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으로 | 로그인 | 회원가입
 
통합검색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양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유튜브강의

가락강의

기타강의

HOME > 지역강의 > 기타강의
2015-08-02 21:15:01 조회 : 3599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사사기 강해 : 의심의 시절) 강의영상 전체보기 이름 : 최지영(IP:221.166.133.152)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목: 의심의 시절


 



 

 


  


 

 





 


#1 수상한 통일성 



-


#2 해석오류 


-


-


#3악의 구체성 


 



 -


#4 이유없는 구원


-  


#5 자아의 틈

-

-


 #6 신앙의 증거


 


-


#7 밤의 소리



  -


#8 내부 충돌 



 -


#9 허무한 명분



 


-


 

 관리자(IP:61.♡.138.77) 15-08-09 12:15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수상한 통일성]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누가 시킨 것인지 모르지만 주의 손아귀에서 우리가 빠져나갈 수 없음을 도리어 우리의 행운으로 여기고 우리 마음대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조차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라고 믿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작부터 끝까지 이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 저희들을 주관하시고 장악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보려는 하나님의 계시는 사사기라는 겁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그 다음에 사사기가 나옵니다. 사사기의 내용은 등장인물이 많다는 거예요. 옷니엘, 에훗, 삼갈, 드보라, 기드온, 들라, 야일, 입다, 입산, 엘론, 압돈, 삼손. 외우는 것도 힘드네요. 많은 등장인물들, 이들이 왜 등장했는가, 왜 등장해야 했는가?

 

그것은 구원자 없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등장한 거예요. 구원자가 아니면서 구원을 발생시켜주는 그런 존재가 됐어요. 자기들은 구원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남을 구원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자기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구원이 되었어요. 그러나 사사들은 압니다. 누가 나를 떠밀었어요. 누가 나를 떠밀었습니까? 제가 원치 않은 일에 왜 저를 집어넣어요.

 

그런데 막상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잘못 해석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이유 있는 구원. 분명히 구원할 때는 이유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은 이유가 없어요. 하나님이 날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잘못된 생각이에요. 하나님이 우릴 구원한다는 것이 성경 전체에 그런 게 없어요.

 

하나님이 우릴 구원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에덴동산의 위험요소, 선악과를 삽으로 파내야 돼요. 파내든지 전기철망을 삼중으로 치든지 그렇게 해야 됩니다. 구원은 이유가 없어요. 자꾸 이유를 뒤에다 갖다 대지 마세요. 마치 하나님이 날 사랑해서 구원한 것처럼 오해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왜 안 되느냐 하면,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걸 날 사랑해서 누군가 보내셨구나. 그분이 나의 구원자야. 그렇게 이야기하시는데 막상 구원자가 이야기합니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함부로 구원받았다고 니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럴 때 우리는 답변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은근히 구원자를 기다렸습니다. 주님, 저 구원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멘트잖아요.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이 이야기한 사람이 예수님을 살해했습니다. 똑같은 현상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어요.

 

하나님이 우릴 구원할 것 같으면 애초에 에덴동산부터 추방하지 말아야 돼요. 한 번 실수, 인간이니까 실수할 수 있다. 그래, 실수했어? 내가 관리를 잘못했으니까 에덴동산에 그냥 살아. 선악과는 또 만들면 되니까. 선악과, 그게 뭐라고 그것 따먹었다고 해서 영원히 추방시키고. 더더군다나 납득이 안 되는 것은 혹시나 에덴동산을 찾아올까봐 아예 에덴동산에 못 오도록 적극적으로 거부하십니다. 오지 말라고. 천사로 하여금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스물네 시간 보초서서 생명나무 근처도 못 오도록 에덴동산 바깥으로 차버렸습니다. 사사기는 바로 그 취지의 반복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계속 이야기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사사기의 내용이 뭐냐고 물으시면, 이스라엘 자체를 反, anti지요. 안티이스라엘로 바꾸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스라엘로 바꾸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공격하는 주체로 바꾸는 것이 사사기에요. 이걸 오늘날에는 이스라엘을 교회로 바꾸면 됩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교회가 진짜 참된 교회를 부수는 안티 교회로 작용하라고 각처에 허락하신 거예요. 저와 여러분은 그 교회에 다니고 있고.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스라엘은 붕괴시키는 작업에 우리가 들어온 거예요. 이게 사사기입니다. 이걸 처음부터 모르면 사사기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반대말이 구원 안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구원의 반대말은 구원이라는 것은 다 짓밟을 거야. 이게 구원의 반대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원은 반드시 구원을 훼방하고 반대하는 세력이 있을 때만 구원이 자기 모습을 뾰족이 내밀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반드시 구원 자체를 훼손시키는 세력이 있을 때 구원이 성사되는 겁니다.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돼있습니까?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끝나면 여러분이 그 내막을 구체적으로 알게 됩니다만 끝나기 전에 가시는 분들이 있어서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개인은 왕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에요. 모든 개인은 왜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돼, 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게 개인이에요. 왕이 있을 이유가 없는데 왜 왕이 있어야 되지? 만약에 누가 왕을 주게 되면 그 왕을 준 것으로 인하여 그렇지, 나는 왕이 필요 없는 거야,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말을 끝까지 들어야 됩니다. 나도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나한테는 왕이 필요 없어.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하면, 누가 나에게 왕이라고 소개할 때 당신이 왕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나는 왕이 필요 없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증명이 된단 말이죠. 다만 왕을 이용할 뿐이지. 내가 아쉬운 것, 못하는 걸 채워줄 수 있는 왕을 하나님이 고맙게도 보내주셨구나. 그럼 왕을 통해서 구원을 이뤄봐? 그리스도란 뜻이 왕이란 뜻이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왕이시니까 그 왕 덕으로 내가 천국 가서 구원받으면 되겠네, 라는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거예요. 자기 소견이에요.

 

사사기 마지막에 왕이 없으므로, 라고 했기 때문에 왕이 없다는 증거가 자기 소견대로 했거든요. 자기 소견과 왕이 있음이 상존할 수 없어요. 같이 있을 수가 없다고요. 그런데 내가 왕이 필요로 한다? 이건 상존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왕이 있어야 되지. 내 힘으로 어떻게 구원을 받아. 나는 죄인인데. 죄인이기에 천국 못 가는데 내 죄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면 나는 왕에게 복종하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본인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안티 이스라엘이란 절차를 안 거친 것이 돼요.

 

IMF, 이 단체의 약자는 모르겠지만 이 단체가 영화에 나옵니다. [미션인파서블5]에 나오거든요. 이 단체가 스스로 이 단체를 함몰시키는, 스스로 뭉개지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기 구원을 포기하고 철회하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배후 조종하는 기록이 바로 사사기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교회의 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가 느끼도록 그렇게 하는 조치, 그게 오늘날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사사기에는 하나님의 신으로 나왔지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소견이라는 항아리에서 그 우물에서 아무리 노력해서 벗어날 수 없어요.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고 나는 자기 십자가 졌다는 것도 자기 생각이거든요. “주여, 저는 저를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뭘 얻고자 하느냐?” “많은 걸 얻고자 하는 게 아니고 구원만 주시면 ....” 그게 바로 주께서 쫓아내신 취지에 안티, 반대로 작용하는 겁니다. 추방시킨 주님의 조치가 옳지 않았다는 거죠. 주님이 옳지 않으니까 나라도 옳아야 되죠. 구원받고자 하는 나는 옳고 그런 나를 구원하지 않는 주님은 무조건 옳지 않은 것이 되죠.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옳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대든 것이 될까 겁이 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겨요. 하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그러면 또 묻지요. “네가 내가 왕인 줄 믿느냐? 그걸 믿어서 너한테 이익이 뭐냐?” 혹시 구원될까봐. 또 마찬가지야. 결국은 아무리 하나님을 끌어당기고 예수를 믿고 삼위일체를 논해도 나의 나됨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이때 누가 타이밍 맞춰서 해답주시면 좋은데? 제 강의 많이 듣는다고 소문난 장로님? 벗어날 수 없으면 어떻게 하면 되지요? 안 벗어나면 되지요. 이게 구원의 시작인 거예요. 성경은 우리 자신을 되비춰보는 거예요. 남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보기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딱 나네. 이러면 깨끗하게 문제가 끝나는 거예요.

 

그 다음 문제는 뭐냐 하면, 왜 그들은 자기 소견대로 했을까? 그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이스라엘이 구원되고 밥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했다. 그것도 우리 이야기거든요. 따라서 그들은 잘 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으면서 어려울 때 부르짖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자를 보내주시기를 간곡히 기도했다. 그것도 우리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시도와 그러한 노력을 다했는데 이스라엘은 안티이스라엘로 변하고 멸망하고 맙니다. 그것도 우리 이야기라고 그건 차마 말 못하지요. 결국 우리가 스스로 망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는 말을 우리가 수긍하기에는 아직도 우리 자신에게 애착과 미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구원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기 때문에 이유를 달아요. 요한복음 3장 16절부터 해서 유명한 구절 다 동원해서 무조건 이유를 붙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유를 붙였던 자들이 메시아를 죽였다는 사실. 유대인들이 그렇게 겸손한 사람 아닙니다. 다 합리적으로 따지고 다 알아보고 모든 걸 앞뒤로 견주어서 너는 아니라고 결론 내리고 그것도 투표해서 시나고게 72명의 국회의원들 모여서 투표해서 결정내린 겁니다. 누군가 아니라고 했으면 반대가 있었을 텐데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열두 제자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그들도 ‘예’라고 했을 거예요.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힘의 단계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강의할 것은 우리의 구원은 물 건너갔어요. 우리의 구원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만 남아있어요.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마치 내 구원과 연결된다고 여겼던 겁니다. 그렇게 연결되는 가운데서 최고 중요한 것이 빠져버렸어요. 걸림돌이 빠져버린 거예요. 십자가 빠지고 그냥 우리가 아는 사랑 개념, 주님은 사랑의 하나님, 사랑이란 개념으로 마주쳐서 “하나님, 좋은 사랑 실현해보시지요. 값없이 주신다고요? 멋진 사랑이네. 저는 그런 사랑 원했습니다. 저는 긍휼을 원했습니다. 됐지요? 됐네. 거래 성사됐습니다.” 이러고 싶었던 거예요.

 

그렇데 되면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의 걸림돌은 이미 사라졌어요. 십자가가 사라졌어요. 십자가를 치워버렸습니다. 십자가를 우회했습니다. 돌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보가 아니지요. 그들 나름대로 한 신앙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낮춰서 영광 돌리기 위해서 온갖 분에 넘치는 행동까지 다 한 사람들이에요. 우리보다 더 멍청해서 주를 죽게 한 것이 아닙니다.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면 그들과 똑같이 표를 던졌을 겁니다. 그들의 결정에 우린 찬동했을 겁니다. 왜? 그들이나 우리나 개인의 소견대로 행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하시는, 버리려면 그냥 버리지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라는 표상으로 이스라엘을 찾아왔느냐? 이스라엘이 원래 없던 나라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나라라는 게 없어요. 누가 만든 나라냐 하면, 임시방편으로 하나님이 자기 약속을 이루는 하나의 마당놀이로 사용하려고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이스라엘 나라 전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여러분 다 아시는 이야기지만 제가 죽 이어나가겠습니다. 애굽 나라뿐이었습니다. 애굽+이스라엘, 이런 혼용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없어요. 애굽에서 사건 하나가 터지면서 이스라엘이 거기서 분리되어 나온 겁니다. 이 사건이 밤에 이뤄진 사건이에요. 밤입니다.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인간이 영향력을 줄 수 없는 모든 인간이 잠자던 그 밤, 새벽 2시 40분인지 그건 확실히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그 밤, 인간의 활동성이 중지된 밤에 일어난 사건으로써 이스라엘이 나왔어요.

 

그러면 밤은 뭐냐 하면, 낮과 낮을 중간에 절단시키는 겁니다. 낮과 낮을 우리는 연속성으로 보거든요. 연속성의 중간을 끊음으로써 시간적인 단절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오면서 달력이 바뀌어요. 그게 4월인데 1월로 바꿉니다. 그것도 밤부터 시작해서. 유월절이 원래 밤부터 시작해요. 해지고 난 뒤에 유월절 시작되거든요. 밤부터 시작된 나라는 밤으로 돌아가야 돼요. 밤은 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고 거기에 들어설 수 없는 시간적인 낯선 영역이에요. 그게 바로 얍복 강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을 때 천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놔라. 해가 뜨니 내가 사라져야 되겠다고 하죠.

 

이것을 무한한 유한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그냥 넘어갑시다. 하늘나라는 경계는 있지만 한계는 없어요. 어떤 요리사가 요리하는데 보통 채소로 몇 가지 집 반찬을 만들었어요. 분명히 만들어진 요리와 다른 재료 사이에 경계가 생겼지요. 접시에 담긴 것은 요리고 다른 건 요리가 아니잖아요. 경계가 생겼는데 맛을 보니까 무한한 맛이라. 세상에 이런 맛이! 먹으면 먹을수록 무한적인 맛이 나와요. 이게 기드온 삼백 명이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축소했는데 더 깊어진 것, 삼만이천 명 왔다가 삼백 명 남았는데 더 깊어졌어. 그게 왜 그런가? 그건 사건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숫자를 최소로 압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소한도로.

 

지금 표정들 보니까 니가 언제까지 모르는 소리 하는지 보자, 이런 식인데 계속해서 모른 소리할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A에서 B로 변할 때 과학은 A 포착하고 끝나고 난 뒤에 B 포착합니다. 그래서 A가 원인이고 B를 결과라고 합니다. 이게 실증적 의미이론이라고 하는데 그건 몰라도 되고요. A에서 B로 변해서 결과를 낳습니다. 그런데 뭘 놓치느냐? A에서 B로 변하는 변화 자체를 언어로써 표현을 못해요. 나뭇잎이 노랗다. 노랗구나. 나뭇잎이 푸르다. 푸르구나. 가을 돼서 노랗다. 노랗구나. 가을이 되었네. 이건 되는데 언제부터 노랗게 달라지는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의미체계는 언어체계로 합치되지 않아요.

 

그래서 언어는 뭐냐 하면, 지금까지 한 것 중에서 제일 어려운 말인데, 언어는 중지다. 언어를 따라붙다가 ‘푸르스름’은 안 돼. ‘푸릇푸릇’ 그것도 아니야. 합치되지 않아. 언어는 결국은 헉헉거리다가 정확하려 하다가 포기하고 중지될 때 그게 언어에요. 여러분, 교재 읽어봤습니다. 헉헉거리면서 여기까지 올라온다고 읽어볼 시간도 없었지요.

 

언어가 현 사실을 표현할 수 없어요. 한계가 있고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인간들 소행이 나쁜 것은 합치되지 않는 언어가 부정확하고 옳지 않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일단 언어로 맞춰놓고 그 다음에 언어가 상당히 잘 먹혀들어 가거든요. 그걸 나라고 일방적으로 거기다 갖다 붙이는 반칙을 범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예수 믿으면 신자가 된다. 예수 믿고 신자가 되는데 몇 분 걸렸습니까? 이걸 언어로 사용하지 못해요. 변화될 때 느낌이 어떻고 체온이 몇 도 올라갔으면 그걸 어떻게 압니까? 몰라요. 구원파 가니까 11월 3일 오전 7시에 했습니다. 정확히 7시입니까? 7시 7초였어요, 7시 6초였습니까? 7시 6초였나? 6점 몇 초였지요? 그게 안 돼요. 왜냐하면 시간언어가 동원된 이상은 이건 비겁하게 하다가 안 돼 안 돼 도저히 안 돼. 이미 자기 한계에 들어가서 포기했잖아요. 포기했으면 그 단어를 자기한테 적용시키면 안 되지요. 이미 실패한 걸 도로 자기한테 가져오는 그런 반칙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예수 믿으면 성도라고 하니까 성도라는 그 단어가 마음에 들거든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됐다. 그건 마음에 더 드네.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걸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 기록된 걸 좋아하라. 저건 나 이어야 해. 그게 좀 바뀌면 저건 나야. 이게 바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다 그렇게 나와요. 안티입니다. 주님에 대한 안티조직이에요. 이 소리 듣고, “목사님, 저는 아닙니다.” 하지 마시고 안티면 그냥 안티라고 받으면 그게 구원의 현장이에요.

 

사사기는 구원자를 보내셔서 그들로 저분이 구원자라고 오해케 해서 결국 이스라엘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열두 지파를 구성하는 띠라는 게 있는데 그 띠가 레위언약이라는 겁니다. 쉬운 말로 은혜입니다. 쉽게 은혜라고 하지 왜 레위언약이라고 하느냐. 은혜라는 게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은혜와 다르기 때문에 언약에서 나왔기 때문에 레위언약이라고 한 거예요. 그냥 괜히 이야기한 게 아니고 다 이유가 있어요. 좋은 게 좋다. 은혜다. 그런 은혜 아닙니다. 레위언약에서 나온 띠로, 레위언약은 모세언약에서 나왔거든요. 모세언약에서 나오는 그것이 이스라엘을 구성하게 했고 땅을 차지하게 한 거예요.

 

그러면 모세언약이 뭡니까? 간단하게 설명해주세요. 모세언약은 모세를 죽임으로써 구원자 없는, 이유 없는 구원을 모세언약이라고 합니다. 구원자 없는 모세가 죽고 난 뒤에 여호수아가 설쳐도 여호수아는 자기 뜻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모세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이 땅을 차지한다는 내용을 담을 때 그게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이건 모세 때문이야. 우리 가운데서 모세 같은 사람 등장하게 되면 우리 조직은 유지 돼, 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건 안티 이스라엘이에요. 그것은 이스라엘과 대립되는 거예요.

 

제 이야기는 의외로 쉬워요. 주는 대로 먹으면 돼요. 차린 밥상 떠먹으면 돼요. 그냥 곱게 먹으면 될 것을 엄마는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주셨다. 이렇게 꼭 뒤에 토를 다니까 그게 지금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셔서 천국에 넣어줬다. 우리를 사랑해서 천국 넣어준 게 아니거든요. 우릴 사랑했다면 애초부터 선악과를 뿌리 채 뽑아버린다니까요. 식목일 누가 만들었어요? 아예 선악과 빼버려야 돼. 그 위험한 나무를 왜 심어놨어요?

 

안 믿는 사람들은 맨날 신자에게 묻는 게 뭡니까? 선악과 처음부터 안 심으면 되지 왜 심어놨습니까? 교회 깨나 다니고 집사, 장로 됐다 하지만 그 말에 딱 막히네. 글쎄 말이야. 선악과 왜 심어놨을까? 기껏 배운 요령 중에 하나가 선악과 왜 심었냐고 묻는 자를 지옥 보내기 위해서, 라고 궁색한 비겁한 변명이십니다. 어디서 되도 않은 변명인데

 

이렇게 볼 때 사사기 전체 내용은 이것 하나로 정리될 수 있어요. 네가 인간인 것을 증명해보라. 인간 보고 인간인 것을 증명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이러한 태도는 네가 인간이라는 근거를 다시 한 번 조사해봐라. 너는 어떤 근거에 의해서 나는 인간이라고 그동안 우기면 살아왔는지 다시 말해서 내가 인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본 적 있느냐? 해보라는 거예요. 사사기에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렇게 증명해요. 내가 인간이니까 밥을 먹고 이렇게 살아있지.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이 네가 살아있는 게 맞긴 맞아? 네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해보라고 나와요. 소크라테스 같아. 말꼬리 잡고 또 묻고, 또 묻는 거예요.

 

내가 여기에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것 맞잖아요. 내가 인간이니까 인간인데 그게 어찌 증명합니까, 라고 한다면, 방금 그 이야기는 당신이 세운 기준으로 그동안 당신을 속여 왔다는 거예요. 내가 만든 그러니까 일단 뭔가 태어나고 난 뒤에 남들 눈치 보니까 예쁜 아들이야, 예쁜 딸이라고 하니까 내가 사람이구나. 남들이 궁시렁거리면서 하는 이야기가 괜찮아 보이니까 그것이 나에 대한 주체의 정체성인 줄 알고 그걸 그냥 가져온 거예요. 가져와서 나는 인간이라고 한 겁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 있는 어떤 누구도 돌멩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누구나 이야기하기 때문에 자기는 인간이라고 우기는 겁니다.

 

그 증명이 왜 틀렸는지 그걸 사사기에서는 보여줍니다. 어떻게 보여주는가? 딱 두 자에요. 진멸한다. 흔히 우리가 아는 편한 말로 토벌한다. 너무 지리산 냄새나지요. 태백산맥 냄새 나지 않습니까. 또는 안 쓰는 용어라서 낯설어요. 이게 적당해요. 전멸시킨다. 왜 전멸해야 되는가? 너한테 나는 전멸되지 않을 근거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전멸 당해야 돼요. 저는 죽으면 안 된다는 이유를 내가 댈 수 없어요. 그게 문제에요.

 

그동안 인간들은 자기가 인간이고 계속 살아야 된다는 것 때문에 그 이유를 댄다고 하나님, 예수를 동원시킨 겁니다. 이건 진멸용으로 했던 용어를 자기가 살려는 용어로 바꾼 거예요. 그 바꾼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보낼 때 그들이 불쾌하게 만드는 구원자를 보낸 거예요. 좀 근사한 구원자 없나. 왼손잡이 말고.

 

왼손잡이는 통계상 10%에요. 에훗이 모압 왕을 죽일 때 왼손잡이라서 무기 수색에 유리했습니다. 보통은 오른손잡이기 때문에 무기가 이쪽에 차있거든요. 그런데 왼손잡이라서 쑤시기에 쉬웠던 거예요. 옛날에 왼손잡이는 장애자 취급했습니다. 베냐민이 오른손의 아들이잖아요. 정상적인 것은 오른손이지 왼손잡이는 제조날짜가 잘못됐는지 뭔가 제조공정에서 문제가 있어서 잘못된 거예요. 그 잘못된 자가 구원자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했거든요.

 

에훗은 모압에게 18년 동안 통치 받고 80년 동안 태평했어요(3장30절). 삼손은 40년 동안 블레셋 통치 받고 20년 동안 독립했고, 입다라는 깡패는 18년 동안 암몬에게 압제 당하고 기껏 숨 좀 쉰 해는 6년밖에 안 됐어요. 입산는 7년이고, 둘라는 23년이고, 야엘은 22년이고, 엘론은 10년이고, 압돈은 8년이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사들끼리 모르는 사이에요. 웃기지요.

 

그걸 저는 서울 마포구의 싱크홀이라고 합니다. 도로에 구멍이 생겼는데 서로 우리가 몇 년 몇 월 몇 시에 도로에 구멍을 내자고 한 게 아니에요. 무작위로 구멍이 뚫린 거예요. 구멍이 뚫리면서 그동안 있었던 은혜가 배수구로 물 빠지듯이 은혜가 빠지고 말았어요. 전에 섬이었는데 섬이 아니라 육지로 이어졌어요. 은혜가 빠지니까. 은혜가 쏙 빠지니까 등장한 것은 뭐냐? 그들은 왕이 필요치 않는 개인적인 존재자들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 믿어요, 하나님을 거론 안 했습니까? 열심히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출처가 달라요. 출발점이 나만 잘 되면 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안티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을 파괴하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사기가 무슨 내용입니까? 딴 소리 말고 짧게 이야기해 달라. 악의 배양지, 악의 비닐하우스, 악의 시설물. 온도가 4,50도나 올라가는. 제가 올 때 성주군 수륜면으로 왔거든요. 들에 보면 시설물, 비닐하우스 있지요. 갇혀 있으면 마음껏 악이 거기서 숙성하는 곳, 그게 사사기입니다.

 

그러면 구원자가 열두 명이나 되는데 구원자가 그들을 구원했잖아요. 구원 안 했습니다. 구원 안 했는데 그들을 10년 동안 해방시켰다는 그런 이야기는 왜 나왔느냐? 해결 되지 않는 구원자를 보낸 겁니다. 개인이 소견에 보기에 옳았다는 그 바탕이 있는 이상은 이건 사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도 해결이 안 돼요. 누가 구원자가 되도 해결이 안 돼요. 이미 바탕은 나를 위한 구원이어야 참 착한 하나님이란 인식이 벌써 발생됐기 때문에 어떤 구원자를 보내도 그건 구원 안 됩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 강의 제목을 [수상한 통일성]이라고 정했어요. 통일 됐는데 굉장히 수상해요.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으면 잘 먹고 잘 살아라 저주받으라고 끝내지 왜 이스라엘을 없는데서 따로 만들어냈는지 그 이야기를 계속 해봅니다. 이스라엘을 만든 목적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세기에 보면 혼돈에서 질서가 만들어지잖아요. 왜 만들었지요? 혼돈 그냥 두지 왜 질서를 만들지요?

 

혼돈에서 질서, 이 말은 내가 왜 있지,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여기 내가 왜 있지? 이 말은, 내가 없어도 되는데 내가 없다고 해서 태양이 주저앉습니까? 달빛을 잃어요? 그건 예수님한테나 해당되지 우리는 해당 안 되지요. 왜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는데 햇빛은 빛나고 있습니까? 유명한 팝송 있잖아요(The End Of The World - Skeeter Davis). 왜 태양은 빛나고 파도는 치느냐 이 말이죠.

 

이별은 만남보다 훨씬 쉽지요. 윤도현 밴드의 [사랑했나봐] 이별은 만남보다 아주 쉽지요. 이게 왜 쉬우냐 하면, 사랑은 억지기 때문에 그래요. 좋은 말 할 때는 적으세요. 사랑은 억지에요. 혼돈이 자연스러운 겁니다. 내가 사는 것보다 우리가 사는 건 힘들어요. 그런데 뭐가 쉬우냐 하면, 내가 죽는 게 쉽다니까요. 나로서는 어렵지만 나한테 원한 가진 사람은, 저 인간 죽여 버릴까. 저쪽에선 쉬워요. 지금도 날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까. 뭔가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구원은 아닙니다. 구원 같으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20년 믿고 30년 믿어봐야 한 순간에 나, 예수 안 믿는다. 그동안 사랑보다 이별이 훨씬 쉬워요. 한 순간에 삐끗하면,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난 예수 안 믿습니다. 그동안 믿는다고 얼마나 용을 썼고 변비 걸릴 정도로 애를 썼지만 그냥 모든 걸 내려놓으니 그게 하나님 안 믿는 게 그렇게 편한 걸. 여러분 다들 그 기분 아시지요. 하나님 안 믿는 즐거움을 편함을 아시잖아요. 오늘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하나님 믿지 마세요. 어색해요. 우리 본성에 안 맞아요. 그냥 본인만 믿으세요. 줄곧 본인만 쥐고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어요. 오직 나만 사랑하세요. 그게 우리를 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혼돈에서 질서를 만든 것은 악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악아, 기어 나와. 창조마저 창조 자체를 붕괴시킨 겁니다. 하나님의 자기 증명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자기성을 파괴함으로써 자기를 증명하는 겁니다. 파괴당하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에요. 여러분 할 줄 모르지요.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못하잖아요. 남은 다 죽여도 난 안 죽잖아요.

 

[매드맥스] 영화 보세요. 핵전쟁으로 다 죽어도 호주의 사막에 누구 하나 이상한 마스크 쓰고 등장하잖아요. 그게 바로 우리가 그리던 진짜 모습이에요. 다 죽어라, 다 죽어. 신격호고 뭐고 롯데고 다 무너져, 다 무너져. 하지만 우리 집은 안 돼. 우리 집 보일러는 안 돼. 그러니까 누가 못 되고 망하고 이혼하면 신이 나. 그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남 망하는 재미로.

 

그래놓고 누굴 믿는단 말이에요. 우리는 누굴 믿은 적이 없어요. 나 외에 다른 사람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천국 준다고 하니까 그게 탐이 나서 믿는 척하고 있을 뿐이지 절대로 우리는 교회 나와도 절대로 나 외에 다른 신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십계명 만들어낼 수 있어요.

 

나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 나는 나 외에 누구에게 절하지 않는다. 나는 나 외에 어떤 것도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 나만 섬긴다. 내가 쉬는 날이 안식일이다. 부모가 나한테 유산 줄 때만 부모님께 공경한다. 나한테 못 되게 하면 차에 깔려 죽어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무조건 좋아해. 그건 로맨스니까. 팔계명은 뭡니까? 도둑질. 내가 아쉬울 때 도둑질하면 하나님도 봐줄 거야. 그 다음에 뭡니까? 십계명도 못 외우겠다. 거짓증거하지 말라. 살기 위해서는 거짓말도 용납된다. 기생 라합을 봐라. 이런 식으로. 십계명이 뭡니까? 나는 탐심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문자로 안 썼을 뿐이지 이미 우리 속에 그것이 잠재돼있어요.

 

하나님께서는 혼돈을 질서에게 악을 발췌해놓고 그 질서를 뭐로 바뀌느냐? 혼돈으로 바꾸면서 왕을 등장시킵니다. 누구냐? 진짜 이 세상을 만든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만드는데 그 나타나는 방법은 모든 질서가 무너지는 것, 이게 하나님의 스스로 자기 파괴거든요. 자기가 만든 것을 스스로 파괴하면서 거기서 포장지 뜯듯이 거기에 진짜 우주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끄집어내는 방식, 이 방식을 사사기에서 사용하십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61.♡.138.77) 15-08-09 12:18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2강 [해석오류]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 끝에 하나님께서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신 것은 부수기 위해서 만들었어요. 히브리서 1장 10절에 의해서. 그냥 부수면 만든 이유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바꿔치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리스도는 영존할 것이지만 그리스도 외에는 영존 못한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이 허물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만드신 분이 만들었다고 하면 될 텐데 왜 꼭 부수면서 만드는가? 그것은 바로 마귀와 예수 그리스도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한 번 만들어진 것 부수지 말라는 것이 마귀 생각이고, 만들어졌기에 무너져야 한다는 것이 주님의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게 첫째 시간에 하나님의 존재증명이라고 했지요. 자기성을 스스로 파괴시켜 나가는 겁니다. 그러한 자기 파괴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굉장히 낯설고 인간을 불쾌하게 만들어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그 발언에 대해서 동의할 위인이 없습니다. 전부 다 한 통속이기 때문에 아담의 족속이기 때문에 다 마찬가지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성경을 해석하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야 될 그 이유에 대해서 제가 지금부터 설명하면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적어볼게요. 영희가 죽다. 또는 같은 말로 철수가 죽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 우리 보기에는 영희라는 개인이 죽는 게 되지요. 영숙이는 안 죽었는데 영희가 죽었잖아. 개인이 죽은 거예요.

 

그런데 ‘죽다’를 주사기로 뽑아내봅시다. 죽음이 영희를 통해서 자기가 스스로 나타냈다고 봅시다. 그러면 어떤 인간도 죽음을 주사기로 뽑아내면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노리는 것이 바로 그거에요. 네가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너를 이용해서 죽음이 실제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영희 같으면, 나는 살아있고 나는 실제라고 여기지만 진짜로 너의 주인, 너의 왕은 네가 아니고 너를 죽게 하는 죽음이 너의 왕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5장 이야기입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거예요. 죽음이 왕 노릇하는 거예요.

 

주사기로 뽑아내는 겁니다. 뽑아낼 때 우리가 주어부분에 턱하니 건방지게 앉아 있잖아요. 이걸 앞에 세우고 영희를 뒤에 세우는 거예요. 죽음이 영희로 하여금 죽게 했다. 그러면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희가 살았다. 사실은 이 말은 성립 안 돼요. 영희가 계속 살고 있다. 그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영희가 계속 살고 있다고 하면 안 되고, 계속 사는 생명을 증명하기 위해서 잠시 영희를 이용했을 뿐이다.

 

그렇게 될 때 피조물들의 다양성은 날아가고 60억 인구는 날아가고 모든 것이 하나에서 나온(주님이죠) 원리원칙 아래 전부 다 모든 것이 종속되고 묶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책이에요. 말로만 그러지 말고 해석할 때도 그것을 거기다 집어넣어줘야 돼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금 우리가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리니.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교단체 하면서 많이들 안 외웠습니까? 시험 치고 하지 안 했어요? 꼭 중요하게 나오는 말씀은 에베소서 2장 8절 말씀은 꼭 나오지요. 나의 나 된 것은 나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그런 구절.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 4절은 중요한 구절이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런데 그건 중요시 하면서 그 앞에 선교단체라는 것이 주어 부분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어 부분으로 하게 되면 영희나 철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우연적 존재가 돼요. 자체적으로는 존재증명이 안 됩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분을 경유할 때 비로소 본래 자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반드시 경유해야 돼요. 신학교 가서 기도 많이 했습니다. 이러면 안 되고. 안 하고 싶었는데 주께서 나를 이용하고 싶데. 나는 기꺼이 이용당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야 자랑할 것이 그리스도만 자랑 되지요.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거죠.

 

그렇게 주체가 바뀌게 되면 사사기에 나오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것이 어느덧 안개처럼 사라지고 말았어요. 나? 내가 주체 자리에 왜 있지. 나는 아니야. 나는 주께서 하신 결과 자리에 있어야 돼. 이렇게 옮겨지는 겁니다.

 

이렇게 바뀌는 걸 해석오류라고 하는데 이런 해석오류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요. 그것은 교인들이나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주체 자리를 내놓을 생각을 안 해요. 신이 나한테 뭘 해줄 겁니까? 만약에 내가 원하는 걸 해준다면 저도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뭘 내가 행하면 30배, 60배 약속한 것 주시겠습니까? 내가 30배 받으면 15배 정도는 내놓을 용의가 있습니다. 60배 받으면 30배 내놓겠습니다. 100배 받으면 50배 내놓겠습니다. 계산해보는 기라. 200 같으면 100은 남잖아요. 그런 계산은 밝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왜 이런 해석오류가 발생되는가? 어느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의 문제풀이를 보세요. 국어시간인데 다음 중 지문의 내용과 가장 먼 것은? 1, 2, 3, 4, 5번. 그 아이는 5번이라고 한 거예요. 왜냐하면 줄자로 재봤거든요. 가장 먼 것은 5번이란 말이죠. 굉장히 쉬운 문제를. 이게 old perceptions에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에서 배웠어요. 얼마나 쉬워요. 이게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거예요. 왜냐하면 지문이 여기 있고 가장 먼 것은 이거란 말이죠. 초등학교 5학년인데 이 얘 걱정돼요. 시킨 데로 안 하고 분명히 연예인, 배우 한다고 설칠 수 있어. 특이해요.

 

여기서 해석오류가 일어났지요. 선생이 묻는 질문과 답하는 인간이 서로 다른 지평, 다른 층을 이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층을 이루면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 층으로 비약, 도약할 수 없습니다. 도약할 수 없으면 저쪽 층에서 와서 건져내면 되잖아요.

 

[어벤져스]가 왜 생겼습니까? 안 되니까 생겼잖아요. 보통 사람이 안 되니까 힘 센 사람으로 악한 자를 이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기대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아래층, 우리 인간 층에서 은근히 고대했던 바의 연장에 있어요. 누가 나를 구원할 자 없을까? 드디어 왔구나, 흑기사. 이렇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기다림이란 비록 내가 못하지만 나의 의미는 한계를 벗어나서 누가 나를 구원해줄꼬, 라고 벗어날 수 있는 거예요.

 

요 근래 강의하면서 그랬잖아요. 큰 암소가 들어온 이유가 뭐냐? “아빠, 내 마음에 암소 들어왔어.” 아빠가, “암소가 너보다 큰데 네 속에 어떻게 들어가?” 마가복음 5장에 나오잖아요. 귀신 이천 마리가 청년 속에 들어갔지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귀신이 그 안에 다 들어갈 수 있느냐 말이죠. 납득이 안 돼.

 

이게 왜 암소가 되느냐 하면, 암소에 대한 모든 의견을 나에게서 출현,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동일성이라 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세계와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는 그것이 아마 천국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여호와증인의 표지에 저 푸른 초원이 나오잖아요. 여호와증인들 잔디밭 못 가져서 환장한 것 같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이슬람에 나오는 천국 개념도 마찬가지에요. 얼마나 사막 지역이 척박했겠습니까? 분수가 나오고(전기세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들판에 골프장이 있고 거기에 옵션 하나 추가된 것이 미인들. 그게 이슬람 교인들이 목숨 걸고 지키는 경전입니다.

 

이걸 동일성 사고방식이라 합니다. 단절이 없어요. 내가 꿈꾸는 세계가 곧 천국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천국 단어 끄집어내서 이건 내가 원했던 그 세계라고 한 거예요. 베드로도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국 가면 누가 높습니까? 다들 그렇게 했지요. 주님께서 칼질을 했어요. 잘라버렸어요. 칼질하는데 누굴 동원했느냐? 그 당시 권력자들을 동원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나이 어린 소녀 하나가, “아저씨(하여튼 싸지도 없어), 저 잡힌 예수와 한 패지요. 내가 봤는데.” “왜 이러느냐? 네가 지금 실성을 했구나. 정신 차려라.” 당장 하옥하라고 싶을 거예요. 아가씨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봤는데 예수와 함께 돌아다녔잖아.” 내가 아는데. 그러니까 베드로가 더 적극적인 부정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옆에서 불 쬐던 사람들도 그런가 하여 바라보고 있고 해서 “나, 저 사람을 저주한다. 됐냐? 이만하면 됐어? 이러면 예수와 관계없는지 됐어?”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 놀아납니다. 타인의 시선에 놀아나는 이유는, 본인한테 눈이 박혀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오후설교에 아예 목을 잘라버려라. 거기다 십자가를 박아 넣는 것이 에베소서에 나오는 교회의 머리라는 거예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가 모든 통제력을 쥐고 있어요.

 

오후설교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간음한 여인을 잡아다가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해요. 너는 나만 바라봐. 저 사람 보지 말고. 너의 얼굴은 나를 바라보게 한 얼굴이었어. 내가 너를 보는 시선을 위하여 영희는 그동안 간음했어야 했어. 영희가 죽는 이유는, 죽음이 영희를 지배하듯이 그리스도가 바라보는 시선을 위해서 소경된 자가 필요했고, 간음한 여인이 필요했고, 38년 된 병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필요했던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받는 자가 아니라 구원에 쓰이는 자에요. 구원받는 자가 아닙니다. 주제넘게 그걸 요구하지 마세요.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이미 구원의 작업 속에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는 중입니다. 무익한 종이니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할 뿐이에요. 뭐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바로 내가 보는 내가 관찰해서 정리하는 나의 현실을 나에게 더 이상 그것이 오류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한 세계지요. 좀 더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혼돈에서 질서로 한 것은 악을 구체화한 거예요. 그러면 질서의 중앙부분이 꼭 있어야 돼요. 그 중앙부분에 두 나무가 사이좋게 있어요. 두 개의 나무가 배후로 서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들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어쨌든 둘로 보입니다. 따먹어라, 따먹지 말라는 두 개의 나무가 있어요. 여기서 물이 나옵니다. 생명수가 나옵니다. 생명수가 에덴동산의 네 개의 강을 적시면서 에덴동산은 낙원이 되었어요. 에덴동산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니고 두 나무가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우주의 주인공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인간 되게 했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었고 그 형상은 조건부로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다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교재 1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그런데 이 의미가 두 개의 층으로 구분 지어진다. 하나는 사법적 영역과 일상적 영역의 구분이 그것이다.]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은 인간 나름대로 혼돈에서 질서로 다듬기 위해서 의미를 주는 거예요. 혼돈을 방지하고 질서체계를 잡기 위해서 의미가 주어지는 최종적인 것은 법적인 권위가 부여되는 의미가 바로 사법적 영역이에요. 그런데 사법적 영역보다 더 높은 영역이 바로 도덕적 영역이 있어요. 이건 법 없이도 사는 세계, 바로 동양철학에서는 이걸 추구하는 겁니다. 법 없이 사는 것.

 

법 지키는 것이 정의가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건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사람이 법으로 정의를 구현하려고 치면 반드시 희생자가 발생되게 돼있어요. 이게 아쉽지만 인간의 법집행의 한계입니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사사기 마지막 대목이에요. 바로 베냐민지파가 날아가 버린 겁니다. 정의롭게 법집행을 했는데 이게 이스라엘이 안 됐어요. 이스라엘이 빵꾸났어요. 한 지파가 날아가 버렸어요. 이빨 하나 빠진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그 나라가 아니에요. 이건 엉뚱한 나라가 된 거예요. 안티이스라엘 된 거예요. 본인들도 당황스러워요.

 

그러면 베냐민지파가 왜 법을 어겼느냐? 법 위에 뭐가 있다고 했어요? 법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거든요. 원래 법이란 법 위에 선함이 있고 선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으로써 법이 동원되는 겁니다. 이것을 지키면 당신은 선합니다, 라고 하기 위해서 선을 위해서 법이 있었는데 이게 더 연구해보니까 법을 위해서 선이 있는 것이 아니고 법 자체를 무조건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예 중에 하나가 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법을 지키기 위해서 행할 선행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왜냐하면 사람마저 착한 일 해놓고 법 지켰다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나는 법대로 했다. 너만 법대로 했나. 나도 법대로 했다. 법은 하나인데 선이 너무 많아져요. 하나의 법인데 선이 백 개가 되면 곤란하잖아요. 까불지 마. 잔소리하지 마. 무조건 법대로 해. 법이 우선되고 선이 밑에 내려가게 됐습니다. 착하게 살아도 법대로 안 하면 착한 게 아니다. 이렇게 돼야 나라꼴이 돼요. 아는 사람이라고 봐주고 하면 나라꼴이 안 되잖아요. 법은 법이고.

 

만약에 교통경찰이 단속하는데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내려 보니까 “아버지? 웬 일이십니까?” “볼 일 있어서.” “바깥에서 보니까 아버지가 달리 보이네요. 3만 원 되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3만 원짜리 끊고. 왜냐하면 공무원은 법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에 매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선 위에 법 있고 법 위에, 법을 뛰어넘어야 비로소 완전한 자유에 이르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을 취합니다. 아예 법을 무시하는 거예요. 이걸 사다니즘이라 합니다. 나 같으면 법 같은 건 없어. 이게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베냐민지파가 길 가는 나그네의 첩을 윤간해서 죽여 버린 사건. 그 사건도 나쁘지만 그러한 것을 오히려 감싸주면서 그 범인만 내 놓으라는 다른 지파의 요구조건을 무시하고 우리 지파는 우리가 지킨다고 나선 그것, 우리가 법이야. 각자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한 거예요. 우린 그리스야. 유로 말 안 들어, 이런 식으로 우리가 법이라고 나설 때 극한 악을 통해서 법 자체를 무시함으로써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 있고

 

두 번째 방법은, 법이 시키는 것보다 더 철저하게 준수함으로 말미암아 법을 요구하는 쪽이 미안스럽게 하는 것. 요새 메르스 때문에 손 씻으라고 엄마가 무심코 던졌는데 아이는 그렇지 않아도 엄마한테 복수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다가 그 소리 듣고 손 씻다가 나중에 손 껍질이 다 벗겨졌어. 12560번 씻어서. 손 씻는데 두 시간 반 걸리고. 그럼 엄마가, “내가 잘못했다. 다시는 이런 것 안 시킬 게.” 이걸 성화론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지키라는 법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법 주신 주님이 나한테 미안해야 돼. 너무 착하니까. 어쨌든 이 두 가지 방법은 다 나한테는 법 따위는 없다. 나는 법 위에 있다는 것. 선 위에 법 있고 법 위에 나 있다. 이게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법을 동원함으로 말미암아 법 위에 각자 있다. 각자 소견대로 행하는 게 있다. 그게 바로 인간의 타고난 속성입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 드린 에덴동산은 어떻습니까? 에덴동산에서는 인간 위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있어요. 이게 법이냐 하는 겁니다. 이것 법 아닙니다. 법 아닌데 하라, 하지 말라는 뭐냐? 이것은 바로 약속입니다. 법과 약속의 차이점이 뭐냐? 법은 지켜야 될 대상이 있지만 약속은 약속 내린 분이 스스로 알아서 그걸 완료해버립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없고 주님의 구원만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져서 구원받는 겁니다. 웬 횡재인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왜 우리가 이걸 왜 몰랐는가? 해석오류 때문에 생긴 거예요.

 

그러면 해석오류를 목사들이 똑바로 가르쳐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에게 엉터리로 가르치면 되느냐?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우리가 무슨 해석을 해도 우리한테 불쾌한 해석은 아예 차단시켜버립니다. 그리고 바른 복음을 전하면 좇아내 버리죠. 바른 복음이라고 계속 전하자, 그런 것 없습니다. 설교 듣다가도 도중에 나가버려요. 누구 말마따나 허리끈 쥐고 당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은 용감한 사람이고. 우리교회 방식은 그냥 나가시는 방식으로 해요. 중간에. 오늘 낮에도 한 분 나갔는데 더워서 나갔겠지. 에어컨 고장 났으니까. 저는 그렇게 믿을래.

 

인간 층에서 위층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방법은 의도적인 단절에 의해서 항상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있는 이런 사실을 갇혀있다고 이야기해요. 갈라디아서 3장에 의하면, 인간은 갇혀있어요. 이걸 구약적으로 이야기하면 약속의 땅에 갇혀있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약속은 뭐로 돼있습니까? 생명나무와 선악과 구조로 돼있지요. 그러면 생명나무와 선악과 구조 안에 갇혀있는 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갇혀있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있지요.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굉장히 쉬워요. 그냥 죽으면 돼요. 정말 복음 쉬워요. 그냥 죽으면 된다고요. 자살할까요? 누가 사이다에 농약 안 탐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게 벌 받고 있는 거예요. 혹시 여러분 가운데 팔십 넘은 노모가 계십니까? 벌 받고 있는 중이에요. 혹시 여러분 중에 구십까지 사는 분은 복역기간이 길어졌어요. 어떤 사람은 구십삼 세, 백세까지 사는 분이 있어요. 제대가 자꾸 지연되네. 예수님은 서른세 살만 살아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는데 우리는 무슨 좋은 날 보겠다고 스스로 말뚝 신청하고 또 말뚝 받고. 진급도 못 하면서 맨날 중사로 있으면서. 그것은 은퇴해서 갈 곳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자기는 살아있으면서 이미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어떻게? 이삭이 죽거든요. 자기가 이삭을 잡았으니까. 이삭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의 본질을 말해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통해서 아브라함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실을 말해줬습니다. 이삭은 아들로서의 죽음이거든요. 아들이란 말은 이스라엘을 아들이라 하고 예수님도 아들이라 하는데 아들은 확정된 신분이란 뜻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모든 것이 끝나 버렸어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아버지가 설치한 아들 사이와의 관계에 그냥 포함됐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에 보면 자식이 죽어요. 입다가 객기 부린다고 이번 승리만 주신다면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은 내가 죽이겠습니다. 제일 먼저 누가 나왔습니까? 자기 딸이 나온 거예요. 마치 강인국이 김옥균을 죽인 것과 똑같은 거예요. 무슨 소린지 모르지요? [암살] 이야기입니다. 매국노 강인국이 자기 딸인 줄도 모르고 쌍둥이 딸을 자기 출세에 방해된다고 내일 결혼하는데 그 딸을 암살하는 그 내용이에요. 혹시 복음에 도움 될까 해서 제가 일찍 봤어요. 과연 입다가 나오네.

 

입다의 잘못은 뭐냐 하면, 이 땅의 아버지란 위치가 가짜란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진짜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있는데 자기가 아버지 행세하려고 건방을 떤 거예요. 이 땅에 있는 모든 위치나 조직은, 그것은 혼돈스럽기 때문에 무너져야 될 사항이거든요. 모든 질서는, 가정이고 모든 것은 무너져야 돼요. 그래서 사사기의 내용은 국가가 무너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가정 내부도 다 무너져요. 다 무너지게 하고 뒤에 멘트 하나 달아요. 자기 보기에 소견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면 우리 가정은 왜 안 무너졌습니까? 안 무너졌다고 여기는 것은 해석오류입니다. 지문의 내용과 제일 먼 것은 5번이라고 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 안 무너졌느냐 하면, 누가 내 형제고 모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형제가 있기 때문에 안 무너진 거예요. 하지만 안 믿는 딸, 안 믿는 아들이 있다면 헤어져야 돼요. 물론 누가 어디로 헤어지는지는 제가 장담 못하겠어요. 믿는 아버지 지옥 가고 안 믿는 딸이 천당 가는 식으로 헤어질 수도 있는 문제거든요. 왜? 인간의 믿음이란 가짜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내가 나의 판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거든요.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관계는 전부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너져야 되는 거예요.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동성애 문제가 나오는데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데 동성애자들이 퀴어 축제인가 하면서 우리도 정당한 부부가 되도록 법적인 조치를 내려달라고 자꾸 데모하는데 여성이 여성과 결혼하고 남성과 남성이 혼인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남성과 여성과 결혼하는 소위 합법적인 부부도 문제가 있다니까. 이게 정상이 아니에요. 임시방편이라니까. 정욕을 방지하기 위해서 임시방편으로 주어진 게 부부라니까. 이게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없는 소리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우리가 천국 갈 때까지만 어설프지만 임시로 지내보자. 이게 부부라니까. 내년 1월 23일 주례 앞두고 참 걱정된다. 김종인 권사님 아들 결혼식이 있습니다. 이건 대놓고 간접광고다.

 

부부란 것은 정상적이 아니에요. 이별이 만남보다 쉬워요. 혼돈이 쉽다니까. 부부로 사는 게 얼마나 억지인데. 혼자 살면 결혼하고 싶지요? 결혼했다가 혼자 살면 두 번 다시 안 하고 싶어요. 그냥 사귀기만 하지 결혼은 안 하고 싶어요. 특히 여자들. 남자들은 불 켜고 환장을 했어. 그러나 여자들은 절래절래. 미쳤나, 결혼하게. 한 번 실패했으면 됐지 또 실패하나.

 

혼돈이 훨씬 쉽습니다. 혼돈이 쉬운데 왜 정상적인 부부라 하느냐? 정상이 아니라니까요. 혼돈인데 아닌 척하고 있을 뿐이에요. 여기에 돈 문제 있으면 대번에 찢어집니다. 합의에 의해서 하든지 가라로 하든지 세무조사를 방지하기 위해서 하든지 세금 덜 내기 위해서 둘이 한 집에 살면서 부부 아니라고 하는 데가 한두 집이 아니거든요. 그것도 돈 좀 있어봐야 알지 저같이 해당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러니까 정상적이지 아닌 부부에서 자식이 나오잖아요. 이제는 자식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해요. 그러면 자식은 정상적이냐? 나오면 천재지요. 한 삼년만 지나면 돈이 천재 만든다는 사실, 돈 없으면 둔재 된다는 사실을 알아요. 특히 아이 많이 낳으면 걱정돼요. 모르겠다. 너희들끼리 알아서 살아라. 여기까지 내 역량은 이것밖에 안 돼. 일찍이 포기해서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철이 나요. 하여튼 못 사는 집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철이 들어서 공고 가고 알아서 잘 갑니다. 기특하지요. 기특한 게 아니고 자기 살 궁리하는 거지요. 산다는 게 기특한 게 아니고 또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산다는 자체가 지금 우스개 이야기로 했지만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참 어지럽게 살아요. 너무너무 힘들 게 살아요. 로마서 8장에서는 그걸 탄식한다고 했어요. 붕어 소리가 어떻습니까? 허~ 이러지요. 이건 되도 않는 개그입니다. 부엉이가 부엉부엉하는 게 탄식이에요. 신음소리에요. 모든 피조물들이 썩어짐 때문에 신음하면서 손가락질합니다. 인간, 니가 조져나서 그 여파가 우리한테 퍼졌다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스가랴에 나오는 천사들이 그걸 조장하지요. 그 천사들이 사사기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돼요. 이스라엘 스스로가 망치는 이스라엘로 돌변하도록 그렇게 조치하는 것은 집단적 위기의식 때문에 그래요. 개인적 위기가 아니고 집단적 위기의식을 하나님께서 조장한 겁니다. 이러다 우리 망하는 게 아니냐.

 

그런데 옷니엘, 에훗이 등장해서 구원하는데 점점 세월이 지나가면 집단 다 건지는 건 아니고 서너 지파라도 우선 살아야 되지 않느냐. 이제는 지파별로 사사들이 등장해요. 그래서 사사들끼리는 모르는 사이에요. 누구십니까? 사산데요. 처음 듣습니다. 이런 거예요. 원래 사무엘 활동과 삼손 활동이 같은 시대거든요. 그런데 둘 다 모르는 사이에요. 입산 태어날 때 사무엘 태어났어요. 성경에는 사사기 다음에 사무엘상 나오니까 먼 나라 이야기지요. 동시대인데 길에서 만나도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모르는 사이가 돼버려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사무엘도 사사로 넣자고 주장하는데 그건 넣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없어요. 어쨌든 간에 사사라는 것은 이스라엘 네트워크를 회복할 수 없다. 무능하다. 이건 어떤 경우라도 본인이 개인적 소견대로 행하는 이상은 사사가 아니라 우사사가 와도 구원 안 된다. 이스라엘은 그런 이스라엘이라고 보여준 게 사사입니다. 무너지는 조직이 붕괴하는 겁니다. 삼풍백화점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지는 거예요. 무너지면서 그들은 자기 보기에 소견대로 했을 뿐인데 무너지거든요.

 

그러면 그 다음 대책은 우리에게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나와요. 그게 사무엘상 8장에 나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인간이 왕을 구한다는 것은 자기 소견을 포기했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소견을 극대화시킨 모습 중에 최종적인 결론 중에 하나가 왕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왕이 있어서 일을 더 망쳐버리죠. 왕이 있으면 국가가 됩니다. 왜냐하면 왕은 세습제거든요. 세습제가 이뤄집니다. 국가가 되면 개인의 몽상, 망상의 극한입니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짐승이라고 이야기하죠.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인간은 짐승에게 인박히지요. 짐승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지요.

 

그럴 때 우린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저항해야지 국가 시키는 대로 해, 라고 하지만 우리가 요청한 구조입니다. 본인의 소견에 의해서 요청한 구조가 왕이 나를 때려주고 지배하는 마조히즘이잖아요. 나를 때려주고 학대함으로써 내가 어떤 보호를 받고 안심을 느끼는 얻어맞더라도 오히려 그게 다행스러울 정도로 우리의 정신 사고는 혼돈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냥 망가지는 거죠.

 

그렇다면 혼돈에서 질서 속에서 악이 나온다고 했어요. 질서 자체에 선악과를 심어놨고, 선악과 벌칙이 정녕 죽으리라. 따라서 죽어야 될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 악이 있고 악이 죄를 유포해줘야 돼요. 죄가 장성하여 죽음을 낳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질서 속에서 선악과를 이루기 위해서 악을 활기차게 만들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그들에게 죽음을 야기하는 이것이 짐승으로 치닫는 현재 우리가 사는 모든 현실이라는 구조가 되는 겁니다.

 

이 현실 구조를 위해서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는 의미를 붙이면서 문화가 되는 겁니다. 문화가 되면서 이 문화는 짐승에게 복속이 되지요. 문화 가운데 하나가 종교, 기독교 이런 것들이 문화 활동하는 거예요. 취미활동이지요. 문화 활동은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가 빠졌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연속성을 내세우기 때문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라고 계속해서 작년도 그 노래 불렀고 올해도 부르면서 단절이 안 돼요. 계속 연속되는 거예요. 어디까지? 지옥 갈 때까지. 아마 지옥 가서라도 그 노래 부를 걸.

 

뭔가 중간에 끊어줘야 돼요.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자가 아니구나.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참여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라고 뭔가 끊어줘야 돼요. 사랑이란 단어를 주님의 자리에 놓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이루는데 동원된 일꾼이거든요. 주님의 사랑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지 그 사랑 하나 얻어내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건 아니란 말이죠. 흥정하기 위해서 있는 건 아니거든요. 이 세상의 주인공을 위해서.

 

그래서 혼돈이 질서가 되고 다시 혼돈이 되면서 혼돈 속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요. 혼돈이 뭐냐? 쉽게 말해서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난 거예요. 끝났다. 이젠 내 생각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끝났어. 그럼 주님이, 진작 그러지.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어서 죽으리란 말을 내가 취소할 것 같으냐? 취소 안 해. 아니 할 수 없어. 아까 약속은 본인이 남긴 약속은 실현하기 때문에 정녕 죽여 버립니다. 정녕 저주해버립니다. 융통성을 보여주소서. 그래서 약간의 여유는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

 

네가 중심이 아니고 네가 중심이라면 어떻게 살려보겠는데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중심이기 때문에 너는 그걸 위해서 있기 때문에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교류가 없이는 우리에게 생명은 없는 겁니다. 그 교류에 있어서 등장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지 우리는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름이 바뀝니다. 이것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제는 내 이름으로 구원 못 받습니다. 이름이 자체가 바뀌어야 돼요.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뜻이고 그 존재의 속성도 이름의 내용에 합치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이걸 오해해서 해석오류가 있어서 예수 이름을 몇 번 부를까요? 이건 몇 번이 아닙니다. 이천오백 번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되는 변하지 않는 진실에 우리가 쓰이는 겁니다. 왜 내 헌금, 내 전도, 내 목회, 내 설교로서 내가 구원 안 되는지 그걸 증명하면 되는 거예요. 참 쉽지요. 그냥 혼돈스럽게 살면 되잖아요.

 

왜 우리 가정은 내가 성실하게 설거지한다고 유지되는 게 아닌 이유가 뭐냐? 주님이 관여해서 살고 있잖아요. 그 말을 못해요? 내가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해주니까 내 사랑에 탄복해서 아내가 날 사랑한다. 되도 않은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그런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왜 사느냐? 주께서 붙여줘서 사는 거예요. 언제까지? 주께서 끊어줄 때까지 이별은 쉬우니까 이별할 때까지 붙어서 사는 거예요. 토 달지 마시고 이유 달지 마시고 푹 주무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61.♡.138.77) 15-08-09 12:21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3강 [악의 구체성]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세 번째 강의 제목은 [악의 구체성] 악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혼돈에서 질서로 바뀌면서 악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악을 구체적으로 보게 되면 우린 신나지요. 저게 악이야, 한다면 그것만 피하면 선이 될 수 있는 문제잖아요.

 

악의 구체화 문제에 대해서 정말 다루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사사기에서 악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사사기 전체에 전반에 걸쳐서 깔아놨어요. 사사기가 1장부터 흘러가는가, 그건 한 시간 만에 다해요. 중요한 것은 왜 하나님께서 그런 흔적을 남겨놨는지 밑에 있는 깊이를 파내는 겁니다.

 

거기에는 시원적인 것, 기원, 최초와 더불어서 끝도 거기에 함께 들어있는 겁니다. 악을 다루면서 시원, 또는 기원, 원천과 끝이 같이 다뤄져야 되는데 사사기에서는 그것에 대한 암시나 힌트를 많이 깔아놨어요. 사사기를 해석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사사기만 달랑 끊어서 이해하는 게 아니고 성경 전체를 다 파악해내게 되면 사사기 해석은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사기 해석에 있어서 악이라고 할 때 보통 상식적으로 사람들이 문제 삼는 게 뭐냐 하면, 레위지파의 처벌, 기브아의 불량배들이 동성애 하겠다고 나설 때 노인네가 그러지 말고 내 딸과 나그네의 아내가 있으니까 마음대로 놀되 손님한테는 해롭게 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남자가 남자를 원한다고 했어요. 우리가 그런 동성애가 악이고 나쁜 것이고 그것이 저질이라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분노하셨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함정입니다. 잘못된 해석입니다. 해석오류입니다.

 

진짜 악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릴게요. 사사기 6장에 보면 나옵니다. 여러분, 사사기 거의 다 외우시죠. 참 제가 웃습니다. 사사기 6장 36절에 보면, 기드온이 하나님 앞에 시험해요. 하나님, 미안하지만 양털을 새벽에 놓을 테니까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그 주변은 바짝 마르게 하옵소서. 그렇게 되었거든요. 그러니까 미안합니다만 한 번 더 시험하겠습니다. 양털은 그대로 있고 주변은 축축해지면 이번 일이 하나님이 시킨 일이라고 생각하겠다고 한 것, 이게 바로 악이에요.

 

악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비교해서는 절대적 악이 나오질 않습니다. 악의 구체성이 포착되지 않아요.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악이 등장해요. 하나님을 상대할 때 절대적인 악이 나오지 인간과 인간을 상대해서는 너는 간음했다, 나는 간음 안 했다. 너는 살인했다, 살인 안 했다. 이런 식으로는 도토리 키 재기밖에 안 돼요. 그런 식으로 악을 주장할 수 없는 거예요.


제가 적어볼게요. 나 자신의 바깥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 이게 절대적인 악이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여러분, 강의 두 번했다고 좀 쉬어질 거라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수록 어려울 거예요. 이게 왜 악이 되냐 하면, 나라는 것이 피조물이기 때문에 누구 관할 하에 있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 관할 하에 있잖아요. 하나님의 관할에서 임의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벗어나서 해방된 입장에서 하나님 관할 하에 있는 나를 다시 한 번 관찰하겠다. 이건 뭡니까? 더 이상 피조물 노릇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이게 절대적인 악이에요. 만들기는 비록 신이 만들었더라도 나는 독립하겠어. 이게 바로 절대적인 악이에요.

 

그러면 기드온이 하나님을 테스트하면서 하나님이 정말 나를 보내신다면 제가 출제할 테니까 알아맞히시면 하나님 맞고, 못 해내면 하나님 아니라고 할 때 기드온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측정하려는 시도 자체가 하나님을 자신의 관찰의 대상으로 삼는 거예요. 이것은 마태복음 4장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91편에 나오는 대로 당신이 뛰어내리면 밑에서 받쳐주게 되면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해줄게. 폼 나게 뛰어내려라. 천사가 와서 받쳐줄 테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테스트해서 내 기준에 부합되면 자비로운 하나님이고, 부합되지 않으면 하나님 아니라고 그 기준을 하나님이 제시한 약속 바깥에서 나로부터 출발한 새로운 기준을 끄집어내게 되면 기준이 두 개가 돼버리죠. 세상을 지배하는 기준과 그 기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게 불쾌해서 나는 나를 위한 따로 독자적으로 내세우겠다는 이것이 선악과 따먹은 후유증입니다. 이게 바로 절대적인 악이에요.

 

절대적인 악을 감추는 방법은 뭐냐? 상대적인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는 겁니다. 저 사람보다 내가 낫잖아요. 저 사람은 나쁜 짓했는데 나는 안 하고 있잖아. 얼마나 착해. 얼마나 질이 좋아. 우수한 존재야. 이러한 이야기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네가 속에 나오는 게 더럽고 들어가는 건 더럽지 않다고 이야기하신 것은, 그 말을 무엇과 연관시키느냐 하면, 네가 천국 들어가는 사람을 막고 전도해서 배나 지옥 백성 되게 하신다는 그들의 기능과 관련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절대적인 악을 저지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악이 유발한 게 질서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질서가 하나님의 창조를 가장 극단적으로 파괴하는 폭력행위가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질서를 혼돈으로 만들고 싶은데 그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난 자만이 기존의 질서의 성질을 제대로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기존의 질서를 체제 유지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 바깥의 질서를 무질서로 간주하지요.

 

제가 어제 이야기했던가요? 천사가 밤에 오지요. 낮은 질서의 세계고 밤은 무질서, 혼돈의 세계거든요. 그런데 밤에 활동하는 천사가 해가 뜨니까 빨리 자기 세계로 가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천사가 있는 곳이 진짜 하나님 세계입니까, 천사를 떠나보내야 되는 천사와 섞이지 않으려는 인간 세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입니까? 천사 없는 세계가 인간들만의 민주주의 사회잖아요. 인민에,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사회 아닙니까. 그런데 그 세계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기존 질서체제의 완성은 왕으로써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있지요. 왕이 없음으로 본인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빨리 너희들도 왕을 구하란 말이요. 너희 성질대로 해. 왜 그래. 빨리 왕을 구해. 그래서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왕을 구합니다. 그리고 왕과 함께 이스라엘은 망합니다. 왕이 없음으로 자기의 소견대로 행하였더라, 이 말을 얼른 듣기에는 왕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 될 것 같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너희들 극한을 보여라. 너희들 속내를 마지막까지 내세우란 말이지요.

 

인간 속에 이런 질서를 추구하는데 질서체제란 게 윤리와 도덕이고 사법적 기능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사법적 기능, 윤리적, 도덕적 기능을 단합하고 붙잡으려고 하지만 인간의 내부는 90%가 무의식에 의해서 활동이 되거든요. 프로이트가 그걸 알아냈는데 인간의 모든 행동의 90%가 무의식에 지배받고, 10%가 의식적으로 지배받는 거예요. 이건 정신과 의사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전에 언급했는데 윤도현의 [사랑했나봐]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그 다음 말이 뭐냐 하면, 다른 데 가면 합창하는데, 이게 무슨 말이에요? 견딜 수가 없다는 말이 뭔 뜻입니까?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 없다는 말이 미치겠다는 말이에요. 이건 무의식이 자기 속에 장착된 거예요.

 

장착된 무의식을 안 들키기 위해서 커버하는 게 윤리와 도덕과 양심이라는 겁니다. 그 포장지만 뜯어내면 인간은 전부 밑에 있는 겁니다. 라캉은 상징적 세계라 했는데 미쳐버린 세계에서 좀 덜 미쳐야 돈이 들어오니까 덜 미친 척하다가 회식할 때는 미치고 아침에 눈 뜨면 허깨수 먹고 정상인 것처럼 또 살고. 이게 사는 것인지 점점 미쳐가는 건지 본인도 분간이 안 돼요. 왜 사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견딜 수가 없어요.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대상이 있잖아요. 더 미치는 것은 대상이 없는데 쫓기는 것, 자꾸만 뭔가 쫓겨 다니는 것, 부대끼는 것. 이것이 이미 인간 속에 장착돼있는 혼돈의 힘입니다. 혼돈의 힘은 나로 하여금 추가적인 절대적인 악을 계속 저질러서 혼돈의 바깥에 새지 않도록 극구 막는데 온 힘을 다합니다. 그걸 두 자로 이야기하면 긴장이라고 하고 영어로 하면 스트레스가 되겠지요.

 

여러분, 생명에는 긴장이 없어요. 생명 받았습니까? 긴장을 할 이유가 없어요. 긴장은 자기를 쳐다볼 때 긴장되지요. 아침에 여성분들이 거울 보면서 바짝 긴장되지요. 티비 홈쇼핑에 나옵니다. 한 세트에 235000원, 여러분들이 주민등록 나이가 필요 없습니다. 이걸 바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바짝 긴장하지요. 저걸 바르면 정말 주민등록 나이가 의미가 없을까? 239000원, 꼭 9자를 붙여요. 뉴욕의 유명 백화점에서 줄 서서 샀는데 특별기획으로 했다는 거예요. 전부 다 긴장입니다. 이 긴장도 참을 수 없는 신음소리라고 할 수 있어요. 이 긴장도 스트레스가 심하면 우리 몸속에 있는 혼돈이 발작을 일으키지요. 암에 걸리고.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는 거예요. 뭔가 자꾸 쫓기는 겁니다. 꼭 남자들 새 차에 쫓기듯이.

 

이런 것을 윤리 도덕을 동원해서 커버하려고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악이 되는 겁니다.

 

절대적인 악에 대해서 왜 하나님께서 이걸 허용하는가? 허용하는 방식의 공식이 있어요. 이것이 A라는 체제 안에서 움직이는 기호의 연쇄 고리가 돼요. 이 공식 시험에 안 나옵니다. A₁,₂,₃,₄로 자꾸 변동하고 B₁,₂도 자꾸 같이 변동하는 거예요. A가 관념이에요. 또는 개념, 다른 말로 하면 기호, 질서, 더 노골적인 것은 역사, 이렇게 되는 거예요. A₁, A₂로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변화를 표시하는 거예요. 그러나 백날 변화해도 이 모든 체제는 어디 안에 있다? B 안에 있어요. B가 뭐냐 하면, 기원적인 것, 원초적인 것,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되지요. 제가 지난 시간에 한 것 중에서 하나님의 자기증명이라고 했지요.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게 있다. 특히 마귀가 해내지 못하는 게 뭐냐 하면, 자기 파괴라 했습니다.

그 말을 이 시간에는 달리 이야기하겠어요. 하나님의 자기존재증명, 자기 파괴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예정해버려요. 여기 예정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B₁, B₂, B₃ 같이 여기와 함께 공조를 맞추면서 계속 변화되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예정을 따로 알면 되지 않느냐? 그걸 몰라요. 왜냐하면 예정이란 숨어있는 실재거든요. 이건 현실판. 여기서 또 헷갈려.

 

현실은 뭐고 실재는 뭐냐? 우리가 구체화되는 것은 현실이고 구체화되기 위해서 숨어있는 구조적인 힘이 바로 실재에요. 실재는 현실감이 없기 때문에 어떤 힘이 없기 때문에 현실 속에 파고 들어와요. 실재는 언어로 표현 못한다고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언어는 뭐라고 했습니까? 언어는 중지죠. 따라붙다가 실패했을 때 언어는 그 자체가 실패에요.

 

여기 교재 .... 잠깐 떠났다 오는 것도 다 복음적 의미가 있어요. 사라짐에서 다시 되찾음이 오게 돼있어요. 그런데 그 말도 사실은 여기 1페이지에 나오듯이 [말이란 공허하다. 그리고 사용하면서 표현된 단어도 궁극적으로 계속 따져 들어가면 무의미하다.] 왜?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물은 표현은 되지만 이거는 우리끼리 약속한 것에 불과하거든요. 이걸 마이크라 합시다. 다른 사람이 와서 마이크를 포도로 바꾸면 그땐 또 바꿔지니까. 그런데 변화되는 사건 자체는 포착이 안 되니까 공허한 거예요.

 

이미 벌어진 결과를 중간과정을 발췌해낼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기호 관념이지만 이렇게 변화를 일으키는 원천은 우리가 아는 현실 속에서는 알 수 없어요. 가끔씩 연세 많은 분들 거울 보면서 왜 이렇게 늙었지? 도대체 몇 년도부터 늙었습니까? 어린아이 찍은 동영상 보니까 이런 탄식을 해요.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고생을 해도 됩니까? 숙제하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고생을 하다니 억울하다는 게 있어요. 여섯 살 먹은 얘가. 인생 살만큼 살았다 그 말이죠.

 

하나님의 예정이 이미 보이진 않지만 현실 역사, 관념, 개념, 기호, 질서, 역사 이름 속에 하나님 예정이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관찰하기 때문에 이렇게 해석오류를 합니다. 나는 예수 믿는 것 보니까 예정되었어. 칼빈주의 예정론이거든요. 그렇게 이해를 해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뭘 놓치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기증명, 하나님의 예정이 자기 증명 용도로 이것이 사용되어 변질되고 만 거예요.

 

하나님이여, 양털에만 이슬이 있고 바깥은 바짝 마르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날 찾아서 나를 구원자로 세운 것을 믿겠나이다. 내가 사명 받은 걸 확실하게 인정해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이 절대적인 악이라 했지요. 왜냐하면 기드온의 존재와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증명하기 위해서 준 예정인데 그 예정을 기드온은 자기존재증명으로 용도를 바꾼 거예요. 그러면 구청에서 고발 들어와요. 베란다 바꾸면 벌금 냅니다. 빌라 함부로 사면 안 돼요. 툭 튀어나오게 했다면 벌금 내게 돼있어요. 벌금 물면 그만이지만 우린 지옥 가는데.

 

그럼 어떻게 하느냐? 실재 세계는 알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것은 내가 관찰하는 나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것은 이건 나의 만든 세계야, 나의 구성된 세계야. 그것만 보면서 즐기면서 인생을 살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예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저 성경말씀에 예정됐다니까 내가 구원된 줄 알자, 믿자, 이렇게 되는데 그래봤자 하나님의 존재증명용으로 쓸 것을 내 잘난 존재를 증명하는 용도로 쓰였으니까 반칙도 이런 반칙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니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 되겠지요. 사사기에 의하면.

 

그러면 신약성경을 봅시다. 우리가 죄인이고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 했지요. 우리 안에 두 개 층이 다 있는 거예요. 우리는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는 우리가 의인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증명하려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지만 그 죄인 중의 괴수가 되는 것을 주님께서는 자기존재증명에 나서다 보니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영원토록 의인되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예정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인 동시에 예수 안에서 의인인 거예요. 처음 알았지요.

 

목사님은 죄인의 괴수라 했다가 어떤 때는 의인이라 했다가 왔다 갔다 합니까? 니가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아래층은 보이지 않으니까 지워버리고 네가 관심사가 네 자신에만 꽂혀있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을까, 구원받지 않을까? 아침 열시 새벽기도 나와서 구원받고, 오후 다섯 시에 운전하다 걸려서 지옥 가고. 도대체 우리가 의인이란 의식이 있을 때 마침 주님 재림하시면 천만다행인데 내가 죄인이라고 할 때 오시면 완전히 지옥 가는 거예요. 자기의식에 자기가 놀아나는 겁니다. 자아는 의식이 만들어내는 겁니다. 자아는 보통 반성에 나서면서 결과물이 자아라는 겁니다.

 

그냥 집에 있을 때 배고프지? 먹자. 이렇게 돼요. 자아가 없어요.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손님 주려고 만든 잡채 누가 먹었어? 내가 먹었어요. 갑자기 내가 등장하는 거예요. 타인이 있을 때 평소에 혼자 있을 때는 나 의식이 없어요. 타인의 응시에 대해서 뭔가 방어할 필요가 있고 나의 혼돈, 나의 무의식, 내가 감당 못할, 내가 감당 못한다는 것은 내가 주인이 안 된다는 것, 내 몸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감출 필요가 있을 때 우리는 자아가 있어서 그걸 커버하는 거예요. 한 번 더 불러볼까? 자꾸 생각나, 잊을 수가 없어. 사랑했나봐. 견딜 수가 없어. 견딜 수 없는 이것을 누가 말립니까?

 

기브아에 있는 불량배가 평소에 동성애 하고 싶어서 환장했다가 새로운 먹잇감이 왔을 때 우르르 몰려왔어요. 그들의 입장은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의 청년들이 남들 보기에는 깡패지만 품어주어야 될 선량한 청년들이거든요. 철이 없어서 그랬는데 장래를 생각해서 훈방 조치합시다. 이게 나와바리거든요. 오늘 각종 방언들이 터져 나옵니다. 나와바리, 이게 영역표시 아닙니까. 구역표시란 말이죠.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우릴 지키랴. 그게 민족역사가 되는 겁니다. 이게 교재에 나옵니다.

 

어떤 국가가 되면 그냥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신화와 전설, 이런 것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옵니다. 지금은 박정희가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그렇지 만약에 한 삼백 년 되면 호랑이 타고 돌아다녀요. 영웅은 반드시 전설이 돼요. 이건 조상 우대가 아닙니다. 현재 있는 국가의 정체성, 질서 확보입니다. 그런데 그 질서가 하나님의 일을 부수려는 가장 극단적인 폭력행위가 질서잡기에요.

 

질서가 안 잡히니까 그들은 왕을 요청해야 되고 그 왕과 더불어 그들은 망하는 코스로 접어들어야 되고. 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관념과 개념과, 관념과 개념이란 추상적이거든요. 이걸 기호로 할 때 여기에 문화가 발생돼요. 관념과 추상이 기호로 바뀌면서 문화가 생긴다고 이야기했고 거기에 대해서 마르크스는 반대하기를 경제적인 착취구조가 하위구조가 상위구조의 문화를 만든다고 했고.

 

그 차이점이 어디 있느냐 하면, 인간은 의식 중심이고 정신 중심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정신이 기호로 바뀌면 문화가 된다고 마르크스 이전에 이야기했고, 마르크스는 유물주의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몸이 중요하고 몸은 기본적으로 식욕과 성욕으로 돼있어 먹고 살아야 되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경제구조가 돈 없이는 못 사니까 여유로 남을 경우에는 문화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교회 다니기가 된다 이 말이죠. 밥도 못 먹으면서 수련회는 왜 오느냐, 이런 식이죠. 살고 보자는 거죠.

 

그동안 정신세계에서는 여러분이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여러분이 만약에 굶어죽는다면 천국 갑니다, 라는 식으로 실제적인 사회구조변혁에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는 거예요. 체제 자체가 점점 더 질서적으로 고착화되기 때문에 판을 뒤엎기 위해서는 가진 자를 치기 위해서는 현실을 똑바로 봐야 되는데 그 현실은 어떤 추상적인 제도나 조직의 질서를 따르지 말고 네가 역사를 만들어야 돼. 네 노동이 역사를 만들면 된다는 거예요. 네가 독립해서 네가 따로 노동해서 돈 벌면 된다는 거예요. 아버지 신격호는 가란 말이죠. 이제는 둘째 아들 시대가 온 거예요. 롯데 그룹을 생각해야 된다. 가족을 생각하지 말고. 롯데홀딩스 대표가 이야기한 거예요. 큰 아들은 한국말도 못하고 민족정체성도 없으면서.

 

이런 일을 하면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마치 자기는 혼돈에서 바깥에 중립지역에 나가 있어서 그걸 관찰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오해하는 거예요. 사실은 그 구조적인 장의 변천이 내가 속해 있는데 이미 파도를 쳤고 이미 파장이 미쳤거든요. 성실하면 돈 번다고요? 줄을 잘 타야 돈 벌어요. 성실하면 성실하게 쫓겨나게 돼있어요. 세상이 왜 이런가? 잠언에 보면 열심히 일한 자는 부자가 된다는데 밥은 먹고 살겠지요. 부자는 끝났어요.

 

그러면 성경이 잘못됐다. 아니야. 성경은 맞는데 현실을 고쳐야 돼. 그렇게 주장하는데 저는 묻습니다. 현재 네 자리가 어디 있어요? 당신은 왜 바깥에 나가 있어요. 자기는 현장에 있으면서 마치 원인 제공자 아닌 것처럼 행세하세요. 인간은 열외가 없습니다. 열외를 시도한다는 자체를 주께서는 허락하지 않고 모아버리죠. 그것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약속의 땅은 약속에 갇혀있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걸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인간은 죄에 갇혀있는데 죄에 갇혀있는 기호를 주셔요. 인간들이 기호에 살고 기호에 죽기 때문에 그 기호를 두 자로 율법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어요.

 

법을 지키는 방법은 알려드릴까요? 법을 지키는 방법은 위반하는 것으로 지키는 거예요. 금지하면 할수록 법은 새롭게 느껴지게 돼있어요. 법이란 우리를 더욱더 위반하게 하기 위한 용도가 법을 주신 취지기 때문에 우리가 법대로 살아야 됩니다. 말, 뉘앙스가 이상한 것 같아. 법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위반해달라는 그런 뜻이에요.

 

법을 지킨다는 것은 의도가 굉장히 수상해요. 이제는 법이 없이 살아보는 그 날을 위해서 독자적인, 아까 최고의 악이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사는 기준을 내가 만드는 게 최고의 악이라고 했지요. 이것은 하나님에 속해 있는 나를 속한 채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벗어나서 나를 관찰하기 위한 두 번째 나를 하나님 손아귀 바깥으로 벗어나서 다시 나를 쳐다보고 싶은 그런 시도, 그게 선악과 따먹은 마귀한테 속한 그런 것의 연장입니다. 그것을 저는 한 마디로 말해서 질서잡기라고 했지요.

 

그러면 사사를 왜 줬습니까? 무질서한 이스라엘에 질서를 잡기 위해서 구원하려고 사사 준 게 아니냐고 물으면, 누가 무질서입니까? 이스라엘이 무질서고 이방나라가 질서 잡아요. 질서 잡힌 이방나라를 그들은 참 사모했거든요. 그러면 따라 가란 말이야. 이 말이 뭐냐 하면 사사기 구원하는 방식이 혼돈적인 기존 질서에 포착되지 않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기존 질서는 질서를 잡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데 사사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힘없는 구원이에요.

 

환경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또는 운동권과 관련된 성경 해석하는 사람들이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양, 또는 사무엘서 2장에 나오는 한나 찬양을 근거로 해서 없는 자를 통해서 가진 자를 뒤엎어버린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정신이다. 따라서 정말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면 우리와 같이 시민운동에 참여해서 가진 자를 엎어서 없는 자가 잘 사는 세계를 만듭시다, 라는 주장을 할 때 우리가 뭐라고 반박합니까?

 

특히 누가복음 4장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특히 옥에 갇힌 자를 해방시켜주고 눌린 자를 풀어주는데 여러분은 기존 교회에서 노닥거리면서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 정신을 얼마나 실현했습니까? 신앙이란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에 있습니다. 경건은 활동하는 것으로 증명합시다. 행함으로 증명합시다. 이렇게 나올 때 우리가 뭐라고 반박하겠어요?

 

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딱 세 자만 붙이세요.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이미 가난한 자가 힘을 노렸다는 자체가 같은 동질성이에요.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똑같아요.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돈을 요청한다는 자체가 돈에 매여 사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같은 동질입니다. 같은 질서, 돈으로 유지되는 질서 세계 속에 있는 거예요. 이건 마르크스 말이 맞아요. 우선 밥 먹고 살아야 인간이지 먹을 것도 없는데 무슨 인간이냐.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어디 갇혀 있느냐 하면, 기호와 관념과 개념과 질서와 역사 속에 갇혀있어요. 특히 역사라 하는 것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A₁에서 A₂로 그 다음에 A₃로 이렇게 나간다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에 받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원래 원천적인 취지는 B₁을 B₃라 보고, A₂를 B₂로 받치고 A₃를 B₁으로 받치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너희는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우리가 범죄 할 때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면 그런 짓을 해야만 구원받는 거예요. 세리나 강도가. 강도가 구원받는 시점에 직업이 뭐였습니까? 강도가 회개해서 남은 재산 남한테 주고 그랬습니까? 그냥 끝까지 간다. 끝까지 간 거예요. 끝까지 강도일 때 가장 그리스도만을 쳐다볼 수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자기증명, 주님 스스로에게 했던 자기 예정에 대해서 자신의 존재증명을 완전히 포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2년 된 혈우병 있는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이죠. 저같이 개 같은 자에게 무슨 그런 게 필요하겠습니까? 혹시 주인의 부스러기, 남은 것이라도 주시면 그저 감사하지요.

 

대전인가 어디에 가니까 저한테 개도 안 걸리는 감기를 왜 걸렸습니까? 이제야 제가 개가 될 모양입니다. 원래 무의식이 인간이 개거든요. 그동안 인간인 것처럼 했습니다. 그래서 물은 거예요. 본인이 개면서도 인간인 것을 증명해보세요. 자기가 인간인 것을 증명해보라고. 90%가 혼돈인데 그걸 10%로 커버한다고 언제까지 커버될까요? 86세 되면 다 드러나요. 치매 걸리면 완전히 개 됩니다.

 

치매 걸린 노인의 놀라운 사실은 자기가 저지른 일을 알면서도 끝까지 그걸 부인한다는 사실. 분명히 증명되는데, 오줌 쌌거든요. 들이대도 안 믿어요. 자기의 추상적인 관념과 개념에서 따로 자기가 폐쇄된 자기 세계 속에 갇혀서 나올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그 안에는 자기가 왕이 되고 자기가 신이 되는 절대자가 되는 그러한 식으로 그동안 마귀한테 잘 훈련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훈련받고 있습니다.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질서의 정체를 모르지요. 사사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데 신은 무질서의 세계에서 온 거예요. 무질서의 세계의 신이 임할 때 삼손은 미쳐버립니다. 삼손에 여자 세 명이 나오는데 1번 여자, 2번 여자, 3번 여자 그냥 따라다니는데 따라다니는 그 모습이 뭐냐?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그 다음에 견딜 수가 없어 미치겠어요. 민족이고 해방이고 자신이 나실인이고 다 때려치운 거예요. 완전히 미쳐버린 겁니다. 나도 나를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말릴 수가 없는 거예요.

 

삼손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도 그런데 삼손은 특별한 사명을 받았어요. 어떤? 껍데기,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껍데기가 노출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삼손 외에는 아무도 노출되지 않아요.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수수께끼. 이것은 바로 A₁, A₂, A₃로 가는 게 아니고 거꾸로 하나님의 예정됨, 예정됨, 예정됨으로 가는 이 밑바닥에서 기호로 표현해도 일치되지 않는 뭔가 말로 표현될 수 없고 언어로 표현될 수 없고 인간에 소통하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 그건 한 마디로 말해서 삼손에게는 부르짖음이에요. 부르짖음은 출애굽기에 많이 나오지요. 백성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출동했다는 것, 완전히 119에요. 부르짖음 할 때 그들은 지금 자기 밑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하나님 언약의 띠를 다시 한 번 요청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사사기를 보면서 이렇게 오해해요. 11+1=12 되지 않겠느냐. 이게 베냐민지파가 날아가고 난 뒤에 남은 열한지파가 오해한 겁니다. 다 죽여 놓고 가만 보니까 너무 정의로웠다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실로의 여자를 보쌈해서 자기 아내 삼아서 대를 잇게 했는데 원래 성경에서 11+1=12 이건 가짜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준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12 더하기 0이 될 때 이스라엘(12+0=12)이거든요. 0은 부재의 자리에요. 존재하지 않음이에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를 존재로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B부분이 A부분과 관계를 짓고 교통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다른 나라는 안 망하는데 이스라엘은 왜 망하느냐? 언약을 알았기 때문에 망하는 거예요. 십자가마을이 아직까지 안 망한 이유는 십자가를 제대로 몰라서 그래요. 교회가 만약에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교회는 망합니다. 망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어느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 돼요. 그걸 공동체 없는 공동체, 아감벤이란 이태리 사회학자가 이야기했는데.

 

공동체 없는 공동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데 소속되지 않는 그들이 무작위적으로 이미 추상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겁니다. 소속되지 마라. 왜? 이미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나 누구든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이면 내가 거기에 있다. 오늘 많잖아요. 그러면 주께서 가야산까지 왕림하시는 겁니까? 그런 뜻이 아니고 흩어져도 상관없다는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생명에는 뭐가 없다? 긴장이 없다. 그러나 언제 긴장이 생깁니까? 나를 바라볼 때 긴장이 생기지요. 그래서 복음 알고 난 뒤에 특징들을 저한테 이야기 많이 하는데 “목사님, 외롭습니다.” 외롭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요?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견딜 수가 없어. 주님 자꾸 생각나고 그런 것 없어요? 주님이 자꾸 생각나는 게 아니고 저 사람 왜 떠났지? 그것만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여러분 교회 떠난다는 말은 그동안 내 딸 시집갈 때 부조를 모으기 위해서 투자한 거거든요. 그런데 그 교회를 떠나면 부조가 어디서 나오겠어요? 마르크스 이야기입니다. 교회도 문화인데 문화는 무엇에 근거돼있다? 경제구조, 돈의 구조 위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모든 행동도 나에게 경제구조에서 인간답게 사는 것과 관련돼있는 것, 그러니까 돈 있으면 나는 인간임을 존재증명할 수 있어요. 이런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신, 성령을 보내서 직접 하나님과 만나게 해서 네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라는 절대 악을 보여주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관리자(IP:61.♡.138.77) 15-08-09 12:23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4강 [이유 없는 구원]


이번 시간 제목은 “이유 없는 구원”입니다. 세 번째 시간 끝에 한 것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기증명은 하나님 스스로 자기를 예정하는 겁니다. “나는 나다. 알파요 오메가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내 이름을 묻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하셨거든요. 그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약속을 던져 놓고 그것을 자기완성 쪽으로 회수하면서 거기에 동반해서 이 세상 운명은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은, 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쪽에서 엔진이 가동되게 되면 그 변화에 따라서 우리가 같이 변한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따로 실시하시는 그 변화는 무엇이지?”라고 묻고 싶지요.


이것이 우리의 버릇이에요. 그러면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야 너! 네가 변화야. 자꾸 찾지 마.” ‘주님이 보고 싶어.’ 주님이 보고 싶다. 주님이 보고 싶다는 말에서 문제점은 뭐냐 하면, 보고 싶다는 그것이 문제에요. “♬보고 싶다.” (왜 자꾸 무의식이 나오는지…….) 주님을 봐서 뭐할 건데? 주님이 보고 싶다고 할 때 주님에 대한 대처는 뭐냐? 봐도 모른다는 거예요. 차라리 소경이 “소경이어서 나는 아무것도 보는 것이 없습니다.” 할 때 이 사람이 소경에서 벗어난 사람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네 눈 안에서 벗어나라는 말이에요. 네가 응시하는 그 시선에서 벗어나라는 겁니다. 어디에 감추어져 있다고? 감추어져 있다는 그 생각도 잘못된 말이에요. 감추어져 있다는 말은, ‘지금까지는 이 만큼을 아는데 범위를 넓히면 보다 많은 정보가 확보되고 그렇게 되면 구원에 대해서 보다 많이 알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현실적 버릇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다. 뭘 안다고 해서 더 아는 것이 아니고 알면 알수록 우리의 눈은 더 침침해져요. 마치 저 카메라의 초점처럼. 늘 강의 때마다 사용하던 저 카메라가 지금 고장 났다는 거예요. 고쳐야 되는데. 초점이 흐려서 침침해요. 카메라가 노안이 들었어요.


가까이 가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보고 있는 내가 혼란스러워요. 정작 주님이 보게 되면 불쾌 성을 느끼고 “에이, 내가 못 볼 걸 봤네. 저리 가세요.” 하고 밀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양과 염소를 가름하는 중요한 심판의 대목에서 “이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소자니까 이 소자는 항상 무시당하는 대상이 되겠지요. “이 형제에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


그런데 정작 소자가 하는 말이, “제가 언제요?” 경상도 말로 “어데예? 언제 제가 그렇게 했는데요.” 본인이 몰라요. 왜 본인이 모르는가? 본인은 자의식이 날라 가버렸기 때문에 주께서 하신 일에 참여할 뿐이지 그것을 따로 떼 내서 내 것이라고 가지고 올 나의 자리가 따로 구비되지 않았거든요. 내 것 만드는 나의 영역, 나의 구역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게 되면 주님의 예정의 CCTV가 다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예정된 거야. 그것도 예정된 거야.’ 그렇게 되지요.


강도가 강도질을 해야 되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해서 구원되기 위한 주님의 자기증명입니다. 강도가 누굴 증명한다고요? 주님을 증명하지요. 그래서 강도를 통해서 주님이 증명됩니다. 이 공식, 강도나 세리나 창녀를 통해서 ‘주님’이 증명됩니다. 그러나 강도나 세리나 창기를 통해서 절대로 하나님은 증명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이것은 백 프로 가짜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느냐? 인간이 자기존재 증명한다고 끌어당겨서 만든 하나의 개념이라니까.


“아, 이 자연은 하나님 외에 누가 만들었겠어?” 우리가 이렇게 중얼거릴 때 만약에 주님이 나타나서 “그래서 어쩌라고?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누가 너보고 그런 엉터리 같은 소릴 하라고 했어?” 너는 누가 만들었는지를 몰라요. 우리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소리를 하려면 우리가 만들어지는데 서 있으면 안 되고 만들어진 곳에서는 옷만 벗어놓고 바깥에 나와서 ‘누가 만들었지?’ 이렇게 살펴야 되거든요. 그렇게 살필 수 있는 자리를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살펴놓고 “하늘의 별을 하나님이 만들었지 누가 만들었겠어?” 하면 그것이 바로 욥을 그렇게도 정신적으로 구박했던 욥의 세친구의 공통점입니다.


“욥아,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욥은 “네가 아는 하나님은 나도 아는데 왠지 낯설다.” 딱 그거예요. “제가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는데 왜 하나님은 나를 버리도록 이렇게 종용하십니까? 도대체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욥이 철이 나도 보통 철난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시도를 하는데 왜 주님은 저를 멀리 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십니까? 주님이 저를 멀리 해서 뭘 얻고자 하는 겁니까? 왜 주님은 저를 반기지 않는 거예요? 왜 주님은 저를 자꾸 밀어내는 겁니까?”


그러니까 친구들이 하는 말이, “네가 미쳤구나. 네가 귀신이 들렸다. 하나님은 누구나 가까이 하기를 원하시는 거야.” 하고 우리가 다 아는 상식을 이야기하지요. 욥이 뭐라고 합니까? 욥이 갈수록 말이 길어져요. “그 정도는 나도 아는데 너희들이 모르는, 너희들의 말로는 절대로 표현되지 않는 그 무엇이 현재 나에게 도달되었어.” 그러니까 나는 너희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부르짖음이에요. 신음소리에요. 먼 산의 부엉이가 “부엉, 부엉!” 하듯이 하나의 신음소리, 탄식소리, 부르짖음이라니까요? 그냥 헐떡이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성도가 성도로서 구원 받는 것은 내가 주님을 붙잡아서가 아니라 주님이 자기존재증명에 필요해서 우리를 놓치지 않는, 단지 주님의 예정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예정된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예정된 거예요. 그래서 욥은 바로 ‘하나님’에서 무엇으로 바뀌는가?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게 됩니다. 뭐라고 바뀌는가? 나에게 고난을 임의로 주신 그 하나님이 종전의 친구들이 알고 있던 그 하나님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하나님으로 새롭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선지자에요.


욥이 고난 받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가 뭐지요? 없지요. 그래서 이번시간 제목이 “이유 없는 구원”이에요. 욥은 옛날 기존의 사고방식대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이유, 나를 괴롭히는 이유, 종기 나게 한 이유, 열 명의 자식 다 죽이고 재산 다 날라 가는 그 이유가 뭔지를 정확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만나면 따질 거야. 내가 이 몸 떠나고 난 뒤에 하늘나라에서 구주를 만나면 내가 멱살 쥐고 따질 거야.”라고 했는데 그 따지는 손모가지가 날라 갔어요. 나중에 주님이 직접 등장할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염소 새끼 낳을 때 네가 거기 있었나?”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원, 원천, 오리진, 근원, 그 때에 네가 있었어, 없었어? 없었지?” 그렇다면 지금은 그 근원의 반복이에요. 그 시초의 반복적용입니다. “그러니까 네 인생에 대해서 네가 안다고 나불대지 마. 나는 너에게 근원을 집어넣고 그 근원과 더불어서 너의 끝도 집어넣은 거”예요. 이게 바로 B의 세계, 다시 말해서 주님의 예정하신 세계입니다. 이만큼 여러분이 알았다 치고 이번 시간에는 이 B의 세계(실재)를 지워서 없앨 겁니다. 이 B의 세계를 없애버리고 아까 말한, A1에서 A2, A3……An으로 가는 무한, 극한의 세계,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우리가 잘사는 때가 오겠지.’라고 ‘고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오지도 않을 그 누구를 기다립니다.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오지 않아도 내가 기다린다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내가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이 중요하지 실제로 오는 것은 안 중요해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제일 화가 났다는 것은 그들이 그냥 기다려야 되는데 기다림을 째고 미리 왔다는 것이 제일 화가 나는 겁니다. 정말 이것은 유머에요. 주님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유머가 그겁니다. 출장 간 남편이 일주일 뒤에 온다고 하는데 미리 왔을 때, 이거 뭐예요? 왜 준비도 안 되었는데 왔습니까? “내가 준비하고 있는 네 허락을 왜 맡아야 되는데?” “그래야 내 존재증명이 되잖아요. 내가 그만큼 잘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네가 ‘신’ 해라. 네가 천지창조고 뭐고 다 알아서 네가 해라.”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할 예정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세계는 ‘유’의 세계입니다. 유에서 질서를 뽑아내서 그 질서로 새로운 유를 뽑아내는 거예요. 이게 바로 과학입니다. 과학에는 두 가지가 있지요.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있어요. 요새 인문학강좌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어요. 그동안 얼마나 돈이 안 되었던가요? 설움을 받고 있다가 “우리한테도 돈 좀 줘.” 이렇게 하는데 인문학은 다 사기입니다. 인문학의 목표가 뭐냐? 해피니스, 행복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서로 소통하자.” 이거 빼면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서로가 서로의 권위를 인정하고 타인의 가치를 존중해주고, 그러며 행복하다는 거예요.


저는 멱살 쥐고 싶어요. “남의 가치를 존중하면 네가 행복하다고?” “행복하지요.” “남 잘되고 네가 못되는 식으로도 너는 행복 할래?” “그것은 아니고.” “그러면 다 같이 잘사는 식으로 행복 할래?” “그래.” 그러면 다 같이 잘사는 그것은 지루함인가요, 그게 행복인가요? 그것은 지루함이에요. 그 지루함이 싫어서 천국 안가겠다는 사람도 있어요. 천국가면 당구장 없다고 천국 안가겠다는 거예요. 당구장도 없고 골프장도 없고 그래서 너무 지루하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동질성이에요. 여기 이 지상에 있는 나를 계속 이어서 무한대에 이르면 아마 그것이 천국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천국은 오면 안돼요. 무조건 우리가 천국을 기다려야 돼요. 계속해서 기다려야 돼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이렇게 기다리는데 있어서 미래가 남잖아요. 미래는 이렇게 점선으로 되어 있는데 그 미래를 알기 위해서 A와 A1 사이에 원인과 결과를 놓고 여기서 어떤 질서의 원칙을 뽑아내요. 질서의 원칙을 뽑아내서 그 다음에 이것을 적용시킵니다. “이렇게 했더니 이렇게 되더라.” 예를 들어 “30분 빨리 걷기, 그리고 식사량을 반으로 줄이기. 그러면 반드시 한 달에서 두 달 만에 4-5킬로그램의 몸무게가 빠지게 되어 있다.”는 원칙을 뽑아내는 거예요. 저를 보세요. 제가 지금 빠졌잖아요. 제가 증인이잖아요. 이게 과학입니다. 이게 나의 존재증명이에요. 그냥 이렇게 하면 좀 미안하잖아요. 여기에 ‘주의 은혜로’를 갖다 붙여요. 너무 미안하니까 기껏 자기 것 챙겨놓고 ‘주의 은혜로’를 붙이는 거예요.


주의 은혜라는 것이 기준이 뭐냐 하면, 내가 원인으로 기대했던 대로 만족스런 결과가 나왔을 때만 이것을 은혜로 연결시키는 겁니다. 내가 기대를 했는데 딱 그대로 될 때, ‘내가 저 사람에게 보험 상품 하나 팔겠다.’고 했는데 딱 성사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보는 겁니다. 요새 은혜로 사는 사람, 은혜를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요. 이렇게 한 번 성공했잖아요. 그러면 이 원칙을 그 다음의 원칙으로 적용시킵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이유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유가 뭐냐?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나 잘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 잘 되라고 점차 나를 천국으로, 구원의 길로, 선한 길로 인도한다면 내가 삐걱거리고 잘 못되는 경우, 졸음운전 하다가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나에게 이런 징계를 내리신 이유는 회개하라는 뜻이다.’ 라는 이유를 여기서 뽑아내요. 이거 사기입니다. 사기당해서 수십 년 동안 삥땅 뜯긴 사람들이에요.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가계에 저주가 흐른다니, 그런 소리들 해가면서.


“당신의 인생이 그렇게 꼬인 것은 문제가 당신한테 있습니다. 어서 주 앞에 돌아와 회개하세요. ♬돌아와~ 돌아와~,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주여, 아버지여! 집 사 주세요, 집 사 주세요!” 쌍둥이 애들이 할머니 따라서 통성기도 하는 것처럼. 정답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처럼 이유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하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아요. 부재의 존재에요.


왜 존재하지 않느냐 하면, 이것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참 난해한 것인데 할 수 없어요.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는데 할 수 없어요. ‘나’는 두 가지에요. 인식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 두 가지로 생각하거든요. 인식이란, 내가 어떻게 뭘 아느냐? 무엇을 안다. 주님 앞에서는 이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안다’고 하니 이것이 소경이 되는 겁니다. “보고 믿겠다.” 도마지요. 인간은 알고, 보고, 그 다음에 내 존재로 가져옵니다. 존재로 가져오면서 ‘누가 있다.’가 문제가 아니고 그 있음에 대해서 ‘누가 있다.’보다 ‘그 있음을 내가 안다.’가 중요해져요. 나로 와버리거든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계십니까? 그러면 저에게 보여주세요. 어? 하나님이 계시네.” 그러면 그 다음에 뭡니까?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나가 된다.” 이게 목적이에요. “무시하지 말라. 나는 하나님을 알고 믿는 그 나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순환구조가요, 목적이 이미 정해져 있어요. 누구로부터 나옵니까? 나를 위해서 한 거지요. 네 번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아래의 층, B층을 없앴다고 했지요. 없애고 위의 층, A층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응용문제 하나 나갑니다.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나오거든요.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나오는데 “짐승이 무엇입니까?”라고 교인들이 물어요.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나오니까, 짐승이 666 숫자로 표현되기도 하고, 기적도 일으키면서 짐승이 적그리스도활동을 하니까 어떤 무식한 사람이 봐도 짐승은 무조건 나쁜 쪽에 속하거든요. 나쁜 쪽에 속하니까 나쁜 쪽은 피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이지요. 피하려면 짐승이 누군지를 알아야 피하지요. “짐승이 어디 있으며 누구십니까?”를 빨리 이야기해 달라는 거예요. 왜? 그쪽은 피하면 되니까. 만약에 짐승의 손목에 666 베리칩을 심어야 되는 순간이 오면 나는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돼요? “나는 거부한다. 나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 주여! 도우소서. 마귀가 나를 이렇게 찌릅니다. 666 이거 없이는 매매도 안 되고 살기가 힘들어지는데 이 마지막 때에 드디어 말씀대로 이 세상이 정말 더러운 세상이군요.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빨리 전 3년 반, 후 3년 반의 기간이 빨리 끝나고……”


하여간 스케줄도 빡빡해요. 환란이 있고 주님 재림 때 주님이 이스라엘 저 감람산에 턱 하니 재림하시면 휴거 되는데, 그 전에 그 마곡에 있는 악의 일곱 족속들이 오는데, 이스라엘은 원자폭탄 준비하고 있는데, 이란이 마곡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할건데, 빨리 미리 벙커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벙커 만들어 놓고 생수 준비해야 돼요. 삼다수 박스로 사서 쟁여놓고 비상식량, 건빵, 라면, 잔뜩 쌓아놓고 아울러 필요한 것은 뭐냐? 기관단총 준비해야 합니다. 환란이 올 때, 이거 빼앗아 먹으려고 덤비는 인간들 몰려 올 때, “어딜, 우리 식구들만 먹어야 해.” 하고 막을 수 있는 기관총 준비한다는 겁니다.


종말을 대비한답시고 이런 짓을 해야 돼요. 그거 지금 안상홍집단이 하고 있거든요. 돈 모아서 그런 짓 하고 있어요. 미쳤어요. 자기존재증명에 미쳐버렸어요. 남 욕할 거 아니고 우리는 돈이 없어 그 짓 못해요. 일단 돈이 없고 그렇게 남 시선 느끼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남들에게 밉상 받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는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지하에 벙커 만들어서 기어들어가 숨고 싶지요. 미국에서 지하벙커 임대하는데 한 40만 불 한답니다. 없어서 못 판답니다. 아주 유행이에요.


원자폭탄 떨어져도 안심되는 것, 갑자기 십자가마을도 구미가 당기십니까? “짐승이 무엇이냐? 어떻게 생겼느냐?” 요한계시록 보다가 이것을 묻는데 그 물음보다 그 물을 왜 묻느냐고 물어야 돼요. 그러면 “짐승을 알아야 구원받지요.” 그러면 십자가 피로 용서받은 것은 어디로 날라 가버렸습니까? 예수 안에서 의인된 것은 어디로 날라 갔지요? “아, 그 십자가 저도 아는데, 알거든요, 십자가로 용서 받는 것은 알지만 십자가 용서받고 난 뒤에 이왕 구원받은 이상 주께서 재림할 때는 구원 받지만 사는 동안만큼은 편안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주께서 우리하고 거래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잖아요. 죄인인 것을 확정짓고 난 뒤에 아버지와 아들의 거래, 그 언약의 관계에 의해서 십자가 능력을 줬기 때문에 우리가 ‘나’를 거기에 끼워 넣으면 안돼요. 십자가를 우리가 알게 되면 주의해야 할 것이 있어요. 일단 십자가를 인식했잖아요? 알았잖아요. 안 것을 가져오는 다른 자리가, 나와바리가 있으면 안돼요. 어떤 자리가 있으면 안돼요.


나는 십자가를 내 구원용도를 위해서 내가 가져와서 결국 ‘나는 이제는 십자가로 구원받았다.’는 그 나를 다시 구축해버리면 안돼요. 그거 성경해석의 오류입니다. 표정들 보니 다들 그렇게 사시는 모양입니다. 어제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에스겔 37장에 보면, 골짜기에 뼈들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그 뼈들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왜? 뼈기 때문에. 그것도 바짝 말랐어요. 누구보고 이야기하는가? 옆의 인자보고 이야기해요. “이 뼈들이 살겠느냐?” 그것은 에스겔 입장에서도 굉장히 난처한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존재거든요. 그러면 산다는 말을 물을 때는 에스겔이 주님 앞에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것을 주님이 차단했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지금 중요한 이야기 하는 겁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백프로 가짜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살려주세요.” 하다가 전부 다 망했어요. 살려달라고 해가지고. 지가 살려 달라할 입장이 못 되고 자격이 못됩니다. 그럴 때 인자가 주체를 넘겨요. “주의 말씀으로 살 겁니다. 주님이 스스로 던져놓은 약속에 의해서 주님이 회수하는 주님의 자기증명의 과정 속에서, 아마 나를 데리고 온 목적, ‘이들이 죽은 자인데 살 것입니다.’라고 해서 그 뼈들이 그야말로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면서 살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한 유머를 생각해 봅시다. 뼈 아닌데 모습만 뼈로 변장, 위장해서 뼈인 척을 하면서 ‘저분이 지금 이야기한다. 잘 들어야지. 어? 살려 준단다. 앗싸! 뜨거운데 조금만 더 참아. 곧 힘줄이 생길거야.’라고 하면 그 뼈 살겠어요, 안 살겠어요? 천사가 와서 살려주다가도 “이거 뭐 이런 가짜가 여기 섞여 있어!” 빼고 진짜 바짝 마른 뼈만 살려낼 거예요. 왜? 그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기 때문에.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완전히 죽음으로 끊어놓습니다.


십자가능력이 왔다는 말은 죽기 전에 이미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그 능력이 바로 나를 통한 하나님의 자기존재증명이라는 이유 때문에 저를 구원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주님한테 가 있지 우리한테 오는 게 아니거든요. 나에게 따로 구원의 이유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짐승이 뭐냐 할 때, 이 이야기가 궁금하지요? 짐승이 뭐냐, 할 때는 내가 묻는 게 아니고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것처럼 짐승을 누구하고 대비시키느냐 하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대비가 되어야 요한계시록이 풀립니다.


짐승이 누구냐고 묻는 그 자체가 건방지기 짝이 없는 것이고 그것을 물어서 뭐할 건데요? 그거 물어서 구원받으려 하잖아요. 누가? 내가. ‘나’ 구원은 없어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기 때문에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구원은 없거든요. 우리는 철저하게 에덴동산에 쫓겨날 때 그 취지가 계속 일어나야 돼요. 선악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돼야 됩니다. “정녕 죽으리라”가 죽은 척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살아 있어도 죽은 것으로 간주하시는 거예요.


다만 그것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이미 산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우리가 인식하지 말고, 그걸 인식하게 되면 내 존재로 가져오기 때문에 인식하지 말고, 다만 인식을 하되 주님의 존재로 돌아가기 위한 그 인식은 돼요. “그러니까 제 몸은 제 것이 아니고 값으로 산 주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 말씀대로 “주의 것임을 다시 한 번 제가 인정합니다.” 하는 조로 인식을 해주면 돼요.


자, 그렇다면 이 법칙을 가지고 응용문제를 풀어봅시다. “짐승이 뭐냐?” 하는 것은 “어린양이 누구냐?” 하고 관련되어 있어요. 그러면 짐승이 노리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 어린양이 하시는 그 업적과 위업을 훼방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예수 공연히 죽었다. 예수 죽어도 소용없다. 누가 죽는다고 해서 네가 구원받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 네가 성실하면 살고 불성실하면 죽는 거야. 착하면 살고 네가 나쁜 짓을 하면 죽는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윤리도덕으로 주님 안에 있는 그 나를 그 밖에 나가서 관찰하는 나의 존재증명용으로 마귀가 자꾸 시도하는 거예요. 그럴 때 짐승은 뭐냐 하면, 이렇게 보시면 돼요. 짐승의 기능이 무엇인가? 짐승은 무엇을 가리고 싶어 하고 무엇을 훼손하고 싶어 하느냐, 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을 보겠습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여기서 저희시체가 누구시체냐 하면, 복음 전하는 두 증인의 시체입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지요.


여러분, 소돔하고 애굽하고 위치가 다르잖아요. 소돔은 북쪽에 있고 애굽은 저 남쪽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지문의 내용과 가장 가까운 것은 5번,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방법을 사용해서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지요. 놀라운 사실은 여기는 어떤 사건, 기능이 나옵니다. “주께서 십자가의 못 박히신 곳이라” 그렇게 나와요. 사람들은 이 대목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성급하게 “짐승이 뭡니까? 오늘날 유럽연합과 어떤 관계로 되어 있는데요? 오늘날 신디게이트와 어떤 관계인데요? 오늘날 프리메이슨과 무슨 관계인데요?” 꼭 자기가 어디서 들은 아는 것만 골라서 자기를 커버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뭐냐? 자기 힘으로 그것을 대비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 대비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질서를 끄집어내는데 여기 보면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했습니다. 9절에서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했고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했습니다. 13절에,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요한계시록을 이해를 하려면 이 짐승을 기능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짐승의 기능은 연루된 기능이 있어요. 어린양, 어린양 앞에 어떤 형용사가 붙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 십자가지요. 십자가의 기능에 대해서 짝을 이루어서 반대하는 기능이 짐승의 기능이에요. 그러면 십자가지신 예수님은 지금 하늘로 승천해서 올라갔잖아요. 올라가게 되면 그 남아 있는 인간세계 모두가 십자가에 반대했던 세력들이 지배하는 동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두 증인이 거기서 죽임을 당하는 거예요.


죽임을 당한다는 말은, 그들이 참수를 당했습니까, 아니면 호랑이한테 먹혔습니까?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보기에 그 두 증인은 살아도 죽은 자 취급을 받는 겁니다. “너 너하고 말 안 해.” 동창생이 “나는 너와는 말을 한해. 난 너의 친구 아니야.” 하나님에 의해서 그렇게 될 때 주의 말씀대로, 요한계시록대로, “네가 당하는 그 현장이 소돔으로 되게 하고 애굽으로 되게 하고 더 놀라운 축복은 바로 내가 당한 그 현장이 주께서 십자가 지신 그 현장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그 주님의 기능입니다.


따라서 제가 내린 결론은 짐승은 주님께서 다뤄낸다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왜? 뭘 위하여?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자기존재증명을 위해서 짐승들이 부지런히 설쳐야 되고 활동을 해야 돼요. 그리고 복음 아는 사람들을 개 무시해 주시는 좋은 일들을 해주셔야 돼요. 사람 취급하지 않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시고 “외롭습니다.” 하고 너무 어리광부리지 마시고 “야호! 신난다.”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는 것 맞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짐승의 기능을 예수님을 경유해서 알았기 때문에 짐승을 알았다는 말을 하면 안 되고 “주님을 새롭게 알았습니다.” 이렇게 돼야 되지요.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는 항상 모든 것이 예수님을 아는데 필요해서 일어나야 했던 사태들이고 사건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밥 먹고 사는 것까지 전부 다 우리가 잘났음을 보여주는 증명의 기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살아 있다는 거지요. 주님이 살아 있어서 지금 십자가를 가지고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활동들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아마 어떤 무식한 사람은 사도바울 불러다가 “차안에 깔린 자기 자식을 들어내라.”고 할 거예요. 사도바울이 배트맨도 아니고 스파이더맨도 아닌데 자기 자식을 건져내라고 요청을 할 거예요. 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못하는 것이 없다.” 했으니까, 다 할 수 있으니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애 포기하세요. 왜냐? 그게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 외에는 사랑이 없어요. 하나님이 죽이시거든 곱게 죽으세요. 긴장하지 마시고 곱고 순하게 죽으세요. 이것이 내가 이 땅에 살던 방식이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바로 그 짐, 당신이 당신의 짐이 되었어요. 당신은 그것을 포기하시면 비로소 당신은 A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밑바닥의 주님의 자기존재증명, 예정이 보일 것입니다. 그만큼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주의 은혜라, 아마 알게 될 것입니다.


뭐, 내 힘으로 뭘 알아가지고? 짐승 알아서 뭐할 건데요? 짐승 안다고 구원됩니까? 이미 구원에 들어온 사람은 새삼스럽게 구원받을 필요는 없어요. 구원에 쓰이기만 하면 되는데 어떻게? 하나의 이름 없는 소자처럼 그냥 주의 형제처럼, 평소에 뭔가 했는데 나중에 심판대에서 보니까 “네가 평소에 했던 그 모든 것이 다 나를 위해 한 것이다.”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의미를 두니까 우리로서는 “감사합니다.” 할 뿐이지요. 그것을 성경에서 미리 당겨서 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면 돼요. “이것도 주의 은혜고 저것도 주의 은혜다.” 하고 감사하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번시간에 중요한 것을 해보겠습니다. 사사들을 투입해서 이유 없는 구원을 한다는데 그러면 구원의 방법으로서 “야, 이유 없다.” 이렇게 합니까? 안 그러면 구원 작업을 할 때 뭔가 이유가 있는 듯이 행세하면서 작용을 합니까, 하는 그 방식이 있겠지요. 여러분 중에 아주 머리가 뛰어난 사람은 이야기할거예요. 인간들이 A1에서 A2로 가면서 거기서 뭘 찾습니까? 거기서 원칙을 찾지요. 과학이니까 질서를 찾는다는 말이지요. “30분씩 운동하고 밥을 반으로 줄이면 살이 빠집니다.” 제가 살이 빠졌잖아요.


살이 빠졌는데 그 빠진 그것이 질서가 된다는 말이지요. 다음 날 되면 “또 그렇게 해야지?” 할 때 이 질서를 공격하는 게 있다는 거예요. 이 질서를 무산시키는 혼돈으로부터의 공격이 들어오지요. 밤이 낮을 공격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베냐민하고 이스라엘 연합군하고의 싸움에서 이방나라는 한 명도 전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자기들끼리 분란을 일으켰기에 한 명도 전사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방나라 화 시켰어요. 이스라엘에 대해서 다른 쪽에 안티 이스라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고 우기는 너희들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이스라엘로 자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사의 활동방식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왜 너희들은 스스로 안티 이스라엘, 반 이스라엘이 될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를 거기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그들의 구원방식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는 지금 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사는 뭐냐? 사사는 구멍이다. 어떤 구멍?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올라오는 유일한 입구역할을 하면서 옵니다. 그러면 사사의 자아가 이렇다면 그 안에 뭐가 있어야 돼요? 거기에 구멍이 뚫려야 되겠지요. 그래야 바람이 들어오니까. 뻥 뚫려 있어요. 뻥 뚫려 있으니까 자아가 온전합니까, 온전치 못합니까? 온전치 못한 것은 현재 온전치 못한 이스라엘이 형편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현재 사사의 형편이 너희들 형편이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뭔가 조직을 갖추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한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거예요. 교회라 하는 것은 모일 때 조직을 하지 마세요. 성령은 원래 바람이에요. 바람같이 왔다가 바람같이 사라지는 겁니다. 이것은 소유대상이 되지를 못해요. 소유하게 되면 그게 내 존재로 탈바꿈되기에 절대로 소유되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나를 소유하면 안돼요.


그게 뭐냐? 주님의 의미인데 이 의미라는 것이 대상이 바뀌고 주체가 바뀌고 대상과 주체를 둘러싼 그 장, 필드가 바뀌면 의미라는 것이 없잖아요. 모든 것이 다 바뀌게 되는 거예요. 이거다, 싶으면 벌써 시간이 지나버리면 다른 것으로 바뀌어버려요. 왜냐하면, 대상이 바뀌고 내가 바뀌고 그 형편이 바뀌기에 그렇습니다. 서로 친구사이인데 한쪽은 실장이 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신입사원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실장이 와서 친구한테 하는 말이 “내가 아직도 내가 네 친구로 보이나? 나는 직장에서 네 상사야. 상사말을 그냥 들어. 내 사무실 청소 똑바로 해.” 이렇게 수십 년 친구를 막 부려먹어요. <이브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친구를 막 부려먹는 거예요. 7시 40분부터 8시 30분까지 하는 엠비시 드라마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각자 자기존재가 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존재한테 걸려들어서 부려먹음을 당하시는 존재가 바로 예수님이에요. “나를 위한 구원자가 아니면 당신이 왜 왔어?” 하는 그 행세가 이런 식이란 말이지요. “우리 가정도 화목하게 못하는 게 무슨 메시아라고. 저리가!” 꼭 이런 식이라. 뭘 맡겨놓았습니까? 돈이라도 받을 무슨 권리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으면서 “당신 착하잖아. 당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잖아요. 크리스마스 때 울지 않는 애들에게 선물 준다면서? 그렇게 착하면 나한테는 왜 그 착한 짓을 안 하는데? 왜 내 인생이 꼬이는데? 그 착한 거 다 어디 갔는데? 왜 남 주고 나는 빠트리는데?” 평소에도 막 그러고 싶지요.


제가 대신해서 말 다 해줍니다. 속 시원하라고. “만약에 당신이 계속해서 날 이렇게 구박하면 난 당신과의 관계를 끊을 거야.” 그런데 그것을 주께서 이용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주님은 이용하신 거예요. “더 까불어봐라. 더 까불어.” 그래서 계속 까불까불 거리는 그 속에서 기원, 원천이 나오지요. 원천이 솟아 나오면서 그동안의 나의 질서가 주님을 압박했고, 핍박했고, 무시했고, 주님을 모독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보고 싶다. 보고 싶어서 미치겠다. 견딜 수가 없다.”고 해놓고는 주님 앞에서는 아주 그냥 쌩까요.


전혀 보고 싶지도 않고, 주님이 반갑지도 않고, 미치고 싶지도 않아요. 구름타고 오는지 뭘 타고 오는지 오면 오고, 가면 가고, “나는 지금 돈 번다고 그런데 관심 둘 시간이 없어, 관심 안 둬.”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언제 그것이 깨지는가 하면, 내가 생각했던 내 질서가 와장창 깨질 때, 그리고 내 자아에 구멍이 뚫릴 때,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구멍이 뚫릴 때 나는 그 순간 그 현장에서 사사가 되는 겁니다. 사사 참 꼬라지 좋지요? 주님한테 당하세요. 당하고 난 뒤에 사사됩니다. 주님한테 당하고 난 뒤에 열두 제자가 열두 사도가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는 짓을 했는데 주께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소리 들으면서 드디어 열두 사도를 대표하는 최종적인 이방인의 사도로서 등장한 겁니다. 그 절차 똑같이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여름인데 여러분, 우리 시원하게 삽시다. 냉장고나 에어컨 있다고 되는 게 아니고 제일 중요한 이 구멍 날라 가면 돼요. 박격포 가지고 치면 구멍 뚫립니다. 뻥 뚫리면 내 저장고가 날라 가버려요. “주님! 이것만큼은 내가 못 놓습니다.” 하는 저장고 다 날라 가려요.


내 저장고가 날라 가게 되면 나는 값을 주고 산,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그동안 주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후적’이라고 합니다. 일이 터지고 난 후, 사후적이라, 또는 소급해서 우리는 A에서 B층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느끼게 될 때 이미 자아가 구멍 난 자아로 느끼기 때문에 나는 나가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 느끼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그걸 노린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누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거든요.


사람들은 그 말을 자꾸 바꿔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니 주님도 살고 나도 살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러면 성경 새로 쓰세요. 본인이 알아서 쓰세요. 그런 성경 없습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나는 주님이 사시는 하나의 새장, 울타리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초콜릿이라면 우리는 포장지. 날마다 주님의 무늬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표출되기를 원합니다. 남들이 이야기해요. “주님은 어디 계시는데? 봐라! 여기 있다. 구멍 난 나.” 총 맞은 것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식사하러 갑시다.
 관리자(IP:61.♡.138.77) 15-08-09 12:24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5강 [자아의 틈]


다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제목은 “자아의 틈” 자아 사이에 틈이 있는데 자아의 틈이라고 언급을 한 것은 사사의 개인적인 성향이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이것은 희한한 일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는데 우리가 천국을 간다? 이것은 희한한 일입니다. 불교처럼 “네가 극락가려면 네가 알아서 도 닦아라.” 이것이 훨씬 이해가 쉽지요. “가만 있어. 내가 다 할게.” 이것은 기분은 좋다마는 문제는 믿어져야 되거든요. 기분은 되게 좋아요.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 나만 믿어. 내가 넣어줄게.” 굉장히 좋은 말인데 문제는 이게 믿어져야 되는데 믿음의 증거를 어떻게 우리가 확보하느냐, 그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했던 그 말에 주님이 신빙성을 가지게 하려면 주님은 말만 하실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천국 보내줄게. 내가 다 할게.”라는 그 내용이 실제 우리 삶속에 뭔가 남겨줘야 되잖아요. 남겨줄 때 ‘야, 주님께서 이것은 인생뿐만 아니고 마지막에 구원받는 것까지도 알아서 챙겨준다는 그런 신호를 우리한테 보내줬구나.’ 이렇게 믿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기대하고 있고 우리가 손에 쥐고 싶은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무심코 툭 던지는 말이 “성령이 임하면 알리라.”


“성령이 임하면 알리라?” 우리 동네에서 소통되는, 흔히 동네 마트에서 파는 것들 있잖아요. 대형마트에서 팔고, 우리가 구입할 수 있고, 우리가 구경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그런 증거를 우리한테 심어주시면 우리가 “믿기만 하라. 천국은 내가 알아서 다 해줄게.”라는 이것이 보증이 되는데 우리가 기대하는 어떤 증거물, 그런 것이 없고 그냥 “성령이 오게 되면 비로소 내 사랑 안에 거하고 너는 나를 알리라.”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것은 니고데모가 갑자기 이해가 돼요.


니고데모가 메시아인 듯, 메시아 아닌, 메시아 같은 그런 메시아가 와 버렸다는 그 말이지요. 그래서 과연 메시아인지 어떤 분이 밤에 찾아왔거든요. “하나님 나라에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할 때에 무슨 처방을 내려줄지 알았지요. “식후 30분에 하루 세 번씩 드시면 됩니다.” 이런 것이든지, 27센티짜리 침을 맞는다든지, 오늘날 목사들이 하듯이 “주기도문을 천 번 외우라. 그러면 방언 터진다.” 이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새벽기도 연속으로 40일하기, 성경쓰기, 이런 것들 있잖아요.


인쇄가 잘 되어 있는데 왜 쓰는지 모르겠어요. 안 그러면 총 동원주일 정해서 두 명 데려오기, 십일조 내기, 11시 예배에 10시 반에 와서 미리 찬양하면서 예배준비하기, 통성기도하기, 집 사달라고 기도하기, 이런 것을 시키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주님 하시는 말씀이 “다시 태어나야 된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도 굉장히 얄밉게 하셔요. 처음부터 “성령으로 태어난다.” 그러면 그냥 집에 갈 건데, “다시 태어난다.”고 해서 ‘야, 다시 태어난다면 갈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주고 ‘그러면 다시 태어나는 방법도 다시 태어나면 된다고 한 그 분에게는 이미 준비된 것이 있겠지?’ 그 방법, ‘어떻게?’ 영어로 ‘HOW’지요.


오 목사님이 저보고 영어를 쓸 때는 단어만 쓰지 말고 문장으로 만들어서 하라고 했는데, 자꾸 비겁하게 단어만 툭툭 던지고. 그런데 주일 낮 설교 할 때는 ‘over there’ 라고 해서 단어가 두개가 들어갔답니다. 제대로 영어를 썼다는 거예요.


‘방법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다시 태어난다는 그 결과를 주실 것이다.’ 해서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하고 물으니까 “성령으로 태어난다.” 물 건너 간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육에서 난 것은 육이야. 못해.” 그러면 처음부터 못한다고 하든지 하지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건 이렇습니다. 제가 강의 중에 여러분의 반응을 보면서 제가 어려워하는 것이 뭐냐? ‘아, 이 점이 참 이해가 안 된다.’ 하는 것을 제가 느꼈는데요.


실재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지우겠습니다. 문제는 A라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B로 합세하는 현상이 어떤 현상이냐, 이걸 설명하는데 여러분이 이해를 못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다시 설명하고 싶은데요, 이것이 사사기와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중립적인 만남은 없습니다. 서로 공격하고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육과 영은 충돌하게 되어 있지 좋은 게 좋은 게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했듯이 중립지역에서 곱게 만나버리면 자칫하면 이것이 권태가 된다니까요? 권태는 짜증스러워요. 천국에서 할 게 없으면 천국이 지옥 같아요. 차라리 시끄럽게 노는 지옥이 좋지 고요하게 “받으옵소서. 제 면류관을 받으시옵소서.” 할 게 없어요. 또 할게 없으니까 “제 면류관을 받으시옵소서.” 주님께서는 “아까 줬잖아. 아까 주지 않았어?” ‘아 맞다. 아까 줬지.’ “그러면 제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아까 노래 불렀잖아. 다른 레퍼토리 없어?” “그러면 랩으로 할까요?” “그것도 지겹다.”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천국이. 그 재미없는 곳에 데려가 준다면 괴로운 겁니다. 중립적인 만남이 아닙니다. 충돌이 일어나는데, 여기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십자가사건이 일어나지요. ‘라인홀드 니버’라는 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쓴 책이 이런 것이 있어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을 썼습니다. 유명한 책인데, 그 말이 뭐냐? 인간은 도덕적이면서 그 인간들이 모이면 비도덕적이 되는가? 도대체 그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그 책에 해답이 없어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 사람이 이 책을 쓴 것은 해답을 준 것이 아니고 “그러니 이 비도덕적 사회야, 이기적인 사회야! 제발 도덕을 회복하자.”라고 권유하는 책이지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분명히 점잖은 사람인데 예비군복을 입혀 놓으면 완전히 달라지잖아요. 휘파람 휙휙 불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점잖은 사람 되고. 왜 그런가 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이유를 모를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제목이 바뀌었어요. ‘비도덕적인간과 도덕적 사회’ 이 말이 맞아요. 왜냐하면, 이 사회라는 것은 중립적이고 차가운 사회이기 때문에. 개인의 성향, 개성을 용납하지 않고 굉장히 도덕적이에요. 그래서 신입사원들이 회사에 취직하고서 제일 힘들어하는 것은 까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까불이, 까불이, 까불 수가 없어요. 그렇게 말 안 듣던 그 인간도 회사 들어가면 갑자기 행동이 달라지고 처신이 달라져요. 거기에 맞춰야 되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신입사원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자신의 돈, 소득을 벌어들이려고 갔는데 막상 가보니 조직이 너무나 우상적이라는 거예요. 절대적이라는 것, 그 앞에서 자기가 너무나 작아졌다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6개월 지나면 앞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치킨을 굽나 어쩌나, 그걸 고민하게 됩니다. 더럽고 숨이 막혀서 회사 못 다니겠다. 그 정도로 이 사회는 굉장히 도덕적 사회입니다.


문제는 혼자 있으면 갑자기 개 되지요. 비도덕적 인간이 되는 거예요. 무의식이 작용하니까. 이 사회는 상당히 중립성을 유지하고 있어요. 사법적이고 중립적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지하고 있는데 사사기에서 사사가 보여주는 것은 자아에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아에 틈이 생겨버리면 이 틈에서 나오는 그 힘으로 말미암아, 성신의 힘이지요, 그 힘으로 말미암아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아주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따라서 비도덕적 인간이 되어야 해요. 비도덕적 인간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사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랑의 체제로부터 탈출해서 벗어나야 돼요. 사랑의 체제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랑하지도 말고 사랑 받지도 말라는 거예요. 무쏘의 뿔로 홀로 가라. 혼자 서라. 사랑하고 사랑 받고, 외로울 때 잠시 그렇게 하지만 사실 좀 더 들어가면 나 빼놓고 다 귀찮아요. 심지어 나이 많으면 자기도 귀찮아요. 자기 자신도 귀찮거든요. 장로님, 안 그렇습니까? 본인이 본인에게 좀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실례의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사실은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기대하다가 원하는 사랑이 안 오게 되면, 짜증이 나잖아요. 그러면 어떤 대비책이 있느냐? 차라리 사랑 안하고 사랑 안 받기. 안하고 안 받기. 그거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생은 영원한 사춘기에요. 전부 다 자폐증 환자입니다. 자기한테 갇혀 있는 즐거움, 나 혼자 책을 읽고 나 혼자 노래하고 나 혼자 밥을 먹고 울고불고, 그것이 인생이에요. 그것이 전부에요. 혼자서 TV보고, 혼자서 영화보고, 최고 편해요. 제일 편해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제가 몇 시간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뭐라고 했던가요? 우리가 바르게 사는 것은 이게 부자연스럽고 이것은 우리 본모습과 달리 억지스럽다고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폐증 환자기 때문에, 사춘기기 때문에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그것이 자기한테 가장 맞고요, 가장 자연스러워요. 그게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더라.” 딱 들어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누구냐 하면, 사사되기 전의 그 사사에 해당돼요. 사사도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물론 남을 위해서 살지 않는 그것은 기본이고요. 그런데 이런 사사에게 주님의 신이 찾아오고 하나님이 찾아와 버리면 그 때부터 본인은 그냥 남들처럼, 자폐증 환자처럼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남을 위해서 살지도 아니하고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도 살 수 없는 그런 난처한 궁지에 하나님이 빠트립니다. “하나님, 좀 살던 대로 살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자기 본토 아비 집에서 불러냈다고 했잖아요. 불러내서는 여러 가지 기적도 일으키고 그랬는데 잘 따져보세요. 날 가만 두는 게 좋습니까, 주님이 찾아오는 것이 좋아요. 그냥 날 좀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살던 대로. 지옥을 가든 천국을 가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만 놔두면 돼요.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임신했던 마리아. 요새 말로 약혼하고 별일 없이 그 다음 순서로 결혼하는 그것이 마리아의 행복이겠습니까, 아니면 덜렁 임신하는 그것이 행복이겠습니까? 마리아 죽었어요. 마리아는 죽은 거예요. 인생 완전히 끝장났어요. 착하게 잘 일하던 구미공단의 여공 하나 임신시켜서 뭐할 겁니까? 그때는 구미공단 같은 것 없었지만 하여간 보통 사람들인데 임신해서 뭐할 건데요?


유명한 재벌 집 딸도 아니고, 땅콩이나 집어던지는 기업의 부회장도 아닌데, 그냥 평범하게 사는데 임신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냥 살던 대로, 사춘기로, 자폐증으로 그냥 살면 안 됩니까? “사랑받는 것도 싫어. 사랑 주는 것도 싫어. 그냥 나만 사랑할래.” 그냥 나만 사랑하는 것도 주께서 가만두지 않고 찾아오시는 사람, 이름은 사사, 그들이 사사입니다. 사사의 내부가 갈라졌어요. 그 자아에 틈이 생겼습니다. 그 틈에서 나오는 그 힘이 놀랍게도 자기뿐만 아니고 주변에 구원의 영향력을 제공하게 되는 겁니다.


원래 인간은 내 일은 나에게만 영향을 주게 되어 있지 남에게, 외부에 영향을 안주게 되어있는데 이상스럽게 사사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사가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분열되고 찌그러진, 째져버린 그런 경우를 겪으면서 그 효과는 남들이 보는 일들이 이스라엘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입다에요. 삼손도 마찬가지고. 기드온도 마찬가지고요. 사사기 6장을 보겠습니다. 사사기 6장 22절입니다.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으니까 이제 내 인생 끝났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하면, 어떤 특정인에게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사자가 등장하게 되면, 그 사람의 내부질서, 중립을 유지하는 내부질서가 바깥 외부질서로 확산되는 하나의 알맹이, 종자로서 사용이 되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말이지요. 쉽게 하기 위해서 다니엘서 5장의 예를 들겠습니다. 바벨론의 벨사살 왕 시대인데 손가락이 왕 앞에 나타났어요. 손가락, 이것은 별로 좋지 않는 용어지만 손모가지가 나타났어요. 손모가지로 하고 싶은데 참는 거예요. 점잖은 말로 해서 손이 나와서 글씨를 썼어요.


그것은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고 쓴 겁니다. 그럴 때 왕이 술이 확 깨면서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를 이야기해 달라.”라고 했습니다. 그 때 다니엘이 하는 말, “제가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메네’가 두 번 있어요.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데겔) 그리고(우) 바사나라.” 살을 붙인다면 “당신의 나라는 부족해서 주께서 끝을 내시고 당신의 이 바벨론 나라를 메데 바사나라로 넘기기로 이미 작심을 했습니다.”라고 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뭐냐? 그렇게 풀이하는 다니엘 자체가 이미 세상의 끝을 지니고 있는 내부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다니엘의 내부질서에요. 내부질서가 이제 다니엘이 죽고 난 뒤에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그것이 인류의 마지막 운명이 그 질서의 법칙에 의해서 결정 나버립니다. 이상하잖아요? 한 사람의 심리적인 성향이 바깥에 있는 우주와 운명을 확정짓는다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에게 일단 누가 찾아왔지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오신 거예요.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오게 될 때에 기드온의 경우에는 본인이 지금까지 생각했고 또 앞일을 생각하는 미래의 계획은 다 찌그러지고 포기된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알다시피 하나님을 만나면 더 이상 살지 못한다는 것,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만나면 내가 죽는다고 그렇게들 알고 있었던 거예요. 우리 같으면 ‘그렇게 무서울 것 같으면 말 좀 듣지. 우상을 왜 섬겼어?’ 그런 생각이 있잖아요. 그런데 우상은 눈에 보이고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잖아요. 눈에 안 보이면 만만해요. 눈에 안보이면 만만하다고요.


집에 있을 때는 맘 놓고 시어머니 욕하지만 딩동, 하고 시어머니 찾아오면 ‘아이고, 나는 이제 죽었다.’ “언제 내려가실 건데요?” “아예 살려고 왔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어머니 당신의 생각이고 며느리의 자폐적인 사춘기는 깨져버리고 완전히 혼선이 일어나버린 겁니다. 다 깨진 거예요. “하나님은 하늘나라에 그냥 사시지 왜 소박하고 겸손하게 사는 인간세계까지 침범해서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나 같은 이 미천한 것에게까지 찾아오셨습니까?”라고 사사기 6장의 기드온에게 찾아올 때 기드온이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사기 6장 15절에 보면,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제가 보잘 것이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이 보잘 것이 없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굉장히 겸손해 보입니까? 그게 아니고 “제발 그냥 가세요, 그냥!” 그런 뜻이에요. “저는 나름대로 제 인생의 설계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냥 똑똑하고 믿음 좋은 사람들에게 가시고 제발 주님은 거창하게 저에게 좀 찾아오지 마세요. 안 그대로 내 몸 하나도 간수가 안 되는데 어른까지 모시려 하니 괴롭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저는 삼위일체 믿는 사람 보면 참 대견하다고 봐요. 시어머니 한 분도 모시기 힘든데 성부, 성자, 성령, 시어머니 세분을 세트로 모시려고 하니까 이것은 보통 힘든 게 아니잖아요. 성부 섬기면 성자, 성령이 삐지고, 성자 섬기면 “네 눈에는 성부 하나님이 안보이나?” 이래서 삐지고 성령 섬기면 “이제 제일 막내를 마지막으로 섬기는구나.”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요? 원래 삼위일체라는 것이 없어요. 괜히 사람들 꾀이려고 신학자들이 만든 건데 모든 삼위일체 개념들이 다 존재개념이에요.


인간존재의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인간의 질서체제를 더 확장시키는 것이 삼위일체라는 겁니다. 그 삼위일체에 뭐가 빠졌겠어요? 단절이 빠졌겠지요. 십자가가 빠져 있겠지요? 걸림돌 다 뺀 거예요. 왜? 그거 넣으면 온 국민이 신자가 안 되니까, 온 백성이 신자가 안 되니까 온 백성에게 세례주고 신자를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의 단절을 다 빼버리고 “이 멘트에 동의하시면 신자입니다. 축하합니다. 합격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세분인 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그 세분이 하나인 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합격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문제 내고 자기 마음대로 합격시키고. 그런데 만약에 ‘아무래도 너무 쉽다.’ 싶어서 손들고 “저 신부님! 어떻게 3이 1이 됩니까?” “그것은 묻는 게 아닙니다.” 본인도 설명을 못해요. 설명이 안 되거든요. 3이면 3으로 몰아세우든지 1이면 1로 몰아세우든지, 3도 아닌 것이 1도 아닌 것이,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대나무인가?


왜 삼위일체를 그렇게 강조했느냐 하면, 삼위일체를 인정하는 그 단어, 그 기호집단을 유일한 정통집단으로 삼기 위해서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역사는 어떤 역사? 중립적이고 평화로운 역사, 질서가 갖추어진 역사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기증명, 하나님의 예정인 B층이 눈에 보이는 A층에, 역사 층, 표면층, 체제 층, 구조 층에 들어가게 되면 여기서 뭐가 일어납니까? 대 충돌이 일어나지요.


약간의 그 충돌을 일으켰던 사람이 있습니다. 루씨 집안사람, 루터에요. 루터는 말하기를,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인됩니다.”라고 십자가 이야기를 언급해버렸어요. 십자가이야기. 그러면 그쪽에서 하는 말이, “루터야! 당신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그게 맞아?” “그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 “그러면 교회의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의 옆에 붙어야 해? 아니면 뒤나 앞에 있어야 돼? 어디에 있어야 돼?” 루터가 할 말이 없네요.


“십자가로 인하여 하나님은 숨어 있는 하나님이고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천주교에서 하는 말이 “십자가로 나타난다면 그 나타난 공동체, 집단이 있을 것이 아니냐?” “있지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냐, 교회 아니냐?” 루터가 “그거 교회네요.” “거봐. 우리도 교회잖아. 종교개혁 왜 했어? 쓸데없는 짓 했네. 뭐가 문젠데? 있는 교회에 십자가만 하나 첨가하면 되네. 옵션으로. 그러면 온전한 교회 되는데 뭐가 문젠데?”


지금 이 이야기가 꼭 십자가마을보고 하는 느낌이 드는데? 루터가 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다.” 그러니까 천주교가 하는 말이 “죄인이면 죄인으로 몰든지 의인이면 의인으로 몰든지 하나만 이야기해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의인이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의인이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죄인인데?” 루터가 입을 가만 다물고 있어요. 왜? 모르니까. 뭔가는 아닌데. 신부가 조롱이나 흔들어대는 그건 아닌데, 그건 분명히 아니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은 맞는데 막상 성경에서 뭘 내어놓아 보이니까 그 쪽에서는 “루터야! 성경의 내용이 그런 거였어?” 하고 궁금해 할 줄 알았는데 궁금해 하지 않고 역시 궁금해 하는 것은 “네가 어떤 소리를 했든지 그래서, 그래서 지금 있는 것이 교회란 말이야, 아니면 교회가 아니란 말이야?”


자꾸 묻는 관심사가 어디에 있어요? “지금 우리가 모인 교회가 교회입니까? 구원되는 단체가 맞습니까?” 그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틈새시장을 공략해서 칼빈이 등장했어요. 어떤 사람은 칼빈의 이름을 굳이 ‘깔뱅’이라고 하는데 하이고, 그냥 칼빈으로 쓰세요. 깔뱅이라고 프랑스말로 쓴다고 해서 별스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칼빈이 와서 하는 말이 “루터가 하는 말은 옳고 그 옳은 사람끼리 모인 사람만 거듭난 사람이고 거듭난 사람끼리 모인 것이 교회니까 여러분은 천주교에서 개종하세요.” 이렇게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내놓은 거예요.


이제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천주교를 하든지, 루터교로 하든지, 아니면 칼빈개혁주의로 하든지, 선택의 폭이 넓어졌는데 그 선택을 결정하는 요인은 옛날과 같아요. “야, 너도 교회 옮길래? 저쪽에 친구가 많은데?” “그냥 나는 안 옮길래.” 이거예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었습니다. 선택할 때도 육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 집안은 종교가 하나 되어야 평화롭다.’ 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러분, 평화로운 질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극단적인 파괴행위라 했지요? 질서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현재 있는 이 질서가 어떤 성질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인간도 무모하게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리고 빠져나와도 소용없습니다. 왜? 빠져나와봐야 질서 또 만들어요. 지방교회, 워치만니처럼. “우리는 거듭난 사람들의 집단이다.” 제가 이야기했지요. 12+0, 이게 12지 11+1 한다고 해서 그게 12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0이라는 이 부재, 보이지 않는 은혜가 이 12를 묶는 허리띠 역할을 해줘야 돼요. 이 허리띠 역할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지난 시간에 레위언약이라고 했습니다. 또는 모세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주무신다고 기억날 리가 있나요?


워치만니가 지은 책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를 언급하면서 열두 광주리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시고 남은 조각을 다 모으니까 이게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는 그 말이에요. 워치만니가 그걸 알 턱도 없고 그런 이야기를 한 적도 없지만 열두 광주리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열두 광주리는 1에서 나온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은 1이 아니고 숫자로는 0가 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B층에서 오신 것이지 A층에 계신 분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 B층에서 오신 예수님이 열두 광주리,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는데 있어서 기존과 충돌과 폭력사태가 일어난 겁니다. 그 폭력 사태를 사도바울은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한 거예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폭력사태를 전한 겁니다. 이 세상은 평화롭고 중립적인 질서체제가 아니에요. 중립적인 질서체제가 되면 이것은 완전히 자폐증 환자가 되어버려요. 이것은 사춘기가 된다고요. “그냥 굳어진 질서 내에서 나는 놀 거야.”


그런데 기드온에 있어서 주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 굳어진 체계에 허락도 없이 그냥 방문하신 겁니다. “네가 굳어진 그 체계를 내가 찢고 찢어진 쥐포처럼 틈을 만들어서 그 틈을 잡아서 외부로 확산시켜서 이스라엘을 이 압제에서 해방하는 힘, 에너지의 재료로 사용하겠다.”라고 일방적으로 침입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기드온에 대한 사적인 침입이 아니고 이스라엘에 대한 침입이에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입니다.


그 공격, 하나님의 전쟁, 그 여파로 이스라엘은 7년 동안 압제 당했는데 40년 동안 평화롭게 유지가 되었습니다. 평화롭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여러분이 아셔야 하는데 이 평화롭다는 말이 뭐냐? 다음에 얻어맞기 위해서 죄가 숙성돼야 돼요. 포도주가 맛있게 익듯이, 참외가 노랗게 익듯이 이게 숙성돼야 해요. 숙성되는 기간이 40년 동안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바깥에 있는 앞으로의 이스라엘의 일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 새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주께서 그렇게 사용한다는 겁니다.


다니엘 이야기를 다시 하면, 다니엘 자체가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 다음은 페르사에게 나라가 넘어갈 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그 주변 사람들이 누굴 쳐다보겠습니까? “다니엘! 누구야 너! (7년 동안 군만두만 먹인, ‘영화 old boy에서’) 너는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다니엘 같으면 정체를 밝히지요. “나는 사망처리 된 사람입니다.” 호적이 없는데 새로 파견된 사람입니다. 마치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같아요. 나사로,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세상으로 살아났잖아요.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가 다시 살아났을 때 우리가 물어야 될 것은 뭐냐? “왜 천국에 살지 않고 이곳에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바로 내가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라고 할 거예요.


천국 간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미 사망처리 된 자가 머무는 그곳이 천국입니다. 예수님마저도 사망처리 되지 아니하면 주가 될 수 없어요. 하나님의 아들은 되는데 만민의 주가 되지는 못합니다. 세상을 심판할 권한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사망 처리된 분이지요. 사망처리 되어놓고 나중에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서 마음 놓고, 유비 쿼터스, 마음 놓고 어디에도 출몰돼요.


“우리 집에 오세요.”라고 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원하는 곳에 그냥 본인이 나타나요. 꼭 <여고괴담>같아요. 팡, 팡, 팡, 이렇게 다가와요. 그냥 곱게 걷는 것이 아니고. 복도에서 곱게 걷는 것이 아니고 퉁, 퉁, 그렇게 걸어와요. 연속이 아니고 단절, 단절, 단절. 부활의 주님을 우리가 소지할 수 없습니다. 소지할 수 없고 그 대신 제자들은 자폐증에서 벗어납니다. 자폐증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더 이상 남을 위해서 살지 않을 뿐더러 더 섭섭한 이야기는 자기를 위해서도 살 수 없는, 참 슬픈 인생을 살아가요. 저와 여러분이 그런 인생을 살아가요. 여기서 한 마디를 해야 돼요. “믿습니까?” 쌍시옷을 넣어서.


쉽게 말해서 “주여, 저를 왜 건드리십니까? 그냥 남들처럼 자폐증환자가 되어서 살아가듯이 자기 재미에 살도록 그냥 놔두시지 왜 사랑할 줄도 모르고……, 이제 사랑받는 것도 귀찮아, 돈이 제일 좋아. 다 귀찮은데 그냥 놔두지 왜 저로 하여금 찾아오셔서 날 위해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남 위해서 사는 그것도 안 되고. 그래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남 위해서 산다.’ 하는 사람은 전부 다 사기꾼인지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반드시 인간에게는 대가없는 행동, 대가없는 노동은 없기 마련이에요.


대가없는 노력, 대가없는 행동은 없습니다.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해마’라고 하는 이 두뇌의 기억조직 때문에 그래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고요? 바보입니까? 아이큐가 30이에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해요? 두뇌에 뇌량이 있어서 오른쪽이 하는 것을 왼쪽이 알고 왼쪽이 하는 것을 오른쪽이 알도록 브릿지로 다 연결되어 있는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한다면 이것은 참 좋지요. 범죄에 노출되기가 쉽지요. 오른손으로 훔치고 왼손으로 훔치고. 오른손으로 훔쳐놓고 “당신 도둑질을 했지?” 하면 “나의 왼손이 했는데? 나의 왼손이 한 거야. 내 책임이 아니야.”


인간은 자기만 챙기는 것, 이거 죽을 때까지 끝까지 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끝까지 가요. 인간은 자기만 사랑해요. 이 기억 때문에. 자기가 한 것, 꽃꽂이 한 것, 봉사한 것, 잊을 라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남한테 해코지 한 것은 잊어도 자기가 착한 일 한 것은 잊을 수가 없어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헤어질 때 뭐라고 합니까? “네가 나에게 해 준 게 뭐 있나? 옷도 사주고 목걸이도 사줬잖아.” 자기가 행동한 것은 기억 못하고 자기가 해준 것만 기억해요.


그것은 해준 게 아니에요. 해주면서 뒤에 고무줄을 달아놓았어요. 해주고 다시 자기 쪽으로 회수합니다. 완전히 고래사냥이에요. 닐 낚시 돌리듯이 막 돌려서 자기 것으로 뽑아내는 거예요. 본전 없는 행동이 어디 있어요? 남지 않는 장사가 어디 있어요? 다 거짓말이에요. 다 남는 것 보고 장사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나인데 나를 위해서도 못살게 해버리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날 위해서도 못살고 그렇다고 남을 사랑하는 것도 이제는 귀찮아요. 사랑하는 것도 귀찮고 받는 것도 귀찮고 사랑도 안 돼.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가슴에 구멍 난 거지요. 뻥 뚫린 거지요. 부재자신고해야 됩니다.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은 자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꼭 이 땅에서 좀비 같아요. 날마다 다가오는 사건들이 낯설게 다가와요. 전에 나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했던 옛 버릇대로 이익을 챙기려고 하는데 내가 한 그 행동이 주의 영광을 돌리는 행동으로 되었을 때 남들이 “성령의 열매를 보여줘서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목사님 때문에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하면 목사는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주여. 나도 좀 조용하게 살게 해주세요.” 이렇게 됩니다. “왜 저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이제 그만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했던 베드로의 고백처럼 성령 받은 사람은 다 그래요. 그렇지요? 다들 성령이 계셔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나를 가만두지 않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강제로 이끄시는 그것, 바로 이 시대의 사사들이에요. 바로 B층에서 하나님의 자기증명을 위해서 우리를 도용하고 이용한 겁니다. 허락도 없이 내 속에 침투한 거예요. 이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가지 않을 때 그 길을 무슨 길이라 하는가? 세 글자로 ‘좁은 길’이라고 합니다. 좁은 길은 좁은 길이 좁은 길이 아니고, 고난의 길 혹은 순교의 길이 좁은 길이 아니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그 좁은 길입니다. 부동산이 15만평, 아파트가 한 200평 될 때 그게 좁은 길입니다. 차는 한 세대, 아우디가 있고 BMW가 있고 벤츠가 있어서 자식들한테 하나씩 나눠주는 그것, 되게 좁은 길이에요. 그거 유지한다고 힘들거든요.


정리합시다. 좁은 길이란 내가 원치 않는 쪽으로 이끌림을 당할 때 그게 생명과 연결되어 있느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순교한다고 나대지 마세요. 그거 넓은 길입니다. 이디오피아 톰스가 울든 말든 가만 놔두세요. 가만 놔두면 돼요. 그거 흉내 내지 마세요. 아프가니스탄 갔다가 탈레반한테 잡혀서 벌금내지 말고 그냥 여러분 사시는 곳이 사사기 때문에 여러분이 사시는 곳이 땅 끝이고 그게 땅 끝 마을이에요. 민들레 홀씨 되어 날아간 그곳이 바로 그곳이에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주께서 부활해서 찾아왔거든요.


처음에는 몰랐어요. 너무나 낯선 인물이었는데 저녁때쯤 식사하면서 보니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네!” 하는 순간 예수님이 홀연히 사라졌어요. 그 사람들 완전히 바보 되었어요. 그래서 왔던 길로 도로 갔습니다. 이스라엘 지도가 이렇습니다. 여기 지중해가 있고, 북쪽의 헐몬산에서 비가 내리면 갈릴리 호수에 모였다가 죽음의 바다인 사해까지 내려갑니다. 옆에서 이스라엘을 보게 되면 사해는 지표보다 200미터가 더 낮습니다. 해발이 높은 산지 쪽의 서늘한 곳에 주요 마을들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해발 630미터의 위치에 있어요. 주변에 세겜도 있고 실로도 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이 올라올 때는 힘들게 헉헉거리면서 올라오는 거예요. 위에서는 화살을 쏘기만 하면 돼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가면 엠마오가 있고 북동방향으로 가면 여리고고 갈릴리 호수에서 서남쪽으로 한 20킬로 지점에는 다볼산, 오늘날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다는 모리아산, 세겜에서 북쪽으로 있는 그리심산과 더 위쪽에 에발산이 있고, 갈릴리 호수 남쪽의 넓은 지역인 데가볼리, 갈릴리 호수 서쪽의 고지마을 가나, 여기에 유일한 평지가 있는데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90킬로 지점에 이스르엘평지가 있어요. 이 평지의 서남쪽 끝에 최후의 전쟁의 상징인 므깃도가 여기 있고 홍해는 여기에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북서쪽 약 56킬로 지점의 지중해 항구마을 욥바가 있고 시돈은 레바논 남쪽 여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위쪽이 베냐민지파의 영역인데 베델을 기준으로 해서 그 위가 에브라임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 5킬로미터인데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5-6킬로쯤 더 가면 기브아라는 곳이 나옵니다. 물론 안 가봤습니다. 에브라임 지역에 있는 한 레위인이 베들레헴에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지역은 이미 여부스 족속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이방민족에게 대접받기 싫다.” 해서 기브아로 가게 됩니다. 모세율법에 의해서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그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기브아에서 대접받겠다고 올라갔다가 동성애 먹잇감을 찾고 있던 불량배들에게 걸려들었습니다. 묵고 있던 집의 노인이 “우리 집에 딸들이 있고 이 레위인의 첩도 있어서 이들을 내어줄테니 이 레위인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첩만 내주게 되어서 봉변당하고 죽어버렸지요.


여러분이 보기에 그 일이 참 악하게 보이지요. 악한 것이 맞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악의 전부가 아니라고 했지요? 그것은 상대적인 악이고 그 상대적인 악에서 잘못된 정의감이 생기지요. 이 정의감 때문에 연합군이 결성되고 이렇게 결성된 연합군이 첫 번째 전쟁에서 지고 두 번째 전쟁에서도 지고 말았어요. 세 번째 전쟁에서야 승리하게 되는데 그 전쟁에서 “과연 형제를 칠까요, 말까요?” 하고 묻게 돼요. 이 말은 뭐냐? 이 정의가 문제가 있는 정의감이라는 말이지요. 상대적인 윤리거든요. “우리는 그런 짓 안하는데 우리나라에 이런 악한 자가 있다니!”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던가요? 진짜 악한 것은 누구를 만나야 알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 진짜 악이 드러나잖아요. 하나님 앞에 서면서 하나님에게 장악되어야 할 내가 그게 싫어서 장악된 나 말고 따로 밖에 나가서 주님 앞에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멋지게 사명감으로 잘 쓰일까를 관찰하는 그 모습이 그게 절대적인 악의 모습이에요. 주께서 다루면 되는데 “주여, 제가 목사잖아요.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되지요.” 주님이 목사고 뭐고 하청 준 적이 없어요. 그렇잖아요. 요한복음 6장에 보세요. 주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6:39)고 우리 주님이 그렇게 약속을 했으면 그냥 믿어야지 “내가 나서지 않으면 어린양을 잃을 것이다.”라고. 네가 뭔데?


문방구 점원이 주인보다 걱정을 더 해. 이것은 수상한 겁니다. 너무 긴장돼 있어요. 본인이 왜 그렇게 어깨에 힘주고 왜 그렇게 힘들어해요? 이것은 사망처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영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해놓고 다시 이 어두운 세상에 재파견 되는 식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되거든요.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지요. 믿습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 믿고 싶은데요. 증거를 주옵소서. 내가 믿을만한 증거를 주세요.”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 증거 십분 쉬고 드리겠습니다.
 관리자(IP:61.♡.138.77) 15-08-09 12:28 
2015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6강 [신앙의 증거]


여섯 번째 강의의 제목은 ‘신앙의 증거’입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내가 신앙이 있습니까?” 에 대한 증거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찾아온 증거를 말합니다. “나한테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증거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본인의 의식의 흐름에서 나왔고 그것은 인간의 기억 속에서 나왔기에 아무 의미 없거든요. 하나님께서 제시한 증거, 하나님께서 “너는 신앙 있다.”고 할 수 있는 증거가 뭐냐? 그런 의미의 신앙의 증거를 생각하는 겁니다.


신앙의 증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붙여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누굴 붙여주는가? 우상 숭배자를 붙여주시는 혜택을 입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신앙의 증거입니다. 우상섬기는 자를 우리에게 붙여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얼마나 우상에 대해서 우호적이고 친화적이고 정감을 나타내는지를 우리로 하여금 두드러기처럼 나타나게 만들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성과는 달리 우리의 감정은 왠지 이끌리는 겁니다.


그것이 사사기 2장에 보면 나옵니다. 사사기 2장 14-1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사기 초반, 옷니엘, 에훗, 삼갈, 그리고 드보라, 기드온, 이런 초반의 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우상을 숭배해서 그들을 이렇게 괴롭게 하는 것이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만 괴롭게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오래 하게 되면 그 체제에 적응하게 되어 있어요.


오히려 그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괴로워요. 어떤 영화에 보면 이 정재(염석진)가 독립군 세 명을 팔아먹었어요. 임시정부 경무국대장을 하면서 일본헌병대 앞잡이가 되어서 독립군을 팔아먹었거든요. 마지막에 독립군에게 걸려서 마지막에 “왜 자기의 동지를 팔아먹었습니까?” 하니까 정말 복음적인 내용이 마지막 멘트에 나옵니다. “해방될 줄 몰랐습니다.” “왜 친일파를 했습니까?” “나는 이대로 죽 갈 줄 알았지요. 해방될 줄은 몰랐습니다.” 해방될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의 증인이고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성령은 마지막 때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니엘이 되는 거예요.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 나를 바뀐다. 이 세상은 끝났다. 끝났다. 왜 끝났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해서 우리는 천국으로 바뀐다.” 이것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품어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다니엘 같은 이 시대의 사사지요.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아이고, 괜히 오버를 했는데? 그게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초반에는 그래도 느낌이 있지요. 하지만 그 괴로움도 여러분 여러 번 받으면 아예 무반응 적입니다. 그래서 사사의 강도가 외부에서 자기내부문제로 응축이 되면서 삼손에 이르러서는 이제 사사가 민족이고 뭐고가 없어요. 그저 사랑 찾고 애인 찾아서 그냥 자기 힘을 소비하는 그런 사사로서 마감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른 백성들아, 블레셋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니까 그냥 이 현실에 순응해라.” 흔히 하는 말로 “계란으로 바위 친다고 바위가 깨지나?”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안 깨지지요. 깨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계란이 깨집니다. 계란이 깨지면서 그 깨진 자에게서 나왔던 그 계란의 노른자가 그 계란이 살아있을 때 죽인자보다 더 많았다고 되어 있어요. 삼손의 마지막 대목이에요. “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삼손이 없는데서 나온 나실 인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안 생겨도 되는 자식이 생겼는데 그 생긴 것은 나실 인의 기능을 가지고 살면서 그 나실 인의 최종 모습은 “죽어라.” 이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그 죽어야 된다는 사명을 본인이 용납할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자기 속에 역시 무의식이 작용하니까. 육적인 본성이 있으니까. 사명이나 민족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감정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나귀턱뼈로 사람 때려죽이는 이런 것은 뭐냐 하면, “내 여자 내놓으란 말이다.” 하고 술 처먹고 하는 행패 있잖아요. 여자 집 앞에 가서 “나 왔다! 오빠 왔다! 이제 창문 열어다오!” 꼭 이런 동네 망나니, 그것도 정식으로는 못하고 술 한 잔 먹고 용기를 내서 하는 그런 비겁한 망나니짓을 하는데 그게 나실 인이에요.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세우신 나실 인이에요. 그것도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규정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 나실 인이 그렇게 살면서 뭔가 흘린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수수께끼에요. 수수께끼의 특징은 정답이 더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수수께끼보다 수수께끼 푼 정답이 더 어려워요. 수수께끼가 이렇다, 하는 그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수수께끼의 근처도 안간 거예요. 그러면 수수께끼를 어떻게 풉니까? 산 사람은 못 풀어요. 사망처리 된 사람만 풀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모든 말씀,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래요. 죽은 자에게만 알려주고 살았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내용인 사사기를 우리는 지금 겁 없이 보고 있습니다.


“그냥 내용이 어떻게 흘러갑니까?” 한다면 한 시간이면 이거 다 해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거든요. 한 시간 만에 사사기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냥 지나가면 햄버거 가게 가는 것이 바빠서 이발소는 안간 것이 돼요. 뒤에 늦게 온 분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앞에 것은 나중에 다시 들으세요. 이발소 거쳐서 햄버거가게를 가야 하는데 햄버거가 그립다고 구원받고 싶다고, 천당 가고 싶다고 그냥 간 거예요. 이발소 가서 자기 목 날아가는 그것은 생각도 안하고. 그렇게 돼야 되는데 중간과정은 생략하고 성급하게 해방이나 구원이나 자기영생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증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어떤 증거를 주셨는가? 우상섬기는 자를 그 사람에게 붙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누가 붙여줬는가? 하나님께서 일부러 붙여주신 거예요. 붙여줄 때 우상 섬기는 자가 거북스럽거든 아직 신자 맞고 우상섬기는 자가 거북스럽지 않다면 뭔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북하라고, “너하고 전혀 속성이 다르니까 저쪽은 지옥 가는 쪽이고 너는 천국 가는 쪽이기에 둘이 만나 이야기해보니 어떠냐? 대화가 통하더냐?” “잘 통하던데요? 카페베네 가서 두 시간동안 이야기하는데 잘 풀리던데요?” 하나님이 ‘이상하다. 그러면 같은 편인 모양이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사사를 보냅니다. 그게 사사기에요. 사사기 끝났어요. 하나님께서 붙여줬는데 “힘듭니다. 우리는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가 우상을 좋아하다니! 구원자를 보내소서.” 하고 부르짖으면 “그래, 다음에 보내주마.” 그렇게 되는데 이게 자꾸 반복이 되다 보니까 점점 더 나중에는 부르짖지도 않아요. 나중에는 삼손이 개인적으로 목마르다고 부르짖은 그것밖에는 없어요. 삼손이 부르짖은 그 샘이 ‘엔학고레’, 이름도 희한하다. 사사기 15장 19절,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하나님이 레히에 한 우묵한 곳을 터치시니 물이 거기서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삿 15:18, 19)


엔학고레라는 뜻이 뭐냐 하면 ‘부르짖는 자의 샘’ 목말라 죽을 뻔 했다가 그 샘에서 마시고 다시 회복된 그 샘. 사사기에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몇 지 증거를 주신 것이 있지요. 그 증거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반복해서 적용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진멸, 그냥 키워드만 쓸게요. 진멸, 부르짖음, 우상, 그리고 이것을 포함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쟁’이라 합니다. 그래서 사사기 3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여기서 ‘전쟁’이 나오는데 우리가 아는 전쟁으로 바로 가지 마시고 이 전쟁을 이해할 때는 제가 앞에 이야기 한 진멸, 부르짖음, 우상을 경유해서 전쟁의 개념을 파악을 해야 됩니다.


의미파악에 있어서 과학적으로 ‘이게 물(H2O)이다.’ 한다고 해서 그걸로 의미가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똑같은 물이라도 눈에서 나온 눈물은 의미가 달라요. 같은 편지라도 산 사람이 보낸 편지하고 죽은 자가 보낸 편지하고 그 내용이 달라요. 이미 사망처리가 된 사람의 편지와 산 사람의 편지가 다릅니다. “너는 나하고 같이 사망처리 되었기에 내가 보낸 편지를 이해하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게 신약성경에 성령 받은 자에게 성령으로 보낸 편지, “♬성령으로 쓴 편지는~” 이렇게 성령으로 쓴 편지.


성령으로만 알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그 내용을 몰라요. 그래서 편지를 보고도 그냥 패스하는 경우가 많아요. “뭐냐 이거? 너 볼래?” 그 편지가 고린도교회에서 천대를 받아요. 그런데 그 편지가 천대를 받아서 바람에 날려서 공중에서 A난이도로 공중에서 두 바퀴 반 돌아서 떨어지다가 얼굴에 척 달라붙었는데 “뭐야?” 하고 떼어보니까 “십자가복음으로 구원받는다.” 해서 그 사람 구원 받았네요. 이거 뭡니까? 그 사람이 바로 주께서 주신 신앙의 증거를 가진 거예요.


신앙의 증거의 특징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내 행함이 요만큼도 섞이지 않은 채 구원받았다.”는 그것이 바로 신앙의 증거입니다. 어떤 신앙의 증거도 자기 행위, 인간의 행위가 담겨 버리면 그것은 마귀로부터 온 편지, The Letter from the devil, 마귀로부터 온 편지에요. 인간의 행함이 들어오면. “안식일 지켜야 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원하는 겁니다.” 마귀로부터 온 편지에요. 어떤 사람은 성경 그대로 읽어놓고 “자, 믿으십니까?” 마귀로부터 온 편지에요. 왜? 의미가 없거든요.


그 의미가 그렇게 전하는 당신의 의미로 와서 전하세요. 왜? 우리는 모두 이 시대의 사사니까. 그냥 글자로 된 거 말고 십자가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로 왔습니까? 그냥 H2O가 아닙니다. 기쁨의 눈물입니까? 슬픔의 눈물입니까? 우리의 주체를 거쳐서 나와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의 주체 자리에 누가 대기하고 있느냐 하면, 십자가 지신 주님이 대기하고 있기에 주님이 풀어주는 의미로서 풀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의미가 뭐냐?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는 것이 주체만 다르지요. 주님의 주체만 이렇게 나와 버리면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의미가 풀어지고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빨리 예수 이름 불러. 그러면 구원받아.” 남묘호렌게쿄 믿는 사람들이 주문외우는 것처럼 “빨리 예수 이름 외쳐. 그러면 구원 받아.” 이것은 마귀가 외치는 마귀의 증거가 되겠지요. 성경구절 쓴다고, 그걸 그대로 쓴다고, 아나운서가 성경 통독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작업이 아니에요.


그러면 아나운서가 또 화를 낼 거예요. “내가 기도하면서, 성령에 충만해서 바이브레이션이 되도록 까지 벌벌 떨면서 했는데…….” 벌벌 떨든 말든 하나님의 신비와 그 신비 아님의 기준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과했다면 벌벌 떠는 게 문제가 아니고 “주여, 저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고백이 나와야 되지요. “감히 나 같은 인간이 성경을 볼 수 있다니 내가 이토록 죄인인줄은 몰랐습니다.” 이렇게 나와야지, 그래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주님이지 “역시 나는 이미 하나를 알고 있는데다가 또 추가적인 것까지 알았으니까 나는 대단해” 이것은 전형적으로 악령 받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전쟁을 알지 못할 때 이 전쟁의 주인은 진멸과 부르짖음과 우상으로 형성되어 있어요. 왜 그런가? 언약이 그렇게 되어 있고 이 언약은 하나님이 자기 증명하기 위해서 스스로 던져놓고 스스로 회수하는 방식으로 피조물에 언약을 던졌거든요. 그러면 언약을 던지고 성취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단어가 몇 개 나왔느냐 하면, 전쟁 나왔지요? 진멸 나와서 둘, 전쟁은 세 번째, 우상,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언약, 여섯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 이 여섯 가지 개념으로 만들어진 것이 일곱 번째 개념인 바로 땅, 또는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전쟁, 진멸, 부르짖음, 우상, 땅, 언약, 이것은 전부 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한테는 모든 것이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낯선 용어들이에요.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침입이 되지 않는 한 ‘내가 이런데 왜 신경을 써야 돼?’라고 강력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용어입니다. 특히 어떤 용어가 제일 맘에 들지 않느냐 하면, ‘우상’이라는 거예요. 우상은 뭐냐? 신이 아니면서도 신인 듯 행세하는 가짜신이거든요. 이게 가짜 신인 거예요. 이 가짜 신의 판정을 누가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을 대변하느냐 하면, 주체 자, 주체, 하나님의 주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께서 따로 떨어져 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에 하나님이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이 이름을 가진 것처럼 나도 이름을 가지고 참여하겠다.”는 겁니다. 이건 뭐냐? “너희들처럼 나도 주체로서 활동해서 너희들과 함께 섞여서 활동을 같이 하겠다.” 또는 “동행하겠다.”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개입을 한 거예요.


그 이름이 개입하면 반드시 벌어지는 것이 뭐냐?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쟁의 양상이 뭐냐? 전 시간 끝내면서 “확실한 증거를 보고 싶다.” 한다고 했는데 그게 뭐냐? 진멸이고 부르짖음이고 우상 섬김으로 티 나는 것, 표 나는 것, 이것이 하나의 증거가 되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뭐가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느냐 하면, 우상이라는 것, 가짜 신이라는 것, 이게 기분 나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성경에서는 이것이 우상이지만 일반 세상에는 우상이 아니고 그냥 ‘신’이에요. 다른 말로는 그냥 ‘하나님’입니다.


쉽게 말해서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네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 믿으십니까? 우상이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하나님 안 믿고 누구 믿어야 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고 로마서 10장에 나와 있는데요?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주 예수에요. 주 예수.


그러면 예수 앞에 ‘주’라는 글자 하나 더 붙이면 되는 것인가? 그런다고 ‘주 예수’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진멸돼야 돼요. 부르짖음이 있어야 하고. 이방인에 대한 진멸과 부르짖음, 그리고 약속의 땅, 천국, 천국에서 살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진멸한다는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의 필연적인 결과를 기꺼이 수용하는 그러한 신, 그러한 하나님, 실제 활동하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언약대로만 실행하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그 사람이 우상이 아닌 거예요.


만약에 하리수가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저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저는 여자가 좋으니 여자가 되게 해주세요.” 할 때 끝에다가 뭘 붙입니까? 기도 끝날 때 뭘 붙여요? “예수 이름으로” 하잖아요. 예수 이름이 갖고 있는 이런 기능과 자신이 남자인데 여자가 되게 해달라는 그 기능과 이게 합치가 됩니까, 안됩니까? 합치가 안 되지요. “하나님, 집 사 주세요.” 자기 혼자 안 되면 어린 쌍둥이 애들까지 동원시켜서 집 사달라고 하는 그것이 합치가 되지를 않지요.


무엇 때문에 그런가 하면, 이것 때문에, 진멸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 어서 세상을 진멸하여 주옵소서.” 이런 기도, 그리고 뒤에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거 딱이에요. “대가야관광호텔 진멸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어서 주께서 재림하셔서 우리 집부터 해서 모든 것이 전부다 진멸되게 하옵소서. 우리 아들 결혼하는 내년 1월 달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미리 다 모든 것이 다 진멸되게 하옵소서.”


누가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우상입니다. 우상숭배가 티가 난 거예요. 주의 이름을 뒤에 괜히 붙였어요. 붙일 내용도 아닌데 붙인 거예요. 그래서 주의 이름은 붙여도 소용없습니다. 오늘 아침인가, 중요한 질문을 했어요. “주기도문은 뭡니까?” 제가 서 있는 채로 답변을 했어요. 제가 미국이 가스펠펠로우십 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인데 주기도문이 뭐냐? 예수님이 알고 있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없었던 우리가 새롭게 생긴 우리가 될 때 비로소 예수님만 알고 있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가 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기도가 주기도문이에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 그 ‘우리’가 우리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해서 이제는 나의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라고 넣어줄 때, 그 영역에 넣어줄 때 비로소 발생되는 그 주기도문이 주기도문이에요. 따라서 그 주기도문 앞에는 뭐가 있습니까? 이방인들의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이방인들의 기도가 뭐냐 하면, 달라는 겁니다. 집사 달라, 우리교회 부흥시켜 달라, 그저 장학금 받게 해 달라, 뭐 달라, 뭐 달라, 그저 달라는 거예요.


이렇게 기도하면 주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너한테 필요한 것은 내가 다 알아서 배급해 줬다는 겁니다. 군에 가서 “스마트폰 사주세요, 중대장님!” 이런 것 없어요. 군대라는 그 조직에 필요한 것은 군대에서 전부 다 배급이 되어 있어요. “소대장님, 야구 글로브 사주세요.” 야구 글로브가 전쟁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전쟁하는 군인이 야구 글로브 끼고 공 던지기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전쟁에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 거예요. 그야말로 복음으로 전신갑주를 입게 하는 것으로만 주께서는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자신의 이름으로 한 업적이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되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나와요. “나는 그게 싫은데요?” 싫어도 소용없어요. 주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주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벗어날 수 없을 때 우리가 하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 뭐냐? 부르짖음이에요. “이제 그만 나를 놔주세요!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나 혼자 그냥 살래. 제발 주님이여, 저에게 찾아오지 마세요.” 옆에서 “너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나?” “너는 몰라도 돼. 주여, 제발 저를 그냥 놔두세요. 넓은 길을 가든 좁은 길을 가든 내가 알아서 이정표 보고 갈 테니까 그냥 놔두세요.”


이 부르짖음, 이게 특별히 없는데서 생긴 이스라엘 단체기 때문에 이런 혜택줍니다. 이런 혜택이 여러분에게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마치 우리가 이속에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데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뭡니까? 이방인이에요. 내놓은 자식이에요. 이것은 이스마엘처럼 내놓은 자식이기 때문에 사사기에서 해당되는 것은 전부 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입니다. 우리한테는 이게 해당사항 없어요.


그래서 다른 민족은 무슨 짓을 해도 가만 놔두지만 이스라엘은 조금만 잘못되어도 언약대로 안했다고 맴매, 회초리로 때리는 거예요. 그 모습을 우리는 사사기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사사기가 조금 이해가 되었지요. ‘아, 자기 아버지에게 얻어맞는구나. 내 일은 아니고.’ 으악, 하면 ‘또 성적 나쁘다고 옆집 애 얻어맞는구나. 내 일은 아니고.’ 나는 성적 나빠서 꼴찌해도 괜찮아요. 저 집은 예민한 아버지가 매일 때려요. “이래가지고 언약대로 백점 맞겠어?” 막 때리는 거예요. “아버지가 절에 다니는 친구하고 사귀라고 했잖아요.” “일부러 사귀라고 했지. 왜? 성적 내려가라고.” 옆에 있는 이방인들이 보고 “저것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지?” 전혀 납득이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납득이 안돼요.


지금 교회도 아니고 교회 다닐 마음도 없는 사람이 사사기를 보게 되면 딱 한마디 해요. “옛날이야기네. 옛날 이스라엘민족의 과거이야기네. 그래서 뭐? 지금은 21세기인데 옛날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는데? 우리도 삼국시대 이야기, 선덕여왕 이야기 해볼까?” 이렇게 나와요. 누가? 김용옥 박사가. “단군자손의 신은 따로 있는데 왜 이스라엘의 신, 예수쟁이 기독교의 신, (어떤 사람은 ‘개독교’라고 하는데) 왜 자꾸 남의 역사만 쳐다보면서 그들에게만 메시아가 있다고 하는가? 왜 그렇게 편협 적이고 독단적이고 독선적인, 편향된 그런 시선을 가지면 어떻게 광복 70년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가 소통해서 한 나라가 되겠는가?”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주여, 진멸하게 하옵소서. 아, 저래서 진멸 당해야 되는구나.”


공직자의 임무는 뭡니까? 바로 나라에 충성하는 거지요. 나라의 녹을 먹고 국민을 위해서 봉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공직 자중에 누가 있었습니까? 다니엘이 있었지요. 다니엘의 임무가 뭡니까? 다니엘의 임무는 바벨론 왕국이 번성하도록 하는 거지요. 그러나 다니엘 입에서 이미 나왔습니다. “이 나라 끝났다. 끝났다. 부족하다. 다른 나라로 넘어간다.” 그걸 가지고 짐승의 나라에서 순교당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꼭 죽어야 순교가 아닙니다. 그런 멘트를 날린다는 것이 바로 순교를 당하는 것인데 당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십자가로서 호적이 사망처리 되어 있습니다. 죽은 놈 또 죽여 봐야 소용없거든요.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 믿어지잖아요. 우리가 안 믿어지지요. 안 믿어지는데 주께서는 우상, 이런 것들을 느껴지게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죽여주옵소서.” 이런 소리가 자발적으로 나오게 하는 그런 사태가 이 산을 내려가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강아지가 아프다든지 그런 것. 강아지가 밥을 안 먹는다든지 그런 것. “주여, 강아지가 아픕니다. 주께서 은혜로 지켜주지를 못하고. 나는 귀한 말씀 들으러 왔는데.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거창한 순교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에 대해서 강한 저항감을 가지고 나올 때 주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기에 구원되었지 우리 같으면 벌써, 진즉에 주님과 ‘굿바이’ 하고 일 끝났어요. 그래서 여러분은 주님 앞에 도망을 치세요. 치시면 주님의 고무줄, 스파이더맨의 거미줄이 여러분의 허리를 도로 잡아당길 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재미있겠지만 무엇을 수반하는가? 부르짖음을 수반하기에 좀 괴로워요. 시발점의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우상섬기는 자, 다시 말해서, 우상숭배를 다른 신을 섬긴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주의 이름을 모른다. 하나님의 언약을 모른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면서 친했던 사이가 나에게 사기나 치고 나의 마음에 어떤 상처를 줄 때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소급해서 차후 적으로 알아야 돼요. 그게 바로 주께서 만들어 준 신앙의 증거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실패해야 돼요. 우리는 실패해야 되고 법을 위반해야 비로소 우리 속에서 법이 살아나요. 위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법을 줬거든요. 그 과정이 사사기입니다.


전쟁을 알지 못하기에 주께서는 전쟁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강한 압박이 들어옵니다. 압박이 들어오는데 그 압박으로 들어오는 나라들의 특징이 뭐냐? 사사기 2장 13절,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바알과 아스다롯은 부부지간입니다. 무슨 신이 부부가 되는가? 신이 부부가 되는 이유는 보이는 내 모습에서 이걸 동질성으로 확장하다 보니까 내가 납득이 되는 범위까지 신은 계속 나에게 포착이 되어야 돼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서 자식을 낳고 자식을 낳으면 자손이 번창하게 되잖아요.


‘이러한 요소를 신이 줬기 때문에 신은 우리를 닮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닮은 신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만들어내면서 신에 가까우면서도 나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는 관계가 바로 바알과 아스다롯, 부부신이 되는 겁니다. 이 부부 신에게 늘 제사 드리고 섬기게 되면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같이 채워줄 수가 있지요. 이 부부 신뿐만 아니고 현재 신들이 총 집합 한 곳이 어디인가? 힌두교입니다. 힌두교 축제를 보면 얼굴에 분칠을 덕지덕지해서 가관입니다. 안 가봤습니다만 여행지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보면 힌두교 축제를 보여줘요.


그리고 캄보디아에 가면 유적지 중에 뭐가 있습니까? 앙코르와트, 그것이 힌두교의 신화를 바탕으로 세운 신전이거든요. 힌두교가 거기까지 전파되었으니까. 그리고 로마그리스신화, 그것은 뭐냐? 하나의 패밀리 의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의 질서체제. 이러한 질서를 주셨다는 것은 신의 세계에 이렇게 닮은꼴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고 다만 그 모방체제의 질서가 우리에게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아쉽고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은 신에게 뭔가 요청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래서 신에게 기도하게 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준다.’는 거예요.


이 신의 특징은 뭐냐? 그 자리를 떠나는 겁니까? 아니면 사수하는 거예요? 그 자리를 사수하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라? “진멸하라, 토벌하라. 애고 짐승이고 다 죽여 버리라.” 하는 거예요. “다 없애버려라. 네가 없앤다면 너는 우상 안 섬기는 것이고 없애지 않고 남겨둔다면 결국 너 자신도 너무나 우상과 닮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실제로 그 당시에 그들은 우상을 좋게 여기고 살았어요. 평화롭게. 질서를 잡는 것이 최고의 뭡니까, 질서를 잡는 것이 최고의 악이라고 했지요.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 몸만 편하면 되니까.


그래서 주께서는 거기에 뭘 집어넣는가? 전쟁을 집어넣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 출애굽 할 때, 전쟁할 때, 어떻게 전쟁했는가? 전쟁할 때 누구의 전쟁인가? 너의 챙길 것을 챙기기 위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전쟁이지요. 출애굽기 15장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이렇게 했잖아요. 가스펠송에 이런 가사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힘이고 나의 노래고 나의 구원이라면 여호와한테 얻어 챙긴 것이 뭐가 있습니까?” 라고 묻고 싶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여호와를 믿어서 뭔가 새롭게 얻어 챙긴 것이 뭐가 있느냐는 말이지요. 뭘 얻어 챙겼기에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고 나의 힘이고 노래’라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혹시 힘 가졌어요? 혹시 승진되셨습니까? 구원이라고 하는데 뭘 얻었기에 구원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정말 궁금해서 묻고 싶어요. 오 목사님, 구원 받았습니까? 구원 받아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애 셋? 그것은 구원과 관계없어요. 그것은 사이가 좋으면 다 나오게 되어 있어요. 보세요. 없잖아요.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상과 언약의 여호와의 차이점이 뭐냐? 우상은 내가 노리는 것이 있고 노리는 것을 내가 기도하는 노동을 하게 되면 그 노동의 대가로 내가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인데 여호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여호와부터 먼저 등장하고, “그런데 얘들아, 여호와를 믿나?” “그래 믿는다. 믿는데 우리가 뭘 얻었지? 미쳤다. 우리가 얻은 것도 없는데 왜 믿지?” 뒤에 나와요, 뒤에. 그 뒤에 뭐가 나오는가 하면, 바로 죄에서, 사망에서, 율법에서, 저주로부터 구원이거든요. 특히 힘으로부터 구원, 전부 다 돈은 안 되는 거예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 이거 한다고 해서 삼송그룹에 취직되는 거 아니잖아요. 아무짝도 소용없는데 하나님은 좋대요. “기쁘다. 내 백성아.” 이러고 있다고요. 뭘 줘놓고 기뻐해야지요. 내가 안 기쁜데, 내가, 내가 안 기쁜데. 내가 안 기쁜데 뭘 줬다고? 제가 목사니까 목사의 예를 들어봅시다. “하나님, 이렇게 저를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왜 감사한데?” “저의 죄에서, 사탄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죄로부터, 지옥에서 저를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너 이번에 위임목사 투표에서 떨어졌는데?” “에이 씨!” 목사해서 생계유지 하려고 하다가 실패로 끝나는 거예요.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정작 내가 원하는 돈 줄줄 알았지요.


위임목사 되면 ‘의수히’ …… 이 단어를 처음 알았어요. 목사들 위임 식에서 쓰는 단어입니다. “성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이제 당회장 목사님이 위임목사 되기 때문에 여러분이 ‘의수히’, (이게 ‘기꺼이’라는 뜻이거든요, 옛날 말로 ‘의수히’) 생활비 드리고 사모님한테는 한복 한 벌, 목사님에게는 양복 한 벌 해드리겠습니까?” 임시당회장이 와서 위임 식 하는데 와서 묻고 있는데 ‘아니오’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예” “그러면 이제 위임목사 되어서 은퇴할 때까지 재직하게 됩니다.” 하게 되면 그 목사와 사모가 “아싸! 파이팅!” 이제 이 교회가 없어지지 않는 한 연금 보장됩니다. 얼마나 기쁘겠어요. 이게 기쁠까요, ‘여호와는 나의 구원’ 이게 기쁠까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위임목사에서 쫓겨나게 만드시는 겁니다. 내가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뭘 알 때까지. 정작 네가 하는 멘트,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합니다.” “정말 네가 기뻐하냐?” 하는 것을 묻지를 않아요. 다만 그 멘트를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거기에 필요한 죄 문제에 대해서는 차차 앞으로 살아가면서 죄짓게 하실 것입니다. 우상 섬기게 하실 것이고 내가 원하는 것을 획득하는 쪽으로 예수 이름을 남발하고, 여호와 이름을 남발하고, 삼위일체를 남발하고, 그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30배, 60배, 100배, 그걸 찾고자 하는 우상숭배의 모습을 살아가면서 보여줄 거예요.


그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토록 우상숭배자구나.’ 그것이 바로 전쟁 중입니다. 전쟁 중에 있어요. 여러분! 우리 더 살아야 돼요. 지금 죽으면 안돼요. 더 살아야 됩니다. 더 살아서 죄를 더 알아야 되고, 더 지어야 되고, 특히 이 출애굽기 15장의 이 전쟁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애굽에서 나왔거든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애굽이 이 세상 전부를 말하는데 전에 했습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계 11:8)


그 애굽이 뭐냐 하면, 힘의 체제에요. 권력체제입니다. 권력체제에서 나라는 것은 이 힘의 어떤 지점에 취직이 되어야 여기서 어떤 주체성이 보장을 받습니다. “너는 어느 회사 다녀?” 그렇게 묻게 되는 거예요. “너는 누구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너 어느 회사 다니는데?” 보통 딸을 시집보낼 때 사윗감이라고 남자친구를 데려오게 되면 신부의 아빠와 엄마가 제일 먼저 묻는 게 뭡니까? “어느 회사 다니는고?” 인물이야 딱 보면 아니까. “내 딸을 사랑하느냐?” 그런 것 안 물어요. “한 달 월급이 얼만데? 그 회사 장래는 있는 회사인가?”


그거 묻고 그 다음에 묻는 게 뭐냐? 혹시 어디 아픈데 없는가, 가정병력이 없는가, 그런 것 물어요. 전부 다 자기 딸과 관련된 것 물어요. 자기 사위의 장래에 대해서 전혀 묻지 않습니다. 그걸 왜 물어요? 어차피 내 사람 될 것을 그걸 왜 물어요? “내 딸과 몇 년 사귀었느냐?” 해놓고 제일 마지막으로 그냥 말려니 찝찝해서 한마디 하는 것이, “교회는 다닐 거지?” 결국은 이 권력체제에서 묻는 사람이나 물음당하는 사윗감이나 돈, 힘이라는 권력체제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안 벗어나려고 애를 써요. 왜? 그게 나의 주체니까. 그게 나의 나다움이니까.


거기서 어떻게 구원이 나와요? 구원이 안 되어야 되지요. 구원이 안 돼야 밥 먹고 살지 구원 되어버리면 백수 되는데 그건 안 되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가지고 “나는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내가 원하는 타입의 하나님이 아닌데요? 아, 불쾌하네. ‘너는 죄라?’ 아, 진짜 듣는 오빠 불쾌합니다. 제가 죄 안 지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냥 가세요.” 이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선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으니까, 완벽하지는 않지만 선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까 그냥 가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지만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한 적이 없습니다.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하면, 정작 구원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를 건져내는데 이분이 바로 여호와 이름이거든요. 여호와 이름의 가시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신앙의 증거로서 가시적인 모습으로 등장해요. 장차 오실 메시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이 A라는 층에서는 뭐든지 가시적이어야 돼요. 인간이 쓰는 언어가 일치의 한계가 있잖아요. 한계 있는 그 언어의 그 한계를 아시고 여기에 들어와 버려요. 인간의 언어의 그 구조와 체제에 주께서 멈추지 않고 들어와 버려요.


그게 뭐냐 하면, 물세례입니다. 세례요한이 말렸어요. “죄인만 들어오지 의인은 들어오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하는 말씀이, “네가 나에게 세례를 줘야 해.” “회개할 것도 없는데 왜 세례를 줍니까?” “아니, 그렇게 해야 돼. 내가 죄를 뒤집어 쓸 거야. 죄를 뒤집어 써야 이 죄가 십자가에서 죽고 나는 사흘 만에 부활될 거니까 네가 나한테 세례를 줘”서 죄도 없으면서 죄에 합류하는 작업을 해주시는 겁니다. 얼마나 친절해요?


바깥에서 “날 믿어라” 그렇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예 우리가 비밀리에 저지른 죄, 그 현장까지 찾아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가져가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런 주님을 여러분이 사랑하고 싶다면 좀 더 사세요. 좀 더 사시면 또 새로운 양상의 아담의 죄들이 나올 겁니다. 긴장하지 마시고요. 자기가 자기 죄를 방어하게 되면 반드시 긴장하게 되고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요. 굉장히 어색해요.


그걸 윤도현은 ‘어설픈 내 사랑’이라고 해요. 어설픈 사랑이라고. “빈 가슴 애태우며 난 기다리겠지 어설픈 내 사랑은” 얼마나 어설프면, “못되게 눈 돌리며 외면한 니 모습 모른 척 할래 한번쯤은 날 뒤돌아보며 아파했다 믿을래.” 뭘 지 맘대로 믿어요. 이건 중요한 거 아니니까 그만 합시다. 하나님의 이름부터 먼저 하고 그 다음에 뭘 확산시키는가? 너희가 어디서 구원되었느냐, 그걸 하는데 애굽에서 구원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것은 예선전이고요 본선에서는 누구하고 싸우는가? 바로 어린양의 취지와 싸우게 됩니다. 그 어린양에서 나온 게 뭐냐 하면, 모세언약, 율법이 나옵니다. 율법, 어린양을 매일같이 반복을 해줘야 돼요. 매일같이 반복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진멸해야 되고 우상은 용서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지금 너희를 상대로 해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전쟁을 모르고 있으니까 전쟁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주변에 주께서 사용하시는 우상섬기는 민족들을 다 동원시켜요.


그런 잡스런 것들을 불러서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을 공격하도록 하는 겁니다. 공격하게 하고 거기에 어설픈 사사들을 등장하게 해서 어설픈 방식으로 전부 다 어설픈 전쟁을 하면서 결국 승리는 누구의 승리인가? 바로 여호와께서 너희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너희에게 이 약속의 땅을 약속의 땅답게 만드는 책임자로서 그 임무가 중단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율법의 제사, 제사를 그들은 버리고 “이제 뭐 살만한데. 이제는 서로 그냥 친하게 지내는 것이 좋지.” 그래서 그들은 쫓아내지를 못한 것이 아니고 쫓아내지를 않았던 거예요. 자기 좋은 것으로 부릴 수가 있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큰 실수한 거예요. 힘에서 힘을 가지고 나온 게 아닙니다. 힘 있는데서 힘없이 나온 거예요. 이게 핵심이에요.


신앙의 증거가 뭐냐? 주께서 우리의 모든 힘을 다 빼는 겁니다. ‘구원은 말이나 칼이나 활이나 군대의 숫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이름에 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시편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여러분은 이게 다들 이해되시지요? 힘이나 권력이나 재물로 사람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힘을 빼고, 힘 빼면 죄인 되지요 뭐, 죄인 되게 하시는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과정으로 이미 우리를 강제로 집어넣은 거예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만을 우리에게 덮어씌우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족족 다 빼버리고 거기에 주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을 집어넣어서 우리가 내 이름으로 살지 못하고 주의 이름으로 살게 하시는 겁니다.


빼는데 뺄 때 제대로 빼십니다. 아주 끝까지 빼십니다. 그게 사망처리 하는 거예요. “너는 이제부터 내가 죽은 자로 간주하고 나 때문에 산자로 간주해주겠다. 네가 뭘 해도 네가 받았단 자식들, 가정, 그 모든 것은 네 이름으로 등기하지 말고 내 이름으로 등기해야 해.” 그렇다고 또 갑자기 세무소에 가서 예수 이름으로 등기 새로 한다고 그러지 마세요. 그 사람들 못 알아듣습니다. 그런 짓 하지 마시고 이 땅에서 죄 지으라니까요. 악착같이 한 푼 더 아끼고 그래야 돼요. 하지만 그것마저 주께서 더 죄 지으라고 주신 하나님의 재료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세요. “주여, 저는 나밖에 모르는, 나만 사랑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 토해내는 색다른 부르짖음입니다. 식사하러 갑시다.
 관리자(IP:61.♡.138.77) 15-08-09 12:29 
2015 여름수련회 7강


이제 사사기의 윤곽이 드러났어요.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을 주신 자기 백성을 때릴 때 이방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끼어들지 말고 그 얻어맞는 신비로움에 감격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주신 후 언약대로 살지 않고 우상을 섬긴다고 마구 때릴 때 그게 신비로움으로 다가옵니다.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분명하네.’ 그러니까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화가 났을 때 모든 학생을 다 때릴 수는 없고 대표로 반장을 때릴 때, 다른 학생들은 주눅이 들면서도 ‘우리 선생님의 성격이 저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는 그런 감격이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구경하되 개입하지 마세요. 사사기에 끼어들지 말고 구경을 하되 그 주시하는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끼어들지 말라는 말은, 이방인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누구에게 조종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어요. 왜냐? 주께서 다 해내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매를 맞잖아요. 맞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은 아프겠지만 우리는 신비로운 거예요. ‘아,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하고 느끼는 거죠. 즉 지상의 육적인 세계와 다른 초월적 세계를 온 몸으로 보고 있다는 즐거움을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문제는 사사기 이후에 또 매 맞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일 수도 있고 여러분일 수도 있지요. 만약 제가 매를 맞는다면 제 주위의 사람들은 또 신비로움을 경험하며 즐거운 시간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매를 맞는다고 해서 끼어들지 말고, 주님께 박수를 치면서 그냥 관람만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자기 증명을 그렇게 해내기 때문입니다.


끼어들지 말기, 조정 당하지 말기, 훈련 받지 말기, 철저히 관람하고 구경하기. 이것이 바로 말씀 앞에 서있고, 말씀 속에 있는 모습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프게 때리시는데 때리는 기준이 있습니다. 사사기 7장 20절을 보면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나오는데, 왜 칼은 등장하지 않고 횃불과 항아리, 그리고 나팔이 등장합니까? 이게 뭐냐 하면, ‘밤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 언약 준 자들을 반장으로 취급하셔서 매우 치십니다. ‘네가 언약을 받고도 그런 짓을 해!’ 하면서 매우 치면, 우리는 울타리 건너편에서 매를 맞는 장면을 관람하면서 ‘아, 저게 진짜 하나님이야.’라고 발견하게 됩니다.


진짜 하나님은 ‘밤의 소리’로 나타나십니다. 본문에서는 나팔이 나오는데, 나팔 소리는 지금 하나님이 여기 함께 계신다는 신호입니다. 여리고 성을 돌 때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데 밤에 활동을 하십니다. 출애굽기 12장 42절에 보면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밤에 구원된 것은 어린양을 통한 이스라엘의 장자들이지요. 이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 소속이 아닙니다. 끝났어요.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장자를 잃어버린 것은 같은 입장입니다. 애굽의 장자들은 그냥 죽었고, 이스라엘의 장자는 죽어야 하는데 소속이 바뀌어 살려주시는 겁니다.


출애굽기 13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고 했지요. ‘초태생은 다 내 것이고 나는 그들만 구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 그들만이 대신 죽음을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밤의 원칙이 출애굽의 원칙인데, 이 원칙이 출애굽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 있는 한 그들은 매일 이것을 되풀이해야 됩니다.


‘우리는 죽어야 되는데 장자라는 이유 때문에 살았어.’ 다음 날이 되면 또 ‘우리는 죽어야 하는데 장자라는 이유 때문에 살았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그냥 사는 사이가 아니고 중간에 어린양을 매개로 해서만 ‘우리는 죽어야 되는데 그분 덕분에 살았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말하면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인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요구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으신 후에는 필히 예수 안에서 의인 된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 것입니다. 주님의 선택으로 예수 믿게 하기 때문에 그 누구로부터 훈련 받을 필요가 없고, 누구의 지시를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자기가 자기를 조종하지 말고, 훈련하지도 말고, 징계하지도 마세요. 몸조심 하지 마시고, 행동 절제하지 마세요. 그것은 긴장의 삶입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조종해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구원을 얻겠다고요? 그러면 어린양의 죽음이 누락되고, 천국 못가는 사람이 됩니다.


항상 어린양의 죽음이 유지되려면 스스로 자기 행동을 조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신비로움에 감격합시다. 낮이 아닌 밤에 왜 공격을 합니까? 비겁한 것 아닙니까? 미디안 군사가 13만 5천명 이었습니다. 300명과 13만 5천 명이 싸웠습니다. 13만 5천은 성경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칼을 든 자 12만 명이 죽었고 1만 5천명 가량이 남았다고 했기에 계산해서 나온 숫자입니다. 사사기 8장 10절에 나옵니다.


전쟁은 숫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의 구축된 질서가 밤의 혼돈에 이길 수 없는 이유는, 밤에 나온 사람만 천국에 살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하필 밤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죽었는데, 그 죽음을 효과 있게 만들려면 죽음을 근거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걸맞은 새로운 시간을 구축해야 합니다.


간추리면 이렇게 됩니다. 천국은 천국 주인공의 영광에 합당한 규모로 영광스러워집니다. 천국의 주인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의 공로에 누가 되지 않고 흠이 되지 않는 조건의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을 빛내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러면 현재의 하늘과 땅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서 임시적으로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니까 그때부터 이 세상은 갑자기 탄식하고 신음하며 우리에게 저주를 안겨주는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지요. 이 세상은 주인이 잠시 방문했다가 사라져 버렸어요. 그러기에 더 이상 이 세상은 별 볼일 없고, 우리가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는 곳이에요. 안 살아도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것을 ‘아브라함이 나그네로 살면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고 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의 소망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어요. 이 땅에는 없는 거예요. 여기에 없다는 것은 이 땅의 것과 비교 대상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이 달라지면 됩니다. 낮의 사람에서 밤의 사람으로 바뀌면 됩니다.


‘죽은 나를 어린양을 통해 살려낸 그 밤을 나는 사랑합니다. 여호와의 밤이 나의 구원이요, 나의 소망입니다.’ 기드온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횃불은 밤을 의미하고, 나팔을 부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함께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밤의 소리’지요. 이것은 옛날 유명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


정리를 하면, 우리 대신 반장이 매를 맞는데, 매 맞는 이유는, 출애굽의 반복에 근거해서 ‘너희는 약속의 땅에 살만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심하게 때리는데, 그 낯설고 이상한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울타리 밖에서 박수를 치면서 감격하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사사기에 끼어들지 마세요. 우리의 반장 이스라엘이 매를 맞을 때 그것을 보고 때리는 하나님과 맞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반복적인 관계성을 발취해 내면 우리의 건질 것은 다 건진 것입니다. 한결 속이 편하지요? “목사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식으로 끼어들지 마세요. 그냥 지켜보세요. 프로야구 관람하듯이 그냥 보기만 하세요.


사사기의 처음은 놀랍게도 마지막에 나와요. 베냐민 지파가 완전히 멸절되는 이야기가 시대적으로 보면 사사기에 초반에 벌어진 일입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제사장 비느하스가 아직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왜 때리시는가? 무엇을 근거로 때리고 그들은 왜 맞는가? 우리는 지켜보면 되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관람하면 됩니다. 이런 기분으로 수련회 오는 거예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무것도 한 적이 없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도 않지요.


그러면 사사기에서 때리시는 근거가 뭔가? 레위 언약입니다. 레위 언약은 하나님과 직접 만나면 죽으니까, 죽지 않게 하기 위해 매개자를 세우는데, 13지파를 세워 그 중 1지파를 독자적으로 빼내서 1지파가 12지파를 보호하는 형식을 갖추게 됩니다. 그것이 레위 지파고 하나님은 레위 지파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고 말라기에서 말씀하셨어요.


이 레위 지파가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병이어에서 12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한 분에 의해 주어진 것인데, 그 한 분의 역할을 레위 지파가 담당한 겁니다. 지난 대전 강의에서 언급했는데, [불편한 여정]에도 나와요. 레위 지파가 지존의 집합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부분집합으로 들어가서 부분이 전체보다 더 많은 무한을 보여준다는 수학적 이론을 들어 설명했어요.


레위 지파가 여기에 속해 있을 때, 그들은 경계는 있지만 한계가 없어요. 작다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무한이 담겨 있고, 초월이 담겨 있고, 천국이 담겨 있습니다. 레위 지파는 42개의 성읍과 6개의 도피성에서 사는데, 레위 지파는 12지파에 골고루 흩어져 있습니다.


12지파의 운명은 레위 지파에 달려 있는데, 레위 지파의 제사가 원활하게 진행되면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게 되고, 제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면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레위 지파 중에도 특별히 아론의 자손들이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집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레위 지파가 살아야 이스라엘이 산다. 따라서 12지파는 소산물 중 10분의 1을 레위 지파에게 주라.’고 하셨지요. 이것이 바로 십일조인데, 십일조의 의미는 10의 9는 자신들이 갖고 나머지 10의 1만 레위 지파의 것으로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12지파)이 소산물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이 레위 지파를 살려주심 때문이기에 모두가 레위 지파 때문에 얻게 된 것임을 고백하면서 10의 1일 내게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는 첫 것을 드립니다. 맏물이지요. 맏물(장자)에 의해 우리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의미를 담고 맏물을 드립니다. ‘레위 지파야, 당신들이 잘해야 우리가 산다.’는 식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거지요. 로마서 8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고 합니다.


아들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의 형상을 입어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천국에 예수님 신부의 자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지요. 신부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단장을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혼인잔치의 비유도 다 이런 것입니다. 관람만 하는 우리들에게는 이게 이상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본래 하나님이 만든 교실에 있는 자들(이스라엘)에게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사야 말씀에는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나의 신부였다. 그런데 왜 바알이라는 다른 남편을 섬겼느냐?’고 막 나무라지요. 그럴 때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시지?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말씀을 하고 계시네.’ 이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여분의 자리가 생겨 이방인에게 넘어왔어요.


우리한테 넘어 온 것입니까? 아니요. 그럼 누구한테? 주님께서 지목한 사람에게 넘어온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가 구원 받았지?’ 하면서 철조망 가까이 가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매를 맞고 있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신비를 느끼자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사기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때리시고 이스라엘은 맞아야 하는가? 십일조를 내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예요. 레위 지파 사람들이 왜 떠돌아 다녔을까요? 자기 땅을 분배받은 12지파들은 과거의 약속(10의 1을 레위 지파에게 드리라는 것)을 기억지도 않고 살았어요. 이것이 약속의 땅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매일 죽어야 매일 살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고, 그러니 당연히 제사가 제대로 드리질 수가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주변의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물어뜯도록 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약속의 땅만 관할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땅이 땅답게 되기 위해서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도 같이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방 나라를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물게 하는가? 십일조를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십일조는 모두 다(10의 10)를 내고 10의 9를 하나님으로부터 되돌려 받는 취지인데,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 때 12지파가 땅을 분배받았어요. 그래서 자신들의 소유가 생겼습니다.


자기 소유가 생긴 후에 그들은 애굽의 사고방식을 약속의 땅에 심기 시작했습니다. 애굽의 특징은 힘이 있어야 사는 나라입니다. 힘이 없으면 인간 취급을 못 받습니다. 돈 없으면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옛날에 잠시 신비롭고 이상한 일이 벌어져서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왔지만, 일단 내 이름으로 등기 이전이 된 상태에서 나 땅에서 내 노동으로 결실한 것의 10%를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제사만 드린 자들에게 내놓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잘 사는데 왜 냅니까? 그래서 잘 내지 않고 살다가 이방 나라와 무역을 하면서 다른 나라 백성들을 보니까 자신들의 요구를 신이 다 들어주고 결핍을 채워주는 멋진 신을 섬기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사기 17장 1-2절에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 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아들이 어머니 돈을 훔쳤어요. 그런데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훔쳐간 것도 모르고, “내 돈 훔쳐간 사람은 저주를 받으라.”고 선포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들이 찝찝해서 어머니께 사실을 알렸어요. “어머니, 내가 그 돈을 가져갔습니다.” 하면서 그 돈을 어머니께 돌려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말을 바꿉니다.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하면서 아들이 돌려준 돈으로 아들을 위해서 신상을 만들어서 저주 대신 복을 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과 어머니가 주고받는 이야기의 내용이 뭡니까? 잃어버린 내 인생 보상 받기입니다. 그런데 사사기의 울타리 옆에서 구경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보다 우상이 더 정감이 갑니다. 나의 잃은 것을 채워준다면 아낌없이 바칠 용의가 있습니다. 왜냐? 일단 받고 시작하니까요. 30배, 60배, 100배 받고 시작하는데, 최소 30배를 받는다 해도 여기에서 10% 드려도 엄청나게 남는 장사잖아요.


내 헌금과 기도 노동에 대해 즉각 보상해 주는 신이 우리 본성에 적합한 신입니다. 돈 놓고 돈 먹기. 이건 큰 불만이 없고 만족할 수 있어요. 우리는 다 타짜 기질이 있기에. 그런데 주님은 ‘아무것도 하지 마! 죽은 너를 내가 살릴 게.’ 라고 하십니다. 아무 가진 것이 없을 때는 굉장히 복음처럼 들리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내 것으로 여길 때 이것에 대해서는 주님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잖아요.


우리의 관심은 내 재산의 증식에 있는데 주님은 우리의 주체에 대해 거론합니다. “너는 죄인인데 내가 용서해 줄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 때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보다는 내 관심에 대해 응답하는 신(우상)에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미가가 지금 다른 신을 섬긴 것입니까, 여호와를 섬긴 것입니까? 여호와를 섬겼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이여, 우리가 당신께 성의를 표시했으니까 당신도 우리에게 성의를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것이 그 시대의 대세가 된 여호와 종교였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레위 지파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사가 필요 없어요. 십자가가 빠져 있어요.


십자가는 없고 ‘누가 더 힘이 세냐? 누가 더 많이 가졌나?’로 경쟁하는 이스라엘이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어떻게 했겠어요? 울타리 밖에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약속의 땅으로 이끈 이스라엘을 어떻게 되돌리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기들 끼리 싸워서 다 망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가짜였음을 들통 내는 것입니다.


가짜가 가짜인 것을 알 때 비로소 제사의 의미는 효과가 극대화 됩니다. 제사 드릴 정도로 나는 괜찮은 인간이라고 여길 때는 제사가 소용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저를 버려두시면 저는 가짜 신자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습니다. 반장을 때리듯이 저를 때리는 신비를 맛보게 하옵소서.’ 쉽게 말해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주님의 그 대표기도가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내 집을 달라고 기도하는 쌍둥이의 기도를 고쳐야 해요. “내 집은 없게 하옵소서.” 이렇게 고쳐야 해요. 그러면 주님은 “‘나는 너의 뜻대로 안 하고 내 뜻대로 한다.’고 하시면서 집을 주시겠지.” 이런 생각으로 기도할 수 있는데, 이런 꼼수는 주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빛과 소금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주님 대답은 ‘꼼수 쓰지 마! 네가 뭘 노리고 그런 기도를 해? 내가 끼어들지 말라고 했지. 왜 갑자기 평소 너답지 않은 기도를 해. 그냥 자연스럽게 죄 짓고 살아. 그것이 너에게 맞아.’ 괜히 겸손한 척하고, 순결한 척할 필요 없어요.


훈련 받을 필요 없고, 조종 받을 필요 없습니다. 밤에서 나온 힘이 낮의 질서를 붕괴해 버립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의 특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이해 못해요. 모두가 자신이 좋아하는 신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우상 섬겼다는 이유로 매를 때리는 것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우상인가 아닌가는 섬기는 사람 본인이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믿으면 그 신은 참 신이고, 남이 믿는 신은 우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끼리는 신비로운 감격이 없는 거예요. 우상을 섬겨도 때리는 분이 없고, 절에서 기도해도 아무렇지 않고, 처음에는 십일조 안 하면 큰 벌이 내릴 것 같아 불안하면서도 돈이 아까워 안 했는데 이제는 불안한 마음도 없어요. 십일조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니까.


십일조를 3년간 안 했는데 오히려 집안은 더 평온하고 사업도 잘 돼요. 휴지처럼 잘 풀리는 집이에요. 그동안 괜히 불안해했어요. 전도 안 하면 큰일 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안 생겨요. 처음 교회 출석할 때는 예배시간 10분 전에 나왔는데 많은 교인들이 11시 5분, 또는 10분에 오는 것을 보고 자신도 조금씩 시간이 늦어져서 다른 분들과 같이 됩니다.


이미 내 소유가 되었는데 추가적인 엄살을 피울 이유가 없어요. “집사님은 왜 기도 안합니까?”라고 물으면, “저는 욕심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답해요. 이게 무슨 뜻이죠? 나는 욕심이 없기에 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고, 그러니 기도를 안 한다는 뜻입니다. “가진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나중에 빼앗기면 “주님, 이렇게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동업자끼리 왜 이러십니까?” 하고 달려듭니다.


지금 자신에게 아무 일 없기에 평화로운 시절이라고 안심하는 분이 있는데, 평화로운 시절이 죄가 숙성되는 시절입니다. 벌을 받기 위한 숙성도 되지만 내 자신의 본성이 무르익는 시간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사들은 힘들어요. 구원 되는 시간도 짧고,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는 표현이 점점 자주 나옵니다. 사태가 긴급하다는 뜻입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이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것은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이 십일조를 해야 먹고 살 텐데 십일조를 안 하니까 먹고 살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겁니다. 백성들은 이미 땅을 소유했고 안정된 삶을 누리기에 제사장을 찾지도 않아요. 오히려 주변 나라 신이 마음에 들어요. 왜냐? 자신이 가진 것을 지켜 주니까. ‘안심하고 맡기면 10% 덧붙여 줍니다.’라는 투자회사 광고처럼 나오는 신이 주변에 많아요. 그러니 여호와께 십일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지요.


레위 지파가 없어지니까 12(12지파)+0(레위 지파)에서 0이 소멸해 버린 거예요. 0이 소멸하면 12는 가짜가 됩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간 매체가 소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의 땅이 애굽이 된 거예요. 주님은 자신의 언약을 자신이 회수하기 때문에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보낸 자가 12명의 사사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사들의 면면을 보면 가관입니다. 사사들이 겁을 먹고 있어요. ‘저는 못합니다. 안 됩니다.’ 이렇게 나왔어요. 그러니 주님은 ‘너 같은 인간도 약속의 땅에 살 수 있음을 내가 출애굽 시킨 원리와 결합시켜서 또 다시 보여 줄게.’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사사기입니다.


일단 짐승들에게 물리게 합니다. 그들은 이미 애굽 사람이 다 되었으니까 초반에는 힘으로 버팁니다. 조공을 바쳤다고, 신하가 되어 섬기겠다고 하고 다양한 방법을 섰는데 하나님이 계속 짐승들(이방 나라)을 부추기니까 그들이 더 거세게 달려듭니다. 심지어 미디안이라는 집단은 공물을 받고 물러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를 진멸하겠다고 달려들었어요.


‘진멸’이란 단어를 예전에 누가 썼습니까? 하나님 이름이 동행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원주민을 진멸해야 하는데 이제 입장이 완전히 바뀐 거예요. 그럴 때 그들은 부르짖어요. 사사기 2장 4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이 땅 거민과는 상종도 하지 말고 언약도 세우지 말라’고 했지요. 이 땅은 이스라엘 백성의 땅이 아니고 하나님 본인의 공로와 희생이 뿌려졌기에 주의 명예가 걸린 땅입니다. 천국은 우리 땅이 아니에요. 주님의 명예가 걸린 땅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신 공로가 영원토록 지속되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너희들이 그들을 쫓아내야 하는데 쫓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너희의 가시가 되고 그들의 신이 너희의 덫이 될 것이다(삿2:3).’라고 여호와의 사자가 말한 후에 백성들은 소리를 높여 울었어요. 왜 웁니까? 부동산이 아까워서 우는 거예요.


역사의 시작은 자식들로부터 시작됩니다.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땅을 소유했다는 말은, 사람은 땅이 있어야 사니까 ‘내 식구는 살아야겠다.’는 것이지요. 이건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격 받으니 울게 된 것입니다. 생존에 큰 위협을 느낀 것이지요. 이 때 하나님은 사사를 보냅니다.


3징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고 했습니다.


옷니엘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이 이방 나라에게 이스라엘을 치라고 붙이시고, 이제 옷니엘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구산 리사다임을 물리칩니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는 손이 지금 약속의 땅을 통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손이 그동안 이스라엘을 제사로 묶었어요.


이스라엘이 이런 혜택을 입었다면 그들은 마땅히 제사가 유지되도록 조치해야 하는데, 자기 소유가 생기니까 십일조나 제사에 대한 관심은 멀어졌어요. 그러니까 에브라임 지역에 살던 레위 사람의 첩이 친정 베들레헴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여자가 친정에 간 것은 이유가 있지요.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지요.


사람들이 제사를 원치 않으니 레위 사람들은 다른 살 길을 찾아야 해요. 팔리지도 않는 상품을 계속 쥐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묶은 띠가 끊어진 거예요. 레위 지파 없어도 우리끼리 잘 산다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레위인이 첩을 찾아 처가에 갔는데 3일을 처가에서 쉬었다가 첩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장인이 하루 더 쉬었다 가라고 권해서 하루 머물렀는데, 다음 날 또 하루 더 쉬었다 가라고 해서 결국 5일간 처가에 머물게 되었어요. 마지막 떠나는 날도 오후 늦게 출발하게 되었어요. 장인이 계속 붙잡으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일찍 출발했으면 베냐민 지파 땅을 넘어 자신이 사는 에브라임 지역으로 갈 수 있었는데 늦게 출발하다 보니 중간에 날이 저물어 하루를 숙박해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그 지역은 예루살렘 인근 여부스 땅인데, 여부스는 가나안 원주민인데 아직 그들을 몰아내지 못했기에 같이 살고 있었어요.


여하간 이방인이 거주하는 여부스에서 숙박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좀 더 길을 가서 기브아로 갔어요. 기브아는 베냐민 지파의 땅입니다. 이 레위인이 아직 순진해요. 이방인이 사는 곳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지역이 더 안전하다고 여겼지요.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말씀이 있으니까 자신을 영접해 줄 것으로 여긴 것이지요.


사람이 소유가 생기면 소유를 방해하는 요소는 다 제거해 버립니다. 오죽했으면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부자가 아니어서 이 말씀이 크게 안 와 닿을 거예요. 부자는 자신이 소유한 것이 짐이 됩니다. 자기 선택이 자신을 옳아 매요. 그리고 그곳에서 탈출할 수 없어요. 왜냐? 그 안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했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레위인이 첩을 데리고 기브아에서 한 노인의 집에 하루 숙박하려고 하는데 그 지역 불량배들이 찾아와서는 ‘너희 집에 찾아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욕보이겠다.’고 해서 노인이 당부하기를 ‘제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불량배들이 말이 듣지 않았고 결국은 제사장이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주었는데 밤새 그 여자를 윤간해서 결국 그 여자는 죽고 말았지요.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레위인의 첩이 죽어 있었어요. 레위인이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자기 살던 지역으로 왔어요. 그리고는 엽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시체를 12토막을 내서 각 지파에 한 토막씩 보냈어요. 왜 이렇게 했지요? ‘베냐민 지파 사람이 내 첩을 강간하고 살해했는데 과연 이런 행동을 이스라엘 다른 지파가 용납할 수 있습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베냐민 지파 사람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면 나와 함께 분개해 주시고, 그들이 문제 없으면 나는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여기겠습니다.’ 이런 의미가 담긴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사기 끝부분에 나오는 내용인데, 시간적으로 보면 사사기 처음부분에 와야 됩니다.


사사기 21장 10절에 보면, 야베스 길르앗 거민을 다 죽었어요. 왜 죽였는가 하면, ‘모든 지파 사람들이 다 분개할 때 왜 당신들은 분개하지 않았어? 그러니 너희들은 죽어 마땅해.’ 그래서 그들을 다 죽였습니다. 베냐민 지파 죽인 것 말고 따로 이들을 진멸해 버렸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여기에 끼어들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신비롭게 관람하면 됩니다. 스스로 갑질 해서 스스로 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저렇게 일하시는구나.’ 신비롭게 보면 되는 거예요.
 관리자(IP:61.♡.138.77) 15-08-09 12:30 
2015 여름수련회 8강


이번 시간에는 ‘내부 충돌’이란 제목으로 강의하겠습니다.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을 유지했는데, 그들이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자체, 갈 곳을 잃었다는 자체, 12토막 사건뿐만 아니고,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미가 집안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집안의 저주를 해소하기 위해서 신상을 만들고 레위 지파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청했지요. 이전에 미가 아들은 레위 지파도 아니면서 제사장 노릇을 했어요. 아들이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었어요.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베들레헴에서 떠나온 어떤 레위 소년이 갈 곳이 없어 떠돌아 다녔는데 미가 가정에서 그 소년을 초빙합니다. “나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리라.” 이렇게 해서 연봉 협상이 되었고, 레위인은 그 집에 들어간 것을 만족했습니다. 일단 숙식이 해결되었으니까 더 이상 떠돌이 생활을 할 필요가 없지요.


다 좋습니다. 레위 사람이 그 가정에 갔으면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해야 하는데, 연봉을 받고 취직을 했기 때문에 그런 지적을 못합니다. 결국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데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그런 과도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미가 이야기와 베냐민 지파가 작살나는 것이 사사시대 초반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레위 지파를 의지할 수 없어요. 사람들이 이미 자기 땅을 확보한 이상은 과거 이야기는 과거와 함께 흘러가 버렸고, 지금 이 땅을 어떻게 넓힐 것인가? 애굽적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 대해 조치를 했습니다. 이방 나라의 침략을 당하게 되었는데, 힘으로 버티려 하다가 결국 심각한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 참 안 됐네요.”라고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세요. 우리는 관람객입니다. ‘아, 저런 신비로운 일이 있었구나. 하나님은 자기 원칙을 포기할 줄 모르네. 끝까지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위해서 피조물을 가지고 노시는구나.’하는 것을 발견하면 되지요. 안 됐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들 전부다 죽더라도 우리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하여튼 제사장을 뽑아 세웠는데, 18장 1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이때에 거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이때까지 기업의 땅을 분배함을 얻지 못하였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단 지파는 아래쪽에 있습니다. 이들이 땅을 찾아 저 위쪽까지 올라갔어요. 올라가면서 그냥 올라간 것이 아니고 누구를 납치하는가 하면 미가의 집에 근무하는 레위 소년을 납치해서 연봉을 더 주겠다는 조건하에 데려갔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의 언약에 신경 쓰거나 관심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자가 상주한다든지 구원자가 되겠다는 사람도 없어요. 이건 남의 이야기니까 우리는 괜찮아요. 우리가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요. 우리는 철조망 건너에서 구경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도 없으니까 여호와 하나님은 있으나마나 한 분이 되었고, 여호와 이름은 자기 세속의 소유를 지켜주는 우상으로 둔갑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러면 당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꼭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데’라는 생각을 가질 만해요. 하나님 없어도 행복하게 살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무 이의가 없잖아요. 우리는 상관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상관이 있어요. 왜냐? 그 땅은 주님의 땅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판치는 가나안 땅, 이게 천국입니까? 약속도 없는데 이게 어떻게 약속의 땅입니까? 약속이 약속답게 되려면 말씀을 어겼을 때는 저주가 임해야 되고, 말씀 지키면 복이 임해야 엄연히 살아있는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지 제각기 자기 부동산 소유해서 동네 만들어서 살고, 그곳에 사사라고 보냈더니만 처음에는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싸우긴 싸워요. 끝나고 난 뒤에 주변에 있는 장로들이 사사에게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시니 계속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서 살기 좋은 동네로 만들어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와요.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도 결국은 우리 가장, 우리 마을을 지켜주는 분이라는 식의 이방 종교로 돌변하고, 그에 대해 ‘그런 대우를 해주신다면 제가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면서 둘이 짝짜꿍이 되어서 다음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는 겁니다. 질서가 잡힌 시절을 보내는 거예요.


사사기 말씀을 기존 교회에서 강해 설교하는 것은 상당히 유험한 일입니다. 그 교회를 곧 떠날 사람 아니면 사사기를 설교 못합니다. 사사기 3장에는 에훗이 나옵니다. 에훗은 자기를 지배하는 모압 왕 에글론을 암살하지요. 오른손잡이 인줄 알다가 긴장을 늦춘 틈에 왼손으로 찔러서 죽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기름이 칼날에 엉기었다고 했는데, 이처럼 사사들이 하는 일이 지저분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이 죄인의 수준에 맞다고 생각해서 이런 지저분한 식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4장에는 여자 사사 드보라가 나옵니다. 드보라는 여자인지라 남자 바락을 불러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치라고 했습니다. 그 때 바락은 혼자 가기를 겁내서 여자 드보라가 함께 가면 자신도 가겠다고 합니다. 그 때 드보라의 말이 ‘내가 너와 함께 가겠는데 가는 일로는 네가 영광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관계를 무엇으로 전환시키는가 하면, 남자와 여자를 대표하는 관계로 이것을 바꾸어요. 남자에게 희망을 걸었는데 그 희망이 이제 끝났습니다. 남자가 구원하는 일은 이제 없고 여자가 구원합니다. 그런데 그 구원하는 여자는 드보라가 아니고 야일입니다. 4장 21절에 “헤벨의 아내 야엘이 장막 말뚝을 취하고 손에 방망이를 들고 그에게로 가만히 가서 말뚝을 그 살쩍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시스라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이 여자가 역도 선수입니까? 하여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방법이 아주 저저분합니다. 구원이 지저분하다는 말은 적들의 수준이 지저분하다는 뜻이에요. 멋있는 적들이 아니고 꼴값 떠는 적들이 왔는데 이들에게서 맥을 못추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지킬 능력도 없는 자들입니다. 어중이떠중이가 덤벼들어도 그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왜? 레위 언약의 관계가 이미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데 하나님이 레위 지파, 제사장을 통해서 복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뭔가 된 줄 알고, 이 땅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착각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까 이스라엘의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3장에 에훗이 죽인 적장은 배에 기름이 끼어 칼날에 엉길 정도로 뚱뚱한 사람이었어요. 별 볼일 없는 적이지요. 그래도 이스라엘은 그런 자들에게 항상 당하면서 벌벌 떨며 살았어요. 4장에 나오는 시스라도 보면 어설픈 장군입니다. 전쟁 중 쫓기다가 야일의 장막에 들어가 숨습니다. 평소에 이 집안과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런데 그 집 여인이 시스라가 잠들었을 때 말뚝을 박아 적장을 죽였어요. 죽이는 방법도 무지막지합니다. 여기에는 절제의 미(美)가 없어요. 죽이는 사람이나 죽는 사람이나 다 짐승 같아요.


드보라 시절 적을 죽인 주인공은 사사 드보라도 아니고 적과 직접 싸운 바락도 아니고 자기 집에 머물러 있었던 여인 야일이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5장에 보면 찬양이 나오는데, 찬양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여, 이번 승리는 모세 언약의 승리입니다. 다른 나라에는 왕이 있고, 그들의 신이 있지만 이 땅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고 여호와신데, 여호와는 철저히 자기 약속을 지키시는 분인데, 그 약속 덕분에 우리는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리고 12지파들이 승리의 혜택을 지금도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찬양을 합니다.


6장부터는 기드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7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주님이 유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증명을 하는데 있어 인간의 노력이 가미되지 않는 조건 하에 이번 전쟁을 실시하겠다는 겁니다. 인간은 힘의 논리에 의해 모든 것을 바라보기에 가능하면 전쟁에서 더 많은 군사와 무기가 있으면 승리의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 더 큰 힘을 모으려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거부하십니다. 처음 군사를 모집했을 때 22,000명이 모였지만 하나님은 다 보내고 300명만 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작전은 적들과 전쟁하기 전에 자기 백성과 먼저 전쟁을 치르십니다. 처음부터 300명만 뽑은 것이 아니고, 전쟁에 나가 싸울 사람을 인원 제한 없이 모집해놓고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내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담고 있는 취지를 기드온에게 전달하신 겁니다.


철조망 건너편에서 이런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300명도 다 돌려보내지 그들은 왜 남겨 두었는가?’ 300명도 돌려보내고 기드온마저 돌려보낸 후 하나님 혼자 다 하시면 좋지 않겠어요? 천사를 시켜 전쟁을 하면 되는데 왜 300명은 남겨 두었습니까?


우리가 울타리 밖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이 신약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천사가 알아서 다 해줍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12제자가 구원 받는데 그들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을 그들은 전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방법입니다.


주와 함께 있는 신앙의 증거가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고, 앉은뱅이는 걸어갔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놀라 베드로에게 주목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왜 나를 주목합니까? 마치 내 능력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처럼.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주가 하셨습니다.”라고 하지요. 앉은뱅이는 예수님을 주로 믿음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준 믿음을 주님이 회수하는 과정에서 앉은뱅이는 걷게 되었습니다.


걷든지 아니 걷든지, 눈을 뜨든지 아니 뜨든지, 건강하든지 아니 하든지 관계없이 지금도 여전히 주님이 활동하고 있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도들은 이런 취지에서 복음의 증인 노릇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취지에서 “왜 나를 주목합니까?”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는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겁니다. 바울의 손수건이 특별한 손수건입니까? 아니죠. 만약 손수건 자체가 특별해서 병이 나았다면 그 손수건은 대단한 히트 상품입니다. 그 손수건만 있으면 병원에 있는 사람 모두를 치료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에서 더 아이디어를 추가한다면 수건을 던지는 것이 아니고 흔들기만 해도 사람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죽은 자가 살고. 만약 이렇게 해서 병이 낫게 되면 사람은 자기 관심에서 못 벗어나요. ‘역시 나는 주님 덕분으로 나았다.’ 나로부터 출발한 관심사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니까 예수님은 우상이 되고 말아요.


이렇게 되면 내가 주님의 것이 되지 않고 주님이 나의 필요를 위한 존재가 되고 말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가 굉장히 위험합니다. 사실은 금지곡에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효과를 본다는 것은 마귀적 발상입니다. ‘예수 믿어도 효과 없습니다. 그런데 구원이 됩니다. 요란스럽게 살지 않아도 구원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강도가 되어도, 세리가 되어도, 창기가 되어도 구원 되면 되잖아요.’ 이게 복음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꼭 유난을 떨어요. 타인의 시선 때문입니다. 사사기처럼 32,000명 모았다가 300명 제외하고 다 빼버렸는데, 그 빼는 작업이 중요해요.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는 원리가 빼는 작업에서 나옵니다.


사사기 8장에 보면 ‘왜 승리의 영광을 혼자 독차지하는가?’라고 불만을 터뜨리는 자들이 등장합니다. 이건 완전히 막장드라마 같아요. ‘전쟁에서 승리할 때 왜 나를 안 데려갔는가?’ 세상이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기드온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영광 받기 위해 참여한 것입니까? 아니에요.


기드온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상황입니다. 스타가 되었기에 악플이 달리는 것과 같아요. 기드온이 혼자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 32,000명 중 300명만 남기도 다 돌려보낸 것입니까? 아니죠. 그리고 전행할 때 밤에 몰래 횃불과 항아리를 들고 갔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입니다.


결국 이 전쟁에서는 미디안 군사 13만 5천명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전쟁 같지도 않은 전쟁입니다. 왜 그런가? 약속의 땅에서는 인간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서는 살 자격이 없는 자는 스스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을 천국 데려가려고 애쓰지 마시고, 미운 사람 지옥 가라고 저주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만히 있어도 지옥 갈 사람들은 천국을 싫어하게 되어 있고, 천국 갈 사람은 지옥 바닥에 가도 주께서 반드시 끄집어내십니다. 천국가고, 지옥 가는 것은 우리가 용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왜 주님 혼자 다 일하시고 저는 그 일에 참여시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사사기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끼어들 필요는 없고 구경만 하면 됩니다.


에브라임 사라들의 불평에 대해 기드온이 답변한 내용은 이것입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이 말의 의미는, 기드온의 아버지 이름이 아비에셀인데, 우리 집안보다 에브라임 집안이 훨씬 큰일을 했다는 것이지요.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의 이 말을 듣고는 흡족해 하며 화가 풀렸어요. 레위 지파와 끈이 끊기니까 이스라엘은 각자 잘난 척하는 양아치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역 싸움만 합니다.


8장 22절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요청하기를 ‘당신과 당신의 아들,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신다면 다른 나라가 함부로 우리를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 섬기는 버릇입니다.


‘유능한 당신이 우리 당에 온다면 우리 당이 정권을 잡을 것이다.’ 라고 유혹하는데 안철수는 계속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하게 내버려 두세요. 사사기는 세상 정치판과 똑같습니다. 이런 소리를 설교 시간에 설교자가 노골적으로 말하면 교회 분위기는 싸늘해집니다.


만약 부목사가 담임 목사가 듣는데 사사기 본문을 있는 그대로 설교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목사도 아닌 것이 목사라고 설치니 교회 꼴이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영웅으로 생각하는 담임목사가 정말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하는 목사 맞습니까? 여러분이 투표하고 뽑은 목사가 여러분을 망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했다면 교인들 반응은 어떨까요?


‘우리의 왕이 되어주세요.’라는 요청에 대해 기도온의 대답은 ‘나도 내 아들도 당신들을 다스리지 않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십니다.’ 라고 했습니다. 자신들의 요구가 묵살되자 차선책이 등장했습니다. 백성들은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음란하게 섬기게 되었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기드온의 힘이 우리 자식들을 보호해 주시옵소서.’


사람들은 뭔가 신비한 일이 있고,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대상에 대해 소문을 듣고 몰려들어 그 앞에 지극 정성을 드리면서 빕니다. ‘우리 아들도 기도온처럼 영웅이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것은 결국 내 땅, 내 가족은 내가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레위 지파와 연결 고리가 끊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9장 1절에 여룹바알이 나오는데 이는 기드온을 일컫는 말입니다. 기드온이 유명 인사가 되니까 아들 아비멜렉이 있는데 이 이름의 뜻은 ‘우리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왕으로 여겼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아비멜렉은 왕자의 난을 일으킵니다. 그 일을 위해 외가에 가서 자기를 도와줄 것을 요청합니다. ‘내 형제 70인이 다 당신들을 다스리는 것과 여러분의 핏줄인 내가 다스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좋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결국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유리하겠다고 생각한 그들은 정치자금을 제공했고, 아비멜렉은 그 돈으로 사람들을 모집해서 자기 형제 70명을 살해하고 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때 막내 동생 요담은 몰래 숨어 살아 남았습니다. 이 막내가 결국 복수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심 산꼭대기로 가서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하니까 싫다고 하고,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라고 하니까 거절하고, 감람나무 역시 거절했는데, 전혀 자격도 안 되는 가시나무가 왕이 되겠다고 나섰으니까 여러분들은 이제 그 가시에 찔릴 것입니다.’ 그러나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3년 동안은 잘 지내다가 반역이 일어납니다.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은 어떻게 듣겠습니까? 장로들이 투표해서 목사를 뽑아 3년은 잘 지냈는데 그 후에 지분 싸움이 일어났다는 말이지요. 지분 싸움은 목사 편과 장로 편이 나눠 싸우는 겁니다. ‘교회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지요.’ 라고 하는데, ‘교회에 그런 일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교회 다닙니까?’ 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권사 투표하는데 장로 편과 목사 편이 나눠졌는데, 목사가 지지하는 사람은 되고 장로가 지지하는 사람이 떨어진다면 장로와 권사 투표에서 떨어진 분들이 교회를 떠나 젊은 목사 불러서 새로운 교회를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에는 교회의 분열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지만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것을 재미로 삼으며 교회 다닙니다.


지분 싸움은 결국 돈 싸움으로 귀결 됩니다. “얼마 주면 나갈래?” 하고 흥정을 하지요. 이런 이야기가 사사기에 나옵니다. 이것은 지분, 소유를 지키기 위한 힘과 그것을 정당화 시키는 종교 외에는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이런 일이 다른 나라 땅에 가면 괜찮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다스려지는 가나안 땅에서 벌어지고 있으니까 이들은 모진 매를 맞고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악신이 그들에게 찾아와서 세겜 사람과 아비멜렉 모두 망하게 하는데, 아비멜렉은 이름 모를 한 여인이 던진 맷돌에 두개골이 깨어져 죽어가면서, 여자에게 죽었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소년에게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해서 칼에 찔려 죽게 됩니다.


여자에게 죽으면 안 됩니까? 옛날에는 여자를 남자의 보조자 정도로 여겼습니다. 보조자에게 맞아 죽게 되었다는 말은 남자가 남자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1장을 보면 입다가 나옵니다. 입다는 조폭입니다. 잡류가 그에게 모여왔어요. 음지의 세계에서는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때 암몬 자손의 공격을 받았는데 입나가 나섭니다. 장로들이 계약을 하러 왔습니다. ‘우리교회 200명 모이는데 임시직으로 오셔서 300명으로 만들어주면 정직원(위임목사) 되게 해주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입다와 계약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입다는 처음부터 정식 직원으로 해달라고 했어요. 장로들이 입다의 제안을 승낙하고 그를 지도자로 세웠어요. 입다는 엄마가 청녀 출신이었는데, 이 사실을 왜 말하는가 하면, 이 정도로 이스라엘은 인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것을 지키려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 하신다.’는 것은 이미 물건너 간지 오래입니다. 지금은 힘이 없어서 떨고 있습니다. 입다는 그모스 신을 섬기던 지역 사람입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전쟁에 나갈 때 제일 먼저 마중 나오는 것을 바치면 효과를 본다는 것이 검정 된 사회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사주팔자, 손금, 관상을 보는 것을 미신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뭐라고 항변하는가 하면 ‘이것은 역사적으로 수천년 동안 검정 된 것’이라고 합니다. 검정 된 것이면 미신 아닙니까? 왜 그 당시 사람들이 우상을 섬겼는가? 섬겨보니까 효과가 있었어요. 왜 효과가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효과를 준겁니다. 주님께서 귀신도 다루시니 까요.


우상을 섬기면 일이 잘 풀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그들을 지옥 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세심한 배려입니다. 절대로 좁은 길로 오면 안 되고 넓은 길로 가야합니다. 그러나 천국 갈 사람은 넓은 길로 가고 싶어도 못가도록 주께서 막으십니다. 그리고 주의 뜻이 내 뜻을 이기는 쪽으로 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입다는 전쟁에 출전하면서 장담을 합니다. ‘내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마중 나오는 자를 제물로 바치겠다’고. 그런데 딸이 제일 먼저 나올 줄은 몰랐지요. 여호와의 사사로 전쟁에 출전하면서 그모스 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제물을 바치겠다고 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광경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하지 마세요. 당신 딸이 죽어요.’라고 했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냥 지켜보고 계실 뿐 그가 하는 일을 막지 않습니다. ‘가만히 버려둬. 그것이 내 뜻이야. 소중한 것을 잃어야 정신을 차리는 거야.’ 이런 식입니다.


승전하고 집으로 귀가할 때 닭이나 소가 나와야 하는데 이것들보다 딸이 먼저 나왔습니다. 이 장면에 입다는 기겁을 했을 거예요.


이것은 입다 개인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적인 문제인데 이것이 우리의 철없음을 인하여 대신 희생해야 될 어린양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어요. 입다의 가정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주를 주저앉게 만들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는 계기가 되고, 그 당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을 누가 아는가? 입다의 딸이 압니다. ‘나 하나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나는 기꺼이 제물이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사무엘하 6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다윗이 언약궤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기뻐서 춤을 추는데 그 광경을 아내 미갈이 보고 못마땅하게 여겼고, 나중에 남편에게 ‘왕이 백성들 앞에 품위도 지키지 못하고 염치없이 몸을 드러내셨소.’라고 비난했습니다.


미갈은 사적인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혀 다른 시각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낮아져도 상관없다.’고. 이 일로 인해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습니다. 미갈은 다윗을 단순히 자기 남편으로만 여기고 말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처럼 입다의 무남독녀가 춤을 추며 아버지를 맞이하니 입다는 옷을 찢고 절망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에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딸은 웃으며 아버지를 맞이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웃을 찢고 절망하는 이 광경은 도대체 뭡니까?


이것이 바로 B층이 A층에 충동을 일으키는 상황입니다. 십자가를 아십니까? 주님은 죽고 우리는 십자가 때문에 살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웃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당하는 고통은 고통이라고 말하지 맙시다. 어떤 일을 당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입다의 무남독녀가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딸이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합니다. ‘아버지여, 걱정하지 마세요. 대적 암몬에게 원수를 갚으셨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말씀대로 저를 제물로 바치세요. 하지만 두 달만 친구들과 함께 할 시간을 허락하소서.’


입다는 딸의 요청을 허락했지만 이 두 달이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짧은 시간으로 여겨졌겠지요. 딸은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런데 왜 딸이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까? 우상 때문에 발생된 것입니다. 입다의 우상 섬기는 속성 때문에 하나님의 레위 율법은 사라지고 개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결과 억울한 죽음을 생산해 낸 땅이 되었는데, 그 땅이 언약이 이루어진 땅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이 예수님이 피 흘린 땅임을 잊지 맙시다.
 관리자(IP:61.♡.138.77) 15-08-09 12:32 
제 9강 허무한 명분 (정석훈 목사 녹취)


사사기 12장에 보면 입다의 딸이 죽고 난 뒤에 입다가 자신이 승리했다고 여겼습니다. 그때 에브라임 사람들이 입다에게 암몬 사람들과 싸울 때에 왜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따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고 말합니다.


이전 사사기 8장에서 기드온이 미디안을 파하고 돌아왔을 때 했던 것처럼 똑같이 에브라임이 행동 합니다. 분명 입다는 암몬 자손들과 싸울 때에 에브라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4절에서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더니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파하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입다는 길르앗 사람과 더불어 에브라임 사람들을 칩니다.


5,6절입니다.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 앞서 요단 나루턱을 잡아 지키고 에브라임 사람의 도망하는 자가 말하기를 청컨데 나로 건너게 하라 하면 그에게 묻기를 네게 에브라임 사람이냐 하여 그가 만일 아니라 하면 그에게 이르기를 십볼렛이라 하라 하여 에브라임 사람이 능히 구음을 바로하지 못하고 씹볼렛이라 하면 길르앗 사람이 곧 그를 잡아서 요단 나루턱에서 죽였더라 그 때에 에브라임 사람의 죽은 자가 사만 이 천명 이었더라”


이것은 전쟁영웅은 나라를 다스릴 합당한 권한이 있다고 스스로 그렇게 내세우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한 쪽에서만 발견되는 차이입니다. 치는 쪽에서만 발견되는 차이 십볼렛이냐 씹볼렛이냐, 살이냐 쌀이냐의 차이입니다.


이런 차이는 사실 레위지파를 은혜를 받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십볼렛 하든지 씹볼렛 하든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레위지파의 은혜가 끊어지고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자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보는 기준에서 보니, 너와 나의 차이를 두고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 사만 이 천명을 죽여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모습입니다. 비록 이것이 집단적이 모습을 띤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왕이 없으므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이것은 사사기 21장에서 이스라엘 연합군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야베스 길르앗 거민과 및 부녀와 어린아이를 칼날로 죽여 버리고, 남은 사백 명 젊은 처녀들을 베냐민 자손에게 주었습니다. 나머지 부족한 이백 명은 매년 여호와의 절기에 실로에 올라오는 선교단체 아가씨들을 납치해서 강제 결혼하라고 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족한 한 지파 베냐민 지파를 채우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도하는 주인공들, 그들이 아무리 승리했고 권력을 장악해도 하나님 보시기는 왕이 없으므로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이 이것으로 함몰되느냐? 무너지느냐?


그런데 사사기를 보면 동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사기라는 A층인 현실 층 즉 관념, 개념, 기호, 언어, 상징, 역사 그야 말로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입니다. 현실이란 해석의 결과입니다. 이 세상 보는 것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면 그것이 나의 현실이 됩니다.


A층, 현실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현실이 캐묻게 됩니다. 네가 어느 정도 힘을 갖고 있는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면 희미한 등불 밑에서 눈물만 뚝뚝 흘립니다. 이것이 옥경이의 현실입니다. 묻는 것이 전부 이런 것입니다.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그리고 좀 살았다 싶으면 자랑질 합니다.


그런데 A층 밑에, 즉 사사기 아래층에 동행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룻기입니다. 룻기는 사사기 9장 이후에 발생하는 사건의 지하층(B층)을 형성하면서 그곳에서 사람들이 구하지 않은 하나님께서 준비한 왕이 나옵니다. 그 왕이 이방나라에서 나옵니다. 이방나라는 이스라엘에는 없는 사람입니다. 부재, 마이너스 혹은 0입니다. 이렇게 없는데서 있게 하십니다. 마치 없는 이스라엘이 밤에 만들어진 것처럼.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꼭 백부장 같습니다. 백부장이 이방인인데 그 이방인이 천국의 본 자손을 추방시키고, 이방인이 그 자리를 다 차지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본 자손은 쫓겨나고 그 자리를 이방인이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는 그 자체가 안티 이스라엘, 즉 스스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계획을 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사사기를 통해서 자기 가족부터 먼저 챙기고 자 감정부터 먼저 챙기고 자기 민족부터 먼저 챙깁니다.


사사 삼손이 민족을 구하는 것과 여자 1,2,3을 따라다니는 것이 똑 같습니다. 그저 이스라엘을 어떻게 한번 살려 볼까? 사사들 열둘을 집어넣었지만 제대로 된 해결책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사본인부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니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사기에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K1 시합할 때 울타리 안에서 싸우는 것을 우리는 밖에서 구경하는 것처럼 구경하면 됩니다. 이렇게 밖에 나온 사람이 희망이 있습니다. ‘주여 내가 사사가 되겠습니다.’는 식으로 나대지 마세요. 나대는 것이 문제가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사사인데 나대니까 사사가 가짜가 됩니다. 왜냐하면 나댈 때는 반드시 명분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얼마나 허무하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까먹고 덤벼 덥니다.


‘하나님이여 이 몸 바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우리 어머니의 서원대로 제가 신학교 가서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이럴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간단합니다. ‘나대지 말고 쓸데없이 맹세한 입다를 보면서 네가 깨달아!’라고 하십니다. 말도 안 되는 맹세를 하면서 하겠다는 그것은 그모스나 몰렉 즉, 이방신을 섬기는 버릇이 또 나온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살아도 주님하고는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십자가를 앞장세우지만, 하나님은 성의 표시만 하면 복 주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님이 좋습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말이 훨씬 와 닿습니다. 성의만 표시하면 복 줍니다. 평안할 때 기도하지 않다가 아쉬울 때 성의를 표시하면 복 주는 그것이 사사기입니다.


우리는 K1 경기장처럼 울타리 쳐진 바깥에서 반장이 선생님께 얻어맞는 것을 보자 이말 입니다. ‘아 저렇게 나대다가 얻어맞는구나!’ 우리는 할 자격도 없이 가만히 있었을 뿐입니다. 그야말로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 간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민족을 위해 살았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 그런 사람들의 귀한 명분을 다 무시한다는 말입니까? 가족과 국가를 살린다는 그 고귀한 것을 무시한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박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구약시대입니다. 신약은 아예 우리를 죽여 버렸습니다. 명분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바짝 마른 뼈인데 거기에서 무슨 명분이 나옵니까?


삼손의 수수께끼는 수수께끼를 낼 때 수수께끼가 카메라 줌 역할을 합니다. 수수께끼를 낼 때 삼손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들이 수수께끼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수수께끼에 쫙 빨려 들어갑니다. 수수께끼를 풀면 진리가 나오는 줄로 압니다.


허무하면서도 허무한 줄 모르는 사람들을 허무하게 되돌려 주는 것이 수수께끼입니다. 수수께끼를 풀어 보니 삼손이 배고파 사자를 때려잡아 죽였는데 나중에 그곳에서 꿀이 나와 그 꿀을 퍼먹는 사적인 이야기가 수수께끼의 해답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수수께끼를 만들게 하신 요인이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명분 때문에 의미를 갖고 산다는 우리로 하여금 허무의 극단에 이르게 합니다.


‘인생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자에게 주님은 ‘네가 그것 알아서 뭐하려고 하느냐?’ 라고 하십니다. ‘사는 것이 뭔지?’ 라고 하면 주님께서는 ‘그것 네가 왜 알아야 하는데?’ 라고 하십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삽니까?’ 라고 하면 ‘그냥 허무하게 살아’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허무의 끝을 보라고 하십니다. 허무의 끝을 보니 거기에 지하층에 흐르는 B층, 즉 하나님께서 자기 증명을 위해 스스로 예정했던, 우리에게 묻지 않았던 따로 준비된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룻기’입니다.


요란한 현실, 옥경이 세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습니까?’를 내어 놓는 그러한 현실세계 밑바닥에 지하수로 흐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모압 여인, 저주 받을 이방여인이 시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시어머니가 자기 민족의 고향인 모압 땅으로 온 후 모든 것을 날리고 망했습니다. 남편 죽고 아들 둘 다 죽었습니다. 허무 그 자체입니다. 이제 손 털고 돌아가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꼴아 박게 하셨구나!’ 라고 했을 때, 룻은 약속의 땅에 적용되는 원칙인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허무하게 끝내는 그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가짜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허무로 몰아넣는 분입니다. ‘같이 허무하자. 같이 죽자.’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죽음에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의 죽음에 관심 있는 하나님은 숨겨진 하나님입니다.


A층 즉, 현실 층 때문에 B층이 숨어 있습니다. 숨어 있는 B층의 존재는 A층으로 올라갑니다. 그럴 때 A층에서 B층과의 만남 즉, B층이 현실에 드러납니다. 이것이 사사기 13장에 나오는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은 율법의 인격화입니다.


이제는 율법을 그들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증명하는 절차가 법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드러내는 절차가 법입니다. ‘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다(롬4:15).’는 것은 로마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죄책감만 증가합니다. ‘법을 지켜야지’ 하면 법에서 ‘저리 가라’고 합니다. ‘법은 네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기 위해 오시는 분이 있을 것’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0장 7절에서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이 법을 지키기 위해 따로 인격자, 인물을 준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법에 손대는 것이 아니라 허무해야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내가 법을 지키겠습니다. 저도 이제 성령 받았으니 성령 받은 티를 팍팍 내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저리 가세요!’


성령 받았으면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할 뿐이지 무얼 지키겠다고 합니까? ‘저리 가세요.’ 그러면 또 로마서 8장 4절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함이라’고 반박합니다. 그 말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러분들이 얼마나 속았습니까? 복음을 알기 전에는 성령 받아서 율법 지키자는 말에 얼마나 복종했습니까? ‘여러분들이 성령 받지 못했을 때에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는데 성령 받았으니 율법 지켜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는 말에 세뇌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죄책감만 증가할 뿐입니다. 법이 주는 저항감이 우리가 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빨리 달아납니다. 우리는 법의 완성을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증서 써주면 이혼된다고요? 주님께서는 법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한 자라고 하십니다. 간음죄가 달라집니다. 한 번도 바람피우지 않는 사람이 가장 간통할 가능성이 많은 사람입니다. 다만 기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남자 나이 구십이면 인간 되는 줄 압니까? 애초부터 인간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인간인 것을 증명해 보세요.


허무합니다. 삼손은 민족이고 무엇이고 자신의 9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는 무의식, 물론 이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 무의식의 감정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조절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실인이야. 나는 하나님의 예정된 사명을 감당해’ 라고 하지만 그 내부는 여자 1, 2, 3만 있습니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양다리 걸치지는 않았습니다.


어찌되었든 삼손 자신의 모든 힘은 자기가 원하는 여성을 차지하는데 몰입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블레셋이 죽어 나갑니다. 무슨 이런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해방합니까? 삼손은 자신의 사적인 욕구, 욕망을 발산하면서 그 부산물로 나오는 것이 ‘블레셋은 죽었다.’입니다. 여러분 이것도 구원에 해당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이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를 초월합니다. B층은 예수님과 하나님만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무엇이 있긴 있지만 그것의 존재 확인은 A층, 즉 언어의 존재 층에 올라 와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습니다.


성경말씀은 언어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인격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존재로 보았습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다.’로 본 것입니다. 거기서 나온 이론이 삼위일체입니다. 왜 삼위일체 교리가 엉터린가 하면 삼위일체 안에 하나님의 존재를 가두어 놓고 내가 삼위일체 외부에 존재하듯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피조물인데 존재한다는 속성을 갖고 있다면 주님도 나와 동일한 존재함의 속성이 있으니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천국 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세부터 나온 신학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주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우상입니다.


‘내 모자가 빨갛다.’고 한다면, 모자는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습니다. ‘모자가 빨갛다.’ 이것이 모자에 대한 모든 것입니까? ‘모자는 머리에 쓰는 것이다.’ 이것이 모자의 속성에 맞는 실체가 됩니다. 엄마에게 ‘모자 빨갛다’고 할 때 엄마는 ‘모자는 머리에 쓰면 된다.’고 합니다. 모자와 합치되는 것은 기능이지 빨갛다, 노랗다는 색깔이 아닙니다.


지금 B층에 있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인 예수 그리스도가 A층으로 올라오니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 얻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믿는다는 믿음이 내 존재에서 나온 내 존재를 정당화 하는, 내 믿음을 정당화하는 욕망에서 나온, 나의 실체에서 나온 더러운 속성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믿음, 소망, 사랑이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믿지 않으면 되는데 얼마나 믿음 없으면 믿고자 합니까? 믿지 않으면 됩니다. 마지막 시간이 위기입니다.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위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목사님 어떤 사람이 죽으면 이 땅에 있는 자아와 동일성을 갖고 있는 같은 인간이 됩니까, 아니면 다른 인간이 됩니까?’ 이 질문 만드는 것도 수년 걸려서 만든 질문입니다. 뭔가 궁금한데 열심히 연구하다 보니 만들어낸 질문입니다. ‘이 땅에 사는 내가 동일한 나로써 천국에 살게 되는 것입니까?’ 걱정 반 우려 반, 합쳐서 전부 염려입니다.


천국 갈 때 ‘나’라는 것이 그냥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호출당한 언약의 호출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나라는 존재를 그냥 보지 마시고 예수님을 경유해서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속성을 반영하기 위해 내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 끝나고 난후 속성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긍휼의 그릇, 다른 하나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이것 밖에 없습니다. 진노의 그릇에 맞게 새롭게 피조 된 자는 지옥에 모이고, 주님의 긍휼 속성이 담긴 자들은 긍휼을 입고 천국에 갑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행했던 인간의 축척된 행함은 어떻게 됩니까?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행한 대로 심판받아 지옥 갑니다. 그것이 ‘행위 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하기 때문에 어떻게 행해도 그것은 ‘네가 반드시 행해야만 했던 행위’라 해서 그 책임을 주님이 가져가 버립니다.


주님께서 ‘네가 나에게 속하지 않았다면 그런 강도짓 하지 않았겠지?’라고 하시면서 가져갑니다. 우리를 위로하는지 나무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내 안에 있는 속성이 나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 허락 없이 주께서 장악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나실인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삼손은 없습니다. 나실인이 먼저입니다. 얘기 없는 곳에 그 속성을 집어넣기 위해서 마노아 가정에 나실인으로 얘기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실인이란 무엇인가? 구별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고유시간을 확보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고유시간을 확보했다는 말은 보통은 해와 달과 별에 의해 시간이 지나가지만 나실인의 머리카락에 고유시간을 확보합니다. 이 세상, 옛 하늘과 옛 땅에 저촉 받지 않는,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의 시간을 체크하는 시간이 나실인의 머리카락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된다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인격으로 버린 인물이 나실인입니다. 이 근거는 보통의 제사 제물에는 사람의 신체일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더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중보자가 있지 않습니까? 더럽기 때문에 어린양이 있습니다. 그 어린양이 들어갈 자리에 더러운 것이 끼어들면 안 됩니다. 그런데 화목제물에 나실인이 서약한 기간 동안 자라난 머리카락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나실인인 그 인간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라 장차오실 메시아를 율법의 인격화로 미리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장착을 한 것입니다. 이럴 때 삼손은 두 가지를 보여 주어야 됩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자신이 머리카락으로 인해 힘을 가졌을 때, 이 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사십년 압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을 압니다. 알지만 여자가 좋은데 어떡합니까? 이것은 자제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절제할 수 있었다면 벌써 절제 했습니다. 절제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체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랑받지도 말고 사랑하지도 말고 그냥 혼자 사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우리가 절제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안 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면 오히려 우리의 껍질이 더 벗겨집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삼손이 민족을 해방한다는 그런 사명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히려 여자만 밝히는데 자신의 온 힘을 던집니다.


성공했습니까? 여자 하나 건졌습니까? 세 명 다 놓쳤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나실인의 사명에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일부러 B층을 끌어당기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졸지에 자신이 의인이 됩니다. 아래층에 등장하는 룻은 윗부분, A층 즉, 옥경이 현실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A층은 율법이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인격화 된 사람이 나실인 삼손입니다. 이 삼손과 룻을 나란히 놓고 보면 명확해 집니다. 삼손은 율법의 인격화인 나실인으로 하나님의 신을 받았지만 그 머리카락은 자신의 정욕과 자신의 욕망에 소비했습니다. 수수께끼를 내었는데 수수께기를 풀어보니 허무로 끝났습니다. 허무로 끝난 그 자리가 얇은 습자지가 됩니다. 십자가는 이곳을 뚫고 들어옵니다.


로마서 1장 3,4절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습자기를 뚫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그분이 살아있는 다윗이 메시아가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다윗이 노골화된 현실세계를 뚫은 유일한 신앙의 증거가 됩니다. 습자지를 뚫었습니다. 그렇다면 습자지에 귀 기울이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바로 허무하게 사는 것입니다. 극단의 허무, 사랑의 체제에서 벗어나서 사랑해도 아무것도 아니요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아닌 어떤 명분도 핑계에 불과합니다.


허무하면서도 허무하지 않은 척하며 살아왔던 세계가 옥경이 층입니다. 개뿔도 없으면서 있는 척해야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세계,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재미로 사는 세계입니다. 복음은 뚫는 것입니다. 내가 뚫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뚫으면 허무를 내 손에서 해소하려는 나의 종교적인 시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여 이 정도로 낮추면 되겠습니까?’ 라는 식입니다.


몽골에서 선교하는 어떤 사람이 쓴 책 [내려놓기] 상하가 나왔습니다. 내용을 보니 복음은 없고 자기 자랑만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정도 내려놓으면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면, 이에 대해 주님은 ‘그것마저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또 한층 더 낮추어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라고 재차 물으면, 주님은 ‘그것도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면 또 더 낮추어 말합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로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네가 천성적으로 허무한 존재임을, 기원적으로, 시원적으로 허무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네가 알기 까지는 너는 내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A층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임을 자랑으로 삼고, 내가 믿음 소망 사랑이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세계가 옥경이 세계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느냐고 물으면 ‘저는 어릴 때 어떻게 했고, 어떻게 했고’ 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것은 행함이니 지옥가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속성으로 인간의 동일성을 유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네 속성을 유지하는 한 갈 곳은 지옥 밖에 없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자고 한 사람은 거지 나사로입니다. 부자가 지옥 갔습니다. 지옥 가서 하는 행세를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에게 지시해서 자신에게 물 좀 갖다 달라고. 세상 살든 그 버릇 지옥가도 안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속성이 자기 실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가도 우리 속성 안 버렸다는 말은 곧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뜻입니다. 지옥이 궁금해요? 보고 싶어요? 마음껏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가면 ‘서로를 보시고 인사하시고 사랑 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허무를 보세요. 최 허무, 김 허무, 박 허무, 서로서로 허무로 악수합시다.


사사기는 K1 격투기 경기장입니다. 이방인은 들어 갈 수 없고 관여할 문제도 아닙니다. 단지 밖에서 구경하며 지켜보라고 합니다. 삼손을 보라. 끝에 허무로 끝났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허무해야 하도록 태어난 것이 천성적인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런 허무한 상태에서 습자지에 귀 기울입니다. 물론 귀 기울인다고, 십년 지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허무로 살자고 할 때 뚫고 들어옵니다. 산 다윗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다윗이 뚫고 들어오면 우리를 삼켜 버립니다.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듯이 우리를 삼켜버리면 이것이 우리가 예상 못한 기적입니다. 성령 받은 것이 기적이고 십자가를 아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 기적 받았다면 다른 기적은 갖다 버려야 합니다. 다른 기적은 내가 있다는 유혹거리가 되기 때문에 갖다 버리세요.


재산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재산 꼭 쥐고 있어야 자식에게 버림받지 않습니다. 부동산 꼭 쥐시되 나의 가치는 허무 자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가치는 허무의 끝장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삼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해보았자 내 감정을 위해 핑계 되고 변명하며 소비할 뿐입니다. ‘나 의인인데 이 정도는 어때’ 라는 식입니다. 그런 본색이 그 동안 나도 미처 몰랐던, 그런 못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주께서 구원받는 절차로서 그것을 행하게 하십니다.


마지막 대목입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립니다. 머리카락 속에 해와 달과 별로 측정되는 시간이 아닌 B층,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위해 예정된 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려버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블레셋은 승리의 개가를 부릅니다. 삼손을 죽이는 장소가 의미심장합니다. 블레셋의 신 다곤의 신전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죽은 분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라는 신명기21장 22-23절 말씀처럼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계시적 싸인이 됩니다. 저주받은 자가 맞습니다. 그 저주 받은 자에 동참하는 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처럼 자신의 행함은 죽고 오직 십자가로만 구원이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이 십자가 이야기할 때 A층 에서는 십자가 사건이 15년 전 지나간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는 순간 밑바닥에 흐르는 B층이 항상 현실 층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계는 있지만 한계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죽은 자로 보이고, 십자가 안에서 내가 너희를 보니 너희가 죽은 자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한쪽에서만 본 차이입니다. 이 땅은 승리했기 때문에 승리자의 입장에서, 자기 쪽에서만 보기 때문에 그렇게 오류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밑층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예정에서 본 그 차이는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승리했다고 영웅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스타 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삼손에 와서는 스타 의식이라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허무한 것으로 끝났습니다.


자 그러면 룻기를 봅시다. 룻기는 이와 전혀 다른 흐름이 흐르고 있습니다. 룻은 ‘망한 집안을 하나님이 망하게 했기 때문에 나도 망해도 좋습니다.’라는 식으로 같이 그곳에 뛰어 덥니다. 정말 이상한 여자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말렸습니다. ‘나이도 젊은데 희망이 있다. 새로 시집 가거라. 요즘 세상에 흠이 아니다. 총각들은 얘 있고 이혼해도 착하고 예쁘면 무조건 좋아한다.’ 예쁘고 착하면 기회는 항상 열려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럴 때 룻이 말합니다. ‘저는 어머니를 보는 것이 아니고 어머니를 망하게 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라고 합니다. 이제 나오미는 이름을 바꿉니다. 마라, 슬픔의 여자로 바꿉니다. 기쁨으로 갔다고 슬픔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아버지로부터 저주받은 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래층에 있는 룻기는 출애굽 대기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제는 외부에서 건져주지 않으면 우리의 대는 끊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에 율법이 개입됩니다. 율법의 인격화는 삼손이 다곤 신전에서 죽을 때 비로소 나실인의 사명을 마감합니다. 나실인 된다는 것은 죽으라고, 율법의 완성은 죽음이라는 것을 비로소 압니다.


나실인 삼손은 그동안 이스라엘 지배의 명분이었던 다곤 신상에서 죽습니다. 다곤 신상 기둥 둘을 붙잡고 죽습니다. 건축가들은 삼천 명이나 들어가는 곳의 건축기둥이 그렇게 촘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쇠사슬로 묶었던 것을 잡아당기니 기둥이 무너지면서 다곤 신전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되지도 않는 것을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아무튼 지문에서 가장 먼 것을 고르는 것과 똑 같은 짓을 합니다. B층을 모르고 A층에서 놀던 버릇을 가지고 해석합니다. 창조과학회가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옛날 유물 파면, 땅 파면 거기에 예수가 나옵니까? 이 세상은 수수께끼입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이 이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해답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해답을 파고 들어가면 마지막은 허무입니다. 90년을 살아도 해답을 모릅니다. 몰라야 됩니다. 그러면 알아야 된다고 합니다. ‘네가 뭔데 알아야 되느냐?’ 모르기 위해 태어났는데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습자기 뚫고 십자가 들어오면 모든 것을 다 압니다. 모든 연령이 다 시청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어떤 분이 ‘얘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합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얘들을 무시하지 마세요. 얘들에게 십자가에 대한 고백이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통성 기도하는 얘들처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면 안 됩니다. 얘들은 나름대로 허무를 압니다. 그것이 절차입니다. 나름대로의 허무를 느낍니다. ‘엄마 시험문제 한 개 틀렸어. 죽고 싶어’ 이것이 바로 허무입니다. ‘나 인생 이렇게 살아야 되겠어?’ 라는 식으로 허무를 느낍니다. ‘주님이 주신 절차야.’라고 하면 ‘무슨 그런 주님이 다 있냐?’ 라고 할 때 ‘어, 주님께 관심이 있네.’ 이렇게 됩니다. 주님에 대한 관심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문제는 부모의 욕심입니다. 무엇을 기대합니까? ‘엄마 나 십자가로 구원 받았어요’ 라고 하면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용돈타기 위한, 스마트 폰 얻기 위한 술책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것을 하지 마시고 허무로 태어난 원천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면 이미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시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허무하냐? 나도 허무하다.


자식을 낳는데 있어서 출애굽 대기 상태에 있습니다. 삼손은 조금 자란 머리카락과 자신의 목숨을 바꿉니다. 나실인 즉, 율법의 인격화는 반드시 언약대로 죽는 죽음을 거칠 때 비로소 나실인의 사명은 마감이 됩니다. 나실인은 포도나무에 관련된 것과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적용시킵니다.


누가복음 22장 18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이 나실인이라고 증거하십니다. 나의 죽음이 율법의 인격화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자체가 인격화된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B층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B층과 A층의 경계를 뚫고 A층, 즉 기호의 세계, 상징세계, 현실 세계에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고 부활한 후 자기의 세계로 가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은 임시적인 정류장이 됩니다. 그런데 이 원리가 다윗을 탄생시킨 룻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룻기에 보아서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아스가 참 멋진 남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보다 보아스가 좋습니다. 첫째, 부자이고 두 번째는 과부라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완전 드라마입니다. 세 번째 남자가 침착하다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내 아이 낳아달라고 하지 않고 먼저 다른 사람에게 권리를 물어 보고 정당하게 권리를 삼으로 말미암아 ‘내 아내가 되어 줄 수 있어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보아서는 이용당한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이용당했습니다. 늙은 여우에게 이용당했습니다. 할머니를 조심해야 합니다. 할머니 정도 되면 이미 사랑의 체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자기만 사랑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귀찮습니다.


나오미가 부자이면서 자기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 보아스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낳은 자식은 죽은 자신의 남편 호적에 올려 버립니다. 그 방법이 바로 노선 교체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족보 교체입니다. 법적인 장남 따로 있고 마음속의 장남이 따로 있습니다. 주님 마음속의 장자는 따로 있습니다. 인간의 족보에서 이탈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아니면서 아들 되게 하는 작업, 그 작업을 위해서 기존 법적인 아들을 죽여 버리고 죽은 그 아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이고 하나님의 아들 호적에 넣기 위해서 죽은 우리에게 성령을 불어 넣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죽은 너희도 살리시리라(롬8:11)고 합니다.


이 모든 효과는 바로 철도 노선을 교체하시는 룻기의 법칙, 즉 다윗언약의 법칙에 의해서 육에서 영으로, 육에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작업을 구약부터 시험을 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켜보면서, 율법 지킬 필요도 없고 극렬하게 아무것도 하지를 마세요.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한 것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습자기 뚫고 올라온 십자가를 알아 버리니 그동안 내가 노력했고 알았던, 교회에서 했던 것으로 너무 돌아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허운석 선교사님 말씀대로 너무나 돌아 왔습니다.


정말 쓰잘떼기 없는 짓을 한 것입니다. 다 이루었는데!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이루었는데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습니까? 허무하게 되어 있는 것을 새삼스럽지 않게 여기게 하시고, 허무하기에 날마다 십자가를 감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
 
게시판
자유게시판
질문/답변
복음의 메아리
성도의 칼럼
사진첩
이전게시판글
이전질문/답변
개혁노회
도서출판후원회
성경신학
성경신학1
성경신학2
신학과철학
성경중심사상과 그 전개
성경강해
구약
신약
신학강의 1
신학강의 2
신학강의 3
자료
십자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의 허상1,2
말씀의 조약돌
피와 성전과 교회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과학의 정체
50여명의 신학자들
인간 구원을 위한 신학
철학의 함정
교회사
지옥의 하나님
예수사회
 
 
지역강의
강의일정
광주강의
대구강의
부산강의
서울강의
안산강의
울산강의
대전강의
기타강의
블로그
블로그
 
Copyright ⓒ 2006 by 십자가마을, All rights reserved.
주소 :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 235번지 신동아빌라 1동 201호   전화 : (053) 986-0172   H.P. : 010-3511-0172   상담 : 이근호   이메일 : knowcross@hanmail.net
홈페이지 관련 문의: 관리자(sungjaep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