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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5 23:23:15 조회 : 3116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이름 : (IP:88.153.7.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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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윤범(IP:119.♡.174.136) 16-10-05 14:39 
20100914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1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구약을 관통해보겠습니다. 구약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고 그것을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논리들이 흐름을 이룰 때 잘 이해가 안 되신다면 또 들어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창세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창세기는 두 개의 창세기가 있어요. 하나는 나 밖의 창세기. 내 안과 밖의 모든 천지창조를 하나님이 어떻게 운영하시고 창조하시고 나 밖의 다른 사람들, 사탄, 영적 세계, 자연세계 여기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창세기를 썼다고 하는 반면에, 두 번째는 뭐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생각하는 내 안의 창세기가 있습니다.

내가 알기는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천주교 모든 역사가 첫 번째 나 밖의 창세기를 이야기해왔어요. 나 밖에 있는 창세기가 허구라면, 지금껏 실제라는 말을 앞장세운 종교놀이하고 있었던 겁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모든 것, 그 많은 주석들, 책들이 있지만 나 자신을 감추기 위한 위작 또는 조작된 창세기일 경우에 평생을 창세기로 오락하고 있었던 셈이 되겠지요.

실제 하나님은, 우리가 있으면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내가 조작하고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가짜라는 겁니다. 저 나무와 풀들,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걸 누가 그렇게 생각하는가? 제가 생각하기에 천지창조는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네가 누군데? 네가 너를 모르잖아. 그렇게 고백하고 그렇게 주장하는 네가 너에 대해서 모르면서 천지는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그것이 진리고 맞는다고 네가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느냐?

저 달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그게 맞는다는 근거가 어디 있어요? 내가 맞는다고 우기는 것밖에 더 되겠어요? 기독교 이천 년 동안 서로 속이고 있어요. 창세기 주석 책이 수십 만 권 나오는 게 이게 거짓말이라면 서로가 서로를 속이는 거예요. 그렇다고 동의하고 교회 세우고 성당 세우고 그렇게 살아온 겁니다.

그렇다면 창세기를 누가 썼느냐? 제가 알기에는 창세기를 사람이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썼지만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창세기 이야기하면서, “내가 창세기라고 글 쓰면 잘 알아듣잖아. 그지? 그러니까 내가 창세기 썼어.” 이렇게 될 경우에는 인간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없는 인간에게 창세기를 이야기하신 게 돼요. 인간에게 문제가 없다면 십자가 사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십자가 사건이 있다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지요. 근본적으로 문제 있는 인간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어, 라는 고백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원하는 고백이겠어요? 내가 보기에는 사탄의 고백이에요. 내 속에 괴물이 들어서 괴물이 만든 고백, “저는 신이 창조한 걸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중에 대표자가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그리고 알라 신을 믿는 사람들. 알라는 하나님이란 뜻인데 그들은 천지 창조를 하나님이 했다고 믿지요. 그러면 그 사람 말이 옳다면 알라 신을 믿는 이슬람 사람들은 아무 문제없네요. 문제없으면 천국 가겠네요. 문제없는 인간을 왜 지옥을 보낼까요? 천국 가야지요.

모든 인간의 생각이나 고백에는 나는 문제가 없음이 깔려 있어요. 그동안 몰랐던 걸 더 보탰을 뿐이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문제도 없는 인간이 죽습니까? 왜 죽습니까? 로마서 6장에 나와 있어요. 인간이 죽는 이유는 죗값으로 죽어요. 죄 때문에 죽습니다. 이것 아시지요. 그러면 인간이 살아있으면서 천지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은 죄일까요, 죄 아닐까요? 죄죠. 그 죄라는 것을 내가 어떤 식으로 눈치 챌 수 있는 역량이나 소질이나 가능성이 죄인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마지막 끄트머리에는 그러니까 나는 괜찮은 존재라고 기어이 증명하는 식으로 모든 고백과 모든 신학과, 성경공부를 하게 마련이에요. 모든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도 움직임 하나, 생각 하나, 사업 벌이는 것, 그리고 아이들 교육 시키는 것, 결혼하는 것, 농사짓는 것, 어부가 고기 잡는 것, 모든 행동 속에는 반드시 마지막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역시 나는 정당해. 이것이 항상 거기에 전제가 돼있어요. 심지어 인간 대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걸 밝혀내기 위해서 창세기를 둘로 나눈 겁니다. 인간 바깥에 있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그 창세기. 그리고 그러한 고백이 잘못된 데서 나왔다고 우리 내부로 파고드는 창세기가 있어요. 우리 내부에서 창세기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우리 바깥에 천지 창조가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천지창조라는 그 의식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내 안에 진짜 창세기와 관련돼있는 것이 있기에 인간은 자기 죄를 숨기고 하나님이여, 나는 천지 창조한 것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에 나오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 그런 거짓말이 나오게 된 원인을 우리는 모르거든요. 그 원인을 지적하기 위해서 창세기가 쓰인 겁니다.

그러니 이천 년 교회역사고 성당이고 지금 아무 쓸데없는 짓을 계속 해오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조차 모르면서. 창세기 주석을 수십 만 권을 내면서 창세기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요. 왜? 본인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본인이 죄인인 걸 모르는 거예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줄로 믿습니다, 라는 그 고백이 정당하다고 착각을 일으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음을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에 대해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의 창세기, 하나님의 계시인 창세기가 내 안의 어떤 점과 결합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리기 전에 두 개의 문장을 쓸 테니 차이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과 함께 할/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 없이 못 살겠습니다.] 이게 뭔 뜻입니까?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는 그런 죄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 없이 못 살겠습니다. 이게 신앙이에요.

신앙이란 창세기란 계시, 구약이란 계시, 십자가란 계시, 신약이란 계시로 날아와서 나를 파괴시켜놓고 나의 파괴를 대가로 해서 진짜 우리 인간이 존재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시와 연계를 꾀하시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파괴 없는 연계는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하나님 뜻을 알아채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나는 파괴될 이유도 없고 오히려 계속 유지해야 되겠지요.

모든 인간의 심보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선 모르고 무조건 괜찮은 것 다 끌어당겨서 자기 것 만들면 자기가 더욱더 든든하고 훌륭하고 성스럽게 된다고 누가 그렇게 생각합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해요. 십자가, 언약, 복음, 좋은 건 다 끌어당겨요. 끌어당기면 끌어당길수록 뭘 몰라요? 자기는 점점 더 위대해지지요. 그게 사탄이에요. 악마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그게 악마의 속성이에요.

그동안 수천 년 가려졌던 우리가 악마의 일부로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으면서 “악마야, 물러가라” 하고 있어요. 본인에서 이미 악마가 작동하고 발동하고 있는데 엉뚱한 사람한테 악마야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하고 있단 말이죠. 그게 특히 심한 것이 종교인들이에요. 불교, 기독교, 천주교인들. 자꾸만 종교생활로 신앙생활하려고 해요. 하면 할수록 어떻게 될까요? 무엇이 가려질까요? 자신의 악마성은 점점 깊숙한 곳에 감춰지겠지요.

이것이 진짜 신앙고백이라면, 악마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 없이 못 살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고백한 유명한 사람이 있어요. 어거스틴입니다. 이게 바로 사탄의 고백, 악마의 고백이에요. 차이가 뭐예요? 앞에 있는 것이 ①이고 밑에 있는 것이 ②이라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할 수 없기에 하나님, 당신을 온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함께 할 수 없는 이 무자격자를 주여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저를 파괴 시켜주옵소서. 그런 뜻이에요. 왜?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을 파괴하시는 그분이 유일하게 의로운 분이죠. 오직 주님이죠. 주님이 주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대가는 뭐냐? 나의 파괴가 필요하기에 주여, 저는 그런 주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영원히. 이게 신앙입니다.

그런데 뒤쪽을 보세요. 나는 당신 없이 못 살겠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나는 당신 없이 내 영혼이 평안함이 없었습니다. 내 평온을 위해서 하나님이여 나의 주가 되시옵소서.”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그런데 이런 이기주의가 대표적 믿음에 모델이 되고 말았습니다. 최고의 표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걸 그대로 수천 년 동안 우려먹었고 수련원, 기도원, 모든 교회에서 청소년들이에, 자식들에게 이걸 모방을 시킨 거예요.

두 번째를 모방할 때 따라 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인간은 본래 악마의 종이기 때문에 이런 고백은 쉬워요. 혹시 여러분들 괴로운 게 있습니까? 그 괴로움을 해결하실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 주님을 영접하여 여러분 괴로움을 해소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다들 하는 거예요. 이것은 알라 신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불교, 기독교, 천주교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모든 기독교 역사의 대세에요. 이것은 드러났고 위에 있는 고백은 핍박 받았어요.

사람들은 직장생활하고 일하면서 삽니다. 그렇게 바빠요. 그런데 왜 살지요? 아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왜 살지요? 혹시 사시는 이유 아십니까? 모르지요. 성경 백독하면 왜 사는지 이유가 나오던가요? 안 나와요. 해답 안 나와요. 나를 위한 하나님인데 무슨 해답이 나옵니까. 처음부터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꿈꾸던 허구적 세계에 성경을 하나의 자료로 거기다 보탠 거예요.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까지 동원한 겁니다. 내가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까지 믿으니 내 미래는 활짝 피어있다. 죽으면 천국 갈 거야. 성경을 믿으니까. 창세기를 믿고 십자가를 믿으니까. 이런 식으로 일본말로 구라, 거짓말을 남발해온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만나고 비로소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게 2번이라면, 1번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고백이지요. 누구 고백이에요? 바로 사도되기 전에 사울 한 고백입니다. 생판 예상도 못한 분이 왜 찾아오십니까? 내가 예상한 것은 2번이거든요. 인간이 되었으면 하나님을 믿는 게 당연하지. 이게 2번이에요. 인간이 되었으면 창조주를 알아야 존재의 이유를 알지. 이게 2번입니다.

그런데 1번은 뭡니까? 사울이 율법에 흠이 없는 자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데 2번에 대해서 자기가 모르겠어요? 정통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먹힌다는 것은 실증적으로 확인했어요. 전 국민이 신자기 때문에. 유대나라는 전 국민이 신자에요. 오늘날 기독교 교회가 소원하는 것처럼. 미국이 신자 됨을 얼마나 기쁘겠어요. 전 국민이 신자인 유대교에 정통한 사도 바울이 2번 고백을 왜 모르겠어요. 인간이 되었으면 창조주를 아는 것이 마땅하단 말이죠.

이사야에 나오잖아요. 자식이 되었으면 아비를 알고, 소는 주인을 알고, 돼지는 돼지 주인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알듯이, 사람이 되었으면 하나님을 알아야지. 그건 모든 인간이라면 딱 들으면 아멘 그냥 나와요. 그건 아멘이 아니고 오멘입니다. 그랬던 사울이 정말 하나님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했습니까? 생뚱맞은 이야기를 했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쉬운 말로 나는 그동안 뭐했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런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생각에는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바깥에 있는 천지창조와 연관시키는 것은 다 거짓이고 사탄이 만든 환상의 세계라면 진짜 세계는 어디에 있고, 진짜 창세기 내용은 어디 있고 그것과 우리는 어떤 관련성이 있느냐고 묻고 싶지요.

인간 속에 창세기적 요소가 들어있어요. 인간이 존재한다는 자체 안에 우리는 모르지요. 우리는 창세기를 바깥에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데 확인하기 이전에 우리 속에 창세기적 요소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와 창세기가 어떻게 관련돼있는가? 죄와 관련돼있어요. 그러면 이 사실을 우리가 알아서 눈치 채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여,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해놓고, “이런 죄를 알았기 때문에 죄인으로써 천지 창조는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내가 믿나이다.” 이러면 사탄의 고백이 아니고 천사의 고백이고 신앙의 고백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묻고 싶겠지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자기 죄라고 들려오게 되면 가짜 죄를 죄라고 만들어놓고 그게 죄라고 다짐을 하고 장담을 해요. 예를 들어서 나는 옛날에 나쁜 생각을 했습니다. 나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인간은 자기 죄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오셔야 비로소 죄를 압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창세기는 전부 다 구라고 가짜라면 진짜 창세기를 만드신 하나님은 창세기를 품고 우리 인간에게 찾아오게 되면 비로소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작용과 창세기 말씀 작용에 의해서 그때마다 새롭게 펼쳐지게 되겠지요.

의미를 확실히 주기 위해서 성경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4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다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희가 죄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비로소 죄가 죄로 드러났지요. 그러면 우리가 죄 있는 것은 고백하면서 하나님 믿으면 되지 않습니까, 하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우리가 만들어낸 죄라는 것은 기존에 알고 있는 죄, 간음죄, 남한테 피해 입힌 죄, 사기 친 죄, 스스로 나쁜 생각, 우리가 납득이 되는 죄만 죄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죄를 끄집어내는 우리 행위는 죄가 아니고, 스스로 자백한 착한 사람이 돼버려요. 이해하시고 계신지 모르겠어요.

내가 반성한다는 자체가 얼마나 대견하고 착합니까? 내가 내려놓고 또 내려놓고 주 앞에 내려놨다는 말 자체, 그걸 인식한 자체가 이미 그만큼 착하다는 거예요. 안 내려놓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착한 거예요. 결국 이천 년 교회역사가 지 잘난 맛에 교회 다니고 신앙 생활한 겁니다. 이렇게 나를 부인하고 낮추니까 목사님, 나 이뻐해줘. 신부님 이뻐해줘. 이거라니까요. 세상에선 예쁨을 못 받아서 마음에 평안이 없었으니까.

주님을 알기 전에 평안이 없었는데 주를 알고 평안합니다, 라는 어거스틴의 고백이 왜 사탄의 고백이라고 한 줄 알아요? 지금 놀이하고 있어요. 하나님과 게임,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오늘 강의제목을 장난이라고 하고 싶어요. 모든 교회, 모든 신학자, 목사들이 교인으로 장난치고 있어요. 진리와 아무 상관없어요. 여러분, 마음 불편하지요? 편안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고객이 원하면 장사하는 사람이 그걸 만족시켜줘야지요.

제가 왜 자꾸 그냥 사세요. 아무티내지 말고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그렇게 티를 내면 낼수록 자신은 점점 더 종교라는 신앙이라는 세계를 솜사탕처럼 부풀려 만들어내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만들어내는 것이 자기의 거짓을 가리는 구명보트처럼 부풀어져요. 나중에 뚱보 돼요. 미국에 와서 인상적인 것은 공항이고 어디고 뚱뚱한 사람이 많은지.

신앙 생활하면 할수록 목사들이 영적으로 뚱보가 되는 거예요? 자기의 위선과 자신의 죄는 점점 가려지고 목소리까지 변조해서 주님은 안 계신 것 같아요. 본인이 신이고 교주 같아. 자꾸 교인들에게 신앙의 티라고 강요하니 교인들은 있는 주특기, 없는 주특기 모방해서 전통적으로 인정받은 종교적인 모습들을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여기 오니까 성화 보고 수도원인 줄 알았어요. 주눅 들 정도에요. 오래 직장생활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처음 온 사람들은, 개 끌고 오면 개한테도 세례 줄 판이에요.

인간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아무것도 손댈 것 없어요. 수작을 걸면 걸수록 점점 더 악마의 모습만 풍선처럼 부풀어질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목사님은, 그게 성경적으로 이론적으론 맞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마냥 기다리라고 한다면 만약에 개척교회해서 먼저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면 교인 한 명도 없게 되지 않습니까? 제 이론에 의하면 주께서 찾아와서 성령님이 세례 주셔야 그게 교회라면 스스로 발견하는 게 교회가 아니고 흉내 내는 게 교회가 아니고 찾아오는 게 교회라면 그 교회는 본인이 나서서 예수님 영접한 건 아니잖아요. 주께서 먼저 찾아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찾아오지 않으면 계속 교인이 아닌 게 된다 말이죠. 그러면 그 교회에 교인이 한 명도 없을 수 있지요. 십년 째 교회 간판 걸고 있는데 한 명도 안 나타나면, 자진해서 예수님 만난 사람은 여럿 왔다 갔지만 진짜 예수 만나고 온 사람이 없으면 그럼 목회자로서 난 어떻게 됩니까? 차마 이런 질문은 못하고 솔직하게 그런 마음은 들고 걱정이 돼서 목회자가 교인 한 명도 없으면 문제 되잖아요. 가게에 손님 하나도 없으면 가게 문 닫잖아요.

제 답변은 간단해요. 주님은 교회 협조하라고 계신 주님이 아니고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알아서 하자 없이 착오 없이 택한 백성 빈틈없이 다 건지면 그게 교회 아닙니까? 평생 삼십년, 오십년 목회해도 한 명도 없었는데 천국 가보니까 올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출석했다면 자기는 공짜로 천국 가게 됐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오히려 감사해야 되지요.

예수님 영접했다는 사람 오천 명 왔다면 골치 아파요. 바쁘기 때문에. 그런데 한 명도 없잖아요. 한 명도 없으니까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가기는 천국 가고. 이렇게 배짱 영업하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그게 진정 목회자의 소망이고 소원 아닙니까? 자기 손으로 목회 안 했는데 주님 앞에서 여러분, 훌륭한 목회자 소개합니다. 살아있을 때 교인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 같이 박수, 짝짝짝. 최고입니다. 한 명도 없더라도 그게 주께서 하신 것을 계속 꾸준히 믿어 왔습니다. 한 번 더 이쪽으로 박수, 짝짝짝. 그런 신학생, 그런 목사가 왠지 오늘 그리워집니다.

목사들이 창세기를 왜 읽습니까? 장사하려고. 여러분, 창세기 궁금하지요. 제가 전문가입니다. 원어 배웠습니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제가 원어로 풀이해주면 당신이 이 정보를 얻으면 당신의 영혼은 천국 갑니다. 이런 작전이 미리 다 깔려있어요.

다시 정리합시다. 창세기란 이미 창세기를 해석하기 전에 창세기 자체가 우리를 대상으로 해석하는데 그 해석하는 결과가 신약시대에 십자가와 관련 되어서 해석해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다 죄인입니다. 그것을 창세기부터 발굴해내게 하고 발췌해 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를 보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 하면 이런 마음이지요. 제가 중국에 갔는데 거기 온천에 닥터피시라는 물고기가 있답니다. 호기심 많은 아담의 후손이 되어 거기 가서 발을 담가보니까 고기들이 신상 왔다고 뜯어먹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와서 뜯어먹어요. 따라서 창세기가 닥터피시에요. 내가 알지 못하는 죄를 창세기가 와서 간질간질하게 우리를 뜯어내기 세상에 우리는 그때마다 감격의 이런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나의 위선과 나의 죄를 들춰내시는 고마운 닥터피시 같은 기능을 하시는 주여, 누구십니까?” 그것은 바로 창세기를 만드신 분이 그렇게 하셨는데 그분이 모세 안에 있는 영이 있는데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이 한 문장으로 창세기 해석 끝났어요. 이 한 문장으로 미국 강의 끝났어요. 여러분 해답 알고 공부하는 것과 해답 알려고 창세기 보는 것은 기분이 달라요. 이미 해답을 쥐고 창세기고 구약에 들어가야 돼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을 봅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지금 베드로 시대에 너희들은 이렇게 하라, 이렇게 살라는 게 아니라 선지자 이야기를 끄집어내요. 베드로 사도님, 신앙생활 어떻게 하면 좋아요? 이렇게 묻고 싶지. 나는 너희들에게 이야기한다. 선지자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교회가 부자 된 성도는 어떻게 부자 됐는지 찾지 마시고 열두 사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구약의 선지자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을 둬야 돼요. 성경을 본 사람은 알아요. 선지자들과 스데반 집사와 열두 제자가 그다지 고생 없이 살진 않았잖아요. 그럼 그들의 고생과 뉴저지에 있는 우리의 고생과 비교할 때 선지자들이 고생을 더 하면 더 했잖아요. 핍박 받고 죽었으니까. 그분보다 덜 고생한 것에 감사하기보다도 내가 제대로 삼을 기준을 잘 됐다는 것, 우리가 소망하고 여망한 것을 그걸 달성하고 쟁취한 그런 사람을 본받지 말고 성경이 왜 있습니까? 성경의 선지자들이 있잖아요. 그들이 간 길을 보잔 말이죠.

마태복음 5장에 보면 팔복의 마지막 복인데,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게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네가 본받을 자가 누구라는 겁니까?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이 아니고 그건 우리의 부러움의 대상이고. 부러워 미쳐. 질투 날 정도로. 저 여자는 왜 그렇게 예쁜 거야. 여자들에게 예쁜 게 부러움의 대상이잖아요. dna가 다른 걸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부러움의 대상은 알아요. 하지만 본받음의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니까요. 얼굴에 손댈 이유가 없다니까요. 본받지 말라 하는데 견적내서 깎고 난립니까. 선지자가 미용 수술했습니까? 선지자가 주의 복음을 위해서 코 세웠습니까? 코 세울 수도 있겠다. 복음을 위해서는.

선지자들은 핍박받았습니다. 선지자들의 삶은 핍박받는 삶이에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들에게 상이 많음이라. 이게 뭐냐 하면, 좁은 길로 가는 자는 어디로 통한다? 영생으로 통하고 넓은 길로 가는 자는 멸망으로 가지요. 제 아내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이 많은 물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궁금했다고 자기 느낌을 이야기하는데 나이아가라 폭포가 굉장히 넓어요. 넓은 길이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길이 결국 나이아가라 폭포가 돼요. 남 하는 대로 따라가다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폭포 끝에서 줄줄이 떨어져요. 지금도 모든 교회가 큰 교회 당회장 본받았다가 지옥으로 차례차례 다 떨어집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이런 포스터가 있어요. 한반도 그려놓고 절벽을 만들어놨어요. 자녀 셋 낳다가는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절벽에서 막 떨어져요. 아주 잔혹한 포스터에요. 넘쳐서 바다에 빠져요. 제가 오늘날 교회를 보면 그래요. 넓은 길, 넓은 길을 추구해서 교회마다 긍정적 사고방식,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전부 다 넓은 길로 모아놓고 목사부터 앞장서서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다 떨어지고 있어요. 좁은 길? 이게 좁은 길 아닙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는 이유가, 자기가 안다는 거예요. 뭘 아는데? 닥터피시여, 제발 나를 뜯어주옵소서, 나를 파괴시켜주옵소서, 하는 자는 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안다는 말은 어떤 뜻에서 나오느냐 하면, 내가 날 살리기 위해서 이것저것 끌어 모았는데 얼추 성경 내용은 들으나마나 거기서 거기고 다 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안다는 말 속에는 나는 나를 살리는데 있어서 나름대로 스케줄이 있어. 그런 뜻이에요.

“나를 파괴시켜주옵소서”가 아니라 나는 평소에 내 생활을 더욱더 공고하게 단단하게 만들어서 천국에 집어넣는 시중에 떠도는 방법은 다 강구했다는 이야기거든요. 그게 바로 마귀 아닙니까. 그게 유대인이고.

아까 요한복음 봤지만 예수님 오기 전까지 그들이 말씀으로 완전 무장했습니다. 사울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고.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오기 전까지 너희들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했으니까, 주님도 인정했어요. 물론 비꼬면서 인정했지요. 너희 최고다. 칭찬입니까? 비꼬는 말이잖아요. 왜? 너희 아비는 마귀로 했으니까. 가장 의로운 자가 가장 마귀다운 거예요. 세리와 창기는 저 뒤에 가 있고. 그들이 하늘나라에 가깝고 앞장 선 사람들은 지옥에 가깝고.

내가 오매 비로소 네가 죄인임이 드러나는 것처럼 창세기를 보는 관점에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의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 내가 열심 있는 신앙인으로 창세기 보신다면 잘못됐습니다. 잘못됐으면 고치면 되지 않습니까? 고칠 방법이 없어요. 그냥 잘못된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잘못된 길로 하고, 하나님의 진짜 해석이 주어졌을 때 진짜 해석을 핍박이라고 계속하게 되면 계속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고, 내 쪽에 문제 있다고 알면 그 사람은 좁은 길로 가서 영생 가는 사람이고. 그런 겁니다.

그럼 옳은 창세기 해석은 뭐란 말이냐? 아까 베드로전서 봤지요. 베드로가 선지자 언급했지요. 제가 강의하고 나면 강의 진도를 천천히 하고 말도 좀 천천히 하라고 말들 하는데 오늘은 천천히 하도록 애써 보겠습니다.

여기 11절에 보면,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는 신약 시대에 나타났지요. 예수라는 이름으로. 그런데 여기 보면 구약 선지자 속에 누가 있다 했어요? 벌써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있지요. 그러면 창세기 1장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그리스도가 관여했지요.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뭐가 있었다? 예수님이 나타나심으로 우리에게 죄가 있다. 그리스도가 창세기 1장에 관여했지요. 창세기 1장을 해석하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의 죄만 뽑아내서 너는 파괴 되어도 마땅하다는 결론 나오면 그게 바로 창세기 해석이에요.

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탄의 고백이고 죄가 되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창세기 정도는 외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못 박게 한 원인이에요. 외운 것으로 자기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했지요. 우리가 마치 성경공부하고 난 뒤에 뭔가 더 많이 알고 그 안 것이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되리라고 착각하는 것부터 시도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럼 성경공부해도 도움이 안 되는데 왜 합니까? 이렇게 정답을 내릴 수 있어요. 성경공부를 우리가 왜 합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은 우리로 더욱더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 한 겁니다. 주께서 모임을 주선한 겁니다.

창세기를 들어가겠는데요, 창세기를 보게 되면 우리에게 발생되는 게 있어요. 그게 의미라는 겁니다. 창세기를 모를 때 하고, 예를 들어서 한 번도 성경을 본 적도 없는 북한주민이 여기 있다고 칩시다. 창세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몰랐던 창세기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그러면 그 사람 속에 창세기와 관련되어서 내가 누구지, 하는 의미가 생기게 돼있습니다. 나는 창세기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은, 나는 이런 류의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 모습의 인간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죄의식입니다.

그러나 북한주민은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가 이런 의미인 줄 몰랐네. 나는 생전 처음 들었어요. 누가 이야기해준 사람이 없으니까.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홍해를 건너고, 나는 처음 알았어요. 모세가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건넜구나. 야, 신기하다. 그럼 어떤 의문이 생기느냐 하면, 나도 그 현장에 있었으면 홍해를 건너고 신났을 텐데. 하나님이여, 저도 홍해 건너는 기적으로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의 이야기가 되게 하옵소서, 라는 의미가 발생하겠지요. 이게 바로 주님이 고대했던 죄입니다. 무슨 의미를 만들어도 그게 죄가 되게 돼있어요. 닥터피시니까. 뜯어내니까.

하여튼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뜯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누가 뜯는가? 주님이 우리를 뜯어낼 때 우리는 비로소 맨날 낯선 내 의미와 다른 의미를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고백은 맨날 이 고백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또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여, 내가 예상 못한 일을 일으키십니까?” 또는 “주여, 제가 원치 않는 길로 궁지로 몰아넣으십니까? 어찌하라고?” 그럼 주님 답변은, “어찌 하지 말란 말이야.”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하지 마, 그래.” 이런 뜻이거든요. “저는 주를 섬깁니다.” “섬기지 말라 했잖아. 섬기는 게 죄라 했잖아. 그동안 공부 뭘 했어. 너한테 나오는 것은 다 죄야.” “이렇게 나온다면 주님 못 믿습니다.” “네가 믿는 것이 죄였어. 이제 알았어? 그걸 발굴하려고 그동안 공들여 너한테 일을 벌인 거야. 이제야 네 자신을 아는구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그 반발이 주님의 기도의 응답이에요. 그걸 보여주는 대목이 이사야 6장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렇게 해서 이사야는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면 안 돼요.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은 보는 순간 우리에게 의미가 생기는데 그 의미가, “나도 이사야처럼 해서 구원받아야지”라고 또 다시 내가 나를 건지려는 구원된 이상적인 모습을 환상으로 그려보는 그런 의미가 발생돼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이거에요. 나는 화로도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한다면 주님이 그때나 지금이나 활동하시는구나. 이렇게 돼야 돼요. 이사야를 만드신 주님이 지금의 나를 관여하고 이 순간 이사야를 보게 하신 그 주님이 옛날 이사야로 하여금 화로다 망하게 하여구나, 하신 그 주님이 닥터피시처럼 나를 뜯어먹는 작업을 하시는구나.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찾아온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것은 사도 바울처럼 번개 치고, 눈 어두워지고, 낙타에 떨어지고, 그런 것 했다고 우리도 재현한다고 고속도로에서 말 타고 하지 마시고 평소에 보면, 기쁨실, 주께서 만드셨구나. 시계, 양탄자. 양탄자에 그려진 최후만찬 그림치고 예수님 얼굴 제대로 나온 그림 본 적이 없어요. 주께서 저렇게 그려놓았구나. 그렇다면 주께서 이렇게 나를 앉혀놓은 거예요. 이게 범사에 감사 아닙니까. 이게 성령의 충만이잖아요.

그래서 스데반이 죽을 때 주님이여, 설교했는데 왜 죽으십니까? 이랬습니까? 주께서 했지요. 내가 안다니까. 눈치 챘어. 이런 고백했어요. 그럴 줄 알았어. 짱돌 들고 저들로 하여금 울분을 일으켜서 돌 던지도록 주께서 하신 줄 다 알았어. 이리 와. 빨리 나와 영원히 살자. 그게 바로 스데반 집사 순교사건이에요.

그게 순교사건이라면 지금 우리가 땅콩과자 먹는 게 순교사건이에요. “주께서 이걸 줄줄 알았어. 주께서 마련했지요?” 순교사건은 피 흘리는 게 아니고 내가 소멸되는 것 이게 순교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36) 16-10-05 14:40 
20100914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2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이야기한 것은 자기 파괴를 대가로 해서 하나님의 창세기는 그걸 구체화한다, 현실화한다. 이게 하나님 작전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창세기 요소를 끄집어내는 겁니다. 우리 속의 창세기 요소를 끄집어내야 창세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는 말은, 우리 안에 창세기로 하여금 창세기 되게 의미를 주는 요소가 있어요. 정답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곧 주시다. 예수님이 주되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죄를 박아 놓는 겁니다. 그 죄 때문에 희생을 하게 되면 창세기의 존재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주가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세기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다 구약에서 말씀하신 뜻대로 그 말씀을 응하게 함이라, 이런 뜻이잖아요.

여기서 제가 한 짧은 멘트 가운데 뭐가 빠져있지요? 하나님은 인간 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내 편으로 절대로 끌어당기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지 사람 편이 아닙니다. 사람은 그냥 이용물이에요. 예수님의 주되심을 위한 소모품입니다. 너희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니라. 뭡니까? 안개니라. 왜 성경에서 이야기는 그걸 자꾸 잊어버립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안-개- 이렇게 나와야지. 그 이름 아름답구나.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안개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분명히 성경에서 인간 존재에 대해서 확실하게 규정해놓은 게 있는 게 왜 자꾸 결부시키지 못하느냔 말이죠. 넓은 길에 어쨌든 출세해서 끼어보려고 머리 디밀고 그것도 작은 교회 말고 큰 교회 가고. 거기에 돈이 생기고 인기와 권력이 생기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내가 사는데 유리하게 작용하니까. 살아서 뭐 하는데? 그건 모르겠다. 처음부터 지가 누군지 몰라요. 왜 하는지 몰라요. 그냥 본능이에요. 살아있기에 살아있고, 더 살고 행복하게 살고 싶고. 실컷 행복하고 나중에 지옥 가고. 집단적으로 몰려가요.

그걸 선지자들이 본 거예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모세, 엘리야, 엘리사. 얼마나 거기에 대해서 외치고 또 외쳤다고요. 그리고 열두 사도들이 편지를 써서 외쳤습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주의 것이라고 그렇게 외쳤건만 나는 나의 것이라고 그렇게 우기잖아요.

구약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영이 작용하고 창세기 자체가 우리 속에서 이미 창세기 성취를 위하여 인간이 존재해 있습니다. 좋게 보지 마시고 죄를 품고 창세기와 관련된 채 우리가 있습니다.

창세기 2장에 낙원, 극락의 동산 한 가운데 뭐가 박혀 있는지 보잔 말이죠. 하나가 아니고 두 나무에요. 두 나무가 어떻게 짝지어 있는지는 한 나무가 훼손 될 경우에만 다른 쪽 나무의 의미가 발생됩니다. 선악과나무가 훼손될 경우에만 생명나무의 진의, 본질이 드러나요. 그걸 설명해드리면, 어쨌든 간에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가 한 가운데 박혀 있는데 거기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선악과 과실을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돼있거든요.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이란 아담과, 남자와 여자는 화이트보드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절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인간한테 왜 알려줍니까? 혼자 아시면 되지. 여기 9개월 된 아기가 있다고 합시다. 아무것도 모르죠. 주는 대로 먹으니까. 이건 소다수고, 이건 사이다다. 그 이야기를 9개월 된 아기한테 왜 이야기합니까? 선택할 결정할 능력도 분별력도 없는데 이야기를 왜 해요? 천국은 누가 갑니까? 어린아이가 가지요. 천국은 어린아이 간다는 이야기를 어린아이한테 합니까? 안 하지요. 그걸 알아들으면 이미 어린아이에서 떠나서 천국 못 가기 때문에.

지금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심어놓고 이걸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것을 구태여 인간한테 하느냐 말이죠. 할 필요도 없는데. 사단이 이야기했다는데 있잖아요. 그렇게 안 보입니까? 법을 이야기했다는 자체가 하나님 내부에 문제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 세계 자체에 뭔가 문제 있다는 겁니다. 어떤 가정이 길을 가는데 갑자기 앞에 그릇이 와서 자기 발 앞에서 깨졌다. 좀 더 가니까 그 집에서 티비가 날아왔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 집안에 부부싸움하고 있고 문제 있다는 뜻이지요.

선악과는 죽음의 나무에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지요. 죽음의 나무를 왜 동산 한 가운데 심어놨느냐 말이죠. 심어놓았을 뿐만 아니고 정녕 죽으리라는 것을 인간에게 왜 통보합니까? 하늘나라 내부에 문제 생긴 거예요. 따먹지 말라는 말은 너는 가던 길 가고, 남의 부부싸움에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 문제는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었으니.

모든 성경은 예수님 중심입니다. 이것부터 먼저 분명히 합시다. 모든 진리는 예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할 때 예수님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하나님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이 말도 어려운 말이지만 여러분이 알아듣는다 치고, 요한복음 5장 39절에 모든 성경은 아버지에 대해서 증거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는 거예요.

인간들은 이걸 자꾸 기피하고 신을 알아야 된다고 자꾸 신에게 결부시키는데 그건 내가 신에 대한 정보를 획득해서 신의 나라에 들어가겠다는 죄의 심보를 드러내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인간의 종교성이죠. 이런 말을 하나하나 하는 것도 힘들어요. 어느 정도 조금 다르면 수정이 되겠는데 맞는 게 없다니까요. 어디서부터 손댈지 몰라요. 입만 열면 다 반대니까, 다 틀렸으니까.

목사님, 예수 믿으면 구원받지요. 그것 거짓말입니다. 어떻게 예수 믿고 구원받아요. 주님이 구원해줘야 구원받지. “예수, 믿습니다.” 그래서 구원 못 받아요. 그럴 것 같으면 강제로 권총을 들이대고, 추석에 예수 안 믿는 아버지한테 칼 들고, 따라 하세요. 나는, 나는, 예수를, 예수를, 믿는다, 믿는다. 아멘, 할렐루야.

방법이 너무 과격했어요. 그럼 쉬운 방법으로 할게요. 아버님, 1000달러인데 매달 드리겠습니다. 돈 좋아하는 네가 웬 일이냐. 아버지 연세가 많으시고 이제 다 됐는데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거기에 심판이 있다는데 자식으로서 두고 볼 수 없어서 아버지 천국 보내야 되겠습니다. 이것 받으시고 다음 주부터 교회 나오세요. 돈 주는데, 한 번 갔다 오는 노동한 일당인데. 권총 들고 칼 들고 하나 똑같은 거예요. 결국 사고방식은 똑같은 겁니다. 이런 이야기는 십자가마을 사람들 다 알아요. 알아도 정말 또 하고 싶어요. 워낙 다르니까. 워낙 엉터리니까. 손댈 구석이 너무 많아서. 완전히 살 처분, 도살하듯이 해야 돼.

에덴동산은 극락의 동산인데 하늘나라 안에 내부문제를 증거하기 위해서 환경으로 잠시 조성된 겁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의 조성은 하늘나라의 내부문제에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미카엘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과 악한 천사와 싸우죠. 그 문제가 신약 마지막에 등장했지만 앞서서 창세기에 미리 예고편으로 깔려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란 존재는 내부문제 후에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잖아요. 인간은 하늘나라의 내부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되지요.

그렇다면 창세기 3장 15절 봅시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 이것은 인간이 관여해서 이룰 문제입니까, 인간이 배제당한 채 이뤄질 문제입니까? 배제당한 채 이뤄질 문제에요. 인간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된 겁니다. 이 말은 인간은 자기 노력(교회 간다든지, 기도한다든지)으로 구원 못 받아요. 구원은 인간 외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 자체 내부의 문제가 자체적인 어떤 작업에 의해서 해소될 때 그 결과로 구원받는 자도 생기고 유황불에 들어가는 자도 생기는 겁니다.

성경해석 끝났지요. 간단하게 끝났지요. 기도, 전도, 선교, 헌금 아무 의미 없지요. 예수님과 마귀의 전쟁 여파로 우리는 전리품이 될 뿐이에요. 그 전리품으로 집단구원이 뭐냐?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전리품이에요. 이스라엘이 애굽과 싸운 게 아닙니다. 애굽의 신들과 싸운 것은 바로 어린양을 요구했던 하나님이 애굽의 신들과 싸워서 승리해서 얻은 전리품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용사요, 우리는 그 전리품입니다. 또는 상급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을 시작하면서 창세기에 들어왔는데 창세기를 하면서 초장에 분명해진 게 있습니다. 모든 창세기의 완성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배제된다. 그래서 아브람은 배제되고 “아브람, 너는 빠져. 나가”라고 아브람은 아니라고 한 하나님 일의 결과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람을 밀치고 아브라함 되게 하고, 야곱을 밀치고 이스라엘 되게 하고.

그러면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야곱의 이름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입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의 이름이에요. 그게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리라. 이건 마치 야곱이 꿈꿀 때 천사 온 그것은 장차올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서 흉내 낸 거예요. 이렇게 하는 분이 오신다는 것을 야곱이 본의 아니지만 흉내 낸 거예요. 어차피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배제되니까. 배제됐다는 말은 나가라는 말이 아니고 너를 쓰겠다는 의미에요. 내가 알아서 썼습니다, 라는 말은 하지 말란 말입니다.

주께서 주님의 내부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 필요한 인간을 끌어 쓴다는 말은, 끌어 쓰임을 당한 인간은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이런 뜻을 품고 고백하란 말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가 있었지요.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했지요. 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합니까? 자기 이름으로 안 하고.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고 하면 앉은뱅이가 얼마나 납득을 하겠어요.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명령하니까 명령자 이름으로 하면 듣고 일어서면 되잖아요.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의 이름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하면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어야 돼요, 예수님 말을 들어야 돼요? 예수님의 말로 듣고 일어났단 말이죠.

앉은뱅이는 알아요. 그런데 주변에 있던 군중들은 이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은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심과 신앙심이라고 하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아주 짜증을 내면서 “왜들 이러십니까? 나의 경건과 나의 기도와 나의 기적의 힘으로 한 게 아닙니다. 저 앉은뱅이가 낫게 된 것은 앉은뱅이가 갖고 있는 예수로부터 난 믿음,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낫게 됐습니다. 앉은뱅이에 대한 주님이 하는 일에 우리는 옆에 선 목격자일 뿐입니다.”라고 고백한단 말이죠.

그 현장이 성령의 현장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이 없는 현장의 해석과 성령이 있는 현장의 해석이 이렇게 달라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알겠지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무슨 뜻을 가지느냐 하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란 말은 나는 아닙니다. 저는 아니란 뜻이에요. “목사님, 병 낫게 해주세요.” “저는 아닙니다.”라는 것이 그 병을 낫게 했단 말입니다. “목사님, 제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 용서할 능력 없거든요.”라는 그것이 바로 주의 증인이란 말이죠. 그게 구약부터 있는 거예요. 줄곧 이어져온 겁니다.

아담과 하와는 연기자들이에요. 어떤 대본이 나오는지 몰라요. 대본 주니까 연기하는 거예요. 우리 인생 자체 전부가 연기고 연극이에요. 거기서 나온 유명한 노래가 <연극이 끝난 후>('80 제4회 MBC 대학가요제 은상)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적이 있나요
음악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는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배우는 무대 옷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고
불빛은 네온을 따라서 바삐 돌아가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무대에 남아
아무도 없는 객석을 본적이 있나요
힘찬 박수도 뜨겁던 객석의 찬사도
이젠 다 사라져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죠 침묵만이 흐르고 있죠
관객은 열띤 연길 보고 때론 울고 웃으며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착각도 하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 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할 때 어떤 현실이 눈에 보이는데 연극이 끝난 후에 뒷모습이 너무 허무하듯이 우리 인생도 한 편의 연극이라서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란 내용입니다. 역할만 했을 뿐이에요. 그것도 내가 정하지 않은 역할, 주께서 주신 역할. 그런데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걸 받아들이지 않아요. 주여, 왜 저를 이렇게 못 살게 굽니까?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렇게 하십니까? 제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 됩니까? 앞으로 이래서는 더는 못 삽니다.

드디어 성공한 거야. 창세기가 너한테 꽂혀서 네가 찾아내지 못한 네 죄를 드디어 끄집어낸 거예요. 우리의 배신성을. 그게 바로 하늘의 문제성이 땅까지 전쟁터가 번져서 에덴동산이고 인간 세상이고 온통 사탄과 예수님과의 전쟁터로 바뀌고 만 겁니다. 거기에 우리는 걸려들었고 우리는 멋도 모르고 태어난 겁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다윗이 알고 시편 50편에서 이렇게 합니다. 나는 내가 죄 지은 게 아니고 죄가 나를 낳았다. 모친의 죄 중에서 내가 태어났다.

이미 전쟁터에 내 의사와 상관없이 영적 전쟁에 말려들었는데 그 영적 전쟁터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둘 다 인간 아닙니다. 둘 다 인간으로 머무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바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고, 뱀의 후손은 악마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후손이 앞의 것을 규정하게 돼있어요. 뱀의 후손은 악마인데 악마이기에 앞서서 뱀이라고 창세기 3장에 미리 온 거예요. 에덴동산에 들어온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선조가 있고 후손이 있잖아요. 성경 영적 세계는 후손이 선조를 규정하게 돼있어요.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뱀의 후손이 뱀의 주가 되는 겁니다. 뱀을 다룬 거예요. 여자를 유혹하라고.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믿지 마라. 네가 따먹는 날에는 나처럼 된다. 누가 이야기했어요? 사탄이 이야기했죠. 네가 따먹는 날에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있어. 내가 되도록 노력하게 될 거야. 이 땅에서. 그래서 인간은 사탄이 되고자 노력하는 게 아니고 정반대로 신이 되려고 하죠. 그게 바로 사탄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구원받고자 하는 이게 사탄의 짓입니다.

소원이 뭡니까? 죄인이 되는 게 소원입니까, 천당 가는 게 소원입니까? 천당 가는 게 소원이죠. 주의 소원은 뭡니까? 죄인으로 드러나서 십자가를 진 주님인 것을 증인되는 것이 성령이 임한 목적입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땅 끝까지 □의 증인이 되리라 할 때 네모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나의 증인이 되면 안 되죠. 그런데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는 네가 되리라. 예수의 증인이 되는 멋들어진 네가 될 것이다. 멋들어진 나를 목표로 우리는 예수 증인되려고 성령세례 받으려고 그렇게 통성기도하고 금요철야기도하고 있어요. 성령 주시옵소서. 뭐 하려고? 괜찮은 사람 되려고. 이게 타고 난 본성인데 어떻게 합니까. 선악과 따먹은 본성이 이래요.

선악과 따먹었다는 것은 어거스틴도 이야기했는데 선악과 구경 해봤어요? 구경도 못했는데 왜 본인이 책임져요. 억울하지 않습니까. 선악과 따먹는 dna 있어서 dna 조사해도 선악과 없어요. 선악과 따먹는 순간 모든 것은 묵시적인 전쟁터로 변하기 때문에 그 전쟁터에서 새로운 얘들 어떤 아이가 태어나든 동일한 전쟁터에서 동일한 규칙을 적용받으면서 백날 태어나도 동일한 원판이에요. 그게 아담 안. 아담보다 이천년 후에 태어나도 아담이 짜놓은 판에서 저쪽 구석에서 태어난 거고, 오천년 후에 태어나도 이쪽 구석에 태어난 거죠. 표정들이 안 믿는 표정이라서 말을 못하겠네.

예수님이 십자가 진 것이 이천 년 전이죠. 그러나 로마서 5장에 보면, 한 분이 의로운 분이  됨으로써 예수 믿는 자는 의인이 되잖아요. 사도 바울은 그걸 예수 판,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천 년 후에 태어나도 같은 예수 안에 태어난 게 되고 오천 년 전에 태어나도 예수 안에 태어난 원리가 뭐냐? 아담 이후 만년 후에 태어나도 그건 아담 안에 있는 육신,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 되는 겁니다. 이제 슬슬 성경의 윤곽이 드러납니까?

기본은 뭐냐? 인간은 나가 있어. 하나님 내부문제가 끼어들 문제가 아닌 거예요. 영적 세계란 천사의 세계에요. 천사의 세계에서 반란이 일어난 겁니다. 그게 뱀의 후손이에요. 악마에요. 요한계시록은 무슨 이야기로 끝납니까? 악마는 유황불에 들어갔다. 이걸로 끝나잖아요. 양의 탈을 쓴 짐승과 물에서 온 짐승은 유황불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나머지는 잘나서 천국 갑니까? 어린양에 기록된 자는 이건 행함도 없이 기록됐다는 사실만으로 천국에 들어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짐승의 이름에 기록됐다는 이유로 전부 다 지옥 가는 겁니다.

제가 지금 성경에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잖아요. 그대로 이야기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너무나 그대로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인간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안 믿는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을 믿지 말까, 이렇게 나와요. 너무나 급진적인 이론이 나왔기 때문에 따지고 싶어도 따질 수가 없지요. 앞뒤가 다 맞는 이야기니까. 너무 맞기 때문에 성경은 옛날 신화 책이라고 하자. 기어이 그걸 기피하려고 해요. 말하기 전에는 성경 믿는다고 하다고 성경의 진실 된 내용을 그대로 이야기하니까 성경을 밀치는 거라.

그러면 성경을 매일 큐티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잘못된 해석을 계속 공급해줘야 돼요. 논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계속 거짓말해서 이 말씀대로 지키면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거짓말해줘야 나를 위한다는데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데 내가 어떻게 성경을 버릴까? 주님 사진 찍어주세요. 성경 보는 순간을 잊지 말아 주세요. 이런 식으로 성경 본 마일리지를 쌓는 거예요. 거기에다 헌금한 마일리지, 선교헌금한 마일리지, 교회봉사한 마일리지.

그런데 창세기부터 인간은 나가 계세요. 아담아 따먹지 말라는 말은,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죠. 누가 관여해야 돼요? 장차오실 예수님이 해결할 문제지 네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죠. 그런데 마귀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인간을 방패로 자기편으로 삼아버립니다. 사실 하나님은 그럴 줄 알았지요. 에덴동산에 선악과나무와 생명나무를 영원히 갈라지게 했습니다.

처음에 주님의 지시가 뭐였습니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요. 그 안에 네가 선악과 따먹는 순간 생명나무는 못 먹는다는 말을 안 했지요. 그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것은 결코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대적으로 싸우는 주의 원수, 사탄은 주의 원수입니다. 이것도 어려운 말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고 주의 원수에요. 시편 110편. 왜냐하면 사탄을 해결할 분은 하나님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 해결하실 분이에요. 그렇게 해결되면 그 나라를 아버지한테 바칩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마지막에는.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과 안 싸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싸우게 만듭니다. 왜? 예수님을 주되게 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성경 전체는 예수님은 주시니라.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성경핵심이 아니에요.

버지니아 강의 들어보세요.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사탄의 생각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인간들이 자기를 하나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만들어낸 거고 진짜 하나님이 말하는 주권사상은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하기 위한 주님의 권한이 성경에서 나오는 주권사상입니다. 개혁주의신학에서 말하는 주권사상은 인간 자기를 위함이에요. “신이시여, 저는 인정합니다. 화초와 모든 세상의 만물은 다 주께서 만드셨잖아요. 이 정도로 압니다. 저를 구원하소서.” 이건 인간들이 자길 구원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한 거예요.

십자가가 빠져버려요. 그렇게 잘도 아는 인간이 왜 죄인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주장이에요. 모든 걸 믿고 모든 걸 아는데 이게 왜 죄인이냔 말이죠. 근본적으로 그게 이상하잖아요.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 왜 죄인입니까? 율법에 흠이 없다는 사울이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이유가 뭡니까? 예수 믿고 난 뒤에 부지런히 쫓아다니면서 그동안 못 지은 죄를 다 지었기 때문에 그걸 종합하니까 죄인된 거예요? 도대체 사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한국에 치킨 광고에 이런 게 있어요. 치킨이 얼마나 맛있는지 깜짝 놀랐어요. 그때 멘트가, “도대체 이 닭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사울이, “주여, 저한테 무슨 짓을 했습니까?” 예상 못했어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그런 하나님은 있지도 않았어요.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드는 하나님뿐이에요.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은 없어요. 그건 인간들이 지어낸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합니다. 이걸 구약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구원합니다. 그걸 상세히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이름만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이름을 버리잖아요. 대번에 탈락이에요.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가리는 게 본인들의 이름이죠. 본인들의 존재감이죠. 본인들의 열성이고 본인들의 가치 같은 것들이죠. 더 나아가서 첫째 강의한 것이 본인들의 의미잖아요.

성경을 보는 순간 의미가 생긴다. 어떤 의미가 생기는가? 하나님 성경 봅니다. 성경 보는 착한 짓하는 나에게 저의 존재를 영원토록 천국에 넣어주세요. 의미 생겼어요. 여기 북한주민 나왔습니다. 천국 이야기했습니다. 하자마자 뭘 생각합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 심판이 있으리라.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소서, 분명히 속으로 하나님께 이야기하겠지요. 그렇게 외치고 싶을 때는 하나님을 상상해서 대상화시켜야 되겠지요. 그리고 구원받는 대상은 누굽니까? 본인이 되겠지요. 그게 이천 년 동안 인간들이 종교란 이름으로 기독교란 이름으로 해온 원형이고 모델이잖아요. 그 사람 구원받습니까?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가 빠졌지요. 북한주민님, 십자가 빠졌는데요? 아차, 하나님, 십자가를 믿습니다. 저를 구원하소서. 뭐가 빠졌지요? 그게 죄라는 사실, 십자가에 의하면 그게 죄라는 것. 다시 말해서 네 구원에 네 자신이 관여했다는 그게 바로 사탄이 이미 피조물들을 다 같이 주의 일에 관여하자, 라고 사탄이 꼬신 거예요. 아담아 따먹고 나와 한 편이 되어서 우리 피조물도 신처럼 되자. 언제까지 피조물 노릇만 하고 도구로만 쓰일 것인가. 이렇게 한 겁니다.

그럴 때 주께서는 아담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현상이 벌어져요. 분명히 처음에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생명나무는 없다. 하고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처음에는 바로 옆에 있었어요. 이제는 영원히 갈라섰습니다. 갈라섰다는 말은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것이고 보이지 않는 거죠. 감추어졌다는 것은 부재,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존재하지 않는 생명나무.

인간에게 남은 건 뭡니까? 신처럼 되는 것이죠. 그럼 어떻게 합니까? 성경을 참고로 해서 상상의 생명나무를 만들어내야 되죠. 상상의 에덴동산, 상상의 하늘나라, 상상의 율법, 상상의 신구약, 이걸 참고로 해서 다 만들어내죠.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과 참된 천국과의 차이는 상상한 것은 어떤 식으로도 천국에 인간은 들어갈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야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십자가 믿으면 구원하고 예수 믿으면 구원한다는 것이 유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뭡니까? 예수님이 오실 때에 주여 누구십니까, 라는 의외의 반발을 유발하면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쏟아내면서 주께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모든 게 주로 마감되는군요. 내가 주 앞에 저주받아 끊어질지라도 주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시옵소서. 나의 파괴를 대가로 해서 주의 일이 이뤄진다면 주께서 저한테 묻어보지 마시고 그렇게 일을 진행시켜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했던 모습이고 그 모습이 성령을 통해서 오늘날 성도에게만 그대로 이어집니다. 방금 이것을 다섯 자로 이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좀 더 길게 하면, 범사에 감사합니다. 어떤 사태가 내 인생에 일어날지라도 감사합니다. 그걸 더 길게 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셨군요. 누구 좋으라고? 주님 좋으라고. 주님만 좋으시면 되는 겁니다. 간음한 여자가 현장에서 잡힌 것도 주님만 좋으시다면 또 잡히겠습니다, 라는 식이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모든 성경의 일은 인간은 배제당합니다. 인간은 끼어들 입장이 못 돼요. 주께서 다만 쓰시고자 하는 가운데 쓰는 거예요. 아브람을 택하사 아브라함으로 바꾸면 아브라함은 아브람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에요. 예수님의 이름인데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 안에 아브라함의 기능이 들어있으니까 그 기능을 앞당겨서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 기능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듯이 예수님도 스스로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한테 바치잖아요. 그게 바로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라는 뜻이에요.

계속해서 인간은 빠집니다. 주님이여, 구원받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구원이란 그 여파라니까. 이미 이루어진 마귀에 승리한 결과로 주어진 거예요. 며칠 전에 우리가 했잖아요. 저는 했다고 보는데 요한일서 2장 14절,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미 이긴 거예요. 우리가 뭘 해서 이겼습니까? 아니죠. 주님 안에 예수 안에서 이긴 자가 되는 거예요. 버지니아 강의에도 나오지만 3장 6절에 보면,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니”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범죄 하지 아니한다는 거예요.

의를 행할 때 우리가 개입했습니까? 개입 안 했지요. 그러면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개입했습니까? 죄 지은 데 우리가 왜 개입 안 했습니까? 이유가 뭡니까? 날 때부터 죄인이기에 자기의 본성을 바깥으로 발산한 것에 불과한 거예요. 그렇다면 너는 범죄 하지 아니하다는 이 말은 주의 규정이죠.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빠져있습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 내 미래에 대해서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아니에요. 주님 계신데 전문가가 있는데 건방지게 내가 왜 관여합니까?

악마야, 나와. 내가 관여한다고 해서 악마가 무섭다고 도망가겠어요? 마늘과 십자가로 악마가 싫어합니까? 악마가 좋아합니다. 도대체 악마가 십자가 들이대고 마늘 싫어해서 물러간다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낸다는 자체를 이미 우리가 상상해서 천국, 귀신, 다 만들어낸 거예요. 백 독, 천 독 한 성경을 통해서 모든 개념을 내가 상상하는데 상상한 개념들은 내가 개입해야 내가 구원되는 그러한 원칙에 준해서 체제를 만든 거예요. 그게 바로 신학체제에요. 그 신학체제 구조에서 교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구원받았지요. 그러면 됐잖아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렸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렸습니까? 움직이는 자체가 예배인데 뭘 또 예배드려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그날인데.

어느 정도 대충 맞고 몇 구절 틀리면 이것 고치세요. 이렇게 말을 하겠는데 다 틀리니 어딜 이야기를 해야 될지. 근원적으로 그겁니다. 대세 따라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큰 강으로 막 우르르 떨어져요. 밀고 떨어지고, 밀고 떨어지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편하게 살고 싶어 해요. 성경이고 복음이고 다 귀찮은 거예요. 제발 좀 놔둬라. 편하게 살고 싶다. 이걸 두 자로 줄이면, ‘행복’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목적은 행복이었습니다. 행자를 떼버리면 뭐가 남습니까? 복. 모든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도 모른 채 복 주세요. 한국에선 이사한 집에 갈 때 휴지를 사 가요. 휴지 이름이 ‘잘 풀리는 집’이에요. 뭘 해도 일이 잘 풀리는 집. 미국 오면서 약이나 김 같은 것 사오지 말고 잘 풀리는 집을 하나씩 나눠줘야 되는데 그래야 액땜이 되고 저주가 풀리는데^^

다 자기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편이라고 강제로 끌어당긴 겁니다. 그게 가능했어요. 왜? 가짜기 때문에 끌어당겨진 거예요. 목사가 가짜 하나님, 가짜 예수, 다른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가벼운 마음에 교회에 출석하면서 오늘도 복 받았다는 자위하는 행위를 그 사기를 반복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신앙의 연륜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오래 해먹은 사람이 장로 돼요. 초신자를 초짜라 하고. 맨 그쪽 길로 가게 돼요.

벌써 창세기 3장 다 했습니다. 인간은 빠지는 거예요. 아담이 이마에 땀을 흘리는 것은 호르몬 작용 때문이 아니고 이 땅에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든 것은 재주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타고난 본성이 자기를 가만두질 않아요. 허망하게 죽을 수 없고 행복을 포기할 수 없다는 악마적인 발악이 자기를 힘들게 만들어요.

엘리야가 사렙다 과부를 찾아갔지요. 엘리야도 참 야박하고 남자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자살할 정도로 마지막 남은 밀가루, 마지막 남은 참기름을 털어 넣으려는 순간 동작 그만, 그걸 날름 지가 먹어버렸잖아요. 이걸 야바리 까졌다. 또는 싸가지 없다고 하거든요. 뭐예요?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해. 그걸 먹고 모자가 죽으려고 했는데 벼룩에 간을 빼먹지. 그걸 빼먹잖아요. 진짜 너의 진면목은 자살할 자격도 없어요. 그게 인간이에요.

다시 말해서 네가 살고자 하는 이유를 네가 모르잖아, 이런 뜻이에요. 살려고 해도 가뭄 들어서 못 살겠다. 과부라서 못 살겠다. 죽자. 너에 대해서 죽자, 살자 하는 그런 권한이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살려주면 사는 거고 죽이면 죽는 거지 왜 네 마음대로 살려 하고, 네 마음대로 죽고자 하느냐 말이죠. 날름 빼앗아 가죠. 이제부터 너는 못 죽어. 내가 살려줄 거야. 밀가루가 화수분처럼 피어나고 있는 기름통은 다 찼어요. 끝. 그리고 난 뒤에 아들이 죽어요. 분명히 엘리야가 살려줬는데 멀쩡한 아들이 죽습니다. 도움 받은 건 생각 안 하고 자기 아들 죽어간다고 살려내라고 난리 치네.

지금 엘리야가 하는 의미가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거든요. 예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날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네가 생명나무를 모르지? 생명나무가 뭔지 알아? 생명나무는 생명나무를 위해서 죽일 수도 있고 생명나무를 위해서 살릴 수도 있다는 걸 마르다, 마리아가 모른다는 거예요. 그것의 형상이 바로 엘리야 사건입니다.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되면, 나라는 존재는 뭔가 하나님의 일에 대한 반영으로, 결과물로 존재하는 것이지 나부터 시작하는 것이 주의 일이 아닌 것을 엘리야를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한윤범(IP:119.♡.174.136) 16-10-05 14:41 
20100915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3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한 것은 인간의 진실은 하나님이 찾아오심을 밝혀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죠.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 안에 하나님과 처음부터 연관돼있는 걸 모른 채 일방적으로 착각해서 찾아가는 겁니다. 찾아가다보면 계속 자기의 망상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지요.

지난 시간에 상당히 중요한 것을 했는데 복습하게 되면, 창세기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창세기는, 내 자신이 누군지 모르면서 보는 것과, 큐티가 위험해요. 우리 속에 창세기 요소가 들어있는 창세기. 주께서 인간 만들 때 창세기 내용이 우리 속에 포함돼있는데 그 내용이 죄와 연결돼있다 했습니다. 그 창세기는 어떻게 가려지느냐 하면, 내가 창세기를 생각하고 내가 성경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진짜 창세기가 가려지는 거예요.

그럼 창세기 해석을 할 수 없는데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선지자들은 뭔가 다른 걸 받았어요. 그리스도 영을 받아서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어떤 해석을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영에 입각해서 해석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입각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베드로전서 1장 11절에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근거해서 창세기를 해석하게 되죠.

예수님이 오신 것은 신약에 오게 되는데 창세기 구약인데 어떻게 신약과 구약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느냐? 구약은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시나리오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가 찾아가는 창세기 말고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창세기를 해석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 결론에 이르죠. 그렇게 하면 되는데 조건이 있어요.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창세기 해석은 백날 해석해봐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해석밖에 나오질 않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해석을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실례를 많이 들었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자기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지 누가 하나님 외에 누가 창조했겠는가? 세상 천지를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을 정답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정답은 뭐가 정답이냐 하면, 십자가를 위해서 창세기를 만들었다는 연관성을 지어야 되는데 십자가 빠트리고 나는 천지를 창조한 걸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이야기해드렸지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렇데 되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했던 거죠. 사람들은 자기가 이미 창세기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예수님의 의견과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했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오기 전까지 죄가 없었다. 내가 오고 난 뒤에 비로소 너희 아비는 악마고 너는 죄로써 드러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 이야기한다고 곧이들을 사람 없지만.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창세기를 비롯한 구약 전체 말씀을 응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밝혀졌습니다. 숨겨있는 진짜 창세기를 우리 속의 죄를 끄집어내는 거죠. 예수님이 오심으로 비로소 죄인된 것처럼 예수님이 창세기를 해석함으로써 창세기 속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런 말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질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것이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 쪽에서 찾아간 창세기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실 때 비로소 창세기의 비밀은 풀린단 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창세기를 인정한다고 치고, 창세기 4장을 봅시다. 대번에 나오는 의문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으면 그 날로 죽어야지 자식은 왜 낳게 하십니까? 창세기 보면 나오는 의문인데 아무도 이걸 목사님한테 질문하지 않아요. 먹는 날 죽어야지 멀쩡하게 살아서 또 자식까지 낳네. 왜 그렇습니까? 뭔가 우리가 기대하는 창세기와 창세기를 가지고 다가오는 하나님과 의도 자체가 분명히 틀어지고 비켜가고 있는 겁니다. 다른 거예요.

그렇다면 이 문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먹는 날 죽이지 않고 자식까지 낳게 하고 계속 번창케 하시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제처럼 두 개의 문장을 대비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두 번째, 태어나지 않으면 죽음도 없다. 두 개의 문장의 차이점을 누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뉘앙스가 좀 다르죠.

쉬운 예를 들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더니 시계를 사줬다. 엄마가, 이번 성적 안 오르면 국물도 없어. 차이점이 뭡니까? 난 공부가 제일 쉬워요, 했더니만 부수적으로 시계가 온 것과, 내가 공부한 것이 중요하지요. 공부 잘했더니 선물까지 주더라. 중요한 것은, 내가 공부 잘한 게 되잖아요. 그런데 성적 안 오르면 국물도 없다는 말은, 엄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엄마의 욕망은 공부 잘하는 자식을 원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자식아, 공부 좀 잘하면 더 좋지. 나는 네가 더 중요하거든. 하지만 성적이 오르면 더욱 더 기뻐할 거야. 이게 아니고 나는 성적만 원하는데 네가 따라줘야 돼. 만약 안 따라주면 미워할 거야. 포인트가 다른 데 가 있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해놓고 자식을 낳게 합니까? 뉘앙스가 인간을 사랑함이 아니라 죽음의 의미, 다시 말해서 금지의 의미를 계속해서 반복시키기 위해서 자식들을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두 번째, 태어나지 않으면 죽음도 없다. 지금 주님께서 죽음을 목적으로 하는 거예요. 죽음을 만들기 위해서 너희들은 계속해서 태어나야 한다. 죽음이 갖고 있는 지층, 죽음이 중첩된 의미는 계속 태어나면 태어날수록 어디에 어프로치해요. 뭔가 수렴하고 있는 거예요. 자꾸 가까이 가고 있는 겁니다.

진짜 죽음은,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목숨 끊어지는 게 죽음이 아니고 십자가 죽음이 죽음이에요. 십자가 죽음에서 하나님의 세계 내분이 밝혀집니다. 첫째 시간 기억납니까? 인간이 만들어진 목적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선악과 심은 목적이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위험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예 없어져야 돼요. 그런 위험한 지뢰 같은 걸 왜 심어놓습니까? 256년 동안 지켰다고요? 그 다음날 먹고 싶은데? 결국은 따먹을 수밖에 없는 지뢰를 그것도 변두리가 아니라 중앙에 꽂아놓는 이유가 뭡니까?

인간아, 너는 하나님 일에 개입하지 말란 거예요. 밀쳐내기 위해서 꽂아놓은 거예요. 하나님의 내부문제는 내부에서 처리하는 겁니다. 그 내부문제가 요한계시록 12장에 독생자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데 있어서 반대세력이 있었던 겁니다. 하늘나라에 반란이 있었던 거예요. 인간은 반란이 있었는지도 모르죠. 하지만 판이 커졌어요. 하늘나라 전쟁이 인간 세계까지 넘쳐온 거예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만들기 위한 전략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먼저고 그 다음에 인간입니다.

간단한 문장인데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모든 설교 때문에 사람들은 복음적 설교에 대해서 토함을 느끼면서 그 현장에서 떠나버려요. 제가 단지 이 말을 했을 뿐인데 골로새서 1장 16, 17절을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람들은 구역질을 느끼면서 화를 내면서 떠나버립니다. 그런 현상이 너무 많아서 헤아릴 수 없어요.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런 취지에서 설교했다고 구토를 느끼고 떠나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라든지 교회에 올 때는 내가 내 것으로 만족을 찾기 위해서 왔다가 자기가 만족하는 범위 내에서 성경해석을 그만둡니다. 어떤 성경해석이 내 구미를 맞춰준다면 눈을 돌려서 그만 좋습니다, 하고 원래적인 하나님 말씀에 접근 안 하고 얻을 것 얻었다는 그런 태도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버려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내 것을 살겠다, 따로 놀겠다는 겁니다. 이게 사탄의 속성이라 했지요. 나는 내 것으로 독자적으로 따로 살게 되면 그게 제일 편해. 인생 뭐 있어? 편하게 사는 게 최고지.

성경을 왜 봅니까? 편하게 살고 싶은데 마음이 불안하잖아요. 그러면 내가 편하게 사는 정도까지만 큐티하고 정도까지만 성경해석하고 돌아서면 그만인 거예요. 그런데 복음 전하는 목사 입에서 그걸 얻고자 교회 왔는데 아무리 해도 자꾸 딴 소리하는 거예요. 예수님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우리가 있다고 하니까 그럼 내 것은 언제 오는데? 아무리 들어도 안 들리는 겁니다. 화가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교회 오는 노동의 목적에 위배되니까 그 노동에 만족하는 다른 교회에 갈 수밖에 없어요. 거기는 그걸 채워주거든요.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 행복합니다. 그게 납득이 되고 나를 위해서 왔는데 다른 분의 이야기를 하니까 내 인생 만회하기 위해서 왔는데 인생 만회하는 방법은 언제 나오는데?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선지자들이 무척 고생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선지자들이 전부 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 먼저 아니고 예수님 먼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렇게 외치다가 쓸데없는 왜 자꾸 문명발전에 우리 사회공동체의 전진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느냐. 힘 모아 발전하자는 그러한 대안을 제시해야지. 왜 자꾸 원론적인 것, 원칙적인 것만 들이대면 우리가 열심히 하는 행위가 의미 없지 않느냐는 거죠. 그러면 그 행위가 누구 행위란 말입니까? 내 행위지. 내 행위로 인하여 어떤 결과를 얻고자 하는 노림수를 갖고 왔는데 내가 어떻게 행동하란 말인가? 당신이 목사가 됐으면 이렇게 또는 저렇게 하라는 지시만 하라는 거예요. 단순하게 그것만 하라는 거예요.

그럼 복음 아는 목사는, 그래서 뭘 원합니까? 그러면 따로 살고 혼자 편하게 살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뱀의 속성입니다. 사귐이 없는 거예요. 누구하고? 나의 원본 되시는 나를 만든 창조주와 사귐이 없으면 천국 가도 못 견딥니다. 천국은 내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13절) 아들의 나라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귀면 안 돼요. 아들의 나라와 사귀어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성경해석을 했단 말이죠.

자기만족을 위해서 성경해석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책으로 보지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서 주신 책이죠. 그렇게 했던 성경해석에 누가 등장합니까? 예수님이 등장해버리거든요. 모든 성경해석을 내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를 주 되도록 해석해버리니까 해석에 차이가 났습니다. 해석에 차이가 나니까 둘 사이에 충돌이 생겼고 삐졌고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나는 하나님 믿고 해석하는데 왜 예수 당신은 내 해석과 다릅니까? 그러면 결국 둘 중에 누가 가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해석이 맞고, 나는 사탄이 심어준 가짜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찬양했고 섬겼고 봉사하고 헌금한 거예요.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이렇게 이야기가 돼요.

이게 바로 회개입니다. 내 중심으로 성경 해석한 거예요. 그 목적은 나는 따로 살고 싶어. 혼자. 다 귀찮아. 그럼 뭐가 필요하겠어요? 돈이 필요하겠어요. 그걸 누가 아느냐? 사탄이 알고, 예수를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경제적 문제로 테스트하잖아요. 돈만 있으면 혼자서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러다 낭패 보는 사람도 있지만 돈만 있으면 된다는 거예요.

돈이 우리 자체적인 힘과 자질과 역량과 권력을, 능력을 소유하게 하겠지요. 소유된 능력으로 사는 이것은 출애굽기에 의하면 애굽의 생활입니다. 애굽에서는 힘만 가지면 사는 거예요. 광야에서는 다 털어먹게 해요. 애굽에 살던 그 성질을 적용시켜 살 어떤 방법이나 강구를 일체 삭제시키는 환경이 광야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평소에 했던 행동, 아침에 일어나 진라면 끓여먹고 한 행동, 저녁에 치킨 먹던 그 행동, 광야에 무슨 치킨이 있습니까? 광야가 닭 키우는 데입니까? 광야에 치맥 없어요. 몸은 습성화 되었어요. 치맥과 술과 담배와 적당한 오락으로. 광야에서 다 떨어내버렸어요. 재미도 없고 권태롭고.

이스라엘 백성은 참 인내심이 많아요. 처음부터 애굽으로 돌아가자 했으면 얼마나 좋았어요. 도저히 못 견뎌서 열 번이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진작 본색을 드러내지. 모세는 답답해서 이 사실을 현장취재해서 동영상 찍고 해서 더는 이 사람들과 못 살겠습니다. 저 사람들 관리가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설교자가 이러한 아픔을 겪어야 됩니다. 교인들의 비 복음적 성향 때문에 고통당할 때 저는 장담합니다. 백 프로 성령 받은 목사에요.

창세기 4장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죽이지 않고 자식을 낳게 하는가? 그것은 인간을 양대 진영으로 나눕니다. 형제간 사이를 이간질해요. 누가요? 하나님이. 이간질하면 결국 개인적인 역량,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없어야 될 벌어짐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새롭게 발생하고 말았어요. 그렇다면 아담이 갖고 있는 역량이라든지 아벨이 갖고 있는 소질이나 재주는 아무 의미 없고 그 둘 사이를 벌어지게 한 그 관계를 위해서 두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야 했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선악과, 내가 금지한 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죽으리라. 금지한 것이 현실에 드러내기 위해서 바로 죽음이 필요한 거예요. 아담과 아벨이 왜 태어났습니까? 태어나지 않으면 죽음이 없다 했지요. 사람은 태어나면 다 죽게 마련이야. 이건 복음이 아니고 허무주의고 염세주의입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관심사는 자기에 대한 애정과 미련과 집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깝다. 내가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늙어죽는구나. 그래, 죽으면 죽어야지. 이건 누구한테 동정하는 거예요? 그동안 힘들게 살아온 자기한테 동정하는 거죠.

그런데 아까 두 번째 문장, 태어남이 없으면 죽음이 없다는 말은, 죽음과 무관하게 태어난 인간은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시다바리입니까? 시다바리죠. 변두리에 별 의미 없는 존재란 말이죠. 우리말로 껍데기에 불과한 겁니다. 알맹이는 주님이 필요해서 다 가져가요. 금지의 내용이 뭔지 필요해서 인간을 만들어놨고 거기서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면서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죽음이란 사건을 유도해요. 거기에 하나님의 개입된 상황을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전쟁터에 집어넣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식빵 먹었잖아요. 아이들은 테두리는 놔두고 폭신폭신 것만 파먹지요. 나머지 껍데기인 거예요. 인간은 자기 본질을 하나님만 알지 자기는 몰라요. 인간은 뻥 뚫린 거죠. 뻥 뚫린 부분을 가만있지 않고 계속 매워나가죠. 껍데기를 잔여물이라 합니다. 남아있는 껍데기가 허전하잖아요. 인간의 심리에서 뭐가 등장하는가? 원인도 없는 알 수 없는 불안, 원인 없는 위협, 협박, 원인 없는 두려움.

이것은 돈이 7조원, 8조원이 있어도 소용없어요. 밤을 못 이룰 정도로 불안해요. 자식이 열 명이 효도해도 불안하고. 공포와 불안이 달라요. 공포는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어요. 더 미치는 거예요. 정신과 가 보세요. 그냥 증세만 억누를 뿐인지 원인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저 원인을 만들어냅니다. 남편이 애 먹여서 그렇다. 그럼 남편이 애 안 먹이면 불안이 없어져야 되잖아요. 아니요.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원인을 모르니까 일단 남편 문제를 들었는데 증세가 없어지지 않고 또 생기는데?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누군지 몰라서 그래요. 그리고 모르는 것보다 더 답답한 것은 아무도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요. 그게 살고자 하기 때문에 계속 마귀 속성과 연계가 돼요.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해서 사탄의 종이 된다. 성령이 알려주는 거예요.

그런데 설교시간에 히브리서 2장 16절에 여러분이 불안하고 벌벌 떠는 것은 살고자해서 그렇습니다. 죽고자하면 마귀가 떠납니다. 눈치코치 없는 목사가 그런 설교했다고 칩시다. 그게 대책이냐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목적이 행복을 위해서 오잖아요. 사는데 더욱더 풍요하고 미래가 안심하고 살기, 벌써 목적 자체가 죽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니고 살기 위해서 온 사람들에게 처방전으로 내놓은 것이 죽으세요, 이게 처방전입니까?

처방전은 그렇게 내리는 게 아닙니다. 주기도문 하루 두 번 외우시고, 성경 몇 장 보십니까? 세 장. 두 장 더 늘이시고, 기도시간은 한 시간 하세요. 이게 처방전이에요. 아닌 것 같아요? 신부가 그렇게 해요. 형제님, 고해성사한지 오래 된 것 같은데? 자주 오세요. 제가 고양이를 바깥에 찬 데 뒀습니다. 제 죄를 용서하옵소서. 알겠습니다. 주기도문 두 번 외우세요. 다음 분. 진짭니다.

천주교에 똑똑한 신학자들은 이걸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 처방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위약효과입니다. 플라시보 효과. 그 자체가 유치해 보이고 천박해 보이죠. 하지만 고양이로 가슴 아파하는 할머니한테는 신부의 말이 예상 못한 정신적인 안정을 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아직도 천주교는 번창하고 있어요.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종교. 그것 아니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당하는 후유증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신교가 천주교를 욕합니까? 천주교 따라 갑니다. 참선하고 영성훈련 다 하고. 옛날에 했던 것 그대로 다 합니다. 신부는 제복 입고 돌아다니고 십자가 배지 달고 계절마다 휘장 바꾸고. 뭔가 효과를 주는 거예요. 직접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어떤 상징물들을 많이 배치해서 정서적으로 안정이 된다는 사람들은 그 교회를 떠나지 않고 거기에 적절한 돈을 내놓을 겁니다. 결국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없으면 교회가 운영이 안 돼요.

남의 이야기할 것도 없네요. 모든 게 돈입니다.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명분이 돈을 위해서 있지 돈이 명분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닙니다. 제일 위선 떨지 마세요. 돈뿐입니다. 왜 돈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돈이 있어야 나 혼자 편하게 살 수 있어요.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살고 싶은 거예요. 절대 신으로써. 돈이 없어서 그렇지 주께서 돈만 주신다면, 권력을 주신다면 그걸 목표로 얼마든지 목사 말에 순종하고 교회에 순종할 용의가 돼있습니다. 얼마나 우리에게 문제가 있는지.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그게 문제에요. 인간은 지식적인 체험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게 구약이죠. 구약에 요나 봅시다. 요나에게 큰 물고기가 하나님이었습니까? 아니죠. 요나가 만난 박 넝쿨이 하나님입니까? 그런데 요나는 뭘 느꼈습니까? 하나님이 자기한테 이야기하심을 만남을 느끼고 있지요.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증명될 수 없어요. 요나는 모든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의미를 발췌하게 되는 겁니다.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움직임 속에서 하나님의 활동하심의 의미를 발췌하는 식으로 하나님과 교류하고 있고 사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야 갑자가 풍랑이 일었다. 하나님께서 내가 다시스로 가니까 벌주려고 하는구나, 하고 눈치 채는데 박 넝쿨, 갑자기 니느웨 사람이 회개해서 하나님은 40일 만에 심판 받는다고 했는데 완전히 구라가 되고 말았어요. 40일 만에 심판하신다고 했으면 동업자끼리 말이 맞아야 될 것 아닙니까.

어떤 수선하는 가게에 부부가 있는데 수선하는데 10달러입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시세 모르는 남편이 5달러입니다, 동업자끼리 왜 말이 달라. 뒤늦게 아내가, 사실은 10달러입니다, 하면 당신 남편은 5달러라고 하던데, 그러면 5달러에 해줄 수밖에 없잖아요. 이미 동업자가 일을 저질러놨으니.

지금 선지자는 누구 편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죠. 하나님께서 40일 되면 반드시 멸망한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내부적으로 문제없어야 되는데 왜 갑자기 회개해서 멸망하지 않게 됐어요. 요나가 화가 난 이유는 회개해서 멸망 안 하는 건 좋아요. 하지만 사전에 언질을 주던지 암시를 줘야 할 것 아닙니까. 이런 동업자가 어디 있어요.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그래서 요나는 죽으려고 했지요. 요나가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햇볕이 따가워. 자살하려고 했는데 땡볕이라 힘들어. 이게 무슨 의도입니까? 요나는 북쪽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선지자지요. 그러면 선지자는 양쪽을 다 보는 겁니다. 하나님 쪽도 알고 이쪽도 다 알아요. 그걸 뉴저지 강의에서 경계선이라 했는데 기억납니까? 경계선은 양쪽을 다 보는 거예요. 그래서 증인이 되는 겁니다. 육의 세계, 영의 세계 다 아는 거예요. 주의 증인이 되어 아예 천당 가는 게 아니고 너희를 데려가지 않는 이유는 주의 증인하라고 아직도 이 고생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도 알고 이스라엘도 알지요. 하나님이 찾아오게 되면 비로소 우리 자신을, 본질을 안다고 했지요. 요나는 이스라엘 사람을 대표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능이 하나님으로 살았을까요, 육체의 컨디션으로 살았을까요? 육체의 컨디션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섭씨 18~20도 사이, 바람은 미풍, 산들산들, 이건 기분 좋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습도는 20~30%, 촉촉한 것보다 좀 더 낮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육적인 쾌감을 누가 이깁니까? 하나님보다 더 원하는 바가 그건데.

아까 머리 띵하다 했지요. 지금도 머리 아파요? 머리가 갑자기 상쾌해져 보세요. 이게 하나님의 축복인가 할 거예요. 인간은 육체의 본능을 이기지 못합니다. 육체의 아픔뿐만 아니고 육체의 본능, 성욕과 식욕, 잠자는 욕구 등 생존 욕구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것이 미흡할 때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부를 때부터 내가 원하는 행복과 벌어진 간격을 주께서 매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결재를 누가 올립니까? 내 쪽에서 결재를 올리고 올린 데로 들어줘야 돼요.

제가 뉴저지에서 2016년 올림픽 조정경기 했지요. 내가 여기 있고 쭉 나가는 거예요. 우리 얘들 어떻고, 남편 사업 어떻고, 완전 조정경기에요. 출발, 시작! 이게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적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를 내가 골라 타겠다는 겁니다. 열두 교회 다녔다고 분명히 제가 뉴저지 강의에서 했는데.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 해도 아무리 선지자 사명해도 따끔따끔 하게 되면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형제우애 다 날아갑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라. 아무리 목사가 이야기해도 이빨 아프면 임플란트 잘못 되면 무슨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 나옵니까. 사람은 주의 말씀을 못 지킵니다. 그때그때 몸의 컨디션 따라 웃다가 울다가 그래요. 어린아이가 그래요. 혼자 웃다가 울고, 감당이 안 되지요.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적절하게 사용하는데 직접적인 하나님 체험은 하나님께서 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방법을 사용하느냐? 떨기나무 방법을 사용하는 게 제일 좋아요. 출애굽기 3장에 떨기나무가 있는데 불이 붙었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소감을 밝힙니다. 왜 떨기나무가 타지 않느냐? 불이 붙는 것과 타지 않는 것은 차이가 있어요. 그냥 불이 붙는 것은 불이 붙는 거지만, 타는 것은 불쏘시개가 점점 더 소모되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불이 붙을 때는 불은 붙으면서 떨기나무는 사라져야 돼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떨기나무는 그대로 있고 불은 불대로 있고. 그 말은 하나님은 인간과 상종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세야, 내가 널 찾아갈 때는 너의 죄인 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너의 죄인 됨을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우리의 회개를 받고 사용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경건을 받아서 사용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못남을 못난 대로 노출시키면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따로 우리의 못남을 앞장세워서 일을 벌이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성과는 예수님의 공로로 돌아가는 거예요.

요나가 하나님 체험을 어떻게 했습니까?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고 어떤 고래가 와서 받았다든지 박 넝쿨이 시들어서 자살하는데 짜증났다든지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그널, 의미가 담긴 신호가 온다는 것을 포착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변화들이. 그렇다면 오늘날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체험이 아니고 하나님이 운동하고 있는 의미를 우리가 뽑아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했습니까, 뭘 준비했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한 것을 제가 적어봤어요. 그 항목을 나열할 테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기 위해서 어떤 걸 준비했는지 읽어볼게요. 교회, 시장, 회사, 공연장, 스포츠경기장, 정치, 유치원, 가정, 티비방송, 건강, 전쟁, 건축, 경작, 창고, 병원, 군대, 농장, 백악관, 유엔. 이걸 준비했습니다. 뭐예요? 지금 살아있는 모든 것이 바로 주님 자신이 우리와 접촉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큰 물고기고, 그리고 시들어버린 박 넝쿨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보여주세요, 할 필요 없지요.

움직이는 의미가 뭡니까? 의미의 사슬, 의미의 조합이 중요한 겁니다. 그 의미는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여러분 아십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을 괜히 읽어드렸겠습니까? 모든 존재와 활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지난 시간에 고린도전서 3장 언급했습니까? 세상은 누구 것이고? 우리의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보세요. 우리는 어떤 종교란 것이 필요 없잖아요. 삶이 곧 종교고 예배잖아요. 이게 사도의 뜻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무슨 짓들을 하고 온 거예요. 지금까지. 따로 논 거예요. 주님이여, 회사 일에 간섭하지 마시고 이번 주일 날 봅시다. 맨날 주일에 보자는 거예요. 주일이 특정 날이 되는가? 오늘 태양과 다른 태양인가요?

왜 인간의 전통에 말려듭니까? 바리새인의 전통에 주의하라, 누룩을 주의하라고 했건만 백날 들어도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나의 정체성, 나의 본질을 규정했던 가문의 전통, 사회의 전통, 국가와 학교, 교회의 전통에서 그것들의 우리에게 진짜 하나님이 주신 의미를 완전히 질식시키고 말았어요. 거기서 선과 악으로 규정한 겁니다. 이래야 선이고 이래야 악하다는 것을 너무 강력하게 세뇌를 받고 세례를 받은 거예요. 우리는 그들의 세례를 받은 거예요. 성령세례 받기 전에 먼저 받은 세례가 있어요.

그중에서 마르크스와 알튀세르 이런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받은 세례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례가 예수님의 광야 시험에서 이미 언급했습니다. 마켓, 세상은 마켓입니다. 대통령? 마켓 사장, 회장이에요. 이 세상에 모든 지도자는 오너 외에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20세기 초에 베버가 이야기한 모든 정치는 관료제란 뜻이에요. 돈 벌기 위한 관료제. 대통령? 돈만 벌게 해준다면 아낌없이 표를 던집니다.

문제가 복잡하게 된 것은 한쪽이 잘 살고, 한쪽은 못 살게 됐다는 갈등이 복잡하게 됐지 목적은 하나에요. 잘 살게 해주신다면 아낌없이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종교라고 바꾸겠습니다. 문제는 딱 한 가지에요. 멕시칸을 잘 살게 하느냐, 중산층을 잘 살게 하느냐, 상류층을 더 잘 살게 하느냐? 거기서 표의 비율이 달라질 뿐이지 항상 모든 것은 시장이에요.

시장에는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한 대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 손이니까 이 말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몰라요. 인간은 껍데기죠. 껍데기는 잔여물, 잔여물은 떠밀려온 쓰레기거든요. 누가 떠밀었어요? 경제학자들이 연구해보니까 돈이 떠밀었어요. 19세기에서 21세기까지. 이것 말고 다른 현실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이게 현실이에요. 우리가 사는 현실은 이것뿐입니다.

돈을 위해서 명분이 있는 것이지 명분을 위해서 돈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순서를 바꾸면 안 됩니다. 정말 명분이 중요하다면 늘 순교할 준비가 돼있어야 돼요. 어디에 대해서? 시장에 대항해서 순교해야 돼요. 얘 없으면 문 닫겠다. 왜 갑자기 문을 닫아요? 운영이 안 되니까. 운영이 뭡니까? 돈이 없다는 말이거든요. 나는 돈한테 굴복 안 해. 나는 이걸 끝까지 사수해서 자폭하겠어. 그런 자신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지는 문 닫아서 좋겠다. 직원들, 얘들 생각해야지. 레슨비 없는데. 서로 관계가 얽혀있는데.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다. 반갑지요. 문제가 생겼어요. 아들이 잘 돼서 돌아온 게 아니라는 게 문제가 된 겁니다. 노후대책을 갉아먹을 쥐가 돼버렸어요. 우리끼리 편하게, 마귀의 속성대로 나 혼자 편하게 살았는데 아들이 돌아왔어요. 반 토막 날 판이에요. 슬슬 밀어내지요. 추석 되면 나오는 말입니다. 취직 언제 할래, 결혼 언제 할래? 그래서 명절에 안 가잖아요. 무서워서. 자식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버지니아 강의에서 했어요. 돈 없는 부모는 부모가 아닙니다. 오늘 바른 소리 왜 하는지 모르겠어. 돈 있을 때만 부모에요. 자식은 돈 없어도 자식이지만. 끝까지 교회에 돈 바치지 말고 쥐고 있으세요. 그래야 자식한테 대우 받아요. 헌금하면 교회가 날 부모 만들 줄 알아요? 돈이 부모 만들지 교회가 부모 만드는 게 아닙니다. 훌륭한 인격, 훌륭한 신앙, 그게 현실 앞에서 무슨 소용 있습니까? 믿음, 소망, 기도가 무슨 소용 있어요. 기도 했다면 돈으로 실적을 보여 달라는 거예요. 네 시간 했다고 자랑하지 말고 기도노동해서 얼마나 벌었는지 그것 내밀라는 거예요. 왜 그 이야기를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에서 왜 못합니까? 쉬쉬하고 있는 거예요. 전부다 감추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두 진영으로 나눴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금지의 본능을 두 형제가 나눠 갖게 됐습니다. 그 안에서 죽음이 발생되고 그 죽음은 마지막 진짜 죽음은 십자가지요. 주님은 사랑한 자는 천국 가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지옥 가지요. 그러니까 두 형제가 두 진영으로 나눠진 겁니다. 천국과 관련된 형제 아벨, 그리고 지옥과 관련된 형제 가인, 두 진영으로 나눠진 거예요. 구약 때부터 이미 십자가의 의미를 필요한 인간들을 모집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마음껏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36) 16-10-05 14:42 
20100915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4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창세기 4장에서 유념해야 될 게 있습니다. 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르릴지니라”

이 대목입니다. 가인은 지금 아벨과 상대하고 아벨은 가인과 상대하지요. 다시 이야기하면 두 형제 사이에 하나님이 끼어들었다. 금지의 내용,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서 끼어들었습니다. 금지의 본질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관련돼있고 그것은 바로 영적 전쟁,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터를 보여주기 위하여 너희들은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거지요. 본질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죽음이 중간과정으로 반드시 등장해야 되고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써 이 세상이 비로소 죄 됨을 확정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어야 돼요.

그런데 죽음에 필요한 여러 가지 보조적인 요소들이 일어나야 됩니다. 거기에 끼어든 것이 죄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죄가 문에 엎드려졌다. 이게 무슨 말이냐? 죄가 강아지입니까? 죄라는 것이 얼굴, 배, 가슴 이런 행태가 보이는 거예요?

우리가 보통 성경 볼 때 필요한 것만 체크하고 본질적으로 안 다가서는 경향이 있어요. 적당히 스스로 정당화하면 그걸로 해석 멈추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 십자가를 경유해야 한다는 말은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인생 문제는 내가 만들어낸 게 아니고 주님이 일부러 만들어냈어요. 따라서 해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한테 가야 해답이 있습니다.

목사님, 이론은 맞지만 해보니까 응답이 없던데요? 응답이 없을 수밖에 없지요. 주님이 하는 질문을 계속 내가 질문했다고 움켜쥐고 계속 가니까 안 없애니까 해답이 안 생기는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하셨죠?”부터 출발해야 될 걸 왜 제 인생에 끼어들어서 힘들게 합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입니다. 내 문제라고 여기고 예수님을 대상화하고 객체로 사용해서 상대하려고 하니까 주님이 해답을 줬는데 자꾸 버리는 거예요. 이것 말고 내가 정식으로 꽂아놓은 그 해답을 달라 이 말이에요, 라고 하니까 해답은 비껴 지나가는 거예요,

가인은 평소에 죄와 상대하는 걸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이 만들어낸 문제를 더욱 더 확대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죄를 가인에게 붙여버립니다. 붙이게 되면 가인은 동생과의 문제가 아니라 먼저 자기 죄 문제와 맞닥트리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잖아요. 이걸 제가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쉽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선에서 쉬운 거고 듣는 사람은 안 그렇겠지요.

죄가 강아지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니고 여기 보니까 청설모가 뛰어놀아요. 죄가 청설모 같이 생기지도 않았고, 그럼 죄가 들어온다는 것은 어떤 물체, 어떤 형태가 들어온다는 말인가? 이것부터 따져봐야 되겠지요. 죄가 들어온다는 게 무슨 의미냐? 다스린다는 말을 통해서 죄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욕망을 유발하면서 다가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욕망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여기 있는데 욕망이 없을 때는 아무것도 그리워하거나 바라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욕망이 생겼다는 말은, 그 욕망이 갑자기 내 손을 잡고 가자, 내 형제여. 잡아당기는 거예요. 귀신이 내 손목을 잡아당기듯이. 욕망은 그냥 욕망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가자고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것을 나의 욕망이라고 해요. 왜? 개인적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나의 욕망은 어디를 잡아당기느냐 하면, 나를 욕망하는 것까지 가게 됩니다. 욕망이 오기 전까지는 나는 그런 인간형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욕망이 오는 순간 나는 저처럼 돼야 돼,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유튜브에 <호텔 캘리포니아> 동영상이 있어요. 미국 사람인데 기타를 너무너무 잘 치는 거예요. 애드리브 막 넣고 하잖아요. 그걸 보는 순간 저 사람 자리에 나를 대입시킵니다. 그러면 나는 그 기타를 치고 있고, 기타 칠 때 혼자 있으면 안 돼요. 앞에 군중이 있어요. 큰 교회 목사가 설교하는 재미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두세 명 놓고 설교하는 게 아니고 수많은 사람 앞에서 2부, 3부 할 때 그 모습이 자기에게 욕망이 찾아온 증거입니다. 한 삼천 명 하다가 삼십 명 교회 가라 하면 안 가. 어디든지 복음만 전하면 되잖아요. 안 가. 삼천 명이 없잖아.

삼천 명은 자기의 제2의 자아가 되죠. 그 사이가 바로 죄가 되고 욕망이 되는 겁니다. 평소에 가인이 동생 죽이고 싶어 환장했습니까? 아니에요. 가인의 취미가 사람 죽이는 거예요? 아니에요. 그런데 욕망이 찾아왔는데 아직도 우리는 4장 7절에서 욕망의 방향은 몰라요. 그 방향은 8절에 나옵니다. 그 아우 아벨을 쳐죽었단 말이죠. 그 순간 가인은 뭘 느꼈는가 하면, 나는 나 혼자 살지, 라고 했는데 죄가 나를 가만두지 않고 흔들어요. 동생 없이 혼자 살고 싶은 거예요.

그걸 본인이 만든 게 아니에요. 강아지처럼 죄가 살금살금 우리에게 찾아와서 기어이 우리가 그 죄를 못 이기게 돼있습니다. 어떤 인간이 찾아온 욕망을 문전박대할 수 있습니까? 옛날 과부들 허벅지에 멍이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멍들어도 소용없어요. 과부 혼자 사는데 지나가는 과객이 그것도 모르고 하룻밤 묵을 수 있습니까? 야심한 밤에 여인 혼자 사는데 그럴 수 없나이다. 은장도 꺼내서 참아야 하느니라. 사실은 그 여인의 욕망에는 그런 게 없어요. 먼저 문구멍으로 잘 생겼는지 상대를 주시합니다. 돈 좀 있어 보이고 똑똑하게 잘 생기고 키 180 이상 돼 보이면, 이러면 아니 되옵니다, 하면서 들이고, 못 생기고 그러면 가라 한단 말이죠.

욕망이란 가만있지 못하게 만드는 그 죄가 욕망인데 우리가 그 욕망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세상 자체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란 흔들기 속에 놓여있습니다. 현장에 만족하는 게 아니고 새로운 만족을 위해서 죄가 흔들어요. 그러면 우리가 가인이라면 욕망을 이깁니까? 못 이기죠. “주여, 이런 욕망을 이길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러든지 어제 이야기한대로 “나를 파괴시켜주옵소서. 나의 죄만 끄집어내게 하옵소서.”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기어이 동생을 죽여 버립니다.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동생을 누가 죽였습니까? ①가인이 죽였다. ②죄가 죽였다. ③여호와가 죽였다. 문제 어렵다. 수능 나오면 안 되는데. 삼번이 정답이에요. 그 사람이 사울입니다.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였잖아요. 스데반 죽을 때 주동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얼마나 위험한 이야기라는 것은 기존 교회 목사들 깜짝 놀라요. 네가 죄를 유발하는구나. 인간들이 죄 지으려고 환장했는데 아예 부추겨라. 무슨 짓거리든 해놓고 뒤에 이번 일은 주께서 하신 일이니 저에게 책임 없습니다. 이 말만 붙이면 그냥 죄 없는 사람 되는. 잘 한다. 교회 꼬라지 잘 돌아가겠다. 안 그래도 근질근질 했는데 교회 내에 바람피우고 싶어 환장한 남자들이 득시글한데 잘한다.

우리 교회는 그래서는 안 돼. 우리는 경건해야 돼. 정결과 성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누가누가 거룩하냐, 그 시합하는 거예요. kbs2에서 금요일 오후 4시에 방영하는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장수프로그램이 있어요. 그걸 교회가 아직도 하고 있어요. 누가누가 착하냐.

왜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인간중심이어야 돼요? 그런다면 찾아온 욕망이 물러갑니까? 이미 들은 게 있는 그 욕망을 치울 길이 없어요. 주님은 놀랍게도 우리로 하여금 지옥 속에 살게 하십니다. 욕망 속에 살게 하시고 그리고 가인처럼 죄를 다스릴 수 없는 입장에 놓이게 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네 역량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네가 때려죽인 아벨의 피가 너를 구원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그 속에 놓이게 했어요.

그 사실을 알면 새삼스럽게 죄를 지을까요, 가만있어도 죄라는 것을 알까요? 교회에서 죄 지으면 가만있으면 돼요. 가만있어도 죄 지은 거니까 구태여 눈이 벌게서 죄 짓는 사냥에 나설 필요 없어요.

그렇다면 이 문제 어떤 문제냐 하면, 욕망의 마지막 목적지가 뭐냐? 나를 욕망하는 거예요. 어떤 나? 내가 내 욕망대로 완성된 그것을 지금 내가 갖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욕망은 ‘소유격+목적격’입니다. 나를 욕망하는 거예요. 이것이 사탄의 속성이에요. 악마의 속성입니다. 나보다 더 소중하고 나보다 더 귀하고 나보다 더 사랑스러운 건 없어요. 지금 문제는 내가 내 마음에 안 들어요. 따라서 우리의 종교의 목적, 하나님을 찾는 목적은 내가 소유할 때까지 줄기차게 멈추지 않고 달려가는 겁니다.

이것을 가인을 키워서 확대시킵니다. 왜? 아벨이 메시아가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 하나 나갑니다. 아담이 범죄 했잖아요. 범죄 하자마자 왜 예수님을 안 보내십니까? 아담이 죄 지었잖아요. 하나님이 사람은 사랑한다면서요? 세상을 사랑하신다면서요? 아벨, 가인 복잡하게 할 것 없어요. 그냥 예수님 보내서 십자가 지고 그 피로 구원하면 되잖아요. 왜 가인, 아벨, 노아 복잡한 계통을 밟게 하십니까?

이건 신학교수도 모르고 어려운 문제지요. 어려운 문제지만 그런 의문점이 들지 않던가요? 모세, 노아 복잡하게 하지 말고 구약이 왜 두꺼워요. 짧게 하면 되잖아요. 아담이 범죄 했는데 주께서 사랑하사 십자가 보내서 구원받아 천국 갔다. 간단하게 되는데 왜 그렇게 두꺼운 겁니까? 그 해답은 출애굽기 15장에 나와 있어요. 죄가 관영하기까지 사백년을 기다려야 됩니다. 누가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바로 애굽에서 대기상태에 있다가 죄가 관영해야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인구원문제가 아니지요. 의가 죄를 이긴다는 주님의 자기 속성에 관한 문제지요. 그 속성에 관한 문제에 아브라함 자손이 거기에 쓰이는 것이지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야망과 구원에 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건 아닙니다. 주체가 하나님이지 인간이 주체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쓰이는 겁니다. 기다려야 돼요. 400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이미 해답은 주어졌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그러나 430년 후에 주어진 것은 율법이었어요. 이상하지요. 이미 해답 줬잖아요. 율법은 왜 줍니까? 해답은 줬는데 문제지를 안 준 거예요. 여러분 수학정석을 볼 때 성질 급한 학생들은 해답부터 먼저 보지요. 주님께서는 그 방법을 극한으로 몰아넣습니다. 해답부터 먼저 줘요. 그래서 신약성경이 어려워요. 해답만 나열돼있기 때문에. 그래서 신약성경은 무슨 뜻인지 몰라야 정답이에요.

그런데 쪽지 보고 안다는 거예요. 하나님 고맙네. 죄 지었는데 죄 용서하라고 십자가 보냈는데 믿습니다. 깔끔하게 끝내버렸어요. 지금 뭘 몰라요? 십자가 피는 안다고 우기지만 정작 피가 무엇과 만나야 됩니까? 죄와 만나야 되는데 죄를 모르는 겁니다. 지난번에 죄 지었지만 지금은 예수 믿고 죄 안 지었어요. 죄는 구약에서 알려줘야 돼요.

구약은 문제지입니다. 구약에 나온 등장인물들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성전 만들라면 성전 만들었지요. 율법대로 제사 드렸지요. 제사장 세우라면 제사장 세웠지요. 그것 하려고 애 먹었어요. 왕 잘 보필하라고 해서 왕 보필했지요. 다윗 나와서 그렇게 신경 썼지요. 적들과 전쟁하라 해서 전쟁했지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 결론은 멸망이었습니다. 안 된다는 것.

요한복음 3장에서는 너무나 냉정하게 그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니고데모한데 한 말은 하늘나라 못 간다는 겁니다. 참 섭섭하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못 간다. 네가 감히 육을 이겨?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영으로 도약되는 게 아닙니다.

비행장에 돌아다닌다고 다 비행기 아닙니다. 화물 실은 자동차 돌아다녀요. 못 납니다. 비행장 온통 돌아다니죠. 오늘날 교회 같아. 교회 실컷 나왔는데 천국으로 날지를 못하니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실컷 십일조하고 봉사하고 목사 섬기고 금요철야까지 나왔는데 날지를 못해. 닭 같아. 지옥 가서 튀겨집니다만. 지옥은 원래 튀김집이에요. 백날 파닥거렸는데 날개가 있어야지요. 천사가 찾아와서 날개를 치든지 해야 되는데 천사가 오질 않으니. 진짜 물동이를 버려둬야 되는데 물 긷는 내 일보다 주님이 찾아오는 것이 물 긷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물동이를 버려둬야 되는데.

주님 찾아오지 않으니까 시장터죠. 돈 없이는 사람 아니라는 그 구조가 있는 비행장만 맨날 돌아다니는 겁니다. 정보 얻기 위해서 큰 교회 가고. 작은 교회는 자기 딸 신랑감이 없어서 큰 교회 가면 있겠지, 하고 기웃거리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원칙은 변함이 없네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안 죽이죠. 분명히 살인자는 죽이라 해놓고 가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뭐가 죽음이냐, 뭐가 저주냐? 번창이 저주요, 번창이 죽음보다 더한 죽음이에요. 왜냐하면 죄가 오염돼요. 온 천지에 죄가 죄를 낳고 죄가 죄를 낳는 가인의 시대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 선조가 뱀의 후손과 가인과 연관돼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을 어떤 경우라도 어떤 순간이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 원수지간을 주께서는 반복시키지요.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뭐냐? 아벨과 가인은 원수지간입니다. 거기에 여호와가 개입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이 개입했다, 하나님이 찾아왔다, 아주 소박하게 하나님이 찾아왔어요. 무슨 뜻입니까? 드디어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 나서게 됐습니다.

지금까지 가인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아벨 이야기해봅시다. 아벨은 형이 돌 들고 왔을 때 아벨아, 뒤돌아봐. 빨리 피해. 라고 왜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아벨의 편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자기편이지. 얼마나 매정한지 몰라요. 그렇게 어린양 잡고 제대로 제사 했으면 적어도 뭔가 받은 게 있으면 인생을 좋게 끝맺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벨이 제사 드릴 때 자기도 육이기 때문에 상상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내 편이다. 욕망이 작용해서 멋지게 될 자기를 욕망할 수 있는 문제에요. 하나님이 나를 짱돌로 쳐 죽일 시나리오에 자기 인생을 마감할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겁니다.

세례요한이 날 때 평범하게 낳지 않았어요. 아주 요란스럽게 아버지는 말을 못하고 서판에 이름 쓰고. 그 집 이름 놔두고 성을 요한이라 할 정도로 요란하게 했으면 적어도 세례요한의 미래는 세상적으로 당회장이나 총회장할 정도로 큰 인물로 나야 되는데 희한하게 인물 났지요. 여자아이의 장난스런 농담 한 마디에 목이 잘리는 비참하게 죽었잖아요. 그렇게 처참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태어날 때 요란 떨지 말든지. 성령이 임해서 예언한 아들이면 그게 걸 맞는 대우를 해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성도의 대우가, 참. 이게 대우하신 거예요?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늙어죽은 것도 아니에요 참 잔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야기합니다. 너는 널 챙길 것 없어. 챙기면 나를 욕망하는 것이 아니고 네 자신, 하나님께 제사 드려 응답받았다는 그 간증을 너는 욕망할 거야. 까불지 마. 나 이 정도야. 쳐 죽여 버립니다. 아벨이 주인공이 아니고 아벨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주인공이에요. 예수님 때문엔 아벨은 예수님을 본받아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가인의 벌은 놀랍게도 번창하는 겁니다. 어느 정도 번창 하느냐 하면, 주위 사람들이 보호해줘요. 보에 싸임이 가인에게 있습니다. 아무도 너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대한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 족속은 가인의 족속이에요. 최고의 영웅이에요.

여러분이 먼저 태어났다고 그 시조가 아닙니다. 씨족 가운데 벼슬 좀 해야 적어도 영의정이나 아래 단계는 해야 시조가 되지 궁중에서 내시한 것으로는, 우리 8대손 내시했다고 이걸 어떻게 자랑스러워합니까. 영의정 쯤 돼야 경주 이씨 상서공 파쯤 되면 영의정한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자랑질 하지요.

그게 바로 우리가 흔히 편하게 생각하는 현실입니다. 성경 공부했잖아요. 돌아서면 우리가 느끼는 리얼리티는 현실입니다. 성경의 세계가 아니에요. 역시 사람은 잘 되고 볼 일이다. 그게 우리의 온 몸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합니다. 성령이 간섭 없이는 어느 누구도 천국 못 갑니다. 매일같이 주께서 간섭해줘야 됩니다.

그러면 아벨은 뭐냐? 이용했지요. 이용당했지요. 아벨은 섭섭하지 않습니까? 천사가 우리 대신 변명해줍니다. 어떻게 저렇게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신분이 되었는고? 저 영광스런 자리를 천사가 부러워합니다. 천사를 위해서는 예수님이 피를 흘리지 않았어요. 그러나 성도를 위해서는 피를 흘렸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필요할 정도, 적어도 우리는 그 정도입니다. 아무도 감격 안 하네. 우리가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적어도 예수의 피가 소모될 정도, 천사가 흠모할 정도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개 차원으로 취급해요. 인간은 쓰일 때만 주님과 연관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삽입되면서 고귀한 신분이 되는 것이지 그냥 인간은 쓰레기입니다. 그냥 껍데기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니에요. 쓰다가 던져버리는 걸레나 낙엽 정도밖에 안 돼요.

그걸 누가 아느냐?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다윗이 압니다. 다윗이 한 고백이 시편 8편에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무엇이관대 저 같이 하찮은 인자를 생각해주십니까? 뉘앙스를 보세요. 하나님 저 정도는 알아줘야지요. 이것과 정반대지요. 안 찾아오셔도 충분히 하나님답습니다. 그런데 하찮은 저를 왜 찾아오십니까? 찾아올 때 다윗이 한 표현이 있어요. 인간이 아닙니다. 人子

예수님은 자기를 호칭할 때 인자. 하찮은 인간과 동일하게 되기 위해서 물세례 받으신 거예요. 의밖에 없으면서도 죄인이기에 받아야 될 물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아 이제부터 나의 갈 길을 가야 되겠다. 여기서 너와 내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 라고 요단강에서 이야기했잖아요.

제가 신약, 구약 왔다 갔다 하는 이유는 제발 성경을 통으로 보셔서 속아도 그만 속으라고. 절대로 인간은 귀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께서 귀하게 쓸 때만 귀하지 그 자체로는 전혀 귀하지 않습니다. 귀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죽음에 대해서 섭섭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벨을 그렇게 죽이고 드디어 창세기 5장으로 넘어갑니다. 창세기 5장에서 나이들이 나오지요. 나이를 비교하게 되면 동시대를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목표가 있어요. 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판을 키웁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에덴동산을 폐쇄했지요.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불든 천사로 그 길을 차단했습니다. 다시는 에덴동산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 네가 존재하는 자체가 죽음의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서 너는 이 땅에 죽어야 된다. 그래서 살다가 죽지요. 주님께서 이름대로 했지요. 아담 이름이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그 이야기할 때 인간들은 비로소 깜빡 하나님께 속았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처음에 아담 이름이 흙이 아니고 사람이죠. 사람으로 지어놓고 결국 사람은 탈락시키고 흙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알고 이름을 지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뱀한테 속인 거예요. 뱀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거예요. 너, 의미 있다. 자꾸 인간을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서 속성이 어디서 왔느냐? 뱀에서 왔거든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뱀이 사탄이 하나님께 대적하게 된 이유가 나타나요. 나도 나름대로 독자적인 내 의미를 따로 갖겠다는 것 때문에 하늘나라에 반란이 일어나서 전쟁이 일어났고 못 이기니까 땅으로 쫓겨나서 인간을 유혹한 거예요.

그렇다면 천사 개인의 의미를 안 줬을까요? 천사가, “하나님 저도 나름대로 나의 의미, 가치를 따로 갖고 싶습니다.” “그래? 가져라.” “고맙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 이럴 수 있는 문제잖아요. 왜 따로 의미와 가치를 주지 않을까요? 그건 세상의 모든 중심은, 의미와 가치를 독점할 분을 하나님이 따로 생각해둔 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분이 누굽니까? 나사렛 예수잖아요. 나사렛 예수님이 모든 세계를 통일한다는 것을 창세전에 이미 결정했고, 그걸 사탄이 눈치 챘지요.

그래서 사탄의 적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탄의 적은 예수님이십니다. 욥기에 보면 사탄이 욥과 싸우지 하나님과 안 싸우죠.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하지요. 그런데 욥 안에 누가 들어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들어 있잖아요. 그리고 스가랴 4장에 보면 여호수아, 스룹바벨 옷을 벗기라 하지요. 하나님 앞에서 사탄이 더럽다고 하지요. 사탄은 고소하는 자니까. 로마서 8장에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고소하는 자가 사탄이에요.

스가랴 3장입니다. 하나님 앞에 여호수아 섰거든요. 사탄이 우편에 섰고, 하나님과 사탄이 안 싸웁니다. 주의 원수죠. 예수님의 원수지요. 그래서 하나님 믿는 사람이 사탄이에요. 알라, 힌두교. 아시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어집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면 발작을 해요. 지들도 들은 게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 경배하는데 이게 왜 죄인이냐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신앙인인지, 아닌지 성도인지, 아닌지는 결판이 어디서 납니까? 내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냐, 죄 지을 경우에만 죄인이냐? 그 문제지. 죄 안 지면 아직도 의인될 여지는 남아있고, 거룩할 여지는 남아있고, 성화될 여지는 남아있다고 한 이것이 바로 사탄의 종이에요. 사단에 종속된 속성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복음 전한다는 것이 마귀로서는 얼마나 긴급한 상황이겠어요. 빨리 색출해서 쫓아내야 되겠지요.

여기 보니까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천사 앞에 서서 여호수아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그러니까 명을 합니다.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세상에 이런 명령보다 더 행복한 명령이 있을까요? 주님 앞에서 저 이상현 목사의 옷을 벗겨라. 세상에 이런 신분. 인자가 뭔데 이런 혜택을 주십니까? 평소에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죄만 지었는데 이런 혜택을 주십니까?

그럼 뒤에서 주님께서 어깨를 두드리면서 개인구원 아니거든.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이분도 있어. 이분도 있고. 처음부터 개인구원은 없었어. 모두 다 주의 지체와 백성이야. 서로 사랑하라. 주 안에서. 그게 바로 내 마지막 계명이다. 개인구원은 사랑이 성립 안 됩니다. 개인구원은 반드시 구원이 된 나를 욕망하고 그걸 소유하기 때문에 구원받은 나를 사랑하기 바빠서 절대로 남을 사랑할 틈이 생기지 않아요.

부자 청년 이야기 알지요. 그 사람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잖아요.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주님과 합치됐습니까? 떠났지요. 그 사람 주장은 이겁니다. 십계명 열심히 지키고 주님을 존중했기에 찾아왔다는 거예요. 주님은 그 본질을 알지요.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알지요. 그래서 모든 걸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는 말은 주께서 그 개인에게 하는 이야기지 다른 사람은 해당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박사학위 셋 있으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팔아 나를 따르면 영생이 있으리라, 하면 박사학위 셋 있는 사람은 신났지. 재산이 없으니까. 그때는 주님이 멘트를 따로 합니다. 너, 박사학위 몇 개 있노? 네 개입니다. 그 모든 것을 찢고 나를 따라오너라. 또 어떤 사람은 박사도 아니고 돈도 없지만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거예요. 아브라함. 네 아들을 바치라고 나오지요. ]

결국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온다는 거예요. 육은 맞아요. 육에 영이 침입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핀셋으로 집어내어서 구원해요. 간단해요. 구원은. 그런데 그 성령이 나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개인구원이란 애초부터 어처구니없는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구약도 좋지만 이것 모르면 구약 접근 못합니다. 마태복음 13장 14, 15절 누가 크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네가 구원받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은 사탄이 우리 마음에 심어놓은 내가 원했던 내 욕망, 소유하고 싶은 내가 나의 목적이 된 내가 꾸며놓은 하나님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거부하고 거절합니다. 이게 아까 에덴동산의 동쪽 길을 천사가 와서 강제로 폐쇄시킨 그 하나님이십니다.

쫓아내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 내가 너무 심했지. 다시 불러들이는 그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인간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내부문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었던 내부문제고 그게 평정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겁니다. 내가 이야기해도 참 너무 냉정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쩔 수 없어요.

인간아, 너는 빠져나오라. 다만 하나님의 전쟁에 의해서 여자의 자손 편에 설 사람은 가서 기다려. 내가 너를 뽑아서 내가 데려와서 일을 시킬 거야. 어떻게? 아벨처럼, 선지자처럼,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여러분 모세가 약속의 땅에 못 간 것 아시죠. 그러면 모세가 천국 못 갔습니까? 갔지요. 모세가 천국 간 게 어느 대목에 나옵니까? 변화산에 나오잖아요. 그때 모세, 엘리야 나오지요. 그런데 우리가 그걸 모른다 치고 광야에서 그 현장을 봅시다. 모세는 벌벌 떱니다. 들어가야 되는데 나 저것 소망이었는데. 그러면 주변에서 지옥에나 가라고 놀리겠지요.

모세의 역량과 본질이 문제가 아니고 모세의 역할에 관한 문제입니다. 못 들어간 것은 못 들어가는 일을 시켰다는 자체가 모세는 천국 백성이란 말입니다. 가룟 유다도 그래요? 사울도 그래요? 이렇게 나올 거잖아요.

구약은 모든 게 모형이고 그림자에요. 구약에 아간, 사울 나오지요. 악신 들린 사람 있잖아요. 지옥 간다고 말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옥, 천국 최종 판정은 신약 때 예수님이 오셔야 되지 구약 그 자체에서는 판정이 안 납니다. 악하게 쓰였다는 건 인정합니다. 지독하게 쓰인 것도 인정합시다. 그러나 사탄이 등장할 때는 최종적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결합될 때 사탄의 기능은 그때 온전하게 같이 드러나는 거예요.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입니다. 사탄과 합세한 사람은 지옥 가는데 오히려 지옥 가는 게 자연스럽고요. 육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게 당연한데 오히려 기이한 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 된 사람들이 출몰했다는 것이 기이해요.

십자가마을에 솔다라는 학생이 쓴 글에 보면 즉흥성의 자유로움, 본인이 그걸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긴 모양이라. 아까 껍데기가 가만있지 않고 주님이 가져가서 비어있으니까 메운다 했지요. 메울 때는 욕망으로 메웁니다. 욕망에 대한 대상은 어디에서 가져오는가? 인간은 세상에 싸여 있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있으니까 얼마나 부러운 것들이 많겠어요. 그 부드러운 것들을 집어넣습니다.

솔다 같은 경우에 내가 보기에 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아. 이게 원활하게 안 된 거예요. 안 됐으니까 깨달은 거예요. 내 속은 주님이 채워야지 세상의 온갖 좋은 것으로 때운다고 땜질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즉흥성이란 말을 썼단 말이죠. 내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나 혼자 살기 위해서 만든 것을 고맙게도 주께서 그걸 방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이냔 말이죠. 내 꿈과 내 비전과 두려움을 실패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친절한 축복이냔 말이죠.

솔다가 한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내가 산다는 것이 전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고 그런 논리로 봤는데 이제는 즉흥적으로 살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 글의 요지니까 십자가마을로 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즉흥성. 그런데 미리 당부합니다. 이 기분 몇 분 안 갑니다. 다시 돌아서면 마켓이라는 시장구조에서 돈 없이는 못 산다는 강력한 힘에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벌벌 떨면서 또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가인의 세계에서 등장한 즉흥적인 구원자의 모습이에요.

그 증거가 창세기 6장에 나옵니다. 2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 경건한 자가 경건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 이 말입니다. 지금 경건한 자가 어디 등장하느냐 하면, 창세기 4장 25절에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하지요.

그러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이니까 죽은 아벨 계통에 나오는 셋의 가문은 항상 가인의 공격 표적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 원칙을 반복하기 때문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잖아요. 옛날 옛적 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현실이 되게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이런 말 나오지요.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핍박이란 말을 하지요. 마태복음 5장에 선지자를 핍박한 것 같이. 사도행전에 보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느니라.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양자의 영으로 아바 아버지로 부르지만 그 영광된 나라에 가기 위해서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한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라. 장차올 영광에 비해서 지금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니라. 이런 구절들이 즐겁지 않습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기뻐봐야 3초지만, 돌아서면 점심 메뉴는 또 뭐하면 좋을까.

-하나님의 아들은 누굴 지칭하는 거예요?

제가 마무리를 안 했네. 4장 26절, 그때 사람들이 누구 이름을 불렀습니까?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집단이 등장한 겁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원어로 따지면 천사가 나오는데 명목상 따지면 경건한 아들들이에요.

-천사가 아닌 거지요.

아니지요, 아니지요.

-그걸 천사로 이야기하는 목사들도 있는데

천사로 하면 크로마뇽인 돼요. 그건 과학적인 논조를 억지로 결합시켜서 납득시키려는 짓이에요. 또 속으셨네.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 힘으로 안 된다는 거예요. 아름다운 지옥이라는 표현이 적당한데 아름답고 부러운 지옥에 둘러싸인 한 우리 힘으로 해결 안 됩니다. 주님이 개입해야 돼요. 주님이 개입해서 성도, 매일같이 즉흥적으로 이끄심을 받는 겁니다.
 한윤범(IP:119.♡.174.136) 16-10-07 15:14 
20160915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5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이번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땅에 관한 문제입니다. 보통 땅이란 그냥 흙으로 된 것이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살아있는 느낌이 들지요. 땅이 다 안다는 거예요. 펄벅의 [대지]에 나오는 것처럼. 땅에서 무슨 일어났는지는 땅이 증인이다. 땅을 속일 수 없다. 인간이 땅으로 쫓겨났는데 하나님의 전쟁은 하늘에서 땅으로 판이 커진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면서 보여주고자 한 것은 여자의 후손의 등장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과 싸우게 돼있고 여자의 후손은 나중에 온 우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주가 되신 나라를 천국이라 하는 거예요. 아들의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 있느냐? 천국은 땅에서 솟아난다. 우리 상식으론 천국은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천국은 땅에서 만들어져요.

아까 목사님 따라 프린스톤 대학을 갔는데 본관에 커다란 십자가가 있어요. 아주 오래된 건물이에요. 십자가 탑이 있어요. 제가 그 앞에서 뭘 봤느냐 하면, 그 십자가 밑에 뭐가 있겠느냐는 겁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십자가 세워질 때 십자가 안쪽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바깥으로 십자가가 보이느냐? 십자가 안에 들어가고 싶은 호기심, 십자가 안에 뭐가 있기에 거기에 들어가 보잔 말이요. 프린스톤 대학에 십자가 해놓고 건물 있으니까 그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마치 내가 십자가 안에 있는 비밀을 헤치는 느낌을 받았다는 그 이야기에요.

천국은 땅에서 솟아난다. 땅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은 땅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발생시켜서 십자가로 완성시켰는지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기 6장을 봅시다. 아담의 10대손이 노아입니다. 5장 29절에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라고 돼있지요.

보통 교회에 다니는 가정에서 아들 이름을 노아라고 짓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조심해야 됩니다. 그 말은 부부싸움을 열심히 했다는 뜻밖에 안 돼요. 부부싸움을 했는데 아들이 비로소 우리 가정을 안위하게 할 것이다.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지요. 아들 대에 와서 비로소 우리 가정은 부부싸움이 그쳤다. 그때 이름을 노아라고 지으면 적절하겠지요.

노아의 적절한 등장은 그전에 하나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간에 대 혼란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을 노아 때 와서 평정한 거예요. 평정하게 되면 얻고자 하는 것은 뭐냐? 노아란 이름 자체가 땅의 안식, 그럼 그 땅은 땅까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흔적, 하나님의 개입이 있는 증거가 남아있는 땅이에요. 하나님이 손댄 흔적이 있는 땅.

그래서 인간은 땅으로 쫓겨났고 땅은 인간들의 세계라 여겼는데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통해서 아벨의 피를 흘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개입했고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주의 나라,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땅에서 하나님의 직접 개입으로 성취하시는 겁니다. 그 첫걸음이 노아의 등장합니다. 노아 등장 이전까지는 땅의 세계는 엉망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엉망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창세기 6장에서 홍수로 완전히 물청소해요. 멸망시켜버립니다.

멸망하게 되는, 하나님이 개입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서 땅을 멸망시킬 때 하나님 쪽에서 답변이 있어야 돼요. 그 답변이 방주 안에 들어있어요. 땅의 세계는 새로운 변화를 흔적으로 남기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 새로운 변화가 뭐냐 하면, 이건 정말 일반 평신도나 신학생에게도 너무나 생소하고 어려운 용어가 시작됩니다.

비-존재라는 거예요. 방주가 존재하느냐 할 때 방주가 있었잖아요. 그러면 존재하는 것 맞잖아요. 그런데 왜 비-존재라 하느냐? 방주의 존재는 그 이후에 일어나는 땅 위에 있는 모든 존재를 존재케 하는 토대가 되는 비-존재가 되는 겁니다. 역시 이럴 때는 그림이 최고에요. 여기에 사람이 있다면, 셈하기 하나, 둘, 셋, 셈하는 것. 123456. 그런데 이것은 뭐냐? 여기에 있는데 셈하기가 해당이 안 되면서도 모든 셈하기의 토대가 되는 어떤 존재가 있는 거예요.

셈이 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지만 모든 존재를 셈이 가능하도록 하는 토대로서의 셈에 해당되는 이건 마이너스로 존재해요. 마이너스는 수학에서 뺄셈, 없애기, 또는 제거하기, 본격적으로 말해서 심판하기. 이 세상은 심판받은 적이 있다는 것이 그 심판 이후에 모든 존재에 대한 의미를 제공하는 유일한 토대가 되는 겁니다. 어렵지요. 그러나 이 표현 외에는 성경 이 부분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요.

여러분이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요나가 하나님과 의미를 주고받았잖아요. 요나가 누구와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그런데 요나는 박 넝쿨이 있다가 갑자기 시든다든지 자기가 물에 빠졌는데 큰 고기가 자기를 삼킨다든지 그런 하나하나의 변화를 하나님이 자기를 죽인 의미로 봤지요. 그럼 요나는 바로 모든 변화에서 그 의미를 조합하고 규합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단 말이죠. 요나가 세상 변화에 있어서 의미를 준다는 것은 무슨 뜻이냔 말이죠. 그런 것부터 생각해야 되는데,

시편 136편 8절에 보면,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신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와 달과 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뽑아내란 말이거든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들어있다는 거예요. 낮에 해를 보면서 인자하시네. 방긋방긋 웃고 계시네. 밤에 달을 보면서 저렇게 너그럽게 인자하실 수 있나. 별을 보면서 야, 정말 인자하시다.

이것을 뽑아낼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 의미 색출이 가능하냐고 지금 이스라엘 사람에게 묻고 있는 겁니다. 집안이 거덜 나고 교회가 엉망이고 회사가 부도났는데 무심코 길을 가다가 달을 보며, “주여 여전히 인자하시군요.” 그걸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느냐 말이죠. 그게 바로 요나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얻은 의미란 말이죠.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안자하심을 어떻게 발췌해내겠습니까? 맞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참 가당치 않는 일이지요. 로켓으로 달에 착륙해봐야 인자하심이 보입니까? 암스트롱은 하나님 계시다고 했는데 같이 간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하고.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지. 달에 착륙했는데 두 사람 의견이 달라요. 하나님을 보았다 하고, 안 보았다 하고.

그럼 어떻게 하느냐? 욥기 38장 31~33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네가 하늘의 법ㅂ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지금 이 이야기가 욥이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이여, 제게 왜 이유도 없는 고난을 주십니까? 고난 받을 이유도 없는데 저한테 이렇게 아픔과 고난주십니까? 온 몸이 종기로 가득 차고 재산 다 날아가고 자식 열 명이 하루아침에 다 죽게 만들고 아내는 나를 욕하게 만들고, 왜 이렇게 하시냐고 따졌단 말이죠. 따질 때 하나님이 네가 지금 나와 너 사이에 의미를 찾고자 하느냐? 그렇다면 묻노라. 내가 북두칠성 만들 때 네가 관여했느냐고 물어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있어도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이유가 뭔지 욥기는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자기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아무리 징조와 징후를 알려줘도 관심사가 정말 왜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하시냐고 하는 한 해와 달과 별이 보여주는 인자하심은 없습니다. 가득 차게 주어지는 넘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을 들을 수 있는 소스를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욥을 집어넣어서 욥으로 하여금 그 속내를 마음껏 터트려서, 욥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차라리 이렇게 힘들게 할 것이면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우리 대신 고난 받는 욥의 입을 통해서 우리의 질문을 다 질문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별 만들 때 거기 네가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고난 받는 것이 나의 인자고 사랑이고 긍휼인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겁니다. 별 만들 때 하나님의 인자가 들어있고 달 만들 때 인자가 박혀있고 해 만들 때 인자가 박혀있는데 인간은 오로지 자기 생각만 몰두하니까 뭘 놓쳤어요? 인자하심으로 가득 차있는 것을 놓친 겁니다. 그 원인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고 셈한 거예요. 인간은 비-존재가 아니고 존재로 활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인자하심의 의미를 놓쳐버린 거예요. 진짜 어렵지요. 정말 어려워요.

그런데 분명히 하나님께서 창세기 6장, 7장에서 이 땅을 심판했단 말이죠. 심판은 모든 존재자를 없애버린 거예요. 이건 비-존재가 아니고 무존재, 부재가 되죠. 존재가 없는 거예요. 존재가 없는 가운데 유독 방주 안에 노아만 살았지요. 그럼 노아는 뭐냐 하면, 무존재와 존재 사이에 있는 경계선에 있는 비-존재가 됩니다.

노아 때문에 모든 인간들이 번성해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은 각자각자 자기 아픔, 자기 희망, 자기 행복만 추구하기 때문에 노아의 비-존재성을 잃어버리고 뭔가 일이 안 될 때는 하나님이여, 왜 이렇게 저를 힘들게 하느냐고 따지면서 하늘의 별과 달, 해를 봐도 거기서 인자하심을 발췌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자를 주셨어요. 햇빛과 은혜와 공기를 주셨어요. 그러나 감사할 줄 모릅니다. 왜? 자기 존재부터 신을 따지려고 하니까. 그래서 가상적인 신, 가상적인 예수, 가상적인 복음, 가상적인 성령 전부 누구 좋으라는 예수고 성령이고 복음입니까? 나라는 존재를 더욱더 나만 유독 존재케 하는 그런 목적과 욕심에 차서 예수를 이용하고, 십자가 이용하고, 교회 이용하고 하나님 끌어당긴 거예요. 십자가의 비-존재성, 예수님의 비-존재성을 어디서 찾습니까?

오다가 보니까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가 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는 성경에 없습니다. 하나님 붙으면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이에요.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망하고 난 뒤에 종말론적 공동체가 교회에요. 종말론적 공동체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는데 실패로 끝나고 난 뒤에 무상에 마지막 때 오는 영이 있어요. 그게 바로 성령. 성령이 와서 강제로 끌어 모은 단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종말론적 단체가 돼요.

거기는 마지막 때가 되어야 나타나는 영께서 마지막다운 면모를 마음껏 보여주시면서 깔끔히 홍수 이후에 누구 하나 구원받는 식으로 어떤 인간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너, 너, 너 구원받으라고 일방적으로 성령세례 주셔서 그래서 모인 단체, 그게 교회가 된단 말이죠. 그 교회는 예수님이 진두지휘했고 그래서 교회 머리를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얼마나 무식했으면 하나님의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에요. 주님이 마지막 때 나타났으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다 망했어요. 그 백성 이제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원하지 이스라엘 회복되는 걸 원하는 게 아니에요. 현재 이스라엘 땅에 감람산에 예수님 오는 게 아닙니다. 이미 왔어요. 성령 안에서.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먹고 마시는 게 아니고. 그게 하나님 나라지요. 성령이 왔으면 미완료된 하나님 나라입니까? 아니에요. 성령 안에 예수님 계시고 예수와 함께 있으면 그게 교회다.

여기서 뺄셈으로 작용한다는 말은, 숫자로 셈을 할 수 없어요. 계시는데 안 계시기 때문에 숫자를 지목할 수 없습니다.

달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달을 보면 사람들이 저도 마찬가지지만 뭘 생각하느냐 하면, 노래가 있어요. 저만치 앞서 가는 님, 그게 노사연의 <님 그림자> 달만 보면 그 노래 생각나요. 내용이 뭐냐 하면, 옛날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가면 달이 비추면 나란히 그림자 있잖아요. 때로는 사랑하는 님이 앞서 가면 님 그림자를 바라볼 수 있잖아요. 지금은 그런 님이 없다는 슬픈 노래지요. 아주 유명한 노래입니다.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황한 달빛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은 날 없네

저만치 앞서가는 님 뒤로 그림자 길게 드린 밤
님의 그림자 밟으려 하니 서러움이 가슴에 이네
님은 나의 마음 헤아릴까 별만 헤듯 걷는 밤
휘황한 달빛아래 님 뒤로 긴 그림자 밟을 날 없네


또 별을 보면 생각나는 게 있어요. 윤동주의 <서시>(별과 바람과 별과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전부 다 모든 별을 자기에 적용시켜요. 또 별 보면 생각나는 것은 별 하나, 나 하나. 또 생각나는 것은, 이경규가 이야기했던 “별들에게 물어 봐.” 바보처럼 나와서.

별에서 주님의 인자하심을 끄집어내는 것은 별이 직접 우리에게 인자하심의 의미를 주는 게 아니고 비존재를 경유해서 우리에게 의미를 줍니다. 우리 밑에 뭐가 있느냐? 오늘날 우리를 살게 하시는 은혜, 그게 십자가 은혜인데 창세기 9장에서 그게 바로 피로 은혜다. 피 채 먹지 말라는 이야기가 드디어 나옵니다.

피가 있고 하늘에 무지개가 있거든요. 피와 무지개가 어디에 들어있냐 하면, 방주의 제한된 의미를 인간들이 방주에서 나오면서 그 의미도 같이 방주에서 뛰어나와서 인간들의 모든 존재에게 의미를 제공하는 토대로 장식하는 것이 피입니다. 이 점을 약간 상세하게 말씀드리면, 창세기 8장 20절, 이건 보셔야 돼요.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여기까지 여러분 아시죠. 하나님께서 더러운 짐승도 같이 탔는데 더러운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게 아니고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더러운 짐승도 같이 방주에 탑승이 가능했고 구원이 가능했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거예요. 언약이라는 것이 더러운 것을 불러일으켜서 그 더러운 것과 극히 대조가 되는 깨끗한 것을 함께 실어서 하나님이 어느 쪽을 희생시키느냐 하면, 더러운 것을 희생하는 게 아니고 오히려 깨끗한 것을 희생시켜서 더러운 것도 구원이 된다. 누구 덕분으로? 정결한 제물 덕분에, 라는 것을 포함시키는 그것이 언약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구원할 때 노아야, 너는 구경이나 하라고 하지 않고 방주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그게 언약을 세우리니 곧 방주의 언약이라.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고 그 안에 노아 식구가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인격적으로 노아가 언약 안의 희생을 보여줄 책임을 가지고 구원을 받게 되는데 노아가 나와서 정결한 짐승을 잡습니다.

그 다음에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뒤에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다. 할 때 네모가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태어날 때부터,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했거든요. 그게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면 죄인으로 왜 태어나게 합니까? 그것은 인간을 위함이 아니라 언약 안에 들어있는 정결한 분이 나중에 인격으로 구체화되는 그 때를 위하여 미리 악한 자도 그분의 희생 덕분에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예수님의 새 언약, 완성한 언약까지 끌고 가시는 겁니다. 그 언약이 끌고 간 자국이 구약성경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끌어 간 자국을 내는 언약중심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비-존재에요. 있으면서도 숫자로 셈의 대상이 안 되는 것. 이 땅에 사람 눈에 띠지 않으면서도 모든 있음을 있게 하고, 모든 구원을 구원되게 하고, 모든 지옥 갈 사람을 지옥 가게 만드는 어떤 숨겨져 있는 동인자, 움직임의 원인이 되는 자, 그분이 바로 언약이란 이름으로 이미 구약부터 시작한 거예요. 언약의 모습으로 등장한 겁니다.

그걸 universal singular보편적 비범자, 또는 특이한 사람, 보편적 단독자. 모든 걸 있게 하는 숨겨진 오직 하나밖에 없는 분, 의미를 제공하는 자.

그렇다면 언약이 바깥으로 나올 때는 아까 요나가 고기나 박 넝쿨을 보는 것처럼 어떤 현상이 일어나줘야지요. 그 의미를 채집할 수 있는, 요나가 박 넝쿨을 보고 주의 의미를 알았지요. 그처럼 이것이 의미가 발생되려면 여기서 의미 있는 현상들이 일어나야 되잖아요. 그게 땅에서는 피 있는 건 먹지 말라는 거예요. 하늘에서는 무지개.

이건 바로 숨겨진 보편적 단독자의 증표가 되는 대역하는 현상들이 바로 하늘에는 무지개가 떠있고 땅에서는 피 있는 채 먹지 말라. 먹는 자는 죽는다. 그게 바로 창세기 9장에 나옵니다. 이제부터 짐승이나 사람이나 피 흘려서는 안 된다. 선지국 먹지 말라는 뜻인데 사람을 죽여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옥 갑니까, 천당 갑니까, 하는 개인구원의 문제가 아니고 이게 숨겨진 비존재자의 대역인 거예요. 보편적 단독자가 숨어있으니까 숨어있지만 계시는 것은 확실한 증표로서 창세기 9장 4절에 나오는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이고, 하늘엔 무지개가 있고.

무지개가 언제부터 있었느냐는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무지개 있다는 것은 땅에 있는 피 채 먹지 말라 또는 피를 흘리지 말라와 연결돼있다고 보면 됩니다. 어린아이가 연을 날리면 멀리서 보면 연을 보이는데 아이는 작아서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가까이서 보면 연줄을 잡고 있는 아이가 따로 있듯이 지상에 있는 피와 하늘에 있는 무지개가 연계돼있단 말이죠. 피는 보편적 단독자를 보여주기 때문에 인간이 찾을 수 없는 이유 없는 법이 돼요. 하늘이 무지개는 악인이든 선인이든 은혜를 받는데 원인을 찾을 수 없어요. 신기하죠.

북한의 김정은이 자기 부하 70명을 죽였는데 못 됐지요. 그런데 왜 안 죽지요? 그걸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켜주기 때문에 안 죽는다 하거든요. 그러면 악인을 지켜주는 원인에 대해서 인간은 찾을 수 있습니까? 찾을 수 없어요.

여러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아십니까? 전두환 군사정권 물러가라고 해서 군사정권에 의해 학살당하다시피 한. [소년이 온다]는 소설로도 나왔어요. 한강이란 작가가 썼어요. 그 작가가 [채식주의자]란 소설로 2016 맨부커상 인터내셔날 부문, 상을 받았어요. 한국문단 최초로 받았어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느냐 하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민주투사가 죽었을 때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이 있는 신부와 목사들이 하나님 뭐 하시느냐? 악이 활개치고 의를 부르짖는 이들은 맥없이 죽어가니까 억울한 피를 보고 왜 하나님은 가만있느냐? 거기서 나온 하나님이 혀 잘린 하나님, 눈 먼 하나님이란 노래가 번졌어요. 무능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 절대적 악에 대해서 무능하다는 이 문제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결책을 내놓으란 겁니다.

정의로운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면 이 사회가 어느 쪽으로 가야 돼요? 정의로운 쪽으로 가야 되는데 말만 하나님이 정의롭고 실제로는 불의가 넘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방치하시고 방관만 하는 것에 대해서 교회들아 해답을 제시하라고 할 때 무슨 해답을 제시합니까? 그저 정의를 위해서 부르짖자, 기껏 노력하자는 그 선만 제시되는 거예요. 정의가 강 같이 흐르게 하소서. 맨날 아모스 이야기 끌어다 사회 운동하잖아요. 예수도 안 믿으면서 운동한다고 나라에서 보조금 타내고 나중에 국회의원이나 되려 하고.

[채식주의자] 서평을 십자가마을에 올려놨습니다. 왜 그 책을 보고 평을 해야 되는가? 현 세대가 그 사람에게 세계적인 권위의 상을 준다는 것은 이 시대가 소망하는 이 시대가 나름대로 아픔과 괴로움을 해소하는 해결책으로 그 책을 해답을 제사했다는 차원에서 상을 줬거든요. 그러면 그 책의 내용이 곧 이 시대가 무엇 때문에 아파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결책을 어떤 식으로 제공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예수 안 믿는 이 시대 사람들이 자본주의의 괴로움 속에서 해결책이 뭔지 찾고자 했는데 한강이란 작가가 그 해결책을 줬으니까 우리는 아낌없이 상을 드리겠습니다, 해서 받은 상이거든요.

사회정의에 대해서 교회가 말을 해야 교인들이 교회에 올 게 아니겠습니까? 해방신학이라든지 해서 보수 쪽으로 갔던 사람들을 다시 자유주의 신학으로 끌어서 나름대로 권력을 쥐려고 했는데 광주 사태가 절호의 찬스가 된 거예요. 하나님은 억눌린 하나님이다. 우리가 희생하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정말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아느냐 그 말이죠.

예수님은 좌우 어느 쪽에 동참한 적이 없습니다. 보수나 진보도 마찬가지고. 왜냐하면 존재를 위한 하나님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비-존재 숨겨진 예수님의 희생은 이미 십자가로 완료했기 때문에 어떤 인간이든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아들의 나라 예수님이 주가 되심에 필요한 그런 자들만 여자의 후손의 노선에 합당하고 안 그러면 뱀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제가 창세기 4장을 하면서 아벨과 가인 사이가 갑자기 원수지간이 되었지요. 이미 아벨은 죽었지만 아벨의 후손 셋이 등장해서 가인은 번창하잖아요. 누가 원수지간을 의도적으로 유발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유발했고, 그 하나님을 창세기 4장 끝에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한 거예요. 구약에서 예수님을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전히 구약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여호와의 이름 중심이에요.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언약을 앞장세웁니다.

모세와 하나님이 만났을 때 누구십니까, 이름을 알려달라고 할 때 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언약이에요. 하나님은 언약을 주고 그 언약을 회수하면서 주의 나라를 이루시는 분입니다. 이게 언약이라면 언약을 던져놓고 던져놓은 언약을 줍는 거예요.

여러분, 아브람이 복의 근원입니까,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에요? 아브라함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선 아브람을 던져놓고 네가 아비 집을 떠나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해놓고 하나님이 그걸 회수하면서 분명히 아브람을 회수했는데 보니까 아브라함이 된 거예요. 야곱을 던졌는데 주의 이름이 얍복 강에서 결합되니까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거예요. 이스라엘이 복의 근원이고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입니다.

오늘날 복 받기 위해서 교회에 온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자기가 복 받기 위해서 뭘 해야 되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그 설교 내용에 예수님이 이야기만 나오지 이렇게 하면 복 받는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니까 그 교회에 두 번 다시 출석하겠어요? 안 하지요. 그러면 그 교회는 명분이 좋아도 문 닫을 수밖에 없지요. 자본주의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교인이 있어야 뭘 하지요. 예수님 이야기만 했는데 올 리가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이야기만 하게 하느냐? 성령 받은 사람에게. 그것은 복 받기 위해 왔다는 자를 아브람이나 야곱처럼 바뀌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나는 이런 관점으로 교회에 인생 만회하기 위해서 온 그 마음가짐 자체를 달라지게 하는데 달라지는 방법은 행함으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비-존재, 예수님께서 너를 찾아가면서 그 언약적으로 덮치면서 달라져요. 언약이 덮칠 때 언약이 나타낼 현상들을 찾아가서 그 속에 예수님의 희생이란 의미를 담아서 찾아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 교회 갔다가 새사람 되어 구원받을 때 그 사람에게 경제적이나 사회적이나 정치적이나 교회 직분적으로 변화가 있겠어요? 아무 변화가 없어요.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아무 변화 없습니다. 아무 변화 없는데 변화되었어요. 자기 존재 의미가 새롭게 파악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달을 보고 주님의 인자하심을 파악한다는 것은 티셔츠 바꿔 입는다고 갑자기 달의 의미가 생기고 별의 의미가 생깁니까?

아까 점심 때 먹은 게 뭡니까? 수육 안 먹고 햄버거 먹는다고 갑자기 주의 자비하심을 느낍니까?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해도 전에는 나를 위해서 먹었지만 이제는 주께서 주신 햄버거란 새로운 의미를 가미할 때 이것이 인간이 달라졌다는 증거입니다. 남들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데 본인은 달라졌어요. 전에는 내 존재를 위해 하다가 이제는 다른 비-존재를 위해서 관계성으로 그분 때문에 비로소 내가 언약의 사람이 됐다는 걸 아는 겁니다. 이걸 아는 사람이 축복을 받고, 달라졌으니까. 이걸 모르고 여전히 옛 게 남아있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 겁니다.

달라진 게 어떻게 달라졌겠어요? 전에 나는 죄인이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그 은혜는 바로 피를 먹지 말라고 우리에게 법을 제시하시고 하늘에 무지개란 연을 띄우신 그분과 연결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축복의 사람입니다. 그 관계 자체가 복이니까요. 보이지 않는 그분과 하나님의 이름과 그리고 그분의 증표로서 징후로서 사인으로서 그분의 흔적으로서 살아있다는 것, 전에는 내가 살고 싶어서 살았는데 그분 때문에 내가 있다는 사인, 나로 하여금 축복된 사람이 되게 하는 겁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걸 아는 경우들이 닥쳐요. 그 중에 하나가 노아가 술을 먹고 벌거벗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똑같이 노아의 아들들이었지요. 셈과 함과 야벳. 서열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별 차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에 하나님이 개입하면 원수지간 되지요. 이제는 점점 더 내용이 분명해집니다. 당연히 원수지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축복과 저주로 간격이 벌어지게 됩니다.

완전히 벌어지게 되는데 벌어지는 방식을 하나님은 어떻게 사용하시느냐 하면 노아를 별 볼일 없는 칠칠맞은 아버지로 변하게 하지요. 아버지는 육을 갖고 있습니다. 육을 갖고 있는 사람은 술 먹으면 개 되지요. 개도 천국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요. 술 먹고 개 되어 자기의 하체를 다 드러냈습니다.

셈과 야벳은 알았어요.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서 훌륭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고. 뭔가 언약적으로 덮어주는 언약의 요소, 피 흘림의 요소, 희생의 요소가 처음부터 수치스러운 인간을 덮어주는 시스템, 장치에 의해서 구원됐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버지의 수치심을 통해서 노아언약의 반복으로 이해했습니다. 언약은 한 때의 언약이 아니고 그 이후에 계속해서 반복됐다는 것을. 그래서 뒷걸음질 쳐서 담요로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는 거예요. 수치를 덮는 행위, 이 행위가 반복적인 언약의 행위며 반복되는 사태를 축복이라 합니다. 돈 챙기는 게 축복이 아니고 나를 가지고 긍휼과 자비를 나의 일생을 통해 계속해서 반복시키는 거예요.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모든 세리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모든 창기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창녀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걸 보여줄 때 그 사람은 언약의 증후고 표상이기 때문에 축복의 나라에 가담이 가능해요. 셈과 야벳은 뒷걸음 쳐서 아버지의 수치를 가렸습니다. 그런데 함과 그 아들 가나안은 알나리깔나리 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보다 못하다는 거지요. 그러면 이거는 존재에서 존재로 본 거예요. 축복의 사람들은 비존재에서 존재를 봐야 되거든요.

우리가 수치스럽지만 존재케 되는 것은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신 비-존재자, 노아 때는 정결한 짐승의 피, 그것이 우리를 받쳐줘서 날 때부터 악하더라도 주께서는 은혜 주신다는 것을 그 언약을 보여줘야 되는데 함과 가나안은 존재와 존재로 평가하고 비판한 겁니다. 누가누가 잘하나, 누가누가 예쁘냐, 누가누가 거룩하냐 이런 식으로 한 거예요.

아버지 술 깼습니다. 술 먹는 아버지가 육적인 아버지가 육적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술 깨고 난 뒤에는 언약의 아버지로 변했습니다. 같은 자식이지만 끝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하지요. 너는 지옥 가고, 너는 천국 가고. 저는 저주받아라. 너는 축복받아라. 이렇게 선언해버립니다. 육적인 입장에서 아버지로써 자식에 대해서 그렇게 선언한다는 것이 굉장히 육적으론 견디기 힘든 거죠.

그럼 축복과 저주를 선언했다는 말은, 선언이 노아한테 나왔지요. 축복과 저주를 다시 원상태로 회수해보세요. 그럼 노아 안에 축복의 요소와 저주의 요소가 들었다는 거죠. 노아 안에 언약이 들어있죠. 노아가 방주 안에 있는 정결한 새 중에서 짐승 중에서 제사를 드렸잖아요. 그렇다면 노아는 선지자지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 11절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영이 선지자 안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마음껏 보여줬지요. 그러면 노아는 결국 장차올 그리스도와 연결 돼있습니다. 그럼 노아가 보여주는 것은 장차올 예수님, 비-존재, 눈에 띠지 않지만 존재하셔서 우리를 존재케 하시는 그분을 증거했지요.

그렇다면 그 노선은 무슨 노선이냐? 신구약을 어떻게 통으로 연결시키느냐 그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이렇게 나오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로써 노아가 등장했다는 말은, 결국 노아는 컨베이어 시스템 다시 말해서 움직이는 선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선반 위에 노아는 그냥 존재자로 서있어서 자기 토대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 고난과 영광을 마음껏 보여줬을 뿐이죠.

그러면 오늘날 성도란 말은, 노아가 움직였던 컨베이어 시스템 위에 우리도 같이 서있지요. 그럼 우리가 보여줄 건 뭡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라. amazing grace놀라운 은총을 보여주면, 우리가 보여주면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물건 사듯이 돈 주고 받는 게 아니고 이미 복의 노선에 있기에 나의 잘남과 우수함을 자랑질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뿐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럼 목사가 강단에 설 때 성도라면 십자가 자랑해야 돼요, 뭘 자랑해야 돼요? 십자가 자랑해야지요. 그러면 교인들은 뭐합니까? 우리가 죄인인가, 이렇게 의심되고 복 받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그 소리 들으러 왔는데 주님을 생각해서 고난을 생각하라 하니까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발 잘못 들였네. 교회 왔다가 고생하라는 이야기밖에 안 듣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니까 갑자기 십자가가 듣기 싫은 거예요. 십자가 이후에 나오는 영광을 얻고 싶지 십자가 속에 들어가기 싫은 거예요.

그러면 장로 선에서 처리가 됩니다. 목사님, 참 믿음은 좋은데 돈이 안 되니까 올해로 사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옆에 교회는 삼백 명 채우겠다고 자신만만한 목사가 대기하고 있는데 할 수 없이 바꿔치기 해야 됩니다. 우리는 삼백 명을 원합니다. 그리고 오백 명을 원합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 있어야 교회가 되기 때문에. 예배당 짓고.

제가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사실은 십자가 복음으로 돈까지 노리는 이상한 교회들이 등장했어요. 복음은 복음대로 전하고 돈은 돈대로 챙기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는데 그것 다 들통 납니다.
 한윤범(IP:119.♡.174.136) 16-10-07 15:15 
20160915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6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땅 이야기 계속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어디서 만들어진다고 했습니까? 하늘에 따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땅에서 만들어지는데 하나님께서 방문해서 친히 만듭니다. 뷔페에서 음식 먹는 것도 있지만 쉐프가 재료 가지고 우리 집에서 음식 만드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음식을 대접하듯이 인간이 사는 땅에서 천국을 만드니까 천국을 만드는 형성과정에서 얼마나 핍박과 고난과 모멸과 모욕과 아픔이 겪겠습니까.

왜냐하면 이 땅은 이미 사탄이 지배하는 지옥 같은 세계에서 천국을 따로 만든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핍박이 있겠어요. 그래서 하늘나라는 고난 속에서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고난 자체만으로 하나님 뜻이 다인가? 아닙니다. 창세기 9장에 보면 피에 관련한 특별한 법이 주어지지요. 짐승의 피를 먹어서는 안 되고 사람의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제가 어제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화이트보드와 같다고 이야기했어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을 왜 구태여 하느냐? 그것은 바로 법 자체가 위반으로써 하늘나라 내분에 의해서 발생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렵다. 정말 어려운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법을 준다는 것은 뭔가 천국 완성에서 온전치 않는 모습, 내면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지요. 그걸 완성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리고 율법을 줬으면 율법으로 구원시켜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로마서 3장에 보면 율법 외에 한 의가 나와요.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받습니까, 율법 외에 한 의로 구원받습니까? 율법 외에 한 의로 구원받지요. 그런데 받는 입장에서는 뭐가 불필요하게 느껴집니까? 어차피 율법 외로 구원한다면 율법 왜 줬느냐 말이죠.

공항에서 수련회장까지 오려면 내비게이션이 알려 주잖아요. 내비게이션이 자꾸 저 길로 가면 안 됩니다. 이 말을 왜 합니까? 안 가면 되지. 제 말이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면 아예 율법 주지 말든지. 어차피 구원도 못 받는데 뭐하려 줘요? 왜 주는데.

-율법이 하나님의 성품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율법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서 율법이 만들어지고 하나님 의가 만들어지니까 유사한 것은 되지만 그렇게 바로 연결하는 건 곤란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 길은 안 된다는 말은, 우리가 그냥 받는 입장에서는 저한테 구태여 알리지 마세요. 이래나 저래나 구원받아 챙기면 전 고맙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입장이란 말이죠. 어떤 통로로 왔는지 알 필요가 없이.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있고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일을 벌이는 게 아니고 애초에 우리는 없는 존재인데 내부 해결책을 위해서 인간이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진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이루는데 있어서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었지 현재 있는 우리 존재가 필요해서 하나님이 법을 주고 의를 주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자리에 머물면 안 되고 율법 외에 한 의니까 왜 율법은 아니며 율법 외에 한 의가 있어야 되느냐, 그것을 알려주는 현장으로 달려가야 돼요. 물론 주께서 달려가게 하시지만. 거기에 가보니까 피 터지는 싸움이 있었던 거예요. 악마와 주님의 피 터지는 전쟁을 증거함으로써 우리는 구원받은 나를 자랑하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과를 자랑해야만 우리는 아들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예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을 우리보다 먼저 하고 있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천사입니다. 그게 에스겔 1장과 10장에도 나오는데 천사들이 그냥 날개 쳐요. 눈을 가리고 두 날개는 발을 가리면서 두 날개로 스랍들이 영원토록 찬양하라고 이사야 6장도 나오고 에스겔 하늘의 보좌도 나오고. 하늘의 보좌가 주님을 양쪽에서 천사의 모습, 사람의 모습, 사자의 모습, 독수리의 모습으로 완전히 둘러싸서 주님을 보호하는데 안에 있는 주님이 좌로 가, 우로 가! 조종하면서 움직이는 겁니다. 장갑차처럼.

에스겔이 봤던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은 항상 장차오실 주의 모습인데 그걸 하나님의 이름이라 해요. 하나님의 이름은 언약을 앞장세워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스스로 회수하는 과정 속에서 예수님 스스로 주가 되시는 결과물을 도출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데 싸움은 누구와 하느냐? 에스겔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이 불타버려요. 성전 지으라고 허락해놓고 하나님이 라이터로 불태우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그게 바로 십자가 죽은 분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한 번 실패가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저주 없는 인간은 구원이 되질 못합니다. 반드시 저주에 참여한 자만이 구원에 참여돼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이, 내가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산다. 십자가 안에 들어갈 때 이미 율법의 저주에 의해서 죽은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간단히 이야기합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어요. 문제는 뭘 믿느냐는 거예요. 믿음으로 의인되었다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이해합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를 믿어요. 자기 믿는 감정을 믿어요. 뭐? 그건 말을 안 해. 주여, 믿습니다. 뭘? 자꾸 믿는다는 색다른 내 감정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런 믿음은 나중에 부부싸움하면 다 날아가요. 새벽기도 은혜 받고 오후 두시 되면 다 날아갑니다. 기도원에서 은혜 받고 나오면서 지 신발 한 짝 잃어버리면 은혜 받은 것 짜증으로 돌변합니다. 받은 은혜 어디 갔는데? 단도리 잘 하지. 자기 믿음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우리가 지어내거나 만들어낼 수 없어요. 하나님 자신이 앞장세운 언약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실하게 수행하는데 바로 수행하기 위해서 내가 호출 당했습니다.

제가 호출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가, 하도 교계에 이 단어가 범람하기 때문에 그래요. 소명이란 단어를 오해하기 때문에 차라리 호출이 와 닿는다. 군에서 차출. 일방적으로 뽑아서 일을 맡기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필요한 곳으로 차출해야 돼요. 차출당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본인은 그런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항상 이야기해요. 자기 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거죠.

그 중에 한 사람이 소년 다윗.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자기 힘으로 이겼다고 하던가요? 이번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된 전쟁이란 겁니다. 이번 전쟁이 할례 받은 쪽과 할례 받지 않는 쪽,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있는 자와 언약 밖에 있는 자의 전쟁인데 그 전쟁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하는 전쟁인데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고 두렵고 떨리고 무서워하십니까? 다윗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어른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존재와 존재끼리 벌이는 전쟁이 아니고 다윗이란 존재와 골리앗이란 존재가 벌인 전쟁이 아니고 다른 언약적 요소가 있는 거예요. 컨베이어 시스템이에요. 그냥 가만있으면 선반이 움직이게 돼있습니다. 소년 다윗이 갖고 있는 무기가 뭡니까? 돌팔매죠. 돌팔매 쥐고 있는데 앞에 어떤 존재가 등장하지요. 판은 비-존재가 깔아놨고 소년 다윗은 비-존재에 의해서 연결돼있고 왜냐하면 이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전쟁, 갖고 있는 무기를 날릴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이미 떠난 한 돌의 궤적은 자기 소관 아니에요. 시키는 대로 했단 말이죠. 돌이 날아갈 때 과장해서 이야기합니다. 돌이 오는 걸 골리앗이 봤어요. 돌의 방향을 보고 피하니까 이 돌이 유도미사일이에요. 돌이 따라오는 거예요. 게 섰거라, 하는 식으로. 그런데 골리앗이 제대로 썼는데 사이에 박혀서 죽었어요.

제가 과장되게 이야기한 건 뭐냐? 골리앗 죽음이 이미 전쟁하기 전부터 시나리오에 삽입된 내용입니다. 골리앗을 그렇게 죽도록 된 거예요. 그러면 소년 다윗 시선에서는 골리앗은 죽은 존재에요. 죽었다 치는데 뭐가 문제에요. 아저씨들, 사울 왕이여, 언약 안에 살아있는 우리가 이미 시체가 된 저걸 못 이기다니 무엇에 졸았습니까, 무엇이 겁납니까? 이런 안목으로 전쟁한 것이 소년 다윗의 전쟁입니다. 참 쉽지요.

그런데 비-존재만 철거해보면 키가 삼미터 삼십, 목소리 크지, 수염 길렀지, 감히 함부로 대적 못하잖아요. 사도 바울이 글에 힘이 있었어요. 실물 보니까 볼품없네. 비-존재가 존재의 세계에 등장하니까 볼품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따라서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결국은 예수님을 외면하게 된 것은 끝까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인상을 아니었어요. 요새 말로 하면 시골 어떤 서른세 살 먹은 나사렛 청년인데 과대망상 환자가 되어 지가 오실 메시아라는 우기는 거예요.

침착하고 지혜롭고 그리고 매사에 조심스럽게 일을 처리하는 72명의 똑똑한 엘리트 유대인들은 모여서 이 청년에 대해서 온갖 배려와 인내성 있게 그리고 충고도 하고 미쳐도 곱게 미치라고 했지만 결국 못 참게 만든 것은 성전을 뒤집은 성전에서 채찍 들고 난동부린 것을 계기로 해서 괜히 로마에 비위를 건드려서 애매한 백성들 죽이면 안 된다고 해서 한 사람 청년 예수를 죽여서 로마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한다는 현명한 정치적 판단에 의해서 예수님을 죽였고, 또 과대망상은 구라가 심하거든요. 죽고 난 뒤에 3일 만에 부활한다고 했어요. 안 믿는데 혹시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갈까봐 로마 군병들이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게 예수이야기에요. 이걸 누가 믿겠어요? 절대로 안 믿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이름 사울이었어요. 똑똑하기 짝이 없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그는 안 믿었어요. 이런 촌스러운 이야기를 누가 믿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내가 처단하노라. 그야말로 만화영화에 나오는 용감한 소녀처럼 그처럼 사울이 설쳤는데 정말 하나님이 살아있으면 말려야 하는데 말리지 않았어요. 여러 명 체포되어 죽고 스데반 집사 죽고 했어요. 그런데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러 갔다가 세례 받았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불신의 눈으로 봤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면서 생긴 정신적 트라우마가 쌓여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도가 넘쳐서 “살아계신 주님이여, 잘못했습니다.” 너무 악한 일을 했다는 양심의 가책이 폭발해서 나가도 너무 나갔어요. 예수는 살아있다는 편지를 썼는데 그렇지 않아서 로마에 압제 받아도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에게 유포가 되어 예수는 살아있다는 거짓말이 유포되어 나중에 로마는 이데올로기로 사용해서 기독교 국가를 만들어서 오늘날 교회가 이런 식으로 퍼졌다, 라고 이야기하더라도 우리는 아멘. 옳습니다, 라고 해야 돼요. 왜?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가 돼야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바로 살아계신 주님께서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이 전략이 세상 끝 날까지 완벽한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고 있어요.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예수를 주시라 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공개되었지만 철저하게 숨겨진 분이에요. 그리고 숨겨진 것은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지 않는 한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는 한 어느 누구도 천국 못 가게 만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입니다.

방금 이야기 한 불신자가 재조립한 이야기를 우리는 거침없이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반대 이야기를. 그래서 저는 한때 이런 생각했어요. 만약에 신학교를 세우면 교수의 90%을 중으로 채우고, 소설가라든지 안 믿는 사람들로 해서 신학생들을 철저하게 세뇌시켜서 그러니까 예수는 신화적 존재라니까 이 바보들아, 라는 것을 실컷 해서 신학교에 50명이 오면 다 떨어트려야 돼요. 그래야 성령 세례 받은 사람이 티가 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중들을 보낸 것은 신학교 총장이 보낸 것이 아니고 주께서 보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이 목사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래야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개인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지 않을 거잖아요.

나 잘 되기 위해서. 자신이 방해물인 것을 아는 사람만이, 내 지식과, 내 명예와 내 자존심이 십자가를 가린다는 걸 아는 사람만이 진정 주의 증인입니다. 가는 곳마다 저, 죄인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것을 성령에 의해서 믿게 했습니다. 이 믿음이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에요. 산을 옮겨서 바다에 빠트린다. 말도 안 되지요. 그것보다 더 심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사렛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는다는 거예요. 산을 옮기는 것은 포클레인 이만 대 동원하면 옮길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흘린 이천 년 전에 다른 몸에서 흘린 피가 이천 후에 이 몸의 어떤 죄도 씻어준다니 그 연관성을 무엇으로 증명할 거예요? 과학적으로 어떻게 증명합니까? 이게 증명 안 되니까 진화론 반대하는 창조과학 하는 사람들은 증명이 안 되니까 과학적 이론으로 신이 천지를 창조했으니까 믿자는 쪽으로 나오는 거예요. 전 그 사람들 신자로 보지 않습니다. 창조론자를 신자로 보지 않아요. 왜? 성령이 임하면 창조론자 되는 게 아니고 예수 십자가를 증거하게 돼있어요. 제 말 틀렸습니까? 사도 바울이 있잖아요. 나는 십자가 주님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했는데 저쪽에서 화석 들고 설치고 공룡 뼈들고 설친단 말이죠.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떤 모순에 빠지느냐 하면, 다른 것은 다 죄라도 과학적 지식은 죄에서 빼주세요, 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마치 미용사가 자기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 내가 과속 운전한 것, 부모한테 효도 못한 것 다 죄가 되지만 저 아줌마 커트 잘한 것은 의롭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주특기를 발휘한 것은 의롭고 나머지는 죄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진정 죄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그 미용사는 아무리 따져도 커트 잘된 게 왜 죄인지 본인이 그걸 증명할 길이 없네요. 이 수박 누가 차렸습니까? 반듯하게 잘 차렸잖아요. 그럼 다른 사람이 칭찬하는 거예요. 누가 잘 차린 거예요? 수박 잘 차린 게 죄입니다, 하면 그때부터 증명을 해야 돼요. 이렇게 차려야 죄 아닌가, 이렇게 잘라야 죄 아닌가? 그게 아니고 십자가 자체가 수박이 아니고 참외가 아니고 미용사가 아니고 과학을 하던 그 자체로 이미 날 때부터 악한 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십자가가 새 언약, 마지막 언약이니까 한꺼번에 우리를 확정지어버린 겁니다.

확정지었기 때문에 나온 게 성령이고 그 성령을 우리가 받게 되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맞네요. 죄인 맞는데 살아가는 것은 모두 감사네요. 별아, 안녕. 인자하심이 저기 있네. 님 그림자만 부르지 말고. 달아, 안녕. 당신도 인자하심 믿고 나도 인자하심을 믿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 같이 예수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 모습, 이게 로마서 8장이잖아요. 성경을 완전히 관통해버렸어요. 십자가 언약으로 완전히 뚫어버렸어요. 뚫으면 나머지 모든 것은 죄로 드러납니다.

한국에 ktx가 있어요. 시속 310까지 나와요. 제가 보거든요. 하도 많이 타서 마일리지 좀 쌓였어요. 에너지를 가하게 되면 공기가 깨지면서 큰 소리로 들리거든요. 십자가가 지나가면 지나간 곳이 전부 다 죄로 변해요. 언약이 지나간 곳에 죄가 들어갑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이걸 몰랐어요. 제사가 지나가면 저희들이 죄고, 이 죄를 용서하는 것이 제사에서 쓴 어린양인 것을 알아야 될 텐데 그들은 제사 지내는 그 자체를 의롭다고 본 거예요. 제사 지냄을 소유하는 거예요. 제사 지내라 하니까 그 율법의 명령을 소유함으로써 의로운 나라가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바로 이 문제입니다. 창세기 11장 봅시다. 함에 땅에 세워진 탑이 하나 있어요. 그 탑이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의 의미가 있어요. 우리 이름을 하늘까지 닿게 하겠다.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거죠. 우리 이름이 하늘로 오르면 누구 이름이 보편적 단독성이 될까요? 우리 이름을 탑 위에 쌓아서 하늘에 올랐으니까 모든 세계는 보편적 단독성, 전체를 덮는 의미를 제공하는 의미를 나눠주는 모든 의미는 우리들 이름에서 나온 거예요.

그게 민주주의고, 민주주의 정신을 아브라함 링컨이 이야기했어요. 게티스버스 연설에서 뭐라 했습니다.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나라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아멘이죠. 바른 소리에요. 왜? 이 세상이 멸망하니까.

경주에 5.8 지진이 일어나도 인민의 나라는 흔들렸어요. 서울까지. 대구는 물론이고. 주님은 통째로 세상을 멸망시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피 흘렸기 때문에. 창으로 찔렀기 때문에.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요한계시록. 예수님을 홀대했던 이 세계가 결국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이 됨으로써 자동적으로 이 세상은 뱀의 후손의 세계, 사탄이 통치하는 세계, 큰 성 바벨론, 그걸로 들통 났습니다. 세상이라 하지 않고 큰 성 바벨로, 음녀라고 의미를 제공한 것은 그 모든 의미가 비-존재자인 예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님 입장에서 붙이는 개념들이 요한계시록에 박혀있는 거예요.

그걸 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 이름으로 풀 수 없고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십자가를 경유해야 풀리게 돼있는데 사람들은 구원받겠다고, 자기 구원받는 욕구가 앞서서 자기 존재성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다보니까 666 받으면 안 된다, 저 어떻게 하면 구원받아요, 내 이름으로 어떤 행동을 하면 구원받아요? 이게 바로 요한계시록 해석의 대세가 되고 말았어요.

[생명의 신호]이란 책이 좁은 길이란 출판사에서 나왔어요. 그 출판사 존재를 아십니까? 그 사장님이 누군지 알아요? 비-존재적 감춰진 인물이죠. [생명의 신호]란 책에 이런 그림 나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어디 있느냐? 역사와 환상의 교집합. 서로 결합되는 집합이 있다. 역사와 그리고 환상의 세계, 환상의 세계는 역사로는 포착이 안 되는 세계에요. 그래서 역사의 세계는 요한계시록을 읽어낼 수 없어요. 왜냐하면 역사는 역사를 부정을 못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예수님이 역사 세계를 부정한 사건이거든요. 부정하지 못하고 자기를 스스로 포기 못하는 것으로 너를 포기하라는 분의 심정을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기어이 나는 구원받아야 되겠는데 나란 역사를 구원받으려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전부 탈락이 되는 겁니다.

그럼 요한계시록 해석을 누가 하느냐? 예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미 구원받은 사람만이 마치 자기가 떠나온 세계를 다시 흩어보듯이 내가 이런 고생했지. 회상하듯이 보는 것이 요한계시록이에요. 이미 십자가로 용서 받고 난 뒤에 도대체 내가 어떤 세계에 살았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개판인 세계였어? 그걸 바라보는 내용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생명의 신호]에 시조 한 편이 실려 있어요.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미 황폐해진 옛 도성을 말 한 필로 돌아보면서 옛날엔 인재도 많았건만 이제는 황폐해졌구나, 하는 느긋한 안목으로 이 뉴-저지를 보시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비-존재요, 없는 존재고 그들이 죽은 존재라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성령 받은 우리들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그들을 죽은 시체 골리앗으로 보기 바랍니다. 골리앗의 특징은 덩치가 크다, 잘 산다, 좋은 차를 탄다,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만 죽은 자가 차 몰고 가는 거예요. 언젠가는 죽을 거잖아요. 지금 살았듯이 언젠가는 살아가고.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묵시적 혜택을 입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면 죽이려고 해도 못 죽여요.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죄가 있어야 죽이는데 의인 돼버리면 통과, 이게 유월절이거든요.

어린양이 대신하면 더 이상 죽을 이유를 찾을 수 없어요. 강도를 붙들고 천사가 아무리 봐도 이 사람 죽일 이유가 없네. 천국. 창녀를 붙들고 아무리 봐도 지옥 보낼 근거가 없어요. 천국. 사전 조치가 다 돼있어요. 예수님께서 피로 용서를 다 했지요. 그야말로 매일같이 신상입니다. 새로운 제품으로 솟아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작업은 어디서 이뤄지는가? 천국은 어디서 이뤄진다? 땅에서 이뤄진다. 어떻게 이뤄진다? 원수지간 전쟁을 통해서 이뤄진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알았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나의 방패라고 했어요. 방패는 전쟁하는 그거에요.

11장하기 전에 15장부터 먼저 봅시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1절) 이 말은 전쟁이 있으나 전리품이 네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네가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가지고 전쟁하는 거예요. 네가 나서서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데리고 전쟁하는 거예요. 마치 하나님이 욥을 데리고 사탄과 내기하듯이.

쉽게 말합시다. 사람은 믿는 구석이 있어야 돼요. 교회에서 제직회할 때 큰소리치면, 목사나 장로가 뭐라고 합니까? 김 집사 뭘 믿고 큰소리칩니까, 하지요. 갑자기 교회가 믿는 단체가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 교회는 예수 믿는 단체입니다. 말을 해도 주님 바라보면서 십자가 바라보며 이야기하죠. 주님 믿고 합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목사가 안 지려고 나는 주님 안 믿나, 이러거든요. 같은 주님인데 의견이 다릅니까.

아브라함 전쟁이 그 뒤에 나와요. 14장에 보면, 아브람이 조카 롯이 사로잡힘을 듣고 318명을 데리고 다섯 왕과 싸워서 이깁니다. 이 전쟁이 아브라함이 전쟁했을까요? 아브라함이 자기가 승리한 전쟁이 아닌 걸 알아요. 누가 하셨는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길에서 누굴 만납니다.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이번 강의에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이 이제 나옵니다.
 
땅이 두 종류로 나눠져요. 하나는 법의 체계가 있고, 또 하나는 묵시의 체계가 땅에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멜기세덱은 이름 없는 사람이에요. 지상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는 사람. 보통 족보는 부모의 족보를 따르거든요. 그런데 지상에는 아비도 없기 때문에 하늘의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이에요.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전쟁에 아브라함이 본의 아니게 말려든 겁니다. 아브라함은 318명밖에 안 돼요. 그것도 용병이고 소수입니다. 말이 군사지 군사 아니에요. 그냥 하인들이에요.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겼거든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궁금해 죽는 거예요. 이번 전쟁은 제 솜씨가 아닌데 누구세요? 정체를 밝혀라.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먼저 하나님이 찾아왔지요.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숨겨진 비-존재적 전쟁을 계속 벌이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비-존재적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그걸 증명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 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묵시적 이름을 갖고 있는 멜기세덱이었고 아낌없이 자기의 모든 걸 드립니다. 그게 십일조에요.

십일조라는 것은 모든 걸 드리고 다시 한 번 나로 하여금 있게 한 것이 주님 쪽에서 존재케 하셨다고 고백하는 식으로 90%을 되돌려 받는 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그 차이가 10%. 그런데 다른 사람들 보기에 마치 내 것 중에서 10% 드린 것처럼 보이잖아요. 사실은 내 것도 아닌 90%을 염치없이 돌려받았는데 다 가져가도 되는데 10%도 아니고 90%을 돌려받으니 이렇게 황공할 데가. 그게 십일조입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면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품꾼이거든요. 약속의 땅의 지주가 여호와입니다. 여호와에 의해서 비가 오고 안 오고 따라서 생산물이 달라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적당한 비를 주면 되지 않겠느냐? 조건이 있어요. 제사장들이 제사를 제대로 지내야 약속의 땅에 비를 내리고 곡물을 생산케 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하나님, 지주의 대변자지요. 백성들은 지주의 품꾼이죠. 그러면 생산물 전부는 누구의 공로입니까? 바로 땅주인의 공로지요. 십일조를 누구한테 드려야 돼요? 제사장한테 드려요. 그게 바로 십일조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공사가 잘 됐습니다. 그래? 기분이다. 90% 가져가.

따라서 돌려받은 그것은 제사장 때문에 돌려받지요. 그럼 퀴즈? 오늘날 제사장은 몇 명일까요? 보편적 단독성, The ONE, 일자, 한 명이죠. 그런데 그 제사장은 임기가 몇 년일까요? 영원이죠. 영원한 제사장으로 등극했다는 것은 계속해서 받을 십일조를 다 받아 챙겼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미 십일조를 받았던 복의 덕택으로 우리에게 성령세례가 왔고 신자가 되었다면 우리가 또 낼 십일조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지요. 덜 냈으면 복이 덜 와야 되는데 완벽한 구원을 이뤘다면 받아 챙길 십일조는 다 받아 챙겼다는 거예요. 적금 다 부었어요.

오늘날 십일조 낸다는 데 받을 사람이 없는데 누구한데 낸다 말입니까? 구약에서 십일조를 누구한테 냅니까? 제사장이 받지요. 오늘날 제사장이 있어요, 없어요? 있기는 있는데 항상 살아계셔서 영원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시는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 드리면 받습니까? 이미 다 받았어요. 본인이 제물이고 본인이 제사장이고 본인이 아버지께 십일조라는 모든 율법을 본인이 십일조가 되셔서 아버지께 드려서 완료됐기 때문에 온 게 새 언약이고, 다 이뤘다. 이뤘기 때문에 우리에게 공짜로 성령이 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공짜 받아놓고 공짜 중에서 내면 무슨 꼴이에요? 모독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말을 잘못했는가?

-신약 시대인데 교회제도는 여전히 구약 시대를

그건 지 마음대로 하는 건데 평가할 가치도 없어요. 지가 뭘 하든 관계없어요.

바벨탑이 뭐냐 하면, 사람의 이름으로 오르잖아요. 아래서 위로 올라가잖아요. 아브라함은 뭣도 모르는 보통 사람인데 위에서 내려왔어요. 하나님은 땅에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위에서 내려오고 인간은 거꾸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고. 위, 아래. 아래, 위.

제가 무슨 설명하려고 하느냐 하면, 간단하게 해서 아브라함은 핍박을 받습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핍박을 받았다는 말은, 누가 핍박받았다? 예수님이 핍박받았다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지금도 우리 이름이 유명해지기를 원하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이 모독 받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주여, 또 제가 까불었습니다. 세상 본받아서 출세하려고 설쳐댔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되기를 포기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고 어디까지 낮아졌다? 십자가 죽기까지 낮아졌지요. 그럼 십자가에 담긴 의미가 뭡니까? 최저까지 낮아지심이란 의미가 십자가에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다른 말로 번역하면, 최저의 마음에서 예수님을 만나라.

바로 천국은 땅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우리가 가지 싫어하는 최저 바닥에서. 스스로 주께서 낮아진 것도 있지만 누가 떠밀었습니까? 모든 사람이 저 높은 곳을 향하는 인간의 이름의 속성과는 반대된다는 이유 때문에 매몰차게 그분을 저 낮은 곳으로 패스시켰어요. 돈 되는 하나님은 연결했지만 십자가 진 하나님은 우리가 안 믿어. 우리가 패스, 패스. 우리가 통과시켰습니다.

마지막 이 말하고 마치겠습니다. 탕자가 가출한 것 아시죠. 아버지는 누굴 기다립니까?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죠. 아버지는 알아요. 집 나간 그 자리가 탕자의 자리가 아닌 거예요. 그럼 탕자는 가출할 때부터 아버지의 이름, 하나님 이름의 자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이름, 다시 말해서 아버지 재산으로 출세하겠다는 인간의 이름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아버지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식이 가출하는 행위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 관계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런데 옆에서 항상 효도 다했던 맏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가출한 경험이 없어요. 그러면 아버지 이름은 인간의 이름으로 핍박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되는데 가출한 것이 없으니까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시카고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제발 서로 사랑하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본문입니다. 그 본문을 설명하고 해석하면서 제발 사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듣는 시카고 교인들 기분 좋았어요. 평소에 하던 행세대로 하라 하니까. 왜냐하면 가출, 탕자가 돼줘야 돼요. 죄인이 돼줘야 돼요. 죄인이 안 되면 구주의 의미가 날아가요. 없어져요.

그러면 제 말 곡해해서 목사님이 책임지고 사랑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제는 미워해야지. 꼭 그런 사람 있다고요.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평소에 내 이름, 내 명예, 내 가치로 살잖아요. 그 자체가 비록 가출 안 하더라도 이미 뭐가 잠복돼 있습니까? 내가 돈이 없어서 교회 나오지 돈만 벌면 놀러갈 거야. 교회도, 하나님도 바이바이야. 이미 내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든지 항상 가출할 만반의 준비가 돼있습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눈치 채면 아버지의 은혜를 아는 영광스러운 탕자, 정말 아버지께 사랑받는 탕자가 됩니다. 우리가 평소에 탕자의 자리에 있을 때 오히려 그 탕자의 자리에서 끝까지 기다려주신 아버지 은혜가 생각납니다. 솟아나죠.

마지막 이 문제 던지고 마치겠습니다. 탕자가 맛있게 소고기 먹고 가락지 끼고 새 옷 입었잖아요. 탕자가 돌아온 지 오년 쯤 지났습니다. 마을 사람이, 둘째 아들 그 가락지 누가 거야? 내가 탕자 되어 얻은 거야, 이렇게 이야기하겠어요? 아니면 나는 탕자였는데 아버지 은혜로 가락지 끼었다고 이야기하겠어요? 오년 이든 십년 이든 가락지가 있는 한 주의 은혜가 함께 있겠지요.

그러면 흔히 말하는 거룩이 뭐고, 성화가 뭡니까? 항상 십자가만 자랑하는 게 바로 거룩이고 거룩한 생활이잖아요. 그때 탕자 되니까 아버지기 이것 주더라. 그때 잘 나갔어. 내 공로로 얻었어. 이러면 안 되겠지요. 항상 십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고 주여, 이것만 보면 아버지 생각납니다. 이처럼 거룩 된 생활이란 예수님만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거룩 된 생활입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한윤범(IP:119.♡.174.136) 16-10-07 15:16 
20160916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7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어제 끝 시간에 했던 내용이 복잡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간단하게 정리하고 진도 나가겠습니다.

11장 바벨탑에서 탑 쌓는 목적이 뭐냐?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 이름이 지상에 있잖아요. 탑 쌓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이, 우리는 땅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 거예요. 땅의 존재면서 땅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염원이 있고 소망이 있고 포부가 있다는 겁니다. 하늘에 우리 이름을 닿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간격이 있으니까 탑을 쌓는 방법으로 우리 이름을 닿게 하겠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이름이니까 인간의 이름, 사람의 이름이죠. 사람의 이름의 속성을 창세기 11장에 밝혀두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과 사람의 이름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보라는 거죠. 사람의 이름에 분명히 노림수가 있지요. 하나님의 이름도 노림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람의 이름의 노림수는 땅에서 하늘까지인데 하나님의 이름의 노림수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겁니다. 독생자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빌립보서 2장입니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지니사 어디까지 낮아졌습니까? 십자가까지 낮아졌지요.

그런데 인간의 이름이 위에서 내려오는 주의 이름에 대해서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우리는 모두 나의 이름을 가졌잖아요. 이름만 가진 게 아니고 포부가 있잖아요. 방금 이야기했지 않습니까. 탑 짓는 아이디어가 집단적 의견이면 나도 포함되잖아요. 우리의 소망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하나님의 소망은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알아먹을 턱이 없는 거예요. 복음 전하니까 교회에서 못 알아먹는 거예요. 전부 다 높은 곳을 향하여 교회 왔는데 복음은 저 낮은 곳으로, 너무나 생뚱맞은 이야기를 하니까 자기 이익에 모순이 되니까 납득이 안 된다, 어렵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복잡하다, 그런 반응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아버리면 내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구나.

죄에서부터 출발해야 주의 이름이 눈에 띠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과 로마서 10장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을 얻으리라 할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마음이 높은 곳을 향했다는 게 아니고 높은 곳을 향하는 노림수가 죄라는 인식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 주의 이름은 땅에 이르죠. 그래서 천국은 땅에서 만들어진다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천하고 누추한 이곳까지 아기로 태어나신 주님, 주님이 이곳까지 왔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제일 충격 받은 것이 뭐냐 하면, 창조주가 사람 사는 곳에 왔다는 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전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가 엉뚱한 것을 추구하고 있구나. 친히 오셨는데 나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구나. 주님의 내려오는 사고방식과 정반대로 가는 걸 알았습니다. 신학생 치고 누구든지 순복음 교회처럼 숫자 많은 걸 염원하지 않을 신학생이 없어요. 순복음 교회처럼 수십만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그런 각오를 하지요.

그 신학생이 놓친 게 있어요. 그걸 목표로 한다면 그 다음부터 인간들은 자기가 스스로 온갖 방법을 간구하게 됩니다. 이만큼 낮아질까요, 겸손할까요, 눈물로 통곡하면서 기도할까요? 이런 것들을 자꾸 제시하는데 따지고 보면 노림수가 있어요. 수십만의 교인을 자기 휘하에 두겠다는 욕심이 깔려있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교 온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학교 온 것 자체가 남이 경험하지 않은 더 깊이 있는 죄를 체험하기 위해서 신학교 보냈구나. 일반교인들은 모르는 목사들만 아는 더 깊은 악마의 속성, 그것은 거룩을 빙자한 성스러운 성직자를 핑계로 마귀가 시키는 대로 저 높은 곳을 향하는 심보, 그런 것을 실제로 체험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죄의 진수를 맛보는 행운을 누립니다. 목사님도 마찬가지고. 약간은 마음대로 잡수시고.

그런데 이러한 일이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것이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옴으로 말미암아 정지가 된 것이 아니라 계속 예수님 십자가까지 발전하고 있는 거예요. 주고받고 하면서. 인간의 이름이 높은 곳을 가게 되면 선지자를 보내서 낮추고, 또 높아지면 또 선지자 보내서 낮추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장에서 비유한 대로, 포도원 주인이 먼 타국으로 가니까 농부들이 주인 없다, 우리 포도밭이다 하니까 주인이 그 소식을 듣고 종을 보내니 죽이고, 종을 보내니 죽이고.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면 존중하리라 했는데 인간의 생각은 이 아들만 죽이면 우리 것이 된다는 식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전 역사를 우리가 공부하는 구약의 전체 역사를 간단하게 포도원 비유로 한 방으로 이야기했어요.

종 보내면 죽이고 마지막에 아들 보냈는데 죽이고. 그러니까 예수님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이에요. 그리고 나는 너희들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는 겁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구약의 정답이 어디 있어요.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에 의해서 너희들이 찾는 메시아가 너희들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계획된 바다. 이 해석보다 더 좋은 해석이 어디 있습니까? 확실한 해석이죠.

그걸 저는 이렇게 합니다. 주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에 의해서 살해당함으로써 주님이 주님답데 이 땅에서 천국을 건설한다. 이런 정답이 나오는 겁니다. 깔끔하게 구약 흐름 관통했지요. 인간들은 그냥 죄는 모르고 메시아 활동, 주의 이름과 만남을 통해서 드디어 자기 죄가 발각되는 겁니다. 그러한 예로 어제 탕자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어떤 분은 말하기를 왜 아브라함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탕자 이야기하고 왔다갔다 어지럽게 하느냐? 출판사 사장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셨어요.

탕자 비유가 멋집니다. 탕자가 돌아온 것도 멋지지만 가출하지 않는 맏아들의 태도가 멋져요. 맏아들은 가출한 적이 없습니다. 묻습니다. 가출하지 않은 아들이 효자입니까, 가출한 아들이 효자입니까? 우리 상식은 가출하지 않는 아들이 효자잖아요. 직장에서 착실하게 돈 횡령하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돈 횡령한 사람이 지혜롭습니까? 우리 상식은 횡령하지 않은 사람이 지혜롭잖아요. 불의한 청지기가 누가복음 16장에 나오고 탕자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와요. 연발로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의 발상을 완전히 부셔버립니다.

인간의 이름을 대표해줘야 주의 이름이 비로소 본질이 드러나는 겁니다. 가출한 자를 받아줘야 이미 죄인인 것이 들통 난 자라야 주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티가 난다는 거예요. 잘난 사람들 교회에 모이면 교회가 안 돼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내가 얼마나 저 높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죄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 현장에서 누구 이름만 높아집니까? 그것을 용서한 예수님의 이름만 높아질 거잖아요.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이 신약성경에서 완성이 되는 이유는, 구약에서는 “너, 잘못됐지?” “잘못됐습니다.” 신약은 놀랍게도 이미 용서해놓고 그 다음에 이제 본격적으로 네 잘못을 저질러 보시지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이미 아버지는 가출할 줄 알고 돌아올 줄도 알고 계속 기다리는 거예요. 가락지도 준비해놓고. 돌아오고 난 뒤에 금은방에서 가락지 맞춘 게 아니고 이미 가락지 준비해놓고 거기에다 양복까지 준비했어요. 그리고 최고의 한우 준비해놓고 잔치 준비해놓았어요.

그런데 맏이가 가만히 보니까 가락지, 그 옷, 맛있는 소고기가 자기를 위함이 아니었어요. 맏이는 납득이 안 되는 겁니다. 정말 납득이 안 돼요. 옆에서 가출한 적도 없이 착실하게 아버지 섬겼는데 그럼 마땅히 대가는 자기한테 와야 되잖아요. 착실하니까. 그러나 착실하다고 천국 못 간다는 거예요. 여러분 착한 사람 천국 못 갑니다. 30년, 40년 신앙생활해도 이것 모르는 사람이 거의 100% 몰라요.

한 때 우리나라에 나쁜 남자가 유행했습니다. 여자를 거칠게 다루는. 그 다음엔 부드러운 시대 왔다가 그게 지루하면 또 나쁜 남자 뜨고 하는데. 나쁜 사람이 천국 갑니다. 그래서 시카고 강의에서 사랑하지 말라 했어요. 서로 경쟁적으로 나쁜 사람 되기 위해서 사랑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했어요. 들어보면 이해돼요. 불쑥 이런 이야기하니까 무슨 이야기냐고 하지만 그 강의할 때 요한일서에 서로 사랑하라.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영생도 없다는 그 대목 펴놓고 그런 이야기했다고. 앞뒤 들어보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돌아온 탕자에게 주어진 아버지의 사랑이 그 탕자를 용납하지 탕자가 용납 받는 행위로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탕자는 네 자리는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네 자리는 이미 내가 만들었다. 이미 내가 만들었다 신약, 잘해봐라 천국 넣어줄게 구약입니다. 그게 왜냐하면 발전해야 되니까.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갈 때까지 가보자. 끝까지 가보자. 둘이 만나요. 인간이 악랄할 때 악랄하고 주님도 희생할 때 희생하면 그 모든 희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질문 들어갑니다. 왜 에스겔은 우리를 구원 못합니까? 그냥 선지자라 하지 말고. 왜 에스겔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느냐 하면, 갈 때까지 안 가고 중간과정이기 때문에 그래요. 에스겔 이름이 인자에요. 다니엘을 인자라고 돼있어요. 그 인자를 최종적으로 마감해줘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 이름이 뭡니까?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 풀리지요. 둘이 경쟁적으로 가는 거예요. 레이스하는 겁니다.

서울에서 인천공항까지 도로 멋지게 깔려있거든요. 밤중에 재벌 3세들 명품 차로 카레이스해요. 둘 다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레이스하고 있어요. 어디를 향하여? 인간은 몰라요. 주님은 알아요. 아버지 뜻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골인하는 겁니다. 그게 거룩한 죽음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잖아요. 복음 뭐 있어요. 십자가 복음이지.

그러면 나는요? 십자가 들어가 봐. 네 이름이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절벽에 충돌했는지를.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아버지께 저주받을 짓거리라는 것이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폭로돼버립니다. 마지막 십자가 장벽에서. 거기서 우리는 내 고집, 내 이름은 없어지고 기도를 해도 마지막에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구원받는 것도 주의 이름, 식사하는 것도 주의 이름으로 주신 것, 꽃나무 자라는 것 모든 것이 십자가로 공로로 우리에게 이유 없는 은혜로 주어집니다.

이유 없는 은혜라고 제가 언급했어요. 그게 무지개 할 때 이유 없는 은혜라 했지요. 김정은한테 은혜주신 이유가 뭡니까? 왜 살려주십니까? 이유 없는 은혜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 세상에 피를 먹지 말라. 피가 생명이란 말은 이유 없는 법이 돼요. 위에는 은혜, 땅에는 법. 이 법과 은혜가 만나요. 만나는 표징은 아이들 무용에 만나는 게 있어요. 원모어타임. 포스터에 자전거 타고 하늘을 나는 게 있지요. 땅과 하늘의 의가 만나다. 이사야 예언에 보면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게 지난 시간에 한 거예요. 복잡해 보이지만.

그럼 아브라함 이야기는 왜 끄집어냈는가? 아브라함은 전쟁에 승리하고 난 뒤에 가다가 멜기세덱을 만난 이야기를 했고, 멜기세덱은 이름이 없어요. 이름은 아버지가 주는데 어미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족보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장차 예수님의 족보가 멜기세덱이란 족보입니다. 하늘에 속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 이전부터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힘으로 전쟁에 승리하게 된 겁니다. 아브라함의 의미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전쟁에 말려들었다는 사실. 그래서 전쟁에 말려들면 구원받은 자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6장 12~17절에서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안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을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그게 뭐냐 하면, 이미 우리는 그 전쟁에 말려든 겁니다. 믿음, 투구, 성령의 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나는 탕자입니다. 그 한 마디만 하면, 수류탄에 철모를 다 갖춘 거예요. 선교단체가 이걸 모르는 거예요. 나는 탕자입니다, 이 한 마디로 전쟁을 마음껏 증거하면 되는데 선교단체 사람들은 전쟁을 지가 벌여요.

이미 끝난 전쟁인데 본격적으로 칼 들고 사탄아 오라. 이건 돈키호테도 아니고 과대망상증 환자에 빠져서 선교단체 사람들은 허황된 과대망상에 빠져서 자기 전공과목은 F 맞고 시험 치지는 않는 성경구절 외우는 건 도사가 되고. 얘들 선교사하고. 이러면 누구 이야기하는 것 같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인데 내가 실수한 것 같다. 전공과목 빵구 내고 성경만 공부해서 주께서 좋은 남편 만나서 결혼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그게 아닐 때 나름대로 자기 합리화시킨다고요.

우리는 탕자기 때문에 탕자라고 하면 마귀는 재미없다고 가는데 무장을 시키기 때문에 마귀가, 이것 재밌다. 성경 더 읽어야지, 기도도 열심히 해야지, 헌금도 해야지 자꾸 쑤시니까 발광을 해서 우리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 기도가 모자랐어. 젊은 얘들을 잡아버려요.

주의 이름과 하나님 이름이 어떻게 발전하고 진전하는지 사례를 듭니다. 이미 결론 났거든요. 주의 이름과 경쟁한다. 그 중에 하나가 창세기 38장. 목사님, 앞의 이야기는 안 합니까? 앞의 이야기는 너무 많이 했어요. 새로운 걸 해야지요.

38장 12절 읽어보세요.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혹이 다말에게 고하되 네 시부가 자기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목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그가 얼굴을 가리웠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세상 생활하다가 성경 보는 사람은 깜짝 놀라는 대목이 있어요. 어떻게 아버지와 두 딸이 관계를 맺는가? 그것도 희한할뿐더러 특히 38장 이 대목에 어떻게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아무리 자식이 좋다고 해도 너무 과한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여기에 대해서 더 놀라운 것은 누가 더 나쁘냐 하면,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를 유혹한 이방 여인 다말이라는 며느리 행위가 의가 돼요. 26절에 보면, 네가 나보다 옳도다. 이런 결론에 도달해요.

그래서 성경을 본 사람은 우리 상식으론 너무 튀니까 성경은 거룩한 책이니까 거룩하게 접근하잖아요. 그래서 보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곳을 향하여 지키려고 하는데 이 대목마저 지키려고 하니까 지킬 건더기가 없어요. 이건 아마 잘못됐을 거야. 밀치려고 하니까 뭔가 빠트린 느낌이 들고 뭔가 놓쳤던 말은 내 거룩의 향상에 누락이 되어 찝찝하고.

그래서 목사한테 물어보죠. 바쁩니다. 그런 초보적인 것은 전도사한테 물어야지. 전도사한테 물으니까 자기도 성경 봤을 거잖아요. 왜 몰라요? 건너뛴 거예요. 옛날에는 그것도 용납했답니다. 옛날 문화에서. 그렇게 넘어가요. 옛날 문화라 하면 성경 자체가 문화가 돼버려요. 문화는 일시적으로 지나가면 그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성경에 박혀있는 이유가 뭐냐 말이죠. 사람이 뭔가 기피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중요하다는 겁니다. 롯의 두 딸이 롯과 동침하여 모압과 암몬이라는 민족을 낳았다는 사실이 껄끄럽더라도 그것은 뭔가 중요한 의미고, 삼손이 여자 밝혀서 이스라엘 자기 민족 구하라는 힘을 여자 하나 얻겠다고 그 힘을 소비하는 그 의미가 항상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른 기이한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줘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편하게 믿는 하나님은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 하나님이 기이하다면 우리도 덩달아 기이해야 된다는 것을 요청받고 있는 겁니다.

제가 버지니아 강의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다고 하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가 구원됐다고 이야기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를 증거하는 게 자녀의 목적이에요. 내가 구원되는 게 목적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 이렇다, 라는 걸 증거하는 거예요. 자기 잘났다는 게 아니라. 성경을 볼 때 항상 우리가 노리고 있는 것을 성경이 거부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돼요. 거부하는 이유는 십자가가 중간에 가려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과하면 내가 반대로 생각했구나. 내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고 다른 하나님으로 알아야 됩니다.

이 본문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논리가 복잡하니까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뭐로 보입니까? 물고기죠. 이 물고기가 심해 4500미터, 엄청나지요. 바다 표면에 있는 우리가 즐겨먹는 고기는 아니란 뜻입니다. 깊은 바다의 물고기는 놀랍게도 드로잉, 드로잉은 그림에서 색깔은 없고 선만 있어요.

드로잉은 선으로만 그린 거죠. 심해 물고기는 안에 내용물은 없어요. 수압을 견디기 위해서 선만 유지되고 안과 밖에 동일하게 내통하고 있습니다. 이게 심해 물고기의 특징이에요. 왜 이 고기를 그리느냐? 이게 성도입니다. 세상은 더럽지요. 세상에 성도 안도 똑같아요. 이 더러운 게 육신+영적 조건이 되는 겁니다.

바로 유다가 창녀를 찾았다. 우리 상식으론 대단히 윤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여러분의 고견은 어떻습니까? 어디서 가서 창녀 찾는 게 착한 일입니까? 아니지요. 쫓겨난 며느리가 창녀가 되었다. 이해는 돼요. 생계가 돼야 되니까. 하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은 안 들지요. 그런데 그 며느리가 한 사람을 노리고 한시적으로 시아버지를 유혹하기 위해 창녀가 되었다. 이것은 세상도 숨기고 싶은 저쪽 바닷물도 숨기고 싶은 그것을 언약 안에서는 노골적으로 까발려지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여러분 신앙생활 굉장히 자부심을 느끼죠. 우리 신앙생활이 많이 엉망이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잖아요. 시아버지 유혹하는 정도는 아니잖아요. 여러분 써먹을 죄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정도까지 막가지는 않잖아요. 만약에 이것보다 더 막 간다면 목숨 내놓는 것밖에 없어요. 무엇을 위하여 며느리는 창녀까지 하면 시아버지를 유혹했느냐? 그 이유가 장차오실 주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의 만남과 관련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다말은 성녀입니다. 수도원에 들어갈 만한 자격 있는 거룩한 여인이에요. 마태복음 족보에 이 거룩한 여인 다말이 유다에게서 자식을 낳게 되는 겁니다. 마리아에서 나온 예수님과 연관성 있는 영적 족보에 합류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장 봅시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3절)

하나님이 주의 이름으로 벌이는 지상의 일이 인간의 상식, 윤리도덕으로 무장된 인간의 입장에서 도저히 납득이 되기 힘든 그런 일을 주의 일에 가장 표준적인 이 일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며느리가 자기의 가치, 자존심, 명예, 명성 이런 것을 아낌없이 포기한 겁니다. 바로 유다의 노선을 위해서. 유다는 야곱과 관련돼있어요. 유다는 야곱의 네 번째 아들이니까.
야곱은 어디와 관련돼있습니까? 야곱은 야곱의 하나님과 관련돼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주의 이름이 등장했어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지요. 사람들은 야곱의 이름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바뀐 이름은 야곱이 죽었다는 걸 근거로 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그 뒤에 야곱이 뭐라 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 만나고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날 때 죽을 뻔했다, 이게 아니고 죽었는데 주께서 축복했기에 살아난 거예요. 그럼 살아남 안에 축복이 왕창 들어있는 거예요.

그 축복 안에 주의 이름이 들어있고 주의 이름은 노림수가 들어있어요. 지상에 천국을 만드는 거예요. 우리 이름은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는 게 우리의 노림수고. 야곱의 노림수는 내가 어떻게 하든지 형의 자리에 앉겠다는 것이고. 주님의 노림수는 형의 자리 안 빼앗아도 내가 찾아오면 너는 장자가 된다는 노림수고. 그래서 얍복 강 일 끝나고 난 뒤에 형을 만나죠. 형한테 자랑질합니까? 일곱 번 절해요. GAME OVER. 완전히 게임 끝났어요. 나는 당신과 상대하는 게 아니야. 나는 지금까지 당신과 상대했는데 인간의 이름과 인간의 이름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된 결실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못돼먹은 탕자 같은 나를 죄인인 나를 찾아올 때 이미 게임을 끝났어요. 승리자입니다. 승리자기 때문에 아낌없이 누구한테도 자존심 포기하고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야곱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다말도 갖고 있었던 겁니다. 누구든지 돌을 던지란 말이죠. 시아버지 유혹한 창녀라고 돌을 던지란 말이죠. 과부 주제에 창녀 짓해서 돈 번다는 소문을 퍼뜨리란 말이죠. 하지만 너희들 같이 저 높은 곳을 향하는 게 아니고 지상에 이미 온 주의 이름에 관계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명예와 명성을 아낌없이 바치리라.

그게 누구냐? 야곱의 계통에서 나온 유다입니다. 유다와 결합함으로써 이방인 다말은 구원을 얻는 거예요. 자기 자존심, 체면 그런 건 몽땅 다 깨지고. 그것도 몰래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정 두지 않고 창세기 38장에 영원토록 박아놨어요. 다말 이름은 유명해졌습니다. 시아버지 유혹하기 위해서 창녀 된 여인. 그런데 그 여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성녀에요. 마리아와 레벨이 같은. 그래서 다말과 마리아가 같은 족보로 이어진 겁니다. 우리도 그 족보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 없어요? 주께서 이미 넣어줬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인의 모습으로 넣어주는 겁니다.

성녀들이 가는 족보에 다윗이 들어가죠. 다윗이 누굴 죽였습니까?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안 죽이는 척하며 죽였지요. 더 못됐어요. 살인교사지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 바로 밑에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다윗이 비로소 자기가 구원받았어요. 왕으로서의 자존심, 체면, 남의 여자 건드림 다 떠안고 고마워 어쩔 줄 몰랐어요. 내가 그렇게 알고자 한 나 자신을 주께서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서 축복을 주셔서 나를 구원하시는 이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습니까.

한 분 빼놓고 우리는 첫 강의에서 다 들었어요. 하나님은 나를 파괴한다는 말했지요. 하나님은 나를 파괴한 대가로 나를 구원한다. 첫날 강의했잖아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릴 구원한다고요. 멀쩡한 우리 껍데기를 헤쳐서 우리 안에 있는 주님께서 장치한 성령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마치 외과의사가 심장을 끄집어내듯이 우리가 가장 아끼는 우리, 가장 숨기고 싶은 그 죄를 끄집어내면서 승리해버립니다. 네 이름으론 그만 살아라. 제발 부탁이니 네 이름으로 사는 것 끝.

이제부터 주의 이름으로 사는데 그 대신 너는 영원히 탕자 되어야 된다. 하지만 탕자의 몸에 가락지 끼어지고 탕자의 위에는 맛있는 소고기가 들어가고 탕자의 옷은 알바니, 최고 비싼 옷이라면서요. 이태리 옷 그것 걸치고. 세상에. 이게 저 높은 곳이 아니고 정반대로 저 낮은 곳으로 오신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똑같아요. 전 이 이야기할 때 신나. 혼자서 신나는데 세상 사람과 우리와 똑같다는 점이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안 나대도 되잖아요. 유난 떨지 않아도 되는 이 존재의 가벼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가 죄인된 것처럼 너도 죄인으로 살아라. 그렇다면 안과 밖의 차이는 뭐냐? 언약 안에서는 드로잉 된 물고기 선 안에서 용서가 되지만 저 밖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용서가 없기 때문에 죄인들이 우리는 왜 용서 안 합니까, 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어요. 왜? 너나 나나 똑같기 때문에.

다만 드로잉을 그려주신 것은 내가 의도한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의 소원이기 때문에 우리가 관여할 바가 안 돼요. 저 사람은 구원 안 하고 저는 구원합니까? 그건 니가 관여할 바가 아니죠. 어떤 사람은 우리가 착하기에. 착한 것 없어요. 안쪽도 바닷물이고 바깥도 바닷물이에요. 심해 사백 미터 밑에서는. 그래서 그 물고기를 모아서 수조에 넣어보니까 처음엔 뿌옇게 보여요. 가만 보니까 어떤 선들이 돌아다녀요. 그게 바로 심해 물고기의 특징입니다.

이걸 사자성어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자유롭다. 진리가 너희를 심해 물고기로 바꿔줄게. 나대지 말고 설치지 마라. 나대지 말라는 것은 생명의 신호 요한계시록 제일 마지막 멘트가 그거였어요. 대전수련회 때. 제일 나대지 말고 설치지 마세요. 있는 자체에서 가락지만 보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것은 탕자에게만 주어지는 아버지의 가락지 이것이 바로 성령의 세례입니다. 고귀한 것 몸에 장착하고 있기에 안 까불어도 되고, 안 나대도 되고, 안 설쳐도 되고, 신앙인 티 안 내도 되고 그냥 하던 행세 잘 하잖아요. 바깥에서 얼마나 잘 나갔습니까? 교회 안 다닐 때. 그 행사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이러면 권유하는 것처럼 돼서 미안한데요. 하되 뭐는 잊지 말아라? 선, 언약 십자가라고 윤곽 지어진 경계 지어진 십자가 안에서 마음껏 헤엄치시고 자유를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은 이처럼 그림자, 모형으로 미리 맛보게 해주고 신약은 최종적으로 탕자, 불의한 청지기라 해서 노골적으로 증거물을 제시하죠.

여기서 더 부연할 게 있어요. 왜 다말은 시아버지에 집착하느냐? 다말은 인간 이름으로 유다를 본 게 아니고 자기가 시집온 그 가정에 약속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 약속을 포기 못한 거예요. 메시아가 온다는 그 약속. 그 약속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약속이 맏아들로 와요. 그 앞에 유다가 아들이 셋이죠. 다말이 첫 아들과 결혼했는데 자식을 못 낳았단 말이죠. 두 번째 아들 오난인데 형수와 결혼하기를 거부한 겁니다. 둘째 아들은 축복된 가정으로 보지 않고 그냥 혈통적 가정으로 봐서 자기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 이름의 특징이죠.

사람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익숙해지면 매력이 떨어져요. 특히 남자들이 그래요. 아무리 미스코리아라도 신상 미스코리아가 계속 생산되니까. 이쪽은 호르몬 떨어져서 탱탱한 피부가 쭈그러드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탕웨이가 놓치지 않을 거라고 화장품에 집착하는 이유가 피부 보존하려고 하잖아요. 백날 해봐야 한계가 있으니까.

왜 내가 한 평생 여자한테 매이냐 말이죠. 그것도 형의 여자에게. 그러나 이걸 시형제 결혼법이라 합니까? 맏이가 자식 없을 때 둘째, 셋째가 해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은 맏이로만 연결되기 때문에 개인적인 욕구 찾다가 진짜 하나님의 축복에서 탈락하면 저주가 돼버려요. 그걸 생각해야 되는데 오난은 자기 씨앗을 아끼겠다고 안 했고.

셋째 아들은 어렸어요. 다말이 약속대로 결혼하겠다고 하니까 유다가 믿음이 떨어졌어요. 아깝거든. 그래서 다말이 변장한 거예요. 그 뒤에 동네에 소문이 났어요. 당신 며느리 임신했다고 하니까 유다가 꼴에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우리 가문에 창녀 같은 여자가 있는가? 24절에 만약에 소문대로 며느리가 다른 남자 만나서 임신했다면 불사르리라고 했을 때, 이실직고하라. 너를 임신케 한 자가 누구야?

며느리가 이겁니다, 하고 유다에게서 받았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으니까 나네. 여기서 유다는 더 높은 차원을 생각한 거예요. 혈통과 가문과 명예를 생각한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 족보에 팍 꽂히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보다 더 셀 때는 ‘~에게서’가 붙습니다. 다말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원래 천국 족보라고 하던 남자는 어매 기죽어. 부끄러워서.

외부에서 날아온 이방여자보다 못한 믿음, 이것이 탕자의 모습, 인간의 이름의 진면목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외부에서 이방여자 보내서 주의 이름으로 탕자를 구원하는 그 원칙이 바로 주의족보에 삽입 돼있다는 것을 마태복음 1장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136) 16-10-07 15:17 
20160916 뉴저지 아카데미 강의 08 – 구약의 흐름
(강의:이근호 목사)


구원이 뭐냐? 지금부터 출애굽기합니다. 창세기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이 영적 전쟁,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에 말려든 것이 인간이다. 말려든 사람들이 점점 구체화하면서 주의 이름이 개입되고 바벨탑, 인간의 이름도 같이 거론 되면서 인간이 원하는 바와 주의 원하는 바가 충돌하면서 지상에 낯선 하나님의 일들이 드문드문 등장하기 시작한다. 지금 이것까지 이야기했어요.

드문드문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인데 언약은 다른 말로 하면 약속이죠. 다말 같은 경우에는 약속을 던진 분이 약속의 성취자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걸 하나님의 성실성이라고 하는데 언약의 하나님은 자기가 던진 약속은 필히 약속을 제시한 하나님에 의해서 다 성취되게 돼있어요.

그래서 선조들은 아브라함을 믿은 게 아니고 이삭을 믿은 게 아니고 야곱을 믿은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었고, 이삭의 하나님을 믿었고, 야곱의 하나님을 믿었어요. 순서상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되지만 막상 천국에 가면 아브라함 있는 곳에 이삭 있고, 이삭 있는 곳에 야곱 있고, 야곱이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신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고자 하다가 보고 좋아했지요. 여기 계신 걸 가지고. 천국에서 봤던 예수님의 모형이 바로 이삭이었고 이삭을 바친 행위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천국 가서 느긋한 마음으로 확인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뭐냐? 먼저 인간의 이름으로 구원이란 불교적입니다. 불교에선 생로병사 질곡에 빠져있어요.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이 지옥 같은 질곡에서 어떻게 벗어나는가? 그래서 인간들의 구원이란 벗어나고 파. 고생 많은 인생에서 벗어나고 파. 이걸 불교 용어로 하면 해탈이 되는 겁니다. 반복되는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

불교적이란 말은 인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인간 본성에 합치된 내용으로 보면 됩니다. 불교가 있는 것을 고마워해야 됩니다. 불교의 정신이 바로 우리 정신이기 때문에. 불교의 갓바위는 그저 빌잖아요. 불교의 교리는 딱 하나에요.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 먹는다. 네가 응답 안하고 배기나 보자. 여기 지성의 양에 비례해서 감동의 양도 비례한다는 겁니다. 지성 정비례의 법칙. 교회 목회 뭐 있어요? 딱 이거지요. 불교 법칙 하나만 있으면 목회성공입니다. 기도를 안 하니까 응답을 못 받지. 바치지 않으니까 인색하니까 복을 못 받지, 인간들아. 열심히 없으니까 교회 성장이 안 되지. 이게 인간의 본성이죠.

그렇게 한 이유는 고생 많은 인생에서 벗어나고 파. 이것뿐이에요. 종교단체가 이러한 소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있잖아요. 이게 아니라면 이게 구원이 아니라면 해탈이 구원이 아니라면 성경에서 무엇이 구원이냐? 궁금하시죠. 두 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효과’입니다. 효과의 의미를 약간 더 자세하게 하면 부대효과.

여기 종이가 있는데 내가 빨리 지나가면 가만있는 종이가 펄럭이죠. 이걸 물리학에서 부대효과라고 합니다. 종이는 아무 생각 없어요. 종이는 그냥 여기 있습니다. 종이 뚝 떨어졌어요. 이게 부대효과에요. 종이가 하는 말이, 난 떨어질 생각 안 했어요. 누가 내 곁을 치고 가니까 떨어졌습니다. 이게 부대효과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것은 종이는 아무 생각 없는데 바람이 불어서 떨어지는 그걸 생각하고 종이 예를 든 거예요.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부대효과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야기한 고생 많은 더러운 세상에서 평온한 극락에 가는 게 우리의 소망이었잖아요. 불교적으로. 그 방법은 지성이 원인이 되어서 하늘도 복 주는 결과를 낳는 그것이 모든 인간의 이름이 갖는 속성인데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그게 아니고 부대효과라니까요. 뭔가 휙 지나갔는데 내가 구원받았어요.

그러면 무엇이 단절된 겁니까? 인간이 시도하는 모든 시도는 부대효과로 말미암아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이제 어렵습니다. 구원이 안 된다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은 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하라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제가 30년 신학교 갈 때부터 지금까지 오해받고 싸웠습니다.

이 목사님,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는 권면과 명령들이 있는데 당신 무시합니까? 오늘 아침에 목사님 질문 있잖아요. 네가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라. 마태복음 5장 16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무시합니까? 질문이 비밀글로 들어왔어요. 오늘 답변 해줬습니다.

일반 목사들은 이야기해요. 신학이고 뭐고 간에 성경에 하라 하면 우리는 목사로써 성경 펴놓고 여러분, 하라 했지요? 다  이 합시다. 내가 뭐가 잘못됐어. 이게 옳은 것이지. 교인 여러분 반박해보세요. 성경에 하라했는데 제가 잘못입니까? 그러면 교인들은 성경에 하라했으니까 하라. 우리 목사님 잘못 아니네. 그런데 성경의 다른 구절과 이상하게 잘 안 맞네. 자꾸 의문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 믿으라 하면 믿고 하라 하면 하면 됩니다. 그냥 넘어갑시다. 그게 바로 유대교에요. 믿음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영광 돌리고. 그런데 성경에서 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부대효과는 어디서 나타나느냐 하면, 너희들의 성질대로 살 때 주의 이름이 무시당하는 상황 속에서 구원의 효과가 비로소 그 현장에 나타나게 돼있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기다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부대효과, 종이는 떨어질 마음도 없었는데 바람이 부니까 떨어졌잖아요. 이게 구원이란 부대효과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대효과를 기다리면 되겠네,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은 기다림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사전 작업에 나서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아 너희 본성을 마음껏 발휘하라.

우리의 본성은 아까 이야기한 지성이면 감천이다. 답답해서 가만있질 못해요. “시켜만 주이소.” 하나님이, “알았어. 시킬 테니까.” 오른손을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참 열심히 합니다.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대라는 그것을 교회 청소년수련회에서 왜 하는지 모르겠어요. 청소년수련회하면 주로 세족식 같은 걸 하거든요. 예수님께서 제자들 발 씻기는 걸 본받아 하자. 저 같으면 오른뺨 때리기, 그것 좀 하면 어떨지.

어떤 여학생이 예쁘다. 어떻게 때리겠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못 생겼다. 말씀대로 때리죠(^^). 너 같은 게 수련회 다 오고. 집에서 살이나 빼지. 성질 나오지요. 매사가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고3이다. 성경구절 찾아내서 지킨다고 난리 쳐요. 그런데 이미 합격했다. 그전에 열 개 했다면 다섯 개 대략 빼고 지킬 수 있는 것 두 개 빼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것을 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네 본색을 좀 드러내라. 탕자라야 구원을 받으니까. 탕자 집에 큰 아들은 가출 안 했지요. 그런 얘는 주의 이름을 기회를 놓쳐요. 주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탕자가 꼭 필요한 거예요. 죄라는 재료가 있어야 의라는 생산물이 나오는 겁니다.

성경에 하라, 하지 말라. 사도 바울의 권면, 권면 얼마나 많습니까? 무시로 기도하라. 분을 품되 해지도록 품지 마라. 네가 새 사람을 입어라.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이제는 빛의 자녀라.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먹는 것 입는 걸 족한 줄로 알아라. 동정하는 자가 되라. 원수를 친히 갚지 말고 주께 맡겨라. 음식물로 인하여 형제를 비난하지 마라. 주께서 구원한 형제를 넘어뜨리려느냐.

눈 감고 들춰보면 전부 다 그거에요.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하고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친 것처럼 하라. 그 구절은 잘 기억하네요. 얻어 챙길 것은 기억하고 줄 건 생각 안 하고. 모든 것이 하라, 하라, 하라. 하세요. 해보라고. 해보면 자기의 숨겨진 나의 이름이 은근히 노렸던 바가 완전히 토하듯이 나와요. 이러한 극단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옵니다. 일곱 교회 나오죠. 일곱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노니 끝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을 들으라.

그 중간에 있는 내용이 이거에요. 나는 이 교회에 대해서 이러이러한 것을 칭찬하노라. 그러나 책망할 것이 있노니. 교회가 그런 본문을 보고 설교를 어떻게 합니까? 이건 주 앞에 칭찬 받겠고, 이것만 고치면 하나님께 칭찬받는 교회가 된다는 아이디어가 막 등장하겠지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돈 많다고 인색하게 굴다가 망했던 교회니까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눈에 안약을 발라라. 원래 라오디게아 교회가 안약이 생산되던 어떤 지방이다. 주석 보면 다 나온 그것. 차라리 주석 들고 읽어. 그 시간에 장로는 자고 있어요. 하도 많이 들어서 더 나올 게 없어요. 초신자들만 저렇게 놀라운 내용이, 이러고 있다고.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일곱 교회 전부 다 교회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교회 모델은 없다는 겁니다. 모델을 찾는다는 자체가 그게 교회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결국 일곱 교회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사라집니다. 여덟 교회 아니죠? 720 교회 아니지요? 일곱 교회란 것은, 환상 속의 일곱 교회가 현실에 나타날 때는 교회 자체가 없어요. 교회는 어디 있느냐? 복음이 전파되는 즉흥적인 우발적인 현상으로만 교회가 나타납니다. 야, 교회다, 라고 붙잡으면 이미 그 자리에는 교회가 없어진 거예요. 역사 시대에 교회는 인간의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소유의 대상이 아닌 건 뭐냐? 내가 여기 있고 교회가 소유의 대상이 아니고 구원이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면 뭐냐? 효과. 주님이 설쳐, 너무 설쳐. 주님이 설칠 때마다 즉흥적으로 교회가 세워졌다고 사라지는 겁니다. 한 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있지요. 한시적이에요. 내가 원하는 교회는 이렇다고 보여주고 사라졌어요. 역사에서는 효과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소유만 인정해요.

서른두 살에 올림픽에 나가서 펜싱으로 금메달 땄다는 이야기를 이 사람이 64살에 이야기하면 그 사람을 어떻게 볼 공산이 큽니까?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힘들게 훈련해서 국가의 명예를 위해서 금메달 땄구나. 참 좋은 사람이다. 존경해야지. 그렇다면 서른두 살에 금메달 딴 가치가 64까지 가겠습니까? 갈 수 없지요. 그 동안 인생 어떻게 꼬였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사람의 심리가 서른두 살에 국위를 선양했다고 해서 그 가치를 본인은 64살까지 유지하고 싶은 거예요.

거기서 나온 용어가 ‘왕년에’란 거예요. 이게 인간의 이름이 갖고 있는 속성이에요. 실제로 서른두 살에 금메달 딴 사람이 서른세 살에 고속도로에서 음주운전해서 차사고 냈어요. 욕 되게 얻어먹었습니다. 심지어 금메달 딴 역도 선수는 코치하면서 제자들 성추행해서 코치직 박탈당했어요. 사람들은 괜찮은 자기 과거는 소유가 되고 별 볼일 없는 것은 지워서 남한테 안 들키도록 감추고. 왕년에 잘 나간 것을 계속 지속시키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자기 가치를.

또 예를 듭시다. 30대, 40대, 50대는 별 볼일 없었는데 70 넘어서 대단한 인물이 됐다고 합시다. 반 총장 그 사람 나이가 70인데 대통령하라고 난리입니다. 이 사람은 왕년에란 말이 별로 없어요. 이 사람이 올해 은퇴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다면, 그냥 대통령선거 낙선자잖아요. 그러면 내가 옛날에 유엔총장이야. 이렇게 나서겠지요. 이게 효과입니까, 소유입니까? 인간의 이름은 소유 외에는 다른 것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 얘가 참 좋은 대학 다녔지요. 지금은요? 신용불량자. 그걸 감추고 우리 얘가 머리 하나는 좋아. 지금은? 부도났지, 뭐. 부도난 건 잊어버리고 옛날 그 기억만 집착하고 강렬하게 소유하려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 우리 얘가 똑똑해서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 얘 지금은 어디 있나? 뭘 하는지 감추지요.

인간들이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왜 방해하고 막아서는지 아시겠지요. 인간의 나라는 존재는 소유의 집체, 집합, 집단이 될 때 나가 돼요. 다른 사람 만나서 안녕하십니까, 나는 납디다. 이러면 못 알아들어요. 실례지만 직업이 무엇인지요? 나를 찾는 게 아니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직업을 묻고, 실례지만 부동산은 얼마나? 오만 평. 자식은? 쌍둥이 둘. 나는 오만 평 있고 직업은 의사고, 자식은 둘. 이만하면 나는 갑자기 풍선처럼 업 되는 거예요.

자식은 없고, 부동산 없고, 직업 없고. 죽어라 차라리. 왜 사느냐, 왜 살아. 내가 있잖아. 네가 있으면 뭔데? 가진 게 없는데. 소유가 그 사람 존재를 말해주는 거예요. 직업이든 나이든 건강이든. 사람이 제일 중요한 건 건강 소유에요. 건강 소유가 행복 소유라고 하잖아요. 최고의 행복은 돈보다 건강이 중요하다.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다. 그러면 뭐해요, 예수를 소유하려고 하는데. 예수 소유하니까 지옥 나는 거예요. 누가 갑인지 분간을 못해요. 예수를 왜 소유합니까? 예수를 소유하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는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면 출애굽기에서 뭐냐?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생각이 없었어요. 일은 주님이 벌였어요. 원래 애굽에 있었던 사람들은 요셉의 명성 때문에 많은 혜택을 입었습니다. 인디언보호지역에 있는 인디언처럼 놀아도 돈 줘요. 물론 마약하겠지만. 그 정도로 요셉을 생각한다면 바로가 요셉의 후손들을 무시할 수 없었어요. 바로가 약속했거든요. 요셉아, 걱정하지 마라. 네 자손들 내가 알아서,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만데. 흉년 들었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요. 흉년, 풍선 예측해서 나라가 부강했으니 네가 믿는 여호와 덕분이다. 이게 옛날 선대 바로 왕이 요셉과 요셉의 후손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게 요셉을 잊어버린 바로가 등장하면서 옛날 바로는 요셉의 효과를 안 사람인 반면에 새롭게 등장한 후대 바로는 내 것이라는 소유의 인간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애굽에 살던 히브리인들은 주의 이름으로 효과로 살았는데 갑자기 인간의 이름으로 소유에 집착하는 그들과 만남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영적 전쟁,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터가 애굽이란 나라가 된 거예요. 성경을 앞뒤로 봐서 그렇게 해석해야 됩니다. 주의 이름이 개입해요.

모세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너를 애굽에 보내노라. 애굽에는 약속이 없고 보내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죠. 그러면 애굽에 사는 히브리인들은 포로가 되고 종이 되고 노예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주인 싸움이에요. 주인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러면 노예가 주인을 못 이기죠. 이걸 갇혀있다.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우리가 율법과 죄에 갇혀있는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방했다. 구원이 아니고 해방시켜놓은 거예요.

뭡니까? 출애굽은 모형이고 신약에서 본격적으로 그게 완성이 되면 우리는 정작 어디에 갇혀있는지 모르면서 살아왔는데 복음이 들어오니까 우리가 법에 갇혀있었구나. 양심에 갇혀있었고, 법에 갇혀있었고, 전통에 갇혀있었고, 체면과 위신과 명예와 소유에 갇혀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목숨 부지에 갇혀있었던 겁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했겠습니까. 추석 만난 게 원수들 만난 거예요. 실제로도 그렇고. 그렇게 친하던 형제들 아버지 돌아가시고 유언장 낭독에서는 갑자기 난 리 납니다. 남자 형제들은 점잖은 체하는데 안에 있는 동서들끼리 큰 며느리, 둘째 며느리 해서 형님은 전에 땅 받았잖아요. 집안이 원수에요.

나를 대적하는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공격하고 내 것을 빼앗는 원수의 일종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이름이에요. 그 습성은 어디서 왔는가? 주인을 닮았거든요. 주인은 바로 애굽이고 히브리인들이 그들을 닮았어요. 그래서 모세가 와서 여기서 나가자고 하니까 바로가 반대한 건 물론이고 누가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까? 히브리인들이 반대했습니다. 모세 양반. 우리는 여기서 나가자고 소원해서 기도한 게 아니에요. 옛날처럼 하나님의 효과를 알던 그때 그 시대로 돌아가서 이왕 살았던 여기서 살기를 원하지 나가기는 어딜 나가. 니나 나가라. 모세를 반대한 사람이 히브리인들이었어요. 몰랐습니까? 성경에 나옵니다. 심지어 어느 정도로 반대했는지 알아요?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저 모세와 아론을 우리 곁에서 떠나게 하옵소서. 구원하러 온 사람을 밀치는 거예요.

왜 그러냐? 본성이 문화와 풍습에 녹아들었어요. 인간 내부가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완전무장 됐기 때문에 바늘도 안 들어가요. 말 좋게 한다고 따라가고 이런 것 없어요. 습성 자체가 완전히 애굽 사람입니다. 어떻게 손 볼 수가 없습니다. 모세 간다고 해서 좋아할 줄 압니까?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정 들었습니까? 정 떼고 죽읍시다. 이게 우리 곁에 온 모세가 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이웃집 애굽 사람과 금융 거래했고 얼마나 그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까. 싸우면서도 정 드는 건데. 그 정을 어떻게 뗄 건데요? 우리가 이 땅을 떠나기 싫은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정.

그렇게 애 먹인 남편과 이별하는 게 힘든 이유가 그 놈의 정 때문에. 신앙이고 뭐고 하나님이고 뭐고 정이 제일 가까워. 예수님은 세 번째 서세요. 제일 가까운 것이 뭐냐 하면, 정으로 사는 거예요. 정 없으면 자살 할 것 같아. 정 없으면 죽을 것 같아. 하루하루 버티는 게 정 때문에 버티는 거예요. 그래놓고 믿음이라고? 개코나 믿어. 정을 소유하는 것보다 믿는 게 뭐 있어요.

복음 이야기하면 목사님 제발 편하게 살게 해주세요. 편하게 사는 게 뭔지 알아요? 정으로 둘둘 말아서 살도록 제발 좀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정으로 둘둘 감았습니다. 복음이고 뭐고 나한테 정주는 사람이 최고에요. 예수님보다 정준 사람이 최고에요. 그 사람이 예수 믿으면 예수 믿고 절에 가면 절에 따라갈 거예요. 정에 웃고 정에 살고 정에 울고. 인간 뭐 있어, 이거지요. 인생 뭐 있어요? 이겁니다.

놀랍게도 출애굽기는 애굽에 사는 히브리인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던가요? 하라, 하라 할 때 효과를 기다리지 말라고 했지요. 성질대로 그냥 사세요. 막 사세요.

목사님 아시지만 답변 글에 막 사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냥 사는 것도 정에 붙들러 사는 막 사는 거고, 막 사는 것도 정상적인 사는 거고. 제가 말을 바꿔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막 사는 게 정상적인 거고 산다고 우기는 것은 위선적으로 사는 거고, 실제로 막 살면서 안 그런 것처럼 사는 위선적인 삶을 산다고 표현하고. 그렇게 하는 겁ㄴ디ㅏ.

어떻게 할 겁니까? 애굽에서 못 떠나겠다는 어찌 할 거예요? 할 수 없지요. 하나님께서 이들을 방치하고 이들 근처에 구원의 효과를 발휘해야지요. 그게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 계획에 대해서 인간들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사전에 모세도 몰랐어요. 주님께서 모세를 보내면서 모세에게 내린 기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 보면 세 가지 기적이 나옵니다. 애굽은 요셉의 은혜를 알지 못했다. 따라서 요셉과 그 속에 있는 히브리인들은 한 통속이 됐고 바로 왕은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런 처지에서 히브리인들은 괴로워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다. 옛날처럼 좋은 바로 왕이 와서 좋은 은총을 받아서 사이좋게 살았던 그 시절이 좋다고 했고, 저는 그것을 한 자로 이야기했습니다. 정이라고 했지요. 정으로 사는 것이 몸에 완전무장 됐어요. 해방이란 인식도 없어요.

그럴 때 열 가지 재앙을 내렸어요. 아홉 가지 재앙 내릴 때까지 히브리인들이 떠날 생각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다. 이유가 뭐냐? 히브리인들이 사는 곳에는 다섯 번째부터 아무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저쪽에 애굽인들이 사는 집단 주거지에는 메뚜기고 우박 떨어지고 난리도 아닌데 히브리인들은 주께서 보호해줬어요. 하나님의 작업을 둘 사이를 분리하는 겁니다. 들 다 똑같아요.

아까 제가 뭘 드로잉했습니까? 물고기 그렸지요. 안과 밖이 똑같아요. 똑같은데 선을 그으니까 여기서 경계선이 섰지요. 경계선이 민수기, 레위기에 들어가면 ‘거룩’이라 하는 거예요. 우리의 윤리도덕 개념이 전혀 아니죠. 따로 분리되었음,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뭔 뜻입니까?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이 너희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분리가 되면 통용되는 개념 자체, 단어 의미 자체가 달라져요.

사랑? 네가 애굽에서 통용되는 그 사랑개념 아니거든요. 미움? 그 개념 아니에요. 기도? 그 개념 아니에요. 모든 개념이 십자가를 경유해서 새롭게 밝혀져야 될 개념이지 십자가 없이 주님의 말씀 듣고 상식으로 주님 앞에 나서게 되면 주께서 거부합니다. 그 뜻이 아니다. 그건 더러운 오염된 뜻이다. 열심히 기도하라 할 때도 열심의 의미도 달라요. 어느 것 하나 틀린 게 아니고 몽땅 다 틀린 거예요. 오류에요. 십자가 모르면.

열 가지 재앙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바로 왕을 자꾸만 강퍅케 만들어요. 어떤 분이 이것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는데 사람이 착하면 착한 마음 나오게 돼있지요. 강퍅했을 때 강퍅함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착한 마음이고 싶어도 하나님이 강퍅하게 한 경우를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바로 왕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하나님 뜻이 아닙니다. 그건 히브리인들 뜻이에요. 하나님이 우리 통치자 바로 왕의 마음을 참 순한 양으로 바뀌어서 우리로 하여금 애굽에서 살 때 편하게 살고 싶다, 라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소원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일부러 갈수록 바로 왕을 강퍅케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바로 왕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주의 뜻을 어길 수 없습니다. 김정은도 마찬가지고, 독재자도 마찬가지고. 인간이 지 마음대로 못해요. 하나님이 시킨 대로 마음을 정하고 움직이고. 핵미사일 실험하고. 주님 마음대로에요. 지 마음대로 핵실험 못해요. 홍수 내고 태풍 부는 것. 저는 미국 남부에 허리케인 오게 되면 무슨 벌을 받아서 매년 쉬지도 않고 허리케인 열댓 개씩 와서 집들이 기초공사도 안 했는지 온통채로 날아가요. 미국 집들은 허술한지 남의 나라인데 걱정이 돼요.

강퍅케 함으로써 어떤 현상이 있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모세가 하는 일에 회의와 의심 그리고 불안감을 병행해서 증강시키는 효과를 줍니다. 모세가 저런 재앙 내린다. 우린 가만있어, 가만있어. 이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내보내야 될 바로 왕의 강퍅함의 수위가 심화돼요.

혹시 친정아버지가 연세는 많고 교회 안 다닌다. 그래서 딸이 죽기 전에 천당 가라고 용돈을 주면 네 소원이라니 교회 가줄게. 이럴 줄 알았는데 주자마자 막걸리 사먹고 개차반 돼서 행패부리고. 아버님 막걸리 값 따로 드릴 테니 교회 갑시다. 이러면 그 돈으로 도박으로 날리고 술 먹고 갈수록 강퍅할 때 그때 딸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이여, 내 할 도리 다했습니다. 더는 못합니다. 이게 지성이면 감천이 깨어지는 거예요.

하게 하셔요. 답답해서 부모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고 다 해요. 그리고 기도의 응답으로 아버지가 교회 가기를 학수고대 기다립니다. 교회 가면 유리창이나 깨고 난리 칠 때 어디서 기도가 응답되느냐 하면, 나는 더 이상 기도 안 합니다. 할 때 비로소 그게 기도 응답이 되었어요. 네 기도의 정성에 따라 움직일 줄 알았느냐? 그렇게 되면 네 마음에 기도라는 소유를 갖게 돼. 나는 기도 응답받는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해탈, 해방, 구원이 안 돼요.

애굽에서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굽에 살던 내가 나로부터 구원이 최종적인 구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라는 거예요. 나는 죽어 마땅하고 그리고 죽어 마땅한 것을 건져내는 몫은 예수님의 자비로운 결정의 몫입니다. 내가 고대했고 내가 간구했기에 구원받은 게 아니고 주님 마음대로 구원하신 겁니다.

나의 희망과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을 소유하지 마세요. 그 소유는 나의 주특기를 자랑질하는 인간의 이름의 존재가 돼버립니다. 그럼 목사님,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그 질문 나올 줄 알았지요.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까 하라는 거예요. 머리 좋은 사람 다 아시죠. 그러니까 그 엉터리를 계속 하게끔 어려운 상황, 난처한 상황, 곤란한 상황, 기도 안 하면 잠이 안 올 지경에 기도 응답되던 말든 지금 답답한데 어떻게 합니까?

차를 몰고 가는데 앞에 경찰이 있고 딴 짓하다가 못 봤어. 벌써 시속 85마일 넘고 절로 기도가 나와요. “주여, 경찰이 못 보게 하옵소서.” 그런데 경찰이 못 봤다. “주여, 기도가 응답이 되었군요.” 답답하면 기도하지 말라고 말려도 우리의 본성인데 왜 본성을 애써 아니라고 하느냐.

교회 헌금하지 말라고 해도 헌금하게 돼있어요. 헌금해야 받아먹어도 양심에 가책을 안 느껴요. 헌금도 안 하고 받아먹는다는 것은 착한 인간성에서는 용납이 안 돼요. 그놈에 착한 인간성을 내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착한 인간성에 위배되는 행동을 함부로 하기 싫어요. 그래서 막 살라고 해서 막 사는 게 아니에요. 내가 말하는 막 살라는 것은 네가 지금까지 갖고 있는 마일리지를 펼쳐보란 말입니다. 네가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착한 사람인지 펼쳐야 그게 바로 탕자의 모습이고 죄인의 모습인 것이 십자가 앞서서 나타날 것이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있는 사람들 다 죽입니다. 히브리인이고 애굽 사람이고 애굽 자체를 다 죽여 버려요. 어떻게? 바로를 강퍅케 함으로써 바로의 신, 애굽의 신과 여호와와 영적 싸움을 벌이기 위해서는 신 안에 있는 모든 애굽의 사람들은 그 신에 종속된 형태를 유지하고 있음을 최종적으로 다 보여주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죽인다. 맏아들을 죽이는 것은 모든 인간을 다 죽인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결국 애굽의 맏아들은 다 죽었습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무슨 말하려고 다 죽었다고 하느냐, 분명히 우리가 알기는 히브리인들 맏이는 살지 않았느냐, 하고 싶지요. 출애굽기 13장 보세요. 다 죽은 것 맞아요. 1,2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다 죽어잖아요. 내 자식 내 새끼 다 죽었잖아요. 내 소유인 것이 죽었잖아요. 죽어야 삽니다. 내 것 죽고 주님 것이 될 때 구원이고 해방이란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 함께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가 계속 살려낼 때 그걸 신약에서 구원이라는 겁니다. 그걸 바깥으로 볼 때 에고 ‘나’가 되는 거예요. 나는 난데 십자가에서 옛날 나를 매일같이 죽이고 매일같이 새로운 내 인생을 주님의 인생으로 바꾸는 작업이 살아있는 드럼통이 나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행해야 되죠. 시키는 대로 행해야 돼요. 율법도 지키고 사도의 권면도 다 지켜야 돼요. 이 말로 끝내고 싶다. 자꾸 행하지 말라는 소리했다, 헌금도 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헌금 하시고 다 하세요. 그리고 그게 죽을죄가 된다는 걸 알라는 겁니다. 뺀질이처럼 돈 아까워하지 말고. 다 하되 하면서 “주여, 또 죄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란 말이죠. 기도하면서 죄 들어간다고 하란 말이죠.

이것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주의 이름은 어디서 드러난다? 인간의 이름과 충돌되고 합체될 때 드러나요. 그렇게 되면 인간의 이름의 본성도 같이 드러나면서 마귀의 후손에 속한 속성인 것이 드러나고 동시에 주의 이름도 거기 등장하면서 주님은 이 땅에서 희생 받는 인간에게 밀침 당하고 고난 받고 핍박받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지요.

그런데 결코 인간의 이름은 스스로 해방되거나 구원이 될 수 없지요. 그런데 인간의 밀침으로 죽었던 주의 이름이 흘린 희생의 피가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뻔히 지옥 갈 우리를 그 피로 부침개로 인하여 맛있게 입에 들어가잖아요. 그걸 레위기에서 하나님의 응식이라, 하나님의 양식이라 돼있어요. 거제, 요제 거기에 동원됩니다. 그런 건 어려워서 할 기회도 없고요.

주께서 받으시는 것은 인간의 이름을 그냥 안 받고 주의 이름의 희생이 묻힐 때는 창녀든 세리든 관계없이 반 총장이든 온 총장이든 똑같이 취급해서 다 죽을 자에요. 자기 소유밖에 모르니까. 그 자를 희생의 어린양의 피로 용서하시고 데려갈 때 우리는 누구의 것이 된다? 출애굽기 13장 2절의 말씀처럼 누구의 것이 됩니까? 영원한 주의 이름의 것이 되는 겁니다.
 오용익(IP:125.♡.25.28) 16-10-13 20:13 
뉴저지아카데미-구약의 흐름 9강(이 근호 목사)

구약이 공룡이라면 그 뼈대 같은 구조에 대해서 시작합니다. 공룡의 뼈대가 대단하지요. 공룡도 대단하지만 그 구조를 이루는 뼈도 대단합니다. 그 뼈대를 이루는 구조가 뭐냐? 성전입니다. 성전 안에는 뭐가 있을까? 성전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고 ‘없음’이 있습니다. 이 말이 장난처럼 들려서 미안하기도 한데요, 성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그것에서 힘이 발휘됩니다.

모든 있음을 향하여 저주와 심판이 제공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과연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이 제대로 있는 것인가를 한 번 의심해 보라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있다는 이것이 과연 영원불변할 정도로 그 있음이 보장되느냐 하는 겁니다. 당연하게 우리는 죽지요. 그렇다면 이 공룡의 뼈대같은 성전의 구조에서 뭐가 나오는가 하면, 인간은 태어났는데 왜 죽어야 되느냐 하는 그 문제까지 쏟아지게 되어 있어요.

교회를 다니세요, 성경을 읽으세요, 그것만 계시가 아니에요. 절에 다니든, 아예 교회를 안다니든 그 사람이 죽는다는 현상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님의 영향력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바빠서 못 믿었다, 엄마가 절에 가서 교회 안 갔다, 그런 이야기들은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입니다.

“당신 늙어 죽잖아. 왜 죽는지 알려줘? 하나님이 그렇게 했어.” 이것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믿고 안 믿고, 그것에 관계없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손을 대고 있는 거예요. 구태여 전도한다는 것이 이상해요. 왜냐하면 안 믿는 사람이 걸어가고 있고 나중에 늙어 죽어가는 거기서 성도는 뭘 발견합니까? ‘아, 하나님이 손 탔구나. 지진을 일으켰구나. 차 사고를 하나님이 일으켰구나.’ 하나님이 손 안댄 구석이 없어요.

새삼스럽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상해요. 하나님을 믿지 맙시다. 그냥 봅시다. 하나님이 활동하시는 것을 그냥 보고 살면 돼요. 유난 떨면서 믿쑵니다, 쌍시옷 넣어가면서 그럴 필요 없이 평소에 늘 ‘음, 하나님께서 애들 모아서 까불게 했구나. 하루 종일 행사 치렀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관을 시키는데 그 모든 것에 영향력을 주신 하나님을 모신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상하지요? 하나님을 모셨으면 거기에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하나님을 모셔야 되잖아요.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구약성경을 이끄는 구조입니다. 뼈대구조에요. 아무것도 없는데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을 신약에서는, 왜 아무것도 없었는가? 그것을 감추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감추었다는 겁니다.

없는데 그 없다는 본뜻이 뭐냐? 감추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는가? 마태복음 13장 16절. 항상 구약은 신약을 통해서 봐야 해답이 나옵니다. 전에 이야기했지요. 구약은 질문이고 신약은 답변이라고.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창세부터,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강의 처음부터 새로 하겠습니다. 하나님 믿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활동을 보고 살면 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믿는다고 유난떨고 별짓 하지 마세요. 그냥 모든 것이 하나님의 활동니까 편하게 그냥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저 인간이 사람을 죽였다는데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감추었어. 없어.” “왜 없는데?”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감추고 계시는 겁니다.

감추고 계시다가 짜잔, “이 세상은 내가 만들었어.”라고 그 감추어진, 숨겨진 베일 뒤에서 하나님 본인이 커튼 열어젖히고 나오는 때가 이게 마지막 때입니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했던 그 분이 드디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그냥 곱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 갈 쪽과 천국 갈 쪽을 분류하면서 등장하니까 이것이 난리도 아닌 거지요.

천국 가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되고, 감추었던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면서 복음이 되고, 안 믿는 사람에게는 마태복음 8장에 나온 것처럼 “이를 갈면서 통곡하리라.” “아! 이걸 몰랐네. 내가 숨 쉬고 살아왔으면서도 이렇게 숨 쉬게 해주시고 살게 해주신 그것이 하나님의 활동, 하나님의 손길이 닿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를 내가 몰랐네.” 하며 통곡, 또 통곡. 그래서 그걸 ‘곡성’이라 하지요.

“저리 가! 시끄러워서 안 돼. 지옥에 가서 통곡해. 지옥의 그 물 한 방울 없는 거기서 통곡해라.” 그렇게 되지요. 그러면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나 던져야 되겠지요. 주님이 나타나기 전에 감추었다 하잖아요. 그 감취어진 세계는 천국을 닮았을까요, 지옥을 닮았을까요? 주님이 빈자리에 나타나기 이 전에 구약은 천국을 닮았을까요, 지옥을 닮았을까요? 둘 중에 하나도 조심스러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꼭 우리교회 오후 대표기도 시간의 모습과 똑같아요.

지옥을 닮았습니다. 그 근거가 신명기 4장에 나옵니다. 신명기 4장 11절에 보면,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화염이 충천하고 유암과 구름과 흑암………” 마그마가 터졌다 그 말이지요. 화산이 터진 거예요. 12절에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마그마만 터진 것이 아니고 거기서 같이 음성이 나오니까 기절초풍할 일인 겁니다.

그냥 화산은 화산일 뿐 거기서 주의 말씀이 안 들리잖아요. 그런데 화산과 더불어 주의 말씀이 들리니 도대체 하나님은 어느 가운데 계시다? 불 가운데 계신 거예요. 신명기 4장 24절에 보면, 여호와는 어떤 분인가?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질투의 대상은 물론 저주의 대상에게 질투하는 거지요.

이 세상은 뭘 닮았습니까? 지옥을 닮았습니다. “목사님, 왜 지옥을 닮아야 합니까?” 쫓겨났거든요. 여러분, 기억 안 납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 에덴동산의 반대편이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잖아요. 쫓겨난 주제에 뭘 더 원합니까? “아, 날씨가 왜 이렇게 더운줄 모르겠어요.” 쫓겨났잖아요. 그 주제에 시원한 것을 원해요? 시원한 사이다에 얼음넣어서 드릴까요?

이 세상에서 쫓겨난 주제를 왜 자꾸 깜박깜박, 치매걸린 노인네도 아니고 자꾸 잊어버려요. ‘아하, 우리가 살 데가 못되는 곳에 임시거처로 힘들게 머물러 있고 결국 우리는 여기서 속 시원하게 떠나면 되는구나.’ 왜? 나그네고 이방인이니까. 여기서 떠나면 되는 거예요. 왜 우리 자신을 그렇게 몰라요. 우리는 쫓겨난 신세입니다. 벌써 마음부터 팍 낮춰줘야 돼요.

이곳이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처음 알았어요? 살만한 곳이다, 살만한 곳이 못된다? 살만한 곳이 못되면 슬슬 보따리 쌀 준비를 하고 떠나면 될 문제지요. 그런데 고마운 것이 뭐냐 하면, 살만한 곳이 못되면 그냥 지옥으로 머물면 되는데 이 지옥까지 주께서 찾아오셔서 나무 크는 것, 햇빛 비추는 것, 전부 다 하나님의 활동으로 목격하게 하고 느끼게 하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지옥 갈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의 전부거든요. 이 범주가 자기가 아는 그 세상의 끝이에요. 그게 전부에요.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과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화엄경에서. 인연과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끝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현대물리학에서는, 모든 것은 양자의 바다, 양자의 물결침의 바다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끈이론이라 하는데 11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양자라는 최소의 입자가 그냥 요동치고 춤추는 것이라고 본 거예요. 불교하고 똑같아요.

아무리 과학자가 연구해도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안 보입니다. 안 보인다니까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하면, 양자물리학이 어떠니, 전부 다 주님이 손대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을 보여주면 내가 믿을게.” “이 바보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감추어진 분이에요. 구약에서. 그래서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은 뭘 모시는 겁니까? ‘없음’을 모시는 거예요.

없음을 모시면서 있음의 세계와 없음의 세계에 무엇을 깔아두는가? 불을 깔아둡니다. 그 불은 어떤 불인가 하면, 있음의 존재가 감히 겁 없이 기어오르다가는 한방에 불태워지고 또 불태워지는 구조, 그게 바로 성전의 구조입니다. 이 성전의 구조는 어디서 나왔는가? 시내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장막이 있지요. 시내산에서 장막이 만들어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세가 시내산을 아홉 번을 왔다 갔다 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많이 올라갔어요.

몇 번을 올라갔다 왔는지는 정확하게 몰라요. 그러나 의미 있는 것은 세 번입니다. 그 불붙는 화산에 모세가 혼자 올라가지요. 그곳에는 모세도 들어갈 수 없어요. 부르니까 들어가는 거예요. “들어와, 들어와!” 불러주니까 들어가는 거지요. 다니엘 세친구가 불속에 들어갔잖아요. 그 당시에 느부갓네살왕쪽에서는 자기들이 집어넣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들어와, 들어와!” 하고 불속에서 주님이 부른 거예요. 불을 경계선으로 해서 세 명이 들어갔는데 몇 명이 나타났지요? 한 명이 용광로 불속에 더 있었잖아요. 불을 군사분계선으로 해서 어느 쪽이 불속에 있는 거예요? 느부갓네살쪽에서는 불 속에 세명을 넣었는데 한 명이 더 있으니까 네명이 불속에 들어갔다고 보고, 주님쪽에서 보면 어느쪽이 불 속에 있는 겁니까?

이 네명 빼놓고 전부다 불속에 있는 거예요. 인식의 전환이지요. 그 불이 만약 십자가라면?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옵니다. 십자가안에서 나는 살아 있는데 세상은 죽고, 세상사람 보기에 는 살았지만 나는 십자가 안에서 죽은자고. 그 불이 십자가로 바꿔치기 해서 오늘날 그대로 말씀 속에서 있는 겁니다. 말씀을 쏙 빼버리면 너와 나가 동일하게 같은 지대위에서 햄버거 먹고 차를 타고 왔다 갔다 하고, 아무 경계선 없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발상의 전환을 성경이 요구합니다. ‘있다’ 하는 것은 없고 ‘없다’하는 것은 있다. 바꾸라는 거예요. 없는 쪽에서 나타나게 되면 그 없는 쪽이 채워지는 것은 미래입니다. 구약입장에서 없는데서 나타나시는 것은 주님이에요. 아까 본 마태복음 13장 24절, 감춘 것을 나타낸다고 하니까. 미래가 그렇게 채워진다면 미래입장에서 볼 때 진짜 영원히 있는 것은, 바로 구약에서 없다고 여긴 그 분이 태초 전부터, 창세전부터 영원히 있었고 소위 있다고 우기는 것들은 사실은 없는 것들이었어요.

이거 설명 필요합니다. 이번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진입했습니다. 이것은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카메라 화면에서 벗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모션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내가 없어요. 뒤에도 나가 없고. 단지 있는 것은 손이 있고 몸체가 있지 여기에 나가 어디 있어요? 나가 어디에 떨어져 있어요? 주우면 되겠네요? 나가 없어요.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장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진짜에요. 나가 없어요. 여러분 중에도 아무리 봐도 ‘너’라는 것이 안보여요. 아무리 봐도 여자라는 것이 없어요. 그냥 몸이 앉아 계신 거예요. 푸른색 원피스를 입으시고. 그러니까 없다니까요. 없어요. 나가 없고 너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주신 신체만 있고 이 신체의 주인공은 감추어져 있다가 마지막에 나타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이게 없는 나를 상정할 때 하나님은 말합니다. “야, 너 되게 수상하다. 네 육체를 너라고 하는 분은 나 하나님인데 도대체 누가 중간에 끼어서 너를 너라고 하고 나를 나라고 하고, 누가 그렇게 했던가? 그렇게 만든 주인공을 나는 손볼 거야.” 그게 바로 영적전쟁이에요.

제가 어렵다고 했지요. 제가 계속 풀어갈 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흙으로 육체를 만들었지요. 그러면 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없어요. 그냥 흙으로 육체가 된 거예요. 자꾸 머리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창세기 2장에서 흙으로 육체를 만들었잖아요. 더 쉽게 하겠어요. 내가 너를 볼 때 네가 보인다. 이 말은 맞지요. 그러나 그 보이는 너에게 이름을 붙일 때는 너 말고 그 너머의 잉여적인 여분의 것의 의미를 감고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여기 컵이 있네요. 여기에 물이 담겨져 있잖아요. 이게 보여요. 그런데 여기에다가 컵이 있네, 라고 컵이라는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면 이 컵이라는 단어 안에 이것도 포함되지만 다른 것도 포함되지요. 그러니까 내가 컵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순간 더 많은 것을 포함시켜서 내가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이 컵과 이름은 일치되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이 건방떠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괘씸한 거예요. “마귀지? 마귀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지?” 진실로 주님 앞에서, 또는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누가 지정합니까? 그것은 만드신 분이 지정을 해야 될 텐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너무 과도하게 다른 의미를 부과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지요. 벌거벗었으면 벌거벗은 채로 있으면 돼요. 그런데 벌거벗음으로 있는데 거기에 플러스, 인간이 뭘 보탰습니다. 죄 짓고 난 뒤에 뭘 보탠 줄 알아요? “부끄러워라.”를 보탰어요. 거기다 부끄러움만 보탰습니까? 부끄러우니까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라고 했어요. 하나님 보기에 참 웃기지도 않아. 내가 그런 인간은 만든 적이 없다는 거예요.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인간으로 만든 적이 없어요.

그런데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또 해 입었네요. 하나님 보시기에 놀고 있네. 웃기지도 않아요. 내가 만든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괴물이에요. 제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참 답답해요. 이 육체를 일단 나라고 하자. 이것부터 사달이 난 거예요. 나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 뭡니까? 하나님이 만든 육체를 ‘너’라고 부르고 거기에 또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하나님을 불러요?

제가 이렇게 흥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우상입니다. 우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언약궤에서 나오고, 언약궤는 시내산에서 돌판이 내려왔습니다. 시내산에서 돌판이 내려왔고 그 돌판을 안치하는 것이 언약궤고 그 언약궤를 둘러싼 구조물이 성전입니다.

성전을 통해서 우상이냐, 아니냐를 결정지어 버려요. 그리고 우상은 주님이 제일 싫어합니다. 우상숭배해서 지옥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상의 시작이 어디냐? 없으신 분이 우리한테 이름을 붙이기 전에 먼저 우리가 내가 여기 있는 것을 그 분의 허락없이 내가 내 맘대로 있다고 주장하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활동을 개시하고 행동을 개시한 겁니다.

그러면 인간이 신을 섬길 때 그 신은 누굴 위한 신일까요? 내가 신을 섬긴다면 누굴 위해서 섬길까요? 나를 위해서 신을 섬기지요. 그것을 가지고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 시작할 때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 너를 위하여 어떤 신도 믿거나 만들지 말라.” 신이 없다면 우리는 무신론자가 되어야 되는데 우리는 신을 믿어버려요. 그것은 누구를 위한 신입니까?

신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내가 과도한, 원래 신도 아닌데 과도한 이미지를 거기에 퍼부어서 그것을 신이라고 질질 끌고 나에게 결합을 시킨 겁니다.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그 증거를 대겠어요. 흥분할 것이 아니고. 출애굽기 32장을 봅시다. 8절이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는데 땅에서는 난리도 아니었어요.

손에 끼었던 금가락지와 귀걸이 빼서 금송아지 형상 만들고, 춤을 추면서, 이 날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해서 주일 지킨다, 부흥회 한다,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그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옵니까? “자기를 위하여” 신이 없잖아요. 신이 없는데 자기는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에요. 신이 없으면 누구도 없어요. 나도 없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내가 없어집니까? 나는 없지만 뭐는 있습니까? 숨겨진 하나님이 만든 내 육체는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러면 무엇이 필요해요? “숨어계신 하나님이여, 이 육체와 숨겨진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떤 고리로 맺어져 있습니까?” 이게 바로 언약이라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율법이고 말씀이거든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육체를 만들고 이름을 지었잖아요. 아담이잖아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리의 신체와 아담이 부합이 돼요. 그런데 그 아담이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 아담이 하나가 안돼요. 하나님 생각하는 아담과 그리고 인간 본인이 생각하는 아담과 일치되지 않을 때는 둘 중 하나를 없애야 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만들고 두 번째 아담을 준비했습니다. 그 두 번째 아담이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마지막 아담이에요.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자기 아들을 인간이 만든 그 실패한 인간대신에 자기아들을 완벽한 인간으로 두 번째 보내신 거예요. 기독교가 감이 잡히십니까? 복음이 감이 잡힙니까? 가짜 붙들고 나라고 여긴 거예요. 간단한 문제에요.

가짜 붙들고 나라고 나오니까 진짜 예수님께서 피 흘리면서 “이리 와서 내 십자가 앞에서, ‘아, 나는 가짜군요.’라는 고백들을 하라.” 그 말입니다. 내가 너를 죽여주고 내 형상으로 다시 진짜 아담에 속한 지체로 만들어줄 테니까 오라는 거예요. 와서 너의 가짜임을 고백하라는 겁니다. “주여,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렇게 되라는 그 말이에요.

지금 제가 이야기한 가운데서 일부러 뭘 빼돌렸는가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나’라고 규정했던 그 배후세력,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섬기게 만든 그 배후세력, 그리고 자기있음을 계속 강조하는 배후세력을 언급을 안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계속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상이다, 우상이다, 우상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하지만 마지막에 감추어진 것이 나타날 때는 그 배후세력은 바로 뱀, 사탄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옛뱀, 용, 사탄.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소유된 육체를, 이미 소유당한 피동적인 육체가 자기를 주인공 삼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에게 이름을 붙이는 오류와 망발을 저지르는 이것을 마귀가 뒤에서 조종한 겁니다.

“이제는 에덴동산 그리워하지 말고 독자적으로 살아라. 네 힘으로 살아라.” 그게 바로 가인의 족속이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아니야. 우리는 나와 나의 기초가 된 육체와 합치되지 않아.”라고 하는 사람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하면, 그 안에 장차 오실 미래의 어떤 분의 자리,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 있어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인간은 나고 너 아니야.”라고 이야기할수 있어야 되겠지요.

그게 누구냐 하면, 아벨 속에 있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영이 아벨 속에 있다 했지요. 결국 아벨은 가인이 “이 씨!” 하고 때려죽여버렸잖아요. 죽이니까 아벨은 죽은 거예요. 아벨이 죽음으로서 뭐가 들통났습니까? 그런 발언, 그런 멘트를 날렸다는 말은 이미 가인의 세계, 인간의 세계는 엉터리라는 것이 폭로가 되어버린 겁니다. 인간의 있음의 세계가 폭로가 된 겁니다.

이제부터 어렵지 않아요. 쉽게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만들었지요. 맞지요?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자기 패물 다 내놓아서 성막 만들고 언약궤 만들었지요. 그 재료를 다 내놨잖아요. 자 이제 문제 나갑니다. 언약궤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방금 이스라엘이 만들었다고 했잖아요. 이스라엘이 만들었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어떠한 것을 숙제로 부여받느냐 하면, 언약궤, 그 아카시아로 만든 그 나무상자를 비롯해서 모든 성막안의 모든 물건과 장식들에 대해서 “우리가 만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누가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하는 그 간격, “내가 만들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었다.”

하나님이 만들었느냐, 내가 만들었느냐, 그 간격을 뛰어넘어야 될 책임과 의무를 지게 되어 있어요. 얼마나 이게 어려운지 몰라요. 우리 애가 좋은 대학에 갔다. 자, 애 좋은 대학 보내기 위해서 엄마가 수고한 것은 누구나 다 알아요. 누가 묻습니다. “그 애 좋은 대학에 갔는데 엄마가 수고했지요?” “예. 제가 엄마로서 수고했습니다.” 와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이의 그 간격, 그걸 그 엄마가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그 말입니다.

어떻게 그걸 좁힐 거예요. 좁힐 수가 없어요. 내 자식을 내가 키운 것이 맞기 때문에. 주님이 천사 보내서 키운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빨래 하려고 하는데 천사가 “저리 가! 내가 할게.” 이렇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천사는 늘 없는 존재고 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할 이유가 뭐냐? 있음의 세계는 우리가 이미 있음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고 점령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성전과 성막의 그 없음을 봉인해야 돼요. 뭘 봉인한다? 없음을 봉인을 해야 되는데, 그 없음의 장소를 봉인을 해야 되는데 없음에서 모든 있음이 있게 하는 능력이 나왔기 때문에 없음을 봉인을 해야 되고, 여기에 들어가게 되면 불로서 태워버려요. 번제의 불로 타죽어요.

문제는 갈수록 이스라엘이 여기에 있는 이 모든 것을 누가 만들었다? 있다는 그 우리들이 만들었다고 해서 그 없음을 뭘로 바꾸는가 하면, 마저 메워버려요. 뭘로? 우리 자신들의 공로로, 자신들의 있음으로 메워버립니다. 그 증거가 뭐냐? 블레셋과 전쟁하는데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앞장세우는 겁니다.

그 점을 봅시다. 제가 너무 어렵게 하지는 않는지 걱정이 됩니다. 민수기 10장을 봅시다. 35절,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다시 한 번 묻습니다. 궤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다고 합니까? 하나님은 자기가 만들었다는 거예요. 증거를 대라고 한다면, 궤가 움직일 때 누가 움직입니까? 하나님이 움직이잖아요.

그러면 궤는 누구하고 연관되어 있어요? 하나님하고 연관되어 있지요. 그러나 아무리 연관되었다고 이야기를 해도 너무 추상적이고 모호해요. 왜냐하면 그 언약궤는 누가 만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자기가 금붙이 빼서 만들었잖아요. ‘이상해. 우리가 만든 언약궤인데 그 언약궤가 움직일 때 하나님이 왜 움직이지? 우리가 만들었는데.’ 주님은 말합니다. “그 원인이 네가 지금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자꾸 너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건너 뛸 수가 없다.”는 겁니다.

주님이 만들었다는 사실과 자꾸 거리가 생겨버려요. 거리가 생기면 자동적으로 충돌이 일어나지요. 계속 봅시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가로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이것은 누가 봐도 조금만 이해력이 있다면, 전쟁은 누가 한다? 이스라엘이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속에 동행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 증거가 뭐다?

언약궤를 앞장세우면 언약궤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같이 움직여서 “누구야? 사랑하는 내 백성을 누가 감히!” 하고 앞장서서 다 처분해 주시고 승리해서 어떻게 돌아온다? 편안하게 “봐라! 내가 다 이겼잖아.” 하고 백성에게 돌아온다, 라고 예언하시면서 이 말씀을 주신 이것에 하자가 없지요? 그 말이 맞지요? 분명히 우리는 다짐했습니다.

그러면 사무엘상을 봅시다. 4장 3절을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 전쟁의 현장에 우리가 있었더라면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승리하게 하자는 이 지도자의 제안에 대해서 우리가 동의했겠어요, 안했겠어요? 동의하지요. 왜? 아까 민수기 읽어봤잖아요. 언약궤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언약궤에 주신 약속이 뭡니까? 언약궤 움직이면 상자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같이 누가 움직인다?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적들을 쳐부숴서 편안하게 승리해서 “그동안 많이 기다렸지? 승리했다.” 하고 돌아오는 그 장체가 언약궤라고 민수기에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면 민수기에 말씀하신 그것을 사무엘상 4장 3절에서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대로 써먹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누가 봐도 하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사무엘상 4장을 봅시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언약궤를 빼앗겼어요, 안 빼앗겼어요? 난리도 아니에요. 사무엘상 4장 10절부터 보면 언약궤는 빼앗기고 난리가 났어요. 22절에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이런 엉망진창에 대해서 누가 해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성경말씀대로 했는데. 우리가 구약을 보면서 이런 것을 발견해야 돼요. 그냥 믿자,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지금 공룡뼈대입니다. 있음이 없음을 옹위해야 되는 이유는 있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없음으로 인하여 구원받는다고 했지요. 동화책에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있지요. 임금님이 얼마나 명품을 좋아하는지 신하들이 그 임금을 놀려먹기로 작정했습니다.

“임금님, 제가 재단한 옷이 어떻습니까?” 임금님이 “안 보이는데?” “임금님, 마음 착한 사람에게만 보이는 최고의 옷입니다.” 임금님이 자존심이 있어서 “그래? 음, 최고의 옷이 맞구나. 한 번 입어보자.” “와! 멋지십니다. 박수! 박수!” 모든 어른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단 한명의 어린애가 하는 말이 “얼레리꼴레리! 임금님이 벌거벗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린애가 올라가더니만 “아빠! 성전에 아무것도 없어.” 우리는 그 아무것도 없음을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음을 못믿습니다. 우리가 있기 때문에. 있음은 반드시 더 큰 힘을 가진 있음을 상징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상징이 바로 우상이에요.

왜 우상인가? 나를 위해서, 현재 그 있음을 옹위해주고, 있음을 후원해주고, 그 있음을 정당화해주고, 내 있음의 모든 활동을 죄로 여기지 아니하고, 착하다고 간주하는 상상의 신을 섬기는데 그것이 없는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우상이 되는 거예요. 제가 전에 총신신학대학원 수련회에 갔는데 큰 기도원에서 했어요.

그 때는 신학생들이 차고 넘쳐서 제대로 잘 곳도 없어서 학교당국에서 학생들보고 되는 대로 자도록 했어요. 저는 강대상 앞쪽 밑에서 잠을 잤는데 어떤 학생들은 용감하게(?) 지성소에서 잠을 잤습니다. 기도원원장 난리 났어요. “하나님의 성령이 계시고 주님이 계신 그 장소에 왜 건방지게 소위 신학을 한다는, 믿음이 있다는 신학생들이 왜 거기서 잠을 잤느냐?” 해서 수련회에서 큰 말썽이 일어났습니다.

왜 지성소에서 자느냐는 말이지요. 그래서 신학생들이 “지성소가 어디 있는데요?” 벌거벗은 임금님이야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또 한 3, 40년 전에 여전도사가 멋도 모르고 강대상에 올라갔어요. 어디 강대상에 여자가 올라갑니까? 강대상에는 제사장인 남자만 올라가는 것이지 여자는 아래 강단, 찬송 인도하는 거기만 머물러야지 여전도사가 위에 올라가느냐는 말이지요.

참 이야기가 웃기지도 않지요. 왜 인간은 언약궤라는 것을 우상으로 만들었고, 성전을 우상으로 만들었습니까? 그 이유는 뭐냐? 내가 여기 있음을 없음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나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이 인간이야.” “아닙니다. 저도 인간입니다.” 우리는 인간 아닙니다. 새로운 인간 되어야 돼요. 우리는 서로가 보기에 인간이라고 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흙입니다.

진짜 천국가야 인간입니다. 세리가 되었든지 창기가 되었든지. 진짜 천국에 가려면 진짜 인간과 만남이 있어야 돼요. 진짜 인간으로부터 호출당하든지 붙잡히든지 해야 돼요. 그 진짜 인간되시는 예수님이 홀로 하신 그 효과, 같이 동반되는 그 효과, 부대효과, 주님이 우리를 대역해서 하신 그 대역의 효과를 우리가 성령으로 받을 때 우리는 “아 참! 우리는 그냥 육체이지 나가 아니군요.” 진짜 나는 주님이 와서 ‘너는 내 것이다.’ 할 경우에만 주님의 인생으로서 ‘나’라고 명칭을 붙일 수가 있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해지만 이런 컵과 ‘컵’이라는 이름과 합치되지 않습니다. 컵은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요. 딱 이것을 컵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아무리 둘러봐도 여기에 ‘나’는 없습니다. 내 눈에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다리 보이고, 손 보이고, 옷이 보이지 여기 ‘나’가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 이 부분에 있습니까? 글자 써놓으면 ‘나’가 되는 거예요? 있지도 않은 나를 위해서, 허구적인 나를 위해서 왜 우리 육체가 평생 걱정하고, 염려하고, 공포속에 놓이고, 위협을 받았습니까? 성경에는 “살든지 죽든지 너희는 나의 것”이라고 했는데, 나의 주인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나의 주인을 모르고 우리는 일방적으로 누구의 꾐에 빠져서 “이것은 내 것입니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너라는 그것을 내놔봐.” 있어야 내놓지 없는데요. 결국 나는 허구고 그 나가 믿는 신도 허구인 거예요. 진짜는 뭐냐 하면, 내가 움직이지 않는데 주께서 움직이는 겁니다. 언약궤를 만든 것이 나라고 우기면 안돼요. 사실은 주님이 언약궤를 만들었기 때문에 주님이 언약궤를 움직일 때만 언약궤에서 주님이 일어서고 언약궤가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내가 홉니와 비느하스같이 언약궤를 들고 간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하고 언약궤라고 이름을 부르는 우리의 생각하고 합치되지 않아요.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뭐냐? 우리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이것을 동원하자고 나선 겁니다. 이스라엘은 누구의 나라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지 이스라엘 본인들의 나라가 아니에요.

이 육체는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따로 있고 이스라엘이라고 여기는 이스라엘이 따로 있는 거예요. 두 번째 이스라엘은 환상이고 허구지요. 그것은 없는 이스라엘인데, 원래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되게 했는데 그 이스라엘 당사자가 하나님 말고 따로 자기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을 만든 거예요.

그래서 그 이스라엘을 누가 지킨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이 지킨다고 나대다가 다 망한 거예요. 언약궤도 빼앗기고 누구도 죽고? 엘리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죽여버려요. “어디서 가짜가 까불어?” 사무엘상 5장 봅시다. 진도 잘 나갑니다. 5장 1절에 언약궤를 누구한테 빼앗겼지요?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제가 묻습니다. 블레셋사람이 언약궤를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궤가 블레셋 사람을 갖고 있습니까? 어느쪽입니까? 지금 5장 1절에 보면, 분명히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았지요. 그러니까 이 모습은 뭐냐? 이스라엘이 그동안 하나님을 오해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빠져나온 거예요. “어디서 착각을 해? 내가 이스라엘 되게 할 때만 이스라엘 되는 거야.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짜 이스라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이스라엘의 적이 되는 블레셋 손에 사로잡힙니다.

사로잡히고 난 뒤에 그 다음 5장 4절을 보세요.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희한합니다. 그들에게 다곤신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믿는 다곤신이 이스라엘이 믿는 여호와를 이겼다고 언약궤를 포로 끌고 오듯이 가져왔습니다.

언약궤를 다곤신당에 가져다 놓은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가 움직이면 하나님도 같이 움직인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전략은 대실패였습니다. 언약궤는 그냥 상자일뿐이었습니다. 상자일뿐이라는 것은 그 상자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냥 내가 만든 상자일뿐이라고 여긴 겁니다. 이거 의미 있습니다. 내가 만든 상자이기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 상자도 아무것도 아니라, 그것부터 출발해야 진짜 우리자신을 알아요.

이 정도로 우리는 우리를 못 넘습니다. 모든 것이 내것이라는 그 욕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하지만 못벗어나는 우리를 주께서 구원해 내시는데 방법이 뭐냐? 일단 주님이 우리를 떠나요. 떠나게 되는데 언약궤가 다곤신당에 안치가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4절에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cctv를 달아봅시다. 다곤 신당에 cctv를 달아놓고 언약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본다고 생각합시다. 무슨 일이 일어났지요? 언약궤가 있는데 상자에서 어떤 허연 수염을 한 노인네가 나오더니 “이놈의 손모가지!” 뚝뚝 부러뜨리고, 목가지도 부러뜨리고 다시 상자 속으로 사라졌습니까?

그렇게 상상하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나’라고 하는 범주를 못 벗어난 범위내에서 극단적으로 상상해 낸 그 상상의 전부입니다. 문제는 그 상상의 전부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비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상상의 전부와 합치되고 같은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는 겁니다.

허연 영감님이 나와서 안수하시고, “여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니 잠잠할지어다.” 하박국 3장 1절을 예배시작하면서 읽고 파이프오르간 치고, 이게 다 뭐냐 하면, 우리가 상상했던,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지어낸 전부가 그 정도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다곤신상은 부서졌습니까?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습니까? 왜 다곤신상의 모가지가 부러지고 손모가지 발모가지가 다 부러진 겁니까?

어떤 물리적인 접촉도 없었을 것인데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도대체 이 상황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결국 우리는 뭡니까? 정답은 모른다는 것이 정답이지요. ‘모른다’가 정답입니다. 그 ‘모른다’가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우리가 안다는 것은 누가 아는가? 내가 아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애초부터 없는데 나를 상정해놓고, I know, 라고 한 거예요. 두 단어잖아요. I 있어야 되지요. 그리고 know도 있어야 되지요.

I know, 내가 안다, 둘 다 엉터리입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나와야지요.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이며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라는 결과를 낳는 것은 바로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다곤신상이 손모가지를 다 분질러 놓으신 주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했기에 주님에 의해서 나는 모른다는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라는 고백만 내놓는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그냥 사세요. 어떻게 살더라도 주께서 유발한 결과입니다. 어떻게 해도 우린 30배, 100백의 열매를 마음껏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졸음마귀를 이기고,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가 얻은 것이 아니에요. 그냥 좋은 땅이에요. 그냥 좋은 땅에 주께서 씨앗을 심어서 주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왜? 우리 몸을 통해서 숨겨진 것이, 우리 몸을 통해서 나타날 때 그것을 두 자로 뭐라고 하느냐? 감추인 것이 나타난다고 했지요. 마태복음 13장 35절에서요.

그것을 뭐라고 하는가? 두자로 크게 써야 돼요. 성전입니다. 구약이 공룡이라면 그 공령의 뼈대구조가 뭐라고 했던가요? 그게 성전이라고 했지요. 성전이 무엇이냐? 없는 것이라고 했지요. 없는 것인데 있는 자들이 없는 것을 옹위해야 되고 그것을 봉인해서 있다는 말이지요. 봉인한 그것이 드디어 신약세계에서는 공개되어 버립니다.

“성전 보여줘.” “자, 여기.” “그것은 너잖아.” “나 아니야 성전이야.” “성전 꼴 하고는. 세수도 안하고 손톱도 길고, 무슨 이런 성전이 다 있어?” 손톱이 길든, 머리가 헝클어졌든, 민낯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그것마저 주께서 하신 결과로 보는 거예요. “내가 먼저 있고 그래서 내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니고 네 육체에 합치되도록 활동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고 주님 쪽입니다.”를 늘 고백할 때 이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10분 쉽시다.
 오용익(IP:125.♡.25.28) 16-10-13 20:15 
뉴저지아카데미-구약의 흐름 10강(이 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해놓고 하나님 자신은 나타나지 않아요. 이것이 얼마나 인간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입니까? “이쪽 신과 이쪽 신과 어느 쪽이 진짜 신인 줄 알아? 이쪽이 나니까 나를 믿어.” 얼마나 쉽습니까? 옛날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기억나시지요. 그 영화에 보면 낳아준 엄마와 길러준 엄마가 나오잖아요. 애 보고 “둘 중 누가 너의 엄마냐?” 고르라고 하잖아요.

관객들 그 때 막 울고 그랬습니다. 왜 우리에게 그렇게 쉽게 하나님을 선택할 권한을 주지 않고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니까, 신을 만들면 그것이 우상이고, 또 신을 만들면 그것도 우상이고, 여호와의 절기라고 해도 그것도 우상이고. 그것은 뭐냐? 인간이 있음으로 시작해서 뭔가를 행동하게 되면, 인간인 너는 모르지만 인간 배후에 인간을 장악한 세력이 너를 앞장세워서 자꾸 참된 하나님과 대립이 되는 요소로서 인간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 주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 할 때, 아까도 쉬는 시간에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님을 죽인 것이 사람이 아니에요. 가룟유다에게 뭐가 들어갔습니까? 가룟유다에게 사탄이 안들어가면 그에게 예수님을 팔 마음이 없어요. 자기도 양심이 있는데 왜 스승을 팔아요. 얼마나 후회했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자살까지 했겠습니까?

사탄으로서 예수님을 죽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에서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뭘 반드시 물게 되어 있습니까? 발굼치를 물게 되어 있어요.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굼치를 문다는 것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옵니까, 안나옵니까? 안나오지요. 현실에서 배제된 이야기거든요. 그러면 현실은 누가 만들어요? 나와 너라고 여기는 자들이 만들어요.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마귀 이야기도 없고, 귀신이야기도 없고, 예수님 이야기도 없고 전부 다 배제되는 거예요. 그 있음의 세계는 있는 자들이 협력해서 지혜를 끄집어내서 문명의 수례바퀴를 돌리는 겁니다.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 그 유명한 횬대사장이 했던 이야기가 아닙니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일곱 번 넘어져서 여덟 번 일어나면 된다는 겁니다.

결국 이 세상은 누구 손에 달렸다? 인간 손에 달렸다는 것을 우리는 어릴 때부터 교육 받아서, 아무리 성경을 배워도 ‘그래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내가 살아가는거야.’ 이것이 몸에 배어버렸어요. 이것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도, “좀 도와주시면 될텐데.” 꼭 그런 식으로 해요. “주여! 오늘도 기도하러 왔습니다. 커피 세잔 마실 각오까지 하고 왔습니다. 철야합니다.” 기도가 자기노동이 되고 말았어요. “이 노동의 대가는 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습관화, 몸에 배어서 기도하는 나에게 응답이 와야 되지 기도는 내가 했는데 응답은 저사람에게 오게 되면 기도할 맘 안납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해도 은혜 주신다, 이 말을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러면 안해도 되겠네.” 그렇게 합니다. 그 말은 뭡니까? 그동안 모든 일은 누구를 위해서 했다? 내가 나를 위해서 했다는 그 티를 내고 말았어요.

그게 구약에서 십계명 시작할 때 너를 위하여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다시 말해서 너를 위해서 신을 만들지 말라는이야기와 합치되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목사님 이스라엘이 왜 있습니까?” 망하라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망하라고 있는 겁니다. 왜요? 시범조교거든요.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이래서 인간나라는 망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나라는 바벨론제국으로 통합되면서 바벨론은 망합니다. 망하고, 망하고, 다 망하는 거예요. 망하는데 망하는 이유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망하는 유대나라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결국 메시아를 누구 손에 죽게 합니까? 이스라엘 손에 죽게 함으로써, 너희 애비는 악마라는 예수님의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이 죽였다? 그러면 안되고, 있음이 없음을 죽였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있음이 뭐로 바꿔야 됩니까?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고 그 없음에 주님께서 같이 참여해서 그 없음을 다시 새로운 있음,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면 그게 바로 구원이지요.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고후 5:17)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은 죽은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분명히 죽은 것이 맞지요? 모든 사람이 죽은 거예요. 죽었으면 우리의 관심사는 죽은 나에게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죽이신 예수님에게 둬야 합니까? 예수님에게 관심사를 둬야지요.

옳은 설교, 참된 설교가 뭐냐 하면, 예수님 이야기 하는 거예요. 이런 조로 설교를 하면 나쁜 설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구원 받읍시다, 이것은 정말 나쁜 거예요. 이렇게 해서 구원받읍시다, 하면 관심사가 설교 내내 어디에 관심을 두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돼요? 저렇게 하면 돼요?” 자기한테 관심을 두겠지요. 그런데 “주께서 하셨습니다.”하는 말은 누구에게서 관심을 뚝 끊어라? 내가 어떤 자며, 내가 무엇을 해야 되며, 헌금을 얼마를 해야 되며, 교회출석, 예배전 몇 시까지 와야 되는데, 그런 것을 뚝 끊어버리라는 말입니다.

다 끊어버리고 그냥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주님은 나에게 무엇을 행사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만끽하면 돼요. 성질 같으면 설교하는 대신 양동이에 물을 담아서, 그 양동이에는 하나님의 의라고 써서 앞자리에서부터 퍼붓고 싶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퍼붓는 주의 은혜를 받으소서, 그런 이벤트를 벌이고 싶은데 이제는 힘이 없어요.

그게 바른 설교입니다. 그게 기쁜 소식, 복음이에요. 한 것도 없이 흠뻑 온 몸이 젖어버리는 겁니다. 뭘 해드릴까요, 이러고 있다가 흠뻑 젖어버리면 그동안 까불었던 것들이 다 날라 가버려요. “손 놓고 퍼붓는 것을 받아라.” 이게 성령세례고 성령충만이잖아요. 이거 외에 뭐가 있습니까? 제가 그동안 성경공부를 제대로 한 적도 없지만, 제가 알기로는 이거예요, 복음이라는게.

설교자가 되었으면 “주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가 나와야지 “여러분이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그게 왜 나옵니까? 속이 터져요. 우상이 교회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관심사가 그리스도안이지요. 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했기에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까?

그 뒤에 19절에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여기서 행위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주체가 누구예요? 하나님이잖아요.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세상에, 이렇게 고마울데가. 죄는 누가 짓고? 우리가 짓고, 우리가 우상을 만들고, 우리가 나밖에 모르고. 그런데 그 죄를 누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 분이 누구냐,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참 횡재를 했네요.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뭐가 된다?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하심이라.” 교인들 성경 안 봅니까? 그들의 성경책에는 고린도후서 5장 21절이 빠져 있어요? 딱 보면 보이는데? 안보여요? 보이잖아요.

헌금하면 복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가 선교하면 하늘나라 확장된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 수가 없어요. 선교가 몇 명 보내면 되느니, 제직회 할까요,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요. 제직회 하나 안하나 교회에요. 우리가 하나님이 퍼줘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습니다. 그냥 사세요. 하나님의 의로서. 우리의 죄가 나오는 것은 맞아요. 우상 만드는 것 외에 다른 주특기가 없어요. 우상만드는 것이 우리는 재주에요. 자기자랑하려고.

그런데 그 죄를 빼돌리는 그 중간작업, 중보자작업을 믿는 것은 성령받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겁니다. 자 이제 신약은 해답이고 구약은 문제지고. 그래서 해답부터 먼저 알고, 이런 반칙을 범합시다, 해답부터 먼저 알고 그 다음에 구약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윗언약인데……, 내심 걱정이 됩니다. 어렵지만 할 수 없어요. 구약성경이 있으니 전해야 됩니다.

다윗언약을 이제부터 합니다. 다윗은 유명합니다. 그런데 언약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기에 사람들에게 거부당해요. 언약이 나오면 다른 교회는 졸기 마련이에요.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그런데 언약이라는 뉘앙스가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바르게 하고, 착하게 행동하기 전에, 세상에는 우리 빼놓고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 언약이에요.

우리 빼놓고. “누구 구원받을까요?” “이 사람 구원하고 저 사람은 버리라.” 그것이 창세전에는 약속이고 그것이 세상에 나타난 것을 언약이라고 해요. 그러면 “신이시여, 제가 어떻게 하면 복을 받습니까?” 하는 사람에게 언약이 관심사가 되겠습니까, 관심사 밖의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자기에게 관심두는 사람에게는 뭐가 자꾸 배척이 될까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이 배척되겠지요. 그래서 언약이라는 말이 자꾸 배척되는 거예요. “목사님, 처음 들었어요.” 이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러면 언약이라는 말이 생소하니 그냥 약속이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약속이라는 말을 못해요. 약속이라는 말은 왜 못하느냐 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면 사람들이 대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네가 지키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약속은 안 되겠어. 언약이라고 해야 돼요. 언약은 인간이 빠졌을 때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것이 언약인데, 그게 사실은 약속인데 그걸 구체화 한 것이 언약이거든요. 방주만들 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 만들어줄까, 그런 식으로 노아에게 협의를 한 것이 없어요. 그냥 만들라고 되어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했잖아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은 뭐냐?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뭐냐? 어떻게 죄인을 하나님과 스스로 화목케 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나온 하나님 쪽에서의 조치가 화목제물이고, 십자가고, 언약이거든요. 지금 자기 일에 분주한 사람에게 뭔가 들이대게 되면 우리는 이질적인 것은 배척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의 세포가 면역체계가 있어서 과도하게 밀치게 되어 있어요. 너무 과도해서 알레르기가 생기잖아요. 이만큼 들어왔는데 기침, 콧물, 두통, 재채기를 하면서 온갖 싫다는 표정을 다 짓게 되잖아요. 알레르기. 어릴 때부터 흙하고 안놀아서 그래요. 면역성이 떨어져서 과도하게 그런 반응이 나와요. 농촌 애들은 알레르기가 없는데 도시 애들은 알레르기가 있답니다. 애를 너무 깨끗하게 키우지 말라는 거예요. 할 수 없지요. 시대가 그런데 어떻게 하겠어요.

지금 언약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조치하면서 언약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우리 행함만 생각하니 언약이 배척받지요. 그 점을 생각해 봅시다. 다윗의 적이 있어요. 다윗의 적이 누구지요? 사울이지요. 사울 때문에 생긴 책이 있어요. 그게 시편입니다. 얼마나 다윗을 못살게 구는지.

얼마나 힘들었으면 다윗이 이렇게 했어요. 시편 21편에 나오지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편 22:1) 예수님은 그것을 그대로 십자가에서 인용해버립니다. “다윗아! 사실은 네가 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네 속에서 너의 상황과 너의 시대상, 너의 삶의 정황 속에서 내가 너에게 그런 고통을 주었다. 그 고통의 완성은 십자가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누구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까? 그게 사울왕 때문에 그런 거예요. 우리가 첫째 시간에 배웠습니다. 사울왕은 무엇을 시도하느냐? 항상 중앙지점이 빈곳이어야 되잖아요. 빈곳에 덜렁 자기가 앉아 있네. 당회장실에. 참 기가 차서. 이스라엘 왕이 누굽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잖아요. 안계신 분이 왕이에요. 말이 희한하지요. 안계신 분이 왕인데.

그걸 계신 분으로 바꾸겠다는 거예요. 본인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다윗은 “임금님! 내려오세요.” “안 내려가.” 그 나라는 자기 나라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당회장이 교회 주인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왜 당회장이 주인노릇 합니까? 교인들이 목사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왜요? 사무엘상 8장에 나옵니다. “우리한테는 지도자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어리석은 자들. 요한 1서 2장 27절을 봅시다. 이것은 다 같이 읽어봅시다. 너무 중요해서요.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누가 건방지게 나를 가르쳐? 누군데? 마태복음 23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마 23:8-10)

그런데 왜 자청해서 너희가 백성의 스승이 되려고 하고 자청해서 아비가 되려고 하느냐는 말이지요. 이런 구절 쏙쏙 뽑으세요.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목사나 설교자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왜 있는겁니까? 그 사람은 자기 고백만, 신앙고백만 내놓으면 돼요. 왜? 성령받은 다른 사람이 참고로 하면 되니까.

목사가 강단에 서서, 굳이 이대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 본문을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 속의 성령께서 어떻게 하실지 그것은 제 소관이 아니고 친히 여러분의 성령께서 제 말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하실 겁니다.’라고 강단을 내려와야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저는 이 본문을 통해서 이렇게 은혜를 받았는데 여러분은 모르지요. 왜?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은 제가 아니기에.’

자, 이 교회의 중앙지점은 비어있습니까, 채워져 있습니까? 비워져 있지요. 그게 바로 성전인 거예요. 있음은 무엇을 증명한다? 없음으로 인하여 있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음이 한시적인 있음, 즉흥적 있음, 사건으로서의 있음이 된다는 말이지요. 옛날 이런 낭만적인 카페이 있어요. 숲속의 빈터. 숲속 한 가운데 벌목을 해서 만든 카페. 상상만 했는데 뉴저지에 와서 보니 왜 그리 많은지. 빈터에 말이 어슬렁거리는 것도 봤고, 아침 운동하면서 사슴이 막 뛰어노는 것도 봤지만. 이 근처에도 빈터가 있어요.

숲 속의 빈터. 다시 말해서 원형탈모. 중앙이 비어 있을 때 거기는 아무도 범접하면 안돼요. 분화구거든요. 생명이 솟아나는 분화구. 거기 들어가면 불타버립니다. 하나님이 하도 이 마귀들이 인간들에게 신을 섬기라고 강요를 하니까 차라리 하나님은 없는 하나님으로, 없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그 없는 하나님을 건드리지 못하는데 인간 배후의 악마가 “물어! 물어!” 해서 예수님이 물려죽었잖아요. 발꿈치.

그러니까 인간들은 그냥 예수를 보통 자기와 같은 목수의 아들로 쳐주지만, 사탄이 가룟유다에 들어가니까 사탄이 가룟유다 보고 “물어! 물어!” 그래서 물었잖아요. 희한하지요. 예수님의 진위의 기준은 빈 무덤입니다. 이것도 어렵다. 무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이 없는 것과 빈무덤이 달라요. 무덤이 없는 것은 아예 죽은 적이 없다는 뜻이고, 빈무덤은 분명히 죽었는데, 분명이 죽었는데 있어야 할 시체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무덤이 없는 것이 아니고 빈무덤을 남기신 분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면 여전히 이스라엘처럼 없는 분이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모이게 하셨고, 있게 하셨습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그분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이름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다시 말해서 모이면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하나하나 호출해서 모일 때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없음의 이름으로만 모이게 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 없음에 의해서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어야 되는데 반석의 자격이 뭐냐? 있음이 얼마나 통탄할만한 아픔으로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베드로가 배신해 버리지요. 배신했기에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이 되는 겁니다. 있음이 없음을 핍박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 있음이 얼마나 악독하게 있음인지, 있음 배후에 악마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뭐라고 합니까? 자기 제자보고, 조금전까지도 칭찬을 해놓고. “사탄아!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그 다음에 뭡니까? “네가 사탄을 생각한다.” 그랬습니까? 네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그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네가 사람 일을 생각한다.” 사람일 = 뭐다? 사탄의 일이에요. 성경은 그렇게 통합니다.

그렇게 공룡의 뼈대구조를 형성합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유난을 떨고, 설치고, 절기 지킨다고 난리 피운다고 그게 신앙이 아니고, ‘내가 없어야 되는데 왜 살았지? 주께서 활동하시는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뭐냐? 이것은 이번에 미국에 와서 제일 어려운 대목을 영광스럽게 우리가 대하게 되었습니다.

제일 어려운 대목을 찾아봅시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었어요, 하고 깜짝 놀랄 겁니다. 마태복음 13장 12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아멘!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이게 말이 됩니까, 안됩니까? 없는데 빼앗길게 어디 있어요? 이 말을 쉽게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아! 네게 없는 것을 내놓아라.” 그런 뜻이에요. “인간아! 네게 없는 것을 내놓아라.” 없는 것을 내놓으라고 할 때 인간은 멍~ 하지요. “하나님이여, 제게 있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아니. 있는 것 말고 없는 것을 내놓아라.” 더 쉽게 해서 “분명히 없었는데 새로 생긴 것을 내놓아라.” 그런 뜻입니다. 분명히 없었는데.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현재 있음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나를 없음으로 이전시켜요. 없음으로 이전시키고 난 뒤에 뭔가 남아 있는 것이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보고 죽었다고 했어요. 죽었는데 손도 있고 발도 있고 뭐가 있지요. 그게 누구것이다? 그게 주님의 것이라는 거예요. 그걸 받겠다는 거예요. 명의이전이에요. 간단한 단어를 생각 못해가지고.

내 명의로 된 것을 누구 명의로? 주의 명의로 바꾸는 겁니다. 바꿀 때 누굴 죽여야 돼요? 허구적인 누굴 죽여야 되는가? 육체는 있는데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나는 없지요. 그 없는 나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육체는 있는데 육체를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셧습니다. 이름도 붙였어요. 아담이라고. 그런데 그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아담이 아담을 관리해요.

아담이 몇 개가 되었어요? 두 개가 된 거예요. 제가 아까 어렵다 했지요? 아담이 두 개인 거예요. 두 개 중 한 개의 아담을 없애야 될 필요가 있는 겁니다. 다윗언약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주인공은 사울이라 하지요. 다윗은 뭐냐? “임금님! 중앙을 비워놓으세요.” “이게 어디서? 이스라엘은 내꺼야.” “아닙니다. 하나님 겁니다. 중앙을 비워놓으세요. 골리앗 누가 이겼습니까? 임금님이 이겼습니까, 하나님이 이겼습니까?” 자기가 이겼다고 하지 않아요. 임금님이 이겼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겼다고 하지요.

하나님이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없으신 분이 이스라엘을 계속 지켜나갑니다.”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랬던 사무엘하 11장에서 우리아장군이 암몬과 전쟁할 때 다윗은 심심해서 왕궁 지붕위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누굴 봤는데 뒤태가 너무 아름다워요. 너무나 몸매가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어요. 아름다움 앞에서는 그녀가 유부녀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이미 그 여자를 보고 있다는 자체가 어떠한 조건도 다 끊어버릴 요량으로 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인간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이야기의 주인공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뉴욕 양키스 4번타자 참 잘쳐. 그런데 뉴욕 양키스가 별거 아니야.” 자기딴엔 별게 아니라고 해도 이미 어디에 잡혀 있어요. 뉴욕양키스에 지금 반해버린 겁니다.

“한국교회 썩었어. 한국교회는 교회도 아니야. 당회장이 어쩌고저쩌고……” 그 말은 뭐가 부럽다는 말이에요? “큰 교회 부러워라.” 하고 같은 이야기에요. “북한 김정은이 그 나쁜 인간! 핵실험이나 하고 있고.” 아까 식사하실 때 고향이 가야산 야로분이라고 했는데 그분의 소망은 실제는 이런 말입니다. 어서 북한 땅도 우리 땅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이야기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그 이야기의 범주안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암몬과의 전쟁은 뒷전이고 다윗은 그 여자를 사모해서 임금의 권세로 데려와서 동침했고, 마침 그것으로 임신이 되었고, 그 여자는 남편이 있는 것을 알았고,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다윗은 지금 중앙을 비워놓았습니까,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까?

중앙을 차지하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 자리 내 자린데? 내려와.”라는 조치가 필요하겠지요. 그 조치가 뭐냐? 그 조치를 위해서 주께서 준비한 것이 아리따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입장에서는 뭐냐? 환란이지요. 집의 재산이 한 80억된다. 환란입니다. 애가 공부 잘해서 브라운대학에 입학했다. 환란입니다. 딴 것은 다 내놔도 그 애는 못내놓을걸요?

나라는 이 이미지, 있지도 않는 나라는 이 이미지, 나라는 것은 없어야 되는데 그 내 아이, 그 나와 관련된 그 공부를 잘하는 내 아이가 나의 중앙을 차지하게 되면 그 애를 나는 흠모하면서, 사모하면서 바라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 외손녀! 오냐, 오냐!” 사모하는 거예요. “보고 싶어라. 외손녀!” 세상에, 주님이 중요합니까, 뭐가 중요합니까? 주님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찬송가는 잘도 부르면서 실제생활에서는 허하기를 내가 허하지 아니해요.

지금 말장난 하고 있습니다. 뭔가 비어있는 것을 내가 허락지 아니해요. 지난번에 강의할 때 했잖아요. 주님께서 식빵속의 중앙을 다 떼어갔는데, 비어 있으니까 우리는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안목과 정욕의 안목으로 이 비어 있는 것을 다 메우는 거예요. 이게 어디서부터 왔다? 세상으로부터 왔다. 왜? 세상은 없음을 모독하기 때문에. 없음을 부정하기에, 없음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음으로 하기에.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노력은 모든 문명을 이끌어갈 수 있다. 이 문명은 인간 손에 달렸다. 있음으로 채워라.” 이것이 배후의 악마, 예수님의 발꿈치를 물었던 악마의 마음입니다. 뱀의 후손과 그 졸개들의 구호에요. 하면 된다.

아까 참된 설교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주께서 이 시간, 지금 이 순간 주께서 우리에게 뭘 해줬는가를, 양동이에 물 부어서 덮치라고 했지요. 그러나 세상 교회는 뭡니까? 뭘 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요. “목사님! 뭘 해드릴까요? 뭘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까요? 뭘로 영광을 돌릴까요?” 이거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목적이 뭐냐? 이 교회를 나로 꽉꽉 채우기 위해서, 빈자리가 생기면 안되고, 우리의 열심과 경건함과 훌륭함과 의지와 영광돌림으로 꽉 채우면 참된 교회가 된다고 그렇게 거짓말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란 비어 있어야 되고 ‘우리’라는 성전도 비어있어야 돼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있게 하셨습니다.” 하는 고백이 늘 나와야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해놓고, ‘오늘도 힘들게 설거지는 내가 다 했다.’ 꼭 허구적인 육체의 이미지인 나라는 것을 가지고 내가 깃발을 꽂아야 속이 차고 만족하니까 도대체 이 성질을 언제 고치겠어요? 죽을 때까지 안 고쳐집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조치가 없으면 우리는 구원 못받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할 일은 간단해요. 그런 죄를 계속 쏟아내면 됩니다. 하나님이 비워놓으면 우리는 채우고, 하나님이 비워놓으면 우리는 채우고, 평생 우리 할 짓이 그것밖에 없어요. 다윗은 그 빈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차지함의 결과가 뭐냐? “우리아를 죽여라.” 우리아를 왜 죽입니까? 지금 우리아가 누구하고 전쟁을 하고 있지요? 암몬하고 전쟁하지요.

그러면 암몬은 누구의 적입니까? 이스라엘의 적이지요. 그러면 이스라엘왕은 누구를 원수로 삼고 죽여야 됩니까? 암몬을 죽여야 되는데 암몬을 위해서 전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군을 누구 손으로 죽입니까?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암몬 편에 서서 암몬의 적들의 화살에 의해서,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우리아 장군을 죽여 버렸지요.

그게 바로 다윗언약에 장착된 내용물입니다. 모세가 돌판 깬 것 여러분이 아시지요. 깨진 돌판 그거 무효로 돌리지 않습니다. 깨진 돌판을 대신한 돌판으로 언약궤를 장만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광야에서 원망했지요. 원망해서 주어진 것이 만나지요. 언약궤옆에 만나를 든 항아리를 배치합니다. 고라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제사장을 공격했지요. 공격해서 나온 사건이 뭡니까? 지팡이에서 싹이 났지요.

그거 언약궤 옆에 보관합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죄가 드러나는 그곳이 바로 주님이 나타나시는 곳이 되는 겁니다. 천국은 더러운 땅에서 피어나는 것이 천국입니다. 더러운 인간의 이름속에서 주의 이름이 핍박받는 모습으로, 주님이 빈무덤을 남기면서, 무덤이 없음의 무덤이 아니고 빈무덤, 빈무덤을 남기고 갔을 때, 주께서 승천해서 올라갔을 때……, 여기 어디 승천하는 유명하는 그림을 본 것도 같은데.

옷자락 휘날리면서 올라가는 그 그림 생각나지요. 사람들은 어디 봅니까? “주여, 언제 다시 오십니까?” 하지요. 주께서 땅을 떠나서 주의 나라를 만들게 되면 이 세상에는 주의 나라와 땅의 나라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성령안과 성령밖, 예수 안과 예수 밖, 십자가 안과 십자가 밖, 같이 공존하는 세계.

사도바울은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 우리아를 죽이고 난 뒤에 입 싹 씻었지요. 세상에 자식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자식의 이름은 없습니다. 이름이 없어요. 그런데 그 죽은 자식 이름이 나중에 붙습니다. “에이, 목사님! 애가 죽었는데 무슨 이름이 있습니까? 죽은 애의 이름이 있다니까요?” “에이, 그런 이름은 없어요.” 있습니다. 여디디아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여디디아가 누구게요? 솔로몬이에요. 그래서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거예요. 마태복음 1장입니다. 다윗이라고 붙여놓고는, 남자 이름의 두 개가 들어가지요. 다윗아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는 것이 아니고,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기 때문에 죄인을 누가 구원한다? 우리아를 희생시켜서, 죽을 죄인을 주께서 우리아를 희생시켜서 구원함으로 말미암아 진짜로 다윗은 이스라엘왕의 자격을 얻습니다. 왜? 죄인 중에 괴수기 때문에.

세상죄를 지고 가는 예수님과 딱 닮았어요. 죄도 없으시면서, 우리아를 건드린 일도, 밧세바와 간음도 한 일이 없는 예수님이 간음한 죄인으로, 살인한 죄인으로서 우리 대신 아버지 앞에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서 그 제사를 완성시켜서 그 부대효과로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된 겁니다. 이게 놀라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구약부터 이미 그 카펫을 깔아놓았어요. 영화배우들의 희망이 뭐냐 하면, 레드카펫 밟고 지나가는 거예요. 우아한 드레스 입고. 양쪽에서 카메라가 찍지요. 뭘 깔고? 카펫을 깔고 우아하게 걸어가서 영화제에서 상 받는 그것. “다 팬들 덕분입니다. 오늘 아름다운 밤입니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렇게 극악무도한 죄, 살인죄에다 또 간음죄에다, 그 보다 더 무서운 죄는 이스라엘 왕으로서 이스라엘 적의 편을 도왔다는 그 모든 죄에 대해서 주께서는 타작마당을 마련해서 그 죄인을 살리기 위해서 호렙산에서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그 다윗의 제사의 효과가 솔로몬, 여디디야. 그 뜻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떤 토대위에서만 그 사랑이 만끽되고 느껴지겠어요? 개판일 때, 개판 5분전도 아니고 완벽하게 개판일 때, 엉망진창일 때, 다시 말해서 내가 나에게 절망해야 내 가상적 이미지가 스스로 손을 떼고 포기를 먹게 되는 겁니다.

“내가 만든 나말고 주께서 만든 나 주시옵소서.” 그게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가 있어서 그 나가 우세해서, 나는 선을 행하고 싶은데 내가 나를 포기를 안 먹네요. 주여, 어쩌면 좋아요.” 그래놓고 돌아서서 하는 말이 “찬양하리로다.” 방금 전까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어쩌면 좋아?” 하다가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그 다음 구절이 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라.”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죄없는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에서 해방하셨다.”

결국 이스라엘의 적은 뭐냐? 암몬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적, 다윗의 적은 자기가 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가상적인 다윗 본인이 다윗의 최후의 적이었던 겁니다. 왜? 마귀가 다윗을 나라고 여기고 그 내가 나를 구원 못받도록 훼방질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합니다. “주여, 주께서 내가 드린 제사 안받고, 내가 드린 번제 안받고 주께서 원하는 것은, ‘나는 마귀편이었습니다.’ 하는 그것, 마귀편 된 나를 가지고 상한심령이라고 하는데, 상한 심령을 그대로 드리는 그것, 그럴 때 예루살렘에 은혜를 바가지채로 부어주옵소서.” 이렇게 해서 시편 51편이 끝납니다.

시편 51편 18절,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지금 본인이 이스라엘 왕이잖아요. 본인이 지금 예루살렘에 거주하잖아요. 이런 벽돌로 만든 예루살렘성은 미래의 것이 아니고 허물어져야 될 것이지요. 진짜 미래의 것은 은혜로 세워지는 예루살렘, 성령으로 세워지는 예루살렘성,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하나님의 신부의 드레스를 입고 내려옵니다. 오늘 아름다운 밤이에요, 하고 내려오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관통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약을 알 때 그래요. 인간 배제하고 하나님끼리의 관계에서 성립된 그 언약이 바로 이 지상에서 구체화되면서, 구원받는 사람은 철저하게 마귀에 농락당했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좀더 깊이 나가봅시다. “그러면, 목사님! 다윗언약이라고 했는데 다윗은 그렇다 치고 왜 다윗 뒤에 언약이 붙습니까?”

다윗은 그렇게 구원받았다. 은혜롭고 참 좋은데 그 뒤에 왜 언약이라는 것이 붙느냐? 언약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면, 그 전의 언약이 들어 있어요. 그 전의 언약이 무슨 언약이냐 하면, 모세언약입니다. 모세언약을 두 자로 율법이라고 이야기하지요. 율법을 하나님께서 그 전에 모세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면 모세가 그 율법을 지켜야 됩니까, 지키지 말아야 돼요? 지키라고 요구를 받게 되지요.

못 지키는 것은 알지만 지키라고 요구받게 되는데, “인간이 약해서 못 지키면 그만이지.” 아닙니다. 못지키면 뭘 받는가? 저주 받아요. 목사님들이 대심방할 때 주로 인용하는 것이 신명기 28장이잖아요. 앞부분에 좋은 말씀이 나오지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따라다니는 전도사는 지겨워죽어요. 했던 소리를 또 하고 또 하고.

그래서 제가 심방하는데 여전도사님이 따라왔을 때는 ‘같은 것 또 할 줄 알아요?’ 해서 하루에 열다섯 번 심방했는데 열다섯 번 다 다른 본문 가지고 했습니다. 재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나는 공부해야 되기에 심방기간을 내 공부하는 기간으로 삼아서, 예레미야면 예레미야, 아모스면 아모스, 1장부터 시작해서 어느 집에 가든 1장, 그 다음 집에 가면 2장, 그 다음 집에 가면 3장, 돌아오는 데로 다 했어요. 빨리 떼야 되니까. 빨리 성경을 관통해야 되니까.

그래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안 할 것이 아닙니까? 통으로 뚫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 좋은 기회로 삼았던 거예요. 그 신명기 28장 앞부분에 짧게,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조건이 있어요. 이 말씀을 지키는 자라는 조건. 그런데 세배나 넘게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들어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게 됩니다.

심방 갔으면 그 저주 이야기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는 안 해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와도 복을 받고, 그렇게 해놓고는 나올 때는 봉투 받아 나와요. 그러면 누가 복받은 거예요? 목사 자기가 복을 받은 거예요. 그 봉투 받아서 여전도사에게 커피 값 5천원 던져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챙기고. 나중에 그걸로 사달이 나지요. “목사님, 제가 강단에 올리라고 준 봉투인데 안 올라 왔습니다.” 그래서 회계집사에게 찾아가서 물어낸다고 바쁘고, 쉬쉬하면서 물어내고, 웃기지도 않아요. 그런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율법은 못 지키면 그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연약한 인간이니 봐주겠지, 그런 것 없어요. 저주 내려야 됩니다. 전에 있던 언약은 뭐다? 율법이다. 율법은 뭘 전수한다? 다윗에게 저주를 전수하는 거예요. 그 율법에 의해서 율법의 진수를 다윗이 보여주는 겁니다. 무엇의 대표자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왕으로 있을 때 인구조사를 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세상에, 전염병이 퍼져서 무려 7만 명이 죽었어요.(삼하 24:9) 요압이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인구조사를 했던 거지요.

대표자, 왕이라는 자리가 율법을 못 지키면, 한 사람이 잘못하면 저주가 백성에게 주어집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왕 하나 잘 만나면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공짜로 복받지요. 그게 바로 언약안입니다. 그 언약이라는 말을 예수님으로 바꿔봅시다. 예수안이 되겠지요. 성령으로 바꿔봅시다. 뭐가 됩니까? 성령안이 되겠지요.

성령 안, 십자가 안, 예수 안에서 우리는 뭘 얻는다?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공로입니까? 예수님 공로지요. 예수님이 왕이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쳐다보고 살아야 돼요?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다 우리 임금님 덕분입니다.” 이게 바로 주 예수를 부르는 자 아닙니까? 이게 성령받은 자잖아요. 이게 바로 교회잖아요. 네 자랑, 내 자랑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예수님을 경유하세요, 라고 제가 수백번 이야기하는 것이 그 때문이에요.

예수님 경유하세요. 여기 미국에 오니까 창고가 이상해요. 시카고에 가도 있고 여기에 와도 있고. 제가 목사님에게 물었어요. “이게 뭡니까?” 이런 조그마한 집이 있어요. 창고라고 하던데요. 색깔은 초록색깔도 있고 여러 가지 있지만. 못봤어요? 저는 많이 길가에서 봤는데요. 그게 구조가 뭐냐 하면, 정점이 있고 몽고사람들의 천막처럼 되어 있지요. 그게 바로 예수 안이에요. 정점에 누가 있다? 머리 되시는 분이 있고 그 나머지는 머리 휘하의 효과를, 주님의 의의 효과를 누리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의롭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해답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제 과정에서는 그 예수 안이, 율법 안, 그 다음에 다윗 왕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흐름을 보여주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용익(IP:125.♡.25.28) 16-10-13 20:16 
뉴저지아카데미-구약의 흐름 11강(이 근호 목사)

지금 우리가 ‘구약의 흐름’을 하고 있습니다. 공룡의 골조에 대해서 언급을 한 이유가, 구약이 범위가 엄청나요. 그런데 그 골조를 언급하면서 그 범위의 최고정점이 다윗언약이라고 했습니다. 생소한 단어처럼 느껴지는데 성경에 분명히 나옵니다. 이 다윗언약으로 인하여 뭐가 밝혀지는가 하면, 성도의 운명이 확정됩니다. 성도의 운명, 또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다윗언약을 지난 시간에 우리가 조사를 해보니까 거기에 끼어들지 말아야 할 것이 끼어들었어요. 그게 바로 ‘나’ 그 나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끼어들어서 나가 나에게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그 말썽을 일으킨 나는 마귀가 집어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나를 뺄 수가 없습니다. 이빨이 아프면 내 이가 아파야 되는데 내가 아프잖아요. 누가 욕을 하게 되면 욕이라는 것은 그냥 음파에너지인데 욕을 얻어먹고 난 뒤에는 기분이 되게 더럽지요.

밥도 안 먹히고.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은 못 본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시각적으로 거리가 멀어졌다는 그것뿐인데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보기 때문에 시들시들 앓다가 죽어요. 상사병이지요. 우리는 분명히 육체밖에 없는데 도대체 이 육체를 자기 맘대로 가지고 노는 그 나라는 괴물 때문에 이 육체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나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가 되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나로 남기 위해서. 그런데 그 나가 누군지를 몰라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고 건방지게 내가 나서서 하나님의 법을 지킵니다. 그렇게 법을 지키다 보니까 그 나가 얼마나 수상하다는 사실은 아는데 내가 나서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그 나가 말썽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대책이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나에 대해서 다루기 시작하는 것이 뭐냐? 다윗언약을 통해서 그 나를 변형시킵니다. 원래 육신의 주인공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줄 때 그 이름이 나가 되는 거거든요. 어제 이야기했지요. 어제 어려운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때는 이름 말고 과잉된 여분의 의미가 또 붙어서 합치되지 않고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원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이 육체의 이름은 아담인데 아담에 합당하도록 해야 우리 육체가 편하거든요. 원래 주인이 합치한 나를 집어넣어줄 때 딱 나와 육체가 하나가 되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있고 천국에 살 수가 있는데 이 엉뚱한 나가 끼어들었으니까 그 나를 교체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교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엉뚱하게 끼어든, 있을 필요가 없는 나를 끄집어내는 작업에 나서는데 그것이 예레미야 31장에 나옵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그 무엇에? 그 마음에 두지요. 그 마음까지 누가 들어와요? 하나님의 언약이, 하나님의 치료시스템이 차고 들어오는 거예요. 그 마음 안에 뭐가 들어 있는가? 가짜 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집어넣은 가짜 나가 들어 있어요. 그동안 신명기 28장에서 법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복을 못 받는가?

그 나가 가짜 나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집어넣어준 그 나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이 왔을 때 지킬 수가 없어요. 지킬 수가 없으니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고 대결이 일어나는 겁니다. 육체는 하나님이 만들어놓고, 엉뚱한 괴물이 와서 이 육체를 내 것이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거기에 대해서 율법을 줘서 제대로 말씀대로 지키라고 하니까, 건방지게 마중을 나와서 지키는데 그게 가짜 나이기 때문에 그것이 안 맞지요.

법을 위반하면 저주가 주어지는 거예요. 결국 인간은 나를 감당 못해요. 잘못 들어온 나를 감당 못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정말 세상 살기 괴로우면 이 육체를, 이 그릇을, 가짜 나가 이 육신을 깨뜨릴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이 아시지요? 그것을 두자로 뭐라고 합니까? 자살이에요. 너무 힘들어서.

섭씨 16도에서 18도, 습도는 60퍼센트, 굉장히 행복한 조건이잖아요. 그런데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구비해주신, 하나님이 햇빛 주시고, 달빛 주시고, 별빛 주시고, 공기주시고, 하나님이 자기 육체를 이렇게 쾌적하고 이렇게 좋게 만들어놓았는데 자기 자식을 잃어버렸다는 그 괴로움 때문에 결국 자살하잖아요. 뭐예요, 인생이라는 게?

이 상태가 지금 에덴동산 같아요. 열시 지금 이 상태, 너무나 쾌적한 상태를 줬건만, 우리의 과거에 대한 아픈 기억, 트라우마,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현재의 주님의 축복을 완전히 찢어버리고 짓밟아버리는 것은 엉뚱하게 침투한, 원래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가짜 나가 들어와서 나로 하여금 주신 선물과 은혜도 감당 못하고 못살겠다고 찢어버리고 죽어버리는 거예요.

뛰어내려서 죽고, 약 먹고 죽고, 차에 찡겨서 죽고, 괴로워서 죽고. “주여, 내가 주의 뜻은 알겠는데요. 내 맘이 편치 않습니다.” 맨날 하는 핑계가 그 핑계잖아요. “그 마음? 내가 손대줄게.” 이게 마지막 언약입니다. 방금 우리가 본문 보는데 교회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용어들이 막 쏟아지지요.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이지요. 교회에서 언약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제가 했는데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에 언약이 이렇게 들어 있는데도 왜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이 언약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는 이유가 뭐냐? 언약이 되어버리면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다 해주는 거거든요. 그런데 교회는 그렇게 하게 되면 장사가 안 된다고 생각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자꾸 행함을 강조하는 거예요. 이것 하라, 저것 하라, 법이 있잖아, 법을 지키라.

법을 지키라고 하니까 교인들마다 가짜 나가 가동되는 겁니다. “이것 지키면 보상 줍니까? 이것 지키면 반대급부 주십니까? 이것 지키면 30배, 60배, 100배, 복 주십니까?” 그 복 받아서 뭐하려고요? 그 자체가 마귀적이고 괴물적인데요. 어제도 이야기했는데 최고의 설교는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주께서 이렇게 일하십니다.” 그것을 그대로 감사히 받도록 전하면 그게 최고의 설교라 했지요.

그러면 최악의 설교는 뭐예요? 자꾸 하라고 시키는 거예요. “십자가를 받아들여라.” 누가 받아들이기 싫어서 안 받아들입니까? 꼭 명령조라. “십자가를 받아들이라.”는 그 설교 하고, “십자가가 여러분 속에 스며들 겁니다.” 이거 하고 주체가 달라요. 행위의 주체가 진짜 설교는 주님이고 가짜설교는 내가 뭘 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침례교신학이고, 오늘날 개혁주의신학이고, 그게 구원파에요. 이게 신천지고 구원파거든요. 사람들이 구원파에 쉽게 빠지는 이유가 기존에 이미 훈련되어 있어요.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 훈련이 되다 보니까 이왕 순응하는 것 천국에 확실하게 가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으로 옮기겠다는 거예요. 확실하게 죽어서 천국가고 살아서 복 받는 교회로 옮기겠다는 겁니다. 꾀는 자도 엉터리, 마귀고 그걸 듣는 나의 자아도 엉터리에요.

하나님께서 그 점을 아십니다. 그래서 마지막 언약이 뭐냐 하면,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지키라는 법을 아예 지킬 필요도 없이 우리의 마음을 절개해서, “이놈의 괴물, 마귀 괴물, 어디 들어 있나? 어디 숨었나?” 쫙 쪼개버립니다. “이 안에 들어 있네? 마음 안에 들어 있네.” 드디어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립니다.

들어와 버리면 우리의 자아가 곱게 순응할까요? 발작을 일으키면서 반발할까요? 발작하고 반발합니다. 고개를 젓습니다. “하라고 하면 듣지만 받아들이라고 하면 안 받아들이겠습니다.” 왜냐? 그냥 받아들이면 자기 고유의 가치와 의미가 다 파괴되잖아요. 지금까지 살아온 내 가정, 내 인생, 이것이 완전히 깨지잖아요. 극렬하게 저항입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극렬하게. 십자가를 외면해요. ‘하라’는 것은 받아들여요.

하라는 것은 받아들이는 이유가 하기만 하면 점점 더 나의 가치가 증가하니까. 나는 내가 되기 위해서 살거든요. 나는 정말 내가 되기 위해서 산다. 전에 강의에서 나의 욕망은 무슨 욕망이라고 했습니까? 나의 욕망은 나를 욕망하는 거예요. 이상적인 나. 십자가는 절대로 끼어들면 안 되지요. 나를 파괴하는 십자가, 자기를 부인하라고 소리치는 십자가, 그것은 절대로 끼어들면 안돼요.

집안 식구가 너의 원수라는 말을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되지요. 하면 된다는 쪽으로 긍정적 사고방식이 와야 계속해서 나라는 괴물로 되어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침투하는 언약과 대치가 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이 궁금한 것이, “그러면 목사님, 마지막 언약인 새언약…….” 다시 읽어볼까요? 예레미야 31장 3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얼마나 간단합니까? 하나님의 방법은 “하라, 하라” 했는데 그 동안은 그 “하라, 하라.”가 마음까지 안 들어오고 코앞에 두었어요. 돌판에 써서 십계명 지키고, 안식일 지키고, 십일조 지키고, 그렇게 하다가 이제는 어떻게 한다? 지키지 못하니까 완전히 마음을 절개해서 할 필요도 없이 아예 장착을 해요. 법을 우리 속에 집어넣어요. 집어넣고 아예 봉합을 해버리지요.

그러면 우리 안에 뭔가 이질적이지만 들어왔어요. 성령의 세례인데 예수님께서 일점일획이라도 모든 법을 다 이루었기에 의가 되었다는 그 의가 우리보고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그 의를 우리 마음속에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로마서 7장을 잠시 봅시다. 로마서 7장에 보면 기이한 대목이 나오는데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이 서서히 자살해 가는 몸에서……, 자살해야만 자살이 아니라 누구나 지금 자살하고 있는 중입니다. ~ing, 진행형이에요.

누구나 자살하고 있는 그 중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완전히 절망입니다. 절망인데 그 다음에 뭐냐? 절망으로 해 놓고 그 다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지금 이 사람이 성도입니까, 아닙니까? 성도에요. 성도 안에 뭐가 있다? 계속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충돌을 보고 있는 겁니다.

‘아하, 내가 저렇게 살았지.’ 그것도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보는 겁니다. ‘아하, 내가 법 지켜서 30배, 60배, 100배의 욕심을 내는 그 죄가 아직도 내 안에 들어 있구나. 목사는 그것을 노리고 나를 속여 왔었어. 그리고 지금도 교회에서 속이고 있다. 아, 저게 평생 저기에 매여서 내 자아가, 엉터리 괴물 같은 자아가 저거한테 속아서 평생 돈 갖다 바치고 충성하고, 그러면 인생이 역전될 줄 알았지.’ 역전되어 봐야 그것도 자살이에요.

8장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짜 우리 맘속에 언약의 완성의 의가 마음을 절개해서 들어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가? 확인이 되어야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는데 어떻게 확인이 될 수 있는가? 그 방법은 뭐냐 하면, 새로운 법을 우리 속에 만듭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법을 만드는데 그 법이 뭐냐 하면, 악이에요. 또는 죄입니다.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십자가와 연결된 악을 우리 마음속에 생성시킴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성하는 악이라는 이름으로 의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 속을 죄인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죄인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미 십자가와……, 지금 카메라가 무엇과 연결되어 있어요? 전선과 연결되어 있지요. 연결된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새언약의 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네가 못한 것 내가 했다는 그 공로를 드러내 위해서 새롭게 연결된 죄와 악이 우리 속에서 점점 더 커지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그래서 우리는 죄인 되는 거예요. 전에 죄는 뭐냐? 내가 규정한 죄인데 이번에 죄는 뭐냐? 이미 우리를 구원해 주신,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의를 집어넣으신 분이 새삼스럽게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그 죄인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너 구원 받았어. 너 구원받았어.”의 반복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죄요, 악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사도바울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래놓고 금방 1초도 안되어서 뭐라고 합니까? 똑같은 인간이 똑같은 고백을 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고백하는 내가 “주여,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너의 정체를 밝혀라. 어느 쪽이 진짜 참 모습이냐?” 그렇게 하지요.

마음껏 죄인이 되어야 돼요. 즐겁게 죄인이 되고 감사히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성도입니다. 설교하는 목사가 “여러분, 설교하는 것이 죄입니다.”라고 마음껏 강단에서 고백하는 사람만 성도인 목회자에요. “제가 심방하고, 설교하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는 그것도 다 죄입니다.”라고 마음껏 고백하는 사람, “이 교회 자체가 죄인의 집단이고 전부 다 죄 덩어리입니다.”라고 다 같이 동의하는 교회, 그게 참된 교회에요.

그게 새 언약의 부대효과, 동반되는 효과, 그게 바로 새 언약의 완성을 증거하는, 십자가를 증거 하는 성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구약의 흐름을 하고 있어요. 지난 시간에 뭐 했습니까? 다윗의 언약을 이야기했어요. 다윗이야기 하면서 다윗과 언약의 관계를 이야기했지요. 다윗이 비로소 죄인이 됨으로서 비로소 다윗언약의 노선에 있음을 본인이 확인했습니다.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번제를 원치 아니하고, 요새 말로 하면 돈을 원치 아니하고,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원한다는 그 고백이 방금 제가 말한 그 다윗언약의 완성, 십자가 앞에서, “주께서는 십자가로 인해서 새롭게 늘 발생되고 매일같이 발생되는 상한심령을 원합니다.” 하는 거예요.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놓으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참 힘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다 마찬가지지만. 그러나 이걸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몸에 옛 자아도 있어요. 옛 자아가 있어야 죄를 지을 것이 아닙니까? 옛날 자아도 있고 새로운 자아도 있고.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서 7장의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성령 받은 사도바울의 고백에 두 개의 자아가 다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즐겁지요.

왜? 한쪽은 오호라 곤고하다는 고백을 해야 될 그 자아고, 한쪽은 돌아서서 히히히, 웃어야 될 자아가 병행하는 자만이 성도거든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가 없으면 성도가 아닙니다. 사람이 제일 서글픈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아는 죄를 자기가 아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하고자 할 때 이것은 파탄입니다. 이것은 실패에요. 이것을 사자성어로, ‘복음폐인’이에요. 맨날 복음을 보면서도 폐인이라.

아주 꼼수를 부리는 거예요. 이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이 없고 감사가 없어요. 노력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 내가 성경을 보고 죄인인 것을 알고 성경을 보고 십자가를 알아서, 내 속에 있는 내 십자가를 가지고 내 죄를 건져보자.’ 뭐해요,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갑자기 표정들이 어두워지고 있어요. 불교경전에 이런 말이 있어요. “무쏘의 뿔로 가거라.”

성경에서는, 그 무쏘의 뿔을 톱으로 잘라버려야 해요. 무슨 무쏘의 뿔입니까? 뭔가 부딪히는 것이 왔을 때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부딪히는 것이 왔을 때는 피하면 되는 거예요. 이거 몰라서 자살하는 사람이 수십만이에요. 부딪히는 것이 오면 피하면 될 것인데 그걸 꼭 이기려고 한다는 거예요. 이 더러운 자아가 고집을 부려서 자기도 망하고. 어려운 상황이 오면 피하면 되잖아요. 그렇지요?

왜 그걸 이겨야 됩니까? 이 뿔로, 무쏘의 뿔로 들이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무쏘의 뿔 다 자를 거예요. 쓸데없이 그 뿔 그걸로 뭐하려고요? 살아가려면 불어터진 쫄면처럼 살아가야 돼요. 어제 그 쫄면 이야기 아닙니다. 어제 그 쫄면은 정말 맛있게 안 불고 잘 되었어요. 거의 다 먹었을 때 보니까 그 때는 불어있어요. 인생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불어터진 쫄면. 우리는 다 실감합니다. 동영상 보는 사람은 실감 못해요. 우리끼리의 혜택입니다. 

지금 이 자아가 괴물인데 고맙게도 괴물인 것을 알려주시는 그 자체가 이미 구원받았기에 그 불어터진 것을 즐기라는 그 말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어제 이야기했지만 우리는 이미 쫓겨난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날씨가 덥니 춥니, 할 그런 입장이 아니에요. 원래 살던 곳에서 “매나 맞아라.” 하고 쫓겨난 입장에서 그냥 이렇게 사는 것도 고마운 줄 아시기 바랍니다.

내 자아가 내 자아에게 문제를 던지면 그것은 해결이 안 됩니다. 물에 빠진 어리석은 자가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겨서 물에서 건지려는 거예요. 그게 됩니까? 물에 빠졌다 칩시다. 허우적대잖아요. 수면에 자기 운동화가 보이거든요. 그 운동화 끈을 잡아당깁니다. 그렇게 해서 건져지겠습니까, 도로 빠지겠어요? 도로 빠지지요. 이게 종교라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겠다는 겁니다. 도를 닦기도 하고, 금식도 하고, 회개도 하고, 헌금도 하고, 아프간선교도 하고, 백날 해봐야 운동화 끈 당기는 것밖에 안돼요.

문제는요, 썩어빠진 내 몸과 합치가 안 되는 자아를 사탄이 집어넣었기에 문제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아프가니스탄에 가지 말까요?” 아니 가세요. 가서라도 거기서 죄지으러 가시면 되는 거예요. 죄 지으려고 선교하시면 되고, 선교지에 가서 “나 죄인입니다.” 하면 그것이 복음전파가 되고, 무슨 일을 해도 마음껏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유발시킨 그 악과 죄를 마음껏 드러내시면 되는 겁니다.

“목사님, 그런 이론이 맞는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너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까? 자기 구원받은 것 자랑질 하는 것 좋은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까?”라는 오해를 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오해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옛날에는 칼 들고 설쳐야, 피를 흘려야 그것이 살인죄잖아요. 그런데 산상설교에 의하면, “나는 스테이크 썰 때 외에는 칼을 든 적도 없다.” 이렇게 나오다가 형제를 미워한 것도 ‘야, 이것이 악이 맞네.’ 추가적으로 죄를 지을 필요 없이 점점 더 십자가와 관련되어서 말씀만 보게 되면 악이 막 쏟아지면서 확대가 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옛날에는 오른 뺨 때리면 왼뺨 내놓으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던 거예요. 어제도 어떤 분이 전화해서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이 근호 목사님의 설교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쉽답니다. 제가 고맙지요. 더 이상 쉬울 수가 없다. 주님이 하신 일을 받으면 되고, 내가 꼼지락거리면서 내가 따로 어떤 작전을 안 벌려도 되거든요. 왜냐하면 우리는 결과물이라고, 항상 우리는 진리를 늦게 알아요.

항상 늦게 안다는 말은,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것은 주께서 유발시킨 결과물이지 내가 일을 잘못해서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까 로마서 7장을 읽었지만 이번에는 고린도전서를 봅시다. “정말 우리 마음에 누가 들어왔습니까?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의심할 수가 있어요. 이해합니다. 그런데 성경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2장 11절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에게 집 사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고, “구하라 주실 것이요” 했다고 해서 발로 대문 차듯이 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 마음을 절개하고 우리 맘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집어넣으면, 그 때부터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앞에서 얼마나 악랄한가 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구원받은 티를 팍팍 내게 되어 있어요.

마음껏 드러내면서도, 죄와 악을 마음껏 드러내면서도, 물론 대단한 것도 아니고 남 보기에는 웃기는 죄지만, 오늘 뺨 때렸는데 왼 뺨 내놓지 않은 그것을 죄라고 간주하는 그것은 남들 보기에 웃기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그런 죄를 마음껏 드러내면서도 그 드러내는 작업이 내가 시도한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마음을 쪼개고 들어오신 주님의 결과물이라면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편하게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이미 완제품이기에, 이미 우리가 완료거든요. 아예 김완료, 박완료, 이름을 그렇게 바꾸세요. 최완료, 배완료, 이미 완료된 완제품이거든요. 완제품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는 뭐만 기다리면 되느냐 하면, 이것만 기다리면 돼요. “주님이여, 내일은 또 무슨 이벤트를 벌이시나이가? 어디서 또 어떤 귀인을 만나게 하실는지?” 그것을 기다림으로 살면 돼요.


오늘 아침에 기다렸더니 방울토마토를 주셨습니다. 그런 이벤트를 주셨고, 노루인지 사슴인지 노는 것도 보게 하셨고. 만약에 성령을 안 받은 경우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산책을 하기 결심했다. 딴따다단~! 결심했다. 나는 노루를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꽃사슴을 보기로 결심했다. 아! 이게 웬일인가? 사슴은 있었는데 꽃은 안보이더라.’ “아! 신이시여, 정말 내 인생 가지고 이러기에요?” 그게 바로 마귀입니다.

자기가 결심한대로 하나님께서 왜 안 따라주느냐는 거예요. 결심한대로. 오늘 계약 체결하기로 했는데 왜 그 계약이 어긋나게 하느냐는 말이지요. 아침에 이 자아가, 이 괴물이, 하나님한테 잘 보이겠다고 기도까지 하면서 아부와 재롱을 다 떨어놓았는데 실제로는 내 기도대로 안 될 때 그 원망은 누구에게 다 쏟아냅니까? 주님한테 쏟아내지요.

그게 바로 여전히 괴물이 들어 있는 거예요. 전에 여러 번 그런 예를 들었는데요. 어떤 젊은 목사가, “한국교회가 썩었다. 이제는 나라도 한국교회를 바른 교회로 만들겠습니다.” 하고 남들이 가지 않는 길, 예수님께서 저 낮은 곳으로 가셨기 때문에 낮은 곳으로 간다는 거예요. 그런 오해들이 넘치도록 신학교에서 사람들을 다 버려 놓았어요.

낮은 곳으로 간다고 해놓고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낙도에 갔어요. 아무도 찾지 않는 곳, 생활비 줄 돈도 없어서 고구마로 생활비를 대신 하는 낙도에 가서 스스로 자기의 쾌락을 즐기고 있는 거예요. 낮아짐에서 오는 반대급부로서의 쾌락을 즐기고 있습니다. “신이시여, 아무도 가지 않는 좁은 길을 가니까 예뻐해 줘~잉!” 그러고 있어요.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그걸 선교사가 간증이랍시고 교회에서 하면서 봉투봉투 열렸네, 해서 돈 내라는 수단으로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고난을 상품으로 해서 온 동네 돈을 챙기는 거예요. 다 아는 장사인데. 그런데 그 낙도목사의 딸이 여상 나와서 육지에 나가서 취직을 했거든요. 오랜만에 그 딸이 어머니 병수발 돕겠다고 왔다가 다시 육지로 나가는 길에 그만 물에 빠져 죽었어요.

「목사님은 섬 주민들과 함께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겨우 고구마로 연명하다가 설상가상으로 사모님까지 영양실조에다 전신이 마비되는 중풍이 찾아들었다. 이 소식을 서울로 취직해 간 큰 딸이 들었다. 여상을 졸업해서 착실하게 홀로 서울서 살았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살기 힘들다는 소식을 듣자 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 병수발을 위해 섬에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볼일이 남아 있어 서울로 가는 길에 차를 놓치고 갯벌로 가로질러 가다가 밀물 시간이 되어 그 딸이 바다 한가운데서 그만 죽고 말았다. 다음날 바닷가에서 죽은 딸의 장화와 옷이 발견되자 목사인 아버지가 교회 제단에 장화를 던지면서 하나님에게 달려들었다. “그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물에 빠져 죽게 합니까? 제가 자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생면부지의 낙도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왜 저희 가정을 돌보지 않는 겁니까?” 하면서 통곡했다. 이 근호, 그 목사의 잘못은 간단하다, p9-10」

하나님은 가만있다가 오른뺨 맞았어요. 자기 혼자 시나리오 다 쓰고. 그 목사가 낙도가는 것이 주의 일이고 낮아진 곳에 가는 것이라고 한 것은 뭐냐? 그동안 그가 배웠던, 그를 둘러싼 엉터리 같은 관행과 관습, 거짓 신학과, 거짓 선교와, 거짓 순교와, 거짓 낮아짐과 십자가에 대한 가짜 실적들로 둘러싸여 있으니까 거기서 뭘 느꼈느냐 하면, 내 자아도 저렇게 고상하고 거룩하고 경건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마귀가 마귀를 모델로 삼아서 자아를 계속해서 엉터리로 구축한 겁니다. 참, 캘거리에서 만날 한 분이 또 선교단체 출신이라는데. 선교단체가 그런 단체에요. 이미 거기서 해방되었으니 마음껏 이야기하지만. 젊은 애들을 다 버려놓았어요. 적어볼게요. 이게 다 뭐냐 하면, 산다는 것은 형식을 수호하는 것이다. 자아가 새지 않도록 울타리를 치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어느 형식, 어느 울타리가 가장 이 괴물 같은 자아를 빛낼 수 있을까, 흉내 내기로, 모방하기로 평생을 살아가요. 산다는 것은 형식을 수호하고 사수하는 거예요. 지난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소유가 없으면 존재도 없다고. 존재란 뭐냐? 그 범위 안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내 존재가 되는 거예요.

치매 걸린 할머니들보고 이사 가라고 하면 할머니가 기겁을 합니다. 그 집에 가면 온갖 잡동사니를 다 끌어 모아 놓았어요. 동네 돌아다니면서 다 끌어 모은 거예요. “어머니, 이거 다 새로 바꿔줄 테니 다 놔두고 우리 집에 들어오세요.” 하면 “안 된다. 이놈아. 이거 버리면 안 돼. 이건 죽은 너희 아버지가 아끼던 볼펜이다.” 나오지도 않는 볼펜. “이것은 죽은 큰 아들이 나에게 선풍기다.” 고장 나서 돌지도 않는 선풍기.

전부 다 잡동사니에요. 어떤 집에서는 한 트럭이 나온다는 거예요. 자기기억의 부스러기들이고 추억의 조각들이에요. 그 파편들을 조립해서 자아를 그만큼 구축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서서히 진행 중인 자살행위입니다. 그 할머니뿐만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마귀에 의해서 자살로 전부 다 밀침을 당하고 있어요. 교회가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성경공부가 절대로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새언약, 진짜 마음 절개하고 “그동안 마귀야 참 수고 많았다. 마귀는 어디까지나 마귀야.” 어제 이야기했잖아요. 베드로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그 이야기 했잖아요. “베드로야, 물러가라.” 하지 않고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이 여기 들어 있었네?” 그 사탄, 사탄이 준 자아가 네 육체를 못 이겼어요. 인간은 아무리 상상해도 이 자아는 근본적으로 육체 성향적이에요. 마아슬루라는 유명한 심리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인간심리를 다섯 단계로 나눴습니다.

최고의 단계가 자아실현의 단계, 고독하게 혼자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그 자아가 문제가 있어요. 혼자 살고 싶은데 혼자 살게 되면 또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예수 없이는 살아도 외로워서 못살겠다, 그렇게 나오네. 예수 없이는 살아도 외로우면 못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쩌라고? 네가 추구하는 것이 단독자라고 해놓고 단독자로 올라서니까 또 외롭다네?

이걸 언제까지 달래줘야 할지. 촌에 집짓고 사니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좋은데 또 밤이 되면 외로워서 미치는 거예요. 혹시 현대 예술작품들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현대예술가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아를 구현하는데 그 자아가 실제 자아가 안 맞는 것이 현대 예술의 딜레마에요. 자기 몸에 물감 칠하고 뒹굴기도 하고요. 우리나라 비디오아티스트 누굽니까? 백남준은 첼로 여인이라고 해서 예술이라기보다는 발광이지요. 자체발광과 관계없는 그냥 발광.

왜 자꾸 갭이 생기는 거예요? 이만큼 잡아서 나를 규명했다고 하니까 자아는 또 잉여, 여분의 것을 또 나타내가지고 또 목마름, 또 목이 말라요. 목마르니까 1960년대의 우리나라 1세대 포크송 가수가 이런 노래를 불렀어요. “물 좀 주소.” 미국에 와서 살다가 한국으로 도로 들어왔어요. “물 좀 주소~!” 그 노래나 “사노라면~” 그 노래나, 또 운동권학생들이 부르는 그런 노래들.

민족운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자아를 어떻게 하면 발견하고 발췌할 수 있는지 잡으려고 하는데 괴물은 싱긋이 웃고 있어요.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욕망의 심원, 깊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종교를 버리고 예술로 갔다? 해답이 있습니까? 종교를 버리고 예술로 갔다는 말은 종교가 해답이 안 된다는 뜻이거든요.

어딜 가도 이 세상에 해답은 없어요. 그러면 대책은 간단해요. 그냥 상한심령으로 내놓으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물 좀 주소, 하는 이 목마른 상황을 주께서 만들었지요? 이제야 알았다.” 하는 순간 모든 괴로움과 모든 무쏘의 뿔은 다 잘리는 거예요. 불어터진 쫄면처럼 이게 형체가 모호한, 그렇게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이렇게 합니다.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빌 4:11) 사도바울은 정말로 대단해요~! 사도바울이 결혼도 안했지요. 천막장사해서 적금 부어봐야 얼마나 부었겠습니까? 즐기는 거예요. 세상에 있으면서 즐기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떠나면서. 세상에 있으면서 즐기는 것은 불교고요. 불교의 한계는 뭐냐 하면, 자기가 죄를 고백할 대상이 없다는 거예요. 불교는 정신병자들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교리를 이야기했어요. 아까 적었는데. 나는 누가 되고 싶다? 나는 내가 되고 싶다. 그게 부처가 그렇게도 보리수 밑에서 고생하면서 깨달은 깨달음, 그것을 저는 한 문장으로 합니다. “나는 내가 되고 싶다.” 그 한 문장이에요. 부처가 들었으면 약 올라 죽겠다. “보리수 괜히 갔어.” 간단한 문장,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그 앞에 있는 나가 괴물이고 그 뒤에 있는 나가 사탄이거든요. 괴물이 괴물 되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탄이 만만치 않거든요. 계속해서 완전히 갖고 노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뻔히 그 괴로움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새언약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존재는 갇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갇혀 있다는 말은 벗어나서 구원받으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내가 새로운 법을 주겠다. 그 새로운 법이 뭐냐 하면, 율법입니까, 복음입니까?

새로운 법이 이 성경책이에요. 이 성경책은 맨 성경책이고 달라진 것이 없어요. 이것이 성경책인데 옛날에는 이 거짓된 자아가, 내 육체하고 합치되지 않는 자아가 이것을 지키려고 했다면 지금은 뭐냐? “아, 주님께서 이것을 이렇게 지키셨구나. 이렇게 우리를 이런 식으로 죄인인 것을,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렇게 할 만한 우리를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바꾸었구나.”라는 점에서 성경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똑같은 성경책이에요. 보태거나 뺀 것이 없어요. 똑같아요. 똑같은데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바리새인을 욕했는데 내가 바리새인이고, 사울이 사람 죽였다고 했는데 내가 사울이고,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예요. 사울이 다윗을 공격할 때, ‘저 못된 사울, 하나님이 좀 말리시지.’ 가만 보니 그 사울이 납득이 돼요. 어디까지 납득이 되는가 하면, 스데반 집사에게 짱돌을 던져서 죽였잖아요.

그들이 분해서 스데반집사를 죽였다는 말이지요. 그게 납득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에게 교회가 있다. 이 교회에서 생활비가 나오고 노후대책까지 다 보장이 되는데, 차마 그 소리는 교인들에게 이야기는 안하지만 그렇게 되는데, 어떤 젊은 부교역자가 왔는데 설교를 해도 너무 잘해요. 11시 예배는 별로 안 오고 부교역자가 설교하는 아침 9시 예배는 막 웅성웅성 왔다가 다들 집에 가니까 어떻게 됩니까?

조용히도 아니고 종용히 불러야 돼요. 종용히 불러서 “참 설교 잘한다. 많이 배우고 참 똑똑하다. 너는 우리교회에서 크면 큰 인물이 못된다. 그러니 올 12월로 계약만기하고 섭섭하지 않고 이사비용 다 주겠다. 얼마 전에 이 근처에 전세 얻은 것도 다 내가 아는데 이사비용 보태줄 테니까 다른 교회 가서 복음 맘껏 전해라.” 그렇게 좋게 좋게 이야기해서 내 보내버립니다.

그거나, 짱돌 들고 때리는 것이나 똑같은 거예요. 왜 나와바리에 걸리적거리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혼자 살고 싶은 이 절대적 성역에 네가 건방지게 끼어드느냐는 말이지요. 내가 너를 부교역자로 부른 것은 너보고 복음전하라는 것이 아니고, 나는 너를 이용하겠다는 내 심보에 놀아나라고 채용한 거예요. 이게 갑질이에요. 회사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당회장이고 네가 부교역자로 왔으면, 너를 뽑은 이유가 뭐겠는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잘했습니다.’ 박수치라고 내가 뽑은 거야. 그러면 그 용도가 다 되었다면 폐기처분하는 것이 당연하니 너는 섭섭하게 여기지 마라. 아쉬우면 너도 5백 명 모으든지. 네가 천명 모으든지. 이것은 내 나와바리야.” 나와바리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조폭들의 그 나와바리. 개들 영역표시하려고 오줌 누는 것. “이것은 내 영역이야, 내 영역.”

인간의 자아는 근본적으로 아무리 고상을 떨어도 결국은 자아실현, 자기가 신이 되는 것이고 그 밑바닥 제일 처음 단계가 뭐냐 하면, 생존의 욕구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아무리 예수, 예수 하지만 배고프면 빵 주는 사람이 천사고 예수님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육체니까. 육체와 자아가 지금 어울리지를 않아요. 아담의 이름에 부합되지를 않아요. 우리는 아담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인간은 없고 죄인밖에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령을 보내주지요. 그 마음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에고를 우리 속에 집어넣어줘요. 집어넣어주면 육체가 있는 한, 고린도후서 이야기입니다, 육체가 있는 한 우리는 강력하게 반발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그 육체의 유혹을 사랑으로 용서하고 다시 들어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 육체의 반발에 대해서 느긋하게 대처하고 자비하고 긍휼을 베풉니다.

그러니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해놓고 돌아서면 뭐라고 합니까?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십자가의 법이 내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기 때문에 내가 자랑할 것은 내 재산이나 자식이나 이런 것보다 근원적인 자랑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라고 주님한테 그렇게 고백해요.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걸 주님한테 고백해야지 같이 계신 분에게 고백하지 마세요. 괜히 오해합니다. 짜증나요. ‘자기만 예수 아나.’ 짜증나요.

그래서 우리교회 교인들은 오후에 기도하라고 하면 할 것이 없어요. 알면서도 십자가 빼고 하고, 그러면서도 딴 것 기도하려니 할 것이 없어요. 제가 어디 가서 강의를 하니까 아내가 주의를 줬어요. “내가 당신의 취지는 알겠는데 함부로 그렇게 칭찬해 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그럴 분들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모르면 그냥 넘어갑시다.

사모가 되니 예민하잖아요. 그런데 이 분들은 세상풍파 다 겪은 분들이라서 걱정할 필요 없거든요. 그래서 편안하게 이야기한 거예요. 사람이라는 것은 그 자아가 결국은 자기자랑으로 맺어질 때 제가 외칠 것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화를 내든, “당신을 나를 모독했어요.”라고 하든, 그러면 그러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십자가를 남에게 자랑하지 마세요. 속으로만 하세요.

그리고 남에게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너하고 똑같아.” 세상이나 나나 누구 욕할 것이 없어요. 똑같아요. 화내면 화내고 질투하면 질투하고 똑같아요. 똑같은데 새언약이, 너는 내 나와바리, 내 영역인 십자가 안이라고 선을 그어줬기에, 우리는 맘 편하게 성경에 위배되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 위배되어 있는 우리의 잠재성을 맘대로 주께서 들춰내는 결과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말을 조심해야 돼요. 항상 결과물입니다. 하라, 하는 그 할 것은 없어요. 그냥 산다는 것이 결과물이에요. 예레미야를 다시 봅시다. 예레미야 31장 33절을 읽어보세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빈 그릇이라는 말이 디모데전서에 나오지요. 우리는 빈 그릇이라. 빈 그릇은 옛사람의 우리의 육체가 빈 그릇입니다. 그러면 이 육체는 이미 자아로 물들었기에 그냥 욕구밖에 없어요. 욕구밖에 없는데 그 빈 그릇에 주님께서 십자가 법이 담긴다는 것은 피가 담기는 거예요. 이미 용서했음이 담겨버리면 빈 그릇도 쓸만 해버리지요.

배신했던 베드로도 주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러나 다는 아니다. 여러분이 그 의미를 생각해 보세요. 끝까지 사랑하는데, 열두 명 중에 다는 아니다. 사랑은 돌아갈 자에게만 돌아가야 사랑의 값이 되는 거예요.

십분 쉽시다.
 오용익(IP:125.♡.25.28) 16-10-13 20:17 
뉴저지아카데미-구약의 흐름 12강(이 근호 목사)

예레미야 31장 31절부터 33절까지 새언약이 준비되었지요. 그러면 뭐가 은퇴를 해야 돼요. 교장선생님 새로 등장하면 옛날 교장선생님이 은퇴를 해야 되고, 새목사 오면 옛날 목사는 천리만리 저 멀리 이민을 가든지 떨어져야 돼요. 가까이 있으면 교인들 다 줄줄이 따라옵니다. 한국교회 제 2세대, 3세대 내려오면서 오랜 된 교회의 문제점이 거기에 있지요.

초대목사는 괜찮은데 후대 목사가 초대목사와 비교가 되니까 그런 현상이 있습니다. 교인들도 후임목사에게 이걸 요구합니다. “우리 처음 목사 비난하지 말고 그 식대로 하면 당신을 우리가 목사로서 인정해주겠습니다.” 그런 조건부로 후임목사를 초빙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특히 유명한 교회에서는 그런 것이 많지요.

그렇다면 예레미야에 있어서 새언약이 왔다면 옛언약은 떨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옛언약은 떨어져야 되는데 그 떨어진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거예요. 떨어진다고 해서 성경책은 그대로 있거든요. 유대인 욕해 봐야 유대인이 보는 구약이나 우리가 보는 것이나 똑같은 거니까. 로마서나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옛언약은 폐기되어야 된다. 폐기라는 말을 해요. 그게 무슨 뜻이냐?

폐기되어야 된다고 하니까 “폐하면 되겠네.”라고 한다면 “당신은 율법 폐기론자요.” 이렇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율법을 폐기한다는 말은, 마치 구약성경인 율법을 몰라야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거예요. 이 십계명 몰라야 됩니까? 십계명이 우리 속에 살아 있어야 십자가가 자꾸 증거되지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는 것이잖아요.

전에는 우리가 “사람인 이상 탐낼 수 있지.” 스스로 완화하고 변명을 했는데 십자가가 꽂히고 나서는 약과고 사이다고 다 탐이 나니, 아, 가만히 있어도 죄가 증강되고 늘어나는 것은 십자가의 구원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가 이미 꽂혔기 때문에 마음껏 이런 죄를, 약과 먹고 싶은 죄를 우리는 발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약과를 막 빼앗으면 안 되고, 그런 것을 발산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율법을 폐기를 한다는 것이 뭐냐? ‘갇혀 있다.’는 그 이야기를 이번시간에 해야 되겠는데 여기다 우선 적어놓고요. 이스라엘 멸망입니다. 같은 말로 교회 멸망입니다. 교회는 멸망하라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멸망하라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멸망함으로 진짜 교회가 그 배후에 등장하는 겁니다. 동남아에서 순회공연하기 전에 짝퉁가수, 조양필, 나운아, 이미테이션가수들 앞장세워서 먼저 해놓고 그 뒤에 진짜 가수 등장하듯이 가짜가 바람을 잡아줘야 돼요.

가짜가 무대 위에서 바람을 잡아놓고 퇴장하면서 꼭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나는 가짜였을 뿐이고 이미테이션이었을 뿐입니다.” 이 말을 꼭 붙여줘야 돼요. 그럴 때 그 율법은 복음이 되는 겁니다. 십계명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분명히 구약에 나와 있어요. 구약에서는 복 받는 방법이 십계명 지키고 율법 지켜야 돼요. 그래놓고 그 율법이 퇴장하면서, 율법이 떠나가면서 이 율법의 완성은 율법이 아니고 다른 쪽에 있습니다, 이렇게 소개를 해줘야 돼요.

그게 율법 외에 한 의가 됩니다. 이러한 방법이 뭐냐? 세례요한이 등장하고 난 뒤에, 바람잡이로 등장하고 난 뒤에 누가 등장합니까? 바로 본게임 예수님이 등장하잖아요. “자, 여기 소개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까이 왔다는 말은, 여기 왔다는 뜻이에요. 현존,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에요.

가까이 왔다고 하니 아직은 안 왔잖아, 그런 해석을 하면 큰일 납니다. 안 왔다는 말이 아니고 왔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는 못해서 문제지 지금 왔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이야기하는 세례요한도 “오실분이 당신이 맞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게 뭐냐? 저는 가짜입니다, 그런 뜻으로 퇴장하는 거예요. 퇴장할 때, “저 보지 마세요. 저는 아닙니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어디로 이동합니까? 예수님께로 이동하니까 세례요한보고 “선생님! 선생님 교인들 저쪽 교회로 다 갔습니다. 어쩌면 좋아요?”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나는 쇠해야 되고 그분은 흥해야 된다고 한 거예요. 목회자 짱이에요. 최고에요. 나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으로 인해서 존재하는 하나의 보이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에, 나는 스피커에 불과하기 때문에 본 음성 나오면 스피커는 슬슬 철거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모습이 선지자의 모습이고 오늘날 이 시대의 선지자는 성도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증인노릇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고, 우리 개인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런 분이라고 증거하게 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더는 욕심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새언약이 등장했다고 했지요.

새언약이 등장하게 되면 뭐는 철수해야 된다? 슬슬 일본말로 해서 시마이해야 돼요. 시마이라는 말도 하고 장날에 아침에는 분주한데 오후 대여섯 시 넘어가게 되면 드디어 시골장터에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삭 불면서 천막들이 흔들리면서 스산한 바람이 불면 굉장히 쓸쓸하지요. 그걸 파장분위기라고 하지요. 이 세상은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파장분위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멸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멸망하고서 그 뒤에 진짜 이스라엘이 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등장합니다. 미식축구에서 공을 숨겨놓고 앞에서 덩치 큰 바람잡이가 까불까불 하잖아요. 공 빼돌려서 갑자기 뒤에 숨어 있던 선수가 나타나서 점수를 내지 않습니까? 이처럼 주님께서 장막을 쳐놓았다가 딱 벗기는 것, 이스라엘은 앞에 인도하는 예인선역할을 충분히 한 거예요.

말씀을 지키면 망하게 되어 있는 존재가 육체가 있는 나, 괴물이 그동안 우리 육체를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괴물집단인 이스라엘이 마음껏 보여준 겁니다. 어떻게 보여주는가? 오늘 에스겔서를 합니다. 에스겔서는 그것을 멸망하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네 자입니다. 그게 뭘까요?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죄가 뭘까요? 우상숭배.

우상숭배해서 멸망하는 겁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의 옛자아는 이렇게 합니다. “우상숭배해서 멸망했다고? 우리가 축복받으려면 간단한 문제다. 우상숭배 안하면 되겠네.” 이렇게 되겠지요. 우상은 부처, 조상제사지내는 것, 진짜 하나님은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하신 그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고, 간단하네, 누구 믿으면 돼요? 여호와 믿으면 되겠네, 라고 나오겠지요.

이스라엘이 여호와 믿어서 망했어요. 자기가 믿는 여호와가 바벨론제국을 키웠습니다. 북쪽나라 BC722년, 남쪽은 BC586년, 성경설교 하다가 갑자기 BC, 이렇게 나오면 교인들은 짜증내요. 안 듣던 용어 왜 나오느냐는 거지요. 우리 무식한 것 폭로하려고 하느냐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성경에 없는 용어를 쓰지 말라는 거지요. 성경에는 BC 722년도 없고 BC 586년이 없잖아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위쪽 아래쪽, 북쪽 이스라엘은 북한이고 남쪽 이스라엘은 남한이지요. 북쪽은 다른 제국에게 망했어요. 앗수르 제국에게. 그리고 남쪽은 BC722년에 어느 제국에게? 바벨론제국에게 망한 거예요. 그런데 그 자기나라 “나의 포도원이요 사랑하는 아내”라고 했던 그 이스라엘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었어요.

어떻게 만드는가? 몽둥이를 가지고 그렇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키운 몽둥이가 바벨론이고 키운 몽둥이가 앗수르입니다. 마귀를, 사탄을 누가 부리십니까? 사탄이 본인 맘대로 안하는 것을 우리는 명심 또 명심해야 돼요. 마귀든 귀신이든 그것은 절대로 주님이 조종하는 거예요. 마귀가 자력으로 그렇게 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 세계의 내분, 하나님 자체의 모순이에요. 그 내분의 목적은 아들, 독생자를 주로 만들기 위해서 사탄이 자기를 반발하는 것을 허락하신 거예요. 그게 숨겨진 비밀인 겁니다. 하나님만 꼬깃꼬깃 알고 있는 숨겨진 비밀이에요. 그 여파로 우리 인간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지만.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어떻게 여호와를 섬겼는데 그것이 우상이 되는가? 그것을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데 어떻게 그게 이단이 되는지 그걸 설명하고자 하는 거예요. 그걸 이스라엘이 잘 보여줍니다. 에스겔 본문 읽고 그 다음에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교인들은 성경이 두껍기 때문에 성경을 잘 안 보게 되고 또 모르게 돼요. 그래서 제가 중요 구절을 찾아드리는 겁니다. 아까 본 예레미야 31장 33절이 중요한 것처럼. 에스겔 24장 18절이요.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고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기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백성이 내게 이르되 네가 행하는 이 일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되는지 너는 우리에게 고하지 아니하겠느냐.”

아침에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 임했어요. 16절에 나옵니다. “인자야……” 인자라는 용어는 장차 예수님이 인자입니다.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종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의 부의하는 식물을 먹지 말라.”

부의하는 식물, 장례음식 먹지 말라고 해놓고 아침에 보니까 누가 죽었습니까? 아내. 평소에 이혼하려고 작심한 아내가 아니에요. 정말 사랑하는 아내가 아침에 죽었습니다. 이 대목, 이 구절, 참 줄긋기가 벌벌 떨릴 정도로, “줄그었으니 그대로 실행에 옮겨줄까?” 그렇게 나올까 싶어서 겁이 나는, 그래서 “안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고 점프하고 싶은 구절이에요. 에스겔 선지자의 핵심이 뭐냐?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는데도 울지 않아야 될 임무를 지닌 선지자가 바로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그 에스겔이 뭡니까? 인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뭡니까? 인자지요.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안다는 것, 예수를 알고 믿는다는 것은 안에 뭐가 들어 있다? 에스겔이 당했던 그 아픔과 괴로움과 황당한 일을 품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황당한 일로 인해서, 그 아픔으로 인해서 천하의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겁니다.

사탄 속에 갇혀 있는 우리, 우리 힘으로 못 빠져나오는 우리, 우리가 스스로 운동화 끈을 잡아당겨도 못 빠져나오는 우리,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요. 문학으로 안 되고, 예술로서도 안 되고, <채식주의자>같은 것 써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나도 쓰겠다, 소설 써도 구원이 안 되고, 위대한 헨델의 메시아를 쓴다고 해도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어떤 수단을 강구를 해도 우리는 우리의 자아의 횡포를 우리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차르트와 동시대의 살리에르라는 사람이 있지요. 살리에르가 뭐라고 했습니까? “신이시여, 왜 나에게는 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영화 같은데서 모차르트가 독약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요. 사람들이 모차르트를 높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요. 뉴턴이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다 거짓이고요, 그런 것은 실제가 아닙니다.

어쨌든 살리에르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술 자체가 자기에게는 구원의 시그널이 되고 말았어요. 더 멋진 작품이 없으면 진짜 약 먹고 자살합니다. 거기에 목숨 거는 거예요. 자식에게 목숨 거는 부모나 남편에게 목숨 거는 아내나 아내한테 목숨 거는 남편이나, 이것은 드문 경우지만 간혹 그런 경우나, 그 사람들은 절대로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닙니다.

아내 죽으면 다 울어요. 너무 슬퍼서. 그런데 “스톱! 에스겔은 스톱, 인자 스톱!” 너는 특별해야 돼요. 비범해야 되고 인자라는 그 호칭 때문에 너는 달라야 돼요. 이렇게 되면 참 미치지요. 선지자가 하고 싶어서 “나는 선지자가 소망이에요.” 이렇게 선지자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선지자는 그냥 하늘나라에서 네가 해, 하고 찍은 거예요.

모세가 하나님 찾아왔을 때 반겼습니까, 거부했습니까? 거부의 핑계가 뭔 줄 알아요? “난 말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럴 줄 알고 말 잘하는 아론을 옆에 세웠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고 말고는 네가 결정할 사항이 아니고 내 피조물이니까 너는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게 믿음이에요.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까라면 까겠습니다, 그게 백부장이잖아요. 세상에 이런 믿음이! 주님도 깜짝 놀랐어요. “세상에, 이렇게 깊은 믿음이! 나라의 본 자손들은 천국에서 다 쫓겨나고 너 같은 인간들을 모아놓은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에스겔의 아내가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에스겔에게 이런 수모가 들어가야 되는가?

에스겔이 인자입니다. 그러면 인자는 뭐냐? 어려운 말로 하겠습니다. 다윗언약이 상대자가 인자에요. 다윗은 다윗언약이 아닌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다윗은 다윗 언약이 아니에요. 다윗언약은 뭐냐? 왕이 따로 있어요.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언약이고 그분은 없는 존재고 숨겨진 존재지요. 숨겨진 존재가 다윗으로 하여금 죄짓고 해서 인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인장에요. 이런 방정식이 성립돼요. 다윗언약이 성취가 되면 우리는 모조리 인자가 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되는 인자를 앞당겨서 인자라고 호칭하시는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구약부터 준비한 자들이 누구냐? 그게 바로 예레미야고, 에스겔이고, 다윗인데 그들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성신을 받았다는 거예요. 자기의 실력으로 한 것이 아니고.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뭘 받아야 돼요? 성신을 받으면 안돼요. 성신은 신약 이전의 구약의 신을 성신이라 합니다. 성신의 목표는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성신을 받은 것이 아니고 성령을 받은 거예요. 물론 의미상은 같은 용어지만 옛언약에 속하는 신이 성신이고 새언약에 속한 신이 성령이에요. 성신은 율법을 우리 코앞에는 들이대지만 우리 마음까지는 안와요. 왜? 마음까지 오실 분이 방향을 틀어서 예수님 마음속까지 들어와 있기에 그렇습니다.

구약의 성신은 우리 앞에 들이대면서 “똑바로 해! 안하면 저주받아.” 여기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못하기에 이스라엘은 멸망당하고 언약은 백성이 멸망당했으니까 찢어지는 겁니까? 포기되는 겁니까? 실패하는 겁니까? 아니에요. 주께서 준비한 언약은 다른 사람이 대신 인터셉트해서 가져갑니다. 예수님이, 인자가 가져가서 그것을 이룹니다.

그 전에 우리는 에스겔 24장 18절을 봤습니다. 에스겔이 멸망하는 이스라엘을 대신 가져가는 거예요. 가져가게 되면 에스겔을 믿는 한 그 시대 사람들은 멸망해도 구원받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시스템이에요. 그 시대 사람에게는 아직 예수님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이것은 흔하게 받는 질문이거든요.

예수님 오기 전의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그 시대의 언약이 그 시대에 주어집니다. “그 시대의 언약은 십자가 아니잖아요. 새언약 아니잖아요.”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그 언약 안에 새언약과 연계되어 있어요. 그 언약 속에 들어가면 새언약과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는 예수님 오시기 전에 약 2천 년 전이거든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겁니다. 예수님하고 아브라함하고 언제 아는 사이로 되었습니까? 성신이 장차 올 예수님을 겨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요. 엘리야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나타났잖아요.

이것을 가지고 저는 포클레인 법칙이라고 하는데 여러분 궁금해요? 항구에 가면 거대한 크레인이 있는데 너무 거대해서 그 크레인을 골리앗크레인이라고 합니다. 골리앗 크레인 옆에는 컨테이너가 쌓여 있지요. 그 컨테이너를 부두에 있는 배에 실어내지요. 이걸 누가 합니까? 이걸 사람이 낑낑거리면서 옮기는 겁니까? 누가 해요? 골리앗크레인이 하잖아요. 앞에 있는 이 골리앗크레인은 모세언약이에요. 두 번째는 다윗언약이고 세 번째는 어제 보았던 예레미야 새언약이고 네 번째로 마지막 언약이 십자가라는 새언약입니다. “내 살과 내 피로 새언약을 세운다.” 새언약입니다.

그렇다면 각 시대의 사람들은 뭐로 구원받습니까? 그 시대에 주어진 골리앗 크레인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이게 구약의 흐름이에요. 이 골리앗크레인들의 연속성이 구약의 흐름입니다. 참 쉽지요. 그런데 왜 그렇게 성경을 보면서 이 골리앗크레인들이 왜 안보였을까요? 인간들은 괴물 같은 자아가 있어서 어떤 법을 주게 되면 골리앗 크레인이 해결할 문제를 누가 합니까? 내가 해보겠다고 하다 보니까 오버를 하고, 사울은 이스라엘나라 지켜보겠다고 소년 다윗을 “저놈 죽여라.” 하고 현상금까지 붙여서 가는 곳마다 잡으려 했어요.

그러다가 “다윗아! 미안하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다시는 너를 잡지 않으마.” 하고서는 악신이 임하니까 또 정신이 이상해져서 “저놈 잡아라.” 다윗이 사울의 물병만 살짝 가지고 나와서 “임금님! 제가 이길 수도 있는데 그냥 풀어주잖아요. 임금님도 제 심정 알았으면 그만 싸웁시다.” “소년 다윗아! 내가 미쳤구나.” 후회도 잘해요. “내가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마.” 해놓고 “저놈 잡아라.” 또 그렇게 합니다.

왜 그 시대 사람들은 악신이 임하면 왜 그렇게 성신 받은 사람을 못살게 굴까요? 이런 크레인들은 이 땅 인간의 이름이 저질러 놓은 악이 범람해야 그 속에서 다윗의 가치, 모세의 가치가 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세가 데리고 인도한 사람이 모세를 좋아했습니까, 원망했습니까? 전부 다 원망했어요. 열 번이나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어요.

육체 자체가 애굽에서 살던 버릇이거든요. 떡볶이 먹어야 되고 짜장면도 가끔은 먹어야 되고, 진 라면 먹어야 되고, 몸이 애굽의 몸이에요. 그러니까 주께서 수난 받는 모습으로 골리앗 크레인이 먼저 앞당겨서 삽입되어서 건질자는 건지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빈틈없이, 그 프로젝트가 잘 진행되어 온 거예요.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깨끗하게 진행되어 온 겁니다.

이제 이 크레인은 에스겔에 옵니다. 이스라엘이 어느 신 믿습니까? 여호와 믿지요. 그들이 여호와를 믿는 이유가 율법대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고 했고 그 신이 어떤 신이냐 하면, 여호와라 하지만 그 실제기능은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를 구원한 자.”라고 되어 있어요.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를 구원 한 자라.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을 봅시다. 오늘 시중에서 파는 십계명에는 뭐가 안 나오는가? 20장 1절, 2절이 빠져 있고 3절부터 나옵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이렇게 나오지요. 그런데 해석은 1절부터 해야 돼요. 나는 너를, 여기서 너는 어떤 너냐 하면, “애굽에서 종 되었던 너”입니다. 갇혀 있던 너에요.

그러면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나는 내 힘으로 못삽니다. 갇혀 있어요.”라는 것이 구성이 될 때 십계명이 효과를 발휘하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난 뒤에 자기는 애굽에서 나왔으니까 본격적으로 십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한 거예요. 그러면 십계명의 취지가 죽어버려요.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줘서, 전에 숙제 10페이지를 쓰라는 것을 20페이지를 쓰라고 하고, 20페이지를 쓰니까 100페이지를 써라, 계속 숙제의 양을 늘려가는 거예요. 헉헉거리면서 숙제를 못하지요. 못하면 뭐가 됩니까? 죄가 되는 거예요.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고, 은혜가 넘친다고 로마서 5장에서 하잖아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주님께서 은혜로 건지는 방법은 뭐냐? 종 되었던 곳에서 스스로 나왔다는 소리, 그 입을 다물게 하는데 있습니다. 입에 지퍼를 채운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내 힘으로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동행하시는 주님의 힘으로 빠져나왔다고 계속해서 은혜만 쳐다봐야 십계명은 저절로 완성이 돼요. 이게 바로 골리앗크레인입니다.

모세언약이 보여주는 골리앗 크레인이에요. 여호와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가 안 되어야 될 텐데 여호와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라면, 여호와 말고 뭘 믿어야 하고 뭘 더 보태야 되는가, 하는 그 문제가 생기겠지요? 머리가 복잡하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믿습니다. 여호와를 믿는 줄 알았어요. 십계명대로 믿고 제사든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제가 몇 시간 전에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는 것을 믿은 거예요. 예배드리려고 교회 나오는 그것을 그들은 믿은 거예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자아중심이에요. 주님이여, 오늘 교회 나왔습니다, 헌금했습니다, 찬양했습니다, 봉사했습니다, 아멘, 그리고 집에 가는 거예요. 자기가 행한 것을 믿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열심히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골리앗크레인과 안 맞은 거예요. 안 맞으면 언약이 중간에 깨지는가? 그럴 수는 없는 거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지켜야 되고, 이스라엘은 착각하고 있고, 그러면 주위에 뭘 배치해야 됩니까? 모압, 암몬, 모압과 암몬의 선조는 누구였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빠져나온 아버지와 딸이 동침해서 나온 자손들입니다.

여기에 아람, 오늘날의 아람은 지금도 전쟁 중입니다. 시리아죠. 시리아 내전중이요. 그 나라가 아람이에요. 그리고 이쪽에 팔레스타인, 옛날 용어로 블레셋, 현대어로 팔레스타인입니다. 또는 에돔도 있어요. 에돔은 야곱의 형, 저주받기로 작정된 에서가 조상이 된 민족이 에돔입니다. 또 가나안 땅 열 족속도 있겠지요.

이런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배치해서 “물어 쉭!” 이렇게 물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가 뭘 믿는다? 여호와를 믿는다고 자부하잖아요. “우리는 애굽군대도 물에 빠트리고 나온 민족이야. 우리가 이정도야.” 하고 나서다가 대패를 봅니다. 그러면 뭔가 반성, 수정작업이 이뤄져야 되겠지요. 승리를 기대했는데 왜 우리가 패배했던고? 어디가 잘못인가?

그 때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지금 사사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사사들이 등장할 때 사사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뭐가 임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신, 성신이 결합이 돼요. 성신은 어디까지 연결된다고 했습니까? 성신은 골리앗크레인이니까 골리앗크레인은 마지막 오실 어디까지 연결됩니까? 최종골리앗크레인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지요.

그런데 십자가는 뭐냐 하면, 너는 죄인인데 내가 내 공로로 구원한다는 그 법칙이지요. 그 법칙이 드디어 성신을 통해서 약간 쫄쫄 하고 사사에게 들어옵니다. 그러면 사사는 기존의 것, 내 힘으로 밀어붙이고 내 믿음으로 밀어붙이려는 승리하려는 것에 반적을 일으켜야 되겠지요. 미디안군대에 대적하기 위해서 2만 2천명을 모집했는데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기드온아! 보내라.”

미디안 군대 대적하는데 2만 2천도 모자랄 판인데 보내라는 거예요. 성경에 보니까 그 이유가, 숫자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1만 2천 보내고 만 명 남았는데 그것도 많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굴 보내고 누굴 남기란 말입니까? “제일 작은 숫자를 찾아 봐라.” “어떻게 합니까?” “물가에 가서 물을 먹여 보라.” 각양 모양대로 물을 마시는데 가만 보니 제일 작은 숫자가 뭐냐? 물을 손으로 떠서 먹는 그들이 숫자가 제일 적어요.

“됐다. 네가 목격했지? 하나님이 보낸 숫자가 어떤 숫자라고?” “제일 적은 숫자를 보냈습니다.” “내가 제일 적은 숫자를 보내는 것은 평소에 너희가 이방민족에게 침범을 당한 이유가, 압제를 당한 이유가, 힘으로 모든 것을 계산했고, 힘으로 이스라엘을 지탱하려는 그것이 바로 말로만 여호와, 예수, 천국, 하나님, 백날 해도 힘, 권력을 쥐고 그 권력을 소유해서 내가 내 모든 것을 얻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숭배라는 것을 이런 전쟁사건을 통해서 너에게 깨우쳐준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해석으로 기존교회가 설교 못해요. 이 본문가지고 해석하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렇게 침체한 것은 여러분이 침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보세요. 그 300명은 정예부대였습니다. 꿇어앉아서 물을 마시면서도 적이 오는지를 다 살피면서 다 침착하게 마셨던 겁니다. 우리도 신천지가 오는지, 여호와의 증인이 오는지 침착하게 살펴서 우리는 비록 소수지만 소수라고 실망하지 말고 남은 힘을 주시면 우리가 기드온 군사가 되어서 이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거꾸로 해석해버려요.

또 뭘 의지합니까? 힘을 의지해버리면 힘을 가진 자는 자기를 죄인으로 간주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소통이 안돼요. 중간에 언약과 언약이 끊어진 거예요. 북쪽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에 남쪽 이스라엘이 회개를 한 것이 아니에요. 북쪽이 힘이 모자라서 망했다고 한 거예요. 힘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요것들 봐라? 앗수르가 만만해 보이냐?” 그러면 앗수르를 정복했다는 말은 바벨론 제국이 앗수르 이후의 제국이거든요. 그러면 앗수르보다 힘이 더 세지요. 이 더 센 힘을 감당해 보라고 하니 감당 못합니다. 감당 못할 뿐더러 감당을 못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감당을 못하는데 또 거기에 안중근 의사가 등장하네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우리가 힘이 모자라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는 안중근의사, 또는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도시락 던진 사람, 일본천황 행렬에 권총 들이대다 실패한 이봉창, 요새 <밀정>이라는 영화도 한국에서 상영되고 있거든요. 그 전에 나온 영화는 <암살>

이런 애국자들이 그 당시에 등장했는데 성경은 그걸 두고 이렇게 합니다. 거짓선지자라고. 희한하지요. 힘을 의지하면 주님 보시기에는 거짓선지자에요. 왜? 십자가와 연계되지 않기 때문에. 고린도후서 13장에는 십자가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에게 이렇게 질문해요. “목사님, 딱 깨놓고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고린도후서 13장을 보세요. 십자가는 ‘약하사 돌아가심’ 약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그러면 십자가가 뭡니까? 약했다는 증거예요. 너무 약했다는 겁니다. 그 약함이 3절에 보면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지요. “내가 약한 중에 강하다. 이것이 내 은혜다.” 강해지는 것이 은혜가 아니고 “주여, 저 못해요.” 이게 은혜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참 한국교회 설교와 비교해볼 때 억장이 무너집니다. 어쩌면 그렇게 정반대로 설교합니까? 근처만 가도 말을 안 해요. 어떻게 그렇게 정반대에요. “힘 생길 때까지 철야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기도하는 목적이 정반대에요. 힘을 모으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거예요. 힘을 빼기 위해서 기도해야지요. 어깨에 힘을 빼고, 목에서도 힘을 빼고 강도로 살고, 세리로 살고, 거지가 되어서 사시라는 것이 주의 뜻이에요. 그래야 감사의 폭이 넓어질 것이 아닙니까?

많이 용서받은 자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예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성경이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 소리를 듣는 목사들이 “이 목사님 말이 맞는데, 우리가 신학교에서 다 그렇게 배웠는데 장사가 안 된다고요, 장사가요. 영업이 안 된다고요.” 장사는 속이는 거예요. 모든 장사는 무조건 속이는 겁니다.

제가 설교할 때 그런 설교했습니다. 사람이 왜 스트레스를 받느냐 하면, 내가 속이는데 상대방이 내 속임에 안 걸려들어서 화가 나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스트레스의 원인제공을 누가 했습니까? 내 기대가 너무 높아서 그래요. 내 욕심이 너무 과해서 자기가 자기 손으로 눈을 찌르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이큐 40되는 정박아가 스트레스 받습니까? 그 사람들은 암에 안 걸린답니다.

투쟁과 경쟁이 없는 곳에서는 암이 안 걸려요. 암이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 스트레스에서 생기고, 스트레스는 항상 현장을 조사해보면, 대기업에서 밤새도록 불을 켜고 야근하듯이 경쟁마당에서는 스트레스가 생겨서 암이 걸리고 그런 거예요.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그게 서서히 자살하고 있는 중이에요. 사사기는 무기 값도 안 되는, 무기라고 할 수도 없는 것들, 그게 무슨 무기입니까? 항아리 들고, 횃불 들고. 캠프파이어 하는 겁니까? 나팔이나 불고. 그게 뭐예요?

하나님의 모든 전쟁은 여리고성 도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결과물로서 표현하는 것이 전쟁이에요. 시작하기 전에 전쟁이 아니고 전쟁은 이미 끝났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증거물이 바로 전쟁의 무기입니다. 빰빠라밤~! 나팔은 언제 불어요? 전쟁이 끝났을 때 부는 나팔이거든요.

그게 바로 희년의 나팔입니다. 사람 이름 아닙니다. 7 곱하기 7 더하기 1, 그래서 50년째가 희년입니다. 희년이라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법은 완료되었음, 그것이 희년입니다. 희년에서는 처음 있던 위치로 돌아가는 거예요. 모든 종들은 해방시켜 주고, 처음부터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누가 갑이 되고 또는 을이 되는 사람이 따로 없었어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갑이었고 전부 다 여호와의 거저주시는 콩고물, 혜택 받고 땅을 분배받았어요. 그 땅은 조상이 물려준 것이 아니고 여호와에 의해서 배분된 땅이기에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기업, 쉬운 말로 상속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천국은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예수님.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공로로 들어갑니까? 공로 없지요. 그러면 왜 들어갑니까?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 맏아들 것으로 다 했으니까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은 맏아들에 종속되니까 상속을 받은 거예요. 그것이 기업이라 하는 겁니다. 그 기업을 갈라디아서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이라 해요.

아브라함에게 뭘 준다? 씨 주지요, 땅 주지요, 복 주지요. 그걸 신약적 용어로 바꾸면, “너희에게 성령을 주리라.” 누가복음 11장에 나오지요.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9-13)

마태복음의 버전을 누가복음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마태복음에서는 좋은 것으로 준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성령으로 이어지는 책이거든요. 

성령을 준다 하니 땅의 것이 아니고 붕 떴지요. 그러면 땅의 것을 찾으면 우상숭배가 되지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것이 이번에 대전에서 할 수련회의 내용인데, 땅에 것을 생각하는 것을 탐심이라고 하고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너희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4)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또 사람들이 오해를 해서 그것을 율법으로 지키려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니 부동산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칠까? 그러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될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 죽을 때까지 재산 꼭 쥐고 있으세요. 돈 없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죽는 날까지 놓으면 안돼요. 죽고 나서야 n분지 1로 갈라먹든지 말든지 그것은 알아서 하라고 하고. 돈은 바치는 것이 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쥐고 있으면서 주의 주신 것이라고 알기만 하면, 그 소유권이 이미 누구의 것으로 등기되었느냐 하면 주의 것으로 이미 등기가 되었어요. 주님 주신 혜택을 왜 마다합니까?

골프장에 가서 “나이스 샷! 할렐루야!” 왜 이런 기회를 놓치십니까? 빠라빠라바라빰! 비싼 오토바이 몰고 도로를 누비는 이 축복을 주님이 주신 것으로 알면 되지, 왜 오토바이를 팔아서 교회에 갖다 바치는 짓을 왜 하느냐는 말이지요. 누구 좋으라고? 20시간 이상 강의하니 복음이 이제 나오네. 미국에 와서 이제야 복음이 나오네.

노동한 것도 주의 은혜고, 노동해서 얻은 월급도 주의 은혜고, 모든 것의 소유권만 등기이전하면 돼요. “천국은 공짜로 받습니다.” 하는 증거가 “이 재산은 주님이 주신 재산입니다.”라는 겁니다. “손 떼! 자식들 다 저리가! 내꺼야.” 이게 뭐냐 하면, 천국은 이와 같이 공짜로 주셨다는 겁니다. 왜?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최후의 승리가 된 상태를 생활로 마음껏 발산해 주면 돼요.

“골프 쳐도 나는 구원받았어.” 하면서 마음껏 골프를 치시고, 뭐든지 마음껏 하시면서, 누리면서,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의 정점, 바로 전도서 아닙니까? 묵시문학이고 계시문학이라고 해요. 전도서, “네가 살아가면서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아라. 이것이 너에게 준 기업이다.” 분배하는 하늘의 복인데 거기 보면 놀라운 말씀이 나와요.

포도주를 마시면서, 네가 마음껏 즐겁게 살아라. 왜? 어차피 세상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에. 헛된데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이 아니고 그 헛됨이 헛되기에 즐겁다? 이게 바로 다윗언약의 골리앗크레인이 주는 축복입니다. 어제인가, 우리교회에 질문한 것이 있지요. “목사님, 성경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라고 하는데 헌금하지 말라는 목사님 말과 성경이 지금 충돌을 일으키고 다른 것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엄청난 짓을 합니까, 라는 식으로 비난하듯이 “헌금하지 말라는 말을 왜 합니까? 설교하는 사람에게 봉급도 주려면 헌금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기로 제가 답변을 못하다가 이제야 한글 자판이 있어서 답변을 했어요. 연보는 가족끼리는 하는 법이 아니에요. 성도는 가족이지 남이 아닙니다. 그러면 고린도전서에서 연보를 모으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름도 성도 모르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잠시 돈을 모으는 것이지 한 가족일 경우는 서로가 서로의 생계를 책임지면 되지요.

물론 자기 생계가 기본이고요. 자기 생계도 안 되면서 남 도와주는 그런 오버는 하지 마시고, 여유가 된다면 같은 가족이라 도와줄 뿐이지요. 복음 전하는 사람은 가족이지 봉급고용인이 아닌 거예요. 그리고 복음 전하니까 도와주라고요? 복음 전하는지 아닌지를 누가 판단해요? 돈 내는 오야 나름이지요. 헌금하려고 했는데 설교자가 지난주까지는 복음을 전했는데 이번 주는 정신이 이상해졌는지, 무슨 욕심을 내는 지, “선교합시다.”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선교합시다.”가 왜 복음이 아니냐는 것은 지금 따지지 맙시다. 지금은 단적인 예를 드는 거예요. 선교합시다, 다른 교회와 연합집회 합시다, 정치꾼으로 나오더라는 거지요. “에이, 거둬라.” 하고 꺼내던 봉투 도로 집어넣어버려야 돼요. 왜? 복음전파가 되어야 하는데 복음이 아닌 곳에 돈을 주는 것은 사탄의 일을 하라고 협조하는 것밖에 더돼요?

그런데 일반교인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해요. ‘하나님 보시기에 내 할 것은 했으니까 나한테 책임지우지 마소.’ 이런 식으로 한다고요. 주께서 무슨 거지입니까? 주님한테 왜 동냥을 해요? 주님 돈인 것 같으면 알아서 제대로 복음 전하는데 써야지, ‘난 책임 다 했으니 장로님이나 집사님들이 나보고 책임 지우려 하지 마세요. 십일조는 따로 안 해도 얼추 계산하면 십일조 한만큼 됩니다.’ 이런 계산을 다 해가면서 왜 그렇게 합니까?

그냥 복음 전하면 가족이고 가족은 연보를 하면 안돼요. 먹는 것 같이 먹고, 쫄면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이렇게 함께 살면 되는 거예요.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복음 전하는 사람은 목표가, 굶어죽는 것을 목표로 해야 돼요. 왜냐하면, 복음의 내용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느냐 하면, 이 땅보다 천국에 좋다는 것이 들어 있고,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냐 하면, 하루 빨리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소원이에요.

그런 훌륭한 목사님께 연보를 해버리면 목사로 하여금, 지금 아파트 좋은데 사놓고 가려고 하는데 하꼬방에서 발목을 잡는 것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제가 지금 과한 예를 들어서 남을 가리키던 손가락이 점점 나에게 오니까 말을 정도껏……?

그리고 더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한 것은 뭐냐? 복음적설교자의 목표가, 돈 내라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성경에 있잖아. 이 교인들아! 성경도 안지키나?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하라고 했으니 돈 내라.” 이것이 목표가 아니고, “제발 좀 놔주소. 이렇게 전하다가 굶어죽을래.” 이게 목표가 되어야 되고, 중요한 것은 네 번째로, 방금 한 세 번째 것 있잖아요.

그걸 흉내 내는 사기꾼들이 있으니 조심하라, 이것으로 답글을 달았어요. 내가 이렇게 목숨 바쳐서 전하는데 “나 지금 굶어죽는다. 내가 이렇게 굶어죽는 것이 소원이었어.” 왜 그 이야기를 자꾸 합니까? 누구 들으라고? 그것은 무슨 꼼수고 무슨 통박입니까? “그래? 그럼 잘 가!” 하니까 “내가 죽는다니까?” “가라니까!” 선교사들 가운데서 99퍼센트가 그런 사람들이에요.

“주를 위해서 목숨 바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왜 우리한테 하는데? 반전을 노리는 거예요. 혹시 꼼수 아니에요? 그냥 복음만 전해요. 내가 이렇다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여러분, 예수님이 이렇게 해주십니다.” 그 이야기만 하게 되면 “당신 죽고 싶어? 못 죽여.” 하고 발목 잡는 식으로 “더 외쳐!” 이렇게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도 위험해. 이것도 노림수가 있다고요. 하이고, 이제 안 되겠다. 그만 합시다.
 서경수(IP:211.♡.22.191) 16-10-13 20:29 
13강

지난 시간에 하다 만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에스겔 24:15-18절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에스겔에게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쳐서 빼앗으리라. 그러나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이게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에스겔의 아내가 밤에 죽게 됩니다.

아내가 죽었는데 왜 하나님은 울지 말라고 하시는가? 에스겔은 인자입니다. 인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호칭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일컬어 ‘인자’라고 하셨는데, 이 표현 속에 에스겔 24장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24장 말씀을 풀어야 우리가 상상한 하나님이 아니고 참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했고, 예수님에게는 성령이 임했지요. 그러면 에스겔과 예수님이 연결되는 고리에 우리가 뛰어드는 셈이 돼요. 에스겔도 보고 예수님을 보면서 ‘아, 이런 기능이 예수님의 일이구나.’ 하면서 우리는 에스겔과 견주어 예수님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해야 할 것은, 왜 하나님께서 에스겔이 기뻐하는 것을 빼앗고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 교리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A, B 두 사람이 있는데 A가 B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각자 삽니다. 여기 계신 분을 위해 제가 죽는다면 제 죽음의 효과가 여기 계신 분에게 갑니까? 없어요. 너와 나는 따로 존재합니다. A와 B가 각자라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도 역시 각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내 대신 죽으심으로 내가 죄 사함 받는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이걸 믿는 사람이 좀 이상한 것 아닌가요? 만약 믿는다면 그 믿는 자에게 묻고 싶어요.  ‘어떻게 예수님의 죽으심이 너의 죄를 사할 수 있느냐?’고. ‘믿으라고 해서 믿었을 뿐인데.’라고 한다면 이건 믿는 것이 아니지요.

A의 죽음이 B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면 이것을 예수님께 적용시키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와 상관없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죽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 죽었다고 집사님이 연금 받습니까? 아니지요. 그분의 죽음과 내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 죽음과 우리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 죽음이 자신의 죄를 어떻게 사합니까? 이것을 정확히 모르면 그 신앙은 거짓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목사와 교인이 서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믿습니까?” “믿습니다.”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다.” 서로가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는다고 합의를 본 거예요.

A와 B가 있습니다. A가 부자여도 B는 상관없습니다. B가 배가 아픈 것이 A에게는 전혀 통증이 없습니다. 따라서 A에게 일어난 일이 B에게 영향을 주는 일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A와 B가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A, B 모두 죽었다고 합시다. 살아 있을 때는 따로 놀다가 죽은 후에는 죽음의 세계에 모이지요.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여기가 죽음의 공동묘지입니다. A가 어제 죽어서 묻혔고, B는 오늘 죽어서 묻혔습니다. 그러면 그 죽음의 세계에서 둘이 서로 대화를 나눕니까?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각자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도 죽어서까지 사이좋게 지낼 수 없어요.

나의 죽음이 다른 이에게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존재의 한계입니다. ‘나는 남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예수라는 존재가 나의 존재에 대해 큰소리를 쳐도 나에게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존재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왜 죽었는지를 따집니다.

성경은 각자 죽음의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이유가 뭔가 하면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각자의 죽음이 하나의 언약에 저촉을 받게 됩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어기면 죽는다.’는 것이지요. 이 죽음은 우리가 보기에는 존재에서 나오는 죽음으로 보이지만 언약의 세계에 들어가면 동일한 율법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동일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인간들은 존재로부터 출발합니다. 성경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그 존재가 죽으면 언약으로 되돌아가요. 제가 이것을 ‘죽음 속으로 간다.’고 했는데, 사실은 죄 때문에 죽음은 언약의 공간이며, 언약은 살아 있고, 살아 있는 언약에 의해서 우리는 ‘죄 값으로 죽었다’ 할 때 이 사람은 존재로 죽은 것이 아니고 죄로 죽었기 때문에 심판받기 위해서 이 사람은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돼요.

심판 앞에서 산 존재가 됩니다. 어떻게? 외부에서 볼 때는 죽은 채로. 언약 세계가 참 신기하지요?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는 언약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출발을 혈통에서 시작합니다.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 정철 시조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 아버지, 어머니의 존재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죠. 그럼 할아버지, 할머니는? 계속 존재의 연쇄 고리로 올라가면 결국 ‘모르겠다’고 하든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나왔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없는데서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면 흙에서 인간이 될 때 개입된 원칙이 뭡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러면 어떤 인간도 죽었다는 의미를 달리 보아야 합니다. 숨 안 쉬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 죄로 인하여 죽었다는 말이 옳습니다.

로마서 5에 ‘그 때는 산 자나 죽은 자나 다 부활하여 의의 심판과 죄의 심판을 받으리라.’고 했지요. 부자가 죽어서 어디에 갔습니까? 지옥 갔지요. 지옥에서 부자는 잠자고 있습니까, 살아서 고통 받고 있습니까? 살아 있지요. 안 죽었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죽었다고 합니다. 왜? 죄 때문에 지옥 간 것을 죽음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로부터 출발한 인식이 얼마나 잘못 된 것입니까? 주님은 죄 있는 자를 죽은 자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숨이 끊어지면 죽은 자로 봅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기껏 이것밖에 모릅니다. 주님은 죄 있는 자를 죽은 자로 보기에 살아 숨 쉬어도 죽은 자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관점입니다. 언약적 관점이죠.

제가 처음 던진 질문이 뭡니까? 남에게 일어난 일이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주는가? 각자의 삶이 다른데. 이것은 죽음 후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마찬가지죠. 그런데 언약 안에서 죄 때문에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의로 처벌 받은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화를 내시며 등장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죠. 그분은 의로운 분입니다.

그럼 의로운 분이 우리 죄를 처벌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일괄적인 멸망이 발생합니다. 다수가 있더라도 모두 멸망이란 하나의 성격에 묶인다는 것입니다. 눈에 내릴 때 내 머리위에 내리는 눈과 다른 사람의 무리위에 내리는 눈이 다릅니까? 몸은 달라도 동일한 눈이 내립니다.

죄인은 동일한 처벌을 받습니다. 나와 너 가릴 것 없이 동일한 분이 처벌합니다. 언약 안에서 동일한 분이 여러 사람을 처벌합니다. 그분의 의인이고, 그분의 메시아고, 그분이 심판주입니다.

이제 문제가 풀리지요? 심판주가 죽음을 처리한다면 한 분이 내리는 처벌을 미리 받는 것이 됩니다. 처벌하시는 분이 미리 와서 우리를 처벌하면 너와 내가 각자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자의 처벌을 받기 때문에 처벌 내릴 자 앞에서는 너와 나의 차이가 없습니다.

문제는 예수님 죽음이 어떻게 나에게 효과가 주어지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의 존재로 출발하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주님과 내가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직접 너와 나를 보지 말고, 너도 나도 주님을 경유해서 본다면, 주님 안에서 너와 내가 한 형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맏아들을 우리 죄인 속에 집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마저 아버지로부터 처벌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우리도, 성도는 모두 다 처벌자 앞에서 한 형제가 되어 한 몸처럼 다뤄집니다. 그 언약을 위해서 에스겔이 등장하는 거예요. 에스겔 24:27절을 보세요.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했지요? ‘표징’입니다.

학교 식당에서 햄버거가 제공되었습니다. 그런데 철없는 학생이 햄버거를 먹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만든 햄버거보다 맛이 없다.”고 했어요. 한 친구는 ‘맛있다’고 합니다. 그 광경을 요리사가 물끄러미 바로 보면서 하는 말이 “내가 있는 한 너희들은 동일한 햄버거를 먹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도 내가 만든 햄버거를 먹는다.”라고 할 때, 요리사나 맛없다고 하는 학생이나, 맛있다고 하는 학생 모두 하나가 되는 겁니다.

내(요리사)가 만약 참외를 제공하면 너희들은 동일하게 참외를 먹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 안’입니다. 언약은 인간의 현실적 안목으로는 드러나지 않아요. 그래서 특별히 에스겔에게 ‘표징’으로 보여준 거예요. 일반인들은 모르는데 에스겔에게는 유난스럽게 상식 밖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더라도 울지 말라고 하셨지요.

아내가 죽었는데 울지 않는 에스겔을 보면 사람들은 낯설고 희한합니다. 이 에스겔의 호칭이 ‘인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24장에서 표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계속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특이한 상황이 계속 나옵니다. 이 상황을 다 모으면 예수님의 일생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인자’지요. “너희는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청사진이 에스겔의 일대기를 통해서 미리 묘사되어 있어요.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 골리앗 크레인의 작용입니다. 위에서 에스겔에게 표징을 남기는 겁니다. 그러면 에스겔의 아내를 왜 죽이는가?

멸망이 곧 구원입니다. 악에서 선이 생성됩니다. 제가 ‘성령의 법’을 설명할 때 말했지요. 우리 속의 악을 등장시킴으로 십자가를 증거한다고. 그러면 결국 우리는 이 시대에 ‘표징’이 되는 거예요. 명절에 불신자들 가운데 성도가 섞이면 분란이 일어납니다. 불신자들은 존재와 존재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속에 성도가 투입되면 언약이 끼어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존재 이야기를 하지요. 명절에 만나면 아이 자랑으로 시작해서, 정치 이야기로 갔다가, 지루하면 화투도 치고, 그러다 유산문제 거론하다가 싸우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표징이기 때문에 특이성을 드러내지요. 친척 중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면, 우리 교회는 사람이 얼마나 모이고, 이번에 새로 교육관을 지었고, 담임 목사님은 어떤 사람이고 등등.

그런데 그런 말 나오는 가운데 성도가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고 하면, 분위기가 사늘해 지지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십자가 이야기는 어느 정도 충격적인 말인가 하면, “삼촌들, 형님, 형수님 잘 들어보세요. 어제 제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안 울었어요.” 이런 소리와 같습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너는 너의 존재를 부정하느냐?” “예, 저는 저를 존재로 보지 않습니다. 저는 표징입니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표징이라니.” “저는 언약의 표징입니다.” “이제 그만하자. 너는 앞으로 명절에 오지 마라.” 성경 이야기를 하는데 교회 다닌다는 사람도 못 알아들어요.

표징을 이야기하는 것은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표징의 해석은 더 충격적입니다. 멸망이 구원에 포함됩니다. 구원의 필수 요소가 멸망입니다. 멸망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구원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으로 구원 받아요. 왜냐? 예수는 십자가 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다.”라고. 존재 세계에서 십자가는 죽음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십자가는 죽음이 아닙니다. 죄와 관련된 사건입니다. 대신 심판 받은 표징이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 혼자 주장하더라. 너의 죄를 위해 내가 죽었다고. 하지만 생각해 봐라. 예수 존재와 우리 존재는 2,000년 간각이 있는데 예수와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냐?”

“형님,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에 생긴 오해입니다. 언약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심판은 내가 당할 심판을 해소하기 위해 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에 우리도 같은 것이고 주님 부활에 같이 부활한 것입니다.” 여기서 부활은 표징의 부활입니다.

예수님 존재의 부활이 아니고 표징의 부활이란 말은, 존재는 한 번 구원으로 끝나지만 표징은 반복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하잖아요. 예수님 존재의 부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을 반복시키는 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내용은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효과를 드러내기 위해서 부활의 능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갇혀 있고, 존재에 갇혀 있고, 죄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고속도로를 자유롭게 통과하는 하이페스와 같습니다. 성령은 죽음의 권세를 벗어났기 때문에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이미 비밀번호를 풀고, 죽음의 권세를 풀고 왔기 때문에.

죽음의 권세만 풀었습니까? 죄를 풀고, 율법도 풀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람은 죄와 관계없고, 율법과 관계없고, 사단의 저주와 관계없고, 주와 한 형제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사귐’이라고 합니다. 

제가 아까 에스겔은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스토리죠. 그렇다면 그 표징은 에스겔 본인만의 표징이라면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잖아요. 인자 된 에스겔에게 일어난 표징이 멸망입니다. 멸망이 곧 구원이라고 했지요. 멸망이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 표징을 계속 ‘인자’의 이름으로, 또는 인자에게 일어났던 그 사건을 다른 형제들에게 파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존재 세계가 아닌 언약 세계 안에서는 같은 형제가 구성됩니다. 에스겔 36:26절을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이게 어떤 경우냐 하면,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그들이 멸망당했으니까 그들 나름대로의 행위나 주장은 일체 다 끊어진 상태입니다. 멸망당했다는 말은 멸망시킨 분이 있지요. 그럼 멸망시킨 분이 멸망당한 자를 대표해서 책임지겠지요. 그러면 멸망당한 자와 멸망시킨 분이 같이 움직이잖아요. 왜냐하면 그래야 의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를 소유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의는 멸망시키는 행위입니다. 죄에 대해 멸망시키는 처벌 행위가 얼마나 의롭습니까? 죄를 그냥 두지 않고 처벌하는 행위 자체가 나타난 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가 나타나려면 처벌받는 자가 있어야 하고, 처벌자가 있어야 되지요.

처벌자와 처벌 받는 자 사이에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절대 죄를 용납하시는 분이 아니다.’ 라는 점이 드러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에스겔 37:1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뼈가 가득하다고 했으니까 존재로 보면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죽었다’고 하면 안 돼요. 언약 안에서는 죽은 것이 아니고 그들은 ‘죄를 지어 멸망당했다’고 봐야 해요. 왜냐? 그래야 심판주가 등장하고, 언약에 의해 의가 등장하는 현장이 돼요.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죄를 지어 죽었는데 죽은 자가 다시 한 번 죄를 만회할 기회가 없지요.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 받지 행위로는 구원 못 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행위는 주님 앞에서 다 확정지어졌습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는 것이 용납 안 됩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똑같은 죄를 지을 뿐인 것을 미리 단정하시고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고 난 뒤에 행위를 내세우면 안 돼요. “내 행위로 안 되는 것을 믿습니다.” 다른 말로는 “내가 이제야 죄인 된 것을 믿습니다.”가 됩니다. 타락, 멸망 이것이 구원의 핵심 요소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이방인이 믿음의 대표자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백부장이 믿음의 표상이 될 줄 누가 상상했어요? 백부장은 율법이 없습니다. 유대인과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죄인이면서 죄를 모르고, 백부장은 이방인이면서 주님 앞에 죄인인 것을 알기에 가장 언약적인 표징이 백부장입니다. 세리, 창기, 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로 보는 세계와 언약으로 보는 세계의 차이를 알겠습니까? 언약 세계는 우리를 숨 쉬냐, 아니냐로 보지 않고 죄냐 의냐의 관점으로 봐요. 죄가 있으면 의로 폭격합니다. 그 때 “왜 나를 때립니까?”라고 하면 안 되고 “때려주시는 분이 계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나를 존재로 보지 않고 죄로 보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그런 안목에서 처벌을 하시니 너무 감사한데, 이 처벌을 우리 혼자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같이 받았으니 더욱 감사하지요. 즉 심판주가 처벌을 받았으니까 세상에 이런 든든한 배경이 또 없어요. “내가 너 때문에 죽었어.”라는 말을 주고받은 것이 있어요.

비록 강도지만 언약 안에서는 주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조직원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조직원이에요.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조직원이 된 겁니다. 세상적 시각에서는 아저씨, 아줌마지만 언약적으로 보면 우리는 인자를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여호와께서 질문하신 말씀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말씀에, 에스겔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살리라’고 하시면서 에스겔에게 대언하라고 명하십니다. 37:13절을 봅시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여호와는 언약을 성취하는 일 외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언약 성취를 위해서 누가 호출되었습니까?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멸망당한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아내가 죽어도 울지 말아야 합니다. 내 존재를 위한 아내가 아니고 표징의 아내고 언약을 위한 아내입니다. 그러면 에스겔 아내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죽습니다.

사실은 에스겔의 아내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내가 죽어야 하지요. 죄를 지었기에. 그런데 그 죄책을 인자라는 호칭 때문에 대신 가져가는 그 자체가 그 시대에 필요한 인자으 표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십자가가 구원의 표징이 되고, 그 표징은 한 번 지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살아서 부활의 힘으로 십자가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들이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러나 주님의 능력으로 살리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준비한 스토리를 전개하시는 겁니다. 에스겔의 아내가 죽은 후에는 또 무슨 일이 전개 될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처음부터 죽음을 향하여 가다가 죽은 후 부활하지요.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칭했어요. 그 ‘인자’의 내막은 예수님 오시기 전 에스겔의 일대기를 통해서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에스겔 37:7-8절을 봅시다.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질문합니다. 뼈에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는 것이 살아 있을 때입니까, 죽은 후의 일입니까? 죽은 후에 살점이 붙었지요. 그러면 오늘날 우리 몸은 죽음으로 향합니까, 이미 죽었습니까? 이미 죽은 몸이죠. 그렇다면, 말씀이 들어오면 우리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지요.

마술사가 검은 상자를 열면 예측도 못한 비둘기가 나오지요. 바나나 껍질을 벗겨야 하얀 속살이 나오지요. 바나나 우유 포장지가 노란색입니까, 하얀 색입니까? 노랗지요. 그러면 그 바나나 우유 버려야 합니다. 왜냐? 바나나는 노릇 껍질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얀 속을 먹기 때문이지요.

주님이 우리 겉사람을 벗기는 것이 구원 작업입니다. ‘죽어라 이놈아!’ 이 말은, ‘살아라 이놈아!’라는 뜻입니다. “주님이여, 제가 죽어갑니다.” “말 바꿔” “제가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 말 잘했다.” 이렇게 우리 주님은 친절하고 말을 바꿔 주십니다. 성령이 지금도 십자가로 이 작업을 하십니다. “너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위해 표징으로 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에스겔 36장에는 그러한 영이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오기 때문에 내가 그 영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빼도 박도 못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성령의 오심을 ‘보증’으로 표현했어요. 그리고 ‘인 치심’이라고도 했어요. 인감도장을 찍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지울 수 없어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의 인을 받았다.’고 했어요. 이 인을 받은 자(천국 백성) 외에는 다 짐승의 인을 받아서 666이 됩니다.

이것은 심판 이전에 이미 심판 받을 자가 구분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육점에 걸려 있는 돼지고기에 ‘검’(검사를 받았다는 표시) 도장이 찍힌 고기와 없는 고기를 구분하듯이 주님은 우리를 삼겹살로 봐요. 언약을 위한 삼겹살이죠. 예수 도장이 찍히면 검사를 통과한 것입니다. 예수 도장이 없으면 사단의 도장이 찍힙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로 보는 세상관이 아니고 언약으로 보는 세상관입니다. 그런데 모든 철학자, 과학자들은 존재로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인간은 다른 존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불신자 띠를 내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서로 도와주자.” 이렇게 나와요. 이건 천주교의 주장이 됩니다.

천주교는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에 사랑을 전하면 하나님이 그 사랑을 가상히 여겨 구원해 준다는 겁니다. 그럼 십자가는 뭔가? 사랑의 모델, 희생의 표상입니다. 제가 천주교의 주장을 잠시 거론했는데, 여러분이 듣기에 어떻습니까? 천주교와 개신교가 별 차이가 없지요.

복습해 봅시다. ‘인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표징이 들어 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에서 부활은 존재론적 부활로 보면 안 됩니다. 심판, 멸망 자체가 구원의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타락하라는 거예요. 타락이 있어야 구원이 있지요. 그래야 모든 공로는 예수님 혼자 다 받게 됩니다. 그것이 정착되는 세계가 ‘아들의 나라’ 즉 성경에 말하는 진짜 천국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표징이기 때문에 면류관 반납하고 주님만 높이게 됩니다.

이제 다니엘을 봅시다.
하나님이 다니엘을 어떻게 호칭하는가 하면 ‘인자’라고 해요. 에스겔에게도 ‘인자’라고 호칭했지요. 그럼 다니엘의 인자와 에스겔의 인자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에스겔은 땅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미리 보여주었다면, 다니엘은 그 활동과 관련된 배경, 묵시적 세계와의 연관성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누가 핍박했나?’를 보면, 에스겔은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같은 (수평적)인간들의 핍박을 묘사했다면, 다니엘은 마귀가 인간들을 어떻게 시험했고, 부추겼는지 수직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에스겔에서는 비행장에서 비행기가 수평으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에서는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갑니다.

한국교회의 모습이 비행기를 차로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하지만 날지를 못해요. 날개가 있어야 날지요. 늘 종교놀이를 하고 있고, 날아오르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하늘을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해요. 예배당을 넓혔고, 교육관을 지었고 이런 이야기는 알아듣는데 ‘예수님 십자가로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

비행기를 활용할 줄 모릅니다. 비행기를 날기 위해 있잖아요. 교회는 이 땅을 떠나기 위해 있는 것이고, 떠날 때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언약적 관점으로 달라져서 떠나야 성령의 힘으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요. 비행기가 휘발유의 연소되는 힘으로 떠는 것처럼 성도는 성령의 힘으로 세상을 떠나 하늘로 날 수 있습니다.
 서경수(IP:211.♡.22.191) 16-10-13 20:30 
14강

다니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묵시 세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 사는 동네에 유령이 나타나면 누가 괴롭습니까? 사람이 괴롭지요. 그래서 유령이 나타나는 것을 막기 위해 장례식을 치러요. 장례식은 고인을 묻어서 더 이상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묻고 얼른 산 사람들은 그 자리를 떠나지요.

그러나 묵시 세계에서는 관점이 바뀝니다. 유령들이 사는 동네에 사람이 오면 유령들이 놀라 자빠집니다. 다니엘은 그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은 사람으로 보이냐, 난 존비로 보인다.” 이게 다니엘이에요. 왜냐하면 다니엘은 국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난 뒤의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언약 안에서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를 받아들인 국가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죽은 자를 받아들이면서 힘 센 자기 나라가 약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왔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잡혀 온 다니엘과 세 친구는 존재적 관점이 아니고 언약적 관점이기에 “이 유령들아! 언약이 있는 우리가 산 자들이고 너희들은 유령이야.” 이렇게 됩니다.

언약적 관점은 이 세상 관점보다 범위가 넓어요. 이 세상 위에서 세상을 쳐다봅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를 잡았어요? 바벨론 사람들은 마르둑 신을 믿기에 마르둑 신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자부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온전히 잡아야지요.

그런데 유령들이 산 사람 때문에 괴로워해요. 이게 구약 다니엘입니다. ‘디 아더스(The Others)’라는 영화를 보면, 여자와 아이 둘이 외딴 저택에 살아요. 가끔 부동산 중개업자가 집을 보러 옵니다. 부동산 업자가 보기에 그 집은 비어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집을 보러 오면 세 명의 유령들이 귀찮아해요.

유령이 왜 그 집을 떠나지 않았는가 하면 엄마가 우울증이 걸려 아이 둘을 죽이고 본인도 자살했는데, 자신이 자살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계속 그 집에 머무는 겁니다. 영화의 주제가, 인간은 인정치 아니하면 그 지역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씩 정리하면서 삽니다. 그런데 정리되지 않으면 찝찝해서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아요. 추억과 기억에 사로잡힌 인간의 한계를 그 영화가 보여주는 겁니다.

맨손으로 고슴도치를 잡을 수 있습니까? 고슴도치의 가시에 손이 찔립니다. 바벨론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를 잡았는데 그들에게는 바벨론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니엘 1장부터 전개되는 이야기에 보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지혜로운 자로 뽑혀 느부갓네살 왕을 보위하기 위해 특별 장학생으로 교육을 받잖아요.

그래서 그들에게는 산해진미가 제공되는데 다니엘과 세 친구는 산해진미 대신 채식을 요구합니다. 관리인은 걱정합니다. 왕의 신하가 될 인재를 교육하면서 좋은 음식을 먹여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 음식을 거절하고 채식을 먹겠다고 고집하니 당연히 걱정을 하겠지요. 그 때 다니엘은 제안합니다. ‘10일 동안 채식을 먹게 한 후 산해진미를 먹는 자들과 비교해서 자신들의 얼굴이 야위고 초라해 보인다면 그 때는 당신 뜻대로 하소서.’ 라고.

그런데 그들은 채소만 먹었는데 산해진미를 먹은 자들보다 더욱 얼굴이 윤택하고 빛났습니다. 벌써 이상한 조짐이 발생하지요? 과연 누구 산 사람이고 누가 유령인지 혼돈이 발생합니다. 그러다가 2장부터 이야기가 급작스럽게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했을 때 이스라엘 외부의 세계가 과연 역사의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상태에서 이스라엘 외 다른 지역의 역사가 자체적으로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체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의 역사는 흘러가는가? 그게 이스라엘의 묵시적 언약 완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역사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방편에 예속된 채 움직이는 역사입니다.

‘역시 여호와는 만유의 주야. 그분 언약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어.’라는 것을 증명해 줄 역사기 때문에 그들 고유의 역사는 없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역사로 진행됩니다. 따라서 역사가 진행된다는 점에서는 같아요. 처음에 바벨론, 다음에 메데 바사, 그리고 헬라 마케도니아, 그 후 로마. 이것은 그냥 흘러갑니다.

로마 이후에는 왜 없습니까? 다니엘 예언이 마지막 때까지만 있거든요. 그럼 마지막 때라면 2016년 브리질 리우 올림픽도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다니엘에 나타난 언약적 의미에서의 마지막은 언약이 다 성취다면 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등장할 때까지만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 때까지만 역사적 의미가 묵시에 종속되었다는 조건 하에서만 의미가 있어요.

그냥 역사는 의미가 없고 묵시의 종속 하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역사의 의미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못 찾습니다. 언약, 묵시를 거쳐야 의미가 있습니다. 언약의 완성 세계가 묵시 세계입니다. 묵시와 언약의 완성이 뭐냐? 카메라가 있지요. 이게 묵시라면 언약은 삼발이입니다. 묵시와 언약의 접점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을 하나님이 ‘인자’라고 불러요. 그러면 묵시, 언약의 완성이 구체적으로 뭔가? 다윗 언약의 완성입니다. 지닌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예레미야 31:33절. 옛언약은 모세에게 율법으로 주어졌지만 새언약은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옵니다.

에스겔 37:25을 봅시다. “내가 내 종을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다윗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다윗의 자손이 온다는 것입니다.

26절에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이제 언약 없습니다. 다윗의 자손이 이 땅에 와서 아버지와 맺은 언약을 이루면 더 이상의 언약은 없습니다. 그것으로 완성이 되는 거예요. 완성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28절 “내 성소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있으리니 열국이 나를 이스라엘을 거룩케 하는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나님의 거주지가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천국에는 보좌가 두 개 있어요. 어린양의 보좌와 하나님의 보좌. 그러니까 하나님은 결국 자기 피조 세계에 자신의 거주지를 마련하시려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진행시킨 거예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자신의 거주지를 마련하시려고 아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면 묵시 세계는 완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니엘에서는 고맙게도 완성의 세계가 미리 다니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물론 상징이지만.

다니엘은 겁을 내면 안 돼요. 이미 묵시 세계가 다니엘에게 온 겁니다. 다니엘 7: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이렇게 나오다가 13절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인자 같은 이’가 나오는데, 다니엘에게 ‘인자’라고 불렀고,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일하러 오신 거예요. 그것을 지금 다니엘은 미리 예고편으로 자신이 표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이방인의 역사는 자체적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멸망이 곧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 되면 묵시 세계가 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뭐냐? 역사라는 지평을 이어오다가 멸망과 동시에 이스라엘 역사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 이스라엘과 함께 있던 주님의 언약은 묵시로 가는 거예요.

떨어진, 멸망한 여기에 인자, 다니엘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멸망한 자기 백성 속에 인자가 있으니까 인자가 유일한 통로가 되어 묵시 세계, 언약이 완성되는 그 상황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는 겁니다. 연락을 취하되 다니엘이 먼저 요청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이한 현상들을 다니엘과 세 친구 주변에 일으키십니다.

묵시의 지점을 지웁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묵시 세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다니엘을 아무리 살펴봐도 묵시가 없어요. 예수님이 안 보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여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점선으로 삼발이를 그려야 해요. 그리고 점선으로 완성세계를 그려야 되겠지요. 이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환상’이라고 합니다.

존재론적 관점에서 환상은 없어요. 그냥 환상일 뿐이에요. 그런데 언약적으로 보면 환상이 현실이고 역사가 꿈같은 환상입니다. 완전히 바꿔서 살아야 합니다. 성령이 아니면 이 사실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이 세상은 꿈이 되는 거지요. 꿈의 특징은 갇혀 있다는 겁니다.

잠을 잘 때는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을 못해요. 잠에서 깨야 알지요. 어쨌든 꿈에 아들이 나쁜 놈에게 끌려갑니다. 그래서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고함을 쳐도 소리가 나지 않고 손을 내밀어도 움직이지 않는 거예요.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러다 잠에서 깨면 식은 땀이 나면서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지요.

꿈은 갇혀 있는 것입니다. 소리를 질러도 안 들려요. 그래서 인간은 환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환상이 있으면 갇혀 있지만 환상이 없다면 제 마음대로 하지요. 세상이 전부입니다. ‘보이는 세상이 모두다.’ 이게 과학적 사고방식이죠. 이것을 학생들이 지금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묵시를 이야기하면 교사 자격증 박탈당합니다.

제가 질문을 드립니다. 다니엘이 핍박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데 그 환상을 다니엘이 철거시킬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다니엘이 지금 꿈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 쪽에서 연락을 취하게 되면 기이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지요. 점선을 지우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명령을 합니다. 박사들 다 불러 모아, ‘어젯밤에 내가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왕이지만 이런 횡포가 어디 있습니까? 학식이 높고, 지식이 풍부한 박사라 할지라도 왕이 꾼 꿈을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신하들이 꼼수를 씁니다. “왕이시여, 꿈을 말씀하시면 저희들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너희들이 신과 교류한다는 박사들 맞지?” “예” “그럼 내 꿈을 알아내고, 또 해석도 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 죽일 거야.” 그래서 박사들은 꼼짝 못하고 다 죽게 되었어요. 질문합니다. 다니엘은 왕의 꿈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몰랐습니다. 그래서 왕의 명령에 박사들이 위기를 맞은 것뿐 아니라 다니엘에게도 위기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다니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겠어요? “하나님, 제가 무슨 죄를 지어 이런 환경을 만나게 하십니까? 그냥 착실하게 고위 공무원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이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수평세계에 다니엘 중심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데 수평적으로 보면 무늬가 발생되는데, 수직적으로 보면 전선이 활동하고 있는데 이것을 밟아 수평으로 만드니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했을 때 사람들은 수평적 능력으로 보았지만 사실은 수직적, 묵시적 하나님께 기도했어요. 기도하고 오병이어로 무리들을 먹였어요. 예수님만이 그 당시 묵시적 접점으로 이동하고 있고 제자들은 멋도 모르고 예수님 따라다니면 성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꿈같은 역사적 존재는 의미 없어요. 인자가 행하는 역사적 의미만 묵시로서의 의미가 있지, 그 외에는 없어도 관계없어요. 주님은 묵시화 된 역사를 안고 다시 성령으로 오시니까, 우리는 양동이에서 불이 쏟아지듯 성령을 받으니 모든 것을 존재적관점이 아닌 언약적 관점으로 보게 된 거예요.

언약적 관점에서 보니 이 세상은 꿈이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지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라(요일2:16).’는 말이 이해가 되고, 그리고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는 말씀이 성도에게는 납득이 되는 거예요.

사도의 기록은 묵시적 기록입니다. 교회 부흥시키라고 준 기록이 아닙니다. 특이한 표징이 되게 하기 위해 준 말씀입니다. 그 말씀 듣고 갑자기 머리 기르고 도포입고 돌아다니지 마세요. 연락은 주님이 취합니다. 내가 억지로 예수님 흉내 낼 이유가 없어요. 저는 개량한복 입고 짚신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수상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니까 온 가족이 특이한 복장을 하고 왔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일종의 문화입니다. 왜 인위적으로 티를 냅니까? 천주교 신부, 수녀들이 이상한 옷을 입고, 목사가 까운 입고, 중이 머리를 깎고 폼을 내는 것은 불신앙을 보여주는 거예요. 정말 믿는 것이 없기 때문에 믿을만한 상품 마련해서 돈 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계절 따라 커튼 바꾸고, 행사를 벌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위선적 행동입니다. 절기 지킨다고 믿음이 생깁니까? 못 믿을 상황이 올 때 믿음 있고, 없음이 드러납니다.

언약적 안목에서 보면 이 세상은 멸망 받을 곳이요 적그리스도의 세상인 것이 보입니다. 이것이 보이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만약 신학교를 세운다면 중, 사비이 교주, 이단 지도자들을 불러 강의시킬 거예요. 그래서 그 강의에 대해 성경적으로 비판하라고 요구할 거예요. 제대로 비판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 강의 듣고 넘어가는 사람은 예초에 성령 안 받은 사람이기에 신학교에 계속 다닐 이유가 없는 자입니다.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세요. 성도는 묵시적 존재이기에 가만히 있어도 이상한 현상들이 주위에서 벌어지는데 그것을 통해 절망을 느낍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이 일을 벌일 때마다 죽은 자가 됩니다.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자기 꿈도 잊어버리는데 남의 꿈을 어떻게 알고 해석을 합니까?

하나님은 극적으로 다니엘에게 느부갓네살의 꿈과 그 해석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꿈을 해석한 후 왕에서 박사들을 죽이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왜냐? 심판할 왕이 심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자체적으로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요. 죽인다고 정의고, 안 죽인다고 악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김정은이 자기 부하 70명 죽여도 의미 없고, 살려도 의미 없어요. 의미 없는 인간이 의미 없는 처형을 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동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도 인민들의 피를 빨아먹은 자들입니다. 김정은이 부하를 죽인 것은 악인이 악인을 친 거예요. 세상은 하나님 허락 없이는 처형도 성사될 수 없습니다.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갔지요. 이 말은, 바벨론이 멸망당할 제국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멸망당할 제국이 멸망하는 것은 지옥으로 가기 위한 것이지만, 멸망당할 제국에 포로 잡힌 이스라엘은 구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죽음이지만 그 죽음이 묵시적 죽임인 것을 믿으면 그 사람이 바로 다니엘과 같은 인자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양 옆에 같이 달린 자들이 있었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 사람은 구원 받고, 한 사람을 지옥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쪽은 언약적 안목이었고, 다른 한쪽은 역사적 안목이었습니다. 주께서 강도되게 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 받고, 내가 살다보니 강도되었다고 믿는 역사적 지평은 가진 사람은 지옥 갑니다.

왜냐? 역사적 안목이기에 예수님께 “당신이 하나님 아들이라면 날 구원해 봐? 그러면 믿어줄게.” 이렇게 나옵니다. 이런 사람은 묵시적 존재로 살겠어요, 역사적 존재로 살겠어요? 역사적 존재인 자신을 위해 역사적 존재인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지요.

참 신자라면 교회 와서 기도할 때 “주여, 죽여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까요, “주여, 살려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까요?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너무 심하고,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기도해야지요. 그러면 주님의 응답은 이렇게 나올 것입니다. “이미 내가 너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어.”

성도는 설교를 들을 때 주께서 주시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하라.’고 설교하면 안 됩니다. ‘믿으세요.’라고도 하지 마세요. ‘믿게 될 것입니다.’라고 해야지요. 제가 강의 중에 헌금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그 때 녹음이 안 됐어요. 녹음기고 고장이 나서.

“헌금을 할까요, 말까요?”라고 묻는 분이 계신데, 제 답변은 요한 1서 2:26절 말씀처럼 성령이 가르치는 대로 하세요. “누구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 성령의 지시를 받는 자가 묵시적 존재이고, 이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자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해 줍니다. 그런데 그 꿈이 느부갓네살 개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느부갓네살 개인 안에 지구 역사의 미래가 다 들어 있었어요. 이것을 ‘보편적 단독자’라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개인 안에 남아 있는 이방인의 역사가 다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큰 성 바벨론’이란 표현을 써요.

지금 느부갓네살 왕은 다니엘과 상대하잖아요. 그런데 다니엘의 이름이 뭡니까? ‘인자’지요. ‘인자’는 주님입니다. 보편적 단독자에요. 그러니까 모든 인구를 축소하게 되면 1:1입니다. “뱀의 후손 나와.” 여자의 후손을 호출합니다. 타락 없는 구원은 없어요. “뱀아, 내 발꿈치 물어!” 뱀이 물었습니다. 이긴 줄 알았지요.

악이 승리하게 이스라엘이 패배할 줄 알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자의 후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의 후손 손에 해머가 들려 있는데 뱀이 발꿈치를 무는 순간 뱀의 머리를 때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물리고) 부활하신 거예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보니까 흔적이 있습니다.

도마가 하는 말이 “못자국, 창자국을 보아야 믿겠습니다.”라고 했지요. 주님은 “봐라” 하시면서 그 자국을 보여줬어요. 사건을 흔적을 보여준 것입니다. 부활은 신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새겨진 사건의 반복이 부활의 취지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했지요.

십자가 사건은 오래 전에 일어났고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십자가를 근거해서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묵시가 역사를 잡는데 바벨론 왕은 착각하기를, 자기가 다니엘을 포로잡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언약적으로 보면 바벨론이 다니엘을 보호하고 모시고 있는 거예요. 다니엘을 묘목, 혹은 모판처럼 모시고 있어요. 역사가 묵시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다니엘은 잠시 잠깐 알았어요.

“다니엘아, 네가 믿는 하나님의 최고다. 나는 꿈 때문에 잠도 못 잤는데 네가 내 꿈을 알게 해 주었구나.” 느부갓네살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회개한 것은 아닙니다. 이 말을 듣고 다니엘은 “나는 역시 묵시적 존재야!”라고 생각했겠어요, 아니면 “휴, 살았다.”고 하면서 안도의 한 숨을 쉬었겠습니까?

“하나님, 이런 장난 다시 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제발 이런 장난하지 마세요. 죽는 줄 알았습니다. 주님이 꿈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와 친구들, 그리고 박사들이 다 죽었습니다.” 절망 속에서 비로소 구원하시는 주님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한 번으로 끝이 아니고 또 옵니다.

느부갓네살이 정신을 차리면 좋겠는데 아닙니다. 또 금신상의 꿈을 꾸었고, 그 꿈을 해석하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또 나섭니다. “이것은 왕의 시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오는 모든 세계를 말합니다. 왕이여, 죄송하지만 이 나라는 망합니다. 망하지만 기뻐하소서. 왕의 나라보다 못한 나라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열역학 제 2법칙입니다.

갈수록 이 세상 에너지의 질은 떨어진다는 법칙을 19세기 말 물리학자들이 발견했어요. 쓸 만한 에너지가 갈수록 고갈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질서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세상은 갈수록 무질서화 된다는 것입니다. 무질서화 된다면 그 원인자가 밝혀져야겠지요.

바다와 육지의 경계고 깨집니다. 바다에서 뭔가가 올라옵니다. ‘아르케’ 원초적 괴물이 올라와요. 이 괴물은 영적입니다. 인간은 육적입니다. 육은 육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영적 싸움터를 배경으로 해서 아담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오는 괴물의 형태가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땅에는 없고 바다에서 올라온 괴물이 이 땅을 정복했다는 것은 이 세상은 역사의 한계가 드러났고 이제는 역사의 바탕이 되는 묵시 세계가 역사 세계를 완전히 뒤덮었다는 뜻입니다. 육지의 사람들이 근원적인 짐승에 대항할 힘이 없어요. 그러면 사단의 세력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그런데 이 이야기는 묵시적 존재인 다니엘에게만 연락이 왔는데, 이 이야기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묵시적 존재가 되어야만, 즉 성령이 임한 자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감춰진 비밀입니다.

짐승이 땅을 정복했습니다. 이러면 판이 커졌어요. 사람에 의해서 움직이던 역사가 원래는 악마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 짐승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하이브리드(hybride)입니다. 혼용체이요. 사자인지 독수리인지 애매합니다. 질서 잡힌 인간 세계의 바탕은 무질서입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인간들의 삶의 의미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왜 사는 지, 왜 태어났는지 답변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질문만 했지 평생 답을 모르는 채 죽었습니다. 모든 철학자, 과학자는 소크라테스의 후손들입니다. 천문학자가 별이 몇 개 인지 알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별만 알지  그 외에는 모릅니다.

세상은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에너지가 제로(0)인 것보다 더 떨어지는 영역이 있어서 거기서 새로운 물질이 창조된다는 것이 양자 물리학의 결론입니다. 이것을 ‘힉스 장’이라 하는데, ‘힉스 장’에서 최초의 질량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이것은 과학인지 신화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런데 물리학자는 이것에 대해 규명을 못해요. 왜 떨어지는지 몰라요. 느부갓네살 신하들 같아요. 이들은 묵시 세계를 몰라요. 묵시 세계는 센드위치 같아요. 위에는 완성된 세계가 있는 반면 이 지상에는 바다가 땅을 정복하니까 결국 인간과 인간의 전쟁이 아니고 배후에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벌이는 전쟁이 남은 역사를 진행합니다.

그 역사를 진행하면서 악마의 세계도 뚜렷이 드러나면서 더불어 메시아도 뚜렷하게 가까이 오는 거예요. 심판주가 나타날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의미를 모르는 채  이유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시대에 메시아가 옵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아갈 뿐입니다. 자기 욕망에 휩싸여서.

이런 엉망진창 짐승의 세계에서 유독 셋별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예수님 말씀입니다. 셋별은 캄캄한 밤에 떠오르지요. 어둠이 짙을수록 셋별을 더욱 빛납니다. 그래서 택한 백성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둠의 시대에 ‘인자’같은 역할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두 번째 이벤트가 뭔가 하면, 느부갓네살 왕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모두에게 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다니엘 세 친구에게 우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절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왜 난데없이 우상에게 절해야 하는 상황을 만드셨는지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자신들의 역할은 이 바벨론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거절한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시작된 일이라면 마무리도 언약대로 하실 것임을 믿고 다니엘 세 친구들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고 그 죄로 불속에 던져졌습니다. 이 상황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이런 일이 지금도 일어납니까? 매일 일어나지요. 성도들의 입에 달린 말이 있어요.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

우리의 매일의 삶에 절망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감사가 썰물처럼 나가는 그 경계선에 우리가 지금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다니엘과 똑같은 처지입니다. 내일 또 깜짝 놀랄 일이 있을 거예요. 주님은 항상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왜냐?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존재로 희석되지 말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에 매료되지 말라고.

어쨌든 내일 일은 난 몰라요. 다만 대비를 해야 돼요. 어떤 깜짝 놀랄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하지 못한 감사가 나오도록, 묵시적 존재로 세상을 언약적으로 볼 수 있도록 일을 일으키십니다. 내일은 역사 속에 묵시로, 수직적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 그림자 밖에 몰라요.

“엄마, 오늘도 100점 맞았어.” 100점 맞았다고 천당 갑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얘들은 그것밖에 몰라요. “여보, 나 부장으로 승진했어.”라는 말을 들은 성도는 ‘주님이 또 사건을 일으키셨구나.’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부장되면 골치 아픈데 주님이 시키셨으니 감사함으로 감당하겠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모든 것이 다니엘 세 친구처럼 불속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깜짝 놀랄 예상 못한 일들. 하지만 그것은 감사로 이어지게 하는 주님의 사건인 것을 약속 속에 있는 사람은 알지요. 그리고 언제 이곳을 떠날지 모르지만 늘 떠날 준비를 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서경수(IP:211.♡.22.191) 16-10-13 20:31 
15강

이사야 53:4-6절을 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게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선지자들의 특징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할 때,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이스라엘은 특수한 나라고, 하나님은 그 나라에 숨어 계시는데, 그 나라에서 펼쳐지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면면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약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멸망하는 가운데 쏟아져 나온 자들이 선지자입니다. 야구공의 실밥이 떠지면 그 안에 실뭉치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깨지면서 선지자가 나왔다는 말은, 그 선지자가 나와서 한 말들은 그전부터 담겨 있던 이스라엘의 성격이요, 본질이란 뜻입니다.

‘김밥 옆구리 터졌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김밥 안에 들어있는 시금치, 단무지, 우엉이 다 쏟아져 나오잖아요. 선지자들이 외치는 말들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안에 포함되어 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깥으로 나와 외치는 소리가 뭔가 하면,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멸망케 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미 이스라엘 내에 잠복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것을 몰랐어요. 그들은 자기 나라가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은, ‘한 번 온 메시아는 그 모습 그대로 자신들과 영원히 함께한다.’고 믿었습니다. 메시아가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이 죽도록 우리가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목숨을 다해 지켜드리겠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생각은 구약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나라에 대한 오해와 똑같은 오해를 반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거기서 선지자들이 김밥 옆구리 터지듯이 나와서, 영원히 함께 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안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를 우리가 놓치면 안 돼요. 하박국, 스가랴, 에스겔, 요나 선지자의 외침이 우리 귀에 들어와야 해요. 그 소리가 영원한 이스라엘을 조성하는 요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 구약의 흐름에 대해 살폈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 마지막 시간에 이스라엘을 과거 지사로 돌리지 마시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촉구할 정도로 기존 형식적인 이스라엘이 담당하지 못할 분출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이 기존 인간들의 제도와 교회 제도와 교회 지평과 이런 것으로 하나님의 교회의 본질을 덮어씌울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성령의 역사를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이런 제도로 틀어막으려 시도하느냔 말이지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이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외침을 어느 누구도 잠잠케 할 수 없습니다. 말라기, 하박국, 이사야가 외치는 소리는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곧 이 세상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저승사자’입니다.

성신 받은 선지자가 ‘저승사자’라면, 신약 시대에 성령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저승사자’입니다. 선지자들이 외치는 내용을 보면 정말 저승사자다워요. 세상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에게 욕들을 만합니다. 하박국 3:17절을 보겠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기서 ‘없음’이 몇 가지 나옵니까? 6가지가 나오는데 이것들은 그 당시 기초 산업의 전부입니다. 이런 것을 없더라도,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은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것이 저승사자 입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얘들아, 떠나자.”는 말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할 것 같으면 그 쪽으로 떠나자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도가 할 일은 굉장히 간단해요. 보따리 싸고 떠나면 됩니다. 여기서 또 오해하면 안 됩니다. 재산 팔고, 사업 접고 기도원으로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구원의 하나님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이지요.

성도는 무화과나무 열매를 탐하지 않고, 외양간의 소 숫자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위인들’이라고 합니다. 정말 성경은 우리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 같아요. 그냥 살기도 급급한 사람들에게 떠나라고 하니까 상당히 힘듭니다.

나는 무화과나무 열매에 신경 쓰고 싶고, 밭은 소출을 기대합니다. 이번 설교 제목은 ‘제 길로 갑시다.’입니다. 이사야 53: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제 길로 가면 됩니다.

왜 제 길로 가야 합니까? 저승사자, 성령 받은 사람이 증거할 것은 메시아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에 주목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잘났는가?’가 아니라,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고리에 무엇이 담겨있고, 무엇이 쏟아지는지 보란 말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말씀 지키는 자기 자신에게 주목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게 되면, 주님 말씀에 의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훼손하는 짓입니다. 이사야 40:6-7절에 이른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면 오늘날 선지자인 우리들은 ‘나 잘났다.’고 하지 말고, 주님과 나 사이에 연결된 이사야 40장을 집어넣고 그것을 증거 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메시아의 효과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40장 말씀을 이루신 메시아가 차질 없이 약속을 이루어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사야 40장 말씀을 지킨다고 하나님의 능력을 훼손하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기 제 길로 갔다’고 하면,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가면 됩니다. 그런데 제 길로 가는 성질이 뭐냐 하면, 채찍 맞기 싫어서 가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육신의 본성입니다.

이사야 53:5절에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는 찔리기 싫어서 각기 제 길로 갑니다. 농부, 의사, 미용사 가릴 것 없이 각기 제 길로 가요. 채찍 맡기 위해 판사하는 사람 봤습니까? 없지요. 그냥 육신의 욕망대로 살란 말이지요. 선교사, 장로, 집사 전부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간 거예요. 채찍 맡은 것을 피해서 간 거예요. 주님 앞에 구차한 변명하지 맙시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5절).”고 했어요. 우리는 상하기 싫어서 도망칩니다. 내 인생이 덜 망가지는 곳으로 피해 갑니다. 그 다음에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이 말은 뭐냐? 우리가 징계 받기 싫어서 제 갈 길로 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결정하고 선택했을 때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했습니다.”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달리 말씀합니다. ‘너는 찔리기 싫고, 상하기 싫고, 징계 받기 싫어서 그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제 길로 가는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절).”라고 했어요. 우리는 채찍 맞기 싫어서 제 길로 가는 겁니다. 불편한 것, 싫은 것, 귀찮은 것, 힘든 것 등을 피해서 각기 제 길로 간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은 박수를 치면서 잘했다는 것입니다. “잘했어. 그것이 네 본성이야. 그렇게 해.” 만약 우리가 알아서 바른 길로 간다면 메시아의 공로를 우리가 갉아먹는 셈이 됩니다. 채찍 맞아서 목사가 되었다고요? 거짓말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 이런 가사의 찬송가가 있는데 가사가 너무 비복음적이라 우리교회는 한 번도 안 부른 찬송가입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거짓말입니다. 자기 명예를 위해 간 것이지 복음 때문에 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인은 징계를 받아서 갔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입니다. 메시아의 공로를 갉아먹고 복음을 훼방하는 짓입니다. 이런 것을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교사가 되어 험난한 길로 가도 그것이 메시아의 공로를 가리면 안 됩니다. 미혼 여성이 제게 물어요. “목사님, 어떤 사람과 결혼하면 좋겠습니까?” 제 답변은 이렇습니다. “키 크고, 인물 잘 생기고, 성격 좋고(후손은 DNA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리고 아내만 챙겨주고, 돈도 좀 있는 사람과 결혼해라.”

“목사님은 왜 신앙 좋은 사람은 조건에 넣지 않습니까?” 신앙 좋은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것은 채찍 안 맞겠다는 사전 공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결혼생활 편하게 하겠다는 것이잖아요. 제가 너무 정곡을 찔렀습니까?

사람은 자기 편한대로 살려고 해요. 믿음 좋은 사람과 결혼해서 복 받으며 살면 얼마나 편하겠어요? “그럼 목사님은 제가 불신자와 결혼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하를 내겠지요. 불신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마귀와 사는 것과 같아요. 마귀와 결혼하려고 하면 말려야 하지 않습니까? “너도 마귀다.”

얼마나 마귀에 사로잡혔으면 예수님 이용해서 편한 결혼생활을 꿈꿨겠습니까? 신앙이 보증수표인줄 압니까?

40대 이혼한 남자분이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제혼하면 어떤 여자와 하면 좋겠습니까?” “예쁜 여자와 결혼하세요.” 50대 남자가 물어도 같은 대답입니다. “예쁜 여자와 결혼하세요.” 60대가 질문하면 대답이 달라집니다. 왜냐? 60대는 퇴직할 때가 되었으니까 “돈 많고 젊은 여자와 결혼하세요.”라고 합니다. 이게 제 갈 길입니다.

제 갈길 따로 챙겨놓고 “주여, 신앙 좋은 여성 만나게 하옵소서.”라고 하는데, 가식입니다. 채찍 안 맞고 남은 인생 편하게 사는 쪽으로 가겠다는 속셈을 주님이 다 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한 것이 뭔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만든 나라이기에(교회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기에, 나는 하나님 믿는 자이기에) 절대로 하나님이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를 했던 거예요. 그들은 메시아와 친하게 지낼 생각만 했지 메시아가 나를 폭파시킬 것이란 생각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뭐라고 합니까?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열매에 신경 쓰지 마라.’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저승사자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라는 거예요. 이게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잘 믿었어요. 열심히 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바알’을 섬긴 거예요.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뭐냐? 착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저주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알은 십자가가 없어요. 성심 성의껏 노동하면 그 댓가를 돌려받는 것이 바알 종교입니다. 바알은 모든 종교를 말합니다. 바알의 아버지가 ‘엘’인데, ‘엘’은 하나님입니다. 언약 없는 사람들이 신을 지칭하는 하나님입니다. 이슬람 사람들에게는 ‘알라’, 한국 사람에게는 ‘조물주’지요. 가나안 종교에서는 ‘엘’이라 하고, ‘엘’의 아들이 ‘바알’입니다. 희망을 주는 신이 ‘바알’입니다.

이사야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은 바알 종교에 의해서 찔림을 당하고 상함을 당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벌이는 그 연극에서 예수님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택한 백성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하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재산 가지고 가출을 해야 돼요. 가출 안 한 큰아들이 나빠요. 성경은 간단합니다. ‘네가 성경을 해석하지 말고 너는 메시야가 해석한 결과물로 남아 있어라.’는 것입니다. 전혀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지키려고 하니까 어렵지요. 그냥 시키는 대로 제 갈 길로 가면 주님이 때리는 채찍을 맞게 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인도)하시는 것을 깨닫게 되지요. 그런 식으로 끌려가면 됩니다.

천국은 100% 예수님 공로로만 가는 곳입니다. 주님이 채찍을 이야기하는 것은 고난 받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99,9%의 사람들이 이렇게 해석합니다.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고난 받는 것이 위대합니까, 제 갈 길로 가면서 주님 보는 것이 위대합니까?” 주님과 연결된 것을 보는 것이 위대한 진짜 선지자입니다. 고생하고 아픈 것만 고난입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고난입니다.

이사야 53장은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을 주신 메시아가 홀로 다 지켰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용사, 어부, 변호사, 장사 등 무엇을 하든지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교하는 것이 주님 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제 갈 길로 가는 것’ 즉, 채찍 맞기 싫어서 도망치는 요나의 모습인데, 그것마저 주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연출에 엑스트라로 넣어 주시니까 우리 자리가 얼마가 귀한지 몰라요.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이 자리가 이사야 53:6절에 의하면 메시아를 보여주는 귀한 자리가 됩니다.

말라기 4:6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데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늘에서 조치가 떨어졌어요. 엘리야를 보내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면 안 되고, 돌이키게 하시는 메시아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약속을 다 이루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엘리야가 와서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이키게 한다’는데, 그 엘리야의 자리에 세례 요한이 왔어요. 여기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냐, 아니면 그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 엘리야냐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17절에 보면,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엘리야 됨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여준 거예요.

세례 요한이 말라기 4장에 예언된 역할을 하고 있는데 ‘너희들이 얼마나 악독한지 그 엘리야를 죽었다.’ 그렇다면 말라기 4:6절은 취소되는가? 천만의 말씀. 세례 요한이 죽임 당했다는 그 양상이 그대로 예수님이 옮겨집니다. 유대인들은 말라기 4:6절을 믿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엘리야가 등장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쳤을 때, “당신이 오실 메시야입니까?”라고 물었잖아요. 그들은 자신이 엘리야를 반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엘리야 오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세례 요한)가 와서 말하는 내용은 예수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민중들은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광야에서 생활했고 복장도 과거 엘리야의 복장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하간 세례 요한이 엘리야인지 아닌지 왔다 갔다 했는데, 그 엘리야를 백성들이 죽였을 때  그동안 자식의 마음이 아비에게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가 폭로된 거예요. 유대인들은 성경을 믿기 때문에 ‘엘리야가 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엘리야처럼 왔잖아요. 그 때 사람들은 요단강에 가서 세례를 받고 난리가 났어요.

그런데 그 엘리야(세례 요한)가 살해당했지요. 그러면 그들이 기다린 엘리야에 내용이 하나 추가가 돼요. 오는 엘리야도 살해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은 아비에게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추가됩니다. 엘리야 1을 보내도 죽이고, 엘리야 2를 보내도 죽이고. 그들은 엘리야가 와도 죽일 정도로 그들 마음은 자력으로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님께서 말라기의 예언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취지가 뭐냐 하면, “나는 오는 엘리야다. 나는 메시야다. 믿어라.” 이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아니면 절대 너희들 마음은 아버지께 돌아올 수 없고, 내가 아니면 절댈 아버지 마음을 너희에게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 채찍 맞으신 겁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은 채찍이 필요 없고, 징계가 필요 없고, 상함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기다리다가 오시면 만나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하면 ‘자기 양들은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이 메시아의 임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탕자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메시아가 할 일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채찍 맞기 싫어서 도망치며 각기 제 길로 가는 것은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마지막 시간에 하는 거예요. 이것을 자책한다는 것은 주님 공로를 또 갉아먹는 셈이 되니까요. “저는 목사님 말씀대로 안 하고 믿음 좋은 사람과 결혼하겠습니다.”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세요. 그러나 그것 자체가 주님의 일은 아니고 메시아와 관련된 주의 일입니다. ‘그릇 행하여 제 갈 길로 가는 것’으로 메시아의 업무 한 모퉁이를 담당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6절에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라고 합니다. 그러니 심고, 물 주세요. 단 이것이 자라나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심고 싶어서 심었고, 물을 주고 싶어서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채찍 맞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징계가 아닙니다.

주께서 인정하는 채찍과 징계는 자신이 몽땅 다 가져가시고, 그분의 징계 받음과 채찍 맞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철없이 제 멋대로 살아가는가를 세팅하듯이 ‘나는 제 갈 길로 갔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성령 받은 선지자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제 갈 길 가는 인간이 무화과나무 열매를 걱정하고, 감람나무 소출을 염려하겠습니까?

그런데 염려하지요? ‘이런 것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채찍 맞으신 구원의 하나님을 더 사랑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기쁨입니다. 제 갈 길로 갔는데 사랑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채찍 맞으신 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살더라도 사랑의 기쁨을 잊지 마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가 아담의 자손인 우리가 어찌 그리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는지 한심할 뿐입니다. 잘난 척하면서 주님 앞에 다가서고, 주님 때문에 고생했다고 다가서고, 주님 고난에 동참했다고 다가선것 다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채찍을 담당하실 분은 오직 주님뿐임을 부끄럽지만 인정케 하시고 그 채찍의 효과로 우리가 메시아으 한 직분을 금방지게 맡게 된 것을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귀한 줄 알게 하시고 거기서 주님과의 사랑의 기쁨이 늘 쏟아져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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