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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1 19:54:36 조회 : 5702         
2015겨울수련회 영상보기 이름 : (IP:119.203.239.154)



 

 

 

 

*첫번째 강의 안내: 11일 일요일 저녁 8시~시50분


 

 

*두번째 강의 안내: 11일 일요일 저녁 9시~9시50분

 

 

*세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오전 10시~10시50분

 

 

*네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오전 11시~11시50분

 

*다섯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오후 4시~4시50분


 

 

*여섯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오후 5시~5시50분


 

 

*일곱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저녁 8시~8시50분




 

 

*여덟번째 강의 안내: 12일 월요일 저녁 9시~9시50분


 

 

*아홉번째 강의 안내: 13일 화요일 오전 9시~9시50분


 

 

 

 
 링크 : http://www.youtube.com/playlist?list=PL5N4qFOJSulzE50IGAeE3-JQIIWDC9sWQ, Hit:1246
 이근호(IP:119.♡.93.36) 15-01-14 07:09 
링크 라는 곳을 치시고 들어가야 합니다.
 관리자(IP:203.♡.42.222) 15-01-14 10:06 
음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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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수(IP:118.♡.140.98) 15-01-14 20:47 
전문가의 녹화 솜씨는 질이 다르네요. 강의해 주신 목사님과 촬영해서 올려주신 최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이근호(IP:119.♡.93.36) 15-01-20 10:37 
2015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가 시작하지 않은 일이 되길 원합니다. 주께서 시작한 일이 마무리까지 아버지에게 기뻐하실만한 말씀의 모임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민수기를 하면서 구원에 대해서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 구원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는 생각을 갖게 마련인데 성경의 민수기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은 이게 있어야 돼요. 저는 이렇게 보는데 쟁반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쟁반이란 표현을 한 것은 사실은 자리, 위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 쟁반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횟집에 가본적은 없지만 영화 같은 데 보면 가만있는데 쟁반이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골라먹을 수 있는, 빨강 쟁반, 노랑 쟁반을 본적이 있습니다. 사달라는 것 아닙니다. 그때 초밥이 쟁반에 담기지요. 어떤 손님이 오느냐에 관계없이 쟁반의 색깔은 한정돼있습니다. 노랑 쟁반, 빨강 쟁반. 안 가봤어요?

 

그 쟁반에 따라서 정해진 것처럼 구원은 본인의 결단에 의해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민수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빼버려요. 인간의 구원 시도는 다 빠집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떻게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걱정 되겠지요. 쟁반이 있어요. 주께서 쟁반을 쭉 갈아줍니다. 쟁반에 실리면 그 쟁반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표현하는 겁니다.

 

쟁반이니까 방금 제가 이야기하기를 쟁반의 색깔이 한정돼있다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는 그 자리가 종류별로 네 가지로 확정돼있습니다. 쟁반의 종류가 네 가지라는 말은, 구원이란 것은, 인간이 구원받고자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미리 준비된 미리 놓여있을 때 그 자리가 천국으로 인도하는 거예요. 그 자리가 네 가지인데 그 네 가지를 미리 말씀드리면, 정실이냐? 아니면 종이냐? 세 번째는 라헬 계통이냐? 네 번째는 레아계통이냐? 이렇게 네 가지로 끝. 네 가지로 끝나버립니다. 무슨 감리파, 침례교파 없습니다. 장로교파 전혀 없습니다.

 

정실 아내의 종이란, 딸려 나오는 하녀지요. 한 사람 야곱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나온 거대한 쟁반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란 쟁반이 나오지요. 이스라엘이란 쟁반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전에 정실이냐, 종이냐, 라헬 계통이냐, 레아 계통이냐? 이렇게 네 가지의 표현형이 나옵니다.

 

제가 표현형이라고 사용하는 것은 1865년도에 멘델이 발견한 멘델의 법칙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유전형과 표현형이 있습니다. 유전의 법칙에 우성과 열성의 법칙이 있어서 우성이 앞에 나오면 열성은 뒤에 숨어있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전에 있어서 어떤 형질이 있고 그 형질이 서로 대비가 될까 대립형질이라 이야기하는데, 멘델의 법칙에서. 대립형질로 모든 것이 정해졌다는 말은, 구원은 자신의 요구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내 쟁반을 골라잡을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이러한 논리가 우리에게 오늘날 어떤 평안을 주느냐 하면 내가 설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고 어느 쟁반에 담겨서 그런 식으로 가기 때문에 구원이 결정돼버려요. 확정 내지는 결정이 된다고. 구원의 결정. 따라서 우리는 내가 뭘 하면 구원되느냐고 기도할 필요 없고 어느 쟁반에 담겼는지 이것만 생각하면 구원은 끝나는 거예요.

 

정실부인, 종이라 하는 것은 야곱의 정실 아내가 라헬과 레아고 그 다음에 라헬의 종은 빌하, 레아의 종은 실바가 됩니다. 빌하, 실바, 라헬, 레아, 네 명의 여인이 야곱과 결혼해서 열두 명의 자녀를 생산하죠. 열두 명의 자녀는 표현형들이 상호 겹쳐져 있는 겁니다. 겹쳐져 있다가 민수기에서 특히 레위지파가 부각되는데, 레위지파가 부각되면서 쟁반 색깔대로 정리되는 단계가 민수기 단계에요.

 

제가 지금 강의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 이야기는 전혀 없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서커스 쟁반 돌리기 하듯이 주님께서 알아서 유전요소, 대립형질로 게임을 벌이는 겁니다. 던지듯이.

 

라헬, 빌하, 레아, 실바, 이 전체가, 쟁반 색깔이 네 가지지요. 네 개의 색깔이 구성된 지평, 지평이라 하면 어려우니까 평지, 그냥 벌판, 넓은 판때기를 하나님의 구원이라 하는 겁니다. 구약 민수기처럼 봐야 되는데 신약 로마서 10장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되는 줄 알고 있어요. 구원에 대해서 구약은 나의 모든 손을 다 떼게 만듭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경우는 없어요. 천국에 그런 식으로 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믿음을 안 믿으면 돼요. 그러면 되는데 인간은 자기 믿음을 안 믿을 수 없는 문제고.

 

지금부터 이 표현형을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 멘델의 법칙을 설명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완두콩이 있는데 완두콩의 특징이 자가 수정 하니까 그 신부가 완두콩의 수술을 잘라내고 꽃봉오리에 암수술에다 다른 데서 가져온 수술을 집어넣었어요. 잡종이 생기지요. 키 큰 것과 키 작은 것을 해보니까 중간 쯤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중간 쯤 되는 게 아니고 전부 큰 것만, 긴 것만 나왔어요. 그걸 우성이라 하는데 뭔가 한쪽으로 몰아준 겁니다. 저기는 숨어있고.

 

멘델의 법칙에서 우열성의 법칙이라 하는데 그게 섞이지 않고. 생물시간이 아니니까 그만두고요. 제가 멘델의 법칙을 사용한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에 나서면서 뽑아내려는 게 있어요. 종과 정실부인의 차이, 그 차이를 통해서 구원을 시켰다는 겁니다. 종과 정실부인의 차이로 하나님이 숨겨놓고 자신의 구원의 원리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종과 정실부인을 그렇게 하시고자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언약에 보게 되면 아브라함에게 하녀가 있었는데 이스마엘의 엄마 이름이 뭐죠? 하갈이죠. 하갈과 사라와 비교해요. 사라는 아브라함의 정실부인이고 하갈은 여종, 하녀에요. 우리 생각에는 개인의 사생활, 가정문제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가정문제를 두 개의 노선을 만들어버려요. 사라 쪽은 천국 가고 하갈 쪽은 지옥을 갑니다.

 

보세요. 우리가 만약에 여기 있다면, “나는 천국 갈까, 지옥 갈까?” 우리가 이렇게 생각은 하는데 그 생각이 완전히 무산돼요. 교회 다녀서 구원받아야지. 이런 생각은 성경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예요. 그건 본인 생각이에요. “나는 이 땅에서 고생 많이 했으니까 죽어서는 편하게 살아야지.” 혼자 많이 하세요. 그것은 본인의 염원에 해당되는 것이고 실제로 성경에서는 네가 어느 노선에 있는지 묻습니다. 아까 쟁반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어느 열차에 타고 있느냐만 물어요.

 

종의 열차에서 나오는 것은, 제가 갈라디아서 4장을 이야기하는데 하갈 노선의 특징이 있어요. 그것은 행함으로 구원입니다. 이걸 구약에서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합니다. 십일조 지켜서 영광 돌리세. 이게 전부 우상숭배에 해당돼요. 간음하지 않아서 영광 돌리고, 살인하지 않아서 영광 돌리고, 말씀을 지켜서 영광 돌리고. 전부 다 우상숭배에 해당돼요. 우상숭배란 것은 인간의 행함이 가담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 발상이 우상숭배를 만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아는, 제가 나중에 강의하면서 자아와 주체를 구분할 건데, 일단 자아는 뭔가 행하게 되면 그 행함의 모든 기대가 본인 소유로 환원되게 돼있어요. “내가 했잖아. 니가 한 게 아니고 내가 했어.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했어.” 내게로 돌아오기 때문에 이것은 결코 누구를 믿어본 적이 없는, 믿고자 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행함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자기 사슬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어요. 어떤 묘수를 써도 이걸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누가 했지? 이러면 우리는 기분 나빠요. 어떤 계획이 있고 기대가 있으면 사람이 그 기대와 계획을 누가 해주면 기분 더러워요. 내가 세운 계획은 내가 해야 기분 좋아요.

 

영화에 보면 그런 것 있잖아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금강산에서 칼을 갈았단 말이죠. 그러다 중국집에서 만두 먹다가 만나서 이층에서 싸우는데 칼을 들고 마지막 원수의 목을 치려고 하는데 원수가 스스로 삐끗해서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죽었어요. 내가 죽인 게 아니고 지가 실수해서 죽었어요. 십년 동안 금강산에서 무술 닦은 것, 헛수고가 될 때 기분 굉장히 더러워요. 내 목적을, 내 기획안을, 내 결재를 손 안 대고 어떻게 해결되느냐 말이죠. 회사에서 부하사원이 결재 내니까 상사가 가로채서 그는 승진해서 우리는 미생 되고 지는 완생 돼버리고. 그러잖아요.

 

사람은 어떤 생각, 기대를 하던 간에 그 모든 결과는 나한테 와야 돼요. 그래서 구약의 우상의 특징은 조건이 붙어요. ‘나를 위하여’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너를 위해서 신을 섬기지 말라. 너를 위해서 신을 섬기는 것은 전부 다 우상이다.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죄목이 우상숭배였어요.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활동했기 때문에 멸망한 겁니다. 요새 말로 번역하면 교회가 교회를 위해서 활동하면 그게 우상숭배 단체가 돼요. 선교단체가 선교단체를 위해서 활동하면 우상숭배의 선교단체. 그게 어느 노선이냐 하면, 하갈 노선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하갈은 자식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라는 자식이 없어요.

 

성경에서는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면, 멘델에서는 우열의 법칙이지만 성경 전체에서는 딱 한 개의 법칙입니다. 이게 부재의 법칙, 없는 것이 있는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미 있잖아요. 있으니까 우리가 존재하지요. 존재한 사람이 부재한 장소를 찾아가야 되는데 찾으려면 본인이 존재로 유지되어서는 못 찾고 본인이 부재에 합당한 존재가 돼야 돼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게 갈라집니다. 어떻게 갈라지느냐 하면, 우리가 그냥 내가 행동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 행동이기 때문에 절대로 갈라지지 않아요. 하지만 외부에서 호명합니다. 너는 유다지파, 너는 갓지파, 너는 아셀지파, 이렇게 배당해버리면, 위치를 정해주면 이것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지정된 자리를 부여받고 부여받은 그 자리로서 그 자리가 뿜어내는 표현형, 구원에 합당한 구원의 무늬지요. 구원의 무늬를 보여주게 되면 그 전체가 모여서 구원의 벌판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가 강의하면서 제일 강조하는 것은 이미 결정론이에요. 이미 확정된 겁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구원된다는 조건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요. 내가 예수 믿었으니까 앞으로 바르게 살아야지, 라는 것 자체가 성경에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르게 산다는 것이 상당히 교만한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바르게 살아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바르게 살겠는데 네가 바르게 사느냐, 바르게 못 사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바르게 살고, 못 살고 간에 자리가 먼저에요.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우리의 존재를 부재의 존재로 분열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분열의 방법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냥 여러분 알고 계세요. 나중에 물어본다고. 열두 지파가 나올 때 모세가 지팡이 들고 나왔습니다. 맞지요. 처음에는 지팡이로 물 갈라졌잖아요. 그 다음에는 지팡이는 날아가고 법궤가 있어야 돼요. 법궤를 앞장 세워서 이스라엘이 진행해요. 법궤가 되려면 지파가 여기에 전적으로 매달려야 되는데 그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 하나가 우뚝 등장하면서 요셉지파가 둘로 나눠지지요. 열두 지파가 열세 지파가 되면서 하나가 열두 지파 전체를 독립해서 대표해서 나온 지파가 레위지파가 되는 겁니다.

 

벌써 민수기 2장 시작한 거예요. 사실은 민수기 한다고 하면 민수기를 읽어 와야 하는데 그렇잖아요. 이건 예의 아닙니까. 수련회에 대한 예의거든요. 그런데 제가 전혀 그런 걸 기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오세요. 쟁반은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동남서북으로 위치 이동, 위치 변화하면서 정실부인과 종의 자식을 구분해요. 잡종과 순종을 구분하면서 열두 지파가 홍해에 왔을 때는 상호 겹침, 이게 종인지 누군지 관계없이 막 섞여서 모세가 그냥 지팡이 들고 홍해를 건너왔던 그들이 지파별로 레위지파가 부각되면서 다른 지파는 자기 쟁반으로 전부 다 정리정돈이 돼버려요. 그리고 정말 고마운 것은 어떤 쟁반이든 관계없이 중앙에 있는 법궤를 관장하는 것은 레위지판만이에요. 레위지파가 법궤를 관장한다는 말은 너희들이 어떤 위치에 있든 간에 하나님은 레위지파만 받아서 너희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레위지파는 땅이 없어요. 땅이 없다는 말은, 제가 아까 무슨 법칙이라 했어요? 부재의 법칙, 없는 게 있는 것을 구원하는 원리를 적용시키는 겁니다. 없는 것 앞에 뭘 붙이면 돼요. 개뿔도 없는 것이 또는 개 코도 없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머리 둘 곳도 없었어요. 개 코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뭘 달라고 하니까 뭐 이상해. 뭐 있어야 주지. 예수님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에요. 너희 것을 없애주마. 이것 줘요. 부자 청년이 주님 앞에 왔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어떻게 영생을 얻겠습니까? 할 때 모든 것을 없애주마. 모든 것을 없애고 날 따르면 너에게 영생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부자 청년이 왜 근심했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인데요. 저는 이렇게 봅니다. 부자 청년이 오기 전에 이미 우상숭배자고 우상숭배는 자기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자기가 부자였다는 것은 그동안 착하게 살았기에 하나님께 보상받은 축복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축복을 없애라고 하니까 그 축복이 돈이 날아가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동안 마일리지 쌓았던 나의 착함, 선함 없이 영생 얻는 방법을 부자는 알 수 없었던 겁니다. 왜냐? 부자는 평소에 행함이기 때문에 아무리 주님을 찾아와도 주님과 자기에 설정된 모든 관계는 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나에게 도로 회수가 되는 거예요. 내 일에 내가 주인공이 되는 그 사슬에서 주님이란 것이 나의 일에 후원해줄지언정 거기에 내 허락 없이 끼어들 순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제가 한 이야기가 인간은 자기 바깥에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구원 못 받는 겁니다. 자기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기도를 해도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이미지로 상상하면서 나는 기도하고 또 다른 내가 옆에 서서 사진 찍고 있어요. “네가 벌써 두 시간 반째 기도하고 있구나. 착하기도 해라.” 기도하고 난 뒤에 귀여워, 어쩌고. 헌금 내면서 옆에서 헌금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카메라고 인증샷 찍으면서, “세상이 그 어려운 가운데서 이런 과부와 같이 생활비 다 바치고. 이렇게 대견할 수가.” 사진 막 찍는 거예요.

 

우상숭배는 누굴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따라서 자기를 위해서 우상숭배를 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위해서 달리 할 수 있는 행함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을 신을 위하여, 영광을 위하여, 예수를 위해서 무슨 말을 갖다 붙여도 그게 전부 다 나를 위한 우상숭배의 조치로 다시 나한테 회수하게 돼있어요. 이걸 하나님이 아시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은 너는 네 마음대로 살고, 구원은 내 마음대로 표현형, 무늬를 입혀줄 거예요. 그런데 그 무늬는 우리가 딛고 있는 쟁반에서 솟구쳐 나올 거예요.

 

처음에 유다고 아셀지파, 유다지파, 무슨 지파로 나오더라도 그것은 네 가지로 정립이 돼요. 아까 라헬, 레아, 빌하, 실바, 이 네 가지의 무늬로 모든 게 정리되고 맙니다. 그러니 아셀지파가 어떻고 단지파가 어떻더라도 그것은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왜? 레위지파가 떴거든요. 레위지파가 뜨는 동시에 다른 지파는 취지에 의해서 조정이 돼있어야 돼요.

 

그럼 레위지파는 뭐냐? 레위지파는 해안선이라고 보면 돼요. 무슨 해안선이야 하면, 거룩과 비-거룩의 맞닿은 선, 경계선입니다. 원래 경계선은 면적을 갖지 않아요. 두 세력이 맞닿으면 끝나니까. 맞닿으면 자동적으로 생기는 거거든요. 경계선에는 폭이 몇 센티입니까? 묻는 게 잘못이에요. 경계선은 경계선 자체로 끝나는 거예요. 경계선에서 폭이 몇 센티이냐고 묻는 것은 마치 경계선이 뭔가 있음을 이야기할 때는 모르지만 경계선 자체가 흔적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폭이 없잖아요. 그게 뭐냐? 부재에요. 없어요. 없는데 생기는 거예요. 뭐가? 경계선이.

 

여자들이 나이 오십 넘어가면 경계선이 많이 생기잖아요. 보톡스 해서 당기고 하는데. 경계선은 자연발생적으로 주름이 잡히면 스스로 생기잖아요. 거룩과 비-거룩은 만나서는 안 되는 겁니다. 만나게 되면 한쪽이 거룩이 비-거룩을 죽입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에게 나를 본 자는 죽는다는 겁니다.

 

죽는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 처음에는 그런 뜻으로 생각하지요. 이 땅에 살다가 없어진다. 참 없어지기만 하면 좋겠는데 내가 존재로 볼 때 없어지는 것이 죽는 거예요. 그러나 역할로 보게 되면 이것이 영원합니다. 없어지지 않아요. 사람은 제가 안 죽는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온 거예요. 사람은 죽더라도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 번 태어났으면 영원히 죽지를 않습니다. 이게 사람이 환장할 짓이에요.

 

아프잖아요. 그러면 죽으면 되는데 죽어도 안 없어져요. 누가? 내가. 왜? 내 역할 때문에. 내가 예수를 챙기지 않고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그 역할은 영원히 지옥까지 가져가셔야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게 된 역할은 천국까지 계속 가져가야 돼요. 여기서 어떤 예외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그래요.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고 네 속에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히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소실시킬 수 없는 입장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과 비-거룩이 만나면 죽는다는 겁니다. 우선 일시적으로는 목숨이 끊어지는 걸 말하겠지요. 그러면 죽으면 안 만나면 돼지. 안 만나면 비-거룩 속에 거룩을 남겨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성소를 세우는 게 목적인데 이게 안 만나게 되면 비-거룩 속에 거룩을 세울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레위지파 속에 무슨 구멍을 만들어요. 부재의 자리인데 이 부재의 자리에는 사람이 들어가지 않고 어린양이 들어갑니다. 어린양이 들어가서 여기서 제사를 드려요. 레위지파는 그 구멍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접근하지 말라고. 그러면 이것은 시내 산에서 봤던 거룩이 지상으로 내려온 거예요. 지상으로 내려와서 열두 지파가 거룩한 나라가 되는 겁니다.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말은, 위에 있던 거룩이 모세도 접근할 수 없던 거룩이 지상에 공존하고 동행한다는 뜻이거든요.

 

거룩과 비-거룩이 만나면 죽는데 그 무서운 저주에 어떻게 여기에 자리 잡을 수 있느냐는 그 문제가 생기는 거죠. 거룩과 비-거룩이 만날 때 이쪽이 다 타죽잖아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비-거룩이 거룩과 유지하려면 같이 동행하면서 같이 살아야 되는데 사는 방식을 하나님 쪽에서 제사라는 방식으로 해안선, 경계선을 만들어요.

 

그러면 어린양이 죽으니까 죽음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지요. 가운데 죽음이 있고, 죽음 근처에 레위지파가 거룩이니까 포위돼있고 그 가운데 열두 지파가 하나님이 정해준 자기의 쟁반 색깔대로 무늬대로 재배치를 받으면서 뭘 보여주느냐? 우리는 종 출신입니다. 우리는 정실부인 출신입니다, 라는 식으로 여기서 배치하는 것이 바로 민수기 2장의 언약주변도입니다. 언약주변이 그렇게 돼있어요.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정리해드리면, 늦게 오나 일찍 오나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란 우리 계획이 아니고 우리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일방적인 하나님의 설계 도안이 제시된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호출된 거죠. 호출될 때 네 행위를 버리고, 그냥 네 행위와 상관없이. 행위를 버리고 하면 또 버리는 행위를 해야 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막 살라 이 말이에요. 그냥 와. 그냥 와서 쟁반이나 배당받아서, “나, 이것 받았다고.”고 그 이야기하면 그것 모으면 그것이 바로 구원된 단체가 되는 겁니다. 구원의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되게 쉽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게 되면 여기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왜 종과 정실부인으로 나누어지느냐? 갈라디아서 4장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면, 아브라함에게 두 부인이 있었다. 하나는 하갈이고 하나는 사라인데 하갈은 종이고 이스마엘이란 자식이 있었다. 그런데 사라는 임신을 못해서 자식의 부재, 자식이 없어요. 있는 자식들은 지옥 가고 없는 자식은 천국 간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간단하게 해서 이런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계시가 우주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전에 설교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이순신 장군 죽었다고 지진 일어납니까? 아니지요. 이순신 장군 죽었다고 갑자기 태풍 불어요? 그런 것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 돌아가실 때 하늘이 까맣게 됐지요. 지진이 일어났지요. 죽은 자가 살아났지요. 그동안 인간들은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고 해서 자연은 자연대로 흘러가고 인간은 인간대로 따로 흘러갔다고 본 겁니다. 자연 따로 인간 따로 이렇게 된 거예요. 죽으면 자연 품에 안기고.

 

그런데 이 자연을 좌지우지하는 자연을 움직이는 동력 원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아브라함에게 전달됐다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전달된 두 부인에게 대자연의 마지막 운명이 결정 나게 돼있답니다. 그럼 이건 뭘 뜻하느냐 하면 성경이야기가 결국 무엇과 관련돼 있느냐 하면,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관련돼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기 전공과목 있고 성경 전공과목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성경을 함으로써 내 전공과목, 뭐 IT분야, 어떤 분야든 괜찮아요. 농사짓는 것도 마찬가지고 성경 내용과 관련성이 있는 내용인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뭐냐 하면, 교회 다닌다든지 내가 예수 믿는다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교회 다니는 것도 아니고 예수 믿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 현실이냐? 이걸로 끝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아는 내가 정리한 현실이 진짜 하나님이 생각한 현실과 동일한 현실이냐? 현실도 모르면서 현실 속에 산다는 것은 현실로부터 소외당하고 지금 그야말로 어긋나게 누가 힘드냐? 본인이 힘들어요. 현실 속에 있으면서 현실 원리와 다른 원리로 우기고 저항하다 보니까 본인이 되게 힘든 거예요. 그러나 현실을 알아버리면 전혀 힘들게 없는 겁니다.

 

그럼 현실은 어디 있느냐? 아브라함에게 내린 계시 안에 응축돼있는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마지막 설교가 맨해튼에서였는데 이렇게 했지요. 세상 안에 예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이지만 성경에 보니까 예수 안에 세상이 응축돼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는지 물었어요. 어떤 특정 인물, 예수 안에 세상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전체가 큽니까, 부분이 커요? 어느 게 큽니까? 보통 우리의 상식은 부분보다 전체가 크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전체의 부분이 그 전체보다 더 큰 거예요. 세상에 속하다고 여긴 예수님이 오히려 세상을 창조한 분으로써 이 세상에 속했습니다. 속하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습게 본 거예요.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지 뭐. 똑같은 인간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돌아가실 때 하늘이 까맣게 되고 지진이 일어났거든요. 예수님 안에 세상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세상을 이해하려면 뭘 이해해야 됩니까? 예수님을 이해해야 참된 현실이 펼쳐지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 내가 밥 먹고 살고 자식 키우고 하는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현실에 속한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빼앗아갔어요. 교회 가서 예수님 뵙고, “월요일부터 이 일은 제 일입니다. 손대면 안 됩니다. 제가 밥벌이 하려고 하는 일인데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예수님이 생각한 현실이 아니고 자기가 따로 만든 현실이 돼버려요. 그래서 현실에서 걱정한다는 자체가 주님에 대한 모욕이에요. 모독입니다.

 

“욕심도 허락 맡아야 합니까?” 하는데 그래요 욕심도 허락 맡아야 돼요. <미생>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거든요. 욕심도 허락 맡아야 된다니까. 더 나가서 화내는 것도 허락 맡아야 돼요. “니가 왜 화내지? 어쩔라고. 화내는 이유가 뭔데?” “제가 몸이 아파서 화냈습니다.” “니 몸이가? 니 몸 내가 아픈데 니가 왜 화나지? 이상하네. 니가 현실을 착각해도 보통 착각한 게 아니네. 네 현실 따로 있고 내 현실 따로 있나?” “그건 아니고요.” “그럼 합칠까, 우리?” “합칩시다.” 합치는 대신 너는 니 현실 자체를 포기해야 돼요.

 

종교를 갖는 게 기독교 신자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에 오락이에요. 게임이라니까요. 취미활동이에요. 기독교 신자 아무 의미 없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의미 없어요. 우리가 생각한 현실 그 자체지 나를 죽이는 현실 그 자체지 따로 어떤 모임을 만든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예수를 믿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니가 뭔데 예수를 믿어요? 주님 안에 속하면 그만이지 왜 예수를 믿습니까? 만약에 아침에 눈 떠서 여러분 아버지한데 “아버지?” “왜?” “아버지를 믿습니다.” “미쳤나. 갑자기. 뭘 믿어.” “여보, 당신을 믿습니다.” 그동안 안 믿었던 모양이지. 갑자기 생뚱맞게 믿기는 뭘 믿어요. 믿는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주심에 대한 모욕이죠. 주님을 모욕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믿는 거예요.

 

어떤 여인이 이렇게 예수 믿습니다. 주님, 주님 앞에 저는 개입니다. 세상이 이만한 믿음을 처음 봤다고 합니다. 주님 앞에서 내가 개입니다. 주님이 아들에게 주기 위해서 빵을 만드는데 그 빵이 나한테 걸려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 개니까. 이거는 아들 먹이기 위해서 있는 빵이, 아들이 아마 너무 많이 먹었던 모양이지, 아들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내 입에 들어오다니. 세상에 내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현실에 개로서 한 다리 낀 것에 대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최고의 믿음인 거예요. 왜? 본인이 소유한 믿음이 아니고 내가 펼쳐놓은 그 현실을 현실로 자기 현실 버리고 주님 중심의 현실을 인정한 게 되니까.

 

여러분, 살 때 고민한다는 자체가 이거는 어처구니없는 착각에서 비롯된 겁니다. 고민을 한다니요? 그럼 목사님은 고민 안 합니까? 저, 고민해요. 고민할까봐 고민한다는. 발걸음을 세신다. 다른 말로 하면 고민하지 말라. 머리카락을 세신다. 다른 말로 하면 고민하지 마라에요. 고민하지 마라를 바꿔서 말하면 범사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 3장 16절 말씀. 그러면 그것 보고 감사하는 사람 있어요. 그 감사를 모독한 거예요. 그냥 사는 게 감사지 그걸 따로 감사하게 되면 감사하는 현실을 따로 구축하게 된다니까.

 

두 시부터 네 시까지 감사. 오늘은 두 시부터 네 시까지 곗돈 타서 너무 감사했다. 그러면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얘 성적이 내려갔다. 이건 감사 보류. 이렇게 돼버리면 주님이 만든 현실 속에 나만의 현실을 따로 장착한 셈이 돼버려요. 그러면 부재의 세계 속에 존재의 세계가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셈이 돼버려요. 그러면 두 개의 현실이 충돌되고 대립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자식이 하나는 존재의 자식 이스마엘이고, 없는 자식이 이삭이에요. 이삭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투입으로 왔기 때문에 이삭이 오는 순간에 이스마엘은 비-약속 다른 말로 비-현실, 현실이 아닌 게 끼어든 거예요. 오물이 끼어든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에서 태어난 것이 하갈 계통입니다. 노선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하갈 계통이고 하나는 사라 계통이 있는데 하갈 계통은 인간의 행함과 인간의 육에서 나온 자식들입니다. dna 물려받은 자식들, 전부 다 지옥 갈 자식이에요.

 

사람 보고 지옥 간다고 하면 기분 나쁘지요. 저도 기분 나빠요. 기분 나쁜데 사람들끼리 노력해서 모인 것을 역사라고 하고 19세기 역사주의가 들어오고 난 뒤에 그걸 현실로 본 거예요. 현실은 역사고 역사는 인간의 행함이고 행함은 극복과 인내와 노력으로 늘 발전한다는 것이 20세기 초반까지의 철학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인간들끼리 존재에 의해서 역사가 만들어진다고 본 겁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은 역사에 끼어들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 이삭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삭을 모를 때까지만 그게 정당하지요. 없는 자식이 옴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비-약속으로 바뀌면서 약속을 위해서 이들은 지옥을 가주셔야 됩니다. 지옥 가는데 존댓말 쓰지요. 이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주셔야 돼요. 왜? 이들만 차지하기 때문에 약속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러면 약속에서 자식을 낳으면 되지 않습니까? 약속은 자식을 못 낳아요. 긍휼을 통해서 그 갈라짐인데 갈라짐 속에서 약속이 나와요.

 

이삭의 자식이 두 명이었습니다. 쌍둥이인데 한 사람은 야곱이고 한 사람은 에서에요.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둘 다 천국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다만 둘이 태어나서 둘이 간격이 돼요. 그러면 야곱이 천국 갑니까? 에서가 지옥 갑니까? 그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야곱이 보여줄 게 뭐고, 에서가 보여줄 수 있는 게 뭐냐고 물어야지요. 표현형이니까. 이건 괜히 물었다. 물은 것, 취소.

 

야곱이 보여주는 것은 처음에는 나는 처음에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아니고 야곱과 에서를 갈라내는 경계선, 해안선, 그 해안선을 주목하게 돼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출현하지요. 자기가 에서에게는 지기 싫어요. 하지만 구분하는 경계선이 약속 따라 들어왔을 때 그분 앞에서 야곱이 살려주세요, 했어요. 제가 존재라고 착각했습니다. 내가 존재로서 존재 값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은 이 땅에 없는 존재가 와서 그분만이 구원을 받는데 나는 여기 있음, 마땅히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기에 나를 구원하리라고 오해를 한 것이 저라고 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구원받아요? 야곱을 죽여야지요. 야곱을 죽이지 야곱 인생은 끝나고 하나님이 심어준 새로운 인생으로 살아가는데 이름이 바뀝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이젠 이스라엘 존재 안에 야곱이 들어있습니다. 이게 신약적 표현으로 예수 안에 있는 자만이 의롭다함을 받는 거예요. 예수 안에서. 이 땅에 보이지 않는 예수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거예요. 전에는 내 안에서 우리 아버지 안에서 경주 이씨 안에서 이랬는데 이제는 하갈 안에서가. 없는 존재 안에서 새로 만들었다.

 

없는 존재를 파악하려면 있음이 없음으로 내려가야 돼요. 어떻게 있음에서 없게 할 수 있느냐? 있음에서 없음으로 하려면 멘델의 법칙이 필요해요. 내가 열성이고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주님의 뜻이 열성을 짓밟는 우성으로 등장하면 돼요. 우성으로 등장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우성으로 등장하고 나는 졸지에 그 앞에서 쭈그려야 돼요. 나는 죄인입니다.

 

네가 어느 지파야, 라고 묻는 것은, 레위지파가 등장하고 난 뒤에서는 그렇게 묻는 게 아니에요. 레위지파가 등장하면 너는 레위지파 앞에서 어떤 쟁반을 부여받았어? 나는 종의 출신이래, 나는 정실부인의 출신이래. 이렇게 분배받지 나는 갓지파, 아셀지파, 스블론지파, 이건 의미 없는 거예요. 왜냐? 모든 표현형은 레위지파가 가져가서 레위지파가 죽음의 구멍 안에서 자기는 죽은 자로서 땅이 없는 부재의 지파로서 버티고 있기 때문에 필요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레위지파가 오래 갔겠습니까? 오래 가지 못했어요. 민수기에 보면 레위지파 안에 내분이 일어납니다. 모세, 네가 뭔데? 민주주의로 하자. 너만 은혜 받았나, 나도 은혜 받았다. 레위지파 안에 분열이 일어나면서 레위지파가 깨지면서 표현형이 요셉지파로 옮겨가서 요셉지파와 유다지파가 대결 상태가 있다가 유다지파가 승자가 되면서 메시아가 유다지파를 통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전부 다 쟁반 싸움이지요. 레위라는 쟁반, 거기다가 요셉 쟁반, 유지지파 쟁반. 시편 68편 7절에 유명한 말이 나오지요(나 혼자 유명하지만^^). 하나님께서 에브라임지파를 싫어한바 되고 요셉지파를 싫어한바 되어서 유다지파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이 나와요. 그러니까 “목사님, 개인적으로 얼마나 착해야 구원받아요? 이런 질문 자체가 성경에 없다니까요. 십일조 하면 복 받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목사 말 듣고 섬기면 됩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당신은 어느 지파에 올라서있습니까? 요 질문만 성립 돼요.

 

야곱이 에서와 싸울 때 자기는 승리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법칙이 뭐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게 어디서 나오는 목소리냐 하면, 야곱과 에서와 갈라놓게 하는 기준에서 나오는 음성이에요. 세미한 음성이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하니까 우리로선 불만이에요. 처음부터 작은 자를 큰 자로 만들면 결과는 마찬가지니까 헷갈리지 않는데 왜 큰 자, 작은 자로 해놓고 순서를 뒤바꾸느냐 말이죠. 왜 어긋맞게 축복하느냐 말이죠.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리 안 바꾸고 하느냐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너 보지 말고 너와 너를 갈라지는 경계선 보라. 경계선에 구원자가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경계선이 뭐냐? 이것 이야기 안 하고 쉬면 곤란하니까, 경계선은 뭐냐? 먼저 난 자가 나중 되고 의인이면서도 죄인 취급받아서 죽게 되고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 인간은 저 높은 것을 향하는데 주님은 저 낮은 곳을 향하고 하여튼 간에 우리의 행함으로 도저히 내놓을 수 없는 색다른 현실, 낯선 현실을 그 경계선에서 피라는 모습으로 이게 번져 나오네요. 그래서 예수 안에서 우리가 예수라는 쟁반 위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5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민수기 2장에 보게 되면, 회막이 있고 회막 주변에 열두 지파가 포위돼있습니다. 중간에는 레위지파가 있지요. 열세 지파에서 레위지파가 중앙에 하나님의 거룩을 보존시킵니다. 열두 지파는 이 거룩을 지향하게 돼있어요. 왜냐하면 거룩이 이스라엘을 만들었기 때문에 나에게서 나온 행위는 나에게 소환됩니다. 거룩에서 나온 것은 거룩으로 소환되게 돼있어요.

 

여기에 아셀지파가 있는데, 제가 A:라헬, b:빌하, B:레아, b:실바, 라고 정했습니다. 원래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고 싶어 했는데 삼촌이 야곱을 속였지요. 우리 동네에서는 1+1이라 해서 언니를 덤으로 가져가라 했는데 언니는 못 생기고 시력이 안 좋고 여동생은 예뻤습니다. 남자가 되서 예쁜 것 취하는 건 당연한 거고. 그래서 이걸 끼워 팔기라는 거예요(허니버터칩에 끼워 팔기 한다고). 끼워 팔기하면서 레아를 넣지요.

 

그렇다면 여기 아셀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Bb가 돼요. 단은 라헬의 여종에서 나와서 Aa. 그 다음에 납달리는 역시 Aa. 라헬이 아기 못 낳습니다. 빌하한테 넘기지요. 그러니까 네 명의 여인이 한 사람 야곱의 자식을 낳게 되면서 하나가 자식을 낳게 되면 나머지는 스톱이 돼요. 스톱이 되면서 거기에 나오는 표현형들은 순전히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들의 집합이 돼요. 이스라엘이.

 

그 다음에 베냐민지파는 마지막 때 라헬이 야곱의 자식이 되어서 AA. 그 다음에 에브라임은 원래 요셉지파는 하나인데 레위지파가 중앙에 대표로 하면서 요셉지파가 둘로 나눠졌어요. 므낫세와 에브라임으로. 요셉지파니까 라헬 계통이죠. AA. 그 다음에 므낫세지파도 AA. 그 다음에 잇사갈은 BB, 그 다음에 유다는 BB, 스블론도 BB. 그 다음에 갓지파는 Bb. 그 다음에 르우벤지파는 BB, 시므온지파도 BB.

 

이렇게 해서 진행방향이 동쪽으로 진행하면서 정실부인 중심으로 배치하고 뒤에는 종으로 배치해서 이미 레위지파가 특수한 지파로 대표로 있는 이상 레위지파가 갖고 있는 위상, 레위지파가 품고 있는 거룩과 비-거룩의 접촉적인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파는 헤쳐 모이되 종이냐, 정실이냐, 라헬 계통이냐, 레아 계통이냐, 그 표현형을 보여주는 데서 전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러한 전략, 이러한 모든 구조는 순전히 하나님께 숨겨진 비밀이지 개인적으로 손들고, “구원받고 싶습니다.” “손 내려!” 그런 식의 구원은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제가 아까 했잖아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님 앞에 어림도 없는 통하지 않는 거예요. 예수 믿는 것도 우상이니까.

 

제가 아까 예를 들었지요. “여보, 이제부터 당신을 믿겠습니다.” 이건 오히려 “수상하다. 왜 갑자기 왜 믿는다고 해.” “아버지, 오늘도 잘 주무셨습니까? 전 아버지를 믿습니다.” 하면 좋아할 줄 압니까? “미쳤나. 아는 사이에 갑자기 왜 구분 해.”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따로 어떤 종교적인 어떤 티를 내겠다는 말은 사실은 그걸 빌미로 해서 나만의 영역을 구축하겠다는 얄팍한 수에 지나지 않아요. 드릴 것 드릴 테니까 내 것은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거래 같은 정신이 있어요.

 

종과 정실부인의 배치는 나중에 약속의 땅에 가서 그리심 산과 에발 산, 높이가 900미터 쯤 되는 두 산에서 정실부인 쪽은 그리심 산 쪽에 서고, 에발 산에는 종 출신의 잡종의 표현형들이 섭니다. 그래서 이쪽은 축복을 선포하고 저쪽은 저주를 선포하는데 축복과 저주, 거룩과 비-거룩을 유지시키고 연결시키는 가운데 뭐가 있느냐? 바로 법궤가 있어요. 레위지파가 있다니까. 한 지파가 땅도 없이, 부재의 존재지요. 땅 있는 동네에 땅이 없다니까 이상하죠. 땅 없는 곳에 가서 너희들이 이 땅에서 사는 그것이 그냥 생존 차원이 아니고 거룩 차원으로 재편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레위지파가 개입돼야 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은 레위지파에서 왔느냐고 묻고 싶을 거예요. 아니요. 예수님은 유다지파입니다. 그럼 처음부터 유다지파를 대표로 내세우지 레위지파를 내세웁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레위지파의 제사행위마저 죄가 돼요. 아, 이것 결정타입니다. 쉽게 말해서 교회 다니는 것이 죄가 돼요. 하나님 섬긴 게 죄가 돼요. 기도한 게 죄가 되고, 헌금한 게 죄가 되고, 전도한 게 죄가 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 확장하겠다고 설쳐대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손이 빠지길 원합니다. 관여하지 않길 원합니다. 전부 다 주님에 의해서 구원이 돼야지 우리가 협조했습니다, 동조했습니다. 동업했습니다, 도와드렸습니다, 우리가 애를 썼으니까 하늘나라 확장되는데 효과적이었지요,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전부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게 아니에요. 다 빼는 겁니다. 빼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구원의 실패자가 되지요. 그게 바로 정답이에요. 구원에 우리가 실패가 될 때 비로소 구원이 되는 것은 나로 인해서가 아니라 실패자마저 구원시켜주는 그분에 의해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레위지파가 결국 유다지파에게 물려준다면 레위지파는 어디에 속하느냐? 레위지파는 열두 개 속에 포함이 돼버리고 이 안에는 누가 있느냐? 그야말로 부재, 유다지파에서 온 임금님이 오심으로써 완전히 새 성전이 완료가 되는데 이것이 에스겔 48장에 나오는 새 성전의 구조입니다. 새 성전의 구조에서 레위 문, 유다 문, 르우벤 문, 요셉 문, 베냐민 문, 단 문, 납달리, 아셀, 갓, 스블론, 잇사갈, 시므온, 이렇게 해서 유다지파 중심으로 재편성하면서 지금의 민수기는 이동하지만 완성된 고정된 배치에서는 유다지파로 완료하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지파가 왜 레위지파를 대신해서, 스블론 해도 되고 아셀 해도 되는데 왜 유다지파가 그게 되느냐 하면, 먼저 레위지파가 등장하게 된 것은 레위지파 BB잖아요. 레위가 누가 자식이냐 하면 레아지요. 야곱이 누굴 사랑했는가? 라헬을 사랑했어요. 야곱의 본처가 먼저 결혼했다고 레아가 본처가 아닙니다. 라헬의 본처에요. 그게 마태복음 2장에 나옵니다. 베들레헴에서 헤롯 왕이 동방박사 못 잡고 난 뒤에 화가 나서 베들레헴 얘들 다 죽였어요.

 

오늘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거기에 보면 송일국 아들 세 명도 있고 이휘재 아들 두 명도 있고 추사랑도 있고. 자기 보기에 예쁘다 하는 얘들 다 죽었어요. 누가 우느냐? 레아가 우는 게 아니고 라헬이 울지요. 라헬이 이스라엘의 본처입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소리지요. 이스라엘은 라헬 중심으로 성립한 겁니다. 남편인 야곱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새로운 이스라엘은 주님으로 인해서 고난에 합세된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로 탄생한다는 이야기지요.

 

헤롯 왕이 베들레헴 얘들 다 죽였는데 예레미야에서는 그걸 미리 예언한 거예요. 예고한 거예요.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헤롯으로 하여금 베들레헴에 있는 귀한 자식들 죽게 한 것은 주님이 의도한 작품이에요. 왜 그렇게 하느냐? 새로운 이스라엘로 하여금 예수님 외에는 어떤 기쁨을 못 갖게 하기 위해서. 주님 잔인하지요. 예수님 빙자해서 예쁜 딸, 예쁜 아들, 일체 성질나서 못 봅니다. 그리스도에게 갈 그 기쁨을 절대로 주께서 남한테 빼앗기지 않아요. 왜냐하면 해안선, 경계선이니까.

 

경계선은 뭔 뜻이냐 하면, 누구도 거기에 경계선에 폭이 없기 때문에 디딜 수 없어요. 지옥 갈 사람 에서도 디딜 수 없고 야곱도 디딜 수 없고. 따로 다른 분에 의해서 발생되는 선이 경계선입니다. 따라서 경계선에서 솟구쳐 나오는 그분이 우주의 본주인공이에요. 우리는 피조물로써 무대 중앙에 등장할 그분을 위하여 잠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거예요. 우리는 박수 칠 준비가 돼있어야 돼요. 심지어 지옥 갈 사람까지도. 우린 천국에서 치고 저기는 지옥에서 치고. 주가 주 되심을. 땅이 갈라지면서 인물 등장하게 되면 우린 박수치면 되는 거예요. 그게 찬양이라는 겁니다. 주에 대한 찬양.

 

그런데 그 자리를 사랑하는 내 딸과 내 아들이 차지하고 있으면 솟구쳐 올라오시는 분의 머리에 뭔가 받치거든. 이것 뭐야. 보니까 추사랑이라. 뭐 이런 게 다 있어. 치고 올라오면 그 얘는 난데없이 죽어야 돼요. 그래서 주님에 의해서 받쳐죽는 자는 복된 자입니다. 성경에서. 성경은 희한해요. 살아있다는 것은 슬픈 소식이고 죽었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고 성경은 모든 게 뒤바뀌어있어요.

 

“주여, 살았습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아직도 살았나? 다른 사람은 낙원에 가 있는데. 뭐 하려고 네가 살아있노, 뭐 하려고 니가 아직 살아있노. (아주 랩을 해.) 뭐 하려고 살아있노. 우짤라고 살아있노.” “그렇지 않아도 주님 만나려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그렇게 이야기해야지.” 어떻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주님 덕분에 이만큼 살았습니다. 랍스타 뜯으면서 주께서 주셔서 살았습니다. 랍스타 사달라는 이야기 아니에요. 전혀 아닙니다. 모든 일에 범사에 감사하란 말이요. 이것이 주님의 표현형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늘날 이같은 상황으로 몰아세운 겁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너희들에게 믿음을 준 것은 세상을 눈에 있어서 즐겁게 주님과 함께 고난 받기 위해서 믿음을 줬다는 겁니다. 그래서 환란 중에 기뻐하라. 환란이 뭐냐? 그 예를 방금 들었습니다. 랍스타 뜯는 것. 이빨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환란이에요. 그리고 유럽여행가는 것, 얼마나 피곤한 줄 압니까? 지금 서 목사님 사모님 고생 많아요. 죄수도 아닌데 노예선 타는 것처럼 힘들어요. 유럽여행, 스위스여행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자식 결혼해서 잘 사는 것, 더 잘 살아야 할 건데. 김장 해주고 다 퍼주는데 아직도 모자라. 더 퍼주고 싶어. 환란이에요. 네가 이렇게 사니까 더 해주고 싶잖아. 못 해주는 그 갭만큼 아파. 집 사줄까? 집 사줘도 안 돼. 왜? 더 좋은 집 못 사줘서 가슴 아파요. 안 사주고 그런 소리 못할 입장입니다만.

 

지금까지 첫째 시간, 둘째 시간 이야기한 것이 부재의 존재가 간격을 만들고 튀어나온다. 이게 끝이에요. 부재, 이 땅에 없는 존재가 간격, 틈을 만들고 균열을 만들어서 그 틈새로 뛰쳐나오는 거예요. 어떻게 뛰쳐나오는가? 죽음의 모습으로, 피 흘리는 모습으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따라서 부재의 원칙을 위해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먼저 시간적으로 앞서서 있음을 드러내게 해요. 있음을 마음껏 보이게 해놓고 있음을 차버립니다. 이것 아니거든. 이스마엘? 아니거든.

 

여러분, 제사를 최초로 드린 인물이 누굽니까? 가인입니까, 아벨입니까? 가인이죠. 요새 같으면 최초로 예배드린 사람이죠. 예배드리고 그 예배를 주께서는 안 받으시잖아요. 왜냐하면 있음은 하나님과 접촉이 되지 못합니다. 이유가 뭐냐? 있는 존재를 주께서는 추방했기 때문에 그래요. 너는 에덴동산에 살지 말고 이 땅에서 나가버려라. 나갔다면 쫓겨나간 거죠. 쫓겨나갔다는 말은 가짜란 이야기입니다. 안 받아준다는 이야기에요. 받아줄 속성이 있다면 받아주지요. 그런데 쫓아냈다는 말은 그것도 혹시 들어올까 싶어서 아예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시켜버렸지요. 이것은 주님의 단호함입니다. “오지 마!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오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이 추방되고 난 뒤에는 어떻게 되느냐? 있는 데서 천국 가기 위해서 시도를 합니다. 자꾸 들이밀어요. “하나님, 예배드릴까요? 하나님, 호박고구마 좀 드세요.” “갖고 오지 마.” “주님, 십일조.” “십일조? 너나 써.” 하나님은 돈을 안 받거든요. 왜 안 받느냐? 더러워서 안 받아요. 창녀의 돈을 안 받듯이 더러워서 안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전세를 내라 했잖아요. 성전세는 내게 해요. 내면서 낼 자격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은 뭔가 행하게 되면 행함으로 뭐가 발생된다 했습니까? 그 행함에 따라서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순환구조가 새롭게 발생 되지요. 쟤는 안 했는데 저는 했거든요, 라고 어떤 선이, 거미줄이 형성돼요. 그래서 되돌아보면 옛날에 내가 어느 교회에 다녔고 부교역자 생활 멋지게 했고, 전도사 생활 신나게 했고, 부흥사로 한 것을 자랑스런 영웅처럼 했고. 그게 거미줄처럼 하나의 역사가 형성돼요. 그것 안 받습니다. 받질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부재지만 주님 보시기에 누가 부재입니까? 누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있으나마나한 존재지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종입니다. 어떤 여인네가 향수를 모아놨어요. 그 향수를 주님 발 앞에 깼습니다. 왜 깹니까? 두 가지의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향수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향수>란 영화가 있지요. 그 영화는 인간의 향기가 어느 정도까지 심오할 수 있는지 얻기 위해서 처자의 피부를 벗겨서 거기에 있는 냄새를 수집합니다. 살인자지요. 하지만 그는 살인자라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완벽한 향수를 얻기 위해서 어떤 것도 허용돼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사람이 향수를 잃었을 때 내 피부 내놓으라고 죽여 버립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사슬을 일시 빌려줄 수 있고 양보할 수 있지만 영원히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 능력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걸 아시고 이렇게 했지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오너라. 이에 가장 합당한 제자가 있었으니 그 제자가 누구냐? 베드로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체포할 때 어떻게 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씩 이야기했지요. 바로 그 과정이 자기를 부인하는 그 간격, 경계선, 해안선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 가장 인간은 자기만 아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지금 베드로는 제일 가까이 간 거예요. 누구보다도 가까이 간 거예요. 예수님을 가장 싫어하고 미워한 그 순간이 바로 주님의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 온 거예요.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셨습니까, 라는 외침이 나올 순간이 그 순간이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마을 사람은 아직 멀었어, 멀었어. 이렇게 착하고 점잖아서는 멀었다니까. 주님이 내 앞에 무슨 일을 도와줬다고? 주님을 왜 믿는데 옛날 과거 인물을 나는 이순신 장군도 안 믿는데 이천 년 전에 죽은 인물을 왜 믿는데, 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주시길 바랍니다. 천국, 지옥 가본 놈 있나.

 

모든 눈에 보이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한 현실에 재료로 다 수집이 돼요. 히틀러의 부하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당신은 왜 유대인들 오백만을 학살했느냐고 하니까 저는 시키는 대로 했어요. 저는 공무원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저의 임무입니다.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그 사람은 가정적으로 굉장히 훌륭한 가장이었고 부모한테 효도한 사람이에요. 이웃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예의바르고 점잖은 사람이고 성질 더러운 것 하나도 없어요. 자기 임무가 뭐냐 하면, 유대인들 학살하는 것이 임무였고 그는 그 임무를 공직자로 충실히 한 겁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어디서 잘못됐지요? 오백만이 학살됐는데 유대인이 죽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왜? 시킨 대로 했기 때문에. 뭐가 잘못됐지요? 이것 모른다면 복음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것이 이렇게 막힐 줄이야 저는 몰랐습니다.

 

전쟁 끝나고 군사재판 받는데 그렇게 변명했을 때 사람들이 당신의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아파하는 걸 모르냐고 하니까 하는 말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는 내가 한 일에 내가 책임지는 거죠. 내가 만약에 구제사업을 했다든지 평소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했다면 유대인을 죽이지 않았지요. 내가 하는 일은, 꾸준히 승진할 때마다 계속 쌓아온 일은 내가 뭘 하지, 오늘 뭘 하지? 이것만 쌓았을 뿐이고 거기에 한 일이 유대인 오백만 학살한 일이었어요. 따라서 같은 인간으로서 그 사람을 추궁할 수 있는 어떤 죄목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죄 있는 자가 돌로 쳐라. 부재자가 아니면 존재하는 자를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히틀러의 부하는 사실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오백 만까지는 안 죽였지만 개미 오백 마리는 죽였거든요. 에프킬라로 모기 오백 마리는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것은 나한테 정당하니까 정당한 거예요.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할 때는 자기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국가체제질서를 생각한 겁니다. 만약에 이걸 용납해버리면 국가전체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거든요. 율법에 돌로 치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을 유지하기 위해서 최소한 법적인 조치를 취해야 된다고 해석한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이스라엘 멸망한 이유가 뭐라고 했던가요? 다 잊어버렸지요. 이스라엘은 뭘 위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했기 때문에 율법에 대한 오해입니다. 율법은 전체 현실, 오실 메시아의 현실로 보여주는 표현형으로 율법이 있는데 사람들은 율법을 가짐으로써 내가 소속돼있는 이 현실이 보다 행복하고 안정된 현실을 유지하고자 율법을 사용한 거예요. 주의 거룩한 말씀을 차용한 거예요.

 

오늘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성도란 특징이 뭐냐 하면, 모든 면에서 굉장히 예민해져요. 전에는 술 마시고 담배 피워야 죈데 그게 아니고 헌금 하는 것도 죄라는 감각이 와요. 성령께서 그렇게 와요. 아무렇지도 않는데 전부 다 죄처럼 느껴지는 것.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뭘 보기 때문에? 간격. 나 같은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나로 인한 일이 아니라는 것. 그럼 누구에 의해서 그렇게 했지? 없는 나로 하여금 나로 보지 않고 나를 누구, 누구의 표현형으로 사용하시는 그분 덕분으로 내가 그분 안에서 그분 작업 속에 내가 참여됨으로써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여러분들이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하갈은 지옥 가고 정실부인 사라는 천국 가면, 내가 만약에 표현형이 종의 자녀라면 이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이러다가 내가 지옥 가는 게 아닙니까?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게 바로 제 말에 대해서 엄청난 오해하신 거예요. 이 오해를 풀어야 돼요. 오늘 참석 안 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풀어야 돼요.

 

야곱과 에서가 어떻게 태어나느냐 하면 부재에서 태어나요. 이삭의 부인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아요. 아기 없는데 하나님께서 계시에 의해서 아기 둘을 나타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기 둘이죠. 하나님께서 해설을 붙였어요. 아기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두 민족이라는 거예요. 두 민족이라면 잘 됐네. 서로 남북화합하면 되겠네. 정상회담하고. 아니에요. 두 민족이 그냥 두 민족이 아니고 이게 싸워야 돼요. 싸워야 경계선이 만들어지니까. 왜 싸우느냐? 놀라운 사실은 싸울 이유를 본인들이 모른다는 겁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너 같은 인간이 지옥 가는 거야. 아니야. 네가 지옥 가. 이렇게 싸우면 이건 둘 다 틀렸든지, 둘 다 맞는 게 돼요. 왜? 이쪽 입장에서는 이쪽 말이 맞고, 저쪽 입장에서는 저쪽 말이 맞아요. 처음에 야곱과 에서가 팥죽 갖고 싸울 때 둘 다 스스로 자기가 맞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누가 먼저 눈치 챘느냐 하면, 경계선에서 올라오신 분만 의롭고 우리 둘은 그분 앞에서 비-거룩하고 죄인이란 사실을 야곱이 알았으니까 구원받았고 그걸 몰랐으니까 에서는 지옥 간 겁니다.

 

이 말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원리가 있습니다. 정리해봅시다. 아브라함에서 복은 없는 자식이 구원된다는 거죠. 이삭에게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야곱에서는 아들이 열두 명이죠. 다 굶어죽을 판에 누가 나서서 이들을 구원합니까? 그중에 요셉이 나서서 요셉의 희생 덕분에 다른 사람이 살지요. 본인은 고생하고 남이 사는 원칙, 아브라함은 없는 자식이 구원받는다. 이삭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세 번째는 죽은 자식이 다른 사람을 살린다. 이 세 가지 원칙이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전부 합체가 돼요. 독수리 오형제처럼. 원리가 합체가 돼요.

 

없는 자식이 구원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없는 분이죠. 하늘에서 오신 분이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선언 받았지요. 죄인으로 선고한 그 판사를 죄인이 나중에 재판해버렸지요. 누구야? 너, 나와. 네가 죄인이야. 죄인으로 받은 분이 오히려 의인이고, 죄인으로 규정한 그들이 도리어 죄인 되고. 세 번째는 주님께서는 누가 잘났나, 못 났나가 아니고 다같이 못난 입장에서 나 혼자 희생해서 내 덕을 봐라. 내 덕분에 네가 구원되라는 것이 세 번째 야곱의 언약의 원리가 되는 겁니다.

 

이 세 가지의 원리를 적용시킬 때 재미있는 것은 이런 세 가지 원리를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으로 주십니다만 이 말씀을 주실 때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없었는데 나중에는 깨닫게 하시지요. 그건 뭐냐 하면, 이러한 예고, 이러한 예언, 미리 주는 예상문제, 이런 것은 인간이 준수할 일이 아니고 지킬 일이 아니고 말씀 주신 당사자가 이 땅에서 현실화시켜 만들어버리죠.

 

이걸 여러분이 아신다 치고 여러분에게 문제를 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십계명은 어떻게 됩니까? 다시 할게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말씀을 주신 본인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해나감으로써 혜택을 우리에게 공짜로 주시는 거예요. 그냥 덤으로 참여시키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께서 주시는 십계명이라는 것, 그리고 제사법, 뭘 하지 말라는 민수기에 나오는 법령은 지켜야 됩니까,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의 권면 같은 것,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던 것, 술 취하지 말고 분 내도 해지도록 품지 말라는 것, 용서하라는 이야기,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이야기, 무시로 기도하라는 그런 이야기, 말씀으로 무장해서 마귀를 이기라는 그런 이야기,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그런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지켜야 된다는 겁니까, 지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디모데전서에서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줄로 족한 줄 알라는 이야기,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이스라엘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예언대로 만들기 위해서 만들어놓는 지평이라고 했지요. 만들어놓는 판때기에요.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스라엘이 멸망했잖아요. 멸망했다는 말은, 이 세상에 모든 인간이 전부 다 애쓰고 전부 다 하갈의 자식 이스마엘이고, 요셉 빼놓고 다른 형제들, 꿈꿨다고 구박하고 너만 잘났냐고 욕하고 꿈꾸는 놈 온다고 죽여 버리자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한결같이 모든 인간이 이런 판에 있습니다.

 

이런 판에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말씀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노선을 새롭게 만들어낼 필요가 있는 거예요. 만들어낼 때는 바로 네가 주의 말씀대로 꼭 반대로 살아가는 요소를 너는 모르지만 나는 아는데 네 안에 반대되는 요소가 들어있는 거예요. 들어있어서 뛰기만 해도 출렁출렁해요. 돈을 사랑해야지, 돈을 사랑해야지. 이게 막 나온다니까. 날 미워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죽여 버릴 거야. 이게 막 나와요. 남을 욕하는 것은 살인죄라 하지요. 나한테 걸리기만 해봐. 가만두는가 봐.

 

오후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우리 어머니 같은 경우에 너무나 그야말로 별명이 천심, 하늘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치매 걸리고 난 뒤에 욕이 막 나와요. 무슨 천심이 욕이 나와. 깜짝 놀랐어요. 너무 신기해서 동영상으로 담아놨어요. 아하, 인간이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는 다 죄가 들어있는데 그동안 발현이 안 됐어요. 만개가 안 된 거예요. 꽃이 늦게 폈어요. 욕하는 꽃이 늦게 피었어요. 다른 분은 일찍 폈는데 우리 어머니는 늦게 폈어요.

 

모든 사람은 아담의 자손으로서 똑같아요.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인간 되는 것은 70%가 환경 탓이고 30%가 유전 탓이라 하거든요. 이 말은 사람이 환경만 좋으면 괜찮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잠복기에 들어가죠. 좋은 가정, 다복한 가정에서는 욕도 모르고 하다가 그 집에 갑자기 부도가 낫다. 그 다음부터 욕판, 술판 집구석이 되는 거예요. 수녀원에 가면 되겠지. 수녀원에 가면 거기에 다른 차원의 욕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못 배웠다고 욕하고 동작 늦게 한다고 욕하고. 그때 때리지는 않지요. 같은 여자니까 꼬집고. 어떤 단체든 간에 단체 자체를 위해서 욕쟁이들이 배치돼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착하다, 안 착하다는 사실은 삭제돼야 돼요.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활용하느냐? 욕쟁이 같으면 욕으로 활용하면 할 수 없어요. 어떻게 활용하더라도 표현형이 주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그런 고백이 나온다면, 그것이 바로 성도인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 듣고 머리 막 돌아가. 나도 나쁜 짓 다 해놓고 주께서 하셨다는 멘트만 뒤에 붙이겠다고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야곱과 이삭과 요셉 같은 경우에는 어떤 멘트를 날릴 때 한 순간에 시험 치듯 날린 게 아니고 평생에 나그네 길을 살면서 완전히 진득하니 사골 우려내듯이 한평생 우려나면서 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형이여, 걱정하지 마소서. 형이 날 미워한 게 아니고 형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총리대신이 되게 하신 것이니까 날 팔아먹었다고 형한테 절대로 조금도 감정 없습니다.” 이게 점잖은 멘트로 하는 것이 아니고 평생을 살아가면서 나오지요.

 

왜 그렇습니까? 타인이 날 조지는 게 아니고 남이 모르는 주님이 개인적으로 나를 짓밟아놨어요. “앞으로 네가 남한테 복된 일하더라도 네 공로로 하면 안 돼.” “알겠습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앞으로 힘들 일 시킬 텐데 그때 니 자랑할 거야?” “어데예, 언제예. 그럴 리 있습니까. 나는 죄인인데요.” “그래야지, 그래.” 완전히 조져놨어요.

 

“베드로야, 너 날 부인했지?” “죄송합니다. 자꾸 미안한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네가 나중에 앉은뱅이를 낫게 할 거야. 네 자랑할 거야?” “어데예. 내 자랑 아닙니다.” 앉은뱅이를 낫게 했을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으로 했다니까 왜 저 보고 이야기합니까?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나를 다루시는 주께서 지금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앉은뱅이나 나나 다 주님께 소속돼있다는 그 표현형만 드러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으면 예수의 증인되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아~ 정말. 그냥 살던 대로 사세요. 때가 되면 교회 가게 하시고 때가 되면 기부금 낼 수도 있고 안 낼 수도 있고 낸 것 도로 달라고 할 수도 있고. 모든 어떤 머리카락과 발걸음도 주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어떤 마음으로 뭘 해도 죄라고 각오하시고 살면 돼요. 점잖은 티낸다고 점잖은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점잖은 체하는 그 자체가 고단수 죄가 되는 거예요.

 

왜 자꾸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환경에서 나와요. 이건 상식인데요. 문명이요? 인간의 노력? 아닙니다. 문명은 어디에 달렸느냐? 아주 단출해요. 기후 조건입니다. 기후가 바뀌면 각박한 세상 되는 것이고, 환경이 봄여름가을겨울 제대로 돌아가면 사람 인심 좋습니다. 옛날 조선시대, 고래시대 때 인심이 좋았던 것은 스모그 현상이 덜 일어나서 그래요. 매연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열대야가 일어나지 않아서 그래요. 각박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사는 것이 환경이 똑같이 밥 못 먹고 사는 시대기 때문에 정도 그렇게 많았어요. 지금은 드라마에 보면 재벌 3세 아니면 결혼 상대자도 아니고 전부 재벌 3세 되서 모였다 하면 썰고 비싼 커피 먹고 노는 동네가 그 동네야. 집에서 잘 때 명품 옷 입고 자고. 도대체 드라마 연출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 전부 다 간접광고 때문에 그런 줄 아는데.

 

그게 우리 인식이에요. 저렇게 살아야 인간처럼 산다는 것. 그냥 비키니 옷장(젊은 사람들 알아요?)으로 얼마나 행복했었습니까? 물론 계속 비키니 옷장으로 있는 건 아니지만 나중에 허물어졌지만. 비키니 옷장에 둘이 단칸방에 살아도 얼마든지 행복했어요. 어딜 집 사달라고? 지 집 지가 사지 남 보고 사달라고 하는지. 집 사주면 사실 부모가 월세 받아야 돼요. 천만 원 보증금에 45만원씩.

 

사람은 환경이 나를 만드는 줄 모르고 지가 착해서 착한 줄 알고 선해서 선한지 압니다. 북한에서 살아보지요. 그것도 나름대로 천국이에요. 어버이 수령님의 은혜로 이렇게 오늘도 한 달 만에 고기국밥을 먹게 됐으니 다 수령님 은혜가 아니고 뭐야. 얼마나 심적으로 행복한지 몰라요. 너무너무 행복한 거예요. 여기는 보리밥 먹고, 현미만 골라먹고, 쌀밥 다 치우고 고기도 가려내고 그저 건강식, 다이어트 한다고 하지만 저쪽은 쌀밥에 고깃국 먹고 싶어 환장하고 있단 말이죠.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데 어떻게 만드는가? 자기예찬. 인생예찬으로 바꿔요. 이 대표적인 영화가 지금도 상영하고 있는 <국제시장>. 인간이 이 정도로 자기 스스로 극복하게 되면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 그 마지막 장면을 제가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버지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지 이름이 아니고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으로 하면서 “아버지여, 참 나 잘 살았지요. 아버지여, 힘들었거든요.” 그걸 왜 돌아가신 아버지 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자기 인생이 아니고 아버지라는 폐쇄된 환경 속에서 주체가 만들어요. 자기를 죽었으면서도 주목하고 주시하고 있는 아버지 유령, 아버지 귀신, 그것이 자기 태어난 환경에서 인간은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다른 분들은 유튜브에 꽃꽂이 한 것 올리고 연주하는 것 올려놨는데 전 목사님은 맨 손으로 바위 탄 걸 올려놨다고요. 등산에 관심 없는 사람은 이걸 왜 올렸는지 몰라요. 하지만 세상에 어떻게 저런 기술이?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어떻게 저런 정력이. 그것 보고 깜짝 놀란 사람 있어요. 그러니까 그쪽끼리 동호회. 우리 십자가마을은 우리가 암장 타는 것 찍지 마시고 내가 막 산다는 걸 찍어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죄인에 불과하다는 것,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고 주께서 그저 죄인을 의인 되게 했던 십자가라는 그 경계선

 

마지막으로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게 어려운데요. 십자가가 하나에 물체로 돼있으면 소지하면 그만인데 십자가가 물체가 아니고 이게 반복된 사건이거든요. 반복된 사건이란 말을 어떻게 소지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의인으로서 죄인을 용서하신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우리 주체 안에 레위기가 들어와요. 우리 안에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너는 레위인 아니었으면 죽었어, 라는 그러한 경계선, 우리 마음속에 경계선 짓는 거룩과 비-거룩을 양산하는 일이 벌어지면 우리 속에 십자가 들어온 거예요.

 

이게 지금 옛날 구약 이야기한 것 같지요. 아닙니다. 이것이 구약 전체가 주체로써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주어집니다. 그럼 우리 주체가 뭐냐? 민수기가 되고 레위기가 되는 거예요. 율법 줘놓고 율법 지켰다고 덤벼들 때 잠복돼있는 우리 죄가 하나님의 율법은 그리스도를 위한 율법인데 우리는 이 율법을 지킨 내가 얼마나 위대하고 잘난 존재인가를 증명하는 그걸 증빙해주는 재료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덥석 집은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잠복돼있던 죄일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그래. 너 잘났구나. 너, 가인해라. 네가 알아서 제사 드리고 다 해라. 이스라엘이 반복된 제사가 결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것은 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잠복된 자기의 죄가 노출된 것이고 다른 민족은 아직 잠복돼있는 것이고 그들은 노골적으로 먼저 노출된 거예요.

 

노출된 가장 극한의 지점이 메시아를 죽여 버렸다는 것. 왜 죽였느냐? 우리가 생각한 율법의 반영과 너무 다른 소리를 하니까 너 같은 인간은 모세 율법에 의해서 너를 처단하노라, 해서 사형시킨 겁니다. 사형시키고 난 뒤에 일이 끝났으면 괜찮은데 그 죽으신 분을 하나님이 나서서 사람들이 몰매 던진 그분을 사흘 만에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누가 이분을 죽였는지 다시 그 죄과를 되묻는 사건이 주님의 재림사건이에요. 온 우주가 재림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창을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요한계시록 1장 7절. 사람 잘못 봤다는 겁니다.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주님이 먼저 욕했으니까 욕했지요. 네가 욕 얻어먹을만하니까 욕한 거예요. 우리는 주님을 상대한 자체가 잘못이에요. 상대할 분이 아닙니다. 그냥 야곱처럼 한 대 얻어맞고 자기 힘 다 빠지고 발목 잡고, “제가 몰라봤습니다. 살려주세요.” 이럴 대상이 주님이지 주님, 얼마나 하면 착할 일해서 복 받겠습니까? 이렇게 같이 흥정하고 맞상대할 대상이 아니에요. 주님이. 그걸 구약에서부터 이미 준 겁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주의 사자를 만날 때 자기는 에서인 줄 알았어요. 아직도 에서를 이겨야 야곱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주님의 사자가 왔을 때 에서와 야곱을 갈라내는 경계선에서 출현한 분이 밤중에 나타난 주님이십니다. 어두운 밤이 낮을 주관해요. 그래서 천사는, “날 샌다. 빨리 가야 된다. 놔라, 놔. 낮에는 니 마음대로 활동하고 밤에는 내 세계다. 좀 놔둬라.” “안 됩니다. 축복, 살려줘야 가십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 장소 이름을 브니엘, 하나님을 만났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보세요. 그냥 살았다가 아니고 앞에 단서가 죽어야 되는데 완전히 땡 잡았다는 거예요. 나는 사람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상대했다? 나를 심판할 그분과 만났고 그분이 날 살려주셨대. 용서한다고. 그래 살려줄게.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야곱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바랄 것은 없어라. 화낼 자격도 없고 걱정이나 고민할 권한도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냥 잘 주무시면 돼요.

 

 

마치겠습니다.
2015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3강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강의하는 것이 행함 없는 구원을 실시하는 거예요. 아무 행하지 않았는데 구원이 되는 것. 행함 없는 구원히 되려면 조건은 딱 한 가지에요. 나는 나중에 등장하는 거예요. 내가 제일 나중에 등장해요. 나중에 등장하는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겁니다. 이게 행함 없는 구원이에요. 나를 앞장세우면 앞장세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무수한 행함을 여기다 집어넣어야 돼요. 그것이 성공하느냐? 성공하느냐 여부를 떠나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입장에서 기대할 것은 자기밖에 없고 자기를 다시 천국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기서 어려운 게 어제는 피곤하다고 제가 쉬운 것 이야기했고 오늘은 열시에 시작했으니까 열시 반 되면 다 주무시거든요. 10시 30분되기 전에 중요한 것 이야기해야 돼요. 제일 중요한 게 뭐냐? 나를 뒤에 등장하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나오고 난 뒤에 그걸 실낙원이라고 하는데 실낙원은 되는데 복원이 안 돼요. 낙원에 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럼 이러면 돼요. 안 가면 돼요. 천국을 안 가면 되거든요.

 

여기서 인간의 딜레마가 뭐냐 하면, 안 가려고 하니까 안 가고 싶어도 나 바깥에 뭔가 좋은 게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어서 환장하는 거예요. 그걸 지워버린 사람을 정박아 또는 정신병자, 이러면 없어요. 이게 전부가 아니야. 뭔가 있을 거야. 죽으면 끝? 아니야. 죽고 난 뒤에 분명히 좋은 나라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큰 짐이 되는 겁니다. 이걸 지우면 되는데.

 

옛날 삼십 년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촌에서 와서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검정고시해서 이야기가 어디서 끝나느냐 하면, 9급 공무원에 합격했습니다. 끝.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드라마, 실화가. 이런 장한 청년도 다 있다. 못 배웠지만 공무원에 합격했다. 끝인데 실제로 삼십 년 지나서 그 사람을 찾아가서 옛날 삼십년 전에 9급 공무원 합격했다던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9급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 있는 거잖아요. 라디오는 9급으로 끝났는데 실제로 그 사람은 9급 되고 난 뒤에 7급, 6급, 5급, 계속해서 이것 말고 더 요구하게 되면 그것은 본인한테 스트레스가 되는 겁니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둘 다 죽는다는 점에서 동일해요. 동물은 태어나면서 그것이 끝이에요. 9급 공무원이에요. 태어나서 늙어 죽으면 되는데 인간은 이상스럽게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수는 없어. 영원히 불멸해야 돼.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너무 허무해. 이렇게 하는 순간 인간은 죽음에 저항하게 돼있어요.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아버지 돌아가신 걸 아는데 죽는 것이 우리 미래인 것을 아는데 그걸 받아들이는 저항요소가 우리 속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하든 하늘이 주신 정보를 입수해서 그 정보에 나의 행함을 가미해서 주님이 시킨 대로 했으니 천국 내달라는 요구를 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게 기독교라는 거예요. 우상이죠. 그게 천주교고 우상입니다. 그게 아니거든요. 내가 먼저 있고 나를 불멸하겠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뭐가 탈락하게 되느냐 하면,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취지 자체를 거부해버리죠.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그 정보는 안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 수 있는 정보만 받아들인 거예요.

 

살 수 있는 정보 중에 하나님과 그를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니라. 요한복음 17장 3절. 영생으로 돌아가는 수가 있네. 다시 낙원으로 가는 수가 여기 있구나. 아이고, 고마워라. 그렇지 하나님이 우리를 섭섭하게 하실 분이 아니야. 자비로우니까. 가는 길을 주셨구나.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면 되거든요. 문제는 그 아는 자세 자체가 이미 망가졌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고 하늘과 중간 쯤 지상 2.5미터 상공에 천사처럼 있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알면 영생되는데 그 보내신 자가 실제로 인간들과 함께 합숙훈련 해버리면 우리는 그 사람을 너는 아니라고 죽여 버린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십자가 사건을 성령을 통해서 반복해서 우리에게 들이댄다는 말은 영생 가는 길을 줘도 못 먹네. 영생 가는 길을 줬지만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와봐야 또 죽이니까 영생 가는 길을 줘도 못 먹어요.

 

뭐가 문제냐? 나를 앞장세운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우리를 아시는 분은 나보다 나를 더 아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거든요.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 백성 만드는 그 작업에 나서는데 우리는 성급하게 나를 앞장세워서 내가 나한테 어떤 일을 가미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야 돼요.

 

오늘 아침에 이런 방송을 했어요. “십자가마을에 오신 여러분은 아침식사가 준비되었사오니 식사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마을에 오신 분들은~ 마을에, 라는 것은 장소란 의미가 방송하는 사람이 ‘~에’라고 장소적 조사를 붙이는 것은 그 사람들의 언어적 습관에서 당연한 거예요. 십자가마을에 오신 분은 식사하시기 바랍니다. 잠들기 전에 빨리 이야기해야 되는데.

 

십자가마을이란 장소가 아니고 마을로서 오는 거예요.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백성으로 가는 거예요. 천국으로써 가는 거예요. 천국을 우리 안에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왜? 죽었던 것이 우리를 위해서 죽은 것이기 때문에 죽은 자리에서 죽은 자를 통해서 주님이 주 되기 위해서 죽은 자들 안에 주님의 성소를 만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네가 범죄자지? 예. 기다려. 네 속에 천국을 만들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짓고 반듯한 바른 생각해서 천국 가고자 하는데 그게 아니고 죄를 지었다는 것이 천국 만드는 유일한 재료가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우리가 주님을 몰라봤고 그럼에도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100%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그러한 상태가 천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첫째, 둘째 시간에 이야기한 이 모든 잘못이 어디서 나왔는가? 현실 말고 따로 우리가 독자적인 현실을 만들기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 만든 독자적인 현실을 존재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마저 내 존재를 키우기 위해서 달라는 거예요. 교회 와서 기도한다. 왜? 현재 있는 나만을 위한 현실을 키우기 위해서 신이 도와주신다면 저도 신한테 섭섭지 않게 헌금해드리겠다. 이런 식으로 거래에 나서는 거예요. 내 자식 키워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존재의 문제점은 민수기 1장에 보면 나옵니다. 이번에 민수기 하면서 성경책 처음 들춥니다. 민수기 1장 10절, 이 정도는 수고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안 읽어본 것 다 아니까. 갈수록 점점 심해. 읽어보더니만.

 

1장 20절에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 장자, 먼저 태어난 사람. 그 다음에 시므온, 세 번째가 레위, 네 번째가 유다. BB라 했지요. 성경에서 정실부인, 하녀 출신 한 것은 이미 아브라함이 하녀 출신은 탈락이에요. 하녀 출신은 지옥 가야 됩니다. 정실부인만 천국 가요. 천국과 지옥은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위치에 있는 게 아니고 아브라함 내부에 있거든요. 아브라함언약 속에 응축된 언약 속에 천국, 지옥이 있으니까 그 정보가 거기에 들어있어요. 그것이 아브라함 자식을 통해서 펼쳐져요. 아브라함을 통해서 펼쳐지면 그것이 아브라함의 원리원칙이 이삭에게 전달됩니다.

 

이삭도 아기를 못 낳는다 했지요. 이삭은 자식이 없어요. 그리고 야곱의 정실부인 라헬도 자식이 없어요. 자식이 없는데 있다는 말은, 이미 우리가 이걸 존재라 했으니까 주께서 반대로 부재, 부재의 뜻이 뭐냐 하면, 없는 듯이 있는 거예요. 없는데서 있어서 현재 네가 있다는 것은 네 작품이지 내 작품이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천국은 내가 만들기 때문에 내 안에 들어오려고 네 작품 되지 않고 나의 작품으로 거기에 가담돼야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는 지옥, 천국의 정보를 입력했고 그 입력이, 정실부인과 자식이 없는 쪽은 천국 가고 자식이 있는 쪽은 지옥 간다는 겁니다. 그게 하녀와 본처의 차이거든요. 그러면 하녀 쪽은 우리 생각에는 없어야 하는데 야곱에 있어서 하녀들, 빌하, 실바를 계속 투입이 돼요. 하녀 출신은 잡종이 되서 이러다가 우리 코너 끝나는 게 아닙니까? 지옥 가는 게 아닌지 걱정이 늘어질 거예요.

 

잠들기 전에 설명해야 되는데 창덕궁이나 경복궁에 보면 옛날 건물이 되어서 빗살무늬 창살이 있어요. 여기에 창덕궁 바깥에 해가 비추면 창덕궁 마루에 얼룩진 빗살무늬의 그림자가 있겠지요. 우리가 여기 있다고 봅시다. 내가 여기 있으니까 존재가 되고 5미터 떨어져 있어요. 저는 하얀 옷을 입었습니다. 5미터, 3미터, 1미터 해서 여기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 몸에 빗살무늬가 띠겠지요. 이게 구원이에요. 여러분들이 빗살무늬 비추면 간지럽습니까? 두드러기 나요? 갑자기 무게를 느낍니까? 아파요? 아무렇지 않지요. 이게 주님이 만드는 현실이고 존재는 나의 독자적인 현실이 있어요.

 

행함이 없는 구원을 설명하는 겁니다. 행함 없이 영생 얻는 걸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인간은 독자적인 영생을 얻기 위해서 신의 말씀을 도입해서 지키겠다고 하는데 이것이 점점 가까이 가서 어느 날 하나님의 현실의 무늬에 들어선 순간 전혀 달라진 게 없어요. 그걸 저는 막 살라고 하는데 예수 믿는다고 전혀 달라질 게 없는데 특징은 나의 현실과 주님의 현실이 중첩이 되는 거예요. 중첩이 되면서 빗살무늬의 내용이 이거에요. 정실부인 출신과 하녀 출신, 이러한 낯선 정보가 내 옷에 장식하는 겁니다. 이게 뭐지? 벌써 아브라함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구나, 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브라함이 계시 받았다고 하니까 혼자 은혜 받은 줄 아는데 혼자 은혜 받은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받은 계시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내렸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의 현실이 진짜배기 현실이라는 거예요. 특히 젊은 분들이 독자적인 현실을 추구하는데 빨리 아버지, 엄마 품을 떠나는 것, 그 외에는 아무 생각 없거든요. 문제는 예수님 재림하게 되면 독자적인 현실이 완전히 불바다 된다는 사실이에요. 불바다 되면 불바다 된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게 어디서 왔지? 보니까 아브라함 언약의 약속대로 온 거예요. 진작 알지. 진작 그 현실에 다가서서 완전히 호피무늬, 얼룩무늬로 하면 되는데 혼자 나는 나중에 늙어 죽을 때 교회 갈 거라고 자기 혼자 독자적인 현실을 구축하는 겁니다.

 

민수기 1장 20절에 르우벤이 분명히 장자에요. 이건 혈통적으로 장자 맞지요. 3장을 봅시다. 이 수고는 해주셔야 돼요. 3장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10절에 보면,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다. 두 번째는 시므온이고 세 번째가 레위고 네 번째가 유다다. 그래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육적인 출생 순서가 하나님의 거룩 앞에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이죠. 아무 소용없잖아요. 지금 하나님의 정보가 그거에요. 나는 먼저 태어나서 장자거든. 에서는 장자고. 약 올라. 나는 왜 두 번째 태어났을까? 먼저 날 잡아당기지. 똑같이 손잡았는데 형은 잡아당기고 나는 두 번째로 나오고 한 번의 순간이 평생을 좌우하는구나. 이렇게 고민, 고민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왜? 먼저 태어나나 나중 태어나나 육은 육이고 주님 앞에 죽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레위지파가 왜 있느냐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아무 행함도 없이 그림자만 잠시 드리울 뿐인데 그 그림자가 합류된 주님의 현실로 인하여 죽음에서 영생으로 바뀌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이야기를 놔두고 교회들이 뭘 하고 있습니까, 지금.

 

레위지파가 왜 있느냐? 레위지파가 주도권을 쥔 것은 제 생각인데요. 시내 산 밑에서 돌판 깨질 때 누가 나서서 우상숭배자를 죽일꼬 할 때 레위인이 헌신해서 나섰다는 그 대목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모세와 아론이 레위지파라서 그런지 그건 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아마 시내 산 밑에서 헌신한 그 이유가 강력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시내 산 자체가 과거 에피소드가 아니고 시내 산 자체를 모세가 그걸 업고 시내 산 사건을 계속 되풀이해서 반복시키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거기서 레위지파가 했던 헌신적인 노력이 계속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거예요. 주도권을 쥔다는 것이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존재가 되어라. 하지만 너희는 부재의 존재, 없는 존재가 되란 말이죠.

 

그런데 어제 시간부터 목사님이 뭔가 자꾸 우리한테 천국은 이러니까 이렇게 하라 하면 그만인데 부재라는 어려운 말을 일부러 쓰는 것 같고, 왜 그렇게 어렵게 몰고 가십니까? 그게 불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요. 나만 그런가?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천국은 이러합니다, 하면 우리 존재는 그걸 소유해버려요. 그걸 내 것 만들어요. 내 것을 만들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요.

 

존재는 뭐냐 하면, 전체는 예외가 있습니다. 전체가 예외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유치원에서 산수 문제를 해봅시다. 바구니에 사과가 세 개가 있습니다. 바구니 바깥에 사과 하나가 있습니다. 자, 전체 사과는 몇 개? 라는 질문을 했어요. 바구니에 세 개 들어있고 바깥에 한 개 있으니까 예외지요. 전체가 네 개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네 개 외에는 사과가 없으니까 전체가 예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네 개가 되는 순간 테두리가 늘어나요. 네 개까지 확장해버려요. 이걸 전체라고 합니다. 그럼 모두(all)라고 해요.

 

그러면 모두라고 보는 경계선을 포함하려면 우리 눈이 어디에 가 있느냐 하면 바깥에 가 있어요. 바깥에서 보게 되면 전체가 소유가 되는 겁니다. 전체가 소유가 되게 되면 내가 전체라고 보는 그 시점이 되려면 나 바깥에 다른 눈이 있어야 돼요. 다른 눈을 의식에서 나는 전부를 가졌다고 내가 다른 쪽에 서서 바라봐야 되는데 이미 전체를 테두리 친 이상 테두리 바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예외가 있는 겁니다.

 

내가 이번 달부터 담배를 끊는다고,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했단 말이죠. 하나님, 이번에 술, 담배 끊었습니다. 착하지요? 할 때 그 사람이 생각하는 전체는 뭐냐 하면, 전에는 술, 담배가 자기 착함 바깥에 있었어요. 하나님이여, 내가 착한 일 많이 할 테니까 술, 담배는 허락해주옵소서, 하다가 이제는 나이도 많고 담배 냄새도 그렇고 담배 값도 이천 원 올랐겠다, 이제 끊어버리자. 해서 담배, 술 끊어버리고 착하다고 할 때 그걸로 전부입니까? 착함의 전부일까요? 살아보니까 더 착해질 수 있는데 내가 너무 소탐대실이라 하죠. 너무 작은 것만 전체로 봤는데 지금 착함의 요소가 저 바깥에서 나를 손짓하고 있는 그것마저 노려버리면 나는 덜 착한 게 되잖아요. 내가 전체라고 이 정도하면 만족하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공무원 9급으로 인생 행복 시작, 불행 끝이라 여겼는데 막상 9급 생활 해보세요. 다른 사람은 7급인데. 저 혼자 9급인데 저는 커피 타야 하는데. 거기서 자기는 완성이 아니고 미생 돼버리고. 그러면 7급 되면 끝입니까? 5급이 끝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국이 이렇습니다. 알았지요? 예, 믿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소유한다는 뜻이거든요. 내 것 만들어서 전체를 가지겠습니다. 이러면 해결이 안 돼요. 주님 이것뿐입니까, 더 없습니까? 이렇게 나오게 돼있어요. 인간은 그 바깥을.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전체가 되지 말고 비-전체가 돼. 전체가 뭐냐 하면, 전체가 어느 정도고 부분이 어디 놓여 있느냐, 하는 사고방식이라면 비-전체는 아예 전체가 날아가 버린 겁니다. 이게 없는 거예요. 비-전체란 말이, 뭐가 전부냐, 뭐가 한계냐는 자체가 생각 들지 않는 거예요.

 

남성들한테는 이런 이야기가 어려운데 여성들한테는 쉬워요. 라캉이란 정신분석학자가 말하기를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를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남성성은 뭔가 하나를 잡으면 그 바깥에 뭐가 있을까 본다는 겁니다. 그게 흔히 말하는 대의명분, 조국이 날 부른다, 이런 것. 예술가라든지 깊은 과학자라든지 또는 종교인이라든지. 내 존재의 가치가 여기서 머물 수 없어. 나는 조국을 위해서 살아야 돼. 세계평화를 위해서 해야 돼. 조국이 날 부른다고 하면, 아내가 음식쓰레기나 치워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그런데 여성은 어떠냐 하면, 전체 부분의 개념이 없어요. 여성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사기꾼의 아내가 되면 같이 사기를 쳐요. 농사지면 무조건 농사져요. 그리고 남편이 치킨집하면 같이 치킨집해요. 사기 치면 같이 사기치고, 조폭 되면 같이 조폭하고. 뭐 없어. 현재 마당이 전부에요. 그 바깥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번에 참석하려다가 바빠서 참석 못한 김중우 집사님이 하는 말이, 여자직원은 일을 하면 잘 하는데 여자직원은 회사의 대의명분에서는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겁니다. 저희끼리 싸워요. 저희끼리 시기하고 질투하고. 일은 충실한데 남자가 보기에 되지도 않은 사소한 일 때문에 삐져서 사표 낸다니까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여자직원을 뽑을 리가 있습니까. 맨날 삐지고 그런데. 저희끼리 싸우는데.

 

표현형을 내가 종이냐, 여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건 하나의 무늬지요. 하나님의 정보가 임하게 되면 그 소유는 전체가 되고 전체는 반드시 뭘 남긴다 했습니까? 예외가 있지요. 전체에 만족하지 않아요. 욕망에는 대상이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지요. 욕망은 대상을 자꾸 바꾸기 때문에. 욕망은 그 대상에 멈추지 않아요. 욕망은 뭘 욕망하느냐? 욕망 자체를 욕망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러니까 욕망의 대상이 없어서 자살하는 게 아니고 더할 욕망이 없을 때 자살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희망이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성취 되더라도 희망을 성취시키면 안 돼요. 반드시 희망은 미완의 것으로 남아 있어야 돼요. 아버지 원수 죽이겠다고 금강산에서 무술 닦다가 중국집에서 만났는데 자기 손으로 죽어야 될 희망으로 평생을 원수 찾아 다녔는데 지가 미끄러져 죽어 버리면 도대체 내 존재의 의미가 없다니까요.

 

육십 넘은 부부가 평소에 싸우면서 죽으라, 죽으라고 하다가 한쪽이 막상 죽어 버리면 남은 배우자가 살 희망이 없다니까요. 죽는 것도 허락 맡아야 돼. 왜 허락도 없이 죽어. 남자, 여자가 사귀다가 여자가 헤어지자고 일방 통보하니까 남자가 미치는 거예요. 왜? 나는 정리도 안 됐는데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닭 좇던 개가 되어 멍하니 있는 거예요. 내 쪽이 정리가 안 되네. 그래서 이혼한 전처 집에 가서 불 지르고 죽고 난리 치잖아요. 네가 없으면 내가 없는데. 저쪽에선 미쳤나, 하고.

 

그래서 틈을 보는 거예요. 존재를 분열시킨 예외가 전체를 갈라버려요. 그래서 전체는 분열의 형식이다. 또 어려운 것 나온다. 통일되었다는 것은 깨질 준비하라 이 말입니다. 뭔가 알았다 싶거든 깨질 준비하란 말이죠. 뭔가 분열의 조짐이 있어요. 분열의 조짐을 두 번째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해안선이지요.

 

해운대 가봤습니까? 바닷가에 가봤지요. 아들아, 해안선 5미터 끊어오너라. 해안선 5미터 끊어올 수 있습니까? 해안선인데. 그런데 지도에서는 끊어져요. 5미터, 5센티도 나온다니까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과 현실이 이렇게 차이나요. 인간은 기껏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화시킬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지만 눈에 보이는 그것이 현실을 가리는 현실을 못 보게 만드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보는 나를 만족함이지 현실에 합치된 건 아니에요.

 

사과가 세 개 있는데 사과 하나가 더 있어요. 그럼 사과 네 개 되겠지요. 에디슨은 어릴 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천재입니다. 선생님이, 바구니에 사과가 세 개 있어요. 바깥에 하나 있는데 전체가 몇 개지요? 보통 학생들은, 네 개. 참 잘했어요. 도장 찍히잖아요. 에디슨 같으면 한 마디 했을 거예요. 사과 3+1=4개인데 선생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말을 어른이 되어서 다시 깊이를 더한다면 인간의 모든 의미라는 것은 인간 본인을 만족하기 위함이지 현실 그 자체가 아닌 겁니다. 해안선을 지도에서 칼로 오려서 가져올 수 있어요. 그러나 현실에서 해안선을 내 소유용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천국도 이와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눈에 보이는 그걸 의미라 하는데, 이런 이야기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참.

 

여러분, 의미와 뜻이 달라요. meaning과 sense가 달라요. 의미는 이미 조직화된 나만의 독자적인 현실 속에서 의미를 찾지만 뜻은 그것을 파괴하는 기능으로 돌발적으로 뛰어들 때 그게 뜻이라고 하는 겁니다. 뜻을 알 때는 반드시 뜻을 미리 알지 못하고 이미 벌어지고 난 뒤에 돌아서서 차후에 터지고 난 뒤에 의미라 하는 거예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1미터는 별 지장 없습니다. 같이 살면 되니까. 대구에 있는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1미터 간격, 대구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어요. 그냥 아파트 1미터 떨어져도 괜찮아요. 그런데 의정부는 달라요. 의정부의 아파트의 1미터는 옆집 불나면 같이 불타게 돼있어요. 4명 죽고, 10명은 아슬아슬하고 백여 명은 중상이라 하잖아요. 사건이 터지고 난 뒤에 그때 좀 띠울 걸. 항상 사건화 되는 거예요. 그 사건이 해안선이에요. 지옥 가고 난 뒤에 그때 행하지 말지. 부자가 이미 지옥 가고 난 뒤에 그때 나도 거지 나사로 될 걸 괜히 부자 되어 지옥 갔다. 이미 사건은 터지고 난 뒤에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자가 거지 나사로처럼 될 수 있을까요? 되려면 자기의 존재를 포기해야 되는데. 존재를 포기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쪽 존재와 저쪽 존재를 가르는 선, 해안선을 만들었어요. 해안선은 폭이 없습니다. 레위지파는 폭이 없어요. 그래서 레위지파를 부재의 존재라고 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땅도 없어요. 그런데 레위지파가 망하게 되는데 언제 망하느냐? 레위지파가 폭을 가질 때 권력을 추구할 때 이미 레위지파는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공직자는 의미가 뭐냐? 봉사하는 자죠. 그런데 봉사하는 자가 언제 망합니까? 봉사하는 검사가 언제 망하죠? 자체적인 독자적인 현실을 가질 때 그게 권력 되거든요. 검사가 자체적인 권력을 가질 때 처음에는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는 취지가 날아갈 때 그건 마피아가 돼요. 레위지파가 그래서 망한 겁니다. 주께서 레위지파로 하여금 죽음과 함께 있고 따라서 죽음을 처리하는 거예요. 종의 출신, 저주받은 출신을 창덕궁의 창살 무늬 때문에 어떻게 종의 저주가 어떻게 해서 정실부인이 받은 축복에 합류할 수 있는지 그 기능을 보여주는 폭 없는 해안선 역할 하라고 레위지파를 내세운 겁니다. 그래서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그건 육에 속한 거기 때문에 의미 없는 거예요.

 

제가 어제 이런 이야기했지요. 아주 짧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해할 사람 없을 건데 레위지파가 몰락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요셉지파와 유다지파가 알력이 생겼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이것은 원래 창세기 끝에 보면 야곱이 미래를 예언 대목이 있습니다. 축구에서 말하는 투톱이에요. 장신 공격수 두 명 세우는 거예요. 막상막하에요. 창세기 마지막에.

 

보시고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창세기 49장 9절, 야곱이 축복한 것으로 돼있는데 예언한 것으로 보면 돼요. 내용이 축복답지를 않아요. 막 저주가 나와요. 망해죽으라, 이런 게 나오기 때문에 예언한 것으로 보면 돼요. 기존에 사적 존재 중심의 축복관 아닙니다. 하도 교회가 이상하니까 전부 바꾸려고 하니까 내가 힘들어요.

 

9절,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여기 야곱이 열두 지파 축복한 것이 완전히 동물의 농장이에요. 전부 동물 이야기에요. 이걸 전쟁하는 기계로 봅니다. 기계는 기능만 중요하지 존재는 중요하지 않아요. 네가 뭘 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네가 어느 대학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천국의 기능에 어떻게 합치해서 하나의 부속품으로 맞물려 돌아가는지가 중요한 겁니다.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실로는 장소 이름인데 인물화 되어 다가온다는 거예요. 저벅저벅. 실로는 법궤가 있는 곳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 저벅저벅 다가오는데 너를 통해서 다가온다고 돼있어요.

 

질문은 남아있어요. 질문은 제가 하고요. 24절 봅시다.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자, 질문 들어갑니다. 이 투톱 가운데 누가 중심입니까? 막상막하인데. 어떤 사람이 음악가한테 이런 질문했어요. 이 세상에 베토벤과 모차르트 가운데 누가 최고입니까, 하고 물으니까, 답변이 멋진 답변이었어요. 베토벤보다 더 뛰어난 음악가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는 유일합니다. 이게 전체와 비-전체의 관계거든요. 비교대상이 있는 것은 아직 전체거든요. 그런데 모차르트는 비교대상이 없는 거예요. 그런 논리로 모차르트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60년대, 70년대 살았던 지금 50대, 60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남진이 좋습니까, 나훈아가 좋습니까? 남진패, 나훈아패, 배호패 막 싸우는 거예요. <국제시장>에서는 남진이 등장합니다. 남진이 우세한 거예요. 주인공은 남진을 욕하면 화내요. 자기가 남진한테 목숨을 받았기 때문에. 거기 남진, 이만기 다 나와요. 제 아내에게 <국제시장> 보라고 하니까 650만 들어가서 안 본다는 거예요. 이건 무슨 비-전체에요. 천만 이상 들어가면 절대 안 본다는 겁니다. 이게 유일자 같아.

 

독보적인 존재가 존재라고 하니까 존재가 아닌 사람을 내세운 것이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는 모든 인간들의 순서와 등급과 계급과 성공실패를 전부 죽음 하나로 무산시켜버려요. 죽어가면서 좀비끼리 인물 잘났다고 해. 레위지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다 죽어요. 레위지파가 작동하는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레위지파가 가동된 체제, 시스템을 모세언약이라고 해요. 레위지파가 몰락한 것은 그들이 자기의 분수, 봉사를 놓쳐버리고 폭이 없는데 해안선에 불과한데 자기는 거룩과 비-거룩의 접점 지점으로 끝나면 되는데 이것이 자기가 십일조를 받아 챙기니까 받아도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구약에서 십일조를 낼 수가 있었어요. 왜냐하면 십일조 내는 제물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낼 수가 있어요. 그 땅의 소산물로 십일조를 내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 내에서 순환이 되게 합니다. 펌프 순환하듯이. 주님 주신 것 중에서 십분의 일, 주님 주신 일부를 주는 거예요. 주면서 우리는 공짜로 십분의 구를 받았다는 감각을 갖고 사는 거예요. 원래 십일조가.

 

그런데 십일조 하던 그 땅이 어디로 올라가느냐? 골로새서 3장에 보면, 하늘로 올라갔어요.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에 땅에서 십일조가 없어요. 정 하고 십일조 하고 싶으면 사다리 타고 하늘에 올라가서 하세요. 거기에 보면, 틈이라 했고 해안선이라 했는데 간격이라 하면 폭을 이야기고, 간극이라 한다면 선 자체를 이야기해요. 갈라진 균열선을 이야기해요. 거룩과 비-거룩이 만날 때 죽음이 있거든요. 이 죽음을 죽지 않고 저주받지 않고 레위지파 하나가 등장해서 온 사람이 다 거룩한 백성이 되는 모세언약 시스템을 확정시키기 위해서 모세언약을 하나님께서 가동시킨 겁니다.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지파가 그냥 르우벤이 장자인 시대에서는 육의 순서기 때문에 그냥 모세가 나서서 지팡이 들고 설치다가 이제는 법궤 주변에 누가 있느냐가 그쪽이 장자기 돼요. 법궤 주변에 있는 지파가 어느 지파입니까? 레위지파거든요. 그 외에는 나머지 지파는 유다지파가 있더라도 의미 없어요. 레위지파 때문에 덤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레위지파가 제대로 가동이 되면 살고 안 되면 못 사는 거예요. 이것은 간극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선을 이야기했는지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천국이 어떤 세계입니까? 예수님이 소개하기를 천국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했어요. 십자가마을이 어딥니까? 묻는 것이 십자가마을에서는 이상하게 느껴지잖아요. 묻는 사람은 당연히 십자가마을이 어디 있느냐? 십자가마을이 뭐 있는 모양이다. 인터넷 찾아보니까 십자가마을이 있어요. 어떤 장소가. 천국이 어디 있느냐, 할 때는 어느 곳에 있기만 하면 고정돼있으면 가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이렇게 이야기해버렸어요. 이건 포도원 비유입니다. 아침 열 시에 온 사람, 열두 시에 온 사람, 세 시에 온 사람, 마지막에 다섯 시에 온 사람들.

 

천국이 어디 있느냐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천국이 어디 있는지 묻는 발상이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를 거기 집어넣기 위해서 묻는 거예요. 답변하기를 어떤 존재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나라는 존재밖에 모르는 우리로 뭔가 활용하는 거예요. 활용하면 나타나는 게 있어요. 제가 어릴 때 솜사탕 만드는 것 보고 참 신기했어요. 솜사탕 만들 때 재료가 설탕과 둥그런 통이 있고 발판밖에 없어요. 분명히 없는데 아저씨가 설탕을 집어넣고 밟으니까 뭔가 없는 데서 있음이 발생되면서 허연 연기 같은 것이 끼는 거예요. 계속 밟고 있고. 지는 나무젓가락 들고 있고. 없다고 여겼는데 분명히 뭔가 생기기 시작하니까 그걸 흩으니까 솜사탕 된 거예요.

 

설탕이 뭐냐 하면 우리들이에요. 존재에요. 존재로 주께서 하니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하다 보니까 이게 천국이에요. 없는 데서 부재의 존재가 존재를 살려주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누가 지적질하고 누가 추궁하고 근본 자체가 잘못된 것을 지적해줄 때 그 지적해주시는 분의 관계가 천국에 입성한 사람입니다. 잔소리 좀 들어야 돼요.

 

포도원 질문하면서 같은 질문인데요. 여러분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돈은 왜 내지요? 식당에서 돈 내는 이유가 뭐죠? 식당에서 음식 만드는 것은 먹으라고 한 거잖아요. 그럼 먹어줬잖아요. 그런데 돈은 왜 내요? 이상하잖아요. 먹으라고 빵 만든 것을 그 취지를 살려서 먹었는데 돈을 왜 냅니까? 돈을 내야 인간사회에서 독자적인 현실 세계에서 사람값을 해요. 만약 돈을 안 내면 그 사람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 현실 속에 존재로 인정하지 않아요.

 

그런데 주님은 뭐냐?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세계거든요. 값을 치러야 사람 노릇한다는 그러한 현실에서 다른 현실이 해안선을 만든 겁니다. 여기에서 이리로 넘어가지 아니하면 구원을 못 받아요. 영생을 못 받아요. 우리가 아는 예수 아닙니다. 사람 노릇을 하고 사람값을 해야 돼, 라는 여기에 선을 그어버립니다. 분열을 일으켜요. 찢어버리는 거예요.

 

찢게 하는 방법은 소유로부터 존재로부터 출발하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천국을 방해하는, 그러니까 구원을 누가 방해해요?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방해하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율법 지켜서 구원받고자 시도하는 순간 우리는 벌써 죄가 생산되는 겁니다. 내가 천국 못 가는 이유가 내 안에 정립이 돼요. 만들어져요. 내가 나를 천국 못 가게 만드는 주범입니다. 주범은 아니고 이게 양아치에요. 그리고 뒤에 주범인 마귀가 악마가 따로 있어요.

 

우리는 악마라는 것을 얼굴 돌아가는 꼬마인형, 괴물 같은 척키 같은 그런 것만 악마라고 하는데 그걸 누가 만들었겠어요? 인간에게서 나왔지요. 일그러진 모습, 아무도 흠모할 게 없는 인간이 악마로 여기는 그 모습을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으로 가져온 거예요. 그게 가면효과인데, 자기의 가면으로 써버렸어요. 인간의 힘으로 벗겨낼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된 거죠. 인간이 왜 주님 앞에 버림받는가? 인간은 자기 존재의 건전함과 의로움을 따로 구축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추방당함으로 말미암아 레위지파가 관리했던 의로운 죽음을 추방한 인간 속에 중심에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를 집어넣는데 그걸 어제 끝나는 시간에 뭐라고 했지요?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주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다운 새로운 주체를 레위지파의 구조로, 모세언약의 구조로 우리 속에 집어넣으면 성도의 특징은 매일같이 분열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돌아서면 소유, 돌아서면 내가 잘 돼야지, 하다가 다시 보게 되면 그 경계선에서 뭔가 선이 찌그러지면서 그 속에서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하시는 그러한 기능으로 작동할 때 우리가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소입니다.

 

 

10분 쉽시다.
2015겨울수련회 4강



민수기 13장에 보면 정탐꾼을 보냅니다. 아 참, 지난 시간 말미에 했던 그 질문에 답변을 해야 되지요. 창세기 49장의 예언에서 유다지파하고 요셉지파가 막상 막하라고 했지요. 누가 장차 주도권을 쥘 것 같아요? 그 예언대로 한다면? 창세기의 그 상황에서는 알 수가 없지요. 한쪽에서는 이스라엘의 기초가 나온다고 하고 한쪽은 지도자가 나온다고 하니까 모차르트와 베토벤 중에서 누가 더 위대하냐는 식이지요. ‘요셉지파와 유다지파 중에서 누가 더 위대하냐?’라고 헷갈리게 하고 누군가를 더 기대하게 만들지요.



그렇게 기대하게 만드는 그 전략이, 너희들이 아직 존재에 묶여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제시해버린 겁니다. 아홉 지파를 요셉지파가 가져가고 남쪽 이스라엘은 베냐민 지파하고 유다지파만 달랑 가져갔을 때 이것은 민주주의원리에 의하면 어느 것이 진리에 가가까우냐 하면 다수의 의견이 진리에 가깝다고 보지요.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져야 될 이유가 쪼개질 때 그 금이 생기잖아요. 그 금에서 다윗언약이 나와요. 부재자가 나와요. 갈라지는 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지키기 위해서 쏟아놓는 모든 정책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갈라지게 만듭니다. 우상숭배를 하게 만들어요.



뭔가 통합된 것, 통일된 것을 의도할 때 이미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금이라는 말이 적당한데 선, 해안선, 그 선을 긋는데 그 금이라는 것은 폭을 가지면 안 되잖아요. 그 금이 나중에 권력을 가지면 뭐가 되지요? 폭이 되지요. 폭이 되니까 주님께서 가만두지 않고 이 폭을 어떻게 합니까? 폭을 다시 분열시키기 위해서, 폭이라 하는 것은 ‘이래서 우리는 단단한 통일체가 되자.’ 하는 것을 추구하잖아요. 추구할 때 여기서 통일 자체가 무엇에 형식이다? 분열의 형식, 그래서 또 하나의 분열이 일어나죠. 그러면 금이 생기지요.



금이 생기면 “우리는 금이야.”라고 등장하면서 금끼리 모아지고 해서 하나의 교단이 되지요. 하나의 집단이 되겠지요? 꼭 지방교회처럼. “거듭난 사람 다 모여.” 해놓고 자기들만의 집단을 만드는 것처럼. 그러면 그걸 또 분열시켜 버리지요. 금에서 하나의 통일체가 된다면 여기서 또 분열이 일어나고, 그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할 때 모세와 아론이 갖고 있던 주도권이 점차 레위지파가 아닌, 참고로 모세와 아론은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로 이동하면서 반드시 이러한 실패의 상황이 벌어질 때 주도권이 넘어가는데 요셉지파의 정탐꾼이 누구냐 하면 여호수아에요.



에브라임지파니까 여호수아가 등장하고 유다지파의 정탐꾼이 누구냐 하면 갈렙이에요. 그러면 월드컵 결승전에 누가 올라간 거예요? 다른 열 지파는 다 탈락해버리고 제대로 된 믿음의 여호수아와 갈렙만 달랑 남아요. 그 때부터 땅을 차지하는데 요셉지파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유다지파는 중요한 땅을 차지해요. 넓은 땅이 좋습니까, 중요한 땅이 좋습니까? 중요한 땅이라고요? 여기는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베토벤이 아니고.



유일한 것, 오늘 ‘유일자’가 오셨어야 하는데, 하여튼 유일한 것이 승리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유일하다고 하게 되면 자체적으로 뭐가 돼요? 이게 하나의 폭을 가지고 면적을 가지지요. 그렇게 되면 이것이 금으로 바뀌기 위해서 유일한 것 속에서 “유일하기에 우리는 통일돼야 돼.”라는 그 이데올로기, 사상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진짜 유일자가, 그 금이 새롭게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역사가 그렇게 진척되는 거예요. 그걸 전부 다 추적해 내야 됩니다.



그렇게 추적하는 그 용어를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남은 자’라고 했습니다. 남은자의 기능은 행함으로 남겠다는 것을 부정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남은 자 앞에 뭐가 붙는가? 그냥 남은 자가 아니고 ‘은혜로 남은 자’지요.(롬 11:5) 은혜로 남은 자가 등장함으로써 졸지에 그 주변의 은혜로 남은 자에 가담되지 않는 자는 무슨 자로 규정됩니까?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모습들이 다시 균열을 일으키면서 남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민수기에게 따질 것은 “이런 남은 자가 될 때의 기준, 어떤 기준이 동원됩니까?”하는 이것이 중요하거든요. “어떤 기준이 일관된 기준입니까?” 제가 대략적인 이야기를 했지요. 뭐냐 하면, “종과 정실부인사이에서 저주받는 자도 금에 의해서, 부재자의 활동에 의해서 영생을 얻게 합니다.” 아까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서 본인들은 폭이 없이 그냥 선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없는 자가 있는 자를 살리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결과를 낳고 결국 이것은 하나의 희생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는 일입니다.”라는 그 내용을 폭과 금, 금과 폭의 기능을 해야 될 사람들이 보여줘야 되지요.



그렇게 되면 땅을 차지하든 뭘 하더라도 항상 우리는 어디에 매여 있습니까? 항상 부재자가 보여주는 그 기능에 종속될 때 그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답게 하는 기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할 때 여러분이 방금 뭘 놓친 게 되느냐 하면, 이걸 놓친 게 돼요. 반대하는 자, “반대하는 자는 어떻게 됩니까?”를 우리가 놓치면 안돼요. “반대하는 자, 반대하는 자는 무슨 기준에 의해서, 무슨 생각에 이해서 그걸 반대합니까?”라는 생각을 우리가 해 봐야 되지요.



반대할 때 나오는 제일 큰 사상이 민주주의겠지요. 민주주의. 이것이 민수기 16장인가에 나오는데요, 민수기 16장에 보면 레위지파 중에 고라자손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대듭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거예요. “홍해를 건너올 때 여호와 하나님 덕분으로 다 같이 건너왔다. 그래서 평등하다. 누가 누구 앞에 대장질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못된다. 그런데 네가 뭔데 왜 모든 일을 결정하느냐?”라고 했어요. 굉장히 존재의 세계에서는 정당하게 보이잖아요. 그런데 이 정당화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반 복음적이고 제일 지옥 갈 사고방식이 되는 겁니다.



아까 그 빵집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빵을 먹고 난 뒤에 돈을 지불하지요. “당신은 우리보고 먹으라고 빵을 만들었잖아요.” “아니요. 나는 돈 벌기 위해서 빵 만들었어요.”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사람값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돈을 지불하면 그 인간사회에서 사람값을 하지요. 그러면 방금 그 논리에 의하면 이렇게 됩니다. 돈 없으면 무슨 값을 못한다? 사람값을 못하는 거예요. 평등입니까? 돈의 이데올로기에요. 평등이에요? 우리가 추구하는 평등이 어디서 나왔는가? 이 자본주의 사회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뜻이 뭐냐 하면, 자본이 최고의 가치를 공급하는 것이 돈이 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에요. 돈 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우열이 없다는 겁니다. 조건이 있지요. ‘돈 앞에서는.’ 그러면 그 전에는 무슨 사회였습니까? 그 전에는 뭐냐 하면, ‘왕이나 귀족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계급사회’ ‘봉건사회’ ‘장원제도’라고 하는데 신이 내린 질서는 ‘나는 왕이 되어야 하고 너는 천민 되어야 한다.’는 것이 신이 내린 질서이기 때문에 이 질서에 어긋나는 것은 신의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 된다는 그것으로 사회가 안정을 찾았던 거예요. 그것을 불평등으로 본 겁니다.



우리가 조선시대, 고려시대, 신라시대로 가봅시다. 신라시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지금 당신은 계급이 있지요?” “예, 귀족과 평민이 있습니다.” “불평등합니까?” “아니요. 너무나 평등하지요.” 너무나 평등한 거예요. 왜? 주어진 자리에 합치하는 것,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불평등이 뭐냐 하면, 천민이 양반노릇 하는 것이 불평등 한 거예요. 감히 서자 출신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고 형을 형이라 부른 이것이 불평등 한 거예요. 딱 맞춤, 자리에 맞춰야 평등한 겁니다. 옷의 기장을 다 재놓고 큰 옷을 입으면 불평등하잖아요.



자신에게 맞는 옷은 따로 있어요. 팔자에 맞는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이것이 평등입니다. 그 당시의 사고방식은 그것이 평등이었어요. 세상이 어찌되려고 그렇게 돈 앞에 평등이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이것이 평등이었습니다. 따라서 평등이나 윤리나 도덕이라 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변천 과정을 겪어요. 윤리 도덕도 마찬가지고.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배가 가는데 풍랑이 일어서 배가 다 깨졌습니다. 배가 깨졌는데 이것만 타면 든든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뱃조각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살아남은 사람은 두 사람이고 탈 수 있는 자리는 한 사람 몫밖에 없을 때 여기서 윤리적인 문제가 생기는데 한 사람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싸울 수밖에 없지요. 그 싸움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당신은 그 때 양보 안하고 왜 그렇게 했어?”라고 윤리적 문제를 규정할 수 있습니까? 할 수가 없지요. 어제 한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히틀러 부하가 되어서 유대인 5백만을 죽였잖아요. 그 때 그 죽인 사람을 재판하면서 “당신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까?” 할 때 “나는 할 도리를 다 했습니다.” “당신은 남에게 준 피해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할 때 정답이 뭐라 했습니까?



존재는 존재를 질책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 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 자기만의 독자적인 현실이 있기 때문에. 네가 나를 재판하는 것은 완전하고 초월적인 입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속한 그 현실에서나 통하는 평등이나 자유라는 고상한 이념에 입각해서 지금 나를 범죄자로 몰아세우는 거거든요. 그러나 나는 윗사람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그 현실에 입각해서 나는 할 도리를 다 했다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죄인 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현실을 보는 차이일 뿐 나는 네가 그렇게 보는 범죄자는 아니라고 할 때 그것을 조정할 수 있는 제 삼의 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 삼의 눈은 없어요. 문제는 그 존재 안에서 새롭게 현실의 폭을 가진다는 그게 문제거든요. 심판을 누구한테 했습니까? 이 땅에서 존재의 폭을 가지지 않고 주님의 기준으로 일방적인 선언을 하는 겁니다. 일방적인 선언이에요. 오늘 이 강의는 선택에 대해서 하겠는데요? 일방적인 선언입니다. 일방적인 선언을 할 때 그게 평등입니다. “너는 천국 가! 너는 지옥 가!” 이게 평등이에요. 이게 평등입니다. 왜냐? 둘 다의 존재가 서로를 질타할 수 없는 부실한 죄악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민수기의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막아버리고 누굴 질책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앞에 평등이 됨으로 말미암아 평등은 평등인데 돈 없으면 평등이 안 되는 거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인간 값을 한다는 것은 남의 노동에 대해서 값을 치러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천국은 뭡니까? 내가 노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이 노동했는데 그 값을 치러주는 거예요. 다시 돌아와서 아까 그 배 이야기 다시 해 봅시다. 배는 한 사람 밖에 탈 수가 없는데 두 사람이 그걸 두고 싸웠어요. 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러분은 지금 머리가 좋아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목사님, 저 같으면 양보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뭘 놓쳤느냐 하면, 둘 다 양보하는 싸움을 한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완전히 농심이에요, 농심. 아우먼저 형님먼저. 둘이 멱살 쥐고 싸울 판이에요. “내가 양보한다잖아.” “아니 왜 형님이 양보를 해요? 제가 양보해야지요.” “네가 양보하려는 의도가 뭐냐?” “내가 살아 돌아가면 얼마나 욕을 하겠습니까?” 결국 네가 양보하는 이유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거예요.



그러면 내 현실의 의를 채우기 위해서, 내 현실을 위해서 나는 기꺼이 목숨까지 내 놓겠다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의 가치는 유지하겠다는, 나만의 현실은 절대로 손상을 입지 않게 하겠다는 그러한 논리거든요. 그러면 이 세상 윤리라는 것이 보는 눈에 따라서 백이면 백 다 달라요. 그렇잖아요. 그래서 옛날에는 임금이 재판을 했거든요. 임금이! 임금이 재판할 때 재판의 기준은 하나에요. “너는 왜 네 자리를 이탈했느냐?” 다시 말해서 “상놈이 왜 양반행세를 했느냐? 매를 맞아라.” 이것이에요.



지금은 뭡니까? 무전유죄, 유전무죄, 그 세상이라니까요. 인질범에게 “뭐? 돈이 있으면 죄가 없고 돈이 없으면 죄가 있다고? 그러면 너는 돈이 싫은가?” “아니요.” “니들도 마찬가지네.” 돈이 없어서 그런 소리 하지 돈이 있어버리면 그런 소리 안 하지요. 뭐 갑 질을 한다고요?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무장이 조현아에게 욕을 얻어먹고 비행기를 회항 당했다고요? 저는 이야기합니다. 사무장보고 “네가 항공사를 차려라. 네가 차리면 너도 갑 질 할 사람이다.” 지시를 누가 합니까? 상사에 대해서 왜 순종하느냐 하면,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순종하는 겁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어요. 남성은 여성을 지배한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은 해요. 그러나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극복을 시킬 수는 없어요. 시키는 대로는 하는데 다를 가질 수는 없어요. 그런데 못 다가진 것이 나중에 역전이 된다니까요? 소유가 ‘금’하고 싸울 때, 경계선하고 싸울 때 늘 패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가 ‘금’속에 들어가려면 자기도 축소되어야 돼요. 소유에서 압축이 되어가지고 들어와야 되는데 너무 압축이 되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소유 자체가 날라 가버려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금(경계선) 속에 들어갔나니 이제는 나는 죽고 누가 있다? 경계선 안에서 그리스도라는 폭만 갖게 된다.’ 이렇게 고백하거든요. 그러면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그걸 실천하려고 하면 조건이 뭡니까? 십자가 사건 앞에 우리가 응축이 되어야 하는데 스스로 응축이 되면 이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게 나중에 블랙홀 되어버려요. 그래서 폭발해 버려요. 별의 진화과정에서 응축이 되면 나중에 폭발한다고요. 막 누르면 누를수록 점점 더 나중에는 반발심이 세서 저항과 비저항의 물리적 법칙에 의해서 나중에 “그만 해라. 마이 묵었따!” 하고 튕겨져 버린다니까요.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게 그거예요. “이 정도까지, 목숨까지 바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나왔던 사람이 결국은 뭐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잖아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이 생각하는 그 실패, 인간에게 실패라는 것은 성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가 아니지요. 단지 시련은 있을 뿐이지 인간에게는 뭐가 없습니까? 실패가 없습니다. 정 회장이 했던 유명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잠시 후퇴는 있어도 일부 후퇴가 이보 전진이 되게 하는 거예요. 양보는 하지만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아요. 인간은.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인간에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인간은 알아먹지를 못하고 계속 저항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리와 창기 속에 천국을 만들어버리지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38년 된 병자, 그리고 소경된 자, 세리와 창기, 강도, 이것은 막장 인생이에요. 끝났어, 더 이상 저항할 용수철이 들어 있지 않아요.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이것은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권력을 쥐고 있어요. 폭이 넓은 사람들이에요. 자기가 가동할 수 있는 권력의 유도리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말 한마디면 쫒아낼 수 있는, 갑 질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천국은 어디 있느냐? 천국은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응축과 멀어져요. 소멸과 멀어져서 천국과 점점 더 멀어져 가요. 점점 멀어진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선택을 해버립니다. 선택을 해서 구원하는 겁니다. 선택을 할 때 방법이 있습니다. 선택을 할 때 누굴 선택하느냐 하면, 가룟유다를 선택해 버려요. 이 대목이 어려운데요. 가룟유다를 선택해 버립니다. 옛날 6, 70년대쯤인가 저도 본 적이 있는데 얼마나 재미있던지. 지금도 꿈속에 막 나타나요. <나바론요새>라고 독일군대포가 나오는 영화인데 그 독일군 영화의 특징이 뭐냐? 첩자가 있어요.



내부첩자로 인하여 주변 인물들의 운명이 결정이 되어버립니다. 조직 자체가 와해돼요. 그것을 가지고 카드게임이라 하는 겁니다. 카드를 가지고 피라미드를 쌓게 되면 우리 계산에 의하면 한 사람당 힘을 십분의 일씩 가져간다고 생각하지요. 카드 게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십분의 일이 아니에요. 카드 한 개만 빼보세요. 10분의 9가 10분의 1보다 못한 역전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런 것 처음 알았지요? 9가 1보다 약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요. 와르르 다 무너지는 거예요. 그런 요소. 그게 첩자 요소에요.



하나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가룟유다를 선택해버립니다. 어떻게? 무너뜨려 달라고. 이 제자들, 열 한 제자들이 상상하고 있는 멋있는 메시아 나라, “예수님! 하늘나라 갔을 때 우리 중에 누가 높은 사람 되겠습니까?” 라고 세상에서 살던 그 습관과 사고방식을 그대로 천국까지 이어나가려고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는 제자, 심지어 치맛바람까지 불어가지고 제자의 엄마가 와가지고 “얘는요, 예수님 우편에 앉게 해주시고 얘는 좌편에 앉게 하옵소서.” 또 “목사님이 식당에 올 때 이 사람은 우편에 앉게 해주시고 저 사람은 좌편에 앉도록 해주세요.” 이런 것. 자리에 앉는 것은 우연이었지요. 맞지요? 그 때 우연이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물론 우연을 가장한 필연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우연이었어요. 첩자를 심어놓고 그 나머지 열한 제자가 ‘나는 주님 앞에 선택받았어.’라는 그것이 쓸데없이 다 무산되는 작전을 주께서 벌이시는 겁니다. 네가 생각한 선택론, 그것이 다 무의미하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 교리의 특징이 뭐냐? 선택론이에요. “우리는 택한 백성이다.” 성경 한 두 곳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 보면 “너희는 택한 백성이다.” 그래서 그들은 앵무새처럼 따라 합니다. “우리는 택한 백성이다. 다른 민족은 다 조져도 우리 민족은 살린다.”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백부장을 불러다가 “얘가 천국가고 본 자손은 다 천국에서 쫓겨날 것이다.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웃기고 있네. 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혈통적 아브라함 자손은 다 날라 가는 거예요.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백부장 이야기를 집어넣고. 그러면 백부장 좋겠네? 질문을 던지면 여러분이 이해를 했는지 못했는지 알 수가 있어요. 백부장은 좋겠네요? “얼레리꼴레리, 너희들은 지옥가고 나는 천국 간다.” 백부장이 이렇게 나왔겠습니까, 아니면 백부장이 뭘 주목했겠습니까?



저 아브라함 자손과 나를 가르는 그 ‘금’에 주목하게 되면 그 사람은 천국 가는 사람이고 ‘나’라는 소유가 천국 간다고 우기면 그 사람은 땡, 탈락이에요. 또 하나의 금이 폭을 가지면 안돼요. 주님 때문에, 이 부재자의 존재, “없는데서 나온 존재가 저를 구원했습니다.” 이렇게 돼야 되지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이 이렇게 나왔어요. “제 신하의 병 좀 낫게 해 주세요. 왜? 제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잖아요.” 이러면 땡, 탈락이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이게 뭐냐 하면, 말씀이 새로 생산시키는 현실이에요. 그 말씀에다 뭘 집어넣는가? ‘금’, 경계선, 경계선이 새로 생산해 내는 현실을 위해서 백부장은 독자적인 자기소유의 현실은 그 현실에 앞서 을이 되고 이 말씀의 세계가 갑 질을 하도록 날마다 자기를 맡기는 겁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눅 7:8) 군대용어로 “까라면 까겠습니다.” 제가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고민하는 것도 허락을 맡아야 되고 화내는 것도 검사를 맡아야 된다고. 우리의 화나 고민 같은 것은 우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현실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의 어떤 의로움과 윤리를 주장하게 되어 있어요. 독자적인 현실이 있으면 그 현실 속에서 이데올로기가 나오고 이념들이 나와요.



‘이것이 평등일거야. 이것이 선하고 이것이 축복일거야. 이것은 기적 받은 것이 맞아. 방언을 하니까 내가 성도인 것이 맞아. 내가 안수해서 병 나았으니까 나한테 믿음이 있는 것이 맞아.’ 나름대로의 자기 폭을 가지면서 그런 것 가지고 스스로 자기를 최면 시키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신자가 맞다.’ 지금 뭘 쳐다보는 거예요? 믿음의 대상이 뭡니까? 본이라니까요, 본인. 본인의 신앙의 연조, 연륜, 그것이 신앙의 내용으로 점점 차고 들어오니까 그것은 자기 세계지 그것은 천국이 아니에요. 주님의 세계가 아니에요. 그것은 아침 열시에 와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뭘 내세웠어요? 자본주의에서 배운 습관을 내세울 겁니다. “주님이여, 주님에게 노동한 것에 대해서 대가를 지불해 달라.” 하는 거예요. 내가 노동한 것에 대해서.



노동한 것에 대해서 돈을 지불해 달라고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나온 더러운 버릇이거든요. 그런데 교회에서 밥 먹고 살기 위해서는 소비자가 왕이니까 소비자인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해줄 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교회 봉사 하시면 상급에 차등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농땡이를 부리면 나중에 여러분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부끄러운 구원 외에는 다른 구원은 없어요. 천국 가면 주님 앞에서 전부 다 부끄러워요. (고개 푹 숙이고) “주여, 미안합니다.” 전부 다 부끄럽고 죄송해서 면류관도 반납해요. “나의 의로움이 아니고 값없이 구원 받았습니다.”



아마 상급을 줘도 그 상급도 되돌려줄걸요? “이 마일리지는 제가 받아서는 안 됩니다. 짜장면 먹고 모아놓은 이 마일리지, 탕수육 안 먹고 왔는데 이거 어떻게…….” 선택론에 대해서 저에게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이 뭐냐? “목사님, 저는 선택 받았어요?”라고 하는 거예요. 한 번 적어보겠어요. 이 질문이 얼마나 잘못된 질문인지 보겠습니다. “목사님…….” (가위표 치면서) 이건 지워버립시다. 이건 지워버리고, “제가 선택되었습니까?”라고 했어요. 선택에서 ‘나’라는 소유가 선택과 만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선택이라 하는 것은 일방성을 가지고요, 그 일방성의 주체자가 따로 있거든요. 주체자는 따로 있고 선택이라는 것은 기능으로 작용하라고 주님께서 선택한 겁니다. 따라서 선택할 때는 아까 말한 무늬, 처음에 이야기한 경복궁이나 창덕궁……, 한 번 가봐야 돼요. 말 나온 김에 서울 한번 가볼까? 그 빗살무늬가 마루에 비취듯이 그 무늬가 오게 되면 그 기능을 하게 되어 있어요. 가룟유다가 선택되었거든요. 그 기능이 뭐냐 하면, 가룟유다의 운명은 빼도 박도 못하고 그 고유기능을 해야 돼요.



어떤 기능을 해야 되느냐 하면, 첩자 노릇을 해야 됩니다. 왜 첩자노릇을 해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 내에 멸망하는 이유를 가룟유다를 통해서 설명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은 것은 가룟유다만 나쁘고 나머지 열 한 제자는 나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열한 제자 속에 있는 모든 죄성을 전부 다 가룟유다에게 밀어서 가룟유다가 대표자로서 표출해 내는 거예요. 레위지파가 선으로 멈춰야 되는데 따로 폭을 가졌다는 말은 레위지파의 그 행동이 그 당시 모세를 따르던 모든 대중들의, 40만 이스라엘 전체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목사님은 무슨 근거에 의해서 그렇게 이야기합니까?” 근거를 댈게요. 근거를 대겠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보게 되면, 16장 41절, 이건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 예, 됐습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고 되어 있지요. 민주주의의 사고방식입니다. 죽인 이유가 뭐냐 하면, 땅이 갈라져서 죽었잖아요.



땅이 갈라진 이유가 뭐냐? “너만 대장질을 하느냐?” 우리도 같은 레위지파고 십일조를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고방식에서 평등이거든요. 우리는 동등한 자격으로 홍해를 건너왔기 때문에 네가 한 5년쯤 하고, 단임제지요,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5년을 하든지 안 그러면 4년 재임하든지 그것은 새누리당에서 결정할 문제니까 우리가 관여하지 말고 비례대표제로 하든지 어쨌든지 혼자서 다 하지 말로 바꿔가면서 하자는 겁니다. 북 치고 장구치고 왜 너 혼자 다 해먹느냐 하는 거지요.



뭐가 누락되었느냐 하면, 중보자 의식이 누락되었지요. 그들의 생각은 이거예요. 우리가 일단 홍해는 건너왔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이미 구원받았다는 겁니다. 모세는 그것이 아니고 구원받았다고 되어버리면 이것이 통일이 되어버려요. 통일되면 안돼요. 반복해서 금이 갈라져야 되는데 한 번 되었으니까, 꿈에 그리던 구원이 되었으니까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쓰겠다는 거예요. 아니 언제는 신경 써서 구원받았습니까? 참 내,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언제는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받았습니까?



그들을 구원시킬 때 얼마나 그들이 반대했습니까? 아까 구원의 훼방자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첩자에요. 우리 안에 있는 첩자. 엄마가 아침에 애들 깨우는 것도 참 힘들지요. 요새는 사춘기를 지나 20대가 되어도 깨우기가 힘들다는데. 그것보다 힘든 것이 뭐냐 하면, 속옷 갈아입으라고 할 때입니다. “엄마, 괜찮아.” 해도 자고 있는 애 강제로 팬티 벗기고 하잖아요. 극렬한 저항이 있지요. “아……악!” 그런 것 비디오로 찍어놔야 되는데. “싫어! 싫어! 싫다고!” 막 양말 벗기고 할 때, 강제로 그렇게 하잖아요.



왜 잘 돌아가고 있는 이 속옷을 왜 벗기느냐? 엄마의 안목은 뭐냐? 더럽다는 거예요. 하루만 지나면 더럽다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이 맡아도 냄새가 안나요. 본인한테는 그것이 평등이라. 이것이 정의로운 거예요. 고라자손이 모세한테 대들어서 하나님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향로를 들고 있다가 향로의 불꽃이 나오고 그들은 땅이 갈라져서 다 죽었습니다. 그럴 때 누가 반대하느냐? 아까 민수기 16장 41절을 봤는데 누가 반대합니까? 백성들이 반대하는 겁니다. “당신이 우리 백성을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어째서 죽든지 상관없이 무조건 죽였다 하는 그 자체에 대해서 우리의 희망의 여지를 꺾어놓았기에 책임지라,”고 는 겁니다. 당신의 임무는 우리를 살리는 것이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모세와 아론은 뭐냐 하면, 살 자만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죽일 사람은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거예요. 사람이 자기가 살아 있을 때는 죽일 자는 죽인다는 말에 대해서 찬동하지만 막상 죽일 자 그룹에 자기가 아는 친척이나 올케나 시동생 시누이 자기 딸이나 아들이 있으면요, 갑자기 반대편에 서버려요.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내 자식을 왜 죽이느냐?”는 말이지요. 네가 뭔데? 우리 인간적 입장에서 ‘네가 뭔데’를 더 확장시켜 봅시다. “하나님, 네가 뭔데? 내 인생을 이렇게 꼬이게 만들어? 하나님 네가 뭔데?”



그럴 때 하나님의 대처방법은 간단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바쳐라.” 이렇게 귀엽게 나오셔요. “사랑하는 아들 바쳐라.” 그러면 우리는 뭡니까? “아들 바치는 대신 저는 예수를 믿겠습니다.” 이런 타협조로 나오지요. “아들 안 바치는 것은 예수 믿는 것도 거짓이고 엉터리다.” 이렇게 나올 때는 ‘아, 예수 믿기라는 것은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중의 또 다른 하나가 아니고 나의 전부구나. 나의 전부를 요구하는구나. 그리고 내가 아들을 사랑해서 주님보다 내 아들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들이 나의 죄 성을 폭로시키는 첩자로 주께서 심어줬다.’ 하는 겁니다.



내가 몰입하고 내 기쁨의 원천, ‘내가 저거 없으면 나는 살 의미가 없다는 것, 나는 저거 없으면 죽을 거야.’ 하는 그 무엇을 누가 심어줬다고요? 주께서 심어준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죄를 생산하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 속을 죄의 공장으로 가동시키기 위함입니다. 죄의 공장을 가동시킵니다. 죄가 있는 곳에 뭐가 넘친다고 했습니까? 은혜를 넘치게 하는 겁니다.(롬 5:20)



제가 한 때, 물론 지금도 무식하지만 정말 무식할 때가 있었어요. 다방에 가니까 커피가 있고 그 옆에 액체로 된 크림이 있어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커피 맛이 쓰니까 커피는 그냥 놔두고 크림을 가지고 물을 타서 마시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크림이라는 것은 커피가 먼저 전제되고 난 뒤에 타 마시라고 준 것이지 그게 주가 되지는 않잖아요. 우리의 구원은 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 속에 죄를 심어놓은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것이 주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걸 증거 하라고 덩달아 구원된 것이 우리의 구원이에요.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 소리 하라고 우리를 구원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적당하냐? 세리와 강도와 창기가 적합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하는 말이 “나는 십일조 하고 금식하고 구제했습니다.” 주께서 즉결 심판하는데 땡, 탈락이었어요. 전혀 구원과 멀어도 너무 먼 거예요. 자기 속에 뭐가 없어요? 죄가 없어요. 죄가 없는 곳에는 은혜가 없고 은혜가 없으면 천국을 만들 수가 없어요. 죄가 있어야 천국을 만드는데.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이 주어진 것은 뭐를 생산하기 위함이라? 죄를 생산하기 위함이라. 여기서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율법, 죄에서 뭐가 지금 빠져있습니까? 크게 쓸게요. 뭐가 빠져 있어요? ‘나’가 빠져있어요. 하나님은 우리하고 상대를 안 합니다. 우리의 착함, 우리의 재롱잔치를 절대로 보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율법과 죄의 생산이라는 여기 이 기계장치에다 걸어버려요. 그러면 이 축축한 오징어도 끝에 가면 무늬만 오징어지 완전히 바짝 눌려진 오징어포가 되어 있지요. (나란히 오징어포가 되어서 줄줄이) 이렇게 되어서 나오지요. 얼굴도 있고 팔도 있는 것 같은데 눌러 붙어서 이렇게 나오지요. 오징어포 생산이에요. 죄인이 생산되는 겁니다.



박수쳐야 돼요. 내가 교회 다녀서 잘 되려고 술 담배 끊고 인간답게 살고 인간 값을 하려고……, 인간 값을 하는 방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돈이 있어야 한다고 했지요. 교회 와서 기도하게 되면 주께서 뭘 주신다? 복을 주신다. 현찰을 주신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교회 나왔다 이 말이지요. 왜? 돈이 있어야 인간 값을 하고 인간대우를 받으니까. 그런데 교회 가서 진짜 복음을 알고 보니까 뭡니까? 내가 죄인의 쥐포로서 나올 때 그 때……, 죄인포지요, 죄인포, 죄인포로 나올 때 비로소 우리는 내 의도가 주님의 의도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에 놀라버린 거예요.



그러면 나는 주님의 현실에 무늬로서 창덕궁 그림자 속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그게 구원이라니까. 주님의 현실에 잠입된 거예요. 그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첩자를 보냈고 그 첩자를 겨냥해서, 그게 마귀죠, 마귀를 심어놓고 마귀를 적출……, 이게 어려운 단어인데 뽑아내는 것, 화학공정에 나오는 용어인데 적출 또는 추출하는 거예요, 뽑아내는 과정에서 율법과 죄를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의 경우에 무슨 착한 일을 한다, 기도를 한다, 금식을 한다 할 때 우리를 어느 기계에 걸어버립니까? “주여, 금식을 하라고 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가 지시하는 것이 그거였어? 아닌데?” 율법에 두 가지가 있어요.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정신 차려서 들으세요. 뭐냐 하면, “……하면 선하다.” 하는 것이 있고, “……하면 죄가 된다.”가 있지요. 둘 다 못 지켜요. 우리가 둘 다 못 지킵니다. 선을 못 지키기에 죄가 되고 제대로 죄에 대해서 죄지을 줄 몰라서 죄가 돼요.



이게 정말 어려운 거예요. 간음죄를 알려면 간음해서는 간음죄를 몰라요. 십자가를 알 때 평소에 밥 먹는 것도 간음죄와 엮여져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엮여져 있어요. 죄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죄와 율법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죄와 율법을 통해서 여기서 금이 가요. 금이 가게 되면 이 안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사랑이 와요. 용서가 온다고요.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죄란 뭐다? 사랑을 모르는 모든 것이 뭐가 됩니까? 죄가 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 하면 여러분 머리가 팍팍 돌아간다고요. “그러면 목사님, 사랑을 알면 죄가 아니겠네요?” 이러거든요.



사랑은 죄를 가르고 돌출 될 때만 나오지 사랑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욕망의 대상이에요. “나는 주님의 사랑을 갖고 싶어요.” 이것은 자기 욕망의 화신이 된 것이지 그런다고 사랑 주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몰라, 몰라, 그냥 죄 지으세요. 죄 지으면, ‘아, 이게 죄구나.’ 느껴지면 그게 사랑이라니까요? 얼마나 사랑을 알았으면, “주여,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오겠어요? 사랑은 없어요. 없는데 죄를 깨닫는 순간 동반해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죄야.”라고 지적해 주는, 그걸 아무나 지적해주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지적해 주는 거예요. 귤 잡숫지요. 그거 죄거든요. 귤 가지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가보세요. 이게 왜 죄인지. ‘내가 여기서 박테리아를 묻혔나?’ 박테리아 전염병을 옮기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은 기존의 인간들의 민주주의제도 하에서 나온 이데올로기, 하나의 사상이거든요.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 이것만 하고 좀 쉬겠습니다.



하도 고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내가 지금 복잡한데요. “남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전염병이 일면 안 됩니다.” “전염병이 일면 왜 안 됩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죽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에요. “왜 죽으면 안 되는데요?” 이 문제, 이 죽음문제 만큼은 인간들이 말하는 전체, 전체 내에서는 예외에 해당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예외, 전체 바깥에 있는 요소를 인간의 의사를 묻지 않고 그 전체 중심에다 심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예수님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까지 포함해서 발언을 하는데 인간의 언어체계에서는 어쨌든지 저쨌든지 살고보자는 것이 진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을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십자가 지면 행복합니까?”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죽은 마당에 행복이 왜 있어요, 죽은 마당에. 차라리 이사야처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사 6:5) 이렇게 말해야 돼요. 이번 강의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물, 나를 앞에 두지 말고 어디에 두라? 나는 제일 마지막에 등장해요. 진짜 나,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 낸 작품의 나는 살아가면서 그게 마지막에 등장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라고.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세계는 사실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저쪽에서 요구하는 세계에요.



알튀세르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주체라 하는 것은 이 조직사회가 호명해 줄 때 비로소 내가 누구라는 것이 규정이 된다는 겁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에 장그래라는 사람이 있잖아요. 장그래 라는 사람이 바둑을 두지요.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바둑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잘 모르는데 제가 바둑의 세계에 대해서 조금은 압니다. 바둑 둘 때 1초 만에 두기 때문에 조금은 알아요. 바둑세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처음에 한 수를 놓잖아요. 그 다음수를 놓을 때는 이미 놓아진 것과 연계체제에 들어갑니다. 체계가 잡혀서 놓아요.



그러면 처음 한 수의 가치와 두 번째 수의 가치가 달라져요. 세 번째 수를 놓게 되면 1번, 2번, 3번의 수를 포괄해서 놓는 겁니다. 마지막 수가 앞에 놓인 모든 수를 책임져야 될 게임이에요. 이 말을 조직사회로 전환시키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사적인 자기만의 독자적인 현실은 이것이 남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미생 드라마의 주제가 뭐냐 하면, “장그래야, 네가 소원이 무엇인고?” 오차장이 물을 때 이렇게 답변합니다. “저는 다른 것 바라지 않습니다. 정규직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같이 일할 수만 있다면.”



이게 무슨 사상이냐 하면, 이게 바로 ‘우리’ ‘우리교회’라고 할 때 그 ‘우리’에요. 이게 바로 레위지파가 폭을 가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폭을 가지면 안 되거든요. 이스라엘은 쥐포가 되어야지 폭을 가지면 안돼요. 폭을 가지는 그것이 자기 구원을 방해하는 본인의 첩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열 두 제자의 운명은 베드로? 아니에요. 요한에게도 달린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달렸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가룟유다에게서 운명이 결정됩니다. 가룟유다가 배반하니까, 카드게임에서 카드 한 장 빼버리니까 예수님 세계가 다 무너지지요.



제자들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주일 낮에 못 부르는 노래지만 그런 노래했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간다고 해놓고 막상 앞에 홍해가 있고 뒤에서는 애굽군대가 따라오니까 기껏 대안이 뭐냐? 다시 내 본래의 자리로, 애굽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민수기에 열 번 나옵니다. 이것이 중요한데 열 번이 나와요.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김광진이 부른 <편지>라는 노래의 앞대목이에요. “억지 노력으로 인연을 거슬러 괴롭히지는 않겠소.” 그 다음 이런 내용이 막 나옵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걸로 끝나야 될 것인데 그 다음에 또 뭡니까? 자기가 돌아갈 자리가 또 따로 있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꼼수에요? 이게 무슨 꼼수입니까? 열 두 제자가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어디로 갔어요? 어디로 갔습니까? 그 간 장소가. 고기 잡으러 갔잖아요. 이게 무슨 꼼수입니까?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제자들은 합창을 했겠지요.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주께서 부활하셔서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지요. 웬 아저씨가 자꾸 기어 붙는기라. “와 아저씨가 자꾸 기어붙노?” 하니까 나중에 눈을 뜨는 거예요. 눈을 뜨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한자말로 두 자로 눈 뜨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개안(開眼)’이지요. 개안(開眼). 첩자가 나를 개안케 하는 겁니다. 내 속에서 죄가 비로소 속에서 나를 면제시키는 거예요. 주께서 내 죄를 지적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눈이 감긴 채 나만의 현실을 주장하면서 부질없는 지옥으로 갔을 거예요.



뒤늦게 부자가 지옥 가서 개안해 보니 뭐합니까? 뜨거운데. 너무나 안타까워서 동생들 걱정해 가지고 “동생 다섯이 아직 이곳에 안 왔는데 거지 나사로를 내 집에 보내시면 안 되겠습니까?”(눅 16:28) 말씀으로 개안되지 아니하면 개안된 그것이 또 자신의 폭이 되고 자기만의 독자적인 현실이 되기 때문에 그런 구원은 없는 것이거든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것이 증명되었으니까 선지자의 말씀 그 앞에서 눈 뜨지 아니하면 그들은 구원 없다. 식사하러 갑시다.

2015겨울수련회 5강



시작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율법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자는 죽는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죽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안 지킬 경우에만 죽어야 되는데 민수기에는 율법과 상관없이 죽는 일들이 있어요. 율법 바깥에서 죽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 안에서 죽음을 규명하려고 “율법 지키면 안 죽지요? 율법 안 지키면 죽으니까 율법 지키면 안 죽지요?”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율법 외의 어떤 상황을 줘버리면 율법과 상관없는데 죽는 일이 벌어지고 마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봤던 고라 자손이 모세에게 대들다가 땅이 갈라져서 죽는 그 죽음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죽는다는 것을 율법에서만 하지 말고 율법 바깥에서도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왜 죽고 사느냐 하는 그 문제를 율법 안에서만 거론했느냐 하면, 이 율법이 바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기능으로 작용하거든요. 제사법도 율법에 포함되니까 이 제사법에서 죽을 자가 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이 범위가 어디까지냐 하면, 율법 바깥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율법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걸 살릴 수 있다는 그 기능이 율법 안에 들어 있어요.



그런데 왜 사람들은 율법을 가지고 율법 지키면 살고 율법 안 지키면 죽는다고 왜 그렇게 좁게 생각했는가? 그것은 율법은 말씀에 의해서 율법을 줬는데 사람들은 뭘 보느냐 하면, 율법을 ‘말’로 본 겁니다. 말씀이 아니고 말로 본 거예요. 뭐냐 하면, 지시와 명령으로 본 겁니다. 이것은 오해를 한 거예요. 지시와 명령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따르면 안 죽고 안 따르면 죽겠지’라고 생각한 겁니다. 말씀의 범위는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것을 언어로 번역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번역하는 순간 인간이 이미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말씀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말의 세계를 능가해요. 죽고 사는 것이 내 손에 달렸다는 것을 하나님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네 손에 달린 것이 아니고 너는 원래 죽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혹시 네가 죽는 일이 있더라도 말은 너를 살리지 못하지만 말씀은 너를 살려주는 겁니다. 죽고 사는 그 기능을 하는 지파가 레위지파고 레위지파의 중심은 거기 누가 있는가? 제사장이 거기 있습니다.



자, 방금 이야기한 율법의 기능을 말로 이해하는데, 지시로 이해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러면 말씀으로 이해하는 그 범위까지 우리가 우리말로써 파악하면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게 파악이 될 것 같으면 말이 되지 그것이 말씀이 아니거든요. 그렇잖아요. 우리 인간이 파악한다는 그 한계, 우리는 말씀의 영역까지 갈 수가 없어요. 우리가 말의 영역을 넓혀서 아무리 말씀까지 도달해도 말씀은 또 하나의 우리가 지키고 안 지키고의 범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황을 유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껏해야 말 속에 갇혀 있지 말씀에까지 진척할 수가 없어요.



이게 언어가 갖고 있는 한계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요? 해안선이 없는데 해안선을 지도에 그리면 그걸 가위로 오려올 수 있다고요. 그만큼 우리는 곡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말이 아니고 말씀 밖에서 일어난 죽음 사건이 어떤 사건이 있는지를 민수기 25장을 봅시다. “목사님은 강의하면서 1장부터 차근차근 해야지 붕붕 뛰고 그러십니까?” 하는데 1장부터 차근차근 하면 1시간만 하면 끝나요. 중요한 것은 백날 봐도 이런 깊이를 모르면 성경을 우리가 말씀이 아니고 말로 곡해하는 이상은 소용없는 거거든요.



1절부터 보니까,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그래서 9절에 보니까,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명이었더라.” 2만 4천명이 죽었어요. 이것은 바로 바깥에서, 율법 말고 바깥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어요. 자기들이 어떤 장벽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겁니다.



그 장벽이 뭐냐 하면, 보호해주는 장벽입니다. 이 장벽은 바로 제사장중심, 제사장제도지요. 제사중심의 제도입니다. 죽어 마땅한 것을 제사제도로 말미암아 매일같이 반복해서 살려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장벽은 눈에 안 보이니까 바깥의, 이 장벽을 거쳐서 이 바깥에 있는 우상 숭배하는 여인들과 음행을 했어요. 이것은 그 사람들이 무엇을 그냥 비켜간 것이 돼요? 그동안 우리를 지켜주는 장벽, 제사장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식으로 행동을 한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음행을 했구나.”하고 죽이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이 죽음을 다시 장벽 안으로 끌어 당겨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영역이 네가 생각한 죄를 더 넘어선 죄까지 처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놓고 ‘아, 죄를 지었구나. 용서받기 위해서 뭘 하지?’ 두리번거린다는 자체가 이것이 그 자체 안에 갇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제가 전 시간 끝날 즈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했지요.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죄라는 것은 십자가와 1:1이 될 때 그게 죄인데 십자가의 용서를 충분히 드러내는 죄는 십자가의 저주를 받는 그 상황밖에 없어요. 예수님만이 죄를 알고 예수님만이 용서를 알아요.



그런데 우리는 본인이 이걸 죄라고 여기고 뭘 갖다 대느냐 하면, 십자가를 갖다 대는데 이것은 낭비가 너무 심합니다. 뷔페에서 음식을 너무 많이 가져왔어요. 내 죄지은 것보다 용서가 남아돌아. 그래서 이왕 죄 지은 것 좀 더 짓고 싶어. 왜, 맞추려고. 아니 아니되오. 그럴 수 없거든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우리가 용서의 양만큼 채울 수 없습니다. 그것이 로마서에서 우리를 의인되게 했다는 의의 분량이에요. 죄 지은 것 보다 의가 더 많아요. 차량 사고 한 대 났는데 견인차가 열대가 오는 거예요. 차량 사고가 열 대가 난 것이 아닌데도 견인차는 열대나 오는 겁니다. 과잉보호입니다.



이 과잉보호가 우리한테는 좀 귀찮고 낭비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 과잉보호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 마지막 요한계시록에서 세상이 불바다 될 때 그 때는 딴 소리 해요. “주님,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유황불까지 내려치십니까? 지옥을 만들었더라도 한 5년간 가두었다가 ‘이제 정신 차렸지?’ 하고 빼주면 되는데 영원한 지옥, 한 번 가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영원한 지옥에 넣어버리면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것은 심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차라리 심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죄 지은 것보다 더 많은 용서를 해주신 그것도 우리는 심하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주여, 넘치는 용서를 주셨습니다. 이 넘치는 용서를 모르는 사람은 이 용서에 합치되는, 그 용서에 대해서 모독하는데 대한 징벌을 내려도 마땅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그것이 히브리서에 나오는데요. 어린양의 피를 밟고 모독한 죄는 천지가 흔들려도 모자란다(히 10:29)고 되어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모독한 죄. 이건희 회장이 어떻고 정주영회장이 어떻고 해도 예수 사랑하지 않고 예수 안 믿는 죄는 그들의 많은 재산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복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않은 다른 사건을 통해서 율법과 관련 없는 죽음 사건을 만들어놓고 다시 그 안으로 들여놓는 것은 이 제사장제도의 보호의 취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이라는 것은 죄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죄를 더 양산시킴으로 말미암아 보호책이 얼마나 넉넉한 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네가 어떤 보호책 속에 놓여 있는 가의 은혜를 날마다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죄를 지어서 죽음이 아니고 그 자체가 죽음이 되거든요. 그러면 죽음이 뭐냐 하면, 죽음이 필연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 제도의 보호에 의해서 살게 되지요. 이렇게 살게 되면 이 삶은 우연이 돼요. 우리가 산다는 것이 우연입니다. 그걸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죽어 마땅한데 용서해줬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 말 맞아요. 이 사는 게 우연의 산물이에요. 그냥 보내셔도 되는데 또 살려주시고, 또 살려주시고. 이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것을 자랑할게 아니라 어떤 원리에 의해서 계속 죽어 마땅한 것이 계속 살려 내심의 은혜를 받는가를 늘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 보호 장치를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죽어야 마땅한데……, 왜냐하면 하나님 만나면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면 죽습니다. 제가 내린 공식이 아니에요. 제가 내린 원리가 아니고 성경의 원리에요. 누구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면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사는 것처럼 야곱의 후손들도 제사제도에 의해서 사는 거예요. 누구하나 대신 반복적으로 죽어나감으로서 사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이 필연이고 삶이 우연이라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뭐냐 하면, 율법을 주신 이유가 이 공식을 확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율법에서 우리를 존재로 만들어놓고 이걸 개방해 버려요.



개방이란 말은 현대 윤리학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향하여 개방된 의식을 가져라.” 하지요. 그 개방을 말하는 겁니다. 율법을 이야기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해서 그 다음부터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이웃이 등장합니다. 그러 의미에서 모든 범죄는 혼자서 짓는 범죄가 아니고 타인과의 연관성에서 범죄가 발생되는 거지요. 타인과의 연관성에서.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에서 혼자서 지갑 꿍치는 연습 한다고 해서 도둑질이 아니거든요. 뭡니까? 남의 지갑, 남의 재산을 취할 때 도둑질이 되지요. 살인죄가 타인을 죽일 때 되거든요.



그러면 타인에게 자신을 개방하게 돼요. 그 때부터 존재기 때문에 드디어 존재의 발작을 시작합니다. 말씀을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말로, 지시로 이해해요. 그러면 타인이 왔을 때 우리는 동정심을 발휘하고 속에 장착되어 있는 모든 양심적인 것을 다 발휘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여, 이 정도로 내가 저 사람을 동정하고 구제했습니다.” 소위 바리새인처럼, 내가 어떻게 했습니다, 도와줬습니다, 없는 돈 내서 저 사람의 사업자금 댔습니다, 30억 부도나서 지금 쫓겨 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할 수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연에서 도로 필연으로 돌아가면서 사람은 ‘내가 여기 존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내가 착한 일로 해서 다시 나는 살아도 마땅하고 더 살고 싶다. 나는 살아 있는 나니까 살아 있는 나를 내가 책임져서 더 살고 싶다.’ 하면서 여기서 무엇을 놓치고 무엇이 빠져 있는가를 보게 하는 겁니다. 사람이 율법대로 바르게 살게 되면 죽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아, 이렇게 착하다니. 난 이제 죽어야 해.’ 이런 생각이 듭니까? ‘그래, 이 땅에서 쓸모 있는 인간은 나 밖에 없어.’ 점점 더 살아야 된다는 근거가 자꾸 마련되잖아요. 근거가 마련된다고요.



코미디에 이런 게 있어요. 형하고 동생하고 싸우는데 형은 백수고 동생은 집안 일으켜 보려고 그렇게 애를 써요. 형은 자꾸 말썽을 일으키거든요. 병든 아버지는 침상에 누워있고. 동생이 화가 나서 “형, 자꾸 놀고먹기나 하려거든 형은 차라리 죽어버려! 그래야 가정 꼴이 된다.” 동생이 화가 나서 그 말을 하고 나가니까 형이 “아버지, 나갑시다.” 아버지보고 이야기한 것이 아닌데. 어쨌든지 붙들고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뭘 놓쳤습니까? 너 같은 인간, 너 같은 죄인을 내가 살려준다는 그것을 우리가 율법이 개방되고부터 “야, 나도 율법 지킬 수 있네,”라는 가능성을 발휘하는 거예요. 윤리 도덕을 발휘하게 됩니다.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부러 이렇게 율법을 줘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존재의 가치를 유지하려고 하게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어요. 그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이건 결혼한 사람에게는 아주 쉬운 예에요. 뭐냐 하면, 들어보면 이해됩니다. 부부싸움을 하는데 사소한 일 가지고 싸우지요. 싸우다보면 점점 말이 격해져요. “당신 시가(媤家)는 다 그렇더라.” 가만있는 시가집까지 이야기 나오니까 남자가 화가 나서 홧김에 좀 쳤다 합시다. 성질나서 한 방 그냥 툭 친 거예요.



그때부터 부부싸움의 화제가 어떤 문제꺼리가 화제가 아니고 “왜 때리는데?”부터 시작해요. 주제가 바뀌어요. 왜 때리는데? 이게 왜 때리느냐에 대한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나를 때려서 죽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 뜻이거든요. “아니, 그게 아니고. 당신이…….” 그래도 여자는 듣지도 않아요. “왜 때렸는데?” “그게 아니고 앞에 그 일이…….” 앞은 필요 없어요. 왜 때렸느냐고. 내가 네 손에 죽을 인간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람은 이상하게 자살하고 싶어도요 물에 빠져 죽는 경우는 있지만 강도에게 맞아죽고 싶어서 그런 방법을 쓰는 경우는 없어요.



자기 죽음에 고이 가치를 부여하려고 해요. 자기 죽음조차도. 죽어도 내가 죽는데 네가 뭔데 나를 죽이느냐는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진짜 때렸다고 하고 한 방 더 때렸어요. 그 때부터 그 여자는 묵언수행의 도를 닦습니다. 묵언수행의 도를 닦아요. 말을 안 해버려요. 보따리 싸서 집 나가버려요. 도인 되는 거지요. 여자들이 도 닦는 방법은 쉬워요. 한 두 방만 맞으면 돼요. 말이 안 된다니까요.



아무리 바르게 설득하고 해도 죽음 앞에서 인간은 화내게 되어 있습니다. 남편이 자기를 때렸지요. 만약에 율법 앞에서는 주님이 자기를 때렸더라도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묵언수행에 들어갑니다. “주님이 나를 때렸어요? 나는 주님 안 믿어요.” 이렇게 되어버리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면서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얼굴을 도려내버립니다. 타인의 얼굴을 도려내요. 여러분이 관광지에 가보면 얼굴이 파인채로 사진 찍으라고 만들어놓은 마도로스가 폼 잡고 있는 형상들이 있지요. 날개달린 천사도 있어서 거기 서서 사진 찍으면 천사처럼 나오잖아요. 통영에 가면 그게 있어요.



율법에서 내가 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고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얼굴을 도려내게 되면 얼굴 없는 그 분이 바로 주님이에요. 이게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누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 할 때 주님이 주신 거예요. 우리는 봉사를 하고 돕더라도 골라잡아서 도와요.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이 전도를 해도 꼭 예쁜 여자만 골라서 전도해요. 못생긴 아가씨는 전도대상에서 누락이 되어버립니다. 왜? 못생긴 것은 천국 갈 자격도 안 된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생각하는 그 말씀의 범위를 모르고 꼭 말로, 내가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착해질 수 있고 선해질 수 있고 성령 받았으니까 말씀 지킬 수 있다는 자기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조치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얼굴 없는 실재로 등장하지요. 그렇게 해서 그 얼굴 없는 실재를 통해서 너의 모든 윤리가 결국은 너의 윤리성에 의해서 소외된 자가 바로 나라는 겁니다. 너의 선택에 의해서 선택받지 못하고 간택 받지 못하는 대상으로 쫓겨난 대상이 바로 주님이에요.



그렇다면 율법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장중심의 제사제도지요. 그러면 그 점을 살피기 위해서 민수기 6장을 보겠습니다. 민수기 5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에 율법이 주어진 이유가 등장해요. 먼저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만일 어떤 사람의 아내가 실행하여 남편에게 범죄하여 타인과 정교를 하였으나 그 남편의 눈에 숨겨 드러나지 아니하였고 그 여자의 더러워진 일에 증인도 없고 그가 잡히지도 아니하였어도.” 라고 하는데 흔히 말하는 음행이지요. 이어서 16절을 보면, “제사장은 그 여인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여호와 앞에 세우고 토기에 거룩한 물을 담고 성막 바닥의 티끌을 취하여 물에 넣고 여인을 여호와 앞에 세우고 그 머리를 풀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소제물 곧 의심의 소제물을 그 두 손에 두고 제사장은 저주가 되게 할 쓴 물을 자기 손에 들고.” 계속 복잡하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이게 뭐냐 하면,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제사장의 가치를 회복하는 조로 율법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아까 민수기 25장에서 음행한 것은 그들이 음행하지 않아야 될 자리에서 음행한 거예요. 제사장 바깥에서, 보호벽 바깥에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죽음조차 이기는 그 보호막이 있거든요. 인간의 윤리도덕으로 나가버리면 그 보호막이 필요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바리새인처럼 실컷 착한일 하고 어디로 갑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나는 이 말씀 지킬 수 있어. 나는 음행 안할 수 있고, 거짓말도 안 할 수 있고, 살인도 안 할 수가 있어.’ 이렇게 되어버리거든요.



그러면 뭐가 빠집니까? 제사장 필요 없네요. 보호막이 필요 없네요. 장벽이 필요 없네요. 자기가 그렇게 착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장벽에 낙서하는 거예요. 장벽에 낙서하지 마세요. 주님의 피에다 낙서하는 게 아니에요. “이번 일을 통해서 내가 전적으로 죄인입니다.” 그렇게 아는 것이지 나의 착함을 거기에 기입하는 것이 아니에요. ‘1월 12일, 나는 드디어 착한 일을 했다.’ 거기에다 일기장 쓰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일기 쓰는 분들은 나중에 소설 내려면 쓰든지 안 그러면 쓸 필요 없어요. 그건 자기예찬이 되거든요.



여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은 제사장이 보는 앞에서 그것이 정화가 돼요. 네 죄가 아니고 내가 감당할 죄를 네가 저지른 게 돼요. 그리고 성경을 보면 희한한 것이, 여자가 범죄한 것은 문제를 삼아도 남자가 범죄한 것은 문제 안 삼아요. 왜냐하면 남자는 일단 결혼하면 되니까. 그 이유가 레위기 20장에 나옵니다. 11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누구든지 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즉 둘 다 반드시 죽일찌니.” 12절에, “누구든지 그 자부와 동침하거든 둘 다 반드시 죽일찌니.”



이 20장 대목을 보면 갑자기 애들에게는 보여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막 들어요. 너무 외설적이죠.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찌니.” 동성애자는 죽이라는 말이거든요. “남자가 짐승과 교합하면 반드시 죽이고 너희는 그 짐승도 죽일 것이며 여자가 짐승에게 가까이 하여 교합하거든 너는 여자와 짐승을 죽이되 이들을 반드시 죽일찌니.” 미쳤어요. 짐승과 왜 하는지. “누구든지 그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을 취하여 그 여자의 하체를 보고 여자는 그 남자의 하체를 보면 부끄러운 일이라.”(17) 여기 죽 나오거든요. “누구든지 백숙모와 동침하면 그 백숙부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그 죄를 당하여 무자히 죽으리라.”(20) 백숙모, 이젠 족보까지 계산해야 돼요.



이게 뭐냐 하면, ‘무자히 죽으리라.’ 하는데 여인의 임무는 자식생산에 있습니다. 성경은 바람 피우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에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바람피운 것을 문제 삼지 않아요. 자식생산을 하나님이 지켜보는데서 해야 되지 그 바깥에서 하게 되면 그 자식이 죄악 된 자식인 것을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지금 무슨 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말이 앞뒤가 잘 안 맞는 것 같지요? 모든 이스라엘 자식은 육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자체가 범죄에서 태어난 거예요. 범죄에서 태어났다는 규정을 받아야 제사에 의한 보호를 받고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하체를 보지 말라는 말은 자식생산이라는 그 체제에 대해서 네가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여인은 자식 낳는 기계지요. 여인을 통해서 뭘 낳아야 돼요? 자식을 낳아야 되겠지요. 그러면 그 자식은 어떤 자식입니까? 죄악된 자식이지요. 그런데 죄악된 자식을 제사장 보는 앞에서, 율법 앞에서 낳아줘야 그게 율법 안에서 죄악이기 때문에 그 바쳐진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전환되는 거예요. 그래서 ‘무자하다’고 되어 있어요. 이거 참 어려운 것인데 해 봅시다.



부부간에 음행을 하지 말라고 할 때 ‘아, 다른 유부녀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말라, 는 뜻이구나.’ 예, 그런 뜻 맞습니다. 맞는데 그렇게 자식을 낳아버리면 자식의 계보가 혼란스러워요. 종을 뭐로 바꾼다고 했습니까? 정실 아들로 바꿔야 되잖아요. 종의 자식은 지옥가고 정실 자식만 구원받기 때문에 여기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없는 자식만이 구원받거든요. 종의 자식은 뭘 통과해야 돼요? 종의 자식이 없는 것을 통과해서 그야말로 구원되는 자식이 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저 혼자 해 볼게요.



종의 자식이 정실부인 될 때는 반드시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없는 자식이 있어서 그래야 구원받는 겁니다. 없는 자식이 되려면 없음을 있음으로 바꾸는 레위지파의 제사제도가 필수적이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레위지파는 그들의 저주를 대신 대변해주는 담당반, 전문분야기 때문에 그래요. 거룩과 비거룩 사이에서 하나의 선으로 있으니까. 그런데 이 구조가 있으려면 자식이 종이냐 아니냐, 종이냐 정실이냐, 그걸 따지는 범위 내에 있어야 되는데 음행이란 그 범위 밖에 있으니까 이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그 자체가 잘라져버린 거예요.



“백숙모와 성관계 하지 말라.” 이 말은 백숙모의 남편이 따로 있거든요. 누굽니까? 백숙부잖아요. 쉽지요. 백숙모와 백숙부 사이에서 누가 나와요? 자식이 나오고 그 자식이 필히 어떤 자식이다?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 될 때 비록 죄인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자식이기 때문에 어디로 옮겨갑니까? 죄가 제사에 의해서 영생을 얻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모든 자식은 육에 속했기 때문에 다 죽어요. 이것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일반 민족도 마찬가지인데 이스라엘 백성은 특혜가 있어요.



아까 말한 장벽, 보호막이 있어요. 너희들 자식은 내가 책임지고 어떻게 한다? ‘영생 줄게.’ 하고 보장한 것이 있어요. 그게 율법 안에 있는 제사제도입니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어떤 부부가 있는데 부부 사이에 관계를 했다. 그러면 부부사이에 관계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음행이 돼요. 부부사이의 관계가 간음이 된다니까요? 왜 그런가하면, 부부사이라도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전부 간음, 음행이 된다고요. “목사님, 그건 너무 심하다. 참고 참다보니 너무 심한데 한 소리 해야겠습니다. 부부사이에서 무슨 간음? 부부사이에서 서로 사랑해서 자식 낳았으면 예쁜 자식인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합니까?” 하시는데 여러분이 레위기를 보세요.



아들이든 딸이든, 아들을 낳으면 33일 동안 더럽고 딸을 낳으면 66일 동안 더러워요.(레 12:4,5) 죄악 된 자식이에요. “아니, 부부가 사랑해서 낳았는데요?” 부부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사랑이 없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를 사랑이라고 한다? 다 잊어버렸지요. 다시 일깨워드립니다. 사랑이란, (♬사랑이란, 사랑이란) 사랑이란, 죄를 알 때만 사랑입니다. 그 금에서 나와요. 좋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전부 연세들이 어느 정도 되었고 또 아예 어린애들이 있고 그 중간쯤은 없으니까 마음 놓고 19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만.



일일이 조사는 안 해봤습니다만 3년 동안 애를 낳고 그 동안 임신을 핑계로 각방 쓰던 버릇이 있어서 그 다음부터는 각방 써요. 왜냐하면 사랑해 봤자 하나가 안 됨을 알기 때문에, 사랑 해봤자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냥 우연히 잠을 자다가 우연히 아내의 손이 스쳐도 남편은 아주 민감한 반응을 일으켜서 홱 돌아섭니다. 젊을 때는 사랑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성관계를 안 하고 또 늙어서는 힘이 없어서 못해. 그걸 가지고 경상도 말로 “디다.” 이게 뭐냐 하면, 그냥 못 헤어져서 사는 거예요. 사랑이 아니고 우정의 무대, 우정으로 사는 거예요.



언제 사랑이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그러니까 제사장의 장벽을 통과하면서 “주여, 세상에, 이런 아내(남편)를 주셨다니.” 그때 감사하지요. 감사하는데 상대방이 그걸 또 오해해요. ‘네가 나한테 감사하는구나.’ 너한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감사해요, 주님한테. 둘 다가 하나 될 수 없다는 말은 각자 자기 현실을 따로 챙기면서 그냥 동거하는 거예요. 이게 팩트에요. 이게 현실입니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사랑이라 하는 것이 주님의 장벽 없이 나의 존재를 가지고 주님의 원하는 사랑과 소망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자식을 낳았잖아요. 자식은 하나님이 손대지 아니하면 그 자식 구원 못 받습니다. 그 원인자가 누구냐? 바로 우리 자신이 원인자에요. 그런데 고마운 것은 바로 사랑도 소망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작업, 구원 작업에 우리를 집어넣어줬다는 사실이에요. 집어넣어 준 거예요. 못났기 때문에,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기 욕구와 욕망만 챙기는 그것 때문에 우리를 집어넣어주니까 이게 감사한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비로소 사랑이라 하고 이것을 가지고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너는 지금 누구와 만나고 있고 누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가를 묻는 거예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들었던 게 뭐냐 하면, 특히 ‘새 가정 만들기’ ‘좋은 아버지 되기’ 그런 사기에 말려들고 속아 넘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좋은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저 회개하는 죄인뿐이지. 최고 좋은 아버지는 날마다 주 앞에서 회개하고 자식들에게, 가족들에게 감사하는 아버지, 그게 최고의 아버지입니다.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것은 주께서 하실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가진 자식을 맡는 하나의 통과용으로 하나의 인큐베이터로 우리를 사용하고 우리를 하나의 과정 속으로 집어넣는 것, 그럴 때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 그 보호하는 것이, 율법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율법을 뭘 로 봤습니까? 말로 이해한 거예요. 자기가 이참에 말씀 지키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뽐내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새로운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뭔가가 보호하고 있다는 것, 용서라는 이름의 보호가 있는데 그 보호막은 우리가 죄짓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과도한 용서로 이미 주어진 겁니다. 여인에게 향수병은 소중하지만 그 향수병마저 주님 발 앞에 깰 때 그 과잉되는 용서를 그 옆에 있는 바리새인들은 몰랐던 거예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예수님,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점점 늘여버려요.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흔 번의 일곱 번 용서하라.” 그러면 다 합해서 몇 번이에요? 490번. 베드로는 악착같이 해서 490번 용서했을 거예요. “또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일흔 번의 일흔 번의 일곱 번”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넘쳐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그 은혜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닫지를 못해요.



율법이라는 것, 그것은 딱 한 가지만 아세요. 율법이라는 것은 ‘내가 나가 되는데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 율법입니다. ‘내가 율법 지키고 난 뒤에 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 될까?’라는 것을 상상한 그것이 실패로 끝나게 하시는 것이 율법이에요. 율법 안에 뭐가 있습니까? 과잉된 제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제사에 의해서 우리는 졸지에 보호받지 아니하면, 용서받지 않으면 구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레위기 20장 같은 경우에는 설교하기가 정말 곤란해요. 본문 읽는 것조차 애들 앞에서는 숨기고 싶어요. 주께서 너무 심한, 선데이 서울 기사를 써도 너무 심하게 이야기했다 싶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뭐가 남이 있느냐 하면, 우리 속에, ‘저는 점잖은 것만 보고 착한 것만 보고 그냥 이슬이나 먹고, ‘아침 이슬’ 말고 이슬만 먹고 사는 그 정도 되는 수준입니다.’라는 것을 아직도 견지하기 때문에 우리의 밑바닥까지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강력한 저지를 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주께서 말씀을 줄 때는요,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는 그 죄인을 겨냥해서 말씀을 줬는데 우리는 그 십자가 안에 있지 않고 점잖은 나에게 주면서 “백숙모의 하체를 보지 말라.”고 하니까 “이것은 저에게는 너무나 심한 욕설 같습니다.” 이렇게 반기를 드는 그것, 그것은 자기 자리 아닙니다. 더 떨어져야 돼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지요. 그 날개가 대한항공 날개지요? 날개 믿다가 계속 떨어지는 거예요. 날개를 잘라버리면 떨어질 것도 없는데. 우리는 계속 가능성, 내가 더 착해질 수 있는 가능성의 날개를 다니까 주께서는 날개를 자꾸 불에 태워버리는 거예요.



제발 도 닦지 마세요. 도 닦을 생각도 하지 마세요. 처음부터 여러분들은 이미 과잉으로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필연이 아니고 이것은 우연입니다. 하나님은 그 우연한 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피에 주목하라고 우리를 아직도 매일같이 살게 하시는 겁니다. 진짜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를 살린 그 무엇, 더러운 인간을 구원받게 해주신 그 것이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는 겁니다. 레위지파의 제사장제도, 그것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것이 예수 안에서의 새로운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제는 백숙모가 되었든 백숙부가 되었든 뭐든지 율법은 다 오세요. 다 받아주세요. 모든 말씀을 자유롭게 다 받으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과잉으로 주신, 너무 넘치게 주신,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지요, 넘치게 주신 그 은혜의 풍성함 속에서 헤엄치시기 바랍니다. ‘이만큼 잘못했는데 이런 큰 은혜를 주셨구나.’



이제 교재를 봅시다. 어떤 분이 “목사님, 교재는 언제 합니까?” 하는데 벌써 많이 했어요. 이 교재의 내용이요, 처음에는 좀 알 것도 같지요? ‘진리와 몰인식’(p1) 하면 좀 어렵지요? 그 다음에 ‘3. 두 가지 시선이 만나는 곳에 진리는 있음’(p2) 하면 이것은 포기를 해버립니다. 무슨 말인지를 모르지요. 저 뒤에 가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두 가지 시선이 만나는 곳에 진리가 있다는 이게 뭐냐 하면, 딱 하나만 알고 있으면 돼요. 내가 누굴 지켜보기 전에 먼저 그분이 나를 지켜본다는 응시, 그 분의 응시만 알면 돼요.



내가 그분을 관찰하기 전에 먼저 그 분이 관찰한 거예요.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분을 관찰하게 된 이유는 그분이 나를 관찰해 왔기 때문에 비로소 그 결과로서 내가 그분을 관찰하게 된 겁니다. ‘주님이 누구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할 때에 사도바울의 주체가 바뀌는 대목입니다. 사도바울의 주체가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타났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내가 여기 있으니까 존재잖아요. 존재 앞에 누가 등장했습니까? 예수님의 존재가 등장하지요. 존재가 등장하면, 사람은 자기 앞에 누가 있으면 응시하고 그 다음에 관찰하고 그 다음에 뭐합니까? 분석하고 그 다음에 사귈 것인지 말 것인지, 뒤돌아 설 것인지 계속해서 말을 걸 것인지 결정하잖아요. 이게 존재가 갖고 있는 특징이거든요.



그런데 “주여,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어요. 응시하고 관찰한 거예요. “주여, 누구십니까?(너의 정체를 밝혀라)” 이것은 평소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했던 이야기거든요.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합시다. 존재가 되면 율법을 통해서 존재가 어떻게 된다? 개방되지요. 개방이란 우리말로 뭡니까? 열림이지요. 타인에게 자기 자신을 열어서 그걸 가지고 소통하라, 작년부터인가 그 말이 유행이 되어서 그 말을 들으면 저는 소통, 소통, 굴뚝같은 느낌이 들어요. 소통하라, 소통하면 뭐가 됩니까?



서로가 차이는 있을망정 뭐는 없다? 차별은 없다는 거예요. 개코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슨 차이와 차별을 따져가지고 말장난을 하고 있어요. 일반 윤리에서. 차별이나 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란 뭐냐? 자본주의 사회란 자본이 스스로 자가 증식하는 그 체제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자가 증식이에요. 자가 증식이라는 것은 가만있는 것이 아니에요. 계속해서 돈을 벌지 아니하면 자본은 다른 노선으로 빠지는 것이 자가 증식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이 참 고생 많이 했다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젊은 분들이 그 때보다 훨씬 고생을 많이 해요.



여러분, 고생이라는 것은 육체가 힘들다고 해서 고생이 아니에요. 고생은 경쟁만 있으면 무조건 고생이에요. 경쟁 없으면 고생 없어요. 다 같이 못살면 견딜 만 해요. 그런데 하나가 뛰쳐나가면 그 다음에는 다 죽었어요. 뒤 따라간다고.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미생>이란 드라마에서 우리 김종인 권사님이 예리한 것을 포착했어요. 평소에도 예리하시지만. 그 드라마에서 안영이라는 직원이 러시아말로 통화할 때 김종인 권사님은 뭘 봤느냐 하면, 그 드라마 속에서 그 여자가 연봉이 얼마인지를 찾아내는 거예요.



연봉이 5천이에요. 연봉이 5천입니다. 미생이니 뭐니 해도 중소기업 사원들이 보면 기가 찬 거예요. 5천이 저 정도 우울하면 그럼 나는? 연봉 2천 4백인, 2천 4백도 많다, 연봉 1천 8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존재는 없어요. 없고 일단 돈으로 환원해서 돈의 가치가 평등한 세계를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네가 석사를 나왔느냐, 박사를 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백 원은 백 원이고 천원은 천원이에요. 누구 손에 있든지 간에. 세상에 이보다 더 평등한 사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얼마나 평등합니까? 인격은 날라 가고 없어요. 인격 같은 것은 없는 거예요. 돈 있으면 무조건 되는 거예요. 돈만 있으면. 우리가 지금 이런 사회에 살고 있어요. 자본이 스스로 증식되고 거기에 참여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사회에 살고 있어요. 국민소득 3만 불이라 하지만 그것은 내외간에 다 벌어서 그런 거예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내가 돈 벌면 나는 집에서 살림하지.” 하는데 도무지 그런 세계가 아니에요. 말 잘못 꺼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내가 직장 나가면 살림 한다면서 “나 설거지 잘해.” 하거든요. 그 잘하는 설거지와 빨래를 자기 집에서 하지 말고 남의 집에 가서 해서 돈을 가져와야 돼요. 왜? 자본은 자기 증식이니까. 가정주부를 하되 남의 집에 가서 가정주부를 해서 그래서 돈을 가져와야 돼요. 그냥 집에서는 뭘 해도 그걸 백수라 하지 전업주부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런 사회에 살고 있어요. 존재가 개방된다? 말은 좋지요.



사도바울에게 주님이 말합니다. “네 존재, 요새 말로는 자본주의, 그 당시는 봉건사회지요, 빠져나올 수 없는 거기서 네 존재를 빼내줄게.” 빼내주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는……, 관찰하거든요. 관찰하고 주목하거든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내가 남을 핍박하다니.” 나는 스스로 살려고 애를 썼는데, 스스로 의롭고 착하고 말씀대로 살고 여호와 잘 믿는다고 장담하고 살았는데 누구도 나를 보고 ‘네가 예수를 핍박한다.’는 주님의 낯선 응시, 내가 주님을 보는 것은 착하고 어진 분이거든요, 그래서 낯선 응시……, 전에 이야기했지요, 2미터 50쯤 공중에 떠 있으면 누구나 예수 믿는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와버리면 아무도 안 믿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미 우리는 핍박하는 그것을 우리 죄에 장착하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이 땅에 태어나기를. 사도바울은 땡 잡았어요. 그걸 남에게 알려주지 않고 우연히 자기를 찾아온 거예요. 왜냐, 평소에 응시하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왜? 창세전에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그게 디모데전서에 나옵니다. 디모데전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창세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택정함을 받았기에 나는 ‘네가 죄인 중에 괴수’(딤 전 1:15)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공식 이상하지요? 창세전에 택했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 살면서 할 수 있는 내 말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나 같은 인간도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더 이상 우리가 내 쪽에서 주님을 관찰한다든지 판단한다든지 어떻게 다뤄볼까 하는 것은 다 끝났지요. 주님이 주체가 되고 나는 주님이 내 안에 주체가 되는 거예요. 이거 하고 십분 쉽시다.



원래 십자가가 우리 바깥에서 일어난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고 난 뒤에 내 바깥에 있는 십자가가 드디어 내 안에 꽂혀버린 십자가가 된 겁니다. 꽂힐 때의 그 과정이 어떤가? 그것은 정확하게 십분 뒤에 하겠습니다.

2015겨울수련회 6강



바깥에 있는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오면서 무엇이 붕괴하느냐 하면, 그동안 내가 나를 구축했던 체계가 깨어집니다. 깨어질 때 두 가지가 깨져요. 시간이 깨지고 공간이 깨집니다. 시간 공간 이야기를 꺼내놓고 제가 걱정이 먼저 늘어져요. 시간 공간만 하게 되면 추상개념이 되어서 설명하기가 굉장히 힘들지만 그걸 알기 때문에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공간개념에 있어서는 비어 있는 공간에 내가 있다는 이것이 인간들이 생각하는 공간개념이에요. 여기 비어 있는 방이 있는데 우리들이 여기 모여 있다고 이렇게 보는 겁니다.



‘공간은 이미 정해져 있고 어떻게 우리가 채우는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가지고 뉴튼의 공간이론, 또는 칸트의 공간이론,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공간이 절대적으로 있다는 이것이 엉터리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알려지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의해서 이것이 깨져버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상상이상으로 정말 희한한 논리가 성립돼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서 이 공간을 죽 이어보니까 저쪽에 나의 미래의 모습이 보인다는 겁니다. 이것을 강의할 때마다, 설명할 때마다 참 설명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 마침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나와서 ‘옳다구나’ 싶어서 그 영화를 일부러 평하면서 거기에 동원된 물리적 이론들을 같이 실어놓았어요. 그런데 그게 더 어려워요.



그 영화도 어렵지만 거기 동원된 논리도 어려운데 거기에 상대성이론들이 죽 나와요. 공간이 비어있고 그 빈 공간에 내가 있다는 이것이 상식이 아니고, 있는 내가 공간을 새롭게 만들어요. 이걸 ‘라이프니츠 공간론’이라고 하고 이게 ‘상대성이론’인데 내가 여기 있으면 공간이 새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공간이 휘어진다는 아주 희한한 이야기를 하는데 공간이 어떻게 휘어져요? 공간이 TV화면입니까, 휘어지게? 공간이 휘어진다는 겁니다. 그런 말을 제가 한 것이 아니고 현대물리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공간이 휘어진다고.



그리고 빛은 직진으로 가기 때문에 휘어진 공간을 따라서 빛은 직선이 아니고 곡선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직진한다며? 직진한다면 직선이어야 하는데 직진한다고 해 놓고 직진하기 때문에 빛이 완전히 직구가 아니고 커브가 되는 거예요. 하여튼 공간이라는 것은 내가 있으면 그 있는 내가 공간을 새로 만들어버립니다. 이 말을 성경 해석에 적용시켜 버리면 예수님 계심에 예수님의 공간이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이것을 가지고 ‘예수 안’이라고 하고 이것이 바로 그동안 숨겨 놓았던 천국입니다.



천국은 있는데 숫자 채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천국을 스스로 예수 중심으로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만들어진 흔적을 우리에게 남기지요. 그 흔적을 어디에 남기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시간, 공간에다가 그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인터스텔라> 영화에 보면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 그리고 옛날에 나온 영화, <사랑과 영혼(ghost)>라는 영화에 보면 유령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애를 써서 알려주는지, 유령이 자꾸 애를 쓰니까 나중에 동전이 하나 움직였지요.



이것은 물리적 세계와 영적 세계의 그 접촉점을 물리적 현상으로서 설명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습니까? 성경에서는 그렇게 천사 있음을 “천사 있잖아! 천사 있다고!!” 하니까 천사가 있는 줄 알았어요? <인터스텔라>라는 그 영화에서는 서가의 책을 다른 차원에서 움직이니까 책이 툭 떨어지는 것으로 아하, 다른 차원, 5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물리학에서 인간은 따져보면 파동으로 되어 있고 세포내에도 파동이 있어서 저쪽 세계의 파동과 만남이 되면 그 파동이 우리에게 의식으로 전환되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다고 논리를 펴거든요. 그것은 과학자들이 대부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만 영화에서는 나왔어요.



예수님께서 천국이 있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남겼습니까? 흔적을 남길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물리적 환경이기 때문에 흔적을 줬지만 우리는 그것을 육으로서는 영의 세계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미세한 소리, 바람 부는 것, 엘리야에게 온갖 것을 했지만 엘리야에게는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에게 세미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지요.(왕상 19:12) 음성이 들려오면서 엘리야는 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음성 들릴 때 엘리야 옆에 우리가 서 있다면 우리가 들었겠습니까, 못 들었겠습니까? 못 들어요. 왜? 새로운 주님의 공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사울이 말을 타고 다메섹으로 내려가다가 말에서 떨어졌지요. 다른 사람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은 어떤 남성의 음성이 들린 것이 아니고 그냥 소리였다고 했지요. 우레 소리 다섯 표, 본인은 주님의 음성이었다고 한 표. 여기서 어느 것이 진리입니까? 다수가 진리지요. 그래서 물리는 진리가 될 수 없어요. 왜, 다수가 납득을 해야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에 혼자 주장하면 그것은 미쳤다고 되는 거지요. 공간은 이렇게 쉬워요. 이것도 쉬운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만든 공간은 인간으로서는 그 음성,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사람에게만 알 수 있다, 둘이 교류가 된다.



그걸로 되었는데. 되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되었다고 치고, 그 다음에 시간론 같은 경우에는 더 심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론의 경우는 이렇게 보면 돼요. 과거에서 현재로 그 다음에 미래로, 이렇게 진행되는 시간론을 갖고 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앞으로 오지 않은 것이고 현재는 바로 지금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 이렇게 시간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이 시간의식은 깨집니다. 어떻게 깨지는가 하면, 이걸 가지고 공정이라는 말을 해요. 공정이 뭐냐 하면, 과거-현재-미래가 되면 항상 과거는 원인에 해당되고 현재는 그 결과가 되거든요.



내가 알고 있는 원인과 내가 알고 있는 결과를 연결시킬 때 나오는 이것이 시간이라는 겁니다. 이게 시간이에요. 시간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주체 때문에 생기는 것이 시간인데 이게 나한테는 역사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나온 것이 간증집회지요. 기도했더니만 응답받았다는 거예요. 대표적인 잘못된 시간관입니다. 제가 어느 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기도응답은 없다고요. 기도가 없다는 말은 안했어요. 기도 응답이 없다고 했지. 기도 응답이라는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시간, 주님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기 때문에.



원인이 이쪽에 있어요. 원인이 미래에 있고 현재는 그 원인을 통해서 도출된 거지요. 그러면 이 전체가 뭐냐 하면, 이 전체가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그림자가 되고 모형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그 원인을 미래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지요. 그 때는 희미하게 봤다. 옛날에는 오늘날의 거울이 아니라 금속을 닦아서 희미했어요. 잡티도 많았고.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지만 그 때는 어떻게 본다고요? 그 때는 얼굴을 맞대는 것처럼 똑똑하게 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이미 그 미래에 의해서 다 주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걸로 끝나면 주님의 시간이 어려운 것이 없지요.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순간이 있습니다. 순간이 있어요. 순간이 있다는 말은 현재는 미래에서 주어진 것이라고 하고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순간이 순간으로 개입이 되어버리면 현재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도 쓸모없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유지가 되어야 되고 이것을 쪼그려내는 잠입으로 주께서 오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서 뭐가 날라 가느냐 하면, 과거-현재-미래라는 것은 순식간에 다 날라 가버려요. 과거가 반복되지는 않습니다. 과거는 반복되지 않는데, 같은 일은 반복되지 않는데 뭐는 반복되느냐 하면, 사건은 반복돼요.



사건이 올 때는 어떻게 옵니까? 순간으로 오겠지요. 순간으로 오면 어떻게 되는가? 알파요 오메가라, 이 전체가 순간 안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순간 속에 담긴 전체가 뭐냐 하면, 나를 있게 한 원인이 되지요.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생각하시고 신약의 사도바울의 편지들을 보시면 비로소 이해가 돼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후 12:2) 그 모든 것은 천국이라는 것은 내가 만들고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잠입하고 내 눈을 띄우는 거예요. 나에게 자극을 주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얼굴이 천사같이 되었다. 주님이 나타나셨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로마로 갈 때 주님이 곁에 서서 하는 말이, “네가 이런 것으로 겁을 내지 말라. 너는 필히 로마 가이사 앞에 서리라.” 하는 언질을 받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행 27:24)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가이사 앞에 선다는 이야기는 주께서 이미 아시잖아요. 주님의 계획이 이미 잡혀 있지요. 잡혀 있는데 왜 풍랑은 일어나서 사람 잡습니까? 지금 사도바울에게 가이사 앞에 서는 그것이 네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지금 네가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이, 네가 가이사 앞에 서던 안 서던 관계없이 이미 너는 목적 속에 포함되어 있는 거예요. 네가 목적을 달성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목적이 너를 달성한 채로 움직이고 있는데 네가 따로 “주여, 잘하겠습니다. 반듯하게 살겠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가 어떤 환란이 있더라도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 일에서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이걸 여러분 인생에다 적용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떤 직업을 선택했습니까? 어떤 직장에 다닌다든지 어떤 일을 결정했으면 그것을 여러분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여러분은 시험에 든 거예요. 여러분은 그걸 절대로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존심과 관련되어서. ‘실패하면 안 돼.’ 이런 식으로요.



앞에다 “하면 된다.” 하는 것을 걸든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래가지고. 무슨 다단계도 아니고 그런 것을 죽 붙여놓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여전히 본인의 시간관과 공간관을 유지하는 셈이 돼요. 인간의 시간은 뭐라고요? 과거가 원인이 되어서 필히 그 원인에 합당한 결과물을 내놓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내가 잘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잖아요. 사람이 늙으면 죽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죽는데 일찍부터 그걸 삽입해 버리면 이미 우리는 죽었다, 죽음을 필연으로 보고 우리가 산다는 것을 우연으로 보자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죽었다고 할 때 내가 늙어죽는 것을 걱정할 필요 없이 왜 죽어야 되며, 그 죽이시는 이유가 뭐냐를 알지요. 그게 뭐냐 하면, 살려주시기 위해서, 영생 주시기 위해서 죽이시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순간 속에 알맹이가 들어 있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자 구원파의 경우를 봅시다. 구원파의 경우를 보게 되면,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도를 아십니까?’ 그 소리하고 똑같은 소리인데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나는 1986년도 7월 14일에 구원받았다.” 한다면 그 다음 7월 15일부터는 구원을 받았으면 할 게 없어요. 구원받았으면 다 됐잖아요. 유병언이나 섬기고 그래야 됩니까? 구원파에 돈 내서 사업자금 대줘야 합니까? 어떻게 됩니까?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하고 말하는 자체가 뭐냐? 인간이 만든 시간관을 주님께서 긍정한다는 말밖에 안되거든요. “언제부터 당신이 당신의 시간을 완전히 접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돼요. ‘언제부터 앞으로 내가 몇 년 더 살 것인가? 앞으로 5년 뒤에 뭘 할 것인가?’ “아이고, 의미 없어.” “그게 의미 없다는 것을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받아야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답변하지요. “네가 뭔데 내가 그걸 너한테 알려줘? 너는 알 것 없어. 너는 너대로 하세요. 나는 내 시간대로 할 테니까.” 이렇게.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할 때 ‘언제’ 빼고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하고 묻는 자체가 존재가 존재한테 물을 질문이 아닙니다. 그런 질문을 해서는 안돼요. “너나 잘하세요.” 그렇게 해야 돼요. 구원이라는 것은 주님한테 소유되어 있지 이게 개인소유용이 아니잖아요. “당신은 언제부터 낚아 채였습니까?” 이런 식으로 묻는 것인데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사도바울은 언제부터 구원받았냐는 답변을 이렇게 합니다. “창세전부터 이미 예정되어서 구원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시간은 날라 가버리고 나의 시간은 주님의 시간의 일부로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은 내가 염려하거나 그다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아까 이야기한 것을 다시 방금 이야기한 것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사도의 경우에 날마다 주님과 함께 동행 했는데 주님의 계획이 있어요. “너는 가이사 앞에 서리라.” 이게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 목적 앞에서는 원인 결과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어요. 그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시간 끝에 뭐라고 했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이라고 했지요. 리카도의 고전경제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돈이라 하는 것은 노동의 대가로 보는 겁니다.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번다는 것은 내가 노동한 만큼 돈을 번다는 것이 고전경제학인 반면에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뭐냐 하면, 시장원리에 따라서 돈이 요구되는 노동을 해야 그게 돈이 돼요. 집에서 짚신 만든다고 하루 10시간씩 일해 봤자 시장에서 그걸 요구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돈이 안돼요. 가치가 없는 겁니다. 사람들이 일을 오래 한다고 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여러분이 직장생활 하면서 일을 많이 합니까? 아니면 자영업을 하면서 일을 많이 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직장생활에서는 꼬박꼬박 토요일과 일요일에 놉니다. 자영업 하면 본인이 노는 것이 용서가 안돼요. 교회고 뭐고 없어요. 본인이 용서가 안 된다니까.



그런데 마음고생은 어느 것이 심해요? 직장생활에서 미생이니 완생이니 그 따위 소리 하지만 자영업을 하면 고생해도 너무 좋아요. 돈이 들어오니까. 제가 자본주의 사회를 언급했습니다. 왜 언급했는가? 이번 시간에 하나님의 현실을 이야기해 봤자 이것만 이야기해버리면 우리는 그걸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자본주의 사회에 집어넣어서 ‘이런 식으로 내가 미래에 행복해야지.’ 이런 틀로 갈 가능성이 많아요. 그래서 두 개를 다 이야기한 겁니다. 이 세상은 이쪽의 세상과 도저히 소통이 되지를 않습니다. 전혀 섞일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은 뭐냐 하면, 중첩이에요. 서로 다른 질이 함께 섞이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롬 12:2)는 언질을 주시면서 주님의 세대와 이 세대가 같이 가도록, 병행하도록 조치하십니다. 그러면 그 조치한 것이 어디에 잠입되는가? 우리의 주체 내에 형성이 돼요. 형성이 되면 우리는 ‘주님 이용해서 내가 앞으로 이 세상에서 성공해야지’라고 하다가 다시 돌아서서 ‘아니야. 그럴 필요가 없어. 나는 주님만 있으면 돼. 오늘 밤에 죽으면 낙원에 가는 것이 좋아.’라고 하는 동시에 다시 돌아서서 ‘그래도 이왕 구원 받은 것 맛있는 것 사먹고 봐야지.’라고 생각하다가 ‘아이고, 재미있는 것도 다 시시하더라.’



우리 십자가마을분들 만나면요, 참 은혜로운 말들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목사님,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목사님 시키는 대로 드라마 봤는데 그것도 재미없고 청담동도 다 끝나버리고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없다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재미있는 것 생길 겁니다. 손자가 잘 되면 재미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지금 이한례 집사님은 그것도 아니랍니다.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하나도 없대요. “그러면 죽으실래요?” “아직 그것은 아니고.”



이렇게 보게 되면 이렇게 나옵니다. 시간은 뭐냐? 주님의 시간 속에 각기 다른 층들이 있다. 마치 시루떡처럼. 이 시간에는 다른 세대가 중첩되어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주체가 되어서 우리는 이 속에서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늘 이렇게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좀 더 고정되면 안 됩니까?” 고정될 수가 없어요. 흔들어줘야, 옛날의 도시락처럼 밥 넣고 고추장 넣고 흔들어줘야 맛있듯이 이렇게 해줘야 거기서 우리의 공로가 사라지고 주의 은혜로만 구원받지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 땅에 사시면서 저나 여러분이나 고생 좀 합시다. 그 고생이 딴 게 아니고 세상적인 성공과 희망을 우리 몸이 항상 방출하고 있어요. ‘네가 복음 안다고 치고 복음은 알면서 집에 돈은 떨어졌는데 네가 어떻게 할래? 복음이 돈 되는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 자꾸 들게 만들어서 ‘그래. 가만있으면 안 돼. 뭐라도 해야지.’ 해서 하다가 사기 당해서 몇 천만 원 꼴아 박고 또 주님한테 따지고 ‘어째서 이렇게 하십니까?’ 혼자 따지다가 주님한테 얻어맞고 ‘주여! 이것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돈 잃어버린 것은 3년 가고 감사는 5초 가는데 ‘그래도 아깝네. 어떻게 회복할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좋은 사람 있다고 소개해줘서 같은 집사라고 믿었다가 이번에는 6천만 원 사기 당했네요.



그제서 눈에 띄는 것이 “돈을 사랑하지 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딤전 6:10) 그런 구절이 막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 일이 없었으면 그런 구절이 기억이 안날 텐데 갑자기 사기 당하고 난 뒤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고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딤전 6:8)는 이게 그냥 들어오는 거예요. 이런 중첩된 시간관이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사사기에도 나와요. 민수기에도 나와요. 민수기에 본격적으로 들어가는데요. 그 전에 사전정지작업을 해줘야 돼요.



사사기 같은 경우에는 이 세대에 푹 젖었어요. 너무 잘 먹고 잘 사니까. 그런데 이 세대가 자기 것을 야금야금 다 뺏어가네요. 뺏어가니까 이 세대가 주님 앞에 돌아서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역량대로 다 해요.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뇌물도 줘봤다가 뭘 어떻게 또 하다가. 결국은 다 털어먹고, 다 털어먹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주여! 도와주소서.”라고 하거든요. 자기는 하늘에서 천사라도 좀 보내줄 줄 알았지요. 도와준다고 내미는 그 대책이 뭐냐? 옆에 있는 평범한 이웃사람이 졸지에 구원자로서 등장하네요.



평소에 그 사람 다 알고 있거든요. 시시한 인간인데 시시한 인간이 등장해서 난데없이 승리를 낚아챕니다. 특히 이건 평범한 사람 정도가 아니에요. 아주 깡패, 입다 깡패가 갑자기 지도자가 되어서 민족을 살려내지요. 입다는 자기가 했다는 자화자찬을 하기 위해서 제일먼저 마중 나온 사람을 번제물로 잡겠다고 했어요. 개나 소나 이런 것이 나올 줄 알고 했는데 세상에 자기 딸이 나올 줄이야. 자기 딸이 나왔을 때 우리 같으면 “아, 그것은 취소합니다. 하나님, 이것은 아니지요.” 딸 대신 다른 것을 잡겠는데 입다는 자기 딸을 잡아버립니다.



그래서 딸은 죽습니다. 죽으면서 아버지를 원망하지요. 아버지의 되도 않는 객기 때문에 죽지요. 결국 구원자가 입다가 아니고 입다의 딸로 전환되는 시점으로 갑니다. 그 잘난체 때문에 핍박받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새롭게 발생시킨다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복음이 좋다고 하면서 다시 세상에 나갈 때 그만큼 다른 누가 희생될 요소들이 우리한테 있는 거예요. 다시 돌아오게 되면 그동안 내 눈에 띄지 않았던 희생된 것이 이렇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값싼 돈으로 바꾸려고 그렇게 시도했건만, 은혜의 가치를 그렇게 모독했건만 그걸 통해서 은혜에 대해서 우리가 손해보고 욕했던 대목이 점점 더 많아졌다는 것을 우리가 느낍니다. 그래서 갈수록, 우리가 살면 살수록 결국 죄만 더 늘어나고 증가될 뿐입니다.



자, 민수기 6장을 봅시다. 민수기 6장을 생각하면서 갑자기 뉴저지가 생각나네요. 나실인 이야기입니다. 저는 나실인 하면 생각나는 것이 “나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하는 어버이노래에요. “♬나실제 괴로움……” 할 때의 그 나실, 인. 나실인이라는 것은 바친다는 뜻입니다. 바쳤다. 드렸다. 바치면 되잖아요. 바치면 되는데 나실인은 바칠 때 새로운 시간관을 품고 바쳐집니다. 그것은 기존의 과거-현재의 시간관이 아니고 미래-현재-과거로 이어지는 장차 올 메시아를 품은 시간관을 품고 나실인이 바쳐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스라엘 내에 두 개의 이질적인 시간층이 형성되지요. 어느 쪽이 어느 쪽을 살리느냐? 나실인이 만드는 시간이 나머지 사람들의 시간을 살려내는 겁니다. 나실인의 시간측정은 시계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째깍째깍, 손목시계로 하는 것이 아니고 머리카락 가지고 해요. 머리카락의 길이가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겁니다. 머리카락의 길이요. 그러니까 부재하지요.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부재한 것이,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살려내기 위해서 나실인이 처음에는 머리카락이 짧아요. 없는 거예요. 없는 것이 점점 더 길어지면서 “어? 있네? 있네? 나실인 세대가 있네. 우리 속에 그게 함유되고 포함되어 있네.” 그 포함되어 있는 그것이 그 당시의 제사제도를 해체해버립니다.



죽은 짐승이 너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결국 살리는 것은 양이나 소가 아니고 너 대신 죽어야 될 사람이 너를 살린다는 거예요. 그 말이 뭐냐? 네 힘으로는 네가 살 가치가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내가 너를 살려줄게”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제일 큰 오해는 그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은 주님을 살려내시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은 주님만 구원이지 다른 사람은 구원되지를 못합니다. 목소리 크게 낸다고 알아먹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된다는 이야기에요. 우리 몸은 구원 안돼요. 그게 나실인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나실인은 머리카락과 더불어서 삼종세트, 머리카락과 포도주와 그 다음에 자기 죽은 가족의 시체를 만져서는 안 된다는 거지요. 아들의 도리를 하면 안 돼요. 집안 일가친척과 결별해야 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시간대에서는 오실 메시아는 이 땅의 어떤 부모와도 관계되지 않는, 엮이지 않는 분이 메시아로 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어릴 적 행적이 일반적인 인간으로 볼 때는 참 되바라졌다는 내용이 나오지요. 아들을 사흘 동안 잃어버렸어요.(눅 2:46) 소문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어른들과 함께 이야기를 한다고 했어요. 꼭 솔다 같아요. 어른들과 같이 말씀을 이야기하고 있던 거예요.



그러니까 나무라면서 “우리가 얼마나 널 찾는다고 애썼는지 아느냐?” “왜요?” “너는 우리 패밀리, 가족이잖아. 내 가족이잖아. 난 이런 아저씨가 아니야. 난 아버지야. 여긴 너의 엄마고. 얘가 왜 이래? 어디 가면 간다고 해야지 그냥 잃어버리면 우리가 얼마나 너를 찾겠느냐?” 거기서 예수님이 정말 되바라진 답변을 했지요. “우리 아버지 여기 있는데?” 우리아버지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나실인은 죽은 친척들의 시체를 만지지 말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한술 더 뜹니다. 살아 있는데도 안 만져요. 살아 있는데도 관계 끊겠다고 작심하고 나서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너 따라 오너라.” 할 때 그 제자가 하는 말이, “예수님, 따라 가겠는데요. 마침 따르고자 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네요.” 예수님 뜻은 이거예요. 제자가 따라올 그 시점에 예수님께서 일부러 그 제자의 아버지를 죽였습니다. 제자에게서 어떤 발언이 나오는지 보시기 위해서 죽였어요. 제자가 하는 말이, “따라가겠는데요.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따라가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할 때에 예수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하지요. 뭐라고 답변하십니까?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산자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죽을래, 살래?” 그런 말이에요. “네가 지금 죽은 자에 속했느냐, 산자에 속했느냐?”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이 세상의 죽은 세대에 속할래, 산 세대에 속할래?” 그런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바에 의하면 “네가 정실부인에 속할래, 아니면 하녀출신이고자 하느냐?”라고 묻는 겁니다. 글쎄 그 말 듣고 그 제자가 갔는지 안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교회 좀 오래 다니고 특히 권사님들 보면 성경말씀 지킨다고 그렇게 애를 쓰고 또 선교단체들 많거든요. 성경말씀대로 산다고 애들 쓰고 하는데 이런 단체들이 자기가 지킬 것만 지키지 아버지 장례에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사지내게 하라.”는 이런 단체는 아직까지 못 봤어요. 물론 돈 안 줄때는 아버지는 내 세대가 아니라고 하겠지만 돈 줄때는 문제는 달라지거든요.



우리가 성경말씀 지킬 때는 나는 이 세대에 속했다고 자부하고 한 번 말씀 지켜보세요. 다 실패로 끝나요. 이 세대에 속하는 것은 주님의 개입으로 되는 것이지, 이 말을 오늘 몇 번 하는지 몰라요, 주님의 개입으로 선이 그어져야 우리가 성도라고 인식을 하는 것이지 우리 자력으로 하게 되면 안돼요. 왜, 존재 안에는 우리의 과거가 들어있고 우리의 시간관이 들어있고 우리의 공간관이 들어 있기 때문에, 나만의 독자적인 현실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강의 처음부터 해볼까요?



강의 처음에 제가 무슨 이야기한지 알아요? 인간은 자기로부터 나간 행동은 절대로 자기 노선 바깥으로 못나간다고 했지요? 반드시 자기의미로 회수가 되고 환원되게 되어 있습니다. 뭘 지킨다고? 주의 말씀을 지킨다고요? 뭐 개방한다고? 율법으로 개방한다고요? 이웃이여 오라! 내가 사랑해주노라! 필요 없어요, 그거. 안돼요. 죄인을 보호하는 그 제사장의 장벽을 놓쳐버리면 다 놓친 것이 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우연이지 필연이 아니에요. 봐줘서 살리는 겁니다. 봐줘서.



흔히들 말하지요. 덤으로 산다고. 덤으로 산다는 그것도 성에 안차요. 덤으로 산다고 하니까 “주여,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내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꼭 그런 인상 같은데 그런 뜻이 아니에요. 덤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덤이 아예 없어요. 매일같이 살려줘요. 매일같이. 과거는 반복 안 되지만 뭐는 반복된다 했습니까? 사건은 반복되는 거예요. 왜, 사건은 우리의 과거-현재-미래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순간순간이기 때문에. 완전히 스카이 콩콩이라. 매일같이 순간이 오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저촉을 받기 때문에 매일같이 은혜를 받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명자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실인에서 세 가지죠. 하나는 뭐냐 하면, 머리카락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없는 시간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거지요. 새로운 세대가 눈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한 이야기, “영과 육이 만났을 때 무엇이 보입니까?”라는 질문, 수능문제로 한 번 내볼까요? 목사고시로 내 볼까요? “영 쪽과 육이 만날 때 무엇이 보입니까?” 1번, 독을 마셔도 해롭지 않다. 2번. 손에 머리를 얹은 즉 병이 나았다. 지금 마가복음 16장의 이야기입니다. 3번, 방언을 한다. 4번. 갑자기 숭숭 빠진 머리카락이 다시 나왔다. 5번. 없다. 몇 번 입니까? ‘없다’가 정답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을 응시하고 관찰할 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만 관찰하면 되지 내가 응시할 필요는 없어요. 주께서 우리에게 등장하게 된 나 자신, 그동안 내 시선으로 봤던 나가 주님의 성령으로 다시 나를 보게 하는 그것이 유일한 접촉되는 접촉점입니다. 내가 원인이 되어서 내가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결과물로 나를 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생긴다면 그게 유일한 접촉점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가 배고플 때 밥을 주었느뇨? 누가 내게 목마를 때 물을 마시게 했지?” 조용할 때 관찰자가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관찰자이기 때문에. “바로 여러분!” 완전히 윤복희야. “내가 외로울 때 누가 위로해줬지? 바로 여러분!”인 거예요.



그 소리 듣고 누가 놀랍니까? “아이고, 놀래라.” 천국 간 사람이 놀라면서, 서로 돌아보면서 수군거리면서 “주여, 제가 언제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습니까?” 네가 한 것을 나한테 한 것으로 내가 원인과 결과를 바꾸어놓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뭘 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한 게 있는 것으로 쳐주시는 주님의 배려하심, 그것이 주님의 과분한 용서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무심코 한 것마저도 주를 위한 일로 쳐주실 때 우리는 이미 육적의 차원이 아니고 영적으로 일방적으로 은혜를 받는 그런 대상자로서, 관찰의 대상자로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발 고민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화내지 마세요. 그런 허락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화내거나 고민하거나 분노하거나 근심할 것을 우리한테 허락해준 적이 없습니다. 화낸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시간을 고수하겠다는 것인데 자기가치를 유지한다는 그런 것은 주님한테 통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나실인의 한 가지는 뭐냐 하면, 포도주와 관련된 것은 일체 접근해서는 안돼요. 여기 보면 상품 종류가, 포도주, 독주, 그 다음에 독주의 초, 생포도, 건포도, 포도나무와 관련된 것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라는 것(민 6:3), 포도와 결별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포도 없는 몸이 되겠지요. 포도 없는 몸이니까 이 사람은 약속의 땅에서 태어나도 주님이 나실인이 되는 순간 어디 출신이냐 하면, 약속의 땅 들어가기 이 전의 약속의 땅 바깥에 포진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형제자매에서도 끊어졌어. 약속의 땅 하고도 끊어졌어. 단지 주어진 것은 뭐냐 하면, 자기 머리카락에 들어갈 하나님의 화목제물, 그것만 겨냥하고 있을 때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려우니까 이건 쓰지 맙시다. 그냥 쉬운 말로 합시다. 그냥 외부인사라고 보면 돼요. 외부인사.



외부인사 내부인사로 전환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외부인사로 보지를 못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금, 경계선은 뭐냐? 외부인사가 내부인사와 이질적인 것을 보여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다른 이질적인 것이 여러분 속에 꿈틀거린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이 기쁜 소식을 이제서 전하게 되어서 참 죄송합니다만.



이질성이 느껴져요. 이것은 남한테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본인만 알고 있으면 돼요. 부부간에도 이야기하지 마세요. 괜히 부부한테 이야기하면 아내라도 착각을 해서 “우리 남편 구원받았다.” 해서 간증하면서 돌아다녀서 짜증나요. 그냥 혼자만 알고 있으세요. 그냥 혼자만. 그리고 바깥에 이야기할 때는 “나는 구원받았다.”고 이야기하지 말고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게 하세요. 명함에 쓰세요. “나는 죄인.” “010-3511……, 나는 죄인.” 이렇게 죄인을 내미세요. 구원받았다고 내밀면 또 구원파가 달려들어서 안돼요. “언제 구원받았습니까?”라고들 하니 “나는 죄인입니다.”



약속의 땅 바깥에 있다는 말은 주님의 시간에 의하면 바깥에 있다, 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가 돼요. 그 시대상 바깥에 있다는 말은 미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미래에 구세주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화목제물 되기 위해서, 화목제물을 완성하기 위해서 침투한 그 분이 바로 이 나실인의 최종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나오지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눅 22:18)



이게 교재에 나오는데요. 8페이지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2:18절에는 예수님의 피를 나실인의 피로 여겨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도록 했다.” 여기서 성경 해석하는 사람들이 제일 크게 실수하는, 실수가 아니지요, 엉터리로 해석하는 것이 뭐냐? ‘……까지’에서 이 ‘까지’를 인간의 시간론에 의해서 해석해버립니다. 그게 아니에요. 침투에요. 인간의 시간론에서 ‘……까지’라는 말은 그 때까지 하고 그 뒤부터는 필요 없다는 말로 이해하는데 성경에서 ‘……까지’라고 하는 것은 지금까지 했던 모든 것은 하나의 결과물이고 ‘까지’에서 주어진 그 상황이 처음부터 원인이었다는 거예요.



“너는 이제부터 사흘까지 숙제 해.”라는 말은 보통 무슨 뜻입니까? 사흘까지만 숙제하고 그 다음부터는 숙제 안 도 된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적용어로 하게 되면 사흘까지 숙제하라는 말은 “이제 사흘 뒤부터 본격적으로 숙제를 더 많이 해.”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사흘 뒤에는 이제는 숙제 하라는 말도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숙제 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런 뜻입니다. 휴, 진짜 설명하는 내가 힘들다. 성경에서 ‘까지’라는 말은요, ‘……까지만’ 그런 뜻이 아니고 지금까지는 네가 이 땅에서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해 왔던 것을 자동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는 겁니다.



‘천년이 차기까지’라는 요한계시록 이야기는 천년이 차고 나면 그 다음에는 대 환란이라는 되도 않는 소설이 막 나오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천년왕국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하늘나라 왕 노릇 한다는 뜻이에요. ‘까지’가 그런 내용이에요. 천년 후에 누구는 재림하고 나머지는 패자부활전을 해서 그 다음부터는 유대인을 조져서 유대인을 “회개 안 해?” 하고 목 졸라서 “주님을 욕보였습니다.” 하면 “이제야 회개하는구나.” 이렇게 달래서 온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는다? 여러분, 팬다고 믿습니까? 팬다고 믿을 것 같으면 진작 패지? 팬다고 믿을 성 싶으면 유대인에게 원자폭탄을 터뜨려버리지요. 그러면 다 믿을 건데? 권총 들고 협박한다고 믿을 것 같으면요. 교회는 나올 수 있어요. 그런데 믿는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믿지 말라는 이유가 우리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우리한테 해버리면 우리는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에 예수 믿지 말라는 이야기를 제가 하는 거예요. 예수 믿으라는 말은 미래에서 이미 믿게 된 자기 때문에, 예수 믿으라는 말은 이미 미래에서 믿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이야기를 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너는 주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이미 창세전부터 확정되어 있고 미래에서 이미 확정되어 있어.” 그런 뜻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 믿으라 하는 것은 우리보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통해서 호소한 겁니다. 이미 성령 받은 사람에 한해서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 보세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행 2:17) 죽 나오지요. 그게 성령에 휘감기니까 그 상태가 예수 믿는 상태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 믿을 필요가 없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은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아직까지 예수 안 믿는다는 뜻이고 앞으로 예수 믿을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에요.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믿으라고 하니까 온갖 요령, 교회 다니면서 알게 된 모든 모방한 것들을 다 해내요. 예수 믿고 할렐루야, 손들고 나온다든지 갑자기 세례 받는다고 달려든다든지. “어머나! 왜 이래요? 갑자기. 너만 알고 있으면 돼, 너만 알고 있으면. 왜 자꾸 믿는 티를 내.” “우리 목사님이 시켜서 그랬습니다.” “그 목사나 잘하라고 해.” 정말 목사가 예수를 믿게 되면 교회라는 게 그 사람한테는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교회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내 교회, 네 교회, 우리교회……, 우리교회가 있습니다만 이런 자체가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한테 무슨 믿으라는 말이 됩니까? “네가 믿고 있는 것은 주께서 주셨다.” 이렇게 돼야지요. 믿지 마세요, 예수.



나실인은 머리카락에 ‘댕기머리’ 죽죽 뿌리고 그러지 않습니다. ‘댕기머리’가 뭔지 아시지요? 머리카락 빠지지 말라고 쓰는 샴푸, 그게 히트상품이잖아요. ‘댕기머리’ 치지 않습니다. 왜냐? 주께서 기르시거든요. 뭘 로 사용합니까? “이스라엘아! 앞으로 너는 여기에 머물 것이 아니고 미래에 가야 될 세대”기 때문에 미래에 가기 위해서는 선도가 있어야 돼요, 선도. 군대에서 선도라 하는 것은 꼭 키가 큰 사람이 돼요. (젊은이를 향하여)군에 가야 하는데……. 군에 가야 선도가 돼요. 키가 1미터 80이 넘으니까.



선도는 다 보이는 곳이거든요. 그걸 보는 순간, 놋 뱀을 보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보지 않게 되는 겁니다. 설교 시간에 그런 예를 든 게 있는데 다시 하게 되면, 어떤 임금이 있었는데 자기가 쫓겨날까 싶어서 모든 것을 감시를 해요. 신하들의 발자국소리, 시녀들의 소리, 어떻게 하든 자기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감시하면서 예민하게 있는데 그 가운데 어떤 여인의 소프라노 음악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 임금은 모든 근심걱정을 다 잊어버렸어요.



왜? 지금 내가 근심하는 것을 완전히 무산시키는, 더 아름다운 초과적인 은혜지요, 초과적인 아름다운 목소리에, “내가 임금 안 되도 그만이고 저 음성만 듣는다면 내가 거지라도 좋아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이사야 6장에 뭐라고 나옵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주님이 하신 말씀이, “그런 이 험한 일을 위해서 누가 가지?” 기다렸다는 듯이 “저요!” 하고 손들지요. “제가 가겠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제가 기쁨으로 죽겠나이다.” 그런 뜻이에요. “기쁨으로 죽겠나이다.”



이 세상에 근심걱정이라 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자본주의사회에서 성공이라는 신화에,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몸이 묶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오직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성공 때문에 우리에 의해서 핍박받은 주님이 “네가 그렇게 세상 좋아하는 것이 원래 나실인으로서, 내가 너를 그렇게 죄인으로 사용했다.” 하는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이 주님의 전략에 우리가 말려들었다고 하는 순간, 더 이상 나의 일은 사라지게 되고 내가 하는 지금의 모든 일이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인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그 때부터 자유를 얻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내가 나를 벌주거나 채찍질 하고 나를 손들게 하지 않아요. 주님이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데 내가 정죄한다는 것은 정면으로 주님에 대한 모독이고 주님의 십자가를 훼손하는 훼방자밖에 안 되거든요. 이 시간 끝내면서 저녁 먹기 전에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더 이상 너무 책망하지 마세요. 책망하지 마시고 감사하세요. 그것보다 더 좋은 회개가 없습니다. 마치겠습니다.

2015 겨울수련회 7강



민수기에서 20세 이상 남자들의 수를 세는데 모든 주석이 여기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군대로 전쟁에 나가기 위해 수를 헤아린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쟁을 몰라서 이런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들은 40일을 정탐했다는 이유 때문에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40년을 광야 생활을 해야 했고, 이들의 수를 헤아리는 것은 삭제시키기 위해 수를 헤아립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전쟁은 미래 전쟁입니다. 미래 전쟁은 [미래소년 코난]을 생각하면 돼요. 미래와 현재가 전쟁하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이건 물을 필요도 없어요. 임 장로님이 바둑 잘 둔다는 말을 여기 와서 처음 들었어요. 제가 진작 알았으면 바둑을 한 판 뒀을 텐데.



바둑의 고수는 상대가 어디에 둘지를 예측하고 돌을 놓습니다. 서봉수 9단은 200수까지 내다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은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이것 한 가지만 아시면 됩니다. 미래 전쟁은 완료 전쟁입니다. 완료를 이해하면 미래 전쟁에 살아남고, 완료를 모르면 삭제당합니다.



그러면 완료 전쟁의 반대는 뭔가 하면, 완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풍랑을 만난 바울에게 주의 사자가 임해서 하신 말씀이 있어요.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이 말을 듣고 만약 바울이 “이제 앞으로 잘 해봐야지.”라고 했다면 탈락입니다. “아하, 이 완료를 위해 내가 존재하는구나!”라고 하면 100점, 합격입니다. 이 세상은 미래 전쟁의 감(촉)이 있는 사람은 삭제당하지 않기에 구원되고, 미래 전쟁에 대한 감이 없고 현재 전쟁을 벌여서 미래로 나아가려는 자는 미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아까 시간을 이야기한 이유를 아시겠지요? 미래에서 확정된 사실을 그림자 드리우듯이 드리우면 이미 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열심히 싸워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고 이미 완료된 것을 맛보라고 참전케 한 거예요. 따라서 내가 가담하기 이전에 주께서 이미 만찬을 마련하신 거예요.



그럼 이 전쟁에서의 무기는 뭔가? 나팔입니다. 나팔이 울림과 동시에 커튼이 열리면 생각지도 못한 완료상태가 우리 앞에 전개됩니다. 대표적인 전쟁이 여리고성 전쟁입니다. 여리고성 전쟁은 주님 백성의 돌잔치라고 보면 됩니다. 일단 커튼을 쳐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을 올립니다. “내가 준비한 만찬에 무슨 음식이 있을까?”하고 한 바퀴 돌고, 다음 날은 “잡채가 있을까, 없을까?” 또 한 바퀴 돌고. 이렇게 6일간 하루 한 바퀴 식 돌고, 7일(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어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도는데, 이들은 여리고 성을 지키는 군인을 의식할 필요 없이 제사장의 나팔 소리만 듣고 성을 돌 뿐입니다. 이 때 백성들은 궁금했을 거예요. “여호와가 준비하신 것은 뭡니까? 빨리 커튼을 열어 보여주세요.” 이런 마음이었겠지요? 마지막에 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수에 맞춰서 일곱째 날에 커튼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준비된 만찬은 금은보화가 가득한 곳입니다.



천국 가고 싶어요? 이미 천국은 주님이 준비 완료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천국이 완료되었다는 근거는 주께서 십자가 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엄청난 비약을 했어요. ‘주님이 십자가 지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가 사함 받았다.’ 즉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났는데 이것으로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겁니다.



바울의 이 주장은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비약을 인정하시는 하나님도 대단하시지만 그 비약을 부정하지 않고 믿는 성도도 대단하지요? 765×586×327×254=? 이 문제를 낸 사람도 대단하지만, “37,234,070,820이 답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더 대단하지요. 이것은 계산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주께서 하신 말씀은 말씀이 도달하는 순간 그 말씀의 완료체로 이미 와버린 거예요.



미래 전쟁은 완료 싸움입니다. ‘해봐야 결과를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해봐야 안다면 여기에는 행함이 동원되지요. 민수기는 이런 사람이 있음을 알고 수를 헤아려서 탈락시키는 겁니다. 주님은 전쟁을 하시면서 탈락시키는 일을 병행하십니다. 수를 헤아리는 것은 얼마나 떨어져 나갔는지 계산해 보라는 겁니다.



교재 7페이지 넷째 줄을 잠시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혈통적 장자인 르우벤 지파(민26:5)의 수가 시내산에서 출발할 때는 46,500명이었지만 그 후에 다시 세어보니 43,730명이 되어 2,770명이 감소되었다. 전체 이스라엘로서는 1,720명이 감소되었다.”



감소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완료를 믿지 못하고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전쟁을 했던 사람들을 탈락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이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리라.’는 주의 사자의 말을 듣고 “예, 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가겠습니다.” 이렇게 나왔다면 바울도 탈락했을 겁니다. “아, 이것이 주님의 계획이었네.” 처음부터 완료된 체로 바울은 그 계획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계획은 커튼 뒤에 감춰져 있는데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공개되면 우리는 입을 쩍 벌리면서 나팔소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됩니다. 나팔소리와 더불어 우리가 유념해야 될 것은 요한계시록 11장 19절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어디에 가있는가 하면 천국에 가있습니다. 그리고 언약궤 안에 이미 완료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 완료를 빼고 나머지는 다 없애버려요. 이 역할을 해야 할 지파가 바로 레위지파입니다. 민수기 3장 10절에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을 세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외인이 가까이 하면 죽는다고 했는데 당신은 왜 가까이 있는가? 12절에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려면 그 전에 먼저 전쟁이 있어야 돼요.



출애굽 사건이 있습니다. 유월절에 애굽과 전쟁 이후에 모든 이스라엘의 장자는 주님의 소유가 됩니다. 그러면 지금 모든 사람의 장자를 대신하는 레위인이 하나님의 언약궤에 포진해 있다는 것은 이 전쟁은 이미 완료된, 미래가 현재에 삽입되어 있는 전쟁입니다. 미래와 현재가 싸운다는 것은 마치 구석기 시대에 특수 미군부대를 파견한 것과 같아요. 구석기 사람들은 돌멩이를 막 던지는데 미군이 자동소총을 난사하면 이게 싸움이 되겠습니까?



[인디아나 존스] 영화를 보면 이집트 사람이 칼을 들고 위협하며 나오는데 인디아나 존스는 권총으로 상대를 쏴 죽입니다. 미래 전쟁과 현재 전쟁은 무기의 격차가 너무 큽니다. 그러니 게임이 되겠어요? 여섯 살 민준이가 안된다고 답했는데, 갑자기 시편 8편 2절 말씀이 떠오르네요.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전쟁에서 목격자가 되고 찬미자가 된다는 겁니다. 미래 전쟁의 완료에 대해서 젖먹이가 어떤 도움이 되겠습니까? 재롱을 부려서 용사들의 사기가 올라서 싸움에 이겼습니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미완료를 인간의 협조를 통해 완료케 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그냥 박수부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수혜자인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 자체가 전리품입니다. 하나님의 완료된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입니다. 그리고 그 전리품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함을 강조하는데 그것인 이단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라는 목사의 말은 삭제 대상입니다. “못 지킨다고 하지 마세요.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하시면 바위도 옮길 수 있고, 산의 나무를 뽑아 바다에 심을 수도 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 구하면 주십니다.” 이거 다 사기입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원해도 주시지 않는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완료된 상태에서는 완료된 것만 주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신 분의 은혜만 높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의 힘을 보테야 하는 전쟁은 현재 전쟁이지 미래 전쟁이 아닙니다. 미래와 현재가 맞붙어 싸우면 미래가 승리할 수밖에 없어요.



레위지파를 중심으로 생각해 봅시다. 전쟁에서는 언약궤가 중앙에 있습니다. 미래 전쟁인 민수기 10장에 보면 전쟁을 어떻게 하는가가 나옵니다. 2절에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 여러분들은 은나팔 소리 들어본 적 있습니까? 저는 들어봤어요. 지난 가을 미국에 강의하러 가서 어떤 장로님 집에 머물렀는데 그 장로님이 이스라엘에서 나팔을 가져왔다면서 보여주고 불었어요.



나팔을 부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제 커튼을 여세요.”라는 신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보면,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나팔소리가 들리지요. 그리고 출애굽기 19장 18-19절에 보면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 나팔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내산 위에 계시던 하나님이 언약궤 쪽으로 내려 온 거예요. 시내산은 과거의 단회적 일이 아니고 이것을 사건화 시킵니다. 과거는 반복되지 않아도 사건은 반복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언약의 진행과정이 인간의 시간요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이 반복되는 연쇄 고리로 언약을 적용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완료가 매일같이 주어지는 겁니다. 주께서 위로하시기를 “네가 오늘도 산다고 고생 많았지?”라고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 사실 오늘도 굉장히 힘들었습니다.”하면서 울먹이겠지요. 이런 식이 되면 안 됩니다. 주께서 이미 완료했기에 힘들 것이 없습니다. 힘든 것은 아직 미완료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완료는 ‘종속 속의 고요’입니다. 찻잔 속의 고요처럼. 그래서 이 전쟁은 희한한 전쟁인데 밖은 시끄러운데 안은 고요해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처럼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이런 전쟁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젖먹이와 어린아이가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완료된 상태를 즐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쟁을 시작해서 끝낼 때까지의 모든 과정은 누가 이끄는가? 여호와 하나님이죠. “너희들은 구경만 해라. 내가 친히 용사가 되어 싸울 게.”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칼은 뭡니까? 그건 갈퀴 역할을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떨어진 낙엽을 치울 때 갈퀴로 슬슬 끌어 모으지요. 그런 식으로 전리품을 끌어 모으는 거예요.



민수기 31장에 미디안과 전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전쟁이 끝나고 정리하는 풍경입니다. 32-34절에 “그 탈취물 곧 군인들의 다른 탈취물 외에 양이 육십 칠만 오천이요 소가 칠만 이천이요 나귀가 육천 일백이요” 이렇게 나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승리하신 후 전리품을 갈퀴로 끌어 모으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하겠다고 나서는데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한다고 설치는 자는 아직도 주님의 완료를 못 믿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은 탈락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는 일에 참여시키겠다.’ 제자들은 빠진 상태에서 주님이 나서서 사마리아 여인을 전도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런 식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주님이 중매쟁이가 되어 양쪽에 만남을 성사시킨 거예요. 이게 바로 전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했지요. 어떻게? 목욕탕 주인이 남탕에서 외칩니다. “여기에 66다 5740 차주 계십니까?”라고. “어, 내 차입니다.” 이것을 복음으로 바꾸세요. “여기에 십자가 부활과 관련된 분계십니까?”



복음의 능력으로 오직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만 찾겠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지요. 그래서 바울은 전혀 영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실적 없습니다. 그냥 잃어버린 양을 찾는 식으로 “혹시 주께서 구원하기로 작정된 분 아닙니까?” 라고 했는데, 그분이 “저는 아닙니다.”라고 나오면 돌아서면 그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는가 싶어 바울을 찾아오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자들에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테니 제발 가주세요.” 이렇게 해서 떠나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떠난 사람을 아쉬워 할 필요 없어요. “저 사람은 헌금 많이 할 수 있는데 아깝다.” 이런 생각 하지마세요.



어떤 것이 감사가 되기 위해서는 예상 밖의 상황이 주어지게 됩니다. 예전 같으면 안 좋아할 일도 주께서 내 마음을 낮추시니 예상 밖의 큰 기쁨으로 다가와요. 이런 모든 조치가 마지막 때 완료, 하나님의 군대로 활동합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민수기에서는 나팔이라고 했지요?



중앙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데 10장 35-36절에 보면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라고 되어 있지요.



법궤를 향해 “여호와여 일어나사 적들이 물러가게 하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우습지 않습니까? 법궤는 아카시아 나무에 금박을 입힌 상자인데, 물체를 향해 말하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법궤가 여호와입니까? 어떤 물체로 여호와를 대체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형상이 없음을 강조하는 용법이 돼요.



‘바늘이 떨어질 정도로 시끄럽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바늘이 떨어지면 그만큼 더 시끄러워요. 하지만 이 말은 ‘참으로 고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어법입니다. 상자를 향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이 완료했음을 통보해 주는 증거물로 언약궤를 두었다는 겁니다.



이미 완료된 전쟁이기 때문에 일은 언약궤가 알아서 해주시고 우리는 그 혜택만 입는 입장임을 모세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세의 온유함’이라고 합니다. 31장 1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고 했는데,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는 것은 미디안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음행케 했기 때문입니다.



‘음행’이란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설명하겠습니다. 자매나 이모나 숙모나 백숙모의 하체를 보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남자의 하체를 보지 말라는 말은 없어요. 자매, 이모, 숙모, 백숙모의 하체를 보지 말라는 말은 여인을 자식 낳는 기계로 보는 겁니다. 여성의 존재는 육의 자식을 낳아야 할 입장에서 남편과 사는 거예요.



계속 미래를 향하여 자식을 낳는 거예요. 그 자식을 낳는데 있어서 가족체계가 갖춰져 낳은 그 자식에게 무엇이 주어지는가 하면, 저주 받을 인간을, 존재 있음에서 존재 없음으로(존재 없어야 구원 받습니다. 이삭처럼), 없는 존재로 구원시키기 위해서 있는 존재를 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제사법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테두리를 벗어나서 다른데서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여기의 혜택을 입지 않을뿐더러 무엇에 대한 모독인가 하면, ‘나는 제사장의 구원 장치를 인정 안 해.’ 이렇게 되면 그것은 죽여야 될 대상입니다. 모든 것이 제사 중심이에요. 왜냐하면 어차피 죽었으니까요. 죽은 자를 레위인 때문에 완료로서 살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포진하는 군대는 희한한 군대에요. 보통 전투에 나갈 때는 장군이 앞장서든지, 아니면 특수부대가 앞장서든지 해요. [300명]이란 영화 보셨어요? 스파르타 300명과 페르시아 대군과 싸우는데 여기에 왕 다리오 3세가 “나는 관대하다.”고 까불지만 사실 전쟁할 때 너무 관대해서 자기는 안 죽으려도 뒤로 빠졌어요. 그러면 안 돼요. “나를 따르라!” 이렇게 나와야지요.



보통 전쟁할 때는 용감한 티를 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완료 전쟁, 미래 전쟁이기 때문에 사람이 빠집니다. 그러면 누가 앞장서는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죽어야 할 이스라엘이 언약궤에서 일어나는 제사의 반복 때문에 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렇게 사는데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나라는 언약궤가 없지요. 그러면 이 전쟁은 적들이 패하게 되어 있어요.



언약궤의 능력을 적들은 모릅니다. 적들이 “이스라엘, 대장 나와!”라고 하는데 “우리는 대장이 없어요.” “전쟁에서 대장이 없다니, 저들을 쳐라!”하는데 힘없는 이스라엘을 천사가 도와서 침략해 온 자들이 스스로 붕괴해서 이스라엘이 승리했습니다. 31장 22절에 보면 “금, 은, 동, 철과 상박과 납의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케 할 것이며” 이것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언약궤 앞에서 바치게 되어 있어요.



‘은, 금, 불에 견딜만한 물건’ 이 대목이 고린도전서 3장에도 나옵니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하시면서 그리스도의 터 위에 아무것도 인간의 행함을 넣지 말라고 합니다. 민수기도 완료 전쟁, 미래 전쟁이고 신약은 더더욱 종말이기 때문에 미래 전쟁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그 말씀을 볼 때 민수기의 완료 전쟁, 하나님만이 용사가 되시는 미래 전쟁의 관점으로 해석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금, 은, 견딜 만한 것은 견디자.’ 이런 식으로 자기 행위 가운데 견딜 만한 것은 따로 챙기는 해석을 해요. “이번 일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것이 될 거야.” 이런 식으로 챙겨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행위를 자극하는 구절로 삼아요.



“헌금을 할 때는 자신을 비우고 헌금하세요. 그래야 그리스도의 터 위에 살아남을 좋은 상급이 됩니다.” 이렇게 주장해요. 기가 차지요? 더 기가 찬 것은 이런 주장에 “아멘”하며 수긍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소유의 증강을 위하여, 또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도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의 전쟁이 아닌 자기의 사적인 전쟁입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시험하는 전쟁입니다. 이런 잘못된 해석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31장 27절에 보면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라”고 했는데, 이 말은 싸움에 나가지 않은 사람에게도 전리품을 나눠 주라는 말이지요. 왜 줍니까? 그들은 기도로 전쟁을 뒷받침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모두가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세리, 창기 되기를 왜 그렇게 싫어하지요? 강도가 구원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강도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상하지요? 전쟁의 전리품을 받은 것은 주께서 그냥 주시는 혜택입니다. 군인들은 전쟁에 나가서 고생했고, 전쟁에 나가지 않은 사람은 고생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데, 오전 10시에 온 사람과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다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사람이 개입되기 전에 이미 완료되었기에 완료된 것을 분배받을 때는 인간의 공로나 성과를 내세울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본문이 어디와 연관되는가 하면 에베소서 4장입니다. 8절에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지금 전쟁 중인데 전쟁에 오신 분이 누군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미래 전쟁을 완료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민수기를 보는 것은 예수님의 긴 그림자를 보는 것입니다. 노을이 질 때면 그림자가 길게 보이지요. 그들은 주님의 전쟁을 한 거예요. 그것을 ‘여호와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예수님 전쟁’이라 하지 않고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용사가 되는 ‘주의 이름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이 신약에 오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됩니다. 주의 이름은 이름뿐이지요? 그것이 실제 인물과 합치되면 ‘나사렛 예수’가 되는 겁니다. 나사렛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민수기에 나오는 대로 해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값없이 선물을 주시는 일을 할 때 주님이 주님다운 거예요.



주님께 선물을 받을 때는 ‘내가 선물 받는 일에 전혀 기여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더불어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 3장 9-10절에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한마디 한마디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한 마디로 하면 ‘차원의 분리’입니다. 이 땅의 연극 같은 요소가 하늘에서는 실체가 됩니다. 그래서 실체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실체를 말해주기 위해서 연극 같은 요소가 민수기에 내려온 거예요. 민수기에는 언약궤가 있고 전쟁에 나간 사람들은 연극배우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고.



“아하, 주님께서 장차 이런 식으로 전쟁하시는구나.” 연극하면서 아는 거예요. 진짜 구원은 다른 분이 하시고 연극이니까 거리낌 없이 나섰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소년 다윗이었습니다. 어차피 연극이니까 “아저씨, 우리 맡은 역할 잘 합시다. 이마는 가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골리앗도 연극에 등장하지요. “내가 개로 보이느냐? 감히 어린 꼬마가 내 앞에 나서다니.” 그러면 다윗은 “이 할례도 받지 못한 놈아! 내 돌을 받아라.”하면서 물맷돌을 던지니까 골리앗이 죽지요.



둘은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 연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다윗의 전쟁이 아니고 만군의 여호와 전쟁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땅에 살면서 연극 좀 합시다. “하나님, 육천만원 사기 당했습니다.” “3년이 아니고 30년 동안 빚 같아야 한다.” “30년은 너무 깁니다.” “그것도 은혜다.”



이 연극을 실제로 착각해서 심각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지요. 완전한 착각입니다. 본인은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잠시 있다 없어지는 안개잖아요. 젊은 때는 꽃다운 얼굴이 나이가 들면 주름이 생기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되고 빠지고 정신도 오락가락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연극배우로 맡은 역할을 한 것뿐입니다. 연극적 요소를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세는 아들이 아니고 그 집에서 봉사하는 사환이다.’ 우리는 다 각자의 역을 맡았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다.’ 부재의 존재가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재의 중심을 남겨놓고 둘러싸는 것이 교회입니다. 아무도 그 자리에 끼어들 수 없어요. 당회장 이름으로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 설교했지요.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하니까 목사님 말씀에 충성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람이 맡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당회장 눈치를 왜 봅니까?



당회장이 맡긴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맡겼습니다. 당회장 눈치 보는 대표적인 사례가 뭔가? “12월까지만 봉사해 달라고 해서 올 말까지는 해야 합니다.” 주님께 무슨 12월이 있습니까? 12월까지는 누가 누구에게 맡긴 거예요? 사람은 여러분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당회를 거쳐 뭔가를 한다는 것은 결국 교회에서 자기 가치를 챙기려는 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31장 29절을 봅시다. “곧 이를 그들의 절반에서 취하여 여호와의 거제를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제사 방식에 네 가지가 있어요. 거제, 요제, 소제, 화제. 화제를 불에 태우는 것이고, 소제는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 드리는 것, 거제는 높이 들어 올리는 것, 요제는 흔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요제와 거제의 특징은 전부 제사장의 음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뭔가 하면, 그 당시 백성들이 제사장을 먹여 살립니까, 하나님이 먹여 살립니까? 하나님이 먹여 살리는데, 그 대변자가 레위지파고, 그러면 나머지 지파는 누가 먹여 살립니까? 하나님이 레위인을 통해서 먹여 살리는 거예요. 왜? 죽는 것은 필연이고 사는 것은 우연이기 때문에. 사는 것은 우연입니다. 아직 연극배우로 할 일이 남아 있어서 살려놓으신 거예요.



자, 그 다음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여호와 전쟁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그 당시 용사가 ‘여호와 이름’이라고 해도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이 ‘하나님의 이름’이 용사가 돼요. 하나님의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용사가 됨을 보여주기 위해 누가 오는가 하면, 천사가 약속의 땅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신병이 훈련을 위해 논산훈련소에 입교하면 조교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조교가 있다는 것에 대해 신병들은 두려워서 뒤를 돌아보면서 “엄마! 무서워.” 이런 표정을 짓게 되고, 엄마는 “이제 뒤돌아보지 말고 조교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무언의 손짓을 하지요. 결국 군에서는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겁니까? 조교와 그 배후 인물이지요.



그 배후는 군대란 이름의 추상 개념이죠. 인간을 기계로 만드는 작용자지요. 기계의 특징은 인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격이 있는 순간은 잠시 뿐입니다. 일요일 교회에 가서 울 때 비로소 인격체가 됩니다. 그러다가 초코파이를 먹을 때 인격은 사라집니다. “아, 나는 단 것을 좋아하는 짐승이구나.”



우리의 인격을 박탈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기계로 만들어요. 여호와 하나님의 완료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쓸모없는 기계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여호와는 인간의 죽음을 근거로 위에 턱하니 버티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죽었어요. 군복을 입으면 옛날 아름다운 머릿결도 사라지고 이제는 군인으로 다시 사는 겁니다. 이것을 ‘새로움이 열린다.’고 합니다.



미래를 향해 새로움이 열리는 겁니다. 조교가 이런 멘트를 날립니다. “천국의 백성으로 들어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 조교 역할을 누가 하는가 하면 천사가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곳에 이미 조교가 있어서 “신발 벗어. 똑바로 서. 이번 전쟁은 네가 싸우는 전쟁이 아니야. 천사들의 전쟁이야. 하늘의 해도 멈출 거야.”



이 전쟁에서의 진짜 적은 하나님의 완료성을 이해 못하는 자들인데, 그들은 다 제거됩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진행되는데 그 일을 천군천사들이 합니다. 그러면 살아남은 자들은 뭘 하는가? 여호와 이름이 하신 결과를 갈퀴로 끌어 모으는 일을 하지요. 그것을 ‘은혜로 땅을 얻었다.’고 합니다.



민수기 전쟁의 특징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지도를 펴놓고 땅을 분배해요. 그런데 겁쟁이들이 있어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이들은 자신의 가축이 많음을 핑계로 현재의 땅(가나안 동편)이 좋다고 여기고 “우리는 가나안 땅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살겠습니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여름에 계곡에 놀러가서 상식 없는 가장들은 계곡 입구에 물이 있다고 그곳에 텐트를 칩니다. 그러면 안쪽에 있는 계곡이 얼마나 좋은지는 전혀 모르고 입구에서 놀라가 돌아가지요. 그런데 성실한 가장은 사전에 답사를 해서 가장 좋은 부분을 파악한 후 가족들을 그곳으로 인도하지요.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 입구에서 터를 잡고 그곳에 머물려고 했어요. 그래서 모세가 화가 나서 말했지요. “이 전쟁은 너희들이 평안하게 먹고 살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 아니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 전체를 차지해야 돼.” 그러니 그들은 양보를 해서 “그렇다면 우리도 전쟁에 동참해서 땅을 다 차지한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겠습니다.”라고 해서 허락을 받았지요. 그런데 그들이 차지한 땅을 나중에 제일 먼저 침략을 받아 빼앗기고 말지요.



소유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죽음이 왔을 때 살겠다고 예수 믿는 것은 너무 성급한 짓입니다. 더 깊숙이 십자가를 맛보고 난 뒤에 그 다음은 ‘어디를 가도 은혜다.’ 어떤 직업이든 어떤 장소든 관계없이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2015 겨울수련회 8강



민수기가 시작되면 전쟁에 나갈 사람의 수를 헤아리는데, 3장부터 16장까지 계속 이어지는 것이 뭔가 하면, 레위인들 관리하는데 제사장 책임 하에 새로운 조직을 만듭니다. 12지파가 전쟁을 하는 것인지, 레위지파가 전쟁을 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레위지파 자체적인 질서가 강화됩니다.



질서가 강화되면서 제사법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이것이 15장까지 이어지는데, 15장 23-24절을 보면 “곧 여호와가 모세로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여호와가 명한 날부터 이후 너희의 대대에 지키지 못하여 회중이 부지중에 그릇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하나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그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화제는 다 태우는 것이고, 전제와 소제는 다 갈아버리는 겁니다. 어떤 물질을 다 태우고, 곡물을 다 갈아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없애버리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 부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쟁에서 이깁니까? 전쟁을 하는데 제사가 왜 필요한가?



민수기를 보면 전쟁을 말하면서 전쟁 이야기는 안 나오고 절기 지키는 법과 제사법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배 밑 부분에 기관실이 있고 그곳에 엔진이 있는데, 기관실에서 바다 구경을 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엔진의 피스톤이 상하로 움직이는데 그것 때문에 배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앞으로 나갑니다. 배 밑에서는 계속 분주히 엔진이 활동을 하고 그 덕분에 배는 움직이죠. 이것이 바로 미래의 천국 가동 방식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으로 완료가 되면 이것을 에너지로 해서 천국은 평온하게 됩니다. 어린양의 피로 풍성한 천국이 마련됩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정결하게 되고 에덴동산보다 더 화려한 천국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 연극용으로 이스라엘 집단은 여기에 있는 거죠.



방금 읽은 본문을 보면 ‘범죄했거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라.’고 했어요. 범죄하는 쪽이 있고, 제사하는 쪽이 있지요. 제사하는 일은 레위지파가 담당하고, 죄 짓는 것은 12지파가 합니다. 제사하는 원리는 어떤 분, 어떤 제물을 받치는 것, 아브라함 언약이죠. 두 번째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것’ 이것은 이삭 언약의 섬김이죠. 그 다음은 ‘그의 희생으로 인하여 다른 자들이 공짜로 혜택을 입는 것’ 이것은 야곱 언약이죠.



아브라함, 이삭, 야곱 언약으로 나눴지만 이게 확정되면 이렇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제사 속에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제사를 한 마디로 하면 ‘부재’지요. ‘없음’입니다. 없던 분의 희생으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이 땅에 전쟁의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땅에 적이 없어요. 원수가 없거든요. 왜냐? 원수가 되려면 이 새로움에 대해서 거부하는 조직이나 단체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적들을 만들어 내요. 그것이 31장에 나옵니다. 16절에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적을 만들 때 외부를 자극시켜서 내부의 적을 만듭니다. 즉 자체적으로 적을 양산해 내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체적으로 악을 만들어 내십니다. 악을 만들어 내면 그 악에 의해서 예수님이 스스로 저주 받게 되고, 저주 받음으로 악의 속성이 만천하에 공개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냥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적과 더불어 등장하는데, 그때는 하나밖에 없는 현실이 두 개로 나타납니다. 한쪽은 그냥 사는 인간 세상이 있고, 다른 쪽은 하나님의 정신에 도전하는 새로운 적이 지평선 위에 떠오르게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는 이스라엘의 적이 만들어지면서 이스라엘과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결과가 제사에 대해서 반대하는 세력이니까, 이 말은 곧 제사 기능이 갖고 있는 완료성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제사 제도의 완료성을 위하여, 그 효과에 대해서 민수기의 중요한 부분에 들어가게 됩니다. 민수기를 읽으면 처음에는 숫자 때문에 짜증이 나고, 그 다음은 제사장 때문에 짜증이 나고, 그리고 제사법에 대해 나오니까 왕짜증이 나는데 22장은 읽을 만합니다. 숲 속의 쉼터라고나 할까요. 이 부분은 이해가 된다는 것이지요.



어떤 내용인가 하면, 이스라엘이 머문 곳 근처에 모압 나라가 있었는데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선지자 발람을 고용합니다. 발람은 평소에 돈 받고 고객이 원하는 대로 많이 저주를 해 주었어요. 그게 직업이었으니까요. 모압의 장로들이 발람에게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의뢰를 했습니다.



22장 18-19절에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발람이 나귀를 타고 가는데 그 나귀가 길로 가지 않고 밭으로 들어갑니다. 왜냐? 23절에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간지라.”라고 했어요.



제가 이 대목을 언급한 이유는 어떻게 해서 육에서 영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제가 제사 이야기를 했지요. 죽으면 된다. 죽으면 영이 됩니까? 아니에요. 죽을 때 죽음을 반기면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죽어야 됩니다. 제 말은 제사 드린다고 육이 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사를 기계적으로 율법에 기록된 대로 드린다고 해서 그것으로 육이 영으로 옮겨가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의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너희들이 범죄하게 되면 수송아지를 잡고 --을 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송아지를 잡아요. 잡는데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면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안 될 것 같으면 왜 죽으라고 했는가? 또 잡았으면 잡은 만큼 효과를 주셔야 하지 않는가? 이 문제를 자체적으로는 풀 수가 없고 이스라엘 외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요. 그럴 때는 하나님이 이방나라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의 가는 길을 막지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에게 가서 제사 안 드려도 구원 되도록 조치를 하면 참 좋겠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자기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구원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외부에 자극을 줍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스라엘 원수가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주 받은 분이에요. 하나님께 저주 받은 하나님. 이건 사람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발상입니다. 복도 주고 저주도 내리시는 하나님이 스스로 저주 받을 일은 없다고 보는 거예요. 남에게 저주를 내리시는 분이 저주를 받는다면 하나님 스스로 문제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은 섬길 필요가 없다고 여기지요.



그런데 그 발상을 뒤엎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저주를 받아요. 하나님이 저주를 받으면 정작 저주 받을 사람들이 “주여, 우리를 저주 하시다니 너무 심합니다.”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없겠지요? 하나님이 저주를 받았는데 인간이 저주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이런 경우가 많이 나오지요. “양식이 바닥이 났기 때문에 대장인 저부터 식사를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나오면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주를 받은 이상은 “주여, 우리를 저주하지 마옵소서.”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장차 오실 하나님이라면 이 일이 미리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나 줘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발람 사건을 이해 못합니다. 읽기 수월하다고 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귀가 엉뚱한 길로 가니 발람이 채찍으로 나귀를 때립니다. 그 때 갑자기 나귀가 말을 합니다. 22장 28절에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짐승이 말을 했다는 것은 이미 짐승의 차원, 육의 차원이 아니고 영이 개입한 차원이죠. 그렇다면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닙니다. 영적 전쟁, 영적 존재가 관여한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분주하게 움직여요.



29-31절에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발람은 누구를 대변하고 있어요? 모압 왕 발락을 대표하고 있지요. 그러면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해서 망하게 하지요. 그런데 여기에 누가 관여합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관여하니까 졸지에 발람이 저주하는 것이 아니고 돈은 다 받아 챙기고 축복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발람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중보자의 자리에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고 중보자가 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 평지가 영적 차원이 되고 영적 지평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연극을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연출가는 따로 있습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시대에 펼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펼쳐지려면 그리스도의 적이 누구냐가 같이 등장해야겠지요.



그리스도의 적으로 등장한 것이 발람이고 모압 나라입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 본인들이 하나님의 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아직 이스라엘과 전쟁을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31장에 시작됩니다. 전쟁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이스라엘 내부를 향해 전쟁이 시작된 거예요.



이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에 25장에 가면 바알브올 사건으로 인해 24,000명이 죽는 일이 벌어지지요. 따라서 이스라엘 자체 전쟁이 바깥으로 퍼지게 되면 그것이 영적 전쟁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 원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원수는 예수님 안에 내장되어 있고,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예수님 속에 있는 그 죄가 바깥으로 퍼져 나와서 그것이 이 세상을 이루고 그 세상을 주님께서 정복해 나가심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십니다.



본인의 주되심을 위해서 본인이 연출한 연극판이 이 세상 역사입니다. 그럼 제사는 뭐냐? 이스라엘의 범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데, 범죄는 뭔가? 모르지요. 부지중에 저지르는 범죄기 때문에. 하지만 제사 제도와 연관해서 바깥에 영적 전쟁이 벌어지면 그들의 범죄는 점점 내용이 깊어지고 확대될 것입니다. 예수님 빼고 다 죄인이 되는 그러한 평지가 펼쳐지는 거예요. 이로써 제사와 제사 바깥에 있는 역사의 전개가 관련이 지어지는 겁니다.



좀 더 나가봅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람의 축복 내용이 뭔가 하는 것입니다. 24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이미 영적 전쟁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것은 없어요. 영적 전쟁에 휘말리면 이미 영의 사람이 됩니다. 발람도 마찬가지고. 물론 발람은 성령이 아니고 성신이 임했기에 일시적입니다.



그 내용이 17절에 나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미래 전쟁, 완료 전쟁을 하는 거죠. 발람은 하나님의 신을 받고 완료된 상태를 본 거예요. 그럼 발람도 구원 받았습니까? 아니요. 발람은 제사와 상관없는 이방나라 선지자에요.



신을 받아도 이 제사는 12지파를 배재한 제사거든요. 12지파와 일대 일의 대응이에요. 레위인의 숫자와 12지파의 맏아들 수가 비슷해요. 이 말은 뭐냐? 출애굽의 유월절 사건은 역사 속에서 계속 반복됩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처럼. 이 모든 것은 제사의 효과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내부에서는 몰라요. 내부를 알려주기 위해서 바깥에 포진해 있는 천사와 영적 존재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내부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들로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럼 내부의 일은 뭔가? 미래의 일인데, 17절에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홀(임금의 지팡이)을 잡는다는 대목이 있죠. 유다지파에게. 그러면 유다지파는 연극배우지요. 예수님이 임금 됨을 보여주는 연극배우로 미리 유다지파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이미 영적 상태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리고 별이 나온다고 했는데, 이 별은 예수님 탄생 시 동방박사가 발견하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보면서 오지요. 그러니까 별은 갑이고 동방박사는 을입니다. 별이 움직이다가 멈추는데 어디에서 멈추는가 하면 예루살렘에서 멈춰요. 연속성이 깨집니다. 그래서 헤롯 왕에게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왕은 부정적 역할을 합니다. 즉 예수님을 죽이는 역할이죠.



별이 멈추는 순간 동방박사는 메시야와 만나는 것이 아니고 메시야를 대적하는 헤롯과 만나지요. 만나는 순간 동방박사는 어떤 운명에 처하는가 하면, 단지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별을 따라 왔다는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입니다. ‘태풍 속의 고요’라고 동방박사는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밤중에 자는데 또 영적 존재인 천사가 등장합니다. 천사가 하는 말이 “왔던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 하늘나라 내비게이션이 작동을 합니다.



결국 동방박사는 천사의 지시대로 다른 길로 갔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동방박사가 다른 길로 가지 말아야 했어요. 동방박사가 다른 길로 가지 않았으면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은 죽지 않았을 거예요. 동방박사를 놓친 것 때문에 베들레헴의 아이들이 죽었지요.



그리고 어디를 가도 예수는 많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 세상이 점잖은 사람이 많은데 복음만 전하면 사람이 발작을 일으켜요. 영적 배치도가 구성되면서 이유도 모른 체 미워하게 되고 서로 소통이 안 되면서 상대에게 불만을 품게 됩니다. 취업할 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기록하는 것은 괜찮은데, ‘십자가 복음을 믿는다.’는 내용까지 기록하지는 마세요. 그러면 표적이 됩니다. “너는 십자가를 믿는다고. 그럼 우리와 함께 일하기 싫지?” 이렇게 나와요.



23장 20-21절에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라고 되어 있어요.



이 본문을 보면서 여러분은 의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를 아예 없애면 안 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않으신다고 하니 제사가 필요 없잖아요. 제사 제도를 없앨뿐더러 아예 이스라엘의 구성원을 더 이상 범죄로 인해 탈락하는 일이 없어야 이 본문과 맞아떨어지지요?



옆집에 사는 사람이 “댁의 가정은 늘 웃고 가족 간에 화도 내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지요?” 라고 한다면 그 말 듣는 순간 “여보, 우리 목소리 높이지 말자. 그리고 화도 좀 자제하자.” 이렇게 되면 안 돼요.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은 영적 존재거든요. 그런데 실제로 그 가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육신대로 사는 존재들입니다.



내부에서는 영적이고 뭐고 없고 그냥 육신대로 살아요. 그런데 외부에서 치고 들어온다는 것은 이제 내부의 조정 작업에 나선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외부에서 본 것처럼. 천사가 본 것처럼 이제 조정에 나설 거예요. 정말 주님이 허물을 보지 아니하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남는 그런 이스라엘로 미래에 완료가 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삭제가 일어나지요. 그러면 영적 전쟁은 외부의 전쟁이 아니죠. 왜? 그들은 천사가 등장하면 꼼짝 못하고, 나귀를 타고 가도 천사가 길을 막으면 계속 갈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제대로 된 이스라엘로 가동되기 위한 조치로 외부의 쓰레기 같은 민족들이 필요합니다.



‘이번에는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공격해라.’ 이게 에스겔에 나와요. ‘모압아 이스라엘을 침략해라.’ ‘블레셋 뭐하니? 빨리 이스라엘을 점령해야지.’ 그들은 몰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일을 시켜서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는 그 영적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변에 도구로 사용하는 이방인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이게 사사기 이야기입니다.



사사기 때는 쳐들어오고 싶어서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개처럼 엎드리고 있다가 “3번 개 출동!” 하면, 벌떡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향해 달려듭니다. “다음은 7번 개!” 하면 그들이 또 공격해 오고. 이런 식입니다. 이러면 이스라엘은 적이 쳐들어올 때마다 “주여, 구원해 주소서.”라고 부르짖고. 이게 뭐냐? 사건의 반복이에요. 하나님의 완료의 반복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한 마디로 마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필요하고 우리에게 주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 필요해요. 헤롯 왕이 적합한 때에 베들레헴 아이들을 죽인 겁니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 아이들은 잘 죽었다고 말 할 수는 없어도 필요에 따라 죽은 거예요. 모든 것이 적재적소에 배정이 되어 있습니다.



강의 서두에 제가 뭘 말씀드렸습니까? 쟁반 이야기했지요. 회와 초밥을 담은 쟁반. 그 쟁반이 구원의 쟁반이에요. 그 쟁반에 합치되어야 구원 됩니다. 그 쟁반을 ‘영적 차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에서 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차원에 쓰일 때에 우리는 영적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날 구원하려고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을 표현하라고 표현형으로, 주님이 우성이고 우리는 열성으로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배정받은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자리에 대해서 전혀 염려할 것이 없어요. 우리 가운데 이러한 제사가, 지금도 주님께서 제사를 단 한 번으로 계속 이루신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란 뜻이고, 우리가 죄인임을 아는 자체가 영적 차원에서 깨달음이 온 것입니다.



11장 1-2절에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들이 하나님께 원망한 이유가 있어요. 5절에 보면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만나만 먹은 것이 원망한 이유입니다.



10절에 “백성의 온 가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그 뒤에 모세가 하는 말이 “저는 이 백성을 감당 못하겠습니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파업을 한 거예요. 15절에 보면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합니다.



18절에 보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정말 애굽에서의 삶이 재미있었겠어요? 하지만 광야 생활과 비교하면 재미있었겠지요. 그리고 애굽의 음식이 아무리 형편없는 것이라도 만나보다는 다양하고 맛이 있었겠지요. 결국 이 말은, 육적으로 못 살겠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25절에 보면, 장로들에게 신이 임하지요. 신이 임하니까 그들이 예언을 하게 됩니다. 예언을 하니까 애굽 생각이 납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말은 새로운 영적 차원이 그들과 동행하고 있지요. 그러면 왜 하나님이 만나를 줘서 원망하게 합니까?



하나님의 메시야 됨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적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생산되어야 해요.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알게 되는 겁니다.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바르게 살아야지.” 이건 우리 생각이고, 육적이에요. 영적 생각은 “이것이 죄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살면 됩니다. 죽음은 필연이고 사는 것은 우연입니다.



여하간 항상 ‘이스라엘 내부에 부정적인 요소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발람이 약속한 대로 ‘너희들 속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은 얻어맞았기 때문이지요. ‘주여 용서해 주세요.’ 이것은 완료된 상태에서는 말이 맞는데 완료된 상태에 가기 이전까지는 뭔가? 항상 육적인 면면을 유감없이 다 드러낼 때 오히려 그것이 영적인 현실에 부합되는 거예요. 참지 말고 그냥 터뜨리세요. 터뜨리는 것이 오히려 영적이에요.



12장 1절을 봅시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미리암은 모세의 누나며 모세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모세가 난 지 3개월 될 때 어머니가 바구니에 아기를 담아 강물 위에 띄워 보내지요. 그 때 누나 미리암이 끝까지 따라가서 유모로 자기 엄마를 위장 취업시킨 공로자입니다.



이런 누나의 말이라면 고분고분 듣겠어요. 그런데 이 누나가 갑질을 해요. “결혼은 가정의 문제인데 가족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왜 모세 너는 마음대로 구스 여인을 아내로 택했는가?”라는 것이지요. 해답은 이것입니다. “네가 온유의 깊이를 알아?” 이것이 해답입니다. 해답을 말할 때 “우리 이제 구원 받았으니까 인간적으로 살자.” 이것 안 됩니다.



인간적이 되면 용서의 개념, 중보자 개념이 없어져요. 누구와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주님의 용서하심을 경유해서 이야기해야 돼요. 부부사이에 사랑이 없다는 말은 맞아요. 그러나 영적으로 둘 다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면 그때부터는 사랑이 넘치는 가정이 될 거예요. 그럼 영적 상태가 뭔가? 중보자가 주체가 되는 집안. 이게 영적 상태입니다.



미친 것처럼 입게 거품 물고 기도하고, 방언하고, 희한한 일을 하는 것이 영적 상태가 아니고 중보자 앞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상황이 영적 상태에요. 이런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왕을 부르는 거예요. 용서하시는 분을 불러가면서 살아가는 인생, 이것이 영적 상태라니까요. ‘죄 용서하실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용서가 드러나니까.



모세가 구스 여인과 제멋대로 결혼해서 미리암이 삐쳐서 모세를 비난하고 욕했어요. 그 때 누가 등장하는가? 개인 가정사 문제인데 하나님이 개입해서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걸리게 합니다. 문둥병은 저주의 표상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네가 저주를 받아봐야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간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홍해를 건넌 일이 너무 과분하다 보니 사건이 반복되지 않고 이제 태평이라. “이만하면 됐고 동생 모세가 결혼하는데 좋은 여자가 들어와서 우리 집안 평안하면 좋겠다.” 이런 마음자세가 사건의 반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가정 일에 저주 받는 여인을 만들어요. 그러면 이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펴지겠지요.



‘이스라엘 속에 저주가 있다.’ 이것이 영적 나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개입이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모세만큼 온유한 적이 있느냐?” 라고 묻지요. 이 사건뿐 아니고 고라 자손이 반란을 일으킬 때도 마찬가지지요. “이 세상에 모세만큼 온유한 자가 없다.” 여기에서 ‘온유’란 ‘모세처럼 하나님을 보고 산 자가 있는가?’ 이런 말입니다. 이처럼 계속해서 연속되는 것은 이스라엘 내부에 부정적 요소가 피어난다는 것입니다.



13장에 정탐꾼 이야기가 나오는데, 두 지파(유다, 요셉)에서 A학점이 나와요. 정탐꾼 장면에서 33절을 봅시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응시’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것처럼 타인도 그렇게 바라 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내가 바라보는 욕망이 타인의 욕망이 되어 공통점을 찾아낼 때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규정하는 겁니다. “나도 내가 초라한데 남들 역시 나를 초라하게 보겠지.” 이것이 내가 임시로 만든 현실이에요. 그런데 그 현실은 주님이 지금 동행하고 있는, 영적 지평이죠. 지금 발람이 이야기하듯이 이스라엘은 독특한 영적 나라잖아요.



모든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나라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 내부에서 움직이는 것은 너무나 육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동생의 여자 때문에 다투고 육적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그것을 영적으로 바꿔나가는 것은 제사장이 계속 제사 드리는 것의 효과로 됩니다.



이쪽은 범죄하고, 이미 범죄한 것만이 아니고 아직도 짓지 않은 죄가 살면서 계속 발굴이 돼요. 광야에서 살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에는 수박도 있고 참외도 먹었는데 여기에서는 만나밖에 없네.’ 이런 불평이 제사가 주는 고마움을 놓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인생과 똑같아요. 반복하고 있어요.



33절을 보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는데, 메뚜기와 대장부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어요? 14장에서 이런 보고를 듣자마자 백성들은 밤새 통곡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보세요. 부정적인 것이 또 나오잖아요. 만약에 약속의 땅에 난쟁이들만 살고, 그야말로 소인국에 나오는 사람들 같으면 웃으면서 잔치를 벌였을 거예요.



앞에 어떤 거인이 오더라도 웃어야 될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왜냐? 적들에게는 용서가 없고 이스라엘은 중보자가 있으니까요. 이 싸움은 궁극적 죽음에서 버틸 수 있느냐, 아니냐의 싸움인데 그들은 애굽 습성이 남아있어서 싸움은 힘과 능력으로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속 삭제해 가는 거예요. 미래 전쟁은 힘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주어지기에 승리하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주여,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해놓고, 돌아서서 또 자존심 챙기지요. 이것이 민수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의 모습입니다.



14장 2절에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장대하고 자신들은 메뚜기 같은데 왜 여호수아와 갈램은 그 땅에 갈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까?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했지요? 14장 24절에 보면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그래서 요셉 땅과 유다 땅이 넓어요. 전쟁 후 갈렙이 유다의 땅을 요구했지요. 여기에서 갈렙과 여호수아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무조건 적들을 이긴다는 말이 아니고 상대가 장대하고 무기가 많은 것이 하나님의 약속 편성에 꼭 필요한 요소로 본 거예요.



상대는 키가 커요. 무기도 많아요.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뭐 어떻다는 것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두 층을 다 보는 거예요. 아래층에서 키가 커고 무기가 많은 것과 관계없이 위층은 아래층을 의식하지 않고 일을 진행하는 거예요. 위층은 이미 시간이 완료된 미래만 있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이 전쟁이 미래 전쟁임을 받아들였고, 다른 사람들은 육의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20세 이상 된 사람을 다 죽여 버립니다. 광야 40년 동안 다 죽였어요.



이제 15장 32-35절을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걸리면 다 죽입니다. 이러다가 가나안에 들어갈 사람이 있겠어요? 어떤 분이 묻기를 “목사님, 안식일에 나무해서 죽은 사람들은 지옥에 갔습니까?”라고 하는데, 지금 지옥 갔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부정적 요소는 지옥 갔다는 말이 아니고 이것이 이스라엘의 차원에 안 맞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연극할 때 나쁜 역을 하면 저주 받습니까? 아니지요. 역할이에요.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다.’라는 거예요. 이런 부정적 요소와 싸운다는 겁니다. 이런 죄 때문에 제사의 엔진이 가동 중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은 상태에서도 왜 유효하냐 하면, 앞으로 이런 경우들이 우리에게 들이닥칠 것을 미리 알기 때문에 완료성 용서가 되는 거예요.



아빠가 대일밴드를 수북이 사왔어요. 왜? 가족들이 상처를 많이 입을 거니까. 아내가 마트에서 휴지와 치약을 잔뜩 사왔어요. 이걸 본 남편은 “언제 이 많은 것을 다 쓸까?”라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며칠 지나면 또 사야 돼요. 많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필요한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거예요. 마지막에는 오직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 받기 때문에 최종 합격 때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미리 앞당겨 십자가 피가 이렇게 필요하다는 연극을 우리가 하고 있는 겁니다.

2015 겨울수련회 9강



율법을 어길 경우에 죽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를 진 밖에서 돌로 쳐 죽이지요(15장 35절). 이처럼 율법에서 지시하신 죽음이 있는 반면에 그 이유 말고 다른 죽음이 발생합니다. 민수기 16장에 나오는데, 이 고라 자손의 죽음은 원천적 죽음인데, 왜냐하면 율법을 제시하는 중앙 집단 내부에서 죽음이 일어나요. 일종의 권력다툼, 혹은 반란이라고 할 수 있죠.



거룩한 제사장 나라의 중심지에서 이런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과 달라요. 그것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성전을 보여주는 특정한 죽음이 되는 겁니다.



보통 죽는 일이나 실패의 사건이 일어나면 “아, 망했구나. 이제 이스라엘은 끝났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하나님은 그런 일을 통해서 오히려 점점 더 당신의 속마음과 본뜻을 보여주시는 계기로 사용하십니다. 가장 중앙지점,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지점에서 반란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본뜻이 더 심화되면서 들춰지는 좋은 기회로 삼습니다.



콘크리트의 강도를 검사할 때 ‘파괴 검사’가 있는데, 겉에서 보면 모르는데 쪼개서 보면 정확히 밝혀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원인, 특히 근본적인 문제는 ‘동물이 죽는다고 해서 우리 죄가 어떻게 사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으라.’고 우길 문제가 아닙니다. ‘어린양을 잡으니까 장자가 살았다.’ 어떤 과정으로 인해 그런 일이 발생하는가? 아무도 몰라요.



주술인가? 미신인가? 요즘도 아프리카에 가면 어린양을 죽여서 병 고친다고 난리를 치는데, 그와 같은 것입니까? 자연종교의 형태가 나중에 유신론적 종교로 발전해서 그것이 이스라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이것이 유럽에 전해져서 유럽의 사고방식을 장악한 그런 종교적 사상체계의 진화적 산물인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은 죄를 내가 착한 일해서 씻는 것이 아니고, 외부인이 죽고 짐승이 죽음으로 내 죄가 사해지는 그 원리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믿으라’는 말은 감사한데 그냥 믿기에는 뭔가 빠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점을 마지막 시간에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 시간에 몰려 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전에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있음이니까 1입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나왔으니까 0입니다. 0인데 태어나니까 1로 칩니다. 0은 없는 것이고, 1은 있는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있는 것을 거부해 버렸어요. 생긴 것은 다 안 된다는 겁니다. 이건 에덴동산 밖의 것이기 때문에 생명나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1이 있다는 것은 저주가 있고 죽어 마땅하단 뜻인데,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서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새롭게 이삭을 줬어요. 이삭은 없는데서 생겼습니다. 없는데서 생긴 것은 다시 0으로 돌아가야 해요. 이게 아브라함 언약의 원리입니다. 돌아갈 때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삭을 잡도록 해서 제물화되면서 0으로 돌아가요.



본인이 스스로 재물화되면서 본인이 스스로 원천지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원천지가 0이 아니고 원천지가 지상의 저주 받은 곳이기 때문에 0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0에서 1이 되고, 1을 다시 0으로 만드는 제물화를 후대에 양산해요. 이 원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겁니다.



전달할 때 이것이 1로 보이지만 사실은 0입니다. 전달할 때 택한 백성, 육에서 나온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자손들 1이 있으면 제물이 투입되어 1을 0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하면서 한 마리의 양이 죽음을 통해서 0이 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1이 죽는 것은 0이 안 됩니다. 왜냐? 죽어도 맨 그 인간이니까.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0의 세계, 하나님이 이 땅에 없는 세계, 에덴동산 속의 세계, 생명나무가 있는 곳의 세계에서 준 약속이기 때문에 이 1은 약속이 깃든 순간 0이 됩니다. 그래서 약속에 의해서 구원 받는다는 말이 옳은 말입니다. 그냥 제물이 아니고 약속에 의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양을 잡는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양, 정해진 염소, 정해진 소를 잡아야 돼요. 그것도 그냥 잡으면 안 되고 약속된 날에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지정된 장소에서 잡아야 합니다. 즉 약속 안에서 펼쳐져야 합니다.



교재 3페이지 밑에 보면 “얼룩이란 무인가? 한마디로 얼룩이란 우리 시야 속에서 시야의 자명함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이런 구절이 있지요. 시야가 또렷하고 잘 보이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얼룩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안경을 예로 들어보자. 말끔하게 잘 닦인 안경을 쓸 경우, 우리의 시야가 맑고 투명하다.” 지금 안경알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그러니 이것은 0이고, 부재입니다.



말끔하게 안경이 닦여 있으면 밖의 현실이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방해요소가 없으니까요. 즉 밖의 세상과 눈으로 보는 세상은 동일합니다. “하지만 작은 벌레 한 마리라도 렌즈 위에 달라붙게 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렌즈는 곧장 투명성을 상실해버리고 두께를 얻게 된다.” 내가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내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안경을 중간에 놓고 세상을 보니까 이 세상은 안경에 의해서 새롭게 정립된 세상이지요. 그런데 그 안경에 벌래가 앉으니까 비로소 주체가 순수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고 안경을 통해 본다는 것을 느낍니다.



1이 0을 못 봐요.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죄를 짓게 만들어요. 그러면 이 죄는 우리가 짓는 죄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새롭게 발생되는 죄가 됩니다. 약속이 없었으면 죄도 아닌데 약속 때문에 발생된 죄를 보고 세상을 볼 때 내가 세상을 잘못 본 것이 깨달아집니다.



나는 정당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성실하다고 나를 착하게 봤던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어진 그 안경을 끼고 보니까 내가 곧 죄를 유발한 죄인이란 사실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 안경에 벌레가 앉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십자가가 개입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겁니다.



33세 된 청년 예수를 죽였을 때는 우리가 정당한 조치를 취했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성령의 안경을 끼고 보니까 죽여서는 안 될,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요, 창조주를 우리 손으로 죽였으니까 나는 죽어도 마땅한, 0이 되어도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양의 모습으로 죽는 것도 아니고 소의 모습으로 죽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모습으로 와서 사람의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인간 되게 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오직 주만 섬기는 그 본래의 목적을 위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겁니다. 인간이 신이 되라고 하나님 형상을 주신 것이 아니고 다 쓸모가 있어서 하나님 형상을 집어넣은 거예요. 그 형상과 마주치면서 인간은 실패했지요.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그 형상을 성공시킴으로 말미암아 진짜 하나님의 형상은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참 형상인 것을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뭔가 하면, 이런 주님과 인간들의 말싸움이 우주가 제대로 유지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1을 0으로 만들어서 0의 세계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0의 세계는 없는 세계이지만 이삭을 보낸 그 세계, 약속의 세계, 숨겨진 하나님의 세계지요.



하나님은 감춰진 분이라고 이사야 45장에 나오지요. 숨겨진 그 세계를 이 땅에서 제사 제도를 통해서 그 흔적을 드러냅니다. 이 제사 제도의 완성이 십자가입니다. 1에서 0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죄 사하는 방법인데 이것을 장치로 보여주는 것이 성소입니다. 처음 바깥에 나와 있을 때는 세상 현실이에요. 이 세상 현실로 가다가 커튼이 쳐진 마지막 방이 있는데 그 방에는 태피스트리(여러 가지 색깔의 위사를 사용하여 손으로 짠 회화적인 무늬를 나타낸 미술적 가치가 높은 직물)가 걸려있어요.



두꺼운 천으로 짜서 무늬를 넣어 벽에 장식해 놓은 걸게가 있지요.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이것을 태피스트리라고 합니다. 태피스트리를 걸어 놓았어요. 태피스트리의 그림이 뭔가 하면 천사의 그림입니다. 1의 세계에서 0의 세계로 들어가는 방식을 성소 안에서 처리했다는 겁니다.



태피스트리가 막장, 끝입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요. 종말이란 말은 시간의 한계를 두고 이야기합니다. 종말 뒤에 시간이 있는 게 아닙니다. 시간이 멈춰 서야 될 곧, 그것이 종말이에요. 시간이 있다는 것은 1이 있다는 거예요. 1을 0으로 만들면 시간도 사라져요. 여기까지가 끝이에요.



종말은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막장, 태피스트리의 반복이에요. “지금부터는 천사의 세계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끝이에요. 이게 종말의 세계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어떻게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서 양이 죽은 것으로 내 죄를 용서됩니까? 없는 것이 와서 희생물이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지워버리는 겁니다. 1의 세계에서 0의 세계로 바꿉니다.



그런데 16장에서 고라 자손은 모세를 1로 본 거예요. 모세를 1로 보았다는 것은 본인이 평소에 독자적인 1, ‘내가 여기 있고 너는 거기 있다’는 식이 되니까 모세를 1로 본 거예요. 그래서 고라 자손이 모세에게 대드니까 누가 나서는가 하면, 모세 배후에 있던 0의 세계, 하나님이 직접 모세를 대변하고 나섭니다. 1과 0의 마찰이 일어난 거예요.



제사 제도의 방식에 화제, 요제, 거제, 전제가 있습니다. 전제(또는 관제)는 디모데후서 4장에 나옵니다. 관제라는 제물에 무엇을 붓는가 하면 포도주를 부어요. 포도주는 약속의 땅에 가야 얻을 수 있는 산물입니다. 나실인이 완성될 때 본격적으로 포도주를 먹을 수 있어요.



하늘나라가 오게 되면 포도의 산물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결실물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새 언약을 세울 때, 하늘나라 갈 때까지 지상에서 포도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어요.



포도주를 붓는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나오는 결실물, 이제는 완료된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관제가 되어서 포도주를 부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덮어지는 것을 의미해요. 제사 형식은 번제(다 태우는 것), 소제(식물을 가루로 만드는 것), 속죄제(하나님께 죄 지은 것), 속건제(이웃에게 죄 지은 것), 마지막에 화목제가 있습니다.



제사의 형태가 이렇게 되어 있으면, 율법이라는 것은 이것이 죄를 사하는 방식이거든요. 그렇다면 율법은 왜 이것이 죄를 사하는 방식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죄가 무어냐를 보여주면서 여기에 맞춰 율법에서 죄를 규정하게 됩니다. 자기 인생을 몽땅 바치지 않는 것이 죄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쳐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고, 자기 죄를 모르는 것이 죄가 되고, 이웃을 해롭게 하는 것이 죄가 되고,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마엘은 존재하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저주 받을 대상이거든요. 그렇다면 삼성의 이00는 수조원의 재산을 가졌고, 전00은 대통령을 지냈어도 영의 세계에서 내려온 약속에 의해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지금까지는 저주 받아야 돼요.



그러면 왜 우리는 돈과 권력을 부러워하는가? 투명한 안경으로 보이는 것이 현실 그대로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안경에 벌레(십자가)가 안 앉아서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별 것 없네.’ 이렇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라고 했습니까? “어서 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 원합니다.” 라고 했어요.



결혼식 주례 때 이 대목을 설교해야 하는데. “신랑, 신부 소원이 뭡니까? 헛된 꿈꾸지 말고 빨리 죽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주례사를 하면 결혼식 분위기 다 깨집니다.



고라 자손은 모세를 자신들과 동질인 1로 봤습니다.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사람은 타인을 볼 때 자기 방식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타인이 갖고 있는 욕망가운데 내가 원하는 욕망을 그대로 욕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타인이 없으면 욕망이 생기지 않아요.



“저 사람은 뭘 갖고 있나? 아 기타를 잘 치네. 나도 기타를 잘 치고 싶다.” “저 사람은 피아노를 잘 치네. 나도 피아노를 멋있게 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남의 것을 봐요. 남의 것을 보는데 자신의 엉터리 안경으로 보기 때문에 라캉은 그것을 ‘상징계’라고 했어요. 상징계로 봐서 어디로 가져오는가 하면 나에게로 돌아오거든요. 그럼 나는 뭐냐? 나는 거울을 보고 나를 알았어요. 이것을 ‘상상계’라고 합니다. 상상계는 동질성이고 상징계는 타인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언어의 세계죠.



그러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뿐입니다. 어릴 때 [백설공주] 동화를 보면서 그 백설공주가 자기라고 착각하는 ‘상상계’가 있고, 나도 백설공주처럼 되고 싶어서 스펙을 쌓으면서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상징계’가 되는 거예요. 현재의 모습으로는 부족하기에 얼굴을 고치고 외국어를 더 공부하고 해서 왕자를 만나기를 고대하지요.



왜? 그것이 나라고 어릴 때부터 이미 확정했기 때문에. 동화를 본 것이 문제입니다. 동화를 보면 착한 신데렐라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겁니다. [마법의 성] 가사를 보면, 어떤 고난과 역경을 겪어도 영웅은 고난 받는 공주를 구출해 낸다는 겁니다. “이것을 뒤엎은 것이 예수님입니다.



어릴 때는 자신이 더욱 잘 되기 위해서 늘 아버지에게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공부하고 착하게 살면 동화속의 사람처럼 될 수 있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알려준 것을 ‘상징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평생을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살지 않고 아버지 이름으로 살지요. 심지어 아버지가 죽어도 무덤에 찾아가서 “아버지, 제가 잘했지요?” 라고 묻습니다. 이것이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현실의 전부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끼어들어요. 그러면 그게 바로 죄라는 사실, 독자적 현실을 구축한 그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럼 왜 그것이 죄인가? 율법의 최고 권력단체에서 반란을 일으켜 그 실상이 드러났어요. 고라 자손은 말합니다. “요단강을 건너올 때 너와 내가 똑같은 입장에서 건너왔기 때문에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나 나나 같기에 모세도 1이고 자신도 1이고, 1+1+1+1이 현재의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다수성입니다. 다수성에 어떤 이념이 나오면 그것이 신에 돼요.



고라 자손이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은 다수의 인간이 다수의 인간을 지배하는 상상한 그런 초월적 개념을 산정한 것이 신이 되는 겁니다. 그 신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1에서 나왔어요. 1의 연장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 신은 굉장히 착한 신입니다. 왜? 자신이 착하니까. 그리고 그 신은 모든 어려운 사람에게 선으로 보상해 줍니다. 왜? 내가 그렇게 받고 싶으니까.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은 거기에 다 있어요. 왜? 내가 한계가 있어 못하는 것을 그쪽에서는 다 갖고 있을 것이니까.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이 등장할 때는 ‘네가 네 죽음을 놓쳤구나.’하고 하나님이 모세를 대변해서 나옵니다. 16장에 보면 고라를 작살내는데 어떻게 하는가 하면 17절에 “너희는 각기 향로를 잡고 그 위에 향을 두고 각 사람이 그 향로를 여호와 앞으로 가져오라 향로는 모두 이백 오십이라 너와 아론도 각각 향로를 가지고 올지니라.”했습니다.



이 향로의 향은 죽음의 증거물이 피어나요. 성소는 동쪽에 문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향하여 동쪽으로 문이 나 있고, 그 안쪽으로 들어가면 제단이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불은 제물을 다 태우는 불입니다. 제물을 다 태우는 제사는 번제입니다. 번제는 무엇을 염두에 둔 것입니까? 여호와를 섬기되 몸과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섬기지 아니하면 죄가 된다는 것을 전제로 그 율법을 위반했을 때 번제를 드려서, 다 태우는 것이 정답인데 ‘네가 정답에 미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번제를 정답이라고 유도하기 위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는 조항입니다. 정답은 속죄제가 정답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전체를 다 드렸지요.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를 주님은 몸을 드려 완성했잖아요. 이것이 로마서에 나와요.



하나님 주신 율법을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것은, 우리는 나를 1로 여기는데 이렇게 되면 상대를 0으로 보지 않고 내가 보는 식으로 보기 때문에 뭔가 율법이 등장하면 하나님이 주신 1로 보는 거예요. 1과 1의 관계에서는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0이 되면 0이 얼룩을 남기죠. 그렇게 되면 1이 깨집니다. 깨어지면 죄인이 되는 겁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고, 저주받게 하기 위해 율법을 준 거예요. 그래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 못 받아요. 율법 외에 한 의로 구원 받습니다. 이것이 로마서 3장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로 드려져서 의롭게 되는 거예요. 그럼 왜 다른 제사가 아닌 화목제인가? 화목제는 다른 모든 제사를 순서대로 다 지내고 마지막에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기에 화목제를 드렸다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났나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구원의 방법이 뭔가? 이런 물음에 답이 나왔기에 종말에 들어간 거예요. 종말은 막장입니다. 더 나갈 곳이 없어요. 종말에다 선을 잇는 것은 0의 세계가 아닌 1의 세계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신천지’입니다. 신천지에서는 아직도 종말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종말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에요. 1의 세계와 0의 세계가 나란히 병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1의 세계와 0의 세계가 나란히 병행하고 있어요.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 이삭이 태어났지요. 이삭과 이스마엘 둘 다 우리가 보기에는 1이에요. 맑은 안경으로 보면 다 1이에요. 그래서 같이 취급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은 저주 받고, 이삭은 천국 간다고 합니다. 왜? ‘어디 감히 육에 속한 자가 약속의 자녀를 구박하는가? 내어 쫓으라.’고 하지요.



우리의 맑은 안경으로는 주님이 하시는 조치를 이해 못합니다. 자기가 만든 사람을 자기가 쫓아내시면 주님은 도무지 어떤 분인가? 참 이상해요. 이것은 에서와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는데 하나님이 쌍둥이를 주셨어요. 그런데 에서는 처음부터 저주받게 되어 있고, 야곱은 처음부터 사랑받게 되어 있어요.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복, 에서는 저주를 받도록 결정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야곱이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가 0의 차원에 속한 것을 알 때 비로소 자신이 이것을 보여주기 위한 제물이란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0의 차원이고 다른 모든 민족은 1의 차원입니다. 1과 0이 전쟁을 하니까 미래 전쟁이 되고 완료 전쟁이 되는 겁니다. 1에 속한 사람은 1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런 질문을 해요. 그런데 0의 차원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이 되었고, 예수님 때문에 구원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 뿐이에요.



하나님이 향로를 들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들고 나온 향로에 불을 담았어요. 그 불은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그런 종류의 불이 아니고 제단을 다 태우는 불이에요. 심판의 불이죠. 제물을 심판하니까. 이 심판의 불로 1의 세계와 0의 세계가 공존하는 것을 고라 자손들은 모른다는 겁니다.



그들이 할 일은 1의 세계를 죽이고 0의 세계로 바꾸는 일을 해야 되는데, 그 일을 하려면 면적, 폭, 권력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냥 해안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기를 소원했던 겁니다. 자기 소유가 필요치 않아요. 그런데 소유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0이 1이 되면서 1이 폭을 넓혀요.



세상의 모든 인간들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내 세계를 얼마나 확장하는가?’ 여기에 초점을 두고, 이것을 얻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나만의 세계가 넓어지는 것. 저도 똥배가 확장되어서 문제입니다. 운동해서 뱃살을 빼야 돼요. 나의 세계가 확장되면 그것을 유지, 보존하기 위해서 온갖 짓을 다합니다.



교회는 하나의 막이고 해안선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과 비거룩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는 기능만 하면 되는데, 교회 자체가 돈이 모이고, 권력이 형성되고 이러면 이 세상에서 유지가 됩니다. 시골 운동회에 가보면 천막 앞자리에 교장, 경찰서장, 면장, 큰 교회 목사 이런 사람들이 앉아요. 권력은 한 편이라는 겁니다.



레위 지파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왜? 그들은 1과 1의 다수성이 만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0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그들의 죽음은 개인 목숨이 끊어지는 사적 죽음이 아니고 자연을 가동시키는 원천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죽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연현상을 위반하는 일이 벌어져요. 지팡이를 가져왔을 때 다른 지팡이는 그냥 지팡이인데 아론의 지팡이에는 싹에 났어요.



우리가 보는 자연세계가 물리학자나 생물학자가 말하는 세계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자연 세계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이 민수기에 이미 실시가 되고 있습니다. 16장 31절에 보면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속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완전히 생매장 해버렸어요.



조폭도 이런 조폭은 없습니다. “돈 안 갚으면 10년째 따라다닐 거야.” 이렇게 나옵니다. 처음에는 조폭 세계의 중간급 간부로 돈 받기 위해서 빚진 아줌마 가계에 왔는데 나중에는 서로 정이 들어서 하나의 막이 되고 말았어요. 이제는 누가 아줌마를 괴롭히면 조폭이 나서서 막아줍니다.



땅이 갈라진다는 것은 우리의 죄 용서와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바다가 갈라지고 요단강물이 멈추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우리 죄가 사함 받는 것이 기적입니다. 왜 죄 용서를 기적으로 보지 않고 병 낫고, 큰돈을 벌고 이런 것만 기적으로 보느냔 말이지요. 1이 0이 되는 것이 기적인데 왜 1이 커지는 것을 자꾸 기적이라고 우기느냔 말이지요. 오늘날 기독교가.



교인 수가 많아지고 헌금 액수가 많아지는 것을 왜 기적으로 보느냔 말이지요. 십자가마을 수련회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도 큰 시험입니다. 우리교회 이00 집사님이 하신 유명한 말이 있어요. 우리교회 새 신자가 오니까 제게 하는 말이 “목사님, 복음 잘 못 전하신 것 아닙니까? 이러다가 우리 코너 끝나는 것 아닙니까?” 라고 해요. 왜 있을 수 없는 일이 있느냐는 거지요. 바다가 갈라지는 일은 있더라도 복음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게 당연한데 왜 그런 사람이 있느냐는 거지요.



종말에는 주님의 일이 급하게 진행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빨리빨리 1을 0으로 만드십니다.



그렇게 해서 고라 자손이 죽고 난 뒤에 이런 말씀이 41절에 나옵니다. 민수기에서 요절 한 구절을 뽑으라면 저는 16장 41절을 추천하고 싶어요.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가로되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였도다.”라고 하면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치려고 해요.



죽어야 삽니다. 그걸 백성들이 몰라요. ‘살아있는 우리를 어떻게 괜찮은 사람으로 바꾸는가?’ 이게 주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주님 약속에 따라 죽는 죽음이 축복입니다. 날마다 반복해서 죽이는 것이 종말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왜 죽이느냐고 달려듭니다. 이 때 하나님이 0의 차원으로 직접 등장하셔서 소매를 걷어 붙이면서 다 죽이겠다고 하십니다. 그때 모세와 아론이 말립니다.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백성들이 다 죽으면 이방인들이 무능한 하나님이라고 놀립니다. 이러지 마소서.”



몇 명이 죽었는가 하면, 고라 자손 죽은 것 외에 49절에 보면 염병으로 14,700명이 죽었습니다. 세월호 침몰로 죽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그리고 38절에 보면, “그들이 향로를 여호와 앞에 드렸으므로 그 향로가 거룩하게 되었나니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라.”고 했어요.



고라 자손이 범죄한 일로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심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드렸던 향로를 그대로 가져와서 차기에 하나님의 제사에 필요한 편철로 만들어요. 이 말은 뭔가 하면, 1에서 0의 차원으로 가면서, 이 지상에 죄의 흔적을 남김으로 하나님이 장차 직접 이 죄를 겨냥하여 뛰어들기 위해서 자기 자리를 이 땅에 만듭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원망의 증거물 만나, 원망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깨어진 돌판. 이것이 재료로 간직이 되어야 확실하게 인간은 주님의 속죄가 아니면 천국 못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환경이 조성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죄 지으라. 그리고 버리자 말라.” 이걸 다 거두는 거예요.



레위 족속은 사무엘이 등장할 때, 즉 엘리 제사장으로 끝이 납니다. 레위 족속이 왜 계속 유지될 수 없었는가 하면, 사람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았어요. 백성들이 십일조를 안 내니까 레위 자손은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그들은 분배받은 땅도 없고 재산도 없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십일조를 내야 레위인이 생존할 수 있는데 백성들이 여호와를 안 믿어요.



왜 안 믿는가 하면, 자력으로 살 수 있는데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요? 바보입니까? 공부가 제일 쉽다고 하는 학생에게 과와 선생을 붙일 필요가 있습니까? 자신이 과외 선생보다 더 공부 잘 하는데. 필요 없지요. 자기 힘으로도 잘 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찾겠어요? 내 힘으로 1이 1값을 하는데 왜 하나님을 찾습니까?



사사기 때의 백성들이 이러했습니다. 자기가 아는 교리를 써먹다가 아무리 감사해도 감사가 안 되는 상황이 닥칠 때는 ‘주여 살려주세요.’라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유다지파의 다윗이 왕이 되면서 레위지파의 모든 것이 유다지파로 넘어갑니다. 목자가 요셉에게서 난다고 창세기 49장에 나와 있지요.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후 요셉지파의 임무가 유다지파로 인계됩니다. 그래서 에스겔 37장에 보면 유다지파에서 목자가 나와요.



뒤에 있는 지파가 앞에 있는 지파의 모든 역할을 혼자서 다 담당하는 겁니다. 담당하게 되면 그들이 구원해 주는가? 아닙니다. 죄를 짓지요. 유다지파에서 나온 뿌리가 유대교가 되고, 그 유대교가 메시야를 죽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은 빨리 근원적인 죄에 접근하라고 일을 맡긴 거예요.



그래서 1에서 너부터 0이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사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가 되기 전에는 ‘나보다 더 뛰어난 바리새인은 없다.’고 자랑스러워했어요. 거기다가 더 하나님께 충성한답시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어 죽였습니다. 사울이 그러했지요.



그랬던 사울이 사도가 된 후로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해요. 자기가 1인줄 알았는데 주님 만난 후에는 0이 되었습니다. 1에서 0이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은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를 증거하면서 ‘여러분들도 나처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증거한 겁니다. 1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향로로 편철을 만들게 해서 “너희들이 옛날에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단다. 그런데 아직도 이스라엘이 유지되잖아.” 그러니까 그 죄마저 하나님이 용서하는 것이 0의 차원이란 말이죠. ‘원망해라. 그런데 원망을 지울 생각은 하지 마라.’ 이것이 다윗 땅에 맞아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밧세바의 남편을 미필적 고의로 죽여 완전 범죄를 꿈꾸죠. 그 후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삼은 거예요. 다윗은 뭘 알았나 하면 ‘내가 이 여자를 만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1의 차원에서 0의 차원으로 바꾸기 위해 의도적으로 짜놓은 상황이다.’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자랑합니다.



“나는 밧세바와 간음을 했었는데 이 일이 아니었으면 내 안경에 있는 얼룩을 보지 못할 뻔했습니다. 이제 나는 살았어요.” 라고 이스라엘에게 증거할 때 그게 이스라엘의 왕이에요. 죄의 극단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왕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주 받음으로 최후의 죄를 보여줬어요. 십자가는 “여러분, 나 저주 받아요.” 이런 뜻이에요. ‘이걸 왜 우리가 몰랐을까?’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은 구원 받는 사람입니다. 왜냐? 이스라엘의 그 왕을 섬기니까. 나에게 저주하시는 분을 나의 임금으로 섬기고 그분에게 복함으로 ‘당신이 아니면 나는 의인인줄 착각했습니다.’라고 할 때, 그것이 교회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안에는 은혜만 나타나요.



다윗이 그렇게 함으로써 유다지파가 날아가 버립니다. 다윗은 죄인이니까. 그런데 유다지파는 그림자였어요. 진짜 다윗의 자손은 0의 차원입니다. 그 유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오셔서 다윗의 전철을 밟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는 거예요. 어떻게 구원 받는가? 예수님이 죽는 것은 택한 백성을 위해서 죽는 거예요.



결국은 하나님이 스스로 죽으시고 스스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용서가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 버렸어요. 자동차 고장 나서 수리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새 차로 바꿔요. 새 차로 바꿨는데 그러면 헌 차는 버려야 되잖아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런 헌 차를 내가 새롭게 바꿔주었다.’고 알려주시면서 죄인 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의인 되었다.’는 말은 ‘예수 없었으면 나는 영원히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가 되어서, 내가 구원 받았음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 덕분입니다.’라고 해서 받은 면류관을 주님 보좌 앞에 반납을 합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나오지요. 이게 팩트입니다. 이게 현실이에요.



주님은 우리보고 죽으라고 오신 거예요.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그런데 그냥 죽으면 안 돼요. 예수님에 의해서 죽어줘야 돼요. 그 죽는 방법은 나를 죄인 되게 만드는 상황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을 ‘고난’이라고 해요. 고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는데, 풍부한 고난이 있어요. 갑자기 150억의 돈을 유산으로 받았다든지, 로또복권 1등에 당첨되어 60억이 생긴다든지 할 때 우리는 ‘갑자기 웬 복?’ 하는 순간 제 입을 치지요. “주여, 시험에 빠졌나이다. 내 죄를 알리기 위해 로또복권에 당첨되게 하셨군요. 제가 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성경에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남의 이야기로 여겼는데 이게 바로 나를 향해 하신 말씀이군요.” 라고 깨닫게 하는 상황. 풍부에 처할 줄 아는 상황. 여러분들이 다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하하.



공부 못하던 아들이 갑자기 1등을 하는 것. 제 처조카가 그랬어요. 제 딸 결혼식 때 축가를 불렀는데, 그 때 예원중학교 3학년 이었는데, 얘가 평소에는 노래를 잘 하는데 남들 앞에 서면 떨어서 노래를 잘 못해요. 그래서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포기했는데, 입학시험 치는 당일 이상하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풍부에 처하는 상황이 왔어요. 노래를 너무 잘 불러서 최고 명문인 서울예고에 합격을 했어요. 이것이 풍부에 처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환란과 핍박과 위험과 적신과 빈곤에 처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말하기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했어요. 새로운 교인 좀 왔다고 어장 관리한다고 심방가고 상담하고 난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복음만 외치는 거예요. 왜? 내가 복음이 좋으니까요.



여하간 18장 이야기는 십일조를 안 냈다는 겁니다. 왜? 풍부하게 잘 사니까. 1의 차원에서는 여러분이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마을 사람들 다 풍부하고 자녀들 다 성공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0의 차원에서는 그 속에서도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약속의 땅,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못 들어가는 땅, 백성들은 오해해서 그냥 이 몸 그대로 들어가면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통해서 죄를 씻어야 들어갈 수 있는 그 천국,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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