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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5 00:53:25 조회 : 1919         
수원 모임 150813 이름 : 이근호(IP:119.18.86.67)
음성1               음성2
 충성모(IP:61.♡.84.13) 15-08-26 10:22 
수원아브라함150813a-이근호 목사

제목을 정한다면 창세기와 전체 성경과의 연관성, 다른 말로 하면 전체 연관성이 창세기를 통하여 어떻게 얼굴을 내미느냐에 주제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의입니다.

천국은 죄인은 못갑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죄가 있으면 못 들어갑니다.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창세기에서 인간을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자 창세기에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하나님의 천국은 하나님의 의만 들어가고.. 그러면 여기에서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불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복음은 불가능성이에요. 가능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제시하십니다. 완벽한 의인은 인간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의가 주제인데 사람을 지옥을 보내시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의가 실행해야 될 하나님의 절차입니다. 지옥이 없으면 하나님의 의가 살아나지를 않습니다. 지옥을 보내시고 하나님께서는 흐뭇해하시는 겁니다. 내 의가 이 정도다. 뭐 할 말 없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하나님의 의, 거룩만 추구하십니다. 일체 인간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뭐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의로운 인간이 죄인 된 것이 아닌 무죄 상태에서 죄가 발생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차이점이 뭘까요? 의인인데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죄가 없었는데 죄인이 되었지요. 그러면 죄가 없는 무죄 상태를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중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립. 마이너스냐 아니면 플러스냐. 아직도 정해지지 않은 것. 결정되지 않은 것. 그래서 이것은 비결정성이라고 합니다. 결정되지 않은 것. 확정되지 않은 것. 그냥 무죄 상태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비결정적이고, 이것이 중립 상태에 있다고 단언할 수가 있는가.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의 구조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을 유치원생이라고 생각하고 쉽게 질문하고 하겠습니다. 자 에덴동산은 인간만 살겠습니까? 인간말고 다른 게 있겠습니까? 에덴동산은 인간이 주인공이겠어요, 아니면 인간말고 다른 게 주인공이겠어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다른 것이 주인공이죠. 그것이 중앙을 누가 차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 중앙을 누가 차지했지요?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지요. 그러면 놀랍게도 인간은 무엇이냐 하면 보조입니다. 보조. 변방입니다. 주변에 나가 있는 거에요. 중앙을 쳐다보면서 변방에서 주변으로 나가있지요? 그래서 에덴의 주역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범죄하고 난 뒤에 인간은 뭘 행사하느냐 하면 자기자신을 천상천하유아독존 자기가 이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에서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되거든요.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과학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물리학이나 천문학하는 사람들의 주관심사가 저 우주에도 인간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외계인이 살겠느냐가 관심사지 저 우주에 하나님이 계시느냐가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타나면 큰일이 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게 되면 하나님이 주인이고 자기는 보조로 빠지잖아요. 이것을 인간 속에 있는 죄가 용납을 하질 않습니다.

인간의 죄는 항상 나를 이 세상에 제일 중요한 존재로 삼는 것에 집중합니다. 귀신들린 자들의 특징이 이것입니다. 이 세상의 영을 받은 자의 특징이 무엇이냐면 의미나 이유에 대해서 나를 중앙에 놓을 때만 의미나 이유가 됩니다. 내가 왜 사느냐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내가 인생을 왜 살지? 내가 살아있으니까 살지.. 그것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이것을 데카르트라는 사람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만약에 내가 생각하는 것을 중지한다면 그것이 무슨 상태입니까? 내 생각이 멈춘 상태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죽은 상태지요? 죽은 상태가 되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현실세계도 같이 훅 한방에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있어도 의미가 없어요. 세상이 있다는 것은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기에 의미가 있지 내가 빠진 상태에서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식구들 놀러 가는데 자기 자식은 놔두고 간다. 얘야 너는 컸으니까 너 혼자 놀아 라고 한다면 그 아들은 막 화를 내지요. 나를 왜 빼놓느냐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그 애가 크면 어떻게 됩니까? 엄마 아빠 가라 나는 따로 놀래. 이렇게 될 때 그것을 교육학에서 자아의식이 드디어 정착했다. 자아의식이 제대로 안정구조에 들었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삐아제 이론에 의하면 자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시민으로서 살 수 있는 그런 능력을 키우는 것 그것이 현대교육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현재 모든 교육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는 것입니다. 니가 주인이다. 니가 주인이야. 그렇게 서로가 주인이 되고 주인이 되는 그런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민주주의 사회가 그 형식만 그렇지 실제로 그것을 뒤엎는 것은 경제가 결정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는 갑과 을의 관계, 종속 관계로 변해버립니다.

지리산에 혼자 파묻혀있으면 살 만한데 그 사람이 시내나 도시로 들어오게 되면 뭐라고 하는가 하면 더러워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왜 지리산은 잘 살면서 왜 여기에 오면 더러워서 못 살겠다고 합니까? 지리산에 가면 아이고 숨이 탁 트이네 좋다. 도시에 오게 되면 더러워서 못 살겠다. 돈이 없다는 말이거든요. 왜 그렇게 말이 달라요? 시장에 오나 지리산에 가나 똑같은 인간인데 왜 말이 달라요? 그게 뭐냐면 의미란 필드(장)에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역이냐 내가 보조냐에 따라서 의미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싫으면 혼자 살면 됩니다. 그 장에 혼자 있으면 됩니다. 혼자.

설교할 때 조심해야 되요. 누가 걸려가지고..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냐 하면 하여튼 생각 없는 사람이 아이 많이 났는다 그 얘기를 하려고 했거든요. 이 분 아이가 네 명이에요. 만약에 네 명이 아니고 열두 명을 낳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가정은 풍성함을 느끼면서 그 부모는 그 가정의 주역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하나도 없다. 참, 자식 몇 명 났습니까? 하면 그 동네에서 더러워서 못 살 것입니다. 제발 그런 것 좀 안 묻는 동네에 가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의미는 이 주인인 나를 남들은 어떻게 보느냐 하는 타인의 시선, 타인의 응시 그것이 나됨을 위해서 받쳐줄 때 우리는 그들과 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창세기와 연관해서 뭐라 하느냐 하면 반대편으로 왔다. 이 문장은 오늘 강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입니다. 죄를 지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를 받는 그 자리 말고 반대편으로 온 것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합시다. 여기에 있어야 될 우리가 반대편에 온 거에요. 원래 하나님께서는 이 자리에 만들어놓았는데. 물론 주인공은 아닙니다. 우리는 주연 아닙니다. 보조, 일본말로 시다에요. 시다발이. 우리는 보조인데 이쪽 자리에서 이쪽 자리 주인이 되는 자리. 이것을 다른 말로 기호학에서 주인기표라고 하는데 주인. 또는 네가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뭐가 된다? 신이 된다. 신. 주인. 여기에 와버렸어요.

이 자리를 요한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이것을 어둠이라고 합니다. 어둠의 자리에 와버린 겁니다. 하나님은 간단해요. 여기에 와 있는 인간을(다는 아니고) 본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일을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실 때, 그 일을 약속이라고 하고, 그 일이 다 끝났을 때 외치는 것이 뭐냐 하면 이번 수련회 마지막 시간에 했던 것 있지요? 다 이루었다. 자 지금 이것은 이해되겠지요? 우리가 원래 자리가 아니고, 죄를 지어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이쪽 자리가 아니고 이제 죄 짓는 자리로 와버렸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9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이쪽 자리에 있어서 저주 받을 자기 백성을 이제는 본래 자리로 돌이키는 데에 성공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공했다는 것이 하나의 사실인가(다른 말로 하면 진리가 되겠지요)?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것 맞는데 여기 있는 인간에 어떻게 이것을 아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식이라고 합니다. 또는 그 인식에 관한 논리를 인식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식론이 어렵습니다. 이것 때문에 제 설교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왜 어려우냐 하면 이것을 아는 데에 있어서 사실, 하나님의 진리에서 인식하면 참 좋겠는데, 우리가 이미 죄를 지은 상태, 나를 주인공이라고 여기는 상태에서 그냥 가만히 있는 주인이 아니거든요, 주인값을 해요. 내가 이해하는 식으로 내쪽에서 인식해서 다시 내쪽으로 가져오는 이런 엉터리같은 이런 인식론을 우리가 멈추지를 않는다는 것이 병(문제)입니다. 이것이 고질병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A라고 하고 내가 이것을 알아채서 이것을 가져온 것을 B라고 한다면 이 A와 이 B의 다툼과 싸움이 치열하고 맹렬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오신 메시야를 살해해버려요. 그 당시에 여호와 믿는 사람들, 사도 바울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왜 너는 내가 이해하는 메시야처럼 우리를 설득하지 못하느냐 왜 이해시키지 못하느냐 하고  어서 오세요(한 사람 등장.) 오늘 강의 다시... 웃음...   늦게 오셨기 때문에 다시 합시다. 다시 해도 괜찮아요. 다 잊어버렸거든요.

오늘 주제가 성경 전체의 주제가 무엇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무엇인가 하면 딱 하나지요. 하나님의 의. 일체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거든요. 하나님의 의를 의답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의를 의답게 하는 일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들을 어디로 보낸다? 지옥 보낸다.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 놓고 주께서는 흐뭇해하시는 것입니다. 왜? 지옥에 보낸 그것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하나의 일부고, 일환이고, 그것이 공정작업이기 때문에, 그것이 절차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돌아가는 것에 하나님의 의가 집중이 되겠지요? 그러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가 전부 다 그것을 해석해내면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이고 우리는 그것만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왜?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여기에 있나니 하나님의 의다. 오직 의인은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이것이 하나의 복음이란 말이죠.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는 것이 복음이고 내가 의롭다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의롭다 하는 것이 복음이에요. 우리가 의롭다 한다면 인식론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의를 내것 만들어서 도로 가져와서 여전히 내가 주인노릇하는 요 나쁜 행세를 버리지 않는 또 죄악된 행세를 또 반복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합당한 위치가 뭐냐 하면은 그 에덴동산을 만들 때 인간이 주역이 아니고 뭐가 주역이었지요?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주역이었지요. 그것이 원래 하나님의 의에 부합되는 원래 우리 자리에요. 우리가 정했습니까? 우리가 의논했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너는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 돼라고 이미 확정된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못된 마귀가 그것을 건드려가지고 우리가 죄인이 되게 했는데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마귀는 이미 알아요. 이 배치가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을 알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의에 입각하게 되면 마귀는 영원한 형벌을 이미 받는 것으로 확정되어 버렸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은 원래 지옥이라는 것이 마귀를 잡아 넣으려고 만든 마귀 감옥소에요. 마귀를 영원토록 유황불에 집어넣기 위해서 만든 거에요. 그래서 마귀는 이미 알아요. 자기가 멸망한다는 것을 이미 알아요.

그것이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데 예수여 우리를 멸망하게 하려고 왔죠? 이미 그들이 알고 있어요. 그러나 나만 혼자 당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만든 피조물을 하나의 인질로 삼는 거에요. 날 잡으려거든 당신이 만든 최고의 창조물 인간도 같이 잡아넣어라 하고 하늘의 전쟁이 땅에 내려와서 인질극을 벌인 겁니다. 꼭 드라마 같지요? 이것이 진짜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온 말이에요. 인질을 잡아놓고 했는데 스톡홀롬 신드롬이라고 있는데 그 인질이 인질을 잡은 사람과 정이 들은 거에요. 그런 것 있잖아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주역이고 인간은 보조역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의인이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무죄 상태, 중립지역이라고 했지요? 의는 하나님의 의에요. 우리는 중립, 무죄 상태지 의로운 상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무죄상태는 천국에 못 갑니다. 적극적인 의로운 상태가 되어야 돼요. 그냥 죄가 없어져 버리면 죄가 없어지고 난 뒤에 무죄 상태가 되면 죄가 들어오면 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래가지고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니까요.

이것은 불교식입니다. 먼지가 묻었으면 구원의 때를 닦아라. 이것은 불교에서 하는 교리거든요. 불교교리. 먼지 묻으면 또 닦고.. 그러면 하루에 몇 번 닦아야 되는데? 하루에 두 번? 세 번? 그럼 오후 두 시에 닦고 오후 네 시 그러면 오후 두 시와 네 시 사이에는 먼지가 안 낍니까? 그러면 오후 세 시에 또 닦을까요? 그러면 한 시간 동안 먼지가 또 끼는데.. 불교라고 하는 것은 되지도 못할 일을 계속 시키는 겁니다. 진 다 뺍니다. 도 닦는다고.. 진 다 빼버립니다. 아예 인간은 그렇게 도 닦을 때 도를 닦는 목적이 뭡니까? 나는 주인공이다. 이렇게 잘못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잘못된 목표에 우리 몸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 몸의 창조는요 우리가 만든 목표와 일치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수요일날 sbs에 보면 자기 집에 천재들이 다 나와요. 엄마들이 애를 잡아요. 극성도 그런 극성이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애가 몇 살 먹지도 않은 초등학생이 반발하고 그러겠습니까? 니는 천재다. 천재답게 살아아 돼. 애들은 막 도망쳐요. 힘들어해요. 그런 장면이 많이 나오죠. 인간은 절대 선을 이룰 수 없어요. 그냥 중립지역에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인간으로 하여금 선하지 않으면 지옥간다. 선해. 자꾸 마귀가 이것을 채찍질합니다.

그러니까 마귀가 인간을 양육을 시키는데 인간은 죽을 지경입니다. 또 죄 지으면 벌 받지는 않을까 또 죄 지으면 학원 문 닫지는 않을까 죄 지으면 우리 집안에 우환이 생기지는 않을까 죄 지으면 이혼당하지는 않을까 마귀가 선악과를 집어넣어가지고 걱정하지 않아야 할 걱정을 걱정거리로 만드는데 살면 살수록 걱정거리가 더 많이 나오게 만들어요. 뒤통수에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빠지면 빠지는 거지요. 뭐 뭘 뿌리면 머리카락이 다시 나지? 이런 것이 또 걱정이에요. 눈꼬리 쳐지면 언제 이것을 또 올리지? 이런 것을 비롯해서 모든 걸... 착한 일을 몇 번 해야 보톡스를 맞아도 주께서는 눈 감아주시겠느냐 이런 것을 걱정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지 마음대로 교리를 만들어서 하는 거에요.

자기가 주역이 된다는 것. 이미 그 사람은 원래 자리가 아니고 벌써 잘못된 자리에 와 있는 거에요. 이것을 이렇게 지금 옮겨주시려고 하는 거에요. 자기 택한 백성만 그렇지만. 창세 전에 예정된 자는 이 자리에서 이 자리로 옮겨주시려고 하는 거에요. 옮겨주실 때 어떤 소리가 들리느냐 하면  요 이야기할 때 오셨어요. 이제부터 괜찮습니다. 옮겨주실 때 어떤 소리가 들리느냐 하면 요한복음 19장에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다 말이죠. 다 이루었다 했는데 막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필드(삶의 장)에서는 그게 무슨 뜻인 줄을 몰라요.

주님 혼자 다 이루셨어요. 그런데 그 다 이룸에 우리가 동의를 한다든지 이것이 체험이 된다든지 어 진짜 다 이룬 것 맞네요. 뭐 이런 것이 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이미 우리가 주연도 아니고 주인도 아니면서 마귀가 우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어요. 니가 우주의 중심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이렇게 인간을 바꾸어놓아버린 거에요. 모든 교육학, 과학, 모든 인문학, 전부다 딱 끄집어 내가지고 보면 뭐냐 하면 우리가 이 우주의 주인이다. 이것입니다. 행복해도 우리가 알아서 소통해서 더불어 잘살자.

인문학의 주제가 뭡니까? 더불어 소통해서 행복하자. 그거잖아요. 미래는 열렸다. 미래는 열렸다는 것이 무슨 말이에요? 그거 의미 없는 말이거든요. 미래는 있지도 않은데 그거 열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꿈은 이루어진다. 결국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면 뭐냐하면 인간 말고 주인이 따로 없다. 인간이 전부다. 이거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전부 같으면 지진은 왜 나고, 화산은 왜 터지고, 인간이 전부 같으면 왜 태양을 어지럽게 도느냐 말입니다. 왜? 인간이 주인 같으면 태양이 쫄다구 되어가지고 지구를 돌아야지요. 구조가 우리의 의식하고 안 맞잖아요.

지구가 중심이고 태양이 돌면서 혹시 너무 춥지 않았습니까? 거리를 좀 떼어드릴까요? 이러면 우리가 아 우리가 주인 맞구나 이러지 싶은데 이 지구가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주인이고 싶은데 이 지구 자체가 이 자연 자연 자체가 우리를 주인으로 대우해주던가요? 추우면 기침이나 해대고.. 모든 환경이 우리한테 굴복하는 거에요 우리가 환경한테 굴복당하고 있어요,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당하고 있지요. 옷을 왜 입습니까? 춥다고 입고 덥다고 입고 하잖아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자연에 알아서 기어야 된다는 거에요. 자연이 갑이고 우리가 을인 거에요. 뭐가 주인이에요? 안 맞거든요. 참 상식적으로 해도 우리가 주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한 괴물이 우리 속에 들어와가지고 주인도 아니면서 자꾸 주인노릇이나 하고 우리에게 의욕을 북돋아주니까 우리는 기고만장해가지고 주인이 되는 양 이렇게 설쳐대는 거에요.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창 1장 28절) 그것은 어느 자리냐 하면 이쪽 자리에요. 이쪽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그렇게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형상이 그렇게 한 겁니다. 아담이 처음 만들어지고 난 뒤에 코끼리하고 강아지, 고양이 뭐, 코스모스, 해바라기, 자기가 만들었습니까? 아니지요? 기껏 자기는 이름만 지었을 뿐이지요? 해를 본다고 해바라기, 멍멍한다고 멍멍이. 이름만 지었을 뿐이지요. 그게 뭐냐하면 자연, 이미 있는 주변에 우리가 종속되는 것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습니까? 우리를 보고 이름을 지으라고 하면 우리가 뭐라고 지었을지 상당히 궁금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름을 지을 때는 뭐로 지었느냐 하면 너는 흙이다. 이렇게 했습니다. 아담은 흙이거든요. 먼지다. 또는 진흙. 또는 흙이다. 예를 들어 먼지라고 봅시다. 내가 너에게 이름을 지어주겠다. 너는 먼지야. 흙이야. 흙으로 지어진 거에요. 그래서 김광석 노래 있잖아요. 먼지가 되어~~ 우리는 먼지라니까요.. 너는 먼지라 말이죠.

그럼 먼지가 왜 안 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를 먼지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따라서 니가 형상 앞에서 주인노릇하고 형상의 말을 안 듣고 선악과 따먹어 버리면 너는 하나님의 형상이 너를 원래 이름 지어준 먼지로 그렇게 환원시켜 버린다 그런 관계거든요. 인간이.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안에 하나님(형상)과 물질(흙) 이 중간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가지고 세상을 하나님의 의로 어떻게 다스리느냐 그것을 보여주는 중간 매체 역할을 하라고 우리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20여분만에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이란 혼자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란 분이 와서 우리에게 너는 이런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소개를 해줄 때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소개를 다시 하게 되면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너는 만들어졌다. 약간 말을 더 붙이면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집어넣어서 만들었다. 그럼 우리 쪽에서 그럼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유지됩니까? 하고 물으면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이 선악과 중앙에 있지? 예. 그 중앙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그것을 합쳐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따먹고 죽어줘야 하나님의 의가 유지가 되고 효과가 나는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인간은 개뿔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네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 허무해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요. 홀로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서 있는 것이에요. 이것이 정답인데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예수님이 제시하고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네가 만들어진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 그를 위하여 그로 말미암아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여기에 보면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다고 했는데 그가 누군가 하면 하나님이 아니에요.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그 앞에 그가 누구냐 하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니까요. 지금 창세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여기에 그라는 것은 뭐냐하면 예수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예수님의 시다발이에요. 보조라니까. 이 보조에 대해서 도리어 고마워해야 됩니다. 내가 그동안 힘든 주인노릇 한다고 얼마나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는 보조로 빠지세요. 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보조로 빠지세요. 왜 힘든 일을 주님이 하시는데 우리가 우리 것도 아닌데 고민합니까?

문방구 하는 사람 밑에 문방구 점원이 문방구 걱정한다는 것이 말이 되겠습니까? 목회 누가 합니까? 주님이 하시지요. 목회자가 교인수 걱정하고 하면요 그건 지 주제파악을 못한 거에요. 택한 백성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이미 주님이 단언을 했는데 주인이 그렇게 했는데 교인이 두 명 있다가 또 한 명이 나가면..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면 그 한 사람 마저 오면 천국 티오가 하나 더 생깁니까? 없어요. 이미 표는 매진되었어요. 이미 표 있는 사람은 가요. 예. 표 더 추가 없습니다. 뭐 특별연휴라서 표 더 뭐 다른 기차 노선 만들고 하지 않습니다. 끝났습니다.

노아방주 크게 만들어놓았지요? 앞에 붙어있어요. 정원 8명. (웃음). 우리 보기에는 수천 명 들어가게 보이는데 정원 8명. 그것도 남의 식구 오지마. 우리 식구 정원 8명. 노아가 천국 가가지고 전도 못했다고 영원토록 손 들고 꿇어앉아있었습니까? 제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 노아를 얼마나 격려했는지 아십니까? 야 노아야 참 잘했다. 나 너 한 명 전도할까봐 아슬아슬했어. 아홉 명 데리고 올까봐 나 걱정 많이 했다니까. 네가 제대로 복음 전하니까 딱 8명 왔지, 아홉 명 왔으면 아마 나 너 안 볼거야. 복음만 전하세요. 복음에 다 튕겨나갈 겁니다.

처음부터 주인공하는 사람은 제발 천국에 들여놓지 마세요. 우리가 걸러내지 않으면 천사가 걸러낼 거에요. 주님 시다발이 될 사람들만 와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주님 보조 역할할 사람들만 와요. 주님 믿고 난 뒤에 걱정 안 할 사람들만 오란 말이지요. 다른 사람 오면 안 돼요. 그러면 다른 사람은 왜 그렇게 주님을 안 믿는가? 자기가 주인이니까. 내 교회. 내 가정. 내 직장. 모든 것 앞에 뭐가 붙어요? 나. 주체 자리니까. 주체 자리에 자기가 있어요. 내 민족. 내 나라. 독도는 우리 땅. 이런 게 붙어요. 독도는 주님 것이지 왜 지건데.. 안중근이 천주교 신자라는데 골로새서 1장 16절도 모르는 모양이라. 만물이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창조되었어요.

그러면 목사님 처음에 끄집어 낸 그 문제 어떻게 이 어둠의 자리에서 빛의 자리로 옮겨갑니까? 하는 그 문제. 그 문제의 해답을 미리 제가 드린다면 이런 겁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가 뭐라 했던가요? 하나님의 의죠. 하나님의 의의 자리가 깊어지게 되면 죄인도 의인 되는 그 장치가 거기에 마련이 돼요. 죄인을 데리고 와서 그 자리에만 집어넣으면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의인이 되는 생산물이 나와요. 그러면 그 사람도 의롭지만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 당사자도 의롭게 되는 작업이 남아있어요.

그 죄인이 의인이 된 자리를 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죄인(육신)이 되셔야 해요. 죄없는 분이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하고 이 땅에 와야 돼요.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어떤 장치가 있냐 하면 죄도 의가 되는 장치. 그래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로마서. 그런 건 여러분이 다 안다고 치고. 보니까 그 정도는 안다고 치는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뭘 모르냐 하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채느냐 하는 그 문제. 참 골치 아픈 문제가 남아있어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다 이루었다. 예수 안에서. 그건 아는데 그걸 내가 지금 한창 나는 누구 시다발이 되기 싫고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고 구원 받아도 내가 잘해서 구원 받습니다. 라는 자랑을 하고 싶어서 속에서 벌벌 끓는 내가 어떻게 자리가 다른데 자리가 지금 죄인의 자리, 죄가 들끓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를 인식하고 포착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가 남아있다는 거죠. 답을 말씀드리면 우리는 모릅니다.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그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니까요. 그래서 목회자가 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뭘 모르는지 그걸 알려주는 것이 목회자가 할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뭘 모르고 있느냐 저 목사님 저는 예수 믿습니다. 당신은 지금 예수 믿는다고 했는데 그 분은 예수가 아니에요. 다른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라고 알려주는 게 사도 바울의 역할이었습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다른 사도, 이런 것들이 고린도 교회에 확 퍼졌어요. 누가 그런 짓을 하는가 보니까 당회장이 앉아있는데 그 당회장을 사도 바울이 보니까 마귀에요. 마귀. 마귀의 종이 교인들을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다른 사도를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사도의 입장(복음을 전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그 왜곡된 전체 자리. 이 자리를 이런 자리가 있습니다. 하고 소개하면 안 돼요. 그러면 실패해요.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면 이 자리와 십자가 복음을 이야기해요. 다 이루어서 하나님 의를 이루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십자가를 이야기해요. 십자가를 이야기해버리면 이것은 흉측한 것이고 실패의 자리입니다. 사형당한 자리이고, 이건 처참한 몰골이죠. 아무도 이것을 원치않죠. 십자가 자리를 다 기피하죠. 부활은 되게 좋아해요. 부활은 상상만 해도 좋아해요. 그게 아니고 십자가라니까요. 십자가를 보이지 부활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 믿으시고 조금 고생하시면 나중에 부활의 혜택 받습니다. 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고 부활을 잡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조금 고생하세요. 그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자체를 이야기해요.

십자가 자체. 십자가를 들이대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짜는 다 걸러지겠지요. 진짜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지 내가 예수 믿는 게 나는 믿음인 줄 알았는데 십자가 딱 보니까 아이고 나 십자가 얘기 안 했으면 나 큰일날 뻔했습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이 예수님인 줄 알았습니다. 십자가를 들이대니까 내가 내 주인노릇하기 위해서 주인지표, 주인기호 내가 이 세상에 중심이 되는 기호로 행세하기 위해서 내가 예수 믿은 그 죄가 인제 들통나주게 하시니 참 고맙습니다. 이게 성도에요. 그것을 회개라고 얘기합니다. 회개. 하여튼 내 쪽에서 나와서 의가 될 일은 없습니다. 라는 것을 그냥 인정하고 자인하면 돼요. 그렇게 되면 내 쪽에서 나온 것이 다 엉터리로 내 쪽으로 돌아온다면 거기에서 본인이 구태여 책임질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까 뭘 해도 죄인데 책임질 게 없으니까 인생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어떻습니까? 없지요? 예.

여기에 목사님 부부 계시지만 처음에 결혼하실 때 아후 나 남편한테 잘해줘서 훌륭한 아내 되어야 돼. 시집 왔으니까 시집에 사랑받아야지. 행여나 그런 생각하신 적 있습니까? 행여나.. 그래서 내가 잘해주면 남편이 감복해가지고 우리 부부는 최고로 행복한 부부가 될 거야. 행여나 혹시나 잠시라도 그런 생각하신 적 있습니까? 그러면 주께서 뭐라 하십니까?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러면 제가 행복하죠 누가 행복하다고? 제가 행복하죠. 그러니까 잘못된 인식인 거에요. 그 잘못된 나의 행복을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 예수를 굳게 믿어요. 그러면 예수가 뭐냐 예수가 씨다발이 되어버려요. 예수가 보조가 된다고. 무슨 목적을 위해서? 내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

교회 이름도 이상해. 행복한 교회. (웃음). 유인책인가요. 하도 세상이 행복을 추구하니까. 최고 행복한 교회는 교인수 많으면 행복해져요. 자기의 세력권이 늘면.. 제일 불행한 교회는 있는 교인 다 나가면 불행해져요. 앞으로는 오늘 복음 듣고 이런 행복이니 교회 이름을 바꿔도 상관없어요. 전혀 부담느끼지 마세요. 결혼을 했냐 안 했냐 전혀 부담 느끼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한테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니가 질 입장이 못 돼. 니 인생의 짐을 니가 질 책임이 없다. 그런데 마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니 인생이니까 알아서 책임지고 관리 잘하라고 우리에게 책임감을 추궁하듯이 뒤집어씌웠어요.

세상에 애 네 명 낳았는데 나는 끔찍해요. 애 네 명 어떻게 책임지려고.. 7명 낳은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까 7명, 12명, 4명 낳았다는 말은 책임을 지겠다는 결론이 안 나옵니다. 나는 책임 안 진다. 낳기만 하고 끝났다. 이런 배짱 때문에 낳는 것 같애. 알아서 방목하면 알아서 잘 크는데 저 들판에 애들 그저 풀어놓으면 지 인생 지가 먹을 것 타고 나니까 다른 사람들이 사막에 갖다 놓아도 살거라고 해요. 예. 삽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느냐 삶의 질이 문제인데 살기야 죽을 때까지 살지요.

어쨌든 제 말은 뭐냐면 주인노릇 하지 말라는 거에요. 주인노릇 한다는 것은 뭐냐면 마귀가 그렇게 했고 마귀가 주인값으로 네가 책임을 져라 책임까지 짊어져버리면 우리는 이 잘못된 인식 때문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나의 의가 여기서 출발해요. 나의 의. 나의 의가 출발이 되면서 무엇과 충돌이 되느냐 나의 의와 하나님의 의가 나의 몸을 중심으로 대충돌을 일으켜요. 그런 충돌도 없는 인간은 이미 내놓은 자식이에요. 지옥가도 내놓은 자식이고. 이미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구원 받기로 작정을 하고 우리를 찾아와서 성령을 줬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우리 내부에서 대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 제가 문장을 한 번 읽어볼 테니까 이 문장이 어디에 있는 문장인지 한 번 답변해보세요. 욕심이 너는 욕망해서는 안 된다.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욕망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어떤 철학자의 이야기겠어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겠어요? 로마서 7장 7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거 있는 거 참 의외죠?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 존재에요. 예. 뭐 크게 선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크게 형무소 갈 정도로 나쁜 짓은 않했어요. 그냥 평범하게 고만고만 그렇게 살아갑니다. 야 행복한 목사님 참 교인들 행복하다. 담요까지 덮어주고.. (웃음). 이렇게 행복한 교회. 사모한테나 잘하세요. (웃음). 사모한테 생전 안 하면서. 고객이니까... (웃음).

성경은 의외로 너는 욕망해야 된다는 거에요. 우리는 자꾸 죄 안 지어야 된다는 건데 그런데 그렇게 하면 니 원래 자리로 찾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욕망해. 마음껏 욕망해. 안 돼? 도와줄게. 말씀 봐. 말씀을 보게 되면 너는 바로 탐욕자야. 이 성경의 원래 번역은 탐심인데 말씀을 보기 전까지는 네가 탐심을 몰랐는데 탐심을 보고 난 뒤에 내가 바로 탐심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10장 14절에 보면 내가 탐심을 알고 탐심을 꺽어보려고 애를 썼는데 그것이 내 내부 자체에서부터 그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습니다. 말씀에 위배하고 주의 법에 위배하라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죄를 지으라고 이 땅에 태어나 거에요.

아담과 달라요. 아담은 무죄상태를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한평생도  무죄상태조차 경험한 적이 없어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모친의 죄중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죄는 단회성이에요. 아담으로 끝났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전부다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를 훅훅 부니까 뻥하고 터져서 죄가 자기 한계의 풍선은 터뜨리고 죄가 죄로 하나의 양상으로 그것을 물리적 입자, 또는 미립자 하나의 입자로서 기체 입자로서 분자, 원자 입자로서 죄의 조각품으로서 이 땅에 태어난 거에요.

여러분들이 해외에 여행가기 전에 걸어서 세계까지 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너무 좋잖아요. 그리스 지중해.. 라라라라라라라라~ 푸른 지중해하고, 포카리스웨트 하고 야 진짜 가고 싶다. 하잖아요. 막상 한 번 가보세요. 갈 때부터 싸우고 올 때까지 싸우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 거기 좋을 때는 누가 빠졌는가 하면 내가 빠졌잖아요 그런데 여행가면 누가 끼어들어요 끽끽거리면서 누가 낍니까 그 지중해 푸른 바다에 내가 끼니까 지중해를 오염시키는 거에요. 그림 속에 끼어든 내가 참 다 버려놓았어요. 내가 있는 것이 그만 죄인되어버린 거에요. 여행가가지고 마스크하고 눈만 내놓으니까 유럽사람들은 범죄집단인 줄 알고 검문있겠습니다. 하고 우리나라 한국의 아줌마들 말이죠. 그저 온통 서양 사람들은 마음껏 태양을 쬐서 비타민D를 마음껏 흡수하는데 이건 다 가려놓았어요. 여행하러 갔는지 아니면 히잡을 뒤집어썼는지 집에서 하던 행세를 그리스 가서도 하고 미국 가도 마찬가지에요. 미국 가도 한국에서 하던 행세를 그대로 해요. 그래서 호주를 버려놓은 인간들은 한국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세계, 니만 없으면 돼. 니만 없으면 돼.

사람 존재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살아요. 필드(구조 장) 자체가 그렇게 짜여져 있습니다. 왜냐 그게 바로 주께서 오셨던 세상도 우리와 똑같은 세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대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오신 세계가 지금 우리하고 어떤 세계이냐가 더 중요해요. 주님이 오시고 다녀간 세계하고 지금의 세계하고 똑같은 세계. 달라지지 않은 똑같은 세계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의인 되었고, 우리는 뭐가 됩니까? 우리는 여전히 그 세계에서 죄 짓고 있잖아요. 뭐가 다릅니까? 주님은 떠날 생각했고 우리는 여기에서 머물 생각을 하고 있어요. 여기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자기를 빛내기 위해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죠. 주께서 원하는 것은 딱 하나에요. 제발 보조역할해라.

그걸 잘했던 사람이 누구냐?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이었습니다. 까라면 까겠습니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주님께서 최고다. 최고. 본 자손들 천국에서 다나와. 다 쫓아내버리고 니가 들어가. 니가 그 자리에 천국 들어가. 아브라함의 본 자손들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니가 들어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저는 주님의 시다발이니이다. 보조입니다. 무익한 종이니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어제 수요설교 혹시 들어본 일 있습니까? 거기 이순재 예를 들었지요? 이순재가 뭐라고 이야기했던가요? 못난 놈, (웃음). 못난 놈, 우리 애가 공부가 떨어졌습니다. 못난 놈, 그걸 니가 왜 걱정하노 공부 못 하면 못 하고 잘 하면 잘 하지 그걸 왜 니 책임으로 하고자 하느냐?

이것이 바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의 내막을 모르고 건성으로 내가 주인이라고 여기고 저 십자가 사건을 어떻게든 내가 이용해 쳐먹겠는가 그걸 잘못 해석 오류를 일으켜서 바로 내 것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서 우리에게 제대로 된 말씀을 줄 때 말씀 뒤에다가 십자가를 깔아놓고 십자가를 들이대 버리면 아 십자가 앞에서 내가 와장창 깨어지라고 나로 하여금 오류적인 사고방식을 하게 하셨구나. 내가 잘못된 인생을 사는 이것마저도 하나님의 의의 작업의 일환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고치지 마세요. 그것도 하나님의 의의 작업의 공정과정입니다.
 충성모(IP:61.♡.84.13) 15-08-26 17:24 
수원아브라함 150813b-이근호 목사님

미진한 것이 뭐냐 하면 다 이루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아채느냐 죄인인 주제에 못 알아챕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항상 날 때부터 죄만 생각하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고 하면 그것을 자꾸 오해를 해요. 그래 알아서 다 이루었구나라고 하지만 정말 다 이루었다에 대한 그 오해를 아까 시간에 십자가를 가지고 들이대지요. 그러면 십자가를 들이대면 십자가는 높이가 몇 미터 이것을 들이대느냐

인간은 눈이 있는 것이 문제에요. 차라리 눈이 안 보이면 십자가를 어떤 다른 능력으로 생각할텐데 눈에 보이기 때문에 요거 보이는 것은 십자가고 네모난 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이렇게 되어버리거든요. 인간은 자기의 감각에서 현실을 제구축을 하기 때문에 큰 오해가 생겨요.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이미 그 내용 창세기에 보면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잖아요. 그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뭐냐면 장차 오늘날 우리가 구원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시달림과 어떠한 조치를 당했느냐를 앞당겨서 대표적으로 당해야 될 사람들이 창세기부터 쭉 모델들이 등장해요. 그 중에 여러 분들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을 생각합니다. 아브라함.

자 아까 논리에 의하면 아브라함도 죄인입니다. 분명히 죄인이죠. 아브라함도 죄인이거든요. 죄인이기 때문에 생각하는 모든 것은 전부다 자기가 주역, 자기가 주인공인 양 여기면서 자기 좋은 쪽으로 전부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예. 아브라함은 그렇죠? 그래서 아브라함도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살기 위해서 자기 아내를 성상납하고 그러잖아요. 바로에게 바쳐서 자기 몸은 살리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잖습니까? 하나님께서 니가 복의 근원이라 하니까 그것을 또 오해해가지고 그래, 내가 살아야지 니는 죽어라. 뭐 이런 식으로 상당히 비겁한 남자인데.. 어쨌든 그게 아브라함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냐하면 십자가를 들이댄다 했습니다. 십자가를 들이댄다는 이것은 뭐가 되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어떤 능력이 나와요. 이 능력이 아브라함의 자기가 주인공에다가 심어버리면 여기서 구멍이 생겨요. 이 구멍이 로마서에서는 이삭 바쳐라입니다. 상당히 특이한 사건이에요. 이 사건이. 자, 하나님의 지시가 없는데 아들 죽였다 이것은 자식살해범이 되지요. 아브라함 입장에서 그 자식을 죽인다는 것은 아버지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 그 자식을 죽여버리면 대가 끊어지니까. 자식을 우야우야해서 대를 이어줘야 하나님이 약속한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진다는 것과 얼추 조건이 충족된다는 생각이 아브라함의 생각이었지요. 우리한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걸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수준에서는 이게 약속을 이루는 가장 완벽한 최상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조건에다가 주께서는 뻥하고 구멍을 뚫어버리죠. 니 아들을 바쳐라. 참 천국 한번 가기 힘드네요.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것. 만약에 니 집에 있는 파리를 잡아라. 그거야 쉽습니다. 파리는 약하고 자기는 힘 있겠다. 파리채 들고 때려 잡으면 되잖아요. 니 파리를 잡았어? 그러면 요번에는 쥐를 잡아라. 약간 등치가 크지만. 그것도 쥐덫 놓아서 잡으면 돼요. 쥐보다 약간 더 큰 거 잡아볼래. 예. 뭐 그런 짐승 같으면 제가 잡겠습니다.

니 아들을 잡아라. 아~ 이것은 물리적인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는 의마가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 자식이잖아요. 내 자식을 아버지가 죽인다? 남이 죽이는 것은 용서가 안 돼. 전에 한 번 그런 얘기했죠.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의 아들이 학교에서 자기 사랑하는 아들을 왕따시켜서 죽여버렸던 사건. 여자를 울려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남자가 나중에 자기 아들을 걔가 행방불명 되니까 이제 같아졌어. 속으로 이제는 미안합니다.
이런 소리를 한다고요.

같은 등치, 같은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나와 관련이 되어있잖아요. 나와. 그저 나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을 내가 주인이잖아요. 주인이면서 주인인 것을 포기하라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란 말이죠. 니 자식을 죽여라. 내가 내 자식을 죽여버리면 나는 뭐가 됩니까? 스스로 나를 범죄자로 만드는 행위를 내가 나에게 가함으로써 내가 범죄자가 되지요. 내가 범죄자가 되어버리면 나는 무죄상태가 아니고 완전히 죄인의 상태로 돌변해 버립니다. 그렇게 죄인의 상태가 되어버리면 신이든 누구든 간에 나를 저주하고 나를 지옥에 보낸다 할지라도 내가 거기에 대해서 아니요 할 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권리가 없지요. 왜? 범죄자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내가 봐도 내가 범죄자니까. 그죠?

그렇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천국 갈 욕심을 내겠어요? 안 내겠어요? 못 내지요.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내가 주인공 같으면 주인공인 나의 동질성을 무한대까지 이어가요. 그게 불멸의 속성인데 인간은 누구든지 한 번 태어나면 누가 태어나게 했는지는 모르고 죽기는 싫은 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교회에 가서 예수 믿어가지고 나를 지금도 살아있지만 죽어서도 불멸의 존재가 되어서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서 영원히 영원히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잖아요.

그게 바로 기독교에 대해서 내가 주인공으로 삼았던 오해란 말이죠. 오해. 오류라 말이죠. 그것도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는 말이지 안 믿는 사람들은 그게 주의 축복이죠.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래 가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말이죠. 우리는 그게 나의 비젼이자 꿈이에요. 내가 죽어서 천국 가는 것, 지금 이렇게 잘난 나를 하나님이 놓치면 하나님 손해입니다. 이렇게 잘난 나를 주께서는 어떻게 죄를 씻어줘 가지고 예수 보내셔가지고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하고 함께 사니 기분 좋다. 이렇게 사시는 것이 나한테도 중요하고 주님께도 좋습니다. 윈윈. 서로가 승리하는 윈윈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와 정반대라니까요. 우리는 내 자부심을 마치 믿음이라고 여겼던 거에요. 그래놓고 믿습니다. 믿씁니다. 해가지고 나중에 어떤 분은 초반에 복음 모를 때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던지요 지금 나이가 많아서 연골이 다 나가버렸어요. 나 같은 죄인을 해가지고 엎드려서 밤샘하면서 매일같이 교회에서 기도했던 사람이 있어요. 복음 알고 일절 끊었지만.. 황전도사님. 지금 연골 나가가지고 수술하느라 이번 수련회 참석 못했잖아요. 그야말로 기도의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하라고 하면 다 하고. 복음 모를 때는 충성을 다했어요. 왜? 자신의 동질성. 질좋은 자기의 동질을 천구까지 영속시켜 보려는 그 욕구, 욕망 그걸 무슨 수로 지웁니까? 못 지웁니다.

내가 나를 관리 안 해주면 누가 해줘요? 내가 나를 구원 안 해 주면 누가 나를 구원해주겠습니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나를 학대해서라도 기어이 잘난 나를 천국까지 집어넣겠다는 그 일념을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천재 만들기 위해서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어떤 아픔도 겪는 것처럼 그게 인간인데 하나님은 그 자식을 잡아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남의 손이 아니고 사랑하는 남자의 손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내 손으로 내 자식을 죽이는 겁니다.

뭐 칼 들었다고 하니까 너무 험합니까? 그러면 더 간편한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목조르세요. 그냥 죽이려고 하니까 너무 참혹해요? 그러면 잘 때 수건을 물에 적셔가지고 (너무 구체적인데) 입에다 막든지 어쨌든 간에 숨막히는 행위를 해보세요. 이걸 인간이 할 수 있습니까? 못 하지요. 주께서 이렇게 약을 올립니다. 테스트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니가 나를 믿느냐? 정말 사랑해? 믿어? 사랑해? 테스트야. 이 테스트 통과해. 죽여. 이렇게 된 거에요.

참 도대체 우리가 예상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쩡하게 보니까 그냥 바보로 보이죠. 정말 아브라함은 직접 만났어요. 직접 만난 하나님은 그런 우리가 상상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상상도 못할 엄청난 것을 요구한 분이에요. 우리는 기껏 뭐만 보느냐 하면 십계명에 적힌 것만 유념해요. 그러나 성경에 아버지가 되었거든 자식을 잡아라. 제 8 계명 이런 것이 있습니까? 제 12 계명 이런 것이 있던가요? 없지요? 계명에도 없는 거에요. 계명에도 없는데 주께서는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만큼 우리는 계명을 보면 볼수록 내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지킬만한 것으로 왜곡하게 해석해가지고 도로 나에게 다시 수거해서 가져오는 거에요. 십계명? 지키라고 줬을 거니까 분명히 지킬 만한 능력이 나한테 있을 것이다. 아, 요렇게 지키면 되겠네. 하고 지키는 방법까지 거기에서 착안해가지고 그 방법을 원래부터 주시는 방법인 양 스스로 오해해가지고 내가 나를 주역(주인공)으로 만들어서 지켜보려고 바리새인들이 그 짓을 한 겁니다. 사두개인들이 그 짓을 한 거고. 오늘날 교회가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내부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의 동질성은 내가 포기 못한다. 나의 동질성.

그런데 아까 강의에서 본 것처럼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우리가 어디에 갔습니까? 잘못된 자리에 왔지요. 이 어둠의 자리에 왔잖아요. 하나님은 자기 택한 백성을 이 자리에서 본래 자리로 옮겨가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성질이 급해가지고 내 등치가 가려고 해요. 주님은 우리 등치는 받지를 않습니다. 우리 자리를 받아요. 요 자리를 받고 이 자리를 십자가를 통과해서 의에 자리에다가 이걸 합류시켜서 거기서 새롭게 우리의 몸을 만들어낼 때 이 몸이 뭐냐 하면은 우리가 죽을 때 우리가 흙의 형상으로 죽지만, 새로만들 때는 예수님의 형상, 하늘의 형상으로 다시 만듭니다.

스타트랙 혹시 본 적 있어요? 옛날 그 흑백 TV에 나왔던 유명한 외화, 드라마에 우주선 이야기인데 지구가 이렇게 있고 하늘에 우주선이 이렇게 있잖아요. 귀가 이렇게 빼쪽하게 있는 사람인데 그 배우가 얼마 전에 죽었답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계장치가 텅텅비었어요. 그런데 삐리리삐리리 하더니 갑자기 점선이 나오더니 점선이 사람 모습이 되더니만 이것이 사람으로 변해가지고 방금 지구에서 도착했습니다. 이러는 거에요.

처음에 아무것도 없는데 양자이동에 의해서 양자를 이동시켜가지고 요것을 이렇게 하게되면 이쪽에 지구에 있던 인간이 방금 순간이동 한 거에요. 그러면 이걸 하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밑바닦에 자리가 필요하겠지요. 지구에 있는 인간을 양자로 분해해가지고 그 분해한 정보를 이렇게 보내면 여기에서 그 정보가 다시 모이게 되면 지구에 있던 내가 다시 모이게 되는 거에요. 드라마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러냐고 묻지 마세요. 앞으로 그것 때문에 이걸 하려고 과학자들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지만.. 그러니까 지금 뭐가 중요하냐면은 밑에 깔려있는 그 바닦이 중요하죠.

그런데 우리는 성질이 급해가지고 내 몸의 불멸성, 동질성에 성급해가지고 이 몸 이대로 가려고 하는 거에요. 갑자기 성형했는데 천국가서 성형한 것이 유지할까? 주사 한 번 더 맞고 갈까? 지금 이것 생각한다고. 몸. 그런데 성경을 보면 죄를 지으면 우리 몸이 어떻게 돼요? 죄를 지으면 먼지가 되어~날아가버려 먼지가 된다는 거에요. 먼지가. 이 내 몸이 없어져요. 죽어요. 죽음이란 사라짐이에요. 내 몸이 없어진다니까요. 예수님 몸도 사라졌어요. 사라지고 사흘만에 부활의 몸이 되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요 전에 있던 그 몸하고 달랐어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인데 어떤 아저씨가 얘기하는데 예수님인 줄 몰랐지요. 나중에 눈 떠보니까 예수님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몸을 만지지 말라고 했어요. 만지지 마라. 니가 만질 몸이 아니다. 같은 몸이 아니라. 또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제자들이 문을 닫았지요. 문을 닫았는데 문이라고 하는 것은 분자구조가 촘촘하게 에너지장이 형성되어가지고 우리 같은 몸을 가지고는 문에 부딪혀서 못 들어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주님은 문이 닫혔는데 문이 닫힌 채로 그냥 들어왔어요. 들어오면서 평안하냐 요새 말로 하면 잘 있었느냐? 잘 지낸 걸로 보이십니까? 그렇게 대답했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잘 있었느냐? 도마가 뒤늣제 와서는 나는 주님 봤다는 걸 못 믿겠다. 나는 손을 만져봐야겠다. 주께서는 자 만져봐라. 보니까 있다 말이에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있는 예수님의 몸에는 창자국, 못자국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 말은 뭐냐면 그때그때 달라요 유비쿼터스에요. 출몰한다. 공간과 시간과 관계없이 출몰해요.

그 출몰하는 것을 사건(이벤트)이라고 합니다. 사건이에요. 또는 영어로 하면 해프닝이구요. 특징은 뭐냐 소유 대상이 안 돼요. 사건은 바람 같아서 소유 대상이 되질 않아요. 다만 추억이 되고 기억만 날 뿐이지 소유대상은 안 돼요. 그러나 추억과 기억이라는 것은 우리 몸이 먼저 전제되어 있을 경우에는 몸이 되는데 이거 추억, 이거 몸, 이게 문제거리가 돼요.

5년 전에 은혜 받았다. 이게 문제가 돼요. 5년 전에 은혜를 받아버리면 지금의 은혜는 감사가 안 돼요. 5년 전 그때 그 모습과 똑같은 체험이 되어야 감사가 되겠는데 시간은 항상 모든 것을 흩어버리거든요. 모든 것을 해체시켜버리거든요. 우리 몸은 해체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5년 전의 믿음, 6년 전의 믿음, 그건 소용없어요. 그날의 염려는 그날로 족하니라. 내일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내일 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죠. 제가 한 이야기는 그겁니다. 우리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몸이 아니고 우리의 자리는 죄의 자리에 와서 우리의 몸이 죽어요. 죽게 되면 우리라는 동질성은 여기서 단절, 끝납니다. 끝났어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누구를 잡았습니까? 이삭을 잡았잖아요. 그러면 이삭은 죽은 겁니다. 이삭은 죽은 동시에 아브라함은 뭐가 되냐하면 자식을 잡은 죄인이 되는 거에요. 죄인이 자식을 죽였으니까 이것은 죄 맞습니다. 죄가 아닌 것이 아니라 죄 맞아요. 하나님이 시켰든 누가 시켰든 죄 맞아요. 죄가 되었잖아요? 요걸 그대로 가져와요. 그대로 가져가면 이제는 자식이 죽었으니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식은 없는 겁니다.

이것을 그대로 이쪽 스타트랙 우주선 안에 데려오게 되면 여기에 누가 있습니까? 여기는 죄가 있지만 이 자리에는 아까 하나님의 의가 있지요? 의의 자리는 그 약속을 이룹니다. 그 약속을 이룰 때에 아브라함이 이룬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은 누가 이룬 겁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신 분이 이루죠. 주신 분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자식을 살려내요. 내가 봐도 어렵습니다만.

아브라함이 자식을 죽이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죽은 이삭부터 시작해요. 죽은 이삭부터 시작이 되면 죽은 이삭을 하나님께서 살려내요. 살려내면 누가 덩달아 살아나냐하면 아브라함이 자식(죽은 자) 때문에, 자기 손으로 죽인 그 자식 때문에 죽인 본인이 의인 돼요. 그 이삭이 예수 그리스도를 표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모형이거든요. 예수님은 다 오라. 나 너 죽여줄게. 죄인되게 해줄게. 십자가입니다. 죽여줄게 죄인되게 해줄게 다 불러놓고 그 다음에 우리가 살지 않아요.

예수님보다 앞서서 소생한 사람 있죠. 에녹, 엘리야 안 죽었잖아요. 그 다음에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 있지요. 나사로도 마찬가지고. 예수님 이전에. 그런데 그들은 부활입니까? 소생입니까? 부활이 아니고 소생이죠. 첫부활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지 그 전에 살았던 에녹이 첫부활이 아니에요. 부활의 첫열매는 예수님입니다. 이삭을 살림으로써 죄인으로 죽어야 될 아버지를 의인으로 만들어버려요. 주께서는 이삭을 살려내면서 구원받아야 될 사람들을 다 살려내요. 예수님을 살려냄으로 말미암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될 사람들을 예수님의 공로에 근거해서 다 살려내요. 이게 바로 십자가의 기능이고 능력입니다.

정말 어렵고 중요하죠? 다시 합니다. 그 순서1번. 죄인은 들이민다. 2번. 자아불멸성. 이거 포기 안 되거든요. 죄인이기 때문에 들이미는데 주여 나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 주소서. 이게 종교거든요. 자아불멸성. 3번. 하나님께서는 꿈쩍하지 않고 뭘 본다? 자리를 본다. 4번. 그 자리가 흙이 되는 자리다. 4번까지 일단 합니다. 그리고 이 전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절차, 공정(프로세스) 중에 포함이 되어있어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세요. 의도적으로 죄짓게 하셔요. 죄를 지어가지고 죄의 모습은 내가 주인공(주역)이 되어서 나만 살면 돼요. 사람이 사는 재미는 뭐냐 나만 빼놓고 다 망할 때 최고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없어요. 자기 눈 앞에 원자폭탄 터져가지고 수원시내 다 죽고 자기만 살아남을 때 물론 살짝 다이빙해가지고 난닝구 좀 째져도 괜찮아요. 남 다 죽이고 나만 살면 돼요. 그때 우리는 다 이루었다고 해요. 하여튼 남이 못 되면 그렇게 좋아요. 남 잘 되면요 .. 그게 그렇게 좋고. 그런데 같이 잘 되면 우리는 짜증나서 못 살아요. 지루하고 짜증나요. 꼭 뭐라도 나보다 못 해야돼. 4번까지 했죠?

5번은 뭐냐 하면 흙이 된다. 이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이 죽음에는 불멸성은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끝났습니다. 불멸성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죽여버리니까 없습니다. 그 다음에 이쪽으로 옵니다. 죽었잖아요? 이제 죽었으니까 반항하지 않잖아요? 조금이라도 살아있으면 왜 이렇게 합니까? 이럴건데 완전히 죽어버렸어요. 완전히 죽었으니까 바짝 마른 뼈같은 거에요. 이거는 마취약을 너무 줘가지고 이제는 뭘 해도 아프지도 않아. 그러면 의사하고 간호사끼리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이제 수술합시다. 그것도 모르고 인간은 그냥 죽어있어요.

예수님 (의사 선생님) 그런데 이 사람이 명단에 있는가 한 번 봅시다. 봐라. 생명책 명단에 김철규, 김철기, 김철호 여기있네. 어 여기 있네. 생명책 명단에 있네. 자 이제 수술하자. 수술하는데 그 자리. 그 죄인되었던 그 자리를 가져와요. 자리를 가져오게 되면 아까 스타트랙 이야기했죠? 그 죄의 자리인데 예수님이 뭐냐하면 이 땅에 죄인으로 오셔가지고 뭐가 되셨죠? 의인되셨잖아요.

그게 십자가에서 모든 약속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것을 6번. 죄를 자기 안으로 가져온다. 예를 들어보면 자 명단에 김철규. 천사가 주님 김철규 시체 가져왔습니다. 아 명단에 김철규 있지 그러면 주님께서 김철규를 주님 안으로 가져와요. 그래서 가져오게 되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7번. 새언약이 있어요. 새언약은 모든 언약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새언약이 되었거든요. 그 새언약이 뭐냐? 내 살과 내 피로 말미암아 언약을 이루잖아요. 예수님의 살과 피.희생제물이죠. 그 희생제물로 말미암아 다 이루었잖아요. 이 희생제물로 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의가 나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 안에서 죄가 뭐로 바뀌느냐 의로 바뀌는데 그 사람이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 우선이 아니고 새언약 안에 죄의 자리가 의의 자리가 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작업이에요. 우리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목적은 뭐냐 하나님의 의가 목적이에요. 처음부터 이야기했잖아요. 죄인으로 의인을 만들어 줌으로써 잘했지. 잘했지. 라고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스스로 자기에게 축하하고 격려하는 거에요. 이게 성경에 있는데 그 성경귀절 찾으려면 복잡하니까 생략합시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의인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게 하는 거에요. 우리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요. 우리는 초반에 죄로 다 드러났고. 우리가 뮙니까? 내 불멸한 존재를 관리하기 위해서 착한 일 많이 하면 천당간다. 착한 사람 천당간다. 이게 바로 죄거든요. 그 죄에 대한 것을 아까 이야기했죠. 율법이 와서 탐내는 욕망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의인인 척하면서 살아갔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율법에서 탐내라 하는 그 순간부터 이제는 탐내는 죄를 짓는 작업을 필히 실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안다 이 말이죠. 아까 로마서 7장 7절과 18절. 지금 성경에 없는 소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여기 지금 7번에 와서 하는 말은 뭐냐 하면 어떻게 구원 받겠습니까? 하는 우리 구원 소관은 끝났어요. 왜?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가 입만 살았습니까? 죽기는 죽었는데 어떻게 삽니까? 이런 마취 덜 걸린 소리는 완전히 마취 걸리면 할 말이 없어요. 죽은 채로에요. 마취가 어중간 되면 아야 아야 이렇게 하는데 그럴 것도 없어요. 완전히 마취 걸어서 일체 구원해달라니 그런 소리가 없어야돼요.

그러면 목사님 구원받은 그 사람을 어떻게 압니까? 이 인식을 어떻게 하냐하면 물에서 건져냄을 당하고 난 뒤에 전에 물에 빠졌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요. 물에서 건져내 가지고 축축해가지고(생각만 해도 춥다.) 물이 막 떨어지는데 생각하길 그런데 잠시 내가 기억력을 상실해가지고 내가 기억나지 않는데 어디에 있는 거지? 하고 개울가에 보니까 자기 진흙 발자국이 있고 진흙 발자국을 따라가보니까 물에서 사라졌어요. 분명히 이건 논리로 따져서 물에 빠졌는데 내가 물에서 기어나와가지고 지금 물이 옷에 축축하니 젖어있다. 따라서 그러면 문제는 누가 나를 건져놓았는가 말이죠. 보니까 같이 축축한 옷을 입고 있는 분이 있는데 내가 건졌다. 내가 믿나이다. 주여 믿나이다.

내가 하는 인식은 그겁니다. 하나님 나 잘났거든요. 내 잘난 존재를 놓치면 하나님 손해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시든지 누구를 보내셔가지고 내 죄를 용서해가지고 나를 천국에서 살게 하옵소서. 이게 바로 잘못된 인식론이죠. 예수 믿어라. 아 믿고 말고요. 또 믿을 것 없습니까? 부활 믿어라. 어 부활 믿죠. 자 첫 번째 예수 믿고 두 번째 부활 믿고 세 번째 이제는 성령으로 율법을 지켜라 옳지 사도의 모든 말씀도 다 지키라고 주신 거니까 지켜야지. 자 지키면 성화된다. 아이고 성화론 해야지. 이게 다 노리는 것이 있는데 그 목적이 뭡니까? 이렇게 지키면 저 안 버릴거죠? 맞지요? 이게 들어있죠. 이것이 잘못된 인식론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7번쯤 오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푹 젖어가지고 누구야? 나를 이렇게 건져놓은 사람이..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전에는 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8번. 새로운 인식론 장착(탑재). 이렇게 되면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온 것처럼 우리 가운데 잘난 사람이 누가 있으며 똑똑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모르는 자를 택하사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한다. 이미 결과가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 그것이 바로 교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9번에 올라가게 되면 이 모든 것이 나를 구원하려고 한 일이 아니고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착각이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해서 하나님 자기 영광, 하나님의 자기 존재 증명이라고 했지요. 자기 자신이 이만큼 위대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의 재료로, 피조물이기 때문에 충분한 권한이 있습니다. 창조주에게 재료로 우리를 활용하신 거에요. 그렇다면 이 자리가 무슨 자리? 예수 안의 자리가 되었다면 아까 저기에서 스타트랙처럼 입자가 양자 입자가 모여서 다시 새로운 구조물이 되죠.

새롭게 구조물이 될 때 뭐냐하면 예수님의 형상(하늘의 형상)을 10번. 예수님의 부활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가 조립이 돼요. 조립이 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이 되는 겁니다. 10번에 피어나야 돼요. 이것은 시간이 조금 걸려요. 왜냐하면 무엇을 교체해야 하냐하면 현재에 있는 우리의 흙에 속한 이 형상이 닳아져야 돼요. 어떤 사람은 90 걸리고 어떤 사람은 70 걸리는데 우리는 아직 그 나이가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두꺼워요. 삼겹살이 두꺼운데 나중에 한 70, 80쯤 되게 되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 습자지처럼 간달간달해요. 곧 가십니다. 이제는 몸이 따라서 곧 흙이 되어버려요. 날라가버려요. 그것은 순서를 지켜야 되니까 성급하게 자살하지 마시고 그 순서를 지켜줍시다. 줄서야 돼요. 줄서가지고 순서에 따라서 죽게 되어 있어요.

죽게 되면 우리의 옛 유니폼 있잖아요. 옛 것(몸)은 벗어버리고 새로운 장막으로 새로운 옷을, 주님이 부활해서 얻은 옷으로 갈아입어 버리면 그때는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천사가 됩니다. 시집 아니가고 장가 아니갑니다. 그때는 형수님도 없고 시누이도 시동생도 없어요. 땅에서 일곱 사람하고 결혼해도 부활에 날에는 니 남편 내 남편 하면서 싸울 필요 없어요. 그 상태를 무슨 상태라고 하느냐 11번째. 산 자의 세계.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여기 와서 산 자라면 저기는 전부다 죽은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죽음의 하나님이고 그 죽음의 하나님을 자기한테 새겨넣는 것이 바로 12번째. 십자가. 나 하나님인데 죽음이 새겨진 하나님. 하나님인데 죽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기에 죽어요.

니체가 큰 착각을 했는데 신이 죽은 게 아니고 제대로 죽으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우리의 죽음은 제대로 죽는 것이 아니에요. 알아서 죽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에요. 누가 신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알아서 죽은 하나님이 살아있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으로써 안 죽었어요. 하나님은 스스로 죽음으로써 진짜 하나님답게 나타난 겁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하나님 믿지 마시고 이 땅에 와서 죽은 하나님이 바로 진짜 살아있는 하나님 믿으세요. 하나님 다 가짜입니다. 왜 가짜냐 하면 우리의 죄악된 인식론에서 나온 그 잘못된 하나님이기 때문에 가짜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이러한 12번째 절차를 응축해서 한방에 아브라함에게 딱 때려주지요. 그게 테스트거든요. 사실은 아브라함을 테스트한 게 아니고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주님이 주님을 테스트한 거지요. 아브라함은 그냥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고.. 아버지! 불쏘시개는 있는데 제물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 잠말말고 산에 올라가자. 이삭은 철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따라 갔지요. 그 상황 전체를 주께서 그렇게 유도하신 겁니다. 왜? 그것이 모형이고 그 모형의 실체는 바로 우리 예수님 본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베드로후서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 오시기 전부터 이미 예수님의 영이 선지자 아브라함이나 그들에게 임해서 그들을 이미 조정했어요. 조정한 거에요.

오늘 주제가 뭐였습니까? 창세기를 통해서 드러난 성경 전체의 흐름이고 주제지요? 전체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죠. 그 의의 대표적인 사례로 아브라함이 누구를 잡는다? 자기 아들 이삭을 잡는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기 아들 예수님을 잡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의 모형으로써 자기 사람들을 동원시킨 겁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잡음으로써 아버지도 날라가고 아들도 날라갔지요. 그렇다면 남아있는 것은 다 죽었는데 뭐 없네 하나 남았는데 아브라함 언약이 남아있지요.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주었다고 해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돼요. 여기 이쪽 편에 있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었으니까 아브라함이 이룰 것이라고 하는데 아브라함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실패를 하죠. 탐내지 마라. 분명히 사람에게 주었기 때문에 탐내지 마라 하는 율법은 인간이 이룰 것이다. 아니요. 인간은 탐내지 마라는 율법을 성취를 못 합니다. 오히려 그 말씀에 저촉이 되지요.

그런데 그 말씀을 주신 분이 다 이루었다. 주님이 12가지 이런 절차를 예상해서 우리 속에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는 그 내용을 십자가의 이름으로 오늘날 우리 속에 칩처럼 집어넣어버린 거에요. 이걸 새겨넣어버렸어요. 새겨넣으니까 우리의 육은 뭐냐 하면 불신자하고 똑같아요. 어떻게 하면 내가 영원한 불멸 존재가 되어서 천국까지 가느냐 이게 우리의 본성인데 이걸 누가 건드려요. 내가 예상 못한 어떤 사건이 건드려줘요. 그 해석이 엉터리 해석이거든요. 이 십자가에서 자꾸 건드려진다고. 건드려줘요.

건드려주게 되면 지금 내가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잘난 맛에 산다는 이걸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이 모습 자체가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아서 해결했던 그 죄에 포함되어 있는 죄 중에 하나의 양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소급해서 항상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뭐만 자랑하지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감사할 뿐이죠.

그 다음 이야기를 해봅시다. 창세기 그 다음 특징은 뭡니까? 방금 아브라함했지요? 아브라함의 중요한 사건은 아버지가 아들 바치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테스트를 통과해서 믿음의 조상이 되지요. 믿음의 조상. 믿는 자들은 동일하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두 번째가 뭐냐? 아브라함 다음에 아들이 누굽니까? 이삭이죠. 이삭에도 뭐가 들어있겠어요? 장차 오실 예수님 십자가의 칩이 장착(탑재)되어 있겠지요? 그러면 아브라함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 이삭 마음에 구멍이 뻥하고 뚫리겠죠? 뭐가 중심지(중앙)에 구멍이 뚫리겠지요.

그러면 이삭에게는 또 어떤 구멍이 뚫리느냐 그것을 저는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어요. 그것은 뭐냐 특이함이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메시야는 특징이 없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에 신의 아들이다 하면 뭔가 보통 사람하고 다른 특별한 징후가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찾습니다. 자 이삭이 축복을 할 때 야곱 안에 메시야가 탑재되어 있다는 것을 이삭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지요. 왜? 자기의 축복을 어디다가 물려주려고 했습니까? 에서한테 물려주려 한 거에요. 야곱은 아무리 봐도 이삭(아버지) 눈에 특이성이 눈에 띄질 않아요. 평범하기에 메시야에요.

왜 평범한 것이 메시아냐? 우리는 메시야를 특별한 사람으로 찾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걸 피해버립니다. 마태복음 25장을 잠시 한 번 봅시다. 38,39절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예. 지금 누가 누구보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지옥가는 사람한테 한 거에요, 천국 가는 사람한테 한 거에요? 천국 가는 사람한테 했지요. 자기를 천국에 집어넣어주는 임금님 보고 이야기하죠. 뭐라고 합니까? 제가 언제 주를 위해서 일했습니까? 지금 우리는 생각하기를 햐! 주님이다. 주님이니까 잘 모셔야지!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주님을 알아본 게 되지요? 주님다운 어떤 특징을 발견한 게 되지요?

그런데 이삭은 어떻습니까? 이삭은 에서냐 야곱이냐 에서냐 야곱이냐 하면서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느 쪽이 축복성과 연결되어 있다? 야곱이 아니고 에서로 본 거에요. 에서가 훨씬 더 자기가 보기에는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동생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강제로 개입해버리죠. 쉽게 말해서 이삭을 죽여버립니다. 이삭이 자신이 엉터리라는 사실을(사실 이삭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이삭의 잘못된 선택을 노출화시켜가지고 니는 니 선택에 의해서 결단코 천국에 간다 못 간다? 결코 니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못된다는 것을 완전히 까발려버렸지요.

그러면 이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켜보면 뭡니까? 저 예수를 믿습니다. 니가 믿는 예수는 예수가 아니거든. 저는 성령을 믿습니다. 니가 선택한 성령은 성령이 아니야. 저는 복음을 압니다. 니가 선택한 복음은 복음이 아니야.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그렇게 개입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이에요. 그렇게 개입해가지고 우리가 진짜 예수는 이런 분입니까? 라고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이 문제가 되어버려요. 알게 돼 버리면 그것을 정답으로 또 소유하게, 쥐게 되어요. 아 머리 나쁜 사람들은 이쯤에서 헷갈리게 됩니다.

3+5=8인데 산수를 좀 못 하는 아이가 3+5=7로 했잖아요. 그러면 엄마가 수정해줍니다. 얘 3+5=7이 아니고 3+5=8이야. 라고 되잖아요. 그러면 걔가 다음부터는 엄마보고 3+5=얼마? 8 그래 맞았어. 이제 똑똑했구나. 이게 우리가 아는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3+5=7이라고 하니까 주님이 3+5=8이야 이렇게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 묻는 거에요. 3+5=얼마야? 하고 물으니까 우리가 3+5=8입니다. 하니까 아니야 3+5=9야 이렇게 이야기한다니까요. 본인이 정답을 말해놓고 정답을 이야기하니까 정답이 안 되는 거에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입에서 과도한 의미가 흐른다. 이게 의미론에 나오는 건데 우리의 입술을 열어서 말을 하게 되면요 우리가 감당못할 넘치는 의미들이 나와요. 그 의미는 우리가 조성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중에 한 가지 의미를 뽑으라고 주께서 일부러 조작한 거에요. 제가 이번 수련회 때 했잖아요. 언어는 뭐라고요? 언어는 중지다. 왜? 많은 의미 가운데 하나를 채택한 거에요. 제대로 말 못해요. 아까 커피는 아닌 것 같고 색깔이 이상한 것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뭐였습니까? 두 잔 먹었는데.. 미숫가루.. 미숫가루? 그런데 다른 것과 좀 다르데요 미숫가루를 먹으니까 오묘한 이 맛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네. 이게 남자한테 참 좋은 건데 표현할 길이 없어요.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어요. 뭐 씹히는 식감도 있고 그러면서도 뭔가 달콤하면서도 아주 쓴 건 아니고 그러면 옆에서 뭐야 뭐야 똑바로 말을 하라니까 글쎄 말로 하려니까 말이 새는 거에요. 자꾸 새버려요.

이 말은 내 쪽에서 그 중에 하나를 잡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에요. 그냥 그 맛을 즐기면 되는데 그걸 남한테 표현을 하려고 하니까 표현한 순간 내가 표현한 주역이 되고 주체가 되고 내가 주인이 되니까 모든 의미는 손가락에 모래빠지듯이 다 빠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삭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은 복의 주역은 이삭 니가 아니고 니는 시다발이고 누가 주역이다? 주님 자신이 주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삭이 아니고 이삭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이삭이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주기철이 구원하는 게 아니고 어떤 목사가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살아계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목사는 그냥 시다발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목사를 보면 안 됩니다. 목사는 우리의 실패를 유도하는 사람이고 우리의 잘못을 까발려주니까 세상에 그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전부 다 잘난 사람인데 십자가 앞에 서면 못난 사람되니까 못난 놈,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이에요..진짜 행복한 순간이다. 행복한 교회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나를 감당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못하게 만드는 거 이게 최고의 행복한 거에요.

우리가 나를 구원할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구원할 가치가 없는 거에요. 우리가 왜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야 되는가 우리가 구원 받을 가치가 없어요 가치가 없기 때문에 우리 손으로 죽지 않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여버렸어요. 나와 함께 죽고 우리를 죽였어요. 이제는 더 이상 가치 찾지 마라. 니 더 이상 의미없다. 니 죽었는거야. 그 다음에 살고 안 살고 누구 뜻입니까?

이번에 자리가 남아요. 그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주님으로 교체된 자리거든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자리란 말이에요. 그 부활한 자리가 내 자리를 차지해 버리면 (내 자리가 아니고 이미 주님의 자리에) 새로운 나가 새롭게 추가적으로 발생되는 거에요. 무엇의 이름으로? 생명책에 주님의 이름에 기록된 새로운 생명체가 여기에서 발생되어 버리면 그 발생된 그것의 영이 미리 와 버리면 이 몸은 옛날 몸이고 우리의 영은 날로 새롭고. 그럼 우리는 이중생활합니다. 영은 주님의 마음이고 우리의 껍데기는 아담 껍데기고. 우리의 몸은 나만 잘되기를 원하는 욕심 덩어리고.

주께서는 그걸 쿡쿡 쑤시고. 내부에서는 그게 죄야. 하고 쿡쿡 쑤시고 있고.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내 힘으로는 절대로 나를 구원할 수 없는 그런 입장을, 그런 존재를 만들어주신 그 자체가 이 땅에서의 성육신처럼 제 2, 제 3의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우리가 살아갑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 이 사도 바울이 한 고백. 그 고백이 오늘날 우리의 고백이기를 바랍니다.

이삭은 특징을 몰랐어요. 왜? 특징없는 게 메시야니까. 아무 특징이 없어요. 아까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처럼 제가 언제 주님한테 봉사했습니까? 봉사한 적 없어요. 주님이 하신 말씀은 니가 봉사한 것을 골라대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봉사했다면 니는 날 위해 봉사한거야. 그걸 그냥 그대로 내 말이니까 수납해. 아 주께 봉사했구나. 주께 마실 것을 줬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니가 주역이 아니고 니가 주인공이 아니거든. 니는 니가 모를 때 이미 내가 주인공으로 너를 시다발이처럼 다루었다 말이죠. 이제 마지막 심판 때에 보니까 그게 딱 까발려지는 거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헝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우리는 메시야의 특징을 찾지 마세요. 그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그 모든 판단은 나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런 식으로 똑똑한 척한다고 하는데 하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아브라함 했지요, 이삭했지요, 물론 창세기 공부하면 야곱도 하고 하겠는데 지금 그럴 형편이 안되니까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엘리야 찾지 말고 예레미야 찾지 말고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어떻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죠.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다. 어리석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알게 되면 참 내가 어리석은 것을 믿는구나 라는 감격이 있어야 됩니다. 남들이 어리석다고 내다버린 것을 우리는 뭐 이런 지혜가 있어 남들이 어리석게 보는 것을 내가 어리석지 않다고 보여지는 것은 이미 그 십자가라는 그 어리석음이 나 인간을 개조해버린 후의 이야기에요. 날 이미 다른 인간으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에 남들은 농담하나 그거 뭐 십자가가 뭐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것만이 나를 구원할 능력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창세기를 통해서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속과 겉이 다른 이중생활을 도리어 감사케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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