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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8 03:37:00 조회 : 3235         
시카고강의 - 요한1서 2016 이름 : 관리자(IP:88.153.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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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65.245) 16-09-10 17:57 
20160906 요한1서 시카고강의1-이 근호 목사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만든 세상에 우리가 나중에 들어와서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누가 만들었고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정짓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지금 공부 할 게 요한1서입니다. 성경의 뒷부분에 나와 있으니까 사람들이 별로 주목을 잘 하지 않죠. 창세기부터 읽다보면 지치기 마련이고, 창세기 읽을 때는 재미있다 싶었는데, 레위기는 재미있는 내용이 하나도 안 나오니까 인내성의 한계를 드러내죠. 마태복음 신약의 족보부터 해가지고 슬슬 참을성 없는 사람들은 족보 하다가 걷어치웁니다. 요한일서까지 계속 쭉 간다는 것이 보통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죠.

 

요한1서를 읽게 되면 요한1서의 내용이 너무나 한정되어서 무슨 이야기인지를 잘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제목 자체는 사도요한이라는 사람이 교회에 편지를 세통을 보냈는데, 첫 번째 편지가 1서고, 두 번째 편지가 2서고, 세 번째 편지가 3서, 그렇게 제목으로 정해놨어요. 근데 요한1서, 2서, 3서를 이렇게 생각하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과 성경 제일 마지막에 요한계시록 나오는데, 그 사이에서 요한1서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아셔야 됩니다.

 

요한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활동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아, 예수님이란 분이 이런 활동을 하셨구나. 요한복음을 보면서, 아,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리어 굉장히 신앙이 깊은 사람이에요. 근데 요한복음을 보면서, 이게 뭐가 어려워? 예수님이라는 분이 오셔서 활동했다. 끝.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근데 요한계시록에 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이 어렵다고 해요. 어려운데, 요한계시록은 어려운데 요한계시록을 풀이한 사람의 책을 보면 별로 어렵지 않고 쉬워요.

 

3차 대전 그런 것 있나 주시하고, 마지막 때를 대비해서 벙커 만들고, 생수마련하고, 3년 환란, 3년 후 환란, 전 환란 이렇게 해가지고 베리칩 안 받아도 돼요. 마트 갈 때 현찰 내고, 카드사용 안 하고, 전부 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현세 살면서 뭔가 피할 거리, 조심해할 거리만 찾는데, 요한계시록 전혀 어렵지 않다. 그렇게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요한일서를 건너 뛴 결과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사이에 요한일서가 깔려있다고 했죠? 이 셋 다 사도요한이 쓴 거예요.

 

요한복음 있고, 그 다음에 편지 요한123서가 있고, 마지막 성경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할 때, 요한계시록은 자꾸 이 현실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고,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이런, 이런 일을 했다는 그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중간에 있는 요한123서는 뭐지? 몽롱해요. 맥주 한 병 먹고 몽롱한 것처럼. 맥주 한 병 먹고는 되지도 않아요. 한두 병은 먹어야지. 몽롱한 것처럼 뭔가 무슨 이야기인지를 몰라요.

 

요한계시록은 현실에서 주의하라고 그 정도 하면, 그 정도는 나도 알아챌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특히 요한계시록에 1장에서 3장에 보면 일곱 교회 나오잖아요. 일곱 교회 나오니까, 교회? 여기 네거리에도 교회 있잖아요. 그죠? 교회 있고. 주의 사자가 편지 보낸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주의 사자를 통해서. 그럼 주의 사자는 누구지? 교회 다니는 목사님이 주의 사자니까, 주의 사자에게 편지를 보내니까, 그럼 주의 사자는 이런 것 조심 하고, 저런 것 조심하고, 이런 것은 책망 받아야 하고, 이런 것은 칭찬받아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요한계시록은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 하거든요.

 

근데 주의 사자가 목사입니까? 그것부터가 이게 요한일서를 다 건너뛰니까 거짓말만 자꾸 등장하는 거예요. 주의 사자는 목사가 아닙니다. 주의 사자는 천사지 목사가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 교회 천사가 왔다는 것을 아는 교회는 기존의 교회가 아니고 영적 교회라야 이게 천사가 관리한다는 것을 알게 돼요. 영적교회. 당회장 목사가 관리한다고 하면 그거는, 이미 그 교회는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남들에게 하려면 요한일서를, 123서를 거쳐야 해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옛날에 이런 분이었다. 어? 그거 쉽네.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왜 환상으로 했지? 그걸 알고 싶으면 완전히 그냥 건너뛰지 마시고 요한123서를 경유를 해주셔야 한다는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경유를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이 역사적으로 있다면 요한일서에서는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역사가 날아가 버려요. 실제로 일어난 역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고, 이렇게 하셨고, 열두제자를 불러 세우시고, 병을 고치고,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에 대해서 그걸 역사라고 해요. 실제로 일어난 역사. 오늘 아침에 식사를 몇 시에 했고 그게 역사거든요.

 

그럼 역사가 아니라는 말은 뭐냐 하면, “그게 무슨 소용 있는데?” 이게 역사 아닌 거예요. 이게 역사 아닌 거다 말이죠. 요한일서에서 역사 아니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카고의 거리에서 오늘도 교통사고 일어났을 거예요. 교통사고 나가지고 우리 고향 달성군 논공에서 19살 먹은 고등학생이 탄 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고등학생 다섯 명이 다 죽었어요. 그 중에 안전밸트 맨 4명이 죽고 안전밸트 맨 1명도 죽었어요. 안전밸트 맸는데도, 도대체 얼마나 속도를 냈으면 그렇게 됐겠어요? 다 죽었냐 말이죠. 그게 tv에 나왔어요.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강의 들었으니까 복습해보죠. 그걸 뭐라고요? 역사에요. 역사.

 

그런데 역사 아닌 것은 뭐라고요? 애 다섯 명 죽든 말든, 열 명 죽더라도, 세월호가 물에 빠져서 150명 죽더라도, 세월호 아시죠? 하도 유명하니까. 구원파와 관련된 사건, ~뭐 하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 집 엄마가 자궁이 약해서 자식을 십년을 기다렸는데, 세상에! 이번에 또 유산을 했대. 역사적으로 보면, 그 집 역사로 보면 무지무지 중요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요한123서에 보면 어떻게 됩니까? 뭐? 뭐? 뭐?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요한1서, 2서, 3서의 내용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동안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이, 그게 뭐냐 하면, 뭐만 믿었어요? 역사적인 희망이나 기대나 믿었지, 성경에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그 내용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 내용을 빼버렸어요. 이건 큰 실수였습니다. 사람이 역사 일에 관심 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자기의 일 년 뒤, 한 달 뒤, 아니면 내일 뒤에 관심 두고 산다는 말입니다. 일 년 뒤, 이년 뒤. 지금은 이래도 내일은 나아질 거야. 이렇게 뭔가 미래에 대해서 지금보다 훨씬 나은 행복이나 좋은 상황이 올 거라고 믿거든요.

 

그렇다 보니까 사람은 어디에 갇혀 있느냐 하면 역사에 갇혀있는, 히스토리history에 갇혀 있는 셈이 됩니다. 여기 미국이니까 영어를 좀 써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어 쓰든지, 안 쓰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히스토리에 갇혀있는 거예요. 역사 속에. 역사 속에 갇혀 있어가지고 하루 스물 네 시간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역사에 관한 것만 생각해요. 역사에 관한 것만. 이걸 가지고 자폐증 증세라고 하는 겁니다. 자폐증 증세. 자폐증이라는 것은 애를 키우는데 바깥에 안 나오고 어디 겁먹은 것처럼 자꾸 집구석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문 닫고 컴퓨터 게임만 하고. 자꾸 또 기어들어가고 나올 생각을 안 해요. 엄마가 노크해도 문 안 열어주고. 이거는 특히 어린애들한테, 요새 이상하게 자폐증 애들이 점점 더 많아져요. 자폐증이죠.

 

모든 인간은 자폐증 환자입니다. 어디에 갇혀 있어요? 역사에 갇혀있어요. 그래서 역사 안의 이야기는 자기 딴엔 납득되고 이해된다고 생각하지만, 역사 밖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몰라. 바보에요. 무지몽매해요. 이순신 장군? 아, 그거 1592년 임진왜란 때 죽었던,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잘도 알아요. 과거 일을. 그런데 어떤 무당이 와서 이순신 장군을 지금 귀신으로 모신다, 귀신아 물러가라! 이순신 장군은 죽었어. 언제 죽었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죽었다 이 말이죠. 나의 죽음을 적군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면서 죽고. 죽었다는 말은 지금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지금 없는 거예요. 이 귀신아 물러가라! 없는 것을 왜 니는 믿느냐? 이렇게 되겠죠.

 

그래서 요한일서 1장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거 설명하는데 10분이 넘게 걸렸어요.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태초는 시간이 없었어요. 역사가 없죠. 역사에 없던 이야기를 이제부터 늘어놓겠습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역사를 믿던 사람들은 이 요한1서에 대해서 믿음이 있는 사람일까요? 없는 사람일까요? 답변은 간단한데, 역사의 끝만 믿는 사람에 있어서 요한일서의 내용을 믿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믿을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예요.

 

결국 요한일서는 뭘 이야기한다? 너희들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믿음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는 뭐라고 고집을 부리느냐 하면 “제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집을 부리니까, 그거는 역사, 니가 아는, 자폐증환자가 헛소리하는 거라고 이야기해요. 결국 이 이야기가. 성경은 우리보고 믿고 천국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너는, 니가 믿는다는 것은, 자폐증환자처럼 역사 속에 갇혀 있는 것만 믿게 돼있는 존재가 너라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있다? 없다? 믿음은 애초부터 없는데 믿는다고 하니까 성질이 더 나죠. 믿음도 없으면서 자꾸 믿는다고 하니까 성질이 더 나는 거예요.

 

애가 성적이 안 좋았다. 그래서 엄마가 화를 냈어요. “뭐 했어? 공부 안 하고?” 그런데 애는 애교가 많아서 “에이. 엄마 풀어!” 자꾸 다가오는 거예요. 엄마가 뭐라고 해요? “공부도 못하면서 꼴 보기 싫어. 저리가!” 밀어내는 거예요. 근데 “에이잉~!” 하면서 애가 다가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지금 밀어내고 있는데, 인간들은 뭐냐 하면, 에이잉~하면서 다가오는 거예요. 믿음도 없으면서. 역사를 믿으면서 마치 믿음이 있는 척 행세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쓰여 지는가,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요한일서의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요한일서 하나도 이해 못합니다. 읽기야 한국말이니까 잘도 읽죠. 읽으면 뭐합니까?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데. “태초부터”가 무슨 내용인지, 역사밖에 없는 사람은 태초를 설명 못해요. 자, 이 내용에 여러분들이 장단을 맞춰주면 좋겠어요. 제가 이렇게 물을 때, 개인적인 단순한 질문을 할 테니까, 여러분들이 단순하게 답변하면 되는 겁니다. 제가 무리한 논리는 안 하고 여러분들에게 납득이 되는 논리만 뽑아서 묻겠습니다.

 

여기 컵이 있는데, 컵이 있다. 컵이 카메라에 비쳐야 되는데, 비치죠? 동영상을 보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거 분명히 맞아요? 틀려요? 맞아요. 지금 간단하게 질문하니까 간단하게 답변해야 됩니다. 추임새를 넣어주세요. 있다가 뭐냐 하면 존재죠. 이 컵이 있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할 수 없어요. 컵이 있다 앞에 뭐가 생략되어 있어요. ((내가 보기에)) 컵이 있다. 지금 요한일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누군지. 우리 자신이 진짜 자폐증환자인지 그거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가 보기에 컵이 있다죠. 내가 보기에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눈이 있다죠. 보니까 눈이 있는 거예요. 눈이 있으니까 이걸 지워보겠습니다. 눈을 빼겠습니다. 그럼 내가 있기에 컵이 있죠. 내가 있기에 컵이 있습니다. 근데 내가 망치로 얻어맞았다. 기억을 잃어버렸다. 기억이 사라졌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목사님 앞에 컵이 있었는데요?” “어? 어? 나는 몰라?” 이러면 나한테는 컵이 있어요? 없어요? 그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있더라도 내가 관심두지 않으면 그건 없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앞에 사철나무인지, 주인보고 물으니까 모르겠다고 합니다. 나무가 있는데, 분명히 나무가 가보면 있어요. 있는데, 나뭇잎 숫자를 아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분명히 나무들 있잖아요? 분명히 있는데, 한 나무 당 나뭇잎 숫자가 몇 개이던가요? 관심 없죠. 그거는 사실은 나무가 있더라도 이론상 내가 관심 없는 것은 없다가 돼요. 그래서 있다를 존재라고 하는데, 있다=존재. 있다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 나에게 의미가 있을 때만 있어요. 뭐든 게 나에게 의미가 있을 때만 있어요. 나무가 있으니까 나뭇잎 숫자 셀 수 있겠죠. 하지만 거기에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는 것은 나한테 없는 것이 됩니다.

 

지난밤에 시카고에서 부부싸움 몇 건이나 일어났어요? 모르죠. 이거는 내가 알고 싶은 것에서 빠져있으니까, 이거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한테 의미 있다? 나에게 의미 있는 것만 있기 때문에, 결국 누구만 있느냐 하면,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만 있는 거예요. 나만. 이 세상에 나만 있어요. 그냥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의미 있게 있는 겁니다. 첫 번째는 있다를 설명했어요. 있다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있다는 것이 의미 있으려면 뭐냐, 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있다는 것을.

 

“당신 참 예뻐!” 강의 듣는 사람들은 누가 예쁜지 궁금해 할 것인데, 뒤통수만 보이니까 모르겠지만. 하나의 예를 드는 거예요. 예니까 다른 사람들은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당신, 참 예뻐!” 그런데 다른 사람 보기에는 “별론데?” “내가 이쁘면 이쁜 거야.”여러분 결혼할 때 다 그렇게 했잖아요? 모든 여자들 줄 세워서 골라서 했습니까? 아니죠. 줄 세울 수 있는 그만한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반경 몇 킬로 내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연관된 가운데서, 그것도 아줌마 빼고, 소녀 빼고, 아가씨들 중에서, 그것도 내 나이하고 얼추 비슷해서, 아래위로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5살 차이로, 그 정도 선에서 마음이 맞아서 한 거예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나한테는 예뻤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멱살 쥐고, “니가 여기 있는 모든 여자들 불러봤어?” “아니.” “그럼 니가 왜 그 여자가 예쁘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느냐?” “내가 예쁘면 예쁜 거야.” 결국 그 여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뭐냐, 내가 예쁘다는 주장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내 아내는 계속 예뻐져야 돼요. 내가 이쁘다고 하는 여자는 계속 이뻐져야 돼요. 이게 얼마나 일방적인 주장입니까? 이래도 자폐증환자 아니에요? 믿는다고요? 인간은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만 믿어요. 나한테 의미가 있고 것만 믿고. 나한테 의미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한테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내 삶에 도움이 되고 내 삶에 보탬이 되는, 나의 유용성. 나한테 유용하다는 말은,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말이에요.

 

나에게 이익이 될 경우에 그거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가 있을 때는 나는 관심을 두고, 관심을 두게 되면, 너는 나하고 같이 있는 거야. 내가 존재하듯이 너도 존재해야 돼. 왜냐하면 내가 너를 예뻐하니까 너는 내 허락 없이 사라지면 안 돼. 근데 내 허락 없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이게 어디 내 허락 없이 사라져? 라고 하는 감정이 뭐냐, 슬프다. 보고 싶다. 이런 거거든요. 제 말 틀렸어요? 섭섭하네. 이런다고요. 니가 내 앞에서 사라지려면 내 허락 맡아야 돼. 허락 맡을 필요 없는데 왠지 섭섭하지. 안 갔으면 좋겠어. 니 내 옆에 붙어 있으면 좋겠어. 니가 나를 구속하려고 하느냐? 구속이 아니고 뭐 그렇다는 뜻이지. 이런 식으로.

 

근데 사람들이, 나오는 감정이라는 것이 그냥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누가 있어요? 내가 여기 있음에, 있음은 존재입니다.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 내가 나에게 의미 있음에, 존재에서 의미가 들어갔습니다. 왜, 의미 있다고 했어요? 내가 나한테 유용하기 때문에. 나, 니만 내 옆에 있으면 나는 외롭지 않아. 누구 좋아하고? 내 좋아라고. 내 좋아라고 니는 내 옆에서 5미터 밖으로 떨어져서는 안 돼. 늘 붙어 다녀야해. 남녀 간에 연애하면서, 스킨십이라고 하죠.

 

근데 오늘같이 화씨 92도까지 올라가게 되면, 그것도 모르고 상대방 남자가 스킨십skinship하게 되면, 손 치워라! 근데 날씨 서늘할 때는 만지라고 하면서 왜 손 치우라고 하는데? 지금 날씨 더울 때, 당신의 스킨skin, 피부가 이렇게 터치될 때에 그게 나한테 유용하지 않아. 날씨 서늘할 때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나한테 유용하지 않아. 땀나. 안 그래도 더워죽겠는데 그런데다 붙으면 36도 되고, 짜증나잖아요. 결국 우리가 뭐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그거는 무엇을 확인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내 유용한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막 살 거야. 하는 식으로, 이 세상에 일방적으로 의미를 주었고, 나름대로의 유용성을 거기다가 퍼붓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군에 갔다, 그런데 비상식량이 다 떨어졌다, 남은 것은 건빵 두개 밖에 없다, 그런데 같은 전우가 두 명 있는데, 그 애도 두 개 다 먹어야 살고 나도 먹어야 산다. 그럴 때는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니에요. 가위바위보, 또는 묵찌빠, 두개 다 먹기. 왜 그러냐 하면 건빵 두개 남은 상황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던, 어떻게 만들었던,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있음이. 세상이 이렇게 있더라. 사철나무가 이렇게 있고 가로수가 이렇게 있더라도, 내가 관심 두는 그 범위 안에서만 품을 수 있는 나만의 현실이 되는 거예요.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전쟁의 의미가 뭐냐? 지금 그걸 따지는 것이 아니고, 건빵이 몇 개 남았냐가 나의 지금의 현실이에요. 건빵이 몇 개 남았냐가.

 

그러니까 그 현실은 누구의 현실에 의해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신이 나를 위해서 허락해줬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한다 이 말이에요. 자,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일방적이죠. 다시 설명하면, 처음에는 뭐였다? 존재, 존재 자체가 수상하죠. 이거는 진리 아니죠? 어렵기 때문에 다시 반복해도 돼요. 컵이 있다. 컵이 있다고 할 때에 왜 컵이 있다고 하느냐, 컵을 누가 보기 때문에? 내가 보기 때문에 컵이 있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컵이 없다고 우긴다면 컵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다의 모든 시작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한테 필요한 것들만 주워 모아서 한다는 이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있다가 그 다음에 의미가 되고, 의미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유용성이 되면서, 다시 하면 처음에 존재에서 의미, 그 다음에 유용성, 이제부터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믿는다가 나와요. 나는 컵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여기 포도가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자두가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 다음에 복숭아가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 다음에 멜론이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보는 사람들이 많이도 먹는다고 욕하겠다. 멜론이 있는 것도 나는 믿는다는 거예요. 나는 여기 포도가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한 것이 그게 뭐다? 나는 옳은 소리를 했다. 그게 진리라는 겁니다. 나는 존재한다. 그게 나의 의미들만 모아서 통일된 나의 현실로 본다. 그 다음에 나는 그것이 나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의미를 둔다. 근데 그 유용한 것을 나는 뭐라고 한다? 믿는다. 나는 있다는 말을 해야 될 것을 나는 의미가 있어. 이렇게 말을 바꾸고. 유용하다는 말을 해야 될 것을 의미 있다고 이렇게 가짜로 이야기하고, 나한테 이익이라고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될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믿어. 이렇게 감추고. 나한테만 무조건 진리라고 이야기할 것을 또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말이죠.

 

그래서 이 모든 것이 결국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에요? 믿음 아니에요? 이거는 정신병환자죠. 이 정신병환자를 이런 써클, 순환구조로 이야기 한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 깨지느냐, 이 진리가 어디서 깨지느냐, 내가 죽을 때. 내가 죽을 때 내 진리도 깨지고, 내가 믿는다는 것도 다 헛수고고, 죽는 마당에 유용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는데.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데 무슨 유용한 것이 있어요? “아이고, 죽더라도 이 포도 잡수시고 죽으세요.” 지금 죽는 마당에 이 포도가 들어갑니까? 5분 전에는, 나는 이 포도를 믿습니다. 하는 것이 진리라고 해도, 죽는 마당에는 이 유용성도 때늦은 거예요. 이미 차는 떠나버렸어요.

 

유용성이 없으면 뭐도 무너진다? 유용성이 없으면 의미도 없는 거죠. 의미도 없다 이 말이죠. 사형수에게, 5분 후에 죽을 사형수에게 “손 씻으세요.” 5분 후에 죽을 사람에게 세균 퍼져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요? 5분 후에 죽는데. 손 씻는 것이 살아있을 때나 의미 있지, 유용하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의미 없습니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내 있음이 이제는 좌절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안에서 이 전체를 누구를 위해서 쓰냐면,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를 위한 역사, 나의 역사죠.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죽음 안에서 자기 역사를 가지고 믿는다고 우기는 것. 이런 정신적인 질환적인 요소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믿는다는 것이죠. 믿는다는 것은 있음에 대해서, 있음을 가지고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것.

 

그래서 여기 컵자리에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집어넣읍시다. 이제 여러분 아시겠죠?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이거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이거는 진리 아니죠. 나는 삼위일체 믿는다. 이거 진리 아닙니다. 나는 교회 다닌다. 이거 진리 아닙니다. 나는 천국 믿는다. 이거 진리 아닙니다. 전부 다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짜입니다. 내가 없어질 때도, 포도 맛있다고 그런 소리 할래? 내가 없어지는데, 내가 사라지는데, 포도 맛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유용성이 있습니까?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도 믿음이 아니에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을 한 5초 동안 정리해보면, 지금 이 세계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전부 다 나름대로 다 믿어요. 모든 인간은 다 믿어요. 모든 의미 있는 것은 놓치지 않아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탕웨이가 선전하는 SK2 피테라에센스 광고에 보면, 발음도 잘 안 돼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의미 있는 것을, 나한테 유용한 것을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이게 무슨 세계냐, 믿음의 세계에요. 이 세상은 믿음의 세계에요. 이 세상은 믿음의 세계.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다 자기한테 존재의 의미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믿음 생활하는 교회가 얼마나 엉터리냐는 겁니다. 지금 다들 믿음의 세계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걸 모든 사람은 신자다. 모든 사람은 신자가 되는 겁니다. 조건이 하나 있어요.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은 이미 신자입니다. 신자라는 말을 세자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종교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종교인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날 때부터 종교인입니다.

 

왜냐하면 뭐가 형성되기 때문에? 나는 믿습니다가 형성되기 때문에. 나는 의미 있는 것은, 유용한 것은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예요. 절대 놓치는 법이 없어요. 내게 이익 되는 것은. 전쟁가운데 마지막 남은 건빵 두 개는 절대 남한테 양보하기 싫습니다. 나는 이 건빵을 믿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근데 다른 전우가 정신병자가 되어가지고 저걸 건빵으로 보지 않고 돌멩이 두 개로 보니까 자기는 신났지. 돌멩이로 보니까 의미가 없잖아요. 근데 자기는 건빵으로 보이고. 자기는 의미가 있으니까. 신자로서 이 세상을 믿음으로 보니까, 믿음 있는 신자가 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통일된 현실관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통일된 현실관이 있습니다. 통일관. 하나로 통일된 현실. 그 현실의 통일관은 자신의 존재의 유용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아직까지 요한일서 보면 안 됩니다. 요한일서 근처에도 안 갔습니다. 이제 요한일서 들어가는 방법을 구약에서 시작합니다. 아시는 사람은 아시는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종교인이고, 신자고, 의미를 갖고 있고, 이게 전부 다 어디서 나왔다? 자기 존재에서 나왔죠. 그런데 구약의 출애굽기 12장에서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호와의 밤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밤.” 여호와의 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무서운 영화를 보면나오잖아요. 꼭 무서운 영화에는 공주전화부스에 12시에 스산한 바람이 불면서, 그것도 11월에 찬바람이 불 때, 낙엽을 확 몰고 가면서 외로운 가로등이 공중전화부스를 딱 비치게 되면 왠지 으스스하고 춥죠. 그럴 때 어디선가 귀신이 나올 때가 된다 말이죠. 근데 보통 새벽 2시 43분, 44분 정도에,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잠 잘 때, 단란한 자기 가정에서 불 끄고 잠 잘 때입니다. 근데 거기 일본의 사무라이가 창검 들고 와서 무자비하게, 그 집안에 있는 맏아들을 무자비하게 다 때려죽이고 홀연히 스산한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난데없이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온 집안이, 애굽 사람 온 집안이 울게 돼요. 아까 강의할 때 했죠? 사람이 섭섭하다는 것이 어떤 경우라고 했는데, 내가 존재를 증명하는데, 내 허락 없이 내 현장에서 떠나버리면 뭐라고 해요? “나는 너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 이 밤에 가니까 좀 섭섭하다.”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자식하고 단란히 한 방에서 잔다는 말은, 니가 있음에, 니가 나한테 유용하고 그걸 통해서 내 존재는 증명이 되는데, 사무라이가 와가지고, 눈만 내놓고 얼굴을 검은 보자기로 다 싸맨 그 사무라이가, 그것도 둘째 아들은 필요 없고 첫째 아들 다 찔러죽이고 나갔다면, 이건 섭섭한 정도가 아니에요. 섭섭한 정도가 아니니까, 성경에 보니까 집마다 곡성. 통곡소리가, 울음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그럴 때,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뭐라고 했습니까? 단순한 거니까 답변해주셔야 해요. 하나님이 다녀가셨다고 할까요? 사탄이 다녀가셨다고 할까요? 사탄이 다녀가셨다. 왜냐하면 믿음의 세계에서, 통일되니까, 통일은 내가 난 자식하고 자고, 딸은 옆방에 자고 아들은 저 방에서 자고, 이렇게 통일 된 것을, 자기 존재증명인데, 이것을 훼손했을 때는, 나한테 손해를 끼치는 것은 전부 다 사탄이에요. 왜? 나의 의미는 유용성이기 때문에. 나한테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믿는 이유가 내 존재를 확인해주고 증명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세계냐, 신자에요. 신자.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기를 신봉하는 자기 종교인이에요. 그게 자기의 믿음의 세계에요. 그 믿음의 세계를 외부에서 파괴시키면 뭐가 되느냐 하면, 정체를 밝히는 것과 관계없이 그거는 사탄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공식 하나 나옵니다. 여호와는 뭐다? 사탄이다. 여호와=사탄. 나의 존재를 파괴시키는 사람,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나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는데, 영생까지 따고 싶은데, 나를 조기에 죽여 버려요. 그걸 파괴시키는 사탄은 여호와입니다.

 

이걸 인정을 하지 못하면, 내가 바로 여호와를 사탄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나는 바로 여기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성경 한 구절도 못 나갑니다. 니가 사탄이든지, 당신이 공격하는 내가 사탄이든지, 둘 중의 하나인데, 나는 믿습니다. 당신이 사탄이고 내가 참된, 의롭게 살고 있는,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너도 신앙인이고 나도 나름대로, 나름 신앙인인데, 나는 내가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내 종교에 영원한 충실한 신자다. 왜? 제가 아까 믿는다고 했잖아요. 믿음세계라고 했잖아요. 나는 믿는 자에요. 나는 내 것을 남한테 양보하거나 파괴되거나 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충실한 신도에요. 유일한 신도가 나밖에 없어요.

 

심지어 우리가 지옥 갈 때도 누가 걸리느냐 하면 내가 걸려요. 힘내! 힘내! 사우나 한번 간다고 이래 생각해! 거기 친구들 많은데 거기 가서 고스톱 치든지, 전처럼 살면 되지 뭐. 물론 물은 없겠지만. 마지막까지 배려하고 끝까지 사랑하고 걱정해주는 것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요. 나밖에 없어요. 이 충실한 존재를 내가 어떻게 배신합니까? 마지막 존재. 나는 이미 신앙 얻은 자고 이미 신자인데. 그래서 여호와가 하는 모든 일은, 다시 말해서 내가 신자이기 때문에 여호와(여호와=사탄)가 하는 일은 뭐가 되느냐 하면 불신자를 눈에 띄게 하는 일들을 바로 여호와께서 성경을 통해서 행합니다. 지금 이 개념 자체가 완전히 반대됐죠.

 

하나님 믿어야 신자고,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을 불신자라고 하는데, 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냐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인간은 자기를 믿는 믿음의 세계를 꾸역꾸역 만들어 가고 있어요. 자, 그럼 여기서 쉬는 의미에서 누가 한 번 답변해보세요. 물이 끓는 온도가 100도다. 물이 끓는 이유가 왜 100도인지 설명해보세요. 진짜 어려운 질문입니다. “물이 끓는 온도가 100인 이유는 물이 끓기 때문에.”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거는 미장원 옆에 이발소 있다면, 이발소 어디 있느냐고 하면 미장원 옆에 있다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거는 말 하나마나에요.

 

이건 에디슨이 어릴 때 이야기한 거예요. 사과가 여기 있어요. 사과가 또 여기 있어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두개라고 하는 겁니다. 사과1+사과1=사과2 여러분 알았죠? 이렇게 하니까 에디슨이 손을 들었어요. 선생님 왜 이게 2입니까? 러셀이라는 사람이 이거 증명하는데 300페이지가 넘었어요. 1+1=2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세계 최고의 수학자가. 이걸 증명할 길이 없어요. 왜 이걸 3이라고 쓰면 안 되는데요? 왜 이걸 4라고 쓰면 안 되는데요? 왜 2냐? 이걸 증명해보라는 겁니다.

 

이유 있어요? 없어요? 이유 없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약속이죠. 근데 누구끼리 약속한 거예요? 누굴 빼고 약속한 거예요? 사탄(여호와)은 빼고 약속한 거예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존재, 그 다음에 의미, 그 다음에 뭡니까? 의미 있다는 것은 유용한 것만 의미 있죠. 집에 올 때, 나뭇잎의 숫자가 몇 개냐? 그건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의미 없는 거예요.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 그 다음에 이게 바로 나한테 진리가 되는 거예요. 아이구, 우리 색시는 얼마나 예쁜지. 이건 누가 봐도 진리에요. 남들이 별론데? 내가 예쁘다는데 누가 별로라고 해? 그녀는 예뻤다. JYP가 이야기하는데 그걸 누가 거부해요. 진리가 되는 거예요.

 

진리를 믿는 신자끼리 물 끓는 온도를 90도 하지 말고, 100도라고 해서, 라면 집어넣자. 약속을 했다 이 말입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이 100도가 너의 죽음 문제를, 너가 안 죽는 것을 보장하느냐 이 말이에요. 진리라면 어떻게 돼요? 죽음 문제도 해결해줘야 되잖아요. 죽음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진리라고 여겼던 모든 것, 내가 신자라고 여겼던 모든 것, 내가 의미 있다고 어겼던 모든 것들이, 죽는 순간에 훅하고 날아가 버려요. 죽는 순간에 포도가 포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포도라는 것은 맞는데, 죽는 나한테는, 사형수인 나한테는 의미가 없으면 나한테는 진리가 아닌 거예요.

 

결국 인간들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이에요. 보편적인 진리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나만 살면 돼요. 나만 행복하면 되고, 나만 즐거우면 되고, 나만 살면 돼요. 따라서 성경을 보면서도, 성경 믿고 하나님 믿고 예수님 피라고 하는 것도, 그것도 진리다? 진리 아니다? 사실은 자기 나름대로 진리라고 우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진리도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도 아니고, 그냥 놀이에요. 화투놀이나, 포커놀이처럼 그냥 종교놀이, 종교게임 한 거예요.

 

교회 가면 집사님~!하면서 칭찬해주죠. 사회에서 인정 못 받는 것 교회에서 인정해주고, 봉사 열심히 막 하니까 대중들이 앞서서 막 칭찬해주니까, 어릴 때 칭찬 못 받아가지고 정신이상한 사람처럼, 교회 가서 열심히 충성하니까 막 칭찬받고. 살 보람을 느끼고, 그래. 나는 믿습니다. 주를 위해서, 이래 나오니까 그게 자기에게 유용하니까, 그게 자기한테 의미가 있으니까, 그래! 나는 교회 나와서 예수 믿어야지! 예수 믿었으니까 영생 얻고 천국 간다고?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요?

 

그럼 똑똑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무슨 소리 하느냐 하면, 수 천 년 철학자들이 죽어봐야 안다는 거예요. 자기들도 이게 일방적이라는 것을 알아요. 왜? 서로가 다르니까. 니 예수, 내 예수 다 다르니까. 어느 예수가 맞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 기준도 없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 때까지만 재미나게 살기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자. 그렇게 합의를 봤어요. 봤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기 전까지는 재미나게 살자는 거예요. 죽음 뒤는 모른다고 했죠. 모른다. 공자가 이야기했어요. 죽음 뒤도 모르는데 사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런 소리 했거든요. 모른다고 했죠. 모른다를 다른 말로 하면 무지가 돼요. 무지. 무지는 뭐가 되느냐 하면 믿음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하면 이거는 결국 뭐냐 하면 유보되는 거예요. 유보. 또는 지연되는 겁니다. 지연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실선으로 나오다가 점선으로 남겨두는 것을 지연이라고 하잖아요. 그렇죠? 이걸 통합해서 보면 내가 이렇게 죽음 뒤를 모르니까 일단은 그 정도로 보자 하면 이거는 뭐가 대상이 안 되느냐 하면 진리의 대상이 안 됩니다. 진리의 대상이 안 돼요. 진리의 대상이 안 되면 뭐가 깨지느냐 하면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어요. 컵을 이렇게 손으로 잡는데, 손이 컵을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잡는 순간 지지직하고 손이 사라졌다고 합시다.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W라는 드라마. 컵을 쥐니까 손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컵을 쥔 손을 내가 온전히 보인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장담을 못하죠. 이걸 가지고 학자들은 불확실성이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 그러니까 졸지에 신자라고 우기다가 이제 공부 좀 하고 나니까 뭐가 됐어요? 내가 신자가 아니고 불신자라는 것. 불신자가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확실한 것이 없다는 거예요. 확실한 것이 없다가 된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할 수 있어요? 없어요? 미래는 모른다가 되죠. 보험 열댓개 들어놔도 마음은 늘 불안하고, 두렵다 이 말이죠.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이 일을 벌이다가 실패로 끝나면? 투자하다가 투자비용의 이자도 안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을 게 없죠. 불안, 불안 하죠.

 

그러면 그 방법을 누가 사용하느냐,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우리 자신을 깨기 위해서, 우리가 신자라고 우기는 것에 대해서 누가 흔들어요? 주님이 흔들어요. 너는 아무것도 믿은 적이 없다고 흔들어요. 이게 불신자에요. 흔들게 되면 우리는 가만히 곱게 흔들려집니까? 반발합니까? 반발하죠.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반발한다는 것은 내가 아는 대상 말고, 내가 미처 모르는 대상이, 내 세계 바깥으로 활동을 벌이고 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을 잡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이거는 너무나 감격스러워요. 사무라이가 덮치는 거예요. 단란한 가정이에요. 우리는 요 이 식구하고 살고 싶어요. 미리 계산 다 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믿습니다. 나는 이 행복을 믿습니다. 그걸 깨버렸어요. 장자를 죽여 버렸어요. 그럴 때, 내 통일성 있는 현실감은 깨져버렸어요. 내가 신자인줄 알았는데, 미완적이고,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내∙가∙나∙를∙믿∙을∙수∙없∙다∙이 아홉 글자를 두 글자로 줄이면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나를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나라는 말입니다. 절대로 나를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나라는 것은, 이미 외부세계와 컨택contact, 접촉되어 있느냐, 이미 접촉되어 있다. ET가 손가락으로 하잖아요. 달이 떠 있는 하늘을 자전거 타고 날아가잖아요. 외계인과 소년이 손가락으로 컨택 하는 것 있잖아요. 접촉하는 거예요.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서 주께서 오셨습니다.

 

날 믿으라가 아니라, 날 믿으라는 말은, 니가 알고 있는 믿음의 세계는 그게 불신세계다. 결국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니가 그토록 싫어하는 사탄이, 내가 사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우리의 통일 된 세계를 포개버리고, 박살내고, 엎어버려서, 의미 있다, 유용하다는 이걸 엎어버리는 거예요.

 

뭐가 의미 있고, 뭐가 너한테 유용하고, 뭐가 관심이 있는데? 그녀는 예뻤다. 뭐가 예쁜데? 늙어봐라. 나중에 주름살이 다 되어버리지. 뭐가 이쁜데? 자식 나중에 돈 문제 걸려 보세요. 자식이 아니라 웬수죠. 뭐가 이쁜데? 두 살까지만 예뻐요. 세 살부터는 말썽쟁이에요. 그런데 그들을 탓하지 마라. 너가 평소에 너를 완전체로 봤던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문제가 있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20160906 요한1서 시카고강의1-이 근호 목사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만든 세상에 우리가 나중에 들어와서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누가 만들었고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정짓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가 지금 공부 할 게 요한1서입니다. 성경의 뒷부분에 나와 있으니까 사람들이 별로 주목을 잘 하지 않죠. 창세기부터 읽다보면 지치기 마련이고, 창세기 읽을 때는 재미있다 싶었는데, 레위기는 재미있는 내용이 하나도 안 나오니까 인내성의 한계를 드러내죠. 마태복음 신약의 족보부터 해가지고 슬슬 참을성 없는 사람들은 족보 하다가 걷어치웁니다. 요한일서까지 계속 쭉 간다는 것이 보통 참을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죠.

 

요한1서를 읽게 되면 요한1서의 내용이 너무나 한정되어서 무슨 이야기인지를 잘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제목 자체는 사도요한이라는 사람이 교회에 편지를 세통을 보냈는데, 첫 번째 편지가 1서고, 두 번째 편지가 2서고, 세 번째 편지가 3서, 그렇게 제목으로 정해놨어요. 근데 요한1서, 2서, 3서를 이렇게 생각하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과 성경 제일 마지막에 요한계시록 나오는데, 그 사이에서 요한1서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아셔야 됩니다.

 

요한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활동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아, 예수님이란 분이 이런 활동을 하셨구나. 요한복음을 보면서, 아,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도리어 굉장히 신앙이 깊은 사람이에요. 근데 요한복음을 보면서, 이게 뭐가 어려워? 예수님이라는 분이 오셔서 활동했다. 끝.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근데 요한계시록에 가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이 어렵다고 해요. 어려운데, 요한계시록은 어려운데 요한계시록을 풀이한 사람의 책을 보면 별로 어렵지 않고 쉬워요.

 

3차 대전 그런 것 있나 주시하고, 마지막 때를 대비해서 벙커 만들고, 생수마련하고, 3년 환란, 3년 후 환란, 전 환란 이렇게 해가지고 베리칩 안 받아도 돼요. 마트 갈 때 현찰 내고, 카드사용 안 하고, 전부 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현세 살면서 뭔가 피할 거리, 조심해할 거리만 찾는데, 요한계시록 전혀 어렵지 않다. 그렇게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요한일서를 건너 뛴 결과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사이에 요한일서가 깔려있다고 했죠? 이 셋 다 사도요한이 쓴 거예요.

 

요한복음 있고, 그 다음에 편지 요한123서가 있고, 마지막 성경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할 때, 요한계시록은 자꾸 이 현실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고,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이런, 이런 일을 했다는 그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중간에 있는 요한123서는 뭐지? 몽롱해요. 맥주 한 병 먹고 몽롱한 것처럼. 맥주 한 병 먹고는 되지도 않아요. 한두 병은 먹어야지. 몽롱한 것처럼 뭔가 무슨 이야기인지를 몰라요.

 

요한계시록은 현실에서 주의하라고 그 정도 하면, 그 정도는 나도 알아챌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거든요. 특히 요한계시록에 1장에서 3장에 보면 일곱 교회 나오잖아요. 일곱 교회 나오니까, 교회? 여기 네거리에도 교회 있잖아요. 그죠? 교회 있고. 주의 사자가 편지 보낸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주의 사자를 통해서. 그럼 주의 사자는 누구지? 교회 다니는 목사님이 주의 사자니까, 주의 사자에게 편지를 보내니까, 그럼 주의 사자는 이런 것 조심 하고, 저런 것 조심하고, 이런 것은 책망 받아야 하고, 이런 것은 칭찬받아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되면 요한계시록은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 하거든요.

 

근데 주의 사자가 목사입니까? 그것부터가 이게 요한일서를 다 건너뛰니까 거짓말만 자꾸 등장하는 거예요. 주의 사자는 목사가 아닙니다. 주의 사자는 천사지 목사가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 교회 천사가 왔다는 것을 아는 교회는 기존의 교회가 아니고 영적 교회라야 이게 천사가 관리한다는 것을 알게 돼요. 영적교회. 당회장 목사가 관리한다고 하면 그거는, 이미 그 교회는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남들에게 하려면 요한일서를, 123서를 거쳐야 해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옛날에 이런 분이었다. 어? 그거 쉽네.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왜 환상으로 했지? 그걸 알고 싶으면 완전히 그냥 건너뛰지 마시고 요한123서를 경유를 해주셔야 한다는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경유를 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그 일이 역사적으로 있다면 요한일서에서는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역사가 날아가 버려요. 실제로 일어난 역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고, 이렇게 하셨고, 열두제자를 불러 세우시고, 병을 고치고,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에 대해서 그걸 역사라고 해요. 실제로 일어난 역사. 오늘 아침에 식사를 몇 시에 했고 그게 역사거든요.

 

그럼 역사가 아니라는 말은 뭐냐 하면, “그게 무슨 소용 있는데?” 이게 역사 아닌 거예요. 이게 역사 아닌 거다 말이죠. 요한일서에서 역사 아니라는 말은, 역사적으로 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카고의 거리에서 오늘도 교통사고 일어났을 거예요. 교통사고 나가지고 우리 고향 달성군 논공에서 19살 먹은 고등학생이 탄 차가 빗길에 미끄러져 고등학생 다섯 명이 다 죽었어요. 그 중에 안전밸트 맨 4명이 죽고 안전밸트 맨 1명도 죽었어요. 안전밸트 맸는데도, 도대체 얼마나 속도를 냈으면 그렇게 됐겠어요? 다 죽었냐 말이죠. 그게 tv에 나왔어요.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강의 들었으니까 복습해보죠. 그걸 뭐라고요? 역사에요. 역사.

 

그런데 역사 아닌 것은 뭐라고요? 애 다섯 명 죽든 말든, 열 명 죽더라도, 세월호가 물에 빠져서 150명 죽더라도, 세월호 아시죠? 하도 유명하니까. 구원파와 관련된 사건, ~뭐 하더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 집 엄마가 자궁이 약해서 자식을 십년을 기다렸는데, 세상에! 이번에 또 유산을 했대. 역사적으로 보면, 그 집 역사로 보면 무지무지 중요한 이야기에요. 그런데 요한123서에 보면 어떻게 됩니까? 뭐? 뭐? 뭐?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게 요한1서, 2서, 3서의 내용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동안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이, 그게 뭐냐 하면, 뭐만 믿었어요? 역사적인 희망이나 기대나 믿었지, 성경에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그 내용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그 내용을 빼버렸어요. 이건 큰 실수였습니다. 사람이 역사 일에 관심 있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자기의 일 년 뒤, 한 달 뒤, 아니면 내일 뒤에 관심 두고 산다는 말입니다. 일 년 뒤, 이년 뒤. 지금은 이래도 내일은 나아질 거야. 이렇게 뭔가 미래에 대해서 지금보다 훨씬 나은 행복이나 좋은 상황이 올 거라고 믿거든요.

 

그렇다 보니까 사람은 어디에 갇혀 있느냐 하면 역사에 갇혀있는, 히스토리history에 갇혀 있는 셈이 됩니다. 여기 미국이니까 영어를 좀 써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어 쓰든지, 안 쓰든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히스토리에 갇혀있는 거예요. 역사 속에. 역사 속에 갇혀 있어가지고 하루 스물 네 시간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역사에 관한 것만 생각해요. 역사에 관한 것만. 이걸 가지고 자폐증 증세라고 하는 겁니다. 자폐증 증세. 자폐증이라는 것은 애를 키우는데 바깥에 안 나오고 어디 겁먹은 것처럼 자꾸 집구석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문 닫고 컴퓨터 게임만 하고. 자꾸 또 기어들어가고 나올 생각을 안 해요. 엄마가 노크해도 문 안 열어주고. 이거는 특히 어린애들한테, 요새 이상하게 자폐증 애들이 점점 더 많아져요. 자폐증이죠.

 

모든 인간은 자폐증 환자입니다. 어디에 갇혀 있어요? 역사에 갇혀있어요. 그래서 역사 안의 이야기는 자기 딴엔 납득되고 이해된다고 생각하지만, 역사 밖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몰라. 바보에요. 무지몽매해요. 이순신 장군? 아, 그거 1592년 임진왜란 때 죽었던,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잘도 알아요. 과거 일을. 그런데 어떤 무당이 와서 이순신 장군을 지금 귀신으로 모신다, 귀신아 물러가라! 이순신 장군은 죽었어. 언제 죽었는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죽었다 이 말이죠. 나의 죽음을 적군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면서 죽고. 죽었다는 말은 지금 있단 말입니까? 없단 말입니까? 지금 없는 거예요. 이 귀신아 물러가라! 없는 것을 왜 니는 믿느냐? 이렇게 되겠죠.

 

그래서 요한일서 1장을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거 설명하는데 10분이 넘게 걸렸어요.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태초는 시간이 없었어요. 역사가 없죠. 역사에 없던 이야기를 이제부터 늘어놓겠습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역사를 믿던 사람들은 이 요한1서에 대해서 믿음이 있는 사람일까요? 없는 사람일까요? 답변은 간단한데, 역사의 끝만 믿는 사람에 있어서 요한일서의 내용을 믿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믿을 수 없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예요.

 

결국 요한일서는 뭘 이야기한다? 너희들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보고 믿음이 없다고 하는데, 우리는 뭐라고 고집을 부리느냐 하면 “제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집을 부리니까, 그거는 역사, 니가 아는, 자폐증환자가 헛소리하는 거라고 이야기해요. 결국 이 이야기가. 성경은 우리보고 믿고 천국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너는, 니가 믿는다는 것은, 자폐증환자처럼 역사 속에 갇혀 있는 것만 믿게 돼있는 존재가 너라는 존재라는 겁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있다? 없다? 믿음은 애초부터 없는데 믿는다고 하니까 성질이 더 나죠. 믿음도 없으면서 자꾸 믿는다고 하니까 성질이 더 나는 거예요.

 

애가 성적이 안 좋았다. 그래서 엄마가 화를 냈어요. “뭐 했어? 공부 안 하고?” 그런데 애는 애교가 많아서 “에이. 엄마 풀어!” 자꾸 다가오는 거예요. 엄마가 뭐라고 해요? “공부도 못하면서 꼴 보기 싫어. 저리가!” 밀어내는 거예요. 근데 “에이잉~!” 하면서 애가 다가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지금 밀어내고 있는데, 인간들은 뭐냐 하면, 에이잉~하면서 다가오는 거예요. 믿음도 없으면서. 역사를 믿으면서 마치 믿음이 있는 척 행세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일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쓰여 지는가,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요한일서의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요한일서 하나도 이해 못합니다. 읽기야 한국말이니까 잘도 읽죠. 읽으면 뭐합니까? 무슨 내용인지 모르는데. “태초부터”가 무슨 내용인지, 역사밖에 없는 사람은 태초를 설명 못해요. 자, 이 내용에 여러분들이 장단을 맞춰주면 좋겠어요. 제가 이렇게 물을 때, 개인적인 단순한 질문을 할 테니까, 여러분들이 단순하게 답변하면 되는 겁니다. 제가 무리한 논리는 안 하고 여러분들에게 납득이 되는 논리만 뽑아서 묻겠습니다.

 

여기 컵이 있는데, 컵이 있다. 컵이 카메라에 비쳐야 되는데, 비치죠? 동영상을 보시는 분들을 위해서. 이거 분명히 맞아요? 틀려요? 맞아요. 지금 간단하게 질문하니까 간단하게 답변해야 됩니다. 추임새를 넣어주세요. 있다가 뭐냐 하면 존재죠. 이 컵이 있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할 수 없어요. 컵이 있다 앞에 뭐가 생략되어 있어요. ((내가 보기에)) 컵이 있다. 지금 요한일서 들어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내가 누군지. 우리 자신이 진짜 자폐증환자인지 그거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가 보기에 컵이 있다죠. 내가 보기에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눈이 있다죠. 보니까 눈이 있는 거예요. 눈이 있으니까 이걸 지워보겠습니다. 눈을 빼겠습니다. 그럼 내가 있기에 컵이 있죠. 내가 있기에 컵이 있습니다. 근데 내가 망치로 얻어맞았다. 기억을 잃어버렸다. 기억이 사라졌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목사님 앞에 컵이 있었는데요?” “어? 어? 나는 몰라?” 이러면 나한테는 컵이 있어요? 없어요? 그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있더라도 내가 관심두지 않으면 그건 없는 것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앞에 사철나무인지, 주인보고 물으니까 모르겠다고 합니다. 나무가 있는데, 분명히 나무가 가보면 있어요. 있는데, 나뭇잎 숫자를 아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 분명히 나무들 있잖아요? 분명히 있는데, 한 나무 당 나뭇잎 숫자가 몇 개이던가요? 관심 없죠. 그거는 사실은 나무가 있더라도 이론상 내가 관심 없는 것은 없다가 돼요. 그래서 있다를 존재라고 하는데, 있다=존재. 있다는 뭘 의미하느냐 하면, 나에게 의미가 있을 때만 있어요. 뭐든 게 나에게 의미가 있을 때만 있어요. 나무가 있으니까 나뭇잎 숫자 셀 수 있겠죠. 하지만 거기에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는 것은 나한테 없는 것이 됩니다.

 

지난밤에 시카고에서 부부싸움 몇 건이나 일어났어요? 모르죠. 이거는 내가 알고 싶은 것에서 빠져있으니까, 이거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한테 의미 있다? 나에게 의미 있는 것만 있기 때문에, 결국 누구만 있느냐 하면,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만 있는 거예요. 나만. 이 세상에 나만 있어요. 그냥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의미 있게 있는 겁니다. 첫 번째는 있다를 설명했어요. 있다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있다는 것이 의미 있으려면 뭐냐, 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있다는 것을.

 

“당신 참 예뻐!” 강의 듣는 사람들은 누가 예쁜지 궁금해 할 것인데, 뒤통수만 보이니까 모르겠지만. 하나의 예를 드는 거예요. 예니까 다른 사람들은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당신, 참 예뻐!” 그런데 다른 사람 보기에는 “별론데?” “내가 이쁘면 이쁜 거야.”여러분 결혼할 때 다 그렇게 했잖아요? 모든 여자들 줄 세워서 골라서 했습니까? 아니죠. 줄 세울 수 있는 그만한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반경 몇 킬로 내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연관된 가운데서, 그것도 아줌마 빼고, 소녀 빼고, 아가씨들 중에서, 그것도 내 나이하고 얼추 비슷해서, 아래위로 플러스, 마이너스해서 5살 차이로, 그 정도 선에서 마음이 맞아서 한 거예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나한테는 예뻤다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멱살 쥐고, “니가 여기 있는 모든 여자들 불러봤어?” “아니.” “그럼 니가 왜 그 여자가 예쁘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느냐?” “내가 예쁘면 예쁜 거야.” 결국 그 여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뭐냐, 내가 예쁘다는 주장을 증명해주기 위해서 내 아내는 계속 예뻐져야 돼요. 내가 이쁘다고 하는 여자는 계속 이뻐져야 돼요. 이게 얼마나 일방적인 주장입니까? 이래도 자폐증환자 아니에요? 믿는다고요? 인간은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만 믿어요. 나한테 의미가 있고 것만 믿고. 나한테 의미 있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한테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내 삶에 도움이 되고 내 삶에 보탬이 되는, 나의 유용성. 나한테 유용하다는 말은, 나에게 이익이 된다는 말이에요.

 

나에게 이익이 될 경우에 그거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가 있을 때는 나는 관심을 두고, 관심을 두게 되면, 너는 나하고 같이 있는 거야. 내가 존재하듯이 너도 존재해야 돼. 왜냐하면 내가 너를 예뻐하니까 너는 내 허락 없이 사라지면 안 돼. 근데 내 허락 없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는, 이게 어디 내 허락 없이 사라져? 라고 하는 감정이 뭐냐, 슬프다. 보고 싶다. 이런 거거든요. 제 말 틀렸어요? 섭섭하네. 이런다고요. 니가 내 앞에서 사라지려면 내 허락 맡아야 돼. 허락 맡을 필요 없는데 왠지 섭섭하지. 안 갔으면 좋겠어. 니 내 옆에 붙어 있으면 좋겠어. 니가 나를 구속하려고 하느냐? 구속이 아니고 뭐 그렇다는 뜻이지. 이런 식으로.

 

근데 사람들이, 나오는 감정이라는 것이 그냥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누가 있어요? 내가 여기 있음에, 있음은 존재입니다.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 내가 나에게 의미 있음에, 존재에서 의미가 들어갔습니다. 왜, 의미 있다고 했어요? 내가 나한테 유용하기 때문에. 나, 니만 내 옆에 있으면 나는 외롭지 않아. 누구 좋아하고? 내 좋아라고. 내 좋아라고 니는 내 옆에서 5미터 밖으로 떨어져서는 안 돼. 늘 붙어 다녀야해. 남녀 간에 연애하면서, 스킨십이라고 하죠.

 

근데 오늘같이 화씨 92도까지 올라가게 되면, 그것도 모르고 상대방 남자가 스킨십skinship하게 되면, 손 치워라! 근데 날씨 서늘할 때는 만지라고 하면서 왜 손 치우라고 하는데? 지금 날씨 더울 때, 당신의 스킨skin, 피부가 이렇게 터치될 때에 그게 나한테 유용하지 않아. 날씨 서늘할 때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나한테 유용하지 않아. 땀나. 안 그래도 더워죽겠는데 그런데다 붙으면 36도 되고, 짜증나잖아요. 결국 우리가 뭐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그거는 무엇을 확인하느냐 하면 이 세상은 내 유용한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막 살 거야. 하는 식으로, 이 세상에 일방적으로 의미를 주었고, 나름대로의 유용성을 거기다가 퍼붓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군에 갔다, 그런데 비상식량이 다 떨어졌다, 남은 것은 건빵 두개 밖에 없다, 그런데 같은 전우가 두 명 있는데, 그 애도 두 개 다 먹어야 살고 나도 먹어야 산다. 그럴 때는 상대방에게 양보하는 것이 아니에요. 가위바위보, 또는 묵찌빠, 두개 다 먹기. 왜 그러냐 하면 건빵 두개 남은 상황이,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던, 어떻게 만들었던,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있음이. 세상이 이렇게 있더라. 사철나무가 이렇게 있고 가로수가 이렇게 있더라도, 내가 관심 두는 그 범위 안에서만 품을 수 있는 나만의 현실이 되는 거예요. 전쟁이 일어났다, 그래서 전쟁의 의미가 뭐냐? 지금 그걸 따지는 것이 아니고, 건빵이 몇 개 남았냐가 나의 지금의 현실이에요. 건빵이 몇 개 남았냐가.

 

그러니까 그 현실은 누구의 현실에 의해서?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신이 나를 위해서 허락해줬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한다 이 말이에요. 자,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일방적이죠. 다시 설명하면, 처음에는 뭐였다? 존재, 존재 자체가 수상하죠. 이거는 진리 아니죠? 어렵기 때문에 다시 반복해도 돼요. 컵이 있다. 컵이 있다고 할 때에 왜 컵이 있다고 하느냐, 컵을 누가 보기 때문에? 내가 보기 때문에 컵이 있는 거예요. 내가 만약에 컵이 없다고 우긴다면 컵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다의 모든 시작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한테 필요한 것들만 주워 모아서 한다는 이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있다가 그 다음에 의미가 되고, 의미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유용성이 되면서, 다시 하면 처음에 존재에서 의미, 그 다음에 유용성, 이제부터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믿는다가 나와요. 나는 컵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여기 포도가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자두가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 다음에 복숭아가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 다음에 멜론이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보는 사람들이 많이도 먹는다고 욕하겠다. 멜론이 있는 것도 나는 믿는다는 거예요. 나는 여기 포도가 있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 다음에 제일 중요한 것이 그게 뭐다? 나는 옳은 소리를 했다. 그게 진리라는 겁니다. 나는 존재한다. 그게 나의 의미들만 모아서 통일된 나의 현실로 본다. 그 다음에 나는 그것이 나에게 유용하기 때문에 의미를 둔다. 근데 그 유용한 것을 나는 뭐라고 한다? 믿는다. 나는 있다는 말을 해야 될 것을 나는 의미가 있어. 이렇게 말을 바꾸고. 유용하다는 말을 해야 될 것을 의미 있다고 이렇게 가짜로 이야기하고, 나한테 이익이라고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될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믿어. 이렇게 감추고. 나한테만 무조건 진리라고 이야기할 것을 또 나는 믿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한다 말이죠.

 

그래서 이 모든 것이 결국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이에요? 믿음 아니에요? 이거는 정신병환자죠. 이 정신병환자를 이런 써클, 순환구조로 이야기 한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 깨지느냐, 이 진리가 어디서 깨지느냐, 내가 죽을 때. 내가 죽을 때 내 진리도 깨지고, 내가 믿는다는 것도 다 헛수고고, 죽는 마당에 유용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는데.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데 무슨 유용한 것이 있어요? “아이고, 죽더라도 이 포도 잡수시고 죽으세요.” 지금 죽는 마당에 이 포도가 들어갑니까? 5분 전에는, 나는 이 포도를 믿습니다. 하는 것이 진리라고 해도, 죽는 마당에는 이 유용성도 때늦은 거예요. 이미 차는 떠나버렸어요.

 

유용성이 없으면 뭐도 무너진다? 유용성이 없으면 의미도 없는 거죠. 의미도 없다 이 말이죠. 사형수에게, 5분 후에 죽을 사형수에게 “손 씻으세요.” 5분 후에 죽을 사람에게 세균 퍼져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요? 5분 후에 죽는데. 손 씻는 것이 살아있을 때나 의미 있지, 유용하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의미 없습니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내 있음이 이제는 좌절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 안에서 이 전체를 누구를 위해서 쓰냐면,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를 위한 역사, 나의 역사죠. 그래서 인간이라 하는 것은 죽음 안에서 자기 역사를 가지고 믿는다고 우기는 것. 이런 정신적인 질환적인 요소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믿는다는 것이죠. 믿는다는 것은 있음에 대해서, 있음을 가지고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것.

 

그래서 여기 컵자리에다 이번에는 예수님을 집어넣읍시다. 이제 여러분 아시겠죠?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이거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이거는 진리 아니죠. 나는 삼위일체 믿는다. 이거 진리 아닙니다. 나는 교회 다닌다. 이거 진리 아닙니다. 나는 천국 믿는다. 이거 진리 아닙니다. 전부 다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짜입니다. 내가 없어질 때도, 포도 맛있다고 그런 소리 할래? 내가 없어지는데, 내가 사라지는데, 포도 맛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유용성이 있습니까?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도 믿음이 아니에요.

 

자, 지금까지 한 것을 한 5초 동안 정리해보면, 지금 이 세계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전부 다 나름대로 다 믿어요. 모든 인간은 다 믿어요. 모든 의미 있는 것은 놓치지 않아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탕웨이가 선전하는 SK2 피테라에센스 광고에 보면, 발음도 잘 안 돼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의미 있는 것을, 나한테 유용한 것을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이게 무슨 세계냐, 믿음의 세계에요. 이 세상은 믿음의 세계에요. 이 세상은 믿음의 세계.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다 자기한테 존재의 의미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믿음 생활하는 교회가 얼마나 엉터리냐는 겁니다. 지금 다들 믿음의 세계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걸 모든 사람은 신자다. 모든 사람은 신자가 되는 겁니다. 조건이 하나 있어요.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은 이미 신자입니다. 신자라는 말을 세자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종교인입니다. 모든 사람은 종교인이에요.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날 때부터 종교인입니다.

 

왜냐하면 뭐가 형성되기 때문에? 나는 믿습니다가 형성되기 때문에. 나는 의미 있는 것은, 유용한 것은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예요. 절대 놓치는 법이 없어요. 내게 이익 되는 것은. 전쟁가운데 마지막 남은 건빵 두 개는 절대 남한테 양보하기 싫습니다. 나는 이 건빵을 믿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근데 다른 전우가 정신병자가 되어가지고 저걸 건빵으로 보지 않고 돌멩이 두 개로 보니까 자기는 신났지. 돌멩이로 보니까 의미가 없잖아요. 근데 자기는 건빵으로 보이고. 자기는 의미가 있으니까. 신자로서 이 세상을 믿음으로 보니까, 믿음 있는 신자가 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통일된 현실관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통일된 현실관이 있습니다. 통일관. 하나로 통일된 현실. 그 현실의 통일관은 자신의 존재의 유용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아직까지 요한일서 보면 안 됩니다. 요한일서 근처에도 안 갔습니다. 이제 요한일서 들어가는 방법을 구약에서 시작합니다. 아시는 사람은 아시는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 구약의 이스라엘백성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종교인이고, 신자고, 의미를 갖고 있고, 이게 전부 다 어디서 나왔다? 자기 존재에서 나왔죠. 그런데 구약의 출애굽기 12장에서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호와의 밤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밤.” 여호와의 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무서운 영화를 보면나오잖아요. 꼭 무서운 영화에는 공주전화부스에 12시에 스산한 바람이 불면서, 그것도 11월에 찬바람이 불 때, 낙엽을 확 몰고 가면서 외로운 가로등이 공중전화부스를 딱 비치게 되면 왠지 으스스하고 춥죠. 그럴 때 어디선가 귀신이 나올 때가 된다 말이죠. 근데 보통 새벽 2시 43분, 44분 정도에,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잠 잘 때, 단란한 자기 가정에서 불 끄고 잠 잘 때입니다. 근데 거기 일본의 사무라이가 창검 들고 와서 무자비하게, 그 집안에 있는 맏아들을 무자비하게 다 때려죽이고 홀연히 스산한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난데없이 죽음이 찾아오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온 집안이, 애굽 사람 온 집안이 울게 돼요. 아까 강의할 때 했죠? 사람이 섭섭하다는 것이 어떤 경우라고 했는데, 내가 존재를 증명하는데, 내 허락 없이 내 현장에서 떠나버리면 뭐라고 해요? “나는 너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 이 밤에 가니까 좀 섭섭하다.”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자식하고 단란히 한 방에서 잔다는 말은, 니가 있음에, 니가 나한테 유용하고 그걸 통해서 내 존재는 증명이 되는데, 사무라이가 와가지고, 눈만 내놓고 얼굴을 검은 보자기로 다 싸맨 그 사무라이가, 그것도 둘째 아들은 필요 없고 첫째 아들 다 찔러죽이고 나갔다면, 이건 섭섭한 정도가 아니에요. 섭섭한 정도가 아니니까, 성경에 보니까 집마다 곡성. 통곡소리가, 울음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그럴 때,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뭐라고 했습니까? 단순한 거니까 답변해주셔야 해요. 하나님이 다녀가셨다고 할까요? 사탄이 다녀가셨다고 할까요? 사탄이 다녀가셨다. 왜냐하면 믿음의 세계에서, 통일되니까, 통일은 내가 난 자식하고 자고, 딸은 옆방에 자고 아들은 저 방에서 자고, 이렇게 통일 된 것을, 자기 존재증명인데, 이것을 훼손했을 때는, 나한테 손해를 끼치는 것은 전부 다 사탄이에요. 왜? 나의 의미는 유용성이기 때문에. 나한테 이익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믿는 이유가 내 존재를 확인해주고 증명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세계냐, 신자에요. 신자.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자기를 신봉하는 자기 종교인이에요. 그게 자기의 믿음의 세계에요. 그 믿음의 세계를 외부에서 파괴시키면 뭐가 되느냐 하면, 정체를 밝히는 것과 관계없이 그거는 사탄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공식 하나 나옵니다. 여호와는 뭐다? 사탄이다. 여호와=사탄. 나의 존재를 파괴시키는 사람,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나의 존재를 계속 유지하고 싶었는데, 영생까지 따고 싶은데, 나를 조기에 죽여 버려요. 그걸 파괴시키는 사탄은 여호와입니다.

 

이걸 인정을 하지 못하면, 내가 바로 여호와를 사탄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나는 바로 여기에 버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성경 한 구절도 못 나갑니다. 니가 사탄이든지, 당신이 공격하는 내가 사탄이든지, 둘 중의 하나인데, 나는 믿습니다. 당신이 사탄이고 내가 참된, 의롭게 살고 있는, 가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너도 신앙인이고 나도 나름대로, 나름 신앙인인데, 나는 내가 중요한 것을 알고 있는 내 종교에 영원한 충실한 신자다. 왜? 제가 아까 믿는다고 했잖아요. 믿음세계라고 했잖아요. 나는 믿는 자에요. 나는 내 것을 남한테 양보하거나 파괴되거나 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충실한 신도에요. 유일한 신도가 나밖에 없어요.

 

심지어 우리가 지옥 갈 때도 누가 걸리느냐 하면 내가 걸려요. 힘내! 힘내! 사우나 한번 간다고 이래 생각해! 거기 친구들 많은데 거기 가서 고스톱 치든지, 전처럼 살면 되지 뭐. 물론 물은 없겠지만. 마지막까지 배려하고 끝까지 사랑하고 걱정해주는 것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어요. 나밖에 없어요. 이 충실한 존재를 내가 어떻게 배신합니까? 마지막 존재. 나는 이미 신앙 얻은 자고 이미 신자인데. 그래서 여호와가 하는 모든 일은, 다시 말해서 내가 신자이기 때문에 여호와(여호와=사탄)가 하는 일은 뭐가 되느냐 하면 불신자를 눈에 띄게 하는 일들을 바로 여호와께서 성경을 통해서 행합니다. 지금 이 개념 자체가 완전히 반대됐죠.

 

하나님 믿어야 신자고, 하나님 안 믿는 사람을 불신자라고 하는데, 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냐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인간은 자기를 믿는 믿음의 세계를 꾸역꾸역 만들어 가고 있어요. 자, 그럼 여기서 쉬는 의미에서 누가 한 번 답변해보세요. 물이 끓는 온도가 100도다. 물이 끓는 이유가 왜 100도인지 설명해보세요. 진짜 어려운 질문입니다. “물이 끓는 온도가 100인 이유는 물이 끓기 때문에.” 이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거는 미장원 옆에 이발소 있다면, 이발소 어디 있느냐고 하면 미장원 옆에 있다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거는 말 하나마나에요.

 

이건 에디슨이 어릴 때 이야기한 거예요. 사과가 여기 있어요. 사과가 또 여기 있어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두개라고 하는 겁니다. 사과1+사과1=사과2 여러분 알았죠? 이렇게 하니까 에디슨이 손을 들었어요. 선생님 왜 이게 2입니까? 러셀이라는 사람이 이거 증명하는데 300페이지가 넘었어요. 1+1=2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세계 최고의 수학자가. 이걸 증명할 길이 없어요. 왜 이걸 3이라고 쓰면 안 되는데요? 왜 이걸 4라고 쓰면 안 되는데요? 왜 2냐? 이걸 증명해보라는 겁니다.

 

이유 있어요? 없어요? 이유 없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약속이죠. 근데 누구끼리 약속한 거예요? 누굴 빼고 약속한 거예요? 사탄(여호와)은 빼고 약속한 거예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존재, 그 다음에 의미, 그 다음에 뭡니까? 의미 있다는 것은 유용한 것만 의미 있죠. 집에 올 때, 나뭇잎의 숫자가 몇 개냐? 그건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의미 없는 거예요.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 그 다음에 이게 바로 나한테 진리가 되는 거예요. 아이구, 우리 색시는 얼마나 예쁜지. 이건 누가 봐도 진리에요. 남들이 별론데? 내가 예쁘다는데 누가 별로라고 해? 그녀는 예뻤다. JYP가 이야기하는데 그걸 누가 거부해요. 진리가 되는 거예요.

 

진리를 믿는 신자끼리 물 끓는 온도를 90도 하지 말고, 100도라고 해서, 라면 집어넣자. 약속을 했다 이 말입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이 100도가 너의 죽음 문제를, 너가 안 죽는 것을 보장하느냐 이 말이에요. 진리라면 어떻게 돼요? 죽음 문제도 해결해줘야 되잖아요. 죽음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진리라고 여겼던 모든 것, 내가 신자라고 여겼던 모든 것, 내가 의미 있다고 어겼던 모든 것들이, 죽는 순간에 훅하고 날아가 버려요. 죽는 순간에 포도가 포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포도라는 것은 맞는데, 죽는 나한테는, 사형수인 나한테는 의미가 없으면 나한테는 진리가 아닌 거예요.

 

결국 인간들은 너무나 일방적입니다. 일방적이에요. 보편적인 진리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나만 살면 돼요. 나만 행복하면 되고, 나만 즐거우면 되고, 나만 살면 돼요. 따라서 성경을 보면서도, 성경 믿고 하나님 믿고 예수님 피라고 하는 것도, 그것도 진리다? 진리 아니다? 사실은 자기 나름대로 진리라고 우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진리도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도 아니고, 그냥 놀이에요. 화투놀이나, 포커놀이처럼 그냥 종교놀이, 종교게임 한 거예요.

 

교회 가면 집사님~!하면서 칭찬해주죠. 사회에서 인정 못 받는 것 교회에서 인정해주고, 봉사 열심히 막 하니까 대중들이 앞서서 막 칭찬해주니까, 어릴 때 칭찬 못 받아가지고 정신이상한 사람처럼, 교회 가서 열심히 충성하니까 막 칭찬받고. 살 보람을 느끼고, 그래. 나는 믿습니다. 주를 위해서, 이래 나오니까 그게 자기에게 유용하니까, 그게 자기한테 의미가 있으니까, 그래! 나는 교회 나와서 예수 믿어야지! 예수 믿었으니까 영생 얻고 천국 간다고?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요?

 

그럼 똑똑한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무슨 소리 하느냐 하면, 수 천 년 철학자들이 죽어봐야 안다는 거예요. 자기들도 이게 일방적이라는 것을 알아요. 왜? 서로가 다르니까. 니 예수, 내 예수 다 다르니까. 어느 예수가 맞는지를 검증할 수 있는 기준도 없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 때까지만 재미나게 살기 위해서 종교를 이용하자. 그렇게 합의를 봤어요. 봤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기 전까지는 재미나게 살자는 거예요. 죽음 뒤는 모른다고 했죠. 모른다. 공자가 이야기했어요. 죽음 뒤도 모르는데 사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그런 소리 했거든요. 모른다고 했죠. 모른다를 다른 말로 하면 무지가 돼요. 무지. 무지는 뭐가 되느냐 하면 믿음의 대상이 되지를 못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하면 이거는 결국 뭐냐 하면 유보되는 거예요. 유보. 또는 지연되는 겁니다. 지연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실선으로 나오다가 점선으로 남겨두는 것을 지연이라고 하잖아요. 그렇죠? 이걸 통합해서 보면 내가 이렇게 죽음 뒤를 모르니까 일단은 그 정도로 보자 하면 이거는 뭐가 대상이 안 되느냐 하면 진리의 대상이 안 됩니다. 진리의 대상이 안 돼요. 진리의 대상이 안 되면 뭐가 깨지느냐 하면 온전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어요. 컵을 이렇게 손으로 잡는데, 손이 컵을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잡는 순간 지지직하고 손이 사라졌다고 합시다. 그런 드라마가 있어요. W라는 드라마. 컵을 쥐니까 손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컵을 쥔 손을 내가 온전히 보인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장담을 못하죠. 이걸 가지고 학자들은 불확실성이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 그러니까 졸지에 신자라고 우기다가 이제 공부 좀 하고 나니까 뭐가 됐어요? 내가 신자가 아니고 불신자라는 것. 불신자가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확실한 것이 없다는 거예요. 확실한 것이 없다가 된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할 수 있어요? 없어요? 미래는 모른다가 되죠. 보험 열댓개 들어놔도 마음은 늘 불안하고, 두렵다 이 말이죠. 믿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이 일을 벌이다가 실패로 끝나면? 투자하다가 투자비용의 이자도 안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 이게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믿을 게 없죠. 불안, 불안 하죠.

 

그러면 그 방법을 누가 사용하느냐,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우리 자신을 깨기 위해서, 우리가 신자라고 우기는 것에 대해서 누가 흔들어요? 주님이 흔들어요. 너는 아무것도 믿은 적이 없다고 흔들어요. 이게 불신자에요. 흔들게 되면 우리는 가만히 곱게 흔들려집니까? 반발합니까? 반발하죠.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반발한다는 것은 내가 아는 대상 말고, 내가 미처 모르는 대상이, 내 세계 바깥으로 활동을 벌이고 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을 잡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몰라요. 정말 이거는 너무나 감격스러워요. 사무라이가 덮치는 거예요. 단란한 가정이에요. 우리는 요 이 식구하고 살고 싶어요. 미리 계산 다 했어요. 그리고 우리는 믿습니다. 나는 이 행복을 믿습니다. 그걸 깨버렸어요. 장자를 죽여 버렸어요. 그럴 때, 내 통일성 있는 현실감은 깨져버렸어요. 내가 신자인줄 알았는데, 미완적이고,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내∙가∙나∙를∙믿∙을∙수∙없∙다∙이 아홉 글자를 두 글자로 줄이면 믿음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이에요.

 

그러면 믿음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나를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나라는 말입니다. 절대로 나를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나라는 것은, 이미 외부세계와 컨택contact, 접촉되어 있느냐, 이미 접촉되어 있다. ET가 손가락으로 하잖아요. 달이 떠 있는 하늘을 자전거 타고 날아가잖아요. 외계인과 소년이 손가락으로 컨택 하는 것 있잖아요. 접촉하는 거예요. 접촉을 시도하기 위해서 주께서 오셨습니다.

 

날 믿으라가 아니라, 날 믿으라는 말은, 니가 알고 있는 믿음의 세계는 그게 불신세계다. 결국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니가 그토록 싫어하는 사탄이, 내가 사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우리의 통일 된 세계를 포개버리고, 박살내고, 엎어버려서, 의미 있다, 유용하다는 이걸 엎어버리는 거예요.

 

뭐가 의미 있고, 뭐가 너한테 유용하고, 뭐가 관심이 있는데? 그녀는 예뻤다. 뭐가 예쁜데? 늙어봐라. 나중에 주름살이 다 되어버리지. 뭐가 이쁜데? 자식 나중에 돈 문제 걸려 보세요. 자식이 아니라 웬수죠. 뭐가 이쁜데? 두 살까지만 예뻐요. 세 살부터는 말썽쟁이에요. 그런데 그들을 탓하지 마라. 너가 평소에 너를 완전체로 봤던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문제가 있는 거예요.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09-10 18:43 
20160906 요한1서 시카고강의2-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여호와가 사탄으로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해보세요. 여호와의 밤. 여호와의 밤, 하나님께서 그 집안의 장자들을 무자비하게, 얼마나 효심이 강한지, 공부를 잘하는지, 그거는 일체 보지 않고 그저 죽이는, 그래서 사무라이가 그렇습니다. 무조건 죽입니다. 이유도 없어요. 그냥 죽여 버립니다. 나중에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처음부터 너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니가 죽는 데에 있어서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 그런 뜻이에요.

여호와를 만났다는 것이 뭐냐 하면, 근원적인, 나를 가치 있게 보는 모든 뿌리를 완전히 뒤엎어버리는 거예요. 일말이라도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긍정할 만한 모든 근거를 싸그리 전부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살하지? 자살도 못하게 만들어요. 누구 맘대로 자살해? 자살도 못하게 만든다니까요. 그러면 우리는 짜증나가지고, 신이시여! why me?왜 하필이면 나를? 왜 접니까? 졸음운전 때문에 사고 난 그 상대자가 왜 접니까? 라고 하나님한테 그 이유를 묻게 되는 겁니다.

근데 그 묻는 것은 정답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컨택, 접촉했다는 관계가 중요하죠. 접촉했다는 관계가 중요해요. 누가 유리 하냐, 불리하냐는 더 이상, 접촉한 순간, 그걸 유리한 접촉으로 이제는 생각하지 말아야 돼요. 접촉 그 자체가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는, 보물이 들어있는 보따리가 들어오는 거예요. 보따리가. 이걸 나한테 얼마나 유용하게 쓸 것이냐 안 쓸 것이냐는, 그것은 우리한테 쓸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하는 것은, 내가 죽었다, 살았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컨택 되었다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찾아왔다는 그걸 강조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그리스와 함께 내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은, 바로 얘들아! 주님이 나와 접촉했어. 라는 거예요. 내가 이제부터 착하게 사느냐, 나쁘게 사느냐 하는 그 책임을, 접촉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걸 나한테 묻지 말라는 거예요. 나는 차라리 죄인의 괴수로 살래.

그러니까 내가 예수 믿고 얼마나 완벽하냐를 나한테 따져 묻지 마라. 그렇게 따져 묻는 것은 뭐냐 하면, 컨택 이전에, 하나님이 찾아오기 이전에, 너 혼자 나를 믿는 신자가 될 때는, 나한테 선한 것이 복이 온다는 그것이 나에게 유리함으로 작용해서. 성경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교회 다니는 것도 의미가 있고, 거기서 내가 칭찬 받는 것도 의미가 있고, 천국도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근거로 했을 때나 있는 이야기지. 컨택 돼버리면 그런 것은, 이거는 내 소관이 아닌 겁니다.

그럼 하나의 방법이 뭐냐, 여호와의 밤이 뭐냐, 이겁니다. 아, 두 번째 시간이 더 어렵습니다. ‘존재하지 않음’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여기 있다가 되죠. 자, 첫째 시간 지나갔는데 잊어버렸나 봅시다. 여기 컵이 있다. 우리는 컵이 있으니까 맞다고 했죠? 맞다고 했는데, 앞에 뭐가 생략되었다고 했습니까? ((내가 보니까)) 컵이 여기에 있네. 만약에 내가 죽는다면 여기 컵이 있든 포도가 있든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반드시 사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그전에 뭘 주장하느냐 하면, 내가 여기에 있단 말이야. 내가 여기에 살고 있단 말이야. 제발 나를 좀 무시하지 말라는, 이것을 전제로 깔고, 우리 가정 행복해. 우리 애들 행복해. 이거는 애들이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애를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누가 있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좀 알아달라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평가도 내가 평가하고, 판단도 내가 판단하고. 결정도 내가 결정하고, 선택도 내가 선택한다는 거죠.

현대 철학에서는 그걸 인간의 주체라고 하는데, 주체라는 것은 시장에서 물건 고를 때, 거기서 주체가 형성돼요. 애가 두 살 되기 전에는, 애야, 그거 하지 마! 그거 찌찌야. 이거 해. 세 살 네 살 되면, 이리와 봐 여기 분홍색하고 파랑색하고 어느 것 할래? 선택권을 애한테 맡기죠. 애는 고민합니다. 파랑 것을 해서 친구들한테 자랑할 거냐? 분홍색을 해서 자랑할 거냐? 옳지. 분홍을 하면 나에게 이쁘다고 하겠지. 이쁘다고 하면 나에게 의미 있는 칭찬이 오겠지. 그럼 나라는 존재는 나를 믿을만한, 가치 있는 신자로 계속 유지되는 거예요. 엄마, 나 분홍색. 그럴 때 주체가 최초로 형성되는 겁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이것을, 최초의 자아형성을 1년에서 3년으로 봐요. 근대 교육 심리학의 삐아제 라는 그 사람도 1년에서 3년을 최초의 자아 성숙기로 보는 겁니다. 7살 때는 마지막에 마무리가 되고. 사춘기라는 잠복기가 되면서 성인으로 나아갑니다. 인간의 두뇌라고 하는 것은, 원숭이는 난지 3개월 만에 형성되지만, 인간은 29세 때까지, 20대까지 두뇌의 피질부분이 계속 발달해가지고, 피질부분이 발달한다는 것은, 인격성이 계속 멈추지 않고 발달해서 완성되어 간다는 거죠. 그럼 이 이야기는 결국 뭐냐 하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이게 과학이잖아요. 과학은 반드시 뭐를 전제로 하냐면 있음에서, 이걸 변동해서 개선시켜요. 개선해서 더 나은 있음이죠.

근데 이 과학자가, 이 철학자가, 이 문학평론가가, 그 귀한 딸자식의 있음이, 누구 이야기냐 하면 이어령씨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집회 많이 하잖아요. 그렇게 미국에서 판사까지 하고, 판사하고 암에 걸리고 목사까지 하고, 그리고 누구 친구냐 하면, 허운석 선교사님 친구이기도 하고. 그런 귀한 딸이 꽃다운 나이에 죽고 난 뒤에 그렇게 신이 없다고 하던 이어령 교수가 어떻게 됐어요? “나는 생명을 만났다.” 결국은 무슨 이야기에요? 생명을 배웠다? 아니에요. 생명을 연구했다? 아니에요.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니에요. 뭐라고 하는가, “만났다.” 아까 이야기한 접촉했다. 나는 생명을 만났다. 나는 죄인이었다.

나는 내가 신자기 때문에 나 말고 다른 믿음의 대상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던 거예요. 너무 완고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믿는 신자가 여기, 내 믿음은 나를 믿는다고 확증이 됐는데, 어디 바늘구멍이 들어갑니까? 이용할 대상이죠. 신이든, 삼위일체든, 예수든, 내가 더욱더 나답게 되기 위한 이용가치가 있을 뿐이지. 이미 신자는 난데. 예수도 나를 위해 이용할 뿐이죠.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할 때, 오천 명이나 따라왔습니다. 왜 따라 온지 알아요? 예수님을 믿었어요? 아니에요. 너희들은 나 자신만 믿는다고 확인하면서 오천 명 따라왔고, 예수님께서 죽음이야기 하니까, 살과 피 이야기 하니까, 오천 명 가운데 하나도 함께 하지 아니하고 다 가버렸어요.

요즘 말로 하면 교인들이 오천 명이 와서 예배당을 지었는데, 예배당 짓고 난 뒤에 한 명도 오지 않은 것 하고 같은 거예요. 한 명도 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너희들도 갈래? 너희들도 가지 왜? 너희들이나 쟤들이나 똑같이, 너희들도 나 이용하려고 붙어 있잖아? 나 믿고 천당 가려고 있잖아? 무슨 집단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나름대로의 통일적인 현실관으로, 천국도 자기의 통일된 현실관으로 하나의 요소로 집어넣고, 나는 죽어서 좋은데 갈래. 니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나를 계속 이용해먹으려고 한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요6:68) 할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컨택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컨택 해서 좇아올 수 없다. 이거는 너희들의 문제가 아니고 도리어 아버지와 나의 문제의 결과물로 니가 내 앞에 선택되었지, 절대로 니가 나를 선택한 적도 없고, 선택을 하지도 않는다. 왜? 인간은 누구만 선택한다? 나는 끝까지 나만 선택하기 때문에. 누구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용할 뿐이죠. 아쉬울 때는 예수 믿다가 여유생기면 다시 멀어져요.

끝까지 자기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인간. 그런데 그 인간이, 사르트르가 이야기 했습니다. 그 인간이 죽음이라는 것이 왔을 때는 대책이 없다는 겁니다. 왜 오느냐, 이유도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은 나중 문제고, 유보하고, 사는 문제나 해보자. 그런데 그들은 알아요. 유보된 그것이, 사는 문제, 진리라고 우겼던 것을 한 순간에 파괴한다는 사실을, 그들도 어렴풋이 알아요. 백날 진리라고 하지만 인간은 어느 순간에 교통사고 일어나서 한방에 가버리면 내가 쌓아올린 모든 명예와 명성과 재산은 한 순간에 다 날아가죠. 거기에 나온 단어가 무슨 단어냐 하면 허무입니다.

이 허무를 B.C 5세기경에 기원전 500년경에 그리스에서 이걸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극. 그리스의 3대 비극이 처음 나온 겁니다. 오이디푸스가 그런 이야기에요. 모든 인간은 신에게 대들다가 깨갱했던 이야기에요. “인간아, 니 꼬라지를 알라. 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아폴로 신전에 적혀있던 말을 추방되었을 때 그걸 인용해서 한 거예요. 인간아 니 자신을 알라. 니 자신이 뭐냐? 니가 비극적인 존재인 것을 알라. 그러면 그 이후에는? 나도 모른다. 결국 마지막 결론은 뭡니까? 무지로 끝나버려요. 모든 학문은 몰라. 모르는데 왜 사는가, 그냥 사는 거야. 그냥 살 때까지 뭐 가보는 거지 뭐. 그냥. 대책 없음. 누가 살래? 몰라. 목적은? 몰라? 죽고 난 뒤에? 몰라. 그냥 살아있으니까 그냥 살아있는 본능대로 루터는 그걸 관성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한 번 움직이게 되면 스톱하기 전에 계속 움직인다는 운동의 제일법칙이거든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이미 자기는 자기를 믿는 신자니까. 이건 양보 할 생각 없으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존재하지 않음.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 모든 문제가 뭐부터 출발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음부터 출발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올 때,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일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열두제자가 다 왔을 때,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는 말씀을 여러분들 다 아시죠? 열두제자가운데 예수님 믿었던 사람 있습니까? 손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열두제자는 백날 내 눈으로 보고 만져봐야 도망치게 돼있어요. 왜? 인간은 자기가 신자기 때문에. 이용할 가치 떨어지면 언제든지 쓰면 뱉고 달면 삼키게 되어 있어요.

그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그 이름도 거룩한 베드로. 천주교에서 성자로 치는 그 베드로가 쓰면 뱉고 달면 삼킨 우리의 모델케이스였습니다. 모델케이스였어요. 인간이 아무리 배신해도 베드로만큼 배신할 수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잖아요. 장모가 병이 나았잖아요. 오병이어의 맛있는 빵,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고기하고 아침 뷔페 다 먹었잖아요. 예수님의 능력으로 온갖 귀신을 쫓아냈잖아요. 혜택 입을 것 다 입어놓고, 그리고 칭찬까지 받았어요. 니가 교회의 반석이다. 칭찬까지 다 받아놓고.

그리고 한 번 배신한 것도 아니고, 세 번 배신했고, 그 배신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나는 저 사람을 ▢. 이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저주한다.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참 용기도 좋아. 나는 죄인이라고 시작했던 그 어부의 생활을 생각하면 그런 소리가 나와서는 안 되는데, 나는 저 사람을 저주한다. 그 저주한 그것이, 그 사람이 천국 갔습니다.

따라서 천국은 존재관리해서 못 가는 나라에요. 내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내 엉터리 믿음을 수정해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에요. 그냥 존재하세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냥 사시는 대로, 너밖에 모르죠. 아, 네. 잘 알겠습니다. 너밖에 모르는 식으로 사세요. 쭉 가세요. 그냥 관성의 법칙대로 쭉 가세요. 뭘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그러지 말고 그냥 쭉 가세요. 그냥 쭉 사시고 그냥 가세요.

다만 이건 알아야 돼요. 내가 무지한 채로 쭉 가야 됩니다. 무지한 채로. 나보다 몇 배 똑똑한 사람이 내린 결론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면, 우리도 모르는 채 쭉 가시기 바랍니다. 뭐 안다는 생각하고 그런 것 없어요. 왜 어차피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자칫하면 내가 지옥 가잖아요? 이러면 안 되는 거예요. 그냥 쭉 가라하는데, 그냥 쭉 가면 되는데, 또 뒤돌아서고, 자꾸 back해가지고. 그냥 사시는 대로 쭉 사시라니까요. 쭉 사시라는 말이죠.

이 말은 뭐냐, 나에게 관심두지 마세요. 어차피 모르는 것. 내일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특히 그리스 문학에서 나중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철학이 나올 그때, 플라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가면이에요. 페르소나persona, 가면. 인간은 모두 다 가면을 썼는데,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얼굴이 없다는 거예요. 가면 벗기면 뭐가 나오는 줄 알아요? 가면2가 나와요. 가면2 벗기면 가면3가 나오고.

그 가면을 누가 줬느냐, 내가 어릴 때, 부모님이, 주위 사람들이 나한테 세뇌주고, 학습해 준 거예요. 계속 하라! 하라! 학습하는 겁니다. 우리 집안에서는 그걸 용납하지 않아. 우리 집안에 살 것 같으면 너는 계속 그렇게 해야 해. 그럴 때, 이걸 ‘옳다! 진리다!’ 진리는 뭘 준다? 당근을 줘요. 진리가 아닌 것은 맴매해요. 채찍. 채찍과 당근으로 모든 인간들은 어릴 때부터 양육과 훈육을 받게 되어 있고 학습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크면 친구와 교사를 통해서. 더 크면 목사님을 통해서 학습 받게 되어 있어요.

그것이 나의 주체의 삼겹살 껍질을 형성합니다. 층층이 껍질을 형성하는 것을 푸코는 고고학이라고 해요. 고고학의 특징은 껍질 벗기는 작업이에요. 제일 위에 있는 최초의 3기, 그 밑에 시대, 그 밑에 시대, 계속 나오는 거예요. 고고학이. 같은 시대 층에 있는 유물은 다른 시대 유물과 비교해서, 이 시점에 나왔으니까 중생대 3기 이렇게 계산하는 거예요. 논리적으로. 인간도 똑같아요. 내가 난데없이 아픔을 겪을 때는, 그 아픔을 겪을만한 이유가, 나는 잊어버렸는데, 일곱 살 때 어떤 사건을 경험한 것이, 그동안 지층 밑에 있었는데, 어떤 친구가 무심코 단어 하나 내뱉었는데, 그게 되게 아픔으로 다가온다 말이죠.

우리 누나 같은 경우는 어릴 때 잡채 먹고 체한 적이 있어요. 그도 지금 67살인데, 아직까지 잡채를 못 먹습니다. 트라우마에요. 트라우마 라고 하는 것은 잠시 과거의 상처가 기억나는 것이 트라우마가 아니고 과거의 상처가 내 몸의 증상으로 나타날 때 그걸 트라우마 라고 해요. 몸의 증상으로 나타날 때. 몸의 증상이 없으면 트라우마가 아니에요. 노이로제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아픈 기억들이 몸의 증상으로 나올 때, 신경질환으로 나옵니다. 신경질환은 치료가 가능하지만 정신질환은 치료가 가능하지 않아요. 가능하지 않으니까, 그때그때 약물로 덮는 수밖에 없어요. 치매 같은 경우는 두 종류가 있는데, 정신적인 치매 같은 경우는 어떻게 손 댈 수가 없어요. 치매엔 약도 없고.

층층이 누적이 되어 있죠. 기억의 층. 이걸 파헤치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고고학이라고 했죠. 고고학인데, 어릴 때부터 층층이 있던 이 주체가 크면서 한 꺼풀 두 꺼풀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아는 것이 자꾸 새로운 양상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아까 플라톤이 이야기했던 가면입니다. 가면 뒤에 본 얼굴 있다? 인간은 영원히 본인 얼굴을 본인이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본인이 몰라요. 그때그때 변장할 뿐인데, 이 변장하는 것을 연극단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연출입니다. 연출의 귀재. 연출의 귀신. 모든 인간은 연출에 어설프면 출세를 못해요. 아부를 하던 뭘 하든 간에.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자기 연출이에요.

이 모든 원인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첫째 시간에 제일 먼저 한 게, 내가 여기 있다 에서 나온 거예요. 이유도 모르는 채 무조건 있고,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있고. 있으니까, 왜 태어났는지 그거 잘라버리고, 죽어서 어디 가는지 그거 잘라버리고. 김밥이나 토스트에서 끝을 자르잖아요. 맛있기는 그게 맛있는데, 상품가치가 없으니까, 여기 잘라버리고, 저기 잘라버리고 몸통만 있잖아요. 고등어 머리, 꼬리 잘라버리고 몸통만 먹잖아요. 인간의 몸통을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내가 존재하매 나는 내 종교의 신자고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비-존재. 존재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 존재의 세계에, 있음의 세계에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 목수의 아들이다! 자, 목수의 아들이라는 뜻을 풀이하겠어요. 목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으로 이미 뭐가 존재한다? 목수 아버지 요셉이 존재한다. 너는 존재하는 것에서 나온 그 존재의 자식이야. 너는 대단치 않아. 너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니가 있음에 있다는 말은 너 먼저 이전에 있음이 있을 건데, 그게 요셉이라는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고, 니 엄마 이름은 마리아가 있다는 말이죠.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왔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내 아버지는 여기에 없다. 내 아버지는 여기에 없다는 거예요. 존재가 없으니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비-존재에요. 제가 철학적인 용어를 쓰는 것 같지만 성경적이에요. 이 세상에는 내 아버지가 없다 이 말이죠. 더 나아가서 없으면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무지가 나옵니다. 너희들은 내 아버지를 모른다 하는 거예요. 그 모름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나는 존재한다는 그것이, 니 생각이 맞다고 생각해? 라는 뜻이에요. 나는 여기 있다. 컵이 있다. 컵이 있네. 니가 컵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 이 말입니다.

갑자기 어려운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해봅시다.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곤충의 구조는 3개로 되어 있다. 머리와 가슴과 배로 되어 있다. 꽃은 4개로 되어 있어요. 암술과 수술, 그 다음에 꽃받침, 그 다음에 꽃잎. 여러분 이거 초등학교에 자연시간에 배웠죠? 이거 옳습니까? 그럼 말을 바꿔서 이게 우리한테 유용합니까? 유용하죠. 과학은 뭐다? 유용성이에요. 과학은 유용성이죠. 천문학자들이 이 세상의 별을 다 압니까? 모릅니까? 다 모르죠. 왜? 새로운 별이 나타나니까.

그러면 현대 천문학자들이 다 모르는데 왜 연구해요? 그 별 가운데서, 지구나 환경이 안 좋았을 때, 피신할 수 있는, 피난처 되는, 가장 지구를 닮은 그런 별을 찾는 이유가 뭐냐, 뭣 때문에? 유용성 때문에. 마션. 화성탐사 영화가 마션이에요. 인터스텔라도 있죠. 모든 과학은 유용성이에요. 무엇에 유용합니까? 죽는데 유용한 것이 아니고, 반대로 살아있는 것을 기어이 질질 끄는데 유용하잖아요. 있음을 계속 있게 하는.

그런데 있음을 왜 포기 못하죠? 이유를 몰라요. 분명히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왜 포기를 못하죠? 이유를 아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과학, 철학자들은 몰라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본능이 그렇다는 거예요. 그걸 본능이라고 하는 것은 답변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왜 그런 본능을 가졌죠? 질문이 또 나오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죠? 잘못하면 얻어맞습니다. 그거. 여자를 왜 좋아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몰라서 묻나? 이런 소리 하면서 그냥 넘어가요.

아르케arche, 근원이라는 뜻이에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계속 잘라내고 시작한 거예요. 우리는 나한테 유용하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다 잘라냈어요. 근데 유용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 진리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내가 꼴 보기 싫다고 내쫓은 그 자식이, 진짠 자식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 땅에 와서 쫓겨난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입니다. 근데 그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게 요한일서가 아니라 요한복음은 그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비-존재로 시작하는 거예요.

너희들만 있는 있음이 있는 세계에서, 그거는 있음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있음의 용어를 바꾸라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있음의 용어가 바뀌어 집니다. 어떻게 바뀌어 지는가, 세 글자로 바뀌게 됩니다. 어두움으로 바뀌어져요. 어두움으로 바뀌어 지는 이유가 있음에 대해서 여기 점선으로 표시하겠습니다. 빛이 올 경우에만 있음이 어두움이 되지, 빛이 오지 않는다면 있음은 절대로 어둡지 않다. 자체발광이라는 말이 있죠? 자체발광. 잘생긴 남자가 지나가면 뭐라고 합니까? 자체발광 이라고 하죠. 미인 지나가도 자체발광이고.

인간은 스스로 자기가 신이고 자기가 태양이기 때문에 자체발광 하는, 자체적인 태양열발전소가 있어서 그 에너지 가지고 평생을 먹고 사는데, 그것도 60지나면 보톡스 맞고 수리하고 바빠요. 잡아 땡기고, 올리고 뭐. 위아래 해가지고. 또 그런 노래가 있어요. 근데 갑자기 있음 자체가 어두움이라는 것은, 다른 빛이 오는데, 아까 점선으로 했죠. 여기 있음에 해당이 안 되니까, 이게 뭐냐 하면 비-존재가 되는 거예요. 존재 아님이 되는 거예요. 존재 아님. 있음 아님이 되는 거예요.

있음 아님이 되니까, 여기서 어려운 게, 있음 아님이 되면 이쪽 동네에 오지 말고 그냥 살지, 왜 끼어드느냐 말이죠. 왜? 여기에 대한 답이 뭐냐 하면, 접수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조직폭력배용어인데, 이 바닥에 오지 마라. 여긴 우리가 접수한다고 하잖아요. 접수한다는 것은 무장해제 시키고 접수하는 것. 그래서 천국은 침노하는 것이에요. 접수하는 거예요. 어느 세계를? 비-존재가 있음의 세계를. 그러면 비-존재가 예수님뿐입니까? 놀랍게도 예수님과 비-존재로 또 등장하는 것은 누구냐 하면 진짜 숨겨진 존재, 우리로 하여금 존재로부터 시작하게 하는 그 존재는 바로 피조물인 악마, 타락한 천사가 예수님이 나타날 경우에만 같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평소에는 악마가 있다? 없다? 없다. 평소에 귀신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있음의 세계에서는 없어요. 근데, 나의 있음의 세계가 흔들릴 때, 그때는 아이고, 이거 귀신 아닌가? 갑자기 자기 존재에서 믿을만하지 못할 때, 예상치도 않았는데 벼락치고 갑자기 잠자고 있는데 뭔가 꽝하고 문지방이 흔들릴 때, 아이고, 이거 귀신 왔다. 이러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내 존재가 내 존재를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입장이니까, 이거는 반드시 외부세력을 해서, 외부 변수 하나를 설정해야 합계가 맞는 이야기가 돼요. 원인, 결과가 이게 논리가 되려면, 나로서는 해결이 안 되니까, 여기에 귀신 존재 하나 불렀잖아요. 그렇지만 자기 존재는 포기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흔히 교회 가는 신자들은, 신자 개념이 중요해요. 제가 말하는 신자는 무엇과 반대되느냐 하면 성도의 반대말을 신자라고해요. 모든 인간은 신자이기 때문에. 갑자기 개념 자체가 혼선되기 시작하는데.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성도는 거룩한 존재가 아니고 이미 거룩 된 존재, 이미 끝났어요. 이미 작업이 만료된 그 자가 성도에요. 성도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성도 아니고, 애썼다는 것은 존재의 미흡함에 불과해요. 존재의 미흡함은 그냥 계속 뭔가 믿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은 진짜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니고, 그냥 트라이Try하는, 시도해보는 거예요. 이덕화가 메리야스 선전하는 것 있어요. 벽 치면서. 트라이. 단어 몇 개 알지도 않는데, 벌써 다 나왔어요.

신자의 반대말은 성도입니다. 신자는 노력하는 반면에 성도는 노력 끝. 이제는 베케이션vacation, 방학이에요. 결국은 노는 일만 남아 있습니다.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남이 해줬기 때문에, 유유자적 누리는 것만, 참 배짱이 대단하죠. 근데 이러한 모든 순서가 예수님하고 제자들하고 하나의 배우들이 등장해요. 연극무대에, 연출무대에,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고 여기에 열두제자가 악역, 허장강 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나쁜 일만 골라 했거든요.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을 삑(☓), 니는 사람도 아니야. 너를 저주해! 라고 한다면 그 뒤에 줄줄이 걸쳐있는 모든 인간은 당연하게,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거예요.

그래서 이걸 이렇게 그림 그립니다. 인간은 이미 존재기 때문에, 여러 번 나오는데, 존재는 의미, 의미는 유용성, 유용성은 믿음을 만들고, 믿음은 진리죠. 현실은 진리입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예요. 그 세계에 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죽고 난 뒤에는 너희끼리 존재하든 그런 거 아무 관계없어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우리 집이 중요해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교회 목사들 지가 당회장으로 있는 한 용서하지 않잖아요. 끝나고 난 뒤에는 망해버려야 돼요. 자기가 있는 한, 이거는 나의 세계에요. 나의 세계. 내가 갑이 되는 세계에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제가 이런 이야기했죠. 인간들의 현실은 뭐로 구성된다고 했습니까? 가정이 있고 애를 하나 낳으면 애를 하나 재료로 삼아서 짜깁기 한다고 했죠. 그래서 나의 영원한 보자기라고 했죠. 근데 나중에 세월 지나면 그 보자기가 뭐로 변한다? 빵꾸가 나요. 구멍이 나요. 애들이 전부 다 백조가 되어서 날아가요. 이거는 내 가정, 내 울타리라고 했는데, 그 세계가 전부 다 헛수고에요. 그동안 뭐하고 살았는지. 자기는 자식을 위해서 다 했는데, 자식은 다 도망가 버렸어요. 그럼 나를 보호하는 보자기 아직도 있어요? 없어요. 그러면서도, 뻔히 알면서도 그 외에는 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뭐냐 하면 실선의 세계로 되어 있는 진리, 다른 말로 하면 현실입니다. 현실인데, 뭘 추방하느냐, 점선의 세계, 환상의 세계, 비-존재의 세계를 꺼지라고 하죠. 예수님도 꺼져가 되고, 또 뭐가 꺼져가 되죠? 아까 했잖아요? 비-존재에서? 악마죠. 악마도 꺼져가 되죠. 귀신도 안 믿어요. 과학시대에서는. 하여튼 종교적인 용어나 영적세계는 다 꺼져! 라는 거예요.

주께서는 이럴 줄 아시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기에 맞서서, 이걸 잘 그려야 해요. 실선에서 뭐로 나온다. 점선으로 나오죠. 주께서는 점선으로 해서 뭐로 나오느냐, 꺼져가 아니라 침투. 어디로 오느냐, 현실세계에 침투했습니다. 나가실 때는 뭐로 나간다? 점선으로 나가버려요. 그 이야기가 바로 요한일서 1장의 이야기입니다. 이거 이야기하는데 한 시간 반이 됐어요.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절,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이제 1장 1절에서 2절의 말씀이 이해되시겠습니까? 딱 보는 순간, 제가 이해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잖아요? 답변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제가 상황 극을 벌이면서 답변하도록 할 테니까. 지금 누구한테 질문할지, 이제는 지목해서 질문할 거예요. 자, 이제 상황 극을 제가 실제로 합니다.

내가 어떤 존재냐 하면 기독교집안도 아니고 불교집안도 아니고 종교라는 것은 관심이 없다. 아무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다는 것은 나한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의미가 없다는 것은 나 자체로서 의미가 충족되니까. 내가 있음으로 해서. 나는 나만 사랑하니까. 나는 내가 즐기는 재미로 사니까.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런데 길에 가는데, 바람이 불어서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2절이 보도블럭에 떨어져 있어요. 무슨 종이인지 주워보니까 글자가 쓰여 있어요. 요한일서 1장 1-2절이 쓰여 있습니다. 근데 나는 뭐냐 하면 관심 없어요.

자, 질문 들어갑니다. 그 쪽지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자, 1번. 그냥 지나간다. 2번. 관심 둔다. 몇 번 이겠어요? 1번이죠. 왜냐하면, 이미 관심 둔 것이 있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는 거예요. 답변을 내가 해버렸는데. 이게 뭐냐 하면, 실선에서 뭐가 나온다?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점선으로, 환상의 세계로 왔잖아요. 이게 계속해서 이 방법을,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예수님께서 계속 실시한다 이 말이에요. 계속 실시하는 거예요. 교회 장로가 되었다. 근데 요한일서가 날아왔다. 의미 있다? 의미 없다? 의미 없는 거예요. 장로 된 내가 날 믿는다. 장로 된 나를 믿어요. 이 말이 중요하지 않아요.

만약에 이것을 믿게 되면, 나라는 장로 된 실선이, 사실 실선이 아니고 완전히 파괴되어서 점선에 포함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거는 내 힘으로써는, 내 능력으로써는, 그러한 권한이, 이거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있을 수 없습니다. 장로 된 지 몇 시간 되었다고, 이 의미 있는 장로직을 치워버려요? 점선이, 이 환상의 세계가 비-존재가 의미 있다고 하려면 장로가 됐든, 신학박사가 됐든, 목사가 됐든, 이거 의미 없습니다가 이거는 상쇄가 늘 풍성히 돼야 돼요. 지금 회사에 취직이 되어 있잖아요? 근데, 요한일서 1장 1-2절이 날아왔다. 그러면 이게 뭐냐, 취업되고 안 되고 무슨 상관이 있어?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시죠?

애가 공부를 잘한다. 근데 요한일서 1장 1-2절이 나한테 날아왔다. 나한테 받아들여졌다. 그러면 애가 공부 잘하는 것이 의미 있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이거는 존재가 노력한 것이 아니고, 컨택,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내가 본다는 것의 의도를 바꿔서 이제는 내가 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너를 주시한다는 거예요. 그게 이번 수련회 교재에 나왔던 단어, “응시”입니다. 바라봄. seeing. 누군가 부담되게 나를 쳐다보는 거예요. 부담되게. 시선은 상대방에게 시비를 유발합니다. 만약에 쳐다보면, “뭐야? 그냥 가던 길로 가시죠.” 시비 거는 조로 쳐다보면, “뭐? 불만 있어?” 이래 되는 거죠. 커피숍에 앉아서 아메리카노 한잔 시켜놓고 있는데, 저쪽 테이블에 앉은 아가씨가 자꾸 본다 이 말이죠. ‘누구지? 이 상황, 이 시추에이션은 뭐지? 커피 값 떨어졌단 말인가? 관심 있나?’ 그래서 다가가서 “아가씨! 관심 있습니까? 왜 쳐다보십니까?” “그게 아니고...지퍼가 열려가지고...내가 도와 줄 수도 없고 해서..”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나는 모르는데, 나는 의미를 모르는데, 저쪽은 이미 의미를 알고 있어요. 왜 쳐다보는지. 쳐다보는 것 자체가 컨택이에요. 쳐다보는 것만 해도 만남이에요. 다른 모임 같으면 다 같이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자제를 해야 돼요. 이게 우리가 만난 것이 아니고 주께서는 응시하고 있음이, 점점 더 가까이 클로즈업 되면서 나한테 실험하면서 통일된 현실관에 군데군데 빵꾸가 터지기 시작 하는 겁니다. 뭐 보일러가 샌다든지, 좋은일 하나 생각하면 나쁜 일 둘이 생길까봐 미리 겁먹는다든지. 애가 성적이 올랐는데, 헌금을 만원 더 할까?  말까? 걱정이 생긴다든지. 자꾸 뭔가 좋은 일 생겨도 불안하고, 나쁜 일 생겨도 이 끝은 어딜까? 걱정이 되고. 알 수 없는 불안.

이게 존재가 미처 모르는 비-존재에 둘러싸인, 포위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의 이야기입니다. 그걸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제가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성령이 나오죠. 이 성령은 어떻다? 인간의 현재 과학책에 있어요? 없어요? 비-존재적이죠. 비-존재하니까, 이 세상에 귀신이 있어요? 없어요? 귀신 없어요. 과학이나 미신적인 요소가 다 배제되는 거예요.

근데 주님께서 계속 비-존재적인 것을 문장에다 그 단어를 집어넣어요. 하나님 나라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인간의 상상에서 나온 겁니다. 그것은 실선에서 실선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거는 하늘나라 아닌 겁니다. 항상 하늘나라는 이 실선의 세계에서는 상상의 세계에요. 그 다음에, 29절,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이 경우에서 집주인 셉니까? 도둑이셉니까? 도둑이 세죠.

그럼 집주인은 사실은 도둑의 응시에 포위되었다 하는 말이 맞아요. 그래서 제가 이 시간에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 포위되어 사세요. 누구의 응시한테? 주님의 관찰 속에 속하세요. 그게 사도바울은 예수 안이라고 표현 한 겁니다. 예수 안. 성령 안. 그냥 가던 대로 사세요. 뭘 느껴야 된다? 그냥 사시는 대로 사세요. 우리 인간은 절대로 못 고칩니다. 내 중심 절대로 못 고칩니다. “나를 닮아라.” 도대체 나를 닮으라는 것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요. 내가 왜 미쳤다고 양보를 해요? 내가 제일 중요한데. 죽더라도 내가 나를 배려하고 내가 나를 관여하고 내가 제일 중요한데. 양보 못 할 것 같으면 양보하지 말고 그냥 사세요.

그래서 제 설교가 막 살라는 것이잖아요. 그냥 막 사시라고요. 하지만 무엇은 받아들여라? 무대에 비치는 스포트라이트, 방금 동남아에서 순회공연하고 온 가수가 무대에 서면 여기에 단독으로 뭐가 비칩니까? 스포트라이트 비치죠. 이 비치는 응시를 의식하시면 됩니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중요해요. 니 또 잘못했구나? 매 맞아야 돼!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응시하는 거예요. 니 참 고집부리고 가는구나. 그냥 지켜보는 거예요.

베드로가 저주할 때, 주께서 입 막지 않았습니다. 워워~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그냥 짓고, 닭은 닭대로 울고. 베드로는 짓고, 닭은 울고. 니 곁에 닭 울음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니 곁에 말씀성취 있다. 이 말입니다. 니가 먹고 마시는 것, 이미 말씀 안에, 이미 프로그램에, 시나리오에 다 짜여져 있다. 각본대로 가게 되어 있죠. 너의 실선의 세계에서는 내 할 일 할 뿐이에요.

아까 주체는 어떻게 생긴다고 했습니까? 내가 선택함으로 주체는 다시 확인이 돼요. 이건 내가 선택했어. 프로스트의 시에 보면 내 숲속의 길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가던 길이 있고 안 가던 길이 있다. 나는 안 가던 길로 간다. 청소년들이 의미도 모르면서 액자에 걸어놓은 시가 있어요. 사람은 가던 길 가면 안 되고, 안 가던 길로 가야 비전이 보이고 용기 있는 인간이라는 거예요. 청소년들을 격려하면서 그런 시를 말하거든요. 선택하는 길이든, 선택하지 않는 길이든, 좁은 길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한 길 밖에 없어요. 내가 선택한 길과 남이 선택해 준 길. 두 가지 밖에 없어요.

그러나 인간은 남이라고 할 때, 그게 남이 누군지를  몰라요. 왜? 실선이기 때문에. 어쨌든 통일된 현실관을 인간은 못 벗어납니다. 못 벗어나도 괜찮아요. 스포트라이트 있으면 되잖아요. 따로 놀면 되잖아요. 따로. 이게 복음이에요. 따로 놀면 돼요. 따로. 어떤 사람이, “주님이여! 포도를 먹을까요? 복숭아를 먹을까요? 자두를 먹을까요?” 언제 주님께서 그런 것 기도하라고 했어요? 그냥 니가 땡기는 대로 먹어. 땡기는 대로. 먹었을 때, 포도를 먹고 난 뒤에 주께서 포도를 먹게끔 너를 사용한 거예요. 그게 응시입니다.

실상은 내가 선택했다는 것이 실상이고, 결과는 뭐냐, 보이지 않는 환상 속에 계신 분이 실상을 이용한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 거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관계 또는 관계성입니다. 이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의, 또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바로 거룩이에요. 내가 거룩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거룩한 거고. 더 중요한 것은 그 거룩하지 않은 나를 거룩케 하시는, 주님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 낚시 줄 잘 안 보이죠? 그것을 인정할 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이 관계를 보기 때문에 뭘 치워야 돼요?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그것도 결과적으로.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관계를 쳐다보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나를 쳐다볼 의미도 없고, 의미 없으면 유용성도 필요 없고, 유용성이 없으면 나한테 존재가 아닌 거예요. 나는 나의 존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인생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응시에 의해서, 내가 잘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그 이상으로 끌고 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응시가 되는 겁니다.

전혀 어렵지 않아요. 이게 어렵고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요. 하여튼 국만 시키지 말고 밥 하나 더 시켜가지고 국밥 말아서 잡수라는 이런 말입니다. 우리는 국이 전부에요. 그런데 주께서는 밥을 준비해가지고 말아먹으라는 거예요. 말아먹을 때, 국이 맛있다 하지 말고 밥이 맛있다 그래야 되죠. 주님의 거룩이 내 거룩보다 더 세고, 주님의 의가 나의 의를 깔고 뭉개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결과가 될 때에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전에는 존재만 알았던 인생관이 이제는 뭐까지 아우른다? 주님의 세계까지 아울러서, 세상 보는 눈이 이거는 무한대까지 열려지는 거예요. 

이제 죽고 난 뒤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에, 태초부터 알게 된 거예요. 태초부터 있던 것부터 알게 되는 거예요. 내가 없던 시절, 만들기 이전부터 세계를 이미 다 같이 그걸 함께 알게 된 겁니다. 뭐, 알게 되면 행동이 바뀌어야 됩니까? 행동이 안 바뀌어요. 안다고 해서 행동이 바뀌어 지는 것이 아니고,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누적된 고고학층이 한 꺼풀 벗겨지는 겁니다. 노출되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점잖은 척 하죠. 나이 칠십 넘으면 지퍼도 안 올리고, 발 냄새나도 누구 배려하지도 않고, 술 먹고 길에서 고함지르다가, 여기 도착하자마자 우람한 시카고 경찰 다섯 명한테 체포돼가지고. 내 옆에 있던 한국 사람인데, 나이 한 75쯤 되었나, 술 먹으면 곱게 먹지, 옆에 외국인 여자를 추행을 해가지고. 자기는 그냥 희롱만 했다고 하는데, 외국인 여자는 추행했다고 해서, 비행기 내에 있는 승무원한테 조서 받고 내려서 경찰한테 인계되고. 무슨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내가 거룩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내가. 우리에게 나오는 것은, 이게 고고학적으로 옛날 어릴 때의 버릇들이 나이 들면 이게 사라지지 않아요. 그대로 또 나옵니다. 계속 또 나와요. 그렇게 할 때, 내가 했다고 하지 말고, 주께서 하게 하셨구나. 뭐 좋아라고? 비-존재가 존재보다 우위에 있고, 선점하고, 먼저 존재했다는, 비-존재가 존재보다 먼저 있었다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목적을 두고,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 이거 두 시간 동안 강의를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2절까지 밖에 못했어요. 3절, 4절은 무작정 기다려야 하고, 하고 안 하고는 주의 선택이 어떻게 되는지. 하지만 우리는 우리 갈 길을 쭉 가시면 발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자, 3절 봅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그래 이 말은 뭐냐, 이 보고 들은 바라는 것은 우리의 역사 속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과거고. 과거는 이미 지나간 거고. 지나간 것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맞죠? 과거가 존재합니까? 현재만 존재하지, 과거가 존재하느냐, 보이지 않는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요한일서가 하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너희들 동네는 존재하지 않지만 너희들 동네를 포위하고 있는 세계에서는 지금 주님이 활발하게 살아서 일하고 있다. 이것을 우리에게 증거 하려 하노라.” 그 이야기입니다.

이제 조금 이해되십니까? 존재, 비-존재하니까 확 이해가 되죠. “영원한 생명”(2절), 아, 이 땅에 없는 거구나. 쉽잖아요. 그 다음에 “너희에게”(2절), 주님은 우리의 현실 세계를, 여기를 주시하고 있고 관리하고 있구나. “생명의 말씀”(2절), 아, 이 땅에는 생명의 말씀이 없구나.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한테 믿음이 없구나. 믿음 없는 채로 그냥 가시기 바랍니다.

뭐가 믿음이냐 하면 나한테 없는데, 주님과 나 사이에 연결된 곳에는 나한테 없는 것이 다 들어 있고. 주께서 원하는 거룩도 있고, 믿음도 있고, 완전한 율법지킴도 있고, 천국도, 영생도..이걸 관계라고 하는데, 이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말씀. 이걸 그냥 말씀이 아니고 살아있는 말씀. 살아있는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그 중보자적 기능을 알려주는 겁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9-11 20:07 
20160907 요한1서 시카고강의3-이 근호 목사

 

세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그걸 증거를 하는데, 여기에 눈이 나오고, 그다음에 손이 나오고, 들었다고 했으니까 귀가 나오고. 귀와 눈과 손은 어디를 말하고 있습니까? 어디서 나온 가지들입니까? 몸이죠. 몸. 요한일서 1장 1절 말씀, 생명의 말씀하고 뭐와 동일 하느냐 하면 몸이, 어떤 특수한 몸이 동일하다는 겁니다. 몸이.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은 몸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 2절에,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어떤 사람을 소개할 때, “나는 그 사람을 눈으로 봤고, 귀로 들었고, 손으로 만졌다.” 라는 이야기를 어떤 경우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까? 그 사람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으면, 나는 그 사람을 눈으로 봤다고 이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입장이 못 된다 할 경우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가 실제로 눈으로 봤거든, 우리가 실제로 만졌거든, 우리가 실제로 들었거든 이라는 말은, “지금 그 분이 어디에 있는데?” 라고 이야기하면, “그 분은 현재 우리가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입장이 안 돼.” 라는 말을 하고 싶을 때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사도요한이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평소에 눈으로 봤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었을 때에, 본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나는 우리 선생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 라는 소리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죠. 같이 있을 때에는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봤다는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지금 그 분이 어떤 경우냐 하면,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에 예수님을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봤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나!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봤는데, 우리는 그 분이 누군지 몰랐어.” 라는 그걸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같이 있으면서 손 만지고, 악수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을 때에, 우리는 그 분이 메시아인줄 알았다? 몰랐다? 몰랐다는 거예요. 몸이 보고 있기에 몰랐고, 듣고 있기에 몰랐고, 손으로 만졌기에 그 분이 누구인줄 몰랐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분이 나중에 요한복은 20장에서 이런 말씀하거든요. 요한복음을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가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사이에서 요한일서가 있으니까, 요한복음의 사상이 끼어들거든요.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보게 되면, 2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너희들이 본 고로 믿느냐 하는 말은 너희들이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믿지 않고 있다는 이 말이거든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지금 진짜 수준을 이야기할 때는,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입장에서 믿는 것을 인정합니까? 아니면 만질 주님도 없고, 볼 수 있는 주님도 없고, 들을 주님도 없는 상태에서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그러니까 만지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들리지도 않을 때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도, 그것이 도리어 믿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전도할 때, 결국은 전도할만한 것들은 다 치워버려야 된다는 거예요. 오늘도 과일 등장했네요. 멜론을 지금 보고 있습니다. 멜론을 지금 보고 있는데, 멜론은 녹색이고 먹음직스럽다. 이럴 때, “너 믿나?” “믿지. 같이 보고 있는데, 먹음직스럽네. 그래 나도 너처럼 믿어.” 라는 것을 주님께서 인정을 안 합니다. 주님께서 이걸 어디에 치워버립니다. 치워놓고, “여기 멜론이 있거든. 녹색이고 먹음직하지? 그렇지?” 하면, 우리 같으면 “주님, 뭐가 있어야지. 뭘 보고 지금 먹음직하다는 말입니까? 보이는 것은 식탁바닥밖에 안 보이는데요?” “그러니까 니가 믿음이 없지.” “보여주면 주의 뜻에 동의하겠습니다.” “그래 보여준다. 보여주니까 어때? 녹색이고 먹음직하지?” “예. 녹색이고 먹음직하네요.” “그러니까 니가 믿음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거예요. 교회에서 믿음이야기 할 때는, 교회가 믿을만한 것을 다 치워버려야 해요. 교회 부흥됐다, 헌금이 모인다, 교인들 모인다, 어떤 사람 병 고쳤다, 천국 봤다, 천국 가보고 왔다, 다 치워버려야 해요. 암에 걸렸는데 병 나았다, 다 치워버려야 해요. 그것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자기가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믿음이 있다고 자기가 그걸 강요한 것에 자기가 수긍한 것밖에 안 돼요.

 

“여러분 믿씁니까?” 쌍시옷이 들어가요. 그냥 “믿습니까?” 그냥 시옷인데 쌍시옷이 있잖아요. 그 쌍시옷의 최초의 유행자는 조용기 목사에요. “믿씁니까? 배나 받아라! 은혜 받은 것을 믿씁니까?” 그렇게 하잖아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 다음 말이 생각이 안 나서 그래요. 그 다음 말이 생각이 안 나서 텀을 두기 위해서 “믿씁니까? 할렐루야!” 하는 거예요. 특이한 음정을 하는 것은, 그 특이성을 마치 내가 믿음이 있다는 증거로 확보하려는 교인들의 심리를 이용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믿는 것이 믿음이지. 어떤 기적도, 어떤 간증도 다 치워버려야 해요. 그러면 왜, 믿을만한 요소를 왜 집어넣느냐, 왜 집어넣어서는 안 되느냐, 믿을만한 요소를 집어넣은 믿음은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 자신의 몸에 문제 있다는 것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항상 믿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는 이 자체가 엄청난 이게 문제가 있다는 그것을 모르고, “주님이여, 내게 믿을만한 요소를 주시면 내가 딱딱 아멘하면서 믿겠습니다.” 그렇게 마음 준비를 가지는 이 자체가, 이게 불신앙덩어리라는 것을 본인이 감히 짐작조차를 못하면서도 믿는다고.

 

비행기 조종사, 파일럿pilot이 음주운전을 해서, 유럽에 그런 비행사들이 있답니다. 음주운전해서 비행기를 탔다. 그 사실을 승객 몇몇이 알았다. 그 비행기 타겠어요? 안 타겠어요? 안 타죠. 그럼 그게 믿음입니까? 확률이에요? 확률입니다. 사고 날 확률이 어느 것이 많은지를. 그게 바로 19세기 초반에 나온 수학의 통계학, 통계학적인 수학입니다. 그 통계학이 있을 때, 아인슈타인의 양자역학이 확률로 되어 있어요. 확률. 모든 현대의 물리학은 확률입니다. 진짜 요새는 법원의 판사도 확률을 이야기해요. 판결을 내릴 때, 확률로 합니다. 벌금은 얼마 하느냐 하는 것도, 저 사람이 죄질 재범이 있느냐에 따라, 확률을 계산해서 많을 경우에 벌금을 많이 매기는 거예요.

 

옛날 조선시대 때 허준이나 초창기의 한국의 의약사들은, 촌에 있는데도 아주 실력이.. “잡솨봐~ 나아~ 한 첩 지어봐~” 요새 의사들은 절대로 그런 소리 안 하죠. 확률이 70퍼센트입니다. 하도 의료사고 재판이 많아서. 왜 70퍼센트지? 백퍼센트 안 해줘요. 이렇게 빠질 구멍은 만들어놓고 이제 이야기하는 거예요. 60퍼센트인데 하시렵니까? 이번 수술 30퍼센트인데 그래도 하시려면 하고 말라면 말고 본인이 알아서 서명하세요. 현대의 진리는 확률입니다. 확률의 퍼센티지가 50퍼센트 넘으면 가능하다는 이론입니다. 그걸 개연성이라고 해요. 개연성. 모호함이 적어질 때.

 

예수님께서 믿는 믿음은 그러한 확률이 많은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확률이 제로였는데 생긴 믿음을 선물로 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택배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냥 주시는 거예요. 왜? 워낙 믿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보고 듣고 만져서 믿으려고 하는, 이 천국 가지 못하는 믿음 외에는 다른 믿음이 없어요. 그리고 그 믿음을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이 아니고 확률이죠. 평소의 경험에 의해서 투자 되겠다 하면 하나의 자기의 신념이 있고 하잖아요.

 

그러나 그런 모호성은 천국에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있던 그 믿음만 인정해요. 다른 믿음들은 전부 다 가짜고, 가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물로 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하고 아버지하고 있었던 그 믿음이 사실은 누구의 믿음이냐 하면 예수님 본인의 믿음이에요. 본인의 믿음인데,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제공해주는 거예요. 똑같이 복사해가지고 그대로 우리에게 제공하게 되면 우리의 믿음은 하자가 있어요? 없어요? 전혀 하자가, 잘못이 없는 거예요. 왜? 백퍼센트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백퍼센트 주님이 인정해준 그 믿음이 선물로 그냥 포장채로 날아왔기 때문에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누구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선물의 내용으로 왔기 때문에, 우리의 결정적인 순간, 성도는 다른 사람과 달리 하다하다 안 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에이씨,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래 되죠. 찬송가에도 나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그런 찬송을 해서 주의 뜻대로 행하시라고 할 때, 그 행함을 위하여 나의 행함은 뭐로 되느냐, 나의 행함은 죄인인 것을 전제로 깔고 주의 행함을 받아들여야 해요.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강의의 결론은 뭐냐 하면, 나는 뭘 해도 불신앙적인,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곧 행함을, 나의 죄악 된 행함을 단행할 뿐이다. 이게 결론입니다. 그럼 우리가 선물로 받은 믿음은 뭡니까?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던 믿음. 그걸 오늘 본문 3절에서는 뭐냐하면 ,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예수님이 아버지와 사귀었던 그 사귐을, 예수님의 독자적인 사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어디까지 확장시키느냐 하면, 이제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것이 나에게 그대로 왔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생산함으로,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그 믿음으로, 그 사귐이 반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최초의 이런 발언을 하신 분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의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이런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이런 놀라운 고백을 누가 한다? 선물을 받은 성도들도 그렇게 할 때,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귐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아버지의 사귐 안에 이제는 예수님의 택한 백성까지 끼어들 날이 온다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데요, 18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예수님은 우리를 뭐로 보죠? 고아로 보죠. 고아로 본다는 것은 뭔가 미흡하다. 관리하고 보호하고 책임질 사람이 있다? 없다? 고아는 그게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렇게 제자들은 결핍되어 있는 거예요. 뭐가 결핍되어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나만 있으면 결핍된 것이 없어요. 왜? 내 인생은 평소에 누가 관리하기 때문에?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나는 나한테 충족된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누구 없이는 못산다? 관리자, 보호자, 미래책임자 없이는 못산다. 이런 사람이 성도가 되고. 그런데 비어있는 자리, 빈자리에 누가 오느냐 하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는 말은, 주께서 누굴 보낸다는 거예요. 누굴 보내느냐 하면, 19절,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 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그 다음에 뭡니까? 너희가 내 안에, 너희가 예수님 안에.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 안에 아버지 있고,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다면, 우리는 결국 누구 안에 있습니까? 아버지 안에 있는 거예요. 이걸 요한일서 3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라는 말이 이 뜻이에요.

 

지금까지 하나도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어려운 것이 나오는데, 지금까지는 어려운 것이 없어요. 어려운 것이 없지만, 다시 한 번 해볼까요?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진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때는 전혀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라요. 그냥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인줄 알았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영생이라는 분인지 우리가 알지를 못했다.

 

근데 막상 예수님이 떠나고 난 뒤에는, 우리가 만지고 보고 듣고 한 그것과는 전혀 다른 예수님으로 왔다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만지고 듣고 봤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믿는 줄로 착각을 한 거예요. ‘아이구,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떠나봐야 돼요. 사랑이 떠나봐야, 사랑은 뭐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이별부터 시작해요. 좋은 소리 나오면 좀 적으세요. 가끔 나와요. 가끔. 그래서 영어로 “I miss you”라고 하잖아요.

 

내가 그리워할 때 사랑이에요. 같이 있으면 사랑인 줄 모르고 맨날 싸워요. 근데 저만치 떠나가게 되면, 그러니까 보이지 않으면, ‘이 미운사람! 이렇게 말없이 떠나다니..이 야속한 사람..’ 이렇게 혼자 질질 짜거든요. 죽은 사람은 지금 그것도 모르고 죽어있는데. 남은 사람이 괴로워요. 남은 사람이. 그렇게 죽도록 맨날 싸우더니만, 암으로 죽고 난 뒤에는 그리워서 어쩔 줄 몰라요. 조용한 거 보니까 헤어져도 그만인가본데. 그러나 검사, 판사라면 이건 또 헤어질 수는 없고.

 

결국은 어떤 사람이 함께 있다 라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알아? 자기 사랑을 자랑질 하기 위해서, 자기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타인을 그냥 인정하는 거예요. 사랑은. 니 나한테 붙어 있어. 왜? 내가 니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니가 그럴 깨달아야 해. 왜? 나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이런 쪽으로 사람을 사귀고 싶어 해요. 사귀는 것도 지 욕심 챙기기 위해서 사귀는 겁니다.

 

자, 그런데 그것이 떠나고 보니까, 우리가 만지고 듣고 보고 했던 그것이 전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말하는 것은 다 치워버리는 것, 없는 상태에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을 때에, 그 말을 달리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미리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옮겨서 바다에 빠지라고 해도 빠질 것이다.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20절,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제가 문제 낼게요. 만약에 내가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고, 산아! 지금 붕 뽑혀서 저 호숫가에 빠지라고 했는데, 과연 산이 옮겨서 호숫가에 빠지면, 그게 믿음이 좋은 거예요? 안 좋은 거예요? 질문이 어려웠나? 믿음이 좋은 겁니까? 믿음 안 좋은 겁니까? 믿음이 안 좋은 거예요. 왜냐하면 실시해보고, 아! 진짜 빠지네! 믿을만한 확률이, 믿을만한 개연성, 가능성이 있는 것을 보고 믿는 것은, 그것은 바로 대표적인 불신앙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안 보고 믿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한 번 해봐. 한 번 해봐서 진짜 되면, 안수해서 병이 나으면, 나 진짜 하나님 믿는 사람 맞다. 이렇게 뭔가 내가 기대한 것을,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일어나게 해주시면 그제야 믿겠다고 하는 말은, 이게 대표적인 불신앙이죠.

 

우리가 늘 아는 사람에게 혹시 모르지만 전도한다고 해보면,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보여주면 믿을게. 천국 보여주면 믿을게.” 이러잖아요. 그럴 때 이렇게 하세요. 보여주고 믿으면 내가 얼마나 문제성 있고 잘못되었다 하는, 그런 것까지는 안 드러나는 거예요. 안 나타나죠. 믿음이라는 것을 왜 선물로 줘야 하는 합니까? 나한테 믿음이 있으면 선물로 줄 이유가 없죠. 평소에, 나는 믿습니다. 파일럿을 믿습니다. 음주운전 한 택시는 타지 않겠습니다. 이걸 믿음이라고 하는데, 이건 믿음이 아니에요. 3×2=6 이거는 나의 오류가 드러나지 않아요.

 

이게 바로 믿음이라면 구태여 우리 주님께서 믿음이라는 것을 선물로 줄 이유가 없겠죠? 선물로 줄 이유가 없죠. 우리의 믿음은 이런 식입니다. 한 다섯 개중에서 네 개 맞으면 믿음으로 쳐주세요. 한 개 틀려도 네 개나 맞았는데, 좀 눈 찔끔 감고 좀 봐 주이소 마. 백점 만점에 팔십 점인데, 그 점수가 어디냐? 이래 나오는 거예요. 천국은 예수님이 아버지로 사귀는 믿음이기 때문에, 백점 만점에 백점이에요. 모든 율법을 일점일획이라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켜야 해요.

 

십계명 마지막 계명이 뭐냐 하면, 탐내지 마라에요.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예수님 믿으면서 한 번도 탐내지 않았습니까? 어떤 여자 분이 미장원에서 나오는데 머리 잘나온 거 보고 탐 안 나던가요? 어떤 사람이 옷을 사는데, 나한테는 안 맞는데, 저 사람은 너무 어울릴 때, 탐나죠. 어떤 사람은 다리가 길쭉한데, 짧은 자기 다리를 보면서 탐 안 났어요? 모든 인간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탐심에서 나온 겁니다. 모든 게 탐심에서.

 

그걸 아시고, 그럴 줄로 아시고, 십계명에 딱 마지막 10계명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마지막에 탐내지 마라. 지키려거든, 지킬 솜씨 있거든 한 번 지켜봐라. 이 말이죠. 이 잘난 체 하는 인간들아!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직접주신 거예요. 하나님하고 독대해서 모세한테 준 거예요. 이거는 하나님 말씀에요. 모세 말이 아니에요. 딱 10계명에 탐내지 말라고 하면서, 니가 지킬 위인이 되는지 한 번 지켜봐라. 못 지키겠나이다. 그러니까 제사법을 준 거예요. 제사법.

 

제사법은 그냥 맛있게 압력밥솥에다가 밥에다 우리 먹는 식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피를 내서 드려요. 껍데기는 치우고 안에서 피를 끄집어내요. 우리 가운데, 아까 식사할 때, 고기 먹었지, 피 먹었습니까? 저는 고기 싫고요. 이 소 잡을 때 나왔던 피 좀 한 사발 소금 간해서 좀 주세요. 지가 드라큘라도 아니고 뭐예요? 아니죠. 주께서 피를 바른다는 말은 나는 의인을 받는다는 말이 아니고, 죄인을 받되, 그냥 받지 않아요. 그 죄인을 위해서, 피를 같이 겹쳐서, 피가 죄를 사한 그 과정을 받아요.

 

죄가 있는데, 이 죄는 스스로 못 씻는데, 예수님의 피가 결합되면서 이게 용서되는 효과가 있어요. 오늘 강의의 주제는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죄를 용서하는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그게 오늘 강의 핵심이에요. 그냥 믿습니다. 하지 말고 하나하나 그 과정을 밟아나가야 해요. 우리 성도님, 저를 처음 만나서 질문했을 때, 저는 깜짝 놀랐어요. “저는 십자가가 안 믿어집니다.” 십자가가 안 믿어지는 것은, 그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발설하지 않은 것을 성도님이 와서 먼저 발설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십자가의 피가 용서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이야기인데, 지금 기분 좋은 이야기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어째서? 왜? Why? 도대체 한발자국, 한발자국 내딛는 그 과정을, 어떻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없어지게 하시는지. 그 한 단계, 한 단계를 놓치지 말고 이야기해 달라. 저는 그렇게 이해를 했어요. 이 이야기가 맞습니까? 제가 너무 과하게 나갔나요? 무대포로 안 믿겠다는 거예요. 한번 따져보자는 거예요. “예. 믿습니다.” 하는 것으로 속 시원한 것이 아니거든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 힌트는 처음부터 이미 힌트를 드렸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몸에 대해서 제자들의 몸은 믿음이 있었다? 없었다? 없었죠. 목자가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는 것을, 같이 3년 동안 부대끼면서 살아도 전혀 예수님에 대해서 몰랐고, 몰랐다는 거죠. 그 모른 이유가 자기 몸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지금 오셨어도 강의 새로 하려고 다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합니다. 이 모임이 이래서 좋아요. 요한일서 1장 3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귀었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아버지와 아들이 사귈 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버지를 믿었습니까? 아니죠. 그런데 이 땅에 있었던 제자들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내가 보고 있기에, 내가 만지고 있기에, 내가 듣고 있기에, 예수님일거라고, 거라고, 착각을 한 거예요. “~거라고”

 

그런데 예수님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고 했으니까, 이 믿음은 뭐냐 하면, 바로 1장 1절에 태초에 있는 그 믿음이죠. 태초에 있는 생명의 말씀이니까. 그렇다면 생명의 말씀은 무슨 믿음과 관련되어 있어요? 태초에 있던 믿음과 관련돼야, 이게 생명과 생명 속에 현존하고 있고 생명 속에 살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이 맞죠? 처음부터 나오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이렇게 했지만, 목자를 치니 도망쳤잖아요. 실컷 만졌는데, 실컷 봤는데, 실컷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도망을 쳐버린 거예요.

 

자, 그러면 제자들의 몸은 태초에 있는 믿음입니까? 아닙니까? 아닌 거죠. 그럼 태초의 믿음이 아니면, 순순한 믿음,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믿음이 아니라면 생명의 말씀이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죠. ‘뭐 그거 믿을만하네.’ 개연성이나 확률로 따지는 거죠. 자, 그렇다면 성경을 주신 몸이 영생을 주기 위한 이야기죠. 영생을 주려면 태초에 있던 그 믿음이 우리한테 선물로 와야 되죠. 그럼 선물로 와야 하는데, 어떻게 오느냐? 그 문제잖아요. 지금 그거부터 시작하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그거 시작하려고 하는 거예요. 택배 선물로, 성령의 선물로 오죠. 믿음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믿음은 이건 선물이라. 에베소서 2장 8절에.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그럼 선물 안에 내용을 뜯어보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사귀었던 그 관계가 그대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아버지를 볼 때, “아버지 좀 보여주세요. 아버지 좀 내가 만지도록 해주세요.” 이게 아니고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그 선물이 오기 때문에, 진짜 믿음은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그것을 다 치워버려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간증이라든지, 어떤 획기적인 것, 실적적인 것, 다 걷어치워야 합니다. 왜 걷어치워야 하느냐 하면, 그걸 보고 믿음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나서게 되면 뭐가 문제냐, 내 안에 있는 내 믿음이 영생 못 얻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자기가, 본인이 몰라요.

 

뭐, 그냥 내가 열심히! 열심히! 열심히는 절대로 영생 못 얻습니다. 열심히 믿음이 아니고 그냥 믿음이에요. 그 당시 제자들이 하도 믿음이 큰 것, 열심히 이야기하니까, 주님께서 놀리듯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더러 너 바다에 빠질래? 하고 한 번 해볼래? 이랬습니다. 세상에, 산이 들려서 바다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큰 믿음입니까? 주님께서 보기에는, 아니,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거예요. 만약에 그걸 못한다면, 그렇다면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거예요. 너희는 믿음이 없는 거야. 믿음도 없는데 왜 자꾸 말씀하십니까?

 

니가 믿음 없다는 그것이, 믿음을 줄 수 있는, 그게 바탕, 전지작업, 택지가 돼요. 원래 숲이 있는 곳은 불도저로 밀어내야 신축단지, 상가가 들어설 게 아닙니까? 전지 작업을 주께서 시작하는 거예요. 믿음 없지? 믿음 없으니까 오라는 거예요. 믿음 없으니까. 와! 내가 채워줄 테니까. 선물로 줄 테니까. 하나님의 영생 줄 테니까. 영원히 천국 줄 테니까. 믿음 없는 사람도 그냥 와!

 

그러나 어떤 인간도 믿음 없어도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자기 사이에 뭐를 두느냐 하면, 거리가 생겨버려요. 이 거리, 나와 주님 사이에 거리가 있으면 예수님은 뭐가 되느냐 하면, 대상, 또는 대상체가 돼요. 그럼 나는 대상체가 있으면 판단하는 주체가 돼요. 그 대상체를 주체와 대비해서 객체라고 합니다. 주체와 객체사이에는 뭐가 성립되는가 하면 판단이 성립됩니다. 판단이 규정되게 되면 거기서 이름을 붙여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러 가지 짐승들을 보여주죠. 그때마다 아담은 이름을 딱 던지죠. 이름을 붙입니다(창2:19).

 

그런데, 여자에게는 이름을 누가 붙입니까? 아담이 붙입니까? 하나님이 붙입니까? 그러면 아담이 여자 이름을 붙일 때(창2:23, 3:20), 아담은 여자를 자기 대상으로 봐야 돼요? 하나로 봐야 돼요? 대상이 안 됩니다. 우리는 둘인데 하나가 됐습니다. 창세기 2장의 이 이야기가 현대과학으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어요. 2=1 어떻게 둘인데 하나냐? 이 말입니다. 둘이 하나된 것이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하나인데, 양태는 둘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 설명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하나, 둘로 세지 말고, 둘이 붙어 있는 그 관계를 only, one 하나로 봐야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에 써먹을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고,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고, 근데 예수님과 아버지와 우리 사이가 또 하나고. “우리가 하나 되게 하옵소서.” 이게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에요. 교인수가 있는데, 우리는 모두 성령 안에서 하나요.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그 하나라는 것은 1+1=2와 같은 레벨의 하나가 아니고, 격상된, 위상이 높아진, 모든 차이를 다 소멸시킨, 그 궁극적인 하나를, 하나인데, 그 하나가 지상에 내려와 보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이잖아? 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나를 하나로 지칭하듯이, “예수님, 니도 똑같은 하나. 니는 하나의 대상체야.” 이래 되는 겁니다. 대상체니까 판단해보고 믿으려고 하는데,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더라. 이러니까 다 흩어지는 겁니다. 영생을 얻는 믿음이라는 것은 위상이 다른 그 하나를 우리한테 새겨 넣는, 개입시키는 집어넣는 작업입니다. 그럼 성경에 보면, 아내는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사랑하듯이 하고,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바친 것같이 아내를 사랑하라. 에베소서 5장에 나오죠. 들었어도 들은 척 안 하겠지만 성경에 그런 것이 있어요. 그 말은 절대로 아내와 남편을, 너는 하나의 대상체로, 너 하나, 나 하나, 둘로 보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나눌 수 없다고 했잖아요.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이혼이 안 된다는 이 말이 아니고, 반드시 뭘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 아무리 봐도 니는 2가 돼요. 너1 나2, 2가 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둘이 있더라도 경유하는 통로를 이렇게 예수그리스도를 만들어버리면, 그림을 그리면 나, 너가 있으면, 너1 나2, 우리는 두 명이다. 이래 하지 말고, 나를 누구한테 양보하느냐 하면, 보이지 않고 믿는 자가 주님이죠. 주님이 이 관계를 부부되게 했잖아요. 결혼하게 했잖아요. 믿씁니까? 믿씁니까? 했죠.

 

그러면 남편은 내가 알아서 결혼 안 했는데, 왜 너는1 나는2, 또는 나는1 너는2 라고 하느냐? 그러지 말고, “주님이 했습니다.” 이게 딱 와버리면 둘이 연결된 이 연결고리가 1이 되는 겁니다. 그 연결고리에 주님이 있으면 셋이 합해서 하나가 돼요. 그러면 에베소서에 아내는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는 것을 내가 지켜야 합니까? 안 지켜야 합니까? 안 지켜야 하죠. 안 지키라고 하는 것이 정답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왜 안 지켜야 하느냐 하면, 나와 아내 사이에 거리가 없어졌어요. 내가 지키려고 해버리면 이게 또 거리가 생겨버려요. ‘나는 저 사람의 아내니까 성심성의를 다해서 저 남편을 존경해야지.’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 저 잘했죠?” 이렇게 나온다고요. 자기 의가 생겨버려요. 그럼 어떻게 해요? 태초의 영생의 말씀은 누구의 소유다? 예수님의 소유죠. 예수님께 뭘 갖고 있죠? 1을 갖고 있죠. 그 1이 1답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줬다면, 이미 우리가 지극정성하나마나 관계없이,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면, 그거는 아내가 남편을 주께 사랑하듯 한 사랑이라고, 판단을 주님이 내리십니다.

 

참 주님은 고마우신 분이에요. 싸워서 멍들었고, tv는 깨져있고, 옷은 다 나와 있는데, 아이고, 이거는 니가 특별히 오늘 밤 10시 반에, 니가 특별히 남편을 사랑하는구나. 남편은 프라이팬으로 얻어맞아 멍해있는데. 남편들아 아내사랑하기를 자기 목숨을 아내에게 바쳐라 하거든요. 미쳤어요? 자기 행복과 편리를 위해서 아내를, 어디 하녀 하나 월급이나 주면서 하녀로 데려왔는데, 그 하녀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쳐요? 이럴 것 같으면 결혼 안 한다고 하죠.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하니까, 그럼 미쳤다고 결혼합니까? 이래 나와요. 버리는 재미로 결혼하는데.

 

마태복음 19장 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하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그러니까 10절에 제자들이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또 유용성이야기가 나옵니다. 결혼을 자기 자신의 유용성을 위해서 결혼했다. 그럴 때는 아내가 나에게 의미가 없죠. 유용성이야기 했죠?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정리해보면, 영생은 있어요. 그리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주께서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믿는 믿음은 자꾸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판단내리는 것이 이게 화근이 돼요. 이게 문제가 되죠. 그러면 주님께서 영생줄 때는 무엇을 터치하게 되어 있어요? 바로 우리가 뭔가 믿는다는 그것을 깨부수는 작업이 시행되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믿지 않는 자여, 제발 좀 오라! 도망가지 말고. 아이구, welcome to 그냥 오너라! 믿지 않기 때문에 오너라! 믿음 없다는 것을 니가 어떻게 알았어? 참, 니 대단한 사람이야. 오너라는 거예요. 니에게 그 필요한 믿음은 내게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인간은 자기를 판단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내 믿음은 어느 정도 확률적으로 정확성이 뛰어나다. 이걸 자부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없어요. 그것을 주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 몸에 대한 사랑으로 봅니다. 자기 몸에 대한 사랑.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라 오너라.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미워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을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백날 예수님 이해해도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놀라운 능력으로 지키려고만 했지, 주여. 그런 지킬 능력 없습니다. 하고 나자빠지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세리와 창기정도 되면, 주여. 손들고 옵니다. 이렇게 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동안 나도 얼추 잘 살아왔거든요. 이만큼 노력하고 판단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지금 이 세상 살아왔는데, 왜? 하루아침에 그 가능성과 그 재주를 스스로 포기할 수가 없죠. 포기할 마음이 들겠어요? 이만큼 했는데.

 

그래서 절대로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생각을 먹질 않습니다. 안되죠. 주께서 안 되는 것을 첫 단계로 놨습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열두제자가 있는데, 그 중에 특별히 두 사람을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한 사람은 가룟 유다고, 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둘 다 제자들입니다. 둘 다 몸을 가진 사람이에요. 둘 다 특징이 있어요. 둘 다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배신하면 지옥 갑니까? 아니죠. 그 근거는 베드로도 천국 갔습니다. 배신해도, 저주해도 천국 갑니다.

 

그러면 왜 가룟 유다는 천국 못 갑니까? 같이 배신했는데 베드로는 가고 가룟 유다는 왜 못 갔느냐, 그러니까 사람이 배신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의 기존에 가지고 있는 믿음가지고 판단해버리니까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똑같아. 똑같았으면 똑같이 같은 꼴로 마지막을 끝내버려야 하는데, 한쪽은 천국 가고, 한쪽은 지옥 갔으니까, 그럼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니가 판단하는 그 판단에 문제 있다는 겁니다. 내 판단에. 그러니까 예수님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기도해도 기도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 기도는.

 

왜? 주님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아요. 기도할 때, 사람이 예상하잖아요. 절대로 그 예상대로 따르지 않습니다. 왜? 우리의 판단이 잘못됐으니까. 그러면 가룟 유다 왜 갔느냐, 요한복음 13장 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느니라” 자, 이런 이야기하니까, 아까 강의한 것이 생각나죠? 영생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영생을 규정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실 줄 아시고 이게 슬슬 마무리 지으려고 하신다 이 말이죠. 다 우리 영생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그 다음에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끝까지 사랑하죠. 끝까지 사랑하는데, 예외가 있어요. 누구냐 하면은, 열한제자는 사랑하시고, 가룟 유다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런 게 어려워요. 열한제자를 사랑하시고 가룟 유다를 미워한 것이 아니고, 열한제자는 사랑하고 가룟 유다한테는 마귀가 들어가도록 허락하신 거예요. 왜? 마귀가 없으면 주의 일이 안되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가 없으면 주의 일이 안돼요. 베드로는 왜 천국 갔는가, 마귀와 접촉이 안돼서 그래요. 마귀로부터 온전하게 장악하도록 허락지 않았어요. 왜?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마귀와 접속된 인간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배신이고, 배신보다 더 노골적인 마귀적인 모습이에요. 세상은 그동안 마귀가 지배해도, 사람들이 마귀가 지배하는 줄을 몰랐던 이유를 바로 가룟 유다가 다 보여줍니다. 이거에요. 반성하는 존재=가룟유다=마귀의 생각, 마귀의 사상을 뒤집어 쓴 사람. 반성하는 존재. 양심이 스스로 반성해서 반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자기에게 벌을 내리고, 자살이라는, 내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내가 양심의 회개하는 것과 이꼴(=)이 될 수 있는, 같은 양으로써 회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그나마도 내 양심이 해소될 수 있는 그 정도로, 나는 이렇게 심각하게 주님 앞에 한 행동에 대해서 후회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후회하고 거기에 대한 징벌을 누가 채택한다? 본인이 채택해서 얼추 이 정도 맞추면 내 양심은 여전히 착한 양심으로 유지되겠지, 라는 이것이 무엇과 관련되었느냐 하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그 사탄의 생각이 그대로 표현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가룟 유다는 마귀의 종이 아니고 마귀의 표현입니다. 마귀의 표현. 그래서 이 세상길에 가시면서 여러분들은 많은 마귀의 표현형들을 보시게 되는 겁니다. 이 시카고에서. ‘아, 내 탓이야. 내 탓이야.’천주교 신자들 차 뒤에다 ‘내 탓이오’ 라고 써 붙여 놓고 마귀 싣고 막 돌아다녀요. 절대로 여러분들을 버리지 마세요. 벌을 줄 자격이 없어요.

 

왜? 우리 몸은 누구 몸이기 때문에? 주께서 쓰시는 몸이기 때문에. 벌을 내리든 뭘 하든 주님이 알아서 해야지. 내가 나를 벌 내리면 나는 스타가 되고, 나는 위대한 마음이 착한 사람이 돼버려요. 착한 사람의 그 착함은 내가 나를 사랑한 착함에 있고,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이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영생은 삑(☓)없습니다. 영생은 물 건너가고 없습니다. 태초의 영생을 위해서 자기를 비워두세요. 주여, 나는 손톱 하나 안 댈래요. 이거 나쁜 짓인지 아는데, 이 나쁜 짓도 주님이 알아서하세요. 내가 나한테 벌 내리고, 손들게 하고, 성경 다섯 장 더 보기 하고, 기도 오늘 삼십 번 더하고, 늦게 왔으니까 헌금 이천 원 더 하기. 이런 것들 하지 마세요.

 

원래 제가 이렇습니다. 제발 믿음 없는 채로, 그냥 죄인인 채로 오라는 말입니다. 병원에 환자로 와서 지가 의사 되어가지고 아는 척하면 골치 아프고. 제발 유식한 채로 오지 말고, 내가 알아서 다 해 줄 테니까, 무식덩어리로 그냥 오시면 돼요. 우리는 태초를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난 것이 태초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리 똑똑한 소크라테스 공자라도 태초에 아버지하고 예수님 사이를 어떤 사이인지 몰라요. 이러면 영생도 없는 거예요. 이제는 그걸 주시겠다는 겁니다.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고, 제자들은 착각해가지고, 야! 영생이다! 눈에 보이네! 귀에 들리네! 우리는 믿는 모양이라. 그 중의 하나가 마귀의 표현형인줄 제자들도 몰랐어요.

 

그리고 베드로 본인도 내가 예수님을 배신할 줄을 본인도 몰랐어요. 하자가 있는 인간을 열두 명 채택한 겁니다. 그 중에 우리가 끼어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도 하자있는 모습으로 끼어 들기를...남아있는 것은 뭐냐, 예수님 쪽에서 이 하자를, 오류 있는 자를, 어떻게? 영생줄자로 바꾸는지, 그거는 10분 쉬고 그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9-12 22:37 
20160907 요한1서 시카고강의4-이 근호 목사

자, 네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문제있는지도 모르고, 가룟 유다하고 베드로하고 둘 다 배신했지만, 베드로는 끝까지 사랑하고, 가룟 유다는 마귀와 접촉을 시킵니다. 원래 사탄, 마귀는 인간의 존재세계에서는 없는 비-존재 세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보낸다? 마귀를 보내가지고, 비-존재가 존재세계를 파괴시키고 공격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너희들이 보기에 그냥 보통 목수의 아들,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마귀를 부릴 수 있는, 다른 영적인 진정한 존재자로서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것은 마귀가 인간을 자기 수하에 두기 위해서 준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은 어떠냐 하면 가룟 유다가 보여주었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반성해서 용서를 얻고자 하는 그런 체재로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할하는 세력의 총수. 그게 바로 사탄의 나라입니다. 사탄의 나라의 특징은 뭐냐, 거룩하고 의로우면 구원되는 그런 나라에요. 레위기에 나오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 이건 베드로전서에도 나와요(벧전1:16).

그러니까 거기에, 하나의 운동회에서 하는 게임처럼, 과자 하나 놓고 애들이 막 달리잖아요. 제일 먼저 달리는 사람이 바리새인이에요. 그래서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바리새인보다 더 빠르지 아니하면 천국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런데 바리새인이 그 의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주님은 약을 올립니다. 모든 율법 중에서 하나라도 어기면, 지금껏 달려 온 것 땡이라는 겁니다. 완벽에 완벽을. 거기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그 소리 듣고 자신만만하겠죠. 왜? 간음한 적 없고, 사람 죽인 적 없으니까. 맨날 하나님의 거룩을 위해서 매진했으니까.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이지. 그 다음에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죄. 오른 눈이 범죄 하면 찍어버려라.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래도? 이래도? 이래도 니가 의인이야? 계속 집어넣어요. 누구든지 판단을 하는 사람은 지가 판단 받고 지옥 간다. 계속 집어넣어요. 아무도 주님의 추가적인 법에 대해서 그걸 당해낼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 현대인에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짜 듣기 싫은 것이 뭐냐 하면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그 다음 뒤에 염려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지옥 가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거리라고 했어요. 그럼 천국 가는 사람은 뭘 안 한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않는 사람만 간다는 거예요. 그럼 누가 가겠어요? 아무도 못 갑니다. 아무도 갈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산상설교에서 실컷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뒤에 8장이 시작하면서 천국 가는 사람 하나 등장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 저주받은 문둥병 환자에요. 문둥병 환자인데, 그 사람은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여, 해결 못합니다." 하니까, "내가 있잖아." 하면서 예수님께서 그 문둥병자의 저주를 해결해버렸어요. 그러니까 산상설교는 내가 알아서 내 구원 챙깁니다. 하는 사람은, 어떤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고, 나는 알아서 천국 갈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주님의 존재를 나보다 더 귀하게 여기겠죠.

그리고 8장에 나온 이야기가 너희 짐을 내가 대신 진다는 이야기에요. 너희 짐을 내가 대신 진다. 벌써 그 이야기 나오면 낌새가, 아하! 주께서는 죄인도 아니면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 지시려고 벌써 발걸음을 그 쪽 방향으로 틀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주제가 뭐냐 하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 질 수 있는가? 하는 그 문제와 그리고 예수님께서 피 흘렸다고 해서 우리 죄가 사해진다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하는 문제입니다.

자, 제가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아침에 어떤 사람이 호텔에서 커피를 들고, 하얀 양복을 입은 것이 기억나요. 큰 덩치에, 키는 1미터 86에서 87정도 되는 사람인데, 커피 들고 갔습니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커피 안 마신 우리가 그 커피 맛을 그 사람하고 같이 공감합니까? 공감 못합니까? 저 사람만 커피 마셨어요. 우리는 물 마셨어요. 나와 다른,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커피 마셨는데, 어떻게 그 사람이 마신 커피가 내 커피가 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거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우화, 이거는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요. 그 사람이 아팠는데 왜 내 병이 낫습니까? 이건 터무니없는 거예요. 의사는 환자대신 아파하는 사람이 아니고 치료제를 주는 사람입니다. 근데 예수님은 어떤 의사입니까? 내가 아프면 저쪽의 아픈 것이 싹 사라지는 그런 의사입니다. 오떻게? 이건 어떻게?가 아니고 오떻게? 그게 가능해요? 텔레파시 그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벌 받은 것이 어떻게 내 속에 죄의 심판이 면제가 되느냐 이 말이죠. 둘 사이에 뭐가 놓여있는데?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몸이기 때문에. 몸은 부부라도, 아무리 한 몸이라도 분명히 두 개의 신체로 되어있습니다. 하나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두 개의 신체가 하나의 신체라면 굉장히 편리할 거예요. 밤중에 화장실 가야 되잖아요. 니가 가라. 니가 가. 지가 가서 오줌 누고 오면, 이쪽은 아휴! 속이 깔끔하죠. 이빨이 아프다. 아내는 지지지직하고 아픈데, 남편은 왜? 내가 시원하지. 이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께서 믿으라고 성경책을 제시한 겁니다. 얼추 믿을 수 있는 정도가 좀 돼야 되지, 말도 안 되는 것을, 못 믿을 것을 주면서 믿으라고 하면, 그런 억지를 쓰면 그 억지는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제자들을 놓았던 것이 힌트가 됩니다.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사탄을 만나죠. 그 사람이 가룟 유다라고 했죠. 요한복음을 잠깐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6절을 누가 한 번 읽어 볼까요? 2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탄을 집어넣은 것이 누구에요? 예수님이죠. 왜? 사탄은 천사입니다. 피조물이죠. 피조물은 누구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창조주의 지시를 따르게 되어 있어요. 사탄을 집어넣은 거예요.

사탄을 집어넣었다는 것 하고, 어떤 아저씨가 커피를 마시고, 내가 커피를 안 마셨는데도 내가 커피 맛을 아는 것 하고, 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상관이 있어요. 가룟 유다의 몸이 있었죠. 그럼 가룟 유다에게 묻습니다. 가룟 유다가 한 행동이 자기 몸에서 한 행동입니까? 아니면 사탄이 한 행동입니까? 사탄의 행동이죠. 몸은 사탄의 행동의 표현형이라 하는데, 이게 어려워요. 표현형. 사도 바울의 움직임은 사탄을 움직이는 표현형이 되는 겁니다. 그럼 사탄은,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했죠. 그러면 인간의 몸은, 우리 보기에는 하나, 하나, 하나..몸 열 사람이 있다면 열 명이지만, 공통점이 있어요. 모두 다 사탄의 통제 하에 있다는, 사탄의 하나 됨에 열 명이 소속된 열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무엇이 형성되느냐, 몸은 멀어도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는, 새로운 잠재된 보편성이 여기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보편성을 확 그걸 심어준 거예요. 지금 여기 이렇게 포도 있고, 멜론 있고, 배있죠. 내가 여기서 잉크를 받아요. "목사님. 이건 멜론이고, 포도고, 배입니다." "그래요?" 잉크를 가지고 확 뿌려버려요. 그러면 전부 다 시커멓게 되죠. "다 뭐예요?" "다 잉크에요." 바로 그게 잉크가 주는 표현형이 라는 겁니다. 사람은 너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생각이 보편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요.

그 보편적인 생각이 뭐냐 하면, 나의 의는 내가 반성해서 내가 창조한다는 거예요. 내가 거룩하고, 내 착함은, 내가 나에게 대한 선악을 아는 지식이기 때문에,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나는 점점 더 착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반성문 쓰잖아요. 일기장의 내용이 뭐에요? 일기장의 주제가 뭡니까? 오늘 시카고에 비가 왔음. 화씨91도. 이렇게 쓰다가, 그럼 그렇게 끝나는 거예요? 아동도 아니고, 아동 같으면 그렇게 쓴다지만. 어른들 같으면, 일기장에 뭡니까? 남한테 안 보여주는, 사춘기 애들의 일기장은 뭡니까? 오늘도 나는 잘못을 했다. 나는 속으로 남에게 뒷담화 했다. 험담했다. 바보야! 바보! 나는 이런 인간이 되면 안 되는데. 주의 형상을 본받아야 하는데. 성경 베드로전서에 보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는데, 또 내가 이렇게 흠집을 내놨네... 이러지 말아야 되는데... 그게 일기장이에요.

근데 이걸 나만 갖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도 갖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도 갖고 있죠. 그걸 문명사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것을 도덕이라고 하고, 사회공동체에서 이 도덕을 가지고 연결시키는 것을 윤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혼자 살면 윤리는 필요 없어도, 혼자 살아도 이 마음속에 있는 도덕감은 지워지지 않아요. 이 도덕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두 글자로 양심이라고 하는 겁니다. 양심. 근데 그 양심은 그때그때 달라요.

양심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사회에 대한 적응력입니다. "에이, 하나님이여. 이거 제가 좀 들어줬습니다. 왜? 말 잘해야 계속 이 밑에서 남아있지, 바른 소리 했다가는 이거는 큰일 날입니다. 나보다 내 가족이 더 큰일 납니다. 주님 봐주세요. 주께서는 사랑이 많으니까 눈 찔끔 감고 봐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나는 모른다. 나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상관없습니다. 나는 묵비권. 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은 안다는 뜻입니다. 질문에 답변 못한다는 그런 뜻이잖아요. 너의 윤리를 나에게 강요하지 말아라. 나도 나름대로의 나에게 도덕이 있다.

윤리를 할 때, 이익 되는 윤리는 윤리로 나갑니다. "예. 나 착한 사람이에요. 얼마든지 바꿔드리겠습니다." 근데 자기가 불리할 때는, 잠시 윤리는 접어두고, "주님이여, 저에게 양심 있는 것 아시죠? 저는 이 정도 착한, 마냥 나쁜 놈이 아니고, 그저 이번 일만 문제 있었지. 그 전에는 얼마나 착했습니까? 길에서 동냥하는 거지들에게 주고, 주께서 그 선행을 양으로 모아서, 작은 내 죄를 막대한 선으로, 그냥 상쇄시켜주시옵소서." 빼기 더하기해서 대차대조표 뽑아가지고, 차변 대변해가지고 당기순이익, 마지막 남은 것. 선이 1퍼센트라도 더 많으면, 나중에 천국 갈 때, 저울 한 번 달아보자. 어이구, 착하다. 어이구 49, 어이구 51, 빼면 2퍼센트. 뭐 그다지 성적이 안 좋다마는 합격선 통과.

그게 선악과. 선을 아는 지식과 악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공유하면서, 항상 내부적으로 양심적인 흥정과 정치적인 타협을 모색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게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란 존재는 다 그래요. 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은 인간은 집어다가 교도소에 집어넣죠. 너 같은 인간은 사회에 살 자격도 없어. 이 부모도 모르는 인간! 집어넣죠. 그럼 나머지기는 부모에게 양심적으로 배려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거죠. 그렇게 해서 사회구성원을 이루고, 그것이 유대사회를 이루었고,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산상설교를 가지고 시비를 걸었고, 그 시비 앞에서 의인은 아무도 없었고, 자기를 지적하는 예수님을 처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없던 시절로 다시 원상회복되기를 원하는 그들을, 예수님은 그걸 간과한 거예요.  

왜?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야만, 나의 선함은 계속 선함으로 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착함은 착함대로 유지되어서, 이 착함이 있기에 신께서는 복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그러한 반대급부까지 고려한, 경제적인 것까지 고려한 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다지 나는 나쁜 놈이 아니라는 것. 이게 조폭이 하는 것하고 마찬가지에요. 차라리 조폭이 더 의리 있어요. 이 나쁜 놈아! 조폭끼리 그런 소리 한다니까요. 남을 등쳐먹으면서 이 나쁜 놈아! 한다니까요.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상대적으로 반성한 가룟 유다를, 기존의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속성으로서, 얼마나 양심대로 살았으면, "팔아먹다니?" 하면서 울었어요. 울면서 자살했습니다.

근데 베드로는 통곡을 좀 했습니다마는, 통곡했지만 죽었습니까? 안 죽었죠. 누가 보호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마귀가 베드로를 삼키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베드로를 막아서, "니 지금 드라마 시작도 좀 했는데 이게 끝인 줄 아나? 니 배신이 드라마 끝 장면이 아니거든?" 드라마 끝 장면이 아니거든요. 마지막에 용서할 수 없을 만큼의 복수가 나와야 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까지, 끝까지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그 끝을 봐야 되지 않습니까? 혼자 미리 좌절해가지고, '나는 안 돼! 안 돼!' 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한다면 끝까지 가야 될 거 아닙니까? 주께서는 끝까지 사랑하는 자를, 베드로를 끝까지 구원해내십니다.

베드로를 구원해내시는데, 그럼 여기 개입된 그 원리를 뒤집는 그거는, 반성하고, 착하고 거룩한 것이 그게 아니라면 주께서 집어넣은 것이 뭐냐 하면, 바로 배신당한 사람. 주님은 사랑하되, 배신의 여지를 두고 사랑하는 겁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는 나를 배신해다오!" 이게 통제를 받고 있는 모든 인간의 공통점에서는 절대 이룰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각자 인간, 본인만 최종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그렇게 굳혀놨어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니는 내 사랑을 받고, 나는 고마움으로 회수해야 돼. 이게 인간관계입니다. 받아놓고 어데 딴 짓 해? 인간은 공짜가 없어요. 한만큼 보답을 해줘야 보답을 느끼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은 본인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하늘도 그런 줄 알고, 하늘에게 은혜를 받았으면 보답해야지. 그 귀한 십자가를 받았으면, 헌금 십일조가 뭐냐? 십일조는 구약이고 신약에는 십에 이조, 삼조 해야지. 돈에 다 환장을 했어. 돈에. 이런 식으로 보답을 하라는 거예요. 순종으로 보답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보답하라는 거예요. 거룩으로 보답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묻지요. "만약에 거룩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거룩 안 하면 지옥 갑니다." 하려고 하니까, 소위 목사가 돼가지고, 먼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얼마나 강조했습니까? 그러니까 지옥 간다고 하면 이것도 곤란하고.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상급아이디어입니다.

구원은 받되 부끄러운 구원을 받아가지고, 천국 구석에 팬티바람으로..그러면 그걸 듣고 무식한 교인들은, "목사님! 그럼 우리는 예수도 믿고, 목사님 시키는 대로 했는데, 어떻게 됩니까?" "시키는 대로 하면 하나도 없어지지 않고 다 돌려받습니다. 십일조 하면 다 돌려받습니다." 그게 바로 보람상조고, 그게 적금 드는 거예요. 알리안츠 보험 드는 거예요. 그거는 결국 하늘에 쌓는 것이 아니고 자기 저금통에, 자기가 자기 것 회수하는 식이에요. 그게 바로 사탄의 표현형입니다. 악마의 모습입니다. 기어이 자기의 가치를 자진해서 폐기할 마음은 더 이상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랑이 뭐냐, 사랑해줄 테니까 제발 배신해라. 제발 배신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곧 나의 사랑은 내가 챙기는 것이 아니고, 나의 사랑은 누가 챙기는가 하면, 아버지가 챙기니까 더 이상 내가 내 사랑을 챙길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마귀의 생각을 가진 모든 인간은, 나를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겨요? 지옥으로 가면서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그건 윤복희가 그렇게 한 거예요. "누가 나를 위해주지?" 빰빰빰~♬ 한 템포 쉬고, "바로 여러분!" 여러분이라는 노래 아십니까?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니가 위로 받을 잽이 되냐 ? 이 말이죠. 죄 지어놓고 무슨 위로를 받아요?

그러니까 평소에 인간에서 나오는 모든 말, 멘트는,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제발 나를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왜? 무조건~♬무조건이야~♬ 무조건 나를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왜? 나는 여기 존재하니까. 나는 유용성밖에 챙기지 못하니까. 그런데 위로 안 해주잖아요? 그럼 내가 니한테 위로해줄게. 그럼 내가 니한테 사랑해줄게. 사랑받는 너는 사랑의 대가를 나한테 돌려 달라. 결국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고무줄 잡았다가 땡기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자, 고무줄 한 번 잡아보세요. 잡았죠? 쭉 잡아당겨보세요. 그러다 고무줄을 놓으면 팅하고 그 순간 어디로 돌아옵니까? 나한테 다시 돌아오는 거죠. 낚싯대를 던진다고 사랑이 아니라, 낚싯대에 걸린 인간은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고백을 하면서 나한테 돌아오라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의 존재감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그런 식으로 이해했는데, 그 대표자들이 바로 바리새인이고, 사두개인이고,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반대급부로 대가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냥 입 닦고 넘어갈 그런 못돼먹은 그런 하나님은 아니다. 하물며 인간들도 서로 도덕적이고 거룩하고 의로워지면 반드시 보답이 있고 대가가 있는 반면에,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은 오죽 대가를 잘 지불하겠는가?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우리가 갖고 있는 거룩한 선을 통해서, 그걸 밑천으로 해서 거래와 흥정에 나서게 되면, 우리는 구원은 기본이요, 보너스로 상급까지 받는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설교입니다. 뭐, 더 들을 것 없어요. 한마디만 들어도 이게 줄줄줄 막 따라 나와요. 마귀의 정당이에요. 마귀를 모시고 있는 마귀의 정당입니다.

주님은 사랑해줄 테니까 나를 배신해라. 이 말은 베드로를 대표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니가 나를 배신할 수밖에 없다. 왜? 내가 배신을 유도할 테니까. 이유가 뭐냐, 배신해야 니 본색이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본색이 아니고, 사랑할 수 없는 악마의 본색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들통날거니까.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왜? 마지막 사랑은 나기 때문에. 나의 마지막 사랑은 나예요. 그래서 주님이 주신 사랑함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뭘 바치라고 했습니까? 자식을 바치는데 앞에 뭐가 붙어요. 그냥 자식이 아니고, 미운 자식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식을 바치라고 했어요.

이것은 바로 아버지가 자식을 배신하는 것이 아니고, 아브람이 아브라함을 배신하는 겁니다. 본인이 본인을 배신하는 것. 이게 바로 가장 어려운 거예요.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다고 애쓰는 나를 내가 배신해요. 끝까지 나를 누가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거예요. 그거는 주님의 사랑이 아니거든? 제발 여러분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여러분 자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거는 내가 원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이 나타나줘야 해요. 이것을 가지고 주님은 자기를 미워하라고, 짧은 멘트로 이야기합니다. 지독하게 너를 미워하라. 이걸 멘트라고 하지 말고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찾아보면 되겠죠. 25절에,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영생을 얻는다 이 말입니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자, 그럼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죠. 자, 아까 뷔페에서 커피 마셨던 사람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커피를 자기 자리에서 마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커피 맛을 못 느낀다고 했죠? 그럼 우리는 저 사람은 저 사람이고 나는 나라고 한다면, 하나의 상황극이니까. 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얀 양복을 입은 사람은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 사이에서 서로 따로 놀아요. 왜? 몸은 세포 60조개가 따로 있어요. DNA가 달라요. 항상 따로에요. 생각이 같다고 우기는 것은 본인 생각이지, 생각 자체가 같지 않습니다. 몸은 같아도 다 달라요. 이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게 되면 이 몸과 이 몸 사이에 무슨 그림자가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CPU, 중앙처리장치에요. 모든 세상 권리를,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수님을 경유해서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여기 시카고에 놀이동산 있습니까? 디즈니랜드 비슷한 것 있어요? 있겠죠. 시카고가 대도시니까. 옛날 구닥다리 놀이동산에 이런 것이 있죠. 중앙 위에 큰 원판에 추가 있고 거기에 그네들이 여러 개 달려 있어서 막 돌아가는 것 있죠?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하는 것은 몸에서 더 이상 범위가 넘어가지 않아요. 피노키오처럼 코가 늘어나고 하는 사람 없어요. 팔 길이도 그대로에요. 늙어 가면 줄어들지만. 여기까지는 내 몸이고, 그 외에는 빈 공기층이고, 저쪽 몸은 따로 있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와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게 되면 누가 등장해요? 사탄이 등장하죠.

사탄의 특징을 누가 보여준다? 열두제자 중에? 가룟 유다. 가룟 유다의 특징은 뭐라고 했습니까? 스스로 반성하고, 자책하고, 회개하고, 자기 죄 문제를 누가 알아서 한다? 자기가 알아서. 그럼 자기 구원 문제를 누가 알아서 한다? 내가 착함을 많이 누적해서 그 착함으로 천국 넣어줄 수 있는, 내밀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있는 사람이 우리다. 이 말이죠. 자, 딴소리 하지 말고 아까 이야기했던 것 다시 해보면, 여기에 우리 있고 저 옆에 양복 입은 사람 있고. 그런데 예수님이 딱 오셔가지고 모두 어두움이요. 죄라고 한다면, 이 사람 커피 마시고, 커피 안 마신 우리가 동시에 이 외치는 한 사람 때문에 연결이 돼요. "감히 우리 인간을 모독하다니?" 커피 마신 사람이 이야기를 하고. 우리도 "당신이 내 인생을 알아? 내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모르면서 어떻게 일괄적으로 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이야기하십니까?" 라고 할 때는 우리하고 옆에 앉아 있는 사람하고 공동으로 같은 생각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를 배반하도록 하는 조치가 예수님으로부터 벌어지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세상에 빛으로 오매 세상은 뭐다? 어두움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뭐냐, 어두움을 확인하는 일을 하는 거예요. 여기도 어둡고, 베다니도 어둡고, 가나안 혼인잔치도 어둡고, 갈수록 어두워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잠잠하다가 갈수록 어두움의 농도가 짙어져가지고 나중에는 이구동성으로 죽여 버리자! 강도 바나바를 살려줄까요? 예수를 살려줄까요? 빌라도가 이야기했을 때, 사람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를 죽이고 살인강도를 살려달 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죠.

그 중에 "예수를 살리세요!" 라고 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아무도 없죠. 그때 제자들은 어디에 갔습니까?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갔죠. 그러면 베드로가 만약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리라고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했죠. 의인은 없나니 단 한명도 없다. 산상설교 지킨 사람도 없을뿐더러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전부 다 판단 miss. 그것은 우리의 몸이, 주님께 영생 얻을 몸이 아니고, 아담의 죄를 그대로 덮어씌운 거예요.

그 몸을 가지고 우리는 그동안 스스로 선악논리 의해서 그동안 아주 나쁜 짓을, 일 년에 한두 번 과속했는데, 나머지기는 뭐, 나쁜 일 한 것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신 스스로 착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위로하면서 살았죠. 누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산상설교나 십계명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래서 성경에 말씀을 율법으로 준 것은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러면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뭐 하나 물어봅시다. 우리가 그렇게 주접떨고 주 앞에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나올까요? 반발 할까요? 반발하는 것을 주께서 기다리십니다. 왜? 그게 바로 주의 사랑의 의도이기 때문에. 내 사랑에 대해서 뭐하라? 제발 좀 배신 좀 해라. 배신. 배신해야 그게 사랑이에요. 배신하는 그것을,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천국 가는 공로에서 완전히 우리 공로가 배제가 됩니다. 그래서 천국 가서 미리 면류관을 쓸 자격이 없어요. 이것은 요한계시록 4장봅시다. 11절,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이 앞에 보면 10절,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이게 남의 면류관이 아니고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던집니다. 천국에는 보좌가 두 개 있어요. 어린양의 보좌 있고 아버지의 보좌 있고. 그 보좌 앞에 면류관을 아낌없이 반납합니다. 내가 감히, 어떻게 내 힘으로 구원되지 않았는데 이걸 쓸 수 있을까? 나는 공짜로 구원받았는데? 얼마나 우리는 자기 딴에 안다고 우기고, 얼마나 자기반성 잘하고 했지만, 내가 주님에 대해서 배신하고, 창조주 자체에 대해서 배신할 줄이야. 내가 미처 몰랐는데, 주님께서 말씀하니까, 울컥, 우리 속에 있는 악마의 잠재성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켜서 날마다 배신. 또 배신. 내일 되면, 9월8일에 배신이라고 써있어요. 또 배신.

배신은 딴 게 없어요. 주여,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게 배신이에요. 주님이 왜 제 일에 끼어들었습니까? 이게 배신이에요. 나의 착함, 나의 의로움을 한몫 챙기고. 그보다 더 못된 마귀는, 주여. 제가 마음을 낮추었나이다. 그 자기의. 그걸 또 반성하고 회개하고 성경 읽고 기도했습니다. 하는 요 자기의. 이것은 죽을 때까지 배신의 근거기 때문에. 내린 결론은, 구원을 한 번 외쳐볼까요? “끝까지 배신하자!” 왜? 배신할 때마다 끝까지 사랑함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기 위함이에요.

그 피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우리의 배신이, 옴팍 들어가 있어요. 배신 한 것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배신 할 줄로 아시고, 니가 아무리 배신해봐야 이 십자가의 용서하심을 뛰어넘을 배신은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에는 우리의 배신이 한몫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 피거든요. 좋게, 좋게 말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알아들었지?” “예.” “아이구, 착해.” “알아들었어요?” “아멘.”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 아멘. 예. 알아들었습니다. 알아들었으니 이제는 주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이 전체가 뭐가 되느냐, 배신으로 우리에게 마지막 표현형으로 나타납니다. 배신이.

그래서 성도는 뭐냐 하면 지옥 갈 사람도 배신하고, 천국 갈 사람도 배신했는데, 이것을 온전한 주의 사랑으로, 이미 사랑 안에 배신의 여지를 남기고, 우리가 배신의 덫에 갇혀서 아무공로 없이 간다고 하는 사람은, 이것은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사람이고. 주께서 이렇게 사랑했으니까, 여러분 바른 인간 되어서 두 번 다시 배신하지 말고, 바르게 살고, 이제는 성화하고 성경 읽는데 봉사도 많이 해서 하나님나라를 확장하자. 이렇게 나오면 그게 바로 지옥 갈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냥 막 사세요. 그냥 사세요. 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도 배신은 우리 평생에 끝나지 않고, 항상 우리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의 배신의 특징이 뭐냐, 그게 바로 요한복음의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 마지막에 원치 않는 길이죠. 원치 않는 길. 들어는 다 봤죠? 자 문제 들어갑니다. 주께서 인도해서 이 길로 갔다. 질문은, 이게 원치 않는 길입니까? 원하는 길입니까? 대답: 원치 않는 길. 아니에요.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길이에요. 주의 은혜면, 주께서 원하는 대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바로 내가 예상했던 길이에요. 그래서 25억 돈 벌어도 그게 나한테 환란이라고 하는 거예요. 25억이냐, 아니면 몽땅 말아먹느냐가 아니라, 어떤 경우라도 이것은 내가 미리 예상했던 것은 일체 이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왜? 배신자에게 줄 것은 사랑밖에 없지, 배신자의 예상을 내 앞에 펼쳐놓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제, 지난 시간에 제 앞에 멜론이 분명히 와 있었어요. 오늘 분명히 멜론이 와 있을 거라고 내가 예상했다고 칩시다. 사실은 제가 예상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 필요 없고요. 예상했다 칩시다. 그럴 때 멜론이 나왔잖아요? 제 요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주여. 왜, 제가 원치 않는 멜론을 주십니까? 지금 제가 무슨 소리하는지 몰라요. 역시 나는 맞혔어! 이게 아니고, 왜 내가 원하는 그것을 주께서는 주시면서, 원치 않는 멜론을 내놓습니까?

그것은 바로 니가 예상했든, 안 했든, 관계없이 주의 뜻대로 일방적으로 온 거예요. 일방적으로 왔다는 말은, 여기 멜론이 있음으로 해서 나는 자동적으로 뭐가 돼요? 예상했던 안 했던 관계없이 나는 원치 않는 선물을 받게 된 겁니다. 내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모든 하루하루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원치 않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그러나 지옥 간 사람은 뭐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미리 예상해서 기도 확실히 해야 되는데. 기도 안 했더니만 내가 과속으로 경찰한테 걸릴 줄 알았어. 자꾸 이래 생각하는 거예요. 분명히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도는. 그럼 원치 않는 것을, 어떻게 원치 않을까요? 아, 내가 멜론을 원치 않으니까 분명히 주님이 바꿔치기 해서 포도가 나왔구나. 이거는 이미 내가 예상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예상하지 않는 한, 원치 않는 거예요.

주께서는 우리에게 주도권을 절대 뺏기지 않습니다. 여기 볼펜이 있는데, 여러분 알아맞혀보세요. 몇 바퀴 돌리는지 맞혀보세요. 몇 바퀴 하겠어요?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하죠. 나는 안 돌려요. 왜? 답을 수집하고 보니까 답 중에 없는 게 하나 있어요. 안 돌린다. 이게 없어요. 그래서 안 돌리는 거예요. 자꾸 주도권을, 사랑받은 내가 사랑에 보답한다는 것에 주도권을 안 빼앗겨야 뭐가 남아 있어요? 우리는 배신하는 베드로가 원치 않는 길, 그 방정식에, 그 공식에 놓여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거예요.

자, 오늘 강의 처음부터 해봅시다.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판단하는 믿음이라고 했죠. 그러면 믿음을 함으로써 나의 가치는 없어질까요? 믿음을 하면 할수록 나의가치는 계속 유지될까요? 계속 판단하려면 판단하는 주체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믿음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이 믿음의 주체는 창조 전의 믿음이 아니고, 창조 되고 난 뒤에, 그때 마귀도 창조되었어요. 마귀도 만들어졌고, 인간도 만들어졌고, 뱀도 만들어졌고, 코끼리도 만들어졌고, 만들어져서 이미 범죄 한 이후에 믿음이죠. 이 믿음을 지들끼리나 실컷 믿으라고 하세요. 문제는 영생이 없어요. 

요한일서에서 주겠다는 영생은 태초에 있는 믿음이에요. 태초에 있는 믿음인데, 우리는 자꾸 뭘 관여하려고 하느냐 하면, 지금 있는 믿음은? 인간의 머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저를 만들었죠?” “어.” “만들었으니까 내 안에 하나님의 요소가 있겠죠.” “어.” “그러면 하나님의 요소를 잘 뽑아내서 한 데 모으면 하나님이 흠뻑 좋아하시겠죠?” 하나님이 아무소리 안 해요. “그럼 그거 드리겠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 때, 저 짐승같이도 아니하고, 저 코끼리같이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마음을 줬다. 섬길 마음을 가지고 하게 되면 그게 믿음이다.

이게 바로 유대교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의와 가치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연결, 접촉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것이 뭐냐, 보고 믿고, 판단이니까. 보고 믿고, 만져서 믿고, 듣고 믿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 복되다 할 때, 너희들은 나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 불신앙만 마음껏 표출해낸다는 거예요. 그 중의 하나는 가룟 유다고, 중요한 것은 그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말릴 다른 제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누구도 사탄을 이길만한 힘이 없다는 겁니다. 아까 식당에서 우리가 여기 있고, 옆에 하얀 양복 입은 사람이 있었고, 여기에 예수님이 오시니까, 너희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할 때, 여기 커피마신 아저씨가 “예수 당신은 뭔데 우리 인격을 모독합니까?” 할 때, 우리가 여기서 말릴 위인이 있어요? 없어요? 말리지 않았다는 말은, 목자가 치니 양이 흩어졌다는 말은, 전부 다 한통속이라는 이 말입니다. 전부 다 똑같은 아담의 속성을 받았다. 한 통속이에요.

그래서 오늘 제목은 “배신하자!”에요. 더 구체적으로 하면, “끝까지! 갈 때까지 배신하자!” 그걸 달리하면 주님 끝까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을 원하면 절대로 천국을 주지 않습니다. 주지 않는 방법으로 우릴 천국에 넣어주십니다. 우리는 성격이 급해서 내가 원하는 천국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는 천국에 넣어주시겠다고 하면 우리는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내가 원하는 천국은 가짜라고 치고, 그럼 주님이 원하는 천국을 한 번 맛보면 안 되겠습니까? 니게 니 소원이야? 제가 원하는 겁니다. 니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다.

왜냐, 그런 식으로 천국가면 천국 가서 자랑하니까. 내가 주님 천국을 커닝을 해야지. 니 몰랐지? 나는 간절히 기도했더니만 미리 앞서서 보여줘 가지고 나는 그걸 꼭 유지해서 들어왔다. 이렇게 돼버려요. 그걸 달란트비유라고 하는데 주께서는 달란트 유지하면 복 준다고. 세상에! 달란트비유는 다 엉터리비유에요. 달란트비유라는 것은, 없는 것을 내놓아라. 이게 달란트비유에요. 예수님 쪽에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새로 생긴 것을 내놓아라. 이 말은 새로 생긴 것은 주님의 움직임의 공로기 때문에, 면류관을 다 반납하죠. 이게 달란트비유에요.

신랑이 왔으면 신부를 만나면 되잖아요. 일부러 안 와요. 그것은 뭐냐 신부의 결혼함은 신부가 이쁜 것이 아니고 기름 준비가 아니고, 신랑의 지체함이 신부가 신랑을 만나는 근원적인 원인제공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름 준비하는 지혜로운 처녀이야기에요. 이게 바로 우리가 봤던 요한복음과 동일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정리하고 강의마치겠습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배신의 여지를 가지고 사랑을 해야 되는데. 인간의 사랑은 해준 만큼 더 얻고자 해요. 내가 월급을 이만큼 갖다 주는데, 니가 그걸 가지고 나를 무시해? 돈 왜 줬어요? 돈 준 것이 아니고 고무줄 준 거죠. 줘놓고 땡기는 거예요. 받은 것은 몽땅 나의 소유가 되는 거예요.

근데 가룟 유다가 그렇게 예수님을 슬퍼한 이유가, 평소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자로 생각하고,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는 내 거야. 나한테 유용가치가 있어. 내가 나를 천국 보내는데 당신은 쓸만해. 근데 베드로에게는,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가서 천국에 넣어줄게. 계속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거예요.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줄곧 원치 않는 길로 해서 천국 가게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것은 사랑의 배신자. 배신자여~ ♬ 사랑의 배신자로서 가기 때문에, 주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을 때, 그 죄인의 역할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도 소홀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내가 배신자 역할에, 죄인 역할에 조금도 소홀해서 스스로 주님을 배신하는데 반성의 여지를 가지지 마세요. 그 정도로 우리가 아직도 훌륭한,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반성함으로써 반성하는 자체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듭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칸트 이야기하겠습니다. 모든 근대의 윤리도덕은, 근대에 자본주의가 발달함으로써 자본주의에 경제구조와 합당한 도덕 윤리가 같이 만들어져요. 그걸 만드는데, 거기에 필요한 주의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계몽주의라고 합니다. 그냥 교양이니까. 계몽이라고 하는 것은, 빛으로써 눈을 뜨게 하다는 뜻이에요. 계몽주의의 가장 쉬운 예는 아프리카는 조져야 된다. 무식한 아시아는 식민지로 만들어야 돼. 왜냐하면 거의 무지한 짐승 같은 인간을 신의 사명을 받은 똑똑한 우리가 계몽해야 되기 때문에.

한국의 계몽주의자로 제일 유명한 작가는 바로 심훈입니다. 상록수. 한국 사람은 다 압니다. 그게 농촌계몽이에요. 공동체 운동도 어떤 계몽. 희생으로써 어떤 대가를 원하는 거예요. 나하나 희생하면 어떤 괜찮은 거 나오듯이. 계몽주의 기초를 다진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입니다. 칸트라는 사람의 주장은 딱 하나에요. 모두를 속여도 딱 하나 속일 수 없는 것은 내가 착함을 행한 이 선한 동기는 어떤 경우라도 이거는 사라지지 않아요. 왜? 하나님이 나한테 그 마음을, 절대적인 도덕률을 주셨기 때문에.

따라서 칸트는 이야기합니다. 교회 나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속에 있는, 장착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사랑을 일깨워주시면, 교회 꼭 그렇게 나와서 미치지 않더라도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위하십니다. 새로운 칸트 종교의 시작입니다. 이거는 맹자의 성선설과 유사하죠. 인간은 날 때부터 착한데 환경이 나쁘다보니까, 악해졌으니까, 먼지를 탈탈 털어내는 거예요.

도 닦는 거예요. 도만 닦으면 거울에 먼지 하나 안 보이잖아요. 훅! 훅! 불어가지고 탈탈 다 털어내면 다시 맑은 명경 같은 주님의 하나님의 형상, 어린양의 형상을 본받게 되면, 주께서 그거 공자이야기나, 맹자이야기나, 칸트 이야기나, 그것가지고 오늘날 교회에 전부 다 동원시켜놨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교인들이 뭐 평소에 자기 원하는 것이 뭐가 있어요? 신이시여, 어느 정도 착하면 천국 넣어줍니까? 그게 목적이었으니까. 절로 아멘! 영어로 에이멘! 에이멘! 할렐루야! 막 터져 나오죠.

거기다가 만약에 복음 전한다고 여러분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죄인이라고 하면, 저놈 끌어 땡겨! 내가 말해놓고 니 혹시 이단교회 아닌가? 이런 식으로 막 공격하는 거에요. 주의 형상을 본받으라고 에베소서에 나와 있는데, 니가 하나님의 은혜의 성령을 받았으면 하나님의 형상을 본 받으라, 이제 어두움의 자식이 아니고 빛의 자녀니 날마다 새로운....이렇게 분명히 나오는데, 이걸 왜 안하느냐? 이걸 왜 무시하느냐?

그 모든 말씀은 원치 않는 가운데서 주어집니다. 세상에! 부부싸움이 사랑일줄 꿈에도 생각 못했죠. 1과 1이 아니라 누가 존재한다? “둘 다 배신자야. 입 다물어!” 하고 끼어드신 예수님 이 하나 됨으로써, 싸우던 말든, 하나님보시기에 하나 될 수밖에 없는 부부가 되는 겁니다. 내가 주님의 뭐 이렇게 저렇게 해도 주 안에서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주안에서는. 이것이 바로 원치 않는 길, 창세 이전에 예수님과 아버지만 알았던, 그 사귐의 믿음이 선물을 통해서 선물로 받게 되면, 모든 말씀은 다 이루었다는 차원에서, 이미 금메달 손에 쥐고, 재방송 보는 그런 느긋함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9-13 22:25 
20160907 요한1서 시카고강의5-이 근호 목사

다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요한1서 1장 8절을 같이 한 번 봅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믿음직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이 말씀은 딱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죄만 상대한다. 이런 뜻입니다. 죄가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서 나는 너희를 상대한다. 내가 죄를 겨냥한 것처럼 너희들도 너희 자신 속의 죄를 내 앞에 가져오게 되면, 이로써 하나님과 구원계약은 성사된다.

우리가 가게에서 물건 살 때, "물건주세요." 하면서 뭘 내밀죠? 돈을 내밀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저기, 죄를 가져왔으니까 용서를 주세요." 라고 이야기해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까요? 물건 가져오기 전에 먼저 뭘 가져와야 돼요?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뭡니까? 돈을 준비해야 되잖아요. 이해되시죠? 가게에서 그냥 물건을 가져올 수는 없잖아요. 그럼 하나님 앞에서는 뭘 준비해야 해요? 돈 필요 없고, 정성 필요 없고, 의미 필요 없고, 뭐만 준비하면 돼요? "죄 가져왔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렇지! 니가 제대로 나를 아는구나." 이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뭘 가져오느냐 하면 "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하는 거예요. 젠틀맨이라는 노래에 그런 가사가 있어요. 전부 다 잘남을 가지고, "니 아들 몇 등 해?" "우리 아들은 몇 등 하는데?" "차는 뭐 타는데?" "차는 이거 타는데?" 뭔가 잘남을 가지고 물물 교환하듯이 가져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여, 제가 이렇게 마음을 낮췄습니다." 마음 낮춘 것 가져와가지고 주 앞에 축복 달라고. 물물 교환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가 이렇게 주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봉사를 했으니까, 주께서 다 꼬불쳐놓은, 준비해놓은, 그 30배 60배 100배 주시옵소서." 30배, 60, 100배가 뭔가 이상한 게, 세상에! 100배가 눈앞에 보이는데 30배, 60배 달라고 하는 것도 뭔가 이상한 거예요.  

달라고 할 것 같으면 100배를 달라고 해야지, 근데 주님께서 30배, 60배, 100배를 이야기하니까, 주님께서 객관식 문제를 내신 것도 이상해요. 딱 100배 준다고 하면 아무 문제없는데, 30배, 60배, 100배를 준다고 하니까, 어느 누가 100배가 아니고 30배를 탐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100배 주세요." 하잖아요.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우리가 못되니까, 우리는 뭐냐, 가져올 때, 죄를 가져왔기 때문에 딴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죄를 가져왔다는 것은, 주님이 어디에 전문가냐 하면, 죄 씻어주는 전문가. 그게 끝.

그래서 여러분이 죄 씻음 받았으면, 얻어낼 것 다 얻어냈고, 받을 것 다 받았어요. 그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지 마세요. 죄 씻음 받았는데, 딴 것을 요구하게 되면 그거는 다른 하나님을 상상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죄를 가져오너라! 다시 말씀드릴까요? 돈 가져오너라! 물건 줄게. 문방구에서 신상품 나오면 애들이 막, 아침에는 안 나왔는데, 오후에 물건이 나와 있을 때, 그럼 애들이 "아저씨! 외상 돼요?" "으응~ 안 돼! 집에 가서 엄마한테 이야기해서 돈 가지고 와라." 하죠. "하나님! 천국 돼요?" "으으응~ 안 돼! 집에 가서 죄 가져오너라. 죄 가져오면 천국 줄게."

의인은 천국에 못 갑니다. 주께서 의인을 요구하지를 않아요. 주께서 요구하는 것은 죄인을 요구하기 때문에, 죄만 가져오면 천국주십니다. 정말 들어보면 이건 주일학교 어린이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어른들은 왜 자꾸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어요. 죄 가져오라고 하면 자꾸 정성들이대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해가지고 기도했다고 하고. 자, 기도 가져오는 사람, 헌금 가져오는 사람, 전도 가져오는 사람, 봉사 가져오는 사람, 가정의 화목 가져오는 사람, 왜 그런 쓸데없는 것들을 가져와요. 주께서는 그걸 안 받습니다. 근데 그걸 왜 가져오느냐 하면, 가짜 하나님을 자기가 만들어가지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상대한다. 인간을 안 봅니다. 죄인만 상대하지 인간이라는 것은 없어요. 죄인을 상대하지. 이 말을 더 나아가보면 하나님은 죄를 만들어내면서 죄인과 상대한다. 좀 더 발전돼야 합니다. 아까 하나님이 죄와 상대한다고 할 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면 "그럼 제가 죄를 만들어오겠습니다." 이래 되죠. 그게 땡이라는 겁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겁니다. 니가 죄를 지어서 죄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니는 죄를 만들 재주가 없어요. 죄를 누가 만드느냐? 하나님이 죄를 만들어내신, 하나님이 만들어낸 죄를 가져오면 용서해줄게.

그럼 하나님께서 만들어낸 죄를 가져오는 방법이 뭐냐, 이거는 왕년에 성경공부 좀 했던 사람들은 다 압니다.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는 방법이 뭐겠어요. 율법이죠. 율법. 하나님의 법인 겁니다. 하나님의 법. 법이 없는 곳에서는 뭐도 없다? 죄도 없다. 없는 죄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집어넣어버리면 없는 죄도 새롭게 만들어져요.

이거 뭐 과격한 것도 아니고. 로마서 7장에 분명히 나와 있는 겁니다. 제가 혼잣말로 안 들리게 하는 것은 녹취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근데 이 말도 녹취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8절에 보면,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절,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너무 좋은 말씀이라고 제가 감격스러워요.

전에는 나는 나라고 우겼죠? 조폭같이. "이리 오너라." "누구십니까?" "나는 나야." 자기가 살아 있어요. '나를 알아 도! 나는 이정도야. 내 재산은 이정도고. 나는 이정도로 깨끗한 사람이야. 나를 알아 도!'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성경 말씀대로 나는 살아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리와! 이리와! 너 이리와! 니가 어떤데?" "저 살아있습니다." "이리와! 이리와!" 여기 7절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나는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주께서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을 집어넣으니까, 졸지에 탐내지 말라는 그 율법에 의해서, 율법이 살아나면서 동반해서 뭐가 살아나느냐 하면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죽어있던, 탐냈습니다를 살려내고 살아있다는 나는 죽여 버린 거예요. 다시 한 번 텀을 줍시다. 지금 긴장해야 될 시간이에요. 주무시면 안 됩니다. 내 속에 잠자고 있던 내 죄를 끄집어내고 나도 살아 있다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는 동시에 나를 죽였다는 겁니다. 죽였다.

제가 억지로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 말보다 성경 자체가 더 어려워요. 이거는 여러분들이 증거 할 수 있죠? 성경 방금 봤죠? 성경 여러 장 봤죠? 대단히 어렵죠? 제가 나름대로 쉽게 해드리는 겁니다. 자, 성경을 볼 때, 출발점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자, 성경을 내가 덮었다고 치고, 로마서 7장을 모른다고 치고, 상상해봅니다. 나는 살았고, 살아있는 내가 죽어도 나는 좋은데 가야지. 나는 지옥가기 싫어. 그럼 거기에 물 한 방울 없는데 거기 왜 갑니까? 갈려면 살아서도 고생했는데 죽어서는 고생 안 해야 하지 않습니까? 천국 가려면 내가 뭘 하면 좋을까? 옳지! 성경을 읽자. 펼쳤는데, 로마서 7장 나왔어요.

"주님이여, 저 좋은 말씀 걸렸습니다. 자, 제가 천국 가는 데 있어서 주의 말씀 지킵니다." 라고 보는 거예요. 보는데, 살아있는 내가 살아서, 주의 말씀 지켜서 산 채로 천국가고 싶어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니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너를 산 채로 보내지 않고 너를 죽인 채로 보내겠다." "그럼 자살할까요?" "자살하지 마! 내가 너에게 뭘 보여줄게. 뭘 보여주게 되면 니는 자살 안 해도 이미 죽은 자가 되고." "그럼 죽고 나면 못하잖아요?" "죽은 동시에 니 속에 있는 죽은 죄를, 도리어 이제는 살려내어서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죄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나와 하나님과 관련지을만한, 의미가 있는 죄인으로서 우리를 상대하시는데, 그 솜씨를 내 쪽에서가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성도에게 실시를 하신 것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럼 여기서 제가 질문 하나 들어갑니다. 자, 질문이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율법을 대할 때만 탐심이 일어납니까? 평소에도 탐심이 일어납니까? 평소에도 탐심이 일어나죠. 그럼 우리가 평소에 율법을 모르고 산다면 사람이 탐내는 것이 그게 정상이죠. 나만 그래? 다들 그러지. 이쁜 것 보고 이쁘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주여, 그것도 죄입니까? 이래 나오죠. 전혀 우리는 탐낸다는 사실을 주의 뜻이 아니면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의 율법을 보게 되면, 그것이 탐낸다는 죄를 영글어내기 위해서, 만들어내기 위해서 우리 앞에 맛있는 선악과부터 해가지고, 역사 끝 날 때까지, 어쩌면 이 세상에서 탐낼 일이 그렇게 많은지. 이쁜 여자도 있고, 잘생긴 남자도 있고, 차도 있고, 좋은 집도 있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는 것으로 쫙 깔려있어요.

"여기 좋사오니" 베드로가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내 맘에 드는, 그냥 떠나기는 너무 아쉬워. 아쉬워. 가더라도 누릴 것은 누리고, 즐길 것은 즐기고, 노래방에 가서 한 한 시간정도 노래 부르고. 그렇게 하고 싶어요. 주께서 재림하셔서 휴거하는데, 저기 재미있는 파티에 한 번 참석하고 갔으면 좋겠는데, 그냥 나와! 손잡고 하늘로 그냥 올라가게 되면, 좋긴 좋지만 예를 들어서 못해본 거, 골프 치는 것도 좀 하고 싶고, 뭔가 손을 대서 코도 높이고 싶고, 이런 것을 못해보고 천당에 가니 좀 섭섭할 거 아닙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데려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데려갈 때, 우리가 죄에 딸려 가는 거예요.

그 죄가 어디서 나왔는가? 너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너는, 그게 죄를 죄 되게 하는 시다발이로, 죄에 딸려서 가는 거예요. 내 주체가 주인이 아니고, 내 속의 죄가 주인이 될 때, 바로 그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인 것을 알 때,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을 아신 겁니다. 제대로 하나님을 아신 거예요. 그럼 이런 하나님을 아신다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만 국한되고, 성령을 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상대할 때, 내 속에 죄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나 자체와, 하나님 자체와 흥정과 타협과 협상에 의해서 구원되고, 안 되고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신이시여, 착한 일을 원하시죠? 제가 압니다. 천국은 깨끗한 사람이 간다는 것을 제가 아니까,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51퍼센트의 선한 지분을 얻어서 가겠나이다. 됐죠? 됐나? 됐심니까? 이러면서 가는 거예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강의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안다 치고,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죄가 무엇이냐? 율법에서 끄집어낸 그 죄가 무엇이냐를 이제부터 설명 들어갑니다. 구약에서는 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들어보시면 여러분이 아! 하고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우상. 우상숭배가 죄입니다. 우상숭배가 죄인데, 여기, 우상숭배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이 "아이구, 목사님 그게 죄인 줄 알아요." 하잖아요. 그럼 제가 맞나, 틀리나, 한 번 해보겠습니다. 안다고 하니까 약간 약이 올라서, 우상이라는 것을 이렇게 쓰겠습니다. 하나님 믿는 것이 죄입니다. 이거 납득이 됩니까?

방금 제가 이거 쓰기 전에 뭘 썼습니까? 우상이죠. 구약에서 에스겔이 우상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지적을 하잖아요. 근데 그 당사자들은 우상을 믿었어요? 하나님을 믿었어요? 하나님을 믿었어요. 참 하나님을 믿었어요. 인간이 기껏 믿었던 하나님은 전부 다 우상이 됩니다. 왜? 인간 안에 뭐가 잠복되어 있기 때문에? 죄가 잠복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주체가 아니고 죄가 주체죠. 죄가 하나님마저 왜곡시키고, 변경시켜서, 내 죄가, 죄가 아닌 걸로 위장하는데 필요한 짓만 골라서 믿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오늘날 한국교회에요. 어쨌든 간에 내가 섬기고 헌금하는 것을 칭찬해주는 하나님을, 나의 예수, 삼위일체 하나님, 뭐 명칭이야 어떻든지 간에 진짜, 진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섬기는 거예요.

그렇게 섬겨버리면, 나의 죄는 더 이상 들키지 않고, 나의 장점 들고 하나님과 직접 흥정에 나서기 때문에, 30배 이야기가, 60배 이야기가, 100배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주님이여, 십일조 한다고 애쓰는 것 주께서 아시죠? 이거 돈 모으니 라고 애 먹었습니다. 이번 교육관 짓는데 제가 얼마나 공들였는지 아시죠? 저희 집 팔아서 전세로 옮기고 나머지 가지고 바치는 겁니다. 주께서 이뻐해 줄 거지용? 이러거든요. 이미 그 자체가 구약에서는 뭐냐 하면 우상이지만, 오늘날에 나 우상 섬긴다고 이야기하는 사람 없어요. 전부 다 참참참 신, 가짜 참기름 말고 진짜 참기름 있잖아요. 진짜 참기름을 못 믿어서, 진짜, 진짜 참기름 하는 것 있잖아요. 진짜, 진짜, 그것도 모자라서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섬긴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되기 전에 사울이었습니다. 추호도 자기가 믿는 여호와가 하나님, 진짜 여호와로 알았지, 우상이라고 평가받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어느 누구도 상대방이 믿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그것을 어제 밤에 이야기했습니다. 공동체에서 질서를 위해서 하는 그것을 윤리라고 하죠. 어제 것 복습합시다.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양심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도덕. 윤리를 파괴하는 것은 짐승만도 못하고, 도덕이 없는 인간은 죽여 버립니다. 여러분 정신병자와 짐승만도 못한 것을 구분해야 해요. 정신병자는 혼자서 도덕이 없어요. 그러나 남을 괴롭히고 혼자 설치는 이런 인간들은 쳐 죽일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회는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면 병원에 가야하지만, 윤리적으로 문제 있으면 교도소에 보냅니다.

제가 갑자기 어려운 이야기해서 죄송하지만, 여러분 이해되시죠? “저 인간은 교도소 보내야 돼. 이거는 정신이 말짱한데, 까불락 대는 것은 교도소에 보내야 돼.” 그런데 이건 뭐 물인지, 잉크인지, 돈인지 모르는, 정신이 이상한 이런 사람은 무슨 도덕이 있습니까? 그냥 파충류 본능대로 움직이는데. 아니, 2개월 3개월 된 애기한테 도덕도 모른다고 하면 말이 돼요? 지금 집안이 부도가 나서 차압이 들어왔는데, 애는 그 사실을 모르고 젖 달라고 울고 있을 때, “애야, 니는 도덕도 없나? 니는 양심도 없나? 우리 집 봐라. 지금 차압 들어왔는데 니가 젖 달라고 울면 줄 수 있겠나?” 이걸 애한테 할 이야기가, 할 잽이 안 되죠.

그걸 애한테 하면 애가 압니까? 그럼 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으으응~” 하면서, 애가 천재에요. 천재. ‘우리 집안에서 내가 조심해야지. 내가 너무 먹는 것만 챙기나?’ 이러면서 젖을 안 먹죠. 이건 이미 밥 먹는 정도가 돼야 되지, 젖 먹는 애가 무슨 그런 시련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른 됐다고 해가지고 남한테 사기나 치고 지 잘난 척 하는 것은 교도소에 집어넣을 윤리라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인간은 뭘 지키려고 하겠어요? 도덕과 윤리를 지키려고 하겠죠. 윤리는 뭐라고 했습니까? 이 사회에서 사람대우 받으려고 하는 것. “나 이정도 도덕적이야. 또는 저사람 앞에서는 나는 기본 부모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에, 나는 어디가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이야.” 라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고 인정받고 있죠. 그렇다면 사람들에게만 인정받아야 돼요? 저 천국에 계시는 하나님께도 인정받아야 되겠어요? 하나님에게도 인정받아야 되겠죠. 그렇다면 윤리, 도덕을 살리고, 살리고, 기 살리고, 살리고 하는, 그 살리고를 인정해주는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이스라엘이고,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대로 남은 거예요. 그게 우상이었다는 거예요. 우상.

선지자는 고난 받는데, 그들은 윤리도덕으로 하면 하나님께서 복 줄줄로 알았던 거예요. 선지자는 핍박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장 비유에서 포도원에 종을 보냈어요. 포도원 농부들이 때리고 죽이고 아프게 했어요. 또 보냈어요. 또 때리고 죽이고 아프게 했어요. 마지막 아들을 보내니까, 이제 아들만 죽이면 이제는 포도원이 우리들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왜 이야기하셨습니까?

인간의 인류 역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고 뭐고 없이, 나는 이 정도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신은 나를 천국에 넣어주어야 하고, 30, 60, 100배, 복을 줘야 되지. 나를 이렇게 섭섭하게 하는 하나님은, 나한테 믿으라는 소리 하지 마! 당신은 사탄이지 진짜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 구미에 맞고, 내가 선택할만한, 그런 어떤 나한테 괜찮은 장점들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럼 나도 당신을 선택해서 믿겠습니다. 

이 건방떠는, 이것이 선악과 따먹은 악마의 표현형이고 악마의 앞잡이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니그들 애비는 악마니라. 어떻게? 악마이야기 들어보니까 악마가 참 정상이죠? 어쩌면 우리하고 공통적인 동일한 심성을 갖고 있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교회 다녔고, 뭐 착한 일 하게 되면 다음 주가 은근히 기대돼요. 착한 일 했으니까. ‘참 우리 애가 이번에 시험 치네? 토요일에 치는데, 국가시험 친다고 했는데, 사전에 착한 일 좀 많이 해야 되겠다.’ 조심~조심~왜? 내일 시험 치는데 함부로 경솔하게 굴다가는, 나한테 올 벌이 자식에게 떨어지면 성적이 떨어질 수 있어요. 일단은 시험 끝날 때까지는 방종하지 말고 근신하고 있어요. 시험치고 난 그 다음부터는 스트레스 풀더라도 시험 전까지는 조심하는 거예요. 그렇게 계산하는 고 심보, 우상적인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저한테 항의가 들어오죠. “목사님. 저는 그런 신 말고, 참된 신을 섬기고 있습니다.” 고거는 더 지독한 죄가 되는 겁니다. 감히 처음부터 그렇게 다짐을 하고, 친절히, 나름대로 친절하게 설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착한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뭘 원한다? 죄를 원한다고. 사전에 그렇게 고집했던 되도 않는 질문 받고 상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쯤 돼서 강의하게 되면, “그럼 목사님, 저는 우상섬기지 않고 참된 신을 섬길게요.” 또 이래 나온다 말이죠. 인간들에게 나올 것은 우상밖에 없어요. 사람의 행동이 지 좋아라고 행동하지, 누구 좋아라고 행동하겠어요?

내 도덕을 알아주고 내 윤리를 알아줘서 거기다가 보너스까지 해서 복까지 주면 금상첨화인데, 그런 하나님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게 바로 우상이고 죄인데, 인간은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죄를 찾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단, only you~♬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 사람은 바로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 해결 할 수가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보고 빠지래요. 죄인이 껍죽대지 말고, 니가 하나님도 모르면서 하나님하고 거래하려고 나서? 내 뒤에 서!

영화관에 가서 표 사는데, 앞 사람이 열 사람의 돈을 다 내겠다고 해요. 그럼 돈 내는 사람 뒤에 서면 될 거 아닙니까? 돈도 안 내고 공짜로 보는 주제에, 표 살 때, 앞에 와서는 “F열에 5번 걸로.” 아니, F에 5번이라니요? 천국은 그 분 맘대로, 값을 지불하는 그 분이 어느 자리인지 그건 그 분이 결정하지. “니는 내 뒤에 서라.” 뒤에 서라고 하니까, “에이, 창가에 제일 좋은 자리로 주지.” 이런 소리 하고 있는 거예요. 자꾸 지가 간섭하는 거예요. 주여, 내 인생 이래 가지 말고, 이래 가가지고 천국에 넣어주세요. 우리 아들 좋은데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자꾸 주님한테, 자꾸 이렇게 뭐라고 할까? 압력을 행사한다고 할까요? 뇌물 비슷한. 자꾸 주님의 결정에 압력을 행사하는 거예요.

"우리 서로 사귐이 있고"(요일1:7), 오늘 본문처럼 우리 서로 사귐이 있잖아요? 사귀면 내 말 들어줘야 할 거 아닙니까? 이왕 할 거면 이렇게 해주세요. 어이, 죄인아! 내 뒤에 가. 내 뒤로 가. 애들 노래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이런 노래 알아요? 중국에도 있어요?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하면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겠니. 찾겠니. 하면 뭐 누구 꽃을 찾겠다. 찾겠다. 해서 가위 바위 보를 합니다. 자, 가위 바위 보를 하는 사람의 결정에 의해서 뒤에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뽑혀서 이긴 편으로 가야 되는 겁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할 때, 그 대표자는 예수님 밖에 없어요.

왜? 유일하게 우상이 아닌 참 하나님을 아시니까. 그러면 예수님 뒤에 서야 돼요. 그걸 성경에서는 예수 안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하신 승리를 아무 한 것도 없이, 그냥 뒤집어쓰는 겁니다. 여기는 집이 단독이잖아요? 근데 아파트 보면 베란다가 있어가지고, 가족한테 안 좋으니까 베란다에 가서 담배 피우면 3층으로 담배냄새가 올라가니까, 담배냄새 싫어하는 3층에서 2층한테, 담배 좀 피우지 마세요. 이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담배를 피우면 간단하죠. 3층에서 바케쓰에 물을 가득 받아서 부어버리면 되죠.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를 뒤집어쓰는 거예요. 죄가 전혀 보이지 않도록 바케쓰 물 퍼붓듯이, 우리가 뭐 잘했다, 못했다 하는 자체를 그  의미가 없게 만들어요. 그 자체를.

내 윤리도덕을 챙길 여지가 없게 만들어요. 자, 아까 사실은 윤리도덕 앞에 뭘 빠트렸어요. 이 도덕은 나의 도덕이고, 이 윤리는 나의 착함을 보여주는 나의 윤리잖아요. 이 나의 도덕, 나의 윤리로 흥정해서 가겠다는 것은, 이게 바로 뭐냐 하면 개인구원이에요. 개인구원.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예수 이름 외에는 달리 구원받을 이름이 없어요. 너 말고 너를 대표하는 사람 이름 대라? 이 말이에요. 그럴 때, 내 이름 댈까요? 누구이름 대야 돼요? 누구이름 댈까요? 주의 이름 대야 돼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참 쉽죠잉~ 너무 쉽죠.

너무 쉬운데, 그 말을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왜 기분 나빠 합니까? 자기 요구가 옵션으로 안 들어갔다고 짜증내는 거예요. 자기 요구사항이. 그러니까 자기죠. 자기. 나죠. 그러니까 개인구원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꼭 이렇게 머리를 내밀고요. "저는요?" 이래 나와요. 이게 나무랄 입장이 안 되는데, 예수님 제자들 가운데에도 있었어요. 전체 예수님 제자들이 열둘이 맞는데, 또 치맛바람이 있어가지고 우리 애가 천국에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세요. 꼭 이렇게 개인구원으로 들이대는 엄마가 있어요. 누가 높으냐, 하는 사람이 있고.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입장에서는 다 죄인으로 다루기 때문에, 개인구원이 없고, 주님의 공로로, 주의 이름으로 가는 겁니다. 그럼 주의 이름으로 간다는 말은, 그럼 "주의 이름을 부르는 나는 개인이잖아요?" 이래 나옵니다. 이래 나오면 안 돼요. 왜냐하면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나만 부르면 내 개인으로 가는데, 이 세상에서 나만 구원받을 것 같으면 개인구원이 되는데, 주의 이름을 나만 부릅니까? 아니면 내가 평소에 사이도 좋지 않는 저 사람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에이씨. 니가 왜 천국에 와? 니가 천국에 오면 나는 천국에서 못 살아. 니가 천국 오면 나는 지옥 갈 거야. 나 니 꼴 보기 싫어서 천국 가는데, 니까지 오면 어떻게 할 거야? 이래 나오는 것이 개인적인 구원의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런데, 어? 내가 믿는 주님을 저 사람도 믿어. 그러면 차이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둘 다 구원받은 상태에서 차이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차이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 강의의 제목을 구태여 붙인다면, 지금까지는 안 붙였는데, 붙인다면 이겁니다. "무차별성" 일체 차이가 없어요. 일체 차이가 없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물 주었다고 했던, 어떤 사람은 심었다고 했던, 뭘 했던, 심었다고 상금 더 주고 물 뿌렸다고 상금 더 주는 것 없습니다. 아까 예를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내 이름 아니라고 했죠. 예수 이름으로. 앞에 표 값을 대신 내 준, 그것을 죄 값을 치러 준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 이름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이 이미 내 죄를 치렀잖아요." 라고 동의한다 이 말입니다.

천사가 와서, "야! 니 뭘 잘했다고 천국에 와?" "누가 내 대신 죄 씻어 줬어요." "누군데? 그게 누군데? 석가모니?" "아니요." "누군데?" "나사렛 예수님이 나를 씻어줬어요." "어이구! 이거, 니가 언약완성을 아는구나. 들어와! 들어와!" 천국에 넣어준다 말이죠. 들어가는 것 까지는 좋은데, 보니까 지 돈 떼먹고 부도나게 만든 그 인간도 들어온다 이 말이죠. 옆에. 그래서 지는 가면서 발로 차는 거예요. 시비 거는 거예요. "어이! 니가 천국을 니가 뭘 보고 들어와?" 주님께서 대신 값을 치러주신 이유가 오늘 요한일서 말씀에서 우리를 뭘로? 인간으로 보지 않고, 행함으로 보지 않고, 윤리도덕으로 보지 않고, 우리 속에서 뭐만 끄집어냈다? 죄만 끄집어내서, 죄와 예수님의 그 씻어주심과 해서 천국 넣어주는데.

갑자기 서로를 보는 순간, 갑자기 둘 다 죄인이라는 생각은 날아가 버리고, "저 인간 때문에 내가 한평생 고생한 생각하면 내가 도저히 있을 수가 없어. 니가 지옥가든지 내가 지옥가든지, 둘 중의 하나는 가야지. 그래도 주께서 가라고 하니까 가지만 주님의 무슨 조치가 있을 거야." 하고. "어이, 이리와 봐!" "아이구, 돈 못 갚아서 미안하다." "미안한 것은 아는데, 니가 나한테 사기 친 것은 아는데, 니 여기 왜 왔어?" "천국 갑니다." "천국 간다고? 니가 나한테 나쁜 짓 한 거 알지?" "아이구, 나쁜 짓 한 거 알죠. 그러니까 내가 죄인입니다." "듣기는 들었구나. 나중에 천국 가서 한 번 보자."

그래서 천국까지 간다 이 말이죠. 둘 다 천국 갔다고 치고. 이건 상황극입니다. 하나의 상황극인데, "주님!" "왜? 기쁘지?" "예. 기쁜 건 기쁜 거고 찝찝한 것이 있습니다." "뭔데? 나는 천국 받을만한 정당한 사람인데, 저 사람은 사기 쳤는데 여기 왜 왔습니까?" 이렇게 고소하는 이유는, "에구, 니 고생 많이 했었쪘쪄요? 니는 천국에 높은 자리에 가고. 뭐? 사기를 쳐? 니는 저 구석에 가라!" 라는 판결을 우리가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것 때문에 그래요. 이게 바로 갑자기 집단구원에서 다시 뭐로 바뀌었어요? 개인구원으로. 그럼 뭐가 날아갔어요? 무차별성. 앞에 뭐 하나 붙입니다. 죄의 무차별성. 죄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 있잖아요? 도둑질 한 사람하고, 살인한 사람하고, 살인 하나도 안 한 사람하고 차이 나잖아요? 아니요. 내가 죄를 찾아서 죄를 바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율법을 주어서 찾아내게 되면, 그 찾아낸 죄는 똑같아요. 더 시커멓다. 시커멓다가 아니라 다 시컴해요. 똑같아요. 어떤 차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가서 싸울만한 일이 있거든 천국 가기 전에 실컷 싸우세요. 누가 잘했나? 하고 싸우세요. 천국 가봐야 안 통하니까. 그건 내가 만든 법가지고, 내가 만든 기준가지고 싸우다가, 그냥 싸우다가 끝나면 안 되고. 싸우다가, 그러니까 우리가 둘 다 죄인이지? 그치? 이걸로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싸울 건 싸워야 해요. 성질나는데 안 싸울 수가 없어요. 실컷 싸우다가, 그러니까 우리는 둘 다 똑같은 인간이야? 그치?

싸우게 된 상황은 주께서 유발한 상황입니다. 싸워서 없던 죄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죄인인데, 싸움을 통해서 자기 본성을 노출시키게 주께서 그렇게 유도하신 거예요. 심지어 부부싸움까지도 주께서 유도하신 겁니다. 뭐 신비주의라고 탓하지 마세요. 그렇게 사시면 됩니다. 그럼 성도한테 그런 특혜를 주는 이유가 죄를 가지고 오지 아니하면 천국은 없습니다. 사람은 죄를 감추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해가지고 어떤 사람은 죄를 자꾸 끄집어내는데, 자기 손으로 자기 죄를 끄집어내지 마세요. 가만히 그냥 사세요. 그냥 살아도 죄인데, 거기서 뭘? 죄도 아닌 것을 가지고 지가 뭐, 무슨 새삼스럽게 죄를 구분해요? 물에다가 참기름 집어넣고 휘발유 집어넣어보세요. 집어넣고 참기름하고 휘발유를 구분하라고 하면 구분할 수 없어요. 전부 다 섞여가지고 다 기름인데, 이걸 어떻게 구분해요?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로새서 3장 5절에 있는 말씀이죠. 모든 것의 눈에는 탐욕이 있고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구약에서 주께서 이스라엘을 저주케 했던 그 원인은 우상. 그리고 모든 죄는 뭐냐 하면, 니가 잘못해서 죄가 아니고, 다른 하나님, 우상이니까. 다른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알고 살았던 그 모든 것이, 바로 죄의 가장 기초였고 뿌리였던 것입니다. 다른 하나님. 그럼 다른 하나님이 죄라면, 의는 뭡니까? 뻔하죠. 참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의가 되겠죠. 그럼 참된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죄 용서 할 때 압니다. 죄 용서할 때. 아, 그러면 죄를 알고 가져오면 용서해준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언제요? 용서할 때, 비로소 내 죄가 어떤 죄인지를 뒤늦게 알죠. 순서는 죄 가져오면 용서하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니가 죄를 알면 용서가 된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거는 우리가 다 떠나고 난 뒤에 아는 순서고, 실제 현실적인 순서는 뭐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용서해주고 용서했던 죄가 무엇인가는 뒤늦게 죄를 까발리는데, 우리의 한평생을 다 보내게 하십니다. 금메달 따고 난 뒤에 금메달 딸 때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평생을 통해서 알게 되는 거예요. 어제 이야기했죠? 우리는 끝까지 배신자여야 한다고요.

그 배신하는 범위가 뭡니까? 내가 나에 대해서 배신해야 돼요. 아브라함이 아브람을 배신하게 되죠. 어제 이야기했습니다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새롭게 만든 피조물이 아브라함이죠. 근데 아브람은 뭐냐 하면 혈통적으로 온 것이 아브람이에요. 나의 본능적인 본성이,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나를 핍박을 해도 그렇게 핍박이 심해요. 내가 나를 핍박한다니까요. 하나님이 만든 새로운 피조물은 뭐냐,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거예요. 옛날의 나, 잘나갔던 나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 좀 죄 좀 지을 수 있지? 뭐? 죄만 지었나? 착한 일을 더 많이 했는데?" "니 교도소 몇 번 갔다 왔어?" "안 갔다 왔는데요." "거봐! 니 착하잖아."

자꾸 옛날의 나는 나를 긍정하려고 하고, 죄를 용서해준 예수님이 들이대는 진짜 나는,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그 나고. 이 두 개의 나 중에서 하나님은 누굴 좋아하느냐 하면, 주께서 만들어준 나를 좋아하는데, 나는 누구한테 정이 들고, 맘에 들고, 자연스럽게 따라가느냐 하면, 역시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고 남한테 자랑할 것이 있을 때, 희망도 있고 살 보람도 있고. 우리는 이쪽을 그렇게 집착하고 좋아하는 거예요. 아줌마들 모이면 지 자식 자랑들 하는데, "이번에 우리 아들 하버드대 들어갔는데, 대출까지 해도 공납금 걱정돼서 죽겠어." 공납금 걱정하긴 뭘 걱정 해. 지금 지 자랑하고 있는데. 사람 사는 재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 자랑하는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혼자서는 못 살아요. 왜? 자랑 할 대상이 있어야 살거든요. 남편이 직장에 가고 난 뒤에, 설거지 대충 하고 나면 아침 아홉시 반 됩니다. 그때부터 언제까지 전화를 하느냐 하면 열두시 다 되어서까지 전화를 하거든요. 그렇게 수다 떨 때, 그거 외롭지 않거든요. 해댈 때, 나는 죄인입니다. 그 이야기합니까? 나는 잘났다. 그 이야기해요? 나는 잘났다. 그 이야기해요. 바로 그 자체를 죄라고 규정해주는 하는 그 분이, 내가 모르는 진짜 하나님이 해주니까. 우리는 실컷 죄만 짓고도 느긋하게, 진짜 하나님까지 아울러 알아듣게 됐으니까, 이런 복이 어디에 있어요? 세상에! 진짜 죄는 죄대로 짓고 자랑은 자랑대로 다 하면서도, 주여. 이게 죄군요. 느긋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것,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참 엄청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수천 번 물었던 것이, “목사님. 성도의 삶이 뭡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마음대로 사세요. 막 사세요.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뭘 조절하고, 뭘 조절 안 하고, 뭘 조심하고, 뭘 자기 관리하고, 절제하고. 절제하고, 관리하고, 이웃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죄인 속에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사랑하게 하신 것을 우리가 사랑한 걸로 말씀은 다 이해되는 거예요.

요한1서 3장 16절 한 번 봅시다. 3장 16절하면 유명한 구절 있잖아요. 요한복음 3장 16절.  이것도 유명해요.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씀은 누가 주신 말씀? 진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죠. 누구 안에 담는다? 죄인에게 담아서 이 말씀 하게 하죠.

그러면 이 말씀이 가만히 있겠어요? 이 말씀이 새로운 인간을 만들겠어요? 이 말씀에 합당한 인간을 만들어내겠죠. 그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상한 것이 있어요? 없어요? 여전히 있죠. 그 예상이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이 말씀 지키려고 애쓰겠죠. 지켜집니까? 살기 바쁜데 어데? 내 귀한 몸을 형제를 위해 바쳐? 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데, 왜 남을 위해 살아요? 최선은 다하겠죠. 양심껏 이런 것 하겠죠. 양심 말고 목숨 주라는데, 우리는 목숨 못 주니까 돈 몇 푼 봉투에 넣어주면서, “그래. 재미있게 살아야지.” 그러면 그게 이웃사랑입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은 간단한 거예요. 3장 16절은 돈 주라는 거예요? 우리 목숨 주라는 거예요? 목숨 주라는 거예요. 이 목숨 주신 사람은 이 세상에 누구밖에 없어요? 친구를 위해서 목숨 바친 사람은 누구밖에 더 있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 밖에 없는 분이 이 말씀을 이룬 상태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줬다면, 그 새로운 비전은 뭐냐, “주여. 나는 주님 하신 일에 죄인입니다.” 어디에 근거해서? 3장 16절에 근거해서, “저는 죄인 맞습니다.” 하는 것이, 3장 16절을 확 완성시키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이 말씀이 우리한테 적용이 되면서, 졸지에 나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우리는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로 드러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죽었나니 나는 살았고? 죽었고? 나는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살아서 뭐 합니까? 요한일서 3장 16절의 완성을 마음껏 보여주면서,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죽은 자가 되고, 주께서는 이 말씀 자체가 살아있는 것으로 증거 되면서 우리의 옛 사람이 왜 죽어야 되는지를 깨닫죠.

그러면, “주여. 우리가 죄인이군요.” 하면서 주께만 감사할 때, 그 감사가 요한일서 3장 16절의 완성입니다. 얼마나 완성됐으면 우리 입에서 감사가 나오겠어요? “주님이여,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 나오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세상에! 못 지킵니다. 그런데 이 죄를 대신 값을 치렀다니 고맙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안에 사귐이라고 하는 거예요. “빛 가운데 사귐이라”

요한일서 1장 6절을 제가 읽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이게 바로 새로운 피조물이잖아요. 주님이 빛이고 우리는 그 안에 있고. 그러면 우리가 행한 것은 뭐가 되고? 빛이 발산이 되는 겁니다. 빛이 발산이 되게 되면 요한일서 3장 16절을 우리가 마음껏 보여 주게 되죠.

그 내용이 뭐냐 8절에, 우리가 죄 없는 자가 아니고 죄 있는 자였는데, 누가 끼어들었다? 진리가 우리 속에 와서 우리를 진리로 용서해주었다는 그 상황을 증거 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피곤하시니까. 지금 무슨 이야기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우리한테 뭘 하라고 하느냐 하면, 형제를 사랑하는데 그냥 말로 하지 말고 뭘 바쳐라? 봉투에 넣은 돈 몇 푼? 아니야. 우리의 목숨을 바치라고 하죠. 우리는 이것을 지킬 수가 없죠.

자, 중간에 누가 끼어들었습니까? 바로 중보자가 끼어들었죠. 그 중보자가 끼어들면서, 중보자가 우리 죄를 뭐 했습니까? 우리는 죄 있습니다. 말씀이 들어와야 죄가 살아나잖아요. 죄가 뭡니까? 우리는 때려죽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못 바친다? 미쳤어요? 바치게.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죄가 있으면 그냥 하나님과 사귀지를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죄를 피로써 사함을 주게 되면 우리는 죄인 된 채로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귀게 되면서 우리는 날마다 죽고, 우리 안에 누가 산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빛 가운데 사귐이 된다. 이 말입니다.

참, 이렇게 복잡한 이유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내가 내 구원의 주체라고 해가지고,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나서는 이 본심이 늘 우상섬기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근데, 아주 짧은 순간에 ‘내가 한 것이 뭐가 있지? 없어.’ 라는 순간에는 전혀 복잡한 것이 아니고, ‘오케이. 그러네요. 그런 이야기가 맞네요. 뭐가 어렵지?’ 아주 극미한 짧은 순간에. 3초. 어떤 사람은 깁니다. 4초정도. ‘자자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뭐 보답해야지.’ 또 슬슬 하는 거예요.

‘뭐 보답을 하면 주께서 상급을 주시겠지. 애 시험 치는데 내가 이렇게 봉사하면 주께서 해주시겠지.’ 또 어데? 되지도 않을 기대를 하네. 죽어야 될 내가 또 갑자기 말씀은 죽고 내가 살아나고 있어요. 언제까지 간다? 배신자가? 끝까지. 나를 걱정하고, 나에게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자기한테 실망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자기한테 실망할 마음이 전혀 없어요. 자랑하는 재미로 인생을 살아야지, 친구한테 전화해서, 나 실망했다고 이런 소리를 왜 해요. 안 그래도 어차피 기죽고 사는데. 스스로 알아서 얼떨이 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10절,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죄인 아니라고 한다면 그거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뜻이에요.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뜻이에요. 지옥가도 한참 가요. 그럼 천국 가는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끄집어내서, 예수님 보내서 죄를 뭐로? 피로. 피라는 이야기는 2장에 나오는데,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시는 그 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영생 얻게 되었고 예수님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응용문제 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 빵이 있죠? 제가 이거 빵이라고 하면 진리입니까? 진리 아닙니까? 이게 바로 진리가 아니고 죄라고 생각하면서 해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빵이 아닌 게 아니고, 주께서 하신 모든 관심사가, 이게 빵이라고 하는 그런 반응 자체를, 주님께서 팔짱을 끼고, “그래, 그거하고 나하고 무슨 의미가 있는데?” 니가 이걸 빵이라고 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어이구, 이거 니가 알았어요? 아이구, 착하다.” 그런 소리 들으려고 하지.

“주여, 제가 이걸 빵이라고 한다고 해서, 이것으로 내가 구원받거나, 내가 의인되거나, 내가 진리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라는 고백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돼요. 빵 맞아요? 다만 빵이 맞는데, 이것으로 인해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마음 자세로 빵이라고 해야 해요. 내가 이걸 빵이라고 해서 “아이구, 착하다. 복 줄게.” 이런 것이 아니고, 저걸 사과라고 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주여, 복은 우리 예수님 때문입니다.” 라고 해야 돼요. 더 나아가서 “이걸 빵이라고 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09-15 00:43 
20160908 요한1서 시카고강의6-이 근호 목사

 

제 6강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 1장 10절에 보면, “만약에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만약에 우리가 죄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백퍼센트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뜻이에요. 그러면 참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우리가 백퍼센트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일깨워주는 분만이 진짜 참 하나님이시구나.

 

근데, 그 참 하나님이 그렇게 알려주신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자기를 백퍼센트 죄인이라고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나쁜 짓도 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쁜 짓을 안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렇게 되죠. 그렇게 우리 자신이 장담한다면 하나님은 뭐가 되겠어요? 진짜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하나님으로 만든다 이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진짜 하나님과 그 외의 하나님, 딱 둘로 나누어지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과 그 외의 하나님.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 되고, 그 외의 모든 하나님은 우리가 전적으로 죄인된 것은 아니라는 것으로 관계 맺어지는 것은 다 가짜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은, 누가 진짜냐, 가짜냐를, 그걸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목제물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 주 되시는 예수님이 화목제물 되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한 것입니다.

 

1장 10절 끝에 보면,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하니라” 하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되게 되면, 1장 1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그러니까 이 땅에 특별한 분이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오신 분과 진짜 하나님과 관련성이 있다는 거죠.

 

진짜 하나님과 관련성이 있는데,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의에 이르지 못하고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데, 그 증거가 1장 7절에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 아들 예수의 피가”라고 해요. 예수님의 돌보심이나, 예수님의 사랑하심이라고 해도 충분하게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의 돌보심도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하심도 아니고, 예수님의 피라고 했거든요.

 

피는 극단적인 충돌이 일어날 때 생기는 사건입니다. 좋게, 좋게, 좋게 해서는 절대로, 피가 터지고 피가 쏟아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셨다, 구원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었다, 구원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하셨다, 구원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하셨다, 구원되지 않습니다. 오병이어 행한 후에 제자들이 다 떠난 것을 아시죠? 열두제자 빼놓고.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신 그 목적이 뭐예요? 결국은 뭘 남기고자 하시는 겁니까? 피를 남겨야 하는데, 그 피가 뭐냐 하면, 이 피가 내가 너희와 하는 새로운 언약이니, 이 잔을 마시는 자마다 영생을 얻고 이 살을 먹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6장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화목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드러내기 위한 그 주변 환경이, 그 배치도가, 우리는 죄인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쪽이고, 하나님 쪽에서는 죽이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고.

 

그냥 점잖은 말을 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고, 점잖은 말은 중간 과정이고, 결국은 죽기 위해서, 피를 흘리기 위해서 아들을 보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낸 피에 합류를 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계속 우상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만약에 피에 합류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합류하게 되면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맞습니다.” 라는 것을 아주 즐겁게 하면 돼요. 즐겁게.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아, 내가 존재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 때문이구나.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2장에 들어가 봅시다. 2장에서 제일 먼저 나온 말이 “나의 자녀들아”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먼저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여러분에게 물어볼게요. 남자6명, 여자7명을 짝을 지어서 결혼을 성사시킨다면 누가 남을까요? 일대일해서 짝을 짓는다면 여자가 한명이 남겠죠. 그 여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짝이 없겠죠.

 

예수님이 누구의 아들이냐 하면 바로, 남아있는 여자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 여자는 짝이 없어요. 그렇다면 짝이 없다는 말로 왜 이렇게 제가 여자의 후손을 언급하느냐 하면은, 이 땅에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냥 덜렁오신 것이 아니고, 구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또는 구약 말씀의 예언대로 오셨다는 겁니다. 예언대로 오셨다면 예수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구약성경이 있겠죠. 몽땅 다 들어있는 것이 당연하겠죠. 구약성경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에, 사람들은 나한테 온다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인터셉트 intercept,라는 말 아시죠? 가로채다. 가로채기 하는 것처럼 어떤 분이 오셨는데, 이 말씀이 가로채기 하신 분한테 오는 거예요. 가로채기 하시는 이 분이 남은 여자, 이 땅에서 어떤 것도 짝이 없는, 여자의 자손으로서 이 땅에 가로채기로 오는 겁니다. 이 여자의 자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우리의 어머니는 오직 하늘에 있다고 되어 있고, 27절에 보면,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뭘 설명하려고 하느냐 하면 이 단어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 단어를 설명해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이해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잉태치 못한 자여” 뒤에 ☐다. 그 네모에 잉태치 못한 자여 울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까?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구로라는 것은 애기 놓을 때 해산의 고통인데, 해산의 고통을 왜 못 느끼느냐 하면 임신된 자식이 있어야 하죠. 임신하지 못한 자여 소리를 질러 외쳐라. 뭐라고?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다. 그게 남편 없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보다 많으니까 어떻게 하라?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외치고 자랑하라. 이 말이거든요.

 

자, 이사야 54장에서 나오는 이 인용된 이 말씀과, 나의 자녀들아 죄를 범치 않게 함이라, 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제가 지금 설명해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제가 설명하기 전에 보통 설명, 흔히 주석에 나오는 보통 설명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이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해석하기를, “여러분들은 예수님 믿고 하나님 자녀 되었죠?” “예.” “그러면 죄 지으면 안 돼요.”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하더라 이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거는 사람들이 뭐 거의 없어요. 아예 없다고 할 정도입니다. 뭐 딱 보면 딱 인데 뭐. 여기서 뭐 다른 설명이 나올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다른 설명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죄 짓는다 할 때는 그 사람이 어디에 위치해 있느냐 하면은, 땅이라는 차원, 땅에서 죄 짓고 말고가 돼요. 땅에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의 자녀들아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할 때는, 그 죄라는 것은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땅의 세계 자체를 의미해요. 땅의 세계 자체.

 

남편이 있어서 자식을 많이 낳은 상황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육적으로 자식을 많이 낳아서 형성된 이 인간세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애기가 어디서 나왔지? 남편에게서 나왔구나. 남편이 있으니까, 애기를 낳았지. 애기를 낳았으니까 이 땅에서 사는구나. 이제부터 죄 짓지 말자. 그러니까 죄 짓지 말자가 뭐냐 하면, 기존의 상황이, 남편 있고 생긴 자식들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자. 이래 되잖아요.

 

근데 성경은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죄 짓지 말자가 아니라 아예 이 세상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자체는 죄 아닌 게 없다는 겁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죄가 아닌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하나님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죄를 만들어내되, 우리는 아예 의가 없는 쪽으로 만들어낸다는 거죠. 만약에 의가 있다고 한다면 누굴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든다? 하나님의 조치를 전부 다 거짓말로 만든다는 거예요.

 

그럼 이 땅은 결국은, 우리는 이 땅에서 뭘 해도 죄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한 거예요. 그럼 우리는 이 땅에서 죄다, 의다, 할 것 없이 아예 통째로 이 땅의 모든 것은 죄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서 생겨나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자녀는 말씀에 의해서 나와야 되거든요. 그 말씀을 제가 이사야 54장을 예를 든 거예요. 이사야 54장을 인용한 갈라디아서 4장 26절을 보면 우리의 어머니는 땅에 있다? 하늘에 있다? 누가 읽어보세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우리 어머니죠. 안산홍 집단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는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에 있으니까. 땅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남편과 인간의 여자가 만든 그런 자녀들밖에 없는데, 그들이 잘했다, 못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땅에서 태어난 것, 남편 있는 자식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죄가 된다 이 말이에요. 이게 진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라는 겁니다. 아휴! 정말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걸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지 누가 이야기하겠어요?

 

“우리 예수 믿고 바르게 살자.” 지금 바르게 살자고 하는 그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예수 믿었으면 죄 짓지 말자.” 지금 그 문제가 아니고, 니가 소속이 어디냐? 그 문제에요. 니 소속이 어디냐? 소속이? 우리가 정말 죄 안 짓는 사람 같으면요, 죄 안 지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여. 우리 소속은 땅에 있는 소속이 아니군요.” 이게 죄 안 짓는 사람에게 나올 고백이에요.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해서 우리 죄 짓지 말자.” 서로 격려하고 하는 이것이 죄 안 짓는 것이 아니고. “주여. 우리는 하늘에 속했지, 땅에 속하지 아니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죄 안 짓는 하나님의 자녀의 합당한 내용물이 된다 이 말이죠. 내 자녀들아!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인간들아! 이런 뜻이에요.

 

자, 어째서 그런가? 모든 이 세상의 여자는 태어나면서 남자한테 소속이 되어 버리고, 남자의 일부가 되어 버려요. 동시에 단독적인 여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뭐냐, 마이너스남자에요. 남자가 플러스남자라면 여자는 마이너스남자에요. 그래서 플러스(+)마이너스(-)가 만나면 그게 1이 되면서, 그 1은 누가 가져가느냐, 그 명목은 아담이 가져가요. 남자가 가져가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은 거예요. 아브라함이 무슨 자궁이 있습니까? 남자가 무슨 남자를 낳아요? 남자가 애기를 낳는 것이 아니고 남자는 그냥 남자인데.

 

하나님께서 뭘 보느냐 하면 자식은 여자 소속이 아니고 남자 소속이 되는 이유는, 여자마저도 처음부터 남자 소속이 되는 거예요.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 그래서 여자는 없는 거예요. 여자는 소녀 때는 아버지에게 속했고, 결혼하게 되면 남편한테 속하고. 그러면 이혼하면 새로운 남자한테 속하기 위한 예비상태에 들어가지, 단독적인 여자는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 세상은 여성이 없는 세계, 곧 남성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남성의 세계에 속하는 겁니다. 육에 속한 세계입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4장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절,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여기에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어요. 하나는 뭐냐, 육체를 따라 난 자 따로 있고, 그 다음에 뭐? 성령을 따라 난 자.

 

제가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있느니라” 여기서 제가 말을 멈추겠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육체로 따라 난 자, 아버지 엄마가 동침해서 태어난 자식들이 있대요. 한다면 여러분이 뭐라고 합니까? 그럼 사람치고 다 부모에게서 태어났지? 그게 다지? 아니, 아버지 엄마가 동침해서 자식 낳는 거, 그것 말고는 무슨 인간이 또 있습니까? 라고 한다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겠어요? 놀랍게도 그 외에 따로 있거든요.

 

아니, 아빠 엄마한테서 자식 낳는 것이, 그게 육체의 전부지. 뭐가 있겠습니까? 엄마가 하늘에 있거든요. 무슨 말도 되도 않는 소리? 무슨 엄마가 하늘에 있어요? 그럼 우리가 신경질적으로 그럼 하늘에 있는 엄마는 죄 없겠네요? 바로 그 이야기 하는 거야. 바로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말은 니가 낳아서 죄 짓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 사람의 본질이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본질이. 땅에서 낳았든, 육체로 낳았든, 그 이유 때문에 무조건 그 사람은 죄의 피울 수밖에 없고, 죄를 유발할 수밖에 없고, 죄를 짓게 되는 본성을 본인이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우리가 지금 요한일서를 보는데, 이 요한일서가 신약에 속하죠? 본문에서만 자꾸 파악하려고 하는 거예요. 근데 신약은 어느 바탕위에 있느냐 하면, 구약의 바탕 위에서 예언된, 구약의 예언이 신약이 되는 거예요. 그럼 신약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반드시 그 기본이 되는 뭘 파악해야 됩니까? 구약의 흐름을 따라서 신약의 내용이 들어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1장의 이야기,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다. 2장에서 자녀들아 너희는 죄 짓지 말라고 하는 그 말이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죄라는 것이, 일단 이 세상의 전부가 다 죄라면, 죄 안 짓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가 아니고, 소속이 죄 안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소속으로서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죄 안 짓는 것이 뭐냐, 죄 안 짓는 것은 중보자를 아는 것이 죄 안 짓는 거예요. 예수님을 아는 것이 죄 안 짓는 거고, 뭐가 죄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죄다. 이것이 요한일서 내내 끌고 가는 테마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어요. 못 알아듣는다는 말이에요. 그게. 세상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고, 하늘에 속한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는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는다고 되어 있죠. 이미 본질 자체가 같은 인간을 두고 똑바로 하고 죄 짓지 말아라 하는 것이 아니라, 니 소속이 어디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고향이 어디에요? 고향이 어디냐고 묻지 마세요. 이런 노래도 있지만. 니 소속이어딥니까? 하늘이에요? 땅이에요? 라고 묻는 거예요.

 

하늘에 속한 사람은 누가 만들었어요? 라고 물으면 땅에 속한 사람은 “제가 나름대로 착해서 만들었어요.” 이렇게 대답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우리의 대언자되시는 곧 화목제물이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어요.” 이야기하고. 반면에 세상에 속한 사람은, “내가 알아서 열심히 해서 죄 안 지었습니다.” 이렇게 하고. 그렇게 되겠죠. 육체에 속한 사람은 아예 뭘 배제합니까? 육체에 속한 자들뿐이라는 것을 고수하면서 뭘 배제하겠어요? 우리처럼 되지 않은 자는 따로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성령에 속한 사람은 뭐가 훤히 보입니까? ‘어, 저 인간은 육체에 따라서 태어났구나.’가 훤히 보이죠.

 

육체로 태어난 사람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그 자체가 뭘 해도 죄가 되게 되어 있어요. 이유는 다른 언약이기 때문에 그래요. 표정들보니까 무슨 말하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제가 바짝 긴장이 되네요. 아까 봤던 갈라디아서 4장 봅시다. 28절, 29절을 보면, 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절,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핍박을 누가 했는데? 한 적이 없는데? 그냥 나는 내 뜻대로 충실히 살고, 각자 자기대로 충실히 살뿐이지, 누가 누굴 핍박한다 말이냐? 라고 한다면, 니가 성령을 따라 태어난 사람을 만나보지 못해서 그렇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았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어떻게 했습니까? 초창기에는 환영하고 대우했지만 수상한 심보 때문에 했고, 마지막에 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좋아했습니까? 핍박했습니까? 보세요. 성령을 따라 난 사람 있잖아요. “예수님 당신은 목수의 아들입니까?” “아니야.” “당신의 어머니는 마리아입니까?”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본토를 이야기해요. 예수님의 본토는 하늘에 있어요. 예수님의 아버지가 예수님의 어머니에요. 예수님을 있게 만드셨으니까.

 

두 종류의 인간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두 종류의 인간을 만들겠다는 말은 두 종류의 인간의 차이점을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겠다는 겁니다. 손들고서 “저 하늘에 속하고 싶어요?” “손 내려! 손 내려라!” 내가 지금부터 내용을 말하는데, 그 내용에 합치되면, 그거는 누가 말려도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거기에 합치되지 아니하면 땅에 속한 사람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내용을 말씀해주세요. 요한일서 1장에 나오잖아요. 누구든지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고, 죄 없다 하는 사람은 어디에 속했다? 땅에 속한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따라서 나타난 하나님인데, 그 약속 안에 이미 두 종류의 인간으로 구분 짓겠다는 취지가 담긴 그런 약속이 내려온 겁니다.

 

그러면 핍박을 누가 했는가? 이삭을 누가 핍박했습니까? 이스마엘이 핍박했거든요. 그러면 이스마엘이 이삭한테 뭐 잘못한 거예요? 아니면 소속이 다른 거예요? 이게 중요하죠. 잘못한 것이 아니에요. 절에 다니는 어떤 사람이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한다면 그 사람이 나에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소속이 다름을, 서로 소속이 다름을 핍박을 통해서 알려주는 계기로 삼는 겁니다. 죄를 안 지으려고 하지 마세요. 본인 소속만 평소에 드러내세요. 편하게 사세요.

 

나의 소속은 땅이 아니고 어디 소속이다? 하늘의 소속이다. 왜 앞자리에 누가 계시니까? 하늘에 계신 성령 받은 분이 내 대신 값을 치렀잖아요. 그 분이 피를 흘렸다 이 말이죠. 자, 피를 흘렸다는 말은, 곱게 죽으신 것이 아니에요. 충돌이 일으켰잖아요. 충돌이 일어났다는 말은, 서로 반대편, 서로 대립되는 반대진영이 있다는 말이고, 주님 소속과 주님 소속을 대적하는 대적과 충돌하니까, 예수님이 희생되어서 피를 흘렸잖아요.

 

그럼 피를 흘렸다는 말은, 주님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고. 그 사람은 어디에 소속된 사람입니까? 그럼 소속이 하늘이라면 더 이상 죄는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그냥 니는 내 아들이다가 아니라 죄를 씻어주면서 내 아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내 자녀라. 이 죄 없는 내 자녀야. 니는 죄가 없어. 그런 뜻이란 말이죠. 왜?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그 뒤에 죄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소속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니가 이런 소속이기 때문에 어떤 것도, 죄가 없느니라, 죄가 없느니라, 죄가 없느니라. 계속 반복해서 요한일서까지 밀어붙이는 겁니다. 니가 어떤 짓을 해도 죄가 없느니라. 왜? 니 죄는 니 행함에 따라서 죄가 생기고 안 생기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죄 있는 걸로 간주했죠? 왜? 죄 없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하나님으로 안 만들려면, 우리는 뭐라고 해라? 우리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하라는 이 말이죠.

 

그 이유가 뭐냐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주님께서 율법을 보내서, 주님 쪽에서, 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만들어낼게. 주님 쪽에서 우리에게 죄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럼 죄는 살아나고 우리는 어떻게 된다?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죽은 자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못해요. 그냥 소속된 그 특징만 드러낼 뿐이지. 여기 돌이 있는데, 돌에다가 발광체를 발랐습니다. 돌이 밤에 반짝반짝 빛나니까, 분명히 돌에다가 형광체를 발라놨기 때문에 빛나는 거잖아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돌아, 돌아 니가 그렇게 착하니까 반짝이는구나. 이렇게 하면 돌은, 나는 죽었어요. 죽었고, 발려진 형광물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겁니다. 왜 자꾸 내가 잘해서 빛난다고 오해하십니까? 아까 못 들으신 분이 계셔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우리는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율법이 오니까 죽은 죄는 살아있으면서 드러내고, 나는 공짜로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나를 뭐로 만든다? 나를 죽은 자로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는 너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잠복되어 있는 죄를 끄집어내서 그 죄와 상대해서 예수님의 피로써 그 죄를 씻어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근데 니는 니 자신을 자꾸 들이대는데, 니 자신을 들이대지 말고 니는 가만히 있어. 내가 니 죄를 끄집어내서, 니 죄와 그리고 예수님의 화목제물하고 이렇게 만나게 해줘야, 화목제물의 의미가 살아나요. 화목 다음에 무엇입니까? 제물이잖아요. 제물의 기능이 뭔지 알아요? 죽는 게 기능입니다. 멀쩡한 제물은 제물도 아니에요.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왔습니다. 죽기 위해서 왔다는 말은 우리 죄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기어이 하나님이 없애주시는 고집과 열심은, 실패나 중도포기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따라서 성도는 어떤 것을 보여주느냐 하면, “주께서 성공하셨습니다.”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이미 구원이 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보는데, “주여,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더욱 죄 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라고 할 때, 니가 착하다가 아니라, “니가 내 소속이구나.” 소속!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어느 소속입니까? 하늘에 속해 있다. 또 성령으로 난 자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 여인들이 낳지 못한, 오직 하나님만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날 자가 너다. 너희 아버지, 엄마, 이걸 속된 말로 하면 애비, 애미 라고 하죠. 애비, 애미 잘 만나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모태신앙, 모태솔로라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증거 하기 위해서 너는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하죠.

 

그럼 우리는 따집니다. 제가 성령으로 태어난 것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육체로 태어난 사람, 지옥 갈 사람들이 너를 핍박할 거야. 그럼 우리는 또 답변하죠. 저는 핍박받은 적이 없는데요? 핍박받는 것이 머리 쥐어뜯고 할퀴고 하는 이런 것이 핍박이 아니고, 다른 소속 때문에 마지막 나오는 멘트의 결론이에요. 세상은 세상 쪽이고. 나는 죄인인데, 나는 간다. 천국! 이렇게 소속 찾아가는 거예요. 자기 소속 찾아가는 거예요.

 

같이 어울려서 노래방에 가고, 술 먹고, 결국 마지막에는 술 먹고 천국 가고, 술 먹고 지옥 가는 거예요. 소속이 각자 자기의 출발지점으로 되돌아 와요. 출발지점으로. 땅에서 왔으면 땅으로 가고, 하늘에서 왔으면 하늘로 가는 겁니다. 에이, 목사님. 그런 구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구라, 거짓말이 어딨어요? 아브라함의 자식이 둘이 있다니까요? 정말 묻고 싶어요. 또 물을게요. 여러분 이스마엘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이스마엘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어요? 없어요.

 

기껏 찾으면 이삭한테 희롱하고 괴롭혔다고. 세상에! 어린애 아닙니까? 어린애 괴롭혔다고, 애가 한 짓이죠. 그 희롱했다고 하는 것을 가지고 소속이 다른 모델로 간주해버리는 거예요. 애들 장난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소속이 다르니까 그렇게 했다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주께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어데? 소속이 다른데 건드려! 애들이 무슨 소속을 알아요? 애들끼리 놀다보면 지들끼리 다투고, 힘이 약하다고 밀치고 하겠죠. 어데? 소속이 다르면서 내가 관리하는 자를 괴롭혀? 이래 된다 말이죠.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짓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처럼 죄짓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처럼 죄짓지 않는다는 말은, 화목제물의 의미를 고수하는데 있어서 동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 행함으로 의인되는 것이 아니고, 화목제물 덕분입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같은 소속이다. 이 말이죠. 그게 성령 받아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아까 5강에서 강조한 것이 뭐냐 하면 이걸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한다고 해서 우리가 죄를 만들어내면 안 된다는 것을 계속 강조했어요.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율법을 주게 되면 죄가 자동적으로 떠오르게 되어 있고, 반대로 나는 죽은 자가 된다. 이 말이죠. 그것이 로마서 7장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은 죄를 용서한다고 하니까, 그 소리 듣고 자꾸 하는 짓이, 이거 죄입니다. 이것도 죄입니다. 자기가 죄를 가지고 나오더라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런 예를 들었죠. 애들이 문방구에서 사고 싶은 물건이 있더라도, 돈 들고 오듯이.

 

하나님은 우리보고 뭘 갖고 오라고 하느냐 하면 죄를 갖고 오라고 하는데, 그 갖고 오는 죄도, 우리가 만들어내는 죄가 아니고. 가만히 있어. 내가 율법을 가지고, 율법의 작용에 의해서, 그래서 생긴 죄를 가지고 나오면, 모든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는다. 주께로 해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회개 한 적도 없어요. 회개 하신 것도 주께서 하신 것이고.

 

자, 요한일서 4장 13절 한 번 봅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알죠? 두 글자로 말하면 이게 소속이에요. 소속. 자, 어떤 단체관광객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동굴 안에 들어가자마자 말소리가 달라져요. 동굴 밖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여보!” 되죠. 동굴 안에서는 뭐가 돼요? “여어어보오오~”가 되죠. 이건 왜 그렇습니까? 일부러 동굴 안에 들어 간 것을 티내려고 보보보~막 반복합니까?

 

“여보!” 하면 될 것을 “여어어보오오~” 이렇게 일부러 꾸미면 동굴 안에 들어간 것이 돼요? 안 돼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럴 필요 없어요. 동굴 안에 있으니까 그냥 “여어어보오오~”가 되는 겁니다. 성령 안에 있으니까 뭡니까? 화목제물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마련이에요. 아니 이게 어려워요? 동굴에 집어넣어버릴까? “여보 물 가져왔어요요요~” “어이, 말 좀 똑바로 해주세요요요~”니나 나나 똑같네.

 

똑같은 이유가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고, 동굴 안에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부부싸움 할 때, “여보! 애한테 그렇게 다그치지마세요요요~” “고3이라고 너무 공부하라고 하지마세요요요~ 당신은 말을 왜 그렇게 해요요요~” 이게 전부 다 소속이 주 안에 있다 보니까, 본인이 본인의 마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동굴의 위력이, 나로 하여금 화목제물을 귀하게 여기도록 몰아가도록 하는 거예요. 동굴 자체에 위력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약속의 자녀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의 자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쯤해서 그럼 목사님! 궁금한데 성령의 자녀가 뭡니까? 또 막 묻고 싶죠? “아이구, 성령의 자녀 되고 싶은데 성령의 자녀가 뭡니까?” 또 묻고 싶죠? 답변해드리겠어요. 그것 때문에 제가 있잖아요. 여러분 육체의 자녀가 누군 줄 아십니까? 아신다면 성령의 자녀에요. 육체의 자녀는 뭡니까? 태어난 내가 알아서 내 행함으로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간다. 이게 육체의 자녀입니다. 그런 쪽이 보이거든, 나는 그런 쪽이 아니구나 하세요.

 

만약에 그게 구분이 안 되거든, 본인하고 똑같아요. ‘아이구, 저 봐! 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저 꼬락서니를 봐!’ 라고 보이거든,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게 보인다는 거예요. 육체의 자녀는 뭐가 안 보이느냐 하면 동굴이 없어요. 맨 땅이에요. 맹숭맹숭 해요. 그냥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어요. 말도 그냥 여보! 하면 끝나요. 여어어보오오~!가 없어요. 모든 것은 자기가 알아서 딱딱 정리해서 하는 겁니다. 아무도 안 도와줘요.

 

근데 성령 받은 자는 하고 싶어도 갑자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길로 가게 돼요. 응답을 받으면서 뭔가 차이남을 보여줍니다. 그 차이남 속에 뭐가 끼어드느냐 하면 십자가가가 끼어드는 것이죠. 화목제물이 끼어드는 것과, 요한일서 1장 7절 보면, “저가 빛 가운데 게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는 것을 집어넣은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 이게 바로 약속으로 태어난 사람,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에요. 예수의 피가 무의미하다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피 때문에 의미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근데, 육체를 따라서 난 사람은 지가 할 일을 지가 알아서 하는데 뭐가 필요 없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왜 끼어드느냐고 하죠. 내 인생에. 그 딴 거 필요 없죠. 교회 가서만 잘 들으면 되지, 평소에 필요 없어요. 그러나 평소에 교회 가서 이렇게 하고 세상에서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나, 직장에 가나, 어디 가나, 우리는 왕왕 울리는 예수 안이라는 동굴 안에서 교회도 가고, 직장도 가고, 집에도 오고. 항상 내 맘대로 안 되는 동굴 안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령 안에 성도입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뭘 해도 죄가 아닌 거예요. 뭘 해도 화목제물 때문에 죄가 없어진 거예요. “거하라” 거하라는 말과 적당한 말은 소속이라는 말입니다. 소속에 행하라가 등장하지 않고, 소속에 거하라. 그걸 요한일서에서는 성령 안에 거하라. 또는 사랑 안에 거하라. 그 사랑이 우리 죄를 씻어줄 것이다. 화목제물이 씻어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 소속된 행함 속에서 나오는 행함이 있어요. 그럼 그 행함은 우리의 본질을 보여주는 행함으로 나올 수밖에 없죠. 소속이 다른 티를 내는 거죠.

 

그리고 이 요한일서에서 항상 주의할 것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우리는 이렇다.”로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와 같지 아니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똑똑히 보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요한일서 4장 4절.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성질 급한 제가 읽겠습니다. 4절,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속하였다는 말은 소속되었고.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소속이니까 안이 성립돼요. 동굴 안. 니가 니 인생을, 니 운명을, 니 팔자를 결정지을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5절,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듣느니라” 저희는 ☐에 소속되었고, 자 ☐가 뭡니까? 뭐라고 되어 있죠? 세상. 세상에 소속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을 대할 때, 그냥 “김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러면 되는데, 또 성도라고 불쑥 나오는 거예요. “세상에 속하신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남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을 때, 이게 성령 받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 부모님 모셔와!” “예.” “아무개 학생 부모님이시죠?” “예. 그렇습니다. 아이구, 선생님 진즉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아이구, 세상에 속한 선생님을 이제 보게 되었네요.” 이런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학교에 속한 선생님이 아니고 세상에 속한 선생님. 물론 그 말을 하면 실례고. 세상이란 말은 생략하고 그냥 악수하세요. 세상에 속한 교장선생님은 무슨 훈시를 하시려나? 세상에 속한 사장님은 무슨 말을 하려나? 이 말은 뭔 뜻이다?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고백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방금 말로 나왔죠. 그게 행함이에요. 행함은 소속 자가, 소속된 신분 자가, 구성원이 저절로 나오는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이 주께 영광이 되는, 하나님의 소속된 자의 표현형이 되는 겁니다. 그냥 사세요. 소속 나옵니다. 이러면 또 “목사님! 이래 사는데 세상 것이 나와요?” 그럼 세상 소속이겠죠. 나보고 어쩌라고? 세상 것이 나온다는 것은 방탕,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내 구원은 내가 행하겠다. 이게 바로 1장부터 이야기한, 나는 죄를 짓지만 선을 행할 수 있어! 이래 나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뭐로 만든다고 했습니까? 거짓말로 만드는 거죠.

 

거짓말 만드는 주특기 때문에 예수님은 피 흘렸잖아요. 가짜 하나님 때문에 예수님이 피 흘렸잖아요, 피는, 충돌이 없는 피는 없어요. 피 흘린다는 말이 어디 넘어져서 피 흘린다는 말이 아니고, 충돌해서 피 흘렸잖아요. “너 아니야!” 때문에 십자가 달렸잖아요. 그런데 그걸 중간에 넣고, 그게 화목제물이며, 내 죄를 씻어주는 제물이라고 인정한다면 그거는 착해서가 아니고, 우리는 착한 일을 해서가 아니고, 하늘의 소속, 처음부터 창세전에 약속에 속한 자녀이기 때문에, 때에 맞추어 이 땅에 누구는 천구백 몇 년도, 누구는 천구백 몇 년도.. 그렇게 태어난 거예요.

 

생일 축하합니다~♬ 하는 것은 소속 다른 자가 태어난 거예요. 소속 다른 자가. 촛불 훅 불고. 이 소속이 다른 자야! 니 뭘 만질래? 실 만질래? 청진기 만질래? 마이크 만질래? 청진기 만진다는 것은 의사된다는 것이고, 실은 오래 산다는 것이고, 마이크는 나중에 아나운서 된다는 것이고. 돌잔치 할 때 하잖아요. 소속이 다르다는 말을 요한일서가 하는 이유는 요한복음이 그렇기 때문에 그래요. 같은 사도가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다음에 요한계시록 해석은 뭐가 됩니까? 정답을 다 알려줬는데? 요한계시록 해석은 뭐가 돼요? 우리의 소속은 이 땅에 속하지 않고, 예수 안에, 생명책 안에 있기 때문에 느긋한 마음으로 세상 멸망을 지켜본다. 이게 요한계시록의 테마입니다. 베리칩 백날 문신 새겨도 괜찮아요. 생명책에는 행함을 묻지를 않습니다. 묻지도 않는 행함을 내세우지는 마세요.

 

우리가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뽑아낸 죄를, 우리는 밖에 세우고, 우리의 죄만 뽑아서,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처리를 하고 난 뒤에,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소속을 알려줬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다가 신분을 노출 당하고 확인 될 뿐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까 쉬는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의 외부가 우리의 내부에 침투해서, 내부에서 형성된 외부를 다시 가져가면서, 다시 내부를 함몰시킨다고. 식사하면서 제가 이야기 했죠? 외부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에 속한 예수님이, 우리의 내부에, 세상 속에 들어와서, 이 안에서 뭘 만든다? 하늘에 속한 자를 만들어 내놓고, 그들만 뽑아서, 택한 자를 뽑아서 데려가게 되면, 나머지기는 뭐냐, 함몰되는 거죠. 쓰레기니까. 아무가치 없는 것이니까. 주께서 천사를 보내서 완전히 도살 처분하는 거죠.

 

이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의 쭉 흐름이에요. 통으로 뚫은 거예요. 외부가 내부에 와서, 택한 백성을 생성시켜서 데려가고 나머지기는 빠이빠이bye-bye! 전부 다 날려 보냅니다. 누구의 행함입니까? 주님의 행함이죠. 주님의 행함이 우리 안에서 말씀대로 완성시킨 그러한 증거물을 하늘에 속한 자가 그대로 내보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랑에는 뭐가 없다? 두려움이 없나니.

 

요한일서 4장 18절,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오직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 하였느니라” 이걸 누가 아십니까? 하나님이 아셨죠? 사랑이 없으면 형벌이 있다는 것을 아시죠? 그럼 예수님이 오실 때, 아무 임무도 사명도 없이 그냥 맨손으로 왔겠습니까?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왔습니까? 목적이죠.

 

그 목적은 예수님도 알고 아버지도 알고 두 분만 알고 있겠죠. 그 목적이 뭐냐,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는데,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 이 말이죠.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뭡니까? 형벌 없애기 위해서 뭘 주면 돼요? 사랑 주게 되면, 사랑이 화목이 돼버리고, 화목제물 주게 되면 더 이상 뭘 할 게 없다? 두려워할 게 없다. 왜? 소속이 다르니까.

 

여러분들이 다니엘 세 친구가 어디 가서 죽을 뻔 했습니까? 불속에 들어갔죠. 불속에 세 명이 들어갔는데, 느부갓네살이 보니까 네 명이죠. 그러면 천국은 불 밖에 있는 게 천국이에요? 불속에 있는 게 천국이에요? 불속이 천국이에요.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천국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 소속이 되니까. 함께 있는 것이 천국이니까. 그러면 자동적으로 불에 집어넣지 사람은 무슨 세계가 돼요? 하늘에 속하지 않는 세계가 되면서 지옥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그 불은 지옥불이 맞아요. 불속이 지옥불이 아니고 불 바깥이 지옥불이 되는 겁니다.

 

제가 이번 시간에 말고 저녁 먹고 할 시간에는, 왜 다윗이 사울 죽인 자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울이 죽을 때 블레셋 군대한테 죽었잖아요. 본인이 자살을 했는데 죽지 않은 모양이라(대상10장). 그래서 옆에 아말렉 소년한테 죽이라고 했을 때에, 다윗이 사울 왕을 죽였다고 해서 그 소년을 또 죽였어요. 그 이유가 뭐냐, 이게 구약 사무엘하 1장에 보면 나오거든요. 그것과 요한일서의 소속과 이게 연관이 되어 있어요. 구약 전체가 신약과 연관이 되어 있어요.

 

신약은 해답이고, 구약은 문제를 던지는 겁니다. 문제 던져놓고, 소크라테스 같이 지는 해답도 모르면서, 니 자신을 알라. 그냥 니 자신을 알라고 문제를 던져놓은 거예요. 니는? 나도 몰라? 같이 모르자. 이게 구약입니다. 신약은 뭐냐, 이제 해답이 온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뭐부터 보는가 하면 해답부터 보니까, 이게 문제하고 연결이 안 되니까, 해답에 대해서 오해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오해들을 하니까, 신약보고 뭘 지키느냐 하면, 신약보고 율법화 시켜서 도로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구약으로 돌아갔어요. 지키면 천당 가고 못 지키면 지옥 간다. 전혀 아는바가 없어요. 소속됨으로 천당 가는데.

 

구약은 뭐냐, 소속이 아니고 뭐로 가느냐 하면 내가 행하면 복 받고, 행하지 못하면 지옥 간다. 내 미래를 누가 해결한다? 지금 내가 단독으로, 휑하니 나만 달랑 남아서, 내 문제 내가 손 안대면 해결 없다. 이런 식으로 자기 미래를 개척하려고 하는 거예요. 신약은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사랑 안에서, 이미 덮어씌운 소속이 있는데, 그 점을 사람들은 놓친 거예요.

 

다시 요한일서 2장에 들어와서 1절 뒤에 보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시라”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저는 (음음음)화목 제물이니, 방금 제가 (음음음)했죠? 빈 칸에 여러분들이 넣어보세요. 무슨 말을 해야 됩니까? 저는 (음음음) 화목 제물이니, 화목 제물과 저는 사이에 뭐가 돼요? “우리” 그 다음에, 우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죄를” 강의 끝났습니다. “우리 죄.” 화목 제물은 우리하고 상대 안 합니다. 화목제물이 와야 우리가 죄인 돼요.

 

화목제물이 아니면 우리는 착한 일도 하고 나쁜 일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항상 자기한테 기대하고 긍정해요. 그러나 화목제물이 오는 순간, 우리는 뭘 해도 화목제물을 위해서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작업대에 놓인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의 소속이 화목제물이신 주님과 같은 소속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9-16 00:04 
20160908 요한1서 시카고강의7-이 근호 목사

제 7강입니다. 요한일서 2장에 보면 나오는 단어들이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나온 단어들이에요. 그중에 제일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화목제물이라는 거예요. 화목제물, 이거는 레위기에도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레위기도 구약입니다. 화목제물이 뭐냐 하면, 제사를 다섯 가지 지키는데, 마지막 마무리 제사가 화목제물이에요. 화목제물 앞에는 반드시 번제, 소제, 속건제 ,속죄제, 제일 마지막이 화목제인데, 화목제물 드렸다는 말은 뭐냐 하면 “끝났다.” “이제 드릴 제사는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화목제물이라는 말은,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추가될 어떠한 방식과 방법도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 믿고 십일조 하라는 말은 이제는 없는 거예요. 예수 믿고 순교하라는 말도 성립이 안 돼요. 십자가 지신 분이 알아서 순교하시는 거예요. 모든 교회 운영은 십자가 믿고 교회 운영 잘하라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지신 분이 따로 만들어낸 교회 있고, 그 교회 운영은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거예요.

왜냐, 화목제물은 화목제물을 완성한 티를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화목제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 사람이 아니에요. 화목제에서 불쏘시개 넣었다고 해서 저도 협조했다고 하면 안 돼요. 화목제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시작과 끝마무리에서, 모든 공로는 인간이나 어떤 피조물이라도 천사들이 다 끊어버리고 예수님이 홀로, 혼자만이 하신 겁니다.

오직 온리only, 예수님만이 하신 거예요. 화목제물 홀로 다 이루신 거예요. 홀로 다 이루셨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에 혼자 달렸고, 혼자 완성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있는데? 못 박은 사람이 왜 십자가의 공로에 왜 끼어들어요? 십자가에 달릴 때, 영차! 영차! 하고 들어 올린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것은 공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의 화목제물로 마감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될 것이 뭐냐 하면, 바로 화목제물이죠. 제물. 구약의 제물은 양과 소와 염소죠. 제물이 신약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인간으로 바뀌었죠. 제물이 인간으로 바뀌면서, 제물(양, 염소, 소)이 했을 때의 그 효력과 인간으로 제물을 했을 때의 효력과 그 효과가 다릅니다. 제물이 했을 때는 이 제물과 관련된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요. 양 바쳐라, 소 바쳐라, 염소 바쳐라, 할 때에는 그 효과는 이스라엘 안에서만 머무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물로 인간을 바치게 되면, 이 제물은 화목제물. 그냥 바치는 것이 아니고, 이삭 바친 것은 번제고. 마지막 제사가 무슨 제사? 화목제물이라고 했잖아요. 마지막 제사, 마무리, 더 이상 죄를 씻을 어떤 방식이나 방법이 없다고 할 때에는, 모든 인간은 화목제물을 위하여 존재하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화목제물의 효과는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구원된다는 말이 아니고 화목제물이 자체적으로 갖고 있던 그 효과가 구원만이 아니라, 죄를 죄답게 드러내는 기능도 화목제물이 합니다.

쉽게 갑니다. “야! 너 어떻게 살아왔어?” “예. 바르게 살아왔습니다.” 다른 답변 한 번 보세요. “야! 너 어떻게 살았어?” “화목제물을 앞세워 살았습니다.” 이게 달라요. 한쪽은 “내가 이렇습니다.” 라는 자기 행함의 효과를 드러내는 반면에, 두 번째는 어떻게 됩니까? “저는 화목제물의 효과를 믿어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한쪽은 화목제물이 있으나마나한 조치로만 아는 거예요. “화목제물은?” “그따위가 뭔데?” “십자가?” “뭐? 십자가 그게 뭔데? 십자가가 내 사업하고 무슨 관계인데?” 완전히 화목제물을 개무시 한 거죠.

그럼 화목제물은 뭐냐 하면,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되는 거예요. 기준은 누가 세웁니까? 천국 기준은 누가 세웁니까? 보통 우리가 세워요. 내가 착한 일 하면 천국 가고 나쁜 일 하면 지옥 가고. 내가 세우는데 그건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언약의 출현과 서서히 정리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축복과 저주는, 언약에 준할 때만 축복받고, 언약을 준하지 못할 때는 저주받습니다.

목사님들이 심방 갈 때, 주로 하는 본문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이에요. 유명한 구절입니다.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내가 왔다 갔다 하면 먼지만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 복이 막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얼마나 신나는 겁니까? 그런데 신명기 뒷부분은 이야기 안 해요. 니가 나가도 저주받고 들어와도 저주받는다. 그걸 너무 차별시키는 거예요. 앞부분만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그 말은 뭐냐, 기준이 뭐다? 주의 말씀을 지키는 여부가 기준이 된다. 그럼 주의 말씀에는 뭐가 들어있다? 화목제물을 지키라고 되어 있다. 화목제물이 그 당시에 시범조로 이스라엘을 상대했다면, 화목제물이 제물이 아니고 사람이 된다면, 사람이라고 생겨먹은 모든 인류에게는 화목제물이 절대적인 기준으로써,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이 가름이 됩니다. 구분 짓게 되어 있어요. 그럼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할 때, 뭐만 설교해야 됩니까? 최종적인 것을 설교해야 되겠죠. 왜? 최종적인 것이 천국, 지옥을 가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기 때문에.

그러면 설교 시간에 뭐만 나와야 돼요? 십자가이야기만 마지막으로 나와야 돼요. 돈 내라가 아니라. 돈 내라고 나오면, 돈 내면 천국가고 돈 안 내면 지옥가기 때문에. 마지막은 돈 내라가 아니라, 헌금 하든, 헌금 안 하든, 상관없이 뭐로 저주받고, 축복받는다?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돈 내나 안 내나, 봉사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천국가게 되어 있고, 십자가 안 믿으면 백날 헌금해봐야 그거는 헌금하면서 지옥 가는 거예요. 돈만 뺏겼어요. 기준도 아닌 것을 가짜로, 구라로 제시해요. 교회가.

그걸 구분할 줄 알라고 교회가게 하신 겁니다. ‘저건 아닌데? 저건 아닌데? 저건 언약이 아니고? 저건 성경의 핵심도 아니고? 저건 화목제물 효과도 아닌데? 왜 저러지?’ 왜 저러기는 뭐, 교회 유지하려면 지금 돈이 중요하지, 뭐 기준이 중요합니까? 맨날 천국 가 본 사람이 어디에 있어? 교회 운영하고 봐야지. 이런 조에요. 목사도 그렇지만 특히 중직에 있는 장로도 마찬가지에요. 어느 장로가 “목사님. 십자가 증거 해주세요. 안 그러면 쫓아내겠습니다.” 그런 장로가 어디겠어요? “교회 키워주세요.” 이런 장로뿐이죠.

그러니까 교회에 가서 이런 복음에 근거해서 교회를 한 번 살펴보세요. 이놈의 교회가 이건 교회인지, 영업장인지, 한 번 보란 말이죠. 사업장인지. 그거는 교인들이 판단 못한다는 것은 교인들 자체가 절대적 기준을 몰라서 그래요.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화목제물입니다. 번제 아닙니다. 속죄제 아닙니다. 속건제 아닙니다. 소제 아닙니다. 화목제입니다. 왜? 마지막 제물이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화목제물이라는 개념을 알기 위해서는 우린 뭐부터 출발해야 돼요? 구약부터 출발해야 해요. 왜냐하면 화목제물은 구약에서 나온 용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다시 해봅시다. 제물이라는 것은 구약의 용어죠. 구약에 때 있는 범위가, 기준이 예수님이 인간 대신 화목제물이 됨으로써, 그 기준이 이제는 구약이라는 범위를 넘어서서, 이스라엘이라는 제한된 혈통을 넘어서서, 어떻게?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이 되겠죠.

그게 바로 2절에 나옵니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온 세상의 죄라고 하니까, 이거는 뭐도 포함이 됩니까? 우리에 해당되는 두어 사람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뭐가 해당된다? 이 절대적 기준이 적용되는 거예요. 이 절대적 기준이 적용된다면, 자 묻습니다. 화목제물은 누가 행했습니까? 예수님 플러스 우리가 행했습니까? 예수님 홀로 행했습니까? 예수님 홀로 행했죠. 예수님 홀로 행하신 그 기준이 절대적으로 적용된다면, 이것은 소속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니 행함 말고 내 행함으로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면, 주님의 행함만 절대적인 기준으로 우뚝 서려면, 주님에게 소속되었느냐, 안 되었느냐의 여부가 천국, 지옥을 가름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몇 년 째 이야기해도 또 돌아서면, 저 어떻게 행하면? 또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면서 질문을 해대는데, 그거는 피곤하지 않고 즐겁게 받아주는데, 그런 질문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일인지.

자, 그럼 지금부터 제가 해야 될 일을 여러분들이 이미 아십니다. “목사님. 성경은 언약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마감됩니까?” 그거 해야죠. 화목제물이 어떻게 인간이 되었느냐? 같은 이야기잖아요. 언약이 어떻게 흘러가서 어떻게 되는가? 그걸 이야기해주세요. 라고 제가 저한테 물으면, 물은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성경 전체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금부터 시작. 이때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성경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우리 자제분한테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은 성경이 주어져있고, 성경은 표면이 문자로 되어 있고, 밑에 내면에는 영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영으로, 성령께서 문자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성경입니다. 그럼 문자만 알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문자를 통해서 뭐까지 내려가야? 영까지 내려가야지. 그럼 문자는 구약의 용어가 다르고 신약의 용어가 다르니까 일치되지 않느냐?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밑에 조금만 내려가면 기다리는 영이 있는데, 영은 구약의 영이나 신약의 영이나 동일한 영입니다.

그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기다렸다가 예수님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아브라함은 예수님 오시기 전, B.C.2000년 사람이고, 예수님은 아브라함 이후에, B.C.2000년 후에 온 사람이에요. 문자적으로 보게 되면 전혀 이게 뚝 떨어져있으니까, 아브라함의 기록에 보면 예수라는 문자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전혀 안 나오잖아요. 전혀 안 나오죠. 그러면 예수님하고 관련된 용어가 나옵니까? 나오죠. 여호와 이레(창22:14).

결국 예수님은 어떤 기능을 한다? 구약 성도에게 미리 준비된 어린양으로 오신 거예요. 이레라는 말이, 준비하심. 누가 준비하신?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심. 요셉 근처에 예수라는 단어 안 나옵니다. 근데 요셉과 관련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관련이 있죠. 요셉은 어떻게 관련이 있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형들한테 팔려서 죽었다가, 물구덩이에 빠졌었잖아요. 마침 그때 애굽의 상인이 지나가지 않았으면 그냥 죽었어요. 애굽의 상인한테 팔려서 죽었다가 살아났죠.

근데 그 사실을 모르고 야곱은 이미 죽은 자예요. 이미 옷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봤어요. 없어진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야곱 입장에서 요셉은 산자에요? 죽은 자에요? 죽은 자죠. 근데 나중에 요셉이 살아 돌아오죠. 그러면 야곱입장에서는 요셉은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이것은 마치 이삭의 반복이에요. 죽을 뻔했는데, 옆에 양이 준비되지 않았으면 그냥 죽었어요. 준비된 양 때문에 살았잖아요.

그럼 요셉은 여호와이레입니다. 형제와 아버지를 살리려고 친히 준비된, 희생돼야 될 팔자가 요셉이었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관련되어 있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들은 그들의 언약을 통해서 예수님과 이미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들에게 주신 언약을 통해서. 따라서 요셉이 이렇게 했다, 저렇게 했다가 아니라, 요셉이라는 이야기 안에, 야곱이야기 안에, 그들에게 흐르는 것은 그냥 영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장 11절은 “구약 해석 어떻게 합니까?”에 대한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백점입니다. 10절부터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이 선지자 속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모세...다 들어있습니다. 11절,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아브라함 속에 뭐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었는데, 영이 어떤 기능으로 아브라함 속에 작용 했습니까? 고난 받고 그 다음에 영광 얻을. 이거는 이삭도 해당되고, 야곱도 해당되고, 아까 이야기했던 요셉도 해당되고. 모든 택한 백성의 계열 속에는 누가 살아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참여함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취급 받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줄 아시고,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질 장차 영광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고난 받죠. 하지만 장차 올 영광은 이러한 시련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비록 우리가 탄식하고 하지만, 우리의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니(롬8:24). 우리는 똑같은 고백을 선지자가 하고 있었던 겁니다. 얼마나 그들이 고생했을까요? 억울하잖아요. 아벨 억울하죠? 하지만 아벨 속에 뭐가 있다?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 있었던 거예요.

아벨과 그리스도와 연관된 증거를 대세요. 히브리서11장에 나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해놓고 선지자들이 대열이 나옵니다. 그 대열 속에서 제일 첫 번째로 나온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아벨이죠. 그 다음에 에녹, 노아, 아브라함...쭉쭉 나오죠. 보세요?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대열이잖아요.

방금 11장을 약간 늘이면 여러분 명단이 있습니다. 그게 칸이 다 11장에 못 들어가서 그래요. 시카고의 어떤 누구는 곗돈 떼여서 고난 받았지만 장차 영광을 바라고 기뻐했느니라. 이런 내용이 나올 거예요. 그걸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이 외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무수함 속에 여러분들이 들어가길 바랍니다. 그 무수함 속에. 앞에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을 앞당겨 보여주는 것, 이게 구약 해석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을 다 집어넣어서 구약을 해석해줘야지.

이게 뭐냐 하면 성경 안에 문자가 있는데 문자를 풀이하는 것이 아니에요. 여호와증인들 뭐 이거 의미 있다고 하는데,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영원한 같은 그리스도, 어디를 해도, 원유를 캐듯이 그리스도의 영이 뿜어져 나와야 돼요. 이 문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이, 십자가가 나와야 이게 구약의 언약해석입니다. 왜냐? 구약에 살든, 신약에 살든, 복과 저주의 유일한 기준은 장차 오실 마지막 제물, 화목제물이신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에.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요한일서 1장 10절에서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증명하기 위해서 긴긴 구약이 있어야 했던 거예요.

그렇다면 구약의 하나인 사무엘하 1장에 보면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 성경 여러 번 찾는데,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만, 귀찮게 합시다. 14절,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15절, “소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저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6절, “다윗이 저에게 이를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 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거 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 함이라 하였더라”

너는 사울을 죽인 것이 아니고 기름부음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를 죽였기 때문에, 화목제물의 효과, 모든 효과 중에서 유일한 기준,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그 저주의 기능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너는 그것을, 기름부음 받은 자를 개무시 했기 때문에, 그 이유로 너는 지옥가야 돼. 그 지옥 가는 모습 중의 하나가 내가 가차 없이 소년을 쳐 죽인 거예요. 소년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데, 지가 사울을 죽이고 싶은 것이 아니고, 죽어가는 사울이 요청했어요. “고통이 심하니까 빨리 죽여 도! 칼 있으니까 그냥 죽여 도!” 그래서 그냥 죽는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고.

아무 의미 없이 죽였는데, ‘장차 예수님하고 관련되어 있으니까 예수님을 죽여야지. 이런 마음도 없었어요.’ 그냥 죽인 거예요. 아까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고 놀릴 때, ‘니는 그리스도다.’ 이런 마음이 없었고 그냥 장난인데, 그걸 하나의 모형으로 사용했듯이. 이 소년도 그냥 무심코 어? 왕이 아프네. 안됐다. 죽여 달라고? 예하고 죽였는데, 그 소년과 사울의 목숨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예표로써 구약에 미리 이런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그걸 그대로 오늘날 적용을 해볼게요. 운전을 하는데, 그냥 조용히 운전했다가 주차를 했어요. 그것도 내 집 앞에 주차를 했단 말이에요. 약간 나갔지만. 했는데, 경찰이 와서 “왜 주차를 합니까?” “내 주차장인데요?” “안 됩니다.” 하면서 주차위반 딱지 뗄 때에, 그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한 것이 되죠. 어떻게 참여합니까? 억울합니다. 하지 말고 오늘 돈 몇 푼 날렸구나! 모든 것은 주의 돈 이구나!를 깨닫게 하시는 거예요. 아마 그 경찰관이 그냥 통보만 했다면 그렇게 아까워하지 않았을 거예요.

근데 벌금이 문제야. 돈이 문제에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지금 제대로 주차를 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왜, 쌩돈 날렸는가, 그게 더 큰 문제다 이 말이죠. 결국은 뭐냐 하면 나의 삶의 기준은 돈이었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돈이 있으면 복이고, 없으면 저주인데, 성령이 와서, 경찰이 와서 나를 더욱 저주케 했다는 것이 기분 나쁜 거죠.                

그러나 그 사건을 유발시킨 것은, 바로 세상은 돈이 기준이 아니고, 벌금 더 나가도 니 구원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게 다윗과 사울의 관계로 지금도 십자가를 반복하는 것으로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매사를 십자가와 연관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두려워한다는 것은, 사실은 솔직히 말해서 부러워한다는 것이죠. 부러움이 생기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만약에 부러움이 없다면 뭐도 없어져요? 두려움도 없죠. 근데 목사님 부러움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있어요. 누구? 사도바울. 사도바울은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이에요. 사도바울한테, 혹시 장가 안 갔는데 장가 간 사람 부럽죠? 아니요. 돈 많이 못쓰는데 돈 많이 모은 사람 부럽지 않습니까? 아니요. 천하에 부러운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성령의 효과,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효과, 언약 속에 있다는 말이죠. 언약 속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구약에서 문자 밑에 영이 있는데, 어떤 문자로써 머물러서는 안 되고, 거기에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뿜어져 나오는 원유 같은 이 영으로 해석을 해줄 때,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축복과 저주가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자, 또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번에는 신약에 가볼게요. 요한계시록 11장을 설명하고 여러분에게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두 증인이 나오죠. 두 증인이 복음 전했습니다. 복음 전했더니만 그 둘이 죽었어요. 하나님이 좀 도와주시면 얼마나 좋습니까?

두 증인이 복음 전했더니만, 사람들이 되도 않는 소리를 한다고 두 증인을 죽였어요. 끝났습니까? 그 사람들이 죽고 좋아들 했죠. 구경하고 좋아들 했는데, 12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3절,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원인제공자가 누굽니까? 두 증인이 뭘 전했기 때문에? 화목제물, 유일한 십자가 복음을 전했더니만 무엇이 관련되어 있었다? 세상에 물리적인 지형의 구성에너지가 관련되어 있어요. 두 증인 죽었다고 뭐가 일어났다? 땅이라는 에너지가 파괴가 되더라는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뭐가 일어났죠? 지진이 일어났죠. 하늘에 있는 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해가 어두워졌죠. 그리고 공동묘지 무덤은 어떻게 됐죠? 무덤이 열려서 거기 있는 시체만 노출되었습니까? 시체가 살아났습니까? 살아났어요.

이게 뭐예요? 세상의 모든 물리적인, 화학적인, 생물적인, 과학이나, 자연과학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 세상은 십자가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물리적인 세상까지, 하늘의 별까지, 박혀져있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기준이 드러나게 되면, 주님 떠나고 나면 이 세상은 와르르 지진이 일어나고, 강물이 쓰고, 뭐 천사가 와서 다 조져놔 버리면 무너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살아남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주제가 아니고, 기준이, 무너진 기준이 뭐냐? 하는 겁니다. 그 무너진 기준이 뭐냐,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의 십자가. 이 세상은 십자가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래서 제가 그렇게 결론적으로 말씀드린 거예요. 이 세상은 십자가 사건을 위해서. 그러면 십자가 사건을 결론으로 한다는 것이 뭐냐, 새 언약의 완성을 위해서.

모든 언약은 하나의 계명 속에 묶어놓기 위해서. 그게 새 언약이거든요.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용서한다는 언약에 묶어놓기 위해서, 그렇게 세상은,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함이 아니고, 십자가의 기준을 내세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이게 우리나라에 교과서에 나온 유명한 시입니다. 아시죠? 공부들 잘하셨을테니까.

그렇다면, 그게 기준이라면,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내 구원을 위함입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까?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차후에 논리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럼 아브라함은 왜 태어났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이전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언약적으로 보면, 십자가 이후에 아브라함이 태어났습니다.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기능이 필요한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아담이 죽고 난 뒤에 바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필요한 기능들이 모세, 다윗...사람들을 통해서 해놓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신 거예요. 처음인 것이 마지막으로. 그래서 아브라함보다 누가 먼저냐, 아브라함보다 뒤에 오신 예수님이 먼저고. 다윗보다 다윗의 주가, 다윗의 자손이 다윗보다 먼저 있는 겁니다. 창세전이 창세후보다 먼저 있었던 겁니다.

그럼 창세전이 창세후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이 들어오게 되면 이 역사는 뭐를 맞이하게 되느냐 하면, 역사가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묵시를 맞이하게 돼요. 자, 언약은 역사와 역사의 층으로 되어 있으면서 거기에 영이 있다. 영이라는 것은 장차 완성된 것이 오잖아요. 그럼 역사+묵시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럼 묵시에 의해서 뭘 보게 한다? 역사를 보게 하는 것이죠.

그럼 역사라고 하는 것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가는 시간 의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역사입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은 뭘 원하느냐, 인간은 대가를 원해요. 자기 행함에 대한 대가와 기대를 하게 되는 겁니다. 한 40일 철야기도 했다, 백퍼센트 뭔가 기대하고 있어요. 그 기대한다는 것은 현재에 속하는 것입니까? 미래에 속하는 것입니까? 미래에 속하죠. 그 사람이 기도했다.→과거, 지금 기도한다.→현재, 기도의 효과를 볼 거야.→미래. 그럼 그 사람은 묵시에 속했습니까? 역사에 속했습니까? 역사에 속한 사람이죠.

역사에 속하니까, 그거는 묵시의 공격대상이 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기도함으로 본인이 복 받고 저주받고 하는 기준으로 삼고 싶어 해요. 이게 역사에 속한 존재의 특징입니다. 그 역사 속에 속한 존재의 대표자가 누구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에요. 그들은 역사 속에 묵시가 속했다는 것을 인정을 안 해요. 역사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역사며, 인간들은 과거 것을 참고로 해서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현재에 충실한 것을 가지고 미래에 괜찮은 미래를 대가로 받는 것을, 그들의 유일한 삶의 희망으로 삼는 겁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이 못살아요. 희망이 나를 살립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이유가 뭡니까? 희망 때문에 그런 거예요. 희망이 희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백날 살아봐야 내가 살아왔던 그것이 자기를 살리는 기준이 되지를 못해요. 기준이 되는 것은 뭐냐, 화목제물이죠. 화목제물의 피는 멀쩡한 제사입니까? 피 흘린 제사입니까? 피를 쏟아내죠. 피라는 것은 충돌이죠. 묵시와 역사의 충돌이죠.

그럼 우리를 살리는 것은 내 행함이 아니고, 제사 바치는 행위가 아니라, 역사 속에 있는 나를 위해서 묵시적인 존재가, 역사에서 빼내기 위해서, 뽑아내기 위해서 피를 흘리셨는데, 그 충돌의 피가 우리로 하여금 묵시적 존재인 것을 증명하고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의 등장은 모든 것이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화목제물로 마지막에 표시를 나타내는 겁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묵시가 역사를 삼킨다고? 뭐, 그런 증거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겠죠. 여기는 없는데, 또 시비 거는 사람이 그렇게 해요. 역사밖에 없어! 자꾸 구라치지 마! 역사밖에 없어! 과거 있고, 현재 있고, 미래있고, 이게 전부지, 무슨 묵시라는 용어도 어려운 그런 말을 왜 쓰냐고 하죠. 그럼 당신이 묵시가 있다는 것을 증거를 대라고 하겠죠.

자, 증거 나갑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어떤 일을 당하죠. 그럴 때 이렇게 되어 있어요.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이렇게 되어 있고. 마가복음도 있는데, 마가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10절을 보면,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라고 했을 때, 네모에 어떤 글자가 들어갑니까? 갈라짐이죠. 자, 갈라짐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하늘이 열려있었을까요? 닫혀있었을까요? 닫혀있었죠. 그럼 밑에서 금고 열듯이 열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럼 밑에서 깨면 깨집니까? 안 깨지죠.

그럼 결국은 갈라진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완벽하게 봉쇄되어있고, 갇혀있다는 거예요. 위에서 깨트리지 않으면, 원래 갈라짐이 아니고 찢어짐이에요. 위에서 찢어지지 않으면, 찢어졌다는 것은 강제성을 의미합니다. 하늘에서 강제로 찢어내지 아니하면, 찢어내기 전까지는 인간은 역사가 현실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안 받은 사람에게 복음이야기하면 먹히지 않는 이유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유구한 역사, 그게 내가 아는 통일된 현실의 전부에요.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고생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니가 열심히 해서 미래로 나아가야 해. 어디까지? 인류는 영원한 거야. 인간은 소망이 있는 한 역경을 딛고 이겨낼 힘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은 역사 안에 갇힌 채 배우는 학문들이에요. 과학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은 다 역사 안에서 배운 겁니다. 그런데 묵시는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아요. 하늘이 찢어지고, 이것은 마가복음 1장 10절에서 하는 이야기지요.

찢어졌다는 말은, 드디어 역사에 갇혀 있는 그 속의 맨홀뚜껑이 열리고, 그 속에서 누가? 역사 바깥에 있는 요소가 안에 들어오죠. 하늘이 찢어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들어왔죠. 자, 중요합니다. 들어왔습니다. 누구에게로? 예수님에게로. 그럼 예수님은 역사적인 존재입니까? 묵시적인 존재입니까? 묵시적 존재죠. 그럼 예수님같이 성령 받은 우리는 묵시적 존재입니까? 역사적 존재입니까? 묵시적 존재죠.

묵시적 존재만이 역사 따로 있고, 묵시 따로 있고. 이 세대 따로 있고, 오는 세대 따로 있고. 이 세상 말고 바깥세상 따로 있고. 내부 있고, 외부 있고. 유일하게 두 개를 다 보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소속이에요. 그래서 요한일서는 소속입니다. 성령이 쏟아지게 되면 성령은 바깥에서 쏟아지겠죠.

여기 역사가 있다면 역사 안에는 뭐가 들어온다? 언약이 들어오죠. 언약 안에는 뭐가 되어 있다. 표면이 문자고 되어 있고 안에는 예수님의 영으로 가득 차있죠. 그럼 역사 바깥에, 이게 찢어졌다고 하니까, 최초로 역사가 찢어지면서 뭐가 들어왔습니까? 바깥에 있는 묵시세계가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왔잖아요. 들어와 버렸다 이 말이죠. 그럼 이게 뭡니까? 역사+묵시가 섞여버리게 된 거예요. 그 전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니까 예수님의 영이 임했죠. 누구한테? 아브라함 이삭 야곱...영이 임한 거예요.

아벨 같은 경우에 영이 임하니까, 역사에 속한 사람과 묵시에 속한 사람이 어떻게 구분되는가? 해석이 다르고 대화가 안 돼요.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죽음입니다. 자꾸 억울하게 죽어요. “임금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어디서 신하가? 함부로 겁 없이? 내가 까라고 하면 까야지. 하라고 하면 하는 거지.” “안 됩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죽여라!”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돌에 맞아 죽었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벨과 스가랴와 모든 선지자의 피가 너희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마23:35).

아까 피 돌아간다는 이야기했죠? 누구한테? 사울을 죽인 아말렉 소년한테.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삼하1:16). 니가 잘못 건드렸다는 거예요. 묵시적인 존재를 건드렸기 때문에, 묵시적 존재를 건드리면 뭐가 허물어진다? 역사의 세계가 현실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여기 우리 행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위에서 바케쓰로 물 퍼붓는데 무슨 행함이 있어요? 

성령의 세례가 뭐냐 하면, 연합되는 거죠. 바케쓰로 줄줄 붓는데, 무슨 행함이 있어요? 어떤 행함이요? 거지가 되던, 창녀가 되던, 세리가 되던, 강도가 되던, 성령세례 받으면 의인됐는데 뭐. 그러면 성령 세례 받은 예수님의 임무가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죠. 언약을 이루죠. 언약을 이룹니다. 내용을 설명하느라 말을 너무 빨리했는데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 믿고 합니다.

언약이 와버리면 역사 속에 묵시가 섞이게 됩니다. 자, 그래놓고 아까 요한계시록 11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두 증인이 뭘 전했는가? 두 증인이 있었는데, 두 증인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복음 전한 장소가 나와요. 11장 8절에 보니까, 8절,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이니라”

이게 역사적으로나 문자적으로도 말이 안 돼요. 왜냐하면 같은 장소가 소돔일 수가 없고, 애굽일 수도 없고, 심지어 갈릴리라는 좁은 지역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성령 안 에서는 이 세상은 예수님을, 언약을 잡아 죽이는 그러한 지옥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9절에 보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그 시체를 며칠 동안? 사흘 반 동안. 지금 이 두 증인 연합해서 뭘 보여줘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그들이 괴롭게 했고, 아까 본 11절에 지진이 일어나죠. 그러니까 제 말은 이 세상은 화목제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준비된 세상이라는 겁니다. 십자가 증거 하기 위해서 보여준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그럼 뭘 행하느냐? 행하지 말고 소속되시면 됩니다. 어떻게 돼요? 하늘이 찢어지고 성령이 예수님에게 왔던 것처럼, 성령이 여러분 속으로 주어지면, 여러분들은 개인구원이 아니고 예수님께 소속된 입장에서, 예수님의 공로로 여러분들은 구원받습니다. 왜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묵시적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같이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자, 요한일서 이제 들어가 봅니다.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행하라가 아니라 고백하라는 겁니다. 너의 소속을 고백하라. 새 언약이 완성됐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언약이 되죠. 그걸 요한일서 2장에서는 한 계명(화목제물)이라고 하는 겁니다. 2절,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일서 2장 3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계명을 지키면 계명을 지키는 자가 부각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안다면, 아들이 무슨 아들? 화목제물 되신 아들. 그래서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화목제물에 대해서 동의하느냐가 계명을 지키는 것이 돼요. 그래야 자기가 소속된, 그 소속의 특징을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게 6절에 보면,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저 안에, 안이라는 것은, 누구 안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다음에 행함이 나오는데, 모든 우리의 행함은 내가 착하다가 아니라, “나는 이런 소속 안에 있습니다.” “소속되어 있습니다.”를 증거 하는 행함이 나오는 거예요. “성령 안에 있습니다.”또는 “예수 안에 있습니다.”를 증거 하는 티를 내는 행함이에요. 착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예수님을 나타내는 행함이죠. 그리고 예수님에게 소속되어 있고. 안이라는 말은 바깥이 따로 있다는 말이에요. 어디 안에 있다는 말은 바깥이 있어줘야 안이라는 말이 성립돼요. 안과 밖 두 개가 있어야 안이라는 말이 돼요. 우리 바깥에는 화목제물이고 우리는 그 안에 있고. 

그래서 이 계명이 뭐냐, 마지막 계명이에요. 사랑이라는 마지막 계명이에요. 요한복음도 마찬가지고 요한일서도 그렇고. 그 하나 계명밖에 없어요. 그 계명이 뭐다? 예수님은 화목제물이다. 그 화목제물이 뭐냐 하면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계명이에요. 그것이 모든 언약의 완성입니다. 언약이 완성되면 뭐가 된다? 묵시가 되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이 영을 받아서 묵시가 된 것처럼, 우리가 거울을 봐도, 거울 보니까, 본인이 뭐 묵시처럼 보입니까? 뭐 천사처럼 보여요? 무슨 천사가 늙어요? 주름살이 자꾸 늘어나고? 천사, 묵시적 존재.

영적존재가, 성령 받은 존재가 자꾸 늙어가고, 기운이 떨어지고 치매 걸리고 그래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우리 옛사람은 이미 후패해야 되고 우리 속사람은 새롭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몸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자, 우리의 옛사람이 떨어져나갈 때, 옛사람 속에 있는 기능들은 어떤 기능들이 있을까요? 나만 사랑하는 것,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것, 세상 것 끌어 모아서 남한테 뽐내는 것, 내 나와바리, 영역을 지키는 것, 이런 것들이겠죠.

많이 피곤하신데, 제가 보니까 역력하게 옛사람이 다 보이네요. 이거하고 마치겠습니다. 세상이 통일되어 있습니다. 화목제물, 예수님으로 통일되어 있죠. 예수님으로 통일되어 있으니까, 이 전체는 뭐가 적용이 된다? 기준이 적용되죠. 무슨 기준? 화목제물로 해서 죄 용서받으면 천국, 화목제물을 핍박하면, 아까 했었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모독하면 또는 희롱하면 지옥 가죠. 이 전체가, 유일한 현실은 예수님으로 통일되는 현실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전체 안에, 예수님의 통일된 현실 안에, 우리는 짧게 나름, 나름대로의 통일된 현실이 있어요. 나는 이렇게 해서 복 받았다. 저렇게 해서 복 받았다. 행함으로 이만큼 살았다. 이런 것이 있겠죠. 내 뒤에 있는 사람도 나름 있겠죠. 내 앞에 할아버지도 나름 있겠죠. 각자 한평생 살아간 것들이 나름대로 있겠죠. 이 할아버지는 1918년에 태어나서 1972년에 죽었다. 이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나름 있었겠죠. 나름대로 살아가면서 뭐합니까? 자기 현실이 있겠죠. 여기에 뭐가 끼어드느냐 하면 화목제물이 다 끼어듭니다. 십자가가 끼어듭니다.

그래서 만약에이 할아버지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자기 인생을 증거 할 때, 나는 이렇게 살았다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 누가 끼어들었다? 주님의 화목제물이 끼어들었다. 한 계명이 끼어들었다. 사랑의 계명이 끼어들었다. 이러면 그 사람은 언제 태어났든, 결국 천국에 합류되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가 되는 겁니다. 만일 이 할아버지에게 친구가 말하기를, 친구야! 니는 무슨 보람으로 사나? 이러면 그 할아버지가 뭐라고 해요? 나는 죄인 된 보람으로 살아간다. 왜? 죄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에. 주께서 죄를 끄집어내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 사람 인생 자체가 이미, 그전부터라도, 그 이후라도 그 사람 시대에 이미 예수님이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처음이요, 나는 끝이니까. 우리는 그 사이에 있거든요. 처음과 끝 사이에,  그 사이에 화목제물의 영향이 이미 다 속속들이 끼어있어요.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오늘 9월8일 오후 3시, 4시 사이에도 끼어들어 있어요. 화목제물이. 빵이 참 맛있다. 빵이 맛있어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 무슨 빵을 먹든 간에 십자가 안에서 영생을 얻은 거죠.

근데 우리는 그걸 다 알지만 생략하죠. 그냥 빵 맛있다고 이야기하죠. 그 뒤에는 빵이 맛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로 산다는 이야기에요. 문장이 너무 길잖아요. 그걸 줄입시다. 참, 빵 맛있네! 우리끼리는 이렇게만 해도 다 통하는 것이 있으면....,그럼 제가, “집사님 빵 맛있어요?” “나도 빵 맛있어요.” 라고 하는 말은 그게 진담이 아니고, “나도 빵 맛있는데 이것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겠어요?

항상 우리는 그렇게 내가 행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용서해주시는 효과를 증거 하라고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나의 행함이 아니고, 하나의 계명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게 6절에 보면 우리는 “그 안에 거한다.” 라고 되어 있어요. 거한 적이 없고 나 혼자 있다면 나만 자랑질 할 거예요. 만약에 거하게 되면 절대로 내자랑 못하고, 우리는 나를 거하게 만드신, 성령 받게 하신 예수님의 화목제물이 와따고 유일한 기준이에요.

유일한 기준, 이것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유일한 기준이라는 것은, 그 기준 앞에, 십자가 앞에 어떤 기준도 들이대지 말라는 거예요. 공부 잘해야지? 아니, 들이대지 마! 부자 되어야 되지? 아니, 들이대지 마! 교회 커야 되지? 아니, 들이대지 마! 아프면 안 되고 건강해야 되지? 아니, 들이대지 마! 그거는 기준이 안 돼요. 나는 착하다. 니가 착한 것, 기준이 아니에요. 나 말고 유일하신,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렇게 합시다. “저요?” 나 안 믿고 누구만 믿는다? “예수 믿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라는 겁니다. 예수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할 자가 없느니라”(3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해야 되죠.

기계적으로 예수 믿는 것 아닙니다. 진짜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주라고 한다면, 그거는 뭘 근거로 하느냐 하면 나는 절대로 나를 자랑하거나 믿을 수 없습니다. 물론 옛사람은 평소에 자랑해요. 3초 빼놓고 23시간59분57초는 자랑해요. 하지만 그 3초가 나의 본질이고, 나의 원조고, 나에게 나올 수 없는, 행함에서 나올 수 없는, 외부에서 내 안에 박힌 이런 묵시적 가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9-16 22:18 
20160908 요한1서 시카고강의8-이 근호 목사

제 여덟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2장 12절을 봅시다. 요한일서 2장 12절에 보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사도요한이 지금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제발, 제발, 용서함 받으세요.” 라는 이야기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여러분 보기에는 죄가 없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죄가 있습니다. 그 죄는 여러분이 자기 죄를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책이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를 내가 해결한다는 것은 마치 내가 지은 죄를 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충돌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충돌이 성립됐다는 말은, 내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 내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모르고 있으면 스스로 해결할 대책도 없다는 겁니다. 대책 없는데, 대책이 먼저 나왔어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피고, 화목제물이에요.

그러면 중심을 뭐로 잡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로 또는 화목제물로 시작해서 어떤 논리를 펼쳐도 우리는 이미 이기게 되는 겁니다. 승리함이 되는 겁니다. 아! 예수 피 믿고 승리해야지! 이러지 말라는 말이죠. 우리가 미리 예수 피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 것 같으면, 우리가 빨리 십자가로 하겠는데, 십자가 피의 등장은 우리 요구사항이 아니고, 우리가 제안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 대신 누가 십자가 지게 해주세요.” 라고 요청한바가 없는데, 요청이 들어왔다는 말은, 이미 그 결과마저도 확정지어져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앞에 포도 있고 멜론 있는데, “아, 나는 사과가 먹고 싶었는데?” 생각했는데, “에이, 여기 사과 있다.” 이렇게 해버리면 이건 이미 요청한 것이 돼요. ‘분명히 내가 거기에 가면 아마 포도가 있을 걸?’ 이렇게 예상했는데, 포도가 있으면 예상과 포도가 관련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예상하지 않고, ‘에이, 사과 뭐 먹을 게 있어?’했는데 사과가 있다면, 그 사과가 있다는 것은 누구 의견입니까? 우리가 요청한 의견입니까? 누구 의견이에요?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해결책이 왔다는 말은, 나머지기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가 해결할 수 없었던 요소가 우리한테 있단 말이죠. 내가 내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방법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해결책을 이미 얻은 것이 돼요. 말을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마는, 이걸 달리 말할 방법이 없어요. 자꾸 뭘 하면 됩니까? 하고 덤벼들기 때문에 그걸 피하려면, 예상 못할 결과가 왔다는 말은, 우리는 내 자신도 내가 예상 못할 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느 게 우선이에요? 언약이 우선입니까? 내가 우선입니까? 언약이 우선이죠. 그럼 진맥 안 받아도 돼요.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모든 스트레스가. 지금 한의사에게 진료 받는 이유가, 모든 출발점은 뭐다? 내가 제일 중요하다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해결책이 없습니다. 보약 지어봐야 효과 떨어지면 마찬가지에요. 근데 예수님의 피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요청한 것이 아니죠? 그냥 누리면 되죠.

단, 조건이 있어요. 내 생각하지 말고 먼저 뭘 생각해라? 주께서 다 이루신 계명만 생각하고, 나는 계명 덕분이라는 말만 하라 이 말이죠. 나는 그 계명 덕분에 몰랐던 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계명 오기 전에는 나는 잘났는데, 계명이 딱 등장하고 난 뒤에는, 이미 용서받은 죄인. 죄인이니까 용서받자가 아니라 이미 용서가 결정된, 내가 없는 걸로 확정된 그러한 죄인. 마음껏 죄지으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마음껏 죄지으세요. 해결책 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서 제가 잠시 써보겠습니다. 계명이 우선이니까, 계명을 제일 첫 번째 자리에 놓겠습니다. 계명 다음에 우리 인간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아니고, 계명을 정립하기 위해서, 계명이 왜 확정적이냐를 증명하기 위해서, 계명이 왜 영생이 되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계명이 먼저 있다는 말은 우리는 계명의 아들이 되고, 계명의 새끼가 되고 계명의 자식이 되겠죠. 계명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난 인간이기에, 이걸 가지고 요한일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형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걸 형제라고 해요.

그리고 계명에서 흘러나온, 형제 없는데서 형제 되게 한, 흘러나온 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 그럼 문제 들어갑니다. 내가 사랑합니까? 계명이 나를 사랑합니까? 계명이 우선이고 계명에서 흘러나온 사랑이 나를 만든 거예요. 없는 나를 만든 거예요. 자, 없는 나를 만들었다? 마지막 시간이니까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자, 어려운 거 하나 나왔어요. 없는 나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둘로 나누어져야 해요.

뭐냐 하면, “내가 아는 나”, 이거 스트레스 받아요. 이거 소용없어요. 그런데 “내가 모르는 나” 이거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계명에서 출발해서 나한테 들러붙어 있는, 새롭게 돌출된, 출현된 나. 이 나가 있을 때, 형제라는 것이 성사가 됩니다. 그러니까 남을 사랑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남을 사랑하지 말라.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기에요? 내가 남을 사랑하게 되면 출발점이 누구부터 해요? 나부터 나오죠. 그런 사랑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골라잡아서 사랑하기 때문에.

제가 옛날에 대학 다닐 때, 선교단체가 있어가지고 노방전도를 하는 거예요. 돌아다니면서 벤치에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선교지, 사영리라고,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이라고 해가지고, 잠시 교육받고 전도를 하는 겁니다. 전도를 제가 실제로 해보니까, 꼭 예쁜 아가씨들한테만 해요. 전도를 하면서도 뭔가, 전도하면서도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은, 뭔가 사귀어볼만한 이성한테 하는 거예요. 그게 깔리고 떨리고. 그러니까 깔려있으니까 떨린 거예요. 그래서 떨려서 전도할 때는 약간 더 신빙성 있고 진지하고. 그런데 못생긴 것이 와가지고, “뭐하시는데 저한테도 이야기를 거시죠?” 그러면 북한말로 “일 없습네다”

왜, 사람은 내 사랑에 실패할까요? 출발점을 누구부터 한다? 나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거는 형제를 아무리, 일본야쿠자들처럼 손목 칼로 그어서 피를 함께 나눠봐야 나중에 지분싸움이나 하고.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사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없는 사랑을 주께서는 상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잘남을 증거 하기 때문에, 이거는 하나님께 일 없습네다. 북한 말로.

일 없고, 하나님께서 하는 일은 먼저 계명이 등장하고, 계명의 어떤 체제에서냐, 이미 완료된, 저는 완료되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성경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겼다고 되어 있어요. 13절 끝에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어떤 겁니까?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증거 하기 위해서 새롭게 창조된 너는 이미 악함을 이겼다는 거죠.

그러면 기존의 나는 악함을 이깁니까? 못 이깁니까? 니가 백날 해봐야 못 이긴다. 이길 수가 없다. 그럼 이길 수가 없다는 말은 우리는 전에 어디에 소속되어 있었습니까? 소속 또 나옵니다. 악한 자에 소속된 자인데 어떻게 악한 자를 이겨요? 소속됐는데 뭘 이깁니까? 못 이기죠. 그러면 우리가 이 소속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소속에서 유일하게 왔다가 벗어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벗어나면서 만든 게 있어요. 계명을 만든 거예요. 그 계명은 벗어났다를 증거 하기 위해서 만든 계명이에요. 악한 데서, 또는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계명. 그 계명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사람이 바로 형제라고 하는데, 형제에서는 사랑이 있고, 그 사랑을 발휘한 것을 가지고 요한일서 뒷부분에서는 성령 안에서 사랑, 성령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냥 사랑은 사랑이지, 왜 성령의 사랑이라고 하느냐, 우리의 행함으로 나올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성령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행할 수 없으니까. 그러면 이래나 저래나 결국은 뭐예요? 사랑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남을 사랑하지 말라는 거예요. 해봤자, 괜히 해가지고 사랑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그게 더 못됐어.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기 더 밉다고. 되지도 않은 사랑을 해놓고, 실컷 사랑했심더~ 이래요. 뭘 사랑했어? 이기지도 못할 사랑. 나 자신의 명예를 보이기 위해서, 지 자랑할 사랑을 해놓고.

그러면 이기는 사랑하고, 내 사랑하고 어떻게 다릅니까? 진짜 주님의 이기는 사랑을 하게 되면, “역시! 계명이, 주님의 사랑이 정말 승리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겠죠. 나는 못했는데, 주께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이래 됩니다. 첫 번째 어려운 것이 살짝 지나간 것 같은데, 아직 어려운 것이 남아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형제는 어떤 사람이냐, 두 개의 경로를 다 고백하는 사람이에요. 뭐라고? 나는 사랑할 수 없었는데,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구를 사랑한다? 사람을 사랑한다?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한다? 아닙니다. 뭘 사랑한다? 형제를 사랑하는 거예요. 형제를.

그럼 형제라는 의미는 뭐냐, 형제의 반대말(↔)세상. 형제의 반대말은 세상이죠. 그래야 형제들은 어디에 속하지 않는다? 세상에 속하지 않죠. 소속이 또 나와요. 너희들은 세상에 속한 소속이 나오지만, 우리들은 하나님께 속했다. 하늘에 속한 형제에서 나오는 겁니다. 자, 그러면 내가 형제를 사랑할까요? 못할까요?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계명이 아니기 때문에. 계명이 유발한 형제를 내가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러면 성경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합니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먼저 니가 나를 사랑했지? 내가 너를 사랑했지? 이렇게 만나는 것이 아니고, “어이! 거기 전하는 사람?” “왜요?” “누구 믿습니까?” “나, 계명 믿어요.” “어? 형제네!” 이래되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그건 엉터리고, 둘 다 계명을 가지고 만날 때, “무슨 계명?” “화목제물.” “어? 당신도 죄인? 나도 죄인.” 죄인과 죄인이 만나고 나서, 이미 계명으로 인하여 새삼스럽게 사랑할 필요 없이, 그 자체가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도 전혀 몰랐었는데 이어진 형제가 되는 겁니다.

사도요한이 이 편지를 쓴 것은 바로 교회를 떠나라는 거예요. 이건 아주 도발적인 거예요. 교회를 믿지 말고 교회를 떠나라. 왜? 그것은 바로 적그리스도가 접수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교회에 속하지 말고 형제에 이미 속했느니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뭐 학자들이 아는 체하면서 요한123서는 이미 교회가 핍박을 받아서 온통 교회가 다 깨진 이후에, 가령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그거는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 예수님의 계명, 화목제물을, 십자가 피를 사모하는 사람끼리 이미 형제가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걸 썼다고 딴에는 맞는 소리를 해요.

그건 맞는 이야기 맞아요. 비판한다고 무조건 다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그들의 그 말은 맞는데, 그들이 모르고 누락된 것이 하나 있어요. 그런 뭐냐 하면, 계명이라는 것.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묻는 게 뭐예요? 계명이 우선입니까? 인간이 우선입니까? 라고 했죠. 근데 분명히 계명이 우선이죠. 인간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안 돼요. 분명히 입맛에 골라잡아요. 자기 습성과 취미에 맞는 것을 해요.

이건 교회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사람 보면 주로 취미생활이 맞는 사람이에요. 이건 계명으로 하나 된 것이 아니고 취미로 하나된 거예요. “골프 치십니까?” “나도 치는데.” “어떻게 에버리지가?” “어이구! 잘 치네? 홀 한 번 돌까요?” 이래되는 거예요. 근데 교회 가서 눈치 없이 “혹시 화목제물 아십니까?” 이러면 아무도 안 친해요. 이미 사도요한시대에, 이미 그 현상이 일어난 거예요. 이게 단체인지, 노는 단체인지, 이거는 어디 정보교환단체인지, 외로운 한국 사람들, 돈 못 버니까 김밥 한 줄씩 먹기 위해서 모이는 단체인지, 분간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보이는 설교자가 계명을 이야기하고, 화목제물이야기하고, 하나밖에 없는 계명입니다.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을 가지고 맨날 하는 소리가, “여러분, 우리 서로 형제를 사랑합시다.” 이거는, 이미 진위를 들었으니까 여러분 아시겠죠? 형제사랑 하는 것, 백퍼센트 가짜교회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수 없어요. 우선이 내가 아닌데 왜 내가 사랑해야 돼요? 전에 했죠? 인간의 행동은 반드시 뭘 원한다? 반드시 대가와 보상을 밑에 깔고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뭐 바봅니까? 쪼다에요? 지 희생해놓고, 대가없는 희생이 어디에 있어요? 사랑 한만큼 사랑 돌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남편이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아내여! 받은 만큼 돌려달라는 이런 뜻이에요. 이거 뭐 뻔한 거예요. 절대로 형제를 사랑하는 교회는 그거 교회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화목제물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해야 돼요. 죄 이야기해야 되고.

이제 마지막 시간이라 다 알고 가셔야 되니까, 여기까지는 다 아셨다 치고 그 다음이 뭐냐, 계명이 뭐냐 하는 것입니다. 계명이. 계명이 우선이라고 했으니까 이제 계명을 알 차례인데, 이 계명이 뭐냐 하면 새 계명이라고 되어 있어요. 새 계명을 숫자로 이야기하면 새 계명=1계명. 한 계명. 그러나 1이라는 숫자는 언제 쓰느냐 하면 모든 위상에서 최고의 궁극적인 위상일 때, 숫자를 1로 쓰는 겁니다. 이게 1이 되버리면 여기 밑에는 2345..이것을 철학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다양성이라고 합니다. 다양성. 이발사 되도 구원받고, 미용사도 구원받고, 의사들도 구원받고, 판사들도 구원받고, 백수라도 구원받고, 놀아도 구원받고, 농부들도 구원받아요. 다양성입니다. 다양성.

그러나 농부라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지 않고, 박사라는 이유 때문에 구원받지 않아요. 그러면 그 이유는 개인에서 끝나야죠. 지금 제 말씀의 의도를 아시겠습니까? 나는 농부다. 농부이기에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이 되는 요소는 농부 자체에서 찾아야 된다? 안 찾아야 된다? 절대 찾아서는 안 돼요. 목사라서 구원받는 것은 없어요. 이걸 교인들이 알아야 돼요. “아이, 목사님은 성품 좋으니까.” 절대로 목사라서 구원되지 않습니다. 다른 데서 찾아야 돼요. 그 다른데서 찾는 것이 요한일서에서는 뭐냐 하면, 그 사람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새 계명 나오면, 그 사람은 목사냐, 아니냐, 상관없이 형제입니다.

요한일서가 무서운 것은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어요. 요한일서 2장 27절에서. 그럼 뭐냐, 누가 니 지도자야? 이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듯이 신학자들은 이미 분명히 교회 다 깨졌다. 핍박받아서 다 깨졌다고 한 거예요. 이제는 교회 직분이고,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내용이 중요한 거예요. 뭐 장로, 목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건 껍데기에 불과하고. 새 계명을 우선으로 여기는 형제에, 이미 형제로 엮어진 것을 동의하는 자가 이미 이겼느니라. 아까 이미 죄에서 사함을 얻었느니라.

자. 이쯤해서 다시 한 번 해봅시다. 12절,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라고 되어 있죠.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었다는 말은, 죄 용서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과 방법은 우리 자체에서 나오지를 않는다. 그러면 우리가 용서를 받았다는 말은, 궁극적인 그 원인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새롭게 구원된 자가 바로 너희들이지? 라고 묻는 겁니다. 우리는 아멘. 그렇습니다. 사람 잘 봤네요. 이래 이야기 하면 되겠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다양성 속에, 어떤 사람은 이발사고, 의사고...이런 사람의 공통점이 뭡니까? 내가 우선이 아니고, 너도 우선이 아니고, 너, 나 보다 궁극적인 최고의 원천에 의해서 우리가 다양성이긴 하지만 다 같은 형제가 되는 겁니다.

자, 그럼 형제가 몇 개입니까? 하나죠. 형제가 몇 명입니까? 라고 묻는 것이 아니에요. 형제가 몇 개입니까? 오직 하나의 형제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그 관계는 둘의 관계가 나와야 돼요? 셋의 관계가 나와야 돼요? 하나의 관계가 나와야 돼요? 하나의 관계죠. 그 하나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면 한다면, 그 하나 관계 말고 다른 관계로 형제들 간에 이어지겠어요? 안 이어지겠어요? 안 이어지죠. 중요한 거 했습니다.

취미 생활 같다고 형제라고 쳐주지 마시고, 전도하면서 아가씨가 인물 예쁘다고 전도하지 마시고, 눈을 뜬 이상 안 보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하면서 뭔가 인물을 능가해야 될 다른 요소가지고 해야 돼요. 결국 우리는 주께서 만들어주신 형제 찾기가 곧 전도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전도 할 때는 꼬시는 것이 아니라 뭘 전했는가가 중요해요. 각자의 역량과 재주와 사랑하기를 전하면 안 됩니다. 그건 가짜입니다. 우리는 사랑 못한다는 것을 증거 해야지. “우리는 사랑 못하죠? 그런데도 용서 받았죠?” 누구겠습니까? ‘아, 위에서 내려온 사랑이 따로 있구나.’ 내 사랑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분의 사랑이 내려오는 것이죠.

자, 거기까지 일단 복습이 됐다고 치고, 진도 나갑니다. 진도 나갑니다. 새 계명이 1계명, 이 한 계명을 성경에서는 새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구약성경에서 계명이 몇 개입니까? 하나죠. 아, 이거 어렵다. 분명히 십계명 있고, 십계명은 계명이 몇 개입니까? 구약적으로 열 개명인데, 요한일서에서 물으면 십계명은 몇 개입니까? 한(1)계명.

우리한테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열 개명을 하나로 만들어라.” 그거 수능 나옵니다. 하늘나라 수능. “열 개의 계명을 하나로 만들어라.” 아, 이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죠? 근데 어렵지 않는데, 3초 만에 굉장히 쉬워요. 123 3초 만에 대박 해답이 나옵니다. 계명을 내가 지킬 계명이라면 이거는 해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이 계명을 인터셉트해서, 뺏어가지고 단독자가 계명을 다 지키면, 그 계명은 두 계명, 세 계명이 아니고, 어떤 계명이든 그 분이 전담이 돼서 혼자 지킨다면, 그 계명이 무슨 계명이 되죠? 오직 한 계명 되고, 그걸 가지고 새 계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고맙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데, 문제는 제가 방금 알려드린 것처럼 합당한 근거가 있느냐? 그게 문제가 되겠죠. 합당한 근거, 제가 제시해드리겠습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친절한지 모르겠다마는, 제시해드리겠습니다. 몇 군데 나오는데요, 우선 요한복음 15장 보겠습니다.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먼저 나를 미워한 줄로 알라”  “너희”가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숫자가 적어요? 많아요? 한명이 아니고 너희니까 여러 명을 이야기하죠. 여러 명입니다. 숫자로 치면 1이 아니에요. “나”는 숫자로 치면 몇 명입니까? 1.

그러니까 여기 너희라 하는 것은 제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민 그 사랑의 효과로 인하여 새롭게 규정된 너희들. 그 너희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너희들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어디를 수긍하고 어디로 쫓아오느냐 하면, “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는 말을 고백하는 그러한 성질을 나타내는 자가, 여기 너희라는 겁니다. 그거까지 논리적으로 맞지요?

그 다음에 나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 것은, 너희를 미워함이 아니고 바로 나를 미워함이다. 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이겼다는 말은 어디에 나옵니까? 요한복음 16장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형제여! 세상을 이기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여러분들이 서로 사랑해서 세상을 이기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는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교회로서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거는. 

33절 말씀 하게 되면 제가 할 말이 없어요. 뭐냐 하면, 여기 “너희”라는 복수 나오죠. 그 다음에 뭡니까? “나”는 단수 나오죠. 숫자 많음이 뭐로 수용된다? 숫자 1로 수용되죠. “여러분 누구 믿습니까?” “나 믿습니다.” 라는 것은 아니죠. “저요? 하나뿐인 궁극적인 예수님 믿죠.” 그런데 세상과 예수님과 싸워서 누가 이겼습니까? 예수님이 이겼습니다. 이겼다는 말이 뭘까요? 세상은 예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음가운데서 부활하셨죠.

그러면 세상은 따라 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세상이 조폭 되어서 땅에 묻었는데, 조폭들이 뒤에 가서, “야, 이거 채무자 한 번 들어봐라 썩었나 보자.” 그랬는데, 빈 무덤이야. 그럼 그 조폭들은 하늘나라에까지 따라와서 죽이느냐? 못 죽이죠. 그럼 천국은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세상에서 내 빼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집합. 이게 천국이죠. 그럼 구원은 뭐냐, 개인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 하나에게 종속된 집단구원입니다.

이제 집단구원 이해하시겠습니까? 그거 이해하려면 계명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부터 출발해야 돼요. 나보다 누가 우선이다? 내가 우선이 아니고 계명이 우선이다. 그럼 나의 삶은 계명을 증거 하기 위해서 아직도 목숨이 붙어서 살아있다. 뭐하라고? 나는 사랑할 줄도 모르고, 나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 고백을 하는 거죠. 그래서 참된 교회는, 사랑하지 맙시다가 이게 참된 교회에요.

논리가 간단한데. “여러분!” “예.” “사랑하지 맙시다.” 오늘부터 절대로 사랑하지 않기. 자기 주제를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주제를. “목사님. 우리는 죄인 되잖아요?” “예. 죄인 됩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아요?” 우리가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구원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고, 우리는 그 분을 버리거나 떠날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말인데, 예수님만 증거 하는 형제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뭘 더 행함으로 보탤 수 있을까요?

한 번 정리 들어갑니다. 계명이 여러 개일 것 같으면 우리가 지켜야 해요. 모든, 여러 개의 계명이 딱 하나로 뭉쳐졌다는 말은, 그 분이 그 한 개만 지키면, 모든 계명을 다 지킨 것이 되죠. 자, 반대로 나갑니다. 그 여러 개의 뻗어 나온 그 계명 하나를 어기면 모든 계명을 어긴 게 되죠. 이제 야고보서에 나오는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돼요.

이걸 사도바울의 편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몸은 하나요 지체는 여럿이니. 제가 한 번 박집사님의 손을 만져볼게요. 그럼 만일 박집사님을 만진 것이 아니고 손만 만졌다고 하면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나는 박집사님 안 만졌어요? 손 만졌지. 그거 내 손인데? 어이구, 그러셨어요? 나는 그저 손 인줄 알았지. 그래서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경우 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하는 순간, 우리는 내가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경유하는 순간 이게 박탈이 됩니다. 주님은 노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에 예를 하나 들어 봅시다. 내가 만약에 누구를 사랑하게 된다면, 복습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뭐가 따른다? 대가가 따르죠. 자기 딴에는, “주님이여 제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대가로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지금 이 공식이 맞는 공식이에요? 틀린 공식이에요? 틀린 공식이죠. 세상을 이기는 분은 누구밖에 없었습니까? 이미 확정 났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왜? 건방떨면서, 왜? 우리가 예수님 자리에 끼어들려고 합니까? 니 좀 나가 있어! 니는 좀 빠져 있어! 그렇게 되죠.

그럼 예수님에게만 공로를 돌리려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어야 하느냐, 아무리 이웃을 사랑해도 그것이 악에서 이길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되겠죠. 제가 젊을 때 봤던 영화 중에 아주 유명한 오멘이라는 영화를 봤어요. 모가지 홱 돌아가는, 그래서 어떤 나라에서는 상영금지 되기도 했어요. 실제로 그 영화보고 죽은 사람도 있어요. 너무 놀라가지고. 어린애가 목이 돌아가요. 귀신들려 가지고.

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귀신들린 애를 신부가 대책을 세웁니다. 어떤 십자가를 구합니다. 그 다음에 성경책을 찢어가지고 도배지를 합니다. 그럼 귀신이 달아날까요? 안 달아날까요? 이겼는데 왜 새삼스럽게 그 짓 하고 있어요? 이겼는데. 그럼 신부가 그 소년을 위해서 왜 그런 무당 짓을 하는 겁니까? 형제 아닌 자를 형제로 만드는 수작이죠. 그러면 형제는 누가 만들어요? 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새 계명이 하죠.

그 새 계명의 주체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그럼 이 예수님이 죽어서 노십니까? 살아 있잖아요? 그럼 살아서 가만히 앉아 마작이나 둡니까? 흥흥거리며 놉니까? 아니죠. 부지런히 뭐해요? “얘가 니가 생각하는 형제야. 형제. 얘가 형제야.” 하면서 부지런히 형제를 소개하죠. 그럼 우리는 뭐합니까? “제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하면서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그럼 형제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합니까? 나는 내가 아무것도 잘할 수 없다는 걸로 생각하는데, 아저씨는 어떻게 사랑합니까? 내가 뭘 사랑해요? 사랑할 줄 몰라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어이구, 반갑습니다. 반갑구만 반가워요!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교회라는 말이죠.

이미 세상을 이겼어요. 그 분이 주장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 분 빼고 나머지기는 손을 훌훌 털어야 돼요. 빠져야 돼요. 주인공에서 빠져야 돼요. 그걸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겁니다.  어디로 빠질까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빠지라 이 말이죠. 제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하니까, 봉투에 돈 넣어서 주면서, 어렵지요? 받으세요. 그게 형제 사랑입니까? 어데? 돈으로 목숨을 때울라고. 주께서는 목숨을 바치라고 했지, 목숨 아까우니까, 여윳돈 갖다 내미는 것은 그건 형제 사랑이 아닙니다.

목숨을 바쳐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어떤 발악을 해도, 내가 아는 나의 옛사람은 이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 뽀빠이! 개입해주세요! 이래 돼요. 뽀빠이! 살려주세요! 어릴 때 뽀빠이 그 만화를 보면서 제가 불만이 굉장히 많았어요. 올리브가 반반하게 생겼지 않습니까? 올리브가 처음부터 뽀빠이를 불러야 되지 않아요? 빰빠라밤빰빠~♬ 빠라라빰빠빰~♬ 처음부터 부르면 부르투스가 안 그럴 건데, 꼭 처음에는 지가 물리친다고 “놓으세요.” 이러고 있다고요. 어린 마음에 답답해서 미치겠어요.

매일 매회에. 뽀빠이! 살려주세요. 매일 매회에 그러는 거예요. 한두 번 당했으면 뽀빠이하고 살림을 차리든지 이래야 될 건데, 뽀빠이가 와서 사랑한다고 하면, 에이, 치워라! 돈 받아놓고 치워라! 그래놓고 부르투스가 와서, 에헤헤 목소리도 이래요. 또 성희롱하고. 또 도망치고. 뽀빠이도 미리 시금치를 먹지, 지 힘으로 한다고 얻어맞고 터져진 후에야 빰빠라빰~ ♬해가지고 시금치 먹으면 알통이 위에부터 나오기 시작해가지고. 어린 마음에 가슴 아팠어요. 정말. 건의할 수도 없고.

세상의 모든 신화는 영웅 신화입니다. 영웅 신화는 반드시 고난이 있게 되어 있어요. 고난을 딛고 시련을 밟고 그 다음에 영웅이 되었을 때, 그런 반전이 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합니다. 중국이고 한국이고 모든 신화는 바로 고난 뒤에는 영웅이 와서 하죠. 중국영화도 보면 아버지가 도장을 차렸는데, 상대방 도장의 사람들이 와서 도장이 엉망이 되고, 아버지 죽고, 아버지 죽고 난 뒤에 쫓겨가지고, 무슨 유명한 산에서 도사를 만나서 무술을 익힌 후에 내려와서, 그 도장 근처 중국집에서 만두 먹다가 한바탕 벌어져가지고, 마지막에 고수 나오면 그 고수 죽이고 영화가 끝나잖아요. 이소룡, 부르스 리 영화가 전부 다 그런 거잖아요.

그건 뭐냐, 인간들은 내가 고난 속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포기 못하는 겁니다. 그거는 자기 자신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계명은 나중입니다. 내가 돈 모아서 교회 세웠다. 이제는 교회가 우선이고, 주의 계명은 나중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이야기 해도 용서해주되, 교회이야기하면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만 해도 흔쾌히 받아들이는데, 우리 교회는 십자가로 끌어 모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삼가주세요. 이런 인간 검증으로써 모인 교회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참, 이게 악한 세대죠.

그 다음에 보겠습니다. 한(1)계명에 대해서 다 아시겠지만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 숱한 계명이 어떻게 된다? 계명 하나로 뭉쳐지죠. 그 방법은 뭐라고 했습니까? 그 계명을 내가 지킨다면, 이거 지켜야지, 미진한 것 지켜야 되지, 세 계명, 네 계명, 다섯, 여섯 계명...매일 이건 숙제를 내야 되지만, 그게 아니고 계명이 하나로 뭉쳐진 입장에서는 어느 계명을 건드려도 다 어긴 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와서 계명 지키는 것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가 계명 지키는 것과 어떤 조건 때문에 우리는 계명을 제대로 못 지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갈라디아서 3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이런 구절은 우리가 누구하고 이야기할 때 기억을 해놓으면 참 좋습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제가 중요한 것은 네모라고 할게요. 10절, “무릇 율법 행위에 ☐ 자들은” 그 네모에 뭐가 나옵니까? “속한” 소속이 또 나와요. 무릇 율법 행위에 소속된 자들은, 이렇게 되겠죠. 그 다음에 “저주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ALL)일을 항상” 항상 영어로 올웨이즈always죠. 시도 때도 없이 모든 율법을 다 지키지 아니하면.

그 다음에,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마지막 계명은 뭐가 주어진다? 축복? 아니죠. 천국? 아니죠. 뭐가 주어진다? 저주가 주어지는 원칙을 누가 세웠다? 율법을 주신 우리 주님이 세운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니가 지키는 것이 율법의 완성일까? 내가 지키는 것이 율법의 완성일까?  너희들 다 동원해! 850 대 1이 아니고 전 세계 모든 사람과 예수님 혼자 할 때, 누가 이기느냐, 누가 승리하느냐, 한 번 해보자 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 본인이 다 지켰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그거는 예수님이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증명해요. 죽은 자가 도로 부활함으로써, 유일한 이름이, 유일하게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이름, 영원한 영생할 이름, 길이고 진리고 생명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율법을 가지고 증명해냅니다. 자, 그러니까 뭡니까? 우리는 율법을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킨다.

그럼 성경을 왜 봅니까? 우리 자신의 소속이 어디냐를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서 못 지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소속은 땅일까요? 하늘일까요? 하늘이고. 만약에 지킬 수 있다고 하면서 보는 사람은 소속이 하늘일까요? 땅일까요? 땅이고. 그렇게 복잡한 성경이 너무 쉽네. 우선 나부터 출발 안 하니까 쉽고. 나부터 출발 안 하니까 내가 못 지킨다고 하니까 쉽고. 더 쉬운 것은 이미 가져가서 내가 못하는 것을 다 해줬다는 분이 있다는 것이 쉽고. 그리고 그 분이 쉬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옆에 형제를 따로 생산해냈다는 점을 아니까 쉽고.

결국 그 전체를 모으면 딱 두 글자. “소속” 소속입니다. 성령께서 묻는 것은 니 소속이 어디냐? 소속이 어디에요? 율법에 속합니까? 성령에 속합니까? 율법에 속하면 무조건 저주고, 성령에 속하면 예수님이 대신 해주셨기 때문에 무조건 천국입니다. 이거는 구약에 나오는데, 광야 때 백성들이 원망했죠. 원망한 이유는, “못살겠다. 애굽으로 돌아가자!”입니다. 괜히 나왔다 이 말이에요. 괜히.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불뱀이 나와 가지고 많이 죽이고 어떤 사람은 아프고 그랬어요.

그럴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대책을 세워줬어요. 그 대책이 뭐냐 하면, 아픈 사람,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대책이 아닙니다. 절대적 기준을 제시해요. 니가 아파야 될 절대적 기준을 제시한 겁니다. 방금 제가 뭐에 물렸다고 했습니까? 뱀에 물렸죠.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세웠어요. 물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들어보세요. 예. 물릴만합니다. 뱀이 와서 죽어도 할 말 없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은 놋뱀을 쳐다보면서 병이 낫고.

이건 전적인 하나님 책임이지, 점잖고 착하고 천당 가려고 애쓴 나를 잘못이라고 한 사람은 절대로 놋뱀을 쳐다보지를 않습니다. 근데 주님께서 더 무서운 것은 그 놋뱀을 뭐로 교체했느냐 하면 십자가로 교체했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은 천국에 가고, 십자가를 안 보는 사람은 지옥에 가요. 쉬워도 그렇게 쉬운데, 이게 왜 어려우냐 하면, 나를 알고 쳐다봐야 하는데, 무조건 무당처럼, 주술처럼 그냥 쳐다보니까, 백날 봐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을 고백을 해야 하는데. 그럼 지금 십자가가 안 보이죠. 그럼 뭐만 보입니까?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형제들만 보이죠. 이게 바로 형제입니다. 이게 진정한 사랑이고 교회입니다. 놋뱀 만든 것을 알겠죠? 니가 물려도 싸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것을 보면, 예수님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고 니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도 싸다는 것에 동조하고 동의하는 사람은 영생 얻은 사람입니다. 아이고~ 이래 쉬운 것을 가지고. 어려워서 못 믿는 것이 아니고, 고집이 얼마나 센지. 나는 나의 의를 포기 못하겠다는 거예요.

자 본문 요한일서 2장 11절에 나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소속이 어디 소속이냐 하면 국가소속이 아니고 어두움의 소속이죠. 이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어두움에 속했다는 말은, “내가 이러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 당신을 미워합니다.” 라는 핑계가 이거는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너처럼 되면 예수 믿을 거야.” 라는 핑계는 핑계일 뿐이라는 겁니다. 어두움에 속했다는 것은 개인의 인격성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키가 몇 센티고, 성품이 온유 하냐, 아이구, 예수 안 믿어도 착하구나. 이런 모든 개인적인 소속들은 일체 없습니다. 일괄적으로 다 어두움에 속한 겁니다.

그럼 저 사람이 어두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빛이 나타나게 되면 어두움도 같이 확연하게 노출되게 되어 있어요. 빛이 등장하게 되면. 이게 바로 8절에 나오죠.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 이니라” 화목제물이신 예수님이 빛으로 등장하게 되면, 결국 그 순간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내게 속했다. 나는 어느 고등학교 나왔다. 어느 대학교를 나왔다가 아니라, 나는 어두움에 속했다를 새삼스럽게, 자기 옛날 소속된 것을 자백하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효과가 있죠. 빛이 왔기 때문에 어두움입니다. 이 어두움이라는 설칠 필요가 없죠. 어두움이 설쳐봐야 아무도 모르는데. 어두움이 헌금해봐야 하늘나라에서 인정 한 해줍니다. 어두움인데. 자, 마지막으로, 시카고 강의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될  이야기가 뭐냐 하면, 남은 숙제가 이겁니다.

그러면 이 어두울 수밖에 없는, 사랑하지 못하는 옛사람을 왜 그냥 두십니까? 백날 해봐야 이웃사랑도 못하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자기 잘난 척만 하는 나를 왜 이렇게 살려 둡니까? 주께서 잘라서 없애버리지? 그래서 참 빛만 남겨두면 되지? 말 잘 듣는 사람만 남겨두면 되지? 왜 그걸 안 버리고 계속 유지시키느냐?

그 질문인데, 그 질문을 쉽게 하기 위해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성경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잖아요? 라는 질문입니다. 방금 제 말 이해되십니까? 이미 구원받고 성령 받았잖아요? 그럼 이 참고서는 대학시험 보고 난 뒤에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단 말이죠. 이것이 구원을 받는 참고서라면 이미 성령세례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면서 그럼 성경을 왜 봐야 하는데? 여러분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교회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십자가마을사람들도 “기도해도 응답 없습니다.” 라고 하니까 대박 나온 답변이, “그럼 기도 안 해도 되네요?”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저한테 들리기는 뭐냐 하면, “기도하기 싫었는데 잘됐다.” 이래 들려요. 평소에 이 말은 뭐냐 하면, 기도해도 억지로 했다는 것이고. 어떤 핑계만 정당성만 준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기도 때려치웁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자기의 노골적인 속마음을 드러낸 거예요. 들킨 거예요.

자,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미 구원받았는데, 성경책이 왜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먼저 답변하기 전에 아는 사람 손들어보세요. 솔직히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성경에서 이래서 구원받았다고 했잖아요? 과거 완료잖아요? 이미 구원됐는데 성경을 왜 봐요? 구원 안 됐으면 더 봐서 구원 돼보려고 하는데, 구원됐는데? 대학을 들어갔는데 고등학교 참고서는 왜 보느냐? 이 말입니다.

계속 강의 주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소속이잖아요. 잉태치 않는 자가 복되도다. 없던 존재가 새롭게 발생된 거죠. 땅에서 아버지, 엄마가 낳은 그 혈통은 절대로 이거는 구원 못 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구원 못돼요. 그러면 영생을 얻으려면 소속돼서 영생을 얻게 되는데, 그거 소속을 생각해서 답변해드리겠습니다.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계명이 우선일까요? 내가 우선일까요? 계명이 우선이죠.

그러면 계명에 의한 구원이 우선일까요? 내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이 우선일까요? 계명에 의한 구원이 우선이죠. 이 계명에 의한 구원은 구원자가 있어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시죠. 이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은 왜 예수님 먼저 부활되었는가? 첫 열매, 첫 부활이죠. 예수님이 왜 부활의 첫 열매인지를, 둘째, 셋째가 무엇에 종속되어야 해요? 근원적인 1. 그 일에 종속되기 위해서 234..가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234..나와도 소용이 없고, 2가 나와도 1에 달라붙고, 3이 나와도 1에 달라붙고, 이게 강력한 자석이 지나가면 개별체가, 니는 니대로 놀고, 나는 나대로 놀고, 니는 커피 들고 가고, 우리 네명은 뷔페 식사하러 가로, 이 모든 것이 마귀가 지나가면 모든 것이 그 순간 하나 되듯이, 예수 그리스도 은혜가 지나가면 전부 다 형제가 되는.

결국 이거는 내가, 개인구원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명하기위해서 우리가 와야 됩니다. 오게 되면 그 사람은 새롭게 숙제가 주어지게 됩니다. 왜? 내가, 니 대신 죽어야 되는가를,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서 주님에 의해서 이끌림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7장을 보겠습니다. 같은 사도요한이 썼으니까. 이걸로 모든 시카고 강의를 끝내겠습니다. 이 말씀을 끝으로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17장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 이로소이다”

여러분들이 하루하루 포도 먹고, 멜론 먹는 그 능력은, 내 능력이라고 하지 마세요. 포도를 먹는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고, 포도를 먹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포도가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몸은 누구 몸인가 하면, 내가 스트레스 받고 신경 쓸 내 몸이 아니고, 내 몸은 하나도 없다. 주님 몸이라고 하지 말고, 내 게 없다고 해야 돼요.

항상 부정적으로 이야기해야 돼요. 이 몸이 이빨이 빠지고 아프던, 내 이빨 아니고 내 손가락 아니다. 그럼 덜렁덜렁해서 죽을까요? 아니요. 주께서, 내 몸이 아니고 주님 몸이기 때문에, 의사 보내시고 치료하라고 돈 벌게 하시는 거예요. 모든 먹고 마시고 죽든지 살든지 주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 계명이 만들어낸, 하나밖에 없는 주님의 연결된 형제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라고 어겼는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의 형제였습니다. 그 사람하고 티격태격한 것이 아니라 곧 주님하고 티격태격한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을 보지 말고 배후에 그 사람을 두게 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로만 연결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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