도 있어요. 그것 목사님이, 믿음 없다고 하면 안 돼요. 형제를 시험치 말라고 로마서 14장에 나옵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하고 싶어도 미운 것이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유 대는 게 비겁한 변명이에요. 좋은데 이유가 있습니까? 자기 아내가 있는데 옆에 예쁜 여자 갈 때 차 운전하면서 돌아보다가 박으면 이건 이유가 없어요. 예쁜데 무슨 이유가 있어요. 도대체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예쁘지만 아내가 있으니까 나는 자제해야 된다. 이건 솔직한 게 아니죠. 예쁜 건 무조건 예쁘지요. 아내 있다고 안 예쁜 게 아니거든요.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라.

 

그리고 봉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봉사하니까 옆의 사람이 수군거립니다. “봉사 좀 한다고 자랑질, 잘난 척하기는.” 그런 소리 들릴 때 때려치우지 마세요. 그 사람이 하는 것도 주의 뜻이 있고 내가 하는 것도 주의 뜻이니까 그냥 하고 심판은 어디에 맡겨라? 최 집사 심판은 주께 맡기면 되는 겁니다. 그게 형제애에요. 그게 로마서에 나옵니다. 우리는 만들어진 것이지 존재, 있음이 아니에요. 만들어졌다가 언제 사라지듯이 사라지는 거예요.

 

이제는 신앙생활을 합산합시다. 교회뿐만 아니고 찬양해도 좋은데 찬양을 하던 바깥에서 뭘 하던 간에 우리는 만들어지고 찬양이나 설거지하는 것도 주께서 즐기라고 준 거니까 여러분 즐거워하면서 얘들 회초리 들고 때리시고 즐거워하면서 남편 바가지 긁으시고 남편은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아내의 바가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모든 것이 즐겁게 하세요. 이것이 분복입니다. 그리 안 돼요? 안 된다면 주께서 즐겁게 하시도록 그 다음 조치가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리듬이기 때문에 세상 전체가 주님이 흔들어대는 물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물방울이고 바다는 주님이니까 물결이기 때문에. 작은 것을 보지 말고 넓게 보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앙생활을 교회에 국한했습니다. 오늘도 신앙 생활하러 가자고 성경책 들고 교회에 왔지만 실은 주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형식을 보지 않는 주님이 밖에 나가서 즐겁게 하시되 그것이 주님이 주신 분복인 것을 잊지 말고 기쁘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관리자(IP:183.♡.100.40) 14-11-19 07:06 
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집회a

(강의:이근호 목사)

 

 

아무도 아무나 들여다보지 않는 그 천국 어떤 기준에 의해서 어떤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누구는 갈 수 있고 못 가는지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천국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저희들이 깨닫는 시간되게 하옵소서. 시작부터 끝까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태복음 25장에 두 개의 비유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비유는 흔히 말하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 신랑 하나 놓고 열 명의 여자가 결혼한다? 참 신기하죠. 물론 능력 있는 남자 같으면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능력 없는 남자한테는 부담이 되겠죠.

 

한 명의 신랑과 열 명의 처녀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하시면서 무엇을 언급하느냐 하면, 25장 1절에 보면, “그때에 천국은”이라고 이야기했잖아요. 천국이란 이 세상 아닌 것입니다. 쉽게 합니다. 천국이란 이 세상 아닌 곳.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원리원칙과 삶의 원칙도 역시 통하지 않는 곳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걸 미리 언급하는 것은 천국에 간다고 하면서 분명히 천국은 이 세상 아닌 곳인데 이 세상 원리를 고집하면서 “천국에 넣어주세요.” 하는 것에 대한 저는 거절의 의미를 언급하는 겁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하면, 이 세상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도 무방하지 않겠느냐는 고집이 있을 수 있어요. “하나님이여, 저는 이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눈감아주시고 그냥 넣어주세요. 가서 잘하겠습니다.” 이럴 수도 있단 말이죠. 저라도 그러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요. 왜냐하면 천국은 이 세상과 그냥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 같으면 그냥 가도 되는데 이 세상이 누굴 박대하고 천대했느냐 하면, 이 땅에서 천국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추방당했느냐 하면, 미움 받아서 추방당하셨거든요.

 

“천국에서 오셨습니까? 잘해봅시다.” 이렇게 헤어진 게 아니고, “뭐지? 뭐야? 왜 낯설지? 우리한테 필요 없어. 당신, 꺼져! 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천국입니다. 원리가 서로 통하면 좋겠는데 이미 이 세상의 원리를 고수하다보니까 섞을 수 없어서 튕겨 나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그분이 세우신 나라가 천국이라면 우리가 사는 원리가 그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베드로전서 2장에서는, 천국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의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겁니다. 하나, 하나 쌓이는 거룩한 성전이 공통점이 있다면 튕겨서 나온 사람들의 집합. 이것은 우리가 “천국은 그렇구나.” 이러면 별 이상 없는데 문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건 좋은데 그 다음에 우리 차례에요. 어떤 차례냐 하면, 우리는 이 세상에 딱 맞는 원리와 원칙대로 사는데 우리 몸에 맞아요. 소위 한국에서 요새 유행하는 단어가 ‘소통’이라는 거잖아요. 소통이란 공통점 만남이잖아요. 서로서로 소통하면서 “그래 당신 원리, 내 원리, 인정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만든 겁니다.

 

그런데 천국은 어떻게 된다고요? 우리에 맞는 원리로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못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못 들어가죠. 우리에 맞는 원리로서는. 왜냐? 예수님이 추방당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곱게 나가신 게 아니고 퇴학당하신 거죠. 퇴학당해서 버림받은 돌이 천국이 되었다면 현재 우리 몸에 익숙한 원리는 안 통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논리가.

 

그 다음 논리를 전개해봅시다. 우리가 사는데 적합하고 이만큼 사는데 필요했던 것이, 그 원리가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우리가 기껏 아는 것이 이 세상에 적합한 원리밖에 모르는데 이게 안 통한다는 이야기거든요. 그쪽에서 안 받아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이 땅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고생인데 죽어서는 편히 쉬고 싶고, 천국이 구미에 당기는 요건 중에 하나가 그게 영원히 산다는 거예요. 십 년 살고 나오는 게 아니고 한 번 들어가면 이사를 안 해도 돼요.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사실은 저녁에 할 이야기인데 당겨서 해도 괜찮겠지요. 지옥의 문제점이 힘들다는 문제가 아니에요. 지옥이 단순히 힘들다, 불이 뜨겁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거기서 빠져나올 수 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거든요.

 

아무리 여자 분들이 스포츠를 몰라도 권사님한테 물어볼까요? 축구할 때 전반전만 뛰고 끝나는 겁니까, 후반전이 있습니까? 전반전 하고 15분 쉬고 후반전 있지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부자가 축구가 전반전만 있는 줄 알았어요. 전반전에 부자 됐거든요. 그런데 후반전에 어떻게 됐습니까? 후반전에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고 자기는 지옥 갔잖아요. 그러면 세 번째 피리어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게 문제네. 마지막 후반전 뛰면 더 이상 축구는 없어요. 이제 테스트는 끝나버렸어요. 이 부자는 전반전에서 후반전으로 이어지질 못했습니다. 부자가 전반전 뛴 것은 소통이었습니다. 남들이 원하는 것을 누렸고 그것으로 자기는 늘 웃는 사람 될 줄 알았어요.

 

그리고 상대적으로 모든 걸 박탈당한 거지는, 제가 미국에서 만난 분들은 박탈된 사람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몰라요. 어떤 식으로든 모든 걸 빼앗겼단 말이죠. 부자는 비아냥 거렸습니다. “아이고, 인간아. 나 같으면 너 같이 안 산다. 나 같으면 자살한다. 내가 보기에도 답답하다. 인간아, 왜 그렇게 사니?” 문제는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가지 몸이 호전된 적이 없다는 겁니다. 마지막 죽을 때 약간 형편 핀 그런 적도 없어요. 심지어 몸도 성하질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웃을 수 없는 패배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9회말 역전이 생겼습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니까 이것도 포함됩니다. 부자가 궁금해서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서 나는 지옥에 오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갔습니까? 그 원리가 궁금합니다.” 끝난 마당에 왜 궁금해? 부자가 하는 말이, 제 동생 다섯 명이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전반전이 전부인 줄 알고 까불고 난리 났어요. 아직 안 죽었으니까. 소통이니까.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줄 아니까 서로 친하게 지내면 그걸로 행복인 줄 아니까 그 동생들에게 거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천국의 원리는 따로 있다. 다르더라. 그 다른 원리가 있어야 나 있는 지옥에 오지 않고 거지 나사로처럼 천국에 갈 수 있다.

 

그걸 보면 역시 맏이는 맏이 같지요. 보세요. 자기가 지옥에서 동생들 걱정하잖아요. 맏이는 타고났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동생을 절대로 그런 마인드가 아니에요. 지만 챙기면 그만인데 가장이니까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원리를 알려줬습니다. 그 원리가 우리가 시작된 거죠. 천국의 비밀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죽기 전에 눈치 챌 기회를 주셨다는 겁니다. 축구 끝나기 전에 이 원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겁니다.

 

기쁜 소식, 나쁜 소식이 있는데 기쁜 소식부터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이 세상 끝나기 전에 그 말씀을 주셨다는 게 기쁜 소식이에요. 이제 남아있는 게 나쁜 소식이지요. 나쁜 소식은 다 바꿔야 된다는 겁니다. 몽땅 다 바꿔야 된다는 이것이 나쁜 소식은 너무 하고 슬픈 소식 정도. 바라기는 슬픈 소식이 기쁜 소식이기를 바랍니다. 강의 끝나고 난 뒤에.

 

왜 슬픈 소식이냐 하면 이 세상은 돈 없이 못 삽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편하게 말하기를 사람 낳고 돈 낳지 돈 낳고 사람 낳느냐고 이야기하는데 돈 낳고 사람 낳습니다. 괜히 곱게 위장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철저하게 돈 낳고 사람 낳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진리 아닌 것 같아서 멀리하지만 실은 어느새 우리 몸도 거기에 푹 젖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돈 보태주는 주님이기를 간절히 간구하면서 우리는 되도 않는 포장용 기도를 해옵니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옵소서. 이 한 몸 희생해서 주의 말씀만 증거하고 주의 뜻대로 살겠습니다.”라고 기도해봤자 주님께서, “그렇게 해서 결국은 네가 원하는 돈 달라는 이야기지? 솔직히 깨놓고 이야기하자. 빙빙 돌려서 이야기하지 말고 딱 깨놓고 이야기해. 이렇게 하나님 잘 섬기면 진즉에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지, 명예회복 시켜주시겠지. 그거지?”

 

그러니까 우리 몸이 어디에 적합하냐 하면, 이 세상 원리에 적합해요. 이것은 사적으로 우리가 성질이 더럽고 나빠서가 아니에요. 제가 지금 기거하는 곳이 김성진 장로님 댁인데 그 장로님이 차에서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인간의 성격이 어떻게 바뀝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뭔가 변화가 있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그 변화가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답변했어요. 교육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dna 30%, 환경 70%라고 하는데 저는 환경 100프로라고 이야기했어요.

 

인간성 더러운 인간이 좋은 환경 되면 100프로 바뀐다는 게 아니고 인간성 좋은 척하는 사람이 진짜 주께서 집어넣은 환경에 들어가게 되면 나는 100프로 죄인인 것을 아는 마음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기본원리입니다. 천국 기본원리라고 해놓고 후딱 지나가서 모르겠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천국의 기본원리는 내가 생각하는 천사처럼 사는 게 원리가 아니고 내가 위선적이고 꾸몄던 모든 껍질이 다 벗겨져서 속살이 그대로 노출되게 함으로써, 예수님 하신 말씀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정말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이 많이 알게 되는 그 심령, 그것이 바로 주님의 천국의 조건입니다. 또 해도 모르겠지요. 잘 이해 안 되면 또 합니다. 나도 끝까지 갑니다.

 

천국은 천사처럼 사는 게 아니고 주여, 주님의 긍휼이 아니고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면 저는 어떤 식으로도 아무리 이 땅에 와서 고생하고 외지에 와서 고생해도 고생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최선을 다해도 최선을 다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주님께서 저를 이유도 따지지도 않고 불쌍히 여겨서 데려가셔야 천국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장착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천국의 조건입니다.

 

부자가 왜 못 들어가는지 아시겠지요. 부자와 왜 못 들어갔느냐? 예수님이 없이도 행복한데 예수를 왜 믿을까요? 가진 게 넉넉한데 왜 믿을까요? 그런데 부자는 바보 같아요. 그 조건이 천국에 못 가는 조건인 것을 상상도 못했어요. 왜? 주위에서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고 설사 그렇게 이야기해도 콧방귀 뀌면서 네가 없으니까 답답해서 그런 소리하겠지. 하면서 시답지 않게 여겨서 거절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합니다. 부자야. 지금 이 선지자와 말씀대로 오신 분을 믿지 아니하면 너는 네 동생들, 거지 나사로의 존재가 부활할지라도 그곳은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은 죽어서 다시 천국 있다는 소식 자체만으로 우리는 천국 못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계시를 받았는데 천국을 봤다. 따라서 천국 계시 본 사람은 갑니다.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주제넘게 우리는 천국을 들어갈 자격이 안 된다는 오히려 그것이 천국 가는 우리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훌륭한 사람보다 천국에 먼저 간다는 그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주 친절해요. 천국이란 있습니다. 증거가 뭐냐? 주께서 부활했기 때문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천국에 가려면 천국에 맞춤, 맞는 마음이 돼야 되는데 현재 우리는 몸 자체가 우리끼리 사는데 적합했어요. 돈이 최고고 돈 없이는 아무리 예수고 하나님이고 못 산다는 것에 우리는 완전히 익숙해진 겁니다. 따라서 그것은 천국에는 맞지 않기 때문에 바꿔줘야 돼요.

 

기쁜 소식은 우리가 아직도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에 꺼림칙한 소식은, 바꿔야 한다는 이것이 상당히 우리한테 부담이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바꾸기 위해서 머리 깎고 절에 갔는데 쓸데없는 짓한 거예요. 어떤 사람은 열군데, 스무 군데 개척교회하고 모든 걸 버리고 선교지로 떠났는데 선교지로 떠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가 소위 종교인들보다 먼저 간다는 주님의 그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봅시다.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셔요. 어떻게 이해하시느냐 하면, 네가 남보다 못 되서 그런 게 아니고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쪽으로 이해해요. 100프로 환경입니다. 사람이 환경에 들어가게 되면, 사람이 아무리 믿고 싶어도 본성이 환경을 이기기 못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너희는 그때에 불순종의 악한 영들 속에서 불순종의 아들들로 살아왔다. 나, 그런 식으로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분야에 있던지 남한테 밀리지 않고 부러움을 사는 자기 자존심의 이름이 영광 받고자 하는 본성은 심지어 어린아이라도 다 있는 거예요. 그걸 누가 이해하신다고요? 주님이 이해하는데 네 자신이 그것을 긍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여, 그래도 남보다 낫습니다.” 그 자체를 긍정하지 마세요. 주께서 이해하겠다니까 그걸 자랑질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할 수 없지만 그걸 자랑삼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여기까지는 알았다고 치고 그 다음 문제는 우리 몸을 바꾸시는데 바꾸는 주체가 나냐, 외부인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천국으로 마음을 바꾸는데 내가 스스로 바꿀까요, 다른 분이 와서 내 마음을 바꿔줄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분이 와서 바꿉니다. 바꿔주는 다른 분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뭘 믿지 말라? 내가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시도하는 모든 것을 절대로 믿지 마세요. 금식, 기도, 헌금, 전도, 선교, 목회 모든 걸 믿지 마세요. 자기희생, 자기 구제 믿지 마세요.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실 때 바리새인이 기도합니다. “주여, 제가 이레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엎드려있는 저 세리는 나처럼 성화되고 거룩한 생활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재판소가 멀리 있을 때 순회재판소가 미국에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판사가 가서 마을회관 같은데서 재판을 하지요. 예수님께서 즉석에서 판결을 내립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자랑질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주여, 저는 감히 얼굴도 못 들고 엎드려있습니다. 주님의 판결이 내려집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까지 하는 너는 천국에 오지 못하고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하는 너는 의인으로서 천국 간다고 순회재판을 즉석에서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판결로 인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데 그럴 때 우리가 궁금한 것이 누가 승리자고, 누가 패배자였습니까? 잘 했다고 하는 자는 패배자고, 죄인이라고 한 것은 승리자가 되지요. 어떻습니까? 그 이야기 듣고 나니까 갑자기 우리가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사람이란 남 따라 하면 되거든요.

 

교육이 뭐예요? 교육의 시작은 모방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건데 뭐든지 교육한다는 것은, “나처럼 해봐라, 이렇게.”라는 거예요. 그러면 교인들은 누굴 모방할까요? 나보다 앞선다고 생각하는 교회 목사님이죠. 목사는 교육자니까 목사가 사는 대로 살겠다고 모방하게 되면 목사가 천국 간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따라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죄인입니다.”에 대해서 누가 모방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모방 못해요. 왜냐하면 사람은 각자 느끼는 죄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도 모방 못해요. 달리기를 빨리 달린다. 연습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는 연습이 안 되는 이유가, 환경이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지요. 구원받은 사람, 합격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어쩌다보니 죄인이 아니고 죄인 되게 하는 목표로 주께서 나를 이 환경에 집어넣었습니다. 드디어 나는 도달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죄인 맞습니다. 이 속성이 천국 가는 원리입니다.

 

진짜 이건 받아들이기 곤란한 원리에요. 아주 어려운 원리에요. 잘만 하면 착한 사람 될 수 있는데 이게 아니고 드디어 주님께서 나에 대한 작업을 성공하셨습니다. 나는 이유도 없이 무조건 이 땅에서는 주님 보시기에 죄인 맞는다는 죄인 의식이 돈으로 살 수 없어요. 경험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여행 많이 다닌다고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주위 사람도 날 칭찬하니까.

 

비유 들어갑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비유가 뭐냐 하면, 열 처녀가 있는데 천국은 이와 같으니, 지금까지 한 것을 응용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먼저 천국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이 땅에 살기 적합한 그것은 뭐로 바꿉니까? 천국에 필요한 조치로 바꾸는 거죠. 이 죄인은 뭐냐 하면, 모든 조건은 주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다 준비된 거예요.

 

어제 제가 이 집에 왔을 때 저녁을 뭐뭐 크랩인데 하여튼 게에요. 목사님이 게 잡은 게 아니고 외부에서 공수해 왔단 말이죠. 천국의 원리는 주님이 친히 준비해온 거예요. 열 처녀 모두 다 똑같이 신랑 올 때 잠을 잤습니다. 이것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혼인한 다섯 처녀와 그렇지 못한 처녀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신랑 만나는 조건을 자기가 준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정해준 조건 앞에서 자기를 내세운 겁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신랑 만나겠지.” 하는 자기의 세상적 논리를 포기하고 낯선 논리, 신랑이 올 때 준비할 기름을 신랑이 왔다고 생각하고 신랑 오기 전에 신랑의 조건을 먼저 시키는 대로 준비한 거예요. 그러면 그 조건은 자기 머리에서 나왔습니까, 주님 머리에서 나왔습니까? 주님 머리에서 나왔지요. 그렇다면 그 구원받은 여자들은 주님의 조건과 더불어 살고 있는 겁니다.

 

열 명 다 잠을 잤어요. 주님께서 아홉 명 잠자고 한 명 깨어있으면 신랑은 오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홉 명 잠자고 깨어있는 사람이 한 명이면 조건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깨어있는 자는 구원받는다는 조건이 되잖아요. 그건 주님이 제시한 조건이 아니에요. 따라서 주께서 가시고자 해도 다섯 명 잠자고 다섯 명 깨어있을 때 안 갑니다. 여섯 명 잠자고 네 명 깨어있어도 안 갑니다. 나중에 너무 졸려서 아홉 명 잠자고 한 명 깨어있어도 안 갑니다. 드디어 열 명 다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타났습니다. 난리 났지요. 신랑 떴다는 순간에 주유소 가서 기름 사고 분산을 떠는데,

 

잠자고 있었다는 말은 여자들이 신랑 오는 것을 반겼다는 겁니까, 안 반겼다는 겁니까? 반기질 않았지요. 다만 신랑이 주는 조건만 생각했지 반기질 않았지요. 신랑 오고 난 뒤에 깨웁니다. 깨우니까 그들은 영접했고 뒤늦게 같이 깼는데 조건이 구비되지 않아서 주유소에서 기름 준비할 때 주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문을 닫아버린 거예요.

 

여러분, 물어봅시다. 하나님은 사랑하십니까? 만약에 사랑하신다면 주께서 문을 닫지 않고 열어두지요. 왜냐? 다섯 명 오는 것보다 열 명 오는 게 천국이 더 빛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문 닫으려고 하니까 다섯 명이, “신랑이여, 우리 기름 준비 못했습니다. 문 닫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요 앞에 주유소 있으니까.” “그래, 기다리지 뭐. 나는 세상을 사랑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다섯 명이 기름 사러 갈 때 문을 닫아버리지요. 주님은 사람을 사랑합니까, 자기 조건을 사랑합니까? 자기 조건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원리 통하는 세상과 천국의 원리와의 차이점이 이겁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칩처럼 박힌 조건을 사랑하지 우릴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런 원리를 수용하기 참 힘들지요. 우린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지요. 좋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자신의 원리만 사랑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너의 아이디어로 천국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고 내가 준비한 것만 용납하는 곳이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조건만 언급하고, 안 믿는다? 싫으면 말고. 그런 배짱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비유, 유명한 달란트 비유. 달란트 비유란 뭐냐 하면, 어떤 공장에 일꾼 세 명이 있습니다. 세 명 다 주인의 종으로 다 소속되었다고 생각했지요. 첫 번째 종도, 주인님. 옳지. 두 번째 종도, 주인님. 옳지. 세 번째 종도, 주인님. 옳지. 너는 우리 편이라고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주님은 타국에 갔습니다. 가고 난 뒤에 다시 왔습니다. 첫 번째 종이 하는 말이, “주인님이 시키는 대로 제가 이렇게 남겼습니다.” 두 번째도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인님이 함께 있으나 우리 눈앞에 떠나있으나 저의 신분은 전혀 달라질 게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세 번째 종은 주인이 떠나고 난 뒤에, 달란트 비유에서 중요한 포인트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세 번째 종에게 하는 이야기가 중요한데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네가 그렇게 노동할 자신이 없다면 내 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를 얻을 생각을 왜 못했느냐고 추궁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세 번째 종은 주님 주신 것을 왜 은행에 맡기지 않았을까요? 그는 책망 받았는데 책망 받을 짓을 왜 했을까요? 그 사람은 주님과 함께 있어도 독자적인 생각을 한 거예요. 저 주인은 나를 위한 주인이지 내가 주인의 종으로 있기는 싫다는 겁니다. 내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주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이 안 보이면 내 것이 아니니까 관심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힘없어서 못하던 하여튼 재물도 주인 것이고 자신도 주인 것이라면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전과 똑같이 일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주인 떠났다고 이제는 자기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나 있고 예수 있지 예수님 있고 내가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 세 번째 종의 본색이었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은, 천국은 이와 같으니 해서 천국에 못 가지요. 천국 가서 독자적인 행동하게 되면 그건 천국이 아니고 자기 나라 되지요. 천국에서 땅 빌려서 자기 사업할 일 있습니까?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바로 못 들어가지요. 그것은 뭐냐 하면, 철저하게 주님이 먼저 있기에 내가 있다는 그 원리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이야기가 달란트 비유입니다.

 

주님이 없을 때 인간은 자기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지금 주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껏 자기 본색을 발휘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나 좋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나 우선이지 예수 우선 아니라는 것, 그 원리가 바로 우리 몸에 딱 맞는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남들이 이해해주는 그런 원리입니다. 하지만 천국의 원리는 그것이 바뀝니다.

 

두 가지 비유를 말씀드렸지요. 여러분이 궁금한 게 하나 있었을 겁니다. 다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하여튼 이렇게 안 되는 걸 어떻게 되게 하시느냐? 그 조치는 어떤 조치인지 그것이 궁금하겠지요. 예수님이 우선이고 나는 나중이라고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그렇게 됩니까? 그건 아니거든요. 누구나 아무리 좋은 것도 내가 제일 좋아요. 우리는 우리가 지옥 갈 때도 격려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요. “걱정하지 마. 지옥 가도 살만 해.” 어깨 두드리면서 할 사람은 우리밖에 없어요. 그런 원리가 어떻게 주님 먼저고 나는 나중이라는 그런 원리로 어떻게 바뀔 수 있습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상당히 궁금하지요.

 

마태복음 13장 시작됩니다. 그걸 생각하시고 바꿀 의사도 없고 바꾸지도 못할 우리가 어떻게 그게 바꿔져서 천국에 골인되는지 마태복음 13장에 그 원리가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3절부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덜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여러분 같이 보았습니까? 그 끝에 있는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은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수상한 음산한 기운이 들지 않습니까. 그 말은 빼도 무방한 느낌 들지 않아요? 지금 제 취지가 전달이 되지 않는 것 같은데. 저기 기타가 있지요. 여러분, 천국은 기타의 현을 치면 소리가 나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기타 치면 소리가 난다는 것까지만 이야기하고 그 뒤에 있는 말,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것은 쓸데없이 갖다 붙인 말처럼 들리지요. 이건 귀고 뭐고 간에 누가 봐도 그렇잖아요. “주님께서 귀 있고 없고 간에 전부 다 누구나 납득이 되도록 그 말씀을 주셨구나.”라고 생각하지요. 기타 현 치면 소리 난다. 이건 얘들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씨를 뿌렸는데 새가 먹어버린 그런 씨도 있고 흙이 얕은 곳에 던져진 그런 씨도 있고 그 다음에 가시덤불에 던져진 씨도 있고 돌밭에 떨어진 씨도 있지만 그 다음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이게 구태여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요건이 꼭 필요한 말씀처럼 들리십니까? 아니잖아요. 그렇지. 어쩌라고? 다 이야기네. 그게 다 아는 이야기십니까?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이 들어간 취지를 모르면 완전히 오해한 거예요.

 

그렇다면 이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면서 잘못된 해석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틀린 답을 먼저 말씀드리면서 그 다음에 제가 진짜 해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잘못된 해석을 이렇습니다. 밭은 사람의 마음이다. 씨는 주님의 말씀이다. 씨가 떨어졌는데 어떤 사람은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가 먹는 것처럼 말씀이 떨어졌을 때 졸거나 할 경우는 마귀가 와서 씨를 먹어버려서 씨 자체를 먹어버리니까 열매를 못 맺었습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 졸지 마세요. 말씀 들을 때 마귀가 와서 먹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여러분은 옥토가 돼야 됩니다. 아멘하면 곤란한데.

 

두 번째 해석, 여러분들이 교회 와서 누가 우선이다? 내가 우선이고 예수님이 나중이거든요. 우리는 돈 낳고 사람 낳잖아요. 돈 있어야 사니까 “주님이여, 다 털어먹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원상복귀 시켜주옵소서. 주님은 전능하시잖아요. 그 전능한 힘 어디에 쓰려고 그냥 두십니까? 주께서 전능한 능력을 주셔서 모든 자존심을 회복해주소서.” 그런 마음으로 그런 기대로 교회에 온 거예요. 오고 난 뒤에 말씀 들으니까 기도하면 이 땅에서 복 받고 나중에 믿으면 천국 가고. 좋더라 이 말이죠. 그러다 갑자기 취직을 했는데 주일에 쉬지 않는 곳에 취직해서 또는 사장이 불교신자라서 “교회 가려면 회사에 나오지 마.” 이랬고,

 

또 어떤 사람은 시어머니가 아주 불도가 심해서 어디 가는데? 교회 갑니다. 어디 며느리가 허락도 없이. 머리카락 휘어잡고 교회도 못 가고 환란이 심하고 또 남편이 교회 간다고 때리고 해서 “아이고, 하나님이여, 저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할 도리 다했습니다.” 하고 환란이 교회에서 집사 시키고 해서 좋았는데 갑자기 주위에서 경제적인 여러 가지 환란이 있으니까 주님이여, 더 이상 저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나중에 늙어서 죽을 때쯤 주님 믿겠다고 하면서 환란에 넘어질 때 “여러분, 그러지 마시고 그러면 열매 못 맺으니까 이겨내셔야 30배, 60배 열매 맺습니다.” 이런 해석 잘못된 해석입니다. 밭 관리 잘하셔서 열매 맺을만한 마음으로 바꿔달라고 간곡히 기도하라는 식으로 이 비유를 해석하는 건 잘못됐습니다.

 

세 번째, 어떤 사람은 교회 와서 부러움을 받을 정도로 복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너무 많이 받았어요. 처음에는 어려울 때 주일 꼬박꼬박 지키고 심지어 새벽기도 나오고 하다가 좀 배부르니까 그 다음부터 노래방에 가고 나이트 가고 흥청망청 쓰니까 목사 입장에서는 교회도 안 나오고 교회 안 나오니까 헌금도 동시에 안 나오고. “집사님 왜 안 나옵니까?” “바빠서. 놀면서 사업 되는 줄 아세요.” 이렇게 된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그러면 천국에 못 갑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그런 유혹이 왔을 때 뿌리치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네 번째, “만약에 여러분 진짜 마음 관리 잘하면 드디어 효과 보는데 30배, 60배, 100배, 가면 갈수록 복을 받는데 이 복을 여러분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 복 받고 싶지요. 그러면 정신 차리고 교회 와서 마음 관리하고 성화생활하시기 바랍니다.” 이 해석,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 구태여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할 필요 없어요.

 

인간은 나면서부터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하나님이 기어이 벌준다는 것이 짜여있기 때문에 열심히 애쓰는 사람에게 복이 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벌이 온다는 그 뻔 한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데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와 있잖아요. 베짱이는 굶어죽고 개미는 잘 산다는 다 아는 이야기를, 내 몸은 내가 관리하고 도 닦듯이 닦아야 된다. 마음을 거울 같이 닦아야 제대로 보인다. 이건 불교에서다 하는 이야기거든요. 그렇다면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할 필요 없잖아요. 주께서는 바로 그 해석 자체가 예수님을 결국은 이 땅에서 추방시킬 수밖에 없는 동기가 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천국은 이 땅에 왔으나 사람들은 그것을 발로 차버렸단 말이죠. 왜 찼을까? 안 맞으니까 찬 거예요. 기존에 들어있는 세상관으로는 천국은 설명이 안 되니까 주님은 탈락된 겁니다. 추방된 겁니다. 이게 십자가거든요. 그렇다면 진짜 비유의 원리가 뭐냐? 이것이 아니라면 정녕 그것이 아니라면 그럼 진짜 그 뜻이 뭐냐? 궁금해요? 그것은 바로 여기에 나옵니다. 누가 마태복음 13장 11절 읽어보세요. 그게 해답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라고 하면서 앞장세운 것이, 씨 뿌리는 비유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쉽다, 누구나 안다고 하지요. 누구나 알고 누구나 이해가 된다면 구태여 무슨 단어가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까? ‘허락’이죠. 허락이 뭐예요? 아무리 가고 싶어도 여기서 패스 오케이라는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못 들어가지요.

 

“씨 뿌리는 비유, 감동받았습니다. 저 이해했습니다. 어때요? 허락해주세요.” 허락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허락해야 들어간다면 구태여 씨 뿌리는 비유를 앞장세울 이유가 없잖아요. “너, 들어와. 너, 들어오지 마.” 한다면 다이렉트로 “목사님, 들어오세요. 들어오지 마세요.”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씨 뿌리는 비유 같은 마치 미끼 같은 것이 필요치 않다 이 말이죠.

 

결국 씨 뿌리는 비유는 뭐냐 하면, 이해한다, 천국 알았다. 이건 내가 알기에 허락 없이도 들어갈 수 있다는 자를 거절하기 위함입니다. 네가 안다는 것, 그것은 내가 곧 거절하는 것이다. 그러면 허락이란 말을 수용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아무리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유일한 남은 희망은 뭐예요? 허락하면 되겠지요.

 

다른 분이 15절 읽어보세요.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내가 고쳐주지 않았는데 고침 받았다고 우기는 인간들에게 그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내가 했는데 첫 번째 이야기가 씨 뿌리는 비유였다는 겁니다. 알아들었나? 그러면 끝났어. “주여,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면 허락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려라. 남은 것은 주님의 허락만 떨어지게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으면서 천국 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첫 번째 강의 전체를 단순하게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아무도 갈 수 없는 그곳을 주의 허락이 떨어지면 어떤 상황도 전혀 거침없이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제안을 하신 주님을 믿읍시다. 못 믿겠다고? 그건 아직도 자기에게 어떤 가능성을 스스로 지키겠다고 버티는 식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못 알아듣는 말씀으로 규정됩니다. 알아듣지 못해도 갈 수 있는 나라, 오직 주님의 허락만 있으면 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말은 애초부터 천국을 상상하지 말라는 거예요. 마치 천국이 내 나라인 것처럼 그렇게 전제로 깔지 말라는 겁니다. 갈 수 없는 나라고 안 가도 되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런데 가게 해주셨지요. 오직 조건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해주셨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허락해주셨는가? 씨 뿌리는 비유를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한 말, 약속을 누가 지키는가? 주님이 지켜서 소급해서 내가 전에 너한테 준 씨 뿌리는 비유 있지, 그것 홀라당 내가 다 지켰어. 내가 다 지킨 자격에서 이미 넌 지켰기 때문에 못 지킨 너도 지킨 내가 허락하면 나와 동반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10분 쉬고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관리자(IP:183.♡.100.40) 14-11-19 07:09 
20141003 미국이상현목사집회b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끝에 제가 이런 말했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뭔가 말을 뱉어놓고 그 말을 본인이 다 수행해버려요. 자기가 던진 말을 다 거둬서 본인이 다 완성해버려요. 그리고 본인 외에 어느 누구도 개입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비유하면서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잖아요. 언약은 주신다는 것은 약속을 주시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약속을 던지게 되면 우리는 그 약속을 지키라고 준 말씀처럼 들리는 거예요. 십계명이 대표적이잖아요. 코앞의 말씀이 왔는데 부메랑처럼 도로 가버리고 주신 분에 의해서 완성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본인이 지킬 말씀을 우리에게 왜 던져줄까요? 그것은 우리의 현재 상태가 천국에 부합되지 않다는 것은 보여주는 겁니다. 법이 없는 곳에는 죄가 없어요. 로마서 7장에서 너희가 탐내지 말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너희들이 탐내는 죄를 지을 수 없었다. 그런데 탐내지 말라는 순간부터 우리는 탐내지 말라는 그 말씀을 내가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부터 우리 속에 탐내자는 본성이 들어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겠어요. 그것이 비로소 노출이 되고 부각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공자 윤리도덕과 다른 점이에요.

 

우리가 어떤 지시를 하게 되면 그 지시를 지킬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해서 준 거라고 오해하는데 그것은 세상의 법에서는 그럴지 모르지만 성경의 법의 목적은 우리 속에 잠재돼있던 법에 대한 위반과 반항심을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것처럼 건드림으로 일깨워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법을 준 목적이에요. 그리고 그 법이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점점 더 완성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하지 않고 다 이룬다고 돼있어요. 이룬다고 하면서 추가적인 법들을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지켰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 새롭게 도입된 추가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보고 기겁을 하지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에 해당된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서 살인자 아닌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체가 이미 간음죄라면 이 세상 남자치고 간음죄 안 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 년 동안 여자에 대해서 관심 없더라도 십오 년째에 정말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십오 년 지킨 것 무효가 되는 겁니다. 말씀을 주신 것은 말씀을 지킬 수 있어서 준 게 아니고 못 지킨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준 말씀이죠. 코앞에 왔다가 도로 가버리죠. 예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는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못한 자를 구분하는 그 권한과 자격이 누구한테 있다고 봅니까? 예수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씨 뿌리는 비유를 했습니다. 문장이 좀 어려워졌지요. 내가 허락하면 천국이고 허락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그렇게 선언할 수 있는 자격자가 예수님 본인밖에 없는 거예요. 천국에 적합한 30배, 60배, 100배를 맺는 그런 능력은 말씀을 주신 예수님 본인만이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천국은 공짜로 가지요. 공짜로 값없이 갑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왜 공짜이어야 하느냐고 할 때 그 다음 말이 있어야 돼요. 왜 우리는 공짜로 가지요? 이 말은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주님께서 치렀기 때문에 공짜로 간다고 해야지 그냥 내가 공짜로 들어간다고 하면, 공짜로 들어가게 하신 그 은혜를 모르면서 그냥 가버리면, “너, 어디서 왔노?” 이렇게 돼요.

 

분명히 씨 뿌리는 비유는 제가 율법이라 했습니다. 조건 주님께서 제시했습니다. 옥토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조건에 부합된 사람이 없습니다. 없으면 천국은 누가 들어가느냐?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당사자가 허락하면 우리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어렵습니까? 참 쉽지요.

 

쉽다 하니까 이제 발동 걸렸습니다. 계속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로서 주님을 만난 사람의 모든 행위와 생각들은 결국은 무엇을 낳기 위한 행위들이냐 하면, 주님에 의해서 30배, 60배, 100배를 맺을 수 있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공정 가운데 우리가 포함이 된 겁니다.


물 있습니까? 목말라서 물 마신 게 아니고 여러분을 테스트하기 위해서 물 마신 겁니다. 제가 방금 물을 마셨습니다. 잘못된 해석부터 먼저 말씀드립니다. “주여, 주께서 물 주셔서 이 물로 힘 얻었으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힘을 얻어서 주의 일을 하게 하옵소서.” 이것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거는 일단 내가 주님 아니까 이제부터 내가 주인공이 되어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겠다는 겁니다. 이것 잘못된 겁니다. 하도 반응들이 없으니까 뒤에 해답부터 먼저 드립니다.

 

그러면 물 마시는 이것조차 30배 열매에 해당되는 겁니다. 주께 이미 구원받았기에 우리가 물마시게 하셨다고 할 때 그것이 주께서 정말 기다렸던 그 열매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이것 자체가 주님의 은혜라고 아는 것, 쉬울 것 같지만 쉽지 않습니다. 주의 능력이 아니면 이걸 깨닫지 못합니다.

 

로또를 샀는데 1등이 되어서 20만불 얻었다. 그때 우리는 이것은 내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이라고 쉽게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로또복권을 들고 가보니까 글자 하나 틀렸어요. 괜히 좋다 말았어요. 안 맞은 것 누구 뜻입니까? 주의 뜻으로 기쁨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 30배 열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불가능 일이에요. 어떻게 내가 고생해서 내가 노동해서 얻은 것을 주님한테 빼앗겨놓고도 그것을 감사합니까? 이게 사람으로 가능한 일이겠어요? 이것이 바로 허락하심 속에 포함돼있는 주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내장되어 사용한 결과입니다. 참 어려워요.

 

전에 욥기 했잖아요. 주신 자는 하나님이요, 우린 믿습니다. 그 뒤에 뭐라고 돼있어요? 주께서 주실 때 고맙다고 받는데 그 주신 것을 도로 가져갈 때 우리는 힘을 쓰고 안 빼앗기려고 애를 씁니다. 줘놓고 도로 가져가느냐고 벌벌 떨지요.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까 가져가실 때 잘 가져가시라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주실 때 고마운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주신 것 도로 가져갈 때 사람은 짜증을 내게 돼있습니다. 이러려면 뭐하려고 주셨습니까?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사실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을 주께서 되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말씀에 부합되는 자만 갈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말씀에 부합되게 하시는 주체자가 내가 아니고 나는 주님이 하신 일에 결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그것이 믿음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주께서는 비유만 던져놓고 그 비유를 따라서 마무리를 지어야 되는데 그 마무리가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우리가 주님이 주신 말씀을 못 지키는 그 죄마저도 주께서 홀라당 다 가져가셔서 그 말씀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의인으로 간주하시는 근거가 우리 내부에 그것이 파고 들어온 겁니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롭게 된 겁니다.

 

“너는 못했지만 내가 했잖아. 겁내지 마. 쫄지 마. 천사 앞에서 쫄지 마.”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주님께서 지시만 했다면 우리는 못 지켰다고 벌벌 떨어야 되는데 지시한 것으로 쫄지 마가 아니라 지시에 따르지 못한 걸 미리 아시고 못한 그 모든 죄를 대신 가져가서 지킨 자로 간주하셔서 찾아오신 분이 내 곁에 있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이게 복음이에요. 자기 잘남과 못남의 자랑이 복음이 아니고, 내 곁에 누가 있다가 복음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너무 독립적이에요. 자기 곁에 누가 있다는 걸 인정 안 해요. 그러니까 맨날 지 잘난 맛에 변명조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도는 남들이 네가 했다고 수고했다고 해도 아니요, 주께서 날 가지고 하셨음을 고백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9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영이란 관계라고 제가 뉴저지교회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타고난 것 말고 이질적인 것이 너희 안에 있지 아니하면 아무리 착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너의 것만 남아있으면 절대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이질적인 것, 전혀 낯선 것이 장착되고 내장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영이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11절을 보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니라”라고 돼있지요. 듣거나 보거나 했지요.

 

이제 문제 나갑니다. 하나님이 우리하고 상대합니까, 우리하고 상대 안 합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그렇지요. 예수님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한다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제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여, 제가 남한테 구제했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여, 제가 성경을 백독했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여, 제가 이번에 큰 목돈을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나는 너하고 상대 안 해.” “헌금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아까워서 빠졌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요.” “주여, 제가 남편이 다섯 있었는데 헤어졌습니다. 이제 사귀는 남자가 여섯 번째입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해.”

 

주님은 애초부터 우리와 상대 안 하기로 마음먹고 예수님의 자신의 영을 넣어서 자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죽을 우리 몸도 천사보다 더 빛나게 하십니다.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습니다. 그 횡재가 우리가 기대한 횡재도 아니었어요. 일방적으로 주께서 찾아와서 주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에게 집어넣고 우리를 예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린 늙어가고 예쁘지도 않은데 무조건 예쁘데요. 우리는 주님을 기뻐하지도 않은데 주님 쪽에서 먼저 우릴 기쁘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사는 것과 너무 달라요.

 

하늘에서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의 평화라는 말씀을 교회에서 어떤 때 많이 듣습니까? 크리스마스 때죠. 제가 크리스마스 때 십오 년 전인가 그 설교를 하면서 그 대목을 지적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기뻐하는 사람이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을 설교시간에 질문을 던진 적이 있어요.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한 공로로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기뻐하지도 않는데 주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고 구원하시는 겁니까? 나중 쪽이죠. 주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기쁘게 보는 거예요.

 

주께서 기쁜 자 중에 주의 평화로다. 기뻐하심을(수동형) 입은 자 중에서 공짜로 자신이 성령 주시고 성령 있다고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거예요. 도대체 우린 뭐예요? 뭔가 왔다갔어요. 마치 위치추적기 같습니다. 잠자고 있는데 배 째고 위치추적기 집어넣고 하는 말이, 네가 어디 가든지 나와 함께 있다. 심지어 죽어도 내장된 주께서 집어넣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치추적기로 말미암아 하늘 끝에 가더라도 건져내겠다는 겁니다.

 

너무 좋아서 안 믿어지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니잖아요. 일방적으로 집어넣고, “누가 이렇게 집어넣었지?” 주님께서 우리와 놀이를 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사랑했지? 내 사랑이 있네. 내 사랑 가져가야지.” 하고 회수하는데 딸려 나온 사람이 누구냐? 우리에요.

 

여러분, 가정주부가 호일로 고구마를 싸서 구운 다음에 호일 먹습니까, 군고구마 먹어요? 어느 쪽을 먹습니까? 군고구마 먹으려면 알루미늄 호일을 벗겨야지요. 그것 벗길 때 아프다고 합니다. “주님이여, 저 착합니다. 성실합니다. 교회 삼십 년 다녔습니다.” 그런데 자꾸 우리의 껍질을 벗겨요. 벗겨놓고 하는 말이, “군고구마 여기 있네.” 하고 그것을 가지고 기쁘게 먹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주님과 소통한다고 목사한테 잘 보이려고 기도할 것도 없는데 하는 척하고 통성 기도했는데 그런 조작과 위선이 의미 없습니다. 자기 것 집어넣고 자기 것 찾아가시는 그걸 로마서 11장에서 모든 게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겁니다.

 

이제 씨 뿌리는 비유는 끝났지요. 30배, 60배, 100배는 이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하는 거예요. 씨 뿌리는 비유에 하나 더 추가합니다. 그렇다면 돌밭에 있는 건 뭐고, 하여튼 밭에 떨어지는 건 뭐고, 그 다음에 가시덤불에 떨어지는 이야기를 구태여 할 필요 없잖아요. 옥토 만들어서 씨 뿌리고 열매 맺으면 되지 그걸 왜 하느냐? 이게 주께서 일하실 때 구원될 자만 드러나게 일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인간은 기어이 내가 구원되지 못하게 했다는 주님 자신의 분명한 분류작업도 아울러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 말씀하신 겁니다. 그 이야기가 뒤에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연이어 나옵니다.

 

우리는 자기 구원에 너무 급하다보니 나만 달랑 구원받게 되면 몰라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천국 가는 사람은 누가 지옥 가는 사람인지 알면서 아울러 천국에 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봅니다. 천국 간다가 아니라 난 저쪽으로 가고 싶은데 저쪽 아니네, 이런 식으로 천국 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주체를 바꿉니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베드로는 고백합니다. 그 정도 이야기했으면 베드로가 괜찮은 수준에 올라온 것처럼 생각이 드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가 띠 띠고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살면서 14년 6개월 15일 동안 원치 않는 길로 가면 그 다음부터 원하는 길로 가겠어요? 못 가지요. 그 다음 날에도 마찬가지로 원치 않는 길로 가요. 만약에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가버리면 저쪽인 줄 알았다고 저쪽으로 가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베드로가 이미 자기가 갈 길을 아는 셈이 돼버리면 그때부터 주님과 베드로가 헤어져도 베드로가 알아서 찾아오는 셈이 되지요. “주님, 그동안 교육 잘 받아서 앞으로 제가 혼자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에 구원받는 길에 베드로 본인의 공로가 섞이게 되지요. 그래서 끝까지 원치 않는 길로 갑니다. 그게 구원의 모델이에요.

 

저나 여러분 한 명도 원치 않는 길로 가서 이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앞으로 내일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원하는 길은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나한테 사기 친 사람, 나를 싫어한 사람들은 이유도 없이 제발 지옥 갔으면 좋겠다는 복수 심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나한테 사기 친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난감하지요. 천국에서 멱살 쥐고 싸울래요? 난감해 진다고요. 나를 싫어하고 내 인생을 조져놓은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면 반갑다고 할 수 있습니까? “너, 왜 왔는데? 주님이여, 저를 지옥으로 보내주시옵소서.”

 

<밀양>이라고 전도연 나온 영화가 있어요. 자기 아들 죽인 사람이 자기가 믿는 기독교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을 믿을 때 주인공 전도연은 그때부터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내가 싫어하는 자와 함께 천국 간다는 것은 자기는 견딜 수가 없었던 거예요. 이건 뭐예요? 천국 가는 길은 이제는 내 힘으로 갈 수 있다. 이 정도 신학 실력이면 갈 수 있다고 여겼던 그것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없습니다. 그저 알루미늄 호일만 칭칭 감은 거예요. 신학이란 호일, 아는 지식, 이런 걸로 감은 겁니다.

 

주께서 여러분 속살을 보여줄 때마다 우리는 그걸 원치 않아요. 남들처럼 근사하고 싶어요. 좀 고귀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요.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 뜻대로 해서 데려가는 겁니다. 우리는 부자 되고 싶어요. 가난하기 싫어요. 하지만 그것이 내 뜻이라면 주께서는 그 뜻을 꺾어버립니다. 배제해버립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 별로 없겠습니다만 저는 부자 되기 싫어요. 정말 우리 얘 공부 잘하는 것도 싫어요. 그런데 주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부자 되게 하시고 공부 잘하니까 견딜 수가 없어요. 나는 남자 만날 때 모범생이고 키 작고 성격적으로 문제 있고 예수도 안 믿고 돈 없고 그런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데 주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키 크고 성격 좋고 나만 사랑하고 돈 있고 잘 생기고 머리 좋아서 후손들 공부 잘할 것 같은 그런 남자가 왔을 때 “주여, 이것은 내 뜻이 진정 아니었습니다. 왜 저를 이렇게 난처하게 하십니까?” 그쪽으로 가야 네가 천국으로 가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 문 앞에서 이렇게 온 것은, 제 뜻이 아니었고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노래가 최성수의 <동행>이에요. 누가 나와 함께 가겠느냐. 이 길을. 주님과 함께 가고 있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절대적 내 뜻대로 아니지요. 주의 뜻대로. 우리는 주의 뜻대로 하면서 이 말씀은 결코 내가 지킨 게 아닙니다. 내가 지킬 수 없었다고 늘 고백케 해서 저 사람이 지옥 가는 것처럼 나도 지옥 가는 게 마땅한데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만 그쪽으로 가지 않고 이쪽으로 간 것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나를 예쁘게 보시고 일방적으로 사랑의 은덕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비유로 주신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체리 보면 유혹 되고 마귀를 못 이기고 환란 오면 다 넘어집니다. 못 넘어지게 하신 것은 내 뜻이 아니고 내 고상한 신앙이 아니라 주께서 이미 확정된 믿음을 주셔서 내가 했다는 소리를 못하게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안 가게 하신 겁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기도 내용이 바뀌어야 됩니다. “주여, 고생케 하옵소서.” 혹시나 말이죠. 통박이거든요. “고생케 하옵소서. 완전 거지 되게 하옵소서. 이게 주의 뜻입니다.” 하면 혹시나 진즉에 우리가 노렸던 부자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주께서는 그 통박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 다음에 비유가 무슨 비유지요. 24절입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 같으니” 그것 하기 전에요 23절에 “좋은 땅에 뿌렸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라고 했지요. 깨닫는 능력이 우리한테 없습니다. 왜냐하면 뭘 깨닫느냐 하면, 이 모든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없음을 깨닫는 거예요. 아까 세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그럴 때 주께서 “네가 합격자야.” 그 원리와 똑같은 원리에요. 기적과 말씀, 말씀과 기적, 같은 원리가 같이 녹아져있습니다.

 

그 다음에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24~29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천국은 하나의 액션이다, 이 말입니다. 천국은 있는 것을 가지는 것이 아니에요. 여기 북쪽에 가면 우두머리(한국말로)? 거기 가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뭐냐 하면, 물건이 존재하는 것을 돈 주고 가져오면 되지요. 물론 남자들은 주차장에서 자고 있지만 너무 힘들어서. 존재하는 것을 가져오면 내 것 되잖아요.

 

지금 예수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종들이 잘못된 게 뭐냐 하면, 가라지가 존재하면 나라는 존재자가 가라지를 뽑아내면 가라지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인이 어떻게 합니까? 가만두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가라지의 존재가 물건처럼 있다면 그 있음에 대해서 나라는 존재가 뽑을 수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뽑을 수 있는 자격이 없지요. 이건 어려운 게 아니고 쉬운 거예요.

 

밭이 있는데 가라지가 군데군데 있단 말이죠. 알곡도 있고. 우리는 가게에 진열한 물건처럼 있다고 보고 까만 것 제거하면 하얀 것만 남으니까 모든 것이 알곡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게 천국을 이해 못한 사고방식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알곡을 심어놓은 게 하나님의 원수가 심어놨죠. 원수가 심어놓은 것을 종들이 뽑을 수 있다는 발상은 잘못된 발상이라는 겁니다. 왜냐? 인간은 원수 안에 있기 때문에, 마귀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적을 물리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가 저 적을 물리치겠습니다.” 주님이, “네가 뭔데? 너도 같은 편이잖아요.” 우리는 주님 편이라고 자부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부하는 식으로 “주여, 주님의 원수가 있습니다. 내가 뽑을게요.” 하면 주님께서, “너나 잘하세요.”

 

하나님의 원수가 심었다는 말은, 같은 편인 우리 인간이, 자기가 마치 주님의 편에 있다고 착각해서 제가 충성되이 뽑겠다고 나서면 인간이 원수를 제거해서 그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지요. 예수님 왜 왔습니까? 예수님 오실 필요가 있습니까? 없지요. 종들만 있으면 되지요.

 

이 해석을 하면서 천국은 어떤 작업이냐 하면, 존재하는 가라지를 뽑을 수 있는 것은 그 원수를 심어놓은 그 존재를 다른 어떤 분, 존재가 제거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종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경우에만 가라지는 제거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의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가만두어라. 네가 나서면 가라지 뽑다가 알곡 뽑힌다. 쉽게 말해서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네 주제에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는 너밖에 몰라.

 

마치 너는 자동적으로 주님 편에 서있다고 착각하는 것, 이건 나폴레옹 정복욕입니다. 징기스칸 정복욕이에요. 저 모든 것 기독교 신자 다 만든다. 이 아파트 몽땅 우리 교회에 다 데려온다. 이거는 자기의 정복욕의 화신이 된 상태입니다. 주께서는, “너나 잘하세요.” 주께서 자기 백성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댄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나대든 안 나대든 관계없이 주님은 자기 백성 구원하는데 실패하지 않습니다.

 

또 여러분이 기다리는 시간이 왔습니다. 잘못된 해석 기다리지요. 잘못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교회가 있는데 장로님 한 분이 자꾸 교회 돈을 횡령하고 있어요. 교인들이, “목사님, 저 장로님이 가라지 같이 행동하는데 우리교회 발전을 위해서 장로님을 아예 이참에 재정에서 뽑아버리죠.”라고 했을 때 목사님이, “마태복음 13장 비유에서 놔두세요. 주께서 뽑아야지. 우리가 뽑다가 알곡까지 뽑히면 안 됩니다.” 이 해석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보나마나 맞을 리가 없지요. 틀린 거예요.

 

왜 틀렸느냐 하면, 그 목사는 지금 주님을 생각하는 겁니까, 교회를 생각하는 겁니까? 교회를 생각하지요. 교회는 존재가 돼요. 어떤 존재에 대해서 처리할 문제는 존재가 아니고 진짜 존재인 주님만 처리할 수 있어요. 그럼 우리는 뭡니까? 하나에 과정이거든요. 우리 가운데 알곡이 있고 가라지가 있다고 했을 때에 우리는 마치 우리가 존재로 생각해서 나는 마땅히 가라지가 아닐 것이고 알곡이라고 확정지어버리죠. 그런데 알곡과 가라지는 존재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곡은 알곡대로 드러나게 하시고 가라지는 가라지로 드러나는 그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가만두어라. 마지막 때에 처리한다는 겁니다. 누가 와서? 주님이 와서 처리하는 거예요. 저 장로 잘못되었으니까 이걸 우리가 뽑자고 할 때 그 장로가 알곡이고 나머지는 가라지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 책임 누가 질 거예요? 그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저 장로를 분명히 나쁘다고 했는데 만약에 그 장로가 알곡이고 나쁘다고 지적한 우리가 가라지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어디서 잘못된 겁니까?

 

실제로 이런 일이 사사기 마지막 장에 나옵니다. 베냐민 지파가 나쁘다고 공격했지요. 베냐민 지파 다 날아갔습니다. 뭔가 잘못되었어요. 자기는 정의라는 이름은 걸었지만 과연 우리 자신이 정의라는 말에 부합되는지 본인이 살필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는 없습니다. 없으면 어떠냐? 간단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세상 살 때 기분대로 삽니다. 누가 잘해주면 기분 좋고 못해주면 적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왜냐? 천하보다 내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에 나부터 우선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나한테 잘해주면 천사고 못해주면 마귀라고 잘못된 판정을 내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가라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빼놓고 다 가라지지요. 알곡은?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대신 십자가 지시고 성령을 집어넣어주면 가라지가 알곡으로 변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내가 상상한 주님이 나도 미처 몰랐지요. 그게 마귀의 본성인 것을.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마귀의 대장이라고 분류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처리하는 그쪽이 천사인줄 알았어요. 바라바를 풀어줄까, 예수를 풀어줄까? 할 때 누굴 풀어줬습니까? 바라바지요. 그렇다면 묻습니다. 그 자리에 본인이 계신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바라바입니다. 맞습니다. 누구도 예수님 편에 설 수 없어요. 왜냐? 의도적으로 다 끊어버리기 때문에. 나 같으면 예수님 편에 설 텐데. 그런 사람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냥 보이는 게 아니고 체포돼있습니다. 상황극입니다. 우리는 여기 앉아있습니다. 묻습니다. 저분은 내 구주라고 고백할까요, 나는 모른다고 고백할까요? 성경에 해답이 나와 있는데 어느 쪽이에요? 모른다고 할 때 정답 맞췄습니다. 갑자기 분위기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여러분, 베드로 개인의 실수가 아니에요. 베드로는 우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권력에 포착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부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제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 이유에 대해서 제가 좀 알거든요. 진도 나간다고 좋은 것 아니니까 할 때까지만 하겠습니다.

 

이것 뭐죠? X가 수학이나 학문에서 뭘 의미합니까? 미지죠. 보이지 않는 미지의 것이라 할 때 X라고 하잖아요. 인간은 미지의 두려움과 공포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뭔가 집에서나 여럿이 있으나 관계없어요. 개척교회를 하시든지 사업을 하든지 간에 어디서나 가만있는 그 순간도 항상 아우라처럼 미지의 공포가 두려움이 우리에게 밀려옵니다. 이것은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몰라요. 알 수 없는 공포에요. 얘가 공부를 잘해서 100점 맞았다고 달려올 때 잠시 기쁜데 이게 웬일입니까? 알 수 없는 공포가 우리를 둘러쌉니다. “쟤가 계속 잘해야 될 텐데 다음 시험에 90점 맞으면 어떡하지?”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옵니다.

 

우리가 남의 일이라고 쉽게 나 같으면 주님을 인정하겠다고 하지만 막상 그 현장에서 예수님이 체포됐을 때 내가 말한 것이 아니고 미지의 공포가 우리 몸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무섭다, 겁난다, 이 땅에서 살 길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나는 저 예수를 저주한다. 그런데 고마운 것은 이러한 형편을 누가 이해하십니까? 주께서 이해하시고 돌아보지요.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퍼뜩 베드로에게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했지요. 진도 더 나가지 맙시다. 지금 중요한 대목이니까.

 

그 다음에 묻습니다. 베드로가 그 다음부터 예수님을 구출했습니까, 울면서 그 자리를 피했습니까? “주여, 제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왔나이다.” 이렇게 했습니까? 피하고 울었지요. 통곡했지요. 왜 웁니까? 구출하고 싶어도 그걸 할 용기가 없지요. 왜 용기가 없습니까? 그걸 제가 묻는 거예요. 인간은 누가 데려다주지 아니하면 인간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했거든요. 마귀가 너를 지배하고 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제가 죽기까지 따르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내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는 마귀의 손에 잡힌다. 이 말은 내가 기도하게 되면 결코 마귀가 공격해서 마귀에게 잡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말은 뭐냐? 자기 힘으로 예수님을 구출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증명하는 식으로 주께서 인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비겁한 자입니다. 절대로 아는 대로 실행에 옮길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점을 주께서 이해해주셔서 이미 다 영생 얻는 문제에 대해서 깔끔하게 해결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주님 믿으니까 내 힘으로 하겠습니다. 되도 않는 건방떨지 마시고요. 이천 명 모였으니까 천오백 명 될까봐 두렵고요, 삼천 명 됐으니까 이천 명으로 내려갈까 두렵고요, 재산 500억 가졌습니까? 300억 될까 두렵고요. 달랑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는 사람이 있거든요. 전두환 전대통령. 20만 원밖에 없는 사람은 10만 원 될까 두려운 거예요. 그게 뭐라고요? 무슨 기호라고요? X에 휘둘리는 두려움에 감사합시다. 이 두려움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한계를 뽐내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이만하면 됐다고 했는데 강도 들어오고, 강도 퇴치하기 위해서 개 키웠는데 또 다른 일이 벌어질 때 이건 뭔가 됐다 싶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는 또 두려움이 찾아오고.

 

도대체 해결책이 뭡니까? 해결책 알려드려요? 사도 바울 같은 마음 가지면 됩니다. “주여, 어서 죽여주옵소서. 제가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빨리 이 땅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빌립보서 1장. 내가 사는 것과 떠나는 것 가운데서 나는 떠나는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못 떠나는 것은 여러분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봉사하느라 못 떠나는 것이지 제대하고 미치겠습니다. 하지만 주의 뜻으로 제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나를 죽인다? 그건 협박, 공갈도 안 돼요. 죽는 게 소원인데 고맙지요.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그것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해요. 다만 주의 뜻 말고 주께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영웅심리에 의해서 호들갑을 떨면서 열심 내는 것, 주의 뜻이 지시도 안 했는데 뭔가 멋들어진 결과물을 내겠다는 것, 그런 것들이 오히려 주님을 힘들게 아프게 합니다. 주께서 일하시니 우리는 그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럼 목사님, 어떤 일을 하게 됩니까? 강의 듣다 조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항상 소급해서 설명하세요. “주여, 졸았습니다. 주의 뜻에 감사합니다.” 믿으면 될 문제지 졸아서 마귀가 와서 말씀 빼앗고 되도 안 되는 소설 쓰지 마시고 모든 것은 머리카락 자라고 뽑히고 키가 자라고 다 주의 뜻입니다. 참새 보세요. 우리보다 훨씬 낫습니다. 개를 보세요. 오뉴월에 개 팔자. 개는 거의 암에 안 걸려요. 아무 걱정 없기 때문에. 미지의 X가 없어요. 개도 있을 수 있겠다. 어쨌든 간에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 우리 힘으로 해결 안 되는 두려움을 주셔서 우리 힘으로 구원받았다는 소리 못하게 하는 것, 이미 다하신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 이것이 나의 증인이 아니고 바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31절, “또 비유로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묻습니다. 나무 되고 난 뒤에 씨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 다음에 봅시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주님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안 보이는 분이 갈 수 없는 천국에 가도록 할 때 그런 관계가 천국의 관계지요. 그러면 그런 관계 되려면 안 보이는 분이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끊어버려야 돼요? 모든 보이는 것을 부정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할 때 천하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나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지요. 그걸 부정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비유 말씀을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킵니다. 이번에 삼촌이 도와주셔서 이렇게 회복됐습니다. 그러면 그 삼촌, 보이는데요. 그럼 누구 공로에요? 삼촌과 나의 좋은 관계가 어떤 큰 효과를 얻었다고 되잖아요. 우리는 그런 식이니까 어려울 때 아무리 친척끼리 싸워도 역시 마지막 어려울 때 일가친척이 도와줘요. 물론 일가친척이 안 도와주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자식이 어려울 때 결국은 마지못해 부모가 도와줘요. 아버지는, “이놈의 자식. 너는 내 자식 아니다. 호적 파가라.” 하지만 그새 엄마는 현금 싸 들고 몰래, “아버지 성질 알지. 내가 도와줄게.” 그게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나라입니다. 이런 식으로 천국 못 갑니다.

 

그러면 아버지한테 도움 받지 말고 주님한테 기도할까요?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하세요. 우리를 도와주던 어머니를 우리 주님이 보냈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참 편리하죠. 그게 사실입니다.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줄 때 얼른 받으세요. 엄마 마음 바뀌면 그것도 못 받습니다. 어려울 때는 그저 솔직한 게 최고에요. 그래놓고 누구한테? 엄마가 아니고 엄마를 보내주신 주님께서 누룩이 되셔서 제가 오늘도 주님의 혜택을 입고 사니 나는 도저히 내 힘으로 못사는 그런 존재임을 일깨워주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제 말은 이 비유의 말을 지킨다, 못 지킨다? 우리 힘으로 못 지킨다.

 

그 다음에 봅시다. 13장 34절,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감추인 것을 드러낼 때 비유로 드러낸다. 비유의 말씀 끝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은 허락된 자와 허락되지 않은 자, 들을 귀 없는 자와 있는 자를 구분한 작업은 네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한다. 따라서 네가 구원받거든 누구 공로다? 허락하시고 들을 귀 주신 오직 주님의 공로로 알아라. 그 말은 세상사람 믿지 말고 그리고 네 자신도 믿지 말고 너를 너 되게 한 주님께서 비유의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포함되어서 구원되는 거예요.

 

그래서 비유할 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비유는 주님이 던져놓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다 지켜놓고 마치 우리가 지킨 것처럼 우리에게 그냥 그 결과를 효과를 덮쳐버리면 우리는 비유 안에서 당당하게 천국 가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비유의 완성은 바로 십자가로 드러나지요.

 

그 다음에 38절 봅시다.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앞에 있는 가라지 비유가 비유로 끝난 줄 알았는데 그 비유를 해석하는 조차도 비유가 되는 거예요. 비유의 확장, 비유의 연장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쪽에서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우리 쪽에서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낱말 하나에 이것은 천사고 이것은 원수고 또 보이지 않는 분을 붙여요. 우리는 보이는 내 힘으로 지키고 싶은데 보이지 않는 분을 붙이니까 역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주께서 혼자 싸우시고 그 결과만 우리에게 그냥 무상으로 제공하는 식입니다. 그 작업에 우리가 말려든 것이죠. 우리의 동의도, 허락도 없이 해놓고 너는 내 전쟁의 여파로 전리품으로 구원됐느니라.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원수는 우리의 원수가 아니고 주님의 원수인 것을, 그런데 주님의 원수를 우리가 압니까?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주님의 원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의 원수라고 하니까 반발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 죄인 된 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예수님의 피로서 의인 되었다. 분명히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 된 자로 넣는 거예요. 원수 된 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우리가 고칠 수 없는 육신의 소통하는 법칙인데 그것 죽을 때까지 절대로 버리지 못합니다. 갖고 있으세요. 우리 몸에 딱 맞습니다. 돈만 챙기고 지만 생각하고. 이런 우리를 주님이 그저 피로서 구원했다는 걸 알면 바로 우리 안에 성령 들어계신 겁니다.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시간은 지났지만 목사님께서 융통성을 허락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여기에 44절 봅시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이 비유의 잘못된 해석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농부는 우린데 세상 살다가 우연히 발에 채였는데 보니까 교회더라. 가보니까 천국 소식이더라. 보물이었더라. 따라서 세상에서 살던 것에서 돌이켜서 교회 가서 신앙생활 잘해서 천국에 골인했다. 이것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우선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주님이란 왜 있느냐? 나 잘 되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우선입니까? 내가 우선이고 나 잘 되라고 예수님 있는 것, 그건 비유해석 잘못될 수밖에 없어요.

 

그 다음에 또 다른 잘못된 해석, 두 번째 해석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농부는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농부가 되셔서 귀한 보물을 챙겨다가 우리로 하여금 농부의 기쁨에 자기 성도를 집어넣었다. 굉장히 건전한 복음적인 해석처럼 들리지요. 내가 우선이 아니고 주님 우선처럼 해석되니까 참된 복음 같지요. 이것 아닙니다. 그럼 뭐냐? 존재로 해석하면 안 되고 농부가 누구며,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흐르는 과정 자체가 예수님의 작업입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든지 하다가 거기서 보물을 발견했다. 기뻤다.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 얻었다. 그 과정이 귀한 것 놓치지 않고 반드시 찾아내서 기뻤다. 그 기쁨이 우리 주님의 기쁨입니다. 따라서 그 기쁨이 속에 있으면 우리가 구원받았으면 이런 주님의 기쁨이 우리 자신의 기쁨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새삼스럽게 이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되면 과정으로 설명할 것을 존재로 설명해버리면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만 인정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존재를 믿어야 될 나라는 존재도 인정하면 아무리 예수님 위주라 하지만 결국 예수님 위주라고 하는 내가 위주가 되는 것이 인간의 사고의 한계거든요.

 

여러분, 아내를 사랑한다는 말이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한다고 보십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도 사랑 받았으면 사랑 값을 해서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야지. 하는 요구가 포함된 사랑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은 손해 보는 장사 안 하거든요. 명품 사줬는데 헤어지자. 이건 화나지요. 사주기 직전에 헤어졌다. 이건 기쁘지요. 사줬는데 얼른 받고 우리 헤어져. 이거는 남자들이 미칩니다. 뭔가 사기 당한 기분이 들잖아요.

 

이건 여자 쪽도 마찬가지지요. 못 배운 주제에 접대부로 있으면서 사랑하는 남자를 법대 나와서 사법고시 합격시켰는데 그 남자가 연수원에 다니면서 다른 연수생과 연애해서 자기를 버렸다. 이것 <별들의 고향>이고, 이것 실화입니다. 얼마 전에 있었거든요. 결국 그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습니까, 사랑 안 했습니까? 오늘 중요한 문제인데 사랑했어요, 사랑 안 했어요? 사랑 안 했지요.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지요. 그것을 정복욕, 소유욕이에요. 사랑이 아니고 소유욕을 발휘해놓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포장한 겁니다. 이런 자기 사랑에서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겠어요?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사랑하면서도 계속해서 미지의 두려움이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쁨은 우리가 참여할 수 없고 주께서 십자가 지시면서 네가 이 기쁨에 참여할 수 없다고 꾸짖으면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했을 때 나는 이 말씀에 있지도 않은 자에게 무상으로 이 기쁨을 주니 사랑도 못해놓고 사랑을 받는 그런 입장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기쁨, 그 기쁨이 바로 이 기쁨입니다.

 

보물은 우린데 그렇게 한 개념에 존재 하나를 집어넣지 마시고 대입하지 마시고 전체에 흐르는 과정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같은 내용이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 어떤 보석상하는 사람이 귀한 보석 얻고 기뻐했다. 누가 기뻐했습니까? 혼자 기뻐했지요. 주님 혼자 기뻐하신 거예요. 과정에서 주님이 기뻐하는 과정에 우리가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내 기쁨 말고 주님의 기쁨이 따로 있음을 깨닫는 식으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겁니다.

 

너무 갈수록 설명이 부실하고 성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여러분 실력을 믿으니까 그냥 넘어가고 마지막 끝으로 하나만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비유가, 천국은 마치, 보세요. 이건 설명해야 되겠어요. 천국은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 물건이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방금 뭐라고 해석했습니까? 천국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과정으로 흐름으로 있는 거예요. 흐름에 휩싸이면 여기가 천국이네 하고 느끼는 겁니다. 천국이 따로 있으면 우리는 그걸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거든요. 그런데 천국이 흐름 같으면 우리도 같이 흐름이 되는 거예요.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천국의 기쁨에 포함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좋은 것을 가짐으로서 내 안에서도 계속 좋다고 여기는 그런 버릇으로 세상을 살아왔습니다.

 

말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하늘의 파랑새가 예쁘지요. 그 예쁜 것을 손에 잡으면 예쁩니까? 비린내 나요. 멀리서는 아름답지만 내 손에 파랑새는 예쁘지 않아요. 온통 냄새납니다. 사람들은 자꾸 행복을 소유하려고 했어요.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행복한데 남이 가진 소유물을 나도 가지면 같이 행복하겠다고 여기는 자체가 이것이 행복을 날려 보내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미지의 두려움이 같이 찾아오게 돼있어요. 이것 잃으면 안 되는데. 돈 가진 사람의 걱정이 뭐냐? 가진 것 날아 갈까봐 걱정이에요. 걱정이라도 갖고 싶지요. 걱정은 걱정이고.

 

그 다음 마지막 비유가 뭐냐 하면, 47절,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언제 말입니까? 세상 끝이지요. 끝의 일을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52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라고 돼있어요.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신약과 구약, 마지막 때 모든 것을 최종 정리할 때 나타나는 현상을 나는 지금까지 비유로 이야기했다. 곳간에 있는 것을 가지고 온다. 피동적이죠. 우리는 피동적이에요. 우리는 곳간에 있다면 주께서 분류해서 좋은 고기는 따로 나쁜 고기는 따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야곱이 착한 일을 하기 전에 에서가 나쁜 일을 하기 전에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걸 구체화시킨 것이 인류역사고 역사 속에 야곱과 에서가 실제로 나타났고. 결국은 구원받는 것은 누구의 권한이며 누구의 일방적인 권리행사입니까?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허락된 사람만 구원받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분 나쁘십니까? 그렇다면 그건 나쁜 고기고, 여기에 대해서 고맙다고 하면, 그것은 좋은 고기가 되는 겁니다.

 

바로 주님이 자신이 던진 말씀을 스스로 십자가까지 지고 가면서 스스로 완성해놓고 소급해서 나는 전에 이런 비유를 던진 적이 있지. 그 비유가 성령 안에서 이미 그것이 완료가 되었기에 너는 죄 지었지만 나로 인하여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말씀 지킨 사람으로 간주되어서 천국에 합류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과정입니다.

 

어디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택한 백성을 끄집어내는 그 과정, 주님만이 할 수 있는 과정을 우리는 지금 뒤늦게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 주님 홀로 하셨다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찬양하면서 우리는 지금 남아있는 인생에 비유의 혜택이 덮치는 가운데서 즐겁게 기분 편안한 가운데 이미 결과가 끝난 상태에서 드라마 재방송 보듯이 축구 재방송 보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주여, 이렇게 못난 인간을 십자가로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비유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던진 말씀을 홀로 이뤄주시니 우리는 웬일인가 싶었는데 따지고 보니까 우리는 나만 우선 챙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바뀌려고 해도 이 성질 죽을 때까지 안 바뀔 걸 미리 아시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씀 취지에서 죄인 되게 하셔서 용서하시니 용서하심에 대해서 다시 감사하고 찬양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질문 있으면 하십시오.

 

-우선 천국 비유를 해주시면서 알곡과 가라지부터 과정을 얘기하셨거든요. 그전에는 과정이란 말씀 안 하셨는데 전환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군데군데 들어가는 주께서 주신 구약에서 인용된 말씀을 집어넣을 때 처음에 인용한 것이 이사야 6장이죠.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이건 총괄적으로 일방적으로 내가 이뤄가는 것이다. 너희는 끼지 마라. 너희는 하나님 원수인 것도 분간 안 되고 마치 예수님 편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런 식으로는 내 작업에 못 낀다. 내가 하겠다.

 

그 다음에 두 번째 비유로 이야기하신 것은 그 비유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수용되고 참여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에는 물체로 이야기하지요. 나중에는 뭡니까? 어떤 사람, 보석, 장수, 드디어 사람 이미지가 강렬하게 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고기로 나는 사람을 분류하면서 지옥 갈 사람은 이렇다는 걸 보여주면서 너는 천국 오너라. 저 사람이 지옥 가는구나. 아울러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나는 저 사람을 지옥 가도록 하지 않았는데 주께서 지옥 가게 하시는구나. 그렇다면 이 조치는 이 분류는 내가 한 게 아니고 주님께서 하셨다면 내가 천국 가는 것도 내가 선택해서 가는 게 아니고 저 사람이 지옥 가는 분류의 능력에 동일하게 나는 지옥 쪽이 아니고 천국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이 말씀과 더불어 기적이 일어나면서 구체적으로 인간과 직접 맞닥뜨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끝나면 이야기하는 게 있어요. 여러분들이 그냥 사세요. 사시면서 자신이 얼마나 아무리 말씀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킨다는 정도는 착한 사람이에요. 그게 아니고 지킬 마음이 없어요. 왜? 살기 바쁘니까. 사람 낳고 돈 낳기 때문에 사람이 중요하다고요? 그건 구색에 불과하고 실제로 내가 중요한 것은 돈이 최고 중요하고 내 명예가 최고 중요하다는 그러한 모습을 살아가면서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재방송이지요. 죄인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작업에 참여된 사람이에요.

 

우리가 흔히 말하잖아요. 저 사람은 불쌍하다. 용서해 달라. 주께서 너나 잘하세요. 남 불쌍하다고 하지 말고. 생각해보세요. 불쌍함의 정도가 뭡니까?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디 일방적으로 자기 기준을 남한테 적용시킵니까. 우리 집 개나 옆집 개에게 수작 걸다가 거절당할 때 우리 집 개가 너무 불쌍해. 우리 얘가 코 파다가 코피나면 불쌍하잖아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게 어른들 보기에 불쌍함에 들어갑니까? 안 들어가잖아요. 다른 사람은 그것보다 더 불쌍한데.

 

그러니까 우리는 자꾸 나를 정당한 기준을 동원시키게 돼요. 그런데 그것이 문제 있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하게 하셨던 거예요. 뭐든지. 나는 예수 믿었다고 자신만만했는데 주께서 일으킨 상황 속에서는 그게 전혀 믿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믿음이 아니고 사랑한 게 사랑이 아님을 들춰내는 그런 사태가 우리에게 자꾸 밀려옵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한 일이고 잘못된 길로 가는 게 아니고 그게 정상이에요. 자꾸 주님께 감사하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구원이 허락된 사람이라면 제가 만약에 중보적 기도를 할 때 이미 이 사람은 지옥 가려고 결정한 사람이라면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구원을 해달라는 그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인가요?

 

인간의 어떤 기도도 다 잘못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중보기도를 시킨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중보기도하지 다른 사람은 중보기도하면 안 돼요.

 

-하여튼 어떤 가족이나 어떤 친척이나 이미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은 허락된 사람이잖아요(그럼 존재가 돼요). 제가 만약에 주의 의지로 이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해서 계속 기도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요?

 

대상을 내가 정했다는 것이 잘못이죠. 주님의 기도 대상은 이미 정해져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미 정해져있는데 우리의 기도 범위 내에 원수가 포함될 수 없지요. 왜냐하면 원수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원수가 발생돼야 되는 거거든요. 원수가 없는데 기도 못하잖아요. 주이 말씀대로 하면 원수가 있어야 되죠. 그런데 원수를 내가 사랑해버리면 그 사람이 원수에요, 동료에요? 내가 사랑한 순간 원수가, 원수가 아니고 나의 동료가 돼버렸죠.

 

 

-그럼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건 우리의 본성이죠. 우리의 본성은 날 위해서 기도하게 돼있어요. 마태복음 6장에 우리는 나한테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내가 정합니다. 쇼핑할 때 “주여, 뭐든지 사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안 하지요. 이것은 살 것, 안 살 것을 내가 하지요. 기도할 때도 내가 정하잖아요.

 

 

-그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백성을 구원했거든요. 멸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

 

모세 안에 예수님이 들어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선지자 안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기 때문에 모세는 그렇게 한 겁니다.

 

 

-사람들이 하는 어떤 중보기도는 그런 것은?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일체 응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계속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는 사건이어야 되는데 사람의 기도는 재주가 되고 말았어요. 기도 시작, 끝. 재주가 되는 것은 숙달된 기능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기도 외에는 이러한 이적이 없다고 한 그 말씀은 무엇인가요? 누가복음에서.

 

그 말이 제 말인데요. 주님이 사건을 일으켜서 하는 기도, 그 기도하는 당사자는 절대로 내가 기도했다는 생각이 들 수 없지요. 왜? 주님이 직접 나한테 관여했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이 관여하지 않고 마음을 답답할 때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데 기도할 때부터 결과를 우리가 예측하잖아요. 그럼 내 뜻대로 마옵시고에 해당 안 돼요. “내 뜻대로 해주옵소서.”라고 협박조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기도하면서 사람은 그냥 기도하는 게 아니고 기도하는 내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가 함께 들어있어요. 그게 문제라니까요. 기도했는데 안 들어주기만 해봐라. 그 마음이 함께 들어있어요. 그런데 제가 강의 끝나면서 뭐라고 합니까? 그게 우리의 본성이에요. 하시라고요. 기도를 하세요. 한이 맺혔는데 터뜨려야지 안 터뜨리면 암 걸립니다. 터뜨리되 의미두지 마세요.

 

히브리서 7장 25절, 본인이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그는 항상 살아있어서 저희를 위해서 기도하지요. 주님의 기도가 응답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되지요. 우리 응답이 왜 필요하지요? 우리 대신 100% 응답되는 분이 기도하고 있는데 내 기도가 왜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뭐냐 하면, 내가 원하고 내가 보고 싶은 것에 대해서 한이 맺혔기 때문에 기도 안 하면 답답해서 못 견뎌서 기도하는 거예요. 답답할 때는 기도하세요. 하시고 그 가운데서 내 기도는 의미 없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기도했다고 하지 마시고, “주님이 내 안에서 기도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이 모든 것을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붙이세요.

 

답답한데 가만있다? 이건 폭발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우리의 기도를 일체 듣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기도하세요. 답답하면 달라 하지요. 강권 하에 하세요. 강권 하에 하시면 주께서 응답하십니다. 어떻게 응답하는 줄 알아요? 네 기도 개판이다. 내 기도 때문에 산다는 응답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내일 2부 예배 때 설교할 걸, 뉴저지교회 11시 예배 설교제목이 [주기도문]이에요. 중보기도 없다는 것 이야기할 거예요. 중보자가 있는데 중보자도 아닌 우리가 왜 중보기도해요. 성경에 도고란 좋은 말도 있는데 왜 갑자가 중보기도가 유행됐는지.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행위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행함이 왜 가치가 있어야 돼요? 큰일 날 일이거든요. 주님이 피에다 우리 행함을 섞으면 이건 복음이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은 복음이 아닌 걸 왜 그리 좋아하는지.

 

그래서 기도한 내용이 뭐냐? 가까운 사람, 내가 사랑한 사람, 이 사람들 이야기하니까 뭐는 빠집니까? 사기 친 놈, 도망간 놈, 이런 것을 위해서는 기도 안 해요. “주여, 저주받게 하옵소서.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나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지요. 그게 무슨 원수에 대한 사랑이에요.

 

우리 성질 드러내세요. 그리고 이미 주께서 그걸 이해하시고 다 아시고 조치 해놨습니다. 우리 인생은 재방송입니다.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재미로 인생 살아보세요. 보시면 모든 것이 어설프기 짝이 없습니다. “오년 전에 목사님 강의할 때 기도했지.” 돌아보니까 그것도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렇게 하면서 돌아보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 뉴저지교회에서 마지막 한 이야기가 전도서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즐겁게 사세요. 세상에 이런 긍정이 없어요. 즐겁게 살고 마음대로 사세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할당된 복입니다. 이미 합격했는데 시험 문제에 벌벌 떨지 마시고 미지의 은사 앞에 농락당하지 마세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늘 그랬으면 좋겠는데 늘 오지는 않아요. 어쨌든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그러면 왜 주께서는 이런 사랑이 늘 오지 않느냐? 누비이불 알지요. 바늘이 들어갔다가 올라왔다가 하지요. 그럼 이불 완성되고 난 뒤에 실이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실이 들어갔던 점 같은 것만 있지요.

 

군데군데 주의 십자가를 알지 스물네 시간 온종일 십자가 생각합니까? 안 하지요. 하지만 가끔 뭘 생각합니까? 자기가 너무 어려울 때 자기가 너무 죄의식을 느낄 때 “주여,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다가 오, 십자가. 이미 구원받았잖아. 그게 바늘 들어간 구멍이에요. 누비이불이에요. 실은 안 보여도 들어간 구멍은 보이거든요. 우리 몸에 촘촘히 성령이 들어간 자국이 있어요.

 

나는 십자가 흔적을 가졌으니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 갈라디아서에 나오잖아요. 십자가 들어있는 장착돼있는 흔적이 예상 밖에 남 같으면 절망할 텐데 “나 죽을 거야.” 하다가 “이미 용서했다는데 내가 왜 죽어. 그런데 이 느낌은 뭐지? 성령께서 내 안에 있으니까 이런 능력을 주셨구나.” 돌아보면서 우린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한테는 실패가 없어요. 실패, 성공이란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성공이 어디 있고 실패가 어디 있습니까? 그걸 따진다는 자체가 우리는 없습니다. 그냥 사시는 대로 주께서 굴러가는 대로 사시면서 세상 유람하시다가 소풍 왔다고 생각하고 사시다가 주님 부르실 때 군대생활 힘들었다고 제대하게 되면 거기 거지 나사로 만나게 돼요. 그 심정 이해하게 됩니다. 축구 후반전 있습니다. 전반전 다 아닙니다.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203.♡.42.222) 14-11-21 15:43 
20141004 미국중국인교회
 
(강의:이근호 목사)
 
 

 

방금 읽었던 요한계시록 20장 15절 다시 한 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제가 말은 이렇게 천천히 하는 것도 저한테는 드뭅니다. 왜냐하면 빨리 하는 편인데 천천히 하라고 부탁받았습니다. 그래서 성질 죽이고 천천히 하겠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한다고 다른 내용 없습니다.

 

15절에 보면,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렇게 돼있지요. 두 가지를 이제부터 이야기할 테니까 어느 쪽이 마음에 드는지 생각해보세요. 첫째,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천국 간다. 그것하고,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지운다. 여러분, 어느 것이 마음에 더 편합니까? 일번일 겁니다. 또 빨랐어요. 천천히 할게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천국 간다. 아무 부담 없이 오케이, 좋아요. 그런데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는 불이 피는 불 연못, 지옥 불에 들어간다. 내용은 똑같은데 이상하게 성경대로 하니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아는 일가친척들 중에 고생하는 것이 눈에 훤하게 보이니까 그들을 두고 나 혼자 천국 가니까 천국 가는 나도 마음이 편치 못하는 겁니다. 지금 말 속도 괜찮지요.

 

우리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왕 같은 내용이라면, 좋은 게 좋다고 이왕이면 좋게 여러분,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천국 간다고 좋게 이야기하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통역 어렵겠다^^), 무슨 기분 나쁜 심정이 있어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지옥 불에 간다고 심란하게 이야기해주니까 듣는 우리가 걱정되지요.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람인데 천국 갈까요, 지옥 갈까요? 골라잡으세요.” “천국 가겠습니다.”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사실은 예수님 없었으면 우리는 다 불 못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을 전제로 깔아두기 위해서 이 말씀하신 거예요. 교회 나오는 것, 예수 믿는 것, 뭐 심심하면 가지. 아닙니다. 몰라서 교회 못 나왔든, 알아서 못 나왔든, 관심이 있든, 없든, 그냥 그대로 있다가는 그대로 지옥 불에 갑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너, 나 아니면 지옥 가는 거야.” 이런 겁니다.

 

마트에서 물건 살 때 “이걸 살까, 저걸 살까? 그래 나는 결정했어. 이걸 사겠어.” 이렇게 한 게 아니고 우리는 이 땅에서 가만있었으면 아무 소리 못하고 지옥으로 쓸려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청소할 때 쓰레받기에 쓰레기를 빗자루로 담습니다. 그 다음에 그걸 쓰레기통으로 가져가지요. “쓰레기야 미안하다. 더러운데 숨 막히는 곳에 고생해라. 삼가 위로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싹 쓸어버리죠. “쓰레기야, 미안하다. 내가 눈물난다.” 이런 것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안 찾아왔으면 지옥 불로 그냥 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네가 선택하는 능력이 없는데 내가 네게 조언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네가 지옥 가도 상관없는데 특별히 불쌍히 여겨서 너를 지옥에서 빼내줬으니까 네가 선택 잘해서 이런 식으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겨서 천국 가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거리에 거지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거지를 봤어요. 안 줘도 되는데 돈을 꺼낼 때 거지는 앉아서 동전 말고 지폐를 바라는데 그 사람은 부스럭거리다 껌을 꺼내서 씹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처음부터 그냥 가는 것도 내 마음이에요. 그런데 거지가 착각한 거예요. 저렇게 오래 걸리는 걸 보니까 큰 돈 주려고 하는 모양이구나. 그런데 그냥 가버렸어요. 첫 번째, 거지가 화낸다는 것이 옳습니까, 그릅니까? 거지는 그 사람에 대해서 화낼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주면 받고 안 주면 말고. 그것을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지는, “잘 먹고 잘 살아라. 에이 재수 없어.” 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뒤늦게 동냥을 줬을 때 그 거지는, “안 줘도 될 분이 주셨구나.” 이런 것이 긍휼을 받은 것이란 걸 알게 되지요. 바로 주님께서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긍휼을 주시기 위해서(이제부터 중요합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을 우리 곁에 배치해두신 겁니다. 솜씨 없어서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아이큐가 낮아서 지옥 간 것도 아니고 성실치 못해서 선택을 잘못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 가는 것은 우리 주님 마음대로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천국, 안 줘?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은 지옥으로 분류하신 겁니다.

 

여러분, 땡잡았습니다. 우린 땡잡았어요. 내 행함도 아니고 열심도 아니고 나의 착함도 아니고 주님께서 그냥 갈 줄 알았어요. 그냥 갈 줄 알았는데 뒤돌아서서 긍휼을 주시는데 주시는 것 안 받을 수도 없고 받아보니까 용서에요, 용서. “너, 죄 졌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용서해줄게.” “당신은 누군데 용서하십니까?” “내가 바로 지옥과 천국을 결정짓는 심판관인데 나는 그 권한으로 너의 죄를 용서함으로 천국에 보내줄게.” 그렇게 해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15절 다시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이렇게 돼있습니다. 제가 지금 천천히 하는 것, 보통 인내 아닙니다.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할 때까지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누구든지’와 ‘생명책’을 연결시켜서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이 땅에서 시험 쳐서 합격한 사람만이 아니고 everybody누구든지 주님께서 인간의 조건을 거부하시고 인간을 일체 인정하지 않으시고 주께서 집어넣게 되면 그게 거기인지 창녀인지 세리인지 관계없이 누구든지 집힌 사람은 다 천국 가기 때문에 생명책에 적힌 사람끼리 경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재주 내놓고, “너, 100미터 몇 초야? 20초? 나는 18초야.” 이렇게 자랑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에브리바디 조건 없이 기록된 거예요. 나는 거지는 거지인데 인물이 좀 되는 거지지. 그러니까 불쌍히 여겼구나. 같은 여자 거지지만 이번에 미장원에서 머리가 잘 나왔기 때문에 예뻐서 생명책에 기록된 게 아닙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네가 따로 조건을 따질 필요가 없이 그저 하나의 조건, 불쌍히 여겼다는 조건으로 여러분, 100프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런데 여러분들이 궁금한 게 있을 거예요. 그렇게 긍휼을 받았다면 긍휼을 받은 티가 나야 되는데 그래야 내가 천국 간다는 티를 내고 안심을 할 텐데 그렇다면 “목사님, 긍휼 받은 사람의 티, 달라진 면이 뭡니까?”라고 궁금하고 싶지요? 궁금해야 되는데(-예, 궁금합니다. 한국사람 말고). 이게 상당히 궁금해야 돼요. 그래야 안심이 되니까.

 

그래서 궁금증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신의 행함을 가지고 천국 가겠다는 사람은 긍휼을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내 행함을 묻거나 따지지 아니하시고 다른 식으로 우리를 구원했다고 믿어버리면 그 사람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입니다.

 

그럼 그 다음에 또 이런 의문점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아주 머리가 좋습니다. 그것은 무슨 의문점이냐 하면, 도대체 우리의 행함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왜 천국에 안 넣어주시는가? 우리가 하는 행함 속에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그것을 시비 걸어서 천국에 안 넣어주는가? 그게 또 머리 좋은 여러분들은 떠오르게 돼있어요.

 

행함이 뭐가 문제냐? 그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함은 어떤 방향, 어떤 곳을 바라보게 돼있습니다. 다시 천천히 하겠습니다. 행함을 자랑하게 되면 그것은 긍휼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 불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행함으로 나한테 나올 생각 말라. 행함에 문제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아멘, 예라고 하고 돌아서면서도 무슨 문제가 있지요? 우리는 묻고 싶어 미치겠어요. 그게 궁금하니까. 우리 행함에 뭐가 문제가 있느냐 말이죠.

 

자식 낳아서 잘 길러. 이게 무슨 문제가 있냐? 배가 고파서 숟가락 들고 밥 퍼먹었어. 이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오줌 누려고 화장실에 가고. 이 행함에 무슨 문제가 있으며 누가 웃긴다고 웃는 것, 이게 무슨 문제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께는 그게 땡 탈락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요한계시록보다 앞서 있는 복음 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4장에 있습니다. 1절부터 11절까지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길지요. 길면 귀찮지요. 귀찮으니까 다 보기 싫지요. 그래서 저는 간추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귀찮은 것을 풀어주기 위해서 그냥 간추려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세 가지로 방향이 정해져서 행동하게 돼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람은 돈 없이는 못 산다는 겁니다. 공감들 하시지요? 우리의 마음은 사람이 먼저고 돈이 나중입니다. 사람 낳고 돈 낳다. 그렇게 살고 싶지만 현재 이 세상 세계는 돈 낳고 사람 낳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쁘지요. 여러분이 부자 돼보세요. 그게 기분 좋은 이야기입니다. 돈 많을 때 기분 좋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상상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방향은 부자 되고 싶습니다. 지지리 궁상(이것 통역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찢어지게 가난함 정말 진절머리 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진짜 죽을 때까지 가난할 것 같아(말 빨리됐다. 큰일 났다). 피곤에 찌들어서 퇴근해서 방에 널브러져 자게 되면, 주여, 정녕 언제까지 이 지경입니까?“ 끝이 보이지 않고 희망도 없고. 언제까지.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소원이 뭐냐?” 우리는 말합니다. “보면 모릅니까? 아시면서 약 올리기에요. 알면서. 왜 고생하는데 그놈의 돈. 돈 없으면 아파도 병원 못 가고 돈 없으면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이 세상에서 도대체 이런 식으로는 더는 못살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돈 좀 주세요.”

 

모든 사람이 화장실에서(그놈의 돈 번다고 화장실도 자주 못 오네) 오줌 누면서도 돈 생각은 잊을 수가 있는가? 우리의 행함, 방향성 있습니다. 그건 돈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너는 돈만 벌면 인간된다고 천지창조 때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치던가요? 아니지요. 중간에 운명이 바뀌었어요. 하나님을 위해서 생각해야 될 생각이 어떻게 됐는지 돈, 돈, 돈밖에 모르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돈을 좋아하는지 본인들도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성경 보니까 악마가 그렇게 우리를 인간성 다 버려놨습니다.

 

“악마야, 네가 나를 사람이 사는 목적이 돈 버는 재미로 살도록 네가 인간을 아주 버려놨구나.” 악마한테 따지면 악마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네 소원대로 돈 포기해보지, 왜?” 악마는 배짱으로 나옵니다. “돈 없이도 재미있게 살아보지, 왜?”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이렇게 나옵니다. “그건 아니고. 말이 그렇지(통역 어려운데). 농담도 못하나.”

 

“아이고, 이 회사 더러워서 못 다니겠다.” 봉투에 사직서 쓰고, “사장 나와. 나도 사나이야. 더럽다. 이까짓 돈이 뭔데?” 사직서 던집니다. 그러면 사장님이, “어이. 김 대리. 방금 뭐 내놨지?” 물으면 갑자기 별 것 아니라고 도로 집어넣었어요. 총각 같으면 됩니다. 눈앞에 아내와 자식 둘이 어른거리면, “참아야지.” “방금 뭘 꺼내던데?” “아닙니다. 그래 참자.”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이미 돈이 유일한 삶의 기쁨이요, 살게 하는 원동력, 동기로 작용하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꼼짝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목사님, 나이 들면 바뀝니다. 라고 하는 사람 있는데 제 주변에 경험으로 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사람은 얼굴이 못생긴 사람이 아니고 돈 없는 늙은이에요. 늙은 것도 서러운데 돈까지 없으면 그처럼 서러운 게 없습니다. 사실 돈 번다는 것이 얼마나 자존심 상합니까.

 

같은 부자 친구 늙은이는 돈 있어 젊은 여자 벌써 세 번째 바꿔치기 했는데 돈 없으니까 여자가 오지를 않네요. 참 서글픈 우리 미래의 자화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요? 예수? 교회? 삼위일체? 돈만 주면 부처라도 믿겠다고 자진해서 나서는 이런 성향, 이미 우리는 마귀의 품에서 권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부분만 정리해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기를 결정할 때 이게 나한테 돈이 더 들어올 수 있는 행동인지 아니면 내 주머니의 돈이 나가는 행동인지가 선택에 유일한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돈 되면 뼈 빠지게라도 충성할 수 있고 돈이 아니면 안 되는 그것이 왜 주님은 평소에 우리의 모든 행동이 문제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유일한 라이벌은 돈이 되는 그런 처지에 너희들이 속해 있다는 겁니다. 더 확실한 사실은 하나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를 미워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이거 겁나게 무서운 말입니다. “집사님, 하나님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뭔 뜻이냐 하면, “집사님, 돈 무지무지 미워하시지요?”라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이라는 말씀이에요. 이것 지킬 위인 없습니다. 우리는 돈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돈까지 주시는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것 마귀가 만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유혹 받고 교회 다니지 마세요. 거기에 적그리스도가 앉아있습니다.

 

두 번째, 우리의 행동에 문제 있는 이유는, 돈으로 인기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 인기라는 것은 평범함에서 우뚝 솟아있을 때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요. 대표적인 것이 연예인들, 가수, 영화배우, 탤런트들. 못 생긴 탤런트 수준이 보통 사람 잘 생긴 것보다 더 잘 생겼어. 탤런트가 못 생겼다고 하지만 실은 그 수준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겁니다. 그래서 감독이 픽업하는 거예요. 그 배우들이 우리가 그리워하던 특출한 인물을 갖고 있을 때 사람들은 대리만족으로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거든요.

 

주목 받는다는 것은 아이큐가 높다든지 공부를 잘한다든지 권력이 아주 높다든지 인물이 좋다든지 어떤 기타를 잘 친다든지 컴퓨터를 잘한다든지 어떤 특출한 능력, 그것이 인기로 돼있습니다. 이왕이면 유명하게 살아보고 싶은 것, 이게 바로 마귀가 예수님에게 두 번째 한 시험입니다. 마귀가 주님한테 하는 모든 말의 취지는 그동안 모든 인간이 내 손에서 다 굴복했고 내 꾐에 안 빠진 위인이 없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사람은 떡을 제일 중요시 여겼고 남보다 특출한 기적과 능력을 행할 때 사람들의 박수와 주목을 받는다. 이것이 내 수하에 있는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이고 그것이 행동으로 그쪽으로 방향을 잡게 돼있다는 겁니다.

 

세 번째,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우리는 세상의 번영과 세상의 권력과 세상의 권세욕에 사로잡혀있습니다. 이왕이면 많은 것을 더 소유하겠다는 이 소유욕, 이것은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타고났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함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런 문제가 있으면 우리가 눈치 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여, 우리에게 이런 문제가 있으니까 제가 반성하겠습니다. 또는 회개해서 제대로 행동하겠습니다.”라고 하면 행위 해놓고 내 쪽에서 알아서 반성하면 천국 갈 수 있는 길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내 잘못을 내가 알아서 반성하면, “착하구나. 네가 네 잘못을 아니까 내가 넣어줄게.” 이렇게 될 법도 한데 “왜 그러면 다른 책, 생명책이 필요하냐?”라는 생각이 여러분 이 시점에서 궁금하지 않습니까?

 

반성 잘하는 내가 행동해놓고 반성하게 되면, “네가 네 죄를 아는구나. 그냥 넣어줄게.” 할 수도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왜 따로 생명책이 필요하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마귀 안에 있는 인간들이 반성을 하게 되면 이제는 반성하고 난 그 이후에 나 자신을 굉장히 신성시 하고 대단한 존재로 간주하는 그러한 속성을 드러내요. 그 대표자들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 일에 집중하고 몰두했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그들에게 질책을 해봤더니만 그들이 예수님을 떠밀었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나온 게 뭐냐? 예수님의 죽음이고 피였습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죽었던 피 흘린 분이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어요.

 

여러분들은 비행기가 왔다갔다하는 곳이 활주로가 아니고 활주로 목적이 비행기가 빨리 달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비행기는 활주로를 떠나야지요. 온종일 비행기 몰고 스물네 시간 재미있다고 비행장 돌아다니면 그거는 비행기 아니지요. 그건 자동차지요. 비행기는 떠야 맛이란 말이죠. 아무리 회개하고 반성해도 죽어서 부활 안 되면 자기 잘난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홈을 팠습니다. 이 땅에 와서 고난 받고 드디어 비행기처럼 수직으로 올라간 것처럼 아버지 쪽으로 수직으로 올라갔습니다. 수직으로 올라간 그 길이 바로 유일하게 천국 가는 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거든요. 그 말을 줄여보면 그 누구도 반성한다고 해서 아무도 하늘나라가 갈 수 없다는 말이에요. 아무도 갈 수 없다.

 

따라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나와 함께 하지 않고는 예수님의 오심은, 왜 오셨느냐? 아무도 천국 갈 수 없음을 마귀에 속했음을 인간의 어떤 모든 행동도 돈과 인기와 세상 권력을 확보하는데 있기 때문에 문제 있기 때문에 아무도 갈 수 없음을 내가 자국을 남기면서 흔적을 긁어가면서 그걸 하신 거예요.

 

그 흔적으로 우리를 가게 할 때 합류한 사람의 특징은, “주여, 나의 모든 행함은 죄였습니다.”고 이야기하면서 들어가 보니까 그 흔적이 피가 적셔있어요. 그 피, 이 땅에서 죽음을 당한 그 피가 부활로 이어진 겁니다. 피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고, “십자가가 있는데 누가 너를 꼬시더냐?”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
 
 

우리는 거기에 초청받아 가면서 저벅저벅 피를 보면서 이 피 아니었으면 잘난 재미로 살아왔습니다. 맞습니다. 나는 지금도 돈 좋아하고 인기 좋아하고. 주면 좋지요. 안 줘서 문제지. 돈 있는 게 문제 아니잖아요. 안 줘서 문제지.

 

그런데 피를 보니까 그냥 반성이 아니고 이거는 반성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반성하나 안 하나 반성하는 행위로도 구원받지 못하고 이미 우리가 반성해도 소용없음을 아시고 미리 준비된 용서의 피가 네 죄를 내가 대신 가져가서 네가 당할 저주를 내가 아버지께 대신 받았다는 그것을 피라는 흔적을 남길 때 그 피를 따라서 가게 되면 예수님은 첫째 부활, 우리는 그 다음 부활, 하늘나라 형상을 보면서 비행기에서 위를 보면서, “아담아, 안녕. 긍휼 받아서 미안해. 그런데 내 소망이 아니고 주님의 소원이었거든.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도 미안하지만 주님의 소원이 나에게 긍휼을 줬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헤어지자.”라고 지금 뜨는 중에 있습니다.

 

돈 없습니까? 너무 서러워하기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지금 머리 둘 곳 있습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마음을 낮출 때에 더 크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사람은 마귀가 있어서 더더더 돈, 더더더 인기, 더더더 세상 권력. 우리도 그것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그 죄가 어디서 용서받았는지 확인합시다. 피로 용서받는다는 것이 농담 아닙니다. 왜? 피 흘리신 분이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소설이 아닌 것이 실제로 죽었다가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 되었습니다. 철학박사 아니더라도 공학박사 아니더라도 그 지혜만 있어도 주님 나라에 합격입니다.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믿어지는 놀라운 능력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영을 주어서 나의 피는 너를 위함이라고 지적해줄 때 우리는 그 마음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돈 없어도 행복한 것은 바로 주님께서 사랑을 해준 그 사랑으로 활주로를 날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공중부양, 진리가 너희를 날게 할 것이다. 세상에서 떨어지게 할 것이다. 마음껏 공중 나는 즐거움을 누리시고 밑을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난 것 없었는데 주님 믿으라고 요청한 것도 없었는데 일방적으로 의논 없이 협의 없이 그냥 들어와서 피와 너의 운명과 관련 있다고 저희에게 알려주시니 우리는 그런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피 흘림이 나의 계획 속에 없었던 건데 나를 만든 주님의 계획 속에 있던 것이 이 땅을 방문해서 피만 남기고 올라가셨으니 그 길 따라 우리도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관리자(IP:203.♡.42.222) 14-11-21 15:45 
20140928 미국동부예배

(강의: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24장 22~27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신약성경 140페이지입니다. “또한 우리 주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이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자지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한다고 할 때 이것이 친목인지 교제를 하는 생활인지 정말 신앙생활인지 본인은 신앙생활이라고 우기는데 과연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사람은 신앙생활 못하게 된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어요. 인간은 신앙생활 하는 존재가 아니고 사람이 제일 원하는 것은 편한 겁니다. 그냥 즐겁고, 즐겁고, 즐겁고. 편하고, 현하고, 편하고. 제는 그것을 노인네들을 통해서 많이 느껴요.

 

인간의 본성이란 신앙으로 위장하고 종교로 위장하고 신이란 이름으로 위장해도 결국 긴장이 풀리면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은 즐겁고, 즐겁고, 즐겁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편하고, 편하고, 편하고. 내 편한 것 방해하면 하나님이라도 싫고. 내 편한 걸 도와주고 날 즐겁게 한다면 부처라도 반길 수밖에 없는 이단, 삼단이든 가리지 않고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우리는 대환영할 것 같은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억지를 부리면서 신앙생활을 한다. 이게 억지가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참 신앙생활 잘 하시는 분에게 예의가 없는 건 알겠지만 깨놓고 이야기해서 신앙이 중요하냐, 내 몸 편한 게 중요하냐? 내 몸 편한 게 최고에요. 귀찮게 하지 말라. 편하게 살다가 죽는 것, 어쩌면 우리의 타고난 본성인데 그걸 가린다고 가려지겠습니까?
 
 

여자들에게 묻습니다. 어떤 남자가 좋으냐? 돈 있고 능력 있고 잘 생기고 키 크고 성격 좋고, 뭐 그 정도만 있으면 괜찮겠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남자들에게 물어보세요. 어떤 여자가 좋으냐? 20대한테 물으면, 예쁜 여자. 20대니까 철이 없어서. 30대 예쁜 여자. 40대, 예쁜 여자. 50대, 예쁜 여자. 그럼 80 되도 예쁜 여자. 90대 노인에게 어떤 여자가 좋습니까? 예쁜 여자가 최고에요.
 
 

그것이 모든 남자의 공통점이라면, 그런 남자가 신앙생활을 한다? 이거는 거짓말 아니면 자기를 속이는 것 아니면 무슨 일이 벌어졌어. 이건 있을 수 없는 기적이 벌어지지 않고는 아무리 교회 20년, 30년 다니면서 사도신경 외우고 예배참석해도 그저 예쁜 것, 다른 말로 하면 잘 생기고 성격 좋고 돈 많고 나의 무한 쇼핑해도 아무 소리 않고 즐겁게 뒷돈 다 대줄 수 있는 능력 있는 남자. 상상만 해도 기분 좋아요. 있든 없든 간에. 그게 인간 본성 아니에요? 누가복음 펼쳐놔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거룩한 말씀 들어도 우리의 본성 우리가 속일 수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신앙생활 이렇게 합시다. 잘해보려고 하지 말고 매일같이 이렇게 생각합시다. 내 신앙 내가 조작한 것일 수 있다는 걸 늘 생각합시다. 이건 분명히 내가 스스로 남한테 우리 가정이 기독교 가정이니까 하도 부모가 교회 가라고 닦달 내니까 믿는 척하지만 사실은 나는 신이고 예수고 성경이야기고 관심 없고 나는 내 몸을 꾸미고 남한테 으스대면서 박수 받는 것, “나 이런 존재야.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런 것을 오히려 더 선호하면서 그걸 교회에서 곱게 포장질하는 이중인격자, 이중만 해도 괜찮아요. 삼중, 사중 인격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본 모습이다.

 

따라서 40년, 50년 성경공부해도 결국 내가 믿는 것은 나뿐일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성경을 보셔야 돼요. 그러면 놀라운 게 나타나는 데 성경에서 예수님의 반대편에 섰던 그 행동들이 어쩌면 그렇게 정이 가는지 그리고 예수님한테 질타 받은 그들이 어쩌면 우리 자신을 그대로 닮았는지. 그렇다면 신앙생활 한다고 우기는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거는 조작된 것이고 그냥 분위기에 맞추려는 나의 연출, 그 연출이 하나님까지 속이려고 경건한 척하는 나의 본성을 내가 어떻게 스스로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복음을 강의했고 이제 누가복음 마지막 대목을 보겠는데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올 때 우리는 여기서 비정상적인 인간을 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상식과 정상은 부활하지 않아야 돼요.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이야기고 이거는 후대 사람이 조작했든지 아니면 그 당시 사람들이 꾸민 이야기인지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성경 말씀을 대해야 됩니다. 마치 신앙도 없으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부활 믿습니다. 남들은 안 믿어도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까불지 말고 진지하게 해야 돼요.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 이 사람들은 여기 선지자 나오거든요. 27절에 보면,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여기 모세와 선지자들은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입니다. 우리는 비정상이 싫어요. 심지어 장애자 한 명만 있어도 약간 느낌이 안 되는데 비정상이 있으면 흔히 요새 유행하는 소통이 안 돼요. 소통 안 되면 우린 왕따를 시키고 싶어요. 소통 되는 우리끼리 친목을 도모하면서 그 자체에서 행복을 만끽하는 것, 이게 우리 몸이 편하게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우리의 소망은 내가 즐겁게 사는 것이고 내 몸이 안 아프고 편하게 있으면 우리는 최고에요. 돈 많이 벌어서 쓰는 재미로 사는 것,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만큼 돈이 없기 때문에 품고 살지만 못 써서 환장하고 남한테 구제도 팍팍하면서. 생각만 해도 기분 좋지요. 그렇게 살 때 우리는 그것을 정상인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정상인]입니다.
 
 

이 정상인이 되는 것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정상인으로 규정하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나와 누가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비정상일 가능성이 많고 나는 원래부터 정상인이니까. 이건 이유도 없어요. 무조건 그래야만 돼. 나는 무조건 정상인이어야 돼요. 그리고 내 목적은 나 혼자 즐겁고 편하고 행복하고. 그게 정상인의 유일한 희망이 되겠지요.

 

그 정상인의 눈으로써 이 부활이야기를 접근해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은 정상인이 아니네요. 왜 그러냐 하면 그분이 부활을 한 거예요. 사람은 한 번 죽으면 흙이 되어 사라질 때 박테리아 작용에 의해서 흙 속에 있는 유기물에서 무기물로 탄소가 있는 결합체에서 탄소 없는 것으로 변하거든요. 이게 정상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인들끼리 내린 결론은,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자연으로 환원한다. 이게 정상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가복음 24장을 봤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정상인입니다.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여자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강의하면서 요새는 머리가 완전히 갔어요. 여자 세 명이 사실은 살로메와 야고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세 명인데 나는 예수님 엄마 같다고 했는데 나중에 뭔가 찝찝해서 찾아보니까 이게 살로메와 야고보 어머니에요. 하여튼 그건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난 틀려도 성경만 안 틀리면 되니까.

 

문제는 이 여인들이 정상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상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을 삼년 동안 따라다녀도 그들은 정상인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그들은 자칭 자기를 믿는 자라고 봤어요. 믿는 자라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보고 놀라야 돼요, 안 놀라야 돼요? 안 놀라야 돼요. 그런데 그들은 자칭 정상인이고 정상인 된 것을 어떤 자부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 왜?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고 그 사회에서 같이 웃으면서 산다는 것이 자기로서는 자부심을 느끼는 겁니다. “나 어때?” “정상인이야.” “너도 정상인이야.” 얼마나 좋아요. 아무도 토 달 사람 없어요.

 

그런데 뭡니까? 그 정상인 그룹에 예수님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예수님 혼자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죽는 게 정상인데 시체가 없어요. 이것 어떻게 할 거예요?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정상인 맞으면 예수님은 비정상인 되고 만약에(지금 이런 말하고 싶은 건 아닌데) 예수님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인이라면, 우리는 자살 열 번 해도 마땅합니다. 이건 인생 헛살았습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에 관한 것이지 종교 하나씩 갖고 있으세요. 종교생활 하세요. 이걸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가져서 뭐 할 건데요? 천주교 가져서 뭐 하는데? 힌두교 가져서 뭘 할 겁니까? 어차피 목적은, 또 이야기해드릴까요? 내 몸 편하고 돈 재어놓고 쓰는 재미, 그래서 그게 즐겁고. 그건 우리 정상인이, 지금 세 번째 강조합니다. 정상인의 목표는 너도 나도 이미 정해졌어요. 이빨 아프면 싫어요. 이빨 아프면 얼른 치과에 가서 치료를 해서 뭐로 환원한다? 안 아픈 이빨을 가지면 내 몸이 편해요. 이빨 아프면 신경 쓰이거든요.

 

항상 편하고 그냥 편하면 또 재미가 없어. 권태로워. 그래서 즐거워야 돼. 즐거운 것은 돈 쓰는 것만큼 더 좋은 재미가 없잖아요. 쇼핑 재미. 완전히 홈쇼핑 중독되어 쓰지도 않을 걸 재어놓는 재미. 알아주는 재미, 잘 사는 재미, 부자 됐다는 소리 듣는 재미, 칭찬받는 재미, 그것이 정상이고 우리를 그것이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옆 사람도 그렇고 다들 그래요. 그러니까 아무문제 없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하늘에서 천사가 오든 주님이 오든 우리는 동의할 줄 알았어요. 호응할 줄 알았어요.

 

그리고 심지어 메시아란 분과 삼년 동안 따라다녔던 여자 분들이나 제자들도 했기 때문에 “정상인 맞지요?” 확인하면서 그동안 같은 레벨인 줄 알았는데 부활했다는 소식 듣고 딜레마에 빠진 겁니다. 그냥 부활을 접수하면 되잖아. 아닙니다. 부활을 접수하는 순간 우리는 졸지에 인생 자체가 사기였습니다. 어제 강의에서 우리는 상징물에 불과한데 실제 인간인 줄 착각한 거예요.
 
 

그래서 일단 부정합니다. 아니야. 부활 안 했어. 아마 시체를 누가 훔쳐갔든지 무덤의 번지수를 잘못 찾았든지. 네가 지금 너무 슬픔에 빠져도 정신착란을 일으켜서 시체도 없는 무덤에 가서 부활하셨다고 착각할 수 있거든요. 하도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한다고 하니까 믿지도 않았지만 혹시 그럴까 싶어서 정신없이 가보니까 그럴 수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여자들이 오고 난 뒤에 특히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자들 취미가 여자 무시하는 거니까. 여자들이 와서 셋이나 그러니까 직접 제자들이 확인 차 가본 거예요. 확인사살이라는 게 있잖아요.
 
 

만약에 부활한 것을 우리가 그걸 미리 내 정상 속에 부활이 들어있지 않다면, 이것은 그동안 나를 정상이라고 여겼던 그 자체가 처음부터 잘못된 판단을 내가 나한테 강요한 셈이 되거든요. 정상도 아닌데 너나 나나 정상이라고 행세를 하니까 빌붙어서 같이 편하게 살려고 즐겁게 살려고 뭣도 모르고 그냥 정상으로 여겼던 겁니다.
 
 

가보니까 무덤에 시체는 없었고 거기에 천사가 나타났고 그 다음에 천사가 잔소리하기를 책망을 하는 거예요. 책망을 하면서 하는 말이, 예수님의 길이 아직도 남아있는 우리 길인지 아니면 장례 치르고 보내고 우리끼리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마감인지 안 그러면 연장해야 되는지 다시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로 연장하지. 우리는 쉽게 생각하잖아요. 그것부터 문제입니다. 만약에 연장하게 되면 우리는 같이 즐겁게 친구처럼 사는 사람에게 미친 놈 소리 들어요. 우리는 서로가 정상이라고 우기면서 만났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버리면 우리는 누구 패로 분류가 되느냐 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을 하신 분과 한 패가 되는 것으로 규정을 받아서 저쪽에서 우리와 안 놀아줘요.

 

그러면 졸지에 우리는 뭐가 돼요? “놀아줘.” 했는데 “너는 정신상태가 희한해. 어떻게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 3+5는 얼마?” “8.” “그건 맞네. 5*5는?” “25.” “그건 맞네. 그럼 그것까지만 알고 우리 편이라 할게.” “아니야. 인간은 죽었다가 부활해서 하늘나라 갈 수 있어.” “그런 소리하지 마. 그러면 안 넣어줘.” 안 놀아주니까 우리만 손해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부정할까요? 부정하니까 찝찝한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저 사람들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런 것 들을 생각도 없는데 이건 웬 은혜인지 웬 강력한 사랑의 폭풍인지 예수님을 연구한 적 있습니까? 없는데 주께서 부활했다는 사실과 아울러 한꺼번에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것이 밀려들어오니까 몰랐던 사실을 아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저들이 안 놀아준다는 데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참 똑똑한 사람인데 아이큐 높은 사람인데 좋은 대학 나왔는데 인간이 저렇게 변해버렸나. 누가 저렇게 망쳐버렸지?”

 

묻지요. “누구야. 어느 광신도가 그렇게 하더냐?” 하니까 신앙인이 하는 말이, “이건 광신도가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주의 성령께서 하셨다.”고 하니까 그 소리 듣고 더 기분 나빠하네요. “에이, 증명되는 소리를 해라.” 성령이 보입니까, 주님이 보입니까? 왜 우리와 전에는 소통할 때는 서로 보이고 아는 것끼리 소통해서 형제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말이죠.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왜 갑자기 예수의 부활과 십자가, 죄 졌느냐 하는데 죄 졌으면 감옥살이하면 돼요. 내가 죄 진만큼 벌 받으면 돼요. 어떤 분이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했다는 약속이 있어서 그 약속이 믿어진다는 겁니다. 그럼 내 인생 조진 거지요.

 

옛날 우리나라 티비 cf에 이런 게 있어요. 아직도 그 cf가 너무 마음에 드는데 닭튀김 광고인데 멘트가 그거에요. “도대체 이 닭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했기에 오묘한 맛이 나느냐 말이죠. 우리가 닭이라면 주님께서 도대체 무슨 짓을 했습니까? 배울 만큼 배웠어요. 물리, 화학 압니다. 저 화학과 나왔어요. 철저하게 논리적이에요. 실험해서 데이터 똑같이 나와요. 안 나오면 뭐가 과정이 잘못됐고 과정대로 했다면 예측된 결과 그대로 나옵니다. 그럴 때는 원자구조가 눈에 안 보여도 확실하게 있는 거예요. 물리학이 그렇고 화학이 그렇고 그런 겁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요? 누굴 속이려고 그런 거짓말을 합니까? 길 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는지. 부활만 빼면 좋은 사람 되고 똑똑한 사람 돼요. 그런데 자기 스스로 똑똑할 수도 있는데 왜 거기에 남들은 납득이 안 되는 부활이야기, 죄 씻음 이야기, 지금 죽어도 강도처럼 하늘나라에 낙원에 합류한다는 이야기,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되는 이야기를 네가 무슨 통뼈라고 그걸 왜 믿어서 손해 보는 짓을 스스로 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하죠. “나도 몰라.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야.” 우리는 묻지요. “주님이여, 저한테 무슨 짓을 하셨습니까?”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해달라고 했어요.

 

이렇게 해놓고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제가 이야기했지요. 우리가 성경을 백독을 하고 만독을 해도 신앙을 자기 스스로 멋있게 만들려고 조작한 것이 아닌지 항상 자기한테 물어야 돼요. 남이 물으면 우리는 변명 잘하지요. “왜 이래? 삼십 년 다녔어.” 본인이 본인한테 물어보잔 말이죠. 내가 안 믿으면서 믿는 척하고 있는 건 아닌지. 자기보다 가장 날카로운 심판관은 없어요. 아무리 남을 속여도 본인을 속일 수가 없어요. 그럴싸해도 본인은 자기한테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조작된 신앙인지 정말 “주님이여, 저에게 무슨 양념을 발랐습니까?” 하는 식으로 주님과 대화 가운데 이뤄지거든요.

 

그것을 누가복음 끝나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니까 주님의 영이 강제로 차압당할 때 빨간 딱지 붙이는 걸 보고 도장을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해요. 우리가 붙이지 않았으니까 뗄 수도 업고. 그래서 우리는 남들은 모르지만 진짜 신앙생활은 날마다 싸웁니다.

 

<박하사탕>이란 영화에서 철길에서 주인공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 돌아갈래.” 나, 옛날로 돌아갈래. 그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 차압된 인간은 절대로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환란, 핍박, 곤고, 어떤 유혹, 어떤 것이라고 그리스도께 이미 용서받은 인간, 천국 가야만 할 인간은 내 힘으로 지옥으로 발길을 돌릴 수 없는 주께서 우리에게 그런 짓을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요. 정상인 되고 싶어요. 똑똑한 사람 되고 싶고 소통 잘 되는 그쪽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나 이게 인력으로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남들이 괴로운 게 아니고 우리가 날마다 괴로우면서도 순간순간 주님이 주신 희락 있잖아요. 그 평화, 이건 남들이 아무리 도 닦고 절에 가도 안 되는 그것을 우리는 한꺼번에 받아버렸어요. 그것도 내 뜻 같으면 내 쪽에서 처리하면 그만이어요. 내가 기도해서 금식해서 믿음을 얻은 것 같으면 그 단계를 내 쪽에서 취소하면 그만인데 내가 뭘 했는데? 어떤 사람은 설거지하다가 성령 받았어요. “가만있어봐라. 내 죄? 내가 어릴 때 주일학교 다닐 때 인간이 어떤 죄를 지어도 십자가 피가 모든 걸 용서한다. 그게 믿어지네. 설거지나 마자하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여자 가순데. 이건 기도한 것도 아니고 예배 참석한 것도 아니에요. 설거지하다 된 거고.
 
 

저 같은 경우에는 소나무에 눈이 앉은 거예요. “눈이 앉았다. 누가 소나무를 만들었고 누가 눈이 내리게 했지? 하나님이잖아. 그럼 하나님이 했으면 나는 뭐야? 하나님이 그동안 나를 만들어왔잖아. 나는 몰랐어도. 그럼 내 할 일은 그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되네.” 인생의 고민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어요. 성경 안 봤습니다. 목사 설교 듣지도 않았어요. 소나무라니까요. 눈 내린 소나무에요. 저쪽에서 조치를 했는데 내 쪽에서 이유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이건 말도 안 되지요.

 

동생이 자고 있는데 개구쟁이 형이 와서 숯으로 고양이 수염 그렸다 말이죠. 동생이 일어나서 거울보고 놀래서 “누가 이런 짓을 했지?” 형이, “내가 했지롱.” 깔깔거리면서.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요. 하나님 없이도 오히려 더 잘 살아요. 주님께서 내 허락도 없이 낙서를 해버릴 때 우리는 그분과 새로운 관계에 돌입됩니다. 그게 오늘 설교에서 부활이란 첫 단락에 말씀드린 겁니다.

 

이제 두 번째 단락이 중요해요. 설교시간에 두 번째 하면 첫 번째 다 잊어버려요. 그래서 제가 두 번째 하면서 첫 번째는 뭔지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뭐냐? 우리는 정상인이고 싶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남들이 예수님을 비정상적으로 보는 그쪽으로 우리를 주님 쪽에서 합류시켜 비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하기 전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집이 다섯 명을 초청했다고 합시다. 소파에 앉았는데 사람 다리는 두 개입니다. 강조할 필요는 없지요. 두 개니까. 다섯 명 왔으니까 2*5=10. 소파 뒤에서 보면 다리가 열 개여야 되거든요. 그게 정상이거든요. 그런데 뒤에서 보니까 분명히 사람 다섯 명 들어갔는데 여덟 개밖에 없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예요? 한 사람은 비정상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은 사람으로 봅니다. 코, 눈 있고 다리 두 개 있으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예수님 혼자 죽었다가 혼자 부활해버리니까 네 사람은 정상인데 예수님은 비정상인으로 규정한 거예요. 우리도 그렇게 규정합니다. 그래, 빠이빠이 어떤 사람이 살다 갔구나.

 

그런데 여자들이 예수님 무덤에 가면 예수님이 정상이라면 거기에 예수님의 시체가 있어야 돼요. 시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시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체가 없습니다. 우리를 놀리는 겁니까?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미처 모르는 바가 있다는 거예요. 미처 알지도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나를 정상인으로 규정시킨 거잖아요. 이건 내가 스스로 나한테 잘못을 저지른 것밖에 안 돼요. 주님은 정상인데 우리는 그분이 다리가 없다는 이유로 그분을 비정상으로 왕따 시키고 우리끼리 정상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이 양반다리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뒤에서 보니까 다리가 두 개 없는 거예요. 양반다리가 무슨 의미냐 하면, 보통사람은 땅에 딛고 살잖아요. 주님은 하늘로부터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이 땅에 시체를 남길 이유가 없어요. 주님이 그렇게 하니까 한둘이 자기도 양반다리 하네. 뒤늦게 온 사람이 저기는 다리 부러진 병신들만 있다고 보는 거예요. 다리가 안 보이니까. 처음에 여덟 개, 여섯 개, 네 개, 나중에 다리가 하나도 안 보여. 전부 양반다리 한 거예요. 다섯 명 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아까 찬송가에 나오지요. 우리는 위로부터 온 은사를 받고서 그동안 자식 길렀고 장사했고 하루하루 눈 떴고 머리카락 하얘졌고 다 위에서 온 건데 우리는 그동안 자칭 정상인으로써 땅에서 내가 힘들여 노동하고 손님한테 아부하고 그런 식으로 내 자식 길렀고 이만큼 옷 입고 밥이나 먹고 있다고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를 천국에 보내주기 위해서 주께서 부른 은혜로써 지금까지 결국 부활의 사람 되라고 조치를 한 거죠. 이게 첫 번째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럼 두 번째는 뭐냐? 살다가 그냥 가면 되겠네. 그럴 것 같으면 누가복음 24장 있으면 되겠어요. 그런데 누가복음 24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저 따라 성경 봅시다.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나, 부활 믿습니다. 하나님, 합류합시다.” 이러면 되는데 누가복음 15장이 있어요. 시간 관계상 여러분 다 아시니까 읽을 필요도 없고요. 15장에 탕자이야기 나옵니다. 이것 설명하기 전에 걱정 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부활 믿으면 주님과 합류되겠네. 그러면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되고 15장이 필요치 않은 거예요. 그런데 24장 받기 전에 22장이 있고, 11장 있고, 1장이 있고, 15장이 있더란 말이죠.

 

거기에 보니까 아버지 재산을 미리 당겨서 기생한테 다 줘버리고 허랑방탕 다 써버리고 완전히 거지꼴이 된 그 아들이 뒤늦게 빌어먹을 데 없어서(아르바이트하기도 힘들어서) 아버지 집에 아르바이트 하려고 들어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집나간 불효막심한 아들이 뭐가 그리 좋다고 오늘도 동구 밖에서 이제나 오나 저제나 오나 하고 있는데 저기서 아들이 나타나니까 평소에 아들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미리 가락지 준비하고 가다마이 준비하고 오는 날 주려고 소 길러놓고(수입 소고기 아닙니다. 한우) 왔는데 와락 안아버려요. “아버지, 미안 ....” 아예 입을 막아버려요.

 

놀라운 사실은 그 옆에 한 번도 아버지 속을 섞이지 않고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힘든 농사를 도와가면서 맏이 노릇을 단단히 했던 아들한테는 가락지 없고, 좋은 옷 하나 없고, 그 아들을 위해서 잔치 한 번 벌여주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배시간이니까 속으로 답변하시면 됩니다. 탕자가 좋은 아들입니까, 맏이가 좋은 아들입니까? 우리의 정상적인 안목에서. 만약에 우리가 신앙도 없으면서 있는 척하면서 성경을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서 “정답은요, 탕자가 하나님 사랑받고 맏이는 미움 받습니다.” 이렇게 아는 척하다가는 오늘부터 네 아들과 네 재산 다 날려도 좋아하겠네? 이렇게 반박 들어오면 그건 또 벌벌 떠는 거예요.

 

이렇게 정합시다. 탕자가 환영받고 맏이가 환영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정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상당히 이상하다는 고백이 솔직해요. 이런 식으로 주장하다가는 남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대가 되기 때문에.
 
 

다시 합시다. 24장만 있어도 구원받는데 왜 15장에 탕자이야기가 있느냐 말이죠. 그 말은 주님과 합류하기 전에 먼저 네 사고방식부터 주님의 사고방식으로 전환시키라고 15장이 있는 겁니다. 전환되기가 참 힘들어요.

 

또 한 가지 15장의 예를 들겠습니다. 양을 백 마리 몰고 갔는데 99마리는 참 말을 잘 들어요. 이리 가라면 가고, 저기 가라면 가는데 꼭 학교에서 어떤 동창회고 어딜 놀러가도 지 마음대로 하는 그런 놈이 있어요. 백 마리 중에서 말을 도대체 안 들어 처먹는 거예요. 그런 잃어버린 양 같으면 99마리 양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다수고 저쪽은 한 마리니까 “샘이여, 쟤는 원래 그래요. 놔두고 갑시다.” 세상에 99마리 양을 두고 그 한 마리 양을 찾으러 갑니다. 납득이 갑니까?

 

우리 생각에는 24장만 하면 되는데 15장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께서 왜 하셨습니까? 사고방식 바뀌지 아니하면 합류가 안 된다는 거예요. 이 말씀은 주님께서 너희들은 너희 존재만 생각하지 나는 과정까지 아는 사람이 내게 합당하다. 죄인을 부른다고 할 때 남들이 싫어하는 죄인을 친히 사랑해주시는 그 무한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 합류되지 못하는 거예요.

 

합류되려면 어떻게 하죠? 남들은 정상이라고 똑똑하다고 보지만 주님 보시기에 틀림없이 비정상이란 주님의 생각으로 교체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잘했다는 것이 아니고 못난 내가 어떻게 잘 됐지? 존재 말고 과정에 주목하세요. 얼마나 과정에 주님께서 말도 안 되는 인간을 천국 보내려고 그런 수모를 당했는지 그 과정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가 승리자인지 관심 있는데 주님께서는 과정입니다. 잘나서 승리한 게 아니거든요. 다같이 못났는데 승리할 자격도 없는 자에게 주께서 이쪽은 사랑을 베풀고 저쪽은 사랑을 안 베풀어서 원치 않는 용서가 돼버린 거예요.

 

탕자가 아버지 만날 때 “나, 탕자인데 잘 했습니다.” 이렇게 온 게 아니에요. “나는 아버지 아들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가락지 있는 것도 몰랐어요. 소 잡는 것도 몰랐고 좋은 입힐 것도 몰랐어요. 하여튼 무조건 나는 주님의 사랑을 감당치 못한다는 거예요. 그 마음을 유지해야 돼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좋아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예수도 아니에요. 나는 내 몸 편하고 내 몸 건강하고 돈 싸놓고 쓰는 재미, 즐거운 걸 원합니다. 그런데 그걸 버리지 마세요. 좋은 복음이죠. 절대 그걸 버리지 마세요. 우리 본성이니까. 그걸 고치지 말고 그 몸 그대로 아버지 품에 안기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저는 나쁜 탕자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제게 과분한 은총을 베푸신 저한테 베푸신 겁니다. 주여.” 주께서 “그러니까 합격이야.”

 

스스로 개과천선하는 게 아니에요. 더러운 속성 그대로 가져오세요. 손대지 마세요. 손대지 말라면 오히려 편하죠. 원래 본성이 돈 좋아하고 잘난 것 좋아하니까. 그대로 가져오세요. 우리의 잘남은 두시고 그대로 가져오세요. 가져오시고 이렇게 하세요. “주여, 저 같은 인간 감당하시겠습니까? 저요? 저밖에 몰라요.” 그대로 가져오세요. 이미 다 준비됐어요. 부활이란 죄 용서했기 때문에 용서된 자만 부활을 믿도록 성령께서 조치를 하신 겁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죄 용서 받은 거예요.
 
 

또 한 가지 16장입니다. 이건 기가 막힙니다.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인데 어떤 직원이 구조조정 당하게 생겼어요. 사장이 회사가 어려워서 회계담당을 자른다는 것을 눈치 챘어요. “사장아, 네가 나를 잘라? 내가 너한테 손해 볼 것 같아. 웃기네.” 자기가 회사 대표로 거래했으니까 거래하는 사람을 불렀어요. “전에 우리 회사에서 소주 몇 병 가져갔어요?” “우리 즐겁네 나이트에서는 소주 천 박스 가져갔습니다.” “장부 가져와.” 사인하고 천 박스를 오백 박스 가져간 걸로 하는 거죠. 이건 회사의 재산을 손해 보게 하는 짓입니다. 이왕 잘리는 것, “감히 나를 잘라내. 내가 그냥 순순히 물러갈 것 같아. 다른 나이트 와.” 전부 장부를 다 반으로 잘랐습니다. 속이 시원해. 회사에 큰 손해를 입혔죠. 이왕 잘리는 것 그냥 못 잘리겠다. 심보가 더러운 놀부 심보에요.

 

속으로 묻습니다. 이 사람 천국 가겠어요, 지옥 가겠어요? 회사 돈 횡령했는데? 지옥 가지요. 부활하신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바로 그 사람보고 나쁘다고 하는 사람은 지옥 가고 그 사람이 지혜롭게 했다는 사람은 천국 간다는 겁니다. 이게 정상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완전히 황당한 내용을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뭐냐? 이렇게 회사 돈을 자기 마음대로 복수한다고 횡령한 이 인간이 이 세상에서 나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게 행동했느니라. 이 세상은 너나 나나 잘했다고 할 것 없는 세상인 것을 주께서 강조하시는 겁니다. 너희들끼리는 저놈 나쁘다, 이놈 나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누가 누구에게 나쁘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는 그런 세상 아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너나 나나 다 나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너희들 보기에 누가 봐도 나쁜 인간을 내가 천국에 넣어줌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저 사람을 나쁘다고 한 나쁨이 주님 앞에 진리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의로운 사람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설교를 정리하면 돼요. “주님이여, 누가 의롭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누가복음을 통해서 나온 정답은, “나, 예수가 의롭다 하면 아무리 욕해도 의로운 거다. 탕자가 아버지 돈 떼먹고 도망쳤는데 나쁘다고 하거든 나, 아버지가 영접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천국행이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입니다. 사람의 어떤 윤리도덕으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상인으로 그런 논리라면 안 믿으랍니다. 불교가 마음에 듭니다. 왜? 성실하게 도 닦으면 업을 쌓으면 복이 온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해도 조작할 수 있어요. 그런데 도대체 이런 나에게 주께서 무슨 짓을 했습니까? 누가복음 15장, 16장을 거부하고 싶은데 왜 거부가 안 되지요? 이상해요. 주께서 손을 대고 있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양반다리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남들처럼 다리로 딛고 노동하고 사는 게 편해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데 주께서는 다리를 접게 만드네요. 네가 너 된 것은 내 은혜지 네 노동의 대가가 아니다. 그건 마르크스에게 배우란 말이죠. 경제한테 배우란 말이죠. 그것은 정상인들의 상식이니까. 하지만 나처럼 비정상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한다. 어쩔 수 없어. 내가 정해준 네 운명이니까. 다리를 양반다리로 접어야 돼. 예배드리면서 양반다리 하기는 처음입니다.

 

비정상인 되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비정상인으로 사는 보람을 느껴야 됩니다. 물론 그걸 티내지 마세요. 그러면 안 놀아주니까. 안 놀아주면 돈이 안 생겨요. 그렇게 하지 마시고 문제는 비정상적인 것을 남한테 하지 마시고 주님 앞에서 “주님이 저를 이렇게 만들어놨습니다.” 남 가진 옷 같이 입고 싶고 남처럼 좋은 저택 갖고 싶고 남처럼 좋은 차 갖고 싶고. 갖고 싶은 걸 그대로 유지하세요. 기쁜 소식이다, 정말. 그리고 이렇게 하세요. “주여, 저 같으면 저를 내치겠는데(나밖에 모르니까) 나 같은 인간을 어떻게 받아주십니까?”

 

마지막 외칠 것은, 이같이 못된 나를 받아주시고 용서까지 마무리 깔끔하게 일처리해주시고 천국 가는데 아무 흠이 없도록 모든 죄를 탈탈 다 털어주시고 그것이 확실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시체를 없애버린 주의 시체 없다는 사실을 성경 속의 문자만 아니고 이게 내 마음까지 퍼져서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이 내 안에도 꿈틀거리고 펄떡거리고 활어가 튀는 것처럼 날마다 주께서 이미 용서했기에 살아있는 그것은 느끼는 놀라운 능력을 주실 때 속으로만 이야기합니다. “주여, 저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끝으로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남들에게 짜증내세요. 성질부리세요. 갑자기 복음 막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안 놀아주면 주님 앞에 서세요. “주여, 나 이 정도밖에 안 됩니다. 내 실력으로 천국 못 갑니다. 이미 천국행을 확정지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성령으로 믿게 해주시니 그저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뿐이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조작된 신앙으로 신앙인 척하며 교회에 합류했던 나,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나, 하지만 그것이 속일 수 없는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실이 찾아오고 주께서 실제로 무덤이 없이 부활했던 사실이 실제 사실로 들어오면서 주여, 도대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남들에게 티내지 말고 신앙인 척하지 말고 그저 주님 앞에서만 신앙인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관리자(IP:203.♡.42.222) 14-11-25 13:52 
20141005 미국뉴욕교회예배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천지를 만들기 전에는 천지가 없었습니다. 제 말 맞지요.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말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계셔서 하늘과 땅, 다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느 위치에서 믿어야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만 계시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이나 생각이 일치될 때 제대로 하나님 아는 겁니다. 이 짧은 논리에 오묘한 것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맞잖아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창조를 안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창조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갖고 있던 뜻을 안다고 할 때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는데 만들어진 중에 우리가 포함돼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을 저는 압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그것 미흡합니다. 그것 전부 아닙니다. 이미 만들어진 상태에서는 만들어졌다는 그것 때문에 없음이란 생각이 스며들 자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들어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있습니다부터 믿습니다까지. “주님, 제가 있네요. 하나님이 절 만들었지요? 저는 하나님 믿습니다.” 이것과 아예 하나님이 없을 때에 인간을 만들 때 그 심정과 결코 일치되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거예요. 그 인간을 방해하는 것이 뭐냐 하면, 어쨌든 간에 나, 여기 있잖아. 이것이 하나님 믿는데 방해됩니다. 이것 간단한 논리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만들어진 하나님 믿고, 나도 너도 그도 다른 분들도 다 그렇게 안다고 하니까 같이 대충 믿는 걸로 서로서로 의견 통일 되어서 믿는 걸로 쳐주신 거예요.

 

그 일하신 분들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지금부터 짧게 몇 분 동안 유대인들의 생각을 제가 말씀드릴 테니까 성급하게 아멘하지 마세요. 미리 당부합니다. 이것 예수님 죽인 유대인 생각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는 누가 만들었지?(이 대목부터 듣는 사람들은 곤란하지 싶어). 창세기에 보니까 없는데서 하나님이 만들었어. 그럼 하나님이 만들었으니까 우리는 뭘 하면 되지? 그렇지. 지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셨어. 그러면 말씀을 줬다는 것은 우리가 지킬 수 있다는 뜻으로 줬기 때문에 그 말씀을 지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안 지키면 모르는 것이 된다. 동의 다 했어요.

 

그리고 계속 나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여기서 하나님 말씀은 지적과 율법 다 포함됩니다) 이렇습니다. 오후에 잠 오니까 복잡하게 하기 싫어요.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기적을 통해서 믿음 생기고 행함을 통해서 영광 돌리고. 많이 듣던 소리 아니에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게 홍해 갈라진 것, 여리고성 무너진 것, 특히 당나귀 말하는 것, 그것 민수기에 있거든요.

 

뉴욕에서 말하는 당나귀 봤습니까? 못 봤지요. 뉴욕에는 당나귀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당나귀가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키지요. 집에서 강아지나 당나귀 키워서 훈련해봐야 짖기나 하지 말하지 못 하거든요. 여러분, 강아지 키우는데 때리면 왜 때리느냐고 하던가요? 주인 기절해버립니다. 인간이야, 귀신이야. 놀라버립니다.
 
 

따라서 제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지키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이미 익히 알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하나님 알아야 하는데(이야기 복잡하게 하면 안 되는데 간단하게 가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통합해서 영원히 살 거잖아요. 그런데 아는데 한계가 있더란 말이죠. 지키는 건 하겠는데(십계명 지킨다든지) 지금 있는 강아지 훈련시켜서 말하라고 한다면 그건 안 된단 말이죠.
 
 

여러분들이 작은 지팡이 들고 홍해에 가보세요. 시험해 보세요. 바다야, 갈라져라. 열두 번 해도 안 되면 서른네 번 하든지, 안 그러면 이천오백오십오 번 해보든지. 갈라지겠어요? 갈라질 리가 없지요.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알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우리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넘겨버리자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멋진 아이디어죠(아멘 하면 곤란한데).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성경중심이에요.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그 다음에 말씀이지만 우선이고 유대인들은 말씀(토라)이 우선이고 자기는 뒤에요. 말씀 속에 있으니까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기적이 있더란 말이죠. 기적마저 지키면 되는데 기적은 우리가 못 일으키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기적 파트까지 모셔오는 방식 중에 하나가 믿자.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다음에 남는 것은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십계명을 던져줬으니까 감이 오더란 말이죠.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라. 평소에 공경해왔잖아요. 뭐가 어렵습니까? 들을 귀까지 동원할 게 뭐가 있어요. 부모 공경하고 있는데. 그 다음에 살인하지 말라. 몇 명 죽였지요? 아니잖아요. 우리는 길에 개미죽여도 회개할 정도로 양심이 유순하고 나약한 사람인데 어쨌든 간에 우리가 사람을 죽이다니?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사람을 안 죽였으면 일단은 지킨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알아서 된 겁니다. 지킬 것은 지키고 믿을 것은 믿어서 믿음 +지키면 온전한 하나님에 영광이 된다고 유대인들은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분명히 제가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은 말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자신만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그 다음부터 한 게 있어요. 십계명 줬습니다. 그런데 계시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잖아요. 이 계시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말씀은 지식이 아니고 실천이다. 바리새인들의 모토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죠.

 

그러면 사두개인들의 주장은 뭐냐? 하나님의 성전 있으면 우리는 살았다. 성전 지키고 제사 하는 그 작업은 우리한테 맡겼다. 사두개인, 사독, 다시 말해서 다윗 시대에 제사장으로 낙인찍힌 대대로 죽으면 옷 벗고 인수하던 제사장계열이 사두개인, 사독계열입니다. 그래서 사독계열은 성전에서 제사만 드리면 우리는 이 성전에 있는 감람산에 메시아가 두 발 딛고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스가랴 에언 대로 거기에 감람산 나오고 메시아 두 발 딛고 내려옵니다.

 

그 다음 문제는 사두개인이 독점하고 난 뒤에 성전을 됐는데 말씀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말씀 전문가가 일체 어떤 일을 하지 않고 말씀연구와 실천 방법을 개발해내는 전문직이 등장했습니다. 누구냐? 바리새인입니다. 제가 그냥 무심코 던지는 조작된 말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바리새인이 선두에 있거든요. 선두에 있는 바리새인마저 천국에 못 간다면 그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천국 못 간다. 따라서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말은 아무도 천국에 못 간다.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유대인이 나오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리새인이 하는 일은, 말씀을 어떻게 하면 실천에 옮기느냐 하는 일을 합니다.

 

또 한참 잠 올 때거든요.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을 바리새인적으로 지켜봅시다. 알코올 혈중농도측정기를 들고 불어야 돼요. 술은 먹되 알딸딸하기 직전에 술잔 놔야 돼요. 그러면 그 말씀을 어긴 것이 아니죠. 또 하나 예를 들면, 분을 품되 해지도록 품지 말라고 했으니까 서산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분을 품은 사람의 멱살을 쥐고 해지기를 카운트합니다. 5, 4, 3, 2, 1. 이렇게 하면 그 말씀을 지킨 것이 되겠지요. 바리새인이 그런 식입니다.

 

주님께서 한 방에 보냈습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 끝. 당황하지 말고 한 방에 조지니까 끝. 끝났습니다. 끝난 게 아니고 여기까지 결론내립니다. 바리새인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겉은 종교적 법으로 해결했는데 문제는 속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안 돼.” 이러면 될 텐데 바리새인들은 저 사마리아인들보다는 낫지 아니하느냐는 식으로 예수님의 일단의 제자들을 사상적으로 포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열두 제자도 사실은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사상에 포위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해결할 문제는 딱 한 가지에요. 겉은 그럴싸하게 됐는데 문제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린다는 그것이 이미 예수님한테 인정받지 못한다, 거절당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최고 실력자인 바리새인만큼 되지 못하면 천국 못 간다고 하니까 결국 바리새인들이 아무것도 해결한 적이 없습니다. 천국 못 갑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겉은 그럴싸했는데 속을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가 있는 겁니다. 겉이 번지르르했기 때문에 자기 속을 볼 마음이 없는 거예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고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여기 장로님 계십니까?(제가 그런 걸 묻는 타입이 아닌데) 예를 들어서 어떤 교회에, 예니까 이해하세요. 장로님이 오셨는데 헌신적으로 했는데 막 들어온 어떤 교인이 있었어요. 그런데 자기가 먼저 된 자로 나중 된 자를 한 수 가르친다고 했는데 주님 법칙이 뭐냐 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거예요. 그러면 오래된 장로님보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가 됐지요. 일단 나중 온 자가 먼저 됐지요. 그러면 자리가 바뀌었습니다. 나중 온 자가 먼저 된 자고 장로님은 나중 되니까 자리 또 바꾸어야 되죠. 머리 나쁜 사람은 이해 못하십니까?
 
 

고정된 먼저 된 자는 인간이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한 적이 없단 말입니다. 천국은 하나에 과정이니까.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핵심은 그거에요. 속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미 자기는 속까지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위장했기 때문에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가 상대적으로 저 사람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었는데 그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선한 사마리아인 나오죠. 문둥병에서 나은 열 명 중에 돌아온 사람도 사마리아 한 사람. 그래서 사마리아는 항상 전제가 유대인은 천국 가도 그들은 지옥 간다는 지옥 리스트에 해당되는 것이 사마리아인들이에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현장에서 다 보냈어요. 달랑 남은 것은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만납니다. 속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설 때
 
 

이것 하기 전에 설교 다시 합시다. 사람이 태어나고 난 뒤에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하나님을 알려면 내가 얻기 전에 있는 상태에서 창조하셨던 그 마음을 알아야 제대로 다 아는데 이왕 있고 난 뒤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항상 한계에 부딪칩니다.

 

<부모>란 노래가 있는데 어릴 때 철없이 부모를 원망했는데 자식이, “엄마 마음, 어때?” 엄마가 하는 말이, “너도 시집가서 아이 낳으면 안다.”는 거예요. 시집가서 아이 낳으면 엄마 마음 압니까? 턱도 없는 소리, 몰라요.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지 모릅니다. 너무 말을 함부로들 해요. 아무도 몰라요. 나는 나의 확장으로 살지 나밖에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을 알아요? 모릅니다.

 

지금 제가 하는 설교의 목적이 정해졌습니다. 만들어진 입장에서 만들기 전의 입장을 어떻게 알아서 깔끔하게 만들기 전의 입장으로 돌아서서 아예 죄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 저는 있다는 겁니다. 그걸 지금 여러분한테 소개해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 방법은 그냥 사세요. 어떤 종교적인 티, 바리새인, 사두개인, 말씀 실천, 그것 다 잊으시고 그냥 사세요.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에 물 길러 온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 온 게 아니고 자기식구들 목말라서 온 겁니다. 이것이 이미 태어난 입장에서는 도저히 죄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줌 마려서 오줌 눈 게 죕니까? 태어난 입장에서 이미 내가 있는 입장에서는 절대로 죄 아닌 걸로 하는 거예요. 물 없을 때 물 달라하는 게 죕니까? 그게 죕니다. 오늘아침 2부예배한 사람은 알아요. 그게 죄에요. 원망을 낳기 때문에 죕니다. 양식 없어서 양식 달라는 게 죕니까? 그게 죕니다. 그게 왜 죄냐? 더 근원적으로 설명해 들어갑니다.

 

그게 왜 죄냐 하면, 일상적인 것 자체가 뭘 모르는 상태냐 하면, 내가 여기 있으니까 목말라서 물 길러 온다는 것은 내가 없을 때 사고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젊은 분들 앞에 두고 어려운 말하려고 하니 참 괴롭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생각을 내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게 막혀있는 거예요.

 

복잡하니까 깔끔하게 합시다. 진짜 우리가 속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내가 사라지면 되겠지요. 그럼 내가 사라진다는 것이 뭐냐? 우리의 일상이 나에요. 목마르다. 목마르니까 물 먹고 싶다. 이게 나에요.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비록 창조주를 모르는 죄인이지만 그냥 편하게 일상적으로 온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 일상을 죄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되기 위해서 같은 레벨을 사용합니다. 물 좀 다오. 사마리아 여인이 하는 말이, 일상적이고 자기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창조 전은 모르고 창조 후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왜 사마리아인에게 물 달라 합니까?”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여기에 전혀 종교적인 냄새, 그런 색채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편한 일상입니다. 그냥 우리가 생활하는 그대로에요.

 

예수님이 하는 말이 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가 물 돔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인이 너는 네 전부를 모른다. 네 일상생활에 뭔가 빠져있다. 결핍돼있다. 생수 주실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을 너는 일상생활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 있다고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일상생활하면서 결핍을 느낍니까? 잘못됐다고 느낍니까? 언제 잘못됐다고 느끼느냐 하면, 돌아가실 때 잘못된 걸 느낍니다. “주여, 아직 제가 죽을 때가 안 됐습니다.” 예상 못할 죽음이 왔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떤 결핍을 느낍니다. 뭔가 빠져있다는 거예요. 오늘 설교제목을 [사마리아 여인]이라 했지만 저는 바꾸고 싶어요. [뭔가 빠져있다]. 나만 빠진 줄 알았는데 저쪽도 빠졌어. 뭔가 빠졌는데 뭐가 빠졌는지 모르겠어요.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하는 말이 11절에 그는 뭐가 빠져있는지 모르지만 빠졌어요. “여자가가로되 주여 물 길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고 했어요. 사마리아 여인은 일상생활에서 합니다. 당신이 물 달라했으니까 물주겠는데 생수 언급했으니까 이 근처에서 당신이 원하는 생수는 여기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말하기를 생수를 언급했지만 생수는 나한테 결핍돼있습니다. 주님의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이 생수라는 낯선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뭔가 결핍돼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느끼도록 조치를 해주신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계속 이야기합니다. 12절에 보면,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하고 1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벌써 결핍 점점 더 또렷하게 돼있지요. “생수가 한 번 생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르는구나. 이래도 결핍 아니야? 이래도 너, 문제 있는 것 아니야?”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기는 그저 거만한 보통 사람인데 예수님이 찾아와서 자기와 대화하는 가운데서 뭔가 나는 결핍된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답변할 어떤 자료가 없기 때문에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거든요. “뭐지, 뭐야? 시비 거는 거야, 뭐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결핍된 것이 정체를 밝힙니다.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결핍돼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잠간 멈추고 설교 다시 들어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미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는데 온전하지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 어떤 선물을 갖고 왔는데 그 선물은 바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갖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실 때 두 사람의 만남은 예수님은 전부를 아는 사람이고 그 맞은편에 서있는 여인은 일부만 아는 결핍된 존재로 부각되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대화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기도한 적 있습니까, 금식하고 통성 기도했어요? 그냥 물 길러왔어요. 물 길러온 것, 계시입니다. 우린 일상이지만 주님 앞에서 그것조차 계시입니다. 어떤 계시? 결핍 있음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계시입니다. 여러분, 요란스럽게 교회생활 할 것이 아니고 여러분 있는 자리에서 결핍된 자로 사시고 무엇인가 빠져있다는, 이 세상, 뉴욕 자체가 무엇인가 빠져있다는 도시에 결핍 있는 나도 같이 살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도 아무도 해답을 제사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찝찝한 가운데서 죽을 때까지 죽으시기 바랍니다. 뭐지? 뭐지? 뭐지? 돈을 벌어도 뭔가 만족하지 않고.

 

14절, “내가 주는 물은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것 설명합니다. 보통 인간 예수님, 보통 인간 사마리아 여인, 둘이 만나면서 대화가 처음에는 됐지요. 갑자기 예수님께서 우물이라는 물체를 집어넣습니다. 예수님과 인간 사이에 우물이 결핍됐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을 가지면 되겠는데 아닙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이 되게 하는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 자체가 주님이 사용하는 영원한 생수가 나오는 우물이 되는 순간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 내려두고 마을로 내려갑니다.

 

처음에 물동이 왜 들고 왔습니까? 어떤 남자 만나서 대화하려고 왔습니까? 아니죠. 물 길러왔는데 자신의 목적은 날아가 버리고 물동이 버려두고 메시아 만났다. 창조 이전의 분을 만나서 내가 달라진 것은, 나 따로 있고 예수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이 나오고 생수가 나오는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운 창조, 창조 이전의 내용까지 알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달라졌다. 실제로 달라진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여자는 집에 가서 살림하고 밥 합니다. 메시아 만나는 순간 결핍이 날아가 버렸어요.

 

전에는 내가 주인공이라 결핍이 있었지만 그 결핍조차 몽땅 주님 쪽에서 접수해가니까 내가 생수를 얻어먹는 게 아니고 내 자체가 생수가 나오는 공장이 되고 말았어요. 결핍이 없어졌습니다. 그때는 로마서 14장,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7,8절) 우리는 다 동의하지요. 이게 바로 로마서 14장입니다. 동의하기는 동의한다 해놓고
 
 

주님의 창조 전의 상황까지 알려줘서 아는 순간 사마리아 여인 본인은 날아가 버렸어요.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 안에서 주님과 동일하게 창조 전의 상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조물은 그 상황의 내용이 뭔지 궁금해요? 알려드리죠.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존재, 이게 바로 비밀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란 추상적 존재를 설정했지만 그래서는 겉만 번지르르했지 속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이제 속에 해당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와서 사마리아 여인은 깔끔하게 주님에 의해서 해결되었습니다. 창조 이후는 아는데 이전은 몰랐던 사마리아 여인은 이제는 예수 안이라는 창조 이전의 창조주와 함께 드디어 살게 된 겁니다.

 

잠간만 기다려주세요. 그 다음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구원받으면 됐지 왜 필요하냐? 예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이제 시작이에요. 처음에 예배는 자기가 하나님 백성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 어떤 외형적인 방법을 찾아서 그 방법을 반복적으로 실시하는 것을 예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어요. 대표적으로 바리새인이죠. 백날 해봐야 천국 못 가는 바리새인.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심 산은 안 되고 예루살렘은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20절에 보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말을 하는 전제가 뭐냐 하면, 장소 있고 형식 시스템 갖추면 예배된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것으로 자기 속도 달라지고 결핍이 매워집니까? 안 되지요. 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그것밖에 모르는 거예요. 일단은 사마리아 여인을 영원한 생수가 나오는 만드는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 만드는 작업이 뭐냐 하면, 네가 나를 알기 전에 내가 너를 먼저 안다는 멘트가 날아갑니다. 여인이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고 할 때 “목마르지 않는 물은 여기 있잖아.”답변하는 것이 아니고 목마르지 않는 우물이 되기 위해서는 숨겨진 면이 노출돼야 돼요. 죄 속에서 구원이 됩니다. 죄가 죄를 구원한다는 어려운 말이 있는데 하여튼 죄 속에서 비로소 그동안 나타나지 않은 의가 나옵니다.

 

따라서 죄라는 바탕이 마련돼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멘트가 뭔가 바뀌었지요?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물 달라는 물체로부터 이제는 인격의 문제로 바뀌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물 있다가 우물을 빼버리니까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물을 만드는 첫 작업을 개시한 겁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하니까 여자는 흠칫하면서 감춥니다. 들키지 싫어서 “남편은 없습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은 정말 놀라운 말씀이에요. “네가 남편이 없다는 말은 옳도다.” 지금 속의 문제에요. 속을 해결해야 돼요. 네 속에 있는 것도 문제지만 속에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2차적 작업하는 그 속도 있음을 깨끗하게 고백한 것은 제대로 한 것이다. 네가 그렇게 나와 줘야 그 죄마저 내가 해결해주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얼마나 미인이었으면 다섯 명까지, 정말 부럽습니다. 한 남편으로 평생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고생인 것을. 그래서 어떤 여자는 남편 얼굴만 보면 토한다는 겁니다. 빨리 바꿔치기하든지 해야지.

 

“네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는 거짓말했는데 옳다고 해놓고 사실은 옳은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옳다고 맞추는 친절한 예수님, 거짓말하는 것을 진짜로 바꾸는 이 작업이 우리 힘으로 속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모든 것이 옳다, 옳다, 옳다의 연속으로 바꿔주는 그것이 생수가 되는 무슨 짓을 해도 의가 되는 죄인이 의인이 되는 그것을 사마리아 여인을 상대로 작업을 시작한 겁니다.

 

문제는 예배입니다. 예배가 효과 있으려면 그 예배 하나 잘 드려서 예배에 참여한 자가 의인이 되는 그 예배를 에스겔에서 예언을 했습니다. 그 순서가 에스겔에서는 다윗의 자손이 오게 되면(요한복음 4장에서는 메시아 오게 되면) 그분이 성신을 보내주고(신약에서는 성령) 성신에 의해서만 참된 예배가 될 날이 온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예배가 되려면 먼저 메시아부터 와야 되는 거지요.

 

예수님이 하십니다. 내가 오리라 한 그다. 여자가 한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 끝. 물동이 버려두고. 아마 그때 집에 가면 혼났을 거예요. “목말라 죽겠는 물동이 어디 있노?”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물동이 어디 있어?” 분명히 이런 핀잔을 받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 여자가 핀잔을 받든 남편 다섯이라고 공격을 받든 그것은 그 자체도 생수가 나오는 재료가 되도록 주께서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넣었던 사실을 메시아의 일방적 작용으로 남편 다섯 있는 여자가 바로 하나님의 예배처소가 되는 겁니다. 움직이는 예배처소. 고정된 것은 날아가 버렸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예배처소는 없습니다. 움직이는 예배처소,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냥 무심코 살았습니다. 결핍되는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할 때 왜 돌아가셨는지 왜 오셨는지 몰랐습니다. 주여, 일상의 지루함을 깨닫게 해주시고 뭔가 결핍을 깨닫게 하셔서 이 속에 숨겨있는 더러운 해결책을 위하여 주께서 일찍 오셨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관리자(IP:203.♡.42.222) 14-11-25 13:54 
20141005 미국뉴저지1부예배
 
(강의:이근호 목사)
 
 

 

-[나실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으시겠습니다. 목사님 나오셔서 말씀을 전하실 때 쉽지는 않지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본 게 구약성경입니다. 구약성경은 옛날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이란 지나간 거죠. 지나간 걸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구약성경은 지나간 것이다. 따라서 현재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구약성경을 펼쳤거든요. 우리가 현재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들이 우리 현재 안에 요소로 있습니다. 이 요소가 빠져버리면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그라운드에 있는 요소가 표면으로 솟아오르는데 그것은 우리가 만들지 않고 우리가 개시하지 않았던 우리가 출발하지 않았던 그 무엇이 이미 우리 속에 층층이 깔려있습니다. 그 깔려있는 것의 효과를 누려서 지금의 우리 존재로 삶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그라운드가 어디서 뻗어 나오는지는 구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로부터 우물을 팝시다. 우물을 파서 그 우물로 구약까지 어떻게 지하에 뻗어 있는지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요즘 한국에 전봇대 지중화사업이란 게 있습니다. 지상의 전봇대를 지하로 묻는 공사입니다. 그 공사를 하다보면 아스팔트를 뒤집게 돼있는데 거기에 케이블선, 전화선, 전선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살기 바빠서 몰랐던 우리의 단면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단면을 쪼개고 공사를 하게 되면 우리 자신의 노동으로 개시된 것이 내가 아니고 이미 일찍부터 내가 있기까지 내가 솟아오르기까지 뭔가 밑에 깔려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로마서 5장에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다. 아담이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면 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습니다. 왜 구경도 못한 사람한테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의 뿌리를 보세요. 당신의 그라운드를 보세요. 이미 그것이 아담까지 뻗어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즉 모든 인간이 다 범죄 했고 죄의 왕 노릇하매 당하게 되고 이유도 모르는 채 죽어야 될 우리 죽음이 아담의 죽음에서 전수되어 그 죽음에 합류돼있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돈 번다고 코앞만 보지 마시고 성경, 우리의 진실, 우리의 뿌리, 이것은 세상의 소설이나 학문이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창세기부터 우리가 현재 어떤 식으로 해서 지금의 존재가 됐는지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이요? 위만 쳐다본다고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밑을 봐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이라고 했을 경우에 우리는 십자가를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속에 십자가가 들어있어서 예수님의 피가 마치 배선처럼 깔려있어서 피가 흐르는 존재의 바탕 위에 우리는 현재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성도가 자기 잘나서 기도 열심히 해서 된 게 아니고 이미 피의 효과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 뿌리가 나에서 보이지 않고 그 십자가는 어떻게 해서 내 안에 들어오게 돼 있느냐? 그것은 바로 그 앞에 예레미야, 그 앞에 사사기, 그 앞에 민수기, 그 앞에 창세기, 우리 안에 이미 성경이 깔려있고 이 세상을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 하나, 하나님의 경영은 말씀에 입각해서 이뤄지는 겁니다. 태어났다가 사라지고 풀처럼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있으리라. 너희들은 풀의 영광이지만 사라지는 그 자체가 말씀을 말씀대로 부각하기 위한 하나님의 과정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민수기 6장을 볼 이유가 생겼습니다. 민수기 6장을 펼쳤는데 낯선 용어 나옵니다. 저는 이 나실인을 볼 때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어머님 사랑, 그런 식으로 외웁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된 자란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편적으로 주신 제사법 있습니다. 십계명 있습니다. 다같이 지키면 됩니다. 그런데 왜 민수기 6장에서 서원하여서 나실인처럼 서원하는 자는 규칙에 의해서 나실인으로 그 모습을 보이라는 지시가 왜 있어졌느냐 하는 겁니다.

 

이쯤해서 설교 다시 해야 됩니다. 우리교회도 늦게 온 사람 있습니다. 요약해서 다시 설명해서 맥락 따라가도록 일단은 노력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현재 살면서 과거를 생각해야 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밑에 배선이 깔려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피, 하나님의 말씀이 깔려있습니다. 깔려있다 보니까 이스라엘을 만나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율법을 줬다고 하니까 그들이 지켰겠지 하는 겁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이 있습니다. 나실인 제도가 있는데 우리는 그걸 몰라서는 안 되지요. 왜 있느냐?

 

나실은 제도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라고 만든 겁니다. 어떤 인간이 1절에 서원한다고 하는데 서원한다고 할 때에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의 희망이나 기대나 욕구, 아주 경건해 보이는 욕구를 달성하기 위해서 “주여, 저 서원합니다. 아들 낳으면 신학교 보내서 목사 되도록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서원하는데 그건 개인적인 요구고요. 그렇게 개인적인 요구는 이스라엘 전체의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나실인이란 요새 유행하는 일탈? 다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의 규격 안에 알고 있는 바대로 살아가는데 여기서 돌출부분이 나와요. 일종에 다이빙대라고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나실인 제도가 삐져나와서 삐져나온 사람은 현재에 만족하고 현재가 마치 완료된 것처럼 그렇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미래지향적으로 그것을 이끌어가는 그러한 사명을 띠고 나실인 제도의 서원을 하게 돼있어요.

 

그것은 마라톤에서 선두주자 또는 군에서 향도라고 합니다. 여러 군집 가운데 집단 가운데서 독특하게 하나를 앞장세워서 “지금은 향도 뒤로 헤쳐모여!” 하면 여기 이 공간에 있던 것이 순식간에 이동해서 향도 중심으로 어떤 변화를 야기 시키는 겁니다. 변화를 주는 거죠. 그러면 향도 역할을 하는 것은 기존 현실에 자족하고 만족해서 그것이 전부라고 여겨버리면 예수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계시는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이스라엘을 계속 역사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향도 같은 역할의 임무를 담당한 자가 나실인이에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항공모함 같은 이스라엘이 보수적인 체제를 가진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접근할 수 있느냐? 그 내용은 나실인 하라는 그 규칙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 규칙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규칙을 오늘 본문에 보면 세 가지인데 또 읽으면 길다 귀찮다 해서 친절한 제가 줄여드립니다. 포도에서 나온 것은 일체 먹지 말라. 두 번째, 가족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마라. 죽은 시체와 가까이 하지 말라는 거죠. 세 번째가 그동안 머리카락 자라도록 방치하라.

 

제시어 세 개 나왔습니다. 포도 관련 음식 안 먹기, 시체 가까이 하지 않기, 그리고 머리카락, 이 세 가지 주제를 주고 여러분이 짜 맞추어 통일된 문장을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5초 시간 드립니다. 힌트 드렸습니다. 항공모함 같은 보수적인 이스라엘 체계를 그리스도로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그 세 개가 주동적인 동력 역할 하는데 여러분 아이디어로 그 세 개를 연결시켜보시기 바랍니다. 5초 더 드립니다. 땡, 시간 끝났습니다.

 

포도를 먹지 말라는 것은, 포도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물을 낼 수 없는 것이에요. 그 땅 자체가 특수한 땅인데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 합니다. 약속의 땅은 조건이 붙는데 약속대로 말씀대로 행할 때만 하나님께서 적절한 농사가 되도록 하는 그런 조치가 되는 가동되는 땅이 약속이 땅입니다.

 

그 약속의 땅이 제대로 가동되었다는 증거는 마지막에 젖과 포도주가 풍성하게 맺힐 때에 모든 것은 우리의 노동의 대가가 아니고 주의 말씀의 실현에 의해서 우리가 공짜로 얻어먹었다고 해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쳤던 그 땅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포도 생산물에 대해서(하나님의 은혜죠) 생산물을 중심으로 결속돼있는 단체가 이스라엘입니다. 약속의 땅은 농산물에 의해서 결속돼있는 그런 단체,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나실인은 포도와 결속된 그것을 의도적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그것이 해체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 쪽으로 이스라엘 완성 쪽으로 1미터도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을 나실인은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면서 이게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향도 같이 한 사람 튀어나와서 “나, 포도에 관한 모든 것은 거기서 벗어나겠어.”라고 다이빙대에서 혼자 점프하는 것처럼 다이빙대에 나가는 겁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조건, 가족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말고 시신을 만지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가 아브라함의 혈육과 관련된 나라입니다. 할례를 행함으로써 혜택을 입는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인데 그 민족에서의 죽음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장차 혈육과 무관한 다른 죽음과 다른 생명과 관련된 나라로 접근해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이 몸 말고 다른 몸 주시는데 그 몸의 죽음과 그 몸의 부활로 말미암은 생명에 도달될 때 이스라엘은 완성이 된다는 것을 앞당겨서 그림자처럼 이스라엘에게 나실인이란 모습으로 그 정보가 담겨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집안 잘됐네. 복 받았네.” 여기에 안주하고 멈추면 안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장 끝에 보면, 예수님 설교하실 때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을 때 섭섭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형제냐? 듣는 어머니, 듣는 형제들 참 섭섭했을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너희들이 나의 가족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직 구약입니다. 그들은 혈육중심으로 우리 혈육과 이방 혈육을 구분하면서 그들은 자기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키웠던 겁니다. 그런데 나실인만큼은 거기서 빠져버립니다.

 

세 번째, 머리카락은 어떻게 관련된 개념이냐? 머리카락은 바로미터에요. 포도에 관련된 것은 먹지 않고 혈육의 장례식, 죽음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과연 지켜내는지 얼마 동안 짘녔는지 그 기간을 측정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머리카락을 사용했습니다. 저울이나 온도계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을 사용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민수기 6장 18절에 보면,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 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라고 돼있습니다. 이스라엘 제사법에서 제물은 일체 인간의 것이 손 타서는 안 되고 거기에 합류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인이고 제물은 의롭기 때문에 의로운 제물에 죄가 섞이면 안 되는 겁니다. 하지만 유독 나실인의 머리카락은 거기에 합류할 수 있습니다. 특별조항입니다.

 

나실인이 기존의 안주에서 벗어났다는 그것을 제대로 지켰을 때 지킨 만큼 기간이 있을 것이고 그 기간에 자란 머리카락을 잘라서 현재 안주함에서 벗어난 미래지향적인 그리스도, 메시아를 향하여 갖고 있다는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섞어 넣음으로 말미암아 기존에 인간의 힘으로는 그리스도, 천국까지 갈 수 없는 것을 이제는 머리카락이 포함된 나실인 같은 그런 인격과 거룩한 제물이 합류해서 제물의 반복에 의해서 점차, 점차 마지막 마무리 제물,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까지 접근해가는 방식을 하나님을 사용했습니다.
 
 

디트로이트 공항에 보니까 전동차가 달려요. 전동차는 달리고 승객들은 기다리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기다리고 있지요. 제물은 메시아 완성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누가 탔느냐? 우리 말고 우리를 대표한 나실인의 머리카락이 거기에 포함돼있으면 나실인 제도의 의미를 예수님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해서 믿는 사람은 비록 자리에 앉아도 구원받습니다. 예수님 때에. 그런 구조에요. 구약구조가.

 

그렇다면 포도주란 그 당시에 재산이죠. 그런 것에서 이탈하고, 혈육에서 벗어난다? 혈육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완전히 지켜졌다는 것이 확정된 증거물로 머리카락이 합류된다면,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혈육에서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니까 육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는 요한복음 3장 8절의 말씀을 지금 앞당겨서 구약말씀 속에 들어있다는 암시를 여러분은 받지 아니합니까?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인데 육으로 같은 일가친척이라고 떼써서 갈 수 없다 이 말이죠. 내 동생이라고 내 부모라고 갈 수 없는 거예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니까 다시 태어나서 영으로 가야 되는데 그것이 신약에서는 영이지만 구약에서는 뭐냐? 나실인 제도거든요. 나중에 나실인 제도와 하나님의 신이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삼손이에요. 손이 세 개는 아니자만 하여튼 삼손입니다. 삼손은 날 때부터 나실인으로 태어났어요.

오늘 민수기 6장에서는 본인이 자원하지만 삼손 시대에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먼저 제안해서 없는데서 마노아 가정에 나실인을 투입시킵니다.

 

그 삼손은 자기가 나실인이 됐지만 그 힘을 여자 밝히는데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힘이 있으니까 그 힘을 자기를 위해서 쓴 거예요. 나실인 되고자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나실인 된 삼손의 꼴좋습니다. 하나님 명예와 관련돼있거든요. 하나님에 의해서 천사가 마노아 가정에 일방적으로 나실인을 만들어줬는데 여자 밝히는데 몰두하더란 말이죠.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사자를 찢고 수수께끼를 내고 했지만 그건 전부다 여자를 소유하고 장악하는데 써먹었단 말이죠. 하나님이 실패했습니까? 머리카락은 자라나고 힘은 세고 그 힘은 자기가 원하는 여자를 더 강한 힘으로 빼앗는데 소모했을 때 그 여자 쪽에서 기다린 것은 마귀였고 블레셋이었습니다. 지금 가자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획한 삼손의 계획은 끝난 겁니까?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알이 파였을 때에 비로소 나를 위한 나실인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한 힘이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나실인인 것을 깨닫고 기도해서 잡아당겨서 자기가 죽었습니다. 그때 죽인 사람이 삼손이 살아서 죽인 사람보다 더 많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나실인의 완성은 바로 나실인 자신이 죽는 그 경우 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삼손은 미리 앞당겨서 보여줬습니다. 나도 구원하고 당신 구원이 아니라 내가 죽었을 때 삼손이 죽어서 삼손을 구원한 것이 아니고 나실인의 위치에서 나실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죽이신 사명의 자리에서 죽음이 발생할 때 그 죽음만이 이스라엘이 탄생하는 유일한 장소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열매 없다는 요한복음 12장 25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현하는 거예요. 전동차가 그런 전동차에요. 죽음을 실어서 하늘나라로 보내는 겁니다. 산 사람은 못 갑니다. 죽은 자만 합류하면 천국 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율법이란 것이 나실인만 그러냐?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 21장 19절에서 21절 말씀을 제가 잠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성경 찾는 그 수고를 아주 안타깝게 여겨서 보통 제가 대신 읽습니다. 성경 찾는 게 얼마나 귀찮습니까? 귀찮은 것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신명기 21장 18절에 보면,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제가 구지 설명하지 않더라도 여러분들 다 귀 두 개씩 달렸으니까 보면 알겁니다. 집안에 자식이 말 안 듣거든 그를 내 새끼라 하지 마시고 마을회관에 내놓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돌로 쳐 죽이란 말입니다.

 

지금 한국에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은 중학교 3학년 수학을 선행 학습합니다. 외국에 주재하던 아들들이 특례 입학했다고 좋아했지요. 고등학교 특례 입학하고 대학교 특례 입학해봐야 기초가 안 되서 못 따라갑니다. 도로 미국에 오고 난리 납니다. 선행학습하고 있어요. 초등학교 5학년이 중학교 3학년 삼각함수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해외자녀들 못 따라갑니다. 그런데 그 자식을 죽여요? 미쳤어요? 내 혈육인데. 이게 팩트에요. 이게 하나님 말씀입니다.

 

“내 새끼를 누가 건드려?” 이건데 성경말씀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 말씀 안 듣거든 네 손으로 죽이지 말고 공개적으로 죽여 버리라고 합니다. 어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말 안 듣는다는 이유로 마을회관 앞에 내세워서 돌로 쳐 죽이는 그 광경을 보고 그것을 잘했다고 스스로 자위할 수 있는 부모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사람들은 참 비겁해. 꼭 지가 지킬 만한 것만 지키는 거예요. 온유와 화평하라니까 지킨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의 이런 말씀은 왜 안 지키지요? 골라, 골라, 골라서 지킵니까? 성경이 마트에요, 백화점입니까?

 

부모가 자기 자식을 보호하기는커녕 남의 손에 의해서 죽이라고 내놓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지 아니하면 그건 산 자가 아니고 죽어 마땅하다는 본인이 인정하는 것이고 동시에 그 자식이 죽는다는 것은 아버지 자신이 맞아죽는다는 것을 동의한다는 뜻이에요. 그 자식의 죽음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그 마음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그 심정과 부합되고 일치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손으로 이삭을 바치는 것은 그 구조가 장차오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주신 로마서 8장의 그 말씀을 미리 앞당겨서 모형으로 보여준 것이에요. 누군가 죽지 않으면 아무도 살 수 없다는 그 원리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비정상이라는 거예요. 우린 비정상인데 말씀만 덮으면 정상이에요. 말씀을 펼치면 비정상입니다. “아이고, 겁나라.” 얼른 덮어버려요. “저, 그 말씀 안 받습니다. 안 본 걸로 쳐주세요. 저는 정상으로 살겠습니다.” 여러분, 펼치시고 그냥 사세요. 왜? 이 말씀의 완성은 우리의 향도되시고 우리의 선도되시는 예수님께서 다 이뤄놓고 그 다음에 우리 인생이란 것이 얼마나 엉망진창인가를 얼마나 내 새끼 위주, 선행학습 위주, 그저 내 자식만 최고라는 그런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재방송 틀어주는 겁니다. 느긋한 마음에. 스물네 살에 이랬지, 서른일곱 살에 이랬지, 마흔일곱에 이랬다고. 하지만 나, 너 이해해. 그것 내가 몽땅 다 가져갔어. 내가 나실인이니까.

 

삼손의 자기 머리카락이 여자 밝혀서 자기 쾌락을 추구하는데 자기 임의대로 자기 주권대로 자기 자유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삼손 같은 경우에는 이미 하나님 쪽에서 나실인으로 지정됐기 때문에 그 머리카락이 자기를 죽이는 머리카락이고 자기 죽어서 남을 살리는 머리카락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마지막 때 알았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은 쪽입니다. 우리 안에 나실인의 기초가 깔려있습니다.

 

남들처럼 못 살고 남들처럼 멋있지 못하다고 하나님께 원망하지 마세요. 봉사할 일 있거든 악착같이 사시고 봉사할 것 없거든 차라리 죽어달라고 하세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서 그 일이 나실인으로써 살기 위해서 그것은 너의 혈육이나 네 자신이 결심한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주의 결심이 현재 너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 그라운드 안에 있습니다. 그 나실인 그라운드가 십자가를 통해서 함축해서 우리에게 안겨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거꾸로 나실인을 찾아갑시다.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안주하지 마시고 천국이 있음을 보여주는 이 지역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 성도 역할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나만 위해 살고 하나님은 내 욕구를 위해서 삼손처럼 필요한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대였습니다. 주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사 이 땅에 주셨사오니 내 욕구 삼손처럼 허랑방탕 자기 욕심만 채우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분 앞에서 제대로 나실인 못했음을 자인하면서 이런 죄도 이미 일찍이 주께서 처리하셔서 천국 백성으로 함께 해주심을 오늘도 다시 한 번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관리자(IP:175.♡.188.188) 14-11-28 12:52 
20141005 미국뉴저지2부예배

(강의:이근호 목사)

 

 

마태복음 6장에 우리가 방금 보았던 흔히 말하는 주기도문이라는 것을 언급할 때에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대목인데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거기에 ‘우리’ 자리에 ‘나’가 들어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마태복음 6장 7절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을 너희들이 알고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의 기도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기도와 차이점이 뭐냐?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너’의 아버지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가 아시느니라.

 

여러분들이 사도신경에 보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지요? 내가 믿사오니. 이것 문제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라는 말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붙일 수 있지 우리한테 붙일 수 없어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니, 많이 믿어라. 내가 믿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만 주셨어요.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차이점을 아셔야 됩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없기 때문에 모든 출발점을 나의 존재로부터 출발합니다. 나의 존재로부터 출발해서 “나를 누가 만들었지?” 나를 만드신 분은 전능하신 분이니까 하나님은 저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인간은, “우리를 누가 만들었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우리 속에 들어있다는 나라는 개체가, 주체가 우리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범죄 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천국에 달랑 지 혼자 가는 게 아니거든요. 천국 혼자 있는 게 아니거든요.

 

천국에 분명 많은 숫자가 있고 상징적으로 144,000이 있는 걸 우리라는 복수의 집단이 있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지향하면서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 나로부터 출발할 줄밖에 모르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것 뜯어고쳐야 돼요. 천국 간다고요? 천국에 가려면 천국에서 살만한 삶의 질이나 삶의 원리가 이 땅에서부터 바뀌어져야 됩니다. 그냥 간다고 가는 게 아니에요.

 

이 땅에서는 내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니 삼위일체니 예수니 그런 건 뒷전이에요. 내가 우선이에요.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 믿고, 나 잘되기 위해서 교회 왔고 나 잘되기 위해서 찬양하고 나 잘되기 위해서 예배드리는 거예요. 도무지 나를 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하나님은 어떤 때 필요하냐 하면, 나 잘될 때 아쉬울 때 내 뜻대로 안 될 경우에 그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이런 것 필요하고, 저런 것 필요합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 “너희들이 있어야 할 것은 미리 알고 있다.” 그런 쓸데없는 기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런 말을 하고 난 뒤에 빗발치는 항의가 들어옵니다. 나 잘되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라면 어떻게 기도하란 말입니까? 수천 번 들은 항의에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나한테 유리하지 않는 행위는 일체 할 용의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신이 됐든 하나님이 됐든 부처가 됐든 나는 나한테 필요하기에 당신을 선택했다는 조로 우리는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그걸 저는 흥정이고 거래라고 보는 겁니다.

 

-아멘.

벌써 아멘 나오면 문제 있는데요?

 

우리에게 있어야 될 것을 미리 아니까 네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나한테 요청하지 말라고 했을 때 나로부터 출발한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안 주면 어떻게 됩니까? 안 주면 나만 바보 되는데 안 주면 어떻게 살라고 합니까? 기껏 마음먹고 하나님 찾으면서 아부하면서 재롱부리면서 이 정도하면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나오는데

 

“너, 도로 가라. 네가 있어야 할 것을 내가 아니까 너는 너를 챙기기 위해서 나에게 나오지 마라. 나는 너라는 존재는 생각한 적도 없다. 내가 생각한 것은 우리라는 존재다.” 그 우리를 형성하기 위해서 각자각자 나밖에 모르는 인간 세상에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때부터 나냐, 우리냐의 갈등과 반목이 드디어 우리 속에 시작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마치 남묘호렌게쿄(주문만 외우면 병 고친다는 종교)라는 종교가 주문 외우듯이 뒤에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붙입니다. 그래서 장로님께서 예배시간에 기도 오래할 때 우리는 기다립니다. “예수 이름으로, 언제 나오나? 너무 길다.” 그러다 예수 이름 나오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이름으로는 핑계요,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내 이름입니다. 그 안에 내용은 내가 소속돼있기 때문에 내가 우선이기 때문에 나를 위로해주고 보실 필 어떤 단체를 위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 내가 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마치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만약에 그 교회에 어떤 집사님이 나를 욕한다면 우리는 깨끗이 물러가고 잘 먹고 잘 살라고 하고 빠집니다.

 

조금 전까지 우리 기도하던 것이 갑자기 옮겨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브라질, 미국, 한국 가도 내가 가는 한 내 기도, 포기 못합니다. 괜히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주의 이름을 붙입니다. 미신처럼.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잖아요. 뭐든지 내 이름으로 하면 다 이뤄진다고 하니까 내용은 내 것 집어넣고 끝에다 주문 붙이듯이 주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겁니다. 레테르 떼버리세요. 주님 안 속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만드느냐? 이제 주께서 없는 우리 만드는 방법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 있습니다. 1부예배 때 그 이야기했는데 동영상 보시면 되고, (우리) 만들 때 출애굽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나는 성질 급해서 다 까먹을까봐). 기도는 사건입니다. 기도는 우연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는 기도하는데 그것을 찌르고 난데없이 내 기도가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기도가 나왔다면 이건 사건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길에 가다보면 앰뷸런스 지나가지요. 누가 아픈가, 불났는가? 좀 기다리면 도로는 다시 정적에 파묻히지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듯. 우리는 평소에 우리의 기도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런데 삐용삐용 하게 되면 그때는 어떤 사태가 백지 같은 내 종이에 칼로 확 그어버리는 거예요. 예상 못한 사건,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와이미, 하필이면 왜 저에게 이런 일이? 기도하지 말래도 기도합니다.

 

단도리 단단히 해서 저주받을 짓 안 했고, 징계 받을 짓 안 했는데 주께서는 난데없는 사태를 일으킬 때에 따집니다. “주여, 가만있는 나를 건드리십니까?” 얘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건드리는 거거든요. 그 얘가 커서 어른 되었습니다. 이건 얘들이나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개와 인간의 공통성을 혼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인간은 짐승이다. 인간은 개와 똑같다. 그러면 개가 기분 나빠해요. 인간은 개만도 못하다. 그럼 개가 좋아합니다.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기도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예측 못했기 때문에 사건입니다. 앰뷸런스 예측 못했습니다. 불난 것 예측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히브리인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어요. 출애굽 사건 설명합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면서 갑자기 왕이 하나 등장하는데 이 바로 왕이 히브리인들을 아주 왕따 시키면서 놀리듯이 고생시킵니다. 히브리인들이 소원한 것은 애굽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권교체였습니다.

 

사람이 누굴 떠난다는 말은 일단 떠나보고 난 뒤에 더 좋은 것을 경험했을 경우에 그래서 다시 왔을 때 못 살겠다. 저기 가자. 할 경우에만 출애굽이 성립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은 애굽을 빠져나가본 적도 없어요. 무슨 출애굽을 기대해요? 정권교체지요. 여기 단골 있고, 여기 아는 친척 있는데 뭘 출애굽을 해요. 이 땅에서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지. 다만 지금 불편하니까 신이시여, 이 난국을 극복해 달라고 기도할 뿐이지 빠져나오는 것은 그들이 마인드가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빼내게 하는 겁니다.

 

그 출애굽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뭘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이 따로 마련된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라가 있다는 것은 일단 좋지요. 여러분,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 알려드릴게요. 좋은 소식은 우리가 천국, 지옥 가기 전에 죽기 전에 미리 알았다는 것, 좋은 소식입니다. 좋아하지 마세요. 나쁜 소식 기다립니다. 나쁜 소식 알려드립니다. 바꿔져야 간다는 것, 미안합니다(제가 미안할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서 이대로 안 됩니다.

 

그래서 광야라는 것을 겪게 합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이동할 때 이스라엘 사람 좋아들 했지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자기는 애굽에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애굽의 확장이었고 애굽의 팽창이었습니다. 살던 행세, 자기가 지금까지 몸으로 맞추었다고 생각한 그 원리가 사실은 애굽이기 때문에 광야 나와도 그 집단 애굽에서 못 빠져나온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있다고 하니까 그들은 착각했지요.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니까 분명히 나에게 유리하도록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조명시설 갖추어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한 곳이 물 없는 곳이었어요. 네비게이션이 잘못됐어요. 네비게이션이 뭔가 잘못된 겁니까? 양식 없는 곳으로 갔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의 갔는데 물 없는 곳으로 가고 양식 없는 곳으로 갑니다. 물 없이 양식 없이 산다는 것은 애굽에서는 상상도 못했고 그런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 생존 조건이 안 되어 물 없기에 원망했고 양식 없기에 원망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죄의 본색이 드디어 나오는구먼.” 이렇게 된 거예요. 무슨 하나님과 소통이 됩니까? 대화가 안 되는데. 대화가 안 되는 것을 공략 불가능성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어떤 철학자가. 서로 대화가 안 되는 겁니다.

 

그들은 드디어 결단 내렸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애굽으로 돌아가자. 달리 이야기하면, “나를 위한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여호와라 알고 섬기자.”라고 그들은 모세에게 대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원망을 충분히 노출시키고 이 인간들은 천국 못 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정시키시고 일용할 양식 주셨습니다. 이게 주기도문에 나옵니다.

 

주기도문이 뭐냐? 출애굽 정신의 이 땅에 대한 반영, 이게 출애굽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마음이 바뀌어야 하는데 바뀌는 마음 중에 주기도문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용할 양식이고 하나는 용서인데,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 다음에 용서하심으로써 그런 마음을 갖춘 자에게만 천국 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왜? 천국은 나가 용납되지 않고 우리가 용납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설교가 이쯤 흐르면 앞에 있는 것 다 까먹었습니다. 설교 다시 돌아갑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어떤 기도냐 하면,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내 기도입니다. 뒤에 예수 이름 붙여봐야 그것, 본인도 거짓인지 아는데 주님은 오죽 알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천국 못 갑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갖추어진 우리 안에 포함되어진 나, 그것이 출애굽인데 출애굽의 특징이 뭐냐 하면, 몽땅 홍해에 집어넣어서 모든 개인적인 요구를 묵살해버려요. 어린양의 피 발라서 모든 것을 묵살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새로운 백성을 만듭니다.

 

“김 집사님, 오늘밤에 죽음의 사자가 온다는데 피 발랐습니까?” “예. 피 발랐습니다.” “최 집사님은?” “피 발랐습니다.” “최 집사님, 페인트 칠 좀 잘해야지.” “아이쿠, 큰일 날 뻔했네.” 페인트 칠 어설프게 하면 죽음의 사자가 그냥 덮칩니까? 주님의 어린양의 피 앞에서 개성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주특기가 인정받느냐 이 말입니다. 없지요. 없으면 우리가 되는 거예요. 너나 할 것 없이 다이렉트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을 경유해서 만나는 거예요. 이 가운데 세리와 창기 있으면 어린양, 십자가를 경유해서 보면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형제입니다. 주께서 친히 귀한 생명 넣어준 우리의 형제입니다. 같이 살 사람이에요.

 

천국 갈 때 가장 난처한 것은 내 돈 떼먹고 사기 친 사람이 천국에 가 있더란 사실입니다. “저 인간, 여기서 보네. 기분 나빠서 지옥 가서 살래.” 이러면 그 사람은 개인이 생각한 사기꾼이라는 그 의식이 아직도 개인 속에 들어있다고 보게 됩니다. 다이렉트로 사람 보지 마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우리는 나밖에 모르는 하나님의 원수의 자격으로 값없는 용서로 구원받은 겁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 용서가 일시적 원리가 아니고 그 용서가 반복되어서 영원히 유지되는 그 원리가 용서입니다. 여기서도 용서, 천국 가도 용서, 이 용서를 알아야 천국 갈 수 있습니다. 이 용서를 알기 위해서 주님께서 어떤 조치를 하시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불평불만이 나올 수 있는 요소는 이 땅에서 사건으로 다 터뜨립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하나는 일용할 양식이고 또 하나는 용서입니다. 그것 이제부터 설명 드립니다. 일용할 양식을 줬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고백하시면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틀 치 양식을 주시는 횡포를 이렇게 부리시깁니까?” 왜냐하면 광야 때 주는 만나가 일용할 양식은 맞는데 신명기 8장에 보면, 거기에 천국의 의미를 집어넣습니다. 뭐냐 하면,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했어요. 만나의 특징은 뭐냐? 개인의 역량대로 많이 가져가는 것을 허락지 않는 것입니다.

 

만나 먹을 때부터 우리는 내가 노동해서 먹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유해서, 우리가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그 무엇, 물 없다고 원망하고 양식 없다고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주시는 그 무엇, “너는 한 되 가져가. 나는 두 되 가져가고.” 이 모든 것이 일체 용납되지 않는 그 무엇, 따라서 만나를 먹을 때 그들은 만나를 먹는 것이 아니고 우리라는 기반이 되는 말씀을 먹는 겁니다. 말씀 안에 나는 사라지고 말씀 안에 우리가 들어있는 거예요.

 

이틀 치 주게 되면, “주여, 이틀 치 주게 되면 이틀 치 있기 때문에 내일은 주님 생각 안 하게 됩니다. 주여, 그런 횡포를 저한테 베풀지 마시고 그냥 하루치만 주소서. 그래야 매일 생각하지요.” 내가 이야기해놓고 겁납니다. 모질게 이야기해놨어요.

 

우리는 평소에 나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을 믿는 버릇이 있어서 이틀 치가 뭡니까? 두 달 치, 일년 치 미리 당겨서 달라고 합니다. 넉넉하게 살려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주님이 한 달에 한 번씩 오시고 양식 떨어질 때만 오게 되면 정수기 렌탈하는 업자입니까, 무슨 필터 갈려 오세요? 양식 떨어졌나?

 

“내가 생각하기에 먹을 것 있으면 더 이상 주님 필요 없습니다. 혹시 양식 떨어지면 그때 제가 부릴 때 호출할 때는 ‘뭘 도와드릴까요?’ 그렇게 하세요.”라는 것이 이방인들이 해왔던 기도란 말이죠. 그러니 그런 마음을 바꿔야 되는 거예요. 아주 나쁜 소식이지만 할 수 없어요. 이야기해야겠어요. 끝까지 갑니다. 이걸 바꿔줘야 돼요.

 

그러니까 매일같이 주님이 만들어준 우리 사랑 속에서 책임자가 내가 아니고 주님이 책임자가 되는 겁니다. 주님이 책임자가 된다는 증거가 히브리서 7장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그 이유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가하심이니라”

 

여러분, 내 이름의 기도를 믿습니까, 주의 이름의 기도를 믿습니까? 주의 이름의 기도를 믿어야 돼요. 이 말은 내 이름으로 하는 그 모든 것은, 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주께서 묵살해주시고 네가 지금 살아있는 것은 기도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너를 위해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기 때문에 기도해서 네가 지금 천국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중보자는 그냥 기도가 아니고 내 기도와 싸우게 해주는 것이 중보기도에요. 우리는 중보기도하면 안 돼요. 중보기도 없어요.

 

성경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intercession도고입니다. 중보자의 기도는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과 대결에 있기 때문에. 일평생 다하도록 주님과 대결상태에 있어요. 교회에서 중보기도가 유행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도고라는 게 있는데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따로 중보기도라고 하느냐 말이죠. 그건 내 이름의 기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법이 아닌지 제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기 주보에 보니까 중보기도가 나오니까 성 목사님이 수습은 할 것이고, 저는 갈 데까지 가버리는 거예요.

 

내가 중보기도 돼버리면 이건 나로부터 출발하는 기도기 때문에 뒤에 주의 이름을 붙이는 그것은 주의 이름에 대한 모독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려면 주님의 계획한 바가 주로 되는데 그것은 항상 주님만 의지하며 사는 것을 지금부터 연습하는 거예요. 천국에 가게 되면 이틀에 한 번씩 주께서 면회 오고 이런 게 아닙니다. 항상 주와 함께 붙어있으면 주의 보좌 앞에서 찬양하며 살게 돼있습니다. 그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일용할 양식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재산이 700억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느냐? 700억 있어도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하루아침에 700억 날아가도 일용할 양식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700억 주신 겁니다. 좀 줬으면 좋겠어. 우리도. 이왕 빼앗기는 것 700억이 어떤지 맛 좀 봤으면 좋겠어.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나한테 유리하고 나에게 잘해주게 되면 사랑을 베풀고 나한테 못되게 굴면 마치 하나님이 복수해달라고 기도할 정도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한 것처럼 어떤 인간도 남을 용서할 자격이 없습니다. 갑자기 기쁜 소식이 막 들려오지요. 인간은 어떻게 해도 용서할 수 없어요. 따라서 남을 용서하지 마세요. 이것은 더 심한, 그렇게 심한 말을.

 

여러분, 다이렉트로 용서하지 마세요. 주의 이름으로 용서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내가 용서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직접 그 사람을 용서하게 돼있어요. 내가 용서하게 되면 용서받는 사람은 그 다음부터 부하직원이 돼요. 내 밑에 정신적으로 종이 된다니까요. 용서해줬는데 까불어? 이렇게 되면 자기가 군주가 되고 자기가 왕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버릇과 똑같은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왕 못 되서 환장하는데. 여러분, 남을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우리는 다이렉트로 불쌍히 여길 위인이 못 됩니다.

 

한 가지를 예를 들어볼게요. 비단이란 어린애가 있는데 자기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문 실장이 사실은 삼촌이 아니고 친아버지였던 거예요. 비단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실은 양부가 아니고 재회라는 사람이 양부로 돼있습니다. 그 다음이 비단이가 숙모라고 부르는 연민정은 사실은 숙모가 아니고 친어머니고, 그리고 비단이 엄마라고 부르는 장보리는 사실은 양엄마고, 그리고 비단이가 양할머니라고 부르는 식모는 진짜 외할머니고, 그 다음에 인화라고 부르는 사람은, 외할머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은 양할머니였다. 이게 <왔다 장보리> 이야기입니다. 시청률 40%.

 

자, 수능추리영역 들어갑니다. 이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은? 10초 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시청자들입니다. 복수 끝났다 싶으면 또 끄집어내고. 이런 드라마가 있다는 것은 인간은 사적 복수심에 환장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잘남을 그냥 잘났다고 하지 않고 내가 싫어하는 인간이 아주 지독하게 짓밟힐 때 우리는 상대적인 박탈감까지 보상되는 아주 즐거운 일이에요. 그저 뒷담화 씹는 재미로 살아가는 겁니다.

 

용서요? 우리 자신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 기대하지마세요. 어디서 주제파악도 못하고 자꾸 교회 와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 내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고 이야기했어요. 여러분, 이것 상상도 안 갈 이야기입니다. 일곱 명에게 용서하라는 그 제안을 베드로가 한 게 아니고 일곱 번, 다시 말해서 한 사람이 돈 빌리고 떼먹고 도망간 그 당사자가 두 번째, 돈 빌리고 떼먹고 당사자가 세 번째, 네 번째, 같은 인간이 일곱 번 할 때 일곱 번만 하면 되겠느냐고 한 거예요.

 

그 베드로요? 일곱 번 끝나고 여덟 번째 오게 만들어 그 동안 용서 못했던 일곱 번째 용서, 반 죽여 놓습니다. 용서를 했어요? 누적된 복수의 마일리지만 계속 쌓이는 겁니다. 그래서 어딜 가요? 천국 가요? 천국 가서 사기꾼 만나면 멱살 쥐고 주님 안 보이는 골목으로 끌고 가서 패버려요. 천국 경찰 와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말리고. 그게 무슨 천국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일흔 번에 일곱 번, 490번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 듣고 베드로가 이렇게 해석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래. 491번째는 용서하지 않으리.” 만약에 490번만 용서한다면 주께서는 일흔 번에, 일흔 번에, 일흔 번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 말은 뭐냐? 너는 네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다. 너는 용서받아야 될 대상이지 용서할 입장이 못 된다. 도대체 왜 내가 용서받아야 될 자인지 네가 아는 작업에 나와 함께 동행하게 되었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것은 이제는 본색, 결국 예수를 믿어도 오직 나를 위해 예수 믿었다는 것이 들통 나는 시점이 올 것이다. 그게 닭 세 번 우리는 소리였습니다. 우리 닭울음 들려야 됩니다. 그래서 본색 들통 나야 됩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런 되지도 않는 객기를 부렸어요. “주님 가신 곳이 어딥니까? 제가 목숨 바쳐서 가겠습니다.” 제 목숨 담보로. 네 목숨이 천국에 되겠어? 뭔가 착각하고 있어요. 처소가 예비 되면 너희에게 오리라 했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 고민에 빠졌습니다. 간단한 고민이었습니다. 안 오면, 안 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베드로는 안 온다는 걱정 안 했습니다. 이유가 뭔지 아셔야 돼요. 그 이유가 닭울음소리는 예상에 없었는데 과연 닭이 울었거든요.

 

내가 닭이라고 치고 주님의 약속이 내 안에 들어오게 되면 나로부터 출발한 그것은 이뤄지지 않지만 주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면 주의 온전한 기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나를 구원한다는 그 약속이 나를 통해서 담기게 되면 반드시 구원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그게 닭이에요. 나에서 어디로 이동했는가? 나, 나, 나로 출발하다가 닭으로 간 거예요. 닭은 베드로에 인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거예요. 나에서 벗어나서 말씀 속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그 말씀이라는 열차 속에는 모든 것이 말씀대로 이뤄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말씀대로 내가 다시 오리라 했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용서할 자격도 없고 용서할 줄도 모르고 용서해봤자 “내가 너 용서했어. 까불지 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남편들이 아내에게, “여보, 나 당신 사랑해.”라고 하는 그것 아주 위험한 겁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감히 니가 나한테 이렇게 나와?” 이거는 용서가 아니고 소유욕이에요. 정복욕입니다. 용서라는 걸 밑천으로 해서 자기 마음대로 휘어잡으려는 그러한 노림수가 있습니다. 들통 낼 건 다 들통 내고.

 

그래서 그 우리라는 것, 이것 안 됩니다. 우리는 기껏 “하나님, 이것 필요합니다.” 그 외에는 할 수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여러분들이 주의 이름으로 바꾸면 되는 겁니다. 내용조차도. 그럼 어떻게 바꾸는가? 바꾸는 방법, 이제 알려드리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평생 기도하세요. 여러분 하고 싶은 것, 여러분 원하는 것, 부자 되게 해 주옵소서, 마음껏 하시고 교회 부흥되게 해 달라, 어떻게 해 달라, 결혼하게 해 달라, 온갖 것 다 하세요. 바꾸는 그것은 여러분 소관이 아니고 여러분의 욕심, 탐욕 다 주세요. 그리고 두세요. 모든 기도 하세요. 다 두세요. 그 다음부터 바꾸는 것은 주님의 소관으로 바꿔집니다.

 

어떻게 바꿔지는가? 나로부터 출발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놓쳐버린 은혜들을 찾아지게 하는 겁니다. 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데 있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저게 왜 있지? 저것이 바로 나의 이름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지금도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자기 이름으로 구한 그 응답이 우리 곁에 널려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걸 보지 못하고 너무 욕심이 많아서 나밖에 몰라서 이방인처럼 그저 달라고 하다보니까 발에 치이고 배제된 무시당한 그런 것들 속에 감사가 들어있는 겁니다. 아직 뜯지도 않은 감사의 택배가 온천지에 널려있어요. 그걸 뜯어보세요. 이것도 감사, 이것도 감사에요.

 

내가 놓친 것을 찾게 하옵소서. 그 뜯지도 않은 택배 보따리에 감사가 있는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만 감사한다는 이방인 같은 더러운 짓거리,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짓거리를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주의 기도로 바꾸기 위해서 네가 놓친 것을 보아라. 그렇게 볼 때 그냥 이 땅에서 감사가 아니라 그게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온 사방이 하얗게 눈 천지가 됐을 때 여러분이 밤잠 안 자고 수군포로 퍼 날랐습니까? 옛날 사람은 알아요. 여기서 수군포가 삽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정을 보냈습니까? 하얀 눈, 그 눈이 지금 우리 주변에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눈 덮인 거기에 회사 가기 바빠서 서류가방 들고 함부로 눈을 밟고 지나간 거예요. 왜? 살기 바빠서.

 

해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 해가 좋고 달이 좋은 점은 사람 차별을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속에서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주께서 은혜주시고 사랑 주셨는데 나만 달라고 했던 이 욕심 때문에 골고루 주신 은혜를 얼마나 무시했습니까?

 

여러분도 다 아는 제 나이 쯤 되는 동화가 있습니다. 외국동화인데 어떤 이태리 왕비가 꼭 왕비는 보통 취미가 쇼핑의 여왕이죠. 돈을 쓰는데 어떤 사람이 밀을 선물하니까 왕비가, “보석, 목걸이 이런 걸 줘야지 왜 밀을 줘.” 하고 버렸습니다. 그 왕비 남편이 인도에 무역하다가 배가 침몰해서 파산했습니다. 완전히 거지됐어요. 졸지에 하루아침에 왕비가 거지 되어서 왕비가 배가 고픈데 밀이 있는 거예요. 왕비가 쓸데없다고 버린 밀이잖아요.

 

자기가 뭔가 자기 것에 몰두했을 때 쓸데없다고 버린 것이 그토록 귀한 만나인 것을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가 밀었던 그 사람, 나 때문에 내가 밀쳐야 될 그 사람 중에 바로 예수님이 들어있어요. 여러분, 예수님이 취직을 시켜줍니까, 예수님이 결혼을 시켜줍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서는 아무 쓸모 짝도 없는 이유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추방되었어요. 누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따라서 우리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나 위해서 하는 기도 자체 때문에 결국은 천국을 이야기해도 합류할 수 없다고 여겼던 베드로, 다시 말해서 나를 위한 예수기 때문에 결국은 주님을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에요. 주님을 보는데 베드로가 꾸부렸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을 가까이 해도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을 못 본 거예요. 너무나 자기만 생각했기 때문에 닭이 운다는 말씀이 올 때 우리는 공동존재, 우리를 느껴야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유산입니다. 이건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스라엘 자체가 레위기에 보면 임대차 계약한 사람이에요. 땅 주인이 하나님이고 계약조로 십일조 낸 사람들이거든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분배한 땅은 어떤 누구도 팔아서는 안 된다. 만약에 팔렸거든 희년이 오게 되면 다시 돌려주라는 게 있어요. 이것은 뭐냐? 공동소유입니다. 공동존재, 공동자유. 예수님을 경유할 때 너나 나나 예수의 피 아니면 용서 못 받았다고 같은 공감을 나눌 때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입니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할 때 저 사람을 비난하지 마요. 그 비난하는 것, 나도 언젠가 그 비난거리가 나오게 마련이에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마세요. 이제는 그만하세요. 스톱!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제발 떠나지 마옵소서. 왜? 이 훈련을 받게 하옵소서. 왜? 천국도 이 불연속의 연속이니까. 뭔가 단절됨의 연속이니까. 하늘에서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하늘의 뜻이 따라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제는 예수님이 하늘로 갔기 때문에 너희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주님 가계신 하늘을 보라고 골로새서 3장 1절에 보면 나옵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이 말은 너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만들어주신 주님과 함께 있는 신분이기 때문에 주님이 땅을 경과해서 활주로를 떠서 비행했다면 네 팔자, 네 운명도 주님과 함께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목사님, 내가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어떻게 아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자기 이름으로 실컷 기도하세요. 괜히 괜찮은 기도 자세로 해봐야 안 귀여우니까 그냥 터지는 대로 나와요. 사람이 한 들면 풀게 돼있는데 뭘 꾸밉니까? “주여, 내 아들 살려내라.”고 하세요. 땅을 치면서.

 

하지만 그 응답은 뭐냐 하면, 그 아들 죽인 것도 네 기도의 응답이니라. 너는 네 아들 죽은 것보다 나 죽은 건 생각 안 나지. 네가 얼마나 네 아들에 꽂혔으면 십자가 죽은 것은 지식으로만 알고 그게 실제가 아니라고 네가 그렇게 했지. 네 아들은 귀한 아들이지만 너희들은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너희들을 이해하니까 너희들의 동의 없이 이미 모든 팔자와 운명을 확정지어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재방송 틀면 돼요. 스물 살 때 이렇게 까불었지. 저렇게 나밖에 몰랐지.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이제 슬슬 즐기세요. 내가 이것밖에 모르는구나. 즐길 때 심심하십니까? 주께서 즐길만한 일줍니다. 여러분 욕하고 도망갈 때 여러분 아낌없이 욕하고 저주하세요. 십리도 못가서 죽어라. “주여, 이것 죄 맞지요?” 점잖은 체해도 긁으면 화나게 되는 인간입니다. 점잖은 사람 없습니다. 다 아담의 자손, 고만고만합니다. 누구 바람피웠다고 욕하지 마세요. 아직 상대를 못 만나서 바람 못 피웠지 칠십 되서 바람피웁니다. 도라지 위스키에 화장 짙은 마담과 할 수도 있고, 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합니다.

 

우리라는 것, 우리부터 출발합시다. 나부터 출발하지 마시고. 하지만 나부터 출발해서 우리로 바뀌시기 바랍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우리 서로 잊지 말아요~ 백지영의 <잊지 말아요>라는 노래 가사에 나와 있습니다.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서로 잊지 맙시다. 같은 하나님의 지체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를 좁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소속된 교회가, 교회가 아니고 주님 몸에 소속된 교회가 교회인 것을 교회 되려고 하지 말고 이미 교회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경유하려 예수님의 피로 산 같은 형제로 주님의 피만 자랑케 하는 그런 모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관리자(IP:175.♡.188.188) 14-11-28 12:56 
20141005 미국맨해튼교회예배

(강의:이근호 목사)

 

 

통역되지요. 오늘 천천히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세상 속에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사람 속에 세상이 있다. 여러분, 이런 발상, 생각해본 적 있습니다. 맨해튼 속에 사람 있다. 이건 오케이. 우린 보통 다 수용합니다. 사람 속에 맨해튼 있다. 사람 속에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있다. 성경은 바로 상상도 못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 사람 속에 세상이 있다니? 어찌 그럴 수가. 그럼 사람밖에 있는 세상은 뭐란 말인가? 사람밖에 있는 세상은 사람 안에 있는 세상으로 교체돼야 될 임시적 세상인 겁니다. 여러분, 그 세상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하지요.

 

여러분, 예수님과 보통 인간이 차이점이 있어요. 그 차이점은 뭐냐? 예수님은 두 끼 먹고 우리는 세 끼 먹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점은, 그분은 부활을 하셨고 우리는 부활을 못하는 존재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부활했다는 것은 그냥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무 작게 생각한 것이고 약간 틀리게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면 예수님 개인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 속에 잠재돼있던 세상이 지금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바꿔치기한다는 뜻에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엄청납니다. 엄청나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인데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이 죽었다고 소생했겠지. 그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만의 어떤 세상을 잉태했고 그것은 예수님의 세상이 그동안 인간들을 품고 있던 세상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이것을 성경 고린도전서 15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부활의 세계가 사망의 세계를 삼켰다고 이야기해요. 삼키는 쪽은 큰 쪽이고 삼킴을 당하는 쪽은 작은 쪽입니다.

 

이런 엄청난 내용이 성경에 있어요. 그저 교회 와서 찬양하고 앞으로 행운 찾아오겠지. 그 정도 아닙니다. 그 행운 찾아온다는 세상, 주님 안의 세상으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체가 최고의 세상이에요. 베스트월드가 the best world, ‘the’가 들어가야 돼요. 오늘 배웠어요. 최고의 세상이에요. 감히 상상도 못한 세상입니다. 많은 성령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부활의영을 받아서 “뭐, 이런 세계가 다 있어?” 너무 놀라서 아낌없이 자기 것을 서로 소통하면서 세상에 들어온 것을 스스로 기념했습니다.

 

여러분, 그 세상에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까? 발 들여놓는 방법 알려드리겠습니다. 얘들은 오라. 다 와도 좋아요. 방법은 이것입니다. 한국어로 여섯 자입니다. 인간은 빠져라. 여러분들이 그동안 신앙생활 굉장히, 억수로(경상도 방언입니다) 힘들었습니다. 힘들어도 안 돼요. 힘들여서 될 일 같으면 힘쓰겠습니다. 아예 빠지세요. 빠지시고 맡기세요. 우리가 애쓴다고 속도 더 나는 것 아닙니다. 빠지시고 지켜보세요. 주님께서 세상 속의 인간이 어떻게 인간 속의 세상으로 바꿔지는지 여러분들은 감상하시고 박수치시고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성스러운 착란입니다. 역전입니다. 성스러운 뒤바뀜이에요.

 

내 자리 키우려고 내 자리를 당당하게 하려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바뀐 세상의 깊이를 더 만끽하고 맛보고 볼 수 있도록 여러분의 기도 내용이 바뀌어야 합니다. 즉 내가 하지도 않은 내가 시도해서 얻은 것도 아닌데 그 영생의 세상이 우리를 삼켜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전에 우리는 세상 속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눅 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맨해튼보고 쫄았던 사람입니다(통역 어렵다). 간이 콩알 만 한 채로 세상에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지옥 갈 가인의 사람들이 만든 게 있어요. 그게 바로 기계였습니다. 그 기계가 사람이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현대인은 모두가 기계들이 되었습니다. 매트릭스에요. 기계가 기계를 낳고, 기계가 기계를 낳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기계가 기계를 낳고. 기계가 자식 키웠고 기계란 자식도 기계를 낳고.

 

이 기계라는 것은 탈출 불가합니다. 인간을 기계화시켰던 가인 세계 밖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속품입니다. 서로가 맞물려서 어떤 인간이란 상품을 계속 만들어내는 공장설비에 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묻지를 말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걸 묻지 않기로 묵계로 약속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기계는 재생산되고 재생산된 기계는 또 재생산되고. 어디까지? 몰라.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어디까지 기계가 확산되는지 전 세계가 매트릭스처럼 정보의 바다, 그것뿐이에요. 이유도 없고 너무 고달프니까 마약에다 술에다가 도박에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쾌락일 뿐이지 또다시 돌아서면 돈 버는 기계, 조직에 충성해야 될 기계, 파이팅을 외치지만 지 팔람 아프지요. 소용없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모든 게 마찬가지에요. 잘나고 잘난 기계, 개기름 번지르르한 기계, 번듯번듯한 기계를 자랑하지만 어디까지나 세상 속에 인간입니다. 이것, 해결책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전부터 세상 속에 사람이 아니고 뭔가 사람 속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미 구약 때부터 차근차근 뭔가 그런 조짐과 징후와 징조가 있었다는 것을 창세기 속에 이미 담겨서 그런 씨앗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해줍니다. 이 세상에 가인의 세계뿐만 아니고 아벨의 세계도 같이 병행해서 있어왔다는 겁니다.

 

그 하나의 예가 아담이 낳고 죽었더라, 죽었더라, 하는데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았더라. 보세요. 죽음을 이기잖아요. 생명을 죽음을 이긴다는 사례가 이미 창세기 5장에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가 에녹처럼 살아서 이 기계 같은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살면 됩니까? 저도 에녹처럼 살아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고 은근히 저한테 기대할 거예요.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손 떼세요. 에녹은 본인이 원해서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에 간 게 아닙니다. 주님의 다른 작용이 에녹을 사용하신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여러분도 만만치 않습니다. 물러서지 않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에녹처럼 사용될 수 있습니까?” 물으신다면 저의 답변은 별로 신선하지 않습니다. 손 떼세요. 발 떼세요. 제가 그렇게 이야기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란 나중에 알고 보니 세상이 있고 거기에 에서도 있고 야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곱과 에서가 먼저 있고 세상은 그로부터 성질이 다른 이질적인 두 세계가 엉키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발생시켜왔습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세상이 있고 인간이 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이 있었고 그 인간에 따라서 각각 분류되는 세상이 섞여서 투쟁하면서 이 세상은 진척돼왔던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그게 진짭니까? 그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생각할 거예요. 목사님이 쉽게 하라고 하는데 양보 못합니다. 쉽게 못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쉽게 못하는 이유가, 우리 사고방식이 세상이 먼저 있고 그 안에, 큰 세상이 있고 거기에 작은 나, 따라서 세상이란 대자연에 맞춰나가면 그나마 숨 쉬고 살겠지. 이런 선입감이 굉장히 강렬해요.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고 남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니까 그 생각은 잘못된 선입견이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이 자아내고 만들어내는 형성해낸 그 세상이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게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11절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이렇게 돼있어요.

 

아직 에서란 이름의 사람, 야곱이란 이름의 사람이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태어나야 될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각각 다른 분류된 곳에 할당하는 식으로 배당하는 식으로 세상이 그렇게 꾸려가게 돼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꽃이 피기 전에 꽃봉오리는 작고 꽃잎은 큽니다. 큰 꽃이 속에서 나오니까 꽃잎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꽃이 되기 위한 전제 환경, 배경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먼저 엄마가 기저귀 준비하지요. 기저귀 맞춰서 아기 태어납니까? 기저귀 큰 것 만들면 거인 태어나고, 기저귀 작게 만들면 꼬마, 미숙아 태어납니까? 절대로 그럴 일 없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세상이란 걸 만든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정된 대립된 인물이 등장하기 전에 먼저 꽃잎을 깔아놨어요. 한 쪽 꽃잎은 에서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을 만들어놓고 한 쪽은 야곱을 위해서 세상을 만든 그 두 가지 세상이 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장담합니까? 바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고. 그것을 잘라보면 하나님의 사랑받는 세상 따로 있고 미움 받는 세상 따로 있고. 이것을 줄이면 천국 따로 있고 지옥 따로 있고. 제 말 맞잖아요? 천국 가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은 미움 받는 사람. 우리는 관람만 하세요. 손 떼세요. 이미 에서와 야곱은 태어나기 전에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에서와 야곱을 천국과 지옥의 대표자로 이미 시나리오가 짜여있고 세상은 그 시나리오대로 전개되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여러분이 궁금한 걸 제가 알아 맞춰보겠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어떤 사람이 야곱 쪽이고 어떤 사람이 미움 받는 에서 쪽입니까?” 그래도 지옥 가기는 싫은 모양이죠. 그런 것을 지금 묻고 싶어 하지요. 성경에서 창세기 4장에서 그게 나옵니다. 또 두 사람 나와요. 참 세상은 해석하기 쉽습니다. 청군 아니면 백군, 양 아니면 염소, 요한복음 1장에 의하면 어두움 아니면 빛, 참 세상 해석하기 쉽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 짝이 되는 대립된 질, 성질이 나오지요. 제가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목사님. 어떤 사람이 지옥 가고 어떤 사람이 천국 갑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제가 자문자답하고 있습니다. 그것 지금 말씀드립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 받았습니다. 거기서 멈춘다면 가인도 천국 갑니다. 그런데 지옥 갈 사람은 절대로 멈추지 않습니다. 제가 아까 강의하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손 떼라고 했지요. 가인은 절대로 손 떼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존심 있고 자신의 행함의 가치를 하나님 앞에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옥 갑니다. “나는 알아.” 그게 불교에요.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늘과 땅 사이에 나밖에 없다. 현대기독교신학은 불교로 갑니다. 사람을 좋게 해요. 사람들이 나는 나라고 하니까 맞춰주려고 사람은 기쁘게 하려고 신학도 그렇게 가버렸어요.

 

여러분, 제가 물을 테니까 속으로 답변해보세요.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서 죽을 작정하고 제사 드렸겠어요, 그냥 제사 드렸겠어요? 성질 급하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그냥 제사 드렸어요. 그런데 자기가 형한테 맞아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몰랐어요. 그냥 얻어맞았어요. 아벨은 자기 인생에서 손 뗐습니다. 한 쪽은 손 뗐는데 손 뗀 아벨을 자기 가치를 보상하라고 자기 가치를 되찾겠다고 한 가인의 방식은 바로 하나님만 믿는 사람을 때려죽여 버린 거예요. 그렇게 해서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해서 나는 영원히 나는 나라고 주장하는 그게 바로 에서고 그게 바로 가인이고 그게 바로 지옥 가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소유화시켜서 내 것 만들까? 그것 지옥행입니다. 그런 예수님 없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나는 기껏 보는 것이 세상 안의 나거든요. 그러면 소문난 예수님의 능력을 갖겠다는 것은 이 세상을 고집하고 이 세상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해와 달, 이 세상을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벨이 죽었던 그 피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영이 들어있어요. 모든 선지자에는 예수님의 영이 들어 있습니다. 결국 아벨 안에 있는 예수님의 세계가 가인이 고수하겠다는 가인이 보고 있는 자연세계를 부활이란 방식으로 삼켜버립니다. 따라서 아벨은 죽어서 새 세상 받습니다. 신세계. 아벨은 죽음으로써 승리한 겁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여러분, 좀 이상하지요. 주 안에 있기에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겁니다. 아벨이 죽었으니까 아벨이 패배자입니까? 아닙니다. 아벨은 죽기까지 자기한테 손을 뗐어요. 주의 조치에 맡겼습니다. 이게 승리입니다. 이게 팩트에요. 이게 승리한 증거입니다.

 

그럼 목사님, 자살할까요? 요즘 허드슨 강에서 자살한다는 사람들 많다는데 한강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강은 더 많습니다. 자살하지 마시고, 성악 하는 사람은 성악 열심히 하면서 죽으시고 공부하는 사람은 죽도록 공부해서 죽으시고 운동하는 사람은 운동 열심히 해서 죽으시고 기타 치는 사람은 기타 열심히 치고 죽으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기타가 아니라 주께서 맡기니까 주께서 시킨 기타기 때문에. 주께서 맡기신 영화감독이에요. 그게 바로 손 떼는 방법이에요.

 

백수가 무직자가 손 떼는 게 아니고 내 일은 가만있는데 주께서 맡기신 일이기에 그 맡기신 일 가지고 이미 천국의 부활의 세계, 예수님 안에 있는 세계에 들어가는 방식이 나에게는 이런 방식인 것을 주께서는 사명으로 부여하신 겁니다.

 

가인이 놀립니다. “너, 기타 쳐서 명인 되려고 하지? the best guitarist 되려고 하지?” “아니.” “왜 치는데?” “나는 즐긴다.” 즐겼더니만 베스트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즐기는데 왜 베스트 안 돼? 그건 2등 하라고 주께서 주신 사명이죠. 그래서 2등하는 자체를 감사해야 됩니다. 물론 25명 중에 25등하는 사람 있는데 물론 감사해야 되겠지요. 주께서 맡긴.

 

그래서 젊은 분에게 부탁합니다. 놀지 마세요. 놀지 않는 방식으로 주께 맡기세요. “주여, 오늘은 뭐할까요? 오늘은 뭘 하면서 죽을까요?” 죽도록 마케팅 해야 돼. 그걸 즐겨야 됩니다. 왜? 내가 이걸 해서 세상 속에 나 안 되기 위해서 이미 나는 주님 속에 부활의 세계 속에 나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놓고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Don't worry(영어 좀 되네. 며칠 살았다고)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모든 걱정은 이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하는 건데 세상이 나한테 있다면 이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 부활 속에 맨해튼 있고 맨해튼 속에 내가 있다면 결국은 예수님 안에 내가 있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부러워하지 마라. 사람은 너희 것이고 너희는 예수님 것이고 예수님은 하나님 것이다. 여러분, 러시아 인형 아십니까? 인형 속에 작은 것, 작은 것 속에 또 작은 것, 또 작은 속에 작은 것, 그것을 관계, 주님과의 관계로서 아무리 여러분이 낮은 자리에 갔더라도 부활 속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이미 죽음을 삼킨 채 즐기듯이 뉴욕거리를 사는 사람입니다.

 

하도 젊은 분들이 성경을 잘 모르고 어렵다고 하기로 제거 서론을 많이 했습니다. 본론은 아주 짧습니다. 본론 약 5분하고 설교 마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혹시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올림픽하면 John3:16 들고 달리는 사람 있습니다. 전도한다고. 카메라에 잡혀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거기서 세상이 뭐냐는 거예요. 그것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입니다. 예수님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오늘 궁금한 게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예수님께서 땀을 피같이 흘리면서 하신 기도 내용이 뭐냐 하면, 바로 세상 속에 인간을 인간 속에 예수님 안의 세상으로 바꾸는 기도를 한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9절에 보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그 다음에 “아니요”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우리가 주님한테 속임 당했어요?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아요? 둘 다 맞지는 알을 거고.

 

이 세상이 뭐냐? 그 뒤에 해답 나옵니다.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세상 속에, 바로 세상 속에 내게 주심입니다. 드디어 하나라고 여겼던 세상이 갈라지면서 한 쪽은 하늘로 뜰 준비를 하면서 겟세마네 기도합니다. 같이 있을 때는 같이 있다고 여겼는데 내가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세상 속에 내 자식을 따로 떼어놓기 위해서 지금 겟세마네에서 기도하고 죽으시고 부활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3장 16절 이렇게 제대로 해석합시다. “하나님이 세상 속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에서와 야곱이 결합된 것이 세상이라면 이제 에서는 에서대로 야곱은 야곱대로 분리될 때가 온 겁니다. 예수님의 가치, 예수님은 세상 속에 예수님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님 속에 새로운 세계, 신세계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그 신세계를 찬양하는 사람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에녹처럼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출세하려고 예수 믿고 성공하려고 예수 믿고 그게 다 내 가치 포기 못하겠다는 집념과 집착이었습니다. 주여, 맡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가는 대로 열심히 살아서 그것이 부활의 능력인 것을 세상에 꿀리지 않는다는 것을 세상에 죽음 능력도 능가한 그 힘에 의해서 작은 일을 한다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235번지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