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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4 11:18:38 조회 : 3192         
혜화동 특강 - 언약의 흐름- 151203 이름 : 이근호(IP:119.18.9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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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IP:119.♡.94.40) 15-12-25 21:58 
20151203 혜화동특강a-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성경의 맥락이라는 교재를 가져 왔습니다. 성경의 맥락 가운데서 구약 부분이 무려 14페이지까지 이어집니다. 성경을 볼 때 사람들이 구약을 잘 알지 못한 채 신약을 보기 때문에 신약 해석이 엉터리가 많지요. 그래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제일 큰 관건이 됐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구약에서 신약으로 연결할 때, 유대인들은 보통 구약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으로 끝이에요. 더 이상 선지자는 없기 때문에.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의 모든 것이 신약에 완성이 된다고 하니까 구약을 보는 의견 차이가 완전히 반대가 되겠지요. 하나는 구약자체로 된다고 보고,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은 하나의 질문이고 그 해답은 신약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완료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자체가 미완료라고 생각할 때 유대인 같으면 어째서 완료가 또 새롭게 추가되는지 당연히 의문점이 있을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유대인들의 생각을 일단 이해해야 돼요. 구약성경으로 충분한데 넉넉한데 왜 신약이 필요한가? 그것은 너희들이 구약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약이 필요한 게 아닌지 유대인들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약 입장에서는 제가 강의하게 되면, 유대인들의 구약해석을 알 필요가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유대인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잖아요. 인간으로서 그들이 구약성경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도 그런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경유하고 거쳐 와야 신약이 새롭게 보여요. 유대인들은 완벽에 완벽을 기해서 구약을 해석했습니다.

 

그걸 축자적 해석, 더 나아가서 은유적 해석, 비교적 해석, 그 다음에 영적 해석, 이렇게 나오는데, 축자적 해석은 기본적으로 문자 자체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은유와 비유는 비슷한데 문자만 보지 말고 다른 구절들이 서로 관련돼있다고 보는 겁니다. 한 구절만 보지 말고 다른 구절과 균형 있게 맞춰야 하나님 뜻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세 번째 영적 해석이란 것은 그렇게 해석해도 하나님 뜻을 다 알 수 없지만 영적인 신령인 경건한 마음이나 신앙심을 가진 사람에게만 특별히 보여지는 해석이 추가돼야 된다. 그들이 그걸 선지자의 해석이라고 보는 거고요. 무슨 뜻이냐 하면 선지자들이 나타났을 때 전에 있던 하나님이 주신 계시나 약속이 있잖아요. 약속을 선지자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살펴보니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 이상의 것이 나오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선지자처럼 해석하면 우리 해석은 정답이라고 감안할 수 있지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영적인 해석을 하게 되면 더 이상 해석은 없지요. 영적인 해석이 그냥 성경해석만 한 게 아니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까지 열어주셨다. 그런 경우에만 영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걸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신이 임하면 해석을 하되 그 해석이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해석이 된다고 유대인들은 본 겁니다.

 

-우리가 본 것과 똑같네요.

 

똑같지요. 그러니까 경유해야 돼요. 문제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해석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그러면 유대인들이 인간 가운데 제일 똑똑하다고 치고, 예수님도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했으니까, 가장 훌륭하다고 치고 훌륭한 사람이 실수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실수는 당연한 거죠. 결국 유대인이 실패한 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성경해석 실패자,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인간이 알라고 준 책이 아니고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려고 비밀 된 계시로 다가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의 해석의 한계를 극복하게 된 사람들, 그걸 뚫어버린 사람들이 성령 받은 열두 사도가 되지요. 기존에 인간의 해석의 문제점이 뭔지 그들은 알아요. 그걸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옛사람으로는 성경은 해석되지 않는다. 그러면 새사람으로 해석하면 되느냐? 새사람으로는 해석되지요. 그런데 새사람은 옛사람과 연결점이 없어요. 그건 유대인들이 실패한 것을 그대로 수요한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성경을 문자적 해석, 은유적 해석, 비교적 해석, 영적 해석인데 이것마저 유대인들의 해석은 나중에 역사적으로 반복된다고 해서 역사적 해석으로 완결됩니다. 그런 해석조차도 옛사람이기에 할 수밖에 없는 해석이 돼버려요.

 

-선지자들 해석과 사도들의 해석과는 같습니까?

 

다르지요. 유대인들이 선지자들 해석이라고 생각했던 것조차 사도들은 옛사람의 해석으로 본 겁니다.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세례요한이 제일 큰데 천국의 어린아이도 세례요한보다 더 크다고 했거든요. 세례요한은 선지자 중에 마지막 선지자잖아요. 선지자보다 어린아이 더 해석을 잘한다는 겁니다.

 

-선지자들도 성신을 받은 사람?

 

성신 받았지요. 성령을 안 받았다는 거예요.

 

-성신과 성령의 차이 때문에.

 

예. 그러니까 사도들은 구약을 미완료로 본 거예요. 유대인들은 그 자체로 완료로 보고. 그들은 그 자체를 완료로 보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충족된다고 보고 사도들은 충족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만나고 보니 그 전체가 가짜더라.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유대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지요. 아브라함이 나 보기를 고대했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대목인데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봤다는 해석이 구약에 아무리 봐도 안 나와요. 아브라함이 서른세 살 먹은 목수의 아들을 기다릴 리가 있겠어요? 없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의 이런 해석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유대인들의 해석을 경유해줘야 돼요. 왜냐하면 그 전체가 옛사람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옛사람의 사고방식이 뭐가 문제인지 유대인들은 자체적으로 알 수 없었어요.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순수하게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받는다는데 그게 왜 거짓이 되고 왜 오류가 생기는지 말이 안 되거든요. 앞뒤가 안 맞아요. 하나님 말 순종하겠나이다. 순수하게 받는데 그게 오류가 있다는 말이 도저히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예를 들어서 잔 다르크가 1431년 백년전쟁 가운데에 프랑스 사람으로서 프랑스 편에서 영국을 치는데 선봉장에 섰거든요. 그 이유가 계시 받아서 그래요. 잔 다르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겠어요? 잔 다르크는 욕심도 없었고 그냥 받았단 말이죠. 그냥 줘서 그냥 받았는데 거기에 무슨 오류가 있겠어요. 커피 줘서 받았을 뿐인데 네가 오류를 만들었구나, 하면 자기는 납득이 안 되지요. 있는 그대로 받았는데.

 

이천 년 기독교 성경해석에서 사람들이 이 점을 빠뜨리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 받고 하나님의 계시 받으면 그게 진리인 줄 알고 있어요. 그 자체가 오류인데. 그럼 오류 없이 진짜로 구원받는 방법 없나? 오류 안에 진실이 있어요. 오류임을 인정해야 그 안에 진실이 있어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계시를 준 것은 우리한테 문제 있음을 최초로 알려주기 위해서 준 겁니다. 우리는 그냥 받기만 하면 된다는데 받는 순간 내가 괴물이고 악마의 앞잡이라는 사실을 발각당하는 일의 출발이 되는 겁니다.

 

엘리야나 예레미야가 계시를 받는 순간 그들은 오실 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지요. 계시 받아서 시키는 대로 한다고 해서 자기가 순수한 것도 아니고 오류 없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죄인임을 알기 때문에. 다윗 같은 경우에 밧세바와 간음한 것도 신의 계시였습니다. 나중에 나단 선지자가 와서 자기가 바람피운 것을 신의 계시에 합류시킬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그전까지 다윗은 순수하게 살고 있었어요. 왕이니까 모범을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바세바에 대해서 마음이 동해서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은 본인이 의도한 게 아니에요. 인간의 육신이란 육신이 감정을 다스리는 게 아니고 감정이 육신을 가지고 놀지요. 충동이. 인간은 한 마디로 어쩔 수 없어요.

 

그런데 내가 오류 있음을 깨닫기 위해서 어떤 시도를 한다면 그건 오류에 오류를 낳지요. 그래서는 안 돼요. 가만있으면 오류를 알려주는데 나서서 나대면 그건 불교고 종교지요. 나 자체에 문제 있다는 것은 누가 지적해서 된 게 아니고 현재 나라고 여기는 그 상황 자체가 나중에 주님 보시기에 그 자체가 문제 있음을 알려주는 자료들을 모으는 겁니다. 이때까지 살아온 게.

 

그게 궁극적인 게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사람이 왜 죽는가? 죄 값으로 죽는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이러면 벌써 오류잖아요. 내가 무슨 나쁜 죄를 지어서 죽습니까, 라고 시작한다면 다시 말해서 내가 죽을 수밖에 죽게 되는 죄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면 오류가 시작된 거예요. 물론 가만있어도 오류지만.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하게 되면 오류가 없는 게 아니고 시킨 대로 하게 되면 오류가 발생되면서 구원이 돼요. 그런데 시킨 대로 한다는 그것을 주님은 뭐로 보느냐 하면, 우리의 장점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숨어있는 죄를 들추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요. 선교, 전도, 목회, 설교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모 노릇하는 것, 감춰놓은 나도 모르는 죄를 들춰내기 위해서 그런 환경을 조성해 가시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속 시원하게 다 풀려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한 것은 엄청난 오류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자랑스러워 할 게 아니고 아브라함이 지은 죄가 우리한테 그대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무슨 자랑거리로 생각했던 겁니다. 그게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무슨 죄에 속했느냐? 예수님은 같잖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더 예민해 있어야 되지요. 모든 인간이 죄의 종인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으로써 죄의 종의 모델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 모델이 뭐냐? 바로 메시아를 기다린 그들에 의해서 메시아가 살해당하는 사태가 일어나지요. 가까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죄가 더 노골화된다니까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경우에 그 사람이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잖아요. 이미 유대인들의 해석을 다 압니다. 자기는 거기에 대해서 어떤 하자가 없다고 본 거예요. 완벽한 해석이라고 본 겁니다. 아까 제가 해석 이야기했지요. 문자적 해석, 은유적 해석, 비교적 해석, 영적 해석, 그리고 그 해석이 역사적으로 되풀이 되면서 전승되고 구전되고 전달되어 계시를 보조하는 계시로서 활용한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정통한 것이 사도 바울이지요.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건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그냥 예수밖에 없는 거네요. 죄를 깨닫게 한다는 자체도 죄고 다 죄니까

 

그래서 결론적으로 뭐냐 하면, 하나님의 자기 증명입니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굴 시험하는 게 아니고 본인이 본인을 시험하는 거죠. 하나님 자체 안에서 이뤄지는 여파가 천지창조죠. 인간은 빠지는 거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죠. 열차 지나가면 바람에 흘리는 것처럼 하나님이 확 지나가니까 인간이 거기서 흔들리고 죽고 죄 짓고 하는 거예요. 인간 역사가. 불바다 되고 마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요. 그 관계가 구체화된 것이 이 세상입니다. 성부와 성자 관계. 그리고 모든 성경 계시는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에게만 준 거예요. 그리고 아들이 그 말씀을 홀로 다 이루지요. 물론 성령의 힘으로 이루시고 합니다.

 

이런 고백이 바로 예수 안에서 이 고백이 나오게 돼있어요. 이런 고백에서 내빼지 말고 이런 진리를 알았다고 단독으로 나가면 안 돼요. 건물 안에 있은 것처럼 예수 안에서 머물러 있으면서 이런 고백이 나오고 만약에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세상에 바쁘다고 놓쳐버리면 건물 바깥에서 이 건물에 대해서 설명하게 돼요. 저 건물은 몇 층으로 돼있고. 설명한다는 자체가 유대인들이 한 거예요. 하나님 있고 자기 여기 있고 중간에 하나님께서 계시 내려주시고. 따라서 자긴 여기 있으면서 계시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그게 유대인들의 잘못인 거예요.

 

그들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을 너무나 인간적인 의미로 해석했지 나중에 언약적 의미로 해석할 줄 몰랐어요.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지만.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고. 열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다녔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함께 있는 게 아닌데. 결국은 예수님 혼자 남고 다 도망가잖아요. 함께 있었던 게 아니에요. 지리적으로 지역적으로 장소적으로 함께 있다고 그게 함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장소적인 함께 있음을 뛰어넘을 재주가 인간에겐 없어요.

 

유대인들이 하늘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까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게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늘나라는 예수 안에 있다. 그런데 그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듣지요. 나중에 성령 받으면 그게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인식론)은 성령이 처소가 되어 확인해야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예수 따라가려 했거든요. 목숨 걸고 따라간다 할 때 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 처소가 마련되면 베드로가 거기로 가는 게 아니고 처소가 이동해서 베드로를 넘쳐버립니다. 그 순간부터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전부터 예수 안에 있던 것을 뒤늦게 차후적으로 알게 되지요. 그러나 인식론적으로 본인 중심이기 때문에 주님과 자신을 떨어져있고 어쨌든 간에 주님을 따라 붙어야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나중에 성령이 와서 보니까 내가 주님을 붙든 게 아니고 주님이 나를 붙든 걸 그제야 아는 거예요. 처음부터 주께서 나를 사랑했다는 걸. 그런데 시간적으로 창세전까지 가요. 창세전부터 베드로가 태어나야 될 것까지 예수 안에서 이미 확정된 사실을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창세전까지 가서 한꺼번에 알게 되지요. 처소적으로 예수 안이란 처소가 시간과 공간을 능가해버립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식할 때는 인간이 태어나서 자기 몸 바깥은 자기 몸이 아니잖아요. 이걸 내 몸이라고 하면 정신병자지 말이 안 되잖아요. 내가 성경책을 쥔다고 해서 성경책을 내 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몸이 성경책을 쥐 것이죠. 그래서 놔버리면 성경책과 따로 되잖아요.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는 안과 밖은 자기 몸 중심이에요. 내 안에 들어오면 내 안에 있고 바깥에 있으면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몸으로 바뀌면 어디 있어도 그리스도 몸 안에 있는 겁니다. 몸 안이라는 장소적이 아니고 몸 안에 있는 기능을 말해요. 사도 바울이 로마 가나 지중해 폭풍 속에 있으나 예수 믿기 전에 바리새인으로 있으나 어디 있어도 그리스도 언약 안에서 활동하는 셈이 됩니다.

 

그게 성경 시편 104편 29절 읽어보세요.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모든 만물이 주께서 호흡 주니까 숨 쉬고 호흡 거두니까 죽고, 참새도 거북이도 기린도 하물며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30절에 보면,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늘 새로운 작용이 이미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이뤄진 겁니다. 유대인이든 북한의 김정은이든 관계없어요. 전부 주님이 호흡을 준 거예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네요? 그게 아니고 언약적으로 활동하거든요. 그러면 북한의 김정은 언약적으로 저주받기 위해서 호흡을 준 거예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기 위해서 지금도 이슬람의 IS라든지 살려두는 겁니다.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인간 보기에는 이 세상이 악이 있고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완벽하게 잘 되고 있어요. 눈 오는 것도 그렇고 조금도 실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부 주의 신이 언약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번 강의의 핵심은 ‘언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약속과 언약은 다른데 하여튼 언약적으로 성경을 봐야 되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마지막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이 새 언약이기 때문에. 새 언약을 다 이룬 겁니다. 그러면 전에 있는 언약은 옛 언약이 되지요. 옛 언약은 옛 사람과 관련되어 있고 새 언약은 새로운 피조물과 관련돼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아니하면 새 언약을 알 수 없어요.

 

시편 104편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 주의 신이 모든 인간을 지금도 통제하고 있습니다. 여기 시편 104편 24절 보게 되면,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나이다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보세요. 악어가 놀지요. 27절에 보면, 때를 따라 식물 주시잖아요. 그런데 그 모든 것에 주의 신이 관여하죠. 주의 신은 주의 명령을 따르죠.

 

어떻게 명령을 따르는가? 원칙이 있어요. 그 원칙을 이스라엘에게 준 겁니다.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의 창조원칙이 있구나. 그 원칙은 언약이 되는 겁니다. 목사님, 그 원칙이 뭡니까? 그건 장차오실 메시아가 보여줘요. 원칙이 있다는 건 아는데 그건 희미하게 알고 다 몰라요. 미완료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언약을 완수하는 당사자로 오해한 겁니다. 우리가 지키면 된다는 거예요. 자기가 문제가 있고 오류가 있다는 건 생각 못하고. 우리가 인류를 대표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온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잘 활용했어요. 말씀을 순종해서 지키겠다는 것이 바로 숨겨진 악마의 최후의 양상, 주장이 그겁니다.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악마가 부추겨서 선악과 따먹게 했어요. 왜 따먹게 했을까요? 너도 나처럼 되기 위해서. 나처럼 된 것이 뭐냐 하면, 선과 악을 내가 판단 내려서 내가 선한 쪽을 해버리면 구원에 대해서 주의 은혜가 삽입될 여지가 없어요. 내 대신 누가 죽어서 구원되는 은혜성이 삭제되는 것이 바로 악마가 노리는 겁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 이게 악마의 마지막 노림수에요. 그 행함 가운데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다 포함되지요.

 

그렇게 행하려면 하나님의 언약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야 되겠지요. 내가 행할 수 있는 것, 불가능한 원칙은 안 돼요. 그럼 내가 구원에 실패하기 때문에 말씀은 하나님이 주고 실천 세목에 대해서는 본인이 기준을 만들어야 돼요. 왜냐하면 본인이 행동해서 완성을 봐야 되니까. 못 지키겠다고 하면 안 되잖아요. 기어이 희망을 가져야 돼요. 자기 자신한테. 지킬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합니다. 그 방안을 내가 만들어서 이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당당해질 수 있지요. 바리새인처럼. 참 대견하지요, 그지요? 묻고 싶은 거예요.

 

이런 속성이 바리새인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하나님,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니까 의미를 주옵소서. 예수님이 말하시기를 “너희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했나?” “했습니다.” “그래?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버릴 것이다. 나를 배신할 것이다.” 이게 주님이 내린 결론이에요. 그리고 가룟 유다는 자살할 것이고. 나름대로 열심히 한 게 결국 배신이에요. 나를 찌를 것이다.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이야기이기도하고.

 

그래서 제가 아까 유대인을 반드시 경유하란 거예요. 그들이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순수하고 순진한 신앙, 낮추고 또 낮추고,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내려놓을 때까지 다 내려놓은 것. 그게 악마가 하는 짓인 것을 누가 알았겠어요. 그게 악마가 마지막 내민 카드란 사실을. 땅 끝까지 가서 전도하고, 자기 몸을 내놓고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고 천사의 말을 하고. 그게 악마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에요.

 

기어이 대신 죽었다는 것을 제거하려는 거예요. 대신 죽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왜 대신 죽어요. 저도 할 만큼 할 수 있는데 그 정도로 우리가 나쁜 존재는 아니잖아요, 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 긍정하고. 그래서 교회 다닌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교도소에서 십자가 피 믿으면 구원받는 겁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달린 그 현장에서 살인강도로 잡혀서 오늘밤 낙원에 있으리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의 가치를 잊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의 제일 큰 약점이죠. 자기가 한 일을 자기가 잊지를 못해. 그게 나쁜 일이든 착한 일이든 회개하든 반성하든 잊지를 못해요. 반드시 거기에 의미를 두게 됩니다. 사실은 I’m nothing.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고 계속해서 눈 펄펄 날리듯이 눈이 계속 오는 거예요.

 

눈 내린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눈송이 하나하나가 바쁘잖아요. 우리는 안 바쁩니까? 아침에 일어나 세수해야 되고 혈압 약 먹어야 되지요. 굉장히 바쁘지요. 그런데 이런 눈송이 내린다고 우리가 구원됩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의 눈송이처럼 아침에 혈압 약 먹고 설치고 운동하고 성경 두 장 본다고 구원됩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활발하게 활동케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런 게 다 모여서 nothing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들이 모여서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것.

 

그러니까 마음을 편하게 잡숴요.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기준은 뭐냐? 이것조차 아무것도 걸 알고 모든 걸 하는 거예요. 성경해석도 해보고 선교도 해보고 십일조도 해보고 다 해보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걸 알고 할 때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 일을 하게 하신 거예요. 우리 육신은 충동과 욕구를 우리 스스로 잠재울 수 없습니다. 성깔, 욱하는 것 반드시 나오게 돼있어요. 참으면 나중에 곱빼기로 나와요. 참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잖아요. 욕망이라는 게.

 

그 욱하는 성격들이 구약에서 나쁜 평가를 받은 자들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우리 모습이에요. 대표적으로 가인, 라멕, 사울 왕 그리고 발람 선지자. 특히 발람 선지자는 목회자가 명심해야 되지요. 딱 우리 모습이에요. 나는 이런 뇌물 받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여호와의 지시를 받고 축복과 저주를 내리겠습니다. 얼마나 발람이 자기 절제를 했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발락 왕의 뇌물이 성공했잖아요. 이스라엘 사람이 멸망할 거리를 만들었지요. 바알브올에서 그들이 이방신에게 음란하게 제사함으로써. 그 아이디어를 누가 제공했어요? 발람이 돈을 받고 했잖아요.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 받을 때는 나는 주의 종이니 이런 것 안 받습니다, 하다가 몇 억 받을 때는 어떻게 해요? 주의 축복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 생각해볼 때 남쪽에 있는 이름 없는 선지자가 여로보암의 재앙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그 선지자가 진짜 선지자인 줄 알고 영접하다가, 거짓말하잖아요. 나도 계시 받은 사람이니까 대접받으라고 해서 대접받은 남쪽 유다 선지자가 사자한테 물려죽잖아요. 그런데 사자가 잡아먹질 않아요. 베드로한테 닭을 보낸 것처럼 그 사람한테는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낸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북쪽 선지자가 내 탓이라고 한다지만 남쪽 선지자는 뭐예요? 분명히 하나님 지시에 어떤 누구에게도 대접받지 말라고 사전에 언질 했잖아요.

 

어떤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필히 네가 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십계명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뜻은 뭐예요? 필히 거짓말을 매일같이 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간음하게 된다는 뜻이에요. 탐내지 말라 것은 탐내게 돼있다는 거예요. 안식일 지키라는 말은 안식일 어기게 돼있다는 겁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다른 신을 섬기면서 평생을 보낼 것이라는 거예요. 구약해석 끝났네. 끝난 거예요. 명령어만 해석하면 끝난 거예요. 어떤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은 그 반대의 속성을 이미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는 좋은 편에 서지 말고 나쁜 편에 서서 그 나쁜 짓을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설교 현장에서 절감해야 됩니다. 아무리 해도 아무리 도를 닦고 기도를 해도 우리는 성경 말씀을 위반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음을 다 끄집어내야 돼요. 그래서 설교 막바지에 우리는 절망으로 끝나야 됩니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대신 죽음의 십자가를 배치해야 되지요. 그러면 십자가 안에서 다시 과거를 볼 때 우리는 막 산 게 되고 그걸 미래형으로 바꾼다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막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기쁨으로 확인하게 되지요. 막 살고 싶은데 주께서 막 살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그만 두게 하시는 거예요. 이제는 예수님의 앞잡이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앞잡이는 상당히 처음 듣는 용어지요.

 

-좋습니다.

 

좋지요. 그동안 우리가 누구의 앞잡이란 생각을 잘 안 하잖아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판단 내린다고 했기 때문에 누구 앞잡이라면 기분 되게 나쁘잖아요. 고린도후서에 보면 앞잡이란 용어는 안 나오지만 그 뉘앙스가 나와요. 두 군데 봐야 하는데 1장 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그 다음에 21절, 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22절에 성령을 우리에게 줬지요. 그게 19절, 21절에 보면 활동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막 살게 하시는 일을 말해요. 우리가 성령을 소유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지금 활동자체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증명해주는 거죠. 소유하면 안 돼요. 소유할 쇼핑백이 낡아 터져서 죽어버립니다. 끝나버립니다. 성령을 담아둘 쇼핑백이 없어요. 그걸 허락지 않았어요. 점점 얇아져요. 죽어가면서. 담을 생각하지 말고 움직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앞잡이라 하는 거예요. 앞잡이는 단독적으로 자길 챙기는 게 없다는 뜻이에요.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어떤 나쁜 사람이 이상한 음성 조작해서 전화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어느 집에 침투해서 이 일을 해라. 만약에 하지 않으면 네 딸의 목숨은 위태롭다. 그러니까 그 아줌마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화려한 유혹>이란 드라마 하고 있거든요. 딸 목숨 때문에 억지로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그게 앞잡이가 아니고 뭡니까? 그동안 우리는 죽기가 무서워서 죽음을 담보로 살아보려고 마귀의 앞잡이 된 거예요. 히브리서 2장 15, 16절 말씀처럼. 그런데 이제는 우리는 로마서 6장의 말씀처럼 죄의 종이 아니고 의의 종이죠. 종이 앞잡이잖아요. 종의 특징은 자기 게 없어요. 자기가 챙길 자기 몫이 없다니까요. 의의 앞잡이 노릇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대표적이고. 앞잡이가 뭘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지금 부지런히 설치는 게 앞잡이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살아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이고.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어야지. 그 계획 잡는 것 소용없어요. 주님 계획은 따로 있거든요. 그게 고린도후서 2장 14절부터 16절까지 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누가 이걸 감당하리오. 기능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구원받으려고 한 게 아니고 누가 시켜. 주님이 시킨 거예요. 시키는 계시가 온 게 아니고 시키라는 계시 없을 때도 화장실에서 용무 볼 때도 구원받는 자에게는 향기로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악취로, 망하는 자에게는 악취에요. 그래서 그들이 당신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 되게 나쁘고 악취로 느껴질 때는 그것도 주의 기능이 그래요. 그런 결과를 도출한 것도 나를 사용해서 하신 주님의 일의 결과로 그들에게는 악취로 들려줘야 돼요. 그래서 사람을 설득하거나 내 사람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본인이 악취를 느껴야 되는데 본인이 냄새가 더럽다는 게 어떻게 하겠어요.

 

물론 예의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지만 의도적으로 그들을 포섭할 필요는 없어요. 포섭하는 게 주의 앞잡이 역할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있던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어요. 마태복음 4장에도 예수님이 있던 그 현장도 악마가 다스리는 세력이잖아요. <헝거게임>이란 영화가 있는데 어떤 특정 구역에 반란자들이 케피톨이란 진짜 세계와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지금 어느 세계가 진짜 세계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지요. 그러면 이 세상은 악마의 나라지요. 이게 플라톤의 이원론이니 뭐니 관계없어요. 성경 자체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단어는 네자 단어로 확실해요. 천상회의. 구약에 나오지요. 천상회의는 천상에 있겠지요. 지상에는 천상회의가 없잖아요. 미가야라든지 에스겔은 천상회의에 참석했잖아요. 따라서 이 세상은 둘로 나눠진 게 맞지요. 천상회의라는 단어 자체가.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열렸다는 말이 뭡니까? 이 세상은 오리 알처럼 있는데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고 그걸 연결하는 세계가 열리면 하늘이 열리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께 임하니라. 결국 인간은 갇혀있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죄에 갇혀있지요. 다른 표현으론 율법에 갇혀있다. 또는 사탄에 갇혀있다. 도둑이 와서 주인을 묶고 가재도구들을 가져가는 것처럼 하늘나라가 이미 그런 식으로 임한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원론이지요. 하늘나라와 지상의 나라, 악마의 나라. 거기서 싸움을 하는 거예요.

 

여기 보면 전쟁을 벌이시는 하나님이죠. 구원 개념이 전쟁 개념이에요. 존재 개념이 아니고. “저,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 이렇게 물을 게 아니고, “저는 지금 무슨 전쟁하고 있습니까?” 질문을 그렇게 해야 된다고. 사도 바울도 영적 싸움한다고 했잖아요. 전쟁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이 몸으로 구원받았으니까 남은 것은 좋은 회사 취직해서 우리 자식과 행복하게 살아야지. 이게 전쟁입니까? 그건 전쟁 개념이 아니고 존재 개념입니다. 나만 살면 된다는 것, 살다가 주가 부르시면 천국 가야지. 이건 존재 개념이에요. 지금 전쟁을 벌여야 돼요.

 

이번에 요한계시록 할 건데 마찬가지에요. 전쟁 개념으로 이해해야 돼요. 여호와 하나님이 전쟁하는 하나님입니다. 다른 말로 만군의 하나님이라 하지요. 많은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하나님. 게하시와 엘리사의 대화중에 나옵니다. 아람 나라가 포위를 했지요. 게하시가 완전히 기가 죽었어요. 졸았다고 하지요. 벌벌 떨면서 선생님, 이제 죽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해주니까 이쪽 편에 천군천사 저쪽 편보다 더 많아.

 

문제는 여기서 유대인의 해석, 유대인의 시각을 봅시다. 유대인들은 그걸 보잖아요. 보는 정도가 아니라 달달 외우죠. 우리를 천군천사가 도와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모든 나라들은 하나님의 악마의 나라가 되어 주께서 반드시 괴멸시킬 것이다. 그런 해석 내리겠지요. 바울 되기 전의 사울도 그런 해석을 내렸잖아요.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평은 이렇습니다. 사울아, 네가 고생하는 것이 너만 손해다. 네가 그런 해석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그것이 나한테 해가 되는 게 아니고 너한테 오히려 네가 맨발로 선인장 가지로 스스로 찌른 것처럼 너한테 혹독한 시련이 주어진다고 이야기하지요.

 

엘리사의 그런 이야기가 나아만 장군 이야기도 마찬가지지만 항상 이스라엘 중심으로 돼 있잖아요. 이게 무슨 하자냐, 무슨 오류가 있느냐고 유대인들은 생각한 거예요. 제가 처음에 반드시 유대인의 해석을 경유하라고 했지요. 성경에 보면 나오니까. 성경에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망한 쪽 우리가 관찰자로 보지 말고 망한 쪽에 서면 돼요. 망한 쪽에 서 있으면 그들이 성경해석을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동의가 돼요. 왜? 그들이나 우리나 똑같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내 위주로 좋은 쪽으로 긍정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것이 우리한테는 아주 자연스럽고 저절로 나오게 돼있거든요. 이게 바로 오류가 되는 겁니다. 그럼 전쟁은 누구와 하느냐? 주님이 우리와 하는 거지요.

 

 

10분 쉽시다.

20151203 혜화동특강b-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의 제목은 전쟁.

 

첫 번째 쉬는 시간에 성신과 성령의 차이점을 이야기했지요. 성신은 언약을 따라서 언약이 나아가는 방향 따라 계속해서 새로운 기능을 보여주는 데 그 기능은 어떤 한 점을 수렴한다고 했지요. 언약이 완성되는 수렴하는 지점을 향하여 성신도 따라가서 성신의 기능도 수렴되고 있습니다. 그 기능은 모든 피조세계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완성하는 그쪽으로 몰고 가죠. 동물, 식물, 하늘의 별, 달, 모조리 다 성신께서 그쪽으로 몰아세웁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 하늘이 캄캄해졌지요.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모든 자연세계를 쥐고 계신 성신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한 공동 작업에 나서신 거예요. 물론 마귀도 거기에 포함됐고, 마귀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고 가룟 유다도 그렇게 한 것도 그렇죠..

 

성신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모든 인류를 구원함이 아니고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언약이란 주니의 속성, 공의로움이 공의답게 드러나고 긍휼은 긍휼답게 일어나기 위해서 인류는 두 패로 나눠져야 됩니다. 긍휼 입은 자와 하나님 공의에 의해서 심판받을 자로 분류되고 그런 것이 발생돼야 될 작업에 성신께서 관여하셔서 한쪽으로 수렴한다는 것, 예수 십자가를 향하여 모아지는 거죠.

 

그래서 가장 하나님의 비밀은 뭐냐? 정말 어떤 인간도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성령이 아니고는 아무도, 깊은 곳이라 했거든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십자가 외에는 깊은 곳이 없어요. 깊은 곳을 성령이 알려줬다는 말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도 바로 그것을 가리데 전력을 다하지요.

 

고린도후서 4장 3절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세상 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이 하는 목적이 있어요.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이미 알고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몰라도 인간을 통제하는 악마는 알고 있어요. 십자가 복음만 어쨌든 가려보자는 거예요. 이 세상에 있는 지도자, 대통령, 국회의원, 재벌 등 이 사람들이 하는 모든 활동은 어쨌든 간에 십자가 복음이 선포되지 못하도록 그걸 가로막는 데 있지요. 모든 철학과 과학을 총동원해서 여기에 집중합니다. 여기는 교회 그리고 교회권력, 기독교 모든 역사가 오직 복음을 가리는데 악마에 의해서 동원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으로 교도소에서도 구원받는데 그게 싫은 거예요. 교회를 잘 되게 하려고 복음을 포기해야 된다는 쪽으로 세상을 흘러가고 있습니다. 몇 명 모였니, 헌금은 얼마냐는 그 자체가 십자가 복음과는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의 관심사, 목사님 교회 몇 명 모여요? 두 명 모입니다. 아이고, 망했네. 저도 알아요. 처음부터 망했어요. 뭘 전하는지 묻는 게 아니고 결과를 보자는 거예요. 실적을 보자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 뜻이라면 많이 모일 것이고 아니라면 적게 모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인식이 십자가 복음과 인식을 유포시키고 확산시키는 겁니다. 바로 그 전쟁을 말합니다. 뭔가 처음부터 그 전쟁이 있었지요. 교재를 봅시다. 전쟁을 벌이시는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이죠. 전쟁을 벌일 때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이 언약이죠. 언약을 실현시키겠다는 것은 하나님 쪽이고, 어쨌든 간에 언약을 가로막겠다는 것은 악마고. 그러나 악마고 하나님이고 둘 다 인간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실재라 해요. 보이는 것은 상징. 인간이 보는 모든 것은 상징이거든요. 지난 우리교회 참석하셨으니까 아시겠지만 떡과 잔, 보통 교회에서 이걸 상징이라 하잖아요. 제가 거기에 추가했죠. 떡과 잔을 먹는 인간도 상징이라 했죠. 설교 핵심은 그거에요. 떡과 잔을 먹는다는 인간도 상징에 해당돼요. 상징은 실체가 있지만 실재는 아니다. 진실은 아니다. 허구란 말이죠. 보통 허구는 실체가 없는 걸 말하잖아요. 유령 같은 것. 그런데 실체를 가지고 있는 허구.

 

실체가 있는데 과학입장에서는 사모님은 과학을 하시니까, 인간의 몸이 허구가 아니죠. 실제로 수술하고 관절 고치고 류마치스 치료하고 허구가 아니잖아요. 실제로 손으로 만지잖아요. 만지다보니까 실체가 있으니까 허구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바로 성경은 그 전체를 상징으로 봐버리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성경해석 실패한 것이 뭐냐 하면, 자기 이스라엘을 상징으로 보지 않고 실체가 있으니까 실재로 본 거예요. 다른 나라는 없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빼놓고 준비된 나라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실재고 예수 안에 이스라엘을 숨겨놓았지요. 숨겨놓은 이스라엘이 있으면 역사 속의 이스라엘의 실체는 허구가 되는 겁니다. 허구기 때문에 허구적 기능을 발휘해왔잖아요. 허구적 기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반대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 기능을 한 겁니다.

 

특히 허구에서 사람들이 상징이라 해도 안 믿는 이유가, 여기서 죽음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죽으면 죽으리라. 이걸 흉내는 낼 수 있어요. 그걸 미메시스라 하는데 플라톤은 이원 세상이 실재 세계 따로 있고 이 땅을 가상 세계, 흉내 내는 세계로 봤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흉내 내기를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막상 본인이 죽는다면 이건 장난이 아니잖아요. 아는 지식이 내 죽음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너무나 실감나는 거예요. 아이, 죽으면 죽지. 그러기는 쉬어요. 배고플 때 먹을 게 있는데도 안 먹는다. 그건 어떤 인간도 못 이깁니다.

 

죽음을 기피하고 싶은 심정, 이걸 누가 아니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만이 실제가 되지요. 과학이든 철학이든 결국 죽기가 무서워서 어떻게 살아볼까, 하는 아이디어들이 모든 실용적 철학이고 모든 과학이고 사실은 종교도 그렇고. 죽기 무서워서 지옥 가는 게 두려워서 그렇게 하잖아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이스라엘이 자기는 실재라는 겁니다. 그러나 실재는 따로 있지요. 모든 게 상징이 돼버립니다. 상징이 될 때 결국 인간들은 이스라엘이 생각한 것처럼 여기 이스라엘 역사가 있다. 그것만이 진리요, 실재라고 했는데 그게 오류가 있을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아들 이삭을 바치는 이야기는 그때뿐만 아니고 처음 아브라함이 소명 받을 때부터 시작되었어요.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이 부를 때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했지요. 어디로 가는지 네가 알 바가 아니라는 거죠. 그럼 어디로 가는지 그곳이 실재가 되고, 내가 있는 곳에서 주께서 이끄시는 그곳을 모르게 되면 결국 이곳이 상징이 돼버립니다. 아브라함이 살아가는 몸, 자기 발걸음, 발자국 소리, 모든 것이 상징이 돼버리죠. 실재가 아니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이 상징이면서도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부르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끌어주심으로 인하여 허구라도 좋은 거예요. 왜냐하면 언젠가 허구가 끝날 때가 있기 때문에. 그게 아브라함을 부르신 소명이거든요. 가면서 아무것도 그냥 가는 게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실재 세계가 손에 만져지잖아요. 그 중에 하나가 네 아들 바치라는 것, 내가 지시한 곳에 가서 네 아들을 바쳐라.

 

그러면 아들이 실재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바치는 행위,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아브라함은 행위로 말미암아 자기 믿음을 기능적으로 표현한 게 됩니다. 그 행위는 본인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고 행위의 목표를 본인이 정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신 예상도 못한 목표를 정해놓고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벌어지는 그런 사건 자체가 주께서는 행함으로 규정해버리죠. 그런 낯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성령이 행하시는

 

그렇지요. 그렇게 되면 행함이란 게 특별한 행함이 아니고 복분자 마시고 커피 마시는 것도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되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는 복분자 마시지만 본인은 주께서 허락하신 은혜로 마시면 모든 게 은혜가 되니까 그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아브라함이 이삭 바치는 행위와 동일한 맥락의 행위가 돼버리죠.

 

그래서 아까 4장 마귀 이야기했고, 마귀가 설치는 것은 복음이고, 고린도후서 3장 3절에 보면,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여기 두 가지가 있지요. 육으로 해석하는 것과 영으로 해석하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나오거든요. 모세가 수건 쓴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거기에 영광이야기 나오지요. 처음에 모세가 수건을 쓴 이유가, 육으로 해석하는 것과 영의 해석이 실제적으로 기능적으로 수건을 써야 될 정도로 인간이 육이 감당 못할 현실을 유발하는 겁니다. 해석이, 해석이 아니고 새로운 낯선 현실의 등장이 해석이 된단 말이죠. 해석의 결과가 낯선 현실이 도래한 거예요. 그렇다면 그 해석은 하나님이 유발한 해석이고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오셔서 성령으로 역사한 이것이 주님의 영의 해석의 도달지점이다.

 

우리가 앉아서 기도하면서 해석한 게 영의 해석이 아니고 평소에 차 마시는 게 영의 해석이란 그런 뜻이에요. 눈부시지도 않은데? 예수님 당시는 낮아지신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눈부시지 않아요. 이것 하면서 눈부셔서 먹습니까? 그래서 간증집회가 위험한 거예요. 별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별을 보면서도 인자하심을 느끼는 것이 주의 영광인데 맨날 보는 별인데 뭐 별 것 있는가? 별 것 없어요. 하지만 별 것 있게 보는 것이 주의 영이 그렇게 함께 하게 되면 그 인자하심을 뽑아낼 수 있다 이 말이에요.

 

평소 살아가는 것, 가족끼리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 이게 웬 떡이냐고 느끼는 것, 작은 것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들풀 속에서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자기 자신의 죄를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아는 것, 이게 바로 오늘날 소자, 그리스도에 속한 소자들의 무심코 한 행동 속에서 주님이 나타난 겁니다. 제가 언제 주님께서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습니까? 배고플 때 언제 먹을 걸 주었습니까? 저는 돈 벌이만 할 뿐인데 언제 했습니까? 그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그러한 기능적으로 이미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럼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아시겠지요. 상징을 실재로 보는 패와 어차피 상징에 불과하다는 패와의 싸움이지요. 그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제 교재 봅시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범죄의 주체는 인간이고 회복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여기서 회복이라 했는데 회복이란 말을 제가 안 좋아해요. 통일교에서나 또는 워치만니 쪽에서 많이 사용하고 기존 교회도 많이 사용하고. 심지어 <회복>이란 영화도 있고 회복 교회도 있어서 오해될 소지가 있어서, 다른 말로 갱신이라 해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아니지요. 왜냐하면 에덴동산은 상징이니까.

 

[신의 나라를 그 나라에 건설하고자 하신다. 인간나라는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창세기 3장에 보면 전쟁을 하잖아요. 전쟁의 원칙은 언약이죠. 언약을 벌이시는 거예요. 인간들은 상대할 대상이 없지요. 인간은 서로 협력하지 싸우는 것이 주 활동이 아닙니다. 인간은 혼자 못 살아요. 외로워서 못 살고 자연에 대응하기 힘들어요. 짐승이라든지 그런 것과 싸우기 위해서는 협력해야 되고 다른 민족과 싸우기 위해서는 성을 쌓아야 되고. 가인이 도시 만들고 성을 쌓았잖아요. 비록 외부와는 싸웠지만 안에서는 단합하잖아요. 협조하고 협력하고.

 

전쟁은 누구 아이디어냐? 일방적인 하나님 의견이에요. 창세기 3장 15절에 나와 있지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라고 나오잖아요. 내가 너로 할 때 ‘너’가 뱀이죠. 뱀은 아까 상징이라 했잖아요. 상징 자체가 허구고 상징이 허구니까 허구가 의미를 가지려면 숨어있는 실재와 관련성이 있어야 의미가 있지요. 허구와 상징 되려면 실재와 연결돼야 되지요. 뱀은 실제 하는 악마의 상징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그냥 뱀으로 볼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상징 세계가 언어 세계거든요. 인간의 언어는 실재 세계를 담을 수 없어요. 상징 세계만 담을 뿐입니다. 상징 세계는 그 자체가 의미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차이와 차이가 날 뿐이지.

 

이것과 이것이 다르다는 것에서 한시적이고 임시적인 의미만 나올 뿐이지 고정된 의미는 없어요. 여기 만약에 사과가 있다면, 사과가 왜 사과냐? ㅅ, ㅏ, ㄱ, ㅗ, ㅏ 대해서 답변이 없어요. 바나나 아닌 사과, 이렇게 돼요. 이것도 바나나, 이것도 바나나 하면 바나나와 모양새가 다른데 혼동이 되잖아요. 바나나가 있는 이상 사과로 해야 구분이 되잖아요. 네가 왜 남자냐? 여자 아니기 때문에. 너 왜 여잔데? 남자 아니기 때문에. 개는 왜 개냐? 송아지 아니거든. 송아지는? 개 아니거든.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의 고유성과 합치된 내용이 아니고 차이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아담이란 이름은 하나님과 인간이 차이지게 하려고 만든 이름이죠.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이 지은 이름이죠. 그런데 아담은 죄 지었을 때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아담 이름이 뭡니까? 먼지, 흙이었잖아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든 아담의 의미가 뭐냐? 아담 의미를 아담도 몰랐어요. 그러나 준비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서는 이래서 아담이었구나.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야 된다. 말씀이 말씀대로 영원하기 위해서.

 

이사야 40장 6절,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아아, 재미있어요. 풀은 시들고 꽃이 마르는 것은 자생적인 힘이 아니라는 겁니다. 힘이 빠져서 죽어야 되겠다. 이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호와의 기운이 됐어, 그만 살아.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세포 끝에 텔레미아란 요소가 있어서 텔레미아가 짧아지면서 인간이 죽는다는 겁니다. 과학에서. 왜 짧아지는데? 이유는 몰라요. 그냥 짧아진데요. 그러나 과학은 여호와와 관련짓지 못하죠.

 

그 다음에 읽어보세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는 자체가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실재와 연관된 상징으로 풀과 꽃이 있는 겁니다. 실재 세계는 죽게 함으로써 진짜 죽음이 없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창조세계를 죽게 만드는 겁니다. 그 중에 죽게 하는 중에 하나가 인간이 포함돼있습니다.

 

인간은 죽어야 돼요. 왜?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는데 지가 뭔데 안 죽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산다면 우리도 사는 거죠. 그걸 성도라 합니다. 주님 죽을 때 같이 죽고, 주님 살 때 같이 살라. 로마서 6장. 그게 성도입니다. 그게 진짜 인간이에요. 그리스도가 실재와 연관된 사람은 성도밖에 없어요.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 목사님 말은 그럴싸한데 그게 실제입니까, 현실입니까? 예수님 죽은 게 진짜입니까? 진짜입니다. 그럼 사흘 만에 부활한 게 진짜입니까? 진짜입니다. 십자가, 부활을 언약 말고 인간적인 이성으로 과학과 철학으로 해명할 길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임해야 십자가를 알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십자가를 이해 못합니다. 이해 못하기 때문에 숨겨진 복음이고 비밀이 되고. 교회가 아무리 크고 융성해도 십자가를 대체할 수 없어요.

 

오만 명 모여도 구원 요소는 그 교회에 없어요. 구원되지도 않는데 모인 겁니다. 오만 명이 다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정말 오만 명 중에서 한 사람이라고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만 명이란 교회 자체에 의미 두지 않아요. 거기에 다니더라도. 십자가가 구원하지 오만 명 교회가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람만 알고 그 교회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그 교회가 없어진다고 해도 아쉬워하지 않지요. 주님은 영원하기 때문에 교회는 당연히 없어져야 되지요. 그게 일곱 교회입니다. 없어지라고 만든 게 교회가 일곱 교회에요. 상징이니까. 없어져야 될 것을 왜 그렇게 붙들고 실적 논하고 어느 교회가 크냐, 잘 됐느냐, 목회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고 논하고 있으니까 그 자체가 바로 십자가 복음을 가리기 위한 배후에 보이지 않는 실재 악마의 모습이고 그것과 싸워야 될 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이다. 전쟁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뱀의 후손이 등장하면서 같이 등장해야 돼요. 여자의 후손만 달랑 등장하는 법은 없고 진짜 여자의 후손이 누구냐는 것은 뱀의 후손이 등장하는 그 현장에 같이 나타납니다. 아벨이 훌륭하다, 어떻게 아느냐? 가인과 더불어 나타나기 때문에. 가인과 짝이 된 아벨이지 그냥 가인 없는 아벨은 의미 없습니다. 같이 등장해서 가인은 아벨을 쳐죽어야 돼요. 그리고 아벨은 죽어줘야 돼요. 맞아 죽을 뻔해서는 안 돼요. 죽어야 돼요. 참 신자로서는 안타깝지만 죽어줘야 돼요. 그래서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는 사실. 아벨의 죽음은 약속된 죽음.

 

아벨의 죽음은 하나의 노선을 형성합니다. 역사란 말을 안 하고 노선이라고 해요. 노선을 형성한다는 말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란 약속을 역사 속에 구체화하려면 서로 대립된 두 개의 노선이 등장해야 돼요. 그 노선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두 언약이라고 합니다. 육에 속한 노선과 성령의 노선 두 개의 노선이 나와요.

 

특히 노선이 마지막에 가면 천국과 지옥으로 완전히 확정되거든요. 마태복음 13장에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이야기하면서 확정됩니다. 가라지와 알곡으로 확정되듯이 처음부터 구약에서 두 개의 노선이 나옵니다. 두 개의 노선이 가만있느냐?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원칙이 언약이죠. 언약은 전쟁을 유발시킨다. 어떤 전쟁? 상징을 앞세운 실재의 전쟁.

 

그런데 악마는 스스로 자기 정체를 감추어 버리거든요. 악마 없다가 악마의 전형적인 방법이에요. 오직 있는 것은 너밖에 없다고 이야기해줌으로서 악마는 있으면서도 눈에 띠지 않도록 빠지잖아요. 결국 인간밖에 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모든 역사는 인간하기 나름이다.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이죠.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놓는 모든 초월적인 개념들, 귀신이나 신이라는 것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으로 이건 상징이라 하지 않고 상상이라 합니다. 상상, 상징, 실재, 세 가지죠. 인간은 어떻게 상상하느냐? 플라톤 같은 게 대표적이죠. 이 땅에 허무한 인생이 끝나면 진짜 원형이 있다. 플라톤은 복음이 아니고 상상의 세계입니다. 상상의 세계는 언제 하느냐 하면, 배부를 때 살만 할 때 상상 하게 돼요. 상상의 동력이 있어요. 상상 되는 동기는 자아실현입니다. 내가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지. 사람이 밥 먹고 살만 하면 이걸 해요.

 

교회도 좀 여유 있는 사람은 상상합니다. 천국 가면 상급 받겠지. 자아실현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돈 한 푼 없다, 몸 아파서 어느 병원에서도 커트 당해서 죽을 날만 기다린다고 할 때는 살려주세요, 하지요. 그때는 상상이 아니고 전체가 자아실현이고 뭐고 몸만 산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돼요. 여유가 없으니까. 돈 없지요, 몸 아프지요. 그럼 끝난 것 아닙니까. 자기는 더욱 더 이게 현실이라고 실감 나지요. 이제는 부처든 뭐든 관계없어요. 이단이든 삼단이든 신천지든 뭐든 내 몸만 낫게 하고 옛날 잃어버린 돈만 다시 나한테 굴러들어오면 그때처럼 살 수 있다면 살아있는 신으로 동의하겠다.

 

이 상상의 단계를 주님이 베드로 찾아올 때 이미 했어요. 고기가 안 잡혀. 베드로 밤새해도 고기가 안 잡히거든요. 일부러 주님께서 고기를 철수시킨 거예요. 베드로 자리가 기본적인 생존의 자리라는 거예요. 이런 입장에서는 눈에 띠는 구체적인 그것이 기적이 되죠. 신의 기적을 자기의 노림수, 자기의 상상과 결부되는 겁니다. 구약 자체가 그래요. 풍랑이 일었다. 누가 대신 제물로 바치면 바다가 잔잔해질 텐데, 할 때 요나가 뛰어드니까 바다가 잔잔해졌지요. 왜냐하면 이미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신의 있음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서 맞춰준 겁니다. 그러면 요나 빼놓고 그들은 천국 갔습니까? 아니에요.

 

문둥병자가 열 명 있었잖아요. 그들은 신을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자기 문둥병을 낫게 해주시면 메시아라고 생각한 거예요.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께서 그 열 명 다 낫게 했지요. 구원받은 사람은 몇 명입니까? 한 명이지요. 그 한 명과 아홉 명의 차이점이 뭘까요? 자기가 생각한 상상의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생각했던 그 하나님은 상상의 하나님이거든요. 상상의 하나님은 실재가 누굽니까? 본인이에요. 다시 말해서 자기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돌아온 문둥병자는 자신이 누구 앞에서 죄인인 걸 안 거예요. 그러면 나의 세계는 죄의 세계고 나를 죄 되게 하신 그분 세계가 실재 세계잖아요. 그래서 그 이방인은 예수님 앞에 돌아온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주께 돌아오라고 살아가는 거예요. 탕자의 경로지요. 목사님 미국에서 사는 것, 내가 한국에 사는 것도 탕자로 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내가 겪는 세계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세계라고 우기고 있어요. 그러니까 상상의 세계지요. nothing인데 아무것도 아닌데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물론 여유 있을 때는 주여, 주여 합니다. 그런데 사기 당한다든지 몸이 아프다든지 하면 내가 급해. 급하다보니까 내가 최고라는 것이 실감 나요. 뭐니뭐니해도 나는 살고 봐야 돼. 헬프 미, 주여, 저를 살려주세요.

 

-상상의 세계에서 끄집어내서 실재를 보게 하시는

 

그렇지요. 그런데 상상의 세계에서 상징의 세계로 가는 자체가 그게 전부라고 본 거죠. 상징이란 자체는 실재를 염두에 둔 경우고 실재를 모를 때는 이 세계가 전부라고 보는 거예요.

 

십자가는 뭐냐? 상상의 세계, 또는 상징의 세계에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메시아의 죽음 사건, 하나님의 자기 죽음 사건을 집어넣는 게 복음이에요. 구름 타고 오는 줄 알았어요. 이것은 다니엘에 나왔고 다니엘 보면서 상상합니다. 주께서 멋지게 구름 타고 올 것이라고. 그런데 구름은커녕 구름 타고 온다고 여긴 유대 민족에서 죽임을 당하신 분. 베드로도 못 알아봤지요. 주께서 구름 타고 올 줄 알았지 맥없이 체포돼 자기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있을 줄 상상도 못한 거예요. 저 사람을 아느냐 하니까 난 모른다. 저 사람과 관계없다. 난 저 사람을 저주한다고 했잖아요. 그게 베드로의 한계인 동시에 모든 인간의 한계지요. 그동안 주님을 어떻게 알았는가? 같이 있으면서 상상으로 안 거예요.

 

그러나 막상 자기가 궁지에 몰리니까 난 살고 싶다는 것뿐이에요. 마귀가 통제한 것, 악마가 통제한 게 그거에요. 일종에 헝거게임을 한 거죠. 거기서 자유로운 것이 있어요. 닭이었습니다. 닭 모가지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것처럼 이 시대성 자체를 닭이 욺으로 말미암아 베드로가 생각한 현실이 사실은 주의 예언 안에 포함된 세상인 사실을 알았지요. 네다 닭 울기 전에 날 세 번 부인하리라 할 때 닭 우는 것까지 이미 관할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아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그 바깥에 주님의 세계가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배신하는 것도 주님의 의도한 바였지요. 오지 말라고. 네 식으로 네 행함으로 올 수 없는 세계에 간다는.

 

내가 스스로 발걸음으로 갈 수 없는 세계가 내 안에 박혀있을 때 우리는 그 세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가 나를 소유하게 되는 겁니다. 품게 되지요. 그럼 나의 모든 생애가 그분의 소유가 돼버리죠. 그걸 통해서 나는 이 땅의 전쟁에 상징물로서 주님의 앞잡이가 되어서 사는 겁니다.

 

앞잡이 중에 하나가 노아입니다. 아까 아벨 이야기했지요. 이제 노아입니다. 노아의 특징이 동행이란 게 있어요. 제가 강의하면서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강의할 것을 염두에 두고 강의하고 있습니다. 교인들과 성경을 찾아보면서 해야 되니까. 창세기 5장 21절, “에녹이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에녹이 동행했는데 앞에 있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나는가? 앞에서는 죽었다, 죽었다고 했는데 에녹은 하나님께서 데려가심으로서 죽음 보지 않고 데려간 게 되지요. 그럼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그런 현상이 있다면 장차 신약 때 주님이 와서 성령이 와서 동행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없다는 게 되지요. 숨 끊어져 죽더라도 그건 죽음이 아니고 그냥 쉬는 것, 죽더라도 동행이 이어지죠. 죽었다고 동행이 끊어진 게 아니죠.

 

그렇다면 성도는 이 땅에서 숨 쉬고 사는 게 중요합니까, 동행합니까? 동행이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동행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밥 빌어먹고 사느냐가 우선이 되겠지요. 교인들이 교회 온다는 말은 하나님 덕분으로 밥 빌어먹기 위함이지 동행하고 싶어서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면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동행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하느냐 하면, 밥 빌어먹는 것을 포기해야 되지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동행이란 사실을 눈치 채야 되겠지요. 그 말은 죽어도 좋아요, 돼야 돼요.

자살하란 말이 아니고.

 

그렇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요. 구원이 목적이 아니에요. 동행을 하게 되면 주께서 전쟁할 때 필요한 상징적인 결과물을 그 사람을 통해서 내놓게 되는 겁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노아지요. 노아가 구원받은 게 문제가 아니고 뭘 했다는 언약적 기능을 했어요. 창세기 6장 17절에 보면,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당에 있는 자는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여기 창세기 6장 8절부터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동행한 바깥은 어둡지요. 17절에 보면, 천하가 멸절돼야 되지요. 세상이 멸절당해야 된다는 사실을 동행한 자의 눈에만 그것이 실제로 현실로 인식이 되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미련 가질 필요가 없지요. 동행하게 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하고 주님을 직접 만난 이사야가 왕이 갖고 있는 보물이 부럽다고 하겠어요? 안 하지요. 지금 동행이 중요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별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 모습이 언약의 모습인 거예요. 그게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 함입니다. 예수는 자유인이란 책 제목이 있어요.

 

첫 번째, 두 가지 세계를 다 알면서 소속은 천상에 속하면서 그 다음에 세 번째, 지상에 사는 사람. 천상에 속해서 팔짱 끼고 보는 게 아니고 진흙구덩이 같은 세상에 들어와서 힘든 인생을 사는 겁니다. 소속은 천국인데 활동지역은 지옥이에요. 이게 언약에 속한 사람들, 이 세상에서 발을 뺄 수 없습니다. 기도원에서 기도만 할 문제가 아니에요. 기도원에 가지 마시고 시장 통에서 장사해야 돼요. 생업에 종사해야 돼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일해라. 돈 번다는 뜻이 아니고 돈 번다는 것을 통해서 얼마나 우리가 돈에 집착하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동행해주시는 은혜를 알라. 우리가 돈의 유혹에서 못 벗어나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절감하면서 아무리 기도하고 노력해도 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해서 대신 죽으심을 그 현장에서 실감하는 거죠. 그게 언약이기 때문에.

 

뱀과 전쟁하는 과정에 주님은 늘 우리와 전쟁합니다. 우리와의 전쟁에서 주님이 우리를 이길 때 그게 뱀하고 마귀한테 이기는 셈이 돼요. 내가 늘 주님한테 질 때 우리는 주님의 군사가 됩니다. 내가 주의 힘 받아서 내가 나서서 칼질하는 게 주의 군사가 아니고 내가 주님에게 져서 포로가 되는 거예요. 포로가 되고 종이 되고 앞잡이 되는 겁니다. 날마다 주님은 이기고 날마다 패배자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이름 바꿔서 조 다윗 이러고 있는데 이름을 지으려면 조 패배자, 이런 것. 김 포로, 이 앞잡이.

 

노아는 안식이거든요. 안식이란 기능에 포로가 된 자가 노아지요. 이름은 자기 이름이 아니고 언약적 이름이고. 그 이름과 평소 생활은 합치되지 않고 합치되지 않지만 합치되게 하시는 것이 동행의 의미니까 기어이 노아를 주님의 군사로 만들어내시는 거예요. 어느 수준에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만드는 과정도 이미 군사의 기능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어느 정도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1등급 신자냐, 2등급 신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뭘 하든지 간에 바깥의 주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기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따로 독자적으로 5등급, 6등급, 1등급을 따지면 안 돼요.

 

그래서 노아가 재미있는 것은 노아가 구원받고 난 뒤에 술 먹고 정신도 못 차렸다는 사실. 자기 처신도 제대로 못하는 존재를 통해서 주의 은혜를 안 사람은 야벳과 셈이고, 그것을 놀렸던 사람은 함과 가나안이고. 노아언약을 이해 못한 거지요. 동행의 의미를 모른다. 합리적인 인간에게 접촉하고 있는 거죠.

 

노아가 전쟁에서 뭘 했느냐 하면, 노아의 전쟁은 자기 빼놓고 자기 식구까지 포함해서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서 그 시대 모든 사람과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 무기는 바로 방주였습니다. 방주는 아무 쓸모가 없어요. 비실용적이죠. 전혀 유용하지 않아요. 어데 쓰는 물건인고? 전혀 적합한 데가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사고방식을 전적으로 모두 부정할 때는 누가 봐도 불필요한 것을 만들어서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어요. 누구에게도 인기 없는 물건, 방주입니다. 그 방주를 자기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심지어 노아도 마찬가지로 아무도 없는 거예요.

 

지금 예수님이 혜화동에 있다면 예수님도 역시 사람들한테 인기 없어요. 뭔가 자기가 원하는 게 예수님한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저 면은 나한테 필요하다는 걸 예수님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네 인생이 사실은 우리한테 불필요한 인생을 살고 있어요. 특히 성도의 한 평생은. 성도가 보기에 아무 이익이 없는 필요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겁니다. 내 계획대로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는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요’가 아니거든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주님께서 다 필요한 거예요. 그게 동행이죠.

 

무기가 방주인데 이 무기는 어디에 쓰는 무기냐 하면,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항상 기본은 분리됨, 갈라지게 하는 거죠. 뱀의 후손밖에 없는데 여자의 후손을 뽑아내는 거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갈라진다는 말도 맞지만 정확히 말해서 뱀의 후손들 속에서 여자의 후속을 따로 돌발적인 사건을 통해서 뽑아내는 겁니다. 언약이 오게 되면 언약의 위력, 그 자체의 능력으로 뽑아내게 되죠. 그래서 말씀을 지키면 안 되고 말씀이 스스로 일하고 있음을 고백해야 되지 말씀을 지키면 안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51203 혜화동특강c-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하겠습니다.

 

계속 전쟁이야기하고 있는데 전쟁할 때는 하나님이 동행하면서 언약을 거기에 삽입시킨다는 이야기를 계속 해왔습니다. 언약이 주어지면 분리가 일어난다는 거죠. 분리를 신약용어로 구약도 마찬가지지만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반드시 전제로 속한, 더러움이 있어야 돼요. 더러움에서 거룩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죄가 있어줘야 죄에서 의를 끄집어내죠. 죄 없는 데서 의 없어요. 더러움밖에 없어요. 모든 걸 더럽다고 해줘야 돼요. 그래야 거룩이 거기서 솟구쳐 올라오거든요. 마치 우주선이 차고 오르듯이. 더러운 세상에서 본인이 깨끗함을 추구해선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의 동행 의미도 없고 언약적 의미도 상실해요. 자기가 스스로 더럽다는 걸 깨달아서 회개하면 종교가 되고 불교가 되고 도 닦는 게 되지

 

하나님께서 더러운 걸 모아놓고 거기다가 예수님이 피로써 전환시킬 경우에만 거룩이 되지 그리스도의 피 없이 자생적으로 거룩이 되는 법은 없어요. 전쟁은 다른 전쟁이 아니고 네가 거룩을 할 수 있다는 게 마귀의 최후의 전략이고, 주님의 무기는 일체 인간은 거룩할 수 없고 의로울 수 없고 천국 올 수 없다. 내가 추방시킨 에덴동산에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그 싸움이에요. 믿음이냐, 행함이냐? 그 싸움이에요. 자생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속된 것으로 더러운 것으로 몰아가요.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서 더럽다 하면 되지 않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자기가 더럽다, 죄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더럽다고 안 것 자체는 의롭지 않을까 하는 논리적 모순성을 인간이 갖고 있거든요. 이것은 나쁘다고 한 그것만큼은 나쁘지 않고 진실 될 수 있다는 여지를 항상 쥐고 있는 게 인간입니다. 칸트의 이성론에 나오지요.

 

회개하는 그 순간만큼은 옳지 아니하냐. 제가 이 돈은 제 돈이 아니고 주의 돈이라고 성령이 임해서 헌금한 것은 참된 헌금이라는 생각을 갖고 싶어 해요. 사실은 마귀의 장난입니다. 기어코 의미를 자기에게 두려고 해요. 꼭 가룟 유다 같아. 내가 스승을 팔아먹다니, 이런 인간은 죽어 마땅하다고 자살을 선택하고 자살을 결정한 의지만큼은 자기 죄를 약간이나마 감량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 거예요. 때리기 전에 자기가 알아서 때리니까. 그만큼은 착하다고 생각이 들지 않겠어요.

 

-유다는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했고, 성령에 의해서 만약에 헌금을 한다면 그것은 ……

 

성령에 의해서 헌금하면 성령의 일은 헌금은 과정에 불과하고 십자가 앞에 죄인인 것을 들어나는 경우가 주께서 하신 헌금이 되는 겁니다. 헌금 행위를 통해서 내가 죄인인 걸 아는 거죠.

 

-성령에 의해서 헌금한다는 자체가 없는 거네요.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고,

 

없지요. 성령은 그냥 십자가만 이야기할 뿐.

 

-그래서 헌금하면서도 죄인임을 고백

 

예. 다른 사람은 헌금 안 하는 행위로 죄를 알지만 나는 헌금하는 행위를 하면서 죄를 알 뿐이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는 의미 없어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게 되면 의미를 둔다고. 남은 안 했지만 전 했잖아요. 반드시 이걸 기억이 되고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자기 존재의 가치가 돼요. 이건 갑자기 상징에서 실재가 돼버립니다.

 

분리시켜버립니다. 분리시킨다는 말은 분리될 수 없는 한계에서 끄집어내서 새로운 분리가 등장하죠. 모든 인간은 물에 빠져야 된다. 노아죠. 그런데 방주로 말미암아 방주 안에 있는 특수한 인간과 방주 바깥에 있는 새로운 세상을 분리시키죠. 방주가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모든 세상은 물에 빠져야 되잖아요. 분리고 뭐고 없지요. 그런데 방주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거룩의 의미가 새롭게 방주 안이라는 제한된 범주 내에서 새로운 거룩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8장 20절,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이게 방주에서 나왔을 때죠. 방주는 끝났습니다. 깨지든 말든 방주 만들 때 고생을 했지만 섞어 문드러지든지. 방주의 의미가 제단의 의미로 함축해서 후대로 전수되는 겁니다. 이게 무지개 언약이에요. 방주 안에 무지개 언약이 들어있는 겁니다.

 

무지개 언약의 취지가 뭐냐 하면, 8장 21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에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태어날 때부터 악함이라. 악하면 보통 저주받아야 되잖아요.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악하기 때문에. 악함이 원인이 돼서 저주받지 않는 결과는 나올 수 없지요. 중간에 매개체로 뭔가 들어가야 되겠지요. 이게 언약입니다. 악함에도 불구하고 정결한 짐승이 대신 죽음으로써 제단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노아 방주가 영원한 방주로써 계속 이 땅에서 제단 쌓을 때마다 반복이 되고 되풀이되겠지요.

 

그러면 제단 쌓을 때마다 인간은 악하다, 고 반복되지요. 언약을 품은 것만 거룩이 되지요. 언약을 품은 자가 등장하면 그게 바로 거룩한 자가 되는 겁니다. 거룩한 자가 실제 삶에서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 그게 바로 창세기 9장에 나옵니다. 20절에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벌거벗은 것에 대해서 “가나인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으며” 덮었는데 함과 가나안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잖아요.

 

덮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냐 하면, 덮기 전의 모습과 덮은 모습이 차이가 나야 된다는 거죠. 노아가 아버지고, 함과 셈과 야벳은 아들이죠. 아버지가 갖고 있던 언약이 아들에게 어떻게 전수되는가? 아버지가 알고 있던 언약이 아들에게 전수될 때는 반드시 두 가지 양상으로 전수돼요. 하나는 축복으로 전수되고 하나는 저주로 전수돼요. 우리 가정은 복 받는다, 이런 것 없어요. 우리 가정이 중심이 아니고 언약이 중심이니까. 언약이 언약대로 실체 본질을 드러내야 되거든요. 본질을 드러낼 때 반드시 양발차기, 축복만 아니고 축복과 저주 두 가지 다 나와야 돼요.

 

아까 고린도후서 2장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어떤 사람은 악취로 느껴지고 어떤 사람은 향기로 느껴진다. 이게 양발차기잖아요. 한쪽을 찼는데 두 가지 상반된 대비되는 결과물이 나온다. 그래서 천국 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은 반드시 그 현장에 지옥 가는 사람이 새롭게 확인 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천국 가는 사람이 확인된다는 말은 지옥 가는 사람도 동반해서 같이 이어지면서 짝을 이루면서 그 현장에 지옥 가는 사람도 등장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면 천국의 원리가 뭐냐? 바로 아까 이야기한 정결한 것을 잡아서 어릴 때부터 악한 모든 것을 덮어주는 거죠. 그러면 언약이 주어졌다, 축복이 주어졌다는 말은 우리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이 된다, 안 된다? 구원되지 않는 거예요. 주목은 거룩한 것의 대신 희생, 8장 20절을 다시 보면,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

 

그럼 방주 안에 정결한 짐승만 모여 있는 것이 상식인데 사실은 더러운 짐승도 같이 타지요.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이고 더러운 짐승은 두 쌍이고. 우리 같으면 될 수 있는 대로 더러운 것을 제거해서 정결한 비율을 늘리는 것이 상식인데 오히려 반대로 더러운 것이 죽는 게 아니고 죄 값으로 정결한 걸 잡지요. 정결한 것이 우리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담보로 대신 희생한 것, 정결한 것을 거룩을 희생으로 해서 우리 더러운 죄가 용서받는 그 구조가 언약적 구조입니다.

 

그것을 자식들에게 할 때 이해하게 되면 축복 노선이고 그걸 모르게 되면 저주 노선이 되는 겁니다. 이제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는 시대는 끝났어요. 어떤 희생, 정결한 분의 희생을 발견하느냐, 못 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죽지 않아야 될 분이 내 대신 돌아가신 걸 발견한다면 언약을 아는 복 받은 사람이고 그걸 모르고 내가 행동 바르게 해서 구원받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저주 노선에 속했다는 것을 노아의 후손을 통해서 확정되지요.

 

아버지의 하체, 하체는 수치를 의미하고, 왜냐하면 수치는 뭔가 정상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제일 먼저 가리지요. 뭔가 본래의 내가 아니고 잘못됐다, 틀어졌다, 고장 났다, 이건 하나님에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이게 수치입니다. 그걸 커버해주는 겁니다. 인간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커버할 때 주께서는 가죽으로 커버했잖아요. 결국 인간은 어떤 식으로 커버될 것이냐에 따라서 지옥 가느냐, 천국 가느냐에 따르는 거예요. 뭐로 덮느냐에 있는 거죠.

 

덮을만한 것을 자기 채택해서 덮느냐, 아니면 예상 못한 내가 덮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친히 주께서 덮어주는 거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거절하고 주께서 하신 것만 고스란히 덮어주느냐에 따라서 천국 가고, 지옥 가고 하는 거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행해서 구원되는 건 아니라는 고백입니다.

 

참 이게 옳은 이야기인데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전혀 먹히질 않습니다. 맨날 설교 끝나면 묻는 게 어떻게 하면 돼요? 그래서 저로서는 막 살라는 것밖에 대안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하시라 하면 흉내 낸다니까. 더욱 더 사람을 지옥 백성 만드는 거죠.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배나 지옥 백성 만드는 거예요.

 

특히 9장 23절에서 셈과 야벳을 옷을 취해서 뒷걸음쳤지요. 뒷걸음친다는 것은 덮어야 된다는 것, 덮는 그것이 우리를 살린다고 생각한 거예요.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인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가나안과 함이 저주받는 이유는 야벳과 셈처럼 안 했다는 겁니다. 보세요. 얼마나 함과 가나안 입장에서 억울합니까. 사전에 내가 술 먹고 하면 덮으라고 했다면, 흉내 내서라도 행할 건데 그게 아니고 그냥 어떻게 할 걸 모른 거예요. 셈과 야벳이 하고 난 뒤에 아버지가 그것이 옳다고 하니까 이쪽이 그 행동을 안 한 본인들이 나쁜 자가 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옳고 그르다는 것은 추후 문제인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지 않으면 모든 게 죄가 되는 거예요. 내가 판단해서 죄다, 아니다 하는 것은 소용없는 기준이에요. 주님처럼 십자가에 죽지 않으면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어요. 왜? 그 모델을 내가 세우기 때문에. 내가 세워봤자 가짜가 가짜를 만드는데 무슨 소용 있어요. 주님이 내 인생에 개입해주셔야 되지 이렇게 인생 살았으니까 착하지요, 라고 내세우면 그건 함과 가나안 꼴 되는 겁니다. 자기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주께서 주신 십자가만이 우리를 덮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되지 못하지요.

 

이렇게 지금까지 한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계시다. 보이지 않는 전쟁은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마귀도 안 보이고 주님도 안 보이고 실제에서 일어나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들인데 그 현상이 굉장히 특이해요. 특이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 따로 있다. 특수한 것이 아니고 특이한 겁니다.

 

일반적인 것은 특수한 것과 관련돼있고 보편적인 것은 특이성과 관련돼있는데 상당히 말장난 같기도 한데 다만 이해를 위해서 해봅시다. 일반적인 것은 모든 것 가운데서 특수, 특수는 모든 것에 포함돼요. 수평적으로 모든 것 중에 특수한 것, 이중에 하나 끄집어낼 수 있지만 보편적인 것이 있다면 특이한 것은 없는 데 튀어나온 거예요.

 

제가 어느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베토벤이 위대한 음악가입니까, 모차르트가 위대한 음악가입니까? 물으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최고의 음악가는 베토벤이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유일한 음악가에요. 평가대상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베토벤은 특수한 뛰어난 거고 모차르트는 기이한 거고. 성도는 기이하지 뛰어난 영웅이 아닙니다.

 

창세기 10장 9절에 봅시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여기는 ‘특이한’으로 돼있지만, 번역은 별 의미 없으니까)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꾼이로다” 특별한 영웅이죠. 니므롯이 함의 아들이죠. 함의 특징은 영웅이에요.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영웅은 최고의 인간이 되는 겁니다. 상상에 의해서 신의 세계가 있고 인간의 세계가 있거든요. 인간이 신의 세계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영웅이 되는 겁니다.

 

신에 접근한 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신의 영역은 죽음 이후의 영역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신이 되려면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게 되면 그 사람은 영웅이 되는 겁니다. 영웅은 인간과 신의 경계선, 다른 말로 한계선에 위치해서 모든 인간의 모델이 되는 게 영웅이죠. 그 영웅은 사실은 인간에 속하면서도 신에 속한.

 

그래서 사실은 성경에 말하는 우상이란 인간의 신격화를 의미합니다. 제가 설교시간에는 물질의 정신화라 했고. 교회에서 원하는 당회장 목사는 인간 교인들이 영웅을 원해요. 자기 기도는 기도발이 안 서는데 목사가 기도하니까 헌금이 늘어나고 교회 예배당 짓고 영적인 카리스마 있는데 영웅을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웅입니까, 패배자에요? 패배자지요. 인간은 특수한 존재를 원하지만 주님은 특이한 분이죠. 영웅은 뛰어난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다른 분이죠.

 

예수님이 처음에 기적을 베풀고 귀신을 쫓아냈을 때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영웅으로 본 겁니다. 그래서 오병이어 뒤에 사람들이 예수님 붙들고 임금 삼으려고 했지요. 우리가 기다렸던 거다. 그래서 예수님 따라오니까 예수님은 따라오는 그들을 떡을 먹고 배부른 족속이라고 규정했어요. 자기를 위해서 떡 주면 좋아하는 그런 족속들. 나는 그런 족속과 매치되는 영웅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뭐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게 나와야 돼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어요? 다 떠나갔지요. 제자들은 왜 안 갔지요? 제자들은 오해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아봤으니까 안 떠나지요, 이렇게 하지요.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야.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으면 올 수 없다. 이렇게 하면 온다가 아니라 올 수 없는 자가 너다. 네가 생각할 때 나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자란 걸 인식하란 거예요.

 

인식해야 주님과 함께 있음에 자신이 기여한 바가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이, 내가 예수 믿는 결심이 빠져야 돼요. 들어가면 안 돼요. 우리가 주님을 아는 것은 내가 이렇게 해서 알았다는 것을 늘 삭제당해야 인생을 살아야 돼요. 삭제당해야 그 현장에 주께서 동행하심과 개입하심이 부각되면서 우리는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창세기 10장에서 드디어 이 세상이 노아의 세상, 언약의 세계다. 노아언약의 세계 특징이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31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거기까지 하고 그 다음에 5장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5장 45절에 보면, 악인과 선인과 함께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를 주시죠. 그런데 6장 31절에 보면,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고 있지요. 지금 이방인에게서 아버지께서 햇빛과 공기를 주신다는 사실이 빠졌지요. 내가 열심히 싸대야 밥이나 먹고 산다는 인식을 갖고 있단 말이죠. 이걸 이방인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면 이방인이란 말은 저주받을 자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자.

 

약속이 없는 자들이 분명히 드러나는 그 현장에 약속이 있는 자들이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줘도 사람은 두 종류로 필히 등장하게 돼있습니다. 그래야 전쟁이 성립되니까. 여기 누가 봐도 커피 있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들어왔다면 여기서 의견이 생깁니다. 내가 돈 주고 샀다는 패가 있고 목사님이 돈 주고 샀다는 패가 있단 말이죠. 커피는 그냥 있어요. 그런데 의견은 두 종류란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 몸은 그냥 있잖아요. 주께서 나를 만들었다는 쪽이 있는 반면에 내 인생은 내가 살아왔다는 의견이 있단 말이죠. 그게 언약의 효과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다른 분의 개입으로 구원받는다는 쪽과 내가 뭘 해서 구원받는 쪽과 항상 두 종류로 나눠지잖아요. 언약은 항상 그래야 돼요. 왜냐하면 언약은 양발차기니까.

 

그 다음 12장 봅시다. 계속 전쟁 중입니다. 전쟁이란 서로 섞일 수 없는 대립된 두 개의 성질이 만나요. 그 성질의 내용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언약이 추가할 때마다 계속해서 차이가 나요. 12장 2절을 읽어보세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당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여기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는 벌을 내리죠. 그런데 아브라함에 끝나는 게 아니고 후손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라함 후손에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게 돼있지요. 그럼 단위가 개인에서 민족 단위로 단위가 커졌잖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언약은 노아는 방주 만들기로서 언약을 나타냈지만 이것은 방주가 아니고 민족 덩어리로 단체로 복의 민족이 등장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어떤 차이가 나느냐? 노아언약에서는 셈과 야벳의 족속은 모조리 축복 받는 걸로 돼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셈과 야벳이 축복 받는 것은 큰 범주고 사실은 셈과 야벳이 다 복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중에 새롭게 구성되는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복을 받는다고 보다 세밀해지고 구체화되겠지요.

 

그러한 경우가 요한복음 3장 16절 다 아시지만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누굴 사랑한다 했어요? 세상. 그 다음에 사랑이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한다고 했지요. 큰 범위 내에서 그런 거예요. 17장 9절,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여기 보면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그러면 큰 범위에서 점점 더 작은 범위로 내려야가야 되잖아요. 그럴 때 진짜 사랑하는 자는 바로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려고 보내준 자만 위해서 주께서 기도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중보기도 외에는 다른 기도는 중보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기도하면 반드시 자기를 포함시키거든요. 그건 반칙이에요. 누구 마음대로 포함시키며 나니까 나한테 어드밴티지를 줘서 나를 구원에 집어넣는 것은 인간의 죄악 된 타고난 본성입니다. 나를 포함해서 구원? 이건 언약이 아닙니다. 인간의 기도란 사실은 자체가 죄가 되는 거지요.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럼 진짜 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가짜 기도를 하셔야 돼요. 가짜 기도 속에 진짜가 나와요. 성도 같으면. 기도 안 할래, 이러면 안 되고 기도를 하게 하시는 가운데서 그 자체에서 바꿔치기가 일어납니다. 이게 가짜고, 이게 진짜라고 바꿔치기하죠. 주여, 기도하지 않더라도 다 주셨는데 기도함으로서 더 얻고자 한 것이 죄군요, 라고 자기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목적이 챙기기 위해서 준 게 아니고 주의 증인 되라고 나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기도를 다시 보게 하는 기회로써 기도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설명하면 이상하게 문장이 길어져요. 그래서 골치 아픈 사람은 그냥 하세요. 막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여튼 뭔가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주님께서 친히 개입하시면 성령이 하는 기도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걸 연출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어디까지 왔습니까? 민족단위로 왔지요. 민족단위는 구원문제가 아니고 아까 이야기한 전쟁에 관한 문제, 전쟁단위로. 언약이니까. 단체로 언약적 민족이 되면서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여기 12장부터 관건이 민족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는 문제거든요.

 

우리의 상식은 그거야 자식 낳으면 되지. 일반상식은 뭐냐? 민족은 혈족이고 혈연관계기 때문에 자식을 낳으면 되겠지요. 자식은 남자 혼자는 못 낳고 여자가 있어야 되겠지요. 여자와 남자와 결합해서 성관계해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이 또 새끼를 까게 되면 그 자체가 민족덩어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방법으로 민족을 만든다고 누구나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아브람 민족이고, 지금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아브라함 민족이에요. 그런데 현재 있는 것은 아브람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은 없어요. 아브라함은 아브람 뒤에 숨어있어요. 이게 언약의 능력으로 계속 나타날 때 아브람이 찢어질 때 나타나거든요. 이근호란 인간은 육에 속한 겁니다. 그러나 이근호가 찢어지면서 그리스도에 속한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이 튀어나오잖아요. 목사님도 마찬가지고. 다시 말해서 내 뜻대로 안 될 때.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튀어나온다고 하니까 어떤 분은 생각하기를 내 뜻대로 안 하면 되지, 하는데 그것도 뜻인데. 사람이 자기 뜻이라는 것이 시작할 때 뜻이 아니고 일 끝나고 난 뒤에 그걸 뜻이라고 규정하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뜻이 없다는 말은 없어요. 본인이 있는 이상은 뜻은 항상 정리되게 돼있습니다. 뭔가 함축해서 갖고 있게 돼있습니다. 그 뜻을 없앨 수 없어요. 내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뜻은 있어요.

 

아브람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은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브람 말고 따로 만드는 게 아니고 아브람으로 아브라함을 만들겠지요. 그럼 언약의 원칙에 의해서 누가 대신 죽어줘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에게서 나온 후손이, 이삭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조상되게 만드는 겁니다.

 

자식이 자기 대신 죽는 겁니다. 제사를 드렸다는 자기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 행위로 말미암아 누가 죽는가가 중요하죠. 아브라함 때문에 이삭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복의 근원은 이삭한테 전달되면서 더 구체화되면서 세밀화 되지요.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라 한 것이 이삭이 복의 근원이라고 전달됩니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데요.

 

22장 17절에 보면,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을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복을 얻는데 네 씨로. 그 씨가 이스마엘 아닙니다. 이삭이죠. 아브라함에서 나온 자식이 다 복의 씨가 아니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전이되고 변이되는 현장에 개입되면서 등장한 후손이 복의 자손의 되겠지요. 이삭이 아브라함의 복의 자손인 동시에 이삭 자체가 아브라함뿐만 아니고 후손에 복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자기 주도권을 잃어버리잖아요. 이삭이 주도권을 쥐고. 이삭도 마찬가지로 야곱한테 넘어갑니다. 그럼 모든 주도권은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쥐고 있지요. 그 사실을 알고 아브라함은 기다렸다가 보고 기뻐한 거죠. 예수님이 모든 역사의 주인 되는 기호, 만유의 주가 되시는 겁니다.

 

그러니 과학이나 철학, 진리라고 우기는 이것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주되심을 가리는 악마 짓하고 있는지 잘 압니다. 우리가 어떤 사업을 한다든지 다 할 수 있어요. 종사할 수 있고 또는 목사라든지 목회하더라도 그게 바로 죄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걸 시킨 거예요. 그 짓을 하면서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늘 느끼는 자체가 그동안 숨길 수 없는 나의 죄성을 폭로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하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늘 느끼게 되죠.

 

모든 일이 주께서 알아서 예수 십자가에 수렴하라고 한 의도로서 나한테 유발되었다는 고백이 돼야 돼요. 심지어 교회 오는 것도 내 마음대로 오는 게 아니고 나가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나가요. 나가라고 한다고 나가는 게 아닙니다. 오라 한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아무도 올 수 없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에요. 그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선교와 전도에 무슨 보탬이 되겠어요. 그 멘트가, 문장이.

 

아브라함 민족과 다른 민족과의 전쟁이지만 사실은 아브라함 내부에서 가정부터 전쟁이 시작된 거죠. 전쟁이 없는 구석은 없어요. 다 전쟁이 벌어지게 마련이에요. 이건 나의 전쟁입니다. 아브라함의 전쟁 또는 이스마엘과 이삭의 전쟁. 이스마엘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창세기를 보면 이스마엘이 지은 죄가 없어요. 아무 잘못이 없어요. 태어난 게 무슨 죄가 됩니까? 그런데 태어난 게 죄가 돼요.

 

에서가 태어나기 전부터 미움 받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거예요. “아이고, 이 밉상아, 화상아.” 주님의 미움의 대상으로 태어나게 한 겁니다. 그래서 어느 인간도 우연은 없어요. 다 주님의 뜻이 있어서 태어났는데 미움의 대상인지, 사랑의 대상인지 본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된 상태에요. 거기에 대해서 섭섭해 할 필요 없어요. 섭섭해 한다는 것은 뭔 뜻입니까?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관행과 습관이 그대로 정신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섭섭해 하잖아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할 건데.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잘 하셨다고 해야지요. 너, 지옥 가기 위해서 태어났다. 잘 하셨어요. 이렇게 돼야지요. 그런 여유가 있어야 되지요.

 

-그럴 수 있는 인간은 한 명도 없겠지요.

 

성령 받으면 돼요.

 

-그러면 이미 그 사람은 지옥 가기 위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저주를 받아 끊어질지언정 주께서 원하시면 사용해달라고. 성경 참 무서운 책입니다.

 

아브라함의 전체 이야기는 이렇게 언약 형성과정에서 전쟁이란 중요한 경로를 밟아서 언약이 구체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언약이 던져주지만 그 던져줌을 통해서 기존의 죄는 죄대로 드러나게 하고 저주받는 쪽 나타나게 하고 양발차기 하고 언약 대상자가 하나님의 원수로 작동하게 하죠. 그래서 로마서 5장에서 원수 된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러니 원수 아닌 자가 없는 거예요. 마귀에 속한 자가 없어요. 마귀에 속한 자를 끄집어냈다. 죄가 있는 곳에 의가 있는 거예요. 죄인 된다는 것을 그렇게 섭섭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고맙게 여겨야지요.

 

창세기 14장 봅시다. 14장 14절에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이렇게 돼있지요.

 

지금 아브라함이 전쟁하고 있지요. 하나님이 전쟁을 시킵니다. 무슨 전쟁이냐 하면 땅 싸움이죠. 재산 싸움이었잖아요. 전쟁이 잃어버린 개인 소유물 되찾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전쟁하고 돌아왔는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요. 그 멜기세덱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아,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승리케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거기에 동의해요. 자기가 사병을 훈련해서 했는데 그게 아니고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승리케 했음에 동의하면서 모든 전리품은 자기 수완, 자기 노력이 아니고 전체가 주님의 것이라고 하면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드리는 방식이 멜기세덱에서 주면서 드려요.

 

그러면 아브라함 보기에 멜기세덱은 하나님이 계심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등장한 인물, 그리고 자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로 공짜로 얻어 챙긴 입장,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또 언약이 그만큼 발달된 형태를 띠는 거지요. 발달된 형태를 띠면서 제3의 인물이 개입되지요. 전에는 하나님 있고, 이 세상 있으면 중보자가 누굽니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었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기 자리를 보다 더 세밀하게 보여주면서 자기 있던 자리 뒤편에 감추었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지요. 그 사람 이름이 멜기세덱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리를 멜기세덱에게 양보하지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 멜기세덱 반열이 당신 맞지요, 라고 기뻐하는 거예요. 나 아니고 주님입니다. 나 아니고 멜기세덱입니다. 내가 이렇게 승리한 것은 내 덕분이 아니고 멜기세덱 덕분이다. 내가 열심히 훈련시켜서 된 게 아니고 멜기세덱 기도 덕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의 기능은 뭡니까? 주님의 뜻을 받들어서 복 받을 자에게 복을 주는 기능이죠. 그 기능대로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 7장에. 그럼 예수님이 홀로 다 해놓고 우리는 그냥 아브라함처럼 복은 받아 구원받는 입장. 그렇다면 성도의 고백은 나 아니고 중간에 개입된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게 전쟁의 승리 요인이 점점 더 구체화되는 겁니다.

 

멜기세덱의 특징이 히브리서 7장에 나와요. 7장 2절, 3절 읽어보세요.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여기에 보게 되면 분명히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죠. 살렘이란 지역이 실제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제사장으로 있단 말은 나머지 모든 인간은 멜기세덱에 비해서 한시적이고 임시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중보자는 항상 있어야 중보자지 일시적인 인간은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이 중보기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중보기도 하는 분이 없으면 인간이 해도 모르겠는데 지금 중보기도 하는 분이 있잖아요. 항상 제사장인 분이 기도하고 있는데 왜 인간 중보기도에 나서야 됩니까? 그건 자기 뜻을 억지로 관철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잘못된 거죠. 그건 마귀의 장난이죠.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가리면 자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거니까 거기에만 열중하고 있죠.

 

동행한다는 것은 그냥 동행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못났습니다, 한시적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하면서 동행해야지 나는 하나님과 한 편이라서 나도 대단하다는 이런 동행은 없어요. 동행하시는 동행자를 주께서 원수로 취급해서 공격하는 그 결과로 우리는 주의 군사가 되기 때문에. 전쟁은 바깥에서 하는 게 아니고 안에서 일어나는 효과로 바깥 전쟁이 이어집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언약을 세웁니다. 그 언약의 표징이 뭐냐 하면, 17장 11절 읽어보세요.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언약의 표징인 양피를 베어라. 양피를 베면 거기서 피 나오지요. 출애굽기 4장에서는 피 언약이라 하지요. 그러니까 언약이란 피를 내는 거죠. 피는 죽음을 의미하거든요. 다시 말해서 어떤 분의 죽음으로 맺어진 언약, 이것이 피 언약, 할례 언약입니다.

 

어떤 분이 죽느냐 하면 바로 육신의 혈연관계는 죽어줘야 돼요. 그럼 뭐는 살리고? 살린다는 개념보다 죽음의 반복이 곧 사는 양상이죠. 이 땅에서. 이것 죽고 뭔가 나타난다는 개념보다도 어떤 분이 먼저 있었기에 항상 한시적인 것은 매일같이 죽어줘야 되는 거예요. 육신은 날마다 죽어 없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육신을 갖고 있으면서 계속 반복해서 그런 현상이 있어줘야 됩니다.

 

그럼 아브라함언약의 반복은 뭐냐 하면, 아브라함 행함은 의미 없다는 것을 날마다 반복하는 그 자체가 아브라함 행위의 의미가 돼요. 행위를 안 하는 것이 아니고 하면서 이걸로 구원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날마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 결과를 믿음이라고 해요. 행위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믿음에 해당되는 행위가 되는 거죠. 계속해서 행위 하면서 행위를 의미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을 증언하는 그런 모습의 행위이기 때문에 믿음의 행위가 되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누가 내 인생에 개입했다. 나는 믿는다. 내 인생에 개입한 분을 믿는다. 그렇다면 내 아들 바치고 다시 살아나는 것은 내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내 인생이 내 아이디어를 구성하는 인생이 아니고 누군가 쳐들어온 인생이다. 누가 날 사용하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정리해봅시다. 노아는 방주 만들었지요. 아브라함은 첫 번째로 민족단위로 왔지요. 민족단위로 전쟁이 되겠습니까? 내부의 전쟁이 일어났지요. 그 내부 전쟁이 혈육이냐, 약속이냐의 전쟁, 그게 이삭으로 넘어갑니다. 언약은 내부적으로 계속해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면서 바깥에 효과를 주는 거죠.

 

축복이란 내 민족이 복 받는 것이 아니고 그 민족 내부에 언약적인 작용 때문에 축복된 사람이 거기서 생산됩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축복된 자가 누구냐고 보여주는 기능이 일어날 때 그 기능자가 축복과 관련된 복 받은 사람이 되는 거죠. 내가 구원받았느냐고 물을 게 아니고 주께서 무슨 일을 일으키셨고 어떤 기능을 일으키십니까? 그걸 보여줄 때 주의 증인이고 언약의 사람입니다.
20151203 혜화동특강d-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아브람과 아브라함이 구분되지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전이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하게 되면 거기서 축복과 저주가 아브람은 저주, 아브라함은 축복, 아브라함의 가정 내부에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 민족이 단체로 복 받는다 하니까 일단은 기분 좋았는데 언약이 계속 개입되니까 안심 놓고 있던 아브라함의 혈육적 관계 자체가 구원이 보장 안 되지요. 언약이 내부에서 내부로 깊숙이 파고들어옵니다.

 

아까 요한복음 할 때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한다 했잖아요. 안심 푹 놓았지요. 세상치고 다 사랑받네, 하다가 나중에 요한복음 17장에 보니까 그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사람이 따로 있고 그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준 자만 국한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정론은 구원론으로 접근할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 중에 하나가 예정된 자로 도입돼야 돼요. 사람들은 예정론 생각할 때 창세전부터 되니까 창세전의 자기 모습과 지금 자기 모습과 직접 연결시키는데 그래서는 해명이 안 되고요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도록 동원된 자는 인간이 노린다고 해서 넣어주는 게 아니에요. 구원돼야지, 구원돼야지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아버지께서 보낸 자에 한에서 예정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이 복 받는 민족이라고 해서 그 민족이 흔히 생각하는 아브람 민족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족속에 속하지요. 그러면 아브라함만 쳐다봐서는 안 되죠. 왜냐하면 언약이 계속해서 추가되니까. 추가되어 새롭게 발생된 현실이 있잖아요. 그게 이번 시간에

 

그 이삭과 이 이삭. 이삭의 차이점이 다르죠. 어릴 때 이스마엘과 대비되던 그 이삭과 그 이삭과 대비되는 이삭. 이 이삭은 죽었다가 살아난, 하나님께 죽음으로 바쳤다가 하나님에 의해서 살게 된 이삭, 이것은 믿음의 내용이 함유된 이삭이에요. 죽었다가 살지 않으면 아무도 이삭 계열이 아니다. 그리고 네가 알아서 자살하는 수는 없고 주께서 언약대로 실시한 그 죽음에 가담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원론이 날아가 버려요. 구원받겠다는 그 의식 자체가 전혀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는 외부에서 투입된 악마적인 사고방식이죠.

 

구원받겠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증거로 어떻게 만들어내느냐는 관계에 있거든요. 예를 들면 과자가 있는데 이 과자는 초콜릿 과자고 이건 초콜릿 과자 아니잖아요. 새카만 초콜릿 과자가 보기 좋았던 모양인지 나는 어떻게 하면 초콜릿 과자가 될 수 있어요, 라고 하나님 앞에 요청한다면, 그렇게 기대한 자체가 내가 어떻게 달라질까를 생각하잖아요. 그럼 하나님께서는 자리를 이렇게 이쪽 자리로 옮겨버립니다. 그 순간 처음 자리에서 봤던 모든 것은 무산됩니다. 하나에 환각에 불과합니다. 내가 이게 탐이 나서 나도 천국 가고 싶어요, 한 그것이 막상 구원받으면 그것은 내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내가 만들어진 게 아니고 주께서 천국 일을 하려고 이미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뒤늦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받겠느냐, 안 받겠느냐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닌 것으로 정리되어서 날아가 버려요. 쓰여지는 게 중요하지 구원되고 안 되고는 관계없는 거예요. 주께서 까맣게 사용하면 까만 케이크가 되는 겁니다.

 

이 이삭은 믿음의 내용이 함유돼있습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이삭이 살아난 것은 바로 장차오실 예수님이 죽었다 살아오실 것을 이삭이 그 내용을 함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삭과 동일한 믿음의 계열이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복된 민족이라 할 수 없지요. 다시 이야기하면 아브라함의 족속은 복되다. 기분 좋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언약을 아브라함 자손에겐 손 안 대고 바깥에만 손댈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 아브라함 자손에게 손대니까 이제는 그 이삭은 안 되고 새로운 이삭으로 변모돼야 되지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포함된 새로운 인간이 이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삭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자기가 경험했던 죽었다 살아난 운명을 자기 인생을 통해서 후대에 똑같이 반복이 되는 자만이 이삭에 속한 복된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 반복을 경험한 사람이 바로 야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삭은 둘로 나눠집니다. 에서를 좋아하는 이삭과, 에서를 좋아한다는 말은 같은 말로 야곱을 싫어하는 이삭, 그 이삭을 통해서 뭘 하느냐 하면, 뽑아냅니다. 이삭이 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삭은 하나님이 복 주는 절차에 방해자로 가담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결과적으로 가린 게 됩니다.

 

그럼 처음부터 왜 몰랐는가? 처음부터 주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자기 취향대로 하다 보니까 돌아서서 보니까 주의 뜻을 가렸군요. 그러면 주의 뜻을 가려도 구원된다는 말은 내가 행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의를 위하여 사용되어지는 언약적 메커니즘(기제) 속에서 이삭은 주님 덕분에 구원받는 겁니다. 야곱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되게 함으로써 야곱이 진짜 야곱 되게 하는 동시에 이삭은 자신의 죄가 용서받는 거죠.

 

이삭에게 복이 전달되면서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 거죠. 야곱 때문에 이삭이 복을 받고.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멀리 있는 노아가 구원받고, 아벨이 구원받고, 아브라함이 구원받는 겁니다. 그 논리를 끄집어내야 돼요. 그 논리를 끄집어내려면 소위 하나님 일에 가담한 자가 죄를 알기 위해서 가담했다는 사실. 주의 일을 알아서 스스로 열심히 했더니만 구원되는 건 없어요. 오히려 그 일을 통해서 자기 성질과 자기 취향이 드러나고 그 취향과 성질은 주의 일과 아무 상관없이 오히려 방해만 되는 육적인 속성이 방출되는 겁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죠. 하나님 지시에 따라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가운데, 그 전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모세 양 치는 데까지 와서 떨기나무에 불붙이고 신발 벗으라까지 친절한 하나님, 일부러 찾아오셔서 거룩한 산으로 유도하셔서 지시 다 내렸으면, 남은 일은 모세가 알아서 하면 될 텐데 모세가 내려가는 숙소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이게 얼마나 모순 돼요.

 

시작을 괜찮게 했으면 계속 괜찮게 해야 되는데 인간의 사고방식이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잖아요. 주님은 반대가 되어 네가 준비한 미래는 미래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한 미래는 과거가 원인이 되어 나온 결과로서의 미래거든요. 그런데 주께서 그걸 틀어지게 하는 겁니다. 네가 과거에 생각했던 미래와 다른 미래를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생각한 과거 자체가 제대로 된 과거가 아니고 거기서 농축된 현재가 제대로 된 현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소명 얻었기 때문에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억측이 되고 오해가 되는 겁니다. 나중에 그리스도 앞에서 모세마저 죄인이 되는 거예요. 모세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지 아니하면 모세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게 변화산이에요. 모세와 엘리야, 얼마나 일 많이 했습니까? 그들이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대화한 내용은 뭐냐? 주님, 언제 돌아가십니까? 별세에 관한 문제였어요.

 

다시 말해서 모세와 엘리야가 한 통속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주님이 죽으시는 그 죽음에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너희들은 고생 많이 했기 때문에 그냥 구원해줄게. 이게 없어요. 모세란 인간도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대신 죽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천국은 없다. 이미 천국에 살면서도 그것을 분명히 일깨워줍니다. 별세에 대해서. 제자들도 마찬가지죠.

 

이삭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 겁니다. 나는 에서 쪽인데 하나님께서 야곱 쪽으로 돌렸다는 거죠. 그런 일 없지만 만약에 이삭이 야곱을 좋아한다면 주께선 에서 쪽으로 돌려버릴 겁니다. 언약은 반드시 인간의 것을 피해가야 대신 죽으심이 의미가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각이 일치되게 되면 대신 죽음의 의미가 죽어요. 모독 받습니다. 사실은 마귀가 노리는 건 그겁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따먹은 만큼 지식의 효과를 구원받는데 보태라고 주장하죠.

 

마귀들 생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삭이 에서를 밀어주고 야곱은 싫어하는 그런 모습 속에 구체적으로 함유돼있어요. 마귀가 뿔 달고 녹색 얼굴 하고 날개 달고 나타나는 게 아니고 실제로 역사 속에 마귀가 세밀하게 작용하고 있어요. 다만 복음이 들어오니까 마귀가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냥 복음이 없으면 다들 점잖고 정상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죠.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고. 세상 제대로 잘 돌아가고 있지요. 문제가 뭐 있어. 문제없는 거야. 문제없이 보이고 세상이 평화롭게 보입니다.

 

우리 공부가 언약에 관한 문제고 언약은 전쟁에 관한 문제인데, 마태복음 10장 34절 읽어보세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보세요. 도대체 우리가 말하는 인간들만의 세상은 항상 평화, 평화.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며 고요하게 사는 게 남는 거다. 하지만 주님은 의도적으로 화평을 주는 게 아니고 더 분란을 일으킵니다. 검을 주러 왔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불화지요. 화평하지 못한 불화하기 위함입니다. 이게 우리들과 저쪽이 싸우는 게 아니고 가정 내부에 딸이 엄마와 얼마나 친합니까. 내부를 조각조각 내는 거예요. 가족끼리 서로 싸운다는 말은 더 내부에 들어가면, 내 마음 자체가 안정을 원하고 지속을 원하는데 이것마저 주께서 허락하지 않고 그걸 깨버립니다.

 

그래서 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이 못난 네 목숨은 지금 개판이란 거죠. 네 마음 지키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집착하고 지키는데 네가 지키는 그것을 깨버리겠다. 부셔버리겠다. 그러면 이 말 듣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럼 어떻게 살라고요?” 이렇게 나오겠지요. 살지 마. 네가 지금 뭘 지키려고 하느냐? 지키려고 하는 것이 너한테 올무고 그것이 나의 전쟁에 훼방이 된다는 사실이죠.

 

쉽게 말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 전쟁할 마음이 있긴 있어? 나의 전쟁에 함께 마음이 있는 거야, 그냥 편안한 게 행복이라고 싶어. 관람이나 하고 싶은 거야, 전쟁터에 뛰어들고 싶은 거야?” 그걸 묻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열두 제자의 사명이 전부 전쟁에 관한 거예요. 네가 핍박하면 도망가고,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11장도 마찬가지에요.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뱃새다야”(20,21절) 이게 갈릴리 바닷가 근처에 있는 지역인데,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1,24절)

 

지금 전쟁이 불나게 일어난 겁니다. 미국의 침례교 쪽 보수주의라든지 성결교 쪽에서는 이스라엘 땅에 의미를 두는데 주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이스라엘이 아니라 러시아 어느 땅이라도 분란이 일어나는 이유가,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화평을 원하고 있다는 마음 자체에 기존의 것을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적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여, 내 마음을 다치면 안 돼요.

 

십자가 진다는 말은 주님의 불화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옛날 이스마엘과 비교되는 이삭이 아니고 아브라함 가정 내부에서 벌어지는 지금의 이삭, 언약적 내용을 품고 있는 이삭입니다. 십자가란 내용을 품었다는 말은 나의 행복은 끝났다는 거죠. 나의 구원은 끝났고. 나의 아름다운 미래도 끝났어요. 내가 관리하거나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내가 없어지는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내 속에 분란 요소가 있지요. 옛 자아와 새 자아로 분란을 일으키죠. 로마서 7장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런 분란만 있을 뿐이지 어느 자아가 구원받느냐고 따로 빼내지 마세요. 빼내면 분란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전쟁할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목사님, 마음이 편안한데요. 복인 줄 아세요. 그리고 감사하면 돼요. 심란하다? 그러면 기도하면 돼요. 고요하면 찬양하면 돼요. 문제가 있거든 기도하고 고요하거든 찬양하란 말은 어떤 상황이든 네가 기대한 상황이 아니고 주께서 다루시는 상황이기 때문에 미리 내 것이라고 미리 예상할 필요는 없다 이 말이죠.

 

강의 중에 이러면 안 되는데 찝찝해서. 어떤 분이 질문했네요. “안녕하세요. 야고보서 5장 15절에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라, 돼있는데 주께서 이 병든 자를 알고 계시는데 굳이 믿음으로 기도시키는 이유가 뭘까요? 아니 이미 중보자께서 기도하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병 낫기를 기도하시잖아요(죄 사함).” 이게 질문입니다.

 

-죄인임을 깨닫게 하려고^^

 

목사님도 이런 질문 많이 받지요. 쉬운 시간에 답하고.

 

언약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 우리는 언약의 부름을 입었기 때문에 주도권이 언약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의 내용과 기대하는 내 내용이 다르게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언약의 내용이 뭐냐고 물으면, 구약적 입장에서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야곱도 마찬가지거든요. 아브라함이 소명 받을 때 내가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기도하니까 롯 조카가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받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 뭡니까? 네 자손이 하늘의 별 같이 많을 것이다. 항상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같이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자기가 뭔가 된다고 당연히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외부에 치장하는 게 아니고 드디어 이스라엘 가정에 들어오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삭 주시고, 그래 이삭은 나의 후손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삭을 죽이라 하지요.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은 자기 게 바닥이 드러나죠. 찢어진다, 깨진다고 표현할 수 있는데 아브라함은 자기의 최후라고 할 수 있는 밑바닥까지 깨져버리면 아브라함은 옛 자아와 새 자아로 분리될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옛 자아는 새 자아로 넘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옛 자아가 알아요. 무지무지 중요한 이야기를 방금 제가 내뱉었습니다. 옛 자아에서 새 자아로 넘어갈 수 없어요. 이건 새 자아로 등장할 때만 옛 자라로 판정되지 어떻게 옛 자아로 새 자아로 하겠다? 이건 하나님의 개입이 아니고 상상한 겁니다. 어떻게든지 살려보려고. 자기가 자기를 살려보려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거죠.

 

그런데 그것이 상상이 아니고 실제로 옛 자아는 끝나고 새 자아로 주어진다는 것을 뭐로 아느냐 하면,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주어지고 이삭을 바쳐야 된다는 사실이죠. 이삭을 바치는 게 대신 죽음이 되는 겁니다. 대신 죽음이 돼버리면 이제는 아브라함이 스스로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끝나버렸어요. 그럼 어디로 건너가야 돼요?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건너가서 이삭의 효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뒤늦게 구원의 혜택을 입잖아요.

 

언약구조인데 똑같은 방식이 아까는 아브라함과 이삭을 대비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면 언약적으로, 이번에는 이삭 대에서는 이삭을 야곱을 상대로 똑같은 그러한 지적을 이삭이 받아야 되겠죠. 그럼 야곱은 어떻게 됩니까? 응용문제. 요셉을 통해서 똑같은 지적을 받는 거예요. 내가 뭔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렇게 해서 됐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 앞에서는 그것마저 구원에 훼방된다는 사실. 대신 죽으심,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내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언약을 증거하기 위한 조치 현상에서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가만있는데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렇게 이끌어 가시고 인도하시는 거예요. 내 마음에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불화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게 모든 인간에게 다 주어진 거죠. 이건 성경에 나오는 구원받은 사람 다 마찬가지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지요. 가락지 끼고 소 잡고 난리 났잖아요. 상상해보는 거예요. 그 뒤에 자랑질했겠습니까, 나는 탕자라고 유지했겠습니까? (나는 탕자라고)유지했겠지요. 지금 목사님은 고백하는데 이걸 아는 사람이 참 드물어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나온 거예요. 십자가 알고 난 뒤에 더욱 더 죄인인 걸 아는데 맨날 저한테 따지기를 의인 됐는데 왜 죄인이라 합니까? 이걸 따지는 거예요.

 

실제로 상상했을 뿐이지 실재가 침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자랑질하기 급급해서 그렇습니다. 왜 그걸 자랑질하고 싶냐 하면, 교인들이 “목사님, 구원받았어요?” 할 때 나, 구원받았다는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랑질해서 뭐 합니까? 주님을 자랑해야지 구원받은 걸 자랑하면 자기 증인 되지 주님의 증인 되는 것 아니거든요.

 

이럴 때는 구원 못 받았다고 하지 마시고, 구원 안 받을래. 또 구원 못 받았다고 하면 우리 목사님 구원 못 받았단다. 나도 구원 못 받는다. “나, 구원 안 받을래.” 얼마나 여유가 있으면 구원 안 받겠어요. 얼마나 자유로우면 구원 자체에 대해서 구원이거든요. 구원 자체에 대해서 탈출했으니까 구원 문제에 연연할 필요 없으니까 그 자유 함을 보이는 거죠.

 

이제는 내가 용서하니 너는 두 번 다시 죄 짓지 말라고 간음한 여인에게 이야기했지요. 그 뒤에 누가 간음한 여인에게, “당신은 예수님께 용서받았지요?” “용서받았습니다.” “죄 지었습니까?” “주께서 죄 짓지 않게 하셨습니다.”라고 할 수밖에 없지요. 본인이 가서 죄 안 지면 본인이 옛날 죄 된 세계에 그대로 눌린 셈이 됩니다.

 

답장을 안 하니 자꾸 오는데 잠시 답장하고 갈까요?

“정정하겠습니다. 중보자께서 기도하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병 낫기를 기도하잖아요. 중보자께서 기도하고 계시잖아요.”

 

지금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사실은 요셉까지 끝난 셈이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우선이다. 언약이 끼어들었다. 언약 앞에서 인간들은 자기가 복의 근원인 것처럼 행세하고 싶어 한다. 주께서 그걸 틀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상징으로 버티고 있으면 실재가 나로 인해 가려져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내 뒤를 가린 것을 내가 상상해버리는데 그게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내 뒤에 계신 분이 현실 속에서 나를 치면 나는 엎어지고 자빠지겠지요. 비로소 그때 등장하시는 분, 그분과 나 사이는 나 같이 멍청하고 어리석은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분으로 등장할 경우에만 언약이 포함된 언약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 다. 뒤에서 발길로 찬단 말이죠. 우리는 자빠지죠. 그것도 아주 꼴사납게 자빠지죠.

 

야곱언약을 이루는데 야곱이 한 게 뭐있습니까? 마차 타고 온 것밖에 없지요. 아들 죽었다고 징징거리다가 잘 믿기지 않은 상태에서 가나안 땅에서 애굽으로 마차 타고 왔지요. 와 보니까 다 돼있는 걸 자기는 언약 이루는데 죽은 자가 됐지요. 주님께선 오히려 살았다는 나를 죽은 자로 무능한 자로 만들고 죽었다고 여겼던 살아서 요셉이 생생하게 살아서 모든 다 이뤄놓고 아버지와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서 애굽으로 데려오잖아요. 그럼 야곱이 한 게 뭡니까? 그냥 언약만 누리죠. 그게 바로 언약이었단 말입니다.

 

그것을 야곱이 품게 되면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큰 아들, 작은 아들 자리 바꾸고 그냥 할 수 있는 걸 어긋맞다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자리를 바꾸지 않고 어긋맞게 해요. 교차되게 한다고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한 옛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구체화되어 나타났다는 거죠. 그러면 그동안 자기 인생을 하나님이 마음대로 이끌어 오신 거예요.

 

그걸 시편 105편 17절,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한 사람을 앞서 보냈지요. 그리고 요셉이 종으로 팔렸는데 19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이 말은 요셉 이전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스스로 성취하기 위해서 성취하는데 구체적인 인물인 요셉을 움직였단 말입니다. 요셉은 다 끝나고 난 뒤에 형제들이 아버지 죽었으니까 이제 나한테 복수할래? 하니까 요셉이 오히려 더 난처해하면서 분명히 내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서 나를 먼저 앞서 보냈다고. 내가 여러분을 살리고 죽일 권한은 없습니다. 말씀이 말씀되도록 우리를 사용한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야곱언약을 해석하게 만들고 야곱언약이 실제로 지금 유일한 창조의 원리로 언약적 원리로 살리고 있습니다. 그건 우리 구원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집단을 이루며 이 집단이 언약의 민족으로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것이 집단화되고 구체화되는 현장 속에 본인들이 다뤄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이건 개인과 개인의 이기심 다툼의 문제가 아닙니다.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그 문제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요셉의 인생에 보면, 분명히 자기보다 못 났는데 잘 되고 잘난 자기는 교도소 가고 역전 현상이 일어나지요. 그건 왜 그러냐? 말씀이 응하기 때문에 그렇다는데 구체적으로 말해서 말씀 내용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낮아지는 것이 포함되기 때문에 말씀이 응한다는 것이 뜻대로 된다는 말이 아니고 장차올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된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성도에게 말씀이 응한다는 말은 그냥 뜻대로 되겠지, 내 주여 뜻대로, 그게 아니고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여주기 위한 거기에 우리가 다뤄지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럼 다뤄지는데 낮아져야 되는가? 낮아지는 게 아니고 죄인 된다니까. 낮아지는 만큼 인간은 지 잘난 체해요. 나는 모든 걸 포기했습니다. 이게 자랑질하는 거예요. 자랑질 안 하려면 죄인 돼야지 낮아졌다는 걸 고백하면 안 돼요.

 

-그게 어려워요.

 

성령 안에서 헌금했습니다. 그러면 안 돼요. 헌금하다보니까 내가 죄인인 걸 알았습니다. 이래 돼야지. 항상 내가 잘났나, 네가 잘났나, 이게 계속 육속에 살아있으니까 잘난 사람 없는데 내가 잘난 사람으로 다시 뽑아내려고 시도하거든요. 그런데 언약에서는 둘 다 죄인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누가 죄인인 걸 깨닫느냐는 문제지 누가 잘났느냐는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이 실수를 범합니다. 자기가 에서를 이겼으니까 자기가 잘났다는 겁니다. 삼촌보다 자기가 잘났고.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은 내가 소유하기에 합당한 존재이기에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얍복 강가에서 그걸 다 잃어버립니다. 얍복 강가에서 알게 된 것은, 야곱은 낮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대낮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은, 이런 말을 안 쓸 때는 사람은 그냥 산다고 되는데 낮에 속한 사람이 돼버리면 인간은 온전한 진리를 모르는 게 돼요. 왜? 밤에 속한 세계가 낮에 속한 세계와 대비가 되고 전쟁을 치루고 있다는 사실을 낮에 속한 사람은 상상도 못한 거지요.

 

창세기 32장 봅시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1,2절)

 

그럼 하나님의 군대, 천사들은 어디서 만나느냐 하면,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밤에 꿈을 꾸지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지요. 전쟁은 누가 합니까? 밤에 속한 자들이 주관이 되어 전쟁을 벌이지요. 천사들이니까. 야곱은 밤에서 벌인 일의 결과가 낮에 있는 야곱, 본인이 된다 이 말입니다. 꿈에 나타났으니까. 꿈에 나타난 천사들이 군대가 되어 전쟁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래서 야곱은 전쟁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쥔다. 자기는 주님의 은혜 덕분에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와 자기는 한 패라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 자신이 문제 있는 걸 몰랐지요. 그런데 얍복 강에서 누가 오니까 야곱이 자기 적인 줄 알고 싸웠단 말이죠. 그 정체를 밝혀보니까 마하나임에 속한 분과 싸움을 벌인 거예요.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는 거예요. 야곱은 본인의 문제가 뭔지 몰랐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낮에 속한 것이 밤에 속한 일과 자동적으로 순하게 연결되지 않아요. 여기에 싸움이 있고 다툼이 있고 희생이 있어야 밤과 낮이 교통이 됩니다.

 

그래서 야곱은 천사를 붙들고 축복해달라고하지요. 그래 축복하마. 이렇게 끝난다면 야곱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약이 없어요. 축복을 하되 이름을 바꿉니다. 그러면 이름이 바뀐 야곱과 이스라엘로 바뀌었잖아요. 야곱과 이스라엘, 그 이삭과 이 이삭처럼, 아브람과 아브라함처럼 이제는 야곱과 이스라엘 사이에 새로운 언약의 내용이 근원적인 언약의 내용이 추가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를 위해서 내가 희생해야 된다는 것, 야곱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희생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요한복음 1장에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결과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잖아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다나엘이 나오지요. 네가 무화과나무에 혼자 있는 걸 내가 아는 것으로 놀랐느냐, 더 큰 일이 있을 것이다.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리라. 야곱언약은 내가 이룬다. 어떻게? 죽음으로써 이루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이 천사와 싸웠던 그것이 한 때 실수가 아니고 본 핵심으로 이스라엘 속에 담아버립니다. 그러면 야곱은 그때부터 내 대신 죽어야 될 자가 내 몸에서 인생을 통해서 시작되는 거예요.

 

희생이 없는 것은 야곱이지만 희생이 있는 인생은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 희생자로 등장한 것이 요셉이에요. 자기 대신 요셉이 희생해서 고생하고 자기는 그 혜택을 입는 겁니다. 이스라엘적인 혜택을 입게 되죠. 그러면 야곱은 뭡니까? 어긋맞게 되는 거죠.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진다는. 처음에 태어날 때 들었던 그 이야기는 야곱 자기중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바꿔지니까 이스라엘 중심인 것을 그동안 이스라엘이 야곱을 가린 거예요. 야곱이 하나님과 다투면서 자기가 뒤통수 맞고 난 뒤에는 야곱을 밀쳐내고 위에 이스라엘이 덮치니까 야곱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종으로 팔려가서 죽도록 고생하는 그 경로가 야곱언약을 야곱에게 이루기 위한 절차 가운데 포함됩니다.

 

-에서와 관계없는 거군요.

 

에서는 빠지는 거죠. 계속 내부로, 내부로.

 

-높은 자는 이스라엘이었네, 결국. 낮은 자가 야곱이고.

 

계속 파고들어요. 그래서 국가 이스라엘은 망해야 살아요. 그리고 우리가 망하지 않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제가 망한다고 했잖아요. 이걸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냥 의인으로 죽는 게 아니고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서. 다른 사람은 그냥 죽지만 우리는 죽어 마땅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해서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주가 부활할 때 함께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 내용이 언약의 내용으로 품게 되면 그리스도의 증인 되는 거죠. 새로운 자아를 부여받은 겁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의 완성은 요셉을 통해서.

 

예.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시고.

 

요셉언약은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야곱이 받은 언약 때문이지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다. 아버지가 받은 그것을 아들이 완성해요. 아브라함이 받은 것을 이삭이 완성하고 이삭이 받은 언약을 야곱이 완성하고 야곱이 받은 것을 요셉이 하고. 이스라엘이 받은 언약은 예수님이 하시고. 미래에 준비된 메시아가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완성시킵니다. 지금은 미래라고 하지 말고 위에 계신 주님이라고 해야 되지요. 왜냐하면 묵시 안에서 시간이 사라졌으니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으니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할 때 큰 자는 이스라엘?

 

없지요. 큰 자도 없고 작은 자도 이 땅엔 없지요. 없는 데서 생겨버려요. 밤에 속한 분이 낮에 튀어나오죠. 이 세상은 낮의 세계니까. 밤의 세계는 이 땅에 없는 세계에요. 언약 때문에 그 순간에 나타나는 겁니다. 나타났다 사라지고.

 

-영적인 세상이라는 보면

 

그렇지요. 낮 속에 이질적인 아까 보편성 속에 특이하게 발생되는. 그 특이함은 모든 낮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특이함, 그게 언약의 장소입니다. 없던 장소가 새로 생기죠. 그래서 성도는 없던 내가 새로 생긴 거예요.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3페이지 봅시다. 이스라엘 국가의 승리. 이스라엘 국가가 특이한 나라에요. 우리가 언약적 내용을 잘 알았다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이질적인 요소가 이스라엘 속에 포함되겠지요. 그렇다면 애굽에 고생한 사람은 이스라엘입니까, 히브리인들이에요? 히브리인들이죠. 아직 이스라엘 나라가 없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이라고 붙이려면 이스라엘 요소를 품은 자가 히브리인들 속에 섞여야 되겠지요.

 

여기 초코과자잖아요. 초콜릿이 묻어 있잖아요. 초코과자라고 붙이려면 초콜릿이 있어야 되듯이 히브리인이 이스라엘 되려면 야곱의 언약에서 완성된 이스라엘 언약이 히브리인에 삽입이 되잖아요. 그 삽입이 외부에서 와요. 내부 인물이 외부로 갔다가 외부에서 뭔가 덧입고 내부로 침투하게 됩니다. 그게 피를 머금고 와야 돼요. 피 언약. 출애굽기 4장, 여긴 피 언약이라 하지 않고 피 남편이라고 돼있습니다. 자기 남편을 피 남편이라고 하는 건 처음일 거예요. 십보라가 4장 26절에 보면 뭐라고 돼있지요?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하지요.

 

여기 22절에 보면 참 어려워요.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했지요. 아들들도 아니고 장자들도 아니고 그냥 단수에요. 대표적 단수가 되는 거예요. 하여튼 단수로 표현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정한 아들이 그 안에 폭 집어넣을 때 그 아들 외에 다른 것은 아들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조건 하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각자, 각자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면 안 돼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돼야지 머리는 하나여야 되지 나도 머리, 너도 머리 되면 안 돼요. 교회 머리는 주님으로 하나로 대표돼야 되고 우리는 주님에 예속돼야 되지 따로 내가 교회라고 하면 안 됩니다.

 

억지로 표현하면 집단적 단수라고 하는데 다양성과 일자성이라는 논쟁으로 번져서 복잡해요. 둔스 스코투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 이것 때문에 고민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한분인데 다양한가? 이 문제에요. 하나님 개성은 하나인데 사람들은 개성이 다 다룬가? 그럼 중간에 뭔가 종합할 경로가, 프로세스가 있어야 될 텐데 그 프로세스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각자가 실체다, 아니야 객체다. 이런 논쟁이 중세 스콜라철학에서 나온 겁니다.

 

거기서 나온 개념이 뭐냐? 실체 개념에서 근대에 들어오면서 드디어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이 등장합니다. 독자적으로 주체가 된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와서 주체는 없다가 돼요. 누가 주체냐? 주체 자체가 없다. 이런 논쟁이 강한데 이게 오늘날 국가 정치이론에서 마찬가지로 적용돼요. 민주주의 주인이 누구냐? 국가 주인이 문제가 돼서 주인이 각자냐, 아니면 모임이냐? 답변하기 곤란해요.

 

어쨌든 우리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 모세가 삽입돼야 돼요. 모세가 그냥 삽입되면 안 돼요. 모세언약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이스라엘 언약은 유월절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고 시내 산 위에서 체결되지요. 십계명을 통해서 맺어집니다. 그러면 출애굽은 뭐냐? 시내 산에 오기까지 전초작업이 되는 거예요.

 

애굽에서 건져낸 그게 언약이 아니고 언약은 따로 세워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은 이스라엘과 애굽이란 집단과 집단의 문제지만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는 십계명으로 와요. 십계명에서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은 우상 단체가 돼요. 모세 빼놓고 우상 단체가 되는 겁니다. 모세 빼놨으니까 나머지는 모든 자가 우상 숭배자가 되지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51203 혜화동특강e-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이스라엘 속에 이질적인 것, 특이한 요소가 들어옵니다. 모세가 개입하지요. 모세의 개입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은 바로 왕뿐만 아니고 모세를 따라서 구원돼야 될 히브리인들도 모세 하는 일들에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애굽 상황이 그게 현실 전체기 때문에. all이거든요. 일반적, 그들이 아는 모든 것 속에 포함된 모세는 단순히 하나의 개인이기 때문에 바로만 무시한 게 아니고 히브리인들도 모세를 무시했습니다.

 

무시했다는 말은 장차 예수님이 창조주로 오시는 게 아니고 보통 일반 구성원으로 한 사람으로서 이 땅에 개입하니까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못 알아듣는 거예요. 목수의 아들 아니냐, 그 아버지를 아는데, 보통 사람이에요. 그리고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너, 어느 신학교 나왔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특이성을 나타내려면 언약적 내용이 거기에 주어지겠지요. 언약적 내용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일어난 사건의 반복이 돼요. 모세언약이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있었던 그 언약의 반복이에요. 언약은 전쟁에 관한 용도라 했지요.

 

출애굽기 3장 13절부터 15절까지 읽어보세요.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의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한 분이라고 해도 되는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세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느냐 이 말이죠. 이건 뭐냐 하면, 아브라함언약이 이삭을 통해서 완성되고, 이삭 통해서 한 언약이 야곱을 통해서 완성되고, 야곱이 현재는 집단적으로 모세를 통해서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 히브리인들은 개인의 구원문제에 집작돼있거든요. 우리가 힘들다, 못 살겠다, 바로가 핍박한다. 개인적인 자기의 생존문제에 걸렸는데 주님께서는 그게 아니고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을 데리고 자기 군대로 삼아서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밖에 모르는 그렇게 통치했던 보이지 않는 악마와의 전쟁에 히브리인들을 사용하려는 겁니다. 그럼 히브리인들이 어떤 재주가 있느냐? 재주는 없어요. 그럼 뭐냐? 그들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12장 봅시다. 12장 41절 읽어보세요.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하나님의 군대가 나왔지요. 군대 같아요, 어때요? 히브리인들이 군대 같은 모양새가, 무기가 있습니까, 진영을 갖추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오합지졸이죠. 그게 언약 안의 군대 특징이 그렇습니다. 자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의 집합이에요. 무능한 자들의 집합이죠. 무능해야 돼요. 무능하지 않으면 영적 전쟁이 아닙니다.

 

지금 기존의 교회에서 선교단체를 유능한 자로 만드는데 절대로 유능하게 만들면 안 돼요. 어느 정도로 무능하게 만들어야 되느냐? 개죽음 당해도 좋다고 할 정도로 무능해야 돼요. 제가 할 게 있어야 선교하지요. 저는 지금 개죽음 당해도 당연합니다, 마땅합니다. 이래야 군대에요. 기도의 용병? 기도의 용병 필요 없어요.

 

우리 가운데 능한 자가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가진 자가 누가 있으며, 우리 가운데 똑똑한 자가 누가 있느냐? 중요한 건 자랑의 내용의 차이거든요. 그리스도만 온전히 자랑할 것이냐, 아니면 그리스도+내 자랑할 거냐? 이건 마귀한테 백전백패입니다. 마귀를 이길 수 없어요. 마귀는 그리스도와 뒤에 뭔가 섞이길 원합니다.

 

언약이 인간은 빠집니다. 언약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언약이기 때문에 인간은 거기에 끼어들면 안 돼요. 끼어들려면 새로운 피조물 돼야 되는데 새로운 피조물은 옛 피조물과 연관성이 없어요. 왜냐하면 옛 피조물은 새로운 피조물을 넘어서며 죽어야 되니까 연관성 없는 거예요. 죽은 것을 주님께서 받아내잖아요. 이건 해골이에요.

 

에스겔 37장에 나오는 해골을 주의 말씀으로 살려내기 때문에 해골과 새로운 하나님 군대는 연속성이 없어요. 중간에 개입된 인자가, 하나님 말씀의 사람이 돼야지 옛날 그 인간이 일하면 안 돼요. 그 인간은 계속 무능한 자가 돼야 돼요. 그러니까 계속 무능이 유지되기 위해서 승리하고 무능에서 벗어나면 패배가 되는 겁니다. 무능에 대한 자각이죠. 제가 지금까지 한 것도 그렇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못할 거예요. 이렇게 돼야 돼요. 전쟁에서.

 

그래서 나중에 나오지만 이스라엘이 승리할 때는 무능할 때는 승리했고 조금이라도 유능할 때는 패배했어요. 왜냐하면 적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적들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적들 배후에 비 언약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귀신입니다. 언약적이지 않으면 무조건 하나님께서는 마귀 편 손을 들어버려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언약궤 돌아오니까 좋다고 춤을 췄잖아요. 20절에 보면,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왕의 신체는 절대자의 신체기 때문에 신적인 요소로 간주되거든요. 국가는 곧 왕의 얼굴이라는 말이 있어요. 국가가 유지되는 것은 왕의 얼굴이 유지될 때 그게 특수한 의미를 지니면서 정신적으로 사상적으로 통합돼요. 그래서 김정은이 김일성 흉내 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왕의 제국에서는 임금의 용안이 곧 중심이 되는 얼굴이에요.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얼굴입니다.

 

왕이 하찮은 종처럼 구니까 왕비가 저래서 나라가 잘 될지 걱정이 된 모양이죠.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21,22절) 했거든요.

 

이게 아까 야곱언약이죠. 처음 된 자가 나중 되죠. 그게 이스라엘 내에 살아있을 때만 이스라엘의 승리가 주어지는 겁니다. 지금 언약궤가 블레셋에서 다시 돌아오고 있거든요. 그 승리가 유지돼야 돼요. 승리의 내용이 다윗에게 포함돼있으니까 다윗이 낮아지고 또 낮아지는 거예요. 그걸 왕비 되는 미갈은 모르는 거예요. 미갈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23절)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지요. 그럼 누가 패배자에요? 결국 블레셋만 패배자가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패배자가 발생된 겁니다. 누가? 미갈이 패배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언약의 양발차기에요. 누구 축복이냐, 저주냐 하는 것은 언약이 실현되는 현장에서 지옥과 천국이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왜 미갈은 이렇게 다윗에게 조언했습니까? 이미 기존에 있는 이스라엘은 자체로 하나님 편이라고 우긴 거예요. 반복적인 언약이 아니고 그냥 상징 자체를 실재로 본 겁니다. 계속해서 언약이 주어져야 되는데 과거의 이스라엘이 지금도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큰 교회에서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다. 왜 그러냐 하면 교회를 교회로 보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가 개척할 때 일곱 명으로 해서 칠천 명 됐다고 합시다. 아들은 어떻게 해야 돼요? 제대로 하려면. 6999명 쫓아내고 새로 시작해야 돼요. 그런데 칠천 명부터 시작하는 것은 칠천 명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지요.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어제 내 아내였으니까 오늘도 내 아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늘도 도망 안 갔구나. 감사합니다. 그게 낮아짐이에요. 자기의 무능성입니다. 언약을 위해서 붙여줬지 내가 잘나서 잘했기 때문에 붙어사는 게 아니잖아요. 둘 다 마음 낮추라는 주의 계획 때문에 붙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날마다 새 장가가야 돼요. 날마다 새로운 시집을 와야 되고. 그게 언약적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게 안 되잖아요. 왜냐하면 역사의식 때문에 그래요. 과거에 그랬듯이 마땅히 오늘도 그런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전쟁은 외부 전쟁 이전에 이미 주께서 언약이 있는 그곳에 내부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사무엘하 6장 6절 봅시다.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보세요. 앞에서 분명히 언약궤를 블레셋에서 가져왔는데 언약궤 혼자 돌아다니면서 블레셋 진영을 온통 전쟁판을 일으켰잖아요. 블레셋이 감당 못해서 내놨습니다. 돌아오게 되면 언약궤가 마땅히 이스라엘 편일 줄 알았는데 웃사가 손으로 잡으니까 웃사를 쳐버렸잖아요. 그럼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 편입니까? 하나님은 그때그때마다 자기편을 생산하지요. 이게 진짜 어렵습니다.

 

날마다 교회 돼야 되지 한 번 교회가 교회라고 하면 안 돼요. 몰라.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교회는 그러면 안 돼요. 이게 일곱 교회입니다. 운명이에요. 그래서 일요일에 교인들 모이거든 모이게 하셨지요. 그 다음 주에 온다는 보장 없습니다. 그건 주님께 일임해야 돼요. 오고 안 오고 모이고 안 모이고는 주님께서 부지런히 안 오게 하시는 활동, 오게 하시는 활동 그건 주님 소관이지 목사 소관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그래야 목사가 자기 싸움을 계속 하기 때문에. 오셔야 되는데, 라는 것이 욕심이 일 수 있단 말이죠. 안 오시면 안 되는데, 이게 욕심일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는 목회하면서 자기 죄를 깨닫는 겁니다. 아까 미갈의 생각이 오늘날 목사들의 생각일 수 있잖아요.

 

이스라엘 내부에 언약이 살아있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었다. 언약을 맺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것이지 육적인 이스라엘 만족과 맺은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분간 못해요. 이스라엘이 있으면 이게 전부지 자기 뒤에 진짜 이스라엘이 받치고 있다는 걸 생각도 못해요. 그러니까 자기는 족보적으로 이스라엘이고 그게 그 당시 현실에 실존한 유일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너온 열두지파가 전부잖아요.

 

열두지파가 전부인데 주님께서 한 지파로 바꿔버려요. 레위지파로 바꿔버립니다. 레위지파에 모이지 아니하면 이스라엘 아닌 게 돼버려요. 레위지파가 가동되면 이스라엘 가동돼요. 레위지파를 무시하게 되면 이스라엘은 망해버립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레위지파를 잘해주면 될 것 아니냐? 잘해주기가 힘들어요. 십일조 해야 되거든요.

 

십일조 받는 자 입장은 뭐냐 하면, 내가 노동하지 않는 것을 마땅히 받아 챙기는 지파가 레위지파에요. 다른 지파는 본인이 노동해서 우리가 노동한 것과 상관없이 이런 생산물이 나왔다고 고백해야 되는 게 나머지 열한지파에요. 그러니까 레위지파는 특이한 지파가 되는 거지요. 대표 지파가 되는 겁니다.

 

민수기 3장 12절,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대신’이란 의미를 누가 품고 있습니까? 레위지파가 품고 있어요. 그래서 열두지파를 대표하는 한 지파기 때문에 그 안에 모든 지파가 다 들어있지요. 모든 지파를 볼모로 잡았다고 보면 돼요.

 

이 말은 모든 지파 내에 레위지파가 흩어져 잠입돼있다고 보시면 되죠. 모든 지파의 레위지파화, 이게 율법이에요. 제사는 레위지파가 드리지만 그 여파는 레위지파에 소속된 모든 지파에게 제사 드리는 효력을 발생시켜서 그들에게 제공됩니다. 그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요? 그게 이스라엘이거든요. 레위지파의 나라, 제사장 나라에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뭡니까? 영원한 제사장이죠. 그럼 우린 뭡니까? 주님이 내 속에 들어와서 주님이 하신 십자가의 결과를 유발시켜서 위해서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용한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겁니다. 주의 증인이 되죠. 그럼 독자적으로 내 것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리스도의 것이 돼야 돼요.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 아니지요. 사마리아 인인데 이스라엘 됐어요. 왜? 예수 그리스도가 만드신 영생이 나오는 우물을 그 속에 만들어넣었어요. 예수님은 영원한 제사장이죠. 영원한 제사장 안에 모든 지파의 제사장이죠. 그 제사장이 사마리아 여인에 들어오면 사마리아 여인은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그게 새 이스라엘 만드는 작업이에요. 언약적 실현입니다.

 

그럼 나머지 역사는 뭐냐? 가짜 이스라엘과 진짜 이스라엘의 싸움이 여호와 전쟁이 되는 겁니다. 바깥의 전쟁은 전쟁도 아니에요. 이스라엘만 이스라엘 되면 나머진 다 이기게 돼있어요. 다윗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다윗이 한 말이 있어요.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우리를 겁줄 수 있느냐? 상당히 언약적 사고방식이에요.

 

이스라엘은 기적적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할례언약, 모세언약이죠. 피언약. 언약 때문에 유지되는 게 이스라엘인 반면에 골리앗이 포함된 블레셋은 언약이 없단 말이죠. 언약이 없으면 저주잖아요. 그럼 뭘 해도 저주되는 나라가 복이 될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언약이 있으면 뭘 해도 복이 되지요. 전쟁은 끝났어요. 저주는 저주대로 복은 복대로 분리되면 전쟁이 끝나는 건데 이 전쟁은 시작부터 끝난 전쟁이다. 다만 골리앗이 까불거리는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환경을 새삼 확인하기 위해서 한 것이죠. 이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전쟁이 아니고 여호와께 속한 전쟁이라고 돼있어요.

 

사무엘상 17장 47절 읽어보시고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잖아요. 그러면 다윗은 아무것도 안 해야 되잖아요. 답변해보세요. 전쟁은 여호와께서 속했으니까 설칠 필요 없이 가만있으면 되는데 다윗은 왜 설칩니까? 물맷돌 던지고 칼이 없어서 골리앗 칼 들고 목을 베고 왜 그런 행위를 보여줍니까? 가만있으면 되는데 여호와께서 속했으면 여호와가 알아서 천사가 와서 할 건데 왜 지가 나서냐 말입니다.

 

언약의 구체성이잖아요. 언약의 구체성은 관찰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직접 뛰어들면서 아님을 알게 하는 거잖아요. 지가 행동하면서 내 행동과 전쟁 승리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여호와 전쟁입니다. 자칫하면 전쟁은 이스라엘이 해놓고 다윗이 패배할 수가 있어요. 내가 했습니다. 사울이 이래서 망했잖아요. 전쟁은 전쟁대로 승리하되 사울은 승리의 혜택을 입지 못하고 빠져버려요. 모든 전쟁은 내부 전쟁이지 바깥 전쟁이 아니기 때문에.

 

골리앗은 허수아비에요. 진짜 전쟁은 이스라엘 내부 전쟁입니다. 다윗의 인식을 갖고 있느냐, 사울의 인식을 갖고 있느냐, 그 싸움이에요. 사울의 인식은 이스라엘은 내가 지킨다고, 다윗은I am nothing. 우리는 이스라엘 지키는데 하나도 소용없음을 보이기 위한 행위만 보이면 되겠지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고 막 사는 거예요. 왜 그냥 살지 않고 ‘막’ 자를 집어넣는가? 우리가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음을 우리가 막 사는 걸 통해서 주님을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이스라엘 내부에는 모세언약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계약은 시내 산 밑에서 계약했지요. 출애굽기 24장 6절부터 읽어보세요.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도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된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아브라함이 이삭 바칠 때 할례를 행한 후지요. 할례언약이 피 남편이라고 했습니다. 근원적인 피는 인간의 육신을 제거하는 데서 오겠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소를 잡지요. 소 잡아서 흘린 언약의 피는 다시 사람에게 오되 그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고 인간 속에 섞이는 특이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피를 호소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한 사람의 피가 중간에 율법을 통해서 양의 피로 바뀌었다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 해서 그것이 진짜 상징을 상징되게 한 실제적인 피, 예수님의 피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모든 언약의 한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나님이 죽는다는 게 포함됩니다. 하나님이 죽어서 하나님 됨을 자기 증명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죽는 하나님이었어요. 죄 지어서 죽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죽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죽는 것은 확정된 것이고 죽음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 죄가 발생돼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는 겁니다.

 

인간의 상식은 뭐냐? 인간이 죄 짓고 인간을 불쌍히 여겨서 죄 용서하기 위해서 어린양으로 제사 지내서 그 피로 씻어주는 게 상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고. 창조 전부터 십자가 있었던 거예요. 이게 인간의 힘으로 알 수 없는 깊은 진리에요. 성령이 임해야 알 수 있는 겁니다. 십자가 피가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조치하는, 처리하는 현상으로 주어지게 되면 구원론이 돼버려요. 그건 종교가 돼버립니다.

 

십자가는 구원론에 연관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본질에 관한 거예요. 십자가지지 않으면 주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 지셨기 때문에 주가 되시고 주시기 때문에 십자가 지시게 되는 거예요. 인간의 구원과 상관없이. 다만 인간이 죄 짓고 구원하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 져야 될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죄 짓고 거기서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아야 되는 겁니다.

 

이걸 누가 모르느냐? 칼 바르트가 몰라요. 칼 바르트가 모른다는 건 다른 신학자 모두가 모른다는 뜻이에요. 모든 신학자 가운데 최고가 칼 바르트거든요. 칼 바르트조차 이걸 모르는 거예요.

 

-처음에는 아는듯하다가 나중에 바뀐 그게 아닌가요?

 

몰라요. 처음도 몰라요. 다른 신학자들보다 월등히 뛰어나요. 그런데 이 사실을 몰라요. 헤겔이란 철학자도 성육신은 알았는데 십자가를 몰라요. 지젝이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기독교에 대해서 너무 잘 분석했지만 십자가를 몰라. 십자가를 모른다는 말은 죄를 모른다는 말이고 죄를 모른다는 말은 언약을 모른다는 말이고 언약을 모르게 되면 복음을 모른다는 말이죠. 그러나 십자가 옆에 강도는 알아요. 강도 돼야 된다는 사실. 누굴 위해서? 주를 위해서. 내가 강도된 것도 주를 위한 일이란 사실.

 

그래서 이게 언약이거든요. 언약의 피입니다. 언약의 피가 계속 가동되면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이 이걸 형식화시킨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내부 전쟁, 형식이냐, 실제로 피 흘린 분이 따로 계시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따로 계신 분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들이 뒤에 오시는 메시아를 위해서 앞에 있는 종들이 죽음을 당해요.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인들을 상대하면서 내세웠던 비유 가운데 이런 게 있어요. 포도원을 만들고 주인이 먼 타국에 가있다가 일꾼들에게 추수한 걸 얻기 위해서 종들을 보냈는데 보낸 족족 죽이는 거예요. 설마 아들은 존중하겠지 하고 보냈더니만 아들마저 죽이고 하는 말이, 이제 포도원이 우리 것이 되었다고 한 겁니다. 그럼 처음부터 종들을 때리고 죽인 것은 그때부터 이미 이 포도원은 내가 노동해서 얻었기 때문에 내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는 거죠.

 

그럼 구약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느냐? 이스라엘은 누구 것이다? 자기 것이라는 거죠. 대대로 자기 혈족, 자기 민족 거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방나라화 된 이스라엘이고 자동적으로 우상을 선호할 수밖에 없어요. 우상이 우상다워서 아니라 본인이 이미 우상이기 때문에. 우상이란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존재하거든요. 교회 가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가잖아요. 그게 우상이란 말이죠. 우상과 우상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특이하게 성신 받은 선지자는 그게 아니라고 나서는 겁니다. 그게 특이한 현상이에요. 그 선지자를 오는 족족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죽여 버려요. 왜?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이스라엘을 훼방해서는 안 된다는 정신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이 나라를 부정해. 그 노선이 아벨에서 스가랴에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그 피가 너희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주님께서 저주와 심판을 외쳤던 첫 번째 나라가 이방나라가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에요. 바벨론 무너지기 전에 이스라엘이 먼저 망해요. 왜? 거룩에 가장 가까이 있으니까.

 

심판이 무엇부터 시작됩니까? 교회부터, 하나님의 집부터 시작된다고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지요. 이게 원리에요.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유대인에게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이야기함으로서 유대인만 악마가 아니고 나머지 모든 인간이 다 악마에 소속돼있다는 걸 언급하는 겁니다. 이게 구약의 요나도 마찬가지에요.

 

요나가 자기 나라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요나가 외도를 했지요. 다시스로 가다가 중간에 걸려들어서 니느웨를 거치게 됩니다. 니느웨 현장에서 자기 나라를 봤을 때 자기 나라가 하나님 나라가 아니었던 겁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말씀을 외치니까 동일한 주의 말씀인데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아니하고 니느웨는 회개했잖아요. 심지어 짐승들까지. 그럴 때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그곳이 바로 숨겨진 하나님의 진짜 이스라엘이죠. 그러면 이스라엘에서 요나 자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갑니다.

 

히브리인이 이스라엘이 아니죠. 히브리인한테 쫓겨난 사람이 모세입니다. 어떤 동조자도 없이. 모세가 사람 죽였다는 것을 같은 동족이 찔렀지요. 동족이 모세를 배반한 거예요. 모세가 삐져서 양 치고 있다가 다시 재투입 파견 근무합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거죠. 마태복음 1장에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만드는 것은 외부인입니다.

 

마태복음 1장 3절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살몬은 라합에게서,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에게서’가 네 번 나오는데 세 개 이야기했죠. 여기 우리야의 아내, 다말, 라합 다 어떤 여자입니까? 이방인이죠.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유지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리아는 유대인이지만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서 임신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처녀가 임신했기 때문에 이스라엘로서는 용납이 안 되죠. 특히 우리야의 아내는 다윗과 간통한 사이잖아요. 마리아는 아예 임신해버렸어요. 갈수록 인간들이 믿을 수 없는 요소가 언약을 통해서 불거지는 겁니다. 크게 부풀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을 이해했다는 제자들이 갈수록 이해 못해요. 처음에 오병이어 할 때는 메시아가 왔다고 착각했지요. 그러나 갈수록 하시는 말씀을 이해 못하고 특히 이해 못한 것은 바로 성전 청결할 때 주께서 폭력을 사용했지요. 성전마저 없어도 된다는 생각을 열두 제자들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성전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지요.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내가 기댈 언덕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돼요. 그래서 구원되는 겁니다. 구원되도록 약간의 접촉점을 내 쪽에서 만들면 안 돼요. 우리가 기댈 비빌 언덕이 있으면 안 돼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의지했습니다. 의지했던 이스라엘이 그야말로 이순재가 하는 것처럼 못난 놈이 되어 이들이 멸망해버립니다. 멸망하는 가운데 선지자들이 계속 투입되고, 투입되면 핍박하고 투입되면 죽고, 이름 있는 선지자도 죽고, 이름 없는 선지자도 죽고, 계속 죽어나갑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죠.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사실은 다윗이 왕 되고 싶은 게 아니고 사울을 대체하기 위해서 왕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사울은 왜 왕 되었는가? 그것은 백성들이 왜 왕을 달라고 했는가? 비어있는 것을 굉장히 못 마땅해했어요. 구체적으로. 아까 구체적인 인물, 왕의 용안이 국가를 대표한다고 했지요. 그런 왕이 없는 거예요. 왕이 없으니까 각자 소견대로 지 마음대로 놀았던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에게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왕이 없어서 생긴 불상사로 여겼던 겁니다. 왕만 있으면 하나로 통합되는데.

 

그러나 제사장 나라에서는 제사 지내는 레위지파가 제대로 지내면 유지가 돼요. 그런데 사사기에 보면, 제사장들이 떠돌아다닙니다. 레위인들이 밥을 먹을 데가 없어요. 땅도 없고. 레위인은 원래 땅이 없어요. 도와주질 않습니다. 기껏 레위인을 자기 가정과 자기 집단 복 빌어주기 위해서 무당 불러오듯이 부른 거예요. 사고방식이 우상 숭배에 레위지파를 접목시킨 겁니다.

 

지금의 군목, 병원의 원목, 학교의 교목, 교회의 회목, 전부 다 마찬가지요. 우리 교회에 잘 하라고 당회장으로 모셨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란 것은 성경에만 있지 이 교회는 없어도 괜찮거든요. 제가 교회를 없애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취임해야지. 그 교회에 가면. 여러분, 부동산 만들었으면 제가 없애드리겠습니다.

 

왕을 달라는 백성들이 이방 나라처럼 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언약의 취지가 날아가 버리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왕을 주되 그 왕을 중심한 이스라엘이 가짜인 것을 그 나라 속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서 바꿔치기 하겠지요. 그게 다윗이고 기존에 있는 것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옛날 이스라엘 대표하고 다윗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데 숫자가 사울 패가 많아요. 전쟁이 일어나겠지요. 다윗이 가는 곳마다 쫓겨 다니죠.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2편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러한 신음소리와 고난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게 이스라엘 때문에 그렇지요.

 

그것을 그대로 십자가에서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는 분이 왕이에요.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자리가 비어있는 왕의 자리에요. 왕의 자리는 버림받는 자리. 그러면 왕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제가 왕을 버렸습니다, 고백하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저 때문에 버림받았습니다. 저 때문에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잖아요. 이 죄 많은 나 때문에.

 

그래서 죄란 것은 나쁜 짓해서 죄가 아니라 십자가 앞에서만 비로소 죄가 드러나요. 죄가 드러나면서 동시에 십자가 앞에서만 그게 의가 돼버려요. 주님과의 연관성 때문에 의가 되니까 마귀가 아무리 율법으로 고소해도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고소할 사람이 없어요. 왜? 이미 자기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태양의 밝은 빛 앞에서 자기 자신의 허점이 드러난 사람이 촛불 앞에서 벌벌 떨겠습니까? 안 떨지요. 자기의 모든 죄란 죄는 십자가에 드러난 사람이 대통령이나 높은 장관 앞에 재벌 앞에 벌벌 떨겠습니까? 안 떨지요. 그게 자유잖아요. 주님 앞에 된 통으로 당한 사람이 주님 앞에 죄인으로 이미 규정받았는데 잘났다고 할 필요 없잖아요. 못난 줄 모르는 사람과 못난 줄 아는 사람의 차이 아닙니까. 성도는 못난 걸 안은 사람이 세상 사람은 지가 못난 걸 모르는 사람이고. 갑자기 나는 못난이 노래 생각나네.

 

그래서 다윗의 나라의 왕은 다윗은 사울을 대신해서 왕으로 들어갑니다. 다윗이 왕으로 등장하면서 원래 진짜 숨어있는 왕이 따로 있어요. 다윗은 상징물로 있습니다. 진짜 숨어있는 왕이 다윗을 통해서 솟구쳐 나와야 되지요. 그 현상이 다윗을 상한 심령, 죄인 되게 만들어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처음부터 원초적인 죄인, 처음부터 죄에서 태어났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이 땅에서 어떤 죄도 짓지 않았지요. 처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성도로 난 사람은 다시는 죄 짓지 아니하나니.

 

-그냥 죄인이기 때문에

 

죄 짓지 아니하나니.

 

-그런 의미였었군요.

 

사적인 죄가 아니고 차원 자체가 죄의 세상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는 두려워하지 않아요. 나를 죄인으로 만드는 이유가 의인이기 때문에 이미 죄라고 드러나면서 의인됨이 같이 드러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져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곧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일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사랑이 임하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래서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 짓지 아니하나니. 사적인 죄 개념에서 벗어납니다. 진짜 죄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게 죄겠지요.

 

다윗을 통해서 뚫었다 했잖아요. 숨어있는 왕이 다윗으로 하여금 상한 심령으로 돌발시켰어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다. 상한 심령이다. 주께서 원하는 모든 말씀을 지킬 분은 따로 계신 거예요. 주님을 위해서 지킬 말씀이 두루마리 책에 따로 한 분이 오시는 겁니다.

 

시편 40편 6절에서 8절 보면 나오지요.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했지요. 그렇다면 왜 제사 드리라, 이야기하셨는가? 그것은,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숨어있는 분이 제사 뒤에 숨어 계셨던 거예요.

 

제사가 실패하면서 제사가 형식화되면서 제사를 뚫고 들어온 겁니다.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제사에 실패한 자를 원하는 거예요. 제사 드려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는 자의 등장. 왜? 상한 심령이 제사 드려야 소용없는 거예요. 제사 드려서 상한 심령이 새로운 심령 되는 건 아닙니다. 대신 죽으실 분에게 일임해야 되고 맡겨야 돼요. 내 인생을 내가 살면 안 돼요. 주께서 일임하고 맡기는 인생을 살아야 된다 이 말이죠.

 

주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내가 왔나이다. 내가 누구냐? 히브리 10장에 이미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와버리면 이 세상은 이미 종결됐어요. 묵시적 세계입니다. 역사가 진행해봐야 의미 없어요. 똑같은 십자가 의미의 반복일 뿐이죠. 사도 바울에게 역사적 종말이란 의미 없습니다. 자기가 외치는 순간이 심판의 순간이고 종말의 순간이죠. 자기 있는 순간이.

 

그렇다면 뚫고 들어오면 다윗 왕 자리를 찢어버리죠. 왕이 없는 거죠. 왕이 없으면 뭐냐? 영원한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겁니다. 모세언약이 살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장차 올 왕은 모세언약을 이루는 왕으로써 등장하겠지요. 제사란 뭘 의미하냐? 모세가 피 남편, 죽음이죠. 죽음을 양의 죽음에서 사람의 죽음으로 바뀌지요. 그걸 미리 보여주는 것이 선지자들의 죽음과 고난입니다. 에스겔, 예레미야, 전부 고난 받고 죽기도 하고. 예레미야나 죽을 뻔하다 살았지 죽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 당시에 시드기야나 여호야긴 시대에 순교자가 많이 등장했거든요. 그건 아벨과 같은 노선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죽었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죽인 자가 있을 게 아니에요. 가해자가 있으니까 피해자가 있지요. 가해자가 누구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자기 딴에 여호와 믿는 사람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여호와 믿고 성령 믿고 삼위일체 믿는 그것이 곧 적그리스도. 어떤 상징, 이미지를 실재라고 착각하는 적그리스도죠. 양의 탈을 쓴 거예요. 마귀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면 그게 교회 이름으로, 목사 이름으로, 장로 이름으로, 교단 이름으로, 기독교 이름으로. 왜냐하면 내부 전쟁이 곧 외부 전쟁으로 이어지니까. 나의 전쟁, 나의 싸움으로 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희가 전부 다 적그리스도?

 

처음부터 적그리스도에 소속돼있다. 앞잡이라 했잖아요. 앞잡이였는데 그걸 확연하게 드러냄을 당한 사람이 이미 성도가 됐지요. 그러니까 감사할 뿐이죠. 주께서 사용한다는 점에서 감사할 뿐이죠. 사용할 가치를 없는 강도를, 창기를 사용하시니까. 뭔가 새 사람 된다는 조건 하에 사용하는 게 아니고 새 사람 안 되게 하시면서 사용하시잖아요.

 

네가 새 사람 될 필요 없다는 식으로 사용해버리니까 그게 옛 자아와 새 자아의 새로운 발생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주님 앞에 사용당하는 겁니다. 마리아가 주의 일에 도움 줬습니까? 임신할 때 미리 기도했어요? 임신해달라고. 그냥 쳐들어온 거잖아요. 난처했지요. 처녀 입장에서 임신했으니까. 바로 그거에요.

 

그래서 고난 받는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선지자의 자리가 항상 구멍, 여백으로 남겨진 공허한 자리로 뻥 구멍 뚫려야 돼요. 메시아 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선지자는 죽음으로 자기 중앙 포기하죠. 중앙은 내 자리 아니라고 자기는 죽지요. 다니엘도 마찬가지고.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인자라고 하지요. 다니엘은 인자라고 불리면서 인자의 자리를 내놓습니다. 나는 그 주변에 있고 일은 장차오실 분이 앞서서 나가고 일하고 계십니다.

 

 

10분 쉽시다.
20151203 혜화동특강f-언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신약에 들어옵시다. 마태복음 6장에 봅시다. 6장 1절 읽어보세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됐습니다.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누구한데 보인다는 겁니까? 인간에게 하나님은 없어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 들키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하나님은 전부 가짜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인간이 의식해서 하는 모든 것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짓거리가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사람으로 온 겁니다.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게 왜 그렇게 다른지 몰라요. 예수님이 아버지 섬기는 것과 사람들이 신을 섬기는 것과 같지 않아요. 같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반대가 되고 충돌이 일어나지요. 싸움은 바로 이 싸움입니다.

 

예수님 본인 빼놓고 인간들이 하는 모든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규정짓고 말았어요. 자꾸 아니라고 하면 안 돼요.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은 사람을 의식하고 하는 겁니다. 그걸 세밀하게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기들 집단, 시대 이름을 빙자해서 같은 인간들끼리 서로 눈치 보기, 의식하기, 그리고 만약에 그 집단에서 그들 식으로 믿지 않으면 추방에 대한 생존의 위협, 두려움, 외로움, 이런 걸 두고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면 인간은 인간 시선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경계는 주님이 정하지 인간들끼리 정하는 게 아니거든요. 인간들이 테두리를 만들어놓고 이게 전부라고 하잖아요. 이 전부 바깥의 것을 상상하겠지요. 인간이 만든 테두리는 가짜입니다. 그 바깥의 여백을, 잉여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가짜 전부가 되겠지요. 진짜 경계선은 예수님 오셔서 치면 인간은 모두 이 안에 갇히게 되는 거죠. 인간이 상상한 그 무엇이 되던 그것마저 주님 안에 갇히게 되죠. 더 큰 범위에서. 이 바깥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예수님 몫이지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 바깥이 뭔지 몰라요. 바깥 모르면 내가 누군지도 몰라요.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모릅니다. 왜? 바깥의 시선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그저 남들이 이렇다고 하더라는 것밖에 모르지요. 전통과 역사 가운데서 나는 정당하다고 이야기하더라, 그것밖에 몰라요. 주어들은 정보로 그것으로 조립해서 자기를 구성하거든요.

 

그런데 사람에게 보인다는 말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테두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리 신에게 순수하게 해도 안 돼요. 예를 들면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못 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인간이 백날 해봐야 사람에게 보이려는 범위 안에서 이뤄지는 행위만 할 뿐이지 심지어 예수님께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걸 그대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예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 바르는 행동이 사람에게 보이려는 행동일 수밖에 없어요. 주기도문을 반복하는 것고 마찬가지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도 마찬가지고. 맹세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고. 백날 흉내 내봐야 그 흉내에 불과하고 흉내 낸 자아는 사람에게 보이려는 자아입니다. 왜냐?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그 경계선은 제자들도 모르고 예수님 본인만 알아요. 아버지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주님만 그 경계선을 알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인간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거지요.

 

그건 뭘 의미하느냐? 마가복음 7장 15절,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더럽지요. 그러면 사람에게 더러움이 들어있는 걸 봐서 마귀의 세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모든 현실관이 마귀의 세계입니다. 마귀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만큼 마귀 세계와 친화적이에요. 자발적으로 그 세계를 원하고 있어요. 더러운 마음이 원하는 세계가 인간이 원하는 현실적 세계거든요.

 

인간이 구성한 모든 역사와 모든 것은 마귀의 세계인 이유가, 이미 마음에 기획안과 설계도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매일같이 쏟아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마귀의 세계만 좋아합니다. 차마 그걸 마귀라고 표현하지 못할 뿐이죠. 그 마귀의 세계를 나의 세계라고 하지만 사실은 예수님 세계가 아닌 이상 마귀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마귀의 세계에서 못 벗어나고 주님 세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 마지막 기대치가 있어요. 국가입니다. 요한계시록 17장. 갑자기 진도가 빨리 나가네. 어쨌든 다 했다는 형식이 중요하니까 무리하게. 요한계시록 17장 1절 봅시다.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여기서 물 위에 앉은 음녀, 바벨론. 바벨론 성이 몇 개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바벨론 성이 하나밖에 없지요. 하나밖에 없으니까 통합이에요. 인간이 구성한 세계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싸워봐야 결국 한 통속이에요. 그걸 하나로 규정짓는 것은 일곱 대접이죠. 일곱 대접이라는 것은 이미 경계선 안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어느 인간도 일곱 대접 바깥으로 못 벗어나요.

 

일곱 대접에서 멸망한다는 것은 그때 멸망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멸망된 상태에요. 새삼스러울 게 없어요. 이미 포위돼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폭삭 주저앉는 겁니다. 일곱 나팔, 일곱 인, 일곱 대접으로.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이 세상이 불바다 되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미 가두어진 자체를 놀라워해야지 가두어진 상태에서 불바다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 때문에 그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인간이 인간 세상에서 못 벗어나는 자체가 이게 이미 절단난 거예요. 예수님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게 절단난 거예요. 무슨 수로 알아듣습니까? 갇혀있는데.

 

따라서 갇혀진 세계에서는 일방적으로, 여기 보면 음녀지요. 음녀란 표현을 누가 합니까? 음녀가 표현할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국가라고 표현하지요. 그러나 음녀라고 누가 표현합니까? 일곱 대접으로 포위시킨 그분이 음탕한 여인이라고 표현했지요. 음탕한 여인에게는 이미 다른 주, 다른 남편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용서나 긍휼은 없습니다. 이미 명칭 자체가 음녀기 때문에 음녀는 반드시 멸망당해야 돼요. 요한계시록에서는 새삼스럽게 어려운 점은 없어요. 있는 그것을 명칭만 바꿨을 뿐입니다. 음녀.

 

그런데 요한계시록 이전에는 세상, 이렇게 하지요. 세상, 하니까 약간 희망 있을 것 같고 잘하면 구원될 것 같지요.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동결, 꽁꽁 얼어붙은 음녀에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곱 대접의 심판 대상. 일곱 대상은 노끈 같아요. 체포할 때 묵비권이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하는 꽁꽁 묶어놓는 노끈 같아요. 일곱 대접, 일곱 나팔이란 빠져나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꽁꽁 묶였다 이 말이죠.

 

여기 나오는 음녀가 어떤 식으로, 특히 17장 3절에 보면,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이거는 마태복음 4장에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데리고 광야로 간 것과 유사한 형태지요. 예수님이 광야로 가니까 마귀와 만났지요. 인간 세계는 마귀가 없어요. 인간들 세계는 인간만 있어요. 인간들의 뭉치가 사회와 국가입니다. 그것뿐이에요. 마귀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하느냐 하면, 이걸 묶어놓는 외부 시선에서 주님의 시선으로 볼 때 이게 마귀의 세계에요.

 

그러나 내부 인간들 시선에서는 마귀의 세계나 음녀도 아니에요. 인간들의 지혜와 노동의 발전책이 현재 국가입니다. 왜 국가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국가는 마지막 통합적인 이데올로기, 사상이기 때문에. 국가 바깥은 없습니다. 국가 대 국가지요. 그 통합국가 최고는 유엔. 그런데 국가 대 국가는 화합하지 않습니다. 민족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은 모든 국가를 하나의 바벨론, 음녀로 통합시키고 말았어요. 따라서 그 시선과 평가, 안목으로 봤을 때는 우리는 꽁꽁 묶인 겁니다. 동결된 겁니다. 개인 심판, 개인 구원은 없어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마땅히 망해야 되는 겁니다.

 

아까 마가복음 다시 봅시다. 7장에 보면,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게 아니고 나오는 게 더럽지요. 그 대목 다시 할게요. 국가란 것은 인간의 마음들이 모여서 국가가 된 거잖아요. 인간이 국가로 여기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동의한 겁니다. 내 마음이 국가를 유발시킨 거예요. 국가를 원해요. 최고의 통합사상, 통합체계입니다.

 

국가를 위해 충성한 사람이 안중근 의사잖아요.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이 축구하면 누구 편 들 거예요? 한국 편 들지요. 왜 그래요? 내 마음이 내가 소속돼있다는 의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국가도 살아있어요. 음녀도 살아있고. 나는 그 국가 안에서 안심과 평화를 얻고 싶고 행복을 누리고 싶어요. 그런데 그 속에서 나오는 그것이 악한 것이란 겁니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악한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어디 있습니까? 이 마음이 전부 인데 전부인 줄 알았는데 모든 건데 낯선 마음이 나온 거예요. 그게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소속이 어디라 했습니까? 생명이 있는 곳이 소속인데 우리 생명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이 삐치고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언약의 요소를 품고 있는 거예요.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과 같은 양상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께서 예수처럼 사용하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서도 데려가지 않으면서 이 땅에 그냥 머물러 두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내가 세상이 속하지 않은 것처럼 너희도 속하지 아니했다. 하지만 너희를 데려가지 않겠다. 이 세상에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너희를 남겨두겠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혼나는 거죠. 소속이 아닌 남의 나라에 사는 겁니다. 이방인, 나그네로서 히브리서 11장 말씀처럼. 우리 본향은 따로 있는데 남의 동네에 사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죽어서 지옥 구경 못하는데 살아서 실컷 구경하라는 거예요. 맛있는 짬뽕 먹고 짜장면 먹으면서. 그 세계에서 예수님이 시달렸던 그 시달림과 당했던 시련과 아픔을 같이 겪어라. 그래서 내 백성이란 말이죠. 하지만 두려워 말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주님이 이겼으면 우리도 이긴 거예요. 내가 이긴 게 아니고 이김의 요소가 발생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군사에요. 성도에요. 맨날 지는데 이기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 속에 옛 자아와 새 자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옛 자아는 이 세상이 좋아요. 한국 팀이 축구할 때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막 듭니다. 제발 한 골 넣고 이겨라. 지고 나면 하루 종일 기분 나빠요. 괜히 말 툭툭하게 되고. 내가 응원하던 프로야구 팀이 지면 기분 되게 나빠요. 내가 은근히 좋아했던 팀이 이기면 갑자기 기분이 삽니다. 감정적으로 충동적이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중심적이죠. 그게 내 마음이죠. 속에서 나오는 주님과 관계없는데도 기분이 좋아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주로 인하여 기뻐하라하는데 내가 원하는 걸로 기뻐하는 그런 모습이 나옵니다.

 

그렇게 나오게 되면 결국 성도는 실망스럽지요. 평소에 성도가 내 뜻대로 안 되지요. 내 뜻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내가 기대하고 싶은 것을 주변에서 이미 그런 욕망들을 보았어요. 나도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감출 수 없이 내 속에서 터져 나온 겁니다. 그걸 주께서 꺾어버리죠. 그러면 우리는 짜증내고 실망스럽잖아요. 그런데 실망스런 가운데 갑자기 기쁨이 확 생기게 만드는 현상이 일어나버리죠. 그게 주께서 주시는 기쁨이죠. 성령의 기쁨이죠.

 

그럴 때 다시 말씀이 우리 속에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 생명은 이쪽에 없고 저기 있다는 거죠. 너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것을 생각하면 그 뒤에 나오는 땅의 것은 우상 숭배니라.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 우상 숭배고 탐심이라면 이 세상 자체가 뭐냐? 우상을 유발하는 세상 속에 너희는 태어났고 살아왔고 성장했다는 겁니다. 우상만 생각하는 곳에서. 내가 곧 우상이죠.

 

그 뒤에 나오는 바로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이것을 주께서 매일같이 우리한테 실시시킵니다. 옛 사람을 버리려면 옛 사람을 유발시켜야 돼요. 내가 아는 옛 사람은 옛 사람 아닙니다. 새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도 좀 있으면 옛 사람으로 밝혀지지요. 왜냐하면 새롭게 나와야 되는데 옛날에 나온 것을 붙잡아서 경건함으로 포장할 때 이미 옛 사람 돼버립니다. 또 지 자랑하고 싶죠.

 

그냥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리지 말고 주께 맡기면 주께서 알아서 옛 사람이 늘 지적받고 나오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약의 사람 되지요. 아까 이야기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주님 만나고 옛 사람과 새 사람 같이 뒤죽박죽 나왔지요. 자기가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대신 죽은 아들이 신앙생활 다 해주지지요.

 

내가 인생 산다고 생각합니까? 대신 죽으신 예수님이 내 인생 다 준비한 걸 모르고 내가 따로 경건한 내 인생을 시나리오를 짜고 소설을 쓰고 있는 겁니다. 주여, 저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살았습니다. 다 찢어버립니다. 주께서 이렇게 했고 이렇게 하신 거죠. 앞으로 그렇게 하실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걸 미처 모르기 때문에 지금도 돌아서면 내가 이걸 했다고 슬그머니 자랑거리로 내놓지요. 주께서 그것을 주의 일로 교체시키는 작업이 언약 작업이고 그럴 때 우리는 언약의 내용이 담겨있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오늘 보았습니다. 결국 하고 싶은 것은 언약중심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두 분의 세계다. 우리는 그 분의 세계의 하신 일의 결과물로 이 땅에 왔을 때 비로소 창조물이 제 자리를 찾은 거예요. 창조주를 찬양하기 위해서 창조물이 있어야 되는 당연한 자리를 주님에 의해서 실현시킨 겁니다. 종이니까 무익한 종이 할 바를 했을 뿐입니다. 면류관 반납하고 주님만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다른 사람이 묻기를 당신이 방금 이야기한 것이 멋있게 보이지만 증거가 뭐냐고 물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실제로 부활했다. 부처가 그랬느냐, 공자가 그랬느냐, 누가 그랬느냐, 대통령이 그랬느냐? 어느 역사에 십자가 부활을 그렇게 강조했나, 옛날에 예수란 자가 그랬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뿐이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었습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이 어떻게 설교했는지 보세요. 사도행전 17장 30절 읽어보세요.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실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의 설교 포인트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 십자가 복음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서 6절까지.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조에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아멘.

 

여기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가 상상한 그리스도가 아니고 죽었다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십자가만이 복음이라고 우리 내부에서 퍼 올려주시는 우리 내부를 복음의 현장으로 사용하시는 주님만이 이 고백에 동참, 그런 자만이 사도 바울 같이 동참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론이 아니고 신학이 아니고 교리도 아니고 실제로 이천 년 전에 예수님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했다는 말은 지금 살아 계시다는 뜻인데 살아서 일한 그 결과가 십자가 복음에 감사하는 결과로 이어졌사오니 그 원천을 따라서 옛날에 살았던 많은 선지자를 따라서 성도로서 십자가 복음만 증거 하다가 주님 얼굴 뵈옵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상현 목사님의 답글

30년만에 찾아온 혜화동 대학로.

젊음과 낭만과 술과 친구가 스러져 간다.
백발과 현실과 성경과 죄인이 눈 앞에 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과 함께 이 또한 또 다른 허구로 넘기어질 때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가 열린다.

예수님
십자가
복음

세상은 내리는 눈 속에서 바삐 돌아가는데
탕자 둘이 예수 십자가 복음 안에서 막춤을 추며 막살고 있다.

부르신 그대로
상징으로서
허구로서

조금씩 복음의 광채를 맛보면서
그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악마와 싸우고 있다.

예수님의 앞잡이가 되어

내 안에 아간을 잡아내는 싸움을
내가 주님께 져서 죽어지는 싸움을
세상 끝날까지 나와 동행하시며 주님이 벌리시는 싸움을...

언약이 유발시키는 주님의 전쟁이다.

이 전쟁의 구호는 베드로의 선창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근호 목사님, 한윤범 목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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