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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10 21:56:25 조회 : 5076         
2016 겨울수련회 (요한계시록 강해 : 생명의 신호) 이름 : 최지영(IP:175.213.168.248)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생명의 신호
강사: 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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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1강 도입부분(기도 마무리 하실때부터 10초간)에 장내 음향시설 문제로
고음이 있으니 꼭 주의 하세요. 청각에 무리를 줄 수 있습니다.
(*동영상의 시작 32초부터 40초까지_ 이어폰 착용 하지마세요. & 소리를 잠시 줄이세요)
 
 
 
 


 관리자(IP:175.♡.141.195) 16-01-17 12:40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요한계시록:생명의 신호 제1강 [연대기속의 주체]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저희들을 잊지 않고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말씀 안에 모였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우리 속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성령께서 재촉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해야 될 게 요한계시록인데 요한계시록에서 이걸 잊어주세요. 성경에는 나와 있는데 우리 삶에는 요한계시록이 없는 삶을 삽니다. 요한계시록 의식해서 살다가는 빌어먹기 십상이거든요. 요한계시록뿐만 아니고 성경을 생각하다가는 세상 못 삽니다. 우리는 본성이 나를 내가 살리는 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한가할 때만 보는 책, 하지만 바쁠 때는 제일 순위로 멀리하는 책이 성경이 되는 거예요. 성경 중에도 특히 요한계시록은 근처에도 가기 싫어합니다. 봐도 모르니까. 그런데 그게 오해에요. 요한계시록은 봐도 모르고 딴 것은 안 것 같고, 사실은 그것이 잘못인데. 다른 것도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인데 안다고 우기고 싶어 해요. 마태복음 같은 것.

 

그 이유가 요한계시록은 환상입니다. 역사 속에 살다보니까 환상은 잊어집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디 있느냐 하면, 역사와 환상이 만나는 그 지점, 이걸 집합에서 교집합(intersect)이라 했어요. 합치면 합집합(union)이 되는데 교차되는 지점에 요한계시록이 있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느냐 하면, 원래 환상의 뜻은 ‘없다’에요. 없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전체에 환상은 없는 겁니다. 환상은 그냥 꿈속에서나 재주 없이 잠시 나왔다가 눈 뜨면 다시 깔끔하게 현실로 돌아가요. 환상을 벗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전부입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의 체가 다듬어지고 주체가 나오는 겁니다.

 

역사는 연대기로 돼있어요. 연대는 순서대로 되는 거예요. 사당-방배-서초-교대(3호선 환승)-강남-역삼-선릉(분당선 환승)-삼성(무역센터)-종합운동장-신천-잠실, 제가 늘 가는 코스에요. 이렇게 순서대로 가는 게 연대기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이 연대기 속에 살았고 연대기 속에서 자기 자아, 주체가 뭔지 규정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우리 세상의 연대기가 대충 어떤 게 있는지 소개해드리면, 소개 끝나고 난 뒤에 그게 전부라는 느낌이 올 거예요. 여러분이 교양으로 생각하고 들어보세요.

 

B.C.3300 이집트문명, 2500 인더스문명, 1750 함무라비 법전, 1200 페니키아에서 알파벳발명, 1100 중국의 주나라, 776 최초의 올림픽, 492 페르시아 전쟁, 431 펠로폰네소스 전쟁(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이겨놓고 자기들끼리 주도권 싸움한 것), 334 알렉산더가 터키 지방, 동쪽 오리엔트를 완전히 정복했지요. 221 진시황제 진나라, 218 제2차 포에니 전쟁, 146 로마제국, 27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황제가 돼요. 4 예수님 탄생.

 

A.D.105 채륜이 종이 발명, 306년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에 즉위, 375 게르만 민족 침범, 392 테오도시우스 기독교를 국교로 정해버려요. 475 서로마 제국 멸망, 486 프랑크 왕국 성립, 500 힌두교 창시, 610 마호멧 이슬람 창시, 690 일본에서 천황제 실시, 870 메르센 조약에 의해서 프랑스, 독일, 이태리의 근본 뿌리 시작, 1000 송나라에서 화약과 나침반을 발명, 1077 카노사의 굴욕(앙리4세와 그레고리우스7세가 붙어서 앙리4세가 눈밭에 꿇어앉은 굴욕을 당합니다. 나중에 복수합니다), 1096 십자군 운동 시작, 1206 몽골의 테무친이 칭기즈 칸이 됨, 1274 원나라 건국, 1299 오스만 제국 건국,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발간, 1309 아비뇽 유수, 1337 백년 전쟁 발발, 1347 전 유럽에 페스트(흑사병) 퍼짐, 1368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1381 영국에서 와트 타일러 난이 일어나서 영국의 시민운동이 커집니다. 1429 백년전쟁 중에 잔 다르크, 계시 받은 소녀가 영국군을 격파, 1450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발명.

 

이때부터 점점 역사가, 국가가 아니고 주체가 강렬해지기 시작하지요. 1453 동로마 제국 멸망, 1455 장미전쟁(영국에서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과 요크 가문(하얀 장미)의 왕위쟁탈전), 1492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1392 태조 이성계가 조선건립, 1592 임진왜란 일어남), 1517 루터의 종교개혁, 1519 마젤란의 세계 일주, 1533 잉카제국 멸망, 1536 칼뱅이 종교개혁, 1543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 주장, 1555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에서 영주에 따라 종교 결정, 1588 영국이 무적함대 스페인 격파, 1618 30년 전쟁(루터만 개혁주의로 인정하고 칼뱅은 인정하지 않으니까 화가 나서 일어난 전쟁), 1632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지동설 주장, 1643 절대군주 루이 14세 등장.

 

1665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 제가 보기에는 연대기에서 이게 제일 중요해요.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현실은 시간과 공간으로 이미 정해지고 거기서 법칙만 끄집어내게 되면 이제는 종교가 아니고 과학이 진리의 자리를 넘어서는 결정적 시기에요. 모든 진리는 과학으로 점검되고 확장되는 거예요. 과학적으로 돈이 나오지 않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그것은 개소리입니다. 그건 환상이에요. 지금 우리가 그런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1688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납니다. 기술자, 금융인들이 권력으로 지배했던 것을 뒤엎는 거예요. 거기서 시민계급이 등장합니다. 이게 오늘날 2016년 우리의 자화상이에요. 제가 말한 인간의 주체란 역사에서 조립한 겁니다. 누가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흘러들어오면서 굳어진 거예요. 과학적으로 무장된 나는 하나의 시민으로써 내 위에 내가 없고 내 밑에 내가 없는 민주주의 사회가 있는 거예요. 이게 진리라고 본 거예요.

 

1769 드디어 과학이 발달하면서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지요. 1775 주체가 되니까 미국이 독립전쟁에서 승리합니다. 1789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나고, 1804 왕 족보가 아닌 힘을 가진 군인이 황제에 등극, 나폴레옹 1세입니다. 1840 어리숙한 동양을 영국이 차를 사는데 은이 모자라니까 아편을 팔아서 충당, 아편전쟁. 광동성에서 중국이 상선에 참패. 거기서 텐진조약이 나옵니다.

 

1857 인도에서 세포이 항쟁이 일어남, 1911 중국에서 신해혁명, 여진족이었던 중국을 민생, 민권, 민족주의에 입각해서 쑨원이란 사람이 혁명을 일으킴. 드디어 중국이 근대국가로 넘어옵니다. 1914 세르비아의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살해함으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독일, 이태리, 오스트리아와 한 패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4년 동안 전쟁. 1929 세계대전 후 막대하게 생산된 상품이 소비할 데 없어서 미국에서 경제공황이 일어납니다. 이 와중에 한 몫을 잡은 사람이 십일조 해서 부자 됐다는 록펠러입니다. 경제사범입니다.

 

1939 전쟁배상금 때문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 1945 다 아시죠. 전쟁 종결, 1949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1957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발사, 1964 베트남 전쟁, 1968 프라하의 봄이라 해서 소련의 탱크에 묵사발 당함, 1969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 1977 LA 캐피탈센터에서 그룹 이글스가 <호텔 캘리포니아>를 라이브공연한 때에요. 1980 존 레논이 마크 채프먼에 살해당합니다. 1989 천안문 사태, 독일 통일, 1991 소련 해체.

 

1800년대가 통째로 빠졌는데, 1859 다윈이 <종의 기원> 발표, 1861 미국 남북전쟁, 1866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 1868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국가로 넘어가면서 덕분에 한국도 근대국가체제로 됩니다(친일파??). 1869 이집트에 수에즈 운하가 영국의 자본으로 개통, 1879 에디슨 전구 발명, 1896 쿠베르탱에 의해 제1회 근대 올림픽 개최, 1898 퀴리 부부가 라듐을 발견.

 

라듐을 발견한다는 것은 보이는 세계만 과학이 정복한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접수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점점 더 과학시대에요. 제가 하는 이야기가 헛소리하는 게 아니고 지금 이 시대에는 요한계시록은 없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천국은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있어도 시답지 않게 여겨요. 우리 주체가 과학적 주체인데 무슨 천국이 있어요. 요한계시록이 옛날 전설 아니에요? 잠도 오는데 요한계시록 왜 하는지 모르겠어. 이미 우리는 진리를 아는데. 양자물리학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손을 댔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 천지창조는 수학적 공식으로 이미 해명이 돼있어요. 힉스 장에서 무에서 균형 상태가 깨지면서 새로운 것이 일어나면 거기서 중력이 생기고 중력이 모아지면 질량이 되고 그게 오늘날 우리가 되는 거예요.

 

어디까지 했더라? 1991 걸프 전쟁, 1997 홍콩을 반환하고, 1998년은 한국에선 잊을 수 없어요. 아이엠에프 사태가 벌어집니다. 2008년 10월 2일 아침 6시에 최진실이 자살합니다. 과학인데 자기가 주체인데 내가 죽을 권리를 내가 왜 행사 못해. 과학적으로 따지면 죽으면 흙이 되는데 원자로 와서 원자로 돌아가는데 누가 이걸 탓해요. 오늘도 대기 순번표 뽑고 어지간하면 자살하려고 준비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최고의 인기를 얻고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도대체 누가 누굴 죽인 거예요? 내가 나를 죽인 거예요. 그러면 최진실이 둘이 되는 거예요. 죽임을 당한 최진실과 죽이는 최진실. 죽이는 최진실은 누가 만들었고, 죽임을 당한 최진실은 누가 만들었어요? 꼭 로마서 7장 같아. 내 안에 또 내가 있어. 가시나무 새인가? 그건 내 안에 내가 너무 많고.

 

종교? 기독교? 불교? 1665년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그때부터 합법적인 행정국가가 되면서 종교는 자본주의에 편입되지요. 종교는 자본주의에 편입되면 교회나 절이나 그 밑바닥이 뭐냐? 자본시장 없으면 유지가 안 돼요. 돈이 없으면 교회도 안 되고 성당도 절도 안 된다니까요. 교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돈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자식한테 교육할 때 돈이 되는 짓을 해라.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박사가 되든지. 우리의 교육은 이미 하나로 간편하게 축소돼있어요. 돈 되는 짓을 해라. 내가 물려받은 주체는 돈 되는 주체였고, 내가 물려줄 주체도 돈 되는 주체고, 내가 아는 연대기 속에서 돈 없이는 못 살겠더라. 뭐 할 일 많다, 나중에 간다고 전해라라든지 전부 돈과 연관 돼있어요. 재촉하지 마라. 알아서 갈게~

 

돈은 기술이고 기술은 과학적 토대 위에서 나와요. 이 삼종 세트가 오늘날 진리고 그 진리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우리의 자아주체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왜 필요하지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 일단 결론을 내립시다. 환상의 세계, 천국은 없다. 그걸 교재에 써놨어요. 길게 써서 찾지도 못하겠다. 3페이지 제일 위에. 없는 장소. 천국은 없는 곳이에요. 아니 있어도 내가 인정 안 하면 없는 곳이에요. 없는 곳은 묘사가 안 됩니다. 없는 곳은 언어가 일대일 대응이 안 되니까 지시나 대응할 수 없어요.

 

문제는 간단히 끝났어요. 요한계시록 결론이 뭡니까? 없는 동네다. 요한계시록은 이 지구상에 없다. 왜 없는가? 3페이지 밑에 2번 보세요. 혈연관계. 내 새끼, 내 집안, 이게 너무 강렬하게 결속돼있기에 내 새끼를 키우는데 필요치 않은 것은 있으나마나 없는 겁니다. 내 몸 하나 잘 먹고 배부르고 혈연관계를 위하여 투자하는 것을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저 내 자식, 내 새끼 좋아하는 것을 사랑이라 하지 남 자식 사랑하는 것을 사랑이라 않습니다. 이웃도 나와 자존심과 관련될 경우에만 이웃이지 날 공격하는 자를 내 이웃이라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이방인과 다를 바가 뭐 있느냐고 이야기해요. 그럼 우리는 어쩌라고?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요? 사랑하면 애초부터 원수가 안 되는데. 적대적인 관계를 어떻게 사랑하느냐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또 다시 느낍니다. 주님의 세계는 현실성이 떨어졌구나. 현실에서는 없는 세계구나. 주님의 세계, 천국,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 새 땅, 그 모든 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살 수밖에 없게 된 이유는, 우리 몸 자체가 내가 만든 게 아니고 연대기 속에서 형성된 주체 덩어리에서 헤엄치는 하나의 주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연대기를 나열하는 것은 조상이 살았던 모습이나 오늘날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한 치도 역사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왜냐? 우리 엄마가 역사기 때문에 우리 아빠가 연대기기 때문에 연대기에 파생된 퍼져버린 그 중에 하나가 주체로 얽혀져있기 때문에 주체 밖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자기 주체를 포기하거나 부정하는 그런 모순된 이야기에요.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없습니다. 없는데 요한계시록은 역사가 전부에요. 역사 속에 끼어드는 게 있어요. 환상이 끼어듭니다. 애써 무시하지요. 애써 배척합니다. 열심히 배척하는데 여기에 겹쳐지는 환상이 와서 가버리면 되는데 여기서 흔적을 남겨요. 제일 중요한 게 시작됩니다. 십자가 사건을 유발하면서 떠나버립니다. 뭐지? 물 위를 걸으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분이.

 

유대인한테는 새로 도래하는 진짜 기다리던 메시아 나라라고 했는데 막상 죽고 끝났어요. 몇몇 사람, 오백 명이 만났다는 소문이 있어요. 풍문으로 들은 거예요. 내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없는 거예요. 뭐지? 새 종교인가, 새로운 교주가 등장했는가? 가버렸습니다. 가고 나니까 역시 환상이 뜯겨져 나가고 역사만 남아요. 자, 앞으로 진격, 진격. 그래서 환상이 와서 십자가 사건 남겨도 역시 없다. 요한계시록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십자가 사건 터져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지금까지 연대기에서 빠트린 역사가 있어요. 이스라엘 역사가 여기에 포함돼있어요. 제가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뭘 만들어왔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역사가 전부입니다. 우리는 역사가 나를 만들었기 때문에 역사 외에는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미지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는 지나갔고 중요한 것은 현재 내가 중요하고. 그것뿐이에요. 골치 아프게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1988년 이문세 제3집에 <광화문연가>라는 노래가 나왔거든요. 가수가 광화문연가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문세 팬클럽은 좋아해요. 그걸 기억한다고요. 왜? 나와 긴밀하게 가까워지거든요. 연대기라는 것은 저 멀리 도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연대기는 역시 내가 포근히 여전히 기억 속에 남고 있는 겁니다. 주체 뜯어보면 기억이 전부에요. 기억 덩어리가 주체입니다. 층층이 겹겹이 과거에 체험된 것이 현재의 자아에 의해서 편집된 채 일방적으로 그것이 자기의 역사로 날마다 구성되는 겁니다. 과거 아는 것을 기억이라 하면 안 돼요. 과거 중에서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을 뽑아서 자기 마음대로 날조하고 조작하고 과장하고 확대하고. 간증집회지요. 내가 여기 존재할 이유가 있음을 남한테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꾸미는 거예요. 날마다 자기가 소설가에요.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역사를 지금 연대기에서 뺐습니다. 교대역에서 3호선으로 빠지는 것을 3호선까지 가지 않았어요. 그냥 교대역에서 강남으로 바로 갔습니다. 그게 선릉에서 분당선으로 빠지지 않고 바로 삼성역으로 간 게 문제에요. 이스라엘 역사가 역사의 핵으로 등장한다고 우기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민족이 있었으니 그 민족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언약적으로 맺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한 것이라서 절대로 하나님 약속은 중간에 취소시키지 않고 반드시 이뤄진다고 주장하고 있지요.

 

이스라엘 역사가 문제의 진원지가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역사 속에 포함돼있으면 기존의 역사는 짐승의 역사가 되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 살아있는 메시아는 환상+역사까지 포함한 합집합이죠. 모든 것을 포함해서 창조하신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것을 이야기해봅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주체가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역사에 의하면 환상까지 포함해서 이게 현실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 주체는 역사의 생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극단적인 환상적인 이스라엘 역사를 배척하게 됩니다. 교회 나가는 건 좋은데 성경은 보지 마. 이런 식이죠. 왜? 성경 자체가 언약의 책이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니까. 이렇게 시작한 하나님이 이렇게 끝낸다는 거예요. 이걸 일본말로 ‘시마이’라고 해요. 요한계시록은 시마이하는 책이에요.

 

문제는 끝내면 역사 속에서 주체라는 우리는 기분 굉장히 나빠요. 우리는 땅굴 파느냐? 노아의 방주를 40만 불 돈 주고 빌려서 거기서 삼년 간 버틸 수 있는 생수와 기관총까지 준비하고 비상식량, 건빵, 라면, 요새 유행하는 진짬뽕, 그런 것을 잔뜩 구비해서 우리끼리 살겠다고(혈연관계거든요) 지금도 노아 방주에 신청하는 사람 많습니다. 화성으로 도망가고 달로 도망가고. 캐나다의 어떤 사람은 아예 냉동 해달라는 거예요. <토탈리콜>인가요? I will be back. 그것도 저것도 안 되는 사람은 팔을 기계로 바꾸고, 눈도 심장도 기계로 바꾸고. 휴머노이드인지 두뇌만 인간이지 나머진 다 기계로 바꿨어요. 반 기계, 반 인간. 그걸 해야 의사들이 돈이 된다니까. 다 바꾸고 고쳐.

 

왜 그럽니까? 역사의 주체는 양보할 수 없는데 과학이 발달하면 언젠가 내 두뇌마저 아이큐 150 인간으로 만들어질 것이다. 그런 꿈이 역사를 이끄는 동력이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을 돈 벌이 되는 것이 계속 가다 보면 역사는 진화되고 또 진화되고 발전하고, 발전하고. 거기에 함께 뛰어들지 아니하면 취직도 못 하고. 혈연관계, 내 새끼, 내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는 거기에 기술로 뛰어들어야 되고. 그게 전부지 뭐 있습니까.

 

그런데 유대인이 말하는 메시아는 백날 가봐야 역사 안에 갇혀있고 너희는 환상을 모르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왜 태어난 지도 모르고 그냥 옆 사람과 경쟁하기 바쁘고. 지하철 2호선 굉장히 복잡해요. 특히 사당, 신도림역. 신도림역 내리면 끔찍해요. 개미들도 아니고. 거긴 정말 힘듭니다. 전부 역사와 연대기가 만든 주체를 욕심내지 않고 소박한 연대기, 나를 위한 연대기 그것 하나 꾸미는 데도 그렇게 힘드네요.

 

주체가 살아있고 역사 속에 자기 연대기 만드는 게 힘드니까 빈자리를 교회에서 종교생활로 “하나님이여, 이런 주체가 힘드니까 내 소망을 이뤄주옵소서.” 그러면 그 종교란 바닥에는 자본주의 원리가 그대로 작용되잖아요. 주님의 환상과 다른 관계되는 거예요. 접촉점에 들어가야 환상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들어가면 요한계시록이 이야기하는 새 하늘, 새 땅,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물으면, 못 들어가요. 십자가 들어가도 못 들어가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시마이한 거예요. 이미 판 끝났어요. 게임 판, 카지노 판 끝났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안목은, 그것은 미래에 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현재가 반복해서 작용하는 바로 현재적 일이라는 겁니다. 괜히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걸 위해서 쉬운 예를 준비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뭐냐 하면, 전기밥솥이에요. 아침 6시에 밥이 되는 그 기계를 전날 밤 11시에 조작해놓습니다. 그러면 밥 짓는 것은 이미 11시에 작동이 돼요. 그럼 아침 6시까지 뭘 하느냐? 이게 지연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성도는 뭐냐? 성도=IS여성대원. 왜? 온 몸에 시한폭탄 갖고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았다. 그리고 터지는 것은 좀 기다려봐. 이미 구원된 사람이 회고하듯이 회상하듯이 요한계시록을 보는 거예요. 그 안목이 예수 그리스도의 안목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보는 겁니다.

 

앞으로 될 일이라는 것은 연대기, 역사 속의 주체가 말하는 미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손때라. 내가 그렇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손때 내가 이미 백미 예약을 했어. 아침 되면 하얀 쌀밥이 돼있어요. 이미 주님이 눌러놓은 것은 우리가 취소할 수 없어요. 회고록 알지요. [대통령의 시간] 이명박이 지었잖아요. 회고록이에요.

 

대통령이 떠나도 회고록 남아있듯이 우리가 뭘 거쳐 왔지, 어떤 걸 경과했지, 어떻게 해서 구원됐지, 라는 관점을 내가 행한 것으로 연대기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갖고 있는 고유의 연대기를 우리가 내 연대기처럼 거기서 보는 겁니다. 아, 이런 절차를 겪어서 우리가 이렇게 예수 안에서 천국을 맛보고 있다는 것을 회고하면서 보는 게 요한계시록입니다. 666 맞고, 베리칩 이런 것 아무 소용없어요. 베리칩 맞아서 구원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오늘날 역사 속에 환상을 집어넣는데 사건을 어떻게 집어넣는가? 이 하얀 게 전체에요. 이 동그라미처럼 환상이 있거든요. 이 목을 치면 환상이 전체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전체 안으로 들어와 버려요. 우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 뜻이겠지요. 남자 하나 앉아있네요. 전체 속에 부분이 들어오게 되면 이 부분은 전체가 장악될 수 없는 전체가 아무리 자기 속에 예속하라고 잡아당겨도 절대로 끌려들어가지 않는 흔적에 속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역사 안에 포함돼있어요.

 

놀라운 사실은 이 사실이 이미 구약의 언약이 주어지는 현장에서 되풀이 되었다는 겁니다. 천상회의를 보았던 예레미야나 미가야에 대해서 기존의 거짓 선지자들은 도저히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너, 우리 같은 이스라엘이냐, 아니냐? 할 때 선지자는 말하기를 너와 같은 이스라엘로 보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속에 있는 주님의 신이 작용해서 같이 있어도 달리 있는 것이다. 면적을 보면 일부를 차지하지만 사실 가까이 옆에서 보면 붕 떠있어요. 멀리서는 함께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면 이쪽은 하늘에 속하고 이쪽은 땅에 속하고 이게 붕 떠있는 거예요. 한쪽은 연대기 속에 있고.

 

특히 이스라엘은 연대기에 굉장히 민감하죠. 왜? 성경해석이 누적돼야 되니까. 조상들의 성경해석을 후대에 그대로 가져와서 그 시대에 맞춰서 해석합니다. 성경해석 자체가 연대기적이에요. 오늘날도 연대기적 해석을 개혁주의 전통 해석이라 합니다. 루터가 어떠니. 칼뱅은 뭘 했으며, 바빙크가 어떻고, 밴틸이 어떻고, 총신 나온 사람은 다 알아요. 장신 나온 사람은 칼 바르트가 어떻고, 폴 틸리히가 어떻고, 한신 넘어가면 불트만이 어떻고 몰트만이 어떻고. 그런 해석, 연대기적 신학이 앞으로 점점 발달한다는 그게 개혁주의 이론입니다. 진리는 없어요. 가봐야 안다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바로 환상이 역사 속에 겹치면서 역사 연대기 속의 주체자들은 아무리 해도 요한계시록이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칼뱅도 포기했어요. 난 요한계시록 해석 못한다. 그런데 용감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만희라고. 신천지. 요한계시록을 연대기로 막 풀어. 걸프전이 어떻고, 또 세대주의자들. 마곡이 어디까지 있으면 마지막에는 유엔이, 유로화가 되게 되면 이러니저러니. 그게 악마의 뜻이 되고. 그럼 어쩌란 말인가? 잘 대비해야 된다는 거예요. 잘 대비해서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1,2,3}, {3,4,5} 두 집합을 합치면 {3}이라는 교집합이 등장하죠. 이 충돌되는 지점이 희극이 아니고 비극이라는 거예요. 어떤 사건? 죽음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단 결론 내리면,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모든 걸 통합했다. 십자가를 위하여 십자가 지신 그분이 주님인데 주님을 위하여 처음부터 세상은 창조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네가 현실을 알아, 네 자신을 알아?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에서부터 새로 시작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주체는 뭐냐? 주체는 단 한 분이에요. 예수님만 주체고 다른 사람은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주체가 아니면 왔다가 사라지는 상징물이지, 뭐.

 

쉽게 말해서 인간은 없습니다. 예수님과 십자가와 연루해서 이야기하면 죄인만 있어요.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 후손이 어떻게 됩니까? 죽었더라, 죽었더라고 돼있지요. 우리가 다 죽기 때문에 죽어서 어디 가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죽는 게 정상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에녹 같아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배척해버려요. 미쳤나. 어딜 살았어. 다수가 진리인데 남들 죽으면 같이 죽어야지 너는 왜 사는데? 그러니까 에녹은 억울한 거예요. 괜히 하나님이 살려줘서. 마치 자기가 비정상적인 존재인 것처럼 억울하게 된 겁니다. 그 억울함이 순교를 낳는 거예요. 본인들이 비정상적인 걸 모르고.

 

요한계시록은 비정상으로 여겼던 사도 요한이 비정상적인 내용을 펼쳐놓은 거예요. 따라서 요한계시록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다면 사도 요한처럼 아프든지 안 그러면 미치든지, 망하든지. 혹시 망하고 싶거든 요한계시록에 관심 두세요. 돈도 안 되고 승진과 아무 관계없고, 면접 치를 때 요한계시록 아느냐고 안 묻거든요. 자본주의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진리가 되는 사회에서 요한계시록은 아무짝도 소용없고 차라리 없는 세계라는 것이 주체의 마음을 편하게 해요.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주님이 들이닥치면 내가 편하고 싶어도 주님이 편하지 않게 합니다. 열두 제자가 편하게 살다가 주님 만나고 고생길 들어선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길이란 본인이 자진해서 손들고 나설 입장이 못 됩니다. 그저 주께서 왕림하시면 우리는 주님이 활동하시는 활동의 장으로 내놔야 돼요. 그걸 사람 일이라 하지 않고 사도행전에서 주체가 없다고 해서 ‘증인’이라고 합니다. 증인은 반드시 앞에 누구누구의 증인. 어떻게 가능하다? 성령이 임해야 증인됩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나의 증인돼요. 나는 믿음 좋다, 나는 선교했다, 나는 헌금했다, 나의 증인돼요. 나는 어느 신학교 나왔고.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했고, 내 기도 덕분에 많은 사람이 병도 낫고, 전부 나의 증인됩니다. 이건 주체가 이미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증인이란 보이지 않는 환상에 매여 있으면서 역사 속에서 살아야 될 팔자.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입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지만 데려가지는 않겠다. 너희는 이제 죽었어. 나처럼 고생해봐라. 너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지만 붕 떴지만 붕 뜬 채로 내가 올 때까지 내가 부를 때까지 너는 이 땅에서 고생해라. 그 사도 요한이 마지막에 밧모 섬에서 본 게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10분 쉬고 계속하겠습니다.
 관리자(IP:175.♡.141.195) 16-01-17 12:42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요한계시록:생명의 신호 제2강 [찐빵 쪼개기]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 가운데 여러분이 기억해야 될 것은 역사와 환상 사이에서 환상이 없어져야 되는데 어떤 교집합 같은 겹쳐지는 지점이 반드시 발생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역사가 이것마저 역사 중에 하나라고 우기고 싶은데 막상 이쪽에 와서 이야기 들어보면 소통이 안 돼요. 뿌리가 다르다는 거죠. 보통은 연대기.

 

연대기란 말은 원인이 역사 속이라면 결과도 역사 안에 흔적을 남긴다. 역사에서 나온 모든 결과들은 그 원인이 역사 속에 있다. 역사 바깥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어떻게 행함에 따라서 결과가 나온 거죠. 그래야 희망이란 것이 실제성을 가지기 때문에. 했는데 결과가 안 나오면 희망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내가 이만큼 하게 되면 결과를 얻는 게 있다는 확고하게 그것이 진리로 수용이 될 때 뭔가 시도하는 보람이 느낄 게 아닙니까.

 

어떤 사람을 재판한다고 불러냈는데 성문이 열리지 않아요. 계속해서 열리지 않습니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란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오죠. 분명히 불러놓고 죄인인지, 의인인지 재판해야 될 텐데 재판정이 열리지 않습니다. 끝. 그게 끝이에요.

 

역사주의가 1차 대전, 2차 대전을 낳았거든요. 힘과 힘의 대결. 그게 싫은 거예요. 역사가 전부가 아니야. 뭔가 있을 거야. 노벨문학상 이런 작가들은 이게 전부가 아니야. 또는 현실주의자들은 그게 아니야. 우리가 뭔가 놓친 게 있어. 놓친 걸 끄집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합니다. 놓친 것을 역사 속에 핍박 받으면서도 근근이 이어가는 살아있는 뭔가, 돈과 관계없이, 과학과 관계없는 순수한 무엇을 아직도 찌꺼기처럼 남아 있을 것이라고 노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기발한 예술작품이 유명세를 타게 되면 자본시장에 흡수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사람이 탈피하려고 연대기적 주체 말고 초월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봐야 끈적끈적한 돈 힘을 이길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네가 하나님 섬기느냐? 그럼 네 뿌리는 하나님이냐? 돈 아니지? 돈 없어도 괜찮지?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믿는 이유가 돈 잘 벌기 위해서 믿어? 그럼 네 뿌리는 하나님 아니야. 돈이야. 네 쪽은 돈 쪽이라고. 패를 잘 봐. 그러면 하나님 쪽에 선 사람은 누굽니까? 예수님 자신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전체니까. 역사와 환상 모두 주를 위하여 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이 여기 개입한다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전히 예수님은 미움 받을 수밖에 없고 만약에 내가 교회 가는 건 괜찮지만 우리 집안에 예수님이 쳐들어오는 건 우리가 용납 못해요. 혈연관계가 깨지기 때문에. 가정에 화평을 위해서 결혼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나는 화평으로 온 게 아니고 불화로 왔다면 예수님이 혈연 연대를 강화하는데 무슨 도움이 돼요. 아무 소용없어요. 나만의 소박한 연대기를 구성하는데 방해만 될 뿐이죠. 소용없는 쓸데없는 예수.

 

그런데 겹쳐지는 것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서 벌써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일곱 교회가 나와요. 터키 동남쪽입니다. 순환구조로 돼있어요.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개가 고리 형상으로 돼있습니다. 전부 도는데 340킬로미터. 그런데 분명히 사도 요한 그 당시에는 역사적으로 있었어요. 분명히 역사인데 환상은 여기에 편지를 보냅니다.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사자는 마지막 때는 심판을 행사하는 사자에요. 목사 아닙니다. 교회를 부수기 위해서 옵니다.

 

사자가 하는 말이, 여기 에베소에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일곱별과 일곱 촛대를 거니시는 이가 말하기를 이기게 되면 내가 너에게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겠다.

 

서머나에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말하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둘째 사망을 임하지 않도록 해주겠다.

 

버가모는, 양쪽으로 날선 검을 가진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만나와 알 수 없는 흰 돌을 주겠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불꽃같은 눈과 빛난 주석의 발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말씀하기를 이기는 자에게 세상을 철퇴로 다스리게 하고 새벽 별을 주겠다.

 

사데 교회는, 일곱별과 일곱 영을 가지신 분이 이기는 자에게는 흰옷을 입게 하고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나와요.

 

빌라델비아 교회에서는,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이 말씀하시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기둥이 되게 하고 예루살렘에 이름 새기고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한테는, 참되고 진실 된 한결같은 주님이 말하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하늘나라 보좌에 앉게 하겠다.

 

그런데 그 주님이 없다면 남는 것은 뭡니까? 달랑 폐허가 다 된 지붕 내려앉아 사그라지는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 일곱 교회지요. 모든 연대기는 쇠퇴합니다. 인간도 나이 들면 죽으니까.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쇠퇴하고 소멸합니다. 왜 소멸하는지 이유도 몰라요. 과학에서는 텔레미어라 해서 DNA가 세포 내에서 복제하면서 텔레미어가 닳아지기 때문에 이것만 연장하면 오래 산다는 거예요. 오래 사는 게 욕입니다. 오래 살아서 뭐하려고, 뭐하려고? 그리고 죽어서 어디 가는데? 몰라요. 왜 죽음에 대해서 모르느냐 하면 안 죽어 봤거든. 죽어 본 사람만 죽음에 대해서 아는데 안 죽으니까 이런 논리, 저런 가설만 난무하지 실제로 죽었다가 살지 않은 이상은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참 성경에서 안타까운 일 중에 하나가 혈연관계의 한계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았던 부자가 지옥 갔을 때 그놈의 혈연관계는 끈질기기도 하지, 내 동생이 있는데 나는 이왕 죽어서 버린 몸이고 동생이 아직 세상에 살아있는데 제발 나 있는 곳에 오지 말라고 거지 나사로를 보내셔서 이렇게 이야기해달라는 거예요. 형님 봤는데 형님 끝났더라. 지옥 가서 물 한 방울 없어서 애를 먹더라. 사우나는 엄두도 안 나고 온천놀이, 그건 안 되고 뜨거운 물에 영원히 못 빠져 나오더라. 네가 망해도 좋고 부도나도 괜찮은데 제발 지옥에는 오지 말라고 나한테 당부하더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들의 믿을까요? 그들의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그렇게 한 환상은 너는 그런 환상을 어떤 역사적 사건에 근거해서 환상으로 조작하느냐고 이야기할 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성경책이 있으니까 구태여 거지 나사로 보낼 필요 없다. 성경 없이 그냥 거지 나사로 보내면 거지 나사로 왈, 또는 거지 나사로가 이렇게 이야기하더라, 또는 거지 아닌 나사로가 이렇게 하더라. 이렇게 되니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로 모으자. 예수님은 이렇게 하더라.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 말하기를,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둘째 사망, 지옥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주겠단다. 못 믿으면 할 수 없고 믿으면 이상한 거고. 안 믿으면 정상이고 믿으면 이상한 거예요.

 

같은 아담 족속이잖아요. 같이 연대기 속에서 주체잖아요. 똑같이 원인, 결과만 따지는 인간에게 원인도 모르는 어떤 결과를 불쑥 믿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요. 이건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아마 계룡산에서 귀신 받았던지 그 수 아니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만약에 원인 없이 믿으면 그 사람은 졸지에 자기라는 게 날아가 버려요. 왜? 내가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내 행동을 낳으면 내가 여전히 주인공이 되지만 내 행동 없이 결과물로 내가 등장하면 나는 내 원인에 가입되지 못하고 내 원인은 바깥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내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나는 바깥에 있는 그분의 주장을 펼치는 대리인이 돼요. 그게 주의 증인입니다.

 

교회에서 기도했더니 교회가 부흥되었다. 그 교회는 본인의 자긍심과 명예를 드러내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이건 주님과 관계없어요. 자기 연대기를 펼치는 사설 교회가 되지요. 그런데 일곱 교회의 특징은 개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나타나셔서 연대기적으로 역사 속에 원인이 없는 것을 이야기해버려요.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말하기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결과를 보면 좋은데 문제는 원인에 결합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 미치지 않고는 그것에 아멘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여러분이 요한계시록을 그래도 수련회 한다는 조금이라도 본 사람은, 제일 거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이기는 자’는 이에요. 그럼 우리는 뭐라 합니까? 만약에 이기는 데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보통 걱정이 아니에요. 못 이기면 어떻게 할 거예요? 조건이 이기는 자거든요. 이기는 자라 해놓고 조건이 죽도록 충성하라. 죽고 난 뒤에 이기면 무슨 소용 있어요. 죽기 직전에 이겨야지. 그래야 낙을 보지. 요한계시록은 이기는 자란 조건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는 완전히 졸아요. 못 이기는데.

 

제가 이 시간에 여러분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서 이기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이기느냐? 무조건 백 퍼센트 이기는 방법은, 가위바위보 할 때 상대방이 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내면 돼요. 이게 요한계시록의 이기는 방법입니다. 상대방 보고 그 다음에 내가 내면 돼요. 가위내면 주먹 내면 무조건 이깁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상대방이 내고 얼음하고 굳어져 있어야 돼요. 시멘트처럼 굳어져 있어야 돼요. 마음껏 돌아보면서 놀리죠. 이쪽이 안 내도 말 못해. 얼어버렸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전체는 동결돼있는 책입니다. 미래도 없고 그 자체가 스톱됐어요. 마음껏 골라잡은 데로 내면 되는 거예요. 가위 내든지, 보자기 내든지.

 

이겼는데 누굴 향하여 이겼는지 회고하듯이 돌아보면서 보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땅콩 까먹어도 괜찮고 아이스크림 물고 봐도 아무 부담되지 않는 책, 세상이 이렇게 쉬운 책이 없어요. 11시에 밥솥은 눌려놨고 아침 되면 하얀 밥이 익어져 있는 거예요. 손댈 게 없어요. 주께서 버튼을 눌러놨습니다. 그래도 주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궁금해요? 밥솥에 창이 있어서 보게 되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사다리 식으로 내려와 있어요. “아하, 주께서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서 나를 오늘날 구원시켰구나.” 그게 보인다니까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경로가 뭐냐 하면, 역사 속에 있다가 묵시로 사라진 예수님의 자기 공생애를 의미하는 겁니다. 유일한 환상적인 존재가 역사와 마주하면서 역사가 자기의 본색을 드러냈던 그 여정, 그런데 우리는 연대기 속에 사람이 예수를 죽였다고 했는데 주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숨겨있는 옛 뱀, 악마가 여전히 보이지 않은 채로 예수님을 공격해서 살해하여 죽음으로 돌려보냈다는 사실이죠. 그래놓고 인간 세계는 역사만 전부로 알기 때문에 마치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이 옛날이야기인 것처럼 지금 예수 죽었다. 어쩌라고? 옛날에 억울한 사람 있었겠지. 억울한 사람이 한둘이야. 나는 안 억울해? 그럼 내가 예수 게. 이런 식으로 다시 지나간 배가 지나간 바다처럼 흔적 없이 함몰되지요.

 

그렇게 해서 얻을 게 뭐냐? 그렇게 얻으면 자기가 주체로 고정됩니다. 다니엘에 보면 그걸 우상화라 합니다. 내가 금신상이에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드디어 나타났다. 너라는 짐승의 졸개야. 이 세상 살면서 예수님에 의해서 폭로당한 짐승의 정체가 오늘날 우리 생을 통해서 그대로 내뱉어지고 반복되고 있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 있죠. 우상이란 뭐냐? 하나님이고 예수냐는 의미 없어요. 나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신이 있음으로 나는 더욱 더 부각되지요.

 

어느 날 설교에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이 세상은 기마전하는 것 같다. 어깨에 메고 한 사람을 돋보이게 만들고 옆에 사람들은 받쳐주지요. 주체가 돋보이면서 밑에 사람들은 내가 원했던 사람, 나를 돋보이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끄집어냈고 우리는 거기에서 짐승노릇하고 있고 이게 잠시나마 황제인 양 행세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를 위한 놀이문화. 그래서 어느 자리에서나 자기가 돋보이지 못하면 자진해서 등록 안 합니다. 자기가 돋보일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죠. 골프 친다고 프로한테 걸려서 돈 잃고 난 뒤에 골프 안 해. 화투 타짜 만나서 그것도 안 해.

 

항상 피해가고 도망가는 장소는 뭐냐? 아직도 내 사랑. 그것이 계속 인식되는 장소가 자기가 마침내 도달하는 장소입니다. 그걸 두 자로 도인, 도 닦는 사람. 기도원에 가면 그런 사람 많아요. 기도원 원장치고 기도 못하는 사람 없어요. 그런 사람 우리교회에서 기도하라면 벌벌 떨 거예요. 우리교회 기도 잘하는 사람 많아요. 언제부턴가 기도가 끊어졌어요. 전부 다 애써 사양하고 있습니다. 환상의 내용을 끌어당기기가 상당히 부담이 되거든. 역사는 되는데. 당회로부터 어린이 주일학교까지 교회에 대해선 잘하는데 우리는 교회는 용납이 안 되니까 환상을 끌어당겨야 되는데 돈 번다고 언제 환상을 끌어당길 시간이 있어야지. 기도할 내용이 없어요.

 

이기는 방법은 이미 세상은 동결된 겁니다. 그것을 한 장면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건 주님이 활동하는 고정된 무대장치가 됩니다. 그걸 미장센misa en scene이라 합니다. 미장센이란 무대장치인데 한 세트에 한 장면에 다 동결되는 것, 전부 얼어붙은 것, 미래, 과거, 현재가 꽁꽁 얼어버린 것, 이 세상은 무대장치에요.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이미 구원받은 자로 유람하듯이, 오랜만에 복음 나옵니다. 놀려가듯이 소풍가듯이 이 세상을 거니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의 삶입니다. 여유를 가지시고 편안하세요. 내가 기도한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동결됐기 때문에. 우리가 그 속에서 내가 본의 아니게 짐승노릇하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이런 죄인도 구원받았잖아요. 죄인으로 거기에 들어가야 돼요.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을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의 시조거든요. 오백년 도읍지 고려의 폐허를 길재란 사람이 돌아보면서 산천은 똑같은데 인재는 없네. 인재가 왜 없어요. 안철수가 있는데. 폐허를 보는 거예요. 다른 말로 풀이하면, 저렇게 해서 망했구나. 이건희 회장은 저렇게 해서 침대에서 생일을 보내는구나. 저렇게 아옹다옹 돈, 인기 얻겠다고 싸우는구나. 그래서 망해야 되는구나. 그걸 돌아보면서 보는 그 재미가 있어야 돼요.

 

미장센 속에 동결된 세상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숫자화라고 해요. 666, 144000, 7, 1000, 모든 숫자는 동결된 거예요. 동결된 것을 ‘얼음땡’하는 것은 인간은 못합니다. 동결됐으니까. 얼음땡은 천사가 해요. 그래서 마지막 때 인간은 손 놓고 천사만 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개인은 없습니다. 집단적인 고유명사는 없습니다. 집합명사밖에 없어요. 집합명사도 단체가 없어요. 누구누구에 속한 그걸 인치심, 마귀한테 속했느냐, 주님한테 속했느냐? 누구에 속한 집단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슬슬 요한계시록 전체가 쑥 들어와야 돼요. 그래야 요한계시록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이란 주님을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내가 주님한테 소유 당하는 것도 인이 아니에요. 소유 당할 내가 없어요. 내 안에 주님의 작업이 활동하는 관계를 인, 도장 받았다. 보통 도장 찍으면 서류에 도장만 나오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도장은 얼마나 센지 도장을 찍으니까 종이가 다 찢어지는 거예요. 자아가 찢어지고 도장만 있고 주님의 관계만 남고 없는 거예요. 우리는 뭐냐? 하나의 기능인이 되는 겁니다. 그것마저도 우리는 개인이 없고 집단이 없으니까 숫자로 표기해요. 144000.

 

숫자를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보통 인간의 세계에서 역사는 1-2-4-8-16 나와요. 주역, 동양철학에 이렇게 해요. 서양철학도 비슷하게 이야기해요. 1,2,3,4,5,6 되는 것은 바벨론에서 천문학이 발달해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문제는 ‘0’이 없어요. 그런데 환상에서는 1에서 2가 되는 게 아니고 2에서부터 출발해요. 2-7-1000-1로 돼버려요. 그리고 2-12-144000이 되고 또 중간에 12*12도 있어요. 이것은 창조 안에 언약이란 환상이 고정된 채 이건 고칠 수 없고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나란히 가는 겁니다.

 

다시 정리해봅시다. 진도 빨리 나가는 건 좋지 않으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역사밖에 없는데 역사에 환상이 오게 되면 배척하게 돼있어요. 역사 속에 환상이 숨어들어가거든요. 숨어들어간 환상이 어떻게 나오느냐는 문제입니다. 지금부터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기원전 1050~1010 사울왕, 1010~970 다윗의 통치기간이고, 970~930 솔로몬의 통치기간이에요. 전부 40년씩이에요. 930~910에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집니다. 이쪽을 남쪽 유다나라로 보고 이쪽을 북쪽 이스라엘로 본다면, 여기에 르호보암, 아비얌이 나오고, 북쪽은 여로보암, 나답이 나와요.

 

둘로 왜 쪼개는가? 찐빵 쪼개기인데 찐빵을 둘로 쪼개면 그 안의 앙꼬가 나오지요. 호떡을 둘로 쪼개면 꿀물이 나오지요. 쪼개면 선지자가 나와요. 선지자가 나오기 위해서 나라는 둘로 쪼개져야 돼요. 왜 남북으로 쪼개졌는가? 진짜 하나님의 언약과 결합되는 것은 역사적, 연대기적 나라가 아니고 천상회의와 관련된 선지자가 지속적으로 그 안에 언약을 성취하는 모습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그 다음에 910~850 아사, 여호사밧, 여호람, 북쪽은 바아사, 엘라, 오므리, 아합. 이렇게 쪼개지면서 엘리야, 엘리사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문서 선지자 아닙니다. 기적 선지자에요. 기적 선지자는 미래와 관계없습니다. 진짜 문서는 이제부터에요. 문서는 옛날에 이렇게 잘못했지 않느냐는 증명서류가 돼요. 문서는 문서 내용대로 신약에 다 이루는 겁니다.

 

그 다음에 850~800에 드디어 문서 선지자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요엘 선지자. 벌써 요엘서 보면 겁납니다. 마지막 때에 해와 달빛을 잃어버리고, 막 이렇게 나와요. 해와 달빛을 잃어버린다는 건 자연세계가 찢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구약은 찐빵, 신약은 막(membrane)이 나와요.

 

신약에 나오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막을 천사가 찢으면서 이쪽에는 역사가 깨지고 저쪽에는 막간, 요한계시록에 보면, 역사 작살내는 군대 사이사이에 막간이 있는데 그 막간은 역사를 찢어버리면 그 결과물로 속 내용물로 환상적인 모습으로 전개돼있습니다. 역사는 작살나고 천국에 있는 백성들은 좋다고 웃고 있고. 그게 교체해서 나와요. 막간인 역사 깨지면서 점점 더 등장하죠. 역사가 깨지면 깨질수록 숨어있던 악마의 정체가 나오고 악마의 마지막 팔자, 운명까지 나와요.

 

막간의 마지막이 뭐냐? 바로 천국과 지옥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막간일 뿐이에요. 이미 동결된 이미 끝나버린 거예요. 십자가 전기밥솥은 이미 눌러버렸어요. 우리는 그냥 찌이익~ 소리 들으면서 기다리면 영원히 삽니다. 생명나무에서. 보는 것도 못해요? 전기밥솥 보면서 벌벌 떨면 요한계시록 보지 마세요. 이제부터 요한계시록을 전기밥솥으로 봅시다. 우리는 실재하잖아요? 실재하면 우리는 IS여성대원이고.

 

850~800에는 아하시야, 아달랴(왕은 아니고 못된 여자), 요아스, 북쪽은 여호람, 예후, 여호아하스. 이 시대에 요엘 선지자. 800~750 아마샤, 웃시야 때에 네 명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요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북쪽 왕은 요아스, 여로보암2세, 스가랴. 그 다음에 750~700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북쪽은 마지막으로 므나헴, 베가, 호세아. 이때에 미가 선지지가 나와요. 미가 다음에는 하박국, 스바냐 나오는데 스바냐는 요한계시록과 똑같아요. 요한계시록 볼 필요 없이 구약 선지서 보면 아주 치열하고 연대기적 역사를 박살냅니다. 선지자 모르고 요한계시록으로 바로 들어가면 왜 주께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몰라요.

 

여러분이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제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모든 것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면 선지서에 겁먹을 필요가 없어요. 이스라엘이 받은 계시기 때문에 난 이스라엘 안 해. 그렇게 험악한 꼴은 보지 않겠어. 그러면 아무 문제없어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메시아로 와서 이스라엘 속에 십자가란 사건을 남기고 사도 바울이 온 동네 다 돌아다니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니까 이스라엘 안 되면 작살나는 수가 있어요. 이스라엘의 메시아며 심판주거든요.

 

그래서 겁먹고 이방인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데 문제는 신약에 오면 그게 끝이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 만들어놨는데 교회를 찐빵처럼 잘라버립니다. 교회 와서 안심하고 있는데 교회를 두 조각내버려요. 그게 바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의 옛날 실패를 되풀이하는 거죠.

 

그 다음에 750~700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그 다음에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야김, 시드기야로 끝납니다. 거기에 맞추어서 선지자들이 나타납니다. 정확히 보게 되면 이래요. 이건 그냥 넘어갈 게 아니고 중요하다. 선지자가 중요하거든요. 850~800 요엘, 800~750 요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750~700 미가 선지자, 700~650 나훔, 650~600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가 등장합니다. 600~586 시드기야 때 오바댜.

 

이렇게 등장한다는 말은, 찐빵이 쪼개져서 앙꼬 되는 선지자들이 불쑥불쑥 바깥으로 튀어나온다는 거예요. 튀어나오면서 한 결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우상 섬겼기 때문에 망해야 된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망한 것은 시범 조다. 이제 이방나라 죽었어.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합니다. 그 다음에 586년에 드디어 유다나라가 끝나고(다니엘, 에스겔) 난 뒤에 스룹바벨 때(537년) 학개, 스가랴. 458년에 에스라, 445년에 느헤미야, 말라기로 구성돼있지요.

 

그래서 성경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나라가 있었고 르호보암, 여로보암 시대에 나라가 둘로 쪼개지면서 찐빵이 찢어지면서 앙꼬가 나오면서 역사에 온 천지에 다 튀기는 거예요. 나라만 망하는 줄 알아요. 자연세계도 망한다. 자연세계가 다 찢어지는 거예요. 걸레가 되고 하늘의 별 다 떨어지는 거예요. 계속 이야기하면서 드디어 이스라엘 역사가 망합니다.

 

망하고 난 뒤에 이스라엘 망했을 때 바벨론이 너희 여호와 믿는다고 까불다가 힘센 우리 신에게 잡혀서 고소하다고 했을 때 다니엘이 하는 말이, 잘못 건드렸다. 너희들이 이스라엘을 건드렸기 때문에 이제는 너희들 차례다. 그 바벨론이 짐승의 대표 나라가 됩니다. 결국은 여기서 신약에 오게 되면, 바벨론, 메대파사(페르시아), 헬라 마케도니아, 마지막 로마, 이렇게 되면 역사는 동결됩니다.

 

왜 동결되는가? 역사의 주인공인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십자가에서 다 이뤘기 때문에 더 이상 연대기는 의미가 없어요. 오래 끄나, 안 끄나 간에 천국이냐, 지옥은 이미 판결나버렸어요. 쪼개진 찐빵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안 쪼개지느냐 그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결국 내가 너를 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너 말고 너를 쪼갠 내가 생각한 너를 그 속에서 나에서 나를 뽑아내는 그 작업을 주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안 뽑히려고 애를 쓰지요. 소박한 연대기 속에서 내가 이만큼 올라오는데 그동안 공부 많이 하고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습니까. 그런데 내가 수고하지 않고 주님께서 은혜로 만들어낸 나를 내 속에서 끄집어내는 거죠.

 

주님을 둘러싼 우리는 뭐가 되느냐? 괴물이죠. 괴물 속에 갇혀있던 주님 안의 나. 이렇게 보면 로마서 다 풀립니다.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괴물, 행함으로 구원 얻고자 하는 아브람 속에 창세전부터 약속된 아브라함을 끄집어내는 주께서 아브라함을 찾아갔기 때문에. 야곱이란 괴물 속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는 것은 주께서 찾아갔기 때문에 그래요. 이삭도 마찬가지고.

 

어쨌거나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역사는 반드시 필요 있다는 겁니다. 70이레 논문 발표하니까 뭐라 하는 거예요. “당신은 역사를 필요 없다 하네.” 이걸 몰라. 역사 안에 들어온다. 역사 바깥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가 종교적 상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역사 끝나고 천국 가는 게 아니고 이미 환상의 세계는 역사 안에 들어있어요. 누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느냐? 천사가 마실 걸 줬는지 알아요? 바로 괴물 안에 주의 영이 임한 사람이 했는데 주님은 그걸 너로 인하여 내가 물 마신 걸로 쳐주는 거예요. 이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주님 올 때 초라하게 온 것이나 오늘날 우리가 초라하게 사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초라하게 산다고 묵시적 존재가 아닌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그냥 사세요. 어차피 구원 안 될 것, 나댄다고 구원되는 것 아니거든요. 그럴 것 같으면 괜히 나대서 교회에 돈 날리지 말고 그냥 사시라고. 그냥 살아도 편하시거든 그냥 사세요. 편한 이유가 두 가지 있지요. 환상을 무시해서 편한 경우와 환상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편한 것, 어느 쪽이 좋은지는 알아서 하시고.

 

원인 없는 것으로 인하여 구원이 된 겁니다. 주님이 어떻게 했는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는 주님의 공생애가 대표로 보여줬고 남은 것은 주님의 공생애와 오늘날 우리의 삶과 그 가교역할은 성령이 하고 천사가 그렇게 해요. 그럼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살았는데 그 산 것이 어떻게 내 죄를 용서하고 나를 구원합니까?

 

그건 천사가 그때그때마다 우리의 삶의 상황 속에 손댑니다. 어떻게 손대는가? 뜯어내요. 뭘? 종교적인 습관과 우리의 관행, 교회 다닌 습관들, 많이 다녔으니까 의롭다고 착각하는 그런 것들을 뜯어내지요. 뜨드득 뜯어내요. 뜯어내 보면 우리 안에 괴물이 그동안 장악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 안에 있는 그것은 우리가 행해서가 아니라 주께서 한 박자 늦추고 가위, 바위, 보해요. 이기는 자라는 주의 말씀이 이미 우리 속에 들어오면 이미 이긴 자로 변하고 말았어요. 주의 말씀, 요한계시록이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이긴 자가 되는 거예요. IS여성대원이 되는 겁니다. 오늘 꿈에 IS여성대원이 되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바로 찐빵을 쪼개면 거기서 하나님의 언약적인 선지자가 튀어나온다. 단 쪼개면서 이스라엘 역사는 작살납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의 연대기적 소박한 인생은 작살났어요. 찢어집니다. 하지만 그 찢어짐 속에서 아파하시 마시고 예상 못한 기쁨이 나와요. 아하, 따로 준비해놓았구나. 난 쓸데없이 내 인생 상당히 소중하다고 여겼는데 나보다 더 귀한 나가, 주께서 나한테 쏙 집어넣었어요.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나는 천국에 못 갑니다. 여기가 단절돼야 돼요. 십자가에서 나는 스톱이 돼야 됩니다. 지금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는 나라는 것은 이건 내가 아직 죽기 전에 일방적으로 상상한 거예요. 이렇게 천국에 가면 이게 나의 세계가 되지 주님의 세계가 안 돼요. 나의 세계가 되면 어떤 오류가 벌어지느냐 하면, 내가 사랑하는 혈연관계에 있는 딸과 아들이 지옥에 있다면 자기 혼자 천국 가면 어미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천국에 살면서 가슴이 찢어지지요. 이게 천국입니까? 지옥 생활이지.

 

나의 소망으로 간다고요? 아니에요. 나의 믿음, 소망, 사랑, 전부 다 죽음과 더불어 삭제 당합니다. 동영상 완전히 없애버려요. 누구라도 복구 못합니다. 그리스도로 죽고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주님이 창세전에 준비된 나로 새로 출발해요. 십자가로 죽고 이제는 예수의 것으로 다시 사는 거예요. 로마서 6장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데 조건이 있어요. 내 주체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주체라고 증거하는 지체로 사는 겁니다. 이걸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런 존재가 된 상태에서 지옥 같은 세상에 우리를 집어넣으니까 우리는 즐겨 기쁘게 나는 죄인 중의 괴수 맞는다고 허허 웃고 있는 거예요. 저런 죄를 나도 지을 수 있는데. 그걸 자랑 삼아 말이죠. 나도 환경만 받쳐주면 저런 죄를 지을 수 있는데. 빵을 훔쳐? 나도 배고프면 얼마든지 훔칠 수 있는데.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나도 돌 많이 쳤는데.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이나 못된 이야기가 나의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나도 연대기적으로 자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주께서 오셔서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내 속에 들어온 주님의 자기 작용을 자기가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구원 작용을 증거하는 주님만 증거하는 그러한 증인으로써 천국에서 면류관도 반납하고 사는 겁니다. 복음 뭐 있어요. 복음 이거에요. 나라는 것은 다리가 끊어졌구나. 이게 복음입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새로 공급받은 나를 보는 거예요.

 

그게 사도의 시선에서 점점 올라가게 되면, 마지막으로 이것만 보고 마치겠습니다. 교재 4페이지, 안목의 나열. [현실 속에서 인간이 형성한 안목] 일곱 교회, 사도 요한 밧모 섬에 갇혔다, 안 됐다, 불쌍하다, 이거죠. 그러다가 잘 먹고 잘 산다, 바벨론이다. [현실 속에서 배척받은 사도의 안목] 밧모 섬에서 고생한다, 두 증인이 순교 당한다, 그거죠. 더 나가야 돼요. [천사의 안목] 활동해야 돼. 그런데 활동이 끝났어요. 이게 예수님의 안목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거예요.

 

전쟁을 시작한다고 알려주는 걸 일곱 인, 활동 진행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일곱 나팔, 활동이 끝났어, 시마이, 모든 것이 끝나버린 상황이 일곱 대접. 그리고 일곱 대접 연속된 것이 마지막 요한계시록 천국과 지옥. 우리는 왜 안 보이는가? 육신 때문에 안 보이지요. 오늘 죽으면 되지, 뭐. 오늘 죽어 낙원에 가면 다 되지요. 육신 때문에 가려서 안 보이는 겁니다. 아직까지 주께 데려감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은 받아놓고 전기밥솥 눌러놨는데 우리는 마음껏 공개된 영적 전쟁과 진행 상태를 보고 완료된 전쟁이 끝나버린 것을 한꺼번에 파노라마처럼 다 보고 거예요. 예수님의 안목이 우리의 안목입니다.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175.♡.141.195) 16-01-17 12:43 
2016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요한계시록:생명의 신호 제3강 [잡곡강정]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복음이라 하는 것은 그 원천이 구약 이스라엘에서 나옵니다. 구약 이스라엘 하나님의 특징이 뭐냐?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세계 어떤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자기 백성을 버리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른 백성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유일한 자기 백성을 스스로 하나님께서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매정하신지 자기 독생자 아들마저 무참하게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보낸 곳이 지옥이죠. 음부란 곳이에요. 그리고 거기서 약속 만에 의해서 그 음부에서 사흘 만에 부활에 이릅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다가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은 없어요. 그저 하나님이 구원하는 자를 알아서 스스로 생산하고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아들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지만 그런 나라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만 있습니다.

 

그런 특이한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지난 시간에 한 것, 정말 중요한 건데 제가 많이 피곤했는지 강조 못했는데, 역사와 환상에서 주체는 역사에서 만들어지고 연대기에서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했고, 그리고 환상과 역사에서 요한계시록이 제시한 교집합, 접촉 지점은 십자가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나옵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십자가 사건으로 역사와 환상의 교차지점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십자가 사건이냐? 십자가 사건은 역사 쪽에서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거든요. 왜 살해했고 왜 주님은 살해당해야 하는가? 여기는 어떤 저항이 있었습니다. 어떤 저항이냐 하면, 인간은 역사 속에 주체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괴물이죠. 역사, 연대기 속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그 괴물이 환상을 알려주면 환상마저 역사 안에 편입시켜 버립니다.

 

예를 들면 역사 속에 없는 주체가 하나님이 어떤 계시를 주시면, 그 계시를 제가 믿나이다, 하는 순간에 이 환상은 토털 연대기로 변해버려요. 난 오년 전에 기도하다 은혜 받았다. 이렇게 돼버려요. 그러면 이 전체가 역사가 된다고. 그러면 십자가 사건은 어디 있느냐? 십자가 사건은 전체가 된 이것에서 다시 환상이 또 접촉점을 만들어요. 여기서 십자가 사건이 또 생깁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자꾸 환상마저, 하나님의 계시마저, 율법마저 정복해서 그게 나를 구원하는 세계로 만들고자 하는 자를 자꾸 저항하는 그런 십자가 사건이 환상 쪽에서 제시가 돼요. 이건 행함에 대한 적극적인 극렬한 저항이요 거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이미 그 당시 십자가는 15년 전에 끝난 사건이에요. 이미 지나간 십자가 사건이 계속해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은 계속해서 내 쪽으로 행함으로 나를 구원하기 위한 연대기적 역사를 계속 쌓고 누적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건 내부에 역사를 고수하라는 어떤 명령권자가 있어요. 역사는 파괴될 수 없다. 끝까지 가야 된다. 유지돼야 된다. 히브리서 1장 10절과 다릅니다. 히브리서 1장 10절에서는 주가 나타나게 되면 주께서 친히 만든 모든 역사와 자연세계는 날아가 버려야 돼요.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가 버림받는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특색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어요. “목사님, 제가 예수 믿는 것 맞습니까?” 그러면 그건 본인이 아십니다. 저한테 확인받을 필요 없습니다. 내가 예수 잘 믿는다고 좀 칭찬해주시고 확정져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나 확정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십자가 사건과 결별하는 순간입니다. 모든 것이 예수 믿는 자기 역사로 전환되고 변질되고 만 거예요. 거기에 적당한 노래가 있어요. <시크릿가든>에 나오는 백지영이 불렀던 <그 여자>란 노래인데,

 

얼마나, 얼마나 더 너를 이렇게 바라만 보며 혼자

이 바람 같은 사랑 이 거지같은 사랑 계속해야 니가 나를 사랑하겠니.

조금만 가까이 와 조금만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

널 사랑하는 난 지금도 옆에 있어 그 여잔 웁니다.

 

하나님을 내 속에 장악하려는 거예요. 신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가 다루려고 하고 관리대상으로 삼는 겁니다. 흥정하려고 타협하려고. 얼마나 기도하면 내 소원 들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협상조로 나가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다가가고 주님은 내빼고. 내빼면서 십자가 사건은 계속 흘리고. 오지 말란 말이야. 저는 주님을 믿고자 합니다. 그 믿음이 바로 불신앙이거든요. 이스라엘이 그래서 망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기를 지켜내기 위해서 자꾸 여호와를 믿는데 여호와는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 속을, 어제 두 번째 강의제목이 [찐빵 쪼개기]거든요. 남쪽, 북쪽을 다 쪼개면 그 속에 고난 받는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마치 장차오실 예수님처럼 버림받는 사명을 지니시고 이 땅에 와서 자기 백성으로부터 버림받으면서 가짜 이스라엘이 티가 나도록 조치하고 가짜 이스라엘은 결국 망하고 맙니다. 이게 우리 선배들이 했던 잘못된 짓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돼요. 자기 역사를 고수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요한계시록 들어가기 전에 이런 사실이 갖추어져야 돼요. 그렇지 않고 요한계시록을 보면 나의 역사로 전환되고 맙니다. 나는 요한계시록 22장 다 봤다. 이 역사가 나의 역사다. 그러면 두 발자국 도망하는데. 네가 나를 믿고자 하지 말란 말이죠. 그런 신은 없어요. 버림받아야 되는데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것,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결국 못 잡아서 주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걱정하는데 걱정하면 불신앙이고, 괜찮아 하면 신앙이거든요. 이해가 안 되시는 모양인데.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들 가운데 자기 백성을 알아서 건지잖아요. 알아서 건진다면 구태여 내가 잡을 필요 없이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만들어낸다면 내가 여유롭게 살 필요가 있어요. 주께서 알아서 하시니까. 제가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이기는 자에게 이런 혜택을 준다고 할 때 백 퍼센트 이기는 방법을 이야기했지요. 시간차 공격을 하는 거예요. 상대방이 내는 걸 보고 바꾸면 되는 거예요. 시간을 한 박자 줄이는 겁니다.

 

주께서 벌이신 일을 우리 쪽에서 주와 함께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 전부가 나를 대신하신 주께서 하신 일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잖아요. 한 박자 죽여서 바라보는 믿음. 그리고 내가 몸부림치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발악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시간에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본인을 쪼개세요. 이스라엘만 남북으로 쪼개는 게 아니고 신약에 오면 요한계시록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 둘로 쪼개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 자신을 내부를 쪼갭니다. 그 안에서 요한계시록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요. 우리는 완성된 요한계시록을 돌려보는 재미가 있어요.

 

여기 교재 3페이지 봅시다. 제가 어제 이 세상이 동결됐다 했지요. 시간마저 동결됐습니다. 분명히 요한계시록 1장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이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했다는 거예요. 속히 될 일이니까 미래가 아니냐고 하지만 미래마저 동결됐어요.

 

동그라미, 이게 현재라면 미래는 여기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목을 치니까 미래가 같이 섞여버렸지요. 현재 속에 미래가 같이 동결되는 겁니다. 동결되는 논리에 대해서 교재 3페이지 밑에. [세상은 예수님의 떠나심 앞에서 아무도 떠날 수 없는 환경이 된다. 모든 환경은 떠나신 분의 내부 환경이 된다.] 떠나신 분의 내부 환경이 된다는 말은, 이 세상은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 남은 껍질이고 던져진 옷이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활동하는 역사 무대는 가장자리로 밀리게 되고 거기서 아무리 대단한 사건들이 줄지어 일어난다하더라도 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4페이지 묵시와 역사 차이, 다섯 번째에 보면, 움직이지 않는 운동이라 했어요. 분명히 굉장히 움직이는데 전혀 움직이지 않아요. 주님의 시간으로 볼 때는. 원래 그랬어야 되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제일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시각이거든요. 주님께서 가시고 사도 요한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제가 전기밥솥 이야기했듯이 이미 사도 요한은 구원받았어요. 성령이 임하면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고 난 뒤에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않는 안에서 어떤 운동들이 요란스럽게 일어나느냐는 것이죠.

 

찾아야 되겠다. 여기 있네. 찾았습니다. 4페이지 위에서. [줄지어 일어난다하더라도 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꿈도 희망도 소용없다. 떠나심을 묘사할 수 있는 전체는 없기 때문이다.] 환상마저 포착할 수 있는 역사는 없기 때문이죠. [확인되지 않는 이질성을 맞이해야 한다. 설명할 수 없는 중심을 모셔야 한다.] 그 다음에 ‘요란한 정숙상태’ [세상은 스스로 자기 증명은 허락되지 못하고 달리 증명당할 일만 남아 있다.] 그게 뭐냐? [볼지어다. 구름 타고 오시리라.] 외부에서 침략하잖아요.

 

그들은 굉장히 바빠요. 지금도 바쁩니다. 내 집 마련 청약저축에 바쁘고, CMA나 MMF라 해서 단기성 자금을 어떻게 활용할까 굉장히 바빠요. 바쁜데 주님 보시기에는 정숙, 고요해요. 소박한 자기 연대성 만들기에 굉장히 바빠요. 요한계시록을 전혀 안 봄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을 수행하고 실천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은 교회 다니는 사람뿐만 아니고 이미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두 조각내고 쪼개기 때문에 혼자서 산 속에서 무슨 짓을 해도 그게 요한계시록에 표현돼있고 나타나게 돼있어요. 요한계시록에 벗어나는 행위는 일체 없습니다.

 

이번 시간에 왜 그런가 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그러한가? 그걸 이제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진도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중요한 대목에 들어섰다고 생각되는데 잘 들으셔야 돼요. 인간은 어릴 때부터 자아가 형성되기 전에 딱 두 가지를 아는데 자기가 있다, 없다, 에요. 존재의 부재인데 엄마가 시장에 가서 없으면 없다가 되고, 오면 있다가 돼요. 있다, 없다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짝을 찾아야 돼요. 없음을 느끼면서 함께 찾는 겁니다. 없음을 요청함으로 내가 있음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것은 어떻게 증명되는가? 어린애들 보면 알잖아요. 엄마 없으면 울고 엄마 있으면 좋아하고. 자기만으로 자기를 알 수 없고 내 곁에 누가 있느냐, 없느냐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짝을 찾아서 요청해서 정합니다.

 

일단 존재와 있다, 없다가 한 세트가 되면 만족하지요. 만족한 순간 이게 있다가 돼요. 그러면 여기서 또 없다를 찾아야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을 사주세요. 왜? 없기 때문에. 그래서 스마트폰을 사줬어요. 굉장히 만족하지요. 그러면 그건 있다가 돼요. 그런데 옆집 정수기에서 얼음이 나오네요. 우리 집 정수기는 얼음이 안 나와. 갑자기 나는 무엇을 결핍한 존재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걸 느끼면 뭘 요청하게 돼있어요. 엄마, 우리 집에도 얼음 나오는 정수기 사줘, 라고 요청하게 돼있어요. 정수기 사주면 그 전체가 일시적으로 만족스러운 있다가 됩니다.

 

그런데 그걸로 인간이 만족합니까? 더 커서 나는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왜 죽는지 몰라요. 있다를 모를 때는 뭔가 없다가 되지요. 없음을 요청하기 위해서 신을 요청해요.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 이걸 요청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게 신이에요.

 

신을 알게 되면 끝납니까?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도망가는데.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이며, 내가 신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뭘 해야 되며, 누구를 믿어야 되면, 헌금은 얼마 내야 되며. 선교는 일 년에 몇 명해야 되며, 기도는 하루에 몇 시간해야 되며, 성경은 하루에 몇 장 보는가? 계속해서 요청하게 됩니다. 나중에 나이 80,90 쓸모없게 되도록 계속 돼요.

 

계속 요청하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이게 인간의 의식적으로 눈에 보이는 있다, 없다로 끝나는 게 아니고 편집증 환자처럼 계속해서 뭘 요구하는 의식적인 차원이 아니고 무의식적인 차원까지 내려가는데 여기는 선악에 관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내가 왜 자꾸 얻고자 하느냐? 뭔가 불길하고 쫓기고 두렵고 무섭고.

 

어제 이야기했듯이 2008년 10월 2일 새벽 6시, 남들은 중요하지 않아요. 최진실 좋아하는 사람은 중요해요. 자살한 거예요. 밥을 굶었습니까, 돈이 없습니까, 결혼을 안 해봤습니까? 그런데 왜 죽어요? 무의식 속에서 나는 선해야 되며 악하지 않아야 된다고 계속 쫓기는 겁니다. 자살이란 마지막 남은 자기의 선함을 유지할 수 있는 최후의 방책입니다. 장렬하게 죽는 겁니다. 물론 찬 물엔 들어가지 말고 따뜻할 때 뛰어내려요. 찬 물은 너무 차가워서 곤란해요.

 

끝까지 자기 정당을 요구한다는 것은 악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가치 없는 쓸모없는 인간, 무가치한 인간이 되지 않는가, 하고 쫓기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있다, 없다에서는 신을 요청하지만 여기선 법을 요청해요. 법을 지키면 되는 거예요. 성경말씀 가운데 지킬 것을 골라서 나는 이 법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신자라고 확정하고 싶은 겁니다. 이게 성화론이에요. 그래서 쫓기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기억하다시피 아주 철저하게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그 현장에서 악은 또 다시 등장합니다. 철저하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이러다간 내가 광신도 되지 않는가, 내가 미쳤어, 이러면 너무 심하게 믿는 거야, 라는 순간 진짜 내가 원하는 선은 분명히 그 장소에 갔는데 저만치 멀어져가요. 지평선 쫓는 것처럼. 지평선 있는 장소에 갔는데 저 멀리 후퇴돼있습니다. 그 갭을 줄일 수 없어요.

 

완벽한 착함을 시도하면 할수록 그동안 몰랐던 죄들이 계속해서 더 많이 나에게 쏟아집니다. 마귀는 이야기합니다. 따라잡아라. 넌 우리 교회에서 제일 착해. 빨리 따라 잡아. 넌 우리 교회에서 기도 제일 잘해. 더 열심히 해야 돼. 너만큼 헌신하고 희생적인 사람은 없어. 너 뒤를 봐. 내신 성적 떨어지는 사람 많아. 하지만 너는 수능 전국 0.1% 조금만 더 따라가면 돼. 할 수 있어. 이게 바리새인들이에요. 자기 학대, 자기 채찍, 자기 비난. 부족합니다. 맨날 그러고 있을 때 주님은 제자들과 술 잡숫고 계시고.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

 

법을 만들어서 법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양심에 쫓기는 일은 없도록 그렇게 자체적으로 나름대로 조치를 해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과 법을 구체적으로 연대기, 역사 안에 합치고 싶어 해요. 너무 추상적이니까. 인간은 연대기 속에서 주체가 나오니까. 이걸 합친 게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를 구약에서 짐승이라고 합니다.

 

일본과 한국 축구시합에서 한국이 이겼을 때, 일본과 야구시합에서 마지막 일본의 구원투수한테 역전으로 3점 낼 때 그걸 보는 시청자들은 눈물 흘렸어요. 드디어 일본 놈을 이기는구나. 우리 한국의 저력을 이렇게 나타내는구나. 갑자기 자기가 의로워지고 하나님이 내 편에 있는 것처럼 내 기도에 응답하고, 야구 때문에 기도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간에 하나님께서 나 좋은 쪽으로 해주는 거예요. 여러분이 스포츠를 보면서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겼을 때 우리는 신의 은총을 느낍니다. 바둑 안 두는 사람은 모르지만 이세돌과 커제와 몽학배 결승전할 때 간절히 기도하고 난리에요. 커제 9단을 이세돌이 이겨서 한국의 우수성을 보여주자. 3:2로 졌습니다. 1억7천만 원 날아갔어요.

 

국가에 대해서 국가가 나를 보호해주는 거예요. 괜찮은 국가 속에 있음으로 나의 정당함과 신을 찾는 것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으로 성취가 되는 겁니다. 안중근 의사처럼 나라 없는 백성은 없다. 그 국가가 성경에서는 짐승이 돼요. 악마가 만든 거예요. 그러면 국가에 대한 권력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국가의 권력에 자발적 순종이거든요. 국가의 대통령에게, 왕에게 복종한다? 복종 안 합니다. 누가 대통령에게 복종해요? 일베? 박사모? 복종 안 해요. 북한 사람도 복종하지 않습니다.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본인에게서 나와요. 본인이 법과 신을 합치하고 싶어서 본인이 원했던 국가기 때문에 자발적 순종 그 자체에서 권력이 나옵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복종하는 거예요. 자기 권력에게 자기가 경배하는 겁니다. 내가 나한테 절하는 거예요. 잘했어, 훌륭해. 그래, 용기 내.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격려한 겁니다.

 

이게 짐승인데 국가에서 짐승으로 어떻게 갑작스럽게 변할 수 있습니까? 갑자기 변한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 국가가 망하고 바벨론 제국에 잡혔을 때 비로소 바벨론이 짐승임이 폭로됩니다. 언약이 함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 앞에서 국가라는 형태가 짐승이란 형태로 변합니다. 왜냐?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환경으로 언약적으로 조종되고 배치되기 때문에. 미장센이라 했지요. 어제 못 쓴 것 써보자. mise-en-scène 하나의 같은 장면끼리 동결되는 거예요. 똑같은 짐승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함으로써 이제는 하나님만 남고, 정확하게 말해서 하나님 이름만 남고 모든 것을 날아갔어요. 날아갔지만 언약은 유효해야 되고 언약은 성취돼야 되기에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계시를 주게 되면 다니엘은 현재 소속돼있는 바벨론 제국 공무원이거든요. 다니엘이 공무원으로 취직해 있는 그 국가가 짐승인 것이 폭로됩니다.

 

짐승인 것이 폭로되면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짐승을 짐승 되게 하신 그분이 다니엘이 제시한 계시를 따라서 장차 이 땅에 실제로 오시게 돼요. 사람들은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그 예수마저 역사 속의 일부로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갑자기 역사에서, 이 그림은 끝날 때까지 잊으면 안 돼요. 역사에 환상 쪽에서 들어올 때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때 역사가 예수를 역사 일부로 간주해서 너 같은 인간은 그냥 사형수야. 역사 일부로 죽으라고 해서 죽으면 끝나는데 여기 예수님이 품고 온 환상이 예수님과 함께 있어요. 동방박사가 별 따라 온다든지.

 

요한계시록 12장 1절만 누가 읽어보세요.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제가 인터넷에 찾아봤어요. 태양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지구 무게의 33만 배라는 거예요. 지구 무게가 57억 톤이에요. 무슨 철인 같은 여인이 그 무게를 감당합니까. 그런데 또 조사해보니까 태양보다 훨씬 작은 10킬로미터짜리 고밀도 중량의 별은 그 무게가 태양의 두 배가 된다는 거예요. 그 별을 사파이어처럼 박아서 머리에 썼다는 거예요. 도대체 머리가 어느 정도 돼야 견딜 수 있을까요?

 

마리아를 보세요. 여자 하나에 환상이 끼어든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마리아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환상적인 요인들이 전부 다 크림들이 발라 있는 거예요. 다 연결돼있는 거예요. 그래서 에녹이 사는 게 정상이고 아담 자손들이 죽는 게 비정상이에요. 동방박사 별 따라 오는 것이 정상이고, 우린 백날 봐도 별 안 움직이는 이건 비정상이라니까. 물 위를 걷는 게 정상이고 물에 빠지는 게 비정상이고. 뭔가 반대로 되었다는 것, 환상 빼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환상 빼놓고 주체를 우리는 간증하고 있는 겁니다. 환상 등장하면 우리는 그걸 역사로 바꿔버리죠.

 

그럼 환상과 역사의 차이점이 뭐냐? 환상은 나와 직접 외부와 관계하는 게 아니고 바깥에 계신 분의 소유로서 관련될 때 이게 환상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분이 어디 있는데? 왔다 갔어요. 왔다 가시면서 나는 구름 타고 다시 온다. 또는 주께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다. 역사 속에서 전혀 재현될 수 없는 일회성 사건들을 남겼어요.

 

그래서 그 일회성 사건을 남기면서 등장한 게 바로 짐승이라는 환상적 개념을 국가에다 부여합니다. 너는 짐승이야. 국가에서 짐승으로 가는 메커니즘, 과정을 인간 속에선 찾을 수 없어요. 어떻게 우리 국가가 왜 짐승이 되는지. 짐승이란 부정적 개념이거든요. 그걸 설명할 수 있는 여지는 없어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환상을 지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해서만 짐승이 적대적 관계에 있다. 우리한테는 호의적 관계에요. 마음이 같이 맞았기 때문에.

 

제가 강의 처음 시작할 때 일곱 교회 이야기할 때 아멘이시요, 충성이요 하면서 혜택 준다는데 제가 분명히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지금 없다면 일곱 교회는 폐허가 된다고 했지요. 건물이 오래 되면 주저앉게 마련이잖아요. 그게 역사에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가미되면서 일곱 교회는 그냥 자연현상으로 무너지는 게 아니고 누가 무너뜨렸다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환상적인 요소가 무너뜨린다면 그분이 오늘날 국가를 짐승으로 규정하는 쪽으로 몰아가는 것과 같이 연결 지을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빼놓으면 설명이 안 돼요. 그들만이 언약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만이 바벨론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잡혀갔기 때문에, 그들만이 자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버림받음과 버려짐 사이에 환상의 효과, 환상의 능력이 그들을 덮어씌운 겁니다. 버림받음은 일종의 파견근무와 마찬가지지요. 바벨론에 가서.

 

바벨론은 금신상을 만들고 금, 은, 동, 철, 진흙, 이것은 이미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세웠다는 말은 그들은 움직이지 않는 운동만 할 뿐이에요. 동결된 상태, 응고된 상태, 얼음땡 게임. 천사가 와서 치면 움직이고 그렇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이 세상은 아무리 요란하고 분주해도 정숙 된 분주함에 불과해요. 나름대로 분주한데 조용해요. 지금 이 시간처럼 조용합니다. 한 시도 짐승에서 벗어날 수 없이 고요해요. 그 자체가 미장센, 고착된 고정화된 그림 세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목 이야기 안 했지요? 제목 나갑니다. 사자성어로 잡곡강정. 잡곡강정은 잡곡들을 섞어서 엿으로 단단하게 하니까 그것을 압력을 가하니 그 많은 다양한 잡곡들이 고정되어 단단한 바처럼 굳어져있어요. 요한계시록 안에 아모스, 호세아, 요나, 하박국, 스바냐, 스가랴, 다 기어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언약 안에서 전부 고정돼있어요. 이걸 얼음땡 게임하는 것처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것처럼 또는 별에서 온 그대처럼 순간적으로 스톱됐어요. 중국에서는 이 드라마를 어떻게 찍어서 저렇게 되지, 하면서 신기할 정도로. 그때는 천사가 와서 건드리면 자기 활동을 하게 돼있어요.

 

잡곡강정이란 온갖 선지자들의 말씀이 거기 다 섞여있어도 그것들이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적인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서 천사의 감촉, 촉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에요. 기다리면 갑자기 굳어진 잡곡이 심판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는 어떻게 해요? 돌려가며 보는 재미가 있어요. 이런 현상을 이미 지나간 일로 여기고 돌려가며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마음껏 환란을 즐기세요. 주의 고난을 마음껏 즐기세요.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림자가 비추겠지요. 담벼락이 있고. 이 앞에 큰 버스가 지나갑니다. 버스 그림자가 담벼락을 다 덮치겠지요. 소박한 나의 연대기가 큰 짐승의 그림자 밑에 전부 가려지면 나의 그림자는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사실은, 내 그림자는 내 범위를 안 벗어나는데 버스 그림자는 내 모든 것을 더 지나쳐서 다 덮어버려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은 개인적인 것과 관계없이 그 공동체, 그 사회가 요구하는 데로 추종해야 되고 그들이 원하는 데로 따라가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자발적인 복종이면서도 한편으론 자기 욕망과 배치되는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에서 짐승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짐승에게 순종했는데 늘 얻어맞는 거예요. 황충에 의해서. 같은 편인데 같은 편이 나를 치는 겁니다. 음녀를 만들어놓고 짐승이 음녀를 칩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시아파나 수니파가 똑같은 인간들인데 똑같이 버림받은 적이 없는 신을 믿는 자기의 상상, 자기의 욕구, 있다, 없다를 채우기 위한 신인데 그 신을 놓고 서로 권력 싸움한다고 서로 죽입니다.

 

이러한 비극, 그걸 비극으로 보지 마시고 요한계시록 했으면 즐기시기 바랍니다. 즐기는 것과 절망함의 차이가 뭐냐? 알고 하면 즐기는 것이 되고, 자기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불안, 불안합니다. 자기 내부에 선악이란 것 때문에. 나는 선해야 되는데 악하면 지옥 가는데. 맨날 거기에 매달려있는 거예요. 그러나 선과 악의 문제, 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뭐냐? 우리가 아는 신이 아니라면 어떤 하나님이냐? 본격적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만이 참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모든 숫자는 1,2,3,4 또는 1,2,4,6,8, 무한은 집합론에서 결국 1로 귀환돼요. 이걸 일자 또는 유일자. 모든 것은 신에게 돌아가는 거예요. 무한은 신의 영역이라고 보는 겁니다. 천문학도 마찬가지고.

 

성경은 1로 시작하지 않아요. 2로부터 시작합니다. 2로 시작하는 이유가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옵니다. 1장 8절에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22장 1절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지요.

 

이게 숫자 1이 아니고 2에요. 피조물들이 2에 끼어들지 마라. 네가 건방지게 아버지와 나 사이에 끼어들지 마라. 네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창세전에 의논한 대로 그냥 결과물로 될 뿐이지 네가 뭘 했다고 해서 아들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2를 이해하고 2에 순종하는 자는 2의 세계, 아버지와 아들의 보좌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보좌가 있고 그 옆에 네 생물이 있고 세 번째는 24장로가 있고 그 다음에는 무수한 천사가 있고 그 다음에 무수한 백성들이 있어요. 단계가 그렇게 돼있단 말이에요.

 

이러한 천국의 내막은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고 전쟁을 통해서 부산물로 주어져요. 그렇다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자연세계에 대해서 공격할 때마다 줌 현상이 일어납니다. 점점 더 가까이 가요. 첫째, 둘째, 줌으로 더 자세히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한 결과, 부산물이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막간이 돼요. 이쪽은 공격하고 거기에 대한 결과물이 막간으로 넘어오게 되면 막간에서는 환상 속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전쟁하는 아군과 적군이 전부 다 환상 같아. 짐승이 어떻고 괴물이 어떻고 환상 같아요.

 

우리가 환상이라고 부르지만 우리가 역사를 오해해서 그래요. 환상이 진짜 세계고 우리 세계는 마귀가 조작한 세계에요. 그래서 조작된 세계를 까발리기 위해서 전쟁을 벌였고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전리품으로 등장한 게 뭐냐 하면, 더 깊이 있는 환상 세계, 더 깊이 있는 막간의 세계를 통해서 보니까 천국과 지옥은 이렇게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과 지옥은 장차가 아니라 지금, 지금 우리는 돌려보는 재미. 아하, 내가 오늘 죽으면 이곳에 가겠네. 보좌 있는데 가겠네. 전쟁은 우리가 못합니다. 왜? 우리는 한 박자 뒤에 들어가기 때문에. 즐기세요.

 

 

10분 쉽시다.
 관리자(IP:175.♡.141.195) 16-01-17 12:45 
2016겨울수련회 제 4강 : 7(칠)


지난 시간에 “썩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이상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안 썩어도 되는데 왜 썩어야 되지요? 썩는다는 말은 그만큼 폐기처분해야 될 이유가 각자 우리 속에 내장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폐기처분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환상에 의해서 살아야 되는데 우리가 역사에 의해서 주체를 굳히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갈 때까지 가보겠다는 거예요. 신을 기어이 자기 손으로, 자기 힘으로 내 편 만들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나는 어느 누구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면서도 구원을 성사시키겠다는 겁니다. 좋은 사이,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칭찬받아서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아들과 아버지사이를 오해해서 그래요. 아들도, 예수님도 아버지께 버림받았으면 마땅히 우리가 버림받는 것이 당연한 거거든요. 왜? 아담이니까. 첫 번째 아담도 버림받았고 두 번째 아담도 버림받았고 따라서 그 속에 있는 우리도 버림받는 겁니다. 버림받는 것이 구원인 것을 알아야 돼요. 버림받는 것이 구원에 필수적인 절차인 것을 우리는 아셔야 됩니다. 그러면 문제가 “역사에서 어떻게 환상으로 바뀔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이 뭡니까? 그걸 이야기해 주셔야지요.” 한다면 그것은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의 예레미야, 에스겔에서 이야기합니다.


분명히 이스라엘백성이 범죄 한 뒤에, 범죄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범죄하고 나서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릴 때 징벌요소 속에 환상의 요소가 들어 있습니다. 그게 뭐냐? “70년이 지나서 돌아오리라.”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마지막 장면이 그거에요. “70년이 되면 돌아오리라.” 사람들은 그것을 70년인 줄 알았어요. 70년 만에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70년이 아니었습니다. 70이레였습니다. 이레라는 묵시적 개념이 붙을 줄이야 상상도 못했지요. 할례 행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해놓고 뒤에 가서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지.”라고 딴 소리를 하시는 하나님.


70년에서 70이레로 바뀌는 과정, 그 바뀌는 과정에서 문제는 환상을 제시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동결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의 필름을 집어넣어서 환상을 비추게 하는 방법, 환등기속에 필름이 있는데 70년을 집어넣어서 70이레로 빼먹는, 확대시키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시간에 대해서 의미가 달라진다고 한다면 그 시간의 의미를 달라지게 하는 주체 자는 누구냐? 시간을 동결시키면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그 시간을 어떻게 동결시키는가?


요한계시록 1장 8절에 보면,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헬라어 모르는 사람들도 성경에 알파요 오메가, 이것이 헬라어라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라고 해놓고 그 뒤에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다.”(계 1:17) 헬라어가 원래 A(알파), B(베타), G(감마) D(델타), E(엡실론), Z(제타), H(에타), Q(쎄타), I(이오타), K(캅파), L(람ㅂ다), M(뮤), N(뉴), X(크시), O(오미크론), P(피), R(로-) S(씨그마), T(타우), U(윕실론), F(휘), C(키), Y(프시), W(오메가), 이렇게 끝나거든요.


거기다가 알파벳 따라서 숫자까지 걸쳐요. 알파, 베타, 감마……, 숫자로 1, 2, 3……. 그래서 666이라고 하면 거기에서 알파벳을 가지고 사람 이름 끄집어낸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는 네가 666이다.” 환상적인 숫자를 붙일 때는 그런 식으로 숫자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666이 진짜 어떤 특정인물이라면 그 시대 모든 사람의 이마나 손목에, 아니면 그 당시 사용하던 동전이나 왕의 유물에 다 새겨져 있어야 돼요. 그게 없어요. 666, 숫자로 매매한다고 한다면 그 당시 화폐에 다 새겨져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666은 밝혀낼 수가 없습니다. 도미티안도 아니고, 티투스도 아니고, 네르바도 아니고, 트라얀도 아니고, 클라우디우스도 아니고, 칼리굴라도 아니고, 베스파시안도 아니고, 그 어떤 것도 특징 잡아서 666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은 고유명사가 없습니다. 숫자로 정했다는 것은 이미 동결된 것이고 그 동결된 것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던 모든 사실이 그 안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예수님을 대적했던 것이 숫자화 되어서 그걸 연대기 속에 집어넣어놓고 천사가 한 번씩 그걸 탁탁, 터치할 때마다 새로운 666이 계속 튀어나오는 겁니다. 어떤 특정인물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도 666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을 특정인물로 삼겠다는 것은 또다시 연대기적 주체의 성품을 못 이겨서, 그 성질을 못 이겨서 자기가 그것을 알아채겠다는 거예요. 베리칩이라는 것, 식별정보가 새겨진 칩 같은 것을 받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1953년 왓슨과 크릭이 무엇을 발견했는가? DNA를 발견했어요. 그것으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 DNA가 우리 세포내에 들어 있는 베리칩이에요. 날 때부터 다 박혀 있어요. 디옥시리보핵산. 인간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정보와 에너지로 되어 있어요. 정보라는 형상과 에너지라는 질료로 되어 있습니다. 정보 없는 인간은 없어요. 세포 안의 핵에 있는 DNA와 세포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 DNA는 모계까지 다 파악해 낼 수가 있어요. 그게 정보인데, 그게 바로 베리칩인데. 아담의 베리칩이에요.


그거 하나 더 받는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밝혀야 될 것은 뭐냐? 인간은 왜 그런 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알 때 정보나 에너지개념 외에는 달리 자기를 파악할 수가 없도록 그런 식의 존재가 되고 말았는가? 그걸 밝혀내야 돼요. 그것은 알파와 오메가 속에서 그들이 동결되었으며 그 동결된 것들은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드디어 천사가 톡, 하고 터치하면 실제로 현실화되는 대기상태에 놓여 있는 겁니다. 대기상태에 있다가 천사가 치면 그 안에 담겨 있는 선지자의 예언들이 활개치고 나오는 거지요.


그래서 문서선지자와 기적선지자의 차이점이 나옵니다. 엘리사, 엘리야는 기적을 많이 베풀었거든요. 기적을 베풀었다는 것은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뜻이에요. “너희가 똑바로 하게 되면 이스라엘을 지켜주신다.” 그런데 요엘 선지자로부터 시작된 문서선지자는 “이제는 끝났어!”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는 이스라엘은 쪼개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포기해라. 난파선이다. 배 갈아타라.” 아예 갈아탈 배도 없어요. 그러면 문서선지자,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그 말씀을 전개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은 어디 있는가? 그 문서선지자가 심판을 행사하는 그 현장에 새롭게 생산되는 것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산되는 겁니다.


70년 포로 잡힌 사람이 다시 돌아온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70이레라는 그 환상적인 실현에 의해서 등장할 때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들을 인자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인자의 백성은 그 환상에 근거해서 이 땅에 등장하기 때문에 그 기능도 환상적입니다. 꼴 보니 별로 환상적이지도 않지만 성격자체가 주께서 환상적으로 다루게 돼요. 환상적으로 다룬다는 것이 뭐냐 하면, 세상을 ‘스톱’ 동결된 상태로 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환상적인 사람입니다. 누구처럼? 사도요한처럼.


그러면 요한계시록의 시간은 어디까지 가는가? 사도요한의 수명에서 마감이 됩니다. 열두제자는 하나님의 계시 때문에 특별히 은사를 받아서 그들이 있었는데 사도요한이 죽고 난 뒤에는 계시는 끝났습니다. 성경, 문서적 계시는 끝났어요. 이것은 뒤에 활용하면 되는 것이니까. 더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라고 하는 것은 사도요한이 죽는 수명까지, 거기까지 스톱이 된 거예요. 그러면 인류역사는 사도요한의 시간까지만 인류역사가 확정됩니다. 그때부터는 인류역사가 되풀이 돼요. 왜? 사도요한의 수명으로 요한계시록이 끝나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을 반복시키면 되는 겁니다. 시간은 사도요한으로 끝나는 거예요.


지금 남아 있는 시간은, 올해 2016년이라는 시간은 누가 만들었는데? 성경에 2016년이 나옵니까? 안 나오잖아요. 그걸 누가 만들었는데? 그것은 의미 없는 시간이에요. 2017년도, 의미 없습니다. 알파요 오메가라는 것은 알파부터, 알파, 베타, 감마, 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이 ‘알파요 오메가’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움직임은 아까 말한 잡곡강정처럼 천사가 와서 다룹니다. 천사가 와서 다룬다는 말은 “우리가 우리 인생에 대해서 손 떼세요.”라는 말이에요. “손 떼세요.”


우리는 뭔가 안하게 되면 불안불안 합니다. “목사님, 기도 안한지 벌써 6개월째 되었습니다.” 이런 거요. “교회 안간지가 1년이 넘었습니다. 헌금 안한지는 2년이 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 또 자기 연대기를 주장해요. 하루가 천년 같은데. “2년이 하루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게 위로인지 안 그러면 고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주께서 키워내는 시간을, ‘알파요 오메가’안에서 적합하게 키워내는 그 수명을, 그 인생을 왜 자꾸 썩어야 될 내 인생에 자꾸 갖다가 붙이는지. 본인이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입니까? 아니잖아요.


요한계시록을 편하게 보세요. 제가 “편하게 보세요.”라고 해놓고 나중에 보면 아예 안 해요. 이제는 그걸 알았어요.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가장 편한 거구나.’ 이 요한계시록 1장 8절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알파요 오메가, 이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알아서 다 해낸다는 거예요. 하이카처럼 알아서 다 해요. CF에 보면 밀어내지요. “할머니는 저쪽에 가 계세요.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해놓고 하이카가 알아서 저쪽에서 다 해요. 거기서 복음을 봤어요. ‘아, 저게 복음이다.’ “위험한 곳에 오지 마시고 저만치 비켜서 주시고 여기는 제가 알아서 다 하겠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할 때 내는 것 다 보면서 한 템포 늦게 내는 그것이 믿음이잖아요. 자기가 하지도 않고 남이 다 했는데 뒤 늦게 개입해서 이긴 자가 되어버리는 것, “다 이겼다. 죽도록 충성했다.” 뭐 했다고 죽도록 충성입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죽도록 충성한 거예요. 그 ‘안하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자기구원을 안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왜? 인간 속에 뭐가 있기 때문에? ‘있다, 없다.’가 있기 때문에. 계속 요청하거든요. 자기 안에 선악과가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막가다가 지옥 가는 것이 아닌가?’ 이걸 이겨내야 돼요. 또 연대기적 자기를 바라보고 있어요. 알파요 오메가도 아닌 주제에. 옆에서 분주하게 천사가 다 하고 있는데. 설거지 한다고 나대다가 피부습진이나 걸리고.


사도요한은 그냥 주는 대로 받으면서 자기주체는 어떻게 되는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됩니다. 1장 17절에,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죽은 자 같이 되었다는 겁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과물이 저군요. 포도나무는 주님이시고 저는 단지 거기서 뻗어 나온 가지에 불과하군요.” 그런 마음으로 살았어요. 주께 따지고 원망하고,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는데 이렇게 귀양살이를 하게 하십니까? 내 자식들은 ……?” 아마 결혼도 안했을 거예요. “내 팔자가 무슨 이런 팔자가 다 있습니까?” 이렇게 따진 것 없어요. 그냥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엎드러져서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사도요한에게 환상적인 면류관, 또는 환상적인 요소를 집어넣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는가?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되어 있거든요. “내 것 네가 가져라. 내가 이 땅에서 성취한 환상을 이제는 네 환상으로 공유하겠다.” “왜 주십니까?” “너는 내 지체거든. 나하고 붙어 있는 포도나무 가지거든.”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볼 때 지키려고 보지 마시고 ‘아, 이미 이런 것들을 주셨구나.’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집에 가셔서 예수님이 보내신 택배상자들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39900원, 이렇게 내고 쇼핑하지 않아도 이미 그득하게 채워져 있는 것들이 많을 거예요. 옷장 한 번 열어보세요. 주께서 환상적으로 주신 옷들입니다. 물론 유행지난 옛날 것들이지만. 그리고 집에 있는 냉장고의 모든 음식들이 주께서 주신 겁니다. 환상은 환상으로 연결지어줘야 되지요. 그걸 연대기로 마중 나가면 안 됩니다. 연대기로 마중 나가면 “왜 이것밖에 안 줍니까?” 이렇게 돼요. “그게 네 거냐?”


그리고 난 뒤에 20절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라고 했는데 둘째 날 이 두 번째 시간 강의 제목은 간단합니다. ‘7’입니다. 빠찡고에서 수박그림 나오는 그런 것 아닙니다. 777이 아니고 그냥 ‘7’. 7을 설명하는 것은 간단해요. 예수님께서 여기 창조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1절부터 3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천지의 창조물을 주님이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시고 창조물이 여기 있다면 주님이 입을 벌리시고 이 모든 창조물을 훅, 빨아들입니다. 며칠 만에 창조했지요? 7일 만에 창조했지요. 훅, 하고 이 창조물을 빨아들였다고 고개를 반대방향으로 해서 훅 내뱉어 버립니다. 그러면 기존의 것은 날라 가버리고 주님의 언약완성에 근거해서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창조세계가 7이라는 숫자를 달고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 7은 두 가지 기능을 하는데 하나는 기존의 것을 부수는 7과 만드는 7로 되어 있어요.


일곱 촛대에 거니시는 것은 주께서 그렇게 만드시고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은 기존의 자연세계를 작살내는 거예요. 자연세계는 마치 만두의 피, 막이에요. 막처럼 얇습니다.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들어가게 되면 만두속처럼 아주 지저분한, 악마가 저질러놓은 모든 배설물들을 충분하게 없애버리지요. 우리는 그 안에 있으면 내 것 달아난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하나님, 저를 이렇게 고생시키기에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스키 타는 철이 되어서 은행대출까지 받아서 스키장 앞에 오뎅집 하나 차렸다가 망해버리고 “이럴 수 있습니까?” 치킨 집 차렸더니 조류독감이 유행해서 본전도 못 건지고 다 날리고서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자기만의 연대기에 감기기를 원하는데 우리는 기껏해야 폐기처분될 창조안의 연대기적인 주체를 갖고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 안에 빨려 들어와서 다시 주님이 훅, 내뱉어 버리면 이쪽 일곱에 속합니다. 여기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관리대상이 되어서 주께서 일곱 촛대사이에 거닐지요. 그리고 “일곱별을 잡고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말씀하니 들어라.” 하고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라고 하지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이 환상 쪽에서 오게 되면 나는 연대기적 역사속의 인물에서 환상속의 인물로 바뀌면서 주님과 같은 안목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게 되면 나는 이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이기 때문에 후차적으로 한 템포 늦추어서 보게 되는 겁니다. 가위, 바위, 보! 하고 보게 되면 이미 알파요 오메가 안에 모든 음식이 다 갖추어져 있어요. 특히 요한계시록에 음녀라는 것이 있지요. 음녀가 뭐냐? 음녀를 간단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본인이 신랑을 구하면 음녀요, 신랑이 구한 것은 음녀가 아닙니다. 신랑이 신부를 찾으면 음녀가 아니고 본인이 신랑을 구하면 이것은 음녀에요. 이것이 호세아에 나옵니다. 호세아, 요나, 요엘, 아모스, 이사야, 대략 BC 800-700년 사이에 활동했던 선지자지요. 아마사, 아달랴, 요아스 시대에. ‘일곱’이라는 그 새로운 창조가 오게 되면 주께서 훅,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뱉을 때 여기에 환상적인 조치를 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부담스럽냐 하면, 이 육신의 몸이 굉장히 부담스러워요. 더우니까 어서 이 아담의 육신을 벗었으면 좋겠고 새 옷으로 좀 갈아입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전기밥솥 스위치 눌러놓았으니 칙, 칙, 김 막 내 뿜으면서 백미 밥 짓고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후딱 이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거예요. 이게 환상적 안목이에요. 예수님과 같은 안목으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보고 있는 겁니다. “소원이 있다면 어서 이 육신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마귀가 공격할 지점이 없어요. 죽겠다는데 뭐, 죽겠다는데. “돌이 떡 되게 해라.” 살아서 무슨 낙이 있는데요? “뛰어내려라. 네가 인기가 있을 것이다.” 죽을 몸이 뛰어내려서 인기 끌면 뭐할 건데요?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가 보이지 않느냐? 나한테 절하면 네 것 된다.” “너나 하세요. 너나 많이 하세요. 나는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존재가 가벼우니까. 어떤 일도 주께서 환상적으로 주신 일이기 때문에. 그것도 한 템포 늦게 가는 일이거든요. 이미 승리하고 들어가는 시합이니 자기가 손댈 것도 없어요. 전리품만 챙기면 되니까. 그 챙겨진 전리품을 가지고 두 자로 뭐라고 하는가? 그걸 은사라고 합니다. 자기백성 아니면 전리품 안 옵니다. 우리가 이북하고 전쟁했다. 전쟁했는데 김정일과 김정은이 갖고 있던 요트를 국방부에서 나에게 줬다. 물론 실제로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만, 그걸 나에게 줬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이미 끝난 거예요. 내가 하지도 않은 전쟁에서 우리는 전리품만 챙긴 겁니다. 그걸 두자로 뭐라고 한다고요? 그게 은사에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은사거든요. 그거 받는 순간, 후딱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버리세요. 버려야 됩니다. 슬슬 주례사가 정리되는데 23일 날 대전에서 12시에 김 종인 집사님 아들 결혼합니다. 광고를 안 하려고 했는데. 다음다음주일인데 못 오는 분들은 돈 보내시고. 김 을수 집사님이 그러는데 주례할 때 좀 복음으로 주례설교를 하라는 거예요. 누구 결혼식 깽판 놓을 일이 있습니까?


사랑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사랑한다는 것은 혼자 살겠다는 거예요.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는 이만큼 나한테 무조건 굴복하라는 뜻이거든요. 서로 마찬가지죠.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것은 우리한테는 없는 겁니다. ‘주님 주신 것이 온다면, 만약에, 그럴 리가 없지만 만약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그것을 주님이 주신 전리품으로 간주하겠다. 이 못난 것을 사랑해주니 고맙다.’ 그런 마음으로 유지돼야 돼요, 결혼이라는 게. 진작 좀 그렇게 하지. 때늦은 후회는 소용없고요. 한번 갔으면 또 가면 되고.


훅, 빨아들여서 새롭게 쑥 나올 때 그 주님이 바로 창조주입니다. 제대로 된 창조주지요. 제대로 된 창조주,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것을 우리도 공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썩어짐이 없어요. 예수님은 썩었다가 부활되었잖아요. 썩어짐이 없는 대신에 우리는 무슨 경험을 해야 되느냐? 썩어짐이 없는 대신에 썩어져야 돼요. 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이 “목사님, 우리가 주의 말씀대로 믿고 썩었는데 안 살려주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이야기했어요. 내시경 하면서 마취된 상태인데 의사 얼굴 보겠다고 버티다가 결국 입만 벌린 채로 의사는 보지도 못하고 깨어나 보니까 회복실에 가 있는 거예요.


분명히 의사 얼굴 못 봤는데 깨보니까 벌써 끝났어요. “내가 봐야지. 나를 데려가는지 확인해야지.” 하면서 눈꺼풀은 점점 더 무거워지고, 나는 사라지고, 내 믿음, 소망, 사랑도 다 없어지고, 내 모든 성과도 다 없어지고, 다 죄로 드러나고, 없어지고 깨보면 회복실입니다. “여기가 어디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자의 하나님이다. 내가 살려준다고 했잖아. 왜? 내가 살았으니까. 내가 산 내 삶을 너희도 같이 산다.” 따라서 그러한 백성을 가지고 이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이름을 이렇게 지어요. ‘7’


왜? 우리의 고유명사는 날라 가버렸으니까. 이제는 숫자로 말합니다. 이제는 늘 7이라고 부르리라. 7이 확대되면 그게 성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7로 살아가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7로 살아가게 되면 12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게 무슨 되도 않는 방언이냐? 7로 살아가게 되면 12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7은 뭐냐? 창조에 관한 숫자고 12는 무엇인가? 야곱의 언약에 관한 숫자입니다. 고난의 숫자입니다. 야곱의 아들이 몇 명입니까? 12명. 12명이 확장되어서 뭐가 되었습니까? 12지파. 12지파가 어디로 갔습니까? 광야. 광야에서 그들은 굉장히 큰 고난을 받았지요. 12가 감으로써 이미 이들 속에 진짜 창조주가 함께 있음을 주변의 이방사람들과 비교시키면서 뭘 하는가? 주님의 전쟁을 벌입니다.


그러면 이 전쟁에서 마지막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에스겔에 나와요. 성전입니다. 성전에 무슨 보물이 들어 있는가? 금인가? 금은 날라 가고 이것은 날라 가면 안돼요. 무엇인가? 언약궤. 요한계시록에 나오지요? 언약궤가 있어야 돼요. 성전의 언약궤. 그래서 잡곡강정에 도입되는 스가랴, 호세아, 아모스, 이 모든 것이 완성되면 다시 성전중심으로 재편성됩니다. 하박국을 봅시다. 1301페이지요.


왜 하박국을 보자고 했는가? 묵시라는 용어가 처음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박국의 내용이 남쪽 유다의 요시아, 여호야김왕의 시대입니다. 600년을 전후한 시대입니다. 하박국이 부르짖어요. “하나님이여, 이렇게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망시켜도 좋습니까? 이게 정당한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악인은 그렇다 쳐도 의인이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잘못된 처사잖아요.”라고 언급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방나라가, 바벨론이 쳐들어오니까. 그럴 때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니 주께서 응답을 합니다.


어떻게 응답을 하는가? “네가 생각하는 의인이라는 것이 연대기, 역사 속에서의 의인을 자꾸 언급하는데 내가 생산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속의 의인이 아니고 묵시속의 의인이다.” 하박국 2장 3절을 봅시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 역사의 마지막이 묵시거든요. 그래서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은 “제가 어떻게 처신하면 의인으로 인해서 마땅히 심판을 면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처신하게 되면 다가오는 심판에서 피할 수 있습니까? 제가 의인 맞잖아요. 그런데 악인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은 너무 억울합니다.”라고 하니까 주께서 하신 말씀이 “너는 역사적 차원에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다가오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묵시다. 묵시가 왔을 때 ‘나는 의인입니다.’ 하는 소리를 하지 말라. 의인은 역사적인 세계가 끝나고 난 뒤에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그 의인은 어떻게 행동을 하는가 하면, 이렇게 행동을 해요. 하박국 3장 17, 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하는 환상적인 안목을 가진 의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이것은 묵시의 주인, 주체가 만든 거예요. 본인이 용케 살아남은 것이 아니고. 하박국 입장에서는 멸망과 심판, 이것은 당연히 일어나야 될 일이에요.


그래야 최종적 관점인 묵시적 관점에서 의인과 죄인이 어떻게 구분되는가가 확연히 드러나는 겁니다. 어제 제가 달력으로 만든 그림 있었지요? 동그라미가 이렇게 있고 그 위쪽으로 살짝 닿은 듯 아닌 듯 붙어 있는 작은 동그라미가 있는데 이걸 탁 치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딸랑 하고 겹치듯이 내려왔지요. 그래서 전체 속에 섞이지 않는 환상적인 요소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쪽의 역사는 뭘 원합니까? 축복을 원하지요. 그런데 항상 반대거든요. 이쪽이 축복을 원할 때 여기는 저주아래 있는 거예요. 이쪽이 죄일 때 여기는 의가 되고, 이쪽이 현재가 되면 여기는 과거가 되고 이쪽이 현재가 되면 여기는 미래가 되고, 같이 있으면서도 섞이지 않는 것, 이것을 가지고 집합론에서 속한다고 하지 않고 포함된다고 하고 있어요. 포함된 것은 항상 이렇게 겹쳐 보여도 실상은 붕 떠서 있는 거예요. 부분집합의 전체는 전체집합보다 더 큰다는 이것이 모순이거든요. 이걸 전체에 담을 수 없도록 빠져나가요. 무화가 나무에 소출이 없다. 이게 저주잖아요. 외양간은 있는데 소가 없다. 이것도 저주잖아요. 포도농사도 안 되고. 충청도 지방은 포도나무 다 들어낸답니다. 농사도 안 되고 보상금이나 받으려고.


그런데 자기는 저주 안에서도 기쁘다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 의인인데 7, 훅 하고 내뱉는데 7이 내뱉은 의인이에요. 이런 의인이 요한계시록에 박혀 있으면 환란과 곤고와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당당히 이기리로다. 심지어 목 베인 영혼들, 목이 달아나도 그들은 ‘아, 주께서 이렇게 당했구나. 주께서 이렇게 했구나. 주님께서 한 그것을 그대로 나에게 주셔서 이 땅에서 12라는 야곱의 환란의 길을 가게 하시는구나.’라는 것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을 보는 게 얼마나 만만하고 즐거운지 몰라요. 이제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이게 묵시세계의 특이성이지요. 하박국이 잡곡강정속에 있다가 건드릴 때……, “너!” 하고 건드리거든요. 그러면 이번에 내가 하박국 차례에요. 하박국 차례가 되면서 레코드 가게를 열었는데 망해버리고, 치킨 집 하다가 망해버리고, 이번에 취직했는데 6개월 만에 쫓겨나오고, 뭘 해도 안 되는데 난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 한다는 이것이 의인이에요.


그런데 그 쫓겨난 것이 환상적 안목을 가질 수 있는, 7이라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는 순간순간이 되는 겁니다. 승인은 이미 났는데 이제 확인하는 것만이 남아 있거든요. 늘 인생을 살면서 확인하는 거예요. 제 이야기가 별로 기쁘지 않는 듯한데, 별로 즐겁지가 않다는 투인데, 그것을 두고 너무 고생하고 고난 받는다고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 과자가 하나 있거든요. 이 과자를 보고 맛있겠다고 여겨서 먹어보니 내 입맛이 문제인지 교만해서 그런지 맛이 없어요. 이게 환란입니다. 왜 내 뜻대로 안 해주는지, 이게 환란이에요.


예수님께서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어요. 목이 말랐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있어요. 열매를 보니까 아직 때가 안 되었어요. 때가 되었든 안 되었든 내가 필요한 열매를 못 내니까 저주해버렸습니다. 이게 무슨 횡포입니까? 굉장히 큰 횡포거든요. “정말 어이없어…….” 이게 유 아인이 하는 이야기거든요. 정말 어이없어요. ‘뭐가 이런 수가 다 있어?’ 제자들이 더 놀랐습니다. ‘이러다가 우리도 저주받는 것이 아닌가?’ 바로 천사가 탁, 터치한 거예요. 이번에는 에스겔? 에스겔은 너무 도가 심하다. 왜냐하면 아내가 죽어도 울지 않아야 되니까.


그러면 좀 쉬운 것 없나? 요나? 요나는 더 문제가 커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야 해. 어쨌든 간에 우리의 모든 기능은 잡곡강정속에 포함이 되어 있으니까 주께서 훅, 창조를 빨아 당겨서 7과 12의 안목……, 그러니까 창조 속에 7과 12라는 언약이 들어 있지요. 바깥에는 창조요 안에는 언약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언약을 함께 빨아들여서 훅, 하고 내 뱉어버리면 새롭게 나온 피조물 속에 12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12의 집단을 가지고 숫자로 표현하지요. 144,000. 14만 4천이라는 것은 12*12*1000, 야곱언약이 야곱언약대로만 확산이 되어서 그것이 언제까지, 1000까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요한계시록에서 구원받는 사람의 총 합이 14만 4천명인가? 아닙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면 더 많아요. 숫자로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요? 성경에서 최고의 숫자가 이만만(계 9:16)이지만 그것은 마귀에 관한 것이고 구원받은 사람의 최고 숫자가 창세기 24장에 나옵니다. 24장 60절, 이것은 잘 안 가르쳐주는 것인데. 거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우리나라 인구의 5분의 1입니다.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신천지는 왜 자꾸 14만 4천을 주장하는지 몰라. 여기 천만인이 있는데. 여기 천만인이 나오잖아요. 천만인 나오고 그 다음에 뭡니까?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1429년에 잔다르크가 영국군과의 오를레앙 전투에서 이겼다고 했지요. 이 리브가가 꼭 잔다르크 같아요. 시집을 가는 것인지 싸움을 하러 가는 것인지가 분간이 안돼요. 남편만나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러 가는데 왜 예언이 “네가 원수의 성문을 열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역사적 연대기로 보면 자기 몸만 챙기면 되지만 환상적 입장에서 보게 되면 네가 맺어야 될 모든 관계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환상의 주인공을 보여줄 기능인으로 미리 당겨서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언약이라는 거예요. 언약이 얼마나 이상한지 언약대로 하게 되면 언약에 의해서 거짓말 안한 야곱은 지옥가고 거짓말 하는 야곱은 천국 갑니다. 제 말 맞잖아요. 제가 지금 거짓말 하고 있습니까? 거짓말해야 할 때 거짓말하는 것을 가지고 믿음에 합한 행함이라고 해요. 기생 라합. 뭘 더 보태겠다고? 베드로에게 보자기가 내려왔지요. 보니까 못 먹는 것들이에요. 그 때 베드로가 욥바에 있다가 가이사랴 해변가로 올라갔는데 욥바에서 자꾸 잘난 체를 하는 거예요. 연대기적으로. 자기는 괜찮다고 보지요. “못 먹습니다. 나는 법을 지킵니다.”


아까 법 이야기했지요. 또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 속에는 자기 무서움과 공포를 떨쳐 버리기 위해서 무엇으로 무장한다? 선과 의로 자기무장을 하지요. “나는 착하니까 나쁜 기운아 떨어져 나가라.” 하지만 그 의는 새로운 것을 요청하지요. 왜? 내가 의냐 악이냐, 할 때 새로운 악이 요청되면서 새로운 악을 저지를 열망이 생깁니다. 악이 있어야 그 대척점으로 자신이 의를 아니까. 그리고 그 악마저 정복할 때 비로소 의가 된다는 자기욕구의 만족을 성취하게 되는데 악을 언제 다 정복합니까? 정복 못합니다.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못 먹습니다. 지금까지 이정도 되는 것도 얼마나 애썼는데 이제 와서 그동안 쌓은 나의 의를 버리면 안 됩니다.” 하는데 “내가 먹으라고 한 것은 먹어.” 하고 먹기도 전에 휙 가버렸어요. 그랬는데 고넬료의 부하들이 와서 “천사가 와서 어르신네 모시라고 했답니다.” 이게 뭐냐 하면, 환상적인 모든 요소가 우리에게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우리 머리위에 하늘의 해, 달, 별, 온갖 무게 있는 환상적인 요인들을 걸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런 입장에서 내 주체를 보지를 못하고 기껏 세상에서 바라보는 것들만 추려서 나라고 여기는 겁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에 교인들이 베드로를 구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했어요. 기도를 했는데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입니까? 천사가 문을 열어줘서 감옥에서 나왔어요. 그래서 기껏 왔는데 왜 왔냐는 식인 거예요. 놀라서 어떻게 나왔냐고 묻는 겁니다. 이게 뭐예요? 그러면 기도를 왜 했어요? 설마 그렇게 될 줄을 몰랐지요. 그러면 기도는 뭐냐? 답답해서 한 번 해보는 거지요. 그 상황이, 그 미장센(Mise-en-Scène)이 참 좋은 거예요. 왜냐? 모든 인간의 움직임은 안한 것이 아니고 방해했다는 거예요. 주의 일을 늘 방해하는 식으로 해도 주님께서는 묻거나 따지지 않는 배려를 해주시는 거예요. “너한테 아예 기대한 적이 없으니까 네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내가 그것에 대해서 탓하지 않겠다.” 하는 거예요.


이정도 이겼으면 보통 이긴 것이 아니잖아요. 어떤 짓을 해도 이미 용납된 채 행동에 나서라는 것, “용납 되었기에 어떤 행동을 해라. 그 행동마저 용납되었음을 추후 적으로 네가 그것을 확인하라.” 진리라는 주님의 환상의 능력을 받은 사람에게 주는 공통적인 속성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와 성도끼리는 어떤 교류가 없고 어떤 자리에서나 선지자 같은 역할을 하는데 그 대표자가 누구냐? 투톱, 두 증인이 나와요. 요한계시록 11장에 두 증인이 나옵니다.


이 두 증인이 아주 희한한 사람이에요. 도미네이션게임이라는 것이 있어요. ‘domination’이라는 것은 ‘지배’ 그런 뜻이 있는데, 말 그대로 지배하는 게임이지요. 007 영화에 보면 그런 게임하는 대목이 나와요. 전 세계를 두고 악당하고 게임하는데 먼저 선점한 나라는 전기가 흐르면서 상대가 못 점령하지요. 또 예전에 DDR이라는 게 있었지요. 불 들어오는 순서대로 밟아서 춤추는 발판. 뒤늦게 그거 설치한 사람들 망했습니다. 두 증인이 가는 곳마다 그 지명이 성경적 용어로 바뀌어요.


애굽이 되었다가 십자가 못 박힌 골고다 언덕이 되었다가. 이 말이 뭐냐? 이제 이 세상의 지명은 환상에 의해서 유동적이 되는 겁니다. 성도가 가는 곳이 성지순례에요. 성지에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머무는 곳이 성지순례가 되는 겁니다. 그것은 본인이 뭘 했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소속된 환상적인 영역이 이미 지상에 있는 자연세계를 몽땅 다 도미네이션,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증인으로서 가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그들이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게임이 끝난, 전쟁이 파해진, 전쟁이 끝나서 휴지가 된 그곳에서 전리품 챙기듯이 ‘아, 이것도 주께서 승리하셨고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이것도……’ 하면서 그것을 밟는 겁니다.


“목사님, 그런 것이면 저도 그거 하겠습니다. 이미 다 폐허가 된 상태에서 밟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은 할 수 있을 것같이 보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밟는데 거기에 괴물들이 있어가지고 체포해서 죽이는데요?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에 텅텅 다 비워놓은 상태에서 그야말로 무주공산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께서 들어가게 할 때는 그야말로 장대한 군사들이 버티고 있고 굳건한 여리고성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두고 뭐라고 하는가? “내가 이미 다 처리했으니까 너희는 들어가기만 하라.”라고 하니까 그들은 연대기적인 과거에 둘러쳐져 있으니까 과거의 인상들이 남아 있어가지고 겁을 내고 거기에 못 들어갔어요. 그런 환상적인 주님의 뜻을 모르니까 못 들어가고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갔잖아요. 교재에서 하나만 설명하고 이번시간 마치겠습니다. 교재 1페이지에 보면, 【흔히 ‘고향’이라고 여기는 것도 사적 기억을 걷어내면 그냥 물질더미다. 산등성이의 화강암 또는 흙과 살랑살랑 부는 바람, 그리고 건조한 들풀과 흩어진 채 누워있는 빛깔들이다. 우리의 몽상은 그 물질 하나하나에 소중한 추억을 붓질 한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게 뭐냐? 사람이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는 고향을 잊지 못해요. 주께서 훅, 빨아들였는데 그 빨아들인 것이 싫어요. 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해요. 연대기니까.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1989년 이 용복이라는 맹인가수가 불렀던 ‘어린 시절’이라는 노래거든요. 번안가요, 기타 치면서. 거기에 보면 돌아갈 수는 없지만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돌아갈 수가 없어요. 다 개발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가 봐도 예전의 그곳이 아니에요. 그래서 돌아갈 수는 없는데 잊지도 못해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의 발목을 잡는 겁니다. ‘나는 천국이 싫어. 어릴 때 내 고향이 좋아. 고향에 있던 그 수미가 좋아.’ 만나보면 이미 다 늙어가지고 “누구세요?” 이렇게 나올 건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희미한 등불 밑에서 보면 너무 늙었어. “혹시 옥경이?” 세월 지나면 어떤 가게도 다 부도나요. 우리 동네 가게 절반이 3년 안에 다 문 닫았습니다. 뭘 해도 안돼요. 무슨 고향이 있어요. 어릴 적 고향에 가 보면 그 때 살던 아저씨는 보상금 받고 다 서울로 이사 가버렸어요. 그 돈 가지고는 서울도 못 갔지요. 경기도 근처. 분당도 비싸서 못가고 그 밑에 어디. 무슨 고향입니까? 가지도 못할 고향이 그래도 기억에는 남아 있어요.


50년 믿었다고요? 70년 교회 다녔다고요? 남는 것은 진달래 먹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 그것뿐입니다. 이거 주께서 훅, 빨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식사합시다.
 관리자(IP:175.♡.141.195) 16-01-17 12:47 
2016겨울수련회 제 5강 : 전쟁의 무기


첫째시간부터 한 것을 정리해드리겠습니다. 연대기 속에서 주체가 확립되기 때문에 그 주체는 연대기를 못 벗어납니다. 제가 첫 시간에 연대기를 죽 나열했는데 사실은 연대기를 더 자세히 하고 싶었어요. 장미전쟁 같으면 왜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명예혁명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나도 그랬을 것이다.’라고 충분히 동의해야 합니다. 1206년에 테무친이 등장했고 1271년에 원나라가 생겼다. 나도 그들과 함께 있었으면 그랬을 것이다. 왜? 그 사람이나 우리나 동일한 장소에서 주체가 형성되기 때문에.


하지만 역사시간이 아니기에 연대기를 죽 훑어내려 오면서 주체는 그렇게 형성된다는 것을 말했고 그렇게 주체가 형성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형성된 주체는 그 연대기에서 두 번 다시 못 벗어난다는 거예요. 그러면 안 벗어나면 되지?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못 벗어나게 되면 환상을 배격하게 돼요. 왜? 돈이 안 되니까. 요한계시록 연구해서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일곱 교회 지시하는 주님의 이야기하고 교회에 주어지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만약에 그 주님이 안계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다면 교회는 폐허가 되는 거지요. 계시든 안계시든 폐허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걱정하는가? 이미 주체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요. 환상을 배격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환상을 배격한 흔적이 십자가로 되지요. 이 역사와 역사 밖의 환상의 교집합은 십자가사건입니다. 십자가사건과 부활이라는 것이 이 역사 가운데서 실제로 있었다는 말이지요. 실제로 있었는데 이 주체가 역사 밖으로 못 벗어나잖아요.


십자가사건이 일어나니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십자가 그것마저 내가 믿어서 나의 역사가 이 환상까지 포괄하게 되면 이것은 뭐가 되는가 하면, 이 전체가 역사가 되어버려요. 십자가 알았으니까 이제 예수 부활의 새 생명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그걸 기대하면서.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체가 그런 행동밖에는 할 줄을 몰라요. “목사님, 알려주세요.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밝혀주시면 다 흡수해서 새로운 정보로서 더 단단하고 확실한 신자로 거듭나겠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했던 자들이 바로 유대인이었고 바로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연대기에서 나온 주체, 주체라고 하면 어려우니 예를 들겠습니다. 안중근이 이토오 히로부미를 암살할 때, 또 김구가 상해에서 고생할 때, 독립군이 힘들게 독립운동을 할 때 우리가 그들 입장이라면 우리는 예수님 편을 드는 것이 아니고 그들에게 후원금 보내고 그들과 동조하는 거예요. “잘한다. 그래야 우리 민족이 살지.” 민족이 뭔데요? 국가가 뭐지요? 그게 왜 필요하지요?


놀라운 것은 요한계시록에서 그 국가와 민족을 짐승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감각이 떨어지는 이유가 이미 연대기에서 주체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성경에서 뭐라고 하면 그것을 흡수할 태세가 되어있고 그렇게 해서라도 나의 구원을 더 확실하게 다지려는 의사밖에 없어요. 그것으로 인하여 십자가사건이 터졌다면 방법은 뭐냐? 역사에서, 연대기에서 만들어진 그 주체를 예수님께서 원하는 환상 속에서 새로운 주체로 만드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 그것은 ‘찐빵 쪼개기’를 통해서 한다고 했습니다. 찐빵 쪼개기를 통해서 자기주체를 자기 식으로 구원하겠다는 의사가 전혀 없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 주체 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문서들이 요엘부터 계속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문서가 나왔다는 것은 사람들이 알아먹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이 세상은 작살나야 된다는 이야기지요. 예수님께서 창조를 다 빨아들입니다. 주님이 영존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손수 만든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불태워버려야 되니까. 그렇게 빨아들여서 그것을 다시 주님의 ‘다 이루었다.’에 근거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뱉어내는 겁니다. 뱉어낼 때 예수님에 의해 완성된 완성품의 복사 품으로, 복제품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탄생하는데 그걸 가지고 인치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의 완성된 것이 들어있는 것, 거기까지는 이해되시겠지요?


그렇게 이해된다면 애초부터 자기구원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자기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성도들의 할 일은 뭐냐? 이걸 가지고 잡곡강정이라고 이야기했지요? 얼음땡 게임. 가만있는데 천사가 와서 톡, 하고 건드리면 어떤 때는 호세아, 어떤 때는 요나, 어떤 때는 하박국, 스바냐,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정리했다 치고, 나 혼자 정리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정리했다 치고 그 다음에 뭐냐? “나는 구원받습니까? 나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그런 문제는 요한계시록에서 성립되지 않습니다.


유리알속의 세계이기 때문에 돌려보면서 그 재미, 이렇게 보고 또 저렇게 보고, 그렇게 돌려서 보는 재미가 있어요.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러면 요한계시록의 성도들이 하는 일이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문제가 아니고 “내가 어떤 존재입니까? 진짜 믿는 자가 맞습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고 “주님과 마귀가 싸울 때 어떤 무기들이 동원되고 어떤 전쟁이 수행됩니까?”라는 것을 이제 성도들은 내놓게 됩니다.


어떤 무기들로 싸우느냐는 말이지요. 이미 전쟁은 끝났는데 전쟁할 때 어떤 무기들이 있었는가? 도대체 짐승들은 어떤 무기들을 내놓았고 거기에 대처한 주님은 어떤 무기, 선지자는 어떤 무기를 내놓고 전쟁을 치렀는가, 그 문제입니다. 자기구원문제는 관계없어요. 왜? 이미 우리의 주체는 주님이 몽땅 가져갔고 우리는 주님에 소속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입장이기 때문에 자기 구원에 대해서 신경 쓴다는 것은 연대기적 주체를 그냥 고집하는 것밖에는 안돼요.


그러면 무기가 뭐냐?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요한계시록 수련회의 제일 중요한 대목에 와 있어요. 그 무기가 뭐냐? 이 세상 누가 행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행함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누가 행했느냐? 사람들이 행했느냐? 아니면 사람외의 어떤 분이 행해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로마서의 믿음과 행함의 문제와 마찬가지에요. 누구의 행함의 결과로 이런 세계가 형성되었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누구의 행함의 결과로.


“저 어떻게 구원받아요? 저 신자 맞아요?” 그런 문제를 다루게 되면 그것은 유대인처럼 되어버려요.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이야기 중에서 유대인을 가지고 ‘사단의 회’라고 했어요. 그러면 누가 행했느냐, 에 대해서 누가 할 말이 많으냐하면, 선지자보다 선지자를 반격하는 그쪽 패들, 짐승의 패들이 할 말이 더 많아요. 굉장히 불평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짐승들이라고 제가 말은 했지만 짐승들이라 하는 것은 선지자들이 이야기한 거거든요.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하게 되면, 70년 만에 다시 돌아온다고 해놓고는 막상 못 돌아와요. 70년에 70이레, 70+이레라는 묵시개념이 첨가가 되었어요.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연대기성은 여기서 깨집니다. 70이레는 연대, 시간이 아니고 뭐냐? 이것은 사건의 조합이에요. 사건의 조합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 시간 밖에서 일어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사건이 터지게 되면 시간과 함께 그 모든 것이 응고가 되고 동결이 돼요.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 아무리 세월이 오래가도 한때 두 때 반 때입니다. 시간 자체가 응고가 되어버린다는 거지요. 스톱이 되어버려요. 그것은 시간을 스톱을 시키는 그 양쪽에 사건이 작대기처럼 경계를 쳐서 그렇습니다. 사건이 딱 경계선을 쳐서 그래요.


한때 두 때 반 때, 한 동안, 두 동안, 이렇게 하는 것은 말이 안돼요. 한동안, 또 한동안, 그 다음에 더욱더 말이 안 되는 것이 반 동안. 수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서를 정하는 거예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런 식으로요. 또 하나의 기능은 양을 나타냅니다. 한 무더기, 두 무더기, 세 무더기……, 양입니다. 그런데 한 때 두 때 반 때는 양을 가지고 순서를 표현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한 때 두 때 반 때가 인간들의 주체 입장에서는 해명이 안돼요.


양은 양으로 하고 순서는 순서로 해야 되잖아요. 1992년 10월 18일, 이렇게 하면 이것은 시간이 양이에요. 그 때 우리나라에서 흰 옷이 많이 팔렸습니다. 흰옷 입고 간다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세요. 그게 흰옷인지. 때가 묻었지요. 왜 사람들이 이 장림에 빠졌는가 하면 연대기적 주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내 쪽에서 뭔가를 행사하지 않으면 나의 구원은 실패로 끝났다는 겁니다. 구원론 중심이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볼 때에 “천년왕국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하는데 성경에 천년왕국이라는 것이 없어요. “요한계시록 20장에 천년동안 왕 노릇 하리라.” 그 뒤에 뭐가 있습니까? 또 “바벨론 멸망 뒤에 뭐가 있습니까?” 그거 알아서 뭐하는데? 그거 왜 알아야 되는데요? 그런 일들을 주께서 하시는데 주께서 하시는 그 일이 절대로 인간들한테는 눈에 띄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이 새로 받는 책 <사시기 속의 그리스도> 121페이지에 보게 되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수수께끼의 특징은 정답으로 인하여 수수께끼의 비밀이 더욱 잠겨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수수께끼를 제시한 지점보다 정답이라고 내민 지점에서 수수께끼의 비밀이 더욱 더 확고하게 봉인되어 버립니다.”


정답을 줬는데 더 몰라. 그게 정답이에요. 정답을 줬는데 더 몰라요. 정답이 뭐냐 하면, 네가 하는 행동, 인간들이 하는 행동에 인간들이 모르는 다른 배후존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 거기에 대해서 이 선지자에게 또는 오늘날 성도에게 비난을 가합니다. 이 세상에 인간 말고 누가 있느냐는 거예요. 결국 싸움은 그거예요.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인간의 손에서 역사는 이루어지고 진화한다.” 이게 인간의 주장이고 선지자는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망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마귀와 예수님의 싸움이 아니에요. 마귀와 예수님의 싸움이 아니고 인간 대 주님의 증인이라고 여기는 인간들끼리의 싸움이에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을 때에, 예수님이 기도할 그 때에 주변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탄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 때부터 사탄은 사라졌어요.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수종 들고 그 다음부터 예수님은 사람 만납니다. 사람 만났을 때 바리새인 나타났거든요.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바리새인들이 할 말이 많아요. “너는 우리와 같은 연대에 속한 같은 인간인데 무슨 큰소리를 그렇게 치느냐? 너는 누구야?” 이런 식으로 대들었지요. 그걸 봐서 예수님의 싸움은 인간들 앞에서 등장했지만 인간들 주체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버린 그 배후세력과의 싸움에 나선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로 하여금 어떻게 하게 했는가? 배후세력이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봉인돼야 돼요. 이 비밀이 열리면 안돼요. 비밀을 열어서 알려주면 되지 않겠느냐.


예수님께서 아주 친절하게, 강남의 학원 강사처럼 아주 재미있게 “당신 뒤에 악마가 있어서 이런 행동을 합니다.” 이렇게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를 해주게 되면 이것은 이미 정답이 확정된 상태의 가치가 손상이 가요. 이미 예수님께서 유대인에게 버림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전민족의 대표입니다. 그러면 이야기는 끝난 상태에요. 세상은 이미 파장인데, 장사는 끝났는데 이제 와서 새삼 누구를 구원한다는 것은, 어떤 개인을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은 사람을 구원하지 않아요. 왜? 더 이상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유대인을 통해서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구원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텅텅 비겠네요? 엘리야나 모세는 변화 산에서 주님과 함께 왜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생산된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을 뭐라고 하는가? <사사기속의 그리스도> 새 책 나왔다고 해서 죽 읽어보니 오자가 딱 한 개가 나왔어요. ‘습자지’라는 단어를 ‘습자기’(202)라고 한 그 한 글자 틀렸어요.


170페이지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기드온 군대 수가 32,000 모았다가 300명 제와하고 다 빼버렸습니다. 그 빼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300명은 바로 ‘처음부터 이 숫자가 아니고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빼시고 남은 숫자’라는 점을 증거 하기 위해 이들은 집에 돌아가서는 아니 되고 끝까지 전쟁에 참여해야 합니다.” 다시 되풀이 할까요? 처음부터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뺐다는 거예요. 따라서 그들은 집에 가지 말고 끝까지 남아서 전쟁에 참여해야 되는 겁니다. 이 전쟁은 누구 전쟁이어야 하는가? 300명의 전쟁이 되면 안돼요. 누구전쟁? 주님의 전쟁이어야 됩니다.


따라서 주님이 아니면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그 300명이 꼭 필요했던 거예요. 그들은 자신들의 전쟁이 결코 아님을, 그리고 전쟁하기 전에 이미 남은자로서, 승리자로서 이미 주님에 의해서 손 탔다는 것, 주께서 저쪽치기 전에 우리 쪽부터 남은자로 만들어서 그 애들이나 너나 똑같은데 은혜로 너를 남게 했다는 그것을 전쟁 통에 나서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전쟁에 군사로 나서는 것, 이게 무기에요. 우리는 은혜로 남았지 행함으로 남은 것이 아니라는 이것이 무기가 돼요.


이게 로마서 9장입니다. 엘리야가 오해했지요. 몇 명 남았나 보니 나만 남았어요. 나만 남은 것이 아닌데? 7천명이 남아 있다. 7자가 또 나와요. 7자, 7천명이 남아 있다. 모든 구원의 일은 주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왜냐?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그 취지가 남아 있어야 돼요. 추방당할 때 이미 추방시켰으면 “저는 추방되어야 마땅합니다.”를 유지를 시켜줘야 됩니다. 그런데 “선악과 또 심으면 되지 그거 좀 따먹었다고 참 쫀쫀하기는. 그까짓 선악과 또 심으면 되지.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사람이 신인가? 하늘나라 식목일 만들어서 선악과도 심고. 그것 따먹었다고 삐져서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그것도 내보내면 그냥 내 보내면 될 일을 두 번 다시 오지 말라고 칼 들고 두루 도는 천사들을 경비용역으로 불러서 지키시니 그게 뭐가 그렇게 화 날 일이라고 그렇게까지 하는가?” 하지요.


그렇게 보면 하나님도 책임이 있네. 그 위험한 나무를 심기는 왜 심어놓았는가 말이에요. 심어놓으려면 저 변두리 안 보이는 곳에 심어놓아야지 동산 한가운데 심어놓고 그것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고, 이것은 백화점 쇼윈도에 원피스 걸어놓고 사지 말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사지 마세요.” 이것은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불교신자 중에 그것에 삐져서 예수 안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운명이나 팔자나 자기의 모든 것에 대해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네가 아는 순간 독립하기 때문에 알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바보 등신이 돼야 돼요. 올해가 병신의 해거든요. 절대로 알아서는 안돼요. 그저 주는 대로 먹고, 실패해놓고 “그저 무익한 종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얼마나 낮아져야 그렇게 됩니까? 돌멩이로 쳐도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이거 뭐예요? 사람이 자기 주체가 살아 있으면요, 방금 이야기한 요한계시록 이야기, 사사기 이야기, 아무리 해도 그것마저 자기주체가 믿음이 있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포섭해버려요. 인간의 주체가 살아 있으면. 그중에 대표적으로 유명한 노래가 있어요. ‘마법의 성’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시작부터 굉장히 신앙처럼 보여요. “♬믿을 수 있나요” 초장에 믿음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 가사를 보니까 마법에 빠진 공주가 나와요. 믿음과 마법에 빠진 공주, 벌써 좀 수상하지요. 마법에 빠진 하녀가 아니고 마법에 빠진 공주라는 겁니다.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찾아가는 거지요. 가서 마법에 빠진 공주를 구원합니다. 용기 주소서, 하면서. 가사에 보면 기도를 해요. 빡세게 기도합니다. 손을 내밀어 구원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둘이 하늘을 납니다. 서프라이즈! 놀라워라! 주체가 현실에 불만이 있을 때 뭔가 미흡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자기 주체를 건드리지 않고 거기에 플러스(+)를 해요.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 +(플러스) 비가시적세계까지 포함하게 되면 이 세상이나 내세나 완벽한 구원에 대해서 드디어 단단하게 자물쇠를 걸은 것이 되지요. ‘이제 재림하기만 해라. 나도 합격이다.’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지어냈던 묵시문학이라는 겁니다. 고난 받고 학대받는 민족의 서러움을, 한을 묵시문학으로 펴내서 자기민족끼리, 억울한 한 맺힌 민족끼리 결속을 다지는 겁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정감록처럼. 차라리 굿을 하는 것이 솔직하지요. “도를 아십니까?” 이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집안이 잘 안 풀리지요? 천도 제 드리시면 복 받습니다.” 그 천도 제나 성당의 미사나 교회의 예배나 차이점이 뭐예요? “예배 참석했습니까? 복 받으실 겁니다.” 차이점이 뭐예요? 똑같잖아요. “당신의 주체를 단단히 하소서.” 그거잖아요.


주께서 300명을 남겼는데 은혜로 남은 자가 구원 받는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남을 때 어떻게 남기는가? 전쟁을 통해서 남깁니다. 그래서 전쟁은 필수적이에요. 필연적이에요. 무슨 전쟁? 아까 이야기했는데 또 잊어버렸지요? 무슨 전쟁입니까?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상황이 내가 기도해서 얻어진 결과물이냐 주님이 개입해서 전쟁하기 위해 주어진 상황이냐, 그 싸움입니다. 피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남은 자, 은혜로 남은 자를 인식할 때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 주체가 고대하고 기대하는 드림, 꿈은 날라 가버립니다.


그런데 성도가 아닌, 주께서 은혜로 남겨서 남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 주어진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면서 그 은혜를 가지고 은밀하게, 내밀하게 자기가 원했던 것을 노릴 수 있는 정당한 근거로 활용하고자 시도하게 됩니다. 내가 기대했던 바를 내 힘으로 안 되었는데 주께서 은혜 주셨으니 이참에 주신 힘 가지고 본격적으로 내가 원래 원했던 내 뜻을 한 번 이루어 보겠다는 거예요. 거기서 나오는 노래가 김 종환의 ‘존재의 이유’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알 수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 더 힘들게 하지만,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 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아르바이트하다가 정식직원이 못된 모양이지요. 사귀는 여자는 “언제 직장 제대로 잡고 언제 결혼할건데?” 할 때 “조금만 기다려.” 막 혼자 우는 거예요. 사진 손에 쥐고 우는 거예요. 오늘도 힘든 알바에 지쳐 퍼져서 애인 사진 쳐다보고 울면서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달려갈 테니. 헤어졌던 그 만큼 너를 사랑해줄게. 왜? 그게 나의 존재의 이유니까.” 하이고, 꼴랑 존재, 참 거창하다. 남자가 태어나면 울어야 할 세 번의 이유가 있답니다. 초등학생이 그런 이야기 했다는데 태어날 때 울고, 죽을 때 울고, 게임 질 때 울고. 왜냐하면 그 애들은 국가, 짐승 개념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자기존재의 이유에서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권력이라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내부에서 내가 기대하는 이미지에 대해서 내가 고스란히 자진해서 자발적 복종을 한다고요. 권력은 나에게서 나와서 그 나온 권력에 스스로 복종하는 거예요. 왜? 자기가 자기한테 경배하고 자기가 곧 절대적인 신이기 때문에. 그런데 그 민족이 나를 배신한다? 그러면 난민이 되어서 독일로 가면 되지요. 조국이 배신하면 나가서 살아야지요. 미국에 가든지, 독일로 가든지, 프랑스로 가든지. 독일 쾰른 성당 앞에서 까불든지.


인간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까지 어떻게 주께서 관리하는가? 새로운 전쟁을 자꾸 유발시킵니다. 그러면 전쟁을 어떻게 유발시키는가? 주께서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들이 행동할 때 절대로 그 인간 배후는 없습니다. 내가 결정하면 그게 결정이고 내가 안하면 결정 안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배후에 뭐가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같은 경우에 자기가 왕입니다. 최고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에서는 느부갓네살을 유일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일으키지요. 바벨론 왕이 꿈을 꾸었는데 무슨 꿈을 꾸었는지를 몰라요. 우리는 보통 꿈꾸고서 무슨 내용인지 모를 때 그냥 잊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그 꿈의 내용이 뭔지가 자꾸 켕기는 거예요. 그 꿈이 어떤 꿈인지를 모르고서는 더 이상 사는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없음을 통해서 있음을 흔들어 버립니다. 문제가 주어지면 해결하면 되는데 더 큰 난제는 문제가 뭔지를 모르겠어요.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어요.


특히 결혼한 사람들은 잘 알거예요. “여보, 왜? 요즘 우리가 서먹한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다. 당신은 아나?” “나도 몰라.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천사가 보고 “참, 호사스러워가지고는. 아프리카 한 번 갔다 와야 돼. 밥도 못 먹는 지경이 돼 봐야 돼. 밥 많이 먹고 기름 값도 내려가니 배 탁탁 튕기면서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것은 잘 살고 못 살고가 문제가 아니고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문제를 주면 풀면 되잖아요. 문제를 주면 잘 푸는 학생은 진짜 공부 잘하는 학생이 아니에요. 없는 문제를 만들어 내는 애가 진짜 공부 잘하는 학생이에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얼마나 공부가 쉬웠으면 자기가 문제를 막 만들어내겠어요? 그런 것을 크리에이티브, 창조적이라고 해서 추앙들을 하지요.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뭐가 문제인지를 모름으로 말미암아, 어떤 문제가 있는데 단,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은 답으로 존재하는데 문제를 모르니 연결고리가 끊어진 거예요. 이게 주님의 흔들기에요. 그 사람들은 마르둑 신을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뭐냐? 역사에 함몰된 환상을 부릅니다. 그게 무당들이에요. 그들은 신에 관한 전문가거든요. 역사에 함몰된, 권력에 복종하는 종교인들을 불러요.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걸 가지고 적그리스도, 가짜 선지자들이라고 해요. 월급 줬으니까 그들을 죽 불러 모습니다.


“지금 내가 이런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이 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꿈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나에게 해답을 제시하라.” 이렇게 요구합니다. 누가 알아요?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다니엘도 몰라요. 이것은 누가 죽을 판이냐 하면, 느부갓네살은 물론이고 거기에 있는 엉터리 박수무당도 물론이만 다니엘도 난처하게 되었네요. 왜냐하면 다니엘이 계시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요셉이 꿈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닙니다. 꿈을 피동적으로 꾸는 사람이지 꿈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요한계시록에서 사도요한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지 계시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성도란 아슬아슬한 사람이다. 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자기가 성도행세 할 수 있는 꺼리는 완전히 무장해제를 당한 사람이 바로 성도입니다. 코미디언에게 “날 웃겨봐, 웃겨봐.” 하게 되면 코미디언은 화가 난다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성도한테 “네가 믿는 것을 한 번 표현해봐.” 이것은 성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 성도들에게나 해당되는 거예요. 간증 많이 하는 그런 사람들이 잘해요.


그런데 진짜 성도는 어제의 믿음이 오늘은 틀려버렸어요. 없어. 자기가 자기를 성도라 할 수 있는 어떤 기제, 어떤 메커니즘이 없어요. 그냥 매일매일 맡긴 채 살아가는 겁니다. 다니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무기가 없어요. 전쟁을 해야 되는데 무기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신은 주님이 친히 무기가 된 그 결과물로 남은 자, 300명, 은혜로 남은자기 때문에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기껏 이 소리밖에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성도된 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닌데요.” “에이, 얼마나 기도했으면 성도가 되었어요? 돈 얼마 주고 성령 받았어요? 나무뿌리 몇 개 뽑고 성령 받았어요?” “저는 나무는 뽑은 적도 없고, 그저 뽑은 거라고는 새치만 뽑았고, 남 기도할 때 나는 잤고, 어쩔 수 없었고, 할 줄도 모르고, 주님 영광 돌릴 줄도 모르고, 찬송하면 음정도 다 틀리고, 3절 부르고 4절 넘어갈 때면 지루하고, ‘찬송가는 왜 이렇게 긴 건지.’ 했고, 장로님이 기도할 때는 잤고, 목사님이 축도할 때에야 깼고 열두시에 예식 있어서 제일 먼저 나왔습니다.” 그런데 성도되었어요. 남은 자입니다. 왜? 그 사람의 고백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내가 행한 것이 없고, 어떤 의미 있는 일을 나에게 가하지 않았고……, 성도입니다.


왜? 은혜로 남은 자 계열이기에 때문에. 다니엘도 마찬가지에요. 다니엘 이야기하다 보니 이 생각이 나네요. 아까 어떤 분이 우리교회게시판에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이 병에 성도의 눈물을 담으면 하나님께 응답받는다고 했습니다. 엄마의 눈물을 많이 병에 담으면 그 자식의 눈물의 기도 덕에 자식이 복을 받는다.” 했는데 이게 뭐가 문제입니까? 성도의 눈물을 바로 내 속에 그런 욕심이 있다는 것 때문에 흘린 주님의 눈물입니다. 답을 달아주려고 하니 스마트폰에서는 들어가지지를 않아서 아직 못쓰고 있어요. 내일 가서 써줘야 돼요.


다니엘은 큰일 났습니다. 그러나 다니엘로서는 큰일 났지만 안심했지요.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항상 일은 주님이 저질러 놓고 자신은 대책 없는 사람으로 내 몰렸고 그 현장에 주께서 아슬아슬한 순간에 응답 주셔서……사실은 아슬아슬한 순간도 아니에요. 자기는 ‘이제야 내 인생 여기서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죽으면 죽으리라.’ 했는데 그제야 주님께서 얄밉게 해답을 주시네. 애간장 다 뜯어놓고 주시는 거예요. 주님이 느부갓네살왕에게 “왕이시여, 이런 꿈이 맞지요? 금신상이……, 이런 꿈 맞지요?” 들어보니 기억이 나거든요. “맞다. 너 빼놓고는 다 죽어야 된다.” “죽이지 마소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랬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당신 속에 품은 하나님의 약속이 당신을 삼켰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당신에게 삼켜져버린 나라의 여호와 하나님이 당신을 그렇게 다루었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보호용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지켜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게 바로 전쟁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에서 오늘날 우리 입장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이후에 또 여러 가지 계시가 오잖아요. 그러면 그 계시의 방식은 어떻게 되는가? 방금 우리가 공식을 받았습니다. 어떤 인간을 흔들어버리는 겁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불안하고 걱정스럽고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지요. 거기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봉인을 열었다. 두루마리가 이렇게 있다면 여기에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봉인되어 있어요. 카스텔라처럼 되어 있어서 한 꺼풀 떼면 또 봉인되어 있고 또 한 꺼풀 벗기면 봉인되어 있고,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의 하나를 열었어요.


하나를 열 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다윗의 자손이 이걸 개봉을 해요. 다윗의 자손이 개봉을 한다는 말은 다윗의 자손이 예수님이거든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서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인간과 자기라는 인간과의 만남으로나 여겼는데 예수님께서 신화적인, 환상적인 요소를 발휘하는 가운데 이 땅을 빠져나가면서 인간들 배후의 어떤 점이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도록 해서 “인간은 오직 행함입니다. 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라는 객소리가 나오게 되었는가의 그 배후를 살피는 내용물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 내용물은 어떻게 나오는가? 이쪽에는 그냥 자연세계를 심판하지만 심판을 통해서 알려진 그 내용물은 막간이라는 것을 통해서 저쪽 한구석에 분류해서 따로 적체를 해놓아요. 따로 모아놓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구조가 그걸로 끝났습니다. 그 복잡한 요한계시록, 한 글자 한 글자 따져가면서 “목사님,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무슨 사건입니까? 아마겟돈? 이것은 무슨 사건입니까? 이것은 시편 83편에 나오는 연합군전쟁, 그 전쟁을 말합니까? 이란이 미사일을 쏘면 이스라엘도 받아치고 걸프전이 일어나고, 그런 것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없어요. 이스라엘이 없는데 무슨 이스라엘전쟁이 나요? 전 천년으로 해서 휴거되고 나머지는 고생시켜서 “잘못했습니다.” 회개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합세해서 올라가고……, 참 사기 치는 밑천도 여러 가지 동원되는데 그것이 세계정치사와 전혀 맞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내 인생은 내가 지켜야 돼. 내 주체는 내가 지켜야 돼.’ 이런 쪽으로 자꾸 가는 거예요. 그런 것을 듣고 난 뒤에 요한계시록을 강의를 한다고 하니 ‘목사님은 저런 것들을 어떻게 풀까?’ 왜 푸는데요? 주님이 풀어놓은 것을 우리가 왜 푸는데?


주님이 풀 때 이 모든 개념은 환상으로 풀어요. 그러면 우리 쪽에서는 우리 언어 가지고는 풀이가 안 됩니다. 안되면 안하면 되지 뭘 그리 걱정이에요? 말해놓고 진짜 기분 좋다. 이 모든 이야기가 환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하고 이번 시간 쉬어봅시다. 교재를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걱정스러워 보이는 그것이 제가 못마땅하다는 거예요. 걱정 안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봐야 하는데 걱정스러움으로 보니까 제가 굉장히 답답한 거예요. 대체 누가 사기를 쳐서 그 걱정을 만들었느냐 그 말입니다.


교재 3페이지에 “없는 장소에 대한 묘사”라고 하지요. 있지도 않은데 묘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언어라 하는 것은 일대일 대응이 되어야 하는데, 어떤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 장소를 묘사한다? 그 말은 없는 것을 묘사하는 그것이 없는 것을 있게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여전히 없구먼.”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 없습니까? 언어가 통하는 우리 세계는 있기 때문에. 그런데 있는 세계가 일곱인 뗄 때 4분지 1일이 없어지고 다시 3분지 1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그대로 있어요. 그대로 있는데 주께서 심판을 그렇게 지금 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리 봐도 대전바닥, 이 한밭바닥에서 심판이 안보이잖아요. 산성비? 산성비 그것도 재앙입니까? 우산 쓰면 그만인데. 강물이 오염되었다? 그건 정화시설을 가동하면 됩니다. 강물오염 같은 그런 것은 따지고 해가 3분의 1일이 없어지는 그것은 왜 안 따집니까? 도대체 반칙을 범해도 그런 반칙을. 같은 요한계시록의 벌을 내리는데 별이 3분의 1이 떨어진다는 그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고 강물 오염, 메르스 퍼지는 그 것, 메르스는 위생시설만 잘해서 대처하면 돼요. 인류역사 지금까지 끄떡없어요.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어도 끄떡없어요. 2012년에 멸망한다고? 벌써 지났는데요? “물로써 심판받듯이 불로써 심판받는다.”라는 이야기, 인간들 세계에서 그것을 뭐라고 하는가? 교재 3페이지에 보면 그것을 은유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없는 세계를 묘사할 때 이미 있는 나의 세계의 주체를 강화하기 위해서 없는 세계를 되받아서 내 의미로 받아주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거울상’이라고 합니다. ‘거울단계’라고 하는데 거울상에 비친 이미지가 있고 그 이미지는 감정이 없고 굳어 있어요. 거울에 비친 그 상은 아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울을 보는 내 마음은 아프고 콩닥콩닥 뜁니다. 거울 보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보입니까? 안보이잖아요.


따라서 냉혹한 이미지가 실제로 느낌이 있는 나, 내 머릿속의 온갖 감정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를 극복하고 그 차이를 같이 보는 이것을 가지고 ‘자아이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동일시’라고 하고 이것을 주체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내 마음에 바람직하고 멋있다고 여길 때 스톱, 스톱이 되어서 며칠 몇 달 동안 그것이 나의 모델이 되는 거예요. 제 머리를 너무 짧게 깎아놓았는데 미용사가 모양을 맞추다 보니까 이렇게 되었어요. 미용사 잘못은 아닙니다. 어쨌든 저의 이 머리모양이 30여년 해오던 그 모양과는 달라서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데 무슨 권력적 아부현상인지는 모르지만 이 머리모양을 보고 “십년은 젊어 보이십니다.” 10년, 10년, 10년, 계속 젊어지면 50년 젊어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속아 넘어가게 되면 진짜 십년이 젊다는 이미지가 고정이 되면서 앞으로 늙어도 그게 내 모델이 돼요. ‘그 때 머리 잘 나왔던 그것이 나야.’ 이렇게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드림, 비전, 꿈이에요. 이걸 상상계라고 하는 거예요. 성경말씀을 아무리 봐도 내가 나의 모델, 내 이상의 욕망을 달성하는 것을 뽑아내기 위해서 성경구절을 일방적으로 채택합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이 뭐라고 해도 이 세상은 아무렇지가 않아요. 고요해요. 문제 있어요? 아무 문제없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로 요한계시록을 못 믿습니다. 십분 쉽시다.
 관리자(IP:175.♡.141.195) 16-01-17 12:50 
2016겨울수련회 제 6강 : 은유


에스겔 초반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환상을 받게 됩니다. 거기 보면 네 생물이 나와 있고 그 네 생물이 사방으로 이동하고 있으면서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여기서 에스겔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제사장은 복장부터가 좀 특이합니다. 복장에 보석이 부착되어 보석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 보석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혜택이 같이 부착되어 있는 열 두 지파에게 그대로 책임지고 주어지는 겁니다. 몸이 같이 움직이니까, 부착되어 있으니까, 명찰같이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제사장이 보석을 달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내린 그 약속이 성취가 되면 해줄 것 다 해주겠다는 거예요. 최고의 보석처럼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화려해요. 황금 길, 그리고 모든 것이 다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혜택이 열 두 지파 모두에게 저절로 주어지는가? 그게 아니에요. 왜 아니냐 하면, 제사장에게 추가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 투입이 됩니다.


투입이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주체변환이 일어나는 겁니다. “저 구원받는다는 말이지요?”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다가 “제가 꼭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는 아니군요. 제가 뭔가 달라져야 된다는 그런 뜻입니까? 아, 내가 없어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제가 없어지면 저를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라고요?” 점점 주체의 변환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그러한 다른 목소리, 다른 반응을 나타내게끔 언약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 언약자체가 ‘이쯤 했으면 신자 맞잖아.’라는 것을 자빠트리는 언약들이 주어집니다. “그 정도해서는 안 되거든. 그거? 그걸 로는 멀었어.”


그래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땅에 있는 주체 이것을 2라고 하고 언약 속에 있는 주체 1이 있는데 주체1이 주체2를 몰아낸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몰아내고 그 현장에 주체1을 실어버리지요. 주체2에 있는 이 사람은 공연히 헛꿈 꾼 겁니다. 헛꿈 꿨는데 “괜히 좋아했잖아. 구원될 것도 아닌데 괜히 좋아했잖아.”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너희들은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지 않다. 보석 달렸다고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거룩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이 만족할 정도로 거룩한 조건하에 너희들은 보석같이 되는 겁니다.


이 거룩이 언약으로 주어지게 되면, 더러움 속에 언약이 같이 자리를 잡게 되면 이 더러운 세계가 아주 혼쭐이 나고 굉장히 혼란스러워요. 무사히 거룩이 더러움 속에 안착이 되려면 거룩을 모실만한, 거룩을 지탱하고 감당할 만한 부속장치들이 이스라엘 내부에 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제사제도에요. 그중 나름대로의 깨끗한 것을 드려서 그만 이것 받으시고 노를 푸소서, 해서 어린양 받으시고 받으신 그 자리에 잠시나마 거룩을 허용해주시고, 그런 일이 제사장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했더니만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이 제사제도가 습관이 되어버렸어요. 반복적인 우연은 필연이 된다고 했잖아요. 이게 습관이 되어버리면 같을 일을 되풀이하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본인들이 그렇게 착각해 버립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이 주체변환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 정도만 해도 신앙인데 더 이상 뭘 변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탈락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변한다고 해도 어떻게 날마다 변할 수가 있는가? 누가 너보고 변하라고 해? 너보고 변하라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거룩을 어떻게 모시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에스겔에 있어서 선지자에게 성전의 내막을 통째로 주는 것은 과연 이 성전을 모실만한 환경이 이 지상에 있겠는지, 과연 이 성전이 이 지상에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를 묻는 겁니다. 불가능하지요. 불가능하지만 성전은 이 땅에 임하게 됩니다.


그 성전이 임하게 되는 것 때문에 대가를 치러야 돼요. 그게 뭐냐? 이스라엘이 통째로 날라 가버리는 겁니다. 멸망당해요. 그러면 그 거룩이 어느 정도로 혹독하냐? 그것은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로 혹독하게 징벌 받느냐에 상응해서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전혀 인간의 구원과 관계없지요. 로켓이 지상에 내리기 위한 터 닦기, 터를 닦는 일을 에스겔 선지자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전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백성 만들기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거룩한 성전 쪽에서 실시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괜찮은 사람을 뽑아서 제 2의 성전을 섬길까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괜찮은 사람 등장합니다. 딱 두 자에요. 뼈들. 이 앞에 형용사 들어갑니다. “바짝 마른” 물기가 있으면 안 됩니다. “바짝 마른” 혹시 물기 있으면 DNA아미노산작용에 의해서 다시 생명이 생겨날 수도 있어요. 빠짝 말라서 구원되고 난 뒤에는 일체 군말 안하기, 일체 군말 없기. 오직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거룩을 모시게 되면 터전이 되었습니다. 신약에 보면 성도가 성전인데 성전은 내가 구원받는 것과 관련 없이 거룩한 분을 모시게 되었다는 겁니다. 감당이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꼬락서니를 보니 감당하는 꼬락서니가 아닌데?


그래서 감당 안 되는 인간을 감당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대리자가 투입됩니다. 그 대리자, 성령이 투입됩니다. 성령은 낮으신 분, 십자가지신 분의 영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잘못을 중간에 대리해서 의로 처리를 해줘요. 처리를 해주게 되면, 물론 당연히 아시겠지요, 그저 모른 체 하면서 “그래, 음, 내가, 거룩이 있을만한 성전이 되는구나. 그러면 내가 있지.” 이렇게 오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자리만 제공했을 뿐이에요. 이게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요. 바깥에는 이러한 현상을 못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현란한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겁니다.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해서 지금 일어난 일을 저쪽에서 커닝 못하게, 저쪽에서 흉내나 모방을 해서 자기들 쪽에서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극단으로 차단하는 그 양식이 너무 가혹하고 혹독합니다. 기분 굉장히 더럽게 만들어요. 그래서 그들은 에스겔 선지자가 전하는 말만 들으면 부아가 절로 치밉니다. 화가 나게 되어 있어요. 마치 오늘날 요한계시록을 보는 그 느낌처럼.


우리보고 어쩌라는 말입니까? 요한계시록 2장 봅시다. 제가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납니다. “에베소 교회에 편지하기를” 방금 제가 몇 분 동안, 10분 동안 죽 설명했지요. 에베소교회에게 편지하는데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아까 성령 이야기했지요. 짜고 치는 고스톱, 안 되는 인간으로 하여금 감당하게 하는 그 성령, 낮아진 그 성령,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그걸 자유로운 성령이라고 해요. 너희가 어떤 상태에서도 준비가 될 정도의 자유로움, 기도를 제대로 못해도 탄식하면서 우리 대신 기도를 다 해주시는 분, 우리 대신 기도해주시는 분, 그래서 우리는 대표 기도할 때 이렇게 하세요.


“주여, 이런 기도가 얼마나 엉망이었으면, 저는 믿습니다. 이 기도 말고 달리 대신 해줄 줄로 믿습니다. 아멘.” 어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안 된다는 사실을 네가 스스로 알라고 우리보고 기도하게 하시는 거예요. 스스로 알아야 주체변환이 일어나는데 우리는 꼼수를 써요. 아예 기도 안합니다. 해도 들어주지도 않는데 기도를 왜 하는데요? 미쳤다고 기도합니까? 그러면 이것은 꼼수지 주체 변화가 일어나지 않잖아요. 뭔가 기도를 해서 이 응답과 사다리 타기가 영 비켜간다는 사실을 아셔야 돼요. 그러니까 성령이 고맙지요. 안 되는 것을 되게 했잖아요.


구원받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들어갈 수 없는 혼숫감이 거룩이라고 쳐주고 들어오잖아요. 이 허름한 집에 주께서, 성령께서 오신다고요. 마치 삭개오 집에 주님이 들어가시는 것처럼. 이것은 계시가 아니고 제 상상입니다. 주께서 삭개오 집에 갔을 때 금고가 한 열 다섯 개 있었고 비밀 계단이 있었고 스위치 누르면 책장이 쩍 갈라지면서 비밀 아지트가 나오고 거기에 금덩이가 쌓여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삭개오가 말하기를 “이런 돈 밖에 모르는 저를 천국을 만드시는군요. 이 돈 필요한 사람에게 네 배나 갚겠습니다.” 구원 챙기고 헌금하는데 자기는 남는 장사에요. 헌금하고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기에, 네 배가 뭡니까? 더 줄 수도 있는 문제지요. 부자가 지옥 가서 물 한 방울도 없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지옥에서 물 한 방울 얼마 합니까? 택배 값이 더 비싸게 먹힐 거예요. 돈이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잖아요.


에베소 교회나 라오디게아 서머나 교회에게 성령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하신 것과 같은 취지에요. 성령께서 이야기합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2)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이 말 따라서 개선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개선을 안 한 것이 아니고 못해요. 그리고 칭찬해도 이 칭찬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왜? 쪼개야 되니까. 에베소 교회 안에 에베소교회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게 바로 구약 때 남북 이스라엘 속에 선지자 끄집어내는 겁니다. 주께서 이미 아신 사람을 에베소교회라는 입구를 통해서 자기백성 족집게로 뽑아내는 작업을 하는데 주께서 하시는 이 말씀, 칭찬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꼭 우리 수련회 같아요,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책망을 하는데 책망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따라서 우리가 할 것은 없고, 그런 입장에서 촛대는 옮긴다는 협박은 왔는데 교회 쳐다보니까 촛대는 안보이고.


촛대가 당회장실에 있습니까? 촛대 없어요. 주인이 그냥 자기 것 찾아가겠다는데 스카치 입테입으로 붙들 방법도 없고, 경비용역 써서 사수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에베소 교회 속에 교회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교회를 쪼개는 겁니다. 호빵 쪼개듯이 교회 쪼개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 들으면 즉각적인 반응이 이겁니다. ‘아, 그렇다. 우리가 에베소교회 같은 교회구나. 칭찬받은 사항은 일단 유지하고 책망 받는 부분만 개선하게 되면 주께서 촛대 옮기지 않겠지.’ 이거 이단입니다. 그게 바로 이단이에요. 왜? 성령이 하시는 일을 모독하기 때문에.


‘남은 자’됨을 행함으로 메우는 것은 배후에 누가 있었다? 악마가 에베소 교회를 세운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아시고 악마 속을 비집어 헤치고 들어가서 악마 속에 있는 진짜 남은 자를 끄집어내는 작업, 이게 주님의 전쟁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교회 망합시다. 망해야 삽니다. 망해야 교회에요. 고치라는 것 고치지 말고 책망하는 것도 책망 아닌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째기 위한, 쪼개기 위한 구실이고 핑계입니다. “가시적으로 행동하는 거, 너 아니거든.” 하지만 교회는 다른데 없어요. 바로 네 속에 교회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에베소 교회를 짓는 것이 아니고 교회 속에 있는 진짜 교회를 위해서 주께서 일곱 교회를 지은 겁니다. 거니시는 거예요. 그리고 뭐라고 하는가? 진짜 에베소교회가 나왔습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생명나무 과일을 먹게 해주겠다는 겁니다. 따먹지 말라면서요? 하여튼 하나님께서 이랬다, 저랬다. 창세기 3장에서는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요. 용역까지 써가면서 화염검으로 지키기까지 했잖아요. 줄 것이었으면 진즉 주시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왜 낳게 합니까?


쫓겨나고 난 뒤에 하와가 늙어가니까 “내가 너무 경솔했다. 나도 욱, 하는 성질이 있어서 미안한데 그래, 그만하면 이제 반성 좀 했지? 다시 봉쇄를 풀어 줄 테니 와서 애도 낳고 해라.”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구원에 관심이 없어요. 선악과를 따먹은 입장에서 그 죄가 성립되어야 주께서는 의를 생산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쥐고 있다고 그게 의가 아니라 죄인 속에서 끄집어내는 방식만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나는 죄인도 용서했단다. 나는 그런 주다.” 왜? 주의 희생, 이 세상은 주님의 희생을 찬미하는 아들의 나라로 전체가 변모됩니다. 십자가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들러리였어요. 주님은 혼자 노시는 게임을 벌린 겁니다. 피조물은 당해도 쌉니다. 왜? 주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누가 말립니까?


그러면 중간에 아브라함, 이삭, 왜 질질 끄는가? 바로 아담 2대에서 예수님 쫙 보내서 나머지 다 구원하면 되는데 왜 굳이 예수님에까지 길게, 길게 끌고 가는가? 인간의 배후인 뱀, 죄의 숙성, 그것을 숙성이라고 합니다, 숙성, 심판이 숙성될 때까지, 어느 정도로 숙성될 때까지? 예수님을 체포해서 살해할 때까지 죄가 마감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 그냥 자기 일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느 쪽이 숙성되어야 되느냐 하면, 들어가야 할 저쪽 가나안 땅이 심판받아 마땅함이 될 수 있도록 죄가 무르익어야 돼요.


그 죄가 뭡니까? 인간의 행함으로 자기주변에 있는 상황을 해결하려고 설치는 것, 그것이 바로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주체입니다. 이 주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 때까지. 이 주체가 그리스도를 살해했거든요. 그래서 이 주체는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 주는 오직 주님밖에 없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오직 누굴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누가 만들었다? 예수님이 본인의 게임을 하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모든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게임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없어요. 주의 나라고 아들의 나라에요. 하늘나라는 인간의 상상이고 이미지, 상상 계에서 만들어낸 거예요. 현재 눈에 보이는 것 말고 비가시적 사실까지 자기연대기로 집어넣기 위해서 결합을 시켜놓은 거예요. 그게 바로 종교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없다, 있다, 없다, 있다.’를 반복해 버리면 그게 굳어지거든요. 반복은 ‘있다, 없다, 있다, 없다.’를 반복하면 그게 굳어져버리고 그렇게 굳어진 것을 뭐라고 하는가? 그 굳어진 것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심벌, 상징이에요.


상징은 습관과 습관이 굳어진 겁니다. 사람이 종교생활을 오래하게 되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그 안에 자기 의가 들어 있어요. 그 자기 의를 포근히 사수하기 위해서 과도한 습관들을 갈수록 점점 더 많이 하게 되는 겁니다. 복음 아는 목사는 그걸 뜯어내지요. 뜯어낼 때 안 뜯기겠다고 “이것만큼은 안 돼.” 하지요. “미안합니다. 뜯어냅니다.” 하고 우두둑, 뜯어내는 거예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하고 우두둑 뜯어내는 거예요. 뜯어내는데 그것이 못마땅해서 뭘 하느냐 하면 “뜯어내기 전에 이번에 제가 금식을 하겠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겠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되면 반성이 덕지덕지 더 붙어서 뜯어내기 더 힘들어져요. 그냥 막 살면 되는데 괜히 막 살고 싶은 본심을 감추기 위해서 그 짓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일곱 교회 없다는 이야기에요. 촛대 다 옮겨졌습니다. 폐허되었습니다. 지금 관광지 되어 있어요. 옹기종기 340 킬로미터 안에 모여 있던 그 일곱 교회, 지금 관광지 되었어요. 성경덕분에 이슬람 국가가 돈 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이 모든 이야기는 그냥 과거지사인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런 말씀 주시면 우리도 본성상, “가만 있자. 에베소교회의 이야기 중에 내게 해당되는 것이 있나? 어? 있네.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이건 부지런 하라는 말인데 내가 성질이 급한 편이니 이것은 그만 되었으니 빼고, 그러면 해당 없으니 이번에는 서머나 교회를 보자. 서머나 교회가 유명한 목사가 있었던 교회인데 그 교회에 ‘사단의 회’가 있었는데 이게 뭔지 찾아볼까?” 그래서 사단의 회가 뭔지를 찾아봐요. 찾아보다가 움찔 하면서 빠져나옵니다. 왜? “죽도록 충성하라.”가 나오니까 “이것은 미리 하면 안 돼. 늙어죽을 그 때에나 해야지 지금은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안 돼. ‘내가 알아서 가겠다고 전해라.’ 하는 그 나이 때가 되어서 지켜야지.”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완전히 뷔페에요. 골라잡아서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만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 해요. 그럴 경우에는 요한계시록을 봅니다. 그게 바로 뜯겨져야 할,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아직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굳은살이에요. “아, 이런 쪽으로 주님을 반기니 주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셨구나.”라고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대한 교회주석이 보면 참 찬란해요. 못 봐줍니다. 자기교회의 정당성을 보이는 하나의 빌미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참 가관입니다. 특히 가관인 것은 선교단체에서 사용하는 것이 있어요. 3장 20절,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백날 문 앞에 서 보세요. 두드리는 사람이 있는가. 선교단체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께서 하실 것은 하고 네가 해야 할 것은 네가 해야지. 네가 성령이 없었는데 이제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너도 한 의미가 있으니까 두드린다 싶거든 후딱 문 확 열고 ‘주여 보고 싶었습니다.’ 얼싸안고 감격의 해후를 하라.”는 거예요.


백날 문 앞에 서 보세요. 누가 두드리는가. 안 두드리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여기에 억지가 동원됩니다. 두드린 적이 있었다고 자기 맘대로 날조를 해요. 계시날조입니다. 조작을 합니다. 조작을 하게 되면 흉내가 되어서 여기서 과도한 오버액션들이 막 쏟아집니다. 그러면 흥분의 도가니가 되면서 그걸 성령충만이라고 자기 맘대로 해석을 해버려요. 성령 충만은 딱 한가지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내가 뭘 해도, 기도를 해도 죄인입니다.” 이것만이 성령충만입니다. 어느 정도까지인가? “나는 돌에 맞아도 쌉니다.” 이게 스데반집사였어요.


스데반집사 나오니까 ‘마법의 성’ 그 노래가 다시 생각나는데 마법의 성 마지막 가사에 보면, 함께 가요. 함께 가는데 스데반집사는 홀로 갔습니다. 마법의 성은 계시가 아닙니다. 마법의 성은 자기가 손수 행함으로 건져낸 그 공주와 살고 싶지 절대로 주님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천당 가는 것도 꼭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가요. 수련회에 와도 꼭 마음 맞는 사람끼리 나불나불 이야기하고요. 난 천국 가도 둘이서만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할 거예요.


계시록 2장 3장에서 2016년도 1월 10일에 지켰다고 칩시다. 내일을 보장 못해요. 오늘은 에베소서의 내용에는 안 걸렸는데 내일 되면 버가모 교회에 걸릴 수가 있어요. 이것은 평생 두근두근 입니다. 언제든지 안심을 못해요. 그러다 치매 걸려 보세요. “예수님이 누구신지요?” “몰라요.” 치매 걸리면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데 예수를 어떻게 알아봐요? 찬송가 부르라고 하면 나 훈아 노래 부르고 생전 욕 한마디 안하던 천심도 욕이 막 나와요. 어디서 욕을 배웠는지. 계시록 2장 3장의 모든 말씀은 기드온의 군대 300명처럼 은혜로 남은 자가 자기가 어떤 통로로 겪어야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느냐, 다시 회고록 쓰듯이, 회상하듯이 유리알 속에 있는 2장과 3장을 돌려보면서 ‘아 이 에베소 교회의 모습이 내 모습이고 책망 받는 모습이 내 모습이구나.’라고 느긋한 마음으로 보는 재미, 골라먹는 재미가 아니고 돌려보는 재미, 편안한 마음으로 2장과 3장 넘어갑시다.


그 다음에 4장 5장에서 중요한 것 하나 또 들어가야 됩니다. 참 요한계시록 이렇게 편하게 하기는 첨이다. 강의 어떻게 할까, 벌벌 떨었는데 ‘가위바위보’ 한 템포 늦게 내는 이걸로 다 되어버렸네요. 한 템포 죽이고 가는 것. 이방인과 이스라엘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하는데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적용시킵니다.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에요. 택한 백성 버리지 않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했습니다. 물론 제가 이야기한대로 이스라엘 말고 이스라엘 속에 있는 이스라엘.


몇 층 내려가는가? 1층? 아니요. 그 이스라엘 중에서 또 이스라엘, 그러면 지하 2층입니다. B2. 그러면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또 그 속에 들어 있는 이스라엘, B3. 그러면 어디까지 갑니까? 예수그리스도만이 남은 자가 될 때까지 계속가요. 그러면 바로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왜 그렇게 층층이 뚫어서 예수님에게 도달되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욱, 새롭게 창조한 그 인간들로 하여금 앞에 탈락된 모든 이스라엘과 동일한 아담의 DNA, 아담의 몸을 동일하게 지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죄의 깊이를 많이 보여줌으로써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분수처럼 폭발하도록, 넘쳐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면류관까지 반납할 정도로.


“이 모든 계획과 미장 센, 무대장치, 천국의 모든 것은 보석 같은 이 부귀영화는 제가 누릴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은혜로 남은 자의 공통적인 속성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고백해야 환란이 와도 고마워요. 당해도 싸니까. 어려움을 줘도 “저 같은 인간은 당해도 마땅합니다. 혹시 이것보다 더 센 어려움은 없습니까?” 이런 식으로. “왜 자꾸 살려주시는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방인과 이스라엘을 분리시킵니다. 분리시키는데 그 분리시키는 기준이 중요하거든요. 그 기준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분리를 시킵니다.


계시록 5장 4, 5절에 보면,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여기서 ‘사자’는 메신저가 아니고 라이언(lion)입니다. 유다자손을 가지고 라이언으로 표현한 것은 창세기에서 야곱이 유다지파를 예언할 때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맞아야 되는데……. 예, 맞습니다. 야곱이 유다지파에 대해서 예언할 때 ‘사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창세기 49장 9절에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하나님의 성전에 하늘의 무늬가 딱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사자고 하나는 종려나무입니다. 사자라는 것은 전쟁의 의사를 동물의 형식으로 드러낸 거예요. “나는 전쟁할 의사가 있다.” 그렇다면 다윗의 이 언약은 뭐냐 하면, 전쟁하시는 주님, 주님이라고 해도 되지만 주님이라고 하지 말고 구약이니까, 이것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있다는 것은 신약에서 드러난 사실이고 구약에서는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데 하나님은 숨어계시고 그 숨어 있는 하나님을 대리해서 역사 속에 함께 하셔서 전쟁 치르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주님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하시는 하나님, 그 전쟁하려면 적이 있어야 되잖아요. 적은 그 때 그 때 만들어내십니다. 억울한 사람을 죄짓게 하는가? 아닙니다. 인간은 빠지고 그 배후의 악마를 노려서 전쟁합니다. 그런데 그 악마가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 내에 있어요. 그래야 이스라엘 아니고 이스라엘, 이스라엘 아니고 이스라엘,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나라는 편안하게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는가? 예수님 오실 때까지는 그랬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바울의 설교에 보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는 이방나라에 대해서 책망하지 아니했지만 이제는 이방나라에 대해서도 이 언약으로 심판을 하겠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 17:29, 30)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언약쪼가리들이 이방나라에 다 기어들어갔거든요. 다 들어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죄지었다고 심판을 했다. 진짜 우리는 심판받은 민족이 맞다.”라는 식으로 그들은 나름대로의 언약을 전했어요. 자기백성이라도 언약을 위반하면 맴매하더라, 이걸 전했다는 말이지요.


그걸 듣고는 이방인 가운데 “와, 그런 하나님 같으면 진짜 살아 있는 하나님이네.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다고 육적인 것을 봐주지 않고, 자기백성이라고 봐주지 않고 심판하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이라면 내가 영접하겠소.”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과 합류된 이방인들입니다. 퇴락된 천막을 다시 짓는 겁니다.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다윗언약에서 다 같이 “제사도 원하지 않고 번제도 원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오직 상한심령입니다.” 상한 심령, 제사나 예배나 이런 것을 원하지 않고 상한심령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 안 나와도 되겠네요? 또 꼼수가 남발하지요. 집에서 상한심령 되는 것과 교회에 나와서 상한심령 되는 것하고를 생각해 보세요. 집에서 상한 심령이란 뭐냐 하면, “주님, 부족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집에 있습니다.” 이렇게 되잖아요. 교회 나와서 상한 심령은 뭐냐? “주여, 제가 오늘도 교회 나왔으니 복 주옵소서.” 하는 거예요. 어느 것이 더 상한심령이겠어요? 어느 것이 노골적입니까? 무엇이 자기 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겠어요? “주여, 열심히 했습니다.” 이게 노골적이지요. 그래서 집에 있으면 도인이 돼요. 집마저 귀찮아서 산속에 들어가면 도인이 된다니까요. 도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그냥 말로 때우지 말고 진짜 어느 정도 부족한지, 산속에 있지 말고 기어 나와서 전세 값 가지고 싸우고 전기세 한 푼 가지고 싸워야 진짜 실감나는 부족함이 드러나지요.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제발 놀지 말고 일하세요. 왜? 부족함을 알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일도 시켜줘야 하지 안 시켜주면 할 수 없고요. 그래서 울지 말라,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고 하시고 드디어 6장에서 일곱 인을 뗍니다. 일곱 인을 떼게 되면, 제가 분명히 했지요, 막간이 나오지요. 일곱 인을 뗄 때 자연현상들이 일어나고 천사들이 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데 이 천사들의 활동은 스가랴 예언에서 나온 겁니다.


이것을 전에 잡곡강정이라고 했지요. 문서선지자들의 예언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버릴 서류가 아니에요. 이것을 그대로 유지했다가 그대로 전달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일곱 인을 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또 떼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할 때 이것을 알아먹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막간을 보게 되면 남은 자가 등장해요. 남은 자가 되면 회고하듯이, 회상하듯이 ‘아, 주께서 이런 전쟁을 치르셨구나.’ 그런데 전쟁의 대상, 전쟁의 방법에 대해서는 인간들의 언어로 이해 못하는 환상적인 언어로 이해가 되는 겁니다.


여기서 “인을 뗐을 때 흉년이 나오고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이 모든 일은 대체 어느 도시에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엘니뇨현상 때문에 콜롬비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런 식으로 찾아다니지 마세요. 이 일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 일어난 거예요. 언약이 그냥 자연세계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은 일단 다 어디로 가느냐 하면, 일단 다 이루어야 되기에 예수님의 몸에서 다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몸으로 언약이 다 들어가요. 말씀이 다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러면 “다 이루었다.”가 되지요. “다 이루었다.” 가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혼자 하는 소리고 다른 사람은 모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해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둡게 되었지요. 벌써 일곱 나팔입니다. 벌써 일곱 인을 뗐어요. 그리고 죽은 시체가 막 살아났지요. 그리고 성경에 보면 지진이 일어났지요. 벤허에 보면 지진이 일어나서 벤허의 문둥병 걸린 가족이 낫는 일이 일어났지요. 어릴 때 그 영화를 봤는데 네 시간이나 지루하게 해요. 고집도 그런 고집을. 오래 한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마차경주, 그것밖에 기억이 안나요.


이미 주님한테 들어가 버리면 여기서 나오는 것은 뭐냐? 그냥 역사적 언어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묵시적 내용을 담으면서 표현은 역사적 언어를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피해보는 자연세계는 그냥 자연세계가 아니라 묵시적 언어를 경유하고 난 자연세계기 때문에 사람은 여기에 나오는 흔적을 인간의 능력으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성도만이, 남은 자 만이 지금도 항상 이런 일이 얼마든지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요. 그걸 느끼게 되면 한마디로 이렇게 됩니다. ‘아, 살 곳이 못되는구나. 작살내는 이 동네에 구태여 미련 두거나 연연해할 필요가 없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하여튼 그렇게 해서 일곱 인을 떼고 난 뒤에 7장에 봅시다. 드디어 열 두 지파, 오직 이스라엘만 구원됩니다. 이스라엘만 구원되는데 전부 다 14만 4천이지요. 14만 4천이라 하지 말고 열 두 지파가 구원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열 두 지파가 모이면 뭐가 되겠어요? 이스라엘이 되겠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인가? 그걸 잠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바탕이 있는데 죽음을 바탕으로 했습니다. 어떤 죽음? 야곱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이 나왔어요. 야곱의 시체에서 나왔다고 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그냥 이스라엘로 주어지지 않고 누구든지 이스라엘이 되는 사람은 누구를 경유하겠어요? 야곱을 경유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누구하고 싸웠던 사람이에요? 야곱은 주의 천사와 싸웠던 사람이고 주의 천사는 그 전에 야곱이 꿈을 꿀 때 사다리로 내려왔던 그 천사에요. 천사가 야곱에게 내려옴으로써 야곱의 인생은 역사적 입장에서는 수평적으로 가지만 야곱의 인생은 묵시적으로 미장센, 하나의 장면으로 스톱, 동결되고 응고가 되었어요. 움직이지 않는 운동만 있을 뿐이지 전체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반드시 죽음을 경유해야 돼요. 죽음을 경유하고 이스라엘 되게 되면 이스라엘도 얼음땡이에요. 이것도 고정되어 있어요.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왜? 이미 나라는 인간은 야곱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죽은 것을 누가 이스라엘 되게 했습니까? 천사가 와서 개입해서 이스라엘이 되었지요? 그렇다면 천사가 개입할 때 야곱을 구원함이 아니고 야곱 속에 뭘 집어넣는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과 속성을 야곱이라는 껍데기에 집어넣으니까 이스라엘은 누가 이스라엘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이스라엘이에요.


요한복음 1장 51절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주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그 몸에 달린 지체지요. 운명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서 계속 은사가 주어지지요. 은사는 주님이 전쟁하시고 전리품을 갖고 옵니다. 그 전리품이 우리에게 도달할 때는 묵시적 전리품이에요. 돈이나 부동산 값 오르는 그런 전리품 안 줍니다. 교회 부흥되는 그런 것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왜냐? 그거 줘버리면 ‘내가 뭘 했기에 이런 것을 받았는가?’ 하고 생각하고 더 무서운 것은 ‘주께서 내가 신자가 맞는다는 것을 확인해주시기 위해서 이런 복으로 격려를 해주시는구나.’라고 되어버리면 이제부터는 그걸 쥐면서 자기가 새로운 주체로 발생되면서 거기서 내 주체중심으로 고정화되어버려요.


그러면 자기는 잘난 존재가 되면서 나중에 주님의 증인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었다고 자부하는 자기 자신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보통 좀 큰 교회 목사도 전부 다 그런 류라고 보면 됩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새벽기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이런 식으로. 그게 뭐가 잘못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거기 있는 사람들도 야곱을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이스라엘이 탐나서 그냥 가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죽어라.” 그 다음에 “네 구원은 없고 주님의 구원밖에 없다.” 너는 너로 끝내라는 말이지요. “너는 너로 끝내고 그 다음에 주님이 새로 준비한 ‘너’가 있다. 그것은 너의 이름이 아니고 14만 4천의 이름으로 합류되게 되면 너는 구원된다.” “안 넣어주면 어떻게 합니까?” “그 걱정 죽일 때 없애줄게.” 수면내시경 할 때처럼 죽여 버립니다. ‘지옥가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다가 스르륵 잠이 오면서 와보니까 천국이에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네요.


왜 우리하고 의논하지 않느냐 하면, 아버지가 보낸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의 목회자들은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내가 깽판을 치고, 개판을 치고, 교인들이 나가도 주께 택한 백성인 자기 양은 목자의 손아귀에서 절대로 잃어버리는 것이 없다면, 진짜 그 목사가 주의 지체라면 주님이 좋아한다면 자기도 같이 좋다고 해야 되는 것이 맞는 이야기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분명히 주님께서 자기가 택한 백성은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자기가 오만상을 다 그리면서 ‘또 두 명이나 나갔네. 이번 달 헌금이 5만원이 뭐야?’ 이렇게 나오면 도대체 너는 지금 누구 자랑 질을 하려고 목회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네가 주의 종이면 나도 주의 종이다.” 지금 그거 자랑 질 하려고 목회하는 거예요?


신학교 들어갈 때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복음이 부끄럽다, 복음이 부끄러워. 커닝하고, 족구하고, 축구하고, 수요일 날 예배 참석 안하고 야한 영화나 보고 돌아다니고, 누가 더 농땡이를 부리나, 기숙사 가면 그거 시합하고 있어요. 시험 때만 되면 커닝한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녀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희한한 인간은 그걸 보고 개탄하는 인간, 그건 또 뭔데? “주여, 이 선지동산 죽었습니다.” 언제는 안 죽었어요? 참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워.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주여, 저는 커닝도 안하고, 족구도 안하고 공부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교회 부교역자로 취직시켜 주소서.” 에라이, 이 도둑아! 참 내! 교회가 있어야 취직을 하지.


그래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알거든 어느 교회에 이상하게 취직이 되거든 교인들 몽땅 데리고 나오세요. 그거 하라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그게 선교입니다. 필리핀 가지 말고, 이상한데 갔다가 총 맞아 죽지 말고 기존교회에 가서 몽땅 데리고 나오세요. 왜? 쪼개야 되니까. 물론 마귀목사는 눈치 챕니다. 설교 안 시켜 줍니다. ‘저 인간이 또 몇 명 데리고 나갈지 모른다.’ 하고.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혹시 우리교회 그럴 리 없겠지만, 교인 수 몇 명 안 되니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부교역자가 있다면 저는 권한 없어요. 교인들이 “이 사람 꼭 부교역자 돼야 됩니다.” 이렇게 한다면 저도 한 표? 누가 명령 하달하고 갑 질하는 거, 우리 없기 합시다. 갑 질 많이 당하는데 교회까지 해야 되겠어요? 유다지파, 르우벤지파, 므낫세지파, 이렇게 지파들이 있는데 지파들마다 1만 2천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흰옷을 입고 손에 무엇을 들고 있습니까? 종려가지를 들었지요. 이들은 무엇을 경유했는가? 예수님을 경유해서 예수님이 기존 이스라엘을 버리고 속에 훅, 빨아들였다가 다시 새롭게 후, 하고 내뱉은 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내뱉어서 나왔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야곱을 경유한 사람 같으면 오늘 여기에 해당된 사람이에요. ‘12*12*1000’이기 때문에 이 ‘천’은 계속해서 세상 끝 날까지 택한 백성만큼은 놓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천’이라는 것은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확산되는 거예요.


결국 따지고 보면 14만 4천은 수많은 사람들이 어린양의 동산에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계시록 7장 10절에 봅시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그 다음에 뭡니까? “……어린 양에게 있도다.” 이게 그냥 주문외우라는 말이 아니고 속에 이것만 들었어요. “주께서 하셨지요. 주께서 하셨기에 저는 한 것이 없지요. 그렇지요? ‘주께서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왜 이렇게 하셨는지?’ 하여간 주께서 하셨지요.” 이게 걸어 다니거나 조깅을 하면서도 늘 나오는 거예요. “오늘도 조깅을 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요. 조깅 하다가 새똥을 맞았는데 주께서 그렇게 하셨지요. 머리를 이렇게 짧게 깎도록 한 것도 주께서 하셨지요.” 모든 것이 “주께서 하셨지요.”로 나오는 거예요. “사기당하도록 주께서 하셨지요. 벌금 내도록 주께서 하셨지요.”


벌금을 내도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마치겠습니다.
 관리자(IP:175.♡.141.195) 16-01-17 12:54 
2016 겨울수련회 제 7강(요란한 정숙)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보면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해서, 예수님 죽음에 대해 모든 인간이 다 가담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보다 일찍 죽임을 당하신 분이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닙니다.


9절에 보면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린양이 되심으로, 이제는 누구도 그 사람을 건져냄에 있어서 토 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 저 인간은 안 됩니다. 정말 말썽꾸러기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뽑힌 자들이 누군가? 24 장로들입니다.


12절에 보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라고 합니다. 헨델의 [메시아] 가사에 이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합당하도다.’라고 해도 이것은 자기들 이야기에요.


만약 여러분들이 저에게 ‘요한계시록을 쉽게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거예요. ‘극장(영화관) 안에서는 활극이 벌어져도 바깥에는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란하게 떠들면 떠들수록 바깥은 고요해요. 그래서 이번 시간 강의 제목을 ‘고요한 정숙’으로 붙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아무리 난리가 난다고 해도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가끔 중국에서 황사가 날아올 뿐입니다. 영화관 속에서 자기들끼리 난리를 칩니다. 바깥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갈수록 더 심화됩니다. 마귀가 체포되고 유황불에 들어가는데도 조용해요. 아무 일 없습니다.


왜 그런가? 홀로 일찍 죽임을 당하신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인간들이 가담되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몰라도 돼.’ 그들은 무지의 결과로 무심코 찬성표를 던졌는데 그 결과 예수님이 사형 당했습니다. 예수님 죽이는데 찬성표를 던진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 삶이 충실하고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특별히 문제성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별 문제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형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면 사람들은 “아, 옛날에 예수라는 사람이 설치다가 죽었지.” 이것으로 끝나요. 그래서 이 요한계시록은 철저하게 감춰진 책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해 못하는 책입니다.


일곱 인을 떼는데 굉장히 요란합니다. 상영관 안에서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방법은, ‘자기들끼리 시끄럽고 바깥은 조용하다.’ 그러면 해석이 끝나는 겁니다. 왜냐? 일찍 죽임을 당할 때 눈치 못 채고 죽인 그 취지가 계속 살아있어야만 어린양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죽었다고 누가 호응해주면 그 사람은 주님 바라보지 않아요. “예수 믿어도 인기를 끌 수 있네.” 이렇게 되어 세상적인 인정과 평가에 편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일수록 세상이 조용한 것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 합치된다고 고마워합니다. 우리 주님 돌아가실 때도 이처럼 고요했을 것이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없었지요.


사도가 요한계시록을 외치면 굉장히 시끄러울 것 같지만 사실은 조용합니다. 예수님이 유명인사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도 유명 인사가 아니에요. 성경에서만 떠들지 다른 곳에서는 떠들지 않습니다.


6장 10절에 보면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라고 했는데, 이것은 새로운 이방인 부류와 구원되기로 작정된 이스라엘과의 차이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고요한 세계에 편성해서 같이 살면 되는데 그들은 어린양과 결부되어 있기에 이 세상에서 못살겠다고 탄원하고 있는 겁니다.


희한한 사람들이지요? 그냥 밥이나 먹고 살지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심판해달라고 탄원을 합니까? 이들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특이한 존재로 분류되어 구원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별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습니다. 종결되어 있어요. 유리알 속에 박혀 있는 고정된 물체처럼. 그리고 15절에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유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 위에 산이 무너져 덮쳐지는 상황입니다. 어린 양의 진노가 두려워서 차라리 산과 바위 밑에 깔리는 것이 낫겠다는 것입니다. [You rise me up] 이란 노래는 반대로 되어 있어요. 주께서 나를 산 위에 세우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모든 사람들이 다 박살납니다. 산 위에 갔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하나님의 진노의 날이 이르기 전까지 그들은 고요할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7장 13절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이 대화가 이상해요. 알면 미리 이야기를 하지, 모르는 척하면서 물어서 누구를 시험하는 겁니까?


이 사람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다 알면서 묻고 대답하게 하는 것은 이미 가있는 그들과 지금 가는 사람이 같은 부류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겁니다.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아는 것, 꼭 말로 해야 압니까? 자기들끼리는 다 아는 거예요. 자기들끼리 묻고 답하면서 자기들끼리 신이 났어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평안히 살고 있습니다. 과연 평안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곱 인을 뗄 때마다 한바탕 난리가 나지요. 일곱은 마치 저고리에 단추가 나란히 달린 것처럼 7개의 파라핀 도장으로 일단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후크 따듯이 하나씩 떼면 말씀을 봉인한 힘이 자연세계를 찢는 힘으로 발산되면서 작용합니다. 저는 이것을 통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우선 자연세계는 큰 원통의 형식으로 일단 표현됩니다. 말씀 안의 자연세계이지요. 일곱 인을 하나씩 뗄 때마다 조금씩 자연의 힘이 해체됩니다. 이런 식으로 1, 2, 3, 4, 5, 6, 7이 진행됩니다. 일곱 번째 봉인해제 작업에서 하나의 작은 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일곱 나팔이 나옵니다. 말씀과 자연이 서로 전쟁 중인데 그 와중에 전쟁의 진정한 본질을 향해 천사는 움직입니다. 그 작은 통의 내막이 1, 2, 3, 4, 5, 6, 7이라는 나팔 부는 방식으로 공개됩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나팔에서 더 작은 통을 하나 그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곱 대접이 순차적으로 자연세계에 퍼붓게 됩니다. 이렇듯 일곱 인은 말씀의 주이신 예수님과 그동안 자연세계를 지배한 숨겨진 배후세력간의 ‘전쟁의 통보’를 말해주는 것이고 일곱 나팔은 ‘전쟁의 경과’를 말해주는 것이고, 일곱 대접은 ‘전쟁의 마감’을 말해줍니다.


이것은 새롭게 된 이스라엘 사람들만 아는 것입니다. 묵시적 존재만 이런 질서가 이 세상에 박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사건들입니다. 옛날에 한 사람이 설치다가 사형 당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어떤 거질말쟁이들은 그분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데 별로 믿을만한 근거도 없어요.


핍박당하는 것과 아무 일 없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기분 좋습니까? 핍박당하는 것이 좋아요. 아무 일 없으면 신자 아닌 것 같아요. 꼭 무시당하는 것 같고. 신앙인답게 순교하려고 하는데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때 찐맛없다(‘재미가 없다’의 경상도 사투리)고 하지요.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든지 반응을 나타내 줘야 복음 전하는 재미가 납니다. 그러나 무반응이면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을 우리가 견뎌내야 합니다. “내가 복음으로 설치는 것은 복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는 너보다 수가 높다고 자랑하는 또 하나의 육적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구나.”하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왜 통이 점점 작아지는가? 통이 작아질수록 심판의 전리품, 결과가 막간의 창고에 그대로 쌓여 마지막 일곱 대접에 이르면 마귀의 정체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드러나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전 인민들이 가담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성도 된 사람들도 가담한 사건임이 드러나지요. 따라서 전부 한 패거리입니다.


한패니까 문제 될 것이 없지요. 시끄러울 게 없어요. 다 소통이 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개무시 하자.’ 이 점에 대해서 서로 의견 투합이 되니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도 된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붙잡혀서 천국은 어린양의 피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 이 고요함에서 벗어나고자 그들은 신원하는 겁니다. “주여, 이 가슴 아픔을 빨리 해소시켜 주시옵소서. 못 살겠습니다.”


8장 10절에 보면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고 했는데, 그러면 하늘의 별이 떨어져서 없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늘을 보면 멀쩡합니다. 아직 때가 안 된 것입니까?


묵시 세계에서는 그렇게 봐요. 별이 있어도 떨어진 것으로 봅니다. 묵시 세계에서는 자연을 볼 때 묵시적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역사적 주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 단어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냐? 묵시적 언어로 포장된 역사적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일한 역사적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역사적 인식으로 접근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 해석이 안 됩니다.


그래서 제 이야기는 굳이 해석을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묵시적 해석은 이미 해석된 것이기 때문에 해석할 필요가 없고, 또 해석을 하면 이것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 묵시의 일은 인간이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천사들이 실천하기 때문에 우리가 설치면 안 됩니다. 실천할 수 없는데 해석은 왜 합니까? 그리니 우리는 천사가 하는 것을 믿음으로 지켜보면 됩니다.


해석 쉽지요? 천사가 한다니까요. 우리가 해야 한다면 ‘이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해석을 해야 하는데 어차피 이것은 우리가 손 댈 문제가 아니에요.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는 역사적 언어에요. 그래서 우리 언어는 묵시적 언어에 합치되지 않습니다.


묵시적 용어가 뭔가? 묵시적 용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 용어를 은유로 바꾼 거예요. 왜 은유로 바꾸는가 하면, 모든 인간들의 언어 이해가 예수님 죽음에 가담되었기에 그렇습니다. 전부 하나의 마음으로 일관했습니다. 따라서 그 세계에서의 묵시는 숨어있는 것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나서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제가 할 것이 아니고 주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들의 몫이네요.”하고 넘겨주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본문의 단어 하나하나 확인 작업에 나서야 합니다. “바다 생물의 1/3이 죽었다는데 정말로 바다에 고기가 줄었는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다의 고기는 전혀 줄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제가 대개를 좋아하는데 이것이 줄면 값이 폭등할 텐데 대개가 줄지 않았어요.


8장 12절에 보면 “네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은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라고 했는데, 이 삼분의 일 이야기는 이미 에스겔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에스겔의 삼분의 일 예언이 무엇인가 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을 찐빵 쪼개듯이 쪼개기 위해서 그 말을 했어요.


그러니 이렇게 보면 됩니다. 온 인류에 일어날 일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먼저 시범으로 삼분의 일을 작살 낸 겁니다. 바벨론 군대를 이용해서. 이 사건이 역사에서 묵시로 바뀝니다. 역사를 묵시로 바꾼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복수하라.”고 해도 복수할 자격자가 없습니다. 왜냐? 이스라엘마저 메시아를 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이방인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담했는데 감히 누가 남을 심판할 자격이 있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는데 아무도 칠 수가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문서 선지자 에스겔이 예언한 것은 절대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이뤄집니다. 이루되 인간들이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이루는 것이 아니고 묵시적으로 고요한 중에 이뤄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묵시적으로 가서 그것을 확인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럴 필요 없어요. 묵시적인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이 날 구원했다는 그 관계성을 갈수록 또렷하게 드러내게 되면 고요하든지 요란하든지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천사들이 활동하는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굉장히 소란하고 많은 일어 벌어지지요. 그런데 사실은 굉장히 조용해요. 신문의 가십거리도 안 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성령의 인도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다가 병거를 타고 가는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납니다(행8:26-31). 만나보니 그가 성경을 읽고 있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며 빌립에게 물었고, 빌립은 선지자의 글을 해석해 주면서 예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통상적으로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안부를 묻고 행선지를 묻는 것이 상식인데 이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낯선 사람 둘이 만나서 선지자가 예언한 인물이 누구인지 묻고 답하는 이런 희한한 대화가 오고갑니다. 빌립의 답변은 내시의 질문에 답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내시는 물이 있어서 그 물에 들어가 세례를 받고 작별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당시 신문에 소개되었습니까? 이것이 화재가 될 만한 사건입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고 난리가 났어요. 자기 백성이 돌아왔다고. 그러나 땅에서는 조용합니다. 사막에 먼저나 일으키고 끝나는 사건이었어요. 왜 모든 성경 내용을 내가 직접 확인해 보기를 내심 원하고 있습니까? 그건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당시에는 잠깐 유명했지 돌아가신 후에는 잊혀진 인물이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요란스럽게 떠드는 것은 전부 가짜입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에게는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일방적으로 묵시를 천사들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마이크 들고 독수리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까, 까’이런 소리를 내지 ‘화, 화’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세상에서 확인하려고 하지 마세요. 이건 믿음이 없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죽임 당했습니까?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기에 떠나갔고 제자들마저 떠나갔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벌어 살기 바쁜데 언제 예수님을 찾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임하니까 삭게오처럼 돈보다 어린양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묵시적 존재로 전환된 그들끼리의 이야기입니다. 환란은 얻어맞고 터지고 망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환란은 노래방에 갔는데 노래 점수가 낮게 나오는 것, 강의 전에 내용을 다 암기했는데 막상 강의를 하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 부분이 생기는 것, 차를 몰고 가는데 네비게이션이 알려주지도 않는 지점에 카메라가 있어 과속으로 걸린 것 이 모두가 환란입니다.


이런 일들이 왜 환란입니까? “아, 짜증난다. 빨리 이 세상을 떠나야지!” 이게 바로 복음이잖아요. “세상 더러워서 못살겠다.” 이게 복음이라니까요. 아내가 식사를 차렸는데 밥상이 어제와 똑같아요. 그래서 짜증이 나서 “내가 빨리 죽어야지.” 그게 복음이에요. 유난 떨지 마세요. 멋있고 나를 돋보이게 만드는 그런 것들을 기대하지 마세요. 다 마귀의 시험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주님을 무시하고 죽이는데 가담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오히려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고 감사해야지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을 때 아무도 곁에 없는 외톨이였습니다.


9장에도 보면 황충이 나오고 황당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메뚜기 이야기예요. 예레미야에서는 메뚜기인데 계시록에서는 황충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한미 합동 훈련하는 것 같아요.


잡곡 강정은 잡곡이 무작위로 섞여 있기 때문에 이 단어와 저 단어가 연결이 안 됩니다. 하지만 묵시 세계에서는 다 연결이 돼요. 어떤 식으로 연결 되는가? 그것은 몰라도 결과는 동일해요. ‘일찍 죽임당한 어린양의 피로 우리가 흰옷을 입게 되었다.’ 이것만 나오면 됩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세세히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을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9장 14절을 보면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는 말씀이 있는데, 천사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놓여 풀려났는지 어떻게 확인합니까? 15절에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고 했는데, 예사로 사람을 막 죽입니다.


16절에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고 했는데 이것이 뭔가 하면, 불신자들이 무저갱에서 나와서 자기들끼리 싸운다는 거예요. 묵시 세계에서는 이렇게 요란스럽게 이야기를 하지만 이 세상은 고요합니다. 이란과 이라크가 외교를 단절하고 싸워도 시간이 좀 지나면 서로 타협하고 조용해집니다.


20-21절에 보면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 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예언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뭔가 하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우상을 섬겼던 그들을 하나님이 시범 조로 큰 벌을 내렸거든요. 벌을 받은 이스라엘이 흩어지면서 온 이방 민족에게 동일한 벌을 내리시는데 그들이 우상을 껴안고 안 살아도 이미 그들은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할 수밖에 없고, 그런 짓을 해도 회개치 않는 성격을 갖고 있으면 묵시로 일괄적으로 선언을 해버립니다.


매일 점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 아이 수능시험을 앞두고, 혹은 자녀 결혼식 전에 자신이 교회 권사라는 사실을 숨기고 재미삼아 점을 보는 것 역시 복술입니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하게 하기 위해서 제가 미리 12장 13-14절을 보겠습니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 때, 두 때, 반 때’가 뭐냐? 이것이 재앙을 내리는 순간의 막간입니다. 전쟁의 결실물이 특정한 곳에 쌓이는 거예요. 저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막간에서 구체적으로 다 보여주는데, 한 때, 두 때, 반 때는 마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미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마귀의 정체가 노골화 될 때까지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고 대치상태로 두는 기간입니다.


마귀조차도 어린양의 주 되심에 동원됩니다. 왜? 피조물이기 때문에. 마귀도 어린양을 높이는데 악역을 해야 됩니다. 옛날에 배우 허장강이 늘 악역을 맡아서 열연을 했지요. 젊은 분들은 모를 거예요. 이처럼 악한 역할만 하는 사람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할을 부여한 겁니다.


그러면 한 때, 두 때, 반 때는 어느 선지서에서 나온 것인가? 다니엘 7장 25절에 나옵니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이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성도가 세상에서 마귀의 손에 잡혀서 한 때, 두 때, 반 때 동안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이 성도를 미끼로 사용하셔서 마귀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성도는 고난을 받습니다. 자연 세계가 박살이 나는데 이것은 인간 배후에서 사단이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한 때, 두 때, 반 때가 사단의 정체와 관련되었는데 이제 호세아 6장 1-2절을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결국 한 때, 두 때, 반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이를 두기 위함입니다. 단절이지요. 그 단절에 제대로 기여한 것이 마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채로 하늘나라에 가지 않고 마귀의 손에 잡혀서 죽게 되지요. 그러면 그러한 사건을 조선일보나 경향신문 기사에서는 ‘예수는 소요죄로 사형 당했다.’고 쓸 거예요. 그러나 그 기사에 마귀는 나오지 않습니다.


연대기적 주체에서는 마귀가 없습니다. 환상의 세계는 없어요. 제가 첫 강의에서 강조했지요. 인간들은 자기들의 노력으로 역사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여기에는 신화적 존재인 마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것도 그 당시 최고 결정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결정했고, 총독 빌라도가 그것을 추인했고 누가 봐도 사람과 사람의 일로 진행되었습니다.


만약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북한에 가서 복음 전하겠다고 몰래 두만강을 넘어가다 잡혀서 실컷 고문당하고 나중에 기자회견에 나와서 “나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훼방하는 나쁜 짓을 했습니다. 이제 반성합니다.”라고 할 때, 거기에 마귀도 성령도 안 보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행정적 절차로 깔끔하게 끝이 납니다. 어떤 영적 가치도 거기에 부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고 전해진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끼리는 ‘목 베인 영혼을 주께서 아시고 신원해 주실 것이다.’라고 하지만 막상 그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로마에 속한 모든 백성들은 황제를 주로 인정해야 하는데 성도들은 주가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소통이 안 되지요. 주가 서로 다릅니다.


처음 전도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주를 이야기하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신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여겼지 황제를 주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주가 점점 유명해 져버렸어요. 그래서 진짜 주가 가짜 주에게 눌릴 판이 되니 조치를 취한 거예요. 국가 질서를 위해 소수를 제거함으로 다수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성경 속에서는 요란한데 바깥에는 아무 일 없다니까요. 전혀 생업에 지장 없고. 그 요란 떠는 가운데서 누가 아무 소리 안 해도 “주여, 이 세상보다 주님 계신 그곳을 원합니다.”라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요란 떠는 곳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입니다. 어떻게 고요함 속에서 묵시의 요란함을 파악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을 주님의 안목으로 보지 않으면 묵시의 요란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11장 5절을 봅시다. 두 증인이 나오는데 감람나무와 촛대지요. 이것은 스가랴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잡곡 강정이지요. 스가랴의 예언도 집어넣고, 다른 예언서도 집어넣은 거예요. 스가랴 본문이 어떤지 관계없어요. 무조건 여기에 집어넣고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되고, 어린양과 관련된 체 해석이 되는 겁니다. 왜냐? 모든 예언서는 십자가로 완성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묵시 세계는 우리끼리의 이야기지 바깥 세계에서 이야기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문 가십에도 실리지 않을 이야기들입니다.


3절에 보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일을 예언하리라.”고 했는데, 1,260일은 3년 반입니다. 이것은 한 때, 두 때, 반 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4절에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스가랴에서 두 증인은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서는 그냥 두 증인이에요.


5절에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라고 했는데 막상 죽기는 누가 먼저 죽습니까? 두 증인이 먼저 죽어요. 이렇게 되면 두 증인의 위신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살려준다고 했는데 죽어요.


7절을 보면, 역사의 주체가 묵시의 주체를 이깁니다. 이기는데 이긴 것이 아니에요. 그들이 죽으면서 어린양의 십자가를 드러내면서 죽었기에 그들이 죽었던 장소가 예수님의 죽었던 장소의 번짐 또는 재현,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곳을 8절에서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소돔과 애굽은 거리가 멀어요. 그런데 소돔이고 애굽이고 십자가 못 박힌 곳이라고 합니다. 혹시 지리를 잘못 파악한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럼 뭔가? 지명이 있고 그 위에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묵시적 사건이 역사에 발자국을 남긴 겁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이 십자가가 반복되는 곳, 다시 말해서 땅이 주님으로부터 공격받는 곳. 그래서 ‘너희들은 이런 것들을 내용물로 갖고 있기에 억울하지만 자연세계는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파괴가 창조입니다.


주님이 주가 되시기 위해 파괴되어야 합니다. 로켓이 하늘로 올라갈 때 옆에 붙은 보조물들은 떨어져 나가야 합니다. 보조물이 떨어져 파괴되어도 로켓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 무너질 것들이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그들은 좋다고 하지요.


그리고 13절에 보면 큰 지진이 나서 성 1/10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7,000명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찾아보려고 하는데 이런 일은 역사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확인이 안 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또는 이 사람들의 죽음에 가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고, 그 후에 일곱 대접으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막간에 들어가면서 성도는 정작 누구와 싸웠는가가 나오는데, 12장 6절에 보면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기서 1,260일이 나오는데, 이것은 한 때, 두 때, 반 때, 삼년 반, 48개월. 또 나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마귀도 어린양을 증거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핍박이라는 나쁜 역할로 협조하고 있다는 것이 묵시적 입장입니다. 여러분들을 무시함으로 마귀가 여러분이 하는 일에 협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마귀가 여러분을 무시하지 않고 높이고 인정해 준다면 여러분은 인기 관리에 몰두하지 주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주여, 살만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좀 더 잘 살도록 지켜주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신원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무시하는 마귀는 참 고마운 존재입니다.


우리를 개무시 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마귀. “누가 네 원수인줄 알아? 교회 다니는 것에 대해 아무 간섭도 하지 않는 형제, 자매, 자식, 시어머니, 며느리가 우리가 어린양만 바라보도록 하는 협조자 들입니다. 그 기한이 바로 한 때, 두 때, 반 때에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 모습, 경계선에 있는 우리 모습이지요.


7절에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이것은 영화관에서나 나오는 이야기고 실생활에서는 용이 없습니다. 용을 찾지 마세요. 용을 써도 못 찾습니다. 개그를 해도 통하지를 않네요?


9절에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이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뭐라고 하겠어요? 이것이 사실이라는 실증적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실증적 증거를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묵시는 영화관에서만 요란할 뿐이에요.


11절에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마귀는 우리를 개무시해야 됩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코미디입니까? 아들이 교회 가겠다고 하는데 절에 다니는 엄마가 교회 가지 말라고 합니다. “꼭 가려면 숙제 끝내놓고 가라.” 엄마는 편하게 이야기했는데, 그 아이는 오버를 해서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을 펴놓고 “주여, 신원하여 주시옵소서.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엄마는 내일 시험 치니까 공부하라고 이야기했을 뿐인데 아이는 오버해서 이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킨 거예요. 잘못 된 겁니까? 잘한 거예요. 그런 감각은 아주 좋아요. 영적으로 예민한 겁니다. 왜냐? 우리는 우리 속에 요한계시록을 걸친 IS 여성 대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우리 속에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3장 17-18절을 보겠습니다.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이게 무슨 뜻입니까? 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지요? 그러면 해석이 나왔어요. 666은 뭐냐? 모든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모든 사람이 어린 양이 죽는데 가담했기 때문에. 2,000년 동안 풀리지 않던 숙제가 이제 풀립니다. 666은 모든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매매도 잘 이뤄집니다. 왜? 서로 의기투합하니까. 묵시에서 환상은 날아가고 경제 원리와 행정적 법칙만 남았어요.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서로 편하게 은행 거래하고, 물건을 구입할 때 편하게 값을 묻고 돈을 지불하지 “이것 구입하면 어린양 끼워줍니까?” 이런 소리 안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666입니다.


따라서 666은 144,000과 대비되는 집합 개념입니다. 666은 세상 모든 사람, 144,000은 그 중에서 뽑혀 나온 묵시적 존재입니다.
 관리자(IP:175.♡.141.195) 16-01-17 12:55 
2016 겨울수련회 제 8강(우물 파기)


요한계시록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거예요. 이방인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깨졌고,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이 있었고, 이방인 중에도 특이하게 남의 나라 하나님을 자기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희한한 사람이 있이 벌어집니다. 언약에 따르면 성령은 주의 백성에게 와야 하는데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말미암아 이방인 머리위에 퍼부어지니까 그들이 성령을 알게 되었어요.


성령을 받게 되니 율법, 십일조, 구약의 율례와 관계없이 졸지에 의인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깨보니까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들어있는데, 그 피 때문에 유대인이 아니고 할례를 행치 않아도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어요. 성도가 된 후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새로운 이스라엘 법칙을 적용받게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스가랴 2장 18-19절입니다.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이것이 원래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괴롭게 하는 제국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것이 신약 성경에 오게 되면 성령 세례가 임한 모든 이방인도 해당되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널리 전파해야 되지 않습니까?’라고 한다면, 전파한다는 것은 유명세를 떨치는 것이 아니에요.


전파하면 할수록 본인은 성령 세례 받아서 구원 받았지요. 그럼 남들이 성령 세례를 안 받았으면 고요한 것이 너무나 당연해요. 왜냐? 본인도 성령 세례 안 받았으면 전혀 그런 일에 관심 안 보일 거란 말이죠. 그런 무시와 멸시를 당하면서 우리 주님은 어떠했겠습니까? 주님은 이방인이 아닌 자기 백성들에게 멸시를 당해 죽었잖아요.


그렇다면 이 세상은 한결같이 고요한 가운데 주님을 죽이는데 가담한 셈이 돼요.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666을 언급 할 때도 짐승이 등장하고 자기들끼리 매매한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를 그들이 들으면 ‘우리는 옛날부터 그래왔어. 새로운 의미 부여하지 마.’라고 할 거란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해 줍시다. 왜냐? 우리가 특이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세례 받은 우리가 특이하지 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냥 자연스럽게 사는 거예요. 시장에서 서로 값을 흥정하면서 사고팔면 되는데, “너희들은 짐승의 표를 받고 서로 통용하는구나.” 이게 뭘 하는 겁니까? “갑자기 성령 받고 난 후에 이상하게 되었네. 왜 그래?” “예전부터 그랬어.”


다시 언급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요한계시록도 없고 짐승도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예수님이 과거에 살다가 죽은 옛날 사람에 불과하지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냥 연대기적 주체로써 살아가면 그만이에요. ‘죽으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죽어보면 알고. 살아있는 생명 계속 살려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세포가 밥 달라고 난리를 치는데 살아야지.


그런데 이것을 성령 받은 이스라엘 쪽에서 보니까 ‘그들은 배후에 짐승이 있어서 어린양의 복음을 무시하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그런 수작을 부렸다’고 구원 받은 사람들끼리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결국 그들은 비밀단체입니다. 그러면 천사는 뭘 하는가? 이번 시간 강의 제목은 ‘우물 파기’입니다.


고요한 땅에 천사가 우물을 팝니다. 우물을 파게 되면 숨어있는 주의 백성(144,000)이 튀어 나옵니다. 우물을 파서 만나기까지 묵시 세계 자기들끼리는 대단히 요란해요. 미가엘이 용과 싸우고, 용이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고 요란해요. 그런데 바깥세상은 고요해요. 그런데 천사가 다른 곳에 또 우물을 팝니다. 이 때 요한계시록 1장에서 22장까지 다 동원됩니다.


성도가 구원되고 나면 하늘의 신부가 될 것이고, 세상은 불바다가 되고, 마귀들은 지옥 불에 떨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은 역시 고요해요. 그래서 저는 이것을 ‘우물 파기’라고 표현했어요. 천사가 묵시적 힘으로 우물을 파는 곳에만 자기들끼리 복음에 의한 기쁨이 생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해석입니다.


묵시 세계가 하는 일을 역사 세계는 모르고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옛날부터 산천은 그대로 있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불심판 같은 것은 없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 약 올리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순환하면서 영겁의 회기를 한다. 죽으면 흙이 될 뿐이다. 성경의 내용은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지 대세도 아니고 다수의 결정도 아니다. 성경은 옛 성인들의 명언집이다. 이 내용을 믿고 목숨을 거는 인간들은 광신도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우리도 성령 받기 전에는 그들과 똑같이 비난해 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천국 간다는 사실도 몰랐지요.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한패가 되어서 666노릇 잘 했습니다. 그리고 144,000이 되고 난 뒤에 과거의 666시절을 돌아보면서 ‘저것이 내 모습이었지.’ 이 생각이야 말로 고요한 세계에서 신앙으로 인내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알아주는 이 없고, 교회 간다고 축하하는 사람 없어도, 예수님이 당한 무시와 외면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 무한한 영광입니다. ‘천사가 우물을 팠구나.’를 깨닫게 되지요. 이것이 사도행전에 보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사도행전이나 로마서를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의 수가 아주 적습니다. 몇 명 안 되는 중에도 복음을 떠나가는 사람이 있어요. 인간들 사는 모습이 똑같아요.


요한계시록을 이쯤 했으면 여러분들은 “간단하네. 우물 파기인데 뭐.” 이렇게 끝나야 돼요.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 용기를 줘요.


13장 8절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이 말씀은 새롭게 이스라엘이 된 자들이 다니엘에 근거해서 그 예언의 말씀이 오늘날 이 시대에 실현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동안 두렵고 겁나서 읽는 것조차 망설였던 요한계시록이 전혀 새롭게 깨달아지니 좀 허망한 생각도 들지요?


14장 8절에 보면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나오는데, 밖에 나가보세요. 무너진 나라가 있는지. 없습니다. 이 세상에 200개가 넘는 나라가 있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바벨론 한 나라로 통합되어 있어요. 제가 지난 시간에 얘기했지요. 세상에 있는 모든 나라는 아무리 갈라지고 나눠져도 결국은 하나로 통합된다고. 바벨탑의 속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다양성이 하나로 응축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이 보편성을 추구하는 의식 때문입니다. 다양한 개념들이 있다면 이 개념들을 모아서 공통점을 찾아서 메타 개념을 끄집어내요. 그러면 보편성 개념들을 마치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 같지만 이 보편성은 구멍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그 공백의 자리가 있어야 소통이 가능합니다.


국가는 없어요. 영토와 백성이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말합니다. “국가를 위해서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대학도 없어요. 캠퍼스가 있고 교수, 학생이 있지 대학은 없어요. 그런데 말합니다. “학생이 그런 행동을 해서 우리 대학의 명예를 먹칠했다.”


이처럼 서로에게 종속되지 않고 서로에게 공유된 추상적 개념이 있어야 서로 소통이 돼요. 이것을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공통된 사상체계지요. 그 이데올로기를 낳게 하는 소시민의 버릇을 ‘하비투스’라 하는데, 습관, 관습을 하비투스(habitus)라고 합니다. 스스로 특정 계급 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는 소시민들이 그 계급의 성향을 보여주는 반복적인 삶의 태도를 나타내는데 이것이 국가적 이데올로기 속에서도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자기네들만의 삶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흔히들 국가 이데올로기를 낳는 것은 경제적 하부구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만 단지 경제적으로 한쪽은 착취하는 계급, 한쪽은 착취당하는 계급론으로만 설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이데올로기란 다양한 집단들이 나타내는 보편적 추구 내용이라고 보면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큰 성 바벨론이라고 이름 붙여지지요. 인간 세계 밖에 어떤 괴물이나 영적 짐승이나 악마가 있어 자신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들에 의한 세계, 인간들만 움직이는 세계, 인간들의 지혜와 노고에 의해서만 조성된 세계이기에 자신들이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하나로 통합되어 모두가 다 잘 살 수 있도록 평화와 안전을 추구하는 의도들이 자생적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추상적으로 하나로 통합된 의식에 대해서 성경은 그것은 ‘큰 성 바벨론’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꿈꾸고 희망하는 하나의 세계상이기에 자발적으로 복종합니다. 이 마음을 요한계시록은 ‘짐승이 준 마음’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에서는 바벨론을 ‘짐승’이라고 합니다. 짐승인데 이 짐승이 어떤 짐승인가 하면 땅에 있는 짐승이 아니고 묵시적 세계에서 나온 짐승입니다. 묵시적 세계에서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고 했어요. 이 짐승은 땅에 있는 짐승이 아니어서 하이 브리드입니다. 몸체는 사자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고, 사람처럼 두 발로 서는 이상한 짐승이 등장합니다. 묵시 세계에서는 이처럼 혼합이 됩니다.


혼합이 되어서 ‘사자냐, 독수리냐?’ 라고 물을 수 없는 것이, 피조물이 보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기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배후에서 우리를 조종합니다. 그래서 경찰이 와도 체포할 수 없습니다. 실체가 있어야 체포를 하지요. 사상을 체포할 수 있습니까?


PC방에 가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초등생들이 게임을 하면서 악당과 싸운다고 욕도 하고 고함도 치고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누구와 싸우는 것입니까? 가상 적과 싸웁니다. 그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상 적과 싸우지 않으면 살맛이 없어요. 게임을 하지 않으면 인간은 사는 보람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상대를 꺾어야 돼요.


누구를 꺾느냐? 요즘 정가에서는 안철수가 탈당해서 신당을 만든다고 하는데, 안철수 편은 문재인을 잡고, 문재인은 안철수를 잡아야 합니다. 왜냐? 그래야 살맛이 나요. 컴퓨터 게임처럼 누구를 쳐부숴야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됩니다. 저도 노모가 계시는데, 자주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심심해서 못 살겠다.”


이 말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멱살 잡고 싸울 상대가 없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적이 생겼습니다. 위층에 사는 할머니. 이제는 심심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면 “그 여자가 말이야 --” 하면서 위층 할머니에 대해 험담을 합니다. 저는 속으로 “살았구나!”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지요.


왜 시험을 치고 경쟁을 하고 서열을 매깁니까? 인간은 자기 존재를 위해서 적이 되는 타인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큰 성 바벨론입니다. 이것이 왜 그런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적 본성이 모든 인간에게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자가 아니어도 이미 환상적인 요소가 모자처럼 머리위에 있습니다.


이 영적 악한 기운을 사람들은 그때그때 역사적인 것으로 바꾸기에 자신에게는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소주 먹다 맛없으면 맥주 먹고, 맥주 먹다 맛없으면 양주 먹고. 의사가 보기에 이 사람을 알코올 중독인데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취향이 다른 뿐이라고 말합니다. 뭔가 영적인 것이 느껴지면 가시적인 것으로 바꿉니다.


꽃꽂이 하다가 재미없으며 골프 치고, 이것도 재미없으면 배낭여행을 해보고 계속 새로운 재미를 찾아 옮겨 다니는데 왜 그런가 하면, 내 자신에 대해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고 뭔가 여백이 있고, 잉여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뭔지 모르는 거예요.


이런 인간들이 큰 성 바벨론은 이루면 어떻게 되는가? 17장 2-3절을 봅시다.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성령께서 예수님을 데리고 광야로 가지요. 광야에 가면 묵시 세계가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사단이 나타났지요. 마찬가지로 묵시 세계에서는 광야가 모든 인간들도 악한 영적 존재로 번역되어서 나타납니다. 왜냐? 내가 바로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묵시는 묵시끼리 통하는데서 해석과 연결고리가 성사됩니다.


‘고맙다. 마귀야, 너 때문에 예수 믿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네가 나를 혹독하게 대해줬기에 나는 주님밖에 믿을 것이 없었다.’ 욥도 마귀가 와서 도와줬잖아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 아내는 이런 소리를 했고. 그러니까 성도뿐 아니라 불신자도 영적 존재입니다.


다만 불신자는 술이나 취미 등으로 스트레스를 풀지요. 우리도 불신자처럼 살 수밖에 없는 자인데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성령을 주셔서 이런 정황에 대해서 안목을 갖게 해주신 것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주의 증인 노릇을 하는 겁니다. 그들은 주체가 아니면서 주체 노릇을 하려고 하니까 세상 현실과 충돌이 발생합니다.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만든 세상인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니까 세상에 대해서 몰라요. 밤이 왜 있습니까? 잠자라고 있는 거예요. 낮은 일하라고 있는 겁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이런 말을 하는가? 우리를 대표하시는 예수님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보면 알아요.


17장 3절에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이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가? 5-6절에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호세아로 가야됩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에 있는 선지서가 그 당시 역사적 해석을 뛰어넘어 전 이방세계에 퍼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이제 역사에 관한 것이 아니고 묵시적 안목으로 재해석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그대로 들어가지요.


요한계시록 1장에 등장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음녀’입니다. 호세아 1장 5절에 보면 “그 날에 내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 하시니라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처음에는 고멜이 아들을 낳지요. 이스르엘이죠. 다음에는 딸을 낳습니다. 이름이 로루하마인데, 그 의미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이름을 누가 지었습니까? 여호와께서 이런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런 저주스러운 이름을 주신 이유가 뭡니까? 이것은 이 이름 자체가 영적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미래의 운명을 불순한 아내와 자녀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즉 ‘이스라엘은 곧 음녀다.’


이것으로 끝입니까? 아닙니다. 음녀, 즉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기에 언약을 어기는 자는 어떻게 되는가를 시범 조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당할 차례입니다. 그래서 ‘음녀’란 무엇인가? 언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음탕한 여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위배되는 것을 말합니다.


언약에 위배된다는 것이 신약에서는 어떤 의미인가?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이것이 음녀입니다. 왜냐? 언약의 완성이 예수님의 기능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언약에 위배되는 것이 저주 받을 일이라면 축복은 뭡니까? 축복은 없습니다. 호세아에서 축복은 없습니다. 그럼 호세아는 지옥 갔는가? 호세아 6장 1절 봅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 언약의 출발은 우리를 음녀로 규정하시고,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주님이 언약을 쥐고 십자가에 뛰어들어 자기 언약의 혜택을 받을 백성을 자신과 함께 3일 만에 일으키십니다. 로마서 6장에 보면 ‘예수와 함께 죽은 자는 예수와 함께 살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성령 받은 우리끼리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상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 돌아갈 때 어떤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나는 음녀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잘난 척하면 안 돼요. 주께서 우리를 도로 싸매 주실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이 언약 요소에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대신 채찍 맞으시고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대속에 혜택을 입을 백성을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앞에 불러내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불러내게 되면 그들은 누구를 만나는가? 성령은 반드시 십자가 지신 예수를 대변합니다. 십자가 앞에 세우지 않는 성령은 성령이 아닌 악령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게 하지요. 마치 도마처럼.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주님이 보여주신 것은 못자국과 창자국이지요. 도마가 하는 말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호세아를 오늘날 신약에 그대로 적용시켜야 됩니다. 왜냐하면 호세아마저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가 봅시다. 17장, 18장 다 바벨론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막간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제가 지난 시간에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을 큰 통 안에 들어 있는 작은 통으로 설명했지요. 일곱 대접 이전 여섯 대접과 일곱 대접 막간에 일어난 사실들을 이야기합니다.


16장 19절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자연 세계를 박살내는 겁니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스가랴를 언급했는데 조금 더 해봅시다. 이방 나라가 하나님께 벌 받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요. 그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이 왜 하나님께 벌 받을 짓인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있는 곳을 그들이 공격함으로 말미암아 숨겨진 자기 정체를 폭로당한 거예요. 그래서 이런 점을 보면 오늘날 우리의 사명과 기능이 막중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고요할 뿐 환상이나 묵시는 없어요. 그런데 여기서 예수에 관한 것이 나오면 그들은 발짝을 일으킵니다. “광신도처럼 교회 돈 다 갔다 바칠 거야? 너는 멀쩡한데 왜 예수를 믿어? 착하게 되려고? 술 끊고 담배 끊고 싶어서? 그건 내가 인정해 줄게. 그보다 더 깊이는 들어가지 마라.”


이런 소리 들을 때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해져야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어요. ‘내가 주님 언약 안에 있으니까 내 주변에서 이제 짐승 된 주체를 드러내는 구나.’ 맞습니다. 그런데 내가 언약 안에 있다는 것을 내가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그동안 신앙생활 하는데 전혀 핍박이 없어서 너무 심심해요.


사는 재미는 적과 싸우고 논쟁하는 것인데 내가 교회 다니는 것에 대해 전혀 방해도 없고 무관심합니다. 누가 핍박을 해야 ‘주님 이 어려움을 이기게 하옵소서.’라고 기도라도 할 텐데 핍박이 없으니까 기도도 안 합니다. 불신자가 나에게 너무 잘 해줍니다. 핍박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반은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았어요. 성경에는 목 베인 영혼이 나오고 피가 뿌려지고 난리가 났는데 자기는 사지가 멀쩡하고 별 일 없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핍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구분하는가? 역사와 환상이 겹쳐지는 부분은 십자가 사건뿐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내가 핍박 받는 사건으로 위장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핍박 받음으로 신자 된다고 위안을 삼지 마세요. 문제는 고요함 속에서, 그리고 주위에서 핍박이 아닌 친절하게 잘 대해주는 그 속에서도 어린양의 피 흘림에 고마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때려야 숙제를 하는 것이 버릇이 된 아들이, 때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숙제 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숙제하라고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숙제도 안 하고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요. 이럴 경우에는 ‘내가 핍박 받아야겠다.’는 것은 바벨론의 속성이 나를 통해서 드러났다고 보면 됩니다.


남에게 핍박 받는 것만 생각했지 내가 현재 주님을 핍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거예요. 주님 증거해야 될 사람이 내 믿음 좋은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위장된 상황을 요청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전7:14)”고 했는데, 생각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 말을 줄이면 한이 맺히거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무시로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사도 바울처럼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기도제목이 되지요. 그러나 초신자들은 자기 챙기기 바빠서 연출된 사건들을 기다려요. 우연히 굿하는 곳을 지나다가 구경을 하고 있는데 무당이 나를 알아보고 “여기 예수 믿는 사람있다. 더 이상 굿을 못하겠다. 철수하자.”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아, 나는 신자가 확실하구나.’ 또 점집에 갔는데 점이 안 된다며 “혹시 예수 믿는 사람인가요?”라고 나올 때, ‘아, 역시 나는 성령의 사람이구나.’


귀신한테 확인 받으려는 미혹에 빠지지 마세요. 사도 바울이 늘 강도의 위험을 당한 것이 아니고, 늘 핍박을 당한 것이 아니라 평안한 때도 있었어요. 그러나 범사에 감사했지요. 그때마다 주께서 새로운 과제를 계속 주시는데,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점점 바벨론화 되어간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세상이 바벨론화 된다는 것은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서로 통용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이 바벨론입니다. 똑같다는 거예요. 예수님께 관심 없고, 어린양을 무시하고, 편한 것이 좋고,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내고 이것이 바로 666이 서로 교통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666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이는데 모두가 공범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고 보니 ‘아, 내가 저러했었지.’라고 불신자들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래, 당신 마음 나도 안다.’ 왜? 나도 그럴 때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단이 등장해서 나를 핍박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 마세요. 고요함이 오히려 가장 우리를 시험하는 상황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17장 8절을 봅시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생명책 이야기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제가 요한계시록을 ‘잡곡 강정’이라고 했는데 구약 선지서의 내용을 다 가져다 놓았어요. 다 모아놓았는데 어린양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빠져나오면서 그동안 감춰져 있었던 배후(사단)들이 어떤 작용들을 하면서 인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지 그 실상을 지금 공개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적 언어로 묵시적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단어를 가지고 특정인에게 적용시켜서는 안 됩니다.


9-10절에 보면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이것은 이 땅에 있는 군주들과 왕을 통해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꿈틀거린다. 이 세상의 모든 왕이 어린양과 대척관계 속에서 그들의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묵시 세계에 있는 사람만 감 잡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왕과 세상 사람들은 행정적 직업 관료입니다. 괜히 억울하지요. 예수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그냥 동사무소에서 호적등본 발부해 줬는데 졸지에 짐승이 되고 말았어요.


“당신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내가 왜 예수를 생각해야 되는데?”라고 나올 거예요. “그러니 당신은 짐승이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짐승 취급 받는 사람들은 정말 억울하겠지요? 성실하고, 교양 있고, 양심적으로 살았는데 예수쟁이가 와서 마귀에 속했다고 하니까 황당합니다. “내가 마귀 들린 것이 아니라 네가 미쳤다.”라고 나올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동사무소에 가서 직원들에게 짐승의 하수인이라고 욕할까요? 성경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해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은 귀한 것을 모르기에 발로 밟아버리기에.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말씀은 ‘전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난 것도 천사들이 주선을 했지요.


요한계시록은 이미 동결된 상태고, 그들이 움직이는 것은 천사들이 손을 댈 때 움직입니다. 사도 바울이 움직이는 것은 성령이 움직이도록 한 거예요. 본인이 설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상 받으려고 다닌 것이 아니고 주께서 끌고 다니시기에 다녔을 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우리의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막 사세요.


평소에 하던 행세 있잖아요. 그대로 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럴 때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바벨론이구나.’ 하는 점을 깨닫게 하십니다. 어린양과 관련해서 세상은 짐승 노릇하는 것이지 나와 관련해서 짐승 노릇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과 좋은 친구로 지내면 됩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발설되면 그들은 발짝을 일으킵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지은 것이 아니고, 불심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가는 것이 세상일 뿐이다. 내 앞에서 예수 이야기하지 마라.’고 나오면, 그 이야기를 주께서 시켰다고 생각하고 우물 파지 마세요. 우물은 주님의 지시를 받은 천사가 파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천사에 의해 뚫릴 뿐이지 우리가 뚫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우리를 통해서 주의 증인되게 하시는 것은 배후에 주의 성령과 천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천사는 주님이 시키는 대로만 합니다. 힘들다고 도망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뭐냐? 현 상태가 이런 식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7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은 주의 말씀대로 차질 없이 진행되니까 쓸데없는 염려하지 마세요.


‘세상이 더러운데 주님은 뭐하시나? 이 더러운 세상을 빨리 전도해서 변화시켜야 할 텐데.’ 종은 가계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다 알아서 합니다. 다만 종은 손님이 오면 물건만 내주면 되지 자기가 가계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하시는데 왜 우리가 걱정을 합니까?


“목사님,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의 말씀이 응하는 식으로 될 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몸에 칭칭 감기도록 조치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증거임을 주의 지시가 있을 때 발설해서 주의 증인노릇 하게 될 것입니다.


18장에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애통하고 일시에 무너진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시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돈 사람들이 돈이 많다고 ‘내가 곧 신이다.’라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선지서에 있는 말씀을 적제적소에 집어넣어서 이제는 시돈 사람만이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라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 죽이는 일에 참여했고, 우리도 한 때 내가 신인 줄 착각하며 살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믿고 싶지도 않았는데 주님 십자가 지신 것이 대신 죽음인 것을 성령께서 알려주니, 성령은 오직 십자가만 전할 뿐이고, 피로 씻어 흰옷 입은 그 세계만 크게 보일 뿐입니다.
 관리자(IP:175.♡.141.195) 16-01-17 12:58 
2016 겨울수련회 제 9강(시간 밖으로)


이번 시간 강의 제목은 ‘시간 밖으로’입니다. 시간 밖으로 가면 이미 죽은 자인데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가 다시 시간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건 옛날 나를 죽였던 그 세계를 관람하고 유람합니다. 그리고 내가 왜 죽어야 마땅한가를 확인하는 가운데 어떻게 영생을 얻게 되었는가를 날마다 확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을 보는 성도의 입장입니다. 이것은 성령 안에 있는 자가 보는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렇게 볼 때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이 모든 내용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선지자가 남겼던 모든 내용들이 성령에 의해 ‘잡곡 강정’처럼 뭉쳐져 있어요. 그리고 그 둘 사이는 연결이 안 됩니다. 한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20장 7-8절을 보면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 38장을 보면 곡과 마곡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민족인데, 이 민족을 반드시 쳐부수는 일을 마무리 짓고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15-16절에 “네가 네 고토 극한 북방에서 많은 백성 곧 다 말을 탄 큰 떼와 능한 군대와 함께 오되 구름이 땅에 덮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 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오늘날 단군의 후손인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 이스라엘과 곡의 관계인데, 이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역사적 사실을 마지막 이 세상 끝날 때 그대로 실어버립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를 말하는가 하면, 그 때 이스라엘과 관련된 곡과 마곡이고, 이스라엘을 해코지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곡과 마곡을 심판함으로 세상이 끝장난다고 했던 것입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곡과 마곡은 뭔가? 언약과 무관한 모든 나라가 곡과 마곡입니다. 제가 첫 강의에서 길게 연대기를 나열했는데 그것을 ‘큰 연대기’라고 한다면, 현재 우리는 나의 가족과 친구가 포함된 ‘작은 연대기’를 만들어요. 내가 결혼한 것은 언제이며, 집을 살 때는 언제고,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은 언제 했고-- 이것은 나의 작은 연대기인데, 이것은 무엇을 모방했는가 하면 보다 큰 연대기를 모방했고, 이 연대기는 보다 큰 연대기를 모방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큰 연대기를 길게 나열한 것입니다.


‘나’라는 주체는 이런 큰 연대기에서 영향을 받고 압력을 받으면서 형성된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요. 언약이 없다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언약 없는 연대기 속에 있는 존재이며, 이것이 우리는 전부입니다. 이것을 ‘역사’라고 합니다.


우리 집에 아들이 있다면, 이 아이가 작은 연대기에서는 우리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 공부 열심히 해야 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가문을 빛내면 내가 속한 민족을 빛내게 되고, 더 나아가 연류에 공헌하는 인물이 되겠지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주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마곡입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네가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알아?’ 이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첫 시간에 연대기를 장황하게 나열한 것입니다. 이문세 3집에 나오는 ‘광화문 연가’까지 거론한 것은 그 중에서도 자기 취향에 맞는 작은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4인조 그룹 ‘이글’의 ‘호텔 켈리포니아’를 거론한 것도 이쪽에 취미가 있는 사람에게 작은 연대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왜 그룹사운드를 결성해서 노래를 부릅니까? 큰 주체에서 보면 그들보다 앞선 가수들이 연기를 얻고 부와 명예를 가진 것을 보았기에 그것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또 그들의 노래가 대중문화에 영향을 끼쳐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기에 닮고 싶었을 것이고, 이런 욕망들이 얽혀 주체 형성에 서로 영향을 줍니다. 이런 것 때문에 우리는 자녀를 교육시키고, 우리도 이런 관계성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보면 마곡이지요.


마곡의 배후에는 누가 있는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지요.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개무시하는 마귀가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우리는 이방인이 되었는데 ‘이방인’이라는 용어도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면 우리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너와 내가 똑같은 인간입니다. 똑같은 인간에서 ‘내가 이방인이구나.’라는 인식이 생기는 것은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인공의 자리에 있는 나를 왜 갑자기 변두리로 몰아냅니까?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인류의 역사를 보세요. 몽고 사람은 그들대로, 필리핀 사람들은 그들대로, 나는 대한민국 사람으로 각각 주체의 자존심을 가지고 자신이 속한 조국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살잖아요. 그런데 그 배후에 마귀가 있다고 하면 대단히 불쾌하지요. 이건 자존심 상하는 문제입니다. 자존심 상하면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를 끊으면 되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 ‘끊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하고 강의하는 것은 ‘흉내 내기는 그만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어설프게 기독교 신자 흉내 내는 것은 이제 끝냅시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주체인 내가 조국과 민족과 내 가족을 위해서 사는데 힘이 좀 모자라서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주체는 그대로 있고 주체의 욕망을 추가하기 위해서 종교적 몸부림을 치는 일을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이 어린양의 피로 용서 받는 복음을 훼방하는 마귀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간단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무시하든지 아니면 그 말씀을 펼쳐 그 말씀에 따른 새로운 주체가 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 서두에 ‘요한계시록은 없다. 남은 것은 역사뿐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종교는 내 주체가 미흡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신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언약,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 마지막에 있습니다. 마지막 성경 중 마지막 22장에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생명수를 준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계시록 이전에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첫째 부활(영생)을 얻었고, 영생을 얻은 입장에서 옛날 내가 죽어야 될 짓들을 했던 역사의 세계에 다시 들어오게 해서 ‘아, 내가 시간 밖에 있는 유령 같은 존재구나.’를 알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보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했고, 17절에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합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께 속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의 모든 이야기는 이미 다 이루어진 이야기입니다. 시간 밖에 나가 있는 사람에게는 다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느긋하게 봐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키는 자’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데 ‘지키게 된 자’는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왜냐? 이건 우리의 과거 이야기입니다. 이방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기에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죽으시고 시간 밖에서 영생을 얻게 하시고 ‘네가 옛날 어떤 자리에서 구원 되었는가를 요한계시록을 통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나는 복 받을 짓을 한 적이 없구나. 내 배후에 사단이 있었구나.’를 알게 되지요.


에스겔 37장 12-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무덤에 들어간 사람까지 끄집어내는 주님의 능력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됩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무덤을 열고 나올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없어요. 없으니까 이스라엘 사람을 새롭게 생산해 냅니다. 누가? 먼저 무덤을 열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에스겔이 예언한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해서 자기와 함께 무덤을 열고 나올 사람을 모집했는데 그 중에 이방인도 합류를 시켰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목 베인 영혼들은 첫째 부활, 무덤에서 나온 사람이라고 규정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에 근거해서. 이 전체를 이야기하면, 사르트르의 표현처럼 우리는 던져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원해서 이곳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면서 이미 조성된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이야기하기 전에 창세기 1장 3절에 이미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은 빛과 의논해서 ‘빛을 만들까, 말까?’ 이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있게 하셨습니다. 스바냐 1장 3장을 보면 “내가 사람과 짐승을 멸절하고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와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을 아울러 진멸할 것이라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멸절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고, 모든 피조물을 지으셨는데, 스바냐에서는 사람과 짐승, 새, 물고기 등을 다 진멸한다고 합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자신이 만든 것을 왜 진멸합니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편성 하겠다는 것입니다. 구조조정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께 내 사정을 열거하면서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나는 왜 건강하지 못합니까? 왜 우리 집은 가난합니까?” 이런 것을 따지려거든 스바냐 1장 3절을 보면서 따지세요. 가난하고 병든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예 진멸하겠다고 하십니다. ‘왜 내가 하는 일이 실패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재편성하기 위해서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그리스도로 재편성하면 했지 왜 내 일은 안 되게 합니까?” “난 너를 죽일 거야?” “죽으면 안 되는데?” “나와 함께 죽고 나와 함께 다시 살아서 이 세상에 다시 집어넣을 거야.” “다시 세상에 집어넣는 이유는 뭡니까?” “나의 증인이 되어라.” 이것이 주님의 재편성 작업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죽었다가 산 자가 죽은 자와 세상에 섞여서 죽은 척하며 살아가는 이 상황,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풍경입니다. 돌려보는 재미입니다. ‘그래, 옛날 내가 이러했었지.’ 그저 내 생존, 내 주체가 나의 작은 연대기를 사수하고 지키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내 가정은 내가 지킨다.’ 좀 더 범위를 넓히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 헌신하자.’ 또는 ‘인류의 발전을 위해 연구 개발하자.’ 기껏 이런 것입니다.


스바냐는 선지서입니다. 이것이 그대로 요한계시록에 담깁니다. 세상이 왜 진멸되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재편성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로 재편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작업이 필요합니까? 행함을 주장했던 자들은 사단과 함께 유황불에 던져집니다. 유황불도 이사야 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이야기한 예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진행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재편성하면서 반드시 이루십니다. 진멸하겠다고 하셨기에 반드시 진멸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 자신이 진멸하겠다는데 누가 토를 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두 권의 책이 나오는데, 행위책과 생명책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행위로 버티겠다고 하는 자는 유황불에 들어갑니다. 이들이 행위책에 이름이 있는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편성하기 위해 자기 행위를 주장하는 사람은 다 제거 대상이 됩니다. 그럼 생명책은 뭡니까?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자기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영원히 어린양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저는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만, 안 믿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내가 너무 좋아하면 안 되는데’ 하는 약간의 미안한 마음도 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요한계시록 21장 8절을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구절에 근거해서 제가 질문 드리겠습니다. “살인하지 않으면 천국 갑니까? 행음 안 하면 천국 갑니까? 우상 숭배 안 하면 천국 갑니까? 거짓말 안 하면 천국 갑니까?” 제가 여러분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 역사적 이스라엘 입장에서 그 때 언약과 관련된 사항을 가지고 이야기한 거예요.


529년에 로마 법전이 만들어집니다. 그 로마 법전이 오늘날 모든 성문법의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추가하겠습니다. “쓰레기 분리수거 안 하면 지옥 갑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당시의 율법인 살인, 우상 숭배의 완성은 ‘살인 안 했다. 우상 숭배 안했다.’가 아니라 ‘주여, 제가 상한 심령입니다.’라는 것이 다윗 언약에서 보여준 율법의 완성입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아니에요. ‘내 이웃을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나는 이 말씀을 도저히 못 지킵니다. 주여 나는 상한 심령입니다. 내 대신 누가 희생했기 때문에 상한 심령도 하늘나라 가도록 다윗 왕을 통해서 언약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내 대신 돌아가신 분은 다윗의 자손으로 장차 오실 메시아 맞지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언약의 완성은 점을 안 치는 것이 아니고, 점을 세 번 치다가 한 번으로 줄이는 것도 아니고, 술 끊고 담배 끊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 끊은 나를 끊어야 됩니다. 왜냐? 담배를 끊게 되면 담배를 끊었다는 것이 나의 의가 됩니다. 이런 나를 끊어야 됩니다.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이 땅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 강의 제목은 ‘시간 밖으로’입니다. 시간 밖에서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이미 죽었는데 마치 덜 죽은 것처럼.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성령을 받게 되면 죽은 자에게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함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은 자가 되고, 이미 죽은 자가 되었기 때문에 산 자로 판정이 나면서 첫째 부활에 참여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느긋합니다. 수시로 먼저 합격했기에 정시에 원서 넣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친구들과는 전혀 달라요. 합격자가 이 세상을 보는 겁니다. “층간 소음 유발자는 지옥 갑니까?” 시대가 바뀌면 점점 더 죄 항목이 추가돼요. 우상 숭배 안 해도 층간 소음 유발하면 지옥 갑니다. 우상 숭배 안 하고, 층간 소음 안 일으켜도 지옥 갑니다. 왜냐?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재편성하는데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자기 행위로 의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은 행위책의 법칙에 의해서 지옥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하면 성경 구절을 들어 반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이 대목과 상충되지 않습니까?


죽은 자가 무슨 일을 합니까? 죽은 자가 보여줄 수 있는 행함은 ‘죽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이 본문은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입니다. 호세아 14장 9절에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의인은 행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에 하나님에 의해 일방적으로 생산된 의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말미암아 생산된 의인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마치 저주 받은 자처럼 보입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즐거워하는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8).”라고 하면서 돌아다니는데 미친 사람이죠.


이 사회의 부적응자고, 부적격자고, 미친 사람이라고 평가 받았던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그 미친 자 중심으로 재편성 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예수를 나의 주로 믿는 사람은 미친 사람 아닙니까? 볼 게 뭐 있다고. 그리고 늘 ‘같이 죽자’고 하시는 분에게 무슨 기도를 해요?


“주여, 건강을 주시옵소서.” “같이 죽자!” 어떤 분이 질문을 했어요. “성경에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고 했는데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구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마태복음 7장 11-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좋은 것’은 ‘성령’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구한 것은 그게 아닌데 왜 성령을 주십니까? 주님은 같이 죽을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구하지 않아요. 내 자존심을 높이고, 내 주체가 확장되는 것, 내 자식 공부 잘하고, 내 사업 번창하고, 가정이 화목하고 이런 것을 구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것은 “너는 이미 죽은 자야.”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느끼는 존재의 가벼움, 이 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다이어트 할 필요 없어요. 저울 위에 올라가면 바늘이 안 움직여요. 몸무게가 0입니다. ‘내가 유령인가?’ 저울이 말을 한다면 “이미 죽은 자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서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은, 주님께서 집어넣은 도를 행함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 14장 9절은 뭐냐?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는데(묵시 세계에서 의인은 생산되는 것이죠)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걸림돌이죠.


걸림돌 없는 설교는 절간의 염불과 같습니다. 걸림돌은 넘어지게 하는 거예요. 누가 넘어집니까? 그동안 나를 사수하려고 했던 내 주체가 자빠져야 돼요. 마치 다곤 신상이 언약궤 앞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지고 손, 발이 부서지듯이.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내 주체의 자랑거리가 넘어져 박살이 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 밖에 있는 존재가 시간 안으로 들어올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것은 무엇을 전제로 십자가를 내세우는가 하면, 3-5절에 보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라고 했어요.


행위의 주인공은 살아 있는 자신의 주체가 될 것이고, 그런 주체가 행위 한다는 것은 노림수가 있을 것이고, 그 주체를 거룩한 곳으로 강화시킬 목적으로 법을 동원합니다. 내가 복을 따내기 위해서 계속 법을 지키려고 나서는데 이것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불안하다는 뜻입니다. “더 살고 싶다.”는 것이죠.


이런 자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아주 초를 치는 말을 쏟아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율법 지키는 것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만 유독 저주에서 빠지나갈 생각 마라. 예수님이 율법의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13절에 나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율법 아래서 저주 받으라고 던져진 존재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저주 받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복음성가에 이런 노래가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 난 사람” 이 가사를 바꿔야 합니다. “당신은 저주 받기 위해 태어 난 사람”으로. 이런 인간을 22절에서는 ‘죄 아래 가두었다’고 합니다.


주체가 이렇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시간 밖으로 나오지를 못하고 현재 자기가 속해있는 익히 아는 시간의 벽을 힘들게 밀어내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과학과 철학, 예술은 뭔가? ‘더 살고 싶다. 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것이 저주인 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이 저주의 시간을 더 길게 연장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아버지, 이제 호스 뽑겠습니다.” “아니야, 그냥 둬라. 더 살고 싶다. 내 통장에 돈 남아 있잖아.” “아버지, 저주를 계속 받으시렵니까?” “나는 이것밖에 몰라. 내 주체는 이것이 전부야!”


율법에서 못 벗어나는데, 이것을 확장시켜 놓은 것이 예수님 중심의 재편성의 구조적 질서입니다. 그럼 대책이 뭔가? 갈라디아서 4장 8-11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라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지키는 주체가 누구입니까? 내가 지켜야 내가 천국 가지요. 죽 쒀서 개에게 주려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열심히 해서 복을 받겠다는데 이런 짓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너는 이미 주체가 바뀌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은 네가 따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네 안을 점령해서 접수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악한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나는 이미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십니다. 그러기에 나는 주님을 모시는 가마꾼입니다. 제가 이번 시간 강의 제목을 ‘시간 밖으로’라고 정하기 전에 ‘여행용 가방’을 생각했어요.


왜 여행용 가방을 생각했는가 하면, 시간 밖에 있는 우리가 시간 안으로 들어왔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여행 가방을 쥔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여행용 가방이란 말입니다. 주님께서 선지서에 나오는 모든 예언대로 지금도 묵시적으로 활동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주님의 어느 대목에 붙어 있어야 하는가? 주님께서 여행가방(우리들) 속에 요한계시록을 넣고 끌고 가시는 거예요.


왜냐? 주님이 제시한 요한계시록의 결실물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이런 인간도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흰옷 입고 천국 가있다.’는 것을 우리를 가지고 자랑하고 싶어서 이미 죽은 우리를 이 땅에서 계속 살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 안에 요한계시록이 들어 있는데, 이것은 환등기입니다. 필름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환등기에 넣으면 바깥 스크린에 요한계시록 내용이 펼쳐지겠지요. 이것이 바로 주와 함께 있는 우리의 위치고, 우리의 위상이고, 우리의 삶의 자리입니다. 마지막 시간에 당부합니다. 성도라면 제발 티내지 마시고, 나대지 마시고, 설치지 마세요. 신자인지 아닌지 분간 못하도록 하세요.


가방은 우리가 쥐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필요할 때 이동시킵니다. 자기가 괜히 신자라고 나대는 것은 아무리 봐도 신자 아닌 것 같아요. 자신이 신자라는 주체를 흉내 내고 모방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의심이 들어요. 자유가 없고 너무 열심을 내며 달려가요. 여유도 없고 대범함도 없고. ‘이것 못 지키면 지옥 가겠지?’하며 벌벌 떨고. 666 도장 받을까봐 불안해하고.


요한계시록은 우리의 과거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서는 승인이 났는데 내가 확인이 안 됐거든요. ‘그래, 네가 어떤 꼴이었는지 보여주마.’ 죽 가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교회 안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인간이 역사 속에서 교회라고 여긴 교회를 찢어야 됩니다.


이스라엘을 깨면 그 안에 진짜 이스라엘이 나오는 것처럼 교회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부수라고 여러분을 파견한 겁니다. 여행용 가방, 환등기로. “저것이 아닌데. 저것은 자기 신앙 자랑이고, 헌금 한 자랑이고, 목회 자랑이고-- 맞아. 내가 저러했지? 내가 곡과 마곡이었지. 주여 감사합니다.”


이사야 62장 4-5절을 보겠습니다.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우리가 신부되려고 환장한 것이 아닙니다. 주유소에 가서 기름 아무리 잔뜩 준비해도 신부 안 됩니다. 신랑 기다린다고 졸리는 잠을 참기 위해 성냥개비로 눈꺼풀에 받쳐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행함으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이사야 62장 이 말씀은 ‘잡곡 강정’처럼 요한계시록에 굳어져 있어요. 천사가 와서 손을 대면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예수님 중심의 재편성 때문에 우리는 신부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은 너무 과분하고 그냥 천국에 넣어주시면 구석자리라도 만족하겠습니다.” “아니야, 너는 신부야. 내가 준 흰옷을 입어야 해.” 이것은 신부를 위함이 아니라 신랑의 위상에 맞추기 위해 신부를 단장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부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랑의 명예를 위한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한다는 것을 온 우주에 자랑하고 싶어서 주님은 신부를 단장시킵니다. 자랑거리의 대상들이 모인 곳이 천국입니다. 신부 자신을 자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의 피 값으로 흰옷을 입게 되었습니다.’하고 주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24장로이고, 많은 사람들이 보좌 앞에 배치되어 면류관을 반납하며 보좌를 바라봐요.


보좌에서 생명수가 흘러넘치고 성도는 그곳에서 마음껏 찬양하고 주께 영광 돌립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벌써 이루어졌습니다. 전기밥솥에 이미 버튼을 눌렀기 때문에. 오늘 밤 죽으면 우리는 이곳에 갑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과거로 봐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몸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미래가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 19절에서 ‘장차 될 일’이란 표현을 섰습니다. 이미 죽었지만 몸까지는 죽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이것이 바로 네 모습이고, 네 안에 요한계시록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IS 여성대원입니다. 우리 몸에 요한계시록의 폭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몸을 어서 벗고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제 옛날 꿈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 즐길 일만 남은 사람들, 이들은 시간 밖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이유도 없었습니다. 단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해서 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안 믿고 싶었는데, 알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냥 내 주체대로 남들처럼 살고 싶었는데 어린양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자랑하지 말고 십자가만 자랑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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