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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3 17:40:28 조회 : 315         
2018 원주 특강 -잠언 속의 지혜- 181103 이름 : 이근호(IP:119.18.83.168)

원주 이성대 성도님 댁에서, 정인순 목사님과 백흥진 성도님 내외분과 더불어 특강했습니다.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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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IP:119.♡.83.168) 18-11-05 06:29 
춘천의 정인순 목사님 녹취
원주 특강 - 잠언 속의 지혜 A



강사: 이근호 목사



오늘은 원주의 이성대 집사님 가정에서 생애 처음으로 성경 공부라는 걸 하게 되었습니다. 심방이라고 봐야 되겠지요.


오늘 제가 준비한 것은 잠언서 16장 33절, 다들 실력들이 있으니까 오늘 강의를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16장 33절에 보면, 제가 어렵게 하는 게 아니고 이 성경 말씀 자체가 어려워요. 33절에 다같이 읽어볼까요.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아마 모든 신학을 이 한 문장으로 박살낸다고 보면 돼요. 왜 그런가 하면 제비를 누가 뽑느냐 하면 사람이 뽑잖아요. 그런데 일의 작정은 누가 합니까? 여호와가 하지요. 그러면 제비를 뽑으라고 왜 시켰어요? 참 이상하지요. 제비를 안 뽑았을 경우에는 일이 틀어지는가요? 그건 아니다 이 말이지요.


하나의 예를 봅시다. 태풍이 분다. 제비를 태풍이 온다 안 온다 나무 잎사귀 해가지고 태풍 온다 안 온다 뜯기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태풍이 뭘 보겠어요? 어떤 사람이 강원도에서 나뭇잎사귀 가지고 태풍 온다 안 온다 그거 보고 있다가 온다 안 온다에 따라서 태풍이 자기 마음대로 가지 말까? 방향의 진로를 바꿔. 이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이 말씀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 보면 일의 작정이란 말, 보통 작정했다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작심했다 이 말은 끼어들지 마 이런 뜻이에요. 끼어들지 마. 어디 함부로 나대,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 잘났습니다. 잘났어. 하나님 맘대로 하세요. 나는 내 맘대로 할 테니까.” 이렇게 토라져가지고 그렇게 나오겠지요.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사람이 제비를 뽑을 때는 아무 생각없이 제비를 뽑는 게 아닙니다. 신이시여. 주의 뜻이 뭡니까? 이래가지고 뽑잖아요. 제비를 뽑는다는 말은 뭔가 우리 손에서 신의 손으로 일을 넘기자는 거예요. 이건 우리 인간이 할 몫이 아니고 하나님께 맡기자. 열두 제자 맛디아 뽑을 때도 마찬가지고.


맡기자고 하면서 제비를 뽑는데 그러한 태도 자체가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동에 문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 일은 우리가 할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문제입니다.” 했을 때 이미 구분되어 있어요. 뭐가 구분 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이 하는 일 따로 하나님 하는 일이 따로 있을 것이다. 인간이 하는 일은 예를 들어서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인간이 하는 일은 제자들이 물 퍼내는 일이지요. 물 퍼내야지요. 물 안 퍼내면 배가 가라앉을 판인데.


인간의 일은 물 퍼내는 것, 그런데 인간의 일이 물 퍼냈을 때에, 이런 게 참 어려운데요. 인간이 물 퍼냈을 때에 물 푸면서 우린 물 푸면 안 돼. 주님께서 주무시는 가운데 일어나서 바다야 잔잔하라, 라고 생각하면서 물 퍼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일단 최선은 다해보자는 겁니다.


칠판 있다고 치고 제가 칠판에 뭘 쓰느냐 하면 최선, Best do it.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그러면 최선을 다했을 때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이게 부정한 것이고 나쁜 짓이고 해서는 안 될 짓이고 이건 터무니없는 악한 짓이라는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최선을 다할 때.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하나님이여. 봐주세요. 우리 인간이잖아요. 천사 아니잖아요. 할 도리 다 하는데 이것까지 책망하시고 이것까지 탓하시면 우린 정말 곤란합니다.” 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래. 모든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인간이 할 도리는 다 해야 돼.” 지천명 하는 것 있지요. 일은 인간이 하되 결정은 신에게 맡긴다는 게 동양사상에 있거든요.


그런 사고방식이 동양철학에서는, 동양철학은 치우고 일반 상식에서는 그것이 박수칠 일이지요. 왜? 겸손하구나. 인간이 으스대가지고 내가 다한다. 내가 다 해낸다. 이렇게 까불거리는 게 아니고 대천명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마음이니까 박수쳐줄게. 마음가짐이 대단하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성경 말씀이 그걸 고발한다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고발감이라면. 도대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뭘 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무섭지요. 인간이 어떤 한계를 정하고 이 너머는 신의 일이고 이 영역은 인간의 일이기 때문에 일단은 인간의 일은 다 하되 열두 제자가 물 퍼내되, 안 되니까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던 거예요. 풍랑 일 때.


그 때 예수님께서 “그래. 할 도리 다 했어? 최선을 나름대로 다 했구나. 대견하기는. 너희들 비켜 봐. 내가 알아서 할게. 너희들 할 도리는 다 했어. 내가 도와줄 게.”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면 책망했습니까? 책망했지요. 제자들로서는 자기 범주 안에서는 다 했어요. 최선을 다했는데 그 범주 안에서 다 행했다는 그러한 대견스러운 일조차도 주님께서는 이 믿음이 없는 자라고 책망부터 하고 그 다음에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했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인간이 믿는다는 일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인간은 신을 믿는다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교회가 하는 짓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예요.


신을 믿습니다, 라는 헛소리는 제발 좀 그 소리는 그만. 윤시내가 불렀던 노래 보면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그 음악은 제발 그만 틀으라는 내용 나오지요. 제발 하나님 좀 믿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태도 자체가 같은 인간들 보기에는 대견해. 얼마나 겸손하게 되면 인간의 자기의 의지와 결정과 자기의 자유의지를 의지하고 겸손 떠는 그 모습이 인간들 보기에는 박수 치고 싶고 나는 니 신앙 한 수 배우고 싶다. 이러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정말 지 주제파악도 안 된 거예요. 니 믿음 어디 써먹을 건데. 언제 니 믿음 내놓으라고 했느냐 말이지요.


에베소서 2장 8절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믿음은 선물이에요. 우리가 믿음을 조장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동행이 뭐냐 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뭐든 일일이 다 감사기도하고 먹고 하여튼 뭐든 일일이 신에게 나름 이 정도는 바칠 용의가 되어있습니다 라는 믿음의 티를 내는 모습을 3년 동안 병행해서 다 보여준 거예요.


주님은 “놀고 있네.” 예요. 그 짓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기본이 안 되어 있거든요. 잠언서를 이해 못하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죽 있지만 잠언서를 보시는 사람은 출애굽기할 때는 주님의 일관 된 노선이 있어요. 이 계획 다음에, 언약을 던져주고 언약의 노선대로 전개한다는 원칙이잖아요. 언약을 던져준 그 언약과 인간들의 배신과 견주면서 그러면서도 인간들의 죄를 극복해서 은혜를 주시고, 은혜를 주신다는 말은 선지자를 보내는 겁니다. 선지자를 보내서 계속 사람들을 적당치 않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제거하고 불뱀 보내 제거하고 나머지는 주께서 인도하는 거예요. 알아서 인도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잘라낼 것은 잘라내면서 나한테 원망하고 이렇게 대들면 이런 꼴 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계속 데려가는 겁니다.


데려가서 주께서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애굽적인 인간성에서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나라, 그걸 약속의 땅이라 해요. 아무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이런 말이 어려워요. 사람들은 경험이라 하는 것은 과거 기억에서 나오거든요. 그런데 뭔가 미래를 생각할 때는 일단 체험한 것 중에서 추스려서 미래를 상상하게 되고 이미지를 그리게 되어 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그려보라고 하는 것은 말조차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이래 왔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렇게 될 거야, 라는 짐작을 예측해서 미래를 계산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미적분 아닙니까? 수학에요. 이미 꾸준히 해왔던 그 논리가 계속 그 노선을 이탈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 하에 그대로 가는 겁니다. 수학에서 선을 긋는데 직선은, 점은 일차원인데 선은 이차원인데 선을 긋습니다. 그으면서 평지가 미래에 평평하다는 조건 하에 가는 거예요. 만약이 이게 울퉁불퉁 3차원이면 이건 직선이 나중에 곡선 되어버린다고요. 직선이라고 할 때는 무슨 공리냐 하면 유리알 같다는 공리 하에 되는 겁니다. 이게 과학이잖아요.


과학은 조건들이 있어요. 과학은 무조건 뽑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조건들은 왜 뽑아내느냐 하면 인간에게 유리하다는 조건 하에. 인간에게 불리한 조건은 아예 조건에서 제거 되어 버립니다. 인류학 정치 경제 사회 심지어 시 예술까지 모든 것이 과학 바탕에 전개되고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이 시대가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주의라 하는 것은 이윤이 있어야 돼요. 이윤이 있으려면 늘어나는 인구를 노동을 시켜줘야 되는데 노동을 시킬 때 노동에 있어 동기부여가 되어야 해요.


동기부여라 하는 것은 옛날에는 밥이나 먹고 살았으면 됐습니다. 고등어가 아침에 두 마리 필요한데 네 마리 잡을 이유가 없어요. 지금도 마오리 족 파파뉴기니아에는 그렇거든요. 두 마리면 되는데 다섯 마리면 썩으면 자기만 손해잖아요. 그런데 파파뉴기니아 자식이 있는데 유트브 해서 방탄 소년단 노래를 들었습니다. 또는 한국의 드라마를 봤습니다. 보니까 잘 살거든요. 자기는 야자나무 입고 있는데 잘 산단 말이죠. “얘. 너는 밥이나 먹고 살아.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살아왔어.” 이게 기억입니다. 이게 전통이고 역사예요.


한 가정에서 가르치는 것은 절대로 전수해 내려오는 것에서 벗어나질 않아요. “엄마. 왜 내가 그렇게 해야 되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했어. 우리 집안의 관습이야. 우리는 뼈대 있는 집안이야.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애들이 용돈 타기 위해서는 할 수 없이 하지만 나중에 자기 생활에 나가게 되면 그걸 단호히 거부하지요. 걔들이 옛날시대 같으면 밥만 먹고 살았어요. 고기는 가끔. 그런데 다른 애들 돌아보세요. 해외 놀러가잖아요. 나이키 신발 신었단 말이에요. 스마트폰도 새로운 기종으로 바꿨어요. 엄마는 말합니다. “얘. 밥만 먹고 살아.” 이게 애들에게 안 먹히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계속 축적되는 겁니다. 소비가 축적됨으로서 인간의 욕망을 끄집어내요. 들레즈는 그 욕망을 가지고 이걸 분열증이라고 했습니다. 분열증이라 하는 것은 계속 새로운 욕망의 출처를 찾아서 탈주 하는 것, 달려가는 거예요. 계속 달려가는 거예요. 지금 자녀분 하나 있지만 엄마 아빠 생각에 니는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들이 있지요. 자식 생각에는 그런 생각 없어요. 왜냐 하면 또래라는 게 뭡니까? 또래라는 게 엄마 아빠 이야기 안 듣겠다는 거예요. 유유상종인 또래. 애들이 엄마 아빠 품에 있다가 같은 또래를 만나게 돼요. 만나게 되면 그들에 대한 같은 행위를 같이 안 해주게 되면 그 공동체에서 소외돼요. 그러면 그들은 소속감이 없게 됩니다. 소속감이 없게 되면 인간은 불안해요. 자기 주변에 자기한테 이득이 오는 친구들로 둘러싸일 때 이건 오야봉처럼 되는 거예요. 우싸우싸 하는. 시간 가는 줄 모르죠.


부모는 잔소리만 해대니까 바깥으로 도는 거예요. 그들 또래에 흡수 되는 거예요. 그 또래가 그냥 노는 게 아니에요. 새로운 욕망의 분출구를 찾고 있습니다. 그게 자본주의 사회예요.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새로운 미래는 뭐냐? 과거에 결핍된 것을 보충하는 식으로 역사라는 표현을 쓰면서 밀어붙입니다. 역사라는 표현을.


그런데 이건 욕망의 멈추지 않는 도피? 또는 이탈? 일탈이라는 말이 적당하다. 일탈. 원주나 제천 바닥 촌에 있으니까 잘 모르지만 강남에 있으면 그 나이에 일탈하기에 바빠요. 그 나이에 전부. 품위 있는 여자 봤지요? 그거 전부 일탈하는 거잖아요. 지금 일탈이 왜 안 되느냐 하면 그만그만하거든요. 춘천 그 동네도. 돈이 있어야 일탈하지, 전부 다 그만그만 하기 때문에 그 정도해도 만족하는 거예요.


그런데 새로운 소비처나 자식을 통해서 “아빠 난 싫어. 이 정도는 해야 돼. 혼수 그 정도 해. 아니야. 이 정도는 더 되어야 해. 이거 이거 바꿔줘.” 이러면 골치 아픕니다. “우리 결혼할 때는 대충했어.” “엄마 나 대충하기 싫어. 여자 쪽에서 대충하기 싫대.” 이게 뭐예요. 너무나 우리 보기에는 철이 없어 보이지만 그들의 누적된 기억에 있어서는 인간이 산다는 것은 그 정도 될 때 산다는 그러한 개념을 구축하는 겁니다. 그것보다 낮아지면 비참하게 돼요.


옛날 신혼 때는 단칸방에 사랑하면 됐잖아요. 젊은 애들 아파트 파는 사람들 생각은 돈 없는 젊은 애들 아파트 구입할 거다. 정말 시건 없는 소리예요. 젊은 애들은 새집 얻어요. 헌집 있는데 안 가요. 대출 받아서라도 새 집 빚내서 가요. 새로운 인생은 새로운 깨끗한 집에서. 이러고 있다고요. 그냥 살지 헌집에. 수리 좀 해서 살면 얼마나 좋아요. 우리 세대 때 이야기입니다. 아파트 내 놔도 헌집은 나가지 않아요. 그리고 새 아파트 가요. 평수는 안 넓지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 욕망의 노선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거예요.


과거 기억한 누적된 지혜도 욕망에서 나온 거고 앞으로 그거에 근거해서 미래도 욕망뿐이에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간다. 약속의 땅은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이라 하는 것은 과거에 경험했던 욕망을 보다 극대화하고 가장 찬란한 모습으로 그려낼 때 성경 구절도 찾아내가지고 이 정도 보석 같은 데라면 내가 가볼만 하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걸 내가 자꾸 상상하는 거예요. 그러나 천국은 그런 세계가 아닙니다. 천국은 내가 예상 못한 세계예요.


다시 갈릴리 바다로 옵시다. 풍랑 일 때 물 퍼내는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 다음에 주님의 대책에 있어서 열두 명 가운데 아무도 미리 눈치 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물 퍼내는 데 최선을 다하게 되면 주께서 “야. 비켜. 열심히 했어. 그 다음엔 내가 알아서 할게.”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만약에 그럴 것 같으면 책망할 필요가 없어요. 물 퍼내니까 인간이 할 도리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니가 믿음이 없다.”고 하신 거예요.


그 이야기를 받고 우리 입장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생각해봅시다. 믿음이 없다고 책망할 것이 아니고 알아서 잠 주무시지 말고 깨가지고 우리 하는 것을 “하지 마. 하지 마.” 하고 사전에 말렸어야지요.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이라는 위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스승이 스승다운 위상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어떤 사업을 하는데 망하고 난 뒤에 “주여!” 라고 찾지 않도록 주께서 하기 전에 “그건 안 돼. 그거 접고 이거 해.” 미리 사전에 팁을 준다든지 조언하는 것이 훌륭하고 자비로운 주님의 할 일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상상이에요.


그러니까 평소에 우리가 예수 하나님 하지만 얼마나 성경에 없는 나 중심의 하나님을 얼마나 조작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게 조작해 내서 예수님한테 건방지게 우리가 지시를 해요.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지시한다고요. 그런데 그 지시한 내용이 뭐냐? 애굽적인 거예요. 가보지 않은 나라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고 애굽에 살 때 힘들게 살았으니까 앞으로는 호강스럽게 살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나님께 내미는 겁니다. 교회자체가 엉터리예요. 전부 다. 설교하는 것부터 해가지고 기도하는 것부터 해가지고. 성경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여러분들 속으로 목사님은 잠언 펴놓고 엉뚱하게 돌아다니고 우회하느냐 하는데 그러면 잠언의 내용을 결론부터 딱 말씀드릴까요? 이겁니다. 잠언은 남의 일은 신경쓰지 말고 니 일이나 해라. 이게 잠언이에요.


그래서 잠언이 어려운 겁니다. 남의 일 생각하지 말고, 예수님도 남의 일이에요. 자식도 남편에 있어서 아내도 남의 일이고 아내에게 남편은 남의 일이에요. 남의 일 신경쓰지 말고 니나 잘하세요. 이게 잠언의 핵심이에요. 기존의 출애굽기나 레위기 민수기와는 달라요.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는 집단적입니다. 집단 구원이거든요. 개인이 구원받는 것 없어요. 이스라엘이 집단으로 표현된 하나의 대표적 개인처럼, 그걸 주체라 하는데, 하나의 집단 주체처럼 움직입니다.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을 상대하지 않고 중간에 모이는 장소가 있는 거예요. 옛날 고대 그리스도 그랬어요. 아고라라는 게 있거든요. 그리스 도시국가에 아고라가 뭐 하는 동네냐 하면 둥근 원인데 옛날 전리품들을 모았던 장소예요. 전리품들을 모았던 장소에 누가 있느냐 하면 여자 사제가 있어서 신탁을 해요. 신탁을 하면서 사람들은 전리품을 가지고 신탁하는 장소, 구약성경을 아시는 분은 감 잡을 거예요. 이번 전쟁의 승리는 누구 몫이다? 우리가 믿는 신의 몫입니다. 여기에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면 여자 사제는 신탁해요. 다음에는 전쟁을 어디를 치라.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내가 너희들 믿는 신이 너희의 전쟁에 승리를 안겨주겠다.


승리라는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표현하는 말로하면 잉여가치라 하는 겁니다. 요새도 노래방이나 치킨집할 때 항상 승리를 내다 보잖아요. 이 골목에서 백종원 만나가지고 내가 장사 한번 해보겠다. 이게 승리입니다. 가게 할 때는 반드시 승리를 내다봐요. 직정에서는 그게 좀 덜 하지만 개인이 할 때는 항상 승리예요. 교회도 개인사업인지 모르겠지만.


그리스 시대 때에 신탁이 있어요. 신탁은 시로 되어있습니다. 이건 상식이니까 알아놓으세요. 시로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시키는 대로 해.” 이게 신탁이에요. 신의 계시니까. 까불지 마. 따지지 마. 시키는 대로 해.


그러면 보세요. 다수가 여기 빈터에 여러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 전리품이 있습니다. 모아놓고 신에게 제사 드려요. 제사 드리면 여기에 신탁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그걸 누가 쳐다보느냐 하면 군인들 시민들 주부들 다 쳐다볼 것 아닙니까? 신탁이 주어지게 되면 다음에는 몇 년 쉬었다가 전쟁해. 앞으로 농사만 해. 지금 스파르타를 당장 쳐야 돼. 이렇게 신탁이 있을 것 아닙니까? 중국 같으면 거북이 껍데기로 하든지 뼈 조각 금, 이건 아무나 해석 못해요. 그러니까 제사장들은 사기꾼들이에요. 어떤 표식은 지가 일방적으로 그냥 해석하는 거예요. 그걸 과장된 해석이라 하는데. 과장된 해석해가지고 계속 붙이는 거예요. 앞에 있는 걸 과장된 해석이라 하고 밑에 있는 걸 상징이라 합니다. 심볼.


그 신탁을 들었으면 개개인이 아니고 집단에게 동일한 신의 미래가 엎어지는 거예요. 개인의 운명은 소용없어요. 신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해놓으면 돌아서서 각자 집으로 가겠지요. 이게 신탁이에요.


그런데 도시국가가 전쟁하다가 이제는 피곤한 거예요. 그리스에 왜 도시국가냐 하면 골짜기가 많아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신탁 자체를 시비를 걸기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토론의 장이 마련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신탁에서 신화의 세계에서 이성의 세계로 과학의 세계로. 누가 이야기하면 “한번 보자. 앞뒤 논리 맞는가 한번 보자.” 과학의 시작이지요. 따지는 겁니다. “증거 대봐.”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화산이 일어났다. 왜 일어났는가? 이렇게 일어났을 거다. 아니. 화산 가보고 와. 그래서 화산 가보고 온 사람들이 내가 보니까 이렇더라. 내놓고 내가 가보니까 그렇지 않은데. 이것은 이런 논리가 있다면 앞으로 이런 논리가 계속 될 것이라고 미래 예측이 됩니다.


신탁으로 미래 예측을 하던 것을 과학적 인식으로 미래 예측을 하는 과학 시대가 된 거예요. 그 과학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제는 신과의 결별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이론은 신의 의중을 모르기 때문에 아는 건 뭐밖에 없어요? 우리가 앞으로 되고싶다는, 아까 자본주의 욕망했지요? 자본주의 설명하려면 시간이 많이 가는데 간단히 합시다. 욕망이에요. 욕망은 뭐로 구체화 된다고 했지요? 이윤이지요. 이윤을 얻으려면 새로운 소비처, 소비심리를 자극해야 되겠지요. 그러면 과학이라는 것도 자본에 따라서 필요한 기술이 있고 필요없는 기술은 도태되고 필요한 기술만 계속 살아남을 수밖에 없어요. 20년 연구했는데 시장에서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건 집안만 망해버린 불행한 발명이 되는 겁니다.


16장 33절 다시 한번 봅시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시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인간이 제비를 뽑을 때 순수하지 않다고 제가 말씀드립니다. 순수하지 않아요. 주여 이건 신에게 맡깁니다. 얼른 보면 신에게 맡기는 것 같은데 이미 이건 맡겨야 되고 이건 안 맡겨야 되는 것을 누가 했습니다. 본인이 했지요. 본인이 이런 결정을 하게 되는 이유는 과거에 결핍된 것을, 결핍은 어디서 생기느냐? 욕망에서 생겨요. 과거에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으로 모자란다는 거예요. 더 키우기 위해서 결핍을 생각했고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나름대로 노력은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론 안 되고 신께서 도와 주어야한다는 사전의 조건은 누가 만들어요? 인간, 결핍된 본인이 다 만들어요.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를 만났던 여인이 있지요. 그 여인이 사마리아 여인이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던 계기가 뭐냐 하면 사마리아 여인이 먼저 물 길러 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물 왜 길러 왔어요? 물 마시기 때문에 온 거 아닙니까? 물 왜 마셔야 되지요? 그걸 보통 목마르다, 산다 하는데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욕망이라 하는 거예요. 사는 것도 욕망이에요. 그걸 사는 욕망이라 하지 않고 놀랍게도 정신분석에서는 죽음의 욕망이라 합니다. 어렵지요? 살아있는 것을 보통 사는 욕망이라 하잖아요. 정신분석에서는 그걸 뒤집어요. 죽음의 욕망에 쫓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번 수련회 때 아가서 하는데 여기서 특별히 아가서 미리 이야기합니다. 누구도 죽음의 욕망을 못 이깁니다. 쫓기니까. 가만 생각해보세요. 이거 욕망입니까? 가만 앉아있는 것. 아니지요. 맛있네. 이건 욕망이지요. 탐내지 말라 했는데 탐내는 거예요. 그런데 왜 먹어야 되느냐 하면 이렇게 있을 때는 내가 살아있든지 죽었든지 관계없어요. 그러나 이거 먹고 살아야겠다는 것은 죽음이 자꾸 쫓아내니까 죽음에 대항해서 내가 더 살아야겠다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아가 핵심은 뭐냐 하면 그 욕망은 인간에게서 자기 살고 싶은 욕망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천국 가겠다는 것도 지옥 안 가겠다는 것도 결국 천국 지옥이 뭔지를 알아서가 아니라 쫓기기 때문에 이왕 갈 것 좋은 데로 빠지자. 그게 천국이에요. 나쁜 데로 가게 되면 지금도 고생했는데 죽어서 불구덩이에 가면 나만 손해잖아. 천국은 누구 세계냐 하면 내 좋아라고 하는 세계라고 인간은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인데 예수님은 그걸 반대라 하지요. 천국이 없는 게 아니고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반대의 천국이 천국이에요.


그러면 어떤 인간도 지금 천국 지옥을 매달려도 그걸 내 살고 싶은 죽음의 욕망은 사라집니까? 안 사라집니까? 안 사라지지요. 아가는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아가가 지금 관련되어 있어요. 잠언 아가 전도서 욥 시편 다섯 개를 지혜 문서라 하는데 관련되어 있어요.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사랑하면 돼요.


집사님 둘이 사랑해서 결혼했지요? 연애 결혼하셨어요? 그럴 것 같아요. 아가의 결론은 이겁니다. 간단한 건 아니지만 내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 생각이 내 안에 흘러넘쳐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사느냐 죽느냐 어떻게 하면 저 여자를 꼬시느냐 저 남자를 꼬시느냐 이런 생각이 없고 그대만 있다면 그대 앞에서 나는 죽어도 좋아. 이게 사랑의 위력입니다.


사랑이 없을 경우에는 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나름대로 세운 법칙이 있어요. 착하면 더 오래 살고 내가 나쁜 짓하면 벼락 맞아 죽는다. 이렇게 돼요. 굉장히 고상해보이지만 사실은 어디에 쫓기고 있다고 했습니까? 죽음에, 악마의 저주에 쫓기고 있는 거예요. 사랑이 오게 되면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 시대의 유명한 70 80 노래가 있어요. 나는 못난이 하는 노래가 있어요. 나는 못난이. 아무리 자기가 의사고 판사라 할지라도 자기가 확 반해버린, 그걸 아가서는 혼이 나갔다고 되어있어요. 혼이 나간 지경이 되어 버리면 내가 지금 재산이 수십억 있든 내가 판사든 의사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 앞에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못난이가 돼요. 이게 자유입니다. 자유. 왜 우리의 영혼이 자유롭지 못합니까? 아가서의 결론은 간단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목사님. 저 사랑했었는데요. 그건 과거고 지금 사랑해야 돼요.


그러면 남편만 사랑해야 되는가? 아니에요.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을이 되게 되면 어디로 떠나고 싶어요. 아무나에게 편지하고 싶어요. 이건 뭐냐 하면 선악에 쫓기는 게 너무 고달파요. 인생살이가. 행동을 해도 이게 지금 착한 일 하는 거야? 나쁜 일 하는 거야? 악마가 선악 가지고, 선악과는 원래 악마가 따먹으라 했으니까 하나의 미끼예요. 낚시에 걸린 거예요. 선악이라는 낚시가. 고기라는 게 있어가지고 니 안 착하면 이번 주 저주 받아. 이번 계약이 날아가는 거야. 계속 매사를 못살게 구는 거예요. 니 이번 일 안 된 것은 두 달 전에 나쁜 짓 했잖아. 계속 기억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게 원인이, 해결책이 뭐냐 하면, “그래 착할 게. 계속 내가 선하게 할게. 내가 어려운 사람 도와줄게.” 이게 인간이 악마한테 쫓기는 해결책이에요. 평생을 교회 다니면서 그렇게 사는 겁니다. 교회도 사기고 그 당회장도 사기꾼, 사기를 치는 거예요. 마귀가 세웠으니까. 해답은 단 하나예요. 나를 못난이로 만드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그것도 기쁨으로. 이건 우러나면서 나 못난이라도 좋아. 그걸 세 자로 상사병이라 하는 겁니다. 정말 지혜 문서 시편 욥기 아가 전도서 잠언 같은 것은 내려오던 출애굽적인 언약적인 언약 노선으로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해석이 전부가 아니에요. 해석이 안 되는 게 아니라 그 해석을 옆구리에 꽂아 내지만 만개한 꽃처럼 언약을 옆구리에 쑤셔서 활짝 핀 게 바로 아가 잠언 시편 이런 거예요.


그래서 잠언서를 하면서 사실 이야기할 것 같으면 할 게 굉장히 많아요. 사람은 제비를 뽑으나 일의 작정하기는 여호와니라. 이 말은 잠언서 1장부터 31장까지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서 어떤 스토리가 하나도 없어요. 스토리가 전혀 없어요. 스토리가 5절까지 또는 6절까지 경우는 몇 가지밖에 없어요. 술 먹지 마라는 게 들어가고 그 다음에 음녀를 찾지마라, 하는 그게 5절 6절 가고 전부 다 단편 단편 그야말로 격언이에요. 격언집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을 할 때 보면 동양에 사는 우리로서는 평소에 아빠한테 엄마한테 윤리적 도덕적으로 잔소리 많이 들었던 내용뿐이에요. 니 세상에 나갈 때 행동 똑바로 해야 된다, 라고 하면서 나왔던 이야기들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as if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이는 귀절들이에요.


보면 깊이도 없어요. 다 아는 이야기예요. 나라도 몇 개 더 보태가지고 써 붙여 넣을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다 아는 이야기인데 여기 32절 봅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사람이 결혼하기 위해서 여자의 마음을 훔치고 하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성을 빼앗는 것보다 어렵다. 그래서 나 동의한다. 어쩌라고? 해석 넘어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잠언서가 해석은 목사가 설교할 게 없어요. 왜냐하면 설교할라 치면 교인들이 벌써 마음속으로 목사님 그건 내가 다 아는 거고 일찌감치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냥 넘어갑시다. 설명하는 자체가 잠 옵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진짜 핵심을 몰라요. 남의 것 신경쓰지 말고 니나 잘 하세요. 그게 핵심이에요. 니나 잘 하세요.


사람들은 잠언서를 볼 때 이 말씀 지켰으니까 대인관계나 사회 나가서 이 말씀 지킨 값을 보상으로 얻어내려고 하는 거예요. 눈이 사회 가서 있는 거예요. 왜? 이것만 잘하게 되면 내 원하는 것 주실 거죠, 라고 기대를 가지면서 잠언서를 보면서 열심히 지키고자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잠언은 뭐가 되는가 하면 처세술이 돼요. 세상에 나가서 이렇게 하면 성공하는 사람의 입지론 그렇게 돼요.


똑같은 말을 해도 잠언대로 살았더니만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성공했다. 이렇게 된다고요. 결론이 그렇게 난다는 것은 원래부터 그걸 노렸다는 뜻이에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니가 사회 나가서 어떻게 될까, 남들이 뭘 보냐가 아니라 니나 잘 하세요 하는 뜻이에요.


그래서 잠언서를 할 때는 언약적인 노선을 이야기하고 보태서 잠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그 언약적인 노선의 완성이 지혜 문서 잠언이에요. 지혜문서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두리번거리면서 살고 세상 어떠니 하나님이 어떠니 예수님이 어떠니 하는 것 그것 다 잠언이나 지혜 문서에는 다 쓸데없는 거예요. 세상일에 대해서 우주 일에 대해서 나한테 맡긴 적이 없다. 너 왜 그렇게 쓰잘데없는, 내가 일 하겠다는데 니가 개입하지 말라는데 니 왜 자꾸 껍죽대면서 우주가 어떠니 세상이 어떠니 왜 사회는 이러해야하니 촛불 집회는 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왜 쓸데없이 그런 데 관심 두느냐? 그건 하나님 내 소관이야, 라고 다그치는 것이 잠언이고 그게 시편이고 그게 욥이에요.


여러분. 이러니까 좀 이해되지요? 욥의 마지막이 뭐라 합니까? 욥이 나의 고난은 어디서 왔느냐? 세상은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은 그건 니 알 필요없어. 니나 잘 하세요. 딴 데 신경쓰지 말고. 이게 삶의 지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더 쉽게 하려면 전도서 보세요. 전도서에서 책 많이 내는 것도, 책을 많이 내고 공부 많이 한 것도 그리고 맞벌이해서 돈 버는 것도 그리고 선한 일 하고 바르게 사는 것도 아무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해온 거예요.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선인이 당하는 것 악인이 당하는 것 착한 일이 악인이 당하는 것과 똑같이 당하고 악한 일이 분명히 저주받을까 했는데 의인처럼 멀쩡하게 살아가는 것 니 눈에 목격시켜줄게. 왜 이렇습니까? 말하지 마. 니나 잘 하세요. 니가 주제넘게 넘볼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쯤 해서 다시 본문 봅시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누구한테 있습니까? 여호와께 있느니라. 그 담겨있는 의미가 다가오지요. 인간이 설쳐봤자 설쳐 봤자예요. 몸 건강하려고 해독 쥬스 먹어 봤자예요. 잠언 내용하고 같이 보면 됩니다. 왜 자꾸 나대고 정치 문제 사회 문제 경제 문제 자꾸 나대느냐? 뭐냐 하면 내 가치를 내가 관리 안 하면 누가 관리하겠냐는 바로 비지혜적인, 주님을 엿 먹이는 그런 내부 성향이 계속 죽을 때까지 작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부가 결혼했으면 잠언에 의하면 아내는 지 일 하면 되고 남편은 자기 일 하면 되지 둘이 간섭하지 마라는 거예요. 부부라 할지라도. 그러면 헤어지라는 말이 아니고 각자 일 하면 그게 부부라는 겁니다. 각자 일 하면. 잠언서 31장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아내가 아내 일을 할 때 그것을 아내가 똑똑하다고 보지마세요. 왜냐하면 잠언서에 보면 어떤 인간도 똑똑한 인간은 없습니다.


잠언서에서의 개인은 뭐냐 하면 백날 해 봤자 그 가치를 안 알아준다는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진짜 언약의 완성, 지혜로운 자라, 이게 포인트입니다. 내가 백날 맛있게 감 해봐야 알아주기를 원해서 깎아 봐야 내 소원대로 안 알아주는 것이 세상일이라는 것,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나를 개무시하기로 하나님이 작심을 했어요. 왜냐하면 인간이 설치면 하나님의 일이 가리워집니다. 내가 설치면.


그러면 우리는 그걸 알고 안 설치느냐? 안 설칠 위인들이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가치를 자기가 챙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이렇게 했지요. 인간은 쉬지 않는다는 것. 인간은 쉬지 않아요. 자꾸 뭔가 꾸밉니다. 한번 해외여행 갔다 오면 그게 끝이 아니에요. 그 다음에 다음 계획 세웁니다. 다음엔 사이판에 갈까? 라오스 갈까? 이번엔 유럽 갈까? 이스라엘 갈까? 자꾸 계획 세웁니다. 돈이 없어 문제지. 또 나갈 생각하고 계속 나갑니다. 인간은 계속 움직입니다. 움직이면 살고 안 움직이면 죽어요. 그 자리에서. 돌이 됩니다. 그래서 항상 환자들도 움직여야 돼요. 의사가 20이고 환자 움직이는 건 80이래요. 90살 먹은 여자 의사가 그런 얘기했어요. 80대 20이에요. 의사는 20밖에 안 해요. 80은 지가 움직여야 돼요. 누워있으면 안 돼요. 움직여야 된다고요.


그러면 움직이면 나한테 이익입니까? 아니 그건 지혜가 아니에요.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런 개 같은 인간이다. 나는 짐승에 불과하다는 걸 인지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기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이게 잠언의 핵심입니다.


그러면 잠언서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은 단락 단락 이 말씀들은 뭐냐? 이걸 보는 동시에 인간은 이대로 살려고 움직일 겁니다. 눈 감고 아무 것이나 펼쳐도, 펼쳤습니다. 펼치고 아무 거나 봅니다. 20장 20절 아무 거나 보는 거예요. 자기 아버지와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자기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지리라, 하는 이 대목을 칼 가지고 찢어봅시다. 찢어지는 것을 공중에다가 세워놓습니다. 그 다음에 21절을 세워놓는 거예요. 그 다음 19절 18절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욱 세워봅니다.


이 우주 자체가 촘촘한 그물망입니다. 안 걸릴래야 안 걸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같은 잠언서 내에서 동일한 말씀이 충돌되는 내용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수십 가지예요. 하라 했다가 하지 마라 했다가. 술 먹지 마라 했다가 술 먹으라 했다가 일 하라 했다가 일 너무 하지 마라고 했다가 가난한 사람을 함부로 무시하지 마라 했다가 가난한 사람을 무시해도 좋다고 했다가. 이 잠언서 내부에서 충돌하는 거예요.


인간의 제한된 생각으로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를 몰라요. 이거 하면 이게 걸리고 저거 하면 저게 걸리게 되어있어요. 걸리라고 만든 촘촘한 말씀의 장입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담양에 대나무 숲에 가면 길이 나 있지만 길 말고 대나무 숲 들어가면 걷기 힘들잖아요. 소나기 올 때 빗줄기가 촘촘하잖아요. 촘촘한 속에서 우리가 놓여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항상 거기서 “주의 말씀대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말씀 어겼다고 너무 탓하지 마세요. 동일한 주의 말씀에 이건 지켰잖아요.” 하고 자기 정당성을 하겠지요. 그럴 때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람은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니라. 이게 뭐냐 하면 니가 이거 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몽땅 다 아무짝도 소용없고 서로 말씀에 안 걸릴 수 없게, 걸릴 수밖에 없는 존재로 남겨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지혜인 겁니다.


잠언서 8장 봅시다. 잠언서 8장 1절에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지혜가 불렀다는 거예요. 명철이 소리를 높였다는 겁니다. 심지어 지혜가 거리에서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지혜가 키가 얼마인지 알 수 없는데요. 지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본 적이 없는데요. 근데 지혜가 뭐냐 하면 말씀 자체가 지혜라는 거예요. 잠언서 8장 22절 23절 보면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에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뭔가 보이지 않는 분이 지혜가 인격체가 되어가지고 모든 인간들의 이 세상사가 움직이는 모든 것에 계속 어떤 작용을 하고 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기의 마지막 대목을 보면 돼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모든 일의 결정은 이미 확정날짜 잡혔어요. 이미 결정 난 겁니다. 이렇게 알게 되면 니는 확정난 주님 앞에서 쓰잘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잠언서에 나옵니다. 남의 일에 보증서지 말라 했어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니나 잘 하세요. 니 주제파악이나 하세요, 라는 것이 잠언의 핵심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살았습니까? 내가 남까지 배려한다는 칭찬을 고려해서 칭찬을 예상해서 얼마나 남 도와주려고 애를 썼습니까? 다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게 제비 뽑는 것과 같은 짓을 한 거예요.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 있는 겁니다. 자식들 커온 거 주님의 희생 때문에 그렇게 온 거예요. 나는 거기에 전혀 보탠 적 없습니다. 주께서 지금도 인도하고 있어요.


우리는 이 말씀 잠언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죄인인가 그것만 알면 돼요. 안 걸리는 게 없어요. 다 결렸어요. 어느 대목이든. 가만 보면 전부 다 “니 이래도 살래?” 하는 식으로 우리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 말은, 하지 말라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과 세상 되어지는 일과 별개라 이게 무관하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내 인생 이렇게 살잖아요? 이게 내가 해왔던 것, 내 행한 것과 내 인생과 별개라는 겁니다. 내가 살아온 것은 주의 작정 된 뜻의 일이고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맨날 선택하고 고민하고 결정하고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인지 나쁜 선택인지 어느 것이 착한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선악적 논리에 빠져서 계속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랑하게 되면 내가 강도가 되든 창기가 되든 세리가 되든 그건 관계없어요. 왜냐하면 사랑이, 사랑해주기 위해서 사랑하는 분이 나로 하여금 창기 되게 하고 강도 되게 하고 세리 되게 했어요. 강도가 자기 강도질 때문에 인생 망가진 인간 인생 망쳐버린 피해자를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남 생각하지 말고 니만 생각하라 했지요. 나로 인하여 내가 과속해서 박아가지고 신혼부부 죽었다. 세상적으로서는 용납 안되지요. 책임지려하지요. 책임지지 마시고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말 함부로 해가지고 자식이 삐쳐가지고 그때부터 벗나갔다. 자식한테 책임감 느끼지 마세요. 내가 그 책임감을 느끼는 것은 제비는 내가 결정하지만 작정하는 것은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그 자식을 그리로 가도록 주께서 그렇게 작정하신 거예요. 보통 독한 생각 아니면 안 됩니다. 독하게 마음먹고 내 한 짓은 다 헛 산 것을 독한 마음먹고 명심 또 명심해야 합니다. 머리 아플 때 먹는 약 명심이 아닙니다. 정말 내 하는 훌륭한 짓이 절대로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 니나 잘 하세요. 모든 작정은 여호와 손입니다. 끝.
 이근호(IP:119.♡.83.168) 18-11-05 06:30 
원주 특강 -잠언 속의 지혜 B



강사: 이근호 목사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지혜가 이렇게 창세부터 태초 전부터 개입했으면 왜 지혜가 알아서 다 하면 되잖아요. 지혜가. 작정은 여호와가 작정하시고 그러면 하나님이 시작부터 끝까지 관여하시면 끝까지 관여하시면 되잖아요. 왜 인간에게 콩 내놔라 팥 달라 할 이유도 없고 인간은 로봇 같고 장기알 같을 것 같으면 인간에게 책망한다든지 인간을 벌칙 준다는 자체도 모순될 같은 느낌 들지요. “똑바로 안 했어? 벌 받어.” 이 말은 뭐냐 하면 똑 바로 할 수 있었는데 니가 게을러서 못했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벌칙이라는 것은 그 행동을 잘못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벌칙이에요. 다른 사람에게 벌칙 준다는 자체가 이상하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이 모든 것을 다스렸다고 그것이 진실이라면 인간은 완전히 소외되어서 관람객 또는 구경만 하면 되는 입장이 앞뒤가 맞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인간을 구경꾼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다고 하면서도 하신 일에 인간을 거기다가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인간을 집어넣어버리면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하면 만약에 인간이 선악과를 안 따먹고 에덴동산에 그대로 있었다고 친다면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되느냐? 그냥 만든 그 상태로 그대로 가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일에 인간들이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의 지혜로서는 돌파할 수 없는 다른 영역이 있어요. 그것을 지난 시간에 미제로 남아있는 것을 해보겠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천국은 없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이 전부예요. 주님께서 에덴동산을 파괴시키고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인간에게 없는 나라, 하늘나라를 이제는 만들어내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인간에게도 없는 나라이지만 하나님에게도 없는 나라예요. 왜냐하면 그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계신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아들의 나라. 아들의 위상이 바뀌어야 비로소 생기는 나라, 아들이 존재함으로 생기는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위상이 바뀌어야 생기는 나라가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아들의 나라, 하나님의 계획에 아들의 나라가 되려면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 나름대로의 프로젝트가 절차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 절차의 완성을 지혜라 하고 지혜가 절차 속에 조금씩 조금씩 미리 미리 스며들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신 겁니다. 그 지혜가 뭐냐? 그 지혜를 잠언에서는 다윗의 아들의 지혜로 보는 겁니다. 솔로몬입니다. 여기서 솔로몬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지요. 솔로몬 이야기할 때 일반 언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한테는 빠트리기 쉬운, 핵심적인 것을 빠뜨리기 쉬워요. 뭐냐 하면 솔로몬이 언약의 제일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빠뜨려요. 버스 정류소가 똑같은 정류소가 있잖아요. 원주도 있죠. 서고 서고 이렇게 간다 말이죠. 같은 정류소가 동일한 노선에 있다고 보통 생각해요. 마지막 예수님 오실 때까지.


그러나 구약에 보면 표고차가 달라요. 고도가 달라요. 솔로몬 대에 와가지고는 언약이 최정점에 이르는 겁니다. 그것을 어디서 보여주느냐 하면 마태복음 1장 족보에서 나와요. 14대에서 최정점에 이르릅니다. 그 다음에 내려가기예요. 올라가기 내려가기 모든 것을 그 역사에 없는 무역사 또는 비역사 쪽으로 등장하기 이렇게 되어 있어요. 마태복음 1장 42 대가. 14대 14대 14대 그렇게 되어 있다 말이죠. 사람들이 역사를 좋아하다 보니까 버스 정류소는 그 동네가 그 동네고 그냥 똑같은 건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고도의 차이를 고려해서 설명해줘야 돼요.


솔로몬에 있어서의 애기 낳은 아줌마 둘이 있었지요. 창기라 했는데 그 솔로몬이 애기 낳은 창기를 재판 할 때 전제가 뭐냐 하면 이건 인간의 지혜가 아니고 신의 지혜를 가진 자가 한 재판이라고 봐요. 신의 지혜를. 그러면 그 소리 딱 들어보면 사람들이 뭐가 궁금하느냐 하면 신의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나한테 한번 들려다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는 지혜에 견주어서 얼마나 대단한가 한번 보자, 라고 어떤 경쟁심이 슬슬 유발 되는 거예요.


두 여자가 애기를 낳았는데 한 여자가 너무 뚱뚱했는지 밤에 질식시켜가지고 자기 애 하나 죽였어요. 자기 애 죽여놓고 간난애니까 표시 안 난다고 생각해가지고 제끼고 옆에 같이 자고 있던 동료 여자의 애기를 내 아기라고 우기겠다 하고 아침에 눈을 떴다 이 말이죠. 보니까 엄마가 자기 애가 저기 있거든요. 달라고 하니까 내 애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자기 애라고 하니까 선악이 밝혀지지 않으니까 이걸 솔로몬에게 온 거예요. 솔로몬에게 왔을 때 솔로몬이 솔로몬의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솔로몬이 재판했다 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인간들의 관심사는 어디 있느냐 하면 이 재판의 진행과 결과에 있어서 과연 우리 인간들이 생각 못한 요소가 뭐가 있는가를 찾아낼 거예요. 인간들 감히 예상못한 요소가 뭔가 찾아본다 이 말이죠. 그런데 재판 과정과 결과를 보니까 인간들이 생각 못한 요소가 아니고 내라도 그런 재판하겠어요. 어머니의 모성애에 호소해가지고 진짜 애기 같으면 애기 아픔에 대해서 양보해서 애기 살리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 엄마냐 가짜 엄마냐 하는 것은 애기에 대한 모성애가 어느 것이 강렬하냐 강렬한 쪽은 진짜 엄마고 약한 쪽은 가짜 엄마다. 그 정도 재판은 나도 하겠다 이 말이죠. 그게 뭐가 초월적이고 신비한 오직 하나님만이 해낼 수 있는 그런 거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솔로몬의 지혜라든지 성경해석에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부실하고 모자라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란 것에 대한 우리의 상상이 멋지고 대단한 것을 끄집어내려고 기대하는 우리 인간의 심보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하면 수학에 무한집합과 관련되어 있어요.


1 2 3 4 5 6 해놓고 점 점 점... 하고 뒤에다가 n 쓰지요. n과 앞에 있는 n-1과 단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절이 없지요. 숫자 하나 1만 더하면 n 되니까. n-1과 n이 단절 되지 않고 n-2와 n-1과 단절 될까요? 안 될까요? 단절 안 되지요. 6하고 7하고 단절 안 되지요. 75676하고 75677하고 단절 안 되지요. 인간의 신 개념이 그래요.


인간하고 단절 없는 신 개념, 그게 집합 개념입니다. 수학의 집합 개념. 신을 그렇게 묘사합니다. 수학을 통해서 노골화 되었어요. 신? 그거 인간이 못하는 것이지만 인간과 떨어지지 않은 관계, 그게 신의 관계, 그게 바로 과학적 사고방식입니다. 언젠가는 진리는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우리가 부족해서 못 찾지 우리가 지식이 축적 되면 진리에 어프로치 진리에 접근해 갈 수는 있다고 보는 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진리는 갈 수 있습니까? 떨어져 있어요? 끊어져있지요. 요한복음 13장에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예수님 계신 곳에 내가 가겠다 했지요. 주께서 하신 말씀은 뭐라고 합니까? 그래. 니가 목숨까지 바쳤으니까 정말 대견하구나. 이 정도 되면 내가 천국 넣어줄게. 이렇게 했습니까? 뭐라고 했어요? 니가 못 간다 했지요. 왜? 니 자리가 지 처소가 없어요.


다시 말합니다. 천국은 인간에게는 없는 곳입니다. 천국은 없어요. 열두 제자까지 사람들은 계속 하늘나라를 유대인들의 하늘나라는 있다고 생각하고 그 나라 간다고 생각하고 그 나라에서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밧줄은 그 사닥다리를 계속 밟고 올라가면 결국은 까꿍 하고 목 내밀면, 천로역정 하는 것처럼, 까꿍 하고 목 내밀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단테의 신곡 그런 것도 지옥과 천국을 계단으로 만들었잖아요. 계층화시키고 계급화 시킨 거예요. 그 당시는 봉건사회니까. 이걸 제가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걸 철폐를 좀 해줘야 해요. 단계 밟으면 까꿍 하고 여기였었어? 내가 많이 왔네. 이 의식을 이걸 박살내야 돼요. 그러지 말아야 된다 이 말이죠. “하나님 계세요. 내가 찾아갈 테니까. 내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거룩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게 끊어져야 돼요. 가보면 망상이에요. 그걸 신기루라 하잖아요. 신기루는 있는데 가보면 현장에 없는 것, 현장에 아무것도 없어요. 왜 현장에 없는가 하면 현장에는 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내가 있는 한 내가 가는 한 그곳에는 이미 진리가 저만치 없어져요. 멀리서 보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가게 되면 내가 간다는 이유 때문에 진리는 거기서 떠났습니다. 잠언의 지혜의 성격이 그렇습니다. 끝까지 단절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늘나라가 없다 할 때 솔로몬에게 지혜가 온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인간이 사법고시 법 공부 하게 되면 알 수 있고 동양철학 서양철학 공부하면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전도서에서 많은 사람이 공부를 해도 그게 몸만 피곤하다 했거든요. 아무리 공부해도. 백 성도님 얼마나 공부하는지, 얼마나 물어대고, 이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물어대시고 공부를 하시는지, 그 공부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거 제비 뽑는 거예요. 열심히 뽑으세요. 머리털도 뽑는데, 계속 뽑아대는데 작정하기는 여호와께서 하십니다. 그 공부 하는 거 내가 구원받는 것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겁니다.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떡해. 궁금하면 해야지요. 움직여야지요. 움직여야 사는데.


솔로몬 지혜의 재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죽음이에요. 뭐냐 하면 그 두 여인 중에 누가 죄인인가를 알아야 돼요. 아무나 안 가르쳐주는데. 진짜 죽은 애의 엄마가 죄를 느낍니까? 가짜 엄마가 죄를 느낍니까? 진짜 엄마가 죄를 느낍니다. 재판할 문제가 아니었던 거예요. 재판할 문제가 아닌 걸 너희들은 제비 뽑듯이 재판을 걸었던 겁니다. 이 자체가 재판을 건다는 것은 뭣이 전제가 되느냐 하면 나는 저 여자보다 정당하다는 것을 보장받기 위해서, 누구에게? 솔로몬과 같이 있는 연결된 하나님 앞에 보장받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자기 자식을 되돌려 받기 위해서. 내가 어떤 자식을 소유한다는 것은 소유할 정당성이 있기 때문에 소유한다는 의식과 결부 되어 있어요.


내가 내 인생, 아파트든지 어떤 소유물을 내꺼라고 우기는 것은 그만한 자격이 나한테 있다고 보고 주께서 준 걸로 본겁니다. 옷에 보면 벽에 보면 찍찍이 붙어있지요. 찍찍이 붙어있을 때 찍찍이 용도는 뭐냐 하면 다른 걸 찍찍이 붙어있는 데 하면 딱 붙잖아요. 이렇게 다른 것이 붙을 만한 권한이 있다고 자부하고 우리는 자아 자체가 일종의 찍찍이에요. 새로운 TV를 사게 되면 저 TV는 내가 살만한 자격자가 된다는 식으로 우리 집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럼 묻습니다. 태풍은 왜 붑니까? 태풍은 왜 찾아오지요? 태풍 오라고 누가 빌었습니까? 기도했습니까? 태풍은 왜 왔어요? 태풍을 한국 배달의 민족에 전화해가지고 태풍 2인분 오라고 누가 배달시켰습니까? 흰머리는 왜 오지요? 머리는 샴푸 TS 발라놔도 자꾸 빠져. 왜 머리는 빠지는 거예요? 왜 늙는 겁니까? 달리 얘기하면 왜 죽습니까? 내가 죽음을 요청한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혜는 완결입니다. 과정이 아니고 완결이 지혜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인간사회의 종결을 완결을 보여주는 사건이 이 두 아줌마 사이에 일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두 아줌마의 문제가 아니고 솔로몬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이 백성을 하나로 뭉쳐서 하나의 바구니에 담겨있는 이스라엘로 본 겁니다. 전체 이스라엘에 누구나 다 공통적으로, 아까 이야기한 신탁이죠. 누구나 다 적용되는 것, 그런 지혜를 하나님이 주겠다고 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이 백성을 다스릴 지혜를 주옵소서.” 하니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하시는 말이 “니가 오래 사는 것도 구하지 아니하고 부자 되는 것도 구하지 아니하고 또 한 가지 있어요. 원수가 니 웬수가 일찍 뒈죽는 것도 구하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사적인 복수심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뭐만 구했습니까?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지혜로 다스리는 이스라엘 되게 하옵소서.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최정점에 와있거든요.


다윗을 통해서 시온성이 확립되게 되면 시온 성에 하나님이 영원히 거하십니다. 그러면 다윗 언약의 완성이 그거예요. 다윗의 시온성이에요 그게 솔로몬이 그대로 거기다가 성전 지었거든요. 솔로몬 때가 마태복음 1장에 최정점에 와있는 거예요. 최정점에 와있는 이 백성들에게는 사적인 것, 내 자식 니 자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국 인간이 죽고 아들의 나라에 왔을 때 인간은 어떤 의미로서 그 나라에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 살아야 되는가를 알려주는 겁니다. 그건 나는 죽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야 한다는 것, 사적인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사적인 죽음은 어차피 인간은 다 부활되니까, 산 자나 죽은 자나 다 부활 되어가지고 심판 받는 것도 다 부활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그것만이 최종 지혜거든요. 십자가 죽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잠시 태어났다가 살다가 죽는 겁니다. 그 과정이 예수님의 지혜의 일부로서 모자이크의 하나의 작은 조각으로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 가야되는 겁니다. 그게 잠언서 8장에 나오는 통합된 지혜의 뜻입니다. 통합된 지혜, 예를 들어서 하늘에서 꽃봉오리 벚꽃잎이라든지, 색종이, 백일의 낭군에 나오는 그런 것, 해가지고 한꺼번에 확 뿌려버리면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반짝반짝 빛나면서 떨어지겠지요. 떨어진 조각들이 잠언서의 한 부분들이에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그걸 지키려면 지혜자만이 하는 자유로운 활동 자체가 반짝이는 꽃잎 하나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 보기에는 모순되어 보이는 거예요. 어떤 데는 술 먹으라 하다가 먹지 말라했다가 가난한 자 무시하지 말라 했다가 무시하라 했다가 어떤 데는 부자 되기를 힘쓰지 말라 했다가 어떤 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부자 되게 해준다고 했다가, 도대체 우리보고 어느 장단에 어느 비트에 어느 박자에 맞춰야 할지 몰라요. 4분의 4박자인지 어디에 맞춰야 되는지.


그러니까 사적인 것이 아니고 위에서부터 반짝이가 반짝반짝 삐라 뿌리듯이 내려오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를 그냥 덮는 거예요. 우리는 그의 일부입니다. 지혜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다만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내가 제비를 뽑지만 작정하는 것은 위에서 이미 작정했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나와야 된다는 것이 잠언이라 말이죠. 아직 구약이기 때문에 십자가라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그런 건 언급 되지 않지만 잠언서 8장 보면 태초 전에 지혜가 있었다는 것이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에요.


솔로몬의 지혜 같은 것은 이미 예수님도 악하고 음란한 죄 요나의 이야기할 때 거기 솔로몬의 남방 여인이 나옵니다. 어쨌거나 솔로몬 이야기 계속 해보면 솔로몬에 있어서 여자가 잠을 잘 때 애기를 죽일 때 이쪽 여자가 죽인 게 아니에요. 누가 죽이느냐? 하나님이 죽인 거예요. 하나님이 죽게 한 거예요. 이걸 과학에서는 변수라고 합니다. 애초부터 처음부터 같은 방에 안 잤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하는 거예요. 같은 방에 잘 수밖에 없는 것이 같은 직업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같은 직업이 안 되었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같은 직업이 아니었으면 두 부모가 떨어져 살아야 되는데 그야말로 세상에서는 우연히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걸 변수라고 하지요. 우연히 같은 동네 친구가 되어가지고 우연히 직업 괜찮은데 해볼래? 해가지고 한 거예요. 하필이면 그 때 그 타이밍에 나보고 그런 창기라는 직업을 권했던 그 타이밍조차도 그 때 그 이야기할 때 화장실 갔으면 안 들었을 것 아닙니까? 하필 그 이야기 듣고 따라 가가지고 창기 된 그 변수조차도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조종 국면에 있었던 겁니다. 이게 잠언 이야기가 아니고 욥 이야기이고 전도서 이야기고 아가 이야기고 시편 이야기입니다.


시편 말씀 보면 이런 이야기 나오죠. 사람 살아가는 것이, 시편 91편입니까? 슬픔과 괴로움밖에 없다. 그런데 전도서에 그런 내용이 있어요. 모든 인간은 고통뿐이다. 그럼 왜 살게 했습니까? 니 좋아라고, 니 사적인 니 개인 좋아라고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아들의 나라, 천국을 만들기 위해서 낙원에서부터 시작 이야기가 스토리가 시작된 거예요. 흐름이.


낙원에서 주님께서 부정적인 것을 심어놨습니다. 아예 선악과 안 심어놨으면 아무 탈도 없는 걸 괜히 심어놔가지고 그것도 십년 째 참아냈으면 그 다음부터는 따먹어도 산다 해야 되는데 이건 끝도 없이 박아놓은 거예요. 백 년 째 참다가 백일 년 째 그걸 어기면 쫓겨나는 거예요. 이 세상에도 그런 법률이 있지요. 오래 지켰다고 처벌을 면해주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바람을 피우다가 걸렸다 이 말이죠. 당신 바람 피웠지? 결혼하고 처음 아닌가? 그래도 한 5번 하면 나한테 문제 삼아라. 적어도 이스람 사람들은 네 번해도 괜찮은데. 니도 왜 맞바람 피우지. 일대일 상쇄하면 되니까. 이게 수학적 개념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동의 연장선 위에 신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단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솔로몬 지혜에는 단절이 있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부분이고 완성은 그 앞에 십자가, 언약의 완성 십자가가 개입 돼서 부분이 완성으로 통합이 되거든요. 이스라엘이 나올 때 어린 양의 피를 발랐어요. 히브리인이라는 혈육적인 조건으로 왜 그게 안 되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아브라함 자손 같으면 약속대로 그냥 이스라엘 되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이든 애굽이든 간에 문설주에 뭘 발라야 돼요? 문설주와 문지방에 피를 발라야 돼요. 피를 바르지 않으면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울산 강의에서 뭐라 했습니까? 이스라엘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 이스라엘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어요. 조건이 있어요. 피 발라야 됩니다. 찬송가에 나오잖아요.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 피를 보고 넘어가는 거예요. 멀쩡한 우리를 피 흘릴 수밖에 없는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포도 먹었을 뿐이고 감 먹었을 뿐인데 이것도 죄입니까? 포도 먹고 감 먹는다 해서 피 없이 구원받을 수는 없어요. 아무리 포도 먹고 감 먹어도 피로 인하여 하는 거예요. 포도 안 먹어도 감 안 먹어도 구원받는 것도 아니에요. 이 땅에서 어떤 경우라도 천국의 조건에 맞춰야 되는데 그게 죽음인데 그 죽음은 무슨 죽음이냐?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에요.


아는 이야기이지만 한번 정리해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다. 아들의 나라는 어떤 나라냐? 아들의 죽음을 기념하는 나라가, 기념하는 그 원칙만 작동이 되는 나라가 아들의 나라예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뭐냐 하면 예수님이란 표시를 안 해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일찍이 죽음을 당한 어린 양으로 되어 있어요. 그 자체가 죽음의 표상이 되지요. 죽음의 표상이 보좌에 앉았어요. 보좌에 보면 죽음이 보좌에 앉아있는 거예요. 죽음의 세계예요.


그런데 거기서 영생의 물이 흘러요. 생명나무, 영생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생명이 흘러나와요. 나의 죽음을 통해서는 생명이 안 나와요. 베드로가 백날 죽어봐야 처소가 없어요. 하늘나라 베드로가 있는 처소가 없어요. 처소 하려면 예수님이 가서 십자가 죽으심으로서 처소가 그때사 비로소 만들어지고 그 다음에 성령을 보내가지고“만들었다. 야야. 내가 만들었어. 니 자리 만들었단다.”라고 불러내줘야 그 자리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그 애기를 잃어버린 여자 마음속에 재판을 걸 때 그 심보가 바로 내가 미쳐 애기를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몰랐던 나의 죄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그 여자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에 보편적인 하나의 헌법이 되어버려요. 솔로몬 자리가 제사지내는 자리고 성전의 자리거든요. 그게 단절이에요. 그러면 솔로몬이 이야기한 죽음이라는 것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완료거든요. 완료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완료라 하는 것은 이 땅에 죽음 현상이 없으면 완료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도 늙고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죽어가고 있으면서 우리가 성도라면 죽어가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즐겨야 되고 고맙게 여겨야 되지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까 이 땅에서는 그냥 막 살아야 되지요. 스피드 너무 내가지고 스피드 차 몰다가 개죽음 당하지 말고요. 그냥 죽는 것이 낫다가 아니라 주님의 계획된 작정한 일이거든요. 주의 작정한 일을 미리 알았다는 것은 이미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단절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죽음 안에서 연결된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서 내 삶을 고집을 안 하니까. 나는 기어이 살아야 되겠습니다를 안 한다 이 말이죠. 솔로몬의 재판 받았던 여자가 진짜 엄마가 내 애를 살리겠다고 고집했습니까? 그걸 보는 거예요. 솔로몬이. 살리겠다고 고집 안 하는 것은 처음에 재판 할 때는 무슨 마음이었습니까? 재판 이겨서 꼭 내 애를 나한테 데려오겠다고 한 그 마음과 재판 결과와 단절이 일어나는 겁니다. 나는 나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제비 뽑았잖아요.”만 생각하는 거예요. 내 제비 뽑는 것하고 작정은 별개라는 생각을 우리는 안 하고 있었던 겁니다.


평소에 내가 열심히 내 인생 꾸려나가는 것과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별개 문제예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로마서 3장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인정함으로서 주께 영광이 돼요. 다른 영광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군지 알면 그게 영광이지, 열심히 반듯하게 산다고 영광이 되는 것 아닙니다. 내 모든 일이 주의 일이 되려면 내가 어떤 일에도 내가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줄 때 그게 모든 일이 뭘 먹든 뭘 마시든 주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니나 신경써. 아내 남편 자식 신경 쓰지 말고 니나 잘 하세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솔로몬에서 지혜라는 것은, 그러니까 솔로몬의 지혜를 보여주면서 재판 이야기를 거론하는 이유가 솔로몬 자체가 지혜의 자리라는 것을 보여주지요. 잠언서 자체가 뭐냐 하면 1장에 보면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지요. 1장 1절에. 그렇지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잠언이라 되어있지요. 그러고 난 뒤에 여기에 왜 솔로몬의 잠언이라 하지 않고 다윗의 아들이라고 왜 했을까요? 제가 그냥 말씀드릴게요. 다윗은 다윗 언약을 말합니다. 다윗 언약의 자식은 없습니다. 천국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 언약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천국도 만들어내고 아들의 나라도 만들어내고 아들도 만들어냅니다. 아들 나라 들어갈 자기 백성을 친히 하나님의 지혜가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지혜가 만들어내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만들어진 사람만이 알아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일의 작정은 이미 여호와 안에서 확정되었다. 또는 아까 이야기했던 표현대로 하면 완결되었다. 지금 우리는 완결되어있는 겁니다. 애들 노는 모자이크 그림 있잖아요. 그림 끼워 맞추는 거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그 한 조각이라 생각하고 누워서 옆을 눈으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나하고 다르잖아요. 다른데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내가 이 그림의 주인공이라고 하지 않아요.


딱 보니까 저 사람은 예수님의 귀 모습의 일부를 해놓았고 나는 예수님의 머리카락 모습의 일부분을 걸치고 있는 거예요. 각자 다르지만 어떤 평원 어떤 평평한 면에 같이 누워있어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같이 누워있지요. 이게 바로 교회 아닙니까? 이게 교회잖아요. 달라요. 아파트 평수 같을 필요 없어요. 약간 곁눈질해도 놀라운 사실은 같아서 놀라는 게 아니고 다름에도 불구하고 각자 다른 인생을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십자가 앞에서 나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을 한다는 사실이 인간의 동창회에서는 이런 고백 안 나와요. 술친구한테서는 이런 고백 안 나옵니다. 지 잘난 체하지.


많은 걸 제가 요구할 수는 없지만 부부 두 명이라도 한번 실험적으로 실시를 해보세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내 하는 일에 남편이 간섭 안하기, 평소에 늘 해왔던 겁니다. 그 다음에 남편 하는 일에 일체 간섭 안하기, 이건 여자 입장에서는 곤란해요. 때려죽여도 못하지 싶어요. 당신 나쁜 거 나는 못산다. 이렇게 나오지요. 또 자기가 선택하고 제비 뽑아요. 남편이 날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남편과 같이 살게 했다는 거예요. 만약에 남편이 죽고 아내가 죽는다면 그 일도 누구 작전입니까? 우리가 같은 예수의 평판에 누워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나를 떠나기 위해서 나는 내 위주로 사는 세상에 있지않다는, 그건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이 터지게 한다는 것이지요.


갑자기 남편 되시는 분이 안 하던 복권을 했는데 10억 된다든지 갑자기 일이 터져버리는 거예요. 내 몰래 땅을 사놨는데 열배가 올랐다든지, 일이 터져버리는 거예요. 주식을 몰래 했는데 갑자기 주식 좀 폭락했지만, 갑자기 올랐다든지, 이건 남편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곁눈질해서 그래요. 요래 보니까 저쪽에서 일이 터진 거예요. 덩달아 같이 기쁘죠. 왜? 한 식구니까 기분 좋지요. 아까 내가 뭐라 했습니까? 아내 일에 남편이 간섭하지 말고 남편 일에 아내가 간섭하지 말고. 그러나 이건 매우 매우 difficult. 매우 어려워요. 그래서 성경 보고 돌아서면 5분도 안 돼 가지고 다 끝나는 거예요.


우리의 육적인 본성, 우리는 평생토록 내가 제비를 뽑아요.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선택한다, 제비와 선택의 차이점은 제비 뽑으면서 입에 뭐라고 거짓말을 하느냐 하면 주여 이것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주께 일임하겠습니다. 절대 일임 안 해요. 화나가지고 있어요. 뭔가 뿔따구 내고 있다구요. 안 되기만 해봐라. 내가 이 정도로 겸손한 티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일 터지게 해봐라. 또 반발 같은 게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제비 뽑을 때 인간의 마음은 순수하지 않아요. 마치 그 아줌마들이 솔로몬에게 재판 걸 때 마음이 순수하지 않은 것처럼 그냥 우리 애는 주의 뜻에 맡깁니다. 이렇게 했을 것 아니냐 말이죠. 그게 마음이 순수하지 않아요. 다 노림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주께서 그 노림수를 주께서는 고맙게도 재껴버리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도 잠언이에요. 예수님도 지혜에 속한 분이에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제 그걸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그대로 하도록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처음에는 안 돼요. 성질나서 안 돼요. 그러나 성령께서 가만히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동안 햇빛 주시고 공기 주시고 아직까지 안 죽었지만 죽을 때까지라도 살게 해주시고 이만큼 먹을 것 입을 것 주셨다는 것은 이건 내 솜씨도 아니고 주께서 작정한 일에 주시는 것인데, 그 작정한 일이 먹을 걸 주는 걸 작정하는 게 아니고 니게 주신 분이 바로 인생을 이 땅에 니가 태어나게 하신 분 그리고 십자가 지신 그 분이라는 것을 아울러 알게 하는 언약의 완성을 알게 하는 그 분이라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제 마무리 하겠습니다. 딴 거 다 잊으세요. 그냥 애들 노는 퍼즐에 모양은 수제비처럼 모양이 다 다르잖아요. 인생이 다 달라요. 아내는 아내의 과거가 있고 남편은 남편의 과거가 있고 어릴 때 과거가 다 달라요. 하지만 옆에 보게 되면 둘 다 결국은 진정성 있게 나오는 고백은 우리의 만남은 주의 뜻이다. 하나님의 작정한, 가보면 알겠지, 하는 것은 완료가 아니에요. 이미 작정된 거예요. 이렇게 살아야 돼. 니 좋아라가 아니라 예수님 좋으라고 이렇게 살아야 돼. 라는 고백이 있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뭘 걱정했습니까? 무엇에 쫓겼습니까? 매일같이 바들바들 무엇이 두려워 벌벌 떨고 살았습니까? 주제넘게 너무 걱정 많이 했고 염려 많이 했습니다. 그 나라 의를 구하라 하고 주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지혜 있는 자 되지 말고 지혜를 보여주는 지혜를 증거하는 지혜를 나타내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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