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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1 21:18:04 조회 : 2072         
뉴저지 주사랑교회 강의 이름 : 관리자(IP:88.153.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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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65.245) 16-09-18 22:57 
20160909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9-이 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주께서 준비한 모든 것이 주께만 영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제를 제가 미리 말씀드렸는데, ‘복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교재는 요한일서를 하는데, 요한일서 1강에서 8강까지는 시카고강의에서 해왔고, 그것이 유튜브에 1~8강이 이미 다 올려져있습니다. 오늘은 요한일서 9강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어떤 지역에 있든지, 누구든지 말씀은 보편화되어야 된다는 것. 한국에 있든, 브라질에 있든, 유럽에 있든 간에, 누구도 그 듣는 사람이 직업과 상관없이, 나이와 상관없이, 복음은 그냥 복음으로만 구원이 돼야 된다는 것. 그래서 지역 따라 차별됨이 없이 그냥 쭉 갈 겁니다.

 

이게 9강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제목으로 드렸듯이, 복음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무엇인가? 라는 말을 하려면, 뭔가 있어야 돼요.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미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형광등이 무엇인가? 그런데 사람이 뭔가 있다는 것을,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은, 자기가 묻는 것이 있다는 것뿐만 아니고, 그렇게 묻는 자기 자신이 먼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학교가 무엇인가? 하늘이 무엇인가? 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늘도 있지만 그렇게 묻는 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고 할 때는 이게 달라져요. 복음이 있어버리면 인간은 없어져요. 그리고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복음은 없는 겁니다. 그러면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복음이 있는 것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있는 것이 좋겠습니까? 어느 것이 있는 게 여러분에게 유리하겠어요? 복음만 나타나고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없어져도 복음만 있으면 좋겠습니까? 이 질문은 요한복음 1장의 질문이에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있다고 시작하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고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알려면 내가 있다는 것을 빼라는 말이죠. 내가 있다는 것을 빼고 복음을 물어야 되지, 내가 여기 있고 복음이 있어버리면 그 복음은 나의 있음을 옹호해주고 정당화시켜주는 가짜 복음이 되는 겁니다. 내가 복음 믿으면 어떤 이익이 있을까? 내가 복음 믿으면 우리 가정이 어떻게 펴질까? 내가 복음 믿으면 구원될까? 이 모든 것은 복음에 대한 모독이에요.

 

요한복음 1장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이 먼저 있었고, 그건 어디에 있었습니까? 태초에 있었습니다. 그럼 태초에 있었다는 말은 우리는 태초에 있지도 않았던 존재들입니다. 먼저 계셔서 만들어진 존재죠. 그럼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뭐냐, 만들어진 이후에 안다는 것은 반칙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알려면 만들어지기 전에, 우리가 있기 전에, 우리가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과 예수님은 무슨 의논을 했는가? 그것을 간파하고 파악해야 이게 복음을 하는 겁니다.

 

내가 있기 전에 복음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있기 전에를 바꿔서 말하겠습니다. 내 가정이 있기 전에, 내 육체가 있기 전에, 내 교회가 있기 전에, 내 사업체가 있기 전에, 내 자식이 있기 전에, 내 돈이 있기 전에, 뭐가 있었다? 복음이 있었고 말씀이 있었죠.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할 때, 내가 우선이 되지 말고 복음이 먼저 우선이 된다고 한다면 무엇이 지워져야 하냐면, 복음이여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이여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님이여 우리에게 오셔서, 내가 고민하는 이런 것들을 다 없애달라고 하는 이런 능력이 작용해야 복음이 복음답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고민거리, 가정, 교회, 직장, 자식, 노후대책문제, 내 건강문제, 이런 모든 것을 가지고 복음과 결부시키려고 하는 것은 사이비 복음이에요. 백퍼센트 사이비 복음이에요. 딱 한마디로 끝납니다. “니가 뭔데?” 딱 한 마디로 끝납니다. “니가 뭐야? 니가 하나님이야?” “아닌데요.” “그럼 뭐야?”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건방지게, 니를 만들기 전인데, 그걸 일방적으로 개입하고 간섭할 수 있어?” 회장단들 회의하는데, 신입사원이 거기 끼어들면 곤란하잖아요? 아무리 미생이라도. 거기에 끼어들면 그 회사 안 됩니다.

 

빨리해서 듣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친절하게 천천히 말씀드립니다. 복음이여 오셔서 내 가정 문제, 내 교회문제, 내 육체문제, 아픈 문제...심지어 나의 천국, 지옥 가는 자체의 문제가 나의 고민이 되지 않게 해주옵소서. 없애주소서. 그럼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래야 태초, 피조 이전의 세계가 우리에게 구현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묻죠. 니 소망이 뭐냐? 저의 소망은 태초이전의 사상과 계획이 그대로 이 땅에 펼쳐지기를 원합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쳤던가? 그것은 태초이전에 관여하신 분이 가르쳤잖아요? 누군데? 성령이 그렇게 가르쳤잖아요. 태초에 성부, 성자, 또 누가 계셨어요? 성령이 계셨잖아요.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상이 문제가 있는데, 그 문제가 해결 안 되는 것이 아니고 해결되는데, 해결되려면 바로 태초로 돌아가, 태초에 계신 그 작정과 계획이 그대로 넘치면 되느니라.

 

뭐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이렇게 이야기했을 겁니다. 참 쉽죠? 문제 정말 간단해요. 우리 애가 몇 살까지 살겠습니까? 그거는 니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야. 제가 앞으로 90일 살겠습니까? 니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야. 왜요? 태초에 관해서는 내 소관이지, 피조 된 니 소관이 아니라는 겁니다.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렇게 묻게 될 때, 이렇게 묻는 우리 자신은 이미 복음에 의해서 소멸 될 마음의 자세를 갖추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소멸 될 마음이 자세를 준비한다면 무엇도 소멸됩니까? 그동안 끙끙 앓으면서 인생의 모든 고민과 걱정과 그리고 기도제목으로 삼았던, 심지어 금식제목으로 삼았던, 심지어 십일조 내는 그 이유로 삼았던 모든 것들은 다 허망한 것이고, 그동안 그 허망한 것을 그렇게 고민거리로 내게 받아들였다는 것은, 태초에 대해서 인간이 알지 못하는 다른 세력, 사탄이 그렇게 가지고 논 것입니다. 인간을.

 

“너 존재하지?” “그래. 존재해.” “잘 존재해서 어쨌든 천국가야지?” “어. 내 소원이야.”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렇게 놀아난 겁니다. 그동안 놀아난 거예요. 사탄은 이렇게 합니다. 예수 믿어라! 사탄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해요. 세상에! 이게 사탄의 말인 줄 상상도 못했을 거예요. 예수 믿으라는 것이 성경에 다 나와 있는 것인데, 왜 그게 사탄의 말이냐?

 

풀이 들어갑니다. 왜? 예수 믿는 것이 사탄의 말이냐 하면은, 그 멘트를 내뱉는 사람이 무엇을 전제로 하겠어요? 나 이렇게 하면 이익이 되겠죠? 가 전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으니까 저 사람을 천국 보내달라고 하는 그런 생각은 절대로 없어요. 내가 멘트를 내뱉는 나 있죠? 스냅사진 찍으세요. 하나님 저 보이죠? 제가 이런 멘트를 날릴 테니까 멘트를 날리는 주인공인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로마서 9장에, 2년 전에 가스펠 펠로우쉽 교회에서 했던, 처음 목요일에 했던 강의의 본문 제목이 뭐냐 하면, 로마서 9장 3절이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끊어질지라도”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내가 원하는 바로다.” 아이 원티드 I Wanted, 내가 원하기는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서 저주를 받는 것조차도 내가 원하는 요소 중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이것을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나는 개인구원에서 벗어났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개인구원. 개인구원 안 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주님만 좋다면 지옥 보내셔도 괜찮습니다. 이 고백을 사도바울이 로마서 9장 3절에서 하고 있어요. 보통 사람을 겁이 나서 후딱 넘어가버립니다. 근데 저는 그것을 잡아당겨서 가스펠 펠로우쉽 처음 강의에 그거부터 시작한 거예요. 그렇게 했더니만 가스펠 펠로우쉽 어떤 교인이 그 취지도 모르고, 본문을 읽었더니만 교회에서 하는 문화처럼 “아멘”이라고 해요. 강의 시작도 안 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 “아멘.” “저도 같은 생각에 한 표 손들었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아! 이 정도였어! 가스펠 펠로우쉽 교회가 이 정도였어!’ 지옥 갈 각오를 가지고 이 교회에 오셨느냐 이 말입니다. 시작부터가 복음이 왔을 때, 왜? 복음의 위협이, 마태복음 3장의 이야기입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세례요한이 이야기할 때, 왜? 이런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 당시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접근되는 것이 아니고, 부정적인 결과를 가지고서, 세례요한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느냐를, 우리가 마태복음 정도는 읽어봤으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의심해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기쁜 소식이 왜 그 당시 사람들은, 거기에 적극적인 반발과 발작증세를 일으키면서, 극도로 저주하고, 저지하고, 심지어는 그 세례요한을 조기에 그들이 살해해버렸느냐? 뭐 세례요한뿐만 아니겠죠. 예수님도 그렇겠죠. 예수님이 어디 천년만년 같이 살자고 하는 내용이 제가 알기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없어요. 제가 알기 에는요. 바라바를 원하느냐? 예수님을 원하느냐? 할 때 바라바라고 했지. 예수님은 조기에 제거 대상이었지. “천년만년 우리와 함께 살면 참 고맙겠습니다.” 라는 그런 생각이, 제가 보기에는 공관복음에 없어요.

 

그러면 그걸 우리가 봤으면 눈치 채야죠. 그 당시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고 침착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의회의 숫자가 몇 명이냐 하면, 70~72명 사이입니다. 왜 유대인들의 의회 숫자를 70명에서 72명 사이에 두느냐 하면은, 결정할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하나의 개인적인, 카리스마 있는 독단적인 의견이 진리처럼 설쳐대는 그 꼴을 못 보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패 가르는 것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이거는 거의 만장일치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느냐, 그럼 완벽하게 동의하지 않으면 이거는 신의 뜻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신중에 신중을 구한 겁니다. 그들이 침착하고 합리적이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고 아이큐가 높은 사람들이에요. 그 72명이 내린 결론이 뭐냐 하면, 예수는 쓸모 짝이 존재다. 예수는. 예수가 쓸모 짝이 없는 존재라는 말은 뭐냐, 예수님이 주장하는 모든 것들이 이 인류 사회에, 인류 미래에 저지해야 될 불필요한, 그러한 제거대상이라는, 아주 침착한 결론의 합에 도달해서 제거한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냐 하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적이라는 말 외에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어요. 예수 믿을 수가 없는데, 예수님이여 오셔서 내 가족 다 파탄시키고, 내 사업 다 망치고, 내 목회 완전히 실패로 끝나서 교인들 한 명도 없이 다 떠나게 하옵소서. 선교한 족족 죽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면서 나설 위인들이 없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니까, 이상해요. 제가 잘못 들었는지, 아니면 뒷조사를 해야 할 문제인지, 무슨 노림수를 가지고 교회오지는 않으셨는지.

 

한국민족의 무속신앙이 옛날부터 뭐 별보고 달보고 비는 것을 좋아하잖아요. 뭐 모든 민족이 다 그렇지만. 지성이 감천이면 누굴 또 감동시킨다? 하늘도 감동한다. 조직신학이고, 교리고, 성경책이고 다 필요 없어요. 딱 하나만 알면 돼요. 정성을 얼마나 증가시키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얼마나 주어지느냐를 결정했던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기독교 교회가 흘러들어왔다는 것은, 지극히 내추럴 natural 한, 자연스러운 거거든요. 자연스럽단 말이죠.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여러분들의 실력을 안다고 생각하고 약간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역사는 원인을, 결과를, 역사 안에서만 찾게 되어 있어요. 별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뭐 상식적인 이야기에요. 역사는 모든 되어 진 결과를, 그 원인을 반드시 역사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역사 안에서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의 그 말이 진리라고 72명뿐만 아니고, 7억, 70억이 동의한다면, 인간의 미래의 찬란한 역사의 결과는 그 원인을, 지금 내가 원인이 될 경우에만 그런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이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환경이 있어야 얻었겠지? 환경도 없는데 얻는다는 것은 이 무슨 도둑놈 심보가 있느냐? 열심히 공부하면 원하는 목표에 갈 수 있다. 이거는 지당한 이야기거든요. 지당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결과가, 당장은 모르지만 추적해보면 반드시 그 원인은 역사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인간들의 기본속성입니다. 아닌 경우는 딱 한 경우밖에 없어요. 그거는 예수님께서 알려줬어요. “너희의 구원은 역사 안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느니라.”

 

그 말을 이해를 하려면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 역사 안에서 역사 밖으로 가서, 아! 그렇구나! 알고 다시 역사로 오는 수밖에 없어요. 왜? 역사란, 그 원인은 역사 안에 있기 때문에. 역사 안에 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 안에, 인간 손에 의해서, 라는 그런 뜻입니다. 내가 여기서 이것을 해내면, 여기에 부합되는 대가와 합당한 결과는 반드시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예수 믿고 천국 가자. 그렇다면 “예수 믿고” 라고 할 때, 예수 믿는 것은 뭐냐, 내가 예수를 믿게 되면 그 결과로 뭐가 주어진다? “우리가 천국 간다.” 라는 논리가 되어 진다. 이 말이죠.

 

근데 이것이 거짓말입니다. 이게 거짓말이에요. 이게 사기에요. 왜냐하면 내가 믿는 믿음은 하나님이 안 받아 줍니다. 성령의 선물로 온 믿음만 받아주지, 내가 믿는 믿음은 안 받아줘요. 성령께서 주신, 성령은 뭐냐 하면 역사 바깥에서 주신 분이에요. 역사 바깥에서 믿음을 선물로 주게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 2장 8절. 믿음을 선물로 주게 되면, 무슨 충동이 일어나느냐 하면, 내가 역사 안에서 원하는 대가와 보상을, 은근히 역사 안에서 손에 쥐기를 기대하면서, 내가 열심히 벌이는 내 믿음과, 그것과 관계없이 외부에서 성령으로 투입되는 그 믿음과는 죽을 때까지,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맹렬한 투쟁과 전쟁이 벌어집니다.

 

이번 애가 공부 잘 한 거, 주여 기도 빡세게 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게 아니다! 니 기도와 애 공부 잘 한 거, 아무 상관없다! 아닙니다. 주님. 이번에 애 때문에 신경 많이 썼습니다. 밥도 못 먹고 금식했습니다. 아니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아닙니다. 제가 공로입니다. 제 기도 공로입니다. 만약에 기도한 공로가 없다면 나는 기도할 이유도 없고 이제 나는 기도 안 하겠습니다. 니가 지금 나한테 개기나?

 

이번에 성적이 딱 올라가면 제가 헌금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아니다! 헌금하는 거, 십일조 하는 것하고 아무 상관없다! 이번에 집사하게 되면 제가 선교사를 작정해서 두 명 보내겠습니다. 아니다! 이번에 일이 잘되면 내 아들을 신학교로 보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아니다! 이번에 하는 일이 잘 된 것은 목사를 잘 섬겨서 그런 것입니다. 아니다! 왜 저의 순수한 마음을 주께서는 기꺼이 물리치시옵나이까? 왜 저의 순결하고 순수하고 경건한 마음을 왜 어떤 결과에 끼어들지 않게 하시옵나이까?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니가 죄인이기 때문에. 니가 보기에는 애가 공부 잘 한 것으로 니가 의롭게 보이느냐? 내가 원하는 것은 애가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은혜로 믿게 된, 의인이 된 아들을 나도 원한다. 애가 공부 잘했다고 해서 천국에 못 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국의 백성을 얻기 위해서는, 천국의 백성의 방식에 무엇이 끼어들고, 무엇이 방해되고, 무엇이 훼손되는지를, 주께서는 너무 잘 알아요.

 

그것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로 천국에 가야되는데, 이 엄마라는 작자가 금식해서 우리 애가 믿음 생겼다고 우기니, 그걸 내쳐야 된다는 거예요. 그걸 잘라내야 돼요. 니가 니 자식을 배렸어. 배렸다고. 엄마 입장에서는 자식을, 그러니까 엄마도 한 소리 해요. “하나님 저도 제 애가 천국가기를 간절히 소원해서 그쪽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 천국백성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순수하게 기도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니가 순수하게 기도한다고 했지만 나는 니 맘 안다. 천국 가되 공부 잘 한 채로 천국 가게 해달라고, 니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도를 니가 스스로 꾸민 것이다.”

 

이렇게 순수한 천국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나중에 우리 아들한테 무슨 행복을 해주실까? 이것이 밑에 깔려 있다고요. 이것이 없는 인간은 없어요. 순수함을 대가로, 순수함의 대가, 다시 말해서 역사 속에서 순수한 것을 내가 간직할 때, 그 결과가 순수하게 역사 속에서 나오는 것을 눈으로 목격할 때, 나는 종이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요번 문장이 좀 길었죠? 이게 뭐냐 하면 그냥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내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잖아요? 두 세 사람이에요. 그럼 세 사람에서 잘라봅시다. 그럼 몇 명이냐 하면 두 사람입니다.

 

교회가 두 명이냐, 세 명이냐 아무 의미 없어요. 오로지 주님만 찾으면 그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근데 사람들은 뭐냐, 두 명에서 세 명되고, 그 다음에 네 명되고, 네 명에서 여덟 명 오게 되면, 이거는 역사적으로 2명에서 8명이 되었으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실적을 눈으로 목격했으니까, 그 목격한 것을, 우리교회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2명에서 8명이 되었겠는가? 그 실적을 근거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제자들로 지금 목회하고 있다고, 그걸 자기 확인, 자기 증명의 자료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이죠.

 

그런 경우가 굉장히 흔해요. 백퍼센트 흔합니다. 권찰이 되어서 목사님 심방하는데 따라갔다. 사실 이런 예는 다른 데에서는 들지도 않아요. 목사님. 우리가 아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는 하지도 말라고 하니까. 심방을 갔는데, 집에 가스 불을 안 꺼서 홀라당 다 태웠다. 그러면 백이면 백이 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의 일 했는데 돌아온 대가가 뭡니까?

 

그러면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역사로 쓰이는 원인은 절대로 결과로 넣을 수 없다. 똑같은 이야기에요. 니가 권찰로 주의 일 했다고 해서, 니 집이 그날 그때에 불나야 할 계획이 변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근데 니는 무모하게 내가 주의 일을 한 것과 집에 불 난 것과 연계시켜서 문제다. 역사에서 일어난 원인은 절대로 역사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데, 우리가 그런 줄 알고, 뭐 말로는 무슨 말을 못합니까? 주여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집 날린 것도 하나님이요. 백날 이야기해봤자, 아무리 해봤자, 제가 여기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죄인 됨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죄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 이야기 들었으니까, “목사님. 말씀대로 원인과 결말을 엮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제발 입에 발린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우리는 우리만 생각하고 내 공로만 자랑하는 그런 인간으로 눈 감습니다. 이 사실을 미리 땡겨서 알게 되면,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태초에 것을 어떻게 하는가, 우린 모릅니다. 올라가서 내려와야 하는데, 누가 올라갑니까? 베드로가 자기 목숨 걸고 따라가려고 하다가 저지당했잖아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주님께서 지정한 자리가 있어요. 니 자리는 주님의 자리다. 니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니 조상부터, 조상의 DNA가 잘못돼서 죄인 되었으니까, 그걸 니 탓으로 생각하지마라. 니가 갖고 있는 성격과 성품은 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건데, 우리가 죄인의 형상을 물려받았기에, 그 다음에 나온 현상이 뭐냐 하면, 죄 되는 것만 선호하게 되어 있어요.

 

이거 몰랐죠? 아무리 기도하고 뭘 해도, 지금 기도 시간이다. 7시에 모이라고 할 때에, 뭐 별 일 없으면 모이는데, 만약에 7시에 사돈네가 온다고 하면 얼마든지 취소할 수 있어요. 인간은 우선순위에 있어서 그다지 우리가 융통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게 제일 우선순위에요. 내가 지금 기도회한다고 사돈을 내쳐버리면, 나중에 우리 자식의 결혼생활이 어렵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장차 역사 안에서 생길 그 결과는 지금 나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철석같이 포기를 못합니다. 내가 사돈하고 잘 사귀면 우리 자식의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그 미래, 예상되는 것. 젊은 애들은 그걸 흔히 비전, 꿈, 드림이라고 하죠. 그게 바로 우리가 죄를 벗어나지 못한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거대한 역사 안에는, 그 안에서 인간은 자기만의 역사를 따로 챙기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역사 안에.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의 거대한 계시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한 사람의 역사를 따라간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의 김정은 역사를 사람들이 따라간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김정은이 무슨 소리를 해도 그 밑에 있는 부하들은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자기 역사를 생각합니다. 돈 모아서 남한으로 튀어야지. 인간은 결코 자기 역사를 절대로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 역사를.

 

신이든, 하나님이든, 성령이든, 관계없어요. 내 역사를 도와주면 믿고, 내 역사를 안 도와주면 나는 당신을 버리겠습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죄로 깔려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한 번 광고합니다. 제발 그 죄를 고치려고 하지마세요. 고치려고 하는 것이 더 못 됐어. 더 위선자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 그냥 사세요. 고치지 마시고, 이게 고쳐질 문제가 아닙니다. 고쳐질 것 같으면 주께서 일부러 우리를 데리러 오시질 않았습니다. 그냥 말씀만 하고 숙제는 니가 알아서 하고 오라고 할 거예요. 이거는 절대로 고쳐지질 않습니다.

 

누가, 누가 위선자냐? 그거 시합할 필요 없잖아요? 교회에서. 그런다고 누가, 누가 더 개판이냐 그거 시합할 필요는 없고. 바라보기는 이런 일이 되는 원인을 여러분 자신에게 찾지 말라는 거예요. 이번 일 이렇게 잘 된 것을 찾지 마세요. 원인은 몰라요. 우리가 보기에 일이 이렇게 꼬인 것, 이 원인을 몰라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일이 잘 됐다, 못됐다를 우리가 언급할 입장이 못 됩니다.

 

거지같은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니까, 뭐가 이렇게 쓰니? 다니? 어디 그렇게 따질 그럴 교만한 위치에 있을 가치가 있겠어요?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지. 뭐가 쓰네, 짜네, 따질 수 있겠어요? 식당에서 족발을 시켰는데, 겨자를 많이 넣었니? 적게 넣었니? 하는데, 근데 그런 것은 따져야 해요. 그런데 뭐든지 주신 것을 감사하고.

 

여러분, 한 달에 햇빛 세금 얼마 냈습니까? 안 내죠. 제가 위쪽에서 왔는데 비가 왔어요. 비올 때, 세금 낸다고 바빴습니까? 야, 비 온다. 돈 더 내라. 이렇게 했습니까? 햇빛과 공기를, 심지어 악인과 선인과 관계없이 다 주시죠. 이게 뭐냐 하면 지옥이라는 것은 받아놓고 누가 준 줄 모르는 사람만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죄인에게도 의인에게도 차별 없이 다 줬는데, 문제는 죄인인데 왜 이렇게 주십니까? 라고 하는 사람은 구원받고. 왜? 천국 가서 면류관 반납해야 되니까. 모든 것이 주님의 공로입니다. 고백하는 사람은 영원히 지루하지 않고 천국에서 살 거고. 내가 이 땅에서 역사 속에서 어떤 결과를 바랬는데, 예수 믿고 천국 갈려고 했는데 왜 지옥 보냈습니까? 하고 따지는 인간에게는, “니 몰랐어? 니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그런 논조를 내가 이 세상에서 내려준 적이 없어.”

 

그런데 교회가 이 세상에서 장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목사님. 뭐 하면 됩니까? 이거 하세요. 또 행함 나와요. 요거 하세요. 뭐요? 나 따라 하세요. 예수 믿습니다. 또 손들고 예수 믿습니다. 한마디 하면...그런 식으로 교회에 오백 명 천명 모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자체가 인간이 예상한 건데요. 자, 정리 들어가 봅시다.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나의 구원을 예상 못한 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천국 가시거든요, 소스라치게 놀라시기 바랍니다. 어! 이런 나를 다 넣어주다니! 나는 나의 이기주의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를? 나는 남한테 지고는 못사는 성격인데, 어떻게 나를? 나를 건드리면 죽여 버리는, 그 정도로 욱하는 성질인데, 왜 저를? 나는 내 것과 내 가정, 내 재산을 건드리면 세상 끝까지 가서 복수를 하는 복수혈전의 사람인데, 왜 이런 저를 이렇게 천국 넣어줬습니까? 아하! 십자가 피가 그런 기능이구나! 그걸 성경을 통해서 미리 눈치 채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미리 눈치 채라는 말은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오늘 강의 들었더라도 2분 후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실지 모르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보니까, 참새가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되어 있죠. 저는 달리 이야기합니다. 참새가 죽고 사는 것은 참새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말씀이 새롭게 들리십니까? 참새가 죽고 사는 것은, 참새 자기 운명이잖아요. 참새 자기 운명인데, 자기라는 것이 자기 운명에 끼어들 잽이 못됩니다. 그걸 살짝 인간으로 바꿉니다. 인간의 죽고 사는 것은,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만 그럴까요?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도 인간이 개입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그것은 지옥 가는 사람이나 평생 실컷 하라고 해라. 그것은 이방인들이나 기도하는 내용이다.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내용이고. 그럼 너희들은? 너희들은, 오늘 강의에 첫 번째 등장하는 어려운 것입니다. “너희”라는 용어. 너희들은 없습니다. 너희라는 사람이 없어요. 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아담의 죄로 이방인이고, 예수님을 오해한 사람들이에요. 너희들은 없어요.

 

성경에는 너희들이라고 해요. 너희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할 때, 너희들이라고 하잖아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너희들은 이 세상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묵시적 존재가 되어야 해요. 너희들은 그 나라 그의 의를 구하라. 다시 말해서 그 나라의 의를 구하는 존재는 니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니가 행함으로 니를 예상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기도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헌금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성령을 통해서 만들어내겠다 해놓고, 앞당겨서 너희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이죠.

 

따라서 그 나라 의를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 나라 의를 구했다면 그것은, 그 솜씨는 우리의 솜씨가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낸, 피조물의 속성으로서 그 나라 의와 연계되어 있게 되어 있어요. 그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가 천국을 바라본 것은 자기의 경건함이 아니라, 이거는 주님의 뜻이잖아요? 라고 모든 공로를 주님께 돌리는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문제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렇게 복음이 간단한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는 날 때부터 이방인이에요. 우리는 역사 속에서 내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천국 가는 결과를 낳고자 합니다. 근데 그 사실은, 그 사이에 뭐가 끼어들어 있느냐 하면, 그 사이에는 들키지 않은 게 끼어들어 있어요. 뭐냐 하면 천국 갈 테니까 일단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은 보장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육적인 본능을 뒤에 감추고 있어요.

 

천국에 넣어줄 테니까 목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이구! 하면서 목을 뒤로 내뺍니다. 한 이십년 뒤에 가겠다는 그런 이야기죠. 이런 식으로 나오죠. 반드시 깔려 있는 것은, “나도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해줄 테니까, 하나님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세요.” 라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 존재로 하여금 더욱더 존재케 하는 거예요. 입는 것, 먹는 것은 보장되어야 하고, 최소한의 행복은 보장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라니까요. 그런 것들은 뭐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에요.

 

천국 가겠다고 하는 것은, 그건 가짜니까 걷어내고, 실제로 니가 원하는 것이 뭐냐?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내 아들 아프리카 선교사로 보내겠다고 하는 그 의도 뭐냐? 그 의도가? 가더라도 내 아들만큼은 건강하게 포로로 잡히지 않고 납치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뭐 이런 것이 깔려있거든요. 왜? 내 아들이니까. 나I, 나니까. 나. 나로부터 나왔거든요.

 

다시 복습 들어가면, 근데 그러한 습성은 죽을 때까지 없어진다? 안 없어진다? 안 없어진다. 이제 마음에 드네요. 그런 습성은 없어지지 않아요. 없어지지 않는데, 왜 교회 와서 위선을 떨고 연출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주께서 다 아는데. 이미 게임 끝났어요. 뭘 고상하고 거룩해봐야 어떤 실적을 가지고 나는 믿는 사람이라고 자랑질 하는 사람들이에요. 전부 다.

 

내가 선교사 몇 명 보냈고, 내가 기도해서 예배당 짓고, 내가 교회 이렇게 해서 오천 명 모이고, 전부 다 지자랑 하는 거예요. 그거는 빤한 거예요. 누구 욕 할 거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교인 수 몇 명 안 되니까 주여! 주여! 하지만, 한 오천 명 돼보세요. 큰 교회 목사 자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어떤 누구도 이거는 성경에서 그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우리는 모두 다 이방인입니다. 이방인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 번째 결론을 지어봅시다. 두 번째 결론은 뭐냐,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습니다.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복음은 우리에게 없다. 내 욕망과 욕망을 채워주는 복음 외에는 복음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복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 말씀을 드릴게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백날 오십년 교회 다녀봐야, 오십년 교회 다니면 가면만 늘어나요. 오십 개의 가면만 늘어날 뿐이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의 마지막은요, 하나님이 아니에요. 결국 돈 문제입니다. 돈 문제에요. 돈이 있어야 밥 먹고 살죠. 목사라도, 아니 원목사라도 돈이 없으면 못 살아요. 빤한 걸 왜 감추려고 애를 씁니까?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 없고.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없어요. 가짜 복음만 우리에게 둘러 싸여 있어가지고 없어요. 가짜 교회가 뭐냐 하면 우리 보기에 괜찮은 역사를 내다보는 식으로 복음을 위장했기 때문에, 없습니다. 없는데, 말씀 보니까 “너희”가 있어요. 우리한테는 없는데, 성경 보니까 말씀에 있어요. 너희들은 내 백성이다. 어? 너희가 나오잖아요. 너희들은 그 나라 의를 구하라. 어? 너희가 나온단 말이죠. 우리들은... 어? 우리가 나온단 말이죠.

 

하늘에 계신, 그 다음에 무슨 하나님입니까? 우리 하나님이죠. 개인구원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죠. 이건 가스펠 펠로우쉽 교회에서 주일에 설교 한 거예요. 두 번 했는데, 첫 번째는 나실인 했고 두 번째는 우리 하나님에 대해서 한 거예요. 그때 장보리 이야기하면서. 우리 하나님, 우리라는 것이 없어요. 아무도 없어요. 목자를 치니 뭐가 흩어진다? 양들이 다 도망갔는데 뭐가 우리가 있어요? 예수님만 달랑 남고 다 도망갔는데? 열두제자 다 도망갔는데요.

 

성경 분명히 보세요. 성경을 분명히 보게 되면 우리가 성경에서 빼먹을 한 구절도 없어요. 성령 받으면 뭐 덤으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또 이런 기도를 하는데, 또 이런 말까지 안 해야 하는데 해야 되겠어요.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는 그 사도바울을 가지고 성령 충만 이라고 했어요.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실제로는 산자요. 내가 가난한 자 같으나 내가 부요한 자요. 역사적으로 볼 때 가난하게 보이지? 묵시로, 역사 바깥에서 볼 때는 나는 부자다.

 

이것이 성령 충만 받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라면, 여러분 그 고백에 고개 끄덕이고 공감하십니까? 공감해야 진도 나가는데? 공감하십니까? 공감하시는 방법을 말씀드릴게요. 예를 들어서 나에게 지금 뉴욕에 아파트 한 2채 있고 , 땅이 한 20만평 있다. 자녀들 재산까지 하면 한 50억 된다. 50억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제가 가난한 자 같으나 사실은 부요합니다. 이 땅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부요한 자라는 고백이 나올 수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1번.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다. 2번. 없다. 몇 번 입니까? 성령 받으면 그런 고백이 나옵니다.

 

재산 팔아서 교회에 바칠 생각 하지마세요. 그대로 갖고 있으세요. 땅하고 부동산 그대로 갖고 있고 절대로 주지 마세요. 헌금이라는 명목으로도 주지마시고 꽃으로도 때리지 마세요. 수법입니다. 이거 있더라도 주의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라고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오해해서 그렇습니다.

 

자기의 재주가지고 주 앞에 들이대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는 아멘을 못한 겁니다. 내가 나를 판정한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신앙을 판정할 자격이 못됩니다. 왜냐, 확정적 자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너는 죄인이다. 뭘 해도 죄인이다. 확정적 자리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나의 성공과 실패도 없고. 내가 이렇다 저렇다 판정하지 마세요. 죄인을 가지고 덜 죄인, 많은 죄인, 그렇게 측정하지 마세요. 그 측정은 주님이 하시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죄인, 덜 죄인, 더 착함, 덜 착함은 어떤 사람에게만 해당되느냐 하면은, 행위 책에 기록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심판기준이고, 마지막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예수님의 생명의 이름으로만 구원되기 때문에, 이 땅에서 더 착함, 덜 착함, 못됐음, 더 못됐음을 일체 묻거나 따지지를 않습니다. 괜히 우리가 쫄았어요. 우리가 성경말씀에 괜히 쫄았습니다.

 

십계명 열 개에서 다섯 개 지키는 사람과 두 개 지키는 사람 중에서, 다섯 개 지킨 사람이 더 착하다고 괜히 쫄았던 이유가 뭐냐,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방인이고, 나의 역사 안에서 행위가 제공된 원인이, 나의 천국에 합당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우리는 동조했을 뿐이죠.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럼 마귀 말에 동조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이렇게 하는데, 우리는 죽을 때까지 마귀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이거는 내 탓이 아니고, 우리의 속성 자체가 그래요.

 

아무리 복음 들어도 뭔가, 우리가 뭘 해드려야, 뭔가 받아야, 우리가 덜 미안스럽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성령께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소스를 뿌려줍니다. 적절한 소스. 말씀으로. 그렇게 될 때, 나의 생각보다 더 세신 분이, 말씀이 우리 안에 운동하느니라. 역사하느니라. 아, 나는 자꾸 행위대로 가지만, 주께서는 행위대로가 아니고, 니 행위 말고 예수님의 행위,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 이미 너를 합격했다고 보시는 겁니다.

 

제가 몇 주 전인가 설교에서 그런 예를 들었어요. 금메달을 손에 쥐고, 금메달 따는 경기를 재방송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금메달을 딴 것을 알고 난 뒤에, 한국선수가 금메달 따는 과정, 16강, 8강, 4강, 준결승, 결승을 보게 되면 어떻습니까? 아주 아슬아슬하면서도 무슨 마음을 느껴요? 흐뭇하죠. 이미 금메달 땄잖아요? 그때는 이렇게 대처하시면 됩니다. 의도적으로 호들갑을 떨면 됩니다. ‘어이구! 어떻게? 이제는 금메달 끝났어. 끝났어. 아이구, 바람 불어서3점이야. 이젠 죽었어, 죽었어.’ 이게 왜 흐뭇 하느냐 하면 이미 알거든요.

 

이런 과정과 상관없이 금메달을 딴 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그 과정을 즐길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즐기시려면, 여러분이 또 착하다고 시작하지 말고, 이미 나는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존재라는 것부터, 자기 자신을 분명히 해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은 뭐냐, 이래서 지옥 가는구나. 그것을 확인하는 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사시면 되는 겁니다. 아,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내가 지옥가야 마땅한데, 이렇게 지옥가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세상의 역사적인 능력으로 안 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역사 바깥에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역사 전부를 한꺼번에 다 아는 거예요. 남은 인생이 행복해보이십니까? 역사 안에 있는 것은 어떤 것도 행복이 없습니다. 어느 집구석에도 고민 없는 집구석이 없습니다. 삼성재벌 지금 돈 벌어서 난리 났습니다. 삼성갤럭시7 때문에 사고 나서 고민이 많습니다. 롯데부회장? 고민 많아요. 고민 많아서 죽었잖아요. 즐거워서 죽었어요? 자살이 취미라서 죽었습니까? 고민 많아 죽었어요. 롯데그룹 부회장인데? 못 먹어서 돌아가셨습니까? 자기 역사가 예상대로 안 되어서 죽었잖아요.

 

그러면 그때 죽었다가 아니라, 그때 자살했다가 아니라, 처음부터 자세히 알아야죠. 처음부터, 날 때부터 죽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 속에 죽음을, 역사 이후로 보지 않고, 역사 안에다 우리 모든 죽음을 집어넣었는데, 우리의 모든 죽음을 일괄해서 묶어서 집어넣고, 죽고 난 뒤에가 아니라 이미 살아있는 자체를 죽음이라고 넣어서 해석하는 그 해석의 징표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걸 죽음의 현실이라고 하는데, 죽고 난 뒤에가 죽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죽음을 우리가 이 몸으로 지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인생과 몸은, 죽음의 표현형입니다. 죽음을 표현하는, 죽음을 보여주는. 아, 이래서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이래서 내가 죄인이구나. 왜 이미 금메달 땄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나의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아주 호들갑을 떨어도 괜찮아요. 애교로 봐드리겠습니다. 아이구, 죽었어. 죽었어. 주님이여, 애가 저러면 나 못살아. 못살아. 하면서 한쪽으로 싱긋 웃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사랑인데,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시카고강의 8강에서, 사랑이란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사랑 안에 배신이 들어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해주실 때는 너의 배신을 여기에다 집어넣으라는 이야기에요. 이게 바로 베드로고, 목자를 치니 양들이 다 떠났어요.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말은 들었는데 안 믿었습니다. 뭐 엄마 마리아는 믿을 줄 알았어요? 믿었으면 그 빈 무덤 찾아서 갔겠어요?

 

그러니까 아무도 못 믿어요. 예수님을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못 믿습니다. 사랑이란 뭘 하느냐 하면, 사랑이란 고맙습니다가 아니라, 사랑 안에는 뭐가 있느냐, 내가 배신자라는 것을 집어넣고, 나까지 포함해서 사랑이 형성되어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 속에서 자신의 배신을, 이제는 주께서 오시는 날까지 자신의 배신을 뽑아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습이 배신할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찬송가는 잘해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더 귀한 것은 없네~ 할 때 전화가 오면, “예예 알겠습니다.” 아무리 노래 불러도 갑자기 바이어한테 전화 오게 되면, 예배 곧 마치고 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네가 아니라, 주 예수 보다 더 쓸데없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주께서 상황을 유도해서 우리가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가를, 죽을 때까지 이 상황을 덮쳐주시는 이것조차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이해해주시기바랍니다.

 

10분 쉬겠습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9-21 00:50 
20160910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10-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한 내용이 뭐냐 하면, 역사 바깥에 대해서 역사 안에 존재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미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만들어졌다는 말은, 만드신 분의 생각과 만들어진 사람의 생각이 달라요. 로봇하고 로봇을 만든 사람하고 같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만들어진 로봇 입장에서는 자꾸 자기 입장을 합리화해요. 뭐, 이정도 알면 많이 아는 거니까 봐주세요. 그럼 그렇게 되면 피조물의 나라에 가야 합당합니다. 아까 어려운데요,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기껏 가봐야 피조물의 나라에 가야 해요.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뭐냐, 피조물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이야기해보세요. 우리가 예수 믿으면 어디에 간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나라죠. 건방지게! 이게 주인이 달라요. 우리끼리 만든 나라는 우리끼리 나라에요. 인간나라입니다. 인간나라이기 때문에 인간의 개성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것이 서로 인정되는 곳이라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정하기 나름이에요. 그 기준을. 인간끼리 뭐 합의해서 해봐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인간나라에 살아야지, 인간이 끼어들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냥 인간나라로 족하면 돼요. 문제는 이 인간나라도 마귀가 설쳐대서, 이게 지옥 같아서 문제가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 갈려면, 뭐 예수님 빽써서 들어간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그 말은 정확한 말이 아니고요. 예수님의 빽써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예수님만 갈 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면, 그 몸이 되는 지체는 그리스도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이걸 구약에서는 이렇게 해요. 집안에 맏이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으면 둘째, 셋째, 넷째..딸내미든, 어떤 것이든 관계없이, 맏이가 모든 것을 소속해서, 결정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유월절 아시죠? 유월절에 죽음의 천사가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다 죽이려고 옵니까? 누구만 죽이려고 옵니까? 맏아들만 죽이려고 오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맏아들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다면, 이미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가정이라는 거예요. 인정받는 가정.

 

그러면 그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중에 하늘나라 보낼 때에, 계약자가 맏이하고 단독계약 하겠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 집 맏이는 군에 갔는데? 계약자가 없는데? 로마서 8장에 보면 모든 백성의 맏이가 나옵니다.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구약은 신약의 모형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작은 모형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천국 갈 수 없는 자들이 어떻게 천국을 가느냐, 죄 진 자가 어떻게 거룩한 나라에 들어가느냐를, 그 원리원칙을 모형을 통해서 솎아내듯이 해서, 그냥 원리만 뽑아내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역사 속에, 현실에 실습을, 테스트를 시켜 봐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좋다고 주의 말씀대로 지킨다고 지키잖아요. 지켰는데, 구약이 끝날 때, 어떻게 끝납니까? 이스라엘의 파멸, 이스라엘의 멸망, 그들은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위인들이었더라. 그 이스라엘의 멸망이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유발하는, 동기로 동원되어야 될 유대인 집단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주요인물로 해서 단체가 이루어지는데, 그 단체가 극대한 대립, 다시 말해서 그냥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되느냐, 아니면 인간이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이 인정해줘서 구원되느냐를, 바로 그 유대집단이 우리를 대표로 해서 말하게 되는 겁니다.

 

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물론 결과는 그들의 아비는 악마라고 해서 지옥가지만 우리한테 유리한 점이 있어요. 그들이 존재해서 유리한 점은 뭐냐 하면 그들이 계시로써 가담되었다는 사실이 어쩌면 그렇게 좋은지. 왜? 우리의 모델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델. 아, 바리새인들이 저런 사고방식으로 메시아를 생각했구나. 그럼 나는? 나는 메시아를 생각할 때, 어떤 사고방식일까?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좋게 보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러지 마시고 바리새인들이 왜 욕을 얻어먹었는지, 이렇게 성경이 있으니까, 대조를 해보게 되면, 이것은 주님 쪽에서 좀 실수하신 것 같은데요? 라는 것이 늘 이렇게 등장해요. 인간으로서는 할 도리 다 했는데, 더는 못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런 게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 오병이어 아시죠?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수많은 사람이, 오천 명이 따라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는데, 그 사람들이 줄곧 예수님을 따라왔습니까? 아니면 중도에 헤어지게 되었습니까? 그들 오천 명이. 계속 예수님을 추종했습니까? 중도에 헤어졌습니까? 헤어졌죠. 예수님께서 어떤 멘트만, 말만 안 했으면 안 헤어졌어요. 근데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그 충성심이 얼마나 갸륵하고, 대견스럽습니까? 예수님을 임금 삼겠다는 것은, 메시아가 볼 때 전혀 오류가 없어 보이죠. 예수님이 말만 안 했으면 됐어요.

 

그런데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을 수 없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다는 말이죠. 영생을 얻을 수 없느니라. 그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그들 눈에는 자기 혼자 존재하고 자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예수님도 존재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것만 보이는 것이 아니에요. 자신의 구원자입니다. 놓칠 수가 없어요. 탕웨이가 한 광고 있잖아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놓칠 수가 없어요. 말만 안 했더라면.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기다가 뭘 집어넣었느냐 하면, 죽음을 집어넣었어요. 죽음을. “육이냐? 안 돼! 육은 안 돼!” 하나님의 나라는 육은 못가. 내 살과 내 피. 너희들로 인하여 흘려진 내 살과 내 피. 너희들이 하는 모든 행위로 말미암아 대신 죽기 위해서 흘린 내 피와 살이 없으면 영생이 없느니라. 이렇게 할 때,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 이단이요? 당신은 잘못 되었어.”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들은 아주 소박하게 이야기했어요. 딱 네 글자입니다. “어렵도다.” 그 다음에 뭐냐 하면 “누가 저 말을 믿을 수 있느뇨” 라고 했어요. 어렵도다. 믿을 수 있느뇨.

 

그들의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설득만 잘해 주시고 우리가 납득되도록 이야기해주시면 우리가 얼마든지 당신을 좋은 존재로 보기 때문에, 눈에 좋게 보기 때문에, 만반의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당신 쪽에서 말을 어렵게 해버리니까, 도대체 우리는? 저걸 이해해야 영생인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건 예수님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제자들도 나중에 성령이 와서 이해되었지,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천 명이 다 가고 난 뒤에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지? 왜?” 그러니까 제자 중에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어디로 가겠나이까?” 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오지 못한다. 제자들아! 너희들이 알아서, 선택해서, 괜찮다고 여기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너희들이 따라왔다고 한다면, 너희는 전혀 영생하고 관계없다. 근데 나중에 아버지의 뜻, 오기 싫어도 와야 되고, 구원받기 싫어도 구원받아야 되고, 지옥 보고 싶어서 환장을 해도 니는 지옥 구경 못하고 천국을 무조건 가야 돼. 이 뜻은 창세기 이전의 뜻이에요. 이미 태어난, 창조 후에 태어난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우리의 바람이 아니에요.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 소망보다 더 우세한 것이 누구의 소망이냐 하면, 창세전에 주님의 소망이 더 우세가 되어서, 우리는 내빼도 내뺄 수가 없는 그런 이상한 팔자가 되고 말았어요. 막 지옥가려고, 뭐 천국에다가 뭐 마약에다가, 합치면 마약 천국. 삐리삐리~오토바이 타면서 온갖 타락과 방탕을 해도 절대로 우리를 놓치지 않을 거예요. 주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천국 넣어줍니다. 요한복음 6장의 내용이 주님의 십자가 안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 1절의 말씀에서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할 때는, 십자가만 찾지 마시고 요한복음 6장의 내용도 거기서 끄집어내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보낸 자는 필히 아버지가 책임지고, 아버지가 시작한 일을 아버지로 말미암아 반드시 들어가게 하는 그 결과물이 오늘날 접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 나온다 하죠. 우리라는 결과물은, 원인은 우리의 역사나 행함 속에 없고, 원인은 창세전에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의 말씀처럼, 창세전부터 우리는 영생받기로 작정되었다고 사도바울이 디모데후서 1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해놨어요.

 

이미 창세전에 우리에게 작정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작정이 어려우면, 계획이라고 바꾸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은 뒤에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어떤 결과물? 나의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주님의 뜻입니다. 뜻이 이 모양 이 꼴이지만, 이 모양 이 꼴이라도 뜻이에요. 주의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창세전과 자기존재를 연결시켜주시기 바랍니다.

 

가느다란 낚싯줄이지만, 거의 안 보이지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성령을 통해서 말씀이 계속 흘러 들어오죠. 계속 흘러 들어옵니다. 곡물 창고가 위에 지어져 있고 밑에 인간이, 곡물 받아야 될 배급자가 있다면, 이 사이에 파이프가 있어가지고 사료나 곡물이 내려가겠죠. 요거, 요거, 이 파이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이 관계가 의지, 내가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위선이고. 이렇게 엉터리라도 하나님이 구원받게 하신 요(파이프) 관계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어떤 죄인도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것은,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니라, 죄를 줄여나가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가 아니라, 점점 더 거룩한 성화를 해서가 아니라, 어느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요 관계,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요 관계로 인하여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검사 있습니다. 표 검사합니다. 표 검사할 때, 행함 들이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한, 이 땅에서 어떤 수모를 당해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겁니다. 로마서 1장 14절에서 17절 사이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거기에 나와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은, 내가 이런 행동을 했을 때 남들이 얼마나 비웃고,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은 나로 인하여 얼마나 실망하고, 나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나로 인하여 기도가 안 먹힌다고 낙담을 하겠느냐, 라고 이렇게 자꾸 눈에 보이는 사이를 생각하는데, 여러분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한 분의 응답만 기억됩니다.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서, 대제사장이 되어서 자기의 택한 백성을 위해서 간절히 간구하고 계시고, 이 기도의 응답으로 너희가 구원을 얻는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기도 할 바를 알지 못했으나, 성령이 실실거리며 비시시 웃으며 그렇게 기도할 줄 알아요.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아이고, 주여! 아이고, 이놈아!” 탄식을 하면서 기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도의 응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세상은 역사지만, 묵시 안에서 하나님의 의는 이미 과거완료가 되어 있어요. 이미 금메달 손에 쥐고 시작하는 겁니다. 이미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왜,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미 구원받는지를, 그걸 알아가는 것이, 이제 남은 세월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무척 어려운데, 어려워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적어놔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눈이 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다 눈이 멀어 있어요. 그걸 브라인드 스팟이라고 해요. 미국에 와서 제가 영어를 많이 쓰는데, 원래 영어 잘 안 쓰는데, 맹점, 블라인드 스팟blind spot. 블라인드 스팟이 어떤 것이냐 하면 제가 위쪽에서 오기 전에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왔거든요. 저 위쪽에서. 나이아가라를 폭포를 가 본 사람, 안 가본 사람, 두 번, 세 번 열 번도 가 본 사람이 있겠지만, 제가 느낀 점은 그거에요. 나이아가라 폭포가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진실을 보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카메라 들이대니까 뭐가 날아와요. 폭포 물보라가 날아와서 폭포 밑에 가니까 그 전경을 볼 수가 없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보기 때문에, 이게 어두움인 거예요. 근데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물보라 때문에, 나도 안 보이고 나이아가라 폭포의 진면목을 전혀 볼 수가 없는 거예요. 어두움인 거예요. 맹인이 되는 거예요. 맹인. 그 막 쏟아지는 물보라 앞에서 도대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이아가라 폭포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멀찍이 가서 보면 뭐가 보입니까? 나 여기 있고, 나이아가라 폭포가 500미터 저기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거는, 나 여기 있다는 말은 이미 절대적인 진실에서 그만큼 멀어졌다는 겁니다. 그만큼 조작되어 있고 위작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은 환상이고 위작이고 조작된 거예요. 자기 역사에 유용한 것과 역사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된, 나의 해석의 결과물로써 나한테 오는 겁니다. 이번에 비 온 것은 우리 농사 잘 되라고 온 것이다. 언제 주께서 농사 잘 되라고 비가 오게 한 적 없어요. 그런 것 없어요. 아들 하나는 소금장수고, 아들 하나는 우산장수인데, 그럼 비가 왜 왔습니까? 비가 오면 소금장수 아들이 화 낼 거고. 비가 안 오면 누가 화냅니까? 우산장수 아들이 화 낼 거고. 엄마. 그런 소리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집 말아 먹으려고 합니까? 우리 집 우산장사하는 줄 몰라요?

 

모든 인간의 판단은 자기의 유용성과 자기에게 어느 것이 이익이 되는 것인가를, 이걸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런 무리수를 두는 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내가 나를 안다고 우기는 거예요. 그러나 절대적인 것 앞에서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어떤 누구도, 모든 인간은 소경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소경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소경 된 자만 뭐가 보인다? 예수님을 안다는 겁니다. 블라인드 스팟, 맹점이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어요. 모르고 있어도 괜찮아요. 왜? 주님의 은혜가 이 결과물이기 때문에.

 

알아서 잘 챙겨서? 알아서 잘 챙겨서 내가 된 것이 아니고, 나는 그냥 내 욕구와 욕망과 환상 속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것이 존재한다면,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의 말씀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 말씀 전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 존재하는 겁니다. 쉽게 가겠습니다. 죄인에서 의인되는 것, 여러분 다 아시죠? 구원받으려면 죄인에서부터 의인되는 것, 여러분 다 아시죠? 왜냐하면 원리가 그냥 낚싯대로 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예수님이 뭘 거칩니까? 십자가를 거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죄는 내 죄 때문이 아니고, 누구 죄 때문에? 너희 죄 때문에 거치잖아요.

 

그럼 우리는 필히 어떤 위치에 있어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죄를 해결할 수 없는 자리며,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해도 뭐가 된다? 죄가 될 때, 예수님과 만남을 통해서 구원되는 공식이잖아요. 이걸 빨리 한 이유는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한 거예요.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중요하지만. 어쨌든 죄인, 이 경로를 거쳐야 되지 않습니까? 거쳐야 하는데, 인간은 절대로 이해 못해요. 잘난 내가 왜 죄인 되는데? 잘난 것 조그만 격려하면 더 잘나질 수 있는데?

 

이 문제는 무슨 문제냐 하면,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이유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안 만나서 그래요. 안 가봐서 그래요. 나이아가라 폭포를 저 멀찍이 서서 사진 찍어서 그래요. 물보라 쏟아지죠, 비닐 옷 입은 것 다 벗어졌죠, 스마트폰 동영상 찍는다고 하는데 위치를 못 찾아서 실수하고 이러죠. 갑자기 물보라가 오는데, 이게 막 밀릴 정도로 강력한 물보라가 온다면, 내가 한가히 멀찍이, “아이구, 폭포 좋다! 세계 3대 뭐 폭포고 높이가 53미터고..” 이렇게 정보를 발산한 것과, “이러다가 배 뒤집어지겠다!” 실제로 온 몸으로 느끼는 것하고는 달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이사야가 이야기할 때는 멀찍이 서서 하나님은 어떻고, 창세기가 어떻고, 지금 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이야기에요. 자기 문제에요. 이 몸 자체가 어떤 몸이다? 망하는 몸인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망하는 몸이 잘난 척 했고, 망하는 몸이 남을 의식해요? 이게 무슨?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망하는 몸이 왜 남을 의식합니까? 망하는 몸이 왜 부끄러움을 느끼죠? 복음 안에서는, 십자가 앞에서는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어요.

 

충분히, 주께서 남들이 너를 놀리는 이상으로, 이미 충분히 놀림의 대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구원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을 구원했기 때문에, 놀림받아 마땅한 것을 충분히 인식하라는 숙제를 주고 구원했기 때문에, 이 자리(죄인)에 머물지 말고 이 자리(의인)에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남한테 모멸감을 당해도 쌉니다. 그거 호들갑떠시면서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수치 문제는 중요한 문제에요. 수치 문제 때문에 자살까지 이어집니다. 사람이 왜 자살합니까? 부끄러워서 자살하는 거예요. 왜? 내가 이 정도 되었다는 평판이 이미 나있잖아요. 친구 만나면 나는 이 정도라는 것이 나와 있는데, 그 사람에게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들 앞에 내가 설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나를 용서가 안 되어서 그래요.

 

제가 시카고 강의에서 몇 안 되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강의를 했습니다. 성도님들이 이해를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주님 소관이지만. 제발 자기에게 실망하라고 했습니다. 제발 매일같이 자기한테 실망하시고, 실망하되 자책하지 마세요. 자책할 권한이 없어요. 내가 내 몸이 아닌데 왜 자책합니까? 우리는 결과물이죠.

 

내가 잘못해서 결과가 나왔으면 자책하겠는데, 내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환상을 꾸다가, 환상이 톡 깨주니까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니까 깨지면서 실망하고 돌아서서 감사하고 그래요. 꺼진 불도 다시보자. 이런 표어처럼. 자기한테 실망하고, 자기한테 실망하도록 해주신,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게 요한일서 2장 11절의 말씀이 해당되는 겁니다. “니가 어두움이며 어두움에 눈이 멀었음이라” 저요! 저요! 제가 그런 사람이라고 나설 때, 그 사람 속에 요한일서 2장 11절의 말씀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그대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여러분들 킹크랩 잡숴봤습니까? 뭐 자랑질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껍데기 먹습니까? 속을 먹습니까? 속을 먹죠. 성도는 내 안에 말씀이 들어있어요. 바리새인 들어있고,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 들어있고, 뭐가 들어 있어도 괜찮아요. 이미 구원받았으니까. 어떤 것이 들어있으면 어떻습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람인데. 주의 말씀을 표현해주는 표현형으로 그동안 우리를 사용하신 겁니다.

 

어떤 사람이 물어요. 하나님. 에덴동산은 살기 좋게 만든 동산이잖아요? 누가 살기 좋다고 이야기했습니까? 왜요? 저 같으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빼버립니다. 생각해보세요. 사람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한다면 에덴동산을 덴저러스dangerous한, 해골표시해서 위험한 곳이라고 표시할 이유가 없잖아요? 제 생각이 틀렸습니까? 여러분들 혹시 아드님 계십니까? 아드님 키울 때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해서 곰 인형이나 이런 것을 놓아야지, 수류탄 두 개에다가, 가시덤불 놓아가지고, 애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 이게 말이 돼요? 지뢰 막 깔아놓고.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은 자기만 사랑해요. 우리를 사랑 안 해요. 왜? 하늘나라는 하나님 자기를 위한 나라이지, 인간을 위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받고. 어떤 인간도 구원 못 받고 장자만 구원받아요. 우리는 그 장자로 인하여 우리는 양자되어서, 이제 성경에서 말하는 아바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면서, 우리는 그 나라에 합류하는 겁니다. 내 영이 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영이 임해서 가는 거예요. 그 예수님의 영이 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니 주제 파악하라는 겁니다. 처음부터 에덴동산 해석부터가 잘못되었어요.

 

에덴동산이 우리 좋아라고 있는 동산 같으면, 죽음의 요소가 거기에 심어질 이유가 없어요. 한 20년 지켰다고요? 그러면 25년째에 안 따먹을 줄 알아요? 한 오백년 지켰다고 해서 오백년 그 다음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데, 오백년 지켰으니까 뭐 따먹어도 봐주세요. 뭐 이런 거 없어요. 천년이 지나도 그건 유혹입니다. 여러분, 유혹을 이긴다고요? 이길 유혹 같으면 애초부터 유혹 값도 못한 거예요. 유혹이란 못 이기라고 주신 것이 유혹입니다. 이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세월 간다고 유혹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유혹에 빠지면 돼요. 이게 뭐냐, 정말 나는 유혹에 빠지지 않겠다는, 내가 보이는 내 시선을 블라인드 스팟, 없애버리면 돼요. 없애버린 그때에,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를 위하여 존재하는 ‘나’가 새롭게 발견될 것입니다. 어둠속에 들어가세요. 거기서 나를 잊어버리세요. 거기에 안 들어가려거든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보시면 됩니다. 정신 차릴 수가 없어요. 폭포 찍으려고 갔다가 폭포는 안 보입니다. 잔뜩 물보라만 찍히고, 나중에 윤곽보이는 것은, 저쪽은 캐나다선(船), 이쪽은 미국선, 미국 배를 조금 뺏을 때에, 그때 어렴풋이 물보라가 보이면서 밑에 윤곽이 흐르는 것이 보여요. 그때 찰칵찰칵 찍어요. 정면 안에 보면 하나도 안 보입니다.

 

하나님 하나도 안 보여요. 멀찍이 보는 하나님 그건 가짜고. 내가 보고 있다고 의식하면서 보는 것은, 전부 다 가짜믿음이에요. 근데 그 가짜 속에 말씀이 들었다면, 그건 진짜입니다. 그래서 나의 외부가 나의 내부를 찢는 그 시간이 성도의 일생입니다. 성화론 없습니다. 거룩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이 관계가 거룩이예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그 ‘너희’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너희’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부터 시작하는 새롭게 피조물 된, 어떤 죄인을 가지고 말씀으로, 킹크랩 속에 집어넣어서 만든, 이런 쓸데없는 인간도, “아버지여, 제가 이 피를 흘려서 구원했습니다.” 라고 예수님 자기자랑 할 만한 그러한 결과물이 바로 ‘너희’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2장 12절에,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그 다음에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여기에 세 종류의 육신이 나옵니다.

 

첫 번째 육신은 뭐냐 하면 자녀가 나오죠. 자녀 나오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아비 나오고, 그 다음에 뭐 나옵니까? 청년 나오죠. 이렇게 세 가지의 육신에 관한 호칭이 나오는데,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의 육신은 그 어떤 경우라도 확정되어 있어서, 육신이 육신의 관계를 변경하지 못한다는 요소가 육신에게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엄마가 자식을 낳잖아요. 자식이 좀 애를 먹는다고 하면, 농담 삼아 뭐라고 합니까? “그럴 거면 집 나가! 나는 니 호적에서 뺀다.” 이렇게 하죠. 절대로 못 뺍니다. 육신은 확정된 거예요. 내가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고 오면, “아이구,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이렇게 하지를 못해요. “이놈의 자식아! 그래, 이제 돌아와?” 이렇게 합니다.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내가 자아가 있다고 해서, 육신의 관계를 변경할 수 없는 그 상황, 형태를 가지고 육신이라고 합니다.

 

육신은 뭐냐, 고정성. 육신의 확정된 이 고정성이 육신의 특징이에요. 육신을 니 마음대로 바꾸지 못합니다. 나는 저 이쁘다고 내 자식 만들고, 저 못난 자식은 니 자식 하라고 이렇게 바꾸지 못합니다. 자녀, 아비 사이 절대로 못 바꿉니다. 한 번 태어난 자녀는 영원한 자녀고, 한 번 태어나게 하신 부모는 영원한 부모에요.

 

꼼짝 못합니다. 이 관계는 꼼짝 못하죠. 그 확정된 꼼짝 못함을 사도요한은 그대로 영적 관계에다가 집어넣어버려요. 육만 꼼짝 못하는 줄 알아? 영도 육신 이상으로 꼼짝 못해! 니가 손 못 대! 그 관계를. 너의 구원, 너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관계는 니가 육신을 니 마음대로 못하듯이 영의 세계도 니 마음대로 못한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나와 너 사이가 자녀의 관계라면, 이 자녀의 관계가 확정된 것처럼,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이 내용도 확정적이다. 니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미 사함을 얻었다는 것도, 육신 그 이상으로 확정적이다.

 

자, 여러분 묻습니다. 확정적인 것을 알려면,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오늘 강의에서 핵심부분에 도달했습니다. 내가 확정적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확인하고, 증명하고, 이걸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아시는 분, 뭐 손들고 이야기해보세요. 내가 확정적이라는 것을? 묻는 내가 잘못이죠.

 

내가 믿던 것 다 깨지면 됩니다. 내가 믿던 것. 저게 확정적이었다는 것이 다 깨지면 돼요. 깨지고, 깨지고 다 깨진 뒤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안 남으면 처음부터 그 사람은 아무것도 확정적인 것이 아니고. 다 깨지고 마지막 요한일서 2장 12절이 남으면, 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음이요, 이게 남았으면, 여러분 처음부터 세상 모든 것을 얻어 챙긴 것이 되는 겁니다. 자녀 떠나고, 남편 떠나고, 아내 떠나고, 집 떠나고, 재산 떠나고, 불나고.....,

 

어떤 분이 자살을 할 때, 굶어서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내가 믿던 확정적이었던 그것들이 파편이 되어 조각조각 깨어질 때, 내가 의지할 것이 없는 거예요. 내가 뭘 믿고 살아야 되느냐? 앞으로? 무슨 보람으로 살아가야 될 것인지. 손에 쥔 것이 다 날아가 버렸어요. 뭘, 해볼 여지가 없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면, 무슨 이야기 되는 겁니까? 니가 그동안 확정적이라고 여겼던 것은 다 구라고 거짓말이라는 겁니다. 니가 지금 믿지 않으면 될 것을, 그걸 가지고 믿음의 대상으로, 내용으로 포함시킨 거예요.

 

제가 아는 어떤 교회는 목사님이 교인들로부터 존경받았어요. 한 오천 명 되는 교회에요. 오천 명 되는 교회인데, 제천에 어떤 분에게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분이 누군지는 말은 못하는데, 그 분이 그 교회에 다녔으니까. 그 분이 나이 한 오십 얼마 되어서 교인들 한 일곱 가정이 남았어요. 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뭐, 뭐 이럴 수라니요? 뭐가 어쨌는데요? 교인이 오백 명이 아니고 오천 명이에요. 제천에서 제일 큰 교회가. 오천 명이 었쨌다구요? 그 사람이 지금 예수 안 믿습니까? 믿죠. 그럼 됐잖아요? 죄 용서 안 받았습니까? 받았습니다. 그럼 됐잖아요?

 

분명히 공식이 뭡니까? 죄인을 뭐했다? 십자가로 뭐했다? 십자가로 의인되었잖아요. 그럼 의인으로 확정된 방법은 뭡니까? 이 역사 속에서 우리는 뭐로 드러나면 된다? 죄인으로 드러나면 되는 거예요. 그 방법은, 죄인이면서, 아닌 척 하면서 의지했던 모든 것은 어떻게 돼요? 이런 껍데기를 다 벗겨버려야죠. 그렇다면 내가 진짜 예수 믿었는지, 아니면 예수 이름으로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었는지가 드러날 겁니다.

 

그러면 내가 믿고 싶은 것은 어디서 생겼느냐, 내가 믿고 싶은 것은 어릴 때부터 부모 교육 가운데서, “우리 가정에서 너 같은 존재는, 적어도 이 정도 되어야지.” 라는 이것을 줄기차게 양육 받고 세뇌 받고 훈련시킨 거예요. 계속해서. “우리 집안은 니같은 인간은 용납 안 된다. 똑바로 해!” 이렇게 양육 받고 훈련받다보니까, 나는 이정도 돼야 나답다고 여기는 거예요. 블라인드 스팟(맹점, 맹인)이 안 된 겁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안 선 거예요. 멀찍이 사진 찍은 거예요.

 

그리고 내가 사진 찍는다. 저 나이아가라 폭포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예수님 잘 계셨어요?” 인사하고 있는 거예요. 실제로 근처도 안 갔어요. 행여나 내 가정이 다 깨질까싶어서. 멀찍이 있으면서, 지금 벌벌 떨면서 가는 거예요. 그럼 우리교회 교인들은 늘 복음 아닌가, 복음인가를 정말 예리하게 집어냅니다. 제가 설교하려고 딱 서면 교인들의 눈빛이, “새로운 것 내놔! 아는 것 말고 새로운 것 내놔!” 계속 내놓으라고 하는 봉사해야 되는 임무가 있어요.

 

그렇게 예리해요. 예리한데, “근데, 저 김집사님. 기도순서인데요?” 이렇게 하면, 삑(☓). 복음 잘 아신다면서요? 그냥 고백하면 되잖아요? “아아~못합니다.” 말을 더듬어서 못하고...뭐, 왜 못할까요? 생중계 때문에 그래요. 생중계. 예배 생중계 되거든요. 생판 모르는 미국에서 어떤 사람이, “복음 아는 교인인 줄 알았더니, 그것도 복음이가?” 씹을까봐. 그럼 어릴 때부터 뭡니까? 너는 남한테 씹혀서는 안 돼! 이게 본능적으로 습성이 되어 있어요.

 

습성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습성이라는 말은 습관이 아니고, 어떤 것이 몸과 하나가 되어서, 자연적으로 몸이 그걸 정상적으로 할 정도로 이미 일체가 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남한테는 욕 얻어먹고는 못 살아. 그럼 자살해야지. 그렇기 때문에, 멀쩡한데, 그럼 기도 안 하면 되지, 괜히 기도해가지고 온 뒷 담화 다 듣고, 김집사, 믿음 좋은 줄 알았더니만, 기도하는 꼬라지하고서는. 이러니까 얼마나 우사스러운지. 그런 우사를 왜 사서합니까? “미안합니다. 저는 빼주세요.” 저는 그 결과가 묵시적, 창세전의 결과기 때문에 동의합니다.

 

그 중에 또, “여보. 당신 기도순서에요?” 하면 제 아내가 기도해요. 기도하면 우리 애가 독일에서 생중계로 듣습니다. “엄마, 말하는데 와 벌벌 떠노?” 벌벌 떠는 거예요. 나이아가라 폭포를 주시해야 될 것을, 지금 자기를 주시하는 시선들을 의식하는 거예요. 목사 부인이니까 그동안 복음을 수 십 년 들었으니까 얼마나 잘 알겠느냐? 알기 개코나 알아?

 

정말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고백해야 해요. 예수를 알고, 십자가에 죽었고,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나는 무조건 죄인이고 소경입니다. 그런 고백 자체가 요한복음 9장에 나오고, 9장에 나온다는 것은 그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내 안에 들어있는, 내가 발산해야 할, 내가 바리새인이며, 내가 사두개인이라고, 고백하라고 주께서 킹크랩 속에 만들어놓고, 그 킹크램은 천국 가고. “내가 바리새인입니다. 내가 소경입니다.” 이야기하면서 천국 가는 거예요.

 

소경이라고 하는 자는 보는 자요 소경이 아니라고 하는 자는 소경이니라. 그 말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럼 이제부터 내가 연구해서 소경이 안 되어야지.’ 하잖아요. 그러니까 소경인거예요. 그 말씀은 그 말씀 그대로 가지고 있어야지, 이게 내가 요리도 못하면서, 어설프면서, 셰프도 아니면서, 손대면 안 돼요. 주여, 이걸 그대로, 소경이라는 그것이 그대로 나에게 현실화되게 하옵소서. 표현형이 되게 하옵소서. 제가 발음이 안 좋아서. 표현형. 여러분들 각자가 알아서 하세요.

 

표현하는 형태가 바로 나의 하루하루 삶이 되게 하옵소서. 아, 이것이 말씀이고 이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가로채서, 주님 홀로 일점일획이라도 다 지켜서, 거기서 생긴 하나님의 그 의를, 낚싯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낚싯줄,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빨대 꽂듯이 꽂아서, 우리의 죄를 쏙쏙 뽑아내면서, 그 죄를 하나님의 십자가의 피에 섞어서 의로 만드는 생산 공장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칠 것이 죄밖에 없어요. 재료가 많으면 의도 많아지잖아요. 쓰레기 많으면 재활용도 많아지듯이. 날마다 내놓는데, 내놓는데 그냥 못 내놓아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놓습니다. 그 예가 뭐냐 하면, 전에는 실제로 간통해야 간통인줄 알았는데,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다. 야호! 죄가 또 생겼네! 남을 비판하는 것도 죄고. 성령 이 외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라고 적용시켰던 그 모든 사례가 죄가 되는 겁니다.

 

“성령 주시옵소서.” 그 외에. 왜? 하나님은 구하는 것은 성령만 주신다고 하셨으니까. 밤새 금요철야기도하면서 성령 달라고 했던 그것이, 성령 외에 것을 달라고 한, 죄가 되는 겁니다. 복음 듣지도 않은 사람에게 외쳐가지고 기어이 목사 값을 한다고 하는 그것도 죄가 됩니다. 왜? 산상설교에 보니까 개한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했는데, 저 인간 내가 반드시 꼬셔서 내 교회 만든다고 설쳐댔으니까. 꼴을 보면 참 가관이에요. 가관. 나와요.

 

선택 받은 사람은 누가 정하고, 구원받은 사람을 누가 정합니까? 그건 하나님의 몫이지, 목사가 관여할 몫이 아니에요. 왜 지가 그렇게 애가 타서 난리입니까? 이미 정해졌는데. 우리는 복음만 전하면 되지. 어떻게? 말로? 아니요. 내가 죄인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증거 하면 되지. 왜? 자기가 한 명 더 꼬신다고 하늘나라에서 더 좋아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노아방주에 몇 명 들어갔습니까? 8명 들어갔죠? 맞죠? 근데 노아방주의 크기가 어떻습니까? 8명만 들어갈 크기에요? 수십 명이 들어갈 크기에요? 더 많이 들어갈 크기죠? 그러니까 노아가 방주 지어놓고 8명만 들어갔으니까 얼마나 미안함 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온 노아를 가지고 벌서고 손들게 했습니까? 이게 교회는 크게 지어놨는데 달랑 8명? 그것도 말이 좋아서 8명이지, 자기 집 식구밖에 없었어요. 하나님은 걱정했습니다. 혹시 9명 데리고 올까봐.

 

8명이 구원됐으면 8명만 구원받아야지, 9명을 데리고 오면 안 됩니다. 그걸 정하는 방법은 숫자에 연연하지 말고, 내가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진상도 모르고 물만 흠뻑 적시다가, 사진 찍은 거 보니까 물보라면 허옇게 있어요. 나는 아는 것은 전혀, 그 순간 내가 나를 잊었어요. 물보라 속에서. 그 물보라는 누가 유발시켰습니까?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그 물보라 앞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 순간 잊어버렸어요. 내가 없어졌어요. 내가 없어지면 스트레스도 없고, 내가 없으면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위협과 그리고 수치도 없어요. 그게 바로 스데반이 받았던 성령 충만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비들아, 그리고 청년들아, 하는 것은 특정인물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육신에 확정된, 아무리 해도 변경되지 않는, 확정된 육신의 관계를 통해서 조건을 제시합니다. 어떤 조건? 니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는 이 내용은, 니가 행한 것이 아니요, 확정적으로 니한테, 킹크랩 속에 집어넣어주고, 그 집어넣은 것을 주님이 손으로 그걸 끄집어내는 거예요. “봐라! 니 같이 더러운, 니 속에 이게 들어있었다. 이게. 이게 고름처럼 들어있었잖아. 이런 게 들어있었잖아. 이런 게.” 수술해서, “봐라 너 같은 못난 자도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했잖아.” 이걸 끄집어낼 때, ‘저런 은혜가 나한테 있었나?’ 이래 되는 겁니다.

 

주님 앞에서는 판사, 의사, 그런 것 묻지도 않습니다. 교사나 농부나 묻지 않습니다. 내과의사가 해부할 때, 어떻게 합니까? 뭐 고관직위 보지 않고 뭐하는지 보지 않고, 그냥 완전히 살점덩어리. ‘암세포가 어디 있을까?’ 하고 찾잖아요. ‘여기 있네.’ 족집게 꽉 집어서, “자, 보호자 보세요. 이 부인에게 암세포가 있었습니다.” “아이구, 그게?” 그러면 거기에서 “나 국회의원 부인이야!” 국회 의원부인이 왜? “나 목사 사모야!” 이게 왜 있습니까? 보이는 것은 암세포만 보듯이.

 

주님께서 ‘보자, 보자 쪼개보자. 어이구, 창세전부터 죄 사함을 얻었다는 것이 여기 있었네.’ 핀셋으로 집어가지고 “니 안에 이게 들어있었다.” 하면서 예수님의 용서와 속죄함을 끄집어낼 때, 그게 말씀의 완성입니다. 말씀의 완성된 형태를, 태초에 약속이 죄인 된 몸을 가지고 재료로 삼아서, 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가 피어난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성령을 집어넣어서, “거봐! 내가 성공했잖아. 예수님이 성공했잖아. 죄 속에서 의를 끄집어낸 것을 성공했잖아.” 핀셋으로 집어내서, “주님. 여기 한 명 구원!”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세리와 창기와 강도도 어떻게 되는 거예요? 구원받는데 그 직업이 지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장 없죠. 주여 저를 생각해주옵소서. 저 암세포자입니다. 알았어!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님 앞에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저 죄인입니다. 알았어! 저 소경입니다. 알았어! 니가 오늘 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이제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을 처음부터, 애초부터, 행함도 없이, 죄인이라고 알 사람이,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할까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왜 인간은 자기를 죄인으로 안 보느냐 하면, 행하기만 잘하면, 몇 달 후에, 몇 년 후에 내가 행한 결과가 나오는데, 그걸 왜 놓쳐요. 그걸 왜 놓칩니까? 희망이 있는데, 그걸 왜 놓쳐요? 희망이 없으면 자살한다 이 말이죠. 그럼 희망이 있는데, 악바리하면서 뭔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나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죄인은 죄인이지만, 전적인, 뭘 해도 죄인이 되는 그것은 나는 인정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버티기 마련이에요. 근데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가 그 안에 오거든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이미 완료된 상태에요. 우리가 미래를 안 가 봐도, 우리가 백년, 천년을 안 살아봐도,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아담의 죄, 우리의 죄가 아니에요. 아담의 죄로 인하여 우리는 죽어야 될 죄인이라는 것을 미리 땡겨서 아신다면, 우리는 주님의 핀셋이 마음껏 다 헤집고 다니도록 그냥 공개하세요.

 

그리고 자신에게 있던 모든 것을, 제발 남한테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남한테 이야기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남한테 이야기하지 마시고. 그럼 남한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잘 하는 것이 있잖아요? 우리 애가 일등 했어요. 일등 하라고 안 했는데. 이번에 땅을 하나 샀는데, 기도 별로 안 했는데, 땅을 사게 되었네. 그런 이야기만 하세요. 그건 잘하는 거거든요. 하지만 주님 앞에서, 주여! 이것도 죄인 것을 제가 압니다. 그렇게 고백하세요. 제발 남 앞에서 자기 간증 좀 하지 마시고, 그런 것 좀 하지 마세요. 그런 것 해봐야 그 사람들한테 스캔들거리밖에 안 돼요. 그거 믿을 것 못 됩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에는, 누구 집사 하지 말고, 아이구, 이 죄인! 김 죄인! 우리 알지? 십자가 앞에서 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냥 교회로 모일 때, 자기 죄만 자랑하면서 모이시기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9-22 22:48 
20160910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11-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요한1서 2장 15에서 1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389페이지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라”

오늘 설교 제목은 ‘조건’입니다. 조건이라는 제목은 육신에다가 조건을 붙여서 주께서 사용하십니다. 육신에 붙은 조건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에서 붙이는 조건이 있고 또 하나는 육신 자체에서 나온, 붙여지는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육신에다가 영적세계의 조건을 언급한다면, 우리가 지난 시간에 봤는데, 다시 보게 되면, 요한일서 2장 12절을 보게 되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자녀들아” 육신입니다. 육신의 자녀들아, 무슨 조건이 붙느냐 하면 하나님이 제시한 조건인데, 너희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는 조건이 붙을 때, 그 사람은 영적사람이 되는 겁니다. 주께서 그 사람을 해부하고 집어내는 거예요. 직업과 관계없습니다. 백수라도 괜찮아요. “요게 있잖아. 내가 이걸 집어넣었는데 이게 아직도 유효하게 살아있네. 희한하게.” 그러니까 어항에다 금붕어 집어넣고, “아이구, 이게 아직도 살아있네.” 하고 집어내는 것처럼. “니 죄가 내 이름으로 사함을 얻는다는 이 사실이 아직도 여기서 움직이고 활동하고 있네.” 그것을 주께서는 끄집어내는데, 그게 영적조건입니다.

또 있습니다. 13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태초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알았다는 사실을, 아직도 이러한 내용이 꿈틀거리고 있네. 하나님이 알고, 너희들이 태초부터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이 사실이 아직도 너끈하게 살아있으니까, 이 육신이 보통 육신이 아니네. 어떻게 영적조건이 합치되는 이런 육신이 있느냐? 아비들아! 연세 많은 자들아! 라는 뜻이죠.

또 있어요. 13절,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하나님이 생각하는 악한 자, 이건 사람이 생각하는 악한 자가 아닙니다. 자기 돈 떼먹고 도망간 자가 악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자를 이겼다는 그러한 조건들, 요소가 아직도 너희 속에 이렇게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으니까, 너희들은 나의 자녀들이고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람만 그냥 데려가면 되지, 뭐, 그 뒤에는 쉿! 하고 입 다물고 하지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적인 조건을 주셔가지고, 고맙게도 황공스럽게도 조건 주셔서, 나는 육신뿐이었는데, 난데없이 영적조건이 내려와서 백성이 되었으니까, 그걸로 우리하고 계산 끝났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러면 그 뒤에 또 다른 것이 붙어있어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영적조건은 개인구원을 하지 않습니다. 나 구원받았다, 손 털자, 이제는 성경 덮자, 이럴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제가 시카고 강의에서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는데, 성경 왜 보십니까? 구원받았는데, 성경 왜 보십니까? 제가 질문을 했더니만, 알고 있지만 겸손들 하셔서 답변을 안 했습니다. 알고 있지만. 구원받았는데 성경 왜 보십니까? 여러분, 구원받으려고 왔잖아요? 구원받았잖아요? 성경을 참고서로 했잖아요. 그래서 그런 예를 들었죠. 고3때 수학정석 공부했는데, 대학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대학 들어가 놓고 고3수학정석을 보는 사람 있습니까? 합격했는데 왜 보죠? 정철종합영어, 합격했는데 볼 필요 없잖아요? 근데 이렇게 또 성경을 보고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은 바로 영적조건이 우리의 개인구원의 용도가 아니라는 것이 뒷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뒷부분에 뭐가 나와 있습니까?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15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절은 아주 유명한 구절인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그러나 이 유명한 구절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솔직하게 느끼는 느낌은, 하나님이여, 우리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아주시옵소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주께서 아시잖아요? 아시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게다가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니?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오늘 아침에 제가 산책을 했습니다. 여기 삼성이라는 글자가 있는 건물부터 해서 쭉 운동 삼아 이렇게 가봤는데, 근데 강이 있었어요. 예상치 못한 강이 있었는데, 강가로 도는 파크park,공원이 있고.

저는 생각했어요. 이 강가에 있는 갈대, 그걸 지켜보고 있는 나, 주님이여, 이것도 세상 사랑하는 요소에 포함이 되는 겁니까? 저는 물었어요. 이것도, 강가에 흘러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강에 흘러가는 물을 쳐다보고 있는 이 한적한 시간마저도,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그 항목 속에 포함이 되느냐 이 말이에요. 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 이게 세상 사랑이 그냥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이런 짓은 하지 말라. 이런 것은 세상에서 왔다고 할 때에, 우리가 놓친 것이 있어요. 세상과 나를 따로 분리시켜서 세상은 더럽다고 한 적이 많았지만, 나를 포함해서 나를 세상에 집어넣는 사고방식을 평소에 하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나를 주관으로 간주하고 세상 밖을 객관으로 간주했을 때, ‘참 세상은 지옥이야. 더러워.’ 라고 평가하는 내가 이 세상에 더러운 것에 한 몫 했다는 것.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산다는 것이 이 세상을 더욱더 지옥 되게 하는데 한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을 빼먹고 세상은 더럽다고, 내가 그렇게 지칭한 겁니다.

그렇다면 개인구원이라는 것은, 이것은 있을 수 없고 주님께서 세상자체와 전쟁하는 가운데서 전리품으로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아주 쉽게 하겠습니다. 아까 우리 육신에다가 뭐가 붙느냐, 영적조건이 붙는다고 했죠. 그렇다면 우리 육신자체에서 붙는 조건이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자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 16절에 보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정욕이 유발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내 육신이 있는데, 육신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될 텐데,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정욕이 작용을 하는데, 그 정욕의 마지막 목표점과 노림수는 뭐냐 하면, 자랑질을 하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육신이, 육신 자체가 영원을 기대하면서 육신 자체에서 나온 조건입니다. 이 조건을 두 글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격이라고 합니다. 근데 성격은, 어제 습성이라고 너무 어려운 말을 했는데, 성격을 자체적으로 고칠 수가 없어요. 성격 안에는 정욕이 들어있고, 성격이 노리는 바는 이 육신을 자랑하는 쪽으로, 그런 조건으로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럼 이 세상은 뭐냐, 성격과 성격의 만남. 흔히 말해서 주님한테 죄졌다, 죄인이라고 하는데, 이게 주님 앞에 죄인이 아니고 성격 드러난 거예요. 대개 성질 드러난 겁니다. 이 성질이라고 제가 표현하는 이유는 이게 고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격을 어떻게 고칩니까? 베드로의 성격이 평생 가는 거죠. 고칠 수가 없어요. 안 고쳐집니다. 그럼 남아있는 문제는 뭐냐, 성격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걸 분해해서 파악하면 되는 겁니다. 성격은 육신 더하기 자랑을 목표로 하는 욕망이 나온다.

그렇다면 주의 일 때문에 티격태격 거렸다. 주의 일 때문에 뭐 이렇게 세상 것 이긴다고 그들에게 전도를 했다 하지만, 사실은 톡 까놓고 말해서 그냥 성질부린 거예요. 성질부린 것. 무슨 거기다가 주의 일을 갖다 붙입니까? 성격과 성격의 부딪힘이죠. 우리는 육신이라고 하니까 조건 없는 육신이라고 착각한 거예요. 육신만 달랑 있고 이제부터 육신에서 내뿜는 모든 것은 성격은 성경 말씀에 의해서 경건성이 더덕더덕, 덕지덕지 갖다 붙여서 그렇게 추가 된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영적조건은 우리가, 육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께서 영적조건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갖다 붙이는데, 그 조건이 뭐냐, 여러 번 했습니다마는, 다시 한 번 보면,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이게 대표적이죠. 우리는 우리 성격이 죄라고 하는데, 우리 성격은 죄가 아닙니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데, 우리 육신은 반드시 어떤 이유 때문에 조건이 붙는데, 육신은 조건이 붙게 되어 있는데, 육신으로 있지 왜 조건이 붙느냐? 이 말도 어려운데 더 쉽게 합시다.

아이큐가 한 30된다고 봅시다. 아이큐가 한 30되는 사람이 성질 있습니까? 성격 있겠어요? 별로 없습니다. 굉장히 순박해요. 쌈 싸먹을 때, 고기 하나 얹이고, 또 고기 하나 얹이고, 기봉이처럼. 굉장히 순수하게 이렇게 나올 때, 얼마나 순박합니까? 별로 성질, 성격 부릴 것이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 아이큐가 높고 이렇게 배우게 되면 그때부터 욕망이 등장하고 욕망은 그냥 멈출 수가 없습니다.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그냥 미끄러져가요. 이걸 자랑질을 해야 돼요.

이게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영적조건에 대적하는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바로 세상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으로부터 왔느니라. 세상은 너가 세상을 이길 수 없느니라. 오히려 니가 세상으로부터 놀림을 받고 다루어진다. 육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영적조건이 붙을 육신에 뭐가 붙는다? 정욕이 붙고, 정욕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에요. 기어이 자랑질을 해서, 한번 자랑한 자랑질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나의 성격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그럼 우리 만남은 성격과 성격의 만남이죠. 다른 말로 하면 세상으로 온 것과 세상으로 온 것과의 챙챙 거리며 싸우는 날카로운 칼싸움입니다. “어이구, 한 성질하네?” “당신도 만만치 않습니다.” 주의 일은 핑계에요.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주의 일은 딱 한가지에요.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죄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그게 주의 영적조건이지, 그 영적조건을 부여한다고 해서 우리 육의 성격이나 육의 조건이 그게 달라지고 다른 것으로 교체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목사님. 교체 안 되면 이 성질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 있는 한 그것을 우리 손으로 개선하거나 조작할 그러한 입장이 못 됩니다.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세상이 악했을 때에 우리가 나쁜 짓을 해서 세상에 보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여기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이 세상에 부림을 당하고, 그들에 의해서 조정을 당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세상을 보여주는 증거물로써 우리가 포함이 되어 있어요. 포함되어있는데, 나는 따로 나는 따로, 따로가 되지를 않아요.

내가 어떻게 따로 됩니까? 내가 만약에 따로 된다면 내 성격한테, 저리가! 저리가! 말 한마디 하면 성격이 뚝 떨어져야 할 텐데. 우리가 어디를 가도, 우리가 주의 일을 해도 우리의 성격은 바뀌지 않습니다. 성격 달라져서 목회한다고요. 우리는 목회 그만둬야 해요. 어느 세월에 성격이 달라져서 목회합니까? 성격대로 목회해야죠. 장사하는데 성질 나빠서 장사가 안 된다, 성격 고치고 장사하겠습니다. 어느 세월에 성격고치고 장사합니까? 성질대로 장사해야죠. 성격대로 장사해야 해요.

미용사가 여자분들 머리할 때, 유행에 맞춰서 머리를 손질해주지, 그것도 모르고 본인은 마릴린 먼로처럼 해주세요. 머리가 다른데, 무슨 마릴린 먼로에요. 육신의 조건은 이미 따로 있는데, 뭐 거기다가 배두나처럼 해달라고 하면, 그거 안 돼요. 본인의 성격은 세상으로부터 덧붙여진 조건을 육신이 수동적이고 피동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어떻게 내가 내 마음먹은 대로 달라집니까? 안 달라져요. 달라질 수가 없어요.

자,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영적조건을 주셨다. 그러나 제가 한 말이, 개인구원은 아닙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영적조건 주었으면, 구원받았으면 성경 덮어도 괜찮아요. 구원받았는데, 대학 들어갔는데, 옛날 고3참고서 왜 봅니까? 볼 필요 없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조건을 준 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적, 세상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우리를 충분히 활용한 것입니다.

더구나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성격을, 우리의 깨질 수 없는 이 더러운 성격을, 더러운이 아니고, 더러븐 성격을 주께서 세상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충분히 활용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니 성격 니가 고치지 마!” 사람이 성격고치면, 또 다른 면의 자랑질이 또 나옵니다. 나 예수 믿고 성격 고쳤다. 그거는 육신의 자랑이 아니고 뭡니까? 그것도 육신이 자랑이에요. 예수 믿고 새사람 되었으니까, 새사람 되기에 합당한, 흔히 말하는 합당한 주의 형상을 본받아서 이제는 예수 본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사람한테 묻고 싶어요. 그러면 서울대 합격했으니까 고3 참고서 보지 마세요. 그거 왜 봅니까? 성경 왜 봅니까? 구원받았는데.

우리가 자꾸 내가 내 성격을 고치려고 하는 버릇을 세상으로부터 부여받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니가 적이 아니야. 니가. 니가 적이 아니고 주님의 적은 따로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세상이 적이라는 겁니다. 세상이. 그러면 세상이 왜 우리에게 성격과 육의 조건을 주었는가? 그것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자기가 점점 더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육신은 뭐 까지 자랑질 하려고 하는가 하면, 영적세계까지 포함해서 자랑질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육신 더하기 자기가 육신에 맞는 영적세계를 갖다 붙여서, 나중에 죽을 때는 이것이, 우주선에서 캡슐은 떨어지고 우주 궤도에 올려놓고 우주선은 그동안 자기에게 봉사했던 캡슐과 해체되고, 자기를 위에 올려놓게 했던 캡슐은 불에 타고 헤어지듯이, 육신으로, 육신을 가지고 영적조건을 붙여서 쭉 가다가 육신은 떨어지고 내가 기대했던 영적조건을 만족시켜서 천국에 합류하겠다는 이 사실. 이것이 누가 보기에는 굉장히 경건해보이고 어쩌면 세계기독교 이천년 역사가 그걸 믿었던 거예요.

세계 모든 기독교 역사, 교회의 모든 설교는 육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육신을 가지고 영적조건을 구비하셔서, 육신 가지고 하다가, 나중에 육신 죽고 떨어질 때는, 여러분이 그동안 몰래 가꾸어놓은 보험 들고 공들이고 저축한 아름다운, 변변한 고상한 것들을 모아서 그걸 하나님께 쑥 들어가시면 여러분의 구원에 성공하십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합치되는 이야기에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십니까? 라고 한다면 요한일서 뒷부분에 나오는 적그리스도의 주장이 바로 그거였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들의 영적분위기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들이 생겼으니, 그들은 결국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떠나게 되면 그들은 적그리스도와 뭉쳐져서 적그리스도처럼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언급한 것이 상당히 이상스럽게 들릴 거예요. 그러나 요한일서 1장 10절을 보시는 분들은, 8절과 10절을 보시는 분들은, 제가 이상할 것이 없이 여러분들 스스로 이상하게 볼 것입니다.

8절,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아, 이게 성경에 나올 말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죄 있다고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혹시 이 강이 무슨 강인지 아십니까? 오버팩 강. 자, 아침에 오버팩 강을 보면서, 그냥 갈대를 보는 것도 이게 죄입니까? 아무리 살펴도 흘러가는 강물을 무심코 보는 것이 이게 무슨 죄에요? 자기가 더불어 유유자적한 것이 이게 무슨 죄입니까? 그래서 설마 이것까지 죄가 안 되겠지, 하고 요한일서 1장 8절을 보니까,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제가 그 오버팩 강을 볼 때에 눈으로 봤습니다. 왜 보느냐? 왜 봐요? 보고 싶어 봤습니다. 안목의 정욕이네요. 그게 안목의 정욕이에요. 내 육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자꾸 뭔가 고상함을 띠는, 고상함을 생산하고자 하는 욕구가 계속 이 육신에서 나오는 거예요. 육신에 부합되는, 육신에 안 맞는 것이 아니고 딱 적합한, 나의 성격에 부합된, 합당한 영적조건은, 내가 불편함이 없이, 원활하게, 잘 맞아 떨어졌다는 그 소급을 스스로 만끽하면서, 이 정도하면 나는 죽고 떠나도 영적조건은 나를, 우주선이 캡슐과 떨어지듯이, 그때는 내가 고이 했던 성과급들이 하늘로 올라가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말이죠.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끝까지 우리는 죄 있는 존재로 되어야 한다. 왜? 그 세상의 유혹을 니 맘대로 벗어난다든지, 니 맘대로 싫어! 싫어! 한다고 세상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 육신은 바로 세상의 악한 조건에 기여를 했기 때문에, 거기에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죽이십니다. 죽이시는 것에 대해서 동감합시다. 그리고 살리십니다. 죽이시는 것에 동감하신다면, 제발 부탁합니다만, 여러분들에게 영생을 줄 때, 그거 순순히 따라주세요.

죽어가는 것을 우리 마음대로 못합니다. 늙어가는 이 청춘을, 누구는 뭐 맨날 바닥을 치면서 청춘을 돌려달라고 하는데, 이 청춘을 돌려줄 수가 있습니까? 나훈아 이야기입니다. 청춘을 돌려달라고 해도 결국은 늙어가거든요. 늙어가는 것에 이거는 동의여부가 아닙니다. 늙어가는 것은. 마찬가지로 영생 얻는 조건은 육의 조건과 유사해요. 육의 조건을 우리가 거부할 수 없듯이, 영의 조건도 거부할 필요가 없는데, 다만 영의 조건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왠지 찝찝하게 찾아와요.

“너는 평생에 죄인이다.” 자, 이런 조건을 제시하고, “그 죄는 예수 이름으로 씻어진다.” 이런 조건을 갖다 들이미니까. 에이, 차라리 내가 고상하게 살아서, 내가 경건하게 살아서, 이걸 내 육신에다 갖다 붙여가지고 나중에 육신이 죽을 때, 괜찮은 조건만 가지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죠. 그러나 성경은 그럴 줄 알고, 너는 뭘 해도, 무심히 오버팩 강을 보더라도 그게 죄 아닌 게 아닌 겁니다.

1장 10절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제가 무슨 나쁜 짓 했습니까? 라고 하지 마세요. 니 소속이 어디냐? 니가 세상에 속했으면, 세상이 이렇게 악한 세상이 되는데, 나는 세상의 악함에 보태지 안했다고 하는 그런 말은 하지 마라. 우리가 존재하는 자체, 우리가 태어난 자체가 세상의 악함에 많이 기여들을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영적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제발 자책하지 마세요. 내가 나쁜 놈이야. 내가 실수해서, 내가 왜 그런 나쁜 짓을 했을까? 하지 마세요. 그거 후회한다고 그 다음에 그런 짓을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를 너무 몰라요. 후회한다고 해서 그 짓, 안한다고 하는 보장이 없습니다. 또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자기 자신을 자꾸 고상하게 만들어내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게 되면 뭘 자꾸 잊어버리게 되느냐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 마치 없는 것처럼, 없는 척을 하게 되고, 마치 자랑을 안 하는 것처럼 위선 떠는 꼬라지가 정말 보기 싫어요. 모든 움직임이 자랑이고요, 그 자랑 배후에는 대가와 보상을 기대하는, 그 기대감이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적조건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왔을 때, 우리가 어떻게 몸부림치고 어떻게 스스로 이 죄 많은 것으로부터 탈피하려고 하는지 다 아셔요. 아시기 때문에 그것마저 능가하는 조건으로 오신 것입니다. 니 모든 죄는 예수의 이름으로 사했느니라. 그 한 마디 속에 우리가 어떤 몸부림을 해도 안 되는 것을. 이미 영적조건을 붙인 겁니다. 그리고 붙인 것은 우리의 개인구원이 아니라, 니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세상, 그 세상에서 이미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것이 요한일서 2장 14절에 나오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우리는 흉악한 자를 구경도 못했습니다. 얼굴에 칼자국 난 조폭은 구경했지만, 진짜 흉악한 자는 구경도 못했어요. 구경 안 해도 됩니다. 이미 우리는 흉악한 자의 명령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요한일서 보면서 사도요한이 계속 추궁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자는 적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근데 놀라운 사실은 적그리스도가 신앙이 좋다는 사실이에요. 보기에, 사람들 보기에. 자기 학대까지 할 정도로. 이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야. 이 육신은 나쁜 거야. 그러니까 그것이 적그리스도에요.

미리 말씀드릴까요? 예수님께서 적그리스도냐, 아니냐 하는 조건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것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적그리스도들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절대로 더러운 육신을 가질 수 없다고 그들은 그렇게 주장했던 겁니다. 흔히 신학자들은 그것을 영지주의라고 이야기하죠. 요한일서는 영지주의자들이 교회에서 분리되고 난 뒤에, 그 영지주의자들을 공격하기위해서 요한일서를 이렇게 썼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거 맞는 이야기 아니에요. 뭐 영지주의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지주의는 아담의 자손이고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 아닙니까? 다 같은 아담의 자손이고, 우리가 얼마든지 영지주의 될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중일수도 있어요. 어쨌든 영지주의 사상이라는 것은 뭐냐, 이미 기독교교리에 정통했고, 교사 있고, 교회 부흥되었고, 그들 식으로 이미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점점 더 도를 닦고, 도를 닦고 할 때마다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영적세계를 추구해야 된다. 왜? 그래야 구원받는다. 이런 논리를 했고, 그 논리에 미혹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따라 온 거예요. “나도 구원받고 싶어요.” “나도 죽어서 좋은 데 가고 싶어요.” 하면서 온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그게 바로 개인구원이라고. 그게 바로 개인구원입니다. 구원파가 개인구원입니다. 구원파만 일까요? 모든 교리가 개인구원을 노리고 접근하는 거예요. “여러분, 나 따라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상대 안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하기를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여러분 육으로 이렇게 해놓고, 혼으로 이렇게 해야 되고, 영으로 이렇게 해야 하는데, 여러분들이 구원받아 놓고 또 그렇게 나쁜 짓을 하게 되면, 중도에 탈락하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육으로 해서 구원받았으면 혼으로 약간 기여를 해서, 말씀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형상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 여러분들이 이제는 육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혼적인 차원에서 열심히 노력하세요. 그러면 영적인 구원이 보장됩니다.”

여러분 결국 이것은 무슨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구원하려고 환장했습니다.” 그 이야기밖에 더 돼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하는 거예요. 에이,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느냐? 우리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속해 있는 우리 우두머리하고 싸워요. 세상의 대적하고 싸우기 때문에, 졸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주여. 제가 또 죄지었습니다. 원래, 니 성격이 그래. 죄 졌다고 하지 마. 성격이 그렇다고 이야기해. 그 성격이 어디서 왔습니까? 세상으로부터 왔죠. 이 성격 못 고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성격 고쳐서 목회하려고 하지 마세요. 왜? 우리 목회 안 해도 예수님이 자기백성 구하는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목회 하는 내가 주의 일을 방해한다니까요. 목회하는 내가 방해해요. “주여, 오늘도 목회 그만두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목회자가 해야 해요. 주님이 목회자인데 무슨 목회자가 또 필요합니까? 그래, 목회자가 없어가지고 주님이 방방 뛰고 그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자는 목회하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한테 목회당하는 자입니다. 목회하면서 지 성질 다 드러내면서, 주여 이거는 고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이 세상의 악함에 일임했군요. 내가 이 세상을, 이 나쁜 세상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 세상에 나도 포함시켜서 나쁜 세상이라는 것을, 왜 그걸 몰랐는지, 요한일서 1장 10절에 보니까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모독하는 자로다. 그럴 때, 아, 내가 나를 빼놓고 했던 이런 잘못을 저질렀구나. 주께서 아시는구나. 내가 주관이 얼마나 강하기에, 나 빼놓고 객관으로 상대해서, 그걸 내 맘대로 판단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자 그럼 그 다음 문제입니다. 뭐, 그러면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뭐 안 된다, 고치지 말고 그냥 막살아라, 뭐 이렇게 성격이 있는데 어떻게 하느냐, 이렇다면 도대체 그런 우리를 구원하는 영적조건 속에, 개인구원이 아니고, 정말 세상을 이긴 주님의 영적조건 속에 뭐가 들어 있기에, 뭐가 들어있기에,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이미 천국을 확정 시켜 놨으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왜 저한테 영적조건이 와가지고, 우리 죄를 주님의 이름으로 사했다는 것을 왜 이렇게 믿어지게 만드셨습니까? 왜?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한 번 톡 깨고 싶어요.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한 번 쪼개보고 싶어요.

나는 내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것을, 왜 주님의 조건은, 안 되는 것을 이렇게 너끈하게 만드는 솜씨와 재주가, 안에 뭐가 들어있기에 가능 하느냐, 이 말입니다. 레위기 3장에 나옵니다. 레위기 3장 2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주의 방법은 희생제물을 뿌리는 거예요. “에잇! 귀신아 물러가라!” 하는 식으로. 주께서는 제단에 피를 뿌리는 겁니다.

자, 이 하나님의 피 뿌림과 우리의 개인구원을 위해서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비교해봅시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려면, 구원해야 될 구제책은 내 육신이어야 하고, 따라서 육신을 학대할 수 있더라도 육신 그것마저 완전히 포기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겠죠. 건진다는 것은, 만약 mp3를 건진다면, mp3가 유지되어 있어야 건짐이 성사되잖아요. 이걸 건진다면. 그래서 내가 육신을 육신으로 건진다면 아무리 육신을 학대해도 마지막 남은 이 육신마저는 내가 포기를 못하는 거예요. 자기 부인이 결코 되지를 않는 겁니다.

그저 귀한 것. 구원시키려고 애썼던 이 귀한 것을 어떤 식으로든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걸 철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어떤 사물과 개체가 있으면 반드시 이름을 붙이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내 몸은 내 이름이고, 나는 주의 이름 백날 해봐야 내 이름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일서 2장 11절에 보니까, 너의 죄는 너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름으로 구원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결국 뭐냐 하면, 이 육신의 건짐에 대해서 다른 육신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내 육신은 내가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아까워서, 물론 자학을 하죠. 금식은 하지만, ‘에라, 모르겠다. 니 지옥 가.’ 이러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마지막 나에게 나를 유일하게 위로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끝까지. 만약에 우리가 지옥가도 끝까지 힘내라고 하고, 너는 할 도리를 다했다고 하고, 마지막 격려는 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 인간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이거는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부인 안 하면 되지? 그럼 부인 안 하면 돼요. 뭐 되지도 않는 것을 힘들게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제가 하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갈고 닦아도, 그것이 점점 더 자기를 구원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것이 반대로 자기의 가치는 증강하고 증가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애썼습니까? 나를 구원하려고. 거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자기 몸을 아낌없이 죽음에까지 내놨어요. 그러니까 제 이야기는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죽음 내놨는데 우리는 아까워서, 아까워서 못 내놓는 거예요. 심지어 우리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머리가 좋아서 베드로처럼, 내 몸을 죽일 테니까, 죽은 내 몸을 너무 버리지 마세요. 자꾸 꼼수를 써요. 죽은 내 몸을 다시 건져내는 그런 몸은 천국에 못 갑니다. 죽은 몸 말고, 새로운, 예수님의 몸에 의해서 구원받아야지, 내 몸 가지고 구원받으려고 하면 흙에 속한 몸이 천국 가는 셈이 되어서 그런 것은 없어요.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으려면 아담에 속한 형상을 포기를 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 세상에 속해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를 포기를 못합니다. 이게 어딘데? 그동안 얼마나 아까웠습니까? 아침마다 운동하면서 뱃살 빼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지금 70키로 밑에 내려갔거든요. 근데 만약 목표가 70키로 아래 65키로 라면, 65키로가 되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해버리면 그럼 내 목표는 언제 이루어져요? 사랑하는 딸이 9월20일에 결혼한다는데, 예수님의 재림이 9월 19일에 와버리면, 사랑하는 딸 결혼식도 못 보고 가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이처럼 인간은 나에 관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탓하고 나무래도 결국은 포기를 못해요. 부모가 자기 자식 아무리 나무래도 끝까지 포기는 못하잖아요. 호적 뺀다고 하면서 나가 죽으라고 거친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래도 돌아와! 응? 적금 하나 넣어줄게. n분의 1로 나누어서 유산 장롱에 넣어놨어.’ 이렇게 하듯이 내가 그짝이에요. 내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나무래도, 이 못된 놈! 마약을 또 못 끊다니? 그렇게 하지만, 결국은 누구 편이냐 하면, 나는 내 편입니다. 끝까지 내 편이에요. 끝까지 주님이 잘못했지, 나는 내 편이에요. 우리는 끝까지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주께서는, 에잇, 귀신아 물러가라고 하면서 피를 뿌려요. 어? 이게 뭐야? 무슨 액체가 날아오나 보니까, 무슨 피가 날아온다 말이죠. 이 피가 뭡니까? 니가 안 되는 걸, 니가 안 되는 것을, 니 대신 내가 아버지 앞에서, 쟤 대신 내가 죽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이제는 걔의 육신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끝난 육신과 더불어서 삑(☓)날아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내 육신으로, 하늘에 속한 육신으로 나의 하나의 사지가 되는, 지체가 되는 새로운 하늘의 형상의 육신이 되어서, 나에게 부활이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부활을 해주옵소서.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로.

하늘에 속한, 아담의 육이 아닙니다. 아담의 형상이 아닙니다. 아담의 흙덩어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의 몸으로, 그들을 친히 예수님이 만들어내십니다. 마지막 때 그렇게 하기 전에 미리 와서 작업을 하신 분이 계시는데, 누구냐 하면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시게 되면 우리의 겉 사람은 뱀이 허물을 벗듯이 탈피해야 하지만,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날로 새롭다는 말은, 날로 말씀이 점점 더 누적되어 내 안에 차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말씀이 점점 더 차고 들어와서 완벽에 완벽을 기합니다. 조금도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럼 목사님, 그것도 개인구원이잖아요? 아니죠. 왜냐하면 나의 이 새로운 피조물의 이 몸은 그리스도라는 머리에 붙어있기 때문에,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 되느냐 하면, 사나죽으나 주의 몸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이야기고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제가 그냥 툭 던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왜? 내 것이 아니니까. 니가 값을 주고 산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니 것이 아니고 내 것이다.

성령께서 말씀을 주셔서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짧은 순간에 기쁨이 오죠. 내 것 아니구나. 내 것 아니라는 말은, 내 것 아니구나. 그런데 왜 내 것이 아니지? 아! 나를 죽이고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시켜주는 그런 작업장이구나. 우리 몸이.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이 말씀이 내 안에서 계속 반복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필요한 겁니다. 이야기가, 논리가 이상히 흘러가죠. 사실 이상히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 잘 하잖아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백화점 그냥 못 지나갑니다. 저 옷 참 좋다. 아니야.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그렇지. 거룩해야 돼. 나 안 살 거야. 안사겠습니까? 또 곗돈 하나 탔는데. 사람은요, 봤으면 잊지를 못해요. 봤으면.

왜냐하면 이 육신의 정욕은 기다리고 있어요. 안목의 정욕, 눈에 쏙쏙 들어오는 것들만 기다리고 있어요. 기다리고 있다고 드디어 여기서 발동을 일으킵니다. 오늘 오후 2시에 니 백화점 지나가다가 쇼윈도에 있는 것 봤지? 봤지? 아니야, 이래서는 안 돼. 나는 참을 거야. 나는 먹음직도, 보암직도 나는 그런 끝났어. 며칠 가는지 한 번 보자. 절대로 우리는 이기지 못합니다. 제 논리가 좀 이상하더라도 참아야 될 문제인데, 주께서 피를 뿌렸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뭐냐 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제발 죽을 때까지 해주시라 이 말입니다.

이건 뭐, 해주시지요? 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어요. 하던 대로 사시면 돼요. 성격 안 변합니다. 똑같습니다. 기어이 우리는 뭔가 하나, 몇 명 전도하고 이렇게 설교 잘하면 우리는 자랑질하고 싶어서 근질근질해요. 육신이 그래요. 이거는 원래 그거 하라고 있는 육신입니다. 그런데 이 적그리스도들은 그것을 감춥니다. 위장합니다. 뭐라고? 내가 나쁜 것을 알고, 나쁜 나를 주의 말씀으로 한 번 고쳐보겠다고 실시합니다.

주께서 일단 피 흘린 것은 감사하고, 감사해서 소유하고, 자, 예수 십자가에 죽었으니까 설설 이제는 육신의 정욕은 끊고, 안목의 정욕도 끊고, 내 자랑도 안 할 참이야. 내가 보기에는 그게 자랑질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게 자랑이야. 지가 도 닦은 거. 지가 순수한 거. 여러분 육신에는 반드시 목표가 있습니다. 목표는 뭐냐 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을 보는 순간, 그게 하나의 욕심이 되어 버려요. 나도 사도바울처럼! 나도 예수님처럼! 나도 요한처럼! 이게 하나의 내 육신이 어느 정도 재주가 넘치고,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과시하고 싶어서. 과시라는 말은 바로 자랑이죠.

근데 그 자랑은 창피스러움을 계속 감추면서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이 뭐냐 하면 교회에서 교회생활을 하게 된 겁니다. 흔히 말하는 사자성어, 신앙생활하게 되는 겁니다. 저는 부탁합니다. 신앙생활 하지마세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믿는 게 무슨 생활입니까? 믿는 것은 생활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생활이라는 것은 수동적이지, 주께서 알아서 성경대로 유발시키는 주님의 생활이지, 내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질  부리고, 주님께서는 그 성질부린 것을 바꾸어주시고. 그렇게 맨날 티격태격 싸우다가 볼 일 다 보는 거예요. 맨날 싸워요.

자,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나는 오늘 은혜 받았다. 이제부터 나쁜 생각 안 가질 거야. 3초도 안 지납니다. 나쁜 생각 안 한 나는, 괜찮은 육신이 되고 말았다는 착각. 이제부터 어떤 능력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내가 다시는 나쁜 짓을 안 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고 만들 때, 그걸 제가 육신의 조건이라고 합니다. 내 육신으로 만든 영적인 것이 붙어있는 것. 그러나 주님의 영적조건과는 전혀 반대입니다. 이리와! 부릅니다. 왜요? 착한 놈 이리 와! 이게 뭐야? 예. 십자가입니다. 이 액체가 뭐지? 피 입니다. 요한일서 1장 7절, “아들의 피로 우리 모든 죄를 씻었느니라” 다시 한 번 봐! 아들의 피로. 아들의 피로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입니다. 육신에 이름이 붙어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바로 우리 죄와 같은, 죄 있는 육체, 죄 지은 적 없지만  주님께서 죄 있는 육신 왔습니다. 똑같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예수님의 피를 확인하고 증명하고, 영적조건을 계속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왜, 피 만이어야 하느냐, 왜, 행함이 아니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대로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안 믿는 사람들과 우리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틀립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뭐 같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뭐 백화점 세일하면 서로 사려고 싸우고, 이런 점이 똑같은데, 고 3이라고 애 교회 안 보내고 애 공부시켜가지고 뭐 SKY대인지 뭐 좋은 대학 시험 치게 하려고 하는 이것은 똑같은데, 뭐가 차이 납니까? 성도는 영적조건이 붙어있기 때문에, ‘아! 바로 요한일서 2장 16절을 증명하고,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충분히 주님께서 나를 활용하시는구나.’ 라는 것은 성도고요. ‘내가 이제 개인구원 받았으니까 이제는 막살자.’ 라고 하는 것은 성도가 아니고요.

활용한다는 말은, 전에는 세상에 일부인 것처럼, 지금은 하늘나라의 일부로서, 충분하게 이 세상에 살 동안에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는 일원이 되는 겁니다. 주여, 이 부족한 몸을 가지고 충분히 활용하셔서, 제 성질, 못 고치는 성질을 충분히 활용하셔서, 제발 예수님의 피만이 이미 우리를 구원했다는, 이 거짓말 할 수 없는 진리를 증거케 하옵소서. 그것이 더러운 육신에 붙어있는 주님의 피, 다시 말해서 영적조건입니다.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레위기는 피를 뿌립니다. 제사장이 피 뿌리죠. 어린양의 피죠. 온통 피에요. 피. 피 입니다. 죽음이죠.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이게 적그리스도, 나중에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예수의 피는, 성령과 물과 피가, 진짜 예수님은 피로써만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어제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다 온 것을 자랑질을 했죠? 자랑질 하라고 했잖아요.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잖아요. 멀리에서 나이아가라 폭포 본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직접 가보니까, 감히 이 폭포를 보다니? 어리석은 중생들아! 해가지고, 폭포가 안 보여줘요.

이게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안 보여줍니다. 왜? 우리가 보려고 했기 때문에. 보지 마! 해서 물보라 일으키니까, 우리가 느끼는 것은 그 절대자에서 나온, 나를 완전히 쫄게 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내는 그 응시, 그 시선이, 진짜 하나님 속에 있는 살아있는 성도입니다. 영적조건입니다.

피가 우리에게 왔을 때는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보라를 생각하세요. 정신없어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냥 피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뭐 몇 분, 몇 초 가지도 않아요. 다시 헤헤거리면서, 나 오늘도 십자가 믿고 예수 믿었다. 또 개인구원으로 가가지고 또 자랑질하고. 니만 구원받았나? 나도 구원받았다. 이런 육신의 조건. 주께서 오늘도 충분히 활용하고 계시는데 대성공을 하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뭐 말로만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죄인이다, 그게 헛소리인 것을 주께서 너무 잘 아시고, 그거는 입발림에 불과하고, 진짜 주께서 우리를 죄인 되게 하시는 그 방법은 오직 말씀대로만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그 작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영적조건은 오직 피 밖에 없음을 다시 한 번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미아(IP:122.♡.165.245) 16-09-23 22:33 
20160911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12-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18절입니다.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절,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여기에 보면 적그리스도가 나오죠. 적그리스도가 의미가 있으려면 그리스도가 의미가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 다들 그리스도 믿죠? 라는 그런 그룹이 있어야 되고, 그 그룹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매이고,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되고, 그리스도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자기 운명과 미래가 결정 난다고, 그렇게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만 적그리스도라는 것이 이게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누군데? 적그리스도? 뭐 그리스도도 인정하지 않는데, 뭐 적그리스도까지 신경 쓸 거 없잖아요? 그래서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적그리스도를 먼저 알기 전부터 그렇게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매이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종속적인가를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속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어디까지 악하여 질 수 있느냐를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악하여 질 수 있느냐? 보통 사람들은 내가 어디까지 선하여 질 수 있느냐를 자기의 존재의 가치로 보는 겁니다. 선에 대한 열망, 선에 대한 집착, 그 선에 대한 집착의 끝은 어디냐 하면 선한 사람만이 합격시켜 준다는 겁니다. 천국에 넣어주고, 악한 자는 저 불타는 지옥 불에 들어간다. 이런 것은 성경을 덮고, 성경을 모르고, 성경에 아는 바가 없고, 그냥 상식으로 따지고 또 따져 봐도, 모든 민족, 모든 종교의 정신적인 스트레스인 동시에 자기 종교를 규합시키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교주가 “여러분들, 그것은 선입니다. 그건 악합니다.” 라고 그걸 결정하는 것은, 그 당시의 선과 악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래가지고는 당신의 미래는 어둡습니다. 당신의 미래는 밝습니다.” 라는 것을 결정하는 거죠. 그 기준이. 그 기준은 바로 선과 악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선하려고 이렇게 시도합니다. 선하려고 시도하게 되면 무엇이 필요 없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이건 문제가 복잡해지는 거죠. 누가누가 착하냐 하는 시합이 아니라 누가누가 악하냐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논리를 갖고 있다는 말이죠. 누가누가 악하냐. 자, 여기 사람이 있는데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내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거 뭐 농사짓는다고 해서, 고기 잡는다고 해서 미래는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식적으로 아는 거고.

 

미래와 현재를 연결시킬 수 있는 어떤 중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중재자. 옛날부터 중재자는 무당, 그런 사람들도 했고, 선지자, 그리고 위대한 멘토, 스승님. 그런 사람들. 소위 지혜 있는 자, 지혜를 사랑하는 자, 그런 자를 철학자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철학하는 사람들이 지혜의 핵심인물이었어요. 그런데 16세기에 들어와서 1665년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난 뒤에 그때부터 지혜 있는 자는 누구냐 하면 과학자들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이여! 우리의 장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만있어보자. 가만있어보자. 우리의 장래는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자들은 오직 과학자들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가만있어보자. 진맥을 짚어보자. 아이고, 상처 다 나았습니다.” 현재의 상태에서 호전된 미래의 상태를 보장하는 것은, 문학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과학자입니다. 과학자, 실험과 검증을 거쳐서 똑같은 결과가 되풀이 되고 반복될 때, 그거는 일단은 과학자 그룹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그것을 대외적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그렇게, 선지자, 중재자죠. 자기를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중재자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동안 과학자들이 했던 일을 그전에는 누가 담당했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과학자가 했던 일을 누가 담당했던가? 거기에는 사제, 신부, 또는 목사들이 그 일을 담당을 했겠죠. 사제나 신부들이. 자, 여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과학자가, 중재자가 나설 것 같으면, 여기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지식과 정보, 더 폭넓은 정보. 정보를 모집하는 것은 컴퓨터.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지식이죠. 지식과 정보가 모아지면 미래는 점점 확실하게 다가올 수 있죠.

 

그러나 만약에 여기 무당이 있다든지, 여기 선지자가 있다면, 무당과 선지자의 그 고귀한 카리스마를 옹호해주려면,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신뢰를 실어주려면 이 무당과 선지자 사이에 개입이 더 벌여져야 되죠. 우리는 무식합니다. 우리는 몰랐습니다. 우리가 선지자를 이렇게 알아보지 못해서 이런 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무당님의 용하심을 우리가 이렇게 무시했더니만, 우리 곡성마을이 전부 다 귀신 들고 했습니다. 이렇게 더 낮춰야 되죠.

 

중재자는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가 됩니다. 그리스도. 보통 사람들의 용어에서는 이걸 중재자라고 하지 않고 중보자라고 합니다. 물론 어떤 데에서는 같은 말로 중개자. 중개자 하면 생각나는 것이, 여러분 부동산이 생각나죠. 부동산 중개업자. 양쪽을 연결시키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양쪽(현재와 미래)을 연결시키려면, 현재는 이 딴 것 다 치우고 내가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겠다고 한다면 중재자가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 없어야 되는데, 사실은 여기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내 미래에 대해서 전문가 집단이 있어야 해요.

 

전문가 집단이라는 것은 각각 전문 분야에 오랫동안 거기에 종사에서 숙련된 지식을 포함하고, 경험과 숙련이 구비된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자문을 구해서 자기 미래를 보장받아야 되겠죠. 예를 들어서 보험사 같으면 보험을, 치과의사 같으면 치과에 대해서, 어느 임플란트가 싸냐? 요새는 백만 원까지 떨어졌다고 하는데. 애들 같으면 교육전문가한테 맡기라고 하던지.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을 생각해보세요. 제가 한 번 물어볼게요. 자신의 미래는 중재자가 결정합니까? 본인이 결정합니까? 본인이 결정하잖아요. 내가 무당을 선택할지, 어떻게 할지, 전문가를 할지, 전문가 집단 같은 경우는 특별히 그렇죠. 프로야구 선수하는 사람이 판사한테 물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판사가 야구전문가 하는 집단은 아니니까. 야구를 물으려면 하일성 전문가한테 물어야 하는데, 그 사람 자살해서 죽었으니까 뭐.

 

그러니까 전문가 집단한테 맡겨야 된다면, 그 전문가 집단의 선택을 누가 내려요? 본인이 내리죠. 그럼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누구 형을 닮을 가능성이 많아요? 누구 형? 내 꿈에 맞는,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모델을 충족시켜주는 그리스도를 골라잡아, 골라! 골라! 취사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익히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 더 잘 알 뿐이지, 내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할 분은 아닙니다. 왜?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니까. 내 구미에 맞고 내 만족성을 들어줄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내다보고, 그리스도를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논리에 의한다면, 이미 그리스도의 성격문제라든지, 본질문제에 있어서는 이미 누가 장악하고 있어요. 선택한 소비자가 어느 그리스도가 합당하냐를 골라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럼 목사님, 그리스도는 한 분 밖에 없는데 골라잡을 수가 있습니까? 물론 그리스도는 한 분 밖에 없죠. 근데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하는 단체는 교회색깔마다 다 다르니까. 소비자에게 있어서는 선택의 폭이 다양하게 된 것이죠.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겁니다. 골라먹는 재미도 있지만 골라 다니는 재미도 있고. 이 교회 갔다 저 교회 갔다, 그런 재미도 있고. 아주 선택이 다양하죠.

 

선택이 다양하다는 것은, 어느 그리스도가 나한테 흡족한지를 골라잡는다는 말은, 결국은 이 말은 더 깊이 논리를 증거해가면 거울을 보면서 내가 알 수 없고, 내가 골라잡은 그 객체, 그 객체에 의해서 내가 다시 조정 받는다는 생각을 여러분 한 번 해보셔야 합니다. 쉽게 말씀드릴까요? 이런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이런 겁니다. 어떤 아가씨가 자기가 어느 정도 미모가 뛰어난지를 몰라요. 어는 정도 내가 신붓감으로 인기 있는지를 모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있지만 확정되지는 않았어요.

 

그러면 남자를 한 열두 명을 만나보는 거예요. 열두 명을 만나보면서 만나본 소감들을 내가 수집하는 겁니다. “아가씨는 참 성격이 좋습니다.” 하면 성격 좋은 것이 들어가고, 다음에는 다른 남자를 만나요. 그럼 열두 명을 만나보면 어떤 자기의, 희미하나마 잡히는 형태가 있을 거예요, 성격은 좋지만 성질은 급하고, 키는 크지만 하체에 비해서 상체가, 여기서 말조심해야 돼요. 튼실하지 못하고 뭐. 여러 가지 조항들이 있을 거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말을 조합해서 결국 규정되는 것은, 그래서 ‘아, 나는 이런 존재야.’ 라고 파악한다는 것은, 결국은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것은 확실하게 여전히 남고. 방금 제가 열두 명 했죠? 만약에 120명 만났다면 정보의 양은 더욱더 확실할 가능성이 있죠. 1200명 만난다면, 뭐 그런 여자 같으면 대단한 여자죠. 돈도 많이 썼을 거예요. 이거는 만나서 수집된 정보의 확실성에서 통계에 어프로치approach, 접근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누군지 모르고, 남들이 하는 그런 평가에 따라서 준동하고 요동치는 나. 이게 오늘날 현대사회입니다. 현대사회.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피아노 레슨 할 때, 레슨 하는 선생님에 따라서 자기의 수준이 다 달라져요. 근데 막상 실기시험 치러 들어가면 완전히 점수가 예상 밖으로 떨어지게 나올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 말에서, 지금 이상한 잡소리 좀 하지 말라고 여러분들이 먼저 화를 낼 텐데, 그냥 잡소리가 아닙니다.

 

여기서 이만큼 시간을 소비하면서 길게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 어떤 경우라도 나의 가치를 정당화시키는 목적이겠어요? 나의 가치를 후퇴시키는 목적이겠어요? 내가 그리스도를 선택했다는 말은, “내가 생각한 이상으로 나를 좀 많이 봐주세요.” 하는 노림수가 있죠. 바로 그 자체가 여러분들이 적그리스를 양산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내가 유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그 자체가 어떤 그리스도의 정책과 책략에 놀아났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나를 칭찬해주고 우리 교회 다니라고 초청했던 그 교회로 말미암아 우리는 왜곡된 자아상을 가질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서글픈 자아상을 갖는, 비극의 모습들이 시작되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열 개중에서 골라잡으려고 하는데, 골라잡아도 참된 그리스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출발부터가 이게 수상해요. 출발부터가. 절 이쁘게 봐주실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벌써 시작부터가 자기를 너무 과하게 점수를 매기고 시작합니다. 과하게.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저 사는 것이 힘듭니다. 요즘 상황이 힘듭니다. 누가 나를 위로해주죠? 그거는 윤복희가 위로해주죠. 여러분. 누가 저를 위로해주죠? “하나님이여, 기도합니다.” “그래.” “저를 위로해주세요.” “뭐 이런 게 다 있어? 니 뭔데?” “아이, 위로해줘요. 잉~” “뭐야? 그런 것 짜증 부리려면 남편한테 짜증 부려라” “저 위로해줘요.” “니가 뭔데? 내가 무슨 근거로 너를 위로해줘야 하는데?” “하나님이잖아요?” “아하, 나를 찾아오기 전에 또 열두 명의 하나님을 찾아갔구먼.”

 

그 열두 명의 하나님을 찾아가니까, 전부 다 위로해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배부르잖아요. 이왕이면 열두 명의 위로 중에서 더 환각적인, 환상적인 위로의 카드를 제시한 쪽에 내가 마음이 굳어지는 겁니다. 이거는 신앙이 아니고, 그걸 두 글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한 번 읽어보세요. 경매입니다. 경매. 노예시장 경매.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노예는 튼실하고 힘 잘 쓰고 일 잘합니다. 하루에 목화밭을 1에이커를 갑니다. 뭐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아이구, 그럼 70달러! 여긴 100달러!

 

<뿌리>를 쓴 알렉스 헤일리 라는 노벨문학상 받은 유명한 작가가 있죠. 그 뿌리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상당히 재미있는 대목인데요. 흑인 노예가정이 노예시장에 뿔뿔이 다 흩어졌어요. 실화니까 헤어졌습니다. 아버지하고 헤어졌는데, 캐나다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 흑인 아들이 하는 말이 “나는 어서 성공해서 아버지를 돈 주고 사와야지.”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아니 아들이 아버지를 만나려면 그냥 만나면 되잖아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버지를 돈 주고 사와야지.” 어서 돈을 벌어야 아버지를 다시 되찾아 올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흑인은 언제 어디서나 노동시장의 상품으로만 존재하지, 가족도 상품으로만 존재하지, 그냥 백인들처럼 태어난 자체로, 출생자체로 패밀리,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거기서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그 작가가. 예수님이 노예입니까? 아니면 심부름꾼입니까?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가 우리하고 흥정하고 협상할 그러한 개체에요? 그러한 대상입니까? 묻는 제가 나쁘죠. “목사님, 그건 아니죠.” 그냥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제가 그게 섭섭한 거예요.

 

“예수님은 그냥 노예입니까? 우리를 그냥 도와주는 머슴입니까?” “아니요.” “그럼 뭡니까?” 입을 꾹 다물어요. 머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머슴처럼 그러한 선입관을 갖고 그리스도에게 다가왔잖아요. 그러면 그 이유를 알아야죠. 왜? 예수님이 머슴처럼 나를 위로해줘야 하고, 나를 사랑해줘야 되고.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주님이 위로해줘야죠.’ 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그러한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사고방식이에요? 도대체? 그건 워낙 가짜 그리스도가 많이 생산되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참 그리스도는,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참 그리스도는 뭐냐, 바로 그리스도를 찾는 너부터 고치라는 거예요. 어떻게? 어떻게 하면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이 “어이구 왔어요? 어이구, 훌륭했어요?” 그런 사랑을 기대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죄를 지을 수 있는가를 연구하라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내가 지금보다 악할 수가 있느냐? 그걸 연구해야 진짜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윤곽이 이제 잡히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모임 같으면, “자, 이제부터 여러분 저를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이래하겠는데, 저는 그런 것 안 할랍니다. 안 한다는 것이 더 무서운 말이겠지만. 안 하겠는데, 그냥 시키자면,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가를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모험에 나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갑자기 목표가 생겼습니다.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지.

 

자, 그러면 이제부터 그걸 시작해봅시다. 우리가 중재자와 무당과 선지자를 찾고, 전문가 집단, 과학자를 찾고 할 때, 우리가 만약에 참으로 악랄하다면, 악하다면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부리려고 하겠죠. 자기가 갑이 되고 이런 사람들을 을로 하겠죠. 변호사한테 상담은 받지만 변호사를 존중하지는 않아요. 돈 주면 상담해주니까. 많은 지식을 부러워하고 놀랄 수는 있지만 자진해서 고개 숙일 의사는 없어요. 그냥 그 지식을 잠시 더 높은 나를 위해서 이용할 뿐이죠.

 

사실은 이런 중보자, 중재자라는 용어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잘난 내가 내 필요에 따라서 미지는 모르니까, 그냥 연결을 시켜서 이쪽으로, 중재자들한테 한 번 시도해보는 겁니다. 쭉쭉 뻗어 나온 이 그림을 보니까 리우올림픽 때 조정경기 준비할 때 , 그 선 같아요. 정말 그렇다면 솔직하게 뭘 치워버려야 해요? 중재자 자체를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뭐만 남습니까? 중재자 없이 나 있고 여기 누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 있고. 중재자 없이 다이렉트로, 직접 하나님과 상대하겠다는 것이 가장 솔직하고 노골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귀찮게 뭐? 중재자 필요 없어. 필요 없어. 내가 하나님과 직접 하겠다.

 

여러분,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래도 뭐 한국의 교회나 건전한 교회는 다 중보자를 원합니다.” 라고 여러분들이 저한테 조언을 하시겠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은 중보자를 귀찮아합니다. 하나님과 직접 맞상대하기를 원합니다. 그럼 중보자를 안 믿는가? 아니, 믿죠. 중보자를 믿는데, 믿는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니까 자격미달이 되어 있어요. 어떤 미달이 있느냐 하면 죄가 있어요. 그럼 필요한 것은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나겠다는 그 열의와 집념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데, 잠시 내가 자격미달 되어가지고 아쉬운 거예요.

 

뭐냐 하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만나 준다고 하니까, 방법은 딱 나왔죠. 뭡니까? 내 죄를 위해서 누가 해소만 해준다면, 아이구.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고 돌아서서 이제 뭐합니까? 죄 없는 상태로 직접 누구하고 맞상대한다? 하나님하고 맞상대하고 싶어 해요. 그걸 상품으로 교회마다 내놓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 믿어야 죄용서 받는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 할 때 너무 목이 멥니다. 너무 감격해서. “모든 교회가 설교한 것을 한 마디로 끄집어내주세요.” 라고 한다면, “십자가에 머물지 마세요.” 이겁니다. 십자가에 머물지 마시고 더더더더더 나아가세요. 어디까지? 새 생명에 이를 때까지. 부활이 능력에 참여할 때까지. 더더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건 뭘 의도하는 걸까요?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사람들은 이게 뭘 의도하는지 모를 거예요. 이게 바로 유대교 신학입니다.

 

그들 유대인들은 알아요. 홍해가 갈라진 것은 자기들 능력이 아닌 것은 압니다. 근데 그들은 이야기합니다. 홍해 갈라질 때는 믿음으로 갈라졌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후에는 십계명이 주어졌죠. 그러면 그들의 원리 딱 나왔네요.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고. 딱 공식 나왔잖아요. 공식 나왔어요. 자, 공식 쓰겠습니다. 나만 흥분하나? 여러분들은 미동도 없는데?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자. 자, 이게 플러스가 되느냐 하는 문제에요. 이게. 믿음 더하기 행함인데, 이게 플러스가 되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 일반교인들은 예수 십자가를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그러나 상급은 한 푼도 없습니다. 상급 받으려면 내신 성적 제일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그 다음부터 믿는 티를 많이 내야 한다는 거예요. 믿는 티를.

 

일반목사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귀하신 보혈의 피를 받았으니까, 이제 믿쑵니까?” 쌍시옷 들어가게 하면서. “믿쑵니까?” “믿쑵니다.” “그러면 염치가 있어야지요? 염치가? 그렇게 공짜로 받았으면 아낌없이 여러분들의 모든 시간과 재물을 주를 위해서 내놓아야지요? 지금도 마귀 사탄의 세계에서 하늘나라를 확장시켜야 되는데? 하늘나라를 확장하는데 여러분들이 돈과 시간이 없으면 어떻게 확장합니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잖아요? 군사잖아요? 군사면 군복과 무기를 살려면, 여러분들이 진짜 구원받았으면 입 닦지 말고, 티를 내서 하늘나라를 확장시켜야죠?”

 

도대체 몇 만 평을 확장해야 해요? 몇 만평? 대구에서는 어느 아파트를 빙빙 돌라는 거예요. 아파트를 다 접수하라는 거예요. 조폭도 아니고, 자기 나와바리, 영역으로 다 만들어버려요. 그것은 뭐냐, 교인들이 나태함이 일을 안 하니까, 계속해서 목적으로 이끄는 삶 해가지고, 목표 줘가지고 교인들을 임금은 안 주고 노동시키는 것 있잖아요. 그걸 시키는 겁니다. 자본주의에서는 원가나 단가가 떨어지면 가치가 높게 돼요. 임금 적게 주면 그 상품은 반드시 가치가 높게 되어 있어요. 제한된 가격에서 한쪽을 낮추면 되게 돼있어요.

 

그런데 믿음은 다가 아니고 행함이라고 하니까, 그럼 머리 좋은 사람은 또 물어보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고 행함은 전혀 없으면 지옥 갑니까? 천국 갑니까?" 또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어요. 속으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꼭 묻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물을 때는 목사가 잠시 주저해요. 그것도 잠깐. 그것도 힘없이 이야기해요. "예.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왜? 그 이야기 안 하면 이단소리 듣기 때문에. "하지만 상관은 없습니다. 팬티바람으로 천국 갈래요?" 이래 나와요. 팬티바람으로 상급 없이. 여러분, 십일조를 해주셔야지, 여러분, 십일조는 손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다 돌려받습니다." 이게 보람상조죠. 적금 붓는 겁니다. 알리안츠 하고 똑같은 거예요.

 

믿음 플러스 행함이 이게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뭘 믿느냐가 중요해요. 뭘 믿느냐? 그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 믿는다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라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믿습니까? 아니면 그 십자가사건 안에 내 죄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어느 쪽을 믿습니까? 내 죄가 있다는 것을 믿죠.

 

그렇다면 십자가 안에는 나의 어떤 죄가 들어있다는 것을, 그걸 알고 믿어야 되지 않습니까? 어떤 죄가 있는지. 뭘 차압해서 가져갔는지, 세무서에서 와가지고. 뭘 몽땅 차압해서 가져갔는지 그걸 알아야 될 거 아니냐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제가 이 이야기는 좀 어려운 이야기인데 좀 해볼게요. 내가 만약에 대충 알고 있는 내 죄를 가져가버리면, 그 가져간 죄보다 무엇이 우세하느냐 하면, 그 죄를 가져갔던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 나의 선행이, 가져간 나의 죄보다 이게 더 커요. 더 크면 나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예수 믿는 선행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는 선행으로 구원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죄인입니까? 선한 자에요? 선한 자가 되는 거예요. 논리가 그렇게 돼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웃이 누굽니까?” “왜?” “저도 이웃을 사랑해보려고요. 이웃이, 고게 좀 걸려가지고, 이웃이 누군지 안다면 그 이웃을 사랑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너는 이웃을 이렇게 하라.” “어떻게요?” “이렇게 하라.” “어떻게요?” “자비를 베풀어라.”

 

이렇게 하면 간단한 문제인데, 주님께서 뭘 집어넣어줘요. 자비를 베풀 것 같으면 자비를 베풀라고 이렇게 하는데, 자비를 베푸는 것이 이웃사랑이 아니에요. 어떤 강도만난 사람이 있는데, 처음에는 제사장이 그냥 지나갔고, 그 다음에는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고, 그 다음 세 번째는 사람들이 무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갔는데, 그 사람이 자기 여비를 다 털어서 그 사람을 도와줬다. 이 중에서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 선한 사마리아인 이니이다. 너희도 이같이 자비를 베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거기의 말씀에 의하면 이웃이라는 것은 유보적이에요. 누가 이웃인줄 몰라요. 그럼 이웃의 시작은 뭐냐 하면, 된 통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분부터 이웃의 개념시작은 출발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웃이 되려면 이웃을 믿으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말을 해놓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이웃이 되면 안 돼요. 이웃은 따로 있고 내가 이웃을 믿는 사람이 될 때는 계속 행함의 그 범주 안에 있게 되는 겁니다. 이게 좀 감이 오십니까?

 

내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고 싶어요. 근데 지금 무엇이 등장하지 않았어요? 이웃이 등장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이웃이 등장하기만 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면, 나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 되어서, 선한 사람이 되어서 천국갈 수 있는 거예요. 그 질문을 한 겁니다. 근데 예수님께서 이웃의 등장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웃의 등장이 되려면 낭패당한, 이거는 뭐 강도 만난 사람처럼 자기 자력으로 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져야 해요.

 

그리고 더 무서운 이야기는 강도만난 사람이 지금 누워 있잖아요. 그냥 퍼질러 누워있는 거예요. 자, 강도 만난 사람이 고릅니다. 첫 번째 출연자 나오세요. 제사장. 두 번째 출연자 나오세요. 레위인. 세 번째 출연자 나오세요. 사마리아인. 그러면 이웃이냐, 아니냐의 결정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저 세 사람들이에요? 누워있는 강도 만난 사람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으로 행세하려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 사람의 출현을 기다려야 해요. 그리고 기다린다고 그 사람이 나의 이웃으로 관계 맺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골라잡아야 돼요.

 

나의 십자가와 관련 있는 사람이 그 중에 등장하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쪽에서 선택한 쪽이 이웃사랑의 완성입니다. 논리가 굉장히 길게 나갔는데, 따지고 보면 이 논리가 제 입장에서는 맞아요. 강도 만난, 상해 당한 쪽에서 선택해야 하나님의 이웃사랑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그 말씀을, 결국 율법의 말씀은 누가 가로챈다? 니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가로채서, 예수님께서 친히 이웃사랑을 완성시키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나갔던 사람들은 잠재적인 어떤 사람들이 되는 겁니까? 이웃이 아닌 자로서 잠재적으로 되겠죠.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오셔야 우리가 비로소 죄인들이라는 겁니다.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처음에 뭐라고 멘트를 던졌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악랄하게 될 수가 있습니까? 그거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내가 이 정도로 악랄 하냐, 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판정을 내릴 문제가 아니고, 고마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판정을 내리십니다. 판정을 내리면 우리는 졸지에 뭐냐, 악랄한 죄인이 되죠.

 

죄라고 할 때, 예수님 쪽에서 드디어 화살을 쏩니다. 예수님 쪽에서 화살을 쏘아버리면 이 사이에서 성립되는 것이 참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에요. 지금껏 강의한 것이 뭐냐, 누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누가 골라, 골라, 골라잡는다? 내 쪽에서 하죠. 골라잡는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는 더더욱 불확실하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 갈지, 지옥 갈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답답해서 적당한 그리스도를 우리 쪽에서 골라잡았습니다. 교회 한 열 두어군데 다니면서.

 

그런데, 어떤 식이 되었든지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한, 그 목사가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이미 내가 적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식이 된다 이 말이에요. 내가. 적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원인제공자가 누구냐 하면, 내가 원인제공자에요.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벌써 시작할 때부터 이미 적그리스도를 아예 싸고 들어오는 거예요. 적그리스도를 만날, 아다리 될 가능성이 농후한 거예요. 내가.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기다려봐! 기다려봐! 내가 너를 찜할게. 어떻게요? 이 악랄한 놈이라고 찜할게. 날 때부터 이 죄인 된 자야! 시편 51편에 나오죠. 모친의 죄 중에서 이 악랄하게 태어난 인간아! 지적해줄게.

 

그 지적자체가 이미 손가락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나왔죠. 예수님의 몸통에서 나왔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지체지, 뭐예요? 그리스도의 머리에서 나왔으면 지체라 이 말이죠. 그럼 그 관계는 무슨 관계입니까? 온전하게 하나님의 이웃사랑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 관계를 제가 지난 시간에 했죠? 하나님의 의. 그 관계. 그게 바로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의.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두 글자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

 

지금 사도요한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쭉 자녀들아 하면서, 지난 시간에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적조건과 육신에 결합된 사람들을 제시합니다. 자녀들아, 아비들아, 형제들아, 니 속에 니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뿜은, 로봇 팔이 쭉 나가는 것처럼, 가제트형사처럼 쭉 뻗어나가서, 가제트형사처럼 팔이 길어져가지고 도달하는 거예요. 오! 아직도 내가 준 죄사함과 성령이 아직도 여기에 있었구나! 뽑아간다고 했죠. 쭉쭉쭉~

 

그렇게 설명해놓고 그 다음에 나온 말입니다.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 이게 나온 거예요. 지금 제가 요한일서를 쭉 설명하면서 적그리스도까지 나왔는데, 만약에 성질 급해서 그냥 2장 18절을 읽어버리면, 아이들아 마지막 때에 뭘 주의하라? 적그리스도를 주의하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보겠습니까? 대번에 나온 문제가 그거에요. 목사님. 성경 묵상하다가, 표준용어로 큐티라고 하죠. 제가 아마추어라고 모르는 것이 있는데, 여기 적그리스도가 있는데, 적그리스도가 빨간 그리스도를 말하는 겁니까? 적그리스도가 뭡니까? 하고 묻죠.

 

물으면, 그 목사님이 이렇게 할 거예요. 아이고, 집사님 참 질문 잘하셨습니다. 아이구, 그렇잖아도 지난번에 설교하려고 했는데, 요새 신천지가 날개 치는데, 신천지가 적그리스도입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혹시 또 길에 가다가 신천지뿐만 아니고,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구원파 만나거든 주의해야 하고, 도를 아십니까? 하는 이것은 더더욱 주의해야 하고.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이야기한 그 사람들이 진짜 적그리스도 됩니까? 똑같아요. 똑같아. 똑같다 이 말입니다.

 

적그리스도를 왜 궁금해 하는 거예요? 이 질문 잘 나왔다. 왜 적그리스도를 궁금해 하는 겁니까? 우리가 궁금해 하니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겁니까? 아니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니까 우리가 궁금해 하는 거예요? 적그리스도가 이미 나타났죠. 이미 나타났다고 했는데 언제 나타났습니까? 아시는 분 이야기해보세요. 마지막 때. 마지막 때이니까 쉬운 말로 아슬아슬할 때에요. 절벽 끝에 있는. 마지막 때는 뭐가 나타난다? 적그리스도 나타난다.

 

그럼 우리의 머리는 팍팍 돌아갑니다. 내가 적그리스도를 알아채면 나는 마지막 때라고 할지라도 구원이 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확정되는 그러한 보너스가 주어지겠죠. 보너스가. 그러면 마지막 때 알고 적그리스도 알게 되면 사실은 내가 성경에서 챙길 것 다 챙긴 것이 되잖아요. 그래서 666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7년 환란, 3년 반 환란이야기가 그렇게 유포된 겁니다. 소설책 휴거가 나와서 유포된 거예요. 전부 다 사기에요. 사기. 사기에요. 그거. 베리칩. 베리베리베리칩. 그거 맞지 말라는 거예요. 마지막 때에. 666맞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도대체 믿는 건지, 정보수집인지, 모르겠어요. 바로 그런 이야기 때문에 아까 출발점을 정보수집 한다는 이야기했죠. 전문가 집단, 다시 말해서 666집단한테 묻지 마라. 7년 환란 3년 반 환란, 그런 집단에게 묻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중재자역할을 하는 거예요. 부동산 중개업자에요. 하나님은 자기네들이 알고 여러분들은 시키는 대로 하면 여러분의 미래는 보장된다. 이 말입니다. 언제 핵전쟁 일어나가지고, 아마겟돈 전쟁이 언제 일어나니까 우리 말 듣고, 우리 집단에 가입해서 생수준비하고 벙커준비하고. 벙커준비하기 위해서 기금모금하고. 뉴멕시코에 가서 집단생활하고 공동체생활하자. 이것은 정보수집이에요. 그것 때문에 제가 아까 전문가집단이야기를 한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믿는 것 아닙니다. 강도 만난 자 믿는 것이 아니에요.

 

지식으로 확보해서, 경상도 말로 단도리, 단디 해라고 해서 대구은행에서 단디 카드가 나왔어요. 은행금리 단디 보장해준다고. 그냥 단도리 하듯이. 보험 열 개 넣듯이. 그냥 단도리 하듯이 성경공부 하는 겁니다. 여기 네 천사는 무엇입니까? 알아서 뭐 할래? 구름타고 언제 주님 오십니까? 감람산에 언제 두 발 딛고 섭니까? 감람산에 두 발 딛고 선다는데, 어디 마징가제트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입니까? 무슨 이스라엘이 있습니까? 요새 무슨 이스라엘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새 이스라엘 그냥 혼혈집단이에요. 정치적으로 분석을 안 해서, 못해서 그래요. 실력이 없어서.

 

성경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있다고 같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혈통적으로 계산 해봐요. 아무관계 없어요. 그 사람들 하나님 안 믿는 사람들이에요. 이스라엘 국가를 믿죠. 자꾸 성경과 현실을, 현실적으로 읽어야 된다고 해가지고, 현실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성경에 억지로 꿰맞춰서, 곡이 어떻고, 마곡이 어떻고, 뭐 터키회복지가, 러시아가 시리아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 드디어 곧 온다. 그래서 믿음도 없는 사람이 정보취득해서 천당 가려고 하는 사람들만 거기에 다 빠져 들어간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진짜 그리스도하고 우리의 관계는 이미 주님께서 지목해서, "너 악랄한 자!" 이미 지목했어요. 악랄한 자로 지명 받으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니가 나한테 이웃노릇을 해야 되는데, 못했다는 겁니다. 십자가 의미는 바로 그 죄를 말씀에 의해서, 뻗어나간 그 팔에 의해서 수거되는 그 말씀들을 내가 내 몸으로, 온 몸으로 받아들여서 이것을 한꺼번에 아버지 앞에서 해결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만약에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하는 거예요. 누구에게만? 영적조건이 붙어있는 자에게만 요한일서 1장 8절과 10절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우리는 주 앞에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에요.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나왔네요. 자, 적그리스도의 개념은 이미 나왔습니다. 적그리스도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든 적그리스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다고 했어요. 근데 그 많은 적그리스도가 백날, 천 날 내놔봐야 공통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치를 우리 금융회사에서 보장해드리겠습니다." 그거에요. "여러분의 원하는 가치를 더 키워드리겠습니다. 30배, 60배, 100배 키워드리겠습니다." 백이면 백, 적그리스도입니다. 장로회 간판 걸고, 침례회 간판이고 아무 의미 없어요. 천주교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의 가치를 북돋아서 키워드리겠습니다." 그거 키워서 뭐 할라고 하는데요? 키워서 어디 가는데요? 그거 키워봐야 적그리스도와 함께 지옥 갑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문제 들어가 봅시다. 적그리스도가 아무나 되나? 하는 문제를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적그리스도를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 물어볼게요. 적그리스도가 불신자입니까? 그럼 불신자는 다 적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가 너무 많잖아요. 적그리스도가 뭔가 그냥 안 믿는 사람하고 차이점이 있어요. 차이점이 뭐냐 하면, 자기와 하나님과 직접 대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자체가, 내가 하나님과 직접 대하면 이미 그 사이에 끼어들 필요가 없죠. 이미 자기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만큼 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뭘 하면 됩니까? 자기가 모든 일을 직접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것을 교회에서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예수 믿었으니까, 예수 믿게 되면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를 받으면 여러분 속에 성령이 있습니다. 성령이 있다면 여러분 더 이상 뭘 의존하려고 하지 말고 찡찡 거려서 얻을 생각 하지 말고 성령 받은 여러분들의 그 능력을, 달란트를 마음껏 발휘해서 그동안 못 지켰던, 죄 있어서 못 지켰던 그때 시절처럼 말씀을 못 지키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폼으로 줬습니까? 성령 받았으면 이제는 모든 말씀을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여 지켜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는 그 지시에 따라야 되지 않습니까? 라는 말을 할 때, 아마추어인 여러분들은 어떻게 반박하겠어요?

 

이 말을 어떻게 반박하겠어요? 그래? 일리가 있어 보이는데? 이제는 십자가에 머물지 말고 부활의 영광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뭘 뒤로 빼돌리고? 십자가는 뒤에 두고. 그러니까 서울에서 ktx기차를 타고, 대전 지나서 대구 왔으면 대전 역은 잊으라 이 말이에요. 대전 역은.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이렇게 하듯이. 이제는 대전 지났으면 눈앞에 보이는 대구를 바라보라 이 말이에요. 목표를 향하여. 그게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잖아요. 그러면 나가려면 뭘 해야 합니까? 이제는 말씀을 실천으로 옮기면 되죠. “말씀을 실천해야 된다.” 이게 바리새인 주특기입니다.

 

그럼 목사님,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늘나라 군대하고 사탄하고 싸워서 이겨야 되죠. 그럼 사탄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늘나라 군대가 되어서 이기면 되겠죠. 그럼 하늘나라 군대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생활에 억매여서는 안 되죠. 이제 노골적으로 자기 색깔을 드러내죠. 자기 생활에 억매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부르면 살림하는 것 딱 그만두고, 교회 와서 노동을 하되, 무임금으로 그렇게 해야죠. 그럼 바빠서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바쁘면 돈으로 대납할 수 있는 편리한 제도가 또 있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꺼진 불도 다시보자는 구호처럼, 돈 내고 시간 바치고. 시간 바치고 돈 내고. 그렇게 될 때, 결과가 뭐냐, 돈에 울고 사랑에 속고. 그 수법이에요. 목회 뻔합니다. 그 수법입니다.

 

그 시작점이 뭐냐 하면, 십자가를 잊으라는 겁니다. 근데 그 교회에 난데없이 복음 아는 사람이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삐용삐용~♬비상 걸리는 겁니다. 당신은 왜 십자가에 머물러서 맨날 제자리 뛰기 합니까? 왜, 맨날 제자리 뛰기만 합니까? 나가야지? 사람에게는 본래 노림수가 있어요. 부푼 가슴을 안고, 교회 올 때 희망을 안고, 그 희망을 교회는 존중해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령세례 받아버리면 나라는 자체가, 희망을 보던 그 나 자체를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께서 찢어버리십니다. 그만! 이제 그만! 꿈 그만! 교회놀이 그만! 권사 될 때까지 30년, 50년 했으면 됐어! 그만! 찢어버립니다. 교회놀이 찢어버립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너는 뭐냐 하면, 십자가 외에는 다른 구원의 능력이 없나니, 이제는 니가 전에 판단했던 그것은 어리석음이 되고, 십자가에서 뿜어 나오는 새로운, 니가 어리석다고 여기는 그것이 이제는 구원받은 새로운 지혜로 작용하는데, 그거는 뭐냐 하면, 이미 이겼다는 거예요. 이미. 니가 군대 되려고 설치지 않더라도, 이미, 예수님 홀로, 활과 칼과 말로 이기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의 이름으로 이미 승리한 것을, 그것을 너는 느긋한 마음으로, 무거운 짐이 없이, 이미 승리감에 마음껏 도취되면서, 뭐든지 할 수 있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는, 어떤 자리에 있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모든 일에 대해서 주님의 은혜인 것을 아는,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09-25 00:17 
20160911 요한1서 뉴저지(주사랑 교회)강의13-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 합시다.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 죄 때문이다. 죄 때문이기 때문에 십자가가 있게 되면 우리의 모든 가치는 사라지고, 우리와 함께 했던 분의 가치가 새롭게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옵니다. 그 쏟아져 들어오는 가치가 뭐냐 하면, 너는 죄인인데, 그 죄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방금 한 이야기는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너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되는 거예요. 루터가 그걸 몰랐어요. 너가 의인이 된다가 아니라 너를 통해서 하나님이 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게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우리가 의를 이루는 것, 하나님이 의인되게 하는 것. 고린도후서 5장 21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화목하게 하여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되면 계속해서 뭐가 작렬해야 하느냐 하면, 죄인인 너를, 악랄한 너를 계속해서 내가 용서하는 지속적인 작업이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서울에서 대전 지나서 대구에 왔다면, 내 쪽에서, ‘대전은 잊어버리고, 십자가 뒤로 하고 새 생명으로 가자.’ 라고 할 때, 그 가자고 하는 주체는, 사실은 그것은 안 죽은 주체에요. 십자가 통과한 적도 없는 주체입니다. 그냥 십자가를 이용하는 가짜에요.

진짜 십자가를 통과했다면, 통과라는 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바로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서, 다른 말로 성령 안에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에서, 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이 ‘안’이라는 의미는 지난 시카고강의에서 소속이라는 의미로 했습니다. 그 소속이라는 의미는 요한일서 2장 19절에도 나오죠. 19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 문장 자체는 사실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원인, 결과가 뒤섞여 있어요.

이발소가 어디에 있어요? 미장원 옆에. 그럼 미장원은? 이발소 옆에. 말하나마나죠. 그처럼 너희들이 나간 것 보니까, 우리 소속이 아니구나. 따라서 우리 소속이 아니기 때문에 나갔어. 이게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 성경그대로입니다. 제가 지금 틀린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나가는 일이 있어줘야, 우리 소속이, 정체성이 성립된다는 거예요. 나가지 않으면, 뭔가 구분되지 않으면, 우리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진짜 그리스도가 개입되면, 긴 이야기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참, 목사님. 적그리스도가 뭡니까? 그것도 우리가 몰라요. 제가 이 이야기하려고 지금까지 빙빙 돌려서 이야기했는데, 우리는 적그리스도를 모르는데, 우리는 뭐가 잘못이냐 하면, 목사님. 저 신천지가 적그리스도입니까? 저 이만희가 적그리스도입니까? 여호와증인이 적그리스도입니까? 자꾸 묻는 거예요. 누구한테 물어요? 목사 지도 몰라요.

목사 지가 뭐 이미 그리스도에게서 나가있는데,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지도 않았는데, 소속되지도 않은 사람한테 적그리스도를 물으면 뭐합니까? 자기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것 때문에 적그리스도랑 이야기를 하죠. “김집사, 박집사 우리 교회 나갔죠? 적그리스도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할 거 아니냐 말이죠. 그걸 누구보고 물어요? 누구보고?

반드시 기준은 그리스도가 기준인데, 문제는 그리스도가 결과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에요. 아, 이 말이 어렵다. 예수님이 계시고, “애들아 저거 그리스도다.” 이렇게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난 뒤에, 적그리스도가 공개한 쪽이 그리스도에요. 적그리스도가 공개한 쪽이. 근데 더 어려운 문제가 있어요. 여러분, 적그리스도치고 자기를 적그리스도라고 한 사람 봤어요? 못 봤어요? 못 봤죠.

구약에 보면 우상이 나오죠. 우상 믿는 사람치고, “아저씨! 나 우상 믿어요.” 라고 하는 사람 봤어요?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뭐라고 합니까? 참참참참참참 신을 믿는다는 거예요. 참 신을. 살아계신 참 신. 참도 한 개만 붙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가 붙어요.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도 모자라도 참 예수, 참 성령, 참 복음 믿는다는 겁니다. 다른 교회는 없는데 우리교회만 참 신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교회보고 우리교회는 망해야 된다고 했어요. 우리교회 망해야 된다. 망하지 않으면 우리교회 안 된다. 왜? 우리교회만 복음 있다고 주장할 적그리스도적인 성령이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교회는 참 복음을 아는 교회고, 우리교회는 다 구원받습니다.” 라는 말을 누가 합니까? 우리교회가 하죠. 그러니까 우리교회가 수상한 거예요. 이상한 거예요. 그건 잘못이라 이 말이죠.

그 논리는 굉장히 어려운 논리인데, 집합논리에요. 부분집합이 전체집합보다 더 커요. 이러한 집합이론까지 나오는 겁니다. 무한은 한계 속에 있다. 이런 말이 있는데,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해볼까요? 선이 있는데 이 선을 3등분합니다. 3등분 한 것을 또 3등분합니다. 또 3등분합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갈 수 있습니까? 어디까지 갈 수 있냐고 한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무한이죠. 그런데 이 선은 한 15센티 정해져있죠. 유한이죠. 유한 속에 뭐가 있다? 무한이 있다. 그럼 묻습니다. 여러분, 유한이 큽니까? 무한이 큽니까? 이거 몰라서 자살한 수학자가 있어요. 참 희한해요. 이게 모든 논리의 최후의 논리에요. 논리의 모순입니다. 어떻게 속에 있는 것이 무한이 되고 어떻게 겉에 있는 것이 유한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지적해야 적그리스도가 되는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언제 나타나느냐 하면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 예수님이 나타난다는 사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후에. 여기 ‘후에’라는 말을 썼는데, 예수님 재림은, 뭐 예수님의 십자가는..여러 가지 곤란하니까 차라리 동반해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더 잘 이해되겠죠. 동반해서.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비로소 아무것도 없던 그 현장이 적그리스도 등장하게 되어 있어요.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그냥 사울로 있을 때에 자기는 그냥 여호와에게 열심을 냈잖아요. 아무 문제없었어요. 정상이에요.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을 다한 겁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근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만나주실 때, 졸지에 자기만 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모든 상황이 반대로 다 변합니다. ‘아, 이게 진짜 내가 거꾸로 살았구나. 잘못되어 있었구나. 이거는 한두 군데만 고칠 문제가 아니고 전면적으로 완전히 반대로 살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그 전에는 사울이 어떻게 살았어요? 내가 여호와에 대한 정보를 채집함으로서 내가 여호와의 사람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가 여호와를 알려고 했던 그것이 나를 구원하는 과정중의 일부였다는 겁니다. 어렵죠? ‘내가 그전에는 예수님을 몰랐던 죄인입니다.’ 이게 아니라, 여러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아이구, 바보야 바보. 내가 예수님을 못 알아봤어. 이제부터 예수님을 똑바로 알아봐야지.’ 이게 아니라, ‘똑바로 알아보지 못해서 구원되지 않고 똑바로 알아봐서 구원되었다.’ 이게 아니라, 그 똑바로 못 알아본, 예수님을 핍박한 그것이 이미 구원이 시작된 거예요. 그게. 이미 구원에 포함이 되었단 말입니다. 포함이.

그럼 내가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주체는 따로 있었고, 나는 뭐냐, 그 주체가 벌인 작업의 일부로서 나는 이미 편입되어 있는데, 그걸 뒤늦게 소급해서, 뒤늦게 확인하는 차원이죠. 이거는 뭐가 날아가느냐, “저 어떻게 구원받아요?” 라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실을 뒤늦게 눈치 챘죠. 뒤늦게 눈치채놓고, ‘에이, 진작 알려주지. 진작.’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진작 해주지. 진작. 진작 구원했는데, 구원받으려고 괜히 십일조 냈잖아. 진작 알려주지. 복 받으려고 헌금내고 했잖아.’

진작 알려줘도 되는데요, 진작 알려주면 안 돼요. 몰라야 되는 그것도 하나님의 적절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그것은 십자가 이후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그래놓고 한 십년 뒤에, 지금 알았으니까 2026년대에, 진작 십자가를 알려주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진작이 또 나와요. 진작이 아니고 10년 전에 십자가 안 그것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겪어야 될, 반드시 너가 겪어야 될 하나의 절차였고 과정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구석에서, 십자가가 확정된, 이 ‘확정된’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한다면, ‘확정된’입니다. 확정된 사항을 우리가 인식하는데 있어서는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한데, 왜 필요 하느냐, 바로 우리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파괴했고 예수님께 대들었던 적들도 우리가 동반해서 인식이 되어야 해요요. “나 구원자 인식한다. 안다.” “누군데?” “예수님.” 이러면 그건 안 되고. “나 안다.” “뭐?” ‘적그리스도.’ 이렇게 되어야 돼요.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를 우리가 판정하고 만날 문제가 아니고, 주님께서 준비된 적그리스도를 주께서 이렇게 펼쳐놓으신 겁니다. 뭐하라고? 십자가가, 예수님의 피가 얼마나 고귀하고 감사한 일인지를, 우리에게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 적그리스도를, 사탄, 이단을 쫙 깔아두시는 그 친절한 조치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자, 그러면 이번 강의를 잘 들었는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적그리스도와 예수님이 판단하는 적그리스도는 다르죠.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내가 있고 판단하고, 예수님이 판단하는 적그리스도는 우리를 결과물로 소급해서 뒤늦게 눈치 채는 식이에요. ‘아이, 적그리스도였구나.’ 하고 뒤늦게 무릎을 치면서 아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늘 무릎이 아파요. 무릎을 치면서 ‘아이고, 진작 이야기해주지.’ 무릎을 치면서 ‘진작 알려주지.’ 이렇게 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아는 적그리스도는, 우리가 이렇게 ‘진작 알려주지.’ 하다 보면, 내 힘으로 연구했다, 파악했다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아니에요. 666을 내 내 힘으로 알았다, 그건 내 힘으로 666을 안 것이 아니에요. 지가 666인데 뭐.

뭐, 요한계시록 내가 알았다가 아니라, ‘이렇게 진작 알려주지.’ 이런 식으로, 요한계시록을 포함해서 모든 성경말씀이 한꺼번에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요한일서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장 14절을 다 읽으면 기니까 끝부분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우리가 “들어오지 마세요.” 라고 하면 안 들어옵니까? 들어오죠.

그럼 우리는 쉼 없이 놀다가 성령을 받게 되면, 그전부터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 안에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이제야 아는 거예요. 이제야. “아이고, 이제 눈치 채게 하시는군요? 진작 알려주지요?” “아니야. 그때는 몰라야 됐었어. 몰라가지고 돈 뺏기고 집 뺏기고 다 뺏겨야 됐었어. 그게 절차고 과정이야.” “왜요?” “니는 바로 니 죄를 알아야 돼. 남 손가락질 할 필요 없어. 니 죄를 위해서 내가 죽었지. 그래, 니 죄를 위해서 내가 십자가 졌기 때문에, 남 죄 할 것 없이, 그 죄 진 놈도 너하고 똑같아. 똑같은 인간이야. 누구 욕 할 것 없어. 저거 적그리스도고, 저건 엉터리고, 저건 이단교회고, 그럼 너는?” “내가 다니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교회를 믿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지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믿으면, 그 교회가 항상 실망으로 주어집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놔라했죠. 놔라는 말은 내 속에서, 여러분 가제트형사만화영화 다 아시죠? 팔아 길어져라! 하면 팔이 쭉쭉 길어지죠. 모든 인간은 존재하면 반드시 가제트형사처럼 자기에게서 쭉쭉 뻗어나가는 것이 있어요. 이걸 놓든지 끊어버리든지 해야 됩니다.

목회자가 목회를 끊어야 돼요.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재벌이 돈을 끊어버리면 행복해요. 재산을 누구 주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그저 목회를 그만두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고. 놔라는 말은 주님께서 한 소리에요. 부모가 자식을 교육할 때 자식을 놔두세요. 그러면 그게 자녀교육입니다. 아버지에게 효도한다고요? 아버지한테 효도하면 아버지 골치 아파요. 제발 효도 좀 하지마세요. 아버지를 놓으세요. 놓으시면 그게 바로 효도입니다. 아버지를 놓으시면.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행함에는 십자가를 반대하는 적그리스도적인 요소가 있어가지고 그리스도가 싫어해요. 짜증내요.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여, 저 가치 있습니다. 저도 뭐 했습니다. 저도 이번에 충성했습니다. 이번에 한 번 목돈 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예수님이 지신 그리스도의 용서라는 의미를 자꾸 희석시키고 그걸 훼방하고 가려버려요. 마귀적인 모습으로 등장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요한시대에는 사도요한은 모이면 계속해서 그 점을 이야기해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죄인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게 듣기 좋겠어요? 싫겠어요?

이게, 놔버린 사람은 아멘하고 받는데, 뭔가 꿍꿍이 노림수가 있는 사람이 있어요. ‘어디 목회를 해볼까? 잘해볼까? 멋지게 해볼까? 이상적인 교회를 해봐? 장로로서 내가 목돈 내면 다른 교인들이 감동받아서 우리 장로님이 선봉자에 서가지고 모범을 보이셨구나. 그럼 집사들이 장로님을 본받아서 목돈을 내어서 어서 빨리 예배당을 지어야지. 이렇게 한 번 내가 솔선수범해보는 동기부여를 해볼까?’ 근데 요새 집사는 약아가지고 “장로님 참 수고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또는 상당히 약삭빠른 장로라든지, 구린 장로, 인색한 장로한테는 와가지고 “봉투, 봉투 열렸네.” 해가지고 돈 빼내는 것. 요새 젊은 사람들이 어수룩한 노인들을 그렇게 놀립니다.

놔라는 말은, 항상 우리에게서 자꾸 뭔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이 있어요. 기대하는 것이 계속 나와요. 기대하는 게. 기대하는 것이 나오니까, 그냥 나오는 법이 없죠. “예수님. 요거 그저 주님 보시기에도 괜찮은, 경건한 아이템이잖아요. 주님. 도와주셔야 됩니다.” 하고 또 뻗어 나와요. 주님께서는 뭐냐, 놓아라. 놔라. 왜냐하면 이미 모든 작업은 주께서 알아서 다 하고 있습니다. 다 하고 있어요. 놓기만 하면, 구원된 것은 기본이요, 그 놈의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놓으면. 스트레스를 안 받아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 19절 한 번 읽어보고 문제 하나 던질게요.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자, 문제 던집니다. 그렇게 어떤 일단의 사람들이 복음 듣기 위해서 나갔잖아요. 그러면 뭐가 남아 있어요? 남은 자가 있겠죠. 그 남은 자 교회입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자, 일단의 사람들이 복음 듣기 위해서 나갔습니다. 그럼 남아 있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뭐가 됩니까? 우리는 복음 아는 사람들이 되겠죠. 그럼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입니까? 라는 것이 제 질문입니다. 지금 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도 그 답변한다고 바빠요. 머리 굴리면서. 아닙니다. 왜? 이게(놔라) 안 되기 때문에. 그걸 놔야 돼요. “우리끼리는, 다른 사람 다 나갔지? 우리끼리는 이제 참된 교회지?” 이거 놔야 됩니다.

왜, 놔야 되는가? 나가게 하신 것이 우리가 눈꼴시어서 나간 것이 아니고, 주께서 끊어냈다면, 남아있는 사람들이 정신차려가지고, “이 교회 우리 거 아닙니다.” 하고 항상 반납을 하고 주님께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해요. “지금 이십 명 남았는데, 여기서 열 명을 남게 하든, 두 명을 남게 하든, 주님 마음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야 하죠.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 작업은 하자가 없어요. 요새 대구나 한국에 아파트 하자 수리 때문에 골치 아파요. 여기 뉴저지는 모르겠지만. 튼튼하게 짓는다고 하니까 하자가 없겠죠. 그렇죠? 아예 하자업체가 없는 거 아닙니까? 집사님 어떻습니까? 한국보다는 낫죠. 하도 튼튼하게 지으니까, 그 하자보수는, 하자보수가 일체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하자보수, 진작이야기하지.” 진작 할 수 없는 게, 끊어져 나가면서 “아이고, 남아있는 우리만큼은 헤어지지 말자.” 라고 실수를 범해줘야 해요. 제가 오랜만에 바른 소리 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이 실수에요. 우리는 실수. “아이고, 나간 사람은 아깝지만 할 수 없어. 우리끼리 단결하자.” 이게 놔라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항상 우리 것을 갖게 되면, 다시 말해서 주님 은혜로 여기 남게 되면, 여기(놔라)에 뭐가 끼어들게 되느냐 하면 여기에 또 다시 주께서는 작용해서 적그리스도라는 작업조를 여기에다 또 투입을 시켜요. 작업조. 사탄의 움직임도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왜? 사탄은 천사기 때문에, 천사는 개인적인 행동을 못해요.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서 파견근무하게 되어 있어요. “어이! 사탄아 욥한테 모든 재산 다 빼앗아버려!” “예. 하나님.” “야! 사탄아! 욥의 건강도 빼앗아버려! 저 마누라 욕하도록 해봐라!” “예.” 사탄은 신이 나서 하죠. “사탄아! 쟤한테 가서 십계명 안 지켰다고 욕해!” “예.” 근데 사탄은 돌아와서 실망스러워요. “저 베드로를 시험해라!” “예.”

그런데 모든 택한 백성한테는 어떻게 됩니까? 모든 택한 것이 실패로 끝나죠. “사탄아! 내가 너를 꾸짖는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옷 입힌 사람은 니가 아무리 흔들어봤자, 이미 내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실패로 끝난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은 간단히 요약하면 뭐냐 하면 신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자, 여러분 아시죠? 이제 적그리스도가 어떤 것인지를 아시죠? 이미 알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미리 알고.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적그리스도 나오니까, 궁금해죽겠는 거예요. 목사님. 적그리스도가 누굽니까? 알아서 뭐하게요? 피할라고요. 아니에요. 적그리스도는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구원은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내 손에 달린 것이 돼요. 우리는 이미 적그리스도가 누군지를 알게 하시는 수단으로써 활용되고 있는 거예요. 누구 손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서 활용되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대략은 알았는데, 노골적으로 적그리스도가 어떤 주장을 합니까? 이젠 이걸 알아야 되겠죠. 어떤 주장을 하기에 사람들이 미혹돼서 그렇게 적그리스도에 말려 들어가는가? 사도요한의 계시에 의하면 적그리스도는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뭐냐 하면,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사람, 부정하는 사람을 적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을 하니까 여러분, 띵하죠? 예수님이 육체로 온 것 맞는데? 그러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인정하면 어떤 공식이 돼요? 누구든지 예수님이 오신 것을 인정하면 이거는 적그리스도가 일단은 아닌 게 되니까, 야! 그거 참 쉽네요. 적그리스도 안 되기 굉장히 쉽네요. “믿어요! 믿어요!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을 믿어요!” 굉장히 쉽네요. 바로 그러한 오해를 우리가 가질 수 있어요.

요한일서 5장을 미리 한 번 봅시다. 그래서 요한일서가 의외로 복잡하게 됩니다. 5장 6절, 이건 중요한 구절이니까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7절,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8절,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무슨 암호도 아니고, 비유 어디 글도 아니고, 우리가 쉽다, 쉽다하는 성경이 이렇게 깊을 수가! 이렇게 어려울 수가! 저는 한글로 보고 있잖아요. 여러분들도 한글로 보고 계시죠? 한글로 보나 영어로 보나, 어디 영어로 본다고 쉽습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입니까? 갑자기 예수님의 육신을 뭐로 분해해놨습니까? 물과 피와 성령, 셋으로 분해를 해놨습니다.

만약에 의사가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머리 부분, 몸통부분, 다리부분이라고 하겠죠. 머리 부분, 몸통부분, 다리부분으로 해석하면 뭐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적그리스도가 발각되지 않죠. 근데 예수님의 몸을 물과 피와 성령으로 하게 되면 뭐가 등장하겠어요? 적그리스도의 정체가 발각되겠죠. 그러니까 성경을 해석할 때, 예수님은 인간이다. 인간은 무엇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 마음대로 쭉쭉 쭉, 나름대로의 연쇄 고리를, 논리 고리를 만들어내면 안 돼요. 

예수님이 누구시냐? 그 해석한 내용까지 성경에서 너무나 친절하게 다 이렇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해? 궁금해? 그러면 예수님을 분해할 때, 뭐로 분해하라? 물과 피와 성령으로 분해하라. 성령은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에게서 나와요. 예수님에게서 나오는데, 마지막 순서가 성령이잖아요? 그러면 성령은 어디를 거쳐서 나옵니까? 예수님의 몸은 물이고, 예수님의 몸은 피고, 그 몸과 피라는 그것을 확정지으면서 성령이 나와 버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물과 피를 모아버리면 예수님은 육체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온 것이 분명하다.” 라는 이 말 자체가, “예. 아멘.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이 분명합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그 의미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그 예수님의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은 무엇을 나타내고자 함이냐, 그것까지 동의해줘야 돼요. “예수님의 몸을 가지고 물과 피와 성령을 드러내는데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 오케이가 되는 겁니다.

아, 이거, 뭐 제가 일부러 여러분을 애먹이려고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 이 성경보다 더 쉽게 해드리고 있는 거예요. 친절을 베풀고 있는 거예요. 뭐 마땅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죄를 깨끗하게 씻는다는 겁니다. 죄를 깨끗하게 씻을 때는, 뭐 씻는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잖아요. 죄를 깨끗하게 씻는다 할 때는 구약적 용어를 들이대요.

그걸 가지고 요한일서 2장 2절에 보면, “저는 우리 죄를 위한”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화목제물이니” 화목제물이죠. 그럼 화목제물이라는 단어를 거론했다는 말은, 화목제물과 더불어 구약적 배경도 동반해서 함께 일어선다는 말입니다. 화목제물을 이해하려면 구약 전체, 화목제물을 유발시킨 그 현장이 동시에 이렇게 부각되어야 하고. 무대 중앙에서 한 무대가 올라오듯이, 구약 전체가 솟구쳐 올라와야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화목제물 등장하죠.

그러면 화목제물에 근거해서 지금 사도요한은 그리스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여, 너는 화목제물을 이루기 위해서 니 몸에서 물과 피와 성령이 나와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적그리스도는 뭡니까? 적그리스도는 중보자가 왜 필요해? 우리가 직접 뭐 지키면 돼요? 우리가 구약말씀 지키면 되고, 우리가 사도들의 명령과 권면 지키면 되잖아? 된다는 겁니다.

왜? 전에는 성령 없어서 못 지켰는데, 우리가 성령 받아야 된다는 거죠. “성령 받았으면 괜히 받았느냐, 말씀 지키라고 준 거다. 성령을 받지 못했을 때는 우리가 실수했지만,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온전히 지킬 수 있다. 그래야 거룩을 이루니까.” 라고 한다면 지금 무엇을 통째로 빼버린 것이 돼버려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우리한테 잔소리한 거 밖에 안 돼요. 똑바로 살아! 왼뺨을 치거든 오른뺨을 대줘라. 잔소리했을 뿐이지. 잔소리는 잔소리로 끝날 뿐이에요. 실제로 효력 없어요.

예예예~ 구하라 주실 것이요. 예예예~구하겠습니다. 철야하고 구하겠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예예~사랑하겠습니다. 말만 예예~ 예예~ 그랬던 열두 제자가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랬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그 말씀은 예수님을 위한 말씀인데, 인간은 자꾸 머리가 이상하게 돌아가서, 저 말씀은 내가 지켜야 될 말씀. 그래서 영광 돌려야 할 말씀. 자꾸 일방적으로 그렇게 호도하면서 말씀을 자꾸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거예요.

여기서 제가 옛날 여러 번 써먹었던 예를 한 번 들을 테니 양해해주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조카가 결혼식을 했어요. 서울에서. 그래서 제가 대구에 있다 조카 결혼식이라고 해서 올라갔습니다. 전문 홀에서 하는데, 빰빠라빰빰~♬ 갑자기 위에서 천사처럼 신랑이 내려와 가지고 온 이벤트를 다 벌이는데, 뭐 그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케이크를 하나 준비했어요. 우리 신랑 측이 아니고 저 신부 측 하객에서 철딱서니 없는 애가, 제가 아무리 봐도 세 살이나 네 살 같아요. 웨딩 케익을 잘라야 하는데 지가 손가락으로 파먹고 있는 거예요. 그걸 어느 누구도 안 말리는 거예요. 신랑 측에서 화가 잔뜩 났죠. 그렇다고 결혼식 케이크 때문에 파토 낼 수 없고, 웨딩에서 약간의 안 좋은 추억이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성경말씀을 누가 지키느냐, 예수님의 전당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배치물들, 장식, 여러 가지 필요한 집기들이 뭐냐, 성경말씀도 그렇고, 십계명도 그렇고, 모든 것이 예수님이 다 지켰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온 그런 배치물인데, 아까 철딱서니 없는 애가 손으로 케이크를 파먹듯이, 적그리스도가 와가지고 흠집을 내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한테 너그(너희의 경남 방언)애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죄 없다고 하니까.

너희들이 죄 없다고 하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내가 죄 있다고 하매, 내가 있으매, 예수 그리스도가 오매, 너그 애비는 악마고 너그는 죄 있는 것이 돼요. 이 말을 제가 말한다는 것이 참 미안스러운 말인데, 제가 말하게 되면 여러분 말고 다른 쪽에서 의아해할 거예요. 아니 사람이 되어서 성경보고 읽는 이유가 뭐며, 이걸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뭐냐? 지켜서 기쁘게 해주면 장차 우리에게 좋은 것이 올 거야. 말씀을 묵상 왜 합니까? 나중에 의인의 회중에 들기 위해서 하잖아요. 그거 빤한 논리 아닙니까? 그 당연한 것을 그게 아니라고 하면, 그럼 지금까지 우리는 뭐했느냐? 이래 되죠.

지금까지 뭐하긴 뭐했어요? 죄만 졌지. 가로챘지요. 가로채는 것, 지금이라도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애도 아니고, 예수님 장식하라고 주신 말씀을 왜 지가 손댑니까? 주님요, 효도했습니다. 왜 자꾸 지가 효도했다고 해요? 왜 지가 효도했는데? 이 효도하면 얼마나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셨는지. 주께서 기뻐하시게 하셨겠지. 누굴 통해서? 니로 하여금 용돈 드리게 해서 기뻐하게 하셨겠지. 모든 주인공은, 행동의 주체는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우리는 수단에 불과한데. 왜 자꾸 모든 영광을 수단에게, 본인에게 겸손한척 하면서, 은근히 뒷돈 챙기듯이, 뒷돈 챙깁니까?

우리가 행한 대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행함도 안 했는데 복 받았어요. 행하지도 안했는데 복을 줬으면, 그 복이 복의 값어치를 하려면, 내가 했다고 하는 소리를 하지 말아야죠. 실컷 공짜로 얻어먹고, 뒤에 가서 돈 10원 내놓고, 이 음식은 내가 샀다고 이래 하면, 주인한테 많이 맞습니다. 나 이제 니 친구 안 할란다. 왜, 인생을 주님의 인생인데 왜 자꾸 내가 공들였다고 케이크에다가 손가락 가지고 침 발라가지고 남의 결혼식 왜 다 배려놓느냐 이 말이죠. 그러지는 말자는 겁니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말이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왜 자꾸 주장하느냐 하면, 우리 멀쩡한 인간 있고, 우리가 성령 받았으면, 우리가 말씀 지켜서 말씀 지킨 보람만큼 하늘나라에서 상급 더 받고, 보너스 많이 받고, 게을러빠진 것들은 천국 가더라도 저 구석에 있고, 그것도 못한 인간은 지옥가고. 모든 것은 우리하기 나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우리한테 내추럴 한 것, 아주 자연스럽다는 거예요. 자연스럽다에 동의합니다. 왜? 악랄하기 때문에.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그것은 진리가 아니에요.

아니, 예수를 믿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까? 부자연스러워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책망하죠. 성령께서 와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잖아요. 책망하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놔두면 지 잘난척하는 것밖에 남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성령께서 날마다 간섭해 주시잖아요. 뭘로? 말씀을 앞장세워서. 물과 피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물과 피, 성령 했기 때문에 나머지기는 니가 하라는 말이 아니고, 물과 피와 성령 자체가 이미 악마를 이긴 거예요. 

자, 마지막 테마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이겁니다. 왜 예수님의 물과 피와 성령이냐, 앞에 악마가 꼼짝도 못해요. 자, 그 이유를 알아야죠. 왜? 그게 뭐라고? 왜? 마귀는 딴 것은 다 용납하면서도, 예수님의 물과 피와 성령으로 하나 됨, 그게 하나이거든요. 한 몸에서 나왔으니까. 왜 그렇게 하나 됨을 못 보고 못 듣도록 하고, 왜 그렇게 교회에서 예수님의 피를 싫어하느냐 말이죠. 그 자체를 완료하는 것은, 왜 싫어하는지,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가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화목제물은 제사 중에서 제일 마지막 제물이에요. 마지막 제물은 무슨 말이냐 하면, 더 이상의 제사를 내가 너희에게 내려 준 적이 있다? 없다? 없어요. 자, 히브리서를 한 번 보겠습니다. 여러분 피곤하시더라도 몇 분 안 남았기 때문에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 제가 참 좋아합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8절, 제가 정말 좋아합니다. 누가 한 번 크게 읽어주시고 제가 읽겠습니다. “이것을 사하였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여러분, 죄가 있는 것에 저주 있는 것이 맞습니다. 충분히 동의해야 해요. 아멘, 해야 돼요. 죄가 있으면 저주 있습니다. 그러면 죄가 사해지면? 뭐가 없어집니까? 저주가 없어지죠. 저주 없으면 나머지기 모든 인생의 굴곡과 모든 것은 뭐냐, 저주가 아니고 축복이죠. 축복입니다. 그러면 진즉에 이야기해 줄 것이지,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습니다. 문제는 이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축복의 상황과 살아온 인생길이 이게 합치가 안 된다는 것이 우리에게 또 다시 갈등을 유발합니다. 축복? 꼬라지 참 좋다. 진즉에, 날 때부터 축복이라고요? 축복 꼬라지하고는, 축복 더 했다가는 난리 나겠다. 조금만 더 축복 줬다가는 집안 거덜 나겠다. 그래서 모든 축복의 기준은 우리의 삶이 축복의 모티브가 아니고, 토대가 아니고, 근거가 아니고, 기준이 아니고, 예수님의 물과 피와 성령이 축복의 근거입니다.

이걸 누가 아느냐, 마귀가 알아요. 왜냐하면 뱀의 후손이기 때문에. 마귀가 알고서 우리로 하여금, 니 저주 받지 말라고 그렇게 친절한 닦달을 내는 거예요. 친절한 닦달. 우호적인 저주를 퍼부어요. 우호적인 저주. 상냥한 저주로 이야기합니다. 고마운 저주. “인생은 너 하기 나름이다.” 인생은 니 하기 나름이다. 니가 게으르면 니 미래는 보장되지 않고, 니가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한 만큼 대가를 얻게 될 것이다. 축복은 니 손에 달려있지, 누구한테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 하나님이 있더라도 복 주지 않는다. 니가 기도빨을 발휘해야 된다. 니가 기도를 해야 주지, 멍청하게 가만히 있으면 주께서는 주시지 않는다. 왜? 구하라 주실 것이라고 했잖아요. 갑자기 산상설교를 거기다가 들이대 버려요. 여러분 모든 말씀은,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이 인터셉트, 가로채갔어요. “구하라 구할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이 모든 말씀을 누가 가져갔는가?

우리한테 오기도 전에 주께서 찾아오시고 우리한테 내밀고. 우리는 껍데기만 내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는 그 결과물을 우리에게 주면서, 아울러 뭘 주느냐 하면, 이것이 바로 “구하라 주실 것이요” 라는 것에 근거해서 너에게 온 축복의 성과가 바로 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대신 구했던 결과물이 우리니까, 우리는 주님한테 감사할 때, 뭘 경유해야 하느냐, 구하라 주실 것이라는 것을 경유하면서, 주님의 공로가 우리의 느려터진, 우리의 게으름, 우리의 죄, 우리의 이상스런 간구함. 세상 것을 구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구하는, 그걸 결사적으로 구하는, 그 잘못된 구함을, 십자가에서 아울러 밝혀질 때, ‘진작 이렇게 복 받을 걸. 진작 이야기하지.’ 라는 감사가 주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건 오늘 이야기고, 내일 되면 내일 또 우리가 알아야 될 몫이 남아있기 때문에, 내일 살게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모레 되면 우리가 또 깨닫고 감사해야 될 몫이 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혹시 이 중에 모레까지 사시는 분이 있다면 모레까지 가서 또.. 죽을 때까지 계속 가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죽게 되면 면류관 다 벗어던지면서, 미쳤어? 미쳤어? 이 면류관을 내가 왜 써? 내가 여기 왜 왔는데? 얼른 갖다 던지죠.

주님 앞에 면류관이 가득 쌓여있습니다. “아이구 잘 아네. 그렇지! 그렇지!” 핀셋으로 집어가지고 “누가 이런 마음을 주셨지?” 예수님 본인이 집어넣어 주셔놓고 묻기는 우리한테 물어요. 성경에 그런 대목이 많아요. “누가 이런 사랑을 알았지?” 주님 자신이 넣어놓고, 자신이 끄집어내면서 감격해가지고, 이렇게 칭찬을 해대시는 겁니다. “이 귀하고 귀한 자들아! 이 복 받은 자들아!” 뭐 했다고? 복을 집어넣어 놓고 핀셋으로 복 받은 자들을 끄집어내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야기했던,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거기에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지키지 마세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주께서 움직이는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교통 범칙금에 걸리면 걸리세요. 걸리시고, 운전할 때 기도하고 싶거든 기도하세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도하세요. 참 말이 모순됩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도하면 안 걸릴 거라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아, 이거 찝찝한데 오늘 기도해야 되겠어.’ 기도한다고 10초 멈췄는데, 내 앞에서 10초 동안에 다른 차는 교통사고 나고.  나는 같이 과속했는데 통과하고. 10초기도 안 했으면 큰 일 날 뻔 했어요. 이건 간증거리죠.

모든 매사가 기도하고 싶을 때 한다는 말은, 니가 알아서 기도하지 마라. 놔버리라는 말이죠. 놓고. 주께서 이렇게 잡아 땡기면 땡기는 대로 하면 돼요. 걱정거리 있으면 걱정할 수밖에 없어요. 염려할 일 있으면 염려해야 돼요. 하지만 내가 걱정하고 내가 염려하지 마세요. 염려하게 하신 것도 주께서 시킨 것이고 걱정하게 하신 것도 주의 일입니다. 애가 갑자기 가출했는데 부모가 걱정 안 할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걱정 안 한다면 그거는 로봇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뭐하라고? 돌아온 탕자 한 번 경험해보라고. 잃었다가 얻었으니까 그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여러분, 같은 지갑이라도, 혹시 배낭이라도, 한 번 놔두고, 배낭 잃어버렸다고 미국에 올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배낭 잃어버렸다가 얻어 보세요. 그 놈의 배낭이 얼마나 예쁜지. 주의 형제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그래서 참 발걸음을 주께서 인도하시는구나. 모든 범사에 이미 느긋한 마음으로 요한일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벌벌 떨지 마시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이걸 그림으로 그려야 멋있는데,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체에서 물과 피가 나왔죠. 물이라는 것은 물세례를 말하고, 피라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의미합니다. 물이라는 것은 제가 아까 설명했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의인이면서도 일부러 죄인의 세계에 들어갔기에,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를, 가능성을 주신 거예요. 접촉할 수 있는 여지를 주신 겁니다. 물세례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가느냐, 주께서는 불세례까지 가는데, 불세례가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이 불세례는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례 받았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버지의 모든 말씀을 본인이 회수해서 짊어지고 가시는 거예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십자가로 가시는 거예요. 갔을 때, 예수님의 육체가 있습니다. 자, 그 다음에 성령은 뭐냐, 예수님의 육체에서 성령이 나와 버리면,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누구의 지시 하에, 누구의 명령 하에, 누구의 관리 하에 있느냐 하면, 성령의 관리 하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면 이걸 누가 아느냐, 성령 받은 사람은 알아요. 어떻게? 내가 했습니다가 아니고, 아하!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물에서 나온 효과로 인하여 구원받았구나! 라고 우리가 어느 집에 있든지, 미국의 집에 있든지, 한국의 집에 있든지, 다시 중심으로 소환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육체로 하신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가 아니고 참, 참, 참 그리스도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 혼자 이루었기에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라는 것을 날마다 되풀이하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는 십자가를 뒤로 돌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내가 가서 말씀 지키겠습니다.” 이게 안 나와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성령의 관할 하에 있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의 관할 하에 있으면 우리는 다 지킨 것이 되네요? 다 지킨 것이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책망이 주어집니다. 책망이. 책망이라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악랄한지를 알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악랄하다? 주님이 하신 모든 업적과 결과를 악랄한 우리는 뭐로 조치합니까?

내가 한 걸로, 내가 기도하고, 헌금하고, 복 받은 걸로, 전부 나한테 돌리니까, 이때 성령께서 계속 관여합니다.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 기도를 주께서는 탄식하면서, 저 놈의 기도는 제켜 주지고 제 기도 받아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우리 곁에서 주님의 성령은 따로 기도합니다. 응답은 내 기도 응답이 아니고 주님의 기도의 응답에 의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귀중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는 즐거움을 이야기합니다. 이 순간,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그래서 제가 시카고강의에서 그토록 여러 번 강조했는데, 글쎄, 듣는 사람은 이 강조의 의미를 알았을까? 안다고 제가 믿쑵니다. 시카고강의에서 결론이 뭐냐 하면, 아무 일도 우리한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는 없어지는 안개이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왜? 아무 일도 아니기 때문에.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솔로몬이 그렇게 큰일을 했지만, 다 헛된 일. 있으나마나. 없어져도 그만. 있어도 그만. 따라서 하나님께서 죽이시기고 하고, 필요하면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기 때문에, 그 죽이시고 살리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이렇게 하세요. “주님이여, 죽이시든 살리시든, 내 차원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민한다는 것은 내가 중요하다는 뜻인데, 전혀 그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지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지금도 내 심장은 뛰고 내일도 할 일은 많습니다. 그리고 해질녘에 잠잘 때 이렇게 하세요. “주여! 오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군요.” 어떻게? 그저 옥색 원피스 입으시고, 두 손을 모으시고, 침대에서 원피스 살짝 올려서 다리만 약간 보이시게 하시고, 소녀의 기도하면서, “주여! 오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고민은 그날에 족하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큰 치마 두르듯이 이 세상을 덮쳤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유발된 일인 것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나의 현실관만 고집했습니다. 내 인생만 고집했고, 나의 역사만 붙들었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적그리스도와 유사한 사고방식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님 육체로 오신 의미를, 이제는 우리 몸까지 전달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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