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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19 14:10:55 조회 : 2622         
Re..함평-베드로전후서강의 녹취 1번 이름 : 한윤범(IP:)
함평겨울수련회-베드로전후서강의 녹취 1번

한윤범 2006-01-18 09:50:28, 조회 : 64, 추천 : 1

2006 함평겨울수련회
(강사:이근호 목사)

베드로전후서 강의

제1번


다같이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번 기간을 통해서 베드로전후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취지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저희들이 알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 지혜의 영이 오셔서 저희를 주장하여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감추어진 창세전의 비밀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성령께서 저희들의 마음을 장악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기 우리가 성경 속에서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라고 이야기할 때 역사적으로 이렇게 머리를 굴리고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사기다. 그건 거짓말이다. 기독교가 사기치는 것이다.'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의사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는데 살인하지 말라,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말을 이 글자를 아무리 분석해도 여기서 '아 그래서 살인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 하는 그러한 취지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이걸 분석하면 아 죽음이란 무엇인가 연구하고, 인간이 무엇인가 연구하고 그것을 전부다 종합한다고 해서 여기서 '아 그래서 그러니까 살인해서는 안 되는 구나' 그게 살인하지 말라는 이 문장에서 그러한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뜻이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안 나온다는 겁니다. 나오질 않아요.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미 우리 마음속에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있는데 살인하지 말라는 문자가 그런 뜻을 대행해 주는 것이지요.

이 동네에 눈이 많이 왔는데 '눈이 오다'라는 이 문장은 눈이 무엇이며 그 화학방정식이 어떻게 되며 일일이 연구하고 연구하면 눈이 옵니까? 이걸 연구하면 바깥에 갑자기 눈이 쏟아집니까? 아니지요. 눈이 온다는 것은 눈이 오게 되면 눈이 오는구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내 마음에 있는 뜻을 이 글자가, 이 문장이 대행해주는 것이지요. 살인하지 말라는 이러한 취지가 있더라도 이것은 살인하지 말라 속에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취지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뜻이 딴 곳에 있어요. 딴 곳에 있는데 그게 뭐 내 마음일 수도 있고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있는 살인해서는 안돼. 살인하는 것은 나쁜 짓이야. 라는 것이 있는 것을 바깥에 있는 살인하지 말라. 눈이 온다. 비가 온다. 이런 걸로 대체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속에 살인해서는 안돼. 살인하면은 나쁜 짓이야. 이걸 그냥 다른 쪽에서 대신해서 표현해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성경 속에서 말씀이 있다는 말은 완벽한 사기지요. 완벽한 사기입니다. 왜 사기냐하면 성경에 있는 어떤 뜻의 취지라도 내 마음 속에 그게 없다면 그 성경이 대신해줘도 그건 아니야 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눈이 옵니다.'라고 얘기해도 보니까 눈이 안 와요. 안 오면 에이, 눈이 온다고 아무리 글자를 써 봐도 내 마음이 눈이 안 온다고 판정을 내린 이상은 눈이 온다는 것은 헛소리지요. 그러면 지금 눈이 온다는 말이 헛소리가 안 되려면 이런 문자보고 믿습니다하고 될 일이 아니고, 지금 글자 이전에 눈이 오게 되면 눈 오는 것을 내가 장님이 아니라서 눈 뜨고 보고 손으로 만져서 눈이구나, 이것이 도넛이나 빵이 아니고, 돌멩이가 아니고, 눈이구나라는 것을 이미 내 쪽에서 결정을 내린 다음에 어떤 사람이 지금 눈이 온다하면, 아멘 할렐루야 할 수 있다 이 말이지요. 이미 결정은 누가한다고요? 내가 내린 거예요. 내가 내려놓고 내 마음 속에 이런 게 들어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차원에서 '지금 눈이 온다'고 하면은 동의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성경이라는 책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책 어디 있는 거예요? 성경에 있다고 우기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이미 내 마음속에 나름대로의 하나님 뜻은 이러이런 것일 것이다라고 있는 것을 자기가 두꺼운 성경책을 통해서 자기 취향에 맞고 자기가 동의하고 싶은 것을 줄 그어가면서 그걸 그냥 발췌하는 식이지요. 그렇다면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이것은 명백한 사기지요. 이 말에 동의를 영 안하시네. 명백한 사기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구미에 맞는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가지고 주의 뜻이라고 하고 나머지는 모르겠다라고 하면 그것은 아직까지는 자기한테는 유보된 하나님의 뜻, 아직까지는 자기가 동의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사 쪽으로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소위 진짜 똑똑한 사람은 성경책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반발하면서 그것은 교회가 성경을 이야기하면서 성경 이야기하는 교회 주체 카리스마와 권위를 챙겨서 그 권위를 가지고 성경 위에 다른 방면에서도 강하게 권위를 작용시키려는 하나의 정치적인 술책에 불과한 거예요. 성경에서 풀이하니까 다른 것도 나한테 지배받아라. 너의 영혼을 나한테 받치란 말이야. 재산까지 받치란 말이야. 하는 하나의 수법, 사람의 영혼을 장악하려는 하나의 수법으로 그 시발점으로 성경 하나 권위 있게 해석한다, 이걸 먼저 넌지시 미끼처럼 던진 하나의 교묘한 교회의 정치적 수작이 아니냐, 그렇게 반발하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보면 그런 반발 정도는 반발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이런 또 머리를 아주 잘 쓰는 사람, 똑똑한 사람이 이런 게 있어요.

이 대목에 은혜 받으면 곤란해요. 뭐가 또 문제냐 하면은 사람이 '나는 믿습니다.' 하잖아요. 누가 믿어요? 내가 믿어요. 그러면 당신이 믿습니다하는 믿음이 나중에 세월이 가고 늙어 가면 이것이 사라져요. '믿습니다.'라는 감정도 사라지지만 믿습니다라고 우기는 나도 늙어 죽어서 사라집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은 세상에 있는 어떤 명찰. 여기 형광등이 있다고 해도 수명이 다하면 없어지지요. 없어지면 이것은 지워버리는 거지요.

여기 나라는 것이 나가 나중에 한 백살 살다가 너무 욕심냈습니까? 한 오십 살다가 죽으면 나도 없어지는 것, 지워지는 거예요. 모든 것이 저도 머리가 빠지는데 머리카락이 있다, 있지만 있다고 여기는 것은 다 없지는 거예요. 다 없어진다 말이에요. 그러면 내가 무엇을 예수를 믿는다고 여기는 것도 없어지는 거예요. 오동잎이 가을에 떨어지면 오동잎이 없어지는 거예요. 오동잎 하나에다가 내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쓰더라도, 이 잎 떨어지면 여기 문자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이것은 뭐냐 하면 모든 믿는 것은 전부다 사라지기 위해서 예비된 것입니다. 모두 없어지는 거예요. 여기 시장 바닥에 나가서 '나는 믿습니다.' 뛰어다녀도 누구 하나 안 알아줍니다. 나는 믿습니다하여도 저 사람, 저 양반 저러다가 나중에 또 부처 믿을 거 아마.

왜 그런 가능성을 할 수 있느냐 하면은 모든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조만간에 없어지기 때문이에요. 구름이 있다. 없어지지요. 해가 있다. 해도 없어지는 겁니다. 모든 것은 없어지는 거예요. 어디로 없어지던 간에 모든지 없어지는 거예요. 모든지 있다고 하는 것은 없어지는 거예요.

문제는 어디로 없어지느냐를 모르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죽으면 천국 간다,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간다하지만, 그 똑똑한 사람들, 이렇게 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저 앞에 있다면 이게 있는 거냐 말이에요. 있는 거는 어떻게 된다고요? 이것도 없어지는 거예요.

심지어 과학자들도 지구도 나중에 블랙홀되면 없어지는 거예요. 있다는 것은 전부다 없어지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결국엔 어디로 없어지느냐? 파르메니데스라는 그 철학자는 모든 것이 다 어디로 없어지냐 하면은 '무' 없음으로 없어져요. 없음으로 없어지니까 없음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잖아요. 그러면 사람은 있음은 있음으로 나왔다고 존재론을 이야기한 겁니다. BC 400년경에 헬라 철학자 중에 한 사람이.

예를 들어서 집에 혼자서 화장실에 앉아 가지고 나는 예수를 믿는다. 그래 믿지. 내가 예수를 믿는데 예수 믿고 있는 내가 없어지면 예수도 없어질까? 예수도 없어지고 나도 없어지면 그럼 내가 예수 믿는다는 정체도 없어지잖아. 없어지면 나는 어디로 가 있지.

애들 한 3살, 4살 애들은요. 엄마가 간식 주려고 방문을 열다보면 애가 떠들어요. 여자애들은 모르겠지만 남자애들은 피융, 덜덜덜덜 한다고요. 3살 먹은 애가 혼자서 말한다고요. '빨리 항복하란 말이야 항복하지 않으면 죽을 거야' 엄마가 와도 마찬가지에요. 혼자 으아아. 비행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비행기가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혼자, 혼자 있다고 여기는 것들 가지고, 그것은 뭐를 창출하느냐 하면 공중전을 창출해요. 적기와 아군기가 공중전을 창출하지요. 그런데 엄마가 문틈으로 보니까 공중비행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잖아요. 혼자 노는 거잖아요. 예수 믿는 것이 혼자 노는 게임 아닙니까?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뭐하노 저 사람, 없어질 거 가지고 믿습니다. 하고 저렇게 놀면 재밌는가? 파르메니데스는, 정확한 것은 뭐냐 하면은 정확한 것은 예수도 전파, 공자도 전파한 것이 아니고, 제우스 신도 정확한 것이 아니고, 그것도 다 지워져 없어져 버린 거예요. 정말 정확한 것은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이것만이 정확한겁니다.

그런데 사라진 것만이 정확한 것이 아니고, 사라질 것이 어디서 나오는 거냐 하는 겁니다.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사라지려는 것들이 없을 무, 없음으로 사라진다면, 현재 있는 것들은 없음에서 나온 것들이라는 말이에요. 없음에서 시작해서 없음으로 돌아가는 거 이것보다 더 큰 진리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혼자 노는 게임, 시체놀이라 해도 괜찮아요. 소위 믿습니다라든지 뭐 교회가 어떠니, 천국이, 율법이 어떠니 하는 것, 베드로전후서가 어떠니, 구속사가 어떠니, 언약이 어떠니 아무리 해도 결국은 그런 것은 다 없음으로 무로 다 사라질 것들이에요.

혼자 재밌게 노는 3살 애가 혼자 두두두두, 혼자 태권도 싸우는 혼자만의 게임처럼, 즐기다가 결국 애가 만약에 혼자 공중전 하다가, 문 옆에 나오다가 문에 받쳐서 죽어버렸다. 그러면 방금 공중전 벌리고 혼자말로 놀던 애가 죽고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렸죠.

그러니까 진리란 것은 뭐냐? 없어지는 것만큼 진리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이것만큼 정확 것이 어디 있어요? 최고 진리는 모든 것이 사라지는 거예요. 모든 것이 사라지는데 제가 아까 애기한 대로 '살인 하지 말라.' 이것이 어떤 문장이 있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이미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이 문장이 있기 전에 벌써 어디 있다 했습니까? 어딘가 있지요. 친구가 그립다고, 내가 그럴싸한 친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만들어 낸 게 우상인데. 사실 우상은 없어질 거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친구라 하는 것은 내가 만들고 싶다고 만드는 것이 아니고, 어느날 친구가 다가왔을 때 친구가 되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뭐냐 하면은, 자꾸 어디서 툭툭 불거지고 나온다는 겁니다. 살인해선 안돼. 살인하는 것은 나쁜 것이야. 라는 마음이 나에게 왜 있는가 생각해 봐야. 이걸 따지지 않고서는 예수를 믿는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마음이 나에게 왜 이런 게 생기느냐 이 말이에요.

그런데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너나 ABC할 것 다 없이 다 생기면 아, 이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남의 진리구나 하겠는데, 만약에 나 혼자 살인하는 것이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옆에 친구는 살인하는 것이 뭐가 나빠 좋은 것이지. 라고 한다면 나의 살인하지 말라는 이 말이 이게 진리가 아닐 가능성이 농후한 겁니다.

그렇지요?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나만이 갖고 있는 나의 개성일 수가 있고, 하나의 특성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것 가지고 살인하지 말라하는 것은 진리다라고 우기다간 다른 사람한데 욕먹을 수가 있단 말이지요. 혼자 노는 게임일 수가 있단 말예요. 엄마는 이것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왜 안 놀아? 엄마는 그게 비행기 아닌 걸 알거든. 이러면 완전히 애 노는데 초치는 것이지요. 빨리 밥이나 먹지, 쓸데없는 것을 왜 하느냐. 좀더 놀고. 그만 놀아. 엄마는 애 노는데 공중전 가담하지 않지요. 그러면 애 혼자만의 개성이지요. 혼자만의 개성은 보편성이 없지요. 보편성이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지요.

여러분들이 아셔야 할 것은, 예수 믿는 맘이 왜 하필 나에게 생겨야만 하는가? 그걸 자문해본 적 있습니까? 혼자 노는 게임일 수도 있잖아요. 재미있어서 혼자만 즐기다가 나중에 시시해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니까 이게 사라져버릴 한 순간의 정신적인 하나의 오락일 수도 있잖아요. 그 생각을 해본 적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진리되신 성령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질문이 나올까봐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성경에 뭐가 있다는 말은 그거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김건모의 핑계. 성경에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이미 내 마음속에 그런 마음이 있는데, 성경책 펴가지고 자기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재확인, 하나의 후원자 하나 얻는 식으로, 호응해 달라는 식으로 성경책 펴서 성경책 봐라 내 마음 똑같네. 이런 게 있다고 지목하는 것에 지나지 않잖아요.

헬라 사람들은 헬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라 하는데, 다른 외부에서 헬라라고 하지요. 헬라의 철학적 사고는 놀랍게도 그 뒤에 기독교가 들어오고 오늘날 2000년 넘어서까지 이 헬라철학이 기독교 신학의 근간을 이루면서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뿌리를 모르고 뿌리를 계속 감추고, 껍데기만 이게 성경에 내용에 있다고 해서 이것을 복음이다, 이걸 진리라고 그동안 우기고 있었던 거예요.

사실은 그 뿌리는 뭐냐면 방금 이야기한 헬라철학이에요. 존재론에 의한 인간은 어디서 생겼느냐, 있는 것은 왜 있느냐, 파르메니데스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것밖에 없다. 없음도 있음에 포함되기 때문에 없다는 것이 있어줘야 현재 달은 왜 있으며, 별은 왜 있으며 내 마음 속에 예수 믿는 것은 왜 있느냐 이걸 추적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없는 것은 있기 위해서 없는 것은 없으니까 있는 것은 없는 것이며 고로 모든 것은 있다 이 말이에요. 전부다 있음에서 시작된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유대교 히브리사상이 고상하고 아무리 심오하고 성경이 심오하다 할지라도, 헬라철학자 입장에서는 백날 놀아봐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아무리 너희들이 고대 종교가 심오하고, 브라만 종교가 불교가 아무리해도 인간의 이성의 제일 밑바닥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아무리 파고파도 결국은 모든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박수칠 수밖에 없고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는 그 지점에 이미 먼저 와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게 바로 헬라철학입니다.

모든 것이 있음에서부터 출발한다면 결국 이것은 뭣을 뜻하냐 하면은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동일한 마지막 최종점에 모인다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류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신이 인간과 인간을 둘로 쪼개서 심판하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근거로 심판하는데 무슨 근거로. 모든 인간은 동일한데. 심판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잘났든 못났든, 마지막에 추궁하고 따지고 안기부가고 국정원에 가서 물고문해가면서 당신은 어디서 생겼어요? 있음에서 생겼어요. 있음은 어디서 생겼는데 없음에서 있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럼 우리 편입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모든 인간은 결국은 무식하든 유식하든 따져보면 모든 것은 없음에서 있음에서 나왔든, 동일한 종류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을 따로 분리해서 한 쪽은 저주하고, 하나는 축복을 준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그걸 저주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이 말이죠. 인간이 볼 때에 없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점에 명심해 주어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나중에 천국가시거든 그 여러분들이 구원 받은 것은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없는 근거를 하나님이 약속을 통해서 주셨기 때문에 내가 생산한 것이 아니고, 어떤 기적도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만들어서 집어넣어 놓고 외부에서 침투한 그 기준을 인하여 구원받지, 우리가 사색해서, 연구해서, 탐구해서, 내가 누구냐를, 내 믿음이 뭐냐고 연구해서, 나는 왜 믿게 되었는가 믿음에 대한 인식론, 어떻게 믿게 되었는가 그 과정을, 절차를 분석한다고 해서, 그래서 분석 잘 했다고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심판 기준 조차도 이러한 헬라철학적인 근거에서는 우리는 밝혀낼 수 없는 그런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나는 왜 예수를 믿을까? 믿는다는 것이 허구가 아니냐, 혼자 노는 게임이 아니냐? 이 나이에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잠시 사업이 어렵고, 생활이, 가정이 어렵다고 해서, 뭔가 기대고 싶어서, 피난처 하나 마련하는 식으로 에이 몰라, 올인하자 해서 뭔가 내 인생을 갖다 맡길 보험하나 걸쳐 놓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해 놓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자기가 자신한테 스스로 세뇌주고 그렇게 해 봤자, 그런 식으로 믿음이 확답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털어버리는 것이 좋지요. 그런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은 털려야 돼지요. 강도한테 털려야 되고.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한테 걸려가지고 한 번 재산을 몽땅 털려야 돼요.

우리 친척 가운데 하나 또 누구한테 걸려가지고 3000만원 털렸어요. 교회 옮긴다고 적금까지 부어가지고 3000만원 날렸는데, 교회가 교인수가 많아서 교회 옮긴 것이 아니고 교회가 큰 예배당이 있는데 썰렁하면 안 온다고 안 썰렁한 예배당 새로 짓는다고 돈내라 해서 지은 거예요. 건물이 오래되니까 시설 나쁘다고 안 올까봐 부흥이 안 되니까 이차에 팔아서 새 건물 지면 오겠지. 라고 해서 돈내라 해서 맞벌이 하고 한 쪽은 계대 연구원하고, 한 쪽은 영어 교사인데 그 둘이 맞벌이를 해서 애 둘을 키운다고 하는데 피 같은 돈 3000만원 날려버렸어요.

그런데 그런 것 한 번 털려봐야 돼요. 털려봐 가지고 결국은 내가 지금 예수란 이름으로 또 신앙이름으로 놀고 있구나. 두두두두. 혼자 노는 게임에 빠진 거예요. 환각에 빠진 거예요. 그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성경 귀절 택해 가지고 믿습니다. 이게 나한테 해당되는. 이런 식으로 성경이 있다고 자꾸 확인 받고 싶고.

그래서 이 베드로전후서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성경책을 공부하러 왔으니까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시편 10편 18절을 봅시다. 제가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그런데 문제가 아까도 살인하지 말라는 문자가 있잖아요. 그런데 세상에 속한 자를 심판하신다는 이러한 것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 감정이 일치되느냐 문제에요. 일치되지 않는다면 일치되지 않는 것이 정상이고 않아야 돼요. 일치 안 되는데 억지로 일치 되려고 애를 쓰게 되면 그때부터 그 사람은 혼자 노는 게임이 빠질 수가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고, 미신이 되는 거죠. 무슨 미신이냐 하면 성경마술을 믿는 미신이 되는 거죠. 여호와를, 예수를 믿는 우상 숭배자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는 그 심판을 뭐 때문에 심판당해야 되는지 우리가 미처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입시켜 버렸어요. 우리가 천국 가는 지옥 가는 심판 기준조차도 일방적으로 주입을 했다는 겁니다. 주입하는 과정이 유대인 이스라엘 역사에 1200년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 기준과 함께 주입될 때 시편 10편 18절도 함께 동참해서 같이 주입이 돼버립니다. 딱 깨놓고 우리 보고 성경 쓰라면 시편 10편 18절을 우리가 쓸 수가 없어요. 우리 보고 지어내봐라 하나님 말씀, 이런 생각 안 됩니다. 나쁜 놈들은 죽여야 돼. 이런 게 나오지만 세상에 속한 자로 하여금 위협지 못하게. 이런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는 거예요.

말이 점점 어렵게 되어 가지고. 성경을 전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 믿겠다면, 우리가 과제를 한 번 내봅시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번 써보세요, 안 보고 써 보란 말이에요.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하나님이였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한 번 써 보시란 말입니다. 창조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고, 마지막 심판이 끝나는 것을 써 보란 말이에요. 써놓고 진짜 성경하고 대조해 보세요. 안 맞죠. 맞을 리가 있습니까? 맞지 않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이미 성경을 줘도, 안 맞는 걸 억지로 맞추려고 애를 쓸 공산이 크다 이 말입니다. 본심이 아닌데 성경이란 이유 때문에 억지로 믿는 척을 할 가능성이 많지요. 그렇죠? 지금 우리들의 실상이 그대로 폭로됩니다. 오늘을 기다렸습니다. 함평을 기다렸어요.

그래서 이게 조작해 낸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하루에 성경 석장 이상, 기도는 30분 해야 되고, 예배시간에 앞자리에 앉아야 하고, 이게 뭐냐 하면은 우리가 입법자가 되는 거예요. 스스로 입법자가 되는 거예요. 살인을 하되 피를 내면 살인이 되고, 찌르는 것은 살인이 아니고(우리가 만든 성경책에는 이렇게 되고), 그러나 성경에 보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자가 되죠. 그러니까 맞질 않아요.

사람이 자기 보고 성경을 따로 쓰라하면 일기장 쓰듯이 쓰라하면 자기만 구원되고 나머지는 구원 안 되는 자기만의 세계관이 나와 버리죠. 보편성이 있는 우주를 통치하고 천지창조하실 때 그 말씀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말씀의 원리가 거기에 담기도록 창조한 이러한 말씀 자체의 내용은 아니고, 내가 신이 되고 내가 절대자가 되기 위한 조건들을 자기가 써 논 성경책에다 기록하는 거예요.

만약에 까만색을 좋아하는 사람 같으면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 죽어라. 예레미아 7장 16절, 보라색을 좋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그리고 성질이 급한 사람 같으면 로마서 1장 16절, 성질이 느림보는 다 죽어라 지옥갈 것이다. 자기한테는 해당되고 남한테는 해당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쌍꺼풀 있는 사람은 천국갈 것이요, 쌍꺼풀 없는 사람은 지옥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쓸 거다 이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들한테 과격한 이야기한다고 생각마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이 바로 평소에 성경을 듣지만 교인들 나름대로 자기만을 옹호하는 자기만의 계시를 죽을 때까지 편찬해 내고 있습니다. 하루의 스케줄은 자기가 편찬해 내고, 스스로 자가한테 벌 세우고, 만약에 십일조 안하면 벌 받기 위해서 한 달 동안 어떤 매를 때릴까, 기다리는 그 조마조마함에 마음을 괴롭게 할 정도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한 30분 늦게 오면 아, 오늘 30분 늦게 왔으니까, 신께서 어떤 벌을 내리실까? 그 벌 종류가 어떤 것일까? 갑자기 안 쓴 휴대폰 전화요금이 많이 나오는 그런 벌일까? 아니면 교통순경한테 걸려 가지고 3만원 걸릴까? 스스로 자기가 입법자가 되어서, 쉴 새 없이 성경을 자기가 제조해 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적이 누구냐 하면은 사실은 우리의 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적이지만 하나님의 적이 누구냐 하면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적이고, 로마서 5장의 의하면 우리 자신은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의 원수라고 합니다. 로마서 3장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상당히 겸손히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이 말은 평소에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훈수마다 대들고 있느냐, 어느 정도로 늘 하나님께 대들고 있느냐? 대드는 그 수법과 그 정도에 대해서 본인도 모를 정도에요. 내가 얼마나 예수님 얼굴은 할퀴고 있는지 본인도 그걸 모르고 있을 정도로 죄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창하게 헬라철학을 논하고 심오한 존재 이야기를 했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긴긴 이야기를 지금 전기도 안 오는데 하고 있어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로 구원될 수 없는 존재예요. 한 번 믿었다고 해서 있는 믿음가지고 우려먹고 그것을 재가공한다고 해서 그 믿음으로 구원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구원은 어떻게 되느냐? 마태복음에 보면 '성경에 응하게 함이라'. 어떤 사람이 행동하면 성경은 말하기를 행동해야만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본인은 그렇게 인정하지 않지만 왜 그렇게 했냐 하면은 모든 것이 성경에 합당한 것이 창세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조치였기 때문이에요. 성경이 응하게 하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의 모든 일상의 죽고 사는 것이 성경이 응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그러한 시도는 하나님의 하는 일에 전혀 보탬이 안 되고 우리의 구원에도 보탬이 안돼요. 우리가 성경을 지킨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돼요. 그 대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 따로 성경을 제조한다 이렇게 고백해야 돼요.

눈감고 아무 것이나 펴보세요. 아무데나 펴봤는데, 예를 들어서, 너희는 거룩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고 떠나라 이사야 52장에 나오거든요. 그러면 거룩한 것을 떠나지 말라하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기초로 해서 성경을 제조해요. 부정한 것이 무엇일까? 아, 나쁜 짓이구나. 그럼 내가 생각한 나쁜 짓은 뭘까? 아,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않는 것이구나. 이렇게 지가 성경을 제조해 버려요. 아시겠습니까?

성경을 안 봐도 제조하고, 봐도 제조해요. 어떤 경우도 성경이 합치된 것이 나온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제조하느냐, 그것은 제가 오늘 강의 첫 번째 얘기한 거예요. 이미 내 마음속에 확인한 차원에서 성경을 해요. 사람마다 성경이 다 달라요. 사실은 그것을 감추고 우리는 같은 성경을 쓰는데 이렇게 하지만, 그것을 풀이하고 해석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죠.

그런데 거기에다가 더 나쁜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제가 방금 쭉 얘기한 것처럼 어떤 누구도, 성경을 응하게 하는 능력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있는데,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성경이 응하게 해서 자기 쪽에서 노력을 한다 했죠. 그것보다 나쁜 것은 어떤 성경도 못 지켰는데 성경도 못 지킨 그 입장에서 이제는 성경을 이만큼 지켰으니까 더 많이 지켜서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된 생활하자라는 쪽으로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이해한다는 그것이 이 사람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주님의 얼굴을 할퀴는 셈이 된다고요. 앞으로 점점 더.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화론의 문제점을 교재라고 짧게 써 논 겁니다. 우리 수련회강의가 베드로전후서이기 때문에 성화론에 간 게 아니고 로이드 존스 목사의 평가한 게 아니기 때문에 하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성화론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모든 개혁주의 신학의 집대성으로 20세기 중반에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다 알거든요. 그렇다면 이 사람이 나오는 성화론은 20세기 개신교 이후에 나오는 성화론을 집대성한 거예요. 그런데 이게 문제점이 있단 말이에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철학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왜 철학을 생각 안 하느냐, 배설물인데 똥인데 뭐 하러 연구하느냐? 버릴 똥오줌을 내가 주워가지고 주물럭거리고 왜 맛보고, 그걸 생각해야 되느냐고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런데 안셀무스(번쇄철학) 이후에 어떤 것이 있느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이성으로 뜻을 알아간다 이렇게 나오다가 16세기부터 철학자들에게 된 통으로 얻어맞고 동시에 교회에 사람들이 안 나오기 시작했어요.

왜 그러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고 이성으로 뜻을 알아가야 하는데 칸트의 이성에 의해서 도로 믿음이 뭐냐고 따지게 될 때 믿음이 깨지고, 이 자리에 뭐가 차지하느냐 하면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이성으로 알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이렇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천국에 대한 것은 믿음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이성으로 따지면 누구나 납득할 만한 근거 있다고 보는 겁니다. 칸트가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칸트가 예수를 믿는데, 그 예수 믿는 방법이 하늘의 하나님이 특별히 어떤 외부에 거듭나는 능력을 줘서 믿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인간 속에 내재되 있다는 거예요. 그 내재돼 있는 것을 이성이라고 합니다. 순수한 이성이 있어서 그 이성에 의해서 도덕도 행하고, 이성에 의해서 그 도덕 중에 하나가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굴복하고 복종하는 소위 순종 또는 말씀에 대한 굴복 이것도 인간의 이성 속에 포함돼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성령이 임한 사람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훈련과 교육과 계몽이 안됐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 못 받는 것이지 인간이라면 진짜 독한 놈 빼놓고 설득하고, 교회 안나오면 밀가루 주고, 라면주고 해서 교회를 오도록 조치를 해서, 애정과 사랑을 퍼 부우면 그 어떤 인간도 예수를 영접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특히 헤겔이라는 사람에 의하면 인간은 신이 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되려고 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나님이 신이 성육신을 통해서 사람이 됐다, 이 말은 인간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겸손함에 의해서 누구든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지시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충분히 낮은 자세에서 허락을 했다는 거예요. 그 헤겔 말 듣고, 사람들은 그 당시 목사들 말 안 들었습니다. 세상에 철학적으로 다 알아버렸는데 교회 가서 설교 들어봐야 무슨 소용 있는데요. 이미 철학적으로 알아 버렸는데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받는다' 말까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받아들일 만하다는 거예요. 아, 교묘하지요. 성령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말까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접수할 만한 내용이라는 겁니다. 왜냐 그 배후에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신을 미워하지 않고 신의 사랑이라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이상은 그 사랑에 의해서 나오는 여러 가지의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는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 10대가 됐든 성인이 됐든 어떤 거라도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이상 그 나머지 연이어 존재하는 절차들, 하나님의 행동 그것도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나쁜 사람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산타클로스를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아마 북한의 김정일밖에 없을 겁니다. 어느 아프리카 미개지에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전부 다 영접하지요. 왜냐하면 너무나 사랑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면 헤겔에 의하면 이미 인간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터전이 마련돼 있는 이상은 그 터전에다가 성경을 가지고 호소하면, 호소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구원받습니다라는 내용을, 메시지를 사랑의 이름으로 쟁반에 담아가지고 제보하면 어느 누구도 그 사랑을 거부할 자가 없다는 이 말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이라는 기반을 두고 창조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반드시 받게 돼있다는 거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은 어떤 사람이 죄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미처 기독교의 사랑을 제 때 안 알려 주었기 때문에 미처 그것을 놓쳐서 그렇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19세기 말까지는.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라너라는 천주교의 유명한 신학자, 제2 바티칸 회의의 결정적인 영향을 준 신학자는 무엇이라고 하냐면 그렇다면 말이 여기까지 된다면 우리가 전해서 비로소 구원받는다면 아예 안 전해도 기독교와 복음과 유사한 사랑의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더라 이 말이죠.

어떻게 알았는가? 문화 인류학이 발달 되고, 미개지역까지 조사를 해 보니까, 이미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더라도 속죄양에 의한 의식과 대속의 사랑과 인간의 품위 있는 그러한 교양과 신에 대한 흠모하는 종교심 이런 것은 비록 이슬람교, 기독교 성경책이 없더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자질로서 바탕된 공통점이 있더라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건 뭐냐? 익명적 그리스도인. 꼭 집어서 교회 안 나와도 이미 잠재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을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사실은 익명적 그리스도인이 이미 16세기 때에 쯔빙글리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 있는 사람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 다니는 이슬람교나 또는 헬라 철학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미 그 이야기가 돼있었어요.

그래서 이 둘째 시간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뭐냐 하면은 이미 우리가 매일 같이 성경 큐티하고 성경 보면서 보는 순간 나름대로 또 나만의 성경을 제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그동안 몰랐느냐 이 말이에요. 계몽이 안돼서 몰랐어요? 제가 이야기 안 해서 몰랐습니까? 계속 성경을 제조하면서 일단은 그것에 맞춰서 신앙생활해보다가 이게 영 실제와 안 맞다 싶으면 다시 다른 것들로 세계관을 시스템을 바꿔 가지고 다른 패러다임, 인식구조 해가지고 셩경 보다가 또 안 맞으면 또 바꾸고. 이게 뭐냐 하면 혼자 노는 게임일 수 있잖아요. 불이야, 두두두두. 으아. 혼자 노는 게임이다 이 말이죠.

이런 우리의 허점과 한계, 부실함 이런 것을 미리 아시고 그 다음에 베드로전서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 말입니다.

베드로전후서는 사실은 굉장히 어려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베드로전후서보다 사도 바울이 약간 더 어렵다고 하는데 베드로전후서는 사도 바울에서 이미 기본으로 알고 잇는 사람을 향하여 준 겁니다. 그 정도로 베드로전후서는 체계가 없어요. 체계가 없는 것은 이미 체계가 잡혔다고 생각하고 그냥 마구 퍼부어대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후서를 체계를 잡으려다가 다 실패했어요.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다만 보통 신학책에 이렇게 나옵니다. 1절부터 몇 절까지는 신학적인 것, 여기저기는 권면적인 사항, 이쪽은 생활적인 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서 그걸 합하면 어떤 흐름인데, 흐름은 없음. 과연 그러냐 이 말이에요.

피곤하신데 7분 쉬시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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