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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0 22:13:48 조회 : 2277         
캘거리 강의 이름 : 관리자(IP:88.153.7.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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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아(IP:122.♡.165.245) 16-10-13 00:12 
20160919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2-이 근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 늘 말씀을 사모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말씀중심으로 다시 모이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같은 하늘에 어느 곳에 있든지 말씀으로만 일하시고, 말씀으로만 모든 것을 이끄시는 주님의 사랑을 이번 집회에서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제가 요한일서를 시작했고, 지금 캘거리에서는 요한일서 3장부터 해서, 그리고 5장까지 하겠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부터 하려면 1장, 2장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를, 제가 요약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일서라는 것은 사도요한을 통해서 전하신 말씀인데, 이 요한일서라는 편지를 왜 살기 분주한 인간들에게, 사도요한이 구태여 이러한 편지를 꼭 전해야 될 그 분만의 이유는 뭐냐, 이것부터 알아야 돼요.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사도로서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요한일서를 전하겠다는 겁니다. 이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요청하거나 부탁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사람이라면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 또는 주문할 때, 또는 음식을 먹을 때,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지목하고, “이것 먹겠어요.” 또는 “이 물건 사겠습니다.” 이게 정상이에요.

왜냐하면 ‘자아’라 하는 것은, 자기결정이나 선택을 통해서 바깥으로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절에 가지 않고 나는 교회 가겠다. 나는 불교를 믿지 않고 예수를 믿겠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는 뭐냐, “예수 믿는 것을 내가 결정했다는 것, 그리고 그만한 결정권은 내가 원초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나타낸 이야기겠죠. “나는 지옥가지 않고 천국 가겠습니다.”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나는 지옥 싫어!(☓) 나는 천국 좋아!( ⃝)” 이 결정을 내가 했다는 말이죠. 나는 지옥가기 싫어 천국 가겠다고 했을 때에, 그러한 결정을 할 때에, 당신이 그러한 결정을 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 그리고 나는 죽어서 내가 원치 않는 곳은 가지 않겠다.” 라고 이렇게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할 때, “당신은 뭘 보고 그렇게 결정을 하고 선택했습니까?” 라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할 말이 없어요. “그냥 내가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는 그 말입니다.” “당신은 왜 죽어서 좋은 데 가겠다는 그 권리를 행사합니까?” “내가 좋다는데? 니가 와?” 갑자기 시비가 되죠. “내가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데 니가 뭔데 시비를 거느냐?” “내가 거기 가고 싶단 말이야!” 그런 뜻이거든요. 지금까지 제 말 틀린 것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 말 틀린 것, 집사님! 있어요? 없어요? “내가 천국가고 지옥가기 싫다는데 니가 왜 시비를 걸어?” 이런 뜻이거든요.

그럼 그걸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나는 죽어서도 천국(좋은 곳)에 가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이게 성경입니까? 성경 어느 대목에 나는 죽어서도 꼭 좋은 데 가겠다는 것이, 창세기에 나옵니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말라기에 나옵니까? 마태복음에 나옵니까? 어디에 나오죠? 안 나오죠. 성경에 안 나오게 되면 그게 진리일까요? 진리 아닐까요?

지금 어떤 마트에서 세제를 파는데 세제 하나에 2달러, 근데 특별세일로 2달러에 두 개 드리겠다는 광고가 붙어있습니다. 자, 그게 성경일까요? 성경 아닐까요? 성경 아니죠. 마트에서 2달러에 한 개 살 것, 두 개 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죽어서 천국 갑니까?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 천국 갈 것 아니면, 그 마트 거래 끊고 가지 말까요? ‘나를 천국 못 보내는 곳이면 안 가!’ 이렇게 되는 겁니까? 그래도 꾸역꾸역 보다 더 새로운 세일을 찾아서 세제 사잖아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모든 출발을 뭐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나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이미 인간은 나 위주로, 내 좋은 쪽으로, 나름대로의, 이 나름, 나름대로의 자기 성경책, “나는 이거는 양보 못해! 죽어도 이건 양보 못해! 진리냐 아니냐, 나한테 묻지도 마! 나는 그러길 원했었어. 이건 내가 원하는 바야.” 라는 어떤 문장 같은 것이 ‘나’ 뒤에 붙을까요? 안 붙을까요? 반드시 붙게 되어 있습니다.

좀 늦게 오신 분이 계셔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강의 처음에 이런 질문을 했죠? 우리가 사도요한을 초청한 적도 없고, 이 캘거리에 사도요한 초청한 적 있습니까? 없죠. 초청한 적도 없는데 사도요한이 건방지게 요한일서라는 책을 우리에게 왜 줬느냐? 이 말이죠. 그 준 의도가 뭐냐? “아, 하나님이여. 저는 천국가고 싶은데, 사도요한이 올 때 그냥 빈손으로 오지 말고 요한123서라는 그 편지를 손에 쥐어서 우리에게 보내주시옵소서.” 라고 우리가 사전에 요청한 적 있습니까? 요청한 적 없죠.

요청한 적이 없는데 우리 앞에 나타났다면, 마트에서 세일 하냐, 안 하냐를 우리한테 물아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세일했다면, 그것을 믿고 안 믿고의 결정권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바로 나한테 있죠. 나한테 있다는 말은 어느 게 갑이고 어느 게 을이다? 성경이 을이고 내가 갑이다. 그걸 선택 하느냐, 마냐를 결정하는 내가 갑이 되죠. 그럼 내가 갑이 된 채, 계속해서 이번에는 요한일서, 다음에는 마태복음, 다음에는 말라기, 다음에는 창세기를 공부하겠다. 그가 계속 시도해서, 그런 식으로 죽을 때까지 시도해서 가는 나라는 무슨 나라냐? 무슨 나라일까요? 나의 나라죠. 나의 나라를 두 글자로 줄이면, 이게 바로 지옥입니다.

모든 인간은 교회 다니면서 지옥가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교회 간 사람도 지옥가고, 교회 안 간 사람도 지옥가고. 모든 인간은 다 지옥 갑니다. 그 이야기를 어디서 하고 있느냐, 요한일서에서 하고 있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 “목사님. 요한일서를 믿고 싶습니다. 요한일서를 믿겠습니다.” 요한일서는 이야기합니다. “누구 선택이냐? 누구 결정이지?” “제가 그렇게 했습니다.” “아이고, 자기나라 만들 사람이 또 있구나.” 자기나라 만들 사람이 또 있어요.

이 나라는 것은, 또는 나라는 존재는, 이미 있습니다. 저는 거짓말 안 해요. 나라는 것이 있죠? 누가 있으라고 했습니까? 이걸 우리가 몰라요. 누가 있으라고 한 것도 모르겠고, 어쨌든 내가 태어나서 내가 있는 거예요. 태어나서 교회 갔더니만, 하나님이 당신을 있게 했다는 소리를 들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있게 했다는 말이, 정답일까요? 정답이 아닐까요? 제가 물을 때 굉장히 수상하게 묻기 때문에 답변하기가 굉장히 난처하죠?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 정답일까요? 정답이 아닐까요? 둘 중의 하나인데, 아무거나 한 번 찍어보세요? 정답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결정을 누가 내렸습니까? 내가 내렸죠. 왜? 내가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기 이전에 먼저 갑질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나’이기 때문에. 요한일서는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한일서는 나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을 주니까 이게 나의 구원과 관련 있다고 일방적으로 그렇게 우기고 또 우기는 것은 뭐냐 하면, 타고난 나의 존재성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존재성이 담겨 있는 그 성질을 마음껏 발휘하는 겁니다. “기다렸습니다. 요한일서! 반갑습니다. 사도요한! 나를 천당보내기 위해서 이렇게 귀한 성경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이래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나는 무슨 나가 되게 되면 개인적인 나가 돼요.

성경은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했죠? 자꾸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복음에 대해서 필요한 나는, 개인적인 나가 아니고 보편적인 나에요. 보편적 나. 너라고 하는 나와, 나라고 하는 나와, 차이가 없는 나. 이것이 바로 복음 안에서 요청되는 나입니다. 복음에서 새로 규정하는 나에요. 근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개인적인 나에요. 개인적 나. 모든 것이 나로부터 스타트하는 거예요. 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천국가고 지옥가고 내가 결정하기 나름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사도요한, 아무리 예수라 할지라도, 내가 예수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것은 단지 하나의 예수였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부를 때, 그것은 나에게 와서 하나의 꽃이 되었다. 어떤 시 패러디하는 느낌이 들죠. 예수라는 것이 예수 본인의 의미는 탈락해버리고, 이미 나한테 끌려오면서 이 예수는 나에게 구미가 맞는, 탈색되고 변질된 예수로 나에게 가까이 와서 나에게 이용당하는 겁니다. 활용당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괴물이 되고, 나는 더욱더 예수마저 알게 된, 하나의 굳건한, 강화된 존재성을 갖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인간들이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괴물단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를 건드리면 누구라도 나는 가만 못 있어.’ 그런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식으로, 그렇게 서로가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가 뭐냐, 1장, 2장 요약한 겁니다. 왜? 1장 2장은 몰랐으니까. 3장부터 진도나간다고 했으니까. 1장은 시카고강의에서 여덟 강의, 2장은 뉴저지강의에서 다섯 강의, 버지니아에서 여덟 강의, 지금 그걸 집약적으로 요약하는 겁니다.

이걸 하면서 지금 어디서 틀렸느냐를 보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한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어요.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차이. 구원이란 무엇인가? 할 때는,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하면, 내 개인적인 구원욕구와 욕망과 관련되어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복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지 않고, 성경대로 하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복음이 나타났느니라.” “복음이 나타났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런 뜻이라는 말이죠. “복음이 나타났으매.” 이런 뜻이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내 허락도 없이 왜 나타납니까?” 이래 되겠죠. “내 허락도 없이? 누구 마음대로? 내가 요청한 적도 없는데?” 자장면 시켰는데 짬뽕 왔다. 나는 자장면 먹기를 원하는데 왜 짬뽕이?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그 문제인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마지막 때에 뭐가 나타났으니? 복음이 나타났으니. 그러니까 인간이 미치지 않고서는, ‘아, 날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이 나타났구나!’ 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접목을 시켜버려요. 미치지 않고서야. 왜냐하면 항상 나는 무슨 나냐 하면 개인적인 나거든요. 개인적인 나.

우리가 언제 봤다고 하나님하고 나하고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입니까? 언제 봤다고? 복음이 나타났으니, 그 복음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 이야기 아니에요. 내구원이야기 아니에요. 누구이야기냐? 예수님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야기.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야기를 받으면서 무슨 멍석을 먼저 깔았어요. 뭐냐 하면, 나는 어떻게 구원받지? 나는 어떻게 구원받지? 라는 멍석을 깔고 예수님이 오니까, 예수님이 본래 해야 될 일을 일방적으로 내 이익과 내 소원달성을 위해서, 어서 오세요! 이럇샤이마세~ 어서 오라고 반기는 거예요. 

복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있다는 말은,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기능이 나옵니다. 숨겨진 기능. 기능이 나오는데, 우리는 뭐부터 출발했느냐 하면, 존재가 이미 닦여져 있어요. 그러면 복음은 창세전부터 예정된 것이고. 창세전부터 성부와 성자사이에서 의논된 것이고. 이건 상식적으로 아시죠? 몰라요? 맞아요. 복음은 창세전부터 예정된 것입니다. 창세전부터 예정 되었으니까, 근데 나라는 존재는 창세전을 몰라요.

내가 여기 있음에, 그리고 생로병사, 살기에 너무 힘들기에, 뭔가 인생역전, 인생만회를 죽고 난 뒤에 천국에서 해보겠다는 심보로써, 어떻게 나를 이 고통에서 해탈할 방법이 없을까?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저 세상에서는 아픈 곳도 없이, 눈물 닦고 그렇게 살아볼까? 이미 존재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기능이 우선이겠습니까? 존재가 우선이겠습니까? 기능이 우선인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받아들이려면 존재에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복음 안에 있는 어떤 기능과 현재 나의 존재가 그 후에, 그 나중에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존재케 되었는가? 이렇게 연결시켜야 되겠죠. 제 이야기에 이의 있습니까? 없죠.

그럼 뭐를 잠시 유보해야 되겠습니까? 나의 구원을 유보를 해야 되겠죠. 나의 구원을. 만약에 내일 캘거리에 비가 온다면,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사람들에게, “이보게! 내일 비가 온대. 근데 그 비가 나를 위해서 온대.” 이렇게 하면 미친 사람이에요. 왜, 비가 오는 것이, 보편적으로 비가 내리는데, 개인이 거기에 끼어들어요? 개인이 왜 끼어듭니까? ‘아, 비가 와? 내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비가 와? 그렇다면 내가 대처해야 되겠지.’ 비 온다는 기능이 우선이고,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대처해서 그 기능에 부합되게 살아남을까? 그걸 생각 하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여기 있고, “복음은 이렇습니다.” 라는 것이 귀에 들리더라도, 우리는 순서를 바꿔야 됩니다. 아,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나 있기 전에 프로젝트가 먼저 설정되고 확정된 사실이 나한테 밀려온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쉽죠? 쉬운데, 지금 제가 더 어렵게 이야기해버렸죠?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그럼 그 기능 앞에서, 내가 말소돼야 돼요? 아니면 또렷이 버텨야 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내가 말소돼야, 없어져야 되죠.

왜냐하면 처음으로 돌아가려면 나중에 있는 것은 주목대상이 되지 말아야 되거든요.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어디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건방지게 복음이야기에 나를 집어넣어야 돼요? 말아야 돼요? 나를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집어넣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요한일서에서는 뭐냐 하면, 존재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기능부터 먼저 이야기하는데, 그 기능을 요한일서 1장 3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사귐이 나와요. 사귐.

사귐은 적어도 둘 이상입니다. 그럼 2내지 3이 나오겠죠. 사귐이 되려면 둘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존재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존재한다,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나는 고기 잡는다. 이게 어려운 말이 아니고 흔한 말이죠. 그럼 내가 고기 잡으면 영생 얻습니까? 저녁에 회나 쳐 먹지 영생하고 관계없죠. 그러나 요한일서에 보면, 니가 고기 잡는다는 그 기능은 너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바로 성부와 성자사이에 사귐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요한의 말을, 쉽게 말해서 나는 고기 잡는 어부죠. 내가 고기 잡는다는 것과 매치를 시킨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평소에 우리 일상적인 생활습관으로써는 이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이거 불가능하죠. 이거 불가능하잖아요. 불가능한데, 복음이 내용으로써는 니가 결부돼야 된다고 복음은 우기고. 나는 존재로 버티고 있기에 결합이 안 되고. 에이, 모르겠다. 요한일서 무슨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냥 넘어가고, 읽는 것으로 주님께 때웠다고 하면서 넘어가는 거예요. 내용도 모르고.

모든 현실은 바로 사귐의 현실화, 구체화로써 이 세상에 펼쳐졌다는 겁니다.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의 사귐으로 펼쳐졌는데, 그 목적은 뭐냐, 아버지와 나와의 사귐 속에 너희들도 같이 집어넣어서 같이 사귀자는 것이, 창세전에 하나님의 예정된 뜻이고, 목적이고, 프로젝트가 되는 겁니다. 이 요한일서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이기도 해요.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 기도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처럼 사로 사귀기 위함이라.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들이 내 안에.

자꾸 아버지와 아들에 누굴 자꾸 끼어들게 하느냐 하면, 성도를 자꾸 끼어들게 해요. 끼어 넣으려고 하니까, 예수님의 기능이 결국 하나의 현실로써 작동을 하고,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 이게 작용을 하고 작동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고기 잡는 어부다. 여기에서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나만 드러내는 기능일 뿐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바다에 나가서 고기 잡고, 오늘도 내 할 일했다. 퇴근하자. 또 내일 아침에도 그렇게 하고. 여기 기능은 나로 회수되는, 나로 다시 돌아가는, ‘내가 내 할 일 다 했다. 역시 내 할 일은 이것뿐이야.’ 라고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기능이, 우리의 기능에 손톱만큼도 안 들어가요. 들어갈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공식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고기 잡는 어부다. 나는 ~하는 ~다. 의사다, 판사다, 하면 결국 이것은 뭐냐, 모든 기능은 무엇을 증명 하느냐, 나의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이 일이라는 것은. “당신이 하는 일이 뭐요?” “판사요.” “당신은?” “몰라.” 이거 말이 안 되잖아요. “이 피고인을 위해서 내가 변호합니다.” 옛날에는 외지부. 드라마 옥중화에 나오는데. 나는 변호사다. 그러면 변호사는 누굽니까? 그건 나지. 결국 나로 돌아가요. 나라는 일은 나를 증명하고, 나를 확인하는 겁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결국 무엇의 증명이에요? ‘내가 믿는단 말이야.’ 이걸 증명하죠. 신이시여! 하나님이여! 내가 예수 믿습니다.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이래 나오더란 말이죠. 아까 이야기한 것에 의하면 그거는 주님의 나라가 아니고 자기나라, 자기가 중심이 되는 나라, 다른 말로 하면 지옥이 되죠. 지옥가기 위해서 열심히 예수 믿으세요. 성령 믿고, 삼위일체 믿고 그렇게 믿으세요. 백날 믿어봐야, ‘나 이정도야!’ 그런 결론밖에 도달되지 않는, 그건 아무것도 없어요. “나 이정도 믿음이니까 건드리면 니가 이단이야.”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죠.

그러면 요한일서를 왜 줬는가? 요한일서에서는 사귐이라고 했고, 우리는 사귐이 없어요. 결국 나한테 돌아오는 나는 독재자입니다. 나는 나한테 독재자에요. 최정점에 내가 서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내 예상 밖의 비가 오더라도 그것에 적응을 잘 하는 나는, 내가 보기에 대견스럽고 훌륭하고. 역시 내가 나한테 칭송하고 박수치고 싶은 겁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하루를 보냈어도, ‘참 오늘 아름다운 밤이야!’ 자기에게 격려하는 거예요.

심지어 우리가 지옥 갈 때라도, 지옥 가는 그 처절한 발걸음 속에서도 위로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어요. ‘힘내! 지옥에도 사람들 있어! 거기에도 너같이 똑같은 사람이 있어. 걱정하지 마! 당구장도 있고 탁구장도 있고 골프장도 있어. 니가 못 다한 것을 거기서 해! 염려하지 마! 주께서 니를 예정 안 해서 지옥 보내니까, 주님의 심술이 그렇다 치고. 니가 니를 기죽여야 되겠어? 니라도 니에게 용기를 부여해줘야지.’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중에 있어요. 이걸 못 고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사귐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뭘 나타내느냐 하면,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하느냐, 존재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것에서의 분열. 해체를 시키는 작업이 바로 요한일서에 말하는 사귐의, 이 현실화의 작업이 바로 해체입니다. 해체, 분열,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파괴. 나를 파괴시키는 겁니다. 존재를 파괴시킵니다.

내 존재를 파괴시키면 거기서 두 가지의 기능이 나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 ‘누가 나를 건드렸어?’ 라고, 나한테 잠복되어 있는, ‘나는 오직 나만 사랑해.’ 라는, 자기에 대한 강력한 집착과 집념. ‘만약에 내 뜻대로 안 되면 나는 스스로 자결할거야. 자살할거야.’ 그 정도로 자기에게 집착된 자기 기능, 강력한 반발. 이게 나오면서,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누군가 나를 건드렸다는 사실. 두 가지의 상반된 기능이, 자아가 깨어지면서 두 개가 나오는 겁니다. 그 내부가 두 개의 요소로 나오는 거예요. 두 개의 요소로 나오면서, 요한일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인간의 존재를 깨는 작업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깨었다고 하고, 거기에 대한 강력한 저항과 반발을 하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온 적그리스도, 사탄의 앞잡이, 또는 사탄이 하는 짓, 기능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요한일서는 결국 뭐냐 하면, 모든 존재를 다 묵살하고, 기능과 색다른 기능, 적대적 기능,  두 개의 상반된 대적적인 기능가지고 현실을 전부 다 설명하겠다는 것이 요한일서의 취지입니다. 취지에요.

분열이 없고, 해체가 없고, 파괴가 없는 것은, 그것은 주님의 성령이 와 닿지 않아서 생긴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은 나 좋아라고 한, 내 존재, 어릴 때부터 그렇게 귀하게 컸던 나를, 20대, 30대, 40대... 80대가 되도록, 끝까지 내가 나를 포기하면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여러분? 여러분이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고 윤복희가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결국은 내가 나에게 관심두지 않으면 누구도 나에게 관심두지 않고. 최종적인 관심사는, 누구도 나를 사랑해줄 자가 없다는, 강력한 나에게서 나온 이 기능. 나를 스스로 지키려는 이 기능. 이 기능에 대해서, 이게 바로 니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폭로시켜주는 또 다른 기능, 그 기능 나오면 여러분 성령 받은 겁니다. 성령 받은 거예요.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정말 여러분들은 오늘 죽어도 오늘 밤 낙원에 갑니다. 낙원에 갑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 1장 10절에 그게 나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다른 말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살아있음은 기능으로 작용하고, 그 기능이 우리 현실에 와 닿으면 우리는 무슨 존재로 발각된다? 죄 있는 자로 발각된다. 그 죄가 뭐냐, 하나님의 사귐에 대해서 극렬하게, 악랄하게 반발하기 때문에. 사귐은 숫자로 하면 2가 되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뭐를 고집하죠? 1을 고집하죠. 많은 친구를 사귀고, 많은 레슨을 해도, 결국은 누구 좋아라고? 나좋으라고.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삼위일체 믿어도, 결국은 누구 좋아라고? 나좋으라고. 이게 강의 첫 번째에서 이야기한 거예요. 예수여, 십자가 지세요. 그 다음 선택은 내가 알아서 선택하겠습니다. 골라! 골라! 골라잡아~ 아, 십자가 이게 괜찮네! 내가 행함으로 구원 못 받는 것을, 대신 십자가로 죄 용서했다고? 아, 이거 아이디어 괜찮네! 이 아이디어 내가 선택하겠습니다. 이 사람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것이 뭐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뭐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 중요한 타이밍에 답변이 안 나오면 어떻게 돼요? 지금까지 강의했는데?

예수 믿는 것이 뭐다? 예수 믿는 것이 뭐였다는 말입니까? 예수 믿는 것이, 이게 바로 죄였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게.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내가 평소에 하는 행세 그대로 예수님을 선택해서 내가 믿은 거예요. 아, 저 아이디어 괜찮네! 나는 행함으로 율법 못 지켰는데, 주께서 그 모든 죄를 대속했기 때문에, 나는 저걸 선택하겠어. 저건 내 미래를, 내 운명을 보장해줄 것 같은 괜찮은 보험이라고 본 거예요. 보험. 상조보험. 상조보험 위험해. 요새 다 부도나요. 최고의 상조, 보험은 바로 예수 믿는 거다. 나는 결심했어! 따땃따~따땃~따따~ 나는 결정했어! 드디어 나는 얻었어!

이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귐을 어디서 찾아요? 사귐을 찾을 데가 없네? 자기 결정에 자기가 스스로 위로받고, 자기 결정에 자기가 쾌락을 느끼고, 쾌감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는 존재. 그 존재에게 무슨 사귐이 있습니까? 그런 존재에 자기가 극대적인 신이 되어있는 입장에서,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하면, “니는 나의 극단적인, 절대적인 존재로 전락한 나에 대해서, 니는 흠집을 내기 위해서 나한테 접근했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우리를 수상히 여기고, 관찰하고, 그리고 경계하기 마련이죠. 경계, 거리를 두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는가, 나는 주체가 되고 상대방은 뭐가 되느냐, 객체가 되죠. 그럼 그 객체의 결정은, 저게 누구다? 저게 뭡니까? 독수리입니까? 저 독수리를 판단하는 기능은 어디서 나왔어요? 나에게서 나왔잖아요. 예수님은 나의 죄를 속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 결정은 어디서 나왔죠? 나에게서 나왔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가짜에요. 성령이 한 것이 아니고, 바로 인간의 육신에서, 마귀의 앞잡이로서 예수를 믿은 거예요.

그 예수가 진짜 예수일 리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어요. 진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와 사귀는 것같이, 하나님과 사귀는 그런 존재가 나올 때, 그게 바로 예수님의, 성령의 결과물이지. 결국 나 구원받았다고, 나 좋아라고 믿는 예수는, 그건 예수가 아니죠. 그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나 좋아라고 믿는 예수기 때문에, 이거는 개인적인 예수에요.

개인적인 예수다보니까, 교회에 두 사람만 모여도, 두 사람이 믿는 예수 이미지가 다 달라요. 교회 교인이 백 명 같으면, 몇 가지의 예수가 나옵니까? 백가지 나와요. 백가지. 가족이 다섯 식구라면, 그 가족이 다 예수 믿는다면, 몇 가지의 예수가 나옵니까? 다섯 가지의 예수가 나오니까, 이건 예수님인지 귀신인지 분간이 안 돼요. 주님께서는 존재를 이야기할 때, 니 존재에다 내 존재를 협상하자, 타협하자가 아닙니다. 내가 너한테 제안을 할 테니까 선택하라. 그게 아니고, 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이유가 개인적인 자아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 보편적 자아로 바꾸는 거예요. 보편적 자아.

보편적 자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열 명이 모여도 동일한 예수님이 나올 때, 그게 보편적이라는 용어가 합당한 거예요. 보편적인 용어가 합당한 거예요. 개인적인 자아에서 보편적인 자아로 바꾸어줘야, 그 보편적 자아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보편적 자아는 어디에 있느냐? 어디서 생기느냐? 아버지와 아들이 사귐에서, 그것이 잠재되어 있다가, 성령을 통해서 구체화되면, 모든 하나님의 택한 성도는 개인적 자아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보편적 자아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요한일서 2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소속.’ 성경의 단어로 이야기하면, ‘거하심.’ 사도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안.’ 예수 안. 성령 안. 십자가 안. ~안, 할 때, in 그리스도. 어디 안에 있다. 안에 있다를 한 번 그림으로 그려볼까요? 그림으로 그리면 여러분들이 다 알 텐데,  ⃝ 안에 있다. 안에 있으니까 여러분이 보기에는 갇혀있죠. 그러면 갇혀있는 힘이 세요? 갇혀있는 내가 힘이 셉니까? 갇힌 힘이 더 세죠. 그럼 여기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결과물이에요. 그런데 내 곁에 어떤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도 갇히게 한 결과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의 결과물에 있다 보니까,  ⃝ 안에 갇힌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의 예수님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습니다. 같죠. 그 같다는 용어를 요한일서에서는 뭐냐 하면, 우리는 어떤 존재라도 뭐가 있다? 죄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디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 앞에서, 화목제물 앞에서, 하나님의 기능 앞에서. 예수님의 기능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능을 기능답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뭐로 드러나야 한다? 어떤 기능도 죄가 되어야 하고, 그 죄가 되는 근거는 뭐냐, 나는 전에는 개인적, 절대적, 특수적, 절대적인 자아로부터 나의 인식이 나를 존재하게 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되는 겁니다.

나는 주님의 성령이 올 때에, 비로소 나는 알았다. 뭐냐, 내가 개인적, 절대적 존재로 오늘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을 폭로당하는 이 기쁨과 즐거움이 성령의 기쁨이고 주님의 사랑의 기쁨입니다. 내가 하는 예수 믿는 것, 내가 하는 헌금, 전도, 봉사,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는 죄로 드러내기 위해서 한 기능인데, 전에는 내가 헌금했다가 아니라, 주께서 나로 하여금 헌금케 한 거예요. 왜? 나로 하여금 헌금하는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

전에 아프리카,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갔다. “주여, 은혜 받은 티를 냈습니다. 은혜를 공짜로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가지고, 제 한 목숨 바쳤습니다.” 라고 해서 자기 개인적 기능으로 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개인적 기능이 아니고. 선교사로 왜 가냐고, 내가 선교사로 가는 것을 비난했던, 고국에 있던 어떤 권사님의 그 존재와 내 존재와 둘 다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하나님의 사귐의 기능이라는 것을 밝히시는 겁니다. 이번에 문장이 너무 길었죠? 설명이 필요합니다.

“선교사로 가지 마!” 라고 했던 권사님의 권면도 뭐가 된다? 죄가 되고. “아닙니다. 나는 성령에 이끌려서, 성령에 응답받아서 파키스탄에 갑니다.” 라고 우겼던 나도 죄가 되고. 그리고 둘 다 그 사실을 안다면, 둘 다 그 사실을 인식한다면,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따라서 형제는 어떻게 된다? 싸우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래서 서로 싸우세요. 그게 서로 사랑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사람들이 못 알아듣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이상한 소리한다고 하는데, 서로 싸우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거예요. 서로 싸우는 것이. 지 성질, 개인적으로 살아가는 지 성질을 유감없이 터트리는 그것이, 결국 주님 주신 사귐에서 나온 사랑으로 실현되기 위한, 하나의 전부 다 주님의 전략이고, 하나의 주님의 활발한 실제적 활동입니다.

아까 캘거리에 일부 모인다고 했죠? 그 모임을 파괴시켜야 해요. 그거 파괴시켜야 합니다. “우리 모임에 참석하세요.” 라는 것도 죄고요. “예. 참석하겠습니다.” 라는 것도 죄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모일 때는 각각 지 팔 흔들어야 돼요. 그게 우리의 성깔에 가장 부합되는 겁니다. ‘아이고, 가기 싫은데 참고 가야지.’ 이거는 자기 성격과 전혀 상반되는, 지금 연출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제발 고집을 부리세요. “니가 뭔데 오라마라 하느냐? 니가 뭔데? 니가 교주야? 아이고, 까딱했으면 새로운 조직 만들겠네? 이게? 뭐 조직 만들어서 교회하고, 니가 좀 희생 좀 했다고, 희생하면 지도자야? 그래 희생 많이 해! 희생한 그것을 우리는 이용할 거야.” 그렇게 하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지 팔 지가 흔드는 식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가더라도 제발 부탁합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요한일서 2장 27절에 나옵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지금 아직 설명 시작도 안 했어요. 이 거하심에 대해서. 이 거하심에. 이 거하심을 설명하는 거예요. 뭐 안에? 기름부음 안에. 성령 안에 거하심입니다. 따라서 성령 안에 거하심은 어떻게 한다고요? 아무도. 아무도, 에브리바디everybody. 내가 아는 단어 몇 개 안 돼요. 지금 몇 개 안 되는데. 아무도, 그 다음에 뭡니까?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가르칠 필요가 없고. 그 다음에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뭐라고? “니는 죄인이야. 죄인으로 니를 반드시 증명하고 확인하고 말거야.”

그렇게 가르친 결과가 뭡니까? 아, 주님의 기능이 나의 기능보다 우세하구나! 나보다 누가 강하다? 주님이 강하고, 나는 주님보다 적구나. 주님의 강함에 밀렸다는 그 결과물이 뭐냐, 주님을 알게 되었다. 주님이 나보다 세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사람이 오늘 밤에 가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나의 나라가 아니고 누구 나라입니까? 구원받은 주님의 나라, 하늘나라, 그게 성령 안이고, 그게 바로 천국이잖아요. 오늘 밤에 죽어도 천국이잖아요. 나는 죄인 되고, 천국 가니까 어린양의 보좌 있고.

죄인아! 소꿉놀이 많이 했지? 니 죄인 된 거 니 뜻 아니었어. 사탄의 뜻이라고? 그 사탄 누가 불렀는지 알아? 내가 너한테 사탄 보내가지고 마음대로 농락당하도록 했어. 실은 사탄 배후에 내가 있었어. 너로 하여금 요한일서 이 계시대로, 죄 있는 자 만들어서 화목제물의 의미와 가치와 효과를 통해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사라지고. 뭐다? 복음이 이것이다.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가 아니라 복음이 무엇입니까? 아, 이게 바로 복음이군요. 복음을 위해서 나는 죄인 되어야만 하는군요.

자기 존재를 결과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이것을 가지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니고, 저 결정은 따로 있고, 그 결정은 나와 주님 사이에 요한일서가 깔려있으며, 그 요한일서의 내용대로 나한테 주어지게 되면, 나는 더 이상 나의 어떤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나 사이는 요한일서에서 무슨 글이 적혀있고, 무슨 내용이 적혀있고, 그 의미가 적혀있고, 그 의미가 적혀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리얼리티reality, 현실로 덮쳤던 사실을, 왜 나는 뒤늦게 이걸 알게 되었는고? 기름부음, 성령이 있을 때는 뒤늦게 알게 되는 겁니다.

‘목사님이 가르쳤구나. 이목사님이 먼데서 와서 가르쳤구나.’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제 고백일 뿐이고. 어떤 의미에서 개인적 자아, 개인적인 나에게서의 고백이고. 그냥 참고사항, 저는 이렇게 이해했다고 제시 할 뿐이고. 여러분의 판단은 여러분도 아니고, 여러분 속에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판단하실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단 한명도 남에게 전도한 적이 없습니다. 다 주님께서 전도했죠. 사도바울은 그냥 다루어지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심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요, 물주는 자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진도 좀 나가겠습니다. 자, 여러분! 지금까지는 믿든, 안 믿든 이해는 한다고 하고요. 그건 제 소관이 아니고요. 이해는 한다 치고,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가 뭐냐 하면,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을,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것을 두 글자로 이렇게 합니다. 언약이라고 하고, 그 언약의 완성태를 요한일서에서는 네 글자로 표현합니다. ‘화목제물’이라고 이야기하고, 이것을 요한일서는 스스로 이렇게 해석합니다. 두 글자로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위하여, 선지자를 통해서 뭘 줬느냐 하면 율법을 줬거든요. 율법. 율법을 줬는데, 율법을 줬다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지키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율법을 지키는 그 지킴이 결국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면, 화목제물의 완성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법을 준 것은 우리보고 지키라고 한 것 같지만, 중간에 인터셉트intercept, 가로채기 한 분이 있습니다. 율법을 줌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유발시키기 위해서 율법을 줬고, 율법을 줬는데 죄가 나왔다는 말은, 어디에 문제가 생겼느냐 하면, 율법을 주신 분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 율법은 선하기 때문에. 로마서 7장에. 그럼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율법대로 못하는 것은 인간에게 문제가 있죠. 그럼 인간에게 문제가 있다는 그 사실은, 율법을 조금씩, 조금씩 줘버리면, “이것은 못 지켰지만 이거는 지키지요. 이거는 나중에 지킬게요.” 자꾸 미루는 식입니다. “아, 내가 바쁘다 보니까 교회 못 나왔습니다.” 이렇게 자꾸 핑계대면서 점점 자기를 지연시켜요.

근데 율법이 완성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율법의 완성이 화목제물이 된다면? 어떤 누구도 이미 율법을 완성되게 지킨 분이, 있어요? 없어요? 완성되게? 한두 개 지킨 것 말고. 모든 주어진 율법을, 몽땅 다 일관되게 지킨 분은, 인간에게 있다? 없다? 없으면 결국 인간들은 뭡니까? 인간들은 못 지키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죄인이 되고. 그 다음에 죄의 값은 뭐다? 그냥 목숨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목숨 끊어지는 것이 벌이라면 자살하겠다. 율법이 심판이 되니까 이게 저주가 돼요. 저주가 주어지는 겁니다. 저주가.

율법 주어서 화목제물로 완성한다는 말은, 사랑이 나온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게 한, 율법을 완성하게 한 경로로써 주어지는 거예요. 경로로써. 필수절차로 들어가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위에서 반드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뭐가 성립돼요? 저주가 현실화 될 때만, 저주 안에서만 주님의 완성이 꽃처럼 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저주가 있을 때만 피어나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이여, 저 저주받아도 마땅합니다.” 라는 그 자체가 이미 그 속에서 어떤 기능이 작용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기능이 작용하는 거예요. 따라서 마귀가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어이! 열심히 성경보고 기도해야지?” “아니야. 나 저주받을 거야.” 이러면 마귀가 주는 그 협박과 공갈이 통하겠어요? 통하지 않겠어요? 본인이 저주받겠다는데. 예를 들어서 어떤 마귀가 저한테 찾아와가지고 뭘 주느냐 하면, 곱창주고, 개고기 내놓고, 그 다음에 순대 내놓고, 그 다음에 오리고기 내놓고 하면서, 맛있게 먹으면 하나님의 복을 주실 겁니다. 이렇게 할 때 먹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입 맛 없어서 가죠. 입맛이 없어서. ‘뭐 이런 게  다 있냐?’ 하면서.

그러니까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고 했어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했죠. 그 말은 본인이 화목제물 십자가 앞에서 무슨 자다? 저주받도록 하나님께서 이 캘거리에 살게 했다는 거예요. 내가 저주받아 마땅한 것을, 우리가 인식하도록, 캘거리면 캘거리, 한국이면 한국, 대구면 대구, 살게 하신 거예요. 목사 되게 하신 것은, “저주받는 것을 니가 모르지?” 이제부터 니가 저주받아 합당한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목사 되게 하고, 장로 되게 하고, 집사 되게 하신 거예요.

뭐 이거 더 나가다가는,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10-13 00:13 
20160919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3-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개인적 자아, 이걸 존재라고 했죠. 존재라는 말은 뭘 분해하느냐 하면, 우선된 존재, 절대적 존재에 의해서, 이 개인적 자아는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야, 니 죄를 몰라? 에이, 갖다버려라!’ 이게 아닙니다. 모든 사탄이든, 지옥 갈 사람이든, 천국 갈 사람이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하셔서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거예요. 부속품 하나 이 땅에서 버릴 것이 없습니다. 들의 백합화뿐만 아니고, 모든 것이 다 주께서 알아서 쓰이게 하시기 위해서, 예비 된 것이고 배치된 것이고, 설정된 그러한 구조물들이에요. 전부 다.

따라서 이 개인적 자아가, 이게 죄로 드러난다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자아는 따로 있어요. 그 따로 준비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자아인데, 이 자아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아버지와의 사귐이 있는 거예요. 예수님의 이 자아,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시는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맞죠? 창조주를 아시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자아를 우리의 개인적 자아와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바꿔치기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거기다 집어넣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도 모르고, 지키지도 못하고, 창세전에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 모르다 보니까 사탄에 의해서 개인적 자아를 자꾸 고집하고, 모든 것을 자기한테 의미를 두는데, 하나님은 나한테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고 주님한테 의미를 두는, 예수님한테 오는 동시에 그 뒤에 뭐가 따라오느냐 하면, 아버지와 아는 자가, 예수님 뒤에 관계 지어서, 동반해서 사귐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아는 순간 우리는 뭐가 되느냐, 나를 본 자는 무엇을 보았다? 아버지를 본 거죠.

이것은 새로운 자아가 들어오게 되면, 우리 모든 개인적인 자아는 뭐냐 하면, 예수님의 자아를 보여주기 위한 기능인데, 우리는 하나의 존재가 아니고 기능으로 해체되는데, 이 기능인데, 어떤 기능이냐 하면, 다양한 기능이에요. 다양한 기능. 그 많은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어떤 특정 인간을, 사도바울이나 베드로나, 어떤 목사님이나, 어떤 특정인간을, 모세나 예레미야나 이사야나 또는 노아나, 특정인간을 메시아로 간주할 수가 없는 거예요. 메시아로 간주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담이 죄 지었죠? 죄 짓고 난 뒤에 바로 예수님께서 왜 안 오셨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아담 이후에 곧바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 지게 하셨다. 왜 그렇게 결정을 안 했습니까? 예수님이 오시는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을까요? 뭣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겁니까? 누가 답변할 수 있습니까? 성경을 그렇게 많이 봤다면서요? 어떤 사람은 백독 봤다면서요? 왜? 주님께서 효율적으로 일을 안 하십니까? 왜? 경제적으로 일을 안 하십니까? 왜? 쓸데없는 일을 많이 집어넣어놓고 뒤늦게 와서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보내시는 이유가 뭐예요?

바로 투입해야지요. 바로. 병들었으면 바로 처방전 내려가지고, 바로 십자가에 집어넣어야죠. 노아는 왜 왔으며, 모세는 왜 왔습니까? 바로 그 이유는 다양한 기능들이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사귐이 품고 있는, 이걸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합류라고 해요. 합류. 품고 있는, 아버지와 예수님의 사귐이 품어있는 그것이 이 지상에 스펙트럼처럼 쫙 펼쳐지게 되면, 노아는 예수님을 담당하는 한 기능이 되고, 엘리야는 예수님을 담당하는 한 기능이 되고. 제가 존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담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 되고.

그 기능은, 기능을 하는 존재에게 돌아오지 않고, 그 기능을 분여하는, 또는 배분, 공급한, 그 공급하는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그 분을 향하여 수렴되게 되어 있어요. 어프로치approach, 모아지게 되어 있어요. 모아지게 되어 있으면, 엘리야의 자기 기능으로, 자기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이, 진정 구원받을 자는, 유일하게 구원받을 자는 예수님뿐인데, 따라서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구원받을 자는 진정 예수 이름뿐인데, 우리는 예수 이름을 드러내는 기능으로,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이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의 이름이 삭제고, 우리 이름의 소멸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우리가 전도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죄며, 나는 이 죄 짓는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해서 자꾸만 개인적, 이것은 내가 했다는 것, 이 기능은 나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기능이라는 것을, 그것을 죄로 규정해서, 죄로 규정한 그것마저 쓸데없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희생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는 전도라는 하나의 기능을 채택했다는 것을, 본인이 결과적으로 수용하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쉬운 예로 하면 이렇습니다. 부부가 되면 부부생활 자동적으로 됩니까? 부부라는 존재가 있으면 부부생활이라는 기능이 정당화돼요? 아니죠. 부부생활을 정당화해야 정상적인 부부가 되죠. 우리의 일상에도 보세요. 존재가 아니고 뭐가 우선이다? 기능이 우선이다. 남녀 간의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자, 서로 해줄 수 있는 사랑은 이제 끝났습니까? 자, 사랑해서 결혼했습니다. 결혼해서 이제는, 결혼이라는 것에 골인을 했으니까, 이제 더 이상 사랑이 필요할까요? 불필요할까요? 답변해보세요. 필요하죠. 결혼했는데 왜 필요합니까? 결혼을 했는데? 왜 필요해요? 결혼을 했는데 왜 사랑이 필요합니까? 사랑의 목적이 결혼이 아니었던가요? 아닙니까? 깁니까?

남녀 간의 서로 연애하는 것이 결혼입니까? 결혼 아닙니까? 결혼이면 이게 땡인 거예요. 사랑하는 이유는 앞으로 계속 반복해서, 더더더 더 사랑하기 위해서 결혼한 거예요. 그렇게 할 때, 그 결론이 뭐냐 하면 남들 보기에 “부부네!” 이게 결론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결론을 목적으로 해버리면, 내가 결혼에 성공했다는 것을 목적으로 봐버리면, 우리는 결혼하고 난 뒤에는 그 다음부터는 긴장이 풀려가지고, ‘뭐 사랑한다고 안 한다고 설마 이혼하자고 하겠어? 나는 이제 그동안 연애한다고 꾹 참았던 나의 남성으로서의, 상남자로서 취미활동이나 한번 몰입해보자. 차나 바꿀까? 차 인터넷이나 하든지, 안 그러면 골프나 치든지, 등산이나 매진하든지, 안 그러면 낚시나 해볼까?’

그럴 때, 아내는 뭡니까? “이게 부부가? 살림하는 하녀지? 이게 부부에요? 니 취미생활 본격적으로 하려고, 뭐 이게 애도 아니고, 경사도 말로 알라도 아니고, 마징가제트캐릭터 모은다고, 그거 한다고 월급의 반을 거기다가 쓰면서?” “나 니하고 결혼한다고 그만큼 밑천 들었으니까, 이제 결혼했으니까, 나의 상남자의 생활을 니가 좀 이해해 도!” “그럼 결혼은 왜 했어? 그것도 니 내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것도 결혼을 하기 위한 하나의 조건이었지.” “지금은?” “결혼 했는데 왜 물어?” 이래요.

여자분들 이거 듣고 화 안 납니까? 남자인 내가 들어도 화가 나는데? “내 취미생활 본격적으로 하듯이, 그런 니도 니 취미생활 본격적으로 해라!” 그럼 여자들도 취미생활 본격적으로 해볼까요? 백화점에 명품 싹쓸이 한 번 해봐? 카드 마이너스 한 번 해봐? 그때서 “이게 아니구나. 협상하자. 두 시간 니 취미생활, 두 시간은 내 취미생활.” 도대체 이게 결혼이에요? 갑자기 결혼이야기에 왜 흥분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뭐냐 하면, 계속되는 기능이 안 나오면 그것은 진정한 결혼했다는 부부의 존재성을 붙이지 말라 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결혼했으니까, 이제 아내에게 소홀해도 된다는 말은 뭐냐 하면, 결혼 자체가 내 존재를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어요. 나로 하여금 더욱더 나 되게 하기 위한, 나를 더욱더 굳건히 하기 위한, 하나의 계략으로, 하나의 책략으로, 여자 하나 데리고 온 것뿐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남성만이 하는 짓거리가 아니고, 좀 드물기는 하지만, 오늘 말조심해야 돼요. 드물기는 하지만 여자들도 그러하다는 겁니다. 여자들이 재벌 3세 연예인을 꼬셔가지고 팔자를 고치고 지는 소비하는 재미로 살겠다는 거예요. 그걸 흔히 꽃뱀이라고 하는데, 꽃뱀이 사실은 꽃뱀이 아닙니다. 꽃뱀치고 꽃이 없어요. 그냥 뱀입니다. 그냥 뱀이에요. 무슨 꽃뱀이 있어요.

모든 인간은 다 나한테 이익이 되고 이용가치가 있다는 조건하에서만, 기능이 나와서 자기는 그 기능을 어설프게 회수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뭐가 빠졌느냐, 이 기능에서, 나에서 나와서 나의 기능을 하고, “나는 고기 잡는 어부다. 그러니까 나는 정당하다.” 이는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이 기능에, 이 분열이, 이걸 분열하려면, 여기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이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내가 사전에 나한테 배분한 가상존재에요. 가상존재. 가상자아입니다.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세상에 마귀도, 지옥 갈 사람도 다 십자가에 불필요한 부속품이 아니라 다 필요한 부속품이에요. 다 필요한 부속품입니다. 아, 자꾸 어렵게 해서 죄송한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십자가를 집어넣게 되면, 우리의 존재 안에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십자가는 그냥 들어온 것이 아니고, 요한일서의 내용에 맞춰서 들어와요.

또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완성상태에서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걸 아까 시간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으로 들어오죠. 사랑으로. 사랑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뭐가 사랑이냐 하면, 십자가를 드러낸다는 것이 사랑의 완결체고, 이 완결체를 화목제물이라고 합니다. 화목제물이라 하는 것은 다섯 가지 제사, 화목제물이 되려면 앞에 있는 제사가 먼저 선행되고, 선행된 제사가 완료된 그 마지막 제사가 화목제물이에요. 화목제물 이후에 더 드릴 제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라는 말은 죄를 사할 수 있는 모든 근거는 예수님에게서 이미 완료가 되었기 때문에, 자기 죄를 사하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더 내놓을 행위는 인간에게서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선교한다고 해서, 추가적인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최종적인 것만 받지, 거기서 추가적인 것은 더 이상 받지를 않습니다. 헌신을 안 받아요. 주님께서는 헌금이나 돈을 안 받는다 말이죠. 우리의 봉사나 이런 것들을 받지를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찬양도 안 받아요.

시편에서 그렇게 찬양하라고 이야기하는 그 모든 찬양은, 인터셉트, 예수님이 다 가져가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존재의 기능으로서 찬양이 나옵니다. 그게 어디에 누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아기로 태어날 때, 질문입니다. 자, 찬양은 누가 했습니까? 1번. 목자가 했다. 2번. 천사가 했다. 몇 번입니까? 천사가 했죠. 천사가 찬양하고 있는데, 목자가 거기에 끼어들어서 소프라노 해봐야 그거 찬양 안 받습니다.

왜?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찬양은 자기의 노래의 찬양으로 회수하는 그런 찬양이 백퍼센트입니다. ‘아, 이번 찬양에는 음정 두 개 틀렸다. 내 찬양 때문에 눈물 흘리네! 내 찬양 때문에 회개하고 다 나오네! 이야! 나는 이 정도 가치 있는 존재야!’ 내가 어느 정도로 가치 있는 존재냐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찬양으로 쑤셔보고, 십일조로 쑤셔보고, 봉사로 쑤셔보고, 목사 넥타이 사주고, 목사 뭐 대접하고, 차 바꿔주고, 전부 다 이런 식으로, 그 모든 행위가 내가 얼마나 하나님에게 필요한 존재인 것을 테스트하기 위한, 하나의 쑤셔보기 위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은 화목제물에 섞일 수 없는 오염된 거예요. 더러운 것이에요. 더러운 손 가지고 화목제물에 끼어들면 안 돼요. 그러면 헌금하지 말고, 전도하지 말고, 기도하지 말라는 거예요. 성경보지 말고, 그러면 성경공부 한다고 여기 왜 모였어? 하지 말라는 겁니까? 여기서 참 어려운 것이 있어요. 사람은 누가 하라 해서 하고,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위인이라는 것을, 본인이 몰라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욕망한테 못 이기기 때문에. 자기 욕망한테 못 이겨요.

차를 타고 가는데 시력이 안 좋아서, 저 500미터 앞에 경찰이 있어요. 자기는 속도위반인줄 모르고, 못 봐서 속도를 냅니다. 경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기도 안 할 사람은 없습니다. 두 손 모아서 하는 이건 아니고, “주여, 오늘 아침에 운전할 때 기도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어떻게? 어떻게 좀 해주세요?” 경찰에 걸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죠. 본인은 알아요. 돈 날아가는 것이 아깝잖아요. 이 말은 뭐냐,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잖아요? 그렇잖아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인데, 경찰 하나 주께서 배치함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 평소에, 가만히 있는 내 속에 뭐가 부글거리고 있다? 나는 돈을 사랑하고 있다. 돈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부글거리고 있다는 것을, 주께서는 적적하게 경찰 하나 세움으로써 발각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우리의 본능을, 우리의 욕망을 우리가 이긴다? “주여, 감사합니다. 경찰한테 돈을 빼앗기게 해서 감사합니다.” 이런 인간 없습니다.  “주여, 할 수만 있거든 피하게 해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과연 내가 가는데, 옆 차가 과속을 해서 걸리는데, 자기도 몰랐어요. 경찰은 하나인데 차는 두 대이고, 먼저 온 차를 잡다가 나는 우회로 피해갈 때, 여러분 어떻게 반응해야 됩니까? 할렐루야! 하고 반응해야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아, 주님. 이 정도로 내가 죄인입니다.” 경찰을 무서워했다는 것은? 사랑 안에는 뭐가 없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약간 늘려봅시다. 사랑 안에는 경찰이 없다. 이런 식으로. 사랑 안에는 부도가 없다. 사랑 안에는 계약이 깨어짐이 없다. 분명히 계약한다고 해놓고 다른 회사하고 하는 이런 것. 사랑 안에는 내 자식 성적 떨어짐이 없다. 이게 사랑이거든요. 좀 생소하십니까? 이 사랑이?  좀 이상해요?

개척교회 하는데 교인이 다 나갔다. 그러나 두렵지 않다. 이게 사랑이거든요. 나한테 돌아오지 않는 사랑. 왜? 나한테 돌아오면 뭐가 없다? 사귐이 형성되지 않아요. 사귐이. 사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독점적으로 알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 있음에 나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게 사귐이에요. “아이구, 그래. 내 자식이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게 사귐이거든요. 근데 우리는 이 지상에 태어나면서, 우리는 창세전에 내용도 모르고, “나 여기 있다. 건들지 마라!” 순 이린 식으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죽어서 어디 갈꼬? 좋은 데 가고 싶은데? 뭘 믿을까? 절에 갈까? 절에 가면 중들 머리 꼬라지 보기 싫고. 교회 갈까? 어? 교회 가니까 윤리, 도덕적 설교가 나온다 말이죠. 윤리, 도덕적 설교를 할 때마다 나는 약간의 반성만 하면, 점점 더 지상에서 어디로 올라갑니까? 하늘의 점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는 어떤 자만감, 자족감, 이걸 주는 거예요. 내신 성적이 올라가는 그 기쁨 아시죠? 내신 성적. 성경은 숙제고, 이걸 지키면 지킬수록, 그걸 못 지켰을 때, 상대적으로 우월감을 제공하니까.

잘못 했을 때도 괜찮아요. 잘만 하면, 반성하면, “이 짜식! 기특하기는, 니 반성할 줄도 알고?” 나쁜 짓 해놓고 주님한테는 보상으로 곱빼기로 받으니까. 그 회개하는 즐거움이 괜찮아요. 왜? 회개하면 회개할수록 점점 자기가 의인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교회에 새로운 교인이 오면 봅니다. ‘니가 수능 어느 정도야? 내신 성적 어느 정도야?’ 비교하게 돼요. ‘어쭈! 30분기도? 어? 저거 봐라!’ 그걸 노리고 40분 기도하고. ‘성경을 두 장 봐?’ 세 장 보고. ‘감사헌금 10만원?’ 5만원 더 내서 15만원.

이게 뭐냐 하면, 개별적 자아가 계속해서 꿈틀거리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기도 30분 하는데, 저 사람은 두 시간하고 왔어요. 그때 감정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두려움. 저 사람이 FM(Field Manual)일까? 저 사람이 정답이라면, 저 사람은 새벽기도 2시간 했는데, 나는 30분밖에 못했기 때문에, 한 시간 반이 미흡한데서 오는 어떤 징계, 저주가, 이번 주 바이어 계약하는데 어떤 악한 영향을 끼칠 수가 있다는 그 두려움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아, 고3 되어서 수능 앞두고, 갑자기 부모들이 경건해지기 시작합니다.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다가 수능에서 1점으로 떨어지게 될 것을 생각하면, 그 책임이 누구한테 옵니까? 부모한테 오죠. 이게 사귀는 겁니까? 지가 자기 절대적인 힘을 휘두르는 겁니까? 나 빼놓고 다 적이라는 거예요. 사귐은 그게 아닙니다. 사귐은 성령 안에서 완료에요. 자, 요한일서 3장 들어갔습니다. 벌써 들어갔어요. 쥐도 새도 모르게. 그게 완료인데, 완료가 뭐냐 하면, 성도는 죄 짓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도는 죄 짓지 않는다.

여러분! 성도는 죄 짓지 않는다고 하면 딱 떠오른 파가 있어요. 무슨 파냐 하면, 구원파죠. 왜 구원파가 이단의 정점이냐, 박옥수, 유병언, 구원파도 한 20개가 될 걸요? 구원파가. 교인들 일일이 찾아가서, “구원받았습니까?” “예. 구원받았습니다.”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니가 알아서 뭐하게? 니가 와?” “지가 뭔데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합니까?” “구원받았으면 성령이 와야 하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텐데, 변화가 없다는 것은 구원 안 받은 겁니다. 제가 변화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이런 고마울 데가!”

구원파가 구원받았습니까? 묻는다는 말은, 제가 강의 첫 번째에 어떤 질문을 했던가요?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고 다른 질문을 했죠? 그게 뭡니까? 복음이 무엇이냐? 이었죠. 이제 정신 차려서 기억들을 다 하시네요. 그런데 개인구원에 매여 있는 사람은 결국은 어디한테 꼬임 당할 수밖에 없어요? 구원파죠. 구원파에 유혹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구원파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기존의 한국교회에서 나왔습니다. 모든 교회가 시도하는 것이 뭐냐 하면, 구원파의 전신이에요. 전신.

여러분,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어머! 놀래라!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말 한다는 자체가 대책이 있고 처방전이 있다는 겁니다. 다른 교회도 그런 소리하는데, 우리교회만 확실하게. 경상도 말로 학실하게. 표준말로 확실하게. 제가 하는 말은 거의 사투리에요. 확실하게! 확실하게! 빠른 지름길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저쪽에서는 복잡하게 하는데 우린 아주 간편하게, 스마트하게, 캐주얼로 해드리겠습니다. 믿고 영혼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자, 시작을 뭐로부터 했어요? 구원부터 해서 마지막으로 뭐로 끝납니까? 구원의 기쁨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나 존재로부터 해서 나 존재로 가는 거예요. 안 말려 들 수가 없어요. 안 말려 들 수가. 결국 교회라고 하는 것은, 교회 목사는 쉽게 말해서 영업하는 장사치죠. 소비자는 구원받고자 하는 소비자고. 교회 목사는 구원시켜주는 중개인이 되고. 그 중간에서 커미션을 받아 챙겨서 노후대책과 생계를 보장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목사들의 관심사잖아요.

그 관심사를 간단하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목양.’ 언제 목사보고 목양하라고 했어요? 목양이라는 말은 전제에 뭐가 깔려있습니까? 이 교회가 깔려있죠. 교회의 머리는 누구죠? 교회 머리가 목사입니까? 부목사는 모가지고? 교회 조직표 한 번 보세요. 전도사는 모가지라니까요. 모가지 잘못하면 모가지 날아가는 수가 있어요. 장로가 재정이사고? 주식에 지분 가졌고? 그런 겁니까? 초신자는 미생이고?

문제는 교회를 증거 하는 거예요. 우리교회는 정당 하는 겁니다. 우리교회는. 우리교회이니까, 이게 뭡니까? 개별적, 개인적이에요. 존재에요. 우리교회, 존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모든 교회 목회가 “우리교회 있다!” 있음, 존재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건 기능이 아니에요. 존재부터 시작한다고요. 존재부터. 모든 성경 해석을 우리교회가 부흥해야 돼야 된다는 것에 모든 성경구절을 다 쏟아 붓습니다. 쏟아 붓는데 그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 개인구원을 시도합니다.

“여러분! 육입니다. 육에서 혼으로 바뀌어야 되고, 혼에서 영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워치만 니, 지방교회. 이단 중에 이단이 워치만 니Watchman Nee에요. “목사님! 지금 어디까지 왔습니까?” “육에서 아직 멀었는데, 까딱하게 혼까지는 왔네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더 열심히 기도하시면 혼에서 영으로 점프합니다.” “언제까지요?” “지금까지 20년 했는데 한 25년 더 하게 될 걸요.”

과연 그 인간이 딱 깨놓고 말해서, 육에서 혼, 혼에서 영이 되고 싶어 할 겁니까? 아니면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권력을 자기 몸 하나 교회에 희생해서, 자식 공부 잘하고, 남편 사업 잘되고, 자기가정이 화목하게 융성되는 것을 반대급부로 노리겠어요? 안 노리겠어요? 노리죠. 내 몸 하나 교회에 헌신해서, 정작 내가 노리는, 얻고자 하는 노림수를, 주님께 이쁨 받아가지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어서, 정작 내 한 몸 바쳐서 얻고자 할 때, 그것은 상술입니다. 그거는 상술이에요.

그 소비자들이 쓰는 상술을, 목사라는 이름에 장사치가 마음껏 유린하고 농락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죠. 헌금하지 말라고. 여러분 가정에 있는 것도 모든 것을 주님이 주신 건데, 주님 것을 왜 지 맘대로 엉뚱한데 냅니까? 니 돈도 아닌데, 자기 돈도 아닌데, 왜 엉뚱한 데 내? 세 사람이 신자면 그게 교회고, 두 사람이 신자면 그게 교회에요. 가정도 교회에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해서 듣는 사람 짜증내겠지만, 죽을 때까지 꽉 껴안으세요. 돈 없는 부모는 부모도 아니라고 했잖아요. 부모는 돈이 있어야 부모에요. 돈 없으면 부모 취급도 못 받습니다.

그러니까 끝까지 자기 돈을 교회에 내지 말고, 끝까지 붙드세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탕웨이가 한 것처럼. 절대 놓치지 않을 거예요. 주님이 주신 돈을 왜 놓칩니까? 지가 무슨 자격으로 남의 돈을 왜 내요? 거기다가? 어떤 분이 질문했어요. “그럼 목사들은 어떻게 먹고 삽니까?” 목사라고 하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굶어죽을 때, 그게 사도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그것도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성령 안 받은 사도바울이 아니고. 성령 받은 사도바울은 복음을 위하다가, “주여! 어서 죽여주옵소서.” 사도바울은 죽겠다는데 발목을 왜 잡습니까? “주여, 이거 복음입니다.” 발목을 왜 잡아요?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죽고 싶은데 너희들 때문에 못 죽는다. 주께서 못 죽게 하셨다.” 이게 뭐냐, 사도바울의 존재의 구원이 아니라, 이 기능은 주 예수님이 주신 기능, 성령 안에서 주신 기능이에요. 나는 가난하나 부요한 자요, 나는 없는 자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나는 산자다. 이 기능을 움직여야 돼요. 그래서 존재에서 십자가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죄 짓는 기능을 의의 기능으로 바꿀 때 십자가가 투입되는 겁니다. 존재에서 존재로, 기능에서 기능으로 바꾸어져야 해요.

사귀는 여자가 남자한테 물어봅니다. “당신은 왜 날 사랑해?” 여자는 자꾸 확인하고 싶거든요. 하도 사기꾼들이 많으니까. “사랑하니까.” “언제까지?” “영원토록!” “오케이! 결혼하겠어!” 결혼이 영원입니까? 결혼으로 끝났으면 영원히 끝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결혼하고 난 뒤에는 자기만을 향하여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을 때, 여자가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우리 헤어지자.” 라고 하면, 남자가 하는 말이 “이미 결혼했잖아?” 이게 무슨 말이에요?

기능이 있어야 결과적으로 결혼이 있는데, 남자는 결혼을 기능으로 보지 않고, 사랑하는 관계로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 결혼했다는 것으로, 결혼 자체로 자기 존재를 커버하는, “나 결혼했다. 나 이 정도 괜찮은 존재야.” 존재로 확정지은 거예요. 그러니까 “니는 절대로 나하고 이혼할 수 없어. 왜? 니가 나하고 이혼하면 내 존재에 흠집이 생기니까.” 또 이야기하고 내가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여러분 화나지 않습니까? 또 이야기해야지.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부 또 여자도 그래요. 꼭 이 이야기를 붙여야 균형이 맞아요. 일부에요. 일부.

우리의 평소에 하는 모든 행동들이 얼마나 복음적인 것하고 관계없이, 십자가를 언급하고, 예수 언급해도, 결국 우리 모든 것은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죄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목사님. 이제는 성령 받아서 고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데, 이것 또 골치 아픈 게, 성령 받으면 고쳐지는 것이 아니에요. 제발 좀 오해하지 마세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에요. 성령 받으면 고쳐지는 것이 아니에요. 더욱더 내가 어느 정도로 죄인인가를 더욱더 확실하게 그 죄를 증가시키는 겁니다.

왜? 십자가와 연결되기 때문에. 옛날의 법은 내가 잘난 체하기 때문에 주어진 법이라면, 새로운 성령의 법은 왜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 속에 그동안 잠자고 있던 죄를 더욱더 확대시키는 하나님의 멋진 작업이 전개됩니다. 뭘 해도 죄가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마귀한테 농락당하거나 협박, 공갈 받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저주받는 경우라도? 나는 이미 저주받았어! 니 망한다? 이미 망했어! 니 그러다 죽는다? 이미 나는 죽었어! 니 지옥 간다? 이미 구원받았어!

이거는 뭐냐 하면, 누가 자꾸 뭘 하라 마라고 하는데, 니가 예수 믿으란 말이야! 내가 왜 예수를 믿어야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기능이 나오는데, 왜 예수 믿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믿을 주체가 없어요.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나오는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누가 산다? 누가 나의 자리를 대신합니까? 예수님이 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산다. 예수 이름으로 산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산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 안에 있죠. 그럼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여기 뭐가 필요합니까? 죄인이 필요하죠. 십자가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는 화목제물이라는 말이죠. 화목제물은 뭐가 필요합니까? 죄가 있을 때만 화목제물이잖아요. 따라서 그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경유하는 겁니다. 경유하게 되면, 나는 저주받아야 돼! 나는 멸망 받아도 마땅해! 나는 징계 받아도 마땅해! 나는 지옥가야 돼! 라는 것을 경유하면서, 예수 안에서 그것이 뭐냐, 십자가만 드러내는 거예요.

이 경로가 아무리 많은 경로라도, 이게 다 어디 안에 들어있다? 이미 구원이 확정된 영생 안에서, 사랑 안에서, 이제 사랑이 이해되십니까?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을 사랑답게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돌리는 겁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따라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뭐 해아 됩니까? 죽을 때까지 죄를 짓게 되는 거예요. 뭐, 논리가 이상합니까?

예수 믿었으니까 이제는 정신 차려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아버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 그 성경말씀 보고 마음껏 거룩한 생활, 성화의 생활을 해서, 너희의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빛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그럼 그 모든 말씀이 다 어디로 간 거예요? 어디로 가기는요? 나에게 왔죠. 모든 말씀이. 나에게로 오게 되면, 그렇게 나에게로 와봐야, 거리에 경찰차 한 대 있는 것 가지고도 두려운데. 전에는 이런 말씀들이 시시하게 보였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보다 더 살아있는 것이 주의 말씀이구나.’ 주의 말씀이 더 살아있는 거예요.

전에는 주의 말씀이 내가 의미를 붙여줄 때, 그때 살아서 나온 것처럼 여깁니다. 어린이 뮤지컬 같은 것을 보게 되면, 토끼 탈을 쓴 애가 여기 있고, 그 다음에 고양이 탈을 쓴 애도 여기 있고, 그 다음에 거북이 탈을 쓴 애도 여기 있고, 또 사슴 탈을 쓴 애도 여기 있으면, 주인공이 노래 부르잖아요. 룰루랄라~♬ 나는 모든 동물의 친구~♬ 해가지고 거북이를 탁 치면 거북이가 쏘옥 나와 가지고 같이 춤을 추는 거예요. 이 상황극이 뭔지 여러분들 예상하시죠? 이 상황극을?

주님께서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시면서 여기에 딱 있습니다. 나는 모든 말씀을 지켰다~♬ 하면서 탁 치니까, 니는 넓은 길로 가고 있다~♬ 아이구, 죄인이구나~♬ 주여! 십자가 감사합니다~♬ 화목제물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고 있는데, 뒤에서 너는 죄를 지었다~♬ 니가 좁은 길 했다~♬(갑자기 발음이 꼬여서 방언처럼 되는데) 이번 주 너는 바이어와 계약 깨진다~♬ 나는 깨져야 한다~♬ 나는 실패해야 된다~♬ 나는 어떤 것도 다, 지금 죽어도 마땅하다~♬ 마귀가 하는 말이 재미없어서 니하고 안 놀란다~♬ 

얼마나 협박, 공갈을 받는, 사탄을 미워하지 마시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시고, 절망하시기 바랍니다. 절망, 실망이 그렇게 아프다는 것은 아직도 나의 존재의 무게가 그만큼 무겁다는 거예요. 무거우면 스트레스로 이어집니다. 죄짓지 않는다는 것은 일대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니가 어디에 속했다는 겁니다. 우리를 대신하는, 우리는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표면에, 문패에, 주의 이름이 있어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

마귀가 와서 우리를 대항할 때,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상대하지 않고, 내가 죄인 된 것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주의 이름이 하신 기능,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마귀에 대적할 수 있는 그 대상자가 내가 아니라 주님이 나서서 마귀를 퇴치할 때, 그 관계를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 사랑의 관계, 그게 바로 사랑이 다시 한 번 돋보이는 현실태가 되는 겁니다. 현실태가 되는 거예요. ‘아하!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구나.’

주님께서 이 사랑의 관계를 얼마나 단단한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감사하게도 가끔은 우리에게 확인할 수 있는 기쁨을 주십니다. 그 기쁨에 대한 리스트를 지금부터 읊어드리겠습니다. 환난, 곤고, 핍박, 기근, 기름 값 내려감, 경주지진, 북한 핵실험, 이런 것이 올지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덤벼! 덤벼! 이 세상에서, 나의 주변에 어떤 것이라도 덤벼!

덤빌 때에, 내가 또 예수 믿었기 때문에 나는 의인이라고 촐랑댔던, 어제 7시간 전에 그 촐랑댐이, 그러한 경주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여기는 경주가 아니니까, 캘거리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아이구, 안 되는데, 돈 모아서 부동산 하나 샀는데, 내진설계를 안 했는데 하필이면 그 동네에 지진이 일어나다니!’ 하고 벌벌 떨다가, ‘아하, 내가 주의 이름 안에 있으면서도 또 나의 이름, 나의 명예, 나의 자존심, 나의 자존감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아, 예수님께서 보내신 마귀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쑤시고 들어왔구나. 감사하리로다.’ 주님께 감사하세요.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했죠. 근데 곧장 그 다음 구절이 뭡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게 뭐냐, 거함. 소속.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고, 이해는 된다고 생각하고, 제가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믿습니다.” 말을 하라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런 이론도 있다는 것을 내가 인정해줄게.” 라는, 뭐 그 정도로 봐주겠습니다. 그런 이론도 있다. 결정은 성령이 여러분들을 가르칠 것이고 내가 가르칠 문제는 아닌데.

개인구원과 소속구원입니다. 개인구원으로 출발하게 되면, 개인구원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이름이, 개인구원, 특수구원, 나라는 특수구원이기 때문에, 나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이름을, 남한테 양보할 수 없는 특별난 이름을 갖고 있어요. 그 이름을 구원하자면, 그 이름이 도중에 깨어지거나 훼손되게 되면, 우리는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 예가 뭐냐 하면, 아브람이, 아브람은 구원을 못 받아요. 아브람이라는 존재가 계속 되는 한, 존재에서 존재가 되는 한, 여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집니다. 나중에 완성되죠. 십자가로. 십자가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 아브람은 죽고, 뭐로 바뀌느냐 하면 아브라함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름이 바뀌면서 이 이름은 죽은 아브람의 이름이 아니고, 아브람을 죽이고 여기 자리에 투입하신 예수님의 이름이 아브라함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존재를 보여주는 아브라함적 기능이 작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뭘 바치느냐 하면 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바치는데, 그 이삭이 미워서 죽이고 싶은 아들이 아니에요. 어떤 아들이냐, 사랑하는 아들이에요. 그것도 둘, 셋이 아니에요.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아들이에요. 그 아들 바치는 존재가 아니고, 아들 바치는 기능. 아브라함이라는 존재가 이삭이라는 존재를 바치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적인 기능이 아브라함에게 작렬하여 이삭이라는 그 존재를, 바침으로써 그 사이에 나타나는, 관계로 나타나는 어떤 특수한 기능이 있어요.

그거는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죽어야 산다는 거예요. 죽어야 산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실패해야 영생이 확인된다. 그래서 이 시간에 계속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 제발 인생을 실패하는 재미로 사시기 바랍니다. 실패하는 경우를 제가 말씀드려야죠. 그냥 하면 또 오해하니까. 실패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벤츠 타는 실패, 부동산 두 채 더 가지는 실패, 우리 애가 하버드 들어가는 실패, 땅 값이 열 배가 뛰는 실패, 경찰 있는데 안 들키고 그냥 돌아가는 실패, 그 모든 것이 여러분의 자존감을 건드리는 환난이요, 핍박입니다. 그 핍박치고는 괜찮은 핍박이죠?

그렇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우리를 시험케 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을 거예요~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이 있어야, 이런 것들이 있어야 내가 얼마나 평소에 돈 좋아하고, 출세 좋아하고, 권력 좋아하고, 그것 안에서 내가 안도감을 느끼면서, 마치 주님한테 복 받은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이 죽을 죄인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러한 멋진 상황들을, 부자 되게 하시고, 성공하게 하시고, 기도에 응답 팍팍 되게 하시고, 아들 목사 시켜놨더니만 오천 명 목회하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보다 나라는 존재에 꽂혀서 살아가고 있는, 마귀적인, 악마적인 사람인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뭘 아느냐, 어디에 소속되어 있어요.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예수 이름에 소속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누구 이름으로 구원받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아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예수 이름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의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존재의 확인차원에서, 주님의 일하심의 증명차원에서, 우리는 이 캘거리에서, 그리고 저는 대구에서 앞으로 또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마지막 강의처럼 이렇게 돼버렸는데, 이제 이렇게 했으니 두 번 다시 안 모일 거잖아요?

자, 3장 8절 보겠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나니, 죄를 짓는 존재는 마귀에게 속한 존재니, 이 모습은 나의 자아상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내 모습을 보고 있죠? 현재진행형이죠. 내 모습을 보고 있죠. 속한 자니, 속한 자니죠. 속했다는 점에서는 뭘 이야기합니까? 이게 내 모습인데, 이상하게, 현재 우리가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주님한테 속해있죠. 주님한테 속해있으니까 옛날에는 어디에 속해있었다는 것을, 저쪽 편에서, 옛날에 속해있던 그 모습을, 그 상황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성령이 임함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니가 어떤 모습인가를 우리에게 확인하는 겁니다. 말을 제가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 쉽게 통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아내가 자꾸 남편을 지적질하고 잔소리해요. 책망하고. 그럴 때, 우리는 그 아내와 남입니까? 한 부부입니까? 남이라면 그렇게 잔소리 안 하죠. 특히 조수석은 참 위험한 자리잖아요. 조수석은. 어떤 때는 핸들을 뽑고 싶어요. 조수석에서 간섭하면. 근데 그럴 때 그런 생각이 든다는 자체가 뭘 의미해요? 내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소리에요. 뭐냐 하면, 나는 나가 있을 때에 비로소 나의 의미가 돼요. 너가 있음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지적받죠.

그럼 성령이 하는 일은 뭡니까?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우리를 책망하죠. 요한복음 16장 8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성령은 날마다 책망하고 간섭함으로 말미암아, 예를 들어서 죄를 짓는 자는 뭐다? 마귀에게 속했다고 성령께서 우리보고 책망을 하잖아요. 요한일서 3장 8절을 가지고, 이 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니” 라고 책망을 하게 되면, 그걸 성령의 책망으로 알아듣는 사람은 마귀에 속했습니까? 주님께 속했습니까? 주님께 속했죠.

그런데 마귀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하나니” 라는 말을 하게 되면, 마귀에 속한 사람은 어떻게 하냐 하면, 이렇게 해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 온지 6개월밖에 안 됐잖아요? 좀 더 시간을 주시면, 죄 안 짓도록 노력하고, 거룩하도록 노력해서, 주님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지금 성화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자훈련 10단계인데, 지금 5단계까지 왔습니다. 열심히 금요일에 성경공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그럼 그 사람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마귀에 속한 거예요. 예수님께 속함을 증명해야 될 교회가 마귀에게 속한 자를 마치 성령에게 속한 자라고 위조해서 그렇게 확정짓는 위험한 짓을 하고 있어요. 왜? 소비자가 그걸 원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나는 어떻습니까?” 그걸 묻는 거예요. “단독적으로 나는 어떤 인간입니까? 오늘 밤에 내가 죽어도 천당 갈 만합니까? 지옥 갈 만합니까?” 그게 되게 궁금한 거예요.

그럼 목사님께서 처방전을 주면서, 보통 처방전을 주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 물약은 하루에 세 번 잡수시고, 이 알약은 식사 후 30분에 잡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처방전을 내리면 어떻습니까? 그게 플라시보 효과죠. 그게 어떤 약이고 간에 나는 이 약을 먹으면 장사 잘 된다는 희망과 소망과 비전과 드림과 꿈이, 현재 자기가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날 수 있는 뭘 줍니까? 힘을 주죠. 현재 교회의 처방전입니다. 이름도 비전교회. 꿈을 키워라! 이게 처방전이에요. 이게. 이게 마귀에게 속한 교회 처방전이라니까요.  

그런데, “목사님. 오늘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전에는 무심코 지나갔는데, 성경말씀에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돌려대라고 할 때, 옛날에는 ‘에이, 미약한 인간이 그걸 어떻게 지켜? 그건 예수님만 지키지. 우리는 못 지켜.’ 라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오른뺨을 때릴 때, 왼뺨 내놓는지, 순간 상대방의 오른뺨을 치고 싶은 욱하는 성질이 나왔습니다.” “누구 앞에서 그랬습니까?” “주의 말씀 앞에서 깨달았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왜?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 속한 자였는데, 이제는 그걸 깨닫게 된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기 때문에, 당신으로 하여금 불신자 같으면 무심코 넘어갈 그 성경구절이, 이제는 실제적으로 나의 구원과 영생과 주님의 기능과 관련된 주의 기능으로서 나한테 스며들었기 때문에, 컨그레츄레이션! 다시 한 번 당신의 구원을 확인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당신과 함께 있음을, 주님이 주가 되고 당신은 결과물이 된다는 것을, 그 관계를 알려주신 것을 축하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 짓지 아니합니다.” 이게 바로 성령님의 처방전이에요.

그럼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놓아라. 오리를 가고자 하거든 십리를 가라 어떤 사람은 5리가라고 했는데, 25리가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말씀 앞에서 내가 죄인 안 되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겁니다. 베드로가 그랬죠. 용서해주라고 하니까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됩니까?” 주님께서 “요것 봐라! 그럼 일흔 번에 일곱 번.” “그렇게 많이?” 그럼 베드로가 오기가 있어서 그럴 다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일곱 번, 일곱 번......,” “용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야. 니가 죄인된 것을 알 때, 이미 남을 용서했느니라. 왜? 개별적 자아는 없고 보편적 자아밖에 없거든.” 십자가 앞에서 누굴 건방지게 용서해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잖아요? 누가 남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지가 죄인 주제에.

그러니까 시간 다 돼 가는데, 여러분들 분명히 들어야 돼요. 남을 용서하는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절대로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게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에요. 그게 성령의 열매에요. 내가 남을 용서할 자격이 없어. 내가 용서한다는 자체가 죄야. 할 때, 상대방은 무슨 저런 온유? 무슨 저런 화평? 저런 기쁨이? 그게 바로 성령이 함께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밤 그냥 주무시고, 내일 또 언제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10-13 00:13 
20160920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4-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3장 10절,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그렇게 되어 있죠. 원래 기독교,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 성경의 내용에 보게 되면 유대교하고 달라요. 유대교는 어디서 끝이 나느냐 하면 그들은 메시아가 오면 모든 것이 끝이 납니다. 유대교는 쭉 창세기부터 가서 메시아만 오면 끝나는 것이 이게 바로 유대교입니다. 유대교.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기독교, 또는 복음, 예수님의 교회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이미 메시아가 왔다는 겁니다. 메시아가 오고, 그 이후, 그 이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고 더 나아가는 거예요. 더.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기다리면 되는데, 기독교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이미 오셨다는 종교에요. 이미 오셨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느냐 하면, 미국의 만화영화에 <톰과 제리> 라는 것이 있거든요. 톰과 제리, 저도 본 기억이 나는데, 쥐를 고양이가 잡으러 갑니다. 절벽이 있는데, 쥐가 고양한테 쫓기다보니까 너무 급해가지고 절벽이 있는데도, 3단 넓이 뛰기 한 것처럼 공중으로 막 달려요. 어딜 바라보느냐 하면 고양이 오는 것만 바라보고 막 달리다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공중에 떠 있어요. 고양이만 의식한다면 공중으로 떠서 계속 가는데, 고양이 의식하지 않고 갑자기 밑을 바라보는 순간 이게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만화라지만 희한하죠.

기독교라 하는 것이 메시아가 오게 되면 좋은 날이 온다, 낙원이 온다, 천국이 온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톰과 제리 이야기처럼, 이미 메시아오고, 와도 더 와버렸어요. 더 와버리니까 이 시대는 뭐지? 뭐 이런 시대가 다 있어? 이런 시대가 다 있어?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면 좋은데, 이거는 더 나가버렸으니까 이거는 왜 생긴 거지? 이렇게 새로 메시아가 오셨고 세상 종말이 되었다는데, 메시아 오면 세상종말이 됩니다. 종말이 오고 난 뒤에 왜 덤으로 오는 시대가 왜 필요한지, 그리고 이렇게 더 추가적인 시대로 말미암아 오늘날 현재 이 시대를 우리가 어떤 안목에서, 어떤 관점에서 재해석해야 되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기독교는 그렇게 해서 신약성경이 해석이 되어 집니다.

그렇게 해석이 되어 지게 되면 우리가 평소에 자기생활 하다가 예수님 오시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그런 생각하고는 너무너무 터무니없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해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인식에, 삶에 관한 관점에, 큰 변혁이 일어나요. 기존의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야기하는 사람조차 내가 미쳤지? 할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만약에 메시아가 여기 온다면, 만약에 기다리고 있으면, ‘착실하게 살자. 바르게 살자. 훌륭하게 살자.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 날이 온다.’ 이렇게 해서 살면 되는데, 이미 심판 날이 지나가버렸다니까요. 심판 날이 이미 지나가버렸어요. 톰과 제리와 마찬가지로 이미 지나가버렸어요.

그러면 이 시대하고, 지나간 이 시대를 A라고 하면, 그 전에 우리가 예수님 오기를, 메시아 오기를 기다렸던, 기다림에 대한 시대 B와, 이미 기다린 이후의 A와 세상을 보는, 현실을 보는 관점이 달라도 이게 너무 다른 겁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라고 하는 것은 메시아 이후에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요한일서라는 성경을 해석할 때도, 본문을 해석할 때도, 그냥 유대인처럼 오신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왔다고 했을 때, 메시아가 왔을 때, 우리는 이 성경과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지금부터 제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참 어처구니가 없어요. 이렇게 되면 나라는 것, 세상이라는 것, 현실이라는 것, 이웃이라는 것, 그리고 형제라는 것, 구원이라는 것이, 전부 다 새롭게 정립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르게 살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하죠. 유대인들이 바르게 사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말씀을 지키는 거죠. 바르게 살면 언젠가는, 바르게 산 사람한테는 구원의 혜택이 주어진다. 이렇게 되지만, 이미 메시아고 오시고 난 뒤에 구원이라는 것의 문제가 뭐냐 하면, 이미 구원문제에 대해서는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성격과 성질과 우리의 태도하고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이걸 받아들여야 해요.

우리가 어떤 짓을 하든,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구원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아직까지 심판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죠. 이런 경우를 실제로 유사한 예로 들게 되면 여러분들 학교 다닐 때 시험 전날까지 열심히 공부하잖아요. 그럼 시험치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 자기가 고생했다고 위로한답시고 공부를 안 하잖아요. 그러면 종교라는 것이 뭡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뭐예요? 시험 잘 치려고 하는 겁니까? 이미 시험이 끝나고 난 뒤에 나는 누구냐와 관련되어 있을까요?

유대교 같으면 잘해서 천당 가려고 하는데, 나와는 상관없이 예상 밖에 미리 와버리면, 시험 준비하려고 하는데, 한국의 수능이 며칠입니까? 11월 달인데, 지금은 9월 달이고, 근데  이야기하기를 “8월 달에 이미 수능 끝났어.” 라고 통보를 받게 되면, ‘뭐지? 그럼 나는 뭐 한 거야?’ 그럼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미 메시아가 모든 판정을 내려버렸어요. 구원될 자와 구원되지 않을 자를 이미 결정해버렸죠. 그걸 방금 읽었던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이미 나타났으니, 이미 결정되었으니, 합격과 불합격이 이미 너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되었으니, 이래 되는 거예요.

결정되고 난 뒤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뭘 주느냐 하면, 일방적으로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사실을 통보해주는 겁니다. 사실을 통보해요. 시험 치지도 않았는데 합격증이 날아오고, 시험 치려고 열심히 준비 할라고 하는데, ‘앞으로 열심히 착하게 바르게 살아서 목사님 말씀 잘 듣고 해서 천국가야지.’ 했는데 뭐가 날아왔느냐 하면 이미 불합격입니다. 여러분 이걸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합격 되려고 교회 갑니까? 그런데 교회 다니는 것과 상관없이 불합격이 날아와요. “마귀에 속한 자”라는 그것이 날아오는 겁니다.

확정된, 주님이 확정시킨 사실을 통보해드리겠습니다. 어느 집은 합격, 어느 집은 불합격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이미 왔으면, 이미 인간들의 자기 자신의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자기의 의견과 기대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될 자와 구원 안 될 자를 확정지었기 때문에, 시험 준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이제 시험 준비 할 필요가 없어요. 캐나다에서 이걸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캘거리 여러분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캘거리에 교회가 그렇게 많아도 이 사실을 누가 믿어요? “교회 열심히 다녀야지.” “뭐할라고? 아, 뭐 할라고 교회 다니는데?” “천국 갈라고.” “끝났어. 니 시험날짜 벌써 지난 것 몰라?”

메시아가 왔다는 것은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아버지와 아들이 이미 결정지은 거예요. 그래서 합격한 사람 특징이 있어요. 주의 이름으로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내가 노력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미 내 대신 시험을 다 치러가지고, 내 대신 이름 쓰고 내 대신 1번에 ③번, 2번에 ④번, 내 대신 시험 쳐서, 결과 통보만, 그냥 합격통보만 날라 올 때,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고 자비라고 하죠.

사랑은 복종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복종할 필요가 없어요. 복종한다고 사랑을 곱빼기로 더 주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합격했으면 복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면 합격된 사람은 뭘 빼야 돼요? 복종과 순종을 오히려 빼기를 해야 돼요. 나, 복종해야지를 빼야 돼요. 나, 순종해야지를 빼야 됩니다. 그럼 순종하고 복종 빼면 뭐냐 하면, 주께서 합격시킨, 합격 그대로 나의 현재 모습으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하게 되면,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의 심판 날을 기다린다면, 나의 모습은 심판이 오기까지 유보되어 있어요. 심판 날 돼봐야 진짜 내 모습을 안다. 열심히 해보기는 해보는데, 아직까지, 마지막 때가, 메시아가 오기 전이라고 여기는 유대인처럼 그러는 거예요. 이만큼 유보된 상태기 때문에, 내가 아직 모르는 유보된 내 상태로 인하여, 메시아가 나를 볼 때 어떻게 볼지는 아직까지 알지 못한 상태가 남아있는 겁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면 과거는 아는데 미래는 모르잖아요. 현재에서 미래를 모르는, 요 폭만큼 내가 나에 대해서 모른다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그런데 메시아께서 이미 앞서서, 이미 우리 모습을 확정지어놓고 다시 오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미흡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미흡함이 없죠. 다만 뭐만 남아 있느냐 하면, 지금 현재상태에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주님은 내가 현재 나를 보는 그런 모습이 아니고, “이미 너는 어떻게 하든 의인이야. 합격이야. 너는 죄 짓지 않는 자야.” 라고 통보가 왔기 때문에, 그 통보가 현재 내 생각 가운데서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채택하고, 어느 것을 포기해야 합니까? 예수님 생각을 채택해야 되겠죠. 주님이 옳으니까. 나는 오해를 하니까.

이것을 이렇게 보면 됩니다. 현실의 감상자, 또는 현실에 대한 감상자는 없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현실에 대해서, 내가 현실을 하나의 대상으로 봐가지고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어요. 왜냐하면 내 자체가 어디 속에 일부로 포함되어 있습니까? 현실 속에 일부로 포함되어 있죠. 그렇잖아요? 그러면 내가 보는 현실은,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현실만큼은 남아있지만, 내가 이걸 더 안다고 해서, 더 순종한다고 해서, 더 복종한다고 해서, 내게 속한 현실이 달라질까요? 안 달라질까요? 전혀 달라지는 게 없어요.

이미 합격통지서가 온 이상,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짓을 해도, 너는 죄가 없어! 라는 그 상황이 달라질까요? 안 달라질까요? 안 달라지는 거예요. 안 달라지니까 우리에게 남은 것은 뭐냐 하면, 이미 우리의 신분은 확정적이고 이미 죄 없고, 이미 구원받았다는 이 사실과, 그리고 지금 내가 어리석고 모자라서 나는 구원받아야 돼! 그 사이만큼은 인식론에서, 아직까지 알지 못하는 미진한 것은 남아있죠. 그렇다고 신분이 달라지지는 않는 거예요. 이쪽 유대인들은 내가 모르면 내 신분은 위태롭게 돼요. 내 미래가 지옥 갈 정도로까지 아슬아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단지 우리가 모르는 것은, 어떤 점에서 내가 이미, 하나님이 어떤 것을 보고 내가 이미 구원의 합격통지서를 받았지? 아주 기쁜 마음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그것을 이제, 그 빈칸은 미흡한데, 그 미흡한대로 살아가면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더 알게 되는 겁니다. 고3의 예를 들게 되면, 고3애들이 수능을 치는데 우리는 이미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 그때 수능참고서들을, 수학정석이라든지, 정철종합영어를 본다 이 말이죠.

보는데, 보면 뭐 모르는 것이 많이 나오죠. 분명히 모르는데도 지금 주님께서는 백점이라고 했거든요. 분명히 나는 이걸 해석을 못하는데, “아이구, 니 해석을 왜 그리 잘해?” 이렇게 나왔으니까, 우리로서는 이미 합격은 받아놓았고, 도대체 뭐가 내 쪽에서, 하나님과 결정한 사항과 내가 생각한 것과 뭐가 틀어졌고, 뭐가 잘못되었기에, 주님께서는 내가 하는 행동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합격통지서를 보냈는가? 그 문제만 남아있죠.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예를 들어서 요한일서 3장 16절을 봅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도다” 마땅하죠. 그럼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는 옛날에 우리 쪽에서, 유대인이라면 옛날에 이 문제지가 왔다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뭐가 됩니까? 불합격이 되고. 목숨을 버리는 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 합격이 되는 거예요. 맞죠?

그런데 이미 메시아가 온 상태에서 우리가 규정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형제를 사랑한 사람이 돼버린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막 눈만 흘기고 형제에게 못되게 했는데. “이게 어데? 후배가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막 째려보고 있는데, 뒤에 주의 천사가 와서 툭툭 치면서 “자식! 참, 방금 재한테 뭐라고 했어?” “째려봤어요.” “ 잘했어! 니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거야. 니 수고했어! 잘했어!” 뭐야 이거? 막 눈으로 째려보고 이랬는데. ‘저거 죽어야 돼!’ 이랬는데. 이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랑이라고 통지서가 오네요. 이걸 한국에서는 젊은 애들이 한 글자로 이렇게 이야기해요. 헐~!!!

마태복음 25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5장을 한 번 봅시다. 오늘은 어제처럼 그렇게 흥분하지 않죠? 37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예,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제가 언제 이웃을 사랑했습니까? 제가 언제 주님을 사랑했습니까? 도무지 사랑한 적 없습니다. 아니 제가 솔직하게 주님을 위했다면 제가 주님을 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평생 동안 내 이익과 우리 가족, 밥 먹고 사는 것,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것, 나는 나 자신이 남한테 꿇리기 싫어하는 이 본성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그렇게 살아왔었습니다. 제가 언제 주님 앞에 헌신하고 순종하고 봉사했습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거 봐! 이거 봐! 말하는 것 좀 봐! 세상에 이렇게 겸손할 데가!” “제가 겸손이 아니라 언제 겸손했습니까?” “자식! 합격된 자의 모습을 보이는 것 좀 봐!” 이게 무슨 이야기에요? 도대체 주고받는 대화가 안 돼. 주고받는 대화가. “아니, 어딜 봐서 저를 구원하십니까?” “아이구, 이거 봐! 온유와 화평과 자비 봐!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지?” “물론 다 성령의 솜씨죠. 성령의 솜씨고 뭐고 간에 정말입니다. 진짭니데이~경상도 말로. 진짭니데이~ 제가 주님한테 한 게 없어요.” “세상에! 나는 너 같은 인간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보아라! 이 구원받은 자를 보아라!” 이래 나와요.

“저는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메시아가 와가지고, “주여! 메시아 언제 옵니까?” “벌써왔다.” “그러면 저는 합격입니까? 불합격입니까?” “합격!” “별로 수능준비를 못 했는데?” “괜찮아. 내가 대신 수능 다 치렀어. 합격!” 자, 왜 그렇게 하시는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뭐라고요? 헐~!!! 이 기이함~!!!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시고 재림이 있어요. 재림에는 모든 것이 온전함입니다. 온전함. 온전함인데, 예수님의 재림 때 온전함인데, 메시아로 오고 난 뒤에 이 사실은, 이 현실 세계에 뭘 주느냐 하면 깨어짐, 또는 분열, 파괴, 해체를 제공합니다. 그러면 어떤 것을 해체하고 파괴하느냐 하면, ‘열심히 순종해야지. 열심히 복종해야지.’ 라는 나의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그 인식을 주께서는 깨버립니다. 박살내버려요. ‘지금 내가 착실하고 있지. 내일은 더 내가 착실하게 순종해야지. 다음에는 착실하게 성경공부 해야지.’ 라는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깨어버리죠.

그러면 이거는 한 마디로 뭐냐 하면, 충돌입니다. 서로, 과거에서 현재로 가는 차와 이미 미래에 도착해놓고 거꾸로 다시 현재를 향하여 꽂아놓는 차와 정면으로 충돌될 때, 충돌될 때,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충돌을 통해서 여기서 깨어짐이 일어나고, 그거는 우리의 주체에 분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 분열, 또는 갈등, 이 갈등의 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깨어질 때 거기서 사랑이 나옵니다. 사랑이.

그래서 열심히 사랑하는 것은 사랑일까요? 사랑이 아닐까요? 사랑이 아니에요. 왜? 깨어짐의 기회가 없었고, 깨어지는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전부가 비-동질성을 갖춥니다. 깨어졌으니까 앞뒤가 다른 성질을 갖게 돼요. 다른 성질을. 비-동질성입니다. 나는 전에는, 과거에서 현재로 잘해보고자 했는데, 주님께서 이미 구원을 합격 지어놓고 우리에게 찾아온 주님께서는, “잘 할 것 없다.” 내가 이미 모든 것을 결정지었다는 예수님의 이름의 결정을, 나의 잘함보다, 나의 착실함보다 주님의 결정을 우선시한다면, ‘내가 잘 해야지’와 “주님 잘했습니다.” 라는 사이가 동질이 아니라 비-동질이 되죠.

그러면 여기서 균열이 일어나는 겁니다. 왜 균열이 일어나는지를 딱 깨보니까, 여러분 제약회사 선전하는 것 보면, 콘택600선전. 캡슐이 반으로 벌어지면서 여기서 뭐가 나옵니까? 콘택600 365가지의 알맹이가 나오는 것을 아시죠? 옛날에 나왔는데, 지금도 있는가 모르지만. 콘택600선전 있잖아요. 쏟아지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의 육신의 종교성과 주님의 구원의 확정성 사이에, 부딪치면서 나오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었다? 없었다? 사랑이 없었죠. 우리는 지옥 갈 사랑만 열심히 했을 뿐이죠. “형제여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이걸 가사를 바꿔야 돼요. “지옥 가는 사랑으로~♬” 이런 뜻이에요. 열심히 사랑해서 열심히 지옥가게 하는 그 현장이 바로 오늘날 교회입니다. “나만 배부르면 되느냐? 필리핀 애를 안다. 3만원만 내시면 50명의 애들이 하루를 굶지 않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지옥 갈 사랑입니다.

왜 그러느냐, 어제는 어제의 내가 오늘의 사랑을 알고, 나는 오늘도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애들을 알고, 내가 한국 땅에서 잘 먹고 사는 것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일부의 돈을 저축해서 유니세프 같은데 기부했다. 그러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한 나일까요? 동일하지 않은 나일까요? 동일한 ‘나’죠. 그럼 뭐가 없어요? 깨어짐이 없죠. 분열이 없죠. 해체가 없죠. 파괴가 없죠. 그거는 지금 수능시험치고 있는 지옥 갈 사람이에요. 불합격이에요. 지옥 갈 사람이에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사실이에요.

이 모든 것을 몰랐던 것은 뭐냐, 유대교적 사고방식으로 교회 다녔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나중에 심판 날에 나에게 어떤 이익이 올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인간의 발상을, 인간의 발상 자체가 이거는 현실을 모르는 것으로 묵살하시고, 유일하게 현실을 아는 것은 말씀의 현실밖에 없어요. 그 말씀은 이미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미 확정된 사실을 지상에 구체화해서 깔아놓은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 외에는 현실을 아는 사람이 없고, 그 현실을 유일하게 아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가 행하기 전에 먼저 합격통지서를 가지고, 메시아를 이미 지나서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재림도 온전한 것이 아니고, 이미 온전했음을 드러내고, 그전에 재림할 때까지는 이제는 이 온전한 것이 왔는데, 왜 온전하지 않는 것이 온전한 것을 시도하느냐? 그걸 죽어라 깨는 작업을, 바로 예수님 초림과 재림사이에 하시는 거예요. 그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요한계시록의 세계는 전부 다 파괴의 현장이고, 이 세상을 전부 다 불바다 만드는 그 순차적 작업의 기록이 뭐냐, 요한계시록입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이해되십니까? 이미 온전한데, 그 온전함을 주께서 자기백성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는, 그 온전함을,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해보자는 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주께서는 다 깨어버리는 거예요.

환난 받으라. 깨어져라. 니 동질성, 오늘도 동질성, 내일도 동질성, 그 똑같은 동질성을, 그런 동질성의 연속을 중간에 마중 나가서 깨버립니다. 깨버리면 다리가 끊어지고. 아까 톰과 제리 봤죠? 쭉 가다가 절벽을 넘어가 버리니까, 이게 공중인지 땅인지 구분도 못했다가, 아는 순간 으아악! 하고 빠지잖아요. 성령을 받는 순간 우리는 으아악! 하고 빠져야 돼요. 질문: “저기서 성령이나 사랑이 우리 스스로 어떤 식으로든 자각이 되거나 인식이 되는 형태로 포착이 되나요? 아니, 충돌되게 되면 자연적으로 자각이 됩니다. 이러한 충돌을 언급할 때,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에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보통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랑을 해야 된다고 알고 있죠? 여러분 다 알고 있죠?

그럼 제가 질문 해볼게요. 10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이렇게 되어 있죠. 이제 메시아 온 후에 이렇게 나타나요. 자, 그럼 질문입니다. 왜, 우리는 마귀의 자녀들을,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누가 한 번 답변해보세요. 왜, 우리는 가룟 유다를 동정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뭡니까?  대답: “소속이 다르니까.” 그러면 사랑 안함이 우리의 구원받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곤란해요. ‘내가 저 사람은 사랑해서는 안 돼. 저 사람은 내가 사랑해야 돼.’ 라고 결정하는 그것이 착함으로 이어져서, 착함으로 간주되어, 나의 착함으로 인하여 구원되는, 수능에 합격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그런 방식이 되니까, 그거는 주님의 방식, 찾아오는, 마중 나오는 방식은 아니에요.

왜, 마귀의 자녀들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까? 이걸 이천년 동안 신학자들이 풀어내지를 못했어요. 대답: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불교신자는 뭡니까? 대승적 지지를 갖고 있죠. 대자대비 하죠. 대자대비는, 죽었던 성철스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4월초파일에 법어를 발표 하는데, “사탄마저 사랑하자. 악마마저 사랑하자.” 그게 1980년대에 법어를 냈어요. 난리 났습니다. 성철스님의 그 진위는 바로 “전두환을 사랑하자.” 이 말이잖아요? 성철은, “불교를 지키기 위해서 뭐, 권력과 손잡아야지.” 이런 식이에요. 불교는 사탄마저 사랑하자고 이래 나와요.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는데 공로자인 가룟 유다를 왜 우리는 사랑하지 않아야 되는 이유에 대해서 어느 신학자도 답변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 답변하지 않은 질문을 제가 여러분에게 드린 거예요. 정답이 궁금해요? 궁금하면 오백 원. 에이, 언제적 개그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이웃을 사랑한다면, 자기가 일방적으로 마귀에 속한 사람은 사랑 않는다고, 자기가 일방적으로 선택할 수 없잖아요. 나중에 자기가 선택했는데, 형제일 수가 있고. 결국 취미가 같으면 하고. 심지어 못생긴 여자는 무조건 미워하고. 잘생긴 사람은 이유를 막론하고 사랑하고. 선교단체에 이쁜 여자만 찾아가서 전도하고 못생긴 여자는 전도하지도 않고. 그런 짝이 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마귀와 가룟 유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하지 않은 자의 특징이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동질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래요. 깨지기 싫다는 거예요. 나는 이대로 그냥 하나님을 만날래. 그러면 성도가 깨진다는 것은 뭐냐, 성도는 동질성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 성도는 존재에서 존재로, 또는 기능에서 기능으로 가면서 여기 뭐가 삽입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가 삽입됩니다. 십자가가. 예수님의 초림에서 이미 메시아가 왔을 때는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왔습니까? 깨어지는 모습으로 왔어요. 이 깨어지는 모습이 현실을 보는 핵심이 됩니다.  

그 핵심에 대해서 마귀의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속하지 않는 자들, 가룟 유다는 강력하게 그것을 거부해요. 그냥 살던 대로 살래. 메시아고 십자가고 싫어. 그냥 내 몸이 하던 대로 그냥 내버려둬. 다 귀찮아. 니나 잘 믿어라. 노쇠하신 부모님한테 오랜만에 전도한다고 하게 되면, 그 노쇠하신 부모님이 뭐라고 합니까? “니나 잘 믿어. 니나 잘 믿으면 혹시 니 빽으로 천당이나 가자.” 뭐 이런 식으로. “그래. 나 이제 늙어서 눈에 글자도 잘 안 들어와. 니나 교회 잘 다녀. 나는 하던 대로 절에 갈래. 귀찮아.” 이런 이야기 하죠. 그리고 또, 기존교회는 복음이 아니고 십자가가 복음이라고 하면, “그냥 나 하던 대로 할래. 옛날에 하던 대로 목사님 섬기고, 그냥 아침 일찍 은혜 받는 앞자리에 가서 앉아 묵상하면서, 너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새벽제단이나 쌓으면서 그렇게 살래.”

그럼 결국 동질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게 쌓이고 쌓이면 뭐가 돼요? 자기 의가 되겠죠. “나는 내가 하는 행세대로, 내 의를, 마일리지 쌓으면서, 날마다 마일리지나 쌓으면서 그렇게 살래.” 이게 바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을 다 그렇게 만들었어요. “조심하세요. 여러분 자칫하면 그동안 쌓았던 실적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인생을 조심, 조심하게 살아야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여러분, 조심스럽게 살면 구원받습니까? 조심스럽게 산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 관리거든요. 자기 관리, 자기 절제. 그 범위를 넓히면 자기 경영. 자기 인격 도야의 관한 서적들. 처세술에 관한 책들, 서적들. 인생이 행복하려면? 이런 책들. 대인관계에서 설득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느냐? 이런 것들. 대화의 친화력을 도모하려면 어떤 식으로 하느냐?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인격도야의 관한 그런 내용들이 설교에 섞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여러분, 자기 인격을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이걸 흔히 하는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자는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 그런 말들을 하죠.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지, 도대체 얼마나 견적을 내야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이런 것들이 납득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바라고 인식되는 것은, 결국에는 그 내면에 뭐가 있습니까? ‘깨어지기 싫어! 누가 나를 깨면 싫어! 나는 이대로 갈 거야! 얼마나 귀한 것인데? 얼마나 내가 보존하려고 애를 쓴 건데?’ 그런 거잖아요. 여러분들이 화초나, 난초에 물 줄 때 심정이 뭡니까? ‘고이고이 자라라! 애들아 내가 너희를 얼마나 공들여 키우는데. 새벽서리 맞아서 죽으면 안 돼!’ 얼마나 물주면서 속으로 대화 나눕니까? 하물며 자기가 키우는 화초한테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죠.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조심하죠. 그게 바로 왕만두 종류에 있는 왕바리새인 이라니까요. 왕만두, 뭐 왕갈비 종류.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에 대해서 미리, 사전에, 자기가 철저하게 수험생으로 준비하고 있는 그런 태도라는 말이죠. 한마디로 말해선 나는 중도에 파괴되기 싫어! 깨어지기 싫어! 그러니까 거기서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십자가라는 것이 빠지는 거예요. 십자가는 다른 말로 하면 거침돌이에요. 자빠져서 깨어지라고 준 것이 바로 그게 십자가입니다. 근데 일반교회에서 십자가라는 것은 자빠져가는 것이 아니고, 니가 십자가 잘 살펴서 괜찮다고 하거든 니가 받아들여라. 그런 십자가에요. 받아들이고, 죄 용서받고, 그리고 깨버리고. 그리고 본격적으로, 다이렉트로, 직접 하나님 아버지하고 맞상대해라. 그런 십자가거든요.

누구나 넘어지는 십자가가 안 넘어지려고 버티니까, 이거는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 있으면 이거는 피해가는 거예요. 결국 십자가 없는, 예수님이 훌륭하시다는 것은, 그건 받아들이지만, 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그 사실은 이야기 안 해주는 교회. 그건 바로 절이죠. 불교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열심히 자기 관리하세요.” 그건 불교에요.

그것은 성경을 뭐로 보느냐, 자기계발성, 자기를 더욱더 향상하고 발전하도록, 계발정도로 성경을 보는 겁니다. 그럼 자기계발성에다 십자가 집어넣어버리면, 어떻게 오해를 하겠습니까? ‘그래. 십자가는 자기를 비우는 거다. 나도 나를 비워야지. 내려놓고, 더 내려놓고, 더더더 내려놓고(3탄) 더더더더 내려놓고(4탄). 이거 억지 쓰자는 것도 아니고. 더 내려놓아야 해. 더 겸손해야지. 겸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빨 아파보세요. 겸손한지. 인간이 어떻게 겸손해져요? 예?

인간에게는 환경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조용할 때와 부산떨 때와, 두 종류 환경밖에 없죠. 조용하면 겸손해지고 시끄러우면 교만해지고. 그겁니다. 모든 동물은 다 그래요. 난처한 환경은 적응하려고 애쓰고. 포근한 환경은 누리고. 그게 짐승이고 인간입니다. 그건 생물학적 자연적인 본능이에요. 그 외에는 없어요. 성경 보면서 자기 계발서로 환호하고, 계발서로 활용하는 겁니다. 목사들이 그런 식으로 잘 해주니까. ‘오늘도 기도해서 겸손해져야지.’ 기도해서 겸손해서 천당 갔으면 제가...한 명도 없어요.

사도바울 같은 모든 사람은 깨어진 사람입니다. 와장창 다 깨어진 사람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에요. “주님이여, 저만 남았습니다.” “니만 남았어? 칠천 명 남았다. 행함이 아닌 은혜로 칠천 명 남았다. 니만 남았다고 하지 마! 니가 현실에 대한 감상자가 아니야. 니가 현실을 보는 것은, 니는 현실을 몰라. 그 안에 담겨있기 때문에 몰라.” 현실이라는 것은 내가 속해 있는 그것을 다 품으면서, 그 전체가 현실이기 때문에, 그 현실에서 인간은 아무리 두리번거려봐야 몰라요. 

따라서 현실 바깥에서 미리 쳐들어와야 됩니다. 우리가 가보지도 않은 세계, 미래의 세계에서 거꾸로 현실 속으로 방문하시고 찾아오신 그 분이 올 때, 우리는 참으로 무식했구나. 어떤 점이 무식했다? 열심히 자기 관리하고 열심히 자기 계발하면 구원받겠지. 하는 이것이, 결국은 나의 동질, 마귀적인 동질성을 붙잡고 사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인간들의 본성인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되죠.

자, 그러면 좀 더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이 깨짐 속에서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 깨어짐 속에서 사랑이 나온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방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존재가 깨어지면 거기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그 틈에서 뭐가 나오죠? 십자가 나온다고 했죠. 십자가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고, 본질이고, 본성입니다. 맞지요? 다 이루었다고 했으니까. “아버지여, 나 다 이루었습니다. 창세전에 약속한 대로 다 이루었습니다.” 이게 바로 속성과 본질입니다.

그럼 이 본질을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라고 했죠. 그럼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동질성은 깨트리는 힘으로 사랑이 들어온 겁니다. 그 예가 뭐냐, 12절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3장 12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성질 급한 제가 할게요.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었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라고 되어 있죠.

가인과 아벨의 배치는 가인을 본받자, 아벨을 본받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의도적으로 유발시켰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만 보면 돼요? 사랑을 어디서 찾습니까? 아벨에서 찾으면 안돼요. 가인에게서 찾으면 안 됩니다. 사랑을 어디서 찾는가? 가인과 아벨의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발견해야 돼요. 사랑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어디에서? 하나님의 숨겨진 본성과 본질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의 사랑과 합치된 사랑이 되겠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

그렇다면 그게 사랑이라면 요한일서 3장 16절이 비로소 해석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말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형제로 인하여 누구 목숨이 날아가요? 내 목숨이 깨지고, 파괴될 때, 이게 주의 뜻이라고 수긍될 때, 이것이 이미 합격된 자의 면면입니다. 합격된 자가 보여줄 하나님의 십자가의, 우리의 구원을 확정시킨 그 사랑의 진면목이, 그 사람으로 부터 당할 때, 그것이 우리 속에서 발산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3장 16절이 이게 정답이라면, 그럼 이걸 실제로 해봅시다. 이사를 왔는데, 이웃집에서 어떤 사람이 떠들었어요. 잠을 못자요. 애가 드럼을 친다나 해가지고, 두두두두두 팍~ 밤 열시에. 하여튼 열시부터 열두시까지 하는 모양이에요. 두두두두 두두두두 막 치는 거예요. 이쪽은 잠 못들죠. 그럼 우리는 이웃사랑을 하고 있어요? 안 하고 있어요? 드럼 소리에 우리 목숨 날아갔죠? 그게 바로 이웃사랑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경찰신고 해야 되겠죠. 그게 이웃사랑입니다. 그럼 경찰서에 그 사람들이 밤 열두시에 한다고 잡혀가겠죠. 그럼 우리는 박수를 쳐야 합니다. 이게 이웃사랑입니다. 따라서 이웃사랑이란 이미 구원받은 자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이웃사랑입니다. 내가 느낀 아픔이 곧 주님이 이 땅에서 느낀 아픔과 같은 성질의 아픔, 주님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반대 경우를 봅시다. 이쪽에서 두구두구두구 팡~ 쳤다. 성질 같으면 가서 이거 뭐야? 하고 싶더라도, 예수님이 아직 오지를 안했어요. 메시아가 아직 오지를 않았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건 주께서 주신 테스트, 이번 수능 25번 문제에요. 이쪽 집에서 드럼을 칠 때, 1번. 참는다. 2번. 신고한다. 어느 쪽이 주의 말씀을 닮느냐? 정답은 1번. 참는다. 그거 참아서 그 사람 지옥 갑니다. 그게 바로 지옥 가는 일이에요. 왜? 그걸 참으면 나의 마일리지가 쌓이겠죠? 그러면 주의 사랑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누구 사랑으로 구원받습니까?

그전부터 내가 참고, 참고, 더 쉽게 말해서 내려놓고, 내려놓고, 은장도 하나 들고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두구두구두구해도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누가 점점 더 거룩해져요? 내가 거룩해지죠. 그런 식으로 수년간 계속하게 되면 뭐가 깨지기 싫어요. 콘택600처럼 중간이 깨지기 싫은 거예요. 나의 이 고귀한 동질성, 수년 동안 교회 다니면서 그 업業을, 불교용어입니다. 쌓고 쌓은 그 업을, 난데없이 드럼 치는 청년 하나로 인해서, 한꺼번에 내 고귀한 내 경건성을 거기다가 다 깨트리는 바보 같은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주여, 저게 마귀의 시험이군요? 아, 이때 정답은 참아야 하느니라. 참자! 참자! 참자!

이게 바로 마귀에 속한 자고 하나님한테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주의 본질에 속하지 않은 사람, 십자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 자기 행동으로 자기가 스스로 구원의 합격 시도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마귀의 자식이에요. 마귀의 자식입니다. 아까 뭐 궁금해요? 오백 원 했는데, 해답 보니까 어떻습니까? 오백 원 가치가 되죠. 이거 알면 여러분의 오백 원은 아끼게 된 겁니다. 오백 원 아낀 거예요.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나는 진즉에 박살나고 깨어져야 할 인간이 그동안 내가 착하게 살면 혹시 나를 잘 봐줄까 하는, 이미 시험이 끝났는데, 메시아는 이미 지나갔어. 합격된 자에게 이미 통지서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그 행세, ‘착하게 살면 구원받겠지.’ 라는 그 행세에 대해서 정면으로 찾아와서, “그게 아니야! 이것들아!” 해가지고 박아버렸을 때, 그게 깨어졌을 때, ‘아하, 내가 주님의 사랑을 내 쪽에서 야금야금 갉아먹었구나. 내가 앞장서서 나의 착함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모독했구나.’ 이게 바로 마귀가 나를 가지고 놀던 전형적인 수작이었던 겁니다. 수작. 못된 짓이에요.

아벨은 순순히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일 때, “야, 형 온다. 피해라!” 그런 이야기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아벨아! 주의해라. 형 성질나서 지금 더럽데이. 아벨 피해! 피해! 뭐해?” 하고 알려줬습니까? 안 알려줬습니까? 하나님은 가만히 있었어요. 뒤에서 짱돌가지고 동생을 죽였습니다. 죽이고 난 뒤에 뒤늦게 와가지고, “가인아!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한다.” 이미 상황 끝났는데, 이미 상황 끝났잖아요.

요한복음 11장하고 어쩌면 똑같습니까? 시름시름 오빠가 아플 때, 마리아가 미리 전갈을 보냈습니다. “예수님 빨리 오세요. 남의 병이나 고치지 말고 사랑하는 우리 오빠 병을 고쳐주세요.” 맨날 한식집에 가서 밥 먹여주고 스테이크 집에서 다 구워주고, 이렇게 한 집이니까, 우리부터 우선순위, 0순위해서 고쳐달라고 했는데 안 와요. 죽고 난 뒤에 왜 오십니까? 죽고 난 뒤에?

그래서 이번 주일 설교에 오용익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리아는 예수님과 자기 관계를 자기 신앙을 북돋아 주는 분으로 오해했다는 거예요. 근데 실제로 오신 예수님은 돋아주기는커녕, 충동이에요. 박살내려 온 겁니다. 그것도 신앙이라고?? 그것도 신앙이야? 니 신앙 깨부수는 것이, 이게 진짜 앞으로 내가 십자가 질, 그 신앙이라는 이름의 죄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겠다. 내가 신앙했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하는 그 죄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을 거야. 오빠는 너를 위해서 죽었다.

그리고 오빠를 다시 한 번 불러내죠. 이 세상에서 고생하다가 이미 제대했는데, 이미 예비군 제대했는데, 이쪽 세계, 메시아 이후에 왔는데, 이제는 여동생 잘 만나가지고 군대에 또 오게 됐어요. 다시 이 세상에 오는 거예요. 오니까, 세상은 다시 예수님만 죽이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다시 살아난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세상에! 두 번 타는 것은 귀뚜라미 보일러가 두 번 타지. 귀뚜라미 보일러가 두 번 타는 것을 아십니까? 귀뚜라미 보일러 선전 보면 위로 한 번 타고 거꾸로 한 번 타고 두 번 탄다는 거예요. 나사로가 두 번 죽었습니다. 이런 팔자가!!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10-13 00:14 
20160920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5-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반대했잖아요. 그 반대의 증거가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러면 왜 반대했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사탄은 자기가 갖고 있는 그 자체에 몰입합니다. 내 것에 대해서 지적질 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잔소리하지 말라는 이런 식이죠. 그 자체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계속 연속적으로 동질성, 동질성, 동질성을 지속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동질성 유지자체가 뭘 거부하느냐 하면, 숨겨진 진짜 하나님의 모습을 거부하는, 하나님이 반대세력이 갖고 있는 본질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요한일서를 누가 요청했습니까?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사도요한은 우리에게 계속 제시하는 겁니다. 이게 현실이라고. 성경의 이야기가 현실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 말이죠. 아까 화장실에 가보니까 저기에 있는 간호사아주머니들이 딴따딴따~♬ 딴따딴따~♬ 이러며서 춤을 추더라 말이죠. 저게 현실이냐 말이죠? 저게 현실이냐?

이건 이런 뜻입니다. 한 번 적어볼게요. “죽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어딘가에 살아있다.” 이 문장의 뜻은 뭐냐 하면, 사람이 살다가 죽게 되게 되면, 죽은 자들끼리는 다 아는 어떤 한 장소에 모여 살고 있다. 이런 내용이잖아요. 이런 내용이. 이 내용이 이야기하는 것은 뭐겠습니까? 이 내용이 우리에게 추가적으로 어떤 내용을 더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까? 추가적으로 더 이야기하는 것이 없죠. 여기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처럼, 죽어서도 한 데 모여 산다. 추가적인 다른 의미가 없죠. 추가적인 의미가 없다는 말은, 그래서 어쩌라고?

이 문장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는 지금 안 나타나있죠. 사람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문장이, 이게 하나님의 뜻 맞지요? 라고 억지로 추인을 해달라는 거예요. 내가 아는 이것에 대해서, 우리가 편하게 생각하는 이것에 대해서, 아마 천국이 이런 나라이지요? 라고 인정해달라고 강요하는 셈이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는 어디에 살아있죠? 산다죠. 그런데 여러분, 살기 위해서 행동합니까? 살아있는 것이 행동이 나옵니까? 아니면 행동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걸까요?

살아있기 위해서 행동을 해버리면, 살아있다는 자체에서 어떤 추가적인 의미가 안 나와요.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면, 어제 이야기한, 존재에서 기능이 뽑아져 나온다면, 그 기능이 비로소 우리가 사는 목적과 이유가 되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뭘 하느냐 하면, 동화에 보면, 둘이 사랑했대요. 뭐 했대요. 아, 둘이 열심히 어떤 행동을 하는구나. 그래서 둘이 결혼했대요. 끝. 결혼하면 그거 사랑이잖아요. 사랑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종결지어버려요. 계속 어떤 행동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바로 사탄은, 악마는 모든 것을, 새로운 기능을, 인간이 행동하는 것을, 자기가 여기 영원히 있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사탄의 생각에 오늘날 우리 생각이 갇히고 말았는데.

성경 요한일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여기 어디 살아 있다가 아니라, 천국이 있다면 천국다운 행위를 계속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 천국 가는 사람이라면 천국 가는 사람끼리 계속 행위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본문을 쭉 보세요. 요한일서 3장 13절,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미워하는 행위죠. 14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우리가 형제를 뭐하므로? 사랑함으로. 행위가 나오죠. 그러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거주를 했다면, 그 거주 자체가 끝이 아니고, 거주한 행위를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거주를 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미 확정시킨 것은, 너를 구원한 것으로 끝이 아니라, 구원했으면 구원받은 사람답게 행위를 보여준다 이 말이에요. 이 이야기 들으니까, 기존교회에서 목사들이 하는 이야기하고 별반 다를 것이 없이 똑같이 들립니다. 헷갈립니다. 이런 생각이 들죠? 구원받았으면 티를 내야지? 이런 생각하고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을 행위로 보이라고 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의 본성이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고, 행함은 중간과정으로 다 집어넣어버리고, “이렇게 했더니만 이런 최종적인 결과에 도달했습니다.” 하고 그냥 사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마귀의 생각입니다. 어쨌든 살면 된다는 동질성을, 자체적인 동질성을 고집을 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아까 주님의 사랑을 이야기했는데, 10절을 다시 봅시다. 제가 방금 전 시간에 했던 취지가 나와요.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라고 되어 있죠. 이 말 그대로 하면 이쪽 영역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쪽 영역은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이쪽 영역은 어디에 속했다 할 수 있습니까? 마귀에게 속했죠. 그러면 끝났네. 끝났죠. 그럼 우리가 이렇게 사네, 산다, 존재한다, 이걸 자꾸 목표로 잡지 마라 말이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뽑아내기 위함입니까? 마귀에 속한 자는 마귀에 속한 일을 뽑아내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뽑아내는데, 그 행위가 예수님에 의해서 나타난 행위임을 드러내고, 이거는 사탄에 행위에 의해서 드러낸 행위임을 보고자 함입니다. 너 행복하게 살라는 목적이 아니라 니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 행위를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걸 원했다는 겁니다. 주님의 행위를.

그러니까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구원받았으면 뭐 볼 것 없다고 하지 말고, 구원받은 자가 어떤 행위를 보여주는가를 더 생각하라 이 말이죠. 구원받은 자가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걸 보여주라는 것이 지금 사도요한의 뜻이에요. 그러면 여기에 마귀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본문이 아주 재미있어요. 저 혼자 재미있는지 모르겠지만.

뭐냐 하면 여기 요한일서 3장 18절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여기 또 행위가 나오잖아요.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메시아가 지나간 이후에, 여기 와서 다시 이 세상이 온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뭐로 만드느냐 하면, 말과 혀로 사랑하는 집단으로, 그렇게 규정짓기 위한 행위를 니가 보인다면, 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속한 사람의 행동을 보이는 것이라는 겁니다.

한 번 예를 듭시다. 아까 아프리카 예를 들었는데, 어떤 이웃에 있는 같은 교인이 간이 아프다. 목사님께서, “여러분 권사님께서 간이 안 좋습니다. 간의 생체조직이 맞아야 수술해서 살 수 있는데, 혹시 누구하나 자진해서 간 떼 줄 사람 없습니까?” 라고 한다면, “뭐 늙은 사람이 대충해서 죽지, 뭐 할라고 살라고 하나?” 이런 사람도 있을 수도 있고, “아이고, 그 권사님 욕심도 많다. 다른 사람은 간을 원하지도 않는데, 왜 그리 살라고 급급 하느냐?” 이런 핑계를 대면서 자기가 간 떼 주지 않는 핑계를 정당화하겠죠.

그런데 20대 애가 간이 아프다. 이식을 원합니다. “아이구,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빨리 가라. 간 이식 원하지 말고.” 이렇게 할 수 도 있겠죠. 그런데 순진한 어떤 집사님이 “제가 드리겠나이다.” 아내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제가 간 떼어 주겠습니다.” 했을 때에, 그 부흥사님이 하는 말이 “이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아내한테 상의했습니까?” “아니요. 이건 주께서 시킨 것이기 때문에, 제가 간을 드리겠습니다.” 아내는 기겁을 하죠. 그 간이 지, 간이 아닌데 떼 준다고 하나?

자, 질문합니다. 그 간 떼 주는 것은 진실한 사랑일까요? 말과 혀로 한 사랑일까요? 문제 간단합니다. 진실할 사랑일까요? 말과 혀로 한 사랑일까요? 1초 2초 3초 4초 5초...계속 시간은 흘러갑니다. 빨리 답변해주세요. “말과 혀로 한 사랑입니다.” 그게 말과 혀로 한 사랑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이 말과 혀로 한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는 거예요. 하나님께 속한 자는 뭘 아느냐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잖아요. 그러면 사망도 알까요? 생명도 알까요? 둘 다 알아야죠.

따라서 사망이 뭔가를 우리의 몸을 가지고 여기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 이래서 지옥가야 되는구나를 마음껏 보여줘야 하잖아요. 보여주는데 그 보여주는 동기가 뭐냐 하면, 구원받은 성령이 와서 이걸 보여주는 겁니다. 성령이 와서 보여주게 되면, 어떤 청년이 간이 없다. 간을 떼 주기 위해서 손을 들면서 하는 말이, “이게 바로 말과 혀로 때우는 전형적인 그러한 거짓된 사랑입니다.” 라고 하면서 간을 떼 주는 거예요. 지금 무슨 말인지 혼동이 되는데, 이해되시겠습니까? 어떤 행위도 항상 우리는, 나는 생명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가 나오는 사람은 없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행위를 보여줘야 되지, 생명을 보여주는 행위는 인간에게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제 좀 머리 좋은 사람은 약간 감이 옵니까?

내가 간 떼 주는 이것이 얼마나 자부심이겠습니까?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의 본분이다. 아무도 안 할 때, 내가 할게. 이것이, 내가 그전에는 진실한, 형제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줄 알았더니만, 말씀에 비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이것이 전형적인 말과 혀로 때우는 가짜 사랑인 것을, 이미 구원 받고 난 뒤에, 아! 이렇게 간사하기 짝이 없는 위장적인 가짜 사랑이구나. 따라서 그 가짜 사랑을 행사해야 된다? 안 해야 된다? 이걸 행사해야 돼요.

헌금하는 것이 죄다. 같은 논리입니다. 헌금하는 것이 죄니까, 헌금 안 한다가 아니라, 헌금하면서, 보세요. 내가 이런 식으로 지옥 갔던 인간입니다. 에이, 묵으라!  이런 짓 하면서 지옥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죄를 누가 없애줬다? 십자가에서 주께서 이미 합격시켰습니다. 이제는 말한다. 이게 바로 죄인 것을! 헌금한 것이 죄고, 선교한 것이 죄고, 교회봉사 한 것이 죄고, 기도한 것이 죄인 것을! 이것이 영생 받은 사람이 보여 줄 행위입니다. 이게 바로 행위에요. 행위. 성경말씀 하나도 어렵지 않죠?

그래서 이 본문은 자기계발서가 아닙니다. 자기성화의 책이 아니라, 이것은 뭐냐 기이한 책이고, 우리가 요청하지 않은 내용만 담아서 우리에게 준 거예요. 우리가 요청하지 않았는데 이 내용을 주었을 때, 우리는 뭐로 오해하느냐 하면, 우리가 옛날부터 요청한 것처럼, 그러한 선입감을 여기다가 집어넣고, 집어넣은 견해를 도로 끄집어내면서, 이거는 주님의 해석이라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우길 수밖에 없어요.       

요한일서 3장 17절에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이렇게 되어 있죠. 자, 이 말씀을 우리가 지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 지킵니다. 아무리해도 못 지킵니다. 왜 못 지키느냐, 우리가 그 형제를 위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면서 못 지켜요. 도와주면서 왜 못 지키느냐, 도와주게 되면 마치 그것이, 도와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보여주는 행동인양 오해하게 돼요. 제가 지금 계속 꼬고 있는데, “목사님. 그만 꼬세요. 어지럽습니다.” 하겠는데.

마태복음 25장에서 뭐라고 했던가요? 소자가 뭐라고 했던가요? 제가 언제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까? “이 소자한테 한 것이, 이 형제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할 때에 그들의 의식을 했습니까? 못 했습니까? 전혀 의식을 못했어요. 그러면 오른편에 있던 양이 평소에 아무런 의식 없이 행동합니까? 무심코 좀비처럼 이렇게 행동합니까? 전부 다 생각해요. 이거는 형제사랑, 이거는 목마를 때 도와줘야지. 한시도 생각 없이 행동한 것이 없어요. 다 생각하고 행동해요. 전부 다. 염소도 마찬가지고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뭐다? 이거는 니가 저 사람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고 한, 그 해석은 누가 한 해석입니까? 미래에서 찾아간 주님의 해석이죠. 그러니까 현재에서 찾아간 해석과 미래에서 찾아온 해석이 이게 어떻게 됩니까? 정면으로 빠빵하고 충돌을 일으킬 때, 콘택600처럼 우리 자신의 행동이 깨어지면서, 그 틈 사이에서 뭐가 나온다고요? 진짜 하나님의 본질, 십자가가 나오죠. ‘나 같은 인간은 십자가가 없으면 벌써 지옥 갔었어.’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대해서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어부는 고기 잡는 기능을 한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죠. 어부라는 존재는 고기 잡는 기능을 보여준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가 삽입될 때는 존재에서 존재로 가는 것이 아니고 기능에서 기능으로 나와요. 고기 잡는 기능이 십자가가 투입되고 난 뒤에는 고기 잡는 기능이 아니고, 고기 잡는 그것이 십자가를 증거 하는 나의 존재행동이 아니라 주님의 행위고, 나는 그저 도구로 쓰일 뿐임을 알죠. 도구로.

그럼 내가 형제가 배고픈 것을 알고 도와주게 되면, 우리가 옛날식 같으면, “형제여, 배고프제? 내가 도와줍니다.” “아이고만, 안 도와줘도 되는데?” “요한일서 3장 17절에 보니까 형제를 위해서 가만히 있으면 용서치 않으리라, 해서 제가 도와줍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빠져버렸어요? 뭐가? 십자가가 빠져버렸죠. 십자가가 왜 빠졌습니까? 이게 뭐가 안 깨졌어요? 중간에 콘택600처럼, 중간이 부러지질 않았죠. 이게 부러져야 여기서 십자가가 나오잖아요. 십자가 행동이 나올 때 그게 영생이거든요.

십자가라는 것은 영생의 행동이 아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그 관계성이 십자가에서 나온 거죠. 이웃을 위해서 헌금하는 그러한 죄인을 십자가만이 그런 행위를 한, 자기 동질성 유지책을 주께서는 분질러서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죠. “아이고, 뭐 없는 돈을 주십니까?” “제가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십자가 전하러  왔습니다. 당신은 내가 돈 주니까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죠? 이거 다 나의 의로 돌아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오른손이 한 것은 왼손이 반드시 알게 마련이다. 그런 뜻이에요.

니가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리라는 말이 뭐냐, 니가 처음부터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스포트라이트를 양쪽에 두 개를 달고 다니고 있다. 이런 뜻이에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라는 말은, 간음은 타고났으니까 니가 고칠 생각하지 말라는 그런 뜻이에요. 맹세하지 말라는 것은, 니가 한 번도 맹세 안 하고 하루일과를 출발한 적이 있는가를 한 번 보라 이 말이죠. 맨날 목적을 이끄는 삶인데요. 뭐. 목적을 이끄는 삶이 맹세입니까? 맹세 아닙니까? 먹고 말거야! 치토스! 맨날 이런 식으로 살아왔잖아요. 이런 식으로. 내 자식 아이비리그에 들어가게 하고 말거야! 맹세하지 말라는데.

그래서 이게 참 기이하고 특이하잖아요. 주님의 십자가가 너무나 기이하고 특이하기 때문에, 그 어떤 세상지혜로도 그것을 알 사람이 없는데, 이미 구원받은 사람한테는 뒤돌아보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었고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 지혜를 감추어진 지혜. 누가 알았으리요. 성령 받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지혜를,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겁니다. 요한일서를 통해서.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우리는 계속 앞으로 가면서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을 주께서는 범람케 하는, 마치 이 세상이 홍수로 범람하듯이, 온 천지가 말과 혀로만 하는 그런 사랑으로 범람케 하실 거예요.

사랑함으로써 구원받고자 하는 그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인간들의 그 행동을 보세요. 그들의 소망은, 마귀의 속한 사람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소망은 “지속적인 발전” 다 지우고 이거만 “지속” 동질성, 또는 동일성의 지속만 소망할 뿐입니다. “하나님이여, 지금 이대로, 내년에도 지금 내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여기도 교회에서 그런 것 하는지 모르겠는데, 신년, 1월1일에 무슨 행사합니까? 행사해요. 설마, 돈 내고 성경 한 구절 뽑고 그런 짓은 안 하죠. 그건 한 때 지나간 노골적인, 그걸 가지고 보이스피싱 이라고 합니다. 있지도 않는 복을 돈 내고 받는.

신년 때 하는 설교 내용이 뭘까요? 할 일 없는 지속입니다. 동질성을 붙들고 사수하자! 나의 나 됨을 잃어버리지 말자! 왜냐하면 사람은 꿈이 있는데, 그 꿈을 놓치지 말자. 이 꿈속에서 깨어보면 그게 지금과 그 꿈 사이에는 지속으로 이어져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우리가, 쉽게 말해서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도와줬다. “그거 제가 한 거 아니에요.” 하면서 화내는 사람 있습니까? “제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나는 어제, 오늘 끊어져있어요.” 이런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거 제가 했습니다. 이거 말 안 할라고 했는데, 제가 했습니다.” 그거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행위죠. 그걸 말씀이 계속 유도하는 거예요.

이런 행위를 통해서, 이런 경우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행위와 관계없이 우리한테 일방적인 합격통지서를 내려버린, 그 주님의 숨어있는 본질을 다시 한 번 감사하는 거예요. 자, 그 다음에 15절을 봅시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것이 무슨 자다? 살인자고. 살인자는 영생이 없는 자다.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여러분, 겁나는 겁니까? 아니면 즐겁습니까? 형제라는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었죠. 하나님께서 형제간으로 만들었잖아요. 가인과 아벨이 모든 하나님의 현실 속에서 이야기하는, 형제의 모델, 형제의 원형이 가인과 아벨이에요. 형제라고 하는 것은 니가 나를 사랑하냐, 미워하냐, 그런 뜻이 아니고, 그 형제 됨의 관계에 대해서 니가 어떤 식으로 거기에 개입되어 있느냐, 그걸 보고자 하는 겁니다.

말로 하면 참 어려운데요. 가인과 아벨 사이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형제의 원형, 형제의 모델을 만들었죠. 형제인데 나중에 어떻게 됐습니까? 한 사람은 맞아 죽었죠. 맞아 죽었다는 이 전체가 형제의 개념에 포함돼요. 십자가 형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제자들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내 친구라고 했죠. 나중에 로마서 8장에 보면, 내 사랑하는 맏아들이 되죠. 형제가 돼요. 이 말은 형제라는 이 관계가 주어질 때까지는 형제가 없습니다. 형제가 없고 내가 선택한 자들, 내가 혈통으로 태어난 자들을 그냥 형제라고 쳐주는 것이지,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된 형제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관계를 없는데서 발생시켜야 비로소 형제라는 것이 발생되거든요.

그런데 형제라는 것은 이 둘 사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두 사람 만들어놓고 그 관계까지 포함해야 이 형제 개념에 합당합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미워한다면, 가인이 아벨을 미워한 게 되잖아요. 결국은 이 미움을 미움 되게 들추어내기 위해서, 주께서는 그 들추어내는 작업으로, 없는데서 뭘 집어넣느냐 하면 형제라는 개념을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졸지에 우리는 나타난 형제 때문에, 나타난 사람으로 인하여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미워할 수밖에 없죠.

이 땅에 형제라는 사람은 없어요. 형제 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때그때마다 우리 속에 담겨있는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형편 따라 형제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유발해버려요. 그러니까, 자 한 번 물어봅시다. 되게 나는 형을 좋아한다. 어떤 때는 미워한다. 다시 좋아한다. 미운 관계입니까? 좋아하는 관계입니까? 종잡을 수 없죠. 미워했다가 좋아했다가, 좋아했다가 미워했다가. 그럼 백번 좋아했는데 한 번 미워했다. 어떻게 살인자가 되는 겁니까? 그러면 천백번 좋아했는데, 천백일번 째 미워했다. 그럼 살인한 자가 되죠? 미워했으니까?

형제를 미워 안 한다고 하지만, 지금 형제를 미워 안 하지만, 또 무슨 일이 벌어지면, 형제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게 되면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어제까지 내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다가, 그 다음날 갑자기 뭐가 됩니까? 마귀에 속한 자가 돼버려요. 그럼 이 말씀을 주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미 너는 구원받았다는 거예요. 구원받았기 때문에, 니가 어떠한 죄에서 구원받았는가를 한 번 생각해보라는 거예요.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는 말씀을.

제가 이야기한 이 말이 제가 말 해놓고도 참, 너무 어렵게 이야기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심에 가책이 들어서 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의 죄는 가인 죄 속의 일부에요. 우리가 죄라고 여겼는데 실제로 성경말씀 보니까, 우리의 죄가 사실 큰 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죄에서 자비를 베풀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가 생각한 자비보다 그 자비가 과잉자비에요. 과잉자비. 우리가 생각한 용서보다도 더 넘치는 용서로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는 세상을 다 안 살아봤으니까. 전부 안 살았으니까, 항상 내가 아는 죄와 내가 아는 자비와 자꾸 연결시켜서 용서받았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우리가 지은 죄보다 더 큰 죄에요.

그게 뭐냐, 이 성경말씀을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 저에게 형이 있습니다. 지금 형을 15년째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16년째 한 번 보자.” “15년째로 마감하면 안 됩니까?” “아니, 마감하면 안 돼!” 그럼 16년째 아버지 유산 때문에 싸웠다면, 15년째 사랑한 것은 완전히 물로 돌아가 버리고 소용없어요. 한 순간에 “형님이 그러면 안 되죠?” 하니까, “어어? 이게 뭐야? 이게?” 그것도 노골적으로 형님한테 한 것이 아니고, 그것도 돌아서서. “형님이 저러시면 안 되는데?” “어어? 이게 뭐야? 이게?” 이게 뭡니까? 형제를 미워했죠. 그럼 졸지에 뭡니까? 살인자죠.

그럼 원천적으로 소속이 앞으로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15년 동안 사랑했어도 원천은 비로소 도출됐다고 봐야죠. 처음부터 나는 마귀에 속했기 때문에, 16년째 그것도 유산문제 때문에, 그것도 노골적으로, “형! 아버지 앞에서 이러시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아니고, ‘형이 그러시면 안 되는데?’ 이렇게 마음속으로 미워한 것 때문에, 졸지에 16년 했던 사랑이,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그 책임을 어떻게 할 거예요? 이 문제를 기존교회 목사한테 물어보세요. 방금 한 이 문제. 15년째 착한 형제인데. 한 순간에 잠시, 그것도 오래간 것도 아니에요. 잠시 한 5초 동안에. 5초도 너무 길면 2초로 줄이세요. 2초 동안에 미워했을 때, 원천적으로 그 사람은 마귀에 속한 사람입니까? 라고 물어보세요.

성경 본문 그건데? 아무리 봐도 그 본문 밖에 안 나오는데? 형제를 미워하는 순간 그때부터 마귀에 속했다는 말이 아니고, 형제를 미워하는 순간 처음부터 니는 마귀에 속했다는 티를 냈다는 식으로, 성경 요한일서 3장이 나왔잖아요. 제가 지금 거짓말 하는 겁니까? 맞죠? 지금 너의 근본이 뭐냐를 묻는 거예요. 형제를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니 바탕 자체가 처음부터 니는 어디에 속했다? 마귀에 속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목이 쉬어도 할 수 없다.

바닥문제에요. 바닥문제. 똑바로 해! 그 문제가 아니고. 바닥문제라니까요. 바닥이 그거니까 행함이 15년째 하다가 16년 어느 날 9월 21일 오후 2시 45분에서 45분 2초까지 미워한 것이 드러난 거예요. 세상에! 그걸 누가 지킵니까? 누가 지켜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속한 자는, ‘야! 참, 내가 죄인 맞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맞다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형제사랑? 아이구, 우리 둘 사이 얼마나 좋다고? 이런 것은 뭐냐 하면 큰 자비의 의미를 몰라요. 모든 게 바로 주님 말씀 앞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게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구원의 합격통지서 가슴에 붙이세요. 유치부 애들이 손수건 달듯이. 합격통지서를 가슴에 떡하고 다세요.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갈 때 뭘 달은 줄 알아요? 이스라엘의 표징인 별을, 다윗이 별을 표시하듯이, 그 별을 달고 가듯이 하나님의 인을 팍 찍어버리세요. 인은 빼도 박도 못해요. 노예나 말 뒤축이나, 동물들에게 내가 주인이라고 표시할 때, 완전히 찢어서 박잖아요. 주의 구원의 성령으로 아예 인을 박아버리세요. 박아놓고 난 뒤에, ‘도대체 무슨 큰 자비가 필요해? 이같이 착한 사람한테?’ 하고 성경을 보니까 ‘아차! 모든 게 내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이것이 악마에 속한 짓거리를 그동안 해왔구나!’ 하는 태도를 나타낸다면, 그게 영생에 속한 행위가 된다. 이 말입니다.

자, 22절 봅시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에요. 계명이 몇 개입니까? 요한일서의 계명이 몇 개입니까? 달랑 한 개에요. 한 개의 계명은 뭐다 했습니까? 사랑. 사랑은 어디서 나온다? 사랑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뭘 쑤셔요? 나의 동질성을 콘택600으로 깨트릴 때, 그 틈 사이에서 뭐가 나옵니까? 사랑이 나오죠. 틈새에서.

동질성은 마귀에 속했는데, 동질성을 깨트려버리니까. “목사님. 동질성을 왜 자꾸 깨트린다, 깨트린다 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게 깨어졌거든요. 깨어짐. 누구에 의해서 깨어졌어요? 예수님은 반대로 누구한테 깨어졌어요? 주께서 인간한테 깨어져서 거기서 뭐가 나왔습니까? 내 살과 내 피가 나왔죠.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누구든지 내 살을 먹지 않고, 내 피를 마시지 않고는 뭐가 없다? 영생이 없다. 예수님 몸 자체가 영생을 담고 있는 콘택600이에요. 안에 들어있어요.

누가 깹니까? 인간이 와서 깨트리죠. 인간이 깨트리니까, 인간과 예수님 사이는 서로가 서로를 깨트리는 관계죠. 주님이 왔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우리를 곱게 간직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우리를 파괴하고, 해체하고, 분열하고, 그 동질성을 깨트리기 위해서 온 거예요. 그걸 깨트리면서 이미 구원되었음이 우리한테 확하고, 박하사탕처럼, 핀란드 자일리톨 껌처럼 확하고 이게 퍼지죠. 그게 뭐냐, 계명이 온 몸에 확 퍼지는 거예요.

“주의 사랑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 자체가 기도응답이고.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행위가, 모든 기도가, 결국 목적이 뭡니까? 십자가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더욱더 알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3장을 한 번 봅시다. 너무 잘 들으시니까 제가 목이 가는 것도 아깝지 않아요. 에베소서 3장에 기도가 나오는데, 제발 이 기도를 표준기도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한 기도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니 주체를 이제 그리스도로 바꾸라는 말이에요. 기도제목이.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절,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충만하다는 것을 제가 방금 무슨 용어로 했습니까? 그 충만함을 뭐라고 했습니까? 과잉. 안 해주셔도 되는데? 과잉이에요. 과잉입니다.

오래간만에 아들이 공부하고 집에 오게 되면, “야야! 니가 몸이 부실하구나? 내가 삼계탕 했다. 자 닭다리 뜯어 먹어라.” “아이구, 어머님. 고맙습니다.” 하고 한 두 번은 그래요. “야야! 이것도 먹어야지?” “제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야야! 이것도 먹어라! 아빠 안 먹는단다.” 남편이 먹고 있는 것을 뺏어가지고. “여보! 그거 내 건데?” “당신은 많이 먹잖아? 야가 지금 몸이 부실한 것 봤나? 당신은 야한테 신경이나 썼나?” 하면서 갑자기 삼계탕도 빼앗기고, 일주일 전 집에 늦게 온 이야기까지 다 해요. “당신의 행동은 하여튼 도움이 안 돼.” 갑자기 삼계탕 뺏긴 것도 억울한데, 이미 잊고 있었던 일까지 끄집어내서 잔소리하고.

이게 뭐냐, 오버한 것, 과잉이죠. 우리는 이 땅에서 재미나게 살다가 천국 갔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주께서는 과잉으로 오는 거예요. “아이구, 야야! 이번에 니가 TV를 새로 바꿔달라고 얼마나 기도했으면 이렇게 응답받아서 다 바꾸게 됐나?” TV응답한 적 없어요. TV는 돈만 있으면 사면 돼요. 또 주의 응답받아 주신 걸로 쳐줘가지고 또 과잉사랑을 주는 거예요. 과잉사랑을. “아이구, 자식을 이렇게 잘 키웠다니?” 지금 자식이 마약해서 해롱해롱하고 있는데. “아이구 자식을 이렇게 잘 키웠나?”

모든 게, 나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사랑 아님이 없음을 깨닫게 하는, 그래서 감사로 이어지는, 범사에 감사로 이어지는 과잉적인 사랑. 그게 뭐냐,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 그걸 항상 알기를 원하노라. 이게 누구의 기도라고요? 사도바울이 교회를 위해서 하는 표준기도입니다. 오직 사랑에서 사랑으로. 다른 말로 하면 오직 깨어지고, 깨어지고, 또 깨어지고, 사업으로 말하면, 부도나고, 부도나고, 또 부도나고. 부부로 말하면,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고. 어제는 사랑하라고 해놓고, 오늘은 또 싸우라고 하고. 싸움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싸우지 미워하면 싸우지도 않아요.

주님의 계명이 우선이고, 우리는 나중이에요. 말씀의 현세상이 현실이고, 우리는 그 현실을 위해서 복무하고, 봉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엉터리 몸으로, 이미 주의 사랑이 앞서서, 톰과 제리처럼, 너무 빨리 내 뺀 주님의 그 합격통지서가, 너무 일찍 과잉으로 우리에게 들이닥치니까, 우리가 물 마시는 이것도 구원받는데 도움이 돼요. 모든 행동이 다 엮어서 연결되어 가지고 또 도움 받는 겁니다. 그게 사랑의 세계에요.

그럼 이 사랑의 세계가 어떻게 한 그림으로 형성될 수 있느냐?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이 그림을 그리면 어떤 분은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라고 생각될 거예요. 그리고 한국에 있는 사람은 이 그림이 상당히 생소할 겁니다.             

누워있는 고운 강아지풀처럼 있고, 여기 소나무인지 뭔지 나무가 있고요. 여기 뭔가 숲이 깎여져 있고, 이게 무슨 산이냐 하면 설퓨릭 마운틴, 황산으로 된 황산의 산이에요. 여기 케이블카가 있어요. 케이블카에 뭐가 달렸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그런데 현재 로키산맥에 있는 황산 산의 케이블카는 산 위에서 해주고 밑에서 내려버려요. 내려버리는데, 이미 구원 안에 있는 사람은 내리지를 않습니다. 안 내리고 다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고, 이렇게 합니다. 내려오면서 뭘 보여주느냐 하면, 바로 요한일서 3장을 계속 보여주는 겁니다. 20대에, 30대, 40대, 50대...계속 죽을 때까지. 계속 보여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방금 뭐라고 했어요? 보여주는 거예요. 왜 제가 케이블카를 예를 들었느냐 하면, 케이블카에 앉아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한 적도 없어요. 가만히 앉아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말씀의 표현형이에요. 이 자체가. 우리가 행동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갈증 나서 물 마시는 것도 보니까, 어디에 해당되는가 하면 바로 주의 계명에 해당돼요. 또 사랑을 행했네. 미치겠어. 또 사랑을 행했어. 우리는 케이블카에 앉았을 뿐인데. 표현형이라고 하는 것은 주께서 이 사랑의 세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누구한테?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얼레리꼴레리~ 너희들은 미래를 몰랐지? 라고 지금 뽐내고 있는 거예요. 누굴 통해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오직 자기 이익만 챙기는, 성경말씀에 관심 하나도 없어요. 그저 이 땅에서 성공만 하고, 이 세상에서 자랑거리고 되고 싶은 그런 인간들을 어디다 집어넣는다? 전부 다 케이블카에 다 집어넣어가지고 내려오면서, 이런 인간도 계명 다 지켰고, 저런 인간도 계명 다 지켰고, 이런 인간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이런 인간도 뭐든지 하나님께 감사한 기도를 드리고, 이런 식으로 쭉 가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표현형이니까. 이게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걸 가지고 요한일서 4장에 보면 바로 이게 영이라는 거예요. 영의 세계에요. 성령이 너의 행함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겁니다. 성령한테 니가 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13절,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우리가 어디 안에 거한다? 이 산이 황산 산이 아니고 성령의 산이에요. 성령의 산에, 우리는 케이블카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갇혀있어서 뭘 보여줘요? 성령이 보여주는, 이미 합격시킨, 이미 구원 이후에, 메시아가 오신 이후에 있는 낯선 상황을, 톰과 제리가 공중에 붕 뜨는 기이한 상황을,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는데 천국에 붕 떠서 살아가는 그 기이한 상황을, 다시 도로 이 세상에 있는 우리 몸으로, 그냥 성령으로 미리 앞당겨서 주셔서 그 안에 놓여있는 사람으로 살도록, 성령께서 사랑으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3장에 나오는 내용은 뭡니까?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게 만드시는 거예요. 22절,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을 그에게 받나니” 우리가 받죠. 그럼 우리가 현재 누리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으로부터 전부 다 받은 거예요. 기도한 것도 없는데? 그러나 기도했다고 쳐요. 왜 그러냐 하면,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기도를 한다고 할 때, 처음부터 기도한다고 하면 설거지하다가, ‘아차, 기도시간이지. 기도해야지.’ 일단 앞치마를 풉니다. 앞치마를 풀어서 놓고, TV는 끄고, 애들한테, “엄마 기도한다. 옆방에서 조용히 해라.” 오늘은 관절염이 있으니까 꿇어앉기보다 편하게 앉아서 기도를 해야겠다. 여러 가지 선택을 하죠. 손을 이래 모을까? 아니면 편하게 할까? 또 하기 전에 시계를 보고 남편 퇴근할 시간 됐으니까 한 6분 동안 해야지. 선택을 하게 되죠. 그래서 문 닫고 꿇어앉고 손 모으고 하는 7분 동안의 그 시간을 우리는 기도한 시간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게.

그럼 그 기도는 누가 정한 거예요? 내가 정한 거죠. 그거는 기도 아닙니다. 오늘 본분을 보세요. 요한일서 3장 22절,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그러니까 앞치마 풀 필요 없죠. 오늘 순두부 하는데 남편이 빨리 와가지고 맛있게 한 순두부를 먹었으면 좋겠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것은 주께서 다 이루어 주리라. 앞치마 풀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의 편지 보면 기도를 어떻게 하라고 했어요? 무시로 기도하라고 했죠. 무시로 라는 것이 뭐냐 하면 시간이 없는 거예요. 무시로~♬ 무시로~♬ 시도 때도 없이 기도하는 거예요. 시간 재서 하는 것이 아니고 시도 때도 없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의 성도의 행함은 뭐냐 하면, 이 메시아 이후잖아요. 메시아 이후. 메시아 이후가 될 때는 이게 무슨 시간이냐 되냐면, 시간의 종말이 돼요. 시간의 종말이, 현재 시간, 여기에 들어와 버리면, 여기서 뭐가 만들어지느냐 하면, 이게 만들어져요. 종말의 때가 만들어집니다. 지금 말장난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시간의 종말이라는 것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세상 끝이에요. 유대인 말이 맞아요.

메시아가 오게 되면 더 이상 시간의 끝입니다. 무엇의 끝이다? 시간의 종말입니다. 시간의 종말인데, 성령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찾아와버리면, 우리는 이미 이만큼 와 있는데, 여기에 이 취지를 알리기 위해서, 이 시대에 옛 생각이 있으니까, 여기에 들어와 버리면, 거기서 뭐냐 하면 더 이상 시간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기도한다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시간이 있으면서도 뭘 느끼느냐 하면 종말을 느끼는, 종말을 체험하는 순간을 갖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하면 이 책을 어디서 내가 샀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 책을 구입하도록 이미 종말론적으로 작용했지요. 이게 우리가 믿어지는 겁니다. 모든 게. 오늘 순두부 맛이 좋았는데, 순두부 내가 맛있게 해야지 하면 과거에서 현재로 가잖아요. 그게 아니고, “주께서 이미 맛있게 하도록, 저에게 손을 놀리고 입맛 돌도록 했지요? 내가 다 알았다니까.” 이런 식으로.

이미 시간 끝부분에, 종말의 때를, 시간이 흐르는 이 시간 속에서 종말을 수시로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럴 때 그 종말이 뭐냐, 다 이룬 거예요. 종말이기 때문에. 시간의 종말 때 다 이루어진 것이 앞당겨서 온 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선취라고 합니다. 선취. 미리 취한다. 이걸 성경적 용어로는 뭐냐, 성령의 보증이다. 성령의 보증. 사도바울의 용어입니다. 정말 어려운 용어에요. 성령의 보증이라는 것은 미래에 만나야 될 그 분을 앞당겨서 미리 만난다는 그 뜻입니다.

끝으로 이 한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형이 군에 갔을 때에, 우리 외갓집 친척 가운데 보안대가 있었어요. 보안대. 군에 안 가신 여자 분들은 보안대가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군에 간 남자 분들은 보안대가 얼마나 센지 아시죠? 훈련받고 난 뒤에 후방으로 빠져야 하는데, 빽 안 쓰면 후방으로 안 빠져요. 빽 안 쓴 인간들은 전부 다 전방으로 가서 어떻게 된지도 몰라요.

그런데 우리 외가 친척이 보안대 하사가 아니고 중사에요. 중사가 와가지고, 대구에 있는 54사단 있습니다. 와서 형을 만나요. “니가 근수가?” “예. 충성!” “나, 니 외사촌 형이야.” “아, 예. 형님이십니까?” “내가 니를 마산통합병원으로 빼줄게.” 자, 우리 형이 마산통합병원으로 갔을까요? 안 갔을까요? 갔어요.

마산통합병원에 가게 하신 그 형님이, 지금 훈련 끝날 쯤 되어 미리 앞당겨서, 두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선취. 확실한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보증. “야야! 이거 초코파이 하나 먹으라. 내가 보안대야. 보안대. 걱정하지 마! 나한테 다 벌벌 떨어.” 왜냐하면 보안대가 장교들 비리 캐서 퇴직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에, “아이구, 보안대!” 이래 하거든요. “이근수 불러와! 몇 번째야?” “윈래 카투사로 몇 명 빠지고 그 다음에 마산통합병원인데요.” “마산통합병원에 이근수 집어넣어!” 공작 다 했어요.

요거 성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도된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그래서 성도된 거예요. “초코파이 하나 먹어라. 괜찮아.” 그럼 그 초코파이는 뭐냐, 훈련받은 대가가 아니고, 보안대 형님 덕분에 먹었다면, 여러분 앞에 귤은 누구 덕분에 먹습니까? 마트에서 산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주신 귤입니다. 마치겠습니다.
 이미아(IP:122.♡.165.245) 16-10-13 00:14 
20160921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6-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요한일서 3장 24절 보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이렇게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이라는 것을 한 번 빼봅시다. 성령이라는 것을 빼고 읽으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안다. 앞에 뭐가 빠졌습니까? 성령이 빠졌죠.

그렇다면 성령을 빼고 이야기하니까, 주님 저기 계시고 우리는 여기 있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우리가 성심성의껏 지킴으로써 우리는 주 안에 거하게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거는 무슨 관계냐 하면 너와 나의 관계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 너, 예수님. 그 다음에 나, 우리. self. 주체. 너(예수님)에게서 계명이 주어지게 되면, 나는 계명을 받아서 지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어떤 혜택이 주어지게 되느냐, 나는 주님의 나라, 너(예수님)의 나라에 함께 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자,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주님 안에 거하면 이것으로 우리는 스스로 구원에 충족되는 공식같이 느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거부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구원이 되는 공식을 주님께서는 제시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보니까 나에게 문제가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상대할 때에, 평소에 우리는 예수님만 상대한 것이 아니고, 이건 너에 해당되는, 나 외에 사람들, 나 외에 사람들을 뭐라고 합니까? 이렇게 하죠. 너, 그것, 이렇게 하죠. 2인칭, 3인칭.

평소에 우리는 나 말고 너라고 지칭되는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 내가 여기 있으면 부모, 학교선생님, 또는 교회 목사님, 또는 집안 어른, 회사 사장님, 이웃주민들, 아줌마, 국가 대통령... 전부 모든 것이, 나는 여기 있으면 그 주위에 자동적으로 성립되는 것이 너라는 것과 교류가 있겠죠. 나는 그 사람 어떻게 본다. 나는 그 영화배우 누굴 어떻게 본다. 있다면, 뭐 그 교류를 어디다가 적용시키느냐 하면, 예수님도 나 외에 사람이니까, 예수님 대할 때에 평소에 내가 남 대하듯이, 그렇게 동일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우리가 갖고 있습니다. 한계를.

마치 절에 다니는 사람이 부처섬길 때에,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 섬기듯이, 부처님한테도 그렇게 섬기는 것을 우리가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이. 뭐 그리고 예수님 섬길 때도 성심성의껏, 평소에 내가 섬기는 대로 그렇게 섬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한테 자연스럽고. “여러분, 하나님 섬기세요.” 그리고 목사님들도 “하나님 섬기세요.” 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섬기세요? 섬김? 그 섬김이 뭐지? 아, 내가 평소에 우리 조상 섬기고, 나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섬기듯이, 예수님도 그렇게 섬기면 되는구나. 그럼 뭐 어려운 것이 없네.’ 라고 그렇게 우리가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있겠죠.

그런데 거기에 대한 보상이 뭐냐 하면 주 안에 거한다고 하니까, ‘야, 평소에 우리가 남한테 잘해주듯이 예수님한테 잘해주게 되면 나한테 어떤 혜택이 주어지는가? 주 안에, 천국에 영원히 거하는 혜택이 주어졌구나.’ 이거는 굉장히, 간단하게 교회 다니고 하는 문제하고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3장 24절에서 여기다가 사도요한은,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뭘 집어넣었습니까? 갑자기 여기다가 뭘 집어넣어요? 성령을 집어넣죠.

자, 성령을 집어넣으면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성령을 고려하지 않고 주님을 정성껏 섬긴다는 것은, 이거는 백퍼센트 지옥 가는 공식이 되죠. 성령이 왔다는 것은, 성령 없이 우리가 평소에 하던 대로 한다면 주 안에 거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 안에 거할 수가 없다. 그런 뜻이에요. 인간이 평소에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그렇게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니가 예수를 몰라도 한참 모르고, 완전히 다른 예수라는 겁니다.

왜? 주님은 성령을 보내신 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성령을 보냈는데, 받는 사람이 성령을 고려하지 않고, 하던 대로 열심히 정성을 다해서 섬기겠다는 것은, 그건 주님의 만남과 성사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요한일서에서 뭐가 중요해졌어요? 성령이 오시는 이유, 개입해야 될 그 필요성, 성령이 없이는 구원이 안 된다는 이 당혹감과 절대 절명의 위기를 우리는 다시 한 번 느낄 수밖에 없어요.

만약에 요한일서를 사람들이 의견내서 쓴다면 성령을 뺄 겁니다. 근데 요한일서는 하나님에게서 온 편지이기 때문에, 그 안에 성령을 집어넣었으니까, 이제는 성령마저 누군지를 알지 아니하면 구원은 묘연한 겁니다. 이제 없는 겁니다. 필수요건이 되었어요. 차라리 인간보다도, 나보다도, 성령이 구원을 주도하는 처지와 입장에 있는 겁니다. 그럼 성령이 뭔지를 먼저 아셔야 되겠죠. 성령은 지난 시간에, 어렵다는 지난 시간에 제가 했습니다.

여기 사람들이 있으면,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죠. 여기 선까지가 기다림인데, 메시아가 와버리면 더 이상 기다림은 없는 겁니다. 메시아가 오면 모든 것이 결정 되는데, 메시아가 오고 난 후에도 결정 되지 않았어요. 메시아가 오고 난 뒤에 계속 일이 진행됩니다. 마지막 재림할 때까지. 여기 이미 너희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이미 지나가버린 거예요.

인간들에게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구원을 완료시켜놓고, 완료되었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 겁니다. 통보하기 위해서. 성령은 인간들이 구원을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전혀 구원과 상관없다는 것을. 구원이 끝나고 그 이후의 시점에서 도로 이곳에 오셔가지고, 우리한테 통보하는 기능을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주님을 열심히 섬겨야지, 주님한테 순종해야지, 이 모든 것이 결코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통보해주죠.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순종해도 안 되고, 계명 지켜도 안 되고, 기도해도 안 되고, 헌금해도 구원이 안 되고, 교회 다녀도 안 되고, 안 다녀도 안 되고, 십일조 해도 안 되고, 안 해도 안 되고. 어차피 구원은 우리 행위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방인들이 성령세례 받을 때, 그 자체가 의인이 돼버린 겁니다. 이게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오는 이야기인데, 워낙 교회에서 모르기 때문에, 그다지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게 되죠.

그러면 이 성령은 누가 보내주는가 보니까, 성령은 예수님이 보냈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일 다 끝나고, 마무리 짓고, 도로 오신 거예요. 제가 글을 한 번 써보겠습니다. 주님은 죽으실 때 십자가에서 약하게 죽었다는 것을 제가 어디에선가 했죠. 무능하게 가셔서 유능하게 다시 오셨다. 이것이 성령의 오심의 취지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죽었다고요? 사람들한테 밀려서 무능하게 죽었죠. 예수님 죽고 난 뒤에 아무도 없었어요. 죽었단다. 끝.  그리고 평상시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에.

그런데 난리가 난 것은 뭐냐 하면, 사도가 설치고 난리가 났죠. 사도가 설치게 된 것이 오순절 날 그들이 뭘 받았습니까? 뭐 교과서 받았습니까? 새로 참고서 공부했습니까? 아니었죠. 뭐 하나님의 선택 책대로 공부해서 한 게 아니죠. 그냥 뭐가 왔습니까? 그냥 성령이 와버렸죠. 난리도 아니에요.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할 소리 다한 이유가 뭡니까? 거기 보니까 뭘 받았다? 성령이 충만한 거예요. 충만해서, 설교해서,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예수님 잘했죠?” 뭐 이런 식으로. “잘했어! 잘했어!” 죽음은 비극의 마지막이잖아요. 그렇게 비극이어도 본인은 그렇게 비극적이지 않고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랑에서 나옵니다. 기쁨은 기쁨인데 무슨 기쁨이냐 하면 사랑의 기쁨이에요. 그러면 성령이 오면 뭘 한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체계적이고 신학에 정통한다? 아니디요, 아니디요. 갑자기 북한 말을 쓰는데. 아니지요, 아니지요. 기쁨이 있어요. 기쁨이 있단 말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기뻐요. 어떤 기쁨? ‘에이, 안 해도 되는구나!’ 하는 기쁨. ‘괜히 마음으로 쫄았잖아?’ 쫄았다는 말은 이상하지만. ‘에이, 괜히 쫄았네!’

아니, 성령이 와서 구원받았는데, 이미 구원을 확정지은 분이, “어이! 구원받았어!” 심판관이, 재판관이 해버렸다니까요. 재판관이. 누가복음 18장에서 성전에서 두 사람이 엎드려서 기도하죠. 한 사람은 기도하는데 분간도 안 돼. 바리새인은 자랑질 하는지, 기도하는지, 분간도 안 돼요. 11절,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자, 강의 다시 해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어떤 방법이냐, 내가 남들한테 평소에 하던 대로, 하나님을 상대로 생각해서 열심히 섬기는 거죠. 그렇게 섬기면 남들이 다 칭찬하니까. “아이구, 정성도 지극하여라. 아이구, 착하기도 하여라. 아이구, 세상에! 간도 떼 준다고 하고. 그리고 돈도 주고. 아이구, 저렇게 하나님께 복 받을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복 받아도 아마 30배 복 받을 거라.” 라고 하는 그러한 기준들이 그 시대에 있기 때문에, 그 기준에 맞추면 맞출수록 점점 더 의인이 되어가는, 또 의인 소리를 듣는, 그런 보람을 느끼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별 직업 없었어요. 그냥 성경만 들으면서, 요새 말로 하면 말씀폐인, 그냥 말씀만 들어보면서 실천에 옮겨서 남한테 지도자급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 그게 보람이었습니다. 기도할 때도 떠벌리면서 기도하고, 시장가에서 구제해놓고 떠벌리면서, 금식할 때도 흉악한 모습을 해가지고, 천하에 모든 질고를 혼자 다 지고 가는 어린양처럼 모습을 해가지고, 폼 하나는 멋들어지죠. 폼 하나는. 그래서 저는 개량한복 입는 사람들이 좀 수상해요. 환경운동, 개량한복, 왜 옷이 한결같이, 유니폼이 꼭 중이 입는 옷 같으냐 이 말이죠. 삼보일배 할 것 같아. 그렇게 하면 삼보일배 하는 것 같아. 그 사람들이.

그런데 그 옆에 누가 있었습니까?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죠. 주님께서는 장차 올 심판을 미리 앞서서 순회재판을 하는 거예요. 순회재판. “피고는 들어라! 너는 의인이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의인이냐? 너는 지옥가거라! 너는 죄인이냐? 너는 천국가거라!” 그 자리에서 합격통지서를 내려줬습니다. 이걸 한국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자성어로 수시모집이라고 합니다. 수시모집. 심판이전에 이미 심판 뒤의 결과가 확정된 사람, 신분. 수시모집이에요. 미리 대학에 합격했어요.

성령은 바로 이걸 통보하러 오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뭐가 생긴다? 기쁨이죠. 그 기쁨을 요한일서에서는 뭐냐, 사랑의 사귐. 니하고 먼저 사귄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아버지하고 나하고 유일하게 사귄 사귐 속에서, 니 인생이 지불해야 될 돈과 값을,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사귀어서, 니가 지불해야 될 모든 돈을 내가 다 지불했음을 성령을 통해서 통보해주니까, 지갑에서 십일조 내려고 하는데, 지불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받지를 않아요.

“누가 지불했습니까?” “내가 지불했잖아.” 그 모든 죄 값을 대신 다 지불해서, 그걸 요한일서에서는 화목제물이라고 합니다. 화목제물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주님 앞에 더 보탤 행위가 남지를 않았어요.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사귐이라고 하고, 그 사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하고, 그 사랑이 오게 되면 우리는 기쁨이 생기겠죠. 사랑의 기쁨. 그것이 바로 구약 시편에 나오는 성경구절을 선취한 겁니다.

잠시 시편 한 번 찾아봅시다. 누가 빽 써가지고 성경 좀 찾아보라고 하는데 빽에 굴복했습니다. 시편 149편 4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예.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고 기뻐하죠. 누가복음에서도 광야나 들판 같은데서 목자가 밤에 양치고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누가복음 2장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기뻐하는 자가 아니라, 기뻐하심을 입은 자. 하나님께서는 “니를 보기만 해도 왜 그렇게 기쁘냐?” 이거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승낙하신 자들 가운데 뭐다? “평화로다.”

이것은 천사들의 찬양이 곧, 우리의 신분을 보고 찬송한 천사들의 감상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보고. 우리는 몇 되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내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아!” 이렇게 보고 계신 거예요. 뭐가 왔기 때문에? 사랑이 왔기 때문에. 사랑은 누가 가져다 줬어요? 성령이 왔기 때문에.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강의 처음부터 시작한다면, 우리가 주님 섬긴다는 것은 성령 빼고 섬기는 방법밖에는 우리가 배운 것이 없어요. 정성을 다하고 순종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 앞에서는 순종이 무의하다고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이미 넘치는 자비 앞에서는 나의 순종이 빛을 잃어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순종은 꼼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순종하는 척 하면서 내심 30배 60배 100배를 노리는, 일종의 투자에요. 돈 놓고 돈 먹기, 뭐 애들은 가라!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 돈 타라! 돈 타면 돈 먹는다. 이 말이 아닙니까? 애들 앞에서 뱀 장사하는 것처럼.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령이 임한 순간 우리는 뭐냐 하면,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무엇의 대상? 주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시편 149편 4절에 의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예언한 선취하는 겁니다.

시편 68편 3절을 봅시다. 집사님. 이런 것 좋아하세요? 성경 찾아보는 것? 누가 이야기 했더라? 집사님 한 번 읽어보세요.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 시카고 강의에 참석했던 어떤 분은, 예수님 복음을 알고 너무 기뻐가지고, 심지어 한의원 마트 앞에서 아무도 봐주지도 않는데, 기타반주에 노래에 맞춰서 약간의 율동, 비슷한 춤까지 췄다는 거예요. 얼마나 우사스러운 행동입니까? 그런데 고마운 것은 아내를 위해서, 믿음도 개뿔도 없는 남편이 앞에서 기타 쳐주고 2년 동안같이 했다는 거예요. 세상에! 샌디에이고에서 와가지고 그 분들이 참석했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일방적으로 우리가 사귀는 그 사랑 말고, 값을 다 치렀고, “너는 죄인 되어도 괜찮아.” 죄인 되어도 하등에 관계없이, 그냥 그대로, 죄인이 되던, 뭐가 되던 관계없이 그대로, 창기, 세리, 간통을 하다 잡히던 관계없이, 도둑이 되던, 그냥 그대로 나의 기쁨의 대상으로 이미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겁니다. 끝났음을 어떻게 압니까? 끝났으니까 내가 왔잖아요? 누가? 예수님의 영이 왔잖아요. 값을 대신 다 지불하신 그 분이 오셨잖아요. 그 분이.

대학당국의 인사책임자가 합격통지서 들고 와가지고, 판사님이 와가지고, “실례합니다. 여기 아무개 계시죠? 축하드립니다. 합격입니다.” 그게 성령이에요. 성령.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는 말은, 두려움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성령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 기능을 인정한다면, 그 임무를, 그 취지를 안다면, 세상에, 어떤 교회에서 하는 협박과 공갈, “당신 그거하면 이번 주 바이어하고 계약 깨져! 당신 자식 성적 내려가! 지금 당신 목사한테 험담하면 3대를 멸할 줄 알아! 당신 앞으로 잘해줘야 해! 안 그러면 당신 집안 끝났어! 가계의 저주가 흐른다고!” 이런 공갈, 협박에 속아 넘어갈까요? 안속아 넘어갈까요? 안 넘어가죠.

말씀 잘 들으셔야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목사님을 세워주신 거예요. 왜? 가짜는 가짜끼리 놀라고. 벌벌 떨거든, 처음부터 이거는 어떤 누구도 방관한 적 없다는 것은, 그런 입장인 것을 깨달으라고 그런 목사님들을 많이 유포하신 거예요. 그 목사님들 참 잘하신 거예요. 제 임무를, 제 역할을, 제 마귀적인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박수 받아야 해요. 짝! 짝! 짝! 박수 보내요. 그렇게 해서 오천 명 모으면 무슨 의미며, 천명 모으면 무슨 의미입니까?

거기서 벌벌 떨고 있는데. 큰 계약 건 앞두고 벌벌 떨면서 새벽기도 나오는 그 모습들을 보세요. 수능 백일 앞두고, 지금 백일도 안 남았어요. 앞두고 교회마다 기도하는 그 모습들. 노골적으로 백일 내세워서 하면 스트레스 받는다고 하지만, 교회는 은근히 새벽기도 나오라고. “새벽기도 나오세요. 고3이 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한가해? 야! 배짱이 센 아줌마네?” 지금 고3이 있다면서 어떻게 새벽에 잠이 옵니까? 교회 나와야지. 이런 것. 우리는 거기에 얼마나 말려들었고, 속아 넘어 왔었습니까?

그러면 그 기쁨이 어디서 나온다고 했습니까? 기쁨은 성령이 오셔서 해준다는데, 성령이 결국 뭘 하느냐, 사귐. 어떤 사귐? 사랑의 사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왔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 행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고백으로 나와요. 어떤 고백입니까? “주님이여, 나로 인하여 주님이 누累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로 인하여. 내가 주님의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이란 드라마에 보면 이 장면이 나와요. 세자가, 그 나라의 2인자죠. 왕이 있고. “라온아!” 라온(즐겁다는 뜻의 옛말)이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말이에요. 저도 드라마에서 처음 배웠어요. “라온아!” “왜, 저를 라온이라고 합니까? 그냥 내시인데.” “라온아! 기쁘니까 기쁘지!” 논리적으로 뭐 메시아 이전 이후가 어떻고, 조직체계가 어떻고, 그게 중요한 것보다도, 우리가 아가서를 한 번 찾아봅시다. 성령이 오게 되면 조직체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기쁨이 아닐까요?

아가서 2장 6절을 한 번 봅시다. 아가서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구약960페이지에 있습니다.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아가의 내용이 뭐냐 하면, 남성의 집요한 사랑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근데 여자는 도망가요. 도망가서 문을 탁 닫는데, 문이 닫히기 전에 남자가 손부터 탁 내밉니다. “이 약 먹고 감기 나으세요.” 콘택600. 판콜씨. 탁 주면서 나으세요. 이거는 뭐 스토커도 이런 스토커가 없어요. 여자는 도망가고 남자는 끝까지 오면서 만나가지고,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이게 주님이 죄인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부부관계로 묘사한 거예요. 이걸 가지고 요한일서에서는 뭐냐 하면 ‘거하다’ ‘소속됐다.’ ‘~안에 있다.’ 우리는 사랑 안에 있음을 성령이 와서 통보해주니까, ‘아하! 내가 지금 사랑 안에 있구나.’ 새로운 처소가 여기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을 부를 때는 이렇게 불러야 돼요. 정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면 이렇게 불러야 됩니다. “당신 앞에서 내가, 당신에게 누累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가 있는 것이 당신한테 짐이 되지 않기를!” 그럼 아내가 하는 말이, “그러니까 일찌감치 집구석에 들어오던가?”

자기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대가 있음 자체가, 그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를 잊어도 더 이상 상관없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 사랑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된 겁니다. 따라서 사랑이 오기 전까지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중요하냐 하면, 나에게 내가 제일 중요한데, 내가 중요하다보니까 나는 항상 내 것을 사수하기 위해서 두렵고 떨리고 벌벌 떨어요. 그런데 성령이 오고부터는, 나보다 더 소중한 분이 떴기에, 그 다음부터는 나에 대한 신경을 안 쓰다보니까, 그 분만 있으면 나는 기뻐하기 때문에, 뭐가 되겠어요?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사랑 안에는 뭐가 없나니?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미래의 나의 주관자를 일찍, 지금 만난 겁니다. 정말 누가 들으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에요. 정말. 지우고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여기 있다. 그리고 성경에 보니까 메시아, 그리스도가 온다는 거예요. 그럼 우리의 할 일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는 구원자도 되고, 동시에 심판주도 되죠. 그럼 구원이 있고, 심판이 있고, 우리의 최종적인 시험날짜가 앞에 있으면, 우리는 그냥 대비하고 준비하면 되겠죠. 이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겁니다. 누가 오기 전까지는?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래서 내가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서, 구원받을 때 유리하게 작용해서, 합격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사전에, 매사에 자기 행동과 마음을 조심하고, 절제하고, 관리하고, 이렇게 해서 살아가게 되면, 적어도 지옥은 안 가고 천국에 갈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성령이 어디서 온다고 했습니까? 이미 메시아가 오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성령이 내가 있는 곳에 왔기 때문에, 우리는 뭘 기다리느냐 하면 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내 허락도 없이, 내 동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나를 합격시킨 분을 어떻게? 그리워하고 보고 싶죠.

“지금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고린도전서 13장 12절. 그래서 여기 있는 우리가 기다리는 이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하나의 그냥 기다림이라면, 기다리는 목적이 뭐냐, 주님 좋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구원받기 위한 기다림이라면, 성령이 오게 된 우리가 기다리는 이것은 뭐냐 하면, 주님에 대한 사랑의 그리움으로 바뀌는 거예요. 이미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렀기 때문에, 이미 구원받은 자 되게 하신 그 과잉적인 자비. 그냥 자비가 아니고 내가 모르는 것까지 다 알아서 처리해준 그 넘치는 사랑을 이렇게 해주신 그분이 보고 싶은 거예요.

보고 싶을 때, 어떻게 보고 싶겠어요? 그리움으로, 사랑으로 보고 싶죠. 그게 바로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사귐이에요. 사귐. 성령 안에서, 사랑 안에서 사귈 때, 너는 이미 합격된 자. 합격된 자를 요한일서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속한자라고 되어 있고, 불합격된 자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 자. 이렇게 되고 맙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자에게는 이미 죄가 처리되었기 때문에 죄가 없게 되고, 마귀에게 속한 자는, 그 마귀에게 속한, 불합격 된 이유를 철저하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으로 작용해요. 계명으로.

계명으로 작용해버리면, 그 계명의 내용은 혹독한 계명의 내용이 됩니다. 그 혹독한 계명의 내용의 일부가 뭐냐 하면, 요한일서 3장 16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는 자는, 이거는 사랑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누락되고 탈락되겠죠. 그리고 사랑이 아니고 사랑의 계명이라고 했으니까.

계명이라는 의미는 뭐냐 하면, 이걸 안 지키면 계명이 위반된 것이 되어서, 거기에 대한 처벌이 따른다는 의미에서 계명이라는 말을 했어요. 계명. 그냥 선물이 아닙니다. 기준이에요. 심판의 기준으로 온 거예요. 따라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아니하는 자는, 온전한 사랑의 계명에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거는 구원에서 탈락된다는 내용이 바로 사랑의 계명으로 이 세상에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그리고 그 앞에 15절에 보면,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뭐한 자입니까? 살인하는 자잖아요.

그러면 살인하지 않고 영생 얻으려면 어떤 조건이 되어야 됩니까? 스물 네 시간 평생 동안 한번도, 단 한 번도 뭘 하지 않아야 돼요?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어야 돼요. 누굴 미워한 적이 있으면 형제를 미워한 것이 되어서 살인자이기 때문에, 계명이라는 차원에서 그거는 구원받지 못한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구원받지 못하는데, 그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잘 지키다가, 미워하지 않다가, 그 다음에 어느 날 미워해버리면 그때부터 탈락된 것이 아니고, 요한일서 3장 10절에서 처음부터 너는, 원천이, 원본이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기어이 너는 그것을, 형제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이벤트가, 사태가 결국에는 일어나게 되었다고 폭로하는 겁니다.

잘 할 때는 하나님께 속했다가 한 번 삐걱해서 마귀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아무리 잘해도 단 한 번이라도 형제를 미워한다면, “너는 근본자체가 썩어먹었어!” 하는 판결을 내려버린다 말이죠. 누가? 계명을 주신 분이. “계명을 주신 분이 그 사랑의 계명에 준해서 판결을 내렸다. 니가 한 번 실수했다고 내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아니야. 너는 근본이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것이 그때 니가 티가 났어. 폭로되었어. 탄로 난 거야. 따라서 처음부터 니는 안 되는 인간이야.” 하고 탈락시켜버린 겁니다.

그러면 평소에 최선을 다하여 성심성의껏 하나님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이 요한일서에 의하여 모조리 다 마귀에 속한 자입니다. 아무리해도 이게 안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해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더 무서운 이야기는 형제를 미워했다, 미워 안 했다 하는 판정을 본인이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거예요. 미워하지 않았지만, 그때 이빨이 아파서 냉정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것도 안 돼요. 사랑해야지 왜 냉정해요? 환희 웃어야지 왜 냉정했습니까? 냉정했다는 것은, ‘니도 때 맞춰서 집에 좀 오지. 내가 아픈 것도 모르고 집에 찾아와서?’ 이런 식으로 혼자 궁시렁궁시렁 하는 것이 주 앞에 들통 나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아무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이미 합격 받은 사람, 성령이 온 사람은, ‘과연 내가 내 힘으로 구원받지 못할 처지에 있게 하셨구나.’ 왜? 우리는 남들 대할 때, 인간적 사귐 외에는, 예수님이 아버지와 사귀는 사귐에 대해서 아는 바다 전혀 없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의 사귐은 전혀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 사귐이었고, 사랑이었다는 것을 합격통지서 받고 난 뒤에, 새삼 그걸 바라보면서, 이 모든 죄 값을 단번에, 이미 값을 치러주신 그분이 보고 싶고 사랑이 그리워지는 겁니다.

근데 그 분이 성령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냥 사랑한 것이 아니에요. 일체 우리의 조건을 일체 묻지도 않고 무조건 사랑했거든요. 그 사랑이 어디에 나왔다고 했습니까? 아가서. 사랑받는 여자는 도망가고 사랑하겠다는 남자는 쫓아오고. 이 이야기가 바로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아가서입니다. 기어이 먹고 말거야! 치토스! 하는 심정으로. 계속 쫓아오면서 집요한 구애를 해버립니다. 날 사랑해달라는 것이 아니고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겁니다. “내 사랑을 받아주오!” 내 사랑 받아주오. 결혼해듀오. 결혼업체선전이에요. 선전문구가 결혼해듀오. 주오가 아니라 듀오. 결혼해주세요.

구약은 예언이죠. 그 선취는 뭐냐 하면, 결혼해서 이미 결혼관계에 돌입했다고 성령이 와서 통보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24절에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우리를 주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했고, 그 사랑의 결실물, 결과물이 우리 자신인 것은 누가 와야 된다? 성령이 오니까, 아, 우리가 이루지 못한 그 계획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셔놓고 그 이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자기자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자기 사랑인 것을 우리는 같이 동감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3장 끝까지 하는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래놓고 이제는 우리가 뭘 보자? 요한일서 3장 15절,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그걸 볼 때, 어떻습니까? 거기서 뭐가 나오죠? 공포나 두려움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뭐가 나옵니까? ‘이걸 언제 지켜? 언제 지키지?’ 이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뭐가 나오죠? 기쁨이 나오죠. 어떻게? 주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뭐냐 하면, 이웃을 사랑하는데, 완벽한, 흠이 없는, 목숨까지 바쳐가며 사랑하고 있는 상태로 우리를 그렇게 규정해주신다는 고마움이 있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귤만 까먹었는데. 귤만 까먹었는데, “세상에! 자기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니!” 이렇게 평가해주는 거예요.

그게 우리한테는 오히려 낯선 거예요. 논리가 안 맞아요. 논리를 비약해도 너무 비약한 거예요. 이제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누가 귤 먹을까 싶어가지고 혼자서 숨어가지고 혼자 귤 까먹는데, 주님께서 어깨를 치면서, “이 자식!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니! 아이고, 기특하여라!” 이렇게 난데없는 과도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궁금해요? 오백 원! 그 해답은 바로 사무엘상 1장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1장을 봅시다. 아까 어떤 분이 성경 많이 찾자고 해서 제가 많이 고려하는 중입니다. 그것도 주의 뜻이라고 알고.

사무엘상 1장 5절을 봅시다. “한나에게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는 것은 임신하지 못하게 만들었죠. 사무엘상의 한나 이야기,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교회 일 년만 다녀도 다 아는 이야기. 교회 일주일만 다녀도 아는 이야기는 달란트비유이야기고. 일 년 정도 다녀야 아는 이야기가 한나 이야기에요. 주변에 집사님 중에 같은 이름인 한나라는 이름이 많기 때문에. 사무엘상 1장 5절의 말씀이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성태치 못하게, 임신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죠.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떻게 형제를 완벽하게 목숨까지 바친 상태로, 의로운 상태로 간주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잉태치 못한 자의 자식은 충분히 그런 의라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마땅하는 겁니다. 마땅하다. 잉태치 못한 자의 자식? 이게 말이 됩니까? 임신이 안 된 상태에서는 태어날 수 없는 여지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태어났다. 분명히 태어날 때는 잉태해서 태어났는데, 중간에 잉태치 못한 자라는 것을 집어넣어버리면, 여기서 뭔가 우리의 논리로써는 이루어지지 않죠.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 원하는 바는 뭐냐, 잉태치 못한 자식이라는 표현자체가, 이게 갈라디아서 4장 2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중에 연결시킬게요. 그 연결이 뭐냐 하면,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인간이 메시아의 말씀을 들어서 구원에 이르는 이 노선에서 절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노선을 하게 되면. 왜냐하면, 이 노선은 인간을 뭐로 보느냐 하면 육으로 봐요. 육으로 난 것은 뭐가 되느냐 하면, 요한복음에 보면, 같은 사도요한이 지은 책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에요. 노선이 바꿔져야 해요. 노선 갈아타기가 돼야 돼요.

노선 갈아타기가 돼야 하는데, 이쪽 노선에서 저쪽 노선으로 갈아타는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교회백날 다녀봐야 구원 안돼요. 교회 다닌다는 자체가 누구한테 자꾸 의지가 되고, 기대를 하게 되느냐 하면, 성경말씀을 지켜내는 내 육신에 경건과 육신의 고상함과 육신의 성실함과 순종함에다가, 모든 기대를 거기다가 다 쏟아 부을 수밖에 없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케요? 저케요? 하는 코미디에 나오거든요. 이렇게 할까요? 저렇게 할까요? 목사님. 이렇게 하면 됩니까? 저렇게 하면 됩니까? 이렇게 하면 내 구원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저렇게 하면 내 구원에 보탬이 되겠습니까? 선교 헌금 내면 내 구원에 약간의 보탬이 되겠습니까? 십일조를 내게 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까요? 찬양대 봉사하면 그 찬양대가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아무리 그것을 물어도 주님께서는, “삑(☓) 단절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 모임에 제일 첫날 첫 번째 시간에 한 이야기가 그 이야기였어요. 구원이 무엇이냐? 라는 것은 없다. 뭐가 있다? 복음이 무엇이냐? 복음이 나타나서, 복음 자체적으로 나오는 그 능력이, 구원이 안 되는 자를 일방적으로 의인되게 하여 구원되게 하는 그 결과물들만 모인 집합체가 뭐냐 하면 천국입니다. 행한 것도 없이 의인된 자들이 모인 곳이 천국이라 이 말이죠.

그래서 천국은 우리들의 나라가 천국이 아니고, 무슨 나라냐 하면,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라니까요. 누가 시작해서 누가 관리해서 누가 마무리했기 때문에 그 아들이 나라에서는 면류관도 반납을 해야 돼요. “우리가 쓰는 것이 합당치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왜 강단에서 못하냐 이 말이죠.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이 궁금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이 고생 많은 세상에서, 이 땅에서 고생하는 것이 자기한테 손해라고 여기거든요. 그 손해를 천국 가서는 몽땅 보상받기 위해서, 그걸 노리고 교회 온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순전히 관심사가 누구한테 있어요? 그저 나한테. 나는 나 혼자고 사귐이 없어요. 모든 주위 사람들은 내가 이용해먹기 위한 대상이지, 결국은 모든 것은 나한테 귀결되거든요.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고 노동이라 이 말이죠. 종교노동. 기도라는 종교노동. 그러나 하나님의 천국은 뭐냐, 사귐이죠. 사귐. 그 사귐의 관계를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사랑이고, 그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감정적인 어떤 현상이 나온다고 했습니까? 두 글자로? 기쁨. 기쁘죠.

기쁨인데, 그 기쁨의 내용을 뜯어보니까 뭡니까? 갈 필요도 없고, 가서도 안 되고, 갈 이유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고, 가고자 해도 못가는, 그런 나라에 이미 가게 되었다는 통보가 주어졌기 때문에, 너무 고마워서 기뻐하고, “이제 나는 주님과 사귈래?” 라는 사귐이 형성될 때, 그게 주님께서 유발한 현상이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안이에요. 안. 천국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안에 또 다른 안을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이 캘거리든, 한국이든 관계없어요. 주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안에 이미, 이 세상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특이한 관계로 사귐을 통해서 새로운 안에 들어 있으면, 이 사람은 이 캘거리 안에 들어있는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성령 안에 있는 자로서 캘거리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역사 안에서의 묵시죠. 역사 안에서의 묵시세계.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밧모섬에서의 사도요한의 형편이고 처지입니다. 참된 성도 위에서 일곱 교회가 다 싸그리 다 멸망하고 사라져요. 교회는 눈에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사라져야 돼요. 그래야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있죠.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작용은 더하기 아니고 빼기에요. 더하기(+)가 아니고 빼기(-)입니다. 여러분들 피부에 사마귀가 날 때, 저는 사마귀가 자주나요. 그래서 저는 약을 한 일주일 바르는데, 바르면 사마귀가 톡하고 빠지죠. 빠지고 난 뒤에 그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완전히 분화구 같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지옥을 지옥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누굴 이용했어요?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분화구처럼, 사마귀 있던 자리에 사마귀가 빠지고 나머지기가 뭐냐 하면, 잉태치 않은 자를 핍박했던, 육에서 육으로 나온 사람들이 거기에, 사마귀 빠져나온 곳에 동그랗게 모여 있잖아요. 그게 바로 안 보이던 지옥이 그렇게 보이고, 안 보이던 마귀에 속한 사람들이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마귀에 속한 사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당장 데려가지 않고, 쏘옥 집어넣었다가, 사마귀 빠지듯이 뽕! 소리가 나요. 뽕! 포도주 뚜껑 따면 어떤 소리가 납니까? 펑! 펑이 아니죠. 뽕! 뽕하고 열죠. 사마귀 빠지고 난 나머지 빈자리 있죠? 숨겨져 있던 마귀의 자손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의 뜻은 뭐냐 하면 하늘나라의 확장이 아니고 지옥의 확장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늘도 한 개 배웠어요. 지옥의 확장을 위해서 일합시다.

지옥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복음 믿는 사람이 성장할 때 그 주변에 형성되는 것이 지옥이에요. 복음이 없는 곳에는 지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땅에 귀신과 악마가 있는 줄 몰랐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나타나자마자 “예수여!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하면서 예수님 중심으로 운집하고 모이는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 오시기전까지는 점잖은 사람인데, 오시면서 예수님께서 “너그 애비는 사탄이다.” 라고 하셨죠. 악마의 정체가 그렇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 아니고, 복음으로 인하여 지옥이 형성되고, 복음을 위하여 천국이 있다는. 복음을 위하여 주께서 일했지,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일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창세기 3장에서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이유가 없어요. 쫓아내도, “그래. 미안하다. 좀만 고생해라.” 이럴 것 같으면 동쪽으로 가는 길을 일부러 화염검을 치고 천사가 막을 필요가 없어요. 스물네 시간 돌아다니면서, 혹시 침범할까 싶어서 돌아다니잖아요. 그건 강력한 의지입니다. 절대로 너 같은 인간은 하나님과 사귐이 없다. 강력하게 저지한 겁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냐? 구원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해요? 절대 구원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효과로써 비로소 구원이라는 것이 성사된 거죠. 구원위주가 아니고 복음위주입니다. 사람은 개인위주지만, 주님은 복음위주입니다. 복음은 바로 예수님 중심이죠. 평소에 우리는 우리중심이고. 우리 중심인데, 교회 다녀서 구원받겠다는 자체가 이거는 마귀적인 실시지, 전혀 이거는 관계없습니다. 거기 가봐야 지옥 가는 방법만 실컷 배우지, 복음에 대해서 없는 거예요.

맨날 배우는 것이 자기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하면 됩니까? 목사님. 이렇게 하면 내가 구원됩니까?” 맨날, 온종일, 스물네 시간 전부 다, 자기 구원에만 몰두해가지고, 교회에 온 정성과 시간과 돈을 다 바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관심사는 그게 아닌데. 복음인데.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구원에 이용만 하려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찬 채 교회가고.  또 집에서는 경건훈련하고, 성경백독하고, Q.T하고. Q.T 백날하면 뭐합니까? 구원 얻겠다는 시도가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거는 유대인처럼 그냥 기다림이에요. ‘이렇게 하면 좋은 점수 받겠지? 이래하면 되겠지?’ 그리고 또 뭐 잘못했다 싶으면 회개하고.

여러분, 이게 회개할 문제입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니” 진짜 이게 회개가 될 문제입니까? 예배 참석 열한시인데 열한시 삼십분에 왔다. 이거는 반성하고 집중하면 다음에 열한시에 도착할 수 있어요. 이거는 가능한 문제입니다. 근데 형제를 미워한 자는 살인한 자다. 제가 두 번 다시는 미워하지 않을 게요. 과연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문제입니까? 아니 미움이, 사람 골라가면서 미워합니까? 미울 수밖에 없는 인간이 등장할 때는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괜히 준 것도 없는데 미운 사람이 있잖아요.

여러분, 드라마에 탤런트 나오면, ‘저 인간 왜 나오나?’ 하면서 미워지잖아요. 그 사람은 마귀에 속한 사람이에요. 왜 미워해요? 형제를? 그래서 형제는 없는 거예요. 형제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 형제라는 것을 누가 평가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계명이 이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에, 이걸 지켜야 하나님께 구원받는데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그러한 나름대로 자기 구원에 몰두한 그 방침에 의해서 사랑할 사람만 사랑하고, 이뻐 할 사람만 이뻐 하니까, 형제라는 개념 자체를 누가 선택했어요? 내가 선택했어요. 만만한 것만 형제에요.

선교단체에서 전도할 때도 이쁜 아가씨들한테만 전도하는 이유를 이제 알겠죠? 못생긴 것들은 전도도 안 해요. ‘지옥에나 가라! 니는 사영리 들을 자격도 없어!’ 꼭 이래요. 교회에서 목사가 심방할 때, 꼭 돈 되는 이런 사람들. 돈 되는 사람들. 가가지고 거지꼴 하고 있으면, 에이! 왜냐하면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시킨 대로 다 했습니다.” 라는 어떤 성과를, 손에 성과급을 내가 쥐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이걸 당당하게 내밀고 싶은 거예요. “주님을 위해서 이 정도까지는 했습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거 아니야! 더더더 더 완벽하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6절은 이렇게 해석되는 겁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대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 자신을 그대 앞에서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대 때문에. 형제가 없었는데, 형제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나는 나 자신이 잃어버린 게 되죠. 잃어버린 이것이, 주님이 아벨이 되시고 우리는 가인이 되어서, 아벨이 드러나기 위해서 가인이 이용당한 것처럼. 죄인으로 드러난 이것을 주님이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형제의 형제 됨을 위해서 내 목숨을 잃어버린 자로 규정을 받는, 그러한 것이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확인되는 겁니다. 지키는 것이 아니고. 확인되는 것이에요.

조금만 더하겠습니다. 모든 매사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주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해서 내 형제로 받아줬다” 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우리로 하여금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 결과로 사귐이, 사랑이 기쁨으로 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이 계명들을 주신 겁니다. “역시 주님이 주가 되셔야 되겠습니다. 성령이 오셔야만 구원되는군요.” 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런 말씀을 주신 거예요.

10분 쉽시다.
 이미아(IP:122.♡.165.245) 16-10-13 00:14 
20160921 요한1서 캐나다 캘거리강의27-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합니까? 아까 첫째시간 마지막에 단절이라는 이야기 했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문제에서 끝났어요. 다만 예수님이 오신 것은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복음을 이 땅에 구체화하기 위해서. 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그것을 출애굽기 15장에서는 내 백성을 전쟁을 해서 전리품으로 만들고, 전리품 안에, 그걸 성소라고 이렇게 규정하겠다고. 시간 없어서 못 찾겠어요. 출애굽기 15장에 나옵니다. 17절,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의미는, 어디에 거하시는가, 주님이 홀로 전쟁해서 나온 전리품, 포로. 포로 안에 거하시는 것이 주님의 성전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그 안에 거하면서 자기 안의 모든 벽돌들은, 주님의 일방적인 본인의 공로로만 얻어진 결과물 속에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전쟁하시는 하나님이시라. 만군의 하나님은 전쟁하는 하나님이에요. 이렇게 되면 구원이 단절인데, 그 단절이 어떻게 이어지느냐? 그 문제가 남죠.

그게 뭐냐, 잉태치 않은 자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잉태치 않은 자. 잉태치 않은 자가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 그리고 야곱의 아내들 중에서 원래 본처가 누구냐 하면 언니 레아가 본처가 아니고, 둘째 라헬이 본처에요. 언니는 세일할 때, 원 플러스 원(1+1) 해가지고, 세일로 팔린 거예요. 진짜 본처를 얻기 위해서 덤으로 얻어걸린 것이 레아라 말이죠. 그래서 야곱은 뭐만 사랑하느냐 하면, 내가 사랑해서 낳은 그 자식만 사랑합니다. 다른 자식은 자식도 아니에요.

거기서 누가 화가 났느냐 하면, 열 자식들이 화가 나서, 그 열 형제가 규합해서 누구를 팔아먹느냐 하면, 아버지의 진짜 엑기스 같은, 아버지가 제일 사랑하는 독생자를 애굽에다가, 처음에는 죽이려고 하다가, 맏이가 말려서, 죽은 것이나 팔린 것이나, 팔아먹고 난 뒤에 아버지한테는 “아이고, 아버지! 애석하게도 짐승에게 잡아먹혀서 이렇게 죽었습니다. 이 피 보세요.” 아버지께서 유독 요셉에게만 입히는 이 채색 옷에 짐승의 피가 묻어 있지 않습니까? 국립과학연구소에 맡겨 조사해보세요. 그게 없으니까 요셉의 피인 줄 알았죠. 그걸 통해서 야곱은 자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좋아하는 자식은 이삭일까요? 야곱일까요? 이삭이 두 아들 중에서 누굴 좋아했습니까? 에서를 좋아했죠. 그러나 축복은 누구한테 갔습니까? 야곱에게 갔죠. 그리고 또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했습니까? 제물로 바쳐야 되죠. 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인간세계에  원하는 것은 결국 단절이에요. 단절. 나의 육적인 사랑의 단절. 나의 모든 사랑이 천국에서는 이게 나의 버림받는 이유가 되고 동기가 되고 원인이 된다는 겁니다. 1에서 시작해서, 나에게서 시작해서 나에게로 돌아오는, 어떤 누구를 만나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이것이 하늘나라에 살만한 여건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육으로 태어났잖아요. 육으로 태어났으니까 나오는 모든 속성은 뭐 밖에 안 나와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이어야 돼요.

그래서 제가 늘 평소에 강의하면서, “제발 막살아주세요.” 라고 부탁한 것이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육에서 육을 가지고, 감히 영을 추구하지 마세요. 그거는 육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전능하다는 그 예수를 자기 행복을 위해서 이용하는 구실에 불과한 것이지, 그거는 속임수에 불과한 것이지, 백날 경건해봐야 반대급부를 노리는 하나의 수작이에요.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그렇다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잖아요. 하늘나라는 영이잖아요. 그럼 영으로 어떻게 가느냐, 이것은 제 질문이 아니고 니고데모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드린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가 있습니까? 할 때에 이렇게 하면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전제를 깔고, 그 다음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자가 없다고 했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니고데모는 그 거듭난다는 그 단어의 의미에 딱 그걸 매치했어요. 성령이라는 것은 빼버리고 다시 태어나면 된다 이 말입니까? 그럼 엄마 품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면 됩니까? 이렇게 했어요. 그럼 엄마 품속이 뭐에요? 육이잖아요. 다시 말해서 “니가 사람으로 태어났어? 천사로 태어났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끝났네!” 이런 뜻이라 말이죠. 사람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이 하늘나라의 취지입니다. 하나님의 확정된 뜻이에요.

그럼 엘리야는 왜 갔고, 모세는 천국에 왜 가있고, 아브라함은 천국에 왜 가있느냐? 그들은 죽었거든요. 늙어죽어야 됩니까? 늙어죽어야 육이에요. 다른 죽음을 죽어야 돼요. 다른 죽음.  늙어서 죽는 죽음 말고, 살아서 죽는 죽음 있잖아요. 살아서. 살아서 이미 죽었다고 통보받는, 그 통보가 있어야 돼요. 그럼 자살할까요? 약 먹을까요? 제가 캘거리 보니까 죽을 데도 마땅치 않아요. 아! 있다. 로키산맥. 거기에 올라가면 되겠어요. 그럼 자살할까요? 죽을까요? 죽으면 천당 갑니까? 

하나님이 받는 죽음이어야지 우리가 죽는 죽음은, 자살하는 죽음은, 백번해도 못가요. 육에서 육으로 간 죽음이기 때문에 의미 없어요. 왜? 우리 인간의 이름이 흙이고. 흙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따라서 육이면서도, 영에서 영으로 오신 분이 스스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아서, 인간이 되셔서, 그래서 죽음 안에서 함께 죽는 자만이, 그 사람은 영적인 차원에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고, 죽은 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거는 뭐냐 하면 “저 구원해주세요.” 라는 말은 일체 나올 필요가 없고, “복음을 저한테 적용시켜주세요.” 라는 말만 적용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 적용된다는 것은, 그 복음이 구원될 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해서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단절이 뭐냐, 잉태치 못한 자인데, 이걸 설명합니다. 사라 임신 못하죠. 리브가 임신 못하죠. 라헬도 임신 못했습니다. 뒤늦게 나온 애 이름이 요셉이니까. 그럼 야곱의 아들들이 왜 그렇게 많으냐하면, 육으로 난 애들과, 영으로 난, 그때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약속으로 난 자입니다.

자, 갈라디아서 4장 한 번 봅시다. 28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이삭을 뭐로 표현합니까? 이삭이라고 하지 않고 이삭에게 의미를 두죠. 니 보기에는 그냥 사람으로 보이지? 아니야. 약속이 먼저 있고, 약속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야만 하는 자다. 그러면 이삭의 일대기는 무엇을 보여줍니까? 예수님의 일대기를 보여주죠. 없던 자인데 생겼고, 임신하지 못한 자인데, 임신하지 못하는 여인에게서 잉태가 되었고, 그 잉태가 된 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에 의해서 희생물이 되는 모습이고, 희생제물인데 어린양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았죠.

그러니까 이 일대기가 뭘 보여주느냐 하면, 예수님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거예요. 약속으로 왔고, 사람들은 그 분이 약속인줄 몰랐고. 그 분이 십자가에 희생제물이 되셔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인정받는 그 모습을 이삭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약속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모두, 그 사람에 존재에 뭐가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숨겨진, 하나님의 약속이 그 사람 속에 내용물이 되어 있는 존재를 가지고 약속의 자녀, 약속의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세리가 되었든, 창기가 되었든, 강도가 되었든.

그 사람들의 모습들은 세리고, 창기고, 강도인데, 탁 깨보면 뭐가 들어있는가? 약속이 들어있는 거예요. 창세이전부터, 창조되기 이전부터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영원한 언약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어제 초콜릿 드셨죠? 초콜릿 안에 뭐가 들어있던가요? 뭐 땅콩 들어있고 아몬드 들어있죠. 니 눈에는 초콜릿으로 보이냐? 아몬드 들어있다. 한때는 킨더 서프라이즈가 금지조치 당했죠. 애들이 초콜릿을 먹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장난감을 노리고 마구 구매를 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저는 그 킨더 서프라이즈보다 더 적절한 과자이야기가 뭐냐 하면, 한국에서 나오는 고래밥이 있어요. 고래밥이 뭐냐 하면, 밀가루로 만든 과자인데, 고래도 있고, 토끼도 있고, 별모양도 있고, 상어도 있고, 여러 모양이 있지만, 먹어보면 그냥 과자에요. 모양만 그 모양이지 실제로는 뭐냐 하면, 밀가루로 만든 과자잖아요. 니가 보기에는 창녀로 보이고, 니가 보기에는 세리로 보이고, 니가 보기에는 강도로 보여? 내가 보기에는 약속의 자녀인데?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게 한 거예요.

뭐 잉태가 돼버리면 아버지 엄마 닮은 사람만 안에 내용이 되어 있어요. 그 안에 아버지 엄마의 DNA가 그대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잉태치 못하고 약속이 된 자가 오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세포를 갖고 있든지 관계없이, 그 사람은 약속된 곳으로 합치해야 될 운명을 지닌, 그 사람의 미래는 하늘나라 되는 사람으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껍데기는 인간인데 속은 그 약속,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사람. 약속이 들어있는 사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이 들어있는 사람. 로마서 8장에 니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영이, 그 성령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살고자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살고자 하는 그것이 뭘 가리느냐, 결국 우리가 영생 얻는다는 사실을 모독하는 것이 돼요. 논리가 이상하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돼요? “나는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라는 이야기를 해줘야 해요. 그것도 모나리자의 미소를 띠면서. 살며시 웃으면서. 여유롭게. “나 죽어야 돼요. 나 성경말씀 하나도 못 지켰습니다. 빼는 것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어느 구절도 못 지킵니다.” 이게 보기에 고래로 보입니까? 고래밥이에요? 아니에요. 약속의 사람이에요. 내가 나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약속이 나의 인생을 이미 결정짓고 말았어요.

그래서 나는 아무리 지옥을 보고 싶어도 이제 지옥은 다 보고 어쩔 수 없이 천국 가게 되었습니다. 흑흑흑. 이러면서.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너무 좋아서. 슬퍼하는 흉내를 내면서 평생을 보내야 되는 겁니다. “야, 운송계약 건 끝났어! 끝났어! 나 부도났어! 부도났어!” 흑흑흑~하하하~ 부도나게 하신 것이 바로 약속이 너의 부도보다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는 그런 존재야. 남들은 부도나면 자살하지만, 너는 부도나면 축복이라고 여길 정도로, 그 정도로 약속이 육적인 모든 본능을 이기고 있는 거야. 그걸 증명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을 아직도 떠나지 않고 살아있는 겁니다.

이게 잉태치 못한 거예요. “너그 아버지 누구냐?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볼때기 잡아당기면서 <친구>라는 영화에서 이야기했잖아요. “니나 가라 하와이!” 이런 것 있잖아요.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말해도 못 알아듣는데?” “이게?” 시계 풀면서 “너그 아버지 뭐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 뭐 많이 맞죠. “우리 아버지 이 땅에 오셨다가 가신 그 분인데?” “그 분이 우리 아버지인데요?” “같이 아바아버지라 부르게 됐는데요?” 이게 바로 여기 갈라디아서 4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26절에 보면,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곧 뭐다? ☐다. 어머니다. 우리 어머니다. 너의 어머니는 이 땅에서 찾지 마라. 아버지를 장례해야 된다고?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례하게 하고 니는 나를 따르라. 니는 다른 사람과 달라. 니 속에 약속이 작렬하고 있고, 약속이 가동되고 있고, 약속이라는 엔진이 거기서 발동하고 있습니다. 자, 약속은 뭐라고요? 약속은 이미 구원이 된 상태에서, 통보하는 쪽에서, 성령께서 오시죠.

따라서 인간의 모든 구원론은 다 헛것이고, 소용없고, 이제는 더 이상 그 자비 앞에, 그 넘치는 자비와 사랑 앞에,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보탤 것이 없어요. 헌금, 기도, 전도, 봉사, 교회충성, 목사 섬김, 어떤 것도 필요 없어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그러면 아무것도 필요 없으면 안 하면 되겠네? 예? 안 하면 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안 하는데 되게 바빠요.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 설명이 뭐냐, 지금 요한일서 4장, 5장 넘어가고 있어요. 진도 안 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진도 다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곳, 자 이곳이라는 것은 장소개념이잖아요. 이곳에 누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곳에? 지금 내가 서있다. 이곳에 누가 서 있느냐? 여러분 보기에 제가 서 있잖아요? 그런데 본인은 누가 있느냐? 이곳은 바로 성령님이 지정한 곳에, 성령과 사귐이 있기 때문에, 성령과 사귀는 자는 그곳에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럼 나는 뭐냐? 하나의 형식이 되고, 내용은 뭐가 됩니까? 성령님이 되죠.

성령님이 되니까, 성령님이 날마다 뭘 내리겠어요? 지시를 내리고 명령을 내리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나름대로의 뭘 가지면 안 되느냐, 목적이나 목표를 절대로 가지면 안 되는 겁니다. 모든 스트레스는 여기서 나와요. 사람이 사는 스트레스가 뭡니까? ‘반드시 이거는 하고 말리라!’ 하는 그것이 자기를 망칩니다. 자기를 파멸시켜요. ‘이걸 해가지고 남한테 꿇리지 않고 과시해야지!’ 이게 자기에게 서서히 이루어지는 자살입니다. 자살. 자기에 대한 자기폭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그 예가 뭐냐 하면 사법고시 번 떨어지고 7번 떨어졌을 때에, 그렇게 판사가 된 아들을 보고 싶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돌아가시고 난 뒤에 8번째 합격했습니다. 합격증하고 소주하고 마른오징어 들고 어디로 가느냐? 아버지 무덤에 가서 엉엉 울죠. “아버지여! 아버지! 제 성공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다니요?” 자식도 아니에요. 자슥. “이 자슥 성공한 것을 좀 보세요?” 지금 그 자리에 누가 있습니까? 남들 보기에는 본인만 엎드려서 울고 있죠? 그러나 그 자식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죽은 아버지가 들어있죠. 육의 아버지죠. 그게 모든 인간입니다. 프로이드는 말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버지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다.”

그게 뭐냐, 예수의 이름이 아니고, 약속의 이름이 아니고, 모든 인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아버지가 죽었어도 자기 행동을 절제하고 조정하는 것은, ‘우리 아버지가 보시면 나를 이쁘다 할까? 나쁘다 할까?’ 그게 교육이 되고 그걸 가지고 아이덴티티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주체성이에요. 쌓이고 쌓인, 훈계 받은 그 훈계가,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 되고, 그것이 나의 자아가 되고 그렇습니다. 참 그건 비극이에요.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라는 것이 증명됐잖아요. 죽은 아버지가 살아있는 나를 배후조종하는 세력이 들 때, 그 아버지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엄마가 그렇게 사랑해줬는데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다. 그럼 그 남자가 찾는 여자의 이미지는 누굴 닮았겠어요? ‘내 엄마 같은 여자 없을까?’ 결핍된 사랑을 마저 채워줄, 누가 나를 사랑해줄까? 누가요?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요? 윤복희죠. 뭐. 여러분! 누가 나를 위로해주나? 한 번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요? 누가 나를( ) 채워줄까? 여기 빈칸이 있죠. 빈칸. 이 빈칸이 있다는 것이 그동안 두려움과 공포를 잊은 겁니다. 이 빈칸이 결핍인데, 결핍의 장소가 있다는 것은 뭐가 없다? 완전한 기쁨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아예 없다. 이 결핍.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이 결핍.

나중에 실패하게 되면 스스로 뭘 끊느냐, 자아를 담은 이 그릇. 자아는 이미지요, 그릇은 육체입니다. 자아가 괴로우면, 너무 괴로우면 그릇을 깨트리겠죠. 이걸 두 글자로 자살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이유도 모르는 채 자살합니다. 이 캘거리를 보세요. 온도 18도, 습도 20도, 누가 와도 최적의 컨디션을 줄 수 있는 환경이잖아요. 천국 바로 밑에 999단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여기서 자살 없습니까? 이렇게 좋은 환경이라고 자살 안 할까요?

자살은 누적된 자기의 결핍을 자기가 못내 못 견뎌서, 자기가 마저 채울 수 있는 희망이 없을 때, 그 괴로움을 못 견뎌서 죽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처음부터 우리는 없던 자였는데, 주님이 주님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낸, 주님 자신의 노리개 감이고, 주님의 장난감이에요. 그걸 기뻐하심을 무슨 자?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고 해요. 기뻐하심을 입은 자. 우리가 어떻게 굴러도 “에구, 이쁜 것! 에구, 이쁜 것!” 이렇게 보시는 거예요.

그게 사귐이에요. 그게. 아니 도둑질 한 것도 예쁘다. 미치겠어! 정말! 창녀 짓 한 것도 예쁘대요. 창녀 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 예쁜 게 아니고, 어떤 짓을 해도 예쁜 이유가, 내가, 그 장소에 누가 있어요? 주님의 성령의 지시에 따라서 창녀 짓을 하는 겁니다. 가다가다 이제 진짜 막 가는 것 같은데, 여러분 지금 강의가 막 가는 기분이 안 들어요? 지금 얼마나 위험한 발언을 내쏟고 있습니까? 죄를 유발시키는 발언을 제가 지금 공개적으로, 그것도 유튜브에 올라간다고요. 우리끼리가 아니고. “잘 한다~ 목사가 돼가지고? 이 캘거리에 와서 난데없이 죄를 유포하는 유포자. 지카바이러스도 아니고 죄를 유포하느냐?”

한 번 생각해보세요. 죄가 뭔지를? 뭐가 유포된다는 것을? 죄는 배고파서 죄 짓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 없어서 죄 짓는 겁니다. 기쁨이 없어서.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억지로 만들다보니까, 내 소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1에서 와서 다시 1로 돌아가는 모든 것이 뭐다? 그게 이미 가만히 있어도 죄가 된다는 이 말입니다. 따라서 기쁨이 있는 사람은, 그것은 죄를 더욱더 죄로 드러나게 함으로써 기쁨이, 이런 죄에서 죄 값을 치렀던 약속의 위대함을 증거 하는 사람으로서 기분 좋게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죄를 더욱더 증거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죄를 더 늘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그 죄는 뭐냐 하면, 육신의 죄가 아니고, 성령의 법에서 나온 죄기 때문에, 그 끝은 이미 해결된, 십자가로 연결된 죄입니다. 그래서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옛날 같으면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면, 옛날에는 이런 핑계대고 넘어갔어요. “이거는 하나님이 지키지 우리는 못 지킵니다.” 하고 넘어갔던 것을,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아!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아는 것도, 이것도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의 리스트에 포함이 되는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니까, 이런 지킬 수 없는 죄까지 다 지불을 해줬으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따라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나는 죄졌습니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하는가 하시는데, “세상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제가 그만 알아버렸습니다. 이런 죄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게 미쳤나?” 그럼 다른 사람이, “당신이 그 따위로 이야기하면 우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없게?” 이렇게 되면, “맞습니다. 그게 로마서 3장 10절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내가 주의 종으로서 증거 하는 거예요.”

그럼 이것을 오늘날 목사님들이 하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 제가 설교합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죕니다.” 이렇게 하거든요. “아이구, 목사님 설교 준비하느라고 그렇게 애쓰셨는데,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시는 것도 죕니까?” “죕니다.” “그럼 목사님 지옥 가지 않겠나?” “지옥 가죠. 근데 지옥 간다는 육을 가지고, 약속이 안을 절개해가지고, 지옥 가는 육에다가 약속을 담아버리니까, 세상에 나 같은 무가치한 인간도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희망이 있습니다.” 이게 복음이죠. 이게 복음이잖아요. 이게 기쁨이잖아요. 이게 사랑의 나눔이잖아요.

결국 오늘 마지막 강의 핵심은 장소에요. 장소. 요한일서 4장, 5장의 내용의 핵심은 장소입니다. 그럼 그 장소의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를 4장 4절을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아하, 이게 참 무서운 말이에요. 여기 하나님 안이라고 표현했고, 거기에 대적되는, 대비되는 개념이 무슨 개념입니까? 세상에 있는 이. 그럼 세상은 자체적으로 뭐다? 하나님의 적이죠.

우리는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세상 안에 살고 있죠. 그럼 세상 안에 살고 있다는 자체가 뭐다? 하나님의 적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성령 안에 있다는 말은, 세상 안에 있으면서 또 다른 세상과 단절된, 또 하나의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 안에 이미 성령께서 형성해놓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걸 갈라디아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안이라고 하는데, 십자가 안은 조금 있다가 설명해드리고요. 어쨌든 지금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안이 어디 있다? 세상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 안, 천국은 어디에 있는 거예요? 세상 안에 있는 거죠. 이런 세상에! 세상에 이런 일이! 하늘만 쳐다봐요. 하늘만. 세상 안, 이미 성령 안에 있는데. 항상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고. 로마서 14장 17절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하늘나라는 어디에 있다? 성령 안에 있는 거예요. 성령 안에는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주님이 있고 사귐이 있으면 내가 갑이 아니고 을이 되는 기쁨. 내가 그분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다는 그 기쁨. 내가 알아서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것은 목적과 목표가 없다는 거예요.

목표라 하는 것은 모든 지향성의 마지막 지점을 목표라 하고, 그걸 바라보는 경향을 목적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삽니까? 나름대로 뭐가 있습니까? 목적과 목표가 있죠. 달성됩니까? 못 되죠. 결핍되죠. 실패하면 자살. 성공하면 새로운 목표를 또 세우죠. 그게 기업 활동이잖아요. 자본시장의 활동이잖아요. 회사에서 그래프 그리잖아요. 제가 시카고에서 어떤 집에 가보니까 벽에다 딱 이 한마디 써놨어요. 이 한 마디. ‘아! 저렇게 일하는구나.’ 이게 내가 아는 영어예요. 몇 개 되지 않는 아는 영어 중에 이게 하나 포함되었어요. “Well” 글자가 얼마나 큰지. 여러분, 이거 해석할 줄 알죠? 잘 해라! 이 말이죠.

그럼 언제까지 한 것이 잘 한 것입니까? 이게 나와 있을까요? 안 나와 있을까요? 끝도 없어요. 잘! 이케요? 아니! 요케요? 더더더더! 따박따박 월급 받아쳐먹듯이 더더더더 계속해서. 나올 것 없어? 나가세요. 수고했어요. 나가세요. 그 다음에 더더더더! 그게 뭐냐 하면 에임aim 목표, 골, 골인할 때 골. 목적, 마귀의 노예들입니다. 자기 육의 노예들이에요. 욕망의 노예들입니다. 기쁨요? 그거는 마약과 술로 잠시 대체될 수 있는 기쁨일 뿐이에요. 노래방? 목사님하고 노래방가야 되는데? 나는 노래방에 가기 싫어요. 왜? 어두워서. 갇혀서. 차라리 노래 부를 것 같으면 로키산맥 알프스에 가서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것처럼 라라라라랄라~♬하고. 마리아처럼 하고 싶다고. 마리아도 춤추다가 갑자기 뎅뎅뎅~♬ 잘츠부르크 성당에서 종소리 들리니까 후딱 모자 쓰고 내려가죠. 마리아도 또 종교에 매여 있네.

어떤 것도 우리를 얽맬 수 없습니다. 이미 합격된 자이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은 뭐냐, 4장, 5장이 그래서 어려운데, 이겁니다. 봐라! 옛날에 니가 저렇게 살았단다. 어디 안에서? 세상 안에서. 니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잖아. 하나님께 속한 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은, 니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저는 요새 이걸 두 글자로 표현 합니다. 웰well은 지웁시다. 웰well은 없어요. 하나님 나라에 잘하는 것 없습니다. 잘 순종하는 것 없습니다. 순종은 자비를 모독하는 거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하면 돼요.

뭐냐 하면, 이게 드론 같은 인생. 드론 알죠? 붕 떠서 날아다니는 것. 이 세상을 독수리처럼 위에 붕 떠서 바라보는 것. 꼬라지하고는? 이것이 아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너의 어머니의 이름은 자유니라. 육에 있으면서도 다른 장소,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니가 육에서 하는 그 죄를 바로 옛날에 니가 한, 이미 합격되기 전에, 수능치기 전에, 수학정석보고, 정철종합영어보고, 학원 다니며 밤샘했던 그 모습, 그 실패를 즐겨라. 저는 저렇게 실패했고, 나는 이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평생 살면서 실패할거리만 계속 행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걸 사자성어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실패하시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실패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여러분 실패했습니다. 지금 근무 중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전부 다 이것 때문에 실패했어요. 돈벌이에 지장이 많습니다. 실패했습니다. 근데 그 여유롭게 실패할 수 있는 사람, 마귀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마귀는 성공가지고 협박과 공갈을 칩니다. 니가 헌금 안 하고 십일조 안 하면 저주받아! 이럴 때 이렇게 하세요. 그 저주 저한테 좀 주세요. 왜? 그래서 제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좀 알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땅에서 변함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람들에게 실패자였습니까? 성공자였습니까? 실패자였죠. 세상에, 실패자를 믿는다는 것은 이거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거예요. 그저 누굽니까? 스티브잡스를 믿지, 예수는 안 믿어요. 마이크로소프트사 회장 빌게이츠를 믿지, 예수를 안 믿잖아요? 누가 예수를 좋아합니까? 빌게이츠를 하게 되면. 심지어 바라바라는 강도보다 더 못하게 취급받은 분이 예수님이잖아요. 빌라도의 재판에서.

그래서 인간이 좋아한다는 것은 결국은 예수가 갖고 있다는 전능하다는 능력을 이용해서 내가 독자적으로 성공해서, 내 목적과 목표를 하나님의 힘까지 동원시켜가면서 기어이 달성하겠다는 그런 수법에 지나지 않아요. 세상에 이런 마귀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걸 또 교회에서 긍정하니까, 마귀가 성전인지, 마귀의 전인지, 신전인지, 구분도 안 돼요.

자, 그렇다면 끝에 5장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혜택이 어디서 왔느냐? 이런 혜택이 어디서 왔는가? 앞에 있는 것은 다 장소문제니까 다 이야기한 겁니다. 5장 6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였고” 아! 이 대목! 생뚱맞게 갑자기 물과 피가 왜 나오느냐는 말이죠. 곤충은 머리와 가슴과 배로 되어 있다. 이게 생물에서 말하는 곤충 분류법이에요.

예수는 뭐로 되어 있는가? 지금 이천년 신학계에서 주장한 바로는, 예수는 인간과 신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 게 성경에 안 나옵니다. 뭐가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이다. 아다나시우스 교리, 삼위일체 교리를 완성하면서 내민 하나의 시국선언 같은 것이 그거거든요. 삼위일체는 뭐라고 했습니까? 전 국민을 신자로 만들기 위해서 문장하나 만든 거예요. 삼위일체 자체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자체가 없어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런 것은 있는데 삼위일체라는 것은, 위라는 체에 단어를 집어넣는 구절이 없어요. 어디 위가 있고, 어디 체가 있습니까? 삼위일체 할 때 위와 체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에요.

성경에서 쓰지 않는 단어를 집어넣었다는 말은, 이거는 누굴 위함이다? 복음을 위함이 아니고, 뭘 위함이다? 구원을 위함이다. 구원을 위함이죠. 생로병사 고생 많은 세상에서 희망이라는 것, 나중에 목적 찾다, 목적 찾다, 정 찾을 수 없으면 천당이나 가자. 이런 인간의 근본적인 구원의 욕구를 이용해서 교회들이 이렇게 지어낸 거예요. 이 요한일서가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은 절대로 바깥으로 뛰어나갈 수 있다? 없다? 없어요.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예수님을 분해할 때, 인간과 하나님이 아니라 뭐로 분해했어요? 물과 피와 성령.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단절됨. 단절된 겁니다. 자, 물어봅시다. 세례요한의 기능은 독자적이었습니까? 아니면 오실 분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까? 오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한 것이 세례요한의 기능이죠. 그러면 세례요한의 모든 기능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겁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세례요한의 개인적인 아이디어가 아니죠. 세례요한의 물세례 기능은 어디로 이전 통합되느냐 하면, 뒤에 후발자 되신 예수님의 기능 안에 세례요한의 물세례 기능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럼 물세례라는 것은 뭐냐 하면, 물세례에 대해서 먼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죄를 유발하는 것이다. 죄를 유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학급에서 수학시험을 쳤습니다. 애들이 신났어. “몇 점이고?” “95점.” “니는?” “97점.” “니는?” “99점.” “아이구, 우리 담임선생님 좋아 하겠다. 우리 담임선생님이 우리 점수를 다 알고 있으니까.” “애들아! 수고했어. 시험 치느라? 내가 단팥빵 줄게.” 이 캘거리에 단팥빵 있습니까? 있어요. 세계 어디에 가도 이 빵만큼 제가 좋아하는 빵은 없습니다. 이럴 줄 알았는데, 담임선생님이 회초리를 이만큼 들고 인상 찌그리고 왔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애들 입장에서, “야! 나는 98점.” “나는 100점.” 지금 캘거리 평균이 95점 이상 됐을 때, 그들이 갑자가 뭘 봤습니까? 선생님이 들고 있는 회초리를 봤죠. 그럼 거기서 그 회초리를 봤다는 말은 그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우리가 뭔가 잘못한 게 있구나.’를 유발하죠. 발생하죠. 세례요한의 세례는요,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을 유발시키는 징표, 사인이 바로 세례요한의 물세례입니다. 죄 씻으라가 아니라 너희들이 죄 있음을, 잠복되어 있음을 바깥으로 그것을 드러내라. 심지어 이 돌멩이까지. 그런데 그것을 심사하러 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칭 뭡니까? 자칭 죄인이 아니고 자칭 의인으로 왔죠.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이 마지막 때에,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이때에 너희들은 뭘 보려고, 뭘 심사하려고 나타났더냐?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이 구원받을 것 같으면 이 돌멩이가 구원받을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아까 예를 든 담임선생님은 뭘 들고 왔다? 회초리. 실제로는 뭘 들고 왔다? 도끼. 도끼 들고 물에 빠질 사람은 빠져. 물에 빠졌다는 말은, “맞습니다. 우린 죄인 맞습니다.” 하는 사람들은 물에 빠지겠죠.

그런데 빠지라고 겁주고 있는데, 여기 누가 빠지느냐 하면, 난데없이 수영복도 안 입고 예수님이 풍덩 빠져버렸어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이것들이 말이야!” 세례요한의 모든 엄포는 사실이지만, 세례요한은 자기 기능이 아니고 누구 기능이냐 하면, 세례요한의 뒤에 오실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세상은, 아까 이야기한, 세상 안에 있는 자체는 뭐다? 육이고, 그게 죄가 되고 단절이 되고, 구원이 안 돼요. 단절된다 이 말이죠.

따라서 세례요한은 폼 잡고 있는데, 예수님 기능을 대신하고 있는데, 아니 자기한테 그런 기능을 먼저 하라고 한 예수님이 물에 뛰어들었으니까, 헐~!! 이 신학체제를 어떻게 구성을 해야 되지? 이 신학체제를? 그것을 요한복음 1장 30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온 자가 나중 된다는, 개념상 절대로 섞일 수 없고 연결될 수 없는 단어 두 개가 나옵니다. “내 뒤에 오신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 분이 나보다 먼저 된 자다.” 이것을 불교에 갖다 주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심지어 교회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뜻일까요? 세례요한은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잖아요.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관계가 장차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창녀질 하고, 내가 세리질 하고, 내가 도둑질 하게 된 것은, 이게 내 뜻이 아니고 누구 뜻이었다?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의, 그 분의 속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어떤 속성? 어떤 죄도 용서받는다는 속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과도한 자비성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세상 죄의 일부를 내 담당으로 하고 살도록, 평생토록 살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주신 겁니다. 그것이 뭐냐, 사귐이에요. 요한일서는 사귐입니다.

그래서 죄 지으면서 흑흑흑큭큭큭~하면서 웃어야 된다 이 말이죠. 처음에 울 때는 ‘나 같은 인간이 왜 이리 되었어?’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게 ‘이래야만 한다는 것.’ 그래야 예수님을 증거 한다는 것. 그 관계성 안에서 이미 영생이 된다는 것. 주님께서 에덴동산 막아놓고 넘어 온 것은, 막을 때는 언제고 넘어올 때는 언제냐? 막을 때는 구원 못 받게 하기 위해서, 저주받기 위해서 해놓고, 넘어올 때는 복음을 위해서 저주도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저주가, 죄가 재료가 되어야 주님의 주 되심과 복음이 성립이 되기 때문에, 죄를 얻기 위해서 이 죄 많은 세상에 뛰어들었는데, 그 뛰어든 확실한 증거가 뭐냐, 죄인들만 받아야 될 그 물세례에 누가 뛰어들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뛰어들었죠. 그래서 여기서 어떤 공식이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은 뭐다? 예수님은 물이다. 그게 요한복음 3장에 나옵니다. 니고데모한테 거듭나야 한다, 두 번째 태어나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럼 첫 번째 태어난 것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물세례를 말해요. 세례요한에 의해서 인간은 이미 규정되었어요. 뭐로 규정됩니까? 죄인이라는 규정이 된 거예요. 그럼 죄인으로 규정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죠.

죄인으로 규정돼도 구원 못 받고, 죄인으로 규정 안 되도 구원 못 받고, 구원을 위해서 온 게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증거 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모든 성경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증거기 때문에. 다만 자기 백성을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취지, 예수님에게 담긴 취지를 펼쳐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그들이 일어난 일이 자기를 알리기 위한 절차로써, 카펫으로써 사용하신 겁니다. 둘둘 말면 주님 쪽으로 다 감기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이에요.

그 다음에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내 뒤에 오실 분은 불의 세례를 받는다고 했죠. 그 불의 세례가 뭐냐 하면, 내가 받을 세례가 남아있다고 해서 그게 뭐냐,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물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피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확정하고 성공하고 난 뒤에 성령이 와요. 이미 다 이루었다. 이루시고 나서 그 다음에 부활하셔서, 부활의 영으로, 부활의 영이라는 말은, 어떤 마귀도, 어떤 율법도, 어떤 죄도, 이미 그걸 빠져나와서 도로 나온 힘이기 때문에, 빠져나온 힘은, 그건 발목을 잡을 수 없게 하는 힘이기 때문에, 바로 뭐다? 성령이고 부활의 힘이에요. 이미 빠져나왔기 때문에, 출입구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마귀가 아무리해도 그걸 막을 수가 없어요. 얼마든지 탈출이 가능한, 주님이 탈출했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에요. 예수님이 탈출한 그 능력으로 우리를 뒤집어씌워버리면, 그 안에 있으면 우리도 어떤 저주나, 율법이나, 마귀나, 그 어떤 죽음도, 우리의 영생을 더 이상 막을 자가 없다는 것을 확정짓죠. 그래서 예수님은 물이요, 피요, 그 다음에 예수님은 성령이다 말이죠. 이 세 개를 그냥 합치면 뭡니까? 이게 바로 예수님이 갖고 있던 예수님의 본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걸 한마디로 말해서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단절된 것을 잇는데 성공했다.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래서 요한일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성령의 책입니다. 제가 아까 50분해야 되는데 뭣도 모르고 55분 했거든요. 이번에 5분 깝니다. 주의 뜻은 아닌데. 그리고 그 셋이 뭐냐 하면, 그 셋을 증거 하는,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성령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사귐을 통해서, 기쁨을 통해서, 그 사랑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가 2장에서 뭐라고 했죠? 저는 기억도 못하겠다. 이거 말씀하고 모든 말씀을 접겠습니다. 지금 이야기가 4장, 5장, 다 한 거예요. 장소문제니까.

아가 2장 6절에 보면,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어떤 시추에이션이죠? 여자는 남자 품 안에 꼭 안겨있는 모습이죠. 이게 사랑의 관계라 이 말이죠. 갑이 되는 남자가 을이 되는 여자를 어떻게 합니까? “지켜줄게! 내가!”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별들의 고향에서 하는 것처럼. “지켜줄게! 내가!” “니 이름이 무엇이냐?” “라온입니다.” “그래? 라온이야! 구름으로 달빛을 그려줄게!”

몬스터 드라마에 도도그룹의 총수 도충이가 회개하고 난 뒤에 기도합니다. “자, 우리 하던 대로 하자! 아버지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 죄 지은 것을 회개하게 해주시고, 넘치는 사랑으로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장면이 나와요. 몬스터 제일 마지막 회 50회에 나와요. 어제 한 겁니다. 한국에서. 몬스터. 여기는 캘거리라.

그 드라마에서 개인구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거예요.“예수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런 것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 여호수아라는 것은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죄인이 되는 경우, 어느 정도로? “주여 저 같은 것은 구원 안 해주셔도 됩니다. 나는 육입니다. 그냥 방치해도 상관없어요.” 그럴 때, “주님이여, 저의 구원을 위해서 온 게 아니고 복음을 위해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위해서 저에게 찾아오신 것을 저는 압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사귐이고, 이게 복음이고, 요한일서의 주제입니다.

이미 마귀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마귀의 협박과 공갈, 다른 말로 하면 행함에서 오는 협박과 공갈에 더 이상은 속아 넘어가지 않기! 우리 약속해! 그거는 누가 행함으로 공갈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자책하고, 내가 나에게 벌세우고, 손들게 만들고. 나를 때리지 마소서. 꽃으로도 나를 때리지 마세요. 자기가 자기를 때리지 마세요. 그냥 사시되, 현재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준비해놓은 그 하늘나라의 지시사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 꿈같은 세상을 꿈인 줄 모르고, 현실이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씀 보니까 이 현실이 나를 위한, 나의 생존을 위한 현실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한 깔아놓은 카펫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 장소에 살면서 괴로워하면서도, 고생하면서도, 실패와 낭패를 거듭하면서도, 이미 우리의 영생은 전혀 지장 없음을, 날마다 미소와 기쁨으로 고백하는 사랑의 관계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오른손과 왼손이 저희를 꼭 껴안아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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