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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31 21:41:12 조회 : 3542         
2016여름수련회(마태복음강해:한없이작은권력) 이름 : cjypro(IP:222.104.241.69)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마태복음 강해
 
제목: 한없이 작은 권력
강사: 이근호 목사
 
 
 
음성1     음성2    음성3    음성4    음성5    음성6    음성7    음성8    음성9  
 
 
 
#01 관점정리

#02 전진하는 경계

#03 법과 의미

#04 온전한 의

#05 미래의 팽창

#06 수동적 믿음

#07 단독 수행

#08 상징과 실체

#09 십자가의 파급효과
 
 최지영(IP:222.♡.241.69) 16-08-01 21:47 
8강 : 유튜브 '통성기도하는 쌍둥이들' https://youtu.be/PkZjppEjRIw
 이근호(IP:119.♡.94.40) 16-08-06 21:30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1강 [관점정리]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서 사라진 모든 자의 방향을 저희들이 추적해서 알게 하옵소서. 그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음을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된 것을 이제는 우리의 운명으로써 수용할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 번째 강의 제목은 [관점정리]입니다. 마태복음이 신약에 처음 나오면서 소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춰봅니다. 그런데 관점정리가 안 돼 있기 때문에 백 독, 천 독을 해도 그저 경험밖에 되지 않아요. 마태복음을 여러분이 다 외우시죠? 마태복음을 흩어보면 어떤 것을 느끼느냐 하면, 누군가 와서 관점이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시작했는데 뭔가 빠져나가는 느낌, 점점 더 한쪽은 머물러 있는데 저쪽은 후다닥 사라져 가버리는 겁니다.

 

오늘 오후에 울산의 대나무 숲을 이야기했는데 까마귀 떼가 앉아 있습니다. 장관이라 하는데 대나무 숲의 까마귀가 있다가 날아가 버리죠. 그래도 대나무 숲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뭔가 왔다 가버린 거죠. 그럴 때 어느 쪽이 움직였고 어느 쪽이 멈췄느냐는 그 문제입니다. 대나무 숲은 멈춰있었고 까마귀 떼는 왔다 갔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걸 시비 거는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이, 인간 세계가 멈추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이 왔다 갔는지, 아니면 주님이 멈추지 않고 영원히 고정돼있고 인간들이 주위를 돌고 있지 않는지 관점을 다시 생각해봐야 돼요. 누가 우리한테 찾아와서 갔다는 것보다도 주님이 계신데 우리가 그만큼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멀어져 있다는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게 인류의 문명사나 과학사에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천동설, 지동설이라고 이야기해요. 하늘이 움직이느냐, 땅이 움직이느냐는 그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대세가 뭐냐 하면, 지구는 멈춰있는데 태양이 움직였다고 본 거예요. 사실은 그전에도 이게 아니라고 이야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말발이 서질 않았고. 그런데 갈릴레이 갈릴레오에 의해서 태양이 있고 지구가 움직인다고 봤습니다. 그럴 때 태양이 공전하는 것이 아니고 지구는 공전한다는 거예요. 태양도 움직이죠. 태양이 가는 걸 황도라고 하는데 19세기 초에 베셀이라는 독일의 천문학자가 망원경으로 지구의 공전을 다음과 같이 증명했습니다.

 

지구가 있고 별이 있는데 만약에 태양이 있고 지구가 공전한다면, 여기 A, B, C, D 지점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별이 하나 있는데 A 지점에서 별을 봤을 때 C 지점으로 움직인다면 그만큼 차이가 날 것이란 말이죠. 그 차이 나는 각도를 연주시차라 합니다.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말은, 지구가 도니까 차이가 나지 만약에 돌지 않으면 차이가 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차이가 나는 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빛은 파장으로 돼있거든요(혹은 입자). 파장으로 된 것을 조사해보면, 어떤 때는 빨강으로 보이고, 어떤 때는 파랑으로 보이고, 어떤 때는 편이가 없음으로 보인다 말이죠. 적색 편이는 길어지니까 멀어지는 거예요. 청색 편이는 짧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구가 이렇게 가게 되면 이쪽 파장이 파랑이 되고, 이쪽은 빨강이 되면서 스펙트럼에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변화가 일어나니까 지구의 공전이 맞는다는 겁니다.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은, 멀어질 수도 있고 가까워질 수도 있다는 것으로 태양이 도는 게 아니고, 사실은 지구가 돈다고 한다면, 이걸 마태복음에 그대로 적용시켜 보는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땅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모든 족보에 대해서, 아들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의견이 점점 더 빠져나간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아기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빠져나가요. 그럼 이건 멀어지는 거죠. 인간의 생각과 공유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은 그냥 멈춰있는데 주님만 홀로 잘 먹고 잘 살아라 야들아, 하고 쑥 빠지는 겁니다.

 

빠져나간 분, 주님이 중심인지 그냥 버티고 앉아 있는 우리 해석이 옳은지를 검토해봐야 돼요. 마태복음의 이런 관점정리가 먼저 검토돼야 되는 겁니다. 그동안 마태복음을 보실 때 어떻게 바라봤습니까? 뭔가 예수님 오셔서 의견 맞지 않고 그냥 빠져나가는 느낌을 못 느끼셨습니까? 울산 대나무 숲의 까마귀 나가듯이 분명히 뭔가 앉았는데 쑥 나가버렸는데 예수님 다녀간 뒤에 인간 세계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울산 대나무 숲에 까마귀 앉든 말든 변화가 없듯이 그냥 그대로. 예수님 다녀가도 우리는 역시 맛있는 것은 맛있고, 즐길 건 즐기고, 아이 낳고, 장가가고시집가고, 변화가 없어요.

 

그럼 마태복음이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말이죠. 오셔서 이상한 객소리하다가 나는 죽노라, 하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아버지여, 하면서 과대망상증 비슷하게 하고 가버렸다. 가고 난 뒤에 천지개벽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냥 그대로에요. 아무런 일 없어요.

 

그런데 마태복음에 보면 인간이 멈춰있고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게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나와요. 별이 움직입니다. 원래 별이 움직이는데 이상한 움직임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별의 움직임이라는 것은 하늘 길을 다니는 자체를 움직임이라 하는데 그 별이 인간이 사는 주거환경까지 들어옵니다. 별이 하늘에 그냥 계시면 되잖아요. 무슨 큰일 났다고 별이 일상적인 환경 속까지 들어온단 말이죠. 별이 인간을 보려고 왔느냐? 그게 아니에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별은 어디 있느냐 하면, 지구가 있고 별이 있으면 하나님은 별 저편에 있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서 안정되게 지구는 돌아가고 별도 제자리 잡고 돌아가고. 그래서 이게 정상이에요. 그런데 왜 별이 자기들 노는 하늘 동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고 들어오느냐 말이죠. 자칫하면 침대까지 들어올 판이에요. 생각해보세요. 별이 지목하기를 그 집 아니고, 미장원 말고 옆에 우체국, 거기야. 별이 그렇게 지목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집요? 아니, 빌라. 그 뒷집. 202동? 아니, 201동. 얼마나 집요하게 딱 꽂아서 찾아오느냐 말이죠.

 

별은 욥기에 의하면, 하나님 따로 계시고, 별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제자리에 박혀있고, 인간은 인간 자리에 박혀있고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서 허용된 활동대로 돌아가면 된단 말이죠.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 별이 움직였는데 인간세계까지 파고들어왔는데 뭘 보려고 찾아왔습니까? 도대체 어떤 인간이 있기에. 보통은 별이 주거환경까지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여기에 없어야 될 인물이 생긴 거예요.

 

없어야 될 인물은 그전까지 없었던 인물이에요. 이 말은 신원조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는데 열두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시는데 “누구야, 너?” 도대체 신원조회가 안 돼요. 주민등록이 안 돼 있어요. 요한복음 7장에서 바리새인들이 물었습니다. “실례지만 신학교 어디 나왔습니까?” 출생지도 모호해요. 베들레헴이냐, 갈릴리 사람이냐. 마태복음 13장 마지막 대목에 보면, 기껏 신원조회 한 것이 아버지가 목수라는 거예요.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남들 다 이야기하는 그 아버지와 엄마가 하나님의 절기에 따라 갔다가 잃어버렸고 사흘 동안 찾다가 결국 찾았는데 예수님이 양친께 하는 이야기 좀 보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습니까?” 만약에 제가 요셉이라면, “누구야, 너? 뭐야? 너 어디서 왔어?” 이럴 거예요. 사실은 알고 있지요. 마태복음 1장에서 천사가.

 

여기서 위기에요. 이 땅에 없으실 분은 없어야 돼요. 그게 우리가 살기 편하고 우리 상식대로 살아도 지장 없습니다. 왜 침입했는가, 에요. 왜 침투하셨는가? 침입이란 말은 마태복음 11장에 나와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이것은 그분이 이 땅에 개입하신 것은 이 땅을 흩고 속속들이 모든 체제, 사상들을 다 손대고 지나가면서 뭘 하느냐?

 

이번 강의 여덟 번째 제목을 미리 이렇게 정해봤습니다. ‘살 처분’ 오리나 닭, 돼지가 전염병 걸렸을 때 이걸 해요. 요즘에 하나 더 포함됐어요. 좀비. 좀비까지 살 처분합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살 처분 나옵니다. 신원조회도 안 되신 분이 괜히 뛰어들어서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살 처분하겠다. 그래서 참다못한 현명하신 유대인 지도자들께서 이런 정신분열증 환자는 용납되지 못한다. 마땅히 당연한 조치지요. 살해했습니다. 너부터 죽어라. 여기가 어딘데 까부느냐, 하고 죽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마태복음입니다.

 

살 처분당할 대상이 예수를 믿는다는 게 말이 되겠어요? 분명히 여기는 그동안 다른 예수였을 가능성이 많아요. 나를 저주하고 나를 완전히 없애겠다고 큰소리치며 예언하신 그분을 내가 믿겠다는 것은 분명히 그것 빼놓고 다른 걸 믿을 가능성이 있고,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남들 다 예수, 예수 하니까 예수가 뭔가 이익이나 가져다줄 줄 알고 겁 없이 예수를 불렀던 경우 등 하여튼 여러 가지 경우가 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 당시에 메시아를 학수고대했습니다.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고대했어요. 그 메시아는 시간의 주기를 통해서 오게 돼있어요. 유대인들에게는 시간의 주기인데 유대인 말고 다른 모든 민족들은 시간의 동질성, 그 내부에 항상 동질하다는 걸 이야기합니다. 시간의 동질성 앞에 모든 인간은 차이가 없다. 오직 시간은 동질하다. 거기에 반해서 유대인 말고 다른 모든 민족은 인간의 동질성이에요. 그 안에 인간 속에 신이 있어서 신을 믿는 인간들은 동일하다. 이런 철학으로 그들은 육천 년 문명을 이뤄왔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이집트 문명에서 모든 건축물들은 통로가 중요해요. 통로를 통해서 죽음의 세계로 인도함을 받아요. 이 땅은 아무것도 아니고 나그네 길이고 오직 죽음의 세계만 되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와 여기 사이에 바로 왕이 있습니다. 신의 아들, 태양의 아들이에요. 이게 바로 백성들을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피라미드를 비롯해서 죽음과 관련돼있어요. 사람은 죽으면 사라지지만 영혼은 영원하다. 미이라 만들어요. 언젠가 영혼이 돌아와 합체되면 영원히 살 수 있다.

 

헬라인들의 주거환경이 신전으로 돼있습니다. 신들은 전담하는 전공분야가 달라요. 박카스라든지, 제우스. 여러 가지 신들은 신전에 모음으로써 모든 변화를 고정시켜놓고 그 신에게 제사 드리면 헬라문화는 안정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잡한 것은 신들이 전담해서 처리해주니까 자기는 신만 믿고 안정하게 살면 되는 거예요. 중국문화 중심에는 조상이 있습니다. 특히 중국 남동쪽이나 타이완에서는 향 피우고 조상에 대한 섬김이 대단해요. 조상이 마을의 중심터가 되는 겁니다.

 

그럼 오늘날 현대인들은 뭐냐? 현대인들은 안정된 게 없어요. 불안, 불안해요. 그러면 인간은 뭐가 중심이냐? 방문이 중심이에요. 방문 닫고 컴퓨터게임만 하면 지가 중심이에요. 내가 중심이에요. 현대인들은 자기가 중심이에요. 옛날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겁니다. 있지도 않은 신을 믿었고, 사람은 살다죽으면 그만이지 왜 죽음에 대해서 벌벌 떨고. 번개 치는 신이 왜 필요해요. 피뢰침 하나면 다 막는데. 모든 병은 의학으로 해결하면 되는데. 불쌍하다. 몰상식한 무식한 조상들.

 

현대인들은 이성적으로 따져보니까 내가 곧 신이에요. 방문이 중요해요. 방문 닫고.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티비보고, 나 혼자 영화보고, 울고불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결혼이고 취직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예요. 방콕. 그러니까 안정성이 없지요. 불안, 불안한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인간뿐만 아니고 인간이 생각한 별은 별자리에 그 위에 하나님, 지상에는 나, 이런 안정된 체계가 별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다 틀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별은 사람 구경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없었는데 발생된 분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분이 누구냐? 아기 예수에요.

 

그러면 아까 그림을 봅시다. 별이 움직인다. 지구 중심에서? 아니, 별은 움직인다. 예수님 중심으로. 별마저. 지구는 있음의 전체성이에요. 마태복음 1장 족보 할 때 제가 언급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서 태어났다고 돼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 4절. 이 말은 뭐냐 하면, 여자에서 태어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의 전체성은 태어나더라도 남자에서 태어나야 돼요. 이 이야기 처음 듣습니까? 미리 당겨서 하면 안 되는데. 모든 딸이든 아들이든 전부 남자에서 태어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남자가 전체성이에요. 아담은 전체 인류를 대표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에서 태어난 법이 없어요. 남자에서 태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는 여자에서 태어났다고 돼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진리체제에서는 포섭되지 않고 포획되지 않는 신원 조회가 되지 않는 낯선 분의 등장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말은 이제 우리는 죽었다 이 말입니다. 살 처분 당했다. 우리는 죽었다. 우리는 버티지 못한다. 그분의 횡포에 버틸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분이 이 땅에 오시면서 사람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과 의논하고 상대한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태복음에 여러 번 찾아봤지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의논상대는 누구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에요. 제자들과 이바구한다고 해서 좋은 의견 청취하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이었어요. 예수님은 아버지하고만 이야기했단 말이죠. 이 말은 너희들과 상대하지 않아, 그런 뜻이에요.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과 상대한다고요? 다른 예수 아니에요? 다른 예수 같은데.

 

오늘날 성도는 예수님과 의논하는 상대가 아닙니다.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으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간이고, 예수님의 쓸개고, 예수님의 창자고, 예수님의 발톱이요, 예수님의 이빨이고, 예수님의 머리카락입니다. 그걸 예수님의 지체라고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사지. 문어다리, 오징어다리 열 개. 다리가 무슨 몸통과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백날 기도해봐야 우리 기도는 거절당합니다. 그 거절당하는 명칭이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해봐야 거절당합니다. 절대로 우리 기도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해봐야 철없는데, 뭐.

 

제가 어릴 때 옛날 촌에 있는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만 어떤 마을에 초가집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중에 기와집이 하나 있으면 나중에 저런 기와집 하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해봤지요. 지금은 옛날 기와집이 문부터 낮아서 못 들어가요. 가구 하나, 책상 하나도 못 들어가요. 난장이만 살았나. 난방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기와집이 욕망의 종착점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게 욕망의 마지막입니까? 욕망의 종착점이 왜 그리 자꾸 이어지는지. 또 다른 걸로 더 큰 걸로, 더 큰 걸로 계속 이어지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철이 없다. 현실 보는 눈이 왜 그리 좁은지 철이 없느냐고 이야기하지요.

 

성경에서 예수님 바라보고 병 낫고자 오는 사람은 철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예수님은 어떤 이유 때문에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붙들고 병 낫게 해달고 하니까. 왜 붙들어요? 빠져나시는 분이잖아요. 왔다가 그냥 가버린 거예요. “잘 먹고 잘 살아라. 너희는 죽었어.” 이렇게 빠져나가신 분이란 말이죠.

 

예수님께서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별이 멈춰 섰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여러분은 학교에서 이걸 많이 배웠을 거예요. 태양이 있고,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이라 해서 아홉 개의 행성이 돈다는 걸 배웠지요. 실제로는 이렇게 안 돌아요. 이건 인간중심입니다. 태양이 가게 되면, 설탕이나 단 음식을 갖고 가면 날파리들이 따라오잖아요. 태양이 가면 소용돌이치듯이 아홉 개의 행성들이 빙빙 돌면서 같이 따라가고 있어요. 실제로 이래요. 태양은 움직이고 있어요.

 

그러니까 동방박사가 본 별은 하늘에 박힐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중심이 지금 땅에 와 있잖아요. 그러면 별은 예수님이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졸졸 따라가야 돼요. 그런데 인간만큼은 뻘쭘하게 있습니다. 저건 뭐지? 저 인간 왜 나타났지, 하면서 아무것도 몰라요.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지요. 제자들이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믿음이 없는 자야. 다른 말로 하면, “너 어딜/누굴 쳐다보느냐?” 그런 뜻이에요. 믿음이 없는 자야 왜 의심하느냐? 지금 제자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의심 문제가 아니잖아요. 풍랑이 갑자기 일었다는 그 문제지 왜 의심을 해요. 저희들끼리 시기, 질투했습니까. 풍랑이 일어서 배에 물이 들어오고 빠져 죽게 됐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왜 의심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물론 그전에 풍랑아, 잔잔하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왜 풍랑은 예수님의 말을 듣게 됐어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리고 풍랑이나 별이라는 대자연은 예수님 중심으로 따라 가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혼자 자기들이 중심이고 우리가 스톱돼있다고 본 거예요. 내가 사는 땅은 영원무궁하리라고 생각하고 그냥 없는데서 왔으니까 이상한 소리하니까 죽여 버리고 손 털고 별일 없을 걸. 예언만 늘어놨을 뿐이지, 특히 마태복음 24장 예언 보면 너무 살벌합니다. 여러분 다 아시죠. 마지막 때 이 세상이 어떻게 깨지는지. 심지어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고 달이 어두워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특히 대전 겨울수련회에서 한 요한계시록 할 때는 우당탕탕 했지요.

 

[생명의 신호] 158페이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난리가 났다. 일곱 천사, 일곱 대접, 일곱 나팔. 그런데 우리 일상은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가끔 중국에서 황사가 날아올 뿐입니다. 영화관 속에서 자기들끼리 총 쏘고 인천상륙작전하고 난리 났어요. 그런데 영화관 소리가 바깥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 격차가 갈수록 심화됩니다. 마귀가 체포되어 유황불에 들어가는데도 조용합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홀로 일찍 죽임을 당하신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모든 인간들이 가담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인간은 남자에서 낳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자의 출생,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전체성의 자식입니다. 전체성은 전부, all, 모든 것의 자식이에요. 눈에 보이는 이것이 전부에요.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는 모든 것을 보완하고 보충하는 점점 더 허블 망원경보다 더 좋은 망원경 있으면 발견되는 플러스알파적인 요소지 이 요소 때문에 기본 본체가 흔들리거나 그럴 리는 없다고 여기는 전체성의 자식들이 오늘날 우리들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 자리가 중심이고 싶어 해요. 우리한테 문제 있다는 생각을 손톱만큼도 하기 싫어해요.

 

유명한 천문학자 호킹 박사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우주는 왜 있느냐고 하니까 인간이 진화의 최정점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주는 있다고 했어요. 더 이상 인간은 진화가 없어요. 우주가 왜 있느냐? 우주가 저기 있네, 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라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 우주는 상호작용에 의해서, 불교에 의하면, 화엄의 인연에 의해서 오늘날 우리가 생겼다고 이야기해요.

 

왜 그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느냐? 현대인들은 방문에 잠겨있는데 가끔은 심심하면 세상은 의미가 뭐냐, 죽는 것 다음에 뭐가 있느냐, 나란 존재는 어떤 의미냐? 늘 하는 게 아니고 심심하면 묻게 되거든요. 묻는 마지막 답을 과학자가 대답해야 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네가 바로 진화의 최정점에 있다. 네가 바로 신이라는 뜻이에요.

 

큰 바위 얼굴, 누군가 올 것이라고 여기고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만 결국 어느 날 나이 많고 큰 바위 얼굴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당사자였습니다. 소망하는 자가 곧 그 세계의 중심이고 주인공이에요. 이걸 세 자로 전체성. 남자가 모든 인류의 대표가 됩니다. 그럼 여자는 뭐냐? 전체를 받쳐주는 마이너스 남자에요. 여자는 없어요. 남자를 위해서 여자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창세기 2장을 인용해서 이걸 배필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여자가 왜 있는가? 남자를 돕기 위해서 있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여자가 있는 것은 남자를 깽판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게 돌보는 거예요. 남자는 자기 자리에서 완료가 되고 스톱이 돼버려요. 신도 예수도 삼위일체도 나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걸 깽판 놓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여자의 후손이 나오지요. 여자의 후손의 짝이 남자의 후손이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의 특징이 짝이 없어요. 성경 많이 봤지만 이건 안 보이든가요? 남자의 후손이라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에 이미 복속과 예속과 지배 속에 합류가 됐습니다. 남자 속에 여자가 포함되고 말았어요. 남자가 여자를 지배해놓고 두리번거립니다. 여자를 찾는 게 아니에요. 자기와 한바탕 붙을 상대자, 남자 없는지 찾습니다. 여자는 자기보다 급이 낮으니까, 자기 예속 하에 있으니까.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야 되니까.

 

그런데 여자의 후손이 등장했다는 말은 이건 남자의 후손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이 말은 인간이 아담의 대표거든요. 그 전체성을 파괴시키는 그러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여자의 후손은 여자가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은 남자에요. 요한계시록 12장에 여자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이 점을 좀 더 친절을 다하여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남성의 성질과 여성의 성질이 달라요. 남성은 자신이 전체성입니다. 자기중심이에요.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미진한 것을 전체성에 포함되지 않는 예외적인 것을 하나 둬요. 남자들이. 그걸 ‘신’이라고 합니다. 이 신을 남자가 상대해야 될 신으로 보는 겁니다. 남자가 전체고 남자에 포함되지 않는 하나의 예외가 있다. 남자를 되게 하는 신이 있다는 겁니다. 이건 신을 믿는 거예요, 신을 필요에 의해서 요청하는 거예요? 신을 요청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전체로 있음을 인정해주는 시다바리 신인 거예요.

 

현재 내가 남성으로서 전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걸 호응해주고 받쳐주고 남자가 여성을 지배하는 것도 합법화시켜주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 남자를 후원해주는 신을 하나 걸쳐놓은 겁니다. 그리고 그 신에게 다가가는 것은, 여성은 다가가지 못하고 여성은 반드시 남자한테 인수인계된 여자의 운명은 남자한테 일체 맡기고 남자가 신에게 다가가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것처럼 그렇게 느껴질 수 있어요.

 

그런데 여성은 뭐냐 하면, 남자한테 소속될 수도 있고 발을 뺄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여성에게 있는 걸 여성적 속성이라고 해요. 여성적 속성은 본인의 의사에 의해서 남자한테 매일 수도 있고 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럼 남자는 애가 타지요. 저걸 마저 잡아먹어야 되는데. 여성은 본인이 필요에 따라서 남자에게 용납할 수도 있고 싫으면 뺄 수도 있고.

 

그래서 라캉은 여성은 없다는 말을 했어요. 왜 없느냐 하면, 남자가 원하는 여성은 일단은 남성의 소유물로 거치고 난 뒤에 받아들이기 때문에 진짜 여성은 없는 거예요. 여성은 없는데 여성이 활개 치거든요. 그럼 저건 뭐지? 그걸 신비라고 했어요. 여성은 신비에요. 신비기 때문에 열 명의 여성을 거느려도 신비로운 여성은 자기 범주 바깥에 또 있어요. 열 명은 일단 아니야. 이미 남자가 다 돼버렸어. 그 너머에 또 하나 찾아야 돼요. 끊임없이 찾아요. 열한 명? 열한 명 끝났어. 열두 명 째, 열세 명 째.

 

여성이란 남자의 전체성에 문제 있음을 지적하는 거예요. 목사님, 그건 하나님이 지적해야지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미 남성과 한 패가 돼있기 때문에 소용없어요. 신과 남자가 한 패가 된 그 한 패마저 몽땅 웃기고 있다고 비웃을 만한 자유로운 영혼, 거기에 여성이 있는 게 아니고, 여성이 나타나고 등장해요. 있으면 안 돼요. 있으면 찾아가니까. 우연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지요.

 

믿거나 말거나. 마태복음 간단한 걸 그렇게 억지를 부리시면 그 억지에 동조하라는 느낌 주지 말라고 하는데. 여러분, 이건 친절을 다한 거예요. 억지가 아닙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한테 시비 걸고 싶어요. 정말 억지가 아닙니다.

 

우선 마태복음 1장 봅시다. 17절,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자, 헤아려 봅시다. 아브라함 1, 이삭 2, 야곱 3, 유다 4, 베레스 5, 헤스론 6, 람 7, 아미나답 8, 나손 9, 살몬 10, 보아스 11, 오벳 12, 이새 13, 다윗 14. 아브라함과 다윗까지 14대 맞지요. 맞는 것처럼 보여요.

 

그 다음 봅시다. 다윗 1, 솔론몬 2, 르호보암 3, 아비야 4, 아사 5, 여호사밧 6, 요람 7, 웃시야 8, 요담 9, 아하스 10, 히스기야 11, 므낫세 12, 아몬 13, 요시야 14, 여고냐 15. 왜 15가 됐지요? 왜 15냐 말이죠.

 

그 다음에 세 번째 14대 봅시다. 여고냐 1, 스알디엘 2, 스룹바벨 3, 아비훗 4, 엘리아김 5, 아소르 6, 사독 7, 아킴 8, 엘리웃 9, 엘르아살 10, 맛단 11, 야곱 12, 요셉 13, 그리스도 14. 14지요.

 

그런데 앞과 마지막 14대는 맞는데 중간은 15가 됐지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여기 6절에 보게 되면,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에요. 그러면 다윗 1, 솔로몬 2 하면 안 되고 우리야 1, 솔로몬 2 해야 되는데 우리야 자리에 우리야의 아내가 들어가요. 여자가 들어간다고. 그러니까 이건 남자의 전체성에서 전체성 세계 자체가 여자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거예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지금 지구가 움직이느냐, 태양이 움직이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세계 전체가 하나님이 도와주러 구원하는 게 아니고 이 인간들이 처음부터 누굴 졸졸 따라가야 돼요. 그분이 이 땅에 왔을 때는 이 땅 전체에 없는 존재로 신원 조회가 안 돼요. 없는 존재로써 와야 됩니다.

 

신원 조회고 뭐고 그냥 왔다고 하면 될 텐데 왜 그러냐? 문제는 여자의 후손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머지는 뱀의 후손이 된다는 거예요. 뱀의 후손이 되면 전부 다 살 처분돼야 돼요. 이게 마태복음 24장에서 지구 멸망의 타당성에 대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박살되는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마태복음에서 그걸 언급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믿어서 구원받자. 그건 마태복음에 있지도 않는 이야기에요. 천국은 침노하는 것이고 침입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도둑놈으로 와요. 담 넘고 와서 자기 백성 빼가는 거예요. 흥분할 게 아니고.

 

그냥 난데없이 누가 왔어요. 인간들은 자기가 중심이고 이 세계는 영원무궁하다고 자부하는 세계에 누가 날아 왔어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 플러스 하나, 어떤 괜찮은 인물 하나, 어르신 하나 온 모양이다. 같이 의논 맞춰서 잘 살면 되겠네, 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신 그분이 이 지구를 완전히 작살낸다고 했을 때 어느 누가 납득하겠어요. 제가 오후 설교에서 했지만 어떤 교회 철야기도 시간에 주여, 저를 저주하고 집안 말아먹게 하옵소서, 이렇게 철야 기도하는 사람 없다고 했지요. 그만큼 다른 예수 믿고 있는 거예요. 다른 하나님 믿고 있는 겁니다.

 

평소에 전체성, 남자 중심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을 남자 중심의 후손이 만나고 이바구한다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만날 수 없고 접촉이 가능하지 않아요. 그럼 안 되는 접촉을 어떤 식으로 되느냐? 그건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2강 [전진하는 경계]

(강의:이근호 목사)

 

 

마태복음에서 특이성을 끄집어내야 된다는 식으로 첫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첫 시간은 관점정리, 관점이 누가 중심이냐? 예수님이 중심이냐, 우리가 중심이냐? 예수님이 중심일 때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아니고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좋은 관계가 아니라서 제가 언급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가 좋은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뭐냐고 물으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좋은 관계라면 십자가라는 살해당하고 살해하는 그런 일이 없어요.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뭘 봐야 되느냐 하면, 십자가가 왜 일어났는가에 주목해야 돼요. 그리고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나는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할 때 십자가가 뭐냐 하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겁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각각 다른 세계를 고수하고 고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다른 세계가 뭐냐? 각각 나름대로 이게 전부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의 걸고 티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반발 기류가 있는데,

 

제가 반발이라는 말을 했지만 예수님 오기 전까지 반발 없어요. 잘해보자, 개혁해보자, 점점 나아지겠지, 인간의 지혜는 영원무궁하다, 좀 모르면 공부하면 되고 연구하게 되면 새로운 살 길이 나오겠지. 인간이란 좌절할 때마다 희망을 품었고 그 희망이 용기로 극복이 되었고 이제까지 문명이 이만큼 발전했기 때문에 희망을 꺾으면 안 된다. 이게 바로 인간 세계에서 소통하는 기본 원리에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하잖아요. 정주영 회장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오히려 시련은 더 나은 동기부여가 될 뿐이지 여기서 좌절하거나 무너지면 안 된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런 교육을 받아왔어요. 통하지 않으면 조율하면 되는 거예요. 조율한다는 것이 소통입니다. 인문학의 주제 아닙니까. 모든 인문학의 주제는 소통이에요.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더라도 대화로 풀게 되면 안 풀릴 게 없다는 겁니다. 참고 인내하게 되면 언젠가는 정답이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끝난 이야기다. 나는 너희들 정체를 이야기한다. 본질, 정체, 힘의 원천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언급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라는 말은 마태복음에는 먹혀들지 않아요. 그런 말 자체가 배후에 아무도 없을 때는 그게 돼요. 지금까지 내가 못해 왔지만 앞으로 잘하면 되겠지. 이건 인간 배후에 아무도 없을 때는 성립되는데 마태복음 4장에 가보면 벌써 광야에 사탄이 와 있습니다. 사탄이 와서 예수님과 이야기가 끝났어요. 그리고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집주인이 가구를 쥐고 있을 때 예수님이 담타고 와서 집주인을 꽁꽁 묶어놓고 그 가구를 빼앗아 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보여준다고 돼있어요. 마태복음을 보시면 의견 조율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됩니다.

 

마태복음이 어디 있느냐? 창세기 붙어 있는 게 아닙니다. 마태복음은 구약 끝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마지막 때. 마지막 때에 마태복음이 있는 게 아니고 마태복음이 마지막 때를 유발하고 생산해요. 마지막 때를 만들어냅니다. 인간에게 마지막이란 말은 그건 실례에요. 인간에게 희망을 끊는다는 말은 지금 살 필요가 없다는 말로 통하기 때문에 절대로 어떤 경우라도 절망적인 언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절망적인 언급을 했고 사람들에게 제거 대상이 됐고 죽었습니다. 죽었는데 끝까지 인간들이 몰랐던 것은 뭐냐? 신원 조회가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 손으로 죽인 사람이 누구였지?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메시아는 유대인들의 주기적인 시간 개념에 맞춰 납득이 되도록 오게 되는 메시아거든요. 따라서 메시아는 아니고. 그럼 뭐지? 마태복음 27장으로 이야기가 끝났어요.

 

어떤 사나이가 성전에서 행패 부리다가 경찰한테 잡혀서 사형 당했다. 끝. 그건 역사에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겁니다. 그런데 28장이 문제입니다. 안식일 첫날에 무덤에 가보니까 무덤이 비어있다는 거예요. 누가 훔쳐갔겠지. 금반지나 있을까 싶어서. 그런데 훔쳐갔다고 소문을 냈지만 실상은 훔쳐간 게 아니고 훔쳐갈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어 있어야 훔쳐가지 살아서 돌아다니는데 뭘 훔쳐가.

 

그러면 예수님이 죽었던 자가 살았다면 그를 죽였던 인간은 뭐가 돼요? 그 인간들이 죽은 자들의 집단이 되는 겁니다. 좀비가 되는 거예요.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은 죽은 자로다. 지금 마태복음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 처음 나왔다고 성경 한번 읽어보자고 해서 마태복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나올 때부터 졸기 시작해서 재미 하나도 없고 어릴 때 들었던 동방박사 나오는 것이나 재미있지 앞에 족보가 무슨 재미가 있어요. 누굴 낳고, 낳고. 나도 경주 이 씨 몇 대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부터 나열된 것은 모든 개념으로부터 분리되어서 떠날 개념과 남아서 심판받을 내용으로 연결되게 돼있어요. 1장에서 나온 것은 육이 둘로 나눠집니다. 육에서 나온 육과 성령에서 나온 육으로 나눠져요. 성령에서 나온 것은 마리아가 육이지만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을 잉태함으로 육에서 나온 자와 성령으로 나온 자가 이미 마태복음 1장에서 나옵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자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졸지에 육에서 나온 육, 그러니까 보통 인간들을 말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자식이 자식을 낳은 이들은 반대로 질문을 받아야 돼요. 예수님으로부터.

 

저들은 왜 저렇게 엉망입니까? 저들은 누굽니까? 질문을 반대로 해야 돼요. 예수님 보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너희들은 그런 질문할 자격도 없어. 육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들이 납득되지 않는 분을 등장시켜서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셔서 모든 인간들로 내가 누군지를 재정립하고 예수님 안목에서 다시 보게 하는 그 내용이 바로 복음이 되는 거예요. 이게 기쁜 소식이 된단 말이죠. 누구한테? 이런 소식에 대해서 아무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상체계를 부정하는 이런 인간을 절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게 복음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시절이 지나고 오순절에 사도들이 왔을 때 옛날 잘못한 것을 회상하고 기록하면서 그때는 복음이 아니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 보니까 이게 복음이구나. 그래서 그 사람을 성령으로 난 자라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난 자가 성령세례 받고 예수님 나라에 합류해야 될 하나님의 양들이 되는 겁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되니까 이제는 어렵지 않지요.

 

제 말이 맞는다면 성령으로 왔다는 것은 무엇을 경과해야 되느냐 하면, 육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줘야 돼요. 누구든지 내 의견에 토 달면 나는 참지 못한다는 것을 마음껏 육적인 본색을 드러내야 돼요. 그 중에 베드로도 합세했고 열두 제자도 동의했고. 베드로는 저주한다고 이야기했고, 노골적으로는 안 했지만 뒤에서 궁시렁궁시렁 이야기 다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같이 겪어야 돼요. 우리도. 이미 겪으시고 난 뒤에 오신 분도 있고, 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이 중에서 예수님을 제일 미워한 사람은 손들어보세요, 하면 다들 먼저 손들어야 돼요. 제가 가장 예수님을 욕했고 싫어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제일 싫어했어. 그런 자랑질을 해야 돼요. 그래야 십자가마을이지. 문제는 그걸 진행 중인 사람도 있다는 거지요. 나는 아무리 봐도 잘났는데 살 가치가 있어서 사는데 이걸 왜 살 처분한다고 하느냐?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인자,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아기 예수지요. 예수님이 오실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했다는 거예요. 이게 다잖아요. 이것 말고 뭘 또 해야 됩니까. 어떤 사람들은, 난 그런 사람 보면 답답해서, 그것만 하면 안 되고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려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손 못 들어요. 아무리 예수님 기다려도 나중 문제고 당장 코앞에 있는 돈 문제, 먹고 마시는 문제, 자식 키우는 문제, 피아노 레슨 문제, 그런 문제가 심각합니다, 라고 이런 소리를 해줘야 되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한 다리는 이 세상에 걸치고 한 다리는 하늘나라에 걸치고, 말이 안 돼요.

 

마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하나를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는 미워한다는 거예요. 사랑을 한다면 달랑 사랑만 할 수 없어요. 사랑은 반드시 상대적인 미움 대상을 유발하게 돼있어요. 사랑이 있는 곳에 미움이 있고 축복을 유발하는 곳에 저주가 있습니다.

 

복음이란 말은, 지금까지 제 강의가 어렵다면,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음 앞에서 전도, 선교, 헌금, 기도, 예배,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말고, 할 필요도 없고, 할 생각도 마세요. 그게 복음입니다. 오시는 분이 우리와 의논 안 합니다. 등을 두드리면서 열심히 해야지. 이런 게 아니에요. 베드로가 고기 잡게 해주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뭡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베드로가 제일 먼저 손들었어요. 나 같은 인간을 어찌 상대하십니까? 이건 주님의 격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잃어버린 찾아오신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 나와요. 주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울산의 태화강 대나무 숲에 까마귀 떼처럼 가버리겠다는 거예요. 이 땅에 머물러 출세시키겠다는 게 아니고 내 백성 잃어버린 양 찾아서 손잡고 떠나겠다는 겁니다.

 

의외로 복음은 기쁜 소식이에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하고 싶어도 할 재주가 없어요. 주님이 원하는 걸 할 재주가 없어요. 마태복음 5, 6, 7장에 나오는 법이 무슨 뜻입니까? 네가 지킬 만하면 지켜봐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 못 지키느냐? 마음의 문제기 때문에 못 지켜요. 시간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꿇어앉는 데 다리가 찌릿찌릿해서 그런 게 아니고 돈이 없어서 헌금 못하는 게 아니고 돈을 아무리 교회에 처발라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한테 다 들통 나서 그래요. 우리 마음구조 자체가 그래요. 따라서 되지도 않을 말씀을, 주께서 할 수도 없는 말을 하신 겁니다.

 

저한테 하는 질문이, “목사님, 기도 어떻게 합니까?” 주기도문이란 말하지 않는 기도를 말해요. 입 다물어. 그게 주기도문이에요. 주기도문에 대한 성취는 입으로 나불거려서 성취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유구무언입니다. 그것을 유발시키면서 예수님 홀로 다 이루기 때문에. 한 적도 없는 주기도문의 결과를 우리는 한 것도 없으면서 공짜로 혜택을 입게 돼있어요. 그게 바로 주기도문이에요.

 

모든 복음 안에서 내용은 부지런히 설치고 활동하는 것은 예수님 혼자 그렇게 했지 아무도 나대거나 돌봐주고 도와주는 것 없어요. 예수님 수고한다고 잡채해주고 탕수육해주고 예수님 발밑에서 성경 말씀 듣는다고 무슨 소용 있습니까? 오빠 죽으니까 자매가 나대서 예수님한테 대들고. 우리 오빠 왜 죽였습니까? 예수님이 이야기했습니다. 오빠, 안 죽었다. 죽였잖아요. 안 죽었다. 죽었잖아요. 안 죽었다. 죽었잖아요. 개념 또 틀렸네, 개념 또 안 맞네. 오빠가 죽었잖아요. 안 죽었다니까.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누가? 중심되시는 분이. 그런데 어떻게 변두리에 있는 날파리처럼 따라가야 될 우리가 거기에다 토를 달고 이의를 제기하는 게 되겠어요. 되겠어요, 하지만 토 안 달순 없고. 답답하니까.

 

마태복음 1장에서는 완전히 초 치는 거예요. 너는 안 돼, 라는 말 속에 안 되는 걸 내가 되게 해준다는 게 섞여있어요. 너희는 절대로 안 돼. 하지만 안 되는 걸 되게 할게. 섞여있는 걸 언약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시간입니다. 언약의 내용은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밖에 있는 것을 안으로 집어넣는 게 언약의 핵심이에요. 예수님 안에 있는 의는 바깥에 내고, 바깥에 있는 인간의 죄를 예수님 안으로 걷어 들임으로 죄가 의가 되고, 또 죄가 의가 되고 주께서는 죄를 재료로 해서 의를 생산하는 반복되고 회전하는 계속해서 가동시키는 그것이 언약입니다.

 

언약을 가동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죄가 필요하겠지요. 죄만 필요한 거예요. 모든 것을 율법으로 죄로 만드는 겁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쁜 소식이에요.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한테 관심 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해야 될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 언약을 가동시키는데 초점이 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모든 죄를 죄로 지적함으로써 자기 안으로 끄집어 당기면서 교류를 직류로 직류를 교류로 만드는 걸 트랜스라 하지요. 경상도 표준말로 도란스. 트랜스 역할을 하시는 거예요.

 

트랜스 역할, 언약적 역할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뭘 해야 되느냐 하면, 바로 차이 나는 계속해서 기존에 알고 있던 너희들의 땅 개념, 천국 개념, 율법 개념을 주께서는 틀어버리는 겁니다.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제자들끼리 예수님, 천국에서 누가 높습니까? 또 틀어버립니다. 어린아이 하나 데려옵니다.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아니하면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 이야기했어요. 이 소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짐과 똑같다고 했어요.

 

어린아이의 특징은 몸은 있으되 자아가 없어요. 몸이 있다고 해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재 첫 번째에 보면, 하찮은 감응체. [거미는 눈, 코, 입과 같은 감각기관이 없어서 보거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그럼 어떻게 사는가? [그저 거미줄 꼭대기에 앉아 파장을 타고 몸에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할 뿐이다. 진동을 느끼자마자 정확히 먹이에게 달려들어 거미줄을 감아댄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이 있어요. [모든 권리가 박탈당한 채.]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얼마나 사셨습니까? 평생 어떻게 사셨습니까? 선택했다고요? 아닙니다. 선택은 선택할 항목 한해서만 골라잡았어요. 인간은 처음부터 선택에 의해서 태어난 게 아닙니다. 내가 남자가 될지 여자가 될지 절대로 선택해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이미 기본 모체가 선택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인생은 한 마디로 말해서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내가 교사가 되지 않고 판사가 된 이유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내가 30등 했는데 1등을 한 것은 공부가 제일 쉬워서 어쩔 수 없음. 공부가 그렇게 재밌어. 재미있는 걸 재미있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단 말이죠. 내가 저 여자와 결혼한 것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여자분들 결혼한 남자를 보세요. 그 남자가 그때 돼서 다시 만난다면 또 그 남자에요. 어쩔 수 없어요. 어쩔 수 없음이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걸 사도 바울의 복음에 의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딱 적합한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맞춤도 그런 맞춤이 없습니다. 딱 맞아떨어져요.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죄인 된 것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자기 죄 문제 책임을 자기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제발 부탁하는데 자기한테 채찍 들고 때리지 마시고 자학하지 마시고. 제가 오전에 그런 설교했습니다. 내가 아픈 것은 가짜 자아기 때문에.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제목이 길어요. 김광석의 노래에요. 아픈 자아는 가짜입니다. 진짜 자아는 중심 되는 주님께서 따로 꼬불쳐놨어요. 하늘나라에. 이미 우리는 이 땅에 죽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느니라. 골로새서 3장 3절. 사도 바울이 외쳤던 복음이 이거였거든요. 왜 가짜 붙들고 그렇게 탄식하고 걱정하고 수고하고 염려하느냐 말이죠.

 

빈 껍질인데. 무슨 껍질에 연연하고 거기에 미련과 애착을 왜 갖느냐 말이죠. 모든 걸 다 투자하고. 심지어 돈까지 다 쏟아 붓고. 그게 뭐라고. 가짠데. 그러면 교회에다 돈 낼까요? 교회도 가짠데 가짜한테 돈을 바쳐요. 좋은 소리할 때는 좀 받아 적으세요. 내가 가짜면 내가 좋아하는 교회도 가짜에요. 그럼 진짜는 어디 있습니까? 그걸 왜 찾아요. 가짜 자체가 재료인데 언약 안에서

 

가짜에 대해서 탓하지 마세요. 자기가 가짜 됨을. 주께서 그렇게 유발시킨 거예요. 가짜가 있어야 진짜가 있을 것 아닙니까. 가짜가 중심이고 진짜는 뺑뺑이 도는 거예요. 여러분, 실험해볼까요? 음식 들고 수풀에 가면 어디서 날아왔는지 날파리들 달라붙잖아요. 이 세상은 예수님 가는 곳에 귀신이고 마귀든 간에 모든 75억 인구가 다 따라오게 돼있어요. 서로 곁눈질하면서. 실례지만 어딥니까? 이슬람교. 나는 천주교. 이러면서 따라온다고. 다 헛된 종교, 아무 의미도 없는 종교, 기독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믿든 안 믿든 간에 그리스도께서 합력하여 안 믿게 하고 믿게 하고. 그게 마태복음이에요.

 

출애굽기에 보면, 유월절에 어린양 잡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심판을 면제를 주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심지어 애굽이라도 어린양의 피가 있으면 그 피를 보고 심판을 면제해주는 거예요. 어린양이 언약입니다. 그런데 어린양이 그냥 천사 왔는데 웃고 있는 게 아니에요. 피 흘린 어린양이에요. 피를 왜 흘렸겠어요? 그 집에 있는 주인과 식구들 때문에 피 흘렸잖아요. 양은 흠 없는 양이에요. 흠 없는 양이 죽었다는 말은 우린 흠 있다는 말이잖아요. 제발 흠 좀 있으세요. 부탁하는데. 없으면 발굴하든지. 흠이 있으면 있을수록 주께 감사할 게 될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 강의 제목이 [전진하는 경계] 또는 경계선. 육이오 전쟁 때 시시각각으로 남북 경계선이 자꾸 이동하지요. 남쪽에서 치고 올라올 때는 경계선이 백두산을 향하여 전진하지요. 전진하는 경계선. 예수님 자신이 움직이면서 완전히 색깔들이 다 드러나요. 도미노게임에서 넘어지는 순서에 따라서 무너지지 않은 색깔과 무너지고 난 뒤에 뒷면 색깔이 연속적으로 바뀌잖아요.

 

마태복음 1장에서 27장까지 연속적으로 가면서 색깔들이 바뀌어요. 점잖고 상식이 있고 합리적이고 모든 것에 모범이 되는 유대인, 바리새인 세계에서 단지 예수 그리스도란 사람이 등장해서 지나가면 말썽이 나고 소동이 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내가 온 것은 화평을 주려함이 아니고 불화를, 분쟁을 유발시키려 왔다. 그런 예수를 믿고 있으니 여러분들도 참. 누구와 분쟁입니까? 다른 이북 사람하고? 아니에요. 시어머니와 며느리 하고. 한 마디로 말해서 딸이고, 고모고 집안 식구가 원수니라.

 

아이고, 이 웬수라고 하잖아요. 말 안 듣는 딸이 늦게 들어오고 하면, 이 원수, 하지만 그건 예뻐서 귀여워서 그런 소리하지만 진짜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원수가 된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침투하지 않았으면 천국 오지 않았으면 우리는 손에 손잡고, 아버지가 널 지켜줄게. 엄마가 널 보호해줄게. 아빠, 사랑해요. 온갖 재롱을 다 떨지요. 까르르 웃고. 그리스도만 와 보세요. 원수의 집단, 집합체가 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책을 보고 있는 중입니다. 마치 지뢰를 밟는 것 같아. 어디서 또 무엇이 터질지 몰라요.

 

전진하는 경계라는 것은 점차 갈수록 개념에 차이를 두는 겁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는 육에 대한 개념이 영과 다르다고 했지요. 2장에서는 지역이 달라요. 갈릴리 지역이 메시아냐, 아니면 예루살렘이냐. 3장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앞으로 올 것이냐, 이미 왔느냐는 문제, 세례 요한을 통해서. 4장에 보면, 권력을 누가 쥐고 있느냐? 인간이냐, 인간 배후의 악마가 쥐고 있느냐? 5장에 보면, 진정한 율법은 어떤 율법이냐? 산상설교, 5장에서 7장까지 나옵니다.

 

8장에 보면, 누가 이스라엘이냐? 백부장이 이스라엘이냐, 이스라엘 자체가 천국 가느냐?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백부장이 천국 가고 본 자손은 쫓겨날 것이다. 쫓겨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못 들어간다는 게 아니고 그동안 무던히도 인간들을 속여 왔다는 거예요. 여러분, 저처럼 하면 구원받는다고 목사들이 수시로 매주, 성경 공부할 때마다 속여 왔다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 목사는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까? 이야기하신다면,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잖아요. 그게 붙고 안 붙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믿음이 중요한 거예요. 제가 여러분이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여러분을 믿게 하시는 게 중요한 거예요. 목사가 믿게 못해요. 그냥 자는 참에 잠 깨다가 저런 의견도 있을 수 있다고 참고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도 있네. 그렇게 보는 견해로 참고로 해보지. 그 정도, 그 정도라도 해주기 바랍니다. 어차피 믿는다고 해도 안 믿고, 안 믿는다는 말도 안 믿어요. 얼마나 믿었으면 안 믿는다고 스스로 겸손을 떨겠습니까. 얼마나 자기가 죄인인 걸 알면 믿고 있으면서도, “목사님, 저는 절대로 안 믿습니다.” 이 사람 믿는구나. 모든 게 복잡해요.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니까.

 

사람이 말을 할 때 정상인이 돼요. 프로이트 이전에 정신학자들의 씨름했는데 프로이트 이전부터 있었어요. 어떤 소녀가 이상하게 아무 이유 없이 몸이 아파요. 그런데 어릴 때 있던 이야기를 의사 앞에 말로 털어놓는 순간 증상이 없어졌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주체는 말을 통해서 주체가 다시 제자리를 잡는 거예요. 우리 말하면 안 돼요. 정신과에서 말하는 정상인지는 모르지만 천국은 못 가요. 뭔가 있는데, 하는 말을 고맙게도 주님이 마태복음을 통해서 우리 대신 아버지한테 말을 다 해놓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아는 게 맞잖아요. 주님이 이야기해줘요. 우리 대신.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린 옆에서 맞장구치지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이에요. 풍랑아, 잠잠하라. 사실은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그 이야기에요. 이런 것. 십자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용서를 받는다. 제가 원했던 게 그 말이에요, 라고 뒤에 맞장구나 치면 돼요. 말 한 마디로 해서 구원받는 것 없어요. 고백해서 구원받으면 나중에 고백서, 사본 돼서 온 인터넷에 다 떠돕니다. 그것 베낀다고.

 

9장에 보면, 죄 인식이 달라져요. 내가 온 것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해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계심으로 말미암아 중심 되는 예수님이 어느 쪽에 붙는가가 중요해요. 부족하다고 철야하는 그들에게 붙지 않고 죄인에게 붙지요. 그래서 죄의 개념을 예수님 중심으로 새롭게 인정해요. 10장에 보면, 새로운 이스라엘 나옵니다. 열두 제자를 뽑으니까. 11장에 보면, 새로운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라고 이야기할 때 세례요한의 역할은 끝났어요. 그 역할을 열두 제자가 인수인계합니다. 장차 성령 받게 되면.

 

12장에 보면,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와요. 안식일에 노동해도 되느냐는 문제에요. 안식일에 뭘 하고, 뭘 안 하고 안식일을 지킨 여부가 나와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인자 모시는 것, 인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그게 안식일의 완성이다. 안식일의 주인이 주님이라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안식일 지키는 게 아니고 이미 안식일 돼버렸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까? 안식일이 이미 나타났어요. 나타났기에 지킬 필요 없다고 고백하는 그 자가 나타난 안식일과 연결 돼있는 사람입니다. 그럼 안식일에 그만한 혜택이 있어야 되는데 혜택이 뭐냐? 안식일에 손 마른 자가 멀쩡하게 낫는 것.

 

13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말로서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비유로 설명하지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없는 나라인데 예수님의 활동 여부에 따라서 그 자리에만 등장하는 출현하는 출몰하는 나라. 그 다음에 14장에서는 새로운 구원받는 자가 등장합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12년 동안 혈루병 걸린 여인이 낫게 되는데, 마태복음 14장 36절 보겠습니다.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게 교재에 나옵니다. 이 대목을 인용해놨지요.

 

제가 교재 올린 것이 유월 말에 올렸습니다. 7월에 라는 드라마가 나왔어요. 지금 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만화세계와 실제세계가 소통이 돼요. 모니터를 통해서. 이게 7월에 나온 거예요. 왜 이걸 강조하느냐 하면, 제가 6월말에 올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과 하늘나라를 연결하는 유일한 모니터 역할을 하는 거예요. 주인공이 만화 속에 있다가 화가 나서 현실 세계로 넘어왔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할 수 없는 다른 세계와 연결 창으로써 움직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손을 대면 저쪽 주님만 갖고 있는 천국의 능력을 이쪽에서 흡수가 돼요. 천국의 능력, 언약의 능력은 죄를 의로 바꾸는 능력이에요. 죄는 오염된 겁니다. 죄와 오염이란 것은 예수님 중심의 하나님 의와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장치에요.

 

그 장치가 언약장치인데 여러분 발전기 원리를 아시죠. N극과 S극 사이에 코일을 감아서 왕복시키면 여기서 전류가 흘러요. 왕복시키는 힘은 수력이나 화력이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방법을 사용하셔요. 오염과 거룩 사이에 몸을 집어넣어요.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이 나오고 용서가 나와요. 그러기 위해서는 전 세계를 구조를 새로 바꾸어야 돼요. 거룩과 오염된 두 구조로 구분해야 돼요. 이게 바로 전진하는 경계에요. 앞으로 점점 더 나아가는 경계선을 유발시키는 거예요.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내시고 하는 말이, 이게 하나님과 세우신 새 언약이라 했습니다.

 

이쯤해서 다시 언급합니다. 마태복음에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우리는 소용돌이처럼 말려들었음을 확인만 하면 돼요. 마태복음뿐만 아니고 마가, 누가, 요한복음, 성경 전체가 다 그렇지 뭐. 그게 복음이에요. 사시는 대로 편하게 사시되 고민하지 마세요. 어차피 가짜니까. 진짜는 따로 있으니까. 진짜는 예수님이 알아서 다 준비해놨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왔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게 관심사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회복에 관심 없어요. 이스라엘은 가짜거든요. 이스라엘 말고 잃어버린 양이란 말이죠. 누구한테 잃어버렸겠어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버림받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온 거예요. 이스라엘은 자기를 의의 나라라고 주장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의의 나라에서 계급적으로 제일 낮은 계급이 뭐예요?

 

카스트 제도에서 제일 낮은 계급이 수드라잖아요(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하여튼 접촉하면 안 되는 천민들, 불가촉천민들. 이스라엘에서 불가촉천민이 세리와 창기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너희들보다 세리가 먼저 하늘나라 간다고 했습니다. 그게 겸손하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사고방식이 나는 가치 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다고 하는 이상은 그건 아무리 마음을 낮추고, 낮추고,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백날 내려놓아도 소용없어요. 내려놓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내려놓으면 안 생깁니까?

 

마태복음 3장에서 바리새인들이 오니까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도 구원받으려고? 잘난 네가? 어디서 이 동네 룰도 모르고 구원받으려고. 너희들이 구원받을 것 같으면 돌멩이도 구원받겠다. 오는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에게 욕설인 듯 욕설 아닌 욕설 같은 욕설. 도대체 구원하겠다는 건지 뭔지 모르겠어요. 너희들이 왜 왔어? 죄인들만 오는 곳인데 잘난 너희들이 왜 왔는데? 심사하러 왔어?

 

경계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집어넣음으로써 주변 상황이 바뀝니다. 착한 것, 덜 착한 것, 보다 더 착한 것, 이렇게 구성돼있던 계급이 전부가 더럽고 오염되고 죄고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렇게 이야기했지요. 속에서 나오는 게 더럽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들어가는 족족 그걸 더러운 것으로 바꾸는 메커니즘이 날 때부터 인간 속에 장착돼있는 거예요. 살인자의 피입니다.

 

내 것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물건 건드리는 것 아닙니다. 내 자존심, 내 가치, 이만큼 살아왔는데 값을 쳐주지 않는 모독적인 발언에 대해서 경멸하는 것에 대해서 가만있을 위인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심화돼요. 경계선이 전진하니까.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이야기합니다. 얘들 있는데 이런 욕해서 죄송합니다만 경건한 욕이라 괜찮습니다.

 

1강, 2강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관점을 정리해야 된다. 우리가 잘 살고 있는데 약속을 메시아 오기를 기다렸는데 주께서 오셨다, 라는 관점이 잘못 됐다는 겁니다. 우리가 괜찮은데 주께서 합세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너희들이 기다린 메시아부터 모든 것이 네가 죄인인 걸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건전하고 괜찮다고 배후에 있는 악마가 시킨 대로 사주한 대로 그냥 그러려니 정상이니 이렇게 해서 영원토록 천국까지 가는 거야. 이렇게 집단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이 어떤 낯선 분, 있지도 않은 분, 정말 희한한 탄생으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돼버렸어요. 그래서 마태복음의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엉망진창인 세계를 같은 관점으로 동의한다고 수용할 때만 복음의 관점을 가졌다고 할 수 있어요.

 

엉망진창인데 이걸 개선하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 시간을 마치면서 이야기합니다. 제발 엉망진창을 손대지 마세요. 이유가 뭐냐? 앞으로 살면 살수록 더 엉망이 돼요. 아직 엉망의 밑바닥을 구경도 못했어요. 살면 살수록 엉망에 더 엉망이 되는 걸 여러분이 시원한 마음으로 감상이나 하면 됩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멀었습니다. 아직 내일까지 못 살아서 그렇지 내일 살면 좀 더 진전 봅니다.

 

일 년 더 살면 앞으로 십년 더 살면, 치매 걸려보세요. 기가 막힙니다. 사람 아닙니다. 곤충인지 짐승인지 좀비인지 구분 안 됩니다. 살 처분 되도 본인은 싫어하지만 가족들은 대환영할 거예요. 그 사람 때문에 남들이 힘들어 죽겠어요. 그런 분들도 젊을 때는 다 착하다고 내세웠고 옷도 근사한 것 입고 가락지도 끼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거기에 분주한 겁니다. 우리 곁에 누가 왔다 갔는지 신경도 안 써요. 나만 안 건드리면 항상 나는 좋은 사람으로 남한테 베풀 준비가 만반의 돼있는 윤리적 도덕적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이고 그들이 바로 마귀의 자식입니다.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3강 [법과 의미]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끝 시간에 어떤 분이 정말 좋은 질문을 하셨어요. 사실 그 질문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질문이냐 하면, 마태복음 1장에 족보에 여자들이 등장하는데 다른 여자들은 거론하지 않고 왜 우리야의 아내만 거론해야 되는가? 여자들이 족보에 네 명 등장하거든요. 그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질문이 나와야 설명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질문을 마무리하고 세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에서 마지막 끝이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태어난다. 마지막 끝이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다면 앞에 있는 족보가 성령에 의해서 꼭 태어나야 될 이유가 돼요. 보통 인간들 족보와 달라야 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하면 일반 족보와 같아 보이죠. 그런데 마지막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되면 그 앞의 족보가 우리가 생각했던 인간들이 흔히 아는 일반적인 족보가 아니란 걸 감 잡아야 돼요. 어느새 그 족보가 노선을 이탈했습니다. 분명히 광주로 가는 기차가 어느새 부산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족보 자체가 특별히 제시하는 이유는 그러니까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강조하면서 족보를 나열했단 말이죠. 교회 오면 누구나 처음 보는 마태복음 1장부터. 우리가 아는 상식을 뛰어넘어요. 요셉을 멀리하고 요셉이 없는 상태에서 성령에 의해서 마리아가 임신해야 앞의 족보와 맞아 떨어진다는 걸 강조하는데 우리는 왜 그래야 되는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 성령에 의해서 태어난다는 걸 정당화시키는 족보로 등장할 수 있느냐 말이죠.

 

그것이 바로 6절에 나와요.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전에 여자 이름, 첫 번째 유다는 다말에게서, 두 번째는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세 번째가 보아스는 룻에게서. 여기 여자 이름이 나올 때 이 여자는 이미 남자에게 예속된 여자입니다. 이 세계는 남성의 세계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는 의도적으로 뭐가 없느냐 하면, 요셉과 정혼했지만 요셉은 없어요. 이 말은 무슨 의미냐 하면, 세계 최초로 밝히는 바입니다. 정혼하지 않고 마리아가 성령으로써 아기 예수를 임신한 게 아닙니다. 요셉을 만난 적도 없는 상태에서 마리아 혼자서 아기 낳는 게 아니에요. 요셉과 정혼 상태에서 분명히 약혼자가 있는 상태에서 임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남성의 세계에 개입한 거예요. 마리아도 곧 있으면 결혼해서 남자의 아내로서 살 여인입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을 넘어서기 직전에 마리아가 임신을 해버렸단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태어난 경계선은 남성의 세계가 과연 전체성, 전부인지 문제 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이건 남성에서 남성으로 내려오는 남성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면 여자의 후손은 짝이 없다고 했지요. 여자의 후손이 있고 남자의 후손이 있는 게 아니에요. 여자의 후손이 있고 상대역이 뱀의 후손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 이것은 달리 말해서 남성이 전부가 되는 입장에서 남자에게 예속된 여성 말고 달리 여성의 후손이 등장했다는 것은 남성과 여성을 비교하지 말고 남성은 일단 여자의 후손과 비교되는 뱀의 후손이라는 설계도를 가지고 남성이 전부를 차지하는 전체 세계에 대조해보란 말입니다.

 

그러면 남자의 세계는 장차 남자 없이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와 투쟁적인 관계에 놓이도록 계속 역사가 진행된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마지막 때입니다. 그건 누가 정하느냐? 그건 선지자가 정하지요. 말라기 선지자가 정한 겁니다. 마지막 선지를 보냅니다. 엘리야를 보내요. 이것이 구약의 마지막 대목이에요. 그래서 마지막 선지자가 나타난다면 이의 없이 마지막 때가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마지막 때 하나님께선 아들을 통해서 모든 걸 말씀했다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가 언약의 안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런데 이방인인 우리 입장에서 마지막 같은 소리하고 있네. 예수님 태어난 지 이천 년이나 지났는데 마지막이 언제 오는데. 조금 있으면 리우올림픽도 하고 마지막 낌새도 보이지 않아요. 마지막 낌새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걸 마지막이라 하느냐? 낌새가 안 보인다고요? 그것은 마태복음에 돌발적으로 계속해서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걸 우리가 채택하는 거죠.

 

그래서 어제 첫째 시간에 관점을 바꿔야 된다. 관점을 어떻게 바꿔야 되느냐? 우리가 있고 하나님이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정지돼있고 우리는 그 주변에 따라가서 예수님을 위해서 항상 거기서 우리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가 뭐냐? 별도 거기에 박혀있고 나도 거기에 박혀있는 거예요. 별이 가만있다가 이 지상에 누가 등장하니까 별이 거기로 쏠리더란 말이죠.

 

별 따라 동방박사가 왔고, 동방박사만 온 게 아니에요. 동방박사를 호위무사처럼 보호한 게 있었습니다. 그들이 꿈에 나타난 천사들이죠. 하늘나라는 굉장히 바빠요. 천사 긴급 투입하고, 테러 진압반 투입하고, 호위무사 투입하고, 어린양 왔다고 모든 시나리오가 어린양 중심으로 짜여지는 겁니다. 없던 중심이 등장한 거예요. 없던 인물이 등장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것은 인구에 +1, 숫자 하나 더 보탠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든 인간의 숫자가 전체성에 속합니다.

 

제가 강의하면서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제일 이해 못하는 게 ‘전체성’이란 단어 같아. 전체성이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에 호응이 되고 그것을 긍정하고 인정해주는 전체성 속에 정보로 플러스해서 보태게 되는 거예요. 예수? 그 예수가 지금의 나를 더 안정되게 만드는 데 있어서 협상하고, 타협하고 이의 없다고 치고 의견조율해서 이 정도 예수라면 우리 편에 넣어줄 수 있다고 해서 수입한 그 예수.

 

이 전체성을 허물어지지 않아요. 아주 단단하면서 예수라는 정보 하나 추가해서 우리 속에 집어넣을 때 그 전체성은 끄덕도 없는 거예요. 이게 전체성이에요. 사람들은 어떤 데이터를 원하고 정보를 원하는 겁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말고 우리가 모르고 있는 초월적인 요소를 메시아가 와서 제공해준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추가해서 받아들여서 우리가 하늘나라 가는데 더 확실한 길을 찾는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용납하겠다고 그 전체성을 안정되게 지키려고 한단 말이죠.

 

그런데 그 전체성이 마리아로 인하여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천사가 대동하고 동방박사가 이동했고 별이 따라 왔고 거기에 대해서 헤롯왕이 갑자기 발작해서 베들레헴에서 두 살 아래 아이들 다 죽이고 하는 이런 일련의 작업은 이 전체성에 포함되지 않는 이상한 쪽이 허락도 없이 침입했다는 거예요. 침범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비상 걸린 거예요. 그 사람을 용납하다가는 자칫하면 전체성이 다 허물어져버려요. 그러면 전체성이 가짜가 되고 그걸 관리했던 남성의 세계는 가짜가 되면서 남성의 세계가 어디로 가느냐? 뱀의 세계와 합치되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제자들은 몰랐지요. 마태복음,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얼마나 엉터리 같은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보좌하고 따라다녔는지의 기록입니다. 그 기록이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자기가 엉터리 같이 살았던 하나하나가 복음이 될 줄이야 사전에 예상도 못했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도 복음이 될 줄이야.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함으로써 베드로는 사도가 된 겁니다. 배신 없는 인간은 주의 종이 될 수 없어요.

 

여러분이 아는 사도 바울 있지요. 그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열 살 때 가말리엘 문하에 갔고, 28살에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다고 예수님 만나서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 31살에 사막에 갔다가 그리고 40살까지 다소라는 곳에 박혀있다고 바나바가 인간 만들려고 데려와서 안디옥에서 1년 동안 같이 목회하다가 바나바와 42살 때 1차 전도로 터키 지방에 갔고, 45살 때 2치로 터키와 그리스 지방을 돌았고, 3차로 간 데 또 가고 그동안 있었던 교회 실패담을 담아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서를 쏟아내었고, 마지막에 구제금 들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52살 때 잡혀서 결국 67살 때 참수 당했는지 죽었지요.

 

그럴 때 그 사도 바울을 우리는 진짜 사도 바울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속으로 이렇게 합니다. 흥! 칫! 뿡! 우리는 껍데기를 보는 거예요. 나는 주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자꾸 나를 보지 말고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가지고 노신 거예요.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성령 받은 모든 이들이 나처럼 되는 거예요. 두 개의 자아가 생기는 겁니다. 하나는 가짜고, 하나는 진짜고. 한쪽 자아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돼있고, 보장돼있다는 말은, 어떤 행위라도 어떤 실수와 실패라고 그 속성이 변경되지 않는 위치에 올라가 있고, 한쪽은 맨날 실수하고 맨날 짜증내고 반발하는 그러면서도 목숨 끊어져 죽는 얼마든지 버려도 되는 고물, 고물 같은 걸 가지고 우리가 모여 있는 거예요. 제자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다윗에서 어떻게 남자 없이 태어난 게 정당화되느냐? 다윗이 둘로 나눠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나야 될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다윗과 그리고 왕의 자격으로 하나님께 대적하는 다윗으로 새롭게 등장하면서 여기에 우리야 장군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6절에서는 족보가 인간의 육에서 육으로 이어지는 연속되는 족보가 어느 순간부터 육이 아니고 성령에서 마리아로 태어나는 영적 족보로 노선을 바꾸는 그 지점에 다윗 자리에 우리야를 집어넣어요. 그러면 남자가 둘이 됩니다. 그 뒤에 솔로몬이 나와요.

 

솔로몬 아빠가 다윗이냐, 우리야냐 하는 문제입니다. 육적으로는 다윗이 되겠지요. 그러나 마리아가 남자 없이 여자의 후손의 세계를 형성하는 그런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남자를 없애버리는 새로운 육의 증거물로 태어나는 것이 솔로몬이에요. 다윗과 밧세바에서 먼저 태어난 아이는 죽어 버립니다. 죽고 난 뒤에 죽은 자리에 새로 태어난 아이가 솔로몬이에요. 이 솔로몬은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 다윗에 내장돼있던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솔로몬이 오는 데 여기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우리야가 되고,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우리야의 아내에게서,이렇게 됩니다. 그러면 숫자를 다윗부터 세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부터 세서 14대를 맞추는 겁니다.

 

남자를 둘 나와요. 다윗과 우리야가 나온다니까요. 다른 여자들, 다말에게서, 라합에게서, 룻에게서, 여자 이름이 나오지만 우리야의 아내는 밧세바가 없어요. 우리야의 아내는 괄호의 아내에요. 육으로부터 죽음을 당했으니까 죽음의 아내, 죽은 자에서 나오지 아니하면 성령의 족보에 가입될 수 없다는 원칙이 서버립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난 뒤에 성령의 세례의 완성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필요 돌아가셔야 돼요. 죽은 자에서 나온 영이 아니면 우리는 죽은 족보에서 노선 변경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죽었던 자와 함께 죽고 죽은 자와 함께 했다는 이유 때문에 함께 살아날 때 그걸 로마서 6장에서는 연합이라 하고 세례라고 하는데, 우리는 바로 죄의 종에서 의의 종으로 위치, 신분이 바뀌는 겁니다. 지금 알고 듣는지 분간이 안 되는데

 

성령이 왔다는 건 한 마디로 이거에요. 너, 죽었어.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살아있으니까 마이크 들고 있지. 살아있는데 어떻게 죽었느냐 말이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죽은 자가 어떤 실수를 하고 어떤 실패를 하고 남한테 욕을 하더라도 그건 죽은 자기 때문에 죄책을 묻지 않아요. 죽은 놈을 또 죽입니까?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한테 죄책을 묻는다는 게 말이 되겠어요? 예수님, 이리와. 왜 과속했어? 이게 말이 돼요?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진짜 하나님 앞에 나와도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수치는 범죄가 그대로 남아있을 때 수치를 당하는데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두 번 다시 더 이상 우리에게 저주라는 것이 오질 않아요. 저주를 불러도 저주가 오지 않아요. 사도 바울은 어느 정도로 용감한 줄 알아요?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이여, 제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랑해주세요. 심지어 제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이게 바로 구원받은 자의 여유입니다. 넉넉하거든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원했던 게 아니고 주님이 원했던 바가 내 속에 장착돼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모든 코스가 성령에 의해서 가는 것처럼 예수님이 갔던 모든 코스가 성령에 의해서 가는 것처럼 성도가 이 정도 됩니다. 성도가 헌금 내고 복 받고 그게 성도가 아니에요. 성도는 어느 정도냐? 누구도 정죄할 수 없는 거예요.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겁니다. 사람 죽이고 교도소 갔다고 해서 누구 하나 거기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는 겁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그게 성도의 신분이에요.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은 이미 죽은 노선에서 산 노선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조건 하에 그렇습니다.

 

방금 이게 진리거든요. 이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나오면, 그걸 인식론이라고 합니다. 인식론은 진리가 아니에요. 새벽에는 은혜 받았는데 오후 2시 되니까 또 짜증나서 싸웠어요. 그건 인식론이에요. 왔다갔다해요. 목사님, 만약에 치매 걸려서 예수 안 믿으면 어떻게 해요? 그건 인식론입니다. 치매 걸리게 하신 것을 치매 걸리기 전에 미리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치매 걸려서 무슨 허튼 소릴 하더라도 치매와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처음 끝 발이 나중 끝 발이에요.


시작하신 분이 끝까지 책임진다. 빌립보서에 나옵니다. 우리한테 일을 맡기지 않아요. 시작하신 분이 자기 일로 시작했기 때문에 마감도 자기 일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인식론은 문득문득 자기의 인식론적 잘못을 들춰내면서 시작부터 내가 아니지. 바보, 바보. 이것을 점차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어제 강의 중에서 얼른 지나갔지만 중요한 말을 했어요. 우리가 말을 해야 되는데 그 말을 예수님이 대신 이야기해준다는 말을 제가 했어요. 그게 바로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성경 말씀을 아무리 해도 설명할 수 없어요.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가 말할 것을 대신 말씀해줍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이야기하신 분은 네가 아니고 네 속의 성령께서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가 뭐냐?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그러니까 주께서 참새도 기르신다. 그 말이야. 끄집어낸 이야기가 성경에 있는 말 그대로 이야기해요. 그 뜻이 뭔데?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 뜻이 그 나라 그 의를 구하라는 뜻이야. 그래 맞아. 내가 하고 싶던 말이 그 뜻이야. 항상 마감재가 말씀으로 증거해요. 그 말씀을 내가 잘 설명할 순 없어요. 하지만 말씀을 전파하게 되면 상대방이 믿든 말든 성령께서 알아서 하는 거예요. 우리가 알아서 믿은 게 아닌 것처럼 성령께서 오신 것처럼 그들도 성령께서 알아서 우리처럼 행함도 없이 구원받게 하시는 매개체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겁니다.

 

전도나 선교에 대해서 우리가 걱정, 염려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삼천 명 목회하고 천국 가나, 평생 두 명 목회하고 천국 가나 똑같은데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 하느냐 말이죠. 여름에 땀 뻘뻘 흘리면서 삼계탕 해서 하루에 손님 백 명 받아서 하나, 손님 하나도 없이 자기 식구만 삼계탕 먹으나 구원받기는 마찬가진데 왜 그렇게 가게 성업하려고 길길이 신경 쓰느냐 말이죠.

 

인생이란 것은 끝에서부터 다시 거꾸로 사시면 되는 거예요. 지금부터 가는 게 아니고 이미 끝 지점에서 되돌아와서 구경하듯이 사는 겁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을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그처럼 이미 폐허화된 세상을 되돌아보는 식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게 성령 가진 자의 여유입니다. 돈 가진 자의 여유만 흉내 내지 말고 성령 가진 자의 여유도 흉내 내세요.

 

이번 강의 제목은 [법의 망토]입니다. 망토는 겉옷처럼 뒤집어쓰는 것. 법의 망토라고 제목을 단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누구와 싸웠는지 적을 찾아내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겁니다. 법은 혼돈에 개입돼요. 어린아이 몸이 혼돈입니다. 어린아이는 질서가 잡히지 않아요. 혼돈에 법이 추가되면 여기서 의미가 생깁니다. 존재의 의미죠. 존재의 의미가 시간이 흐르면 나의 역사가 돼요. 존재의 의미가 환경을 만나서 투여, 투사하면 여기서 권력이 생깁니다.

 

현재 이천 년 인문학 역사가 달랑 이것 하나입니다. 반 페이지도 안 돼요. 이것 하나가 전부입니다. 여러분 잘 오셨어요. 문화, 사회, 정치, 경제, 전부 다 딱 이것 하나에요. 몸에다 혼돈에다 법을 집어넣습니다. 의미가 생기는 거죠. 어린아이가 뭐라 하면, 그래 엄마 좋다 이 말이지. 주변에 있는 어른이 재단을 해요. 의미를 규정해버립니다.

 

우리 손녀딸이 있는데 4개월째인가 우연찮게 엄마, 했어요. 그러니까 사위가 아이가 벌써 엄마의 의미와 단어가 일치된 줄 착각해서, 아이 착하다. 나는 그 다음에 아빠,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부지, 이러는 거예요. 사위가 부산 사람입니다. 그 다음부터 엄마는 쑥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안 하고 있어요.

 

숟가락으로 먹어야지 손으로 먹는 것 아니야. 혼돈에 법이 제공됩니다. 법은 선과 착함과 옳음과 그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법은 혼란스러우냐, 평화로우냐, 그게 문제에요. 모든 인간의 법은 옳고 그름과 관계없어요. 잡범들, 도둑질하고 편의점에서 훔치고 그런 것은 잡범에 속해요. 진짜 국가법에서 중요한 것은 공안법이고 지식법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닙니다. 혼돈 상태가 되면 안 돼요.

 

어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10시 이전에 들어오라고 법을 낸다는 말은, 10시 이전에 들어오면 착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말이고, 10시 이전에 들어와야 가정이라는 질서체에 질서가 잡히는 거예요. 그래놓고 아버지는 11시 반에 들어오고 12시에 들어오고 그래요. 그렇더라도 나는 어기더라도 너는 지켜야 돼. 그래야 질서가 잡혀요.

 

법은 혼돈에서 질서로 바뀌는 겁니다. 그래야 의미가 생겨요.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다. 나중에 어른이 돼서 어떤 행동을 할 때 이런 행동을 해선 안 돼. 왜?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실망하겠는가. 그게 존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과도하게 되면 노이로제 걸리고 정신병 걸리고. 어릴 때 과도하게 사랑한다든지 방치한다든지 하면 노이로제 걸리고 신경증에 걸리는 겁니다. 정신분석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사람들은 과거는 망각하고 잊어버렸지. 프로이트는 그런 소리 들으면 미칩니다. 망각한 게 아니고 억압됐다는 거예요. 억압된 것이 나사가 풀리면 그것이 욱하는 성질로 튀어나옵니다. 과도하게 간섭 받은 아이는 초조하기 짝이 없어요. 가만있어봐, 가스는 껐나? 청소는 했고? 내가 휴대폰을 어디 뒀지? 내가 이런 말을 했는데 실수한 건 아닌지 다시 가서 사과할까? 사과했는데 안 받아주면 어쩌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그게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프로이트란 사람과 그 제자 라캉이 있는데 프로이트는 이 사람은 정신과 의사니까 생물학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것은 번식과 관련돼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욕망은 번식과 관련돼있어요. 최근에 도킨스란 사람은 말하기를 인간은 dna의 운반체에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인간은 껍데기에요. 번식이기 때문에 인간은 항상 짝짓기 욕망이 있는데 그것으론 사회에서 못 사니까 사회가 혼란스러우니까 이걸 계속 억압하는 게 윤리와 도덕이고 자라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 교회에서 배운 것, 그리고 신이란 이름으로 내면화된 모든 것이 바로 억압된 거예요.

 

그래서 학생수련회에서 철없는 전도사가 여러분 예수 이름으로 새 사람 됐으니까 막걸리 먹어도 됩니다. 학생들은 전도사님이 막걸리 먹어도 된다는 말은 막걸리가 허용된다는 말이지 나중에 벌겋게 되고. 얼마나 억압됐겠어요. 그 부모로부터, 가정으로부터, 학교로부터.

 

그런데 라캉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정신적 현상은 짝짓기란 욕망에 억눌린 게 아니고 말을 안 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어릴 때부터 말로 법을 줬기 때문에 너무 과도한 법이나 너무 방치된 것으로 인하여 자기 존재의 의미를 몰라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라캉의 입장에서 이상적인 사람은 말을 주고받는 대화의 상대를 찾으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남자나 여자 입장에서 대화가 되는 상대를 선택할 것이냐? 이건 라캉 쪽이고. 뭐래도 예쁜 게 최고다, 하는 것은 이건 프로이트 쪽이에요. dna운반체니까. 저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괜찮은 dna 운반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sns에 보면 꼭 못 생긴 것들이 글을 잔뜩 올려서 좋아요, 엄지 척. 얼마나 젊은 사람들이 외로운지,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왜 자꾸 찾아요. 한영애 노래입니다. 잘 있었니, 임창정의 <소주한잔> 전화 걸어서 안부를 왜 물어요. 자꾸 대화 상대를 끌어당기는 거예요. 왜? 어릴 때 자기 존재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 말씀보다 이걸 더 잘 듣고 있네. 다 말씀과 관련돼있습니다.

 

이 의미로 자기 확장에 나섭니다. 존재의 의미가 되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잖아요. 마태복음 18장에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 했지요. 어린아이는 몸은 있으되 자아가 없지요. 자아가 없으니까 남에게 의존할 필요 없어요. 그냥 맡기면 되니까. 같은 18장에서 베드로가 이런 질문을 해요.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용서하면 됩니까? 베드로는 자기 한 사람과 저 한 사람, 두 명을 이야기해요. 예수님은 용서를 의미하면서 둘이 아니고 삼이 개입될 때 문제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얼마나 용서해 주는지, 하지 말고 어떤 임금에게 신하가 있었는데 그 신하에게 많은 빚을 탕감해줬어요. 그런데 탕감 받은 그 신하는 자기 종한테 돈 50원, 100원 그것 갚지 않았다고 옥에 가뒀어요.

 

그러면 제삼의 인물이 개입되지 않으면 용서라는 게 성립되지 않아요. 용서는 내가 할 수 없고 저쪽에서도 할 수 없어요. 용서는 제삼자가 따로 출몰해서 용서의 진수를 보여주게 되면 우리는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미 용서받은 자가 되기 때문에 남을 용서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말은 중간에 예수님이 가로챈 거예요. 예수님의 모든 말은 자신만이 지키는 거예요. 그 당시 유일하게 성령 받은 분이기 때문에. 성령 받은 분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게 돼있어요. 내가 나서게 되면 두 종류의 다윗에서 한 종류의 다윗으로 변해버립니다.

 

다윗은 양을 횡령한 자에게 네 배나 갚으라고 했지만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어디 하나님 앞에서 법을 거론하십니까?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법이 없이 살아가야 될 사람이에요.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은데. 법 없이 살아가는 자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껏 법의 저촉을 받고 거기에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운전했는데 과속에 걸렸어요. 기도의 응답입니다. 과속해서 걸린 것과 오늘밤에 낙원에 가는 것과 전혀 상관없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경찰이 거기 있는 이유가 네가 기대한 것이 어긋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늘 평생 경험하라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참 이런 말을 하는 제가 잔인한 것 압니다. 얘 성적 내려가도 구원과 관계없다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제가 알거든요. 지금 이것이 우리가 세상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의미가 환경을 만나게 되면 권력을 낳습니다. 권력이 질서체가 되는데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인데 뼈대도 없는 네가 감히 우리 집안의 아들을 넘봐? 막장 드라마에 나오잖아요. 봉투 내밀면서 이것 먹고 아기 지우고 유학 가라고 보냅니다. 이게 권력입니다. 어디서 박사학위도 없는 것이 우리 교회에 부목사로 오려고. 이것이 교회라는 것이 자체적인 의미가 생기고 환경을 조성해서 권력체로 만든 겁니다. 그 안에서 질서 지키고 교회법 생기고.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처하는가? 이걸 치는 거예요. 응시. 바라봄입니다. 응시라는 말은 그냥 바라봄인데 제 뜻은 그게 아니고,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게 돼있어요. 내가 바라보고 있고 저 사람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이건 평범한 거예요. 그런데 응시는 뭐냐? 내가 찾을 수도 없는데 다른 분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내 속에 계속 살아있을 때 그게 바로 응시라는 겁니다. 원인을 찾을 수 없어요. 내가 왜 이렇게 불안한지 아무 일 없는데 왜 근심, 걱정이 되는지 아이 다 키웠는데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차 조심하라고 하는지. 그래야 내가 편한지.

 

내면화된 법이 우리 속에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아무리 완벽을 갖추어도 응시를 의식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인간이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 상처입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칭찬하고 적들이 하나도 없는데 불안, 불안해요. 원인을 찾을 구석이라고 있어야지. 그런 낌새도 없어요. 분명히 최적의 에어컨이 다 됐는데 잠이 오지 않아요. 왜 잠이 오지 않는가?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나쁜 징조라고 이미 법적으로 내면화돼서 그래요. 잠이 안 오면 안 오는 채로 천국 가면 되지 왜 잠을 자야 됩니까? 이게 자체적으로 권력화

 

응시에 대해서 교재를 봅시다. 4페이지 중간에 보겠습니다. [응시의 욕망의 우리가 속한 세계의 질서를 언제나 넘어선다는 사실로부터 응시의 공포는 시작된다.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세계-질서를 파괴하지 않는 한, 즉 우리 자신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는 한 응시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게 되는 것이다.]

 

응시를 지우려면 나도 같이 지워진다고 해서 응시를 지울 것인가, 같이 동반해서 파멸할 것인지 선택한다는 그것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불안하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신이시여, 왜 저를 몰아세웁니까? 더 이상 어떻게 완벽하게 살 것을 요구하십니까? 더 이상은 못합니다. 누가 뭐랬어요? 혼자서 그런다니까요. 신이시여, 예수님이여, 그것만은, 아들만큼은 못 내놓겠습니다. 안 내놓으면 되지, 뭐.

 

하나님께서 걱정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트라우마가 박혀있는 것을 걱정하는 거예요. 행동 똑바로 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자꾸 주님께서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마라, 무시로 기도하라, 복음으로 원수를 대적하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니라, 있는 줄로 족한 줄 알아라.

 

사도 바울의 모든 권면과 행동은 제발 너 자체에 대해서 기대와 희망을 손을 놔라. 내가 이미 손 놓은 걸 너를 니가 무슨 수로 그걸 쥐고 착한 인간 만들겠다고 그렇게 신경 쓰느냐 말이죠. 내가 포기했는데 너도 같이 포기하면 되잖아요. 자기 포기가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 그 모든 말씀은 주님께서 이뤘기 때문에 이제는 무엇을 버릴 것이냐 알려주기 위해서 버릴 고물을 이래서 못 지켰어, 이래서 못 지켰으니까 버릴 건 버린다는 취지로 주셨는데 우리는 고물을 가져다 색칠하고 예쁘다고 하는데 냄새 나는데 뭘 예뻐요.

 

그래서 그 뒤의 말이 중요합니다. [응시에 대한 대응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무당들이 행하는 굿판을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굿은 세계의 심연(공백)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초월적인 힘들을 인간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심연 속에서 발산되는 초월자의 응시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욕망을 달래기 위해 인간이 마련할 수 있는 제물들(이미지들)을 준비하는 것이 바로 굿이라는 행위의 본질이다.]

 

제물들, 괄호 열고 이미지들, 성당입니다. 교회입니다. 파이프오르간이고 철야기도입니다. 모든 성당과 교회, 절간이 굿판이에요. 좋다는 뜻 아니에요. 살풀이 굿이에요. 살이라는 것은 무당이 살을 쏜다고 이야기해요. 무당은 세계를 에너지로 보기 때문에 기로 보기 때문에 그 기가 우리 내부에서 균형을 깨기 때문에 병에 걸린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병에 안 걸리고 정신 느슨하게 놓으면 스트레스 받으면 암에 걸린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무당이 이미지화 시켜서 굿판을 벌이는 거예요. 악귀야, 나오너라. 무당이 하는 그 이야기가, 환자가 그래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야. 그걸 무당이 대신 해주니까 갑자기 몸이 가뿐해지는 거예요. 한 500만 원 날렸습니다. 내가 못 흔드는 대나무를 대신 흔들어주고 내가 못 노는 작두에 대신 뛰놀고. 무당은 숙련됐기 때문에 함부로 따라하면 안 돼요. 하여튼 무당은 돈만 보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그런 효과로 깔끔하게 낫는 겁니다. 이천만원, 삼천만원 바칠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이 너무 천박스럽고 정말 부끄럽지요. 그걸 대체한 것이 바로 교회, 성당, 절, 이런 겁니다. 점잖지요. 이걸 중심으로 한 게 뭐냐? 예수님 당시에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 욕해도 유대인들 참았습니다. 사려 깊고 배려하고 단독행위하지 않고 의견조율하면서 침착하기 짝이 없는 그런 합리성을 가진 배운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결정하기 이전에 전통적인 해석은 어떻게 했는지 차분하게 심사숙고하고 세밀하게 조사해서 성경 말씀을 해석했던 전통적 해석법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욕해도 꾹꾹 참았어요. 뭐 때문에 그랬습니까? 법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괜히 쑤셔 건드렸다가 혼란만 더하면 안 되니까. 평화가 중요하니까. 했는데 기어이 못 참고 터뜨린 사건이 있었으니 예수님이 어디를 건드렸습니까? 법의 본부, 아지트가 있어요. 그게 바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을 헐어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 더는 못 참는다. 참을 만큼 참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해서 죽인 겁니다. 죽일 때 최소한으로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 내부자 고발을 이용한 겁니다. 배신자를 찾았고 가룟 유다가 적절했고 음모가 있었고 단독으로 만났고 거기에 은밀한 거래가 있었고 밤에 조용한 시간에 경찰 보내서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 한 사람을 없애서 나라가 조용하다면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돼있지요. 그런데 그 의미를 예수님이 이렇게 바꿨습니다. 한 사람 내가 죽어서 있지도 않은 새로운 이스라엘이 형성된다면 한 알의 밀알이 돼 주마. 똑같은 십자가 사건을 두고 서로 상반된 의견을 내놓게 됩니다. 이게 바로 노선이 바꿔지는 거예요.

 

그럼 율법의 망토는 권력에 대해서 행사하는 것이 법에서 나왔고 법은 혼란과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서 법적으로 돼있는 겁니다. 권력이 이렇게 되게 되면 개인을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바로 교재에서 거미 이야기 다음에 나오는 어설픈 목격담 이전에 하찮은 감응체와 공포 속의 체제, 그 이야기가 권력 이야기

 

 

시간이 넘었는데 10분 쉽시다.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4강 [온전한 의]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응시라고 했는데 응시를 뭐라고 했는가 하면, 보통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게 되면 보이는 사람이나 사물을 판단하게 돼요. 판단을 했을 때 결론이 나올 겁니다. 사람이 뭔가 본다는 것을 지각이라고 하고 지각을 하게 되면 이해를 하게 되고 이해를 하게 되면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지각하고, 이해하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결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에요. 결론을 내렸으니까 그 결론을 결론1이라고 한다면 그 결론에 의해서 처음에 했던 이해를 하게 되면 이해2가 되고 그 때 내가 느꼈던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지각1에서 지각2로 바뀝니다.

 

바뀌면 거기서 새롭게 이해를 하게 되면 이해3이 되고 결론1에서 결론2, 다시 결론3으로 바뀝니다. 그 결론3에서 다시 또 들어가요. 이렇게 내린 결론가지고 소급해서 ‘과거에 나는 이렇게 했다.’ 가 되어버리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한 행동은 합리화되고 정당화되는 겁니다. ‘나는 이런 행동을 했다.’가 아니라 ‘그런 경험을 했어야 돼.’ 이렇게 돼버려요. 누가? ‘내가, 내가 경험을 하는 것이 옳았었어.’ 그렇게 돼 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서 자꾸 뭐가 생기는가 하면, 권력이 자꾸 누적이 되는 거예요. ‘건드리지 마. 나는 과거의 모든 것이 현재의 내가 되기 위한 합리적인 절차였어.’ 이렇게 돼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권력이라는 것이 이렇게 생기는 것이에요. 거기에 시간이 첨가되면 이것이 역사가 되고, 찬란한 우리나라의 역사, 우리 교회의 역사, 우리 집안의 역사가 되는 겁니다.

 

역사라는 것이 나왔으니까 역사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또 하나의 뭐가 나오는가? 법이 나와 버려요. 이것이 전부 다 서로가 서로를 보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보게 되면 여기서 권력이 나오지요. 권력체가 나오니까 나왔던 사람이 또 등장하고 또 등장하니까 이게 전부 다 눈에 보이는 권력 체의 투쟁이 되고 마는 겁니다.

 

이런 대표적 권력체가 북한, 신천지, 다단계, 대기업, 이런 것들, 병영, 군대, 학교, 병원, 물론 교회도 포함되고요. 이 권력 체 자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나라 자체가 권력체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권력체가 되기에 여기서 자발적인 충성과 복종이 생기는데 그 이유는 내가 여기 존재하는 의미가 권력체가 있기에 나는 거기에 소속되었다는 점에서, 그게 없으면 내 존재의미가 날라 가버립니다.

 

이게 심각한 굴레인데 이러한 심각한 굴레에서 어느 누구도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딜레마에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낯섦. 낯섦이라는 것은 원인 없는 결과. 원인 없는 결과를 완전히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결과가 나오기 위해서 원인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 자기원인을 자기권력 체에서 찾아요. 찾아야 그 권력 체에서의 자기존재의 이유가 있기에, 그리고 정당화되기 때문에.

 

자, 어떤 의미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찾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새벽기도를 연속적으로 40일 나왔는데 애 성적이 많이 올라가더라. 그러면 이것은 인과관계가 성립됩니다. 40일 했는데 5등이 올라갔으면 비례해서 80일 동안 하게 되면 10등 올라가고. 그러면 200일 기도한다면 아예 천정을 뚫을 거예요.

 

성경에서는 그냥 행함이라고 하지만 그냥 행함이 아니고 존재의 의미는 바로 내가 생각한 자기 자신에 대한 법적인 것을 바탕으로 존재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이 법, 법 자체에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드디어 산상설교, 산위에서 설교를 하시면서 법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해요. 모든 세상은 법으로 만들었다. 시작 자체가 그래요. 모든 세상은 법으로 만들었고 이 세상 마감은 그 법이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켜질 때 완전체, 완벽한 것이 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 온전한 의가 있다는 말은 결국 무슨 뜻이냐 하면, 필히 심판이 따른다, 그런 뜻이에요. 그렇다면 법이라 하는 것은 온전한 의를 이루지 못할 경우에 법으로 처벌을 하는데 이 처벌이 온전한 처벌로 이어짐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의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을 제대로 처벌하는 그 자체가 ‘역시 법은 완전해.’라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법을 날리는데 너희는 이제 죽었어.” 그런 뜻이에요. 내가 전하는 이 법은 너무나 완벽하기에 일점일획이라도 법을 못 지킨 사람에 대한 처벌은 그야말로 가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산상설교가 5장, 6장, 7장이 나오는데 7장 마지막에 뭘로 마감이 되느냐 하면, 홍수로 마감이 돼버립니다. 모래위에 지은 집은 다 무너뜨려요. 그 전에 더 무서운 말이 나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있는데 나는 모른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다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제 이야기한 살 처분이지요. 다 죽이는 거예요. 사람 나고 법 난 것이 아니고 법 나고 사람 난 거예요.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자를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12장에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는데 모든 법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자라는 것이 뭐냐? 풀이하면 사람의 아들이잖아요.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에요. 사람이 될 수 없는 분이 지금 사람으로 오셨다는 그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로 올 이유가 없는 분이 사람의 아들로 왔다. 이 말은, 기존에 사람이라고 우기는 너희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사람일 수가 없다는 뜻이에요. 자기 자신을 가로막은 막이지요.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요새 하는 W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면, 만화 속의 세계와 만화를 쓴 작가의 세계가 있는데, 현실은 만화를 쓴 사람의 현실이 현실인데 착각하기를 만화속의 세계가 진자 현실2로 등장합니다. 만화를 그리는 작가의 딸이 만화 속으로 넘어오니까 강철이라는 인간이 그 딸의 신원조회를 하는데 나오지를 않아요. 멜기세덱반열에 있는 것처럼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아무것도 흔적이 없어요.

 

병원의 레지던트라는데 그런 것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 병원 자체가 없어요. 드라마대사대로 하면 맥락이 안 맞아요. 원인결과가 맞아떨어지지를 않아요. 그러면 뭐가 부정되느냐 하면, 이 현실자체가 우리한테 ‘우리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의심하게 하는 겁니다. 왜? 우리 속에 신원조회가 안 되는 사람이 끼어듦으로서 우리 자체의 붕괴의 조짐이니까. 그러다가 이쪽 세계(만화 속)에서 이쪽 세계(현실)로 넘어가는데 성경에서는 넘어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로 가로막아 버려요.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키지 아니하면 이쪽 모니터를 통해서 가상세계에서 진짜세계, 이걸 실재계라고 하는데 상징계에서 실재세계로 넘어갈 수가 없어요. 죄 때문에 의의 나라에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가면 되잖아요, 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이미 나 자체가 바뀌어서 가버려요. 그래서 내가 가고자 하는 그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함몰되고 그 나는 날라 가버렸어요.

 

그러면 지금의 나는 뭐냐? 십자가이후에 있는 성령에 의해서 새로 지음 받은 나가 지금 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마르다 오빠도 마찬가지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살게 하는 겁니다.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죽고 난 뒤에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났잖아요. 그래서 살아났을 때 누가 놀랐습니까? 유대인들 다 놀랐고, 그리고 누이동생들 다 놀랐습니다. 그리고 보는 우리도 다 놀랐어요.

 

유대인들이 놀라서 예수님만 죽이려 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살아난 나사로 죽이겠다고 요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이 세상이 성도에게 그렇게 압박을 가하는 거예요. 지금 돈 떼먹고 도망갔다든지 혹은 죽이겠다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성경에 보면 나사로 죽이겠다고 하는 겁니다. 왜? 신원조회가 되지 않기에. 원인결과가 매치가 되지 않아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인자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의 막이 되어서 오지 말라는 거예요. 너희는 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결국 알지 못한다. 너희로 하여금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천국입구를 가로막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대학교 선교단체 이야기와 정반대에요.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이것을 이야기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 말 들으면 올 수가 없다는 것이 마태복음 13장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4절에 보면,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20세기 초에 브래드라는 신학자가 있었는데 그 신학자의 고민이 뭐냐? 왜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쳐놓고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귀신에게 당부를 했는가? 그게 그 사람에게 평생 풀리지를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내린 결론이 뭐냐? “예수님은 사실 메시아가 아닌데 메시아 흉내를 낸 사람이다. 메시아 흉내를 냈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걸 마치 메시아 본연의 기능인 것처럼 조작을 했다.”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왜 갈 수가 없는가 하면, 구원받는 자아는요, 예수님의 작업이 원인이 되고 그 결과의 결실물로 나와 준 그 사람이 아들의 나라에 갈 수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나무가 완료가 되고 포도나무의 열매의 자격으로서, 포도나무의 가지에 붙은 자격이 돼야 갈 수 있는 거예요. 만일 우리 쪽에서 목숨 걸고 간다면 주께서 말립니다. “베드로야, 아직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다. 너는 목숨을 바쳐도 절대로 올 수 없는 곳이 처소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가 목숨을 내놓을 테니까 같이 가자고 하는 거예요. “네 목숨 그냥 가지고 있어.” 헌금 한다고, 십일조 한다고 가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짓거리를 해도 못가는 곳을 주께서 따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갈 수 없는 곳에 가기 때문에 우리는 면류관도 반납하면서 모든 영광을 주께서 받아야 된다는 고백을 영원토록 할 수 있는 거예요. 영원토록. 그것도 멈추지 않고, 싫증내지 않고 영원토록 할 수 있는 거예요.

 

만약에 조금이라도 자기가 기여한 바가 있다면 천국 가서 생색 낼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는가? 우리 이름은 없어요. 죽은 자는 이름이 없어요. 없기 때문에 누구 이름인가? 산 사람 이름으로 가요. 누가 살았어요? 예수 이름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에 나오고, 사도행전 2장에 나오잖아요. 예수 이름으로.

 

“진정 살았다는 것은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 있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물로 지금 내가 앉아 있습니다, 서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이야기가 너무 기니까 짧게 “믿습니다.” 하면 돼요. 너무 길면 입만 아프니까 그냥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면 된다는 그 말이지요. 내가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하게 하신 일인 것을, 늘 일을 할 때는 몰라도 일이 터지고 난 뒤에 돌이켜 보면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자아가 등장한다면 기존자아는 교체해야 돼요. 기존자아는 권력에서 나왔거든요. 권력에 존재의미가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권력을 정통으로 공격합니다. 권력을 공격하면서 그 권력이 가짜 권력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뭐가 안 나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나오지 않기에. 그러면 의가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당신이 어떻게 아는가? “자, 내가 법을 이야기할 테니 의가 나오는지 한 번 봐라.” 이렇게 하면서 기존의 권력이 뭐냐?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일단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멘트를 날리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기준, 일종의 높이뛰기입니다. 이번 올림픽에 이신바예바선수가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높이뛰기의 바를 걸쳐버리는 거예요.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걸쳐놔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해서 바리새인을 제일 높은 바로 설치해버립니다. 바리새인이 이신바예바 선수에요. 최고입니다.

 

그 바리새인이 이신바예바선수처럼 선봉에 서고 그 뒤에는 바리새인을 본받기 위해서 열심히 훈련하고, 노력하고, 자기 법을 내면화화고, 상시화 시키기 위해서, 툭 치면 의가 나오고, 툭 치면 의가 나오고, 자동기계처럼 의가 나올 수 있도록 훈련과 훈련을 거듭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수련회에서 하는 짓이잖아요. 목 다 쉬도록 기도하고. “목사님, 기도하면 10초를 못 넘깁니다.” “훈련하면 5분이 됩니다.” 그러면 목표는 5분 동안 해도 지치지 않는 기도. 그렇게 하게 되면 5분 동안 기도가 돼요.

 

5분 동안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10분짜리 성도가 참석하게 되면 “5분은 되는데 10분이 안됩니다.” 그래서 10분 동안 기도하려면 또 열심히 새벽기도 하면 10분이 되고 15분이 되거든요. 두 시간짜리 오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요?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 정점까지 간 사람들입니다. 모든 훈련교습 안이 다 들어 있어요. 경건의 훈련을 그렇게 시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시키면 시킬수록 존재의 의미의 강도가 더 세밀해지기 때문에.

 

‘나 이 정도야.’라고 하는 것은 그 정도마저 버리기가 더 힘들다는 뜻이에요. 헌금 10만원 하다가 2천원 내 보세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요? 그만큼 했다는 말은 그만큼 스스로 자기 의를 포기하기가 힘들어 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지옥에 가까운 거예요. 자기 의를 못 버리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를 설치해 버립니다. 바를 설치해놓고 그 다음부터 바리새인들이 만든 법을 시비 걸어요.

 

너희는 모세를 거론하는데 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죽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그 여러 가지 어려운 내용들이 있는데 5장을 봅시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이게 주님이 주신 법의 핵심부분입니다. 법을 지키는 자는 법을 지킨 이후의 나에 대한 관심이 있는 반면에 예수님은 법 자체의 취지만 드러난다면 네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예요. 호리라도 남김없이 처벌하게 되면 너는 지옥가고 법은 휘파람 불면서 법이 법대로 뚜렷하게 그 위엄성과 의로움이 드러난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예요.

 

너는 망가지든 말든 법만 드러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29절에 보면,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오른 눈을 아직 달려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하면, 나는 이 눈으로 한 번도 범죄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지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안경도 더 쓰고. 혹시 눈알 빼갈까 싶어서. 오른 손이 멀쩡하다는 말은, 한 번도 오른 손을 가지고 컨닝 한 적이 없고 나쁜 짓 한 적도 없다고 되거든요.

 

자꾸 주님께서 신체를 가지고 절단하라고 나온 것은 신체를 가지고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그 신체를 유발시킨 마음까지 들어가는 거예요. 워낙 인간들이 자기 마음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법의 취지는 쉽게 한 마디로 이렇습니다. 양말부터 먼저 만들고 이 양말에 맞는 발 찾기가 율법입니다. 신데렐라에요. 구두부터 먼저 있고 온 마을의 처자 중 누구 발이 맞는지를 찾는 겁니다.

 

그런데 이 법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냈기 때문에 그 양말에 맞는 발은 누구 발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발 밖에 없어요. 아무도 안 맞게 되어 있어요. 안 맞으면 안 맞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처벌이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지키지 못하면 거기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계속해서 모든 것을 완전히 쌍끌이로 갈아버려요. 모든 법체제를 갈아버리고 그래서 법이 무너지면 뭐가 무너지지요? 법이 무너지면 존재의 의미 무너지지요? 존재의 의미 무너지면 또 뭐가 무너지지요? 권력이 가짜 권력으로 무너지겠지요.

 

그런데 이 법을 싹 가니까 그 바리새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아니면 대들겠습니까? 대들겠지요. 그 대드는 방법을 미리 예수님께서는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문둥병자가 와서 “저를 깨끗하게 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시고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마 8:4)라고 하면서 적절한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적절한 예물이라는 것은 새 두 마리를 잡아서 하는 것이 있어요. 한 마리는 물 위에서 잡아서 피를 흘려서 나머지 한 마리의 날갯죽지에 발라서 날려 보내는 거예요. A-항공기 폭파시키고 그 피를 K-항공기에 붙여서 날려 보낸다는 그 말이지요. 훨훨 창공을 나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레위기에 보면 문둥병이 나오는데 그 문둥병과 피부병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있습니다. 피부명은 고치면 되지만 문둥병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풀리지 않는 저주로서 문둥병이 들어갑니다. 문둥병은 치료되는 것이 아니고 확인하는 거예요. 제사장이 고치는 것이 아니고 관찰하는 거예요. 우리 가운데서 이런 문둥병이 있다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응시의 최종지점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진리에 있다는 겁니다.

 

이 진리, 모든 우리의 전체성을 파괴시키는 우리 속의 빈자리, 공백의 자리, 그곳을 주께서는 쳐다보고 있습니다. 문둥병이라는 거예요. 주의 말씀대로 문둥병을 고쳤다면 그 고침 받은 문둥병을 이제는 남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너의 가장 깊숙한 곳에다 그 문둥병을 놓아버리라는 그 말이지요. 그걸 두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이거 누가 읽어봐야 돼요. 중요합니다. 8장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가 문둥병을 가지고 우리의 제일 깊숙한 곳에, 우리의 존재의 의미가 있던 곳, 내 자존심의 근원, 내 체면과 위신의 근원, ‘어릴 때부터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야. 우리집안은 이런 집안이야.’라고 했던 그 가장 깊숙한 곳에다가 문둥병을 가져다 놓게 되면, 안치된 그 문둥병을 대신 가져감으로 말미암아 존재의 의미 자체에서 그리스도가 대신 모든 것을 해결했다는 것이 나의 가장 깊숙한 곳의 존재의 의미가 되고 그게 원인이 되어서 새로운 결과물로 자아가 생기는 거예요.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주께서 찾아오시는 거예요.

 

왜?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율법을 주신 당사자, 양말을 먼저 만드신 분이기에 거기에 맞는 맞춤 발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마태복음을 이렇게 보면 쉬워도 너무 쉬워요. 예수님이 자신의 할 일을 미리 당겨놓고 그것을 자기 쪽으로 회수하는 식으로 죽 나열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가짜로 등장하느냐 하면, “제가 지킬게요. 제가 지켜서 주님 앞에 영광돌리겠습니다.” 이렇게 손들고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다 가짜가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 8장, 그리고 9장, 계속 나가면서 무엇을 와해시키는가? 권력을 와해시킵니다. 권력을 와해시키는 방법은 낯선 원인을 제공하면서 기존의 권력체가 그 원인을 찾지 못해서 우왕좌왕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9장을 봅시다. 여기에 어떤 중풍병자가 오지요. 이 사람은 중풍 병을 고치러 온 사람이에요. 맞지요? 감기 나으러 온 사람이 아니지요. 중풍 병 낫고자 위해서 온 사람이지요.

 

그러면 이 사람이 중풍병 낫고자 할 때에 그 사람의 존재의 의미의 최종원인은 뭡니까? 중풍병만 없으면 나는 어떤 사람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왔지요. 중풍병만 나으면, 그래서 내가 온전해진다면, 나머지는 내가 온전하니까, ‘나머지 온전한 것 + 중풍 병 나았다 = 그러면 나는 온전하다.’ 그래서 소문 듣기를 예수님께서 모든 병을 고친다 하니 ‘나도 그렇게 병을 고쳐볼까?’하고 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병을 고치는 데는 관심이 없고 그 사람을 뭐로 사용했습니까? 네 죄를 내가 사한다고 했습니다.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은 병 낫고자 해서 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네 죄를 사했다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그 사함을 받은 사람이 “나는 중풍 병이 나았다.”고 이야기를 하겠어요, “죄 사함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예? 모르겠어요? 이렇게 쉬운데? 죄사함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겠지요.

 

그 사람이 또 중풍 병이 걸려도 그 사람에게는 중풍 병이 존재의 핵심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병 걸려 죽든, 늙어죽든, 어떻게 죽든, 까불다가 죽든 관계없이 죄 사함 받았다는 그것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겁니다. 그래서 병 낫기를 기도는 하되 그것은 내가 원했던 기도이기에 응답은 기대하지 마세요. 원인 없는 것이 결과가 되어줘야 돼요. 내가 기대한 것은 이미 원인을 내가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는 원인을 미리 알아챘습니다.” 하는 것이 자기 의로서 자기 내부에 깊숙이 장착됩니다.

 

“저도 쪼끔은 주님의 뜻을 알기는 알지요?” 이렇게 까불다가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병을 낫게 하는 것은 하나의 연막전술이었지요. 병 낫게 해주고 지옥 보내고, 병 낫게 해서 지옥 보내고, 그렇게 계속 하시는 겁니다. 인자 자체가 그래요. 인자 자체가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케 하는 겁니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처럼.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인자자체가 꼭 인간이거든요. 인간이니까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실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이야기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할 때 “그래! 내가 사람의 아들이다.” 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너희들이 생각한 인간은 아니다.” 하는 뜻입니다.

 

임금님을 뭐라고 이야기하지요? 주상전하라고 하지요. 옥녀가 어떤 암행어사를 만나서 하는 말이, “암행어사 나리! 주상전하 만나거든 과거시험을 없애주세요. 대비마마가 봉은사증축하는 일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서 과거시험을 서둘러 치르려고 한다는 말도 있고 과거시험에 쓸 종이마저 다 매점매석하고 있는 판국이니 차라리 이번 과거시험을 없애서 그것을 좀 해결해주세요.” 라고 할 때 암행어사가 하는 말이 “내가 꼭 주상전하께 알리겠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암행어사가 바로 주상전하에요. <옥중화>를 봐야 이야기가 되지요.

 

메시아가 하나님이라니까요. 자꾸 변장하는 거예요. 브래드라는 신학자가, 자기가 해놓고서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한 이유가 뭐냐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이 뭐냐 하면, 이미 이 세상은 마귀의 손아귀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발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의미로? 마귀적 입장에서 재해석해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알리지 말라고 한 그것으로 도리어 예수님이 유명인사가 되고 말았어요.

 

주님께서는 ‘그럴 줄 알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왜곡된 해석의 범람의 바다, 그것이 바로 이 멸망해야 될 이 세상의 현주소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만, 만약에 제가 안수를 했는데 갑자기 거기서 앉은뱅이가 나았다. “저, 집사님! 절대로 남에게 알리지 마세요.”라고 했더니 병 나았다고 온 동네 돌아다니더라는 말이지요.

 

병 나았다고 온 동네 돌아다니면 아, 예수님한테 온다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병 낫는다는 결과를 유발하겠지요. 이것은 익히 인간들이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런데 죄사함을 받았다고 해서 예수님만나서 죄사함을 받았다고 떠들어댄다면 그 유대권력체에서 이걸 유행시키겠습니까, 아니면 금지시키겠습니까? “너 죽어!” 그렇게 되지요. “내가 나흘 만에 죽은데서 살아났어.” 이렇게 이야기하고 돌아다니니까 누가 가만두지 않습니까?

 

이제는 예수님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사로도 죽이려 드는 거지요. 그걸 통해서 이 세상의 권력체, 인간존재의 의미의 덩어리, 이것들이 얼마나 적그리스도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까발리시는 겁니다. 점점 더 위험한 세계에 몰입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이 세상은 전혀 위험하지 않아요. 교회에서 복음만 이야기안하면 교회는 그야말로 좋은 친목단체입니다.

 

때만 되면 놀러들 가고, 복음만 안 전한다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떤 교회에서 눈치도 없이 복음을 전해버리면 그것은 요주의인물이 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마태복음이 이런 책입니다. 마태복음이 이렇게 무서운 책인 줄 여러분 몰랐지요. 마태복음 10장을 보겠습니다. 군데군데 하는 이것은 지난시간에 다 한 거예요.

 

10장에 보게 되면, 여기에 15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나님의 온전한 의를 이룬다는 것은 온전한 처벌과 심판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쪽에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잘 살고 있는데 그런 우리가 왜 처벌받고 멸망하느냐?” 그것은 온전한 의가 행사되는 현장에 있기에 그렇습니다.

 

가짜 발을 가지고 진짜 온전한 양말을 신으려고 하는 자체가 온전한 의가 가만두지 않고 반드시 처벌을 하게 되어 있고 심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열 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결국 무엇을 전한다는 말입니까? 심판을 전한다는 말이에요. 10장 22절에,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이 말은 이 세상 자체가 그렇게 만만한 세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병 고쳐준다고 해서 환영받을 생각을 하지 마라. 병 고침이 다가 아니고 예수님 복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병고쳐준 그 사람이 오히려 너에게 달려들 것이다. 병 고쳐준 것은 고마운데 딴 소리를 하지 마소.”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5만원 주면서 우리교회 와 달라고 해서 가서 복음을 전하면 그 5만원 날리는 겁니다. 5만원 주면서 오라고 했을 때는 반드시 복음을 빼고 이야기를 해 줘야 해요. 그게 아까 말한 굿판이에요. 이미지를 좋게 내놓는 거예요. 그 다음에 10장은 넘어가고 11장 11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이 뜻이 안 풀려서 본문을 이렇게 바꾸고 저렇게 바꾸고, 킹제임스버전이 어쩌고 하는데 세례요한에게는 제 삼자가 없어요. 일대 일로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왕에게(헤롯대왕의 둘째아들로 갈릴리와 뵈레아지역의 분봉왕)에게, 권력체에게 대들었습니다.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일(마 14:3,4)을 문제 삼은 것 같아요. 그 결혼이 법적으로 옳지 않다고 했어요.

 

세례요한과 헤롯왕이 일대 일로 맞대결한 거예요. 제 삼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역할은 그걸로 끝나버렸어요. 예수님이 오시고 난 뒤에 예수님에게 인수인계해서 바톤을 넘기고 세례요한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겁니다. 기존권력 체에서 제 3의 응시,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응시를 세례요한이 더 이상 요청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치 않은 거예요.

 

IS라는 집단이 십자가를 다 부수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바보인지. 응시하는 권력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에요. 북한 부순다고 해서 우리나라 좋은 나라 되는 것 아닙니다. 왜? 북한은 보이는 거예요. 신천지를 이단이라고 한다고 해서 다른 쪽이 멀쩡한 것도 아니고. 히틀러가 폴란드와 헝가리를 침범한다고 독일이 커지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숨어 있는 권력이 따로 있는데 우리가 같이 상대하는 경쟁자인 그것을 없앤다고 해서 좋은 나라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운동하고 지상에 천국을 이루겠다고 이벤트를 벌이는 그것은 주의 뜻이 아니에요. 환경 운동한다고 예수님이 한손에 십자가, 한손에 쓰레기봉투 들고 왔습니까? “여러분, 십자가 지시고 환경은 보호합시다. 분리수거 잘 하시고!” 이렇게 오셨습니까?

 

제발 좀 악이 범람하도록 그냥 좀 보라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이해했지만 걱정되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이 세상은 선과 악이 아니에요. 살기 편한 세상이냐, 아니면 혼란스러운가, 그것만 필요한 겁니다. 따라서 여기서 필요한 것, 혼란을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수결이고 다수결은 투표에 의해서 결정하는 겁니다. 투표에 의해서 많은 숫자가 한시적인 진리의 법체제로서 가동이 되는 거예요.

 

이 법하고 예수님의 복음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다수가 그러자고 하면 그냥 그런 거예요. 어차피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걸 누가 허락했는가?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마귀를 누가 부리십니까? 주께서 부리시는 거예요. 내어버려 두시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게도 하시고. 성경말씀대로 이 세상이 악하다고 한다면 악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지요.

 

11장에 보면, 세례요한 이야기는 끝났어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에 대한 개념, 천국 자체가 예수님에게 인수인계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일을 받아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천국이라면 이 천국에 대해서, 여기에 뭐가 있는가 하면, 가짜천국관이 여기서 반드시 성립이 돼요.

 

그러면 이 가짜천국과 예수님 두 세력과의 투쟁이 되겠지요. 빼앗는다는 말은 빼앗기는 쪽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빼앗기는 쪽이 천국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힘겨루기가 되겠지요. 그러면 예수님 쪽에서 저쪽을 공격해서 빼앗아온다는 말은 여기서 뭐가 필요한가 하면, 예수님의 희생이 필요한 거예요. 이 말은, 인간들은 아무리 설쳐도 천국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세례요한은 그냥 잔소리를 했잖아요. 예수님은 잔소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냥 희생해 버려요. 그 가짜 권력에 의해서 그냥 죽어버립니다.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했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 진짜 천국인 예수님을 침략하고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지요. 그러면 이 땅에서 천국은 없어요. 그러면 천국을 기대하는 사람은 뭐가 됩니까? 예수님이 죽으심과 더불어서 “에이 씨, 괜히 헛바람만 들었잖아.”라고 하겠지요.

 

그 길을 주께서 가시는 겁니다. 누구처럼? 세례요한 때처럼 인수인계 받아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천국이 잠복되어 들어가 버립니다.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말한 대로, 시냇가 물 밑에 있는 다슬기처럼. 냇물은 요란한데 다슬기는 가만히 웅크리고 있지요. 밑에 달라붙어 있어요. 사금 채취하듯이 다슬기를 채취하면 그것이 바로 천국 가는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 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7절에 보면,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 이야기를 또 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그야말로 어떤 말을 해도 먹히지가 않는 거예요.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서러워하지 말고, 이걸 불편해하거나 짜증내지 마시고, 이게 주의 일이 지금 너무 잘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열 두 제자가 복음 안 믿는다고 해서 생떼부렸습니까? “뭐 이런 게 있어?” 하고 권력으로 대들었습니까? 그냥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하지요. 여러분 가족 중 누구에게 “복음 믿어라. 교회 가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복음까지 알아라.” 이렇게 한다면 강렬한 방어기제가 작용하는 것처럼 방어하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너무 기대를 하지 마세요. 21절에 나옵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벳새다는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마을이고요. 여기서 권능이 모자란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질의 권능이 작용한다는 말입니까? 멸망 받아야 된다면 멸망도록 권능을 행사하는 그것도 주의 일입니다.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25절에 나옵니다. 지금 예수님은 혼자서 좋아서 웃고 계셔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늘나라 어린이집 할 일 있어요? 여기서 어린아이라 하는 것은 주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말하겠지요.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고 있는 거예요. 세상이 어둡고, 패역하고, 비 복음적이고, 반 복음적일 때 휘파람불고 찬양하라는 그 말입니다. “세상 꼬라지 잘 돌아간다!” 놀리는 식으로 그러지 마시고요 진짜 잘 돌아가야 돼요. 복음을 열 명에게 전했는데 한 명도 안 받아들인다? 명절에 친척들에게 복음 전하면 다 느끼는 거잖아요. 집안식구가 원수라는 말이 빈말이 아닙니다.


“아재요, 옛날에 많이 도와줬지요? 애들 공납금도 대주고. 그런데 제 말좀 들어보소. 십자가…….” 하면 “아이고, 됫니더, 됫니더.” 이렇게 하지요. 안동말씨로. “그만 됫니더.” 또 “동생아 고만 해래이.” “형님, 그게 아니고.” “고마 니나 잘 믿으래이.” 하잖아요. 그럴 때 우리는 쾌재를 불러야 된다니까요. 이게 내 소원대로 안 되듯이 나도 저 사람같이 내 뜻대로 내가 구원받을 수 없는 입장인데 거기에 누가 개입하는가?

 

숨겨진 원인제공자,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 그게 마태복음 11장이라면 11장 26절의 말씀이 내 안에 장착되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걸어 다니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내 속에 아버지의 소원덩어리가 들어 있다. 이게 바로 걸어다니는 마태복음 11장 후반 이야기입니다. 이래도 실망할 필요가 없고, 저래도 실망할 필요가 없고, 이래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그게 29절에 나오지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결국 쉽다는 말조차도 원인을 주님이 제공해야 돼요. 쉽게 하려고 내가 나한테 원인제공하면 안되고 이 자체가 주님의 결과로서 받아 들여야 됩니다.

 

네가 주님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먼저 너를 생각하고 다루고 있기 때문에 네가 네 앞길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마라. 네 일은 쏙 빼고 네가 하는 모든 것이 주의 일이 된다는 것을 네가 믿으라는 그 말입니다. 네가 연필을 깎든지 잠을 자든지, 잠자는 것도 주의 일로, 주의 일로, 주의 일로, 항상 모든 일어나는 일이 주의 일로 살아왔다는 것을 믿으시고 점심식사 하시기 바랍니다.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5강 [팽창하는 미래]

 

(강의:이근호 목사)

 

마태복음 12장을 봅시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이삭을 제자들이 먹는데 안식일에 먹었습니다. 이삭을 먹는 이것을 이렇게 적어보겠습니다. 생활공간이라. 생활공간에서 예수님의 개입이 과연 어떤 변화와 의미를 줄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일상에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우리 일상이 달라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갑자기 이삭이 더 맛있어 진다든지, 조미료가 더 첨가 된다든지, 조금 먹을 뿐인데도 배가 부른다든지,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릴게요. 우리 생활공간에서 예수님이 개입하시면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대리변호가 일어납니다. 생활공간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욕구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 덤벼들기 마련이거든요. 앞 뒤 안 가리도 덤벼들게 되어 있어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의 육신은 이 땅에서 땅에 있는 것을 먹게 되어 있고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정신으로 커버하기가 곤란해요. 먹고 싶고, 즐기고 싶고, 마시고 싶은데 ‘이것은 정신적으로 하면 안 돼.’ 이렇게 억압을 한다고 해서 말소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게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먹고 싶은 것을 두 번 세 번 참다가 나중에 폭발해 버리면 더 많이 먹게 돼요. 전에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만 아는 목사님께서 주일날 금식을 합니다.

 

주일날 금식을 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설교를 하는데 점심때는 아침 굶은 것 곱빼기로 잡숴요. 뭐냐 하면, 얼마나 설교하면서 참았겠습니까? ‘빨리 끝내고 곱빼기 먹으련다. 고추장 듬뿍 얹고 참기름 쳐서 콩나물 비벼서 마구 먹어야지.’ 그래서 항상 뚱뚱 하셨어요. 뚱뚱한채로 걸어 다녔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그래서 생활공간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고 자기 탓을 한다는 자체가 자기근원을 몰라서 그래요. 이것은 욕구대로 살 수밖에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에 오셔서 “제발 작작 먹어. 그렇게 하면 배가 나온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잔소리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편식하지 말고 좀 골라먹어. 골고루 영양을 취해야지.” 예수님이 영양사가 아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직접 개입하셔서 실제로 하시는 일이 뭐냐 하면, 대리변론, 대리변호입니다. 조달호변호사지요. 대리로 변호해주는 거예요. 대리변호를 통해서 뭘 얻느냐 하면, 대리변호 이후에, 즉 생활공간에서 율법에 대한 죄가 유발되고 있고 여기서 예수님이 나서서 값없이 무료로 대리변론을 해서 생활공간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을 얻게 하는 재인으로서 예수님이 개입합니다.

 

이 공식은 참 중요한 공식인데 ‘주께서 우리 집에 오시면 좋겠다.’ 할 때 그 오시는 목적이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고 대리변론이라니까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누가 너를 고소하리오.” 그 정죄와 고소에 대해서 대리변론을 해 주시는 거예요. 주님 하시는 일에 좀 혼동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내 소원 들어준다.’ 그렇게 하지 마시고, 우리의 환경은 생활공간이고 이 생활공간은 내 육신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는 감내한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것들로 계속해서 욕망을 부추기게 되어 있어요.

 

대리변론이 있다는 말은 단독으로 뭘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단독으로 자기변명,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 식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어요. 그러면 혼자 살지 왜 예수님 믿고 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리변론자로 계시고 우리를 고소하는 자를 염두에 두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데 그 좋은 변호사를 그냥 놔두고 어디에 써먹을 거예요? 그 좋은 변호사를 놔두고.

 

그리고 인간의 욕구라 하는 것은 탐내기 마련이고, 십계명에 위반하기 마련이고, 마음속으로 절제가 안 되는 것은 뻔히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개입은 곧 변호사의 개입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안식일과 관련되어 있지요. 안식일에 먹은 것은 제자들이 먹었는데 변호하시는 것은 누가 변호하신다? 예수님이 나서서 “누가 내 사람 건드려?” 이렇게 변론해 주시는 겁니다.

 

“물으려면 나한테 물어.” 이게 아까 이야기한 안식일법의 중간가로채기에서 “이 법은 내가 알아서 지키고 그 효과는 나와 동행하는 사람의 효과로 전가된다.” 이런 법칙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믿어야 되는 것이 이미 이 땅에서의 천국의 실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12장 5절부터 13장에 예수님의 천국비유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보기에 마태복음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점에서 어려운가 하면, 12장도 마찬가지지만 마태복음 13장에서 비유 이야기를 할 때 비유에 대응되는 구체적인 인물들이 없어요. 농부가 나왔다. 농부가 밭을 가는데 툭, 하고 소리가 났다. 뭔가 보니 보물이 있더라. 얼른 보물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면서 땅 주인에게 가서 그 땅을 샀다. 거기서 농부는 누구며 그 보물은 누구냐, 라고 물을 때 사람들이 자꾸 일대일 대응을 하고 싶어 해요.

 

그 보물은 성도고 그 농부는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보물을 발견하고서 킥킥킥킥킥, 혼자 좋다고 하게 되면 그것이 하늘나라 완성이다? 그거 아닙니다. 그뿐만이 아니고 마태복음 13장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첫 번째 비유에서 씨뿌리는 농부는 누구며, 밭은 누구며, 두 번째는 누구며, 세 번째는 누구며, 네 번째는 누구며, 이러다가 교회 네 파로 갈라져서 싸움합니다. 새누리 당, 민주당, 국민의 당, 이런 식으로.

 

결국은 열매 없는 것은 잘린다. 너는 열매 없잖아. 잘려라. 예수님의 비유는 구체적인 인물대응을 포기해 줘야 돼요. 쉽게 말해서 인물 없이 설명하는 것이 천국이다. 그래서 얼마나 어렵겠어요. 13장을 미리 보게 되면, “천국은 이와 같으니……”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11절에 ‘천국의 비밀’이라고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비유로 이야기했다는 것은……, 이런 복잡한 것은 결론적으로 미리 알려 드리면 간편하겠지요?

 

인물들에 의해서 천국을 설명할 때는 뭘 로 하느냐 하면, 시간 층의 배치로서 설명이 돼요. 인간은 빠지는 거예요. 인간은 빠지고 시간 층의 배치. 시간층의 배치라고 한다면 시간층이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둘이라는 말입니다. 시간층이 두 개인데 그 두 개의 시간층을 배치하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삐어져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면 시간층의 배치인데 어느 시간과 어느 시간인가?

 

한쪽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점점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간층과 두 번째 시간층은 뭐냐 하면, 미래가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현재를 거쳐서 과거에 대한 공격으로 진행되는 층, 이것이 또 하나의 층입니다. 미래의 횡포, 미래의 폭주, 저는 이시간의 강의 제목을 ‘미래의 팽창’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미래의 팽창’이라고 정했습니다만 이 두 개의 시간층에서 여기에 인간을 개입시켜 버리면 인간은 두 개의 시간층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런가 하면, 아직 되지 않는 미래에 대해서 감각을 갖는 것은 인간의 권한과 능력 밖의 일입니다. 인간은 미래에 대해서 예상하는데 그 예상조차도 과거에 있던 데이터를 근거로 해서 미래를 예측하게 되어 있어요. 데이터 가운데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쳐서 ‘이것이 아마도 옳은 길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시간에 관해서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보충적인 내용을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의 시간을 선으로 이야기한다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 현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가까이 있는 과거와 더 먼 과거, 또 더 먼 과거가 현재 밑의 지하층, 지질층을 이뤄요. 과거a, 과거b, 과거c, 과거d……,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과거는 잊고 현실에 충실하자.’ 하지만 길 가다 동창생을 만났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인데?’ 희미한 등불 밑에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아, 동창생이구나.’ 이것은 가까운 과거가 아니고 뒤에 있는 과거가 불현 듯, 마치 석유가 뿜어져 나오듯이 솟구쳐 나와 버립니다. 그 말은 뭐냐? 현재 지하에 수많은 과거들이 나의 의식층을 이루면서 장착하고 있습니다. 이게 시간의식이에요. 이 시간의식은 철학에서 ‘현상학적 시간’에서 나옵니다. 훗설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고 그 뒤의 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줬는데 그게 뭐냐 하면, 현재라는 것은 현재라는 그 껍데기만 현재가 아니고 밑에 있는 이 층, 과거의 데이터가 영향을 주는 겁니다.

 

영향을 주게 되면 우리 몸은 영향을 받아서 어느새 습관화 되는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 형은 잡채를 안 먹는다고 했어요. 왜? 어릴 때 잡채 먹다가 목에 걸린 경험이 있어서 잡채를 안 먹습니다. 잡채만 보게 되면 헉, 해요. 몸에 각인되었어요. 그런데 여러분 전체가 다 뭔가 있을 거예요. 여러분들은 사실은 껍데기는 세포껍질이지만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는가? 기억의 순차적인 지층, 고고학에서 말하는 그 기억의 지층이 꽉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것이 누적이 되면 ‘나는 이상하게 저 사람은 이유도 없이 싫더라.’ 혹은 ‘나는 저 사람은 이유도 없이 호감이 가더라.’ 이것이 호불 간에 결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배우자를 만날 때도 ‘저 여자는 엄마를 닮아서 호감이 간다.’ 혹은 ‘저 남자를 보니 옛날 술만 먹으면 엄마를 패던 우리 아버지를 닮아서 도저히 트라우마 때문에 못 사귀겠다.’ 모든 일이 몸에 각인된 습관들이 과거의 영향을 받아서 현재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과거가 어디까지 내려가는가? 미래까지 내려가요. 미래에 대한 인간들의 예상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방적인 상상으로서 자기의 미래를 예상하지요.

 

그런데 인간들이 더 불쌍한 것은 오지도 않을 미래가지고 과거에 근거해서 벌벌 떤다든지 미리 울게 된다든지, 미리 피하게 된다든지, 도망치게 된다든지, 이렇게 생활환경이 복잡해요. 이 전체가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이런 시간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를 변호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런 시간에 눌려 있는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확실한 미래상을 가지시고 그걸……, 우리는 침투 못해요.

 

우리는 현재에서 미래로 요만큼도 못나갑니다. 조금도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신원조회가 되지 않는 분이에요. W라는 드라마에 보면, 주인공의 베개 밑에 권총이 있는 것까지 다 알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만화 봤거든.” 만화 보니까 베개 밑에 권총을 준비해 놓은 것이 다 나와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미리 봤거든요. 어디서? 자기 아버지가 만화작가니까, 미리 훔쳐봤으니까. 만화의 세계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는 불확실성이지만 예수님이 내 뱉는 그것은 이미 시간이 완료된 상태에서 현재에 들이닥치게 되면, 과거에서 올라오는 모든 불안과 걱정을 전부 다 삼켜 버립니다. “염려하지 마라. 내가 다 이루었다.” 다 이룸의 덩어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오시게 돼요. 그래서 그 정도 돼야 변호할 만한 자격자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마귀도 그걸 알거든요. 마귀가 양심적으로 어떤 죄를 지적할 때는 그 죄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우는 사자와 같이 미래의 지옥으로 기어이 데려가기 위해서 우우우, 울부짖으면서, 오늘도 먹이를 찾아 해매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해매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이미 알아요. 마귀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지요.”라고 물으면서 하는 말이 “우리를 멸하러 오신 것 맞지요?”

 

선수는 선수끼리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들이 자기를 영원한 지옥의 유황불에 보내기 위해서 확정짓고 난 뒤에 찾아왔다는 것, 그러니까 이게 마지막 때에요. 마지막이 찾아온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무덤에 있던 그 마귀는 그렇게 예수님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 때 예수님은, “조용히 해! 발설하지 마.” 합니다.

 

우리는 바보 같아요.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바보냐 하면, 악이다, 나쁘다, 못됐다, 하는 것을 구체적인 권력체, 질서체를 가지고 자꾸 그걸 악마라고 대응시킵니다. 히틀러는 악마다. 나폴레옹은 악마다. 교황은 666이다. 자기가 666이면서. 적그리스도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그것은 미래를 이미 확정짓고 난 뒤에 소급해서 적그리스도가 뭔가가 파악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층을 이렇게 깔아버려요. 둘 다 깔아버리면 여기서 “인간들은 여기서 나가 놀아.” 하고 우리를 내 보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간을 대입하거나 시간 속에서 뭘 손질할 수 있는 능력은 없어요. 12장 20절을 봅시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이게 바로 미래의 확실성입니다.

 

18절에,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우리에게는 아직 심판이 먼 미래의 이야기지만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는, 예수 안에서는 이미 성령하고 이야기가 끝난 바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심판이 완료된 상태에서 과거에 있는 모든 것에 심판을 퍼부어 버립니다. 현재라는 것도 미래입장에서는 과거가 되지요.

 

쉽게 말해서 과거에 얽매여서 살 것인가? 말을 더 간단하게 해서 아픈 과거에 대해서 네가 아직도 연연하고 그걸 떨쳐버리지 못할 것이냐? 아니면 이미 대리변호가 완료된 상태인 주님의 약속 속에서 살 것이냐를 주님은 요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요구함을 받더라도 우리가 그걸 받을 수 있는 능력은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이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는 보장되지 않기에 기존 시간층에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인간대신에,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해서 성령께서 여기에 개입을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시고 인간의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인간의 대리대표자는 인자가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선수는 선수끼리 논다고요. 프로는 프로끼리 놀아야지 아마추어가 거기에 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나 설교를 하면서 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그냥 사세요.” 그래도 말 안 들으면 앞에 ‘막’이라는 글자를 넣어서 “막 사세요.”

 

막사세요, 라고 하니까 그때서야 알아먹어요. 막 사세요. 그냥 막 사세요. 이것이 뭐냐 하면, 우리의 구원문제, 우리의 대리변호에 대해서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고 요청할 문제도 아닙니다. 일은 이미 벌어졌어요. 선수들끼리 비행기에서 공중전 벌어지고 있는데 지상에서 새총 쏜다고 해서 비행기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해봐야 드론도 안 떨어지겠다. 떨어지지 않아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생활공간에 빠져 있기 때문에. 코앞에 있는 빨래거리, 살림살이, 돈 벌어서 양식사는 것, 이 생활공간에 얽매여 있는 입장에 있어요. 안 그래요? 다들 그렇지요. 여러분은 수련회 마치고 또 밥 먹고 살아야 됩니다. 생활공간에 대해서는 우리의 욕망은 차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에요. 생활공간 자체가 두 자로 현실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온 몸에 와 닿는 현실은 생활공간이에요.

 

초등학교 학생에게 묻기를, “북한 핵문제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애들의 생활공간은 ‘방학이 더 길었으면 좋겠다. 방학숙제는 적었으면 좋겠다.’ 그게 생활공간이에요. 나중에 그 애가 커서 나이 한 70이 되고 유엔총장 되거든 그때는 묻든지 해야지 애들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살림 사는 주부한테, 남중국해 문제, 필리핀과 어떻게 될 것인지, 그런 것은 전문가도 아닌 주부한테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여자라도 전문가가 따로 있어요. 정치외교전공한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에게나 물어야 됩니다. 생활공간이 뭐냐 하면, 어떻게 고등어를 냄새 안 피우면서 구울 수 있는지, 그런 프라이팬이 요새 나왔는데 그런 것을 인터넷 뒤져서 정보를 찾는 그것이 생활공간이에요. 생활공간은 그냥 현실에 충실할 뿐입니다.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고 예수님은 미래에 충실하고. 죽이 잘 맞는 거예요. 미래의 확실성은 주님이 보장하고 우리는 현재에 있으면서 날마다 불확실성을 가지고 벌벌 떨고 있고. 이것이 우리의 한계인데 어쩌란 말입니까?

 

이것이 우리의 한계에요. 주님께서 뻔히 알아요. 우리보고 돈 내놔라, 밥 내놔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정을 뻔히 아는데 뭘 더 내놓겠어요. 내놓으면 낸 것 생색낸다고 30배달라고 할 것이 뻔한데. 그러면 일이 어떻게 되는가? 먼저 마태복음 12장 3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자, 설명 들어갑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와서 아직까지 미래에는 도달되지 않는 그 기존의 시간층에서는 어떻게 되고?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미 십자가 지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성령이 오시는 그 확실한 그 작업에 대해서 인정하지 못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거예요.

 

지금? 아니요. 성령이 올 때. 갑자기 어려워져버렸지요. 지금 너 믿을래, 성령 믿을래, 하는 것이 아니고 아직 성령이 오지를 않았어요. 성령은 예수님에게만 독점적으로 오신 거예요. 성령은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오고 그 다음부터는 성령세례가 이방인에게 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훼방하면 사하심을 못 얻는다는 것은, 이 말씀을 할 때의 지금이 아니라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때 성령을 훼방하게 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이 시간층에서 미래에서 완전히 현재를 갉아먹고 과거를 묵사발 내는 이 시간층으로 열차를 갈아타지 못하면 사하심을, 그것도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그런 뜻이에요.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명하기 위해서 생활공간부터 먼저 이야기를 했고 대리공간부터 먼저 언급을 한 겁니다.

 

우리는 생활공간에서 못 벗어나고, 거기에 대해서 주께서는 중간에 괄호를 쳐서 대리변호를 하셔셔 “내 사람이다. 정죄하지 마.” 이런 식으로 대리변호를 하시고, 그 다음에 선수는 선수끼리 싸운다고요. 우리가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옛날에 이 바닥에 들어올 그 때 많은 부흥사들에게 공통적으로 이 본문을 들어온 내용은 이거였습니다.

 

사람에게 죄 짓는 것은 용서를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이것을 뭘 로 해석하느냐 하면, 그냥 보통사람에게 죄 짓는 것은 용서를 받지만 방언하는 사람에게 대들면 용서받지 못한다. 이런 해석들을 들어왔었어요. 기가차고 코가 찰 일입니다. 그 사람들은 방언이 뭔지도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 때부터 방언해서 자기 방어기제를 스스로 만들어서 ‘나 건드리기만 해라. 영원히 용서받지 못해.’ 그걸 자기의 훈장처럼 차기 위해서 방언하려고 열광을 하는 겁니다.

 

방언이 잘 안되잖아요. 안되니까 교습소에 가서 그걸 몸에 익히는 학습을 받아요. 랄랄라, 룰룰루, 새벽기도, 여러 가지 학습의 방법들이 있습니다. 빠른 혀놀림, 어눌한 혀놀림, 그것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냥 해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바닥에 들어오면서 하도 답답해서 우리 동료 신학생들에게 이렇게 했어요. “저 단양 구인사도 방언하더라.” 진짜에요. 태고종 본산인 구인사도 방언 가르치고 방언합니다. 방언은 모든 종교에서 일어나는 보편적 현상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 혀는 짧지 이게 한꺼번에 좁은 출입구로 나가다 보니까 말이 섞이는 것이 방언입니다. 빨리는 이야기해야겠고 유입속도는 빠른데 밖으로 나가는 출구에서의 속도는 늦고, 거기서 엉켜서 못 알아들을 소리로 나오는 거예요. 32절을 봅시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인자가 어디까지 인자인가 하면, 주가 되기까지 인자에요. 그러니까 지금은 인자로 계시는 겁니다. 지금은 두 층이 확정되지 않은 층이기 때문에 그냥 미래의 시간층을 깔아놓은 거예요. 두 개의 서로 이질적인 시간층이 있는 상태에서. 이 미래는 누가 주도하는가? 인자가 주도해요. 예수님이 아니고 인자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 인자라는 말이 뭐냐 하면, 인자는 반드시 성령의 지도와 지시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 예수님은 주가 되시기 때문에 역전이 되어서 친히 성령을 가지고 “누구 세례 줘. 그리고 누구한테 찾아가. 누구를 충만케 해. 또 저쪽 귀신에게 가서 꼼짝말라고 해.” 이렇게 되지만 주가 되시기 전에 인자는 세례 받고 난 뒤에 성령에 의해서 주도권을 받아줘야, 기도할 때도 성령으로 기도하고, 십자가에 곱게 죽는 것도 성령으로 하고, 심지어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도 예수님의 자기 능력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으로 죽은데서 살아났습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요새 서문시장에서 한 근에 얼마씩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리스도의 영이 근에 얼마 나갑니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그걸 원했던 거예요. 그 괜찮은 성령 돈을 몇 푼주면 살 수 있는지를 물었던 거예요. 돈 주고 못 사지요. 돈 주고 못산다는 말은 이 생활공간에서 무슨 뜻이냐 하면, 살 수 없다는 거예요. 살 수 없는 생활공간은 마지막 때에 쓸데없는 공간입니다. 80, 90년을 살아봐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세월만 세월아, 내월아, 하고 그 세월만 갉아먹고 있는 거예요.

 

노인정에 가 보세요. 저는 아직 그럴 나이가 안 됩니다만. 노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세월만 갉아먹고 있어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어떤 사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냥 사는 대로 살래.” 사는 대로 사는데, “그러면 선생님의 미래는?” “과거도 다 잊어버렸는데 무스 미래까지?” “기차를 갈아타지 못하셨군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몰라도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생활공간에서 못 헤어납니다. 욕구와 욕망 때문에. 그럴 때 대리변호 들어옵니다. 대리변호 들어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미 확정된, 확실성이 보장되는 성령에 의해서 인자가 이 시대에 대표적으로 미래에서 주어지는 카펫을 깔아버려요. 미래는 과거에서 오는 것과 정면충돌하면서 과거에서 올라오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정죄하고, 심판해버립니다.

 

어느 정도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이유는, 심판을 마감할 때까지 성령의 부림을 받는 인자가 그 작업을 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우리는, “너는 빠져 있어. 너는 생활공간뿐이야. 너는 돈 버는 생각밖에 못해.” 이렇게 빠져 있어야 되고 “빠져 있으면 누가 해주는데?”

 

그게 12장 28절에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어떤 방식인가? 그 방식이 나와요.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결국 우리는 뭐냐? 우리는 세간살이고, 우리는 그 세간살이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과거에서 현재로 오는 그 시간층에서 우리는 자력으로 탈출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서 인자로 오셔서 담 타넘고 와서 잠자고 있는 부부를, 이건 성경의 내용이 아니라 가미된 거예요, 그 잠든 주인부부를 몰래 꼼짝 못하게 해놓고, “귀금속 어디 있어?” (입에 재갈이 물린 채로) “음음음!” “어디 있어?” “음!” “알았어.”

 

가서 쌀뒤주단지 안에 있는 귀금속 챙겨서 “수구해!” 다시 담을 타넘어 왔을 때 한 사람 건졌다는 이 과정이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만들어 가시는, 상당히 황망한, 우리로서는 전혀 예상 밖의 도둑놈에 의해서 구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렇게 해서 하늘나라의 한 사람을 건진 거예요. 주께서 친히 와서.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주님과 함께 가다보니까, 가면서 가끔 뒤돌아보니까 우리는 과거에 얽매이고 현재 때문에 멍들고 미래 때문에 불안한 그 시간의 노선에서 이미 확정된, 이미 구원이 완료된 그 시간노선으로 뒤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되는 현상을 느낍니다. 누구한테만? 성령에 이끌림 받은 사람한테만.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제자들이 성령 받고 난 뒤에는 과거의 이런 잘못이 하나도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자기가 주님을 배신하고 잘못된 길로 간 것, 그래야 하늘나라 가서 자기자랑을 안하도록 주께서 아예 깔끔하게 모든 것을 정리해 주셨잖아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선수는 누구끼리 한다? 선수끼리 하는 거예요. 우리가 나설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악마를 이기고 악마에 예속되어 있기에 못 빠져나오는 우리를 데리고 나왔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성령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장차 성령님은 누가 보내는가?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이루었음을 근거로 성령이 오기 때문에 성령이 오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우리 구원에 대해서 더 추가될 행함은 일체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일체 남아 있지 않아요. 십일조고 뭐가 일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미 미래에서 십일조와 아무상관 없이 십자가로만 구원했습니다. 이것을 기존에 있는 이 세상에서는 못 믿지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어리석고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거예요. 미련하게 보는 겁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성령 받은 자에게는 구원의 능력이라 했어요.

 

사도바울이 그것만 이야기했어요. 다른 것은 이야기 안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다. 다른 능력은 나오지 않는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능력, 대리변론만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에요. 그런데 십일조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뭡니까? 십일조를 미리 봅시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이요. 제가 그 본문을 읽어드릴테니까 뭔가 좀 차이난다는 것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들도 행하고 저것들을 용서하지 말라.” 방금 이렇게 읽었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들은 용서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뭐냐 하면, 의와 신과 인이고 저것들은 뭐냐 하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했다는 그 외식을 너희들은 방치하거나 용서해서는 안 된다. 그 위선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 이게 헬라어본문 해석입니다.

 

간단해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행하라는 것이 없어요. 십일조라는 것이 명사가 아니고 십일조 행함이거든요. 십일조 행함에 대해서 “버리지 말라.” 하는 원뜻이 뭐냐? 헬라어본문에서 “메 아페이나이, mh afienai”라고 하는데 ‘아페이나이’는 용서라는 뜻이에요. ‘메’는 해서는 안 된다는 부정의 뜻이에요. “너희들은 왜 의와 인과 신에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박하와 회향과 근채(채소)의 십일조를 가지고 십일조를 했다는 그 위선덩어리를 왜 방치하고 묵인하고 방관하느냐?” 그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입니다. “의와 신이 있는데 왜 그 위선을 방관해?” 그런 뜻이에요. 이것은 누가복음도 같은 뜻이에요. 이것도 그리고 저것도, 여기서 이것이라는 것은 뒤쪽에 나온 것을 받는 거예요. 이것이라 할 때 이것은 의와 인과 신을 말하는 것이고 저것은 앞에 있는 것을 받는 겁니다. 지시하는 정관사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라. 십일조를 가지고 무슨 양수겸장, 장기 두는 겁니까? 그게 원천적으로 없어요. 2천년동안 속았어요. 이제는 말한다. 생각해 보세요. 의와 신도 행하고, 그 다음에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행하게 되면 두 행함이 동일한 행함이 아니고 두 종류의 행함이 되잖아요. 두 종류의 행함이 되면 어느 쪽이 강조되는지는 인간의 마음으로서는 둘 다 강조할 수가 없어요. 한쪽에 의미를 두고 한쪽에 덜 의미를 두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마음속으로 의와 신에 의미를 둘까요, “십일조 냈습니다.” 여기에 의미를 두겠어요? 실제로 냈다는 그 자랑질에 의미를 두겠지요. 그러니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는 것이 없어요. 의와 인과 신을 진짜 안다면 왜 십분의 일을 냈다는 그것 가지고 위세 떨고 “십일조 했잖아요.”하는 그 위선덩어리를 왜 용서를 하느냐는 말이지요. 용서를 하지 말아야 되지.

 

자연스럽게 이 문맥이 흘러가요. 마태복음 23장이, 바리새인들이 현찰 삼키고 자기 배를 채우는 그 본문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니까요. ‘십일조(apodekaτευω)’라는 단어는 명사가 아니고 십일조를 드리다, 하는 뜻의 동사입니다. 십일조라는 덩어리를 행하라는 자체가 없어요. 십일조가 동사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동사가 되어버리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마음 이야기는 의와 인과 신, 벌써 했잖아요. 마음 드리고 또 마음 드리고, 무슨 이런 말이 다 있어요. 말이 성립이 안돼요. 마음 드리고 또 마음 드리고. 참 이거 기가 찹닏. 다시 13장으로 돌아갑시다. 마귀로 하여금 한국교회나 세계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게 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성경까지 이렇게 잘못 번역시켜서 하게 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평소 생활공간에서 십일조를 하면서 얼마나 미세한 떨림이 있었습니까? “생활비 없어도 꼭 내야 됩니까? 갑근세 떼고 내는 겁니까, 아니면 보태서 내는 겁니까? 집 팔고 전세대비 내야 됩니까? 전세에서 이윤 남긴 그것의 십일조를 드려야 되는 겁니까? 십일조 반 떼서 다른 교회에 십일조 내면 다른 목장에 내는 것이 됩니까? 선교회비와 건축헌금까지 합치면 십일조 금액이 되는데 그것으로 그만 퉁 칩시다.” 이런 온갖, 의와 인과 신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마음도 같이 벌벌 떨고 있어요.


여러분,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미래에는 십일조가 없습니다. 미래에 가는 기차로 바꿔 타시기 바랍니다. 십일조 했는지 묻지도 않아요. 우리가 받는 상은 우리가 행해서 받는 상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이루어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을 아무 행함도 없이 그냥 누리는 겁니다. 급이 달라요. 신랑이 대단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단지 신부라는 포지션 때문에, 위치 때문에 신랑의 격에 맞도록 우리는 아무것도 안한 우리가 화려한 웨딩드레스에 보석에 난리도 아닙니다.

 

이것은 신부가 예뻐서가 아니라 같이 살 신랑이 너무나 대단하게 때문에 우리는 덩달아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에서 현재로 내려온 성령이라는 이름의 기차입니다. 십일조를 이야기하고 나니까 이상하게 더 이상 성경 볼 마음이 안 들지요. 그게 얼마나 목에 걸린 계륵 같은 것이었습니까? 복음공부 아무리 해도 속으로는 ‘그래도 목사님 내야 됩니까?’ 맨날 이런 것이 올라오고, 수십 년 교회 다니면서 한 번도 이런 것이 시원하게 내려간 적이 없잖아요. 지금 나 혼자 너무 오버하는 느낌인데요.

 

13장에 들어가 봅시다. 좀 남아 있는 12장 39절 먼저 봅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 시간층이 두 개의 시간층이 있는데 하나는 과거에서 현재로 오고 미래는 불확실해서 벌벌 떠는 이것, 이쪽은 죽든 살든, 울고 불든, 이미 과거는 확정된 신분을 가지고 유람하듯이 폐허가 된 도성을 말 타고 돌아보듯이 느긋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이 두 시간층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건너올 수 있는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죽고 산 사람만이 이쪽 기차, 성령의 기차를 타는 겁니다. 로마서 6장 이야기 했지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거예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하게 되면, “목사님, 성령 받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이런 질문을 하고 싶지요. 제가 대신 해 드리겠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난 뒤에 어떤 달라 졌습니까?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난 뒤에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같은 이야기에요.

 

예수님께서 성령 받고 난 뒤에 하늘나라로 달려간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죽는 뜻이라면 성령에 의해서 죽게 하소서. 성령을 받게 되면 자동적으로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부인이 되는 겁니다. 자기부정이 돼요. 자기부정이 된다는 말은, 이게 마음에 관한 문제지 돈을 교회나 기도원에 바치는 이런 것은 아니에요. 그냥 사시면서 옛날에는 집에 한 40억이 있어서 그 돈을 의지했는데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40억이 있어도 돈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부인이 되는 거예요.

 

돈 처리 문제는 자기부인 상태에는 처리될 대상조차 안 되는 겁니다. 부동산 해놓았거든 팔지 마시고 그냥 간직하게 되면 나중에 값이 오를 수가 있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받아 챙겨야지 뭘 어쩌겠어요? 아무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벌써 잊었지요. 예수님이 오셔서 뭘 한다고요? 대리변호를 해요. “제가 돈만 밝혔습니다.” 밝혔어도 대리변호사가 안 밝혔으면 된 거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이름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요. 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이 아니고 그리스도 이름으로 되는 거예요. 전혀 달라질 것이 없이 그냥 막 사시면 돼요. 이미 제가 이야기 한다는 것이 부끄러워요. 이미 막살고 있으니까요.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은 이 기차를갈아타는데 있어서, 이미 갈아탄 경우에 어느 브릿지, 어느 다리를 건너왔는지를 확인하는 겁니다. ‘아하, 십자가를 건너왔지.’

 

남들 보기에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지만 나한테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40억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것, 돈보다 귀한 것을 받았다는 것, 그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자기부인을 하라고 하면서 그 나 중의 말이 뭐냐 하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12장 46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예수님! 밖에 동생들이 와 계신데요.”라고 할 때 그 동생들과 모친을 현장에서 참 부끄럽게 만들어요.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대리변호입니다. 대리변호인데 사람들은 대리변호를 모르고, 예수 믿었으니 이제 독자적으로 하나님형상을 이뤄보겠다고, 독자적으로 착하게 해보겠다고 해봐야 그것은 마귀의 밥이 되는 겁니다. 13장에 들어갑시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비유에서는 여기에 대응할 수 있는 개인주체는 없습니다. 그냥 시간과 시간의 연결고리, 그 틈 사이에서만 천국이 나오는 겁니다.

 

11절에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사람이 누구십니까, 묻지 마세요.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누구십니까, 가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 이쪽 기차에서 이쪽 기차로 올라타게 되면, 전에 있던 기차에서는 ‘저건 내 자리인데.’라는 나의 자리라는 것이 아예 없어요.

 

나의 자리가 없고 그 자리는 전부 다 주님이 예약해준 자리고, 주님께서 솎아서 넣어주는 자리가 주님의 은혜로 그냥 배당받는, 할당받는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미리 당겨서 ‘저기 창가자리 풍경 구경하기 좋은데.’ 이렇게 미리 내다보지 마세요. 요나의 기적, 십자가를 건너올 때부터 모든 인간의 자기기대성은 이미 함몰되고 죽어버렸어요.

 

그 다음에 예수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마음대로 자리가 배치가 되고 구성이 되는 겁니다. 어떠한 직업을 가지든, 어떤 입장에 있든지 그들을 한데 묶는 것은 요나의 표적, 예수님의 십자가로 묶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미리 이야기하는 것은, 괜히 비유를 보고 염려하거나 걱정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어요.

 

내가 만약 말씀을 들었는데 존다고 해서 마귀가 와서 씨앗을 물어가게 되고, 그래서 내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나쁜 밭으로 분류가 되어서 “너 탈락” 이렇게 되면 어쩌나, 다음에 기회가 주어져서 정신 바짝 차려서 잘하려고 했는데 생활의 어려움이 와서 잠시 교회 두 번 빠졌더니 그 다음에 “너는 탈락” 이러면 이 모든 말씀이 대체 일본의 파친코처럼 장애요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 장애요소들을 다 피하고 정말 좋은 밭이 되기에는 우리의 생활공간이 너무 힘들어요. 자기가 제임스 본드도 아니면서 무슨 액션을 한다고 라스베가스를 다 뒤집어놓고 말이지요. 영화 안보신분들은 잘 모르지요. 대단한 영웅도 아닌 게 어떻게 이 난관을 다 피합니까? 파친코 아세요? 땅 당기면 사다리 타듯이 죽죽 내려오잖아요.

 

모든 장애요소를 다 피해서 기어이 성공한다. 이거 아닙니다. 이것은 누구한테 맡겨야 되는가? 전문가 선수에게 맡겨놓으세요. 십분 쉽시다.


2016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 마태복음강해 제6강 [수동적믿음]

(강의:이근호 목사)

마태복음 13장에서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라고 했을 때 거기에 대한 해법, 해결책은 13장 35절에 보면 나옵니다. 13장 35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비유를 말하신 그 당사자가 창세전부터 감추인 것,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활동에 나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뿌리고, 돌밭에 뿌리고, 가시떨기에 뿌리고, 좋은 땅에 뿌린다는 것은, 우리는 뭐만 생각하면 되느냐 하면, 네 개의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의 장면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고 나머지 세 개의 밭은 전혀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13장, “내가 입을 열어서 비유를 말하고” 이렇게 비유를 말하는 그분의 활동성은, 열매 있는 쪽과 열매 없는 쪽을 차별화시키는 식으로 비유를 말하신 당사자가 그것을 현실화시키면서 계속해서 활동해 나가시는 것이지요.

 

열매가 없는 쪽, 열매가 생길 수 없는 경우를 계속 유발하게 됩니다. 열매 없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가져가는 경우와 돌밭에 떨어져서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잠시 견디다가 환란이 일어났을 때 넘어지는 자, 그 다음에 가시덤불에 뿌리웠다는 것은 세상염려와 재리와 유혹에 막혀서 결실치 못한 자, 이런 자들이 예수님께서 비밀을 드러내는 협조자들로 등장인물로 삼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 하는 일에 하나 버릴 것이 없어요. 마귀도 다 쓸모가 있는 겁니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비유를 던지신 예수님께서 그 비유의 마지막결말을 일구어 내시는데 있어서 마귀는 필히 자기의 역할을 담당을 해줘야 돼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자로 하여금 말씀을 빼앗아 가도록 마귀가 적극적으로 개입을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입장은 뭐냐 하면, 확실성 앞에서의 성도의 입장은 수동적이에요. 어디 앞에서? 확실성 앞에서. 모든 것이 확실해 졌어요. 끝에 웃는 자, 마지막 웃는 자가 승자라고 하잖아요. 마지막에 누가 웃느냐 하면, 예수님이 마지막에 웃어요. 마지막 예수님의 웃음을 위해서 얼마든지 우리가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같이 웃을 수 있는 겁니다. 어떻게 되든지 “주님께서 참 잘하셨습니다. 모든 세상만사는 주님의 뜻대로 통일되게 돌아가는 것이 맞군요.”라고 고백하는 사람치고 지옥 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증인을 왜 지옥 보냅니까? 마귀 증인입니까? 자기를, 모든 것을 시작했고 모든 것을 끝장내시는 분으로 증거 하는데, 그런 자들을 모아서 천국 보내는데 그 사람이 구원 안 될 수가 있겠어요?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여러 밭의 경우들을 보고 남은 것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어디서? 세상에서, 이 가야산 밑에 내려가서 즐기는 거예요.

 

세상재리의 염려가지고 고민하는 사람, 말씀 들으면 홱, 하고 외면하는 사람, 교회 나와서 좀 어려움이 있다고 해가지고 ‘나는 종교를 잘못 선택해서 집안에 우환이 있다.’는 사람, 세상에, 딱이야 딱! 어쩌면 그렇게 마태복음 13장의 현실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우리의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그걸 보고 매사 깊숙하게 세세한 곳에 손길을 닿게 하시는 주님의 섬세한 손길 앞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 끝났네. 걱정할 것이 없네요. 전부 다 하나의 역할이니까. 그렇게 해서 16절을 보게 되면,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것을 절대로 수동적으로 이 결과물을 받아들여야지 능동적으로 이것을 차지하려고 용쓰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열매는 기껏해야 자기열매가 되지 주님의 열매가 안돼요. 농부의 모든 열매는 주님의 열매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가 능동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피할 수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길가에 떨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슝, 하고 독수리가 날아와서 방금 떨어진 씨앗이 어디 있지, 라고 하는데 독수리가 날아오니까 이쪽으로 확 피해서 ‘휴, 살았다.’ 또 ‘내가 마귀에게 잡힐까 보냐.’ 이렇게 능동적으로 피할 수 있는 방도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들이닥치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그냥 즐기세요. 주께서, 비유로 던진 분이 알아서 홀로 완성한다는 사실을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비유도 마찬가지에요. 가라지를 심어놓았는데 어떻게 합니까? 29절에 봅시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마지막 때까지 미래에서 온 열차로 인하여 과거에 있던 모든 것은 결국은 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처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느긋하게 봐 줘야 돼요. 제가 이 바닥에, 이 목회의 바닥에 들어오고 난 뒤에 이 본문을 교회 내에 적용해 버리면 정말 이것은 당파싸움이 일어납니다. 노론소론 난리 납니다. “네가 가라지야. 어디서 가라지가 주제도 모르고.” 이래가지고 난리가 나요. “우리는 알곡이야.” “알곡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래서 한쪽은 입구에 모여 있고, 경찰들이 와서 진치고 있고, 한쪽은 본당 내놓으라고 하고 다른 쪽은 본당 입구에 서서 못 들어오게 막고 있고.

 

그게 전부다 뭐냐 하면, 수동적이 아니고 능동적으로 사수하겠다고 설치는 것, 그게 바로 가라지입니다. 아주 그 역할들을 그들이 잘 하고 있어요. 분쟁하는 그런 교회 가서 “주께서 참 일 잘하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찬미를 올리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31절에 보게 되면, 여기에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투입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겨자씨 한 알이 있는데 겨자씨가 아무리 커도 나무가 안돼요. 어쨌든 겨자씨가 있는데 32절에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식물학적으로 겨자씨가 제일 작은 씨는 아닙니다. 좀 작은 편에 속해요. 그런데 주님은 그런 것 좀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이런 비유를 하시는 분이 35절에, 비유로 말하되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별로 해석할 것이 없어요. 우리가 개입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냥 구경만 하고 떡만 먹으면 되니까요.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이것은 아까 이야기했고요. 그 다음에 37절에 죽 보게 되면,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전부 이것은 예수님이 홀로 하셨다는 것에 필요한 하나의 스텝들이에요. 조명은 누가 담당하고, 그리고 카메라는 누가 담당하고, 조연출은 누가 하고, 미술담당 따로 있고, 여러 가지 또 많을 거예요. 그 모든 스텝들, 끝나고 난 뒤에 짜장면 한 그릇씩 얻어먹는 스텝들 있잖아요. 그런 스텝들이 쫙 깔린 거예요.

 

그 스텝들이 마귀요, 그 스텝들이 바로 이단이고 불신자라는 말이지요. 그 스텝들의 특징이 뭐냐? 한결같이 예수님 하는 일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자꾸 개입하려고 시도한다는 겁니다. 비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뭔가 몸부림친다는 거예요. 비유는 그냥 비유일 뿐 우리는 그냥 느긋한 마음으로 보면 되는 겁니다. 비유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비유 끝나고 난 뒤에 이루어져요.

 

비유는 하나의 원설계도고 그 설계도대로 이것은 미래에서 투입된 시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끝까지 가실 거예요. 44절에,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이러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이런 식으로 반전을 일으키면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밭을 사는 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자기 일에 대해서 남에게 하청 떼어주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을 본인이 알아서 홀로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48절에,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이런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 다음에 결정적인 것이 52절에, 마지막 때에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구약과 신약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구약과 신약, 옛 약속과 새 약속을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 주인과 같으니.

 

집주인이 꺼낼 때 혼자 꺼내면서 그 말씀을 혼자 다 이루시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오는 것이 예수님에 대한 신원조회가 나오는데 그들은 그 일에 실패합니다. 57절에,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보고서도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14장으로 넘어가 봅시다. 14장에서 주목할 것은 27절입니다. 유령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령이다.”

 

그러면서 무서워하지요. 왜 유령이라고 했을까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인간이라면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이 기존에 깔려 있는데 물위를 걸었고 거기에 세트처럼 짝을 이루어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께 갔습니다. 이럴 때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자기를 관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만 보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주님만 바라보고 있지요. 주님만 바라보고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서의 수동적인 모습입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자기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내가 미쳤지. 지금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어?’ 하는 순간 물에 빠졌어요. 자, 그렇다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오면서 그가 경험했던 것은 뭐냐?

 

출애굽기 24장을 보겠습니다. 4절에서 8절까지 보면,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여기서 순서가 이래요. 12, 그 다음에 법, 물론 제사법도 포함됩니다, 법, 그 다음에 마지막 마무리가 뭐냐 하면, 피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언약이 체결돼요. 열 두 지파는 인간입니다. 인간이고 그 다음부터 인간 말고 주어지는 것, 피와 법은 하나님에게서 주어져서 이루는 것은 언약을 이루는 겁니다. 그렇게 주어지게 되면 인간들은 신분이 바뀌어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신분이 바뀌거든요.

 

이 말은, 예수님 쪽에서 다가올 때 법은 제사법입니다. 제사법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안은 밖으로 나가고, 밖에 있는 것은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안에 있는 것은 의고 흠 없는 제물이니까 흠 없는 의가 밖에 나가서 죄인으로 취급받아서 죽게 되고 밖에 있는 죄인은 그로 인하여 안에 들어와서 원래 안에 있던 의의 사람이 되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언약 안에서 일어나는 기제,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어요.

 

이런 과정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반가워서 뛰어내릴 때 베드로마저 하나의 세트가 돼요. 열두 지파 이스라엘의 원형을 베드로가 잠시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법이나 피라는 것은 바꿔치기 할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죄인이 필요하고 그 죄인의 자리에 열두지파가 개입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예수님 쪽에서 준비한 것은 법과 피를 준비했습니다.

 

법이라는 것은 율법이고 피라는 것은 십자가 피죠. 이것이 결합할 때 이미 출애굽기 24장에 나오는 공식이 되는 거예요. 베드로가 어느 정도로 수동적이 되어야 되느냐? 나 없다. 그냥 주님만 있으면 주님이 알아서 모든 것을 친히 홀로 이루신다, 하는 순간 그 베드로의 자리는 물이든 불이든 상관없이 주와 같은 범주안에 속하는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자기를 보는 순간 빠져버렸어요. 이것은 뭐냐? 자기고유의 단독적인 생활공간을 따로 설정해버리고 만 겁니다. 그럴 때 이것은 뭐냐? 수동에서 능동으로 바뀌게 돼요. 제가 뭘 해야 됩니까, 이렇게 돼버려요. 그런데 그걸 보고 있던 사람들은 뭐냐 하면, 유령이라 했습니다.

 

이 말은, 전진하는 경계(2강)라는 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점점 더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결별의 순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점점 더 갈라져요. 그게 14장부터 나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걱정되는 것은,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마음이 들끓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물위를 걷고 싶다는 자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이용합니까?

 

우리는 물위를 걷기는커녕 폐허가 된 옛 초등학교건물에 혼자 있을 때도 “귀신이다. 엄마야!” 하고 막 벌벌 떠는데요. <여고괴담>식으로 복도에 팡, 팡, 팡, 팡, 오게 되면 막 도망치는데. 심지어 거울보고 자기가 유령이라고 깜짝 놀라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모든 것이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생활공간에서는 자꾸 이런 것을 흉내 내지 마세요.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다고 해서 제자들이 “베드로야! 한번만 더. 내가 사진 찍어줄 테니 한 번 더 걸어.” 이런 것은 없습니다.

 

바울이 손수건 가지고 사람 낫게 했다고 해서 손수건 한 번만 더, 이런 것은 없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한 잠시의 역할로 들어갔는데 그게 제자들에게는 신스틸러, 신을 강탈하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처럼 느껴지겠지요. 15장 봅시다. 15장 18절을 봅시다. 17절에, 이것은 전에도 했는데요,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 마음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아무리 경건하고, 손을 씻고, 어떻게 해도 마음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하면 전부 다 그것이 주께서 받을 수 없는 더러운 짓이 되는 겁니다.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그러면 손씻고 경건하게 먹는 것은 괜찮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에요.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냥 살아라. 어차피 인간 안 되는 거, 그냥 살라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그 인간 안 되는 것……, 그 뒤에 나옵니다. 25절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것은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인들과 제자들과의 결별하는 상태에서 제자가 아닌 엉뚱한 제 삼자를 예수님과 그 유대인 사이에 집어넣어 버려요. 집어넣고 왜 너희들이 나를 따를 수 없는가를 계속해서 추가적인 사람들이 와서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믿음 좋다, 충실히 따랐습니다, 하는 그런 것들이 새롭게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그 믿음이라는 것이 무색해 집니다.

 

14장 36절을 보겠습니다. “다만 예수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리라. 이게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를 낳게 되었을까요? 접촉하니까 다 낫게 된다. 출애굽 때는 제물이 있었는데 그 제물에 접촉한 자는 반대로 다 더러워진다고 했어요. 죽은 시체, 부정한 음식을 접촉하게 되면 역시 더러워집니다.

 

접촉이라는 말은, 전염, 또는 오염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접촉하니까 그들이 나음을 입었다. 그러면 예수님을 접촉한다는 말은, 예수님 자체를 뭘로 보느냐 하면, 하나의 공백, 또는 구멍,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구멍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바람이 술술 들어오겠지요.

 

텅 비어있는 거예요. 텅 비어있는 곳을 접촉한다는 말은 기존에 있는 모든 세계를 순간적으로 부정하는 거예요. 부정한다는 말은 이것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온갖 것 다 해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더라. 그러므로 이것은 다른 세계에서 이 통로로 불어오는 바람에 나를 맡기게 되면 이 새로운 다른 차원의 바람으로 인하여 우리가 낫는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손을 만진 거예요.

 

만진다는 말이 행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만질 때 딱 만져야 된다는 식의 그런 것이 아니고 그 마음자체가 이 땅과 저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다가서게 되면 거기서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보다 더 좋은 바람이 불어서 예상치 않은 새로운 변화가 여기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 같은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 역할을 지금도 우리가 했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여러분, 병 낫는다고 구원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문제는 죄 용서기 때문에 그 죄용서가 “죄용서!” 이렇게 오는 것이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대리변호를 해주는 거예요. 십자가 지신분이 “쟤는 죄가 없어. 왜? 내가 대신 모든 율법을 지켰으니 죄가 없어.”

 

의로운 자가 변호하면 죄가 없는 거예요. 너무 간단해서 이상해요. 그런데 너무 간단하다는 말은 우리 쪽에서 나대거나 설칠 필요가 없다는 그 점에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스스로 부정해버리는 효과를 낳게 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는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날라 가는 거예요.

 

우리 인생 그렇게 한 번 살아봅시다. “내 쪽에서 할 것이 없습니다.” 저쪽에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구멍 같은 주님 앞에 서서 “제가 이렇게 했습니다. 저렇게 했습니다.” 하지 마시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염치 불구하고 나왔습니다.” 하는 그 순간 그게 바로 대리변호의 효과를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순간이에요. 어차피 생활공간에서는 우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 다음에 마태복음 16장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13절이요.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드디어 결별의 수순으로 빠집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23절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대비를 시켰습니다.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사도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 돼요. 그러나 성령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만 되고 그 외 모든 사람의 일은 사람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우리가 딱 하나만 알면 돼요. 사탄은 어디에 등장하는가? 사탄은 항상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어떨 때 사탄이 자기정체를 유감없이 드러내는가?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언급하게 되면 사탄은 거기서 등장하고 발작을 일으키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십자가로 한꺼번에 모든 일이 해결되는가?’라고 진지한 얼굴로, 걱정스런 얼굴로, 되레 우리를 걱정하고 염려하고 많이 생각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럴 수 없느니라.” 할 때 사탄이 나와요. 그것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신이 오직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하도록.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뭐냐? 관심사를 다른데 두게 하는 거예요. 관심사를 다른데 두게 할 때 그 딴 데 두는 내용이 뭐냐? “너는 이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어. 너는 할 수 있어. 주저하지 말고 해봐. 그러면 너는 되게 되어있어.” 자꾸 우리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 사고방식을 심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주의 일이 된다는 그것에서 자꾸 얼굴 돌리게 만드는 겁니다. 누가? 세상신이. 세상은 원래 그런 것들이 소통이 되는 현장이 세상이기 때문에요. 예수님 공생애에서 제일먼저 마중 나온 자가 누구였습니까? 놀랍게도 악마가 마중 나왔어요. 악마가 마중 나올 때 사람들은 궁금해요. “목사님, 악마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악마 생긴 것 제가 묘사해 드려요? 녹색 날개 달리고 뿔나고, 악마가 그렇게 생겼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요? 우리가 평소에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잠재의식이 그렇게 튀어나온 거였어요. 튀어나온 것을 묘사했는데 나쁜 것만 골라서 집대성해서 악마를 그려내게 되면 얼굴이 이렇게 있다면, 눈은 쫙 째지고, 입은 비웃는 듯하고, 얼굴은 이렇게 길어요. 관상학적으로 안 좋은 것은 다 끌어 모은 거예요. 뿔이 있고, 날개는 징그럽게도 녹색으로 되어 있고요.

 

브람스토커라는 사람이 지은 <드라큘라>라는 소설이 있어요. 이 소설에서 보면, 모양새는 점잖은 백작입니다. 밤만 되면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을 일으키는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400년 동안의 한 맺힘이 혈관에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건 호러지요? 무섭지요? 지금 춥지 않습니까, 여러분. 꿈속에 드라큘라 나오겠어요.

 

얼마나 한이 맺혔습니까? 400년 동안, 희생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걸 백작이 온 몸으로 받아내는 거예요. 그걸 참을 수가 없어서 일단 덧니가 나야 돼요. 덧니가 나야 목을 물 때 잘 안 빠지니까. 그런데 그걸 막는 방법이 뭐냐? 마늘, 마늘 값 오를 때는 곤란해지죠. 마늘과 십자가. 동양철학과 혼재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십자가를 들이대면 드라큘라가 으악,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하나는 뽑아낼 수 있어요. 한 맺히면 마귀 들렸다고 보면 돼요. 그 놈의 한. 뭐가 그리 한이 맺혔습니까? 한 맺히면 사주 보게 되어 있고 한 맺히면 점 보러 다니고, 한 풀려고 온갖 짓 하고, 한 맺히면 철야하게 되고, 한 맺히면 갑자기 평소에 안하던 헌금을 많이 하게 되고, 한 맺히면 갑자기 안 나오던 오후예배까지 나오고요. 한이 맺히면 사람이 가만 있지를 못하고 뭔가를 해요.

 

한이 왜 맺히겠어요? 왜 나를 단독존재로 살지 못하게 만드느냐, 그것 때문에 한 맺히거든요. 그게 바로 베드로가 대표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건재한데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어줘야 우리가 희망이 있고 낙이 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구나.” 그게 바로 사람의 일이라는 거예요.

 

사람의 일이 사탄의 일이라는 말은 사람 중에서 한 안 맺힌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한이 맺힌 거예요. 자, 그런데 16장 17절부터 하는 말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베드로를 가지고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베드로가 앞으로 예수님과 의견충돌이 없어야 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예수님이 십자가 이야기를 하고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했다면 이것이 가장 반석다운, 돌로서는 최상의 것,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최고의 반석으로서 베드로가 아주 적절한 태도를 보이게 된 겁니다. 자력으로 교회 되는 방법은 없었다. 베드로가 다시 이걸 보면서 얼마나 절감했겠습니까?

 

내가 가장 교회의 반석다운 이유는, 내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는 소리를 들을만했다는 고백의 대표자기에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고백하고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거든요. 한 맺혀 있으니 무슨 일을 못하겠어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다 한 짓거리들 하고 오신 분들이에요. 아직도 그런 짓거리를 안했으면 그런 짓거리가 남아 있다는 것이 상당히 아쉽네요. 염려스럽습니다.

 

17장 봅시다. 점점 더 헤어질 대목들이 가까이 옵니다. 변화 산 이야기인데 변화 산에 세 명이 대표로 올라갔습니다. 그 중에 베드로가 아주 멋들어진, 극히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발언을 합니다.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습니다.” 이게 왜 가장 세속적이냐 하면, 초막 셋은 누구한테 좋은 집이냐 하면, 땅 밑에 사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는 멋들어진 제안입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얼마면 되겠습니까? 같이 살고 싶은데 집 지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산 위에 있는 세 사람, 예수님과 엘리야와 모세는 그런 집이 필요하겠어요, 필요 없겠어요? 그런 집이 필요치 않잖아요. 이것은 베드로가 무엇을 경유하지 못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직 경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바가 곧 주님도 굉장히 좋아하는 선물이 될 것이라고 지금 착오를 일으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뭐냐? “갖다 바칠 생각을 하지 말고 너희는 저 예수님의 말만 들어라. 이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원하는 바에요.”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가 뭐냐 하면,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 거예요. 하나님께 갖다 바칠 생각을 하지 말고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그 말씀을 경청하고 어떤 식으로 과정을 이끄는가를, 그 말을 마음에 담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만 모든 정보를 알려주셨다? 누구에게만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에게만 모든 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 외의 여러 항목이 있는데 적어보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교회. 교회를 위하여 사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의 생활환경, 자기의 집을 위해서 사는 것, 자기 가정을 위해서 사는 그것도 우상숭배가 되고, 그 다음에 자기직장, 이것도 우상숭배가 되고, 자기조국을 위해서, 자기국가를 위해서, 민주화운동을 위해서, 이게 전부 다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주님을 위해서 가정을 잘 다스리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주님을 위하려면 주님의 조치가 주어졌을 때만 영광이 됩니다. 자기가정 살피다가 주에 의해서 폭삭 망했다는 체험을 할 때 그것이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주님 덕분에 우리가정 잘 다스리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섬기는 대상이 두 개가 돼버려요. 주님도 섬기고 자기 집도 섬기는 그런 얄팍한 꼼수를 쓴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도 우상이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에 나오듯이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예수님의 말씀만 우상숭배가 아니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만 섬기는 방법은 뭐냐? 주께서 알아서 이런 것들이 의미 없음을 조치를 해주니까 우리가 미리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우리 하던 대로, 가정 섬기고, 직장 섬기고, 그렇게 해주시면 우리의 기대대로 잘 안되실 것입니다. 그럴 때 주께 영광돌리시면 되는 겁니다. 굉장히 쉽지요. 아주 간단합니다.

 

그 다음 17장 20절에 보게 되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러니까 우리가 섬기는 일에 실망을 일으키는 일이 벌어지거든 주께서 복음을 주시기 위해서 참견하고 있다고 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정이나 기대하던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될 때, 그것은 주께서 그런 것을 잡고 그런 것에 마음 두면 안 된다고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계속해서 17장 2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러면 교회에서 기도회 할 때 다른 것 가지고 기도제목 할 필요 없어요. 전도사가 앞에서 한 30분 찬양 인도하고 기도제목 줄 때 “다 같이 합심해서 산을 옮깁시다. 가야산을 옮깁시다.” 이것이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했거든요. 산을 옮겼다면 그것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봐주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산을 못 옮긴다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기도해서 산을 옮긴 사람이 혹시 있습니까? 그런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아무도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믿음이 있으면 안돼요. 왜? 믿음은 갖다 줘야 돼요. 주님께서. 아까 식사할 때 제각기 찬거리 들고 갔습니까? 장봐서 갔습니까? 그냥 다 차려놨잖아요. 늦게 가면 비빔밥 없지만. 이미 다 차려놨잖아요. 그냥 먹기만 한 그것이 믿음이에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참석한 것도 주의 은혜요, 앞자리에 앉게 된 것도 주의 은혜요, 앞자리에 앉으려고 하다가 권사님에게 눈총 받아서 뒷자리로 간 것도 주의 은혜요, 찬양하는데 4절을 부를 것을 3절 불러서 우세당하는 것도 은혜요, 그것도 생중계 되는데 가사 더듬거리는 그것도 은혜요, 반주하다가 텅, 텅, 텅, 미끄러지는 것도 은혜요, 모든 것이 주의 상찬, “주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편 23편.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믿음이 없음에도 주어지는 그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제공된 것을 믿을 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간질 들리고, 자주 넘어지는 이 모든 병자고침은 자기소관이 아니고 주님소관인 것을 그들은 믿지를 못한 거지요. 예수를 안 믿은 겁니다. 그들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네 식으로 하려면 산을 옮겨보라고 주께서 숙제를 준 거예요. 이게 지금 제자들과 결별수순을 밟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24절에 보니까 여기에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본인이 성전이기에 안내도 되지만 너희들로 오해케 하지 않도록 성전 세를 준다, 하면서 돈이 없어서 못주는 것이 아니고 돈 있음에도 불구하고 낚시를 던져서 잡힌 고기의 입을 벌리니까 거기에 딱 성전세 액수만큼의 돈이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없는데서 생긴 거예요. 사전에 공작을 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 몰래 고기 한 마리 잡아서 입을 벌려서 동전 넣어놓은 다음에 물에 딱 띄워놓고, 시간 맞춰서 딱 봤다가 “성전세를 내라고? 베드로야, 고기 잡아라. 베드로야, 그 고기 말고 옆의 고기!” 벌써 주님께서 표를 해놓았거든요. “그 고기 말고 이 고기! 그렇지 입을 벌려라. 나왔다.”

 

그 원인을 추적해 들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 설명하고 이번시간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는 기름 준비하는 지혜로운 처녀. 두 번째가 너무너무 유명한 거예요. 교회 한 달만 다녀도 다 아는 유명한 비유가 나옵니다. 흔히 달란트 비유인데 이 달란트 비유가 언제부터인가 탤런트비유로 바뀌었어요. 기가 찰 일입니다.

 

달란트는 돈의 단위인데 갑자기 탤런트가 왜 나옵니까? 재능기부 하라는 그 말이거든요. 두 번째가 달란트비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예수님께서 어린 소자에게 지극히 작은 자가 했다고 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 지옥과 천국의 비유인 이 세 가지 비유인데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비유가 뭐냐 하면, 주께서 네게 없는 것을 내놓으라는 말입니다. 없는데 어떻게 줘요? 없는데? 없는 것을 내놓으라는 것은 뭐냐 하면, 없는 것을 내놓는데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께서 움직이십니다. 움직이게 되면 없는 것이 새롭게 발생되었다는 그 원인이 예수님이 움직임으로 연계해서 없는 것이 새롭게 생깁니다. 예를 들면, 주인이 먼 곳으로 출장을 가버려요. 이렇게 움직입니다. 주인이 움직이는 순간 그들에게는 ‘나에게 이런 것이 있었어?’ 하는 그런 요소를 내놓게 되지요. 바로 그것, 내가 움직여서 획득된 부가적인, 추가적인 것을 내 것으로 가져오라는 거예요.

 

신랑이 미리 와서 신부 챙기고 결혼식 하면 돼요. 그런데 신랑은 오지를 않습니다. 신랑은 오지 않고 신랑이 오지 않다가 움직입니다. 움직일 때 그 때, 기름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요소가 발생이 돼요. 그 기름을 보겠다는 겁니다. 신랑이 오지 않고 있을 때는 기름이 필요 없어요. 신랑이 드디어 신부를 만나러 오면서 기름이 새롭게 필요한 요소로서 신랑을 맞이할 중요한 핵심요소로 등장합니다.

 

그 기름을 보자는 거예요. 이것은 세 번째 비유인데요. 사람이 가만있어도 주님께서 혼자 설쳐대는 거예요. 혼자 설쳐대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주섬주섬, 이것도 네가 한 것이고, 이것도 네가 나 주려고 한 것이고, 그렇게 다 가져가요. 가져가니까 25장 37부터 보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주님께서 “네가 나에게 줬다.” “제가 언제 줬습니까?” 천국 가는 양은 기억이 안나요. 언제 우리가 주님한테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막 사시라는 그 말이지요. 막 사시면 주섬주섬 다 가져가요. 마치 장사하고 있으면 휴지 줍는 노인네가 와서 주섬주섬 휴지를 가져가요. 나중에 “할아버지 이 휴지 어디서 주웠습니까?” “저 사람이 줬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응? 내가 준적이 없는데?”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아니요. 저 사람이 내가 어려울 때 종이를 모아놓고는 ‘할아버지, 이것 팔아서 용돈 쓰세요.’ 하고 줬습니다.” 하는 거예요.

 

순전히 노인의 자작극이잖아요. 세상 자체가 주님의 자작극이에요. 그게 주님의 활동 때문에 우리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는 우리 것으로, 우리가 한 것으로 전부 다 해주시는 것, 이것이 주께서 모든 활동의 그 열매와 혜택을 자기백성에게 넘겨주는 그런 비유가 마지막 때에 성도에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이게 세 가지 비유에요.

 

기름 준비하려면 주유소 가까이에서 살아야 돼요. 얼른 준비해야 되니까. 기름 준비하는 이것은, 기름은 성령이니 성령을 준비해야 된다. 제발 그 해석은 그만 하시기 바랍니다. 내 쪽에서 나서서 뭘 준비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채로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나름대로 투쟁하고 노력하는 종교적인 행위가 불과합니다. 그런 것은 전부 다 사기입니다.

 

가만있으세요. 주께서 다 혼자 하셔서 모든 것을 “네가 날 위해서 이렇게 고생했다.” 하는 식으로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딱 하나밖에 안 남아요. 그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는 그분의 능력을 믿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동안 참 인내했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마치겠습니다.  


제 7강 (단독 수행)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결별 수순을 밟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가 한 템포 늦춰서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로 용서해 준다.’ 이건 고마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 대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천국으로 인도하겠다.’ 이런 말씀은 듣기만 해도 황공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소원은 안 들어주십니까? 영생을 주신다고 하시면서 왜 우리 소원은 안 들어주시는 겁니까? 참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고, 주님이 희생하셔서 ‘오늘 죽어도 낙원에 간다.’고 하신 것에 대해서는 정말 입이 100개라도 감사할 뿐인데, 소박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작은 소원을 외면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아무리 좋은 미래의 천국을 약속해 주셔도 지금 당장 시급한 소원을 안 들어주시면 섭섭합니다. 만약 내 아버지가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처럼 나라를 구했다면 그것도 좋지만 나와 함께 놀아주고, 잠자리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그런 아빠가 더 좋지 않을까요? ‘내 아버지 아니면 나라 구할 사람이 없나?’ 이런 생각이 들겠지요?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좋은데 왜 작은 나의 소원은 안 들어 주시는가?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주님 말씀이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습니다. 베드로가 평소에 물 위를 걷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이 반가워서 맞으러 나가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물 위를 걷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왜 주님은 들어주시지 않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은 우리가 원치 않는 분위기 속에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에 집착하다 보니 내가 원치도 않았는데 그냥 얻게 된 것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과 출애굽기 24장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12지파에게 법이 주어지고(제사법도 포함), 거기에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언약을 이루셨는데, 12제자는 이런 방식을 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제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는 것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어른 된 입장에서 그런 것들을 다 챙겨 주시는 겁니다.



마치 초등학생이 자신에게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부모가 알아서 챙겨주듯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챙겨 주십니다. 초등학생이 철없이 엄마에게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하는데, 그것 안 들어준다고 시장 통에서 엄마 붙들고 울고불고하다가 얻어맞고 집으로 오지요.



엄마는 자식이 요구한다고 다 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원치 않아도 필요한 것을 알아서 챙겨주시는 것에 대해서 아이는 너무나 무관심하고 고마운 줄도 몰라요.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법과 피를 주셨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원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 두 번째 이유가 19장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의 단독 작업입니다. 주변에 있는 제자들을 따돌리고 혼자 일하십니다. ‘이번 거사는 너희들이 함께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이야기와 우리 소원 안 들어주시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주님의 공생애가 성도에게 그대로 주어집니다.



제자들이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을 붙들고 자기 소망을 이뤄달라고 요청했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을 따돌립니다. ‘이런 위험한 길을 너희들은 갈 수가 없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는 상황을 오늘날 성도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그러면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가고 있다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제자들마저 따돌리시는 주님의 작업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심으로 주님이 가신 길(공생애)을 우리도 가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 거사를 앞두고 우리의 소소한 요구는 묵살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요청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우리가 두려워 피한 길을 주께서 외롭게 홀로 가셔서 거사를 이루시고 그 이루심을 우리 인생에 그대로 소프트웨어로 심습니다. 마치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깔듯이.



그러면 제자들이 튕겨 나온 것처럼 우리도 튕겨 나오고 나중에 뒤돌아보면 주님께서 외롭게 거사를 다 이루어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결별하는 수순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19장부터 시작됩니다. 16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어요. 이런 사람의 등장을 저는 굉장히 반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속마음을 이 사람이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런 답변을 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 말씀에 대해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청년처럼 어릴 때부터 철저히 십계명을 지켰으면 영생은 떼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눈 팔거나 딴 길로 가지 않았고 계명에 철저히 순종하며 살았기에 자신은 당연히 복을 받을 수밖에 없고 영생 얻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께 확인 차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답변하시기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의 답변은 제자들의 답변을 대변해 주고 있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청년에게 하신 말씀을 제자들이 듣고 제자들도 근심에 휩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거예요.



제자들은 예수님은 3년 동안 따라 다녔는데 날이 갈수록 예수님을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인지 점점 더 미궁에 빠집니다. 자신들이 예상했던 분이 아니고 다른 분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떼 내는 작업의 결과입니다. 주님 홀로 일하셔서 오늘날 우리가 혜택을 입습니다.



신앙생활 40년 하면서 신학도 공부하고 목회 생활도 30년 했는데 날이 갈수록 내가 지금 예수 믿는지 안 믿는지 분간이 안 됩니다. 나태해서가 아니라 더욱 자책하면서,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식으로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게 주어질 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정상입니다. 아주 건강한 것입니다.



이제 서서히 주님께 하청 받아 일하는 내 모습은 사라지고 주님만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이제 주님께 이런 저런 요구를 할 것이 아니라 입을 다물고 주님 하신 일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만 가지는 깊이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할까요? 이것 할까요, 저것 할까요?” 촐랑대며 까불지 말고 주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바라봐야 합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더라.’ 주님은 다 떨쳐내십니다. “제가 주님의 호위무사가 되어 끝까지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검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주님 하신 말씀은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고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지요.



예수님이 부자 청년과 대화하실 때 왜 청년이 제시하는 것으로 대화를 지속하지 않습니까? ‘십계명 지켰습니다.’라고 할 때 ‘제대로 지켰는지 따져보자.’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게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어요.



진작 ‘네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으면 부자 청년은 지켰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켜 온 청년은 십계명 외에 더 추가된 계명을 주셨다면 그것마저 지켰을 것인데 처음에는 전혀 말씀하지 않은 계명을 이제 와서 새롭게 불쑥 제시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것이 꼭 지켜야 할 계명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다 말해야 하는데 주님은 부자 청년에게만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 청년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습니다.”라고 했기에 새로운 것, 절대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추가로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구멍을 내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에게 구멍을 낼 수 없어요. 주님의 응시가 있을 때 구멍이 발생합니다. ‘응시’란 표현을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우리가 아무리 말씀을 지켜도 미진한 것이 계속 남아 있어요. 계속 남아 있으면 감시받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남아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잉여’부분입니다.



내가 말씀을 온전히 지켰다 할지라도 뭔가 빠져나가는 잉여분이 있어요. 이것은 우리가 손 댈 수 없는 다른 요소입니다. 이것은 ‘타인’인데,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십계명을 지켰는데 타인이 내가 지켰다는 것 외에 다른 계명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이것이 뭔가 하면 ‘주님의 응시’입니다. 쉽게 말하면 미지의 X입니다. 미지의 X로 인하여 초월적인 타인이 볼 때 나는 항상 미흡한 사람이 됩니다. 구멍 난 것처럼 미흡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바라볼 때 “영생의 문제는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네 영생 문제에 너는 손을 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무능한 자여서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영생을 예수님이 대신 해주십니다. 이 주님의 작업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개입시키지도 않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9:24).” 부자 청년에게 주셨던 응시를 이제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반응은 “듣고 심히 놀라”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제자들이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오늘날 우리들도 오해하고 있지만)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과 구원을 동일시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제자들은 개별적 구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어떻습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우리 중 누가 높은 자리에 앉습니까?” 이런 식으로.



20장에도 치맛바람이 불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만 천국 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 받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 받는 것과 천국 가는 것은 달라요.



진짜 천국은 자기 구원을 포기한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적은 구원을 포기한 자만 집단으로 구원 받습니다. 천국은 개인 자격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들어가면 나중에 난리가 납니다. 누가 상급이 더 많은가 경쟁이 벌어집니다. 한쪽에서는 주님께 영광 돌리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상급 경쟁이 벌어지고 ---



천국은 착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착함과 상관없이 갑니다. 착한 사람은 천국 못갑니다. 나쁜 사람만 가요. 나쁜 남자, 나쁜 여자만 가요. 좋은 남자, 좋은 여자는 다 탈락합니다. 부자 청년이 착각을 하고, 제자들도 사적인 구원을 생각해서 ‘내가 어떻게 해서 천국에 갈까?’를 생각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은 천사들이 철저히 경비를 서기에 두 번 다시 그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은 우리가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만 살아야지 왜 내가 들어가 살려합니까? 그 사고방식 자체가 틀려먹은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행세가 있는데 어디를 감히 넘봅니까?



갈 수 없는 동네에 주님이 넣어 주십니다. 갈 수 없는데 특혜를 입어 들어갑니다. 공짜로 넣어 주십니다. 천국 가기 위해 시험치고 노력해서 들어가는 자는 없습니다. 나라의 본 자손들은 다 떨어져 나갑니다. 이들은 율법을 열심히 연구해서 천국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못 갔습니다. 세리, 창기, 이방인 백부장이 천국 갔습니다.



제자들도 아직은 멀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떨쳐냅니다.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지니라.’ 예수님의 밀어내심에 제자들이 근심되어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했지요. 구원은 예초에 인간에게는 할당 된 바가 없습니다. 인간이 허전하니까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들어서 자신의 허전함을 메우려고 합니다.



메울 수 없는 공백을 신을 초빙해서 “신이 우리를 예정하사 구원했다.”고 우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예정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했습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1장 4절에 나옵니다. 칼빈은 엄청나게 잘못된 해석을 했어요. 사적 구원론에 집착해서 ‘예수님이 우리를 예정해서 천국에 넣어준다’고 주장했어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만 예정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예정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예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만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천국은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그 이름을 ‘아들의 나라’라고 붙였습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어찌하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 생각에 총 맞은 것처럼 구멍이 나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떨쳐내십니다. ‘너희들이 힘써서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처소를 마련하면 너희들을 그곳으로 부를 게. 그 때에는 너희들이 얼마나 천국에 대해 오해했는지 깨달을 것이다. 그 사실 전체를 성경에 기록해서 후대에 전해라.’고 해서 마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구원 받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들은 천국 못 간다.” 19장 26절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미 제자들의 마음을 간파하신 거예요.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면 하늘나라 갑니까?’ 정답은 간단합니다. ‘천국은 인간의 힘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3장 6절에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애초부터 천국 가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천국 문제는 나에게 맡겨라. 너희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의문이 생깁니다. ‘걱정 안 하고 그냥 살다가 나중에 지옥가면 어떻게 하나?’



주님이 지옥 가라고 하시면 우리는 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힘써서 지옥 갈 것을 천국으로 갈아 탈 재주가 없습니다. 지옥도 주님의 나라이고 천국도 주님의 나리인데 주인이 알아서 보내는 데로 가면 되지 왜 우리가 천국을 욕심냅니까? 그래서 주님은 단독으로 일하십니다. 계속 인간을 배재시킵니다.



“너희들을 그냥 지켜보고 있어. 성령이 오면 ‘아, 이래서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었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실패를 통해서 우리의 본바탕이 폭로됩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설교하면서 ‘실패하라.’고 했잖아요. 무엇을 해도 우리는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실패하자.’ 이런 마음으로 살면 편합니다.



주님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실 때, 우리라면 이런 질문을 했을 것입니다. ‘부자는 천국 가기 힘들지만 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 갈 수 있겠네요?’라고. 그러나 제자들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면서까지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천국이 좋다고 해도 추상적인 관념보다 손에 잡히는 돈이 더 좋아요. 어쨌든 제자들은 계속 의문이 생겨 질문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는 전혀 소통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는 말을 통해 주님이 제자들에게 원하는 답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나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을 만해야 믿지요?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만 확실하게 믿습니다.”라는 태도를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시도는 했잖아요?” 라고 나온 거예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28절).”고 하시면서,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29절).”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33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부자 청년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질문했는데 불똥이 제자들에게 튀었어요. 모든 소유를 다 버려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괜히 주님께 영생에 대해 질문했다고 심각한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으니까요. 그 고생에 대해 주님이 격려해 주시고 복을 주실 것을 기대했는데, 날이 갈수록 주님은 점점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시고 자신들과 차츰 멀어져 가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누구 고집에 더 센지 경쟁하는 것 같아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은 모든 것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6-27).”고 했어요.



천주교의 신부, 수녀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키는가 하면, 결혼하지 않고 신부, 수녀가 됨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9장 12절의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는 이 말씀을 순종한다고 남자는 신부가 되고 여자는 수녀가 됩니다.



모든 것을 바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니까 큰 것을 얻기 위해서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결혼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만약 어떤 여인이 수녀로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송준기나 조인성이 청혼하면 자기의 결심을 고수할까 의심이 들어요.



남자 청년이 신부로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예쁘고, 성격 좋고, 직장 좋고, 재벌 3세인 아가씨가 청혼하면 자신의 결심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주님의 뜻이라고 믿고 그 여인과 결혼할 가능성이 많지 않을까요? 이게 뭔가 하면, 모든 소유 속에 본인의 자존심과 미래의 꿈도 자기 소유에 포함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계속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이 구절을 써서 액자를 만들어 방 안에 걸어놓았으면 좋겠어요. 누가 ‘사람이 할 수 없다고 했는데 너는 이렇게 되었잖아!’라고 하면, ‘주님이 하셨다.’고 답변하겠지요.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나는 할 수 없는데 주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자 청년이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줘야지요. 왜? 자기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 주님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장차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지금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마태복음 19, 20장을 보면 점점 예수님과 제자들이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되는데 19장 28절을 보면 ‘너희가 어떤 짓을 해도 열 두 보좌에 앉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제가 16장을 보면서 말했는데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제자들에게 12 보좌에 앉아 통치하게 하십니까? 제자들은 다 실패자요 못난 사람의 요소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못난 자입니다.’ 목자를 치니 제자들도 다 흩어졌기 때문에 12지파를 다스릴 만한 충분한 자격자가 됩니다. 실패했다는 의미에서.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예수님을 배신했던 베드로도 천국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배신까지는 안 했고 짜증을 낸 우리는 능히 천국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의외로 저 높은 곳에 바라는 것이 아니고 저 낮은 곳에 바라야 한다는 것이 오늘도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술을 끊고 10년째 마시지 않다가 화가 나서 술을 한잔 했다면 약간 미끄러졌잖아요. 그러나 배신까지는 안 갔잖아요. 앞으로 여분의 죄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얼마나 느긋합니까? 어떤 사람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100가지가 있다는데 죽기 전에 100가지 지을 죄를 생각해 보세요. 아직도 얼마나 많이 남아 있는지 몰라요. 성도는 이런 넉넉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죄 안 짓겠다고 아등바등하면서 정신병자 되지 말고, ‘오늘은 이런 죄를 지었는데 내일은 또 무슨 죄를 지을까?’ 이런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면 됩니다.



20장을 봅시다. 여기에 보면 자본주의 원리가 나옵니다. 노동한 대가만큼 얻는 것. 그것이 통하지 않는 세계. 그래서 천국은 자본주의와 전 반대 지점에 있습니다. 노동의 대가는 받아야겠다는 것이 대세가 되어 있는 이 세속적인 풍토 속에서 천국을 생각한다는 것은 극히 어렵습니다.



‘내가 노동해서 받은 대가인데 이 가치를 누가 무산시킬 수 있는가?’ 이렇게 나오면 안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은 --- 와 같으니’ 라고 시작합니다. 천국은 개별 구원이 아닙니다. 천국은 천국 되게 하는 기능이 있어요. 그 기능에 모든 사람이 공유될 때 그것이 바로 천국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신 기능을 같이 나누게 됩니다. 그럼 천국의 기능이 뭔가? 예수님이 곧 하나님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셨고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가치를 만드신 세상에서 조금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럼 뭘 했는가?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할 뿐이지 주님의 것은 전혀 없어요.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함이라(요6:38)’고 했지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3시에 온 사람, 그리고 퇴근 시간 1시간 남기고 온 사람이 있었지요. 만약 자발적으로 퇴근 1시간 전에 왔다면 정말 싸가지 없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불러서 온 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할 일 없이 놀고 있었던 자들입니다. 놀고 있던 사람이니까 주인이 불러줄 때 주인이 준 품삯이 발생되었는데, 품삯의 가치는 모두 동일하게 1데나리온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과의 언약입니다. 언약은 하나입니다. 피로써만 구원 받습니다.



모든 사람은 동일하게 오직 예수님 피로써만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이 피는 예수님의 노동입니다. 예수님의 노동에서만 집단적으로 구원 받기 때문에 여기서 개인의 노동과 땀은 삭제됩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하면 ‘이런 설교가 교인들의 열의에 무슨 보탬이 되는가?’라고 물어요.



‘놀아도 구원 받고, 헌금 안 해도 구원 받고, 예배 참석 안 해도 구원 받는다면 교회 잘 돌아가겠네?’라고 비웃습니다. 이런 식으로 빈정대지 말고 교회 잘 돌아가는 것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 믿는 사람입니다. 형광등 고장 났는데 고칠 사람 없어도 감사하고, 식사 당번이 결석해서 라면을 끓여 먹어도 감사하는 믿음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는 교회지요.



교회에서 말썽이 일어나는 것이 뭔가 하면, 교회에서는 늘 봉사하는 자만 봉사합니다. 그 사람은 제일 먼저 온 사람이에요. 그래서 먼저 온 사람이 나중이 되는 겁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우스운 일이 생깁니다. 전부 꾹 참고 있어요. 왜? 나중 된 자가 되기 싫어서.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교회 꼴좋다.”하고 불평을 하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경우입니다.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지상에서 미리 맛보는 천국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참아야 하는가? 나서고 싶은데 참는 것은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모두가 먼저 노동했더라도 오후 5시에 온 사람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1시간 일하고 하루(8시간) 품삯을 받았으니 오직 감사할 뿐이겠지요.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성령 안에서의 천국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미 천국이 왔어요. 왜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했잖아요.



20장 26-2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실천한다고 교회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져요. 식당에서 목사님께 제일 상석에 앉으라고 권했는데 목사가 이 말씀 실천한다고 말석인 식당 입구에 앉았어요. 그러니까 더나드는 교인들이 얼마나 불편한지 몰라요. 상석에 앉아라고 하면 앉아야 합니다.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자기 겸손한 것 티낸다고 ‘내가 모범을 보여야지’라고 나오는데, 이게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위험합니다. 교인들이 골프 치자고 하면 같이 골프 치면 되지 ‘나는 성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기에 골프는 치지 않겠습니다.’ 왜 목사가 모범이 되어야 합니까? 주님은 어디가고?



주님을 믿어야지 목사를 믿습니까? 십자가 지지도 않은 인간을 왜 모범으로 삼아야 합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주면 고맙다고 받고 감사하면 됩니다. 겸손한 티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21장 18-19절입니다. 무화과나무 열매가 몇 월에 달립니까? 아직 열매 맺을 때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예수님이 저주해 버립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습니다. 주님이 시장하시다고 때도 되지 않았는데 열매를 찾았어요. 때가 되지 않았기에 무화과나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를 저주했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권성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주님 뜻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계약을 체결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축복을 하든 저주를 하든 그대로 성취 될 뿐입니다.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성경을 알아도 소용없어요. 주님이 보내시는 대로 갈 수밖에 없어요.



무화과나무가 주님의 저주로 말라버린 것을 보고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갑자기 소름이 돋습니다. 납득이 안 돼요. 만약 무화과나무가 우리라면 어쩌겠어요? 밤 10시가 넘어 식사가 끝났는데 갑자가 남편이 손님과 함께 들이닥쳐 밥상 차리라고 합니다. “반찬거리도 없고 밥도 없는데요.”라고 하니까 남편이 “당장 나가!” 라고 하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억울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는 잘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남아 있는 겁니다. 이런 것이 남아 있음을 아시고 주께서는 무화과나무에게 시비를 건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님을 위해서 멸망당해야 할 민족입니다. 그게 그들의 역할입니다. 나빠서가 아닙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들은 멸망당합니다.



2016 여름수련회 8강 (상징과 실체) 녹취 - 정석훈 목사





먼저 시간에 두 개의 시간 층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게 되면 예수님은 미래의 완료적 입장에서 세상을 다루고 계십니다. 거기에 대해서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들은 과거에서부터 차올라오고 미래로 향하는 입장에서, 미지의 것이 남아있는 입장에서 잘해보려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미 잘해보겠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두 지점이 한 쪽은 미래에 서있고 다른 한 쪽은 현재에 서 있기 때문에 갭이 생깁니다. 오른 쪽이 미래고 거리를 둔 왼쪽이 현재라면 그 사이만큼 의견 일치가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의견 일치가 안 될 때 주님께서는 미래의 입장에서 계속 미사일을 쏴 대시면서 심판의 정당성을 남겨 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왜 멸망해야 하는가? 그 멸망의 이유를 알려고 사람들은 그들의 나쁜 짓 찾기에 급급합니다. 그렇다면 ‘나쁜 짓을 하면 이스라엘처럼 망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나쁜 짓했던 사례들을 다 가져와도 그 나쁜 짓 때문에 이만큼 매를 더 맞아야 한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욥의 친구들이 욥이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식으로 분석해서 이야기 했지만 결국 누가 옳았습니까? 욥이 옳았고 욥의 친구들은 잘못된 겁니다. 욥은 욥의 친구들이 모르는 다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유일성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 없는 유일한 민족임을 언급해야 합니다. 그 유일성의 내용은 곧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대표로 이야기합니다.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해 이 땅의 생로병사로 고생하는 모든 것은 주님의 정당한 조치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이 대표해서 보여줘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은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이 근거가 되어서 인간은 구원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럼 앞의 인간은 모든 이스라엘이고 두 번째 인간은 이스라엘 속에 먼저 잠입을 시도하시는 인자가 됩니다. 그럼 인자는 무슨 근거로 멸망될 이스라엘에 들어오느냐? 인자가 들어오는 근거는 바로 다윗에게 맺어진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89편에 여호와의 성실하심이 반드시 다윗 언약을 성취시킨다는 겁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에게 다윗 약속을 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닌 다윗 언약을 염두에 두고 이스라엘을 겹겹으로 그동안 이끌어 온 것입니다. 알갱이가 중요하고 껍데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알갱이가 언약을 위하여 그동안 많은 이스라엘 역사라는 껍데기가 겹겹이 쌓여있을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왕들이 그렇게 해도 다윗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이 멸망당해도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족보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럼 이것은 누구 솜씨냐? 위대한 왕? 없었어요. 대단한 사람? 없었습니다. 그것은 누구 솜씨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까지 면면히 연결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오신 주님의 솜씨가 되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의 근거를 미리 대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 43절입니다. “가라사대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이 말씀을 이방인들은 무슨 소린지 몰라요. 다윗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성령이 나옵니다. 다윗의 자손 나옵니다. 그리스도 나옵니다. 주가 나옵니다. 이런 개념들은 이방 민족이나 단군의 자손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주라고 한다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겁니다. 언약이 뭐냐? 약속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약속 위반하면 그만이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과의 약속은 하나님 쪽에서 제시했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범죄한다 해도 절대로 그 언약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패괴해도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여전히 유지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자기 언약 완성의 여정입니다. 약속을 던진 신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고, 언약의 하나님은 자신이 언약을 던져놓고 자신이 회수하는 것이 주특기입니다. 주님께서 언약을 던진 만큼 세상 역사는 조금 더 진전해 가는 겁니다. 세상에 언약을 던지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포장하기 위해서 역사는 그만큼 더 유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이 마감되면 끝납니다. 끝났기 때문에 세상은 언약 따라서 옛날엔 물로, 이제는 불로 날아가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고 끊어지지 않는다는 증거를 찾을 필요가 있는데 그 증거를 찾으려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만 찾아야지 단군의 역사를 찾아봐야 무당의 역사밖에 안돼요. 단군이 무당이란 뜻이에요. 무당역사 찾아 봐야 무당만 나옵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원수를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 하셨는데 이방인들은 말을 해도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주께서 내 주에게” 주님은 몇 분입니까? 두 분이죠? 약속을 계획하시는 주님 따로 있고, 그 계획한 것을 지상에서 실행에 옮기는 주님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계획은 누구와 누구 사이의 언약입니까? 주님과 주님 사이의 언약이기 때문에 인간은 제발 나대지 말고 빠져 달라는 겁니다. 인간은 빠져야 됩니다. 인간이 빠진다는 말은 인간의 선교, 헌금, 전도, 봉사, 희생 이런 것들도 의미 없이 다 빠져야 한다는 겁니다. 주님 두 분이 알아서 하도록 우린 끼어들면 안 됩니다. ‘내가 아버지와 의논해서 모든 것을 끝낸다. 내가 하는 일이 정당한 것은 아버지가 증인이고 나도 증인이 된다.’ 둘 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질문 하십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22:45).” 이 질문을 바꿔 이야기하면, ‘너의 아들이 너의 주가 된다면 그것을 믿겠느냐?’ 하는 말과 같은 겁니다. 이순신이 전주이씨 입니까? 전주이씨라면, ‘이순신 장군이 네 자식이라면 어떻게 이순신 장군이 네 선조가 되겠는가?’ 라는 질문과 똑 같은 질문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진행하는 방법이 아니고, 긴 전봇대의 그림자처럼 미래에 이미 확정된 사실이 창세기까지 뻗어 있는 겁니다. 그럼 모든 구약 이스라엘 속에서 무엇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끄집어 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모형, 그림자, 상징, 표상이라고 합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5:14).”했는데, 이 말은 아담은 헛것이라는 말입니다.



피조물이 자신을 창조한 분을 상대로 해서 대들 수가 없습니다. 사투르누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농경 신. = 크로노스)라는 거인이 있는데 시간과 관련된 거인입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자기 입으로 다 먹습니다. 고야의 작품을 보면 그런 그림이 있습니다. 입을 벌리고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간이 인간을 잡아먹을 때 아름다운 청춘이고 뭐고 간에 다 잡아먹어요. 그림에 보면 머리부터 잡아먹어요. 거기에 머리는 삼켜지고 다리만 가련하게 남아있는 그림입니다. 거인이 인간을 먹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시간의 모든 우리의 아름다운 것을 다 삼키고 잡아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이사야 40장 6-8절에 나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인생은 풀이요 그 한 때의 영광은 풀의 꽃 같아서 바람이 휙 불면 다 시들어버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운명은 필히 망해야 될 나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망해야 될 나라고, 망함으로써 그 포장지가 벗겨져 거기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이스라엘이 서서히 빛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144,000이고, 12지파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남아있는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들에게 개인 구원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과 동일한 성령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머릿돌 되시고 그들과 함께 있는 그것을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21장 42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22장 44절을 계속 보겠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그 다음 46절을 보면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에서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 그 실체를 과거 쪽에서 당하는 사람이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말하느냐?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것을 이야기 합니다. 주를 위해서 앞에는 이스라엘이 있다고. 주관식 문제지만 간단한 문젭니다. 이스라엘은 왜 있습니까? 답변은 주의 그림자입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답하면 됩니다. 모든 것은 누구를 위해서 있습니까?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통일되게 있습니다.’ 이렇게 답변하시면 됩니다. 답변만 잘하지 마시고 실생활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미래에 선 입장에서 과거를 바라보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미래에서 과거를 바라보고자 한다면 주님으로부터 그 안목을 수입해 와야 됩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예수님, 미래에서 보는 안목을 제게 알려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기다려봐. 좀 더 기다려야 돼. 십자가 죽고 난 뒤에 성령 올 때까지, 오순절 올 때까지 기다려!’ 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그날이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래 그런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고 진짜 이스라엘이 등장할 터인데 그들은 바로 오순절 날 성령이 오게 되면 등장한다.’고 하십니다.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교회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안 망합니까? 네, 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아까 제가 이스라엘을 뭐라 했습니까? 유일성이라 했죠. 이것이 에베소서 4장에 보면 교회도 똑같이 씁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유일성입니다. 하나란 말은 개인구원은 없다는 말입니다. 개인 구원이 없으면 개인교회도 없습니다. 우리들끼리의 ‘우리교회’도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있습니다. 지묘동에. 왜 있느냐? 망하라고 있습니다. 언제 망합니까? 매 번 망합니다. 항상 교회가 망해야 진짜 교회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눈에 보이는 교회를 보면 정말 하나밖에 없는 교회가 가려지게 돼 있습니다.



지난 번 설교 직전에 갑자기 에어컨 4대를 가동하다보니 전기가 나갔습니다. 그래서 예배당이 찜통이 되었습니다. 더워지면 설교자가 신경 쓸 것이 정말 많습니다. 일단 더우면 성도들이 주무십니다. 주무시면 설교문맥이 연결이 안돼요. 그럼 그 사람이 깰 틈에 지나간 것을 다시 집어넣어 줘야 해요. 그래야 줄거리를 따라갈 수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실패다. 그러나 주님의 교회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윗이 주 되심을 언급하는 쪽에서 그렇습니다.



하나 된 그 교회를 등장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역사적 이스라엘은 처참하게 다 무너져야 합니다. 무너지는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어요. 그들이 예수를 몰랐다는 겁니다. 상당히 억울하죠.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까? 제자들도 예수님을 몰랐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단독 행위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건 성령이 와야 알지 그게 아니면 아무도 몰라요.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멸망시키고 제자들에게는 성령이 오고, 그것은 무슨 특혜입니까? 주님의 답변은 ‘내 마음대로다.’ 주님 맘대로란 겁니다. 내가 사랑하기로 작정한 자에겐 특혜를 줄 충분히 그럴 만 한 자격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이후에 나온 교회들은 망하려야 망할 수가 없죠. 왜냐하면 이미 망한 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한 걸 보고 비웃거나 조롱할 수 없어요. 그들이 망했으면 우리도 당연히 망해야 돼요. 율법 지킨다고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우린 안 지킵니까? 그런데 그들은 망하고 우리는 망하지 않고 견뎌냅니까? 우리가 기댈 것은 주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잘 할게요.’ 이건 옛날 이스라엘이 망했던 이유인데, 두 번 다시 교회에서 용납하면 안돼요. 날을 지키고 절기를 지켜요? 십일조를 드려요? 안식일을 지킵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서 탄식하면서 바울이 말렸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드냐?” 십자가가 눈앞에 있는데 대체 어느 인간이 날과 절기를 지킨단 말이냐? 어느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킨단 말이냐? 도대체 넌 뭘 믿기에 그게 가능하냐는 말이냐? 내가 전한 복음이 헛되이 될까 염려스럽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방인들은 아무 것도 없이 성령 세례를 공짜로 받았어요.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자기가 지켰던 율법이 죄인 줄 알면서 성령을 받았어요. 그게 교회에요. 그래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른 두 개의 교회가 아닙니다. 둘 다 동일하게 집단 구원 받았어요. 그 중간에 있는 담은 오직 십자가로 헐어지고 십자가로 하나로 맺어진 겁니다. 그게 에베소서 2장에서 교회이야기 할 때 말씀하십니다. 몸의 지체는 여러 가지지만 머리는 하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예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실 때 어떻게 언약을 성취해서 완전히 허물어버리느냐? 22장 초반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이야기하되 천국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천국은 ᷧ다. 천국은 기능입니다. 예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그 현장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붙들고 쳐다본다고 천국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쪽에서 어떤 기능이 작용해서 거기에 포섭이 되면 그 사람이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천국이 어떤 기능을 하느냐?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고 손님들을 초대했습니다. 초대 받았으면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묘합니다. 날짜를 초청한 사람과 사전에 상의해서 정했으면 참석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어요. ‘당연히 가야죠. 임금님.’ 그런데 한창 바쁠 때 초청장을 보냅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참석 못하는 변명을 늘어놓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기능입니다. 나에 대한 관심으로 인하여 더 귀한 것을 놓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그런 인간이 들어가 봐야, 즉 임금님 아들 결혼식에 가봐야 자꾸 시계만 볼 겁니다. ‘소를 샀는데 지금쯤 차에서 내릴 텐데 .... 돈만 내고 갈까 ...’



누가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본인이 장가가는데 임금님이 초청장을 보냈어요. 본인 장가가는데 장가가지 않고 임금님 잔치에 갈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천국이라는 겁니다. 자기 장가간다는 그것이 천국에서는 변명으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네 장가가는 것보다 임금님 아들 장가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지금 임금님이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 쪽에서 ‘너무 합니다, 이건 너무합니다.’ 라고 나오겠죠. 그게 바로 기능이에요. 주께서 ‘너무합니다.’ 라는 소리 안하는 사람 데리고 가는 겁니다.



마태복음 22장 4절~8절에 보면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니~’ 이 혼인잔치는 조폭 혼인 잔치도 아니고 잔치 참석 안했다고 거기에 대한 징벌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그러나 미래에서 바라보면 이것이 과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천국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를 자신들의 바쁜 일상 때문에 다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복은 저주를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서는 또 심판을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를 구원한다는 것은 한쪽은 완전히 망했다고 보면 됩니다. 시소원리입니다. 한쪽이 올라가면 한쪽은 반드시 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지옥 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사거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서 오라한대...’ 그럼 진작부터 사거리로 가지. 뭣 하러 오지도 않을 자을 부르시고, 오히려 약만 실컷 올리기 위해 사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오게 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멸망해야 할 이유를 억지로라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겁니다.



21장 28절~31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애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결과적으로 보면 미래적 입장에서는 둘째 아들이 아비의 뜻대로 하였는데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둘째 아들에게 물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뉘우침이란 것을 찾아내는 겁니다. 뉘우침이 바로 천국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기가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간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는 반드시 뉘우침을 동반해서 천국에 가게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22장 혼인잔치를 봅시다. 13절입니다. “바깥 어두운데 내어 던지라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곳은 지옥 같습니다. 혼인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은 참석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참석한 사람 외 모든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됩니다. 임금의 혼인 잔치에 참석 못한 사람은 지옥 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구분 짓습니다. 예를 들면 축구경기에서 골대 근처에서 반칙을 해서 프리킥을 합니다. 그때 방어하는 쪽에서는 스크린을 짭니다. 이때 방어하는 쪽만 스크린 짠 곳에 서는 것이 아니라 공격하는 팀원들도 그 속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되면 수비하는 선수들이 공을 누가 어떻게 차는지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킥을 하는 순간 스크린 속에 있던 선수 중 약속된 선수가 그 자리를 빠져 나오면 그 곳에 틈이 생겨 그곳으로 공을 차서 골을 넣습니다. 이처럼 가짜 이스라엘이 스크린을 짭니다. 이들이 싹 빠지고 나면 진짜 구원받는 자들이 그때 윤곽을 드러냅니다. ‘우리에게 올 것이 아닌 천국이 우리에게 공짜로 공통적으로 왔네. 너나 나나 잘한 것이 없는데 동일한 기준에 의해서 동일한 은혜를 받네.’ 이것이 바로 천국 만들기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혼인잔치 때가 되면 쏙 빠집니다. 장가간다고 빠지고, 소를 사야 한다고, 밭을 사야 한다고, 상업 차 쏙 빠지는 겁니다. 그럴 때 엉겁결에 남아 있는 자가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방인들입니다. 원래는 자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빠진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아브라함 자손도 아닌데 아브라함 자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경주이씨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야만 이스라엘의 유일성이 됩니다.



22장에서는 혼인잔치 문제, 세금문제, 부활문제, 무슨 계명이 가장 큰가 하는 문제를 마지막 전봇대를 꼽고 미래의 관점에서 보십니다. 17절입니다. 세금을 누구에게 내느냐의 문제를 다룹니다. 세금은 아무나에게 내도 괜찮다는 것이 미래의 관점입니다. 굉장히 간단합니다. 세금 낼까요, 말까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 이것이 미래의 관점입니다. 세금문제가 주님의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마음대로 해. 내려면 내고 내기 싫으면 내지 마.’ 이것이 주님의 답변입니다. 관심사를 하나님께 두어야지 세금 문제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목사가 세금 내야 합니까? 내고 싶으면 내고 내기 싫으면 내지 마세요. 저는 개인적으로 내고 싶지 않습니다. 수입이 나가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아무 의미 없는 것입니다. 물론 낼만한 소득이 없으니 낼 수 없을 겁니다.



마지막, 미래에서 보게 되면 우리의 고민거리, 걱정거리가 걱정거리도 아니고 고민거리도 아니고 오히려 천국을 가로막는 스크린 같은 것들밖에 안 됩니다. 대한민국이 이번 리우올림픽에서 몇 위 하겠습니까? 박태환 선수가 금메달 따겠습니까? 몇 등 하든 말든, 메달 따든 말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삼성라이온스가 9등인데 꼴찌 하든 말든 무슨 의미 있습니까? 도박해서 선수가 퇴출되든 말든, 한화가 5등으로 올라가든, 두산이 일등 하든 말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러나 야구 좋아하는 사람은 야구가 종교입니다. 유럽은 축구가 종교입니다. 삼만, 사만 명이 모입니다. 브라질은 칠만 명 모입니다. 교회는 나가지 않고 축구장에, 야구장에 갑니다.



주님께서 혼인잔치에 오라고 하시면 나는 티켓 끊어 두었기에 축구장에 가야 된다고 할 겁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메시 한 골 넣으라고 말입니다. 은퇴하지 않게 해 달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야구 중계방송을 보면 아가씨들이 두 손 모아 얼마나 간절히 기도합니까? 지금 동점인데 제발 안타 쳐서 역전하게 해 달라고, 아니면 제발 실점 하지 말로 경기 승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왜 기도합니까? 마지막에는 야구도 없고 축구도 없고, 이 세상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없어질 것을 위해 기도합니까? 그저 과정이 재미있다는 그런 뜻이겠지요.



마태복음 22장 23절 이하에서 사두개인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땅에서 여자가 남자 일곱과 결혼했는데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천국도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천국도 부활도 없지만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 부활의 세계에 가서 집안싸움 일어날 때 해결책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일곱 명의 남자가 모두 꽃을 든 남자가 되어 한 여자에게 ‘여보’하고 달려들면 여자가 어느 꽃은 선택해야 합니까? ‘이것이 난처한 일이 아닌가?’ 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미래를 몰라서 그렇다. 부활의 세계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간다.’ 이 소리를 들은 사두개인들이 뭐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천국은 정말 재미없겠다. 권태도 그런 극단적인 권태가 어디 있느냐?’ 그럼 천국에서 뭐합니까? 당구, 바둑판 필요 없습니다. 시간도 남아도는 천국에서 영원히 뭐 합니까? 그래서 니체는 말했습니다. ‘천국은 가지 않겠다. 왜냐하면 너무 재미없기 때문에’



그런데 문제는 천국은 가기 싫다고 안 가는 곳이 아니요, 가고 싶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넣어주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은 이 세상을 살면 누적된 체험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십자가와 함께 죽을 때 한 때의 기분으로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엇이 대신 채워집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서 당하신 모든 고생과 아픔과 서러움이 성도의 마음속에 성령에 의해서 다 채워집니다. 주님만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도 복음 때문에 수난 받고 밉상 받습니다. 그것이 채워지면서 천국을 가면 두 눈에 눈물을 닦아 주시는 의미가 생깁니다. ‘내 신부로 산다고 고생 많이 했지?’ 라고 하면서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주님께서 ‘그 때 그 귀인 내가 보냈다. 곡성 영화에서처럼. 그 때 벌벌 떨었지? 네가 믿음 있는지 내가 테스터 한 것이야.’ 부활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주께서 적합하게 넓은 길로 가지 않고 좁을 길로 가게 하시기 위해 유도하신 일입니다.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재미나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이 있는 자는 돈이 없는 것처럼 해라’고 합니다.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것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전7:30-31).”



결국 세상 형적은 돈이고 아내고 남편이고 간에 다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것도 다 한 때라는 말입니다. 한 때라는 말은 그것이 너에게 이 세상에서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려주는 재료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의 무대장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의 모습은 ‘연극이 끝난 뒤에 객석에 남아 조명도 꺼지고, 한때 꿈이었구나! 아무것도 아니네.’ 그 현장에 그 모든 이벤트를 계획하신 분, 주님이 계시고 그 옆에서 천사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마태복음 23장18-22절입니다.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굉장히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절차를 따라 하나님과 유일하게 소통하고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는 내 이름으로 구원되지 너희들이 인공적으로 만든 제단과 제물은 나처럼 구원되는 통로는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쓸데없는 짓거리를 했다는 말입니다.



23장 33절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파하겠느냐?”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 요한복음15장 22절에 나옵니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 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그동안 저들은 이것이 죄다, 아니다를 본인이 결정했습니다. 본인이 결정할 때 어떻게 결정하느냐 하면 죄를 짓더라도 다음에는 얼마든지 안 지을 수 있는 사항만 죄라고 이야기함으로써 ‘내가 지은 죄지만 두 번 다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는 자랑거리를 만들 수 있고 생산해 낼 수 있는 여지를 남깁니다. 항상 그렇게 합니다. ‘잘못 했습니다.’ 라는 말은 그 정도는 다음에는 잘만하면 그 죄를 안 지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서 회개하고 반성하는 겁니다. 정말 두 번 다시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면 회개하거나 반성하는 항목에서 빼버립니다.



죄는 아무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유사 죄만 지어놓고 부흥회 때 수요일 밤에 단체로 통회하고 랄랄랄라 하고 있습니다. 그것? 연출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 해보면 요령이 늘어요. 죄는 아무도 모릅니다. 따라서 유대인은 지옥가면서 왜 지옥 가는지를 모릅니다. 지옥 간 후 알게 됩니다. ‘주님이 나를 그냥 보냈구나.’ 이런 어리석은 이야기를 누가 믿겠습니까? 십자가도 동등합니다. 라인이 같습니다. 십자가를 믿어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합니까? 그러면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당신은 죄를 모르기 때문에 당신은 지옥가야 됩니다. 주님 때문에 지옥 갑니다. 그만한 권리는 우리 예수님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은 미래에 다리를 걸치고 현재를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35절입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가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것이 피의 족보입니다. 이 피 안에는 억울함이 들어 있습니다. 이 피는 억울한 피 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이 억울함을 당하고 삽니다. 그러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함이 닥쳐도 억울한 줄도 모릅니다. 당연한 조치인 줄 알고 있습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가인에게 죽고 난 뒤에 가인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아벨을 죽인 가인은 죽이지 않습니다. 그 자손들이 대대로 번창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죽은 아벨만 손해가 아닙니까?’ 라고 하겠지만 원래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긴 그림자입니다. 그러니 이 귀한 보석같은 노선 주위에 다른 많은 것들이 거푸집처럼 형성되어 덮어 버리는데 이것을 나중에 물로써, 불로써 심판해 버립니다.



아벨이 피를 흘렸다는 말은 아벨처럼 예수님이 피로써 오셨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을 완성하십니다.



불교와 복음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불교는 마지막이 자기 구원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나 성당이나 모두가 어떻습니까? 불교와 동급입니다. 노골적으로 목사들이 중을 크리스마스 날 초청해서 함께 합니다. 서로 경우 바른 대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교회는 크리스마스가 조용한데 그 앞에 있는 아미사 절에서는 크리스마스 날 난리입니다. ‘축 성탄절’이라고 간판을 세웁니다. 그러면 그 못지않게 저쪽 성당에 가보면 ‘축 부처님 오신 날’을 세웁니다. 이것이 도대체 뭐하는 짓들인지 둘 다 이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짓을 합니까? 그 이유는 인간은 자기만 영원히 행복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고객만족입니다. 고객이 왕이잖아요. 그렇게 하는 것이 소득이 있으니 고객만족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탓하면 안 됩니다. 그것이 거푸집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아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자기 구원만 생각하는 남성중심의 세계가 확산되어 있습니다. 더럽고 치사한 정글 같은 그런 세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남성중심의 세계가 팍팍 티가 난다는 것은 주님께서 배후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징으로서 이 땅에서 외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너무 외로워하지 마세요. 외롭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가치를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심보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울 여가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 지시 받기 바쁜데 그럴 여가 없습니다.



37절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르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미래에 서서 보는 안목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는 성경 말씀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제9강 (십자가의 파급효과) 녹취 - 정석훈 목사



구원의 능력이 십자가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이미 구원된 사람만 갖고 있는 인식이지 구원 받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인식자체도 가짜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원된 후 뒤돌아 보면서 어디서 구원되었는지를 보니 십자가의 능력이었습니다. 이것은 내 쪽에서 구원을 시도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면 이유도 없이 지옥가고 이유도 없이 천국 가는 하나님의 원칙이 깨져 버립니다. 천국을 가고 싶어서 천국 가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조치에 의해서 결정된 후 뒤돌아보니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이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는 구원 받지 못해 지옥 가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고 극히 어리석은 방식이 됩니다. 십자가 자체가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기에 ‘어찌 그럴 수 있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이유도 없이 주께서 구원하셨다는 것은 애초부터 주님이 발휘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입니다. 그 마지막 카드에 대해서 이의를 건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처음 강의 시작할 때 우리가 인식의 관점을 정리해야 되고 시차적 관점(과거-현재-미래)을 바꿔야 한다고 했습니다(미래-현재-과거). 온 세상이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별의 움직임을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8강까지 마태복음을 살펴보면서 구원의 문제가 인간의 능력, 권한 밖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겠다는 시도 자체가 구원되지 못해 몸부림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구원된 사람은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 주의 일이기에 느긋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를 ‘하나의 상징’이라 했습니다.



상징은 실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실체는 따로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 실체는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피조물로서 상징적 관계로 엮여져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성경전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 입각해서 이 모든 자연세계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1장 17절에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우리 자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치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듯이 행동해서는 안 되겠지요.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그동안 우리는 내가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것을 통해서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믿어서도 안 되고 믿을 필요도 없는 것들을 주님께서 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은 수많은 기둥이 큰 판을 받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영원히 거주할 공간 천국에서 우리가 산다고 할 때에 아래에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안정적이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께서 이 기둥들을 무너뜨립니다. 주님께서 무너뜨리는 것은 믿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안에서 안심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믿지 말아야 할 것은 친절을 베푸셔서 마태복음 24장에서 그 기둥들을 무너뜨려 주십니다.



무너뜨려야 하는 기둥 중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성전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24:1-2).”



성전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마태복음 24장에서 작살내시면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전을 무너뜨린다는 말은 성전에 종사하는 직업종교인들인 제사장이나 성경 가르치는 사람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 장로 집사들입니다. 그들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성전이 무너지면서 성전을 유지 보수 개선하고 성전을 지탱하고 정신적 지주로서 이것을 붙들고 그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파급시키는데 종사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 1-2절에서 성전이 무너집니다.



두 번째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 24장 10-11절에 나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사람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이미 여러분들이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잘 압니다. 절대로 사람을 믿어 보증서면 안 된다는 것을 알잖아요. 사람을 믿고 사람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절대로 상대방을 이용하거나 의지하거나 기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외롭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 누구 없소?’ 자꾸 찾지 마세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사람마저 집단 매장지에 매장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자체가 집단 매장지입니다. 이 매장지의 특징은 시신이 있는 무덤입니다. 여기에 비해 마태복음 28장에서 예수님 무덤은 시신이 없는 무덤입니다. 이것이 대조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빈 무덤이 아닙니다. 주님이 집단적으로 시신이 있는 무덤으로 조치하십니다. 우리도 역시 시신이 있는 무덤의 장소에서 아등바등 살고 있습니다. 날씨가 35도 넘어가니 실감나지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애굽이라 하고 큰 성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균질화, 규격화, 표준화 속에서 인간은 더욱 더 고립됩니다. 교재 2페이지에 2. 공포속의 체제에서 ‘규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개성이나 특색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규격화라 합니다. 여러분이 수련회를 마치고 생활공간으로 갑니다. 그 생활공간은 규격화된 공간입니다. 티면 안 됩니다. 티면 퇴사해야 됩니다. 철저하게 책상 스랍처럼 딱딱 맞추어진 그 위치에서 자기 일만하고 돈만 받아 챙기는 그런 체제입니다. 거기 가서 복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그것을 평균화, 균질화, 규격화라 합니다. 이것을 못 견디는 사람은 직장에서 튀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도 더러우면서 더러워서 일 못하겠다고 합니다.



교재 3페이지 첫줄을 보면 “평화는 불안 위에 세워지고, 전쟁은 공포에서 힘을 얻는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평화는 한시적 평화입니다. 불안정한 평화입니다. 전쟁은 공포에서 힘을 얻는다는 말은 회사나 조직이 잘 되기 위해서는 과도한 긴장, 공포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전쟁을 해야 됩니다. 전쟁을 하지 않으면 힘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 예 중 하나가 학생들 시험입니다. 계속 시험 친다고 몰아세워야 됩니다. 선행학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태백의 대안학교 가야 합니다. 경쟁을 하기 싫으면 그런 곳에 가야 합니다. 힘을 길으려면 긴장이 있어야 하고 긴장은 공포분위기 속에서 조성됩니다. 이번 프로젝트 따지 못하면 우리 회사 망한다는 공포분위기가 있어야 됩니다. 공포가운데 전쟁을 해서 힘을 만들어내는 세계가 산 밑에 있는 생활공간입니다.



각 가정은 멀리서보면 정겹지만 가까이서 보면 지옥입니다. 절대 남의 가정 부러워 마세요. 성냥팔이 소녀 동화 있잖아요. 눈 내리는 추운 겨울날 성냥팔이 소녀는 추위에 떨고 있지만 어느 집안 가정은 따듯한 곳에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준비하고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마지막 성냥 그으면서 엄마 만나러 가는 동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때에만 있는 이벤트일 뿐입니다. 그 집이나 추운겨울 눈길에 얼어 죽는 소녀나 마찬가지입니다. 동화자체가 공포스럽고 경쟁에 내몰리는 세계에서 어릴 때의 낭만이 약간의 위로가 될까 하여 우리는 자꾸 어릴 때의 동화 같은 신화를 찾게 됩니다.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그런 것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봐 주지 않습니다. 살 처분 합니다.



세 번째는 20절에 나옵니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종교적인 습관과 관행을 믿는 것은 가짭니다. 사람의 반복적인 행위는 습관을 낳게 되고, 그 습관은 자신의 윤리체계가 되고 내면화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자신의 가치로 울렁거리면서 남이 뭐라고 하면 ‘내가 이정도야!’ 라고 하면서 되받아 칩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하라는 대로 다 했다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네 번째는 구원자를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24절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마나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믿는 순간 그 사람을 거짓 선지자로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조희팔에게 투자할 때 안 믿었습니까?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중국에서 고미술화 들어오는데 이것을 빼낼 수 없는데 빼내어 팔면 열배 받는다고 하는 것을 믿어 많은 부자들이 투자했습니다. 이건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상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남의 주머니 속의 것을 빼먹으려면 사기 치지 않고 빼낼 수가 없습니다. 교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 반복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고 성화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해서 계속해서 급수를 높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어서는 안 될 무너질 기둥입니다.



다섯 번째는 과학적인 대상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24장29절입니다.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천하없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해와 달과 별들도 무너집니다. 다 무너집니다. 과학이란 절대시간과 절대 공간에서 나왔습니다. 칸트가 철학적으로 이것을 정립했습니다. 절대시간은 우주의 어떤 공간에 있더라도 일초의 길이, 일분의 길이가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절대 좌표 위에서의 절대 시간관입니다. 그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에 의해 깨어집니다. 빛의 속도에 따라서 늙어가는 속도가 다릅니다. 이것을 이야기할 때 과학이지만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시계를 높은 산 위에 올려놓으면 산위의 시계는 중력에 의해 산 아래보다 시간이 늦어집니다. 차이가 미미해서 잘 모르지만 사실 이것을 통해 이 세상은 중심이 없고 중심이 있다면 빛의 속도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현재에는 빛의 속도조차도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오십년 동안 과학은 눈곱만큼의 발전도 없습니다. 기능과 기술은 발전되었지만 과학은 발전된 것이 없습니다. 과학의 종말이요 과학의 끝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아기자기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기술의 발전일 뿐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떨어지게 되면 우리가 믿었던 것도 결국은 다 무너지게 됩니다. 과학을 진리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진화론이나 창조론 둘 다 믿지 마세요. 창조론은 진화론의 일부입니다. 창조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발견됩니까?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철학적 신을 발견하는 것이지 어리석고 미련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해와 달과 별 위쪽에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안쪽에 예수님이 계셔서 남들 보기에 어리석은 모습으로 활동하셨기 때문에 과학적 틀 자체가 무너진다는 미래적 안목이 없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학자가 예수님을 믿는 모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과학자체가 진리가 아니요 이것도 죄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십자가를 믿게 됩니다.



여섯 번째는 시간이 깨어져 버립니다. 43-44절입니다.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니라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특정 시점적 시간이 깨어집니다. 특정 시점을 기다리면 믿음이 아닙니다. 그냥 막살면 되는데 주님이 오실 것인데, 징후를 봐서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특정시간을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시간속의 한계를 못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믿어 봤자 한계선만 확장될 뿐이지 한계선 밖으로 못 벗어납니다. 어떻게 시간을 벗어나요? 철학자 샤르트르는 실존적 존재인 인간은 시간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이 마지막입니까?’라고 묻는 자체가 시간 안에 갇혀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믿지 말아야 할 것들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간, 공간, 성전, 관행, 교회, 인간 다 무너뜨렸습니다. 마지막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권력’입니다.



마태복음25장40절 보겠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나오는 지극히 작은 자는 없는 개념인데 주님께서 발굴해서 찾아낸 개념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본인도 모릅니다. ‘지극히 작은 자(권력)’ 이것은 내가 자신에게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발굴하는 노력과 애씀에 의해서 나타난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붙이면 안 됩니다. 이것은 마지막에 무너뜨려야 하는 것은 자아입니다. 절대로 자아를 믿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평생 나는 나 자신만 믿어 왔는데 그것이 모두 죄였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를 믿기 때문에 ‘나는 똑똑하다, 지혜롭다, 알만큼 알아서 천국 간다.’는 것이 십자가 앞에서 어리석고 미련한 짓거리였다는 것이 이미 구원받은 후 십자가 앞에서 재확인 되는 겁니다. 구원을 틀어막은 자가 나 자신이고 주님을 죽인 공모자가 우리 자신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자아를 모시고 노는 것이 신학입니다. 개혁주의 신학부터 모든 신학의 지성소를 가보면 ‘나는 복음을 믿었다’가 들어 있습니다. 자기가 자신에게 경배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 믿었는지 좋은 것은 다 가져 옵니다. 십자가 복음, 언약 나오는데 항상 자신을 의식하면서 하는 이것이 이단입니다. 마지막엔 자기 자신을 지성소에 모시고 자기 종교에서 최후에 남을 신자로서 자신이 신이 되고 자신이 마지막 남은 신도가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형식을 띤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큰 소리 칩니다. 불교가 기독교를 향하여 ‘형제여!’라고 합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불교인도 형제라 합니다. 숨겨진, 은익적, 익명적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들도 착하게 살면 한 형제로 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하나요 그 진리의 내용은 사랑이며 그 사랑의 길은 여러 갈래라는 겁니다. 그러니 꼭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주장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인류는 하나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we are the world.’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결국은 자기를 신격화시키는 그 방식을 30년 40년 동안, 목사하면서 장로하면서, 모든 것을 총 동원해서 잉태한 것은 내가 곧 신이라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냅니다.



마지막 딜레마가 이것입니다. 자기를 어떻게 깨부숩니까? 자기를 눕혀 놓고 짓밟으면 됩니까? 그러면 밟는 나와 밟혀 장열하게 죽는 두 개의 자아가 여전히 생생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데 그 기억을 무슨 수로 지울까요? 지우개로 지울 수 있어요? 내가 나를 조져서 나를 만든 두 개의 자아를 지성소에 안치를 할 건데 무슨 수로 그것을 없앱니까? 폭파시킬 수 없습니다. 안됩니다.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과거로부터 현재, 현재로부터 미래로 가는 모든 것을, 심지어 그 속에 제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전부 다 거부하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가 구원받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주님의 움직임에 의해서 규정되고 규명되는, 주님이 친히 발굴했던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 스스로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는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국에 합류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들은 이야기 합니다. 분명 ‘나’가 있습니다. ‘나’가 있지만 항상 나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내가 어느 때에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어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25:37-39)”



‘저는 생활공간에서 균질화, 규격화, 등질화 된 세상에서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돈 벌고 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제가 주님을 영접했습니까?’ 이럴 때 주님께서는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야. 그러니까 네가 신자지.’ 여기에 대해 십자가 앞에서 ‘내가 한 것은 나를 위해 급급하게 살 뿐이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구원에 보탬이 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마태복음 25장 말씀과 딱 들어맞는 것입니다. ‘제가 언제 주님께 봉사했습니까? 제가 언제 주님을 섬겼습니까?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를 ‘주님의 작품’이요 ‘주님의 결과물’입니다. 이런 사람의 지성소에는 본인이 없습니다.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규명할 주님만 계실 따름입니다. 이런 자가 주님의 백성이요 주님을 경배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모든 힘은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17장2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유일한 권세는 영생 받을 자들을 발췌하고 뽑아내는데 소비되는 권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 즉 마귀나 이방인들을 다스리는 모든 권세도 예수님 자신을 주라고 섬길 자를 죄의 권세에서 뽑아내는데 소모되는 권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극히 작은 권세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절대로 내가 구원받는데 도입 될 것이 아님을 본인들이 자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내가 주님 믿는 믿음조차 내가 구원 얻는데 도움되는 권세처럼 작용해 버리면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권세를 가로막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나오는 결론은 네 자입니다.



막 국수? 아닙니다. 막 메밀? 아닙니다. 막 사세요. 이미 구원을 넘어온 자들에게는 ‘막 사세요.’라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막 살고 있고, 막 살게 되고, 결국 막 살아도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복음이냐, 십자가가 복음이지’라고 하면서 그들이 오해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결국 막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왜? 권세는 다른 곳에서 발휘되고 투입되고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자기가 자신을 경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타인과 경쟁합니다. 경쟁한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를 요청하게 되고 요청한 타자를 통해서 자신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너희들이 보기에 내가 어떻게 생겼느냐?’ 말은 노골적으로 하지 않지만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점점 더 고착해 되고 단단해 지고 차돌처럼 숨 못 쉴 정도가 됩니다. 본인이 스스로 이렇게 만듭니다. 이렇게 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남들이 하면 혹시 나를 욕하지 않을까? 여기에 비해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바리새인과의 관계는 1과 1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제 삼자가 등장합니다. 2가 아니라 3의 관계입니다. 여인은 2의 관계에서 최종 판결나는 것이 아니고 3의 관계에서 판결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둘 사이에 개입하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주님께서 2냐 3이냐를 묻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 “네가 시선을 의식해야 되고 늘 신경 써야 할 타자는 어디 있느냐?”를 묻습니다. 여인이 속 시원하게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그들은 모두 애굽이요 바벨론인 예루살렘에서 살처분 되어야 할 2인자이지 제 3 자가 아닙니다. 제 3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문명을 믿고 자신의 과학적 인식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훼방자들입니다. 물론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 은혜로 개입하셔서 나도 너를 칠 수 있지만 십자가의 작품, 십자가의 결과물이 되기 위해서 너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너 스스로가 재료가 될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이 여인은 순회재판에서 이미 합격 통지를 받습니다. 본고사 아닌 수시에 합격했습니다. 지금 느긋하게 놀고 있습니다. 바로 구원받은 자만이 이 모든 혜택이 주님의 일방적인 권력 행사였음을 고백합니다. 자기 백성을 아시고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건져 내시는 권세가 도달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느긋함이 행사되는 겁니다. 마태복음에 이러한 내용들이 나옵니다.



25장 44절에서 지옥 가는 자들이 대답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였나이까?”



이렇게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없애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이 27장 39-43절에 나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여기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라는 말은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한 말과 동일합니다. 이들이 얼마나 침착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명석한 판단입니까? 왜 사람이 자기를 꺾을 수 없고 자기를 부정할 수 없는가? 그 이유는 따지고 따져서, 탐색하고 탐색하여 요모조모 살펴보아도 예수라는 작자는 분명히 실패자라는 것이 명확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가 와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진 찍고 카메라가 와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실패자입니다. 남은 구원한다고 큰 소리 치면서 정작 본인은 세상 권세조차 못 이겨 맥없이 십자가에 죽었다면 밑천이 다 드러난 것이 되잖아요. 열두 제자 데리고 오천 명, 칠 천명 먹일 때는 나라도 구할 것 같이 느껴졌는데 마지막 도달점에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겁니다. ‘예수 그 사람 죽었데. 그 사람 아니었어? 아니었네. 난 괜히 뭔가 되는 줄 알았는데. 죽었데.’



마지막이 결혼해서 잘 살았다고 하면 드라마가 되는데 주인공이 죽었다고 하면 인기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라면 그 마지막이 무엇으로 끝납니까? ‘우린 십자가 피로 천국 갑니다.’라고 하면 ‘너 얼굴 꼬라지 보니 옛날보다 못하네. 결국 죽잖아. 백날 그 소리 해 봐도 나는 합리적으로 생각해.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해. 당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안 믿어. 부활 그런 것 없어. 그냥 당신은 죽어’ 라고 할 겁니다. 그럴 때 ‘아니 나는 안 죽어. 나는 부활 될 거야’ 하는 자들은 신천지요 안산홍입니다. 얼마나 인간들이 실질적인 성과를 보고 싶어 했으면 ‘우리 집단에 오시면 안 죽습니다.’라는 것으로 사람을 유인하겠습니까? 이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리석다고 하겠지만 거기에 안 속아 넘어가는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삽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이 우리 속에 이렇게 많다는 것에 대해서는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들의 주장은 우리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늘 테스트용으로 우리 주변에 우리가 만나는 사람속의 입을 통해서 우리가 거기에 젖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목회해서 수천 명이 모이고, 미국도 몇 달간 갔다 오고 할 때 남들 보기에는 주의 종이요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겠지요. 그것들은 교인들이 모르는 헛짓거린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이것은 같이 잠을 자는 식구도 몰라요. 삼십년 오십년 목회하고 한국에서 대표적인 목사가 된다 할지라도 신자 아닙니다. 제가 이들이 신자 아님에 오천 원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회를 당장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알아서 목회 해보려는 사람은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진리인 복음을 아니 주께서 팍팍 도와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극히 합리적이고 사실적이고 통계적으로 실적이 다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권세자’는 극히 소수입니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와 달리 ‘저는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는 말에 예수님 외에 모두가 동의합니다. ‘남은 구원한다고 큰 소리 쳐놓고 본인 꼬라지는 좋다.’ 이런 말입니다. 내가 저 사람 안 믿은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나는 절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모인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나는 현재 이스라엘이 핵폭탄 보유하고 견고하게 버티게 만든 뭔지 모르는 미지의 X 라는 추상적인 초월적 관념을 인정한다. 이렇게 믿는 이유는 이스라엘 나라라는 실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 사람이 김일성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을 믿음으로서 북한이 아직도 결속되고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북한이라는 나라, 금강산, 백두산 등 눈에 보이는 실적을 근거로 믿는 겁니다. 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소비자입니다. 광고해 봐라. 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화장품 샘플 나눠 주듯이 체험 마켓팅입니다. 이런 인간의 한계를 무슨 수로 돌파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마태복음 27장 42절에 한 표 던져놓고 ‘그게 아닌 것 같다.’라고 하면 성도입니다. 그냥 성도라고 큰 소리 치지 마시고 그쪽에 한번 가보는 겁니다. 그리고 ‘조롱하는 그들의 말에 동의합니다. 누가 천국에 가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해놓고 발을 빼면서 그건 아니네. 하는 모습이 성도입니다. 한 번 거쳐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옛날 사람이다. 손에 잡히는 세포 덩어리만이 진리다. 진리는 이것밖에 없다.’로 가서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빠져 나오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7장 42절에 나오는 희롱과 조롱이 우리 주변에서 우리에게 매일같이 화살처럼 쏟아진다는 사실을 감안하시고, 그렇게 쏟아지게 하는 권세마저 진짜 자기백성을 건지기 위한, 마지막 다슬기를 물속에서 건지시는 그 권세에서 나와서 우리에게 인내를 테스터 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정말 답답하다. 제발 부탁이다. 그냥 조용하게 교회 다녀라. 세례 받고 성찬에 참석하고 천당 가면 된다.’고 말하는 그들은 극히 이성적입니다. 그들과 함께 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돈을 그들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나온다고 돈 주는 곳이 없습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주시는데 죽을 때까지만 주십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백세까지 주시지 않습니다.



28장에 드디어 부활이 나옵니다. 부활에 대한 한 단어만 쓰면 부활 의미의 전부입니다. 부활이 오늘날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러워하지 말라’입니다. 삼성의 7조 수익을 부러워하지 말라. 누가 판사, 검사 되었다고 부러워하지 말라. 누가 출세하고 승진했다고 부러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마저 이겨서 살아 있는 생명의 세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요지경 속을 보듯이 사람들이 이런 것 때문에 혼이 다 빼앗겼구나를 보는 그 느긋한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들을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련회 마치고 산에서 내려가면 이것 하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부러워하지 마세요. 이 부러움 때문에 감사가 날아가 버립니다. 범사에 대한 감사가 다 날아갑니다. 주님은 감사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감사하고 싶어도 탐심이 장난이 아닙니다.



집단매장지에 필마로 돌아다니면서 왜 부러워하지요? 공동묘지를 돌아다니면서 왜 부러워합니까? 우리가 이미 십자가의 파급효과인 부활의 영, 성령을 받았으면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마세요. 미장원에 가서 머리 잘나온 것을 부러워하지 마세요. 머리 잘 나온 것은 인물이 되기 때문에 머리가 잘 나온 겁니다. 인물이 안 되면 머리 잘 나올 리가 없습니다. 자기 주제 파악을 못해요. 그런데 머리 잘 나왔다고 해서 영생 얻는 것 아닙니다. 머리 잘 나온 채로 집단매장지에 묻혀 버립니다.



교재에 보면 통합세계, 통일체가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등장합니다. 규격화, 이 규격화된 통일체에서 빠져나가면 나는 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죽었고 부활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의도적이라도 죄 될 만한 곳을 구경하는 것도 괜찮아요. 나이트클럽에 가지 마시고 구경만 하세요. ‘아하 사람들이 저것을 좋아하는구나! 저것에 환장하는구나! 축구에 환장하고, 야구에 환장하고, 골프에 환장하는구나!’ 당구 칠 때 천장이 온통 당구공이 굴러다니는 곳으로 보이고, 천장이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장으로 보이는 그러한 권세 속에 우리는 지극히 작은 권세자로 그런 것을 평생 누리고 살아 왔음에도 정작 주님께서 우리를 규정하실 때에는 ‘지극히 작은 자여 네가 나에게 이만큼 해주었다’고 하십니다. 정말 아무 한 것도 없는데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한 모든 것이 네 일이 아니라 주의 일이었다. 너는 실체가 아닌 상징이기 때문이다. 내가 실체로서 너를 평생 부려 먹었다.” 이렇게 주님은 주님의 권세를 우리에게 소비하시고 소모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태복음 보았습니다. 무슨 책인지 몰랐고 그냥 고전 중 하나인줄 알았습니다. 그냥 문자에 갇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현실이 된다는 것을 우리 이성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허상인 것을,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위해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남을 도리어 느긋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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