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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8 20:43:27 조회 : 4499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복음의 생산) 전체영상보기 이름 : 최지영(IP:175.213.185.56)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골로새서'강해

 

제목: 복음의 생산
강사: 이근호 목사

 

음성1         음성2          음성3      음성4       음성5        음성6        음성7        음성8       음성9 

 

 

※현재_ 1~9강이 업로드 완료 되었습니다.

(아래▼ 영상 상단의 제목 텍스트를 클릭하시면 다른영상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링크 : https://youtu.be/a64G26D29jA?list=PL5N4qFOJSulxSFOyTDzCDyClrBhAtQ2li, Hit:251
 관리자(IP:119.♡.94.40) 17-01-11 06:40 
1강 이외의 강의는 1강 왼쪽 제일 위에 있는 세 개의 막대 그림을 치든지 아니면 위부분에 나열된 글자를 쳐도  나머지 8개의 강의도 뜹니다.
 한윤범(IP:119.♡.174.48) 17-01-14 12:11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1강 [장소 없는 장소]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어디에서나 주께서 함께 계십니다. 늘 주의 품안에서 살다가 오랜만에 얼굴을 보았습니다. 다시 흩어진다고 하더라도 사람 얼굴보다 주님의 얼굴을 더 사모하고 가까이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께서 말씀으로 주셨기에 의로 사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하셨기에 이 말씀 속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있고 영생을 받고 있는가를 저희들의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번 수련회 강의는 골로새서입니다. 골로새서에서 특별히 사람들이 상당히 난감한 대목이 있어요. 그게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가지 말라”

상당히 간단해요. 위 쳐다보고 살면 되니까. 그 다음 3절이 문제가 됩니다. 쳐다보면 되는데 어떤 상태로? 살아있는 상태로 쳐다보면 일반적인 종교와 별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3절은 이렇게 돼있어요. “너희는 죽었고” 죽은 자가 뭘 쳐다봅니까? 살아있는 상태가 되어야 쳐다본다는 것이 성립이 되는데.

그냥 “너희는 죽었고”라는 말을 빼고 1절과 2절,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 뒤의 말씀은, “우리는 살았어. 그러니까 산 사람답게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자.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구나.”라고 굉장히 간편하게 모든 것이 정리정돈이 되는데 3절에서 “너희는 죽었고”라고 돼있어요. 우리네 상식은 죽은 자는 쳐다보고 할 것도 없어요. 바짝 마른 뼈다귀가 뭘 쳐다봅니까? 흙이 된 상태에서.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라”라고 돼있거든요.

그럼 여기서 난처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죽었다면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면 생명이 있는 곳에서 다시 지상을 내려다보든지 이렇게 되거든요. 생명이 있는 곳은 이 땅엔 없잖아요. 하늘에 생명이 있다니까 하늘에서 다시 이 땅에 내려다봐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생명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라고 돼있어요.

그래서 여기 1절, 2절은 쉽게 넘어가다가 3절에서 “너희는 죽었고” 여기에 그만 덜커덕 걸리고 마는 거예요. 너희는 살았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에 있으니까 위를 쳐다보라고 해야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왜 여기에 “죽었고”란 말을 구태여 집어넣을 필요가 뭐가 있느냐? 살았다고 해도 앞뒤가 맞는 것 같은데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가 편하게 생각할 때 중요한 걸 놓친 게 있다는 겁니다.

첫 번째 강의 제목은 이렇게 정했습니다. [장소 없는 장소] 장소 없는 장소라는 것은 현실이 단일현실이 아니고 다중현실이라는 겁니다. 이걸 골로새서를 3장에서 언급하고 있어요. 단일현실이 아니고 다중현실이라면, 단일현실에 있으면서 자기 딴에 신앙 좋다고 하다고 만약에 다른 현실에서 너는 신자 아니라고 한다면, 단일현실에서 신앙인척하는 게 전부 다 소용없게 되는 거예요. 다중현실 속에서 어디에서나 그것이 신앙인으로 또는 성도로써 확인돼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동안 우리는 보통 신앙생활 한다면 현재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은 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여기에 있고. 그래서 죽으면 하늘에 간다. 그러면 우리는 단일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계신다고 하니까 하늘을 쳐다보니까 하나님은 여기 계시죠. 하나님은 우리 바깥에 있다는 것을 ‘외재성’이라 합니다. 외재성이란 말은 이것을 기준으로 봤을 때 바깥 있다는 거죠.

그런데 외재성과 ‘바깥’이란 말과 차이가 나요. 바깥은 연결이 안 된, 그러니까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바깥이란 우리가 기껏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연결돼있는 외재성밖에 없는데, 바깥이란 것은 끊어진 상태에서 바깥을 언급하면 말씀에서는 바깥이 있는데 현실적으론 바깥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너희는 죽었고” 하니까. 살았고 하면 내가 있고 하나님이 계신 곳이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려면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살아있어야 되잖아요. 나는 살아있는데 살아있는 내가 생각한다. 이 세계 말고 다른 바깥 세계가 있다. 이렇게 된다 말이죠.

“죽었고”라고 한다면 이미 여기서 죽은 입장에서 바깥을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겁니다. 단일현실이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기는 거예요. 이게 다중현실이 되게 되면 여기 살고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중현실이 이 안에 들어와 버려요. 이 안에서 “이미 우리는 죽었고”가 새로운 현실로 새롭게 성립이 돼버려요.

예를 이렇습니다. 아토포스란 말이 있습니다. a-topos라는 말이 있어요. topos는 ‘장소’고, a는 ‘아니요’란 뜻이에요. 이걸 우리말로 번역하면 비-장소가 됩니다. 요 근래 이 말이 유명해졌어요. 정유라가 이화여대 시험문제에 이게 나와 버렸어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아포토스, 그런 말 없어요. 아토포스에요. 헬라철학에서. 장소 없는 장소가 있다. 이 말은 형식은 단일현실에서 통하는 형식을 가져오되 동반해서 다중현실이 이 안에 등장한다는 것. 형식은 똑같아요. 형식은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 단어를 쓰는데 그걸 붙잡으려면 그 뜻 아니거든,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예를 들어서 재림 같은 경우에 재림이 된다 할 때 “재림은 어디에 옵니까?”라고 묻지요. 재림은 하는데 어디에 옵니까가 안 돼요. 왜냐하면 재림하는 이유가, 단일현실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재림 해버려요. 그러면 재림의 공간개념을 날아가고 기다림만 있어요. 만약에 재림을 어떤 장소개념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현실에 있느냐 하면, 예수 믿었는데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하고는? 딴 데 가서 살고 싶다. 성경에서는 다른 곳에 가서 살 곳이 없어요. 힘들다하는 그곳이 천국이에요. 다중이거든요. 포개져있거든요.

A와 B라는 층이 포개져있다면 A에 해당하는 개념, 단어 따로 있고 B라는 것이 따로 있어야 될 텐데, 다중현실에서 바깥에 있는 현실이 안에 들어오면 우리가 사는 단어를 공유해서 함께 사용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편하게 주고받는 그 단어가 주님한테는 왜곡되어 전혀 안 맞는 단어가 돼버립니다. 대표적인 것이 ‘거룩’이거든요. 구약에서 거룩은 흠도 티도 오염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다중현실에서 거룩은 분리된 것입니다. 전혀 맞질 않아요.

이스라엘이 있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단일현실이에요. 이스라엘에서 구원은 애굽에서 나오면 구원입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다윗의 왕국을 이루면 그게 복 받는 거예요. 야곱이 아버지한테 빌미를 바쳤더니만 양이 늘어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게 단일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하박국에 가면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AI조류독감이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하리로다. 따라서 복을 받아놓고도 복 받았다는, 양이 늘어난다든지 소가 늘어난다든지 증거물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벌써 하박국에 들어가면 단일현실에서 다중현실로 넘어가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일현실에 살면서 복이라고 여기는 것을 손에 쥐려고 하는 것은 성경해석에 대해서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유명한 신학자들의 말대로 골로새서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골로새서에 대해서 손 뗀다. 그것을 우리가 보고 있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인지. 그 사람들이 그걸 왜 몰랐느냐 하면, 구약의 용어가 나오는 환경과 신약에 나오는 용어의 환경이, 구약은 단일현실이고 신약은 다중현실인데 그걸 몰라서 그래요.

그러면 다중현실이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 들어와 버리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라고 중첩이 되면 뭔가 들어왔던 구멍이 있을 것 아니냐? 그 구멍이 바로 신약에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빠져나가고 빠져나간 그 구멍을 통해서만 보혜사가 들어와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다른 계약서가 없거든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계약상대자가 안 돼요. 더러워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자기 아들만 계약상대자로 하나님께서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구원받는 모든 언약은 어디를 초점을 맞추느냐? 예수님이 나갔다가 성령이 오신 이 구멍만 주목하는 그 내용만 계약이지 다른 것은 계약으로 성립이 될 수 없어요. 그러면 이 구멍을 통해서 바깥세상으로 나가면 될 것 아닙니까? 바깥세상이 구멍을 통해서 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거예요.

다중현실이 되면 우리는 헷갈리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재림이 되고 마지막 불 심판 되면 전부 다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 눈에 익었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하는 것들이 다 날아가 버려요. 지구가 불에 타버립니다. 다 타버리면 주님의 영광 된 나라가 그제야 드러나죠. 단일현실에서 다중현실로 바뀌다가 재림이 되면 온전한 단일현실로 드러나고 마는 거예요. 그때까지는 힘들더라도 좀 참으세요.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은 보려면 계약 안에 들어가야 볼 수 있습니다. 계약 밖에서는 볼 수 없어요.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이 오시는데 성령이 뭘 가져오는데 예수님께서 단일현실 속에 다중현실로 살았던 그 안목, 관점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관점이에요. 세상 보는 관점, 세상 보는 기준점을 말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수입이 더 늘어나는 게 아니고 같은 세상을 보되 다중현실 속에서 세상을 보는 거예요. 그렇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린 겁니다.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했고 거기에 대해서 열두 제자 중에서 들을 귀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고. 왜? 성령이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성령이 오지 않았으니까 장소 없는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겁니다.

정리하게 되면, 다중현실, 내부와 연결된 외재성이 아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세계가 아니라 생뚱맞은 거예요. 바깥을 그냥 알 수 없는 이유가, 죽음을 통해서 이 땅에서 “죽었고”가 성립되기 때문에 살아있으면서 상상하는 세계 말고. 우리는 상상할 자격도 못 된다는 단일현실과 같이 죽어야 될 그 몸과 마음과 생각들 속에서 평소에 갖고 있던 천국이라는 상상의 세계, 유토피아는 그건 헛방이죠, 거짓말이죠. 그런 세계가 있을 리가 없지요. 그건 연결된 외재성이니까. 살아있는 우리가 그냥 상상하는 거죠.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이불 뒤집어쓰면 그 이불 위에 상상의 천국이 보입니다. 그게 정 안 되면 마약하든지 소주 먹든지. 힘들 때 상상하는 세계, 별자리처럼 말씀들이 끼어있는 세계, 요한계시록 21장이 막 연상이 되는 세계, 다 헛방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상상할 때 나는 죽어있는 것이 아니고 오롯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것은 골로새서 3장 3절과 달라요. 우리는 살아있다는 말을 자신한테 적용시킬 수 없어요. 죽었다는 말도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가 미처 몰랐던 죽었다와 살았음을 예수님의 다중현실의 관점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다중현실 안에 들어오게 되게 되면, 외재성이 아니고 바깥이라 했습니다. 들어오게 되면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이걸 숫자로 하겠습니다. 1+1은 2지요. 1+0+1, 이것도 2지요. 이걸 보통 우리는 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같지 않아요. 안에 ‘0’이 들어있는 거예요. 물리학자들이 이걸 간파했어요.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밑이 있는데 밑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창세기에 나와야 될 그 이야기가 현대 양자물리학에서 언급한다고.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왔다는 거예요.

하여튼 과학자들은 고민이에요. 분명히 뭔가 있거든요. 컵이 있는데 이걸 잘라보자는 거예요. 그래서 잘라봤어요. 분자, 원자 다 잘라봤어요. 잘라보고 잘라 봐도 끝까지 남아 있는 입자가 있어요. 이걸 또 잘라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이젠 자를 칼이 없네. 너무 작아서. 그렇다면 거기서 멈출 인간들이 아니잖아요. 입자가 어디서 나왔는가? 비전문가들이 막 물어대는 거예요. 답변을 해야 될 텐데 어디서 나왔다고 이야기해야 될 텐데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때부터 과학이 아니고 완전히 종교가 돼버립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마구 뿜어내기 시작합니다. 끈이 있는데 끈이 진동을 하는데 1초 10의 42승으로 빠르게 진동하면 뭔가 나온다고 온갖 것 다 하고 있거든요.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현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1 밑에 0이 깔려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처음부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잃을 것도 없다. 이게 현대과학이라는 종교가 내세우는 윤리입니다. 그냥 살대로 살아.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야? 인생 실패했다고 애닮아 할 필요가 뭐 있어? 상당히 종교적 냄새를 많이 풍기지요.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사는 것이나,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요, 비슷한 구석이 있지요.

요새 유행하는 종교는 과학밖에 없어요. 과학만이 유일한 종교에요.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밖에 없으니까. 모든 학문은 과학이 밑바탕 돼서 나오는 거예요. 과학적이 아니면 미신이라고 유포되는 입장에서 과학만이 최종 진리인데 과학에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생겨났다. 생겨나는 과정을 교재에 써놨는데 그건 선택사항입니다. 보면 보고 말면 말고.

그러면 성경에서는 어디에서 나왔느냐? 이걸 언급하거든요. 그 언급이 우리가 하는 질문과는 달라요. “그것이 여기 있다.”와 “내가 여기 있다.” 이것이 서로 같지 않습니다. 그것이 여기 있다고 하면, 지명할 수 있지만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은, 여기에 내가 들어가면 답변이 안 돼요. 왜냐하면 내가 먼저 있고, 내가 어디서 나왔는가는 묻혀 들어갑니다. 해답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떻게 보는지 욥기에서 해답이 나옵니다. 욥기 10장 5절에 이렇게 돼있어요.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나희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하시나이까” 이걸 설명하면 이래요. 욥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에 인생을 사는 이유는, 주께서 다중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제가 여기 태어났잖아요. 주님의 날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장차 주님께서 나처럼 이렇게 산다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욥이라는 저를 먼저 이 땅에서 인생을 살도록 했잖아요. 주님 증거하라고 살게 하셨으면 왜 이렇게 저를 힘들게 저의 죄를 다 찾아내려고 저를 괴롭히십니까?

여기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자연을 못 이겨요. 대자연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인간 쪽에서 자연을 해쳐가면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 진리를 찾는 게 결코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인간은 자연을 못 이긴다는 말은, 배고플 때 밥 먹어야 되고, 잠잘 때 잠을 자야 돼요. 인간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충동을 이길 수 없어요. 이것은 진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신앙생활 잘해도 돈 밝히고, 남한테 욕하고 싶을 때 참아낼 재주가 없어요. 신앙생활은 무슨 신앙생활을 해요. 자연한테 늘 굴복하면서. 자기 속의 자연도 이기 못하면서 뭘 거룩한 생활을 해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자연을 이기기 못한다는 말은, 자연한테 지면 돼요. 자연에 복속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다중현실이라 했지요. 다른 말로 하면, 자연 속에 갇혀 있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자연이 있어요. 자연과 자연 사이의 만남에 의해서 특이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분이 바로 인간이에요.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동물은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지만 인간은 내가 누군지를 묻는다는 거예요. 이게 다른 동물과 차이 나는 특이한 점이라는 거예요. 다 같이 자연 속에 주눅이 들어서 비 안 오면 농사 못 짓고 몸 아프면 죽어야 돼요. 어떻게 자연을 이깁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화가 나네. 왜 화가 나느냐 하면 신앙생활 잘할 수가 없어요.

아까 어떤 분이 저한테 이야기했어요. “목사님, 오면서 날씨 참 좋았습니다.” 기분 좋지요. 주님이 내 마음에 있는 기쁨보다 날씨 좋은 기쁨이 더 좋지요. 이게 솔직한 인간이잖아요. 습도 괜찮고 온도 괜찮으면 갑자기 성령 안 받아도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이 그냥 막 나온다니까요. 왜 자꾸 자신을 속입니까? 자연한테 못 이기는데. 집안에 치매 걸린 어른이 있으면 온유, 화평이 나오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거기다 말도 안 되는 답변을 해대고, 서로가 일방적인 이야기를 해요. 꼭 촛불집회 같아. 서로가 무슨 말하는지도 몰라. 지는 지 이야기고 저쪽은 저쪽대로 이야기하고.

자연은 그냥 동물, 짐승은 순응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같이 주눅 들어서 꼼짝 못하고 살아가면서 이상하게 인간은 말합니다. “나는 누구지? 죽으면 어디 가지? 천국은 어디 있지? 지옥이 있기는 있겠어?” 이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특이하다는 겁니다.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게 골로새서 1장에 보면 나와요. 우리란 말이 계속 나옵니다.

다중현실에서 우리는 우리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한 그 새로운 우리, 여기서 내가 여기 있는데 나를 살리는 우리가 아니고 나는 일단 죽음에서 끝나버려요. 단일현실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은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그쪽 세계, 예수님의 세계에 있는 인간은 우리가 관여할 수 없어요. “저, 넣어주세요, 절 구원해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나 권리 자체가 원초적으로 박탈된 상태에 있습니다. “입 다물고 있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이게 예수님 뜻이에요.

빽 쓴다든지 그럴 수 없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새 언약이란 모든 인간을 제치고 언약 자리에 예수님 단독으로 서거든요. 그것을 인정한다면 우리가 살며시 가서 뒤에 같이 서면 안 돼요. 살을 빼려고 75인가 하고 저울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90까지 올라갔다. 보니까 다른 사람이 같이 올라서서 눈금이 확 올라간 거예요. 그처럼 예수님 자리에 살며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주께서 예쁘다고 쓰담쓰담 쓰다듬어 주는 줄 알아요? 그런 것 없어요. 네가 여기 있을 자리가 아니야. 아버지와 아들과의 계약 관계에 주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이 거기에 끼어들면 안 돼요. 신앙생활, 헌금 이런 것 다 헛방이에요. 해도 소용없는 이야기라니까요. 교회 가서 헛짓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성경은 원초적으로 그런 것을 주께서 받아준 적이 없습니다.

그런 게 없어도 왜 자꾸 하느냐?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는 거죠. 누가? 내가. 왜? 안 죽으려고. 안 죽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게 단일현실로 생각해서. 바깥을 생각해야 되는 외재성을 자꾸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죽고 난 뒤에 가는 나라를 여기서부터 연결돼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끊어졌는데 상상의 세계, 유토피아를 천국이라고 오인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 이유가 나중에 나옵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어요.

현재 있는 단일자연과 새로운 자연이 오면서 충돌이 일어나고 충돌 속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세례요한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 이게 사실은 단일현실에선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축복으로 기다림의 나라이지 회개할 필요 없어요. 하늘나라를 그냥 기다리면 되지 물속에 들어가서 죽을 필요 없단 말이죠. 만약에 우리가 물속에 들어가 죽는다면 그동안 기다린 보람이 없잖아요. 살아있어야 반갑게 얼싸안고 마주안고 주님 기다렸습니다. 고생 많이 했다. 쓰다듬어 주고 할 텐데, 주님이 오셨는데 왜 물속에 기어들어갑니까?

이것은 세례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슨 나라냐 하면 심판의 나라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자연이 있다, 단일현실이 있다. 이걸 심판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따로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 심판이 인간들이 선과 악 사이에서 생각하는 그 심판이 아니기 때문에 문제에요. 우리가 날마다 선은 취하고 악은 버리겠다고 나름대로 심판하고 있거든요. 자기 자신을 심판하고 그 심판으로 남들도 심판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데 그렇게 되면 심판하는 당사자는 안 죽고 계속해서 버티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나는 믿음이 좋아. 아니야, 믿음이 나빠.” 믿음이 나쁘고 좋고 문제가 아니고 그렇게 판단하는 나는 안 죽고 계속 살아있다는 조건 하에 이것은 나쁘고 옳다고 판단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네가 뭔데, 네가 뭘 알고 판단해? 우리 자신을 없애버린단 말이죠. 그러면 바르게 살아서 구원받겠다는 당사자가 날아가 버리는데 천국은 무슨 의미 있습니까? 이것을 세례요한은, “물속에 다 들어가!” 집단 목욕하는 게 아니에요. 물속에 들어가서 기다려요. 왜냐? 그 물속에 풍덩 같이 뛰어든 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실 심판의 나라는 아무리 심판이란 용어를 쓰지만 그 용어는 단일현실에서 쓰는 심판과 다중현실에서 쓰는 심판의 개념이 달라요. 다중현실의 심판은 오죽 아버지를 유일하게 아는 아들만 알고 있는 심판 개념입니다. 열두 제자도 몰라요. 그래서 맨날 오해하잖아요. 천국에서 누가 높습니까? 예수님은 그럴 때마다 인자는 죽어야 하느니라. 제자들은 살아서 구원받으면 누가 높으냐고 하는데 예수님은 방향이 달라요. 나는 죽어야 하느니라.

그래서 다시 정리하면, 자연과 자연의 충돌에서 낯선 특수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인물이 늘 이야기하기를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죽는 것이 완성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한다면 자살하는 건 아니고 분명히 죽이는 주체 세력이 있어야 돼요. 그 세력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던 그 당시 자연세계에서 유일하게 이스라엘로 택한 백성이라고 우겼던 그들이 특수한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죽여야 됩니다.

이것을 일반성이라 합니다. 일반성의 반대말은 개별성이고, 보편성의 반대말은 특수성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특별한 개별자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일반적인 것에 속해요. 보편성은 서로 달랐는데 같은 것, 촛불집회. 서로 직업이 다른데 박근혜 퇴진을 같이 요구하는 건 보편성이고, 일반성은 반대에요. 서로 같은데 외양 모습은 다 다른 것. 일반적이라 하는 것은 모습은 달라도 생각은 하나고, 보편성은 직업은 다른데 생각은 같은 거예요. 둘 다 똑같은데 사건이냐, 사물이냐, 설명할 때 이렇게 바꿔 설명하거든요.

어쨌든 예수님은 일반성에 치고, 보편성에 치는 거예요. 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계약자기 때문에. 일반성, 보편성은 어떤 역할을 하냐? 계약에 도움을 줘요. 죽여라. 우리는 살아 마땅하고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거예요. 이렇게 될 때 예수님은 살아 마땅하고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계약이 성립되는 겁니다.

다중현실은 바로 형식을 기존 것에서 차용하여 동반해서 나타나는 거예요. 바깥 현실은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바깥 현실을 포착할 언어는 없어요.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언어를 차용하는 겁니다. 같은 단어를 쓰면서도 서로 뜻이 다른 정도가 아니고 대결하고 충동해요. 예를 들면 기도하자. 일반현실에서 기도하자는 것은, 기도하는 행위자가 원인자가 되어서 기도의 결과가 응답이란 모습으로 나타난다. 원인은 누구라고요? 기도하는 당사자가 있어야 돼요. 기도하는 행위가 먼저 있고 그 결과물로 응답이 연결돼있다. 이게 일반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뭐냐? 인간들이 일반적으로 보편적으로 하는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예수님이 하는 기도가 응답이 되는 거예요. 가룟 유다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안 팔리는 것처럼.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줘야 주님은 계속 우리 손에 죽어가는 겁니다. 얼마나 우리가 공로자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의 시작점을 우리로 꼽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렇게 예수님을 욕 되게 한다면 차라리 그런 기도 안 하겠습니다.” 하는데 일반성과 보편성에서 허락 없이 빠질 수 없는 권한이 우리한테 없어요.

우리가 기도를 안 하잖아요. 갑자기 500미터 앞에서 교통경찰이 나타나서 “주여, 살려주옵소서.” 대번 기도하게 만들어 버려요. 기도를 안 하고 싶어도 갑자기 집안에 우환이 일어난다든지 발을 삔다든지 하여튼 사소한 일 같은 것. 주례를 맡았는데 차가 밀려서 결혼식에 참석 못할 때 “주여, 빠른 길로 가게 하옵소서.” 저절로 나온다고. 왜 그렇게 하느냐?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통하기 때문에 그 인간이 기도 안 하고 싶어도 기어이 간절한 기도 목숨 거는 기도를 하게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데 한 몫 하도록 주께서 선하게 인도하셔요. 합력하여 선하게 인도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한다. 아니에요. 내가 뭘 하고 있다. 그것도 아니에요. 나에게 무슨 일이, 이상한 일이 이뤄지고 있어요. 내가 생각도 못한 이상한 일이 나한테 벌어지고 있어요. 그 벌어진 일이 주와 관련된 일이라고 어떻게 아느냐? 그것은 그 일로 인하여 내가 점점 더 이 땅에 어떤 원인제공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는 겁니다. 뭔가 벌어졌을 때 전에는 내가 기도해서 헌금해서 얻었다고 됐는데 갈수록 내 행함과 전혀 상관없이 뭔가 같이 있으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 그분이 원인자가 되어서 나는 그 결과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욥기에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보다 더 체계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단일현실, 다중현실 이렇게 현실 두 개, 또는 자연관 두 개 있다 했지요. 그리고 인간은 자연을 못 이긴다. 신앙생활 이겼다고 자꾸 우기지 마세요. 못 이깁니다. 아직 호된 맛을 보지 못해서 그래요. 인간은 자연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냥 자연이 시키는 대로 끌려갈 뿐이에요. 내가 기분이 좋았다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어요. 날씨가 좋다든지. 우리는 자연의 일부가 됩니다. 같이 움직입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자연, 새로운 현실을 몰고 오게 되면 몰고 왔다는 소문은 났는데 막상 등장한 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달랑 예수님 몸 하나입니다. 이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에요. 분명히 세례요한도 요란을 떨었는데 하늘나라가 닥쳐서 불세례를 받는다고 했는데 이게 하나의 허풍인가? 조용해요. 얼마나 조용했으면, 세례요한이 물었어요. “오실 분이 당신이 맞기는 맞습니까?” 그걸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례요한이 기껏 알고 있는 현실과 천국에서 성령 안에서 어린아이보다 더 못하다는 겁니다.

왜? 구약은 다중현실이 아닙니다. 단일현실이에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바로 세례요한이거든요. 세례요한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당시 유대인들과 같은 세계관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 오셔서 하늘에서 불이 막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불이라는 개념 자체를 다중현실과 기존의 현실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줄 알았어요. 우리는 불이 붙는다는 걸 알잖아요. 그러나 지옥불은 주님만 알고 우리는 모르죠.

방금 이야기한 걸 공식 같은 걸 만들어 볼게요. 여기서 예수님만 달랑 왔어요. 조용해요. 새로운 현실은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냥 외롭고 그리고 맥없이 힘없이 욕하면 욕먹고 귀싸대기 때리면 다 맞고 옷을 빼앗겨도 가만있고 잡혀있어도 큰소리치긴 해요. 지금이라도 천군천사가 내려온다. 그럼 해봐. 우린 그걸 보고 싶거든요. 그런데 안 내려와요. 고린도후서에선 주님께서 연약했다, 돌아가셨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들이 뭘 놓쳤느냐 하면, 이것이 사건이 된다는 것, 새로운 자연이 오면 예수님의 움직임 자체가 사건이 돼버려요. 사건이 되면 어떤 의미가 붙느냐 하면, 요한계시록 11장에 있거든요. 8절을 읽어보세요.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장소 없는 장소가 돼버렸어요. 단일현실에 있는 모든 장소가 다중현실에서는 사건 중심으로, 그것도 예수님이 죽었던 사건 중심으로 재집합, 재정비가 되고 정렬이 되는 거예요. 모든 사건이. 어느 장소에 예수님이 오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복음으로 욕 얻어먹는 그 장소가 소돔이고 애굽이고 그리고 갈보리 언덕이에요. 갈보리 언덕을 긍정적으로 보지 마세요. 갈보리 언덕이 구원받는 장소인 동시에 소돔이 되는 장소입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주의 복음으로 고난을 받으면 성도가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다중현실 속에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씀이 사건화 되어서, 예수님과 똑같아요. 새로운 성경적 의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계속 의미가 나오는 거예요. 너는 방금 갈보리를 건드렸어. 이게 대전이 아니고 애굽이야. 소돔과 고모라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공식으로 만들면 어떻게 되느냐? 공식하면 어려워진다. 할 수 없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합니다. 존재의 연합이 현실이 아니고, 위치의 연합인데, ‘위치의 연합=주체+권력’이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와 다중현실이란 새로운 공간에서 사건 안에 들어가면 공식이 있는데 어떤 공식이냐? 위치=주체+권력. 권력은 성령이고, 주체는 예수님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그전에 인간은 주체가 아니고 신체에서 나온 자아입니다. 자아는 자연에 속한 거예요. 예수님의 하늘나라에 속하는 게 아니고 기존에 여기에 속한 겁니다.

이런 공식, 우리가 쓰는 ‘위치=주체+권력’에서 위치가 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뭐냐? 권력에서 새로운 주체로 호명 받을 때 위치가 된단 말이죠. 이 공식은 심지어 멸망할 세상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나의 위치는 누가 나를 김 과장님, 박 과장님이라고 주체로 불러줄 때 나의 새로운 주체로써 위치로써 내 나름대로 이 세상에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엄홍길이 산에 갔지요.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나는 에베레스트에 갔다 왔다고 하죠. 그 이야기를 왜 하는 거예요? 이 사회에서 8000미터가 넘는 산 열여섯 개나 올랐다. 그걸 16좌라 하는데 나도 가고 싶은데 용감하게 갔다 온 사람 없을까, 할 때 여기 있다고 하게 되면, 엄홍길은 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 겁니다. 저 사람은 유명한 등산가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평소에 우리는 단일현실에서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 받아왔고 특히 부모로부터 양육 받아왔어요. “너, 공부 못하면 나중에 거지 되는 거야. 거지 돼도 좋아? 공부 좀 해.” 우리는 어디 속했다? 현재 단일현실 속에 일부가 되는 거예요. 현실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는 거고, 자연이 움직이면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신앙생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신앙생활 없어요. 그냥 자연에 적응해서 사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권사님이라고 교회에서 불러주잖아요. 그러면 나라는 것은 교회에서 권사라는 주체를 확립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체니까 그것이 곧 나라는 겁니다. 수상한 권력, 잘못된 권력이 나를 위치로 호명할 때 우리는 주체로 돼버린다 말이죠.

그런데 바깥 현실은 새로운 개념이 없어요. 이걸 그대로 모방합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와서 성도로 불러주면 성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권력이 어디서 나오는가? 이 땅에서 빠져나와요. 그것도 그냥 빠져나오는 게 아니고 미움 받아서 죽임을 당한 권력이 우리로 하여금 성도로 불러주게 되면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죽었고 주 안에서 새로 살았다는 새로운 주체를 부여 받게 되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다중현실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19.♡.174.48) 17-01-14 12:12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2강 [사라지는 유령]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을 정리 겸 진도 나가기 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었다고 말해선 안 되고,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생성하는 가운데 있다. 그렇게 되면 어른이 되었다는 게 주가 아니라 생성하는 그 변화가 그게 주안점, 중요한 점이 돼요. 그게 왜 중요한 점이 돼야 하느냐 하면, 아까 제가 과학 이야기했지만 다른 말로 하면 과학은 항상 존재의 있음을 이야기해요. 있는데 어떻게 있느냐? 입자로 있다. 과학자들은 입자로 있는 거예요.

입자로 있으면 문제는 여기서 이렇게 달라지는데 달라지는 이걸 찾아낼 수 없어요. 푸른 잎이 나중에 붉게 물들었다. 나오는 것은 푸른 잎이라는 그 조각은 있고, 나중에 빨갛게 되었다. 그 두 개는 있는데 어떻게 해서 푸른 잎이 붉게 되었는지 아무리 해도 그걸 다 찾아낼 수 없어요. 물론 중간 과정에서 푸르고, 붉고 반반 되는 것 하죠. 그래봐야 반 되기까지 뭐가 있는지 찾아낼 수 없어요.

뭐든지 입자가 있을 때 입자가 열여섯 개 있다고 하는데 입자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생성하는지는 인간은 알 길이 없어요. 그래서 달라졌다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렇게 되더라고 이야기하지 그 과정까지 찾아낼 능력은 없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그렇게 관찰하는 본인도 입자기 때문에.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 자체를 입자로 보지 않고 주님을 위한 사건으로 보는 겁니다. 우리는 태어났다, 출생했다고 하잖아요. 출생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땅에 출현한 것으로 봐요. 저도 자식을 낳았다고 생각했는데 요 근래 외손녀가 나타난 뒤에는 출생이 아니고 출현으로 봐요. 어디서 이런 게 나왔노? 아무리 해도 설명할 수 없어요. dna 논리해도 안 맞아요. 그냥 출현했는데 출현한 그것이 크면 클수록 자기 고집을 내세워요. 그 고집은 부모가 강요하고 지시한 게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말 잘 들기를 원하지 고집부리기를 원하지 않거든요. 이것은 부모가 가르친 게 아니고 뭔가 귀신이 씌웠어.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게 덧씌웠어요.

이유식 못 먹겠다는 거예요. 이유식을 먹어야 젖을 뗄 때가 됐는데 젖을 먹겠다는 겁니다. 이유식 먹는 입으로 달라져야 되는데 이걸 모르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강력하게 반항이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생성으로 설명해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구원을 구원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한 인간이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생성을 낚아채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왜? 주님은 사건을 일으키려 왔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나라는 입자, 이 덩어리가 천국에 가 있는 덩어리 되길 원해요. 그러면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생성하는 방법도 모르고 변하는 방법도 모르면서 되도 않는 고집을 내세우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나의 천국 가는 입자가 되려면 죽어야 된다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자는 그것을 공격하게 돼요. 입자가 공격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어떤 힘이 반항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일에 반항하는 것, 그게 누굽니까? 적그리스도, 악마 외에는 없어요.

악마가 자율적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악마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요.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체제 속에 입자로 만들어놓고 자기는 슬그머니 빠져나가요. 그래서 제가 낮 설교에서 그랬지요. 욥은 악마를 놓쳤다. 고난은 받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근거로 해서 매개할 줄은 상상도 못하고 그저 왜 이렇게 내가 아파야 되는지 모른단 말이죠. 결국 우리는 제삼자 입장에서 악마를 전혀 생각 못하고 있어요. 직접 주님과 상대해서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데 주님과 인간 사이에 일을 저질러놓고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그것을 사라지는 매개자. 매질, 촉매, 매개라고 말하는 이유가, 구약의 제사에서는 양이 되고 짐승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또는 성전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떤 물질성(물성화) 외에는 그걸 매개로 하지 않고는 만나질 못해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아담 이후로부터 자연 속에 있기 때문에 자연물이 아니면 하나님을 표시할 수 없어요. 그게 출32장에서 모세가 시내 산으로 가고 난 뒤에 아까 배웠던 일반성, 보편성이 나옵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여호와를 묘사한 것은 금가락지 던졌더니만 금송아지 나왔다. 금송아지가 바로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한 여호와라는 겁니다.

이것은 로마서 1장에 보면, 모든 자연물을 신의 은유로 사용했어요. 신을 신이라고 한 게 아니고 신을 표현하는 매개체가 자연물을 매개로해서 이야기한 거예요. 주님은 이걸 사건으로 보고 인간은 자연물이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별을 섬기고, 해를 섬기고, 달을 섬기고 그렇지요. “alba lux, diva mea, diva es silentissima” 방언하는 것 아닙니다. [팬텀싱어]에 나온 라는 노래 가사에요. “새벽의 빛이여, 나의 여신이시여 고요하시도다” 누굴 보고? 달을 보고. 사랑의 은유로 그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교회는 앞자리에 은혜 받는다. 이게 뭐예요? 물성화, 물질화. 기도할 때 두 손을 꼭 잡고 옥색 원피스 입고 하늘을 보면서 오늘도 무사히. 이렇게 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완전히 물성화로 포위됐어요. 사건 아니에요. 입자를. 은혜 받았던 사건이라고 그걸 입자화 시킬 때 우리는 안심하고 있습니다. 언제 구원받았어요? 날짜까지 동원합니다. 몇 년 전에 구원받았어요? 구원파들. 또는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 이것도 마찬가지고.

그게 우리가 종교성에 납득이 되고 설득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몸이 성전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래서 담배피우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성전에 담배피우면 주님께서 켁켁거리면 안 되니까 청년들이 담배피우면 안 된다. 성령이 연기를 피우는데 담배연기까지 피우면 얼마나 오염되겠어요.

이러한 매개문제가 상당히 중요하죠. 매개문제를 단편적으로 표현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두 문장을 비교해보세요. 웃음 잃은 고양이. 무슨 뜻인지 아시죠. 고양이가 웃을 잃었구나. 이게 1번이라면, 2번은 고양이 잃은 웃음. 이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고양이는 없는데 여운 남기면서 웃고 있어요. 얼마나 기괴합니까? 이게 아토포스에요.

아토포스는 기괴함이에요. 분해하면 장소 없는 것이 되지만 그 전체 뜻은 문학에서 기괴한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기존에 모든 의미와 단어를 동원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 그 무엇. 이게 이사야 53장에서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냐하면 주께서 이사야 6장에 예언하기를 너희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알지 못하고 눈으로 봐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 그것이 바로 다중현실이 기존에 있는 현실의 단어와 용어를 사용하면서 같이 섞여서 들어오면서 입자를 옹호하고 존재를 옹호하고 주님은 그것을 사건화 시키는 겁니다.

사건이 뭐냐? 생성이에요. 예수님이라는 입자와 너라는 입자 사이에는 내 쪽에서 사건화 된 힘이 아니면 너는 새사람이 될 수 없어요. 그것은 요한복음 3장 8절에서는 성령이 바람 같이 임의로 분다. 임의란 우연성이 나와요. 우연성은 사람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모든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변화시키는데 그 사건을 일으키는 내용이 뭐냐? 그 내용을 두 번째 시간 제목으로 하겠습니다. [죽음의 범람] 죽음이 차고 넘치는 거예요.

죽음의 범람은 이사야 37장에 보면 나오는데 어떤 대목이냐 하면,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는데 하루아침에 십팔만 오천 명이 죽어요. 37장 36절.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천사가 십팔만 오천 명을 다 죽였습니다. 아까 제가 이야기한 일반화, 보편성이란 말을 했지요. 입자는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의 주체로 보는 거예요. 왜? 동일한 권력 안에서 다뤄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죽였기 때문에 십팔만 오천 명이 죽었지만 하나가 죽은 거예요. 죽이는 사건입니다.

죽이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입자의 속성을 말해줍니다. 나는 언약의 위반되는 것은 그 사람의 인품이나 가정교육 보지 않고 그냥 죽여 버려요. 그 사람의 직업이나 나이 묻지 않고. 꼭 세월호 같아. 빠져죽은 아이들 중에서 기독교도 있고 불교도 있을 건데 일체 묻지 않아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빼주는 것 없습니다. 혹시 살아났다면 기독교 때문에 살아난 게 아니에요. 살아나서 더 반항질 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난 걸 강조하면 사건을 강조한 게 아니고 나는 살아남았다. 그래서 나는 신자다, 라고 자기 입자를 강조해요. 입자는 물질화에요. 하나의 매개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악마가, 오늘 오후에 그런 설교했지만 선과 악은 서로 반대가 되는 거예요. 반대기 때문에 통일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는 선과 악을 인간의 몸에, 인간의 마음에 통일시켜 집어넣고 자기는 빠져버렸어요. 이게 사라져버린 매개자에요. 악마는 인간을 혼란 속에 빠뜨리고 갈등 속에 집어넣고 지는 빠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인간은, 내가 선을 행해야 구원받는다. 그 선함 중에서 예수 믿는 선을 행해야 돼. 예수 믿는 착한 일이 나를 구원할 거다. 그때부터 고민에 빠졌어요. 예수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는데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예수 믿는 것은 어떻게 해야 잘 믿는 거냐? 이렇게 돼버려요.

이걸 악마의 무한이라 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나는 a다. 그 다음에는 나는 내가 a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 다음에는 나는 내가 a라고 생각하는 그런 나다. 계속 무한으로 가버리는 겁니다. 나는 반성한다. 반성한 나를 반성한다. 반성했던 나를 또 다시 반성한다. 언제까지 할까요?
계속 하게 만드는 거예요. 나는 40일 금식했다. 아니야. 모자라. 42일까지 했다. 안 돼. 나는 50일 한다. 안 돼. 60일 한다. 처음에 교회 올 때는 미안해서 점심값으로 천 원 냈다. 그 다음부터 감사헌금으로 오천 원 냈다. 아직까지 십일조는 안 되더라. 그러다 얼추 계산해보니까 점점 십일조에 가까워서 기뻤다. 드디어 십일조를 능가해서 십의 이조까지 했다. 어디까지 하렵니까? 십의 구조까지? 어디까지 할 건데요? 다 바쳐도 헌금 아닙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헌금 반해서 죽었지요. 만약에 다 냈다면 죽었을까요, 살았을까요? 죽었지요. 왜냐하면 받는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입자라는 내가 내고 입자라는 사도가 받는 방식으로는 생성이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입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달라지게 했던 주님이 관여하신 그것을 주께서는 도로 가져가잖아요. 성취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웃사랑 하라는 게 아니고 이웃사랑을 건집니다. 우리가 이웃사랑 해버리면 필히 그 이웃은 나에게 종속되고 나는 갑이 되고 그는 을이 되게 돼있어요. 여러분, 누굴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내가 만약에 어떤 가난한 집을 도와줬다 합시다. 그 집 앞에 갈 때마다 항상 발을 멈추게 돼요. 내가 15년 전 눈 오는 날 이 집에 떼거리 없어 울고 있을 때 쌀 한 부대를 몰래 가져다 줬다. 이걸 잊을 수가 없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했어요. 그게 되겠어요? 절대로 안 돼요. 네가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 네가 무엇이 있어야 될 것을 내가 아느니라. 이게 가능하겠어요? 기도 언제 합니까? 아쉬울 때 하잖아요. 그런 걸 기도하지 말라면 기도할 내용이 없는데.

사건이란 항상 예수님의 입자에서 나오는 속성, 그 내용만을 사건으로 계속 번져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는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한 입자, 존재가 되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나타난 입자가 아니고 파동이고 사건의 결과물입니다. 그렇게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1이고 예수님이 1이라면 그 사이에 0이 들어가면서 아버지는 예수님을 주로 만들어요. 그래서 언약완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로 만들 때 있다가도 없고, 없어졌다가도 생겨버리는 이런 우연적인 요소, 이게 누구겠어요? 인간이죠, 뭐.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간이 여기 끼어들어서 예수님을 주 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이 공식, 1+0+1이 성경 전체 공식입니다. 성경은 우리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래서 아까 이사야 37장 36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의 십팔만 오천 명을 쳐 죽인 자들 중에서 효자 있을 것이고 신혼인데 모병 되어 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 사람들도 나름대로 착하고 군에 제대하고 난 뒤에 취직하고 유학 갈 사람들도 있을 텐데 일체 그런 것 묻지 않고 한꺼번에 같은 질로 다 해버려요. 왜냐하면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대들었다는 겁니다. 단체로 대들었다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여러분들이 생각나는 것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단체로 일체 어떤 가치와 의미를 주지 않고, 생각나는 것 없습니까?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유월절 어린양이에요. 유월절 어린양에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상대하는 것은 양만 상대해요. 인간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장자가 살았습니까, 안 죽은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어느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어떤 입자, 덩어리, 아버지가 있고 내가 낳은 자식, 아들이 있다고 하는데 출생이라 하지만 사실은 출현으로 봐요.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내 아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했다. 문설주에 피를 발라라. 우리 같으면 아들의 피를 바르겠는데 아들의 피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계약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돼요. 나가 놀아라. 네 구원에 대해서 네가 나설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심지어 남의 구원이 아니고 내 구원인데도 불구하고 내 미래에 대해서 내가 간여할 틈을 주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어린양이 개입합니다. 이스라엘 장자 빼놓고 봅시다. 애굽은 권력이죠. ‘위치=주체+권력’에 의해서 애굽에 있는 장자로 위치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빠져요.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주의 위치죠. 어린양에 대해서 심판을 행사해버립니다. 이스라엘은 일단 빠지고 애굽에 있는 사람은 하나 없이 다 죽은 거예요. 히브리인이 뭐고 간에. 다 죽은 이유가 뭐냐? 이들이 나중에 산 장자는 더 이상 집안의 장자가 아니고 여호와의 소유가 되는 겁니다. 그게 출애굽기 13장에 나와요. 살아난 사람은 더 이상 너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장자가 돼요.

그러니까 육의 장자에서 하나님의 장자로 넘어갈 때 필히 죽음이 필요한데 그 죽음은 자살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반드시 언약적 입장에서 상대자의 죽음의 개입돼야 돼요. 그럼 우리는? 발로 차는 거죠. 너는 하나님 일에 건방지게 끼어들지 마. 나가 있는 거예요. 어린양이 대신해서 이 집안은 죽었습니다, 하고 고백을 하게 되죠. 애굽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 아들이 다 죽고 히브리인들은 어린양이 대신 죽고.

그래서 어린양은 택한 백성만 위해서 죽은 거예요. 언약이란 거기에 적이 있기 때문에. 적들의 죄도 위해서 주께서 죽었다고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의 원수에 속한 자들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오직 어린양에 의해서 구원할 사람의 죄를 대신합니다. 성경 여기저기에 나와요. 어쨌든 여기서 해결 봤습니다. 어린양의 약속에 의해서 여호와의 장자가 돼요.

방금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아들었는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양이 죽었는데 왜 사람이 살지요? 이게 문제입니다. 사람은 산 적이 없어요. 역시 죽기는 마찬가지에요. 내 자식은 죽고 주님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집 아버지는 내 자식이라고 하면 안 돼요. 그럼 헤어질까요? 헤어지지 않아요. 그걸 매개자라 해요.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장자를 통해서 그 집안에 약속이 혜택이 주어지는 겁니다. 출애굽기에서는 무려 천 대까지 복을 받게 되죠. 장자 안에 어린양의 요소가 살아있는 한 어린양으로 인한 혜택은 계속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 혜택을 받을 입자가 있는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어린양의 속성을 보여주는 사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건화 된 상태에서 그 사람은 계속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운 걸 다 아시죠. 안 믿는 사람들도 알고 있어요. 그럼 질문 해봅시다. 왜 하필이면 다윗이 형들 도시락 가져갈 때 골리앗이 있었습니까? 따로 학교 화장실 뒤에서 둘이 한 판 붙으면 안 됩니까? 왜 다윗이 세냐, 골리앗이 세냐는 식으로 붙었어요? 이것은 결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아닌 겁니다. 다윗이란 입자와 골리앗이란 입자의 싸움이 아니고 골리앗을 골리앗 되게 한 위치와 다윗을 다윗 되게 한 위치와의 다툼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하실 전쟁의 일환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 싸움은 사람에 속한 싸움이 아니고 여호와의 싸움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여호와의 싸움이라면 여호와가 나타나야 돼요. 허연 도포입고 “alba lux, diva mea” 사제처럼 등장해야 되는데 여호와는 콧등도 안 보여요. 기껏 나타난 게 다윗, 그것도 소년 다윗. 이게 바로 시편 8편처럼 젖먹이로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는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벌인 그 사건은 기존에 악마의 권력에 있는 입장에서 볼 때는 충분히 무시할 만한 밟으면 밟힐 정도로 그런 모습으로 여호와의 속성을 드러낸 겁니다. 그 여호와가 이 땅에 왔을 때는 아무도 그분이 메시아인 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실력이 없고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이미 인간은 악한 권력, 또는 수상한 권력에 의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공격해대는 권력에 의해서 주체자로 이미 사용되고 있어요.

선악이야기를 잠시해보겠습니다. 선과 악은, 선+악은 하나로 통합이 안 돼요. 그 성격이 서로 대치되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로 묶어놨어요. 악마가 따먹어라. 따먹고 인간은 감당을 못했어요. 그래서 로마서 7장에 보면, 나는 선을 원하나 더 센 다른 나가 악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통합될 수 없는 여기서 어떻게 건져낼 것이냐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 받은 사도 바울의 고백 대신에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바로 선을 행한 자리에 더 큰 악이 나타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식, 또는 악마가 거기에 동원되는 방식을 몰라서 그래요. 선으로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위선자가 되는 거죠. 온통 교회가 사람을 위선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선으로 악이 돼버리면 사건이 아니고 입자가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건져내랴. 건져낸 그 몸이 성령이 임한 몸이 되면 졸지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건화 된 몸이 돼버려요. 사건화 된 몸은 물질화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죽어도 좋아요. 흙이 돼도 괜찮아요. 하루하루 주님의 도움 받고 살기 때문에. 내 것이란 어떤 특정한 입자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돼야 되고 몸무게는 70으로 빼야 되고. 70으로 뺀다고 영광됩니까? 그럼 75는 지옥 갑니까? 공부는 몇 등까지 해야 되고.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되고. 이건 인간으로 하여금 간증집회고 되고 안 되고 문제가 아니고 계속해서 너는 입자다, 너는 단단해야 돼, 너는 확고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입자 자체로 구원 못 받는 거야. 이렇게 돼버려요.

그런데 주님의 방식은 그게 아니고 입자된 우리를 죽여 버립니다. 이 땅에서는 입자 자체를 주님한테 양도하고 주님에서 나온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날마다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사는 반복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겁니다. 그걸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문장을 읽어볼 테니까 여러분 뭔 뜻인지 알아보세요. “10미터 쯤 볼 때 그녀는 귀티가 흘러보였다. 3미터 쯤 떨어졌을 때 10미터에서 볼 때처럼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꾸미고 있었다.”

그 사람이 다가오는 그 여자를 보면서 누가 착각을 일으킨 거예요? 다가오는 여자가 착각을 유발하도록 애를 쓰지요.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10미터에서 볼 때처럼 미인으로 계속 유지하도록 점점 신경을 많이 쓰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누가 눈치 챘어요? 보는 사람이 눈치 챈 거예요. 10미터에서는 진짜 예뻤는데 3미터에서는 예뻐지려고 노력했단 말이죠. 그럼 3미터까지 오지 말고 다시 10미터로 가보세요. 그 상태 계속 유지되고 있지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 성도는 절대로 변화를 위해서 본인이 손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10미터에서 보던, 3미터에서 보던 그 관계있잖아요. 그 관계를 주께서 의롭다하는 관계기 때문에 본인이 스스로 본인이 보기에 의로운 행동을 절대로 해서는 안 돼요. 그렇게 되면 위선자가 돼버려요.

10미터에서는 그녀가 귀티가 흘러보였다. 3미터 떨어졌을 때는 10미터 볼 때처럼 애써 꾸몄다고 했는데, 그녀 자리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를 넣어봅시다. 10미터에서 볼 때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3미터 떨어졌을 때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 다음에 “나는 목사다.” 10미터 전에는 나는 진짜 훌륭한 목사처럼 보였다. 3미터 쯤 오는데 그 남자는 목사 되려고 되게 애를 썼다. 그런데 그것이 남들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제가 강조하는 것은, 본인이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도록 우리가 애를 쓴다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있으면서 자연을 이기지 못해서 입자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우리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꿔야 되지 않습니까? 바꾸는 것은 10미터에서 보이는 것처럼 더 애썼다가 돼버려요. 바꾸지 마세요. 왜 바꾸지 말아야 되느냐 하면, 입자가 갖고 있는 내용이 예수님의 형식이 됩니다. 이걸 액자효과라 합니다. 어떤 물체가 형이 없는 것을 액자를 치면 졸지에 훌륭한 그림이 돼버리죠. 우리는 자꾸 내가 어떤 행동을 하면 그걸 액자화 시켜 거실에 걸어놓으려 해요. 내가 셀카 찍듯이 찍어서 매일같이 이것 어떠냐고 계속 찍어내요.

그런데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위선적인 것을 액자로 찍어버립니다. 죄가 재료가 되고 거기서 의를 생산하게 되죠.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죄만 지으면 돼요. 우리가 짓는 죄는 죄로 인정하지 않고 저절로 지은 죄만 죄로 인정해요. 우리가 짓는 죄는 주님의 재료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너무 지저분해서 안 돼. 무심코 나오는 죄 있잖아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여러분 감 안 잡히죠. 그걸 엠페도클레스가 이야기한 사랑과 미움. 이유도 없이 미워지는 것, 이유도 없이 사랑하는 것, 이게 저절로에요. 이건 말릴 수가 없어요. 저절로에 대해서는 제가 오후 설교 때 란 노래를 인용해서 이야기했는데 나중에 들어보세요.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 불렀던 노래의 가사로 설명했습니다.


 
Take the ribbon from your hair
Shake it loose and let it fall
Laying soft upon my skin
Like the shadows on the wall

Come and lay down by my side
Till the early morning light
All I'm takin' is your time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I don't care who's right or wrong
I don't try to understand
Let the devil take tomorrow
Lord tonight I need a friend

Yesterday is dead and gone
and tomorrow's out of sight
Oh, it's sad to be alone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Lord it's sad to be alone
Help me make it through the night



이건 본인이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그 무엇,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회개 자체가 성립이 안 되죠. 내가 죄 짓고 싶어서 지었습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저절로 나오는 거예요. 그걸 주님께서는 액자화 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액자화 시킨 내용을 세 자로 이야기하면 그 유명한 단어, 막 살기가 되는 겁니다. 인위적으로 자기가 죄를 짓는다든지 사람을 죽인다든지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사시면 저절로 자연스럽게 감사하면 살면 되거든요. 그걸 액자화 시킵니다. 그게 주께서 일하시는 형식이 되는 겁니다. “그냥 살아? 너에 대한 죄는 내가 책임질게.” 이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막 살지 않고 조절해가면서 살아요. 악은 멀리하고 선은 행하고. 그래놓고 내가 죄 지었으니까 용서를 구한다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런 용서를 주질 않아요. 그게 구약 레위기에도 보면, 제사법에서 일부러 한 죄는 용서가 안 됩니다. 모르고 한 뒤에 소급해서 나중에 새롭게 추가해서 주어진 율법에 보니까 그게 죄가 되구나, 할 때만 죄가 용서가 돼요.

그러면 또 구분해야 돼요. 저절로 지은 죄와 억지로 지은 죄로. 그러면 율법이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그게 골치 아프니까 막 사세요. 막 사시면 소급해서 죄 지은 것만 용서하는 게 아니고 무심코, 부지중에 한 그것조차 주께서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예상 밖의 감사가 나오는 거죠.

매개자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고 두 번째 시간을 정리하겠습니다. 죽음의 범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입니다. 어린양의 죽음이 나오게 되면 둘 중에 하나에요. 사실은 말을 조심해야 돼요. 둘 중에 하나가 하나밖에 없어요. 애굽의 모든 것을 심판해버립니다. 이 사실을 알고 심판에서 면제될 생각을 하지 말아야 돼요.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었고 마지막에는 새 언약, 예수님의 죽음이 오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다 죽은 자로 돼있지요.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여기서 죽음의 범람의 넘쳐흐르는 취지가 드러납니다. 죽게 함으로써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과 여기에 인간이 그동안 살아갔던 일에 대한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악마가 되겠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직접 마주치게 되겠죠. 그러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죄를 용서한다 할 때 죄가 있고 용서하는 게 아니고, 그건 잘못된 거예요. 예수님의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계속해서 죄를 유발하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께 대드는 일을 계속해서 꾸준하게 하기 싫어도 해야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바로 왕이 강퍅해야 되는 겁니다.

이 사실을 구원받은 성도가 보면 모든 일에 감사할 뿐이지요. 세상에 되어가는 모든 일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악마마저 일을 시키는 겁니다. 감사가 된다는 말은 즐겁다는 말이고 웃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코미디가 뭐냐 하면, 지옥 가면서도 큰소리치는 거예요. 지옥 가면서는 아버지는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에 보면 나와요. 자기 아들은 갇혀 있고 아버지가 얼마나 대범한지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아빠는 지금 게임하는 거야.” 제목이 인생은 아름다워에요. 끝은 죽어요.

악마에 속한 모든 건 지옥 갑니다. 지옥 가면서도 그 안에서 갖가지 일이 벌어지죠. 이미 심판에서 벗어난 성도의 눈으로 보면, 다중현실이란 안목에서 보면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어요.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최순실이 복음을 알고 판사나 촛불 집회하는 사람이 복음을 모른다면 최순실은 코미디를 보는 거예요. 그럴 일은 없다고 치고.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일을 하나에 주님을 위해서 벌어지는 코미디로 보잔 말이죠. 그러면 모든 일에 감사가 되는 거예요. 모든 일이 감사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악마를 셰퍼드로 해서 “물어, 물어!” 하는 거예요. 그러면 감사가 되지 않는 사람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무서워 벌벌 떨겠지요. 그러니 사람들은 다중현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일현실 속에서 본인이 입자로서 버티려는 그것밖에는 아무 생각이 없는 거예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한 마디만 하면 돼요. 예수님의 일은 장소를 지운다. 예수님의 일은 모든 단일현실 속의 장소를 지우고 그걸 사건화 시킵니다. 따라서 입자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물질화, 물성적인 매개자에게 현혹되지 마세요. 이건 재수 좋은 장소, 이건 효험이 있는 기법, 기도를 할 때 5분 이상 하면 효과가 온다는 그러한 악마적인 술책에 넘어가지 마세요. 어떤 분이 저한테 이랬어요. “목사님, 영육 간에 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용어인지. 목사란 입자여, 입자로써 버텨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늘 사건으로 허물어져야 된다. 내일 죽을지 몰라요. 왜? 사건이기 때문에. 다만 주께서 액자화 시킨다면 살아있다는 것이 주님 때문에 살아있다는 사건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한윤범(IP:119.♡.174.48) 17-01-14 12:13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골로새서강해 제3강 [우리는]
(강의:이근호 목사)


세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두 번째 강의 제목을 어젯밤에 바꾸었습니다. [죽음의 범람]에서 [사라지는 유령]으로 바꿨어요. 왜 바꿨느냐 하면, 욥의 멀쩡한 피부를 종기 덩어리로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책임도지지 않고 사라져버렸어요. 욥의 입장에선 멀쩡한 피부가 종기 덩어리 되었으니까 무슨 이유를 밝혀야 되는데 잡을 수 없는 거예요. 그리고 악마가 인간을 유혹해서 선악 구렁텅이 빠지게 해놓고는 본인은 사라지게 만들었습니다. 누굴 붙들고 책임을 물어야 되는데 악마는 유령처럼 사라져버렸어요.

대책은 뭐냐? 인간 쪽에서 따지기 위해서 신에게 나가는 방법밖에 없는데 물체화 된 매개물로 신에게 다가설 수밖에 없어요. 물론 그건 실패로 끝납니다. 자연숭배라 해서 애니미즘, 토테미즘, 모든 민족이 그것으로 시작하잖아요. 단군의 신화도 마찬가지고 모든 민족도 마찬가지에요. 특히 일본의 신화들을 연구해보면 숲속에 신들이 있어요. 그들을 정기적으로 잘 달래줘야 마음에 안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것은 그만큼 살기 힘들다는 거예요. 그리고 천재지변에 대해서 대책이 없다는 거예요. 이처럼 인간은 자연한테 늘 지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20,21세기에 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이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인공지능이나 원자력발전소, 여러 가지 혁혁한 기술의 발명품들이 나오게 되면 우리는 자연을 정복했다고 학교에서 그렇게 잘못되게 가르치거든요. 그런데 인간 자체가 자연의 일부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만든 원자력발전소, 수력발전소도 이게 바로 자연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바보 같아. 자기가 폭을 넓혀놓고 자연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팔이 아프다. 로봇 팔로 갈아치우게 되면 그 다음부터 인공팔로 범위가 늘어난 확장난 거예요. 자연에서 벗어난 게 아닙니다. 해결책이 없어요. 지금은 냉동인간이 나옵니다. 죽기 전에 세포 살아있을 때 얼려놓고 나중에 수십 년 후에 깨우면 더 살게 되겠지. 더 살아봤자 단일현실 속에 그대로 갇혀 있는 겁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딜레마에 빠지게 된 자체가 뭐냐 하면, 뭔가 빠진 게 있어요. 사라진 유령 같은 게 있어요. 자연에 속하지 않는데 뭔가 빠져버린 게 있어요. 도망쳤거든요. 악마가 비겁하게 도망쳤단 말이죠. 해결책도 못 내놓고. 어디로 도망치는가? 하나님 보좌 앞으로 도망가지요. 그럼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다시 마귀를 귀신을 보내지요.

그래서 인간이 자연 속에 갇혀 있고 그것에 대해서 마귀가 지배를 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인간은 해결하기 위해서 자연종교로부터 시작한 소위 제도종교라 하고 법률종교라 하는데 기독교, 이슬람교 등 경전에 의해서 한 종교를 만들어냅니다. 만들어내야 그 자체가 법으로 돼있어요. 유대교도 마찬가지고.

골로새서 2장 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여기서 어려운 것은 월삭이나 안식이나 시간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대체하는 것으로 몸이 들어갑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세계에서 참 터무니없는 논리에요. 시간을 지키지 말라고 하면 끝나는데 그리스도의 몸이 그 안에 들어간단 말이죠. 말을 해도 이해되는지 모르겠어. 너희 안식일 지키지 마, 이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 안 지키는 우리가 나와요. 십일조는 신약에 없다고 하면, 십일조 안 하는 내가 나와요. 이러면 구원과 관계없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 몸이 들어가야 되는데 안식일 안 지켜도 되는 몸, 십일조 안 해도 되는 몸, 교회 안 가도 되는 몸이 되면 이건 뭐예요? 결국 어려울 때 교회 찾게 돼있고, 기도하게 돼있고, 헌금 내게 돼있고, 절기, 크리스마스 때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 몸으로 자연에 속한 유령이 떠나고 난 멍청하게 닭 쫓던 개처럼 내 인생 조져놓고 가버렸단 말이죠.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간 사람, 얄~미~운~ 사람.

원래 하나님의 창조는 선악을 모르게 돼있어요. 어린아이처럼 돼요. 선악을 몰라야 되는데 선악을 알아놓고 얄밉게 떠나간 사람. 가끔은 들어와서 네가 법대로 지켰느냐, 십계명 지켰느냐고 들쑤시는 악마.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얼마나 들쑤셨으면 로마서 8장에서 그런 이야기해요. 널 위해서 어떤 몸이 가미됐는데 왜 자꾸 옛날 몸을 견지하려고 하느냐? 지금 있는 몸을 괜찮은 몸으로 전환시키려고 수단을 부리느냐 그래봐야 선과 악의 딜레마에서 못 벗어난다 말이죠. 그래서 골로새서 2장 16절 말씀처럼 어떤 법이나 지키지 마세요. 그 대신 그리스도의 몸이 여러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런 법을 지킬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그림자에 불과한 거예요.

이 원칙을 그대로 골로새서 1장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1장 2절 우리가 나와요. 3절에 우리가 나와요. 또 3절에 “우리 주”라고 해서 우리가 나오죠. 4절에 너희란 말, 역시 우리란 개념인데 그 다음에 5절에 너희 두 번 나오고, 6월에 한 번 더 나오죠. “너희 중에서와 같이” 나오고, 7절 끝에 보면 너희 나옵니다. 8절에 너희 나오고 우리 나와요.

우리가 뭐냐 하면, 우리가 현재입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지칭하는 거고, 1인칭 복수. 현재는 시간에 관한 개념입니다. 골로새서는 이렇게 설명돼야 돼요. 우리는 예수님이 현재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우리가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는 관심 끊으시고 예수님은 현재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자기 일을 증거하느냐? 현재를 보여주는 증거물이 우리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교회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이거 문제 크지요. 제가 갸우뚱할 때는 문제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게 과연 현재 보이는 교회와 관련성이 있는지를 지금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앞에 계신 분에게 질문해보겠습니다. 어떤 주부가 살림 잘하고 애 키우고 남편은 직장생활 잘하고 월급 꼬박꼬박 잘 갖다 주고 행복하게 삽니다. 이 가정의 문제점이 뭡니까? 여자는 주부생활하고 남편은 직장생활 하는데 그 가정의 문제점은? 거기서 행복을 느끼는데 문제점은 뭐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수련회 끝나고 난 뒤에 그걸 소망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걸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단편적이에요. 그것으로 자족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교회는 단편적이 아니고 전체적이에요. 세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사적인 만족감과 전혀 관계없지요. 그런데 나는 애 키우고 남편은 월급 갖다 주고 둘이 사는 게 굉장히 행복하다. 이건 단편적인 거예요. 단편적인 것이 문제 있다는 것은 어디를 기준으로 했을 때 문제 있느냐 하면,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든 전체성에 비교해볼 때 이건 문제점이 아주 큰 겁니다. 문제점이 크다는 그것을 증명해 드릴게요. 어떻게 증명되느냐?

단편적으로 산다. 그런데 주변에 여러 가정이 있고 점점 더 거대사회가 되잖아요. 서울에 고급 아파트에 살수록 외로워집니다. 촌에 살면 사람들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는데 점점 더 단편적으로 되게 돼있어요. 그러면 넓은 세상이 감당이 안 되니까 개인적 의미로 모으게 됩니다. 이걸 수축이라 합니다. 점점 갈수록 단단해져요. 이 말은 이 세상에 흐르고 있는 모든 변화를 나만을 위한 개념과 의미로 수집해요. 다 수집하면 이렇게 단단해져야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퍼주고 이래선 안 돼.

캘거리 강의하면서 아주 의미 있게 전한 게 있어요. 놓치지 않을 거예요. 꼭 쥐고 있을 거예요. 절대로 빼앗기지 말고. 그래야 이 험한 세상에서 버티고 살 수 있습니다. 무딘 면은 힘들어 못 살아요. 그러나 연필심처럼 뾰족하게 되면 어디라도 뚫을 수 있습니다. 뾰족하다는 것은 모든 중량이 같은 단면적에 집중하는 거예요. 물리적으로 집중하게 되면 힘이 생겨요. 힘이 생기면 어딜 가도 살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수축에 수축을 가미해야 됩니다. 그저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끝나지 나는 살아남아야 돼. 그래서 나온 게 “엄마, 나 시집 안 갈래.”

뾰족하게 모든 에너지를 거기다 집중했는데 이걸 남한테 나눠준다는 것이 자기로서는 할 수 없고 할 능력이 안 돼요. 나만을 위해서 살아온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쳐도 믿을 수 없거든요. 그래서 이걸 나눠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내 성채가 허물어진다는 위기감을 감당할 수 없어요. 그냥 내가 일해서 돈 벌어서 유럽 배낭여행하고 그렇게 살래. 시집이고 뭐고 다 귀찮고 나는 나대로 수축된 채 살래. 나의 의미로. 나만 행복하면 되지. 아프지 말고.

뭡니까? 단편적이에요. 그런데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게 하나의 트렌드가 됐는데 이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도달하니까 나를 위한 수축이란 용납이 되지 않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단단해진다는 이것은 갈수록 용납이 안 되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이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자기 잘난 맛에 자기 거룩한 맛에 경건한 맛에 살아가는 이 모든 것들아, 네 아비가 바로 악마다. 선은 악의 실체화입니다. 선이란 악의 구체화에요. 악의 실존이 선이에요. 선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의 아비가 악마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연결돼있는 그것에 대해서 따로 자기 룸, 홀을 챙기는 겁니다.

주님 행복하면 저는 행복해요. 이런 이야기는 정말 요즘 시대에 거의 없지요. 그러면 아까 1장에서 봤던 우리, 너희 이러한 집단 복수적인 개념은 뭐냐? 이걸 설명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여러분 계속 어려운 것 나와도 참으면 네 번째부턴 쉬울 겁니다. 골로새서에 들어가기가 힘들어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져야 되기 때문에 제가 지루하지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1+0+1이란 공식을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0이 들어감으로써 예수님이 주님이 되지요.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입자, 쉽게 존재지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밖에 없어요. 물론 삼위일체니까 성령까지 붙어서 말할 수 있는 성령은 예수님의 보조적 역할하기 때문에 입자로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입자로 말할 수 없고 존재가 될 수 없어요. 내가 란 말을 붙이면 안 돼요.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거예요. 이걸 지난 시간에 생성이라 했고 이걸 변화라 했습니다. A에서 B로 갈 때 하나님께서 찾는 것은 A라는 입자, B라는 완성을 찾는 게 아니고 어떻게 달라졌는가? 이것을 주께선 건져내시고 회수하시고 이것을 통해서 영광 받는 거예요. 구원을 구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악마로부터 우리 인간 속에 서로 대비되는 선과 악이 우리 마음속에 뒤집어졌으니까 우리는 존재로 입자로 행세하다보니까 우린 자꾸 지금의 나보다 더 향상된 경건된 천국 갈만한 괜찮은 사람, 여기에 주목하는 겁니다. 예수님, 천국 가면 누가 더 높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왔어요. 너희들이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어요. 왜 어린아이가 될 수 없느냐 하면, 어릴 때는 철이 없어서 되는데 크면 너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 서로 입자 비교에 들어가니까 주께서 어떻게 하셨는지에 관심이 없어진 거예요.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공식을 집어넣습니다. 어떻게 집어넣느냐 하면, 이렇게 집어넣어요. A에서 B로 달라지게 하면서 여기다가 0, 없음을 이 과정에 집어넣습니다. 그럼 A는 착각이죠. 내가 뭐가 된다는 착각이고 실제로는 주님께서 성도를 없는 존재를 집어넣으면서 사건을 만들어요. 그러면 우리는 또 오해합니다. 없음에서 내가 태어났으니까 있음이죠. 이게 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잠시 주님의 존재됨을 증거하다가(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됐으니까) 다시 죽어 버리면, 다시없음으로 내려가야 되거든요. 주님을 위해서 잠시 나타났다가 인생은 안개니까 쓰였다가 다시 내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올라갈 때 들어가는 자리는 바로 위치의 자리에요. 어떤 위치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뭔가 되는 게 아니고 할당받은 위치의 기능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사람은 손이요, 어떤 사람은 발이요, 귀, 코란 말이죠. 전체에서 손이 개인적으로 나라 하면 반칙이에요. 귀가 나라고 하면 귀가 떨어져서 걸어갑니까? 이게 안 되거든요. 어디에 종속적이란 말은 단독적으론 존재란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단독적으로 나란 이야기해선 안 되고 붙여진 이걸 우리라 하고, 상대적으로 너희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골로새서에 쭉 나와 있는 겁니다.

우리끼리 모여서 교회 합시다. 미쳤어요? 그게 무슨 교회에요. 입자들 모여 봐야 그건 집단이 아니고 집합이에요. 집합이란 그냥 자기 일방적 생각으로 뭐 하기 위해서? 수축되기 위해서. 그래서 뭐하려고? 뾰족한 연필심이 되어 혼자서, 무소뿔로 홀로 가라는 식으로. 결혼은 미친 짓이다.

수축이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여러분 이걸 아셔야 돼요. 이게 기호고 언어고 거기에 따르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날아다니는 인터넷에 있는 모든 단어는 다 내가 뾰족한 연필심 되기 위해서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다 긁어모은 거예요. 알기는 인터넷 찾아보면 오만 것 다 알아요. 다 아는데 문제는 그걸 어디에 써 먹일 거냐는 거죠. 나만의 개성을 찾기 위해서가 돼버리면, 골로새서 1장 16절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돼요. 단독적으로 존재가 되고 입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심지어 물리학에서는 입자가 어디서 나오는가? 어떤 장(field)이 있어서 장이 파닥거리면 16개 입자가 나온다는 겁니다. 물리학도 어떤 의미에서는 입자를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입자를 입자되게 했던 그걸 힉스장이라 해요. 힉스장에서 에너지의 폭등이 생기면 거기서 중력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 에너지가 결합되면서 제일 가벼운 산소, 헬륨 나오고 점점 더 나가면 수소, 탄소 나오고, 수소와 질소가 결합하면 유기체라 해요. 그럼 탄소유기체 여기서 dna 나오겠지요. 여기서 아미노산 나오고, 아미노산과 dna 결합하면 단백질 나오고, 단백질 모아놓으면 세포 되지요. 세포 60개조 덩어리하면 인간이 되는 겁니다. 배엽을 통해서.

교재에 뭐라고 쓰였는지 봅시다. 3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에 이렇게 돼있어요. [입도 없다. 이도 엇다. 목구멍도 없다. 식도도 없다. 위도 없다. 배도 없다. 항문도 없다. 그런데 거기에서 인간이 나온다.] 이 말이 맞잖아요. 수정해서 입도 코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뭐만 있는가? 정보만 있어요. 그 정보는 dna고 dna 쪼개보면 유기체에요. 그건 원소화합물이에요. 이게 오늘날 종교입니다. 여기에 이의 거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게 진리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초등학교에서 남녀 성별을 없애고 Z로 통일하자는 겁니다. 남자, 여자를 구별하면 남성우월주의라 해서 인권에 저해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남자화장실, 여자화장실 없애고 남녀 샤워 실도 없애고 어릴 때부터 교육받기를 남녀평등을 구현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공교육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기독교 가정에서 어차피 대안학교로 탈출할 수밖에 없어요.

성소수자가 우리도 부부로 인정해달라는 그 정도도 아니에요. 이건 브레이크 없이 그냥 내리막길로 가는 거예요. 인권이 최고에요. 세상이 미쳤어요. 왜냐하면 과학을 대적을 논리가 없기 때문에. 인간 쪼개보자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이상 서로 소통하면서 서로 존중해주면서 서로 의견을 존중해주면서 종교 그런 것 따지지 말고 서로서로 따져주자. 인권이 최고다. 참 인권이 .....

마귀가 얍삽하게 도망쳤잖아요. 그 해결책이 없으니까 과학에서는 악령이 없어요. 그러니까 분자로 만든 세포로 만든 인간이 모여서 의논할 수밖에 없어요. 의논해서 더 인권적이고 장애자를 위해서 기술개발해서 팔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인공 팔 만들어주고. 제가 이걸 뭐라 했습니까? 점점 더 확대해도 이게 자연이죠. 단일현실밖에 없는 사람에게 빈 무덤이 된 걸 설명할 수 있습니까? 홍해 갈라진 것 설명 안 되지요. 여리고성 무너진 것 설명 안 되지요. 다니엘이 계시 받은 것 설명 안 되죠. 과학에선 그건 옛날 신화라고 하면 끝나 버려요.

그러면 결국은 모든 인류가 인권이란 이름으로 민주주의란 이름으로 총결집해서 결국 대드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너희 아비는 악마에요. 인권, 거룩, 여기에 종교, 과학 다 동원되지요. 진화론 나와서 하는데 그럼 잠시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과학에 제가 도전장을 제시하겠습니다.

인간은 세포로 됐다고 하는 것 맞다 치고 인간의 키가 4미터입니까, 7미터입니까? 보통 2미터도 잘 안 되지요. 평균적으로 1미터 70이라 치고 왜 인간은 세포가 1미터 70에서 스톱되는 겁니까? 과학적으로 설명해보세요. 50만 년 전에 크로마뇽인, 네안데르탈인이 있었다. 그러면 왜 15만 년에 현생인류가 태어났는가? 설명해보라. 설명 못합니다. 과학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진화되기를 그것이 자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1미터 80도 해봤다가 1미터 30도 해봤는데 오랜 시간 동안 해보니까 역시 1미터 70이 적당하더라.

이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자기 규제적인 변명이라 합니다. 자기 합리화에요. 지금 있는 존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긴긴 역사를 그렇게 깔아놓은 거예요. 우리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하다. 그래서 우리가 내놓는 의논과 토론도 정당하다. 우린 그 재미로 산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6절과 같습니까? 바로 그 단일현실 속에서 주님께서 다중현실에서 와서 그들에게 맞아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맞아죽었던 말던 지금 없잖아. 있습니다. 현재에 있습니다. 현재 어떻게 있는데? 우리는. 우리에요. 내가 되고 싶은 우리가 아니고 입자가 죽었던 사건으로 개입된 새로운 우리에요. 우리는 그냥 사건이에요. 우리를 잡지 마세요. 우리를 단체로 만들지 마세요. 단체로 만들 그런 주인공도 없고 그런 회원도 없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삼천 명 모였잖아요. 주께서 깨뜨려버립니다. 다 흩어졌는데 히브리서에 보면 총회라고 합니다. 아까 대구에서 차타고 오면서 워치만 니 교회를 지방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 거들었지요. 왜 이왕 할 것 지방교회라 하느냐? 총회라 하지. 지방교회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 에베소에 있는 교회라고 해서 기존 교회와는 뭔가 다른 면모를 보여서 저쪽 사람을 꾀려고 그 짓하거든요. 그렇다면 지점이라 하지 말고 아예 총회라고 하면 될 걸. 성경에 나오니까. 전부 얍삽하게 꼼수를 쓰고 있는 거예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많이 들어봤지만 처음 듣는 느낌 아니에요?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내 몸이라고 따로 삽으로 파오지 마세요.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현재 증거하기 위한 발생적 사건으로 들어간 겁니다. 언제?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목사님, 예수 믿을 때부터 아닙니까?” 아닙니다. 창세전부터에요. 창세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나지 말아도 태어나야 했어요.

16절 다시 보겠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절에,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존재/입자라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만 붙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는 그와 언약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첫째 시간에 나를 건드리는 것은 갈보리를 건드리는 것과 똑같다고 했지요. 요한계시록 11장에.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규제를 해요.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해요. 자기 규제를 하면 연필심이 되어 내 것 건드리면 와해가 생기기 때문에 여기에 방어기술이 발달했습니다. 이렇게 대하면 이렇게 대처하고, 이렇게 공격하면 이렇게 고소, 고발하고. 남들이 나를 공격할 때 나는 이렇게 방어하겠다고 갈수록 점점 더 수축이 되면서 나중에 응축, 완전히 돌멩이보다 더 단단하게 되는 겁니다. 독자적이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되는 겁니다. 불교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고 교회에서 그렇게 만들어요.

찬송 부를 때는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하다가 “집사님, 혹시 노는 돈 있으면 좀 ..... 이자 20퍼센트 쳐줄 테니까.” 큰 교회일수록 그런 일들이 많지요. 연필심들만. 필통 같아. 뾰족한 사람들만 다 모여서. 그래서 지난 낮에 인생을 들춰보면 거기는 방어기술만 누적돼있어요. 살아온 인생이. 이렇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런 것만 있어요. 그것은 자기로 말미암아. 이건 교회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죠. 그러면 묻습니다. 교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교회 있지요. 그러니까 무교회주의 아니지요. 무교회주의란 말이 왜 나왔습니까? 자기 교회중심으로 세상만사 모든 의미와 모든 개념이 자기 교회 부흥되기 위해서 끌어당긴 내 교회, 내 교단, 또는 내가 당회장으로 있는 이 교회, 내가 권사, 집사로 있는 이 교회 잘 되기 위해서 모든 개념을 다 끌어 모았는데 이 더러운 행세는, 본인이 혼자 살 때 한 행세를 어디 가도 못 버리거든요. 교회 가서 꼭 그 짓해서 그것을 자기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집단으로 만든 겁니다.

그러나 골로새 교회 없고, 고린도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 몸밖에 없어요. 따라서 골로새 교회 만들어놓고 이것도 교회라고 우기지 마세요. 골로새 교회도 나중에 사라지고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다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할 수 있는 것 우려먹을 것 다 우려먹었으니까 이제는 네 역할을 끝났다고 일곱 교회를 다 망하게 하는 겁니다. 그 말은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 걸었다고 그걸 쳐다보는 것은 그건 악마의 집단이라고 보면 돼요.

그러면 악마의 집단에 계속 다녀야 됩니까? 다녀야 되지요. 주께서 보내줬는데. 그 외에도 악마의 집단이 많은데. 어디 혼자 산 속에 들어가도 지도 악마 될 건데. 이 세상 현실 속에서는 주님이 다녀간 곳이기 때문에 어디라도 마귀가 도사 같이 찾아옵니다. 복음 전하니까 손잡고 교회합시다. 그때 거부합니까? 거부할 권한이 우리한테 없어요. 주께서 보내신 악마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이 부족한 것. 말끝까지 들어야 돼요. 이런 교회 안 갑니다? 안 가는 게 어디 있어요. 감사합니다. 주께서 시켰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주께서 시킨 줄 알고, 당신이 시킨 게 아니야. 언제까지? 목숨 다할 때까지. 뒤에 붙는 게 있어요. (네가 준 목숨 아니거든) 저는 당회장 목사님을 섬기고. (너는 죽었어, 이제는)

어느 직장이고 괜찮은 직장 없어요. 모두가 연필심들입니다. 거기선 권력이 있고 김 과장, 박 과장 이렇게 위치를 주게 되면 거기서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주체가 성립됩니다. 만약에 일을 못한다? 그러면 주체를 쫓아내면서 우리 위치, 자리도 책상 빼야 됩니다. 이런 세상 권력이 있어요. 권력이 뭐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유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유령이 우리에게 뭘 주느냐? 의미와 기호와 언어와 개념을 퍼붓습니다. 이게 명령법이에요. 어릴 때부터 지시받고 사는 명령법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 동안에 악마 없는 곳으로 찾아갈 수 없습니다. 나란 입자가 살 수 있는 적합한 세상은 아니고, 주께서 당하시고 빠져나간 세상에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서 이 땅에서 일부러 태어나야 하신 거예요. 야곱처럼. 창세전부터 사랑하사 일부러 태어나게 하시면 주께서 주신 임무가 있어요. 등 뒤에 밧줄이 있어요. 어디까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까지 연결돼있어요. 그 연결 끝에는 우리의 생명이 거기에 있어요.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이 한 것처럼 예수님이 살아가는 대로 하게 되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항상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십자가로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항상 없는 존재로 살아야 돼요. 이미 죽은 존재로, 이미 이 땅에서 죽었고, 란 말은 예수님이 하신 경험을 네가 누리란 뜻이에요.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지라. 이 땅에서는 죽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이미 죽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아니. 입자되신 주님께서 죽었고 우리는 그 입자를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는 사건으로서 이 땅에 온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인 것을 날마다 짊어지고, 란 말이 있지요.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문섭이 이것 설명해볼래? 머리가 완전히 축구 잔디밭이 됐는데 이게 나만의 개성이거든요. 나만의 개성이 있을 때 뭐가 문제냐 하면, 나는 나를 위해서 살거든요. 평소에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내가 잘 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겁니다. 이게 전체적이 아니고 단편적이에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성령을 받았거든요. 성령을 받으면,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뭐냐?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다녀갔는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한테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예수 죽인 것을 날마다 반복하게 되는 겁니다. 반복하는 것이 현재에요. 현재 그리스도께서 활동한다는 증거물로 우리를 대리자로 이 땅에 앞장세운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사건으로서의 교회, 또는 생성하는 교회, 입자가 아닌 존재가 아닌, 특정 교회가 교회 아닌 전체가 오직 그리스도의 몸 하나밖에 없어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고 믿음도 하나죠. 이걸 또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에서 연합한다고. 그건 정치적 연합이에요.

다음 2월 부산강의에서 알랭 바디우란 철학자에 대해서 복음적으로 강의할 거예요. 알랭 바디우란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을 미리 언급하게 되면, 사람이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셈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1이 된다는 거예요. 1이 되는 걸 일자, 신이 된다는 겁니다. 왜 사람이 헤아리는데 신이 나오지요? 이것은 인간의 염원이 파도처럼 나타난 게 신이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런데 신은 안 보이잖아요. 신을 대신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네 가지에요. 사랑, 예술, 과학, 정치.

알랭 바디우의 주장은 이겁니다. 사랑이든 과학이든 정치든 뭐든 간에 출발하게 되면 마지막에 신에 도달될 수 있도록 인간들은 사랑하고 과학적으로 하고 정치적으로 한다. 이게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사람의 사상이 굉장히 중요한 사상이에요. 인간이 어떤 일을 해도 최종적으로는 신에게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도록 인간은 움직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함을 해야 내가 신과 연결된 천상천하유아독존, 최고의 궁극적인 존재가 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은 입자/존재라는 것은 결국 신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신을 찾는 거예요. 종교적으로. 왜 그러냐 하면, 악마가 인간을 네가 따먹는 날에는 신처럼 되리라 해놓고 일은 저질러놓고 도망가 버렸어요. 남은 것은 악마처럼 살아야 될 그것만 남아있는 거예요. 경건하게 살려면 어떻게 합니까? 더더더. 기도 더 하고 헌금 더 하고 성경 더 읽고. 이젠 모든 것 집어치우고 산속에 가서 기도만 하고. 이게 자아실현이에요. 궁극적으로 자기가 신인 적을 증명하고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란 말이죠.

그러면 엄홍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나이트클럽 춤추는 것. 자기가 춤 좀 춘다고 했는데 거기에 도사들 와있거든요. 그러면 저만큼 하면 돼? 더 해? 심지어 스피드광들. 더 빠른 차, 더 경쟁해서 이기는 것. 공부가 제일 쉬워요.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24살에 사법고시, 20살에 소년 급제, 우병우. 점점 더 빠르게 누가 빨리 검사장 되는가? 이게 마귀가 저질러놓은 것을 인간이 그대로 하는 겁니다. 욥의 세 친구들처럼. 그게 모자라면 교회 가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고 힘을 차용하죠. 믿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러면 이 문제의 해결책은 어떻게 되는가? 그건 딱 10분 쉬고.
 오용익(IP:61.♡.207.237) 17-01-14 12:16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골로새서강해 제 4강 [언약의 자리]
(강의 : 이근호목사)

악마가 일을 저질러 놓고 저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내뺐습니다. 그 안에 갇혀 있던 인간은 신이 되고 싶어서 신을 찾고 아우성이고 해결책은 전혀 없습니다. 본인이 신이 되고자 하는 그 자체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중심으로 연관시키는 그것과는 전혀 대척되는 잘못된 관계지요.

여기에 대한 주님의 해결책은 바로 자리입니다. 자리를 마련하는 거예요. 자리를 마련하는 구절들이 골로새서에 가득 담겨 있어요. 이 자리는 어떤 자리냐 하면, 천지창조할 때 창조하신 그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자리를 만듭니다.

그 창조하신 원리가 뭐냐? 어두움 가운데서 빛이 있으라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악마가 저질러놓은 이것을 통째로 뭘로 보는가 하면, 어두움의 자리로 봐서 창조의 준비과정에 도입시켜 버립니다. “실컷 어두워라. 마음껏 어두워라. 내가 이 어두움을 활용하겠다. 쓸데없다 버리지 않고 활용하겠다.” 하는 겁니다.

그런 내용들이 여기 1장 12절부터 나오는데 그냥 말로 죽죽 이어가겠습니다. 이 전체 어두움인데 전체가 어둡다 하니까 그 어두움이 무엇인지 어두움에 있는 사람은 그 어두움에 대해서 오해해요. 이 어두움이라는 것은, 빛의 관점에서 봤을 때 어두움이지 우리가 봤을 때는 이게 어두움이 아닙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런 어두움이 아니에요.

우리는 상당히 활발합니다. 제가 두 번째 시간 끝에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의 중요성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0미터 쯤에서 볼 때 그녀는 귀티가 흘러보였다. 3미떠쯤 떨어졌을 때는 10미터에서 볼 때처럼 보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더라.” 그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늘 뭘 한다? 자기자신을 조작하는 거예요.

조작을 해서 나중에 수축이 되지요. 조작을 해서 수축이 되는 인간들이 많이 있게 되는 겁니다. 이게 자연이라고 했지요. 이 원, 자연이라고 했는데 인간이 갇혀 있는 모습의 자연입니다. 이 자연이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성질이 뭐로 바뀌는가 하면, 어두운세계로 바뀌게 돼요. 빛이 왔으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희한하지요.

보통 빛이 오게 되면, 예를 들어 촛불이 가까이 오게 되면 온 그 만큼 밝아지는 것이 정상인데 빛이 들어서니까 오히려 어두움이 더욱더 어두워지더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예수님이 오실 때는 건전한 사람이고, 교양있는 사람이고, 품격있는 사람이고, 점잖은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빛된 복음을 이야기하게 되면 완전히 미쳤어요. 발작을 일으킵니다.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내가 어째서 죄인이란 말이냐?” 그러니까 “그것봐. 어두움이 더 티를 내잖아.” 점점 더 어두워지는 거지요. 어두운 자리에 빛을 비추는 이 방식으로 주께서는 자리를 마련하는데 그 처음은 이걸로 시작되는 겁니다. 처음은 이스라엘로 시작돼요.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하면, 다른 나라에 대해서 폐쇄적 민족입니다.

첫 번째는 혈통으로 폐쇄적 민족이에요. 아브라함자손이 아니면 하나님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자손이 아니면 백성이 아니라는 이 폐쇄적인 원칙을 고수하는 반복되는 제도가 있었으니 그 제도가 뭐냐 하면, 할례입니다. 이게 골로새서 2장 11절에 나오지요.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여기서 할례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을 만들기 위해서 사전에 뭐가 준비되어 있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준비되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잠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다른 나라와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나라는 혈통만 있으면 이스라엘은 혈통이 우선이 아니고 약속이 우선이에요.

이스라엘을 만든 사람은 자생적이 아니고 만든분이 따로 있어요. 시작점이 뭐냐? 위, 하늘이에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다른 나라는 뭐냐? 다른 나라는 약속이 없어요. 그게 비약속이고 비언약이지요. 이쪽은 약속대로, 언약대로 만든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이 땅에 언약을 펼쳐 보이리라. 그걸 증거할거야. 그걸 실현에 옮길거야.” 그게 이스라엘 나라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나라의 존재가 언약을 증거한다면 그 증거하는데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성공했습니다. 왜? 그 나라가 멸망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당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언약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나라는 폭삭 망한 겁니다.

왜냐 하면, 언약에 이런 것이 있어요. 내 말씀을 지키게 되면 복을 받되 만약에 못지키게 되면 저주받는다는 것에 대해서 아주 충실하게, 합당하게 이스라엘의 역사가 적용이 된 겁니다. 지금 제가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는데 여러분은 안심 푹 놓지 마세요. 이게 오늘날 부르심 받은 성도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성도한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가 십자가복음 말고 다른 복음을 전한다든지 다른 말을 하게 되면 너는 저주를 받으리라.”가 적용되는 대상이 바로 성도에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만약에 내가 25년동안 복음 이야기하다가 26년째 복음말고, 그것도 실수로, 그것도 약간의 치매기운이 있어서 실수로 ‘종교는 다 똑같지 뭐.’ 이렇게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것도 딱 한 번 그렇게 했을 뿐인데 그것도 저주받습니까?” 이렇게 나온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성도로 부름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목사님, 예정되었는데 혹시 내가 복음적으로 살지 않고 십자가를 안 믿으면 그 예정도 한꺼번에 취소되고 무효되는 겁니까?”라고 걱정을 하신다면 처음부터 예정을 받아본적도 없고, 아예 예정된 사람도 아니에요. 그러면 예정된 사람은 예정에 대해서 의심이 되어도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입을 다물고 있든 발설을 하든 자기 구원에 대해서 신경쓴다는 자체가 이것은 출발점을 나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의 괜찮은 정보를 얻어서 결국 내가 신이 되고자 하겠다는 어두움의 속성을 그대로 반영해 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부터 시작합니다.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나님의 언약만 나타난다면 저는 지옥가도 좋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의 말씀이에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내 형제가 구원받는다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저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것이 내가 소원하는 바입니다.”라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하지요. 구원파에게 그런 이야기 하면 큰일날 거예요. 사도바울은 구원파에서 쫓겨날지 싶어요. 구원받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자진해서 저주를 받겠다니 이것은 미친 짓이지요.

인간은 자아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아니고 주체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아니고, 주체는 중간이고, 하나님이 만든 그 자리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그 자리는 무슨 자리인가? 언약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언약의 자리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라고 묻게 되면 그 언약의 자리는 우리쪽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연세계에서, 인간쪽에서 출발해서 얻을 수가 없어요. 어떤 경우라도. 이 자연속에 갇혀 있고, 악마가 일을 저질러 놓고 내뺀 입장에서 악마 잡아다가 “네가 책임져라.” 할 수도 없고요, “선악과 먹은 것을 토해낼까.” 이럴 수도 없는거란 말이지요. 인간쪽에서 출발할 수가 없어요.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부부사이에 문제가 생겼지요?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고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라,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게 하나님이 주신 벌이에요. 죄지었으면 벌 받아야 되는 것이 맞잖아요. 제가 너무 심한 욕을 했습니까? 죄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무슨 생각들 하고 계십니까? “목사님, 힘들어 못살겠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기본이 안되어 있어요, 기본이!

부산의 어떤 분이 기간제 교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임용에서 탈락했어요. 걱정이 되어서 연락을 했는데 전화를 안받습니다. 혹시 이 화면을 보시거든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평소에 하던 말이 있어요. “나는 주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탈락이 되든 안되든 다 주의 뜻으로 받습니다.” 내가 아마 수십번 들었어요. 그런데 도대체가 연락이 안돼요.

‘입원했겠지.’ 이렇게 좋게좋게 생각은 합니다만. 모든 것을 끊고 기도하러 들어갔을수도 있고요. 부부 사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요. 부부사이가 갈라지는 것이 힘들지요. 그게 우리에게 당연한 거예요. 부부사이가 좀 좋아지거든 감사와 찬양을 하시고. ‘어떻게 살다살다 이런 일이 다 있나.’ 부부사이가 좋아지거든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저같은 죄인에게 이런 말도 안되는 행운을 주신다는 것이 겁이 납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에베소서라든지 골로새서 3장에 나오지요. ‘주 안에서’ 부부생활을 하라는 말이 뭐냐 하면, 나를 위한 아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한 사건으로서 아내되는 사건, 남편되는 사건이 이루어진 거예요. 어떤 사건? 언약의 자리안에 있는 사건. 언약의 자리는 뭐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맴매 하는 것, 벌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몸소 살면서 마음껏 보여줘라, 그 말이지요.

남편은 무조건 내 말을 들어야 된다고 욕심을 내다가 삐끗 해서 발 다칠 수도 있는 문제고. 뭐든지 상대방을 볼 때에, 너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그것을 그냥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부부생활입니다. 그래서 “난 시집 안갈래.” 하지 말고 좀 가주시고 장가 가세요. 장가 가겠다고 신청한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사적으로 만나서 잘 유도리 해보세요.

올해 나이 사십다섯인데 얼마 전에 광주에 취직해서 있어요. 뒤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 계십니다. 이름은 구지 밝히지 않겠습니다. 이성철이라고. 물론 총각입니다. 살아봐야 주께서 주신 벌이 뭔가를 알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자식은 내 손에 자식이지만 사실은 내 몸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고 출현된 거예요. 우리집 가정을 깽판 놓으려고 출현한 거예요.

이거는 자기 맘대로에요. 어머니 은혜 못잊어……, 이런 것은 하나도 없어요. 툭 하면 “엄마는 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런 반발이나 나오고. 어디서 그런게 나오는가 몰라. 그런 것을 겪게 하는 것이 뭐냐? 언약으로 자리 만들기입니다. 그런 자리는 우리가 요청한다고 주는 것이 아니고 출발을 육으로부터 출발해요.

이게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인데 육으로부터 출발해서 영적 사람이 되게 하는 겁니다. 육은 아브람이지요. 나중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야 돼요. 여기에 투입된 것이 뭐냐? 할례입니다. 그것을 할례언약이라 합니다. 이게 생성이에요. 아브라함이라는 어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이 할례언약에 담겨 있는 어떤 메시아라는 인물을 구원하겠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왜? 메시아만 입자기 때문에, 존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진 곁가지들이거든요. 단독존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단독존재라는 것은 악마가 우리에게 그런 심보를 심어줬지 단독존재라는 것은 이 땅에 없어요. 심지어 귀신과 마귀까지 전부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와 연계되어 있어요.

이것은 과학이 주장하는 진리와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부터 어려운데 좀 참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뀔 때에 아브람은 아브라함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자, 복습해 봅시다. 상상한다는 것, 단일현실일때 이 상상하는 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외재성이라고 했지요. 외재성이라는 뜻은 현재 있는 나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그대로 구원받는 것, 내가 설정하고 상상한 이 세상 뒤의 여분의 자리를 만든 것을 외재성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진짜 주님께서 마련한 이 바깥은 내가 동질성을 유지하면서는 절대로 나갈 수가 없다고 했지요. 그래서 어떻게 나간다고 했습니까? 내가 죽어야 나간다고 했지요. 내가 죽어야 나가는데 내가 죽어버리면 내가 꿈꾸던 소망도 다 같이 없어져 버려요. 네 소망은 나는 안 듣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소망은 성령이 우리에게 심어준 소망, 그 소망이지요.

그 소망은 내 소망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주님의 자기소망을 우리 안에 집어넣은 소망이에요.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주께서 사람이 그 원하는 바를 만들어내고 주께서 그렇게 시도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주님이 만든 새로운 인간을 나라는 그 형틀을 통해서 그내용물을 뽑아내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너 말고 네 안에 있는 너.

너는 자아고 네 안에 있는 너는 주님 보시기에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만든 새로운 주체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새 사람이라고 하고 새사람은 옛사람에 담기게 되어 있어요. “겉사람은 날마다 후패하고.” 후패해요. 늘어진다고 올리거나 하지 마세요. 후패합니다. 계속 우리는 늙어갈 수밖에 없어요. 늙어갈수록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만큼 해산할 날이 가까운 거예요.

지금 장로님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시는데 연세가 제일 많으신 것 같아요. 제대 날짜가 얼마 안남았거든요. 군복 벗을 날이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 예비군이 아니고 제대날자가 가까웠고 우리는 아직도 예비군으로 있고, 그래서 모든 면에서 벌 받고 있고 이 저주의 땅에서 저주를 받고 있는 거예요. 힘들지만.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서 우리는 뭐 한다 했습니까? 모든 의미와 정보를 가지고 우리는 뭘 한다고 했어요? 조작하지요. 어떻게 합니까? 남들 보기에 10미터쯤에서 보면 폼을 내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 폼을 낸다고 얼마나 자기를 위장하는지. 나도 마찬가지고. 사람을 너무 가까이 보면 실례입니다. 가장 각도가 나오는 데서 봐줘야 그게 사람간의 배려에요.

옆 모습이 좋아보이면 그 모습이 보이는 쪽으로 봐주야 돼요. 방금 미장원에 다녀 왔을 때는 방금 만진 머리를 보고 이야기를 해야 되고. 인생이라 하는 것은 조작밖에 없어요. 인간이란 조작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아브람에 있어서 아브라함은 생각도, 상상도 못한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생각한 것이지 아브람이 생각한 것은 없어요.

그러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넘어가면서 생성이 되어야 되는데 이 생성의 자리에 아브람을 대체할 존재가 등장합니다. 이삭이 등장합니다. 이게 과학에서, 양자물리학에서 안나옵니다. 생물학에서 이게 안나와요. 과학이 진리라고요? 이런 이야기 안합니다. 여자 나이 90, 아내 나이 100세인데 아기를 낳았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과학자는 뭐라고 합니까? “만들자, 만들어.” 아예 태를 인공지능으로 만들어버리지요. 이런 구상을 한다고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나옵니까? 여자가 900살이고 남자가 1000살인데 아이를 낳았다. “따라오려면 따라와봐!” 과학은 악마거든요. 악마는 항상 신이 원하는 것을 따라붙이려고 더, 더, 더, 계속 나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행함으로 구원 아닙니까? 행함으로 구원은 목적이 있어요. 도토리가 참나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듯이. 그래서 BC 400년경의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존재는 목적이 있다.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는 것을 지향하듯이 인간 나름의 목적이 있다.” 그게 과학의 원리에요. 최초의 생물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플라톤은 하늘이야기를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의 이야기를 했거든요. 땅의 실제적인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요. 그러면 뭐가 문제냐 하면, 있음에서 더 나은 있음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리 만들기는 이스라엘 없이는 자리가 안 만들어져요. 이스라엘 제켜 놓고 이방나라가 백날 의논해 봐야 천국가는 자리가 없어요.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지 이방인의 메시아가 아닙니다. 이방인은 곁가지로 들어가는 거예요. 참감람나무에 돌감람나무를 접붙임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언약이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다는 뜻은 쉽게 말해서 상종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이스라엘이 기본이에요. 그래서 어떤 과학자도 이스라엘이 홍해에서 건너온 것을 증명 못합니다.

그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났던가? 물이 절벽이 된 이유를 설명을 못해요. 그래서 과학의 힘을 빌린 고고학자들은 “그것은 홍해바다가 아니고 갈대바다라 해서 그냥 얕은 개울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과학에 아부를 해서 과학에 빠진 사람까지 교인으로 확보하려고 교회가 그것을 요구하니까 신학자들이 하는 짓이 뭡니까? 교회 부흥되도록 하는 것이 2천년교회역사의 신학이 된 거예요. 그중 하나가 삼위일체고.

예수 믿을 필요 없이 삼위일체 문장외우면 구원받는다, 삼위일체가 거기서 나온 거예요. 삼위일체를 인정하면 그것으로 정통이 된다는 겁니다. 정통이 되면 그 교회 연필심들은 몽땅 다 전세버스 타듯 전체로 다 천국간다는 거예요. 문장 잘 외웠으니까. 엑기스만 골랐으니까. 오랜 역사가운데서 거짓된 것들 다 제키고 옳은 것, 옳은 것, 옳은 것만 했기 때문에.

이게 바로 “너희 애비는 악마”라고 했던 그 짓을 똑같이 하고 있어요. 정통이 구원합니까? 본인의 존재감이 그리스도를 막고 있으면서 구원을 어디서 찾아요? 구원은 없어요. 본인이 십자가를 막고 있으면 구원받는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총맞은것처럼 구멍나면 돼요. 총맞은 것처럼, 총도 아니고 대포를 쏴서 구멍이 뚫려야 돼요.

구멍이 뚫려서 십자가가 바로 보여야 됩니다. 아브람이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노력은 다 실패로 끝나야 돼요. “가만 있어 봐. 아기를 못낳아? 내가 아들까지 낳도록 할 테니까.” 그러면 그 아들이 아브라함을 위한 대체제물로 들어가요. 네 아들을 바쳐야 됩니다. 바칠 때 생성중에서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삽입이 되면서 생긴 아브라함은 아브람과 전혀 상관없어요.

전혀 상관없고 아브라함은 누구한테 종속되느냐 하면, 자기자식한테 종속됩니다. 나의자손이 선조인 나를 구원해요. 아브람의 자손이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겁니다. “언약이 있는 한 이 일은 언약이 완성될때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아브라함은 미리 당겨서 믿었지요. 그 자손은 끝은 뭐냐? 예수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나를 보기를 기대했다가 보고서 기뻐했다.”고 했거든요.

뭐가 살아있어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 있어야 돼요. 언약은 우리를 개무시하는 겁니다. 그냥 무시가 아닙니다. 개무시하는 거예요. 왜 개무시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가 자꾸언약을 가로막고 있거든요. 손들고 “저 구원해주세요.” 이렇게 나오니까 “손 내려! 손 내려! 손 내려!” “저요!” “손 내려!” “앞으로 순종해서 구원받겠습니다.” “손 내리라니까. 구원은 네 소관이 아니야. 네가 요구할 입장이 못돼.”

구원은 예수님이 자기원하는 사람만 구원할 뿐이에요. 요한복음 5장에서. 아버지가 자기 원하는 사람을 추려내는 것처럼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 구원하는 권세를 준게 아니고 심판하는 권세를 줬어요. 말자체가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다 손 내려!” 그런 뜻이에요. “다 손 내려! 내가 심판하러 왔다. 심판 다 받아.” 라고 해 놓고 심판 받는 중에 “너, 너, 너 나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나옵니까? 심판을 흠뻑 뒤집어 쓰고 나옵니다.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하고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나는 저주받아야 되는데, 지옥 가야 되는데, 세상에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어?” 그럴 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지요. 자기 믿음 있다는 것을 절대로 자랑하지 않아요. “나 예수 믿습니다.”를 자랑하지 않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엄홍길이라는 그 사람이 에베레스트 산에 갔다 와서, 나 그 산에 갔다 왔다, 는 그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나 예수 믿습니다, 하고 남에게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돼요. 목사가 설교할 때 “나는 죄인입니다.” 그 말 하면 되지 딴 소리 하면 안돼요. 성경말씀에 비춰볼 때, 여러분 말고, 장로 말고, 성경말씀에 비춰볼 때 나는 죄인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면서 아브라함은 아브람은 아브라함되기 위한 하나의 재료가 되는데 이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생성돼요. 아브라함은 의를 위하여 재료로 부름받은 겁니다. 아브라함이 되어놓고 아브라함 입장에서 다시 아브람을 생각하고 다시 그 과정을 생각할 때 그 과정을 소급해서 보는 관점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 믿음은 여기에 절대로 도달 될 수 없었습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내가 눈치채서 아브라함 되는 그런 수는 절대로 없었습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모든 인생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직 내 인생에 개입하신 언약적인 주님만 믿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개입은 뭐로 이루어져요? 사건이지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내가 요청한 것이 아니고 호출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들이닥치는 거예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런 질문들을 해대요. “목사님, 그 이야기 듣고 한 20년간 그 사건이 오기를 기다렸건만 오늘 1월 9일에도 안오게 되면 저 지옥가면 어떻게 해요? 우연적 사건, 바람같이 분다는 성령이 내 옆 사람에게는 다 불었는데 나에게는 불지를 않으니까 선풍기바람이라도 돌리든지 해서 어떻게 구원받는 수가 없겠습니까?”라고 한다면 그것마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긴 현상입니다.

왜? 그 이야기가 본인이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죄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받기를 원했더니만 구원했다는 것이 되어버리면 출발점이 구원받고자 하는 악마적인 속성이 그대로 노출된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없는가? 있지요. “있다면 저 사람에게는 그런 악마적인 속성이 있어도 용서해주고 왜 나는 용서해주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네가 뭔데? 네가 주제파악좀 해라.” 너는 하나님 형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형상을 봅시다. 골로새서 1장 15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뭡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했지요. 먼저 나셨다는 것은 먼저 나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나오는 모든 사건과 현상들은 먼저 나신분에게 예속되고 종속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겁니다.

그물망이지요. 촘촘한 그물망입니다. 심지어 그 안에는 마귀도 들어 있고 다 들어 있어요.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피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할 때 그 진짜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걸 두 번째 아담이라고 하고 두 번째 인간, 마지막 인간입니다. 로마서 5장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인간 아니지요. 인간 아니고 흙이지요. 흙이 되면 인간은 언제 됩니까? 흙이 되었다가 하늘의 형상을 입게 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조건으로 입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겁니다. 이 이야기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지는 이야기에요. 이방민족에게 주어진 이야기가 아니고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지는 이야기에요.

그 시발점 되는 것이 뭐냐? 아브람에서 아브라함 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 안 나왔습니다. 여기에 뭐가 들어가는가? 할례가 들어가지요. 중요한 것이 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 다같이 찾아봅시다. 갈라디아서 4장 22절,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여기 보면 하나는 계집종 하갈이고 또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 사래지요. 같은 인간이 보기에 사람이지요. 사람인데 24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이것은 비유니.” 사람을 개무시하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입자로서, 존재로서 버티고 싶은데 너는 하나의 은유라는 겁니다. 은유라 하는 것은 껍데기만 겉으로 있는데 그 실체는 겉으로 안 나타나고 그 껍데기의 실체, 베이스는 따로 깔려 있다는 겁니다.  

그게 아까 말한, 주체밑에 깔려 있는 ‘자리’에요. 언약의 자리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눈 이유는 마지막에 뭐가 있는가? 천국과 또 뭐가 있어요? 지옥이 있지요. 지난 주일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쓰레기통은 쓰레기 담으라고 있는 거예요. 쓰레기통이 텅텅 비면 안됩니다. 주께서는 쓰레기를 생산해내요. 이것은 아니고, 이것은 아니고, 이것은 아니고, 이렇게 분류하는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하겠다는데 우리는 어쩔 수가 없어요. 지옥간 쓰레기나 천국간 사람이나 모두 합치면 둘 다 은유고 비유에요. 누굴 위해서? 예수님만 모든 것의 주가 되고 모든 창조의 네트워크는 오직 예수님을 중심에 두는 거예요. 하나님은 뒤에서 우병우처럼 팔짱끼고 흐뭇하게 보시는 거예요. 비선실세는 예수님입니다.

그 앞에 있는 문고리삼인방은 은유에요. 왜 이 예가 적절하게 다가오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렇게들 하고 있잖아요.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당신이 했잖아.” “기억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형제를 미워했잖아.” “기억나지 않습니다.” “스물다섯살 때 교회갈 때 30분 늦었잖아.”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은유니까.

너의 죄를 일체 묻지 아니하신다는 겁니다. 왜? 몸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래요. 아브라함때 아브람의 죄를 묻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람을 볼 때는 뭐로 보느냐? 현재 믿음으로 의롭다 한 그 과정에 아브람, 옛날 육에 속한 인간이 꼭 필요했다는 사실, 친히 주님께서 자리로서 준비했다는 하나님의 네트워크만 기억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평생 죄짓고, 반항하고, 대들고, 불신하고, 주께 욕하고 원망했던 모든 것을 이 땅에서 살면서 기억만 하면 되는 겁니다. 어떤 차원에서? 주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 믿음 안에서 기억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내가 이정도밖에안되는 죄인중에 괴수였는데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거예요.

죄도 질적인 차이가 있지요. 사도바울은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우리죄는 과속좀 하고 어릴 때는 노상방뇨 하고 이 정도지요. 그런데 사도바울의 죄는 뭐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습니다. 저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바울이 얼마나 당당한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지난 일, 예수 잡아 죽이는 그것도 하나님이 시키신 하나님의 비유였고 은유였다는 겁니다.

내 책임 아니라는 거예요. 이 뻔뻔함? 이런 철판이 어디 있어요? 너무나 뻔뻔해요.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지 못합니까? 좀 팔짱도 끼고, 우리가 검찰청의 우병우처럼 뻔뻔함을 배웁시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성령안에서의 자유함이라고 하는겁니다. 구애받지 말고 주눅들지 말고,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비유인데 그 비유가 있다는 말은 비유를 비유되게 하는 실체가 있을 거잖아요. 그 실체가 26절에 나옵니다. 그 실체가 문제가 돼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그 다음에 뭡니까? “우리 어머니라.” 어머니가 위에 있다는 거예요. 안상홍집단인가요? 어머니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그 동네인가요?

그 어머니를 아무나 어머니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 어머니로 낳은 자식만 어머니가 그 어머니가 되는 겁니다. 그 자식은 어떤 자식인가? 27절에 나옵니다. “잉태치 못한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다시 말해서 믿는 자는 이 땅에서 나를 신자되게 만들고 믿는 자 되게 만든 어떤 인물도 같은 인간 내에는 없다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나의 어머니가 될 수가 없다는 것. 그러면 그 어머니는 뭐냐? 그냥 하늘에 있는 어머니라 하지 마시고, 바로 비약하지 마시고 언약이 우리에게 엄마역할로 자리를 깔아요. 자리를 깔게 되면 그 자리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효과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나옵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4장 29절에,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라고 되어 있어요.

두 종류의 인간으로 되어 있어요. 비유인데 하나는 성령따라 난 사람이 있고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이 있지요. 육체를 따라났다는 말은, 아버지 날 낳으시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성령을 따라 난 것은 아버지가 날 낳아도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버지가 육적인 아무 역할을 못하는 거예요.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라서 모태신앙이고, 유아세례받고, 아버지가 목사고, 장로가정이라 해도 절대로 나를 구원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냥 시키는대로 하게 되면 용돈이나 더 타낼지는 모르겠지만 교회 가준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교회 안가면 안됩니까?” 안간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 그 전의 과정, 성령께서 어떻게 나를 다뤄왔는가, 나를 이끌어 왔는가, 인도해왔는가를 소급, 믿음은 소급현상이거든요, 소급해서 ‘내가 믿습니다.’가 아니라 ‘성령께서 믿게 하셨다.’고 언약으로 돌려버려요.

돌려버리면 어떤효과가 있느냐 하면, 나는 죽어도 이 언약의 자리는 계속 남는 겁니다. 내가 죽는 자리에 다른 사람이 구원받고 또 다른 사람이 구원받아요. 동일한 언약의 자리에. 이것은, 도서관에 책 던져놓고 거기서 공부했는데 다음날 되면 다른 학생이 내가 있던 자리에 자기 책가방 놓고 공부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자리는 영원토록 갈 자리지요. 그 영원한 자리가 할례언약의 연속성에서 이루어지는 제사법에 있어서의 화목제물이 만든 자리가 되는 겁니다. 화목제물이 만든 자리가 돼요. 이것이 골로새서에 나옵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부터 누가 읽어보세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

분명히 주님께서 창세전에 먼저 난 것(1:15)으로 되어 있지요. 창세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창세전에 먼저 난 것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났지요. ‘죽은 자들’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언약을 완성하는 그 터, 토대, 베이스, 그 죄많은 이세상을 하나도 버리지 아니하고 아주 실용성 있게 다 그걸 모아서 주님께서 주가 되시는 자기 터전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알뜰하게 살림사는 분은 없어요. 바퀴벌레나 지옥 갈 사람까지 다 끌어모아서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를 죽여라, 그 말이지요. 사람은 죽고 나서는 살 수 없다는 그것이 완전히 깔려 있는 이 세상, 죽음으로 끝나는 이 세상에서 “그렇지 않다. 죽음 가운데서도 구멍 뚫고 사흘만에 살아난다는 이 경우가 너는 예상 못했지만 분명한 현실로 주어진 거”예요. 이게 다중현실인 겁니다.

기존 현실에서는 악마를 이기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은 이미 악마를 거뜬하게 이긴 거예요. 악마를 이긴 입장에서 그 다음부터는 들락날락 하는 이것은 그냥 패스포트에요.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에서 남녀커플이 미성년자 못들어가는 술집에 들어갈 때 “혹시 미성년자가 아닌지……?” 하니까 차태현하고 전지현하고 짝을 맞춰서 주민등록증을 꺼내 쳐들면서 들어가는 장면이 나와요.

한 번 보라는 말이지요. 만 19세 이상이라고. 주님께서 악령마저 이겼기 때문에 그 이긴 패스카드가 들어 있는 사람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고후 4:8) 답답하다는 이 말을 고치겠습니다. 교회용어로 바꾸겠습니다. 컬컬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당하여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조로 이야기하지요.

이 말은 우리한테 즐거운 겁니까? 아니면 슬픈 겁니까? 갑자기 우울해져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병주고 약주는 것이 좋습니까? 아예 병 안드는 것이 좋아요? 우리 개인적 입장에서는 컬컬이고 답답이고 아예 좀 조용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스데반집사 보세요. 그리고 열 두제자 보세요. 베드로를 보세요. 그 가는 길이 원치 않는 길, 허리끈 틀어 쥐이고 원치 않는 길로, 그것도 질질 끌려가잖아요. 내일일을 알지 못하면서 질질 끌려가는 겁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모든 것이 막혀 있을 때, 대책이 없을 때, 과연 내가 성령으로 난 사람인지,육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인지 티내는 하나의 실험기회가 온 거예요. 내가 노력해서 기도해서 해결하려 하면 이것은 마귀에 완전히 빠진 사람입니다. 이런 일을 당할 때 내가 기도하면 효과 있더라는 이것은 안됩니다.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그 해결점은 있어요. 어디 있습니까? 내가 그 해결점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서 누르고 있어요. 나만 낮추면 되는데, 나만 쪼다 되면 되고, 내가 세상에서 개망신되면 되는데, 내가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니까 일이 자꾸 꼬이는 거예요. 이게 뭐냐? 사사기에요. 사사기의 구원자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에요.

쪼다같은 방앗간 주인, 그게 사사에요. 인간취급도 못받는 왼손잡이, 그게 사사고 깡패 입다가 구원자에요. 심지어 잇따라 세 번씩이나 여자를 밝히는 그 삼손이 구원자라니까요. 왜 자꾸 환경을 조작을 하십니까? ‘이 괜찮은 나에게 괜찮은 환경이 주어져서 나는 괜찮은 인생 살았다고 남에게 자랑질 해야지.’ 이것은 10미터에서 하는 남에게 보여주기인데 3미터 앞까지 가면 그것이 들통나요.

이것은 조작한 인생입니다. 주님이 거기에 속아넘어갈 리가 없어요. 나는 남을 속이고 싶어도 주님은 우리에게 속아넘어가지 않는 것에 대해서 또 다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내 수법에 안속아넘어가시고 또 나로 하여금 네가 너무 과분한 은혜 받았음을 깨닫게 하시는 그것이 매일의 감사가 되시고 범사에 감사가 되시기 바랍니다.

화목이라는 말, 제사 이야기를 했는데 남은 시간에 제사 이야기를 잠시 해 드리겠습니다. 제사가 주님이 시킨 것이 맞아요. 그런데 문제점이 있어요. 제사의 특징은 인간쪽에서 하나님쪽으로 나간다는 이것이 문제가 돼요. 그래서 제사해서 실패해요. 인간쪽에서 하나님쪽에서 나가는 것은 뭘 들고가요. 십일조나 예물을 가지고 나가서 받으소서, 하고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야기합니다. 시편 50편, “온 산의 것들이 다 내것인데 거기서 그것들의 장소를 이동시킨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내 것이 될 일은 없잖아. 네가 나한테 바칠 생각 하지 말고 현재 네 안에 갖고 있는 모든 것이 나에게 바치기 전에 내가 너에게 먼저 준거잖아.” 줬다는 거예요. 다 준거예요. 십일조 바치기 전에 우리는 십의 전부를 이미 누리고 살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십일조의 완성, 그것이 의와 신과 인입니다.

돈 낸다고 십일조가 새삼스럽게 완성된 것이 아니에요. 다 주님의 것이라고 믿을 때 이미 십일조는 완성이 된 거예요. 어디서 왔는가? 그리스도가 죽은 자에서 살아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이 곧 율법의 완성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들고 나오게 했어요. 들고 흔들고, 요제, 거제, 붓고, 전제, 태우고, 화제, 이 네가지 종류의 제사법이 인간쪽에서 뭔가 손대고 실시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현실? 단일현실이지요. 이 단일현실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뭐냐? 천주교고, 심지어 개신교도 물상적, 물질화된 매개를 일반 고객들이 원하니까 목사가 갑자기 로만 칼라를 하지를 않는다 철마다 가운을 갈아입지를 않나, 계절마다 커튼을 바꾸지를 않나.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교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월급 값을 하니 쫒아내지 마세요.” 그런 뜻이에요. 이제는 말한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고 있으니까, 새신자 모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제발 월급 깎지 말고 보너스도 두둑하게 주세요. 커튼 바꾸잖아. 아마추어들은 모르지만 내가 프로기에 알아.” 맥추절에 맞춰서 바꾼다는 그런 짓들을 하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구약의 제사의 특징은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은 아서라, 말아라, 내가 너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냥 덮치는 것, 함몰되는 거예요.

식사합시다.
 오용익(IP:61.♡.207.237) 17-01-14 12:18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골로새서강해 제 5강 [팽창과 수축]
(강의 : 이 근호목사)

지난 시간에 이 험하고 험한 세상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우선 나라도 살아야 되니까 수축이라는 방식을 사용한다 했습니다. 수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나에게 의미와 모든 것을 나에게 쏟아서 나만이라도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괜히 남을 잘못 만났다가 상처 입으면 안 되잖아요. 발을 하나 빼놓고 상처 입었다 싶으면 얼른 거두는 요령 있는 방식이 현대인의 삶의 방식으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수축이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 있어요.

현대인이 수축을 하게 되면, 자기한테로 모든 것을 모으게 되면, 흘리고 있는 것들이 있어요. 남기고, 배제하고, 제켜야 될 그런 요소들이 굉장히 많아요. 여자들이 신는 스타킹이 있지요. 이 스타킹이 땅바닥에 누워 있으면 이것이 구멍이 났는지를 몰라요. 그런데 이 스타킹을 발에 신겨보면 군데군데 올이 나가서 구멍이 뚫렸으면 이것은 전체를 커버하지 못하지요. 구멍난 것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개인이 살기 위해서 이것은 제키고, 이것은 배제하고, 이것은 삭제하고, 난 너하고 안 놀아, 하고 단독적으로 사는 것은 좋은데 이렇게 되면 뭘 놓치는가 하면, 전체성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물었잖아요. 주부로서 살아가는데 남편은 직장생활 잘하고, 그리고 그들이 행복을 느낄 때 문제점은 뭐냐?

본인이 단편적으로 보면 행복한데 전체성을 놓치지요. 전체성을 놓치고 얻는 대가가 뭐냐 하면, 바로 주도권을 쥐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끝나고 난 뒤에 돌아갈 때 제가 염려하는 것은 뭐냐? 수련회 마쳤는데 집에 가도 여전히 내 가정은 내가 지킨다, 이 주도권을 고수해 버려요. 그러면 역시 전체성은 귀담아 듣지도 않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지, 하고 그대로 돌아간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를 왜 하겠습니까? 이 수축을 사람만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도 수축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면서 모든 것이 퍼져  나온 것을 가지고 축복이라 하는데 그것을 팽창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팽창하지요. 팽창된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한곳에 다 집어넣습니다. 이게 수축인데 어디에 집어넣는가 하면, 성육신과 십자가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게 골로새서 1장 18절에 나옵니다. 이 골로새서가 정말 어려워요. 신학자들도 손을 드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잖아요.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그 다음에 뭐냐? 다 같이 읽어볼까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지요. ‘죽은 자들’이거든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이것은 자신의 죽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본인이 소생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의미가 뭐냐? 소위 신학교엣 제대로 공부했다면 죽은 나에서 내가 부활하는 것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아야 돼요. 죽은 자들, 이것에 대해서 상당히 심도 있게 연구했던 신학자가 있습니다. 몰트만이라는 사람이에요.

몰트만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한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들에서 부활한 것과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고 이 전체에, 전 우주에 퍼져 있는 예수님의 창조를 회수를 해요. 회수를 하고 그것을 새로운 질서체제로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산자가 아무도 없게 만드는 것. 저는 이것을 한라산 분화구로 보는 겁니다. 백록담이 있지요. 여기에 한라산이 있고 제주도가 있고 이 산 밑에 민가가 있어요. 그 민가에 질문했습니다. “지금 살림 잘하시고 남편 직장 잘 다니고,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행복합니다.” 여기에 민가가 있는데 이 민가는 사실은 백록담에서 흘러나온 마그마와 화산재위에 민가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 토대가 뭡니까? 이 마그마의 토대위에, 화산재의 토대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게 전체성입니다. 전체성인데 개인은 자기만 행복하면 다 된다고 생각해요. 이게 구멍 난 스타킹이 돼요. 자기는 덮을 수가 있는데 전체를 덮을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 팽창된 전체를 누가 가져가서 수축한다면, 예수님이 이 전체, 백록담, 한라산을 다 가져가서 수축해 버렸다는 말이지요.

성육신으로 수축해서 나중에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수축해 버리면 이 민가는 죽음의 바탕위에 일시적 행복을 구가하는 헛되고 헛된 인생을 보내는 것이 되는 겁니다. 목사가 이렇게 설교하기가 힘들어요. 행복을 위해서 교인들이 교회를 찾아왔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이미 죽음 안에서 날라 가버렸습니다.”라는 말을 설교자가 함부로 못해요.

교회에 살려고 왔는지 죽으려고 왔는지 분간도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살아났다, 이 대목을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사기 16장 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삼손이 두 번째 여자인 기생을 보고 들어갔더니 블레셋 사람들이 성 밖에서 포위에서 성 밖으로 나오면 체포해서 죽이기로 작정하고 새벽까지 기다렸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삼손이 밤중까지 누웠다가 그 밤중에 일어나 성 문짝들과 두 설주와 빗장을 빼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문이라는 자체가 블레셋이라는 적과 삼손자체를 구분하는 경계선입니다. 그런데 경계선을 삼손이 어떻게 했다? 경계선, 그 문짝을 어깨에 메고 와 버렸어요. 그러면 삼손 자체가 움직이는 경계선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삼손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그들이 쳐놓은 경계선, 기준자체가 삼손에 의해서 날아가 버렸어요. 경계선 자체가 없는 거예요.

“나는 소박하게 민가에 살아야지. 여기서 여기까지는 나의 구역이고 이것은 행복의 보금자리야.”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삼손의 경우처럼 모든 것을 죽음에 수축해 버리니까 나와 내 바깥을 경계지우는……, 나는 나, 내 바깥에 있는 모든 타자, 거기에는 하나님도 예수도 다 포함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경계선 자체도 이미 수축 속에 다 집어넣어 버리면 벌거벗은 채로 나와 버린 거예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울타리 날라 간 것과 똑같은 겁니다. 삼손이 문설주를 뜯어내서 메고 가버린 것은 성을 철거하는 수준이에요. ‘경계를 중심으로 해서 나를 체포하려고? 그렇다면 너희들의 체포자체를 무산시켜야지.’ 하고 그 지키는 성 자체를 날라 가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는 말은 이 백록담의 모든 것을 어깨에 메고 그냥 이동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만 그냥 부활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이 살아남으로서 모든 인간은 일괄적으로 이미 죽은 자가 확정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의 팽창과 수축으로 예수님이 증명해 주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일어난 사건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고 그 다음 구절은 뭐냐? 그 바깥에서 일어난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가를 보는 겁니다. 20절에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화평이라고 한다면,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 좋게 지내자는 식으로 그동안 교회에서 이해를 해 왔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화평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화평을 내밀어도 인간 쪽에서 화평을 거부합니다. 이유가 뭐냐? 화평을 하게 되면 주도권을 빼앗겨요. 주도권을 상실합니다. 몰랐지요? “하나님,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 너와 화해할게.” “감사합니다. 이제 집으로 가자.” 아니에요. 집으로 못가요.

여러분, 나사로 같은 거지하고 화해했습니까? 동정은 하고 도와줄 수는 있어도 화해를 안 합니다. 화해의 자격이 안 되기 때문에. 상대를 보고 화해를 해야지요. 화해했다고 하면 그 다음에 돈이나 빌려달라고 할 건데. 내 살림살이를 책임지라고 달려들면 어떻게 하겠어요? 갑질을 해야 돼요. 사람은 갑질이 소망이지 화해하는 것이 소망이 아닙니다.

내가 남들을 도와줌으로서 내가 도와준 상대 앞에 나는 갑이 되고 도움 받은 그 사람은 나에게 을이 될 때 우리는 그 관계를 유지하는 재미로, 보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분이 우리와 화해한다면 누가 갑이 되는가? 주님이 갑이 되어버리면 소박하게 나만의 인생,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던 그 모든 것이 다 주님 앞에 강탈당합니다.

그래서 화해했다고 할 때, 하나님과 화해했으니 찬양합시다, 할 때 아무 뜻도 없이 찬양하고 그러지 마세요. 정말 화해에 들어가려면 이제는 나의 주도권은 이미 주님 앞에 등기이전이 다 되었어요. 집이고 부동산이고 간에 자식이고 간에 주님 앞에 다 넘어갔고 “죽이든지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될 때 그게 화해관계입니다.

이 화해관계는 전쟁관계인데 이긴 자가 몽땅 다 갖는 관계지요. 그렇게 화해가 된다면 ‘주님의 화목제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잖아요.’ 이렇게 생각하는데 여기에 또 오해가 있어요. 틀린 곳이 한두 군데 여야지요. 우리가 화목제물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고 예수님은 화목제물 되셔서 그 화목제물을 우리가 받는 것이 아니고……, 오늘 강의 중에 제일 중요한 대목에 왔습니다.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화목제물이 돼요.

화목제물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이 시대에, 마지막 시대에 주님의 화목제물로 기능하도록 주도권을 주께서 쥐고 있는 겁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24절에 나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어떻게 한다? “채우노라.”

여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나오는데 주님이 고난 왜 받았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고난 받았잖아요. “그렇다면 그 고난을 제가 채우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남은 고난을 채우겠습니다.” 남은 고난을 채운다고 하니까 이런 노래가 생각이 나요. “스치는 바람결에 사랑 노래 들려요 내 곁에서 떠나버렸던 .” 이 노래 아시지요? 특히 노래방 하는 사람은 아십니다.

그 노래 끄트머리 가사에 보면 “이제는 울지 않을래 이별은 너무 아파요 다시 떠난다 해도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께요.”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이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누가 주고 누가 받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주님에 의해서 세상에 쓰이게 되면,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구경 못했지요? 저를 보세요. 제가 여러분의 죄 때문에 당하고 있는 이 모습이 지금 주님의 현재 모습입니다.”

이걸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 함부로 도장 찍지 마세요. 주께서 화해  했기에 우리는 이제 구원받았다, 이렇게 생각하지마세요. 사인이나 도장 찍을 때는 볼 것 다 보고 해야 돼요. 주도권은 양도해주시고, 양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도바울처럼 화목제물 자체로 걸어가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의 문제가, 이렇게 모든 것을 수축하고 그리스도 몸에서 화목제물이 되어버리면 뭐가 상실되는가 하면, 시간 속에서 시간이 정지되어 버려요. 시간이 정지되면 성질만 남습니다. 이것이 천국과 지옥이에요. 천국과 지옥은 시간이 끝나고 난 뒤에 성질만 계속해서 무한반복이 되는 겁니다. 무한반복을 사자성어로 하면 무한리필이 되지요.

끊임없는 저주, 시지프스의 신화를 여러분이 아시지요. 산위에 돌을 굴려 올리는데 산 정상이 뾰족해요. 올려놓고 1초라도 머물러 있으면 쉬는 시간이 있는데 올라가자마자 돌이 밑으로 주르륵 내려가요. 저쪽으로 내려가면 또 올립니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또 올려요. 시지프스 신화가 왜 생겼느냐 하면, 인간이 주도권을 가질 때 인간의 일생은 이렇다는 겁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질 때, 내 새끼는 내가 알아서 키웁니다, 우리 가정은 내가 관리합니다, 라고 할 때 문제 하나 해결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있고, 또 하나 문제 지나가면 또 하나 생기고. 자식이 둘 같으면 하나가 애 먹이면 다른 하나는 착하고. “엄마,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는데 어느 것 먼저 들을래?” 이런 식으로 사람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어버려요.

시지프스의 그 고된 노고는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지프스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 고된 노역과 기준은 도대체 누가 집어넣어 줬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마귀가 그걸 해놓고 자기는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쏙 도망쳐서 갔다는 것을. 마귀가 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가 뭐냐?

자연세계 속에 동결되었어요. 우리의 성격, 우리의 성질, 이것은 자연과 함께 연동해서 움직이기에 비가 좀 불어도, 바람이 좀 불어도 우리는 깜짝깜짝 놀라요. 죽을까 싶어서.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모든 시간은 예수님 죽음 속에서 사라지고 거기에서 시간이 아닌 성질, 축복의 성질과 저주의 성질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온다면 저주의 무한리필은 참 곤란하지만 축복이 무한리필은 감사할 일 아닙니까?

그게 화목제물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이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내 가정, 내 인생의 주도권을 주님 앞에 화해하면서 넘겨주세요. 어차피 이 한라산 전체가 주님의 어깨위에서 해체당하고 철거당한 입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듯이 사람의 저주는 딴 게 아니고 불멸이에요. 사람이 안 죽으니까 저주가 되는 거예요. 이게 저하고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의 주도권이라 하는 것은 무한반복을 스톱할 수 있지만 마지막 죽고 난 뒤에는 이 무한반복을 정지시킬 수 있는 주도권이 없어요. 시지프스처럼 그냥 저주받고 있는 겁니다. 혹은 계속 복 받고 있고. 복 받고 있는 것이 천국이고 저주받고 있는 것이 지옥이 되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요, 라는 이 복음의 소식에 의해서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26절에 보면,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팽창입니다. 팽창 안에 있던 그리스도의 그 비밀이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어떻게?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살아나셔서 그의 성도들에게 알게 하시고, 그 뒤에 보면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우리가 다시 한 번 골로새서 전반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골로새서가 뭐냐? 첫강의부터 이야기한 것은, 단일현실에 다중현실이 쳐들어온 거예요.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단일현실에서 나답게 살고, 개성 있게 살다가 갑자기 뭔가 이 세상전체가 통째로 다중현실에 의해서 그 성격이라든지 모든 결정사항이 끝나버렸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원래상태로 복귀되어야 마땅합니다. 여러분, 탈영병하고 헌병대하고 화해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탈영병은 집에 가고 싶어서 탈영한 것이고 헌병대는 그 탈영병을 잡으러 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화해했다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집으로 보낸다는 말입니까, 부대로 복귀한다는 말입니까? 부대로 복귀하지요.

이게 피조물의 위상이에요. 그동안 마귀 때문에 헛바람 들은 겁니다.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바람도 이런 헛바람이 없어요. 그런데 그게 언제까지 허용되는가 하면, 죽기 전까지 허용된 거예요. 그래서 그 죽음자체 위에는 시간이 정지되게 되면 남는 것은 성질만 남거든요. 성질만 남는다면 이게 불멸입니다. 그 때는 고통스러워서 죽고 싶어도, 아무리 칼 가지고 자기를 찔러도 안 죽어요.

유령 같아요. 죽어서 고통을 없앴으면 좋겠는데 안 죽는다는 말이지요. 어떤 가정이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기 식구들 자는데 목 졸라서 다 죽이고 마지막에 약 먹고 자기도 죽고. 그렇게 되면 고통이 없어집니까? 마지막에 본인이 행동한 것이 뭐예요? 가족들 다 죽고 자기도 약 먹고 죽었지요. 그러면 계속해서 어떤 성질은 남습니까?

내 인생은 내가 쥐고 마지막 자살하는 그 순간까지 나는 내가 결정한대로 행복했다는 그것이 그대로 남아서 지옥 가겠지요. 지옥에 가면 나는 내 개성대로 내 뜻대로 산다는 것이 계속 주어지게 되면 그것은 영원무한리필로 저주를 받게 되는 겁니다. 왜? 세상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야 되기에. 그래서 자식 죽이고 아내 죽이고 자기 입에 약 털어넣기 직전에 회개하면 되지요.

야, 참 그런 일이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자식 죽이고 아내 죽이고 살아온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그런 고백이, “이것이 주께서 시킨 일입니다.”라는 고백이 과연 진정성 있게 나올까요? 26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라고 되어 있어요.

감추었으면 계속 감추고 있지 나타내기는 왜 나타내십니까? 그것은 바로 성도에게만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에 보면 성령에 의해서 나타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대로 성도 외부에서는 이렇게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해서 세상 전체가 십자가 중심으로 심판된다는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2장부터는 뭐냐?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가? 바깥에서 아무리 십자가를 지고 무슨 난리를 쳐도 내 마음은 멀쩡하게 “뭔데? 뭐야?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되어버리면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2장 8절을 보겠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을 제가 설명하는데요. 이거 설명하는 논리가 좀 어려워요. 어렵더라도 좀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넘어가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요. 그러면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이미 철학과 속임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에 이야기한 공식. 위치 = 주체 + 권력.

세상권력에 헛된 속임수와 철학이 이미 있는 거예요. 그 철학과 한통속이 되게 되면, 이게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 우리의 위치라고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 20세기에 들어와서 미셀푸코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이 권력에 대해서 아주 잘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느냐 하면, 옛날 봉건시대의 권력은 왕이라는 군주가 쥐고 있었어요. 그래서 권력을 보려면 왕궁에 가면 되고, 수도인 한양에 가면 되고, 높은 자리에 가면 권력이 인격화되고 가시화 되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셀푸코의 책에 보게 되면, 일반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냥 교도소에나 보내서 처리하지만 왕의 몸을 죽이는 것은 능지처참, 말을 가지고 사지를 잡아당기고, 공개적으로 처형을 해요.

그 이유가 뭐냐? 왕의 몸과 너희들의 몸이 다르다는 겁니다. 같은 세포로 되어 있는데 이게 다르다는 거예요. 그 다르다는 것을 위에서 아래로, 권력으로 계속해서 서열을 정해버리는 겁니다. 이게 봉건사회의 권력이에요. 저는 사극을 거의 안봅니다. 화가 나서 안봐요. 조폭도 아니고 말이지요. 네가 뭔데 명령을 하달하고 상당히 기분 나쁘거든요. 왕이라고 별겁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왕이라고 해서 특별대우해주는 그것, 그렇게 될 때 ‘정말 이 세상이 더러운 세상이 맞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미셀 푸코는 이야기합니다. 군주 때는 이 권력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만 지금의 권력은 편재되어 있다는 겁니다. 미셀푸코의 이 아이디어는 아주 탁월합니다. 권력을 누가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알아서 기는 거예요.

알아서 적당하게 윤리 도덕적으로, 자기가 스스로 이 시대에 인정받는 사람으로, 스스로 법을 만드는 식으로 법의 네트워크로 퍼져 있다는 겁니다. 알아서 하는 거예요. 알아서 하니까 더 무서운 거예요. 왜냐하면 위에 권력이 있으면 몰래 딴 짓 하면 되는데 이 권력이 자본주의 사회에 스며드니까 법이 위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매일 같이 내가 뭘 만드는가? 규칙을 만들어요. 내가 스스로 규칙을 만든다고요.

아침에 여섯시에 일어나서 조깅을 하고……, 내가 스스로 규칙을 만든다고요. 규칙을 만드니까 이것은 편재되어 있는 권력망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미셀푸코가 이야기한 가운데 상당히 중요한 함축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적어 볼테니 혹시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군주의 권력은 죽게 하고 살게 내어버려둔다. 그런데 현대자본자의 권력, 현대국가의 권력은 살게 하고 – 푸코는 이것을 생명권력이라고 해요 – 죽게 내버려 둔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군주는 걸리면 체포해서 처단해 버려요. 사족을 멸해버립니다. 군주 근처에는 항상 죽음이 있어요. 이게 감히 왕에게 대들어.

그것 때문에 백성들은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왜? 군주에게 걸리면 안 되니까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반면에 현대는 복지국가정책을 씁니다. 될 수 있는 대로 틈새복지를 해서 연로한 사람들이 굶지는 않는지 기초생활을 보장해줍니다. 동사무소공무원들 보내서 복지를 통해서 전부 다 살게 하는데 살게 함으로서 죽음이라는 것이 나타난다는 거예요.

살게 했기 때문에 죽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어려우니까 쉽게 풀이하겠습니다. “폭력은 인간을 살게 하고 칭찬은 인간을 자살하게 만든다.” 그 이야기에요. 잘한다, 훌륭하다, 내 새끼 최고다, 나중에 벌써 자살했어요. “엄마, 의미가 뭐야?” 밥 먹여줘도 밥은 먹으면서도 의미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가 뭐 하면 되지? 앞으로 내가 삼십대가 되면 어떻게 되지? 내 가는 길은 어디야?’ 지금 밥을 먹고 있으면서, 라면을 끓어먹고 있으면서 ‘내 인생 어떻게 살지?’ 그러고 있어요. 지금 살고 있잖아요. 살고 있는데 자꾸 사는 그 힘이 나를 죽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뭐가 더 있을 거야. 난 이 직장 때려치워야지. 더 좋은 직장으로 가야지 여기는 나한테 안맞아.’

뭐 열정페이?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지금까지 무시 안당하고 살았어.’ 직장에 사표 팍 던지고 나가는 거예요. 살려주기 때문에 점점 더 죽음 쪽으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 군주 때는 뭡니까? 죽는 게 확실해요. 걸리면 죽어요. 그러니까 어쨌든 간에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되는 거예요. 둘 중 어느 것이 행복합니까?

군주시대가 훨씬 행복해요. 그 때는 암 걸려도 암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행복하고, 당뇨병이라는 단어가 없어서 행복해요. 암 걸리든, 당뇨병이 걸리든, 뭐가 걸리든 그것은 늙어죽는 것으로 일괄 처리하는 겁니다. 조선시대 때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47세에요. 50넘으면 영감소리 듣고 60이 넘으면 웬 기적이냐, 해서 온 가족들 모여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요새 환갑잔치 하면 욕 얻어먹습니다. 그저 조용하게 부부가 제주도에나 갔다 와야지요. 자식들에게 알리지도 못해요. 한 때 65세는 뭘 주고 또 노인으로 쳐준다고요? 내가 65세에 다가가니까 이게 70으로 늘어나려고 해요. 나는 공짜표도 못타먹고 죽을 판이에요. 내가 70이 되면 다시 75로 늘어날 것 같아요.

소위 인간들의 꼼수가 인간들의 늪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런가? 주도권을 쥐고 본인 인생 문제를 본인이 해결하려고 하거든요. 이런 식으로 양육 받았고, 이런 식으로 훈계 받았고, 이런 식으로 남이 지시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그런 규칙을 매일같이 개발해요. 자기의 권력을. 그러니까 철학이라는 것이 헛된 속임, 여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사람의 유전’이라고 되어 있지요. 사람의 전통과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세상의 철학과 세상의 초등학문과 반대되는 것이 무엇이냐? 8절에 보면 무엇을 좆음? “그리스도를 좇음”이 나오지요. 그리스도를 좆는 것은 내가 생생하게 살아서 좆는 것이 아니고 주도권을 양도하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러한 팽창이……, 9절에 나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이게 수축이지요. 그리스도 몸 안에서 창세전부터 있는 의미나 모든 개념이 그 안에 응축이 된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몸 안에 그것이 응축되어 있다는 말은 다시 그것이 팽창이 되면 십자가의 의미로만 다시 분화구를 일으키면서 바깥으로 온천지에 마그마를 퍼부으면서 새로운 질서체제를 펼치게 되어 있어요.

제가 묻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그 새로운 질서체제의 성질이 십자가일까요, 부활일까요? 이게 십자가에요. 부활이 아닙니다. 교인들은 원래 눈치가 빠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는 것을 믿어야 된다고 해서 골라잡아요. 예수님이 마굿간인지 외양간인지에서 태어났다. 탄생. 그 다음에 열두 살에 아버지보고 좀 대들었지요. “왜 저를 찾습니까?” 이런 터무니없는 반발을 했고.

그 다음에 물에서 세례 받고. 그것이 30세인지 29세인지는 확실치가 않고요. 그 다음에 여러 가지 기적을 베푸시고, 산상설교 하시고, 열두 제자 뽑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다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잖아요. 사람들,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니까 여기서 자기가 관찰자로 딱 서 있어요. 어느 것을 믿을까, 하고 보는 겁니다.

‘탄생? 병원에서 출생하지 왜 여기서 하지? 이건 나는 싫어. 물세례. 그것도 귀찮아. 기적? 이건 좋다마는 된다는 자신감이 별로 없고. 십자가?’ 후딱 지나가고 싶어요. 그런데 부활? 아, 이걸 믿고 싶어 해요. 부활. 왜? 부활되기 전의 이모든 것이 여기에 함축되어서 포함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활을 믿으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어서 부활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거예요.

여기서 나온 이론이 부활의 새생명이론입니다. 부활의 새생명으로 성령 없으면 못 지키는 말씀을 지키자고 그렇게 나와요. 이단입니다, 그거. 이렇게 돼버리면 무엇을 용인하는가 하면, 관찰자 자리를 용인하게 돼요. 제 3의 따로 떨어져 있는 자리. 골라, 골라, 골라잡아라, 골라잡는 자리를 용인하게 돼요.

그러니 이미 십자가로 갈 때는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선택해서 골라서 믿는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그냥 행함의 일종입니다. 괜찮아 보이는 어떤 정보를 얻어서 그 정보 장착해서 구원받겠다는 종교적인 욕구에 불과한 거지요. 제 3의 자리는 없습니다.

3장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그 다음에 뭡니까?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이렇게 되어 있지요. 너희가 죽었고. 이미 죽은 상태에서는 내 생명 구원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기회는 없어요. 그 다음에 우리를 죽게 하는 생명이 무슨 생명이냐? 그리스도의 생명이거든요.

그리스도의 생명이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새로운 피조물을 이미 주께서 마련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팽창에서 수축되었다가 수축에서 다시 팽창으로 나가게 되면 새로운 마그마가 펼쳐지면서 그리스도를 영광되게 하는 새로운 백성들이 거기서 창조되는 겁니다. 이미 우리의 주도권이라 하는 것은 찾아볼 길이 없어요.

이러한 생명이 우리한테 있다고 치고,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만 있다고 치고, 그 다음부터는 우리의 대인관계나 교회관계나 어떻게 교제하고 나눌수가 있는가? 반드시 십자가를 경유해서 해야 돼요.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다면 반드시 그냥 가면 안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 부부의 연을 맺게 한 것도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를 인정한다면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에게 마저 채운다는 입장에서 결혼을 해야 되지요. 아주 비장한 결심을 결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그게 아닙니다. “주님이 받았던 고난을 내게 채우는 입장에서 나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이런 이상한 프러포즈는 없거든요. 흥, 치, 뽕, 하고 도망갈 것이 뻔하다는 말이지요.

케이크를 먹다가 아야, 해서 보니까 다이아 반지가 들어 있어야 되는데 “우리 주님의 고난을 함께 마저 채울까요?” 원 샷 하는 것도 아니고 고난의 잔을 우리가 왜 마십니까? 인생 편하려고 결혼하지 남은 고난을 마시고자 결혼하지는 않잖아요. “우리는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 되었습니다.” 이런 결혼은 아마 선교단체에서 강제로 짝지어줄 경우에나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선교단체 안에서 서로 만나 결혼할 때에.

하여튼 형식과 폼은 온갖 좋은 것은 다 가져와요. 골로새서에서 다 가져오는데 마음은 영 딴판에 있었어요. ‘저 남자 때문에 팔자 펴 보자. 좀 편하게 살아보자.’ 이런 것이 있더라도 결국 우리는 뭐예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결국 우리는 날마다 뭐 할 줄 안다? 날마다 조작해요. 10미터쯤에서 오해할 만한 것, 오해를 유발할 만한 그 일에 대한 작업을 3미터 앞에서 계속 벌이고 있는 거예요.

교회가 크다, 교회가 굉장히 아름답다, 청소도 잘 되어 있다, 50미터 앞에서 보면 너무 교회가 아름답거든요. 그런데 막상 교회 안에 들어가면 그 아름다운 교회를 유지하고 연명하기 위해서 그 많은 아줌마들을 권사, 집사, 구역장으로 만들어서 뺑뺑이 돌려요. 그것도 무임금으로, 열정페이로. 10미터 앞에서 아름다운데 3미터 앞에 가니까 땀 뻘뻘 흘리면서 청소하고 있어요. 그것도 강요에 의해서.

그것도 모자라서 좀 이상한 단체에서는 그렇게 해야 14만 4천에 포함된대요. 그게 뭐냐? 헛된 속임수에요. 자기 인생을 내가 꾸려간다는 주도권을 아직도 쥐고 있어요. 그놈의 주도권 화해하면서 넘겨주면 될 텐데 아직도 내가 되고 싶은 내가 갖고 있어요. 그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구멍 난 뭐? 구멍 난 스타킹이에요.

어설픈 개념과 의미를 자기가 집어넣는데 그것은 단편적인 것은 되는지 모르지만 전체성을 커버할 수가 없습니다. 골로새서 4장을 봅시다. 7절에 누구 이름나옵니까? 두기고. 9절에 보면 오네시모. 그 다음 10절에,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 11절에 유스도. 14절에 의원 누가, 데마. 17절에 보면 아킵보, 빌레몬의 아들이지요. 이렇게 죽 나오거든요.

이 사람들 보게 되면 우리가 성경 골로새서를 보면서, ‘아, 여기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들이 있네.’ 하는데 똑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이 사람들이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주체가 아니고 위치에요, 위치. 주체가 아니고 위치라니까요. 위치는 뭐다? 주체 + 뭐가 나온다? 주님의 권력에 의해서 그들이 공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요.

위치라고 하니까 잘 이해가 안될 것인데 예를 들면, 제 집안에 열 식구가 살았어요. 나하고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고모나 삼촌들이 많이 살았어요. 할머니가 늦둥이를 많이 낳았어요. 형과 삼촌이 동갑인 집이 옛날에는 많았잖아요. 그렇게 살 때 여자들을 알아봤어요. 군불을 때는데 불 땐 아랫목은 뜨겁고 1미터만 거기서 올라가도 윗목은 싸늘하고 차갑거든요.  

우리집이 로켓 달나라 가는 것 본다고 TV 샀어요. 1969년도인가에 샀는데요. 암스트롱이 달나라 가는 것 본다고 TV앞에 앉아 있는데 엉덩이가 차갑다는 말이지요. 그런 것은 여자들이 빠른데 얼른 담요를 가져다가 깔아요. 그래서 여자들끼리만 깔고 덮어요. ‘아, 이렇구나. 이것이 여자들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이구나.’

담요가 있는데 고모 세 명과 할머니까지 네 명이 앉았다는 말이지요. 숫자는 네 명이지만 그 담요는 오직 한 장의 담요에요. 이게 위치입니다. 개개인의 역량을 따지는 게 아니에요. 개개인의 믿음을 따지는 게 아닙니다. 너희들은 어디에 걸터앉았는가? 어느 모포를 덮고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부부가 된다는 말은 같은 담요, 주님이 주신 담요, 용서의 담요, 화해의 담요를 같이 덮고 사는 것을 부부라고 합니다. 그것도 주 안에서 부부에요. 4장이 벌써 끝나버렸네요. 그런데 이걸 보고 “여러분, 이 두기고가 어떤 사람인데 여러분들도 본받아서 사도바울을 위해서 봉사합시다.” 봉사합시다, 그 말이 무슨 뜻이에요?

“김 집사님, 봉사 안했지요? 두기고가 되어야지. 안 그러면 탈락입니다.” 교회에서 사람 이름 거론하고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데……, 이렇게 하면 전부 교인들이 주눅이 들어요. 아킵보는 목숨을 바쳐서 봉사했고, 아리스다고는 감옥 까지 같이 따라갔고……, 하면서 자꾸 김 권사를 쳐다보네요. ‘목사 집 쌀 떨어진 것도 모르지 지금! 복음과 함께 고난을 안 받고 있지?’

이런 식으로 은근히 협박 아닌 공갈을 우회적으로 ……. 본인은 정말 그런 식으로 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게 안 듣긴 다니까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sns에 이런 소리를 했어요. 제발 예수 이야기만 좀 해라 하는 말을 왜 했겠어요. 예수 이야기만 하고 싶어도 골로새서 4장이 나오니까 실컷 앞에서 1장, 2장, 3장, 예수님은 이런 분이고, 또 이런 분이고, 죽 해놓고 4장에 들어가면 “이제 본격적으로 봅시다. 교회 꼬라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번 볼까요?”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여기 기도하라고 했는데 요즘 새벽기도 영 안 나오던데요.” 이렇게 막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성경을 해석할 때 그리스도로 출발했으면 사람에게 가서는 안돼요. 그리스도에게 되돌아 와야 됩니다. 모든 것이 주 안에 있기 때문에. 골로새서 4장에 이런 인사가 나온다는 것은 “사도바울과 같은 담요를 지금 덮고 있지요?”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것 맞지요?”라고 묻는 거예요. 뭘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주어진 형편이 그리스도가 주신 위치, 그리스도의 권능과 함께 있는 것, 그렇지요?“라고 던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함께 옥에 갇히고, 어떤 사람은 도와주고, 그런 것은 그 사람의 역량에 따라서, 그 사람의 형편에 따라서 주께서 알아서, 사도바울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도바울에게 듣고 있는 그 복음을 위해서 내놓을 때는 내놓고 거둘 때는 거두고, 이것은 사도바울의 눈치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믿는 성령 안에서 그렇게 할 뿐입니다.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직접 너희를 가르치는데 왜 목사가 그 중간에 건방지게 겁 없이 거기에 차고 들어와요? 목사가 구원했습니까? 목사가 십자가 졌어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지지도 않았어요. 사도바울은 세례도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외에는 주지도 않았어요. 착각할까봐, 사도바울이 중간 매체라고 착각할까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쓴 사람이에요. 내가 나서기 때문에 복음이 오히려 가려질까봐 두려워한 겁니다. 왜? 교회는 그리스도 몸이지 우리들 몸이 뭉친 것이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분 쉽시다.
 오용익(IP:61.♡.207.237) 17-01-14 12:19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골로새서강해 제 6강 [할례와 세례]
(강의 : 이근호목사)

이 시간에는 골로새서 2장 11절을 보겠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 다음에 할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12절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세례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어디서 그 근거를 끄집어내느냐 하면, 할례에서 그 근거를 끄집어냅니다.

할례 안에 담겨 있던 하나님의 그 지시사항, 창세기 17장이지요, 할례 받지 않으면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그것을 할례언약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그 할례의 약속을 하는 취지와 그 취지의 완성이 이 세례를 통해서 구현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현되었다고 한다면 이 과정에서 뭐가 나오는가? 뭐가 생산돼요.

이 강의의 제목이 <복음의 생산>이지요. 복음의 생산입니다. 또는 성도의 생산, 새 성도, 또는 새로운 피조물의 생산이지요. 그러면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고 세례도 세례요한을 보내서 세례를 하게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려주신 법과 법 사이에서 하나님이 필요한 것들은 모조리 다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자기 솜씨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디에 끼어들어야 되는가 하는 그 문제가 있겠지요. 처음부터 할례에 끼어들려고 하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고, 우리 이방인 입장에서 세례에 끼어들려 하니까 할례를 모르면 세례에 못 끼어들고, 대체 어느 대목에서 우리가 끼어들어서 이 언약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대상자가 될 수 있느냐를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물론 이 질문이 바람직한 질문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은 할 수 있잖아요. 생각하는 것은 자유니까 그렇게 생각한다 그 말이지요. 성경에서 세례 나오고, 할례 나오고, 그리스도 나오고, 그 다음에 십자가로 승리했다 하니까 그 승리에 우리가 참여하고 싶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되고 싶은 의욕들은 다 있는 거예요.

아주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할례나 세례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무에서, 없음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없음에서 나온다는 말은, 존재의 밑,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밑이 있는데 그 밑에서의 작용이 존재세계 속에 이것을 드러내게 되면 이것이 할례가 되고 세례가 되는 겁니다.

이 존재, 이것이 ‘있음’이니까 우리는 이스라엘을 있음으로 생각하지요. 이스라엘 있음을 밑에서 밀어붙여 버리면 여기서 무슨 현상이 나오는가? 할례를 행해야 하는 할례언약이 일어나는 겁니다. 없음에서 이스라엘에게 할례언약을 행한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슨 뜻도 모르고 그냥 하라고 하니까 그냥 하는 거예요. 할례를 행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있음이 없음의 지시를 등에 업었는데 결국은 이 없음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이 할례가 이스라엘을 잠식하고 없앰으로서 할례는 세례로부터 완성을 보이는 겁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할례를 행했는데 신명기 뒷부분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는 왜 마음의 할례를 안행하지?”(신 10:16) “육신의 할례를 시키는 대로 했는데요?” “아니. 그게 다가 아니거든?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지.”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이스라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뭐라고 반박하겠습니까? “진작 그렇게 해야지요. 처음부터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하지 이제 와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한다면 하나님 쪽에서 이렇게 답변해요. 할례를 행하라는 것을 던져놓으면, 그 할례가 없음에서 나오게 되면, 할례 행함을 함으로서 비로소 밝혀지는 죄들이 있어요. 악한 죄들이 나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율법을 지키기 전까지는 발각되지 않는 죄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발각되는 죄가 있어요. 그 죄는 뭐냐? 갑자기 율법 받고 난 뒤에 교만해졌다, 그런 말이 아니고 할례언약을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 모든 하나님의 지시명령이 어디에 준해서 주어지느냐 하면, 할례에 숨겨진 취지에 준해서 계속 명령이 하달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교인이 있는데 어느 날 자기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 교인에게 목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아는 양반이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를 안다는 양반이 그런 것 때문에 불평하십니까? 주님은 그것보다 고생했는데, 복음전하다가 돌에 맞는다고 불평하기 있기요?”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목숨을 바쳤는데 애 하나 세월호사건으로 물에 빠졌다고 그걸로 자꾸 시비 걸래요?” 이런 말과 똑같은 거란 말이지요. 차라리 십자가를 몰랐으면 애 잃어버렸다고 원망하고, 집에 불났다고 원망하고, 가정에 문제 있다고 원망하는 것이 나의 정당한 권리처럼 여겼는데 십자가를 알고부터는 그렇게 정당한 권리조차 숨겨진, 잠재되어 있던 죄악이라는 사실이 들춰지게 되는 겁니다.

“목사님, 그렇게 훌륭하게 하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교회 없습니다. 내가 지어낸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 아는 교인이 그래서 되겠어요?”라고 말을 할 수 있는 목사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목사 본인이 그 교회를 사면해 줘야 돼요.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동안 여러분에 많은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나 줘야 돼요. 그것도 매주 마다.

자기가 간섭이나 해댈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너는?” 이런 말이 대번 나오거든요. “십자가 아는 사람이 그렇게 하느냐고 닦달 내는 너는? 너는 십자가를 안다는 이야기인데 십자가 안다는 꼬라지하고는!” 이렇게 되거든요. 양자물리학에 이런게 있어요. 하나의 입자가 있다면 그 입자 속에 힘이 작용하면서 필드를, 하나의 장을 형성합니다. 이것이 교재에 나와 있거든요.

그런데 교재에 안 나오는 이야기가 있어요. 여기에 힘이 작용할 때 이 힘이 원 발원지, 여기서부터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필드의 힘이 도착지점과 원발산지까지 다 추궁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최종 마지막 입자가 되어버리면 여기에 접근하는 힘이 무한대기 때문에, 실제 관측과 안 맞기 때문에 끈 이론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물리학의 끈 이론을 말하는 겁니다. 뭔가 무한대의 힘으로 작용 받게 된다면 이런 일은 없다. 어떤 면적의 끈이 있어서 그 중간과정에서 숨은 차원이 있다. 7차원이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이 뭐냐? 십자가를 언급했으면 언급한 사람은 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언급한 내용에 본인이 추궁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 있는 자격자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안 보이는데요? 교회에 예수님이 안 보인다고요. 허연 영감이 도포입고 있다든지 그런 것이 안보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현재성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현재성은 바로 성령이지요. 그래서 성경대로 모든 교인들과 성도는 누가 관리한다? 목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관리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교회 목회는 누가 합니까?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친히 성령께서 목회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디모데 3장에 나오는 감독된 자는 무슨 역할인가? “이렇게 하는 그것이 감독된 자의 입장에서 죄인입니다.”를 보여주는 입장에서 감독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겁니다. 문장이 좀 길지요? 집사로 세움 받은 사람들은 집사가 되어봐야, 성경에 나오는 대로 집사는 이러이러 해야 된다는……, 집사는 술에 인 박이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 있어요.

집사가 되어봐야, 집사 되기 전에는 남의 이야기인데 집사 되고 난 뒤에는 그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춰볼 때 집사 될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는 존재, ‘그 죄인이 나구나.’ 하는 자를 교회에서 집사로 세워야 되는 거예요. 햇권사 세울 때도 마찬가지고, 부목사 세울 때도 마찬가지고, 목사 세울 때도 마찬가지고.

“여러분이 목사 세웠으면 이제 이 목사라는 것이 얼마나 목사 입장에서 죄를 짓는가를 이제부터 똑똑히 보시기 바랍니다.” 하고 그렇게 선포를 해야 되고 교인들은 거기에 맞받아서 “목사답지 않으면 다음 달부터 월급 없습니다.” 하고 맞받아 나와야 돼요. “……의수히 드리고……” 그런 것 있으면 안돼요. 위임식 할 때. 의수히 드린다는 것 잘 모르지요? 아시는 분은 아실 것인데.

당회장 위임식 할 때 노회장이 와서 당회장 세워놓고 교인들 선서시키는데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그 대목이에요. “사모한테 한복 한 벌, 목사한테 양복 한 벌 주고 생활비는 의수히 드리고” 정한대로 빠지지 않고 드리겠다는 뜻이에요. 옛날 교회 다닌 사람은 다 그런 아련한 추억들이 있지요. 그게 하이라이트에요. 그 이야기 하려고 위임식하는 거예요.

교인들은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하는 거지요. 이게 복음의 생산, 성도의 생산입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는데 그 법의 입안자와 그 법을 제시하는 분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교류해야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교인이 나가면 주께서 보내신 것이고 교인이 왔다면 주께서 오게 하신 거예요. 그 다음 주에 안보이더라도 상관없어요. 그 다음 주에 안 보이는 것은 주께서 안 오게 하신 거예요.

너무 왔다 갔다 하면 교인들이 보기에 약간 어지럽기는 해요. 하지만 그걸 통해서 뭔가 붙잡으려고 하고 안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그 욕심, 괜히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런 욕심이 있음을 들통 내게 하는 작용을 주께서 그 교회에 목회라는 이름으로 실시하시는 겁니다. 주일 날 했는데 제가 생각해도 너무 재미있어서 여기서 써먹어야 되겠어요. 시편 4편 7절이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여기에 응용문제 막 나올 수 있지요. 교인 갑자기 50명이 오는 기쁨과 주께서 평소에 내 맘에 두신 기쁨 중 어느 것이 큽니까? 그러면, “교인 50명 와도 별거 아닙니다.” 하면 이것은 한 6천명 모이는 교인들이에요. 그런데 25명 모이는 교회에 50명이 오게 되면 ‘와! 재정 자립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요. 그것은 평소에 주께서 내 맘에 두신 기쁨보다도 50명이 오는 기쁨이 더 크겠지요. ‘이제 쨍 하고 해 뜰 날 왔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제가 주일날 써먹었던 것은, 교인들에게 40억, 50억 나눠주면서 ……, 5천원 나눠주면 “주께서 주신 기쁨이 더 큽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아예 50억이나 60억을 주면서 “50억을 받을 때의 그 기쁨과 주께서 마음에 두신 기쁨이 어느 것이 더 기쁩니까?”라고 물어보지요. 그러면 이론상은 “주께서 주신 기쁨이 더 기쁩니다.” 하지만 시험을 해보자는 말이지요.

갑자기 그 집이 불이나면서 50억이 날라 가보세요. 괜히 10미터 앞에서 조작하다가 들통 나버렸지요. 이게 시편이거든요. 시편 이전에 창세기에 할례언약이 있는 거예요. 육신의 할례언약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점차점차 내부로 침투해서 마음의 할례를 행했느냐를 추가적으로 시편 4편 7절 같은 말씀으로 계속 투입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 내가 끊어내야 될 것을, 고추만 끊어냈지 다른 것은 전혀 손도 안대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들통 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여자는 할례가 없는가? 물론 아프리카 무슬림에 그런 것이 있지만 여자는 왜 할례가 없는가? 여자는 남편을 쳐다보는 입장에 있어요. 저 남편이 얼마나 어설프고 엉터리인가를 지켜보다가 그게 엉터리인 것을 알고 바꿔치기 할 예비단계에 놓인 사람이 여자에요.

‘잘하는가 한번 보자.’ 우병우처럼 이렇게 팔짱 끼고 ‘주의 말씀대로 잘 하는가 보자.’ 하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뻔하지요. 못하잖아요. ‘그렇지. 우리 신랑은 주님밖에 없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담요만 저희끼리 덮는 것이 여자가 아니에요.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나중에 마음의 할례까지 온다는 이것은 결국 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왔는데 그것이 어디까지? 자기 백성의 마음까지 침투한다는 것을 할례라는 상징물로서 구약에서 그림자로 보여준 거예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 믿자. 열두 제자 중에 믿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다 실패했습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다는 거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앞당겨서 필름 빨리 감아버리면 예수님이 목자라고 하는 그 뉘앙스 속에 있는, 양들이 다 떠나가고 홀로 남을 목자라는 그 의미를 예수님만 아는데 그 주변에 있는 열두 제자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오해하고 곡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육신대 육신의관계가 그런 거예요. 오해의 관계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늘 조작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필요한 의미와 개념만 둘둘 감겨 있어요. 구멍 난 스타킹처럼. 전체를 덮을 필요 없지만 나한테는 유리해 보이는 그런 의미만 있는데 주님은 전체의미를 몰고 왔잖아요. 그러니 어설프게 덮으면 안 덮이잖아요. 너무 누락된 부분이 많고 빠진 부분이 많아가지고.

“아, 예수님은 나하고 계속 사귈 분이 아니야. 떠날 분이야. 도망치자. 나 저사람 모른다. 나 저사람 저주한다.” 베드로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말이지요. 자기가 감고 있는 의미로서 주님을 몽땅 다 함유하기는, 주님을 다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방법은 뭡니까? 주님께서 오시면 되는 거지요.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자기 딴엔 다 내놓았는데 그 의미가 주님의 취지를 덮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여름에는 요한복음을 해버릴까요? 요한복음 21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 거예요. 베드로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예,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못해요.

자기가 아는 의미는 제한되고 주께서 먼저 사랑이라는 말을 끄집어낼 때는 나를 온전히 덮고도 넉넉하게 남아 있는 그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리를 넘기지요.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비겁하기는 참. 한 번 더 물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아실 줄 믿습니다.” 바통을, 주도권을 넘겨버려요.

또 세 번째 묻고 난 뒤에 “너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평소에 네가 원하는 길로 가고자 안달이 났었어. 내가 그런 너를 그냥 방치하지 않을 거야. 왜? 나는 네가 모르는 새로운 의미, 천국을 완성하고 영생을 주는 의미는 나만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베드로가 3년 동안 배웠다고 그것을 써먹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매일매일 배우는 겁니다. 지금껏 써먹었으니 얼추 어지간하면 통하지 않겠는가? 그런 것 없습니다. 주께서 허리띠 쥐고 매일같이 가게 되면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주님의 의미가 느껴지지요.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했던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3장을 볼까요?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기도내용이 뭐냐? 18절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왜? 의미가 우리보다 크니까.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넓이, 길이, 높이, 깊이, 3차원이지요.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미 완성했기 때문에 모든 의미는 완료 상태에 들어갔어요. 충만해요. 충만한데 우리가 조금만 지금 먹고 주님 안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어린 애들, 철없는 예닐곱 살 애들보고 씻으라고 하면 춥다고 대충 물 찍어서 시늉만 내잖아요. “에라, 이놈아.” 하고 양동이로 물을 부어버리지요. 그 양동이에 이름을 ‘충만’이라고 써놓았어요. ‘이거 나한테 유리한데. 이 말씀은 나한테 좋은데.’ 어디서, 하고 그대로 다 부어버리지요. 어푸, 하고 뒤집어 씌워지게 되면 내가 몰랐던 주님의 그 사랑의 깊이와 용서의 그 은혜로움을 더욱더 많이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 계속해서 들이닥치지요. 이래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미리 아는 환란과 곤고나 핍박은 그거 핍박 아닙니다. 항상 우리가 소급해서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돌아보니까 과거의 모든 것들이 환란과 핍박과 기근이고 적신이고 위험이고 칼이었습니다.

내 힘으로서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상황, 그것이 어려운 일도 될 수 있고 더욱더 어려운 위협은 거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더 끊기 힘든 거예요. 주님 주신 기쁨보다도 포도주가 갑자기 생산량이 늘어나는 그 기쁨이 주의 기쁨을 취소시키는 현상 속에 우리가 놓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육체 바깥에서 우리의 내부로 온다면 우리 내부한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라고 물으면 성경대로 답해야지요.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위해서 목욕탕에 갈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목욕탕 갈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행하기 위해서, 또는 다른 말로 세례를 행하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성령을 통해서 창세전의 비밀을 알 수 있는데 그 비밀은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친절한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무거워서 벗어나지 못한 그 짐들을 주께서 공생애를 통해서 다 벗겨내는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14절에 봅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라고 되어 있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못 박음을 당했지요. 본인이 “못 하나 주세요.” 해서 장도리 가지고 본인이 못을 쳐댄 것이 아니잖아요.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았지요. 지금까지 배운 것 복습해 봅시다. 시간이 완성이 되고 멈추게 되면 뭐만 남아 있다? 시간이 거두어지면 성질만 남아 있지요. 성질의 특징은 무한반복이지요.

십자가의 무한반복이 되게 되면 앞으로 역사가 얼마가 진행되든지 관계없이 택한 백성에게는 십자가가 반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반복할 때는 어떻게 되느냐? 주님이 십자가에 당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 자리에다가 자기가 목수가 되어서 자기가 졌던 십자가에 어떤 내용이 중첩되어 있고 주름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치는 거예요.

일종의 공고판입니다. 보란 듯이. 옛날 관원의 이방이 사또가 전하는 전달사항을 붙여서 광고하잖아요. 이런 인상 가진 사람은 현상금 20냥, 하듯이 십자가에 공고를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예수님의 육체를 잠간만 싹 내려 보니까 예수님 육신 뒤에 뭐가 있는가 하면, 율법을 찢었다는 것이 걸개처럼 걸려 있어요.

걸개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광주에 가보면 알 수 있어요. 광주 민주화운동 할 때 걸개를 많이 했어요. 거는 그림을 걸개라 합니다. 걸개처럼 죽 달아놓았다는 말이지요. 그게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걸려 있으면 말씀의 완성단계에서는 이것이 무한리필, 무한반복이 되는 거예요. 내가 행할 수 있는 할례는 없고 내가 행할 수 있는 세례도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그 세례와 할례를 다 행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세례도 뭔가 절차가 있어요. 율법을 제거하려면 주님께서도 아버지의 지시에 따른 절차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온 절차가 물세례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불세례에요. 불세례에서 세례요한이 말한 불세례는 유황불 떨어지는 것이고 예수님의 불세례는 십자가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의견이 달라요.

그 다음에 나오는 순서가 성령세례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 이것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했던 거예요. 어디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제로. 그래서 적그리스도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는 것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그냥 육신이 아니고 육신으로 하신 일이 있어요. 우리가 하지 못한 일을 주께서 대신, 물세례, 불세례, 성령세례를 이미 다 치러버린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좋기는 좋은데 우리가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세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노리고 침투하라고 보낸 거예요. 그 침투한 근거가 뭐냐 하면, 새언약입니다. 새언약과 옛언약의 차이점은, 옛언약은 언약이 있고, 율법이 있고,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제사할 때 제사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물 들고 내가 성전에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가는 반면에 새언약은 율법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버립니다. 이게 예레미야 31장 31절에 나와요. 새기는데도 조건이 있어요. 새기는데 아무한테나 주는 것이 아니고 다윗언약에 해당되는, 진짜 다윗언약의 자손에게만 새겨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게 다윗언약이 완성이기 때문에. 다윗언약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왕과 그 백성의 관계입니다. 백성은 하나도 없어요. 왕이 먼저 등장해서 백성을 새롭게 생산하는 언약이 다윗언약입니다. 백성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새언약대로 성령을 보내지요. 새언약의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성령 보낸다는 구절이 어디에 예언되어 있는가?

이게 에스겔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메시아가, 다윗이 다시 오셔서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바짝 마른 뼈인데 말씀과 성령이 와버리니까 막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바짝 마른 뼈에요. 그걸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인자야, 라고 장차 오실 예수님이 호칭을 사용합니다. 너에게 일어난 그 일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이 자리에 안계셨지요? 아까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요.” 이처럼 다윗언약이라는 것은 노리고 들어가는 겁니다. 질문이 뭐냐 하면, 남편 돈 잘 벌어오고 남들 보기에 행복하게 사는 가정의 문제점이 뭐냐 하는 질문이었어요.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알아요? 세 번이나 했는데 이제는 다 알겠지요. 전체성을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로 둘둘 감아서 자기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문제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그것이 문제지요.

계속해 봅시다. 언약에 있어서 왕이 먼저 등장해요. 왕이 먼저 등장하는데 왕이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뼈로 죽었던 이 백성의 책임을 왕이 대신 담당을 해줘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다윗언약 자체가 왕 개인 한 사람보고 하지 죽은 백성보고 계약을 안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국은 한 사람보고 계약을 하지 그 한 사람 빼놓고 다른 사람은 다 물러가 있어야 돼요.

물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있어야 돼요.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복음을 설명하면서 복음이 뭐냐? 예언된 그 다윗 왕이 육신으로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했다. 이게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구약을 토대로 확고하게 하나님의 약속은 변개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다윗언약을 성실히 지킨다고 시편 89편에 나와 있어요. 다윗언약은 영원함이라.

그 다윗언약의 영원함을 에스겔에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백성을 끄집어낸다고 했지요. 누가복음 1장에서는 가난한 자에게서 끄집어낸다고 되어 있어요. 다윗의 후손이 오게 되면 권세 있는 자를 쳐부수고 가난한 자를 권세 있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을 촛불집회에서 써먹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해요.

촛불집회에 이 본문이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갖다 붙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왕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난 뒤에 하나님이 다윗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왕과 결부된 새로운 백성들을 성령으로 찾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왕이 부활되고 그 다음에 백성들이 부활되어야 돼요. 이게 다니엘 12장에 나와 있거든요.

이렇게 되면 이게 마지막 때가 돼요. 마지막 때란 더는 하나님의 계약은 없다는 거예요. 이 다윗언약의 오실 분으로서 모든 것을 끝내버립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설교한 대목인데요. 오늘날도 이렇게 설교했으면 좋겠습니다만, 30절에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여러분, 들어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불신자라고 치고 어떤 아저씨가 와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했지만 이제는 정신 차리고 회개하라.” 했다 치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좀 건방지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네가 알기는 뭘 알아? 세상에 사람이 너밖에 없어? 그리고 더 나아가서 네가 무슨 권리로 전세상의 모든 민족과 역사를 총괄해서 정리할 자격자가 되나? 민족마다 역사가 따로 있고 종교가 따로 있고 신이 다 다른데 네가 그것보다 초월적인 위치에 있어서 거기서 이런 건방진 소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너에게 위임했나? 네가 유엔사무총장이라도 되나? 그럴 수가 있나?” 그 말입니다.

초반에 이런 이야기 할 때부터 어떻게 됩니까? 거부반응이 오지요. 그 다음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그 다음에 뭐예요?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사람이라고 생각해? 너는 사람 아니야.” 그런 뜻이에요. 건방에 곱하기 건방이에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뭐라 합니까? 교만에다가 곱하기 교만이에요.

“너만 생각이 있고 너만 판단력 있어? 우리도 다 생각이 있어. 우리도 공자 있고 맹자 있고 다 알만큼 아는 사람이야. 경험도 있어. 심판을 해도 내가 알아서 심판해. 네가 심판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대들 수밖에 없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살다 가신 그 동일한 세계, 동일한 단일현실에서 사도바울도 똑같은 비난과 미움과 핍박을 경험케 하고요,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이런 경험과 핍박에 화목제물 되게 하신 우리를, 성도를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건방떨지 않으면 성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드론을 띄워서 위에서 보는 전체성을 가진, 우리 집은 행복해, 그것 말고 세상을 볼 때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 사람만 이 사도바울의 말이 교만한 것이 아니고 이게 정당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면 드론을 띄우자는 말입니다. 

드론 띄우고 촛불집회 위로 가보자는 말이지요. 그게 정의인지, 민주주의가 정의인지, 평등이 정의인지 한번 보자 이말입니다. 사도바울은 평등이 없어요. 민주주의 아닙니다. 독재도 이런 독재가 없어요. 끝났다! 끝났다! 끝났다! 독수리가 날면서 하는 소리(계 8:13)와 똑같은 겁니다. 마지막때 하는 거예요. 그런 용감함을 좀 누리시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이 말하면 독선적이라든지 “너는 평소부터 교만한 줄 알았는데 더욱더 교만하네.” 이런 소리 들으면 그동안 쌓아놓은 나의 위신과 체면과 자존감은 다 어디서 찾지, 이렇게 벌벌 떨지 마시고요. 그렇게 하면 우리가 너무 조심스럽게 살아가잖아요. 이왕 건방지다는 소리 듣는 것 화끈하게 드론을 한 500미터쯤 띄워버리세요.

31절에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직장에서 어떻게 하느냐? 결재 판을 올릴 때 마음속으로, 진짜 올리면 안 되고요, 마음속으로 사도행전 19장 31절을 적어서 올리는 거예요. ‘이거나 받고 천당이나 가라.’ 하면서.

“부장님, 결재 올립니다.” 결재를 올리면서 올리는 자기 정신은 드론을 띄워버리는 거예요. 드론 띄우면 그 부장 머리 빠진 것 다 보이지요. 인간 아니지요. 부장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아니에요. 왜?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던 시대, 된장인지 뭔지 아무것도 몰라요. 회개하라는 말도 못 들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뭘 줬다? 증거를 줬다.

믿을 만한 증거를 줬다는 말은 다른 증거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간증 들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른 증거, 간증이 왜 위험한가 하면, 이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기에 위험한 거예요. 성령이 와서 믿어야 되는데 성령 없어도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기도 많이 했더니 부자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 없이도 평소에 노리던 거잖아요.

주님 주신 기쁨보다 돈 챙기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평소에 노리는데다 간증을 해버리니까 ‘야, 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 뭔가 행운이 찾아오겠구나.’ 이렇게 해서 끌어 모아봐야 그것은 쓰레기교회에요. 그것은 교회 아니지요. 점집이고 절간이라니까요. 자기생계에는 도움이 되겠다마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1차 작업은 일단 끌어 모아놓고 2차로 복음으로 공략하겠습니다.”

사람이 바보입니까? 처음에 했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람이 헷갈리지요. 그러면 자칫하면 이렇게 돼요. 죽을 자를 살리고 살릴 자를 죽이는 에스겔에서 나온 그 고발에 그 목사가 당하는 경우가 되는 겁니다. 그런 꼼수를 쓰는 이유를 대라고 나와요. 그런 꼼수를 써야 될 뭔가 노림수, 그 이유를 대보라고 하면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했다.”

“아닌데? 하늘나라 확장이라는 것은 사도바울처럼 이런 설교를 해야 되는데 너는 왜 그런 꼼수를 썼는가?” “하늘나라 확장하면서 커미션 챙기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솔직하게 고백하게 되지요. 고백한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사 차리고 커미션 챙기는 것과 똑같은 거잖아요.

계속 세례에 대해서 합니다. 다윗언약에서 백성을 만듭니다. 백성은 죽어 있기 때문에 행함의 여지가 없어요. 뭔가 꿈틀거리면서 “주님이 저기 계시네. 인내하고 찾아가야지. 주여, 5미터, 4미터, 3미터…….”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손 내밀고 있는데 “가까이, 더 가까이……” 그런 것은 없어요. 직접 주님이 우리 속에 반도체 칩 심듯이 장착해서 탑재를 시켜 버립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의미는 혼란에 빠집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 사도행전이나 골로새서 2장의 말씀이 전에는 문자로 왔던 것이 우리 내부에서 살아서 좌우로 발길질을 해대요. 임산부 안에서 아기가 발길질을 하듯이 말씀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발길질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나오느냐? 본인이 만들어가는 인생이 아니고 어떤 낯선 영이 들어왔는지 내 인생을 내가 어떻게 책임진다는 것을 포기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안 그래도 뜻대로 하고 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자꾸 그런 말 하는 것이 수상한데 가만있어라. 입 다물고 있어. 내가 뜻대로 할 테니까.”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심하게 몰고 가지 마옵소서, 라는 연막을 치는데 “가만있어라. 모든 것을 뜻대로 할 테니 모든 뜻에 대해서 너는 범사에 감사하기만 하면 돼.”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남들 앞에서 내가 어떻다는, ‘나’라는 이 주어자리를 포기하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했습니다, 하고 자기는 목적어나 서술어자리에 가버려요. 그러면 문장의 1형식이 주어 + 동사로 되어 있고 2형식이 주어 + 보어로 되어 있고 3형식이 주어 + 동사 + 목적어로 되어 있거든요. 이 언어의 의미에서 주어 자리에서 주님이 주어자리를 차지해 버리면 내가 어떤 목적이 되든, 어떤 보어가 되든지, 어떤 동사가 되든지 간에 주님의 사람의 되는 식이 다윗언약의 완성이고 이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를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2절에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지요. 세례를 몇 번 받았습니까? 한 번 받았지요. 여기서 몇 명이 받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번 받은 세례에 다 같이 포함이 되지요.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는 ‘연합’이라고 합니다.

모세한테 모세외의 모든 사람이 연합이 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아버리면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 다음에 뭐가 나와요? 세례도 하나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 세례 따로 있고 내 세례 따로 있고, 유아세례 따로 있고 유아세례 안 받은 사람 따로 있고, 그런 것은 없어요. 세례는 하나입니다.

“그러면 세례는 언제 받습니까?” 그것은 질문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기 때문에, 종결되었기 때문에 시간자체가 날라 가버리고 남은 것은 세례의 성질과 성격이 무한리필로 우리 인생을 주께서 원하는 인생으로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세례 속에 있는 것이지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 하는 시간개념은 여기서는 성립이 안돼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세례를 받아야 됩니까?” 하는데 “내가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여기서 ‘내가’는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주어 자리에 있지요. 이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물세례를 받으세요.”라고 나오지요. 전통적으로 그렇게 나오지요.

“성령세례 받았는데 왜 또 물세례를 받습니까?”라고 성경깨나 봤던 이 똑똑이가 겁 없이 목사님에게 질문한다는 말이지요. 성령세례를 받았으면 되었지 왜 물세례를 따로 받아야 되느냐고 물으면, “성령세례 받은 티를 내기 위해서 물세례 받습니다.”라고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면 그 똑똑이가 또 가만있지 않습니다. “티는 왜 내야 됩니까?”

티는 왜 내야 되느냐 하면, “교회는 모두 물세례 받은 사람이 성도의 연합이기에 상징으로 받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목사님은 점점 땀을 질질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 무슨 질문이 또 나올지. 그러면 그 똑똑이가 또 질문해요. “그러면 성령세례 받아놓고 물세례를 안받으면 성도가 아닙니까?” 이렇게 나와요.

제가 지금 누굴 예를 들고 있는지, 안 그러면 가르치는지, 혹은 선동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만, 그렇게 질문 받으면 목사님은 좀 더듬더듬 그러지요. 더듬거리면서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 대 인간의 연합에 있어서는 같이 물세례를 받아줘야 분위기가 썰렁하지 않고 다 화목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똑똑이가 진짜 똑똑한데 “제가 알기에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끼리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뭐로 연결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결하는데 목사님의 말을 들으면 어떤 친목차원에서, 교인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자는 차원에서, 너 받았으니까 같이 받아서 우리는 한 그룹이라는 것을 그냥 확인하는 차원으로 받으라는 그런 이야기입니까?”라고 물어요.

그러면 그 목사님이 참다 참다 육의 열매가 나오지요. “받기 싫으면 안 받아도 됩니다.” 하고 휙 돌아서지요. 속으로 ‘줘도 문제라.’ 하면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교회가 뭐라고 했던가요? 교회는 그리스도 몸이지요. 그 그리스도 몸을 가시화시키려고 했던 거예요. 왜 가시화시키려고 하느냐 하면,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은 신을 찾아가는데 물질이나 체계를 더듬어서 가는 거예요.

왜? 금송아지 습관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있으면 안심이 되고 거기서 심리적으로 안정을 얻는 거예요. 교회가 아니고 집에 있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도 댕겨야지.” 월세 내는 홀에 들어간 거잖아요. 좀 괜찮은 데는 고딕식 건물에 가잖아요. 거기 갔다 온 것과 집에 가만히 있었던 것과 심리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은, 평소 습관이 물질적인 것, 체계적인 것, 법적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스스로 자신이 매개물로서 채택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게 뭐가 문제냐 하면, 본인이 신을 찾는 것을 유지하고 간직하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돼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교회 다니는 내가 교회 안다니는 사람을 폄하하게 되고 질타하게 됩니다. 내 기준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모독하게 되고 판단하게 돼요. 그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에 일어났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원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뿌리는 자도 있고 물주는 자도 분명히 있어. 하지만 백날 뿌리고 뭘 줘봐야 모든 주어자리에는 누가 있다?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이 원칙을 고수하지 않는 한 너희들이 성만찬을 하든 뭘 하든 처음부터 너희들은 성령의 성전 됨을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목회를 잘했습니까?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가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교회가 무너졌습니까? 하늘나라 확장에 지장이 되었습니까? 그게 바로 하늘나라 확장의 방식입니다. 가짜임을 들통 내는 그것이 복음의 위력이에요. 이제 실제적인 문제. “그 이야기는 무슨 취지인지 알겠는데 그러면 세례 받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앞으로 교회에서 세례 준다는데도 받지 말까요?” 이렇게 하는데 제가 분명히 정답을 내리겠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감당할 수 있는 법은 감당하세요. 감당해야 그 사람에게 그 다음 진도를 나갈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키는 대로 세례는 받았지만 사실은 이게 의미 없거든요.”라고 말을 건넬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를 경유하는 형제사랑이거든요. 형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일단 형제사랑으로 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퇴박을 놓는 거예요. “이게 뭐야? 이거 엉터리 아니야?” 이렇게 되면 나만 잘났다는 자기 신앙을 자랑하는 거예요.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신앙을 자랑질 하기 위해서 교회 꾸준히 출석하는 사람이 돼버려요. 얼마나 남에게 인정받고 싶으면 교회 가서 그 짓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일조차도 주께서 그때그때 성령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저녁 먹고 계속 해야 되겠지요.
 관리자(IP:119.♡.94.40) 17-01-14 16:23 
7강



하나님의 창조는 팽창이고,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수축되었고, 그 후에 예수 안에 있던 것이 또다시 팽창되면 그것이 바로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했지요. 그리고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예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지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팽창이 펼쳐지다가 예수님을 보내셔서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집어넣고(수축) 여기서 다 이루시고, 다음에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이것을 전달하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집약해서 예수님께 담기고, 여기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주로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사역은 끝이 납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관점으로 보게 됩니다. 이게 말은 쉬운데 뭘 전달했는가? 무엇을 집어넣었는가? 그 들어간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하지만 실재로 우리가 받아 챙기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뭘 받아 챙겼습니까?



골로새서 1: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피가 왜 등장하는가? 예수님의 손과 발, 예수님 옷자락, 예수님 눈빛 다 가능한데 굳이 예수님의 피를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실 내용을 전달했고, 전달한 모든 것이 예수님 피로 완성이 됩니다. 왜 하나님의 모든 일이 피로 완성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예수님의 피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시장에서 살 수 있습니까? 교회 가면 살 수 있습니까? 성찬식 때 포도주를 마시면 실 내용을 받아들이게 됩니까? 우리가 실재로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피는 구경도 못했어요. Rh+인지 Rh-인지, O형인지, A형인지 전혀 모릅니다.



이런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구원 받는 일에만 너무 심취해서 실재로 예수님 피로 구원 받았다는데 왜 굳이 예수님 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예수님 피로 하나님의 모든 일이 완성되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지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하면 골로새서가 신약에 있는데, 신약 끝에는 어떻게 말씀하고 있고, 구약 처음에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실 내용이 무엇인가를 확인해 보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2, 20절에 보면 ‘금 촛대’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은 1장부터 하나님의 성전이 나오는데, 성전은 제사 드리는 곳이지요. 요한계시록 8:3절에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라고 되어 있고, 5절에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시간을 걷어치우면 성질과 성격만 남아요. 걷어치우고 남는 성질과 성격은 뭔가? 성전 제사의 무한 반복이 이어집니다. 요한계시록 11:19절에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라고 합니다. 이 자체가 구약 하나님의 성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요.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얼마 전에 경주에서 강도 5.7의 지진이 일어났는데, 만약 하나님의 성전에 지진이 일어났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성전이 다중현실 속에서 완성을 보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세전에 무엇을 계획했고, 그 계획에 아버지와 아들이 관여했는가? 이것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잖아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실패로 끝납니다. 그럼 남는 것은 뭔가? 하나님이 드리는 제사만 있지요. 하나님이 다 마련해 놓으신 제사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성전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계획해 놓았습니다.



성전을 만들면 하나님이 예수님께 전달하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전 완성에 꼭 필요한 것을 주신 거죠. 그 필요한 것이 골로새서 1:20절에서 ‘십자가의 피로 되었다’고 합니다. 성전은 제사 드리는 곳이고, 제사의 상세한 내용은 모세가 받은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성전 기구를 만들게 하시고 운영 방식은 성막에 피 뿌리고, 재단에 피 뿌리고, 지성소에 피 뿌리고 성전 곳곳에 피를 뿌립니다.



그리고 레위기 17:11절에서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고 했어요. 제가 질문합니다. 생명이 머리에 있지 않고, 심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왜 피에 있는 것입니까? 왜 이런 질문을 해야 하는가 하면, 실재로 우리가 예수 믿는 자라면 믿음의 실 내용을 받았고, 그것이 어떤 효과가 나타난 것인지 모르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골로새서를 보면 이렇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 믿지요?”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었으니 교회 값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 값’이 뭔가 하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빛과 소금이 되고 착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소문이 나고 전도를 많이 해서 하늘나라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동원되는 것은 기껏해야 세상 사람들보다 좀 더 나은 윤리, 도덕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이길 수 없어요. 자신의 욕구, 욕망을 못 이깁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보기만 해도 미운데 어떻게 합니까? 미운 점을 찾아서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만 해도 미운데 어떻게 합니까?



심지어 미운 사람 때문에 교회도 가기 싫어요. 내 마음에 충동이 요동치는데 말릴 수가 없어요.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미워하는 것은 죄야.” 하면서 아무리 다짐을 하고 미워하지 않으려고 해도 본인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조작을 해요.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주님이 감안해서 봐 주시겠지. 회초리 2대 맞을 것을 1대로 감해 주실 거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신약에서 인간의 행함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행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나는 부족합니다.”라고 하면서 회개하고 가슴을 쳐도 그것은 골로새서 2:18절에 위반됩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골로새서에서 ‘정사와 권세’는 악마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악마가 인간을 짓눌러 옴짝달싹 못하게 하면서 악마가 유행시킨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뭔가 하면, ‘천사처럼 완벽하고 철저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너를 엄격하게 채찍질 하라. 경건에 경건을 더해라!’ 이렇게 속삭입니다.



이런 것들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행함이 동원되어야 하고, 행함이 동원되면 지난 번 행함과 지금 행함의 차이에 대해서 본인이 쾌락을 느낍니다. 담배를 2갑 피웠는데 1갑으로 줄이면 기쁩니다. 이제 반갑으로 줄일 계획을 세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피를 보는 것이 아니고 성장하고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만족에 빠집니다.



이미 우리는 죽은 자인데 성장과 변화를 기대한다는 자체가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할 것은 없고, 주께 받은 것이 피인데 그 피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때는 율법이 주어집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고, 율법을 성취시키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셨고 예수님이 받아서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 끼어들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은 무엇을 주셨고, 그것을 왜 예수님이 하셔야 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왜 우리 인간은 행할 때 그것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게 되는가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출애굽기로 가야 돼요. 골로새서는 중간에 있으니까요.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세웁니다. 또 언약이 나와요. 언약은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가 맺은 것이 언약입니다. 어떤 인간도 이 언약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역사는 성부와 성자가 맺은 언약을 구체화시키는 카펫입니다.



언약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셔서 성전을 만들게 했다면, 이방 민족은 왜 역사에 등장하는가? 그것은 거룩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방민족은 하나님에 의해 저주받게 되어 있고, 이스라엘은 축복의 대상입니다.



이방민족은 왜 저주받고 이스라엘은 왜 축복 받는가를 똑똑히 보라는 겁니다. 그건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약의 실 내용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겠지요. 막연한 언약 개념 말고, 언약을 지탱하고 계속 가동하게 만드는 요소가 뭐냐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보면 언약을 세우는데 여러 가지 필요한 장치들이 있어요. 첫 번째는 율법이 있어요. 두 번째는 제사가 있어요. 세 번째는 제사가 끝난 후 모세가 피를 백성들에게 뿌립니다. 그러면 1, 2번을 봅시다. 율법이 주어졌는데 율법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면 거룩을 요구합니다. 처음부터 인간들이 거룩했으면 율법을 주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주었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어 거룩을 요구하게 되면 여기서 꼭 알아야 할 것은 더러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내용을 보면,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성전에 참여할 수 없는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인간이 스스로 ‘이것은 나쁜 짓이야.’라고 판정해서 ‘주님,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나오지 말고 율법을 주기까지 기다려야 된다는 겁니다.



오징어를 먹으면 더럽습니까, 안 더럽습니까? 오징어 두루치기 얼마나 맛이 좋습니까? 정말 맛있어요. 인간은 자기에게 기쁨과 이익을 주면 좋은 것으로 간주해요. 그러나 레위기 11장을 보면 오징어는 먹지 말아야 할 부정한 음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강에 좋지 않다거나 칼로리가 지나치게 높다거나 그런 것을 따져 먹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징어는 무조건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오징어가 듣는다면 상당히 기분 나쁠 거예요. 오징어가 “제가 왜 더럽습니까? 저는 바닷물에 깨끗이 씻었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안 돼요.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고, 지옥을 더러운 곳으로 삼으시면서 그 지옥의 구성 요소를 이 땅에 더러운 것으로 확장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더러움을 바탕으로 율법대로 하는 것만 거룩하다는 것을 따로 발췌해서 그들만 하나님이 드리는 제사에 혜택을 입고 참여시킵니다.



모든 것이 성전 중심이죠. 결론을 말씀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고 예수님은 예배를 드림으로 성전 제사는 완료됩니다. 그러면 창세전에 성부와 성자가 이벤트를 벌이면 끝난 것인데 인간은 왜 만드셨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주로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이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에 대해 찬양하고 박수칠 사람들이 필요했던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게 기도하신 것은 알지만 기도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요? 요한복음 17:1절에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이 약속한 내용입니다. 이 약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자보다 성부가 1인자니까 1인자를 영화롭게 하면 성부가 기뻐하기겠지?’ 삼위일체 하나님 중 성부가 제일 서열이 높은 것처럼 생각하는데 큰 착각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영생이 뭔가 하면, 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가 주신 자들이 있어요. 아버지가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듯이 이 세상의 피조물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처럼 그들도 아들을 영화롭게 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그 판에 참여시킬 때 세상의 모든 역사는 종결됩니다.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내용입니다. 9절에 보면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를 위함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에서, 사랑의 대상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고, 세상 중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맡긴 자들입니다. 그들을 건지는 권한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거예요.



소위 ‘뽑기’를 하는 거예요.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아들이 뽑는 거예요. 그래서 10절을 보면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 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그렇게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동일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거예요.



삼위일체 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돼요. 성경은 예수님 중심이지 삼위일체 중심이 아닙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는 내용이 앞뒤고 맞지 않고 모순됩니다. 단일 현실은 다중 현실의 내용을 다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영광을 그 백성에게 동일하고 나눠주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율법을 준 것은 무엇이 더러운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거예요. 오징어, 메뚜기, 돼지기 등은 먹으면 안 돼요. 짐승 중에는 되새김질도 하고 굽도 갈라진 것만 먹을 수 있어요.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노아 홍수 심판 때 방주에 더러운 짐승과 새는 2쌍씩, 깨끗한 것은 7쌍씩 들어갑니다. 그런데 더럽다, 깨끗하다는 것은 노아가 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지정해 주셨어요. 율법에 의해서 무엇이 깨끗한가, 더러운가가 분류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식을 먹을 때도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가려서 먹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는 다른 자들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 정결한 것을 먹으면 거룩한 백성이 되는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그 거룩을 유지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율법을 준 거예요. 이 율법은 많은 조항들이 있는데 나름대로 지킨다고 했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혹은 자연적 충동 때문에 율법을 위반하게 됩니다.



율법을 위반하면 7월 10일 속죄일에 대제사장에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백성이 죄를 다 씻는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인간 개인이 하는 속죄를 위한 행위는 주님이 안 받습니다. ‘회개합니다. 제물 드립니다.’ 이런 것을 안 받고, 사전에 율법을 주고 제사 제도를 마련한 것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 됩니다.



제사를 통해서 율법의 완성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고 죄 지은 인간들은 들러리가 됩니다. 그래서 율법과 제사를 통해서 거룩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율법과 제사는 끝났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그 다음에 피를 가지고 백성들이 참여해요. 제사 드릴 때 나오는 피지요. 여기에서 제사와 피를 결합시킵니다. 죄인인데 제사로 용서했다는 것은 7월 10일 대제사장이 속죄의 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립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의 인격화, 또는 제사의 인물화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마련한 제사에 피를 통해 백성들을 참여시키는 겁니다. 피로 참여한다는 말은, 제사 드릴 때 흘리는 그 피를 하나님의 범주에서만 머물지 않고 백성들을 피로써 여기에 초대하고 합류시킵니다. 중요한 것을 다시 강조하겠습니다. 율법이 아니면 어떤 인간도 자신이 더럽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양심 수준에서 내가 더러운 자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일을 했는데 결과가 좋게 나오면 우리는 내가 한 일을 착한 일로 오해할 소지가 많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착한 일을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면 내가 뭔가 나쁜 일을 해서 이런 결과가 온 것은 아닌지 오해할 소지가 많습니다.



율법과 제사의 만남에 의해서 인간은 어떤 짓을 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거예요. 인간은 선악의 딜레마에 빠져서 선과 악을 나누는데, 선악 속에 갇힌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혀 선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것을 왜 따먹었느냐는 말이지요. 그것은 악마의 권세에 눌러 따먹은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가운데 구원론은 끼어들 틈이 없는 겁니다. 예초에 구원론은 없어요. 왜냐하면 일방적으로 초대하는데 무슨 구원론이 있어요. 구출이나 구원이란 개념은 인간에게서 나오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아들에 적용시킵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의 선봉에 선 것은 모세가 지팡이를 든 모습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홍해 물을 갈라 길을 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든 것이 아니라 지팡이가 모세를 이끈 거예요. 모세가 지팡이에 종속됩니다. 그래서 아말렉과 전쟁할 때 지팡이를 들었을 때는 승리하고 지팡이가 내려오면 패하는 일이 벌어졌지요(출17장). 이런 일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요.



어쨌든 인간에게서 나오는 어떤 행동도 하나님은 더럽다고 안 받는다는 거예요. 그럼 무엇을 경유해야 합니까? 반드시 제사를 경유해야 되는데, 율법을 시작으로 제사를 경유해서 제사 드린 제물의 피에 참여할 때 비로소 그 인간은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의문이 생깁니다.



피에 참여하는 것이 골로새서 2:10절에 나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라고 했지요. 십자가 피가 있다는 말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계시고 인간이 있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전달해 주셨습니까? 율법과 제사로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그 취지가 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해 주셨지요.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되었지요. 그러면 여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러움이죠. 이제부터 골로새서가 어렵습니다. 보통 골로새서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모인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가 바른 행동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합니다. 골로새서 3: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수배니라.”고 했고, 8절에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눈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러운 말이라.” 12절에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13절에는 “피차 용서”하라 했고, 16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 하나님을 찬양하고” 등등 계속 나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예수 믿고 성도가 되었으니까 이런 것들을 향해야 하겠구나.’라고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평소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조작해서 착한 사람으로 포장한 그 윤리, 도덕(구멍 난 스타킹)으로 ‘이 성경 말씀을 최선을 다해 지켜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자.’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무리 착하고 싶어도 직장에 가면 팀이 구성되어 같이 움직이는데 그것이 윤리, 도덕이 아니라고 해서 내가 혼자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계란 한판에 2,300원 했는데 최근에 조류독감 때문에 8,500원까지 올랐어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우리는 소비자의 고충을 생각해서 계란 값을 올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또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사장도 아닌 직원이 계란 값을 갑자기 올리면 가난한 사람들이 살기 힘들다고 마음대로 계란 값을 올리지 않고 팔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했다면 당장 쫓겨날 거예요. 그런데 신앙 좋은 사람이 “하나님 뜻대로 선한 일을 했으니까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실 거야.”라고 믿고 그렇게 행동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까요? 안 도와주십니다.



내가 나쁜 일 하려고 하지 않아도 뒤에서 떠밀면 밀려서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뒤에서 밀고, 나도 밀려가 다른 사람을 밀게 됩니다. 사회는 이렇게 빡빡하게 돌아갑니다. 세상은 혼자 사는 동네가 아닙니다. 당구공처럼 나를 치면 나도 굴러가서 다른 공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라는 거예요. 이게 골로새서 3장과 합치되는 말입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 앞에서 통할까요? 아니죠. 강남의 부자 아줌마들이 모인 교회 여전도회와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줌마들의 윤리, 도덕은 수준이 달라요.



강남에서는 집사가 욕을 하면 “어머, 저 집사님이 화가 많이 나셨나봐!”라고 하지만, 노점상 아줌마가 욕을 하면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가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교회에 부임해서 욕하는 것이 듣기 싫어서 설교 시간에 “악한 말은 버리고 선한 말을 합시다.”라고 하면 “우리교회 나가서 목사 당신이나 선한 말 잘 해라.”하고 쫓아냅니다.



사람은 권력장(場)에 놓여 있기 때문에 본인이 원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환경이 차이가 나서 어느새 거기에 물들게 되면 본인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지만 남들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골로새서 3:5절에 나오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구멍 난 어설픈 윤리적 의미를 가지고 지키려 하지 말고 이것은 다른 기준에서 와야 합니다. 다른 기준이 뭔가 하면, 율법의 완성에서 와야 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다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가페 사랑, 에로스 사랑, 필로스 사랑을 말하는데 성경에는 이런 구분이 없어요. 인간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주님의 은사로 왔을 때 ‘나는 죄인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사랑입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한꺼번에 떠져 나오는 것이 성령의 열매(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나의 육은 더럽다고 주께서 죽였습니다.’ 라는 결과물이 성령의 열매에요. 누가 죽였는가? 성령이 주인공이 되어 나를 시시때때로 죽입니다. 죽일 때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십자가가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면 율법의 기준은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지 거기에 비춰 우리는 어떤가를 평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삶을 흉내조차 낼 수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간음, 음란, 부정, 사욕, 탐심이 되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예수님 삶을 비디오로 찍어놓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나하나 내 삶과 비교합니까? 예수님의 공생애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시시각각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적용시키는 방법은 양몰이, 소몰이 하듯이 적용시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차단시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길을 탐색하게 되지요. 그것도 차단시키지요. 그럴 때마다 우리 속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십자가에서 주님이 건네받은 육적인 죄가 우리가 불평, 불만으로 튀어나오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입니다. ‘네가 이런 탐욕이 있었지? 나에게 들켰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 방법을 어디에서 사용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데려나와 광야에 떠돌 때 이 방법을 사용했어요. 생존에 기본적인 것 물과 양식은 줘야 되잖아요. 그런데 광야는 이 기본적인 것도 없었어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을 원망했지요. 이런 원망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이렇게 판정 내리면 우리는 억울한 느낌이 들겠지요. 우상 숭배는 부처상에 절을 한다든지 점집에 찾아가서 사주팔자를 본다든지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한다든지 하면 우상 숭배라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멍 난 윤리관으로 본 우상 숭배입니다. ‘나는 절에도 가 적 없고, 점집에 간 적도 없고,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에게 기도한 적이 없기에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싶지요.



이게 바로 죄인의 생각과 판단입니다. 주님이 우상 숭배라고 규정하신 것은 ‘탐심이 곧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기에 지금보다 더 나은 뭔가를 요청할 때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나와요. ‘좋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우리가 탐심은 있었지만 부정은 저지르지 않았다.’ 이렇게 나와요.



이것 역시 자기가 알고 있는 의미를 고집하는 것이지요. 십계명을 보세요. 이 10개의 계명이 나중에는 두 개의 계명으로 축약되고 결국에는 한 계명으로 축약됩니다. 두 개로 축약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한 계명으로 축약하면 사랑이 되지요. 로마서 13:8절에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했잖아요.



“나는 평소에 다른 여자에게는 눈도 안 돌렸습니다.” “그럼 너는 이웃을 사랑하나?” “아니요” 그러면 그는 간음한 자입니다. 사랑하기는 싫고, 골로새서에 나오는 대로 착하게는 살고 싶지요. 그러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아야 해요.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나는 부족합니다. 저를 용서하소서.”하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남편이 “여보, 미숫가루 어디 있지?”라고 하니까 “시끄럽다. 기도하는데 --” 하면서 화를 내지요.



백날 도를 닦으니 뭣합니까? 도 닦는 시간에 남편이 방해하니 벌컥 화가 나는데. 이게 사랑입니까? 그러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왜 남편이 끼어들어 화나게 되었는가? 주께서 일으키신 일입니다. 주님이 소몰이 한 거예요. “놀고 있네. 네가 도 닦는다고. 도 얼마나 닦았는지 보자.”하면서 주님이 남편을 보낸 거예요.



‘하나님이여 저는 복음 전하는 기업에 가서 열하겠습니다.’ 하고 사장이 기독교인이고, 신앙을 바탕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는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한 달이 지났는데 월급을 안 주는 거예요. 열정 페이(pay)입니까? 기독교 학생들을 모집에서 일을 시키고는 돈을 안 줍니다. 그래서 데모하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했다’면서 성경구절을 들먹이고 --



그러니까 이 세상은 십자가로 시간이 종결되면 성질만 남는데, 십자가의 용서가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어요. 그럼 본문에 나오는 탐심과 음란은 뭔가? 사랑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계속 자극을 주는 주님 말씀입니다. 즉 십자가의 율법적 기능이 됩니다. 사도의 모든 율법과 권명이 다 이런 것입니다.



이미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에게 ‘네가 원하는 세상보다 훨씬 더 귀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수시로 성령께서 이런 말씀으로 우리 속에 역사하셔서 다시 주님 십자가 앞에서 “저는 죄입니다.”라고 죄인이라는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면 그 순간에 놀랍게도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가 동시다발로 터져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노리고 시작하면 안 돼요. 성령의 열매로 바로 가지 말고 반드시 이것을 거처가 가야합니다. 갈라디아서 5:19절 이하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생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 등등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이것은 일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뿌리는 같은데 표출되는 모습은 다양합니다. 이것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그 근거가 갈라디아서 5:6절에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바탕으로 해야 됩니다. 사랑을 담는 믿음이라고 믿음이고, 사랑을 담는 소망이라야 소망이 됩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고 느낄 때 죄인에게 믿음을 주신 사랑의 주님께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골로새서 3:14절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지요. 탕수육 위에 소스를 붙는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사랑의 소스를 부으면 소스에 잠겨버립니다. 그러면 ‘나는 부정한 일은 했지만 음란하지는 않았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게 하나라 묶어버립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으면 죄인인데, 이미 구원 받았기에 무한 리필로 사랑을 계속 부어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제사에 참여시키는 방식입니다.
 관리자(IP:119.♡.94.40) 17-01-14 16:24 
8강



골로새서 3:17절을 보겠습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 구절은 평소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안 통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하는데 왜 예수 이름으로 한다고 합니까? 우리는 이미 구원 받았잖아요. 이제 주님 앞에 보란 듯이, ‘주님 덕분에 새사람 되었으니까 내 솜씨를 한 번 보여들이겠습니다. 이제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맺게 된 성령의 열매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해야 되는데, 본문은 끝까지 그것을 좌절시키고 저지하고 나섭니다.



‘네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난 뒤에 자립적인 존재로, 내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충성하고 싶었는데 내 이름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니 모든 일을 주 예수 이름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이게 왜 그런가 하면 구약의 언약 구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반드시 중보자를 거쳐서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 중보자는 거룩한 자가 되는데, 출애굽 이후 거룩한 자는 대제사장입니다. 백성들은 제사장까지만 진출하고, 그 이후 자신의 죄를 씻는 문제에는 손을 떼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회개합니다.’라고 양을 몰고 왔으면 그 다음은 제사 전담반인 제사장에게 넘기고 본인은 빠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실을 굉장히 고마운 일입니다.



회개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반성하고 회개하면 그 다음은 회개했다는 것이 새로운 의로 드러납니다. ‘너는 회개 안 했지? 나는 회개했다.’ 이것이 새로운 의로 장착됩니다. 그래서 중보자에게 넘어가면 그 사람은 죄 지은 것에 대한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원천적인 죄가 사함 받습니다.



죄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구약 언약에 의하면 중보자의 존재를 잊어버렸기에 죄가 됩니다. 우리가 언제 죄를 짓는가? 자기의 죄를 의식할 때 죄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서신 마지막부분에 저주가 나오니까 수신자들이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그러면 당연히 대처 방법이 나와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몇 번 용납하고 저주하십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30분 정도 주를 잊고 사랑하지 않았다고 저주하지는 않겠지요?’ 뭐 이런 식입니다. 만약 3시부터 30시 30분까지 TV본다고 주를 잊고 사랑하지 않았어요. 그 때 주님 재림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척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포기 못하고 자기 이름에 대해서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주님 덕분에 내가 잘 됐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요. 그래서 연애는 뜨겁게 하는데 결혼까지 성공 못하는 커플을 종종 보는데 그 원인 중에 남자가 속이 좁아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식사비는 내가 낼 게.’하고는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미는 손이 자꾸 주춤거리고 있어요. 사진 찍으라고 포즈 취하는 겁니까. 왜 머뭇거리지요?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이만큼 당신을 위해 돈을 쓰니까 기억해 두었다가 당신도 보답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해놓고 자기 자신을 포기 못해요. 그러니까 최고의 사랑은 ‘나는 죄인입니다.’가 됩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죄인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래놓고 더 놀라운 사실은 자기를 이스라엘의 보편성 속에 집어넣어요. ‘나처럼 훌륭한 사람이 있을까?’ 이게 아니고 “나는 많은 백성 중 하나입니다.”라고 함으로 “나를 위해 누가 갈꼬?” 할 때, 이사야는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많은 백성 중 한 사람인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이야기할 때 백성들이 그 말을 듣겠습니까, 안 듣겠습니까? 듣지 않지요. 이사야는 문서 선지자인데, 문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지만 듣지 않고 멸망하고 난 뒤에 그 외쳤던 말만 문서만 달랑 남게 되어서 문서 선지자라고 합니다.



기적 선지자는 아직 여유를 줘요. 기적을 일으키면서 “앞으로 잘 해. 알겠어?” “예” 이런 기회가 있는데, 문서 선지자는 그것이 아닙니다. 문서로 남았다는 것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죠.



남자와 여자가 연애를 하는데 자꾸 쩨쩨하게 ‘나는 돈도 투자하고 희생도 하는데 상대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밥값을 내니까 주저하면서 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계속 사랑을 유지하란 말이 아니고, 원초적으로 너는 문제 있는 인간임을 말씀을 통해서 반복해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앞에서 “예, 이제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제가 죄인입니다. 주님 말씀이 아니면 제가 어떻게 저만 사랑하는 죄인인줄 깨닫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게 되지요. 물론 이것도 잠시 뿐 또 자기 사랑에 빠지겠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주님의 사랑을 반복해서 부어주시는 겁니다.



그럼 질문해 봅시다. 왜 우리 이름으로는 안 되고 주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까? 그것은 중보자와 하나님 사이에 체결된 약속에는 인간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변화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내가 회개를 했다면, 회개하기 전의 나와 회개한 후의 나는 달라졌어요. 계속 변이가 일어납니다.



본인은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번도 동일한 적이 없었습니다. 상황 과 시간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같은 말을 해도 5년 전과 지금의 말이 달라요. 이것은 특히 자식을 키워보면 압니다. 예전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사준다고 하면 부모의 요구에 순종했는데, 이제는 원하는 것 사준다고 해도 순종하지 않아요.



수련회 참석하기 싫다는 자식에서 용돈 많이 준다고 해서 수련회에 데리고 올 수 있었는데 내년에는 그것으로 통하지 않을 수 있어요. 아이가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늘 변하거든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과 중보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내가 회개했다고 해도 회개한 나를 믿어서는 안 돼요. 나는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반드시 ~하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주일 설교에서도 강하게 말했지만 어떻게 교인을 믿습니까? 주님을 믿어야지 어떻게 인간을 믿어요? ‘나는 집사님이라고 해서 믿었습니다.’ 집사님을 왜 믿어요? 그 집사님이 얼마 전에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잖아요. 그럼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우하면 되지 그 죄인을 왜 믿었어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은 ‘날 믿지 마세요.’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잖아요. 본인이 자신의 신상을 털어놓고 다 이야기했는데 ‘나는 집사님을 믿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생각을 잘 못 한 거지요. ‘저 사람이 죄인이라고 솔직히 인정했으니까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고,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믿을 만하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이지요.



성령은 인간을 계속해서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에 사람을 믿으면 안 됩니다. ‘믿을 수 없으면 안 믿으면 되겠네?’라고 하는데, 안 믿는 게 핵심이 아니고 성도끼리 서로 감사하면 됩니다. 사랑하라고 무리하게 요구하면 안 됩니다. ‘당신을 보니까 내 모습이 보인다.’ 비꼬는 말 같은데, 상관없습니다. 하여튼 감사해요. 주께서 마주치게 하고 만나게 하셨기에 감사한 거예요.



알랭 바디우는 과학, 정치, 종교(사랑), 예술 이 네 가지로 진리를 설명했어요. 어떤 것으로 나가도 결국 일자(신)에 도달 된다고 했어요. 전위예술가들 보세요. 신인지 미친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알랭 바디우가 히트 친 말이 있어요. ‘사랑은 1을 뚫을 수가 없다. 사랑은 반드시 만남에서 성사되기 때문에 숫자 2가 되어야 사랑이 성립된다.’고 했어요.’



이건 아이들도 다 아는 소리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잖아요. 알랭 바디우는 둘이 만나서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나의 중간에서 사랑이 발생 된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복음적이에요. 교인들끼리 만나고 집사님끼리 만남으로써 내가 미처 예상 못한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요. 그것을 ‘종교(사랑)’로 이야기합니다.



중보자와 하나님 사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중보자는 제사장이고, 제사장이 메시아입니까? 아니에요. 원리는 변하지 않지만 원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계속 교체됩니다. 제사장은 죽고, 다른 제사장이 일하고, 또 죽고. 마지막에 이것을 멈추는 방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중보자로 세웁니다.



아들이 중보자가 되면 이것으로 완전한 언약이 체결되면서 옛날 것은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2:16-17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간(절기, 월삭, 안식일 등)을 지킬 때 사람들은 자기 몸으로 지키지요. 그러면 남는 기억은 뭡니까? 내가 지킨 것이지요. 이것은 자기 이름이 되는 거예요. 자기 이름으로 한 것은 탈락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제사를 드리라고 했는데 나중에 다윗 언약에 가서는 ‘나는 번제를 기뻐하지 않는다(시51:16)’고 하셨어요.



그럼 처음부터 제사를 거론하지 말지 제사를 드리라고 해서 드렸는데 나중에는 번제를 원치 않는다고 하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유가 있어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짐승의 희생(번제) 대신 다른 몸(제물)을 준비하신 거예요. 그 다fms 몸이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율법대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모든 구약의 그림자 율법은 폐기되었습니다. 폐기되었다고 하면 ‘율법 폐기론자’라고 공격합니다. 구원론에서만 율법 폐기론이 성립되지 언약에서는 율법 폐기론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건물을 지을 때 지지대가 같이 올라가지요. 그러나 건물이 완성되면 지지대는 철거합니다.



구원론자들은 우리가 연약해서 율법을 지키지 못했지만 성령 받은 후에는 율법을 온전히 지켜 구원 받겠다고 하는데 성경에는 구원론 자체가 없어요. 성경에는 기독론 밖에 없어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거예요. 우리는 할 게 없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영(성령)으로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 이름으로 구원해 주십니다. 이 말은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는 신경 끊으라는 것입니다. 너의 이름을 구원하겠다는 것은 예초부터 없었던 계획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목사님, 율법을 더 지켜야 합니까?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하니까 율법 폐기론자라고 욕하던데 어떻게 할까요?”



‘율법 폐기론이 맞다면 구약 성경을 다 찢어야 하는데 그것은 좀 불합리한 것 같고, 구약 성경이 있어야 한다면 예수 믿어 성령 받은 후에 구약도 지켜야 한다는 말인가?’ 이 사람은 아직도 자기 사랑에 빠져 있는 거예요. 자신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런 집착은 하늘나라에서 탈락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베드로전서 4:11절에 나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것은 말씀이 없으면 말하는 것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이 없으면 봉사했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지요. 이와 동일한 말씀이 빌립보서 2:9-11절에 나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게 누구 소원이에요?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이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합니다. 찬양할 때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4부 합창을 하면 떼창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4부로 찬양하면 듣기는 좋아요. 찬양하면서 본인의 귀가 즐겁다는 것 때문에 거기에 빠집니다. 여기에 파이프 오르간 연주까지 나오면 은혜(?)가 넘칩니다.



찬양할 때 주님께서 음정, 박자 따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노래자랑 경연대회에서나 따지지 천국에서는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아요. 찬양할 때 기본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하는 겁니다.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성령이 우리를 책망하시면 우리가 흥얼거려도 찬양이 됩니다. 정확한 음정과 박자에 맞춰 화음을 넣고 찬양한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 귀는 즐겁게 할 수 있지만.



제사드릴 때 중보자, 제사장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중보자와 하나님은 변함이 없고 사람은 변하기에 사람이 나아갈 수 있는 곳은 제사장까지라고 했지요. 하나님과 중보자의 관계가 시내산에서 정립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시내산에 있어요? 아니죠.



시내산 위에 계시던 여호와께서 어디에 합류했는가 하면,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해놓고 본인이 그 성막에 들어와 버렸어요. 옛날식 다중현실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 성전에 함부로 들어오면 죽어요. 말은 달리는데 탄 사람은 안 보이는 식이에요. 이 희한한 현상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됩니다.



언약궤가 블레셋 온 지역을 휘젓고 다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빼앗아 자신들이 섬기는 신 다곤 신당에 두었는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요. 원래는 이스라엘이 공격해서 점령해야 할 블레셋 땅을 언약궤가 단독으로 그 지역을 섬멸해 버렸어요. 저는 이 상황을 대전강의에서 ‘언약궤의 독주’로 표현한 적이 있어요.



언약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요. 처음에는 아스돗의 신당에 두었는데 모든 신상이 박살이 났고, 아스돗에 옮겨 놓았더니 그 지역에 재앙이 내려 망하고, 가드로 옮겨놓았더니 그 지역에 독종이 퍼졌고, 에그론으로 옮겼더니 그 지역에도 독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언약궤를 소가 끄는 수레 위에 실어 자율주행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 소가 벧세메스로 가면 그동안 하나님이 블레셋에 재앙을 내린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한 일로 간주하겠다고 했는데 그 소는 벧세메스로 갔습니다(삼상 6장).



이 언약궤가 왜 이스라엘로 돌아갔는지 나중에 알아요. 보이지 않는 주의 이름이 언약궤와 변하지 않는 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블레셋이 겪은 낭패와 언약궤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고 하는 이 모든 일은 중심점 문제입니다. 이 세상은 언약궤가 중심이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1:19절 봤지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거기에 언약궤가 있지요.



하나님이 언약궤 중심인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유일하게 언약을 통해서 만나는 겁니다. 언약궤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하면, 돌판과 피가 들어있어요. ‘너희들이 드린 제사는 안 받고 내가 너희를 위해 드린 제사는 받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동참하면 더러운 인간도 거룩하게 되어 천국에 합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중현실이죠. 인간들이 있는 현실에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언약궤 혼자 설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도 언약궤 근처에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너무 무서워서.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언약궤를 지성소에 모셨는데 그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했다고 나옵니다(왕상 8장).



이사야 6장에도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는데 주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고 천사가 찬송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고 연기로 뒤덮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사도바울은 삼층천까지 올라갔지요. 드론을 띄웠는데 주님이 계신 성전까지 띄우니까 사도바울의 입장에서는 세상에서 잘난 척하는 인간들이 같잖은 거예요.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어요. 지옥 가는 것도 모르고 큰소리치는 것을 보면 기가 차지요.



그렇게 싸움 잘 하는 언약궤가 혼자 다 모든 것을 해치우지 왜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 것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 왜 따로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는 설친다고 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의인으로 바꿀 수 있어야 주가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지옥 보내는 주님의 공의가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죄인을 거쳐서 왔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편끼리는 잘 하지만 죄인에 대해서는 주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겠지.’ 라는 것이 일체 없게 만들어요. 사도신경에 보면 음부에까지 내려가지요. 초기 판본에는 지옥까지 내려간 것으로 되어 있어요. 베드로후서에도 지옥까지 내려갔다고 되어 있지요.



지옥이든 천국이든 전부 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야 그게 온전한 주 되심입니다. 그래서 지옥 간 사람도 주님을 알아봐요. 요한복음 5:28절에 보면 “무덤 속에 있는 자가 그 (인자 되시는 예수님)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라고 했어요. 이 말씀을 보고 예수님 음성 들으면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인자의 음성은 심판권을 행사하시는 겁니다. ‘너는 천국, 너는 지옥’ 이렇게 분류하시면 주님이 결정하신 일이기에 군소리하지 말고 영원히 분류된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피조물의 합당한 자리입니다. 에서는 미움 받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출생’이라 하지 않고 ‘출현’ 또는 ‘출몰’이라 표현합니다.



부모는 그냥 이용 기계가 될 뿐이고, 주님이 보내실 인간이 부모의 몸을 통해서 출현하는 거지요. 내 자식이 아니고 주께서 보내신 자식입니다. 한 인간이 출몰할 때 이것은 주의 이름이 관여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천국 가냐, 지옥 가냐와 상관없이 주의 이름이 관여한 거예요.



야곱은 주님의 자비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 출몰한 거예요. 그리고 형 에서는 예수님의 속성 가운데 공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옥 가야 되는 겁니다. 이건 토기장이 마음대로입니다. 진노의 그릇과 자비의 그릇을 만들 권한이 토기장이에게 있는 겁니다. 그래야 주가 주답거든요.



주님이 취하신 조치에 대해서 박수를 치면서 ‘참 잘 했습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다 박수를 치는 것이 아니죠. 사랑 받기로 작정된 자는 박수를 치지만 미움 받기로 작전된 자는 주님 조치에 대해 화를 내고 불만을 나타내겠지요. 그래서 천국 가는 자는 주님 하신 일에 찬동해서 천국 가고, 지옥 가는 자는 주님 하신 일에 불만 가졌기에 지옥 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내막을 들여다보니 그것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주님이 일방적으로 처리하신 겁니다.



이 이야기가 즐겁습니까, 아닙니까? 아멘이라고요? 내 딸이 지옥 가도 괜찮습니까? 주님의 뜻에 찬동하고 싶은데 문제는 내가 평소에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 만약 지옥에 간다면 자식과의 끈끈한 정을 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를 지옥 보내고 제 딸은 천국에 넣어주세요.”라고 간청하고 싶지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우리는 들러리가 되고 주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구원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결정을 우리가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거예요. 내 사랑하는 가족이 지옥 가도 주님 하신 일에 기쁨으로 찬동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럴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권력으로 눌러버려요. 어떻게 하는가?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하게 만들어요. “나는 죄인입니다. 주께서 모든 것을 해주셨건만 범사에 감사하지 못했습니다.”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주님이 조치하십니다. 주님이 눌러서 파생된 결과물이 뭡니까? 내가 주를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진정성 있게 다가옵니다.



내가 예수 믿는 행위 때문에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런데 선교단체에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라는 거짓말에 젊은 청년들이 얼마나 쉽게 동의합니까? 앞으로 나오라고 하면 손들고 앞에 나오고, 죄를 자백하라고 하면 온갖 일을 다 고백합니다.



마트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바구니에 담는 것처럼 천국 가기 위해 좋은 말, 좋은 행위를 담는데 그렇게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함으로 이스라엘 속에 있는 참 이스라엘이 구원 받는 겁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백부장에게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시면서 ‘너는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셨어요. 백부장이 뭐라고 고백했어요? “말씀만 하옵소서.”라고 했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겠나이다.’ 주어 자리에 자기 이름이 없어요. ‘예수님이 사랑하신다면서 이런 힘든 일은 왜 시키지?’ 이런 것이 없어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보면, 대령이 7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교사 마리아 수녀가 오기 전에, 아이들을 어떻게 훈련시키는가 하면 호루라기를 불어요. 마리아가 중보자 역할을 합니다. 커튼을 뜯어서 옷을 만들어 입혔어요. 커튼이 뭐냐? 중보자 역할이에요.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 호루라기가 아니고 마리아 선생님의 사랑으로 새로운 보편성이 형성되는 겁니다.



예전에는 무엇을 해도 죄의 종이었는데 이제는 어떤 일을 해도 의의 종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의를 혹은 죄를 보여주는 관계지, 독자적으로 ‘내가 예수님 말씀을 성심 성의껏 지키겠습니다.’ 이런 것은 없어요.



사도행전 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내가 만약 상자라며 상자 위에 주의 이름이 임해서 구원 받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사도행전 3장에 나와 있어요.



앉은뱅이가 등장하는데, 앉은뱅이는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기의 현실관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돈을 요구했지요. 그 때 베드로가 야박하게 ‘은과 금은 없다.’고 했어요. 앉은뱅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돈에 종속되어 산다는 것 자체가 자기 이름으로 사는 저주 받은 모습이라는 겁니다.



사도가 앉은뱅이 앞에 선 것은, 앉은뱅이를 동정해서 그가 요구하는 돈 몇 푼 주려는 것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알려주려는 거예요. 그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했는데 여기서 주의해야 됩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큰 소리로 말했습니까? 소리의 크기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3:16절에 보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어요. 이 말씀과 베드로를 연결시키면,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베드로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앉은뱅이 안에 계셔서 베드로가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반응을 유발하도록 하신 거예요.

그렇게 하신 이유는 3:12절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를 대단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현장의 구경군일 뿐입니다. 주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베드로가 한 일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베드로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결론을 맺겠습니다.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보이거나 보이지 않으나 관계없이 실존입니다. 주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다중현실을 의미합니다. 다른 세계가 함께 있는 거예요.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지요. 이것을 베드로는 지금 고백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똑똑해서? 공부를 많이 해서? 아니요. 그 현장에 먼저 주의 이름이 베드로와 앉은뱅이에게 찾아왔고, 그것을 주님 이름이 했다고 믿는 사람은 주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가담되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주님 앞에 늘 죄인입니다. 만약 주님이 당신 마음속에 들어오신다면 당신이나 나도 똑같이 구원 받은 사람이고, 전도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이 당신을 전도했기에 당신은 내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 이름으로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 받는 형제로 확인되는 겁니다.’라고.
 관리자(IP:119.♡.94.40) 17-01-14 16:25 
9강



골로새서 3:18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19절에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4:1절에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1, 2, 3장에서는 하늘에 관한 이야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인 다중현실을 거론해놓고 3장 18절부터 갑자가 아내, 남편, 부모, 자녀, 종, 상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믿음 없는 사람은 여기에서 다 떨어집니다. 뒷부분은 납득이 되는데 앞의 것은 전혀 이해가 안 되거든요.



이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실체 수준에서 주체 수준으로, 영적 권력으로 나아가야 되는데, 말이 좋아서 실체지 이것은 물체 또는 신체, 물질덩어리입니다. 이것은 어디에 속하는가 하면 단일 자연세계, 자연계에 속하지요. 그냥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눈만 뜨면 쾌락만 생각하는 물질덩어리,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 동물수준이고 나중에는 돌멩이 수준까지 내려가는 자기밖에 모르는 실체, 단일현실 속에는 이게 제대로 된 모습입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3:3).”고 할 때는 뭔가 붕 떠는 것 같은데, 3:18절부터는 도로 현실로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물질덩어리, 신체덩어리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이 참 고맙지요. 믿는 척하고 조작하다가 다시 원상복귀 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4:14절에 나오는 데마입니다. 디모데후서 4:10절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것이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세상에 사는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데마는 잠시 사도바울에게 현혹되어 그와 함께 종교생활 하다가 이제 정신을 차리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온 것입니다. 데마는 사도바울이 로마에서 옥에 갇혔을 때 같이 투옥된 사람입니다. 복음 전하면서 사도와 함께 고난도 받았어요. 그렇게 하면서 무엇을 자꾸 되새겼겠어요? 일단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고, 십자가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종교적인 환상에 불과한지 계속 의문을 가졌는데 결과는 허구라고 판단하고 사도바울을 떠난 것입니다.



데마의 모습이 가룟 유다와 유사한데,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성경공부를 하고 수련회에 참석해도 결국 실체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나는 골로새서 1, 2, 3장 말씀은 도무지 모르겠는데 3:18절 이하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들고 여기서부터는 납득이 된다.’는 거예요.



3:3절에 ‘너는 죽었고 너의 생명은 하늘에 감춰져 있다.’는 이야기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3:18절에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건 이해가 된다고 합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파는 것이 나쁜 것인가는 확인할 수 없는데 노아시대에 홍수가 나면 물질덩어리, 신체덩어리가 이미 악마에 의해서 조작된 권력 속에서 다수의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가 되어 다 함께 넓은 길로 갑니다.



홍수 심판 이전에는 사람들이 주님의 주체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주체는 위치를 부여받거든요. 영적 권력, 그 다음에 위치. ‘너희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고 했듯이 좌석을 배정받습니다. 그런데 주체가 아니고 실체(물체덩어리)로 가버릴 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홍수가 올 때(혹은 인자가 올 때)는 현실이 전부가 아닌 단일현실에 불과하고 또 다른 현실이 있음을 압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골로새서 1, 2, 3장에 나오듯이 십자가에 누가 죽었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다 죽는데 죽는 것이 뭐 대수인가? 죽긴 죽었는데 예수님 무덤은 빈 무덤이란 점이 문제가 돼요.



왜 이런 황당한 일이 일어나서 나로 하여금 완전한 실체로 가지 못하고 주님 앞에서 새로운 주체를 부여받게 하시는가? 그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새언약에 의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일이 벌어지게 합니다. ‘너는 네 인생이 아니라 내 것이야.’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배치가 잘 되어 있어요. “1, 2, 3장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3:18절에 ‘아내들이여 --’ 이것은 이해된다.” 이렇게 배치함으로, 앞에서 주님 이야기를 했기에 모방하고 신앙이 있는 척 조작하고 믿는다고 하다가 용수철이 달려 있는지 원위치로 튕겨가 버립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했다.’ 이런 이야기는 지어낼 수 있는데, 문제는 예수님 무덤이 빈 무덤이란 점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로 갔습니까? 이것이 바로 영적 세계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사람을 믿게 하는 책이 아니고 확인하는 책이에요. ‘당신 인생에 당신이 손댈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나는가?’



그 현상들에서 1, 2, 3장이 배치되어 있는 것은, 제발 그 영적 현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거예요. 노력한다면 데마처럼 됩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은 참으로 고상하고 처음 듣는 귀한 이야기야. 나도 그 세계에 꼭 들어가야지.’ 들어가려고 노력은 했는데 결국은 신체덩어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요.



누구를 설득하고 강요해서 신자로 만들 수 없어요. 이것은 예수님의 세상이기 때문에 예수님 소관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18절을 봅시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여기서 잠시 주례사에 돌입합니다. ‘배우자의 욕심을 우습게보지 말라.’ 이게 부부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부부생활은 적당히 악해야 돼요.



상대방을 좋게 생각하면 크게 실망합니다. 남편(혹은 아내)에게서 분명히 나를 힘들게 하는 요소가 나올 것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안 줄 수 있어요. ‘저 사람이 날 사랑하니까 내 모든 것을 바쳐야지.’ 라고 하는데 등신짓 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1, 2, 3장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내 남편만은 죄인 아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고, 죄인은 온전하게 사랑할 가치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곳에 신혼부부도 계시는데 잘 듣고 있습니까? 내 배우자는 모든 것을 바칠 대상자가 아니에요. 우리는 주님께 모든 주도권을 넘겨야지 왜 음흉한 죄인에게 주도권을 넘겨요.



부부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침대에서 같이 자는데 한 사람이 몸부림을 쳐서 상대를 침대에서 떨어지게 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상대로 하여금 스토커라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제발 나에게 그만 집착해라. 적당한 선에서 네 고유의 영역을 따로 챙기고 나도 따로 챙기고 그렇게 하자.’ 이게 현명한 사람입니다.



어떤 여자는 결혼한 직후에 남편은 직장에 출근하는데 본인은 유럽에 배낭여행을 갔데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역시 신세대 새댁이구나.’ 생각했어요. 아직 젊으니까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배낭여행을 가니까 자기도 따라 간 거예요. 결혼했다고 손해 볼 필요는 없잖아요. ‘당신이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내가 놀러가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 라고 하면서 신혼 초에 친구들이랑 배낭여행을 떠난 거예요.



이 사람은 침대를 혼자 너무 많이 차지해서 남편이 침대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자유를 누려야지요. 결혼생활은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양보 못하지요. 그리고 상대방이 양보하지 않는다고 닦달하지 마세요. 결혼생활도 정치적 타협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있게 돼요.



3:18절 말씀이 들어와야 우리가 계속 죄인인 것이 유지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고 죄인 아닌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죄인인 이유가 다 준다고 해도 진정 다 주지를 않아요. ‘이만큼 줬으니까 내가 사랑한 만큼 너도 나를 사랑해야지.’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요. 이게 바로 18절 말씀과 전혀 안 맞는 말이에요.



이것은 주를 경유하지 않았어요. 말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노림수를 끝까지 쥐고 있었던 겁니다.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처음부터 신앙적인 객기를 부리지 말고 적당히 줄 건 주고, 감출 건 감추세요.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세요. 남편이 직장에 갔는데 화상통화해서 현재 어디에서 뭘 하는지 확인하려 하고 그러지 마세요.



19절에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지요. 남자들은 이렇습니다. 아내가 자신에게 아낌없이 희생하게 되면 감사한 게 아니고 부담을 느껴 도망치고 싶어요. 지나치게 잘 해주면 그 잘해준 만큼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 남성이 가지고 있는 책임감인데, 머리로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책임을 다 할 자신이 없어요.



그러면 아내의 사랑에 비해 나의 사랑은 미흡하다고 느껴 간격이 발생하고, 간격이 발생하면 할수록 자신이 아내에 비해 가정에 덜 충실하다는 자괴감 때문에 무척 힘들어요. 그러면 자꾸 가정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요.



자식도 늘 칭찬만 하면 그 자식은 자살합니다. 뭘 해도 항상 잘한다고 칭찬하니까 본인이 정말로 모든 일을 다 잘하는 줄 알아요. 그런데 막상 사회에서 살다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그리고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으니까 부모의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안 되는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 저 성공했습니다.’ 하고 싶은데 날 반겨줄 세상은 그 어디에서 없어요. 이렇게 되면 자체 폭발합니다. 차리라 자식이 잘못한 일을 발견하면 꾸중하고 화를 냈다면 진정한 사랑인데 --



18, 19절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너는 죄인이다.’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계속 확인하며 살려면 결혼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다 내놓지 않는 정치술을 익혀야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니까 미혼인 분들은 ‘이런 정도면 결혼할 만하네.’라는 생각이 듭니까? 결혼할 여자에게 ‘시어머니 섬기고, 가정 화목하게 이끌고, 자식 낳아 잘 키우고’ 이게 얼마나 큰 짐인데요.



20절에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어요. 부모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식이 태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먼저 선점해서 가정 분위기를 잡는 것은 부모지 자식이 아닙니다. 자식은 물질덩어리로 살아갈 뿐이에요. 이런 자식을 부모가 잘 관리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을 못한다고만 하면 자신의 책임을 자녀에게 전가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성도의 가정에서 자식은 어떻게 키워야 합니까? 자녀를 낯선 존재로 보세요. ‘이런 괴물이 우리 집에 선물로 왔구나.’ 이렇게 자녀를 대우하세요. 그러니까 ‘나는 너의 전부를 안다.’고 여기지 말고, 보면 볼수록 낯설고 기이해서 부모가 손댈 수 없는 지경으로 변하는 새로운 면에 대해서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다.’라는 점을 점차 느껴야 합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나면 ‘교회와 인류를 위해 큰 일하는 일군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는데 차츰 자라면서는 ‘이 아이는 내가 손댈 수 없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가끔 물으세요. “넌 누구니? 어느 별에서 왔어?” 이 말의 의미는 ‘나는 네 부모로써 너에 대해 다 안하고 생각했는데 키우면 키울수록 너에 대해 모르는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식 키우는 재미와 보람이 사라지면서 그 자식이 지옥에 가더라도 부모로써 아무 책임을 느끼지 않는 정상적인 성도가 됩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자신은 천국 가고, 딸이 지옥에 가 있으면 못 견딥니다. 바꿔치기 하고 싶어요. 자식 키우는 재미에서 벗어나야 돼요. ‘처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을 자식 없이 느끼지 말고, 자식을 키우면서 낯선 면을 발견하고,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자녀 교육이 냉정하고 객관적이 됩니다.



‘만약 남이라면 저 행동을 어떻게 보겠는가?’ 이런 객관적 자세로 자녀를 대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식을 키우면서 자녀 키우는 보람이나 기쁨을 기대하지 마세요. ‘너를 잘 키워서 이 세상에 내 명예를 떨치겠다.’는 생각은 부모로써 하지 말아야 할 생각입니다. 자식에게 기대를 하지 않아야 자식 때문에 절망하고 낙담하는 일이 없어요.



자식이 뭔데 내 인생이 꼬이게 만듭니까? 그걸 왜 허락해요? 예쁘거든 고마운 줄 알고 감사하시고, 행동이 튀거든 냉정하게 지적하고, 나이 20이 되면 용돈 주지 말고 자립하게 하세요. 왜냐하면 자식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부모가 자기에게 잘 해주면 등쳐먹을 생각을 해요. 엄마, 아빠 양다리 걸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용돈을 타낼 것인가만 생각해요.



어느 자식이 부모를 사랑합니까? 부모를 사랑하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고마운 줄은 알지만 그것은 조건부 감사지요. 자기가 아끼는 여자 친구를 부모가 받아주면 고맙게 여기지만 반대하면 부모와 갈라섭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왜 어머니가 반대하십니까? 계속 반대하신다면 어머니와 결별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좀 더 심하면 ‘어머니가 진짜 내 어머니 맞나?’ 의심하지요.



골로새서 3:18-21절의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이야기는, 죄인이면서 죄인 아닌 척하지 말라는 거예요. 죄인이면 죄인 값을 해야지, 말씀 지켜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되겠다는 건방진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우리가 죽는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가 잘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살려주셔서 사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영생 얻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덕분에 영생 얻는 겁니다.



자식은 부모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자식은 자기만 사랑해요. 어릴 때는 재롱을 부리니까 부모가 귤 하나 더 주고, 주면 또 받고 싶어서 아양을 떨고 하는데 이것은 부모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다 자기 이익을 위한 행동입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식으로 훈련이 된 겁니다. 점점 뾰족한 연필심처럼 되어가는 거지요.



만약 우리 집에서 키우는 남의 자식이 담배를 피운다면, 담배에는 60가지의 발암물질이 나오는데 그냥 피우게 내버려두지 않겠지요. 술 먹고 새벽에 들어온 자식에게 아침에 해장국 끓여주고 그러지 마시고 ‘어디서 이런 추태를 보여.’ 이렇게 나와야지요. 자식이 “가만히 보면 우리 엄마, 아빠는 내 부모가 아닌 것 같아요?”라고 하면, 부모는 “너는 진짜 내 자식 맞나?” 이렇게 되물어야 돼요.



폭력이 인간은 만들어요.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잠13:24).”고 했어요. 처음부터 때리면 안 되고 부모를 이용하려는 속셈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는 보람을 자식 키우는 것으로 삼으면 나중에 자식이 복음을 안 받아들일 때 주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왜 자식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에 위반돼요. 예수님도 그랬지요. 제자들이 예수님께 “모친과 동생이 왔습니다.” 라고 하니까, 모친과 동생이 듣는데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라고 하셨어요.



골로새서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과 권면은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시는 겁니다. 구약보다 더 세밀하고 내용이 더 깊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



21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물론 부모가 자식을 고의로 격노케 하는 사람은 없는데 성질이 나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적당하게 악한 자가 되세요.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체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여기 종이 나오니까 오네시모(4:9)가 생각나네요. 오네시모는 나중에 에베소서 교회 당회장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어요. 천주교에서 발간한 책에 보면 나와요. 어쨌든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힘들어서 주인집에서 도망쳤어요. 도망쳤다가 복음을 듣고 실체에서 주체가 되어 하늘나라에 좌석을 배정받았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데 이제 종으로 여기지 말고 형제로 여기라.’고 당부를 합니다(빌레몬 1장).



4:7절에 두기고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에베소, 골로새에 바울의 편지를 전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같은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10절에 아리스다고가 있는데 이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이고 바울이 2차 전도 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에베소에서 바울이 복음 전할 때에도 같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에베소에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곳에서 우상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된 사람인데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우상은 신이 아니다.’고 말하니까 데메드리오가 그 지역 사람들을 선동해서 ‘이 지역은 우상 장사를 해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바울과 그 일행 때문에 장사가 안 될 뿐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여신 아데미도 경홀히 여김이 되니 저들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행 19장).’고 해서 잡힌 사람이 아리스다고입니다. 그곳에서 혼이 났습니다.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서에 편지를 보냈는데(그래서 골로새서를 옥중 서신이라고 함) 그때 바울과 함께 아리스다고도 갇혀 있었어요.



이것은 사실 사도바울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에 동참하게 된 사람인 거지요.



10절에 “바나바의 생질 마가”가 나오는데, 마가는 마가복음을 쓴 사람입니다. 자기 집 다락방에서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기도했고, 예수님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벌거벗고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1차 전도 때 바울 일행과 동참했다가 힘이 들어 중도로 포기하라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 다시 복음 전도에 힘쓰는 일군이 됩니다.



11절에는 유스도가 나오는데, 이 사람은 2차 전도 때 고린도에서 전도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사람입니다(행 18장). ‘저희는 할례당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한 때 복음을 제대로 이해 못해서 할례도 받고 십자가도 믿어야 신구약이 완성된다고 여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보니 구약은 율법이 아니고 복음에 흡수 통합될 내용인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별미 바치면 복 받습니다.’ 이런 것이 아니고 구약 전체가 별미 바치고 지옥 간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구약입니다. 율법 지키고 십일조 철저히 내도 지옥 갑니다. 천국에 가면 십일조 낸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에요. 자기 행함으로 자기 의가 쌓여가는 것으로 여겨요.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면, 자기 딴에는 복종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종해도 인간은 수고한 것에 대한 대가를 포기할 수가 없어요. ‘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잘해줬는데 남편은 내게 뭘 했지?’ 이런 식으로 대차대조표를 계산해요. 우리 모두는 아담의 후손이기에 이런 성질을 버릴 수가 없어요.



사람이 나이가 많이 들면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최고로 여깁니다. 극히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이는 거지요. 그 부모 밑에 그 자식이니까 전부 똑같아요. 그러니 적당히 죄인이 됩니다.



12절에 에바브라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설교할 때 와서 복음을 듣고 골로새 교회를 세운 사람입니다. 17절에 아킵보가 나오는데, 이 사람도 골로새 사람인데 소문만 듣고 문안 인사를 하는 거예요. 왜냐? 같은 위치,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이기에 소문만 듣고도 문안할 수 있습니다.



실체에서 성령 받아서 하늘나라의 새로운 주체가 된 사람에게는 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안부전화하고 화상통화해도 괜찮아요.



13절에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히에로볼리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골로새서가 다 터키 남쪽에 있어요. 거리가 80Km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근처 지역들이지요. 그래서 함께 그 지역에 있는 형제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누가복음의 저자입니다. 이 사람은 꾸준하게 바울의 전도에 협조하고 동참한 사람입니다. 아리스다고와 누가는 끝까지 바울과 함께한 사람입니다.



본문에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여러분들이 주의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런 사람을 본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구약의 선지자들이 대단한 사람들이지만 천국의 어린아이는 선지자보다 더 큰 자입니다. 세례 요한이 대단하지만 신약의 이름 없는 소자 하나가 더 대단합니다.



천국에서는 ‘대단하다’는 의미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가로 결정됩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나는 인간도 아니다. 이 땅에서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할 정도로 그리스도만 크게 생각하면 되지,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에 현혹될 필요 없어요.



교회사 공부를 하면서 주의 할 것은, 교회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은 자들이기에 하나님께 미움 받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칼빈, 루터. 이들은 정치꾼이라고 보면 됩니다. 누구나 정치꾼인데 주님 앞에서 ‘나는 악한 정치꾼입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 주님 사랑을 받은 자예요.



많이 사랑 받은 자가 하나님을 많이 기뻐하는 자예요. 교회에서 많이 일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존경하게 되면 그 사람은 큰 시험에 빠집니다. 앞장서서 일할 때 본인은 ‘더 완악한 죄인으로 폭로시키기 위해 주님이 이 일을 시키는구나.’ 이런 생각으로 일하면 됩니다.



교회사에 나오는 인물 중 토마스 아켐퍼스가 있는데 주의 인물입니다. 이런 사람을 존경하지 마세요. 또 잔느 귀용이란 사람이 있는데 누가 소개해서 제가 그분 책을 5권 읽었어요. 과연 성도인지 고개가 기우뚱했는데, 이것이 나만의 못된 성질 때문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C. S 루이스 이 사람도 주의 인물입니다. 오락이라고 보면 돼요. 이 사람의 책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며 보는 이유가 친구들에게 지적으로 신앙적으로 얕보이지 않으려고 읽어요. 카-레이스를 벌이는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하기가 겁이 나는데, 그 이유는 이런 책들을 읽은 후에 공격을 하든지 욕을 하든지 해야 하는데, 아예 읽지도 않고 욕만 하면 제거 근무태만을 유도한 사람이 됩니다. 세상에서 유행되는 [천로역정] 이런 책은 정말 나쁜 책이지요. 단테의 [신곡]도 마찬가지고. 기독교를 변증하고 옹호한다는 자체가 마귀의 심보 같아요. 주님은 손 놓고 놀고 계십니까? 전도를 누가 합니까? 주님은 자기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 건지는 분입니다.



그래서 교회사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의 책을 보면서도 ‘내 속에 나도 미처 몰랐던 죄를 저자가 보여주는구나.’라는 입장에서 마음껏 읽으세요. ‘회개했더니 수천 명이 감동받고 예수님께 돌아왔다.’ 이런 내용 있잖아요. 그런 류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저자의 마음을 간접체험 할 수 있습니다.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체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 이렇게 나오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은 명쾌합니다. 절대로 노동자들을 우대하지 마세요. 노동자들 심보 자체가 악마적입니다. 빼먹을 때는 빼먹고 더 빼먹을 것 없으면 뛰쳐나갈 인간들입니다. 전혀 직장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순진한 노동자들은 ‘내가 일을 열심히 하면 주인이 알아주겠지.’라고 생각해요. 이건 착한 것이 아니고 순진한 거예요.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래요.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주인은 노동자를 기계로 봅니다. 그러기에 노동자가 주인을 대할 때는 나도 기계고 주인도 기계라고 여기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멍청한 노동자는 자신은 인간인데 주인은 기계라고 생각해요. 기계와 기계가 만난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만 만나는 거예요.



복음을 말하다가 갑자기 정치적 발언을 하면 안 되는데, 제 개인적 생각은 ‘정규직은 한 명도 안 뽑고 다 비정규직으로 뽑으라.’고 하고 싶어요. 왜냐? 정말 노동자가 회사를 생각한다면 회사 주식을 사든지, 아니면 나가서 회사를 세우든지 해야 합니다.



회사를 한 번 차려 보세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도발인지 알게 될 거예요. 그런데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먹으려고 하면서 악덕 기업주라고 사장을 욕하고 비난하는 노동자가 태반이에요. 그럼 본인은 천사입니까? 제가 이런 말 하는 것이 정치적 발언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은 복음적 발언입니다.



인간은 살 가치도 없는 존재입니다. 노동자나 사용자나 다 나쁜데, 근본적으로 나쁜 것이 뭔가 하면, ‘나는 살아남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비교해 보세요. 죄인 아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같은 죄인끼리 누가 더 정의로운가 다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입니다.



그래서 22절 말씀을 대하면서 또 다시 우리는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최근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호주 광산에서 5년을 성실히 일했는데 한 날 실수를 했어요. 그 광경을 사장이 목격하고는 “당신 해고야!”라고 해서 그날로 해고 됐어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과 나의 만남은 기계와 기계의 만남이었다는 겁니다.



두 기계 사이에 공통지점이 있어요. 돈을 벌수만 있다면 당신 기계를 인정하고 그렇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장이 직원을 해고했다고 해서, 또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해서 절대 상대를 모독한 것이 아니에요.



만약 회사에 취직한 직원이 ‘방금 이사 왔고, 어린 자녀가 3명 있고, 노모를 모시고 있고’ 등등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사장 당신이 양보해서 우리 가족 먹여 살리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취직한 거예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이런 반발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럼 힘 없고 가난한 사람은 죽으란 말인가?”



제 말은 죽으라는 소리입니다. 단일현실에서. 이제 이것이 복음인줄 아시겠습니까? 너무 오래 살았어요. 남들이 살고 있으니까 나도 살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33년 사셨습니다. 지금 목사가 자격증 가지고 먹고 살려고 교회에서 술수를 쓰고 있지요. 예수님을 상품으로 팔아서 밥 먹고 살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내부적인 규칙을 만들어요. 그 규칙이 싫으면 다른 나라로 이민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민도 가기 싫어요. 이민가면 수다 떨 대상이 없기에 외로워서 싫다는 겁니다. 돈이 있고 넓은 저택에 살아도 사람은 수다 떨 대상이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민을 가서 성공하면 친척들, 친구들을 불러들여요.



사람은 물질덩어리기에 죽을 때까지 외롭지 않고, 배부르고, 건강하게 맛있는 것 먹으며 사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게 정상적인 인간입니다. 예수님이나 사도바울은 비정상이에요. 골로새서는 비정상인 주님께서 이 땅에서 정상인이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들 중에 비정상인을 모아서 천국 백성 만드는 책입니다.



이제 수련회에서 들은 골로새서의 내용을 다 잊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서 내가 말한다, 일한다. 먹는다. 이런 것 말고 어떤 일이 벌어져야 됩니다. 그 때 골로새서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바로 실체에서 주체로 옮겨가는 주님이 일으킨 사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고, 자꾸만 잡아당기는 세상과 친근하다는 점도 속이지 말고, 어차피 우리는 세상만 좋아하는 데마처럼 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주님 십자가 앞에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의 십자가 피가 우리에게 천국의 자리를 마련한 그 은혜만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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