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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5 17:52:21 조회 : 1942         
버지니아 강의 이름 : 관리자(IP:88.153.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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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65.245) 16-09-27 23:40 
20160912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4-이 근호 목사

 

줄곧 요한일서 내용에 대해서는 계속 해왔습니다. 앞에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시카고강의하고 뉴저지 강의에서 했었습니다. 일단은 그 내용을 보셨고 다 안다고 치고, 앞에 있는 열 세 개의 강의를 여러분들이 안다고 치고, 여러분들만의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진도 계속 나갑니다. 할 수 없어요. 다시 복습합시다. 그런 거 없습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에 보면,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절,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이래 되어 있거든요. 사도가 오늘날 우리뿐만 아니고 오고가는 모든 세대사람들에게 구태여 이 말을 꼭 해야 될 이유가 뭐냐, 1번. 심심해서. 2번. 자기 좀 알아달라고. 3번. 그냥 헛소리인줄 알면서 그냥 외쳐볼라고.

 

왜 이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을까요? 쓸데없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돈이 안 되고, 현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원하는 바가 없었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었다 이 말이죠.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런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죠. 그런데, 2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라는 말을 사람들이 그렇게 기대하고 이 말을 해주기를 그렇게 학수고대하고 고대했습니까? 살기 바쁜데?

 

그걸로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은, 있으나마나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왜 했을까요? 그것은 이 성경 안만 진실이고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이 강의에서 첫 번째 시작하는 것은 뭐냐 하면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현실은, 1번. 지진이 현실이다. 2번. 진리가 현실이다. 이렇게 사도는 묻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둘 다 현실이라고 이렇게 할 수 있죠. 그럼 사도는 다음과 묻습니다. 진리가 우선입니까? 지진이 우선입니까? 이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진리가 있어서 지진을 유발했습니까? 아니면 지진 따로 진리 따로, 지진은 이공계에 해당되고 진리는 인문계에 해당되고, 둘 다 그렇게 우리한테 양쪽 다 편리한대로 뽑아 세울 수 있는 겁니까? 하고 묻는 거죠. 그런 진리가 우선일까요? 지진이 우선일까요? 우리가 아는 기독교의 교양에서는 진리가 우선이라고 하죠. 그런데 문제는 교회라고 쳐서는 안 됩니다. 진리에서 지진이 나온 그 경로를, 근거를 제시하세요. 주관식문제.

 

진리에서 지진이 나온 그 경로, 메카니즘을 제시하세요. 이렇게 문제를 낸다면 모르죠. 어떻게 진리에서 지진이 나오느냐 말이죠. 현대 과학은 지진은 지구의 내파와 관련되어서 맨틀의 움직임에서 나온 거예요. 그 맨틀 안에는 내핵과 외핵이 있고 내핵과 지구의 자전축에 의해서 전개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고, 그 움직임이 지각 표면까지 움직여서 지진이 일어난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지구의 움직임과 인간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감정과 관련성이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지진이 많이 봐줍니까? 아이구, 요거, 요거 지진일어나면 어린애가 아프겠다. 피해가야지. 지진이 그런 안목이나 인격성를 갖고 있습니까? 없죠. 맹목적이잖아요. 그러면 오늘날 인간들은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거는 우연이나 운에 맡기는 도박 같은 인생입니다. 어떻게 될지를 몰라요. 그럼 이거는 인생의 허무죠. 목적도 없고 이유도 없고 의미도 없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인간의 의미나 목적이 뭐냐, 거두절미하고, 머리 잘라내고 꼬리 잘라내고 남는 것은 그냥 잘 먹고 잘 살자.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거는 나는 모르겠고, 그냥 잘 먹고 잘 살자 그뿐이죠.

 

왜 당신은 잘 먹고 잘 살아야 됩니까? 라고 물어보면, 내가 그러고 싶어서. I Wanted, 내가 그러고 싶어서, 내가 원해서. 왜 원하십니까? 그러는 내 욕구와 욕심이 그렇다. 그러면 당신의 욕망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답변이 없네. 당신은 왜 그런 욕망을 원하십니까? 그걸 분석한 것이 정신분석학이에요. 정신분석학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든 행동이라는 것은 지표면에 나타난 것이고, 그 지표면 밑에는 지진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욕망이고, 그 욕망은 어릴 때부터 가정교육 받으면서 세뇌 받은 것이고, 학습 받은 것이고. 니는 우리 집안에서 이 정도 돼야 돼. 그것을 가지고 타인의 시선, 응시라고 이야기합니다.

 

행동 하나하나에 자기 개인적인 행동을 하고 난 뒤에, 친정아버지는 어떻게 보겠는가? 내 동창생들은 내가 이런 꼴로 사는 것을 얼마나 욕하겠는가? 또는 반대로 나를 그렇게 우습게 봤던 인간들이 내가 이렇게 저택에 사는 이 모습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화들짝 놀라겠는가? 내가 롤스로이드 고급차 타고 다니는 것을, 그 집 앞에 한 번 주차를 하고, 어이! 한 번 불러내야 되겠는데, 이런 모든 의도성은 인간의 욕망이며 그 욕망은 타인에 의해서 그렇게 되어야 된다는 것을 기초로 해서 우연이고 맹목적으로 그러한 부를 축적하는 것. 이것 자체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게 만약 해답이 아니라면, 그러면 진리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그 메커니즘을 성경은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진리와 지진을 합쳐서,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세상이라고 봅니다. 같은 용어에요. 우리는 현실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이나 현실이나, 현실이나 세상이나. 그런데 성경에서는 여기에다 한 마디 더 합니다. 세상은 갇혀있다. 또는 재판의 대상이다. 심판의 대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심판의 대상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현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그 현실이 심판의 대상이라면, 그러면 현실 바깥에 다른 세상의 테두리가 또 있단 말인가? 라는 안목을 성경에서 제공해줘요. 그러면 그 안목에서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니 왜 태어났는지 모르지? 니 죽어서 어디 가는지 모르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다음에 심판이 있으리라. 그러면 누가요? 그거는 성경한테 물어야지. 누가요? 라고 묻는 순간, 나는 어떻게 지금보다 밥 먹고 잘 살고 돈 잘 버느냐 하는 문제의 관심사에서 방향이 틀어지게 합니다. 내가 누굽니까? 로 바뀌는 겁니다.

 

내가 누굽니까? 주체에 관한 문제에요. 성경이 없으면 내가 누구냐를 누구보고 묻느냐 하면 같은 똑같은 인간들끼리 물었어요.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당신은 나를 얼마나 예쁘다고 봅니까? 참하다고 봅니까? 이래 보는데, 당신은 어떤 관점에서, 어떤 기준점을 가지고 저를 심판할 요량이십니까?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사울이었죠. 사울은 어떻게 살 요량이었느냐 하면 일단 여호와를 심판주로 간주하고 자기와 심판주 사이에 주님이 주신 기준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 기준이 뭐냐 하면 율법을 줬다는 거예요. 그럼 사울이라는 사람은 오해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가지고 심판한다. 라고 오해를 했습니다. 육해도 아니고 사해도 아니고 오해를 한 거예요. 율법 지킨 것이 오해서 율법대로 심판한다는 것이 오해라면, 그것마저 오해라면 그럼 진실은 무엇이냐? 진실은 이겁니다. 인간은 자기가 심판을 받는다는 자체가, 그것이 오해고 실수라는 겁니다. 그게 오해고 실수에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고, 따라서 율법을 지킴으로써 내 단도리가 되고, 내 미래는 보장되겠다는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진면목이 아니에요. 그게 오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종교는 오해입니다. 사기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 여호와, 그거는 사울에게는 가짜였습니다. 가짜였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줬다는 사실도, 그 하나님 자체가 가짜기 때문에, 하나님이 율법 줬다는 그것도 가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나를 심판할 때, 그 나라는 것, 에고ego, 또는 이드Id, 라고 하는 ‘나’가, 그것은 내가 조작한, 거짓된, 잘못된 ‘나’입니다. 일종의 가면 같은데, 진실한 나는 영원한 미제의 사건으로 남아요. 내가 몰라요. 그래서 사울은 자기 현실 속에, 세상 속에 하나님 집어넣고 율법 집어넣고 자기 집어넣어서, 그걸 짬뽕을 만들어서, 자기 구원되는 프로젝트를 거기서 조작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종교라는 거예요. 이게 구원파에요. 이게 기존 교회의 장로교고 침례교고 이런 거예요.

 

성경은 근본적으로 묻습니다. 니가 니를 제대로 알고 니가 구원을 언급하느냐, 이 말이죠. 니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나 여기 있어. 괴롭다. 살기 싫다 죽어서 좋은 데 가고 싶다. 구원해주세요. 그거는 니 생각이지. 니 생각. 그거는 니 중심으로, 니가 지구고, 태양은, 하나님은 너를 위해 돈다는 니 중심적 사고방식이에요. 종교는 오락이고 취미에요. 종교 단체는 교제모임단체로 끝나는 거예요. 결국은 지 잘난체하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삼위일체 해도 지 자랑질 하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그걸 원하기 때문에 목사는 돈을 받고 그 장소를 제공하고 그들에게 적절한 위로를 퍼부어주는 거예요. 목사는 그 돈 받고 생계와 노후대책까지 보장받고요. 친목단체를 가지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친목단체를. “주여, 저 구원해주세요. 예수 믿습니다. 구원해주세요.”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니가 도대체 누군지를 알고나 구원을 언급하느냐?” 구원은 인간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지금 목소리 낮추라고 하네요. 아니, 아니, 흔들거린다고요. 네 알았어요.

 

구원은 인간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구원받고 싶어요.” “니가 뭔데 구원을 받아? 니가? 니가 누군지를 알고 지금 구원 운운하느냐?” 모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인간은 구원을 소망할 잽도 못돼요. 그런 권리도 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요? 인간이 누군지를 알고 사랑해요?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겠죠. 자기만 사랑한다는 것을 깔고, 나만 사랑한다는 것을 차마 못해서, 너무 염치없어서 인간을 사랑한다고 해놓고, 사랑을 인간 안에 슬쩍 집어넣어가지고, 그러니까 전체 인간을 사랑하니까 부분집합 안에 나를 사랑하겠지. 어디서 꼼수를 쓰고 있어요. 꼼수를.

 

성경을 본다는 것은 계시를 대하는 겁니다. 계시를 대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계시라고 느낄 수 있느냐 하면, 멀쩡한 내가 갑자기 소멸되는 그 순간에 계시는 비로소 계시다워요. 그걸 블라인드 스팟 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내가 갑자기 소경이 되는 순간, 따라서 내가 어디에 있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도 못하고, 나에 대해서 관심조차도 날아가 버릴 때, 그때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다른 것이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느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의 계시, 말씀이 이 현장에 있고 나는 그 안에서 사라져버려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사라지고, 나만 사라지고 내가 있던 그 자리에 그리스도만 있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자리가 그리스도의 자리네. 내가 여기 있고 그리스도 저기 있고, 맞상대해서 타협하고 흥정하려고 했더니만, 그거는 내가 조작한 가짜 예수고, 나를 사라지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작용이고 활동이고 작업이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알게 됩니다. 주님 만나고 난 뒤에.

 

그래서 하는 말이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비로소 “나는 죄인이다.”에서 “나는” 없애버려야 해요. “그냥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 라고 하면 뭘 노리는가 하면, “죄인인데 구원받아야 되겠습니다.” 나라는 것이 설정되어 있기에, “죄인인데 어떻게 한번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이렇게 나올 여지가 있지만, “나는”을 없애버리면 죄인 되게 하는 그런 작용만 이 현장에 이 자리에 퍼부어주옵소서. 세상 전체를 죄로 만드는 그 작업에, 휩쓸려가게 하옵소서. 그러면 거기에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죄 안에서만 반드시 의가 등장하게 되어 있어요.

 

주님이, “내가 전 세계를 죄라고 규정했다.” 하시면서 비로소 우리 안에 등장할 때,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 되는 겁니다. 강의 끝냅시다. 끝나도 될 것 같은데. 처음부터 내가 노림수를 가지고, 내가 이렇게 구원을 받아도 되는 입장이냐? 하는 것은 생각 안 하고,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옳지! 로마서 10장이 있구나. 누구든지 예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라. 됐네. 여기 있네. 주여, 손들고 나옵니다. 목사들이 손들고 나오라고 하고 뭐, 오늘도 한 영혼이 영접했다고 하고, 박수치고, 물에 풍덩 담가가지고 던지고, 어디 물미역도 아니고 물에 담가가지고. 그래놓고 잠시 예배드리고 집에 가면 돈 좋아하고. 이게 뭐예요? 도대체?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이라고 해서, 세상이라고 언급할 때는, 세상이라고 언급하면서 가두어두게 하는, 이걸 인간이 아는 궁극적 가림막, 또는 휘장이라고 합시다. 궁극적 휘장을 휘하에, 슬슬 또 어렵기 시작합니다. 아래쪽에. 세상을 궁극적인 휘장으로 간주하는 아래쪽에,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일서에서는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용어나 요한일서의 용어나 요한계시록 용어나 같은 용어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디 아래 있느냐 하면, 진리 휘하에 궁극적인 휘장으로 짜여진 세상이 있는데, 이 전체를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은 기껏 생각해봐야 휘장 안에서만 놀고 있다는 이 말입니다. 놀고 있네~ 이 말은 맞는 말이에요. 어두움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어두움 안에서. 그러면 목사님,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됩니까? 방금 다 이야기했는데, 어두움 안에서, 어두움과 더불어서 노시면 되는 거예요. 막살면 되는 거예요. 또 전매특허용어 나왔다. 그냥 막사시면 되는 거예요. 그것도 어떻게? 즐겁게. 부담 갖지 마시고.

 

여기까지가 끝인가보오~♬ 아니 더 즐기세요. 여기가 끝이 아니니까 주저하지 마시고. 갈 데까지 가보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뉴저지에서 강의했지만, 내가 도대체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가를 테스트해보세요. 내가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지. 내가 아무리 악랄해져도 베드로만큼은 덜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뭐 우리는 혜택 받은 것도 없으면서 하잖아요. 베드로는 혜택뿐만 아니고 교회의 반석입니다. 너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그 사람이, 나는 예수를 저주한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죠. 그러면 교회라는 것은 무엇이 기초가 되어야 해요? 배신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논리가 간단한 논리에요.

 

우리의 배신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거예요. 왜? 어차피 대표적 배신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어두움 안에서 배신 외에는 할 게 없기 때문에. 뭐, 경건 찾고, 백날해도 배신이에요. 삼위일체 연구하고 신학박사해도 전부 다 그게 배신입니다. 전부 다 거짓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그 말이에요. 그 말씀이라니까요. 이미 해답은 다 나오고 난 뒤에 소급해서, 거꾸로 지금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서.

 

성경을 안다는 것은 마지막 때 이야기 거거든요. 이 마지막 때, 결승점에 돌아서서, 다시 뒤에 따라오는 모든 것들을, 이렇게 규정짓는 겁니다. 그럼 마지막 때는 세월이 안 됐는데, 왜 마지막 때입니까? 성경에서 여기 어두움 안에 뭐가 흐르느냐 하면 시간이 흐릅니다. 그럼 시간이, 궁극적인 휘장, 하나의 둘러친 범주라면, 갇혀있는 범주라면, 마지막이라 하는 것은 시간조차도 벗어난 묵시세계가 되는 겁니다. 묵시세계.

 

그 묵시세계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성령 안, 예수 안, 십자가 안이라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이 삼층천 올라간 것을 아시죠? 그 안목에서 세상을 지금해석하고, 거기에다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시간 속에 갇혀있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은, 바로 한 진리를 증거 하기 위해서 그렇게 그들은 분주하게 폭발해야 되고 울렁거려야 됩니다. 미국에 유명한 옐로스톤이라고 있잖아요. 옐로스톤의 샘물은 평소에는 부글부글 거리죠. 부글부글 거린다는 말이 적당한 것 같아요.

 

부글부글 거린다는 말이 뭐냐 하면, 큰솥에 곰국 끓이듯이, 오래 끓이면 부글부글 거리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거기에서 나와 올라가는 모든 수증기는 누가 받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그들은 부글부글 거립니다. 그 부글부글 하기 위해서는 천사가 필요한데, 그 천사는 타락천사가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꼭 천사가 필요합니다.

 

천사를 함부로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하늘나라 공무원들입니다. 공무원들이 얼마나 세다는 것은 공항검색대를 보면 알아요. 많이 당했습니다. 공항검색대에서 분위기 잡고 할 때, 그걸 사탄이라고 보시면 그 사탄의 말을 들어야 해요. 평소에 잘 길 들여져왔습니다. 그 사탄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은 하나의 정형화가 되고, 하나의 질서가 잡히는 겁니다. 사탄 때문에 질서가 잡히는 거예요. 사탄이 없으면 이거는 질서가 안 잡히는 겁니다.

 

질서 있는 세계는 사탄의 세계에요. 주님은 사탄의 세계, 질서 있는 세계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어요. 혼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흑암가운데, 혼돈가운데 창조를 시작하기 때문에, 질서 있는 것을 혼선으로 또는 혼란으로, 혼돈으로 전환시키는 그 특수한 임무를 띠고 아버지로부터 이 땅에 왔잖아요. “아이고, 우리 가정은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거는 예수 안 믿는 거예요. 그거는.

 

그 행복한 가정에 무슨, 마태복음 10장에서 집안 식구 원수니라는 말씀이 어디에 대응이 되겠어요? 무슨 원수가 웃으면서 친한 원수가 어디에 있습니까? 정다워서 우리 헤어지지 말자고 하는 원수가 어디에 있어요? 무슨 다정한 가운데서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나, 며느리가 시어머니하고 싸우고, 자식이 부모하고 싸우고, 자식하고 부모하고 싸우는 것은 유산문제 빼놓고 어디에 있겠어요? 형제가 형제랑 싸우고. 그건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나 싸우지 뭐 있겠어요? 그 외에는 다 평안하잖아요.

 

이 말은 인간은 의지할 곳은 오직 혈통, 혈육 외에는 의지 할 것이 없는, 그걸 생리, 하나의 본성처럼 이 땅에서는 꽁꽁 단결된 혈통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이 와서 그렇게 조립한 겁니다. 그렇게 조직한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4장에 나오죠. 바로 사탄이 예수님을 테스트하잖아요. 마태복음 8장에서 어떤 제자가 와서 예수님을 따르게 했다 이 말이죠. 따르겠다고 해놓고 약속을 안 지켰어요. 집회 참석한다고 해놓고는 볼 일 있어서 못 온다고 한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왜 못 왔느냐고 하니까, 아버지가 죽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뭐다? 질서 잡힌 것을 혼동케 하시죠. 죽은 자은 죽은 자로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좀비는 좀비끼리 해서 부산행으로 보내버리고, 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입니다. 니는 아버지가 사람으로 보이나? 그런 뜻이에요. 니 눈에는 니 잘 키워주고, 니 공부시킨 부모가 사람으로 보이니? 근데 우리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니가 사람으로 안 보이죠?

 

그렇게 무모한 질문을 해대가지고, 사람으로 하여금 당황시키는 그 질문을 해대는 예수님이 사람으로 안 보입니다. 결국 제거대상입니다. 어디 안정된 세계에 호작질을 하러 와서, 시카고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시카고강의를 많이 해서 어디인지 모르지만요.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아니, 뉴저지강의 첫째 시간에 했구나. 유대인들이 침착한 사람이에요. 72명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의 개인의 의견이 진리를 통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서 거의 만장일치 아니면, 만장일치로 합의되지 않으면 결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만장일치로 죽이기로 결정했습니다. 72명 뿐만 아니에요. 거기에 참석했던 모든 군중들도 예수님의 가치를 어느 정도보다 더 못한 것으로 봤느냐 하면, 강도바라바보다 더 못한 것으로 쳤다 이 말이죠. 이건 뭘 의미하느냐 하면 모든 인간은 각각 개성 있다고 NO! 다양하다고 NO! 갑가지 영어를 씁니다. 모든 인간은 각자 환경이 다르다고, 서로 다르다고, 의견 소통이 안 된다고요? 아닙니다. 그들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걸 집단적 ONE, 1이에요. 단체 1이에요. 그래서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개인 심판도 없어요. 모든 것은 딱 하나, 단체지옥이고, 단체구원입니다. 하나로 봐야 해요. 인물보고 뽑는 것이 아니고, 인물보고 절개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해부를 해버려요. 해부를 해서 로마서 8장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를 찾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이쪽으로 분류를 합니다. 영이 있으면 이쪽으로 분류를 합니다. 아, 참 냉정합니다. 정말 냉정합니다.

 

왜 그렇게 냉정 하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 구원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게 복음이에요. 인간은 자기 구원에 어떤 것도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와 그리고 2000년 교회와 구원파 부터해서 모든 것이 이단인 이유는 딱 이 한가지입니다. 자기구원에 보탬이 되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시도하게끔 유도한다는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짜로 만든, 세상 안에서 돌아다니는 삼위일체. 세상 안에서 돌아다니는 천국, 지옥 개념. 세상 안에서 돌아다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세상 안에서 돌아다니는 성령개념, 복음 개념. 그 안에 갇히도록 하는 겁니다. 세상 안에서.

 

그 갇혀있는 그 안에서와 진짜 진리 안에서의 차이점은 뭐냐, 세상 안에 갇혀있는 성령, 삼위일체의 주인공이 결국은 어디로 소환되느냐, 나로 소환되는 반면에, 진짜 진리 안에서 모든 그 부글거림의 원인자는, 최종적인 한 분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요. 그래서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믿어서 구원받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버지 믿었던 그 믿음을 성령을 통해서 택배로 보내주는데, 아무나 보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추석 선물 다 보내주는 것이 아니거든요. 아무나 보내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하고 이미 창세전에 이야기가 끝났어요.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이루려 함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을 이룸인데, 아버지의 뜻은 뭐냐, 내게 주신 자는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 살리는 이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경우라도 낙오되거나, 숫자 하나라도 착오가 되거나, “아이구, 야 어디 갔노? 바쁘다보니 빠트렸네.” 이런 것 절대 없습니다. 따라서 목회는 주님만 하지, 어떤 목사도 목회 한 적도 없고, 목회는 그냥 세상에서 하는 거죠. 세상에서 하면서 지옥 다 보내는 거죠. 어떤 인간도 인간이 목회해서, 사도바울이 구원한 사람 단 한 명도 없고요.

 

왜냐하면 성령은 사도바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합니다. 인간 쪽에서 성령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데, 그 성령을 누가 보내느냐, 누가 그 제공자냐 있어서 사도바울은 아주 눈치가 빨라요. 쏙 빠집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고린도전서 1장에서 “나는 십자가 안 졌다.” 라고 하면서 뒤돌아서요. “나는 십자가 안 졌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졌다는 말은 십자가에서 뭐가 나온다? 십자가 사건을, 그 내용을, 성령을 통해서 전달하는 그 과정에서, 주 안에서 십자가가 주 외부의 십자가, 바깥의 자기 백성의 십자가로 이렇게 연결되게 되어 있어요. 체인으로 연결되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사도바울은 눈치 빠르죠. 걸릴까봐,, 얻어맞을까봐, “나 십자가 안 졌어.” 하고 빠지는 거예요. “나 보지 마! 나는 가이오 집 외에는 세례 준 적 없어”(고전1:14). 빠집니다. 빠지놓고, ‘아이고, 큰일 날 뻔했다. 사람들이 얼마나 진짜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이게 무슨?’ 세상에! 구원파, 감리교, 장로교, 세상에 이런 게 어딨어요? 이런 게? 왜, 구원파, 장로교, 이런 게 있습니까? 시간을 고수하기 때문에. 그 시간, 옛날에 괜찮은 이론들이 시간으로 형성돼가지고, 우리는 그 시간에서 형성된 그것을 정통진리이론으로 받아들여서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 걸은 거예요.

 

이 말은 “나는 이단입니다.” 라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예 구원파 없애버리고, 통째로 2000년 역사 전체를 구원파로 간주해도 상관없어요. 다 구원파에요. 다 개인 욕망이에요. 지 뭐 한 게 있다고 구원받으려고 합니까? 시작을 자기부터 시작한 것은, 자기부터 시작했다는 점에서 어느 파도 이의가 없습니다. 여러분 구원받고 싶죠? 우리 파에 오면 원활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하나의 예를 들게요. 밭에 작물을 손질하는데, 삽으로 해야 되겠어요? 호미로 해야 되겠어요? 질문 자체가 어처구니없다는 것을 알거든요. 질문자체가.

 

작물, 채소를 가꾸는데 호미로 할까요? 삽으로 할까요? 둘 다 필요하죠. 그러면 호미로 할 때 영생을 얻습니까? 삽으로 할 때 영생을 얻습니까? 둘 다 관계없죠. 인간은 바로 영생을 얻는데 수단을 집어넣으려고 하고, 방법을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우리교회 방법이 제일 낫습니다. 세상에! 방법을 인간에게 하청을 준 적이 없어요. 그걸 맡긴 적이 없습니다. 삼성그룹이나 하청을 주지, 하늘나라에서는 하청 준 적 없습니다. 목사한테 그걸 맡긴 적이 없어요. 진정한 복음을 하는 목사는 할 소리가 이거밖에 없습니다.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한 게 없습니다.” 이거만 증거 해야 돼요. “혹시 여러분 중에서 그런 분이 계십니까?” 이거 확인하라고 목사 세운 거예요.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한 게 없는데, 다시 말해서 나는 천국 가고 싶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물론 지옥도 가기 싫지만. 어쨌든 간에 나는 돈 벌이에 바빠 가지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건 나중 문제로 미루어놨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강제로 납치해가듯이 납치해가셨습니다. 누군가 보니까,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나밖에 모르는 이 세상에 사탄을 보내가지고, 의도적으로 만들어놓고, “니 힘으로 못 빠져나오지? 그지?” 라는 식을 동반해서 통과하면서, 아무도 못 빠져나오는 그 구석을 주님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서, 빠져나오면서 발생된 그 빠져나오는 능력을,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집어넣어주니까, 그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머물게 하지를 않고 자꾸 빼내요.

 

“나와! 이 자슥아!” 질질 끌면서 천국으로 땡기는데, 우리는 우리의 본성도 만만치 않습니다. “11월에 애 결혼식 하고 가겠습니다.” 하고 고집을 부리면서, “좋은 낙을 봐야 될 거 아닙니까? 어디 사업 한 번 벌였는데 소문보고 가겠습니다.” “이리 와!” “아닙니다. 다음 주가 내 생일인데 생일축하 받고 가겠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은 육신의 본성인데, 강력하게 지남철처럼, 정들었던, 그놈의 정이 문제라. 초코파이가 뭔지. 그 놈의 정들었던 세상에 대해서 이걸 쥐고 있으니까 손톱이 다 빠지는 거예요. 지지지익~ 잡아 땡겨도 기어코 다시 가가지고, “나 미워했던 자에게 복수하고 가겠습니다.”

 

“심판은 내게 맡겨라” 로마서 12장 19절의 말씀을 해도 듣지도 안 해요. “내 손으로 부모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해가지고 또 가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나에 대한 복수심에서 바탕이 깔려있는 거예요. 모든 복수에요. ‘날 무시했지? 무시한 놈 이리 와! 내가 성공해서 보여줄게.’ 그러니까 이 얼마나 개인주의입니까? 교회에서 기도하는 사람치고, 기도 내용이 자기 인생역전 기도 안 하는 사람 봤습니까?

 

뭔가 빵구 났던 그 빵구를 메우기 위해서. 보상받기 위해서. 때우기 위해서. 기대수치는 높은데, 그동안 보증서다가 망한 거. 얼마나 남들이 놀리겠으며, 쪼다같이 보증이나 서고. 그 창피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만회하기 위해서, 나는 기도빨로 메웠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다. 결국 인간은 자기가 만든 인형 같은 여호와 삼위일체를 만들어놓고, 그거 지금 자기하고 노는, 혼자 노는 시체놀이하고 있는 거예요. 시체놀이 하는 거예요. 그러 얼마나 재미있으면 살이 찌겠습니까?

 

오늘 강의의 제목을 붙인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의 제목은 뭐냐, ‘장난’입니다. 모든 하는 것이 장난입니다. 제가 뉴저지 강의 마지막 시간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실컷 강의를 다하고, 만약에 죽을 때 되어가지고, 앞에 연세 많으신 74살이신 집사님도 계셨는데, 만약에 죽을 때 되어 주님께서 니 인생이 어떠냐고 묻거든, 제가 이렇게 답변하라고 칠판에 썼습니다. “주님.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나라는 것이 가짜였기 때문에.

 

주님이 부글부글 만들어서 그때그때마다 조립된 자아가, 그때마다 조립된 자아가 계속 다른 다양한 자아로 내 속에서 만들어졌을 뿐이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걸 야고보서 4장에서 인생은 안개니라. 안개가 뭡니까? 안개라는 말은 안개 있다, 그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결국 인간은 자기도 모르면서, 사탄의 질서 잡힌 세계에서, 질서 잡힌 가정에서, 집안에서, 너는 이런 인간이어야 돼. 그래야. 그래야 우리 집안의 가문에 먹칠을 하지 않아. 라는 것을 계속 부여받았기 때문에, 혹시 실수로 먹칠하게 되면 자살합니다.

 

굶어죽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고, 노령연금 못 타서 자살한 것이 아니고, 땡겨서 자살한 것이 아니고, 자존심 때문에. 그 자존심 어디서 형성되었습니까? 어릴 때부터 우리 집안은 이런 집안이라는 것을, “우리 집안은 전부 다 서울대에 갔어. 니는 뭐고?” 이런 것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내 모습 어떻게 볼까?’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어떻게 볼까는 생각 안하고 주님께서는 아예 우리를 죄인으로 봐요. 니가 세리, 창녀, 깡패가 되도 그것을 묻지를 않습니다.

 

쪼개서 성령이 있으면 구원이고, 성령 없으면 지옥이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거 하나님의 아들 아니죠. 로마서 8장10~11절처럼. 성경이 뭐 그리 복잡합니까? 굉장히 간단한 문제에요. 예수님 자기이야기인데. 예수님 자기 이야기인데 복잡하게 된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이야기를 누구이야기로 돌렸다? 사탄의 지배와 통제와 명령과 통치와 압력 하에, 너 죽으면 안 돼! 너 잘되게 하기 위해서, 니 인생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나의 이름으로 할 때부터 드디어 문제는 꼬이기 시작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여호와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자체를 살려보려고 애썼기 때문에 그들이 멸망당한 거예요. 이스라엘은 처음에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그럼 책임을 누가 집니까? 하나님이 책임지는 건데. 막상 이스라엘이 되고 보니까, 본인이 이스라엘이니까 자기중심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남 민족 죽든 말든 나만 안 죽으면 되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거예요.

 

일본 지진 날 때,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고소했습니까? 위안부 했기 때문에 이제 저주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36년 압제했기 때문에 벌 받았다고 했는데, 자 경주 지진 날 때 일본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했겠어요? 지난 번 축구 이겨서 벌 받았다고 이야기할 거예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우리의 모든 행동은 밑에 복수심이 깔려 있어 타인의 눈을 응시합니다. “그래? 니 나 욕했지? 에이씨.” 이런 말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욕 아는 것도 별로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우이쒸, 한 번 두고 보자. 니가 내 무시했제? 내 이렇게 잘 되는 것 보여줄게.” 도대체 누구를 위한 삶입니까? 그 인간 죽어도 죽은 귀신 붙들고 복수할 인간이에요. 인간이.

 

복수 없는 인간 없고, 울분 없는 인간 없고, 분노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뭐, 웃는다고요? 그거 왜 웃는지 알아요? 그게 복수심을 가릴 수 있는 멋진 찬스기 때문에 웃는 거예요. 웃는 게 웃는 게 아닙니다. 모나리자의 미소에요. 뒤에 칼 갈고 있어요. 그래서 모나리자가 명작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명작이에요. 위선덩어리고 가면덩어리로서 멋진 작품들을 사탄이 다 그렇게 만들어놨습니다.

 

사탄은 장담합니다. 어느 누구도 너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거는 사탄이 아주 장담합니다. 그 이야기가 욥에 나와요. 욥에 나옵니다. 하나님 우리 내기합시다. 인간이 자기를 미워해요?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돈 잃어버렸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여기는 그 나를 나는 사랑합니다. 예수 믿는 나를 사랑합니다. 어느 인간이 마귀를 벗어납니까? 예수 믿는 것이 마귀 짓인데.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것이 마귀 짓이에요.

 

구원은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허락 없이, 예상 없이, 난데없이 구원받는 겁니다. 사울이 주님 만날 때, ‘아이구 이거 뭐고? 약속시간 늦었나?’ 그래서 한 게 아니에요. 다메섹쯤 와가지고 또 보고, 한발 걷고 또 보고, 이래 해서 한 게 아닙니다. 난데없이 왔어요. 소경이었습니다. 소경이니까 자기를 볼 새가 없어요. 그냥 보는 것은 주님만 보는 것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거는 이사야 6장에 나온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원래 니만 망한 게 아니고 다 망해요.

 

근데 망하게 되었다는 인식을 한다는 자체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구원받은 사람하고 안 받은 사람하고 사는 것은 똑같아요. 하루 세 끼 먹고, 어떤 사람은 두 끼 먹지만. 다이어트 한다고. 하지만 다 똑같은데 다른 점이 뭐냐 하면, “망해야 되는데 왜 오십니까?” 라고 따지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도대체 뭐 합니까?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안 살려주고? 왜 저를 자꾸 불행에 몰아넣습니까?” 이게 바로 불신자에요. 내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꺼.

 

제가 이렇게 강의하면 또 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는 다 아는 이야기를 자꾸 합니까? 합니다. 여기는 버지니아Virginia거든요. 버진,virgin처녀들. 처녀지역에 살잖아요. 너무 오랫동안 안 봤잖아요. 기초 한 번 닦아놓으시고, 일단 물걸레 한 번 청소해야 되지 않습니까? 잊어버린다고요. 이거 물걸레질 안 하면요, “목사님, 저쪽에서는 구원파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우리는 정통교리로 구원받죠?” 또 호미냐? 삽이냐? 또 들고 나온다니까요. “어느 방법이 우릴 구원하는데 진리입니까?” 또 나온다 이 말이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살아가시는 것은, 어디까지 악랄할 수 있느냐? 체험하라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 악랄함의 의미가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문제지만, 남한테 피해주는 것만 악랄한 것이 악랄함이 아니고, 바로 주님의 몸을 내 몸이라고 여기고, 나한테 집착하는 그것이 주님에 대한 악랄한 짓이 되는 겁니다. 얼굴 이쁘다고 얼마나 평소에 자랑질 해오셨습니까? 그게 악랄한 짓이에요. 왜? 주님이 해가지고 들어갈 것 들어가고 나올 것 나왔는데, 왜 갑자가 그걸 에고ego, 나라는 이름의 명찰로 바꾸어버려요? 주의 몸인데.

 

그래서 뉴저지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죠? 환란이 따로 없다. 부자가 되는 것이 환란이다. 자꾸 내 돈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의 돈인데. 자꾸 내 돈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그럼 그걸 남한테 주지? 아니요. 내 것을 남한테 주면 내가 기부했다는 생각이 드는 그 이유는 뭘까요? 그러니까 주지 말고 부둥켜안고 절대 빼앗기지 말고. 그러면서도 환란을 겪어야 돼요. 이 75억이 왜 자꾸 내 돈처럼 생각됩니까? 왜 내게 이런 환란을 주십니까? 왜 자꾸 이렇게 하셔가지고 저 사람 기도 많이 해서 복 받았다는 그런 오해를 당하게 하시고 이 수모를 당하게 하십니까?

 

왜 주님의 자식인데 그렇게 공부를 잘해서 남들로 하여금 마치 내가 교육 잘해서, 맹모삼천지교 잘해가지고 또 영어로 STA 일등 수석 했다는, 그런 오해를,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됩니까?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3장에 나옵니다. 저 앉은뱅이가 낫게 한 것은 주께서 하셨잖아요? 왜, 사람들은 베드로와 야고보의 경건하심과 신앙 깊으심으로 나은 것으로 왜 자꾸 오해하게 하십니까? 한 4분만 기다리고 파리를 잡읍시다. 이 파리 때문에 쉬어야 되겠어요. 파리 때문에 강의가 안 돼요. 주께서 보내신 파리입니다. 강의 끝내고 잡읍시다.

 

하나님이여, 나를 얼마나 향상시켜주실 겁니까? 우리는 말은 하지 않아요. 이 몸을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맨날 번지르르하게 말은 하지만. 인간은 대가바라지 않고 보상이 없는 것에는 나서는 법이 없어요. 그리고 그 보상, 대가 받아가지고 자신을 응시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은 거예요. “나 봐! 무시했지? 잘 됐잖아?” “누구야! 니 나와 봐! 내가 열심히 해서 복 받아서, 하나님이 나를 믿는 자라고 복 줬잖아. 니는 복도 없지? 지지리 못난 인간아! 지옥에나 가거라!”

 

이게, 첫째시간 결론내리겠습니다. 진리는 어두움이 없이는 진리는 나오지 않는다. 이게 첫째 시간의 결론입니다. 이 짧은 멘트 이야기 하려고 이렇게 길게, 뭐 헛소리는 아닙니다. 다 맞는 이야기인데, 길게 이야기를 한 거예요. 오늘 요한일서 2장에서 왜, 적그리스도를 이야기했고, 앞에 적그리스도 나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어디서부터 왔다? 아까 이야기한 세상으로부터 왔다. 안정된, 정돈된 세상으로부터 왔다.

 

그 이야기를 왜 깔아놨는가, 진리는 바로 그런 것을 휘하에, 하나의 휘장으로 둘러치고 있는 거예요. 갇히는 거예요. 어두움을 갇히게 해서, 어떤 인간도 지 재주로써 어두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는 겁니다. 분명히 해두는 거예요. “동영상 초점이 안 잡히니까 다음 시간에 길게 이야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지막 질문이 뭐냐 하면, 그럼 주님, 우리가 어떻게 살면 됩니까? 우리라는 것을 죄인으로 만들어서 의인되는 것은 십자가로만, 주님의 전문영역이거든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 죄인으로 살면 되고, 얼마나 내가 악랄한지를 생각하세요. 악랄하게 되면 복수심도 날아가요. 너보다 내가 더 악랄한데? 무슨 복수를 해요. 내 돈 떼어먹은 너보다 내가 더 악랄하다고? 이러면 저절로 복수심이 없고. 악랄하다는 말은 결국은 사람의 응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의 응시?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09-29 10:10 
20160912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5-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갇혀 있는 사람을 주께서 하나님의 성령을 보내서 건져냅니다. 자, 그렇다면 건짐 받았으면 됐다. 이래 버리면 개인구원에 빠져요. 나 구원받았다. 끝났다. 뉴저지에서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서울대학 갔는데, 수학정석 볼 필요 없지 않느냐, 정철종합영어 안 봐도 되거든요. 서울대학 합격했거든요. 그럼 성경 왜 봅니까? 구원받았는데. 구원받았으면 성경 볼 필요 없잖아요. 그거는 왜 봐야 되느냐 하면, 구원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을 증거 하는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나 구원 받았다는 것을 증거 하지 말고,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구원을 시켜준 거예요.

 

구원이 하나의 서랍이라면, 거길 열어보면 양말들 있잖아요. 양말들 증거 하라고 우리를 서랍장으로 사용하십니다. 이래 보시면 적당합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서랍장은, 이건 주님한테 의미 없습니다. 그 빈 바구니에, 그 서랍 안에 주님의 것으로 담아야 되는데, 이것을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것으로 담는다 하니까, 사람들이 주님의 것 중에서 괜찮은 것 담는 것으로 오해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바리새인, 사두개인 이 모든 것도 같이 담아야 해요.

 

바로 내가 바리새인이고, 내가 바로 사두개인이고, 내가 왕 바리새인이고. 왕 바리새인이라고 한 말은 허운석 선교사가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내가 왕 바리새인입니다. 자꾸 왕만두 이런 것들이 생각이 나요. 나쁜 것, 그리고 얍삽한 것, 그리고 성경이 지적한 것, 그걸 우리가 마음껏 담아야 해요. 왜냐, 그 지적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온 지적이기 때문에. 그런 지적들을 실컷 담아도 이미 서랍장 자체가 구원이기 때문에, 구원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구원은 어떤 행동도 구애받음이 없어야 돼요. 온전한 자유죠. 온전한 자유.

 

주의 의지로 인해서 발생된 이 모든 상황을 기꺼이 감사하면서 되뇌이면서 그걸 수용하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누가 뭐 폭행을 하든, 때리든, 뭘 하든 그거 관계없이, 그것마저도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걸 받으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그 안에 우리 옛사람도 놓여있고, 그 옛사람에 대한 주님의 가혹한 질책들이 계속 주어지죠. 그 바뀜이 결국 무엇에 대한 바뀜으로 이해되어야 하느냐 하면, 옛사람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주체였던 주체로서, 내가 주인공으로 살아왔던, 주체라는 말이 너무 어려우니까 바꿉시다. 주인공 노릇하며 살아온 거예요. 주인공 노릇이라는 것이 어릴 때 소꿉놀이 있잖아요. 그게 주인공 노릇이에요. 커서도 맨날 그 놀이를 하지만.

 

물론 갑이 되면, 옛날에 했던 그 소꿉놀이를 그대로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을이 되면 못해요. 그래서 을로서 갑을 지향하는 겁니다. 나도 얼른 갑이 되어서 내 휘하에 밑에 사람 부리면서 어릴 때 했던 왕초질 했던 소꿉놀이를 계속 지속하고 싶은 겁니다. 따라서 이 주체로 했던 나를, 옛사람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개체로 바꾸는 거예요. 개체로 바꾸면 뭐가 되느냐, 수동형이 됩니다. 피동형이 돼요. 주께서 귤을 주셨잖아요. 주께서 맛있게 먹게 하셨습니다. 혓바닥이 안 아파서, 이가 안 아파서 주께서 주신 귤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런 태도가 어떤 태도입니까? 수동적인 태도고, 피동적인 태도죠. 아침에 일어나서 주께서 참 잠을 잘 자게 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감사가 시작되죠. 주르륵주르륵 비가 오면 주께서 비가 오게 해주셨군요. 따라서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비 안 맞도록 주께서 주신 우산 가지고 씁니다. 그럼 이 언어활동에 있어서 주께서 주셨다는 말이 너무 빈번하게 들어가도 귀찮아요. 그걸 전부 다 생략을 해보자 말이죠. (( ))생략을 하고 살아가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엄마 돈 도!” 이래 되는 거예요. 간단하죠. “돈 도!” “이 콩나물 좀 깎아주세요.” 이게 전부 다 생략한 현상입니다.

 

이걸 생략을 안 하게 되면, 주께서 주신 몸이 주께서 주신 당신 앞에서 주께서 주신 콩나물 사러 주께서 주신 돈 가지고 사러 왔으니까 주께서 내려온 지시에 의하면 깎으라고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깎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 주께 영광 돌립시다. 이 말은, 간단히 말하면 깎아주세요. 좀 헐값에 안 되겠습니까?입니다.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는 사는 게 똑같아요.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본인이 알고 있는 문제에요. 본인이. 그걸 남한테 과시할 필요가 없거든요.

 

그래서 자기가 주님한테 잘못한 것을 절대 남한테 이야기하지 마세요. 뭐 남이 위로해봐야 위로도 안 되고 해결책 없습니다. 나의 죄를 남한테 알리지 말라. 이건 이순신 장군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죠. 나의 죄를, 내가 죄 지은 죄를 남에게 알리지 마세요. 괜히 그게 주님 의지 않고, 남 의존하는 그것이 버릇됩니다. 의존하는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날 안 도와주면 널 미워할 거야.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갑자기 복수심이 일어날 수 있어요. 니가 뭔데 나를 안 도와주느냐 하는 식이라 말이죠. 그럼 저쪽에서 니가 뭔데 내가 도와줘? 서로가 자기 위주기 때문에 안 되죠.

 

그래서 한 번 정리해보면, 성령은 어떻게 한다? 주체와 객체를 바꾸는 겁니다. 그동안 니 주인공 노릇 많이 했다. 고만해라~마이 묵었다. 바꾸는 거예요. 자, 주체에서 객체로 바꾼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 바꾸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바꿔지게 되면 주인공인 예수님으로부터 지적을 받는 대상자가 됩니다. 지적을 받는 대상자가 되었다는 말은, 이 관계 자체가, 이 관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에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가 된다면, 지적을 받게 하기 위해서 뭘 주느냐 하면 율법을 줘버려요.

 

그럼 우리는 지적받는 대상이 되고, 주께서는 지적받은 대상을 향하여 뭔가 지적하기 위해서 율법이나 산상설교나 사도의 권면과 명령이 뭔가 와야 되지 않습니까? 분을 품되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 사도바울의 의견이 아니에요.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5장에. 그걸 왜 줬느냐, 너와 나의 관계는 하나님의 의의 관계인데, 의의 관계라는 것은 반드시 죄가 형성돼야 거기서 의가 나와요. 주님께서 옥에서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지옥에서 구원이 있고 지옥에서 부활이 있어요.

 

그러면 이것은 우리에게 뭘 의미합니까? 이 땅에서 내가 시키는 대로, 이 땅에서 지옥생활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지옥생활 하고 있습니다. 아까 지옥생활의 제가 멋진 예를 드렸죠. 애 성적 만점 받은 것 하고, 75억 재산 가진 것. 아휴, 괴로워 미치는 거예요. 로또 하면 일등이고, 심심풀이로 했는데 또 되고. 땅 사놨는데 열배 오르고 서른 살 때 시집간다고 했는데 이십대 때 남자 열 명이 들끓어서 골라먹는 재미있고. 이건 뭔 도대체 왜 이런 환란을 주시는지. 떠나야 되잖아요. 우리의 주체와 객체의 영원한 만남은 이 땅이 아니에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

 

하늘나라에 살아야 되는데, 이 땅에서 우리를 고생시키는 방법도 가지가지죠. 자꾸 이 땅에 살면서 환경이 나빠서도 지옥이지만, 환경보다 더 나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자꾸 예를 들어야 해요. 성경의 예를 들어야 해요. 디모데후서 3장 2절을 한 번 읽어보세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이래 됐죠.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죠. 그러면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누가 시범조로 보여야 합니까? 돈을 사랑한다는 계시를 받은, 이미 서랍장, 구원받은 사람이 이 땅에서 보여줘야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의가 구원받은 사람을 통해서 마음껏 발현되어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뭘 사랑하게 한다? 돈이 있어도 또 있고 싶고, 75억 있으면 750억 있고 싶고, 돈을 사랑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이미 형성된, 십자가로 대속하신 죄 용서밖에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첫째 시간에 한 제 말이 맞는 거예요. 어디까지 악랄 하냐, 계속 악랄함을 찾는 거예요. 그 방법을 친절하게도 누가 도와주느냐, 성경 말씀이 도와주니까 우리는 성경 말씀을 늘 묵상해야 돼요. 이것마저 죄였어! 왼뺨 때리는데 오른뺨 돌려대지 않은 이것마저 죄였어!

 

이번 가야산 수련회 때 마태복음 강의했잖아요. 다들 들어보셨으니까, 물어보면 부담되니까 물어보질 못하겠는데, 그런 이야기 했어요. 우리에게 오른 눈이 지금 박혀있습니다. 지금 박혀있는데, 오른 눈이 박혀있다는 말은 분명히 둘 중의 하나다. 하나는 뻔뻔스럽거나, 안 그러면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거나, 둘 중의 하나에요. 왜냐하면 주께서는 니가 오른 눈으로 범죄 하거든 빼버리라고 했거든요.

 

빼버리라고 하니까 안 빼고 버티겠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주님 싫습니다.” 하는 이야기나 아니면, “지은 죄가 없는데요?” 하는 거나. 아무것도 내가 이 눈으로 죄 지은 적 없다는, 둘 중의 하나에요. 그럼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뭡니까? 개무시 한 거죠. 말씀을 개무시 한 거예요. 말씀이 성경책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평소에 돈 벌기 바빠서 말씀에 신경도 안 쓰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데, 성경은 나중이고. 성경 안다고 돈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요.

 

바로 그 삶에 충실 하라는 이 말입니다. “나 살기 바쁜데 성경이 뭔 대수야?” 라는 것을 액자로 만들어가지고, 이거 잘못 붙였어.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하지 말고, 돈 벌기에 바쁜데 이 성경이 대수야? 라는 이걸 액자로 붙여야 돼요. 그래야 가슴에 확 와 닿는 거예요. 이게. 확 와 닿는 거예요. 그래놓고 뒤에다가 디모데후서 3장 2절. 벌써 또 말씀 하나 기억했죠? 확실하게 다가오죠. 성경말씀은 그렇게 외우는 거예요. 위반하면서 외우는 거예요. 위반하면서. 이미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위반했다를 소급해서 딱지 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딱지를 이만큼 묶어야 해요. 성경 본 만큼 딱지는 늘어나야 해요. 그럴 때,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는, 너로 하여금 죄인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이미 구원된 죄인, 이미 구원받은 죄인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재료로 했습니다. 죄인이라는 재료가 있어야 의가 생산돼요. 대추가 들어가야 대추차가 나오듯이, 우리는 죄인으로 들어가야 의인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천국에 가서 면류관을 반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다시 이야기 하면 주체와 객체를 바꾸는 작업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여기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 다시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2장 20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이 기름부음이라 하는 것은 2장 27절에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2장 27절을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죠.

 

뭐, 그럼 목사는 뭐예요? 니는 니 고백만 내놓으라. 목사의 설교는 없어요. 목사의 고백만 있을 뿐이죠. 그 고백을 보고 저건 뭔가 성령의 고백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그건 악령이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방법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말고 방법은 없습니다. 성령이 옴으로써 확실해졌어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아! 방법이 없었구나. 십일조, 주일성수, 방언, 신학공부, 성경공부, 이게 방법이 아니에요.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거는 방법이 아니에요. 어떤 성경 말씀도, 모든 성경 말씀을 이미 주님이 가로채서 주님이 다 이루었습니다.

 

일점일획이라도, 이걸 다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자기보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거는 내 숙제지, 니 숙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왜? 처음부터 인간은 못 지키는 것을 아시는 겁니다. 자꾸 못 지킨다는 것을 아는데, 자꾸 우리는 간음하지 않았다 하니까, 우리가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쪽에서 어떤 의미에서 억지를 쓰시는 거예요. “나는 지금까지 귤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시게 되면, “누구든지 귤을 보기만 해도 이미 먹은 자니라” 라고 억지를 부리시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미리 법을 정한 것이 아니고, 딱 듣고 난 뒤에 고뤠? 이거는? 하고 다시 제시하게 되면, 그런 게 있었어?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따라오려거든 따라와 봐. 도저히 그 갭을 메울 수가 없어요.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 나한테 해코지하는 사람을 내가 일곱 번 용서하면, 정말 주의 합당한 일곱 번이라는 것은, 이건 완전히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베드로가 만약에 그 말을 듣고 여섯 번째 용서하고 일곱 번째 할 때 얼마나 기분 좋았겠습니까? 이제 성질 죽이고 한 번만 용서하면 되거든요.

 

그런데 주께서는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고, 약간 약을 올려버려요. 일흔 번에 일흔 번이니까, 70곱하기70같으면 얼마입니까? 490번. 고집 있는 베드로 같으면 489번까지 갈 수도 있는 문제에요. 이제 한 번만 하면 주의 뜻대로 했다. 한 번만 하면. 십일조 하라고 하니까, 갑근세 떼고 십일조입니까? 집 바꾸는데 월세 전세 차이만큼 십일조 합니까? 전체 십일조 합니까? 이게 베드로의 우매한 질문하고 똑같은 거예요. 주님의 답변은 이겁니다. 너는 용서하지 못한다. 왜? 니가 용서하고자 했기 때문에 니는 용서할 잽이 못된다. 그럼 용서는 누가 하느냐, 이미 용서받은 자가 용서한다.

 

그 뒤에 나온 이야기가 뭐냐 하면, 어떤 신하가 있었는데, 임금한테 빚 탕감을 많이 받았는데, 자기는 탕감 받아놓고 자기 하인이 돈 20원 안 갚았다고 옥에다 집어넣고. 그때 주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진멸한다. 그럼 하나님의 진멸, 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 십자가가 오기 전까지는 지옥이고 천국이고 용서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이 십자가 들이댈 때부터 모든 실체는 그 기준으로 확연해졌어요. 십자가 모르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래 되는 거예요.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이미 저주 받은 데다, 저주받은 것을 일부러 구원하는 것이지, 저주 없는 곳에 저주를 내리는 것이 아니고, 당연히 저주받아야 돼요. 하지만 예수님의 자기희생이라는 그걸로 인하여, 그 저주의 일정한 구역을 만들고, 그 구역에 있는 것을 남은 자라고 하는데, 그걸 교회라고 해요. 저주받아야 되는데, 그들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없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일방적인 예수님의 자기 결정권에 의해서, 저주 받은 사람들 중에서 일부를 자기 천국으로 가게 하시기 때문에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인간의 공로를 탈취시키고 없애느냐 하면, 그 예를 들기 위해서 주께서 예를 든 것이 뭐냐 하면, 바로 강도, 강도는 자기 공로 없잖아요. 세리, 창기, 그리고 거지나사로 같은 경우에는, 거지라도 아픈 거지. 이런 것들. 이런 사람들. 전혀 내세울 것이 없는데, 그들을 하나의 모델케이스, 미국 발음으로 마럴케이스. 모델케이스로서 그들을 뽑아 세움으로 말미암아 거지되어 구원받는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에요. 그러면 서로 거지되려고 난리도 아니에요. 창녀나 깡패 되어 구원받으려고 하면 안 돼요. 전부다 창녀나 깡패 되어서 교회 다 옵니다.

 

이건 뭐냐 하면, 그냥 살아! 니 하는 짓대로 그냥 살면, 뒤에 톡톡 두드리거든 뒤돌아보고 그냥 낚이면 돼요. 낚이면. 그럴 때 이렇게 해야 돼요. 왜 주님 저를 구원하십니까? 화내야 된다니까요. 가진 자의 여유죠. 구원받은 자의 여유. 구원받은 자의 호들갑을 떠시기 바랍니다. 아이구, 제가 왜 천국 갑니까? 속으로 기분 좋으면서. 슬슬 웃으면서. 천국 가면서도 애한테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고, 가정에 불화가 일어날 수도 있죠. 불화 있고 가정이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주여! 이런다고 내가 천국 가는 것 안 좋아할 줄 알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잖아요. 참 말은 쉽다. 그죠?

 

내 자식을 이렇게 어렵게 한다고 해서 내가 주님을 싫어할 줄 알아요? 환란이나 기근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어떤 것도 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8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기름 부었다는 말은, 요청한 적이 없다는, 주문서 낸 적이 없다는 이 말이죠. 그냥 와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냥 와버리면 어떤 차이가 나느냐, 내가 주인공이 됐을 때의 진리와, 주님이 주인공이 되어, 기름부음 받은, 성령을 통해서 왔던 그 주인공이, 그 주인공이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대립되고 반대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나 죄인이라는 모습으로, 내가 곡해한 개념가지고 그동안 복음이니, 십자가니, 성령이니, 사랑이니, 엉터리 같은 그런 개념들을 남발했습니다. 충성이니, 순종이니, 기도니, 그런 것을 했다고 고백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런 □ 분입니다.” 라고 □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집어넣는 거예요. 나를 집어넣어서, “나는 이렇게 해서 죄인입니다.” 하는 이것이 바로 배후에 진짜 주체자가 객체 안에 있는 나를 집어넣어서, 죄인으로 엮어서 주체는 따로 있음을 증거 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문장이 길긴 긴데, 여러분 알아들으셨죠? 제가 이걸 달리 표현할 수가 없어요. 주님이 계시기에 나의 기도가 응답 안 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우리 기도가 응답이 되면은요, 지옥 갈 사람이에요.

 

그래서 기도하다가, 보통 응답이 안 되는데, 기도하다가 응답될 때가 있잖아요? 따지셔야 됩니다. 왜? 주님이여, 기도응답해주십니까? 지금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 말이? 왜? 저의 기도를 응답해주십니까? 왜? 그럼 지금부터 저 혼자 살란 말입니까?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 기도응답 해줬다고 불평하는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니라. 이야기가 참 복잡해가지죠. 히브리서 7장에 나오거든요. 어떤 사람도 기도 응답해주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것,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 기도 응답에 루트는 이미 정해져 있어요. 예수님과 아버지로 이미 기도 응답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우린 뭐냐 예수님의 기도응답의 결과물이죠. 기도응답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뭐가 필요해요? 주체, 객체 바꿀 필요가 있듯이, 그동안 기도응답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 이게 바꿀 필요가 있죠. 그래서 바뀐 사람만 기도응답 받았다고 화나서 따지는 거예요. 주님이여, 제가 기도할 때 응답해주지 말라고 기도했잖아요? 이런 식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말이 굉장히 꼬여가지고 의미파악이 힘들어요.

 

“주님이여, 제가 응답하지 말라고 기도했는데, 왜 응답하십니까?” 주님께서는 “그게 응답이야.” 그러니까 지금 응답이라는 말을, 한 단어를 사용하니까,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주님이 쓰시느냐, 내가 쓰느냐에 따라서 그게 합치가 안 되는 것 같은데 합치가 돼요. 아이고, 말 그만 합시다. 내가 이야기를 끄집어냈어도 너무 심하게 끄집어냈다. 여기서 중지합시다. 어쨌든 취지는 알겠죠? 주님이 결과로써 있어야 되는데, 내가 지금 내가 된, 원인제공자인 나를 끼어 넣게 되는 것은, 이것은 진리에 합하지 않는 그런 것이 맞지요? 라고 물으면, 니가 그걸 아니까 그게 바로 너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작업을 꼬이게 하신 거예요.

 

자, 방금 한 것을 우리가 생각해봅시다. 자, 제가 묻습니다. 기름부음의 결과가 뭐라고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했잖아요. 왜 타인을 의식해요. 타인을. 주님하고 상관하는데 왜 목사 지가 끼어듭니까? 여러분 헌금했습니까? 평소에 니가 보태준 것 있어요? 생활비 당신이 줍니까? 당신이 노령연금 줬어요? 왜, 당신이? 당신이나 헌금하라고? 당신 헌금? 당신이 왜 나한테 묻는데? 왜 교회에 늦게 오십니까? 니나 잘하세요. 니나. 기름부음이 사정이 있어서 오다가 차 펑크 나서.. 그거는 주님하고 나하고 의논할 문제지 당신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니나 제대로 잘 신앙 고백적으로 하세요. 니나. 쓸데없이, 월급 깎아 버릴까보다. 심방 갈까요? 오지 마! 주여, 목짜가, 목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니가 언제 목자야? 목자는 주님밖에 없어요.

 

진짜 목자는 “나는 목자가 아닙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가 주님의 목자에요. 그게 목자 개념이, 주체, 객체가 변함에 따른, 모든 개념의 변환. 그게 뭐냐, 진리 아닌 진리. 진리 아닌 진리 같은 진리. 진리인 것을 위해서 반드시 진리가 아닌 것이 있어야 돼요. 죄 속에서 의가 나오고, 지옥 속에서 천국 나오고,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서 구원이 나오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어느 자리에? 지옥자리에, 저주자리에, 잘못된 개념자리부터 우리는 출발해야 됩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가 있습니까? 바로 정돈된 자리. 조직화된 자리. 권력으로 조직화된 자리. 안정된 자리. 혈통으로. “내 아버지 장례 치르고, 끝까지 효심으로 행하겠습니다.” 효심으로 안정된 그 효심의 자리를, 주님께서는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8:21-22). 바로 그 효심을 찢어버리잖아요. 효심을. 효심해서 뭘 한다고요. 왜 목사님들은 어버이날 맨날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에베소서 6장만 본문으로 설교하고 이 본문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마태복음 8장,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그 본문을 가정주간에 왜 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마태복음 10장 34-37절에 나오는 좋은 본문 있잖아요.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그것, 고부간의 싸우고 하는 그것을 가정주간에 왜 본문으로 삼지 않습니까? 따지고 싶네요. 정말. 발상의 전환이에요. 발상의 전환. 지금까지 모든 개념을 거꾸로 배우신 거예요. 근데 거꾸로 배워도 그렇게 우리가 좋아한 것은 평소의 삶이 내 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소비자가 있으면, 고객이 있으면 장사는 되게 마련이거든요. 이런 내 중심의 고객이 있으니까 교회가 번창하는 거예요. 우리는 삽으로 팝니다. 저는 호미로 팝니다. 각자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천국의 지름길 제공합니다. 이런 것들이 코앞에 있는 거예요.

 

아무도 주께서는 그들에게 하청을 준 적 없어요. 주님 것은 주님 마음대로 성령 주셔서, 성령세례 주셔서 구원시킵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얼마나 다졌습니까? 이렇게 해서 말씀 지키면 메시아 만날 수 있다. 이케요? 저케요? 요케요? 하면서, 십일조는 이렇게 지키고, 안식일은 이렇게 지키고, 백날 하면 뭐합니까? 성령세례는 이방인이 다 받는데? 십일조 한 적도 없고, 안식일도 지킨 적 없고, 할례 받은 적도 없는데, 성령세례 받으니까 에디오피아 내시가 물에 가서 세례 받고, 성령을 받고 나니까 그 자체로 의인되어 버렸어요. 하나님의 의가 되어 버렸어요(행전8:26-40).

 

유대인들이 시기 나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시기 나니까 그 시기 난 분노를 풀길이 없어가지고, 바로 사도바울 니가 로마에서 복음 전해서 그렇다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복음 전했다고 사도바울을 죽이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죽었어요. 본인도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죽은 시체를 성 밖으로 내쳤는데, 이게 또 꿈틀거리네(행전19-20). 파리 어디에 갔어요? 죽은 줄 알았는데? 파리 귀신에 너무 씌여 가지고. 죽었어요. 죽었죠. 그래도 안심 못합니다.

 

사도바울 본인이 본인 게 아니에요. 내가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우겨쌈을 싸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이거는 모조리, 전부 다 성령이 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주 안에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주님이 하신 일이다. 계속 하는 겁니다. 그걸 요한일서에서는 성령이 하지 않고, 성령이 또 나옵니다. 그걸 먼저 기름부음이라 해서, 성령 대신 기름부음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그 당시에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목자, 인간 대 목사의 관계를 완전히 재편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사람 빠져! 그동안 너희들이 기대하고 한 수 배우겠다고 한 인간들 나가세요!”

 

인간들이 있던 목사의 강대상에, 성령을 세워놓고, 기름부음으로 이야기해서 보이지 않는 분 중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신승훈이 불렀던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라~라~라라~♬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에요. 보이지 않는 사랑을 위해서 모든 보이는 사랑에 대해서는 집착을, 기대를 하지 마세요. 남편이고 자식이고 다 그게 나의 집착의 대상입니다.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얻어내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마세요. 그거는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 안에 반드시 뭐가 들어 있느냐, 배신의 자리가 자리 잡고 있어요.

 

이거는 제가 시카고강의에서 제가 했죠? 다 보셨네요? 이야! 이거 괜히 이야기했네요. 물청소 괜히 했네요. 다 아시네? 들어도 몰라요. 들어도 다 잊어버려요. 이렇게 답변이 되죠. 결국 요한일서 2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들에 있어서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항상 세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의 장막 같은 것, 가름막, 적당한 말은 이거에요. 방어막. 진리 휘하에 방어막이 쳐져있다. 이래 보시면 돼요. 그 방어막 안에 갇혀있는 상태입니다. 갇혀있는 상태에서 주님이 오실 때에, 요한일서에서는 이것이 주님의 어떤 모습이냐 하면, 주님이 키가 몇 센티냐? 뭐 몸무게가 몇 킬로냐 그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기능이거든요. 그럼 기능이 뭐냐 하면, 화목제물.

 

다 아신다고 하지만, 진도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화목제물은 제사를 마무리 했을 때. 앞에 있는 제사는 다 했다는 거예요. 앞에 있는 제사가 다 뒤로 넘기고, 릴레이처럼 넘겨서 마지막 최종적인 것이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는 뭐냐 하면 율법 외에 한 의가 있으니 얼마나 하나님이 용의주도합니까? 율법 줘놓고, 모든 것을 저주하게 만들고, 율법 외에 한 의가 있다는 말은, 율법과 한 의를 섞지 말라 이 말입니다. 율법을 지킬 때는 행함이 들어가야 되죠. 예수님의 화목제물 십자가는 행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 예수 믿는 것이 뭐가 돼버려요. 행함이 돼버리죠. 니 믿음 가지고 믿는 것은 행함의 일종이지 믿음이 아니죠. 그러면 그 행함의 범주에 나타나지 아니하는 믿음은, 그건 외부에서 주어져야 되죠. 주께서 십자가 질 때 그 안에 뭐도 이게 옵션으로 들어 있느냐 하면, 택한 백성이 반드시 십자가에 대해서는 믿게 되는 그러한 요인이 십자가 사건 안에 이미 포함이 되어 버렸어요. 하나의 옵션이에요. 옵션. 세트로 되어 있어요. 옛날 tv살 때 화면 말고 안테나도 같이 줬거든요. 그냥 tv줘버리면 백날 해봐야 아무것도 안 나와요. 아까 집사님네 tv에서 심심해서 뭐하나 봤더니 아무것도 안 나와요. 신호가 안 잡혀서 안 된다고 하면서 지 혼자 돌아다녀요. 그러니까 십자가가 백날 코앞에 있는데도 몰라요.

 

근데 십자가가 멀리 있거나, 안 그러면 아예 십자가가 느껴지는 것은, 이건 분명히 십자가 안에 장착된 것이 이미 내 안에 투사됐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에요. 기름부음입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에 의해서 된 사람을 요한일서 2장 19절에서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세 글자로 되어 있어요. “저희들” 이거 참 어렵습니다. 2인칭 복수죠. “저희들” 굉장히 어려운 용어입니다. “저희들” 또는 성경에서 같은 취지로 나오는 1인칭으로 되어 있는, “우리들” 이런 용어를 설명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체가 되어 있을 때는 저희들과 우리들이 누구냐 하면, 내가 있는 곳이 우리들이 되고, 나와 함께 있는 곳에, 내가 주체가 되어 있을 때, 내가 보이는 맞은편에 서있는 것을 저희들이라고 하잖아요. 근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주체가 바뀌었어요? 안 바뀌었어요? 주체가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함께 있으면 우리들이 되고, 주님이 보고 사랑하는 자는 저희들이 되죠. 그럼 주체가 우리가 된 입장에서는 이 저희들과 우리들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게 돼요. 없어요.

 

그래서 성경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저희와 우리들을 집어넣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활동에 의해서 없던 우리들이 새로 생기고, 없던 저희들이 새로 생기는 거예요. 새로 생겼다는 말은 그 뿌리가 자신의 노력이나 행함의 토대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건 뭐냐 하면, 역사 속에 묵시적 존재가 되고,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내가 속하지 않음같이 너희도 속하지 아니했다고, 예수님의 일방적인 어떤 연결 체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관계가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 한 기름부음이에요. 기름부음.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세상 속에 왔다가 가셨잖아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자기를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죠. 근데 그런 고백을 할 때,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서 했거든요. 성령세례 받고. 그래서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그 상황을 반복해서, 계속 이 땅에서 발생을 유발시킵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냐 하면 주께서 주인공이고 우리는 주님에 대한 객체로서의 저희와 우리가 되기 때문에, 주님이 사용하신 우리들과 저희들과 예수님 본인과 연결된 것이 있기에, 모든 성경의 우리들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우리들이죠.

 

따라서 예수 믿은 모임은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 안 믿는 모임도 물론 교회가 아니고. 그 점을 설명하기위해서 누가 19절 한 번 읽어보세요. 19절,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어떤 일단의 사람이 있었는데, 사도가 보기에는 그건 적그리스도를 따랐어요. 적그리스도한테 우르로 나갔습니다. 자, 문제 하나 나갑니다. 그럼 남아있는 그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한 우리입니까? 우리 아닙니까? 우리라고 하면 워치만 니 지방교회입니다.

 

제가 아까 했잖아요. 우리라는 것은 없다고. 그때그때 발생시켜줘야 돼요. 어떤 일단의 사람들이 나가면 남아있는 우리는 진짜 택한 백성이라고 하지 말고, “다음에는 우리 차례다.” 라는 이런 마음의 준비를 하라 이 말이죠. 주께서 나가라면 나가야지, 우리가 뭔데 버틸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 이 말이죠. 자, 로마서 9장 한 번 봅시다. 이건 예전에 했던 설교인데요. 3절,“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 바로라” □안에 뭐가 들어가죠? “저주를” 또 □안에 뭐가 들어가죠? “원하는”

 

또 이것도 액자 해서 이쪽에 하나 걸어놓고. “저주받아 끊어지는 것이 우리 가정의 소원입니다.” 라고 해야 되는데. 어느 교회 가서 이야기했더니만 뭣도 모르고 앞에서 아멘하는 분이 있었어요. 이 세상의 모든 개인구원, 다시 말해서 구원파는 이 본문에 의해서 다 깨져버려요. 구원파보면 이 본문 이야기하세요. 사도바울은 구원 못 받았네. 왜? 구원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고 저주를 원한다고 했으니까. I Wanted 저주! 저주를 원한다. 누구의 뜻이면? 주의 뜻이면. 왜? 자기는 객체기 때문에. 객체가 주체노릇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이미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주인공이 와 있기 때문에, 어디 건방지게 니가 인생의 주인공 노릇을 하느냐 말이죠.

 

나한테 일어나는, 가정에서의 일이나 어떤 일도 주인공이 알아서 일으킨 일이지, 내가 원인되어서 일으킨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한테 실망은 하되 자책은 하지 마시라고 제가 뉴저지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매일같이 우리의 삶은 우리한테 실망하는 겁니다. 근데 실망할 때 웃으면서 하세요. ‘니는 안 돼. 인간아 니는 인간 될 수가 없어.’ 히히히~기분좋아하면서. ‘안 돼! 나는 인간 될 수가 없어!’ 히히히~그게 기름부음입니다.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이고. ‘안 돼! 주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거는 지옥 갈 사람이고.

 

범사에 감사하라. 참 간단한 멘트입니다. 정말 간단한 멘트에요. 한 때 말고 매일 반복적으로. 따라서 그 말씀을 반복적으로 하기 때문에 이 성도한테는 개인적인 성장은 없어요. 말씀의 깊이는 있습니다. 전에 알던 말씀보다 더 내려갈 수 있지만, 더 내려간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구원이 더 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있는 서랍장이 듬성듬성하다가 양말 쪼가리 더 끼어드는 거예요. 이 말씀 몇 가지, 중요한 구절로 요한복음 3장 16절 같은, 그렇게 듬성듬성 있다가, 이제는 남들이 찾지도 않는 시편 끄트머리 구절까지 하나의 삶이 되어서, 내 구원의 증거물로써 여기 가득 차있는 그런 현상들을 주께서 그렇게 합니다. 모심기하듯이 모를 빡빡하게 심는 거예요.

 

우리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시겠다는데, 뭐 할 수 없죠. 그럼 강도는 성경을 얼마나 알았습니까? 강도는 성경 볼 시간이 없었죠. 다만 그 사람은 성경의 결과물을 그냥 획득했으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누구 못지않죠.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요한일서의 주제가 바로 그 사랑입니다. 사랑에 의해서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가치 없는 것으로 짓밟아버리고 나중에는 사탄과, 악마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두려워하느냐 말이에요? 분명히 너는 사랑이 없으니까 두려워한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 영역 따로 있고 생명 영역 따로 있다는 거예요. 옮겼다는 겁니다. 옮겼다는 거죠. 어떻게 하면 안 돼요. 삽이고 호미고 하면 안 돼요. 이미 기름부음 자체가 통보해주는 거예요. 이미 다 해놓고 통보해주는 겁니다. 차 수리 맡을 때, 차 고장 난 사람보고 드라이버 가지고 이거 좀 해죠? 이게 아니고 하이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할머니는 저기 가 계시고, 다 해놓고 “다 됐습니다.” 이렇게 오죠. 요새 하이카 광고 있어요. 할머니가 차 고장 나서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에, 한쪽으로 밀어놓고 젊은 사람이 와가지고, “할머니 여기 좀 계시고 우리가 다 알아서 해드리겠습니다.”

 

천국의 전문가는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다 해놓으셨습니다.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을 주셨고, 성령을 주니까 주체와 객체가 바뀌었고, 바뀌니까 구원받았다. 개인구원 받았다가 아니라 이제부터 할 일이 생겼는데, 그건 뭐냐 하면 모든 개념들을 반대로 생각했다는 것을 널리널리 전파하는 겁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전파하듯이. 나랏말싸미 듕귁(중국)에 달아, 천국 말씀이 지옥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서로 맞지 아니할세, 이걸 어여삐 여겨 내가 성경을 맹가노니 이래가지고 훈민정음이 제작이 되듯이. 그럴 때, “니가 만들었냐?” “아니. 우리 주님이 만들었다.” 그렇게 주님이 만드신 하늘나라를 우리가 마음껏 펼치는 겁니다.

 

우리가 할 것은 바로 주체에서 객체로, 수동형으로 바뀌면서 감사가 아울러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극단적인 상황을 이렇게 생각해놓으시고, 극단적인 생각 놓고, 지금은 그만큼 숨쉴만하니까, 그만큼은 감사가 아니냐? 제가 이야기하죠. 항상 범사에 감사해야 되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 요한일서를 보면서 답답해하지 마시고 느긋한 가운데서, 침 발라넘겨 보면서, ‘도대체 내가 뭐야? 아, 주께서 이런 식으로 만들어놓으셨구나.’ 그렇게 보는 겁니다.

 

다시 19절을 제가 말씀드립니다만, 우리에게서 나갔다 할 때, 그 우리는, 남아있는 우리 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뭔가 적그리스도를 유발시켜서 나가게 하는 그 어두움의 작업과 동반해서, 자동적으로 그 옆에 생기게 하는 것이 우리라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 우리는, 또 다시 구원받은, 거듭난 집단으로 여겼던 그 집단 내에서 또 배신의 자리를 발생시켜서 또 구분하는 거예요.

 

애들 옛날 어릴 때 노는, 지금도 하지만, 바닷가에 가서 하는 놀이가 뭐냐 모래 쌓아놓고 중국집 나무젓가락 위에다 꽂아놓고, 가위바위보해서 이긴 사람이 먼저 모래를 조금씩 옆에부터 파내고, 파내고 하다가 마지막까지 나무젓가락을 쓰러지지 않게 하는 애가 승자가 되잖아요. 이긴 사람한테 뭐든 다 해준다는 내기를 걸고 하잖아요. 그렇게 주님도 남은 자의 마지막에, “우리끼리만 남았습니다.” “아니 멀었어.” 또 갈라내고 또 갈라내고.

 

결국 남은 자는 누구밖에 없느냐, 예수님의 몸밖에 없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에요. 지체기 때문에 머리에서 부어주는 성령이 저 마지막 실핏줄까지 다 도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도달된 결과가 뭐냐 하면, “콩나물 값 좀 깎아주소” 이거라 말이죠. 생략된 것이 많지만. “아이, 좀 깎아주소” 이거라니까요. 이게. 뭐 이야기 다 붙이면 문장이 아주 길어져요. 아주 코미디가 된다니까요. 구봉서가 아들 이름 짓는 것처럼. “김 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그렇게 번거롭게 되어버리죠.

 

우리라는 것은 내가 속한, 내가 주체가 된 우리 집단이 우리가 아니고, 나를 반대한다고 저희가 될 수 없고 예수님 중심으로 해서 그때그때 우리가 나오죠. 여기서 잘렸는데 딴 데 가서 그 우리가 성립한다면, 우리나 저들이나 주님 안에 있다면, 어디가도 같은 우리잖아요. 백지영의 노래에 나오잖아요. “같은 하늘 다른 곳에 있어도 부디 나를 잊지 말아요.” 슬퍼하지 마세요. 같은 하늘에 같은 주님 안에 있다 이 말이죠.

 

그걸 누가 가르쳐줘요? 기름부음이. 성령은 도대체 역할이 뭐냐, 그냥 니가 있음이 주님의 사랑의 결과니라. 우리가 매일같이 돈 번다고 잊어버리고, 놓쳐버린 그것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내 건데 왜 가져갑니까?” 라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유발해가지고, ‘아차, 아차, 이러면 안 되지. 내 것이 아니지. 내가 주체가 아니지. 내가 객체지.’ 하고, 그 자리에서 감사를 유발시키는 작업이 계속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09-29 22:49 
20160913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6-이 근호 목사

오늘 본문은 요한일서 2장 22절 보겠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이렇게 나와 있죠. 성경을 이렇게 보지 않고 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들의 느낌이 뭐냐 하면 인격을 모독한다고 저한테 많이 해요. 근데 제가 인격을 모독하는 이상으로 성경이 인간을 모독합니다.

여기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자체가 모든 종교에 대한 모독입니다. 인간모독이죠. 사도요한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믿고 싶어도 성경내용 전체가, 모독, 모독, 인격모욕으로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참 성도는 성질도 좋아요. 이렇게 모독하고 모욕하는데도 이걸 기어이 참고 이걸 받아들이니까. 원래 성격이 좋은 건지, 아니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러는지 분명히 둘 중의 하나일거예요. 사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그냥 순하게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격을 모독할 때에, 여기에 우리의 인격 모독이라고 제가 이렇게 접근하는 이유는 인간 나름대로의 원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걸 제가 쓰겠습니다. 새로운 매직에다가 새롭게 쓰겠습니다. 행복입니다. 이건 영어로 자신 있습니다. 해피HAPPY, 행복. 이건 본심이고 본능이죠. 행복에 대해서 이유를 물으면 그게 또 인격 모독이 되고. ‘에구, 행복 하고 싶어. 해피하고 싶어.’ 행복은 감정적으로 어떤 감정이냐 하면, 유쾌한 감정. 또는 상쾌함. 상쾌한데 행복 안 할 수가 있습니까? 상쾌, 유쾌해요. 근데 상쾌, 유쾌인데 사람이 늘 상쾌하고 늘 유쾌한 것이 아니죠. 다시 말해서 인간이 늘 행복한 것은 아니죠.

그럼 행복 원한다는 것은 유쾌함과 상쾌함을 맛보고 그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그렇게 됐으면 하고 그것을 원하고 있죠. 그것은 뭐냐 하면, 이건 크게 쓰겠어요. 우울, 또는 우울감. 아휴! 우울해. 이렇게 우울한 가운데서 인간은 비로소 상쾌를 고대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남들에게 ‘나는 행복 하고 싶어.’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목적과 기대가 이게 전부 아니겠어요? 그런데 상쾌하고 유쾌하잖아요? 상쾌하고 유쾌하게 되면 이 상쾌 유쾌가 오래가지를 않아요.

어떤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불안감이 생기고, 불안감이 생기면 상쾌 유쾌가 5분 지속되다가 다음에 도로 어디로 내려갑니까? 우울해져요. 아, 이거 또 지진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경제가 나쁘면 어떻게 하나? 주식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우울하게 되니까 또 상쾌한 것과 유쾌한 것을 기대하게 되고, 그것을 남들에게 “나는 행복 하고 싶어요.” 이렇게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만약에 성경을 이야기 않고, “여러분들에게 행복을 주시려는데 한 번 들어보시렵니까?” 그러면 내가 원하는 바가 행복이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모르지만 뭐 분명히 객소리겠지만 뭐 이야기나 해보소.” 관심 없으면 고개 핵 돌리고. “뭐 이야기나 해보소.” 안 들은 척 하면서 다 듣고. 왜? 내가 원하는 것이 행복인데,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복하게 살게 해준다는데, 그걸 마다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야기하죠.

그렇다면 내가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여러분들의 상쾌해지는 방법을 알려드린다면 인격모독이겠습니까? 인격옹호겠습니까? 인격모독이 아니고 옹호해주는 거죠. 근데 성경은 뭐라고 했죠? 이거는 뭐 대놓고 인격을 모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우리가 기대하는 행복을 누가 알아요? 뻔히 하나님이 알죠. 이걸 지워버리는 겁니다. 너희는 이걸 원하는 것을 알거든? 알고 내가 본격적으로 인격모독에 나선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행복과 대척지점에 있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보고 성경을 묵상하고 좋다는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에요. 제대로 성경을 알고 보는 것과 안 그러면 성경을 보면 내가 원하는 행복 줄 줄 알고 보는, 성경 자체를 오해해서 보는 것. 그래서 설교나 강의하고 난 뒤에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인격모독을 당했다는, 그것도 공개적으로 노골적으로 당했다는 찝찝한 기분이 들죠. 그러면 두 번 다시 보기 싫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행복인데, 원하는 것은 제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니까. 제 이야기는 싫어하면서 성경은 또 본다고요.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다른 것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해놓고 오늘 본문 22절을 봅시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이것은 이미 우리의 행복하고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죠. 행복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를 제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상쾌함과  유쾌함과 분명히 상관이 없어요. 그럼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왜 우리가 들어야 합니까? 나는 행복을 원하는데, 행복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왜 들어야 돼요?

그 이야기가 뭐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야기, 남의 집 이야기를 우리가 왜 들어야 하죠? 남의 집 이야기를. 우리집이야기 아니고, 뭐 시카고 어떤 집의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싸웠다든지, 좋다든지, 하는 그 이야기를 내가 왜 들어야 합니까? 내 행복과 무관한데. 내가 원하는 것은 행복이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야기인데.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사도로서 아버지와 아들이야기 한다는 것은, 너희들 자리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거기다가 개입시키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이 관계는 창세전부터 주어진 관계입니다. 창세전이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내가 없을 때, 여러분들이 없을 때, 우리 인간이 없을 때, 개구리하고 코스모스하고 코끼리가 없을 때, 해와 달과 별이 일체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 계신 분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너희가 들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우리는 그것조차도 인격모독으로 다가오죠.

주님이여, 난 남의 이야기 별로 좋아한 적 없습니다. 나는 내 이야기하기도 바쁜데. 내 이야기도 지금 어떻게 우울한 감정에서, 어떤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조치를 해주시면, 이 우울한 것이 상쾌함으로 바꾸어지면, 뭐 바치지 말라고 해도 바치고, 봉사하지 말라고 해도 봉사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해주셨다면, 사람이 양심이 있지. 받은 것이 있으면 보답하는 것이 양심인데, 행복만 준다면, 뭐 아들 아니 아버지의 이야기라도, 뭐든지 듣겠습니다. 우선 행복하게 해준다는 조건을 주시고, 그 다음에 이 이야기 들으라면 듣겠습니다. 이렇게 듣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전제가, 토대가 뭐로 깔려있습니까?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토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창세 이후에 만들어진 나의 행복을 돗자리 깔듯이 깔아놓고, “신이시여! 이거 채워주세요.” 이렇게 돼버려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유명한 단어가 뭐냐 하면, 참 이거 유명한 단어 하는데 전화가 와버리네요. 하나님의 주권, 또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입니다.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이거 사탄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자체가 사탄의 주권이에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은 사탄이 통제하고 통치한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고 할까요? 그것은 자기 장래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 장래가 궁금해서 미쳐요. 왜냐하면 지금은 우울해요. 하지만 우울하다고 해서 포기할 인간들이 아닙니다. 행복은 저 산 너머 무지개 피는 그곳에 있을 거예요. 그러면 기다리든지, 내가 찾아가든지. 산 넘어서 바다건너서 찾아가든지 뭘 해야 해요. 행복을.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가 지금부터 무척 궁금해 해요.

만약에 내가 장차 불행하게 된다면 여기서 수정작업 들어갑니다. ‘아, 내가 종교를 바꾸어야 되겠구나.’ 그러나 내가 행복이 보장된다면, 나는 지금 이 노선을 고수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고 보면 눈만 뜨면 사나 죽으나 결국 뭡니까? 내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느냐? 그 목적과 그 목표는, 저는 포기할 수 없어요.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이 있데요. 제가 봤어요. 불행을 목적으로 한다면 절대로 하지 않아요. 그러나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그런 것을 기대한다는 자체가 창세 이후에 발생되는 관심사지, 창세이전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창세이전의 관심사는 뭔데? 나의 행복 아니야? 행복 아니에요. 그럼 내가 잘 되는 것? 아니라는 말이죠. 내가 천국 가는 것? 아니에요. 그거는 내가 없을 때의 이야기에요. 내가 없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데, 자꾸 나를, 나를, 나를 집어넣어요. 내가 없을 때 누가 있었는가?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어요. 성령님은 그걸 보조하고. 그러면 우리가 마땅히 피조물이라면, 피조물인 본인 생각은 접어두고 창조주의 뜻을 따라야 해요. 그럼 창조주의 뜻이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받아들이면 그게 하나님의 창조에 흡족한 것이고,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그게 거룩인 겁니다.

그렇게 기존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자. 거룩해라.” 라는 이야기가 나의 행복 때문에 이게 방해받는 거예요. 나의 행복 접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그게 저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이래 되어야 될 거 아닙니까? 분명히 시작한지 몇 분 안 됐어요. 근데 이 이야기만 해도 벌써부터 인격모독이라고 간주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퉁명스럽게 이야기해요. 내 말이 틀린 게 없으니까. “흥! 이 목사님은 딱 들어보니 하나님의 주권이네?” 뭐 들었다고. 이 하나님의 주권이 사탄의 주권이라니까요. “기껏 해봐야 우리가 뭐 하나님의 주권사상이잖아?”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사탄의 주권사상이라니까요.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바로 칼빈과 루터의 칼빈주의 사상에서 나온 거예요. 그거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거는 정보고 이론이에요. 그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극대화한 것이 바로 이슬람교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딱 하나에요.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라는 것은 우리말로 번역하면 하나님이에요. 알라는 신이 아니고 그들의 하나님이 알라에요.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하나님은 위대하다는 거예요. 근데 제가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하나님이 위대한 것이 아니고 여자가 위대하다고. 하나님이 위대하다고 해서 사람 죽이고, 무슨 그런 하나님이 있어요?

하나님은 위대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모든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사탄의 주권이에요. 그러면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어디에 있느냐, 사탄의 주권의 범위 안에서 싸워야 돼요. 싸우고, 감추어진 겁니다. 감추어진 거예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유사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우는데, 마귀가 그렇게 한 겁니다.

"지금 너희들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돌아간다." 얼마나 듣기에 믿음 좋은 이야기입니까? 뜻대로 돌아간다면, 그럼 여기 매직이 있는데, 매직을 내가 돌리는 것도 주의 뜻입니까? 주의 뜻입니다. 그럼 내가 말하는 것도 주의 뜻입니까? 주의 뜻입니다. 자, 여기서 뭐가 빠졌어요? 우리보기에는 주의 뜻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믿음이 좋죠? 그런데 뭐가 빠졌느냐 하면,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이 빠져있어요.

자, 여기 귤이 있습니다. 둘 중의 하나니까 답변해보세요. 이 귤이 나타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귤이 있다. 이게 1번이고. 2번.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귤이 있다. 어느 것이 맞습니까? 2번이죠. 그런데 2번을 이야기하는 교회를 제가 본 적이 없습니다. 전부 다 1번을 이야기합니다. 왜? 납득이 되니까. 나 있고 신이 있는데 신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것도 스스로 보기에 대견스러워 미치는 거예요. '미쳤어! 미쳤어! 와 이리 믿음이 좋아?' 거기다가 "신의 주권을 알았으니 신자입니다." 이것까지 쳐주니까. 저절로 행복이 오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요한이 말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인간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모른다는 겁니다. 왜? 감추어졌으니까. 누가 오기 전에? 직접 아들이 오기 전에, 독생자가 오기 전까지, 너희들이 알았던 신과, 신에 관한 신과, 신의 존재와 신의 활동과 기능과 전능하심과 위대하심, 모든 성경에 나오는, 시편에 나오는, 모든 도, 용어들이 자기한테 와서, 그 용어들이 다시 자기로부터 나와서, 자신이 뜻을 가지고 다시 내뱉어서 형성된 모든 신학체계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일체 들어있지 않다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기관이 바로 유대나라입니다. 여호와 있죠. 율법 있죠. 십계명 있죠. 안식일 있죠. 할례 있죠. 그리고 그들이 행하는 모든 법은 제사법이고 모세 율법에 나왔잖아요. 뭐가 없어요? 뭐가 딱 없습니까? 이거는 사도바울이, 나중에 사도행전을 보세요.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뭐를 증거 했던가요? "여러분 율법 믿으세요. 안식일 지키세요." 그 이야기했던가요? 사도바울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방인이었던가요? 유대인이었던가요? 유대인이죠.

유대인은 뭐냐 하면 신의 주권이에요. 여호와의 주권이었습니다. 자, 이제 제 말 이해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하는 그것을, 예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너그('너희'의 경남방언)애비는 악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화가 너무 났어요. 완벽에 완벽을 기했습니다. 행여나 하나님의 일에 누를 끼칠까봐, 영광 못 돌릴까봐, 철저하게 말씀 지켰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을 비난할 때, 그냥 비난한 것이 아니고, 모세 율법에 근거해서 비난했습니다. "모세의 법에 당신은 모세의 법을 어긴다."

그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딱 이야기하십니다. "너희들 정죄할 자가 내가 아니야. 물론 나도 정죄하지만, 먼저 너희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세가 너희들을 정죄할 거야. 왜? 모세는 나를 겨냥했는데 너희는 나를 비켜갔어." 모세율법과, 법에 대해서 마치 자기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한 겁니다.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낫게 했죠. 하필이면 안식일에 낫게 했죠. 제자들이 밀밭사이로 갈 때 이삭을 잘라먹은 것도 안식일이죠(마12장). 그때 유대인들이 다 지켜본 거예요.

지켜보면서, 안식 법을 어겼으니까, 안식 법은 에스겔, 예레미야에 보면 영원한 법이에요. 안식일 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래서 안식 교인들이 예수도 믿고 안식일도 지키는 거예요. 바보도 아니고, 진짜 이건 뭐, 마귀 들렸으니까 그런 짓을 하겠죠. 유대인들이 바로 그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죠.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는 것. 그러니까 이미 홍해로부터 은혜를 믿고 받았으니까 값을 해야죠. 값을. 은혜 받은 값을 해야 내 백성 한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값을 못해서, 예레미야에 보니까 안식일을 못 지켜서 매 맞았으니까, 유대인들은 과거가 교훈을 주어서 그들은 특별히 안식일에 고난도 많이 해요.

왜냐하면 예레미야에 보면 "너희들이 안식일에 그렇게 놀면 되느냐? 고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지." 그러니까 마태복음 6장에서 바리새인의 주특기가 뭐냐 하면, 구제전문가들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성전에서 바리새인이 기도하는 내용이 나오죠? 구제하고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십일조 모아서 뭐하는 줄 알아요? 구제해요.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아요. 그 아이디어가 고만고만해요. 특별한 아이디어가 없어요. 유대인들이 했던 짓을 오늘날 교회가 그대로 하는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거기에 대한 무슨 하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거기에 무슨 하자가.

어제 오신 그 분이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은 딱 한가지에요. "구원파에서는 죄 짓지 않는다는데, 목사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그 질문 하러 왔을 거예요. 요한일서에 나오잖아요. 요한일서 5장에 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유병언이가 이거 주장했잖아요. 그래서 아들 이백 명인가 사백 몇 명인가 죽였잖아요.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따라서 회개할 필요 없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기존교회는 몰랐던 건데, 우리는 알았으니까 우리한테 나오고 해야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게 개인구원이라는 거예요. 개인구원. 근데 개인구원이 문제라고 누구하나 지적하는 사람이 없어요. 왜? 기존교회가 다 개인구원가지고 영업하고 장사하기 때문에. 근원적인 문제가, 아버지와 아들하고 해야 되는데, 현재 우울증에 있는, 지금 우울감에 젖어 있는 내가, 이 땅에서 지금은 우울하지만 천국에 가서 행복하자는 거예요. 해피니스Happiness. 영어 막 쓰자. 해피니스, 행복하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망이 있는데 왜 내가 포기하겠어요? 그 소망을 찾아서 어디로 온다? 소망 찾아서 교회오고. 더 확실한 소망 찾아서 구원파에 가고. 정보가 더 확실해보이니까. 그럼 그 가는 방법이 뭐냐, 성경구절가지고 수집하면 되지 뭐. 어느 구절이 정확합니까? 어느 구절이 더 정확합니까? 지금 성경구절문제가 아니고, 교리문제가 아니고, 해피니스 문제거든요. 나는 행복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무슨 창세전에 행복이 어딨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뜻만 이루어지면 끝나는 거지. 거기에 내 행복이 왜 끼어듭니까?

고급식당에 가면 손님들 가운데, 그런 일은 별로 없습니다마는, 약간 짜증나는 일은 그거에요. 뭐냐 하면 손님들 이야기하는데 웨이트리스가 팔 뒤로 하고 물 쭉 따르면서, "뭐 더 필요한 거 없습니까?" 라고 할 때, 지금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지 마세요. 필요한 거 없으니까 말하지 말라고. 지금 한창 이야기하는데 흐름 다 깨진다고." 왜 자꾸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끼어듭니까? "혹시 영광 돌리려고 하는데요?" "가만있어. 내가 알아서 영광 돌리고 해." "거룩해드릴까요?" "선악과 따먹어놓고 무슨 거룩이 돼?" 피 뿌리면 거룩 되는데, 히브리서 보세요. 거룩은 피 뿌림으로 거룩을 얻었노라고 되어 있어요. 하여튼 그런 구절들은 눈에 안 들어오는 모양이라.

피 뿌림이 남아 있으면 누가 봐도 거룩이고. 세리든 창기든 거룩이고. 피 뿌림이 없으면 뭘 해도 오염된 더러운 거예요. 왜 그런 구절들을 선택적으로 배제하고 선택적으로 골라내느냐 하면, 노림수가 ‘지금은 불행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를 버릴 리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분명히 행복하게 하실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거는 이미 유대인들이 테스트해서 실패로 끝난 거예요. 성전지라고 해서 성전 지었죠. 십계명 지켰죠. 안식일 지켰죠. 하라는 것은 다 했어요. 다 망했어요. 하라는 것 다 했다가 다 망했어요. 

다 망했다는 소릴 들을 때마다 늘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박미선 이봉원이 생각이 나요. 15개 사업해가지고 15개 다 망했어요. 지금은 옥중화에 나와서 성공했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이봉원이 보고 박미선이한테 빨대 꽂고 산다고 해요. 이 이야기하니까 중국 조선족은 몰라요. 드라마를 안 보니까. 우리가 망했으니까, 망하면 자기 죄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오기가 생겨가지고 한꺼번에 만회를 하려고 해요. 만회하려고 교회에 오는 겁니다.

“나! 행복할 자격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목사! 당신은 나한테 행복하게 해줘!” 그런데 말씀대로 해버리면 인격모독인데? 그러면 “나는 인격모독 하는 데는 안 가! 나는 행복하게 하는 데에 가겠어!” “행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럴듯하게 플랜카드 붙여 놓은 교회에 가는 거예요. 행복해질 줄 알고. 시키는 대로 다 해가지고. 요케요? 이케요? 해서 다 시키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고 숨겨져 있습니다. 숨겨져 있을 때, 유대인들은 아들을 다른 말로 메시아라고 해요. 기름 부은 자이니까. 얼마나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습니까? 그런데 이사야 53장에 미리 엄포 놨습니다. 보내는데, 보내는 것은 맞아요. 그런데 너희들의 희망? 너희들이 행복? 없어. 보냈는데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네. 알아 못 본 정도 같으면 괜찮아요. 심지어 기피한다니까요. 싫어버린바 돼요.

싫어버린바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인격모독도 그런 모독이 없습니다. “사장님. 왜 저를 싫어합니까?” “무조건 싫어” 이거 뭐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어머님은 같은 며느리 셋 중에서 왜 저를 제일 싫어합니까?” “싫거든.” 여기서 무슨 말을 하리요. 이거 성경용어입니다. 시어머니가 싫다는데? 니 오지 말라는데 뭐 어떡해? 니 유산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어머님. 저 너무 서럽습니다. 같은 며느리인데?” “싫어.”

한 번 물어봅시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이 무슨 잘못 했습니까? 저는 아무리 찾아봐도 이스마엘 잘못한 점을 못 찾겠어요. 그러면, 이스마엘 지옥 갔거든요. 참 인격모독입니다. 성경 그 자체가 인격모독이에요. 자, 에서가 뭘 잘못했는가? 에서는 취미가 있어요. 사냥하는 취미가 있어요. 에서의 잘못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얍삽한 야곱이 형을 현혹하는 짓거리를 했어요. 야곱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에서는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 돼요. 그리고 야곱이 팥죽을 끓일 때 까지도 에서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냥하고 헐떡거리면서 돌아왔는데, 배가 고프다 이 말이죠. 자, 아까 배운 것 이제 써먹을 때가 됐습니다. 불행한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불쾌죠. 우울한 거죠. 그러면 행복은 뭐냐, 상쾌한 거죠. 지금 에서의 기분이 배고파서 상쾌, 유쾌가 아니고, 불쾌한 상태죠. 불쾌한 상태에서 뭘 기대하겠어요? 인간은 반드시 불쾌한 상태에서 유쾌한 상태를 그리워해서 회복하려고 하겠죠.

그때, 코에 뭐가 쳐들어오느냐 하면, 스멜smell, 냄새가 오는데 아주 미치겠는 거예요. 팥죽이다! 저것만 먹으면 불쾌에서 뭐로 바뀝니까? 유쾌로 바뀌죠. 스탑STOP, 스톱은 한국말로 하는 것이고, 영어로 스탑. 스탑STOP! 이제 게임이죠. 야자타임 있잖아요. “내가 형하고, 형은 동생해라.” 그냥 놀이하자는 이야기죠.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한 번 태어난 것은 영원히 먼저 태어난 것인데. 그게 뭐 우리끼리 소꿉놀이하듯 바꿔지지 않아요. 그렇잖아요? ‘어이구, 바보! 내기한다고 이상한 것을 내기해가지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하고 불쾌에서 유쾌로 바꿨습니다. 배부르죠. 기분 좋죠. 근데 그걸 사진으로 찰칵 찍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다는 겁니다. 이거는 함정수사에 걸려든 거예요. 억지입니다. 억지. 억지라도 이 에서를 지옥보내기 위해서 함정을 판 거예요. 그래서 지옥 갈 사람은 아무리 교회 나와도, 복음 알아도 결국 지옥 보냅니다. 그리고 천국 갈 사람은 구원파에, 구구파라고 할지라도 괜찮아요. 마음대로 가라. 구원파 가고, 여호와증인 가고, 다 돌아가세요. 결국은 십자가복음 알고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목회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가 하는 것이 아니고, 목회를 포기한 평신도들이 목회해요. 왜? 애초부터 목회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목회하는데? 나 개판이다. 주님이 찾아와서 그냥 십자가로 건졌대. 이방인에게 성령세례 온 것처럼. 나 예수 관심 없었거든. 예수님이 다 했대. 다하고 난 뒤에, 다 했으니까, 끝. 다 이루었다. 다 이루었대. 어떤 짓을 해도. 이게 목회입니다. 이게 목회에요. 목회한다고 새벽기도하고, 전화하고, 대심방하고, 그게 목회가 아니고. 그거는 자기 영업수완이고. 영업이고요.

목회는 모든 것을 놔버릴 때, 목회가 돼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미래가 보장되었죠. 그거 이야기 미리 해봅시다. 요한1서 2장 25절 누가 읽어보세요.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이미 우리가 예상한 것은 행복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행복에 뭐가 개입했다? 아버지와 아들이야기가 개입하면서, 아버지와 아들만 오신 게 아니고, 뭔가 선물 들고 온 거예요.

아들만 오고 날 믿으라가 아니라, 아예 믿을 수 있는 믿음까지 셋팅 되어 다 온 거예요. 출장뷔페 하는데 젓가락 숟가락도 안 가져오면 되겠어요? 다 가져와요. 셰프까지 다 와서, 요리사까지 다 와서 열심히 음식 만들고 저쪽에서는 서로 히히덕거리고. 이게 출장뷔페 아닙니까? 주께서 출장뷔페 오신 거예요. 오늘 제목은 출장뷔페입니다. 뭐 다 해서 내가 할 게 없어요. 할 게.

믿는 것부터 해가지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죄짓지 않는다는 것 까지 전부 다. 다하는데, 문제는 개인적인 행복을 포기해야 돼요. 왜냐하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집단구원이기 때문에. 개인구원 같으면 내가 믿는다가 성립돼요. 구원파가 침례교에서 나왔거든요. 침례교는 뭐냐 하면, 개인의지를 인정해줘요. 십자가는 코앞에까지 왔고, 믿고 안 믿고는 니 의지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처음부터 개인구원이에요.

이걸 할까? 저걸 할까? 부처 믿을까? 예수 믿을까? 지가 예수가 누군지 안다는 거예요. 알기는 뭘 알아요. 그래! 결심했어! 딴따단따단따~♬ 이휘재처럼. 결심해가지고 믿었어요. 지금 이 개그가 통한다는 것은 20년 동안 개그가 끊어졌다는 거예요. 새로운 개그가 버지니아까지 안 왔다는 거예요. 옛날 이휘재가 개그 할 때, 20대에 살았으니까 다행스럽네요 제가 행복합니다. 선택을 한다는 자체가, 나의 선택입니다. 그게 포함되어서 천국 가는 거예요.

그러면 창세전에 선택은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침례교는 예정을 안 믿습니다. 개인구원이기 때문에, 니 하기 나름이라는 거예요.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지는 그렇게 해놓고 자살해버리고. 하기 나름이다? 뭘 하기 나름이에요? 몰랐는데? 함정수사였어요. 나쁜 짓은 야곱이 나쁜 짓 했고, 에서는 바보같이 걸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했고. 그러니까 사랑이 이 땅에 왔다는 것은, 사랑을 찾고 싶어? 보고 싶어? 얍삽한 짓! 이래 보시면 되는 겁니다. 얍삽한 짓이에요.

얍삽한 짓인데, 이게 어떻게 통하느냐 하면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회사 잘렸다. 좀 이렇게 챙기고 잘려야지. 불의한 청지기처럼 되어야 되는데, 양심이 너무 고와서. 횡령하고 나오셔야지. 그 불의한 청지기가 그 당시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감은, 모욕감이 아니고 모멸감이라도, 뭘 받아도 우리는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면 이 세상은 사탄의 주권이 있었고, 여기서 예수님, 메시아와 전쟁이 일어나야 되거든요. 이사야 53장에서 메시아, 아들을 보냅니다. 자, 감추어진 세계가 이 땅에 오는데, 감추어진 세계가 이 땅에 오실 때,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비유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 생략하고 이 단어만 쓰겠습니다. “뿌리는”

자, 뿌린다는 의미는 무슨 말일까요? 뿌리기 전에는 여기는 아무것도 어떤 흔적도 없었다는 겁니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매 하늘나라 무늬가 발생돼요. 근데 하늘나라 무늬가 뭐냐 하면, 전투하는 하늘나라에요. 완료된 완성품이 아니고, 뭔가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다른 영적세계가 윤곽을, 본체와 본질을 드러내면서, 인간은 배제되고, ‘그동안 우리 배후에 이런 존재가 있었어?’ 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들추어내는데, 그 존재가 죄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요. 죄가 인간을 다루고 있었죠. 근데 이 모든 것이 인간은 행동중심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이야기하니까, 오늘 요한일서 5장에서도 그 개념을 수정해주는 겁니다.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범죄치 아니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누가 말려들겠어요? 예수 믿고 무슨 짓을 해도 죄 안 짓는다고 해서 그걸 자기 행위로 돌리는 사람들, 구원파죠. 이런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노출시킨 거예요.

적그리스도가 옹호하는 구절이 구원파가 적그리스도임을 노출시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겁니다. 아직도 행함이야? 아직도? 그럼 뿌리는 의미는 어디로 날아가 버렸어요? 주께서 뿌린다는 말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모든 게 인간 대 인간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처럼, 하나님도 인격자니까, 다른 사람과 사귀듯이 하나님도 사귀고, 이렇게 인격적으로 교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요한일서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이 악한 자가 너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한일서 2장 14절 끝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라고 되어 있고요. 요한일서 2장 10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절, “그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제가 이걸 시카고강의에서 할 때 소속이라고 했습니다. 소속으로만 표현돼요.

소속이라는 것은 어떤 장충체육관, 창고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창고 안에. 우리가 집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안에 있을 경우에는 안의 영향력을 못 벗어나요. 못 벗어날 것 같으면, 어두움 같으면 어두운 짓을 해야 되고, 빛이라면 빛의 짓을 해야 되는 거예요. 어두운 짓을 한다는 말은 우리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죄가 우리를 마음대로 부리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저항할 수 없었다. 이 말입니다.

저항할 수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게 자연스러운 거죠. 그럼 목사님! 죄가 뭡니까? 아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 이야기에요. 간음, 살인이 죄가 아니고.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모르는 것이 죄라는 겁니다. 그러면 죄 안 지을 수밖에 없죠. 그럼 왜 그걸 모릅니까? 사탄의 주권이 가로막혀있으니까. “왜 자꾸 목사님, 사탄의 주권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주권이지?” 아니에요. 유대인들이 그걸 여호와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미 포장을 다 해놨기 때문에, 그들은 정상적으로 여긴 겁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걸로 여겼어요.

사도바울이 사도되기 전에. 자기가 하는 일이 적그리스도일인지 몰랐어요.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았어요. 잡기만 한 게 아니에요. 죽였어요. 성경 보면 나와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사도바울이 뻔뻔합니까? 자기 하나 때문에, 자기 잘못된 신앙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죽은 사람들 가족들은 어떻게 생활해요? 그 미망인까지 생각해줘야죠. 지가 미망인하고 결혼해줄 것도 아니고. 해피니스를, 행복을 보장해줄 것도 아니잖아요. 지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몰랐다. 나는 그때 주님을 안 만났거든.” 그럼 그 말 한마디 하면 다 끝나는 겁니까?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 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기로 인하여 희생당하고 피해 받은, 먼저 자기 손에 죽었던 스데반 가족의 유족들은 그럼 행복합니까?

스데반 집사 죽을 때 거기에 누가 있었어요? 행정적 책임자가? 사울이죠. 사도되기 전에 사울이죠. 그렇다면 나중에 적어도 인간적이라면, 사도되고 난 뒤에 주스 좀 사들고 친히 먼저 스데반 집사의 유족을 방문해서 사죄하고, “제가 몰랐다고 하는 것이 핑계인줄 알지만, 뒤늦게 와서 유족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의만 더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바탕에는 뭐가 있다? 돈이죠. 얼마 안 되지만 금일봉 드리면서, “나중에 더 후하게 드리리다.” 뭐 강도만난 사람에게 사마리아인이 했던 것처럼. “치유하고 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더 드리겠습니다.” 지가 천막장사해서 얼마 번다고 더 드리겠다고 하는 줄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적어도 인간이라면...., 근데 그런 거 없습니다. 입을 싹 닦아버려요. 사람이라면 자기 책임을 다 해야 한다고요? 책임 다 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어떤 인간도 우리의 죄에 대해서 그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위인은 아무리 백 살까지 산다고 해도 다 모자랍니다. 나로 인하여 피해 입은, 정신적 심리적 보상은, 아무리 그 사람에게 충성을 다해도,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런데 충성을 다하겠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 사탄의 주권 안에 있는 인간들의 선악의 논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자기 안에 평안과 양심이라는 그 평온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기를 학대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마다 또 생각나는 것이, 그런 예를 왜 또 드냐고 이렇게 하지만, 여기는 20년 텀이 있기 때문에, 저는 늘 생각나는 노래가 있어요. 산장의 여인. “그건 옛날 노래죠.” 예. 맞아요. 그 내용도 아시죠? 자기가 과거에 잘못된 것을 속죄하는 의미에서 어딜 혼자서 가는데, 혼자서 가고 또 어딜 가느냐 하면, 산장에 가요. 경치 좋은 데를 왜 찾아가요. 산장에 별장지어가지고 거기서 회개하고요. 실제로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불교신자였어요.

그게 불교입니다. 남에 대한 피해 때문에 자기의 행복이, 해피니스가 깨지니까, 선악적인 체제가 어떻게 보상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보상하고 자기의 행복의 평온을 찾게 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그렇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 거예요. 잘못을 자기 선에서 처리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뻔뻔함이 없어요. 제발 좀 이봉원이 됐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빨대를 꽂을 수 있으면 꽂아야죠. 안 그렇습니까? 남자들이 직장을 잃으면 또 이래요. 미안하다고. 미안할 것 뭐 있어요. 꽂아야지요. 뭐. 좀 이제는 자기 분수를 알아야죠. 내가 결코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 어디까지 악랄할 수 있는가를.

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쁜 짓해서 죄가 아니고, 독생자 예수를, 은혜를 모르는 것이 죄에요. 너무나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를 사랑할 수 없어요. 너무나 자기가 착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예수님은 뭘 준비해왔느냐 하면, 악랄해도 괜찮다는 것을 다 준비해 온 거예요. 악랄해도 괜찮다.

제가 뉴저지에서 버지니아로 올 때, 한식이 그렇게 먹고 싶었단 말이죠. 노스웨스트 국내선 타면서 또 나오는 것이 땅콩, 과자주고, 콜라 or 커피? 내가 아는 영어 나와서 그거 이야기하니까 주더라고요. 아이스는 내가 아는 단어니까. 아이스콜라 먹었다 이 말이죠. 오면서 한식이 먹고 싶다고 했는데, 갈비를 떡 내놨어요. 이게 뭡니까? 주의 약속이잖아요. 영생 아닙니까?

주께서 준비한 것 앞에서는 뻔뻔스러워질 수 있는 요인을 다하세요. 여기 갈비 먹는데 우린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십자가의 공로로 한 겁니다. 자, 문제 나갑니다. 이제는 알아맞히시기 바랍니다. 이 귤이 온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까? 십자가의 피 입니까? 이 안에 십자가의 피가 있어요. 자 보세요. 색깔이 빨갛잖아요. 십자가의 피가 있다니까요. 십자가의 피.

그런데 기존교회는 뭡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은혜를 줬다는 거예요. 그거는 유대교고, 세상종교입니다. 사실은 그거는 세상종교에요. 사도요한은 말합니다. 너희들이 죄지을 수밖에 없는 것을 아시고, 외부에서 투입한 거예요. 독생자를 투입하신 거예요. 아까 이사야 53장에서, 투입할 때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있는데, 어? 못 알아보는 거예요. 알아볼 수가 없어요. 왜? 감추어졌으니까. 감추어진 것은 뭐냐, 뿌려야 돼요.

뿌리게 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배제가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하고 싸우지 않는다. 어떤 분은 그 이야기를 못 알아듣겠다고 하는 분도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하고 상대를 안 합니다. 그것을 우리교회 교인들도 처음에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어요. 나하고 상대를 안 한다고 하니까, 그러면 세상에, 인격모독도 이런 모독이 없잖아요? 나하고 상대를 안 한다는 것은 “나가!” 이런 뜻이거든요. 왜, 어른이 이야기하는데 웨이터가 팔 뒤로 하고 물을 따르느냐 말이죠. 왜, 손님이 이야기하는데 웨이터가 “필요한 것 없습니까?” 하고 묻느냐 말이죠. 면상을 밀어내면서 “저리가! 제발 저리가! 당신 때문에 흐름 다 깨져!”

모든 걸 밀어내고 하는 거예요. 모든 걸 밀어낸다는 이야기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바로 로마서 9장에 나와요.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어두심은, 다른 말로 하면 밀어내면, 그냥 밀어내는 것이 아니고 면상을 대번에 밀면서, “가 있어! 애들 좀 가! 제발 좀 가!” 불순종에 가두어두심은, 그 다음에 762번 호출해요. 762번! 어? 나는763번인데? 앞에 있는 사람보고 너잖아? 근데 왜 날 부르지? 갑자기 부르는데 보니까 강도라. 강도니까 에라, 그냥 가자. 하는데, 오늘 밤에 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832번! 어? 왜 부르지? 832번이 지금 뭐 할 때냐면 모텔에서 장사하고 있을 때거든요. 창녀라 이 말이죠. 어? 날 왜 부르지? 예가 좀 너무 극단적인데. 창녀와 세리와. 세리는 퉤퉤 돈에 침 발라가면서 세면서. 세리가 원래 이중장부를 만들어요. 원래 처음부터 세리에요. 원래 정부에서 5퍼센트 받으라고 했는데, 5퍼센트는 남는 게 없으니까 6퍼센트 받아서 1퍼센트 떼고 5퍼센트 주는 거예요. 그게 세리에요. 그걸 다 알아요. 다 안다고요.

그러나 그 당시에는 학자, 문자를 아는 사람이 얼마 없기 때문에, 나름대로 엘리트를 뽑아서 세리 맡겨가지고 철저히 자기들을 위해, 쉽게 말하면 일제앞잡이죠. 나까무라에요. 나까무라. 한국인 나까무라가 그런 짓 하고 있는 겁니다. 앞장서서 로마총독부에 돈 내라고 하는 거예요. 나까무라인데, 1246번! 호명받아서 나까무라가 간 거예요. 그러니까 그동안 목적이 뭐냐, 해피니스인데, 행복하려면 그 방법이 뭐냐, 돈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니가 오늘 밤 니 집에 구원이 있으리라.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있다고 하니까, 그럼 이 돈은 뭐야? 원래 법에는 두 배만 갚으라고 했어요. 근데 “네 배나 갚고 더 갚겠습니다.” 라고 나오는 거예요. 네 배를 갚는다는 말은 갚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았다!” 이런 거예요. “나 구원받았어!”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돈만 챙기다가 구원받은 거예요. 사람들의 소원이 갑자기 다 삭개오 되고 싶어서. 돈은 돈대로 챙기고 구원은 구원대로 받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죠. 그러나 사실 그것은, 돈이 있다는 것은 나중에 없어질 때의 아픔을 경험하라는 기회를 준 거죠.

뿌린다는 말을 다시 정리하면 없는 겁니다. 없는데, 뿌리면서, 뿌릴 때 지키려고 덤벼드는 사람은 아직도 면상 밀린다는 것을 몰라요. 싸움은, 인간 배후를 유대교식으로, 그런 행함으로 하게 하는 원수가 있어요. 죄, 악마, 사탄, 뱀의 후손, 그것과 여자의 후손으로서의 싸움이 있고. 그 싸움의 결과가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써 승리했느니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처럼(요16:33).

예수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제자들을 배제하고, 이미 단독으로 이겼고, 그 이긴 것을 이제는, 그럼 이겼으면 주님혼자 구원이지 우리는 아니잖아요? 기다려봐. 성령을 보내줄게. 보혜사가 오게 되면, 보혜사는, 이게 우주선 모체하고 떠도는 그것과 연결시키는 거죠. 연결. 도킹을 시키는 겁니다. 도킹 시킬 때, 여기서 교회가 나오는데요. 우주선 캡슐모체하고 여기서 나온 선을 우주선하고 연결시킬 때, 우주선은 한 사람만 있잖아요. 한 사람만 있으면 개인구원이 돼요. 다 교회라는 것. 내가 저 사람 모르고 저 사람이 나를 모르지만, 십자가(우주선모체)를 경유할 때만 형제가 되는 거예요.

왜? 둘 다 못난 사람이니까. 자기 직업자랑, 돈 자랑 안 하고, 전부 다 죄만 자랑하는 사람들만 모여서 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 모임에서는 그냥 이야기하지 않고 십자가를 경유해서 이야기해요. “나도 못났지만 당신도 어지간히 못났군요.” 이게 인격모독이 아니고, 오히려 합당한 성령의 고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워치만 니가 이단인 이유가 거기 있어요.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뭐는 잊어버리자? 십자가 필요 없다. 이게 단독구원이거든요. 단독구원이기 때문에, 나 잘났다는 거예요. 니 잘났다는 거예요. 혹시 여기서 설교할 사람? 설교 잘하면 그 사람은 또 종속되는 거예요. 

설교하는 자체가 죄가 되는 이유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하기 때문에, 뭘 했든 간에, 죄가 가서 의로 나타나기 때문에, 설교하는 것도 죄고, 강의하는 것도 죄고, 헌금하는 것도 죄고. 이 말을 복음 깨나 안다는 사람들이 도대체, 마지막에 다 따라와 가지고 뒤로 돌아 갓! 여기서 딱 걸려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죄고, 이건 죄지만, 죄 아닌 것은 있을 거야? 그 죄 아닌 것이 자기의 행복을 위한 종자 씨앗으로 깊숙이 집어넣어요. 종자씨앗으로.

“내 인생은 망가졌지만 복음은 알았다!” 그 복음 알았다는 것이 자기 인격을 모독하지 말라는 마지막 남은 근거에요. 그럼 제가 또 가만히 있습니까? 그럴 줄 알고 그걸 또 공격한다고요. 그럼 삐져서 그 다음부터는 교회 안 나옵니다. 안 나옵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어떻게 헌금도 죄라고 하느냐? 그것도 성령의 뜻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한 현금을 왜 죄라고 하느냐? 둘 사이의 관계를 자꾸 하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한 곳에 모여 있는데. 216번 호출되게 되면 죄인으로 호출되고, 저쪽 816번 호출되었으면, 만남은 직접 만나면 안 돼요. 주님을 경유해서 만나야 돼요.

주 안에서 부모를 섬겨라, 주 안에서 자녀를 사랑하라는 말이 거기서 나온 거예요. 이 말은 효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녀 사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효도하면 그게 죄가 됨을 익히 알기에. “부모님!” “왜?” “이렇게 봉투 드립니다. 봉투 봉투 열렸네~ 해서 봉투 드립니다. 이 봉투 드리는 죄를 범합니다.” 이렇게 하면, “진희야! 진희 너한테 용돈 받는 죄를 범하노라” 이렇게 되가지고 양쪽은 주 안에서 죄를 범하지 않는 거예요. 모든 게 죄가 되기 때문에 죄를 범하지 않는 겁니다. 이걸 왜 구원파가 모를까요? 그럼 우리는 안다고 치고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09-30 22:45 
20160913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7-이 근호 목사

적그리스도가 뭐냐, 전에 한 것을 요약하면 벌써 사도요한 말 자체가 인격모독입니다. “우리는 몰라도 돼요.” “아니, 니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모르면 니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뜻으로, 인격모독으로 또 나오죠.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가 없으되” 완전히 이거는, 그 당시에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세계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한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아들을 시인하는 자는 아버지가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고 싶으냐, 이건 요한복음 10장에 나온 이야기를 그대로 한 거예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든 왜, 또 아버지를 보길 원하느냐”

그러면 한 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 여기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따로 있고,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소개함으로써 여기 뭐가 있느냐 하면, 자기를 아들로 제시하고 숨어있는 분은 아버지가 되겠죠. 그러면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믿게 되면,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내 방식이 여기서 계속 유효하고 살아있죠. 방법이.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 관계 자체가, 아버지도 숨어있고 아들도 숨어있다면 이 관계도 숨어있겠죠. 그 숨어있는 것이 뭐냐 하면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의 완성이 되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의가 되고, 의가 되면 죄가 없죠. 죄가 없으면 이게 축복이 되고, 축복이 되게 되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수위, 이 하나님의 의의 정도, 본질은 어떤 인간도 이 관계를, 의를, 율법의 완성을 못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율법의 완성 담당자가 아들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일은, 결코 어느 누구도 나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겨냥해서 사람들이 모르는 법을 계속해서 제시를 하게 되어 있어요. 제시하는 것이 뭐냐, 예수님이 여기 계시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말씀 나오죠. 행위 나오죠. 또 기적 나오겠죠. 이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스스로 이루어서 해석해서 만든 의기 때문에, 이 기적과 행위와 말에 대해서 인간들이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지키죠.

왜냐하면 옛날부터 못 지킨 것은 물론이고, 새삼스럽게 예수님의 말을, 지금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숙제하나 더 내주면,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이거 더 지키라고 내줘버리면, 그건 생각도 못한 거잖아요. 이혼증서 써주면 이혼이 된다. 이거는 모세의 법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혼증서 백장 써줘도 그거는 간음이다. 이렇게 해버리니까, “그 이야기를 왜 이제 와서 합니까?” 그런 식이에요. 그 이야기를 이제 와서 해버리면, “우리가 의가 될 수 있는 준비기간이 짧지 않습니까?” 그런 식이죠.

못 지킨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뒤늦게 마지막 때 이야기하는 거예요. 기어이, 기어이 아버지와 아들 관계, 의의 관계에 니가 합세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어이 보여주기 위해서 나타나시는 겁니다. 그러면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예수님께서 홀로 다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떤 사이냐 하면 끊어진 관계죠. 아버지와 아들의 나라와 이 세상은 끊어진 나라죠. 끊어졌다는 말은, 이쪽에서 이어지지 아니하면 이 끊어진 관계는 여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끊어진 관계 속을 이어버리면서, 이 세상, 사탄의 세계, 흔히 말하는 이 세상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속했던, 마귀가 속한 그 세상 있잖아요. 그 세상을 무슨 세상으로 바꾸느냐 하면 아들의 세상으로 흡수통합을 시켜버립니다. 흡수통합을 시켜버리면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내 목숨 끊어지고 안 끊어지고는 영생과는 상관없게 돼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사나 죽으나에 신경 쓰는 이유가 그동안 우리가 마귀한테 매인 것은 죽기를 무서워해서 벌벌 떨어서 그동안 굴복했다는 겁니다. 우리 육신이 굴복한 거예요. 육신은 다른 말로 하면 본능이고, 본능은 생존을 발휘하게 되어 있고 생존의 본능 때문에, 아무리 신학을 했고, 지식을 해도, 그딴 것은 본능 앞에 못 이겨요. 본능 앞에 이기지를 못합니다. 죽인다고 하면 예, 예, 안 믿습니다. 대번에, 0.1초도 안 기다려요. 생각할 것도 없어요. 살려주세요! 금방 나와요. 죽인다는 것도 되지만 다른 말로 하면, 돈 줄게! 예~ 예~ 그것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갖고 있는 육의 본성은 어떤 경우라도 이걸 이길 신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관계를 잇기 위해서는 주님께서는 정복을 해야 돼요. 정복 또는 이김이라고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의 핵심은 이겁니다. “이 땅은 주의 땅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 땅은 인간의 땅이고 하늘만 주의 것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이 땅마저 주의 땅입니다. 이 땅이 주의 땅이라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어쨌든 간에 이 땅을 소박하나마나 나의 땅이고 싶어 하는 생각으로 우리는 가득 차 있죠.

어디가 사느냐? 내가 확보한, 내 소유의 내 땅은 몇 평이냐? 부동산중개소 알아놔서 어느 집이 괜찮은 집입니까? 그게 자리에 깔려있는 것이, 이 땅은 내 땅일 수가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한 적이 없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 이 땅을 이용해야 된다는 것이, 이 본능이 앞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땅은 주의 땅이라고 했는데, 주의 땅인데 내 땅으로 했으니까 이 사람은 살 수가 없죠. 

그런데 주의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 단수가 아니고 복수에요. 사람들이 있습니다. 레위기 26장에 나오죠. 품꾼의 자격으로 삽니다. 그들이 누구냐, 이스라엘입니다. 주인은 따로 있고 품꾼으로 사는 거예요. 레위기 대목을 보겠습니다. 요새는 자신감이 없어요. 26장인지 25장인지. 26장 앞에 25장 마지막 절입니다. 55절,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꾼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여긴 진짜 버지니아다. 성경책을 보잖아요. 딴 데 가면 전부 다 스마트 폰 펴놓고. 그게 훨씬 빠르대요.

자, 머리 좋은 사람은 딱 압니다. 야! 내가 생각하는 구원을 다 배제하고 하나님의 숨겨진 구원만 적용시켜서 구원하는구나. 머리 좋은 사람은 대번에 딱 나옵니다. 뭐 여러분도 머리 좋은 편에 포함되지만. 개인구원이 없는 거예요. 자, 개인구원이 없고 하나님의 자신을 위한 구원이 있다면, 내 개인구원은 없다 정도가 아니고, 이제는 발길로 매일같이 차이는 겁니다. 저리 가! 그거는 니 생각이고. 그런 니 중심의 구원은 내가 생각하는 구원과 섞일 수 없고 배제당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일서는 인격모독이에요. 품꾼이라는 것은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가 객체가 되고, 주님의 하나의 대상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주인님은 따로 있어요. 그래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이 그 말이에요. 예수님이 주체가 되고 나는 주님에 의해서 새로 발생된, 옛날의 내가 아니라, 흙에 살리라 했던 내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주님이 생각한 그 땅에 살리라. 그러니까 노래 바꿔야 돼. 주님이 주신 땅에서 살리라.

이거는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어야 되는데, 이쪽에서 내가 살리라가 주님의 땅에서 살리라로 바뀌려면, 그 안에 반복된 유월절이 도입되어야 하는데, 그 반복된 유월절을 세 글자로 십자가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 유월절을 다시 언급할까요? 여러분 다 아시겠지만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자, 언급할 때 물어볼 테니 답변 한 번 해보세요. 왜 유월절에는 둘째아들, 셋째아들이 왜 가담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맏아들이니까.” 에구, 정답을 미리 이렇게 말하시면 재미가 없잖아요?

자, 그러면 하나 더, 왜 하필이면 맏아들만 그렇게 하고, 이왕 하는 거 둘째아들, 셋째아들도 아들인데, 주께서 아들 다 상대하면 왜 안 됩니까? “오직 맏아들만 인정하기 때문에.” “장자만.” 예, 장자인데요. 제가 원하는 답변은 뭐냐 하면, 창세전에 독생자는 몇 명입니까? 한 명이죠. 바로 장자에요. 예수님의 장자 됨을, 구름 끼면 밑에 그림자 있죠. 창세전에 독생자의 그림자가 이 지상에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면 유월절은 우리 구원하는 사건이 아니고 예수님 됨을 보여주는 모형이고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은 신약의 모형이라고 히브리서에 나와 있고, 로마서 5장에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되어 있고, 영어로 하면 심볼symbol이라고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완전히 인간을 도용하면서도 인간인 우리는 빠져있어요. 이스라엘은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만들어줬기에, 우리가 원하는 이스라엘로 하나님께서는 번창케 해주실 것이다. 시켜만 주이소~ 이래 나온 거예요. 시켜서, 나와서, 그래서 멸망당한 거예요. 

예수님이야기인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다가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이 있다. 이케요? 그 속에 또 이스라엘이 있다. 이렇게요? 그 속에 또 있다. 결국 최후에 남은 자는, 내 아들, 내 장자, 요단강 세례 받을 때 하늘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변화산에서는 뭐라고 한 줄 알아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막9:7).

그래서 하나가 열둘이 되는 관계를 주께서는 성사를 시킨 겁니다. 하나가 열둘이 되는 건데, 요한계시록에 12지파가 나오죠. 1이면 1이고 12이면 12이지, 어떻게 1이 12로 퍼질 수가 있고, 어떻게 12가 1로 수렴될 수가 있느냐? 이건 수학적으로는 성립이 안 돼요. 아니, 말 잘못했는데, 수학적으로 성립이 됩니다. 귤 12개가 있습니다. 숫자로 12죠. 이게 1로 되려면, 숫자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양(12)입니다. 양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질(1)로 바꾸면 됩니다. 간단하죠. 참 쉽죠잉~ 

어느 땅에서 신앙생활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너희 교회가 몇 명이냐는 양을 묻지를 않습니다. 누구 이름으로 모이느냐? “두 세 사람 걱정하지 마!” 두 사람, 한 사람 괜찮아요. 누구 이름으로 모이느냐? “주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게.” 사람들은 그런 소리하니까 참 주님도 바쁘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사람들이 굉장히 걱정해요. 왜? 너무 바쁘게 설쳐가지고. 전국에서 애들이 굴뚝 앞에서 양말 펴놓고 선물 기다리고 있으니까. 택배회사치고 그렇게 바쁜 택배회사가 없어요. 그거 이상하죠. 그래서 어떤 물리학자가 계산을 해봤습니다. 루돌프 사슴이 끄는 썰매의 속도가 얼마가 되어야 가능하냐를 계산해보니까, 시속 40만키로가 되어야 그게 가능하대요. 빛의 속도에요. 완전히 인터넷이에요. 그렇게 돼야 선물을 다 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한테 아무 쓸데없는 계산을 했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요. 왜? 그것을 주께서 유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에베소서 1장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충만”(엡1:23). 유비쿼터스, 어느 곳이라도 내가 없는 곳이 없다. 바로 성령 안에서는 멀리 있다는 게, 그게 필요 없어요. 그냥 충만하다고 이야기하면 돼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하늘에 같이 있어요. 충만한 겁니다.

양에서 질로 바뀌려면 뭐가 날아가요? 개인구원이 날아가죠. 개인구원 없고, 1로부터 다시 보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구원 안에, 같은 구원의 혜택을 입습니다. 다만 뭘 봐야 하느냐, 그 경계선인 유월절, 십자가를 증거 해야 되겠죠.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15년 내지 20년 후에 썼습니다. 확실한 것은 몰라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입장에서, 또는 갈라디아서 편지를 읽는 입장에서는 난해하기가 짝이 없어요.

십자가는 이미 15년 전에 끝난 사건이에요. 십자가 있던 갈보리 요새 가봐야 거기 아랍인들이 장사하고 있어요. 십자가 있던 갈보리 골목에. 안 가봤지만 동영상으로 다 봤어요. 다 있더라는 말이죠. 그럼 십자가가 보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갈라디아 사람들아 니 눈앞에 십자가가 보이지 않느냐?” “안 보이는데요?” “이거 뭔가 이상해? 나는 보이는데?” “어데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면서 뒤에 나온 말이 뭐냐 하면, “니가 지금 행하고 있는 것이 십자가에서 행함이냐 아니면 율법의 행함이냐” 

자, 율법을 행하려면 누가 전제되어야 해요? 내가 여기 하나로 있음을, 내가 여기 있음을 전제로 해야 되죠. 내가 있게 되면 십자가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내 똥배가 보이죠. 내가 보이지 십자가가 왜 보여요? 내가 보인다는 것이 뭘 가려버린다? 십자가가 보인다는 것을 가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여기 있음으로 하지 말고, 십자가의 반복되는 능력의 작용으로, 십자가 증거 하라고 내가 여기 있을 때는, 내가 안 행했는데 행해요. 행하면서 뭐와 결부시킨다? 십자가와 결부된 행함으로써 지금 등장하니까, 행하세요. 행하되 뭘 경유해야 된다? 내가 행했다는 내 주체가 행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주체로 연결되게 되면 어떤 것을 행해도, 헌금을 하던 뭘 하던,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아니, 헌금 하는 것이 죄라면서 왜 갑자기 의가 나왔느냐? 조건이 있어요. 십자가를 경유해서, 그럼 십자가를 경유하면 뭐가 죽는다? “제가 지금 헌금하니까 의죠?” 라는 그것을 찢어버리죠. 어떻게? 헌금하는 것도 죄라고 들어가서 나올 때는 주님이 하신 의로서 나와 버리는 겁니다. 말로하면 복잡한데, 따지고 보면, 뭐 없네? 없어? 복잡할 게 없어요. 그냥 살면 되고, 강조하게 되면 ‘막’글자 하나 붙여서 막국수처럼 막살면 되고. 막국수나 국수나 맨 국수에요. 막 하나 붙었다고 이단이고 그냥 행한다고 이단이 아닌 것이 아니고. 그거 뭐 그냥 쳐서 그냥 막 뽑아내서 시원한 물에 헹궈 먹으면 돼요.

오늘 강의가, 모든 것은 예수님이신 아들의 관계가 이 땅을 접수해서 그 땅에다 그냥 퍼붓는 거예요. 지금도 퍼붓는데, 누굴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성령을 받은 자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관계를 보면서 우리는 알죠. 우리가 이렇게 나 댄 것은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 날 드러내기 위한 것인지 알죠. 자,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을 한 번 봅시다. 요한일서와 요한복음이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제가 설명하기 전에, 잠깐 제가 묻는 형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한다는데 우리는 그리심 산에서 예배합니다. 그런 것이 맞습니까?” 하는 조로 이야기했죠. 그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23절 보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그 다음에 □다. 그 □다음에 뭐가 들어갑니까? “곧 이 때라” 이걸 설명하려면 몇 시간 더 걸려요. 근데 이건 생략합시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지만 주님은 이 세대로 봐요. 이 세대라. “이 때라” 원뜻은 카이로스가 됩니다. 지금 주님이 활동하는, 주님이 개입한 이 때라. 그러니까 예배는 누가 주관한다? 니가 나한테 드리려고 오는 것이 아니고, 너 개인, 나 여기 있어가 아니라, 독생자인 아들과 아버지의 이 관계를, 예배하라는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배하라는 그 말씀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에, 그 주님을 독생자가 대표해서 그것을 성취해서 지상에다, 이 땅에다가 그냥 퍼부어 버리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돼요.

자, 묻습니다. 그렇게 했으면, 여기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다음에 25절이 문제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질문 드립니다. 방금 신령과 진정, 성령이야기 했는데 왜 여자가 메시아 이야기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흐름상 이걸 알아야 돼요. 지금 주고받는 것이 예수님께서는 예배이야기 했고, 예배 같으면 어떻게 예배드려야 합니까? 예루살렘입니까? 그리심 산 가야됩니까? 아니다. 신령과 진정, 다시 말해서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 그렇게 갑자기 장소이야기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성령이야기로 바뀌었죠.  

그러면 성령이야기가 나와야 될 건데, 여자가 하는 말이 “메시아가 와야 된다고 하는데, 메시아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줄 겁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언제인지 메시아가 오시면 알려줄 겁니다.” 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바로 “네가 말하는 바로 그니라” 했거든요. 자 그럴 때 여자가 왜 갑자기 메시아 이야기를 끄집어내느냐 이 말이죠. “예. 알겠습니다. 성령으로 예배드리겠습니다. 예. 제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겠습니다.” 요새 흔히 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여러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휴대폰 끄세요.” 파이프 오르간 우와왕~♬하박국 3장에서 말씀, “성전 안에서는 모든 사람은 잠잠할지어다”(합2:20). 이 멘트 한 번 깔고. 파이프 오르간 한 번 치고, 없으면 그냥 전자오르간 치고. 조용! 이렇게 신령과 진정을 우리가 꾸미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만약 사마리아 여인 같으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면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서 신령과 진정으로 분위기 띄어서 예배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데, 왜? 메시아 이야기를 언급하느냐 이 말입니다. 여자가. 여자가 예수님을 보고 뭘 감 잡았어요? 주께서 내뱉는 말은, 바로 이거는 자기가 알기로 메시아가 와서 가르친다는 말은, 그 이야기를 이미 언급했다는 자체가,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할 게 전혀 없습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내 몫이 아니고, 파이프 오르간 몫이 아니고, 경건하게 옷 입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유발하는 현장이 곧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혼자서 다 합니다. 기다립니다.” 하니까, “니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나잖아.” 여자가 뭘 버려두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여기서 기가 막힌 거예요. 여자가 처음에 뭘 하러 왔습니까? 물 길러 왔잖아요. 자기 본분을 잊어버렸어요. 본분을. 물 길러 왔다는 것은 자기 존재감이 물길을 때 있는 거예요. 근데 물동이를 버려두었다는 말은 뭡니까? 까짓 것, 내 책임이고 뭐고. “야야! 순자야. 니 어디 갔다 왔어?” “물 길러 갔죠.” “니 물 어디에 있는데?” “없어요.” “뭐 이런 게 다 있어?”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메시아를 만난 거는 좋고 물 달라고? 니 물 길러 보냈잖아?” 하면 무슨 말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아차! 하고 다시 돌아가서 예수님 만나고 이럽니까?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물 길러 갔던 그 모든 타이밍이 예수님께서 이미 짜놓은 각본대로 움직였다는 겁니다. 내가 메시아를 기피하려고 해도 기피 못할 팔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놈의 팔자가 무슨 팔자가 되어가지고, 기어이 메시아 받아서 천국 가야 할 팔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드디어 이 무대에,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벌이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벌이기 위해서 땅 위에, 이미 자기 땅으로 접수하시고 그 땅 위에 무대를 설치하시고, 그 무대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뽑아진, 그때 길거리 캐스팅 된 여자가 사마리아 여인이 된 거예요. 

요한복음 4장의 주인공이, 여자 조연으로 이렇게 영원토록 우리 앞에 등장한 겁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고. 등장했어요. 그 현장에 누가 없었습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말씀을 악바리로 지킨다는 유대인하고 말씀 지키는 것 하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발길로 차는 거예요. 저리가! 너희 유대주의자들은 저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뭐냐, 옛날에 우리의 옛 성정이 배척당하는 현상을 동반하고 주께서 우리에게 계속 들이대는 겁니다. 

물 길러야 돼요. 맞습니다. 물 안 먹고는 못 사니까. 그러나 그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에요. 남자 다섯 있었고 지금 사귀는 남자는 여섯 번째다. 그러나 지나가보면 으흠~어깨를 올려야 돼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자한테. 왜? 내 입장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럼 나에게 일어난 남자 다섯은 누구 일입니까? 내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입니까? 주의 일이에요.

여자분들 이 이야기 들으면, 나도 좀 괜찮은 남자 골라잡는 재미로 한 열 명 사귀고 천국 들어가면, 엘리자베스테일러가 그렇잖아요. 돈 되죠, 인물 되죠. 뭐 인물도 점점 더 뭉개집니다마는. 데미 무어, 세상에! 26살 연하남이에요. 돈 되지, 인물 되지, 골라잡아, 애먹이는 남편이 있나, 혼인신고는 말고는 지 맘대로 하면 되고. 그러다 남자가 누나 헤어지자고 하면 돈 한 1억 부르면 챙겨주면서 잘 놀았다고 보내고 다른 남자 또 사귀면 되고. 마돈나. 마돈나가 무슨 뜻이냐 하면 성모마리아라는 뜻입니다. 하여튼 성령을 받았어. 하여튼 복이 무슨 이런 복이 다 있어? 남자 다섯 있었는데 또 사귀고. 얼굴이 되는 모양이라. 그러니까 그렇게 사귀죠.

그런데 어떤 작가가 이런 이야기해요. “도대체 인간은 무슨 저주를 받아서 한 남자, 한 여자만 데리고 사느냐? 신의 저주는 이게 저주다.” 라는 거죠.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 라는 유명한 미국 작가가 이런 이야기 했어요. “한 여자한테 잔소리 듣는 그 아픔은 한 여자만 바라본다는 그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멋있는 말이죠. 한 여자로 인해 잔소리 듣는 아픔은 오직 한 여자만 바라볼 수 있는 그 혜택에 비하면 그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라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깊이 생각하라는 거예요. 사람이 두 여인을 다루는 것이 행복하게 보이나 천만의 말씀이에요. 골치 아픈 거예요. 야곱 보세요. 질투사이에서 그게 진짜 힘들죠. 제가 어떤 아랍사람을 아는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있어요. “아랍 사람은 좋겠다. 여자 네 명까지 둘 수가 있어서?” 그러니까 아랍 사람이 되받아서 말이 “하나도 버거운데, 네 명 한 번 해보죠?” 이게 돈이 돼야 하지, 돈이 없는 인간이 네 명  하면요, 이거는 남자를 바짝 애먹일 판이에요. 감당 안 되는데요. 가만히 생각하면, ‘아! 그렇구나.’ 다 이렇게 나타나죠. 

자, 다시 한 번 해봅시다. 땅이라 하는 것은 옛날 어느 땅이었다? 사탄의 땅이었고 세상이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어디서부터 왔다? 땅에서부터 왔어요. 근데 그것마저 주께서 점령을 했다는 말은, 마음껏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하라. 근데 그것이 누구의 뜻이었다. 아들을 증거 하기 위해서, 너희가 죄인 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탄은 그런 식으로 해서 미움을 받은 거예요. 인간은 빠지고 사탄과 주님과의 싸움인데, 그러면 우리는 뭐하면 됩니까? “성령 보내줬잖아?” “그럼 성령 안에는 뭐가 있는데요?” “사랑이 주어졌잖아.”

이게 요한일서 4장에 나오는데 한 번 봅시다. 조건이 있습니다. 이 조건부터 설명해들어 가겠습니다. 어렵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뭐가 없다? 본 사람이 없다고 하죠. 이것은 요한복음 20장 29절에 나오는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것을, 같은 사도요한이기 때문에 줄곧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게 굉장히 부담이 돼요. 그래서 교회는 뭐냐 하면, “목사님. 내가 신자인 것을 증명해주세요.” 라고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소비자를 계속 붙들어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시면 아마 이런 복을 받을 것입니다.” 라고 해서, 소비자가 원했던 거예요. “우리 가정에 이런 변화가 생기면 신자 맞죠?” 라고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실적과 업적을 손에 쥐기를 원하는 겁니다.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교인들이 그렇게 나오니까, 40일 철야해보라고 한다든지, 새벽기도에 연속 출석해보라고 한다든지, 성경을 한 열댓 번 쓰시면 아마 손가락은 아프지만 은혜는 받을 걸요? 이렇게 해서 마음이 낮아진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자꾸 어떤 결과를 내다보게 되고, 그 다음부터 그 사람에게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죠. 목사님께서 방언을 터지게 하는데 방법이 뭐냐 하면 주기도문을 천 번을 하라고 했다. 실제로 조용기 목사가 시킨 거예요. 뭐 방언해야 성령의 은사라고 하는데 안 되니까, 우리 좀 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니까 주기도문을 천 번 해보라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불교에서 백팔번뇌, 백팔번뇌가 안 되면 삼천배하든지, 번뇌를 삼천배할 때, 한 번 할 때마다 돈을 깎아봐야 해요. 천 곱하기 천하면 백만 원인데, 이걸 복리로 계산하게 되면 이백만원이 돼요. 뭐 새마을금고에서는 이자를 별로 안 주기 때문에 한 백오십만 원쯤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거 해가지고 부흥된 교회가 많거든요. 왜? 행함을 이야기해주니까 복잡한 성경을 덮어도 괜찮아요. 시키는 대로 하면 납득이 되니까. 왜? 납득되게 실적을 만들면 돼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은 실적을, 업적을 줄 리가 없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느냐, 그 기도의 응답을 본인이 만들면 돼요.

자기 기도응답을 본인이 만들어놓고 기도응답 됐다고 우기는 그 작전을 보게 되면 가관입니다. 가관이에요. 본인이 억지로 우기는 그 모습이 가관이라니까요. 안쓰러워요. 주님께 기도를 했는데, 조용한 거 보니까 다 그렇게 했는가 보다. 기도했는데, 주여! 성적 좋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애를 딱 기다렸어요. 시험 쳤는데 배렸어요. 배려서 아, 응답이 없는구나. 하는데, 그 순간 아는 친척이 와가지고, 아드님 요새 놀고 있죠? 뭐 시험 친다면서요? 성적이 안 나와서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회사에 마침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가지고 좋은 자리 있는데 오세요. 아이구, 주여! 앗싸! 응답됐구나. 기도응답이 됐구나. 피할 길을 주시는구나. 주께서 환란 날에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으니까.

원인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 자기 기도응답을 찾는, 찾다보니까 응답이 자기한테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순간 히브리서 7장이 날아가 버려요. 주의 기도로 우리 죄를 들추기 위해서 줬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자기 기도를 기어이 응답시키려고 다른 방법으로, 하여튼 어쨌든 저쨌든 취직만 되면 되잖아요. 목적이 취직이니까. 됐다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그게 응답이에요. 내 기도는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응답이 응답이다 이 말이죠. 어제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복잡 했습니다마는, 다시 복잡해졌어요.

기도의 응답을 찾고자 하는 그것을 탓하지 마세요. 모든 기도할 때는 노림수 없는 기도는 없습니다. 주여, 기도하는 것 잘 보고 계시죠? 나는 어떤 식으로 하던 나는 겸손해가지고 찾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찾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주실 줄 믿습니다. 그게 실적이잖아요. 하다가 어떤 식으로 예상 못한 행운이 오게 되면, 주여! 응답이군요. 아차! 그때 배웠지? 이게 응답이 아닌 것을! 이게 응답이 아닌 것을 믿습니다. 하는데, 기분은 왜 그렇게 좋아지죠? 이중삼중으로 트릭을 쓰는데 가관이에요. 가관. 여러분, 그냥 사시면서 기도케 하는 것이 처음부터 그게 주의 기도응답 입니다.

자식 취직시험 친다는데 가만히 있을 엄마가 어디에 있어요? 뭐 소녀의 기도처럼 꿇어앉아 원피스 입고는 안 하겠지만, 뭐 기어 다니고 화장실에 왔다 갔다 하면서, 주여! 주여! 하는 이것도 기도라 말이죠. 무시로 기도한다 말이죠. 기도 안 할 수 없게 만들어요.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으면 분명히 우리에게 적용되게 되어 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요한일서 4장 12절 아까 했잖아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그러니까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어서, 답답해서, 인간 쪽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꿈틀거린다는 것을 주께서 아신다 이 말이죠. 그럼 인간이 원하는 것은 자식 취직이고 결혼이겠지만, 주께서 주는 것은 달랑 하나밖에 없어요. 사랑이고 성령입니다. 성령을 주시고 사랑해주신다는 것은, 이거는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어요. 여전히 그대로 가는 겁니다.

12절을 이어서 보면,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우리가 사랑하면, 여기 우리라는 것은 어제 우리가 배웠습니다. 우리라 하는 것은 뭘 경유한다? 독생자를 경유해서. 여기 우리라 하는 것은 아비들아, 자녀들아, 할 때 그 우리죠. 그러면 그 사람들을 깨보면 뭐냐 하면 영적조건이 붙어있는 거예요. 영적조건이. 이미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그게 붙어있으면 우리가 되는 겁니다.

그럼 다시 하면, 우리라 할 때는 양적으로 하면 안 되고 질적으로죠. 질적인 것은 따로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하는 자에게. 거기서 발생된 결과물이 우리가 되고, 그 우리에는 뭐가 있고 사랑이 있고, 사랑에는 성령이 거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온전한 사랑이고, 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뭐를 표현하느냐 하면, 이 땅에서 독생자가 활동하시는 것을 반복적으로 성령의 공동체, 또는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반복적으로 증거 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작용하시는 거예요. 요한일서, 요한복음 그렇게 이해했죠.

요한일서 한 번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한 번 정리합시다.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이 뭡니까? 우리는 몰랐는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우리에게 이미 다 이룬 업적으로, 다 이루었다는 현실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는 일은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온전히 모든 율법을 다 이루어서 하나님의 의가 생산됐다고, 사랑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증거 하는 일을 우리에 해당되는 사람이 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정리됐죠.

그 다음에 요한일서 2장 24절 봅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 처음부터. 이 처음부터라는 것은 창세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요한을 알게 된, 편지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안이라는 말이 너무 어려우니까 이걸 제가 쉽게 하기위해서, 소속이 정해져 있다. 이 소속에서 생기는 것은 신분입니다.

회사에 사원들이 들어갈 때 뭘 달죠? 사원증 달죠. 사원증 가지고 입구에 들이대면, 카드 대라고 해서 들이대면 패스, 통과되잖아요. 소속된 자는 주님의 성령이 함께 있기 때문에, 패스가 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함께 있고. 결국 이 소속이라는 말은 뭐냐, 시간이 삭제되어 있어요. 시간이 끊어져있으니까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묵시가 되는 겁니다. 그럼 시간이 삭제되었다는 말은, 우리 몸은 시간 속에 있는데, 몸은 시간 속에 있기 때문에 숫자로 다루어지게 되고, 본질은 묵시에 속하고.

이 땅 자체를 접수했는데 이 땅에는 시간이 흐릅니다. 시간은 세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크로노스, 아이온, 카이로스. 이렇게 있는데, 이 카이로스는 아이온하고 한데 묶읍시다. 세 가지를 하려면 복잡해요. 여러분들 복잡한 거 싫어하니까. 이 둘(아이온, 카이로스)은 크로노스하고 비교가 됩니다. 크로노스는 단선적 시간관. 단선적 시간관의 특징이 뭐냐, 과거는 흘러갔다.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 십자가는 흘러갔다. 교회에서 십자가는 잊으라. 구원의 새 생명만 남았다. 이게 단선적 시간이에요.

“여러분 미리 아시고 불렀지만,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미래에 성화되는 것만, 거룩하게 되시면 여러분은 천국에 골인합니다.” 아주 합격 안 됐어요. 합격하려고 애쓰는 자는 합격되고. 안 그러면 탈락한다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의 모든 바탕이 뭐냐 하면 단선적 시간관을 유지하면서 사는 거예요. 이런 시간관을 유지했던 자들이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다윗의 저~ 밑에 있는 후손이, 어떻게 다윗의 제일 꼭대기 선조가 되겠는가? 설명하라. 자,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을 있게 한 선조가 있겠죠. 그것을 예수님은 주라고 합니다. 또 다윗의 후손들이 있잖아요. 어떻게 이 선조가 후손과 일치가 되겠는가? 단선적 시간관에서 설명해보라. 만약에 이게 설명이 안 되면 뭘 버려라? 단선적 시간 속에서의 나, 자아를 포기하라. 시간속의 나를 포기하라. 이걸 포기하고 묵시 속의 나를 진짜 나라고 인정하라. 이런 뜻이거든요.

근데 그 사람들은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단선적 시간 외에는 시간의 의미가 없어요. 시간 개념을 이게 전부라고 본 겁니다. 말을 못하죠. 그럼 주님도 “나도 말 안 해줘. 너희들이 말을 못하면 나도 말 안 해줘” 하고 사라지죠. 그럼 제자들은? 제자들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예수님께서 시간에서 부활로 말미암아 묵시로 가고 나니까, 비행기가 뜨면 밑에가 보이죠. 묵시로 확 뜨니까 그 시간적 단선관이 뭐냐 하면, 이 시간(아이온)에 갇혀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단선적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을 가두어 놓는 시간이 아이온에요. 이걸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세대에요. 세대. 세대는 갇혀있다. 동그란 시간, 구(球), 동그란 시간의 창고. 아이온.

아무리 그들이 미래의 천국을 원해도 그 천국은 아이온에 갇힌, 옛 시대가 조작해놓은 가짜 천국이에요. 아무리 지옥이 무섭다 해도 그 지옥은 있지도 않는 가짜 지옥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아이온을 뭐로 만들었느냐 하면 지옥으로 만들었어요. 누가 대장이기 때문에? 사탄이 대장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이온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면, 적그리스도, 가짜 양의 탈 쓴 짐승, 가짜 선지자, 이것들이 가면서 거기에 누가 따라오느냐,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도 함께 어느 불에 간다? 유황불로 가게 되어 있어요. 유황불로.

유황불로 들어오는 순간, 카이로스, 아이온, 그리고 크로노스가 드디어 다 깨집니다. 시간 자체가 없어요. 그럼 시간 자체가 없다는 말은, 시간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시간이죠. 그렇잖아요? 필요에 따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거죠. 그럼 이 시간을, 이런 그림을 상상할 수 있는데요. 둥그런 원 안에 시간의 철도가 깔려있습니다. 이걸 한 번 압축을 해봅시다. 옆에 밀어내고 위아래 위위아래해서 찌그러트려봅시다.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카이로스가 돼요. 때가 되어 버려요. 때는 점입니다. 점의 특징은 면적이 없다는 거예요. 물론 현미경으로 보면 면적이 있지만, 우리의 인식상 약속을 했어요. 면적도 없고 그냥 점이다. 있는지, 없는지 경계지점으로 보자. 볼펜 가지고 점을 딱 찍어버립니다.

그러면 이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흔적이라고 하고, 이걸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단선적 시간에서, 오늘 며 칠 이죠? 묵시 속에 있어서 시간을 잊어버렸어요. 9월 14일. 9월 14일이 단선적 선이잖아요. 이 선을 잘라보면, 식빵 슬라이스 하듯이 잘라보면, 모든 게 뭐냐 하면 사건사건사건...연발총 쏘듯이, 사건의 연관된 것에 뭉치, 또는 다발이 되겠습니다.

그럼 뭐로 끊을까요? 1분으로 끊을까요? 그럼 1분으로 끊으면 60초로 다발로 끊어집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우리는 묵시의 은혜를 받아서 하루를 살기 때문에 그날 걱정은 그날 하라. 다시 말해서 니가 걱정하는 사건은 니가 잘못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주께서 유발하신 거예요. 사무실 문을 닫는데, 철컥 달렸다. 이거는 주께서 유발하신 거예요. 이거는. 카이로스입니다. 그 사건을 일으키신 당사자 누굽니까? 시간 자체를 초월하신 분이죠.

이제는 그렇게 시간 자체를 초월하신 분이라고 하지 말고,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계획했던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 뭐를 정복했다? 이 버지니아 땅을 점령하고 접수하고 한 거예요. 우리는 졸지에 품꾼이 되고 말았고. 우리는 품꾼이 되었어요. 뭘 보여준다? 사건을 보여주는, 주께서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는 것, 임마누엘. 주께서 함께 있기만 합니까? 가만히 멀쩡히 앉아만 있습니까? 계속해서 사건을 일으키는데 사건의 증거를 대라. 내가 사건의 증거에요. 내가.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 내가 고백한다는 것,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나 자신을 사건으로 볼 수 있다는 이 안목, 양이 아니고 질적인 안목.

이게 바로 주의 유발하신 사건이기 때문에, 이게 증거죠. 제가 이렇게 은혜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서신에 쫙 깔려있어요. 이번 대전에서 겨울수련회 하는데, 거기서 골로새서를 하는데, 골로새서 이야기가 이 이야기가 될 거예요. 사도바울의 편지를 읽을 때는 묵시로 읽어야 돼요. 그래서 베드로후서에 보면 사도바울의 편지를 문자로 보지 말고 뭐로 읽어라? 영으로 읽어라 이 말입니다. 그걸 문자로 억지로 풀다가 다 넘어졌느니라.

본인은 단선적으로 해가지고 나를 예쁘게, 해피니스하게 하려고 하고. 성경이여, 목사님 설교해가지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세요. 나나나나나 그렇게 하고. 베드로의 편지는 영적으로 우리를 슬라이스, 완전히 잘라내요. 모든 하루하루를 잘라가지고, 고 하루하루 발걸음을, 오른발에서 왼발 내딛는 것도 주의 뜻이 아니면 딛을 수가 없다. 왜? 그런 경우 제가 많이 봐요. 그래서 제가 마그네슘 갖고 왔지만. 쥐가 나가지고. 지금은 앉아서 하지만 서서 할 때는요, 쥐나요. 쥐나면 이게 며칠가요. 한 이틀, 삼일 막갑니다. 빨리 마그네슘! 마그네슘! 부를 동안에 계속 쥐는 나고 있죠. 마그네슘 먹으면 약간 풀리는데, 기분상 풀린 것 같기도 하고. 플라세보 효과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효과 나고. 그 다음부터는 마그네슘 미리 먹고. 미리 먹는데 자꾸 잊어버려요. 안 그럴 줄 알고 있다가 또 쥐가 나고 그래요. 

그런데 어쨌든 간에, 갑자기 개인이야기해서 미안합니다만, 나도 날마다 슬라이스, 잘라야 해요. 그 자를 때에 발걸음을 생각 못하죠. 아까 처음에, 이거 강의하고 쉽시다. 처음에 행복은 뭐냐 하면, 지금은 우울부터 시작하죠. 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은 나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소망해야 되고, 기대해야 되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돼요. 포기하지 마!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성경보고 교회 나오잖아요.

그런데 묵시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발걸음을 세는 것도 내 뜻이 아니라면, 우리가 미리 어떻게 행복 할까? 하는 것도 따질 필요가 없어요. 왜요? 역사를 벗어나서 묵시 안에 속하고, 성령 안에 속한 자체가, 우리가 도달해야 될 모든 목적은 이미 확보해 있는 것이 된 거니까. 여기서 뭐 더 이상 뭘 원합니까?

거지나사로가 부자 되기를 원했던가요? 아니죠. 거지가 되던, 뭐가 되던, 확보했잖아요. 나사로 이름이 바라봄이잖아요. 이미 그 나라를 바라봄이 현실이 됐으면, 오늘 여기 우리라고, 우리, 우리, 그렇지, 그렇지, 라는 뜻이에요. 그렇지, 라는 묵시의 결과물이 나와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랑만 확인하면 돼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두려움이 없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만 하면서 살아가는데, 문제는 이게 우리가 늘 확인이 안 되고, 또 콩국수 어떻게 준비하고, 그게 또 걱정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자꾸 또 기대를 해요. 콩국수 맛이 잘 나와야 되는데,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께서 수시로 들락날락하면서, 콩국수 못 나와도 영생 얻었어요. 삽이냐 호미냐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모든 콩국수 짜면 짠 대로 먹으면 되고, 뭐 안 먹어도 되고, 그런 걱정은 주께서 유발하신 하나의 사건으로 치시고, 우리는 그냥 쉬시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점심 먹어가면서. 콩국수 그것도 하나의 사건입니다. 모든 게 이처럼 사건 안에서, 주님의,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계획된 것을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10-01 23:54 
20160913 요한1서 버니지아강의18-이 근호 목사

 

이번 시간에는 요한일서 2장 27절,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의 목표가 나와 있죠. 기름 부음은 독자적이지 말라. 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거하라는 말은 니가 새로운 소속에 포함되었다. 전에 니가 빠져나올래야 빠져나올 수 없는 것처럼, 기름 부음이 너를 사로잡아서,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 안에서, 성령 안에서 바깥으로 탈출하고자 해도 너는 실패할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지키는 말씀이 아니고 확인되는 말씀이에요. 지키는 말씀이라는 것은, 내가 지켜야 현실이 되는 것은 지키는 것이고. 확인되는 말씀이라는 것은, 이미 이런 현실이구나, 하는 것을 재삼 재차 반복해서 깨닫는 겁니다. '에구, 바보같이 또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도 저곳을 사모했구나.' 또 확인하고. 뭐 돌아 서면 마찬가지겠지만. 또 다시 되게 되면 '아이구, 바보같이 성령이 함께 있는데, 천국 안에 있으면서도 지옥에 있는 사람을 그렇게 부러워했구나.' 하는 겁니다.

 

부러워한다는 것은 그 부러움을 통해서 자기 소속의 정체를 밝히는 겁니다. 세상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세상에 속했다는 건데, 우리도 여전히 옛 사람 때문에 세상을 부러워하게 되죠. 근데 기름 부음이 가만히 있습니까? 가만히 있지 않습니까?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아이비리그Ivy League도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아이비리그에 가서 영생 얻을 것 같으면 다 기를 쓰고 공부하죠. 천국은 아이비리그하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염려되는 것은 아이비리그가 천국의 귀한 복음을 가로막지나 말았으면 좋겠다는 이런 생각이 들죠. 그래서 기름 부음의 목표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안에 소속돼서 거한다는 겁니다. 거한다는 말을 다시 말씀드리면 나의 어떤 행동과 관계없이, 그 상태, 그 상황 안에 놓여있다. 또는 갇혀있다. 그러니까 좋은 데 갇혀있는 거죠. 나쁜 데 갇혀있는 것이 아니니까. 괜히 바깥에 나가도 마귀한테 걸리지 않는, 안전한 벙커 안에, 또는 방주 안에 있는 거죠.

 

새로운 방주를 뉴왁 이라고 하잖아요. 새 방주라는 이름의 도시잖아요. 우리는 새로움 안에 갇혀있는 겁니다. 노아가 보호를 받듯이. 뭐 뉴왁 간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우리는 새로운 성령 안에서 있다. 이 말이죠. 그럼 기름 부음에 목적을 알았어요. 어디 거하게 하는 거죠. 우리의 행함과 관계없이, 그 상태 안에 안정적으로 영원히 놓여있는 상태가 돼가는 것이 기름 부음의 목적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 기름 부음이라는 말은 뭐냐, 이것은 바로 만남입니다. 기름 부음이 만남이에요. 만남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속에 것을 끄집어내는 것을 만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불자가 도를 닦는 것, 절대로 만남이 아닙니다. 부처한테 비는 것, 이걸 흉내 내는 거죠. "니만 부처야? 나도 부처될 수 있어. 니만 해탈해? 나도 해탈할 수 있어." 하나의 모델로 삼아서 따라 붙는 것은, 이것은 만남이 아니고 하나의 목표가 되겠죠.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계속해서 자기는 고립되어 있습니다. 만남이라 하는 것은 나 여기 있고 나 말고 다른 존재와 부딪힘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면 이 만남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만남이 유용함이 되는 경유가 있고, 만나자마자 유용함에 실패해서 헤어짐의 경유가 있죠. 만났는데 그걸로 끝까지 헤어지는 거예요. 만나서 한 덩어리가 되는 반면에 둘이 만나서 그냥 둘이 빠이빠이 하고 헤어지는 거예요. 만남에는 이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기름 부음이라는 것은 성령이고, 성령과 인간의 만남이 될 때, 물론 하나로 융합되는, 융합이라는 말은 어려우니까 성경에 있는 대로 합시다.

 

연합된다고 합시다. 또는 성경에 있는 대로 하나가 된다. 또 성경의 다른 말로 하면 세례다. 세례, 연합, 하나, 다 같은 말이에요. 세례라는 말이 어렵기 때문에, 연합으로 해서 하나로 합쳤다. 이렇게 보시면 좋겠습니다. 만남이라는 것이 하나로 합쳐야 되는데, 이것이 헤어져버리죠. 그러면 복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나타나가지고, 어쨌든 만나잖아요. 만났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불러서 이렇게 영원히 성령에 거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끝까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남하고 만날 때는 공통점 찾고, 취미 찾고, 저 사람하고 사귈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피잖아요. 우리 인간들의 만남은 무엇을 위함이냐 하면, 나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인지, 손해가 되는 사람인지. 만나서 이용가치가 있는지, 빼낼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빼냄을 당하는 위험한 요소가 있는 사람인지. 분간해서 적당히 관찰하고, 적당히 탐색전 벌이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갈라서는 겁니다.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만남이 하나로 성사되기 위해서는 그 결정권이 나한테 있다. 이래 되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랑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사랑해서 부부했는데, 부부라고 해서 하나 되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면서 계속 살 것이냐, 말 것이냐, 계속 탐색하고 있어요. 물론 애까지 낳으면 탐색한 변수가 생겨가지고, 헤어지는 조건이 좀 더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못 헤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성령의 만남이 하나 되기까지는, 성령께서 뭐를 제공해야 된다는 논리에 이릅니까? 사랑을 줘야 된다는 겁니다. 사랑이 되는데, 사랑의 목표는 바로 하나 됨이다. 그러면 물어봅시다. 혼자 살고 싶어요? 누구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살고 싶어요? 어느 쪽에서 살고 싶습니까? 혼자 살고 싶어요. 태어난 태생이 혼자 살고 싶어요. 그러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내용은 뭘까요? 태생이 혼자 살고 싶은 인간을 기어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은 그 작업의 기록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 되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혼자 살고 싶기에, 혼자 사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죠. 저 사람이 나한테 이익이 되는가? 손해가 되는가? 그럼 이거는 그 사람을 같이 나한테 이용하겠다는 것, 이익이 되는 조건하에서만 내 부하직원으로, 내가 다루는 하녀로, 하인으로 할 때만, 당신과 같이 살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조건이 있어요. 나한테 이익이 될 경우에만. 그러다 결혼 하고 10년 후에 이익이 안 된다 싶으면 갈라설 준비를 하죠. 먼저 변호사 만나가지고 지금 헤어지면 몇 퍼센트 받습니까? 뭐 이런 것 물어보러 몰래가서 만나고. 잘해주면 이거 또 인간 개과천선 되는 모양이라, 이렇게 생각하는데, 개과천선은 없습니다. 성격은 변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탐색전을 계속하는 거예요.

 

결국 결혼이란 하는 것은 본게임 뛰기도 전에 탐색전하면서 볼일 다 봐요. 치고 박고하는 겁니다. 계속해서 저 아내가 나한테 얼마나 이용당할 것인가? 남편이 얼마나 이용당할 것인가? 맨 그 탐색들을 하는데, 그 탐색을 누가 배우느냐, 자식들이 배워가지고 자식들이 커서, 여자가 남자 고를 때, 나는 우리 아빠 같은 남편을 구할래! 라는 딸도 있는 반면에, 어떤 경우라도 나는 우리아빠 같은 남자 만나면 죽어도 결혼 안 한다고 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죠. 그건 평소에 엄마가 어땠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빠가 엄마한테 잘 해주면, “나는 아빠 같은 남편이 아니면 결혼 안 해!” 가 되고. 아빠가 엄마 구박하게 되면, “차라리 그런 남자 만나느니 내가 결혼 안하고 죽고 말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은 배운 대로 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나한테 참고사항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럼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은 만남이었는데, 만남은 그냥 헤어지면 안 되니까 주께서는 만남과 동시에 뭘 퍼붓는다? 사랑을 퍼붓는데, 그 사랑에 대해서, 어? 사랑은 좋은 건데, 받아들이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열두 제자의 관계를 보니까 그렇게 만만치 않더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인간과 예수의 만남과, 인간 대 인간의 그 만남과 별 다를 게 없어요.

 

제자들도 예수님 볼 때도 이용가치를 따졌고, 평소에 인간이 인간을 볼 때에 이용가치만 따졌고. 세상은 이용가치만 따지니까 눈치 채고 헤어지지만, 주님은 분명히 이용가치만 따진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에게 이용가치를 당해줘요. 당해준다고요.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한 장면이 나오는데, 36절에,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너희들이 폐기처분한 그 사람을 하나님은 주워 다가 이 세상의 영원한 왕으로 삼았다고 하니까, 그 뒤 37절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우리가 어찌 할꼬? 그 안에 분명히 예수님을 본 적이 있는데,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죠. 왜 성사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으면 믿으면 되는데, 왜, 안 믿고 있다가 죽었다가 부활하고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야 허겁지겁 예수님 앞에 어찌 할꼬? 하고 나서느냐 말이죠. 그러면 그 가치를 알았단 말입니까? 몰랐단 말입니까? 몰랐다 이 말이죠.

 

그리고 난 뒤에 38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래 되어 있죠. 이 본문이 참 재미나요. 예수님을 놓쳤는데, 놓치고 보니까 아깝더라 이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옛날 행색이 그대로 나오죠. ‘아, 이렇게 이용가치가 있는데, 이용가치 있으니까 내가 믿어야 되겠다.’ 하고 나서죠. 그럼 그게 믿는 겁니까? 또 이용가치 노리는 겁니까? 또 노리는 거예요.

 

그러가 더 난해한 것은, 전에는 예수님 사람 몸으로 있을 때에는, “아저씨 좋게 지냅시다.” 하면서 악수 먹고. 그러면 좋은 관계로 지내는 건데, 지금 예수님의 육체가 없잖아요? 지금 부활승천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안 계신, 예수님이 부재한 상태에서 예수님과 사귄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용가치가 있다고 해서 어떻게 사귈 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하늘에 대고, “주님! 어찌 할꼬? 제가 귀한 것을 놓쳤습니다. 좀 봐주세요?” 이렇게 하면, “아이구, 니가 뒤늦게 내 가치를 알았구나? 내가 갈게.” 하시면서 쪼르르 쫓아오시는 겁니까?

 

예수님은 안 오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방법에 놀아나지를 않아요. 악수하자고 한다고 같이 손 내미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치워라! 이거!”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여 돈을 바치면 사람들은 되게 좋아하죠. 주님께 돈 바치면 “치워라! 이거!” 하시는데. 어디서 사람 사귀는 행세를 나한테 똑같이 적용시켜? 먹힐 것 같아? 니가 어디다 써 먹을라고 해? 사람한테는 정성이면 통하지만 나한테는 정성이면 안 통한다 이 말이죠.

 

그럼 이건 뭐냐, 바로 끊어진 단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렸지만 아이구, 고맙게도 하나님 아버지가 이걸 살렸구나. 라는 말만 내용이 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버렸어? 누가 버렸어? 내 아들 누가 버렸어?” 뭐 누가 버렸겠어요? 세상 사람이죠. 바로 그러니까 너희들은 애초부터 너희들의 사고방식과 숨겨진 하나님의 사고방식은 단절되어 있는 거야. 십자가의 의미는 단절을 확고히 하는 의미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십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십자가를 선포하는 거예요.

 

누가 믿었으리요? 누가 알았으리요? 그걸 그대로 계속 적용시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선교단체나 교회를 저는 거부하고 싫어하는 겁니다. 그건 구원받는 사람들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의 취지와 그들의 모든 작정과 경영방식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고, 어쨌든 사람들을 불러다가 구원시키려는 그 사고방식이 단절의 의미를 누락시키고 있어요.

 

“어쨌거나 목사님! 단절되면 못 가잖아요?” 그 뒤에 보세요. 성령세례를 받죠. 성령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그게 뭐냐 하면 니가 나를 사귀고자 하는 것, “중요한 것을 놓쳤으니까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라도 관계 맺읍시다.” 하는 그 자체가 죄에 해당되는 것을, “어디 감히 단절을 니 입으로 그걸 돌파하려고 하느냐?” 단절을 돌파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뭐가 돼요? 죄가 되는 거예요. 아쉬우니까 찾잖아요. 사람들이 사람을 왜 찾습니까? 자기 필요 없으면 내칩니다. 왜 찾습니까? 아쉬워서 찾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흔한 이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사랑이란 사귈 때는 몰라요. 헤어지고 난 뒤에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소 느끼는 겁니다. 헤어지고 난 뒤에. 아깝다. 헤어질 때는 온갖 큰소리 다 치죠. “가! 가란 말이야!” 낙엽 던지면서 해놓고는, 가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 그만한 사람이 없네. 그래서 헤어짐의 특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는 이렇게 봅니다. 만나고 난 뒤에 헤어짐의 특징은 이걸로 끝나요. 독백.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거죠.

 

아내 죽고 난 뒤에 수시로 꽃을 사들고, 처량 맞게 비가 철철 내리는데 가가지고, 일부러 비 맞는 고통을 자청하면서, 공동묘지에 가서 ‘여보! 내가 왔습니다. 고등어 굽어주는 당신은 어디 가고, 콩 갈아서 국수해주는 당신은 없고, 나 당신 없어서 못 살겠습니다. 진작 잘해줄걸.’ 하고 한 바탕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은 안 되고. 우산을 쓰면 안 돼요. 일부러 처량하게 비를 맞아줘야 해요. 그럴 때는 옷을 나일론 계통, 방수계통의 옷을 일부러 입고 와 가지고 지가 납득이 되는 쇼를 벌이고 하는 거죠. 청승을 떨고 처량 떨면서 하죠. 그래놓고 집에 와서 혼자 중얼중얼하죠.

 

이게 독백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헤어지긴 헤어졌으나 깔끔하게 헤어져야 하는데, 현실은 헤어졌지만 자기마음은 헤어짐을 용납을 하지 않기 때문에, 대치물이 있어야 돼요. 그게 주권사상이라는 겁니다. 진짜 주권사상은 십자가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사상인데, 인간의 주권사상은 인간이 납득이 되는 하나님이어야 된다는 그 조건하에 신의 주권사상을 만든 겁니다. 당신은 통치하시오. 당신의 통치를 흔쾌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알라는 위대하다. 뭐 이런 거예요. 여호와는 위대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이 와도 못 알아봤어요. 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싫어버린 바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여호와 주권사상으로 턱하니 버티고 있으니까, 진짜 하나님의 주권이 십자가의 모습으로 오니까 내치는 거예요. 평소에 잘하고 있는데 쓸데없이 왜 또 죄인이라고 들이댑니까? 그래서 밀치는 거죠. 밀치니까 넘어져버렸죠. 넘어진 그 사건이 바로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인 거예요.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은 바로 내가 떠밀었다. 강력하게 저지했다. 강력하게 반발했고, 내 영역에 오지 말라고 밀쳤다는 그 증거가 십자가인데, 십자가가 그냥 십자가가 아니고 피를 흘리죠. 그 피를 보면서 우리는 뭡니까? ‘아, 나는 인간도 아니구나! 나는 인간도 아니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결국은 마지막 배신을 하도록 만들어요. 어쨌든 간에 배신하게 만들어서, 그 배신할 때만 배신이 아니었어요. 그전부터 베드로 본인이 몰랐지, 내 속에 배신의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참, 하나님의 말씀은, 작전은 아주 예민하죠. 조밀하고. 촘촘하고. 빈틈이 없어요. 기어이 죄인 되게 만들잖아요. 기어이. 근데 이 독백을 하는데, 이 독백하는 이러한 버릇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뭐 하나님이 됐든, 누가 됐든 간에, 나의 감정은 내가 살려야 되겠다.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것으로 가득 차죠.

 

그런 독백을 9개월 된 외손녀나, 외손자를 두고도 할아버지들이나 할머니들이나 늘 해요. “아이구 요거 이 아몬드 맛있어 보여요? 그래 따라서 웃었어요?” 그런데 9개월이라 말도 못 알아들어요. 할아버지가 무슨 말하는지도 몰라요. 이이이잉~ 팔만 흔들 뿐이에요. “그래? 맛있다 이 말이지?” 지가 내뱉은 말을 자문자답하면서. 애는 앙앙앙앙~ 팔만 흔들고 있어요.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아가지고. 자기 즐거움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켜놓고 그 즐거움을 자기가 회수하면서, 외로움을 벗어날 시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혼자 있는 외로움을. 그래서 손자, 손녀 없으면 외롭다고 하잖아요.

 

평소에 혼자 노는 시체놀이를 열심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노는 버릇이 그대로 있는 거예요. 그래놓고 뭐 자기이익이 되면 열심히 예수 믿고. 교회 뭐 몇 달 안 나가도 오히려 월급 더 올라가고 편안하게 되면 성경도 안 보고, 기도도 안 하고, 교회도 안 가고, 관심도 없고, 동영상도 안 보고, 그냥 편안하게 히히거리고, 동영상 틀어놓고 잠옷 바람으로 왔다 갔다 해가지고, 한바탕 지나가서 한 20분 지나간 뒤에 와서 그 다음 듣고. 이건 뭐 전부 다 혼자 노는 게임이에요. 혼자 노는 버릇이에요. 오늘도 예배드렸다고 치고.

 

주님께서 연합이라는 만남을, 성령이 오면 연합된다고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확인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기백성에게 확인할 길을 줍니다. 자, 이제 그 확인하는 방법을, 제가 말씀을 제시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3장 한 번 봅시다. 14절, 15절,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14절,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절,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자, 방금 읽었던 것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이죠. 여러분, 예언의 말씀은 흐지부지 됩니까? 반드시 현실화됩니까? 성취라는 말도 좋지만, 이 땅 자체가 주의 땅으로 변화됨에 따라서 이 땅에 예수님의 십자가 무늬가 얼룩덜룩하게 있죠. 이 말씀이 그대로 이 땅에 반드신 실현되고 성취됩니다. 우리가 못 알아봐서 그렇지만. 그걸 알아보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밖에 없어요. 이 세상 전부의 모든 변화가 십자가의 얼룩무늬라는 사실. 이거는 어느 하나가 십자가와 무관하게 되는 사건은 없어요.

 

모든 사건은, 김정은이 핵실험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나타난 사건들입니다. 십자가와 연결된 사건. 참,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믿어야 될지, 구라가 너무 심한 구라가 아닌가, 무슨 논리가 김정은이 핵실험하고 무슨 관계가 있냐고 그렇게 하는데, 그게 연관이 되어 있어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만남을 성사시키는데 있어서, 제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만났느냐? 그냥 이용차원에서 예수님을 그냥 이용해보려고 하느냐?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그 질문을 던져놓고 그 답변으로 제가 제시한 것이 지금 이 본문을 언급한 거예요.

 

근데 이 본문의 제일 마지막에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고 되어 있죠.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는 말을 아주 쉬운 말로 하게 되면, 내가 허락하는 한 너희가 절대로 고침 받는 일은 없다. 내가 너희들이 내 말 듣고 고침 받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아주 단호함이에요. “내가 모든 말씀을 준 것은 너희들이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고치고 싶어도 내가 나서서 저지할 거야. 내가 나서서 그걸 못하게 할 거야.” 라는 예언의 말씀이에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깨닫지 못해야 정상이라는 이 말이거든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라고 내가 이 말씀 줬기 때문에 니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마치 뭐냐 하면 그 강대상에 예수님이 설교하시는데, 어떤 사람이 실수를 해서 “아멘”했어요. “아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무슨 아멘이야? 뭘 아멘이야? 내 뜻도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아멘이야? 그리고 아멘 못 할 거야. 아멘 못하고말고. 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지금 강대상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온 인류를 향하여.

 

그러니까 이 교회가요, 뭐 예수님의 뜻을 뭐 반영하는 정도가 아니고요, 반대해요. 교회라는 자체가 반대해요. 뭐 절은 말할 것도 없지만. 자꾸 사람 편에 서버리면 이거는 십자가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사상,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나와 버려요. 하나님의 주권사상. 신은 무섭다. 신은 위대하다. 신은 장엄하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그 장엄함 앞에서 약합니다. 약하디 약한 여러분! 큰 것을 품 안에 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믿으세요. 여러분 알아줍니다. 사랑하니까. 이거에요. 이거.

 

뭐가 빠졌어요? 뭐가 날아가 버렸어요? 고칠까 두려워함이라. 이게 날아가 버렸다니까요. 내가 온 것은 너희들이 깨닫지 못하게 함이라. 이 예언의 말씀을 그럼 어디서 찾습니까? 어디서 발견해야 되겠어요? 강의에서 이 시간쯤 되면 앞에 했던 것을 다 잊어버려요. 제가 다시 한 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만남은 이용가치, 유용성 아니면 안 만납니다. 만나서 사귀더라도 저 인간이 동업을 빙자한 사기를 치는구나.

 

보증 선다는 말이 뭐예요? 보증서라고 하는 말은 안 하잖아요? “동업합시다.” 또는 “투자하세요.” 라고 하죠. “좋은 아이템이 있는데, 투자하세요.” 이게 동업이고 이게 보증이에요. 보증서서 사기 당했다고 하는데, 보증이라는 말은 없고, 전부 다 공동투자해서 사기당한 거예요. 오늘날의 부부의 개념도 사업하는 사람한테는, 여긴 사업하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입니다만, 사업하는 사람한테는 여자를 보고 결혼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친정집안의 재산을 보고 결혼을 하죠. 세상에 자식 미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이 어렵다는데 가만히 있을 부모 없잖아요.

 

그럼 사위되는 사람이 자기 아내한테, “여보, 친정 한 번 갔다 와. 이거만 메꾸면 깔아놓은 돈 다 회수하게 되어 있어. 우린 대박이야. 요것만 메꾸면 되는데, 한 이천 필요해.” 물론 한국은 이천이지만, 미국은 이천달러죠. 그러면 딸이 와가지고 엄마 붙들고 훌쩍훌쩍 짜면서 “언니는 아이비리고 보내주고 나는 고등학교 보내주고?” 그러나 그 테마도 한두 번 써먹어야지. 죽을 때까지 써먹어요. “언니는 대학가고 나는 고등학교만 보내주고?” 엄마가 “공부하라고 할 때 공부 왜 안 했어?” “그때 엄마 장사한다고 해서 도와준다고 못 했잖아?” 또 핑계도 엉뚱한 핑계대가지고. 기어코 못 다한 몫을 유산으로 빼내기 위해서. 가만히 있는 거 보니까 전부 다 그렇게 산 모양이라. 그렇게 찔찔 짜니까 “그래서 뭐? 뭐?” “김서방이 요거만 도와준다면...” 결국 또 돈 이야기. 엄마가 돈 없다고 하면 집 대출받으라고 하고. 담보해서.

 

인간은 이용가치가 없으면 사귀지를 않습니다. 그 단단한 혈통도. 부모는 자식을 혈통으로 보죠. 자식은 그 혈통을 혈통으로 보지 않고, 투자 백그라운드로 봐요. 따라서 자식에 있어서 혈통이란 조건이 있어요. 돈 있는 부모가 혈통이고, 돈 없는 부모는 짐입니다. 참, 너무 강력하게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평소에 하는 태도가요, 자기밖에 모르는데, 거기다가 뭐 예수님 말씀, 무슨 말씀, 아이구, 잘도 믿겠다. 곡해해서 믿어버리고, 주권사상 믿으니까, 하나님 믿으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이거는 더불어 옵션으로 오는 줄 알았어요.

 

제 1인자를 믿는데, 제 2인자는 땡겨서 그냥, 옵션으로, 국밥에다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것처럼. 그렇게 얹으면 믿는 걸로 알고 있어요. 세트로. 하나님 믿는데 아들 믿지. 아들의 의미도 몰라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예 너희들을 모른다는 뜻인데, 하나님을 아는데?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하나님이 인격자인 것을 아는데? 세상만물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하나님이 운영하는 것을 아는데? 그거는 주권사상이에요. 주권사상. 신의 주권사상이에요.

 

아이구, 제가 그 말 들으면 속상해요. 정말. “목사님. 주권사상 아닙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본성을 완전히 까발리기 위해서 오셨어요. 까발리는 근거가 이사야 6장 읽었던 겁니다. 너희들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한다. 왜? 이용가치로 신을 따진다면 나는 피해가겠다. 나는 기피하겠다. 너희들이 나를 다른 사람 사귀듯이 나를 어떻게 한번 해보겠다고 한다면 내 모든 말씀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씀으로 적용되고, 더 결과는 뭐냐,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너희들은 두 번 다시 내 말 듣고 고치는 법은 없다. 이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이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오늘 강의의 제목을 붙인다면 고립자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신이에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신처럼 되는 거예요. 신은 옆자리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항상 신은 자기만을 위한 자리만 자기가 꿰차고 있을 뿐이에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이거는 고쳐질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안 고치잖아요. 니가 신인 것을 고친다면 내가 손을 장을 지진다는 식이에요. 절대로 너희들은 자기 본성을 못 고칩니다. 한 번 신이면 영원한 신이에요.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에요. 고쳐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고칠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이사야 6장을 이미 깔아놓았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그런 것으로 일단 전체를 규정시켜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고요? 스쳐지나가죠. 열두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다녔다고요? 스쳐지나가는 거죠. 3년 동안 따라다녔다고요? 3년 동안 따라다녀 봤자, 이걸 압축시키면 카이로스, 한 순간이 돼버려요. 한순간.

 

그래서 인생은 뭐라고 했습니까? 안개니라. 안개의 특징이 뭡니까? 있다가도 없어지는 거죠. 생일축하합니다~♬하다가, 죽을 때 되면, 죽고 난 뒤에 6개월 지나면 그 집 할아버지 이름도 몰라요. 다 잊어버려요. 나중에 자기 아버지, 어머니이름도 돌아가시면 다 잊어버립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신이 아니고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내가 신이에요. 그걸 어디서 찾느냐, 자식들 행동하는 거 보면 압니다. 아무리 맞춰서 부모효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부모가 어렵다고 하면 도망치기 바빠요. 미국까지 따라오면 독일 가버리고, 독일 가버리면 남미로 가버리고. 따라오지 마! 따라오지 마! 귀찮게 하지 마! 숨 좀 쉬자!

 

우리도 부모한테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DNA로 그대로, 빈 그릇에 아이스크림 채우듯이, 그냥 거기다가 우리의 본성을 아이스크림 꽉꼭 눌러서 채우듯이 다 채웠습니다. 자식을 보면 바로, 내가 잊었던 내 어릴 때 본성을 그대로 되풀이해서 자식이 보여줍니다. 그런 마음으로 예수 믿는다? 아, 정말 예수 믿는 사람 있으면, 저는 기적이라고 안고 싶어요. 정말 우대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자진해서 자기 신 됨을 포기할 사람이 있을까요? 오! 이거는 아니죠.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예수 믿고 뭘 믿어도 자기의 신 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기존에 나왔던 모든 개혁주의 신학의 문제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잘못 안다. 이건 OK이에요. 근데 잘못을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바뀔 수 있다. 이건 NO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야기했죠.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 그런 이야기할 때 베드로가 성령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이미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나중에 오순절 되면 성령을 받게 되죠.

 

그럼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베드로가 지가 원하는 대로 갔을까요? 원치 않는 길로 갔을까요? 원치 않는 길로 본격적으로 가게 돼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끝까지, 사도요한이나 베드로, 이 인간들이 얼마나 고립적인 신처럼 살아왔는가를, 그게 왜 주님 앞에 죄가 된다는 사실과, 그리고 예수님이 자빠져서 피흘려가지고, 그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그 사실을, 절대적 고립자인 나와 예수님의 피와 연계시켜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전파시키기 위해서, 주께서는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하는 겁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것은 두 번 다시 안 해요. 왜? 했기 때문에. 만약에 요단강 건널 때, 또 물 꽉 차 있었으면 사람들은 전부 다 모세에게 눈 다 돌려서 모세 지팡이를 봤을 겁니다. “모세님. 또 물이 있네요. 에? 했던 것 있잖아요? 했던 것? 지팡이가지고 물을 대기만 해도 갈라지는 것?” 근데 두 번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예 물속에 들어갑니다. 물은 끊어지지 않아요. 제사장 죽을 뻔 했을 거예요. 언약궤 메고 중앙로 들어갈 때 제사장 아마 혼났을 거예요. 아마 어떤 제사장은 몰래 구명조끼 장착했을지도 모르죠. 사람이 믿을 걸 믿어야지, 물속에 들어간다면 못 믿죠.

 

원치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사태를 일으킬지 예측이 안 돼요. 주께서 내일 일에 무슨 사태를 준비해가지고 화들짝 놀래게 만들고 경기 나게 만들지 예측이 안 됩니다. 근데 경기 난다는 것이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는 내가 천상천하유아독존, 내가 최고가 되겠다는 이 성격을 뭐 포기를 못하니까. 그래서 끝까지 성령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아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그냥 쪼개가지고 성령 있는가만 봐요. 내가 성령 받고 인간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안 봅니다. 성령 들어있으면 성령이 알아서 제대로 죄인 되게 만들었던 거예요. 그걸 가지고 무슨 법이라고 하면, 성령의 법이라고 해요. 전에는 율법의 법이라서 내가 알아서 고치고, 내가 알아서 인간되는데, 이제는 그건 실패로 끝났고, 이제는 성경이 강권적으로 기름부음이 내빼지 못하게 합니다. 이게 하나에 속했기 때문에. 주 안에, 성령 안에 거하기 때문에.

 

자, 그렇다면 이 고립자, 그러면 고립자로 만드는 이유가, 인간이 스스로 신이라는 의식을 인간이 태어나서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고, 이건 인간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적은, 예수님의 적은 마귀다. 맞는 말이죠. 동시에 예수님의 적은 인간이다. 그 말도 똑같은 의미로 맞는 말입니다. 그럼 그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근거는 바로 마태복음 16장에 나와요.

 

23절에 보면, 유명한 구절인데,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분명히 사단아 물러가라고 했죠?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우리 같으면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탄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이렇게 해야 될 것을, 본문에서는 뭐냐, 니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그러면 인간의 일은 하나님의 일에 합치가 됩니까? 대적이 됩니까? 대적이 되죠. 반대가 되죠.

 

그걸 갈라디아서 5장 19절에서는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육체의 열매. 아니, 육체 없는 인간이 없으니까. “저, 육체 있습니다.” “육체 있으면 니는 신이야. 신으로 행세할 거야.” “그럼 어떻게 고칩니까?” “못 고쳐.” “근데 저 사람은 천국 가잖아요?” “그건 성령이 임했잖아? 이 바보야!” 성령이 임해야 되는데, 왜 자꾸 니 힘으로, 이 말씀가지고 니가 고쳐서 도 닦아가지고 천국에 가려고 하느냐? 성령이 임해야 되는 거예요. 성령이 임해야. 성령이 임한다는 말을 지금 제가 안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거부터 확실히 해야 해요.

 

성령이 인간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인간이 사탄의 일과 동일하다는 그 전제 작업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니하고 상대하는 것이 사탄하고 상대하는 것과 똑같은 거야. 그런 취지에서, 그런 차원에서 니 상대하는 거야.” 라고 성령이 우리한테 말씀을 해줍니다. 그러면 저주받을 사람도 성령이 상대하고, 구원받을 사람도 성령이 상대한다면, 그럼 구원받을 사람을 상대할 때는 저주받아 지옥 갈 사람을 상대하는 것하고 뭔가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우리가 언뜻 할 수가 있죠. 지적하는 것은 똑같아요. 하지만 그건 달라요.

 

뭐냐 하면 요한복음 16장에 보게 되면, 자꾸 찾지 마세요. 찾으면 여러분이 피곤할까봐 제가 걱정이 돼가지고 배려하고 싶어요. 요한복음 16장 8절, 그가 와서, 그라는 말은 보혜사, 성령이 와서 하시는 말씀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거예요. 방금 하버드에 입학했고, 방금 세계에서 제일 큰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축하는 못할망정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와서 “아이구, 축하한다. 열심히 해라.” 이렇게 성령께서 격려한다는 것은, 평소에 우리가 고립자와 고립자,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그렇게 축하하게 되면 저 사람은 나한테 유용하다는 계산이 서가지고, 내가 축하하고 잘 보이면 쟤가 나중에 출세할 때 이득이 올 거라는 계산을 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은 그런 게 없어요. 성령과 우리의 만남은 그런 게 아니고, 책망입니다. 방금 취직해서 좋다고 하는 애한테 하는 말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리라” 참, 냉혹하죠. 미국영화에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한국영화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마는, 주인공인데 오해를 받았어요. 오해를 받아 도망자 신세가 됐습니다. 오해받는 이유가, 주로 그런 영화에서는 경찰 내부의 비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쫒기는 사람은 형사인데, 오해받아서 퇴직했어요. 살인누명을 쓰고 도망가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는데, 주로 사랑하는 여자의 도움을 받잖아요. 영화의 특징은 도움 준 여자가 전부 다 이뻐~ 이뻐요. 이쁜 여자의 도움을 받아 둘이 결혼생활을 할 때, 안 그래도 추적하는 형사들이 드디어 알았는데, 세상에 냉혹하게도 목사 앞에서 결혼선언을 하고 있는데, 실례합니다.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수갑 채워서 체포하는 거예요.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데, 안 기다려요. 그래야 영화가 되거든요. 냉정하거든요.

 

방금 취직해서 좋다고 하는데,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해서, 철컥 채워서 가져가버려요. 다른 사람들은 참 잘했다 하는데, 성령께서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따지는 거예요. 얼마나 냉혹합니까? 이거는 신자뿐만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미 십자가를 근거로 일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 대해서 죄 없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근데 죄 없다는 것을 핑계로 해서 체포한다는 것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구원해주겠다는 겁니다. “이제 너는 꼼짝없이 천국에 가게 되었어! 천국에 합격!”이라는 통지서에요. 그럼 체포된 그들은 뭐냐, 빈 서랍장이 돼요. 서랍장이 되면서 앞으로 살아가면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노라” 이 말씀이 구원받은 서랍장 안에 이게 하나하나 쌓이게 되는 겁니다. 많이 쌓이게 되죠. 실제적으로.

 

그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가 신으로 살고, 신으로 산다는 것은 악마의 앞잡이로 살았고, 그것은 남들 다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고 살았죠. 첫 번째 강의에서 제일 먼저 이런 이야기를 한 것 기억하시죠? 인간이 추구하는 것을 행복이다. 20대도 행복, 30대도 행복, 지금 40대 사람들을 보세요?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일하잖아요? 그 사람들 왜 일합니까? 코리안 타운에서 열심히 일 하잖아요? 아이스크림도 팔고 열심히 일 하잖아요? 왜 합니까? 행복하기 위해서. 왜 행복해야 되는데요? 남 행복? 아니에요. 나 행복! 이게 인간의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인간의 일을 뭐로 봅니까? 이게 사탄의 일이에요. 누가 이 말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인격모독, 모멸로 보죠. 목회는 어려운 것이 아니에요. 불가능한 거예요. 지금 여러분들은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의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이 시간에 강의 듣는다고, 이거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거. 또 이런 게 있어요. ‘이거 하게 되면 오늘 못 온 손님 내일 곱빼기로 오시겠지.’ 곱빼기로 오신다고 하는 것은 참 점잖은 분이고, 보통 교회에서는 곱빼기로 안 하고 30배 60배 100배로 온다고 이야기해요.

 

십일조 하게 되면 계산이 빨라야 돼요. 25,600원 같으면 계산이 바빠요. 25,600☓30, 60, 100. 왜 30배 하느냐, 100배달라고 하면 자체적으로 너무 교만하게 보이거든요. 양심이 있지. 처음에 30배로 시작하다가 조금씩 양을 늘려서 60배로, 100배로. 이 비유가 어디서 나옵니까? 씨 뿌리는 비유에서 나오죠. 이 이야기가 돈 소유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십자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간은 결국 고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그런데 옆에 밭을 보니까 30배 60배 100배 됐잖아요. 불가능입니다. 기적입니다. 내가 그걸 원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고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정한 목표, 내가 주는 말씀은, 니 행함으로는 어림도 없다. 니가 도 닦고 해봐야 니 행함은 여전히 고침을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괜히 평생 수녀해가지고, 독신선언해가지고, 수녀 한다든지 해봐야, 자개만 짜고 토속된장만 만들지, 그거 뭐 아무 의미가....., 그리고 노는 시간에 기타치고 가스펠 송 부르고. 그러다 늙어서는 노인정에 가서 저그들끼리 십원짜리 화투치고 세월 보내는 거예요. 모자하나 덮어쓰고. 신부도 마찬가지에요. 그 사람들 그거 실수한 거예요.

 

근데 왜 그렇게 하느냐,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남보다 더 빠른 신으로 승진하고 싶은 거예요. 남이 천천히 거북이로 오는 것을 자기는 토끼로, 빨리 자기의 본성이 합치되도록, 나는 신이라고 높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다 결혼도 안 하고. 토끼는 원래 중간에 산에서 한 번 자게 되어 있어요. 엉금엉금 기는 거북이가 태극기 꼽아버리면. 세리와 창기가 태극기 꼽아버리면 바리새인들은 자다가 완전히 지옥 가는 겁니다. 그 말도 안 되는, 되지도 않는 경주, 달리기, 레이스를 위해서, 주께서는 이렇게 해요. 누구든지 바리새인보다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달려라! 한 번 붙어봐라! 뛰어!. 더더더더 속도를 내봐! 추월해봐! 되는지?

 

세상에 그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교회, 미국교회, 온 교회에서 바리새인, 왕바리새인 짓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이렇게 바치면 신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바치면 복을 더 받겠습니까?” 계속 사탄의 속임수가 작렬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그 목사는 자기 교회를 가질 때 자기가 신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고립하면서도 외롭지 않기 때문에. 장사하는 것, 농사짓는 것, 자식 키우는 것, 애 교육시키는 것, 전부 다 결국 자신의 영혼은 내가 절대자 되는 것이라는 선악과 따먹은 그 성향을 한시도 버린 적이 없어요.

 

이거는 정말 성령께서 죄를 날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지 아니하면, 성령께서 함께 아니하면, 그거 뭐 주님만 날마다 대적할 존재일 뿐이죠. 뭐.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성경 왜 봅니까? 고침을 받지 못할 정도로, 니 주제 파악하라는 거예요. 니는 감추고 있지만 나는 이미 안다. 니 신되고 싶지? 신을 이용해서 신보다 더 절대적인 신이 되고 싶지? 그게 사탄의 생각이기 때문에, 주님이 사탄을 이겼다는 말은 바로 그 이김으로 우리를 부숴버릴 거야. 우리 자신을 부숴버릴 거예요.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10-03 19:36 
20160914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19-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선악과 따먹고, 사탄의 속성을 그대로 물려받았죠. 그렇다면 이제 사탄은 영적존재로서 뭘 아느냐 하면, 하나님을 알아요. 그러면 사탄이 신에게 대들었다는 말은, “니만 신이냐? 나도 신이 되겠다.” 해서 반발했고, 더 사탄이 아는 것은 뭐냐, 단순히 신이 되겠다는 도전이 아니고, 누가 주가 되느냐에 대해서 사탄이 알고 있어요. 독생자 예수님을 주라고 승격시키신 것에 대해서 사탄은 반발합니다.

 

그래서 무덤사이에서 귀신들린 청년이 나와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여, 당신이 무슨 일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압니다.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왔죠?” 라고 먼저 언급하죠. 예수님께서 “쉿! 조용히 해라. 니만 알고 있어!” 이런 식으로 대화가 나오는데, 모든 인간은 속성상 최종적인 자리에 본인이 있어야 되지,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이 있으면 인간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최종적인 자리에 가야 만족하는데, 그것은 뭐냐, 이 세상이 사탄의 세상이기 때문에 사탄의 성격과 맞아야 살아요.

 

“목사님. 어떻게 삽니까?” 사탄의 마음을 가지고 사시면 살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그런 식으로 살면 돼요. 그런 식으로 모든 게 교육되어지고. 그럼 사탄의 생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십자가만 외면하면 돼요. 그래서 편안히 주일날에 교회 가고, 평소에는 자기 직장가고. 아무 일도 없죠. 고민거리도 없고. 왜? 교회에서 십자가 복음이 안 들려지니까. 행복을 만끽하죠.

 

십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곧 성령께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누굴 책망해요? 이 세상을 책망하거든요. 이 세상은 곧 멸망하고 불로 타기 때문에, 그걸 통보해주는 건데, 그 통보를 귀 막고 안 듣겠다는 거예요. 제발 좀 부정적 이야기 하지 말고 긍정적 이야기를 해줘야 행복이 유진된다는 겁니다. 행복이 유지된다는 말은 내가 지향하는, 내가 최고라는 것에 대해서 가로막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남자들의 가부장적인 특징이 뭡니까? 옳고 그름이 아니에요. “내가 말하고 있는데 니가 중간에 왜 토를 달면서 입을 여느냐?” 이 말이죠. “내 이야기 끝나고 난 뒤에 ‘예’ 라고 해야지 어데? 하늘같은 남자가 이야기하는데 여자가 끼어들어서 재수 없게?” 그리 이야기하죠. 그래서 얼마나 분했으면 어떤 tv프로그램에 김숙이라는 개그우먼이 있어요. 김숙이 옆에 있는 윤정수 보고 나무라는 거예요. 어떻게 남자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느냐고 나무라고 있어요. 이게 어디 남자의 목소리가 담을 넘어가? 무엇의 패러디냐 하면, 여자의 목소리는 담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가부장적인 것을 패러디로 이제 김숙이 반대로 하는 거예요.

 

결국에 모든 인간은 서로 고립자가 되어야 하는데, 다만 고립자가 되기 위한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고개 숙이는 척, 아부하는 척, 양보하는 척하고 다들 무슨 놀이? 천사놀이 하고 있는 거예요. 수모를 당하면서 상대방을 마귀로 만들고, 자기는 거기에 대해 참고 있고, 저쪽이 마귀 되면 이쪽은 불쑥 천사에 가까워지겠죠. 백설 공주 라는 동화를 아시죠? 그 동화가 오늘날 상당히 문제가 돼요. 뭐가 문제냐 하면 백설 공주가 자기를 돌봐준 일곱 난장이를 버렸다는 사실. 얼마나 못됐는지. 결국 결혼은 누구하고 했습니까? 이웃나라의 왕자하고 했죠. 그럼 일곱 난장이는 뭐가 돼요? 결국 결혼은 외형보고, 외모보고 하는 거예요. 돈보고 외모 보고 하는 거예요. 도움 받는다고 도움 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탄은 기존의 하나님의 체제에 반대해서, 독자적으로 내가 따로 나서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가 따로 주가 되겠다 하니까, 주가 될 독생자 예수님과 주가 되겠다고 한 사탄과 이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탄과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고, 잠재적인 주가 되시는 예수님과 전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는 하나님과 마귀하고 싸운다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주권사상 때문에, 신의 주권사상을 깨부수는 것을 마귀라고 보는데, 그러면 알라, 이슬람 종교의 특징이 뭐예요? 알라의 주권사상이잖아요.

 

그들이 사람 죽여 놓고 하는 소리가 뭡니까? 신은 위대하다. 모든 게 주의 뜻이다.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들 세계에서 보기에 사탄은 뭐예요? 하나님의 하신 일에 토 달지 말자, 그리 되잖아요.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럴싸한 논리지만 실제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반대하는 것이 사탄입니다. 악마는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님이 활동하시고 예수님의 주되심의 활동을 나타내면, 그 현장에 그걸 극구 반대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그 한 예를 들어볼까요? 고린도후서 11장,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수정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우리가 어디서부터 고쳐야할지, 참 많아요.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보면, “뱀이 그 간계로 이와(하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제가 12년 가까이 시골에 있으면서, 아무리 설교해도 이 할머니들이, 여기 본문이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잖아요. 사탄이 그리스도와 관계있는데, 할머니들한테 물으면 꼭 하나님이라고 해요.

 

“그리스도를요?” 그리스도라는 말이 안 나오고 꼭 하나님이라고 보는 거예요. 왜? 목사들이 그리스도를 2인자로 가르쳤기 때문에. 이왕이면 2인자하고 상대할 것 같으면 1인자하고 상대해야지. 재벌총수하고 상대해야지 재벌아들하고 상대해서 뭐하려고요? 기본에 깔려있는 것이 뭐냐 하면 조물주, 절대자, 그것이 이름이 바뀌어서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 잘 섬기면 구원받는다. 이게 토대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사탄의 종교인데. 참 이걸 분명히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전부 다 쉽게, 쉽게 하나님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에 보면 누구나 하나님을 알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 아니하고, 다 하나님 안다 이 말이죠. 하늘의 별 누가 만들었겠어요? 하나님이 만들었고, 저 천지창조도 하나님이 했겠지. 유대인도 그렇고 힌두교도 마찬가지고, 불교도 마찬가지고 천주교도 마찬가지고, 모두 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믿는데, 정작 하나님의 일은 너희들이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스라엘 야곱의 혈통에서 나온 어떤 특정인물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인물이 만유의 주가 되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짜놓은 원대한 비밀이고 스케줄이에요. 이게. 원대한 프로젝트가 이겁니다. 예수님을 주로 올리는 것이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나와야지, 대한하나님교회 나오면 이미 수상한 겁니다. 순복음과 대한하나님교회요. 어차피 2인자를 딛고 1인자로 나와야지, 이래서 2인자를 무시하는, 2인자 딛고 나온다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자기 개인구원에 욕심이 있어가지고, 그냥 하나님을 이용하는 겁니다.

 

이게 안 되니까 말씀도 관심도 없고, 성경도 관심이 없는 거예요. 이게 안 되니까. 자꾸 하나님을 안다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교양적으로, 마음적으로, 심적으로,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정성만 다하면 돼요. 그러나 예수를 안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 자기를 죄인으로 드러내야 해요. 어떤 것을 해도. 어느 쪽이 편하고 어느 쪽이 마음이 수월해집니까? 사람의 노동을 알아주는 쪽이 좋지. 실컷 해도 죄라고 하는, 이거는 언뜻 다가서지 않는 거예요. 다가서봤자 또 마찬가지에요. 다가섰다고 또 보상이나 대가 내놓으라고, 이게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성령께서는 뭐냐, 예수의 이름으로 오셔가지고 진짜 성령세례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야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잖아요. 모든 것이 관련된 것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1장에 4절에 보면,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한 번 적어볼게요. 사도바울이 다른 예수라고 하죠. 부처 믿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예수 전했는데 보니까 다른 예수라 이 말이에요. 다른 영. 성령을 그렇게 강조하고 성령, 성령하면서 삼위일체 강조하는데, 보니까 다른 성령을 이야기하더라는 말이죠. 고린도교회가. 또는 복음, 복음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더라는 말이죠. 자, 이걸 사도바울이 증거 할 때에, 이 증거 함을 받은 그쪽 목회자나 교인들이 사도바울한테 뭐라고 대들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예수라면, 그 고린도교회가 “여러분 우리 다른 예수 전하겠습니다.” 이렇게 했던가요? 아니죠. 예수 전하죠. 성령 전하고. 참참참~ 참 복음 전한다고 하고. 순순순~ 순 복음 전하는 줄 알고. “여러분 우리가 다른 복음입니다.” 이렇게 안 하잖아요.

 

그렇다면 이렇게 지적하는 사도바울보고 뭐라고 대꾸하겠느냐 말이죠. 진짜예수, 진짜성령, 진짜복음의 기준이 뭔데? 기분 나쁘다 이거죠. 그런 소리하는 거 보니까 니는 진짜예수, 진짜성령, 진짜복음을 안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니가 제시하는 진짜예수, 진짜성령, 진짜복음은 뭔데? 하고 대들겠죠. 그럼 거기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답변을 해야 되겠죠. 사도는 이렇게 답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도다” 사도라고 해요. 사도.

 

사도이다. 사도는 열두 사도가 있는데, 열두 사도가 죽으면 뭐도 없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어져요. 성경이 마감이 됩니다. 성경편집이후라고 보면 돼요. 물론 성령께서 그러게 배후에 작용을 하지만. 그들의 말이 아니라, 사도가 하는 말이 다 성경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이 다 성경이 아니고, 성령께서 편집한 것만 성경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건 더 보태는 거고. 성경에 나오는 것만 성경이지, 이거 말고도 예수님 말씀이 있다고 해서 그걸 고고학적으로 발굴했다고 해서 성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간에 성령께서 확정지어 나간 거예요.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과 만남을 주선하는 그 안에서 이 책 외에는 없다고 확정지어 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배제하고 나면, 성령을 빼고 나면, 우리가 예수 믿으려면, 예수님에 관한 정보를 더욱더 수집해야 하는데, 도대체 얼마를 수집해야 정확한 예수상이 규합되겠습니까? 이만큼 정보를 모아서, “자 그러니까 예수다.” 라고 했는데, 만약에 몇 년 뒤에 또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상황이 나타나 가지고 쭉 한다면, 지금까지 한 것은 예수는 미흡한 예수고, 미흡한 예수 믿으면 그거 구원받겠어요? 온전한 예수를 믿어야지.

 

그럼 온전 이라는 말은 누구 소관입니까? 성령께 속하잖아요. 아까 요한일서 5장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 짓지 않죠. 이거는 뭐냐 하면 성령과 함께 거하기 때문에 그래요. 완전, 온전 이라는 말은 인간이 쓸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나 성령이, 예수님 쪽에 계신 성령이 하시는 말씀이거든요. 죄 짓지 아니하고 완전하다는 말은 성령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야기해봅시다. 니가 이렇게 예수알고, 성령알고 복음 안다는 소리인데, 그럼 니가 아는 예수, 성령, 복음이 맞고, 우리가 틀렸다면 니는 무슨 예수, 무슨 성령, 무슨 복음이냐? 할 때, 사도는 자기가 사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는 목회자이지만 나는 사도라는 거예요. 사도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의 발자취가 됩니다.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견해 같은 것이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의 계시에요. 그럼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과 사도의 행동의 차이점이 뭐냐, 일반적인 행동은,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의 행동은, 그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로 마감이 되지만, 사도의 행동이 계시가 돼버리면 사도가 이렇다, 저렇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런 분이구나로 규합이 돼요. 이걸 오해한 자가 신천지 이만희입니다. 행함이거든요. 성경을 행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개인구원 받습니다. 개인이 모인, 개인구원이 되는 신천지를 집단구원이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거죠.

 

근데 이 성경이 개인구원 목적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까? 제가 아까 했죠. 성령이 아니고서야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 못하죠. 성령의 뜻은, 내가 잘 믿는다, 내가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관련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것만 알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의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근데 이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애들 공부한다고 바쁜데, 인터넷 다음에 보니까 “세상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야자시키냐?” 이래 나왔어요. “애들 대피시켜야지 지진이 일어났는데 애들 공부시키냐?” 해서 문제가 됐는데, 애들 야간학습 왜 시킵니까?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해서 시킵니까? 고립자라고 했잖아요. 고립자. 내 집안은 독특하고 절대적이고 뛰어나다. 그걸 증명하고 싶어서 자기 자식들 그렇게 시키잖아요. 근데 거기다가 무슨 사도바울의 편지가 먹혀들겠어요? 지금 사도요한은 기적을 바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기적을 바라고. 기적이라는 것은 날이면 날마다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요나가 물에 빠졌습니다. 그 지점에 누가 물에 빠져보세요? 고래가 삼키는지. 사건이라는 것은 일어났다 사라지면 그 현장에 사건이라는 것은 없어요.

 

예를 들면 방금 우리가 점심때 콩국수 먹었죠. 그 콩국수를 지금 만들어보세요. 그 콩국수 맛이 안 납니다. 왜냐하면 콩국수 먹는 그 맛과 관계없이 콩국수 만들면서 수다 떨고 좋았던 분위기는 어디서 수입합니까? 중국에서 수입해요. 그때 그 상황을 그대로 재현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불가능해요. 왜?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한번 휙 나타났다가 휙 사라지면 없는 거예요.

 

우리 인생? 인생이라고요? 사건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지면 없는 거예요. 결국 누구나 있어도 늙어죽으면 없어지죠. 결국 인생이라는 것은 없는 겁니다. 그럼 나는 뭡니까? 나는 없는 거예요. 나는 없는데 여기 생겼으니까 이건 사건이다 말이죠.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도 감사해야 해요. 왜? 나라는 것이 없어야 되는데, 여기 빨간 티 입고 앉아계시잖아요. 이것이 사건이에요. 지금 동영상화면이 흐릿해졌어요. 이것도 사건입니다. 껐다가 한 번 새로 해보세요. 동영상 두 개 올리면 돼요.

 

사도가 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자, 그러면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예수님을 그 전처럼 하나의 사건으로 모으면 돼요. 무슨 사건이냐?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시다고 보지만, 예수님이 계신 자체가 사건인데, 누구한테만? 성령 안에 있는 자만 이게 사건이 됩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한테만, ‘아! 예수님이 먼저 계셨음에 내가 있었구나. 예수님 있음에 짧은 인생이지만 살아가는구나.’ 이걸 아는 겁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성령의 취지와 활동의 목적은 예수님의 주되심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 먼저 오셔가지고, 주 되실 때까지 계속해서 돌봐주시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 돌봐주는 것.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간호사라고 하거든요. 간호사, 돌봄이 없으면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어요. 그 보혜사 말고, 이제 예수님이 승천하시는데 다른 보혜사, 이미 예수님이 주 되신 이후에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지, 우리 개인구원을 위해서 성령이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주되심과 관련된 충만이지, 나 신앙생활 잘하라고 주는 충만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잊어버린다든지,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하지 못할 때, 주께서 역사하사 충만케 하는 겁니다. 내가 잘되는 것하고 관계없어요.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놀랍게도, 아이러니하게도 성령이 충만했어요. 두 번만 충만하면 다 죽겠다. 충만해서 돌 맞아 죽었어요. 충만해서.

 

이런 이야기가 교회에서 설교하면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위로가 안 되어야 되죠. 왜? 그들은 사탄의 마음이니까. 지금 사탄의 마음에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남을 자는 남고, 들을 자는 듣자. 갈라면 가라. 이거 다 배짱장사다. 배짱장사. 뭐 장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바울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배짱장사 한 거예요.

 

고린도후서에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나는 사도인데 어떻게 살았는가, 나는 죽음의 길만 찾아갔어요.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사도바울은 주기도문도 못 외웠는가 보죠. 주기도문에 일용할양식이 있잖아요. 사도바울은 일용할 양식도 없어요. 일용할 양식도 없을 때,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하나님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얼마나 근심되겠습니까? 주의 일 하겠다는데 뭐 도와주지를 않아요. 뭐 내일 하겠다고 하는 겁니까? 주의 일 하겠다는데 양식이 없어요.

 

사도바울이 성령에 충만했어요. 그런데 어떤 선지자가 하는 말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지금 잡힌다. 가지마세요. 잡히니까 가지 마세요.”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해석인데, 사도바울은 “그래, 그럼 가서잡혀야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잡힌다는 소리를 듣고, ‘아, 지금 제 코스로 접어들었네.’ 네비게이션에서 이랬어요. 지금 예루살렘에 가시면 잡힙니다. turn left! turn left! 잡히는 쪽에 가지마세요. 잡히는 쪽으로 가니까, turn right! turn right! 그러니까 잡혀야죠. 하늘나라는 환란 없이는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개인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는 모습을 주님이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은 순간이거든요. 긴긴 세월의 인생이 이게 응축이 돼버리면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되니까, 사건 자체에 주님은 주님으로서 또 작용을 하는, 이러한 관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요한일서 2장에 들어가 봅시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크게 쓸게요. 사귐입니다. 사귐의 반대말은 고립자.

 

모든 세상의 힌두교나 모든 이방종교는 특징이 고립이에요. 심심해서 미쳐요. 고립되어 있어요. 신이라고 하는 것은, 둘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산이 있으면 제일 꼭대기에 있어야 해요.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산은 가끔 영화 보면 나옵니다. 파라마운트 픽쳐스, 파라마운트사 영화 보면 제일 꼭대기 산이 나오죠. 파라para는 초월한다는 뜻이에요. 산을 초월하는 최고의 꼭대기. 이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입니다. 왜 사람들은 신을 이렇게 그릴까요? 본인이 그 자리를 은근히 염원하고 기다리기 때문에.

 

그 특징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사건이 하나 있어요. 무슨 사건입니까? 바벨탑. 바벨탑사건이 갖고 있는, 함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에 닿겠다. 그동안 자기 이름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땅에 있다는 거예요. 땅에 있으니까 누구한테 눌립니까? 하늘에 있는 신에게 늘 당하고 산다고 느끼는 거예요. 5.8의 지진에다가, 당하고 사니까. 어떻습니까? 5.8지진일어나면 사람들이 회개할까요? 회개 안 할까요?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습니다.

 

당하면 당할수록 오기가 더 생긴다고 나와 있어요. 얼마나 마귀 적입니까? 당신이나 나나 신인데, 신은 신끼리 알아줘야지, 왜 힘들게 하십니까? 더 닦달 내요. 이런다고 우리가 당신한테 굴복할 줄 알아? 당신이 정말 신이라면 우리에게 기적을 베풀어봐! 기적을 베푼다고 바리새인들이 복종하겠어요? 예수를 신으로 인정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신으로 인정하는 그 정도로 나도 만만치 않는 신이죠?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지옥 가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 말이죠. 내 믿음으로 예수 믿는 것은, 이것은 저주받아요. 선물로 받아야죠. 선물로 받는 믿음은 반드시 어디서 오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와요. 십자가에서 와버리면 그 믿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의 의미가 들어있죠. 그러면 믿음을 받는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받는 것이 되고,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니 믿음 때문에 내가 죽었다는 것을 우리 안에 활성화시키겠죠.

 

그래서 우리는 성령 받게 되면 육과 영의 갈등이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근데 그런 갈등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예수님. 받으소서. 받으소서.” 맨날 바치고 봉사하고 더불어 동급이라는 것을 자랑질하고. 주 앞에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도 죄인이라는 것은 십자가 처음 믿을 때 한 번만 죄인이고. 지금은 죄인이지, 그때는 죄인도 아니었어요. 모르는데 알았네. 그뿐이지, 죄인이라는 의식이 없어요. 지금은 한 고비 넘었으니까, 그 다음에는 지성이면 정성이라고, 정성만 바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요한 때나 지금이나 세대가 더러운 세대라서 이 말씀이 그대로 유효합니다. 요한일서에서 성령을 주었다는 것은 사귀자고 하는 겁니다. 근데 사귀는데 조건이 있어요. 주 안에서 사귀자. 주 안에서. 그럼 주 안에서 사귀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갈라디아서 6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은 뭘 주장한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증거 합니다. 그 주되심이, “주님 저기 계시네!” 가 아니죠. 이 땅에, 이 땅이 현실이라고 할 때는, 이 땅이 주님의 땅이니까, 현실에 어떻게 나타난다? 십자가 자랑으로 나오죠. “주님! 주님입니다!” 이게 아니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 주님 저기 계시네!” 이런 간증, 신비한 경험을 가지고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에요. “나 신비한 경험 했다.” 그건 코카콜라 목사가 하는 것이고. “나는 주님 봤다! 천당 봤다! 지옥 봤다!” 그걸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건 인간의 종교성을 유도도해서 자기 팬클럽 만드는 것이고. 실제로 성경에서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계시에 의하면, 예수님의 계시에 의하면, 정말 주되심의 그 자랑은 이 땅에서 주님 찬양! 이게 아니고, 여전히 한결같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십자가를 이야기해요.

 

그래서 제가 십자가를 증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저를 비난하면서 이 근호 목사는 십자가밖에 모른다고 했어요. 이게 욕인지 칭찬인지 내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인지. 오직 십자가만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성경에 부활, 성령, 다른 것 많은데, 다 빼고 십자가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십자가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니나 내나 목회자라면 그렇게 해서 장사되겠느냐? 그 이야기에요. 교회가 있어야 사람을 건질 게 아니냐 이 말이에요. 학원이 세워져야 서울대학 보내죠. 그러니까 보험회사가 있어야 보험금을 제공받고, 보람상조가 있어야 장례식이 간편하고.

 

모든 게 어떤 단체가 있어야 되는데, 왜 단체를 부정하고 십자가만 이야기하느냐? 우리가 교회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고 주의 일이잖아? 근데 순수한 마음으로 교회 일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래서 교회 와서 봉사해라, 헌금해라, 하는데 니는 왜 그걸 순수하게 보지 않고 왜, 그걸 비난하느냐? 그럼 한국교회가 다 썩었느냐? 한국교회 다 이단이냐? 이런 식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결국은 관심사가 뭐예요? 하나님 앞에 하청 받았다는 거예요. 하청 받았다는 거예요. 주 앞에 가지 말고 일단 나를 거쳐서 주님께 가라는 겁니다. 내가 관리인이기 때문에. 지가 세리도 아니고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세례요한이나, 사도요한이나, 사도바울은, 사도들은 십자가만 자랑했어요. 그리고 베드로, 요한이 그랬잖아요.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지금 주님이 없으면 내가 하청 받아서 하겠는데, 지금 주님이 계시면, 물론 보이지 않지만. 주님이 계셔서 이런 결과를 낳았으면, 너의 눈에 내가 보인다는 말은 어떤 의미겠어요? 보이지? 보이는 것을 사람이 안 했다는 것을 증거 하라고, 다른 말로 하면, 보이는 사람은 나 아니야! 라고 하기 위해서 보여 진다는 거예요.

 

진정한 믿음이라면, 정말 성령 받았다면, 저 분 때문에, 저 이 목사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지금 저한테 아직 몸이 있는 거예요. 죽으면 하나의 납작해져 사건 되어 없어지지만. 마술사들이 뭐 이렇게 해놓고, 하나! 둘! 셋! 하면 없어지잖아요. 주님은 마술사에요. 시켜놓고 손 떼면 없어져요. 저 뿐만 아니고 여러분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살만큼 살면 없어져요. 그렇게 치매로 애먹여도 돌아가시면 없어져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잖아요. 마술사 손에는 아무 일도 없어요. 조금 전까지 비둘기 보이고, 돈 보이고, 색종이 보였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세상이 꽃처럼, 풀처럼 없어지고 남는 것은 그 현장에 주의 말씀, 예수님 말씀만, 예수님의 행적과 공로와 일하심만 남아요. 이것을 바로 성령 받은 사람만 아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니고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다시 해보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네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제가 이 본문을 왜 찾았느냐 하면 사귐이 뭐냐? 라고 했잖아요. 보통 세상적인 사귐은 뭐냐 하면, 너 나가 계속 있어야 사귐이 형성되는데, 주님의 사귐은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이, 사람들이 눈에 있으면서도 마치 없는 것처럼,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 사귐을 이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겁니다.

 

제가 설교하고 녹음하고 동영상 찍고 하는 것이 분명한데,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주께서 하신 것이지, 제 행동과 관계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주께서 잠시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헌금을 해도 죄가 된다면 안 하면 되겠네요?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데, 그게 평소에 돈을 얼마나 좋아했다는 것을 티를 내는 거예요.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헌금 안 하고 천국가게 하옵소서. 할 수만 있다면. 이런 식이라니까요.

 

헌금을 하게 되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을, 헌금하면서 나름대로 중요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지적하기 위해서 헌금하게 하신 거예요. 자발적으로 해봐야, 인간은 내놓고는 후회하거든요. 돈이라는 것은 내놓으면, 너무 과했나? 나만 쪼단가? 그래서 식당가면 어떤 사람들은 신발 끈 묶는다고 하고, 화장실 간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눈치 보는 거예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이번 일로 낼 사람 없습니까? 하면 눈치 다 봐요.

 

사귐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평소에 인간들끼리 사귀는 식으로 하는 것을 삭제시키면서 사귐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자꾸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면서 사귀어요. 우리의 사귐은 뭡니까? “안녕하십니까? 우리 뭐 노래방이나 갈까요? 하면서 술 먹고 하는 이게 사귐이잖아요. 진짜를 핵심으로 한 사귐은, 십자가의 의미만 드러내는 쪽으로 사귀어야 그게 성령 안에서 사귐이지.

 

천주교 수녀원이나 단체나, 영성단체처럼, 그저 묵도하고, 스케줄 짜가지고, 아침에 몇 시에서 몇 시까지 노동하고, 그 다음에 기도하고, 그 다음 묵상시간, 노래도 그냥 부르는 것이 아니고, 워더디다디더디디~♬ 이태리 사람도 못 알아듣는 라틴어로 해가지고, 무슨 그런 사귐이 있어요? 그건 사귐이 아니고, 벽을 보고 독백하는 거예요. 자기가 생각하는 사귐을 자기가 연출하는 겁니다. 9개월 아기 보고 “사과 먹고 싶지? 줄까?” “어따띠띠띠~”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잖아요.

 

마찬가지로 자기가 예상한 거룩함을 설정해놓고, 그게 종교놀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건 개인적인 종교놀이고. 교회에서 권사 활동하는 것은 교회에서 하는 놀이고. 어쨌든 저쨌든 놀이에요. 사귐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사귀는 것이 사귐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사귀어야 되고, 성령 안에서 사귄다는 것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죄인이라고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죄인인 것을 확인하는 거예요. 그럼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면 뭐만 자랑하겠어요? 십자가만 자랑하겠죠.

 

그럼 그 십자가는 자기한테 뭐 했다고요?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요. 세상은 십자가 안에서 나에 대하여 죽고. 그래서 제가 쓴 책에 이런 제목이 있어요. <죽은 세상 산 성도>라는 책이 옛날에 나왔습니다. 세상은 죽었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은 성도만 살아있다. 성도가 고립되어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사귐 속에서 살아있고,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의 영생의 능력 안에서 살아있고.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아주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오빠하고 살았던 마르다, 마리아는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이건 뭐 우긴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께서 우시면서 “가자! 현장에!” 현장에 갔어요. 제가 만약에 주님이라면, 돌문 있고 무덤 있잖아요. “거봐! 살았잖아?” 이렇게 했을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하고 다른 사람은, “어딜 가서 이게 살아있어? 이게 숨을 쉬나?” 그럼 주님께서는, “불러봐! 오빠 이름을! 나사로이름 불러봐!” 그러니까 “사람들이 저 분이 미쳤나?” “불러봐!” 그냥 죽었으면 혹시 기절한 줄 아는데, 나흘 되어 썩은 냄새가 되잖아요. “이미 썩었습니다.” “썩었어도 한 번 불러보라니까! 안 불러? 그럼 내가 부를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니까, 살았네.

 

도대체 주님이 보는 세상 안목은 뭐고, 우리는 뭐냐는 말이죠. 주님은 이렇게 할 거예요. 아버지와 나와 사귐이 있고, 너희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귐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껏 인간 대 인간의 사귐에 참여했기 때문에, “어딜 봐서 살았어요? 죽었지?” 하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더 웃기는 이야기는, 이게 요한복음 12장 10절에 나옵니다. 나사로가 살았잖아요. 유대인들은 예수님만 처지하면 되는데, 예수님 때문에 나사로가 살았으니까, 나사로도 함께 죽이려고 시도하고 있어요.

 

똑같은 현상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불러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는데 도사입니다. 오른쪽, 왼쪽, 위쪽, 아래쪽, 그물 안 던져 본 곳이 없어요. 오른쪽 빼놓고 왼쪽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던져볼 곳 다 던져봤어요. 없어요. 그날따라 없어요. 주께서 고기보고 다 가라고 했으니까. 고기보고 빠지라고 했으니까. 고기들 민방위훈련 시켜서 다 치워놨어요. 없어요.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그물을 오른쪽에 던지라!” 아, 베드로가 갈등을 일으키죠. 자기는 이미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다 훑어서 없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없는 것을 알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한 번 그냥 던져는 보겠습니다.” 이왕 안 잡히는 것 던져봤죠. 탁 던지니까 배가 기우뚱합니다. 어떻게 됐어요? 너무 많이 잡혀서, 배가 기울 정도로 잡혔습니다. 그 없던 고기가 어디서 생겼습니까? 우리 같으면 “땡잡았네! 고맙습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만납시다.” 그럴 건데. 그게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 버려둔 것처럼,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한테 달려가서 바짝 엎드려 하는 말이, “주여, 몰라 뵈었습니다.”

 

인간이 예상한 것은 단선이에요. 단선. 과거, 현재, 미래로, 그래서 미래는 항상 예상하게 되어 있어요. 예상 밖이라고 하는 것은, 원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묵시세계가 여기 관여할 때만 그렇습니다. 카이로스, 하나의 때로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말이 중요합니다. “나 같은 인간은 상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상종해야, 사귈 때 “나 주님하고 사귄다!” 이따위 소리 안하죠. 그러면 뭐냐, “나 같은 인간도 이렇게 사귀어주시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의 만남이에요. 만남이고, 통합이고, 연합이고.

 

따라서 걱정하거나 염려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는 사실상, 이론상 생길 수 있는 여지가, 건덕지가 없어요. 지가 죽었는데, 죽은 놈이 무슨 염려하고 걱정을 합니까? 죽었는데? 죽은 줄 아시고, 내가 보기에는 내가 살아있지만, 아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할 때 주님은 다른 안목 가지고 우리를 보잖아요. 다른 안목은 십자가에 근거해서 다른 안목,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그 논리와 그 원칙을 가지고 그런 시선을 봤다면, 나는 죽은 자라는 말을 가볍게 해도 괜찮아요.

 

살았다 해도 못 알아듣고, 죽었다 해도 못 알아듣는 인간들에게 차라리, “너 내가 산 걸로 보이지? 사실은 주 안에서 살아있어!” 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시라는 말입니다. 왜? 사귐이니까. 그래서 주 안에서 사귐이 있다는 말이 요한일서 1장에도 나오고 2장 초반에도 나와 있고, 그리고 3장에도 사귐이고, 4장에도 사귐이 있는데, 하지만 이거 다 찾다보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니까.

 

결국 사귐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화목제물의 효과를 통해서, 이 말이 어려우니까 더 쉬운 말로, 예수님의 피를 경유해서, 경유라는 말은 무슨 취지로 하느냐 하면, 이 근처에 놀이동산 있어요? 놀이동산에서 보면 철주 세워놓고 철주에 체인이 여러 가닥으로 묶여 있고, 탈 수 있도록 의자들이 있어 남녀들이 타서 막 돌아가면 악~하고 소리 지르면서 좋다고 하고, 이게 빙빙 돌잖아요. 이 고리와 이 고리가 어디서 묶입니까? 가운데 철주에 묶이잖아요. 세상에 있는 모든 일들이 예수님 안에서 연결되어서, 전부 다 관련되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다면 주님께서 사귄다, 교회가 서로서로 사귄다 할 때, 그냥 사귀면 안 되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니까, 서로 저 사람이 이익이냐 아니냐, 잘났느냐 못났느냐, 이쁘냐 못생겼냐, 그걸 따지기 때문에, 반드시 이게 주님께 가게 되면, 가는 순간 우리는 성령 세례 안에서 가기 때문에, 죽은 자죠. 죽은 자로서 가다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면, 전에 ‘저 사람을 이용해야지.’ 하는 생각이 죽음과 함께 이미 소멸된 상태에서 ‘오직 저 사람에게 그리스도만 자랑해야지. 나 못난 것만 자랑해야지.’ 이렇게 교회가 서로 사귀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이 교회는 어떻게 할까요? 이제 서로 자랑해야죠. 이해 안 되십니까? 지금 다 와 가는데 이 말이 이해 안 되면 안 됩니다. 우리 못난 사람들끼리 예수님 때문에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자랑해야죠. “우리 애가 아이비리그에 다니고..” 좀 자랑을 해야죠. 이미 이것이 못난 짓인 것을 다 알고 하기 때문에. 그런데, “권사님.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권사가 되어 가지고. 이근호 목사님 강의 못 들어봤습니까? 주 안에서 우리는 못난 자인데,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저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이구, 자랑질 하기는 씨.” 그건 지 자랑질이죠. 지 자랑질. 그 과정을 설명해야지. “이렇게 지 자식 잘 두었다고 까불다가 당했습니다.” 그걸 자랑해줘야지. “나는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뭐 복음 안다고 개코나 알아요? 맨날 돈 자랑하고, 여기는 돈 자랑할 사람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안심이 된다마는. 돈 자랑하고, 뭐 자랑하고, 교회 뭐 똑같네? 복음 알아도? 똑같아요. 강도에요. 강도. 다른 교회에 비해서 우리교회는 특수하다고 하죠. 우리교회도 똑같아요. 다른 교회하고 똑같아요.

 

그래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사귐이 있는 겁니다. 아무리 성경을 해석해도 결국 막사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요. 결국 막사세요. 이걸로 되돌아와요. 막 사는 대로. 그러나 거쳐서 오는 것과, 그냥 막사는 것과 다르죠. 그래서 막살라고 해서 삐져서 안 나오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잖아요. 막살라는 그 소리 듣고 삐져가지고. 잘 해보려고 하는데 격려는 못할망정, 인간을 더 망치게 만드느냐? 이런 식으로 하죠.

 

그게 뭐냐 하면, 어지간히도 지 자랑하려고 한다. 십자가는 피해버리고 내가 이렇게 우수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그 자랑 못해서 환장을 했어요. 환장을. 나는 지금 혼의 차원 떠나서, 영의 차원으로 들어가고 있어. 뭐 우주 로켓 발사하니까? 하여튼 나는 지옥 간다고 자랑질 하고 있어. 그게 뭡니까? 십자가만 자랑 못한다는 다른 예수 믿는 사람들이에요. 지옥 가는 게 그렇게 자랑스러운가? 그럼 마음대로 떠들라고 하세요.

 

자, 요한일서 2장 28절 봅시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것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이것 설명하려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로마서 9장으로 가야 돼요. 33절, 누가 한 번 읽어주세요.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시온에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돌이 있죠. 그 돌은 뭐를 깨는 돌이냐 하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다 깨는 돌이에요. 그게 바로 32절에 나와요.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어디에 의지한다? 행함에 의지하는 것을 다 깨버립니다. 따라서 여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미리 깨지면 안 부끄럽다는 말이죠. 미리 사람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미리 주님 앞에서, 완전히 성령에 의해서 다 깨져버리세요.

 

그게 나이아가라 이야기를 뉴저지에서 두 번씩이나 이야기한 것이 그겁니다. 폭포 보러 갔는데, 폭포가 안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멀리서는 보이는데, 더 진짜 폭포보기 위해서 갔는데, 물이 카메라고 뭐고 다 덮어버렸어요. 하얘가지고 소리도 안 들려요. 카메라 찍었는데 소리가 안 들려요. 어딜 감히 진짜 폭포 모습을 봐? 멀리서 가짜나 봐! 가짜 볼 때는 폭포 있고 나 있고 하죠. 정작 가보면 나도 없고 폭포도 없어요. 물보라만 있어요. 그게 제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갔던 깨달음입니다. 깨닫는다고 부처 되는 것은 아니고.

 

배타고 밑에 가니까. 폭포는 없고 물만 뒤집어 쓴 거예요. 그냥 물 뒤집어 쓴 줄 알아요? 바람 불어요. 바람 불면 카메라고 뭐고 앞에 덮어 쓴 것이 다 가려가지고, 이거 하나 벗기고 초점 맞추고 이게 안돼요. 그래서 2인 1조로 가야 돼요. 나는 촬영 포기하고 아내로 하여금 카메라 잡고 결사적으로 찍게 하고, 그래서 펼쳐진 윤곽을 겨우 찍었어요. 다른 사람은 난리도 아니에요. 그건 예상도 못했거든요. 그럴 줄은.

 

비만 오면 괜찮아요. 바람이 세니까. 그냥 다 내려가는 거예요. 완전히 물속에 빠졌지 폭포 앞에 있다는 의미는 없어요. 그게. 그래가지고 배를 싹 돌리니까, 이쪽은 미국 배, 저쪽은 캐나다 배를 돌리니까, 한숨 쉬고 멀리 가서 찍어봐야 그거는 내가 있고, 내가 찍는다가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그건 가짜입니다. 그 폭포는 가짜에요. 진짜 폭포는 앞에서 혼났어요. 폭포이야기 하다가 마치네요.
 이미아(IP:122.♡.165.245) 16-10-04 23:56 
20160914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20-이 근호 목사

자, 요한일서 3장 1절에 보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우리가 자녀가 되는 방법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녀가 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한 번 써보겠어요. 여기 하나님의 자녀가 있고, 여기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께 사랑으로 자녀가 되는 것인지, 이거는 요한일서 3장 1절이고. 믿음으로 자녀가 되는 것인지, 이거는 요한복음 1장 12절이고.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자녀라 하는 것은, 이것은 생뚱 맞는 겁니다. 전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거예요. 자녀라 하는 것은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 혈통을 생각하고, 자녀라 하는 것은 누구누구의 자녀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자녀라 하는 것은, 자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니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녀가 되는 겁니다. 이 자녀  안에는 아버지의 정보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녀라 하는 것은, 나 자녀다! 자랑하기 위해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교회에서 또 이걸 잘못 가르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항상 들을 때는 뭐냐, ‘나는 되었구나. 구원되었구나.’ 자기 자신의 구원되었음을, 자녀라는 것으로 대변하는 경향이 있어요.

자녀라 하는 것은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우리 아버지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드러내라고 자녀가 되는 거예요. 변호사 역할이 뭡니까? 자기 재판 잘하라고 변호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억울할 사람을 승리하게 위해서 변호사가 있잖아요. 그게 바꾸어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한 자녀가 아니라, 자기 자녀 됨을 자랑질 하는 것은, 이거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자기 구원욕구에서 나왔어요. 구원욕구. 여러 번 버지니아에서 계속 강조합니다마는, 인간의 개인적인 구원욕구에서 나왔습니다.

이 개인적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고립이라고 했죠. 고립은 어떤 여건 때문에 고립이 생깁니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기가 뭐라고요? 신이죠. 신. 이 본성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의 본성을 어떻게 하면 발산하고, 신의 본성을 어떻게 하면 확인 할 길이 없는가? 하고 노리다가 신의 자녀가 된다니까 멋진 기회가 찾아온 거예요. 그러니 요한복음 1장에서는 믿음으로 된다니까, “믿습니다.” 라고 된 거예요.

결국 자녀인데,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강조점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내가 나한테 수작을 부려서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남들은 안 믿는데 나는 믿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어처구니가 없죠. “너는 뭘 말하고자 하느냐?” “내가 믿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뭘 얻었는데?” “제가 구원받았어요.” “그게 뭔데?” “하나님의 자녀.”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보여 줄 것을 믿느냐? 하는 겁니다.

이거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떠한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출발점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함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욕구가 되면 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되죠. 그럼 무엇을 잘라야 됩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에서 무엇이 잘려나간다? 자신의 세상적인 욕구와 구원의 희망은 다 잘라내야 됩니다. 무엇을 잘라내야 하는가? 목적을 잘라내요. 사람이 살면서 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당하는 이유는, 집착을 가진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적이 있는 한, 그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목적 말고 다른 목적으로 반드시 활동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자녀의 목적은 뭐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 이미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린도전서 6장이 그냥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너의 존재의 목적은 이미 결정 났느니라. 아버지가 어떤 분이지 드러내라.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 가서도 목적이 따로 있어요. “하나님. 이번 일만 잘 성사된다면 다이아몬드가 문제겠습니까?”

이미 월요일에 바이어와 만나서 계약체결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화요일에 애가 중요한 시험이 있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수요일에 내 딸 진희가 선을 봐야 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이상은, 그런 날을 앞두고 있는 주일날에는 목적이 뭐냐 하면 완전히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구 이 어려운데, 이 더운데, 교회까지 왔는데, 이런 소박한 소망정도는 주고받고 해야, 뭐 계속해서 믿을 마음이 들겠습니다. 제발 이번만큼은 어쨌든 간에 성사시켜주시옵소서.” 이게 우리 동네에 갑바위 있거든요. 갑바위 비는 것하고 교회 비는 것하고 차이점이 없어요.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기의 그런 소박한, 시험 잘 보게 해달라고나 기도하려고 하는데, 이건 뭐 목사와 장로가 또 거기다 목적을 줘버리네. “이번에 예배당 지어야 되는데 여러분 합심해서 기도합시다.” 이건 또 예배당 짓는 것이 목적이 돼버렸어요. 예수님이 건축갑니까? 예배당 짓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지, 여기 장도리하고, 장도리 오랜만에 사용합니다. 장도리. 장도리하고 줄자하고 옆에 허리에 차고 목수일 하러, 아버지는 목수였지만, 미장일 하러 오신 게 아닙니다.

집하나 지어놓고 다 이루었다고 하지 않아요. 집하나 지어놓고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집 없는 사람들한테 봉사해서, 무슨 운동입니까? 해비타트Habitat(무주택 가정 및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주거문제 해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봉사단체). 해비타트죠. 뭐, 해비타트 운동해서 집지을 때나 하지만. 주님은 이 땅을 불로 싸질르러 왔는데, 짓기는 뭘 짓습니까? 인공적인 것은 불로 다 태워지는데요.

그래서 자녀는 뭐가 없어야 된다? 목적이 없어야 된다. 이 세상에서 목적이 없는 이유는,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또 “목사님 말씀은 너무 허무합니다.” 허무하기는 뭐가 허무해요? 목적이 있을 때는 뭐가 허무해요? 목적이 없을 때는 허무하지만. 도대체 설명을 뭘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실컷 듣고 허무합니다. 아하, 지가 기대한 목적과 결부된 방법을 제시 안 하니까, 그래서 허무하다고 생각하겠죠. 이러한 믿음, 하나님께서 믿음을 줬을 때는, 우리가 덥석 물어서 믿음이라고 하지 마시고, 제대로 된 믿음이 누구부터 시범조로 보여줬는가를 발견해야 돼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델, 모델이 아니고 마델이에요. 제대로 된 발음한다. “믿음이 보고 싶어?” “이게 믿음이야.” 그 당시 바리새인 믿음과 완전히 대비 적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목적이 없이 살면 어떻게 사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일단은 목적 없습니다. 목적 없어도 돼요. 아버지가 누구신지 드러내면 그게 우리의 목적이죠. 어떻게요? 하지 마세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목적은, 아버지의 자녀라면 아버지를 드러내야 하니까.

자, 고린도전서 7장 30절에 보면, 목적 없는 사람, 곧 성도죠. 하나님의 자녀죠. 자녀가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나와 있습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주로 우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찡찡대는 자죠. 고민이 많은 사람이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같이 하며” 촐랑대지 말란 말이죠. 뭐 일이 잘 됐다고 까불까불되지 마라. “매매하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며” 돈도 아무것도 없으면 장사 못하죠. 매매하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다음에, “세상에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백화점에 가서 뭘 살까? 신상 나온 것 없는가? 하면서 살피는 사람은 이 물건들이 백화점에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물건을 집어라 이 말입니다. 그렇게 쇼핑할 때 너무 심사숙고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것을 해도 별 의미 없다는 겁니다. 백화점에 가면 남자들은 화장실 앞에 가방 들고 앉아있고. 여자들은 두 시간 세 시간 쇼핑하고. 거기서 여성은 위대하다가 증명이 돼요. 다리 아픈 줄도 몰라요. 정말. 다 소비를 못하는 것처럼 하며. “이 세상의 흔적은 지나감이라” 인생 뭐 있어? 아무것도 없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소비자체가 목적이 되지 말고, 부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되지 말고, 나는 항상 울지 말아야 돼! 그게 목적이 되지 말고, 나는 항상 웃어야 돼! 그게 목적이 되지 말라 이 말이죠. 왜냐하면 세상이라는 것은 그냥 내 옆으로 스쳐지나가는 구름 같은 것이에요. 이게 어떤 환경이 지나가든, 이게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 자체는 변함이 없다는 겁니다.

뭐가 보장이 돼주는가? 이제부터 그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에, 오늘은 자녀인데 내일은 자녀인지 아닌지 헷갈리고, 그 다음에 자녀라고 했다가 한 달 뒤에 헷갈리고, 아예 70 넘어가지고 치매 걸려서 하나님의 자녀고 뭐고, 이거는 뭐 행악질했을 때에, 그때 과연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또 본인은 하나님의 자녀인가를 생각해보자 이 말입니다. 치매 걸린 환자는 정신병이기 때문에, 우선 내가 누구냐 자체를 정립할 수 없죠. 그 기억을 저장하는 부분이 망가졌기 때문에.

그럼 치매환자에 있어서의 그 사람의 미래나 그 사람의 행동은 본인이 결정 못하기 때문에, 본인 외에 외부에서 결정하게 되어 있죠. 그럼 논리는 간단해요. 그 치매환자가 만약에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관리는 누가 하겠습니까? 1번. 요양병원장 2번. 가족 3번. 며느리 4번. 아버지. 몇 번 이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관리하겠죠. 물론 며느리를 보내서 하든지, 뭐 이렇게 보내서 하겠죠. 딸이 있으면 딸이 하는데, 우리 집안에는 딸이 없기 때문에 며느리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산부인과에서 딸 놓으면 와우! 하는데 아들 놓으면 죽었다! 마지막까지 누가 돌볼 것인가? 딸은 반드시 부모를 돌보고, 아들은 마누라한테 팔려가게 되어 있어요. 아들은 다 빼앗기게 되기 때문에 키워줘 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옛날에는 딸 키워봐야 출가외인이라고 아무소용 없다고 한 것이 바뀌어져서 아들 키우면 아무소용이 없어요. 아들이 뭐 아이스께끼고, 아이비리그고 갔어도 아무소용이 없고, 누구 좋은 일 시키느냐 하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예요.

목적이 없다, 목적 없이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와 이 세상의 뱀의 자녀와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더 핵심적인 건, 우리가 자녀가 되고 싶었습니까? 딱 깨놓고 말해서 인간의 육신은 하나님의 자녀에 미혹 받고 그것이 유혹거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그냥 육체적인 작업과 쾌락이에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몸의 컨디션입니다. 섭씨 18도에서 20도 사이가 최고 좋아요. 이러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예수님도 잊어버려요. 편안한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노후대책이 될 정도로, 한국 같으면 월 300백 이상만 뭐 따박따박 나오면, 이것이 내 육신으로서는 만족이에요. 이런 만족도가 있는데 뭐 구태여 하나님의 자녀 되려고 그렇게 애쓰지 않습니다. 결국 제 말이 뭐냐 하면 육신이 뭘 방해한다? 자녀 됨을 매일같이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육신의 쾌락 때문에 이 더운 날 이렇게 활동하시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어서 오늘도 활동하셨습니까? 온종일. 뭐, 활동해서 자녀가 될 것 같으면 얼마든지 활동하겠는데, 활동해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제 말이 맞는다면 무슨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은 뭘 끊어내야 될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죠. 뭘 끊어내야 되는가?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렇게 했죠.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녀 값을 한다면, 자녀 티를 낸다면 뭐를 자꾸 하나님께서 잘라내겠어요?

혈통에 구애받지 말고, 니 육신에 구애받지 말고, 타인의 시선에, 타인의 응시, 타인의 평가에 구애받지 말아라. 왜냐하면 그것과 별개로 너는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별개로. 그러면 이 이야기를 추론해보면 이래요. “하나님이여!” “왜?” “저를 자녀 만든 것은, 그러면 제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너 뜻이 아니지.” 왜? 우리 육신 속에는 혈통의 욕구와 그리고 주변의 시선과 안목으로 똘똘 뭉쳐있습니다.

내가 뭘 꿈적거린다는 것은, 어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내가 뭘 움직인다는 것은, 결국은 남한테 보란 듯이 또 복수심을 깔고 ‘니가 나를 개무시 했지? 봐! 이정도야!’ 자꾸 타인을 의식해요. 타인을. 남은 가만히 있는데. 가만히 있는데, 혼자 일부러 상상을 해가지고, ‘니 그렇게 했지?’ 보란 듯이. 도대체 교회 와서도 걸음걸이부터 달라져요. 뭔가 좋은 일 있으면, 딱딱딱 이렇게 들어오고. 뭐 안 좋은 일 있으면 뒤에 앉았다가 축도 끝나기도 전에 없어져버리고.

자랑거리 있으면 “안녕하세요? 할렐루야!” 하고. 우사스러운 일 있으면 언제 왔는지 점심도 안 먹고 그냥 가버리고.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들지만 나는 인간성이 좋아서 그래도 인사는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더 심한 저주는 퍼붓지 마세요.” 뭐 이거 협박도 아니고, 압력 주는 것도 아니고, 공갈치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 사람한테 하는 행세대로 그대로 하나님한테 하잖아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어요? “니그 아버지 꼬라지 좋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 꼬라지에요. 그 꼬라지요. 무슨 하나님의 자녀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완전무장 되어 있습니까? 물론 끊을 수 없습니다마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자녀가 되는 노선과 그 통로는 따로 있다는 것. 그거는 예상치도 못한다는 것. 나아가서 예수님이 왔을 때에, 자녀 된 조건도 동반해서 다 세팅되어서 우리한테 찾아온 겁니다. 예수님 혼자 구원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지니고 독생자가 오셨어요. 우리는 그 권세를 주님 것에서 내 것으로 이동하려고 하는 그런 막돼먹은 생각을 하지 마세요.

탐을 내도 탐을 낼 것을 내야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면 되지, 구태여 주님 손모가지를 비틀어가지고, “요거는 전능하신 능력이니까, 주님 무겁죠?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기도 빡세게 해서 주님 가지고 오신 권능을 내가 가져와버리면, 이거는 뭐냐 하면, 아까 제가 오후 두시에 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자칭 뭐가 되고 싶다? 신이 되고 싶다는 그 열의를 참지를 못해서 주님 오니까, 주님이 뭐 화물엘리베이터입니까? 얼른 문 열고 주님은 생각 안 하고, “아이구, 고맙습니다. 이제야 택배가 왔군요.” 주님이 택배기사도 아닌데.

물건만 자기가 가지고 가가지고, “자, 나보다 능력 있는 사람 나와 봐! 내가 안수하면 병 나아!” 이건 무슨 이런 무당이 다 있어요? “자녀가 어떻게 되는지 나한테 물어~ 봐~!” “부채야! 부채야! 안 되겠다~!” 이건 뭐 교회 권사가 점을 치질 않나, 투시가 뭐? 니 앞길이나 투시하세요. 지 앞길은 지가 가로막고 보지도 못하고 뭐 남을 투시한다고? 예언한다고? 왜 자꾸 주님만? 우리는 주님한테 전부 다 맡겨야 하는데, 있을 것도 맡겨야 되는데, 주님한테 있는 것을 손모가지 비틀어가지고 끙끙대면서 내 것 만들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남한테 기 안 죽을라고. 맨날 내 능력이 얼마? 능력이 얼마? 내신 성적 따지고.

성경말씀 하나하나하고 오늘날 교회영접하게 되면 성경말씀이 절로 이해돼요. 반대로 하면 돼요. 반대로. 꼭 말씀은 봐놓고 결과는 반대로 돼가요. 주님한테 맡기면 내 고민은 내가 놓으면 돼요. 주님께서 오른손 손모가지를 잡으면, 내가 왼손으로 잡는 주님은 놓아도 괜찮은데, 주님이 잡았다는 것을 못 믿기 때문에, 내가 붙들어야 되는데, 백날 붙들어봐야 치매 걸리면, 붙들고 싶어도 무슨 짓 하는지 몰라요. 그냥. 결국 인간은 치매 걸리나 안 걸리나 늙어 죽을 때 되면 정신없어요.

심지어 대구 유명한 교회 목사가 미국에 집회 가서 설교 도중에 갑자기 흘러간 유명한 노래를 불렀어요. 술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이 가가지고, 의도적이 아니라 갑자기 중풍이 왔는데 정신을 잃어가지고, 중풍이 와도 찬송가가 오면 은혜로운 데, 찬송가가 나온 것이 아니고 평소에 흥얼대던 유행가가 막 나왔어요. 저처럼 평소에 유행가 하면 원래 그러려니 하고, 위아래 위위아래 막하면 원래 그렇다가 되는데. 이게 아니고 지 딴에는 한 경건해가지고, 평소에도 경건으로 목사 대우받아서 그동안 생계비 받아놓고, 거기서 갑자기 흘러간 옛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병원에 갔어요.

목적을 버리라는 말은, 정말 제가 심사숙고한 거예요. 모든 사람의 고민은 그가 따로 목적을 챙겨서 그런 거예요. 그럼 목적을 왜 챙기느냐고 물어보면, 그 목적이 있음으로서 내가 누군지를 구체화하겠다는 거예요. 당신이 그거 구체화 안 해도 성경말씀에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이미 충분히 확정됐습니다. 남한테 기죽지 않는 나의 정체성, 아이덴티티identity, 그걸 따로 적립하기 위해서 자꾸 주님의 능력이든, 뭐든, 따로 힘을 갖고 싶은데,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은 그 집안과 아버지가 자식한테 기대가 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엄마라든지, 키워준 사람이, “너는 절대로 우리 부모한테 실망시키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돼!” 그것을 심어주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여기 혈통의 자녀가 되죠.

혈통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 맘대로 되는가? 지 맘대로 안 돼요. “믿습니다.” 해봐요, 그 믿음은 주께서 인정도 안 해줍니다. 권세에서 나온 믿음이어야지, 뭐 욕심에서 나와 믿는다고 하면 누가 못해요? 그래서 오늘 강의에서 우리가 할 일은 정해졌습니다. 육신의 자녀를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방법을 알고 합시다가 아니라, 이미 자녀가 된 사람에게만 납득이 되는 겁니다.

육신의 자녀가 그 다음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죠. 방법에 대해서는 추상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있는 자가 더 받게 되어 있고, 없는 자는 아예, 아무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해도, 없는 자는 없음으로 끝나버려요. 마태복음 13장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을 것이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빼앗긴 채로 니는 지옥가라 이 말이거든요.

그 본문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참 어렵죠. 뭔가 없는데 빼앗기는 것이 어디에 있어요? 없다는데 왜 없는 것을 빼앗기느냐, 엎친데덮친 격으로. 있는데 왜 더 주느냐 하는 이런 문제도 생긴단 말이죠.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뭔가 추가적으로 이걸 집어넣어야 해요. 집어넣는데 예수님의 일대기가 여기에 들어가요. 예수님의 일대기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모형을 여기 육신의 자녀에다가 결합을 시켜요. 예수님을 결합을 시켜버리면 나오는 결과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육신의 자녀는 권세가 없어요. 땅을 뚫고 하늘로 나갈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면 권세는 어디서 오는가? 예수님에게서 이쪽으로, 자녀로 권세가 오게 되는 거예요. 그럼 요한복음 1장에서는 권세라고 되어 있는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요한일서 3장에서는 권세라고 하지 않고, 권세인데 딱 깨보면, 구체적으로 흔히 보는 권세는 힘이잖아요? 힘은 정치적인 힘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힘일 수도 있는데. 그런 힘 말고, 우리가 아는 그런 힘 말고, 하나님이 원하는 힘은 따로 있어요. 그게 요한일서 3장에서 구체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사랑이라고 해요.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랑 말고, 힘으로 작용하는 사랑이라고 이해하시면 요한복음 1장과 요한일서 3장과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자, 이야기가 이렇게 우리는 연결했는데, 세밀하게 과정을 밟아야 해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성급하게 나오지 말고,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밟아나가시면, 거기에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세밀하게.

그러면 그 과정에 대해서 말씀이 세밀하게 근거가 있어야 되는데, 그 근거를 우리가 놓치게 되면 우격다짐이 돼요. 그 우격다짐이 뭐냐 하면, “믿씁니다.” 하고 자꾸 자기행위를, 주님의 행위로만 점철되고 연결되어야 할 고리에다가 자기의 우격다짐이 그 속에 끼어들게 되면, 이거는 굉장히 수상해요. 분명히 가짜일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언젠가 제가, 한 십 년 전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기도하니까 방언이 되더라. 그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면, 방언이 안 됐는데, 기도하니까 거기서 힘이 나와서 내가 방언하는 사람이 됐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언제 했느냐? 어제 기도할 때 했다. 그럼 그 사람한테 오늘 기도해봐라. 오늘 기도하니까 또 방언이 되네. 그럼 내일 해봐라. 내일 될지 안 될지. 쭉 되다가 만약에 한 달 후부터 안 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앞에 것이 다 부정당해요. 그럼 그 사람은 또 당황해서 기도의 방법을 또 바꾸기 시작합니다. 리모콘 누르면 tv나오고 누르면 tv나오고 하는데 안 나오는 거예요. 당황스럽잖아요.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자녀이겠습니까? 요한일서에서는 완전자거든요. 요한일서에서 성도는 완전자입니다. 하자나 고장이 나지 않고, 실패도 없고, 서비스 부를 필요도 없어요. 이미 자녀가 되었으면 그 자체가 완전해요.

그럼 그건 뭐냐 하면 사랑이 품고 있는 권세는 마귀가 어떻게 설치든 간에, 이 권세가 오류를 일으키는 법이 없이, 온전한 사랑으로 그 사람을 온전한 자녀로 만든다는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요한일서가 정말 지루할 정도로, 정말 짜증날 정도로, 이 말은 했잖아요? 왜 또 합니까? 할 정도로, 이렇게 좀 솎아내고 싶을 정도로, 너무 답답할 정도로, 이렇게 촘촘하게 사랑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일서를 보게 되면, 뭐, 빤한 이야기. “하나님은 사랑이다.” “저 알아요.” “그래, 서로 사랑하란 말이야.” “안다고요. 두 번, 세 번, 잔소리라는 것을 아셔야지.” “사랑하는 자들아!” “예. 고맙습니다. 사랑해줘서.” 뭐, 자녀 됐는데 왜 자꾸 하느냐?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은 자녀 됨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얼마나 우리에게 촘촘하고 세밀하게 치밀하게 일하셨는가를, 아버지의 공로로 돌리고, 아버지의 행함을  영광 돌리기 위해서 자녀가 된 거예요.

구원받았으면 때려치우지 뭐? 아니에요. 종합영어 정철이라는 사람과, 수학정석 정대석이가 얼마나 촘촘하게 잘 해놨으면, 내가 서울대에 들어갔는가를. 또 다른 사람이 들으면 내가 서울대 나온 줄로 오해하겠다. 저는 서울대 출신 아닙니다. 얼마나 수학정석 참고서를 잘 해놨으면 내가 대학에 들어갔느냐? 그럼 대학 들어갔다고, 구원받았다고, 성경 덮는 것이 아니고, 자녀라면 다시 봐야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내일 수요일에 창세기부터 시작합니다. 뉴저지 수련원에서 창세기부터 할 거예요.

이제 성경 보는 이유를 알겠죠? 구원받겠다고 성경 보면 애초에 지옥 가는 거예요. 봐도 지옥 가요. 성경 만독 해도 지옥 가요. 난데없이 구원받아 놓고, 도대체 왜 난데 없이냐, 왜 뜬금없이 구원해주느냐, 한 번 볼까? 이러면 되는 거예요. 성령세례 받고, 이방인들은 성령세례 받고 성경 봤어요. 편지를 보게 되면 성경도 성령으로 썼고, 자기도 성령 받았기 때문에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겁니다. 사도의 말이. 그럼 사도 쪽에서는 뭐냐, “그러니까 성도지.” 라고 확인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교회라고, 주 앞에 영광을 돌리고 찬양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데살로니가후서 3장 2절에 나오죠. 또 사도행전13장 48절에 보면 영생줄자는 따로 있다. 영생줄자에게 영생이 돌아간다.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에게 이 복음이 먹혔다. 이래 되어 있어요. 뭐 예정론 따질 거 뭐 있어요. 사도행전만 봐도 분명히 나오는데. 무슨 이의를 겁니까? 예정론에 대해서. 자,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조금 있다 이야기하고요. 우선 요한복음 1장 12절 봅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되어 있죠.

그 권세는 예수님이 주시는데, 권세라는 것은 그 뒤에 요한복음 3장이나, 제가 시간 내서 찾지는 않겠습니다. 특히 17장 2절 같은 경우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는데, 이 권세는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영생받기로 작정한 자에게만 차질 없이, 작업이 차질 없이. 마귀가 아무리 달려들어도 그걸 떼 내는데 소모되는, 권세를 사용하는 겁니다.

이 세상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기 택한 백성에게 영생주기 위한 하나님의 치밀한 권세작전이에요. 어떤 경우들이 발생되더라도 그 권세는 자기백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다 살리는데 소모될 권세입니다. 그러니까 지옥 갈 사람은 뭐냐, 남 좋은 일시키는 들러리죠.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뒤에는 명절에 안 믿는 친척들 만나면, 뜬금없이 “아이구 올케 미안해.” “형님. 뭐?” “에이, 그런 게 있어. 미안해.” “뭐? 구체적으로 왜 미안한데?” “니가 지옥 가서 내가 천당 가게 생겼어.” 이거 뭐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명절분위기 다 깨고. “미안해 올케. 니 지옥 가는 바람에 내가 천국가게 되었어.” “다시는 내가 시댁에 오나봐라.” 시집 분위기 왜 이래요? 요새? 소통의 시대에 와 이래? 소통이고 뭐고 마음먹고 구분을 짓는 셈이 되죠.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일으킨 것도, 미얀마, 북한이나 어떤 일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서. 그런 일들이, 베트남이라든지 영국, 프랑스, 모든 일이, 시리아의IS전쟁, 모든 것이 우리 영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관련이 있습니까?” 그거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죠. 그 내력을 이야기하려면. 성경에 다 있거든요. “이러한 것도 궁금하다니까요?” 알았어요. 알았어. 고린도전서 한 번 찾아봅시다. 3장. 이거는 동서한테 써먹으세요. “동서! 미안해. 동서가 지옥 가서 내가 천당 가게 생겼어.” 성경구절에 어디 이런 것도 있나? 없는 것 같은데 있어요.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21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만물이 다 누구 것이라고요? 여기 너희가 누군데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잖아요. 또 계속 읽어보세요. 22절,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다 누구의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 것이잖아요. 제가 지금 말을 과하게 했습니까? 같은 성경 보고 있는데. 같은 하늘아래에서 같은 성경 보고 있는데.

저는 이게 보이는데요. 여기 시리아 나오네. 터키 나오고. 북한 핵문제 여기 나오네요. MBC뉴스 시간에 나오는 것이 다 나오네요. 다 누굴 위함이다?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응답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2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 모든 권세를 내게 주신 것은 택한 백성에게 영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한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경제적으로 그렇게 구분되지만, 주님의 나라는 양과 염소로 구분돼요. 좋은 고기 나쁜 고기로 구분되고. 영생 얻을 자와 지옥 갈 자로 구분돼요. 거기서 이러한 부글부글한 움직임들이 어떤 조합을 짜 맞추어 움직이는 겁니다. 이 정도 알려면 드론 띄워 저 높은 곳에서 지구를 돌아가면서 다 봐야 돼요. 이 모든 세계에서 움직이는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발휘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내가 믿습니다.” “니가 믿게 된 권세가 어디서 왔는데?” 내가 믿습니다, 하고 믿어버리면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자랑할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정녕 되었다면, 고린도전서 3장 23절을 보세요. 거기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23절,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나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녀라는 어떤 특정 역할자리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 자리에, 그 엑스트라 자리에, “니가 해라!” “니가 가라! 하와이.” 하듯이. 나를 집어넣은 거예요. 우리는 무심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털썩 앉아놓고, 하나님의 자녀 되기 전에는 자기의 육체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서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어요. 남한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한, 이 정도야! 하면서 자랑질 했는데, 성령께서 성령세례 주셔서 그 자리에 앉고 보니까, 어? 내 목적과 내 의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나를 집어넣어준 하나님의 세밀한 말씀의 그 과정들과 하나님이 뜻을 자랑하라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아는 겁니다. 돌아가는 모든 만물이.

그때부터 바이어를 만나든지, 친척을 만나든지, 모든 만남에 대해서 우리가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어요. 하나님이 저 분을 왜 보냈을까? 니가 왜 왔어? 하지 않고. 하나님이 왜 보내셨을까? 그렇게 바라보면 되죠. 아직까지 제가 이야기하면서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그 과정은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중간단계로 갈라디아서 3장 26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라고 되어 있죠.

자,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것이 단독으로 따로 떨어져 나오는 겁니까? 아니면 어떤 소속이 되는 겁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되죠. 자, 그렇다면 제가 예수 안에서를 강조했습니다. 이 자리를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오다 보니까 여기 감리교도 있던데. 감리교에 가서 어떤 목사 설교를 듣거나, CBS나 기독교방송 설교 들으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빠지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시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이야기해요.

출발이 인간의 행위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끄집어내가지고, 정신집중을 시켜가지고, 믿씁니다! 믿씁니다! 하는 거예요. 그때는 스마트폰 다 진동으로 해놓고,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문자 알잖아요. 정신이 하나면 안 될 일이 없다. 그런 뜻이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믿음을 참기름 짜내듯이 짜내는 거예요. 특히 부흥회가 그런 거예요. 믿씁니까? 믿씁니까? 이래가지고요. 뭐가 빠졌습니까? 그거는 자기 안에서 믿음을 끄집어낸 것이기 때문에, 자기는 지금 연출을 하고 수상한 연극을 벌이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짜내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소속감을 줄 수 있는, 예수 안 속으로 우리를 뒤집어 씌웁니다. 인디언 천막처럼. 우리가 여기 있는데, 천막이, 권세가 와서 뒤집어 씌워버려요. 그럼 안이라는 것이 성립되면서 천막은 경계가 돼요. 그리고 밖이죠. 그럼 여기 안에 있는 우리는 뭘 아느냐 하면 안도 알고 밖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도 알고, 예수그리스도 밖도 알고, 둘 다 알았어요. 밖에는 물론 지옥이고 안에는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것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목적은 뭐냐, 그냥 무심코, 그냥 추상적으로, “하나님!” 이러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이 집중적으로, 초점이 모인 곳이 뭐냐, 하나님의 주 되신,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자랑하라고 우리를 예수 안에 집어넣은 거예요. 자랑할 때 예수 밖에서 자랑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자랑하란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교회가 뭡니까? 교회는 예수님만 자랑하는 곳이 교회에요. 그 조치를 위해서, 너희들 가운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고, 재산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또 똑똑한 사람도 많지 않고,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잘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고전 1:26-31). 세상에서 자녀가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고립적으로, 나는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그 인간들을, 오히려 그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권세가 예수 안에서 구비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물어봅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누굴 부러워 했겠습니까? 질문하는 자체가 잘못되었죠. 그럼 여러분은 누굴 부러워합니까? 아이고,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야기합시다. 그 이야기는 초반에 이야기고 지금 여러분은 바뀌었죠. 예수 안에 있으니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뭘 부러워해요?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 하다가. 이제는 더욱더 구체적으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입니다. 우리가 보는 요한일서는 그보다 더 구체적입니다.

예수 안에 뭐가 있더냐? 하는 겁니다. 요한일서 2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예수 안에 뭐가 있느냐? 3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절,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여기 계명이 나오죠. 여러분들이 시카고강의를 참석하지 않았고, 또 유튜브 볼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제가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에 계명이 많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에 보면 계명이 많지가 않아요. 딱 하나에요. 그럼 하나라는 말은, 여러 계명이 하나로 종합되었다는 라는 말이 아니고,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완성했다. 그러니까 올림픽으로 이야기한다면, 뭐 경기를 메달 따기 위해서 경기 할 경우에는 금메달 리스트가 유보되어 있지만, 이미 메달을 줘놓고 달린다는 것은, 달릴 때에 선수가 간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금메달리스트가 간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미 완전한 자, 완성된 자, 그걸 구체적으로 예수 안에 있으면, 바깥에서 어떤 마귀가 고자질을 하고, “알나리깔나리 쟤는 간음 했대요~” 아무리 해도 백날해도 의미 없어요. “쟤는 간통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아줌마래요~”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창문 빼꼼히 열고, “누구냐? 쓸데없이 이 골목에 와가지고 내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를 욕하는 자가 누구야?”

이렇게 하면 바리새인들이 짱돌 들고 “죽이라! 여자를 내놔라!” 하잖아요. “누구야? 니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가지고 욕해? 그래? 그러면 니들한테 묻는다. 여기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란 말이야!” 그럴 때 주님께서는 글로 쓰시는 거예요. “한번 내가 니가 죄 있는 것을 밝혀봐?” 글로 쓰거든요. 무슨 글인지 모르지만, 글로 쓰니까 그 글을 보고 전부 다 도망가는 거예요.

“자, 이 글대로 해서 죄 없는 자? 너야? 나와!” 글을 보고서는, “죄 있습니다.”  “그럼 가!” “너 나와!” 글을 보여주면서, “있어? 없어?” “있습니다.” “왜 있는데, 죄 있는 자가 돌을 들고 와? 다 가! 죄 없는 자는 나밖에 없어. 이 여자는 내가 처리할거야. 다 저리가! 저리가! 내가 처리할거야.” “여인아! 너를 정죄하는 자가 어디 있더냐 ?”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둘이 예수 안이라는 뜻이에요. 예수 안에. 밀실에, 예수 안에 있어요.

“여인아! 너를 정죄하는 자가 누가 있더냐?” 다시 말해서 “니가 신경 써야 할 타인의 응시는 있더냐?” 이 말이에요. “너를 그렇게 주시하고 너에게 관심 끄는 자들이 있더냐”? “다 가버렸습니다. 아무도 없나이다.” 어쩌면 우리 교회 표어를 만들라면, 이걸 제가 설교시간에 했죠. 이걸 표어로 삼는다고 했죠? “아무도 없나이다.” 그것도 길잖아요? “없나이다.” 아무도 우릴 정죄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이야기죠. “누가 정죄하리요?” “없나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여! 그 많은 자를 누가 보냈느냐?” 여자는 싱긋이 웃겠죠. “주님이 보내놓고, 뻔히 알면서도 왜 저한테 묻습니까?” 이러겠죠.

주께서 예수 안에 우리를 두기 위해서, 주님의 조치가, 주님의 자녀를 감히 힐난하고 시비 거는 자들을 주님 선에서 다 처리를 해버립니다. 가! 가! 저리가! 가! 가! 똥개들  가! 다 가! 오늘 강의 제목은 “가!”입니다. 가! 가! 가! 다 가! “우리 둘이 남았다. 예수 안이다. 있나?”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왔거든. 니 힘으로는 율법을 못 이루는데 내가 왔다.”

그러니까 계명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종합됐다는 말이 아니고 완성한 계명이 주어진 거예요. 율법시대 지났다는데, 하필이면 왜 또 계명이냐? 계명의 특징이 있어요. 이게 확정적입니다. 계명은 요지부동이에요. 확정이 되니까. 그 계명이 뭐냐, 사랑의 계명이에요. 사랑하겠다는 데에 있어서 누가 이의를 걸 수 있다? 없다? 아, 이 말이 중요한데, 이게 시카고강의를 들으셔야 하는데, 다시 합시다. 인간보다 뭐가 우선이냐 하면, 계명이 우선이라는 것을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는 계명의 계명다움을 증거 하기 위해서 따로 새 인간 됐다는 겁니다.

목적은 이 계명의 완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너에게 이 계명에 머무는 인간으로 내가 새로이 지음 받은 거예요. 뭘로? 화목제물로. 드디어 앞에 화목제물 나오잖아요. 화목제물로 말미암아 너가 구원을 받았으니, 이 계명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화목제물의 효과가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 효과는 이렇게 늘어져서 우리까지 포함되죠. 이게 바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그 권세가 요한일서에서는 사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정리하게 되면 계명은 뭡니까? 사랑이다. 계명=사랑

자, 다시 요한일서 3장 봅시다. 사랑이다. 그럼 목사님. 흔히 교회에서 하는 말이 맞네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표어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합니다. 그 말이 다 맞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를 겨냥하느냐 하면, 인간에게 겨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아닌 인간이 없기 때문에. 그럼 지옥이 있다는 것은 다 쓸데없죠.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여호와증인한테 가든지. 여호와증인에게서 지옥은 겁주기 용이에요. 불교 같아요.

불교의 윤회설이 뭐냐 하면, 겁주기 용이에요. 나쁜 짓하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쥐새끼로 태어난다. 쥐새끼에서 한 바퀴 더 돌면, 쥐새끼로 태어났다 죽었다. 그 다음에는 바퀴벌레다. 바퀴벌레로 태어났다 죽으면 그 다음에는 뭐? 한 번 한 것은 안 하고 다른 동물로 바뀌죠. 모든 동물을 섭렵하고 난 뒤에 결국은 인간이 돼요. 왜? 대승적견지에서 봐주기 하기 때문에. 불교는 안 믿고 기다리면 다 부처가 돼요. 해탈되게 되어 있어요. 성질 급한 사람만 머리 깎지 안 그런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부처가 되게 돼있어요. 이게 불교에 대자대비에 다 들어있는 겁니다. 뭐, 불교논리는 그렇게 구태여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목사님. 하나 의문점이 드는데요.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그게 여기에 합당한 그 말씀이십니까?” 그렇죠. 그 새 계명에 열두제자가 아무 기여한 바가 없습니다. 멍청하게, 저 분이 무슨 이야기하느냐? 계명이 있는데, 왜 새 계명이냐? 완성될, 이제는 예수 안이 완성했죠. 예수님이 완성했죠. 예수 안을 만들어버리면, 하나의 천막으로 만들어버리면, 여기다가 사람을 집어 넣어 버리면, 뭣도 모르고 완성체 안에 다 들어오게 됩니다.

마치 혼인잔치에, 놀다가 혼인잔치에 끌려와가지고, 혼인잔치에서 잔치국수 먹는 식이에요. 단 조건이 있어요. 이 잔치는 너의 개인구원을 위함이 아니라, 아들의 주되심, 아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지, 너를 기쁘게 하기 위한 용도로 혼인잔치가 있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죠. 근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나는 놀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우기는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아요. 뭘 안 입느냐 하면, 예복을 입지 않아요. 그러면 들어왔다가 쫓겨나가요.

예복을 입는다는 말은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보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거예요. 이건 모든 인간의 지위와 학력과 성격과 성질, 모든 것을 다 옷 하나로, 똑같이 유니폼 하나로 통일시켜버려요. 그러니까 자기자랑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지난 시간에 뭐든지 다양성은 예수님을 경유해서 하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모든 세계를 연결시키는 축이에요. 그걸 CPU라고 하잖아요. 중앙처리장치. 모든 들어오는 것의 입력은 중앙처리장치를 통해서 배달되게 되어 있고. 또는 모든 택배는 물류센터에서 걸러가지고 대명동은 대명동으로 따로 가고, 동인동은 동인동으로 따로 가듯이, 정비소에 온 것은 거기서 분류가 되어야 트럭에 싣고 집중적으로 배달해주듯이.

일단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와서 주님으로 회수가 되고, 주님께서는 자기백성에게만 영생을 주도록, 세상의 모든 정치라든가 경제를, 이렇게 기름 값 오르락내리락 하고, 곡물 값까지 다 조정하는 겁니다. 특히 시카고에서 그런 일을 많이 하죠. 주님이 특별히 시카고를 신경 쓰는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 곡물시장과 원자재 시장의 가격을 결정짓는 곳이에요. 그래서 시카고에서 무슨 난리가 나면 전 세계가 전부 다 경제공황이 일어날 정도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한 곳에서 하지 말고 여러 곳에서 하면, 근데 그걸 여러 곳에서 하면 경제적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항상 금융의 일 번지는 월 스트리트 이렇게 한 곳에 집중하게 되어 있어요.

그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목적이 없어야 된다는 것은, 그 목적이 뭐냐, 하나님 아버지를 증거 하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구체적으로 뭐냐, 구체적으로 예수 안이죠. 예수 안이 뭐냐, 새 계명이죠. 하나의 계명. 그 계명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딱 깨보니 사랑이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 그건 10분 쉬고 다시 합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10-07 18:24 
20160914 요한1서 버지니아강의21-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 본격적으로 사랑이 뭐냐 할 때, “목사님. 사랑이 뭡니까?” 라고 한다면, 예수님께 무슨 일이 있어났는가, 그게 모아지면 그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할 때 너무나 모호하잖아요. 추상적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사랑이라고 하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체적인 활동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흔적을 잡고 지나가게 되면 그동안 우리 눈에 몰랐던 것이 거기에 나타나요. 마귀의 일이 나타나는 겁니다. 마귀의 일.

 

그럼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못 받는, 사랑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 사랑이 차단된 세계에서 살아왔던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차단된 사랑에서 주님이 오셨는데 그렇다고 사랑 안 하느냐? 아니죠. 사랑이 예수님께만 집중해서 조명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행위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되고,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 못하는 모든 영역은, 그거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이 아닌 정도가 아니고, 미움이 되죠.

 

하나님께 미움이 되면서, 미움 받는 원인은 바로 악마, 요한일서 3장 8절에서는 마귀라고 하는데, 마귀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마귀가 하나님의 사랑을 차단시키는 방향으로 그동안 세상의 권세를 쥐고 왔던 거죠. 권세를 부려왔던 겁니다. 그럼 여기서 이게 현실이라면, 말씀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라면, 우리 주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라는 생각을 우리가 할 수 있어요.

 

성경자체가 옛날 문화 배경이고, 오늘날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21세기에 적용될 때, 주의 사랑이 적용될 때, 우리는 어떤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느냐? 그런 질문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변을 이것으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욥기. 욥기에 나타났던 현상은 평온했던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질서 잡혀있고 균형 잡혀있습니다. 욥은 선한 사람이며, 부자며, 자식들이 아름다우며 훌륭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선하고, 그 다음에 부자고, 그 다음에 자식들이 잘 되고, 또 하나 더한다면 본인의 몸이 건강했어요. 건강했고, 의롭고, 부자고, 자식이 많았고, 이 네 가지의 4중 축복을 다 갖고 있던 거예요. 욥이.

 

이야기가, 이것이 끝부분의 이야기가 아니고 욥의 시작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바로 여기에 대해서 주위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욥의 세 친구들이 등장합니다. 등장하면서 욥이 이렇게 된 것은 욥이 의롭고, 의롭기 때문에 부자 되고 건강하고 자식이 많게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당시에 거의 확정된 사상체계였죠. 확정된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다? 선한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복을 주지 않고 가난하게 만든다. 그런 내용이 욥기에서 내내 주고받고, 주고받고 흘러나옵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없는데,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원칙이냐,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원칙이냐, 아니다 이 말이죠. 여기서 뭔가 뒤집어져야 돼요. 뒤집어지는데, 여기에 동원된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과 내기하기를 욥은 당대의 의인이고 욥같이 믿음이 좋은 사람을 못 봤다. 지금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은 욥을 내세웁니다. 그것은 욥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욥의 자리가 하나님이 마련한 서랍장이기 때문에. 욥 가지고 뭔가 보여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구약에 있다는 말은 장차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동일한 내용이 미리 거기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그럼 사탄이야기 하다가 왜 욥 이야기 합니까?” 사탄의 뜻은 욥의 친구들이 보여줍니다. 욥의 친구들이 뭐냐 하면 사람은 착한일 하면 복을 받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 이게 바로 사탄의 생각이에요. 악마의 생각이에요.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본성의 생각인데, 이게 사탄의 생각입니다. 그럼 어째서 그렇게 되느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은 욥의 친구들이 아니고 욥이에요.

 

욥의 친구들이 정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면 욥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이 동의를 해줘야 해요. “욥아! 니가 참 의롭지만 참아. 니가 아무리 자식 열명이 하루아침에 다 죽고 재산 날아가고 니 건강을 잃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믿는다. 니가 의인인 것을.” 이렇게 되면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욥이 이렇게 힘들게 되니까 욥의 친구들이 등 돌려버렸죠. 등 돌린 이유는 딱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현재 통용되고 있는,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그 원칙에 대해서 니가 낯설다는 거예요. 낯설다.

 

하나님의 사랑은 낯설어요. 흔히 통용되는 사랑과는 대조되는 사랑으로 오는 겁니다. 사랑 같지도 않아요. 꼭 미움을 닮았어요. 사랑이란 게.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걸 누가 거부해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게 잘못되어 있다는 것은 뻔히 아시죠. 당신이라는 말은 애초부터 없는 말이에요. 주님은 사랑이시지, 날 위해서 사랑을 준비한 것이 아니에요.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나쁜 의미가 아닌데, 욥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굉장히 낯섭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결국은 욥이 누굴 위해서 기도하느냐 하면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하죠. 그러면 욥이 받은 사랑이 저쪽에 흘러들어가지 아니하면, 욥의 친구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똑같은 방법이 독생자 예수님에게 주어집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 따라서 너희들은 나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이 너희에게는 있지 아니해서 그렇다.

 

그럼 아버지의 사랑이 있지 아니한다는 것은 누구한테 지배를 받고 있어요? 사탄한테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낯선 것을 한번 찾아보세요. 우리의 상식과 안 맞는 것을 살아가면서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착하면 복을 받고 나쁜 짓을 해서 벌을 받는데, 착한일 했는데 복이 안 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나쁜 짓을 내가 봐도 너무 많이 했어. 그러면 다리몽둥이가 부러져야 하는데 더 잘살아.

 

뭔가 나쁜 일 한 내가 더 행복하고, 십일조도 한두 번 안 낼 때는 움찔거리지, 자주 안내면 복 받아요. 십일조 하면 갈수록 꼴아 박고, 십일조 안 하면 더 복을 받게 되어 있다니까요. 주일성수 처음에 빠질 때는 온 몸이 소름끼칠 정도로 벌벌 떨지만 서너 번 빠져버리면, 하늘은 쨍쨍 날씨도 좋구나! 애들아, 선생님 손잡고 소풍가서 점심도 먹고..그런 유치원 노래가 있어요. 하늘도 쨍쨍~유치원에서 소풍가는 그런 노래가 있거든요. 그 가사를 보면 너무 아름다워요. 하늘은 쨍쨍, 날씨도 좋고, 엄마가 김밥 싸들고 가는 그 모습을 볼 때, 얼마나 행복합니까? 물론 그 유치원 애가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알리는 없을 거고.

 

사랑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독점했어요. “사랑이 보고 싶어? 내 가는 길을 봐! 이게 사랑이다.” 뭔가 가위로 찢어버리는 것. 세상을 두 토막 내는 그런 양상입니다. 그래서 사탄과 예수님의 관계, 이런 것이 요한3서에 쭉 나와 있는데요, 하면 후딱 지나가는데, 지나가면 우리가 그만큼 진리를 놓치기 싫기 때문에, 우선 아브라함을 예로 들겠습니다.

 

자, 여러분 이건 다 알기 때문에 주고받고 하는 식으로 해봅시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평탄한 인생이었어요? 아니면 찬란했습니까? 어떻습니까? 이름부터가 벌써 두 개죠. 뭔가 인생이, 아브라함 인생이 특징이 뭐냐 하면 갈 바를 알지 못했어요. 갈 바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갈피를 못 잡는 거죠. 갈피를. 가라하는데 갈 곳을 잃어버렸어요. 최백호 같아. 어디로 갈지를 몰라요. 물론 하나님의 지시가 떨어져서 움직였는데, 만약에 지시가 안 오면 어떻게 할까요? 안 오면? 10년이고, 100년이고 안 오면 어떻게 될까요? 오도 가도 못하죠. 감감하죠.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난해한 것은, 아브라함 존재만 생각하는데, 아브라함 때문에 사건들이 움직입니다. 주위 환경들이 움직입니다. 심지어 애굽에 흉년까지 발생되니까. 모세 때도 모세 때문에 주변의 배치조직들이 다 달라져요. 질서가 잡혀가고 하는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이것이 신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면 모든 다른 것은 사랑과 아닌 것을 위하여 배치가 달라져요.

 

그런 영화가 있었죠. 자동차인데, 갑자기 기계소리내면서 갑자기 로봇이 되는 그런 영화. 트랜스포머죠. 트랜스포머 같아요. 모세나 사도바울이나 아브라함과 이사야 이 모든 것이. 특히 엘리야 엘리사처럼. 여호수아 같은 경우는 하늘의 태양도 져야 하는데 눌러도 안 져요. 누르고 싶어요. 빨리 태양이 지라고 해도 지지도 않아. 뭐, 이상하게 돼요(수10:12). 그게 뭐냐 하면, 뭔가 트랜스포머를 그때그때마다 조종하면서 뭔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불법과 의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아브라함을 제시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아브라함 인생을 통해서, 그때그때마다 아브라함이 새롭게 불법과 의를 생산한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걸 오늘날 적용시키면 성도 한 사람이 여기 버지니아에 살면, 이 버지니아는 무엇이 불법이고, 무엇이 의고, 무엇이 복음이고, 무엇이 복음이 아닌 것을 증거 하는 기준점을 벌써 하나에 포함시키고 있는 셈이 되죠. 그 기준점을. 또 나가서 예수, 영어로 지저스Jesus 외치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요. 있기만 하면.

 

우리가 설치지 않더라도, 그 성도 중심으로, 그 사람중심으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중심으로 주변배치도가 이게 달라진다 이 말이죠. 그럼 어떻게 압니까? 찾아보세요. 찾아보면 그런 것들이 하루에도 수 번 내지, 수십 번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제 말에 동의를 안 하시는데, 세상의 진위를 안다는 말이 아니고 불법과 의의 기준점이 새롭게 보인다 이 말입니다. 세상이 지금 지진 나고 홍해 갈라진다는 말이 아니고. 성도가 보기에, 전에는 저 사람이 좋았던 사람인데, 아닌 것 같아요. ‘나는 저 사람이 천당 간다면 나는 내가 알아서 지옥 갈 거야.’ 하는데, 저 사람이 이상하게 천국 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는 사전에 미리 협상을 보던지, 뭘 해야 돼요.

 

바로 이 말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사랑을 준 게 아니고, 사랑이 트랜스포머를 위해서 우리를 하나의 기계처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지금 요한일서 3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시면 그 다음부터 훅 지나가요. “니가 바로 계명이다. 사랑이라는 계명을 품고 살아가는, 하나의 기계처럼 내가 다룰 거야.” 이 말이 굉장히 중요한데, 왜 중요한가 하면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 짓지 아니하나니” 3장 9절에 나오죠.

 

이걸 바로 구원파들은 본인이 죄 짓지 아니한다는 거고, 진짜 성경이야기는 죄 안 짓는 방향으로, 너를 기준으로 해서 모든 것을 재편성해줄게. 전에 죄였던 것도 니가 쑥 들어가면 죄 아닌 것이 되고, 전에 죄 아니었던 것이 너로 인하여 죄가 되는 이유는, 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하나님의 자녀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로 죄 짓지 않는 자녀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주변을 바꾸어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하나님의 성령께서 활동하고 이렇게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 신기함을 찾아보라는 이야기에요.

 

근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저 사람을 맞춰줘야지.’ 맞춰줄 필요 없어요. 맞춰주면 누가 변하느냐 하면 우리가 자꾸 달라져요. 달라지게 되면 3장 9절은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확정적이에요. 이걸 다른 말로 완전체, 완전한 존재라고 이야기해요. 완전한 존재. 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존재. 하나님입장에서 모르고 그런 소리하지만, 저 성질 나빠요. 성질 나쁜 것은 아는데, 이게 예수님 옷을 입었다니까요. 어디, 너 보고 이야기하나? 우리 속에 성질 더러운 것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전에는 어떤 교인 보면, ‘정말 성질 더럽다. 저러다 지옥 가겠다.’ 했는데, 복음 듣는 태도 보니까 ‘성질 더러워도 저 사람 천국 가겠네.’ 라는 생각이 들면, 이것은 뭐냐 하면, 기준!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기준은 이게 완전체라는 것. 내가 새롭게 알던 모르던 간에 처음부터 완전체로 왔는데 내가 오해한 거죠. 사실은 내가 나에 대해서 오해한 거예요. 내가 착하게 살아서 영광 돌린다는 자체가 오해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자녀이기 때문에, 완전체에 인식론적으로 결합시키려고 한 거예요.

 

갑자기 제가 어려운 말해서 죄송한데, 인식론 나왔어요. 인식론, 교양에 속한 것이니까, 여러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인식론이라고 하는 것은 칸트철학에 나오는 건데, 존재론하고 인식론을 구분하면 쉽습니다. 존재론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 어떻게 있는가? 무슨 목적으로 있는가? 존재론입니다.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는 존재를 내가 어떻게 알아채느냐? 하는 문제에요. 여기서 칸트는 말합니다. 이성의 비판, 또는 이성의 한계를 통해서 인식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인간의 도덕이라는 것은, 이건 손댈 수 없어! 무조건 이웃을 사랑해야 돼! 살인하지 마! 라는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우리의 존재다. 그 인식에 못 미치는 사람이 있고, 이미 아는 사람이 있는데, 어쨌든 인식론은 이성을 분석하고 판단하면 할수록, 저 진리에 접근하는 인식을 얻기 때문에, 뭐, 공부 좀 하라는 그런 이야기를 칸트가 하는 거예요. 인생 제대로 좀 생각하고 살아라!

 

그러면 너가, 처음에 무식할 때 생각하는 너와, 생각하고 공부하고 보는 너가 아마 다르게 보일 걸? 다르게 보인다는 말과 다른 존재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걸 성경에 그대로 적용시키면 딱 맞아요. 내가 예수 사랑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압니까? 치매 걸리면 어떻게 압니까? 존재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에서 인식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칸트의 잘못은 뭐냐 하면 내가 너를 분석하기 때문에, 그 존재나, 그 인식이나, 그 주인공은 내가 어떻게 해봐야 하는데,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니가 점점 더 인식해야 될 거야. 어떤 인식으로? ‘죄 못 짓는구나. 죄를 짓고 싶어도 못 짓는구나.’로 달라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이해된다는 것은 아예 기대한 적 없고요. 이 자체가 구체적인 인물이 딱 한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다윗입니다. 다윗은 자기가 이스라엘 왕이에요.

 

자, 왕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이스라엘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기 때문에, 제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리라고 생각해서, 그 자리에 올랐다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사실 그만한 근거가 있었어요. 골리앗을 누가 죽였어요? 그것도 어른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이에요. 소년 다윗은 그 당시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어린아이 내세운 것과 똑같은 겁니다. 애들도 이기는 것을? 꼬라지 좋다! 어른 주제에? 어른 되면 믿음이 더 좋다고요? 애들 믿음보다 못하잖아? 이걸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8편에 나오죠.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죠. 어른들은 칼 들고 말 타고 무슨 짓이고? 하나님의 전쟁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전쟁이 미리 확정되었으면, 나중에 끝나서 “진작 이겼다고 이야기해주지?” 이렇게 나왔다고요. 찬송 부른다는 것이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요. 저쪽은 활과 칼과 병거로 나오지만, 여기서는 횃불 들고, 뭐 정월대보름입니까? 왜 항아리 들고 횃불 들고 나팔 들고 왜 갑니까? (삿7장). 칼이 어디에 있어요? 칼이 없어요. 칼이 없는데, 터지고 난 뒤에는 여호와의 칼이요, 기드온의 칼이요. 도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무기는 이미 승리한 것에 대한 무기입니다. 내일 할 것을 미리 다 하는데. 여리고성은 이미 무너지게 돼있어요(수6장). 그것을 미리 안다고 나팔 부는 겁니다. 나팔 부는 것은 뭐냐 하면 승리하고 난 뒤에 부는 축하의 나팔을 이스라엘 백성은 미리 부는 거예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미리 부른 겁니다. 모든 것이 미리 앞서서 뒤돌아보는 식으로 평가하는 거예요. 우리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하늘에 앉히시고 뒤돌아보는 식으로 이런 육신을, 이런 메커니즘을 통해서, 과정을 통해서 우릴 구원했다는 겁니다.

 

그럼 그 구원을 하는데 뭐가 개입되는가, 바로 계명이 주어지죠. 계명은 뭐다? 바로 사랑이고, 사랑은 예수님의 독생자 일대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 있으니 바로 예수님이다. 그럼 예수님하게 되면 안 나타난 듯이 나타나죠. 실제로 예수님이 가게 되면 누가 나타납니까? 귀신들이 소리 지르면서 하는 말이 뭡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죠? 우리를 멸망케 하러 오셨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쉿! 조용히 해! 조용히!” 그리고 병이 낫게 되면, “이 병 낫게 된 것을 남한테 알리지 마라!” 메시아는 비밀이에요. 알리지 마라. 왜냐하면 사람들은 병 나은 것만 보기 때문에.

 

너희들이 모르는 귀신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모르고, 다만 몸이 아픈데 보기 때문에, 주님을 찾아올 때, 또 소문 듣고 병 나으려고 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9장에서 병 나으려고 왔다가 죄 씻음 받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기분 좋았겠어요? 기분 나빴겠어요? 안 좋았습니다. 왜 안 좋았느냐 하면, 병을 고치는 것은 그 시대가 용납하지만,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불경스런 일이기 때문에 죽여 버립니다. 어디서? 어디 이단에 빠져서? 하고 죽여 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중풍병자에게, 중풍 병 나으려고 왔는데, 중풍 병이 아니고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이렇게 되니까,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중풍 병 걸려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사람은 죽을 때는 병들어 죽잖아요. 그러나 중풍 병 걸리든, 감기 걸리든 이 사람은 죄 사함 받은 상태에서 감기 걸리고, 죄 사함 받은 상태에서 중풍 병 걸리고, 죄 사함 받은 상태에서 치매 걸리는 거예요.

 

그것을 바로 사랑이, 성령이 오면 인식하는 거예요. 아! 내가 완전한자구나! 죄를 짓고 싶어도 죄 못 짓는구나! 그러면 니가 나쁜 짓 하면 죄 짓고, 착한 일 하면 죄 안 짓고 하는 것은 누구의 일이냐 하면, 여기 요한일서 3장 8절에 보면 그게 마귀에게 속한 마귀의 일이에요. 그러니 요한일서가 얼마나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까?

 

과연 이 말을 제가 하면서도 이걸 믿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이거는 너무 충격적인 발언을 지금 쏟아놓고 있습니다. 3장 6절에 보세요.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지금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니가 있는 소속의 능력과 권세는 너로 하여금 완전자로 만들어내는데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니가 그런 소속을 보지 않고 개인구원으로 봐버리면 우리는 이걸 지키려고 할 거예요. 자기가 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꾸 착한 일만 할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냐 바로 예수 안이 아니고 예수 밖에 있다는 티를 내고 있는 겁니다.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이 없다는 뜻이에요.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면. 제가 설교 시간에 사랑에 대해 그런 예를 하거든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게 가까이 가지 않는다. 상대를 접촉해버리면, 이거는 성경적으로 맞는 이야기에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손으로 만져 버리면, 이 더러운 때가 사랑하는 대상을 만져버리면 사랑에 흠집이 생겨버립니다. 너무 사랑하기에 사랑고백을 못하는 거예요. 너무 사랑하면. 다들 그런 경험이 있지요. 남편 된 사람이 너무 나를 사랑하기에 차마 말을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거예요. 그 다이아반지를 그냥 드리지 못하고 케이크 속에 집어넣고. 돈 없으면 붕어빵 속에 집어넣고, 돈 있으면 케이크 속에 집어넣고 벌벌 떠는 겁니다. 먹었는데, ‘아야! 뭐가 끼이네?’ 보니까 돌이 나오면 깨지는 거고. 다이아 나오면 성사되는 거고.

 

사랑한다는 것은, 연애할 때 사랑한다는 것은 뭐냐 하면, 셋방살이를 하느냐, 월세가 문제가 아니고, 그냥 그대 있음에 나는 아무래도 괜찮다는 겁니다. 참, 언제 적 이야기를, 제가 옛날이야기를 간만에 하고 있는 겁니다. 옛날 한 번씩은 다 들어봤죠? “그대 있음에, 그대가 나에게 어떤 짓을 저지른다 해도, 군화발로 짓밟는다고 해도 그것을 나는 나의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 정도로. 내가 지금 너무 오버하고 있네. 진정해야 돼!

 

예수님은 아버지를 사랑해요.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버려도 아낌없이 수용하겠다는 겁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왜? 아버지의 뜻이니까. 이게 하나님의 자녀 아닙니까? 누가 그것을 실행하겠어요? 안 돼! 안 돼! 하지 마세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게 되게 하시는 거예요. 내가 시키는 것이 아니고, 기어이 그게 되게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 “왜?” “저건 마귀 일이네요?”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딱 보니까 알겠네요.” 그러니까 이건 완전자에요.

 

행함으로 의롭고, 행함으로 자기 의를 지키려고 하고,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 저게 딱 내가 보기에는 마귀 일이네요?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니? 어떻게 알긴, 그냥 알아지네요. 그게 바로 완전한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런 말 한다는 것은 니가 완전자야. 다시 말해서 너에게서는 죄가 나올 수가 없다는 거예요. 죄가 나올 수가 없어요. 내뱉는 모든 말이 예수님의 사랑을 경유해서 나오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겁니다.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 잠언에 나옵니다. 잠언 19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거기에 보면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이 말은 니가 그 여자를 선택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선택당하도록 하나님께서 뒤에 사전조치를 해놓았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여자가 하나 투입된 것이 아니고, 여호와가 투입되는 거죠. 누구 가정에? 내 가정에. 그렇다면 여호와가 투입되면 이게 내 가정이 됩니까? 여호와 가정 됩니까? 이게 여호와의 가정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완전하라고 하는 것은 나보고 완전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간섭과 통제 안에 있기 때문에, 완전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보고 니가 무슨 완전자야? 어제 니가 이런 죄 지었고, 이런 죄 지었는데? 그렇게 지적하거든, 그 지적은 사실 예수님의 얼굴을 향하여 지적하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누가 너를 송사하리요? 너를 위해서 누가 커버했는데? 내 목숨 바쳐서, 내 생명 다하여서 커버했거든요. 하나님께 받은 사랑으로 자기백성을 지킨 그 사랑이 사랑인데, 이 사랑은 이미 모든 인간들의 비난과 악마의 술책과 악마의 권세를 벗어나는데 이미 성공했던, 성공한 능력이 그대로 우리에게 투입된 겁니다.

 

따라서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완전히 닫혀, 이중삼중의 벙커 속에서 주님 혼자 구멍 뚫고 나왔고, 나온 구멍이 십자가고, 그 구멍사이로 부활의 능력이, 이 바깥의 자유로운, 죄에서 벗어난, 죄에서 마귀로부터, 율법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저주로부터 벗어난 그 자유가, 다시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져가지고 구멍 속으로 들어와 버리니까, 여기 속이 내부에 속한 외부가 되는 겁니다. 내부에 속한 외부.

 

그럼 내부에 속한 외부니까, 여기 성도가 있고 성도 아닌 사람이 있다면 여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하면 단절이 되죠. 단절. 성도는 완전자. 성도 아닌 자는 완전치 못한 자. 결국 주님은 성도를 구원용이 아니고 기준용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기준용으로. 그럼 내가 착했다, 못됐다, 하는 것은 지금 내가 누굴 바라보는 겁니까? 내가 내 행동을 기준으로 보는 거죠. 이게 옛 성품입니다. 나는 어째서 이렇게 성도가 되었지? 보는 것은, 그 순간 타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을 지금 전달하고 증거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하신 일을 증거 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떻게 해야 돼요?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 라는 소리를 해야 되죠. 사도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라는 말을, 아주 이제는 미소 띠면서 아주 편하게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 돼요.

 

어떤 분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마는, 남편이 괴롭히려고 자꾸 성경구절을 갖다 대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오른뺨을 때렸는데 왼뺨을 내놓아야지, 니가 왜 안 내놓느냐?” “나는 안 내놓을 거야.” “왜?” “무조건 니하고 반대로만 하면 되니까.” 이게 완전자이기 때문에. 저쪽의 주장은 뭐냐 하면, 사람이 착해야 복을 받는다는 주장이잖아요.

 

그럼 우리는 이 버지니아에서 하나의 기준이 된다면,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배치가 된다면, 무조건 반대로만 하면 돼요. “예수 믿어야 구원받아!” “나 예수 안 믿어!” 이러면 되는 거예요. 그게 완전자에요. 무조건 반대로만 나가면 돼요. 뭐 심술도 아니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서 제가 시카고강의 6번짼가, 사랑하지 말라고 했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가짜교회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손잡으세요. 또 남녀 간에 손잡게 만들어가지고, 미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짜릿짜릿하게 만들어놓고, 이것도 음란의 유혹을 참아가면서 이중고삼중고를 집어넣어놓고, 사랑하는 형제자매~ 노래 부르면서 하는데, 그건 교회가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서로 사랑하지마세요.” 라고 해야 돼요.

 

왜? 완전한데 왜 사랑을 해야 돼요? 완전한데, 또 사랑하게 되면 그동안 미흡하다는 티를 내게 되는 거잖아요. 완전하기 때문에 사랑 안 해도 그게 사랑이 되는 겁니다. 차라리 그게 사랑이 돼요. 얼마나 느긋하면 사랑 안 해도 사랑이 될 지경입니까? 너희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사랑해야만 사랑이지만, 주님이 주신 사랑은 예수 안에 있는 그 자체가, 죄인도 사랑하시는 주님의 숨겨진 사랑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기회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께서 이 현장과 함께 만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체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것이 아까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목적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우리의 개인적인 목적은 놔버려야 돼요. 근데 잘 안 놓아지죠? 그럼 어떻게 하느냐. 애를 때릴 때, 다리를 위로 쳐들고 엉덩이를 때리면서 맴매! 맴매하잖아요. 하나님께서 목적을 안 놓으면 우리를 거꾸로 쳐들어요. 그럼 옷에 들어있던 잔돈들이 어떻게 됩니까? 우르르 떨어지죠.

 

맴매! 맴매! 목적을 갖지 마! 먹든지 마시든지 뭐든지 다, 너를 완전자로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너를 기준으로 세웠는데, 기준! 하고 손들어야 할 기준이, 뭐가 미흡하네, 아직도 멀었네, 아직도 배고프네, 월드컵 4강까지만 하면 되는데, 히딩크 감독은 아직도 배고프다는 거예요. 그럼 우승해야 돼요? 왜 자꾸 목적을 대요. 목적을.

 

한일전 축구한다고 하면, 뭐 예수 믿는 사람들 기도하고, “주여! 주여! 한 골 넣게 해주세요.” 한 골 넣고 나면, “한 골 지키게 하옵소서.” 무슨 목적이, 그때그때마다 그렇게 세속적이에요. 저 같은 경우는 결과만 봐요. 1대0이구나. 수고했다. 지면은, 내가 질 줄 알았어. 까불지 마라. 이런 식으로. 한일전 이기는 게 뭐, 축구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어떤 목적을 잡아버리면, 이건 백퍼센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착한일이 동원되고, 이거는 스스로 완전체 아님을 폭로하게 되고, 폭로하게 해버리면 이 버지니아에서 기준이 날아가 버려요. 주께서 이 말도 안 되는 기준을, 우리가 뭐 했다고 기준입니까? 완전하지 않은 인간을 이미 완전한 자로 확정지어놨다는 것은, 세상을 마귀의 세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인식론을 새롭게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아브라함이에요. 이삭이고, 야곱이고. 뭐, 이삭, 야곱 부자 된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완전히 인생이 그렇게 꼬여도, 엉망진창입니다. 특히 야곱 같은 경우에는 여자 둘이, 지들끼리 싸워가지고 난리도 아니에요. 삐져가지고. 남자와 동침하는데 가위바위보해가지고 하는 동침이 어디에 있어요.

 

요한일서 3장 7절을 한 번 봅시다. “자녀들아” 아까 자녀라고 하는 것은,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설명해드리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혈통으로 오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죠. 그럼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면 누구 뜻도 포함이 됩니까? 내 뜻으로 내가 자녀 된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내 뜻으로 자녀가 된다면 우리는 완전 자가 아니에요. 이케요? 저케요? 자꾸 완전을 추구하게 되죠.

 

그러면 그것은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가 나타나지 않아요. 마귀가 오히려 그 사람을 도와주기 때문에, 마귀하고 단짝이 되지, 마귀가 내 앞에, 적의 영역에 마귀가 나타나지 않아요. 마귀가 어떻게 나타난다?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완전을 향하여 열심히 매진하는 그런 모습을 해야 마귀가 흐뭇해하면서, 모든 인간세계를, 그동안 완전한 세계가 없었기 때문에, 충분하게, 넉넉하게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쳤잖아요? 어떤 돈을 바랬습니까? 그 사람이 착하기 때문에 고쳐줬습니까? 그게 바로 확실한 증거잖아요. 착하지도 않지, 헌금하지 않지, 고침 받고 헌금한다는 보장도 없어. 그럼 완전 자가 완전한 치료를 했잖아요. 누가 발작을 일으켰는가, 마귀가 난리가 났어요. 왜? 대가없이 고쳤느냐? 대가없이? 우리는 기도해서 고쳤는데, 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그냥 말 한마디로 가게 하느냐 이 말이죠.

 

그들은 안식일 날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한테 이쁨 받아서 병자를 고치는 방법을 사용했어요. 베데스다못가에서. 그래서 안식일을 지켜야 행운이라도 온다. 이런 식이었는데,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한테 찾아가서, “야! 니 아직도 이러고 있나?” 또 병자가 생각하는 것이, “누가 나를 업어서 첫 번째로 베데스다못가에 던져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38년 된 병자가 요구하는 것은 뭡니까? 예수님이 완전자라는 것을 모르고, 자기가 생각한 그 생각은, 일단은 완전한 것으로 보고, 이 완전에, 주님에게 자기는 그냥 협조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계획은 내가 세우고 주님께서는 다만 힘만 주시면 된다는 거예요. 근데 주님은 어떻게 나갔겠습니까? 들고 낑낑거리면서 물속에 들어가게 했습니까? “완전한 내가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강도여! 니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여자여! 내가 용서로 사하노니 너는 죄가 없느니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게 뭐예요? 너나 나나 이제는 예수 안에서, 내가 완전한 것처럼 너희도 완전해져버린 거예요. 완전체로 예수님께서 생산해버린 거예요. 이 믿음은 인간의 힘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와야 이게 믿어져요. 거울 봐도 볼품없습니다.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질 거예요. 이게 내려앉고, 위아래 위위아래가 점점 내려앉을 거예요. 모든 게 다 흘러내릴 수 있는 문제란 말이죠. 뭐가 완전해요? 두 번만 완전했으면 여기 자빠지겠다. 정말.

 

뭐가 완전합니까? 하지만, 세상이 보이는 거예요. 인간들의 헛수고, 마귀의 꾐에 빠져서 교회에서 헛수고 하고 있는 거예요. 헛수고. 공짜로 주는 자식이고, 공짜로 주는 선물인데, 이걸 내가 기도해서 얻겠다는 거예요. 결재는 내가 만들고 당신은 거기에 필요한 능력만 후원해달라는 거예요. 그게 뭐가 완전이에요? 완전을 추구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완전입니까? 그건 하나님의 자녀 되려고 하는 것이지, 그게 무슨 하나님의 자녀겠어요?

 

그럼 하나님께서 말씀만 해대시지, 왜 친히 오셨겠습니까? 주님이 친히 오셨다는 것은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그 변화를, 주께서 완전한 자녀로 이미 확정짓기 위해서 오셨고, 십자가에 그 근거가 있고, 성령을 통해서 선물로 줬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그 자녀는 누굴 증거 한다?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모든 관계를 마음껏 증거 한다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4장 봅시다. 참, 사도바울이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4장 6절에,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지금 제 말이 아닙니다. 성경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잖아요. 영을 받았으면 그 티를 낼 거 아니에요. 그 티가 뭐냐, 8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 마귀에게 종노릇해서 뭘 지켰느냐 하면, 10절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이게 골로새서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는 이 짓거리들을, 십일조하고, 이 짓거리하는 것은, 티를 팍팍 내는 거예요. 뭐다? “나는 마귀에게 속했습니다.” 그럼 교회는 뭘 생산하는 곳이다? 마귀자녀를 더욱더 마귀자녀로 확정짓는, 낙인을 찍는, 그런 업무를 하면서 돈을 챙기는 곳이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구원파는 뭐라고 합니까? 구원파는 교육을 받으라는 거예요. 교육을. 우리 단체에 와서. 개인구원을 받아야 개인구원이 된다는 거예요.

 

성경에는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개인구원은 오직 누구한테 해당되는가, 예수님에게만 해당이 되고, 그 분의 개인구원으로, 개인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지. 나도 주님 앞에서 뭔가 한 수 배웠다고 독자적인 나를 따로, 존재를 획책할 수 있는 어떤 여지를 없애버려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이고 예수 이름으로 살아나서, 살아나보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확보했어요. 하나님의 자녀 되는 모든 구비서류를 확보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낑낑거리면서 우리 따라오려고, 하나님의 자녀 되려고 애쓰는 꼬락서니하고는, 참 가관이다. 가관. 가관입니다.

 

가정에 저주가 흘러내리니, 일천번제를 드려야 대학시험에 붙니, 안 붙니, 세상에! 인간에게도 정성을 드리는 법인데, 살아계신 하나님께 정성을 안 해놓고 무슨 뻔뻔스럽게 복을 바라느니, 이거는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계속 쏘아대는 말이 이거에요. 니가 그런 벌을 받고도 니가 죄 없다고 하면, 더욱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너를 더 벌주겠는가? 자기 딴에 하나님 중심주의에요. 하나님 주권사상입니다. 예수 안에서 욥은 기가 차요.

 

주께서 이유 없이 고난주니까, 이거는 나중에는 친구가 아니고 웬수에요. 하다하다 안 되니까 욥이 욕을 해버려요. 너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니가 지금 어긋난 길로, 잘못된, 교회 안 다니고 이상한 모임만 가고 있다고 공격을 해대는 거예요. 아니 기가 차서! 예수님이 십자가 왜 졌습니까? 안 그래도 숙제 많은데, 율법만 해도 숙제 많은데, 숙제 하나 더 내주려고? 실제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계명 지켰지만 모자라다. 예수님의 계명까지 지켜야 된다는 겁니다. 새 계명까지.

 

아! 정말! 로마서 13장에 보면, 모든 율법은 사랑함에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들 이런 것은 눈에 안 들어와요. 사랑만 하면 모든 율법은 온전히 다 이루었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적질하지마라...뭐 하지마라. 사랑하면 그게 다 되는 거예요. 사랑하면 그게 온전한 거예요. 이 이야기만 하고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마귀이야기까지만 하고 다음 것은 딴 데 가서 할 테니까 들어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까 제가 분명히 사랑을 뭐라고 했습니까? 자기소멸이라고 했죠. “그대 있음에 내가 어떻게 되도 상관없이 그대만 모실 수만 있다면, 제발 당신을 모실 수 있는 그 영광을 저한테 허락하소서.” 이러니까 남자들이 다 프러포즈할 때 신사답게 무릎을 꿇잖아요. “당신에 있음에 내가 이런 굴욕적인 모습도, 당신 있음에 충분히 용납됩니다.” 초장에 하자마자 일어서지만. 자, 정리합시다. 사랑 앞에는 뭐가 없다? 내가 없죠. 내가 없으면 나의 목적도 없죠.

 

그러면 일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던 간에,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을, 확정된 너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 일을 하도록 궁지에 몰아넣는 거예요. 제가 자주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촌에 가면 사람들이 농사짓잖아요. 자, 물어봅시다. 농사짓는 이유? 1번. 농업이 그렇게 재미가 난다. 2번. 땅이 있기 때문에 지었다. 3번. 할 것 없어 그 짓한다. 몇 번입니까? 할 게 없어 그 짓해요. 농사도 마찬가지고, 판사도 마찬가지에요. “공부가 제일 쉬워요.” 이러면 결국은 그쪽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실력은 대기업인데 일부러 중소기업에 가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왜 대기업 가는가? 대기업 가는 쪽으로 그렇게 몰아세우니까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나를 살게 하시는가? 우리를 위함이, 구원파처럼 내 개인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환경을, 딱 맞춤, 월계수양복점이죠. 딱 맞춤으로 그렇게 맞춰서. 이렇게 살게 했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화낼 거예요. 왜? 다른 사람처럼 재벌 되게 맞추지, 왜 고생하는 것으로 맞췄느냐? 그러면 저는 답답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소멸되잖아요. 사랑 앞에서.

 

“사랑하는 분이 어떤 조치를 해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해야 사랑의 관계다. 이 말이죠. “이것 왜 저렇게 몰아붙였습니까?” 이렇게 따지는 것은 누구를 의식합니까? 사랑을 의식 하지 않고, 사랑을 이용해먹으려는 심보가 돼버려요. 그대 있음에, 주 예수 있음에,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왜? 완전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을 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또 이 말 듣고 되지도 않는 사랑을 해본다고 새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가 빈 서랍장이에요. 빈 서랍장에,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이라는 양말이 하나 들어온 거예요. 여기에 차곡차곡 쌓이는 거예요.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 이게 쌓이는 거예요. 이 전체가 뭐다? 새 계명이고 사랑이다. 이 말이죠. 십자가 피가 묻어가지고. 우리는 그냥 빈 서랍장인데, 날이 갈수록 말씀이 하나하나 쌓여가지고, ‘아, 이래서 우리는 사랑을 받았구나!’ 하는 것을 증거 하시면 되는 겁니다.

 

마지막 이거 보고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아까 53분했기 때문에, 완전자기 때문에, 이번에는 2분 까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3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여러분, 확 안 와 닿죠? 요한일서가 어려워요. 뭐냐 하면, 자기가 어떤 목적을 지녔는지를, 주께서 자기에게 어떤 목적을 주었는지를, 본인이 알아요. 목적을 이루면 더럽고 이게 아니라, 이미 깨끗해졌기 때문에 깨끗함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그 쉬운 일을 그냥 하면 돼요.

 

왜? 목적은, 내가 구원받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 같으면 이게 실패로 끝나요. 어디까지 깨끗해져야 합니까? 이렇게 되는데, 우리는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깨끗해졌기 때문에, 주의 깨끗함을 증거 하는 것은 간단해요. 어떤 악랄한 짓이 내 속 안에 또 있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화목제물의 그 가치가 계속 부각되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잖아요.

 

그럼 나는 그 사랑하는 사람의 그 광채 앞에, 그 희한한 영광 앞에 나는 있으나마나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럼 남들이 이야기하기를, “니 뭐야?” 할 때, 자기는 이미 소멸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이야기하지 않죠. 누굴 이야기합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더이다.” 고어 써가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더이다.”

 

그거 증거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굴 증거 한다? 아버지의 행하심을 증거 하는. 아버지의 행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 자녀라면, 딱 자녀에 맞는, 딱 그 완전한 자가 되는 겁니다. 아버지 덕분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뭐가? 그 아버지 사랑이 저에게 넘쳤습니다. 그 아버지의 깨끗함이 오늘날 이렇게 저에게 새로운 목적을 갖게 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 없다 하면 아버지를 거짓말하는 자로 만든다는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죄 있는 것을 화목제물로 죄 없이 했다는 것이 과연 사실이라면, 우리는 죄 없음을 믿게 하옵소서. 그래서 죄 없게 하신 화목제물, 하나님의 사랑, 그것만 우리의 자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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